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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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    시--비방울 강남꽃 예쁘기만 해 댓글:  조회:1885  추천:34  2010-05-14
비방울 강남꽃 예쁘기만 해     하늘에선 보슬보슬 이슬비 내리는데 비방울 강남꽃 예쁘기만 해 5월의 향취안고 밖으로 내달으니 어서 와요 화알짝 웃는 장미며 북방의 나그네 반기여 주네   비방울 머금어 어여쁘냐고 천사 닮아 더 싱싱하냐고 물어보니 꽃들은 수집은듯 고개를 숙이며 청초한 꽃무늬 흔들며 화답하겠지   싱긋한 꽃향기 뿜어 주겠지   하늘나라 감로수 받아 안을 때 그  감로수로 내몸을 정화시킬 때 정화된 마음을 남에게 열어 줄 때 이 한몸 그지없이 어여쁘다고 너와 나 아름다움으로 엉키여 진다고   그래서 그래서 불타는듯한 붉은 장미 말하는구나 대롱대롱 석류화 속삭이누나 남을 위해 내마음 불태울 때만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산한다고요   2010년 5월 13일 강남 두앵원에서  
484    안중근연구 빈구석 (3)-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 댓글:  조회:3910  추천:51  2010-03-31
【안중근연구 빈구석】(3)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                                                                                        일전(2005년)에 “안중근의거 한민회의 조직적기사”를 쓰면서 해당자료를 훓다가 명동촌 출신인 한국 경희대 문리대학장 윤영춘선생의 글 “황무지에 세운 기폭”에서 “안중근이 이또오를 저격하기 위해 명동 문안골에 와서 사격연습을 한 일이 있었다. 문안골의 바위를 가상적으로 하여 연습을 했다.”는 대목을 읽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오늘의 룡정시 지신땅 명동일대에는 근본 문안골이란 마을이 없거니와 이 일대서 안중근이 사격연습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였다. 여하튼 이는 필자의 신경을 모았다. 안중근관련 해당자료들에도 이런 취급이 가끔 보이여 주의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아래 이런 자료들을 먼저 언급해 보기로 하자. 연변 해당학자 2명의 서명으로 된 “간도반일민족 교육의 선구자—김약연”론문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 기념학술대회 문집”﹞에는 “그후 안중근의사 역시 명동에 머물면서 반일무장투쟁을 계획하고 문안골에서 권총사격연습까지 하고 떠났다.”고 밝혀져 있었다.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에 올려진 론문“룡정의 명동—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에서도“1909년 봄, 그는 훈춘으로 하여 명동에 왔다. 안중근은 명동에 와 있으면서도 자기의 무장투쟁론을 력설하면서 문암동에 가서 권총사격연습을 하였는데 그가 천주교도이면서도 천주교마을인 삼원봉에서 류숙하지 않고 기독교촌인 명동촌에서 류숙한것은 그만큼 그가 명동촌을 신임하였기 때문이며 또 어려서부터 수렵, 사격과 기마에 큰 흥취를 가졌기때문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1—“개척”에 실린 “이등박문을 쏴죽인 안중근”이라는 한편의 글에서는 문암동서술과 달리하여 아예 “룡정에 온 안중근은 명동에 자리잡고 팔도하자 만진기에서 땀을 흘리며 무예를 익혔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한국 해당자료의 재현이지 이곳 학자들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다면 안중근의 사격연습 진실한 력사는 어떠한가, 이면에서 연변대학 교수 최홍빈선생이 비교적 실사구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홍빈교수님은 연변대학 원 민족연구소 소장이였다. 교수님은 안중근의거 80돐 되던 해인 1989년 12월 15일 부 “연변일보”에 실은 글 “항일독립투쟁의사—안중근”이라는 장편 글에서 “안중근은 일곱살때부너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열두살 때부터는 백발백중의 소년포수로 린근에 이름을 날리였다.”고 모를 박았다. 선생은 이 글에서 또 “안중근은 1907년 깊어가는 가을에 사랑하는 가족과 학생들의 눈길을 뒤로 하고 민족의 래일을 위한 투쟁의 전선—간도로 길을 재촉하였다… 북간도에 도착한 안중근은 룡정에 머물러있으면서 3개월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병부대양성기지를 물색하”다가 “로씨야 령토인 연추를 지나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면서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를 회피하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문제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은 제정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와 현안문제를 토의하려고 1909년 10월 16일에 일본을 떠나 대련, 려순, 봉천(심양)을 거쳐 26일에 할빈에 도착하기로 하였다. 안중근 등이 이 소식을 해당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것은 이해 10월 20일이다.   한민회 회장인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은 인차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지고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과 이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은 할빈에 대기중이던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 황천객이 되였다. 이 짧은 기간내에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이기 위하여 로씨야땅에서 북간도 명동에 와서 사격연습을 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1909년 봄, 명동행도 문제투성이다. 항일독립단체—한민회의 주요성원인 안중근은 회장 김치보 등 11명과 함께 1909년 새해 첫날 연해주 연추부근의 카리(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음)란 마을에서 단지혈맹을 결성하고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작심하였다. 그뒤 명동에 다녀갈 기회는 없지 않으나 1909년 봄에 천주교도인 안중근이 기독교촌인 명동촌에 머물렀다는 서술은 사실과 퍼그나 어긋난다. 왜냐하면 이해 봄까지 명동과 그 일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동에 교회가 선것은 1909년 5~6월경이다. 이해 5월경에 신민회간부이고 리동휘의 동지인 정재면이 명동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기독교력사가 시작된다. 다시 안중근의 권총사격연습에로 돌아오면 명동일대에는 문안골이란 마을이 없다. 문안골이 아닌 문암동은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회경 6대(개산툰시내 서쪽 부근 마을)를 가리키는데 명동촌과는 곧게 쳐도 20~30리 거리가 잘된다. 여기서 지적하고 넘을것은 원 룡정시 덕신향 석문촌 석문구간이 문암동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리고 열두살 때 백발백중의 소년포수로 소문이 났다는 안중근이, 사냥의 모습을 자주 보인 안중근이 여기저기서 권총사격연습을 했다는 자료가 보이는데 그 자체가 의문점이 없지 않다. 최근에 필자는 항일독립지사이고 연해주 한민회 회장이고 그후의 로인단 단장이였던 김치보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또 이러한 자료와 맞띄웠다. 1905년에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종성군수를 지냈던 김치보는 군수고 뭐고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상기와 같이 안중근은 한민회의 주요성원이고 김치보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서 김치보의 집에 2년간이나 머무르면서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글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 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진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한국독립사 해당자료가 그렇게 말하고 김치보가족사에 그렇게 씌여져있었다.   지난 90년대초 김치보항일투쟁사 자료수집과 조사결과도 그러했다. 안중근이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단다. 안중근이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 맞혔다는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안중근은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굳잠에 빠져 베개를 빼내도 세상모르고 잠만 잘 잤다고 한다. 그런 안중근한테 이등박문은 끝내 당하고야 말았던것이다. 우와 같이 본 글에서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사격연습문제”를 가지고 두루 검토하여보았다. 긍정적인것은 안중근의 문안골사격연습문제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안중근이 항일무장투쟁의 대업을 위해 명동촌에 이르러 한때 동만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여진 김약연과 대사를 도모했다는것은 력사사실인것 같다. 단 명동촌에 간 시간문제가 오차를 보일뿐이다.
483    안중근연구 빈구석 (2)-이등박문 암살 총지휘는 김치보 댓글:  조회:3297  추천:39  2010-03-30
【안중근연구 빈구석】(2)     이등박문 암살 총지휘는 김치보     20세기 10년대 겨레항일운동사를 펼치면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되여 묵묵히 제2선에서 독립운동을 지지, 성원하면서 이등박문 암살지휘부 총지휘로 싸운 한 투사가 있다. 투사의 이름은 김치보(1860~1941, 金致甫)이고 당년의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한민회》회장이고 《로인단》 단장이였다. 1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 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룡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룡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그는 결연히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반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1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지면서 저마다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였다. 그러던 나날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수분하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이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죽었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한것으로만 알려졌다.   2   1909년에 들어선후 무력으로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놈들의 야욕은 날따라 백일하에 드러났다. 국내의병항쟁이 일제의 야만적인 무력탄압으로 쇠잔해진데서 반일애국지사들은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립장을 밝히면서 일제의 병탄야욕을 폭로, 저지시키려고 서둘렀다.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는 운동이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상해, 미주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재빨리 형성되였다. 운동과 밀사파견에 필요한 자금은 연해주, 간도, 상해, 미주 등지에 사는 동포들에 의해 풀려갔다. 네델란드(화란)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밀사는 리상설과 리준이였다.  《세계인명대사전》 리상설 조목에 의하면 그는 1905년에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못해 가두에 나서서 울면서 대중에게 연설하고는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 망명》 하고있었다. 그때 《한민회》회장으로 있은 김치보는 리상설과 가까운 모양이였는데 그는 국제회의 밀사파견의 적극적인 추진자였다. 리상설이 리준과 함께 밀사로 파견되자 김치보는 그들 둘의 모든 경비를 지출하였고 그해 4월, 씨비리렬차로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날 때 역에 나가 바래였다. 김치보는 뒤미처 리상설과 리준이 도중에 러시아 수도에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의 아들 리위종을 대동하여 네델란드의 헤이그(海牙)에 닿았으나 일본측 대표의 무리한 방애를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더우기 회의참석자격마저 얻지 못한데 분격한 리준이 머나먼 이역땅에서 순국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통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뒤 류랑길에 올랐던 리상설이 미국을 거쳐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왔을 때 김치보는 마음을 활열어 뜨거이 맞아주었다. 또한 1910년 성명회에서 취지서, 즉 성명서를 내여 이른바 일제의 《한일합방》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며 규탄할 때 그들은 힘을 합쳐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가 러시아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해 8월 17일(음력 7월 13일), 울라지보스또크에 체류중인 조선의 반일지사들은 분노하여 《성명회》(聲鳴會)를 결성해가지고 일제침략자들의 조선병탄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통절히 호소하면서 조선병탄반대운동을 드세게 벌리였다. 이 운동의 진두에는 류린석, 리범윤, 리상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이 서있었는데 김치보는 명실공히 성명회의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리상설도 끼이였는데 그들은 힘을 합쳐 격문을 산발하고 동지를 모집하는 한편 유일한 독립운동기관지 《대동공보》에 일제놈들을 단죄하는 전문기사를 실었다. 성명회에서 발표한 취지서는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각국 정부와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강렬한 호소를 내품었다. 취지서는 《저 아름다운 삼천리강산은 우리 시조 단군께서 전하신바이며 신성한 아 2천만동포는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차라리 2천만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5천년의 조국을 버릴수 없》기에 《조국을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은 《속히 힘을 합하고 소리를 같이》하기를 희망하였다. 나중에 취지서는 《아아! 주저하지 말지어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동포여, 아아!》를 련발하면서 끝을 맺었는데 찬동자의 주의사항과 더불어 류린석, 리범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의 이름이 정히 적혀있다. 이해 8월 23일, 조선이 병탄당했다는 비보가 확실해졌다. 김치보는 성명회의 동지들과 함께 격문 1천매를 인쇄하여 러시아와 간도 각지에 배포하면서 류혈적인 방법으로 조선병탄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후에도 김치보의 활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3   1919년 3월,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위대한 《3.1》독립만세운동이 활화산마냥 터져올랐다. 잇따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시위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독립만세운동이후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은 러시아 볼쉐위크파의 힘있는 후원아래 부문별 비밀결사를 무어 항일구국활동의 길로 나아갔다. 그중 주요한 단체는《로인단》(1919년 10월), 《대한국민의회》, 《독립단》, 《림시위생회》 등이였는데 《로인단》의 단장이 바로 김치보였다. 1919년 이해 김치보는 60살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구치를 전후하여 조직된 《로인회》의 토대우에서 이름을 로인단으로 바꾸고 본부를 울라지보스또크에 설립하였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로인단의 단원들은 46살이상 70살까지의 조선인남녀들이였는데 독립운동에 뛰여든 조선청년들을 받드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고 한다. 김치보의 책임은 무거웠다. 그는 이에 못지 않게 로인단의 명의로 장서(長書)를 작성하고 일본정부에 보내여 독립권 환부를 요구하는 한편 리발, 정치윤, 윤여옥, 차대유, 안태수 등으로  대표단을 무어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총독부에 떳떳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 서울 종로에서 독립연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김치보《로인단》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때 세상을 들썽케 한 로의사(老義士) 강우규의 남대문밖 일제총독 사이또습격사건은 그 돌출한 실례라 하겠다. 1910년 일본침략자들은 조선 삼천리강산을 병탄한후 피비린 무단적통치를 강행하였다. 1919년《3.1》독립만세운동이후부터는 수단을 바꾸어 문화적통치를 시도하였다. 그야말로 양의 탈을 뒤집어쓴 승냥이의 심보였다. 제2대 조선총독인 륙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 소환되고 해군대장 사이또(齊藤)가 제3대 총독으로 파견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로인단단원들은 의논이 분분하다가 사이또란 이 섬나라 승냥이를 불벼락으로 영접하자고 입을 모았다. 결과 64살의 강우규(1856년생) 가 나서게 된다. 그가 떠나는 날 김치보와 로인단의 단원들은 서로 붙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에 새로 부임한 사이또는 동부인하여 서울 남대문역에 내리였다. 플래트홈에는 영접하러나온 사람들로 붐비였다. 사이또는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환영군중들에게 연신 답례를 하였지만 그 자리에 나선 강우규에겐 침략자의 우두머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맨 마지막에 선데서 틈탈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우규는 기회를 찾다가 사이또부부가 역전앞에서 쌍두수레에 오르려고 할 때 주저없이 수류탄(작탄, 폭탄이라고도 하여 엇갈린다)을 던지였다. 사이또는 부인을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한후 디딤대에 올라서려다가 불벼락을 맞았다. 하늘이 도왔을가, 사이또는 천명으로 살아나고 대신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강우규는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빠지였지만 뒤따른 대검거에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끌려들어가 시달리는것을 듣고있을수만 없었다. 그는 류치장에 갇힌 청년들을 구출하려고 떳떳이 남대문헌병대를 찾았고 떳떳이 단두대에 올랐다. 한때 일제 놈들을 경악케 했던 일본총독 사이또습격사건, 반일독립력사의 한페지를 빛내인 강우규는 김치보가 이끄는《로인단》의 단원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1918년 8월이후 러시아 원동지구에 출병한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학살하며 미쳐 날뛰였다. 김치보의 로인단도 여러 독립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일제놈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김치보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했으나 1922년 말을 계기로 정세는 갑자기 돌변을 가져왔다. 바로 일본군의 철병이였다. 원동지구에서 1918년 6월의 체코군의 봉기와 뒤를 문 일, 미, 영, 불 등 련합군의 출병으로 말미암아 씨비리전쟁은 4년동안이나 지속되였는데 1920년 이후 고국작전하고있던 일본군은 드디여 울라지보스또크를 마지막으로 철병하지 않을수 없었다. 1922년 11월 15일에 원동정부(극동공화국)가 레닌의 쏘베트정권에 통합되고 씨비리전역에 쏘베트정권이 수립되면서 연해주의 조선인무장들은 력사사명을 끝내고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이후 씨비리에서 쏘베트 사회주의건설이 시작되면서 쏘련공산당과 정부는 조선인 각파지간의 파벌투쟁이 날따라 치렬해지는데서 그 시기 흑백을 가리지 못하고 조선인의 일체 무장활동에 금지령을 내리였다. 따라서 조선인 각파책임자들은 잠시 강금되였다가 풀려나오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김치보도 의례 갇히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였다. 1922년 말을 계기로 러시아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즉 쏘련)으로 세계에 나타났다. 쏘베트체제하에서 항일독립무장이나 독립단체들이 독자적활동을 한다는것은 대중없는 일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김치보는 야밤에 독립운동가 엄인섭이와 같이 일가식솔을 데리고 쏘중국경을 너머 중국의 훈춘현 동흥진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중국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때부터 그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시끄러움을 피해 이름을 김감령으로 바꾸었다. 그가 사망된것은 1941년 11월 18일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김치보는 안해와 자식들에게 쏘련에서 갇고온 종성군수임명장과 혈서, 시, 여러 문건 등 50여점을 맡기면서 이제 조선이 독립하면 나라에 바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인생을 다하면서도 그는 이런 문건들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4   김치보는 생전에 안해 김선녀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그들로는 맏아들 꼬랴, 둘째 김철수, 셋째 김갑수, 큰딸 유바, 작은딸 김순덕이다. 1923-1924년경에 김치보는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가만히 국경을 넘어설 때 동행한것은 안해 김선녀와 큰딸 유바, 둘째아들 철수, 셋째아들 갑수였는데 그때 맏이 꼬랴는 대학공부중이여서 따라서지 못하였다. 그는 쏘련의 어느 대학인가 졸업하고 쏘련 중앙 조선인대표위원회에서 사업하다가 쓰딸린이 서거한후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풀리여나온후《우수또부》에서 생활하다가 사망(꼬랴의 안해 사망원인은 모름) 했는데 필자가 취재할 때 그 자식들이 우수또부(?)에 살고있다고 했다. 그외 자식들은 아래와 같다. 둘째 김철수는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살다가 1968년에 사망, 셋째 김갑수는 역시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생활, 림업국의 자동차운전수로 일하다가 1990년에 사망. 큰딸 유바(쏘련이름)은 훈춘시 동알라에서 생활하다가 사망. 작은딸 김순덕(중국 태생)은 필자가 방문할 때 60살이고 남편 김려병은 67살로서 도문시 향상가에 살고있었다. 이 막내딸이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필자는 이들 막내 딸의 남편 황병만의 알선으로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이들 가족을 만나보고 김치보의 투쟁력사와 가족사에 접하게 되였다. 황병만은 그때  연변일보사 인사처 처장사업을 하고있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김치보가 목숨처럼 아끼였던 50여점 문부가 뜻하지 않게 전부가 소각되였다는 점이다.  1961년 경에 김치보의 안해 김선녀는 막내 딸 김순덕의 집에 약 2년간 거처했는데 모든 문부를 가지고있었다. 1963년에 이 문부는 셋째 김갑수한테 넘어갔다. 1968년 말 문화대혁명기간에 김갑수의 친척되는분이 붙들려 투쟁을 맞게 되였다. 이 친척은 바로 김갑수의 집앞에 자리 잡고있었는데 이로하여 김갑수는 사상투쟁이 치렬하였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그는 어느날 저녁 50여점의 문부를 꺼내다가 부엌에서 태워버렸는데 가마안의 물이 끓어번졌다고 한다. 이는 필자가 지난 90년대초에 김순덕과 그의 일가족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와 해당자료들이다.   (주: 김치보의 셋째아들 김갑수가 말했다는데 의하면 리조말년에 조선에서는 이름난 사람들의 이름을 평양의 대동강변 바위절벽에 새기였다고 하는데 거기에 새겨진 김성준이 바로 김치보라고 한다.)                    
