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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    김송죽선생님께 드리는 글 (2) 댓글:  조회:1053  추천:19  2010-01-31
          김송죽선생님께 드리는 글 (2)     선생님의 선의적인 글 “사실을 뒤섞지 말자”를 보고 느끼는 바가 큽니다. 서로간의 시비는 이렇게 선의적이고, 토론식으로 되여야 서로 마음을 상하지 않을수가 있지요. 또 이런 분위기속에서라야 시비요, 쟁론이요 할 멋이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면서 저의 글 “남대관 권수정 이자들은 누구인가?”를 보시고 재만한족총련합회의 무장투쟁의 선차적인 과업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였다,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철저한 반일, 반공단체였다, 1929년—1931년 사이 동북군벌과 손을 잡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면서 답을 바랐기에 선생님께 드리는 글(2)로 올려 드립니다. 상기 세가지 관점은 저 개인의 주관결론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여기 관점들은 모두 우리 조선족 력사학계의 견해들이고,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 --“불씨”(1995년 12월, 민족출판사 출판) 제4부분—“민족주의계렬의 반일투쟁”부분 신민부, 한족총련합회 관련 글들에 관통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은 신민부나 한족총련합회의 력사적역할을 객관적으로 긍정하면서 또, 그들의 공산주의운동 적대시를 묵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교적 실사구시한 평가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929년--1931년 사이 동북군벌과 손을 잡고 서술은 김좌진장군 살해후가 주선이 옳습니다. 이것을 김좌진장군의 피살원인에 몰아간것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제가 “남대관 권수정 이자들은 누구인가?”를 쓰게 된것은 선생님이 먼저 글들에서 “리광훈은 독립혁명을 해온 원로급인물인바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한다”, “우리 민족 모두가 경모해야 할 독립운동가”, “독립투사였고 당당한 력사학가” 등등 평가를 주니까 이에 대비해 한족총련합회의 성원들인 이강훈 등의 반공죄악을 폭로하기 위해 쓴글이였습니다. 이 글에서 이강훈 옹을 중심으로 폭로하진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강훈 옹은 반일전선에는 나섰다하지만 우리 모두가 존중하고, 경모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환영받지 못할 반공분자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알려 드릴것은, 선생님은 이강훈이 김좌진장군 피살현장에 있던 목격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한국 관련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강훈 옹은  장군 암살 며칠후에야 현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때문에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의 결단으로 공도진 즉 리복림을 통해 집행한 사실을 그가 알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베일에 가린 사건인데서 더더구나 그러 하지요. 관련도 없는 강경애를, 그 시절 강경애의 행적조차 모르면서 강경애를 끌어들이는 자체가 그의 무지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상기 세가지 관점에 대해 보다 잘 설명하고저, 선생님이 아직 보시지 못한것 같아 신민부, 한족총련합회가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했다는 관련서술을 발자취총서 2에서 뽑아 참조로 보여 드립니다. 한편 중공만주성위의 관련 성토문을 뽑아 보여 드리니 참조하였으면 합니다. 이런 관련서술이나 만주성위 관련 성토문(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극단적인 평가가 보이기도 하지만)을 보면 김좌진장군 피살—발생하지 말아야 할 력사비극이 어찌하여 일어났겠는가를 사고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믿어집니다.   1.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2 의 관련 서술   신민부는 1925년 3월 10일부터 15일까지 녕안현 성내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한후 그에 의해 산생된 중앙집행위원회는 신민부의 금후 활동방침을 결정할 때 제3에서 “공산주의 침투를 저지”한다고 밝히였습니다   ---제 207페지에서   학교운영에 있어서 재정난이 심해지고 선진사상이 날로 침투되자 신민부에서는 학부형들에게 재정부담을 가중시킨 결과 점차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또 협애한 민족주의로 학교에서의 선진사상의 침투를 반대한 결과 진보적인 청소년들과도 엄중하게 탈리하게 되였다.   ---제 211페지에서   리백호 등은 빈주현에서 강박적방법으로 군자금을 징수하려다가 도리여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냈을뿐만아니라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류혈사건(빈주사건)까지 빚어내였다. 그리고 훈춘에 파견되였던 신민부 모금대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군자금징수를 거부하는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신민부는 점차 민중들의 신임과 후원을 잃게 되였으며 민중들과 엄중하게 리탈하였다.   ---제 213페지에서   1928년 11월 18일 군정파인 리백호가 빈주현에서 당지 주민들에게 군자금과 의무금을 강요하다가 총을 발사하여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빈주사건”이 발생하였다.   ---제 219페지에서     신민부도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였기때문에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냈으며 점차 민중들을 엄중히 리탈하게 되였다.   ---제 217페지에서     신민부의 지도층은 거의 모두가 량반가문의 출신들이였다.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그들은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였으며 지어는 공산주의자들을 검거, 체포, 학살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신민부는 인민대중들의 기반을 잃었을뿐만아니라 당시 북만지역에 분포되였던 농민조합, 북만청년회 등 조기공산주의단체들의 공격대상으로 되였다. … 1929년 6월, 조공당 만주총국위원회에서도 “신민부와 같은 부패한 민족단체는 매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제 222페지에서   군정파에서 활약하던 김종진, 리붕해, 리종주, 리강훈 등 무정부주의자들은 김좌진에게 무정부주의의 조직원리에 좇아 원 신민부 군정파를 개편할것과 이미 작성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계획안”에 의하여 새롭게 반일투쟁을 전개할것을 요구하였으며 무정부주위로써 공산주의사상의 침투를 방지할것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신민부시기 이미 대중적기반을 잃었으며 또 계급적국한성으로 하여 공산주의운동을 접수할수 없었던 김좌진을 위수로 한 군정파는 점차 무정부주의에 동감을 표했으며 무정부주의로서 금후 반일투쟁을 조직, 전개하기로 하였다.   ---제 229페지에서   무정부사회의 수립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최종목적이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우선 일제를 타도하고 공산주의사상의 침투를 방지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에서는 상술한 강령을 제정한 동시에 다음과 같은 “당면강령”도 제정하였다. (1)    우리는 재만동포의 항일, 반공 사상의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 ………… 이상의 당면강령에서 볼수 있는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은 항일, 반공 사상의 계몽과 생활개혁을 당면의 주요한 과업으로 내세웠으며…   ---제 230페지에서   1929년 7월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에서 조직된 한족총련합회는 원 신민부 군정파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의 무정부주의자들간의 련합의 산물이며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반일, 반공 단체이다.   ---제 232페지에서   김좌진이 무정부주의를 접수하게 된것은 주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힘을 빌어 위기에 처한 신민부조직을 재정돈하고 민정파와의 분렬로 하여 잃었던 교육, 산업 인재들을 보충받고 날따라 고조되고있는 공산주의운동과 공산주의사상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한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도 볼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급적제약성으로 하여 공산주의운동을 용납할수 없었던 신민부 군정파들은 부득불 반일반공을 “당면강령”으로 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의 정치리념인 무정부주의를 수용할수밖에 없었다.   ---제 233—234페지에서   한족총련합회는 무장투쟁보다도 교육 및 농촌지방 “자치”조직의 건설 등에 정력을 기울였기때문에 정규적인 무장부대를 가지지 못하였다. 지방의 치안을 담보하기 위한 별동대는 있었으나 그것도 근근히 간부들의 신변보호와 소규모의 일제주구청산 등 역할밖에 놀수 없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리념과 무정부주의리념의 갈등으로 하여 한족총련합회와 공산주의 각 단체들간의 모순이 점차 악회되여가자 총련합회에서는 선차적으로 공산주의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부대를 설립하였다. ---제 239페지에서   한족총련합회에서는 자기들의 계급적리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학량의 동북군벌들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5월 연변일대에서 공산당의 령도하에 “붉은5월투쟁”이 전개되자 한족총련합회 성원인 남대관, 백남준 등 10여명은 권수정을 통하여 “공비토벌대”대장인 길림성 군법처 왕과장 등과 련합하여 길림, 연변 등지에 가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으며 지어는 “선량한 조선인을 압박, 체포, 김금, 략탈하는 등 극도의 횡포까지 부렸던것이다.”   ---제 239페지에서       2. 신민부, 한족연합회 등에 관한 만주성위의 관련 문건 (리함 번역)             《성위 소수민족운동위원회 재만 한국로농군중운동에 관한 중공만주성위 결의안 초안》에서 (1930년 5월 24일)   (2) 대일본제국주의, 중국통치계급 및 한국반동단체(국민부, 신민주) 등 겹띄운 압박하의 한국 농민 및 모든 로고군중의 생활은 극히 잔혹하다… 일본제국주의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각 오지(奧地)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 및 중일지주자본가의 주구가 되기를 달갑게 여기는 반혁명적 이른바 《독립군》—국민부 한국총련합회 및 일본정탐조직으로 《독립》을 표방하는 신민부 등이 출몰하고 있다…                                                   914--915쪽   (6) …지금 국민부, 한족(韓族) 총련합회와 농민동맹반동파(1929년 제3차 대회결의안을 반대하여 물러선 집기간군 정미업자), 최근 중국국민당 경현(京縣)정부의 양해하에 조직된 이른바 조선혁명당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민부, 정의부의 정통이다. 지금도 의연히 계속 반공(反共)을 다그치고 공산주의자학살을 다그치고 군중조직을 파괴하며 중일통치계급의 간접적 혹은 직접적 주구로 되었다…                                                   916--917쪽   《재만주 고려인문제에 관한 중공만주성위의 제안》에서                    (1930년 6월)   …이런 열정은 모두 국민부, 한족회(韓族會) 등 봉건통치식단체에 쏠리였다. 재만고려인 통치기관으로 자처하고 고려농민들에게 갖가지 세금을 강요하였다. 만약 불복하거나 반대자가 있으면 원시식 사형(私刑)을 가하거나 심지어 총살과 언어도단(言語途斷)의 학정을 감행하였다… 국민부, 한족회 등은… 재만 중국군벌의 주구로 변하여 혁명분자의 체포나 직접적체포를 도와주고 중국군벌 및 일본제국주의에 넘기였다. 하여 계급관계가 극단적으로 첨예화되고 허다한 지방의 교통이 막히고 총과 총이 대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926--927쪽   …군벌과 야합한 주구단체— 국민부, 한족회를 속히 타도하고…                                                  928쪽     《중공만주성위, 공청단만주성위 군중들에게 알리는 글》 (1931년 9월 20일)   …중국의 혁명적 로농병형제들과 련합하여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자!… 국민부, 한족련합회, 한족자치회 등 반혁명기관을 소멸하자!                                                   1092쪽   (역자주: 이상 문건절록은 《동만지구혁명역사문헌회편(匯編)》(하책)에 의하였음. 이책은 《중공연변주위 당사연구실》에서 2000년 9월에 편집, 인쇄한 내부간물.》   2010년 1월 31일 강남땅에서  
444    겨레발자취 (31) - 룡정사는 바로 눈앞이구려 댓글:  조회:4237  추천:38  2010-01-30
【겨레발자취】(31)     룡정사는 바로 눈앞이구려                                                            1   새해 2010년 1월 이달 잡아 항주로의 두번째행은 북송시절 의천 대각국사님이 다녀간 항주 서호 주변의 상천축사와 룡정사를 답사하는것, 상천축사 제2차 답사를 마치자 현장님은 머리도 쉬울 겸, 새해도 즐길 겸 아름다운 서호변  등산을 해보자며 자가용을 곧추 어디론가 몰아간다. 차로 가니 어디가 어딘지를 알수가 있느냐만 목적지에 이르니 서호 서남쪽 룡정샘물터로 이어지는 계곡이렸다.    산아래 계곡어구에 이르자 현장님은 오늘 재미나게 룡정샘물을 따라 등산해 보자며 우리 부자를 계곡어구의 한 정자에로 안내한다. 정자가 “룡정팔영시비랑”(龍井八詠詩碑廊)으로 나타나 내가 의아해하자 현장님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선후 6차나 강남유람길에 올랐다가 4차나 이곳 룡정계곡을 유람한데서 세워진 정자라고 설명하면서 정자 옆 시비랑을 보면 내연을 알수가 있단다. 시비랑을 보니 시비들에는 과연 건륭황제가 네번 룡정계곡 여기를 유람한 시간과  친히 쓴 시들이 씌여져 있어 인상적이였다. 건륭황제가 네번이나 찾은 룡정계곡은 항주 서호의 사자산(獅子山) 아래 기반산(棋盤山)과 옹가산(翁家山) 사이에 위치하고 그 일대가 전부 룡정차의 원산지로 되여있었다. 룡정(龍井)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샘물 자리는 두곳으로 알려지는데 하나는 풍황령 옹가산 북쪽편비탈의 깊이 10여미터를 이루는 로룡정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등산으로 오르는 하룡정 샘물터였다. 건륭황제의 시비랑을 지나 산기슭에 이르면 처음으로 맞아주는것이 “과계정”(過溪亭)정자이다. 현장님이 정자 아래 안내글을 보라기에 카메라를 내들다말고 읽어보니 건륭황제가 친필로 쓴, 룡정팔경의 첫 경관이고 북송 승려 변재(辨才)와 항주 태수 소동파와의 만남이 깃들어 있어 무심히 지나칠 정자가 아닌가 부다. 전하는데 의하면 천축에서 룡정사로 은거한 북송시절 승려 변재는 찾아오는 객들이 많아 매일 손님접대에 바쁜데서 “산문송객, 최원불과호계”(山門送客最遠不過虎溪)란 알림글을 써서 룡정사에 붙이였다. 그럴 때 항주 태수로 부임한 소동파, 즉 소식은 변개의 위인됨을 듣고 하루 룡정사를 찾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 빠져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이르고 밤을 거친다.    이튿날 소동파가 떠나게 되어 변재스님이 바래게 되고, 이야기하며 걷다보니 저도 모르게 규칙선인 호계교(虎溪橋)를 넘어섰다. 옆사람들이 일러 알았을 때는 이미 규칙선을 넘어선 때라 두 사람사이에 웃음이 한바탕 터져 오르고 덕담이 오가는데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과계정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또, 일명 “이로정”(二老亭)이라고도 한다며 소동파 친필체가 정자안에 걸려 있었다.       2   과계정을 지난후 척심소(滌心沼), 일련운(一片云), 룡홍동(龍泓洞), 신운석(神運石)등 룡정팔경들이 차례로 맞아준다. 나중에 이른 곳이 두 룡정의 하나인 하룡정(下龍井)구간인데 룡정샘물구간을 중심으로 주위는 여러가지 정자와 옛식 차집들로 옛스러움을 다분히 풍겨주어 기분이 난다. 신비로움은 석회암들을 가져다 인공석림을 만든 이곳 룡정샘물은 나무가지로 저어보면 샘물에 기묘한 무늬선이 생기는것, 무늬선은 처음 반원경을 이루며 밖으로부터 안으로 점차 작아지다가 없어지는데서 유람객들의 발목을 곧잘 잡는다.    우리 바로 앞에서 유람하던 어느 부자간이 나무가지로 저어보니 과연 그러하다. 그러노라니 1983년 5월, 남방 첫 답사차 항주에 처음 들리여 이곳 룡정차 구간과 샘물터를 돌아보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그 시절은 룡정샘물 주변이 인공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자연모습 그대로이고, 인공바위산이나 정자나 차집 따위는 더구나 없었는데 샘물이 층을 이루어 각전을 넣으면 각전이 물에 떠서 재미를 끌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장장 27년 전의 일, 27년후 룡정샘터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변해 나와 아들애를   맞아준다. 그해 5월은 아들애가 태여나지도 않은 시절, 몇달뒤 그해 8월에 이 세상에 나온 아들애가 27년이 지나 아버지와 더불어 룡정샘물터를 유람하게 되니 나의 감수가 어떠했으랴. 그래도 감수속에만 빠질수가 없어 현장님 보고 이젠 룡정사를 찾아 갈때도 됐다고 하니 현장님은 “허허허”웃으며 옛날 룡정사 자리가 바로 여기 눈앞이라고 하질 않는가. “뭐? 룡정사가 눈앞이라구?” 나는 나의 귀를 의심, 현장님은 우리 부자를 룡정사로 안내하면서도 내색을 내지 않고 등산하자며 잠시 비밀놀음을 벌려 보았었다. “그럼 언녕 그렇다고 할거지.” 내가 고운 눈길을 흘기자 현장은 또 사람좋게 “허허허”웃으며 옛날 룡정사는 더는 찾아 볼수 없고 그 자리에 옛스러운 차집들이 꾸려져 유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며 알리기를 잊지 않는다. 룡정샘물터 차집사진들은 이렇게 룡정사 대신으로 여러 장이 찍히여졌다.      3   의천 대각국사가 1085년 8월초 항주에 이르러 찾은 곳은 대중상부사이고 데중상부사에서 만난 스님은 오매에도 그리던 정원법사(1011~1088). 정원법사는 그 시절 항주 불교계의 대표적인 고승이고, 두 나라 두 스님은 서로 편지교류를 가지다가 정원법사가 송나라 구법류학을 권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여 그들은 항주 대중상부사에서 첫 만남을 가지게 되였는데 의천이 송나라행을 결심한것은 정신적 스승인 정원법사를 만나 법사한테서 “바다와 같이 넓은 진리의 세계”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 만남이  하도나 진지하여 의천스님은 훗날 귀국한후 그때의 심경을 “옛적 해동에 있으면서 외람되게 자기 몸처럼 생각해 주는 사랑을 받았”고 “이제 절강에 와서도 내 몸처럼 생각해 주는 은혜를 입었”다고 밝혀 본다. 그러나 그 시절 대중상부사는 오늘날 항주시내의 번화한 한 주택지여서 찾아 볼수가 없다. 대중상부사와 상천축사를 거치여 의천 대각국사가 찾고 머문 사찰은 1086년 정월에 대중상부사에서 혜인원으로 옮겨간 정원법사 사찰이지만 정원법사 아닌 원정스님을 찾은 사찰은 이곳 룡정사로 알려진다. 의천스님은 룡정사에서 원정스님을 만나고 원정스님의 알선으로 스님의 제자인 종간스님한테서 직접 천대종의 교리를 배우게 됨은 세상이 다 아는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4   1085년 8월 의천스님은 북송 조정의 안내자 양걸과 더불어 항주 룡정사에서 원정스님을 만난 뒤 룡정 샘물터와 주변의 풍경지들, 사자봉 등을 유람했다고 전해진다. 고려로 귀국한후 의천 대각국사는 삼각산의 식암(息庵)을 찾아 보다가 식암의 경치가 북송 항주 룡정과 비슷함을 보아내고 맘속 시 한수를 지어본다.   절에서 강의를 마치고 식암을 찾으니 구불구불 솔밭길엔 아지랑이 피어난다 그때 룡정에서 천대종지를 담론하였으니 여기 경치 그곳 같아 그때 사람 생각나네   그 시절 그 시가 지금 메아리되어 나의 마음을 세차게 울려준다. 원정스님을 만난 룡정사와 그곳 사람들, 그곳 경치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으면 시를 지어 자기 마음을 달랬으랴 싶어 마음이 보다 울렁인다. 그 옛날 룡정사 샘물터에서 머리들어 산우를 쳐다보니 사자봉이 저만치에 솟아있고,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아래 계곡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현장님께 감사할 뿐이다. 현장님의 극진한 수고로 의천 대각국사님이 다녀간 상천축사와 룡정사를 드디여 원만히 답사하게 되니 항주에 선후 두번 머무른 의천님의 약 7개월 간 발자취 답사를 기본상  마무리게 되였다. 시름을 덜어도 큰 시름을 덜었다. 항주 고려사여, 안녕히~~ 항주 상천축사여, 안녕히~~ 항주 룡정사여, 안녕히~~~~                                               2010년 1월 21일                  
443    남대관 권수정--이자들은 누구인가? 댓글:  조회:1581  추천:32  2010-01-29
