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行하는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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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재물신이 오시는 날에는 댓글:  조회:2914  추천:9  2021-02-16
   나는 베푼다는 말보다는 나눈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 어쩐지 베푼다는 말속에는 위에서 아래로 던져주는 듯한 오만함의 의미가 깃든 듯해서,  좀 더 평등한듯, 부드러운듯한 나눔이라는 말뜻이 한층 더 좋아져서이다. 금년 춘절에는 여느때보다도 폭죽소리가 요란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전세계가 다 같이 피해를 입는 이때 다들 폭죽을 터뜨려서 그 역병을 물리치려는 심리가 작용한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나쁜 귀신을 쫒거나 액운같은것을 쫒을 때도 폭죽이요, 결혼이나 좋은 모임에 혹은 누군가를 영접하는 훌륭한 날에도 폭축을 터치는것이 상례다.   오늘은 선방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다가 멀리 시내쪽에서 울리는 폭죽소리에 깨어났다.  매년 이맘때면 떠들썩한 술자리보다는 참선방에서 명상을 하며 , 가끔씩 글도 쓰고 차도 마시면서 조용히 지내는것이 관례가 되였다.   위챗을 들여다보니 오늘은 마침 정월 초닷새다. 민간에서 재물신을 맞이하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요란하게 폭축을 터뜨리나부다. 어디서나 재물을 좋아하기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인가 본다.  민간에서뿐 아니라 불교에도 황재신이라고 해서 어려운자들에게 재물을 주는 신이있다. 정월 초닷새에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재물을 점지하나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재물신을 청한다.   중국 명나라때까지만 해도 민간에서는 대부분 백성들이 재물신이라기 보다는 灶神이라고 해서 부뚜막신을 모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궁핍한 상황에서 재물보다도 부뚜막에 불을 지펴 밥을 먹을수 있게 해달고 기도하는것이 그 유래였던것이다. 청나라 후기에 들어와서야 점차 재물신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할수 있다. 정월 초나흘에서 초닷새 자정에 들어서기 전까지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자정이 들어설때 폭축을 터뜨리며 재물신을 청한다. 집안의 가장과 남자 가족들이 함께 폭죽을 터치고 나서 큰소리로   (迎财神了! )라고 외친다. 그리고 집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대문까지 왔을때 다시  (财神进门了!)라고 한마디 한다. 이때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다 같이  (迎接财神爷)라고 큰 소리로 화답한다.  이어서 그런식으로 재물신을 집안의 정문까지 들여서 비로서 가족의 가장이 대표로 집안에 모시고 있는 재물신의 상이나 족자에 향을 사르고 초불을 밝힌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절을 하면서 새해에 많은 재물을 모을수 있기를 기원한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떻게 쓰느냐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 큰 숙제이다. 언젠가 아들놈하고 미래 비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과연 당연한 대답이 왔는데 였다.  그게 나누는 즐거움일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나눌때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재물뿐이 아니다. 미소를 나누어도, 좋은 말을 나누어도,  격려의 포옹을 나누어도 좋다. 우리는 뭔가를 먹고나면 필요한 만큼 남기고 소화기관을 통해서 다시 자연에 돌린다.  만약 먹기만 하고 변비가 심하다면 큰일이다. 그게 힘든 줄 모르고 요즘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기만 하고 쓸줄을 모른다. 변비에 걸려도 크게 걸렸다. 그러나 진정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눔의 의미를 안다. 그래서 재물을 가치있게 쓸수 있기를 기도한다. 가치있게 쓸수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부와 재물이 차례지는것 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재물신은 참으로 복 받은 신이시다. 언제나 주실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시랴. 여기에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재물신을 청하면서 하는 기도문이다. 재물신에게 기도할때 그냥 하거나 하면 아니된다.  먼저 동서남북과 중앙을 합해서 다섯방향의 재물신 모두의 명호를 차례로 부르면서 각 방향의 재물이 모여들기를 기원한다. 이어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재물신도 재물을 바르게 쓰는 자에게 더 많은 재물을 준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신에게 재물을 빌기전에 우선 재물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쓰겠다는 준비가 되여 있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기 때문이다. 준비된 자야만 재물은 가장 유용하게 쓰임을 재물신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말에 는 말이 있다. 바로 재물이 모이지 못함은 그것의 쓰임을 몰라서임을 알려주는 명구이다. 몇해전에 공부하다가 재물에대해 닿는 생각이 있어서 써놓은 우리 말 시조 한편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제목은 그냥 이라고 달았다.   쓰고나면 없어진듯 아니써도 거기있는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한데 잠간만 빌려쓰고 떠나면서 돌려가오.     이렇게 글을 적다가 보니 벌써 섣달 초닷새의 자정이 지나간다. 문뜩 유대인들의 속담이 떠올랐다. 는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 아닌가?! 이 세상의 어머니들은 신들이 다하지 못하는 영역에 서서 우리를 보살피는 신의 역할을 하신단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물신이 오시는 날 재물을 나누면 나도 재물신과 다름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재물을 나누는 자는 받는 자에게는 재물신이다. 나도 위챗으로 먼저 내가 존경하는 몇몇 스님들께 작은 돈을 보내 드렸다. 수행하시다 요긴하실때 쓰시라는 용돈의 의미의 공양이다. 이어서 주변에서 장학재단과 같은 좋은 일들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위챗에도 좋은 일에 써달라는 문구와 함께 작은 돈이지만 성의껏 보내 드렸다. 재물도 재물이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많은것을 나눌줄 알아야 한다. 바로 나눔을 행하는 자가 재물신이며, 재물신께서 우리곁에 오시는 날의 바른 의미도 나눔임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재물신이 오시는날 폭죽보다도 나눔을 실천한다면 그게 재물신과 복신을 청해들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2021년 음력 정월 초닷새 축시 도문 일광산 수월선원에서.
54    아버지로의 성장 댓글:  조회:3085  추천:26  2021-02-10
아버지로의 성장   김문일      요새는 코로나19 때문에 지구촌이 하나 같이 부산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떤 리유이든간에 자연이 우리에게 경종을 주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년말련휴기간인데도 어디 나다니기가 거북스럽다. 나도 오랜 만에 한가한 시간들을 만나게 됐다. 그래서 집안의 서재에 들어박혀서 《西藏生死书》라는 책을 읽고 있다. 절강대학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인데 자못 흥미진진하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몇년 전 한국어판으로 번역된 다.  한국의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책인데 우리 글이 뜻문자가 아니라 소리형 문자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중국글에 더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여러가지로 알아보기가 힘들었었다. 마침 이번 년말에 고향에 돌아오면서 공항 서점에서 중국어판본을 보게 되여 선뜻 사왔다. 한국어 판본과 중국어판본을 서로 대조하면서 보게 되니 자못 더 흥미롭다.     책을 읽다가 피곤해서 잠간 쉴려고 외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과 위챗으로 통화를 했다. 여러가지로 오래동안 아들과 상담을 하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우는 느낌이다.    마치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듯이 나도 그렇게 함께 배우면서 아이들과 같이 성장을 한다. 실은 나의 마음도 아직 아이들처럼 천진하고 랑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강함이 없어서 우리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지 못했다. 또 나는 싸울 줄 잘 몰라서 우리 아이들을 악착스럽게 키울 수 없었다. 나의 두 아들은 그렇게 부족한 아빠한테서 착함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 뺏기면 두개를 빼앗아오라고 시킬 때 나는 손해보는 것이 리득보는 것임을 아이들에게 리해시키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이 자녀가 한대 맞으면 두대 때리고 오라고 시킬 때 나는 양보의 미덕을 가르쳤다. 그게 바보처럼 보여서 안해의 핀잔도 가끔씩 들었지만 나는 내 게 없는 것을, 그리고 내가 볼 때 아닌 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   한비자는 라는 말을 했다. 즉 눈앞의 리익에 매달리다 보면 큰 리익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말이고 당연한 일이나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다. 부부싸움에 쌍방 부모가 서로 자기 자식편에 서서 싸우질 않나, 자그마한 부부간의 모순에 서로 자존심 상한다고 섣불히 리혼을 하지 않나, 요즘은 정말 나로서는 리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옛날 춘추시대에 진(晋)이라는 강국이 괵(虢)이라는 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의 일이다. 괵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虞)나라의 령내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준마와 옥을 주고 길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우나라의 중신들은 "괵나라가 멸망하면 다음은 우의 차례입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했지만 우나라의 왕은 선물에 눈이 어두워 진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 결과 , 괵나라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도 진의 침공을 받아 멸망해 버렸다고 한다. 우왕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는 쉬우나 그런 립장에 자신이 처해지면 같은 실수를 범해 버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그 당시는 바보처럼 보였지만 양보를 하는 우리 아이들 주변에는 친구가 많아졌다. 더 많은 친구들이, 또 더 순수한 우정들이 하나, 둘 모였다. 나는 그래서 감사했다. 건강하고 착하게 커줘서 감사했고 바르고 씩씩하게 커주어서 감사했다.   우선 아버지이기 전에 나는 자녀였다.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부모님과 두 누님의 사랑을 가득 받으면서 자란 나는 고생이 뭔 지 모르고 컸다. 그렇게 청춘을 흘러 보내면서도 나는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내 인생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인생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보다 더 값진 것이 있는지 질문하지도 않았다. 인생의 가치나, 소중함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의심할 바 없는 바른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리 휩쓸려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뜩 나는 한발자욱 성장한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되였다. 코로나로 인해서 외지에서 설 쇠러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 아들놈이 처음으로 고향생각, 부모생각이 났나부다. 태여나서 처음 부모를 떠나서 혼자 쇠는 설이다. 자리에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 아들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내 가슴이 아파왔다. 뭔가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내 심장을 쿡 찔렀다.  아~그때에야 나는 내가 비로서 아버지로서 한 발자욱 성장을 했음을 깨달았다. 자식을 곱다고 키우고만 있었지 어떤 것이 아버지인 줄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따뜻한 차 한잔과 잔잔한 일상에 감동하고 배우면서 나는 삶을 배워가고 있다.   문뜩 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세기 유명한 프랑스의 극작가 크로텔이,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마리아에게 고함》에서의 한 구절이다. 이 대사 앞에는 이런 말이 더 있다. 라고 그는 반문했다. 물론 크로텔이 죽음을 찬미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죽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죽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은 어떤 형태를 끝맺음으로서 삶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그러니 이제와서는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야 말로 나에게 있어서 최대의 문제가 되였다. 몇년 전 써두었던 라는 시가 떠올라 여기에 적어본다.   나는 질문 없이 살았어요 주어진 대로 생각나는 대로 그러다보니 세월은 가고 어느새 내 얼굴에 주름이 지네요   질문을 했다면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면 왜서 이렇게 사는지 어째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걸 질문했다면 나는 기필고 이렇게 후회하진 않았을거예요   질문은 내 삶을 빛나게 하고 질문은 해답보다 중요한 것이죠 질문하는 자에게는 해답이 올 터이니 질문만 하면 되는것을 나는 몰랐어요   아직도 늦지는 않을거예요 이제도 기회는 있는 것이죠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으며 내게는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을가요? 그렇게 질문하다 보면 어느새 내게도 더 낳은 길이 보이겠죠. 지금보다 더 바른 길요.  
53    심어야 거두리 댓글:  조회:3733  추천:5  2020-04-04
  오늘 청명에는 바람이 몹쓸게 불어쳤다. 어렵사리 차린 제사상에 날리는 심한 모래바람에 바르게 제사를 지낼 수 조차 없었다. 중국 당나라 시기에 두목이라는 시인이 청명을 쓴 시가 있다. 清明时节雨纷纷,路上行人欲断魂。 借问酒家何处有?牧童遥指杏花村。 이라는 구절이다. 청명절에 비가 오는데 길가에 행인들은 선친을 그리는 마음에 가슴들이 찢어진다. 술집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사람에게 목동이 멀리 보이는 행화촌을 가르킨다는 시이다.   청명을 맞으면서 언제나 떠오르는 시다. 예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요즘 나이가 들면서 새록새록 어릴 때 외워 두었던 시구들이 떠오르면서 공감을 느끼군 한다. 아마 삶과 시간속에서 시속의 구절들과 대응되는 상황들을 발견할 때가 점점 많아 지나부다. 언제부터 인지는 몰라도 청명에 날이 개일때를 거의 보지 못했다. 특히 산소로 제사를 지내려 가려고 할 때면 언제나 같이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군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과 헤여 져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산다. 한마디로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이다. 죽음은 우리를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우리는 마치 천만년을 살 것처럼 엉뚱한 곳 만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기우뚱거리며 걸음마를 익히는 철부지처럼 그 본질적인 숙명을 외면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결점은 정신의 장님이다. 그것은 사람을 미혹시킬 뿐만 아니라 그 미혹마저 사랑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인간성의 부족함을 정곡으로 찌르는 철학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이라는 불교 우화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사는 지붕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타고 있는데도 그 안에서 뛰쳐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오늘 뭘 먹을가?》를 걱정하고 《래일 무슨 옷을 입을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 모든 금전과 권력도 보잘것없는 것임을 우리는 요즘 역병을 통해서 배워오고 있다. 또 우리는 언제인가 잃었다는 슬픔과 잃을 것이라는 걱정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필연적인 결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까스로 외면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자기 변명으로 무장한채 계속 불타는 집안에서 《이 불이 어디에서 제일 먼저 붙었는지?》 《불타고 있는 지붕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불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지?》 《불을 지붕에 붙인자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를 따지면서 산다.   아니 사는게 아니라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역병이 대폭 터지기전에 연길시의 모 양로원에 우리 회사의 제품을 납품했던적 있다. 이제 다시 일들을 시작하게 되니 어제는 그 상태를 점검하러 다녀 오게 됐다. 양로원의 중간 복도에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줄줄이 앉아서 창문 틈으로 새여 들어오는 햇볕 쪼임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별로 할말도 없는지 모두들 묵묵히 앉아만 있다. 오전내내 일을 보며 그 사이를 들락거리는 내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리는, 아니 삶을 더욱이 열망하는, 그 로인네들이나 지금 지붕이 불타고 있는 집안에서 오늘 점심에 《국수를 먹을것인지? 아니면 빵을 먹을 것인지? 》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내가 무엇이 다른 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 고서인 채근담에는 《勿恃久安 勿惮初难》이라는 말이 있다. 즉 오래 지속되는 안녕을 의지하지 말고, 처음 부딪치는 어려움을 겁내지 말라는 말이다.   중국의 또 다른 고서인 역학(易学)에서도 비슷한 의미로서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채근담에서 이야기하는 이 구안(久安)이란 길게 계속되는 운이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초난(初难)이란 최초로 부딪치는 곤난이다. 따라서 《오늘의 행운이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고 생각지 말며. 처음 닥치는 어려움에도 겁내어 도망치지 말라는》 깊은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운이 붙을 때면 운 있는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불행이 닥쳐오면 순간 당황해 버린다. 무슨 일을 하든 지간에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다. 시련이 두려워서 포기해서는 않된다.   벌써 봄바람이 세차게 분다. 산불을 조심해야 할 때이다. 분주히 제사를 마무리 짓고 내려오는데 바람이 죽지를 않고 더욱 세차게 불어 친다. 청명에 불어치는 이 거센 바람이 이 지구에서 기승을 부리는 역병을 뿌리채 다 뽑아 날려보내 주십 사 큰 소리로 기도를 해봤다.   오늘 아침 꿈에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았다. 살아 계실 때처럼 밝게 보였다. 이제는 몇년이 지났는데도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슬픔이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청명이나 제사날을 맞추어 꿈에 오시 군 한다.  나는 천성으로 이별에 약한가 부다. 그래서 이런 날이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청명이 지나면 이제는 씨앗을 심을 시기가 온것이다. 춥고 거센 바람도 실은 봄 바람이다. 오래전 시조 쓰기를 배우면서 써두었던 시조 한편이 떠올라 읊어 본다. 오늘은 이걸 쫒고 내일은 저걸 쫒고 복(福)을 쫒고 부(富)를 쫒아 남는것 하나없네 복과 부는 쫒는게 아니오라 거두어야 하리니 지가 심지 아니하고 어디서 거두리오.
