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
1. 머리말
한국의 문화관광부에 의해 지난 세기 30년대 일제강점기의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대단히 잘된 선정이라 해야겠다. 헌데 요사이 한국에서는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 중 하나라는 주장이 제기돼 인터넷을 무척 달구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인터넷 카페 게시글들에는 지어 강경애를 《독립군을 잡아먹은 년》이라고 거리낌없이 모독해 놀라움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먼저 한국의 인터넷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따르면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 중 하나라는 주장은 전 한국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이선우씨의 제보와 이강훈 전 광복회회장의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제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1월 4일 오후 이선우씨가 조선일보 《월간조선》기자를 찾은 데로부터 인기 되었는데 조선일보 인터넷은 1월 17일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면서 신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선우씨(전 한국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는 《김좌진장군 장례대변인을 맡기로 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이 생전에 증언한 내용》이라며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을 교사한 김봉환과 내연의 관계로, 일본경찰에 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뒤 변절해 김좌진장군암살을 공모했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어냈다. 유감스러운 것은 강경애가 공범이라면서 용정의 강경애가 어찌하여 김장군 암살을 교사한 공범이라는 것을 꼬물만치도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만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한데서 이 주장은 한국의 학계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강경애를 문화인물로 추천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45)교수는 《김장군의 암살배후에 대해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 《심지어 강씨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고, 김봉환의 애인이었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어떤 책에서는 <김경애>라고 지칭하는 등 신빈성이 떨어져 학계에서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용정에서의 허다한 사실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강경애를 연구한다는 중국 측의 허다한 조선족학자들도 작품 평에 몰두하면서 강경애인물에 대해서는 간단히 스치고 만다.
하다면 강경애가 과연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일가? 이는 세인을 웃기는, 말도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럼 아래 일제강점기 여류소설가 강경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역사속의 진실한 강경애부터 보기로 하자.
2.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
다 알다시피 여류소설가 강경애는 황해도 송화출신이다. 중국의 일부 조선족학자들은 황해도 장연으로 알고있다. 생졸년월일도 1907년~1943년 설과 1906년~1944년 설 두 가지로 반복된다. 어린 시절도 어떤 이곳 학자들은 조실부모로 알지만 사실은 워낙 털면 먼지뿐인 살림에 아버지가 강경애 4살 때 사망한데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선다. 어린 경애도 다섯살 때 장연으로 이주, 이때의 생활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1913년 8살 되던 해 강경애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쳐 고대소설을 읽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에 벌써 동네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어 《도토리 소설 장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장래 여류소설가의 싹수가 보인 것 같다. 어디를 가나 가난신세라 열 살이 되는 1915년에야 청년학교를 거쳐 장연소학교에 입학, 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 공부하다가 중퇴, 서울의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약 1년 간 수학. 그 무렵이던 1923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 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조혼에 의한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양주동이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이고 문학적 재질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라 문학도 강경애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드디어 강경애는 양주동과 1년간 동거하게 되고 여성에게 봉건적인 생활태도와 종교생활을 강요하는 학교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로 가담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퇴학한 것이 바로 동맹휴학 때문이었다. 또 양주동과의 동거생활에서 획기적인 것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는 양주동이다. 1년이 지나 강경애는 양주동과 헤어졌다고 하나 작가로서의 생애가 펼쳐지니 행운이라 해야겠다.
강경애는 서울 동덕여학교 3학년에 들어가 1년 간 수학하다가 1924년 9월 후에 귀향하여 야학운동, 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강경애가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불린 연변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9년이다. 중국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일가견인데 강경애는 용정에 정착하여 근 2년 간이나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①고 한다. 이 글에서 채미화교수는 계속하여 강경애는 2년 후인 1931년 말 간도를 떠나 고향에 돌아갔고 1932년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이 쓴 글은 이와 차이를 보인다. 선생은 문화발굴《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이란 한편의 글②에서 강경애는 1931년에 황해도 장연에서 수원 농업전과를 졸업하고 장연군 군청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고 그 해에 용정에 이주하였다고 밝히었다. 어느 글의 서술이 옳은가는 굳이 밝힐 필요는 느끼지 않으나 한국학계의 평론이나 논문들도 시기시기 생애서술에서 시간상 가끔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강경애의 생애 시기가 잘 알려지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1931년 설이든, 1932년 설이든 아무튼 강경애는 용정에 다시 들어선 후 가정주부로 문학창작에 정진하면서 용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강경애가 1931년에 단편 《파금》과 중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면서 1938년까지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③을 남기였다. 그중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는데 당시 사회의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하기에 한국의 인터넷검색에 의하면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권조차 얻을 수 없었던 노동자의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소설로, 근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꼭 밝히고 넘을 것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다. 장하일은 장연에서 강경애와 결혼하고 용정에 이주한 후 줄곧 동흥중학교 수학교원, 교도주임으로 근무했는데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임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었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 외 행사나 교수용어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용정 총영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1942년 여름이후 학교운영은 말이 아니었고 완전한 노예화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에 교도주임 장하일은 교장 임계학 등과 더불어 연속 사직으로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하였는데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하루동안 동맹휴학을 단행④하였다. 장하일은 사직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사》총편집을 맡았다고 하는데 광복 후에는 북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었다.
