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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떡집” 녀주인 “아몽”의 꽃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2월1일 14시52분    조회: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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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떡 만들기 “달인”급에 상당한 그녀가 왜 이곳 연변을 찾아왔을가.

연변이모한테서 물려받은 "고향떡집"

타향살이에 힘들고 지칠 때면 어련히 생각나는 것이 고향이다. 그녀는 워낙 화룡시 서성진 북고성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연변태생이였다. 스무두살 꽃나이에 금의환향을 꿈꾸며 또래들과 함께 대도시 광주로 향하는 그때 그녀는 아예 ‘김련화’라는 자신의 이름마저 “김몽”(金梦)으로 고쳤다.

꿈이 아무리 야무지더라도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이 타향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몇년이 지나면서 또래들은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들 왔으나 그녀는 당지의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아이가 두살 나는 해인 2001년에 그녀는 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작은 스낵음식점을 차렸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돌아치는 스낵점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친분이 있는 ‘연변이모’한분이 자기가 하던 "고향떡집"을 물려주었다. “광주에는 한국인들도 많고 조선족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떡집을 하면 성공할거다.” 연변이모는 이틀간 떡 만드는 기본기술을 가르치고는 사정이 있어 연변으로 돌아갔다.

정작 떡집을 차리고 보니 스낵점 일보다 배로 힘들고 어려웠다. 허나 떡은 광주지역에서 누구나 손 댈 수 있는 품목이 아니고 또 떡을 요구하는 손님들은 각별한 기대를 안고 매장을 찾는지라 웬지 계속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모찌떡 있어요?” “모찌떡이 없는데요?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없으면 없다 모르면 모른다면서 애써 해보려 하는 그녀에게 고객들은 떡 만드는 방법도 사심없이 알려주었다. 강한 호기심을 앞세우고 감히 도전해 나서며 그녀는 고객들의 수요에 따라 각종 떡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떡 한그릇 들고 30리 길을 다녀오며 고객 평가에 귀 기울리고 고객들의 수요에 따라 이름 모를 떡도 절로 떡명을 지어내면서 찰떡, 시루떡만도 수십가지나 개발해냈다.

“제가 만든 쑥시루떡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거든요. 한가마에다 백여근씩 단번에 쪄낼 수 있는데요. 저는 손으로 한층한층 말아가며 꺼냅니다. 이런 방법은 아마 저밖에 모를거예요.”

남방에서 북방에다 농사기지를 두고

그맘때쯤 광주에는 한국인 떡집이 수풀처럼 일떠서면서 가격경쟁이 일었다. 모든 떡 값을 꼭 1원씩만 떨구어 파는 가게 쪽으로 갑자기 손님들이 쏠려갔다. 그녀는 위기 앞에 랭정하게 사색하면서 자신의 우세를 떠올렸다. 언어우세로 고객들과의 소통이 좋고 일군관리가 안정된데다 떡의 질만 더 높여간다면 승산이 있었다. 그녀는 가격경쟁에 휘말리기보다 떡의 질 제고에 모지름을 썼다.

지역에 따라 쌀 성능에 구별이 있고 또 광주지역은 더운 곳이라 쌀을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 길림지역에 농사기지를 따로 세웠다. 모든 알곡은 겉곡으로 두었다가 본인이 요구하는 시간대에 바로바로 정미를 하여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하여 그녀의 떡맛은 질적으로 달랐다. 떠났던 고객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고향떡집’떡볶이, 가래떡은 광동이며 주강3각주, 절강, 강소일대 남부지역에 널리 알려져 반성품으로 대량 팔려나갔다.

하지만 곡경은 곡경대로 따로 겪어야 했다. 떡집을 차려 1년만에 백설기로 떡케익을 하고싶은 의욕이 생겨났다. 백설기를 가마에 찌어 그 우에 사탕도 놓고 과일도 얹고 인물캐릭터도 만들어 올리면서 시장판로를 열어가는데 광주의 한 유명 호텔에서 대형떡케익을 주문해왔다.