       남대관 권수정—이자들은 누구인가?                                      1 1929년 7월 , 신민부에 이어 조직된 “재만한족총련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는 본부를 해림현 산시에 두고 그 아래에 의사기관과 집행부를 설치하면서 한인들의 지방 “자치조직”을 설립하기 위한 활동, 재만한인 교육활동, 무장활동을 주요한 활동으로 내세웠으나 무장활동의 선차적인 과업은  공산주의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원 신민부 군정파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 무정부주의자들간의 련합산물인 재만한족총련합회는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철저한 반일, 반공단체였다. 1929년—1931년 사이 이들 재만한족총련합회는 자기들의 반일,반공 방침에 따라 동북군벌과 손을 잡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 진두에 한족총련합회의 주요성원들인 남대관, 권수정, 리강훈 등이 서 있었다. 1930년 5월 연변에서는 천지를 진감하는 “5.30”폭동이 기세드높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중공동만특별지부가 발기하고 원 조공당  동만지역국 산하 엠엘파, 화요파 등이 호응하여 일어난, 원 조공당 당원들을 투쟁의 시련을 거쳐 중공당에로 받아들이기 위한 대중적 폭동이였다. 이에 피눈이 된 한족총련합회의 주요성원들인 남대관, 권수정 등 수십명 골간들은 전문 “토공대(討共隊)를 조직하고 대지주이고 동북군 돈화 주둔 제7퇀 퇀장인 왕수당과  결탁하여 길림,  연변 더우기 왕청 일대에서 사처로 쏘다니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5.30폭동이후 원 조공당 각파 당원들이 거의 모두가 투쟁의 시련을 거쳐 개인신분으로 관련수속절차를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 남대관, 권수정 등의       학살대상도 조선족 중공당원과 혁명자들에게 돌려졌다. 1930년 가을 이후 왕청현에 이동한 이자들은 당지 보위단과 야합하여 대흥구, 하마탕, 묘령, 천교령 등지에서 중공왕현위가 지도하는 우리 반일유격대와 혁명자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이해 12월에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은 상기 지대들에서 활동하다가 부득불 현유격대—반일유격대를 이끌고 라자구 일대로 전이할수 밖에 없었는데 겨울나이 준비가 따르지 못한데서 유격대를 잠시 해산해야만 했다. 1931년 정월에 김훈은 동지들과 함께 대흥구, 묘령, 천교령 등지에 숨어들며 적들의 토벌로 하여 파괴된 당조직과 혁명단체를 다시 춰세우는 간거한 사업에 나섰다. 그러던 그달 21일, 김훈이는 천교령의 민간의사 현씨집에서 병치료를 하던중 이들 토벌대에 체포되어 왕청현성 백초구로 끌려갔다. 적들은 김훈이를 유격대 대장인줄로만 알고 갖은 유혹과 구박을 들이대다가 길림성 제4감옥ㅡ연길감옥으로 압송하였다.   2  1931년 1월, 중공왕청현위 서기 김훈이 불행히 체포되고 갓 성립된 현위는 엄중한 손실을 받았다. 이 긴요한 고비에 중공동만특위(1930년 10월에 건립됨.)에서는 김상화를 중공왕청현위 제2임서기로 위임하였다.   1931년 1월 하순의 어느날(1930년 음력 섣달 보름날) 저녁 김상화는 적들의 대토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먼저 북하마탕 영안툰에 있는 녀동생 김순옥의 집으로 갔다. 그는 녀동생의 집 뒤고방에서 저녁을 대충 에때운 후 중공북하마탕 지부서기이며 공청단하마탕구위 서기인 한영호 등과 함께 북하마탕 대방자촌에 가서 해당 회의를 밤새껏 열고 지방혁명자 김득봉의 집안천정에 숨어 있다가 한영호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권수정은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이자는 김상화를 불러내더니 빈들거렸다. 《당신이 공산당이지!》 보통키에 앞가슴이 떡 벌어진 김상화는 우습다는듯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권수정은 한걸음 다가서면서 능청을 떨었다. 《김선생, 우리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다 알고있소. 외고집만 부리지 말고 실토하시오.》 《나는 당신들의 선생이 아니오.》 《그럴 필요까지야 없지 않을가, 당신이 실토만 한다면 즉각 석방할 뿐만아니라 큰 벼슬자리에 앉히고 한늬 영화와 부귀를 누리게 할 것이요.》 김상화가 아예 입을 꾹 다물어버리자 악에 받친 권수정은 푸들푸들 떨었다. 워낙 다년간 반일진영에서 민족주의를 부르짖던 이 자는 놈들의 개로 전락되어 전문《공산당잡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 자기에게《큰 고기》가 물렸는데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권수정은 드디어 야수같이 으르렁거렸다. 혹심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놈이 눈을 싸매고 뒤에서 머리를 당기는가 하면 두놈은 열손가락을 노끈으로 매고 좌우 량켠에서 당겨댔다. 그리곤 꿇어앉히고 무릎안쪽에 장대기를 가로지르고 네놈이 장대기 량끝에 올라서서 내리 눌렀다. 38식 총알을 열개씩 묶어 가슴팎을 찌르고는 패운 그 자리에 향불과 담배불을 지져댔다. 또 고추물과 냉수를 먹이며 찬물을 마구 온몸에 끼얹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3   상화는 벌써 몇번이나 까무러쳤는지 모른다. 하루 수차의 혹형에 몸은 성한데없이 피투성이건만 한번 닫긴 상화의 입은 도시 열릴 줄 몰랐다. 한영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유격대에서 쓰지 못하는 권총은 어디에 있고 누구누구는 무슨 일을 한다고 일부를 누설하였다. 또 새아침이 밝아왔다. 집집마다 자기 친인들께 아침끼니를 갖추어왔다. 금방 아침식사가 끝나자 한영호는 정주칸문턱 한쪽벽에 기대여 앉고 김상화는 가마를 베고 누워버렸다. 이때였다. 한영호가 어디에선가 면도칼을 꺼내들더니 어쩔사이도 없이 자기 목을 썩 베고 쓰러졌다. 김상화가 면도칼을 이어받아 자기목을 베였다. 상화가 쓰러진 사이 한영호가 다시 일어나더니 재차 목을 베고 또 쓰러졌다. 그 자리에 있던 군중들은 끔직한 광경에 기가 막혀 소리도 치지 못하고 묵묵히 한숨만 지을 뿐이였다. 뒤미처 보초놈의 전갈을 받고 권수정이 달아왔다. 이자는 쓰러진 김상화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 《네가 정말 독한 사람이다. 네가 내 말을 듣는다면 큰 벼슬에 오르겠는데 이렇게 죽었구나!》 김상화와 한영호의《시체》는 짚에 싸여 바닥에 내려졌다. 한참후 김상화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더니 손더듬으로 종이와 연필을 달라고 하였다. 희색이 든 권수정이 종이와 연필을 갖다주자 상화는 한글자한글자씩 써내려갔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여기에 갇힌 사람들은 아무 책임도 없는 애매한 군중들이니 당장 석방하라! 혁명은 꼭  승리할 것이다!》 일루의 희망을 품었던 권수정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죽여달라는 김상화를 보고 어쩌는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한영호도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수건을 목에 감아 주었다. 권수정이 면도칼은 어디서 난 건가고 묻자 영호는 신바닥밑에 감추었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날 김상화는 수레에 실려 사형장으로 나갔다… 중공왕청현위 제2임서기이며 조선족의 미더운 아들인 김상화는 하마탕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4   중공 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과 제2임서기 김상화를 통해 동북군 돈화 제7퇀과 야합한 남대관, 권수정 토공대의 진면모를 알아 보았다. 이는 왕청 일대에서 벌어진 이자들 토벌대의 한 토벌편단이지만 그때 그 시절 왕청현의 지하 당조직은 엄중히 파괴되고, 얼마나 많은 중공당원과 혁명자들이 체포되고 살해되였는지 모른다. 그들 거개가 피끓는 조선족 반일지사들이였는데 당현위 서기 김훈과 중공왕청현위  제1임 부녀위원 김영신, 최선일, 리신옥 등도 왕청에서 활동하다가 상기 토벌대에  의해 1931년 초에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투옥, 리신옥은 오빠 리진(일명 리선재)과 함께 연길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리진은 왕청현 대감자 사람으로 알려지는데 어느날 리진은 역한 냄새가 코찌르는 감방과 우중충한 감옥담장을 바라보며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연길감옥에 갇혀 몸은 시드나 혁명정신이야 어찌 시들수 있겠소!》  격정이 넘치고 시맛이 도도한 25살 열혈청년의 말이였다. 그뒤 리진은 이 어구를 살리고 보충하여 7절로 된 《연길감옥가》를 손수 지어냈다. 그는 혁명에 대한 피타는 마음을 그대로 노래에 담았었다. 리진은 그후 악형에 의한 시달림과 장질부사에 모대기다가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리진이 지은 《연길감옥가》는 조직선을 통해 온 감방에 퍼지고 외부에 전해져 수많은 혁명자들을 일제놈들과의 투쟁에로 고무하였다.        바람거친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기에 폭탄쥐고 날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이후 몸은 시드나     혁명에 끓는 피야 언제 식으랴     7절로 된 “연길감옥가”의 제1절, 리진이 짓고 선참 부른 이 노래는 온 감방에 퍼져 수많은 혁명자들을 투쟁에로 고무하고 밖에서 일제놈들과 싸우는 수많은 동지들을 항쟁에로 불렀거니 연길감옥가의 작사작곡자 리진과 김훈, 김영신 등은 남대관, 권수정 등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왕청현의 반일지사들이였다.   치가 떨린다. 남대관, 권수정 이자들은 누구이냐? 상기와 같이 동북의 항일투쟁에, 조선족인민에게 엄청 피빚을 진 철두철미한 한무리 반공분자, 반역자들이였다.  
442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 (2) 댓글:  조회:1874  추천:17  2010-01-28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2)    3. 김좌진장군 피살원인   우에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공당 만주총국의 조직적인 행동이고 그 구체적인 집행자는 공도진, 즉 리복림이라고 제나름의 견해를 밝히었다. 헌데 조공당에서는 어인 원인으로 김좌진을 피살하기에 이르렀을까, 아래 계속하여 량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한다.   청산리 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역사사실은 김좌진도 월경했음)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양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원 필자주: 지금 북만의 70여세 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니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주요활동은 :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 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 (략)    ③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 대원 공도진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제4집《20년대 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실린 서술이다. 지금 보면 대단히 과격하고 극단적인 견해가 그대로 보인다. 이는 량환준 로선배가 스스로 지어낸 력사근거가 아니다. 조공만주총국에서는 상기 이유로 김좌진을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없애치우기로 결정》하고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제 다른 한편의 글에서 한족총련합회가 조직한 이른바 “토공대”(討共隊)가 당년 동북군 돈화 제7퇀과 야합하여 우리 연변 중국공산당 조직과 조선족 항일지사들을 마구 살해한 치떨리는 죄악들을 드러내겠지만, 그때면 이땅의 우리 겨레들치고 격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4. 량환준 항일로선배가 말하는 김좌진피살설    한국의 강경애 공범설에 대비해 필자는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공범인가?\" 론문을 써서 김좌진장군 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고 밝히면서 주요자료를 량환준선생한테서 찾았다. 하다면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 피살내막을 어떻게 알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20년대 후기 량환준선생의 항일활동을 중점적으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량환준선생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사람이다. 1930년 2월하순에 그는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시를 받고 화룡 평강 오도구를 거쳐 아성현 해거우(海沟)에 가서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 중임을 짊어졌다. 때는 김좌진장군이 피살된지 한달이 지난 뒤였다. 량환준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30년 3월, 그는 조공당만주총국 소재지 아성현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나게 되였다. 공도진은 량환준선생과 더불어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 사람인데 1907년 5월 27일에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열한살때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땅 명암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량환준선생과 죽마고우로 되고 자라서 또 같이 조공당 지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28년 여름에 공도진은 조직의 지시로 녕안현에 갔고 김좌진장군 암살특수과업을 수행하였었다. 3월에 아성현 해거우에서 이들 둘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암살자가 바로 공도진 본인이 였던것이다.     듣고보니 암살지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 이로하여 량환준선생은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야 했는가고 물어보았다. 김백파의 말도 공도진과 같았다. 다르다면 암살결정자가 바로 김백파를 수령으로 한 만주총국이였다. 그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김백파고 조직부장에 강화린, 선전부장에 장시우라고 할 때 김좌진암살결정권 행사는 그들이였을것이다.    김백파는 김성득, 김득수라고도 했는데 1919년 3.1운동때 남만의 통화신흥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성원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후 신흥학우단 성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였다고 하는데 1926년 5월에 김백파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그는 1927년 10월에 조공당만주총국 조직부장으로 임명되고 1928년 9월에는 리동산의 후임으로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뛰여올랐다. 김좌진암살도 김백파가 조공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뛸 때 벌어졌다. 그러니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암살내막을 제대로 알게 되였다.       그밖에 량환준선생은 지희겸도 이 사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도 자기의 회억록에 이 사실을 밝히였다고 서술하였다. 지희겸선생은 당년 조공당 엠엘파의 주요활동가로서 광복후 선후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제1기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으로 사업한분이다. 이런 신분의 지희겸선생이니 당년의 김좌진피살형편을 알고 증실까지 하였던것이다.     리연록장군은 이름난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이였다. 유감스러운것은 필자가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을 접하지 못한것이다. 이 회억록에 김좌진암살사실이 적혀있다고 하니 또 다른 증실자료가 될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후 1930년 5월에 량환준선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현위서기로 뛰면서 피어린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이런분이니 량환준선생의 증실은 믿을만한것이다. 공도진도 말하고 김백파도 말하고 지희겸, 리연록장군도 증실하였다는 사실은, 김좌진장군피살은 조공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는것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고보면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공범이라는 설은 자연히 오류설에 지나지 않는다.   5. 중공만주성위 관련 문건들에서 (략) 6. 중국조선족 학계의 관련 글들에서 (략)   7. 일대 력사의 비극   본문에서 1930년 1월 김좌진장군 피살배후를 중점적으로 헤아려 보았다. 장군피살의 가장  주되는 원인은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면서 조공당과 엇서며 사회주의 계렬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엄중히 리탈한데 있다고 보아진다. 김송죽선생의 얘기처럼 김좌진장군이 “시종 바란것은 대동단결”이지만 실상은 중국구국군 제13군, 중국 남방지역의 국민당, 쏘련과는 련합할지언정 선진세력으로 광범한 인민대중의 옹호와 지지를 받고있는 조공당과 중공당,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렬과는 철저히 담을 쌓고 적대시했으니 1929년 6월에 벌써 조공당만주총국에서는 “신민부와 같은 부패한 민족단체는 매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중공만주성위에서 신민부, 한족련합회를 반공단체로 보고 련속 결의문을 내며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조선인 민족주의계나 조공당, 중공당 공산주의계 대립과 투쟁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느냐, 내가 죽고 네가 사느냐 하는 사활적인 투쟁으로 번져졌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항일명장 김좌진장군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런 력사현실에서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에서는 결단하고 암살행동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력사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이것이 김좌진장군의 진실한 피살배후이다. 어찌하든 항일독립운동가이고 명장인 김좌진장군의 공은 혁혁하다. 장군의 생애를 조명하면 이는 력사의 긍정을 받아야 하고 또 받고있다. 하나 신민부, 한족련합회를 둘러싼 그 지도자로서의 김좌진장군의 이런저런 사도 력사의 현실이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살아가다보면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신선이 아닌 이상 이러저러한 오유, 즉 과오를 피면키 어렵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고 력사속의 모든 인물들도 그러하고 김좌진장군도 그러하다.   2010년 1월 28일, 보충수개   
441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 (1) 댓글:  조회:1745  추천:16  2010-01-28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 연구(1)     1. 강경애 공범설과 한국지성인들 반론                                 지난 2005년 1월 중순, 조선일보 “월간조선”의 뜻하지 않은 2월호 한 기사에 의해 일제강점기 대표적 녀류작가 강경애는 일약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동거범으로 몰리며 한때 찬기운이 뼈속을 핥는 액운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한국과 중국 연변의 여러 지성인들의 드센 반발과 피타는 노력으로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였지만 베일에 가리였던 김좌진장군 피살배후는 아직도 한국의 학계와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것 같다. 과연 김좌진장군은 어찌하여 피살되였고 그 피살배후는 어떠한가, 그때 그 시절의 력사를 펼치면 김좌진 장군의 피살배후는 서서히 드러난다. 몇달전 강경애 공범설이 떠오르며 판을 칠때까지만 해도 김좌진장군피살은 강경애가 이른바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중국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형사의 회유로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 24일 암살한것으로 나타난다. 김좌진장군의 측근이고 장례대변인을 맡기로 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이 생전에 증언한 내용”이 였다니 “정설”로 굳어진것 같다. 력사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한때 녀류작가 강경애는 온 한국국민의 타매해야 할 궁지에 몰려야 했다. 이에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교수는 “김장군의 암살배후에 대해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 “심지어 강씨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고, 김봉환의 애인이 였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어떤 책에서는 ‘김경애’라고 자칭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져 학계에서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는 “김좌진장군은 일제에 의해 죽은것이 아니라 간도지방에 지부를 두고있는 적기단이 감행한것으로 알고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박상실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고 모를 박았다. 강경애 공범설이 휩쓸 때 한국지성인들의 반론이다. 그때 형편에서 한국의 지성인들이 이같이 반발해도 감좌진장군의 피살배후를 알수 없은데서 “적기단”의 감행으로 리해해야만 했다.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 있었고 이강훈 옹까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수가 없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2. 김좌진장군 암살자는 누구인가   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녀류작가 강경애는 이주 후 거의 룡정에서 생활하면서 가정주부로 청빈한 삶, 작가적 삶, 불행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어떻게 보아도 강경애는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암살과 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 공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월간조선》2월호 기사를 인용했다는 조선일보 인터넷은 강경애가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월간조선》 2월호 기사나 조선일보 인터넷은 여기에서 무책임한 치명적인 두 가지 약점을 드러냈다. 첫째 치명적인 약점은 1927년 봄에 강경애가 북간도나 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둘째 치명적인 약점은 이른바 김봉환의 애인이라는 강경애 혹은 김경애가 우리가 말하는 녀류소설가 강경애가 옳은가 하는 점이다. 기사나 인터넷은 아무런 분석이나 분별이 없이 그저 이름만 보고 강경애라고 점찍었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기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는가, 확실히 강경애라고 한다면 그의 래력과 해림에 나타나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설복력 있게 피력하여야 보는 이들이 수긍이라도 하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이강훈 옹의 증언에 의해 시름을 놓은 데서 인기되었겠으나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있다는 자체는 떠올려야 했다. 베일에 가렸기에 김좌진장군 암살 며칠후에야 현장에 이른 이강훈 옹의 증언도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강훈 옹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믿음직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 암살자는 김봉환이나 그가 시킨 박상실도 아닌 타인으로 나타난다. 아래 당년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이었고 항일로선배였던 량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하자.   조공 아성총국(만주총국)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리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부하 몇을 데리고 정비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 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 속으로 냅다 뛰어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 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 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었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 갔었는데 1년 후 산시에 파견 되어 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필자가 1930년 3월, 아성현에 갔을 때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당년 엠엘파조공 주요간부, 항일로선배)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   이는 1985년 11월, 《연변문사자료》 제4집에 실린 량환준 선생의 글 《20년대 후기 재만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반영된 내용인데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를 두고 필자는 량환준 선생 생전에 수차 방문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력사를 깊이 있게 터득하면서 수긍이 갔다.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면밀히 짜고 든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그 구체적인 집행자가 바로 공도진, 최동범 등으로 불린 리복림이였다. 리복림은 본명이 공도진이고 때에 따라 최동범이라고도 불렸다. 리복림은 1907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으로서 1925년경에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 이주하였고 조공동만도 간부인 당시 리동선(항일렬사)의 소개로 조공당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중공 아성현위서기로, 1932년 봄에는 중공 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1933년 10월에는 주하항일유격대 주요책임자로, 1936년 8월 이후에는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지대사령, 중공 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4월에 전사하였다.  