편자의 말:    오늘은 안중근 순국 100돐이 되는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안중근 순국 100돐을 기념하면서 필자는 “안중근연구 빈구석”  (1~2~3)을 조글로에 륙속 올리게 된다. 안중근연구는 우리 피어린 항일투쟁사에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연구분야이고 그 성과는 이루다 말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 연구흐름에 있어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한 이등박문 격살이 흔히 안중근이 혼자서 주도하고 행동한 것으로만 흐르고 있어 유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등박문 격살은 러시아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에 본부를 둔 항일독립단체 한민회의 소행이였고 그 총지휘는 이름난 항일독립운동가 김치보건만 연구가들은 흔히 이를 잘 모르거나  외면하여 안타까움을 주는 실정이다.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이 아닐수 없다. 이에 필자는 지난 2009년 10월 안중근 할빈의거 100돐을 맞으면서 조글로에 한편의 글을 올린바 있다. 또, 이에 앞서 2005년이든지 “흑룡강신문”에 이미 실은 바도 있다. 오늘 다시 조글로에 올리면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외 관련연구가들의 주시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제 필자는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을 전문 여러 편의 론문으로 완수하여 안중근연구에 힘을 보태고저 한다.         【안중근연구 빈구석】(1)      안중근의거 개인적 행동이 아닌 조직적 행동     1909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를 두고 중국, 한국, 로씨야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있다. 이런 견해들 가운데서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등 《대동공보》직원들이 중심이 돼 이뤄졌다는 견해와 최재형, 리범윤 등 의병련계속의 조직적거사라는 견해가 주축을 이루는것 같다. 허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필자는 상기 두가지 견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는 항일운동가 김치보를 회장으로 한 한민회 관계속의 조직적거사가 주축이고 이등박문  격살 때 파견된 소조가 안중근 할빈소조 뿐이 아닌 장춘, 심양 등 여러 개의 소조가 파견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싶다. 이를 헤아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등방문 격살 총지휘 김치보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 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mm),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용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용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군수고 뭐고 죄다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로씨야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2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졌다. 일이 이쯤 번져지자 안중근은 피로써 서약하는 혈맹을 맺자고 제의하여 나섰다. 모두가 호응할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그들의 앞에는 인차 안중근이 품에서 꺼낸 태극기가 놓여졌다. 안중근이 먼저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자 모두가 그대로 행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자료 서술이 이러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짙은 의문점을 갖고있다. 김치보의 집에서 그의 한민회수하에서 활동을 벌린 안중근은 김치보와 19년의 격차를 두고있는데다가 회장인 김치보와의 사전토의도 없이 김치보가 앉은 자리에서 안중근이 먼저 단지혈맹을 제의하면서 주도했다는것은 믿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김치보와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이자 막연한 지기였다. 그들은 나이 거의 20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어느덧 한민회에서 반일독립을 도모한지도 옹근 2년,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굴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다.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맞혔다는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베개를 뺴내여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만 잘잤다고 한다. 드디여 기회가 왔다.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등박문이 어디에서 나타나면 어디에서 죽여버릴판이였다. 력사는 안중근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이해(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등박문은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이 희소식이 전해지자 김치보는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였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하고 의거한것으로만 알려졌고 이등박문격사를 위해 김치보를 수령으로 하는 한민회에서 면밀히 짜고들었고 한민회 소속 여러 개 소조가 할빈, 장춘, 심양 등지로 파견되였다는것을 외면하고있다.
481    해당화 즐기신 인민의 총리 댓글:  조회:5529  추천:31  2010-03-24
                해당화 즐기신 인민의 총리   나는 지금  소흥의 주은래기념관 뜰안 해당화 나무가를 거닐고있다. 꽃피는 강남의 3월을 맞아 곱게곱게 피여난 해당화를 보노라니 인민의 총리—주은래총리를 한없이 그리게 된다. 주은래총리는 생전에 해당화를 그토록 사랑하신 일대 위인이시였다. 해마다 3월은 우리 북방으로 말해 가끔 눈도 내리는 겨울의 연장이라 하지만 북방 내 고향 연변에서 5000~6000리 떨어진 강남땅은 개나리, 목련화, 봄동백, 오얏꽃, 벚꽃, 유채꽃 등 뭇꽃들이 다투어 어여쁨을 뽐내는 호시절로 나타난다. 이 강남 뭇꽃들 중의 하나가 아름다운 해당화거늘 3월 하순의 해당화를 찾아 소흥의 후산풍경구, 회계산풍경구, 탑산풍경구, 주은래기념관을 두루 돌아 보며 꽃사진찍기에 정신을 팔아본다. 이 겨를에 이른것이 주은래 조부 옛집과 옛집구내 주은래기념관이고 기념관 뜰안에는 마침 해당나무 몇그루에 해당화가 환하게 피여올라 발목을 잡는다. 소흥 주은래기념관 관련 소개에 따르면 수도 북경의 중남해 서화청에는 해당나무가 수두룩하여 해마다 봄이면 아름답게 피여나고, 주은래총리는 나라 일로 분망한 속에서도 시간을 내여 부인 등영초와 더불어 해당나무 아래를 산책하며 해당화를 즐기셨다고 한다. 그런 모습의 주은래 부부한테는 해당나무 아래 산책이 단순한 산책을 위한 산책만이 아니였다. 부부 같이 식사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는걸로 알려진 주은래총리는 그 소중한 시간을 타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 나라 중국인들 심목속에 꽃과 같이 순결하고 고귀한 인격의 상징으로 나타나셨으니 옛날의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그린 리상의 세계--“도화전기”를 써내고 국화를 지극히 사랑하며 자기 마음을 기탁했듯이 해당화 사랑속에 온 나라가 꽃피는 새봄이기를 바라는 총리 부부의 고상한 정조와 인생경지의 아름다운 추구를 담고있었다. 해당화사랑 일대 위인의 고상한 정조와 인생경지의 추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주은래기념관 2층에 잘 배치된, 중남해 서화청 해당화 앞에서 찍은 주은래 부부의 정다운 사진모습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해당이 고인을 그린다”(海棠思故人) 는 문자설명을 달아 우리 인민의 총리 주은래와 등영초의 위인 형상이 그지없이 돋보이게 한다. 그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비길수 없으리만치 마음을 끄당기며 보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뜰안에 한창 만발한 해당화 구간과 더불어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가슴을 쾅쾅 울리는 감동의 구간이라 하겠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꽃들, 인공이 가미된 꽃들을 사랑하는 이들이면 누구나가 알수 있듯이 해당화는 장미과의 락엽 활엽 관목으로 알려지지만 여기 강남의 해당나무들은 한반도(조선반도)에서 말하는 해당나무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당나무의 자람 키나 가시를 이룬다는 점들이 그러한데 꽃의 경우를 보아도 여기 중국 강남에서는 3월을 잡아 이루 헤아릴수 없는 꽃망울들을 이루다가 3월 중순이후 만개하여 아름다운 3월의 꽃의 하나로 강남대지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해당화 꽃 품종도 다양하여 대자연속 꽃과 화분꽃들은 붉은 꽃으로부터 연분홍꽃, 흰꽃, 노르스레꽃 등등 갖가지로 헤아려진다. 강남 해당화는 이같이 갖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나고 있었지만 지난 3월 중순 이전까지만도 나는 강남속 소흥에 해당화가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가 알려줄수 있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여 주은래기념관에서는 해당화하면 주은래총리를 떠올려 보지만 자연속에서는 해당화를 해마다 익숙히 대하면서도 그 이름을 알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 “망울꽃”이라 지어 부르니 만개하기전 숱한 꽃망울을 가진 꽃이라는 의미였다. 이 3월, 꽃을 즐기며 꽃사진에 열중하는 절강월수외국어대 서방언어학원의 한 녀교수한테서 해당화소개를 들어서야 해당화를 알아보게 된 나는 그동안 무지와 소홀로 인한 실수를 미봉하고저 련일 회계산풍경구 남하가와 도심의 탑산풍경구 꽃시장 등지를 찾으며 여러가지 자태의 해당화들을 이모저모로 찍어 보았다. 여기엔 나만의 이야기도 있다. 3월 18일 날 오전 강의가 끝나 후산복숭아절 보러 소흥 후산풍경구로 갔더니 나의 앞에 느닷없이 키가 한미터 정도되는 꽃나무가 나타났다. 그것도 외홀로 한그루로 자란것이 아니라 한포기내 숱한 그루를 가진 무더기 꽃나무, 이런 꽃나무에 이름모를 붉은 꽃이 많이도 피여 사진을 두어장 찍어 보았다. 귀가후 그날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인터넷에서 이 사진과 꼭같은 사진을 보게 되니 이 꽃이 내가 그토록 알고프던 해당화였음에랴. 뒤를 이어 며칠전 회계산풍경구 남하가 꽃사진찍기에 나섰다가 월수대 상기 녀교수를 만나 현지에서 남하가를 덮은 꽃들도 품종이 다른  해당화임을 알게 되였으니 수확이면 큰 수확이였지. “강남땅 소흥에도 해당화가 많고 많구나!” 뒤늦게 알게 된 해당화, 해당화를 알아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 이름을 모른데서 강남꽃 사진찍기에서 소외시했던 해당화에 미련을 두고 3월의 철을 놓일세라 여가시간을 타서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다니며 갖가지 모습의 해당화를 디지털 카메라에 담고 담은 나, 그 와중에 소흥의 주은래기념관을 수차 찾았을 때 보았던 해당화와 인민의 총리—주은래총리가 상기되여 오늘 또 1~2교시가 끝나기 바쁘게 아들애를 데리고 주은래기념관을 다시 찾게 되였으니 이왕에 해당화하면 주은래총리와 이어 보며 해당화 배경속 주은래 부부사진이 너무도 인상적이였는데 오늘 또 찾아도  그 인상, 그 감수가 새롭기만 하다.   중남해 서화청에는 해당나무들이 많다. 1976년 1월 8일 서화청의 해당나무가 엄동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배태하며 화창한 봄의 꽃피기를 기다리는데 그들의 주인은 총총히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수십년래 해당화는 피였다가는 지고 지였다가는 다시 피여나며 방불히 자기들을 사랑해 주던 주인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것 같았다.   해당화와 주은래 부부사진 문자화 소개의 첫 부분이다. 너무나도 가슴을 치는 글이여서 나는 이 첫부분을 몇번이나 보고 또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노라니 제1차 국공합작 시절,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정치부 주임 주은래와 조선족 양림 상위 대장의 우정이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중앙쏘베트 강서 서금시절 중공중앙국 서기 겸 로전위원회 주임 주은래와 로전위원회 참모장 양림이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1930년대 후반 무한 팔로군판사처 책임 겸 국민혁명군 군사위원회 정치부으로서 조선의용대의 조직과 탄생에 불멸의 기여를 하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팔로군, 신사군에서 활동하는 우리 조선의용군에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40년대 초반의 중경시절 어느 한 축사에서 “자기의 학생시절과 황포군관학교시절 이후 혁명군대 시기에 모두 조선동지들과 같이 어울렸다”며 조선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그러면 경애하는 인민총리—주은래총리가 해당화 꽃속에서 환히 웃으시며 걸어 나오시며 이 나라 56개 형제민족을 포옹하며 나아가시는 것만 같다. 해마다 3월 해당화 피여 나는 시절이면 더더욱 주은래총리를 그리게 됨은 이 나라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생하는 인민의 총리이기 때문이리라.   2010년 3월 23일                  
480    강남의 무릉도원 예로구나 댓글:  조회:2020  추천:39  2010-03-21
