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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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야래자(夜來者) 설화와 한왕(汗王)산성 댓글:  조회:4694  추천:49  2009-09-21
    “한 마을에 처녀가 살았는데 밤마다 웬 남자가 와서 그와 동침하였다. 그러나 이 남자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다. 어느 날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아서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워낙 돌굴에 있는 지렁이었다. 그 후 옥동자를 순산하였으니 그가 바로 나라를 세운, 혹은 유명한 누구였다…”   눈 감고 줄줄 외울 수 있는 옛말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런 야래자 설화는 다만 지명과 장소, 이름이 약간씩 다를 뿐이며 중국과 한국, 일본, 서구까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구전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 견휜의 출생설화가 이와 비슷하며 또 서구의 ‘큐피트-사이키’형 설화도 이와 사뭇 비슷하다. 함경북도 회령지역에 전해오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도 다만 돌굴이 늪으로, 지렁이가 구렁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에서 등장하는 이 늪은 바로 한왕산성에 있는 걸로 전한다. 한왕산성은 몽골어로 임금, 왕의 산성을 이르는 말로 용정시 삼합진에서 서쪽으로 약 10㎞ 상거한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다. 한왕산성은 현지인들이 누르하치가 쌓은 산성이라고 주장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학계에서는 또 이 산성이 조동(朝東)촌 부근에 있다고 조동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이 위치한 산은 천불지산 산맥의 지맥으로 두만강 강기슭에 툭 튀어져 나왔는데, 산 정상의 삼면이 벼랑인 까닭에 흡사 고깔모자처럼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뜨인다.   산기슭에 있는 조동촌 어구에는 서북쪽의 벼랑바위를 배경으로‘한왕산성’ 표지판이 서있다. 이 표지판을 지나 골짜기에 들어서서 북쪽으로 10여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선다. 산 정상이 왼쪽에 있는지라 그쪽의 수풀로 사라진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비탈을 얼마간 올라가자 불쑥 높은 둔덕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이 둔덕은 반달 모양으로 벼랑을 감싸고 있었는데, 오솔길은 둔덕을 지나 곧바로 벼랑위에 덧쌓인 석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둔덕은 다름 아닌 석성 동북쪽 성문 밖의 옹성이었던 것이다. 옛날 산성으로 내왕하던 교통로도 바로 지금 발밑에 밟고 있는 이 산길이 아닐까. 오솔길에 그려진 들쭉날쭉한 나무 그림자는 마치 그리스의 아리송한 상형(象形)문자처럼 홀제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옹성 문자리 부근의 수풀에는 깊이 1.5미터, 지름이 2미터 되는 웅덩이가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인공적으로 쌓은 돌들이 아직도 반 미터 남짓한 높이로 남아있다. 옛날 초병들의 막사자리로 알려진 유적이었다. 이곳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비탈이었는데, 이 때문에 산성 주인은 옹성을 만들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또 초소를 세울 정도로 성곽 경호에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옹성 밖에서 잠깐 화젯거리가 생겼다. 남쪽 막사 유적지 부근에 벼랑가로 간신히 톺아 오른 오솔길이 있었던 것이다.   “옛날 초병들의 소행으로 보이네요. 다문 몇 걸음이라도 덜려고 한 게 아닐까요.”일행 중 누군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이 오솔길은 초병들이 옹성 쪽으로 돌아가서 성으로 들어가는 일이 귀찮아 만든 ‘지름길’ 같다는 것이었다.   옹성을 지나 내성 성문에 들어서자 불시에 눈앞에 뉘엿한 평지가 나타났다. 산 정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평했고 또 부지가 엄청 컸다. 성벽은 절벽 위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 정상을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지날 정도의 오솔길이 성벽 내측에 그림자처럼 졸졸 붙어 있었다. 둘레가 1,500m인 한왕산성은 중등 크기의 산성으로, 지세를 보아 전형적인 산봉식 산성이었다. 남쪽은 수직되거나 거의 수직된 5~15m 높이의 현애절벽이었는데, 산성은 이를 직접 이용하고 있었다. 기타의 성곽은 이런 자연적인 낭떠러지나 천험 위에 0.5~5m의 높이로 돌을 쌓고 있었다.   산성의 동쪽 모서리에는 망루자리로 보이는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이 자리에 들어서니 산기슭을 따라 연연히 흘러가는 두만강이 먼발치에서 보였다. 동쪽의 삼합진으로 통하는 길과 앞쪽의 강 건너 북한의 회령시 유선, 그리고 서쪽의 두만강 상류로 통하는 강기슭 길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웅덩이가 위치한 모서리 자체가 천연적인 망루였다.   성문자리는 서남쪽에도 하나 있었다. 이 성문은 두만강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바깥쪽은 경사가 심한 비탈이어서 수비에 유리하고 공격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북쪽 성문처럼 옹성이 없었고 초소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낭떠러지가 낮은 까닭으로 그 위에 서너 미터 높이로 덧쌓은 석성은 산성 전반에 걸쳐 이곳에서 제일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성문 부근의 석성은 약간 허물어진 곳이 있어서 아예 속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석성은 돌들을 안쪽 깊이까지 엇물려주어 역학적으로 아주 안정된 구조를 이룬 모습이었다. 바위 위에 덧쌓인 성벽은 돌들을 모양새에 따라 맞물려서 차곡차곡 올려 쌓고 있었다. 이런 성벽은 아래부터 물려오는 적심석으로 해서 아주 견고했다. 이 때문에 산성은 천년의 풍상세월 속에서 거의 원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성에는 집 자리로 추정되는 건물유적이 세 개나 남아있다. 산성 남쪽에 위치한 이런 건물유적에는 흙으로 쌓은 담이 있어 아직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산성의 크기와 건물유적으로 미뤄 이곳에 있었던 수비군을 3,0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갑자기 수풀에서 후드득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대여섯 마리의 꿩이었는데, 건물유적 북쪽의 늪가에서 물을 먹고 있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타원모양의 이 늪은 어림짐작으로도 지름이 50m가 훨씬 넘었다. 산 정상의 수원지로는 과연 일대 장관이었다. 늪 서쪽에는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인공으로 쌓은 둑이 있었다. 둑 부근에는 또 지름이 10m, 깊이가 2m 되는 물웅덩이가 있었으며 물웅덩이에는 큰 돌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옛날 물을 긷던 곳이 아닌지 모른다.   현지인들은 산성에서 천 무늬가 있는 회색 기와조각을 발견, 또 돌구유와 구리 숟가락을 발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성한 수풀 때문에 기와조각은 더는 한 조각도 주을 수 없고 구리 숟가락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 서남쪽 성문부근의 건물유적 밖에는 아직도 돌구유가 그대로 남아있어 위의 내용을 방증하고 있었다.   산성 남쪽 1.5㎞ 되는 두만강 기슭에서는 바로 이런 구유모양의 나무관이 여러 기 발굴되어 산성과 이상한 ‘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무덤 떼는 조동촌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동 무덤떼로 불리는데, 연변지역의 명나라시기 무덤으로는 단연 첫손에 꼽힌다. 1976년, 연변박물관에서 13기의 무덤을 발굴, 대부분의 무덤은 나무관을 쓴 흔적이 나타나고 있은 걸로 전한다. 무덤의 매장풍속을 보면 단인장이였으며 사기기물과 구리기물, 쇠 기물, 조가비 치렛거리, 구슬, 질그릇 등 230여점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조동 일대는 명나라 때 여진인의 활동지역이였으며 건주좌위의 소재지인 북한 회령과 불과 10㎞ 상거한다. 상술한 정황으로 미뤄 조동무덤떼는 건주 여진인의 무덤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로 자리하고 있다.   산성 부근의 이 조동무덤떼는 산성과 그 무슨 연관이 있으며, 따라서 학계에서는 명나라 때의 여진인이 바로 한왕산성의 진실한 주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다. 정말로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도 여기 산성과 그 무슨 ‘실’로 꽁꽁 얽매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성의 위치나 특이한 지세 그리고 축성기법 등을 미뤄 일찍 고구려시기에 축성되고 그 후 또 요․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산성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다만 이런 견해가 위의 거센 주장에 파묻혀 몹시 미약하게 들릴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만강지역에는 설화를 비롯하여 여진족의 형상이 이상하다고 할만치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이 지역이 여진족의 옛 활무대였던 특수한 지리, 혈연적 관계를 묵과할 수 없다. ‘사돈(査頓)’이 여진족의 낱말이듯 함경도 사람들의 피에는 여진족의 피도 적잖게 섞여있는 걸로 알려진다. 그걸 잠시 제쳐놓더라도 조선왕조의 건국역사에는 여진족 인물이 적지 않게 출현한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대공을 세운 퉁두란, 즉 훗날의 이지란(李之蘭) 역시 여진족 대토호로 전해지고 있다. 미상불 한왕산성은 여진족의 흔적이 너무 진해서 여타의 주장이 모조리 파묻히고 있는지 모른다.   한왕산성은 수원지나 건물 등 일반 시설은 물론이요, 견고하고 전술의미가 있는 옹성 그리고 수비에는 쉽고 공격에는 어려운 석벽 성곽이 있는 등 두만강지역의 전형적인 천험 요새로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산성의 축성연대는 아직도 베일에 깊숙이 가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성의 시원을 열어놓은 ‘야래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수풀에 장벽처럼 둘린 늪에는 야래자의 숨결인 듯 정오의 아지랑이가 그물그물 춤추고 있었지만, 천년의 신화 속으로 사라진 야래자는 더는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9    주몽의 화살에 뚫린 구렁이산 댓글:  조회:3722  추천:76  2009-09-09
주몽의 화살에 뚫린 구렁이산 김호림   두만강은 도문시 양수진(凉水鎭) 경영(慶榮)촌 부근에 이르러 활등처럼 크게 휘어진다. 조선반도 최북단에 있는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가 바로 경영촌의 강남에 위치한다. 경영촌의 동쪽에는 활등을 타고 앉은 바위산 하나가 있으니 구멍이 많다는 뜻의 굴륭산(窟窿山)이라고 불린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활을 쏜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 굴륭산, 그래서 굴륭산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유난히 많은 게 아닐까?   주몽은 일곱 살 때 벌써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목표물을 정확히 맞혔으며 이로 하여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린 이름이라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그러나 전설은 항간에서 부풀린 게 많아서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렇든 말든 굴륭산에 화살이 뚫은 흔적인지는 몰라도 구멍이 많다는 건 현지에서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여름철이면 이런 구멍에는 뱀이 유난히 많아서 굴륭산은 일명 구렁이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걸 다시 한자 이름으로 만들어서 굴륭산은 또 구룡산(九龍山)이라고 불린다. 아무튼 확실한건 굴륭산에서 고대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마을에서 물도랑을 팔 때 옛날 물건이 많이 나왔다고 하던데요…” 현지인 조만길(40여세)씨는 아리송한 기억의 끈을 가까스로 잡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마을 부근에서 유적지 표식판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중에 보니 표식판은 경영촌 북쪽을 지나는 도문-훈춘 철길과 도로 교차로 부근의 둔덕에 있었다.   