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어머니의 그 ‘일본딸’ 을 찾습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3월4일 13시59분    조회:19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대형계렬기획보도- 백성이야기(93)

— 어머니의 생전 소원을 풀어드리려는 윤영학로인의 집착

윤영학의 어머니

요즘《길림신문》일본특파원 리홍매의 일본 관련 기사를 애독해오던 장춘의 윤영학(85세)은 문득《길림신문》을 통해 그의 어머니(전생금, 1893년 생)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던 ‘일본딸’을 찾아볼 생각을 해보았다.

사연을 알게 된 기자는 얼마전에 윤영학을 찾았다. 윤영학의 어머니와 그의 ‘일본딸’은 1950년에 중국에서 갈라졌다. 서로 갈라진 후 윤영학의 어머니는 한시도 그 ‘일본딸’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타계한 후 윤영학은 어머니의 평생 그리움이였던 그 ‘일본딸’ 찾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일 수교 후 윤영학은 그 ‘일본딸’을 찾아보려고 외사부문과 중국국제방송국 일본어부에 편지를 띄워보았지만 헛물을 켜고 말았다. 한것은 그 ‘일본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특수한 력사시기에 만난 ‘모녀’

윤영학이 어릴 때 살던 곳은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향(지금은 동광향) 태평촌이라는 심산벽촌이였다. 1945년 8월, 고향이 해방된 후 그의 부모는 원래 살던 비좁은 집을 버리고 임자없는 8간짜리 큰집으로 이사했다.

1947년 마을에 작은 송근유공장이 들어섰다. 개간대로 중국에 끌려왔던 일본 평민과 항일전쟁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 강제병 등 일본인 로동자 7~8명이 윤영학네 집을 숙소로 정했다.

개간대중에는 강제병과 결혼해 두살짜리 딸까지 낳은 젊은 일본녀인이 있었다. 그들 젊은 부부는 따로 집 한칸을 차지하고 살았다. 윤영학은 일본녀인의 그때 나이를 18~19세 정도였을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말을 곧잘했고 성품이 바르고 상냥했다.

마음씨 착한 영학이의 어머니는 그 녀인을 가련하게 여겼기에 색다른 음식이 나지면 서로 나누어먹으면서 한가족처럼 다정히 지냈다. 그녀의 딸이 칭얼거리거나 떼질을 쓸 때면 어머니는 두말없이 그 ‘손녀’를 등에 둘쳐업고 밖에 나가 달래군 하였다.

“일본애를 업고 다닌다”는 또래들의 조롱을 받기 싫은 영학이는 상심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제발 그 애를 업고 밖에 돌아다니지 마세요.” 라고 애원했다 . 그럴 때면 어머니는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다 불쌍한 사람들이야...” 하고 아들 영학이를 타이르며 훈계했다.

“그 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커서 돌이켜보니 그것이 바로 특수한 력사시기에 이국인에게 보낸 어머니의 인도주의사랑이 아니였나 봅니다!” 윤영학은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너무나도 몰라준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그 때를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쓰려난다고 말한다.

“두 ‘모녀’는 비록 국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어머니의 인간적인 사랑은 극진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1948년, 자식의 공부를 위해 영학이네 부모는 시골에서 왕청현성으로 이사하게 되였다. 그 후에도 계속 태평촌에서 살고 있던 ‘일본딸’은 ‘본가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만삭이 된 몸을 해가지고 어머니를 찾아왔다. ‘본가집’에서 그녀는 몸을 풀고 남자애를 낳았는데 어머니가 손수 접산하고 산후조리까지 했다.

‘일본딸’은 무릇 몸이 아프거나 병을 보일 때면 ‘본가집’에 와 묵으면서 치료했다. 학교를 다니는 영학이가 밥곽이 없어 점심밥을 싸가지 못해 끼니를 에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자기가 아껴모은 돈으로 밥곽을 사서 영학이에게 선물하였다. “구리로 만든 그 밥곽은 비록 납으로 만든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었습니다.” 윤영학의 말이다.

