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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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중편소설) 어긋난 연분 댓글:  조회:3957  추천:0  2017-05-16
                                                                             어긋난 연분                                                                 최 균 선                                                                     1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다하고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 그른데 없다. 그사람, 평생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도 감히 만나볼 엄두도 못내였던 그 남자를 무도장에서 만날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필연은 아닐테지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우라 할것이다.     무도장에 늘 다니다보면 자연히 춤짝을 뭇고 차차 배짝도 되여 늘그막 로맨스로 열을 올리는게 관례이지만 그녀는 고독이 지겨워서 이 무도장 저무도장을 다니면서 요청하는 남자가 있으면 몇바퀴 돌며 소일할뿐 무슨 석양의 열련같은것에는 흥취가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인지 새로 개업한 석양무도청에서 잊은듯 차마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꿈자리에도 나타나던 그 사람과 해후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동안 세월은 몇십굽이를 휘돌아 흘렀건만 첫눈에 들어온 그 영상이 대번에 녹쓸어버린 기억의 대문을 활짝열고 들어섰다. 농사일에 찌들리는 청년답지 않게 그냥 패기에 넘치던 근육질의 남자, 훤칠한 체구에 어깨가 유달리 넓은 청년이였다. 비록 한창때처럼 숱이 많지 않았지만 굽실굽실한 반양머리의 흔적이 력력한데다 리지적인 너부죽한 이마아래 정나미돌던 그윽한 눈빛은 별로 색바래지 않았고 날선코마루와 거의 녀성적이여서 좀 이색적이던 입모양도 별로 변한게 없었다.      지금와서 말하기는 격에 맞지 않지만 분명 혹해버렸던 첫사랑이였다.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는 자기위안을 다림질할수록 이왕지사가 피 려지며 잠을 쫓아냈다. 그는 어떤 마음일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가? 자꾸 발을 헛디디며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는 자신이 민망했지만 팔리는 눈길을 거둘수 없었다.     한번도 녀자의 정에 젖어들어보지 못했다던 남자의 마음에 상처인들 오죽했으랴.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죄될것이 없을진대 나는 죄인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의 자기 감각과 마음을 자신이 장악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길 없었다. 결코 늙어서만도 아니였다. 어쩌면 인류의 언어로는 형용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참괴한 일이지만 거의 반세기 세월이 흘러갔어도 잊어버릴수 없었다. 망각해버리기엔 기억에 너무나 깊숙이 새겨졌고 평생 갚을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였다. 숱한 빚은 갚을 날이 있어도 자신이 진 감정의 빚은 갚을수 없기때에 기억의 홈타기를 자괴감으로 채우면 가장 절절한 후회가 되는걸가? 워낙 잘 그리지 못한 그림에 검은색 크레용으로 마구 덧칠해버리는 심술난 아이의 마음같은것이랄가?                                                             2       기억도 생생한 처녀시절, 새벽농대를 다니던 때는 그야말로 신주대지를 진감하는 혁명년대인지라 저마다 렬화금강이 되려고 윽윽하던 격정시대였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출신이 명랑하지 못했지만 동학들속에서 인끔이 높았고 웬간한 남자는 찜쪄먹게 못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공량을 바칠때는 200근짜리 콩마대도 등에 지고 아찔한 발판을 씨엉씨엉 올라가서 꼬리없는 암소라는 탁호까지 얻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지 않는지 련애를 걸어오는 남자라곤 없었다.     세개 큰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에게는 두개의 큰산이 있었다. 첫산은 지주성분이고 두번째 큰산은 딸만 아홉인 집에 맏딸로 태여난것이다. 성분이 좋다하더라 도 처가가 될 집에 딸만 아홉이란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뒤주춤할 일였다. 그러다보니 그런 란리판에도 련애하느라 야단들인데 그녀만 “수녀”질 하였다. 수녀원도 아닌 학교에서 남몰래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것도 아니여서 자신에 분통이 터질일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반에 차명훈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편지 한통을 건네여주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설마 명훈이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처지에서 별스레 련애편지 따위를 쓸 그런 맹충이 아니였던것이다. 평시에 누구보다 잘 리해하여 주고 은근히 동정심도 쏟아주는 그였지만 성분도 마다하고 랑만적인 로맨스를 엮으려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터인데 이 무슨 장난질인가?     “무, 무슨 편진데 반장동지가 이렇게…”     “내사 알턱이 있나? 어떤 친구가 부탁한 편지니까 련애편지 아닐가?”     “련애편지? 무슨 생뚱맞은 소리요? 누가 나에게…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명훈동무가 나같은 사람에게 오작교를 놓아줄 생각을 다 하였소?”     “사정이 그렇게 되였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혁명은 혁명이구 인정은 인정이지, 실은 중학교때 절친했던 친구였는데…문학을 하는 친구라서 달착지근할걸…”     명훈이는 익살맞게 눈을 찡긋하고는 휘파람불며 돌아섰다. 암만 생각해도 지꿎은 명훈이의 장난질로 치부해버리는게 좋을것 같았지만 난생 처음 받아보는 련애편지라 면…가슴이 팔딱팔딱 뛰였다. 편지임자가 누구든간에 자기에게 편지를 쓸만큼 마음이 따스한 남자일것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확 붉어올랐다. 그는 한달음에 학교건물뒤 사람없는 곳에 숨어앉아서 읽고 또 읽었다.     춘여동무,     몹시 놀랍지요? 안면도 없는 처지에 이런 편지를 쓰는것은 지금같은 시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니까요. 그러나 워낙 용기가 없는 사람이여서 편지로써 서로를 알고 지낼 길을 닦을수밖에 없음을 리해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사나이로서 벼르고 별렀던 마음을 곧이곧대로 쏟아내니 끝까지 읽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로서 하많은 말을 억제할길 없군요. 나는 련애편지에 보통 잘 쓰듯 대번에 감동을 안겨줄 미사려구를 떠올릴수 있지만 동무에게 처음으로 쓰는 이 편지에는 화작을 부릴생각을 접고 그저 솔직하게 쓰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말하면 누구들보다 량심으로 진정성을 담보하겠습니다.    춘여동무는 나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지만 나는 유일하게 친구로 남아있는 명훈에게서 동무에 대하여 잘 료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처지는 못되면서도 같은 처지에서 오히려 서로를 송충이를 꺼리듯하는 때에 혹시나 춘여동무만은 나를 리해해주고 시작부터 비뚤어진 인생길을 함께 걸어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요행심리에 내 전부를 걸고 이렇게 씀니다. 리해는 사랑보다 높다고 하지요. 사랑이란 모든 젊은이들의 자연발생적인 감정이지만 나같이 못생긴 새끼오리로서는 본성인 사랑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그래서 동무라면 나의 사랑의 감정을 엿보아주시고 나의 실락원에까지 이어줍시사하고 하소연 하는 바입니다.     착하고 녀자다운 모습과 인품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동무에게 한 남자의 충정으로 고백합니다. 누구도 쉽게 받아주지 않을 운명을 타고난 나에게 이른바 행복을 안겨준다고 장담못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굶주리지 않도록 한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할수는 있습니다. 동병상련이 오히려 우습게 되여진 현실에서 우리 손에 손잡고 인생길을 끝까지 가줄수 있다면 이한 생명을 다바쳐 인생반려로서의 기쁨을 누려보려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빌어다가 빚는게 아닌줄 압니다. 동무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떤 공통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요? 이렇게 고백은 하되 소중한 동무의 순정을 흐리우지는 않겠습니다. 저 울밑에 백일홍 이 내마음의 위로가 되여주듯이 리해하고 믿음이 되여주십시오. 불우한 내인생길에 지팽이가 되여주고 용기와 힘의 동력으로 되여줍시사 하고 내마음을 골방을 다 털어 냈으니 사랑의 천사, 아니면 내 어두운 삶의 마당에 외등이 되여줄수 없을가요? …………………………………………………………………………………………                                                        1968년 7월 12일                                                                       남이  드림       그녀는 마치도 감정이 풍부한 풋내기 소녀가 첫사랑의 감정에 미혼탕을 먹은듯이 생각의 문도 꽉 막혀버리는듯 하였다. 그는 낯모를 남자의 마음을 너무나 잘알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보아도 결코 순간적으로 떠올려보는 눅거리 동정심같은것이 절대 아니였다. 그는 자기 감정의 진실대로 살아왔던것이다. 자신도 외로움과 드러낼 수도 없는 괴로움으로 얽힌 삶의 진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평생을 기탁할수 있는 미더운 남편을 얻는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었지만 득세하여 떵떵거리는 남편을 바란다는것은 그림에 떡이라고 단정한지 오래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바엔 차라 리 인정스러운 남자의 넉넉한 사랑속에서 농가부녀로 살고싶은 그녀였다.     장황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울리는 그의 고백에 감동의 여울이 일렁이였다. 한번 보지도 못한 남자이지만 정말 편지에서 비쳐지는 그런 풋풋한 사람이라면 마다할 리유도 없을것이다. 성분타령을 하다가 시집가서 한풀 꺾이고 사는 녀자애들을 많이 보고있는터이다. 인간의 감정에서도 가장 슬기로운 감정인 녀성적인 련민의 정도 씨알 마냥 저도모르게 익고있었다. 자신을 리해하는것은 위안의 고전적형태일세 자신을 벗어나서 아름다운것을 지향하는것을 랑만이라 하는가?     녀자들에게는 육감외에도 예감이라는게 특히 중요하다. 다른 녀자애들도 거개 그랬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봉건성이 짙은 가정에서 자라나서 보수적이였지만 괄괄한 성미를 가지고있었다. 회답을 쓰든 만나보든 헤덤비지는 말아야 했다. 편지한통으로 홀딱 넘어갈수는 없는 일이였다. 편지는 어쨋든 엮는것이다. 편지글을 직접 심장으로 쓸수 없지 않는가, 그녀는 기회를 보아 명훈이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명훈히, 나에게 속이지 말고 그 남자에 대해 죄다 말해줄수 있겠소?”     “그 친구 편지에 자기소개를 아니하던가? 좋소. 노여워하겠지만 사실 내가 그 친구에게 춘여를 소개해주었소. 그친구 참 불쌍한 친구야, 공부도 잘했고 작가꿈도 있는 애인데 그만 세상에 잘못 태여났지. 성실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이루지 못할줄 알면서도 글뒤주라오. 지금은 발표할수 없지만 쇠힘줄이라오…무엇을 속이고 감추고 할것두 없소. 그친구 치명적약점이라면 출신이 나쁜것 말구는 인간적으로 참 미더운 사내라구…낯모를 처녀에게 그렇게 편지질부터 먼저 하는 경망한 친구는 아닌데 아마 내가 군침을 삼키게 했는가봐 하하하…”     “나는 명훈이가 어떤 사람이란것을 잘 알고있기에 믿음이 가지만 그래도 처녀로서 어찌 허타이 회답편지를 쓰겠소?”     “그럼 한번 대면해서 대화해보던지.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구 만나보면 호랭인지 시라소니인지 알게 아니요? 사실 내가 말해도 생각해낼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춘여에게도 전혀 생면부지의 친구가 아니요. 참, 그런데 내가 춘여에게 남자를 소개해주었다는것을 남들이 모르게 해주기 바라오. 사연이야…”     “걱정말아요, 그럼 그 사람 한번 만나게 련락해주오”     “그 사람 룡산에 사는데…곧 기별해줄게, 허, 로처녀씨가 싱숭생숭해졌나?”     “정 그러기요? ”춘여가 얼굴을 붉히며 종알거렸다.     일요일, 한침실에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없는 숙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외간남자를 숙소에 불러들인다는건 좀 모험적이긴 했지만 추운겨울 어디가서 이야기 를 나눌곳도 없었다. 약속한대로 오후에 명훈이가 한 청년을 데리고 슬그머니 들어섰다. 남자를 보는 처녀들의 눈은 천성적으로 혜안이다. 농사군답지 않게 끼끗하고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듬직한 몸가짐에 긴장으로 조금 경색된 눈에서 진심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좀 갈아앉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한 억양에서 내심의 격동이 은은히 메아리치고있었다.     그런데 이런 희한한 만남이 있단말인가? 명훈히 말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니였다.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가끔 고마운 마음속에 떠올려지기도 한 남자였던것이다. 인연이였나? 지난 겨울, 공구량을 바치러 다니던 어느 날 밤이였다. 그날도 남자들과 함께 “량잔”에서 마대치기를 하였다. 처음에는 본때스레 메여올렸지만 차차 힘에 부침을 느끼였다. 필경 녀자라서인가? 아니면 온하루 너무 무리한탓인가?     마지막 벼마대를 어깨에 올려놓고 휘청거리는 발판을 오르는데 어쩐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힘이 싹 빠져나가는듯했다. 발판 중간쯤에서 정신이 아찔해나며 뒤로 번져질것같았다. 자칫 벼마대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날엔 죽지는 않더라도 크게 상 할판이였다. 다른 생산대 공량군들도 벼마대를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급해났던지 모른다. “아차!”하는 순간이였다. 벼를 뒤주에 쏟고 내리는 발판으로 들 어섰던 한 청년이 눈치빠르게 “잠간만!”하고 소리치며 훌쩍 뛰여건너와서 벼마대를 받아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그녀의 팔도 잡아주었다….     …그때 그저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헤여진후 어디서 사는 사람인지 알수도 없었지만 뜨락또르위에서 마대를 메여주던 명훈이는 그 장면을 다 보았다. 그러나 춘여가 묻지 않는 일을 싱겁게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후 언제가 길에서 만난 남이가 새벽농대에는 남자꼬부래가 그리 많아가지고 녀자를 마대치기를 시키냐고 힐난하였다. 그래서 말이 난김에 춘여가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보니 늘 자진해서 적극성을 발휘하는데 정말 못말리는 녀자라며생각이 있으면 소개해줄 의향도 내비쳤더랬다. 물론 그녀는 그런 내막을 가지고 있는줄을 알리없었다.     “아이참, 알구보니… 어쩜 이렇게 공교로울수 있나요…그날 정말…”     “글쎄요, 그 발판이 오작교노릇을 한것인지도 모르지요.”     남자는 사람좋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정이 뚝뚝 흐르는 편지를 보내던 남자를 직접만나 몇마디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가슴속에 고요히 잠자고있던 녀자의 특성이 걷잡을수 없이 대번에 눈을 뜬것을 느끼며 그녀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방에 대한 인상은 첫 3초에 결정된다던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하고나서 곧 형성된 자신의 감정이 옳다고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자신이 그랬다.     하긴 녀자 나이가 스믈다섯이니 그의 본능과 욕망은 한껏 성숙되여 터질때만을 기다린던 참이였다. 녀자로 태여나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였다는 신비로운 광환에 싸여 불행에 대한 동정심으로 온몸이 팽팽해졌고 가슴이 울렁거릴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가슴에 딱 찍어말할수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 그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멀리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 천실만실 사랑의 꿈을 엮는듯싶었다.    억눌리며 자라서 더없이 순해빠지고 성실한 처녀들이란 일단 한 남자를 믿기시작 하면 연분이라 생각할수도 있다. 그녀는 진실한 넋의 지향에 이미 끌려들었고 그 끌힘이 남자를 더 친근하게 다가서게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슴속에서 미묘한 파문 이 일어나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안된다고 단속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기기로 작심했던것이다…                                                                                         3       남이도 심심풀이로 나가보던 무도장에서 늘 기억의 갑속에 꽁꽁 챙겨두고있던 아픔의 주인공인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해에게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해주었지만 자기의 그 복잡하게 얼킨 정한의 갈피는 다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때문에 한번 의심을 가져보지 않던 마음씨 너그러운 안해는 때때로 롱담하듯 혹시 그때 그 춘여라는 녀자를 안해로 삼았더라면 인생이 또 다르게 엮어졌을수도 있었는지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춘여라는 녀자를 다시 만난것은 순전히 우연일세 더 깊이 생각한다는것은 안해 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 충격을 받은탓인가 달빛이 처량하게 비쳐드는 서재에 앉아 애꿎은 담배를 태우노라니 이왕지사가 담배연기처럼 스물스물 피여오른다. 세월은 반듯한 소녀의 이마위에도 깊숙한 흔적을 남겨놓는다. 함께 춤을 추면서 눈빗 질해 보니 모진 세월속에서도 탐스럽던 옛모이 용케도 남아있었다.     녀자는 용모가 뛰여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여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여나면 지성이 모자란다고 어느 책에 써있었는데…체대가 덜썩 크지 않지만 탄탄하게 생긴 녀자로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요염하지 않았지만 잘 짜여진 몸전체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아름다움은 오직 첫눈에 반해버린 사람만이 기쁘게 보아 내고 흔상할수 있는 그런 숨겨진 은은한 미였다.     그녀의 모습에는 진실한 감정이 깃들어있었으며 녀자로서는 남달리 씩씩한 기상이 넘치고있다.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고 남자의 이마와 같았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순정이 담기여 어덴가 애련한 멋까지 풍기고있었다. 야들야들하고 해맑은 얼굴살갗이 해볕에 그을어있었지만 여전히 보드랍고 섬세하였다. 특히 다소곳한 자태 가 탐탁하였다. 첫눈에 벌써 깨끗하고 성실한 덕성을 갖춘 녀자라는것이 읽혀졌다, 부드러운 감정같은것은 이 시대에 부차적인 자리밖에 안되였다. 그들은 인생을 자기 들의 어렴풋한 견해로 평가할뿐이다.       남들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할수도 있는 반듯한 이마아래 그윽한 눈길속에 사랑의 세계가 몽땅 깃들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 고 그의 눈모양과 눈시울이 움직임속에서 이렇다 꼭 말할수 없는 숭고하기까지 한 매력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것이 첫눈에 떨쳐버릴수 없는 욕심을 부풀리였다…     그처럼 지울수 없는 좋은 인상을 새겨주었던 녀자는 결국 함께 할수 없게 되였다. 차거운 세월은 그의 가슴속에 피가 림리한 상처에 소금물만 뿌려주었다. 그 세월에 그가 무엇을 애석하며 무엇을 부등켜안아야 하는가? 더 버덕거릴 일도 없고 자신마저 사랑할 리유도 없는데 심장을 박동하게 할 동력이 있었던가? 부정만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사방은 캄캄한 어둠의 절벽뿐이다. 이런것을 진퇴유곡이라 하는걸가?      그럼에도 떨쳐버릴수 없는 어떤 욕망이 속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오는 몸부림은 대체 무엇인가? 질기고 질긴 생명의 끈인가? “부딪쳐야 해, 이 절망의 심연속 에서 헤염쳐나가야 해, ” 사냥군의 총탄에 상처를 입고 일어서려고 버둑거리는 어린사슴이 그때의 남이의 모습인가…. 그때 남이는 그렇게 고통에 모대기였다. 인생이란 본디 끝없이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때론 유유히 흐르다가도 때론 거세찬물결에 물 바래일며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영예와 치욕은 객관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하게 되여있으므로 사람의 욕망과 의지로는 도무지 돌려세울수도 없는 법칙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을 알지도 못해서 그저 그렇게만 생각되였다.    사랑이란 일상적인 사소한 타산이나 충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분노, 질투심, 일반적으로 모든 정열이 다 그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것을 남이는 더 뼈저리게 절 감했다. 인생이란 변화무상한것이여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 꼭 잡아주는 보이지 않은 손길이 뻗쳐오고 숨돌릴 공간과 자신을 정리할 기회를 준다. 희망, 그리 고 창망한 앞날을 기약할수도 있다. 그리고 망연자실하여 어쩔바를 모를때 발밑에 또 한갈래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그 녀자였다.     …그날, 녀자는 만약 녀동생이 여덟이나 되는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허락을 받자고 제의하였다.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은 격이라 남이로 서는 마다할 리유가 없었다.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우려도 할 계제가 못되였다. 너무 로쇠해서 때시걱을 겨우 차려주는 로모를 생각해서라도 마른나무꺾듯해도 좋을듯싶었 다. 그러나 이 춘여라는 녀자는 대번에 마음을 주어도 랑패는 없을것으로 믿어졌다.     그들은 새벽농대의 넓은 교정을 나올때는 서로 떨어져 걷다가 인하촌으로 가는 대통로에 올라서서는 나란히 걸어갔다. 해질무렵의 겨울바람은 뼈를 저밀듯이 옷속을 칼질하였다. 동그마니 한족솜옷차림인 그녀의 얼굴은 익은 사과알이 다되였다. 남이는 두툼한 목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춥겠구만. 목이라도 시리지 말아야하지, 얼른 감소.”     “동무는? 그러다가 감기걸리면 어쩌려구”     “괜찮소. 나야 남자구 또 고깔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지 않았소?”     말을 하고보니 좀 안되였다. 언제 친해졌다구 “하오”소리를 하다니? 녀자가 그냥 사양하자 큰 마음먹고 바싹 다가가 녀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녀자의 뜨거운 입김이 코를 간질렀다. 둘다 얼굴을 붉혔다. 금방 사귄 녀자의 손을 잡는다는것은 대 역부도한 일이라 그러지는 못하고 벙어리장갑까지 내주었다.    녀자의 따스한 눈길에서 은근히 감동을 받았다는것을 느낀 남이는 칼바람이 몰아쳐도 세상끝까지 가고싶은 마음에 온몸이 후끈해났다. 그녀를 위하여 한 남자로서 무슨 행복의 동산은 못쌓아주더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은지라 말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참, 명구란 그 사람 친구인가요? 동무를 불러세워놓고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했나요? 혹시 저에 대해서…”     “아니, 두루두루 알게 된 사람일뿐이요. 춘여가 그사람을 어떻게 아오?”     “새벽농대 농장에서 뜨락또르를 몰지요. 평판이 하두 나쁘길래 나두 알아요. 친구가 아니라니 좋아요. 제가 괜히 물어서…”     녀자가 왜 캐여묻는지 까닭을 알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예감은 되였다. 사람을 그 저 깔볼 권리는 없지만 명구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두루 알게 된것이다. 