지면의 유물은 주요하게 굴륭산 서쪽 산기슭과 경영촌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지의 면적은 길이 1,500m, 너비 250m로 알려지고 있는데,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석기, 골기, 자기, 건축자재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은 1957년 겨울철이었다. 물길 공사를 하면서 마을 남쪽의 두만강 기슭에서 많은 유물이 나왔고, 굴륭산 서쪽 기슭의 공사현장에서도 석기와 골기와 발견되었다. 연변지역 원시사회 유적지에서 유일하게 삼족 기물의 밑 부분 유물 2점이 발견되어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가치와 재부의 상징인 조개껍질의 화폐도 출토되어 한때 화제가 되었다. 그때 벌써 화폐로 교환할 정도로 거래가 몹시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적지에서는 건축자재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는데, 연꽃무늬의 막새, 압지무늬의 평기와 등이었으며 이런 기와에는 천 무늬가 있었고 대부분 홍갈색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유물이 모두 굴륭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학계에서는 이 유적지의 이름을 굴륭산유적지라고 지었다.   학자들은 또 강물의 충격으로 생긴 단면 그리고 마을의 웅덩이 단면에 대한 고찰을 거쳐 유적지를 상, 하 두 문화층으로 나눈다. 아래 문화층은 약 2천년 전의 시기를 좌우하여 이곳에서 살고 있던 북옥저인들의 마을 자리이며, 윗 문화층은 발해와 요․금시기를 아우른 고대 문화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한편 동명왕 10년 즉 B․C 28년에 고구려가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하고 책성을 세워 북옥저지역을 다스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굴륭산 유적지의 연대표에 고구려시기도 망라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학계에서는 유물이 풍부하고 또 상대적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 여기를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가 번영했던 중요한 성새로 보고 있다. ‘경영고성’이라고 이름한 이 성새는 발굴된 유적으로 미뤄 장방형 모양이며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굴륭산 유적지는 물론 고분들도 농가와 경작지, 과수원, 못, 대로 등에 파괴되어 원래의 형태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기슭에 나뒹구는 조약돌에는 이름 못할 애수만 파릇하게 젖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굴륭산유적은 외따로 고독한 게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유적은 굴륭산 동쪽에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굴륭산 동남쪽으로 약 3㎞ 되는 곳에는 높이가 30m 정도인 자그마한 산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언덕이 두 개 있는데 남북 양쪽에서 보면 그 모양이 똑 마치 강가에 엎드린 한 마리의 거북과 같다. 이 산은 형국이 거북인 데다가 다른 산들과 평지를 가운데 두고 홀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고산자(孤山子)’ 혹은 거북이라는 뜻의 ‘왕팔산(王八山)’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고산자 유적은 바로 이 산 위와 산 부근에 있다.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 고산자는 북쪽의 도문-훈춘 도로와 수십미터 길이의 길쭉한 언덕길로 이어져 있다. 조씨에 따르면 고산자는 두만강 기슭의 천연적인 초소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산 북쪽기슭의 바위에는 배기통 모양의 네모난 구멍이 패어 있었다. 지난 세기 60년대 말, 중국에서 전시준비를 하면서“방공 굴을 깊이 파던” 때의 흔적인 것 같았다.   이전에 고산자산과 부근의 경작지에는 토기와 자기 조각이 수두룩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때 고산자에서 채석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이 유적지에서는 돌로 만든 창날과 도끼 등이 출토되었으며 또 원주형의 돌절구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산자 부근의 밭에는 강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을 뿐 토기나 자기 조각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뭘 보시려는데요?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조씨의 권고를 뒤로 하고 기어이 산마루에 기어올랐다. 사실 서쪽 산꼭대기의 화강암에 인공으로 뚫은 흔적이 있다는 기재 때문이었다. 「훈춘현문물지에」 따르면 이 화강암은 둘레 60㎝, 두께가 15㎝나 되는 큰 돌덩이였다. 그런데 진짜 발품만 들인 셈이었다. 이 무거운 화강암마저 누군가 건축자재로 실어갔는지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키 넘는 무성한 수풀은 2천년 전 북옥저인들의 흔적을 모조리 어디엔가 파묻어버린 것 같았다.   굴륭산 부근에는 이 시기의 옛 무덤 유적들도 적지 않은 걸로 알려진다. 굴륭산 서쪽기슭과 남쪽기슭은 물론이고, 양수진을 위시한 양수평원 주위에도 옛 무덤떼가 여럿이나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들은 흙구덩이 무덤, 돌무덤, 석관무덤 등 여러 가지 유형이며 모두 2천년전 좌우의 무덤인걸로 판정되고 있다. 양수평원 일대는 책성으로 비정되는 온특혁부성과 서쪽으로 불과 수십㎞ 상거, 북옥저인들이 활약하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굴륭산은 또 훈춘 옛 장성의 서쪽 끝이라는 주장이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변장(邊墻)’, ‘변호(邊壕)’ 또는 ‘고려변(高麗邊)’이라고 불리며 훈춘평원의 북부 산간지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훈춘 옛 장성은 일찍 1920년대부터 고찰이 시작된다. 학자들의 고찰에 따르면 장성 성벽은 죄다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일부 구간은 돈대나 망루, 봉화대로 이어진다. 이 장성은 훈춘하 하류의 훈춘평원을 중심으로 평원의 북쪽 산지대에 쌓여졌는데 이것은 훈춘평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옛 장성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원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못하다.   훈춘의 옛 장성 축성연대를 두고 학계에는 고구려설, 발해국설, 동하국설, 고려설 등 서로 다른 4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때 북으로 내려오는 읍루의 남침을 막기 위해 북옥저인을 동원하여 쌓은 군사방어시설이라고 보는 게 제일 합당하다는 주장이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 후 발해시기와 동하국 시기에 계속 이 장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성 서쪽 끝머리로 추정되는 굴륭산 부근의 유적지에 고구려의 ‘도장’이 찍히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굴륭산에서 고구려의 ‘도장’을 확실하게 찾는다는 건 주몽의 화살구멍을 찾는 것처럼 정말로 쉽지 않았다. 「훈춘고성고(琿春古城考)」에 따르면 굴륭산 꼭대기에 장성의 일부인 흙 둔덕이 있다고 하는데 이 둔덕은 수풀로 몸을 감춘 구렁이처럼 종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남쪽 벼랑기슭에 그제 날을 견증한 비석인양 우뚝 서있는 돌기둥만 눈에 아물거릴 뿐이다. 보아하니 옛 장성은 이미 굴륭산의 전설로 사라진 것 같았다.   굴륭산의 이름을 만든 구렁이 역시 전설 속의 기담(奇談)으로 되어 있었다. 오래 전에 현지의 농부들은 산의 석굴에서 죽어버린 구렁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구렁이가 굴륭산 북쪽의 채석장에서 울리는 남포소리에 놀라 죽었다는 게 항간의 속설이다. 그때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장정들이 까닭 없이 죽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세간에는 굴륭산의 수호신인 구렁이가 죽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뒤숭숭한 추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기슭의 경영촌을 원래 ‘용배미’라고 불렀다고 하니 산과 마을은 예전부터 그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굴륭산에 얽힌 천년전의 이야기는 산과 마을에 전하는 전설의 어디엔가 숨어있는지 모른다. 아쉽게도 굴륭산의 전설과 기담은 두만강 기슭에 엄청난 물음표만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하다면 이 물음표를 과녁처럼 명중하여 의문을 말끔히 떨쳐버릴 ‘주몽의 화살’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8    어곡미(御谷米), 두만강 기슭의 전설 댓글:  조회:3703  추천:77  2008-12-07
 천평벌은 길림성 용정시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두만강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옛날 개척민들은 물 좋은 고장을 찾아다니다가 맑은 샘물이 솟는 펑퍼짐한 곳에 이르면 샘물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고장 이름도 자연히 샘 “천(泉)”, 버덕 “평(坪)”을 달았던 것. 천평이라는 지명도 이렇게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길림성 연길에서 떠나 용정을 거쳐 천평(泉坪)벌의 하천평(下泉坪) 마을에 도착하는데는 한시간 정도 걸렸다. 하천평은 60여가구, 170여명 인구를 가진 자그마한 동네였다. 승용차는 달구지 길을 간신히 비비고 지나 마을 귀퉁이에 있는 빈터에 멈춰 섰다. “어곡전”이라는 글을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어곡미가 나는 논이 바로 여깁니다.” 안내를 맡은 오정묵(남, 53세)씨가 이렇게 소개했다.    “별로 이상한 데가 없어 보이죠. 그래도 임금에게 천거된 땅이랍니다.”   푸른 논을 애정에 잠겨 응시하는 오정묵씨는 완연 시골 나그네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사실 그는 농부가 아니라 용정시 현지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의사이다, 일찍 연변의학원(대학)을 졸업하고 WHO 산하의 세계전통의학과학원 박사학위를 획득한 그를 진짜 시골의 농부와 한데 이어놓기 힘들다. 그러나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는 땅에 대한 애착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생활로 어느 정도 생활이 부유하게 되자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몇년전 하천평의 땅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마지막 부의황제가 먹던 쌀이 여기서 났다고 해요. 그래서 바로 여기다 하고 기어이 살 작정을 했어요.”    그때는 마침 부근 종이공장의 오염으로 농사가 잘 안되고 쌀도 잘 팔리지 않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땅을 사는데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일가? 계약서를 체결한 바로 이듬해 정부에서는 농업세를 줄이는 정책을 출범했고, 환경보호부문의 간섭으로 오염문제가 해결을 보았다. “어곡전”이 주인을 만나자 하늘도 이를 알아준 모양이라고 동행한 인부가 너스레를 떤다.    빈터의 귀퉁이에는 10여미터 높이의 백양나무가 아스라이 서있었다. 동네의 “당수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인데 수령이 1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어곡미가 난다는 “어곡전”은 바로 “당수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당수나무는 동네보다 어곡전을 지키는 수호신인 듯 했다. 어곡전 논배미의 일부는 시멘트로 반듯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구경꾼들을 배려한 주인의 자상한 마음씨가 엿보였다.    우리가 논에 다가서자 논물에 금세 푸드득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논에 있던 물고기들이 놀라서 도망치는 소리였다. 이어 개구리가 풍덩풍덩 물에 뛰어들어 적이 놀랐다. 오염에 찌들어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지 오랜 시골에서 진짜 희한한 풍경이었다. 화학비료를 일절 쓰지 않고 유기농법을 하고 있단다. 어곡전의 윗쪽 논에는 잉어, 아래쪽 논에는 게를 넣었다고 한다.    사토질의 이 땅에는 자연재해가 적고 다른 지역보다 날씨가 따뜻하며 무상기가 140일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불과 0.6정보의 이 논은 어딘가 다른 땅이었다. 부근 논들은 검은 색의 흙이었는데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렸던 이 논만은 유독 누르께한 색의 땅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쌀은 다른 논에서 나는 쌀보다 맑고 향기가 진하며 점착성이 강하고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어 그 맛이 진짜 일품으로 전해진다.    어곡전은 말 그대로 천혜의 땅임이 틀림없었다. 