이런 남편의 영향 하에서 강경애는 용정에 이주한 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3년 11월에 용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 이주복 등에 의해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용정 남녀중등학교의 교원들과 재학 중인 문예청년들이 기본 동인들이었다.⑤ 강경애나 안수길 등처럼 일부 영향력 있는 작가들도 가담, 강경애는 이 북향회의 동인이면서 고문이였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작가생활에 전념하다가 말 그대로 나빠진 건강으로 1942년에 남편 장하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1년 후 신병으로 요절했다.
3. 김좌진장군 암살자는 누구인가
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여류작가 강경애는 이주 후 줄곧 용정에서 생활하면서 가정주부로 청빈한 삶, 작가적 삶, 불행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어떻게 보아도 강경애는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암살과 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 공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월간조선》2월호 기사를 인용했다는 조선일보 인터넷은 강경애가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월간조선》 2월호 기사나 조선일보 인터넷은 여기에서 무책임한 치명적인 두 가지 약점을 드러냈다.
첫째 치명적인 약점은 1927년 봄에 강경애가 북간도나 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왜서? 강경애가 처음 북간도에 진출한 시기는 1931년 봄으로 나타난다. 이는 강경애의 수필들에 잘 반영되여 있다. 둘째 치명적인 약점은 이른바 김봉환의 애인이라는 강경애 혹은 김경애가 우리가 말하는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옳은가 하는 점이다. 기사나 인터넷은 아무런 분석이나 분별이 없이 그저 이름만 보고 강경애라고 점찍었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기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는가, 확실히 강경애라고 한다면 그의 내력과 해림에 나타나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설복력 있게 피력하여야 보는 이들이 수긍이라도 하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이강훈 옹의 증언에 의해 시름을 놓은 데서 인기되었겠으나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있다는 자체는 떠올려야 했다. 베일에 가렸기에 이강훈 옹의 증언도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강훈 옹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믿음직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 암살자는 김봉환이나 그가 시킨 박상실도 아닌 타인으로 나타난다. 아래 당년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이었고 항일노선배였던 양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하자.
조공 아성총국(만주총국)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이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부하 몇을 데리고 정비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 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 속으로 냅다 뛰어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 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 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었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 갔었는데 1년 후 산시에 파견 되어 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필자가 1930년 3월, 아성현에 갔을 때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당년 엠엘파조공 주요간부, 항일노선배)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⑥
이는 1985년 11월, 《연변문사자료》 제4집에 실린 양환준 선생의 글 《20년대 후기 재만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반영된 내용인데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를 두고 필자는 양환준 선생 생전에 수차 방문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역사를 깊이 있게 터득하면서 수긍이 갔다.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면밀히 짜고 든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그 구체적인 집행자가 바로 공도진, 최동범 등으로 불린 이복림이였다.
이복림은 본명이 공도진이고 때에 따라 최동범이라고도 불렸다. 양환준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복림은 1907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으로서 1925년경에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 이주하였고 조공동만도 간부인 당시 이동선(항일열사)의 소개로 조공당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중공 아성현위서기로, 1932년 봄에는 중공 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1933년 10월에는 주하항일유격대 주요책임자로, 1936년 8월 이후에는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지대사령, 중공 북만임시성위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4월에 전사하였다.
