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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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인생소감--현장님과의 만남 겨레사회로 이어간다 댓글:  조회:1204  추천:19  2009-11-11
【인생소감】                  현장님과의 만남 겨레사회로 이어간다        항주와 소흥은 쾌속버스로 한시간 미만 거리로 가까운 편이라지만 두곳에서 서로 만난다는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지난 8월초 연길만남이후 절강에서 항주 현장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그러하다 할까. 그러던 현장님이 자가용으로 소흥에 온다고 하니 오랜만에 친인을 만나는 기분이런듯 기다려지는 마음을 어찌할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내가 항주의 현장님을 처음 만난것은 2007년 11월 17일의 일이였다. 2006년 8월, 내가 내 고향 연변을 떠나 첫 강남진출길에 오를 때 조글로사이트의 관리자 김삼님과 연우산악회의 명상님은 항주에 현장님이 있으니 꼭 찾아보라고 했다. 조글로사이트를 통해 이미 어느정도 알고있은터에 나도 꼭 만나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항주 서호가 고려사 차집에서의 우리 만남은 화기애애했고 첫 만남이라지만 오랜지기처럼 못하는 소리가 없없다   항주고려사 차집에서 우린 많고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절강연우산악회와 조글로미디어 활약활성화, 고대 겨레발자취 련합답사와 소주, 양주, 무석, 상해,  항주, 소흥, 녕파. 등지를 망라한 화동지구의 뜻이 맞는 4050 지성인모임 등을 두고 뜻을 나누었습니다.   이는 내가 우리 간의 첫 만남—“항주 서호에서 현장님 만났습니다”라는 인상기에서 쓴 한 구절, 첫 인상편이였다. 첫 만남에서 나이격차와는 관계없이 형님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으니 그후 우리 사이는 친형제처럼 가까와졌고 수시로 만나 마음을 주고 받았다. 현장님과의 사이에서 남다른 것은 겨레를 위한 우리의 마음이 막힘없이 한곬으로 흐르는 것이라할까. 현장님은 19994년 10월에 연변서 강남땅으로 진출하고 소주, 상해, 이우, 항주 등지를 거치여 온  젊은이로서 지식이나 사회, 겨레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박식한데서 내가 강남땅에서 중점적으로 추적하고있는 항주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 등에 대해 깊이 리해하고있었다. 더구나 인상적인것은 내가 수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친 항주고려사 자리가 옛터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2008년 5월 12일 4월 초파일날 항주고려사 옛터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지고 항주고려사 복원관련 등 허다한 복제자료를 주어 항주고려사에 대한 나의 리해는 비약의 나래를 탔다. 올해 2009년 2월 8일 우린 현장님의 자가용으로 수백리 밖 절강 천대산 국청사로 달려가 고려명승 의통대사 (927~988) 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함께답사의 시원을 열어놓기도 하였다. 고려인 의통대사면 중국 불교 8대류파의 하나인 천대종 13대조사여서 절강, 강소, 복건 등 연해지구에 깃든 중한 고대문화교류를 연구하자면 의통대사를 꼭 알아야 했다. 이런 의통대사의 화상과 소개가 천대종의 시조—지자대사를 모신 천대산 진각사의 “지자탑원”에 모셔지고있었다. 지난 3월 3일 현장님을 통해 항주에서 또 유망한 작가 조룡기님과의 만남이 이우어졌다. 흑룡강 해림출신이고 려행사 가이드로 뛰고있는 조룡기님은 우리 문단의 새별이라고 불리우리만치 소설과 수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이였다. 서로간의 얘기가 오가는중 우리 문단이 비치고 소주, 상해 등지의 문인들이 비치며 우리도 연변작가협회 산하 “남방지구 창작위원회”를 내오자는데로 흐름이 이어졌다. 한동안의 질서있는 준비과정을 거치여 2009년 6월 13일 소흥에서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가 고고성을 터치고 절강창작위원회 소속 회원들은 항주, 소흥, 소주, 남경, 상해, 광주 등지 널리였다. 이런 활동의 진두에는 현장님이 뛰고있었으니 현장님을 제치고는 여러 일들을 상상할수도 없다고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현장님과 같은 이런 문인동생을 둔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런 대학생 문인동생이니 서로간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만나면 얘기가 끝이 없다. 11월 6일 소흥 만남에서 우린 실로 많고많은 얘기를 주고받았으니 그 주요줄거리가 국내 여러 우리 글 문학지들에 문학특집을 싣고, 작품집을 무을 문제, 강소, 상해, 절강을 망라한 화동지구 관련학술세미나와 화동지구 대학들 한국어글짓기 경연을 조직할 문제 등 큼직큼직한 것들이라 하겠다. 4050을 주축으로 하는 화동지구 각지에 절강창작위원회 산하 상해, 소주, 항주, 광주 활동소조—모임체들을 륙속 뭇자는것도 우리 얘기중의 하나였지. 오늘도 우리 인연은 그지없이 소중하다. 한동안 만나지 못해도 오랜세월 만나지 못한듯 그리워지고, 만남이 기다려지고, 전화련계가 끝이 없다. 우리들의 만남과 인연은 이속에서 둘사이의 인연거래를 넘어 산동 이남지구에 펼쳐지는 우리 겨레사회로 이어가며 하나 또 하나의 발자취로 찍히여진다.   2009년 11월 8일, 강남 두앵원에서                    
404    눈내리기전 모아산 단풍일경 댓글:  조회:5211  추천:32  2009-11-02
              눈내리기 전 모아산 단풍일경     지난 10월 중순, 연변대학 60돐 기념행사와 동창모임으로 잠간 내고향 연변에 다녀 왔다. 연변대 조문학부 78년급 졸업 27년만에 가지는 두번째 동창모임, 동창모임의 한 행사가 모아산 산책인데 산백양에 드는 노오란 단풍이 그리도 매력적일 줄을 몰랐다. 10월 13일 깊은 밤, 적절히 말해 14일 새벽 1시 지나 연길공항에 내리니 바깥세계는 깊어가는 북방가을의 찬기운이 차고넘치여 홑옷 바지바람의 나는 오스스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노라니 지난세기 20년대의 최서해가 그의 “탈출기”에서 그린, 처음 두만강을 건느고 오랑캐령에 올라 섰을 때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그 시절은 깊어가는 가을이 아닌 봄철이였다. “오랑캐령에 올라서니 서북으로 쏠려오는 봄새 찬바람이” 뺨울 마구 갈기여 어머니는 “에그 칩구나! 여기는 아직도 겨울이로구나.”하면서 수레우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최서해의 “탈출기”의 한 장면이다. 연변보다 따스한 남쪽땅에서 북행하니 봄새 찬바람이 오스스 할수밖에 없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탈출기의 이 장면이 어쩌면 강남땅에서 북행에 오른 나를 말하는듯 싶었다. 내가 잠시 삶을 영위하는 강남땅은 10월은 물론 11월 내내까지도 마가을의 오스스함을 몰라 겉옷바람으로 다니는 세상,  그런땅에서 연변땅에 들어서니 마가을의 찬기운을 진하게 느낄수밖에 없나부다. 이러구러 연변대 조선—한국학학원 60돌 기념행사와 관련행사을 마치니 78년급 동창 30여명이 모인 연길 소하룡행사가 펼쳐진다. 서쪽으로 강건너 성자산이나 소하룡 주변산은 단풍시절을 넘어 누우런 자태를 드러내고 내고향 산야는 푸르름을 잃어 약동하는 생기를 느낄수가 없다. 내가 강남은 사철 푸르름의 세계라고 하니 동창중 누군가 사철 푸르름 한 본새면 멋이 없다며 황금색 가을도, 눈내리는 겨울도 있어야 제멋이라고 동을 단다. “그래, 그래도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 연변이 좋지!” 그러면서 너나없이 황금빛 마가을에 취해 본다. 그러는 동창들이 얼마나 좋은가, 대학졸업 근 30년 세월속에 우린 30대와 40대의 삶을 뛰여넘어 50대의 삶을 맞았으니, 허다한 동창들은 졸업후 20여년만에 처음 대하니, 이런 경우를 두고 세월이 무상하다고 하고, 이런 경우를 두고 오랜만의 만남이 그지없이 즐겁다고 하는걸까. 어느덧 2~3일이 눈깜짝새에 지나 10월 16일 오전 우린 내고향 명산—모아산에 올랐다. 모아산기슭 정차장 주변은 온통 노오란  단풍으로 덮힌 황금빛 세계다. 참나무 단풍에 이어 이해 마지막으로 대지를 수놓는 산백양의 단풍세계, 그 세계에 끌리여 카메라를 내드니 어인 영문인지 카메라 셔터가 눌러지지 않는다. 급해난 나는 카메라를 역사질하다가 동창 김순림의 자가용을 타고 연길시가지를 다녀와서야 그런대로 모아산 산백양 단풍세계를 카메라에 담아볼수가 있었다. 눈내리기전 모아산의 단풍일경이다. 카메라의 불찰로 사진화면은 희부여도 머나먼 강남땅에서 내고향 연변의 가을단풍세계에 쉽게 휩쓸릴수 없는 나로서는 소중한 기념사진이라 할까, 더더구나 허다한 대학동창들을 근 30년만에 대하는 모아산만남이여서 그 소중함이 보다 진해만 간다. 모아산의 단풍인 산백양 단풍은 뭇나무들을 덮은 나무잎세계의 마지막 달림으로 우리 앞에 황홀한 세계를 펼쳐보인다.   2009년 11월 3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403    사진으로 보는 09 한글문화 큰잔치 시상식 성황 댓글:  조회:4811  추천:35  2009-11-01
      사진으로 보는 09 한글문화 큰잔치 성황
402    마가을 10월에 호박순 따고 달래를 캐고 댓글:  조회:4839  추천:63  2009-10-31