그런 영광의 나날에 환난을 같이 겪은 친구였지만 그후 가끔 길에서 만나도 도무지 친해지지 않아서 별로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녀자와 함께 나오는것을 보자 불러세우고는 횡성수설 끝이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춘여를 기다리게 하는것이 안되여서 그냥 뿌리칠가 하다가 혹시 호사 다마일지 모를 일이라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명구가 하는 말을 귀등으로 흘리며 그가 춘여에게 단단히 악감을 먹고있다는것을 얼핏 간파해냈다. 지주성분에 딸이 아홉이나 되는 집에 사위가 되려하다니? 머저리같은 생각을 한다며 훈계조로 나왔다. 말은 다하지 않았지만 아마 깨진 남비에 꿰맨뚜껑이 되는격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으나 명구는 그런 말을 생각해낼 머리가 못되였다. 침을 튕기며 말을 하다하다 네 딱친구 성남이가 한마을에 성분이 나쁘지만 참한 녀자가 있는데 소개해주겠다고 하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남이란 학교때 의기상투하던 태평촌에 친구로서 지금 어느 산골에 가서 선생질 하고있었다. 성남이는 진정으로 생각해 줄수 있다고 믿었지만 명구의 말은 믿기 찜찜 했다…그래서 더구나 명구가 한말을 녀자에게 곧이 곧대로 다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명구의 됨됨이로는 춘여를 먹고싶을 때 베여먹을수 있는 칼도마위에 고기덩이쯤으로 생각할수도 있어 아무짓이나 하고도 남을수 있었다. 춘여와 명구라는 존재를 련계지 여 생각하는것조차 불쾌해지면서 공연히 분통이 터지였다.     “명구란 그 친구에게 무슨 선견이라도 있소?”     “아니예요. 그런 사람과 무슨?”     녀자가 작정한듯 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았다. 남이는 정어린 고운눈과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선이 또렷한 입술, 그래서 청순하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춘여의 얼굴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늘져있었는데 맺고끊는 말에는 서리발쳤다. 남이는 녀자의 눈을 정시하며 전파를 날렸다. (피차 아껴주는 인생반려가 됩시다. 곧 쌓아가려는 애정탑이 하잘것없는 오해로서 무너져서는 안되겠지요? 근시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것입니다. 터무니없는 편견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맙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험난 한 인생길을 굽이굽이 잘 휘돌아가리라 믿습니다…)     “남이동무, 그런데 제가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대담하게 나왔는지 궁금해요.”     “울릴줄 모르던 내 마음의 현줄이 우연하게 울렸다고 할가요?”     “너무 어렵게 말해서 어리벙벙해지네요. 호호호…”     그들은 완전히 련인이나 된듯이 어깨를 스치며 정답게 걸어갔다. 추운줄도 몰랐다. 화전자골로 들어가는 산기슭에 헐망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인화9대에 도달해보니 마을동켠쪽 가파른 산발들에 듬성듬성 박힌 소나무들은 푸른빛이 외롭고 가둑나무랑 잡나무들이 가난한 마을을 지키는 초병으로서는 너무 허수룩해 보였다.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초가삼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참, 아버지 엄마에게 한마디 연통도 없이 웨간 남자를 데리고 불쑥 들어서면 어떻게 생각할지 막막해요. 그러나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    “이미 마음다잡고있소. 넘어져봐야 어떻게 아픈지 알게 아니겠소, 오히려 가자 고하니 덜썩 따라나선 내가 너무 경망한지도 모르지요.”     “아니예요, 저만 믿고 들어와요.”     남이는 머뭇거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지은지 오랜 초가였지만 잘 꾸며져있었다. 흔한 가둑나무를 베여다가 박아놓은 울타리도 든든했고 집이영새도 깔끔하게 다듬어 져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허접스레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예로부터 집은 그 주인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보지 않아도 옛날 지주집 살림살이 전통은 말려내지 못할것인가보다. 딸이 아홉인 집에 맏사위가 된다면 한절반 아들노릇도 해야 할것이라 생각 하니 미묘한 느낌이 가슴을 메웠다.     집안에 들어서니 한구들 가득 앉았던 녀자애들이 제언니를 할끔거리다가 올롱해진 눈길들이 내몸을 구멍내고 있었다. 물론 춘여의 어머니도 바가지에 퍼담았던 물을 도로 독에 쏟고 어정쩡해하였다. 웃방에서 담배를 썰던 집주인도 검고 커다란 두눈에 놀라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구들에 올라와 앉자마자 춘여가 입을 열었다.     “아부지. 너무 제멋대로 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남이는 들었는둥 말았는둥하며 딸을 건너다보는 50대초의 사나이를 눈빗질했다. 세상이 바뀌고 많은 시련을 겪었을 얼굴은 풍상고초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고 나 이보다 많이 찌들려있었지만 구들에 턱 들어앉아있는 덩치가 놀라웁게 덜썩 커보여서 저도모르게 조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어, 그래? 아무튼 우리 집 내막과 내 딸냄의 사정도 잘 알면서도 찾아왔다니 고맙네그려. 아비된 나로서는 먼저 젊은이의 가정내막도 알아야겠지? 안그렇소? ”      남이는 생면부지여도 사회적으로 한통속인 사람앞에서 별로 꿀릴것도 없다싶어 곧이곧대로 이실직고하였다.     “허어, 아직 나이가 어린사람이니 나와는 다르겠지만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텐데 주눅이 들지않고 씩씩한 모습이 마음에 드네그려. 충분히 믿어지네, 그런데 어쩌나? 자네도 우리같은 사람들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란지 잘 알겠지? 동병상련이라 서루 마음이 못통할것두 없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구만. 툭 찍어말하면 저애가 정한 일이니 마다할 까닭은 없지만 내가 지금 너무 뒤몰리다보니 딸들만은 성분이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여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 살게 하고싶다오.”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리해됩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마음을 제가 설득해서 곧 풀어질 일이 아니라는것도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른나무 꺾듯이 할 일도 아니니고 해서 오늘 제가 절을 올리고 허락받자고 온것은 아닙니다.”     “좀 까다롭게 생겼다하고 생각하는데 말 한번 시원허이. 그래 시국이 시국이고 한 딸애의 종신대사이니 사람을 더 지내보기두 해야겠지비, 그러니 오늘은 이쯤하세. 이제 밤이 되였고 모아산꺼정 가려면 길이 멀테니 저녁이나 드시고 나와 저 웃방에 서 묵고 래일 돌아가세.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말구 마음을 너르게 가지게나”    춘여는 고개만 푹숙이고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녀가 부모앞에서 항변이라도 해야 하는가? 남이는 그러는 녀자를 너무 잘 알것같았다. 마음같아선 당장 일어나고싶었지만 체면도 있고해서 눌러앉았다가 저녁밥을 얻어먹기로 작심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어떻게 할수 없는지라 그냥 먹던듯이 차린 저녁상이였지만 점심도 굻은 그로서는 별식이였다. 그래서 잡담제하고 맛갈스럽게 먹었다. 혼사말은 제쳐놓고 일 상얘기를 좀 나누다가 저녁설겆이도 끝나는것같아서 자리를 차고일어섰다.      “저녁까지 대접받았으니 전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집에 혼자 계시는 로모가 걱정도 하실터이니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페를 끼쳤습니다.”     밥술도 드나마나하던 춘여가 마침내 격한 목소리를 말했다.     “아부지,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것은 제 잘못이지만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마음속에 결정한 사람임다. 그런데 제맘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그리고 먼길을 온 사 람을 단마디로 퇴박줄수 있슴까? ”    “쯧쯧, 이것아, 산전수적 다겪고 인정사정 다 아는 이 애비이기에 그러는거다. 내 라고 이러는게 마음이 좋을줄 아느냐?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세월을 탓해야지, 장래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두 이렇게 하지 않을수 없는게다. 사람이 평생을 두고하는 마음고생이란게 어떤지 너도 가히 상상수 있을거다. 후유ㅡ”     말꼬리를 사리는 아버지의 눈빛은 처절했다. 바람든 무우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토하며 웃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맏딸로서 그러는 아버지를 더 닦아세울수도 없 는 일이였다. 남이가 차려야할 례절은 다 차리고 녀자네 집을 나서니 랭기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뒤따라 나온 춘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 밤길을 어찌가나요? 원래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것 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말고 우리 장기전을 합시다. 예? 내마음은 절대 꺾이지 않을것입니다. ”    “나 춘여의 처지와 마음을 너무 잘 읽고있소.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소. 얼른 들어가보오, 옷도 걸치지 않고 그러다가 감기들겠소, 자, 그럼…”    그말은 둘사이에 묵계일가.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가장 깊숙이 숨겨둔 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춘여가 “앗차, 목수건!”하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바람같이 사라는것도 못본체하고 마을길을 내리다가 뒤돌아보니 춘여가 목수건과 장갑을 흔들 며 쫓아왔다.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필요없으니 더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홱 돌아서서 건정건정 내뛰였다.    신작로에서 숨을 돌리며 마을을 바라보니 동산에서 몰래 솟아오른 달이 찬란한 별무리를 거느리고 마을길을 여유롭게 산책하고있었다. 모멸감을 참아내던 육신에 더운피가 거꾸로 흘렀다. 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이런저런 수모를 받고나서는 아무데 나 퍼더버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다가 그대로 영영 잠들어버리고 싶었던 멍든 가슴이 이번엔 갈갈이 찢기는듯했고 고추물에 절어드는듯 쩌릿쩌릿하였다.    무엇을 어째야 하겠다는 의식도 뿌리채 흔들리고 래일을 바라고 애써 쌓으려던 사랑탑도 물먹은 토담처럼 무너졌다.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걸 참아내 느라고 잠시 그대로 머리를 돌려버렸다. 참으로 견딜수 없이 마음이 아플 때, 금방 이라도 눈물이 솟구칠듯싶을 때 버릇처럼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녀에게 속한 한귀퉁이 하늘은 의연히 넓어보이고 구름은 의연히 유유자적한것을 보면 흐느낌도 갈앉을것이다. 죽는 일도 아닌데 왜 락심천만하는가?     남이는 그날이후 더는 춘여를 찾지 않았다. 몇달후 마침내 짤막한 편지를 썼다. 잊어버리기 위한 작별의 편지라고 할가?       “춘여, 나라는 사람이 일컬어 참된 사랑을 이루려는것이 얼마나 허황한것인지 비로소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시종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자존심마저 완전히 포 기할수도 있는 그런 남자로 자처해 왔습니다. 추호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 랑을 춘여에게서 이루어지리라 믿었던것입니다. 나를 무서운 고민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줄듯 싶었던 녀자, 그러나 곧 그 혹독한 고독과 절망속에 던져버린 녀자로 충당 되여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합니다. 춘여씨의 본의가 아니래도 말입니다.    봄은 간다는 말도 없이 살그머니 여름의 록음속에 숨어버렸군요. 꽃과 나비춤, 그리고 푸른잎새를 기약해주고 가는새없이 가버린 봄, 뒤따라 하늘도 산야도 대기마저 다 짙푸르게 물들어버린 6월이 무성하는 7월을 불러올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시국은 시끌벅적해도 인간상정으로서는 꽃피는 아침에 꽃을 사랑하고 달이 밝은 밤이면 달에 매혹당하는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나날은 변할것이 없지요. 나는 그대와 꿈도 알락달락하게 지극히 감성적이고 향락적인 이성의 일면보다도 그렇게 해서 불태우는 정열이 가져오는 사그라들지 않는 생의 욕망과 용기를 안고 내 불우한 인생을 나름대로 가꾸려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결혼했기에 사랑하며 한가정을 꾸린다는 그러한 관념적인 사랑만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운명이 나를 그렇게 자위하게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랑만을 보듬게 만든것이라고 리해하면 우습지 않을것입니다.    조물주가 남자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사랑과 추구의 용기이고 녀자들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두려움과 사양하는 담략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오름니다. 하긴 이 세상의 모든 남녀가 누리는 그런 일상의 애욕도 굽이굽이 풀내려가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 순결한 처녀를 점유하는데서 오는 보통의 남자로서의 본능적추구마저도 나에겐 허무하군요. 춘여탓이 아니니 상심해 말아요. 춘여의 아버지가 세월탓이라고 하였는데 잘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세월을 이겨나갈수 있을가요?     …………………………………………………………………………………………………                                                                                     4     사람들은 서로 충성심을 불태우며 혈안이 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지만 화살보다 빠르게 도르래기 돌아가듯 빙빙 도는 지구는 백여도 자전하는 동안에 적설이 길길이 쌓였던 산과 들에 비단을 깔아놓은듯이 푸른 풀이 우거지고 강건너 룡처럼 굽이쳐 내 려가 룡산촌 뒤산에는 살구꽃들이 화사하게 웃기시작했다.     낮에 한동안 실실이 내린 첫비가 하늘을 말끔히 걸레질하여 더없이 청청했다. 고향의 동산에 둥실둥실 떠오른 달님은 금시 목욕을 하고 나온 소녀의 청신한 얼굴 마냥 유난히 아름답고 깨끗하였다. 남모르게 타들어가는 속을 식혀볼가해서 옛날 비 행기활주로에서 홀로 바장이던 춘여는 저도 모르게 해란강가에까지 나왔다.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흐르고있다. 멀리 서쪽켠에 모아툰으로 통하는 해란강다리가 커 다란 뱀이 걸린듯 우중충하게 안겨왔다. 그녀는 저도모르게 그 남자를 생각했다.     비록 깊이 사귀여보지 못했지만 그 남자네 마을의 생산대장에게 시집을 간 한마을의 소꿈친구 영자에게서 그 남자의 내속과 살아가는 모습을 전해들으면서 더구나 망각할수 없었다. 망각하기엔 너무나 깊숙히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어 마치 유리알같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잔인한 운명이란것도 빈구석이 없이 실감할수 있었다. 그는 비판투쟁을 밥먹듯하며 살고있단다. 만약 그 남자가 막연한 래일을 바라고 운명과의 사투를 포기했더라면 언녕 열번도 넘게 저승사자앞에 섰을것이다.     남들은 혁명하느라 밤낮으로 구호를 웨치며 돌아다녔지만 반란파에도 들 자격이 없는지라 맨날 똥진오소리처럼 일만하였다. 그녀의 뇌리에는 남자를 처음 만나던 일 과 남자가 둘러준 목도리의 따스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함께 걷던 그날의 자기와 그후의 그럭저럭 지나간 나날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치 아득한 먼옛일처럼 운무에 가리운듯 아무리 그려보아도 그 영상이 좀처럼 눈앞에 똑똑이 안겨오지 않았다. 자책감과 후회가 클수록 절망이 커지는가? 자기와 같은 경우에는 후회가 뼈저릴수록 자책감이 무거워지는것인가?     그래서인지 눈만 감으면 그 남자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지척이 천리라고 한시간도 안걸리게 걸으면 모아산아래 그 남자네 동네에 이를수 있었지만 먼저 찾아 갈 용기가 종시 솟아니지 않았다. 그렇게 밤길을 더듬어간 그 남자는 마지막 결별의 편지를 보내고는 아무소식도 없다. 상념은 무리를 찾아헤매는 외기러기처럼 번민의 무리를 찾아 맴돌이치기가 그 몇십번이였던가,     혁명이 고조기에 이르면서 하루건너씩 “최신지시”가 내려올라치면 한밤중이라도 학교마당에 모여서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불멸의 태양이 내린 “최고지시”를 외 워대며 공사마당에 집중하여 경축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신으로 말하면 국외인으로서 덩달아 해야 하는 충성이였고 남들이 웨치니까 웨치기만했다. 말이 새벽농업대학이지 그저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농사짓고 비판투쟁을 하는게 업이였다.     원래 자기와 같은 오류분자의 자제로 대학생이란 명칭을 띠기에도 하늘에 별따기 였지만 초대학생회 회장인 명훈이가 힘을 써서 입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훌쩍 떠나버리기도 안되였다. 졸업증이나 타겠는지 모르고 탓다고해도 크게 해볼데가 없는 줄 알면서도 그래도 어울려주는 무리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 생산대에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는터였다. 동학들이 찬눈길로 보지 않는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의 도움도 바랄수 없는 꽉 막혀버린 자기의 처지에서 깊고 내밀한 아픔들을 혼자 보듬어야 하고 그러노라면 가슴은 온통 갈기갈기 찢긴 칼자리뿐이였다. 저절로 한숨이 애를 끓였다. 남녀사랑이란 그렇게 빈약하고 그렇게 쉬이 무너질줄이야, 높은 리상도 아니고 그저 마음에 드는 남자와 농가의 향락을 누리며 살려는 안일한 지향이 그렇게도 어려울줄이야, 남들은 그렇게 쉽게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사는데…     편지에 쓴것처럼 그 남자는 절절한 사랑의 애원이 있을뿐 애욕의 성급함이라 전혀없다는것을 녀자의 본능으로 느끼였다. 그를 바라볼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 나 그남자의 눈길은 가슴에 끓어넘치는 격정을 감추고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에는 똑같은 감정이 비끼여 있었고 두마음은 하나의 생각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마지막편지가 될줄은 생각못하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남이동무:    안녕하십니까? 지금도 저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요? 물론 저의 아버지가 그 냥 허락을 하지 않고있지만 사랑문제는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마음을 달리 먹지않기를 간절히 바람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먼저 사랑을 버리고 더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래요.     눈에는 두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육체의 눈,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말이예요. 육체의 눈은 가끔 잃어버리는수가 있지만 마음의 눈은 항상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요. 비록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동무의 량심적이고 인격적인 정열을 그리며 몸이 달아오를 때 이것저것 망서리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을 훌 맡겨버릴가 하는 생각을 한두번 한게 아니였습니다. 녀자로의 수치심을 덮어버린 진심입니다.     남이씨를 알고나서 오래 고이키웠던 로처녀의 순정과 단조롭던 생활에도 마침내 달콤한 시간이 찾아들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해빛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룡산중턱에 진달래꽃도 더 붉어보였습니다. 성숙한 정염의 신비한 동경속에 부끄러운 욕망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쳤습니다.    우리들은 무엇때문에 이미 마련된 행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가? 무엇때문일가? 우리들은 남들보다 못하지 않는 아름다운것을 얻기 바라지 않는가요? 그런데 결과적 으로 얻기도 전에 왜 잃어버려야 합니까? 남은것이란 미봉할수 없는 가슴을 저미는 한단락의 추억뿐이여서 매양 후회의 심연속에서 모대기에 됩니다.    신화를 그리워하고 영원을 생각하는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해주던 그 말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순간에 있어서 주의를 생각하고 현실을 생 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순수성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고하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하든 그것이 남녀의 사랑의 특징이고 평범한 사랑의 생리임은 사실이지요.     슬픔에 찢어진 나의 가슴은 나날이 갈마들던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잠시동안이 나마 벗어나 순결한 넋이 안겨주는 더없이 살뜰한 애정과 감미롭고 미묘한 동경과 이성애의 환락속에 한껏 젖어보기도 하였던 저입니다. 몰래 한숨을 삼키고는 무겁게 마당을 나서던 동무의 뒤모습을 얼없이 지켜보면서 우리의 엉성한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서로 지나치도록 열정을 쏟으며 알뜰히 가꾸려던 사랑의 터밭을 이대로 내버린 다는것은 나로서는 너무너무 크낙한 고통이고 슬픔이였습니다. 나에 대한 동무의 감 정이 완전히 탈색한다 하여도 저는 완전히 지워질수는 없을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하더라도 말이예요.    휴식날 집에 돌아가 퇴마루에 앉았을 때 호젓한 앞마당에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 하나의 소리는 저의 가슴속 깊이에 간직된 물음에 화답하는듯 싶었어요. 그러면 나의 마음은 또 소란스러운 번민으로 뒤범벅이 되여버렸습니다. 동무가 더 주동적으로, 더 용감하게 나올수는 없을가요? 나는 이미 한번 도끼질에 넘어갔지만 당신은 열번스므 번 찍어서 우리 아버지를 넘어뜨릴 그런 용기가 없나요? 기다릴게요…     그녀가 평생 장악한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말을 총동원해서 편지를 썼지만 남자는 종시 회답을 해주지 않았다.                                                                                                5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는 남이의 사나이다운 정열보다 현실성과 실효성을 지닌 명구의 지꿎은 추구가 고달픔을 한결 더 쥐여짜게 하였다. 그녀가 명구를 이를 갈며 미워하는데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사연이 있었더랬다. 그녀는 원래 순진하고 성실한 자기의 성품대로 감정을 거슬리지 않고 자기의 믿음에 따라 인생을 가꾸려는 성미의 처녀였다. 그녀로 하여금 성분이 좋으면 다 백마왕자로 보지 않은것인지 모른다.     그가 갓 농업기계반에 입적하였을때다. 순진한 녀자애들로 말하면 거의 언제나 선량한것이라고 믿어버리거나 진실한것이라고 믿어버리는데로부터 실책이 저질러진다. 명구의 내막을 잘 모르는 그는 뜨락또른운전기술을 배우면서 명구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말을 곧이듣고 부르면 만났고 그의 말을 최신지시처럼 새겨들었다.     몸집이 갱핏한 남자였다. 가마노르께한 길쭉한 얼굴에 턱은 뾰족하고 입술은 곡선이 하나없이 다물려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입을 벌릴때마다 몸서리치게 하얀 이발 이 들어났다. 공연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거운빛이 내뿜기는 눈은 보통 말하는 뱀의 눈과 흡사하였다. 매부리코는 독살스러운 교활성과 짜내는 성실성과 리기주의적 욕심과 동시에 아무도 안중에 없다는 오만이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겉보기에는 흔한 남자같지만 독기를 품으면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 사람이라는것이 력연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체를 타도하는 혁명이 터지자 농장반란파의 두목이자 학교에 진출한 빈하중농대표랍시고 매양 개잡은 포수처럼 우줄렁거리였다. 명구라면 다른 녀 자애들도 딱 질색이였다. 같은 반란파지휘부에 있는 명훈이와도 수화상극이였다. 농 대의 천교장도 명구가 휘동하는 반란파들의 손에서 반주검이 되도록 박해받다가 자살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리고 발구에 실어다가 남산덕이에 대충 묻어버렸다.    