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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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50대의 인생과 사명 댓글:  조회:4962  추천:2  2014-07-29
  내 나이가 오래잖아 60대에 들어서지만 그래도 아직은 분명한 50대라 할수 있다. 50대의 인생ㅡ 인생 반세기 넘어 살아오다보니 참 희로애락이 많았고 느끼는 점도 많으며 또한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질 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50대의 인생ㅡ 우리는 특수한 시대에 태여났고 그러한 시대에서 살면서 또 그러한 시대가 만든 특수한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우리는 시대가 만든 “희생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중국으로 놓고보면 우리 50대가 태여나고 자라던 시기가 각종 정치운동이 가장 심하던 시기였다. 대약진, 반우파운동 등 운동열이 심했나 하면 지난 세기 60년대 초기에는 우리 중국이 가장 큰 기아에 시달리던 시기였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 필자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이 지나자 “문화혁명”이란것이 터져 그때로부터 10년간 배움의 “황금계절”을 놓치고말았으며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을 때는 배움의 “황금계절”이 훌쩍 지나간 뒤였다. 우리 50대들은 조상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물려받은것이 거의 없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밭김을 매고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업어키웠고 또한 성인이 되기 바쁘게 “지식청년”이 되여 농촌으로 쫓겨가지 않으면 공장의 림시공으로 노루꼬리만한 로임봉투를 받아서는 그대로 부모한테 바치군 하던 우리였다. 또한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 분가라도 하게 되면 전 재산이래야 고작 색시가 갖고온 이불장에 가마솥 2개, 그리고 찬장(식장)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아래세대들은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덕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배고품과 헐벗음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자랐고 또한 나이가 들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부모가 모든걸 다해준다. 아빠트에 모든 가전제품 그리고 요즘엔 아들 가진 집에서 아파트를 사주면 딸 가진 집에서는 자가용을 산준다고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키우는것 역시 부모의 몫으로 된다. 이 모든것은 우리 세대에서는 꿈이나 꿔보았던가?! 분가하면 “성냥갑” 같은 세집으로 나가고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을 꿍져업은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만 했던 우리였다. 어찌 보면 우리 세대는 억울한 세대이다. 조상들로부터는 물질적으로 물려받은것이 거의 없지만 아래세대한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줘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뒤바라지 해줘야 하는 의무감으로 아직도 아글타글하며 살고있는 50대들이 허다한걸로 알고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것이 우리 세대의 운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사명감으로 간주되고있다. 아래세대한테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주어 그들한테만은 우리 세대가 겪어왔던 고생과 풍파가 없도록 한다는것은 아주 고귀한 생각이며 이를 놓고 시야비야 문장을 만드는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아래세대한테 아주 중요한것을 물려주지 못하고있다는것이다. 웃세대가 우리한테 물려주었던 “간고분투하고 부모한테 적게 의거하고 모든것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며 해결해나가던 그런 정신”을 물려주지 못하고있는것이다. 그제날 전등불도 없는 두메산골 집체호에 자식을 맡기고는 눈물로 돌아서며 자식한테 “독립의식”을 심어주던 웃세대들이였다. 큰아들이 장가를 들어도 아래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들딸들때문에 장가가는 아들 자신이 “홀로서기”를 하게 했으며 손군이 생겨도 역시 그것들때문에 외면했던 웃세대들이였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얼마전 뻐스에서 젊은 녀성은 그냥 홀몸이였고 친정어머니쯤 보이는 50대 녀성이 아이를 업고있는것을 보고 충격적이였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식이 보다 덜 고생하게 하려고 자식의 집을 청소해주고 빨래해주고 손군까지 맡아 키워주는 50대들이 아주 허다하다. 세상사란 예측하기 어려운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한테 그 어떤 불상사가 생기고 자연적으로도 어떤 재난이 덮쳐들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언제까지고 아래세대들을 “껴안고 돌볼수가 없다”는것이다. 그들을 “껴안고 돌볼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고생이란것이 뭔지를 알게 하고 고생을 이길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게 하는것”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50대인 우리한테도 인생이 있다. 매양 자식들한테 매여 살수는 없고 우리 자체의 인생을 즐길 시간도 가져봐야 할것이다. 돌이킬수 없는 청춘, 제한된 인생 – 우리의 인생은 나 자신의것이지 결코 아래세대한테 꿰여있는 “실”이 아닌것이다. 연변일보 7월 29일자
39    말기단계의 갑급권 및 연변팀 현황 댓글:  조회:3727  추천:0  2013-10-13
    현재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혼전양상으로 하남건업을 비롯한 3개팀이 슈퍼리그진출을 위해 득점전쟁을 벌이고있고 이른바 제3집단군에서는 연변을 비롯한 호남상도, 성도셀틱, 귀주지성, 호북화개르, 중경FC 등 6개팀이 강등권에서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쏟고있는 상황이다.     갑급선두그룹에서 보면 선두주자인 하남건업이 앞으로 성도셀틱(원정), 천진송강(홈장) 및 심수홍찬(원정) 등 3개팀과 경기를 진행, 상대팀의 상황과 실력을 보아 3승 혹은 2승이 유력하기에 슈퍼리그진출에 큰 장애가 없을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할빈의등과 광동일지천 역시 강력한 슈퍼리그진출후보로 보인다. 그중 할빈의등은 심양심북(홈장) , 연변(원정)  및 북경리공(홈장) 등 팀과 3경기를 치르고 광동일지천은 연변(홈장), 북경리공(원정), 중경FC(홈장) 등 3개팀과 3경기를 치른다. 그렇다면 이 두팀가운데서 도대체 어느 팀이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할지 가늠할수 없으나 현재의 순위 및 실력 등을 감안할 때 할빈의등이 슈퍼리그진출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가싶다.     한편 현재 강등후보권을 볼 때 일대혼전이다. 그중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호남상도와 같은 27점여서 두팀 모두 갑급잔류에 어느 정도 유리하다고 할수 있어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팀들과의 점수차이를 보면 제일 꼴찌팀인 중경FC와의 차이래야 겨우 4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연변팀이 치를 상대는 각각 광동일지천, 할빈의등 및 석가장준호팀이다. 그중 광동일지천과 할빈의등은 슈퍼리그진출을 목표로 하므로 연변팀한테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것으로 보인다. 이는 연변팀한테 크게 불리한 점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연변팀한테는 홈장이 1경기이고 원정이 2경기여서 원정패전이 많은 연변팀으로 볼 때 이 역시 불리한 요소가 아닐수 없다. 그외 중국리그가 마지막 단계가 오면 하냥 그러했듯이 올해라고   “거래축구”가 성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경제력 및 지역 상황을 고려하면 또 연변팀한테는 불리한 요소이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 들어 갑급권 선두의 3개 팀과 마지막 6개팀외 기타 팀들은 슈퍼리그진출희망과 강등우려가 모두 없기에 “거래축구”를 할 가능성이 커보일수밖에 없다. 연변팀의 분발이 요청된다.    
38    최후의 결전단계 연변팀 비장한 결심 토하라! 댓글:  조회:3461  추천:0  2013-09-22
     이번에 성도셀틱과의 경기에서 0 : 2로 패하면서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의  갑급보존여하가 갑급리그 제30라운드 막판까지 이어질것 같다. 현재 연변팀(24점)의 점수는 갑급꼴찌인 중경FC(19점)와 단 4점차이, 연변팀의 승전이 없고 중경FC가 2련승을 하면 순위는 대뜸 엇바뀌게 된다.      이제 남은 연변팀의 경기일정을 보면 심수홍찬(원정 – 9월 28일), 호북화개르(홈장 - 10월 5일), 광동일지천(원정 – 10월 19일), 할빈의등(홈장 – 10월 26일), 석가장준호(원정 – 11월 2일) 등 팀들과의 대결 5경기가 남았다.      앞으로의 경기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예측할수 없는 상황이다. 홈장에서 강호 하남건업을 무너뜨린 경기라면 질 경기가 없을터고 이번 성도셀틱과 완패한것 같은 경기라면 이길 팀이라고는 없다. 불리한 요소도 있다. 원정 3경기이고 홈장 2경기 그리고 리그 막바지마다 나타나는 “흥정경기”도 제외할수 없다. 슈퍼리그진출이 좌절되고 강등우려도 없는 팀들은 막바지기회에 “한몫” 챙기려 들수도 있고 강등위험이 있는 팀들은 “금전”을 “비밀카드”로 꺼내들수도 있다.     이로부터 볼 때 연변팀에는 불리한 요소가 많다. 더우기 연변팀은 “금전”을 내세우는 “비밀카드”도 내세울 상황이 못된다. 연변팀에 남은것이란 경기장에 나설 11명 선수의 비장한 결심과 투혼밖에 없다.     ……     연변팀의 강등,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이는 또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결국 연변팀이 강등하면 “축구고향”의 수치이고 중국축구의 비극이기도 하다.    
37    본 휴전기 연변팀 갑급잔류에 있어 일종 충전기회 댓글:  조회:3716  추천:0  2013-09-08
      갑급잔류를 위해 안깐힘을 쏟고있던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에 휴전기가 찾아왔다. 약 보름가량이 되는 휴전기ㅡ 이는 현재 몸담고있는 갑급권을 지켜내느냐 아니면 빼앗기느냐 하는 관건고비에 있어서의 절호의 충전기회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절호의 충전기회라고 하면 갑급권의 기타 제후들도 마찬가지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갓 사령탑을 교체했고 선수들 또한 급방 마음을 안착하고 경기에 림하고있는 연변팀에 있어서 “급시우”처름 더욱 절호의 충전기회라 해야겠으며 금싸락같은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이다.   휴전기와 감독대리 리광호씨       리광호씨를 놓고말하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을급권을 거쳐 및 갑급에 이르기까지 감독조리(감독은 고훈)로 연변팀에 몸담고있으면서 윤광, 지문일, 백승호 등 지금의 로장 몇몇과 팀풍격 등에 대해 잘 알고있을뿐만 아니라 감독과의 기전술분석 혹은 어깨너머로 감독의 경기운영같은것에 대해 많이 터득한것만은 틀림없으며 “감독으로 가는 길”에서의 인격과 자질 등을 골고루 갖추고있은걸로 잘 알고있다. 하지만 그래도 피말리는 감독경력은 전무했으며 더군다나 얼마전 조긍연감독의 “하차”로 급작스레 사령탑을 맡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갑급잔류가 급선무인지라 거의 심리상 준비할 겨를도 없이 덜컥 지휘봉을 물려받은셈이고 물려받자 곧바로 갑급권에서 현저하게 선두를 지키고있는 하남건업팀과 맞다들게 되였다. 물론 리광호씨가 지휘한 3경기에서 2승 1패를 기록해 팀의 부진국면을 돌려놓았지만 그 사이에 앞으로 있을 매 경기를 어떻게 치를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판을 짜놓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다.     그렇다면 이렇듯 피말리는 3주여간의 주야를 보낸 리광호 감독대리한테 재정비할수 있는 금싸락같은 시간이 생겼으며 또한 새로운 다른 모습을 보여줄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이라 할수 있다.   휴전기와 연변팀의 모든 선수들       이번 휴전기를 놓고보면 선수들한테도 절호의 충전기회가 될수 있다. 체력적 및 심리상으로 조절이 가능할뿐만 아니라 새 사령탑 리광호씨의 축구사상과 기전술시스템에 대하여 보다 받아물수 있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연변대학 체육학원의 김창권교수는 “팀이 부진일 때 새로운 전환을 꿈꾸자면 감독교체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지적한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감독이란 거개가 새로운 축구사상이나 기전술시스템을 갖고있으며 전임감독보다 다른 훈련 및 경기운영을 시도하기때문이다. 특히 연변축구협회 관원으로 매경기마다 연변팀의 경기를 지켜본 리광호씨로 말하면 긍정코 조긍연감독의 장점과 약점을 보아낼을 가능성이 많으며 “만약 내가 팀을 지휘한다면” 하는 속궁리도 수차 해보았을수가 있다. 하지만 선수들 또한 새 감독의 모든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한동안 시간이 수요될수 있다. 물론 홈장 2련승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선수들 모두가 리광호씨의 축구사상과 기전술시스템을 100%로 받아물어 관철해서가 아니고 연변팀에 대한 상대방의 홀시 혹은 판단력미흡에 의해서가 아닐가싶다. 경기에서 상대방에 대한 분석과 판단의 정확여부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한줄로 알고있다. 그래서 아무리 약팀이라 해도 강팀과의 경기에서 이길수 있는 요소 30% 정도가 가능하다는 말도 나오고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수들이 지난번 홈장 2련승의 여세에 이번 휴전기를 빌어 감독대리 리광호씨의 축구사상과 기전술시스템을 보다 공고히 다지리라 보여진다.   리광호 감독대리   그리고 팀에 보내는 메시지         지난 대 하남건업전이 승리한 후에 있은 소식공개회에서 연변팀의 감독대리 리광호는 “전임 조긍연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팀을 응원해준 팬들한테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필자는 리광호씨가 아주 말을 잘했다고 생각는다. 선수들과 팬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것도 그러하지만 전임 조긍연감독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짐이 바람직한 자세인것이다. 조긍연감독에 대해 말할라치면 성적부진 및 선수들과의 일련의 불화 등 부분적으로 차질을 빚은것도 있겠지만 올해초 주력선수들이 거개가 빠져나가 10여명밖에 되지 않는 선수진을 지금의 30여명으로 비교적 완정한 구단을 형성케 했는가 하면 선수들한테 강한 정신력을 부여한것도 인정해야 하는바이다. 그리고 그의 축구사상 또한 크게 나무람할바도 아니라고 보아진다. 하다면 리광호 감독대리의 립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바라는 축구를 보여주더라도 조긍연 전임감독이 갖고있는 선진적이고도 과학적인것은 과감히 받아들여 구단과 선수들의 특점에 알맞게 축구운영을 함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선수들 역시 이전의 전임감독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몽땅 털어버리고 새로운 리광호 감독대리의 주위에 똘똘 뭉쳐 깨뜨릴수 없는 응집력으로 하나 또 하나의 험난한 고비를 넘기면서 올해의 갑급잔류사명의 완수를 위해 사력을 불살라야 할것이다.     총적으로 오늘의 연변구단과 리광호 감독대리 그리고 선수들의 모습은 올해 그 어느 시기보다도 다른 씩씩한 모습이다. 기대가 가며 구단의 갑급잔류목표에서 자신심이 생길것 같다. 이제 남은 “리광호”호의 6경기가 궁금하다. 그리고 새로운 사령탑 리광호씨를 한번 조용히 만나보고도싶다.      