주문시간은 빠듯이 다가오고 가마에서 갓 쪄낸 백설기는 채 식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며 백설기 우에 사탕이랑 잔뜩 얹어 예쁜 장식을 마치고 배달했다. 그런데 사탕이 녹아내리면서 떡케익이 마구 범벅이 되는 바람에 호텔측으로부터 눈이 빠지도록 욕을 얻어 먹게 되였다.

그뒤로 감히 떡케익에 손을 대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탈이 없고 안전하며 건강하고 이쁜 꽃떡을 개발하려는 구상을 그냥 무르익혀갔다. “떡을 하라고 그랬는지 뜻밖으로 남편이 꽃떡 빚는 재간도 있었고 부탁하는 대로 떡도구들도 뚝딱뚝딱 잘 만들어주었어요. 하여 우리 집 떡케익에는 10년전부터 무색소 천연식재료로 된 고무마 장미꽃도 올랐고 노란 호박꽃도 올랐으며 다종다양한 떡케익이 광주에서 판을 쳤어요. 떡맛이 월등한데다 떡케익을 급랭동하여 신선도를 보장하면서 원근에 지체없이 배달하다보니 한국인들도 우리 집 떡을 사들고 귀국방문을 하게 된거지요.”

아버지의 명언- '물어뜯어서라도 이겨라'

그러던 언젠가는 “고향떡집”에서 떡을 안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명 누군가의 시기에 찬 비루한 작간이였다. 별로 위챗도 들여다볼새 없었던 그녀는 일부러 “아몽”(雅梦)이라는 멋진 위챗명으로 그럴듯한 채색떡광고까지 굉장히 올리면서 나쁜 소문을 터뜨린 자를 검거해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거짓 소문임이 간파되자 "엄마"들은 더욱 한마음이 되여 "아몽"의 꽃떡을 아껴주었다.

“어찌보면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한걸음 한걸음씩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노라면 화룡현 서성진 수의소 소장을 지낸적 있는 우리 아버지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딸만 셋이였던 아버지는 아들 없는 허수함에 술 한잔 하시고는 우리 자매들에게 늘‘물어 뜯어서라도 이겨라’고 당부를 하셨거든요.” 이미 고인된 아버지를 그리는 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지금쯤 부모님들이 살아계신다면 뉘집 아들 못지 않게 “성공”한 딸을 앞에 두고 얼마나 기뻐하실가. 지금 그녀의 년간 떡생산량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고향떡집”은 명실공히 강남의 떡공급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노력은 다만 물량을 늘이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허구프게 웃는다.

“한달간 ‘궁중떡향기’공방에 머물면서 리향단 원장의 지성어린 가르침에 따라 옛날 황제의 음식상에 올렸다는 두텁떡도 만들고 로할머니가 저의 생일이면 정성껏 빚어주던 수수경단도 만들고 다과공예도 잘 익히면서 책에서나 보아오던 떡공예를 실전으로 배우고 나니 바랄 것이 더 없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굽은 길을 적게 걷게 한다’는 말의 참뜻을 알 것 같습니다."

기실 연변행을 하기 전 그녀는 매일과 같이 반복되는 힘든 일상에 권태감을 느꼈고 비전이 없는 떡 만들기를 당장 손에서 놓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번씩 일었다고 한다.

"가장 필요한 때에 스승님을 만나 우리 떡의 문화가치를 알게 되고 떡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특히 스승님의 손끝에서 탄생되는 예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앙금플라워 꽃떡 작품을 흠상하면서 여태껏 17년이란 세월동안 물량을 늘이기 위해 아글타글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새롭게 우리 민족 문화를 전파하고 우리 민족을 알리는 강남의 '꽃떡왕'으로 거듭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아몽(雅梦), 그녀는 새로운 꽃꿈을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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