1950년, 중국에 남아 살던 일본인들이 최후로 귀국할 때 ‘일본딸’네도 돌아가게 되였다. 그들이 떠나는 그날은 몸이 오싹해나는 겨울의 저녁무렵이였다. 느닷없이 ‘일본딸’ 부부가 ‘본가집’에 들려 떠나련다고 알렸다. 눈물의 리별이였다. 헌데 그것이 ‘모녀’의 영원한 리별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러나 그 때 갑자기 들이닥친 리별에 경황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도 문맹이고 저도 철이 들지 않아 그들의 이름을 남길 엄두도 못냈습니다. ” 이렇게 말하면서 윤영학은 아쉬움을 표했다.

항일렬사 어머니의 소원

사실 1녀 3남을 둔 윤영학의 어머니는 빈곤가정의 주부이면서도 항일렬사의 어머니였다.

일찍 낳은 딸은 시집을 갔고 큰 아들은 부농집 계절 아동공으로 일하다가 14살에 병이 나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죽었고 둘째 아들은 12살에 항일유격대의 비밀통신원으로 활약하다가 17살에 항일반격전에서 전사했다. 셋째 아들은 1945년에 참군했다.

그러다 나니 집은 남은 막내 아들 영학이에게 쏟은 어머니의 사랑은 한량없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그 쓰라린 마음을 헤아려드리지 못했다며 윤영학은 손등으로 눈시울을 찍었다.

윤영학도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와 비슷한 운명을 체험하게 된다. 윤영학은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흙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우리 말 속담을 떠올리며 “제가 늘그막에 큰 병을 앓던 외동아들을 앞세우고 보니 그 때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그 아픔이야 오죽했으랴는 생각이 갈마들더라.”고 개탄한다.

윤영학은 고령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한평생 고생하다 돌아간 어머니 생각에 때로는 밤잠을 설치고 때로는 어린애처럼 얼빠진 사람이 되군 한다고 말한다.

윤영학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되지만 내 생애의 마지막에라도 어머니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일본딸’을 찾아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다면 죽어도 눈을 감을 것 같다.”고 가냘픈 목소리로 기자에게 고백한다.

일본에서 안해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윤영학로인

오가는 인간애에 암증도 물러간다

몇년전에 윤영학은 전립선암에 걸려 류학을 마치고 일본에서 취직하고 있는 딸의 알선으로 일본 치바현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바다와 같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 할가, 어머니가 자기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일본딸”에게 모성애를 베푼 것처럼 일본병원의 의료일군들도 한결같은 미소와 배려, 최선의 치료로 생면부지의 한 중국로인에게 정성을 다했다. 그 덕분으로 윤영학의 병은 더 악화되지 않았다. 국적이 다르고 민족이 다른 자신에게 베푼 일본 의무일군들의 인도주의정신에 윤영학은 심히 감동되였다.

“늙으면 자주 추억에 잠기군 하지요.” 일본에서 병치료를 마치고 장춘으로 돌아온 윤영학은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은 내 마음의 영원한 빚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머니의 그 ‘일본딸’을 꼭 찾아 우리 딸과도 만나게 해 두 가족의 인연을 삼대째 이어가고저 하는 것이 내 여생의 소원이기도 합니다.”고 토로한다.

“그때 ‘우에다’ 씨라는 분 기억납니다!”

윤영학은 그 ‘일본딸’ 부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90고령일거라고 추측한다. 혹시 타계했더라도 그의 자식의 년세가 70대쯤 되니 분명 살아있을거고, 그들이라도 만나서 어머니의 그리움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란다.

요즘 윤영학은 왕청 시골집에서 주숙하던 일본인 로동자 한명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자나깨나 어머니와 ‘일본딸’ 생각을 하다가 근간에 갑자기 ‘우에다’(上田)라는 일본인의 이름이 생각난 것이다. 그 때 우에다씨의 나이가 윤영학보다 네살 이상인 17세 정도였으니 살아있다면 90세가 거의 될 것이란다.

윤영학은 당시 당지에 있던 일본인들의 이름을 찾아보려고 일전에 왕청현 사지(史地)를 쓴 작자를 찾아 문의해보았지만 해방 후의 일본인 명단은 기록이 없어 찾을 길이 없다는 답복만 받았다.

윤영학은 어머니의 ‘일본딸’을 찾을 일루의 희망을 걸고 길림신문사를 찾게 되였다며 이 사실을 길림신문사 리홍매 일본특파원을 통해 일본사회에 알린다면 혹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가고 말하면서 기대감에 넘쳐있었다.