36    기복이 심한 연변팀의 경기력을 두고 댓글:  조회:3252  추천:0  2013-08-25
    연변팀이 올들어 지금까지 가장 커다란 이변을 만들어냈다. 갑급팀 강호이며 가장 유력한 슈퍼리그진출후보인 하남건업팀에 선제꼴을 넣으며 최종 2 : 1로 상대방을 꺾었다. 대단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경기의 결과상 상대방을 이겼는가 하면 경기내용에서도 상대방한테 위축되지 않고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며 어떤 국부적장면에서는 경기를 리드하며 아주 이채로운 장면들을 연출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갑급순위 선두주자와 제14위 사이의 경기에서 보여준 연변팀 건아들의 모습, 아주 통쾌하고도 흐뭇한 마음이 앞서면서도 진작 이렇게 경기했더면 하는 생각이 남아돌지 않을수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올들어 연변팀의 경기력은 기복이 아주 심해 다음번 경기를 예측하기 힘들고 또한 홈원정사이의 기복이 크기에 팀이 아직도 성숙되자면 시간이 필요한것으로 진맥되고있다.     우선 올들어 예견과는 빗나간 연변팀의 경기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라운드 원정에서 북경팔희와 이기거나 적어도 빅을것으로 예측했지만 1 : 2로 패하는 결과를 낳았고 제3라운드 천진송강과는 지거나 빅을 가능성이 큰것으로 예측했으나 이변을 토하며 4 : 2로 대승했다. 제8라운드 북경원정에서 북경리공과의 경기예측이 빗나갔는가 하면 제9라운드와 제10라운드 홈장에서 중경 FC와 성도셀틱과의 경기 또한 이기것으로 진맥했으나 빅고말았었다. 그리고 제13라운드 대 광동일지천전, 제20라운드 대 호남상도전과 이번에 치른 대 하남건업전은 경기내용에서 상대방과 대등하지 않으면 약간 상대방을 밀어붙이는 경기를 치렀거니와 경기결과상 아주 만족스러운 기록을 남겼다.     다음 말하고싶은것은 연변팀의 경기를 보면 잘 치른 경기와 졸전사이의 차이가 너무 기복이 컸다. 그렇다고 볼 때 잘치른 경기를 보면 제3라운드 천진송강전, 제11라운드 심수홍찬전, 제13라운드 광동일지천전, 제20라운드 호남상도전과 이번의 하남건업전이고 졸전을 보면 제9라운드 중경FC전, 제10라운드 성도셀틱전 그리고 제16라운드 북경팔희전 등을 들수 있다.    축구에 대해 담론하기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한쪽팀이 강하면 다른 한쪽팀은 잘차지 못하면서 수세에 몰리기마련이고 한쪽팀이 약체면 다른 한쪽팀이 우세전을 펼치면서 잘차기마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연변팀한테는 이 리론이 잘 먹혀들지 않는 모양이다. 특히 올들어 그렇다. 올들어 연변팀이 홈구장에서 이긴 팀들 즉 심수홍찬, 광동일지천과 하남건업은 모두 갑급 6강내에 드는 팀이고 호남상도 역시 연변팀보다는 몇단계 우위에 있는 팀이다.     그럼 연변팀의 기복이 심한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가? 필자가 인정하건대 구단의 내부분규, 홈원정간의 환경요소와 감독의 기전술 운영 등도 승패의 요소로 되겠지만 선수들에 대한 감독의 컨디션관리 또한 배제할수 없는 원인이 아닌가싶어진다. 경기전야에 선수들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 최정상으로 끌어올리게 하는것이 감독으로서는 자못 중요한 과학적관리가 필요하기때문이다. 이번에 연변팀이 하남건업을 격파하여 한숨 돌리게 됐지만 갑급잔류에 있어서 넘어야 할 고비는 아직도 많다고 할수 있다. 매 경기마다 새로운 결심으로 치러야 한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100%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을 쏟도록 노력해야 할것이고 감독 또한 매 선수들마다 100%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을 쏟을수 있도록 선수들의 컨디션관리에 대해 신경써야 할것이다. 결국 경기장에서 뽈을 차고 꼴을 넣으며 득점하는것은 선수들이기때문이다.      
35    중국국가축구대표팀의 미스터리는? 댓글:  조회:2967  추천:0  2013-08-04
     얼마전에 결속된 동아시아컵 축구대회에서 부박이 이끄는 중국남자축구대표팀이 아시아축구의 정상인 일본에 이어 2위를 기록, 오래간만에 축구다운 축구를 했다고 축구전문가들은 입을 모았고 국내매체들에서 대거보도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중국남자축구대표팀은 7월 21일 일본과 3 : 3으로 빅었고 24일 한국과는 0 : 0으로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대회 마지막날인 28일에는 오스트랄리아와 4 : 3으로 이기는  “쾌거?”를 일구어냈다. 비록 한국축구대표팀에서 손흥민, 구자철, 리청용, 기성용 등 해외파 기둥선수들이 대거 불참했고 또 중국팀이 기본상 페널틱(禁区)부근에 갇혀 얻어터지면서도 키퍼 증성의 몸놀림이 민첩해 많은 위험공을 살려낸것도 사실이였지만 여하튼 주최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0 : 0으로 빅었다는 전적만도 대단하다고 할만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7월 21일에 있은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역시 국가 2팀이라고 할수 있는 멤버가 출동했으나 아시아챔피언인 일본축구와 3 : 3으로 빅었다는것은 어떻게 말해도 긍정할바라는 평가이다.      한편 이는 지난 6월 15일 중국국가축구대표팀이 홈에서 타이팀과 1 : 5로 대패한것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주지하다싶이 당시 타이팀은 진짜 주력멤버들로 구성된 팀이 아니였다. 주로 신진들로 구성된 팀으로 말그대로 청년팀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국내의 축구전문가들과 매체들에서는 중국의 을급팀이 참전해도 그토록 얻어터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결과 국가팀의 참패는 국내축구팬들의 실망을 자아냈으며 당시 국가주석 습근평도 대노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는 중국축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얼마든지 있을수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도그럴것이 중국축구계에서는 그 어떤 일도 발생할수 있기때문이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감독 카마초를 밀어내기 위해 이미 짜놓은 씨나리오가 아닌가싶다. 례하면 국가팀 스트라이커(前锋), 중앙수비 및 키퍼 등 몇몇 기둥선수들만 선동하면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며 축구를 하는 당사자는 선수이지 결코 감독이 아니기때문이다.      중국축구계에서의 류사한 사례는 많다. 이전에 중국국가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았던 호든, 아르에한 등 감독들도 정도부동하게 이러한 피해를 경험해본 상황이다. 때문에 부분적 “총명”한 유명감독들은 흔히 중국국가축구팀을 맡아달라는 중국축구협회의 러브콜(邀请)을 례의있게 사절하군 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신화를 이룩한 히딩크가 그랬는가 하면 현재 광주항대의 사령탑을 잡고있는 리피감독 또한 항대와의 계약만 완료되면 이딸리아로 돌아가련다고 표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축구는 스포츠이다. 스포츠이기때문에 이기든 패하든 순수한 축구로 시작되고 순수하게 끝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축구에 정치와 외교문제가 개입돼도 안되거니와 경제가 중요하다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치우쳐도 페단이 생기기마련이다. 더군다나 어느 한 감독을 밀어내기 위한 조작된 씨나리오같은것이 있으면 절대 용납못할 일이다.      현재 동아시아컵에서의 중국국가축구팀 전적, 그것을 두고 긍정은 해야겠지만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34    갑급보존의 가시밭길 포기하지 말고 투혼 불사르라! 댓글:  조회:3049  추천:1  2013-07-29
      기대가 컸던 연변팀의 홈장 련속 4경기가 2무 2패를 기록하면서 연변팀은 강급변두리로 점점 밀려나고있는 상황이다. 이제 남은 갑급리그일정표를 보니 암담하기만 하다. 말그대로 가시밭길이라 할수 있다.      이제 남은 갑급일정중 연변의 홈장은 5경기로 각각 호남상도, 하남건업, 북경리공, 호북화개르, 할빈의등 등 팀들과의 경기이고 원정은 귀주지성, 심양심북, 중경FC, 성도셀틱, 심수홍찬, 광동일지천, 석가장준호 등 7개 팀과의 경기로 된다. 하다면 지금까지의 전적을 볼 때 홈장에서 이길 팀이 어느 팀이고 원정에서 이길 팀은 과연 어느 팀일가? 홈장에서 이기거나 빅을 팀이라 해야 1 – 2개 팀에 불과하고 원정에서는 이길거나 빅을만한 팀이 있을는지조차 진맥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연변팀이 경기력을 보면 넣은 24꼴중 13꼴 즉 절반 이상이 리재민이 넣은것, 그것조차 그중 6꼴은 리재민이 페널티킥으로 넣은것이다. 연변팀에 페널티킥기회를 많이 준 심판한테 감사하다고나 해야 할가? 그외 3꼴과 2꼴씩 넣은 선수가 김기수, 석철, 백승호 등이다.     총적으로 꼴을 넣는 선수들이 많지 못하다. 다시 말해 화력망이 그만큼 단조롭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할 때 리재민선수가 경고루적 혹은 상병으로 출전하지 못할 경우 누가 득점하겠는가?! 이번 대 천진송강팀과의 경기가 잘 말해준다. 리재민선수만 출전했더면 이길수도 있는 경기였다.     강급변두리에 이르고있는 연변팀 이제 더는 여유가 없다. 연변팀의 남다른 우세는 투혼이다. 남보다 우세라는 투혼 – 이젠 그것을 불사를 때가 다가왔다. 투혼을 불사르노라면 기회는 생긴다. 남들이 두려워도 한다. 강팀이라 해서 주눅들지 말고 대담히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것밖에 없다. 투혼마저 없다면 올시즌의 연변팀한테는 진짜로 강급이란 운명이 현실로 도래할수도 있다.
33    기대가 커지는 연변팀 제2순환경기 댓글:  조회:2790  추천:0  2013-06-30
   연변팀이 원정에서 올시즌 “강호” 할빈의등한테 아쉽게 패했다. 하지만 실망은 없다.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기때문이다.        지난 5월 18일 연변팀이 홈장에서 성도셀틱과 0 : 0 무승부를 기록한 뒤 소식공개회에서 조긍연감독은 팀이 점점 나아지고있으며 올해의 갑급보존도 무난할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동감이다. 현재 연변팀이 확실히 나아지고있다는것이 보여지고있다. 바로 지난 홈장에서의 광동일지천팀과의 경기에서부터 더욱 현저해지고있다.     우선 “킬러” 리재민의 득점력이 살아나고있다. 특히 이번 할빈의등전에서 리재민은 련속 2꼴을 성공했다. 그것도 페널티킥에 성공한것이 아니고 자신의 개인기에 의해서 득점했다. 다음 중원조직자 지충국과 리재민 등 득점선수들과의 묵계적배합이 두드러졌다. 지난번 광동일지천전에서는 지충국의 패스를 이어받아 리재민이 꼴에 성공했고 이번에 역시 지충국의 센터링에 의해 신진 석철이 시즌 첫꼴을 터뜨렸다. 지충국의 시야가 넓어지고 조직감각도 많이 향상되였다는 점이 팀전력상승에 큰 도움이 되지 않나싶어진다. 그리고 올들어 팀에 “수혈”된 신진들의 성장이 매우 빠르다. 이번에 득점한 석철선수도 지충국이 변선돌파를 할 때 위치선정이 정확했기에 득점에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아직도 산재한 문제가 없는것은 아니다. 상대방 “킬러”를 대인마크함에 있어서의 책략과 능력의 부족, 신진들의 경험결핍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모든것이 한꺼번에 개선될수는 없다. 하나하나씩 바꾸고 개선시키는것이 장원한 타산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해의 과도기를 거치면 명년에는 전반 구단이 진정으로 “탈태환골”의 모습을 보여줄것이라싶어진다.      