        마가을 10월에 호박순 따고 달래를 캐고     10월도 막가는 때면 가을이 깊어가는 마가을이라 우리 북방 연변은 기온이 령하로 떨어지기 십상이고 눈발이 날린다지만 여기 강남땅은 산과 들이 푸른 단장 그대로 이고 꽃은 꽃대로 피며 무궁화꽃이 만발하여 이색적인 기분을 안겨준다. 마가을 10월에 나물캐러 가는 기분이 어떠할가? 나는 이런 기분속에 젖어보고 싶었다. 10월 28일은 수요일, 강의가 오전 두시간 뿐이라 9월의 개학이후 어쩌다 맞아보는 홀가분한 시간이 나진다. 나는 이 시간을 타서 여느때와 같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절강의 불교명산—회계산 풍경구 남하가 호박밭을 찾았다. 철이 철이라 호박가을이 끝난 때라지만 호박순만은 야들야들하여 나를 빤히 올려다 보는것만 같다. 마침 60대로 보이는 주인집 바깥로인이 밭을 정리하며 겨울나이 채소심기 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내가 호박순을 따고싶다고 하니 얼마를 요구하는가고 묻는다. 얼마든 보이는대로 따겠다고 여쭈자 로인장은 하던 일을 접고 호박순을 따기 시작한다. 나도 호박순따기에 열을 올리였다. 이미 여러차례 딴 모양이지만 나나 가족이 먹을만한 호박순은 얼마든지다. 호젓한 그 기분이 별기분이지, 우리 북방에서는 상상이 가지않는, 10월이 막가는 시절의 싱싱한 호박순따기.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나는 10월의 달래를 맛보고 싶어 안해와 아들애의 동행속에 소흥에서 서남으로 10여킬로메터 떨어진 란정풍경구로 갔다. 시안의 35선 시내버스를 타다가 도심의 부산풍경구 부근에서 향촌까지 달리는 3선버스를 타면 란정풍경구의 란정국가삼림공원이 한겻만이다. 란정풍경구는 소흥현 란정진 경내에 위치, 동진시기의 대서예가 왕희지를 기리는 풍경구인데다가 란정국가삼림공원까지 곁들이여 갈때마다 느낌이 새로운 걸음이다. 란정국가삼림공원 정문 앞 습지구내는 싱싱한 미나리에 달래가 나는 곳이라 우리 절강연우산악회 패들이 몇번이나 다녀갔는지 모른다. 하긴 봄나물캐기였지, 가을나물캐기는 령의 기록이나 다름없더니 가을달래들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여든다. 한겻이 지나니 캐여든 달래가 퍼그나 된다. 안해는 싱싱한 강남의 민들레가 먹음직하다며 꽤나 캐여 들었다. 그런속 점심참은 또 어떤가, 집에서 갖고 간 오이, 파, 마늘에, 토장에, 식초에, 생수에 시원한 냉국이 입맛을 돋군다. 강남의 대자연속에서 우리 북방 연변의 냉국으로 점심을 때운다는것이 그리도 흥날수가 없다. 10월도 막가는 시절에, 우리 북방에 눈이 내린다는 시절에 련일 여름철인양 무더위가 쏟아지는 강남의 날씨에 호박순 따고 달래를 캐는 기분 짱이다. 이 기분에 젖어 온 겨우내 달래를 캐며, 겨울나물을 캐며 새 기분을 만들어 보려고 벌써부터 윽벼려 본다.   2009년 10월 3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401    옛 발자취 (5) -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 (2) 댓글:  조회:1213  추천:18  2009-10-28
장강남북에 남긴 옛 선조들의 발자취 찾아서(5) 기자: [리함] 래원: [본사소식] 발표: [2009-08-27 오전 7:53:10]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 (2) 주산군도 보타산의 상징인 남해관음불상 기원 863년에 귀국길에 오른 일본 고승 혜악스님과 배로 스님을 안내한 신라인들이 주산군도 련화양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암초에 걸리면서 부득불 뭍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던 곳 력사의 현장 주산군도 련화양이 오늘은 유람객들로 붐빈다                                                   4 신라초기념비에 감사했다. 아니, 신라초기념비를 세운 주산시 보타산관리국과 한국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가 감사했다. 기념비로 보아 2003년 11월에 세운것인데 바로 3년전 이때의 일, 나의 주산군도 보타산행은 신라초기념비 하나만으로도 대만족이였다. 내가 주산군도 보타산으로 달려옴은 중국불교의 4대 명산중의 하나인 중국불교 관음보살도장에서 우리 김교각―지장보살님의 옛 자취를 찾아볼수 없을가 하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헌데 첫걸음, 첫 경관에서 전혀 생각밖으로 신라의 청해진 대사로서 고대해상왕으로 이름높은 장보고를 대하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가 없었다. 력사연구가에게 있어서 실머리만한 단서면 파고들 여지가 큼을 시사한다. 나의 머리에는 우리 겨레의 일대 위인이며 고대해상왕이였던 장보고의 형상이 우렷이 떠올랐다. 고대해상왕 장보고는 조선반도 삼국시기 신라사람으로서 본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전해진다. 그 시절 일본승려 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장보고라고 기록되여있다. 장보고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여난 능력을 보여 궁복, 궁파로 불린것은 력사사실인것 같다. 어찌하든 장보고는 신라가 낳은 바다의 영웅이고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였다. 장보고는 청년으로 자라난 후 자기보다 열살가량 어린 동향후배 정년과 더불어 당나라로 건너갔고 30살쯤에 오늘 강소성 서주지방의 절도사 휘하의 주력부대―무령군에 가입하고 30대초반의  나이에 벌써 군사 5000명을 거느리는 무령군 소장 군직에 올랐다고 하니 과시 여간내기가 아닌가부다. 그러던 장보고를 《삼국사기》에서는 기원 828년 즉 신라 흥덕왕 4년에 당나라서 귀국한 뒤 신라왕에게 청해를 진수할것을 상주했다고 밝히고있다. 당시 서남 해안에서는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로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략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임금의 허락을 받고 군사 1만명을 모아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활동한 모양이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통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장보고는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하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함께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펼치였다. 840년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내면서 일본과의 무역을 밀고나갔다. 결과 장보고는 신라, 당나라,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왕으로 떠올랐고 그의 세력과 경제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막강함을 보여주었다. 장보고 시절, 당나라와 신라와의 우호적관계로 하여 지금의 산동반도 남쪽 연안일대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연해지구들에는 자치집단을 이룬 신라인 촌락―신라방들이 많이 일어섰다. 이에 장보고는 해상무역활동을 통해 키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제날의 산동 문등현 적산촌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우기에 이른다. 법화원내에 년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수 있는 장전이 있어 신라류민들과 류학승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할수 있었고 많은  승려들이 법화원에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수 있었다고 하니 적산법화원은 산동반도 일대 당나라거주 신라인들의 활동중심지로,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 등 3국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장보고는 당연히 그 중심의 총수였다.                                                    5 관련자료들을 모아 헤아려보는 고대해상왕―신라인 장보고의 대충 행적이라 하겠다. 그런 장보고가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 비문에 따르면 당나라와의 무역과정에 교역품 운송에서 보타산항로를 많이 리용하게 되고 그로 하여 보타산 남쪽 련화양 바다가에 신라초라는 옛이름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남방에 와서 틈틈이 고대겨레발자취를 추적하는 나에게 있어서 신선하게 안겨들수밖에 없다. 나는 장보고관련 신라초기념비를 떠나 부근의 암초구간과 남천문바다가를 돌아보았다. 그러노라니 출렁이는 저 대해속에 장보고가 무역선을 이끌고 금시 보타산에 들어서는것만 같았다. 그속에 남천문을 벗어나 부근의 해변가 관음조와 《관음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자죽림, 남해관음불상(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높이 33메터, 그중 금동주조 불상의 높이 18메터, 인민페 4000여만원으로 1997년 음력 9월 29일 준공), 보타산관리국 주재 중심경관구 등지를 비속에서 답사해보았지만 생각은 온통 장보고 하나뿐이다. 잊을수 없는 2006년 11월 25일, 지장보살님 추적으로 보타산에 갔다가 고대해상왕―장보고의 행적을 더듬어보게 된 하루, 그 하루가 나에게는 그지없이 소중했던 하루가 아닌가싶다. 소중한 하루라 함은 장보고외에도 중국불교 4대 명산―보타산도장의 유래를 다소라도 헤아리게 되였기때문이다. 기원 863년에 일본의 고승 혜악스님이 불경 구하러 세번째로 당나라에 왔다가 산서 오대산에서 관음보살 불상 한존을 얻었다. 귀국행동중 주산군도 련화양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암초에 걸려 부득불 조음동으로 해서 대안에 오르고 장씨댁에 불상을 모실수밖에. 이 불상이 《관음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이다. 워낙 일본행인데 배가 암초를 만나 귀국하지 못하고 보타산에 머물게 되여 이렇게 불려진것 같다. 후에 이 관음불상을 모시고 보타산이 관음보살도장으로 떠오른다. 내가 알고있는 관음보살도장 유래 관련자료의 간략적집대성이다. 보타산관련 모든 자료들이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사실은 기원 863년 일본 고승 혜악스님의 귀국행은 그 혼자가 아니였다. 당나라 신라방 시절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썼고 해상왕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렀던 일본 승려 원인이 신라인들의 절대적 보호와 받들림속에서 당나라행이 성사되였던것처럼 일본 고승 혜악스님도 신라인들의 도움속에서 움직이게 되였다. 신라초기념비 비문에 한패의 신라상인들이 오대산에서부터 혜악스님과 더불어 관음불상을 모시고 동행하고있었다는것이 그러하다. 이것이 진실한 력사일진대 그번 관음불상으로부터 보타산 관음보살도장 형성에 이르기까지 신라방, 신라상인들의 역할을 배제할수가 있을가?! 보타산의 가랑비는 제법 대살비로 바뀌여지고  시간은 빨리도 흘러 오후 2시를 넘어선다. 불교경관들로 총총한 보타산을 하루품으로 답사한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 나는 부득불 후일을 기약하면서 급급히 귀로에 올라야 했다.