어곡전은 왼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었고 오른 쪽에는 국사령(國師嶺)을 두고 있었으며, 뒤에는 선구(船口)산성을 업고 있었고 앞에는 군산(群山)이 춤추고 있었다. 풍수학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현무, 주작이 골고루 갖춰진 셈이었다. 더구나 어곡전 뒷켠의 국사령은 거북이가 목을 길게 빼들고 두만강의 물을 마시려고 하는 형국이었다. 두만강은 또 항간에서 “황제의 강”이라고 불리는 등 역사적인 무게를 어곡전에 실어주고 있었다. 조선 이씨왕조의 시조 이성계, 청나라 왕조의 시조 누르하치의 탄생 전설이 대를 이어 두만강 지역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임금의 수라상에 어곡미를 올린건 부의황제가 첫 사람이 아니였다.  어곡미는 일찍 발해의 왕이 즐겨먹던 쌀이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은 버들이 방천을 이루고 인적기가 드물었다. 늪에서 피어난 연꽃 향기는 먼 하늘의 천궁까지 풍겼다. 천녀는 그 향기에 취해 지상에 내려오며, 이곳에 살던 부지런한 총각과 연분을 맺는다. 옥황상제는 천녀에게 볍씨를 주어 총각과 더불어 벼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이 들(논)에서 난 백옥미는 천녀가 가져온 쌀이라 천녀의 부드러운 살결처럼 희고 맑았으며 향기 또한 천녀의 체취처럼 그윽하고 감미로웠다. 한입 건너 두입 소문이 자자한 노송의 백옥미는 드디어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    임금은 백옥미를 맛본 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쌀을 다 먹어보자면 크게 심어야 할 것이로다.”    사람들은 하늘의 은혜를 입어 벼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이 논을 “하늘의 복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금은 또 이 “하늘의 복판”을 지키기 위해 뒷산에 둘레가 4천미터나 되는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백년 세월 속에 노송은 상전벽해의 개벽을 맞는다. 천평벌을 지키고 섰던 선구산성은 어느덧 폐허로 사라지고, 산 아래의 동네도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청나라 시기 천평벌은 또 봉금(封禁)정책으로 200년간 더구나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조선 북부의 이재민들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기재에 따르면 연변경내의 수전농사는 1868년부터 두만강 기슭의 조선족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천평일대에는 20세기 초에 수전농사가 시작되었다. 천평벌이 “어곡전”으로 소문을 놓게 된 것은 천평벌에 벼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 길주에서 살던 농부 최학출이 1935년 남부여대 하고 두만강을 건너 천평벌의 하천평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였다.    최학출은 모를 일찍 내는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 냈다. 당시에 소문을 놓은 “유지(油紙) 온상 육모법”, 말하자면 오늘의 비닐박막 온상육모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 유지제품이 없어서 콩기름을 바른 크라프트지를 모상판 위에 덮어주어 모판의 온도를 높이고 이로써 벼모가 빨리 자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학출 농민의 밭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또 밥맛이 좋아 점차 소문을 놓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간도총사령부를 통해 만주국(僞滿洲國) 정부에서 알게 되었다. 만주국에서는 최학출에게 황제의 수라상에 올리는 “어곡미” 생산을 위임했다.    어곡전에서 마을 처녀들은 하얀 버선을 신고 모를 냈고, 가을이면 하얀 장갑을 끼고 가을걷이를 했다고 전한다. 달거리가 온 처녀들은 이런 대오에서 단연 제외되었다고 한다. 어곡전 주변에는 마을의 개나 돼지가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어곡전은 탈곡도 맨 먼저 했고, 쌀을 찧은 후에는 판 위에 한줌씩 올려놓고 귀가 떨어졌거나 색이 이상한 것은 알알이 골라냈다. 이어 하얀 옥양목으로 만든 주머니에 포장하여 황제에게 진상하였다.    훗날 최학출은 황제에게 진상한 이 “어곡미”의 덕분으로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에 상경하여 포상금과 시계를 받았다고 한다.    이토록 소문난 어곡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맛보기에는 판판 부족이다. 재래식 자연농법을 쓰고 또 땅이 한정되다보니  1년 소출이 3t 미만이기 때문이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 지금 어곡미는 1㎏에 100위안(약 1만 3천원)이라는 고가이지만 그래도 금방 동이 난다고 한다. 어곡전 주위의 쌀도 “어곡미”의 명성에 힘을 입어 쌀 가격이 껑충 뛰어 올랐다.    어곡전의 주인인 오정묵씨는 여기에 만족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어곡전 민속마을”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쌀을 생산해서 팔기만 하던 재래의 원시농법을 개변해야 한다는 것. 한두 뙈기의 땅을 떠나 마을 전체인 하천평을 생태관광의 모델 마을로 만드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시작하고 보니 일이 점점 커지네요.” 오정묵씨는 자조삼아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지금 그가 하천평에 사놓은 농가만 해도 십여 채가 된다. 인제 어곡전 부근에는 바야흐로 민속농가, 박물관, 도서관, 농업과학연구소 실험기지 등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빈 터에 닦은 광장과 무대 등 하천평촌은 동네 귀퉁이에나마 민속마을의 추형을 갖춰가고 있었다. 옛날 임금의 수라상에만 오르던 어곡미의 전설은 인제 민속마을의 브랜드로 되어 두만강 기슭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7    천년 고성의 슬픈 이야기 댓글:  조회:3304  추천:110  2008-06-27
천년 고성의 슬픈 이야기 김호림   흥안고성은 현지의 동네이름으로 명명된 옛 성곽인데,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시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걸로 알려져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까, 뜻밖에도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옛날 고성 성터에 세워졌던 표지판은 개발의 붐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현지인 황종림(49세)씨는 기재가 잘못 된 게 아니냐고 재삼 묻는다. 그는 소꿉시절부터 이곳에서 자랐지만 옛 성곽이 있었다는 얘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고 말한다. 혹여나 해서 흥안향 정부청사 부근의 노인활동센터를 찾았더니 한담을 즐기던 노인들은 도리어 엉뚱한 질문을 던져온다. “이봐, 자네가 말하는 성터란 게 뭔가?”   아닌 게 아니라 흥안향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성벽 비슷한 둔덕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풀처럼 일떠선 아파트들이 땅 위에 슬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도 흥안고성과의 인연은 쉽사리 끊을 수 없나 보다. P교수가 사그라졌던 불씨를 다시 지펴줬던 것이다. 모 역사연구소 전임 소장이었던 P교수는 연변의 고대 성곽 연구에서 권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흥안고성 말인가? 바로 3호선 버스 종착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네.”    필자가 고령의 노인에게 안내 부탁을 드리기 어려워 머뭇거리는데,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3호선 버스의 종착역은 도시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쯤부터 건물들이 자리 나게 줄어들고 밭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내에서 빠져나온 연길-도문 도로는 낮은 비탈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내처 뻗어가고 있었다.   요금을 지불하느라 택시에서 잠깐 지체하는 사이, 길옆을 기웃거리던 P교수는 어느 결에 손에 기와조각을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보니 그건 네모무늬의 붉은 암키와였다. 흥안고성에서 발견되는 이런 기와와 노끈무늬의 기와는 집안현의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동류의 유물로, 색깔이나 무늬, 두께, 무게가 모두 일치한 걸로 알려진다.   흥안고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형국으로 남부와 서남부는 주민구역이며 서쪽에는 북남 방향으로 연집강(煙集江)이 흐른다. P교수에 따르면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바로 흥안고성의 동북쪽 각루자리라고 한다. 연길-도문 도로는 바로 고성의 동쪽 변두리를 뭉텅 잘라내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각루자리에는 높이가 1.5미터 되는 작은 둔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벽돌담이 일어선 이곳에는 기와조각을 제외하고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로 서쪽에는 연집강 강변으로 이어진 흙길이 있었다. 밭들 사이에 난 이 흙길은 이웃 지경보다 조금 더 높았는데 바로 흥안고성의 북쪽 성벽 자리라고 한다. 기재에 따르면 이 북쪽 성벽은 길이가 374미터에 달한다. 서쪽 성벽은 연집강의 물에 밀려 말끔히 사라졌는데, 500여 미터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안고성은 둘레의 길이가 약 1,800미터로 중급 규모의 평지성이었다.   그러고 보면 연길-도문 도로를 달릴 때마다 흥안고성을 지나는 셈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대로 옆의 수수한 흙길이 바로 천년 성벽 자리인줄 상상조차 했을까. P교수에 따르면 흥안고성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 한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현지에서 고성을 잘 모르고 있는데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성터인 밭에는 황소 한두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한가롭게 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밭갈이를 하지 않은 밭두렁에는 기와조각들이 자갈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다. 잠깐 사이에 우리는 빗살무늬의 기와, 노끈무늬의 기와 조각 여러 개를 찾았다. 다만 온전한 모양의 기와는 하나도 없었고 죄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조각들이었다. 이 성터에서는 기와조각을 비롯하여 토기 조각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연변의 옛 성곽에서 고구려 유물이 이처럼 밀집된 것은 기타 고구려 유적지에서 아주 보기 드물다.   흥안고성을 세운 것은 이곳이 고구려의 동북부 변계에서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길 지역은 바로 도문이나 훈춘에서 용정이나 화룡, 안도를 왕래하는 교통로의 중간 기착지에 위치한다.   “주위의 유적을 보게. 이곳이 중요한 요새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네.” P교수는 부근의 유적지들을 일일이 가리켜 보인다.   흥안고성 서북쪽에는 고구려 천리 장성의 일부라고 추정되는 평봉산(平峰山) 장성과 봉화대가 있으며, 남쪽에는 모아산(帽兒山) 돈대, 서남쪽에는 연길공원 소돈대, 동북쪽에 역시 대돈대가 있다. 동쪽 20㎞ 되는 곳에는 또 쌍둥이 성곽으로 불리는 성자산산성과 하룡고성이 있다.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성곽이라면 후세의 발해가 묵과할리 만무하다. 그런데 흥안고성은 여느 성곽처럼 발해시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발해가 흥안고성의 남쪽에 따로 성곽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해성곽은 1937년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가 최초로 조사하고 “간도성 고적조사보고”에 글을 발표하며 연길가(延吉街) 북고성이라고 명명된다. 그때 이곳은 일본군의 요충지였으며, 이 때문에 도리야마 기이치는 성곽을 조촐하게 조사하고 지표면의 일부 유물을 채집한데 불과했다. 1985년, 연변 문물조사팀은 두 번에 걸쳐 조사를 하고 고성의 위치와 규모, 출토된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현지의 북대촌 이름을 따서 북대고성(北大古城)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도 북대고성 자리에는 병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중국군의 한 유명 부대가 숙영하고 있는 이 병영은 흥안고성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상거한다.   이때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다. 