440    신민부의 공과 사를 두고 댓글:  조회:1407  추천:24  2010-01-27
                신민부의 공과 사를 두고                                                                    1   지난세기 20년대 초이후 동북지구 조선인반일단체들간의 통합운동이 무척 열기를 띠였다. 1923년 8월에는 집안을 중심으로 한 “참의부”가 설립되더니 1924년 10월에는 길림지구를 중심으로 한 “정의부”, 1925년 3월 10일에는 녕안에서 녕안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가 조직되였다. 한데서 이 시기를 “3부정립”시기라고 하는데 김혁,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신민부는 로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꾸려 북만일대 조선족들의 문맹퇴치와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하고 보안대와 별동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 친일단체 숙청운동, 조선국내 진군작전활동 등을 활발히 펼쳐갔다. 했으나 신민부는 창립이후 상기와 같이 공도 수두룩하거니와 사도 적지 않아 많은 물의를 빚어내며 점차 민중의 신임과 후원을 잃어버리고 최종 해체되는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혁이후 신민부의 대권을 틀어쥔 김좌진장군을 절대적 항일영웅으로 받들면서 력사상에서 일으킨 공적역할만 강조하면 력사의 편차를 가져오게 된다. 력사는 허위와 꾸밈을 모른다. 김좌진장군은 공도 크거니와 사도 큰 력사인물이여서 응당 력사의 저울에 의해 공정한 평가를 받아야 옳을것이다. 아래 력사상 존재했던 항일단체 신민부의 공과 사를 꾸밈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해 보기로 한다.                                                                      2   다 아는바와 같이 북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 교육회 및 북만지역, 조선국내 지역대표들은 목릉현에서 갓 조직된 “부여족통일회의” (1925년 1월) 토대우에서 1925년 3월 10일부터 15일까지 녕안현 현성에서 대회를 가지고 신민부의 창립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창립대회는 신민주창립 선포문과 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그 조직체계는 중앙집행위원회(행정기관), 참의원(립법기관), 검사원(사법기관) 등으로 구성되였다. 이에 따라 선출된 인원은 아래와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민사부: 최호 군사부: 김좌진 참모부: 라중소 외교부: 조성환 법무부: 박성태 경리부: 유정근 교육부: 허빈 선전부: 허성묵 련락부: 정신 실입부: 리일세 심판부: 김돈 참의원 원장: 리범윤 참의원: 홍종림, 김진원, 김송암, 량재헌, 최문일, 황공삼, 윤각, 리장녕, 안호연, 안룡수, 허빈, 김규현, 남극, 차동산, 리백향, 송상현. 검사원 원장: 현천묵 검사원: 강규상, 로호산, 황국민, 강인수, 손일민, 김기남, 라중소, 지장희, 강명현, 양윤삼   중앙집행위원회는 산하에 지방총판부를 두고 총판부 산하에 구를 설치하였다. 1926년의 해당 통계에 따르면 지방총판부는 제1지방총판부, 제2지방총판부, 액목지방총판부, 돈일지방총판부로 이루어졌으며 총판부마다 자기 산하에 몇개 또는 10여개의 구를 두었다. 녕고탑에 소재지를 둔 제1지방 총판부는 17개구, 해림, 목단강 등지를 소재지로 하는 제2지방 총판부는 5개구, 돈화 삼도량자에 소재지를 둔 돈일지방총판부는 4개구를 설치하고 드센 활동을 벌리였다.                                                                        3   하다면 3부정립시기 녕안현을 중심으로 북만에서 활동한 신민부의 주요활동은 어떠한가, 이를 두고 교육활동, 무장투쟁 등으로 나누어 보기로 하자.   1. 교육활동:   1)      학교교육   신민부 창립대회 결의안에 의하면 소학교 과정은 6년이고 중학교 과정은 4년이며 관할구역내 매 100호이상의 마을마다 1개의 소학교를 둔다고 하였다. 과연 신민부는 창립후 목릉, 주하, 밀산, 요하, 돈화 등 15개구역에 50여개의 소학교를 두었는데 그 주요한 학교는 이러하다.   해림 서두가 신창학교 목릉현 원동학교 아성 개신학교 녕고탑 동명학교 아성현 이층전자 이층전자학교 모아산 신창학교 아성현 취원창 동원학교 석두하자 영신학교 아성현 탄자황산 부달학교 채가툰 삼가자학교 안도현 삼인방학교   상기 학교들은 일반적으로 교원이 2-3명이고 학생은 20~60명 쯤이였다. 학교의 기본과업은 문맹자들에 대한 문화지식전수와 청소년들에 대한 반일민족의식 주입이였는데 수신, 지리, 력사 등 한글 교과서를 자체로 편찬하고 사용하였다. 1927년 8월 1일에는 북만한인교육대회가 해림에서 소집되기에 이르렀다.   2)      사회교육   당시 북만일대의 조선족농민들은 거의가 문맹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신민부에서는 관할지역내 조선족들이 살고있는 마을마다 로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세워 40살이하 사람들이 봄과 여름 두기씩 매일저녁 한시간 강제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40살이상 사람들은 야간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3)      “신민보” 발행   신민부에서는 자체발전의 수요에 따라 1925년 4월 1일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월간 또는 순간(旬刊)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하였다. 1926년 4월, 할빈일본령사관의 간섭으로 신민보는 부득불 페간할수밖에 없었다.   2. 무장투쟁:   1)      보안대와 별동대   신민부 반일무장투쟁의 조직형식은 보안대와 별동대였다. 군사부에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지도하였는데 그 조직부서는 아래와 같다.   총사령: 김좌진 총사령부관: 주혁 보안대 총지휘: 박두희 보안대 1대 대장: 문우천 보안대 2대 대장: 백종렬 보안대 3대 대장: 오상세 보안대 4대 대장: 주혁 보안대 5대 대장: 장동철 별동대 대장: 문우천   2)      사관학교   신민부는 창립후 목릉현 소추풍에 반일군사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성동사관학교를 세우고 2기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김혁이고 부교장은 김좌진, 교관은 오상세, 박두희, 백종렬 등 8명, 고문은 리범윤, 조성환 등이고 선후 수백명의 졸업생을 키워냈다. 신민부는 또 시초에 녕안현의 산림속에 병영을 짓고 집중군사훈련을 시도했으나 무기공급과 식량공급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무장부대내 둔전제실시도 수포로 돌아갔다. 1927년 5월, 안도와 돈화에서의 새로운 군사기지설치실패가 그러하다. 병영과 군량문제로 만 18살이상 40살이하 남자를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3)      친일주구와 친일단체 청산   ①1925년 9월, 신민부 별동대 대장 황덕환 등 6명은 명령을 받고 일제주구인 “해림조선인민회” 회장 배두산을 미행하다가 한 산기슭에서 처단했다. ② 1925년 9월 26일, 별동대는 대장 황덕환의 인솔하에 할빈조선인민회를 습격하여 친일주구들에게 반성문을 씌우며 엄포를 놓았다.   4)     국내진군활동   1927년 8월 3개 특수공작대가 조선국내에 파견되였다. 주요과업은 작전지도작성, 지리상황료해, 대중선동사업, 일본군 주둔지확증 등이였다.   제1조 활동: 압록강건너 강계, 평양일대 제2조 활동: 백두산기슭에서 떠나 함경도, 강원도, 경산도를 경과, 전라도 지리산 일대. 제3조  활동: 두만강건너 종성, 북청일대   결과 3개 특수공작대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맡은바 과업을 수행하고 그해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밖에 1927년 초봄에 신민부 총사령 겸 중앙집행위원장 직을 맡은 김좌진은 백두산 서쪽 산림속에 진을 둔 중국구국군 제13군사령관 양수일과 합작을 도모하고 중국국민당 만주공작책임자 공패성, 구국군 악유준, 사가헌과도 련합투쟁을 시도했다. 또 국민당 및 풍옥상부대와의 련계를 다그치고 조선공산당 엠엘파 최창익을 통해 쏘련의 군사위원장 뜨로쯔끼와도 련계를 가지였다. 하여 20년대 말에 이르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해당 학교들에 수많은 조선인학생들을 보낼수 있었다.                                                          4   상기서술은 력사적으로 보는 신민부와 신민부지도자 김좌진장군의 일대 공적이라 하겠다. 그러면서도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신민부는 학교교육에서 재정난이 심하다고 학부형들에게 재정부담을 가중시킨 결과 점차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군자금해결에서도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기다가 뜻대로 안되니 강제실시하기도 하였다. 신민부의 리백호 등은 빈주현에서 강박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고 무고한 백성을 해치는 류혈사건, 즉 빈주사건을 빚어냈고 훈춘에 파견된 모금대는 군자금징수를 거부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결과 신민부는 말 그대로 민중들의 신임과 후원을 잃고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였다. 민중을 떠난 그 어떤 반일투쟁이란 운운할수 없다는것을 력사는 알려주고 있었다. 또,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조공측도 력사적인 오유가 있었다)과 무조건 엇서니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리탈하게 되였다. 지방단체들과도 권력다툼을 하고 정의부와도 지방쟁탈을 하니 민중들의 신임을 보다 잃었다. 나중에 신민부 내부의 분렬과 대립은 최종 해체의 국면을 초래하였으니 그 직접적인 책임을 김좌진장군이 안아야 했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김좌진장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장군은 그 당시 중국구국군이나 중국 국민당과도 합작 또는 련합하고 쏘련과도 련계를 가질지언정 조선공산당과는 합작을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김좌진장군의 치명적인 오유가 아닐수 없다. 신민부나 김좌진장군의 력사적오유에 대해서는 “김좌진장군의 피살배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기에 이 글에서는 더 전개하지 않으려 한다. 신민부의 공과 사는 력사적산물이기에 그대로 서술하는것만이 력사와 그 인물을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말하고싶다. 이를 떠나서 신민부의 공적만, 김좌진장군의 공적만 력사라고 하면서 신민부를 모두가 옳다고 하면 진실한 력사에 책임지지 못하는 오유를 범하게 될것이다.                                
439    1931년 전후 강경애의 행적 연구 댓글:  조회:942  추천:26  2010-01-26
                       1931년 전후 강경애의 행적 연구     2005년 1-2월 사이 문화산백사이트에서 벌어진 인터넷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필자는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란 글을 써서 올린적이 있는데 이 글과 시시비비 관련 글들은 2006년 11월에 “한국학술정보(주)”에 의해 출판된 나의 연구론문집—“조선족역사문학연구문집”(2)에 실리였다. 이 글은 강경애가 1929년에 연변 룡정으로 들어왔다는 기존의 설이 틀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1929년-1931년 사이 강경애는 어디에서 살았고 무엇을 했을까, 이를 옳바르게 밝히는 것은 강경애가 1930년 1월 김좌진장군 피살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아진다.   1. 강경애의 어린 시절과 학교시절    이름난 녀류소설가로 불리는 강경애는 조선 황해도 송화 (오늘의 황해남도 송화군)출신이다. 중국의 일부 조선족학자들은 황해도 장연으로 알고있는것 같다. 생졸년월일도  1907년-1943년 설과 1906년-1944년 설 두가지로 반복된다. 어린 시절도 어떤 이곳 학자들은 조실부모로 알지만 사실은 워낙 털면 먼지뿐인 살림에 아버지가 강경애 4살 때 사망한데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장연 (오늘의 황해남도 장연군)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선다. 어린 경애도 다섯살 때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하고 유년기를 장연에서 보내게 된다. 어떤 학자들이 강경애의 고향이 장연이라 하고, 또 장연의 풍경이 훗날 강경애의 작품에 작품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것도 이 때문이다. 여덟 살이 되던 무렵 강경애는 그의 의붓아버지가 보던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우치고 “삼국지”, “옥루몽”, “조웅전”, “숙향전”등 고대소설들을 독파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에 벌써 동네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어 《도토리 소설 장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장래 녀류소설가의 싹수가 보인 것 같다. 생활의 어려움으로 열 살이 지난 1915년에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녀자청년학교를 거쳐 장연보통학교에 입학, 열여섯 살 무렵인 1921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1923년 3학년 때 학교내 한차례 동맹휴학에 뛰어들었다가 퇴학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24년 봄에 강경애는 서울의 동덕녀학교에 편입하여 약 1년 간 수학. 그 무렵이던 1923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 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조혼에 의한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양주동이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이고 문학적 재질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라 문학도 강경애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그들은 자주 만났고, 1924년 5월에는 “책한권”이란 시를 양주동이 주재하는 “금성”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양주동과의 교류에서 획기적인 것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는 양주동이다. 1년이 지나 강경애는 양주동과 헤어졌다고 하나 작가로서의 생애가 펼쳐지니 행운이라 해야겠다.    2.       1929년을 전후한 장연 생활   1924년 9월 강경애는 서울 동덕녀학교를 중퇴하고 장연으로 돌아갔다. 장연에서 강경애는 “가을”(1925.11), “다림불”(1926.8)이란 시를 발표했고 1929년 10월에는 염상섭의 평론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 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독후감 형식으로 쓴 이 글은 사회현실에 대한 나름의 안목으로 자기의 생각을 리론적으로 펼치려는데서 그 의미를 보여준다. 강경애는 또  시론 “조선녀성의 밟을 길”을 조선일보 문예란 (1930.11.28-29)에, 단편소설 “파금”을 조선일보 문예란 (1931.1.27-2.3)에, 비판문 “양주동 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강악설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1931.2.11)에 발표한다. 1931년 이해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는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련재하기에 이른다. 장연에 돌아온 몇년사이 강경애는 감상적인 시를 쓰던 문학소녀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는 녀류작가로 성장해 간다. 장연으로 귀향한후 강경애는“흥풍야학”에서 가난한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근우회 장연 지회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일으킨다. 근우회는 비밀정치단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사회주의 녀성운동 측과 기독교 녀성운동 측이 같이 1927년에 설립하고 1928년과 1929년에 산하 지회들이 전국에서 많이 조직된다. 1929년 5월에 근우회 본부는 장연지회 설립안을 가결하고 그해 6월 10일에 근우회 장연지회 야유회를 가진다. 이날 야유회에서 강경애가 장연지회 서무부장 직책으로 개회사를 했다고 하니 장연에서의 강경애 활동모습을 엿볼수가 있겠다. 그뿐이 아니다. 1929년 강경애의 장연활동은 1929년 10월의 그의 글 “염상섭 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글에서 강경애는 “장연 근우회 지회 내 강경애”라고 밝히여 1929년 5월—9월기간 장연에 있었음을  잘 알려준다. 글에는 또 “9월 17일 추석 달밤”이라고 씌여있어 이해 추석까지도 장연모습을 환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보면 강경애가 1927년 봄부터 중국 해림지역에 거주하고 김봉환 동거자와 같이 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장군을 암살케 했다는 이강훈의 진술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3.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어떤 사람인가?   (1) 장하일은 누구인가?   강경애와 그의 문학연구, 강경애의 생애를 쭈욱 보면 강경애의 생활에 뛰여든 남자는 오직 두사람 뿐인데 첫 사람은 본문에서 간단히 스치고 지난 평양 숭의녀학교와 서울 동덕여학교 시절의 양주동이고 두번째는 그의 남편 장하일이다. 장하일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별반 없으나 룡정 동흥중학교 교원시절 모습과 부부생활 모습은 조금 보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은 문화발굴《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이란 한편의 글(연변문학 2003년 4월호)에서 강경애는 1931년에 황해도 장연에서 수원 농업전과를 졸업하고 장연군 군청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고 그 해에 룡정에 이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이 그러하다. 이 시기 이전의 장하일 경력은 모르나 황해도 황주 (오늘의 황해북도 황주군) 사람이고 수원 농업전과 출신인 장하일이 장연 군청서기로 부임한후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강경애를 알고 련애하고 결혼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년 6월경에 장연을 떠나 중국 룡정으로 올 때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이들 부부가 룡정에 이주한 후 장하일은 룡정을 떠나기까지 줄곧 동흥중학교 수학교원, 교도주임으로 근무했는데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었다. 여러가지 관련자료를 보면 장하일이 룡정행을 결단한것은 교장 림계학과 관련되고 있다. 교장 림계학은 조선 함경남도 사람이고 보성전문학교 법과 출신으로서 1924년 7월에 벌써 동흥중학교(1921년 4월 15일 설립) 교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공산당 화요계 당원으로 활동한다.   (2) 림계학은 누구인가?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18일 서울에서 창립된 정당으로서 4월 18일 제1차 회의에서 중앙지도기구를 내오고 산하에 해외부, 만주총국, 일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26년 5월 16일에 중국 북만의 주하현 일면파에서 조공당 만주총국이 조직되고 이해 10월 28일에 동만의 연길현 룡지향 삼성촌에서 조공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구역국이 조직되였다. 림계학은 동만구역국 9명 위원중의 한 사람이였다. 1927년 10월 2일, 일제에 의한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에서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정재윤(안기성)과 림계학, 동흥중학교 교장 박재하 등 29명이 서울에 압송되고 각기 4년, 5년, 6년 판결을 받았는데 림계학 등 5명이 4년형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조선공산당 화요계 당원들이였다. 림계학은 출옥후 룡정으로 돌아왔고 동흥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때는 조선공산당이 이미 공산국제에 의해 취소되고 학교내 중국공산당 지부가 파괴된 후였다. 그러나 반일지사로서의 림계학의 립장은 변함이 없없다. 이런 교장의 주도로 장하일은 조선 황해도 장연에서 룡정으로 왔고 림계학의 동지로, 견결한 반일지사로 교원활동을 이어갔다. 동흥중학교는 대성중학교와 더불어  사생들의 반일투쟁 열조가 대단하였다. 그 선두에는 림계학, 장하일 등이 서 있었다.   (3) 장하일 등의 반일투쟁과 사직   그러나 1939년 6월 15일에 만주국 교육부의 거듭되는 엄령에 의해 동흥, 대성 두 학교는 룡정국민고등학교(1941년 7월에는 간도성립 제2국민고등학교로)로 합병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교장은 림계학이 맡고있으나 부교장은 일본인 우시마(宇島)로서 이자가 학교의 실권을 쥐고있었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 외 행사나 교수용어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 총영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 장하일 등이 선두에 나섰다. 1942년 여름이후 학교운영은 말이 아니었고 완전한 노예화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에 격분한 교장 림계학 등 반일지사들이 련속 사직하였다. 교도주임 장하일도 사직으로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하였는데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하루동안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교장 림계학은 사직한후 룡정에서 북선려관을 꾸리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광복후 조선으로 나갔고 조선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하였다. 장하일은 사직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사》총편집을 맡았고 광복 후에는 북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었다고 한다.   4.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   강경애는 1931년 6월경에 남편 장하일을 따라 중국 룡정으로 이주했다가 1932년 6월경 1년만에 조선 장연으로 돌아 갔고 1933년 9월 경에 다시 룡정으로 돌아온다.  1936년과 1937년 사이에 또 서울과 장연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은 살림살이에 애쓰는 안해에, 술좋아하는 호인 교사남편의 평범한 생활로 보였다고 한다. 실은 장하일이 견결한 반일지사일 때  이런 남편의 영향 하의 강경애는 이름난 녀류작가였고 1933년 11월에 룡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 리주복 등에 의해 조직된 문학동인단체 《북향회》의 동인이면서 고문,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하였다. 룡정시절의 강경애를 두고 그의 이웃에서 산 작가 안수길은 인상담을 이렇게 쓰고있다.   “수수한 품이 여느 부인네들과 다를 것이 없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 등 유명한 작가라고 이웃에서도 모르고 있을”정도였다.   공부관계로 가정 일에 서먹서먹한 강경애는 결혼후 가사 일이 서투러서 남편과 자주 다투는 듯 하였다고 한다. 우물 물을 깃느라고 물동이를 몇개나 깨뜨리지 않으면 빨래할 때 양잿물에 손끝을 빨갛게 벗기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강경애는 살림살이에 충실했고 틈틈히  시간으로 책을 읽고 글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작품을 쓸 때면 파지를 엄청 내는 습관이 있고 자기 체험으로 소재를 찾고 답사를 하기도 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그로서의 개인풍모를 갖고 있었는데 만주 조선인작가로 불리우는 현경준은 그의 문학풍토기—간도편 “인문평론”(1940.6)에서 그들 부부와 장하일의 풍모를 그려보았다.   용정에는 소설가 강경애 씨가 있다. 언제나 건실한 사상으로 착실하게 생활하여 나가는 씨는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이 한이다. 어린애가 없어서 탄식이지만 그 불건강 때문에 창작을 맘대로 못하는 것이 어찌 시 자신만의 한이랴? 가끔 찾아가면 그리운 지기를 만난 그 심정에 소설 이야기 평론 이야기 문단 사정에 대하여 연방 질문하듯 이야기하는 곁에서 부군 장하일 씨는 너그러운 웃음으로 호주(胡酒)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이야기 끝나기를 기다리나 끝이 없는 이야기에 끝이 있을 리 없다. 기다리다 못해, “여보, 손님을 붙잡고 이야기루만 지날테우? 뭐 좀 호주래두 대잡해야지”하면 “아이구, 구실이 좋구먼. 술생각이 나문 그저 생각이 난다구 솔직하게 고백하구려.”하고는 슬쩍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 나가는 씨에게서 나는 소설가라기보담 현처를 느꼈다.   이들 부부사이의 일화이다. 장하일은 사람좋은 애주가이고 반일지사이며 강경애가 쓴 글을 첫 사람으로 읽어주고 조언해 주는 남편이자 독자이고 비평가이고 동지였다. 그러던 강경애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작가생활에 전념하다가 말 그대로 나빠진 건강으로 1942년에 남편 장하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고 1944년 4월 26일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여 생명을 마감하였다.   본문에서 강경애의 어린 시절과 학교시절, 1929년을 전후한 장연 생활,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 등을 두고 1931년 전후로 나누어 강경애의 행적을 두루 헤아려 보았다. 강경애는 실로 일제치하 중국 동북에서 생활한 겨레작가들중 거의 유일하게 친일 행위를 하지 안고 반일지사 남편과 함께 지내며 글을 쓰며 사회활동도 하면서 살아간  우리 겨레의 저명한 녀류작가였다.   2010년 1월 23일, 강남 두앵원에서  