4. 김좌진장군 피살원인
우에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공당 만주총국의 조직적인 행동이고 그 구체적인 집행자는 공도진, 즉 이복림이라고 제나름의 견해를 밝히었다. 헌데 조공당에서는 어인 원수로 김좌진을 피살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은 무엇일가, 아래 계속하여 양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한다.
청산리 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역사사실은 김좌진도 월경했음)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양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원 필자주: 지금 북만의 70여세 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니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주요활동은 세가지였다.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 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할빈 일본총영사관에 주재하고 있는 총독부 특무 마쯔시마와 결탁하여 그놈에게 북만의 공산당활동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만 원의 일본 돈을 받아 산시에 정비소를 꾸리고 첩을 두어 향락하였다.
③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 대원 공도진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제4집《20년대 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실린 서술이다. 지금 보면 과격하고 극단적인 견해가 보이긴 하나 당년의 조공만주총국에서는 상기 이유로 김좌진을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 되어 없애치우기로 결정》하고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비해 김좌진장군과 그의 딸 김강석 장편전기 《설한》을 펼쳐낸 조선족작가 김송죽은 설한에서 상기 이유를 몇 마디로 묵살해 버리었다.
김좌진은 할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와 결탁하였다느니,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한다느니,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주었다느니, 김좌진은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차리었고 제 친구의 여편네를 빼앗아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가지가지 험악한 요언이 나돌았다.⑦
상기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도 시비가 분분하다. 온 겨레가 받드는 항일독립운동가라고 별로 말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20년대 초 이후 중국 동북지구 조선인 반일단체들간의 통합운동이 무척 열기를 띠였다. 1923년 8월에는 집안을 중심으로《참의부》가 세워지더니 1924년 10월에는 길림지구를 중심으로 《정의부》, 1925년 3월 10일에는 녕안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한데서 이 시기를《3부 정립》시기라고도 하는데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는 노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꾸려 북만일대 조선족들의 문맹퇴치와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했고 보안대와 별동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 친일단체 숙청운동, 조선 국내 진군작전활동 등을 활발히 벌려갔다.
그러나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학교교육에서 재정난이 심하다고 학부형들에게 재정부담을 가중시킨 결과 점차 백성의 불만을 자아냈다. 군자금해결에서도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기다가 뜻대로 안되니 강박적인 집행을 실시하였다. 신민부의 이백호 등은 빈주현에서 강박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고 무고한 백성을 해치는 유혈사건, 즉 빈주사건⑧을 빚어냈다면 훈춘에 파견된 모금대도 군자금징수를 거부하는 무고한 백성을 살해⑨하기도 하였다. 결과 신민부는 점차 민중들의 신임과 후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또,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며 조공당과 엇서니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엄중히 이탈하게 되었다. 지방단체들과도 권력다툼을 하고 정의부와도 지반쟁탈을 하니 민중들의 신임을 보다 잃었다. 나중에 신민부내부의 분열과 대립은 최종 해체의 국면을 초래하였으니 그 직접적인 책임을 김좌진이 안아야 했다. 그러니 김좌진장군이 타매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조선인 민족주의계나 공산주의계 대립과 투쟁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느냐 하는 사활적인 투쟁이어서 이를 한 두 마디로 해석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그 시기 20년대 후기 중국동북의 역사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4. 맺음말
본문은 현대 여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를 두고 역사적으로 두루 살펴보았다. 긴 맺음말과 결론해석이 필요없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 아니거니와 근본 연계가 되는 인물이 아니다. 여류작가와 역사에 책임지지 못하고 모독하며 이 땅의 조선족들을 상심케 하는 일이 더는 나타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주해】
①채 ① 채미화, 간도체류시기의 강경애의 창작,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 결전, 521~522쪽.
② 연변문학, 2003년 4월호, 224쪽
③ 최삼룡, 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 연변문학 2003년 4월호 (강경애 간도체험과 지식인여성의 자기반성, 김양선, 역사비판, 1996년 여름호, 362쪽)
④연변문사자료, 제6집, 1988년 12월, 20쪽.
⑤권철, 《북향회》의 전말, 대형문학총서 《두만강》 제 3호 222쪽.
⑥연변문사자료, 제4집, 1985년 11월, 11-12쪽.
⑦장편전기, 설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4.8, 272쪽.
⑧동아일보, 1928.11.18일자.
⑨동아일보, 1926.11.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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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24일
도라지 2005년 2월호에 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