400    자식농사 글농사 (3) \"아빠, 아빠, 하문대! 하문대!\" 댓글:  조회:1255  추천:20  2009-10-27
                       “아빠, 아빠, 하문대! 하문대!”     6월 26일인가 쌍둥이 막내 딸애 대학입시 성적이 616점으로 알려졌으니 대학입학결과가 내내 기다려진다. 7월 15일은 발표되는 날이라는데 연변쪽 막내 딸애한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6000리 밖 연길에 여러번 전화 걸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대답뿐이다. 오전도 그러하고 오후도 그러하다. 초조한 마음에 글도 쓸수 없고 책도 볼수가 없다. 쌍둥이 막내 딸애는 올해 대학입시서 616점이란 나름의 성적을 따내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지난해 성적 496점, 막내 딸애로 말하면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수 없다. 어찌 보아도 600점 정도는 맞을수 있는 애인데 100점이나 곤두박질했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때는 대학입학대인 보통대ㅡ해남사범대를 받아들이겠다고도 했으나 지난해 상해 가족유람은 막내 딸애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아니야, 해남사범대를 포기하는거야. 다시 대학입시를 시작하는거야!) 마음이 정해진 막내 딸애는 홀로 연길에 남아 맏아매ㅡ처언니네 집에 거처하며 이악스레 공부에 달라붙었다.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일심정력 공부에만 몰두했다. 6차의 월고(月考)에서 근 천명학생중 학년 100등안으로, 90등안으로, 60등 안으로 팍팍 뛰여올랐으니 워낙 문과생인 막내로 말하면 리과 60등안은 놀라운 성적이였다. 그러는 막내 딸애를 안해와 같이 6000리 밖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내가 독종으로만 여겨졌다. 대학입시가 열을 올리던 6월 7일과 8일에도 막내 딸애 곁을 지켜줄수가 없었다. 대학교수중이라 여가를 탈수가 없음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도 막내 딸애는 친가, 외가의 성원속에 대학입시에 림하더니 616점이란 자기나름의 성적을 올리고야 말았다. 소수민족 우대점수 10점까지면 626점이라 올해 중점대 점수선 539점을 훨씬 뛰여넘는 쾌거를 이뤄냈다. 올해 중점대 입학은 더는 문제도 아니고 상해동제대일가, 하문대일까하는 결과소식만 남았다. 그러는 결과를 지켜보아야 하는 하루가 그지없이 지루하고 초조하기만 하다. 하루길을 달린 해가 서산너머로 사라져도 감감 무소식이다. 초저녁을 넘기여도 그 상이 장상. (이거, 일이 틀어진것이나 아닐까?) 초조한 마음에 안절부절, 시간은 더디게, 더디게만 흐른다. “아빠, 아빠, 하문대! 하문대!” “뭐, 발표났어?” 나는 넓은 방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다말고 벌떡 일어선다는것이 그만 무릎을 걸상모서리에 들이박아 퐁당 물앉았다. 아찔한 정신을 추스리고 헤둥헤둥 침실방으로 달려가니 내내 자기의 노트북을 지켜보던 큰 딸애가 하문대 초생코너를 가리킨다. 초생코너에는 리향이라는 이름에 대학입시번호가 보란듯이 떠올랐다. “됐구나. 그런데 향이가 바라던  상해동제대가 아니여서 어떨가?” “하문대는 중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대학이고 중국명문대에서도 배렬 13등안에 드는데.” 시점은 7월 15일 밤 10시를 가리킨다. 큰 딸애는 괜찮다며 자기 쌍둥이 녀동생한테 하문대 소식을 알린다. 전화를 받은 연변의 막내 딸애가 반기는 기색이 아니여서 축하한다는 말도 꺼낼수가 없다. 숨죽이는 정적이 흐른다. 그렇게 한겻이 흐르다가 막내딸애 전화가 이어진다. “기실 명문대 배렬대로라면 하문대가 상해 동제대보다 앞이지. 하문대가 마음이 들어.” “그러면 됐다!” 쌍둥이의 주고받는 전화소리, 뒤늦은 축하가 이어지며 연변과 절강은 환락의 절정을 이룬다. 세상사 일이란 별나기도 하지, 우리가 절강이고 큰 딸애가 해남인데 막내 딸애가 또 복건 하문이라니 일가족다섯 세갈래 모두가 북방이 아닌 남방진출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세상사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는걸까. 일가족다섯이 모두 남방에 진출하게 될줄 뉘 알았으리오. 돌이켜보면 쌍둥이딸애 둘이 대견해만 보인다. 나의 90년대중반 하해와 인생 미끄럼질로 쌍둥이 중소학시절은 어려운 생활고의 연속이기도 했지만 쌍둥이는 별탈없이 잘 자라주었다. 사춘기도 무난히 넘기여 언제 한번 엄마, 아빠와 버성겨본적도 없고 애를 먹인적도 없다. 골치꺼리를 안긴적은 더구나 없다. 그러는 쌍둥이는 이 애비한테서 욕한번, 매한번 당해보지도 않았지. 그만큼 쌍둥이는 우리 부부의 즐거움이였고 삶의 희망이여서 수년간을 바닥인생에서 헤매면서도 “쌍둥이 대학공부는 이 애비가 시킨다!”고 입버릇처럼 호기를 부리를 부리여 보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 호기가 오늘의 나 제2인생으로 이어져 쌍둥이는 아무 뒤근심이 없이 대학공부에 전념할수 있겠으니 나와 나의 가족은 수난의 삶 언제냐듯 ~ 옛말하며 웃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였다. 오호라, “자식농사 글농사” 꿈이 펼치여진다. 지식이 힘이고 지식이 재부라고 우리 온가족이 지식의 해양에서 맘껏 헤염쳐보자. 쌍둥아~사랑하는 딸들아, 엄마아빠 기대안고 대학의 전당에서 맘껏 커보아라, 희망찬 새날이 너희들을 반기여줄것이다.   2009년 7월 16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99    절강월수대-- 09 중한 한국문화 큰잔치 펼치다 댓글:  조회:6864  추천:39  2009-10-26
절 강 월 수 외 국 어 대 학      09 중한 한국문화 큰잔치 펼치다     무궁화 아름답게 피여나는 강남의 10월에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주최하고, 절강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와 한국 학원총연합회 서예교육협의회에서 주관한 09 중한 한국문화 학술세미나 및 한국문화 큰잔치(10월 23일~25일)가 대성황을 이루며 절강월수대에서 펼쳐졌다. 절강성 소흥시와 교육국의 해당 지도자들과 절강월수대 집행원장 오국량, 부서기 겸 부원장 서좌평, 부원장 양기생, 부원장 두세위, 부원장 단승강 등 월수대 지도자들과 절강월수대 동방언어학원 사생들, 복단대학, 상해외국어대학, 소주대학, 가흥대학, 절강관광대학 등 여러 대학의 사생 도합 수백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였다. 절강월수대 중한 한국문화 큰잔치는 2007년에 절강월수대에서 처음으로 펼쳐진후 올해로 세번째를 맞이한다. 절강월수대 중한 한국문화 큰잔치는 한국 서예가 한글서예작품전시회, 대학생한글경필실기대회, 대학생한글서예실기대회, 대학생한글글짓기대회 등 다양한 행사들로 조직되였는데 올해는 이런 행사들과 더불어 중한 한국문화 학술세미나를 처음 가지고, 복단대학 강은국교수, 상해외국어대학 김기석교수, 김충실교수 등과 한국 서울대학 박갑수교수, 한국 경희대학 진용옥교수, 한국경기대학 박종찬교수, 한국배재대학 최정순교수, 한국 학원총연합회 서예교육협의회 이종선회장 등이 참석하시여 절강월수대 한국문화 큰잔치의 품위를 보다 높이였다. 09 중한 한국문화 학술세미나 및 한국문화 큰잔치는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중한 한국문화 학술세미나, 한국서예가 한글서예작품전시회, 절강성 대학생한글경필실기대회, 절강성 대학생한글서예실기대회, 절강성 대학생한글글짓기대회, 절강성 대학생서예실기대회 작품전시 등 행사로 펼쳐져 대회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중한문화교류에 심원한 의의를 갖게 될것으로 기대된다.                                                    
398    안중근의거 한민회의 조직적 거사 댓글:  조회:3677  추천:25  2009-10-26
편자의 말: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할빈역에서 일본 조선침략의 원흉—이또 히로부미를 격살한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 뜻깊은 안중근 의거 100돐울 맞으며 필자는 “안중근의거 한민회의 조직적거사”라는 한편의 글을 다시 올리면서 안중근의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바이다. 안중근의거를 두고 남들이 중시를 돌리지 않는, 제나름의 독특한 견해인바 안중근을 사랑하고 기념하는 이들의 깊은 중시를 기대하여 본다.     안중근의거 한민회의 조직적거사         1909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를 두고 중국, 한국, 로씨야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있다. 이런 견해들 가운데서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등 《대동공보》직원들이 중심이 돼 이뤄졌다는 견해와 최재형, 리범윤 등 의병련계속의 조직적거사라는 견해가 주축을 이루는것 같다. 허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필자는 상기 두가지 견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는 항일운동가 김치보를 회장으로 한 한민회관계속의 조직적거사가 주축이라고 주장하고싶다. 이를 헤아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김치보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 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mm),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용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용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군수고 뭐고 죄다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로씨야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2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졌다. 일이 이쯤 번져지자 안중근은 피로써 서약하는 혈맹을 맺자고 제의하여 나섰다. 모두가 호응할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그들의 앞에는 인차 안중근이 품에서 꺼낸 태극기가 놓여졌다. 안중근이 먼저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자 모두가 그대로 행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자료 서술이 이러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짙은 의문점을 갖고있다. 김치보의 집에서 그의 한민회수하에서 활동을 벌린 안중근은 김치보와 19년의 격차를 두고있는데다가 회장인 김치보와의 사전토의도 없이 김치보가 앉은 자리에서 안중근이 먼저 단지혈맹을 제의하면서 주도했다는것은 믿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김치보와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이자 막연한 지기였다. 그들은 나이 거의 20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어느덧 한민회에서 반일독립을 도모한지도 옹근 2년,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굴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다.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맞혔다는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베개를 뺴내여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만 잘잤다고 한다. 드디여 기회가 왔다.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도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3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등박문이 어디에서 나타나면 어디에서 죽여버릴판이였다. 력사는 안중근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이해(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등박문은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이 희소식이 전해지자 김치보는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였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하고 의거한것으로만 알려졌고 이등박문격사를 위해 김치보를 수령으로 하는 한민회에서 면밀히 짜고들었고 한민회 소속 3개 소조가 할빈, 장춘, 심양 쪽으로 파견되였다는것을 외면하였다.                                