우리는 병영을 지척에 두고 부근에서 한겻이나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옛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터가 있었다는 채소밭은 다문 한 뙈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병영 역시 아파트단지에 빈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도 병영 북쪽 담의 기슭에는 산등성이로부터 내려오는 옛날의 물도랑이 그대로 뉘어 있었다. 북대고성의 남쪽 성벽은 바로 이 도랑을 지나 병영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재에 따르면 유적지의 남쪽 부분에는 자그마한 둔덕이 있었는데, 건축 유적지로 추정되며 그 주변에는 유물이 많이 밀집되었다. 유물 분포 상태로 미뤄 북대고성은 동서와 남북 길이가 각기 500미터인 고대 중급 규모의 발해성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의 아성은 그런 아련한 기억마저 빡빡 지우고 있었다. 와중에도 P교수는 포장도로 옆에 있는 흙속에서 회색기와 한 조각을 줍는다. 기와 뒷면에 있는 천 무늬는 천년의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뒤이어 필자도 전봇대 아래에서 또 회색기와 조각 하나를 찾았다. 옛날 여기에 유물이 적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날 병영 내에서도 유물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고 전하지만, 그곳은 일반인 금지구역이라 마음을 접어야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북대고성에서는 또 푸른 유약을 바른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와는 훈춘 팔련성의 발해 동경유적지, 화룡 서고성의 발해 중경유적지 그리고 개별적인 발해 사찰 외에 아주 드물게 보인다고 한다. 그때 북대고성은 일반 성곽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증한 셈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발해인들은 일반 성곽이 아니라면 고구려의 성곽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왕궁이나 주, 현의 치소(治所)는 멸망된 이전 조대의 성곽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발해인들은 동경 용원부인 팔련성의 경우, 부근의 고구려 책성인 온특혁부성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부근에 따로 성곽을 세웠다. 북대고성은 부근 고구려의 성곽인 흥안고성과 엄연히 분리된다. 따라서 북대고성을 발해의 “노, 현, 철, 탕, 영, 흥” 6주의 어느 한 주의 소재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제 날 천년 성곽의 화려한 모습은 편린으로나마 지면의 유물들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북대고성의 폐허는 인제 아파트와 포장도로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다. P교수는 성터를 돌면서 연신 탄식을 했다.   “몇 해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아쉽구먼.”   천년고성의 슬픈 이야기는 이로써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연길 도시의 외곽은 연집강 강기슭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터를 넓히고 있었다. 흥안고성 역시 바야흐로 북대고성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얘기이다. 천년의 이 고성은 결국 도시의 음영에 묻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있었다.*
6    “아리랑 고개”의 정암(亭岩)산성 댓글:  조회:3449  추천:107  2008-03-17
    정암산성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연길에서 도문을 지나 양수진까지 약 50㎞, 이어 양수진에서 산성 기슭의 정암촌까지 10㎞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마을 북쪽에 있는 정자 같은 둥그런 바위가 금방 손에 닿을 듯 지척에 보였다. 후문이지만 정암산의 이름은 이 때문에 붙여졌으며, 정암촌 역시 이 정암산의 유래를 따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성을 지척에 두고 잠깐 주춤해야 했다. 양수진에서 살고 있는 동창이 홀로 산행에 나서는 필자를 극구 막아 나섰던 것이다. “혼자서는 어림도 없어. 성벽은커녕 산을 오르는 길도 찾지 못해.” 그의 말에 따르면 정암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서 초행자는 자칫 성곽의 이마빼기도 만지기 어렵단다. 동창은 나중에 현지 토박이인 자신의 자형 이덕호(59세)씨를 안내인으로 찾아줬다.   우리가 탑승한 택시는 마을 동쪽의 대로를 따라 그냥 산속으로 더 들어갔다. 기재에 따르면 이 길은 훈춘에서 왕청 지역으로 통하는 천년의 고도(古道)라고 한다. 고도(古道)는 지난 세기 80년대만 해도 울퉁불퉁한 수레길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왕모래를 깐 국방도로로 되어있었다. 마을을 1㎞ 정도 벗어났을까, 정암산은 수풀이 울창한 분위기로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 이덕호씨는 정자 바위로 오르는 방향이 아닌 북쪽 산골짜기로 통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에 따르면 정자 바위는 해발고가 400여m에 불과하지만 톺아 오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 언제인가 그도 정자 바위 쪽을 선택해 산을 오르다가 비지땀을 동이깨나 흘렸다고 한다. 보아하니 안내자가 없었더라면 오후 내내 엉뚱한 곳에서 허둥거릴 뻔 했다.   “노인들이 그러시는데 광복이 나던 해 일본군이 이 산성에 들어와서 진을 쳤다고 하네. 왕청 쪽에서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막을 심산이었나 보네.” 이덕호씨가 말 주머니를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그때 많은 일본 군용차량이 정암산성으로 진입했다고 한다. 정암산성에 무슨 물건이 얼마 들어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렇든 말든 근대의 일본군까지 이 산성을 이용했다면 천혜의 군사요충지가 틀림없다.   산골짜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산세가 갑자기 급하게 뻗어 내리고 높다란 참나무 숲이 빼곡하게 깊어진다. 애들의 머리통만한 돌덩어리들이 수풀사이에서 무더기로 보였다. 골짜기를 따라 도란도란 흘러내리던 물줄기는 이곳에 와서 돌 틈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림짐작에도 성곽에 이용했을 자재는 산에 가득한 듯 했다.   문득 이덕호씨는 걸음을 멈추더니 참나무 밑 부분을 발길로 툭 찼다. “이건 산짐승이 누워있던 자리구먼.”아닌 게 아니라 참나무아래에 깔린 두툼한 낙엽더미에는 우묵한 자리가 패어 있었다. 옛날 정암촌에는 늑대가 동네어구까지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지금도 정암산에는 여전히 멧돼지며 노루가 뛰어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웬 일인지 산을 오르느라고 땀벌창이 된 몸에 싸늘한 기운이 뻗친다.   500m쯤 올라가자 드디어 산중턱에 돌로 쌓은 산성의 모습이 삐죽이 나타났다. 천년의 이끼가 덮인 성곽 위로 나무 사이를 꿰뚫고 햇빛이 가느다랗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풀을 헤집고 어렵사리 산성의 한 모퉁이에 다가섰다.   바람소리에 우수수 흔들리는 나무 가지들이 환영처럼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내닫는 무사들의 창과 방패가 번뜩이는 듯 싶다. 솔직히 천년의 산성에는 한그루의 나무, 한조각의 돌에도 고혼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깐 다리쉼을 하고나서 계속 산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라갔다. 이윽고 높다란 바위가 나타나 숨을 톺으며 기어올랐더니, 금방 현훈증이 일어난다. 10여m 높이의 아스라한 절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 바위의 너비는 고작 서너 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덕호씨는 평지를 걷듯 어느새 저만큼 앞쪽에 멀어진다. 그를 불러 세우기가 뭣해서 네발걸음으로 간신히 바위를 건넜다. 방금 산행에 자신 있노라고 동창에게 오기를 부렸던 게 생각나서 낯이 달아오른다.   서쪽 산성은 이 절벽 바위에 이어서 쌓았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누워 있었다. 성곽의 문터 자리와 부근의 참호 자리가 확연하게 보였다. 이덕호씨에 따르면 산등성이에 있는 이 산성 유적지는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정암산성은 불규칙적인 삼각형 형태로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으며 둘레의 길이가 약 2.5㎞ 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중 동북부의 성벽은 700m, 서쪽성벽은 800m, 남쪽성벽은 800m 정도인데, 어림잡아 약 500m 길이가 되는 절벽에는 낮은 곳만 골라가며 돌을 덧쌓고 있었다. 성내에는 동문, 북문, 서문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벽의 문터에는 골짜기 사이의 길을 따라 길옆에 돌로 쌓은 군사시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곽 아래쪽의 펑퍼짐한 곳에 너비 2,3m의 웅덩이가 보였다. 삼태기 모양이었으며 바깥쪽으로 홈 채기가 패어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런 웅덩이를 온돌에 불을 지피던 구덩이라고 보는 게 통설이다. 온돌이 놓인 이런 곳은 병영 터로 보고 있다. 정암산성에는 병영 터가 30여 곳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성곽에는 많은 병력이 상시적으로 주둔했다는 얘기이다. 산성 동남부의 정자 바위는 산성의 천연적인 전망대로 불린다. 바위 위에서 고도(古道)의 상황을 낱낱이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 서쪽에 있는 병영 터는 이런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정자 바위에는 또 재미나는 일화가 깃들어 있다. 이 바위는 동서 두 봉우리로 이뤄졌는데, 두 봉우리 사이에는 언제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굵은 나무가 뉘어진 다리가 있어서 서로 왕래가 무척 쉬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다리가 없어져 두 봉우리를 드나드는 게 마치 견우와 직녀의 상봉처럼 몹시 어려운 모양새라고 한다. 봉우리의 높이가 수십미터 되고, 또 봉우리 사이의 거리가 서너미터 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두 봉우리를 드나든다는 게 전설 같은 이야기로 되었던 것이다.   정암산성 성곽에는 전망대, 병영 터, 문터, 통로와 샘물이 있으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분지가 있다. 정암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정암산성은 아직도 축성연대를 확인할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이다. 사학계에서는 정암산성의 축조연대에 대해 아직도 정설이 없다. 한때는 명나라 시기의 유적지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정암산 기슭에는 그런 내용의 비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어찌된 영문인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훈춘문물지”에 따르면 정암산성은 산성의 조형, 축성기법으로 보아 훈춘의 살기성, 통긍산 산성과 유사하며 이 때문에  발해 시기이거나 이보다 더 이른 고구려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늦은 가을의 저녁 해가 서쪽하늘에 떨어지고 있었다. 찬바람에 실려 오는 싸늘한 한기에 몸이 오싹해났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기 전에 부랴부랴 산을 내렸다. 동창은 그때까지 정암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성곽은 이 마을 안에도 있단다.” 동창이 귀띔하는 말이다.   정암촌에도 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었다. 성벽은 사람 키 높이로 돌을 쌓았는데 남아있는 부분이 2~30m 정도 되었다. 이 성벽은 정암산성 남쪽의 고도(古道) 부근에 위치한 걸로 미루어 정암산성의 평지성 성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고구려 성곽은 산성과 평지성이 한조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암촌은 500여명 인구가 살고 있는 비교적 큰 동네로, 1938년 일제강점시기 집단이주한 충청북도 사람들로 이뤄졌다고 한다. 정암촌에는 충청도 사투리와 충청도 웃다리 농악 등이 지금껏 보존되어 있었다. 마을의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모임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옛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시아버지 죽으면 좋다 했더니 빨랫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어머니 죽으며 좋다 했더니 보리방아 찔 때마다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청주 아리랑”은 중국에서 동란이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시기 마을에서 한때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러나 힘든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떨어뜨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덧 정암 바위는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차창 밖의 어디선가 “청주 아리랑”의 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아 공연히 심정이 침울했다.*