                 강남의 무릉도원 예로구나                 1   춘3월이라 강남의 붉은 복숭아꽃 피여나고 붉은 복숭아꽃속에 리상의 세계—무릉도원을 만들어 낸 옛날 도연명을 떠올려 보지만 이런 무릉도원이 꿈만이 아닌 현실세계로 펼쳐졌다면 그대들은 믿을수 있겠는가, 이 글 따라 소흥의 후산풍경구로 가보면 모든것이 드러난다. 3월 18일 오후, 강남의 붉은 복숭꽃 피여나는 시절에 나는 아들애를 데리고 소흥 명승 중의 찬란한 명주—후산풍경구를 찾았다. 후산풍경구는 소흥시가지에서 동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해빛찬란한 평지에 솟아오른 산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미 글에서 쓴것처럼 오나라를 격파할 하나의 뜻으로 와신상담하던 월나라 왕 구천이 대신 범려를 후산에 보내 사냥개들을 길러 남산에서 흰사슴을 잡아 오나라 왕께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고장으로 알리여져 있다. 하긴 후산이 이름난것은 월나라 왕 구천 관련 전설 때문만은 아니다. 지혜로운 이땅의 옛사람들이 1000여년 력사속에 후산 동쪽의 바위들을 캐서 남긴 채석장을 기암괴석들로 들쑹날쑹한 인공풍경구로 만들었으니 이름이 난거지. 후산풍경구에는 장구한 세월의 채석과 대자연의 조화로 외바위, 기석, 깊은 못, 버섯 모양의 운석, 기반석, 일동천, 염라동, 방생지 등 40여자리 경관들로 이루어져 유람객들의 발길이 그칠줄 모른다. 허나 이곳 대자연의 경물들은 수없이 보아온 나에게 더는 신비의 동경물이 아니렸다. 3월 18일 후산풍경구를 찾음은 후산풍경구 해마다 복숭아꽃절을 이루는 붉은 복숭아꽃을 한번 제눈으로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가 아들애와 같이 후산풍경구 입구에 일어선 “강남무릉원” 입구석패 다섯 중문글자를 보고 흥이 도도했다. 강남무릉원이면 옛날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말하지 않는가, 도연명도 오늘의 강서 구강을 가리키는 고장 사람이고 강남사람으로서 그가 자기 상상속에 그려낸 무릉도원은 강남땅에 속함은 두말이면 잔소리. 무릉도원속 사람들, 무릉도원속 마을들은 상상속의 사람, 마을이련만 대자연속 무릉도원은 강남땅에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지금 쓰고있는 후산풍경구가 바로 그러하지 않는가.                                                          2    개탄이 절로 나갔다. 그렇게 수차 지나  다니면서도 언제 한번 여겨보지 않았고 보아내지 못했던 “강남무릉원” 다섯글자여서 그러했다. 강남무릉원 글자를 보는 찰나 뇌리를 스치는 강렬한 무엇이 있다. 그래 후산풍경구가 강남무릉원 글자 그대로 강남의 무릉도원이 옳지, 뒤늦은 수긍이지만 그 느낌은 새로왔다. 후산풍경구 구내에 들어서면 그 느낌이 보다 강렬해진다. 보시라, 세면이 푸르른 산으로 둘러있는 풍경구 평지는 복받은 쳔혜의 땅으로서 어딜보나 강남 춘3월에 피여난 붉은 복숭아꽃들, 희거나 연분홍 복숭아꽃 세계가 아니던가. 무릉도원 세계가 나의 앞에 너의 앞에 전설이 아닌 현실로 펼치여진다. 아름다운 미인으로 일컿는 요염한 꽃들이 진짜배기 미녀들처럼 여기저기서 추파를 보내 오는데 어느 미녀를 보고 웃어야 할지, 사진을 찍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미녀들 뿐인데 말이다. 그때 나는 싱숭생숭 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며 무릎을 탁 쳤다. 여느 때 다닐 때는 이곳 평지가 계화나무 등 강남 푸르른 꽃나무들이 우거진 푸르른 평지더니만 어느결에 소흥 사람들은 이 평지를 여기저기 인공언덕으로 평지로 가꾸고 이 평지에 화분속 매화를 방불케 하는 가지가지 복숭아나무들을 심어 완연 다른 모습으로 꾸미였으니. 이 모든것은 이 이태사이의 일, 덕분에 이곳 평지는 복숭아꽃들이 일매지게 피여나는 강남의 무릉도원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소흥 사람들의 앞서가는 경제의식에 탄복이 절로 난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2009년까지 소흥 후산도화절—복숭아꽃절 열네번 펼치였다고 하니 올해는 열다섯번째 해를 맞이한다. 3월 20일부터 한달간 펼쳐지는 열다섯번째 후산도화절을 위해 그 준비로 분망히 보내는 풍경구사람들 모습이 여기저기서 비껴온다. 해마다 복숭아꽃이 피여 날 때면 으례 그러하니 1998년 후산도화절 기간 유람객수는 연인수 20만에 달했다고 하지 않는가.                                                       3   중국사람들은 아름다운 붉은 복숭아꽃을 미의 천사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미인과도 같은 말이려니 미녀와도 같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 들뜨지 않을 사람 있을가 싶다. 하다면 이런 복숭아꽃 천지가, 무릉도원 세계가 언제부터일까, 관련 자료를 보면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이고 소흥사람이였던 륙유의 조상들이 소흥 서쪽가의 로허에서 후산풍경구에 이주해 와서 동, 서, 중, 전, 후 등 숱한 저택을 짓고 살면서 저택과 사위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후산의 절경—무릉도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절경속에 산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있고 못과 강물이 있고 수풀이 있고 사철 강남꽃들이 있다. 글자그대로 산, 수, 석, 꽃, 사찰 없는것이 없으니 도연명의 상상속 무릉도원이 예아닌가. 다름이라면 륙유네 선조들이 살던 시절은 도연명 시절보다 800년 쯤 늦은 후시절이고, 도연명이 리상속 세계로 무릉도원을 그려냈다면 륙유네는 현실속의 무릉도원을 펼치여 냈다는 점이라 할까. 무릉도원—후산풍경구는 월나라 왕 구천의 와신상담 시절 이야기, 륙유 선조들의 이야기가 깃든 전설의 고장, 력사의 고장이라면 이 고장에 력대 문인문객 수십명의 발자취가 스며 있다고 하니 인공으로 일궈낸 기암괴석들에 새겨진 바위글과 시문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후산은 이렇듯 이름난 풍경구여서 10여개 영화드라마 기지로 발돋음하며 드라마 “서유기”의 속집 촬영기지요, 41집 국가급 텔레비드라마 “월왕구천”의 촬영기지라 지금도 “월왕궁” 등 여러 경관들이 그대로 남아 풍경구에 이채를 더해준다.    4   후산풍경구가 도연명의 도화원기처럼 강남의 무릉도원이 옳음은 이색적인 복숭아꽃 개화에서도 단연 드러난다. 풍경구의 복숭아꽃 품종들은 다양한 자태를 보이는데 개화기는 선후 40일 이상에 이르며 가장 이른 복숭아꽃은 2월 하순에 벌써 활짝 피여난다고 한다. 이같은 2월 하순 개화는 화동지구, 강남지구들에서 두번 다시 볼수 없다고 소흥사람들은 말하니 이해 2월 9일 방룡남박사 부부네와 더불어 후산풍경구를 찾았을 때 벌써 금시 터질듯한 붉은 복숭아나무의 꽃망울들을 보고 놀라던 일이 금시런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2월 초순에 벌써 목련화 백련 선구자들이 환히 피여나고 산수유가 활짝 피여나니 후산풍경구만의 이런 특히한 자연현상은 소흥의 같은 지방들에서도 다시 찾아 볼수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 강남의 모든 자연요소를 다 가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후산풍경구를 강남의 무릉도원이라고 하는걸까. 그래서 그래서 회계산 백조락원 입구 나만의 꼬마 무릉도원에 이어 진짜배기 후산풍경구 무릉도원을 거니는 내가  아들애가 행복해 보이는 걸까. 그래서 그래서 도연명이 떠오르고 륙유가 떠오르며 상상속이 아닌 현실세계의 무릉도원이 눈앞에 펼치여 지는걸까. 그렇지 그렇지 후산풍경구는 강남의 전설속 현실속 무릉도원이라고 붉은 복숭아꽃을 주선으로 아름답게 아름답게 피여나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는거지.   2010년 3월 21일      
479    복숭아꽃 하면 도연명이 떠오른다 댓글:  조회:2305  추천:45  2010-03-19
            복숭아꽃 하면 도연명이 떠오른다     춘3월속 3월 14일 봄빛이 무르녹는 강남의 회계산풍경구 남하를 산책하는데 유난히도 어여쁜 붉은 복숭아꽃 한송이가 시선에 맞히여온다. 아이유~복숭아꽃 피는 시절이 오는구나, 너무도 반가운 나는 대우릉 남쪽가 백조락원 어구 철벽옥천으로 달려가니 철벽옥천의 호수를 덮은 붉은 복숭아나무들에도 가담가담 한두송이씩 피여나 붉은 복숭아꽃 시절이 곧 도래함을 알리고 있다. 그런 붉은 복숭아나무 아래, 내가 “꼬마 무릉도원”이라 이름지은 호수가를 산책하노라니 복숭아꽃  피여나는 무릉도원과 더불어 떠오르는 이는 이름난 “도화원기”속에 리상적인 동네—무릉도원, 무릉도원내 리상적인 세계의 꽃—복숭아꽃을 그려낸 옛날 도연명이다. 전원시인(田园诗人 )이요, 은일시인(隐逸诗人 )으로 널리 알려진 도연명(陶渊明  , 365~427)은 심양시상(浔阳柴桑 , 강서 구강시)출신으로서 동진말년으로부터 진, 송이 교체되던 시기에 생활한 사람이였다. 가문이 관료지주 가문이고 증조부 도간이 대사마를 지내고 조부와 부친도 태수 일급의 벼슬을 지낸데서 마땅히 유족한 가문이라고 해야겠지만 도연명이 태여난 시절에 이르러서는 가세가 기울어져 쇠락의 일로를 걷고있었다. 그런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소년 도연명은 뭔가 큰일을 해보려는 장한 포부를 지니더니 어언 어른으로 자라난 29살 때에 처음으로 강주제주(江州祭酒)라는 벼슬길에 올라 본다. 그러나 그 벼슬도 한 시절, 적성이 아니여서 사직하고 은퇴했다가 진군참군(镇军参军), 건위참군(建威参军)등 눈에 차지도 않은 벼슬을 두루 거치여 본다. 두루 거치여 보는 벼슬길이라 시간이 모두 짧기만 하다. 인생길에 비해 짧다는 말이지 이러구러 13년에 걸치는 벼슬노릇. 39살 때는 환고향하여 농사를 지어보나 “농사수입으로 자급하지 못하는데다가 어린 자식들도 많아 독에는 저장한 알곡이 없었다.”(“归去来辞”에서)생활의 핍박으로 팽택현령을 또 맡아보나 그 벼슬기간은 가소로울만치 80여일. 여기에는 이런 일화가 깃들어 있다. 팽택현이란 오늘의 강서 구강시의 한개 현을 말한다. 1983년 5월, 대학을 마친 이듬해 남방 겨레답사길에 강서 구강에 이르렀다가 려산에도 올라 보고 린근의 팽택현내 석화암 동굴도 유람한데서 팽택이 인상깊게 다가선다. 예나 제나 팽택으로 이어지니 도연명 그 시절 어느날, 의관을 정제하고 뵈알하라는 현리의 령이 떨어졌다. 아니 “내 어찌 쌀 댓말을 위하여 시골뜨기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 속이 울컥한 도연명은 그날로 사직하고 후세에 이름난 “귀거래사”(归去来辞)를 지으면서 은퇴를 굳히였다. 그때 도연명의 나이 41살이라고 하니 은퇴를 시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지으며 살아갔다. 했으나 귀농이란 농군생활이 순탄치가 않았다. 도연명의 논밭이 재해를 입었는가 하면 설상가상으로 44살 때는 뜻밖의 큰불로 가택재화를 당한다. “너희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헐벗고 굶주리게 하였구나.”, “늘그막에 더욱 배를 곯았네”,”술병드니 술방울 끊어져 있고 아궁이를 들다보니 연기조차 없구나” 등 관련 시구들로 보아 도연명의 농사생활은 말이 아니였는가 부다. 도연명은 이같이 궁핍한 생활난에서도 자기 재능인 글짓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오늘날 알려지는 “도연명집” 의 130여편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도연명의 작품은 거의가 시가로서 시가는 대체로 영회시(咏怀诗),전원시로 나누어진다. 시가들에는 그 시절 어두운 현실과 부패한 정치를 까밝히고 아름다운 생활을 지향하며 가난한 자를 동정하는 등등 내용으로 흘러 넘치는데 시가 주체는 전원시로 나타난다. 도연명의 전원시 세계를 보면 “전원으로 돌아 가다”(归园田居)시 한수만 보아도  이 시는 모두 다섯수로 이루어지는데 이 시에서 도연명은 전원경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은거생활에 대한 애착심을 그리였다. 그중 한 구절을 보기로 한다.   집뒤엔 느릅나무, 버드나무 그늘 앞뜰엔 줄지어선 복숭아, 오얏 머리드니 가물가물 저건너 마을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밥짓는 연기 골목에선 개짓는 소리 들리여오고 뽕나무 초리에선 닭이 해를 치네   도연명의 전원생활과 생활모습이 잘 묻어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전원으로 돌아오다”의 한 구절이라면 불멸의 “도화원기”에서는 도연명의 리상세계로 알려지는 무릉도원이 처음으로 펼쳐지면서 풍경이 이를데 없는 복숭아꽃과 활짝 핀 숲, 리상적인 농경생활이 잇달아 나타난다.   땅은 평탄하고도 넓었고 집들은 아담하게 줄지어 섰는데 기름진 논과 밭, 아름다운 늪과 못이 있는가 하면 뽕나무, 대나무들이 늘어서고 논밭가운데로 길이 동서남북으로 쭉 뻗었고 개와 닭이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정들과 녀인들이 입은 옷은 모두 동굴밖의 사람들과 다른바 없었는데 늙은이나 어린이들은 모두 기꺼운 얼굴들이였다.   보여지는 바와 같이 도연명의 “도화원”내 한단락, 이 세상 사람들은 착취가 없고 압박이 없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 로동으로 오붓하게 삶을 영위한다. 그야말로 평화롭고 자유로 넘친 세외도원이요, 현실 세상에 대한 대담한 부정이요, 비판이 아닐수 없다. 그런 무릉도원이 지금 나앞에 놓여있다. 이 무릉도원내에는 궁궐같은 철벽옥천이 있는가 하면 호수가 있고 호수속 정자가 있으며 사위가 수풀로 우거지고 호수가는 붉은 복숭아나무들로 덮히여있다. 붉은 복숭아나무들에는 선구자 꽃들이 한송이 두송이 피여나 미구하여 만개하리라고 예시하여 준다. 나만이 부르는 무릉도원, 붉은 복숭아꽃 피는 이 무릉도원을 거닐 때면 1500여년 전의 도연명시인이 떠오르고 시인이 그려낸 무릉도원이 환히 펼쳐진다. 나뿐이 아닌가 부다. 한국에서는 복숭아꽃하면 흔히 도연명을 떠올리고 도연명의 도화원기—무릉도원을 떠올리니 무릉도원속의 복숭아꽃은 리상적인 세계의 꽃으로, 신선화(神仙花)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복숭아꽃은 또 미인을 상징하는 장생불로의 령약으로 보아지니 그럴만한 연유가 한반도(조선반도) 삼국시절—신라 때 도화녀의 설화에서도 잘 알려진다. 복숭아꽃같이 아름다운 도화녀를 보고 임금이 첫눈에 반해 버렸다고 하니 복숭아꽃을 미인에 비유함은 그제나 오늘이나 동양인의 마음의 상정인것 같다. 허나 복숭아꽃이 나한테는 먼저 미인으로가 아니라 먼저 무릉도원으로 도연명으로 떠오른다. 내가 봄날의 강남 붉은 복숭아꽃에 무척이나 끌려듬은 이 때문이리라. 소흥땅에 해마다 철이 바뀌며 복숭아꽃 망울지고 피여나는 계절이 오면 무작정 달려가는 곳이 남하가 붉은 복숭아나무요, 붉은 복숭아 꽃들로 덮히는 백조락원의 쳘벽옥천이 아니던가. 오늘도 나는 회계산풍경구의 남하가와 남하가에 이어 백조락원 철벽옥천 무릉도원을 거닐어 본다. 그러면 무릉도원 세계를 처음으로 그려보인 옛날 도연명이 떠오르며 도연명은 나를 나만의 무릉도원—조용한 대학강의, 그 강남생활의 조용한 여가 산책, 조용한 겨레발자취 답사, 집필로 이끌어준다.  이 무릉도원 속에서 나는 누가 뭐라 하건말건, 누가 알아 주건말건 내 삶에 충실하며 주어진 내 삶의 한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   2010년 3월 18일                      
478    겨레발자취(37)-명주는 의천 대각국사님 구법 종착지 댓글:  조회:4516  추천:30  2010-03-17