397    자식농사 글농사 (2)--상해동제대 찾아 보았네 댓글:  조회:1238  추천:32  2009-10-19
                  상해동제대 찾아 보았네     밖에서는 대살같은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아들애는 “비가 오면 비행기가 뜨지 못해 어쩌는가”며 근심이 태산같다. “괜찮아. 우리 경원이 녀동생 쌍둥이 막내를 위해 상해동제대를 찾았다고 하느님이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는거야.” 과연 비는 반시간쯤 퍼부어 대다가 그치고말았다. 때는 2009년 6월 29일 정오, 상해 동제대 본부 부근 한 커피홀, 쌍둥이 막내가 여러 중점대들과 더불어 상해동제대학을 지망하였다고 우린 오전 8시23분 녕파ㅡ상해행 렬차로 상해에 이르렀고 상해 남역에 내리자 곧추 택시를 타고 20킬로메터 밖의 상해 동제대 본부에 내렸었다. 헌데 정오를 바라보는 시점이라 동제대 본부 초생판공실은 점심시간이고 우린 부근의 커피홀에서 휴식하면서 점심식사를 하여야 했다. 비도 그치고 오후 1시 30분이 가까와왔다. 동제대 초생판공실을 찾으니 아직도 문이 잠겨져 있는데 문어구에는 섬서, 강소에서 온 대학입시생 부모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중 섬서 분들은 아들이 상해교통대를 지망했는데 교통대가 이미 지망생들이 넘치여 동제대를 바라고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초생판공실이 아닌 주임사무실에 가서 주임도 만나 보았다지만 동제대에 지망을 쓰지 않고 동제대 입학은 불가능하다는 답복뿐. 이윽고 동제대 초생판공실 문이 열리고 섬서, 강소, 길림 우리들이 우르르 판공실안에 들어섰다. 여러 부모님들은 자기 애들을 위해 이모저모 물으며 걱정을 내비친다. “천하 부모마음”(天下父母心)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조선족들 가운데는 예로부터 소팔고 집팔더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전통이 흐른다지만 형제민족인 한족들도 례외가 아니다. 심히 감동된 마음에 끌리다가 초생판공실 녀선생과 얘기를 주고받으니 대학입시 626점이면 동제대에 “씨왕만따”(希望蛮大)라고 한다. 큰 시름을 더는 순간이다. 지난해는 대학 중점대 선이 569점이였지만 올해는 어려운 시험원인으로 중점대 선이 30점이 내려진 539점으로 이 점수선보다 거의 100점이나 뛰여 올랐으니 희망이 클만도 했다. 지난해 여름 상해 등지 가족여행은 쌍둥이 막내의 마음을 돌리는 계기가 되였었다. 소흥, 항주, 녕파, 주산군도를 거쳐 상해에 이르니 막내는 상해서 공부하고 살고싶다며 해남사범대 입학기회를 밀어버리고 1년간 다시 연변1중 재학에 달라 붙더니 끝끝내 괜찮은 성적을 따내고야 말았다. 실수로 인한 지난해 대학입시 496점에서 일약 626점으로 뛰여올랐으니 자기의 실력을 옳바르게 과시한 셈이다.  상해, 상해ㅡ기분이 붕 뜬다. 상해 동제대 구내 연못가를 거니는 마음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지망대에 상해만도 상해동제대, 상해재경대, 상해외대 3개 대학을 썼으니 상해가 되면 뜻대로 풀리는거고 아니더라도 중국의 당당한 명문대인 하문대는 될것이라고 믿어진다. 어느모로 보아도 하문대가 더 나아보이지만 상해를 바라는 막내 딸애의 마음이 상해동제대로 향했으니 부모된 마음도 상해동제대가 마음에 드는가부다. 이런 마음들을 축복해서인지 연못가에는 휘고 연분홍 련꽃들이 소담히 피여나 멀리서 달려온 우리들을 반기여주는듯 싶다. 상해동제대나 하문대는 떼놓은 당상이라고 웃어주는 것만 같다.   2009년 6월 30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96    6월의 무궁화속에 피여난 딸애 댓글:  조회:1184  추천:18  2009-10-11
            6월의 무궁화속에 피여난 딸애     오늘은 일요일이고 하지날, 아버지날이라지만 마음이 번거롭기만 하다. 쌍둥이 딸애 막내의 대학입시성적이 아직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정쩡한 속에 오전시간을 덧없이 흘러보내야만 한다. 갑자기 전하벨이 “따르릉” 요란을 피우더니 안해가 “뭐라니, 616점? 됐구나!”하며 법석 끓어오른다. 그 소리에 인터넷을 검색하다말고 벌떡 일어나 전화있는 방으로 뛰여가니 쌍둥이 막내의 대학입시성적은 틀림없는 616점이다. “끝내 600점 이상을 일궈냈구나. 축하한다, 향이야!” 나는 송수화기를 와락 빼앗아 들고 흥분부터 쏟아냈다. “왠지 시험성적을 알게 되니 온몸이 풀리면서 물먹은 모래성 같습니다.” “그럴거다. 긴장이 풀리니까. 믿기지가 않지, 인젠 진짜 시름을 싹놓고 푹 쉬거라.” 오후 1시 시점이다. 나는 위안의 말을 건네주고는 송수화기를 안해한테 넘겨주어 버렸다. 이날을 위해 막내는 최선을 다해 공부에 림했고, 그러는 막내를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는것이 늘 맘에 걸리였다. 6000리 밖이여서 어쩔수도 없었다. 지난해 쌍둥이 딸애들은 연변1중 공부를 마치고 대학입시에 접어들었지만 운이 따르지 못하여 대학 중점선에 오르지  못하였다. 큰것이 537점이고 막내가 496점이여서 둘다 중점대가 아닌 남방의 모 대학에 가야 했다. 막내는 600점 쯤을 따낼수 있는 수준인데 미역국이여도 아득한 미역국이였다. 그러는 쌍둥이 마음을 풀어주느라고 지난해 여름방학에 강남으로 불러 항주며, 녕파며, 주산군도며, 상해며, 청도며, 위해며, 대련이며 나라의 연해지구들을 유람시켜 주었더니 견식과 청춘의 사유가 백열화를 이루었다. 이 나라 최대도시—상해를 두루 돌아 본 막내는 마음을  바꾸었다. 남방의 보통대학을 포기하고 다시 대학시험공부를 하겠다는데는 전적인 지지를 주어야 했다. 막내는 홀로 연길에 떨어져 60대 이모댁에 거처를 옮기고 다시 공부에 뛰여들었다. 긴장의 나날이 쭈욱 흐르고, 막내는 끝내 소원성취하여 이번 중점선 539점을 훨씬 뛰여넘는 616점이란 쾌거를 일궈냈다. 돌이켜보면 쌍둥이 딸애들은 소학시절부터 마음이 바르고 공부가 월등하여 늘 학급의 1~2등을 다투었다. 담임선생은 쌍둥이를 무척이나 고와하면서도 제한된 3호학생 수를 두고 쌍둥이 둘에게 다 줄수 없다며 학기마다 엇갈아 3호학생 영예를 주는데서 쌍둥이는 서로 학급 중대위원이고 공부가 남달리 삐여나도 소학6년 련속3호학생으로 뽑히지 못하였다. 그것이 먼저 마음에 걸리는데 소학 5학년 때인가 담임선생이  바뀌더니 련속 둘다 3호학생으로 뽑고 큰애를 파격적으로 반장을 시키였다. 그시절 쌍둥이가 다니던 연길시 태평소학교에서 남자가 아닌 녀학생이 반장으로 된다는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큰애는 또 “연길시 10대 붉은기소년”표병, 막내는 언니때문에 늘 눌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중학교시절 쌍둥이는 둘다 문과가 뛰여났다. 어린시절 6년간 애비된 내가 매주 일기와 글쓰기를 하루와 같이 지도했더니 글쓰기수준은 온 중학교의 왕자, 교내외 글쓰기경연 참가는 의례 쌍둥이의 몫, 받은 대상, 금상, 동상들이 수두룩하다. 상대적으로 리과부분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학교 때부터 리과공부반으로 뽑히여 중학시절에까지 이어진 전문 리과공부 학생들을 앞지를수가 없었다. 리과 탓으로 쌍둥이는 학급성적순으로 앞 첫두자리가 아닌 4~5등, 6~7등에 머물렀다. 그것이 나한테는 두고두고 한이더니 고중인 연변1중에 다니면서부터는 둘다 리과반으로 넘어 나 마음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쌍둥이는 처음 리과에서 어려움을 느끼더니 차차 미립이 터갔다. 둘다 학년 성적순이 근 2000명에서 200등 안에 들더니 성적이 팍팍 올라갔다. 그래도 학급 일류의 수준선은 아니여서 지난해 대학입시에서 중점선에 이르지 못한 비운을 감내, 큰애는 그런대로 운명이라며 남방 모 대학에 갔지만 막내는 496점이란 성적을 도저히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인젠 막내 대학입시성적이 알려졌으니 큰 시름을  덜었다. 올해만도 안해는 절강의 불교명산인 회계산 정상 사찰에 올라 몇번이나 소원을 빌었는지 모른다. 올해 대학입시 전날에도 일가족 셋이 또 폭염속 회계산 정상사찰에 올랐다. 안해는 66은 길할 순(順)이라며 616점을 기도했다고 나와 말했다. 쌍둥이 막내공부 정도를 잘 아는 나도 비슷하다며 정상발휘면 610~620점 쯤은 맞을거라고 내다 보았다. 과연 축복을 받았을까,  막내는 지난해 대학입시 496점 불운에서 100여점을  돌파하여 616점 소원선에 오르고야 말았다. 올해 대학시험이 류달리 어려웠고 페단이 아니였더면 630~650점 돌파도 가능했으리라고 보아진다. 안해는 오후 내내 막내 대학지망대학을 찾아보기에 여념이 없다. 오후 4시가 지나 나는 옆에서 지켜보다말고 자전거를 잡아타고 회계산 서쪽아래 남하와 호수풍경구로 달리였다. 쌍둥이 막내를 축복하고저 6월에 피여나는 무궁화꽃을 디카에 담고 또 담았다. 온 하늘이 먹장구름에 덮히고 비올듯이 우중충. 낮인데도 카메라 섬광이 번쩍이여야 했지만 평소 경험에 의해 어두움을 무릅쓰고 꽃사진을 괜찮게 찍어냈다. 무궁화는 우리 겨레의 꽃이라 겨레의 꽃처럼 겨레의 딸로 무럭무럭 커가라는 마음의 축복이였다. 귀로에 늘 다니던 아름다운 남하구간에 이르는데 물가 디딤돌 우에서 더위를 식히던 백학 한마리가 푸르륵 강건너로 날아간다. 제비들은 쌍쌍이 물우를 날아예며 여름을 즐긴다. 평화로운  강가에 또  이름모를 붉은꽃들이 무더기로 피여 축복을 준다. 손과 발을 물에 헤우며 물장구를 치는 나, 어린 시절에로 돌아가는 듯 싶다. 월수대 캠퍼스에  들어서니 월계화, 장미꽃이 어여쁨을 비긴다. 캠퍼스 호수가에는 5월의 석류화가 아직도 피여있어 그야말로 가관이다. (여보소~~강남 석류화야, 5월에 떠나기 싫어 6월에도 잔광을 뿌리니, 쌍둥이 막내위해 여적 피어있나부다.) 응, 그래, 6월의 무궁화야~~ 응, 그래, 6월의 월계화야, 장미야~~ 응, 그래, 6월의 석류화야~~ 너희들 모두모두 6월의 대지에 피여나 6월의 하지, 6월의 대학입시 성적알림을 기다렸구나. 6월의 무궁화속에 나의 막내 소원의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났구나!   2009년6월 2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95    절강월수외대 양은천총장 모시고 댓글:  조회:4132  추천:50  2009-10-04
            절강월수외대 양은천총장 모시고   절강월수외대 양은천총장은 대우문화국제세미나 기간 내내 대회에 참석하시고,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분들과 한국문화연구소 교수님들을 뜨거이 대해 주시였다.   대우릉 제사행사에서 필자는 양은천총장과 기념사진을 남기는 가운데서 총장님이 2001년까지 지구급 당소흥시위 선전부 부부장 겸 소흥일보사 사장, 주필 중책을 떠메다가 2002년부터 절강월수외대 총장으로 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였다.    양은천총장은 월수대 회계산문화연구소를 대우문화연구소로 개칭하고, 대우국제학원을 창설, 대우문화연구를 월수대 대외간판으로 내세우고 깊은 관심과 배려를 돌리시는 분이시다.