438    김송죽선생님께 드리는 글 (1) 댓글:  조회:1132  추천:33  2010-01-25
          김송죽선생님께 드리는 글 (1)     조글로를 통해서 김선생님의 세편의 글을 모두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첫편의  글을 올려서 한두시간이 지나지 않아 보았드랬지요.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즉각 반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2010년에 저의 행동좌우명으로 내세운 “삼사이후행”(三思而后行)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한걸음 물러서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견해는 철통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립장을 바꿔 생각하면 선생님의 견해, 선생님의 립장이 리해도 됩니다. 김좌진장군의 딸이라는 분한테서 들은 얘기고, 전 한국광복회 이강훈회장의 견해니 그럴수밖에 없겠지요. 견해를 돌리기란 정말 쉽지만은 않으니까. 이 점을 리해한다는 얘기입니다. 솔직히 저의 생각을 터놓고 픕니다. 력사를 연구하고 력사 글을 쓰는 분들은 어느  한 력사인물, 어느 한 력사사건에 대하여 흥취를 가지면 그 인물,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자료들을 다 들여다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가, 깊은 연구를 하지 않으며 여기저기서 베껴내고 자기의 연구성과처럼  자처하다가는 골탕을 먹게 됩니다. 앞뒤를 모르고 하다가 무엇으로 들이치면 당할수밖에 없지요. 선생님의 경우 김강석과 이강훈회장의 말이 귀에 박혀 다른 사람의 견해에 풀쩍 뛰고있으니 어른님다운 풍격이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먼저 2005년 1-2월 사이 문화산맥에서 벌어진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 글들을 잘 보시고 남들은 어찌하여 경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 동거녀가 아니고,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공당 만주총국의 집단획책이라고 하는가, 이 력사사실을 잘 보며 사색하여야 할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옳다면 어떻게 옳다고 조리있게 견해를 밝히면서 도리로 대방을 설득시켜야 하겠지요. 그러나 선생님은 선생님의 글 댓글에 “진실”이라는 아이디 글이 나타나니 뛰고있습니다. 저는 2005년 1-2월사이 강경애시시비비에서 주장으로 뛴 리광인입니다. 제가 알아보니 그 시시비비 주력들인 조성일회장님, 북경의 장춘식씨도 “진실”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주력팀들이 선생님과의 설전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시비는 도리로 나눌 필요가 있겠지만 나먹은 문인들이 길길이 뛰며 싸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온화한 태도로 조글로 저의 코너에 그 시절 시시비비 몇편의 글을  금시 올렸고, 장춘식씨는 앞서 그 시절 글과 강경애 문장을 몇편 올리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력사진실을 잘 모르는 분들이 진짜 우리 강경애 녀류작가를 오해할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희들도 “진실”님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님의 댓글을 보면 박식하고 력사지식이 대단히 풍부하고 김좌진장군 암살전후를 잘 알고있는 분으로 알리더군요. 이제 저는 진실님을 찾아 교류할것이지만, 특히 진실님이 지적한,  암살자 공도진이 바로 리복림이고 최동범이고 박상실이라는 점에 류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모두가 공도진 한사람입니다. 박상실이 바로 공도진이라는 점은 력사와 씨름하는 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김좌진장군 암살자는 공도진으로 나타나지만 그 조직획책자는 그 개인이 아닌 조공당 만주총국(화요파)이였습니다. 한편 우리 녀류작가 강경애는 그시절 그사건의  녀인이 아니며 그 시절 녀류작가로서의 우리 작가 강경애는 조선 황해도 장연에서 룡정행에 오르지도 않은 시절이였습니다. 이미 글 한편을 썼으니 제가 쓴 1931년 전후 강경애 행적을 보면 선생님도 수긍이 갈것입니다. 한걸음 물러서서 다시다시 력사공부를 진지하게 하면서 잘 검토해 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후배가 선배님께 드리는 진지한 진언입니다. 그러면서 더는 조공당을 모독하며 이강훈회장을 올리추는 글들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구요. 또, 조공당을 모독한다는 자체가 력사를 잘 모르는 무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조공당의 절대다수 사람들은 견실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항일지사들로서 1930년 동북 “5.30”폭동전후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동북의 가렬처절한 항일무장투쟁에서, 적후투쟁에서 피흘려 싸운 견실한 항일지사들입니다. 아닙니까? 조선의 립장에서는 김일성장군 계렬이 아닌 그 먼저라고 조선서 홀대하고, 중국공산당 계렬이 아니라하여 (1930.5.30폭동이전)력사평가가 부진하고, 한국의 정통 독립운동사가 아니라하여 한국에서 홀대하고 그러면 그들은 누구입니까?! 제일 옳바르게 평가를 주어야 할 우리 중국조선족들이 그들의 투쟁을 리해하지 못하고 무시한다면 뭐가 되여요? 그들을 무시한다는것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피어린 력사, 피어린 항일투쟁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자초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만큼 쓰겠습니다. 선의적인 글이니 선생님도 리해가 가리라고 믿습니다. 그때 강경애시시비비 글들과 진실님의 댓글을 잘 보셨으면 합니다. 요즘 리광인 저의 문학코너와 장춘식씨 문학코너의 글들이 그때 글들중의 일부이니 줄거리는 주어집니다. 새해 안녕하시고, 하시는 일들이 잘 되여가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2010년 1월 25일 , 리광인 강남에서  
437    겨레발자취 (30) - 의천님 항주 상천축사 다녀가셨네 댓글:  조회:4881  추천:27  2010-01-25
【겨레발자취】(30)    의천님 항주 상천축사 다녀 가셨네     강남땅 절강에 와서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 발자취를 꾸준히 답사하였지만 항주 서호가의 상천축 사찰과 룡정사 사찰을 옳히 답사하지 못한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더는 미룰수 없어 새해 2010년을 잡은 1월 16일 아들애와 함께 아침 8시반 쾌속버스로 항주에 이르자 항주의 현장님이 모가부에서 기다리고있었다. 모가부(茅家埠)는 항주 서호의 소제(苏堤)건너 서리호(西里湖)밖의 호수로서 서쪽으로 비래봉과 상천축 사찰에 이르는 길목이였다.   현장님의 승용차는 모가부에서 보복령로(普福岭路)를 지나 계곡따라 하천축, 중천축을 차례로 거치여간다. 현장님은 하천축 사찰은 일명 법경사(法鏡寺)라고도 하는데 항주에서 유일한 비구니도장이고, 중천축 사찰내에는 항주불학원(佛學院)이 있다고 알려준다. 내가 이 계곡 상중하 천축이라고 하는 천축(天竺)이 고인도 이름이라고 하니 현장님은 동진 때 인도 승려—혜리와 관련되여 천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자상히 설명한다. 그러는 사이 승용차는 매령북로(梅岺北路)로 이어가다가 잠간새에 상천축에 대인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상천축, 중천축, 하천축 3개 사찰을 가진 천축산은 원래 무림산이였다는데 동진 함화(咸和, 326—334) 초년에 인도에서 온 고승 혜리가 이곳 산의 생김새가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중의 천축산의 한 봉우리는 인도에서 날아왔다는 뜻에서 비래봉(飛來峰)이라고 불리여 오늘에까지 그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으니 혜리고승에 의해 비래봉아래 처음 일어선 사찰이 유명한 항주 령은사다. 령은사 가까이 계곡따라 세워진것이 하, 중, 상 세곳의 천축사여서 일반적으로 천축산의 세 사찰로 불리우는데 세 사찰중에서 가장 늦게 일어선 사찰이 계곡 제일 우에 자리잡은 상천축사로 알려진다.  상천축사에 송나라 시절 천대종의 이름난 고승 원정스님과 종간스님이 련이어 머물고 있었기에 항주에 이른 의천 대각국사는 대중상부사에 들러 정원법사를 만나고 또 상기 이들 스님들을 찾아 상천축 사찰에 오르게 된다.   그로부터 근 1000년 세월이 흐른 오늘은 나와 아들애 그리고 현장님이 의천 대각국사 발자취를 따라 상천축사에 들어서매 상천축사 정문 우 편액은 “법희강사”(法喜講寺)로 밝혀지고있었다. 정문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꺾으면 좁은 구간길이 나타나고, 그 구간 오른쪽 담벽에 “진대고찰”(晋代古刹) 중문 네글자가 박히여 여기가 그 옛날 진나라 시기에 건설된 사찰임을 알리고 있다.   좁은 사찰구간길을 지나면 방향이 다시 오른쪽으로 산기슭까지 뻗으며 상천축사의 천왕전과 대웅보전이 차례로 나타난다. 천왕전과 대웅보전에는 설명절 기간 항주사람들의 풍속으로 되는 붉은 초롱이 5개씩 수없이 걸리고 새해기도를 드리거나 소원을 비는 불교도들과 유람객들로 차고넘친다. 현장님은 어제 15일부터 음력섣달이 시작되니 항주사람들이 사찰들에 이렇게 몰린다며 이는 항주의 하나의 풍속으로 굳어졌다고 일가견을 내비친다. 나는 이 일가견에 완전 동감, 그래 풍속으로 보는것이 객관적이구 말구.   와중 유감스러움은 근 1000년전의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 유적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것이라 할까. 그래도 관련 력사자료는 한국 등 연구서들에서 볼수가 있음이 다행이지. 의천스님이 상천축사를 찾았을 때 원정스님은 늙은 몸으로 룡정사로 은거하고 원정스님의 천거를 받은 종간스님이 항주자사 포종맹에 의해 상천축사 주지로 활동하게 된다. 종간스님은 원정스님의 제자로서 19살에 출가한뒤 상천축사의 원정스님한테서 천대교리를 배우다가 주지님의 권유로 금산에 가서 범진스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다가 포종맹은 원정스님의 천거에 따라 종간스님을 상천축사의 주지로 내세우고 조정에 다시 천거하여 자변법사 호를 받게 한다. 한국 “의천 대각국사”의 저자 차차석박사는 책에 이렇게 쓰고있다.   “의천에게 종간의 천대교학을 배우도록 권유한 사람은 항주자사 포종맹이였다. 의천이 종간에게 천대교학을 배우고 있는데 고려에서는 어머니 인혜태후로부터 조속히 환국하라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즉시 귀국할것을 망설이는 의천에게 어머니의 뜻에 따라 효도를 하라며 귀국을 권유한 사람은 종간스님이었다.”   이에 따라 보면 의천 대각국사와 종간스님과의 관계는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수가 있다. 이제 다음 룡정사 답사글에서 보다 밝히겠지만 의천 대각국사가 1086년 여름 귀국길에 천대산 지자대사 육신탑을 찾아 참배할 때 오죽하면 “전당의 자변대사 종간의 문하에서 교관을 이어 받고” “훗날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을 베푸신 노고에 보답하고자”한다고 서원하기에 이르렀을까.   우리는 천축산 정상아래 산기슭에 자리잡은 상천축사 답사를 마치고 상천축사 정문을 나서면서 일찍 강남순시길에 오른 청나라 건륭황제가 선후 8차나 이 사찰을 찾아보고 사찰이름을 법희사로 하사한 력사전경을 떠올려 보았다. 법희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지만 2008년 5월 12일, 즉 음력 사월초파일날 현장님의 권유와 안내로 항주고려사와 고려사 옛터를 거쳐 이곳 상천축사를 처음 답사했을 때 이 사찰이 의천 대각국사가 다녀간 사찰이라고 현장님이 분명 일러 주었으나 별로 주의를 돌리지 못한 내가 한없이 미워났다. 그때는 건성으로 듣고 흘려보내다나니 지나치고 말았는데 오늘 다시 찾으니 감수가 자못 새로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의 송나라 시절 중국내 발자취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발자취 찾아가는 유적지마다 의천님의 형상이 우렷히 떠오르며 현실세계서, 바로 우리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것만 같아 의천님과 서로 얘기 주고받는다.  고로 근 1000년 세월 흘렀어도, 님은 갔어도 상천축 사찰 주지 원정스님의 천대종 가르침을 받는 의천님의  모습이 너무나 똑똑히 보이는 것이리라. 그래서 의천님 다녀가신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떠날 때면 “헤어지기”가 아쉬워 다시다시 돌아보며 “안녕히!””다시 찾아 오리라!”를 맘속으로 몇번이고 되뇌이게 된다.   2010년 1월 20일      
436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댓글:  조회:1601  추천:15  2010-01-23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올년초 1월 24일, 필자는 중국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 사이트에 올린 론문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에서 “강경애가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불린 연변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9년이다.”라고 쓴 바 있다. 솔직히 말하여 조선족역사연구자인 필자로 말하면 강경애 연구전문이 아니여서 1929년 설 근거를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한편의 글에 두었었다. 이즈음 강경애관련 연구자료들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가운데서 이와 유사한 견해들이 여러 곳에서 보임을 알 수 있었다. 아래 유사한 견해들을 보기로 하자. 박충록교수(중국)는 “강경애의 작품세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1929년 겨울 중국북간도 용정일대에 근 2년 간 있으면서 임시교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무직업과 가난의 고초를 겪기도 하다가 1931년에 귀국했다.”① 은종섭선생은 “조선근대 및 해방전 현대소설사연구”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강경애는 1929년에 간도에 들어가 용정일대에서 임시교원 등을 하였다. 그후 1931년 말에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음해 다시 용정에 들어”갔다. ② 김창현선생은 “그는… 숨막히는 고향을 떠나 중국 간도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하다가 1931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③ 중국 연변의 김순금선생은 자기의 한편의 연재글에서 이런 자료들을 답습하고 있다. 강경애는 “생활난에 쫓기여 1929년에 중국 동북(간도)에 들어 왔다가 1931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갔음… 1932년에 다시 간도 용정에 이주하여 문학창작사업에 종사” ④ 상기 채미화와 박충록, 은종섭, 김창현, 김순금 등 연구자들은 모두 중국과 조선의 해당 학자들로서 모두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29년으로 보고 있다. 하다면 이런 연구학자들의 자료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즈음 필자는 한국 이상경교수가 엮은 수정증본 “강경애 전집”을 보고서야 여기에 시원을 두고 있었다. 하기에 한국의 이상경교수는 “강경애전집”에 실은 작품해석 “강경애의 시대와 문학”에서 김헌순의 연구는 강경애연구에서의 “최초의 본격적 작가론”이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쯤까지 서술하고나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29년인 것 같다. 또 강경애의 해당 평론과 수필, 시를 보지 않은데서 필자도 1929년 설을 따랐다.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주장이고 강경애 연구 관련자이며 강경애 해당 글을 읽지 못한데서 나온 결과였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한국 이상경교수도 “강경애전집”에 올린 작품해석에서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29년 이전으로 쓰고 있다. 여러곳에서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보면 한국과 조선, 중국 학계의 견해대로 1929년설을 따라도 무방할 것 같다. 실수는 여기에 있었다. 학계과 필자도 조선 김헌순학자의 주장을 따른 결과 큰 실수를 빚어냈다. 왜냐하면 강경애가 자기의 첫 간도행에 대해서 여러 글들에서 똑똑히 밝히었기 때문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간도” 서두에서 쓰고 있다. “나는 간도를 안지 불과 이태에 지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간도를 자랑하고 싶다.” 이글은 1934년 5월 8일부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다. 강경애는 자기의 수필 “고향의 창공” 서두에서 또 쓰고 있다.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이 글은 1935년 5월 “신가정”에 실린 글이다. . 강경애는 “신동아” 1934년 7월호에 실은 수필 “두만강예찬”에서는 자기의 첫 간도행을 일목료연하게 밝히였다.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이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무르익은 버들숲을 끼고 흐르고 흐르는 저 강수(江水)!” 이 격정이 넘치는 한편의 수필에서 강경애는 “누구든지 간도를 알아보려면 이 두만강부터 먼저 알아야 할것이다.”면서 자기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한 시간을 1931년 봄으로 적었던 것이다. 혹자는 이는 수필이여서 믿기 어렵다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상기 수필과 “두만강예찬”은 모두 작가의 실생활 그대로 임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여류작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 봄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떠나서 강경애연구에서의 최초의 작가론을 쓴 김헌순처럼 굳히 1929년 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실수에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가, 한국의 해당 인터넷을 검색하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을 1931년이나 1932년으로 썼고 1929년 설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이상경교수도 강경애의 1929년설에 대해 이의를 가지면서도 1929년 이전설을 따르는 유감을 남기고 있다. 기본상 할말은 다 한 것같다. 상세한것은 계속되는 논문연구에서 밝히기로 하면서 강경애작가의 지적을 떠난 실수를 더는 빚어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따라서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 동거범이라는 주장도 더는 발붙일 곳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해】   ① 박충록, 조선문학간사, 연변교육출판사, 1987,강경애의 작품세계. ② 은종섭, “조선근대 및 해방전 현대 소설사연구”, 김일성 종합대학출판사, 1986년, 70쪽. ③ 김창현, 강경애의 소설 작품에 대하여, 현대조선문학선집 30, 장편소설 인간문제. ④ 김순금, 장백산, 1991년 제1호, 중국을 다녀간 백의문일들(연재1), 160쪽. ⑤ 김헌순, 강경애론, 현대작가론, 평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1, 296—297쪽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2월 5일  
435    량환준이 말하는 김좌진장군 피살설 댓글:  조회:1768  추천:14  2010-01-23