32    연변축구와 우리의 문화생활 댓글:  조회:3925  추천:0  2013-06-09
    언젠가 주내 모 예술단체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가 “연변축구가 없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연변에서 예술분야에 대한 중시와 투자가 더 잘 이뤄질것이 아닌가”고 했다.     이 말에 필자는 어이가 없어 그냥 그 친구를 바라만 봤다.     그리고 최근들어 연변축구팀에 대해 이렇쿵저렇쿵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연변팀의 성적이 올라가지 못하니 그럴수도 있겠다고 리해는 되나 그렇다고 필자마저 그런 사람들과 곡조를 함께 할수는 없었다. 특히 올들어 룡정해란강경기장에 가보면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과 조긍연감독을 욕해대는 관중들을 자주 볼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 그런 사람들도 욕을 하지만 축구경기를 관람은 계속 하고있다는것였다. 필경 그들도 축구는 좋아하고있었으며 연변팀을 좋아하고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축구란 우리 생활권내 문화의 일종이다. 가령 연변에 프로축구팀이 없다면 그만큼 우리 생활권내의 어느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사람이란 없던것이 있다면 몰라도 있던것이 없어지면 더욱 그것을 그리워하기마련이다. 이는 지난 2000년말 원 오동팀이 절강으로 매각된 후의 시기를 지내본 축구팬들은 더욱 잘알것이다.     그뒤 리호은감독이 이끄는 연변팀(후에는 고훈감독)이 을급권으로부터 다시 나타났을 때 연길경기장은 국내 대도시의 슈퍼리그경기장을 뺨칠 정도로 폭발적은 성황을 이루며 관중들이 모여들군 했다. 당시 이런 관중들한테는 연변축구팀이 을급권이건 갑급권이건간에 관계가 없었으며 그냥 연변축구가 좋았을따름이였다. 가령 당시 연길경기장의 평균 관중이 2만명이였다면 연변프로축구가 없던 시기 그 2만명 관중들의 문화생활은 어느 정도 황페화되다싶이 됐다는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그리고 경기장의 관중외 TV를 통해 연변축구와 접한 사람들까지 통합하면 그 수는 더욱 헤아릴수 없다.     연길시민들의 문화생활공간인 연길공원은 순 정부에서 투자하여 여러가지 레저오락기구도 설치하고 여러 종의 동물도 사들여 시민들에게 문화생활구로 제공되고있으며 지금은 입장권도 받지 않고 무료로 제공되고있다. 연길공원뿐이 아니다. 연길시는 선후로 국제무역유한회사의 모아산민속촌, 진달래광장과 중국조선족민속원 등을 건설하여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다양화에로 선도하고있다.     그렇다면 연변에 프로축구팀이 하나가 있는것을 결코 못마땅해할 필요가 없다. 연변에 연변가무단,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등이 필요하듯이 또한 연길공원과 중국조선족민속원 등이 필요하듯이  연변축구도 반드시 필요한것이다. 그리고 북경에 슈퍼리그팀인 북경국안과 갑급리그팀인 북경리공과 북경팔희가 있듯이 연변에도 2개 이상의 프로팀이 있으면 더욱 좋을듯싶다.
31    제1단계 연변팀 중상위권 진입하자면 댓글:  조회:4484  추천:1  2013-04-28
올시즌 중국축구 갑급리그의 제1단계 경기는 이제 8경기가 남아있다. 현재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갑급중하위권에 머물러있는 상황, 제1단계가 끝날 때까지 적어도 갑급중상위권에 올랐으면 하는것이 모든 축구팬들의 기대이다.  제1단계가 끝날 때까지 연변팀이 갑급중상위권에 진입하자면 적어도 6경기 정도 승전하여 성적 20점 이상(지난해 제1단계 6위성적 23점) 끌어올려야 하는걸로 분석되고있다.   애로는 크지만 희망이 없는것은 아니다.   우선 올시즌 초반 기초를 기본상 잘 닦았다. 지난해에는 제7라운드까지 겨우 1점벌이에 그쳤지만 올해는 -3점으로부터 시작됐고 또한 첫 2라운드까지 련패행진을 했지만 상황이 많이 호전되였다.   다음 이제 남은 경기중 이른바 약체로 보이는 팀들이 많다. 제8라운드에서는 올들어 꽤 전성기를 타고있는 북경리공과 맞붙게 되지만 력대적으로 북경리공은 연변팀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제9라운드 중경 FC와의 경기는 연변의 홈구장 경기인데다 올해 중경FC 실력은 “녹쓴 전차”의 양상이다. 그리고 제10라운드와 제11라운드 그리고 제12라운드와 제15라운드에서 만나는 성도셀틱과 심수홍찬, 호북화개로, 석가장준호 등 팀도 중경FC처럼 별로 신통치 않다는 분석이다.   올들어 강세를 보이는 팀은 제13라운드와 제14라운드에서 만나는 광동일지천과 할빈의등으로 철저한 준비가 요청되지만 광동일지천과는 홈구장이기에 어느 정도 우세가 엿보이며 원정에서 할빈의등과는 빅경기로 단 1점벌이에 성공해도 제1단계에서의 목표가 실현될상싶다. 한편 경기에서의 변수는 항상 있는법이다. 천시, 인화, 지리 등 요소외 심판요소와 같은 인위적피해도 감안해야 하는바 방심은 금물이란 말 해주고싶다.  
30    총체적배합과 득점력을 두고 댓글:  조회:3005  추천:0  2013-04-21
    지금 갑급권축구에서는 4명의 외적용병중 1명은 반드시 아시아권 선수를 기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있다. 하기에 부분적 갑급구단들에서는 마지 못해 일본이나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선수 1명을 기용하는 상황이다.     반면에 올해 연변구단에서 기용하는 외적용병 모두가 아시아권 선수이다. 그것도 3명 모두가 한국에서 왔다.     우월점이 많아보인다. 우선 언어가 통해 선수들 사이의 소통이 잘된다. 그것은 배합에서도 나타났다. 2차례의 홈경기를 관람한 결과 연변팀의 배합은 수준급으로 슈퍼권구단들에 못지 않다는 생각이다. 또한 한국선수들의 정신력이 크게 돋보인다. 다른 구단의 외적용병들이 60%의 능력을 낸다면 한국선수들은 100% 혹은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다. 이는 기타 선수들한테도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연변팀은 지난 2007년 시즌에도 김영준, 서혁철 등 4명의 조선선수들을 기용했었는데 올해와 비슷한 상황이였다.     다른 한편 아무리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기량상에서는 유럽이나 남미를 비롯한 기타 대륙의 선수들에 비해 짝진다는 생각이다. 유럽선수들의 세련됨과 남미선수들의 화려함 그리고 아프리카 선수들의 충격력 등 면에서 짝지지 않는가 본다. 그것은 결국 득점력에서 나타난다. 공격차수가 많으나 득점력미숙 이것은 결국 외적용병의 수준과 련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하다면 1 – 2명의 공격수에 의거하기보다는 누구나 득점할수 있도록 화력망을 강화함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29    축구선수들의 년봉 중국의 GDP 그리고… 댓글:  조회:3429  추천:0  2013-04-17
  1     국내의 “왕이닷컴”에 따르면 최근 한국프로축구련맹이 한국프로축구사상 처음으로 프로축구선수들의 년봉을 공개했다. 한국프로축구련맹의 공개자료에 따르면 외적용병을 제외한 한국 K리그 클래식(1부리그) 14개팀 선수들의 평균 년봉은 한화로 1억 4609만원(인민페로 약 81만원)이였다. 그중 평균년봉이 가장 많은 수원은 2억 9249만원(인민페로 약 163만원), 제일 적은 대전은 6571만원(인민페로 약 37만원)이였다.     반면에 중국의 슈퍼리그의 16개팀은 지난해 선수들의 평균 년봉은 한국프로축구선수들보다 한배 정도가 많은 인당 평균 157만원인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에서 최고의 년봉을 받는 수원삼성의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외국인선수들의 년봉까지 통합해 한국선수들과 중국선수들의 년봉을 비교해보면 더욱 엄청난 차이가 난다. 공개된데 따르면 지난해 중국슈퍼리그의16개팀은 선수 인당(국내선수와 외적선수 통합) 550만원을 지급, 그러면 한국선수들의 년봉은 중국선수들의 평균 년봉의 약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집계가 나왔다.     스포츠선수들이 다른 직종보다 고액의 년봉을 받는다는데 대해 왈가왈부하는것은 결코 아니다. 기타 직종보다 기초투자가 큰것에 비해 프로생애가 짧은 스포츠선수들이 짧은 기간 고액의 년봉을 받는것은 마땅한것이며 이 또한 스포츠의  발전에도 리롭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중국프로축구마당에서의 선수들의 년봉은 어딘가 크게 궤도를 벗어났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부적절한 실례도 적지 않다.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말에 중국청소년팀을 이끌고 브라질류학을 했으며 선후로 연변오동, 상해신화와 광주항대 등 구단의 코치직을 담당했었던 저명한 축구전문가 추명씨에 따르면 상해신화의 일부 신진들은 월급 6만원을 타게 되니 어떻게 써버려야 할지 몰라 맴돌다가 결국 나이트를 택하고 나중에는 도박에 빠지거나 퇴페업소의 표객(嫖客)으로 되더라는것이였다. 그리고 외적용병들의 년봉은 국내선수들은 쳐다볼수도 없는 정도로 천정부지의 액수이다. 공개된데 따르면 광주항대의 루카소 바리오스의 년봉은 인민페로 약 3420만원이란다. 3420만원이라면 웬간한 갑급구단의 1년계획에 맞먹는 액수이다.   2    최근 몇년간 중국의 경제발전속도는 엄청 놀랍다. 국민생산총액(GDP)이 2007년에 독일을 추월했고 2010년에 일본까지 따돌리면서 명실에 부합되는 세계제2의 경제대국으로 됐다. 하지만 인당 GDP는 평균 4000딸라정도, 남방의 심수나 광주 등 발달지구가 겨우 만딸라선을 넘어선 상황이며 중국의 전체는 아직도 발전도상에 있다. 중국의 인당 GDP는 2만딸라를 이미 초과한 한국의 약 5분의 1정도이다. 그럼에도 중국프로축구선수들이 받는 평균 년봉은 한국선수(외적용병 제외)들의 6배 이상에 달한다. 도무지 리해할수가 없다. 경제상황이 한국보다 뚜렷하게 우월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축구수준이 한국과 비교할 상황은 더욱 아니다. 중한사이의 프로축구수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싶지도 않다. 모두가 잘 알고있겠으니말이다.     중국은 인구 13억을 초과하는 인구대국이다. 중국에서의 축구인기는 대단하다. 강세종목인 탁구나 바드민톤, 다이빙 등 종목은 먼발치로 밀려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축구의 저변인구는 가련하리만치 적다. 집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축구협회에 등록된 중국축구선수(프로팀, 학교축구팀 및 아마추어팀 통합)가 도합 71만명으로 일본의 480만명보다는 턱없이 적은가 하면 한국의 109만명에도 못미치며 세계의 12위에 머물어있다. 13억이란 인구대국으로서는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다.     하다면 축구선수들한테 지급되는 거액의 년봉보다는 축구의 인프라구축 례하면 유소년축구나 기타 사회령역의 축구활동에 보다 투자하여 축구에 참여하는 축구인구늘이기를 추진하는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3     중국은 1992년 축구프로화가 가동되면서 외적용병영입도 동시 진척됐다. 프로축구가 가시화됨에 따라 원 갑A리그의 10개 구단이 증개돼 현재 슈퍼리그의 16개 구단이 됐고 외적용병의 영입수도 늘어났다. 이전엔 매 구단마다 3명으로부터 4명으로 제한하던것이 최근 몇년간에는 5명 이상씩 외적용병수를 늘이는 구단들도 나타나고있다.     지난 19세기 아편전쟁을 계기로 8국 제국주의렬강들이 살진 중국땅을 획분하며 아귀다툼을 하던 시대가 있었다. 어찌보면 오늘의 중국축구의 슈퍼마당과 갑급마당이 그 시대를 방불케 한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인 지난 세기 50년대초 반도남북에서 발발된 “6.25전란”은 최초의 남북동란으로부터 나중에는 중조측을 포함한 사회주의진영을 일방으로 하고 미한과 16개국이 참여한 유엔군 즉 자본주의진영을 다른 일방으로 한 량대 진영의 전쟁으로 됐다. 3년간에 거친 이 전쟁에서 반도남북은 이 량대진영한테 전쟁터를 제공한셈이였다. 그렇다고 할 때 중국의 프로축구무대가 진정 중국선수들한테 활동무대를 제공하고있다는것보다는 세계급축구스타들한테 또 다른 무대(살진 고기 뜯어먹기?)를 제공하고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중국프로축구마당에는 벼라별 국적을 가진 축구선수들로 넘쳐난다.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대륙의 토종,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흑사자”들과 유럽이나 남미의 “노란색헤어스타일”… 중국에서는 아시아축구의 섬세함과 아프리카축구의 거센 폭풍 및 남미축구의 황홀함과 유럽축구의 세련됨을 모두 볼수가 있다. 아니, 중국에서는 중국축구협회가 주도하는 “대륙간컵”을 볼수도 있고 중국의 “월드컵”도 볼수가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것 같다.     외적용병과 외적감독들의 덕을 톡톡히 본 지구도 있다.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초까지만 해도 작디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심수의 축구가 오늘은 국내의 축구마당을 주름잡고있으며 광주항대는 외적용병과 외적감독(리장수)의 실력에 힘입어 지난해 3월에 있은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한국 K리그의 챔피언이였던 전북현대를 5 : 1로 압도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근 40년간 “공한증”에 시달리던 중국국가대표팀의 수모를 일거에 해소시킨셈이였다.     하지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싶이 중국의 축구전통지구가 황페화된다. 남방의 매현은 진작 볼장을 다 보았고 북방의 연변 또한 간신히 숨쉬고있는 현실이다. 특히 우리 길림성내에서 보면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연변축구는 갑A리그 차원이였고 장춘축구는 갑B리그 차원이였지만 지금은 그 반대로 장춘이 슈퍼리그 차원이고 연변은 갑급리그 차원이 됐다. 우습게 번져졌다. 마치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으로 된셈이라고나 할가?       