52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사라지는 우리 말1 댓글:  조회:3303  추천:10  2020-03-21
  우리가 어릴 때 교과서에는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인가? 》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위위라는 작가가 쓴 조선전쟁시대의 중국 지원군을 대표해서 쓴 글이다. 물론 긴 우주의 계보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의 욕망을 대표하는 장난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대의(大义)를 위해서 선뜻 나서는 사랑스런 사람들이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집 불이 꺼졌다 해서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언제 불이 다시 피여 옆집으로 퍼질지 모른다. 이제는 지구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국말 속담처럼 이제는 이 불가능 해졌다. 혼자만 깨끗해 질려고 해서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신종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인간과 바이러스와의 또 다른 전쟁이다. 생과 사의 박투인것이다.  그 전쟁에서 언제 어떻게 희생될지를 모르면서도 선뜻 사지로 뛰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참 사랑스럽다. 이 시대의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사랑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포함되여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있고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있고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 있다. 종교적으로 볼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자비로움이 있다... 프랑스의 작가 생 떽쥐베리는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 보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같이 어떤 방향을 향해가는 사랑이야 말로 올바른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어릴때만해도 부모님들이나 어르신들중 부부라면 서로 《동무》라는 말을 썼다. 그러다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하면서부터 어느 날인가 한국에서 온 선배가 듣기  거북했던지 한마디 했다. 《에키, 부부간에 어떻게 동무가 되는가? 》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는데요? 》 《여보,라고 부르던지 아니면 당신,이라고 불러야지 동무가 뭐야 동무? 부부가 어떻게 동무가 될 수 있어. 》 그때는 한국의 경제가 잘 나가고 있고 우리보다 많이 발전해 있었기에 우리는 그 말들이 다 맞는 줄 알고 있었다. 한류의 영향으로 젊은 이들중 하나 둘 말을 바꾸다 보니 이제는 부부간에 동무라는 말을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사전을 뒤져보면 여보라는 말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쓰인다.)고 돼있다.  실지 여보는 《여봐라, 여기 봐라》의 줄임 말이다. 봉건시대 부부간에 서로 애칭을 부르기가 쑥스러워서 《여기 봐》라고 부르던 줄임 말이 그렇게 쓰여 진 것이다. 다시 《당신>이라는 말을 보자.  2인칭인 소유대명사로 쓰이는《당신 누구요?》 라는 식의 당신이 있고 , 3인칭의 존칭인 《어머니는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신다. 》라는 식의 당신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냥 당신이라는 말은 《부부사이의 호칭이다. 》 라고 돼 있다.   그냥 내 개인적인 기호일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인생을 함께 가는 길동무라는 의미로서의 동무라는 애칭이 훨씬 더 산뜻하고 다정다감하다.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서로 손을 잡고, 짧지만 긴 인생의 려정(여정)을 함께 가는 동무가 진정한 부부가 아니겠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말인가? 왜 언어에 꼭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을 가져다 붙이는지 나는 아직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체호브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매형은 무한시로 의료지원을 떠나면서 슬그머니 보험을 사놓았나부다. 코로나 치료를 갔다가 사망시 거액의 보험금을 누님앞으로 사놓은것이다. 보험회사에서 가족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누님에게 전화가 와서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위챗으로 따지는 누님에게 매형이 슬쩍 한마디 한다. 《여기 올 때 살아서 돌아갈지, 죽어서 돌아갈지 누가 아오? 내가 죽어도 동무는 꼭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야지 않겠소? 》라고 말하는 매형의 말에 누님은 그냥 엉엉 울어버렸다.   어느 작가는 《사랑이란 우리의 영혼 중에서 가장 순결한 부분이, 어떤 미지의 것을 향해 포옹하는 성스런 동경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단순한 맹목적인 애정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시련을 뛰어 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손을 잡고 나가는 정열이 아닐까 싶다.
51    악마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한다. 댓글:  조회:3586  추천:5  2020-03-03
  오늘 새벽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심각하던 일들도 깨고 보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마치 우리 살아있는 삶도 너무나도 반듯한듯 하지만 언젠가 꿈에서 깨고 보면 그냥 꿈처럼 하얀 기억만 남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꿈처럼 허망할 진 대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애쓰는 일들 역시 그러하지 않을 가? 가장 두려운 것은 뭔가 조금 알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세상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미신인지 알고 있지 못하는 우매함의  울타리가 바로 미신이다. 중국 글에서 미신이라는 글자는 미혹될 미(迷)자에 믿을 신(信)자가 붙는다.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이다. 글자 그대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두개의 십자 길 여덟 방향에서 갈팡질팡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믿고 따라감의 변이 붙어 있다. 내가 잘 모르는 걸 믿는 것을 미신(迷信)이라 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는 종교 집단이 그러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지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신도를 발전시켜서 자기들의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런 무식한 신도들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자기 자신만을 미신하는 광신도들이다.  그들이 진정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는 자기 자신 뿐이다.    너무 무섭다.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의 울타리를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유한한 지식을 미신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이 두려울 뿐이다. 나의 주변에도 우수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들 역시 어느 정도 높아지면 오만함의 늪에서 헤여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유럽문단에서는 유명한 몽테뉴는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을 계속하면 사라진다.》라고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도 끊임없이 갈고 닦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럴리스트인 몽테뉴는 종교전쟁 시대에 남 프랑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 났다. 38세까지 법률가로 지냈ᅌᅳ나 은퇴후 독서와 사색의 생활에 몰입한다. 그런 그가 47세에 그때까지 써두었던 소감과 고찰들을 정리한 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좌우명으로 두고 있는 그는, 수상록의 간행후에도 새롭게 독서에서 얻은 지식과 사색의 결과를 추가하여 수정하는 일을 59세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자신의 말한대로 스스로 실행한것이다.   《정말 인간처럼, 놀라울 정도로 여러가지이며 변하기 쉬운 것 도 없다. 인간에 대해 일정하게 변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기는 참으로 어렵다.》라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다.   사기(史记)를 보면《四时之序,成功者志》라는 말이 있다. 四时之序란 춘하추동의 변화를 말한다. 봄은 봄의 역할을 끝내면 여름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고, 여름은 여름의 역할을 끝내면 주인공의 자리를 가을에게 남겨준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우리 각자의 삶은 스스로의 계절이 있다. 그 성숙함의 시기를 정확히 붙잡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하는 관점을 가지고, 새롭게 사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만이 언제나 발전하는 삶을 살아 갈수 있다. 또한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올바른 길을 선택할수 있는 것이다.   로시푸코의 에서는《인간의 가치는 과일과 같이 제각기 계절이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란 과일이 익어서 먹을수 있을 때를 말한다. 실지 사람들마다 각자의 인생의 성숙기는 저마다 다르다. 더욱이 성숙한 때 스스로 정확히 붙잡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자신은 어느 계절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잠언이라는 것은 17세기의 프랑스의 사교계가 탄생시킨 싸롱 문학의 하나이다. 잠언속에는 기발한 말들이 많이 들어 있다. 같은 시대의 파스칼이 쓴 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표현한 것도 상당수 있는 것이 일부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역병은 우리에게는 큰 가르침을 많이 주고 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않되는 인생의 큰 계발이다. 왜서 이번 역병이 한국의 신천지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폭발 했을 가? 중국 말 속담에 라는 말이 있다. 나쁜 행실을 많이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라는 종교를 표방한 집단이 기독교의 성경을 표방해서 한국에서만 200만명의 신도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 연변에까지, 무한에까지 신도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한다. 문뜩 어릴 때 읽던 섹스피어의 희곡집에서의 한마디가 떠올라 적어본다. 《악마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한다.》는 말이다. 섹스피어의 에서 나오는 말이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사악한 종교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더 무섭다. 올바른 세계관과 바른 인생관이 어느때보다도 더 필요 할 때이다.   우주의 커다란 계보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군가가 정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는 있을 가? 또 누가 걱정하고 있을 가? 인간의 최종적인 삶의 목적은 또한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또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  아니면 우리는 그냥 누군가가 싫어하는 우주의 바이러스일 뿐일까? 
50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  조회:3822  추천:15  2020-02-27
  벌써 2월이 다 지나간다. 역병으로 인해서 설부터 꼬박 집안에 박혀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게 모두들 힘든 가 본다. 공자의 말씀 중에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한 말이다.  그의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시 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는 장님이였지만 비파를 뜯으면서 사람들에게 시를 랑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호메로스는 인생은 짧고 유한하기 때문에, 무위(无为)로 지나쳐 버리는 각각의 시간을 아쉬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실지 우리가 안일하게 랑비 해버리는 시간은 또한 얼마나 될까? 짧고 유한한 인생에서 차를 마시며 수다 떨고 드라마 보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며 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한시(武汉市) 코로나19치유를 위해서 의료 지원 출정을 떠난 매형이 퇴근후의 사진을 위챗으로 보내왔다. 무한시는 이미 영상 20도를 넘어섰다고 한다. 환자들의 2차감염을 위해서 에어컨도 돌릴 수가 없다. 다섯벌의 방호복을 입고 마스크에 방호 용 안경까지 온몸을 감싸고 8시간을 꼬박 일해야 한다고 한다. 자칫 피부가 로출(노출)될 경우 코로나19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수가 없다. 하루동안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한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막기위해서 될수록 적게 먹어야 한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에 물도 마시기 힘들다. 그러나 하루에 흘리는 땀은 거침이 없다. 몇겹의 방호복속에서 피부는 완전히 찜통속에서 쪄낸 것 처럼 흐드러진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어선 매형은 이번 의료지원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의사에 속한다. 요추간판 돌출이라는 병도 있다. 그런 매형의 땀에 절인 얼굴에 방호용 안경과 마스크의 자리가 깊이 박혀있다. 사진을 보고 누님은 한참을 울었다.   현재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국제적인 상황도 너무 명랑하지 않다. 이웃나라인 한국도 일본도 심각한 상황이다. 유럽에서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때일수록 집에서 가만히 있는 우리는 그냥 시간만 보내서는 안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는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살고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사서(史书) 의 하나인 대학(大学)에는 《小人闲而不善》이라는 말이 있다. 뜻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시간이 있어도 변변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 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면서 세월을 허송해서는 아니된다. 미래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로인(노인)들 뿐이다.   중국의 현대 작가 로신(鲁迅)은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않는 인간의 대부분은 영원히 전진하고 영원히 희망을 갖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큰 부자들도, 우리가 보기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또 다른 희망을 안고 산다. 희망이 사람들을 이끄는 횃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   이번 역병이나 자연재해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구사하는 바가 크다. 마치 고난이나 역경이 한사람을 단련시켜 강하게 만들 듯이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않된다. 뭐든지 생각한대로 되는 만족한 경우는 , 왕왕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교만하게 되거나 이상하게 옹고집이 되거나 오히려 남에게 미움받는 수가 많다. 물론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부자유스런 경우도 힘들다. 언제나 적당함이 좋다. 축복 받은 듯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 둘 즈음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花看半开,酒饮微醉》라는 말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고서인 채근담《菜根谭》에서 하는 가르침이다. (술에 관한 저자의 관련 글 술의 경지(境界)를 참고 바람. ) 채근담에서는 술 마시는 방법이나 꽃을 보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같지만 실은 인생의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매형에게 응원을 보냈다. 연변 주 부련회와 매형 병원의 간부들이 출정나간 의사와 간호사들의 가족 위문을 다녀 갔다고 한다. 그래도 세상은 참 훈훈하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세상에 지나가지 않는 일이란 없다. 행복도 불행도, 즐거움도 어려움도, 그리고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지진과 황충, 그리고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역병도 다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문뜩 금강경《金刚经》의 한구절이 떠오른다. 라는 말이다. 글 면의 뜻대로만 보면 과거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은 더욱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내 마음속에 와닿는 가장 큰 울림이다.