【겨레발자취】(37)    명주는 의천 대각국사님 구법 종착지   1   천대산을 출발한 의천 대각국사님이 설두산의 설두사를 거쳐 오늘의 녕파—명주 이르고 다시 명주 근처의 아육왕사를 찾은것은 1086년 음력 5월 10일 경, 그로부터 근 1000년이 흘러 녕파시 지도에서 아육왕사를 찾아내고 녕파행에 오른것은 2009년 2월 4일의 일이다. 아육왕사가 어디인지 어느 방향인지 분간할수가 없어 녕파역 버스시발점에서 무작정 아육왕사 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니 아육왕사는 녕파에서 동쪽으로 고작 20여킬로미터 되는 녕파시 은현 동향보당 높은산 아래 기슭 큰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아들애가 버스에서 내려 동남불국이라고 불리우는 아육왕사 산문(山門)에 들어서니 시침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킨다. 산문내 좁다란 구간을 지나 사찰내에 들어서면 산문안 왼쪽구간이 환히 펼쳐지며 널다란 방생지가 나타나고 방생지와 접한 첫 사찰건물이 웅장한 천왕전. 천왕전 뒤 사찰이 대웅보전인데 천왕전과 대웅보전 사이 좁은 구간에 수령을 알수 없는 굉장한 두 그루의 고목—녹나무가 잇어 옛스러운 색채를 더해 준다. 아육왕사 안내글을 보면 아육왕사는 405년이 아닌 서진 태강(西晋太康)3년 , 즉 기원 282년에 처음 세워진것으로 나타난다. 예가 “팔길상지”(八吉祥地)라고 하는걸 보아 대단히 길하고 상서로운 땅으로 보이는데 사찰내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만들었다는 8만 4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그 의미를 더해준다. 이런 사찰을 기원 522년에 량나라 무제가 아육왕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남송시절에 벌써 “선원오산”(禪院五山)중 하나로 이름이 뜨르르하고 1983년에 국무원에서 전국 한족지구 불교중점사찰로 확정하니 아육왕사는 강남땅서 내가 본 그 어느 불교사찰들에  비해 사찰로의 방대한 규모를 갖춤이 돋보인다. 아육왕사 평면도가 사찰의 방대함을 잘 알린다. 먼저 보는 바와같이 담장밖 큰길쪽으로부터 산아래 쪽으로 방생지, 천왕전, 대웅보전, 사리전(舍利殿), 장경루가 차례로 들어서고 주체사찰들 오른쪽으로는 념불청, 사리단,선각당(先覺堂), 대비각 등이, 왼쪽으로는 조사전(祖師殿), 대단(大壇), 운수당(云水堂), 벽오헌(碧梧軒),승은당(承恩堂) 등 하많은 사찰부서들이 허리를 펴며 일떠섰으니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불교사찰은 강남에 온 이래 처음 보는 진풍경이였다.   2   나와 아들애는 사찰 이모저모를 부지런히 돌며 보고보았으나 말타고 꽃구경하기지  사찰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아내기는 자못 어려웠다. 더구나 의천스님이요, 의통스님이요 하는 고려명승들에 대해서 사찰내 스님들이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점잖고 유식해 보이는 한 젊은 스님과 아육왕사에서 왜 자기 사찰의 대외교류사도 모르는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네니 류례없던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구 파괴된 사찰을  개혁개방후 복구하고 지금도 의연히 복구중이여서 많은 력사자료들이 소실되여 말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리해할만하다며 북송과 고려시절, 고려의 명승들인 의통스님이나 의천스님들이 아육왕사와 관련교류를 가지고 천대종의 16대조사인 고려 의통스님은 아육왕사에서 입적한 줄로 안다고 하니 앞으로 이에 꼭 주의를 돌려 가겠다고 내심을 내비친다. 사실 귀국길 음력 5월 10일 경에 명주에 이른 의천 대각국사님은 고려로 떠나는 배를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시간도 있고하여 의천스님은 명주에서 20여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사찰—아육왕사를 찾았다가 일대  명승—대각회련(1009-1090)님을 만난다. 회련스님으로 말하면 계행에 뛰여난 운문종의 승려로서 북송시절 북송의 제4대 황제인 인종황제의 사랑으로 서울인 개봉 최초의 선종사찰로 알려지는 시방정인선원에 머물면서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인 당대의 문장가 소식 등과 널리 교류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러던 회련스님이 1085년 은퇴하여 강남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였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사명지방을 맡아 관리하던 사명군수가 회련스님을 아육왕사에서 만년을 보내도록 깊은 배려를  돌려 주었다. 바로 의천스님이 명주에 나타나기 1년전의 일이다.   3   아육왕사를 찾은 의천 대각국사는 깍듯한 례절로 회련스님을 대하면서 폭넓은 교류를 가진다. 음력 5월 12일 의천과 그의 일행이 명주를 떠나게 되자 짧은 기간이나마 지극한 정을 나눈 회련스님은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 귀국길 안녕을 바라는 시 한수를 지어 의천스님께 드리였다.   에잇 쯔쯔 상하동서의 네 귀퉁이를 끊어버리니 들은 자 그 누가 삶을 귀둥하게 여기랴 오직 계림에 승통스님 계시여서 해동의 큰 보위를 아끼지 않고 머리와 수염 깎고 가사를 입었도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법을 희롱하게 되니 하하하 동해 바다 큰배는 파도에도 안전하네   회련스님은 그러고도 마음을 다하지 못한것 같아 여러 고승스님들과 함께 명주를 떠나 귀국배에 오르는 의천 일행을 멀리멀리 바랜다. 아육왕사에서 동으로 더 나아가면 주산군도로 넘어가는 부두였다. 이밖에 북송 조정에서 파견한 주객원외랑 양걸이 시종 의천 대각국사의 안내를 맡아 나섰으니 의천스님의 일거일동에서 일대 대각국사의 위인됨을 깊이 느낄수가 있었다. 고로 양걸도 석별이 아쉬워 의천 대각국사를 찬미하는 꽤나 긴 시 한수를 지었으니 그는 시에서  “동방 고려국에 고승이 계시는데 순수한 도덕을 오래도록 입으셨”다고 쓰면서 그 시 해석에서 “1년 사이에 화엄종의 현수스님의 리론, 법상종의 자은 규기스님의 가르침, 선종, 률종, 천대종의 가르침을 통달하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4   실로 의천 대각국사는 1085년 음력 5월 2일 북송의 판교진(오늘의 산동성 교주시)에  등륙해서부터 밀주, 해주, 숙주를 거쳐 서울 개봉에 이르고 다시 대운하를 따라 회수, 사수, 진강, 운주, 항주를, 또 천대산, 설두산, 명주를 거쳐 귀국선에 오르기까지 북송에서 보낸 14개월 기간 50여명의 고승들을 만나 배우며 교류하며 항주일대 화엄종, 천대종의 중흥에 불멸의 기여를 했다. 그러다가 1086년 음력 5월 12일에 명주항을 떠나 관음성지인 주산군도 보타산에 이르고, 보타산에서 계절풍을 기다리며 며칠간 묵다가 드디여 보타산을 출발해 망망바다에 나서게 되니 중한 고대불교문화교류에 기여한 의천스님의 업적은  대서특서할만도 하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그젯날 명주로 불리운 녕파의 아육왕사를 찾아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스님의 발자취 따라 이제 강남을 떠나 산동 판교진으로, 하남 개봉으로, 강소 진강으로 달려 갈것이다.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의 중국내 발자취 기행, 연구문집을 기어이 펴내고야 말것이다.   2010년 1월 21일      
477    향로봉에 촐랑촐랑 봄물이 흐른다 댓글:  조회:1888  추천:26  2010-03-13
            향로봉에 촐랑촐랑 봄물이 흐른다     절강의 명산 회계산은 소흥, 제기, 승주 등지에 걸쳐 길이 200킬로미터, 너비 100킬로미터로 뻗으며 소흥 구간 정상부가 로봉선사 향로봉을 이루는데 절강월수외국어대 교수아빠트 6층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회계산과 흰눈을 그대로 떠이고 솟은 향로봉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 아름다움에 끌려 교수를 마무리기 바쁘게 홀로 향로봉 로봉선사 어구에 이르니 골골마다 촐랑촐랑 눈석임물—봄물이 흘러 내린다. 산아래 웅장한 로봉선사 구내를 지나 사면관음산 암자 구간에 이르면 향로봉 등반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한갈래는 오른쪽 산비탈을 곧추 톺아 산등성이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유람길이고 다른 한갈래는 회계산 서쪽 골을 따라 정상으로 이어간 유람길, 눈석이라고도 하고 눈석임, 얼음석이, 설수(雪水)라고도 한 봄물을 실컷 보자면 그래도 왼쪽골 유람길을 택해야만 한다. 사면관음전 암자 앞 골안을 가로지른 방생지를 내려다 보니 푸르다 못해 진록색을 강하게 띤 방생지 물이 어서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듯. (응 그래, 봄물을 따라 오르는 거야!)나는 방생지 푸른 물과 맘속 얘기를 주고 받으며 사면관음전 암자 구간을 벗어났다. 고느적한 골안 숲속길 아래 이즘 추위를 이겨낸 눈석임물이 제법 벽계수를 이루어 흘러내리고 흥에 겨운 뭇새들이 조잘조잘 노래를 불러 이 세상 선경이 예 아니가 싶다. 선경이 따로 있을까, 한해 사계절을 두고 내내 굳은 비가 내릴 때만이 맑디맑은 벽계수를 이루며 내리는 물이 때아닌 강남의 이른 봄에 눈석임이 봄물되여 흐르니 별멋 같다. 그 멋에 취해 나는 시간가는 줄도, 힘드는 줄도 몰랐다. 선경을 이룬 강남 특유의 골안 유람길은 동으로 이슥 나아가다가 한구간에서 남쪽으로 구비를 타며 방향을 바꾸어 버린다. 이곳 벽계수는 이 구간에서 평소 땅밑으로 흐르다가 유독 한두자 높이 후미진 바위 구간에 이르러 땅우로 다시 솟아 올라 바위위서 돌돌 떨어지며 자그만치 소를 이루기에 발목쉼을 하며 시원한 생수 마시기 제격이다. 이같이 자그마한 소가 오늘은 설수로 넘쳐나 촐랑이며 이 북방손님을 반겨준다. 그래 언제나 꼬옥 쉬여가며 샘물을 마시군 하던 바위소 구간이였지. 언제던가 그날도 골안따라  향로봉에 오르는데 바위 후미진 이곳 소에 나무가지와 나무잎들로 덮히여 볼썽스럽다. 그것이 안쓰러워 물깡치까지 말끔히 가셔주고 바닥과 주변을 샘물터인양 모래와  돌들로 깔끔하게 꾸며주니 정갈한 샘물터 울고 갈 판이다. 회계산의 또 하나의 샘물터 탄생이니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시골 시내물—벽계수와 벗하며 살아온 놈이니 어디를 가나 이러한 모습만 보면 동심이 샘솟아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살손을 붙여 주는데 회계산 향로봉 너머 동남쪽 골안따라 소리없이 흐르는 미미한 바위구간에 맑은 샘물터를 만들어주고 회계산 향로봉 서쪽 산등성이 중턱 옛 샘물터를 향로봉에 오를 때마다 꼭꼭 들리여 새 모습의 샘물터로 만들어 주고야 직성이 풀린다. 사방 수십리를 이루는 소흥 구간 회계산 골골마다 나의 손을 거쳐 소생한 샘물터들이 여러 개는 잘된다. 오늘만은 례외다. 눈석임물이 흘러 내리는 벽계수는 스스로도 기분나는 맑은 물이여서 손댈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바위소 구간을 지나 향로봉 정상에 오르니 정상의 사찰은 한해 소원을 빌러 온 유람객들로 차고 넘친다. 서남쪽 사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정상사찰은 험준한 바위무리 우에 일어서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르는것 같다. 이에 따르는 향로봉 서쪽 구간은 천하절경을 이루어 “야—야—”탄성이 저절로 터져 오른다. 나는 향로봉 서쪽 구간 산등성이를 따라 산을 내리다가 산중턱 아늑한 곳 샘물터에서 다시 발길을 멈추었다. 사방 수십리 소흥 구간 회계산을 두고 엄지손가락을 내들만한 샘물터인데 눈석임물이 스며든 샘물터는 정갈한 모습 그대로 맑디맑은 샘물이 넘쳐 흐른다. 일전에 볼때까지 만도 샘물은 샘물터 안에 움츠러진 모습의 샘물터더니 오늘은 완연 다른 모습이다. 조용히 흘러 넘치는 구간 어지러운 락엽들을 가시여 주니 맑은 샘물은 소곤소곤 조잘거리며 거침없이 흘러 내린다. 촐랑촐랑 봄물이 되여 흘러 내린다. 향로봉 골골 벽계수의 어머니 벽계수답게 내 가슴속에도 흘러 내린다. 흐르는 산간 벽계수를 보면 샘물터를 보면 맘이 끌리며 동심에 젖어듬은 왜서일까, 동심이란 실로 아름다운 부름이지. 인생 50대에도 마냥 동심이 동반하니 나 아직도 젊음에 사나봐. 정갈한 샘물속에 꿈많던 내 어린 시절이 비끼여 오고 걸어온 인생의 구비구비가 비끼여 온다. 산속 샘물에 내 모습 어리고 내 마음 어린다. 그 비낌과 어림속에 인생의 잡질이 가시여 지며 샘물같은 정갈한 마음의 승화가 이루어진다. 퐁퐁 솟아 오르는 샘물처럼 하냥 지칠줄 모르는 힘으로 한생을 살아가야 함을 이르기도 한다. 그런 마음 가짐에 향로봉 서쪽 산등성이 샘물터 오른쪽 아래 평지를 이룬 산등성이 바위 반석구간에 이르면 이 바위반석 우에 서면 회계산의 정상을 이루는 향로봉과 사방이 환히 안겨와 가슴이 그대로 활 열리여진다.  인생은 가슴을 열며 살아야 하는거지, 그러노라면 향로봉에 오르는 골안과 서남쪽 골안의 촐랑촐랑 봄물소리 그대로 들려 오며 가슴에 흘러 들어 올해 봄날속 눈석임물—봄물따라 거치여온 유람길이 정답기만 하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길이 정답기만 느껴진다.   2010년 2월 16일                
476    목련화는 울고 있다 댓글:  조회:4057  추천:34  2010-03-12
                   목련화는 울고 있다     3월 10일 , 장장 열흘만에 해를 보는 날이다. 이날 오전 2교시 교수를 마치고 아들애와 같이 시내에 가고 시가지 남쪽변두리의 아름다운 남하를 따라 산책하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목련화 백련의 현실에 놀라마지 않았다. 의례 곱게곱게 피여 있거나 희디힌 옷을 입으며 망울을 터뜨려야 할 백련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선참으로 활짝 피여나 생기로 넘치던 꽃들은 거의 전부가 누우렇게 죽어버리고 망울상태로 피여나려던 꽃망울들은 누르끄레 반점들이 박히여 말이 아니다. (오호, 3월 9일 새벽 최저기온이 령하 3도로 떨어지며 산간지대들에 큰눈이 내리더니 된 얼굼을 맞았구나. 목련화 백련들은 강남 령하의 추위를 피해가지 못하는구나.) 나는 사랑하는 자식이 뜻밖의 추위를 만나 떠는것처럼 가슴이 쓰려남을 어찌할수 없었다. 몇해전에 강남에 와서 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에서 교편을 잡게 된후 나는 수년을 하루와 같이 강남 사계절을 관찰하며 보이는 사계절 꽃들을 전부 사진에 담으며 강남꽃들에 무척이나 빠져 버렸는데 강남 목련화는 지극히 사랑하는 꽃들중의 하나였다. 고운 흰살결 안고 활짝 핀 목련화 백련은 순결하고 순박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에게 안기여 들었으니 나만이 아닌 한국의 경우 목련화처럼 시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꽃은 없다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강남에 온후 해마다 목련화 피여나는 계절이면 목련화들을 사진에 담고 또 담으며 진한 사랑을 물부어왔다. 올해 목련화 백련 첫 꽃을 대한것은 지난 2월 9일 방룡남부부와 우리 부부에 아들애까지 후산풍경구 산행유람에 나섰을 때였다. 해마다 2월 하순이면 피여나기 시작하여 3월 한달을 목련화의 달로 부를만치 내내 련달아 피여나는데 후산풍경구의 목련화 백련 선구자는 벌써 터진 망울 상태요, 피여난 꽃상태였으니 다른 곳에 비해 열흘이나 앞당기고 있었다. 그런고로 나는 강남의 이 봄에 목련화 개화에 무척 신경을 써왔다. 보편적으로 2월 20일 직후부터 피여나는 시가지 목련화들과 월수대 캠퍼스의 목련화들, 회계산 대우릉 구간과 회계산 서쪽아래 남하의 목련화들이 말그대로 순결하고 순박하고 우아한 모습 그대로 나의 디카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그런데 비극의 조짐이 알려진다. 3월 1일부터 강남 소흥의 날씨가 흐리며 때아닌 찬비가 때때로 내리기 시작하더니 며칠이고 지꿎게 끝이 없다. 3월 초순 후반엔 최저기온이 령상 3도로, 2도로, 1도로 떨어지다가 3월 8일엔 령하권으로 곤두박질한다. 강남으로 말해 겨울이 다시 돌아옴이니 3월 9일에는 끝끝내 최저기온이 령하 3도로 떨어지며 찬비가 눈으로 번지여 이곳 회계산을 망라한 산간지대에 큰눈으로 내리니 겨울꽃이 아니요, 추위를 이겨내는 동백꽃류나 매화류가 아닌 목련화는 령하3도의 된추위 강타를 이겨낼수가 없다. 보는바와 같이 남하가는 한두그루가 아니라 거의 전부의 목련화 백련들이 죽어있거나 울고 있다.  남하뿐이 아닌 소흥의 목련화들의 불쌍한 신세.   3월 11일은 기온이 20도를 웃돌아 화창한 봄날이 다시 강남땅을 찾아왔다. 사유로 오전 2교시 관련 교수를 끝내고 소흥시가지로 나가보니 수풀로 우거진 도시의 도시광장 목련화들도 그상이 장상이다. 그렇게도 3월을 장식하며 아름다운 자태로 발목을 잡던 목련화 백련은 생기를 잃고있었다. 얼굼이 경한 꽃이라해도 겉을 둘러싼 꽃잎들은 누르끄레한  반점들로 얼룩져 있으니 뜻하지 않은 한류—찬기운이 빚어낸 비애가 아닐수 없다. 불행중 다행은 목련화의 홍련들은 백련보다 개화가 조금 늦은데서 얼굼의 피해를  그다지 입지 않은것. 게다가 망울상태로 터지고 흐드러지게 피여나지 않은 백련들은 겉 꽃잎들이 피해를 입은 정도여서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자 상처입은 몸으로도 피여나는 강의한 모습을 보인다. 강남으로 말해 령하권은 한겨울의 된추위를 말하지만 이번 찬기운 남하추위도 바람막이 양지바른 곳이거나 청사들로 둘러싸인 캠퍼스내 백련들에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하여 이런 백련들은 다시 찾아온 화창한 날을 맏아 만개를 시작한다. 해도해도 이런 류의 목련화 백련은 전반 목련화중의 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올해 3월은 백련 목련화가 3월을 아름답게 덮는 달이 아닌 무더기 죽음의 달, 비애의 달, 울고있는 달이렸다. 내 그래서 마음이 쓰리고 3월 12일이후 또다시 찬기온이 몰린다니 마음을 졸이거니 울고있는 목련화여, 어서 상처 가시며 피여나렴아, 아니 천천히 피여나 다시 추위에 휘말려들지 말려므나,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여나 3월초순 후반의 비애를 가시여 가렴아, 속으로 기대 또 기대를 가져 본다. 겨울은 필경 새봄에 자리를 내기 마련이거늘, 찬기운은 필경 꽃샘추위에 지나지 않거늘……   2010년 3월 12일                      