             량환준이 말하는 김좌진피살설                                                                   한국의 강경애 공범설에 대비해 필자는 며칠전에 \"강경애는 김좌진 장군암살 공범인가?\" 론문을 써서 김좌진장군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고 밝히면서 자료래원을 량환준선생한테서 찾았다. 하다면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피살내막을 어떻게 알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20년대 후기 량환준선생의 항일활동을 떠올려야 할것이다.     량환준선생은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사람이다. 그때는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이라 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당시 조무래기였던 량환준선생은 저들 또래와 함께 명암촌에서 휴식하는 홍범도장군과 어리광을 부린적도 있다. 그러던 그는 몇년후 끌끌한 청년으로 자라나면서 조선공산당 화요파당원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고 1929년 2월 초에 조공당만주총국 동만도위원회의 지령을 받고 길림으로 가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에 서울에서 탄생한 정당으로서 미구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국제공산당의 한개 지부로 되었다. 이듬해 1926년 5월 16일에는 흑룡강성 주하현 일면파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건립되면서 총부를 녕고탑에 설치하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구역국을 두었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바로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도를 받는 청년들의 선진조직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도 이런 선진청년조직의 산물이였다.     1929년 9월에 량환준선생은 남만에서 활동하는 외지혁명자들은 북만으로 철환하라는 조공당만주총국의 지령을 받고 고려공산청년회 남만도위원회 책임비서 김만흥(일명 김동만, 강철산, 박봉남), 조직부장 강석준 등 6명과 함께 길림을 떠나 도보로 녕안현 동경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 일행과 동만에서 온 주현갑, 유태순 등 도합 20명은 당지 조선인 사립학교에 모여 정치리론강습을 한달 푼히 받았다.     정치리론강습반이 끝난후 량환준선생은 동만의 옹성라자구역 류수하에 가서 청년정치강습반 교원으로 뛰다가 1930년 1월초에 조공당동만도위원회 책임비서 김창일의 지시를 받고 평강오도구로 갔으며 조선 광주학생반일시위성원투쟁의 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이해(1930년) 2월하순에는 조공당만주총국의 지시를 받고 평강오도구를 거쳐 아성현 해거우(海沟)에 가서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 중임을 짊어졌다. 때는 김좌진장군이 피살된지 한달이 지난 뒤였다.     량환준선생의 위인됨을 알려주는 한단락 경력이라 하겠다. 그는 고려공청만주총국에서 활동하면서 김좌진장군피살과정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단, 글로 남긴 이 사실이 너무 개괄적인 편단이여서 유감으로 남을 뿐이다. 량환준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30년 3월, 그는 조공당만주총국 소재지 아성현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나게 되었다. 공도진은 량환준선생과 더불어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 사람인데 1907년 5월 27일에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열한살때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땅 명암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량환준선생과 죽마고우로 되고 자라서 또 같이 조공당 지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28년 여름에 공도진은 조직의 지시로 녕안현에 갔고 김좌진장군 암살특수과업을 수행하였었다. 3월에 아성현 해거우에서 이들 둘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암살자가 바로 공도진이였던것이다.     듣고보니 암살지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소행이였다. 이로하여 량환준선생은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이였는가고 물어보았다. 김백파의 말도 공도진과 같았다. 다르다면 암살결정자가 바로 김백파를 수령으로 한 만주총국이였다. 그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김백파고 조직부장에 강화린, 선전부장에 장시우라고 할 때 김좌진암살결정권 행사는 그들이였을것이다.    김백파는 김성득, 김득수라고도 했는데 1919년 3.1운동때 남만의 통화신흥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학우단\"성원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후 신흥학우단 성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였다고 하는데 1926년 5월에 김백파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그는 1927년 10월에 조공당만주총국 조직부장으로 임명되고 1928년 9월에는 리동산의 후임으로 조공당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뛰여올랐다. 김좌진암살도 김백파가 조공당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뛸 때 벌어졌다. 그러니 량환준선생은 김좌진암살내막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밖에 량환준선생은 지희겸도 이 사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도 자기의 회억록에 이 사실을 밝히였다고 서술하였다. 지희겸선생은 당년 조공당 엠엘파의 주요활동가로서 광복후 선후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제1기 연변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으로 사업한분이다. 이런 신분의 지희겸선생이니 당년의 김좌진피살형편을 알고 증실까지 하였던것이다.     리연록장군은 이름난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이였다. 1931년 9.18사변후 연길현 옹성라즈(오늘의 명월구)에 주둔하고있던 동북군 13혼성려 7퇀 3영 영장 왕덕림이 결연히 항일의 기치를 들고 연길현 소성자에서 국민구국군을 조직하였을 때 그때 공산당원인 리연록은 중공연길현위의 파견을 받고 왕덕림구국군에 들어갔고 구국군 참모장으로 등용되였었다. 그러다가 그는 1934년 10월에 중공밀산현위의 지도를 받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책임자로 되고 1936년 1월에 동북 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편된후 제4군 군장으로 싸운다. 유감스러운것은 필자가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을 접하지 못한것이다. 이 회억록에 김좌진암살사실이 적혀있다고 하니 또 다른 증실자료가 될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후 1930년 5월에 량환준선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또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현위서기로 뛰면서 피어린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이런분이니 량환준선생의 증실은 믿을만한것이다. 공도진도 말하고 김백파도 말하고 지희겸, 리연록장군도 증실하였다는 사실은, 김좌진장군피살은 조공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는것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고보면 여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공범이라는 설은 자연히 오류설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1월 27일  
434    한국학자들이 보는 견해 댓글:  조회:1483  추천:19  2010-01-23
              한국학자들이 보는 견해       △한국 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45)교수:    — 김장군의 암살배후에 대해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심지어 강씨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고, 김봉환의 애인이였다는것도 분명치 않다. —강씨가 김장군의 암살에 개입했다는 증언은 이강훈 전 광복회장의 회고록이 거의 유일한데 그나마 어떤 책에서는 〈김경애〉라고 지칭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져 학계에서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김좌진 암살배후가 볼분명한 상황에서 김봉환이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들어 강경애를 암살공모범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이상경교수는 한국 여성문학학회 회장이기도 한데 강경애 문학연구의 한 권위인사로서 강경애를 《이달의 문화인물》로 추천한 분이다.   △한국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실장:   —월간조선이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문제를 기사화했지만 이는 확실한 사실이 아니다…설령 강경애가 김봉환의 동거녀였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김좌진의 암살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국 원광대 한국어문학부 김재용교수:   —강경애는 좌파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과소 평가됐는데, 우리 문학사에서 진작에 재소명을 받았어야 할 인물이었다. —일제시대 좌파계열인사들을 재평가하려는 정부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이런 기사가 나온 게 아니냐 —강경애는 일제시대 만주에 거주한 우리 작가들중 거의 유일하게 친일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서울대 신용하(67) 명예교수:   —김좌진장군은 일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간도지방에 지부를 두고 있는 적기단이 감행한 것으로 알고있다. 직접적인 암살자는 박상실이 확실하지만 배후는 더 연구해야 한다. —그녀가 남편(동거남 김봉환)을 구하기 위해 위장전향했을 가능성도 있다. 강경애를 반(反)민족적 인사로 단정하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신용하교수는 독립운동사 전반연구에 조예가 깊은 역사학자로서 위망이 높은 분이다.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1월 27일  
433    김좌진장군 피살을 론함 (량환준, 리광인 정리) 댓글:  조회:1954  추천:15  2010-01-23
               김좌진장군 피살을 론함   량 환 준 (리함 정리)     편자의 말고 량환준선생은 지난세기 20년대후기와 30년대초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위 선전부장, 고공청만주총국선전부장, 중공아성현위 선전부장, 아성현위 서기 등 중책을 지고 활동한 항일로선배이다. 광복후에는 연변인민출판사 제1임사장을 맡았고 만년에 정협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사자료위원회에 근무하였으며 조선족역사연구, 더우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역사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는 생전에 김좌진장군 피살관련 글들을 적지 않게 남겼다. 지금 보면 량환준선생이 이런 글을 쓸 때 의연히 좌적사상이 남아있을 때라 김좌진장군을 극단적으로 평가한 면이 보이지만 김좌진장군의 피살상황을 구명함에 유조하다고 생각되어 그의 글중 일부분을 발취해 참고로 제공한다.                                                            《문화산맥》                                                                                   1    1928년부터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가일층 다그쳤다. 그해 6월에 일제는 봉천 황고툰역에서 동삼성군벌두목 장작림을 폭사시킴으로써 만주부터 먼저 손아귀에 넣으려 하였다. 일제는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더욱 떠들어대면서 동삼성군벌에게 협력을 강요하는 한편 만주내의 조선인민족주의단체들과 공산주의단체들에 대한 탄압을 가일층 강화하였다. 동만지구에서만 해도 동만조선인청년총동맹, 조선인로동총동맹, 조선인여성청년동맹과 환성회, 근북회 및 신간회지부, 근우회지부 등 조선인혁명적군중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탄압하여 혁명운동은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 이런 형세밑에서 용정을 중심으로 김근, 강상야 등 7명이 철혈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서술하려 함). 발끝까지 무장한 원쑤들앞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혁명활동을 추진할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이런때에 민족주의파와 공산주의자들간에 모순이 날로 격화되어갔다. 1927년 2월, 조선내에서 통전단체로서 신간회가 결성되자 만주의 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분자들도 통일전선결성을 위하여 분주하였다. 좌, 우 각파대표들이 몇차례의 회담은 하였으나 통일전선결성은 실패되고 도리여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우익세력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때 일제는 더 말할것없이 공산주의운동을 말살해보려고 발악하였고 동북군벌의 새 대표자인 장학량은 일제의 침략과 압력에 대처하여 남경국민당반동정부에게 의지함을 표시하여 청천백일기를 내여거는 한편 밀령을 내려 공산당을 탄압하였다.     이런 형세밑에서 조선인민족주의 우익은 더욱 반동적이였다. 남만의 정의부 우익두령들은 민국 길림성공서의 고급관원으로 있는 오인화(조선사람)을 통하여 군벌과 결탁하여 남만조선인농민동맹, 재중조선인청년동맹과 수화상극이 되어 헐뜯던끝에 1929년 겨울에 학살사건을 빚어냈다. 이를테면 남만의 신빈현 왕청문에서 정의부무장대는 리활민이하 혁명군중 13명을 살해하였고 동시기 류하현 삼원포에서는 한청옥, 박기주 등 12명을 살해한 류혈참안을 빚어냈다. 그후 정의부 두목가운데 김리대, 고활신은 일제의 주구로 변했고 일부는 관내로 들어가 혁명하였으며 량서봉, 고이허 등 일부는 항일전쟁마당에서 혁명을 위해 희생하였다.     북만의 민족주의단체인 신민부의 반동두목 김좌진은 1929년에 할빈주재일본총령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松本 또 松岛라고 함)와 결탁하여 수치스러운 민족의 역적으로 되었다. 그는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하였고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주었다. 김좌진은 이 돈으로 산시(山市—해림서쪽)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첩을 얻어 타락한 생활을 하는 한편 《동청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중동선의 횡도하자로부터 해림에 이르는 구간의 객차에 신민부 무장사복대를 파견하여 조선공산당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하여 치떨리는 살인사건이 적지않게 발생되었다. 조선 함남 정평에서 한 진보적청년이 녕안으로 오느라고 중동선렬차에 올랐다가 신민부사복대놈들에게 체포되어 산시에 구금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가 조선에서 찾아와서 사정하니 속신금 5백원을 바치라는것이였다. 그는 조선에 다시 나가 밭을 다 팔아 겨우 5백원을 마련해가지고 들어와 보니 아들은 놈들의 악형에 시달려 이미 죽고말았다.     조공 아성총국(즉 화요파)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리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부하 몇놈을 데리고 정미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속으로 냅다뛰여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였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갔댔는데 1년후 산시에 파견되어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것이다. 필자가 1930년 3월, 아성현에 갔을때 해거우(海沟)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     또 다른 사료에 의하면 1929년 7월에 김좌진일파는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색동맹의 성원들인 남대관, 리강훈 및 신숙 등과 제휴하여 소위 《한민총련합회》란것을 조작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이 피살된뒤 그 도당들인 남대관, 권수정 등 수십명은 1930년 여름에 길림성정부의 군법처 오과장(오인화)과 결탁하여 토공대(讨共队)를 조직하였다. 그해 겨울, 그 일부는 연변각지에서 공산당인과 혁명군중 수천명을 체포, 학살하였으며 다른 일부는 북만 중동철도연선에서 수많은 공산당인과 혁명군중을 체포, 투옥시켰다.(이 사실은 다른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다.)    종합해 말하면 일제와 국민당군벌 그리고 조선인민족주의 우익집단들이 재만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만주의 조선공산당인들은 국제공산당의 12월제강에 의하여 조직을 재정돈하지도 못하였으며 중공에의 가입도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조급정서가 자라났고 더욱 좌경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주: 김백파는 일명 김성득, 김득수이다. 김백파는 남만 통화 신흥사관학교 졸업생으로서 1927년 10월 간도공산당 제1차검거사건후 조공당만주총국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9월 만주총국 책임비서 리동산(리동성)이 남만으로 간후 김백파가 만주총국 책임비서를 맡았다.                           _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2    공도진(최동범, 리봉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여 1925년경에 평강 이도구명암촌에 이주하여왔다. 리동선의 소개로 조공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29년 가을에 파견을 받아 김좌진의 본부인 산시에 잠입해있다가 1930년 1월 24일에 김좌진을 처단하고 도망쳐돌아왔다. 1930년 10월에 중공아성현위 서기로 임명되었다. 11월에 민국군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31년 11월에 봉천에서 출옥하였다.    1932년 봄에 중공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어농민을 발동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6월, 리계동, 조상지와 함께 손조양의 반일부대에 침투해 들어갔다. 1933년 10월에 주하항일유격대를 성립하고 조상지는 대장이고 리복림이 당지부서기를 담임하였는데 대원은 70여명으로 발전되었다. 1934년 6월, 주하유격대를 동북반일유격대 하동지대로 개편하고 조상지를 사령으로, 리복림을 지대당위서기로, 허형식을 제1대대장으로 임명했다. 그해 겨울 하동지대는 일본군과 위만군의 련합토벌을 여러차례 분쇄하였다.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하동지대를 기초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성립하고 조상지를 군장으로, 리복림을 군법처장으로 임명하였으며 9월에 리복림을 1퇀 정치부주임, 허형식을 3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1936년 8월, 리복림은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하동유격대사령을 담임하였다. 그해 겨울에 리복림은 중공 북만림시성위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였고 동시에 제 3, 6, 8, 9군련합의동(依东)판사처 주임으로 사업하였다. 1937년 1월, 3군주력의 서부원정에 배합하기 위하여 1사 1퇀을 령솔하여 할빈동부각지에서 작전하다가 그해 4월에 통하현 얼도허즈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영용하게 희생되었다.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3    김좌진은 1889년에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출생하여 1917년에 남만의 류하, 길림일대에 와서 류랑하다가 1918년에 《대종교》에 가입함으로써 서일의 중시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 때 서일이 북로군정서총재로 되고 김좌진이 북로군정서 사령으로 되었다. 청산리전투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에 머물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량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지금 북만의 70여세되는 로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굶어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城东士官学校)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페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였으나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8년, 이른바 《삼부통감》운동때 김좌진의 획책밑에서 《재만유일당책진회》를 내왔는데 그때 연변의 전성호가 이 유일당운동을 크게 고취하였다. 그러나 호응하는자가 적어서 그 세력이 해림으로부터 횡도하자 구간에만 국한되였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죄악적활동은 세가지였다.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 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 할빈일본총령사관에 주재하고있는 총독부 특무 마쯔시마와 결탁하여 그놈에게 북만의 공산당활동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만원의 일본돈을 받아 산시에 정미소를 꾸리고 첩을 두어 향락하였다. ③ 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대원 공도진(최동범)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 제4집》(1985년 11월),                   《20년대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량환준) 에서                                                        4▲ 윤해, 신숙은 1929년에 《김좌진과 합작하여 조선총련합회란것을 조작하여 민족주의파를 끌어모아 반공을 책동했다. 