394    대우문화세미나 중한우의로 넘치여 댓글:  조회:5837  추천:45  2009-10-04
       대우문화세미나 중한우의로 넘치여     대우는 중화민족의 영웅이고 화하립국(華夏立國)의 시조로서 오늘날 대우문화는 세계화를 이루면서 대우문화가 국제성 학술열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속에서 절강월수외국어대와 대우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한 대우문화국제세미나가 9월 25일 해내외 관련학자 등 60여명 참가속에 절강 소흥에서 성황리에 펼치여졌다.   소흥 대우문화국제세미나의 이채로움은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의 열성적인 지지성원과 한국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교수와 한국 우씨종친회 재무 우종희선생의 참석. 한국 관련 사서(史書)를 보면 4000여년전 대우천제와 고조선 단군임금이 교류모습을 보이고 대우를 시조로 하는 우씨가 한반도로 이어지며 한국땅에 20만의 우씨 후예를 갖고있다. 절강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 리광인은 “절강 회계산과 수천년 역사속 중한우의 연구”, 이대로교수는 “한국과 중국 절강지구문화교류 발자취”, 우종희선생은 “중국 대우후손과  한국 단양우씨의 교류”라는 연구론문을 갖고 세미나에 참가, 대우문화 중한공동 학술연구는 처음이여서 해내외 대우문화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과 열성을 자아냈다. 이번 세미나에 큰힘을 기울인 한국 윤철수교수는 “중한 우씨제사문화 연구”론문까지 대회에 교부하였으나 뜻밖의 사유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9월 26일 오전, 대우문화 해내외 참가자들은 소흥 대우릉에서 제사행사를 가지고 로신옛집을 찾아 보면서 대우문화 이해와 서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아래 사진으로 세미나 중한우의 모습과 대우제 행사 등 모습을 보기로 한다.
393    9.24 대우문화국제세미나 환영만찬 댓글:  조회:4683  추천:29  2009-10-04
           9.24  대우문화국제세미나 환영만찬     9월 25일, 절강월수외국어대 대우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한 "대우문화국제세미나"가 해내외 대우문화 학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속에 성황리에 열리였다. 한국의 이대로교수님과 한국 우씨종친회 대표 우종희선생이 모처럼 참석, 9월 24일 저녁에 월수대 가까이 루중루에서 성대한 환영만찬이 펼쳐졌다.
392    5월 기행 (6) - 왕양명묘소 왜서 소흥 란정일까? 댓글:  조회:4665  추천:40  2009-09-30
            왕양명묘소 왜서 소흥 란정일까?    소흥관광지도를 펼치면 왕수인 양명선생의 묘소는 소흥현 란정진 경내의 화가(花街)부근으로 나타난다. 양명선생의 고향은 절강 여요인데 묘소를 왜서 소흥 란정으로 잡았을까, 이는 나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냈다.    5월 16일은 마침 토요일이다. 이날 오전에 나의 위병으로 하여 안해와 아들애 셋이서 소흥시 북쪽교외의 매산으로 곰취 뜯으러 갔지만 나의 머리는 온통 양명선생 뿐이다. 양명선생의 고향집에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소흥 란정에 있다는 묘소를 찾아야지, 나는 귀로에 안해를 집에 돌려보내고 아들애를 데리고 소흥 부산 북쪽가에서 란정행 K003버스에 올랐다.    약 반시간만에 버스는 시구역에서 서남으로 12킬로메터 떨어진 란저산아래 란정풍경구에 이르렀다. 풍경구내의 여러 사람들과 물으니 왕양명의 묘소를 잘 모른다. 드나드는 차량을 통제하는 문지기 로인만이 왕양명묘소가 있긴 하나 여기 란정이 아니고 화가라고 알려준다. 화가를 어떻게 찾는가고 하니 무어라고 하지만 로인의 소흥말씨를 전혀 알아들을수가 없다. 곁에 있던 택시운전수가 택시가 묘소까지 갈수 있다고 하면서 택시값 40~50원이라고 한다. (몇리 안된다는 거리가 40~50원이라, 얼치기 놈들이구나!) 나는 밀어버리고 말았다.    일순 어찌할 방도가 나지 않아 란정풍경구 버스역 가까이에 보이던 태호석을 찾아나섰다. 한 500메터 정도 되는 거리지만 오후 태양이 어찌도 강렬한지 사람을 들볶기만 한다. 그속에서 태호석 그곳까지 가서 개개를 사진찍고 집지기 녀주인한테서 소흥개발용으로 사들인 태호석과 태산석이라는것을 알아냈다. 태호석은 잘 알고 있지만 태산석은 처음 보는것이라 흥취가 없지 않았다.    그래도 양명선생 묘소를 찾지 못함이 맘에 걸린다. 이미 시간이 오후 3시를 넘긴 시점에서, 란정 화가를 어떻게 찾는지도 모르는 형편에서 무리를 부릴수는 없었다. 나는 일단 귀가하기로 했다가 래일 일요일에 일찌감치 찾아 보기로 했다.    이튿날 5월 17일 오전 9시쯤에 소흥 부산가에서 다시 K003선 버스를 잡았다. 란정행이고 버스가 명인로선이라고 자처한데서 버스 차장과 왕양명묘소를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수가 없다. 이때 곁에 앉았던 한 30대 녀인이 왕양명묘소는 란정 화가에 있다면서 란정버스정류소에서 4~5개 정류소를 지나면 화가라고 알려준다. 버스안 정류소표시도를 보니 화가는 과연 란정 다음 몇개 정류소 뒤였다.    고마운 녀인이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대로 버스에 앉아 란정을 지나니 화가 정류소가 나와 아들애를 기다린다. 어제 이런줄 알았더면 오후 3시 지나도 다녀오련만 모르니 어찌할수가 없은거지, 화가 정류소의 삼륜차부는 왕양명묘소가 화가에서 몇리 밖에 안된다면서 우리 부자 안내에 나섰다. 삼륜차 값은 4원이다. 5원을 주니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삼륜차부가 순진하기만 하다.    왕양명의 묘소는 화가정류소에서 몇리밖 란정 선가별정구내 한 산비탈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소 주위는 로송들이 둘러서고 묘소를 오르는 세멘트 계단길은 두 계단을 이룬다. 두계단을 오르면 묘소는 또 3층 높이를 이루고 맨 우에 묘소를 꾸미였다. 묘소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묘소중앙에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명왕양명선생지묘(明王阳明先生之墓)라는 검은 글자가 씌여졌다. 묘소는 풀들로 덮히여 관리가 따르지 못함을 보이였다. 대신 묘소계단길가에 비문과 묘소안내비가 보이는데 안내비에는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왕수인묘/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06.5.25공포/ 절강성인민정부 립”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아들애와 나는 선후하여 왕양명묘소에서 두손을 잡고 머리숙여 묵도한후 묘소를 내리였다. 묘소구내 평지 왼쪽가에 옛스러움을 나타내는 왕양명기념관이 있어 찾으니 꽤나 커보이는 단층기념관은 텅비여 휑덩그렁하고 시산한 분위기였다. 묘소와 더불어 역시 관리가 따르지 못함을 단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여요의 고향집과는 판이한 대조였다.    그에따라 의문이 머리에 떠오른다. 녕파 여요가 고향인데 왜 여요에서 근 100리 떨어진 소흥 란정에 왕수인 양명선생의 묘소를 모시였을까, 귀가한 나는 관련자료를 찾아보았다.    첫째는 여요가 력래로 소흥부 소속 여요였다는 점이다. 이를 알고저 소흥부의 유래를 뒤적이니 소흥부가 처음 나타난것은 1131년의 일이다. 그 시절 1125년과 1129년에 북방의 금나라가 하남 변경(오늘의 개봉)에 수도를 둔 북송을 거듭 대거 진공하였는데 전란속 1127년에 남송의 이름으로 나타난 남송의 제1대 황제 송고종 조구는 황황해서 림안(항주)으로, 월주(오늘의 소흥)로, 명주(오늘의 녕파)로 달아나기만 한다. 나중에는 황실 대신들을 실은 몇척의 배에 나누어 앉아 절강 대주와 온주사이의 바다에서 근 한달간 머무른다. 남송의 한세충장군과 그가 지휘한 8000명 군대의 결사저항으로 금나라 10만군사가 물러간후에야 송고종 조구는 온주에서 명주로 돌아오고 다시 월주에 와서 1~2년 자리를 잡는다. 다음해 1131년에 남송 년호를 건염(建炎)에서 “소흥”으로 고친다. 따라서 월주도 소흥부로 승격하니 소흥이라는 지명의 시작이 알려진다. 소흥 2년에 송고종은 림안(항주)으로 돌아갔지만 소흥부는 그대로 남아 오늘날 녕파시 산하 현급시인 여요가 옛날에는 줄곧 소흥부 산하 현이였다.    둘째는 왕양명 부친시절에 왕씨일가가 지금의 소흥구내로 이사하였다는 점이다. 왕양명의 부친 왕화는 아들이 10살되던 해에 과거진사시험에 합격되여 북경에서 관리직에 오른다. 왕양명이 11살 때 조부 왕론과 같이 북경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5년을 머무르지만 만년의 부친 왕화는 경치수려한 산음(소흥)의 산수를 무척 그린다. 그래서 만년에 여요에서 소흥으로 와서 광상방(光相坊)에 자리잡으니 28살에 진사시험에 합격된 아들 왕양명이 관직을 두루 돌다가 50살 되던 1521년에 조정에 의해 남경 병부상서(兵部尚书)에 오르고 신건백을 봉받는다. 이 신건백 봉함이 여요가 아닌 소흥 광상방에 하달되지만 두달뒤인 1522년 초에 부친이 운명한다. 이에 왕양명이 관직을 떠나 소흥에 돌아와 운명한 아버지를 상주하며 줄곧 6년간이나 소흥을 떠나지 않는다. 그동안 왕양명이 문하에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심학리론(心学理论)을 전수하니 이미의 심학리론에 기초하여 50살때인 1521년에 처음으로 내놓은 량지(良知) 철학명제, 보다 완벽하게 발전한 심학체계가 널리 전파된다. 이것이 독립사상체계를 이룬 신유가학설ㅡ양명심학의 탄생이다.    이런 자료들을 두루보면 이들 왕씨일가가 어찌하여 여요에서 소흥으로 이사하였고 왕양명묘소가 여요가 아닌, 소흥시 경내에 자리잡았는가를 알게된다. 자료에 따라 나의 의문도 풀리고 왕양명에 대한 리해와 존중이 보다 깊어진다.    “가경 산음현지”기재에 의하면 왕수인의 옛집은 산음 광상방 사공교(谢公桥)부근임을 알수가 있다. 왕씨일가가 여요서 소흥으로 와서 백부제(伯府弟)를 완공한것이 왕양명 50살 전후의 일이고 왕양명이 소흥에서 6년을 지내다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출마했다가 사망한것이 58살때인 1529년(가경 8년) 1월 9일의 일이다. 사망지는 강서 남안 대유 청룡포, 조문자들이 제자들을 망라해서 얼마인지 모른다니 조문기간내내 매일 100여명이 조문을 했다고 한다. 그뒤 왕양명의 유체는 산음 란정의 홍계(오늘의 란정 화가)에 이장하니 문하조문객만 1000여명, 사처에서 모여온 조문객은 그 수를 헤아릴수가 없었다고 관련자료는 전한다.                                                                                                                                