그건 그렇다치고 처음부터 개똥밭에 참외처럼 보았는지 기회만 있으면 지분거려서 소름이 끼치였다. 그러다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말았다. 어느 일요일날이였다. 반란 파지휘부로 오라는 명구의 호출이 내렸다. 곧장 득달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갔 는지 그가 혼자 있었다. 그는 걸상을 권하고는 다자고짜 엄정하게 선포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에, 말하자면 유훙유쫜”의 무산계급새일대 기술인재를 배양하는 이 전당에서 춘여같은 지주집 딸이 혁명일대들과 함께 공부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니겠소? 그래서 우리 관리위원회에서 의론했는데 아직 결론은 짓지 않았지만 생산대로 돌아갈 준비하라고 불렀소. 하긴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일이기도 한데…춘여동무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게 관건이지…”     순간, 가슴 한복판이 쿵하는 파렬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증을 타게 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명구가 무엇을 하자 는것인지 지각이 든 처녀로서 모를수 없었다. 남자들은 다 자기속에 동물의 모습을 감추고있다. 남자들은 자기가 잡아놓은 쥐를 오래오래 양공질하는 몹쓸 고양이를 가지고있다. 아니면 나비를 유혹해서 그믈속에 끌어넣은 다음 그피를 빨아먹는 독거 미를 가지고 있다고할가 명구가 지금 그 고양이로, 독거미로 현신한것이다.     “툭 찍어놓고 말한다면 이 방대장이 춘여를 좋아한지 오래오. 그동안 매우 점잖게 대했지만 혁명이 어디 칭커츠판이나 수놓이를 하는게요? 나의 사랑을 받겠소? 아니면 촌에 내려가 호미강대를 쥐겠소? 량단간 결정하오. 내각씨가 되면 이 무시무 시한 혁명폭풍속에서 무사히 살아갈수 있을것은 떼놓은 장땅이지? 안그러오? 어쨋든 나같이 고도의 혁명각오가 있는 사람이 능히 교육할수 있는 오류분자자제들을 책임지려 하지 성분이 좋은 어느 남자가 춘여를 요구하겠소, 내가 한평생 춘여와 처가집과 한구들이나 되는 처제들을 잘 책임져줄게 어떻소?”     아무리 막돼먹은 남자라도 이렇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것이다. 어리숙한 녀자라도 남편을 고를때는 아주 세심하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한 남자라도 열련에 빠 지면 바보가 되여버린다고 했다. 하다면 나는 아주 세심한가? 이 남자는 지금 열련에 빠져 바보가 되여버린겐가? 출신을 턱대고 아무짓이나 하는 망나니밖에…                            명구는 슬며시 다가와서 끌어안으며 정욕으로 달아오른 끈적끈적한 입술을 볼에 대며 가슴을 마구 헤치였다. “너무 좋아서 아닌체 하는거야, 얌전하게 있어,” 아무 방비도 없던차 그가 구렝이처럼 휘감들자 그저 몸서리쳐지면서 정신이 아뜩해났다. 출신이 나쁜녀자는 제하고싶은대로 하려는 이 동물에게서 자극받고 흥분하고 정복당 하고 어떤 쾌감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동물이 되여야 하는것이다.     녀자들은 보통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귀간지러운 거짓말을 들으려 하지만 한 남자를 미워하게 되였을 때 듣고싶어하는것은 진실이다. 녀자가 소리도 못치고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있자 더욱 대담해진 명구가 교실바닥에 번져놓고 마구 깔아뭉갰다. 차디찬 세멘트바닥의 섬뜩함을 느끼며 마구 덤벼치는 야수에게 유린당할수도 있다는 괴로움 마저 얼어들어 꽛꽛해졌다. 인간생활은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상하다 하여도 결국은 두가지뿐이다. 하는 녀자의 생활, 하나는 남자의 생활이다.     비참한 오한에 전률하며 자신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다가 극복의 문리가 차차 트이였다. 괴로움속에서 터진 울음끝에 오는것은 흐늑흐늑 흐느낌이다. 이대로 당하고 그이 노리개가 될것인가? 포악스러울만큼 거칠고 탐욕스럽게 옷을 벗기려는 미친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이 지킨 순정이 절대 안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자기의 입을 찾는 명구의 입김을 피해 몸음 비틀어대던 춘여의 눈에서 마침내 분노의 불길이 타번졌다. 그것은 원치않은 헌신을 강요당하는 약자의 굴욕감에서 서릿발치는 저항의 비수였다. 비애와 쓰라림은 짙은구름이 되여 얼굴이 무섭게 일그 러졌을것이다. 땅바닥의 랭기가 괴로움과 분노의 불덩이가 가슴에서 화산으로 터졌다.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는 남자를 힘껏 뿌리쳤다. 힘으로 한다면 명구쯤은 헤까닥이다. 일어나서 자기를 잡으려는 남자를 콱 밀치고 밖으로 내뛰였다. 뒤에서 “쇠새끼 같은년, 두고보자!”하고 욕질하는 목갈린 소리가 날아와 귀청을 스쳤다…     명훈이를 찾아가서 학교지도부에서 정말 자기를 내보내려고 결정을 지었는가고 물어봤더니 그런 일이 없다고 도리질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명구가 너절한 수단으로 자기를 어째보려한 꿍꿍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더 있을 체면이 없었다. 명구는 자기가 매일 꼬리없는 암쇠를 올라타고 놀아댄다는 야비한 소문을 퍼 뜨리고 다녔다. 그런 더러운 소문이 마침내 그녀의 귀에도 들렸던것이다. 그날로 이불짐을 꿍져지고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본가집에 나들이를 온 영자에게서 가슴아픈 소식을 들은날 밤. 그는 집뒤 산기 슭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남이가 일을 저지르고 구류소에 갇혔다고했다. 영자의 말에 의하면 남이가 농대에 있는 어떤 사람을 죽도록 패놓았는데 문제가 크게 번져 잡혀가서 언제 풀려나올지 알수 없단다. 맞아댔다는 남자가 명구였을게 분명했다. 그는 그 남자를 위해서 통곡했고 자신의 가슴이 찢기여서 온밤을 흐느끼였다.     썩후에 명훈에게서 들어서 안일이지만 모욕받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런게 아니였 단다. 자기가 소개해준다고 한 태평촌에 부농집딸이 일색인것을 보고 어떻게 구슬렸 는지 아니면 강다짐으로 잡아챘는지 안해로 삼았단다. 역시 성남이란 친구에게서 들은 말을 남이에게 하였는데 아무래도 분노가 겹치여 일을 친것같다고했다. 구류 소에서 반년넘게 고생하다가 풀려나오긴 했는데 그일 때문에 더 고생하게 생겼단다. …자기의 인생이 그렇게 비틀어지자 아름다운 사랑의 동산이고 뭐고 더 바랄것 없이 아버지 말대로 연길역전앞 마을에 시집갔다. 물론 출신이 좋은 집에 며느리가 되였다.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사는 동안 황당하던 질풍노도의 세월도 끝나고말았다. 긴긴 십년세월, 개잡은포수로 날뛰던 명구가 못된짓도 많이 한데다가 학교의 천교장의 학대사건으로 갈데로 들어갔다고 한다. 인과보응이라 할것이다.     영자에게서 들을라니 남이도 늦게 결혼하고 어느 시골학교에 민반교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에 드문히 문장을 발표한다고도 했다. 쥐굴에도 볕이 들었다고할가,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할가, 자신이 그 남자를 배반한것인가? 역시 연분이 아니였다고 자기를 위안하면서도 가슴은 그처럼 허전할수 없었다. 더구나 후에는 도문시내의 큰 중학교에서 교원질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람이야 만날 면목이 있으랴만 남이의 작품이 실린 신문이랑 잡지서껀 얻어서는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는것이 그 남자에게 속죄하는 흉내라도 되랴만 감정의 빚을 덯쌓는것으로는 무관하리라 생각했다. 영자도 명동골, 도문으로 전전하며 선생질하는 남이에 대해 더는 소식을 전할수 없었지만 발표되는 작품에서 그남자의 후반생의 궤적을 추적할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렇게 뿌리깊은 첫사랑일수 있느냐고, 늙도록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마음은 그냥 한곬으로 흐르는것을 말려낼수 없었다. 더 구나 남편이 일찍 타계하고 새끼들도 다 출세하여 집에 혼자남게 된후 저도모르게 흘러간 세월을 더듬게 되고 그 세월의 언덕에는 어김없이 그 남자의 영상이 오롯이 서있군하였다. 더구나 그가 대학에 교수로 퇴직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인생무상을 느 끼며 한탄하였다. 일부러 하는것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것도 알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 참으로 녀자의 첫사랑이란 다 이런것인가?     어느 책에서 녀자가 늙으면 늙은 남자들보다 더욱 우울해지고 고독해진다고 썼더니 과연 그말이 맞는것같다. 지금 자신이 고독을 달래지 못하여 무도장출입이 잦아 지게 되였는데 혹떼러갔다가 혹을 붙여온다고 자기야말로 아픈 추억이라는 혹을 달고 왔으니 고독한 만년에 이 무슨 보응인가? 모르는게 약이라고 가끔씩 옛일을 떠올리며 무엇인가에 안위를 받아야 하련만…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남자에 대한 련모의 정을 못잊어 가슴태우는 녀자의 얼굴, 그 몸가짐이 젊은녀자라면 아름다울지 모르나 다늙어서 옛사랑에 모 대기는 자기의 모습은 결코 보기가 좋을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긴 그녀로 말하면 그래서 더구나 허무하였다.                                                                  6       남이도 가끔 옛일을 추억할 때마다 안해에게 자기의 이왕지사를 숨기지 않고 말해주군 했는데 안해도 시무룩하게 웃으며 잘 응대해주었다. 기실 모아툰에서 농사 일을 할 때 친하게 지낸 영자라는 녀자가 우정 들으라고 그랬는지 춘여란 녀자의 얘기도 몇번 하길래 그간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몇번은 영자와 연길에 장보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함께 가자고해서 용포동의 그녀자네집에 따라 가기도 했단다. 참으로 수더분하고 장생긴 녀자더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남편이 드문히 나가던 무도장에 며칠 안나가자 안해가 캐묻는 바람에 옛날 그녀 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제 무엇을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늙은 이여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스스럼없이 주고받으며 남이는 회심의 미소를 짓 기도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녀자로서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이지만 시작도 못해보 고 흐지부지 막을 내린 그 사랑의 연극이 지금와서 무슨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인생의 저문언덕에 한가지 깊숙한 홈타기가 된것은 사실이다.     “그럼 한번 더 나가서 만나보구 국수라도 함께 나누구려. 나 절대 질투하지 않을 테니까유. 같은 녀자이고 나도 그런 풍파를 겪으며 당신에게 시집을 왔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아유. 그 녀자도 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애석해 할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요? 나라도 그럴것 같은데 호호호…”     “허허허…참으로 인생이란 새옹지마이지, 어쨋든 마누라가 도량이 넓어 좋구려”  진심어린 미소는 잔잔한 호심에서 이는 미풍과 같은것이다. 가슴에 뒤끓는 태풍을 안은채 진정한 미소를 지을수 없다. 시기와 질투와 불신의 소용돌이를 감춘채 진 정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기는 어려운것이다. 지난날을 다 리해하여주며 늘 동고동락을 기약하는 미소처럼 흐뭇한것은 없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기도 하다.     남이는 역시 버릇처럼 자기 허구픈 사랑철학에 빠졌다.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에 산이 있어 물이 있듯이 인간사회에 남성이 수요되고 그만큼 녀성의 존재는 불가결의 인소이다. 흔히 녀자는 감성적이고 유연하고 섬세하며 외유내강하다고 한다. 일컬어 녀자를 천사의 화신이라 칭송하면서 녀인은 “사랑”의 대명사로 된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없는 세계는 무질서하여 혼란할것이고 녀인이 없는 세계는 메말라 쇠갈될것이라는 아름다운 글귀들을 줄기차게 엮어왔다. 그러나 자신의 첫에덴동산엔 싸탄이 나타나서 인생을 다른길로 끌고갔다. 에머슨은 정직한 마음만큼 성스러운것은 없다고 하였다. 나자신은 애정에 얼마나 성실했는가? 따지고보면 춘여만 원망할 일이 아니였다고 늦게나마 반성해본적이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귀속되여 할 녀자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사랑을 구겨박은것이고 자기감정의 노예가 된것이다. 젊은시절 사랑함에서 가장 삼가해야 할것은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미래를 환상하는것이였고 늙어서는 어디까지나 서로의 지난날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라 할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련애사가 복잡하더라도 자기가 만나고 사랑했던 녀자를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애석해하면 할수록 녀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신비한 면사포를 쓰고 눈앞에서 하늘거릴뿐이다. 어찌생각하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 절절한지도 모를일이다. 아무튼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던 곳에는 애석함과 련민의 정이 남아있게 되는법이다. 녀자를 가지는것보다 어떻게 사랑했던가가 더 중요하고 자기와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어디서든 행복하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후에 청심환 같은 쓰잘것없는 사랑철학이리라.     그래 맞다. 흘러간 과거는 흘러가라 하라. 어차피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수 없거늘 추억이 눈물겹다면 그로써 자족하는것이 좋으리라. 남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말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단떼의 “신곡”에 한구절이 생각났다.“여기서는 일체의 머뭇거림을 버려라  그 어떤 주저함도 여기 죽어마땅하도다”이것을 패러디한다면 지옥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입구에도 비슷한 요구가 써있을것이다.     그날밤, 남이씨는 꿈을 꾸었다. 춘여가 나타나서 비겁하고 무책임한 남자라고 질 책했다. 그리고는 꺼이꺼이 울어댔다….                                                             2015년 5월 8일 (수정)
811    단풍례찬 댓글:  조회:3050  추천:0  2017-05-13
                                                           단풍례찬                                                               최 균 선       나는 가을마다 단풍이 드는 숲의 사연을 알지 못하지만 알심들여 단풍례찬을 엮으련다. “연변단풍수필회”회원들의 작품집15기 출간에 즈음하여 기념문장을 쓰려니까 자연히 단풍례찬으로 화두를 떼지 않을수 없다. 비흥법쯤 되는것인지 모른다.     단풍고운 산을 놓고 고금의 수많은 문인들이 미문을 지어 례찬했다. 단풍은 희망을 심는 새봄, 구슬땀흘려 가꾸는 여름, 풍성한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이은 대자연의 조화로운 걸작들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서 그 최고경관에 노상 감동을 먹군한다.     10월을 앞두고 나무들은 이채로움을 띄기 시작한다. 햇빛과 단풍이 시시각각 춤추며 색깔이 변하지만 우리 눈에는 서서히 물드는것으로 인지되고있다. 가령 마음을 지어먹고 관찰한다면 단풍의 색은 인간의 시각으로는 식별할수 없이 부단히 변하고 있음을 보아낼수도 있을것이다. 순간순간 이어지는 미세한 변화를 알아본다면 단풍에서 눈을 떼지 못할것이요 그 조화로움에 찬탄하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꽃이 화훼의 전체가 아니지만 눈길을 사로잡듯, 단풍도 나무의 전부가 아니지만 마음을 잡는다. 단풍의 색채가 인상적이기때문이다. 인상적이란 말은 이미지에 치우 친 표현 즉 인간중심적 시선이다. 사람의 립장에서 보고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무의 립장에서 보면 단풍은 외양을 잘 보이려고 옷을 갈아입는것이 아니라 그저 나무가 살아가는 과정의 한 양태일뿐이다.     그처럼 자연스럽게 겨울나이를 위해 물기를 말리고 잎을 지우는것뿐이다. 나무는 덤덤한데 단풍에 매혹된 사람들이 수선을 떠는것인가? 모든 사물에는 정면이 있는것이 아니다. 자연의 순환으로 보면  가을은 단풍의 계절, 산 전체가 물들고 계곡과 릉선에 아롱다롱한 자연의 색채가 어우러진 경관을 뒤짐지고 멀리서 바라본다면 단풍잎 마다에서 록색의 생명에도 붉은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단풍잎의 그 내밀한 속을 알아 볼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인상에 끌리고 치우치는 일이 많지만 말이다.     “이미지의 시대”라는 말이 우리에게 감각되는 모든것을 함축하고있다. 이미지란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을 두루 아우르는 의미로 리해하지만 이미지란 보이는것으로, 보이는것은 영상 또는 형상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것이다. 단풍든 나무들의 이미지도 그렇다. 얼핏 보면 계절의 변화에 따른 색채이지만 생명혼이 불타고있다.     그런 의미를 가진 “연변단풍수필회”가 혁혁하던 로작가들의 발기하에1998년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는데 석양처럼 불타는 인생의 잔광을 문필사업에서 빛내려고 남은 생명을 보람차게 연소하면서 오로지 좋은 수필을 쓰려는 즐거움으로 모인 원로들의 문학단체이다. 초창기에 최정연, 오태호, 권철, 현룡순…등 작가들이 운집함으로써 태생적으로 권위성을 띠였다. 아무 욕심도 없이 단순히 문학사랑으로 모인 로문인 들의 모임은 로년문학단체라기보다 우리 문단에 석양이 비낀 오아시스라고 말하고싶다.     돌이켜 생각하면《연단풍수필회》초창기의 로문인들은 퇴직전 자기가 맡은 일터에서 무슨 감투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기량을 굴린적이 없었듯이 수필회내에서도 아무 욕심도 없는 지성의 문인들이였는바 후학들에게 늘 용기를 주시고 좋은 작품을 쓸수 있도록 인도하며 격려하시던 선배선생님들에게 우리 후배들은 세월과 더불어 색바래지 않는 존경을 고이지 않을수 없었다.    올곧은 선비들의 마음의 터밭을 가꾼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15년세월 많이도 로심초사한 로작가님들과 연변대학의 학자분들이 “단풍수필회”에 쏟아부었을 그 정성과 심혈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의 품격은 후배들을 편달하고도 남는다.    《연변단풍수필회》는 언제나 빛을 건져 광합성을 하는 가을나무들처럼 작품집《단풍잎》열다섯호나 출간하게 되였다. 비록 단풍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성쌓고《남은돌》들이 모인 동인회라고 여길수도 있지만 돈이나 명예를 얻는일도 아닌 순수문학모임이다. 글쓰는 일이 번거롭기는 해도 생명활동의 보람과 위안을 삼을수 있다는것은 보람찬 일이 아닐수 없다.   《단풍잎》이라는 표지에는 단풍의 이미지를 살리려는 불타는 마음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만큼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작가들의 마음이 어우러져《단풍수필회》만의 고유한 빛깔을 재창조하여왔다. 그동안 수필회를 헌신적으로 이끌어 당당하게 열다섯고개를 넘어 작품집 15호를 내면서 새삼스레 초창기 원로들의 모습이 떠올려지고 자연히 옷깃여미고 명복을 빌고 또 빌게 된다.      뭔가 남과 다르게 튀여야 하고 이질적인것으로 창신을 보여주어야 부가치가 오르는 이 시대에《단풍잎》이라는 단어는 마치 철지난 실락감을 느끼게 할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음미해보면 단풍이라는 계절의 특징을 상징하는 그 의미속에 만년에 생명의 빛을 단풍처럼 불태운다는 의로움이 가슴깊이 와닿을것이다.   《단풍잎》라는 이 특정된 그릇에는 얼마든지 다양하고 새로운 시대정신과 마음의 소산을 담아왔으며 석양처럼 생명혼을 빛내며 서로 긍정적인 힘을 주고 받으면서 좋은 글을 써내기 위해 여전히 단풍이라는 이름으로 문단을 나름대로 수놓았다. 몸은 비록 쇠잔해가지만 시들줄 모르는 문학정신과 지성을 아우르며 생명력있는 또 다른 문학원지를 가꾸어왔기때문이다.      로선배들은 파란많은 인생현장에서 느낀 감수를 에누리없이 표출함으로써 우리에게 좋은 수필의 본보기를 세워주었다. 혹자는 수필이란 정열의 부르짖음도 아니요, 비통의 하소연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정(情)을 아름다운 문구에 담는 자아가치실현이요, 한가함을 위로하며 재능을 빛내는것이라고 자긍할수도 있으리라.     무엇을 고백하든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든 인생의 걸어온 자취 혹은 흔적을 드러내는것이 수필이 아닐가싶다. 고개길을 넘던 나그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어떤 상념에 잠겨도 볼수도 있고 무심히 발앞에 흩어진 단풍잎을 주어들고 생명의 막무가내함과 생활의 무상함을 느껴볼수도 있으리라.     로작가들처럼 진실이라는 투시경을 내들면 생활현장을 투시할수 있을것이요 가식없는 진솔한 마음을 담으면 좋은 수필글이 될것이다. 비정과 비리에 대한 분노가 그속에 있고 인생에 대한 감수가 그속에 있고 진리가 또한 그속에 있다. 가슴에 맺힌 정한과 눈물과 웃음을 담는것이 진실한 문필사업이요 문학의 진미라고 믿어진다.     연변문학지들이 경제난으로 불경기를 겪고있던 와중에 로인들의 문학단체는 더 이를데없이 경비난에 고생하였다. 그러나 수레가 산앞에 이르면 반드시 길이 있다고 하더니 고마운 분이 나타나서 정부차원에서 힘있게 밀어주게 되여《단풍》은 때지나 시들어버린 락엽으로 세월속에 묻혀버리지는 않고 오늘도 락엽귀근의 구실을 잘 해내고있다. 황혼을 불태우는 지성의 문인들이 새 아침에 선배들이 남겨준 훌륭한 전통을 이어받아 다시 젊은일대들에게 물려준다면 그보다 더 값높은 일 있으랴!     매년 가을산에서 단풍을 바라볼때마다 생각도 절로 붉게 물든다. 저렇게 불타듯이 붉어지기까지 얼마나 생명혼을 불태웠으며 저렇게 불타오를때까지 단풍잎들은 얼마나 아팠을가!그래서 자화자찬이라는 오해를 살지라도 산에산에 곱게 물들었다가 마침내 산을 불사르는 단풍처럼 그 뜨겁던 가슴들, 지금도 그들처럼 뜨겁게 달구고있는 가슴들이 어렵사리 엮어낸《단풍잎》15호에 찬가로 기리고싶다.                                                                2015년 11월 20 일                      (단풍잎 15호)
810    (진언수상록 51)《천하제일미》ㅡ권력맛 댓글:  조회:3228  추천:0  2017-05-06