49    출사표<出师表>를 내는 매형 댓글:  조회:4392  추천:27  2020-02-21
   매형은 의사다. 그것도 병원에서는 손꼽히는 의사로서 이제 얼마 있으면 퇴직할때도 되나부다. 그런데 이번 역병으로 인해서 의사 지원자를 찾을 때 무한(武汉)을 지원해야 한다하니 자기가 가겠다고 지원을 했다고 한다.    역병이 의사들을 피해간다는 보장은 없다. 무한시 그곳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옷깃을 스쳐도 병균을 옮길수 있는 무서운 지역이다. 그런 불구덩이로 스스로 뛰여 든다고 하니 소문을 들은 친지들은 아연실색을 했다.     매형의 이런 선택을 위대한 어떤것에 가져다 붙인다면 오히려 그 선택에 대한 모독이 될지도 모른다.  매형은 위대하다기 보다는 평범한, 그리고 의사로서 당연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병원을 대표하여 출정하여 무한시로 출발해야 하기에 나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차로 매형을 바래다 드렸다. 연변에서 모두 25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자원으로 출정해서 떠난다고 한다. 역병기간이라서 출정식은 간소하고 짧게 진행되였다.   요즘 역병이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가 했더니 전 세계적으로 황충이 하늘을 뒤덮고 지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엇때문일가? 무슨일인가? 요즘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서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뒤돌아보며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한다. 《인간은 이 우주의 불량 소년이다. 》라고 슬퍼한 미국의 시인 오펜하임이 있다. 또 영국의 극작가 길버트는 《인간은 조물주의 유일한 실수이다. 》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아마 전쟁이나 인간파괴 요즘 같은 환경과 자연을 략탈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실은 이라고 한다. 괴테가 한 말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말이다. 누구라도 일생을 회고할 때 아아, 그때 이런 일들이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계기였구나 라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 의 결정을 하게 된 매형에게도 어떤 내재된 사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순간을 결정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사명이 있다. 그 의 중요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기원전 19년 루비콘강을 건넌 시저의 결단이 그것이다.   루비콘강을 거너는 일이란 다름아닌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왕이 되느냐, 아니면 죽느냐에 있었다. 그는 강가에 서서 잠시 생각한다. 물론 지금 후회해도 늦지는 않다. 되돌아 갈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외친다. 이는 섹스피어가 의 극중에서 말하는 내용이다.    겨울이 춥다, 춥다 하다가도 곧 따뜻한 봄이 오는것처럼 천지의 법칙은 존재한다. 그리고 달은 점차로 차서 보름달이 되고 또 점차로 이지러지게 된다. 언제까지나 늘 보름달인 채로 있을 수는 없다. 이게 중국 고서인 에선 말하는 의 도리이다. 천지의 도는 극에 이르면 곧 뒤집어지고, 차면 곧 기운다는 뜻으로서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너무 크다. 그래서 이번 역병도, 또 어떤 재해도 꼭 이겨나가리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섭리도 이와 같다. 점차로 올라가 정점에 이르고 나면 더 이상의 정점이 없어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내려 감 뿐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빠져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또한 올라가는 길 뿐이다. 그래서 정상에 올랐을 때 교만해서는 않되고 한층 더 신중하게 처신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밑바닥에 떨어진다고 해서 결코 락(낙)담할 필요 또한 없다. 초조하거나 허둥대지 말고 , 힘을 저축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출사표》를 내는 제갈량처럼 길 떠나는,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은 모두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다. 매형 병원의 어린 간호사도 지원했다고 한다. 현재도 하루에 수천명씩 환자가 늘고 수십명씩 죽어나가는 그곳으로 자식을 보내는 어머니들의 마음은 또한 어떨가 싶다. 벌써 의사와 간호사도 많이 죽은 전쟁터이다.    길림성에서는 의사와 간호사 모두 합해서 17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물론 연변의 25명을 포함해서이다. 이 글을 쓰는 사이 매형이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무한시에서도 제일 위험한 중환자실로 가기로 했다고 한다. 매형이 병원에서도 중환자실 주임으로서 경험이 많다고 그리 신청했나부다.  주정부에서는 처음으로 보내는 무한시 지원 출정이다. 걱정이 가득한 가족들의 눈빛들이 떠나가는 버스를 바랜다. 그동안 잘 참고 있던 누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48    역병을 통해 보는 인과의 법칙 댓글:  조회:3078  추천:11  2020-02-15
   하늘에서는 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였음직 했지만 꼼짝 않고 창밖만 내다본다.   요새는 역병이 기승을 부린다. 그래서 모두들 집안에 들어박혀서 역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씩 휴식일이 왔을 때면 한두날 휴식하는 것이 좋아서 늦잠을 자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좋을지 몰라도 이렇게 두달이 다 되도록 꼼짝 못하고 집에 들어 박혀 있으라고 하니 모두들 마음이 답답한가보다. 그나마 요즘은 인터넷이 있고 TV에서 각종 재미있는 프로를 매일 쏟아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무한에서 시작된 이번 역병은 야생동물을 잡아먹은 인간들때문에 생긴 전염병이라고 한다. 박쥐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박쥐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이 된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전 세계적인 역병으로 번져졌다. 무서운 일이다.   중국말 속담에는 는 말이 있다. 물론 말을 함부로 해서 화근을 부른다는 쓰임이지만 요즘에 맞추어 보면 오히려 음식을 탐하는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세치 혀바닥을 통한 즐거움을 찾아서 온갖 일들을 저지른다. 박쥐는 그냥 보아도 징그럽고 무서웁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시장에서 파는 많고많은 검역을 거친 고기들을 제외하고 각종 뱀이며 고슴도치며, 두더쥐며, 심지어는 갓난 쥐의 새끼를 생것채로 먹는다.   인터넷을 통해서 생쥐새끼를 접시에 놓고 먹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그만 그날 먹은 음식을 다 토해버렸다. 그것도 광동에서는 라는 료리라고 한다. 중국말 뜻대로 보면 세번 소리 낸다는 것이다. 아직 털도 채 자라지 않고 눈도 뜨지 않은 쥐새끼들이 접시에서 오물오물 거리는데 젓가락으로 집을 때 한번 하고 소리를 내고 다시 입에 넣을 때 하고 소리를 내고 다시 씹을 때 하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라고 이름했다는 료리다.   중국사람들은 무엇을 먹으면 인간의 어떤 몸을 보신한다는 말을 믿는다. 즉 동물의 심장을 먹으면 인간의 심장도 좋아지고 동물의 간장을 먹으면 자신의 간장도 좋아진다고 믿는것이다.   거짓말도 열번하면 정말이 된다고 하는데 너무 황당한것이지만 이제는 정말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몸보신을 한답시고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이다. 물론 신기하거나 재미로 그렇게 살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나부다. 요즘은 금지하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국 광동지역에서는 산 원숭이의 대골을 빠개서 그 뇌를 퍼먹는 료리가 있었다. 밤 시장의 한구석에서 조롱속에 원숭이 무리들을 가두어 놓고 있다. 그 원숭이 대골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믿고 사람들은 가게 주인에게 돈을 주고 원숭이를 산다. 조롱속에 원숭이들은 그 손님이 자기들중에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바들바들 공포에 떤다.  가게 주인은 쇠집게를 원숭이 조롱속에 집어 넣은데 원숭이들은 바들바들 떨며 그 쇠집게를 피하겠다고 조롱속의 구석으로 피한다. 그러나 마음이 쇠덩이 같은 가게 주인에게는 막무가내다. 그렇게 원숭이가 목이 집혀나오면 밥상중간에 파놓은 구멍에 원숭이의 목을 조이고 머리만 상우에 내놓는다. 마치 옛날 죄인들에게 씌우는 칼처럼 말이다. 차마 글로 표현 못할 상황이다.   인간들은 자기가 잘 살겠다고 그렇게 살아있는 원숭의의 대골을 망치로 깨서 그 시뻘건 대뇌를 퍼먹는다. 글을 쓰다보니 그때 그 원숭이들의 그 두려움에 떠는 눈길을 보는같아서 등골이 다 서늘하다. 그렇게 동료의 죽음을 보며 도망갈데가 없어서 조롱속에서 두려움에 새된 소리를 지르는 원숭이들이 마치 현재의 우리와 같지 않은가? 역병은 마치 그 마음이 쇠덩이 같은 가게주인이고 우리는 그 조롱속에 갇힌 원숭이들이다. 언제 쇠집게에 집혀갈지 알수 없다. 그래도 살겠다고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 살아야 하니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철학자들의 말씀들이 하도 많아서 다 인용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필연성을 가지고 산다. 또한 는 말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기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냥 다른 동물들보다 좀더 똑똑한 동물일 뿐이다. 현시대의 과학적인  우주관으로 볼 때 지구는 우주에서 작은 티끌 같은 존재다. 불교의 세계관에는 라는 말이 있다.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8대행성을 (2006년 8월24일,국제천문학련합회 제 26차 대회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던 9번째 행성이였던 명왕성을 태양계의 행성에서 취소하기로 표결을 하였다.) 하나의 세계로 보았을 때 이런 태양계 같은 세계가 천개를 합치면 하나의 소천세계라고 한다. 이런 소천세계가 천개가 모이면 하나의 중천세계라고 한다. 또 그런 중천세계가 천개가 합치면 하나의 대천 세계라고 하는데 그런 대천세계가 삼천개가 모여있는 것을 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믿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천문과학을 통하여 우리는 그 지혜를 엿볼수 있다. 이렇게 삼천대천세계에서 지구는 그냥 티끌 같은 존재다 물론 그 티끌속에 인간들은 그냥 우리가 느끼는 세균 같은 존재일 뿐이다.   괴테는 그의 글에서 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 중요한 구절은 자각이다.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사고하고 자각으로 이르는 지혜를 이루는 것, 그것이 삶의 목표가 아닐까?   요즘 중국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영국에서는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이라는 대 시인이 있다. 그가 실명의 불행속에서 쓴 은 영국에서는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락원에서 추방되여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담을 향해 천사 미카엘이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밀턴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없이 이다.   우리 몸도 어찌보면 하나의 우주이다. 우리 몸속에, 어찌보면 그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심장속에 하나의 우주가 있고 또 그속에 또다른 태양계가 있고 우주가 있고 또 다른 지구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도 우주에서는 하나의 세포일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속에 세균들이 우리들이다. 우리는 명리를 탐하고 성공이라는 이름을 걸고 전쟁을 하고 략탈과 살생을 서슴지 않는다. 역병도 별거 아니다. 과학적인 우주관에서 볼때에는 그냥 세균들의 전쟁일 뿐이지 않는가?! 여기에 정의니 사함이니 선이니 악이니 갖다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볼때는 심각한 일이기도 하다. 커피 한잔을 타서 마시며 창문가에 서서 여느때 보다 조용한 길거리를 보고 있을려니 문뜩 철학자가 된 기분이다.    공자의 론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받아들일수 없는 일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듯이 동물들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세균 또한 그러하다. 또 는 말이 있다. 우리는 죽임을 통해서 죽음과 가까워 지고, 나눔을 통해서 부의 번성함의 도리를 배우고 있을 뿐이다.   이 무서운 역병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심은 행위는 어떤 씨앗으로 심어져서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올것이다.   그게 인과의 법칙이다.
47    사소한 시작 댓글:  조회:3369  추천:0  2016-07-02
  여름은 소리도 없이 성큼 다가왔다. 벌써 아침햇살이 무척 따갑다. 지난해 시골별장에 손수 심은 포도넌출에는 작은 포도열매가 조롱조롱 달렸다. 호박넌출이 길게 뻗어서 손수 넌출들을 작은 천으로 매달았다. 그 넌출들이 한쪽 담장에서 다른 편 담장으로 옮겨오더니 중간즈음에서 양쪽 넌출이 서로 마주쳐서 악수를 하듯 인연을 맺었다. 마당가에 심은 오얏나무에는 봄에 하얀 오얏꽃이 가득 피더니 그 자리에 어느새 작은 열매가 가득 피여난다. 벌써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듯 연한 오얏가지가 길게 바닥에 드리웠다. 토마토씨를 화분통에 옮겨심었었는데 거기에도 토마토 열매가 아직은 작지만 탐스럽게 가득 열렸다. 그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통의 흙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고 우리는 그냥 물만 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크고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 달리는지 의문이 간다. 식물이 땅에서 영양을 가져가지만 더 많이는 하늘이 주는 태양의 양분을 흡수하는게 아닌가 싶다. 태양의 에너지가 아버지라면 땅의 에너지는 어머니이다. 그런 음양의 조합으로 이 땅에 많고 많은 식물이 생겨난게 아닐가 싶다. 우리도 그중의 일원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도 동물과 식물과 다름없는 자연의 자식이다. 그런데 탐욕스런 인간의 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자연의 파괴는 이제는 놀랄만큼 무섭다. 지구 온난화로 세계의 명승지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아프리카에 가보니 아프리카 적도에서 유일한 눈덮인 산으로 그 척박한 열대의 가뭄을 이겨내는데 큰 힘을 보태주던 킬리만자로산우의 빙설이 15년안에 다 녹아서 없어진다고 했다. 이미 80%가 사라졌단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부동산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을 아래위로 막아서 그나마 물이 고인 강변을 만들었다. 그 주변에 아파트를 가득 지어서 비싼값에 팔기는 했는데 그게 얼마나 생태를 파괴하는 일인지 모두들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눈앞의 리익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치가 아닌 미래 백년을 내다보는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될수 있다. 임기가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정치인이 아닌 백년, 천년이 지나도 그 정신을 기리는 정치인이 이 땅, 이 민족에게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따라 간절하다. 물고기는 알을 낳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 그걸 아래위로 막아버렸으니 거기의 물고기는 그냥 갇혀버린 신세가 된것이다. 요즘 같으면 도시보다도 농촌이 더 심각하다. 다종경영으로 부업을 해서 돈을 번다는 욕심에 사람들이 저마다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든다. 여기저기에 낚시터고 지천에 고기잡이 군들이다. 부모님과 함께 언젠가 시골에 내려갔을때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이 강물에 물이 많아서 키를 넘었었는데 지금은 개울물보다도 못하구나. 그때는 애들이 물에 빠질가봐 어른들이 애들을 물가에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모두 난리였단다.” 부모님의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어릴적 물가에서 놀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냥 스쳐지나갈만한 소리같지만 이제 겨우 20년이 지났는데 강물은 말라서 허옇게 바닥을 드러낸다. 어디나 그렇다. 중국의 도교에서는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이 땅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그들은 존중하고 경의를 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의 파괴를 능력으로 생각하고 자연을 정복하려고 꿈꾼다. 자연은 정복하는것이 아니다. 자연과는 타협하고 친해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나라 지도자가 정한 조화사회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의 목표일것이다. 사람이 뇌졸중이 오는것은 혈관이 막혀서이다. 신선한 혈관이 인체의 구석구석에 깨끗한 영양분을 전달해줘야 인간은 건강하게 오래 살수있다. 우리 지구도 그렇지 않겠는가?! 지구안의 지하수는 우리의 림파선이고 지구위의 강물과 호수는 우리의 혈관이다. 그것들을 여기저기 끈으로 조이고 막아버린다면 우리는 뇌출혈이 백번도 더 일어났을것이다. 자연에게 행하는 인간의 이런 행동은 조만간에 큰 화를 자초할것이 자명하다. 요즘 지구촌에서 빈번해지는 자연재해를 본다면 공감이 갈것이다. 조그만 방심, 예사롭게 흘려버리는것이 큰 사건으로 발전하는게 이 세상의 상식이다. 전기를 내기 위해서 강을 막으면 리익이 있는 대신에 꼭 페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동전의 량면이 있듯이 음양의 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법이다. 고대로마의 정치인이며 웅변가인 키케로는 라고 했다. 아무리 안전성이 높다는 항공기도 작은 실수로 대참사를 일으킨다. 천재이변이라고 하는 호우나 산사태도 결과적으로 보면 개발을 성급하게 하여 일어났을수가 있다. 조잡한 설계로 인한 인재(人灾)이지 천재가 아니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다루는 중동쪽의 전쟁이나 큰 사건, 그리고 기업의 도산 등 모든 일들의 시초는 모두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긴것이다. 중국의 황하나 장강의 원류를 가보면 그냥 자그마한 강물일뿐이다. 큰일은 모두 작은 일에서 일어난다. 바꾸어말하면 세인을 놀래킬 엄청난 기획안도 세심함과 치밀함이 쌓여서 구석구석까지 신경이 미칠때 좋은 결실을 얻게 되는것이다. 한비자(韩非子)는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개밋둑에 결려 넘어진다.”라고 했다. 큰일에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나 작은 일에는 쉽게 마음을 놓아 실패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99%에서 그만두면 미완성이 된다. 물이 정상적인 상황에서1도가 모자라도 끓지 못하듯이 말이다. 더 많은 지성인들이 소리치고 질타를 해서라도 잘못된 우리의 작은 행동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얕고 힘이 없을 지라도 함께 목놓아 외치다보면 차차 그 힘이 커져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것이다. 요즘 류행하는 인터넷을 보라. 처음에는 그냥 작은 모임처럼 보이던 인터넷문화가 요즘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를 뒤흔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호방한 담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섬세함과 순수한 정열이 더 필요할듯 싶다.