남대관, 권수정 등의 반공활동과 련계있다.》    주: 윤해는 함남 영흥사람인데 1917년 12월에 문창범, 김립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5▲《김좌진은 자초지종 반공이였다. 1928년 남만 화전에서 정의부를 비롯한 19단체, 39명대표가 모인 민족유일당 결성협의회에 참가하지 않고 따로 북만에서 〈재만유일책진회〉를 조작하였다. 1929년에 녕안현 산시에서 정신, 민무, 리붕해 그리고 신숙 등과 더불어 〈한족련합회〉를 만들고 그수석자리에 앉았다. 군자금이니, 독립운동비니 등등 모금으로 김좌진 등은 관료생활을 하여왔으므로 민분이 높아갔고 공산당(조선공산당을 가리킴)의 활동을 백방으로 방해하는 한편 할빈 일본령사관 주재 조선총독부 특파원 마쓰시마와 련계하여 공산당의 활동정보를 제공하였다. 1930년 1월초 자기 부하로 있던 잠복한 공산당청년 최동범(원명 공도진, 간도이도구 명암촌 사람)의 총탄을 맞고 그 반동생애를 끝마쳤다.》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6△《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후 각파가 분렬되고 김찬이 연해주에서 녕안에 와서 조공당만주총국(화요파)을 조직할때 우룡선이 위원으로 되고 동만도위(道委)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연변에 왔다. 1928년 가을에 북만에 왔을 때 신민부(김좌진파)의 밀고로 중국관헌에 체포(최승권, 안근규와 우룡선 셋이 체포)되어 길림감옥에 압송,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 해당연변역사의 인물보》(량환준 1981년)에서                                              ▲ 《북만에서 민족주의단체 신민부와 이른바 무정부주의자 남대관, 권수정, 자치촉진회파 (전성호 일파)는 결탁하여 1929년 7월에 반공적인 〈한족총련합회〉를 결성하고 동북정부내의 반동군벌과 더불어 창궐하게 반공하였다. 동년 12월에 산시의 화요파청년 최동범(원명 공도진)이 김좌진을 죽이고 각현 조선족농민들이 일어나 신민부 무장을 반대하고 구축하였다. 례컨대, 녕안현 남호두의 농민들이 신민부의 군자금을 반대하여 그들을 몰아냈고 빈현의 농민들도 일어나서 그들을 반대하였다. 목릉현 팔면통의 농민들은 일찍 일어나 그들을 구축하였다.》《1929년 가을, 빈현에서 김좌진의 부하(무장인원) 들이 빈현에 이르러 조선인 농호들에서 강박적으로 군자금세를 거둘때 농민들이 견결히 거절하였다. 그들 이른바 독립군은 총을 쏘아 당장에서 2명을 사살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농민학살사건이 터지자 빈현 농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일떠나 신민부 간부와 무장인원을 구축하였다.》 주: 남대관, 권수정:     한민총련합회 주요성원들인 남대관, 권수정 등은 1929년~ 1930년 사이 동북군 돈화주둔 제7퇀과 결탁하여 연변내, 더우기 왕청일대에서 사처로 쏘다니며 《공산당토벌》(1930년 6월후는 모두 중공계렬) 에 광분하여 중공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항일렬사), 왕청현위 제2임서기 김상화(항일렬사) 등 수많은 조선족혁명자들을 체포, 학살하여 피비린 대혈채를 빚어내였다.                                  《조선공산당간사》(량환준 미발표작 1981년)에서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1월 27일
432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 댓글:  조회:1605  추천:18  2010-01-23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     1.  머리말   한국의 문화관광부에 의해 지난 세기 30년대 일제강점기의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대단히 잘된 선정이라 해야겠다. 헌데 요사이 한국에서는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 중 하나라는 주장이 제기돼 인터넷을 무척 달구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인터넷 카페 게시글들에는 지어 강경애를 《독립군을 잡아먹은 년》이라고 거리낌없이 모독해 놀라움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먼저 한국의 인터넷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따르면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 중 하나라는 주장은 전 한국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이선우씨의 제보와 이강훈 전 광복회회장의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제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난 1월 4일 오후 이선우씨가 조선일보 《월간조선》기자를 찾은 데로부터 인기 되었는데 조선일보 인터넷은 1월 17일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면서 신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선우씨(전 한국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는 《김좌진장군 장례대변인을 맡기로 한 이강훈 전 광복회장이 생전에 증언한 내용》이라며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을 교사한 김봉환과 내연의 관계로, 일본경찰에 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뒤 변절해 김좌진장군암살을 공모했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어냈다. 유감스러운 것은 강경애가 공범이라면서 용정의 강경애가 어찌하여 김장군 암살을 교사한 공범이라는 것을 꼬물만치도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만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한데서 이 주장은 한국의 학계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강경애를 문화인물로 추천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45)교수는 《김장군의 암살배후에 대해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 《심지어 강씨가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고, 김봉환의 애인이었다는 것도 분명치 않다》, 《어떤 책에서는 <김경애>라고 지칭하는 등 신빈성이 떨어져 학계에서 신뢰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용정에서의 허다한 사실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강경애를 연구한다는 중국 측의 허다한 조선족학자들도 작품 평에 몰두하면서 강경애인물에 대해서는 간단히 스치고 만다. 하다면 강경애가 과연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일가? 이는 세인을 웃기는, 말도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럼 아래 일제강점기 여류소설가 강경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역사속의 진실한 강경애부터 보기로 하자.   2.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   다 알다시피 여류소설가 강경애는 황해도 송화출신이다. 중국의 일부 조선족학자들은 황해도 장연으로 알고있다. 생졸년월일도  1907년~1943년 설과 1906년~1944년 설 두 가지로 반복된다. 어린 시절도 어떤 이곳 학자들은 조실부모로 알지만 사실은 워낙 털면 먼지뿐인 살림에 아버지가 강경애 4살 때 사망한데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선다. 어린 경애도 다섯살 때 장연으로 이주, 이때의 생활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1913년 8살 되던 해 강경애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쳐 고대소설을 읽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에 벌써 동네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어 《도토리 소설 장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장래 여류소설가의 싹수가 보인 것 같다. 어디를 가나 가난신세라 열 살이 되는 1915년에야 청년학교를 거쳐 장연소학교에 입학, 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 공부하다가 중퇴, 서울의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약 1년 간 수학. 그 무렵이던 1923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 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조혼에 의한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양주동이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이고 문학적 재질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라 문학도 강경애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드디어 강경애는 양주동과 1년간 동거하게 되고 여성에게 봉건적인 생활태도와 종교생활을 강요하는 학교 교육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에로 가담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퇴학한 것이 바로 동맹휴학 때문이었다. 또 양주동과의 동거생활에서 획기적인 것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는 양주동이다. 1년이 지나 강경애는 양주동과 헤어졌다고 하나 작가로서의 생애가 펼쳐지니 행운이라 해야겠다. 강경애는 서울 동덕여학교 3학년에 들어가 1년 간 수학하다가 1924년 9월 후에 귀향하여 야학운동, 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강경애가 살길을 찾아 북간도로 불린 연변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9년이다. 중국 연변대 채미화교수의 일가견인데 강경애는 용정에 정착하여 근 2년 간이나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①고 한다. 이 글에서 채미화교수는 계속하여 강경애는 2년 후인 1931년 말 간도를 떠나 고향에 돌아갔고 1932년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이 쓴 글은 이와 차이를 보인다. 선생은 문화발굴《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이란 한편의 글②에서 강경애는 1931년에 황해도 장연에서 수원 농업전과를 졸업하고 장연군 군청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고 그 해에 용정에 이주하였다고 밝히었다. 어느 글의 서술이 옳은가는 굳이 밝힐 필요는 느끼지 않으나 한국학계의 평론이나 논문들도 시기시기 생애서술에서 시간상 가끔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강경애의 생애 시기가 잘 알려지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1931년 설이든, 1932년 설이든 아무튼 강경애는 용정에 다시 들어선 후 가정주부로 문학창작에 정진하면서 용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강경애가 1931년에 단편 《파금》과 중편 《어머니와 딸》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면서 1938년까지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③을 남기였다. 그중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는데 당시 사회의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하기에 한국의 인터넷검색에 의하면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권조차 얻을 수 없었던 노동자의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소설로, 근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꼭 밝히고 넘을 것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다. 장하일은 장연에서 강경애와 결혼하고 용정에 이주한 후 줄곧 동흥중학교 수학교원, 교도주임으로 근무했는데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임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었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 외 행사나 교수용어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용정 총영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1942년 여름이후 학교운영은 말이 아니었고 완전한 노예화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에 교도주임 장하일은 교장 임계학 등과 더불어 연속 사직으로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하였는데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하루동안 동맹휴학을 단행④하였다. 장하일은 사직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사》총편집을 맡았다고 하는데 광복 후에는 북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었다. 이런 남편의 영향 하에서 강경애는 용정에 이주한 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3년 11월에 용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 이주복 등에 의해 문학동인단체 《북향회》가 조직되었는데 당시 용정 남녀중등학교의 교원들과 재학 중인 문예청년들이 기본 동인들이었다.⑤ 강경애나 안수길 등처럼 일부 영향력 있는 작가들도 가담, 강경애는 이 북향회의 동인이면서 고문이였다.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작가생활에 전념하다가 말 그대로 나빠진 건강으로 1942년에 남편 장하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1년 후 신병으로 요절했다.   3. 김좌진장군 암살자는 누구인가   돌이켜보는 강경애의 삶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 여류작가 강경애는 이주 후 줄곧 용정에서 생활하면서 가정주부로 청빈한 삶, 작가적 삶, 불행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활동에도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어떻게 보아도 강경애는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암살과 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경애는 김장군 암살 공범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월간조선》2월호 기사를 인용했다는 조선일보 인터넷은 강경애가 그의 애인 김봉환과 같이 1927년 봄에 해림역에 도착해 동거생활을 하다가 두 사람이 할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의 회유로 변절(공산주의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 변절)하고 공산계 급진주의자인 박상실을 사주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월간조선》 2월호 기사나 조선일보 인터넷은 여기에서 무책임한 치명적인 두 가지 약점을 드러냈다. 첫째 치명적인 약점은 1927년 봄에 강경애가 북간도나 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경애를 몰라도 너무나 몰랐다. 왜서? 강경애가 처음 북간도에 진출한 시기는 1931년 봄으로 나타난다. 이는 강경애의 수필들에 잘 반영되여 있다.     둘째 치명적인 약점은 이른바 김봉환의 애인이라는 강경애 혹은 김경애가 우리가 말하는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옳은가 하는 점이다. 기사나 인터넷은 아무런 분석이나 분별이 없이 그저 이름만 보고 강경애라고 점찍었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기었다. 실수를 저질러도 이런 실수가 어디 있는가, 확실히 강경애라고 한다면 그의 내력과 해림에 나타나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설복력 있게 피력하여야 보는 이들이 수긍이라도 하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이강훈 옹의 증언에 의해 시름을 놓은 데서 인기되었겠으나 김좌진장군 암살사건 자체가 베일에 가려있다는 자체는 떠올려야 했다. 베일에 가렸기에 이강훈 옹의 증언도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강훈 옹은 그때의 진실한 암살사건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믿음직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김좌진 장군 암살자는 김봉환이나 그가 시킨 박상실도 아닌 타인으로 나타난다. 아래 당년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이었고 항일노선배였던 양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하자.   조공 아성총국(만주총국)에서는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되어 김좌진을 없애치우기로 결정지었다. 1929년 가을에 총국에서는 공도진(최동범, 이복림)을 산시에 잠입시켜 김좌진일파가 경영하는 정미소에 일군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임을 얻게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부하 몇을 데리고 정비소를 시찰하러 왔을 때 공도진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김좌진에게 거퍼 두방을 갈겼다. 김좌진이 거꾸러지자 그 부하들이 어쩔 바를 모르는 사이에 공도진은 삼림 속으로 냅다 뛰어 도망쳐 버렸다. 공도진은 화룡현 서성향 명암촌 사람으로서 필자와 한 마을 사람이며 조공의 한 지부내의 성원이었다. 1928년 여름에 그는 상급의 지시를 받고 녕안현에 들어 갔었는데 1년 후 산시에 파견 되어 가서 이 특수한 과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필자가 1930년 3월, 아성현에 갔을 때 해거우에서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김좌진을 죽이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고, 필자가 조공 만주총국 책임비서 김백파에게 왜 김좌진을 죽여버렸는가 물어보았더니 김백파도 우에서 말한 사실들을 또 나에게 해설해주었다. 이밖에 지희겸(당년 엠엘파조공 주요간부, 항일노선배)도 이 사실들을 증실하였고 동북항일련군의 리연록 장군의 회억록에도 이 사실이 적혀있다.⑥   이는 1985년 11월, 《연변문사자료》 제4집에 실린 양환준 선생의 글 《20년대 후기 재만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반영된 내용인데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이를 두고 필자는 양환준 선생 생전에 수차 방문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역사를 깊이 있게 터득하면서 수긍이 갔다.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면밀히 짜고 든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그 구체적인 집행자가 바로 공도진, 최동범 등으로 불린 이복림이였다. 이복림은 본명이 공도진이고 때에 따라 최동범이라고도 불렸다. 양환준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복림은 1907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생으로서 1925년경에 연길현 수신향 명암촌(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에 이주하였고 조공동만도 간부인 당시 이동선(항일열사)의 소개로 조공당에 가입하고 1928년 8월에 녕안현으로 전이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중공 아성현위서기로, 1932년 봄에는 중공 만주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주하현에 가서 주하중심현위 조직부장으로, 1933년 10월에는 주하항일유격대 주요책임자로, 1936년 8월 이후에는 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겸 합동지대사령, 중공 북만임시성위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4월에 전사하였다.   4. 김좌진장군 피살원인   우에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암살은 조공당 만주총국의 조직적인 행동이고 그 구체적인 집행자는 공도진, 즉 이복림이라고 제나름의 견해를 밝히었다. 헌데 조공당에서는 어인 원수로 김좌진을 피살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원인은 무엇일가, 아래 계속하여 양환준선생의 글을 보기로 한다.   청산리 전투 뒤 김좌진은 밀산으로 철퇴하였다. 반쏘반공정서를 품은 김좌진과 그의 부하들은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고 밀산경내(역사사실은 김좌진도 월경했음)에 머물면서 밀산진의 상점과 양식상점을 털어먹었다. (원 필자주: 지금 북만의 70여세 되는 노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있다.) 서일은 이 사실을 듣고 비분에 차 밀산현 당벽진에서 굶어 자진하였다. 김좌진은 부하 수십명을 데리고 목릉현에 가서 성동사관학교를 꾸렸으나 군중들이 반대하고 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내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 1925년 산시일대에 가서 《통치식》단체인 《신민부》를 세우고 스스로 총사령이 되었으니 밀산, 목릉, 동녕, 녕안(동남부)과 주하, 아성 등지의 조선족농민들이 경비와 식량을 납부하지 않아 아주 고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1929년, 그가 벌린 주요활동은 세가지였다. ①중장철도호로군사령부와 결탁하여 사복한 부하를 시켜 중동철도기차에서 공산당혐의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②할빈 일본총영사관에 주재하고 있는 총독부 특무 마쯔시마와 결탁하여 그놈에게 북만의 공산당활동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만 원의 일본 돈을 받아 산시에 정비소를 꾸리고 첩을 두어 향락하였다. ③신숙, 정신 등 인과 가장 반동적인 《한민총련합회》를 성립하였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조선족인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24일, 조선공산당 무장공작대 대원 공도진이 산시 정미소에서 그를 처단하였다.   《연변문사자료》제4집《20년대 후기 재만 조선공산당인들의 활동》에 실린 서술이다. 