                                                   《천하제일미》ㅡ권력맛                                                              진 언       천하제일미란 특정된것일가? 신선도 담을 뛰여넘어 들어와 먹는다는 전설에서 이름지어진《불도장(佛跳墙)》료리를 천하제일미라고 칭하여왔다. 하지만 실제상 천하일미란 불확정적이라 해야 할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한두가지가 아니고 사람들의 구미가 천차만별이요 저마끔임에랴, 거두절미하고, 며칠씩 굶다가 어쩌다 얻어먹는 음식이 게걸이 감식이라 더없는《천하일미》이기도 하다.     이는 미각문제이고 통감적으로 누구나 한번 맛보면 평생 싫증나지 않고 먹을수록 냠냠거리고 로망이 들어도 버릴수 없고 죽어서도 맛보고싶은《천하제일미》는 바로《권력의 맛》이 아닐가싶다. 미관말직도 못했으니 권력의 맛을 전혀 모르지만 누구나 맛보고싶어하는 일미이리라. 권력맛이 달콤한지, 신지, 쓴지, 짠지, 느끼한지, 아니면 그 오미가 혼합된 맛인지 체험자들만이 알수 있겠지만 곁에서 보아도 분명 천하제일미 임에는 틀림이 없을것이다. 아니면 둘이 먹다 하나죽어도 모를 지경이겠는가?     권력의 맛은 자기의 의지로 다른 사람을 강압적으로 지배할 때 다시없는 느끼는 심리적향수일것이요 자기 의지에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권력의 맛이 진해질것이며 대방이 피지배, 피복종을 원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권력의 맛은 진동하게 될것이다. 천하일미야 흔하랴만 권력한자락 잡기으면 권력의 맛은 도처에서 맛볼수 있고 무시로 맛볼수 있을것이고 천하에 산해진미인들 그 맛에 비할손가,     권력의 맛이 가지각색이겠으나 그 기본맛은 니체가 말한《“자아확장”을 방애하는 모든것을 정복하는》맛일것이고 또《권력만이 생활의 최고원칙》이라는 맛일게다. 그 리고 권력의 맛을 볼때는 위엄이 뚝뚝 흐르는 틀을 피우며 혼자 향유한다. 권력과 평등은 한지붕아래서 살수 없는법이다. 아무리 천하일미라도 끼리끼리 나누어 맛볼수 있지만 권력의 맛이라는 이 천하제일미는 한결같이 독점하는것이 관례이다.     아니면 동서고금에 권력쟁투에 골육상잔이 비일비재하고 독재천하가 가장 리상적 인것이 되고 매관매직이 그처럼 극성을 부렸겠는가? 조선조때 사또님 납시면 뭇별들 이 달을 둘러싸듯 라졸들이 일산을 펼쳐들고 좌우에서 옹위하고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호응하고 투숙하면 주지육림에 흥청이고 기생이 수청들고…     권력이란 토템같아서 죽기내기로 숭배하고 굴종한다고 할수 있지만 다 권력의 맛에서 기인된 심리이요 그에서 인기된 작태들이다. 흔히 권력은 선택된것이 아니라 부여된것이라 한다. 아이러니컬한것은 백성이 권력을 주고 도처에서 그 맛을 보도록 보장해주지만 당사자는 스스로 숙명적으로 복받서 그리된것처럼 양양자득한다는것이다.     농촌에는 돼지임재(임자)보다 돼지매재(돼지몰이)가 더 우쭐거린다는 속어가 있었다. 권력자도 아닌데 권력봉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니 지고무상의 보좌에 높이앉아 천하를 호령하던 봉건통치자들의 권력맛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권력맛을 볼수있으면 천하의 모든 맛을 볼수 있다는 말은 마구지어낸 말이 아니다. 천하를 취하고 나서 천하위에 앉아 향수하던 그 관습의 관성은 지금까지 효력을 잃지 않고있으리라.     천하제일미는 혀를 취하게 하고 위를 기쁘게 하지만 권력의 맛은 권세와 위력이라는 두가지의 별미를 맛보게 할것이다. 실체로 말할 때 권력은 쌍날검으로서 나라를 진흥시키고 력사를 창조하여 천추공덕을 쌓을수도 있고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수도 있다. 권력은 하늘과 땅을 감동시킬수도 있고 귀신을 떨게 할수도 있으며 그 권세가 날아가는 새도 떨굴수도 있고 일패도지하여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이 되여질수도 있다. 례컨대 황제보좌아래 문무백관들은 살얼음판우를 걷는 그런 심정으로 “진충보국” 했지만 황권이라는 소가죽에 털에 불과하였던것이다.     권력은 한 나라의 집정에서 필요악이다. 그러나 천하제일미에 취해 있을 때 한번쯤은《집정자가 민심을 따라야지 민심을 거슬리면 일패도지하니라》고 한 관자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을것이다. 권력의 맛에 중독되여 민심을 등지고 유아독존하며 횡포무도하던 집정자들치고 거꾸러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것은 흥망성쇠의 섭리이기도 하거니와 력사의 주기률이기도 하다.     연구가들에 따르면 편협한 사람일수록 권력의 맛에 집착하는데 안전감이 극히 낮으므로 뇌리에는 노상 남을 지배하는 강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때문이란다. 편협한자가 한번 권력의 맛을 보면 늙어 로망이 날때까지 그냥 맛보려 하다보니 인간으로서의 근본인 리성마저도 상실하게 된다. 력사가 이를 증명하였다.     력사적관성인지 몰라도 권력이란 단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곧 사악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권력의 맛은 스스로의 심신을 해친다. 권력맛에 미치면 골육도, 형제 자매도, 혈전만리를 누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부하도 안중에 없다, 봉건시대 리씨조선의 왕궁비사도 그렇고 현재 세계각국에서의 권력쟁투가 이를 증명한하고도 남는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권력의 맛에 그리도 매료될가? 나로서는 알길없다.     권력욕을 고상한 권력욕과 착오적권력욕으로 나누고있다. 그러나 전통관념상에서는 권력이란 다른 사람을 공제하고 심지어 생사여탈권으로 인지되고있다. 그래서 인류에게 있어서 권력과 금전은 최대의 가치오구(误区)였다. 하여 예로부터 항간에 “대장부는 하루라도 권력이 없으면 안되고 소장부는 하루라도 돈이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 류전되여왔다. 권력욕과 명예(명성)욕은 인간의 직접적가치추구인데 어쩌랴,     그러나 권력맛의 일종인 매관(买官)은 탐욕의 늪에서 자맥질하는것이며 권력의 맛을 보려고 매직(卖职)하는자는 허위적자신감의 충족이며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허영심의 변종이다. 권세가가 치솔질할 때 치솔을 흔들지 않고 턱을 흔들든, 젓가락으로 이발을 쑤시든 다 제멋이라 하겠지만 애비의 권세를 믿고 횡행한 현대판 “고아내류”들로 말하면 수호전에 고구를 욕질할 리유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뿌리에 달린 감자와 같다.     긴말은 여기서 접어두고, “권력, 권세”에서 권(权)의 본래의 의미는 “저울을 뜨다”로서 평가와 분배의 행위이다. 저울질에서 전제는 공평이고 저울뜨는 목적은 분배이며 평가와 분배의 기초는 공정성이라고 풀이하고있다. 리론적으로 말할진대 만약 가치추구의 각도에서 권력욕은 십분 숭고한 추구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권력욕의 진실한 목적은 “가치있는 사람이 되려는것”이기때문이다.     권력욕에는 세상의 오욕과 칠정이 다 들어있을것이고 치욕과 영광이 엇갈리고 곧 불안과 자족이 범벅이 될것이다. 옛글에“부유함을 으뜸으로 여기는 자는 록을 사양 할줄 모르고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는 명예를 사양할줄 모르며 권력에 매료된 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루를 쥐여줄줄 모른다. (以富爲是者,不能讓祿, 以顯爲是者, 不能讓名, 親權者 不能與人柄)”라는 구절이 있다. 권력이란 천하제일미에 자기를 잃었다면 인간미도 잃게 되고 권력맛을 독점하면 인성마저 구겨박게 될것이 자명하다.     자고로 권력쟁탈은 진흙탕을 거치지 않으면 승패가 나뉘지 않는다. 력사는 영달에 일락천장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닌다. 과식은 불식이요 백사에 과유불급이다. 변질한 권력의 맛에 중독되면 인성도 잃어 도루묵이 되면 죽을맛일게다.“세상에는 우리의 침울한 두눈으로 발견할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다. -니체 ”그러나 그게 곧 권력맛을 보는데만 있는 행복이 아니다. 옛사람들이 이르되 화속에 복이 있고 (禍中福), 복속에 화가 있다고 (福中禍) 하였거늘…                                                                          2011년 9월 15 일
809    수요의 미학 댓글:  조회:3010  추천:1  2017-04-29
                                                          수요의 미학                                                                   최 균 선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불가극복의것이 무엇이냐? 곧 “수요”라고 단언하고싶다. 고자의 말처럼 “식색성(食色性)”과 사회성수요(영욕(荣辱)가 인간의 생명욕구의 기본동력이요 인생의 전부의 내함인즉 수요충족이기때문이다. 수요와 욕망은 다 심리선상에 있으나 수요는 생존의 기본조건이고 욕망은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이다.     생명은 일정한 물질조건을 갈구한다. 수요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존재함의 체현이다. 닭알은 생명-한마리의 병아리를 잉태하고있다. 그것은 미지일지라도 미쁜 기다림이다. 모든 생닭알은 꿈을 꾼다. 모든 화초는 해볕과 수분을 먹고 꽃을 피운다. 그런데 생명은 원래 단순한데 인간심사는 왜 그리도 복잡다단하게 되였는가? 그 근원은 생명자체의 수요를 벗어난 과욕을 한데 섞어버렸고 탐욕은 수요의 한계를 벗어나 무지경이 되였기때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큰 집이 있다해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자뿐이요, 좋은 논밭이 만경이 있어도 하루먹는 식량은 두되뿐이다.” 라 했다. 설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갑부이고 전지구촌에서 가장 고귀한 권세자라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녀인을 만날수 있고 오르지 못할 고봉이 있으며 루만금을 주고라도 사고싶은 물건을 그 주인이 한사코 팔지 않을수 있으니 욕망 그 자체는 만능이 아닌것이다. 대저, 수요밖의 바람을 과욕이라 한다. 자연수요를 벗어난 물욕은 생명자체가 가지고 나온것이 아니라 사회자극, 서로간의 비교가 낳은것이다. 기실 물욕이 가져 다주는 쾌락은 생명자체의 쾌락보다 얕고 협착하며 정신적쾌락보다 훨씬 아래이다. 인생의 많은 고통은 자연수요이상의 욕망의 악과이다.《회남왕성(淮南王书)》에“全 性保真,不以物累形”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너의 완정하고 진실된 생명상태를 보존 하여야지 물욕으로 그것을 손상주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이는 장자의 사상으로서 그는 만약 물질속에 자아를 상실한다면 본성을 세속에서 상실하는것이며 곧 거꾸로 된 사람(丧已于物,失性于俗者,谓之倒置之民)이라고 하였다. 무엇이 전도되였다는것인가? 현대말로 가치관이 전도되였다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절실히 수요되는 생활필수품외에도 다다익선으로 사치품을 가지려하고 그만큼 가진것때문에 시종 마음이 쓰이게 되는것을 무시한다. 무엇을 가진다는것은 바로 그 것에 얽매이게 되는것이다. 이는 심오한 도리가 아니다.     수요에 의해 가진것이라도 도리어 심리상에서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주객이 전도 됨으로서 자신이 되려 소유물로 되는 경우가 있다. 많이 가진것이 떼복이고 과시이고 자랑이겠지만 그만큼 얽히게 되는 측면도 가지고있다. 소유욕은 리해와 정비례된다고 한다. 이 말은 확실히 오묘하다. 나름대로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는다는 다 아 는 도리를 달리 말한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진짜 잃고 나서야 더없이 소중함을 알게 되는것이 청춘, 건강, 사랑, 생명로서 한마디로 자유가 곧 그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수요의 저너머 그야말로 하늘보다 더 넓다는 인간의 흉금때문인지 욕망은 깊이도 끝도 없는 우주보다 더 넓다. 사회에 류행되는 인생의 최고경계는 정말 군침을 흘리게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로임, 영국식주택, 스웨덴핸드폰, 스위스시계,한국안해, 일본애첩, 타이안마사, 독일제호화차, 미국비행기, 프랑스 붉은술, 오스트랄리아물고기, 꾸바려송연, 이딸리아구두, 서반아녀자와 놀기, 오지리가극, 로씨야식별장, 비률빈하녀, 이스라엘경호원, 토이기사우나, 높은 관리…만약 마지막 소원을 이룬다면 앞에 수많은 욕망들이 호박이 넝쿨채 굴러듯 할것이다…     욕망은 무어나 최신식, 최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 모든 최고가 실용가치가 무지경인것이 아니다. 례하여 고급핸드폰의 70% 공능은 무용하며 고급하이야의 70% 속도는 무용하며 궁궐같은 호화별장의 70% 방이 그저 비여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더 넓고 더 호화로운 사무실과 어마어마하게 큰 사무상과 여러가지 장식품이나 화분통을 늘여놓아야 더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풍조이며 개인도 더 넒은 집과 더 많은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갖추기를 바란다.     곰곰히 생각해 볼것도 없이 그 모든 최고급의 사치품이나 소지품의 구매는 욕망 의 큰입을 만족시킬뿐이지 행복의 고대광실에 들어서게 하는것은 아니다. 고차원의 물건들을 늘여놓은 구석구석에 작은 령혼들이 쪼크리고있다.     탐욕스러운자가 부자가 되였더라도 정신빈곤자가 많으며 수요의 충족을 아는자는 가난해도 마음은 부자인 사람이 많다. 높이 앉아있어 평안한듯 보여도 마음은 시종여일 불안하고 비지땀을 흘리는 짐군이 보기에는 민망할수 있지만 마음은 여유로울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인생현장이고 그속에서 사는 우리 인간군이다.     그런데 욕망에는 왜 한계가 그어지지 않는가? 인간의 욕심은 길고 아름찬 구렝이로는 너무 부족해 코끼리를 삼키려한다. 한마리도 아닌 무수한 코끼리를…그러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돼지를 욕한다. 그 모든 유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살면 참을수 없는 기갈과 빈곤의 처절함과 적막의 고험과 실패의 참담함, 낭떠러지에 다가선 아슬함… 등 일패도지를 면할수 있으련만 결국 자신이 자기에게 패하고만다. 그러는것은 마치 실탄한 여러자루의 총을 두고도 빈총만 들고 쏘는 우직함과 다를배없다.    오색잡다한 유혹의 세계, 주머니사정이 어려울 때 일확천금이 유혹이고 적막할 때 주색잡기가 유혹이고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포기가 유혹이다. 아무도 세계의 풍경을 다 볼수는 없다. 욕망을 멀리하고 수요에 따라 살면 구수한 흙냄새와 분방한 꽃의 향기를 맡을수 있을것이며 과일의 달콤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저차원의 생활안배는 당신의 공간을 압축하지 않는것을 말하며 생활의 질량을 낮추는것을 말한다.     선택의 자유권에서 욕망이 무한정 부풀고 확장되는 이 세계에서 분별력과 버릴줄 아는 사람이 기실 행복을 만들줄아는 사람이다. 욕망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자기를 잃지 않을수 있으며 “버들숲지나 또 새마을이 나타날수 있다.” 산꽃은 창턱에 화려한 화분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산뜻한 잔디밭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청산에 록수는 편안한 늪에 갇히기를 바라지 않기에 창창한 바다의 품에 안길수 있다.    “새는 나무위에서 산다. 그것도 낮은것을 두려워하여 우듬지에서 산다. 그럼에도 먹이에 속히여 그믈에 걸린다.”우리가 추구를 낮추고 몸을 낮춘다면, 요구를 낮춘다면, 공간을 더 좁힌다면 이런 자원랑비가 필연코 줄어들련만, 물질요구는 낮게, 적게, 정신적요구는 더 높게, 더 넓게 한다면 자족은 곧 찾아올것이요 행복은 더 가 까이 다가올것이다. 결국 자기생명수요의 조절문제이다.     당신이 자기 생명을 지배한다거나 당신의 생명이 당신을 운전한다고 할 때, 당신의 마음속에는 누가 운전수이고 누가 손님이라는것이 명백하다. 욕심을 조절할줄 안다면 넘칠일이 없을것이고 넘치지 않으면 온정할것이고 온당하면 유유자적할수 있을것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자신의 인간상이 잘 그려져있다. 인생현장은 늘 안개가 자오록한 수면같지만 꿰뚫어보는 뭇눈길들이 있는법이다. 그것을 무형의 속박이라  한다. 그런 속박감이 우리를 방종에서 격리시키는 금지선이 된다.                                                2012년 7월 13일   ㅡ2017년 2월 23일 (연변일보)
808    (진언수상록 87)언론과 여론의 기본 댓글:  조회:3080  추천:0  2017-04-29
                                                           언론과 여론의 기본                                                                            진 언       언론이라하면 언론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이라고 지칭하고있다. 언론은 사회적 쟁론을 규정, 쟁점에 관한 해설과 비판을 제 공하는 사명을 띠고있다. 따라서 언론의 책임은 미루고 피룰여지도 없이 사실보도, 공정성, 공익성, 객관성, 정확성의 보장이다.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므로 언론이 자정(自净)능력을 상실하면 여론의 오염은 회복불능의 악과를 자초 하게 된다.     그런즉 언론인이 다시각을 갖추지 못하고 제구미에 맞는것만 보도하는것도 문제이거니와 리념성향, 주관욕망으로 꾸미고 확대하고 분식하고 아전인수식 해석까지 가첨하다보니 가짜, 엉터리기사가 더 문제다. 그에 따라 언론의 존재리유이자 가치인 신뢰도가 바닥을 치게 되는데 자업자득이다. 개인의 경우, 머리가 모르는것을 혀가 멋대로 나불거리는 경우가 많지만 무심히 뱉은 말에 살인이 날수도 있는판에 공공언 론 이 형성시킨 사회여론은 일파만파로 수습할수 없게 되는것은 누가 책임질것인가?                                        여론이란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적 쟁점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표명한 생각과 의견이다. 여론은 통일성을 갖는 언론이 전제가 된다. A라는 언론과 B라는 언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A와B 모두를 가리켜서 여론이라고 말할수 있다. 민주정치에서는 여론이 정당, 리익집단, 대중매체 등을 통해 전달되여 공공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언론이 표현의 자유(개인)라고 한다면 여론은 개인이 아닌 다수의 묵결에 의한것이라고 인지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여론의 정의는 비상히 다양화되여 “여론학”이라는 학과까지 나와있지만 정녕 무엇이 여론인가에서 여지껏 의견합치를 보지 못하고있다. 어떻게 정의되든 여론이란 대중의 의견으로서 도덕과 정감의 석방, 사회의 소리이고 민중의 호성이다. 비록 엎지른 물이 곧 땅속에 스며들거나 증발하여 종적없듯 입밖에 나온말은 바람처럼 생명 력은 한순간이지만 무형의 독배가 될수 있기에 모두 몸서리치는것이다.    추리도 분석도 없이 확증과 론리적 검증을 생략해 버리고 결론부터 앞세우고 절대화하는 기사는 개가 사람을 문것이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식의 렵기성을 추구하는 기사문원칙과도 별개의 문제이다. 다각도로 사건의 진실을 파해치고 그 진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견해를 넣은 기사를 쓰는것은 기사의 허용범위이지만 그런 3류소설같은 기사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읽는자의 판단능력도 별로이다.     벽틈에 숨어있던 벼룩이가 날벼락에 맞아죽었다는식의 거짓말은 렵기적이고 그로써 자극적이 되겠지만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진실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수밖에 없었다는 반증이 되는게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카더라” 식 의 기사를 람발니 오유의 늪에서 자맥질하며 자족하는것이고 진위가 밝혀져도 손자밥 떠먹고 천정을 쳐다보듯 “함, 아니면 말구”로 끝나니 자아풍자라고나 할가?     중국 후한의 허신(許愼)은《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직언왈언(直言曰言), 론난 왈어(論難曰語)"라고 했다. 직접 말하는것을 “언”‘, 질문에 답하는것을 “어”‘라고 한 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론의 언(言)은 직언이다. 론(論)은 ‘언(言)과 륜(侖)의 합성어다. 륜은 “조리를 세우다”의 뜻을 가지니 론(論)은 직언의 론리를 세운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언론이란 “조리를 세워 직언을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였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엉망진창이 되여졌던 대동란시대에 “류론(谬论) ㅡ당시 농촌에서는 유론이라고 하였음” 이란 말을 잘 썼는데 유론의 근원지를 “쑈톨쑈시 (小道消息)” 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어떤 나라들에서 무슨무슨 “소식통에 의하면…” 하는식의 뉴스를 잘 꾸미고 있는데 신문, 방송 등 공식매체에 의한것이 아니니 기실 “쑈톨쑈시” 에 불과한것을 언론화하고 여론화하려는 알량한 기량이다. 하긴 자기가 내뱉은 언론이 책임을 추궁받게 될경우 “나도 소식통을 통하여 안겜니다. 그저 전달했을뿐임다…”라고 하면 눈감고 “야옹!”하는 식이라도 일시 발뺌은 될게다.     몰상식을 반복하면서도 어물쩍한 엉너리는 될지라도 문필로서는 전혀 책임적이지 않다. “증거가 천지 빼까리다ㅡ많다)라는 경상도 방언도 있듯이 사실만 골라쓰자 해도 버거운데 왜 작정하고 론리적추리도 아니고 억측에 오리발을 달아 람발하려 할가? 왜 그리 편집광적일가? 적대감을 앞세우면 사팔뜨기처럼 사물이 사선으로 비쳐드는건 가? 그래서 그냥 무조건 폄훼하고 흑백을 뒤섞어서 사회언론인체 조작하는걸가?     세상을 감시하고 밝고 어두운 면을 파헤쳐야 할 사명을 허위와 짬짜미를 하고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진실은 인제 삽이 아닌 굴삭기로 파야 볼수 있는 풍조가 되여진듯. 외곡하여 엮어내고 포장하고 자극하여 혹세무민하려 하지만 남의 말도 석달이라고 곧 언론쓰레기로 될것을 왜 그리 극성일가? 하긴 불행중다행으로 언론다운 언론, 기자다운 기자들도 있어 진실이 영영 매장되지 않기는 한다.     사람들에게는 기사라면 "사실" 또는 "진실"이라고 믿는 심리관성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눈을 오염시키는 문자쓰레기이다. 오랜 기간 반복되는 똑같은 거짓된 말과 행동에 속는이도 민충이고 속이는자 또한 멍청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많아도 너무 많다. 오래동안 거짓된 언론에 속히웠다는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엉터리기사에서 진실을 읽고있는듯 자족한다면 사유치곤 설렁탕이 아닐가? 근간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한국 국민의 '뉴스 신뢰도'가 세계 주요 36개국 가운데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듯싶다..     히틀러의 악명높았던 선전부장 굅펠스가 거짓말도 천번 반복하면 진실로 된다고 했다더니 그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는가? 뉴스가 없으면 만들어내라는것은 남조선언론계의 전통이라던가, 날조로 적대방을 찍어누르려는 그런 광신적 대결은  아주 비생산적이고 비미래지향적이며 민족의 융합도상에 상당히 위험한 지뢰를 묻는것과 다름없다. 운이 좋게 오뉴월에 절로 떨어진 쇠불알 줏기같은 환상처럼 미쁘지도 않다.     누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것과 진실을 직설한다는것은 벌써 다른 문제다. 신비한 그리고 광막한 우주공간에서 인류가 알고있다고 하는것은 천박하고 단순한것뿐이다. 례하여 가시에 찔리고 나서야 비로소 기억의 노트에 장미의 아름다움과 날카로운 가 시라는 개념이 씌여지듯이, 이런 이률배반현상을 직감으로 깨달은것은 한층차 높은 깨달음이다. 그래서 원래부터 이률배반적인 세상만사를 앞뒤를 가려서 보는 시각을 가지고 본질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표달하라고 하는것이다.     림상학상 간경화도 무서운 병이지만 한 민족의 “관념의 경화”는 그보다 더 비극적이다. 리념으로 범벅이된 “동족증오병”이 골수에 사무친 민족은 장래가 무(无) 이다. 비리성적인 관념과 행위를 정상적인것으로 인식하기때문이다. 그냥 미워서 달걀에서 뼈를 찾아내려는 악마화는 결국 누워서 침뱉기다. 선의적이 아니래도 객관적으로 잘못을 질타하는건 좋은데 어거지 부정을 내드는 습성은 보통 나쁜게 아니다.     무릇 인식이 견해의 단초가 된다. 편견은 판단력을 비틀어놓고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 열번 생각한것과 백번 고민하고 생각한것은 다르다. 바르게 생각되는바가 있어야 옳은 얻음이 있는법인데 무엇을 칭송하든 폄훼하든 자기네 리익의 잣대로 객관현 실을 재이려 든다면 그보다 더 무모한 언동이 없다.무슨무슨 전문씨, 연구씨들이 학식과 리성사유방법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망발로 여론을 오도한다면 그저 불쌍한 정도가 아니다. “명사(名士)” 라면 무지자들이 망언으로 무식함을 자랑하는것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력사는 나중에 력사를 리드한 자들에게 책임을 묻게 되여있다. 오도된 엉터리 여론에 지구자체가 웃다가 배꼽(축)이 빠질수도 있으리라.                                                   2014년 12월 2일
807    (잡문) 거짓말의 뉴앙스 댓글:  조회:3349  추천:0  2017-04-22