46    우리 민족 바른전통2-이 개보다 못한 자슥아 댓글:  조회:3680  추천:1  2016-04-10
  글을 쓴다는것은 순간순간의 생각의 멈춤이다. 그런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글속에 담아 내면서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매일매일 내 마음을 갈고 닦는 시간을 가진다. 강의할때도 그렇다. 무엇보다 강의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우는것처럼 글을 쓰면서 역시 내가 가장 많이 배우고 있는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어이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내 친구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모친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얼마나 가슴아플까 싶어서 다른 도움줄게 없냐고 문안을 하고 시간을 맞추어서 이튿날 화장터(연길)로 올라갔다.  그런데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다른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냥 귀찮아서 식도없이 간단하게 치른다는것이다. 살다보면 가끔씩 그런 광경도 목격하게 되는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그 모친의 골회가 나올때 그 아들이라는 자가, 바로 예전의 내 친구라는 놈이 모친의 골회를 신문지에 싸가지고 나왔다.  묘소도 않세우고 그냥 골회를 날릴건데 골회함을 사서 뭐하냐는 것이다. 돈 낭비가 아닌가 하는것이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했다. 세상에 이런일이? 그것도 바로 내 주변에서 이런일이 벌어진다는데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때 돌아가신분의 큰 아버지 되시는분이 그 아들되는 놈 (예전의 내 친구라는 놈)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대성질호한다.     “야 이 개보다 못한 자슥아.....”   알고보니 내 친구였던 그자는 어릴때 입양되여 키워진 양자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녀가 없어서 입양을 했겠지만 정말 두 로인은 그자를 친자식처럼 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웠다. 어릴때 남부럽잖게 키운다고 벼라별 놀이감도 우리보다도 많았다. 그래서 그가 입양된 양자인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양자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핏줄처럼 키워온 부모를 마지막길 보내는데 골회함 살돈이 아까워서 신문지에 싸가지고 나오는 그런 무지막지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너무 씁쓸해서 나는 그만 발길을 돌려 나왔다.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짐승보다도 못하다.  그런자와 친구였다고 한때 지내온 내가 부끄러워 몸둘바를 모르겠다.   사람의 가치는 살아있음에 있다고 생각들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맞이할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평가받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렇게 리기적이 되고 우리의 바른 전통을 잃어버렸을까? 이제는 이런 형편없고 어이없는 짓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이 당연한줄로 알고 바라만보고 있는것이다. 그 총대가 언젠가는 다시 우리를 겨냥하게 되는줄도 모르고 말이다.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서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따위가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이루어지는것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바람직하냐 아니냐 하는것이다. 자기  부모의 묘소를 만들면 나쁜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냥 날려버리면 좋다더라고 어디서 류언비어가 떠돌더니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중 귀너르고 우직한 사람들이 그냥 그 말을 정말로 믿고 따라하고 또 저들의 황당한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마치 사이비 종교를 믿는 신도들처럼 말이다.   “한국에 가서 돈벌이 하는데 언제 묘소를 관리하겠소?” 라고 그냥 골회를 날린다. “묘소를 잘못쓰면 오히려 자손들에게 해한다면서” 라고 떠들면서 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유물론적으로 볼때 우리가 잘 되고 잘못되는것은 자연의 섭리일뿐이다. 불교적으로 볼때는 각자의 업보때문이다. 우리가 지은 업을 우리 스스로 받을뿐이다. 우리 인생을 누가 대신해 살아줄수 없고 돌아간 조상의 귀신이 와서 자손을 해칠수도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로소 죽은자의 정신을 기리는것은 유물론을 행하는 공산당도 지지하는 일이다. 우리 연변에 마을마다 렬사기념비를 왜서 만들었단 말인가? 집권당인 공산당에서 할일없어 심심해서 만들었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우리의 바른 전통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꼭 묘소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어서 해마다 명절이나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때마다 찾아가서 조상에게 알리고 후손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군했다. 요즘처럼 국가에서 토지관리때문에 화장을 제창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신문지에 싸서 날리는 일은 정말 있으면 아니된다.  이제는 우리가 바르게 알고 고치고 개선해야할 때이다.   옛날 고려장 이야기가 떠오른다. 늙으신 부모가 나이들면 쌀축을 낸다고 산속에 버리는 풍속이 어느 옛날 고려시대에 있었나본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늙으신 부친을 지게에 메고 산에가서 내려놓고 오는데 그 아들이 낡은 지게를 다시 메고 내려왔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이미 메여 왔으니 그 지게는 그만 두고 가도 된다.” 라고 할때 손자가 말했다.  “이제 아버지가 늙으시면 나도 이 지게로 메여올려 산에 버려야지 않겠나요?” 그말에 아버지가 부끄러워서 다시 자기 부친을 지게에 메여 집에 돌아와서 잘 모셨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우리의 바른 효에 대한 전통이였고 우매함에대한 반성이였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힘들게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이민왔다. 우리는 커다란 중국땅에서 언제나 전통과 문화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이였다.  (나의 글: 조선족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참조) 그런데 그 전통과 문화가 점점 무지막지한 인간들의 우매함에  까맣게 물들고 있다.  한국가서 배웠다는것이 가장 배우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들이 하는 황당한 짓거리를 배워가지고 와서 그게 좋다고 따라한다면 우리가 어찌 사람으로서 사람소리 들으면서 살수 있을것인가?    기업을 운영해본 사람들은 다들 잘 알겠지만 유행은 언제나 우로부터 아래로 퍼진다.  마찬가지로 력사상 많은 성인들이나 왕후장상들의 행동을 본받아서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닦아왔다.    유물론을 숭상하던 중국에서 수십년간 미신을 때려부신다고 전통을 버리고 혁명에만 몰두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는 공자묘를 부수고 전국의 사찰들을 마스고 불질렀다. 그리고 이제와서 국민의 도덕이 바닥에 떨어지고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니 그제사 를 부르짓고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배우란다. 그리고 이제 전통문화를 찾는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도 전통문화를 찾겠다는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는것은 얼마나 놀랍고 대견한 일인가?    이제 우리도 늦으면 아니된다. 우리 스스로 바른 전통을 찾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 일신이 편안해지기만을 바라는 리기적인 사람은 발전이 있을수 없다.  유교문화와 전통을 중시하는 중국과 한국의 모든 크고 잘된 가문을 돌아보라. 어느 가문에 조상의 사당이 없는 집안이 있는가. 어느 재벌가가 귀찮아서 부모님의 유골을 날리는걸 본적있는가?    절대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을 그대로 날려보내서 잘된다는 도리가 없다. 부모님의 가시는 길을 영위롭게 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삶과 이웃을 대하고 이제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죽음에 마저 감사할줄 하는 사람만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고려장 이야기”가 백년후에 “연변 날리장” 이야기가 된다면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참괴해서 어찌 후손들을 볼것인가?
45    우리 민족 바른 전통1-청명을 맞으며 댓글:  조회:4037  추천:1  2016-04-02
   해마다 청명즈음이면 부슬부슬 봄비가 온다. 이때면 태양의 황경이 15°에 있을때여서 하늘이 가장 맑다고 한다. 그래서 맑을 청자에 밝을 명자를 붙혀서 부르는것이다. 청명은 24절기중 다섯번째 절기이다. 대충 양력으로 4월 초순에 오게 된다.    어제는 어느 모임에 갔다가 한부부의 잔잔한 사랑다툼을 보게 됐다. 이미 장성한 딸이 곧 결혼을 앞두게 되여 있는데 지난해 어머님을 잃은 남편은 청명에 산소에 성묘(省墓 )를 다녀와야 한다고 하고 안해는 따님이 결혼하는 해에는 어떤 경우에도 산소에 갈수없다고 우긴다. 그래서 그 질문이 나한테 돌아왔는데 그 자리에서 어느 편을 들수도 없고 해서 참 답답했었다. 물론 이러루한 일을 보고 들은것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모두 먼 남들의 이야기같아서 전에는 그냥 넘겼지만 이제는 그냥 그렇게 지나칠수 없었다.    옛날 “동국세시기”라는 책의 기록에 의하면 청명(清明)날에 사람들은 버드나무와 느릎나무를 비벼서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이나 판서와 같은 문무백관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 행사를 사화 (赐火)라고 했는데 옛날에는 불을 피우기도 어려웠지만 역시 꺼지기도 쉬운지라 습기나 바람을 잘 막는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조선팔도로 불을 보냈다. 한편 백성들은 이날 만큼은 낡은 불을 끄고 그렇게 임금으로 부터 내려오는 새불을 받아오는데 그 사이에 불이 없으니 따뜻한 밥을 먹을수 없어 찬밥을 먹게된것이 지금의 한식(寒食)명절의 유래가 된것이다.  바로 그러한 신성한 새 불을 일으키는 날이 청명이요, 또 이 새불을 온 나라 백성이 나누어 가짐으로써 동심일체의 한나라 백성임을 재확인하는 날이 바로 한식일인것이다.    그렇다면 결혼하는 젊은이든, 그 부모든, 이렇게 좋은 날인 청명에 집안의 어르신의 산소에 성묘를 가는것이 안된다는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말도 안되는 황당하고 무지할뿐만아니라 암둔하기까지 한 풍속이다. 아니 절대 우리 민족 고유의 풍속은 아니다. 연변의 조선족들한테만 있는 이상한 유언비어일 뿐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풍속에서는 청명의 성묘는 신성한 날이다. 어찌 결혼을 앞두었다고 해서 성묘를 안한단 말인가? 중국의 한족들도 이날만큼은 가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대한 날이다. 옛날에는 청명에 성인들의 권화에 의해서 왕들이나 장군, 재상들이 조상을 기리는 큰 제사를 지내군 했는데 그걸  본 백성들이 본따서 지내게 된것이 지금의 청명날 성묘가 된것이다.   나는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산소에 가면 안된다는 말을 대체 어디서 들었습니까?”하고 질문해보았다. 그랬더니 “누가 그러는게 아니고 다들 그래야 된다고 하던데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다들 왜서 그렇게 말하고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요?” 하고 질문하였더니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좋은날에는 산소에 안간다고 한다.  좋은날에 산소에 안간다면 나쁜날에 가야하는가? 그렇지도 않을게 뻔하다. 그런데 또 한술 뜬다.  “그리하면 좋다는데, 좋다는대로 하면되지 자꾸 원인을 알아 뭘합니까?”이다.   정말 코막고 답답한 노릇이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전통에서는 청명을 아주 중요시 했다. 특히 같은 유교문화권에 있는 중국의 한족들도 청명날 만큼은 새해를 맞으면서 조상들한테 가족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중요한 제사를 행하는 날이였다. 이제 곧 결혼할 자녀들은 종묘에 가서 을 알린다. 그리고 곧 해산을 앞둔 임산부도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순산을 빌고 자손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을 빈다. 그게 우리의 전통문화였다.   실은 우리 조상들만큼 성묘를 자주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일년에 적어도 네번을 성묘했다. 봄에는 청명에 여름에는 중원(中元은 음력 7월15일이다.)가을에는 추석秋夕(中秋)에 겨울에는 동지(冬至)날 눈길을 밟으며 찾아뵙고 산소위의 눈을 쓸어내렸다.   얼마전 방영된 한국 드라마를 보면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무덤앞에 가서 성묘하고 이제 결혼하게 됨을 알린다. 그렇게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게가서 앞으로의 집안의 행사를 알리고 마음로 기리면서 미래를 준비해나가는것이 우리가 지켜야하고 계승해야할 민족의 전통이다.   옛말에 뿌리가 든든한 나무는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상의 음덕을 잘 기리는 가족이 번영하게 되는것이 자명한 일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신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것을 맹목적으로 믿는것을 말한다. 조상에게 성묘하는것은 어떤 미신행동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으로서 보아야한다.    그러나 제사나 성묘에 빠져야하는 부류도 있기는 있다. 해산을 앞둔 임신부나 신체가 허약한 사람은 될수록이면 제사나 성묘에 참가하지 않는것이 좋다. 돌아가신 선친을 기리다 너무 슬퍼서 신체에 영향을 가져올수 있고 또 성묘를 위해서 산발을 타다보면 임신부의 건강에 영향이 있을수도 있기때문이지 절대 엉뚱한 미신으로서가 아니다.    물론 각 개인의 가치판단으로 말미암아 한마디로 전통문화와 미신, 종교를 구분할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였건 뿌리가 든든한 나무가 크고 높이 자라듯이 자신의 선친과 조상을 잘 모시고 가꾸는 가족이 번영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도 이제 다녀올 선친의 성묘를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다가 멀리 창문가를 내다보았다. 봄비가 내리는 창가로 이제 푸르기 시작하는 산자락이 멀리 보인다. 문뜩 어릴때 아름다워서외워두었던 중국 시인 한유(韩愈)의 이른 봄(早春)을 노래하네라는 시귀가 떠올라 절로 읖조려본다. 天街小雨润如酥, (장안거리에 봄비는 부르럽게 내리고 ) 草色遥看近却无。   멀리 보이는 록색은 가까이가니 보이잖네 最是一年春好处,  초봄은 일년에서 가장 좋은 계절이니 绝胜烟柳满皇都。  어찌 버드나무 우거지기 시작하는 그 시절에 비기랴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깊은 관찰력을 보아낼수 있다. 두번째 구절인 (草色遥看近却无)  라는 말은 현재 청명을 맞는 여기 초봄과 비슷하다. 갓 피기 시작하는 초봄에 우리가 멀리서 산을 볼때 그 산은 파랗게 보이지만 정작 가까이 가서 그 풀들을 보면 오히려 록색을 볼수가 없다. 선인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도 그러해야 할것이다. 매일 입에 효자니, 효자손이니 떠들것 없다.  우리 마음에 파란 씨앗이 있으면 된다. 그것이 언젠가는 산과 들을 파랗게 만들기 때문이다.