28    “약자의 반란”과 그 내실다지기 댓글:  조회:3330  추천:0  2013-04-14
    올시즌 갑급리그가 제5라운드까지 진행돼왔다. 제5라운드까지의 전적표(13일까지)를 보면 지난해 슈퍼리그에서 강등한 하남건업이 4경기 무승무패행진으로 1위를 기록, 그뒤로 중경력범과 할빈의등이 2 - 3위를 차지하고있다. 그리고 나란히 12점씩 기록하고있는 북경리공과 북경팔희가 역시 갑급상위권에 속해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약체팀으로 제14위와 제15위를 기록하고있던 북경리공과 북경팔희의 급성장은 모든 갑급제후들을 어느 정도 놀라게 하고있다. 특히 북경팔희는 지난해 을급으로 강등됐다가 대련실덕이 해체됨에 따라 중국축구협회가 슈퍼리그권 갑급리그권을 조절하면서 간신히 다시 갑급잔류했던 팀이여서 더욱 화제가 된다. 이른바 “약체의 반란” – 축구에 있어서 이는 아주 정상적이다. 약체의 반란이나 강체의 파멸같은것이 없으면 축구에 있어서 현념이 없게 된다.      하지만 “약체의 반란” 역시 축구의 인프라구축이 잘된 토대에서 자금투자와 선수구성 및 타당한 기전술응용 등으로 이뤄져야 하는법이다. 하다면 최근 몇년간 북경리공이나 북경팔희 등 수도권구단을 비롯한 갑급권의 몇몇 구단의 “탈태환골”에 대해서는 어딘가 짚이는데가 있으며 그것이 몇명의 외적용병실력으로 이뤄지는 약체의 반란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외적용병에 의거한  “탈태환골”은 단기효과를 볼수는 있으나 장구지책은 아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약체의 반란”이란 스포츠가 아닌 경제적측면으로 보면 “거품경제”현상이란 생각도 든다.
27    결과보다 더 만족되는 경기내용 댓글:  조회:2950  추천:1  2013-04-07
    6일,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올해의 첫 홈구장에서 북상해온 귀주지성팀을 1 : 0으로 가볍게 눌렀다. 홈구장에서 상대방을 누르고 귀중한 3점을 따냈다는것보다는 경기내용에 더욱 만족되는 마음이다.     우선 구단풍격이 지난해보다는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선수 모두가 90분 내내 적극적으로 활발한 플레이를 펼쳤으며 그 가운데서 기회를 찾았고 공를 앗기면 악착같이 달라붙는 그 장면들이 보기가 좋았다. 왕성한 체능을 보완한 결과라 해야겠다.     다음 기전술변화도 돋보였다. 출중한 스트라이커가 없는 상황에서 량측변선을 보다 활용했다는 점이다. 즉 공격형미드필더와 량측변선을 리용해 화력망을 강화했다. 그와중 출중한 변선공격수 한남용을 잠재력을 발굴, 마치도 그제날의 동경춘, 방근섭과 천학봉을 다시 보는듯 했다. 또한 총체적배합이 좋았다. 공격한다고 하면 수비선의 5번 고기구까지 가담하고 수비선이 위태로우면 9번 리재민이나 한남용까지 합세했다. 이 역시 왕성한 체력의 결과라 해야겠다.     문제점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아직도 패스배합에서 어딘가 서툰점이 가끔씩 보였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점차 훈련과 경기중에서 충분히 완미화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팀의 첫 홈구장승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관전평  
26    이제 시작! 연변축구 보다 더 지켜보자 댓글:  조회:3269  추천:1  2013-03-24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이 또 졌다. 2련패이며 거기에 1 : 4로 대패했다. 아쉽고 불안하긴 모든 축구팬들도 마찬가지일것이다. - 3점으로부터 스타트를 뗀 연변팀, 언제 플러스의 선에 올라서고 또한 다른 구단들을 따돌리며 승승장구할지 초조하고 걱정스럽다.     선수층이 얇고 꼴잡이 스타가 없으며 거기에 자금난 등 산재한 문제가 수두룩하기까지 한 연변팀이다.     ……     하지만 아직은 실망하며 땅을 치기가 이르다는 생각이다. 겨우 2경기를 치렀을뿐이다. 문제점도 많지만 희망도 보이였다. 졌지만 2경기 모두 선제꼴을 터뜨렸다. 그것도 빠른 역습으로 상대방의 꼴문을 갈랐다. 그리고 량측변선활용이 지난해보다 두드러졌다는 분석이다. 아직 패스실수가 많고 3선 탈절이 잦지만 이는 감독의 기전술이 100%가 먹혀들어가지 못한것, 감독이나 선수들을 탓할 일이 아닌것 같다.     모든것이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1997년 최은택감독시대에도 제6라운드까지 겨우 1점을 따낸 기록도 있었다. 때문에 진지하고도 인내성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연변팀이 결코 이대로 무너질 팀이 아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축구에도 적용될수 있는 명언인것 같다.        
25    되돌아보는 인생그라프 댓글:  조회:3526  추천:0  2013-03-13
□ 허길성     사람들은 길고도 짧은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순간순간과 하루하루가 모여 하나의 트랙이 되는것 또한 인생이라고도 한다. 나 자신을 놓고볼 때 1939년생(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임)이니까 만으로 올해 75세이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70세를 넘어서자 나는 어릴 때와 젊었을 때의 회포가 주마등처럼 갈마들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어릴 때 소꼴을 베러 다니면서 도시의 애들을 부러워했던 일, 공소합작사의 점원, 제지공장의 견습공을 하면서 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며 새로운 “극락세계”를 꿈꿔왔던 일…등 일들을 오늘 다시 돌이켜보노라니 그제날의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가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농촌일만은 “질색”이던 소년시절   어렸을 때 왜서였던지 그렇다고 할만한 리유도 없이 그냥 농촌일이 싫어졌다. 1943년 아버지의 쪽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정착할 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지만 후에 점차 셈이 들며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서부터는 농촌과 농촌일이 싫어졌던것이다. 1951년 룡정시가지로 이주한 후에는 더욱 그랬다. 도시의 애들은 늘 깨끗한 옷을 입고다니면서 부모들이 주는 용돈으로 얼음과자같은것을 사먹고 그랬지만 나만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꼴을 베러 다니지 않으면 밭으로 기음매러 다녀야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시기 나는 자신이 천성적인 게으름뱅이 아닌가 하고 호되게 꾸짖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일을 한다고 하면 아주 잽싸고도 요령이 있었다. 특히 겨울에 가마니를 짠다고 하면 하루에도 20개 이상(가마니 하나에 50전이였음)씩 짰기에 부모님한테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러니 내가 천성적인 게으름뱅이가 아니였던것만은 분명했다. 당시 나의 계몽선생은 룡정고중에 다니는 둘째형님인 허길룡(후에 연변일보사에서 퇴직)이였다. 길룡이 형님은 늘 나한테 공부를 잘해야 하거니와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해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나는 자신의 앞날을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17살이 되던 해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는 연길현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던끝에 일자리를 배치받게 되였는데 그 일자리인즉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의 점원직이였다. 그 일자리는 100% 만족되는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마음에 들었다. 헌데 나는 그 일을 오래동안 할수가 없었다. 약 1년후 전 연길현적으로 직원정간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미성년인 내가 걸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 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한 보람으로 이번에는 석현종이공장의 통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자리가 차려졌다. 헌데 한달로임이 18원밖에 되지 않는 보수로서는 그 작업량이 너무 많았고 힘들었다. 거기에 숙소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생활비용을 제하고나면 남는것이 별반 없었다. 또한 한평생 이런 고된 로동으로 살아간다는것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그 직업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공부마저 팽개치고 사회로 나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사회에 나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딸것 같았지만 결국 사회에는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재차 자신의 앞날을 검토하던끝에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현무장부에 가서 신청하자 무장부에서는 우리 형제중 한명이 이미 군대에 갔다는 리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말인가?! 사정하고 떼질쓰고 “앉아버티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중 때마침 부대에 간 둘째형님 허응산한테서 오래지 않아 곧 제대된다는 기별이 왔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갖고 재차 현무장부로 찾아갔고 이어서 신체검사 및 기타의 심사에서 통과되여 군대로 갈수 있게 되였다. 모든것이 드라마틱한 인생과정이였다.   부대생활에서의 ABC… 나의 군부대생활은 료녕성 려순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우리 부대는 려순 앞바다의 소평도섬에서 산굴을 팠다. 당시 힘든 부대생활이였지만 나는 그 모든것을 용케도 이겨내면서 나중에는 제법 훌륭하게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한어 한마디도 번지기 힘들어하던 시기라 언어상의 애로는 아주 오래동안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약 1년뒤 부대는 길림성 교하쪽으로 이동하였고 부대는 46군 136사 고사포부대로 개편되였다. 때는 1960년대초로 당시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대륙수복”을 한창 떠들던 시기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비행기는 자주 한국을 거쳐 우리 동북지구로 날아와서는 전단지같은것을 뿌리군 하였다. 그러던중 1961년의 섣달 그믐날 대만의 국민당비행기가 또 연변일대에 날아와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듣는 말에 의하면 당시 연길 공원뒤산에 해방군 고사포부대가 있었지만 기계작동문제로 국민당군비행기가 둔중한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였다고 했다. 한편 그해 음력설날 우리 부대에도 명령이 떨어졌다. 기차에 고사포 등 기자재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새벽 3시 교하역에서 기차에 올라서는 창문도 없는 컴컴한 화물바곤에 앉아 한동안 가다가 내리니 낮이였고 지점은 조양천이였다. 조양천으로 온 뒤 우리 부대는 조양천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 모두 3개 련대였는데 한개 련대는 지금의 광석촌부근에 진지를 구축했고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고 밤낮 하늘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국민당군대의 비행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 봄이 되여 농민들의 논갈이가 시작되자 우리 부대는 구축했던 진지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2개 련대는 다시 교하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 청산으로 갔다. 당시 나는 군부대생활을 하면서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한문학습에서 더욱 품을 들였다. 그때 우리 부대 전사들은 이전에 지원군들이 입던 솜옷을 입었는데 옷속이 흰광목천으로 누빈것이라 나는 한자 한글자를 익힐 때마다 그것을 옷속의 흰광목천에 적어두군 했다. 물론 종이가 귀하니 옷속에 적은것이였다. 그래서 한동안 다른 전사들한테 “정신환자”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어느 하루 련장이 옷을 벗으라고 해서 벗었더니 련장은 왜 옷속에 글을 쓰는가고 물었다. 이에 나는 당당하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련장은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얼마 안있어 나는 부패장으로 되기도 했다. 또한 그해 련대에서 추천되여 교하에 있는 사부에서 문화시험을 쳤는데 모두 26명이 친 결과 2명이 시험에 합격되였으며 그 2명중에 내가 들어있었다. 당시 부대의 인당 화식비는 한끼에 13전이였고 하루의 화식비는 39전으로서 모자라는 부분은 련대 자체로 해결하는것을 제창하였었다. 그래서였던지 그때 사부에서 친 작문시험은 “련대에서는 어떤 부업으로 화식비를 보충하는가”란 제목이였다. 그러자 나는 작문쓰기에 능력이 없었지만 부대에서 돼지를 어떻게 치고 남새는 어떻게 가꾸었으며 절약은 어떻게 하고 랑비는 어떻게 방지했는가 하는 등으로 별로 순서와 앞뒤가 잘 맞 난 작문쓰기에서 나는 76점을 맞았으니 그 모든것이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였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다보니 나는 사부에서 추천한 전사로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앙군위에서 세운 문화학교에 입학하는 행운까지 지니게 됐다.   추억속의 나의 첫사랑   내가 무석에 있는 부대문화학교에 입학하고보니 전교 학생이 도합 1000여명이 되였으며 그중 대부분이 국내전쟁이나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적이 있는 로병들로서  90% 이상이 문맹이였다. 나를 놓고말하면 나이가 젊은데다 지식수준은 거의 앞자리 10위권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리고 나 자신은 몰랐지만 학원생들마다 나를 “멋쟁이젊은이(佳小子)”라고 불러주면서 부러워하는 한편 아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인기가 있었다고나 할가? 전 학급에 6명밖에 없는 녀학생중 한 녀학생이 내가 조선족인줄 알고 찾아왔다. 왕순자라고 부르는 그 녀학생은 자신은 워낙 조선인이라고 하면서 조선말도 어느 정도 할줄 알았다. 그녀는 전쟁때 폭격에 고아가 된 자신을 지원군군관이 구해주었으며 후에 그 지원군군관이 귀국하면서 자기를 데려와 양딸로 삼아주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원래의 성은 왕씨 아니라 김씨라고 알려주면서 지원군군관의 성을 따라 왕씨로 고쳐지게 되였다고 했다. 그 왕순자는 바로 당시 상해경비사령부 사령원이였던 왕××장군의 딸이였던것이다. 