5    북경인의 “에덴동산” 주구점(周口店) 댓글:  조회:3320  추천:126  2007-06-18
[중국탐방] 북경인의 “에덴동산” 주구점(周口店)     주구점에 들어서자 금세 나지막한 산들이 앞을 막아섰다. 산기슭을 감도는 메마른 주구하(周口河)와 시뿌연 연기는 어딘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따금 지나는 화물기차는 마치 타임머신이 되어 내처 수십만년전의 세상으로 달려가는 듯 하다.   북경  서남쪽에서 불과 50㎞ 상거한 주구점은 고대 원인(猿人)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주구점 원인 유적지는 일찍 1987년에 세계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전에 사람들은 주구점 서쪽의 자그마한 산에서 고대동물의 화석을 자주 발견, 이런 것들을 만병통치의 중약재로 썼다고 한다. 중의들이 이런 화석을 용골(龍骨)이라고 불렀기에 이 작은 산은 용골산(龍骨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러고 보면 약재에 조상의 뼈가 섞여 있는 셈이네요.” 일행 가운데 누군가 뼈 없는 농담을 던졌다.   가이드는 웃음으로 대답을 흘려보내며 일행을 비탈길로 안내한다.   용골산은 옛 동굴과 박물관, 그 사이를 이은 포장길 등으로 고대와 현대를 한데 어우른 이색적인 그림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고 있었다. 발굴자들의 사진이 양켠에 도열한 비탈길을 수십미터 올라가니 왼손 편에 30~40미터 깊이의 큰 구덩이가 나타났다. 이 구덩이는 원래 동서 길이 140미터의 거대한 동굴이었다고 한다. 동굴은 맹수의 공격을 피하려는 원인들의 주거지로 뛰어난 곳이었다.   1921년, 스웨덴의 학자 안데르손이 처음으로 이 구덩이를 발견, 1927년 캐나다 학자 D․블랙이 정식발굴을 하면서 인간의 이빨화석 3점을 발견하고 "중국원인 북경인종(種)"이라고 공식 명명한다. 1929년, 중국학자 배문중(裴文中)은 최초로 보존이 완전한 "북경인"의 두개골을 발견하여 세상을 들썽케 했다.   그때 현장사진을 찍던 카메라맨은 흥분한 김에 두개골화석을 안고 있는 "발굴자"를 두동강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화석 두개골은 큼직하게 찍었는데 발굴자의 두골은 화면 밖에 냅다 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접시 크기의 이 두개골 화석에 달라붙은 진흙 따위를 제거하는데 장장 4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의 노고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을 에피소드였다.   일행은 구덩이에서 한식경을 머물렀다. 가로세로 그어진 흰 선, 낙서하듯 쓰인 아라비아 숫자들… 아직도 아스라한 흙벽에 새겨져 있는 발굴흔적은 그제 날의 현장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더듬게 했다.   1921년 이후 선후로 계속된 동굴의 발굴 작업에서 총 3만㎡의 퇴적물을 처리, 두개골 6개와 하악골 15개, 치아 153개 그리고 상당수의 팔다리뼈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 다양한 연령층의 40여명 남녀로 구성된 골각이다. 이런 발견은 동시대 인류화석으로는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는 어딘가 힘이 실리고 있었다. "북경원인은 과학계에서 호모 에렉투스(直立人)가 인간인가 아니면 원숭인가 하는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어요."   호모 에렉투스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간 고리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호모 에렉투스의 전형은 여전히 주구점 북경원인이라고 한다.   북경원인은 20~50만년전에 생활, 뇌 용량이 현 인류의 2/3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굴에는 여러 개의 잿더미 유적과 불에 탄 많은 짐승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발굴로 인간이 불을 사용한 역사는 수십만년 앞당겨졌으며 당시 북경원인은 이미 각종 석기를 다듬어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과 불씨를 보존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산에는 앙상한 벽과 바위만 남은 발굴지들이 적지 않았다. 군데군데 작은 입구의 동굴들은 인간 기원의 비밀을 간직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1933년, 용골산에서 또 1.8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화석이 발견된다. 이 화석이 바로 "산정동인(山頂洞人)"이다. 산정동인은 원시몽고인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체질적으로 현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다. 또한 장식품 제조기술이 상당히 발전된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구석기 말기에 해당하는 문명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5년부터 중국학자 가란파(賈蘭坡)의 주도로 발굴 작업은 용골산에서 계속되었다. 이듬해 북경원인이 두개골 화석조각이 3점이나 발견되어 학계를 놀랜다. 그러나 이런 발굴 작업은 1937년 주구점 근처인 노구교(盧溝橋)에서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인간의 전쟁은 수십만년전의 인골 화석에도 역겨운 화약 냄새를 풍겼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후 일본이 중국 내의 미군 기지를 점령하는 과정에 북경원인과 산정동인의 유골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지금 중국에는 "북경원인 두개골 화석 수색사업위원회"가 설립되어 두개골 화석의 선색을 찾고 있지만 이 미스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북경원인은 세상에 얼핏 존재를 확인한후 재차 수십만년의 깊은 미궁에 빠진듯 하다.   그러나 용골산의 유물 발굴은 뒤미처 또 개선가를 울린다. 1973년, 50만년전의 북경원인과 1.8만년전의 산정동인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10만년전의 시기로 추정되는 신동인(新洞人)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용골산의 전설은 부근에도 나타났다. 2001년, 용골산 유적지의 서남쪽에서 수㎞ 떨어진 전원(田園) 동굴에서 39종의 포유동물 뼈와 6개의 이빨이 붙어있는 턱뼈를 포함, 많은 유골 화석이 발견되었다. 전원 동굴의 화석은 3~4만년전에 고인류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주구점의 용골산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일까?   "그때는 북경의 위치가 북위 35도로, 지금의 북위 39도에서 4도나 남쪽으로 더 치우쳤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소개이다.   그때 북경은 간빙기(間氷期)에 속해 있었으며 지금의 날씨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고 한다. 주구점은 적어도 20만년전까지 삼림이 무성하고 초원이 펼쳐진 곳이었다는 것. 북경원인 동굴에서 발굴된 200여점의 동물화석에 따르면, 이곳에는 사슴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니고 코끼리와 코뿔소 등 북방온대 지역의 포유류 동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늘은 지변(地變)으로 북경원인의 말일을 예시한듯 하다. 약 30만년전 북경원인이 기거하던 동굴은 문득 천정이 내려앉는다. 그래도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동굴을 사용하던 북경원인은 드디어 약 23만년전에 용골산에서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로부터 10여만년의 세월이 흐른 뒤 용골산 주변에는 선후로 신동인, 전원인, 산정동인이 나타난다. 그들은 진짜 북경원인의 후손일까? 아니면 타지역에서 찾아온 정체불명의 이주민일까?… 역사는 띄엄띄엄 연결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세인들에게 우주와 같이 무한한 연상의 공간을 던져주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전원동굴의 화석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부터 시작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졌다는 정설과 달리 여러 대륙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생 인류는 약 15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6만년전부터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발견된 유골의 수량이 적어 현생 인구가 여러 곳에서 기원했다는 방증은 되지만 이것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천년, 만년이 되는 일을 어떻게 알아요?" 일행가운데 누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이다.   인간이 멸종되면 불과 20만년후 인간의 생활흔적은 지구에서 가뭇없이 소실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옛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화석은 이름 그대로 태고적의 이야기를 적은 천서(天書)인 셈이다.   산길을 돌아 나오니 산중턱에 주구점 유적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은 주구점 북경원인의 발굴과정과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 놓인 북경원인의 동상은 말없이 멀리 평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굴 대신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과 짐승 떼 대신 무수히 오가는 차량… 천지개벽의 이 엄청난 변화를 두고 북경원인은 뭔가의 상념에 깊숙이 빠져 있는 듯 하다.   일행은 북경원인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박느라 잠깐 법석을 떨었다. 낮고 평평한 두개골과 돌출한 광대뼈를 가진 북경원인의 동상은 이상한 헤어스타일과 복색의 현대인들에게 둘려 사뭇 괴이한 화면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천손(天孫)민족의 신화가 시공에 드린 커튼을 젖히고 불쑥 실체로 현신(現身)할듯한 별스런 착각이 들었다. 웅녀의 인간 환생, 알에서 깨어난 시조 왕… 전설 같은 옛 이야기들이었다.*
4    치우괴수(蚩尤怪樹), 그 천년의 비밀 댓글:  조회:3821  추천:127  2007-05-22
    넓은 황야에 병풍처럼 둘린 민둥산과 드문드문 나타나는 촌락… 싯누런 황사에 덮인 탁록(涿鹿)은 그렇게 황량한 모습으로 처처히 다가왔다.   먼 옛날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대전을 벌인 싸움터로 유명한 탁록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120㎞ 떨어져 있다. 탁록의 벌판에는 황제묘(黃帝廟), 정차대(定車臺), 토탑(土塔), 치우채(蚩尤寨) 등 고대 전장의 흔적이 적지 않다.   치우채는 이름 그대로 치우가 설치한 군영이라는 뜻이다. 5천년 전의 역사가 지명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채는 생각처럼 찾기 쉽지 않았다. 지명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도로에는 안내표시도 없었다. 근처를 오르내리다가 아예 “황제성(黃帝城)”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황제성은 관광풍경구로 도로에 안내판이 있었고, 또 관광지라면 십중팔구 가이드를 찾을수 있을 듯 싶었다.   “치우채를 찾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가이드는 약간 괴이쩍다는 표정이었다. 이 며칠째 내가 첫 손님이란다. 후문이지만 치우채에는 1년에 대여섯번 정도 한국 관광팀이 찾아온단다. 그리고 황제성을 다녀가는 홍콩, 마카오 사람들도 이곳을 드물게 찾는다고 한다.   이윽고 차는 가이드의 안내로 용왕당촌(龍王塘村)을 찾아 마을 중심가의 빈터에 멈춰 섰다. “치우채”라는 글자를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 왔다. 마을사람들이 40~50년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동네 어구의 벽에 모신 토지신과 농가의 바깥벽에 옴폭하게 자리를 파고 모신 신상(神像)은 여느 시골과는 어딘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해묵은 소나무가 마을 빈터의 한 귀퉁이에 서있고, 졸졸 흘러나오는 물가에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물은 부근의 치우천(蚩尤泉)이 있는 샘터에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치우천이 있는 서너 평 크기의 뜰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전전(李佃全, 42세) 촌장이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왔다. “애들이 들어와서 장난을 칠까봐서요.” 그는 자물쇠를 열면서 변명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문객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치우천은 “탁록지전(涿鹿之戰)”때 치우부족의 인마(人馬)가 물을 마시던 곳이다. 