 (잡문)                                          거짓말의 뉴앙스                                                                  진 언       거짓말을 황통이라고도 한다. 입으로 나오는 말, 필묵으로 쓰는 글, 일상적 한담, 진술, 정규적 모임에서의 연설, 발언, 보고 등에도 쌀에 뉘처럼 거짓말이 섞여있기 마련이다. 무릇 거짓말은 사람들의 실제리익의 수요일뿐만 아니라 정신과 정감의 수요이기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거짓말은 때에 따라 방편(方便)이 된다.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 거짓말도 잘하면 오려논 닷마지기보다 낫다“”는 속담도 이를 실증하고있다.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화가,시인이었던 빌헬름 부슈는 가장 선한 사람이라도 가끔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신과의사 조지 서번은 거짓말을 ‘인간의 제2 천성’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종종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거짓말을 할수밖에 없는 동물이요 스스로 진리에 이를수 없다는것을 의미한다.     싸르트르는 “거짓말이란 내가 만든것이 아니고 계급으로 나눠진 사회에서 생겨난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면서부터 거짓말을 상속하고있다”고 하였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거짓말이 없다면 절망과 지루함으로 죽을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거짓말이 인생살이에서 약국에 감초쯤으로 되는것인지 모른다.     거짓말을 하는것은 일종 자기 “보호술”인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진실을 숨기려한다. 흔히 이런 리익은 듣는자의 리익과 일치할 때가 많다. 그 경우 누구나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본능을 행사하게 된다.객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것도 사회환경에 순응하는것으로서 강권에 타협하고 종용하는것이다. 사람들이 핍박에 의해 혹은 주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리익을 보호하려고 할 때 무조건 타매할수 없다.     하지만 나를 거짓말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데도 거짓말을 하는것은 그 자신의 자질에 속한 비도덕성이다. 되돌아와서 생각할 때 “민본위”사회에서 만약 매개 사람 의 권리가 모두 보장받 는다면 거짓말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강압이 없고 인격상 평등하다면 누가 누구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므로 무엇을 말하고 싶으면 무엇을 말 할수 있고 자기 량심을 속이지 않는 진실한 말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약자의 거짓 말은 비애이며 강자의 거짓말은 인간악으로서 그 자체가 비루하다. “선의(善意)에 서 나온 거짓말은 그 의도나 목적이 결코 불순하지 않다. 완고한 진실보다 정직한 거짓말이 때로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온다.”는 서양의 명언도 있다.     그러나 가장 고약한 거짓말쟁이는 바로 진실의 가장자리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말은 그 자체가 죄일뿐만아니라 정신까지도 더럽힌다. ”고 한 플라톤의 말을 좌표로 삼아야 할것이다. 사실 진실한 말을 하지 않는데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우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기에 득죄하여 생존위협을 당할가봐 거짓말을 하지 않을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두려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참말을 하지 않는데 불성실하긴 하지만 꼭 비도덕적이라고 말하기도 난처하다.     사람은 우연히 사람이 아닐수는 있어도 한평생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다는 말처럼 수치감과 자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거짓말을 할수는 있어도 거짓말을 하루세끼밥을 먹듯이 하며 살수는 없다. 만약 누가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쟁이요 일생동안 줄곧 거짓말만 했다면 그의 존재 자체가 허상이다. 물론 천차만별의 인간들이 얽혀서 돌아가는 인생현장에서 진실만을 말할수는 없다.     거짓말은 불행을 몰고 오는 녀신의 기수라는 말이 있다. “승냥이가 왔어요”라는 이소프의 우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거짓말쟁이가 받는 가장 큰 벌은 그 사람이 진실을 말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것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고있다. 그리하여 거짓말을 하여 돌이킬수 없는 악과를 빚은 이야기정절로 아이들을 교육하지만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역시 한편의 우화로만 기억에 남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화속에서 장난삼아 거짓말을 한 목동을 타매할 근거를 잃고있다.     인류는 파란만장한 진화의 과정에서 신의와 진실이 얼마나 소중한것인지를 가슴에 새겼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솔직하지 않다는것을 매일의 생활에서 느껴왔다. 얼룩덜룩한 인생을 살면서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모든 진실을 곧이 곧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불필요하기때문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유해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좋을 때가 있다는것을 명지한 사람들은 거개 경험했을것이다.     무엇때문에 세상에는 동서남북, 상하좌우 처처에 거짓말이 성행하는가?사회의 재난성적인 거짓말의 위해성은 랭수마시듯 하는 민초들의 거짓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위정자들이 참말을 하지 않는데 있다. 리론상에서는 말을 듣는자는 참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씌여있으나 거짓말은 담장가에 넝쿨처럼 무성해지고 거짓말은 온역처럼 공제할수 없게 되였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것은 자고로 관본위사회에서의 일종 특징이며 진모습으로서 뿌리가 깊이 박혀있기때문이다.     그만큼 거짓말이 류행되는 사회는 그 자체에 위기를 배태하고있다. 참말을 하지 않는것이 보편화된 사회라면 필연적으로 “표면”적 사회와 ”진실”사회로 획분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민초사회이든 관본위사회이든 투기분자가 끼여들 공간이 더욱 많아 질것도 자명하다. 가짜의 전제가 거짓인것이다.     무릇 거짓말은 허구된 “사실”로서 즉 무중생유(无中生有)이다. 더 부연한다면 거짓말은 꾸며낸 “사실”로서 유생무중(有生无中)이다. 바람을 잡는격인 거짓말은 사실을 과장한것이고 무거운것을 가볍게 하는식의 거짓말은 사실을 축소하는것이다. 완전히 지어낸 거짓말은 상대적으로 적다. 왜냐하면 곧 들통날것을 알기때문이다.     거짓말은 인류가 터득한 일종의 인생예술이 되였다. 현시대 많은 사람들은 리익을 먼저 내세우지 무슨 인격을 내세우지 않는 물질화된 인간으로 변해있기에  성실한 사람은 미련퉁이의 동의어로 되였다. 거짓이 뚫고 들어가지 못한 틈새란 없다. 민초들속에서 생성되는 거짓말은 인간심리의 진실문제이지만 지어먹고 참말을 하지 않는 관본위적인 집단성거짓말은 곧 부정부패의 체현이다.     호메로스는 일찍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가 있지만 그 모든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거짓말과 관련한 한가지 진리가 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불러온다”는것이다. 거짓말을 한번 하면 그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한다. 거짓말 달인들이 모든 사람을 잠시 동안 속일수 있고 몇사람을 늘 속일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늘 속일수는 없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면 자기도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데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우리는 가히 거짓말쟁이를 무시할수는 있지만 거짓말의 효력을 무시할수 없다. 우리는 거짓말을 무시할수는 있지만 거짓말의 매혹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거짓 말을 쉽게 간파할수 없는것은 거짓말이 그처럼 모종의 힘과 매혹력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면 그를 내놓고 그것이 거짓말인줄을 아무도 모른다. 그리하여 거짓말에도 곤혹스러운 뉴앙스가 있게 되는것이다.                                            2012년 7월 6일  수정완고
806    꽃과 바람과 나비와 인생 댓글:  조회:2802  추천:0  2017-04-15
                                                꽃과 바람과 나비와 인생 [수필]                                                                     최 균 선 (야 조)     꽃, 철따라 피여난 꽃들은 대지의 가장 어여쁜 딸들이다. 이른봄 먼저 피여나서 련정을 불태우는 진달래, 내 고향의 앞남산 뒤동산에 몰래 몽글다가 마침내 활짝 웃는 복숭아꽃, 살구꽃, 오얏꽃, 신록에 이채로운 개나리, 어엿한 함박꽃, 내둑에 수집은 민들레, 산기슭, 길섶에 찔레꽃, 터밭에 소박하게 핀 호박꽃, 외꽃, 감자꽃… 꽃들은 꽃마다 제멋에 겨워 바람과 나비를 불러낸다.     바람, 바람이 분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은 꽃의 화분을 실어나르려고 부지런히 부는것이 아니다. 바람은 어이 불어오는지, 어이 가뭇없이 불려가는지, 그저 불기 위해 부는지…그러나 꽃은 락화의 사연을 바람에 묻지도 않고 바람이 하는대로 하면서 꽃가루를 살며시 가지우에 내려놓아 열매의 꿈을 몽그린다. 부는 바람에 정이 없지만 바람에 기탁하는 그 마음만은 갸륵하다 하리라.     가도와도 가질것 없는 바람은 바람대로 불고가고 비래편편(飞来片片) 꽃나비, 호랑나비는 꽃이 탐나서 하늘하늘 춤추며 련정을 흘리지만 화분을 날라다주어 결실을 이루려는 꽃님의 소원따위에는 흥심이 없다. 화심을 파고들어 꽃즙을 빨아먹으며 이꽃저꽃 희롱하다가 엎딘김에 절하듯이 다리, 날개에 묻은 화분을 무심결에 털어놓는것으로 꽃의 말없는 순정에 보답할뿐이다. 꽃과 나비는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 으며 공생하면서도 마음을 주지 않는 불화한 련인과 같다 하리라.     꽃과 바람의 슬픈 사연은 하늘과 인간의 사이와 같거니 무심한 사람은 알리가 없다. 유정한듯 무정한 하늘의 풍운조화속에 사람은 절로절로 행복을 가꾸어야 한다. 꽃의 편지를 나르는 봄바람은 무심하지만 그 경계는 높아서 와도가도 전혀 가질 마음이 없이 훌훌 털고 사라진다. 그래서 맑은 바람 청풍이라 하건만 바람같은 경지 에 있는 사람은 인간촌에 그리 흔하지 않다.     꽃과 나비의 슬픈 사연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이런저런 사연과 같다고 할수 있으리라. 자기중심주의에 절어들어 리기와 리해를 앞세우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네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어 원치 않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내가 너를 위하고 네가 나를 위하는것으로 되여 마치 자전거에 사슬처럼 맞물려서 돌아가는 인간세상이 된다.바람이 없다면 락화의 한이 없을것인가? 나비의 홀림이 없다면 꽃의 사랑은 홀로 외로움에 시들어버릴가? 바라건대는 나비여, 해충으로는 되지 말아다오.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 한철을 마주하고 꽃과 인생을 생각해본다. 철따라 어길세라 자기의 권리를 찾아 만발하는 백화의 화창함과 락화를 보며 인생무상을 절감하지 않을수 있으랴, 잠간 피고나서 금방 스러져야 하는것이 꽃의 운명이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 춥고 시린 긴 겨울을 견디고 풍상을 겪으며 꽃꿈을 익혀오다가 필 때가 되면 잠시 피여 웃고나서 금방 지고마는 꽃의 운명과 초로인생의 인간의 생명꽃은 꽃을 닮은 운명이다.     어느 꽃이 곱다고 하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듯이 인생도 호화로운 생활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꽃은 모두가 아름답다. 활짝 핀 꽃도 꽃이요 지고마는 꽃도 꽃이려니 잘 살아도 못살아도 인생은 그저 인생이다. 아침에 솟은 해가 중천을 지나 서천에 락조가 되듯 우리네 인생도 의욕과 열정으로 불타던 젊음도 중년을 지나 백발로 변하고 인생의 황혼을 맞는다.식물은 풍상을 겪으면서 열매속에 씨앗을 담아 대를 이어놓고는 빈몸으로 또다시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생명을 륜회시킨다.     길가에 수줍게 핀 민들레가 세상을 향해 대담하게 꽃씨를 날리고있는 모습을 보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추구하는 그 욕심이 허무함을 깨닫게 된다.내가 제일이라는 자만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각자의 삶을 살기마련인데 다양한 생명체의 존귀함을 모르는자는 뛸데없이 우자(愚者)이다.     볼품없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지만 민들레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나는 나의 주인”이라고 자긍하며 스스로의 생명을 영위하는 모습이 경이롭지 않은가! 민들레가 척박한 땅에서도 떳떳이 살아나 당당하게 꽃씨를 날리고있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자기가 자기인생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진다면 과연 이상한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생명의 꽃이다.물론 인생길에 내내 화원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백화가 다투어 피여도 자리다툼을 하지 않듯이 천층만층의 사람들과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고있다는것을 좋은 인연으로 생각하고 공생공존하는 화해로움을 왜 그리도 이루기 힘든것인가? 꽃이 활짝 피여 화심을 다 드러내는데 우리는 너무도 리기적인 삶을 사느라고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살아가기에 사람을 아름다운 꽃으로 보는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하고있는것이다.     인간촌의 평화란 인간을 꽃으로 보고 나가서 그 꽃이 바로 인간이라는것을 깨닫게 되는 인성의 성숙이라 할것이다.꽃은 아까와서 함부로 꺾지 않으면서 꽃중의 꽃인 인간의 생명은 무참히 짓밟으며 다다익선, 독점욕으로 많이 점유하려 경쟁하며 모순충돌을 합리화하려 극성을 부리니 어리석고 슬픈 생령들이 아닌가?     한폭의 수채화는 여러가지 사물이 간단하게 조합된것이 아니다. 소는 그저 한마리 소이고 초원에는 청초와 꽃이 있을뿐이며 나무가지 새로 비쳐드는 해빛은 한가닥 빛일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곳에 배치하면 마력같은 매력을 산생한다. 그처럼 창창한 바다나 꽃이 만발한 봄날의 정경은 단순한 풍경일수 있으나 무한한 인문내함을 가지고있다. 인애의 정신과 인애의 마음이 있어야 사랑(광의적의미)의 씨았을 움틔우고 무성하게 자라게 할수 있음을 모를 사람이 있을것인가?     소위 인문정신이란 때론 그 충만된 내포를 한마디로 표현할수 없지만 내심으로 묵묵히 새겨보는게 오히려 더 의미로울수 있다. 한송이 장미꽃의 형식과 내재적인 지향에 대하여 두부모베듯 구분할수 없다. 한것은 량자는 물과 젖처럼 완전히 하나 로 융합되여있기때문이다. 솜씨가 비범한 목수가 짜놓은 멋진 가구는 그와 더불어 인문적인것일진대 그 형식과 내용을 구분할수 없듯이 말이다.     인간관계가 상실되여 고독해진 상황에서는 개인들사이에 무관심만이 지배한다. 이런 상태의 지속은 남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공존하며 화해롭게 살아갈것 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은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다. 례컨대 자기에게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나누려고 찾아간 사람이 제일보다 더 기뻐하면 마치 꽃도 상하지 않고 자 기의 꿀을 빚고 꽃에 화분도 완성시켜주는 꿀벌 같은 지기이다.그러한 지기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자기의 마음을 여는것이다.     만약 두번째로 찾은 사람이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맞아준다면 그는 벗 이며 찾아간 세번째 사람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도 내심상 평정을 찾지 못하고 당신의 희열의 순간이 한오리 바람으로 되기를 바란다면 그저 잘아는 사이의 사람이다. 이처럼 꽃과 바람과 나비의 사연속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오묘함을 본다. 꽃은 피여있고 바람, 나비, 꿀벌 같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나가는 인생마당이다.     공생공존의식을 앞세운다면 어디서 벗을 찾을것이고 리해득실만 따지고든다면 라이벌만 만들것이다. 시끌한 인생현장에서 스스로 고달프게 살지 않으려면 사랑을 탐지기로 삼고 인생길 어디쯤에 있음직도 한 “알리바바동굴”을 찾으라.리해란 때론 아주 간단하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그가 처했던 단계에서 보면 무난하다.                                    2014년 8월 14일 (연변일보)
805    (진언수상록 50) 명성의 안팎 댓글:  조회:3390  추천:0  2017-04-10
                                                               명성의 안팎                                                                         진 언       인간의 욕망과 추구는 다종다양하고 복잡다단하지만 명성과 미덕과 성취야말로 최고층차의 추구라고 할것이다. 명성은 개인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매개물이다. 명성은 성취와 지위의 가장 유력한 표지이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호사유피,인자유명(虎死留皮,人者有名)”는 속담에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얼마나 명성을 중히 여겼는가를 알수 있다.     사람들이 죽기내기로 갈구하는 명리(名利)라는 단어에서도(名)이 앞에 놓이고 리 (利)가 뒤에 놓였으니 명성이 금전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것을 시사하고있다. 명성은 설복력과 지배력을 구비한 일종 권력이 되기도 한다. 범부속자들은 별로 연연하지 않지만 명성은 이름의 위력이고 순문화력량이기도 하다. 명성은 한 사람의 자비감을 누르고 우월감, 자존심을 만족시켜준다.하여 후세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우고 명인박에 올리고 조각상을 만들며 지명으로 명명한다. 그처럼 명성은 인류생명의 일종 전파방식이 되기도 한다.     자아표현욕에서의 핵심은 명예욕이다. 명성이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으는 이름이고 도덕적존엄이 남에게 승인받고 존경과 흠모와 찬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명성은 사회적평가와 가치함량의 총화이다. 진정한 명예의 가치변수는 도덕적 존엄에 대한 자각정도이다. 명예와 영예는 쌍둥이다. 영예는 곧 영광스러운 명예에 이르는 계관이다. 명예욕은 일종 인생관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물욕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고 명예욕으로 사람들이 있다.     이름은 매개인의 사회문화부호로 곧 그 사람으로서 그의 력사에 흔적을 남기는 유일한 부호이다. 미명이든 악명이든 지명도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어떤자들은 그것이 미명이든 악명이든 관계없이 명성만 남기면 만족한다고 한다. 그래서 백세에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유취만년이라도 좋다는 명언도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세상엔 스스로 명성에 담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명성이 와자자하여 알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있으면 더 매달릴 필요가 없을것이요 명성이 너무 미미해서 론할여지도 없는 처지여도 담박할수 있다. 그러나 명성이 곧 그 사람의 인격과 등호로 되는것은 아니다. 에머슨은 인격은 그 사람안에 갖춘 마음의 자태이지만 명성은 그 사람의 인생을 남이 나름대로 평판하는 외부적인 소리라고 했다. 명성이 미미한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나 조금 이름이 나면《그만 조심하지 않아서 이름이 나고말았네》하고 겸손한체 하는 야비한 자들은 정말 가소롭다고 해야 하리라. 크든 작든 명성을 얻은건 그의 몫이지만 “조심하지 않아서”따위의 허접스러운 겸손은 가히 허겁뜬 소리라 할것이다. 명성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인가?     명성의 변증원리를 다는 리해하기 어렵다. 17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하리파 크스는《추구당하기 시작한 그 시각부터 명성은 곧 일종 죄악이 된다》고 하였고 타고르도《나는 높은 산정에 올라서 명예의 황무지에서 불모의 언덕을 보았는데 숨을만한 곳도 없다는것을 발견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참으로 금과옥조이다.     중국에는 사람은 이름이 나는것이 두렵고 돼지는 살찌는것이 두렵다 (人怕出,名 猪怕)는 말도 있는데 명성의 부정면을 시사하고있다. 아무튼 명성을 남기고싶어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악행, 몹쓸짓, 행패, 핍박, 탄압, 학살로 유명하게 된 히틀러같은 야차는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몇명을 죽이면 살인자이고 수십백만명을 학살하면 영웅이라 호칭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미명은 자기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겨둔것으로서 유한한 생명을 무한히 연장시키고 있는것이다. 최초의 명성이 최고의 명예로 될수도 있다. 그후 덧돌이로 얻은 명예가 아무리 눈부셔도 그 사람을 그 이상 거듭나게 하지는 못한다. 명성은 스스로 쌓는것이요. 명예는 다른 사람이 주는것이기때문이다.     명성은 지극히 가변적이다. 오늘 혁혁하던 명성이 이튿날 티끌처럼 날려갈수도 있고 오늘 소문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새에 일월처럼 빛날수도 있다. 명성은 비온뒤 무지개 같은것도 있고 만고청산같이 유구할수도 있으며 국부적이기도 하고 사해를 떨칠수도 있다. 명성에도 진품이 있고 가짜가 행진하는 이 시대에는 조작되고 턱없이 과장돤 명성이 있을수도 있다. 자기의 성과로 얻은 명성도 있고 조상3대로 물려 받은 골동품같은 명성도 있다.     명성에는 빌려쓴 모자처럼 맞지 않은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늦게 얻은 명성일수록 그 빛발이 오래갈수 있다. 금광석이 하루아침에 굳어진것이 아니듯이 훌륭한 물건은 천천히 이룩되는 법이기때문이다. 진정 가치로운것은 명성이 아니라 그 명성에 안받침된 실적이다. 그만큼 명성이란 내재적이라기보다 외재적인 과시물이다. 명성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려야 하지만 명성을 잃기는 잠간이다.     명예는 산봉우리와 같다. 산정에 올랐다면 산하ㅡ백리풍경을 흔상할수 있으나 이 산에 오르면 저산에 높아보이는게 명예욕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냥 건너뛸수 없으므 로 산을 내리여 다른 산정에 올라야 한다. 그래서 불확실한 인생마당에 명성도 불확실할수밖에 없게 된다. 과거의 영예가 그 사람의 현재의 가치표준이 될수 없다. 명성은 지구성이 있지만 영예는 장래에 관심이 없다.     그 스스로 빛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빛이 나며 명예가 올라간다. 진정한 명예는 명예롭기를 바라지 않을 때 빛나는법이다. 높은 사람은 자신을 낮출 때 남들이 우러러 그렇게 보이는것이다. 스스로 명예롭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로자의 말을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명예는 자기가 원한다고 올라가는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옥처럼 빛나려하지 말고 차라리 길가에 버려진 돌처럼 행동하는것이 명예를 높이는 지름길이 된다. 매사에 담담하여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명예로운 사람이 될것이다. 저 스스로 명예롭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름다운 비취반지를 사서 자신을 치장하려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다. 진정한 아름다운은 치장을 해서 얻어지는것이 아니다.”     당조때 배해(裴谐)라는 사람이 하루는 두보의 묘소를 지나다가 느끼는바가 절실하여 “이름은 묻길수 없거늘 해골이야 썩은들 어떠랴,”하는 시구를 남기였다. 두보와 같은 대시인들의 경우 사람이 죽자 곧 명망도 잊혀지는것이 아니다. 거목이 거목으로 된것은 땅속깊이 뿌리를 내리기에 하늘을 찌를듯 우로, 우로 키돋움할수 있기때문이다. 뿌리는 척박한 땅이든 바위짬이든 마다하지 않고 더 깊이,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명예의 수림에는 상록수가 없지만 그 뿌리는 깊고 굵다.     진정한 명망은 묻히지 않는다. 명성은 하늘이 부여하는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생업적에서 발산하는 빛발이다. 그리고 관건은 스스로 이름나기를 잊고있다는것이다. 사실 이름내기를 등한시 할수록 더 유명해지고 명성에서 도망칠수록 명성이 바싹 따른다는것은 기묘한 섭리가 아닐수 없다. 반대로 립신양명하려고 안달복달하는 자에게 허명은 있을수 있으나 허깨비같다. 진실한 명성은 숨기려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력사는 명성으로 하여 오래오래 유전되는것이다. 스스로 총명한체 하여 명성을 절취한자로 말하면 장님이 초불을 켠것과 같고 도금한 금목걸이에 불과하다. 위대한 명성은 영원히 땅속에 묻히지 않는다. 이름이 높다는것은 고상함의 표지이다. 고상함은 덕성에서 온다. “고상한자의 묘지명은 고상이다.(북도)”                                                   2012년 1월 25일            
804    (잡문) 자는체하면 놔둬라 댓글:  조회:2697  추천:0  2017-04-06