지금 보면 과격하고 극단적인 견해가 보이긴 하나 당년의 조공만주총국에서는 상기 이유로 김좌진을 《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인정 되어 없애치우기로 결정》하고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비해 김좌진장군과 그의 딸 김강석 장편전기 《설한》을 펼쳐낸 조선족작가 김송죽은 설한에서 상기 이유를 몇 마디로 묵살해 버리었다.   김좌진은 할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장 마쯔모도와 결탁하였다느니, 중동철도연선에서 공산당인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조선인공산주의운동을 파괴한다느니, 마쯔모도는 김좌진에게 활동자금을 대주었다느니, 김좌진은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차리었고 제 친구의 여편네를 빼앗아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가지가지 험악한 요언이 나돌았다.⑦   상기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를 두고 학계에서는 아직도 시비가 분분하다. 온 겨레가 받드는 항일독립운동가라고 별로 말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20년대 초 이후 중국 동북지구 조선인 반일단체들간의 통합운동이 무척 열기를 띠였다. 1923년 8월에는 집안을 중심으로《참의부》가 세워지더니 1924년 10월에는 길림지구를 중심으로 《정의부》, 1925년 3월 10일에는 녕안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한데서 이 시기를《3부 정립》시기라고도 하는데 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는 노동강습소와 야간강습소를 꾸려 북만일대 조선족들의 문맹퇴치와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했고 보안대와 별동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 친일단체 숙청운동, 조선 국내 진군작전활동 등을 활발히 벌려갔다. 그러나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학교교육에서 재정난이 심하다고 학부형들에게 재정부담을 가중시킨 결과 점차 백성의 불만을 자아냈다. 군자금해결에서도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기다가 뜻대로 안되니 강박적인 집행을 실시하였다. 신민부의 이백호 등은 빈주현에서 강박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징수하다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고 무고한 백성을 해치는 유혈사건, 즉 빈주사건⑧을 빚어냈다면 훈춘에 파견된 모금대도 군자금징수를 거부하는 무고한 백성을 살해⑨하기도 하였다. 결과 신민부는 점차 민중들의 신임과 후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또, 기타 민족주의단체와 마찬가지로 흥기하는 공산주의운동을 적대시하며 조공당과 엇서니 선진청년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점차 민중을 엄중히 이탈하게 되었다. 지방단체들과도 권력다툼을 하고 정의부와도 지반쟁탈을 하니 민중들의 신임을 보다 잃었다. 나중에 신민부내부의 분열과 대립은 최종 해체의 국면을 초래하였으니 그 직접적인 책임을 김좌진이 안아야 했다. 그러니 김좌진장군이 타매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일제강점기 그 시절의 조선인 민족주의계나 공산주의계 대립과 투쟁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느냐 하는 사활적인 투쟁이어서 이를 한 두 마디로 해석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일제와 싸우는데서는 목표가 일치하기에 공산주의계나 민족주의계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지만 그 시기 20년대 후기 중국동북의 역사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4. 맺음말   본문은 현대 여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를 두고 역사적으로 두루 살펴보았다. 긴 맺음말과 결론해석이 필요없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 아니거니와 근본 연계가 되는 인물이 아니다. 여류작가와 역사에 책임지지 못하고 모독하며 이 땅의 조선족들을 상심케 하는 일이 더는 나타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주해】   ①채       ① 채미화, 간도체류시기의 강경애의 창작,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 결전, 521~522쪽. ②     연변문학, 2003년 4월호, 224쪽 ③   최삼룡, 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 연변문학 2003년 4월호 (강경애 간도체험과 지식인여성의 자기반성, 김양선, 역사비판, 1996년 여름호, 362쪽) ④연변문사자료, 제6집, 1988년 12월, 20쪽. ⑤권철, 《북향회》의 전말, 대형문학총서 《두만강》 제 3호 222쪽. ⑥연변문사자료, 제4집, 1985년 11월, 11-12쪽. ⑦장편전기, 설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4.8, 272쪽. ⑧동아일보, 1928.11.18일자. ⑨동아일보, 1926.11. 14일자                                                   문화산맥 www.koreancc.com                                                     2005년 1월 24일                                          도라지 2005년 2월호에 계재  
431    겨레발자취 (29) - 항주고려사와 고려 의천 대각국사 댓글:  조회:5932  추천:44  2010-01-21
【겨레발자취】(29)     항주고려사와  고려 의천 대각국사   1   5월 11일 항주의 현장님이 조글로 절강연합에 올린 사진—항주고려사 전등원 개원 뉴스를 접하고 가만 있을수가 없다. 이튿날 5월 12일은 마침 오전1~2교시 뿐이라 나는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아들애를 데리고 소흥중심뻐스부에 가서 항주행 10시 15분 쾌속버스에 올랐다. 항주 동역버스부에 이르자 현장님이 승용차로 마중 나왔다. 승용차는 곧추 항주 서호가 남고봉 부근의 항주고려사로 달리였다. 입장료 한장에 20원인데 현장님이 돈을 물었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찌할수가 없다. 항주고려사는 기원 927년에 오월왕 전홍숙이 혜인원이라는 선원으로 세운 사찰이다. 그러다가 항주에 온 의천대각국사와 깊은 인연을 가지면서 고려사란 이름으로 통하고, 2005년 9월에 복원을 시작하다가 2007년 5월 1일에 정식으로 관광불교사찰로 대외에 개방되였다. 수차 다녀간 터에 사찰내를 두루 알고있지만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 동상을 모신 정문 오른쪽 기념당--전등원은 금방 개원한데서 원내 내실을 모르고있었다. 현장님과 더불어 고려사의 천왕전과 종루를 지나 전등원 가까이로 다가가니 원내 정면 담장에 큰 글씨로 씌여진 “전등” 두 중문글자가 선참 안기여든다. 전자는 전할 전(傳)자요, 등자는 등잔 등(燈)자라 그 의미가 너무나도 잘 알려진다. 전등원안에 들어서면 왼쪽이 대각당인 기념당이고 오른쪽이 학자여귀당으로서 기념당 중앙에 모셔진 의천 대각국사의 동상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2    오늘날 익히 알며 발자취를 추적하고 있는 의천 대각국사 (1055~1101)는 한국 천대종(天臺宗)의 개조(開祖)로서 1055년 9월 28일 고려 11대 임금 문종과 불교독실자인 인예왕후 리씨 사이에서 넷째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후(煦)이고 자는 의천이며 시호가 대각국사, 호는 우세로서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성인에 뜻을 둔 소년이였다.  의천이  후에 불교에 깊이 빠진데는 독실한 불교신자들인 부모님의 영향과 갈라볼수 없다. 그가11살 되던 해 어느날, 아버지 문종임금이 아들들을 불러 “너희들 중에서 누가 출가하여 복전을 짓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출가를 지원한 이는 의천, 그때부터 의천은 고려 전성기를 이룬 시절11살에 출가하여 영통사에서 경덕국사를 은사로 불경과 유교, 역사, 제자백가의 사상 등을  열심히 배우게 된다. 학문 정진중 경덕국사가 별세하자 의천은 그의 강의를 대신하게 되고 출중한 강의로 명성이 온나라에 뜨르르, 문종 21년(1067년) 7월, 15살 때 우세(佑世)란 법호와 함께  승려의 최고 승직(僧職)인 승통(僧統)에 올랐다. 이에 만족할 의천이 아니다. 불경에 도취된 의천은 이웃 송나라 정원스님(1011~1088)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무역하는 배편에 편지를 띄워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서 송나라 유학을 결심. 부왕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나 그는 정원스님과의 서신거래를 꾸준히 가지면서 스님의 초상을 얻어 보기도 하고 화엄 등 그의 저서를 모두 탐독하기도 한다. 그런 중에 부친 문종임금이 64살로 세상을 떠나고 세자 순종이 왕위를 이어받으나 또 세상을 떠나니 중형인 선종이 왕위를 계승, 선종도 송나라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의천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옛날 당나라의 현장스님과 신라의 의상스님이 구법서쪽행을 실례로 눈물로 호소해도 허사였다. 언녕 송나라 류학을 결심한  의천은31살 때인1085년4월(5월 ?)에 임금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몰래 제자 수개(壽介)등 두 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미복차림으로 정주 (김포의 서해쪽)에서 송나라 상인 임녕의 배에 올랐다.   3   력사로 보는 의천 고려명승, 항주고려사 전등원을 거니는 나에게는 송나라 배편에 바다길을 달리는 의천 일행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한달여 바다길, 의천은 이해 1085년5월에 송나라 판교진 (오늘의 산동성 교주시 판교진)에 이르고 7월에 송나라 서울 변경(오늘의 개봉)에 들어가 송나라 황제 철종(哲宗)을 만난뒤 계성사에 머물렀다. 철종의 추천으로 화엄종 승려 유성을 만나 법정(法藏)의 5교판(敎判)과 지자(智者)의 4교판의 차이점에 대해 문답을 나누었다. 의천은 또 송의 관리 양걸을 안내자로 삼아 지방으로 다니며 송나라 고승들과 토론, 항주로 가는 도중 강소 진강 금산사에서는 불인료원(佛印了元)선사를 만나 법담을 나누고  항주에 가서는 정원스님과 화엄 등 불교교리와 법장, 지자의 불교에 대해 토론. 이어 천대종 승려 종간을 만나 천대의 교관을 토론하고 다시 혜인원(慧因院)에 가서 정원 스님을 만났다. 혜인원에 머물 때 경론에 대한 주석서 7500여질을 조판, 인쇄하여 기증하고 귀국한 후 불교서적 기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원래 선종에 속했던 혜인원이 화엄종으로 되고 이름도 고려사로 더 많이 불리게 되였다. 의천은 송나라에 머물면서 선후 50여명의 고승들을 만나 교류를 하며 침체일로를 걷던 화엄종이 항주일대에서 중흥을 가져오게 한다.  모친의 독촉으로 송나라에 1년 4개월 밖에 체류하지 못하다가 귀국하여야 했지만 송나라에서 천대학을 접한 그는 귀국을 앞두고 천대산에 올라 지자대사 탑을 참배하면서 고려에 천대종을 널리 전할것을 맹세한다. 또, 중국 4대불교 성지 다음으로 불자들이 많은 설두사 미륵도장에서 참배하고  명주(오늘의 녕파)에서 고려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고려로 돌아간 후에도 의천 대각국사는 정원스님 등 여러 스님들과 꾸준히 련계를 가지면서 고려와 송나라 사이 천대종발전을 위해 많고많은 일을 한다.   4   그런 대각국사님의  형상이 그지없이 돋보인다. 대각당 세면 벽에는 의천 대각국사의 삶을 그려낸 12폭의 동판그림에 그림설명까지 곁들어 의천님 리해에 크나큰 도움을 준다. 대각당 맞은켠 학자여귀당은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의 불교문화교류 1600여년의 력사에서 그 성이나 이름이 알려진 300여명 고승중 23명의 고승을 동판상과 함께 소개하여 인상을 깊이한다. 23명 고승중 신라스님 9명, 백제스님1명, 고려스님 4명 도합 14명을 이루니 감탄이 절로 난다. 그중에서도 중국 불교 4대보살중의 한분이신 김교각스님, 고려서 경전을 송나라에 갖고와 송나라 천대종의 부흥 토대를 마련한 제관스님, 천대종의 송나라 중흥에 크게 기여한 의통스님, 한국 천대종의 시조를 이루는 의천 대각국사님이 보다 인상적이라 할까. 전등원 답사는 전적으로 항주 현장님 공로라, 우린 같이 기념사진 몇장을 남기였다. 그속에서 항주고려사의 종루와 대웅보전을 다시다시 돌아보며 겨레 력사연구자의 책임이 무거움을 다시다시 느끼였다. 항주고려사가 혜인고려사를 불리우면 어떠랴, 순 불교사찰이 아닌 관광사찰이면 또 어떠랴 ~ 세계적인 관광명승지—항주 서호가 남고봉 부근에 우리 겨레의 고대발자취,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의 동상과 동상을 모신 기념당이 일어섰다는것만 해도 위안을 느낄 일인데.   2008년  5월  15일  초고 2010년 1월 8일  보충수개
430    강남 별하늘 려행길에서 댓글:  조회:912  추천:30  2010-01-20
                  강남  별하늘  려행길에서   1   정말이지 오랜만에 월수대 운동장에 저녁산책을 나온것 같다. 하루 기온이 13~19도라더니만 저녁도 따스한 봄날련상 제격인데 아들애가 동남쪽하늘 희한한 겨울별들을 보며 “야~별들이 환하다!”며 련속 탄성을 지른다. 불빛이 그닥지 않은 드넓은 운동장으로 강남 밤하늘의 총총한 밝은 겨울별들이 쏟아져 내려 그야말로 장관이다. “ 동남쪽 하늘 저 나란히 서있는 세개 별이 무슨 별인지 알아?” “삼태성!” “용케 맞추는구나. 그럼 삼태성이 속한 별자리를 뭐라 했지?” “뭐드라?” 오랫동안 별하늘을 려행하지 못한 아들애가 머리를 가로 흔든다. 내가 오리온자리라고 하자 아들애는 생각난다며 박수를 쳐댄다. 그런 천진한 모습을 보노라니 아들애와 쌍둥이딸애들을 데리고 밤하늘 별세계를 려행하던 북방 이왕지사들이 물밀듯이 흘러든다. 쌍둥이 아장아장 시절이니 아들애는 열살쯤 되였을 때 봄이라고 기억된다. 내 고향 연길시 서시장 남쪽가에 자리잡고 살던 우리 온가족이 부르하통하와 연집하가 합수하는 강뚝을 따라 저녁산책을 하는데 고느적한 연집하 물에 저 하늘의 달이 어리여 물결친다. 두세살 밖에 안된 쌍둥이들은 엄마 손을 뿌리치더니 달이 강물이 떨어졌다며 건져 올리라고 야단을 떤다. 달이 흐르는 쪼각구름에 가리우자 이번에는 “아야, 달이 제집으로 도망갔다”고, 달이 구름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이번에는 “달이 도망갔다가  돌아왔다”고 퐁퐁 뛰며 짝자꿍을 친다. 그러던 쌍둥이들이 자라 소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저 달이 어째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가?”고 묻기에 이른다.    2   소학교 초급학년 시절 어느날 저녁, 그날도 연집하 강뚝을 따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 쪽으로 산책하는데 서남쪽 높은 하늘에 은하수를 사이두고 유난히 밝은 두별이 서로 의좋게 마주하고 있는 하늘모습이 비껴온다. “아빠, 저 밝은 두별중 어느것이 직녀별이고, 어느것이 견우별입니까?” “글쎼~~” 쌍둥이 딸애들 뜻밖의 물음에 나는 대답이 궁해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철모르던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북극성이요, 북두칠성이요, 견우요, 직녀요 하는 별들 옛말들을 수없이 들어 북국성과 북두칠성 쯤은 익히 알고 견우와 직녀 두별도 가리킬수가 있었지만 은하수를 사이둔 두별 중 어느것이 어느별인지는 모르고 지나왔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애비노릇을 잘하자면 무어나 막힘이 없어야겠다고 자책, 그때부터 밤하늘 별세계 공부에 달라붙었으니 그때가 내나이 40대시절,  1997년인가 1998년이 였을것이다. 일이 되느라고 쌍둥이 초급학년 그 시절, 나한테는 한국서 시시로 부쳐오는 많은 책과 잡지들이 있었는데 그런 중에는 “과학동아”라는 월간잡지가 있었고, 잡지에는 마침 춘하추동 사계절에 따르는 별자리 성도(星圖)와 관련지식을 련재. 처음 접해보는 성도라, 나는 그 성좌도를 갖고 젊은이인양 밤하늘 별세계를 좇아다니기 시작했다. 별밝은 밤이면 밤마다 의례 저녁이나 새벽이나를 가리지 않았으니 나는 완전히 밤하늘 별세계에 취해 버렸다. 그렇게 몇몇밤도 아닌 옹근 두해를 헤둥거렸더니 저 밤하늘의 다양한 달로부터 육안으로 볼수있는 우리 태양계 9대행성중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5대행성에 이르기까지, 별찌—류성으로부터 성운, 성단, 은하, 우주를 거치며 국제천문련맹 규정 88개 별자리, 21개 1등성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익히 알게 되였으니 이쯤이면 아마추어 천문학자 수준은 갖춰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테지.    3   헛된 별공부는 아닌것 같다. 별밝은 밤이면 소학교 고급학년에 다니는 쌍둥이와 아들애를 데리고 밤하늘 려행을 자주 다녔더니 쌍둥이도 88개 별자리중 육안으로 가릴수 있는 40~50개 별자리를 환히 꿰뚫어 보았다. 지력장애 아들애도 금성이요,  북두칠성이요, 삼태성이요 쯤은 식은죽먹기로  알았을 때 쌍둥이 천문지식은 동년배 아이들을 훌쩍 뛰여 넘어 우주를 나래치고 있었다. 쌍둥이 딸애들은 별세계지식으로 작문이랑 척척 지어내며 “자연”과 기타 공부에서 월등함을 뽐내고, 중학교와 고중시절에는 천문학자를 꿈꾼다며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글쎼, 나라는 일개 문인출신이 1999년 겨울에 대련가서 한달 공부하고 국제해원자격을 따고 상선하여 한국 동해바다에 가서 두달기간 있으며 남북간 바다를 주름잡은 적이 있는데, 그때 사왔다는 한국책이 말짱 “밤하늘로 가는 길”,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이라면 믿을만 할까?! 그쯤이면 몰라도 “밤하늘로 가는 길”의 저자이고, 밤하늘의 별을 찾아 망원경과 씨름하는 별밤지기 김지현씨를 만나기까지 했으니 이런 책과 천문학자의 계시는 나의 사색을 무한한 별세계--우주세계로 이끌어 주고, 쌍둥이 딸애들에게 끝없는 상상세계를 펼치여 주었으니 나는 밤하늘 별들 세계에 헛 빠지지 않았나부다. 그 시절 별세계공부도 이젠 10년, 10여년 전의 얘기, 그런 아버지를 지력장애 아들애도 너무 알고 있어 별밝은 밤이면 저 별은 뭐고, 저별은 언제 지고, 언제 떠오르는 가며 가끔 질문을 던져온다. 그때마다 에누리 없이 대답해주니 오늘 저녁도 그러하다. 동남쪽 하늘에서 오리온자리를 알더니 마차부자리는, 황소자리는, 큰개자리는, 쌍둥이자리는 하고  련속 묻기에 바쁘다. 그만큼 온 하늘서 가장 화려하게 안겨지는 겨울철 별자리들은 동남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운 저 겨울철 대6각형속에 마차부자리,  황소자리, 오리온자리, 큰개자리, 작은개자리, 쌍둥이자리 들로 수두룩하고 육안으로 보이는 온 하늘의 21개 1등성중 겨울철 대6각형속에만 7개 1등성이 빛나고 있으니 아들애가 별들이 많고 환하다고 탄성을 지를만도 했다.    4   이 시각 저 하늘—북쪽 하늘에는  북극성을 안은 북쪽 하늘의 별자리--작은 곰 자리와 영어의 W자 모양이기도 하고, 3자 모양이기도 한 카시아페이아 자리가 보이고 서쪽 하늘로는 봄의 대표적인 별자리--사자자리가 밀리여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다가 보는 강남 밤하늘의 별세계가 북방에서 남방에 온 우리 부자에게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안기여 듬은 왜서일까, 북방에서 볼 때 높이 떠서 보이는 북극성이 남방에서는 지평선에서 겨우 25도에 솟아 있고, 북방에서 낮추 보이는 겨울철 대6각형의 제일 아래쪽 큰개자리의 1등성—시리우스(온 하늘의 21개 1등성 중 가장 밝은 별)는 남방하늘에서 근 20도 높이로 허궁 들리여 있으니 신기하고 매력적일 만도 하지. 그래서 맑고 깜깜한 밤하늘은 이 세상 아름다움의 반이라고 하는걸까. 머나먼 우주공간속의 별들이 한줄기 별빛으로 되여 우리 시야에 안기여 들기까지 뭇별들로 총총한 밤하늘의 별들 세계, 실로 대자연이 우리에게 하사하는 신비로운 축복이요, 하느님의 선물일진대  가슴을 울렁이며 들뜨게 하는 그 시각의 설레임과 정겨움과 황홀경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냐, 이 시각도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북두칠성 등 옛말을 들으며 집앞을 흐르는 물도랑 뚝에 가로 앉아 미지의 별세계를 동경하던 그 시절을 떠올림은---- 그래서냐,  40대를 20대 한창나이로 여기며 쌍둥이 딸애들에게 호기심을 심어주며 미래를 심어주며 밤하늘 려행으로 보내던 그 몇몇 춘하추동을 떠올림은---- 오늘도 별빛이 내리는 월수대 운동장, 50대 중반을 내닫는 이 시절도 신비로 가득찬 강남의 밤하늘, 나 삶의 일부가 되여버린  별들 세계를  맘껏 려행하노니  별과 운명을 같이하는 하나의 반짝이는 별로 우리 겨레사회에 떠오르고 싶다. 저 하늘의 별들이 깜박깜박 웃어준다.   2010년 1월 19일, 강남땅에서   
429    상해 항주 문인들 소식 2편 (홍순범 등) 댓글:  조회:860  추천:30  2010-01-08
【소식】(1)                 상해 7명 문인들 한자리에   홍 순 범      11월 20일 상해천사마트옆정일품식당에서 우리 글을 사랑하는 조선족문인들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에는 상하이타임안귀선 .한교자문의 전은종. 그리고 이금화. 김향려. 이설령 .김미화. 홍순범. 등 글을 사랑하는 분들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저마다 뜨겁고 정열이 넘치는 교제의 장이였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문단에 우수한 작가선생님들의  작품을 서로 나눴고 또한 \"글사모\"가 앞으로의 발전번창해 지는 그림을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저마다 하고 있는 사업소개/자아소개/자작글소개를 하면서 서로에 대한 요해를 깊이 할수 있어서 넘 좋았습니다.    처음으로 모이는 자리였지만 \"글\"이라는 주제가 있어서 서로 서먹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생각을 나눌수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 모임에선 \"글\"에 대한 더 좋은 생각을 교류하고 또한 새로운 회원분들도 더 많이 만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7명이 모여서 찍은 첫 발자국이었지만, 다들 글에 대한 정열로 넘치는 뜨거운 가슴이 있어서 그 흔적이 뚜렷이 남은 모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고 나아가 그런 좋은 글로 우리 상해의 교포들의 전체동향을 파악하고 영향을 주는 그런 뉴대로, 글사모가 발돋움하기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갈수록 나아지고 번창해가는 우리 글사모를 기대합니다. 이상 상해에서 뒤늦게 전해드립니다         【소식】(2)         절강창작위원회 새해 활동 담론    2010년 1월 8일,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 현충혁과 남연, 리광인 셋은 항주의 려궁에 모이여 새해의 활동을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서로간 이야기에 력점을 둔것은 올해 상반기를 계기로 지난해 “연변문학”11월호 특집 계속으로 절강창작위원회(남방창작위원회) “장백산”특집을 뭇고, 작품집을 뭇는 문제였습니다. 작품모집이 한창 열기를 안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다음은, 남연씨의 제의로 항주의 겨레 선배님들을 중심으로 한 절강지구 겨레발자취 취재와  문집출판을 다그치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절강지구 중한 고대, 근대 문화교류 발자취도  함께 취급하기로 토의했습니다.   모임은 또, 항주, 상해부터 솔선하여 절강창작위원회 산하 활동소조를 내오고 창작교류활동을 활성화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남방지구 조선족문인회도 담론의 한 내용을 이루었습니다.