44    조선족의 정체성 댓글:  조회:5764  추천:21  2016-01-29
  지난주 일요일날 큰 매형과 둘째 매형이 낚시질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냥 인근 교외의 강변에서 한 겨울 낚시였는데도 퍼그나 잡은듯 했다. 큰 고기는 아니였지만 손가락만한 붕어들이 대부분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낚시는 잔인한 취미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취미야 어떻게 막겠는가. 아이들이 물고기를 키우고 싶어해서 일부 달라고 해서 남생이를 키우던 자그마한 어항속에 물을 부어넣고 넣어 주었더니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 이상이 죽어있었다. 남생이는 아직 작아서 물고기를 잡아먹을수 없으니 물고기들 자체가 낚시코에 걸렸던 상처때문에 죽은듯 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니 한두마리 따라서 죽어가던것이 이윽고 네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 네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더니 이제는 활기를 찾아서 잘 자라고 있다. 오히려 거부기에게 주려는 먹이를 빼앗아 먹을 정도로 싱싱하게 살아났다. 처음에는 사람이 어항 가까이 가면 놀라서 이리저리 흩어지던것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어서 그런지 사람이 가까이가도 제법 태연하게 헤염을 치며 유유작작하다. 비록 강에 있을 때처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먹이 걱정 잡힐 걱정은 없을듯 싶다.   중국말 속담에 새는 먹이때문에 잡히고 사람은 재물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 역시 그런 자연의 섭리를 벗어날수 없는가 싶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은 낚인 물고기를 보면서 득의양양하겠지만 그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돈과 물질의 미끼에 걸려든 물고기인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진 92년 그때부터 조선족은 남한이라는 나라를 다시 알게 됐다. 88올림픽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알리고 중국에 있는 동포사회에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조선족 사회에는 서울바람이 불었고 십배가 넘는 월급을 바라보며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래서 생긴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오래동안 조선족 사회의 아픔과 상처로 남을듯 싶다. 한국에서는 또 조선족을 불법체류자로서 잡아서 가두고 반송해 보낸다. 그래서 잡혀온 사람들은 한국에 강한 반한감정을 가지고 돌아오고 한국사람들을 적대시 했다. 불법체류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안해와, 남편과 아이들과 생 이별하고 몇년 지어는 십년가까이 그 땅에서 돈벌어 부쳤다. 이로 인해 조선족 사회도 한국 사회도 모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됐다. 중국에 와서 사기를 치고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법을 위반하고 쫒기는 조선족 또한 많았다. 불법체류자 반송을 반대하는 운동을 서울에서 진행하던것이 거퍼 2, 3년도 채 안된 전의 일이다. 많은 조선족 작가들과 지인들이 황페된 조선족 마을과 시들어가는 조선족의 가족관계를 되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써왔다. 신문에서 말하고 방송에서 이야기 했지만 돈과 물질의 충격에 이성을 잃은 조선족에게는 어떤 충고도 들리지 않았다. 한국나가도록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을 치고 돈과 금전에 자존심도 팔고 가족도 팔고 심지어 사랑마저 팔았다. 그렇게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다. 한국에서는 재외동포법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무연고 취업비자로 제법 쉽게 한국에 다녀올수 있도록 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조선족의 경제적인 수준이 어느정도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년전 한국에 가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란 딱지로 한국의 감옥에 갇혀있다 반송돼 돌아온 한 조선족 청년은 나한테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라디오에서는 고국이고, 동포고 떠들더니 이게 뭐야? 중국에서 살면서 한번도 감옥 들가본 일 없는 내가 도적질 했냐 어쨌냐, 내 손으로 돈벌어서 살겠다는데 감옥에 넣어 온갖 수모를 주고 쫒아보내다니.”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자 문제는 커졌고 오히려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이 가득 생겨난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법으로는 역시 그들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였을것이다. 조선족이라고 해봐야 옛날에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간도땅을 건너간 독립군 후예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진정 조선족의 미래를 한국의 미래와 연결시켜본 한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을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어느 시기에서나 통하는것이 있다면 바로 대부분 사람들은 리기적이라는것이다. 사람들은 잘살고 능력있고 힘센 사람옆에서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면서 빌붙으려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한 조선족에게 일을 실컷 시키고는 몇달씩, 심지어는 몇년의 월급을 제때에 주지 않고 불법체류자라고 법무부에 고발해서 중국에 잡아보낸 악덕 업자들 때문에 전체 한국의 이미지와 조선족이 한국인을 보는 태도가 변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것은 바로 돈과 이익때문이지 민족성과 고국애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내에서도 가난한 친척은 잘사는 친척에게 무시당하기도한다. 그렇다면 연변의 조선족은 자기 주변의 가난한 친척들을 한번도 무시한적 없는가? 당연히 그럴리가 없다. 잘살고 힘있으면 대접받고 못살고 가난하면 무시당하는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오래전에 한국 출장다녀오면서 느낀것이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대륙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대만이나 홍콩에서 온 중국인들에게는 여간 살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돈의 힘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나 동포보다도 현실적인것이 더 중요하다. 조선족들이 한국은 우리 고국이고 한 핏줄인데 어찌 이다지도 못살게 구느냐고 한때 아우성을 쳤지만 그것은 경제의 원칙을 몰라서이다. 한국사람들이 동포를 싫어서도 아니고 동포가 고국을 찾아온줄을 몰라서도 아니다. 답은 간단하다. 조선족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조선족의 당위성이 무엇인지? 세미나가 열리고 포럼이 열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할일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들이 한국을 욕하고 한국사람을 욕하지만 조선족은 다 잘하기만 하는가? 한국의 잘못을 보고 한국인의 잘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치고 바꾸어나가야 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 조선족들보다 아직 상대적으로 못사는 조선 (북한)에 가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하던 똑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 돈 있는척 거들먹거리고 도박을 놀고, 오입질하고 벼라별짓을 다하고 다니면서 무슨 낯으로 한국을 꾸짖고 한국인을 욕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대부분 한국인들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가난의 대명사이다. 한국에서 허드레일만 하고 아직 먹고살기 어려운 그런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한국인들앞에서 조선족하면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 노가다판에서 막일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바뀌여 가고 있다. 조선족의 경제적인 위치가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가리봉동의 많은 가게들이 조선족경영인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조선족들도 더는 그냥 단순 노무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무역과 사업을 벌려서 크게 성공한 조선족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글로발 경영으로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미치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점점 늘어난다. 조선족을 위한 행사때면 천만원씩 일억씩(한화)선뜻 내놓는다. 옛날 미국적을 가진 한인들이 서울에 오면 대접을 깍듯이 받았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돈에 대한 예우이고 서비스일뿐이지 지역 감정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한국만큼 쪼그마한 땅덩어리서 지역감정 운운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지역이 어디든 나한테 돈을 벌어주고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선족은 가장 우수한 핏줄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조선족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글 참조) 그들은 고생을 두려워할줄 모르고 부지런하며 지혜롭다. 일부 부족한 사람들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동네에 문제 없는 곳이 어디에 있을가? 조선족은 이제 서서히 발전하고 있고 언젠가는 미국에 있는 한인이나 일본에 있는 한인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국인의 사회에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게 될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생각을 하면서 중국을 무시하고 있지만 중국의 경제 성장은 놀라울 지경이다. 빈부격차와 사회적은 문제점도 있지만 년 2만불 소득을 넘긴 사람이 이미 1억 2천만명을 넘겼다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한국이 2만불 시대에 들어간것이 이제 몇년이 안됐는데 중국이 어떻게 그럴수가? 하면서 놀랄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전반적인 국민 평균소득은 한국보다 낮을수 있겠지만 이 1억2천만명의 고소득층은 매일, 매달, 매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전체 인구를 합한 세배에 가까운 수치다. 게다가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은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의 열배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 그만큼 기본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에서 중국어 잘하고 한국어도 능통한 신 조선족은 비약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현재 삼십대 좌우의 젋은 층들은 거개가 한국어, 중국어, 영어 혹은 일본어등 삼개국어 이상을 자유로이 사용할수 있다. 그들은 중국의 광동, 상해, 북경 등지에 진출하여 번역, 가이드 등을 하던데로 부터 이제는 여행사, 무역회사 사장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것이다. 일부는 국제적인 그룹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국민들은 반도땅에서 좀 더 크게 좀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반한 감정이 생기고 일본보다 미운 나라가 한국이 된데는 한국민의 자존심때문이다. 한국의 KBS나 기타 TV프로를 보게되면 중국을 보도하는 거의 대부분 내용이 부정적인 부분만 보여준다.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들 아니면 부정부패의 관원들, 아니면 환경오염을 만들고 짝퉁 저질 상품을 만드는 기업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삼십년전 한국도 짝퉁을 만들었고 서울 인사동에는 아직도 짝퉁이 팔리고 있다. 서울의 달동네에서도 소년소녀 가장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누굴 욕하고 웃을 상황이 아니다. 그런걸 찍어서 알량한 한국민의 자존심이나 세우련다면 큰 오산이다. 중국의 발전과 거대한 경제력을 직시하고 위기 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인 자세로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국은 살아남을수 있다. 또한 조선족이 지금까지 그래도 중국땅에서 그만큼 대접을 받은것은 그나마 자신의 고국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북한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잘사는 한국이 있었기에 민족자부심도 가질수 있었다. 이제 한국이 경제가 떨어지면 조선족이 중국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자부심은 없다. 가난한 친척이 밉다가도 그 친척이 잘살게 되면 다시 고와지는것이 세상 인심이다. 한국이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중국 경제와 정치를 통하여 새로운 세기 더 큰 발전을 원한다면 조선족에게 투자할줄 알아야 한다.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코앞의 것만 바라볼뿐, 멀리 내다 볼줄 모른다. 통찰력이 없는 리더들이 모인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루 이틀 사는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미래를 내다볼줄 아는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 긴 인생의 굴곡을 대비 할수 있도록 도와줄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현재를 이끌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쓰면 자존심 강하고 감성이 예민한 한국인들은 발칵할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때 한국인들은 우리집 어항속의 고기떼와 같다. 여기 저기 대국에서 넣어주는 먹이에 의존하고 언제 낚시코에 걸릴지 모른는 상황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매일 떨어지는 먹이에 안주하며 사는듯 싶다.   현재 중국은 14억이 넘는 거대한 인구로 내수 시장을 활성화 시키고 있고 탄탄한 기술력으로 새로운 세계시장 판도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앞으로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할 나라는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중국이 될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것은 통찰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조선족사회는 연변의 작은 농촌에서 서울로 이동하던데로부터 이제는 다시 북경, 상해, 광주등 중국의 대도시로 각자의 사업과 실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것이다. 나는 그들을 새 조선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이 새 조선족의 리더들이고 대표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조선족의 정체성과 당위성을 의논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과 한국민이 해야할 일은 조선족의 지금 보이는 모습보다 그 내면에 숨겨진 잠재력을 살펴보는것이다. 그것이 사물의 본질을 보는것이고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구할 사람들은 한국인 자신이지만 미래 한반도의 통일과 경제성장의 가장 큰 힘이 될 주역은 미국의 한인도 일본의 한인도 아닌 바로 새 조선족이 될것이다. 그게 역사의 필연이 아닌가 싶다.