샘은 3m 정도의 둘레에 4~5m의 깊이었는데, 돌로 쌓여 있었고, 밑바닥에는 물이 한두 뼘 정도로 차있었다. 몇 년전만 해도 물은 사시장철 샘물터의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철을 제외하고 거의 말라있는 상태라고 한다.   치우천의 앞뒤에는 각기 천년고목이 서 있었다. 고목 앞에는 모두 돌로 된 제대(祭臺)가 있었다. 제대에는 누가 놓고 갔는지 붉은 점을 찍은 만두가 놓여 있고, 타다 남은 향대가 향로 삼아 놓은 모래 대야에 꽂혀 있었다.   “이걸 잘 보세요.” 이전전씨는 그 중 앞쪽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뭐가 비슷하게 보여요? 모두들 이 나무에는 신령이 현신했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 밑둥에 박힌 옹이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흡사 뿔이 돋친 짐승의 머리가 나무에 박혀 있는 듯 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머리에는 긴 뿔이 돋쳐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치우의 신령이 샘터의 고목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말라드는 샘물과 더불어 4천여년 전의 위용이 역사 속에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진짜 치우가 현신할 걸까…   치우의 군사가 숙영했던 군영이 근처라고 해서 대끔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치우천 북쪽의 수십 미터 되는 곳에 자그마한 산 둔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치우가 담을 쌓고 군대를 주둔했던 숙영지라고 한다. 이곳은 치우의 북쪽 군영이라는 뜻의 치우 북채(北寨)라고 부른다. 고증에 의하면 그때 치우의 군영은 남, 북, 중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남채(南寨)는 후방의 공급기지, 중채(中寨)는 지휘중심, 북채(北寨)는 전연진지었다.   우리 일행은 반달음으로 둔덕에 올랐다. 둔덕 기슭에는 한그루의 고목이 있고, 그 뒤로 흙담이 있는데 고대 전장의 잔재한 성벽이라고 한다. 저쪽 둔덕은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금방 발끝에 닿일 듯 했다. 이런 둔덕의 뒤쪽은 산에 막혀 있고, 앞쪽에는 들판이 펼쳐졌다.   4,700여년 전, 황제의 부족은 염제의 부족과 연합하여 치우의 부족과 이곳에서 대결전을 벌였다. 전쟁에서 황제는 천녀(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풍후(風後),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도움을 받고, 치우는 과부족(夸夫族)인, 풍백우사(風伯雨師), 이매망량(魑魅魍魎)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對陳)을 보아도 범상하지 않는 이 싸움은 중국의 신화에서 제일 유명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는 재간을 갖고 있었다. 치우의 법술로 천지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황제의 군사는 방향을 잃는다. 황제는 나중에 “지남차”를 만들어 인도를 받는다. 싸움에서 패한 치우는 황제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한다. 그의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 수림을 이뤘다고 전한다.   지금 탁록의 고대 전장 유적지에는 치우의 무덤이 3기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현지인들은 그중 남쪽의 치우무덤이 진짜 무덤이라고 말한다. 황량한 들판에 있는 자그마한 흙둔덕에 천년의 비밀이 숨어 있다니 전설인지 신화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 대전에서 치우를 전승한 황제는 많은 부락의 옹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어 염제(炎帝)의 부족도 황제의 부족과 충돌이 발생하여 탁록 부근의 판천(阪泉)에서 싸움을 벌인다. 승전한 황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중원지역의 부락연맹 수령이 되었다. 염제의 하족(夏族)이 황제의 화족(華族)과 근친이고, 또 한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을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결국 “탁록지전(涿鹿之戰)”에서 패한 치우의 부족은 이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중국 중부의 황하(黃河)유역에 살던 묘족(苗族)은 이때 서남부로 이주했다. 묘족 역시 한민족처럼 치우를 선조로 섬기며, 치우를 “우공(尤公)”이라고 부른다. 치우의 부족인 동이구려족(東夷九麗族)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한 단락이다.   중국에서는 치우의 부족이 점차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게 융합되어 염황자손의 일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의 초반, “황제성”에 세워진 “중화 삼조당(三祖堂)”이 바로 그런 학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 3조는 황제, 염제, 치우가 중화민족의 선조라는 뜻이다. 중국 사책에서 짐승의 몸을 갖고, 인간의 말을 하는 “수신인어(獸身人語)”의 악인으로 기술되었던 치우는 이로써 비천한 신서를 고치게 된 것이다.   혼전을 벌이던 인마와 창칼의 마찰음은 모두 전장을 뒤덮었던 온무처럼 가뭇없이 광야에 사라졌다. 아, 이 들판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산 둔덕에 서있는 고목은 멀리 들판을 굽어보며 수호신처럼 묵묵히 전쟁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고목은 수령(樹齡)이 천년을 훨씬 넘는다고 하는데, 모양은 느릅나무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상한건 도대체 수종이 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든 말든 해마다 가을철이 오면 나무에는 또 앵두 크기의 노란 과일이 수두룩하게 달린다고 한다.   “그림속의 떡이죠. 식용이 불가능하니까요.” 이전전 촌장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현지인들은 이 이상한 나무를 “치우 괴수(怪樹)”라고 부른단다. 어쩌면 전세(前世)의 인물 치우가 수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천년의 괴수로 현령(顯靈)한듯 했다. 치우의 신상에 얽힌 수두룩한 비밀은 지금 무명(無名)의 과일로 응고되어 세상에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듯 하다.*
3    베이징의 경찰군단, 그 속에 있는 조선족들 댓글:  조회:3538  추천:134  2007-03-29
  베이징의 경찰군단, 그 속에 있는 조선족들                                                                김호림   박성국(36세, 남)씨는 나젊은 형사이지만 마약수사에서는 벌써 10년이라는 오랜 경력을 자랑한다. 개인표창, 개인 3등공, 집체 1등공 등 공로메달만 해도 10여개 된다. 베이징시공안국 마약수사실 정찰대  대장이라는 직위가 바로 그런 화려한 경력을 말해주는 듯 하다.   그는 마약사범들에게는 철면 사나이로 통한다. 추호의 인정사정도 없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남몰래 애써 숨기는 나약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조선족 마약사범들을 만날 때가 그러했다.   “같은 민족이라 동정심이 생기는걸 어쩔수 없었어요. 참"   박성국씨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때의 착잡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읽을수 있을 것 같았다.   직업 관계로 박성국씨는 자타를 불문하고 조선족 마약사범은 물론이요, 한국 마약사범을 체포하는 현장에 자주 등장한다. 언제인가 중국 언론에 드물게 보도되었던 북한의 마약사범도 그가 직접 체포했다고 한다.   진짜 한순간이나마 마음이 심란해지는 경우였다. 더군다나 여자 마약사범을 만나 그가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애원을 할 때는 지어 괴롭기까지 했다.   “시초에는 느낌이 이상했는데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죄는 지은대로 가야 하잖아요."   베테랑급 형사인 그에게 인제 마약사범은 단지 마약사범일 따름이다.   마약범죄는 거개 조직범죄이다. 마약사범들은 일단 잡히면 열에 아홉은 사형인줄 알기 때문에 극단적인 사례를 낳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성국씨는 늘 죽음의 고비를 제 집처럼 넘나들어야 했다. 언제인가 그는 마약사범으로 가장하고 혈혈단신으로 마약거래 현장에 들어간적도 있다. 그의 말을 빈다면 허리에 머리를 차고 들어간 셈이다. 마약사범을 체포할 때 자칫 총에 맞을번 한적도 있단다.   솔직히 키가 1미터 67센티미터인 박성국씨는 형사치곤 "난쟁이" 모자를 벗기 힘들다. 그래서 그가 형사라고 하면 머리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탓일가? 사복차림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주객이 전도되어 엉뚱한 단속을 받은적 있다. 현지 보안인원은 그가 경찰인지 뭔지 금방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   그러고 보면 억울해도 한창 억울한 셈이었다. 박성국씨는 경찰과 친지관계라고 할수 있는 체육학교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유달리 반응이 빨랐던 그는 복싱을 배운지 1년 7개월만에 54킬로그램급에서 성급 1위를 차지하며 성 대표팀과 국가 대표팀의 평가전에서 단연 상대방을 제압한다. 그리하여 국가 대표팀에 발탁되고 이어 국가대표팀에서 복싱 감독의 추천을 받아 베이징체육대학에 입학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는 대학기간 공안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마약사범을 나포한후 중국 경찰측의 통역을 서면서 베이징시공안국의 "포획"대상 명단에 편입된다. 결국 복싱, 언어 등 남다른 특기는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그에게 경찰복을 입게 했다.   박성국씨는 마약수사계 형사로 되는 순간 마약과 일대 선전포고를 했다고 자부한다. 인생의 좌표계를 마약사범과의 전쟁에로 쭉 그었던 것이다.   현 세계에서 금전의 유혹 때문에 다국적 마약사범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주요한 마약 진원지에는 동남아세아의 "금삼각"과 아프카니스탄이 망라된다. 이 두 진원지는 베이징에도 마찬가지로 피해가 막심하다. 이밖에 동북방향으로부터 베이징에 밀반입되는 마약도 급격히 성장, 지난 한해에만도 12% 늘어났다는 베이징시공안국 관계자의 소개이다.   중국에서 마약복용자는 100여만명이라는 방대한 군체를 갖고 있다. 지난 해 중국에서 수사해낸 마약범죄안건은 4.5만건, 체포한 마약사범은 5.8만명에 달했다. 마약의 소비시장을 위축하는 일환으로 지난해 중국은 연 29.8만명에게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했으며, 연 7만명에게 노동교양을 통해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했다.   현재 성급 이상 급별의 공안국에는 모두 강제적으로 마약을 끊게 하는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戒毒所)가 있다. 베이징시공안국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 역시 이런 차원의 강제치료소이다. 이 강제치료소는 지난 6월 새 청사에 이전했다. 깊은 산속에 있던 원래의 청사에 비해 새 강제치료소는 교통이 더 편리하게 되었으며 환경, 관리제도 등 측면에서 국내 선진수준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1천개의 침대가 있는데, 건축물, 장소, 시설에서 모두 국가 1류의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의 기준에 이르렀다.   이성문(35세, 남자)씨는 9년전에 베이징중의약대학을 졸업한후 베이징시공안국 마약복용자 강제치료소에서 임상의료 의사로 있는 경관이다. 날마다 동네사람처럼 마약복용자를 접촉하는게 바로 그의 일상이다. 그는 마약복용자에 대한 인상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의기소침하고 또 옷차림이 지저분한게 바로 마약복용자의 자화상입니다."   그들을 보면 저도 몰래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난다고 한다. 그들이 하필이면 만인이 저주하는 길을 선택했는가 싶다. 그럴수록 직업을 떠나 마음으로부터 마약극복에 대한 책임감이 짙어진다.   “…금단현상을 해제할 수 있는 약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여가를 타서 고대 의학서적을 찾아 마약극복 조제약의 비밀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라고 한다.   마약치료는 생리적인 마약 탈리, 심리적인 금단현상의 해제, 사회로의 귀환 이 3개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강제적인 치료과정은 반년동안 지속된다. 이중 2-3주의 시간을 들여 마약복용자에게 마약 탈리, 생리적인 금단현상 해제를 하는 외 기타 시간은 기본상 법제, 마약의 피해 등 측면의 교육 그리고 "심리적인 금단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미한 노동을 시킨다고 한다. 강제치료소는 또 재배, 양식 내용의 노동 장소를 만들어 일부 마약복용자들에게 강제치료소에서 나간후 생계를 이을 재간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에는 아직 마약투약이 범죄인가에 대해 왈가불가 판정이 나있지 않다. 