녕파 여요의 왕양명 고향집
회계산 완위산 동쪽에서 양명동을 찾아낸후 나 답사의 발길은 지구급시 녕파경내에 있는 명나라 시절 왕양명의 고향집으로 이어졌다.
5월 15일, 소흥의 학사거리 하지장 옛집을 돌아본후 나는 녕파 여요행 쾌속버스에 올랐다. 1시간 쯤 달려 오후 1시반에 50킬로메터 밖 여요에 이르자 여요 쾌속버스부 앞 강우에 5개 아치형을 이룬 옛 다리 하나가 보인다. 옛 다리를 사진찍고 택시를 잡아타니 왕양명 고향집은 여요시 무승문로(武胜门路)서쪽, 양명동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 언급해 보지만 왕양명(1472-1529)은 이름이 수인이고 자가 백안, 호가 양명으로 나타난다. 명나라시절의 이름난 철학가, 사상가, 교육가이고 군사가, 문학가인 왕양명은 관직이 남경의 병부상서에 오르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진 사람으로서 중국력사상에서 보기힘든, 문무가 겸비한 위인으로, 중국 근 500년 사상변혁의 선구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기에 지난 500여년의 력사흐름속에서 왕양명의 고향집은 수차 확건되고 수건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왕양명이 조정에 의해 봉해진 “신건백”이 고향집 입구의 길가 문패를 이루고 있었다.
문패안에 들어서면 고향집과 문패사이 광장에 군사가의 차림으로 뒤에 긴칼을 찬 왕양명의 동상이 선참 안겨진다. 그 다음은 고향집구내로서 왕양명의 고향집은 좌북조남(坐北朝南)으로 평면장방형을 이루며 남에서 북으로 조벽(照壁),문청(门厅),轿厅(교청),대청(大厅),주체건물 서운루(瑞云楼) 등이 차례로 분포되여있었다. 동서에는 각기 배방(配房)이 있고 사위는 높은 담장, 왕양명의 출생지이고 고향집의 주체건물을 이루는 서운루는 나무구조로 된 2층집 으로서 그 건축면적이 500여평방메터를 이루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것은 왕양명 출생후의 한단락 얘기다. 왕양명은 원명이 왕운이고 1472년 음력 9월생, 어린 시절을 서운루에서 보냈다지만 첫돌을 지나 다섯살을 잡을때까지도 어인영문인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집안어른들이 근심하던차에 하루는 한 도사가 왕씨댁을 지나다가 “좋은 아이인데 유감스럽게도 도가 이그러졌다, 다시 말해 운이라는 이 글자가 하늘기운을 흐리여 말을 번지지 못하는 징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겠다고 집어른이 이름을 수인(守仁)이라고 고치니 왕양명은 드디여 말을 하게 되고, 출중한 천부적 재질을 보인다. 철모르던 시절에 어린 왕양명은 조부가 읊는 시문을 몇번 듣더니 제꺽 암송하기에 이르고 서당에 다닐 때에는 서당선생과 “인생의 최대추구는 무엇인가?”고 묻기에 이른다. 서당선생이 “글을 읽어 앞으로 진사에 뽑혀 벼슬하는것”이라고 대답하니 어린 양명은 “공부와 진사벼슬이 가장 큰 추구가 아니라 독서하여 성현이 되는것이 인생의 가장 큰 추구”라고 말한다.
명나라 대성현 왕양명의 어릴 때 이야기다. 어릴 때 남다른 추구를 가진 이 위인의 역사는 고향집내에 “왕양명 생활시대 정경 복원진렬”, “진삼불후(真三不朽)ㅡ왕양명생평사적진렬”, “왕양명에 대한 국내외 기념과 연구”, “왕양명 사적진렬” 등으로 나누어 진렬되여 여느 옛집과도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여러 진렬실 가운데서 나를 강하게 끌어들이는것은 “왕양명에 대한 국내외 기념과 연구” 진렬실이였다. 국내외 왕양명 관련연구와 기념활동을 보면 왕양명학설이 널리 퍼진 유럽나라들과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지구들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초보적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세기 20세기 80년대 중기이래 국내외에서 왕양명과 양명학파, 양명학 연구저서와 론문집 50여부(어떤 자료는 80여부), 이밖에도 20여편의 박사론문과 헤아릴수 없는 석사논문, 학술논문,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국내외에서 양명학 관련 국제학술세미나가 10여차, 왕양명 관련 력사유적과 기념관 등을 복원했거나 수건한 곳이 여덟곳에 이른다.