475    이강훈 옹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을까? 댓글:  조회:830  추천:19  2010-03-07
    이강훈 옹이 전혀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을까?                   한국 이상경 교수     이강훈 옹이 전혀 근거없는 말을 지어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강훈 옹이 그러한 회고를 남기게 된 어떤 사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 어쩌면 ‘김경애’라고 하는 여자가 암살의 사주범이라고 지목된 김봉환의 근처에 있었을 수도 있으며 그 여성은 문학 여성이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24년과 1925년 상해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인물 중에 ‘김경애’라는 여성이 있다. 재 상해 일본 총영사가 자기네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사찰 자료에 의하면  1924년에 상해 동방예술학교에 재학 중이며 출신 지역은  황해도인 김경애라는 여성이 있다.(「상해 在住 鮮人 留學生 상황에 관한 건」, 기밀 제37호 ꡔ불령단 관계 잡건 - 선인의 부- 상해지방 5ꡕ , 1924년 2월 19일  또 1925년에는  “고려공산당 여자선전부원 김경애는 수일 전에 천진 천상리에 있는 김경삼과 비밀 회의를 한 뒤에 여운형 씨로부터 선전비 일백오십 달러, 조선돈으로 삼백 원을 얻어가지고 국경의 엄중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경성시내에 들어왔는데 엄중히 수색한 결과 인사동 ○○○○○에 출입한 형적이 있으나 그 종적을 분명히 알 수 없으므로 서대문서 고등계에서는 비밀리에 활동 중이라고 한다.”(「시대일보) 1925년 6월 3일) 는 기사가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이후 고려공산당 조직과 관련을 가지면서 김봉환과 관련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1929년과 1932년에는 용정 동흥중학교 교원인 박윤식의 아내로 ‘김경애’라는 인물이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되어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는 보도가 있다. (「간도 사건은 모 비사 관계인 듯, ꡔ중외일보ꡕ 1929-10-26; 「송봉욱 사건 연루자 석방, ꡔ중외일보ꡕ 1929-11-28 ; 「면소된 118명 금년 내 출감 불능」, ꡔ동아일보ꡕ 1932-12-29) 이 인물이 상해 시절의 그 ‘김경애’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김경애란 인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실제 강경애가 용정에서 동흥중학교 교원의 아내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자 사람들이 이 인물들을 모두 동일인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추측을 해 볼 수는 있겠지만  작가 강경애가 김좌진 장군의 암살 사건에 관련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474    겨레발자취(36)-설두산 설두사서 의천님 떠올려보다 댓글:  조회:4352  추천:28  2010-03-05
【겨레발자취】(36)   설두산  설두사서  의천님 떠올려보다        1   2009년 11월 13일, 항주의 현장님이 승용차를 몰고 소흥 절강월수외국어대로 왔고 우린 다시 녕파 봉화의 계구(溪口)진으로 달리였다. 계구진은 장개석어른의 고향으로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력사의 고장으로서 이 고장 사명산의 설두산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귀국길에 참배한 설두사가 있었다. 천대산에 이은 설두산 의천 대각국사님 발자취 답사라지만 설두사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난다.  절강으로 온지도 3~4년이 잘된다. 이 몇년래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설두사에 주의를 돌리였지만 설두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수가 없어야지. 그러던차 2009년 10월 5일 온가족과 더불어 두번째로 장개석고향 유람길에 올라 보았는데 장개석과 아들 장경국의 발자취 어린 설두산 산정의 천길 천장암(千丈岩)폭포와 묘고대(妙高臺) 부근 산정평지에 일어선 불교사찰이 설두사라고 하지 않는가. 설두사라면 근 1000년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참배한 사찰을 말하는데 려행사 유람팀을 따라 설두산에 오르니 그날 관광코스가 아닌 설두사를 돌아 볼 시간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설두사를 곁에 두고 지나쳐야 하는 그때 그 마음 어떠했는지는 나만이 알뿐이다. 두어시간을 달렸던지, 녕파시 구내 봉화시 계구진 설두산풍경구 정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때는 오전 11시경, 우린 설두산풍경구 정문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설두산행 관광버스를 바꾸어 탔다. 두루 문표만도 매인당 인민페 200원을 넘었으나 우린 개의치 않았다. 관광버스는 11킬로미터 산길을 한식경에 조여준다. 관광버스가 멈추어선 곳은 장개석과 송미령, 장경국이 일찍 거처, 산책, 휴식을 취하던 천길 벼랑가 묘고대 주차장. 묘고대와 묘고대에서 서북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폭포 관광명승지 삼은담(三隱潭)을 도보로 유람하고 돌아오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선 시점. 우리가 걸음을 멈춘 자리는 설두산 관광명승지의 산정평지로서 이곳 가까이에 천장암폭포와 묘고대가 있고 서안사변후 장학량장군 연금지와 중국내 제5대 불교명산 -- 미륵도장이라 불리우는 설두사 등이 있어 관광과 휴식의 리상적인 명소였다.        2   배가 촐촐해 난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어느 농가식당에서 대충 식사를 하고는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분장장개석과 분장 장개석비서와 함께 사진을 찍으니 기분이 별로이다. 이어 설두사 쪽으로 움직이니 “사명제1산”이라는 금빛편액이 설두사 첫 정문에 걸리고, 드디여 설두사를 찾았다는 흥겨움이 가슴을 들먹인다. 설두사 정문에 들어서니 또 우람진 담장이 앞을 막아선다. 담장에는 “미륵도장”(彌勒道場)이라는 중문 네 글자가 박히여 여기가 둘레 400킬로미터를 이루는 절강의 명산 사명산, 사명산은 280개 봉우리로 이루어지고 봉화 구역에만 70봉우리 ,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가 설두산임을 알리어 주고있었다. 이런 이름난 설두산에 미륵도장 설두사가 있으니 설두사의 사찰시작은 유구하여 불교가 봉화에 들어오던 동진시기 설두산 첫 “폭포원”으로 거스른다. 사찰다운 사찰이 수건된것은 기원 841년으로 알려진다. 그후 세월속에서 수차 수건을 거치며 소실되고 하다가 1163년에 다시 확건되어 남송시기 천하선종(禪宗)10사찰중의 하나로 떠오른다. 1288년과 1643년에 두차례 또 훼멸되였다가 청나라 순치년간에 복원, 20세기 60년대 전례없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다시 훼멸의 운명을 거듭하니 오늘의 사찰규모로 수건된것은 1986년이라 한다. 설두사의 흐름으로 보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천대산을 거쳐 사명산 설두사를 참배하던 1086년 여름은 999년 북송황제 송진종 조항이 “설두자성선사”(雪竇資聖禪寺)사찰편액을 하사한 뒤여서 설두사가 흥성의 일로를 걷던 시절이였다.        3   미륵도장 담장안에는 불교사찰의 기본을 이루는 미륵보전과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루(藏經樓)가 차례로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미륵보전 앞 하늘을 떠인 두 그루 은행나무 고목에 이어 나타나는 장경루 앞 두 그루 녹나무라 할까. 이 두 그루의 녹나무는 1936년 화청지—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장군이 도로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여 설두산에 거처(1937.1ㅡ9)할 때 늘 설두사를 거닐다가 심어놓은 녹나무였다. 장학량장군을 연금한 장개석도 고향 계구로 오면 늘 설두사를 거닐군 하였다나. 하나 또 하나 이어서는 불교사찰 구내를 벗어나니 사방이 훤히 트인 넓고넓은 미륵대불 구간이다. 천하제1이라는 미륵대불은 평지에서 언덕따라 산아래 더기에 자리잡았는데 멀리에서도 그 웅장함이 그대로 안겨 들었다. 그때는 이미 오후  3시를 넘긴 때라서 온 하루 흐리던 날씨가 거무칙칙 번져오다가 차가운 비를 내리며 11월 잡아 첫 찬기운이 극성하여 카메라를 든 손이 어찌도 시린지 사진한장을 찍기도 쉽지가 않았다. 미륵대불 앞 올리막 층계를 올라 미륵대불 아래에 서니 그 웅장함은 이루 형용할수가 없다. 미륵대불의 전체 높이가 56.74미터, 그중 좌불의 높이 33미터, 불상존안의 높이만도 10.5미터, 미륵대불 전체 차지면적이 6600평방미터를 이룬다니 그 규모의 방대함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다. 미륵대불의 밑부분은 3~4 계단 높이를 이루는 원형모양으로 되여 있는데 유람객들은 제일 밑변에서 실내계단을 따라 미륵대불—좌불 발치에까지 오를수가 있다. 좌불의 몸체도 엄청이여서 좌불은 1200톤의 강재결구와 석, 청동으로 완미하게 주조되여 황금빛을 뿌리고있었다. 미륵대불 발치에서 설두사 산정의 평지와 그 평지에 자리잡은 설두사를 내려다보면 그 장쾌한 풍경앞에 뉘 감탄하지 않으랴 싶다. 그만치 미륵대불은 산정의 평지 설두사보다 높이높이 솟아 있는데 미륵대불을 이루는 수치 또한 보다 감탄을 자아낸다.   ㅡ 미륵대불의 전체높이 56.74미터는 56억 7천만년후에 미륵이 성불(成佛)이 되여 내림을 나타낸다. ㅡ 미륵대불의 불상높이 33미터는 미륵의 신체 33층천(層天)을 나타낸다. 봉화는 미륵불이 전세(轉世)했다는 불가의 땅이여서 봉화에서 전해지는 포대(布袋)미륵이 원적(圓寂)한 날이 3월 3일이기도 하다. ㅡ 미륵대불을 받쳐주는 56송이 련꽃은 중화  56개민족의 조화로운 공존을 나타낸다.   관련 수치로 보는 설두산 미륵대불, 눈으로 보는 미륵대불의 웅장함---그야말로 장관, 신성, 웅위, 높고큼을 일체화한 천하 미륵대불의 으뜸이 아닐수가 없다.        4   나와 현장님은 미륵대불을 받드는 56개 련꽃의 유람대에서 설두산 산정의 평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을 다시 화제로 삼아보았다. 설두산 산정에서 설두사가 보이는 평지를 내려다 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우리는 하나같이 귀국을 앞둔 의천 대각국사님이 천대산의 불룡---진각사 지자대사 육신탑 앞에서  서원한 것처럼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 베푸신 로고에 보답하고자”결의로 가슴을 불태웠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진정 그러했으리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적이 있는 설두산 설두사는 절강 봉화의 사명산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설두산의 정상평지에 자리잡은  사찰이요, 절동(浙東) 제1명사찰(名刹)로 불리우니, 미륵의 도장으로도 이름높은 설두사거늘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이 어찌 참배하지 않으리오. 설두사에서 의천님 떠올려보는 마음 뜨겁기만 하다. 다시 보면--설두산 설두사를 한품에 안은 강남의 사명산은 둘레가 400킬로미터, 봉우리만 280개, 절동 이름난 관광성지로 받들리는 봉화 계구진과 설두산 주위는 사명산 뭇산들로 둘러있으니 사명산 남록에 위치한 설두산에서 봉화현성까지는 서북 15킬로미터요, 녕파까지 서남 39킬로미터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설두사에서 녕파, 그젯날 명주까지 39킬로미터 거리도 도보로 행했다니 그 옛날, 그 모습이 우렷히 안기여 든다. 어느덧 오후시간도 4시를 가리킨다. 설두산 설두사를 떠나야만 하는 우리는 찬바람, 찬기운 속에서 거닐다가 산아래 설두산 정문앞에서 다시 기념사진을 남겨서야 직성이 조금이나마 풀리는것 같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설두산에 올라 볼까, 언제 다시 설두사에서 설두사 참배 의천님 떠올려 볼까~~그러노라니 가슴이 아련히 아리어온다.   2010년 1월 13일            
473    행적과 수필로 보는 녀류작가 강경애 댓글:  조회:811  추천:21  2010-03-05