391    5월 기행 (5) - 녕파 여요의 왕양명 고향집 댓글:  조회:6697  추천:31  2009-09-22
               녕파 여요의 왕양명 고향집   회계산 완위산 동쪽에서 양명동을 찾아낸후 나 답사의 발길은 지구급시 녕파경내에 있는 명나라 시절 왕양명의 고향집으로 이어졌다. 5월 15일, 소흥의 학사거리 하지장 옛집을 돌아본후 나는 녕파 여요행 쾌속버스에 올랐다. 1시간 쯤 달려 오후 1시반에 50킬로메터 밖 여요에 이르자 여요 쾌속버스부 앞 강우에 5개 아치형을 이룬 옛 다리 하나가 보인다. 옛 다리를 사진찍고 택시를 잡아타니 왕양명 고향집은 여요시 무승문로(武胜门路)서쪽, 양명동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 언급해 보지만 왕양명(1472-1529)은 이름이 수인이고 자가 백안, 호가 양명으로 나타난다. 명나라시절의 이름난 철학가, 사상가, 교육가이고 군사가, 문학가인 왕양명은 관직이 남경의 병부상서에 오르고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진 사람으로서 중국력사상에서 보기힘든, 문무가 겸비한 위인으로, 중국 근 500년 사상변혁의 선구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기에 지난 500여년의 력사흐름속에서 왕양명의 고향집은 수차 확건되고 수건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왕양명이 조정에 의해 봉해진 “신건백”이 고향집 입구의 길가 문패를 이루고 있었다. 문패안에 들어서면 고향집과 문패사이 광장에 군사가의 차림으로 뒤에 긴칼을 찬 왕양명의 동상이 선참 안겨진다.  그 다음은 고향집구내로서 왕양명의 고향집은 좌북조남(坐北朝南)으로 평면장방형을 이루며 남에서 북으로 조벽(照壁),문청(门厅),轿厅(교청),대청(大厅),주체건물 서운루(瑞云楼) 등이 차례로 분포되여있었다. 동서에는 각기 배방(配房)이 있고 사위는 높은 담장, 왕양명의 출생지이고 고향집의 주체건물을 이루는 서운루는 나무구조로 된 2층집 으로서 그 건축면적이 500여평방메터를 이루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것은 왕양명 출생후의 한단락 얘기다. 왕양명은 원명이 왕운이고 1472년 음력 9월생, 어린 시절을 서운루에서 보냈다지만 첫돌을 지나 다섯살을 잡을때까지도 어인영문인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집안어른들이 근심하던차에 하루는 한 도사가 왕씨댁을 지나다가 “좋은 아이인데 유감스럽게도 도가 이그러졌다, 다시 말해 운이라는 이 글자가 하늘기운을 흐리여 말을 번지지 못하는 징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겠다고 집어른이 이름을 수인(守仁)이라고 고치니 왕양명은 드디여 말을 하게 되고, 출중한 천부적 재질을 보인다. 철모르던 시절에 어린  왕양명은 조부가 읊는 시문을 몇번 듣더니 제꺽 암송하기에 이르고 서당에 다닐 때에는 서당선생과 “인생의 최대추구는 무엇인가?”고 묻기에 이른다. 서당선생이 “글을 읽어 앞으로 진사에 뽑혀 벼슬하는것”이라고 대답하니 어린 양명은 “공부와 진사벼슬이 가장 큰 추구가 아니라 독서하여 성현이 되는것이 인생의 가장 큰 추구”라고 말한다. 명나라 대성현 왕양명의 어릴 때 이야기다. 어릴 때 남다른 추구를 가진 이 위인의 역사는 고향집내에 “왕양명 생활시대 정경 복원진렬”, “진삼불후(真三不朽)ㅡ왕양명생평사적진렬”, “왕양명에 대한 국내외 기념과 연구”, “왕양명 사적진렬” 등으로 나누어 진렬되여 여느 옛집과도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여러 진렬실 가운데서 나를 강하게 끌어들이는것은 “왕양명에 대한 국내외 기념과 연구” 진렬실이였다. 국내외 왕양명 관련연구와 기념활동을 보면 왕양명학설이 널리 퍼진 유럽나라들과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지구들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인다. 초보적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세기 20세기 80년대 중기이래 국내외에서 왕양명과 양명학파, 양명학 연구저서와 론문집 50여부(어떤 자료는 80여부), 이밖에도 20여편의 박사론문과 헤아릴수 없는 석사논문, 학술논문,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국내외에서 양명학 관련 국제학술세미나가 10여차, 왕양명 관련 력사유적과 기념관 등을 복원했거나 수건한 곳이 여덟곳에 이른다. 더우기 한국에서의 왕양명과 왕양명 학설연구는 눈부실 정도라 하겠다. 왕양명고향집에서의 관련자료를 보면 양명학설이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한것은 16세기초엽, 17세기에 이르러 이미 양명학 서적들을 계통적으로 연구하고 번역출판한, 저명한 학자인 정제두(1649~1736)를 대표한 조선의 양명학자들이 출현하였으니 이는 그후의 조선실학의 산생, 발전과 갑신정변, 농민운동의 흥기에 대하여, 유신변법과 혁신에 대하여 선두적인 적극적 역할을 놀았다고 왕양명 고향집 연구자료들이 말한다.  20세기20년대와 30년대 일제시대에 이르러도 한반도에서의 왕양명영향은 식을줄 모른다. 한국의 이름난 독립운동가이고 학자인 박은식의 경우나 대한민국 림시정부 국무령, 주석으로 활동했던 김구선생의 경우에도 왕양명은 대단한 존중을 받았다. 김구선생은 1919년 봄이후 조선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가 중국땅 안동(지금의 단동)을 거쳐 상해에 이르게 되고 선후로 림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러다가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본천황 저격사건과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사건을 획책, 지도한다. 그후 절강 가흥과 해염, 항주, 남경 등지로 피신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침략자들이 남경과 상해를 진공하고 장개석 국민정부의 각 기관들이 중경으로 옮기게 되자 김구선생 등 광복전선 3개당의 100여명 대가족이 물가가 싼 장사로 피난하게 된다. 김구서생은 장사에서 불행히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과 더불어 동료 리운한의 권총에 맞아 생사를 다투다가 살아나게 되고 호남대학 내부 악록서원의 휴양지에서 휴양을 취한다. 일은 묘하게도 악록서원은 일찍 력대의 주희, 왕양명 등 일대 위인들이 강의를 하던 곳이고 왕양명을 존중하며 그의 학설에 주의를 돌리던 김구선생은 왕양명을 심심히 기리게 된다. 당대의 발전은 더욱 비약적이다. 한국에서 한국 양명학연구 저서들이 20세기 60년대에 11종에 지나지 않더니, 70년대에는 50종, 80년대에는 113종, 90년대와 2003년까지는 284종으로 뛰여오른다. 이런 결과는 1995년 4월 8일, 한국 성균관 대학에서 한국 양명학학회가 설립되고 “한국 양명학회회보”가 발간된것과 갈라볼수가 없다. 이로부터 보면 양명학은 중국의 10여개 성시는 그만두고라도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의 사상학설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왕양명과 그의 학설은 절강에 속할뿐만 아니라 중국에 속하고 동아시아에 속하여 제반 동아시아 사상사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루면서 인류사상문화 보물고의 중요한 정신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여요 왕양명 고향집 답사를 마치고 부근 산을 이루는 여요 룡천산의 왕양명 기념비와 왕양명의 중천각(中天阁)강의처를 답사하면서 나의 리해는 보다 깊어져 간다. 왕양명 발자취는 절반 중국에 남아있다고 하는데 주요발자취만 보더라도 절강 여요와 귀주 수문, 강서 남창, 감주, 숭의, 룡남 등지에 왕양명상이 세워지고 양명동이 여러곳에 있으며 절강, 귀주, 강서에 왕양명의 이름으로 명명한 도로와 거리 마을, 공공기관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위인이 당나라 문화거인 지장보살 김교각을 통해 우리 고대겨레와 이어지고 고대, 근대, 현대를 거치여 오면서 조선과 이어지고 한국과 이어진다. 세상일이란 워낙 이러한가부다. 2007년 7월초 안휘 구화산 동암안좌 답사를 통해 왕양명에 흥취를 가지게 되고 지장보살 김교각님에 대한 왕양명의 존경이 나를 절강 회계산과 각지 왕양명 발자취답사에로 떠밀더니 녕파 여요의 왕양명 고향집답사와 관련자료 보기, 여요 룡천산 답사는 왕양명에 대한 나의 리해와 존경이 비약의 나래를 타게 한다. 그제날 조선 왕조시기와 오늘날 한국에서의 왕양명과 그 학설연구는 나를 그지없는 흥분속에 빠뜨린다.      