                                           자는체하면 놔둬라                                                      최 균 선       속담에 나간 놈의 몫은 있어도 자는 놈의 몫은 없다는 말이 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간 사람은 일하러 나갔거나 볼일이 있어 나갔겠으니 남겼다가 주어도 자는체하며 거동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따로 몫을 챙겨주지 않는것은 인정에는 얼룩질수 있으나 사리에 맞는 처사이다.     그런데 진짜 잠에 곯아떨어진 사람은 세괃게 깨우면 깨여날지도 모르지만 짐짓 자는체하는 사람은 좀해서는 깨여나지 않는다. 자는체하는데서 무서운것은 “ㅡ는체” 하는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일을 속으로 가늠하면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잘 알면서도 자는체 드러누워서 일어나려 하지 않을 때 열사람이 접어들어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설사 일으켜 놓았더라도 아예 엎드려버릴것이다.     자는체 하는 사람과 대지자(大智者)가 어리석은체 하는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지자의 “어리석음”은 일종 생존예술이기도 하다. 우둔한체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다가 일거에 만록총중에 일점홍처럼 출중하게 솟구쳐나온다. 그와 반대로 역어빠진 자가 자는체하는 목적은 준엄한 현실에 대한 일종 도피로서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의무 에 모르쇠를 들이대는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그들은 “자는체”하면서 “꿈”은 꾼다는것이다. 감나무밑에서 하벌린 입속에 홍시가 똑 떨어지기를 바라는격이다. 그래서 꿈속에서도 자는체 하는것으로 리해득실에 주산알을 튕기고있다. 자는체하는자들은 “청고함”과 “침묵의 예술”을 표방하면서 세상과 다투지 않는양 자신을 분식한다.     자는체 하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깨여나는것이지만 자기가 엮어가는 몽경이 지속될수 없을 때는 부득불 눈을 크게 뜨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여느때보다 더깊이 “잠들고”싶어한다. 한것은 자신이 자는체하는 동안 현실세계와 잠든체하기 전의 세계가 너무나 변해있기에 꿈속에 정경과 비할나위조차 없음을 절감하기때문 이다. 잠든체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저만치 멀리 가버렸다. 그래서 금이라는 침묵 을 표방하면서 은밖에 안되는 웅변을 은근히 비웃는것으로 심리평형을 찾는다.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는 말은 절대적이 아니다. 공공리익에는 침묵하다가도 자기 리해득실에는 웅변을 토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는 말이다. 속으로 선악을 판별하고 시비를 가르고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을 분별하고 애증을 품었던들 그것을 내내 표현하지 않으면 한번도 빼들지 못한 보검과 다를게 무엇이랴, 이 경우 침묵은 금이 아니라 녹쓴 양철판과 같은 방패일뿐이다.     다시 본제를 말해보자. 자는체하는것과 침묵을 표방하는것은 일맥상통하나 금으로서의 침묵과는 인연이 없다. “장미를 위해서 가시에 물을 주어야 한다”는 아라비야 속담이 있다. 경쟁이 치렬한 이 시대에 남보다 뛰여나고 실속있게 성취를 거두려면 자기 인생의 터밭에 나름대로의 꽃한송이라도 피워야 할것이다. 그러자면 꽃씨를 심어놓고 싹트기를 기다려 인내해야 하고 물을 주고 김을 매며 가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침묵하는 시간이 아니라 묵묵히 분투하는 과정이다. 무릇 내심을 숨기는것과 내심을 분장하는것은 왕창 다른 일이다. 범이 발톱을 숨기고 웅크리고있는것은 무엇 이 두려워서가 아닌것이다. 그처럼 침묵에도 유의적인 침묵이 있고 비겁한 피동적 침묵이 있듯이 세상과 담을 쌓고 자는체 하는것과 불똥이 자기에게 튕길가봐 짐짓 자는체하는것도 별개의 문제이다.     인간의 감정에서 가장 진실한 감정은 아마도 남에게 알릴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일것이다. 이런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뭘하고있는가? 내가 지금 하늘을 우러러 보고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30도 각도로 쳐다보는가?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보고있으리라고 생각해서이다. 왜 꼭 30도 각도로 보아야 하는가? 나의 눈에 고인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것이다.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가? 하늘은 저렇게 텅비여있는데 누구에게 기도한단 말인가?” 30도 각도로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숨기고있는 사람은 자는체하는 사람과 질적으로 다른 인생자세이다.     인간을 바다속의 어류에 비유한다면 각자의 서식수역이 있다. 혹자는 생활의 천수(浅水)에서 개발헤염을 치고 혹자들은 생활의 심수(深水)에서 자맥질하고 혹자들은 수면에서 물결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며 산다고 할수 있다. 부동한 수역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부동한 수역을 동경하고 흠모할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민초들의 인생은 미비하기가 초개보다 못하다. 풀은 가을에 잎과 줄기가 말라 죽어도 뿌리는 살아있어 새봄이면 다시 움트고 한여름을 무성해서 대지를 수놓는다. 그러나 인생은 부평초같이 뿌리가 없기에 한번 껌벅 죽으면 재생이란 없다. 그래서 인생에 부득부득 “뿌리”를 남기고싶으면 생전에 사회와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청사에 길이 빛나는 현자, 인의지사들이 바로 세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 범례가 된다.     이처럼 모두가 취해있는데 홀로 깨여 납함하는 사람이 있고 자는체하며 세상의 풍진을 피하는 사람도 있다. 유가에서는 현실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라고 하고 도가에서는 무위(无为)의 도를 따르고 자연에 순응하여 달관하면서 시끌벅적한 세상을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데 자는체하면 과연 세상사는 지혜를 터득한것인가?     깨여있으면서도 자는체 하는것은 일종 무책임함이며 심지어 비겁함이다. 자는체 말고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도 켜보고 입이 찢어지게 하품도 하고 코방귀라도 흥흥 거려보라. 거세게 숨쉬고 한소리하며 사는 인생이 참인생이다. 삶의 동력은 내심의 들끓음에 있다.                                                  2013년 11월 28일                                                2015-3-12 (연변일보)  
803    (진언수상록 49))수단의 목적화와 목적의 수단화 댓글:  조회:4003  추천:0  2017-03-30
                                               수단의 목적화와 목적의 수단화                                                                             진 언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하는 문제는 퍼그나 유치하지만도 조금 돌려서 심각하게 생각하면 곧 목적과 수단이라는 철학범주에 소급되는 문제로 된다. 환언한다면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문제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목적과 수단이란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수단이 어떻게 목적으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를 사색해보는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예기된 효과를 두루 목적이라 부르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투입한 전부의 노력을 수단이라 부른다.     론리상에서는 수단이 목적에 선행한다고 하지만 가치판단의 순서에서는 목적이 수단에 선행한다. 수단은 목적의 존재하에서만 존재리유를 가지기때문이다. 그만큼 수단은 목적의 전개이고 목적은 수단의 론리적결과이다. 수단이 주의, 제도, 규칙, 법률순서, 륜리규범 등에 해당한다면 목적은 인간의 자유, 민주, 안전, 존엄 등 가치 보증과 맞물린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가듯이 수단에는 방법이란게 따라붙는다.     원래 목적은 목적이고 수단은 수단이지만 무질서가 질서일지도 모를 만화경같은 혼동시대여서인가 시행과정에서는 부지불식간에 목적과 수단의 계선이 헛갈리게 된다. 무릇 목적에 반영되는것은 주체의지의 지향이며 그것은 수단을 통하여 주체의 지향의 전 과정에 관통된다. 그래서 지자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반드시 결과를 예상한다.     주체는 개체일수도 있고 군체, 사회, 국가일수도 있다. 인간과 동물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구별점은 행위의 목적성인바 목적달성을 위해 천방백계를 다한다. 현시대에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목적과 수단의 혼동은 돈에 관한 문제이다. 돈벌이는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는 합목적 수단인데 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해치는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비리이다. 근검치가의 수단은 절약이지만 도를 넘으면 수전노로 된다. 이처럼 수단과 목적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고있다.     사람은 돈을 벌기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돈을 버는가? 수단이 목적으로 번지면 그랑데같은 돈자체로 타락하고만다. 우리가 밥해 먹고 잠자고 성을 즐길 장소로서의 집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가질수록 더 크고 더 호화롭고 좋은터에 자리잡은 별장까지 가지려하는데 결국 수단이 목적으로 된것이다.     독일의 고전철학가 칸트는 일찍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출했다. 당시 봉건사회귀족들이 자기를 목적으로 삼고 백성들과 노예를 자기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데 대한 반발이였다. 하지만 인간은 이 철학명제와는 달리 문명해질수록 스스로를 수단으로 삼아왔다. 육체교역으로 인생을 영위하는 밤골목의 이른바《성복무업자》들이 전형이라 할것이다.     한 녀자가 한 남자의 안해가 되였을 때 그 남자는 비로소 남편이 되는 목적에 도달한다. 이때 그 녀인도 한 남자의 안해로 됨으로써 안해가 되려는 목적에 도달한다. 결혼이 바로 수단이 된다. 많은 녀인들이 가정과 아이의 장래를 위해 소위 위장결혼극까지 놀면서 한국에 나갔는데 후에 마음이 변하여 남편도 아이도 돌보고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한국생활에 애착을 가졌다면 목적이 수단으로 변한것이 된다.    수단의 목적화는 거창한 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루쏘의 설법대로 하면 사람들은 천연적인 자유를 희생한 대가로 하나의 공동체를 결성하고 국가와 군주라는 관리자에 의해 충분히 자유를 향수하기를 바랐는데 결과적으로는 수단으로 삼으려했던 관리자 가 자기의 목적을 공동체의 목적위에 올려놓았다. 이 론리에 력사유심주의 모자를 씌울수도 있으나 이런 정황은 유사이래 줄곧 존재해온것은 사실이다.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고 심지어 목적이 해제되는것을 철학상에서 일종의 “이화” 라고 한다. 맑스는 이화가 실제상에서는 인간과 인간지간의 이화라고 천명했다. 요긴 한것은 이런 이화가 현대시대에 극에 이르렀다는것이다. 루쏘로부터 시작되였다는 병태적사회현상과 인간의 정신질환은 많은 세월의 언덕을 넘어서 의난잡증이 되였다.     통찰력이 뛰여난 모든 사상가들은 일찍 수단과 목적이 통일되고 다시 분렬되는것을 보아냈지만 수단이 최종적으로 목적을 뒤엎어버린 론리적과정이 무엇인지를 천명한 사람은 없었다. 중요한것은 목적의 수단화이다. 이런 목적은 왕왕 아주 숭고하고 매우 신성한 리상이였지면 결국 실현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도리어 전제정치를 수호하는 수단이 되고말았다.     례컨대 태평천국을 이룬다던 홍수전은 처음엔《밥이 있으면 다같이 먹고 옷이 있 으면 다같이 입고 돈이 있으면 같이 쓰고 밭이 있으면 다 함께 농사지어 먹고 어디 에 공평하지 않은 곳이 없고 어디에 배부르고 따뜻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리상을 내걸었다. 하여 아주 매혹적인《천묘제도》들 공포하여 장병들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혈전하였다.     그러나 소위 령수들은 벌써부터 황제로 칭하고 제왕으로 칭하기에 급급하다가 마침내 만청왕조보다 더 엄연한 등급제도를 세웠다. 목적화의 수단이 원래의 리상을 구중천에 팽겨치고 장병들의 피에 젖은 승리의 과실을 수단화한것이다. 숭고하던 목적이 비렬한 수단으로 타락했다고할가. 아니, 자초에 목적을 수단으로 삼은 음흉한 사기극이였는지 누가 알랴,     물론 수단의 목적화와 목적의 수단화는 때론 물에 술을 탄것처러 분별하기 어렵지만 기실 어느 위치에서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달린 일이다. 정계의 부패도 기실 수단의 목적화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 살려는것인데 그를 위한 수단인 소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어 목적이 불투명해지고 결국은 목적을 잊어버린다. 수단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것이다. 목적이 옳다면 수단도 자동적으로 정당한것이 되여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냥 비틀어지고있다.     원래 목적 자체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수단으로 삼는 인생은 슬픈 인생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사회라는 이 거대한 기계에서 하나의 나사못 노릇도 못하고 생명도 삶도 주재할수 없는 민초들은 수단일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것은 사실이지만 자기절로 자기를 수단이기를 바란다면 더구나 슬픈 숙명이 아닐수 없다. 한 나라의 위정자도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혼동한다면 혼군이 될수밖에 없다.     인간은 바로 여기에서 파멸한다. 인간은 어떤 사나운 동물보다도 야만스럽게 스스로를 타락의 길로 이끌어오면서 괘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인생을 쾌락을 얻는 수단으로 삼았다. 무지경의 향락욕은 모든 인성악의 온상으로 되였다. 례컨대 대자연이 인류에게 하사한 항구한 선물도 악의 보금자리가 됨으로써 인류는 스스로가 자멸의 낭떠러지에 선 우둔한 동물이 되여졌던것이다.     경우에 따라 목적보다 수단을 우선시해야 살아남을수 있다. 그러나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것은 인간의 법칙이 아니다.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것은 동물세계의 법칙이다. 인간도 동물이긴해도 리성동물이라는데서 짐승과 구별 된다. 인간이 스스로 용서못받을 잘못은 목적을 수단으로, 수단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그런 실수는 끝내야 하는 곳에서 시작하고 시작해야 할 곳에서 끝을 내도록 오도하였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오도의 끝이 어딘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2009년 6월 15 일
802    뾰족한 연필의 계시 댓글:  조회:2871  추천:0  2017-03-29
                                    뾰족한 연필의 계시                                                  최 균 선       매번 연필을 깍아줄 때 아이는 마냥 뾰족하게 깎으란다. “너무 뾰족하게 깎으면 부러지기 쉬운데…”라고 말하면서 엉뚱하게 사람이 처사함에서도 너무 예리하여도 좋지 않다는 철리가 떠오른다. 사실 부대껴야 하는 인생현장에서 감각이 도끼등 같아도 불가하지만 뾰족한 열필끝 같은 감각, 신경을 내들고 나서면 남에게 지울수 없는 상처를 줄수도 있기때문이다.     지나치게 뾰족한 감각은 하는 말도 날이 서게 된다. 자기가 내뱉는 말은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말은 그 자신이 풍기는 첫번째 향기이자 듣는 사람의 뇌리에 새겨주는 최후의 기억이 된다. 자기가 무심하게 내던지는 한마디가 스스로의 삶은 물론 주위사람들의 정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심지어 삶까지 고양 할수도 있고 혹은 망가버릴수도 있음을 모를 사람은 없을게다.     “뾰족하다”에서 빼여났다는 개념이 련상되지만 풋풋한 인정은 나올수 없다. 왜 뾰족한 인생은 위태로운가?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의 뜻은 여러가지로 풀이 된다.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말도 되고 강직한 사람은 남의 공박을 받는다는 말도 되고 너그럽지 못하면 대인관계가 원만할수 없음을 이른다.     뾰족한 부분이 닳고닳아 뭉툭해진다는것, 그것을 예감하고 그 뭉툭해질 운명을 받아들일수밖에 없다는 마음챙김부터 벌써 위태위태하다. 영화부귀가 일장춘몽이 될수도 있다는 반복무상의 원리를 미리 받아들이는것은 해당자로서는 너무너무 기분이 찜찜해지고 슬퍼지는 일일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모난돌은 정을 맞고 다듬어져야 이런저런 곳에 쓸모있는 돌이 되는것은 사실이다. 둥근돌은 정은 피하지만 어쨋든 둥근 그자체 뿐이지 그다지 실용가치가 없다. 이는 역향사유인가? 발산사유인가? 잘 모르겠다.     진달래 피고 함박꽃이 웃고 하얀, 노란 나리꽃이 반기여도 미구에는 속절없이 질것이라는 예감때문에 애틋한 마음을 주름잡는것과는 다른 심경이다. 꽃이 질거라는 징후인 봄비가 싫다는것은 변덕많은 풋소녀의 심태이다. 한겨울 나무는 라목으로 온 추위를 맞고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봄에 활짝 핀 꽃을 기약하고있다.     꿈이 사라지면 미래가 없고 사람이 떠나면 그나마 살고있던 터전마저 무너지고만다. 사람이 역경에 처하여 더 자위할수 없을 때 술로 세월을 보내며 한순간이나마 자신을 취생몽사에 맡기려 할 때 취하고싶다는 그 마음이 바로 신경이 뭉툭해지고 둔탁해지고싶다는 표지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인생이란 모종 의미에서는 유감의 반복이고 연장선이라 할수 있다. 인생에 가장 심각한 유감은 어떤것일가? 정답이 없다. 관용을 베풀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주어 뱀을 품어준 우둔한 농부처럼 도리여 해를 입었을 때, 아첨을 질색하면서도 극진히 개여올리는 달콤한 아첨에 엿가락이 되고 그만큼 보상을 베풀어 주고나서 자기 량심에 향하여 그 유감의 깊이를 물을수도 있다.     로신선생은 “사람에게 필연고 부족점이 있게 된다. 그래야 자기의 수요를 생각하게 될것이기때문이다. 그들이 원망하라면 하라. 나는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보아하니 자기 일생에 무슨 유감같은것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으며 관용도 쉽게 믿지 않은것 같다. 그래서《이이집•유항선생에게 답함 (而已集,答有恒先 生)》에서 이렇게 쓰고있다.“나는 자기를 해부함에서 다른 사람을 해부할 때보다 더 인정사정 두지 않는다. 모란꽃을 심은자는 꽃을 얻을것이요, 납가새(蒺藜)를 심은자 는 가시를 얻을것이다.”     지구는 돌고 세상은 변해도 유감이란 영존한다, 생활이 있는 곳에 유감이 있고 사람에 따라 유감의 내용이 다르며 시대색채를 띠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유감속 에서 생활을 투시하고 유감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새긴다. 후회는 유감의 결과물이라 할지…     이승과 저승 사이가 먼것일가? 우리의 생 또한 그 사이에서 물리적인 진짜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뾰족한 연필끝에서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조심조심 처신하고 막무가내한 현실과 소망의 락차에 실망 하여 체념 비슷한 마음으로 두루두루를 방패로 삼는 시대이기도 하다. 내 마음에 불편한 시대에 무디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자세는 그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다.     하루낮새에도 수많은 글자들을 오리느라고 안깐힘 쓰다보니 뭉툭해졌거나 아예 속대가 깊이 부러진 연필을 깎노라면 뾰족뾰족한 삶도 아닌 어려운 삶을 견뎌오느라 뭉툭해진 나의 몽당인생을 락서하게 된다. 내 이제 연필처럼 뾰족하게 깎을 무엇이 있을것인가? 완벽한 인생에는 세가지 감각이 있다고 할수 있는데 사명감,실락감, 위기감 이다. 자기의 사명을 다하느라 하면 때론 뾰족하게 나오지 않을수 없고 실락감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쓰다보면 더구나 뾰족한 연필끝처럼 부러지게 되기도 하고 위기감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더 내세우려고 모지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각하지 않은 무모한 일들을 저지르게도 된다.     누구나 자기 념두속에서 우둔한 판단을 쫓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부정적사고는 일종 악습과 같고 습관은 습성이 된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그래서 때론 역향사유가 유익한것이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지만 가시있는 꽃은 꺼린다. 말도 글도 마찬가지다. 가시돋힌 말은 대방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통쾌하겠지만 제 손에 쥔 가시나 무에 자기가 찔릴수도 있다는것은 영원한 이률배반이다.     그래서 자고로 중용지도가 처세술의 정수가 되였는지 모른다. 너무 사나우면 남들이 꺼리고 무골충같이 나약하면 남이 업신여기니 사나움과 나약함을 버리고 지혜롭게 중도를 지키는것이 좋지만 타고난 천성은 어찌해야 할가?                                         연변일보          2015-1-22
801    민담) 유복자 댓글:  조회:3090  추천:0  2017-03-19
민담)                                 유복자                                            최 균 선        까마득히 멀고 먼 옛날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날 외진 산속, 호젓한 길에 수상쩍은 길손이 나타났습니다. 나귀등에 앉은이는 파파늙은 안로인이고 고삐를 잡고 길을 다그치는이는 20대의 장정이였습니다. 어찌보면 효성스러운 아들이 로모를 모시고 먼 나들이를 떠난것 같은데 안로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름니다.     10, 20리, 굽이굽이 열두굽이 느질령을 지나 높고높은 아득고개를 넘어가고 또 넘어갑니다. 초목이 울울하고 송백이 청청하여 인적이 없는데 원숭이의 구슬픈 울음소리만 간장을 끊입니다. 여기는 무주공산, 그들의 계속 진대나무 우거진 망망림해로 들어가는데 안로인의 옷섶으로 난데없는 가는 베실이 슬슬 풀려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실오리를 따라 이야기를 잠시 뒤로 밀려야 하겠군요.     젊은이는 그 안로인의 아들입니다. 기둥같이 믿어오던 남편을 너무나 일찌기 잃고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아글타글 궁한 살림 지탱하며 눈물나게 키워온 유복자입 니다. 강보에 싸인 피덩이를 불면 날아날가 쥐면 부서질가 오줌똥 주무르며 애간장을 다 태웠습니다. 독수공방 긴긴 밤을 등불과 동무하며 흘린 눈물인들 얼마였으며 한숨인들 얼마였겠습니까! 춘풍화월 꽃시절을 속절없이 보내면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아들을 보면 구곡간장에 서리고 서린 과부의 설음도 사라지군 하였지요.     무정세월 류수같아 해와 달이 바뀌여 아들은 어느덧 장정으로 되였습니다. 허구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역에 시달려온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얼키고 나긋하던 허리도 굽어들어 파파할미가 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늘그막에 실명까지 하여 청맹과니가 되였으니 이 아니 슬픈 일입니까? 그런데 두손에 고이 받들려 자란 아들은 성가할 나이가 다 되였건만 로모의 고생을 덜어줄대신 흥탕거리며 놀기좋아 하는 백수건달이 되였습니다. 하오나 어머니된 마음에는 아들이 그저 대견해 보였고 아들의 뒤바라지가 락으로 느껴졌을뿐이였습니다. 방종한 자식이라 마음씨 고운 현처나 생기면 밥이든 죽이든 며느리 손에서 받아먹으며 손자손녀 거느리고 여생이나 즐겨보자고 연줄달고 수소문 하여 아들놈을 장가까지 보냈더랍니다.     옛말에《문턱높은 집에 정갱이 긴 며느리가 들어온다》했건만 며느리 분복이 없었던지 깨진 남비에 꿰맨 뚜껑격으로 그만 심보가 사나운 며느리가 들어올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아들마저 녀편네의 동당이 되여 어미구박이 성화같았습 니다.《귀한자식 매 하나 더 치라》는 속담도 이미 늦어진 후회였습니다.     어느 하루였습니다. 손주놈이 세살을 넘도록 할미가 추접다고 품에 안길세라 하던 며느리가 마실을 나가면 아이를 맡기였습니다. 얼마나 안아보고싶던 손주였겠습니까, 지정지정 아래방에 내려와 손주놈을 얼싸 안으니 아이는 그만 기겁하여 와~ 하고 우는것이였습니다. 금지옥엽같은 손주를 이리저리 달래던 할머니는 옷고름에 매달았던 변두리가 닳아 반들반들한 동전을 떼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막힐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실로 눈섭에서 불행이 떨어진다더니 한창 재미있게 놀던 아이가 그만 두눈을 희뜩 뒤집으며 뒤로 훌렁 너부러지지 않겠습 니까? 입에 물고 놀던 동전이 목구멍에 걸렸던것입니다. 너무도 창졸간에 생긴 일이 라 그저 이거이거 하며 경황실색해 있을 때 며느리가 문을 떼고 들어섰습니다. 생때 같은 아들이 죽어 넘어진것을 보자 급기야 대성통곡을 하며 며느리는 불문곡직하고 시어머니에게 달려들어 행악질을 하였습니다.     아들도 녀편네의 송사만 듣고 눈에 쌍불을켜고 행패질하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였습니다. 손주를 잡아먹은 할미가 되였으니 비상을 먹고 죽자해도 없어 못 먹는 애달픈 심정이였습니다.     이 일로 하여 녀편네의 성화를 받다못해 아들은 로모를 심산속에 던지러 가는 길 이였습니다.     어느덧 실꾸리도 다 풀리고 맥도 진해버린 로모는 나귀에 내려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의원도 싫으니 여기다 내버리고 어서 돌아가게, 날이 저물어 산짐승이라도 나오면 어쩌겠나? 난 살 욕심이 없네. 마음놓고 돌아가게!》     그러나 아들은 들은둥만둥 이번엔 로모를 둘쳐업고 걷기 시작합니다. 이제도 얼마를 가려는지? 로모는 손에 잡히는대로 자꾸만 나무가지를 꺾었습니다. 그 속심을 알길없는 아들은 걸음이 지체된다고 야단입니다. 하건만 로모가 끝이 없는 모성애로 아들이 돌아갈 길이 열려지고 있음을 멧새들이 알는지…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짓을 펼쳤습니다. “까욱, 까욱!” 불길하게 울어대는 까마귀소리는 한결 비감스러웠습니다.(인제 날개가 돋쳐도 못살리라)고 생각한 아들 은 구새먹은 나무아래에 로모를 내려놓고 주자를 놓으려는데 로모가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아, 길없는 수림속에서 어찌 헤쳐나가려나? 올 때에 나무가지를 꺾어 놓았으니 그걸 방향잡고 나가게나.》     야차같은 마음에도 걸리는데가 있었던지 아들은 주춤 돌아섰습니다. 원망소리 한마디 없는 로모의 초췌한 얼굴에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흐름니다. 자기를 버리는 자식에게도 다함없는 사랑을 쏟는 그 마음에 무정한 초목도 흐느끼는데 아들놈은 묵묵 부답입니다. 