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가불러 끝없어라
최 균 선
원래 산가란 전야에서 일할 때나 혹은 정감을 토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부르는 가곡이다. 산가는 내용이 광범하고 결구가 간소하며 곡조가 명쾌하고 정감이 질박하며 절주가 자유롭다. 산가는 주요하게 고원, 내지, 산향, 어촌 및 소수민족지구에 많이 분포되여있다. 사람들이 길을 가거나 땔나무를 하거나 방목하거나 풀베기를 할 때보통 잘 불려진다. 노래없이 못사는 인간이기에 산간에는 산가요, 초원에는 목가요, 어촌에는 어가(渔歌), 선가(船歌)등이 불리여 노래하는 인생이기도 한것이다.
여기서 나의 산가는 산이 좋아서 나름대로 지어부르는것이다. 산이 왜 좋냐? 일찍 공자가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 일렀으되 나에게 산이 좋고 물이 좋은데는 별도의 리유가 없다. 물을 좋아하지만 인자여서가 아니고 산을 좋아하지만 지자여서가 아니며 지자여서 움직이기 좋아하는것이 아니며 남달리 어진자여서 청정함을 좋아하는것이 아니며 지자여서 즐길줄 아는것이 아닌것처럼 말이다.
창공에 치솟은 아아한 산은 누구라없이 우러러보게 되여있지 않던가? 산은 륙지에 온갖 생물들의 발원지로서 날짐승, 들짐승이 그곳에 터전을 잡고 풀과 나무와 꽃들이 거기서 자란다. 만물을 길러내면서도 귀찮아하는 법이 없고 모두가 그 혜택을 나름껏 끝없이 누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이 그곳에서 일어나 천지의 쌓인 기운에 숨통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자연히 산을 숭경하게 되지 않을가? 몇백, 몇천 억겁을 제자리에 지켜서서 그 모습으로 인간들의 우러름이 되고 무언의 교화로 감화시키며 세상의 막힌 기운을 소통시켜주는 소임을 다하는 산, 세속밖의 진풍경은 오로지 산에 있을뿐이다.
물론 산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산이 아무리 넉넉한 품일지라도 산은 결코 아무나 받아들이는것은 아니다. 산의 흉금과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산의 내속을 알아보려는 정성과 산을 아끼는 마음을 지녀야 산도 비로소 가슴을 열어 나를 아늑한 그 품에 안아줄것이다. 선인들은 오래 머물러 바라보면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切)의 호흡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왔다. 산을 안다는것, 산과 막역한 정을 주고받는다는것은 아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몇번 산에 올랐다고 산을 안다할수 있을가?
산은 고유의 의미가 색바랠수 없기때문인가, 형태적특성 이상의것인 산이라는 자연현상의 모양, 크기, 고도, 구성성분, 색채 등 각이하지만 산의 개념 등 의미차원의 범주에 포괄될수 있는 산은 모두가 정나미가 돌게하는 우주의 걸작이다. 나름의 감각, 경험을 가지고 형태적인것과 의미차원으로 구분하는것은 산에 대한 오해이고 모독이다. 산앞에 마주설 때마다 그 느낌이 하루한날 같다면 산을잘 모르는것이다.
북송의 위대한 산수화가 곽희(郭熙)는 《림천고치(林泉高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이렇지만 몇리 떨어져서 보면 또 이렇고 십여리 떨어져 보면 또 이러하니 멀어질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걸음마다 바뀐다는것이다. 산의 정면은 이러하고 옆면은 또 이러하며 뒤면은 또 이러하니 볼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면마다 보아야 한다는것이다. 이와같이 하나의 산도 수십백가 지의 형상을 아우르고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을수 있겠는가? 산 하나의 모습이 이렇듯 천변만화일진대 려산의 진면목을 어찌 안다하겠는가? 다만 외경과 사랑을 담아 산을 바라고 산을 그리며 산과 닮아가기를 바랄뿐이다.”
