내 글에 흙냄새 날번하지
글/리근(상지)
1940년에 농민의 아들로 태여난 나는 생의 절반이상을 농촌에서 지냈다. 하기에 농촌에서 살아오던 일들이 가장 또렷이 남아있다.
여름에는 개구쟁이들과 함께 개울에 나가 옷을 홀랑 벗고 고기잡이를 하던 일, 도둑고양이마냥 남의 집 참외밭에 기어들어 참외쓸이하던 일, 겨울이 되면 얼음판에 나가 팽이를 치기도 하고 썰매를 가지고 동산에 올라가 아래로 지치기를 하던 일…… 이렇게 나는 시골에서 잔뼈를 굳혔다.
나는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 소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10년동안 잡다가 상급의 지시에 따라 향정부로 전근되였다. 당시 향간부들은 사흘이 멀다하고 하향했는데 나는 주로 조선족마을로 내려갔다. 주숙은 촌사무실에서 잤지만 식사는 집집마다 돌며 했는데 아주머니들은 나를 위해 맛나는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무척 신경을 썼다. 농촌에 사는 친구들은 집에 색다른 음식이라도 생기면 나를 잊지 않고 불러주었다.
공직에 있지만 여름이 되면 종종 사원들속에 끼여 논김을 매고 가을이면 탈곡장에 나갔으며 겨울에는 들에 나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곡괭이로 언 땅을 파 등짐으로 날라다 웅덩이를 메우곤 했다. 그리고 밤에는 촌간부들과 머리를 맞대고 사업을 토론했다. 그 과정에 나는 농민들의 실생활을 속속들이 알게 되였고 자신의 책임감도 페부로 느꼈다.
글쓰기를 좋아한 나는 그때부터 농촌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밥을 먹다가도,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령감이 떠오르면 실성한 사람마냥 후닥닥 일어나 필을 들곤 했다. 이렇게 줄곧 필을 달려 “보 막던 날”, “우리집 누렁이”, “닭싸움과 아버지의 가르침”, “공량 바치던 날” 등 농촌제재의 글을 꽤나 썼다.
농촌생활에 많은 미련을 가진 나는 정년퇴직후에도 종종 시골로 내려가 며칠씩 묵으면서 변화되는 농촌실정을 상세히 료해하군 했다. “페허로 되여가는 마을”, “고향의 변천”, “시골 로인들의 곤혹”, “설이란게 지나가는 나그네 같아” 등 글을 써내 시대의 갈림길에 있는 농촌의 현황을 우려하고 앞으로 대안을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사람들은 내 글에 구수한 흙냄새가 난다고 한다. 내가 농촌을 념두에 두고 쓰는 글들은 모두 농민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글이니 그럴법도 하다. 내 글의 소재는 과거지사를 회고하고 자신의 삶을 검토하면서 현실을 정확히 리해하며 미래지향적인 긍정에너지를 전파하는것이다.
나의 어떤 글은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켰다. 어떤 독자는 독후감을 써 신문, 잡지에 발표했으며 어떤 사람은 천여리밖에서 전화를 걸어와 조선족농촌의 황페화문제를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50리 상거한 어느 마을의 당지부서기는 신문에 실린 나의 글을 보고 나를 직접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부딪친 문제해결책을 함께 연구하였다. 1996년이라 기억된다. 한 생면부지의 안로인이 찾아와 남편의 렬사증문제를 두고 당시 한국대통령인 김영삼께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로인의 애달픈 심정을 헤아린 나는 그자리에서 필을 들어 성의를 다해 편지를 써 드렸다. 두달후 그 로인이 다시 찾아와 렬사증문제가 해결됐다면서 연신 사의를 표했다. 나도 매우 기뻐 할머니손을 꼭 쥐였다.
이젠 산수를 톱는 나이에 이르러 기억력도 많이 쇠퇴되고 구상이 둔해져 글쓰기가 퍽 힘겨워졌다. 그러나 아직도 컴퓨터앞에 앉아 글쓰기를 견지하고 있다. 친구들은 나를 보고 사서 고생한다면서 놀러나 다니자고 잡아끌지만 나는 그럴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농촌문화를 글로 써서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하기에 나는 오늘도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한다. ▣
<중국민족>잡지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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