43    길은 어디에 있는가? 댓글:  조회:4630  추천:5  2016-01-09
  새벽에 어수선한 꿈을 꾸다말고 잠을 깼다. 아이들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낑낑대는 소리에 깨였던것이다. 며칠전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꺼번에 여섯마리를 낳았다. 그중 한마리는 태여나서 하루만에 죽었고 다른 한마리도 여간 약해서 마음이 걸렸는데 강아지의 우는 소리에 방에 가보니 어미개가 죽은 새끼를 입에 물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미물인 강아지도 지 새끼의 죽음을 아는듯 했다. 선천적으로 약한데다 태여나서 젖을 빨 힘조차 없었나 본다. 전날 우유를 달여서 예전에 애들이 쓰던 우유통에 넣어 억지로라도 먹이려 했지만 역부족이였다.   새벽에 죽었는지 죽은 강아지의 몸은 아직도 온기가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뒤숭숭한 꿈을 꾸었나부다. 어미의 입에서 죽은 강아지를 빼내는데 싫다고 한참을 짓어댄다. 지 새끼를 앗아간다고 항의를 하나본다. 그래도 어쩔수 없는 일이라 작은 꽃삽을 들고 밖에 나왔다. 아직 날도 새지않아서 사람들이 없을줄 알았는데 벌써 새벽  청소하는 사람들이랑 운동나온 사람들이 띄염띄염 보였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꽃을 가꾸던 그 자리에 어느새 동네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어서 채소밭을 만들었다. 벌써 몇년째인데 아무도 관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채소농사하는 사람들이 도심에서 제법 즐기고 있기도 하는 곳이다. 날이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아서 밭을 갈지 않은 옆 변두리에 구덩이를 파고 죽은 강아지를 묻었다. 얼어붙은  땅을 파서 그 새끼를 뭍는데 따라나온 어미가 다시 그 구덩이를 파면서 낑낑거린다. 새끼의 죽음을 애닳파하는듯 했다.   강아지를 묻어두고 꽃삽을 옆에 세워둔채 을 외워줬다. 죽은 강아지가 이 세상의 업을 그렇게 축생으로 한번 태여나는것으로 씻어버리고 좋은 곳에 왕생하기를 기원해주었다. 그렇게  돌아오는데 마음이 어쩐지 심란해났다.   사람도 짐승도 그렇게 벌거숭이로 왔다가 가는데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또다시 고민이 든다. 요즘은 바쁜 회사일때문에 마음의 수련을 게을리 했는데 이런것을 가리켜서 부처님께서 전도몽상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정말 맞는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가야만 진정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얻을수 있는길인지 의문이 간다. 가끔 내가 이런 고민을 할때면 옆에 있는 친지들은 그런 내가 우습다고 되려 웃는다.  그들은 일상 그 자체를 일상으로만 생각하고 궁극적인 저 깨달음에 대해서는 찾으려고도 , 찾을 필요도 느끼지 않고 있는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은 ‘늘 그런’ 삶이다. 우리는 한 밤중에 자다 깨어 불을 켜지않고 심지어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벽에 부딪치지 않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고, 주방에 들러 물을 꺼내 마실 수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잠기가 깨지 않은채 전등을 끄고 제자리에 누워 다시 잠이 든다. 우리는 그런 일상 생활에 그렇게 친숙하다. 심지어 우리는 혼란함조차 친숙하다. 사회가 혼란하고 나라가 혼란하고 세계가 혼란해도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늘 그런 일이 있다는데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우리의 일상이 깨어지기가 일쑤다. 일상이 깨어질 때, 우리는 당황한다. 또, 일상이 깨어지는 경우는 보통 좋지 않은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 우리는 사는 게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사는 게 무상해’란 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다.   도대체 우리들의 삶은 어느 편인가? 일상적으로? 무상하게? 무상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실, 우리들의 삶은 그 어느 한 편도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형편에 따라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아예 그 모두를 함께 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혼란스럽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인데도,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그 일상적인 삶에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사는 게 뭐야?”  그리고 그 혼란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다. 나는 나의 삶을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나 또는 삶의 혼란스러움을 그냥 혼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언제나 묻고 생각한다.   내가 알아야할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찾아야할 길은 어떤것인지? 그길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가 지금 나의 과제인듯 싶다. 지금처럼 이렇게 사업이다, 돈이다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술마시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사는것이 진정 내가 추구하는 삶인지 의문이 든다.   옛성현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知不知, 上; 不知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이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라는 말이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갈길을 찾지못하고 이 생을 방황하고 있는 중생이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한숨이 나간다.   옛날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도를 구하려던 한 젊은이가 길을 가다가 한 은사에게 도를 물었다. 그 은사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의 달을 가르키는데 그 젊은이는 그 은사의 손가락만 쳐다보면서 도를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나도 그 젊은이처럼 깨달음을 찾으려고 하면서도, 도를 찾으려 하면서도 하늘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서도 예수는 하고 말씀하셨다. 성경의 요한복음서에서 나오는 말이다. 지극히 내 생각일 뿐이지만 성경의 이런 말씀에 나온 ‘길’은, 老子의 말을 빌리면, ‘신비롭고 신비로운 모든 오묘함의 문 [玄之又玄, 众妙之門의 길이아니겟는가?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아마도 그 길 끝에서 천국의 좁은 문을 만나게 되고, 그 문을 지나면 ‘아버지’가 계신 천국 즉 진리와 생명의 나라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에서 나한테 답을 줄수있는 그런 길은 없는 것일까?   나의 이런 엉뚱한 에 대한 사색은 종교적인 관심 여부를 떠나 신비롭고 신비로운,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을수 있도록 귀를 열어주는 복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논어에는 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 라는 말이된다. 지난일에 후회가 있다면 그것으로 배움을 알게 되고 지난일을 통해 교훈을 삼았다면 그것으로 삶의 스승을 삶을수 있다는 뜻이 되겠다. 지금의 나한테는 잘 어울리는 말이된다.   강아지를 묻고 돌아서는데 어미가 새끼 묻은 곳을 뱅뱅돌며 땅을 뒤진다. 애처로운 생각에 강아지를 쓰다듬어주다 안고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입구를 들어가다 말고 하늘을 쳐다봤다. 봄이 다가오는 하늘가가 푸름히 밝아온다.   주역에서는 하늘의 운행이 동지날부터 음기가 약해져서 양기가 태동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편 우리 풍습에서는 춘절부터 봄이 들었다고 한다. 그냥 내 생각일뿐이겠지만 벌써 숨결에 봄내음이 가득하다. 이런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도 가야하는 삶은 가야하는게 우리의 생일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한구절이 문뜩 떠올랐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42    나의 꿈 댓글:  조회:3437  추천:3  2015-12-25
  오늘 아들놈의 학교에서 “나의 꿈”이라는 제목의 작문짓기를 숙제로 내줬나본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가질만한 숙제제목이였다. 그런데 엉뚱하게 꿈에 친구들과 뽈을 찰때의 이야기를 한가득 써가져와서 검사해달라고 한다. 물론 주제를 벗어난건 아니지만 너무 엉뚱하고 황당해서 아들놈에게 의 바른 의미를 이야기 해주게 됐다. 꿈이란 목표의식이고 꿈이란 희망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다시 고쳐쓰면 더 좋을듯 싶다고 건의 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내 아들은 아직 어려서 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어른인 우리는 그 꿈의 의미를 알면서도 오히려 엉뚱한테 삶의 정력을 쏟아붓고 있지않나하는 반성이 앞섰기때문이다.   어릴적에는 나도 꿈이 참 많았다. 비행사도 되고 싶었고 군인도 되고 싶었고 경찰관도 해보고 싶었고 의사도 되고 싶었다. 콜롬부스처럼 유명한 탐험가가 되고 싶었고 아인슈타인같은 유명한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이라는것은 마음의 씨앗이다. 생각이 머무는곳에는 씨앗이 심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꿈이 있다는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봄에 씨앗을 심고 잘 가꾸기만 한다면 가을에 풍작을 거둘 기대를 우리는 하게 된다. 우리 마음속의 씨앗도 그렇게 잘 가꾸다보면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우리에게 안겨주지 않을가 싶다. 에치투오 리더십강의를 진행한지도 벌써 십여년이 후딱지났다. 매번 수료식할때마다 수강생들에게 을 이야기 하군 했다.  그런데 십년이 지나도록 아직 그 꿈을 실현못했다. 그러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것이 아니다. 참대나무는 씨앗이 내려져서 4년동안 뿌리만 내린다고 한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날 비가 오면서 죽순이 돗아나면  단 하루 사이에 수메터에서 수십메터까지 쑥쑥 커버린다고한다. 그래서 잘 자란다는 말을 ‘우후죽순’처럼 자란다고 했을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때가 있고 시기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꿈의 씨앗을 심고 잘 가꾸기만 하면 된다. 수분이 부족하면 물을 주고 양분이 모자라면 영양분을 보충하고 해볓이 잘 들도록 배려해주고 가꾸어간다면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히는것은 시간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십년전 에치투오 리더십과정을 개발하면서 가진 꿈이 십년이 넘도록 변함이 없이 여전하다. 우공(愚公)이 대를 이어 꿈을 이어가듯이 꿈을 심고 행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나의 신념은 확고하다. 그 첫번째 꿈이 이 지역에 를 설립하는 것이다. 의료자선복지재단을 만들어서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위해서 치료해주는 병원을 건설해야겠다.   내가 이런 꿈을 이야기하면 코웃음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잘 알아야 할것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 혹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써 헐뜯거나 비난하거나 시샘하거나 질투하거나 증오하는 식의 저항을 한다면 ,그것이 말로 되였든 행동으로 되였든 아니면 그냥 생각으로 되였든간에 실지 가장 확실히 그 상대를 돕는 일이되고 자기 자신은 오히려 그 만큼 약화시키는 일이 될뿐이다. 그게 생각의 법칙인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해주군 한다.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어느날 바닷가에서 밀물에 밀려 나온 조가비를 주어 바다깊은 곳에 던져 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 있는데 어떤 지나가던 늙은이가 이야기 했다. “어이 젊은이 거기서 뭘하고 있나?” “네, 밀물에 밀려나온 조가비가 해볓에 타죽는것 같아 물속에 도로 집어 넣고 있습니다.” 그 말에 늙은이는 우습다고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젊은이 이 해안선이 얼마나 긴지 아나? 밀물에 밀려 올라오는 조가비가 얼마인데 자네가 다 주어서 살릴수 있나? 공연한 헛수고를 하지 말게.” 그러나 젊은이는 계속 바닷가에 나와있는 조가비를 주어서 바다깊이 멀리 던져 넣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할아버지, 저기 해안선에 밀려나온 많은 조가비들을 저 혼자 힘으로 다 구할수는 없겠죠. 그러나 방금 제가 던져넣은 저 조가비에게는 전부잖아요.” 그렇다. 내가 의료기금회를 설립한다고해서 이 세상의 모든 어려운 사람을 다 구할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꿈이 실현되여 단 한명이라도 기금회를 통하여 생명의 구원을 받는다면 그한테는 전부가 될것이고 그런 전부의 삶들이 하나,둘 늘어간다면...... 그리고 그런 꿈의 실행이 대를 이어 이어진다면 나는 충분히 행복할듯 싶다.   말로.모건이라는 작가가 쓴 ‘문명에 대한 야만의 경고’라는 글을 읽다가 맘에 들어 밑줄을 그어놓은 것이 있었는데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이제 때가 되였습니다. 그대의 고향과 지구에 대해 알기 위해, 그리고 온갖 생명체에 대해 알기 위해,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것과의 모든 관계를 알기 위해, 그대는 앞장서야 합니다. 어떤 집단의 맨뒤에서 잠시 걷는것도 좋은 일이고, 중간에 섞여 시간을 보내는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앞장을 서야합니다. 지도자의 책임을 맡기전에는 결코 그 역할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봐야 합니다. 현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해야합니다.     내가 십여년가까이 강의를 하면서 어렴풋이나마 수강생들과 함께 느끼고 배워가는것이 있다면 좁은 리기주의에서 탈피하여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사랑을 나누고 꿈을 심어주는 정신을 익혀가는것이 아닐가 싶다.   지금 나자신에게 스스로 바라는것이 있다면 내 자신의 리더십이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약하고 아프거나 무시당하거나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주고 안아줄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또 그런 리더십을 통하여 내 자신을 스스로 밝히면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밝음을 전달하는 촛불같은 사람으로 되고 싶을 뿐이다.   꿈은 심어졌고 가끔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때때로 내 마음의 터전을 갈고 닦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꿈의 씨앗에 믿거름을 주고 있다. 이런 일들이 리기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의미없고 멍청한짓처럼 보일지라도 내 마음에는 동요가 없다. 언젠가는 해야하고 누군가가 해야한다면 나라도 해보고 싶기때문이다.
41    마음의 시간 댓글:  조회:3098  추천:6  2015-12-18
  새벽 한시반즈음 괴이한 꿈에 놀라 깨여났다. 뒤치락거리다가 아예 자리를 차고 일어나 명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명상삼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꾸 잡생각이 머리속을 가득채웠다. 이럴땐 잠시 쉬는것도 좋을듯 싶어서 홍차 한잔을 달여서 마셨다. 따스한 차가 가슴을 타고 흐르면서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는걸 느꼈다. 다시 명상에 들어가서 오전 6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아이들이 깨여나서 떠드는 소리때문이다.   어제는 회사에서 회식을 하고 핸드폰 밧데리가 없는걸 모르고 들어왔었는데 핸드폰마저 꺼져있었다. 오늘 일찍 직원면접이 있다는것이 생각나서 부랴부랴 회사에 나왔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됐다.   오전에는 직원면접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을 대충 때운후 오후에는 은행에 다녀오고 손님 몇명을 만났다. 다 비즈니스에 관련된 사람들이였다. 그러고나니 또 하루가 다 지났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한편 무섭고 걱정이 간다. 그제야 문뜩 새벽에 꾼 그 괴이한 꿈이 생각났다. 어떤 곳에 갇혀서 빠져나가려고 애쓰다가 깬꿈이였다. 해몽을 해보면 내가 요즘 어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다. 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꿈인것이다. 그래서 좁은 공간을 탈출하려고 애쓰는 꿈이 나타난것이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안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이 우리 11주년 결혼 기념일이란다. 그것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해는 몹시 실망한 눈치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잘해보려는 마음마저 없이 내 몸과 마음은 후줄근해 있었다. 안해한테는 미안했지만 내일 꼭 보충하마하고 약속했다. 그러구보니 나는 요새 뒤 돌아볼새도없이 일에만 매달렸나본다. 어떻게 회사를 잘 해갈까? 어떻게 직원들에게 큰 보상을 해줄가에대한 생각만으로 달려왔던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나본다. 어릴때부터 써오던 일기마저 벌써 몇일째 손을 놓고 있었다.   오늘저녁을 계기로 내 마음의 평형을 다시 잡아봐야겠다. 너무 일에 마음을 빼앗기다보니 오히려 평형된 마음을 찾지 못하는듯 싶다. 그래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정도, 우애도 멀어지는것이다.   중국말속담에 “近墨者黑近朱者赤“(먹과 가까이한사람은 검어지고 주사와 가까와진사람은 붉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사업을 한답시고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현실적인 리익만을 따지는 사람들과 너무 가까히 하다보니 내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전혀 없다.   불경에도 心为法本 心尊心使 中心念恶 即言即行 罪苦直追 车轹于撤 心为发心 心尊心使 中心念善 即言即行 福乐自追 如影随形 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풀어서 계시를 적어놓은걸 보면 이러하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인이 되여 모든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악한 일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때문에 괴로움은 그를 따르리  마치 수레를 따른 수레바퀴처럼   마음은 모든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가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착한 일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 때문에 즐거움은 그를 따르리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처럼     불경이야기가 나오니 따라서 이런 이야기가 한편 떠오른다. 한때 부처님이 “기사굴”산에서 정사(精舍)로 돌아 오시다가 길에 떨어져있는 낡은 종이를 보시고,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시고 그것이 어떤 종이냐고 물으셨다. 그 비구가 여쭈었다. “이것은 향을 쌋던 종이입니다. 향기가 아직 남아 잇는것으로 보아 알수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나아가시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새끼를 보시고 그것을 줏게 하여 그것은 어떤 새끼냐고 물으셨다. 그 제자가 다시 여쭈었다. “그것은 생선을 꿰였던 것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는것으로 보아 알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말씀하셨다. “사람은 본래 깨끗한 것이지만 모두 인연을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것이다. 어진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에 이르는것이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 해서 향기가 나고 저 새끼는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것과 같은것이다. 사람은 다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마는 스스로 그렇게 되는줄을 모를 뿐이니라.” 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도 부처님의 그런 말씀은 들어서 알지만 마음은 참 요상하다. 가끔씩 생계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사업을 한답시고 장사를 한답시고 뛰여다니다보니 어느새 사업과도 멀고 가족과도 멀어진 사람이 되여버린듯 싶다. 당장 눈앞의 일이 급하고 또 그것을 하다보니 시간은 가버리고 오히려 소중한 많은것을 잃고 있는줄도 모르고 지나온것이다.   오늘 아침의 꿈때문에 참 많은것을 되찾은 하루가 된듯 싶다.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았고 내 마음의 평형의 추를 찾았다. 하루하루를 엉뚱한곳에 너무 빼앗긴듯 싶다. 사람이 고통스러운것도 진실한것을 찾지못하고 엉뚱한데서 찾으려는데 있다고 했다. 일기를 쓰다말고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창문을 열어졋혔다. 시원한 겨울바람이 밀려들어왔다. 한가득 들이켜본다. 이제 몇일만 지나면 양력으로 새해이다. 시간은 빨리도 간다. 매번 새해가 올때면 다짐도 크지만 정작 한해를 돌이켜 보면 해놓은것이 없어서 답답할때가 많다.   새해를 맞아서 길가의 상가들에서 벌써 울긋불긋 단장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제는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해봐야 겠다. 물론 이젠 때가묻은 내 마음의 옷도 갈아입어야겠다.