       행적과 수필로 보는 녀류작가 강경애               한국 이상경 교수     1. 강경애는 1931년 봄에 처음으로 간도로 건너갔다.   김좌진 암살 사건은 1930년 1월에 발생하였고 강경애는 고향 장연에서 거주하다가 1931년 봄에 처음 간도로 갔다. 이 사실은  강경애 자신의 진술 세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간도풍경」(신여성 1932년 1월)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2)「간도를 등지면서」(동광,1932년 8월)   그때에 내 머리에 얼핏 떠오르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던 작년 이 때다.   3)「두만강 예찬」(신동아,1934년 7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 때이었다.   이상의 세 자료로 볼 때 강경애가 간도가 처음 간 것은 1931년 봄이다. 그러므로  김좌진 암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에 있었을 수가 없고 이 사건과는 무관하다.  강경애는 1931년 봄에  처음으로 간도로 갔다가 1931년 9월 발발한 만주사변 등의 이유로 하여 1932년 6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년여를 장연에서 머무른 뒤 1933년 9월  다시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계속 거주하면서 작품 창작을 하였다.      2. 1931년 봄 이전에 강경애는 고향 장연에 있었다.   강경애가 1931년 봄 간도로 가기 이전에 고향인 장연에 있었음은 당시의 동아일보 보도 기사와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의 서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강경애가 근우회 장연 지회에서 서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동아일보(1929.6.17) 보도 기사 근우회 장연 지회에서는 지난 10일 오전 아홉 시 경에 회원 이십여 명(...)이 본읍 향교 대성전 뒷동산에 회집하여(...) 순서에 의하여 동회 서무부장 강경애 씨의 의미심장한 개회사가 있은 후   2) 근우회 장연 지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1929.10.3-7)에  투고한  글의 서명   독자투고로 발표한  「염상섭 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에  ‘장연 근우회 지회 내 강경애’라고 서명     3) 장연에 있으면서 조선일보(1931.2.11)에 발표한 글의 서명   「양주동 군의 신춘평론 - 반박을 위한 반박」에 ‘장연 강악설’로 서명                          
472    김봉환이 정말 변절한 인물일까? 댓글:  조회:1045  추천:26  2010-03-05
               김봉환이 정말 변절한 인물일까?     김송죽선생의 글 “강경애 명예원상복구라니? 믿을수 없다”에는 이런 한단락의 구절이 있다.   나는 강석누님이 보관해 온 김좌진의 재종제인 “시야 김종진전”(이을규)을 보았는데 거기 강경애는 김좌진암살을 책동한 김봉환의 애인이라 밝혀졌고 김봉환이 할빈 일본령사관에  갇혔다가 강경애와 같이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한국 전 광복회 회장 이강훈 옹의 회고에도 이런 구절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말하고있는데 “이강훈의 회고”(1984)의 관련 구절은 이러하다.   일본제국주의를 논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했던 김봉환이 1929년 겨울의 어느날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 령사관원에게 체포되었으나 강경애, 마쓰시마 세 사람의 밀약으로 즉시 석방되었다.   여기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당년 김좌진장군의 측근이였던 이을규나 이강훈은 하나같이 김봉환을 변절로 보거나 김봉환과 강경애, 마쓰시마를 서로 이어놓고 있다. 그 시절 김좌진장군 측근들이 이렇게 보았으니 후에 각기 회고들에서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를 증실할만한 일제측 자료나 조공당 측의 문헌자료들이 보이지 않고 이을규와 이강훈의 말들 뿐이여서 이런 주장은 유력한 탄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다면 이을규나 이강훈 옹이 김봉환 변절근거는 어디에 있는것일까? 이들의 근거는 김봉환과 강경애가 할빈령사관에서 나오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것과 김봉환이 마쓰시마와 조용히 마주 앉아 담화하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느때, 누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조직에 회보되였다는것도 말하지 못한다. 이런 근거로 김봉환이 변절했다고 찍어 말하는것은 시기상조가 아닐수 없다. 왜서, 이는 이강훈 옹의 회고를 보면 여러 곳에서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첫째는, 김봉환이 가령 할빈에 갔다고 할때 할빈령사관 측에서 김봉환을 어떻게 알아보고 체포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강훈 옹의 회고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이을규가 말하는 이른바 1926년 4월의 신민보사건은 김봉환과 강경애가 반일의 글을 종종 발표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고 이강훈은 그로부터 3년이 더 지난 1929년 겨울이라고 하면서 김봉환을 끌어들이니 크나큰 모순을 띠고있다.   여기에 또 “일본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나온” 김봉환이 “동지들을 비롯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동지들로부터 백안시 당하였다”는 이강훈의 회고가 이어진다. 이 말도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좌우익 모든 동지들로부터 백안시 당한 김봉환이 어떻게 같은 조직 조공당원인 리복림(박상실)을 사주할수 있었을까? 백안시 당했다는 자체가 김봉환의 “변절”을 알고 있다는 말인데 리복림이라고 모를리 있을까? 이런 전제로 보면 “백안시”와 “사주”는 하나의 모순이 아닐수 없다. 백안시와 엄청 모순되는 점은 뒤에 있다. 김좌진장군이 암살된 그날 밤으로 장군 측근 치안대는 해림 역전근처에서  조공당 만주총국 산하의 화요파 한 잔존기관을 돌연습격하여 김봉환과 다른 한명을 잡았다는것이 바로 그러하다. 좌우익 모든 동지들로부터 백안시 당했다는 사람이 자기 소속당 화요파의 기관에 버젓히 있었다는 말이다. 모든 이들한테 백안시 당한 사람이 리복림을 사주하고 자기 당내 기관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리해할까? 모순되는 말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김좌군장군 측근 치안대가 그날밤으로 김봉환과 다른 한명을 체포했을 때 문건들을 압수했다는 것도 큰 모순으로 남는다. 김봉환 개인이 일제놈들의 사촉으로 리복림을 사주할 때 문건을 작성할수가 있었을까, 역시 믿어지질 않는다. 그 어떤 일제측, 조공측 관련자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여러가지 모순들은 김봉환의 이른바 “변절”이 성립되기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때나 그후이나 조공당이나 중공당 시절 적들에게 체포되였다가 나온 사람들에 대한 조직의 심사가 자못 엄했다. 조직의 심사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그 어떤 직무를 맡고 활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봉환은 엄연히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령을 받고 리복림과 접촉하며 그에게 김좌진장군 암살이란 특수과업을 맡긴다. 해림역 근처의 비밀거점에서 김봉환 등이 치안대에 의해 체포되고 관련문건들이 압수됐고 “이번의 흉계는 그네들”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가 꾸미였고 박상실이 김봉환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젠 무엇이 조금 알려지는것 같다. 김봉환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 출신으로서 조공당의 지령으로 리복림을 움직이였지 일제측의 사촉으로 리복림, 즉 박상실을 사주한것이 아니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모순체들로 김봉환과 이른바 강경애를 변절로 몰아가는것은 때이른 결론일수 밖에 없다.   2010년 2월 6일                  
471    신민보사건 시절 강경애는 일개 문학소녀 댓글:  조회:831  추천:20  2010-03-05
      신민보사건 시절 강경애는 일개 문학소녀     1927년 3월초 신민보사건을 김봉환, 강경애와 련계시키고 이 시기 강경애를 소설을 쓰는 초학자라고 하면 이는 력사진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도 모르고 하는 주장이 아닐수 없다. 강경애의 행적과 그의 작품세계를 해아려보면 신민부원들이 신민부사건을 회고했던 사건의 그때 그 시절 강경애는 짤막한 시 세편밖에 발표하지 못한 일개 이름없는 문학소녀에 불과했다. 그중 시 “책 한권”은 “금성”(1924.5)에 발표되고, “가을”은 “조선문단”(1925.11)에, “다림불”이 “조선일보”(1926.8.18)에 발표되였다. 아래 조선일보에 발표된 시 “다림불”을 보기로 하자.   어머님께서 오늘 저녁 나에게 금빛 은빛으로 단장한 옷을 주시려고 다림불을 피우시나요   어머님 모르십니까 저 동쪽 하늘가로 어젯밤 눈 감고 그리워하던 꿈같은 달빛이 새어흐름을   그러면 어머니 다릴 옷일랑 밤꽃의 그윽한 향내로 고이고이 달빛을 실어다 다려 뿌린 후 주세요   이 시를 두고 한국 강경애연구 권위인사인 이상경교수는 “다림불을 보면 강경애는 아직 그렇게 일본 영사관의 취체를 받을 만한 사상적 글을 쓸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도 김봉환과 동거했다든지 공산주의자였다는 말은 근거도 없다”고 찍어 말한다. 한 문학소녀의 감상적 색채가 그대로 다분히 풍겨나는 시, 이 시절 강경애의 모습이다. 소설도 모르던 시절의 강경애이다. 1924년 9월에 강경애는 자기가 다니던 서울 동덕녀학교를 중퇴하고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갔다. 귀향후 강경애는 언니가 경영하는 서선려관에 있기도 하고 최문려씨의 집 사랑방에 류숙하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몰두한다. 이 모습은 이규희, “강경애 연구—빛과 어둠의 절규”, 이화여대 대학원, 1974)에서 그대로 보여진다. 지난세기 20년대 중반 이 시절 강경애는 장연에서 문학공부를 하면서 혹간 신문잡지에 감상적인 짤막한 시를 투고(상기 시 3편이 그러함)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절의 문학공부를 두고 강경애는 훗날의 수필 “고향의 창공”(“신가정, 1935.5)에서 그때의 나는 “문예란 말만 들어도 입을 헤하고 벌리던 그때라”고 쓰면서 유치한 문학소녀 시절의 자기를 회상하고 있다. 할진대 이른바 1926년 4월 신민보사건 그때 “강경애가 소설을 쓰는 초학가(강석누님이 “소설을 쓴다는 에미나”라고 했다는 글)라고 하면 이는 훗날의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는 김송죽선생만을 나무릴 일만은 아닌것 같다. 한국의 신민부시절 관련 부원들이 그렇게 말하고, 한국 작가 이이녕이 “민족 반세기사—일제하 36년 독립운동실록 17”(동도문화사, 1984년)에서도 김좌진장군을 측근에서 보좌했다는 이강훈, 정환일, 임기송 등을 인터뷰하고 쓴 글에서 신민보사건을 거들면서 그때 강경애가“<혜성>이라는 잡지에 <어머니와 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여류소설가”라고 찍어 말한다. 이이녕이 말한 그때는 1929년 5월 하순 이전을 가리킨다. 조금만 강경애를 알아도 강경애의 소설 “어머니와 딸”이 1931년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혜성”에 처음 련재했다는 것을 상식쯤은 알텐데 그렇지 못하니 유감천만이다.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 암살사건과  이어놓으니 력사는 외곡되고 강경애는 그들에 의해 그들의 시야에서 친일이라는 천길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강경애에 조금만 주의를 돌려도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그때 강경애는 아직 작가로 알려지지 못하고 황해도 장연에서 문학공부를 하는 한 문학소녀라는것을 알수 있으련만…   2010년 2월 5일          
470    이강훈 옹 등의 강경애 회고 흔들린다 댓글:  조회:947  추천:24  2010-03-04
        이강훈 옹 등의 강경애 회고 흔들린다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를 극력 모독한 한국 전 광복회 회장 이강훈 옹의 회고는 언제일까, 한국 이상경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1969년으로 알려진다.   강경애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김봉환의 애인입니다. 그런데 강경애가 공산당이고 김봉환도 공산당입니다. 그러한 사이인데… 이때 김경애가 찾아 왔어요.   이 회고는 이강훈 옹이 1969년에 김좌진장군 암살과 관련해 이정식교수와의 면담시 최초로 언급한 것이라고 이상경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 면담은 이정식 면담, 김학준 해설로 1988년에 민음사에서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으로 출판되였는데 이정식교수가 면담자료를 정리하여 출판한 모양이다. 그런데 면담절록을 보면 강경애와 김경애가 헷갈려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강훈 옹은 이 면담 글을 계기로 그후 회고록, 자서전 등을 썼다고 하는데 이런 회고록 등에서 하나같이 강경애로 못박게 된다.  이상경교수의 일가견이다. 문제는 “회고가 반복되면서 좀 더 자세한 사항을 덧붙이”고 “그럴수록 그것은 사실과 어긋나게 된다”는 지적이다. “항일독립운동사(1974)”, “내가 밝혀야 할 두 악한(1992),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 등이 그러하다고 한다. 이상경교수는 계속하여 “김봉환-강경애의 관계에 대해 근거로 제시되는 자료는 과거 신민부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회고뿐이고 그중에서도 이들이 마쓰시마와 관련되였다고 하는것은 이강훈 옹의 회고뿐이다… 김봉환과 강경애 그리고 마쓰시만의 관계에 관한 진술은 이강훈 옹의 회고 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김송죽선생이 제시한 자료—“나는 강석누님이 보관해 온 김좌진의 재종제인 <시야 김종진>(리을규)를 보았는데 거기에 강경애는 김좌진암살을 책동한 김봉환의 애인이라 밝혀졌고 김봉환이 할빈일본령사관에 갇혔다가 강경애와 같이 나오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강경애 명예원상 복구하니? 이럴수 없다)도 포함된다고 해야 할것이다. 하다면 이강훈 옹의 김봉환, 강경애 설은 어떤 경우에 떠올린 설일까? 이상경교수는 그 경우가 신민보사건에 관련된다면서 앞의 글에 언급한, 신민부원의 회고 -- 1926년 4월 설을 이강훈 옹은 1929년으로 보면서 신민보의 허성묵 등 신민부원들이 체포된 일과는 달리 1929년 겨울에 마쓰시마와 밀약을 했다는 쪽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강훈 옹은 “공산당에 암살당한 김좌진 장군의 최후”에서 김봉환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그는 “姜慶愛라는 여류 문인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29년 겨울의 어느날 할빈으로 갔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다. 그 당시에 松島라는 영사관 경찰서 경부가 해림에 있는 강경애를 꾀어내 할빈 영사관에 감금된 김봉환과 만나게 했다. 