더우기 한국에서의 왕양명과 왕양명 학설연구는 눈부실 정도라 하겠다. 왕양명고향집에서의 관련자료를 보면 양명학설이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한것은 16세기초엽, 17세기에 이르러 이미 양명학 서적들을 계통적으로 연구하고 번역출판한, 저명한 학자인 정제두(1649~1736)를 대표한 조선의 양명학자들이 출현하였으니 이는 그후의 조선실학의 산생, 발전과 갑신정변, 농민운동의 흥기에 대하여, 유신변법과 혁신에 대하여 선두적인 적극적 역할을 놀았다고 왕양명 고향집 연구자료들이 말한다.
20세기20년대와 30년대 일제시대에 이르러도 한반도에서의 왕양명영향은 식을줄 모른다. 한국의 이름난 독립운동가이고 학자인 박은식의 경우나 대한민국 림시정부 국무령, 주석으로 활동했던 김구선생의 경우에도 왕양명은 대단한 존중을 받았다.
김구선생은 1919년 봄이후 조선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중국땅 안동(지금의 단동)을 거쳐 상해에 이르게 되고 선후로 림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러다가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본천황 저격사건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사건을 획책, 지도한다. 그후 절강 가흥과 해염, 항주, 남경 등지로 피신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침략자들이 남경과 상해를 진공하고 장개석 국민정부의 각 기관들이 중경으로 옮기게 되자 김구선생 등 광복전선 3개당의 100여명 대가족이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게 된다. 김구서생은 장사에서 불행히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과 더불어 동료 리운한의 권총에 맞아 생사를 다투다가 살아나게 되고 호남대학 내부 악록서원의 휴양지에서 휴양을 취한다. 일은 묘하게도 악록서원은 일찍 력대의 주희, 왕양명 등 일대 위인들이 강의를 하던 곳이고 왕양명을 존중하며 그의 학설에 주의를 돌리던 김구선생은 왕양명을 심심히 기리게 된다.
당대의 발전은 더욱 비약적이다. 한국에서 한국 양명학연구 저서들이 20세기 60년대에 11종에 지나지 않더니, 70년대에는 50종, 80년대에는 113종, 90년대와 2003년까지는 284종으로 뛰여오른다. 이런 결과는 1995년 4월 8일, 한국 성균관 대학에서 한국 양명학학회가 설립되고 “한국 양명학회회보”가 발간된것과 갈라볼수가 없다.
이로부터 보면 양명학은 중국의 10여개 성시는 그만두고라도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의 사상학설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왕양명과 그의 학설은 절강에 속할뿐만 아니라 중국에 속하고 동아시아에 속하여 제반 동아시아 사상사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루면서 인류사상문화 보물고의 중요한 정신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여요 왕양명 고향집 답사를 마치고 부근 산을 이루는 여요 룡천산의 왕양명 기념비와 왕양명의 중천각(中天阁)강의처를 답사하면서 나의 리해는 보다 깊어져 간다. 왕양명 발자취는 절반 중국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주요발자취만 보더라도 절강 여요와 귀주 수문, 강서 남창, 감주, 숭의, 룡남 등지에 왕양명상이 세워지고 양명동이 여러곳에 있으며 절강, 귀주, 강서에 왕양명의 이름으로 명명한 도로와 거리 마을, 공공기관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위인이 당나라 문화거인 지장보살 김교각을 통해 우리 고대겨레와 이어지고 고대, 근대, 현대를 거치여 오면서 조선과 이어지고 한국과 이어진다.
세상일이란 워낙 이러한가부다. 2007년 7월초 안휘 구화산 동암안좌 답사를 통해 왕양명에 흥취를 가지게 되고 지장보살 김교각님에 대한 왕양명의 존경이 나를 절강 회계산과 각지 왕양명 발자취답사에로 떠밀더니 녕파 여요의 왕양명 고향집답사와 관련자료 보기, 여요 룡천산 답사는 왕양명에 대한 나의 리해와 존경이 비약의 나래를 타게 한다. 그제날 조선 왕조시기와 오늘날 한국에서의 왕양명과 그 학설연구는 나를 그지없는 흥분속에 빠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