나는 왕순자의 가정환경에 혹했다기보다는 그녀가 원래 조선인이였다는 배경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나를 다른 학원생보다 다르게 보는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련애라기보다는 우정이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드디여 왕순자가 나한테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가자면서 아버지도 “미래의 사위감”을 보고싶어한다고 했다. 그러자 거기에 마다할 내가 아니였다. 당시 매 주말마다 왕순자는 아버지가 보낸 경비사령부의 차에 앉아 집으로 가군 했는데 그 덕분에 나 역시 왕순자와 함께 왕사령원 경위원이 모는 짚차에 앉자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왕순자의 집은 상해도심에 있는 단독주택이였고 방이 여러개가 딸린 호화주택이였다. 농민의 자식이였던 나로 놓고 볼 때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왕사령원은 나한테 이것저것 물었다. 부모는 뭘하는 사람들이고 형제는 몇명 있으며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 등등으로 묻는것은 많았지만 가정생활따위의 지저분한 물음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때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군 했다. 내가 썩 싫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 내가 왕순자의 부모님을 만나본 뒤로 우리 둘은 공개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학교규률에는 학교에서 련애를 하면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학교지도부 역시 왕순자의 가정배경을 아는지라 묵인해주는 태도였다. 그녀와 친하면서 나는 도움도 많이 받았다. 상해위수구사령부 사령원의 딸인 왕순자는 경제상 어려움이 거의 없었으며 매번 차를 타고 밥을 먹고 할 때마다 그녀가 돈지갑을 털군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학교의 교정과 학교뒤 공원에서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면서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변치 말자”고 수없이 맹세를 하기도 했다. 한편 나는 자신이 부대문화학교에서 조선출신의 한 녀학생과 사귀고있으며 이제 돌아오는 겨울방학만 되면 함께 부모님을 뵈러 연변으로 가겠다고 집에 편지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 세상사와 인생살이인 모양이다. 1962년 여름의 어느날밤, 갑자기 집합나팔소리가 울려 부랴부랴 학교운동장에 모였더니 학교지도부로부터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미 이동학원생명단이 작성되였던지 학교지도부 주요 책임교원이 서류장을 펼치며 점명하면 명단에 오른 학원생은 무조건  “옛”하며 대렬앞으로 나와야 했다. 명단에 올라 점명된 학원생은 50% 이상에 달했다. 뒤이어 명령이 떨어졌다. 점명된 학원생들은 생필품과 책만 휴대하라고만 했다. 그리고 기타의 물건은 짐에 집주소만 적어놓으면 학교지도부에서 책임지고 집으로 부쳐준다는것이였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전에도 이런 긴급집합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딘가 이상했다. 아니나다를가 그날밤 떠난 학원생부대는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아니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해 여름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이른바 “광복대륙”이란 명목으로 미친듯이 날뛰였기에 대륙의 인민해방군은 전쟁준비의 수요로 잠시 내가 다니던 학교같은 문화학교를 적지 않게 휴교하였다고 한다. 첫패로 절반 이상의 학원생이 떠난 며칠후 또 야밤집합이 있었고 이번에도 적지 않은 학원생들이 떠나갔으며 역시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디로 갔는지조차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아있는 우리가 초조해났다. 그것은 나보다 왕순자 그녀가 더했다. 순자는 녀자인 자기가 남을것이고 남자인 내가 떠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그녀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에 나는 제딴에는 그래도 남자노라고 그녀를 달래는수밖에 없었다.   “순자, 우리 둘 다 군인이니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할게 아니오?! 너무 괴로와하지 마오. 그리고 중국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꼭 다시 만나게 될것이요. 내가 순자네 집을 아니 말이요.” 우리는 공원에 있는 한 아름드리 나무를 가르키며 후에 누구든 여기에 오면 그 나무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 나무를 우리 사랑의 견증수(树)로 되게 만들자고 서로 손잡고 약속했다. 리별은 빨리도 찾아왔다. 헌데 순자의 생각대로 내가 먼저 떠난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보다 며칠 앞당겨 떠나게 됐던것이다. 이는 순자의 아버지였던 상해경비사령부의 왕사령원도 예견하지 못하던 일이였다. 아무리 부대의 고급수장이라고 하지만 부문이 서로 다르다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모든것은 그렇게도 급작스레 들이닥쳤다. 첫패의 학원생들이 떠나서부터 한달안에 생긴 “사변”과도 같은 상상밖의 일이였다. 그러다보니 나와 순자는 매일 서로가 갈라져야만 한다는 애절한 생각으로 가슴을 쥐여뜯으면서도 막상 갈라질 때 서로 상대방한테 줄 선물같은것을 생각하지 못했거니와 지어는 상대방 가정의 집주소를 서로 교환해야 한다는것조차 까맣게 잊고있었다. 상대방의 집주소의 교환 - 그것을 망각하는통에 후일 나는 엄청 많은 후회를 남겼고 70고개를 넘기고 손군들을 두고있는 오늘까지도 가끔씩 그때의 일때문에 참회속에 젖어들군 한다. 한편 그후 어느 해엔가 내가 무석에 있는 군사문화학교 뒤에 있는 공원을 찾아가 우리가 늘 앉아있던 “사랑의 견증수”밑에 가서 살폈으나 그녀가 남긴 글을 찾을수가 없었다. 아마 순자가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슨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년뒤 심양역에서 당시 문화학교시절의 어느 한 동창생을 만나 행여나 하고 순자의 행방을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자기도 순자가 상해군의대학을 졸업했다는것만 얻어들었을뿐 그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길지는 않지만 약 1년간에 있은 나와 왕순자와의 로맨스ㅡ 오늘 내가 그것을 세상에 밝히는것에 대해 나 자신도 그것이 옳고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의 마누라는 1966년 나와 결혼한 뒤 수십년동안 나한테 충성하였거니와 두 자녀를 키워 출세시키느라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체험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 옛날 젊은 시절의 로맨스를 끄집어낸다는것은 마누라한테 너무나도 미안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70고개를 넘겨 인생을 정리할 때도 되였고 또한 그렇다고 지금 마누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털끝만치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시점에서 젊은 시절의 자초지종에 대해 마누라한테 고백하는것도 그닥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 글을 통해 밝히는바이다.   북경생활과 나의 전성기   왕순자와 갈라진 뒤 학교지도부에서는 중앙군위의 지시에 따라 소수민족학원생만은 별도로 남겼다가 어느 날 드디여 그 소수민족학원생들마저 집합시켰다. 그러고는 역시 다른 짐에는 집주소만 남기게 하면서 챙기지 못하게 했다. 그렇찮아도 당시 나한테는 짐이라고는 별로 없었기에 몇벌 안되는 옷같은것은 그대로 버렸다. 나의 짐으로는 다른 학원생들이 버리고 간 책들로 한트렁크가 잘되였다. 그날밤 9시경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여러 시간을 달려 남경에 도착했고 남경역에서 하차한 우리는 배를 타고 장강(당시 장강에는 다리가 없었음)을 건넜으며 장강을 건너 다시 기차에 오른 우리는 계속 북상하다가 나중에 종착역으로 내린 곳이 북경이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상급에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대해 물을수도 없었고 가령 묻는다고 해도 인솔자가 대답해주지 않거니와 그 인솔자 역시 알고있을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북경에서 하차하자 대기하고있던 자동차들이 우리를 싣고 어디론가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큰 건물의 대문안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많은 군인들이 북을 치고 징을 울리며 우리를 맞아주었으며 높게 걸린 프랑카드에는 “신입생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알고보니 그 건물은 군위에서 세운 북경공정병학원이였던것이다.     순간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도록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나라에서는 장개석군대의 대륙진공을 막기 위해 전쟁준비에 분주한 상황에서도 원 문화학교의 다른 학원생들과는 달리 우리 소수민족학원생들만은 계속 공부를 할수 있는 배려를 주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수가 있으랴! 나는 당과 정부와 그리고 인민군대의 고위층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북경공정병학원에서 나는 기계 및 건축설계학과에 배치받았다. 당시 20대 청년인 나는 셈이 들대로 든지라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지식의 중요성을 이미 잘 알고있는 상황이라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그때 당시 문화기초가 박약한 나로서는 시험을 치러갖고 대학에 간다는것은 그닥 장담할 일이 못되였다. 그렇다고 할 때 시험도 치지 않고 해방군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할수 있다는것은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때문에 이 모든것을 잘 알고있는 내가 공부에 게을리할수 없었던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당시 나 자신은 잘 몰랐지만 남들은 모두 나를 “키가 크고 멋지고 잘 생긴 청년”이라고 했다. 그래서였던지 내가 하마트면 외교관으로 될번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북경공정병학원에 입학해서 얼마후에 있은 일이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는 3명의 조선족학원생이 있었는데 한번은 중앙민족학원 지도일군이 우리 3명을 찾아왔다. 그 지도일군은 우리한테 국가인재를 양성하려고 그러는데 조선어를 더 전공하고싶은 생각이 없는가고 하였다. 나와 다른 한명은 당장에서 거절하고 흑룡강성 밀산이 고향인 친구가 거기에 응했던것이다. 중앙민족학원 지도일군의 제의에 거절한 우리 2명은 조선어는 이미 장악한것으로도 사회에 나가 활용할수 있기에 더는 배울 필요가 없고 기술을 많이 장악하는것이 그저 “땡”이라고 여겼던것이다. 그래서 밀산친구는 민족학원으로 가고 나를 포함한 기타 2명은 북경공정병학원에 계속 남아서 공부하게 되였다.    한편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하면서 1963년과 1964년 련속 2차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있은  10월 1일 “국경검열식”에 참가하였었다. 특히 1963년의 검열식때 “모주석만세!”란 대형표어를 멘 대오가 천안문앞을 지나면서 모택동주석과 기타 중앙지도일군들의 검열을 받았는데 바로 그 대오중에 내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해전인 2009년 한 조선족군인(연변적)이 국경60주년 열병식에 참가해 화제로 되고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나니 대뜸 근 50년전 내가 검열식에 참가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그 감회가 깊어졌다. 또한 지금은 열병식장면을 록화하고 사진도 찍어두는가 하면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취재하기도 하니 그 조선족청년군인이 몹시 부럽기도 했다.    문화혁명과 뒤죽박죽이 된 인생   1965년 7월 나는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하고 심양군구에 배치받았다. 사업터는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였다. 내가 전공한대로 그것을 활용할수 있게 되였는데 주요 업무는 전쟁준비용산굴설계같은것이였다. 헌데 운명의 희롱이라고 할가? 나는 심양군구에 오래동안 있을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됐고 나를 포함한 많은 조선족사병들이 이른바 “좌파지지”의 수요로 연변으로 나오게 됐다. 당시 연변은 문화혁명의 “선봉지구”였다. 특히 당시 주장이며 주위서기였던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느냐와 타도하느냐를 두고 2개 조직의 대립과 갈등이 몹시 심했다. 그러던중 묘한것은 “좌파지지”로 파견된 군인이였던 나와는 달리 연변일보사의 기자였던 나의 둘째형님인 허길룡은 주덕해의 결사지지파였으며 부대에서는 이 관계에 대해 알고있었던것이다. 당시 허길룡형님은 연변대학에 가서 자주 강연같은것을 하였는데 하루는 부대에서 이를 알고 나더러 연변대학에 가서 길룡형님을 설복하라는것이였다. 명령이였고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별수 없이 부대의 명령에 따르긴 했으나 그냥 그대로 갈수 없었다. 특히 군복을 입고는 더욱 갈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내에 있는 형님네 집에 들려 형님의 옷을 바꾸어입고 서민처럼 해갖고 연변대학으로 찾아갔다. 서민복장을 하니 형님을 쉽게 찾을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형님을 설복하려고 들자 형님은 “넌 이곳의 상황을 모른다. 그냥 돌아가거라. 못들은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형님을 설복할수도 없었거니와 딱히 설복하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냥 부대의 명령이니 어쩔수 없었을뿐이였다.   부대로 돌아온 나는 연변대학으로 찾아갔으나 형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부대의 수장은 그냥 “알았다”고 했으나 후에 알고보니 그때로부터 부대수장은 나의 “정치적립장”을 의심하기 시작한것이 분명했다. 그뒤 문화혁명의 거센 폭풍이 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전쟁준비열풍이 몰아쳤다. 도처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방공호와 산굴같은것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나의 부대에는 대졸생이 2명뿐인데다 그중 공정병학원출신은 유일하게 나뿐이여서 나는 연변의 거의 모든 산굴설계를 도맡다싶이 하게 되였다. 연길현 팔도공사에 있는 “전쟁준비총지휘부” 산굴을 비롯하여 룡정, 훈춘 등지에 있는 전쟁준비용산굴은 모두 나의 손을 거쳐 탐사되고 설계된것들이기에 나는 지금도 그 산굴마다의 내부구조에 대하여 손금보듯 알수가 있다. 