이윽고 아들이 박정하게 돌아서자 로모는 스스르 모로 쓰러집니다.     바람이 우수수, 밤은 바닥없이 깊어가는데 비몽사몽간에 난데없는 구러이 한마리가 스르륵 기여왔습니다. 몸뚱이는 아름이나 실히 되고 얼룩얼룩 무늬가 별스러운데 올롱한 종지눈에서는 보기만 해도 락담실혼할 파란 불이 흐름니다.    《놀라지 마시라, 불우한 어머니시여 , 저는 천지룡왕늪에 사는 수중왕자 해동이 올시다. 불쌍한 어머니에게 약을 드리고저 왔나이다. 이 약은 “환생령지초”이온데 죽은 손자에게 먹이면 능히 재생하오리다…》     구렁이는 또 옥황님께 염라왕을 시켜 손자의 이름을 호명책에서지워버리게 했은 즉 40일동안 해빛이 없는 곳에 은둔시키고 이 약을 먹이면 끊어졌던 숨이 통하리라 고 세세히 알려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졌습니다. 너무도 괴이하고 놀라와 뛰는 가슴을 겨우 달래는데 한줄이 청풍이 일며 백년묵은 범이 나타나 안로인에게 넙죽 절하며 말 했습니다.    《진정하소서, 어머니시여! 나는 이 무주공산 산중대왕 백호이온데 가긍하신 어머니를 위하여 범나라 명약인 야명주를 가져왔나이다. 이 약은 “보안천리명환”이라 복약후 40일간 해빛을 피해있노라면 가히 대명천지 광명세계를 보실수 있으리다.》     말을 마치자 범은 안개같이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꼭 꿈만같은데 손에는 과연 향기로운 꽃한송이와 동글동글한 보배약이 쥐여져 있었습니다. 기쁘기가 한량없건만 누운곳이 망망림해라 속만 바질바질 탈뿐이였습니다.     이때 아들은 길을 잃고 한창 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진대나무가 척척 길을 막아 나서고 넝쿨이 자꾸만 발목을 휘감았습니다. 천방지축 나아가노라니 아슬한 단애절벽 이 또 눈뿌리를 빼는데 츠렁바위 로송아래에서 백호가 퍼런 불줄기를 내뿜으며 으르 렁, 따웅ㅡ하니 산천초목도 부르르 떨었습니다.       《에쿠 어마! 나죽소》하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몸서리 치게 징그러운 큰 구렝이가 종지만한 두눈을 딱 부릅뜨고 불길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를 휘휘 내젓는데 길길이 높이 자란 풀대들도 몸부림쳤습니다.    《아이구, 엄마야, 날 살려주오!》하고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와들와들 떨고 식은 땀을 쫙쫙 흘리던 그는 그만 폭 꼬꾸라졌습니다.    《하느님이시여, 가련한 이 인생을 불쌍히 여겨 잔명이나 보존케 해줍소서…》하며 손이 발이 되여 빌던 아들은 너무도 무서워 오장이 다 찢어지는듯 하더니 정신이 아찔, 하늘땅이 핑그르르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잠풍하던 밀림에 광풍이 대작하고 창살같은 비줄기가 억 수로 쏟아지니 만고밀림도 쏴쏴 울부짖으며 분해서 몸부림치는듯 했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벼락치듯 내리는 호령소리가 쩌르렁 산울림합니다.    《네 이놈, 듣거라!》 아들이 머리를 들고 혼겁해서 쳐다보니 반공중에 풍악소리가 은은한데 구름수레 를 탄 백의신선이 도고히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네 나를 알겠느냐?》    《모르겠나이다.》아들의 대답이였습니다.    《음, 그럴수도 있겠지라. 내가 바로 네 아비노라. 살아생전에 단명하고 가세는 궁했으나 부모공양 착심하고 이웃을 어진 례로 대하야 음덕을 많이 쌓았기로 죽은후 천국에 왔느니라. 지금은 인간세상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성직에 있노라.》    《예, 아버님! 그러하오면 마침 잘 되였나이다. 이 목숨 경각에 이르렀나이다. 혈육의 정을 보아서 이 목숨 구해주사이다.》    《에익, 천하에 미욱한 놈아, 제어미를 알은체 않는 놈 감히 아비를 알은체 할가? 자고로 부생모욕지은이 태산대해 같거늘 대역무도한 네놈은 백번죽어 마땅하도다.》     그 소리에 아들은 유구난언, 머리만 조아릴뿐입니다.    《듣거라, 우리 부부 백년을 동심동덕으로 해로하면서 남녀간에 일점혈육이 있거든 옳은 인생으로 인도하야 후대를 번성코자했더니 내 명이 짧고 너의 어미 또한 마음이 어질어 너같은 불칙한 자식을 길러냈으니 심히 원통한 일이로다.》하면서 눈 물을 흘렸습니다.    《죄송하여이다. 아버님! 실은 그런게 아니외다. 저의 귀한 아들놈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선은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네, 이놈! 무슨 망발인고? 그래 네놈이 본디는 효성했더란 말이냐? 대저 땅이 없으면 초목이 번성하지 못하고 뿌리가 없고보면 가지가 못뻗고 열매가 없는 법이온 데 네놈이 사내대장부로 태여났으면 일개 아녀자를 거나려 현처량모로 인도하는것이 천만가당하거늘 외려 언감생심 이런 불칙한 짓을 한단말인고?》     마디마디 가슴을 찌르는 질책에 아들은 두눈만 꺼벅거릴뿐입니다.   《네 죄를 인제 알겠느냐?》라는 신선의 질문에《예, 황송하옵니다.》아들은 고두백배(叩頭百拜) 사죄합니다.   《음, 괘씸하고 괘씸한 네 소행 백번 죽어 마땅하나 네 에미 후반생이 가긍하여 네 죄를 용서할테니 네 자식 살리고 한목숨 보존하려거든 속히 어미를 찾아 속죄를 하고 일후 지성으로 공양할지어다. 그러지 않다가는 산중고혼 면치 못할줄 알라.》말을 마치자 신선은 소매를 훨뤌 털며 표연히 사려졌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이 황홀한중에도 아버지의 지엄한 말씀 귀에 쟁쟁 울리는것 같았습니다.《옳지! 어머니를 찾아가렸다.》마음이 금시 밝아지여 기신기신 일어나 둘 러보니 바람은 잠잠 고요한데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렵게 어두운 캄캄칠야였습니 다. 그런데 불현듯 저 멀리 밀림속에서 무엇인가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뿜고 있었습 니다. 그 빛을 따라가니 구새먹은 나무아래 유령처럼 누워있는 로모의 손에서 야명주 가 빛을 내고있었습니다. 그 모습 하도 처참하여 철석간장 아들의 마음도 뭉클해지고 고허리가 시큰해 났습니다.     “어머니, 정신차리시오. 제가…금수보다 못한 이 불효자가…왔나이다…”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소발통같은 주먹으로 땅을 치며 부르짖는 넋두리에 로모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에이구, 이 사람아, 상기 아니 돌아갔나? 무슨 변이라도 당했는가? 옳거니, 자 네 길을 찾지 못한게로군, 내가 올적에 베실을 늘이고 나무가지를 꺾어 길을 표시해 두었으니 그걸 따라 곧추 가면 될거네…”     실로 자식이 한번 생각할 때 백천번 더 생각해주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로모는 신기한 꿈얘기를 하면서 두가지 약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얼른 가서 이 약을 써보게…손주놈이 살아난다면 나는 죽어도 원이 없겠네…》 돌부처도 감복하여 돌아앉을 말씀에 다시금 얼굴이 뜨거워나고 주먹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아이고, 어머님, 이놈은 백번 죽어 마땅한 놈이외다. 천지신명이 어머니를 도우시고 초목군생이 불칙한 이 자식을 미워함을 깨달았나이다. 어머님 어서 집으로 돌아 가사이다…》    《아닐세, 이 늙은것이 더 살아 무엇하겠나? 자네들에게 짐이나 될뿐이지, 그리말고 어서 급히 돌아가게, 손주놈만 재생한다면 내가 죽어도 원이 없겠네.》 《어머님,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손주야 또 없으리까만 어머님이야 이생에 또 계 시오리까?!》 아들은 두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자탄했습니다. 앞에서는 무엇인가 스스륵 스르륵 길을 헤쳐주고 파란 불빛은 깜박깜박 잡아주는데 어머님의 야명주 또 한 어둡던 아들의 마음에 빛을 줍니다. 걸음도 날아갈듯 가벼운데 어머님을 태우고 다시 돌아가는 나귀도 건정건정 잘도 걸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서방을 기다리던 안해가 반겨 내달아 왔습니다. 그러나 시어 머니를 도로 싣고 온것을 보자 그만 샐쭉해집니다. 남편은 그런것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구들장부터 와락와락 뜯어제꼈습니다.    《아니, 이 량반 백주에 구들은 왜 뜯어요?》    《그러니 어쩌란 말이요? 산에 버리고 오자니 천벌이 내려 목숨을 잃을번 했지, 모시자니 당신이 싫다지,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가며 키워준 은정을 생각해서라도 마 른 땅에 묻는것이 그래도 시비가 옳은것 같구먼…》    《아이구, 끔찍스러운 소릴! 산 사람을 어떻게 묻으며 그 우에서 살기는 어떻게 산단말이요?》 안해는 기겁해서 발발 떨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구.》    《어떻게요?》      남편은 안해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습니다. 여차여차 하면 일이 성사될것이라고…      이튿날, 남편은 안해에게 신신당부한후 명산대천을 찾아떠나가고 안해는 남편이 시키는대로 하루세끼를 집안 땅굴속에 모신 시어머니에게 콩죽만 쑤어 대접했습니다. 땅굴속에서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약을 먹입니다. 삼일만에 심장이 뛰고 얼굴에 피기가 돌더니 숨을 활 내쉬면서 동전을 왈칵 토했습니다. 할머니도 행여나 소원성취 이룰가 하여 야명주를 꿀꺽 삼키고 천지신명을 울러 성심껏 빌었습니다.    《귀여운 우리 손자 재생시켜주고 늙은 이 몸이 손주놈 한번이라도 안아보게 해주옵소서…》 날이 가고 달이 가 어언간 40일이 지났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은 땅굴문을 활 짝 열어제끼고 목메여 불렀습니다.    《어머님, 제가 돌아왔소이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아이가 와뜰 놀라 깨여나《와ㅡ》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울음소리에 너무 반가와 울먹울먹해진 할머니가 두팔을 벌리며《어디 보자! 내 귀염둥이야!》하며 손자를 담쑥 껴안을제 두눈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더니 삽시에 앞이 환해지면서 손자놈의 해바라기같은 얼굴이 우렷이 안겨왔습니다.      이게 어찌된 셈판인가!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올줄은 천만뜻밖이라 어안이 벙벙해진 며느리도 모성애만은 있었던지 아들을 껴안고《사랑둥이,보매둥이…》하면서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죄꼬만 앵두입술 방긋 열고《엄마, 아빠, 해해…할머니 곱다.》고 새롱거립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러서 기쁘고 들어서 정겨운 저 티없이 맑은 고운 목소리에 어느 뉜들 가슴이 저리지 않으리까!     실로 천만갈래 물줄기 대해에 흘러들고 인정의 난류 또한 제곬으로 흐르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눈을 다시 뜬 로모와 죽었다 환생한 아들을 볼수록 얼굴이 붉어지는 아들과 며느리의 두 눈에는 회한의 눈물이 진주로 아롱집니다.     그때로부터 한집안이 오손도손 화목하게 웃음꽃 피우며 무르녹는 사랑속에 살아 갔다는 유복자의 이야기입니다그려.                                                                                《연변녀성》    
800    (련시조) 인생잡사 댓글:  조회:3228  추천:0  2017-03-18
                                           인생잡사                                      1. 세월이 먹여주는 나이가 웬쑤지만                         기력이 쇠잔해도 정신줄만 댕겨쥐소                         빛과 열 다쏟아주고 불타는 석양 보소                       4. 세월은 간곳없고 인생고만 남았구려                         늙음이 아쉽다만 소신대로 살았다면                         초로의 인생이여도 헛살지는 않았니라                       5. 인생의 막바지에 석양이 가경일다                         여보소 일모도원 타는 마음 그뉘 알고                         알괘라 인생진미는 로년에야 맛보느니                       6. 그뉜들 소원이여 나이먹어 늙어질고                         세월을 이긴 장수 이 세상에 있더이까                         로옹을 가긍타마라 그리 될 날 필연이니                       7. 천리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어도                         문닫고 앉았으면 보이는게 소세계라                         인생의 최고경지는 종신토록 배움이제                       8. 험난한 인생행로 허위단심 헤쳐와도                         발자국 보이잖고 허무함만 굼실대네                         이링공 디링공하며 사는것이 인생인가                                            9. 이보오 저 늙은이 무덥다고 욕을 마소                         비온뒤 불볕아래 곡식들만 좋아라꿍                         장사래 콩밭을 맬 때 동이땀을 잊었능겨                                    10. 중추라 만월인데 로친네는 기별없네                          돈내에 취했는가 향수마저 날아났냐                          이보오 얼러덩 와라 생홀애비 단명할라                                                                                  
799    (련시조) 순리 댓글:  조회:3351  추천:0  2017-03-18
                                               순리                        1. 출생은 우연인데 북망산은 필연이라                                          순산이 좋았듯이 순리대로 살아가세                          과거에 련련해 말고 미래에도 열광말고                        2. 살기가 고달픈건 선택过多 그탓이요                          인생의 희극무대 부귀빈천 무관하나                          어떳타 인생비극을 공방형이 엮는거냐                        3. 원쑤가 벗이 되면 친구보다 미더웁고                          친구가 적이 되면 적보다 더 위험해라                          믿음도 可变이로다 가고 옴을 담담하게                        4. 명성이란 좋거니와 보따리도 되여지고                          총명이 과인해도 불안, 근심 자초하매                          처세에 难得糊涂라 만세유전 금언일세                        5. 시비를 캐지마라 자초하는 걱정이요                                                   량심에 짐이 되니 달관함이 으뜸일세                          나홀로 깨여있던들 취한에겐 거슬리니                        6. 순금이 없던듯이 완인 또한 없을진대                          제기준 내세우며 헐뜯기에 신명나냐                          사람은 류류별별 속생각도 나름이니                        7. 사람은 천층만층 무슨 사람 없을손가                          빛좋은 개살구에 비단보에 개똥많지                          알괘라 유명무실자 젠체하니 가관일세                        8. 창밖에 설한풍이 문풍지를 울리여도                          도목을 쌓아놓고 심심풀이 군불때니                          농가의 복 따로있나 배부르고 등따스워                        9. 선인들 일렀으되 이웃이 사촌이라                          이사도 이웃보고 택하라 하였건만                          지금은 문마주해도 초면강산 일상일세                       10. “仁者의 사랑이란 사랑아닌 恕이니라”                           공성인 일렀으되 행하기란 어려왜라                           리기가 앞서고서야 사랑할 맘 있으리오                         
798    (련시조) 인문경관 댓글:  조회:3169  추천:0  2017-03-18
                                          인문경관                        1. 청산은 말없는데 록수절로 울며가네                          바다로 가는 길을 탓할 일이 이시랴만                          원천은 잊지 말거라 만경창파 이루어도                        2. 시골엔 인정있고 도시에는 얼굴이라                          웃는입 화사해도 속마음은 알길없네                          어즈버 성향차별을 이로부터 알리로다                                              3. 인생은 초로인데 세상은 넓어있고                          시끌한 인생만큼 할 일도 많으련만                          저보오 무료한 이들 선하품에 해저무네                        4. 인생은 한권의 책 내가 바로 저자여니                          자라를 그리든지 호랑이를 새기든지                          할탓에 있다할진대 흉내만큼은 금물이여                        5. 사람은 드바쁘면 힘들다고 우는소리                          无事라 한가하면 심심하다 짜증내니                          괴이타 인간심사야 무료하면 일하거라                        6. 이름은 그럴듯이 연집하라 부르매로                          냄새가 나더라도 강둑길을 산책하며                          버들숲 우거지였던 옛풍경을 그려본다                        7. 꿀벌은 꿀빚느라 꽃을 찾아 만리길                          나비는  꽃희롱에 날개짓도 경망하다                          어화라 탐화봉접은 뜻다르고 해석달라                        8. 어제는 병문안에 그저께는 장례식에                          래일은 어찌될가 한치앞도 알수 없어                          참으로 가장 좋은날 오늘인가 하여이다                        9. 성공해 좋을 때엔 가짜벗들 모여들고                          적수도 맞장뜨니 일희일비 엇갈린다                          어즈버 평지돌출이 좋을리만 없을진저                       10. 미숙한 소인배들 리익으로 죽고살고                           성숙한 지자들은 대의 위해 자아희생                           먹이로 죽는 새들을 저도몰래 닮는것가                                          
797    (련시조)설경 댓글:  조회:3211  추천:0  2017-03-18
                      설경                     1. 첫눈은 송이송이 하늘나라 엽서인가                      라목의 가지마다 다복다복 雪花로다                      좋구나 북국의 풍광 설경밖에 더 이시랴                     2. 눈내린 만산편야 은세계를 이뤘구나                       눈보라 휘몰아쳐 천지아득 가관인데                       만건곤 백설속에서 독야청청 로송일다                     3. 밀림의 련산련봉 눈발속에 아득한데                       목재군 목재싣고 황둥글이 재촉한다                       이랴 낄 버쩍 힘써라 목재생산 너죽일라                     4. 순결의 상징인가 은세계가 경이로워                       숫눈길 걷노라면 가슴조차 비워진다                       어디냐 눈에 묻힌 길 헤쳐가니 헌헌해라                     5. 알맞춤 때맞추어 내리는 비 단비라면                       얼어든 땅을 덮는 겨울눈은 이불이라                       비오고 눈뿌려주는 하늘님이 고마워라                                     6. 숫눈길 밟노라면 마음조차 희여진다                       백포를 어지럽힌 발자국이 밉다만은                       설경이 하도 좋아서 정처없이 헤매도다                      7. 설중에 매화꽃은 보니난 눈시리다                       뭇꽃이 스러진 때 호을로 만개하니                       너만한 지조 있을가 만록총중 일점홍이                     8. 배나무 가지끝에 까지밥이 대롱대롱                       단즙은 말랐다만 까치들은 반가우리                       과목들 말이 없어도 새봄맞이 꿈깊어라                                   9.  라목의 가지마다  성예꽃이 차가워도                       때아닌 꽃이여니  한겨울의 걸작일세                       향기야 있으리오만 이채로워 취하노라                  10. 춘사월 때아닌 눈 飞来片片 나비같네                      겨우내 가뭄든 밭 눈석임물 목추기리                       반가운 풍년설이라 농부님네 시름던다
796    (잡문) 호박넝쿨 뻗을적같아서야 댓글:  조회:3239  추천:0  2017-03-12
                                                  호박넝쿨 뻗을적같아서야                                                                  진 언       인생철학의 보물고라고 할수 있는 우리 말 속담집에 “호박넝쿨 뻗을적 같아서야”라는 속담과 같은 뜻으로 “호박넝쿨 뻗을적 같아서야 강계, 위연, 초산을 뒤엎을것 같다”는 속담이 있는데 한창 기세가 오를 때는 무엇이나 다 될것같으나 결과는 두고 보아야 안다는 말이다.  한창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가문이 번창해질 때라도 너무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교훈적 의미를 가진다고 풀이할수도 있겠다.     권불십년(权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无十日红)이라는 속담들은 권력의 무상함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있다. 참말이지 옛말 그른데 없고 속담의 뜻이 빗나가는적이 없다고 할수 있다. 한때는 하늘이 부여한듯 죽도록 휘두를것같던 그 권세, 그 명예가 알고보면 고작 꽃병속에 뿌리없는 꽃과 같은것이다.     어느 금언집에 “지위나 명예도 덕망으로 얻는것이라면 들판의 꽃처럼 향기를 뿌리며 기운차게 뻗어갈것이요 공을 이루어 갑자기 온것이면 화분이나 화단속의 꽃과 같아서 문득 옮겨지기도 하고 뽑히거나 피여나기도 한다. 만약 권력으로써 얻은것이라면 꽃병속의 꽃과 같아서 뿌리가 없으니 그 시들음이 서서 기다릴 시간에 불과하리라. ” 라는 문구가 있었다. 부귀와 명예가 능력과 도덕에 의거하여 따낸것이면 숲속의 꽃과 같아서 저절로 쑥쑥 자라나 번성할것이라.     꽃병속의 꽃이 영원할수 있을가? 우문이다. 하늘 찌르는 오기로 자연의 섭리를 고칠수 없다. 현답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악과만 초래될뿐이다. 상식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욕심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을 낳군한다. 과분한 지위와 명예에는 그처럼 쉽게 습관되여 분수에 넘치는 부귀영화를 반납하는데는 내켜하지 않는게 관례이다. 아니, 관례정도가 아니라 아예 용납조차 안되는 아집인것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하늘낮다 하고 기고만장해 발을 구르고 하늘에 삿대질하지 않을것이다.     서울 갈 당나귀는 발통부터 다르다는 속담이 있지만 당나귀에게 안장을 얹는다고 경마가 되는것은 아니라는 속담도 있다. 어찌어찌해서 출세는 했으되 무능할수록 과시욕이 극한에 치닫고 무덕할수록 군자를 표방하지만 대중이라는 명경속에 그 내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법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운에 달린다. 만리무사고자동차도 언제 번져질지 모르듯 잘 나가던 사람도 언제 곤두박힐지 모른다.    고서에 이르되 선하지 않은 일로 이름(리익)을 얻은 자는 사람이 해치지 않더라 도 하늘이 반드시 죽이느니라(作不善,得顯名者,人雖不害,天必戮之)하였다. 그런데 한자리 하고있을 때 음으로 양으로 제배속을 챙기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 결과야 더구나 예고된 파멸이 아닐가? 오르지 않으면 내릴 일도 없거니와 제 분수를 모르고 과도하게 치솟지 않았다면 일락천장에 분신쇄골이 될 일도 없을것이어늘…     조금은 어긋날수도 있는 얘기를 되새겨보자. 차설, 희랍신화에 태양신 헬리오스는 매일 아침 태양마차를 몰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고대희랍인들은 해가 뜨고 지는것을 태양신 헬리오스가 태양마차를 몰고 동에서 서로 횡단하 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버려졌던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이 자기가 신의 아들임을 립증하고싶어 애비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아버지의 마차”에 올랐지만 마차를 끄는 네마리 말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말이 롤러코스트처럼 요동치는 바람에 고삐 를 놓치게 된다. 결국 말은 궤도를 벗어나고말았다. 말이 낮은 궤도를 달리면 산에 불이났다. 들판은 뜨거운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메말랐다. 강에는 연기가 피여올랐고 나일강은 도망쳐 사막에 숨어버렸다.     온통 불바다로 변해가자 대지의 녀신이 신들의 제왕 제우스에게 호소한다. 파에톤이 아버지의 마차를 몰아 생긴 변고라는걸 알게 된 제우스는 우뢰를 일으켜 오른 손에 벼락을 거머쥐고 태양마차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파에톤을 향해 힘껏 던졌다. 벼락을 맞은 파에톤은 거꾸로 떨어졌다…     파에톤의 이야기는 겸손과 분수를 알라는 경종이기도 하지만 불편한 계승자의 말로를 시사하는 교훈으로 수천년간 되풀이 되여왔다. 사람이 앉을자리, 설자리를 모를 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운집한 사람들속이다. 앉을자리 설자리를 모르고 날치다가 일패도지하게 되는 화근은 자기ㅡ 즉 “나”를 잘 모른것이다.     “나”란 과연 누구인가? 불교에서는 “중생의 심령심처에 여러가지 관념으로 자기 보존과 영속적보호를 위해서 내세우는 영원성, 참다운 ‘나’라는 사실성과 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 자아중심적인 생각으로서 중생은 본능적으로 이를 통하여 자기의 약점과 허위성을 보호하려 한다”고 설교하고있다. 이 류의 “영웅”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강한체 하기 위하여 어떠한 창조적 절대치를 설정하여 그속에 들어가 의지하고 보호받으려 한다는게 공통한 특질이다.     이는 있음직한 인간본성이고 인지상정이다. 부처님은 이 모두가 진실앞에서는 물거품과 같은것이라고 갈파한다. 그 가상적, 가정적인 절대자의 권능을 리용하여 자기의 욕구를 달성시키고 그 허상의 위치에 안주(安住)하려는 하는데 온갖 잡다한 속임수에서도 가장 부끄러운 속임수이다. 자고로 인생마당은 이루다 헤아릴수 없는 크고작은 기득권자들과 그들의 등살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으로 넘쳤거늘…     동서고금, 고왕금래, 국내외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좌에 올라앉아 부정축재하고 내노라 떵떵거리던 무리들의 호황기와 몰락사를 보면서 탁월하게 령리하고 악착스러운 그네들이 너무 요요하면 부러지거나 넘어질수도 있다는 도리를 모를리 없건만 그냥 내문다졌으니 “호쌰창(好下场)” 너무 맹랑하게 된것이다. “선이란 처음이 좋은것이고 악이란 뒷맛이 나쁜것이다.ㅡ헤밍웨이”     자업자득(自业自得)에 사필귀정(事必归正)이라 그처럼 무소불위(无所不为)의 권세가들도 원점으로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는 인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것, 룡이 개천에 떨어지면 미꾸라지가 된다던가? 제눈으로 본적이 없으니 속담 그른데 없다고 믿어야 하리라. “지록위마(指鹿爲馬)”에 공조하며 조걸위학 (助桀爲虐) 한자들로 말하면 그저 줄을 잘못 서는 그런 선택문제가 아닌듯, 가령 자초에 예고된 파멸이였다면 그보다 더한 랑패가 있을랑가? 눈물이 날가?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눈물 마저 아니 나올테니 그보다 더 참담한 일이 또 있을랑가?     농촌에 늙은이들은 무슨 일을 벌려놓고 시작부터 너무 요란떨면 “글쎄나, 좀 두고 보자니…”하며 뒤를 경계하였는데 그앞에 말인즉 “호박넝쿨 뻗을적같아서야” 이다. 무릇 일을 시작할 때 결과를 예상하지 않다가 망태기가 되였다면 “그거 보라니, 당초 아니 시작하기만 하냐?”라는 힐난을 면치 못한다. 한때의 성공에 머리가 너무 뜨거워졌을 때 랭철하게 자신을 단속해야 하는데 그게 가장 배워내기 어려우니 참으로 처세학의 정수요 살아가는 기술에서 으뜸가는 작동이라 하겠다.     대저, 인생일사 만백가지 일에서 시작보다 끝이 좋아야 한다는것은 진리이되 누구나 다 념두에 두고 일을 벌리는것은 아니다. 비유하건대 좋은 소설은 절정 혹은 미성이 멋지여 오래 기억되고 좋은 드라마도 결말이 좋아야 여운이 메아리치고 좋은 노래도 마지막 소절이 매력적이다. 한마디로 만사에 끝이 좋아야 시작이 빛난다. “호박넝쿨 뻗을적같아서야”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鸣动鼠一匹动) 이라는 속담에 대구쯤 되리라. 어쨋건간에 본분을 모르고 납뜨시면 뒤끝이 처절하할것은 당연지사라……                                                                             2017년 3월 11일