송도 자신을 포함한 이 세 사람이 1시간 동안 밀회를 한 결과 김봉환은 그 즉시 석방되어 애인과 함께 해림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6~7년의 징역을 살아야 될 형편에서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나온 그는 동지들을 비롯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동포들로부터 백안시 당하였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나온” 김봉환이 “동지들을 비롯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동포들로부터 백안시 당하였다”는 부분이다. 설령 이 말이 옳다고 가정할 때 김봉환이 자기 부하 박상실을 사주해 김좌진장군 암살을 의뢰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냐면 김봉환의 변절을 알고 백안시 한 조공당 화요계 동지들이 김봉환을 믿고 그의 사주에 따랐다는것은 믿음성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의 결단으로 행해졌다고 할 때 일제측의 사촉으로 김봉환이 박상실을 사주했다는 설은 성립될수도 없지만도 말이다. 또, 이강훈 옹이 말하는 마쓰시마가 김봉환과 강경애를 체포하고 어쩌고 어쩌고 할 때는 우리가 말하는 후일의 녀류작가 강경애는 황해도 장연에서 문학공부를 하면서 근우회 활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강훈 옹의 관련 언급을 개괄하면 “일본제국주의를 논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했던 김봉환이 1929년 겨울의 어느날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 영사관원에게 체포되였으나 강경애, 마쓰시마 세 사람의 밀약으로 즉시 석방되였다”(이강훈의 회고, 1984)이다. 이런 회고는 “이강훈 력사증언록”(인물연구소, 1994)에도 실려 있고, 비슷한 회고들도 여라가지가 있다고 이상경교수는 말한다. 그러나 상기 이강훈 옹의 회고들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의 결단과 지시에 따라 리복림(박상실)이 행했고, 김송죽선생도 리복림이자 박상실을 접수할 때 이강훈 옹의 주장은 발을 붙일수가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또, 이밖에도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사건과 무관하다는 넉넉한 자료들이 있지 않은가. 강경애가 1929년 5월부터 장연에서 근우회 장연 지회 서무부장으로 활동했다는 1929년 6월 17일부 동아일보 기사가 있고, 조선일보(1929.10.3—7)에 독자투고로 발표한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의 길>을 읽고”에 “장연 근우회 지회 내 강경애”라는 서명이 있는데다가 중국 만주에, 북간도라 불리운 연변 룡정에 처음 온것이 1931년 늦은 봄날이라고 강경애 자신이 쓴 수필 3편이 있다고 할 때,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것이 너무도 잘 알려지고 있다. 강경애는 중국으로, 북간도로 처음 들어서던 시기를 수필 “두만강 예찬”(“신동아”,1934.7)에서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었다”고 분명 밝히였었다. 여기까지 이르고보면 이강훈 옹의 김봉환, 강경애 관련, 마쓰시마 와의 비밀관련은 설득력이 없음을 알수가 있다. 이들 일을 누가 어떻게 알게 되였는지에서도 이강훈 옹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 신빙성이 없다고 이상경교수는 말했다. 그럼 김봉환이나 강경애가 자기로 3자관계를 말했을까? 아니면 마쓰시마가 자기가 시켰다고 말했을까? 여기에 대해 이상경교수는 “이강훈의 회고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은 불보듯이 뻔하다. 누군가 그들이 밀약하는 장면을 목격했거나 영사관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면 (김봉환이 강경애와 같이 령사관에서 나오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김송죽선생의 글) 조공당 만주총국이나 김좌진장군 측에서 그대로 둘리가 있을까? 이를 알면서도 관련 조치를 강구하지 않다가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이 일어나서야 장군의 부하들이 김봉환을 체포하고 죽였다는것은 진실치 못하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른바 변절 강경애는 어떻게 되였다는 정보조차 없다는것도 그러하다. 이 글을 더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강훈 옹 등의 회고는 설복력이 없고 믿을바가 못되며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의 암살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렇지 않는가.   2010년 2월 5일
469    드러나는 이른바 \"신민보사건\"의 진상 댓글:  조회:981  추천:19  2010-03-03
          드러나는 이른바 신민보사건의 진상      김송죽선생은 “신민부 신민보사건”이란 조글로 한편의 글에서 “1926년 4월에 들어와서 항일단체인 신민부는 경을 치르렀다. 일본의 할빈령사관에서 김일성(金一星)이와 강경애가 써서 신민보에 낸 글이 반일적이라고 트집잡고 흑륭진에 있던 신민부의 기관보를 돌연습격하여 선전부 위원장 허성묵과 경사국장 리광진을 체포해갔다.”고 하면서 결과 “이 신문은 창간 한돐만에 활동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쓰고있다. 허나 알고보면 신민부 신민보사건의 진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1927년 3월 10일부 “동아일보”에 의하면 신민보사건은 1926년 4월이 아니라 1927년 3월 초로 밝히여 지고있다. 이 3월 10일 “동아일보”는 또 허성묵과 리광진만이 체포된것이 아니라 신민부사람들 다수가 검거되였다고 하면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여 적극적행동을 점점 개시하는 모양이며 따라서 삼월일일은 oo기념일로서 축하적 회합을 행례로 하는 기회를 잃지 않고 일대검거를 하려고 할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는 … 신민부 선전부장 겸 신민보 주간 허모외 11명을 검거”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동아일보” 이날 신문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3월초 체포한 사람이 허성묵, 리광진 둘만이 아니라 다수라는 점, 신민보 돌연습격 목적은 신민부의 “적극적 행동”과 3월 1일 “축하적 회합”과 관계된다는 점이다. 이는 또 신민보사건은 그들 독립지사들이 말하는 강경애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바 신민보 그때의 관련기록들에는 “강경애는커녕 김봉환의 이름도 찾아볼수가 없다”고 한다. 이를 두고 한국 이상경교수는 이렇게 밝히고있다. “<신민보>는 1925년 4월—7월까지 순간(旬刊)으로 하여 12호가 나왔다. 그중 중요한 기사의 목록이 일제측의 자료로 남아있다. 그 자료에 의하면 주요 필자는 허성묵, 박두희, 최창익이며 강경애는커녕 김봉환의 이름도 없다”면서 그 근거를(新民府 幹部 崔昌益 取調 狀況ニ 關 スル件), 京城鐘路警察署張,  ꡔ京鍾警高秘 第12939号ノ1ꡕ1925年11月10日.)에 두고있다. 이상경교수는  최창익은 신민보 창간호의 사설을 쓴 신민보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국내에 들어왔다가 1925년 10월 14일  잡혀서 취조를 받고 11월 11일에 방면되었다고 밝힌다. 이상경교수는 한국 강경애연구 권위인사로서 계속하여 신민보를 추적하면서 1926년 5월 21일에 신민보 제4호가 나왔는데 제4호 사설에 실린 “혁명적 정당과 민중운동 본위”라는 글이 불온하다는 일본경찰서의 보고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자료출처는“중국 순경에게 잡힌 신민부원 10명 공판, 민족운동을 적화에 전환 활동, 신의주 법원에서 개정”, “동아일보”ꡕ 1927년 8월 3일부 신문이다. 신민보사건의 공판소식을 전하는 관련 기사에 의하면 허성묵이 사회주의쪽과 련계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있다. 동아일보 1927년 8월 3일 이날 신문은 상기 제목 글에서 “허성묵은 …1923년에 간도로 들어가 용정촌을 중심으로…재작년 3월 13일에 … 신민부를 조직하고 … 선전부장의 임무로 기관지 전후 16호나 발행하여 해와 각처와 조선 내지 경성 평양 등 중요 도시의 각 단체에 수없이 발송한 사실을 일일이 진술하였다. … 허성묵은 국내외에 선전을 주로 하는 동시 ○○운동을 더한층 사회주의 운동과 같이 하자는 의견으로 노동 로국(露國)의 간부와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그때 마침 곽송령의 반란 기회로 그를 후원하기로 하여 당시 북경에 부하 김병희를 파견하고 비밀히 활동한 일이 있었”다고 쓰고있다. 이것이 1927년 3월초 신민부 신민보사건의 진실한 진상이다. 이로부터 보면 한국 1954년 신민부원 생존자 공동회고가 말하는 1926년 4월설은 틀리며 그들이 말한는 사건진상과 다르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들 신민부원 생존자 공동회고가 그대로 1954년 4월 기록으로 된 “신민부의 약사”에 오르고 독립운동사 관련 책들에 오르고 김송죽선생도 따라서 쓰니 신민보사건을 김일성(金一星)과 강경애의 관련 반일글에 돌리려 한 주장이 엇나갈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보다 한심한것은 신민부원의 1926년 4월설 회고와 이강훈의 회고가 서로 어긋나고 서로간에 모순을 띠고있다는 점이다. 이강훈은 “이강훈의 회고”글 “공산당에 암살당한 김좌진장군의 최후”(“북한”1984.6)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논박하는 글을 종종 발표했던 김봉환이 1929년 겨울의 어느날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었으나 강경애, 마쓰시마 세사람의 밀약으로 즉시 석방되였다고 말한다. 이제 다른 한편의 글에서 전문 론하겠지만 이강훈은 김봉환, 강경애가 문제의 글을 썼다는 신민보사건 시기를 1929년으로 다르게 보고있다. 이쯤하면 신민부 신민보사건의 진상이 관련 “동아일보”기사와 한국 이상경교수의 깊이있는 연구를 통하여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는것을 어렵사리 보아낼수가 있다. 따라서 김봉환, 강경애의 문제의 글 설법은 자연히 그 의미를 잃게  된다.       2010년 2월 5일              
468    인생소감--개학 첫날 한국 력사문화 가르치면서 댓글:  조회:4928  추천:28  2010-03-02
【인생소감】     개학 첫날  한국 력사문화  가르치면서     어제 3월 1일부터 강남에 찬비가 내리며 기온이 뚝 떨어지지만 개학 첫날부터 중국애들에게 한국 력사,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내 마음 후더워만 난다. 정기 흐르는 맑은 두눈으로 교단의 나를 응시하며 한국 력사, 한국 문화에 귀를 기울리는 중국 대학생들, 그애들을 대할 때면 온 몸에 샘솟는 새힘을 느끼며 청춘에 사는 기분으로 둥둥 뜬다. 벌써 몇해던가, 은사님 류은종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강남땅 절강월수외국어대에 와서 대학의 교단에 나선지 엊그제 같은데 어언속에 햇수로 5년철—만 4년해를 잡아가니 정말이지 흐르는 세월이 살같기만 하다. 속셈을 터놓아 강남땅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생활 신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학졸업후 근 30년세월 꾸준히 우리 력사와 씨름해 온 나로서는 하나의 고역으로 느껴지기가 일쑤였다. 춘하추동 많은 시간을 한국어교수에 바쳐야 할 때면 그만큼 우리 력사연구와 글쓰기를 멈추어야 하니 흘러버리는 세월이 아까워 죽겠다. 살기 위한 마음에 없던 선생노릇이여서 그러한가부다. 하면서도 자기 글과 말도 아닌 외국어—한국어 글쓰기와 말을 배우겠다며 시간마다 선생의 교수를 명심하는 중국애들을 볼 때면 흔들리던 마음이 누그러지며 저애들을 위해서라도, 중한 문화교류의 현장에서 뛸 저애들이 앞날을 위해서라도 한국어교수를 잘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가슴을 불태우군 하였다. 그런 속에 한해 또 한해가 흐르며 만 4년철을 잡더니 오늘은 2010년의 봄철 새학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개학 이튿날인 3월 2일 오늘도 하늘은 찌뿌둥 자주 찬비를 내리 드리운다. 돌이켜 보면 강남의 한국어과 대학교수생활에서도 가장 신나는 일은 그래도 한국어열독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일인것 같다. 한국 조선시대의 력사인물과 력사사건속에 파묻혀야 하는 한국어열독과는 언제든지 싫은 줄 모르겠는데 중국애들에게 500여년 조선사의 가장 위대한 임금—세종대왕,  500여년 조선사의 가장 위대한 애국장령 이순신장군,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을 격살한 의사 안중근, 광복의 그날 바라며 한생을 싸운 훗날의 상해림시정부 주석 김구선생, 한국의 첫 녀서예화가, 한국의 제일 어머니로 불리우는 신사임당, 조선이란 새 나라를 세운 조선조의 첫 임금—이성계, 한글운동의 탁월한 선구자 주시경선생 등등 쟁쟁한 분들을 가르칠 때면 진짜 성수가 난다. 이에 따라 한국어열독과를 통해 배운 조선시대의 인물들속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요, 한국의 제일 어머니 신사임당이요, 한글의 중흥시조이기도 한 주시경이요 하면서 졸업론문으로 써내는 애들이 늘어가니 대학의 교단에서 한국어과 교수로 나선 마음 그지없이 뿌듯하기만 하다. 마음 뿌듯함은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에서 지금껏 한국문화 강의는 의례 나의 몫인데 안해와 나의 편저로 된 “한국문화산책”교과서로 대학생들에게 한국의 지리적 위치, 한국의 례절, 한국의 복장—한복, 한국의 음식, 한국의 민속놀이, 한민족의 력사 등등을 강의할 때면 매번 2시간 강의--90분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알리고  한민족(조선민족)을 중국애들에게 알리는 보람찬  교수여서 그러한가부다. 2010년 이해 9월 새학기 잡아 나는 또 이곳 대학생들에게 송나라와 고려와의 관계를 주선으로 하는 “중한 고대문화교류사” 첫 강의에 나서게 된다. 이번 학기내에 새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니 이다지도 신날수가 있을까. 한국력사요, 문화요, 중한교류요 하는 이런 강의는 우리 력사와 씨름하는 나의 직성에 어울리는 일이고, 마음이 가는 일이고, 하고픈 일이여서 해도해도 또 하고만 프다. 개학 첫날부터 지난 지난 학기 2007년 07학번 60여명 대학생들에 이어 08학번 20여명 대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다시 교수하게 된 기회를 가지게 되니 기분이 실로 짱이다. 강남의 대학생들이 맑은 정신으로 강의를 들으며 한국문화에 빠져드니 이 아니 가슴 뜨거울까. 오늘도 그러하고 래일도 그러할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 성스런 교수생활, 힘자라는데까지 뛰고 또 뛰여 보리라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런 속에 황하이남 광활한 대지의 겨레발자취 좇아 가고 또 가리라고 채찍질해 본다.   경인년 3월 2일 강남 두앵원에서            