이어서 “좌파지지”사업도 끝나고 기세드높던 전쟁준비열풍도 흐지부지하게 되자 부대는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부대는 심양으로 돌아가기 전야에 한차례의 정간을 하였는데 그만 그 정간에 내가 걸려들었던것이다. 내가 정간당하게 된 리유는 다음과 같았다. 즉 1963년 내가 북경공정병학원에 다닐 때 방학기간을 리용해 가만히 월경(그때 연변에서는 거의 맘대로 조선으로 다니고있었음)해 조선에 있는 누님을 만나본 일이 있었다.  헌데 그것을 혼자만 알고있었더면 아무런 탈도 없었을것을 개학때 방학기간의 생활을 회보할 때 내가 덜컥 자랑삼아 털어놓고말았던것이다. 그러자 학원에서는 중국외교부와 문의한 뒤 나한테 탈주병이란 처분을 주었고 그것을 나의 서류에 기록했던것이다. 거기에 조선에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있는데다 문화혁명기간에 형님은 “보수파조직”의 골간이였고 나 또한 정치적리념이 강하지 못한것 등등으로 의해 결국 나는 군복을 벗을수밖에 없게 되였다. 군복을 벗자 나는 곧바로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단련을 받게 됐다. 말이 로동단련이지 기실은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 개조대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로임도 50% 이상이 줄어들었다. 부대에 있을 때는 고급기술군인이였지만 공장의 말단로동자로 되니 46원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사이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셈이였다. 나는 갑자기 과묵한 인간으로 변했다. 온종일 거의 입을 열지 않으면서 정신없이 일하는것(용접공으로 일했음)으로 화풀이를 할 때도 자주 있었다. 또한 그때 “외국특무”란 모자를 쓴 차충섭이란 분도 나와 함께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었는데 나와 그는 늘 함께 어울리군 했다. 우리 둘은 갖고온 도시락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상대방의 고충을 묻기도 하고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러던 언제인가 상급에서 참관단이 와 연변뻐스공장을 참관하게 되였는데 그 참관단 성원중 한분이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였다. 이에 나 역시 어딘가 낯이 익은지라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을 다니지 않았소?” “예, 다녔습니다.” “그때 중앙민족학원에서 데려가자고 한것을 거절한적이 있었지 않았소?”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데 저의 내막을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허동무 맞구만, 내가 바로 당신네들을 데려가려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갔던 사람이우다.” “예?!…” 나는 대뜸 목석처럼 굳어지고말았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극적인 상봉이였다. “그때 당신이 기술을 배워갖고 뭔가 큰일을 할것처럼 그러더니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그때 중앙민족학원에서 북경공정병학원의 조선족학생을 선발할 때 제일 먼저 선택한 학생이 바로 나였다고 나서 그때 중앙민족학원을 선택한 밀산의 친구는 지금 중국외교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말에 나는 더욱 큰 쇼크를 받았다. 한명은 국가외교부의 고급관원이고 한명은 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땜쟁이(용접공)”ㅡ 인생이란 참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았으며 우리 둘의 운명이 이렇게 뒤바뀌울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몇년후 내가 북경에 출장갔던 걸음에 겨우 외교부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만나보았는데 거주 및 사업 환경이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 그 친구의 궤속을 보니 모태주와 오량액을 비롯한 고급술만 수십병이나 있었다. 진짜 부러웠었다. 그리고 그때 북경에서 돌아올 때 그 친구가 그 고급술 30여병을 몽땅 포장해서는 나한테 선물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이는 그에 대한 나의 부러움만 더하게 할뿐이였다.   명예의 회복과 중년의 인생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말단로동자로 일하는 동안, 당시 나처럼 억울하게 군복을 벗은 사람이 연변에도 적지 않아 수십명이 되였고 전국적으로는 무려 70만명에 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매달 5원씩 내서는 돈을 모아 사람을 북경에 파견해 중앙군위에 고소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4인방”이 살판치는 때라 우리가 아무리 고소해도 그것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북경에 사람을 파견했다. 1973년, 1974년과 1975년… 드디여 1976년 10월 “4인방”이 꺼꾸러졌고 전국정세가 차츰 안정세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1978년에 있은 당의 11기 3중전회와 더불어 류소기동지의 명예가 회복된 뒤를 이어 군복을 벗었던 우리도 명예를 회복(경제적보상은 없었음) 하게 되였다. 다만 벗었던 군복을 다시 입을수는 없었고 지방에서 간부편제에 다시 넣어주면서 새로운 근무터를 배치했던것이였다. 당시 나의 요구는 설계부문에 가는것이였으나 당원이였던 나는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다. 어느날 내가 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부르기에 갔더니 연길시방송국 지도일군이 선전부일군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였다. 선전부일군은 이제 곧 연길시에도 TV방송중계소가 서게 되는데 TV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나같은 설계분야의 인재가 수요된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연길시라지오TV에 배치받았다.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TV방송중계소의 건립은 내가 가자바람으로 가동되였다. 당시TV방송중계소의 대부분 설비는 할빈으로부터 들여오게 되였는데 나는 한달사이에도 할빈출장을 몇번씩 다녀와야만 했다. 나는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결심으로 일했다. 한편 안해한테는 몹시 미안했다. 결혼뒤 몇년이 안되여 군복을 벗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지지리도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잦은 출장으로 집과 자식들의 뒤바라지는 몽땅 안해한테 맡겼으니말이였다. 게다가 매번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로임을 타면 그 로임봉투가 얇아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럽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안해는 가타부타 바가지를 긁는법이 없이 근무터(연길시병원)로 출근하는 한편 나의 내조와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열심히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다. 이렇게 TV방송중계소가 세워지고 모든 업무가 가동되자 나의 가정생활도 차츰 안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물론 자녀 2명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고 경제상에서는 늘 딸리는 상황이였지만 가정이 화목하고 화기가 돌았으며 거기에 자녀 둘 다 공부를 잘하기에 그야말로 인생이 보람있다는 느낌이 늘 들군 했다. 행복하고도 보람있는 생활은 빨리도 흘렀다. 1995년 나이 57세가 되자 나는 1선에서 물러나 서서히 은퇴를 준비했다. 그런데 당시 마침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유선TV국을 새로 내오게 되자 나는 또 몸을 뺄수 없었다. 나는 단위지도부의 요청에 의해 유선TV국을 세우는 일에 동조하게 되였는데 그러면서 또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고 그뒤에는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직원주택을 짓는다기에 그 설계를 맡아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주택이 마무리될 때까지 참여하다가 2000년에 접어들어서 정식으로 퇴직휴양이란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되였다.         나의 가정    1966년에 나는 지인의 중매로 당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처녀인 송금자씨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결혼뒤 우리는 한동안 연길과 개산툰 이렇게 두곳에 떨어져 생활하다가 안해가 연길시병원 화험실로 전근돼오면서 비로소 안착된 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는 결혼 2년후인 1968년에야 딸 허영혜를 보게 되였다. 딸 영혜는 령리하고도 재롱을 잘 피웠다. 특히 두살이 되자 라지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제법 그 곡조에 따라 춤도 잘 추었다. 이러한 딸애를 보면서 동네사람들은 후에 음악을 전공하면 크게 성공할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그렇찮아도 우리 부부는 딸 영혜를 음악인재로 키울 타산이였다. 우선 우리는 딸애한테 피아노 한대를 사주기로 했다. 그 당시 일반 가정에서 피아노를 산다는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 노력해보기로 했다. 헌데 인생이란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다고나 할가? 1971년 내가 군복을 벗고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단련을 하게 되면서부터 생활은 급작스레 내리막질을 하기 시작했고 잇따라 1971년 아들 영동이 태여나면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준다던 계획은 아득한 먼 앞날의 일로 간주되였다. 하지만 안해는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안해는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았다. 말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밤낮이고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친정집에도 손을 내밀고 또 여러 친구들한테 시정해서는 드디여 딸애한테 피아노 한대를 사주었다. 당시 피아노값은 적으만치 인민페로 6800원이였다. 6800원- 이는 당시 둘의 로임을 합해도 100원이 안되는 우리 가정으로 놓고볼 때 그야말로 거금이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리 어려운 역경속에 처하더라도 힘과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안해를 통해 알게 되였다.  나는 진짜 안해한테 고마웠다. 그뒤 딸 영혜는 드디여 연변예술학교(지금의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신)에 입학하여 자신이 꿈꾸던 음악공부를 할수 있게 되였다. 바로 그러던 나날에 안해는 지병으로 인해 한창 일하는 나이인 49살에 앞당겨 퇴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안해는 휴식하며 병치료에 전념할 대신 다시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 안해는 자녀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밤마다 삯일을 했다. 복장점에서 재단한 옷감을 가져다 가공하는것이였는데 한견지에 겨우 2전씩 하는것이였다. 삯일치고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었다. 내가 퇴근하여 밤마다 도와주어도 1년에 겨우 1000원 정도나 벌었가고 할가? 그뒤 딸애에 이어 아들 영동이까지 대학으로 가니 그런 삯벌이로는 도무지 자녀들의 뒤를 댈수가 없었다. 그래서 벌여놓은것이 해리서치기였는데 그것은 투자금만 해도 수천원씩 들어가는 사양업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는 오래동안 할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뭔가 잘되는가싶더니 나중에는 원가가 많이 들어가는 한편 시장도 없었다.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을 벌여서 만 3년만이였다. …그야말로 힘든 나날이였다. 돈이 나올 구멍은 적고 돈쓸 일은 태산처럼 많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겠다는 자식들의 마음에 찬물을 껴얹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아무렴 갈 때까지 가본다. 나한테는 일종 배짱이 생겼다. 만약 잘못되여 빚더미에 올라앉더라도 내가 몽땅 안고갈 배짱도 생겼다. 그것인즉 곰사양이였다. 내가 안해한테 상의했더니 안해 역시 동의하였다. 아니 내키고말고간에 그 당시 자녀의 뒤바라지를 하자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됐기때문이였다. 곰사양은 처음부터 어려운 조건으로 시작했다. 사양장이 없으니 집안 객실에 사양실을 만들고 곰 한마리부터 사놓았다. 그러고는 관련 책들을 보면서 하나부터 익히군 했다. 고생도 많이 했다. 곰이란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을 알아보는 녀석이 아니였다. 먹거리를 줄 때 까딱 주의하지 않으면 손을 덥썩 물거나 긁어놓기도 하여 나와 안해는 자주 손을 상하군 하였다. 또한 먹을것을 장만하는것도 고역이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이 특히 문제였다. 그래서 가을마다 우리 부부는 과수원과 배추밭 등을 돌면서 이삭주이를 하여서는 과일, 채소 등을 수천근씩 저장하군 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딸과 아들을 대학까지 마치게 했는데 그중 아들 허영동은 대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에 가서 석박사과정을 거쳐 일본 모 회사의 중견으로 사업하고있는 상황이고 딸 역시 일본류학을 마치고 현재는 북경의 모 일본회사에서 근무하고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러는 사이 우리 부부는 어언간 고래희를 훌쩍 넘어섰고 특히 안해로 놓고보면 그옛날 처녀시절의 이쁜 모습은 거의 찾아볼수 없도록 얼굴이 망가지고 몸도 몹시 지쳐있는 모습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나같은 무능한 인간을 만나 이 가정을 거의 홀로 영위해왔으니 그 몸인들 어떻게 견디여낼수 있었으랴?! 게다가 우리 부부는 아직 환갑잔치도 치르지 못한 상황이다. 안해한테 몹시 죄진 마음이다. 지금 우리 부부의 “고난의 행군”시대는 이미 지난해 곰사양업을 정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안해한테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하고싶다. 그리고 이제 3년이 지나면 우리 부부의 결혼 50주년이 된다. 그때가서 나는 자녀들한테 부탁하여 결혼50주년 이벤트를 마련하는것으로 안해를 한번 크게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 에필로그   인생을 한번 쭉 돌이켜보면서 그것을 정리해보는 이 시각, 나는 행복이란 이 단어를 놓고 여러가지로 생각해본다. 어떤이는 대부자로 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생각할수도 있고 또 어떤이는 크게 출세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간주할수도 있다. 그중 나는 큰부자도, 큰벼슬도 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그것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긴다. 수십년간 나를 따라준 현숙한 안해가 있고 거기에 많지는 않지만 해외류학까지 한 아들과 딸이 있는가 하면 귀여운 손녀가 있으며 또한 지금도 나 자신의 취미와 능력에 따라 살고있으니 더욱 만족이다. 나의 취미란 곧바로 독서, 스케트타기와 가끔씩 친구나 일가친척들과 모여앉으면 즐겁고도 유쾌하게 마시는 술 한잔 등이라고나 할가? 그렇다. 나는 결코 지나온 나의 인생에 대해 큰 후회가 없으며 또한 이제 다시 태여나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지금의 나의 취미와 생활방식대로 살고싶음을 고백하는바이다. (끝)   김철균 대필      
