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가요와 황정일할머니
□ 김철균
혁명을 찾아서 암초많은 바다로/ 감옥살이 두려우랴 혁명대렬 앞으로// 어느곳의 감옥이 내집으로 되든지/ 단두대에 오른대도 겁날것 없어라
적은 무리 잘살고 많은 대중 못사는/ 자본주의 노예된 그 설음이 원통해// 일어나라 로동자 농민과 녀성들/ 불평등한 자본사회 때려나 부시자
…
지난해 여름, 본편집부에서 조직한 통신원원고평의 모임에서였다. 경치가 아름다운 연길공원 뒤산이라 원고평의가 끝나자 자연히 술파티와 더불어 오락이 시작됐다. 통신원들이란 거개가 60-70대가 되는 로인들인지라 그 오락모임에서 나는 로인들의 정서에 알맞게 항일가요 몇수 불렀다. “적기가”, “결사전가”, “연길감옥가”, “메데가”,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인민주권가”…
그러자 로인들은 젊은 나이인데 진짜 항일가요를 아는것이 많다면서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느냐고 했다.
로인들의 그 물음에 나는 즉각 떠오르는 인물 한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녀성항일투사 황정일할머니였다.
내가 황정일할머니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것은 할머니의 친구였던 나의 셋째 고모에 의해서였다.
1972년 내가 16살이 되던 해의 여름이였다. 그때 흑룡강성 동녕현에서 살던 셋째 고모가 훈춘으로 오게 되였는데 어느날 내가 고모의 손목에 이끌려 황정일할머니네 댁으로 가게 되였다.
…
“이보게 동갑이, 얘가 부모없이 형님의 집에서 얹혀자라는데 동갑이 아들삼아 자래우면 랑패가 없을걸세.”
이에 황정일할머니는 “앞으로 얘가 뭐 나같은 늙은이하고 함께 있고싶어하겠나?” 이러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후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훈춘시복장공장에 출근하면서 18살 되는 견습공을 딸 삼아 집에 두고 보살펴주다가 20살을 넘기자 시집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같은 남자애를 아들삼아 두고싶은 마음이 많을상싶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를 키워두던 형님이 “형인 내가 퍼렇게 살아있으면서 왜 동생을 남한테 주겠수”하고 거절하는통에 그 일은 그렇게 무산되고말았다.
이렇게 내가 황정일할머니의 양아들로 되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할머니댁으로 놀러다니군 했다. 홀로 살기에 생활적여유가 있어 내가 가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에 다닌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할머니와 함께 있노라면 많은 옛말을 들을수 있어서였다. 그러던중 한번은 내가 조선영화 “영원한 전사”에서 배운 삽곡을 코노래로 흥얼거렸더니 할머니가 대뜸 그것을 받아 부르시는것이였다.
나가자 마중가자 밝은 동이 튼다/ 싸우자 총과 칼로 우리의 길 닦자// 용감히 걸음도 굳세게 청년들 모두다 나서자/ 우리는 로동자 농민의 청년돌격대…
“어머님께서도 이 노래를 아시나요?”
“그래 내가 아마도 너보다 더 옛날사람이니 조금은 더 알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할머니는 “녀성해방가”, “혁명가”, “인민주권가” 등을 거침없이 줄줄 부르시는것이였다. 그속에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가로 불리우는 “태극가”도 망라되여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지금와서야 비로서 알게 되였지만 그 옛날 전체 조선인들이 부르던 “애국가”로서 동북항일련군내의 조선인병사들이 불렀는가 하면 태항산의 조선의용군들도 불렀으며 중경의 한국독립군 병사들도 부르던 노래였다. 다르다면 곡이 지금의 한국국가의 곡이 아닌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불렀다는것뿐이였다.
한편 할머니를 통해 나는 많은 항일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대황구항일유격구의 이야기, 연통라자항일유격구의 이야기…그외 일본의 이또히로 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놀랍게도 중국내 안중근의 활동을 동조한 사람중에는 황정일할머니의 부친인 황병길선생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모친인 김숙경녀사와 언니인 황정신, 남동생인 황정해 등도 모두 항일혁명에 투신하였는데 특히 남동생 황정해는 항일련군 패장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위증민 부총사령의 경위원으로 임무를 집행하다가 24살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기도 했었다. 그럼 할머니의 항일력사는? 말치 않아도 할머니 역시 그제날 항일련군 피복공장의 일군으로 유격대의 원호사업과 녀성해방사업에 투신한 항일투사였다. 다만 항일유격대와 떨어져 흑룡강성 동녕현 경내에서 활동중 일제에 의해 체포되였고 후에 항일유격대의 쏘련경내로의 이동으로 인해 더는 항일투쟁에 참여하지 못한것이 할머니의 생애에서는 가장 큰 오점이였다. 하긴 력사적원인으로 봐도 1940년초에 들어서는 일제의 가혹한 토벌로 동만경내의 항일근거지가 초토화로 된것도 사실이였다. 이 력사로 하여 해방후 할머니는 오래동안 항일간부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로 인해 억울해한적이 없었다. 오히려 공산당이 있었기에 못살던 만백성이 사회의 주인으로 될수 있었다고 말씀하시군 하였다.
할머니에 대해 탄복되는 다른 한가지라면 옛날로인들이라면 당연히 흘러간 옛노래인 “홍도야 울지 말라”, “나그네설음”, “번지없는 주막” 등에 잘 알고있었으련만 나한테 이런 노래에 대해선 일절 배워주지 않고 오직 항일가요뿐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 70년대까지만도 우리 중국조선족의 항일가요에 대해여 부르지 못하게 할 때 할머니가 나한테 많은 항일가요를 배워주었다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항일력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바라는 소망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 또한 할머니를 통해 항일가요를 배움과 동시에 우리 조선족의 항일투쟁사에 대해 알게 된것도 사실이였다. 나뿐만이아니라 정영석 등 많은 작가들도 항일제재를 다루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할머니를 통해 력사적제재를 제공받기도 했었는데 그중 채광춘선생의 회억록 “눈보라치는 밀영”에서의 많은 사실은 황정일할머니가 제공한것였다.
한편 할머니한테 자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1930년대에 결혼한 할머니한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동북민주련군에 입대시켰고 후에 조선에 나가 조선인민군으로 개변되였다가 조선전쟁중에서 전사했다. 이렇듯 할머니의 가정은 아버님 황병길선생으로부터 형제들인 황정신, 황정해 모두가 혁명투사였도 아들까지 혁명에 목숨을 바친 혁명가정이였다.
할머니는 1987년에 력사문제가 풀리여 그 이듬해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던중 고질병이던 고혈압, 관심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그때 할머니의 슬하에는 13살 때부터 키워주던 시동생의 딸 김련순이가 있었다.
할머니의 양자로 될번했고 또한 할머니를 통해 많은 항일가요와 항일력사를 알게 된 필자로서는 오늘 이 한편의 글로 할머니를 추모함과 아울러 할머니가 즐겨불렀던 “녀성해방가”를 적으면서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권리를 박탈한 자본사회에/ 청춘의 붉은꽃 못피는 원한// 아느냐 그대여 녀성동무들
남몰래 조용히 우는 눈물은/ 청춘의 고운 낯에 주름 생기고// 매맞아 얻은 병 정말 싫어요…
녀성들 우리 동무 다 일어나라/ 부르죠아제도를 없애버리고//동등한 권리 위해 총들을 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