795    ( 잡문) 맙시사《황금신》이여! 댓글:  조회:3629  추천:3  2017-03-06
잡문)                           맙시사《황금신》이여!                                          최 균 선         이 지구촌에 허다한 교파들이 있다.     독일 고전철학가 헤겔은 중국의 유교는 도가 있는 종교요 인도교는 환성적종교요 희랍교는 미적종교요 로마교는 합목적종교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가장 진리적이고 자유적이며 제시적인 종교는 기독교라고 일컬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고있건대 그 무엇보다 가장 지적이고 가장 합목적이고 가장 제시적인 실체로 존재하는《종교》가 따로 있다. 그게 무었이냐? 바로 《화페배물교》이다. 파우엘이 황금숭배를 우상이라고 했듯이 그것의 우상은《황금신》이고 기본교리는《황금만능론》이다. 그게 어찌하여 지고무상의 존재로 되였느냐? 크게 이상할것 없다.     전지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래세의 응보,개체의 영생을 준다고 하고 무소불능 (无所不能)하느님은 천당에의 만복을 기약한다 하고 령검하신 부처님은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하여 극락에로 인도한다고 하였지만 아직까지 천당이나 극락에 간 사람이 있다는것을 세상은 알지 못하고있다.     그러나 이《황금신》이야말로 혹자들을 지상락원에서 만복을 누리게 하거나 탐욕의 도를 넘은자들을《지옥》에 처넣는 마력을 가지고있다. 그렇지 않던가? 피부가 검거나 희거나 누르거나간에 빈궁한자나 부한자나 비천한자나 고귀한자나간에 설교없이도 미치도록 신봉하는 전 인류적인 준종교로 되여있음을 누가 부인할것이냐?  《황금신》은 워낙 사람이 땅속에서 캐여낸 비천한 출신이다. 그러기에 처음엔 근근히 가진자들의 장신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류는 《황금신》의 거족적인 발전사를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다. 황금은 자초에 상품의 등가물로 승급했다가 뒤미처 그 주인들의 육체와 령혼의 등가물로 부상되였고 마침내 인간의 생사,질병, 희로애락, 관혼상 제…등 인생일사를 주재하는《제우스》로 등극하였다.     하여 인류는 자기의 지혜로운 원시적 인성과 무지를 불사르고 물욕의 기적을 창조함과 동보하여《황금신》의 노복으로 전락되였는바 인류사회의 진정한 희비극이 이로부터서막을 열게 되였다. 더구나 인간의 금전욕과 권세욕이 야합하여 력사발전의 공간을 종횡무진함으로써 사회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졌다. 탐욕은 권세욕의 효모였고 되돌아와 권세욕의 무덤으로 되였지만 량자는 불과 기름처럼 잘도 어우러졌다. 주님은 하늘 어디쯤에 있는지 알수 없지만 황금은 눈을 즐겁게 하고 금의옥식에 미녀까지 하사하였으니 어찌 죽을판살판으로 신봉하지 않으랴.     신의 사도들이 빈입으로 모종의 단합과 관용, 박애를 설교할 때《황금신》은 철두철미한 배타성과 리기를 앞세우고 세계만능의 공통어로 그 어떤 론리적방법, 도덕기준으로도 해석할수 없는 최고의 철학을 강의해 왔다. 그러면서 구멍만 있으면 숨새여드는 수은처럼 침투의 범위가 날로 확대되여 도처에서 인류의 의지를 강간했고 인류의 리지를 속박했으며 인류의 정감마저 말살했다. 인류의 의지와 리지와 정감이 마멸됨으로써 인성과 그것과의 리탈이 가속화되였다.     아닌가 보라! 법률은 신성하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황금신》을 만나면 대번에 창백무력해지지 않던가? 사랑은 신성하다고 자랑처럼 뇌까린다. 그러나《황금신》앞에선 더러운 양말짝처럼 구지레해지지 않던가! 우리는 자유와 평등, 공리라는 아름다운 명사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황금신》을 만나면 그만 몸종이 되여지는 주객전도의 기이한 현상을 볼 때 당신은 비애를 느끼지 않는지…     누군가 황금과 신을 함께 따를수 없다고 하였지만 주의도, 리념도《황금신》은 코방귀 뀌여버렸다. 하여 역어빠진 인간은 신의 가르침과 속세의 행복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면서 풍요한 물질재부가 주는 만족감에서 살진배가 푸떡거렸고 껄껄 웃던 입으로《주여! 죄많은 이 아들딸들을 구하사이다》하고 기도하지만 얼굴은 한번 붉히지 않았다. 신앙의 위기시대《황금신》은 신앙의 변태를 내갈기고있다. 그런데 이런 변태들은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부끄럼없이 엮어내고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귀맛좋은 최강음은《돈소리》일것이다. 오죽하면 돈소리 하면 배속의 아이도 손을 내민다하고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가 된다고 하였으랴, 반대로 개도 안먹는 더러운 돈이라고 욕하고 개가 금사슬을 걸어도 개는 의연히 개라고 빈정거리지만 그게 다 못가져서 나온 비틀어진 소리라 하겠다.     돈이 왜 나쁘겠는가? 황차 “생즉유욕이요,무생즉무욕(生则有欲无生则无欲)”인 인간인데 돈가지면 좀 좋을가? 돈은 아이를 조숙시키고 어른들을 “명지산유호,편향호 산행(明知山有虎偏向虎山行)”의 천하기개를 떨치게 하거늘 다만 돈이 천당의 열쇠가 되느냐 지옥의 열쇠가 되느냐는 그 사람의 용의와 됨됨이에 달렸을뿐이다.     돈의 이미지는 다양하다. 돈을 손에 쥐면 종이장처럼 가볍지만 머리속에 들어앉 히면 연덩이처럼 무겁다. 돈은 물과 같다. 큰배를 띄울수도 있고 휘딱 뒤번질수도 있다. 돈은 태산같기도 하다. 발밑에 딛고서면 천지가 넓어진듯 느낄수 있고 머리에 이면 짓눌려 분신쇄골이 되고만다…이 모든 경세지언들은 곧 돈에 고유한 이률배반을 말해주고있다.     당조의 재상 장설의《전본초》를 한번 읽어보는게 좋겠다.《돈은 그 맛이 달거니와 성질이 열(熱)하고 독성이 있니라. 그러나 능히 얼굴의 주름살을 펴주고 주림을 말려주며 곤궁지환(困穷之患)을 헤침에 령험하도다. 능히 린방을 흥하게 하고 할수  있거니와 덕행을 더럽힐수도 있니라. 전본초는 천생 청렴을 꺼리거늘 탐욕자가 복용 할제 고르게 함이 상책이다. 불원이면 그 차고더움이 서로 격하여 곽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니라. 전본초는 무시로 딸수 있으나 비리로 따면 정신을 상하게 하도다.     만약 모으기만 하고 헤치지 않으면 수재나 화재, 도덕의 화를 자초할수 있고 헤치기만 하고 모으지 않으면 기한에 빠지게 되니라. 대저 모으고 쓰면서 보배로 여기 아니하면 덕이라 하고 그 취함이 알맞으면 의라고 하며 구하지 않고 나누어가지지 않음은 례라 하며 중생을 널리 구제하면 곧 신이라 하니라. 이같은 7술(七術》을 잘 익히 면 장수할수 있으나 비리에 쓰면 심지를 크게 상하게 되니라…” 그러나 이런 금과옥률(金科玉律)도《황금신》의 배우에서 탐욕이 브렉딴스를 출 때는 다 마이동풍이 되리라. 돈이 귀신을 석마를 돌리게 한다는 말도 거꾸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사람을 부리던 돈이 인류의 순복도구가 될 때면 인간세상은 밝아질것이요 생명없는 돈이 내내 인간의 주재자가 된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게 될것이다.      맙시사《황금신》이여!                                  2002년 7월 9일 《길림신문》문예부간
794    (진언수상록 48)부처님도 돈내에 취할라… 댓글:  조회:3342  추천:0  2017-02-17
                                                           부처님도 돈내에 취할라…                                                                          진 언       근일에 중국불교협회 부회장이며 장사 록산사의 주지인 성휘(圣辉)법사가 호남성불교협회 제 6차대표대회에서 호남의 29개소 사원의 주지들과 공동히 발기하여 사원의 문표를 주동적으로 취소하고 면비로 개방함으로써 상업화를 두절시킨다고 공포하였다. 명승지 문표값을 끊임없이 높이는데 공중의 념원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지방정부와 기업측의 리익만 추구하는것은 그야말로 “만수천산은 어디까지나 돈”이 라는 위시장경제론리를 따르는 전형이며 “일체는 돈을 향하여”는 절대코 량성사회의 응유의 내용이 아니라고 질타하였다. (《신경보 (新京报)》5월 14일부)     아닌게 아니라 근년에 각지의 사원들에서 대대적으로 확건토목공사를 벌리는데 교의를 신장시키고 종교인재를 배양하는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가? 공방형이 짝짝꿍치 는 풍경은 아닌가? 문물고적들을 과도하게 개발함으로써 문화함량이 희석되고 고유의 맛이 변하였다고 지성인들이 대성질호하고있다. 사원들마다 배불(拜佛)자들을 위하여 개방했다기보다 공방형(孔方兄)형을 맞아들인것이다. 이런 사이비현상으로 하여 언젠가는 불교가 사람들의 심목속에 한푼의 가치도 없은 허상으로 되지 않을가싶다.     종교신앙은 심령을 정화하는 신성한 미덕으로서 돈내는 불교정토와 인연이 없다. 사람들의 전통관념속에는 사원은 가장 깨끗한 곳으로서 세속의 추악한 현상들이 없고 풍진세계의 번잡한 소음이 없이 오직 대인대지(大仁大智)만 있다고 각인되여있다. 하다면 일체 탐욕을 등진 성지라는 절마다 “관광지”로 “상업번화가”로 되여 조금 남아있는 정토마저 상업경쟁의 희생품으로 충당되였으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문표도 자그만치 받던것이 시장경제의 아주좋은 형세를 바싹 따르는 표현인지 100-200원에로 치달아올랐다. 사원내에서는 승려들이 관광기념품을 팔기에 열을 올린다. 소림사에서는 향한대를 태우는데 6000원이나 한다고 하니 이 아니 놀라운 기문인가? 천궁을 소란한 손대성도 여래불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공방형의 손에 쥐여 놀게 되였으니 대자대비한 부처님이 가가대소할것인가?     절마다 상업화, 산업화,브랜드화의 경향이 이미 풍조로 되였는데 이는 불교의 현대적진화인가? 퇴보인가? 이는 필연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시행착오인가? 잘 모르긴 하지만 아무도 정답을 낼수 없을것이다. 한것은 오늘의 사원관리는 더는 사람들의 상상속에 청등고불(青灯古佛)과 목어종성(木鱼钟声)이 아니고 더는 산림불교, 제손으로 농사지어 먹는 반농반선(禅)의 경상이 아니다. 아무리 문외한이고 국외인이라도 전통가치기준과 발전각도에서 볼 때 불교문화는 교리, 교의(教义)에 의거하는것이지 급공근리적인 경제리익의 다소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아님은 잘 알것같다.     불교는 신격화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화하는 종교로서 깨달음, 실천, 지혜, 자비, 평등을 주장하는 평화의 종교이며 스스로 깨달음 즉 자각을 지향하여 스스로 부처가 되는 종교 즉 타력문 (他力門)이 아니라 자력문(自力門)이며 형이상학적, 현학적, 관념적 종교가 아니라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을 지향하는 실천의 종교로 평판나 있다.     불교의 “팔정도”는 사람을 정도로 나가라고 가르치고있다. 사성제(四聖諦)또는 사진제(四眞諦)라는것이 있는데 네가지 절대진리라는 뜻이다. 사제(四諦)를 고집멸도 (苦集滅道) 사제라고 한다. 고와 집은 미망의 세계의 결과와 원인을 밝히고있으며 멸과 도는 깨달음의 세계의 결과와 원인을 가르치고있다. 이 사제는 부처님의 최초의 법문이라고 일러왔는데 마침내 부처님도 금전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가?     불교에서 수행이라는것은 우리 삶의 탐진치(貪瞋癡ㅡ貪慾, 진에(瞋恚), 우치 (愚 癡)의 비중을 약화시키는것을 말한다고 해석하고있다. 시시각각으로 흩어져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한생각으로 집중시켜 정성껏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생각하고 찬탄하는 “정근”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지며 무한히 맑고 밝아지라고 경을 읽고 념불한다.     일찍 부처님께서 “내가 열반에 든뒤 말법시대가 되면 갖가지 오물들이 세상에 등장, 간사함과 협잡을 부려 선지식 노릇을 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현혹케 하며 가는곳마다 남의 집살림을 망하게 할것이다. 내가 비구들로 하여금 걸식하게 하고 제손으로 익혀먹지 못하게 한것은 온갖 탐욕을 버리고 정각을 이루게 하려는것이니 그저 지금 살아있는 동안 삼계에 묵어가는 나그네로서 오직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함이니라. 그런데 어떤 도둑들이 나의 법복을 훔쳐입고 여래를 팔아 갖가지 업을 지으면서 모두 부처님법이라고 말하며 한량없는 중생들을 의혹케 하여 무간지옥에 떨어 지게 할것이다.”라고 경계하였다지만 시대와 더불은 변화무상함을 어이 당해내랴,     세속을 등진다는 승려들이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인터넷으로 현대문명세계를 널리 섭렵하는 21세기이니 어찌 목탁을 두드리며 좌선하는 고풍스러운 중의 이미지를 고집할수 있으랴만 세속인들에 못지 않은 고도의 물질문명의 주동적인 향수는 불교의 전통관념과는 상충되지 않는가? 승려들이 도를 닦는데 전념하는것이 아니라 돈나무(摇钱树)신자들을 불러들여 치부경을 외우거나 명예를 낚는 일에 혼신을 팔며 정치자본을 얻으려 한다것은 공개된 비밀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지의 항간에는 “경제승려”,“정치승려”라는 사이비한 신조어들까지 류행되고있다.     이런 풍조에 신성한 불상마저 유흥객들을 끄는 도구로 충당되고있다. 5월 20일 “봉황사이트(日凤凰网)”에 의하면 희미한 네온등불빛아래 은은한 기타소리가 울리는데 가수의 등뒤에는 높이가 4메터나 되는 라체불상이 라체녀자를 끌어안고 교배하는 모양인 일컬어“艳遇佛”이 턱하니 놓여있다고 한다. 이 불상을 환희불(欢喜佛)이라 하는데 본래는 서장에서 전해내려온 불교밀종에 속하는 본존 신(本尊神)으로서 즉 불교에서 “욕천(欲天)”,“애신(爱神)”이라 한다.     남자는 법을 대표하고 녀자는 지혜를 대표한다, 남체와 녀체가 서로 껴안고 있는것은 법과 지혜가 더불어 이루어지고 둘이 합하여 한사람이 된다는것을 표시하는데 법계와 지혜는 무궁하다는것을 비유하여 표시한것이란다. 불교각파에 모두 불상이 있지만 환희불은 밀종에만 있고 오직 선장에서 전파된 불교사원에서만 모시고 불공한단다. 조형으로 보면 밀종의 “남녀쌍수(男女双修)” 에서 기원된것이다. 이는 중국식의 만화가 아니면 중국식 가치추구의 걸작인가? 불타에 대한 모욕은 아닌가?     그러나 유흥가에서 이런 불상이 돈벌이 수단이 되였다는것은 분명 신앙소비의 혼잡성, 정신산품가격의 실조현상이 아닐수 없다. 사원내에서 비자원적으로 모금하게 하고 유인 혹은 공갈성적으로 점괘를 받게 하는 등 해괴한 일들이 비일비재이다. 종교신앙은 인성의 수요로서 자고로 돈과 재물과 얽혀돌았으나 이건 아닌듯싶다.     지금 불교는 세계화, 우상화, 세속화, 기독교화 네가지추세에 도전받고있는데 사원의 상업화는 불교의 세속화로 체현되고있다. 절에는 도풍이 없고 장사냄새만 짙어 돈냄새가 향기를 뒤덮어버리고있다. 승려들도 이화되여 본래의 수행자, 홍법자 (弘法 者), 법무주지자의 각색을 그만두고 재무관리인원, 활동기획자, 행정관리자 심지어는 공공관리자의 각색을 맡고있다. 그러다보니 경읽을 시간도, 념불할 시간도, 수선할 시간도 없으며 홍법교화(弘法教化)할 시간은 더구나 없다고 한다. 그래도 금빛가사는 걸치고 한손에 핸드폰, 한손에 념주를 만지고 저녁엔 누리꾼으로 맹활약하는 문명의 자태로 고전적불교를 풍미하고 있으니 이 아니 기관인가?! 선재, 선재로다!!!                                                        2013년 5월 21일
793    내가 만난 그 사람 댓글:  조회:3825  추천:0  2017-02-16
                                                내가 만난 그 사람                                                       최 균 선       자기중심주의시대, 저마끔 자기 하는 일에 열중하다보면 누구를 어떻게 돌보고 이른바 “쓸데없는 일”에 오지랖 넓게 배려를 베풀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이요 그것에 습관되여가는 우리네 삶의 마당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리해득실로 얽힌 일도 아니건만 참으로 백성의 공복답게 후더운 마음을 가지고 진심을 쏟았다. 나는 급별이 높은 관리들과 상종한적도 별로 없거니와 들은 풍월로 일종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터였다. 우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고 강물도 우물을 범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례컨대 재정사업을 하는 사람이 우리네 문학활동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여도 누가 시야비야 할 일이 못된다.     원래 문학에 별로 애호를 가지지 않는 행정간부들은 문학을 “소인”이 하는 일로 여길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보기좋게 금구를 깨뜨려보인 그 사람에게 왜 이처럼 감동받게 되였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얼마전 “단풍수필회”의 일로 부회장인 장진숙녀사와 함께 주재정국에 간 일이 있다. 너렁청한 사무실, 커다란 사무상뒤에 50대의 사람이 한창 전화를 받고있다가 의미있는 눈길을 보내며 잠간 앉아서 기다려달라는듯 손짓하였다. 그 얼핏 들었다 놓는 손짓이 왜 아무 거부감도 담고있지 않았는지 모른다. 사업일군이 커피를 가져다주자 가슴속에서 다시 들척지근한 어떤 감응이 번져갔다.     국장인지라 예상했던대로 아침부터 바삐돌았다. 련이어 손님이 찾아들었고 내부령도와도 무슨 토론을 하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나 여느때와는 달리 조급증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를 “접견”하러 이쪽으로 건너왔다. 손을 내미는 그 손이 친절했고 담배를 권하고 불까지 붙여주는 그 거동에서 틀거지를 전혀 찾아볼수 없어 마음에 쑥 들어오면서 챙겨가지고 왔던 거리감이 대번에 줄어들어버렸다.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기전에 그쪽에서 먼저 허두를 뗐다.     ㅡ우리 연변에 원로작가들이 “단풍수필회”라는 사회단체를 내와가지고 민족문화의 진지를 지켜가는 그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고 보귀하게 생각됩니다. 한개 민족으로 말하면 언어문자는 바로 그 민족의 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언어문자를 계승, 발전시키려고 로심초사하는 로작가님들 존경하고싶습니다.     내가 놀라와하는것이 이상스러운 일이였지만 아무튼 나는 놀랐다. 아무 가식도 없이 하는 진심을 그 눈빛과 그 어조에서 얼마든지 확신할수 있었다. 일언중천금이였다. 첫마디부터 딱딱한 업무적인 대화가 아니여서 더구나 친숙감이 앞질러나갔다.     ㅡ사실 나는 문학을 하지는 않지만 관심은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책도 보기좋아하구요. 찾아오신 목적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내가 더구나 민족문자사업, 나아가서 문화사업에 더욱 생각이 깊어진것은 전번에 운남성려강 나시족 자치주에 사업차로 갔을 때 만난 나시족사람과의 대화에서였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들은 언어문자를 가지고있는 자랑찬 민족이라고 자호했습니다. 그 자신은 형상문자인 자기네 글을 많이 알지도 못하지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며 긍지에 차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보다 월등한 민족이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호기심이 동해서 그 민족이 무슨 민족이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연변이라는 곳에 조선족이라 하지 않겠습니까?내가 바로 그 조선족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부풀어올랐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문화대국이 되여야 진정 경제대국이 될수 있다는 큰도리같은것을 알고있는지 모르지만 그의 자랑스러운 모습에서 민족문화가 살아남아야 민족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더한층 다져지였습니다. 로작가님들은 바로 이런 대업을 위해 로심초사하며 석양을 불태우니 국외인이지만 참으로 우러러 보입니다.     ㅡ참 말씀 한마디에 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슨 문제해결을 제쳐놓고 그런 문화의식을 가지시고 있고 말씀도 그렇게 하시니 정말 고마운분을 만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겁습니다.     ㅡ과찬입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우리 주당위 등개서기도 문화사업에 매우 관심이 깊은 분입니다. 어느 작가가 출판난에 부딪쳤을 때 자기 주머니를 열어서 도와준 그런 분입니다. 세로운 리주장도 성에 있을 때부터 문 화사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많이 배려를 돌린 분입니다. 그리고 물론 자기의 주관범위이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주의 리흥국선전부장도 문학과 민족문화사업의 진흥에 심 혈을 붓고있습니다.     이쯤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면 문학같은데 행정적으로나 대하겠지 하고 생각하던 편협한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 무너진 편견우에 민족문화사업을 지지성원하는 한 재정사업자의 지성적인 형상이 새롭게 부상되였다.     ㅡ언제 기회가 되면 우리 늙은이들 자리에 모시고싶은데요     ㅡ아니, 감사합니다. 우리 이렇게 서로 활짝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게 얼마나 좋습니까? 수필회를 영위하는데 어려움이 많은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느 해 외인사나 단체에서 구차스레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로작가들의 의로운 문필사업은 우리가 응당 적극 지지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걱정은 말고 보귀한 문화유산을 굳건히 남기려는 사업에 만년을 빛내주십시오…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리념과 문화가치관이 동일선상에 놓여있음에랴! 등개서기나 리주장을 비롯해서 우리 민족간부들부터 민족문학과 문화사업을 진정으로 배려를 돌리고있다는것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일이 있을것인가?! 나는 묵은 선입견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섰다. 그러자 그는 겸손한 자태로 명함장을 내주었다. 조룡호국장 겸 당위서기였다.     굳게 잡은 손에서 숭고한 묵결을 느낄수 있었다. 밖에 나와서 바야흐르로 가까와 지는 봄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예이제 밝게 웃고있었다. 화사한 봄이 오고있는것이다. 나의 이 졸문은 조국장에게 그 무슨 후광으로 될수는 없다. 그도 이러는걸 바라지 않는 인격자인줄로 믿고있다. 그러나 돋보이지 않을수 없는 한 민족간부의 형상을 조명하고싶어 무딘 필을 다듬었을뿐이다.                                    200 8년 3월 3일 (단풍잎)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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