한 비극의 시대에 발생한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연, 잔인한 침략전쟁 이후 눈 속에 핀 매화처럼 중일 두 나라 인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소중한 인간애는 평화와 사랑을 갈망하는 두 나라 인민들의 변함없는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 길림신문 박명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천갑록씨(61살)는 신발수리공이다. 돋보기를 넌지시 코에 걸치고 능숙하게 실을 꿰는 천씨는 흰 운동화를 손에 들고 해진 곳을 바느질한다. 여기저기 해져서 볼품없던 신발이 천씨의 꼼꼼한 바느질로 금세 새살이 붙으면서 말끔한 모습을 보인다. 천씨는 2년 넘게 연길시 북대 대우화원 아빠트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있다. ...
  • 2013-07-31
  •    올해 62세인 서숙자는 10년전 연길시 저압전기기구공장에서 퇴직한후 지금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에서 로후를 장식하고있다.    2005년부터 북경에 있는 딸 집에서 생활하며 열심히 신문열독을 하면서 가치있는 자료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일들을 누가 ...
  • 2013-07-29
  •             일전에 연변두만강애심협회에서는 불우한 장애인가정 학생들에게 사랑으로 넘치는 달콤한 하루를 선물했습니다. 연변지체장애인협회에서 추천한 김이령, 우희봉, 허충량 등 12명 학생들은 두만강애심협회에서 조달한 조학금과 학용품을 받았습니다. 두만강애심협회 윤희백회장님...
  • 2013-07-29
  • 왕청현려명예술단 단장 리주성씨의 로후생활 새로운 무용곡을 구상하고 있는 리주성씨. 가야하반에 자리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퇴직한후 장장 11년동안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민족예술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예술을 계승, 발전시켜 연변은 물론 동북3성에서 《민간예술가...
  • 2013-07-29
  • “무더위에 환경청결을 하느라 땀을 많이 흘렸는데 사회구역 간부들이 따라준 녹두물을 마시고 마음이 더없이 개운하고 시원해졌으며 더위가 확 날아간것 같았습니다.” 이는 연길시 공원가두 원성사회구역에서 청결공으로 일하고있는 52세 리서진씨가 청결도중 원성사회구역 간부들이 갖고 온 녹두물을 마시고 ...
  • 2013-07-25
  • “시내가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 농민들도 ‘공인’처럼‘쌍발’해 월급 타거든요.” 함주원씨는 아담하고 정갈한 마을풍경과 시설, 경영체를 일일이 가리키면서 “땅도 부치니까 이중수입이다보니 우리 마을 사람들이 호강스럽게 살아간다”고 자랑한다. 함주원씨는 민속관광, 특...
  • 2013-07-25
  • 8년간 사회구역 주민들을 위해 충실히 일해온 간부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연길시 건공가두 연화사회구역 당총지서기 대지품입니다. 요즘 연화사회구역 경찰아파트단지에서는 단지출입구에 자동문을 설치하느라 바삐 보내고 있습니다. 원래 아파트단지는 자동문이 설치안돼 관리에 허점이 많았는데 사회구역 당총지서기 대...
  • 2013-07-23
  • 연길시 조양천진 승리사회구역 철남에 거주하고있는 올해 71세인 최인숙은 전국로력모범의 본색을 잃지 않고 퇴직후에도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있다. 일찍 개산툰 철물상점에서 과장으로 사업하면서 20만원이란 놀라운 영업수입을 올린 최인숙은 1985년에 전국로력모범으로 표창받았다. 그후 조...
  • 2013-07-22
  • 백혈병소년 박명혁, 따뜻한 성원속에 두번째 화학치료도 무사히 마무리 두번째 화학치료후 병실문을 나서서 걷다가 힘들어 쉬고있는 박명혁학생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앓는 애와 저희 가족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내용의 메세지와 함께 련속부절히 입금해주고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습...
  • 2013-07-22
  • 《우리는 나라 발전의 견증인이며 유공자이다》   이때가 얼마나 좋았던가?...1963년도에 찍은 왕청현제5중학교 졸업생사진 1963년 7월 10일은 왕청현제5중학졸업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날이다. 지난 7월 14일, 도문립봉산장에서 반백년만에 처음 이 학교 당년졸업생기념파티가 있었다. 파티의 조직자인 문영수, 강봉...