만일 마약투약 행위를 범죄라고 계선을 확정한다면 관련되는 측면은 아주 넓다. 중국에서 잠성(潛性)의 마약복용자까지 포함하면 마약복용자는 1천만명에 이른다는 설법이 지배적이다.   이성문씨는 마약금지는 사회적인 방대한 공정이라고 역점을 두어 말한다.   “마약밀매를 엄격히 타격해야 하거니와 여러 가지 마약극복 형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약 피해에 대한 홍보를 늘리는 등 해야 할일은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 힘들어요."  “마약”은 이상한 연줄로 되어 이성문씨와 박성국씨를 굴비처럼 한줄에 엮어놓았다. 사실 그들은 "마약"과 관련 없이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군 한다. 같은 경찰복을 입은 한 피줄의 동료라는 의미 때문이다. "마약"처럼 끈끈한 정분은 속일수 없는 모양이다. 이처럼 자주 만나는 조선족 경찰은 그들 둘뿐이 아니다.  “여럿씩 만나는 경우는 많아요. 그러나 한꺼번에 만나기는 진짜 힘들구요."   올해 박성국씨의 주선으로 베이징시 조선족경찰 13명은 어렵사리 만남의 장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베이징시공안국 여러 부처에 모래알처럼 널려 있고, 또 주거지도 베이징의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다보니 전부 만나려면 아닌 게 아니라 바위에 구멍을 뚫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베이징에서 조선족경찰은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에 나타났었다. 지금 베이징시공안국에는 정치부, 외사과, 치안처, 파출소 등 여러 부문에 조선족이 약 20명 된다. 박성국씨나 이성문씨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직접 공안국에 배치받은 사람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군인에서 제대한후 직접 공안국에 요원으로 배치된 사람이다. 지금 중국에서 제1류의 경찰을 육성하는 중국공안대학에도 "후보 경찰"인 조선족 학생은 여럿 된다.   와중에서 일부 경찰은 조선족이라는 이름과 관계없이 직업적인 관계로 신분 노출을 무척 꺼린다. 김철(42세, 가명)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제대한후 공안국에서 소임을 맡은 그는 근무 수칙상 그저 공안국 모 부문의 경찰로 통하는 사람이다. 또 일부 사람은 시야비야 하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베이징의 조선족무대에 아예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모르는게 오히려 편안하죠. 뒷말도 없구요."   그러다니 워낙 가물에 씨 나들 듯 드문 조선족경찰은 베이징에서 더구나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외계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존재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둘린 화려한 빛 무늬에 색이 바래지는건 아니다.   그들과 인터뷰를 할때 누군가 화제로 담았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천안문광장에서 관객이 하나 깜짝 놀라 가로되, "베이징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찰이라니? 이게 도대체 웬 일이냐?" 진짜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2006년 여름(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    얼굴이 바뀐 사람 댓글:  조회:3517  추천:150  2007-02-26
    서울에서 고향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김범진이라고 부르는 이웃동네의 사람으로 이전에 종종 내왕이 있었던 사이였다. 고향을 떠난 십여년만의 상봉이라 그렇게 놀랍고 기쁘지 않을수 없었다. 한참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옆사람이 그를 정모씨라고 부른다.   (분명 나와 같은 김씨인데 난데없이 정모씨라니?…)   그러나 김범진은 아주 담담한 표정이다.   “뭐가 그리 이상하니? 사실 난 몇해전에 언녕 이름을 바꾸었어.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 들어올수 없었으니까.”   나는 의아함을 떨쳐 버릴수 없었다.   “그건 왜요? 무슨 죄라도 지었어요?”   김범진은 서글피 웃었다.   “6년전에 한국신문에 요란하게 실렸댔어. 밀항선을 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해양경찰대에 잡혔거든. 그런 경력이 있으니까 감히 본명을 쓸수 있냐.”   6년전의 밀항선 이야기라니 어슴푸레 기억되는 것이 있었다. 중국신문에도 떠들석하니 실린 톱 뉴스였으니깐 말이다. 그 장본인이 고향사람이라니 참말 세상이 작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니까 무척 알고싶겠지?…” 김범진은 고향사람답게 그렇게 쉽게 말꼭지를 떼주었다.   9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려권 수속이 무척 힘들었다. 초청장이 동반해야 했고, 초청장이 있다고 해도 꼭 려권을 받을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때 돈만 두둑히 내면 밀항선을 탈수 있다는 고향사람의 소개에 김범진은 귀가 솔깃, 나중에 친지 4명과 함께 밀항을 단행한다.   김범진은 요녕성 심양에서 기타 밀항자들과 합류, 브로커와 함께 출발지인 장하(庄河)에 갔다. 브로커는 밀항선은 큰배라서 기슭에 닿일수 없다고 했다. 일행은 똑딱선에 몸을 싣고 약 2시간동안 검푸른 바다를 달렸다. 밤장막 아래 희부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이 12메터, 너비 5메터짜리 나무배, 파도가 칠때마다 금세 자빠질 듯 기우뚱거렸고 그때마다 이음목이 무섭게 입을 반뼘씩 쩍쩍 벌리군 하였다. 목에 단박 오라 줄을 매더라도 그런 배에는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는 이미 범의 잔등에 올라 탄 격이였다.   나무배는 가랑잎처럼 파도를 타고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난생 처음 배를 타는 시골사람들인지라 배멀미가 심했다. 여자들은 아이때 먹은 젖물까지 게워낼 심산인지 죽어라고 토악질을 하였다. 그렇든 말든 날이 밝아오자 선주는 20여명 되는 밀항자들을 비좁은 선창속에 떠밀어 넣었다. 창해속에서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배들에게 밀항선이라는게 발각될가 두려워서였다. 선창에는 빵과 물이 나름대로 충분히 실려있었다. 그러나 긴장감과 흥분, 배멀미 때문에 음식물에 손을 가져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내들은 애꿎은 술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바다위에 거밋거밋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김범진은 기다렸다는듯 선창위에 올라갔다. 그때까지 배는 계속 공해를 달리고있었다. 선주는 배가 수시간후에 한국쪽으로 꺾어들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하루낮 하루밤을 자지 못한 선주의 눈에는 피발이 벌겋게 서있었다.    “성공할수 있어요?” 김범진은 아무래도 찜찜한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근심말라 해.”   선주는 지도 한장을 꺼내 보였다. 한국 군산 앞바다의 지형도였는데 섬들의 위치, 레이더망 초소, 해양경찰대의 순라시간, 예정 항로 등이 자세히 적힌 첩보급의 지도였다.   “이래 봐도 여러번 군산에 가만히 드나들었다 해. 현지정보랑 일기예보랑 꼭꼭 챙긴다 해. 경찰에게 잡힌다거나 비바람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해.”   드디여 나무배는 군산쪽으로 방향판을 돌렸다. 얼마를 갔을가? 멀리 륙지에서 깜박깜박 점멸하는 전등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배에서는 나지막한 환성이 터졌다. 그런데 야단이 났다. 감기에 걸린것처럼 콜록거리던 엔진이 무슨 성깔을 부리는지 느닷없이 멈춰버렸다.        “젠장, 물이 들어갔다 해.”   선주는 사람들을 시켜 선창의 물을 퍼내게 하였다. 모두들 마음이 급한지라 손길이 분주히 빨라졌다. 그러나 엔진은 한식경이 지나도록 요지부동. 갑자기 머리우로 하얀 섬광이 펀뜩 스쳐지났다. 탐조등 불빛이였다.   “어이구 발각된거야.”   누군가 나지막히 비명을 울렸다.   아니나 다를가, 불과 몇분후 눈앞에 집채같은 거물이 세개 나타나 나무배를 울바자처럼 둘러막았다. 한국 군함이였다. 밀항자들은 군인들에게 압송되여 옴짝달싹 못하고 군함에 올라탔다. 군함 갑판에서 내려다보니 그들이 탔던 나무배는 손바닥만큼 조그마하게 보였다.      “얏따, 그놈의 군함이 크긴 크구려.”    “포로”가 된 와중에도 밀항자들은 신기한 구경을 했노라 저마다 혀를 끌끌 찼다. 시골에서 군함이라곤 TV나 영화에서 얼추 눈요기를 했던 그들이였다. 그들은 인제 바다 밑으로 추락된 신세는 잊어버리고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한국 군인들은 그런 어이없는 군상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라면을 끓여주는 선의를 보여주었다.   배가 군산 부두에 도착하자 한국 언론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왔다. 카메라들이 눈을 뚝 부릅뜨고 있는데다가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머리가 막 어질어질해졌다. 밀항자들은 군산 교도소에서 약 2개월 쭉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인물사진을 찍고 중국 관련측에 전송하여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에 시일이 어느 정도 걸렸던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중국 대련에 강제출국 된후 중국인들로부터 또 반역자라는 눈총을 받아야 했고 약한 다리에 찜질이라고 중국측에 또 인민폐로 벌금 5천원(원화 80만원)을 물어야 했다.   김범진은 밀항사건이 터진 이듬해에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지전장을 뭉치로 날려버린 한국 꿈을 종이장처럼 허망하게 접어 버릴수 없었던것이다. 밀항선을 함께 탔던 친지 4명도 공무와 연수, 결혼 등 명목으로 모두 한국에 다시 들어온다.   “본명을 사용하면 밀항 경력이 들통날 수 있잖아? 그래서 성도 이름도 몽땅 바꾸었고 생일까지 바꾸었어. 말하자면 변성명을 한거지. 어떤 때는 내가 정모인지 김모인지 진짜 착각이 되는거야.”   김범진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역에 나가 기웃거렸다. 혹여 일감을 찾을수 있을가 해서였다. 그의 기색을 보고 한국인 하나 다가왔다.   “자네 노가다를 뛰겠나?”   “예.”   “그럼 뒤를 따라와.”   김범진은 그렇게 일산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당 3만원을 받고 잡부로 일하게 되었다. 문틀을 세우는 일이였는데, 오야지(팀장)는 물론 기타 일군도 김범진에게 내처 허드레 일만 시켰다. 도면을 들여다 볼려고 해도 그때마다 무슨 핑계거리인가 만들어서 자리를 함께 할수 없게 하였다. 김범진은 어깨너머로 목수일을 배우고, 눈어림으로 도면 보는것을 배우면서 4개월을 보냈다.   “그 다음 홀로 서기에 성공한거야. 먼저 돈내기를 했지. 문틀 하나에 7천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이때 김범진은 잡부에서 한 단계 승진을 한 셈이였다. 그후 일에 미립이 트고 돈지갑이 두툼해지자 김범진은 타카, 못주머니 등 도구를 사들였고 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원천 오야지(팀장)에게서 하청을 받고 또 아래에 일군 6명을 두는 등 명실상부한 오야지(팀장)로 둔갑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게 1년 푼히 걸렸지. 그동안의 고생이야 이루다 말할수 있겠나.”   김범진은 지난해 4월부터 모 아빠트 건설현장에서 문틀 2만개를 맡았다. 인건비만 한화로 1억원대의 돈이 쏟아지는 큰 일거리였다.   “1월까지 이 일을 끝낸다면서요? 그후에는 어떡할건데요?”   “글쎄 말이다.” 김범진은 약간 주저하는 모습이다.   “사실 인제는 예약이 많이 들어오고있어. 그런데 아무래도 찜찜한데가 있어서 미뤄놓고있는 사정이야.”   그럴 법도 했다. 지난해 5월, 한국정부가 불법체류자들에게 자진신고에 잇따라 허용한 “합법적” 체류기한은 올해 3월까지인데 그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수하 일군들이 혹여 강제출국 당하면 맡은 일들을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그럼 내년 3월에도 귀국을 안 하려는 타산인가 보죠.”   김범진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돈만 좀 벌었어도 당연히 귀국할거 아니겠어?”   김범진은 지난해 추석전까지 그간 산더미처럼 쌓인 빚돈을 깨끗이 물었다고 한다.   “아니, 한국으로 온지 5년이 넘는다면서요? 인제 겨우 빚을 갚아요?”   “처 때문에 빚이 또 늘어났댔어.” 김범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1998년에 김범진의 안해가 입국하여 식당에서 일하였다. 덕분에 1-2년만 맞벌이로 벌면 빚을 인차 갚겠다 싶었는데 때아닌 날벼락이 떨어졌다. 누군가 출입국사무소에 안해를 불법체류자로 신고하였던 것이다. 남편에게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당에 나간 안해는 그게 마지막 걸음이였다. 행방을 알리느라고 안해가 수용소에서 어렵사리 걸어온 전화에 김범진은 기가 막혀 한동안 할말을 잊어버렸다. 입국 4개월만의 일이였으니 입국비용 1천여만원을 또 고스란히 빚으로 만들어야 하였다. 김범진의 안해는 2년전에 변성명한 신분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러니저러니 빚돈들은 수년동안 새끼를 치는 이자 때문에 원화로 약 5천만원, 인제 빚을 말끔히 갚아서 한 시름을 덜긴 했으나 그렇다고 냉큼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이다.   “고향에 돌아가 집 한채는 마련해야 하고 무언가 사업을 할 기반은 갖추야 할거 아니냐?…” 김범진은 어름 잡아 아직도 2년정도는 더 버티고 있어야겠다고 실토한다.   “뭐니뭐니해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거야. 중국에는 이렇게 좋은 돈벌이 기회가 없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목돈을 쥐어 볼수 있겠어?”   김범진과 함께 일하는 일군들도 동감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우리들은 언제 강제출국당할지 모르는 신세잖아. 한푼이라도 더 모으려면 아득바득 일할 수밖에 없잖느냐.”    김범진은 지금 안해가 입국하여 한 지붕을 이고 살지만 사실 이름이 부부사이지 서로 이야기할 사이도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오전 6시이면 일어나는거야. 건축현장에 7시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저녁이면 12시가 넘어야 들어가기가 일쑤이지. 그런데 처는 저녁 10시에 들어와 오전 10시면 나가거든. 서로 잠을 자는 얼굴밖에 볼수 없단 말이야.”   핸드폰 벨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자주 끊어놓았다.   “또 술 먹자는 전화겠지.” 김범진은 시큰둥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날마다 저녁쯤이면 의례 그런 주문이나 전갈이 들어온다고 한다.   “모두 고향사람들이야. 너도 잘 아는 이웃사람들이야.”   김범진은 한국에 고향사람들이 3-4백명 들어왔다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한 가구에 거의 한명 꼴이니 불가사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고있는 중국조선족이 약 10만명, 그 엄청난 숫자를 피부로 느낄수 있는 순간이였다.   “우리 건축현장에 식당이 있는데 그저께 새로 들어온 아줌마가 글쎄 한고향사람이 아니겠어? 정말 서울이 작긴 작은 모양이야. 허허.”   김범진의 웃는 얼굴에서 금세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것만 같아 마음이 이상해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 같기도 한 사람들이다. 서울 어덴가의 식당에서, 아니면 어느 건설현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닿여오는것이리라. 사실 그들은 강제출국이 행하여지더라도 얼마후 또다시 달라진 얼굴로 입국할 터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정말 일을 많이 해. 돈만 된다면 어지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꺼리지 않아. 아마 조선족들이 없으면 금방 일손을 멈춰야 할 회사가 한두개만 아닐거야. 건설현장에서는 일군들이 거개 5-10명씩 함께 뛰거든.”    어덴가 호기가 넘쳤지만, 김범진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였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일시적인 “인력 진공상태”가 이뤄질수도 있는 실정이다. 관련업계와 중소기업청 등에 따르면 외국인 근로자가 몰려있는 경기도 안산시 시화공단의 경우 지난해 5월이후 20%가량이 더 많은 임금을 주는 다른 회사나 인근공단으로 옮겨갔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기업들은 정상가동이 어려운 상황까지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말 자유왕래를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이처럼 맨날 마음 졸이고 살지 않을텐데. 우린 한 피줄이 아니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고국땅인데 왜 이렇게 남스럽게 피곤하지?” 김범진의 얼굴에는 한순간 그늘이 비꼈다. 그래서인지 가무스레한 그의 얼굴은 더군다나 흐릿해 보인다. 가물가물해지는 김범진의 얼굴에서 또다시 수많은 얼굴을 보는듯한 환영이 안개처럼 일어나 갑자기 머리속이 혼란스웠다.*
1    학원이 제일 많은 나라 댓글:  조회:3381  추천:143  2007-02-26
    어린 학생들을 싣고 서울의 밤거리를 달리는 버스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차체에 '00학원'이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학원생들의 셔틀버스인 듯싶었는데, 귀가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시골은 모르겠지만 도시에 살면서 학원 문턱을 밟아 보지 않은 학생은 제가 보기엔 단 한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영어학원은 기본이고, 보습학원(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을 복습, 예습시키는 학원), 예체능학원(피아노, 발레, 미술, 수영 등을 가르치는 학원)까지 아이들은 하루에도 여러 학원을 전전한다고 합니다.   보습학원 같은 경우 주 5일, 날마다 수업시간이 1시간 반 내지 2시간 정도이니 말이 학원이지 학교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학교를 두세 개씩 다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학교 교육보다 학교 밖 교육의 비중이 큰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형적인 교육 현실은 물론 널리 알려진 한국인들의 교육열 때문입니다.   내 친구 하나는 딸애를 서울에 데려다 초등학교에 넣었는데, 반년 만에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르칠 과목을 학원에서 미리 배우다 보니 정작 학교에서는 그리 열성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는 중국에서 온 학생에게는 빈 껍데기였던 것입니다. 애들이 학교에서 배울 걸 학원에서 모두 배웠다니 학교에서는 도대체 뭘 하겠어요. 여자애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마냥 꽃 그리기, 수놓기 같은 일과가 전부였습니다. 부부가 모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네는 그렇다고 아이를 학원에 보낼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는 아이를 하나도 아닌 여러 가지 학원에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학원 한 군데 다니는 비용이 한달에 최소 7만~8만원, 또 교재비는 별도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한국에서 학생 1인당 연간 사교육비는 초등학생이 1백35만원, 중학생은 1백53만원, 고등학생일 경우 1백76만원, 대학생은 2백64만원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한국인들이 사교육에 들인 비용은 한화로 26조원, 국가 교육예산 21조원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입니다.   한국인들은 자녀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옛날부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자녀를 공부시키던 미풍양속이 그대로 이어진 것일까요. 만만찮은 교육비용이지만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한달에 과외비로만 수백만원을 지출한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것을 잡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신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대개 영어자모 'R'와 'L'의 발음을 구분하기 어려워합니다. 어릴 때부터 익혀 온 한국어 발음에 혀가 굳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이것이 선천적으로 혀가 짧은 탓이라고 우기면서 코흘리개 자식들의 혀 수술까지 단행하고 있다니 기겁할 노릇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집착이나 무지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영어를 잘하는 한국사람들을 만나면 그의 혀가 언제 입밖으로 나오나 말똥말똥 살피는 못된 버릇이 생겼습니다. 저 사람도 어릴 때 붉은 혀에 얼음장처럼 흰 칼을 박아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해서요.   이런 일들은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있지만, 과열된 교육열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부모들의 그런 열띤 기대 속에서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들의 노력은 말 그대로 아예 뼈를 깎는 처절함입니다. 어릴 때부터 너나없이 모두 그렇게 길들여진 터라 대학입시 때에는 더군다나 기를 쓰고 뛰어야겠죠. 남보다 한 걸음이라도 뒤지면 좋은 대학은 물 건너 간 것이 되겠으니 말이죠.   입시생들을 위한 보습학원의 경우, 밤 12시 심지어 새벽 1시에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이른 아침이면 또 감기는 눈을 비비며 등교하는 아이들이 정말 안쓰럽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들은 여린 몸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 제일로 꼽히는 서울대 등에는 모두 그런 뜀박질 끝에 입학한다고 합니다.   S대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 김영화씨는 OO연구팀 팀장으로 여러 명의 석사, 박사연구원을 이끌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의 악착같음과 집요함으로 소문난 김영화씨도 한국 후배들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한국 학생들은 일단 실험을 했다 하면 밤을 여러 날 지새워도 끄떡없어요. 진짜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니까요"   하루 이틀도 아닌 며칠을 의지력과 집중력으로 조금의 실수도 없이 버텨야 하는 무수한 실험들이었습니다. 체력의 극한을 초월하는, 그런 어려운 순간들을 일상처럼 스쳐 보내는 후배들이 한순간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비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무한경쟁의 달리기 코스를 수없이 뛰었던 한국 학생들이라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 진학은 아이들이나 부모들 모두 자나깨나 바라는 것입니다. 일류 대학이 일류 직장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일류 운명을 만든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좁다란 그 문에 들어서는 것은 사투에 가까운 노력의 대가가 없이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대학 진학을 꿈꾸는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그곳에 몰려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 너나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니 대부분 높은 점수를 받기 때문에 1점이나 2점이라는 간발의 차이로 상위권 대학이냐 하위권 대학이냐 하는 승부가 판가름되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입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모의고사 같은 실전경험을 두둑이 쌓아 두는 게 좋은 결실을 맺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벽까지 쏟아지는 잠을 쫓으면서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 학원을 전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운명들인 것입니다.   무거운 멍에를 쓰다 보니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공부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입시교육에 매달린 학교 역시 그들에게 별도의 공부장소를 마련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도서관이 있는 중학교는 겨우 1%, 도서실이 있는 중학교는  60% 안팎이라고 하는 집계가 있습니다. 본의든 타의든 교과서 외의 독서는 아이들과 멀리 떨어진 별나라 얘기가 되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 거의 모든 중학교가 나름대로 도서실을 갖추고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학교들에서 마냥 백이면 백, 만이면 만으로 똑같은 '붕어빵'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대학교라는 허기만 채우면 되니까, 별미가 담긴 '빵'을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요. 확실히 창의력과 사고력은 아주 떨어지거든요." 김영화씨는 한국 학생들이 같은 세대의 중국 학생들과 비교할 수 않을 정도로 뒤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속출해야 하고, 나름대로의 분석력을 갖추어야 하는 실험대 앞에서 그런 격차는 금세 눈에 뜨인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교육계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입시 과다경쟁이 부른 학생들의 창의력 부족에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교육계에 마침내 '적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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