산을 낀 마을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고향산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할것이다. 산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자별난 감정을 다져넣는 곳이다. 산은 그 높낮음과 무관하게 시간적, 공간적으로 항상 마음을 끄는 성스러운 존재물이다. 동년시절 내 마음속에도 비암산 일송정이 웅좌처럼 들어앉았고 청년시절엔 모아산이 인생의 한모퉁이로 새겨진후 세월이 아득히 흘렀어도 낮아질줄을 몰랐다.
산에 가면 그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던가, 산은 산마다 민족의 신화, 전설의 발원지인 명산일수는 없지만 그나름의 사연들을 간직하고있다. 이를테면 비암산은 일송정 선구자의 노래로 유명해졌고 모아산은 지금은 연길, 룡정사람들이 등산을 즐기는 명소로 되였고 내 기억속에는 농부시절의 땔나무터로도 의미가 있다.
청년시절, 엄동의 모아산에서 싸리나무를 힘에 버거울만큼 한짐 해놓고 땀을 식힐 때, 산은 나의 어니처럼 그윽하고 대견스러워 하는 마음으로 나를 반겨주는듯 싶었다. 그래서 이른봄, 한겨울이면 모아산꼭대기, 서쪽비탈, 골짜기를 누비며 초부의 산노래를 엮었다. 그러다가 팔자가 펴서 분필가루를 먹고사는 훈장이 되고 도시민이 되여서도 비암산, 모아산을 잊을세라 저만치 바라보며 살아왔다.
나는 사계절의 산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새봄의 산이 더욱 좋다. 라목의 헐벗음과 추위를 떨어버린 숲, 소생하는 생동함이 동년의 정서에 잘 맞기때문이였을가? 내 인생의 초년은 산이 베풀어주었다. 산은 푸른 숲을 이루고있을 때 더없이 후덕해보인다. 헐벗은 산은 너무 쓸쓸하다. 숲은 그늘을 주고 물을 주고 산소를 주지만 헐벗은 산은 눈보라와 추위로 준엄한 시련만 안겨준다.
고향의 산도 여느 산들처럼 흙과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곳이지만 사계절 마음을 열어 사람들을 품어준다. 진달래꽃이 분홍치마를 두르던 봄의 비암산,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신록의 모아산, 폭염을 식혀주는 은총같은 깊은 그늘을 지어주는 무더운 여름의 모아산기슭, 장려한 단풍으로 불타는 동서남북의 높고낮은 뭇산들, 고즈넉하게 마음을 닫는 한겨울의 눈덮힌 산발, 그 모든 산의 모습은 고향의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전이되여 사람을 산이 되게 한다.
산의 리용과 보존의 판단은 객관적상식이 통하는 기준에서 결정할 문제지만 그 기준은 사람의 편견에 지배되여왔고 멋대로 변형되여왔다. 명산이면 명산일수록 더 못살게 굴었다. 만고의 전설을 지니고있는 민족성산을 보라. 문명의 혜택으로 몸살앓는 산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격한것인가? 대답해야 할 산은 말이 없다. 천년천년, 만년만년 억만년을 침묵으로 치솟있어도 세상사의 모든 리치를 다 담고있다. 산은 만물의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척도로서 인류의 진화와 더불어 존재해 왔으니 말이다.
산에 오를 때 숨가쁜 인고의 발걸음도, 정상에서의 시원한 자연풍의 그 짜릿한 느낌도 모두 인생의 페지들에 많은것을 적도록 계시해주지 않던가!격식도 형식도 죄다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과 함께 숨쉬려는 사람들은 흐르는 땀의 무게만큼 산이 주는 의미를 새기게 될것이다. 언제나 함께하는 마음, 언제나 배려하는 마음, 언제나 바라지 않는 마음을 산에서 배우고 인생의 폭을 넓히면서 새로운 느낌들을 간직하며 산이 주는 향수에 취할것이다.
산은 인간들의 삶을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무한정 말없이 봉사해왔을뿐이다. 그러나 산을 고스란히 보존해 온것도 아니다. 인류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키려고만 해왔기때문이다. 산의 리용과 보존이라는 이률배반적인 존재가치를 합리화하는 인간의 론리는 얼마나 사이비한가! 바라건대 지구촌의 영원한 기념탑인 산을 아끼시라.
2015년 4월 4일 2017.6.1(연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