40    사회주의 핵심가치관과 화협사회(和谐社 会) 댓글:  조회:3739  추천:2  2015-12-11
  겨울인데도 봄날처럼 따스한 날이다. 일때문에 하남부근으로 이동중인데 방송에서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에 대한 공익광고를 방송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에서 창도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강, 민주 ,문명, 화협,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 성신, 우선(,富强、民主、文明、和谐,自由、平等、公正、法治,爱国、敬业、诚信、友善 ) 이다. 그냥 어떤 정치적인 구호로 떠올릴수 있는 단어들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모두  우리 백성들의 생업과 긴밀히 연결된 부분들이다.  문뜩 지난해의 일들이 떠오른다. 지난해 연길다리 확장공사를 할때였다. 다리 하나가 통하지 않는것때문에 무척이나 시민들은 불편을 겪었다. 시간이 급한 사람들이 빙 에돌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택시요금이나 교통체증때문에 모든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으리라. 그래서 옛날부터 길을 닦고 다리 놓는것을 큰 공덕으로 쳤나본다. 편민 공정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백성을 편하게 하는것이 잘된 정치라고 해왔다.  그때 그 다리를 건너면서 보니 점심시간이여서 그런지 차들이 많이 밀렸었다. 시간은 아마 지금쯤 초겨울이였으리라. 마침 겨울바람에 이따금 흩날리는 눈발에 아직 마무리 짓지못해서 어수선한 다리 주변공사들까지 해서 비록 개통은 되였다고 하지만 저으시 스산했다. 그런데도 형상공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다리 안전확정이 돼서 개통을 시작한것은 역시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이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한다”는 말이다. 공자의 정치가에 대한 그리고 정치에 대한 어떤 모습을 그려본 것이다. 이어서 그는 “나라를 지키고 집을 지키는 자는,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않음을 걱정하라, 가난함을 걱정하지 말고 안정되지 않음을 걱정하라” 라고 말한다. 나라를 지키고 집을 지키는 자란 정치인을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명심해야 될 일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일보다 먼저 부의 불평등을 없게 하는 일, 인구를 늘리기 보다는 먼저 백성 하나하나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여야 한다고 규정짓는다. 공자는 그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라고 한것이다. 요즘 국가에서 제창하고 우리가 따라 외우는 말중에 화협사회(和谐社会)라는 말이 있다. 바로 공자가 말한 이말과 잘 맞는 말이다. 요즘 세월같으면 정치가 안정되고 국가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옛날 처럼 굶어죽는 일같은것은 없다. 그러나 가난때문에 자살해죽는 뉴스를 가끔씩 접하면서 부의 불균형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굶주려서 자살하는것이 아니라 부의 불균형 때문에, 상대적인 빈곤때문에 자살하는것이다. 그것이 공자가 로 말한 말일것이다. 형사법정 법관으로 있는 친구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형사 사건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고 해마다 전국적으로 새로 짓는 감옥의 수만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그래도 미처 죄수들을 넣을 감옥이 없어서 고민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 나라 전 주석이 화협사회(和谐社会)를 건설해야 한다는 구호를 만들었고 또 새로 연변에 다녀간 습주석도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에대해 강조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민생문제를 보았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도 위의 그 말을 이어서 라고 단언했다. 그것이 현대사회라고해서 어찌 통하지 않을것인가. 우리 모두가 직면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정작 일기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하루가 너무 빨리 흘러가서 정말 소름이 끼치군한다. 오늘하루도 이렇게 다 가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인생이 참 무섭게 느껴진다. 오늘 일과를 돌이켜보면 이렇다.   오전일찍 출근하여 안X호 선생님을 만나서 투자건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고 점심 식사는 모 광고신문사 최사장님과 함께 했다. 오후에는 연변주사회교육원에 올라가서 개강에 대한 준비로 사회교육원 원장님과 미팅을 했고 또 내려오면서 우리 회사건물설계일로 황화 선생의 건축설계실을 잠간 둘러보았다.   그러고 연변대학부근을 내려오는데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양교수님의 소개로 중국에 실버사업이나 골프연습장 사업을 투자하고자 한다는 한국에서 온 리원장이란 분을 시내커피숍에서 잠간 만나서이야기를 나누고 이어서 장사장을 만나 광고에 관한 협의를 나누었다.   퇴근무렵이 되니 녹초가 된 몸은 이미 시라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어제부터 시작한 닝겔을 또 맞을 생각을 하니 머리카락이 곤두서는데 급성인후염은 목에서 겨불내가 팍팍날정도로 심해서 어쩔수 없이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오늘은 닝겔을 꽂고 어제와 달리 그냥 늘어지게 잠만 잤다. 많이 피곤했는지 드렁드렁 코까지 골더란다. 밖에 나가 보니 겨울밤이여서 그런지 아직 초저녁인데도 동네 길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이따금 개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사람들 동네에 어울려 사는 개들도 따뜻한 겨울을 났으면 좋겠다.
39    향상하는 삶 댓글:  조회:2732  추천:3  2015-12-09
  오전에는 무척이나 무거운 몸을 끌고 나왔다. 몸이 쑤시고 아파서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잡아놓은 비즈니스 약속들이 너무 많아서다. 이 몸을 위해서 사업을 하는것인데 몸이 아파도 사업을 해야하는것이라면 이 자체가 뒤죽박죽된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개발구 모회사에 가서 장사장을 만나서 우리 회사에서 쓰던 중고 버스를 판매하는데 대한 계약서를 썼다. 그리고 연길에서 모 광고잡지를 운영하는 전사장의 사무실에 찾아가서 우리 회사의 제품홍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가지로 공감이 많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전사장과 함께 사업을 하는 모학회 윤회장을 만났다. 많은 기업에서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주역학의 가구배치와 음양오행설을 응용하는데 한 기업에서만 일년 고문비용으로 8만원씩 지불한다고 한다. 연변에서 이런일도 있구나 싶어서 무척 놀라웠다. 전사장의 추천으로 오후에는 모광고회사의 장사장을 만났다. 장사장과는 예전부터 안목이 있었는데 연변아침신문 경제판 편집으로 있을때부터 알고 있었다. 한족친구치고는 머리도 좋았고 사업도 잘 하고 있었다. 이야기중에 우리 회사 광고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계약도 잘 진행되였다. 내가 예상했던것보다도 훨씬 싸게 계약이 돼서 오늘 피곤한몸을 끌고 나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도 여기저기 약속한 손님들과 만나고 다녔는데 퇴근시간이 다 되여서야 회사에 들어갈수 있었다. 목이 따끔따끔 아파나고 온몸이 후줄근히 힘이 빠졌다. 퇴근시간이 되여 돌아오면서 병원에 들러 보였더니 급성 인후염이라고 했다. 본래 만성인후염이 있었는데 요즘 스트레스가 많고 많이 피곤한 몸을 혹사해서 인후염이 도졌나본다. 의사선생님은 편도선까지 벌겋게 부었다면서 주사를 맞기를 권장했다. 생각해보다가 그냥 의사선생님이 시키는대로 주사를 맞기로 했다. 두시간가까이 병원에서 닝겔을 꽂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닝겔을 달고 있으면서도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은 더 말똥말똥해지는통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사업에 대한 생각때문이다. 사업이 잘 되는듯 하나 허실이 많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은듯하나 리해관계로 둘러있어서 겉모습보다는 현재가 무척 나에게는 힘든 시간이다. 오히려 예전에 사업을 하다가 망쳐서 힘들었을때보다도 더 마음이 무겁게 느껴질때이다. 가끔씩 이런것을 내 업으로 인한 부처님의 사랑의 채찍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닝겔을 걸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있을라니 더욱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고전주의 시인인 쉴러의 말이 떠올라서 적어본다. 라는 말이다. 왜 불운이 오히려 우리를 향상하게 할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기때문일 것이다. 후회하는 사람은 고친다는 말이 있듯이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고집이 세고 발전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쉴러는 우리가 잘아는 괴테와도 아주 절친했으며 나란히 두사람은 고전주의 시인으로서 유명했었다. 괴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적있는데 고 했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나 체호프 연주로 유명한 우라지밀 프리체도 역시 라고 말한다. 또 오스트리아의 작가 엣센바하의 명언에도 라는 철학적인 말이 있다. 행복하고 잘나갈때 인간은 교만하기 쉽다. 밝은 빛이 눈부셔서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즐거움속에 있기에 현상에 만족해버린다. 불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사찰이나 불당에 가게 되면 부처님께 비는 말중에서 가 있다. 그런분들의 기도의 뜻에는 길가다가 차사고 나지말고 계단에서 구르지 않게 해주고 가족성원들이 아프지말게 해주십사에 대한 줄임 의미들이다. 그러나 불교의 그 팔난중에는 북구로주에 태여나는것이 있다.  그 북구로주라는 곳은 모든것이 구전해서 즐거움만 가득하다고 한다. 그런 즐거움과 편한함이 가득한곳에 태여나는것을 우리는 바라고 또 그렇게 됐으면 좋기를 비는것인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팔난중의 하나로 치부한다. 왜서일까? 즐거움과 편안함속에서는 노력하자는 의지가 없고 발전하려는 마음이 없으니 그것이 오히려 퇴보를 가져오고 불법을 공경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곧 어려움이라는 것이다.   어려움을 느낄때 마음을 다스리라는 경고로 듣고 노력하고 마음이 힘들때 진정한 내가 찾는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고 운이 따라주지 않을때 내가 지은 덕보다는 내가 지은 업을 참회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간호사가 닝겔을 뽑고나서도 한참은 그 침자리를 누르고 있어야 하는데 잠간 누르고 있다가 손을 떼니 피가 흘러 나왔다. 그런줄도 모르고 있다가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놀란소리를 질러서 보니 피가 역류해서 손가락새가 흥건했다. 피가 흐르는데도 아픈감을 모르고 있었던것이다. 두시간 가까이 주사침을 꽂고 있던 피부가 마비되여 아픔을 전달하지 못했나본다. 사람들도 그렇게 몸속에 침이 꽂혀 피부가 마비되면, 그 마비된 몸을 정상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침이 뽑히면 오히려 고통스러워하고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것이 전도망상이리라.   몸은 고단하고 힘들지만 주사를 맞으면서 오히려 두시간가까이 내 현재 삶을 뒤돌아 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오늘도 내 마음의 정원에 감사함의 꽃씨를 가득 뿌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도 힘든 하루는 아니다. 오히려 향상하는 아름다운 하루였다. 