390    옛 발자취 (4) -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 (1) 댓글:  조회:1174  추천:26  2009-08-30
옛 발자취(4)         주산군도 보타산의 신라초기념비 (1) 주산군도 부두의 모습 들쑹날쑹 바위무리가 저렇게 바다로 들어가 암초로 된다 1이러구러 절강월수외국어대학에 와서 한국어교수로 교편을 잡은 후 고대 신라인―김교각 지장보살님의 발자취를 추적하는것은  나의 생활의 일과로 되여버렸다. 2006년 11월 15일에는 항주, 천대산, 향로봉 등지 답사에 이어 절강 주산군도  보타산으로 갔다가 뜻밖에도 고대에 이 땅에서 활동한 우리 겨레 관련 신라초와 신라초기념비를 발견하고 나는 흥분해마지 않았다. 이날 아침 7시 반에 나는 력사문화도시 소흥의 중심뻐스부에서 직행뻐스를 타고 곧장 주산군도 정해로 갔다. 동해명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주산군도는 중국의 제일 큰 군도이다. 이쯤은 지리상식으로도 알고있는터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중소학교를 다녀서인지 우리 세대는 지리과를 배우지 못했는데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 후 문과류에 지리가 있어 나는 세계지도, 중국지도, 세계지리, 중국지리를 놓고 죽을둥살둥 헤덤볐다. 그 덕에 지리성적이 86점, 78년급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지망한 내가 조선어문은 고작 60몇점인데도 총점에 의해 무난히 연변대학에 입학할수 있었다. 지금도 세계지도요, 중국지도쯤은 눈감고도 통달이여서 그속의 주산군도도 상식적으로 안다고 자부하는 나다. 그런 내가 30년후에 주산군도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다니...꿈을 꾸는것만 같다. 한편 흥미로운것은 내가 탄 직행쾌속뻐스가 주산군도 정해행이여서 절강 녕파에 이른 후 부근 부두에서 뻐스 그대로 배에 실려 바다 건너 정해로 가는것이라 할가. 우리말고도 숱한 크고작은 차량들이 대형 전문선박에 실려 한시간미만의 바다를 건너는것이 그리도 흥미로울수가 없다. 나로 말하면 뻐스그대로 《바다》를 건넌것은 주산군도행이 처음이 아니다. 20여년전인 1983년 초여름에 나는 대학졸업후 처음으로 남방 겨레답사길에 올랐다가 강서 구강에 이른적이 있다. 구강에서 남으로 파양호 좁은 구간너머 팽택현 경내에 이름난 석화암 동굴―룡궁동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동행한 화룡현당위 당사연구실 왕청산선배님과 함께 무작정 왕선배 친척이 몰고 온 승용차에 앉았는데 이 승용차가 그대로 파양호 량안을 이어주는 선박에 실려 파양호를 건넜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6년 11월 25일, 이번에는 직행뻐스에 앉은채로 대형선박에 실려 망망대해를 질주하게 되니 그 기분이 별스러웠다. 2 주산군도에 세워진 신라초기념비바다 건너 주산군도 정해부두에 이르니 보타산행 부두는 보타산섬과 마주하고있는 심가항이라고 한다. 심가항이 어딘지 내가 어찌 알랴, 택시를 타는게 상수지. 택시는 반시간만에 어렵사리 심가항에 들어선다. 심가항은 크고도 큰 어항이라더니 택시가 어항을 따라 한식경이나 달려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택시기사와 물어보니 심가항은 세계 10대어항의 하나로서 요즘 들이닥친 태풍에 의해 길이 20리 어항에 대소어선 근 1만척이 정박했다가 풀리는 중이라나. 심가항이라는 이 세계적인 어항은 나를 또 하나의 지식의 세계에로 이끌어주었다. 드디여 심가항부두 매표구에 이르렀다. 보타산행 관광선박표를 끊으니 인민페 19원 50전, 보타산섬까지의 거리는 6킬로메터 남짓하고 반시간거리, 태풍의 영향으로 비오는 날씨에 풍랑이  인다지만 내해나 다름없는 이 구간 바다길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관광용 소형선박은 풍랑속으로 바다를 헤가른다. 보타산부두에 오르자 나를 선참으로 흥분케 하는것은 《보타선경》이라는 보타산 입구정문이였다. 《오, 끝내는 보타산에 이르렀구나!》 나의 마음은 파도마냥 설레이기 시작했다. 50대중반에 이르러 인생길이 흐름을 달리하여 연변서 6000리밖에 있는 절강에 와 대학교서 교편을 잡게 되였고 온지 거퍼 두달도 안되는 사이 우리 고대겨레 지장보살님 발자취 따라 다닌 답사의 길 얼마였던가. 오늘은 답사의 길이 멀리 안휘 구화산 앞서 보타산으로 이어지게 되였으니 마음이 설레일만도 했다. (오늘은 보타산―중국불교 4대명산의 하나에 무엇이 있을가? 과연 지장보살님과 관련된 무엇을 찾아낼수 있을가?) 나는 부푸는 기대를 안고 보타선경 정문을 지나 본격적인 답사의 길에 올랐다. 3 《관음원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천고의 보타산 력사시작, 신라방, 신라상인들과 관련되는 이야기 낳은 력사의 자리가 보인다.30년전 대학입시시절 자습으로 익히였던 중국지리속의 주산군도는 상식그대로 중국의 최대군도로서 크고작은 섬이 1390개로 헤아려진다. 그래서 천도지성으로 불리는 주산군도는 오늘날 지구급 주산시로 되여 산하에 정해, 보타 2개 구와  14개 진, 7개 향을 두고 면적이 943평방킬로메터, 인구 69만명을 이룬다. 그만큼 력사가 유구하여 6000여년전 신석기시대에 벌써 인류의 활동을 보이고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 진시황은 일찍 서복이라는 신하를 동남연해의 봉래, 방장, 영주 세개의 신선산에 보내여 장생불로초를 찾게 하였다고 한다. 그중 봉래산이 오늘의 주산군도의 대산도로서 섬안에는 서복을 기리는 정자, 서복의 《동도기념비》   등 고대건축물을 찾아볼수가 있다. 이것이 대학입시시절 지리공부에서 익힌 상식이 아닌 현실 알아보기라면 주산군도 주체섬과 바다를 사이두고 바라보는 보타산은 군도의 동부바다에 위치하여 그 면적이 41.05평방킬로메터로 나타난다. 섬전체가 수풀이 우거진 산체를 이룬데다가 수령이 100살이상인 고목이 1329그루(그중 녹나무 한그루는 수령이 800년, 나무 둘레길이가 6메터)나 서있어 보타산의 옛스러움을 그대로 풍겨준다. 하나 보타산부두를 나서고 보타선경 정문에 들어서도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관광지도를 펼치니 정문안으로 한참 더 나아가면 보타산의 상징경관인 남해관음불상 구내이고 이 구내 바다가에 남대문이 자리하고있었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걷기만 했다. 수풀구간을 지나니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언덕같은 산우에 하늘에 치솟은 웅장한 남해관음불상이 기다리고있었다. (먼저 남대문이 있다는 바위산아래 바다가로 가보자!) 목표를 잡으니 걸음이 빨라진다. 가랑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날씨라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조금 뒤에야 남대문 바다가 첫 경관잡기로 상상외로 적중했다는것을 느껴야 했다. 남대문과 이어진 해발이 고작 수메터를 기록하는 언덕산 정상 숲속에 《신라초기념비》가 서있었으니 말이다. 너무도 뜻밖이여서 심장이 툭 멎는것만 같다. 그래서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하는걸가. 나는 신라초기념비를 지켜보다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보고 사진 한장을 부탁했다. 그리곤 기념비 뒤면을 보고서야 무언가 다소 알것 같았다. 신라초기념비의 비문을 보면 보타산은 력사속 명주로 불리운 녕파의 관문이자 동남해안의 요충지로서 신라의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당나라와의 무역을 중시하여 교역품 운송에 보타산 항로를 많이 리용했다고 씌여있었다. 또 보타산 남쪽 련화양에 암초가 있으니 그 암초를 신라초라고 부른다고 밝혀져있다. 관광지도를 보니 내가 서고있는 구간 앞바다가 련화양이였고 바위산으로 된 신라초기념비 아래 바다가는 암초구역임을 알리는 들쑹날쑹한 바위무리들이 바다를 헤집고있었다.                                                 인터넷길림신문 리함 2009-07-25 오전 7:53:21]
389    연변 절강 부분 문학동료들 한자리 모이여 댓글:  조회:1265  추천:32  2009-08-26
      연변 절강 부분 문학동료들 한자리 모이여       지난 8월 5일 저녁 연길시의 한 음식부. 연변작가협회 저명한 번역가 진설홍의 초대로 작가협회 전 부주석 우광훈과 절강창작위원회의 류은종교수, 현충혁부주임, 방룡남박사, 리광인 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방룡남박사의 중앙민족대 동반동창이고 교수인 북경의 서영빈이 연변대 관련 행사차 연변으로 왔다가 동석하여 자리를 빛내였다.