24    장경률선생 한국 KBSTV와 인터뷰 가져 댓글:  조회:3425  추천:0  2013-03-13
    한국매채에 익숙한 해당일군에 따르면 오는 9일 한국 KBSTV방송 일요스페셜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특집을 방영, 중국 연변일보사에서 론설위원, 연변일보 신문연구소 소장을 력임하였던 장경률선생이 특별인터뷰를 통해 “아리랑은 중국조선족의 령혼”이라고 주장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을것으로 전망되고있다.     장경률선생은 인터뷰에서 “아리랑은 중국조선족의 령혼이다. 그래서 중국조선족은 또한 아리랑민족이라고도 부른다”고 력설하였다.      아래에 상기인터뷰의 일부를 요약하여 싣는다.      문: 중국의 소수민족문화보호정잭이란 어떤것이고 제도적으로 소수민족문화를 보호하려는 리유는 무엇인가?     답: 중국은 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민족국가이다. 중국의 960만평방킬로메터의 대지에서 살고있는 한족을 비릇한 56개 민족은 일률로 평등하고 공존공영하며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민족이 크든작든 그 어떤 민족도 기시하거나 억압하거나 따돌림을 받지 않는다. 이는 공산당의 성질과 기본 로선, 방침, 정책에 의하여 결정된것이다. 하기에 모든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호하고 발굴하고 발전시키는것은 국가의 기본국책이기도 하다.     문: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면 어떤 보호와 관리를 받게 되는가?     답: 국가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구체적으로 국가에서 제정한 상관법률과 법규의 보호를 받고 자기 권리와 발전의 자유를 향유한다. 중앙으로부터 최말단의 향진정부에 이르기까지 무형문화재에 대한 규정, 이미 등재된 무형문화재에 대한 관리, 보호세칙이 있고 상관관리감독기구가 설치되여 전문일군을 배치하였다.     문: 조선족에게 아리랑은 어떤 의미를 갖고있는가? 선생은 어제(11월 14일)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특강할 때 “아리랑은 조선족의 령혼”이라는 표현을 하셨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답: 우리 중국조선족은 일명 과경민족, 과계민족, 다시 말하면 국계를 넘어와서 정착한 민족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1860년대 우리 조상들이 조선땅에서 두만강, 압록강 혹은 그 무슨 경로를 통하여 중국의 연변지역 나아가 동북의 그 어디에 정착하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부르면서 아리랑을 두만강을 건넜던것이다. 살길찾아 사랑하는 고향산천을 등지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그 많은 한숨과 눈물을 흘리면서 장백산 골짜기와 드넚은 만주벌판에 정착하여 화전농으로 어려운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때도 조선족들은 한많은 사연을 담아 “아리랑”을 부르며 억척스레 고난을 이겨왔고 그후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의 나날에도 그리고 건국후 토지를 분배받고 번신한 나날에도, 문화대혁명기간과 그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나날에도 “아리랑”을 부르며 오늘에까지 왔으며 “아리랑”은 한순간도 중국조선족을 떠난적이 없다.      과거 우리 중국조선족들은 슬퍼도 기뻐도 그리고 타향살이를 하던 어려운 나날에도 자신의 신세를 “아리랑”에 기탁하여 마음을 달래며 불러왔다면 오늘은 중국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새로운 정서와 삶의 희로애락을 새 가락에 담아 불르고있다. “아리랑”은 중국조선족의 슬픔의 노래요, 한숨의 노래요, 피눈물의 노래요, 투쟁의 노래요, 기쁨의 노래요, 희망의 노래요, 우리 겨레의 마음과 념원을 담은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다.     조선반도의 본조 “아리랑”을 바탕으로 광복전후 중국경내에서 새롭게 창작돼 대중들속에 널리 불리워진 “아리랑”들로는 “기쁨의 아리랑(30년대)”,“새 아리랑(채택룡 작사, 허세록 작곡) 등이 있으며 문화혁명후에는 “장백의 새아리랑(최현 작사, 안계린 작곡)이 있고 그외 “꽃피는 아리랑(채택룡 작사, 김남호 작곡”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전통이라랑의 음악선률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된 “중국조선족아리랑” 등이 있고 대형창작가극 “아리랑(1989년)”, “천년아리랑(2008년)”이 있으며 문학지로도 “아리랑”이 있다.      이처럼 “아리랑”은 이미 가요의 함의를 벗어나 중국조선족이 참여하는 사회의 여러가지 민속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상점명이나 상품명, 기념행사나 축제의 이름, 광고나 방송에 이르기까지 “아리랑”이라는 명사가 널리 광범하게 활용되고있다.     조선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여온 160년간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새롭게 이룩해놓은 “중국조선족아리랑”이라 하겠다. “아리랑”은 이제 중국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떳떳하게 살아나가고있는 조선족의 대명사로 되여버렸다. 또한 “아리랑”을 오늘까지 지키고 발전시킨데는 중국조선족 선인들의 피타는 노력과 눈물겹도록 어려운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다. 조선족전통음악연구자이며 작곡가인 김남호선생은 2010년 가을에 이미 한국아리랑세미나에서 상기의 주장들을 호소한바가 있다. 재한조선족칼럼작가 김정룡씨도 일전 “이제 아리랑은 한국만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백의민족의 공동소유”라고 피력하고있다.     문: “아리랑”의 유네스코 문화재 등재를 앞두고있다. 한국의 단독 등재이다. 이에 대한 선생의 생각은?     답: 한국은 물론이고 조선과 중국조선족, 로씨야의 고려인, 재일조선인을 비릇하여 지구촌 모든 우리 겨레들이 한결같이 기뻐할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공동한 마음의 발로인 “아리랑”이 전 인류의 문화재로 되는데 왜 기뻐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축하할것이다. 례컨대 어느해인가 국제스포츠대회에 참가할 때 남북의 단일팀이 조선반도(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의 주악속에서 손에 손잡고 등장하여 우리 중국조선족들은 한결같이 박수를 치고 성원을 보냈다.
23    연변축구의 “`97신화”와 오늘의 현실 댓글:  조회:3938  추천:0  2013-03-13
● 위기는 새로운 기회로 될수도 있어     이제 며칠만 되면 16개 갑급제후들이 판가름을 할 중국축구 갑급리그가 전면 가동이 된다. 올시즌을 앞두고 지난 동계전훈때부터 갑급권의 많은 구단들은 “올해엔 얼마만큼의 자금을 투입하게 되오”, “어떤 수준급의 외적용병을 영입하오”하며 구단실력보강에 열을 올리는 반면 우리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만은 비교적 조용하다. 정부측의 2000만원 투자로 “슈퍼리그진출”을 웨치던 지난해와는 판판 다른 양상이다. 하긴 올해엔 정부측의 투자와 구단관명권투자유치 등이 아직도 즘즘한데다 선후로 고만국, 허파, 배육문, 최영철, 강홍권 등 주전들이 대거 빠져나갔으며 거기에 중국축구협회 규률검사위로부터 강점 3점 및 벌금 50만원이란 책벌이 내려진 상황이다. 구단측의 속내를 리해하지 못하는바가 아니며 국내의 많은 매체들까지 올해의 가장 유력한 강등팀으로 연변팀을 꼽는 추측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위기 또한 가장 훌륭한 기회로 될수 있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획기적인 변화 기회창조의 관건     중외고금의 력사를 놓고볼 때 위기가 기회로 될 때가 많았다. 축구도 그 례외가 아니였다. 연변축구를 보더라도 그것이 좋은 실례가 된다.     1996년 연변축구에는 위기가 닥쳐왔다. 그해 연변조선족들을 주축으로 하는 길림삼성팀은 전국축구 갑A리그에서 10위로 간신히 갑A잔류에 성공, 이러한 위기중 그 이듬해인 1997년 팀을 맡은 분이 바로 한국의 최은택교수였다. 팀을 맡은 최은택감독은 팀에 대수술을 들이댔다. 그 당시 연변오동팀은 리홍군, 방근섭, 김광주 등 주축들이 이적 혹은 질병 등으로 팀을 리탈한 상태여서 최은택감독은 어쩔수 없이 고종훈, 황동춘 등을 주축으로 김청, 천학봉과 같은 신진양성에 모를 박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성적은 인차 나타난것이 아니였다. 제6륜까지 1무 5패로 1점을 기록한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의 약체팀으로 불린 8.1팀과의 원정경기에서 3 : 0으로 완승했고 제6륜부터 련속 9륜을 무패행진하는 “한국선풍”을 일으켰으며 연길홈장에서 대련만달의 47라운드 불패기록을 깨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해에 8승 5무 9패로 갑A리그의 4위에 올랐다.     한편 지난해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또 한차례의 위기를 맞았다. 10승 4무 16패 34점으로 겨우 갑급 13위에 머물었다. 득 38꼴에 실 51꼴을 기록했다. 맨즈(面子)가 서지 않는 기록이였다. 1996년의 경우와 비슷한 상황이였다. 그리고 1996년이 지난 뒤 한국의 최은택교수가 왔고 올해엔 한국의 조긍연이 왔다. 다르다면 조긍연감독이 지난해 연변팀 경기 몇껨 지휘했다는것뿐이다. 팀상황도 비슷하다. 고만국, 허파, 배육문, 최영철, 강홍권 등 주전들이 대거 빠져나갔으며 팀사기도 어느 정도 저락돼있다. 거기에 올해엔 – 3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다면 올해 조긍연이 1997년의 최은택감독에 이어 새로운 축구선풍을 일으킬수 있을가? 필자의 분석으로는 그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할수 있다. “양이 이끄는 사자무리는 사자와 같은 용맹이 있을수 없지만 사자가 이끄는 양무리는 사나운 무리로 될수 있다”고 한다. 이는 지난해 조긍연감독이 연변팀을 잠시 지휘할 때 어느 정도 보아낼수 있었다. 조긍연감독은 사령탑을 잡은 짧은 기간에도 구단관리를 엄하게 하는 한편 수비핵심 리민휘와 신진들인 박세호, 손군 등을 대담하게 기용했으며 팀의 성적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중반에 사령탑을 잡았기에 팀풍격을 완전히 전환시키기엔 시간적으로 부족하였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동계전훈부터 팀을 장악하고 자신의 축구 사상과 시스템을 주입하고있는것으로 전해지고있다.     한국감독들의 기전술체계에 대하여 왈가왈부할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구단관리에 대해서만은 그 무엇인가 특별한것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제날의 최은택, 리장수와 차범근이 그랬다. 축구뿐이 아니였다. 선후로 중국 국가녀자핸드볼팀을 맡았던 정형훈, 중국 국가녀자양궁팀을 맡았던 양창훈, 중국 국가녀자하키팀을 맡았던 김창백 등도 중국 국가팀을 이끌고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에서 메달권내에 진입했었다. 그만큼 어찌보면 한국감독들이 유럽이나 남미의 감독보다 한수 우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비결이라면 유럽이나 남미의 감독들이 60% 정도의 능률을 낸다고 할 때 한국감독들은 100% 혹은 그 이상의 능률을 낸다는것이라고나 할가?     여하튼 올들어 조긍연감독이 연변팀을 이끌고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하거나 그렇치 못하더라도 갑급의 앞순위에까지 끌어올리기만 하면 한국감독들의 선진적인 구단관리비결이 재차 증명될수 있다고 보아진다. 적치된 난제 악성순환 될수도     그제날의 최은택감독처럼 조긍연감독도 연변팀을 이끌고 새로운 “한국선풍”을 일으킬수 있다는 점은 우에서 이미 언급한바이다. 또 이를 바라고있는 연변의 축구팬들이다. 하지만 반면에 연변팀한테 1997년보다는 아주 불리한 객관환경이 조성돼있다.     우선 이미 말밥에 올랐지만 올시즌 연변팀은 -3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축구에서 3점벌이란 이기만 한경기에서 따낼수 있지만 빅는 경기라면 3경기를 치러야 따낼수 있는 성적이며 지고빅고 하는 경기라면 몇개 라운드를 거쳐야 할지도 미지수이다. 1997년 최은택감독도 6경기에서 1점을 따낸 사례도 있다. 때문에 그 3점을 따내려면 많은 대가를 치를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1997년엔 1500만원이란 오동그룹의 관명권후원이 있었지만 올해는 아직 관명권협찬자는물론 기타의 후원자도 나타나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축구와 경제를 너무 련결시키는것도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제를 무시할수도 없는것이 현재 중국스포츠계의 현실이다. 특히 축구가 그렇다. 올해 많은 주전들이 연변을 떠나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그들이라고 연변이 싫어서 떠났겠는가? 모두가 보다 대우가 좋은 곳을 선택하다보니 그렇게 된것이라고 보아진다.     다음 올들어 여러 구단들에서 슈퍼리그진출 혹은 을급에로의 강등모면을 위해 연변팀을 “제밥”으로 만들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판단이다. 최근 몇년간 중국축구계에서 공평경쟁을 위한 환경조성마련에 노력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알다가도 모를 스포츠가 중국축구이다. 항간에서 중국축구협회가 몇몇 돈줄이 긴 구단앞에서는 쩔쩔 맨다는 소문이 날 정도이다. 그리고 이왕의 사례들을 봐서 연변팀이 심판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보기도 했다.     조긍연감독이 능력자라는것을 의심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 “거칠고도 험한 중국축구계”에서 “고군작전”을 하자면 필경 많은 장애벽에 부딪칠수 있다는것이다. 또한 조긍연도 사람인만큼 능력이 한계가 있을것이고 그 능력이 바닥을 칠수도 있는법이다. 애로와 진통이 거듭되다보면 흔들릴수 있고 그 자신이 흔들리면 전반 구단상하에 악성순환이 들이닥칠수도 있으며 결국 한국축구인의 맨즈(面子)도 땅에 떨어질수 있다.   