  • 2013-07-18
  • 한국 벽제농협과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이 자매결연을 맺고 17년간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있다. 지난 6월말, 자매결연 17돐을 맞아 또다시 홍기촌을 찾은 한국 벽제농협 리승엽조합장을 비롯한 임직원 4명은 촌민들과 함께 즐거운 만남을 가진후 홍기촌발전기금과 만보소학교발전기금, 마을 54명 학생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 2013-07-18
  • 연길시 신흥가두 민화사회구역에는 지은지 20여년이 되는 한 아빠트가 있는데 하수도가 자주 막히는바람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있었다. 2011년에 민화사회구역의 일군들이 애를 써서 겨우 하수도를 소통시켜놓았는데 금년에 또 문제가 발생하였다. 민화사회구역 일군들은 부득불 한집에서 30원씩 거두기로 하고 집집을 찾...
  • 2013-07-18
  • 하늘이 내린 선물 —안도 만보진 홍기촌의 세쌍둥이(8살, 지미선, 지미자, 지송군)가 모두의 갸륵한 마음 그대로 자라 이제는 동심의 꿈을 한껏 펼쳐가는 어엿한 소학생이 되였다.   “학교생활 신이 나요”   11일, 특대홍수후 새로 닦은 시원한 도로를 따라 골목안으로 아담하게 들어앉은 안도...
  • 2013-07-18
  • 왕청현 제18차 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서 선진으로 표창받은 오기철.(사진 김룡기자) 일전에 연변주 왕청현 배초구진당위에서는 복림촌 촌민 리옥희(李玉喜)가 보내온 감사신을 받았다. 감사신에는 배초구진 복림촌 촌민위원회 주임 오기철이 자기 안해가 중병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관건적인 시각에 선뜻이 나서서 남...
  • 2013-07-17
  • 란간 보수작업을 하는 오기송씨(왼쪽사람).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연길의 명물이라 불리는 부르하통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문뜩 그 사람들 사이로 탁 트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외로운 쪽배 하나가 손에 잡힐듯 시선을 잡아끈다. 뭘 하나 유심히 봤더니 상류쪽에서 떠내려오는 쓰레기들을 긴...
  • 2013-07-17
  • 7월 14일, 길림시설봉문화협회의 행사가 길림시 송화호 기린애섬에서 있었다. 협회 회원 40여명이 아침길을 줄여 한시간 반가량 가도가도 끝이 없을듯한 수림속 산길을 뚫어 도착한 송화호 서남변 선착장, 또다시 배를 타고 찾은 곳은 기린애섬이다. 송화호 기란애섬에 도착 산수가 어우러져 그림같은 선경에 잠시 잃었던 넋...
  • 2013-07-16
  • 2006년 3월 27일에 뇌경색이라는 불청객이 나한테 또 찾아왔다. 이날도 친구와 둘이서 술한병을 마셨는데 이번에는 오른손을 잘 쓸수 없었다. 2년전의 경험이 있는 지라 그 길로 병원에 갔더니 이번에는 왼쪽 뇌혈이 막혔다는것이다. 평소에도 맥박이 고르지 못하고 비오기 전날 심장이 아파나는데 고통스러워 가슴을 주먹...
  • 2013-07-15
  • 어머니와 함께. 왕청진에 거주하는 김순자는 ( 올해 72세) 지난해 43년전에 갈라진 아들 전진석을 만나게 되였다. 김순자는 1963년에 결혼하여 1965년에 아들 진석이를 봤는데 남편과 감정이 맞지 않아 1967년 2월 28일에 법적리혼을 하고 아들애는 남편이 키우기로 했다. 김순자는 애가 보고파 애와 갈라진 두달후인 4월 ...
  • 2013-07-15
  • 최근 몇년간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축구협회에서는 민족 축구 발전과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에 따르면 이 협회는 2011년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로부터 목단강대표처로 임명되면서 새롭게 탄생하였다.지난 세기 80년대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된적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여...
  • 2013-07-12
  • “마을일이라면 발벗고나서는 '걱정도감'을 신문에 내줄수 없습니까?” 10일, 화룡시 투도진에서 아침 일찍 뻐스를 타고 본사 사무실을 찾은 김학송(80세)로인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걱정도감은 화룡시 투도진 신북촌의 김송웅(73세)로인으로서 화룡시 공안국에서 사업하다 퇴직한후 마을과 이웃들을 위...
  • 2013-07-1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