388    5월 기행 (4) - 양명동은 꽤나 넓은 골안지대였네 댓글:  조회:3814  추천:24  2009-08-24
          양명동은 꽤나 넓은 골안지대였네     5.1일 완위상 양명동 답사에서 당나라 하지장의 마아석각을 찾아냈다지만 필경은 내가 찾고저 하는 양명동 동굴이 아니였다. 5월 2일 녕파에 가서 당나라 시기 옛탑을 답사한뒤 3일날 나는 안해와 아들애를 데리고 또 양명동을 찾아나섰다.   오전 8시가 지난 시점이다. 대우릉 입구구내ㅡ대우제사광장에 들어서니 제사광장은 어디라 없이 가지각색 연들과 “소흥시 연날리기절” 현수막이 걸리여 있었다. 안해는 5월1일 6층 교수아빠트에서 보노라니 대우릉 구내 연날리기 경기가 가관이더라고 말한다.   대우릉 신교와 입구를 지나니 대우릉가를 흐르는 남하에 아이들놀이ㅡ커다란 풍선이 둥둥 떠있다. 소흥에 와서 언제인가 한번 풍선놀이를 놀아본 아들애는 벌써부터 마음이 동해 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그런 아들애를 두고 그저 지날수가 없지, 나는 안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선놀이 관리자에게 인민폐 20원을 넘기였다. 아들애는 풍선구내 안에 들어가 물우에서 마구 뛰놀기 시작한다. 올해 27살 청년이라지만 아들애 사유는 기본상 소시적 그 무렵에 머물러 있으니 어린애와 다름 없다.   석범산 대우동상 남쪽골안의 백조락원을 지나 석범산의 한 산등성이에 오르고 다시 회계산 북쪽가의 절벽강산 샘물터에 오르니 절벽강산 아래 숲속의 사찰주인이 반겨맞는다. 사찰주인과 양명동을 묻는데 사찰에서 중간쉼을 하고있던 30대 부부가 끼여들며 남자라는 젊은이가 양명동이 있는 쪽을 안다고 한다. 마침 그들이 회계산쪽 그곳방향으로 간다고 하여 따라서니 아니였다. 그들이 말하는 양명동은 5월 1일 내가 찾아낸 하지장 마애석각쪽을 일컿고 있었다.   그들과 헤어져 나는 다시 절벽강산 샘물터로 돌아왔다. 사찰주인과 사찰가까이 절벽가로 내리는 오솔길을 물으니 오솔길은 이곳 산을 따라 양명동 아닌 북쪽의 골안으로 내리는 길이라고 한다. 오솔길 따라 내리면 뭔가 새발견이 있을것 같아 나는 안해와 아들애와 헤어져 사찰로 이어진 오솔길따라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자욱을 빗디디면 바위산 아래로 굴러떨어질것만 같은 구간, 오솔길은 급하강을 이루며 구비구비 산을 에돌아 내린다. 구비구비 오솔길은 전부가 인적을 모르는 강남의 우중충한 숲속이여서 온갖 산짐승과 뭇귀신들 잡동사니들이 마구 뛰여나올것만 같다. 웬간해서는 겁을 모르는 나인데 처음 내려보는 완위산 동쪽자락 숲속길은 심장이 콩당콩당 뛴다. 담을 키우노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해서야 숲속길을 헤칠수가 있었는데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숲속길은 원형을 이룬 어두운 동굴속을 헤쳐나가는 무시무시한 기분이였다. 드문드문 부스럭 소리가 들릴 때면 머리가 쭈볏해지며 두주먹을 불꾼 거머쥐군 하였다.   아짜아짜 긴장속에서 숲속길을 헤치니 사찰주인의 말대로 과연 완위산의 동쪽자락 북쪽골안이다. 아무것도 보아낼수가 없다. 실망이 앞서는 속에 한식경을 목표없이 발길을 옮겨놓다가 하지장 마애석각을 다시 답사해보기로 했다.   완위산 북쪽자락의 남쪽골로 나아가다가 숲이 시작되는 시내물가에 이르니 남쪽산아래에 웬 남자분 둘이 서성인다. 그들과 양명동 동굴을 물으니 우습다고 무어라고 주절거리면서 양명동은 동굴이 아니라 이곳 완위산 동쪽골 전부를 양명동으로 부른다고 알려준다. 그러니 동굴 동이 아니라 동네 동이라는 말이렸다. 또, 양명동은 도교의 36동천 11동천으로서 완위산 동쪽자락 바위에 도교의 상이 있다고, 웃쪽구간 유람길에서는 잘 헤아릴수가 없으니 아래켠 북쪽가에서는 확연히 알아볼수가 있다고 한다. 이미 알고있는 사람머리형 2~3개 바위무리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사방 수십리 회계산의 모든 바위강산을 사진찍으며 헤쳐온데서 도교의 머리바위를 찾는것은 별문제가 아니였다.   보매 이곳 양명동을 익히아는 사람들이였다. 회계산 답사 2~3년만에 양명동을 아는 사람들을 처음 만난 귀인들이다. 두 남자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하지장 마애석각을 다시 찾아 나섰다. 연도에서 완위산 동쪽골안을 눈저어보니 도교의 36동천이 될만한 리상적인 고장으로 안겨졌다.   이곳 회계산 완위산정상은 4000여년전 대우가 대홍수를 다스릴 법보를 얻은 성스러운 산봉으로 알려진다. 하지장 마애석각 룡서궁기의 기재에 따르면 옛날 황제님시절에 하늘의 신선님을 기다린다는 후신관(侯神馆)을 지었고 이 후신관이 당나라 초에 신선을 그린다는 뜻의 회선관(怀仙馆)으로 부름이 바뀌운다. 그뒤 당 개원 2년 (714년)에는 또 룡서궁으로 불리운다. 당나라 하지장이 이런 룡서궁에 이르러 우로 경사지는 바위에 마애석각을 남기였으니 이곳이 도교의 36동천으로 됨은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절강 여요출신의 하지장이 당나라 조정에서 고관대작으로 있은지도 50여년, 80대의 고령에 이른 하지장이 서울 장안의 선평방(宣平坊)에 살고있는데 그의 집 앞으로 늘 한 로인이 당나귀를 몰고 다니였다. 5~6년이 되여도 당나귀 모는 주인의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에 드나드는 평민로인이라 어느날 하지장이 처음으로 방문하니 로인의 집에는 시중군애 하나가 있고 로인은 하지장을 깍듯이 맞아들이였다. 서로간의 거래가 빈번해지면서 하지장은 로인이 비로소 도교의 도술에 능한 사람이라는것을 알았다. 또 어느날 하지장이 부인과 같이 로인한테로 갔다가 이젠 시골시절의 진귀품이라면서 명주(明珠)를 내놓으며 도술을 배우기를 바랐다. 그런데 로인이 그 명주를 시중군 아이에게 주면서 30여개 잰병(胡饼)을 바꾸어 오게하고 그것으로 하지장을 초대하니 하지장은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때 로인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도술이라는 이것은 마음으로 얻는것인데 어찌 힘으로 얻을수 있으리오… 도술은 반드시 사람들을 멀리한 심산대곡에 가서 수련하며 얻어야지 서울에서 사들일수 있는것이 아니오다…”   하지장은 로인한테서 큰 계시를 받고 거듭 답례하고 돌아섰으나 그후 하지장은 다시 로인을 찾을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하지장은 서울을 떠나 귀향을 결심했고 천보3년 (744년) 정월 5일에 고향길에 오른다. 이러고 보면 하지장의 환고향이 1200여년 일이고 하지장이 만년에 도교에 심취했으니 양명동이라는 이 36동천의 11동천은 하지장 그 시절에 이미 시원을 열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뒤 명나라 시절은 대성현 왕수인 양명선생과 관계된다. 양명선생은 명나라 중엽의 이름난 철학가이고 교육가, 군사가, 문학가이고 서예가이기도 하다. 이것은 왕수인이 출세한 이후의 부름이라 하겠지만 왕수인이 여러번의 과거시험끝에 1499년 28살되는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되여 명나라관리의 행렬에 오른다. 3년뒤인 1502년 31살에 나는 왕양명은 병으로 고향 여요에 돌아오게 되며 오늘날 회계산 양명동천에서 1년간 휴양시절을 보낸다. 그래서 하지장 마애석각으로 들어서는 갈림길 어구에 갈선옹(葛仙翁)이 연단(炼丹)하던 자리라고 써놓은 흔적을 볼수있나 보다.   이런 왕양명이 16세기 20년대인 1522년에 부친님의 병으로 고향 절강여요에 다시 돌아오게 되였다. 그 귀향이 6년으로 이어지면서 왕양명은 고향에서 제자들을 모아 자기 학설을 가르치면서 지낸다. 양명선생 철학의 핵심은 “량지(良知)”, 나중에 “지선(至善)”의 도덕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할까. 사처에서 제자들이 모여드니 완위산 동쪽자락에도 제자들이 세운 양명서원이 일어서고 왕양명이 이 양명서원에서 자기 주장ㅡ철학리론을 편다. 그뒤 왕양명은 가정 6년(1527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오늘의 광동, 광서ㅡ량광 (两广)에 진출하여 군사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이에앞서 왕양명은 절강 산음(소흥) 즙산에 세워진, 남송시절 주희를 기념하여 세워진 즙산서원에서도 자기학설을 펼치게 된다.   그럼 룡서궁 일대가 언제부터 양명동으로 불리게 되였을가? 여러 자료들을 모아보면 아마도 완위산 동쪽자락에 양명서원이 일어서던 그 시절로 보아야 할것 같다. 력사적으로 보아도, 골안 형성과 위치로 보아도 도교의 36동천의 하나로 불리울만 했으니 한두번의 답사도 아닌 수십차의 현지답사끝에 양명동은 절벽강산의 바위동굴이 아닌 완위산 동쪽 골안지대였음을 알게된 나, 회계산 3년답사의 결과물이였다.              
387    절강창작위 연변문학지 방문 댓글:  조회:1255  추천:53  2009-08-24
            절강창작위원회 연변문학지 방문   7월 28일 오전, 절강창작위원회 리광인과 현충혁이 연변문학지를 방문했습니다. 쌍방은 서로간의 리해와 련계, 합작을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연변작가협회 최홍일 부주석이 동행하여 분위기를 고조화했습니다. 연변문학지에서 점심초대를 하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386    작가친구들 산책길 모아산으로 이어진다 댓글:  조회:1114  추천:26  2009-08-23
        작가친구들 산책길 모아산으로 이어진다   7월 30일 늦은 오후, 류연산친구의 자가용은 장춘에서 온 리여천작가와 리혜선작가 그리고 친구의 부인과 나를 싣고 모아산으로 달리였다. 모아산아래 민속촌 입구 부근에서 왼쪽 오솔길을 택하니 이야기속에 모아산 아래 남쪽 정차장이 잠깐으로 느껴진다. 리여천작가는 류연산친구와 리혜선작가와 20년도 넘는 문인지기이고, 금방 장백산잡지사 부사장, 길림신문 부사장으로 발탁된 친구. 모아산 돌호랑이 조각상가에서 산책하는데 리여천작가의 말이 피부로 와 닿는다. “연길사람들의 얼굴모습이 환한 모습이요. 여유로운 삶이 얼굴들에 씌여졌거든.” 전적인 동감이다. 최근년간 연길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개인 삶의 향상과 풍요로움은 건강제1을 믿는 사람들을 모아산운동에로 부르고 있으니 푸른 숲 우거진 모아산 숲속에서 그들의 얼굴이 환히 피여날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모아산 산정에 오르지 않고 모아산 숲속 북쪽으로 뻗은 새 유람길을 따라 산책을 이어갔다. 도중에 뜻밖에도 저녁 모아산 산행길에 오르는 우리 산악련맹 산하 명상팀의 주력맴버들인 송도님, 바람님, 봄비님을 만나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네들이지만 허물없이  롱담하는 그네들이 좋았다. 류연산친구는 자가용을 민속촌어구로 몰아 가더니만 민속촌어구 구내에서 차를 멈추었다. 물통 두개를 내리더니 모아산 샘물터로 가잔다. 리여천작가와 내가 따라섰다. 이미 어스름이 몰려드는 때라지만 숲속 오솔길은 여전하다. 오솔길은 내리막을 이루며 내리고 내리더니 나무로 덮힌 깊숙한 골짜기로 떨어진다. 샘물터는 잘 꾸며지고 샘물받는 곳이 두곳으로 보이는데 류연산친구는 주변에 샘물받는 곳이 여러곳이라면서 모아산샘물을 마이다가 다른 샘물을 마일수가 없다나. 샘물을 받아 마여보니 과연 샘물의 왕자이다. 처음 모아산샘물터를 밟아보는 나에게는 모아산샘물이 좋았고 고느적한 숲속이 좋았다. 친구의 자가용은 다시 민속촌 구내길로 내리 미끄러졌다. 도착하고보니 민속촌 구내 숲속음식점이고 바깥 정자모양의 자리에 푸짐한 저녁상이 마련되였다. 숲속의 싱그러운 수풀 냄새 기분을 풀어주는데 남방에서는 맛볼수도 없는 우리 연변의 두부가 그리도 신날수가 없다. 간장에 찍어먹는 삶은 소고기도 좋다지만 우리 식 두부에 장으로 해결하는 풀채들이 나 입맛에 더 어울린다. 이런 농가맛에 얼려 류연산친구는 부부동반으로 이곳 모아산 숲속음식점을 때때로 찾는단다. 작가친구들 얘기는 웃음으로 이어진다. 지난 80년대부터 생겨난 에피소드 들이여서 재미나기만 한다. 우리 력사와의 씨름속에서 자주 대하지 못하는 친구들 얘기여서  더욱 그러한가부다. 모아산으로 이어진 산책길, 모아산 숲속음식점으로의 모임—그속에서 연길, 장춘, 남방의 우리 만남은 시간과 더불어 조용히 흘러간다.                                             2009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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