467    겨레발자취(35)-지지대사 육신탑 찾은 의천 대각국사님 댓글:  조회:4235  추천:26  2010-02-28
【겨레발자취】(35)            지자대사 육신탑 찾은 의천  대각국사님      1   천대산 국청사 북쪽 5킬로미터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등성이 불룡은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이르러 천대종을 처음으로 하나의 종파로 일떠세운 발상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런 불룡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귀국길에 올라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하고, 근 1000년이 흐른 오늘 천대산 국청사와 신라원자리 답사를 마친 우리가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 따라 진각사를 찾아간다. 승용차는 국청사 오른쪽 골안을 따라 앞으로 달리는데 골안 따라 아스팔트길은 갈수록 고도를 높이다가 구비구비 갈지자를 이루며 펼쳐진다. 도중에 불룡으로 오르는 옛 소로길들이 가끔 나타나 우리를 옛날의 그 시절로 끌어간다. “이 소로길 따라 지자대사 육신탑에 오르는 의천 대각국사님을 보는것 같습니다.” “같은 마음이지. 저 앞에 의천 대각국사님이 우릴 보고 반가히 손을 젓는 환영이 떠오르는구만!” 나와 현장님은 서로 주고받으며 의천 대각국사님을 떠올려 보았다. 의천 대각국사가 송나라에서 많은 고승들을 만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여 갈 때 고려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송나라 황실에 대각국사의 귀국을 바란다는 글월을 보내 왔다고 한다. 대각국사는 이에 응할수 밖에 없어 항주에서  배편으로 송나라 서울 변경에 이르게 된다. 변경이란 오늘의 하남 개봉을 가리킨다. 이 날이 1096년 2월 13일이라고 하는데 항주의 정원법사가 전송차 동승하게 된다. 의천 대각국사는 변경에 이른다음 계주의 진여사에 가서 장수법사 자예의 사리탑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백금 16성(星)을 내여 사리탑을 수건케 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것이 천대산행이다. 의천님은 자기 나라 고려에 돌아가면 고려에 결심코 천대교학을 선양하겠다며 다지고 다진다. 그래서 행한것이 천대산으로 향한 걸음인데 국청사에 들러 국청사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며 신라원자리에서 쉬이 떠날줄 모르다가 도보로 소로길을 조이며 불룡에 오른다. 그 모습이 근  100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나와 현장님께 비껴오며 우리 사이 대화를 이어준다.   2   승용차는 어느덧 10리 산길을 조이더니 우리를 불룡이라 불리우는 산등성이에 이르게 한다. 승용차에서 내리니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정상아래로 산등성이가 뻗어 내린다. 산등성이와 량켠은 흔히 밭들이여서 나무들이 별반 없이 밋밋한 모양을 이룬다. 그에 반해 불룡의 정상부로 보이는 마루 주위는 온통 수풀이 우거져 숙연한 감을 느끼게 한다. 뒤늦게야 안바이지만 산의 정상부는 지자대사 육신탑을 모신 “진각강사”(眞覺講寺)였다. 진각사에 오르자면 아스팔트 길에서 벗어나 정상부를 따라 돌을 깐 소로길을 따라 이저리 올라야 했는데 산에 오르는 의천 대각국사의 모습이 다시 어리여 오는 대목이다. 밋밋한 여기 소로길을 지나니 소로길은 왼쪽으로 구비를 타며 로송들과 대나무숲  우거진 아늑한 숲속이 나타난다. 그 숲속에 옛스러운 사찰이 비껴오니 그게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고저 했던 진각사였다. 진각사는 천대종의 시조 지자대사 육신탑을 모신 사찰로 하여 탑원사(塔元寺) 또는 탑두사(塔頭寺)로도 불리였다고 관련 자료들은 말한다. 1086년 여름 의천 대각국사가 이곳 불룡에 나타났을 때는 대자사로 이름이 바뀌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 진각사 정문에 들어서니 각기 300년을 기록하는 계화나무 두 그루가 의좋은 쌍둥이처럼 서 있고 뜰안 정면으로 단층 지자육신탑이 마주하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한 스님 차림의 로부인이 어른거려 여기가 지지대사 육신을 모신 진각사라고 귀뜸하는상 싶다. 현장님은 로부인이 산중에서 수고한다며 인민페 200원을 드리며 안녕을 기원한다. 우리는 조용한 걸음으로 지자대사 육신탑안에 들어갔다. 흰 대리석 모양의 백석 지자대사 육신탑이 선참 시야에 안겨드는 속에 탑의 높이가 7미터이고 륙면삼급(六面三級)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차 알수가 있었다. 탑에는 지자대사의 금빛 화상이 모셔지고 조박초 중국불교협회 회장의 “천대지자대사진신보탑” (天臺智者大師眞身寶塔) 액면글이 새겨졌다면 대사의 유체는 탑아래에 모셔지고 탑내 정면과 좌우 삼면 벽에는 천대종 력대 17인 조사(祖師)의 화상이 문자설명과 함께 걸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여기 17인조사 화상에 주의를 돌리지 못한데서 천대종 16대조사로 알려지는 고려출신 의통스님(927~988)의 화상을 헤아려 보지 못한 것, 두고두고 후회가 한가슴 괴여오른다.   3   1086년 여름, 천대산에 오른 의천 대각국사는 모처럼 이곳 불룡의 지자대사 육신탑을 찾아 참배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지자대사 육신탑 앞에 경건히 서서 발원문을 올려 고려명승 제관스님(?~973)의 불후의 업적을 회고하면서 귀국하면 기어이 천대종을 창건하겠다고 굳은 맹세를 다진다.   “의천은 머리를 조아려 귀명(歸命)하오며, 천대교주 지자대사께 이룁니다. 일찌기 듣건대 대사께서는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불법을 구별하여 해석하시매 극진함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후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어찌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희 조사이신 화엄소주(華嚴疏主)께서 ‘현수대사의 오교는 천대대사의 가르침과 매우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옛적에 스님이 계셨으니 그 이름은 제관이며, 대사의 교관을 강의하였습니다. 이렇듯이 해외까지 유통되였으니 전하여 공부하는 계통이 끊어져 이제는 없어지고 말아 제가 몸을 버리면서까지 분발하여 스승을 찾아 도를 물었습니다. 이제 전당의 자변대사 종간의 문하에서 교관을 이어받고 거칠게나마 대략을 알았습니다. 훗날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을 베푸신 로교에 보답하고자 이에 서원합니다.”   그때 그 시절 의천 대각국사님의 그 참배모습 방불히 서리여 오른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지자대사 육신탑 앞 뜨락에 비방울 어린채 망울졌던 흰매화가 첫 꽃송이를 터쳐 올려 깊은 감회를 자아낸다. 보매 진각사는 산문전(山門殿), 동서사랑채(東西廂房), 념불당(念佛堂), 방생지, 반약심경탑(般若心經塔) 등 불교건축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사찰이였다.   4   귀로에 진각사를 나서니 진각사로 오르는 소로길 한켠에 옛날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처음으로 오셨을 때 세운 수선사(修禪祠) 옛터가 보이였다. 지자대사는 한생에 36개소의 사찰을 일떠세웠다고 하는데 그중 12개소가 천대산이고 수선사는 12개소 가운데의 하나, 1000여년 세월속에서 수선사는 옛터자리만 알리고 그 자리에 두어채의 낡은 빈 암자만이 댕그라니 서있을 뿐.  “천대산지”에는 수선사의 좌우언덕을 금지령(金地領)과 은지령(銀地領)이라고 하는데 은지령 쪽에 사찰의 정문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진각사 산아래 1.5킬로미터 계곡에 위치한, 한창 확대건설중에 있는 고명사(高明寺, 지자대사가 손수 세운 천대산 12개 사찰중의 하나)를 돌아보고 귀로에 올랐다. 귀로 내내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하며 서원하는 의천 대각국사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노라니 지자대사 육신탑을 떠나 귀국길 사명산 설두사로, 명주(오늘의 녕파)로 향하는 의천 대각국사님이 멀리 멀리 보이는것만 같았다.   2010년 1월 12일                
466    윤동주발자취(11)-윤씨네 정착마을은 자동 부령촌 댓글:  조회:1329  추천:20  2010-02-26
    【윤동주 발자취】(11)     윤씨네 정착마을은 자동 부령촌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다녀온 이튿날은 9월 3일이다. 날씨는 의연히 좋아 한낮에 이르러 몹시도 뜨겁기만 한다. 아침식사후 연길을 출발했다지만 개산툰에 이르러 먼저 광소촌에 가서 이미 페교된 정동중학교 교문자리 등을 사진 찍노라니 자동 3대에 이른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서였다. 자동 3대 장기철로인댁을 찾아 인사드린후 나는 철길넘어 4대에 가서 향화촌 패말, 살구나무, 철교, 철교에서 내려다보이는 3대와 4대를 사진 찍어보았다. 점심식사후 나는 장로인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직접 자동의 윤씨네를 둘러싸고 흘러갔다. 장로인의 안로인 되는분은 차신옥이고 62살, 명동출신, 재혼관계였다. 장로인의 첫 부인은 개산툰 광소촌녀자로서 1964년도에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게 되였다. 아들은 부대 갔다와서 한국에 가고 큰딸은 쿠웨이트에, 막내딸은 미국에 간데다가 1999년 몸에 로친이 사망하니 장로인 한분이 외톨로 집을 지켜야 했다. 재혼은 4년전, 안로인 차신옥은 령감이 사망한후 장로인한테로 옮겨앉게 되였다. 인젠 구면이고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는데 예견대로 자동서 가장 오랜 마을은 부령촌이였다. “부령촌은 70세대의 마을이였으나 지금은 45세대쯤밖에 없습니다. 장씨, 한씨네가 많고 그 많던 윤씨네는 한세대도 없습니다.” 장로인의 계속되는 마을소개에 따르면 이 마을의 마지막 윤씨네는 윤영일이라고 부르는 분, 부대에서 제대한후 룡정현 무장부 부장, 연변농학원 무장부 부장으로 사업하다가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이른바 외국특무로 몰려 피해 받고 사망에 이르렀다. 윤영일씨 부모들은 부령촌에서 사망되여 이 집이 부령촌의 마지막 윤씨네로 되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장로인의 경력담을 둘러싸고 이어지다가 다시 현실생활 이야기로 돌아왔다. 부치는 토지는 수전 석짐, 한전 여섯짐하여 모두 근 한헥타르쯤인데 일년농사는 수입이라야 5000원, 이 정도수입으로는 먹고사는 정도밖에 안된단다. 농업세감면에 300원, 종자보충수입 200원하여 모두 500원이라지만 대신 농약이 값이 올라 화학비료 값 1500원, 농약 500원이다. 5000원 수입에서 이 2000원을 떼내면 3000원쯤밖에 남지 않는다. 한마디로 지금의 농촌농사는 리득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80년대초 호도거리 3--4년간 생활이 펴이였다지만 그후 생활은 내리막질을 거듭, 출국바람에 마을에 늙은이들만 남으니 생활은 보다 하강선을 긋는다. “아기돌잔치 먹어본지 한 15년됩니다. 출생률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한해 치고 초상집은 몇세대에 이르러 여러번 가야 합니다.” “마을엔 30여살 총각이 4~5명, 홀애비가 5명쯤에 이릅니다. 40대녀자를 볼수조차 없고 50대가 좀 보입니다. 많은 가정이 혼자여서 로인들 사망률이 높습니다.” 이왕의 취재경험으로 보아 흐르는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보아 막아나서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가 가끔가끔 토막나면 취재는 흔히 제곩으로 흘러들지 못하지. 이에 비추어 이야기가 마무리되여 갈 때 장로인의 아버지 이주시간을 물으니 1910년쯤, 그때 벌써 자동일대에 조선이주민 세대수가 많더라고 들었다는 장로인. 이는 력사기재와도 어울려 떨어진다. 광서 7년이면 1881년인데 그해 길림장군 명안은 조정에 상주하여 선참으로 두만강이북지구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훈춘에 연변의 최고행정기관 부도통(副都統)아문을 설치한다. 봉금령해제와 개방조치는 숱한 조선이주민을 받아들여 오늘의 연변 해란강이남지역에 벌써 5590여세대의 조선이주민들이 밀려들었고 훈춘 부도통은 이들 개간구역에 따라 4대보(4大堡) 39개사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자동일대는 4대보중의 녕원보관할구역에 속했는데 녕원보의 소재지가 오늘의 개산툰진 광소촌이였다. 원 “룡정현 광개향 자연툰 건툰(建屯)시간”자료에 다르면 오늘 자동의 응달촌, 리화동, 부령촌, 후저동 등 마을의 형성시간은 광서초년이다. 광서원년이 1875년이니 윤동주의 윤씨가문이 두만강을 너머 자동으로 올때는 광서12년인 1886년, 즉 광서초년에 해당된다. 그때 이미 여러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말인데 20세기초에 이르러 자동 여러개 마을의 조선이주민은 200여세대에 달했다. 1910년쯤에 이미 200여세대를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무언가 륜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 나는 장로인과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옛 팔간기와집을 물었다. 100년도 넘는 팔간기와집이라고 하는데 그 원주인은 알수가 없지만 명동집으로 통했다는 기억이 난다고 했다. 명동집 래력을 물으니 의회단운동때인가 명동에서 몇집이 부령촌으로 와서 새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중대한 돌파구였다. 연변사학계의 권위인물 연변대 박창욱교수의 론문 “룡정의 명동—중국조선족 근대문화의 발상지”(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 연변교육출판사, 2002년 8월) 에 의하면 1900년 그해 중국 의화단사건으로 하여 명동의 김하규 등 가족들이 자동으로 피난을 갔고 의화단사건이 즘즘하여지니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자동에 가서 새집을 짓고 살았다는것은 모르고있었다. 1899년 2월, 조선 종성과 회령의 김약연 등 4대 가문이 명동으로 이주할 때 먼저 자동으로 이주한 윤씨네와 련락하고 취한 행동인데 1900년에 의화단사건이 터지니 그들은 또 윤씨네를 찾아 자동으로 가서 새집까지 짓고 한시기 살았었다. 그 마을이 부령촌이니 윤동주 조부네가 생활하던 마을이 부령촌이였음은 두말이면 잔소리다. 2005년 9월 2일과3일, 이틀간에 걸쳐 자동 부령촌에서 만난 장기철로인, 이분과의 이얘기 저얘기에서 끝내 윤동주조부네가 1900년까지 14년간 자동에서 생활한 마을이 드러나고말았다. 윤씨네는 김하규 등 가족을 따라 다시 명동으로 이주하여 명동사람들로 알려졌으니 인젠 시름을 놓아도 좋을것 같다. 꿈에 본 별하늘, 깨여나 본 새벽의 밝은 별, 그별 방향 따라 자동으로 달려갔더니 윤씨네 정착마을은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3대--부령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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