38    창조하는 사람 댓글:  조회:3192  추천:3  2015-11-29
   누군가와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약속이 편안해져야 하는데 약속이 부담스럽다면 삶자체가 고단해지기 일쑤다. 그러나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부담스런 약속이라 할지라도 해야만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남들이 못하는 약속도, 하기 어려운 일도, 심지어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해야만 하는것이 사업가라고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종당에는 후회가 들거라는 생각이 오늘 아침커피를 마시면서 문뜩 들었다.   오늘은 무척 바쁘게 보냈다. 많은 약속때문이다. 손님들과의 약속이 마냥 신나는 일이라면 참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때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가 사는 연길은 도시가 작고 교통이 아직까지는 용이해서 하루에 손님을 많이 만날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국이나 기타 선진국에 가게되면 길이 막힌다하면 한시간정도는 보통이고 도시가 또한 국제화 대형 도시이다보니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다. 그래서 출장을 가게되면 보름씩 가 있어도 실지 만나는 사람은 20명 남짓밖에 되지 못한다. 하루에 두명이상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길에서 나는 최고로 하루에 손님을 20명까지 만나고 다는적이 있다.  그만큼 도시가 작다는 말도 되겠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일의 효률을 높일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많은 일들을 추진할수 있는것이 중소도시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의 장점일수도 있다.   오후에 중요한 비즈니스 약속을 하고 만난 사람이 한분 있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광고전문지를 운영하는 사장님이신데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실은 우리말로 사장님이라고 그냥 부르기에는 그분에 대한 존경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본래는 34세의 나이에 검찰원의 부원장부터 공상국 국장을 역임했고 안도현의 부현장까지 하시다가 과감히 공직을 버리고 사업에 뛰여드신분이셨다.  그분앞에 서니 문뜩 내가 작아졌다. 나는 사단법인 단체장을 맡고 있으니 사람들이 회장님이라고 불러주지만 실지 사업에서 회장님 소리 들어야할 분이 그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후에는 잠간 그분을 만나뵙고 비즈니스관련된 일만 하고 돌아오려고 계획했었는데 정작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가는줄 몰랐다. 말씀도 구수히 잘하시지만 살아오신 년륜과 걸맞는 인생의 경험담은 나에게 큰 교과서로 다가왔다. 나도 무척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인데 이런 분이 한도시에 살고 계시다는걸 일찍 몰랐다는것이 아쉬웠다. 실은 최사장님과는 연변방송국 촬영장에서 만났었다. 약 일주일전에 이라는 제목의 방송프로그램을 녹화하기 위해 함께 초대되였었다. 그때 처음으로 광고전문지로서 교차로신문이 전국 150개 이상 도시에 프렌차이즈와 지사형태로 발전돼 있다는걸 알았다. 우리 주의 본토 기업치고는 최고의 숫자였고 자랑할만한 실적이기도 했다.   나는 기자도 아니고 누군가에 당장 아부해야할 아쉬움도 없는 사람이지만 일기책에 이분에 대한 인상정도는 오늘 꼭 적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사장님과는 오늘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면서 기쁜 대화시간을 가졌다.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담이였고 둘도 없는 훌륭한 시간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 최사장님의 인상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뭐라고 표현할까고 생각해보았다.  가볍게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이라는 단어였다. 그분의 반백년이 넘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창조하는 삶을 사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한 기업인을 돈으로 평가하는것은 잘못된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회사 규모나 직원수나, 생산량같은걸로 기업인을 평가하는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기업인은 그 사람의 인품과 창조성에 두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세계적인 작가 로망롤랑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창조하는 사람 이외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생명과 무관심하게 지상에 떠있는 그림자다. 생의 모든 기쁨은, 연애든지 재능이든지 행동이든지 모두 창조의 기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에서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나도 창조적인 삶을 살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들을 하면서 살고 싶지만 정작 세속의 티끌속에서 묻혀살다보니 저도 몰래 때가묻고 먼지가 올라 그 빛을 잃을때가 많다. 요즘따라 새 사업을 벌려놓고 끙끙 머리를 앓을때 그분의 조언과 말씀은 나에게는 큰 안위가되고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요?’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일, 지혜를 다하는 일, 그리고 창조하는 일’ 이 있으므로 삶이 윤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없다면 ‘살아있는 의미를 잃는다’라고 대답한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창조란 단순히 무에서 유를 탄생시키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조하는 일이란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것을 연구하고 이미 있었던것이라도 새롭게 발전시킬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연구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오늘도 내 자신이 누군가를 존경할수 있는 마음을 가질수 있다는것에 감사했다. 누군가를 존경할수 있다는것은 내가 아직 너무 오만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것이고 오만한 인간이란 자기 중심적이고 리기적인 인간이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아직 내가 뭔가를 배우고자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오늘따라 아파트 단지사이에 빼곰히 얼굴을 내민 반달이 제법 아름답다. 겨울의 추위도 잊은듯 환히 웃는다. 오늘은 창조적인 사람을 만나서 창조적인 하루를 산듯 싶다.
37    락천지명(乐天知命) 댓글:  조회:3265  추천:4  2015-11-21
  아침에 출근길에 나서보니 어제 내린 눈발이 차창가에 얼어붙어 당장 운전할수 없을 지경이 돼 있었다. 눈솔로 쳐내도 차창문에 얼어붙은 눈은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차안의 히타를 켜놓고 반시간 가까이 녹여서야 차창에 얼어붙었던 눈들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가끔씩 불어치는 찬바람이 여간 매서운게 아니다. 겨울이 들긴 들었나 부다.   추운 겨울날에 춥게 사는사람들이 더러 있다.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미안한 일이 아닐수 없다. 사업을 한답시고 무심하게 지난일들이 가끔씩 후회될때가 있다. 주말에는 추운 이웃이 없나 돌아보고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옛날에는 이웃이 사촌이라고들 했는데 요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아빠트 단지내에서 같이 산지 십년이 넘어도 서로 얼굴도 모르고 뭐하는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모두들 꼭 닫고 살기에 현대인들의 마음은 점점 더 말라가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우울증도 더 많아지고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더 많아지는것일듯 싶다. 조금 어려울때 따뜻한 말 한마디가 구원이 돼주고 마음이 기댈구석을 만들어 줄수도 있다.   오늘따라 운명이란 어떤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슬비에 바지자락 젖는줄 모른다고들 했는데 생계에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정작 마음수련에는 게을러질수밖에 없다. 그렇게 바지자락 젖는줄도 모르게 내 인생의 반이 소리없이 흘러가고 있는것이다. 오늘 멀리에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자기의 아내가 임신했다고 전화가 온것이다. 곧 아이를 가지게 된다고 좋아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늦게 결혼했고 결혼하고나서 곧 한국으로 외화벌이 나갔었다. 얼마전에 안해마저 따라서 한국에 갔는데 이렇게 전화가 온것이다. 그 친구하고는 학창시절에는 참 친하게 지냈었다. 한국에 간후도 가끔씩 출장길에 서로 얼굴은 만났지만 옛날처럼 그렇지는 못했다. 우리 모두 컷나본다. 컷다는것은 성숙됐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어쩐지 성숙보다는 미흡했던 그때 그 시절이 더 기억에 남고 그리워질까. 친구의 전화를 받고 축하한다고 몇마디 사무적으로 마무리지었는데 오후내내 사무실에서 잡일을 처리하다가 늦어서야 문뜩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얼굴에 웃음이 피였다. 잡무와 일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나에게는 따뜻한 감로수같은 전화였다.    얼마나 좋았으면 멀리 외국에 있는 친구한테마저 전화를 해서 임신소식을 알리고 싶었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가 중학교 나온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때 코흘리개이던 친구에게 이제 그를 이을 자식이 생겼나본다.  운명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운명에 대해서 가장 깊이 믿은 선인이 있다면 공자일것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에 대해 귀결한적 있다. “吾十有五而志于学,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顺,七十而从心所欲,不逾矩。” 라는 논어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다.   운명은 생사나, 부귀, 빈궁,혹은 일생중에 우리가 맞딱드리고 해결해나가는 모든것이 될지 모르나 공자는 십오세에 학문에 뜻을두고 서른살에 스스로 자립하고 마흔살에는 외계의 학설에 현혹되지 않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고 육십에는 모든것을 받아들여 경청할 마음의 준비가 되였고 칠십에는 자신의 의지와 주관규칙규범이 하나가 되여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는 말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공자가 하늘의 움직이는 도리를 이해했다고들 풀이하는데 나는 가끔씩 다르게 생각들 때가 많다. 천명이라는것을 운명으로 풀이한다면 더 적적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때문이다. 물론 내 얄팍한 지식으로 풀어낸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나 지천명(知天命) 이라는 말을 공자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새삼스레 깨달았다로 이해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공자의 인생을 보면 젊어서는 자신의 큰 포부를 펴기 위해서 많은 제후국의 국왕들을 만나는데 그의 이상과 포부에 동감하는 국왕 한명도 만나지 못하고 나중에 다시 걸식하면서 자신의 고국인 로나라로 돌아온다. 그런 그가 오십이 되여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이 교육을 하는 학자로서 서는것이지 세상을 뒤흔드는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는 뜻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공자의 학문에 가장 많이 영향준 책이 있다면 주역(周易)일텐데 공자가 그 주역을 천번을 읽어서 죽간(竹简)의 끈이 끊어져 세번이나 다시 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주역을 편찬한 사람이 주문왕 희창인데 주문왕은 반평생을 제후로 있다가 다시 억울한 사연으로 옥에 같힌다. 옥에 같혀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 같으면 오히려 힘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릴지 모르겠지만 주문왕은 오히려 옥의 벽틈에 자라는 시초를 가지고 점쾌를 보다가 세상사의 흐름을 깨친것이다. 그래서 만들어 진것이 주역인데. 주문왕의 50년의 삶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주역도 있을수 없다는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즉 주문왕의 나이 50에 세상의 모든 세상만물은 주기성있는 부단한 변화를 하고 있음을 깨달아서 만들어진것이 변화를 나타내는 역경(易经)이고 공자는 50에 천하에 가르침을 펴는것이 자신의 숙명임을 깨닿고 “논어”를 편찬했다고 하는것이다. 실은 역경(易经)에 훨씬 먼저 공자가 말한 천명에 대한 말이 나온다.  "乐天知命,故不忧"라는 말이 그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기뻐함은 그 명을 아는 고로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된다. 하늘과 명을 합치면 천명이 된다. 이럴때보면 “天“도 “命”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사람의 도리는 하늘의 길에 기인하니 사람의 길흉화복과 요절 장수는 모두 하늘이 지배한다는 말이라고 사해(辞海)에는 적혀있다.          옛날부터 중국사람들은 인간사회의 여러가지 현상은 하늘의 의지인 보이지 않는 실로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이 ‘천명’이고 ‘명’인 것이다. 따라서 그 ‘명’을 자각하면 달관이나 체념이 생길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깨닫는 경지에 가까워져 갈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라고 했을것이다. 그러한 달관의 경지,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떤 변고에도 허둥대지 않게 될것임은 틀림이 없다. 역경(逆境)에 처했을때 더 나쁜것은 허둥대는 일일것이다. 보기 흉할뿐 아니라 한층 일이 악화될뿐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낙천지명해야할 것임이 자명한것이다. 친구의 그 전화가 나더러 내 운명에 걸맞게 낙천지명해야 함을 가르쳐주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밤 서재에 앉아 글을 쓰려다보니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소슬한 겨울의 기운에 몸을 줄이게 된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자정이 다되여서인지 길가에 다니는 사람조차 없다. 오늘은 달도 보이지 않고 우중충한 하늘가에 서너개의 별빛만이 추위에 떨고 있다. 내일에는 멀리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라고 한통씩 해야겠다.
36    이치에 집착하는 병 댓글:  조회:3426  추천:1  2015-11-08
   입동을 알리느라 그러는지 하늘에서 부실부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후퇴근 시간즈음되니 거위털같은 눈발이 흩날렸다. 아직 땅의 온도가 있어서 그런지 눈이 땅에 내리면 인츰 녹아서 길이 여간 질척거리지 않는다.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다. 큰 눈이 내릴때면 보통 바람이 불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내일쯤 눈이 그치게되면 바람이 모질게 불어칠것이다. 그러면 체감온도가 뚝 떨어져서 진짜 겨울을 경험하게 될듯 싶다. 요즘은 회사에서 백화점에 LED전시장을 만드느라 일손이 바쁘다. 거래처 손님들과 전화통화 몇번하고 몇명 회사지원자들의 면접을 보고나니 하루 오전이 또 후딱 지나갔다.   오후에는 우리일을 주관하는 시정부의 모 공무원과 사업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공무원의 생각이 꽉 막혀있어서 그 생각을 풀어서 일한다는것이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일단 무턱대고 안된다고 우기는 스타일인데 그의 입에서 된다는 소리를 듣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일단 안된다고 하고 다시 면목으로 해주는척하면서 인사치레를 하려는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인지는 잘 몰라도 안된다는 리유를 가득 늘여놓는데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었다.  사업을 하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어려우니까 해결하려고 하는것이고 부족하니까 메꾸려고 하는것이지. 다 만들어져있고 다 될 일들이면야 그걸 어찌 사업이라 하고 청들려고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일을 하면서 누군가와 손발을 잘 맞추어 나가는것이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더우기는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 나로서는 부탁을 들어줘야할 사람이 꽉 막혀 있으면 어쩔도리가 없는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잘하는 면이 있고 못하는 면이 있다. 완벽무결한 인간은 없는법이다. 부족하기때문에 배워야하고 부족하기때문에 수행이 필요할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꽉 막히고서야 어떻게 사상을 해방하고 지역경제를 발전시킬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纵欲之疾可医,而执理之疾难医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하여 보면 “어지러운 욕심의 병은 고칠수 있으나 이치에 집착하는 병은 고치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치료할수 있어도 도리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고칠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사욕에 눈이 어두운 병도 어떻게 보면 꽤 중병이다. 그러나 그런것은 본인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든가 주위의 상황이 변하든가 또는 우연한 계기로 변할수 있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예를 가끔씩 주변에서 보기도 한다. 문제는 “이치에 집착하는 병”이다.  쓸데없이 이론만 캐고 완고하게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문제인것이다.   물론 자기 의견을 가지는것도 좋은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진보도 없고 주위 사람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할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 속담에 지나침은 부족함만 같지 못하여 모처럼의 장점마저 결점이 되여버릴수가 있다. 이 “병”을 고치기 어려운것은 성격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 결점을 자각하는 일이 치료의 첫걸음이라고들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옛말에 옹고집,옹고집하는데 고집이센 사람중에서도 옹기장수만큼 고집쟁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옹고집이라고 했다고 한다. 좋은것을 고집해도 요즘처럼 다문화, 국제적인, 도시화사회에서 자리잡기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주관적인 생각만을 고집하고 자기 삶의 방식만을 고집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까지 종용하는 고집이라면 “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것이다.   오늘 그 공무원과의 미팅은 별 소득이없이 끝냈다. 그러나 사업으로는 소득이 없을지 몰라도 인간관계의 학문에서는 실로 한수 배웠다. 때로 우리는 정면 인물이나 긍정적인 사물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가끔씩 반면인물이나 실패의 교훈에서 더 많은것을 배울때가 있다. 어제 금방 마음의 평형을 찾으려고 다짐을 했으면서 오늘 또다시 까맣게 잊어먹어버린다면 뉘우침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후에 늦어서야 회사에 돌아왔다. 차 한잔을 타서 마시면서 밖에서 하늘가득 하얗게 떨어지는 눈발을 보고 있는것도 인생의 묘미가 아닐수 없다. 저 큰 대지에 가득 덮어 날리는 눈발이나 우주의 조화에 비하면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중심적이다. “오늘의 고집은 내일의 후회를 낳는다”는 불경의 한구절이 떠오른다. 참 맞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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