22    연변스포츠의 스폰서로 자리매김한 기업인 댓글:  조회:3298  추천:0  2013-02-28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 류지동총경리     “고려촌술” 하면 연변술업분야의 “브랜드제품”으로 우리 주내에서 많은 애주가들이 인정해주는 계렬술제품이다. 그리고 이 연변의 “브랜드”제품을 만들어내는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는 연변의 각종 문체사업분야에 그 어느 기업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편이다.     그중 단연히 참여종류가 가장 많고 또한 투자액도 가장 큰것이 바로 연변의 스포츠분야라고 할수 있다. 축구를 비롯하여 등산, 싸이클, 투우, 장기, 빙상 등이다. 그럼 이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가 연변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여러 스포츠분야에 적극 참여한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 회사를 이끌고있는 기업인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아는이가 별반 많지 못할것이다.     그 기업인인즉 바로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의 류지동총경리이다.   1       “나를 놓고말하면 어려서부터 운동을 즐겼으며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고 할수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스포츠스타의 꿈을 자라나는 세대들한테 기탁하려고 하다보니 결국 스폰서에 나서게 되였다. 현재 저의 기업이 경기가 좋다보니 돈을 버는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돈을 잘 번다고 해서 다 스포츠에 참여하는것은 아니다. 마음이 따라가야 하는법이다. 기업을 하다보면 확대재생산에도 늘 신경써야 하기에 자주 은행대출도 받기마련이겠지만 스포츠참여같은 하고싶은 일을 하는것 또한 기업인의 자세가 아닌가본다.”     현재 연변팀이 치르는 중국축구 갑급리그의 경기장에 가면 “고려촌컵” 중국축구 갑급리그경기라고 쓴 현수막을 볼수가 있다. 이것이 곧바로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에서 갑급리그 연길경기구의 “관명권”을 사서 협찬하는 표징으로 되고있다. 연변축구가 2005년 갑급리그진출에 뛰여들 때부터였으니까 올해까지 8년철을 잡고있다.     류지동총경리는 또 연변구단의 성적이 부진의 수렁에 빠지거나 선수들이 피로를 느끼는것 같으면 자주 양이나 개 등 몸보신에 좋은 동물들을 잡아서는 그들을 청해먹이기도 하며 구단응원을 책임진 축구팬조직에도 지원의 손길을 보내주고있다. 이 역시 몇년째 계속되고있는 상황이다.     한편 류지동총경리는 구단성적이 좋을상 싶으면 적극 밀고나가고 그 반대라면 아예 손을 떼는 그런 기업인이 아니였다. “광고효과만 추구하면 장춘아태의 홈구장이나 북경구장에 진출할수도 있지만 연변축구를 그만큼 사랑하기에 힘이 닿으면 우선 연변을 밀어주고싶었다.”     그도그럴것이 “고려촌술”이라면 부디 광고를 하지 않아도 기업경영에는 별 영향이 없다고 단언하는 류지동총경리였다.   2       지난 1월 3일, 제12회 전국동계운동회가 길림성의 장춘시 오환체육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우리 길림성사상 처음으로 펼쳐지는 전국동계운동회에는 수많은 기업인들이 업체의 홍보를 위해 모여들었다. 물론 술업분야의 보스들도 대거참여했다. 하지만 대회조직위원회에서는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에서 생산한 “아리랑”표 술을 대회연회석상의 지정술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아리랑”표 술이 조선족특색이 짙은것도 있었겠지만 다른 더 큰 리유도 있었다. 그것인즉 별로 크지 않은 민영기업이 다년간 지방의 스포츠발전을 위해 적극 참여한것에 대한 긍정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제12회 전국동계운동회 당시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에서 협찬한 “아리랑표”술은 그 가치로 인민페 50만원어치가 되였다. 이는 류지동총경리가 우리 연변을 벗어나 국가급스포츠행사에 참여한 첫스타트였으며 그가 스포츠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행동이기도 했다. “사회로부터 얻은 재부는 반드시 사회로 다시 반환한다. 단, 그것의 첫보조는 스포츠분야이다.” 이는 류지동총경리가 기업을 운영함에서의 일종 좌우명이기도 했다.   3       지난 1월 29일은 음력으로 정월 초이레로서 중국전통의 “인일절(人日节)”였다.     그날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에서는 새봄맞이 직원들의 련환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에는 특별한 손님 한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올해 만 16세밖에 되지 않는 그 손님은 국가속도스케이트팀의 연변출신선수 석효선이였다. 그는 지난해에 있은 제1회 청년동계올림픽중 중국국가대표로 녀자쇼트트랙 500메터 경주에서 준우승을 따낸 선수였다.     그날 석효선선수와 동행한이들로는 주속도스케이트팀 총감독 방세찬과 주체육학교의 지도일군들이였다. 그날 석효선선수는 우리 연변의 체육사업을 적극 부축여주고있는 연변변성술업유한회사와 류지동총경리한테 짙은 사의를 드렸고 류지동총경리 또한 우리 연변과 중국의 대표하여 사상 처음으로 되는 청년동계올림픽에서 영광을 떨친 석효선선수가 수고했다면서 앞으로 있을 많은 세계급 경기에서 더욱 큰 성적을 따낼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영양보충에 쓰라면서 인민페 1000원이 들어있는 붉은 봉투를 건네이기도 했다.    ※                          ※                     ※         “건국이래 연변의 조선족들은 기본상 연변내의 문화 및 스포츠 분야를 주도해왔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1965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우승고지를 점령하여 연변축구가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게 했다. 그리고 조선족의 가무와 그네, 널뛰기 등도 아주 유명하다. 이렇다고 할 때 조선족은 문화 및 스포츠 분야에서는 특기가 있다고 할수 있다. 이는 이번 자치주창립 60주년경축행사에서 충분히 반영되였다.     하긴 중국이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연변의 문화 및 스포츠 분야가 좀 주춤하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연변경제가 보다 춰서면 연변의 문화 및 스포츠 분야가 다시 활성화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그러면 그때 가서 연변의 문화 및 스포츠 분야를 밀어주는 과업은 우리 기업인들의 몫이라고 해야겠다.”     실로 스포츠분야의 스폰서다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업인들이 있는한 연변의 스포츠분야는 희망이 있는것이다.  
21    2012년 연변팀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 연출 댓글:  조회:3807  추천:0  2013-02-28
    중국축구 갑급리그는 지난 10월 28일, 전반 30륜의 경기를 마치고 중국축구의 진면모를 그대로 로출시키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우리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은 전체 30륜 경기중 10승 4무 16패 승점 32점으로 제13위를 기록, 갑급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을 연출해냈다.     그럼 올해의 연변팀 상황을 놓고 지난 8년래의 상황을 비교해보면서 참답게 총화해보는것도 필요한것이라 보여진다. 올시즌 연변팀에 주어진 환경       지난해말 주정부 리룡희주장은 주체육국에서 사업연구를 하면서 “새해 연변축구팀이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하여 자치주창립 60주년에 헌례”하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리룡희주장이 어디까지나 주체육국을 포함한 해당 부문에서 계획보고서 등에 의거해 내린 결단성적 지시이지 결코 스스로 연변축구를 판단하고 주먹구구로 내린 결단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주장한테 해당계획서를 올려보낸 보고서에 큰 구멍이 생긴것이 틀림없다는 진단이 나올수밖에 없다.     기실 지난해 연변팀의 상황을 보면 지난해 시즌 중후반기에 사령탑을 잡은 정상룡감독에 의해 간신히 갑급보존에 성공한 상황이였으며 구단으로 놓고볼 때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럼에도 주정부에서 투자하는 2000만원이란 자금으로 실력파 외적용병을 영입해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헌데 올시즌 들어 갑자기 갑급일정에 커다른 변수가 생겨 시즌초반 연변팀한테 련 7경기가 원정으로 배정되였다. 거기에 기대와는 달리 영입했다는 4명의 외적용병중 쿠리바리와 한국의 홍진섭외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그중 한명은 몇경기 출전하지도 못한채 본국으로 소환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한편 그 7경기의 원정중 연변팀은 2 승 2무 5패 8점으로 갑급 12위에 머물어있으면서 슈퍼리그진출가능성이 아주 희미해지게 됐다. 감독풍파 정상적인 경기운영에 악영향       7경기에 달하는 원정에서 겨우 8점을 챙긴 연변팀은 제8륜부터 있게 되는 홈경기에 큰 기대를 걸게 됐으나 홈장에서의 첫상대가 올리그 슈퍼리그진출에 성공한 무한줘르였다.   홈경기였지만 워낙 상대가 강했기에 0 : 2로 패했고 두번째의 홈장에서는 성도셀틱한테 2 : 3으로 패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정상룡의 감독수준을 의심하던끝에 그를 경질시켰고 한국축구협회와 련계하여 감독물색을 하기 시작, 그와중 감독대행을 맡은 김광주가 팀을 이끌고 갑급 제11륜 북경리공과의 홈경기(2 : 1)와 중국축구협회컵 중경FC(5 : 4)과의 경기에서 이기면서 연변팀 선수들에 대해서는 그래도 본토감독이 더 잘 료해한다는 평가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구락부에서는 이미 한국적 조긍연감독을 물색해 계약까지 맺은 상황이였다. 연변팀 사령탑을 맡은 조긍연감독은 “1꼴 허락하면 2꼴 넣는 축구를 펼치겠다”, “최은택감독을 존경하지만 그를 초과하련다”고 강한 자신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가 중국축구리그를 너무 얕잡아보았을가? 모든것은 그의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조긍연감독은 제12륜 홈장에서 광동일지천과 1 : 1로 빅었고 원정에서 중경력범한테 2 : 1로 패했으며 사령탑을 잡아 세번째 경기인 심수홍찬팀과의 경기에서 1 : 0으로 겨우 이겼다. 최초 호언장담하던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그는 또 경기운영중 훈련에 게을리한다는 리유로 외적용병들인 쿠리바리, 홍진섭, 라피치 등을 포기하고 순 본토선수들로 경기를 운영, 그의 작법에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과 그는 지병을 리유로 제22륜부터 일선에서 물러나고 다시 김광주가 감독대행을 맡았은데 그때는 연변팀의 슈퍼리그진출이란 리론상에서만 존재할뿐이였다.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 연출       올해 연변팀의 슈퍼리그진출목표는 시즌중반에 무산되였다. 이를 탓하는것이 아니다. 많은 요소들은 시즌초반에 예견되던것이였다. 문제는 슈퍼리그진출에 실패한건 물론 마지막 두번째륜까지 갑급보존을 위해 허우적거렸으며 갑급 8년래 가장 최악의 “흑색기록”을 연출했다는 점이다.     올시즌 연변팀의 여러 기록들을 정리해봤는데 여러가지가 어처구니가 없는 기록을 했다. 우선 갑급순위에서 8년래 최악을 기록했다. 8년래의 갑급에서의 연변팀 순위를 보면 갑급으로 진출한 2005년에는 5위, 2006년과 2007년에는 각각 6위, 2008년에는 9위, 2009년에는 6위, 2010년에는 3위, 2011년에는 11위였고 올해는 13위였다. 그중 2008년, 2011년과 올해들어 감독교체가 빈번했으며 순위 또한 각각 9위, 11위와 13위가 됐다.  꼴득실에서도 8년내의 가장 최악을 기록했다. 자료에 따르면 꼴득실에서 가장 득점을 많이 한해가 2005년 시즌이였고 실점을 가장 많이 한 해가 올해로 무려 51꼴을 허락, 평균 한경기에서 1.7꼴씩 허락했다. 비록 올시즌이 지난해보다 4경기가 더 많았지만 지난해의 37꼴 실점에서 올해의 51꼴 실점, 13꼴 실점의 차이는 팬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홈장패전도 올해가 많다. 16경기 패전중 홈장패전이 5경기였고 그중 지난 7월 28일에 있은 제19륜의 홈경기에서는 0 : 3으로 상해동아한테 완패당했고  9월 1일에 있은 제24륜 홈경기에서는 할빈의등한테 1 : 5로 대패했으며 제일 마지막 륜에서도 약체팀 심양심북한테 0 : 2 로 홈장완패를 당했다.   그외 꼴잡이중에서도 연변의 꼴잡이는 하위그룹에 속했다. 1위로는 심수홍찬팀의 바바카가 23꼴을 성공시킨 반면 7꼴을 넣은 연변의 허파는 성도셀틱의 풍탁의, 호남상도의 동방탁과 더불어 공동 10위에 머물었다. 이 역시 2010년 시즌 11꼴로 꼴잡이 단독 6위에 오른 루둘라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     ※     ※       슈퍼리그진출이란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연변팀은 갑급진출 4년만인 2008년부터 슈퍼리그진출이란 구호를 제출해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올해까지 슈퍼리그진출은 물론 갑급보존마저 위태로운 징크스에 깊숙히 빠져 갈수록 슈퍼리그진출이란 목표가 흐지부지해지게 됐다. 그래서 “연변축구의 ‘체질’은 갑급이 가장 적합하다”, “연변축구의 전성기는 다시 도래하지 않는다”는 등 여러가지 분석들이 많다. 이런 분석들이 맞아떨어질지도 또한 가장 과학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래도 연변축구의 슈퍼리그진출꿈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것이다. 설마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더라도, 또한 그냥 꿈에 그치는것으로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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