428    새해의 첫눈 감회속에서 댓글:  조회:1729  추천:21  2010-01-07
                 새해의 첫눈 감회속에서   아침에 일어나니 6시반, 습관적으로 아빠트 창문가에 다가가니 저 아래 아빠트 정원의 겨울 푸른나무들은 소복단장을 한듯 흰눈에 덮히여 있다. 녹으며 내린 눈이 벌써 자국눈을 이룬걸 보아 간밤에 조용히 내려앉은 모양이다. 이젠 지난해로 되어 버렸지만 12월 27일 강남 첫눈에 이어 내린 2010년 새해의 첫눈이여서일까, 마음이 동심인양 랑만으로 동동 뜬다.    아침식사를 대충 거르고 나는 일찌감치 아빠트 정원에 내려가 강남의 푸른나무들을 보듬어안은 눈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발길을 동방언어학원 청사를 지켜선 소나무가로 돌리여 설경속 강남 소나무들을 카메라에 잡아 보았다. 이때도 새해인사를 하기라도 하듯 새해 강남 첫눈은 사분사분 내리기만 하는데 푸른 잎들과 가지들에 보송보송한 눈들이 어서오라 나를 부르기만 한다. 오전 강의가 있어 눈속에서 더 보내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이러구러 오전 1~2교시를 마치니 하늘을 덮으며 하늘하늘 춤추던 눈들은 멎어있고 령상권 강남날씨를 이기지 못하여 스름스름 눈녹이를 시작한다. 나는 부랴부랴 집에만 갇혀있는 아들애를 불러 같이 월수대 캠퍼스를  지나 대우릉 백조락원 숲속을 찾았다. 눈이 왔다고, 백조락원에 왔다고 아들애는 기뻐 어쩔줄 모르는데 침엽수 소나무들과 푸른 잎들에 담뿍담뿍 내린 눈송이들이 아들애를 퐁퐁 뛰놀게 한다.    대우릉 산천은 온통 새해 첫눈으로 덮히여 있다. 지구촌 북반구를 강타하는 한파의 남하가 기온을 령하권으로 떨구면서 한창 내리는 강남의 겨울비를 저처럼 희디흰 눈세계로 바꾸어 놓으니 대자연의 힘은 대단도 하다. 어른이 아니면 티없이 흰 저 눈우에서 마구 뒹굴어 보고도 픈데 대우릉 우람진 종이 우릴 부른다. 새해 6일이여서 여섯번, 류류다순(六六大順)이라 하여 여섯번.    부자간이 다시 월수대 남대문 캠퍼스에 들어서매 남대문 가까이서 몇몇 남녀 대학생들이 어울려가며 눈사람 만들기에 분주하다. 년말 새해를 앞두고 내린 지난 12월 27일 겨울 첫눈 때도 오전 수업을 마친 여느 대학생 몇몇이 주위 눈들을 모아 눈사람 만들기에 바쁘더니 눈사람 만드는 강남 대학생들 신나는 모습 보노라니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뛰놀던 때가 눈에 삼상하다.    소학교 초급학교시절인 1964년, 4월이라 새봄이 덩실덩실 춤출 때인데 때도 아닌 이달 16일에 폭설이 쏟아져 천지간은 온통 눈으로 덮혀 버렸다. 조무래기 우리들은 저세상이노라고 무리를 지어 눈싸움을 벌리다가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3살아래 녀동생과 같이 집뜨락에 눈사람을 만들며 법석을 떨었다. 그때도 저 대학생 애들처럼 만들어 놓은 눈사람에 눈과 코, 입, 귀를 만들고 초모자까지 씌웠고 눈을 쓸라며 비자루까지 걸쳐주고 깔깔 웃어댔다.    일은 묘하게도 그로부터 4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2006년 4월 16일부터 련며칠 봄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내 고향 연변대지를 눈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하늘이 그대로 폭설이 되여 무너져 내린 것이리라. 나는 연변1중에 다니는 쌍둥이 딸애들과 같이 또 눈사람을 만들며 맘껏 동심에 젖어 보았다. 저 남방 대학생 애들도 지금 한창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눈이 내리면 눈사람 만들기, 아마도  동심세계의 장난끼는 인간의 공성 그대로인것 같다.    나는 대학생 애들 눈사람 만들기 신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대학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한국어를 맡아 본 06~6반 애들을 떠올려 보았다. 2006년~2007년 겨울방학 맞아 북방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몇몇 녀대생들은 연변에 가면 겨울의 모습이랑, 눈이랑 사진들을 많이많이 찍어오라고 희망을 내비친다. 겨울눈을 거의 보지 못하며 자라온 그네들한테는 북방 눈이라 하면 신비하고도 동경으로 넘친 세계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던 남방이 이상기후에 휘말리며 겨울방학에 우리가 연변으로 돌아간 사이 강산같은 폭설로 남방대지를 강타했다. 그해 폭설을 우린 겪어 보지 못했지만 폭설이 가져다 준 피해는 엄청이였다. 그에 비해 자국눈 따위 남방 눈은 우리가 남방에 온  이 몇년래 해마다 내리여 눈을 거의 모르고 자란 오늘날 남방 대학생들에게 성수난 신선한 세계를 펼쳐 주고있다. 눈사람 만들기에 나선 저 대학생들이 그 신선한 세계에서 뛰논다.    새해 벽두의 강남 첫 눈속에 서보는 나 감회가 새롭다. 우리 북방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자연스런 눈내림이 이곳 남방세계에서는 희한하고도 신선한 세계로 펼쳐지니 폭설이면 즐거움보다 엄청 피해가 따르겠지만 맞춤맞춤 내리는 눈은 이렇듯  동경을 불러 일으키며 하많은 감회를 자아내기도 한다. 나는 인차 그 감회속에서 헤여나오질 못한다.   2010년 1월 6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427    새해 첫날답사 동산재기로 이어간다 (2) 댓글:  조회:1690  추천:18  2010-01-06
【강남기행】        새해 첫날답사 동산재기로 이어간다 (2)                                              4     사안이 중년의 나이 40대의 문턱에 오르매 동진나라의 운명이 험악하기만 하다. 세인들이 사안의 출마를 기대하고 사대부들이 사안이면 이그러지는 나라를 구할수가 있다고 믿는다. 이때 사안의 나이 40살, 사안은 더는 보고만 있을수가 없어 승평 4년, 즉 기원 360년에 동진 명제의 사위 정서대장군 환온의 청을 받아 들이고 형주로 가니 환온 대장군의 사마(司馬), 환온이 죽은 후에는 선후로 상서부사(尙書訃射), 통령리부(統領吏部), 후장군으로 활동한다. 조정에서는 또 사안더러 중서(中書)사무를 총괄하게 한다. 동진의 황제 간문제가 별세한후 사안은 황제의 림종유언에 좇아 나어린 효문제를 충성으로 보좌하여 나선다. 효문제가 친정한 후 효문제는 황제를 대표하여 령을 내리는 상징인 “절”(節)을 사안에게 넘겨 책임지도록 하기에 이른다. 사안은 조정에서 선후로 리부상서(吏部尙書), 총중서(總中書), 사도(司徒), 태보(太保), 태부(太傅) 중요요직과 양주, 서주, 광주, 청주 등 15개 주 군사를 통솔하는 중임을 떠멘다. 동진 조정에서의 15년, 사안은 위기에 처한 동진을 만구하면서 개혁을 단행하고 사회모순을 완화시키고 정국을 온정시키는 능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태원 7년, 기원 382년에 전진(前秦)이 중국 북방을 통일하였다. 그때 전진과 대치할수 있는 나라는 동진 뿐이지만 전진 황제 부견(符堅)은 동진을 눈에 차하지도 않았다. 태원 8년(383) 9월에는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90만 대군을 이끌고 대거남하하여 동진과의 결전에 총궐기하였다. 그때 동진에는 저항할수 있는 군사라야 10만에 미치지 못하고 그 주력이 사안이 조직한 북부병(北府兵)일 뿐이다. 강대한 적의 침공앞에서 사안은 태연한 자세로 나라인심을 안정시키면서 회북사람들을 회남으로 이주시키고, 견벽청야(堅壁淸野)로 적들의 보급래원을 끊어버리는 전략전술을 취했다. 전진군의 30만 대군이 회남의 중진인 수양(壽陽, 오늘의 안휘 수현)을 함락하였다. 사안이 급파한 정예한 수군 5000명이 미처 수양에 이르지 못한 형편, 허나 이 군사들은 사안의 명에 의해 지혜를 모아 북부병 5000병력으로 전진군의 1만 5000여명의 병력을 소멸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린다. 동진을 깔보기만 하던 전진황제 부견은 수양성루에서 겁이 더럭 났다. 긴장과 무서움에 눈까지 착란이 오니 부견의 눈에는 수양성외 팔공산(八公山)우의 초목들이 동진군사로 비쳐들었다지. 력사상 유명한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성구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5   그때 전진의 군사는 오늘의 안휘  비수 대안에 진을 친데서 동진군은 신속히 비수를 건너 전진군을 격파할수 없었다. 전진군의 주력이 다닥치면 동진군은 극히 불리하게 된다. 이에 동진군은 사자를 적진에 보내 전진군이 조금만 후퇴한다면 동진군이 비수를 건너가 결전에 나설것임을 알리였다. 승리감에 도취된 부견은 동진군이 비수를 건널 때 일망타진하려고 동진군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부견은 오산하였다. 전진군의 허다한 군사들이 강박에 의해 끌려온 사람들이여서 후퇴의 명령이 전해지자 후퇴는 패배로, 도망으로 번저져 군심은 수습할수 없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때 동진군이 비수를 건너 적들을 질풍노도같이 무찌르니 적군 인마 서로 밟기까지  하여 적들의 시체는 산과 들을 덮었다. 부견도 혼전에서 화살에 중상을 당했다. 전진군은 대패하여 락양까지 물러가니 군사는 겨우 10여만이 가랑가랑. 비수의 싸움(淝水之戰)은 동진왕조가 존재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사활적이고 결정적인 전역이였다. 이 싸움은 중국 고대전쟁사에서, 중국력사상에서 약한 군사로 강한  군사를 싸워 이긴 빛나는 전례(戰例)로서 사안은 비수의 싸움에서 군사통수로서의 지휘재능과 탁월한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태원 10년(385)8월 22일 (양력 10월 12일) 사안이 별세하자 동진황제는 3일간 대전(大殿)에서 애도하며 사안을 태부(太溥)로 봉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으로 내린다. 장례도  대사마 환온의 상사때처럼 특수한 방식으로 치른다. 또, 전진군 평정에 탁월하여 봉호를 바꾸고 “려릉군공”(廬陵郡公)으로 추증한다.   6   성구 “동산재기”로 보는, 중국 동진력사로 보는 동산재기의 주인공 사안이다. 이런 력사의 위인이 지금 절강 소흥 상우시 남부에 위치한 상포진 동산에 고이 모셔져 있다. 동산은 동진시절의 탁월한 정치가이고 군사가인 사안이 은거하였던 곳으로서 산아래는  옛날 효녀 조아의 이름으로 된 조아강이 유유히 흐르고 산에는 대나무들이 우거져 풍경이 자못 수려하다. 이런 고장에 내가 아직 답사하지 못한 사안의 옛집이 있고, 상우에서는 지금 동산사찰을 세우면서 관광지로 꾸리고있다. 안휘는 또 어떤가, 안휘 지도를 보면 안휘의 중심부를 이루는 성소재지 합비에서 회남쪽으로 올리보면 수현(동진 때 수양)이요, 사가집구(謝家集區)요, 팔공산구요, 비수강이요~한눈에 알아 볼수가 있다. 그 옛날 전진군과 동진군의 비수의 싸움으로 이름난 력사의 강이 아니더냐, 동진군 통수로서의 사안의 탁월한 지휘재능이 그대로 발산된 비수지전이 아니더냐. 나는 시선을 다시 절강으로 돌리고 소흥으로 돌려 본다. 소흥시 소흥현 란정진 경내에는 동진 대서예가 왕희지를 기리는 란정풍경구가 있는데 이 란정풍경구에는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곡수류상”(曲水流觴)이 있어 자못 인상적이다. 동진 목제시절인 기원 353년 어느날, 왕희지는 동산의 사안,  손작 등 42명의 명사들을 불러 란정의 곡수류상에서 조용히 흐르는 물에 술을 부은 술잔을 띄워놓고 시를 주고받으며 즐긴다. 천고의 미담으로 남은 옛 이야기, 그날의 시들이 시집으로 묶어지고 시집에 왕희지가 서언, 즉 이름난 “란정집서”(蘭亭集序)를 일필휘지한다. 이 왕희지가 동산 은거중인 사안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다. 사안이 동산재기하여 동진 조정에서 조정을 보좌하는 높은 벼슬에 있을 때 왕희지와 더불어 한 성루에 올라 담소하며 상상의 나래를 멀리멀리까지 펴간다. 그런 사안이 지금 상우 상포의 동산에 누워 1600여년 후에   찾아온 6000리 밖의 북방손님을 반기여 주는듯 싶다. (동진시기 사안은 정말 그시절 동진 황제를 보좌하며 동진을 지켜낸 대단한 인물이구나!) 나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동산재기후에도 소흥 상우 상포진의 동산에 요란함이 없이 조용히 누워있는 력사의 위인 사안에게 존경의 마음이 가기만 한다.   2010년 1월 3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426    새해 첫날답사 동산재기로 이어간다 (1) 댓글:  조회:1457  추천:16  2010-01-05
  【강남기행】                    새해 첫날답사 동산재기로 이어간다   1   옛날 20대 시절에 즐겨 보았던 “한어성구소사전”(제3차 수정본, 1977년 출판)에는 3013개의 한어성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강남땅 절강 50대 시절에 “동산재기”란 성구에 깊이깊이 매료될줄을 몰랐다. 한어성구소사전에 의하면 동산재기(東山再起)의 재기란 다시 일어나 관리질한다는 뜻, 그 유래는 동진시절 사안(謝安)이라는 사람이 관직을 떠나 동산에 은거하였다가 다시 높은 관직에 오름을 말한다면 실세하였다가 다시 득세함을 비유하는데도 널리 쓰이고 있다. 절강에 온후 대학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여러가지 성구에 자주 부딪치지만 성구 “동산재기”에는 그닥 주의를 돌리지 못한것이 사실, 그러다가 동산재기 유래의 주인공—사안의 묘소가 절강 상우에 있다는 관광안내를 보고는 자석마냥 끌림을 어찌할수가 없다. 상우(上虞)면 지구급 시인 소흥시의 한개 현급시로서 소흥과의 거리라야 불과 23킬로미터 밖에 안된다. 나는 고대 겨레발자취에만 매울수가 없어 새해 2010년 1월 1일 양력설(신정)날 정오에 아들애를 데리고 상우 동산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새해 첫 태양 맞이에 이은 새해첫날 동산재기 답사라 하지만 바깥답사 첫 시작부터 오리무중,  여러 류형의 택시운전사들이 동산은 안다면서도 사안묘라면 도리질을 하니 말이다. 이 운전사, 저 운전사를 두루 거치다가 40대로 보이는 장씨라는 운전사가 안다하여 다시 20킬로미터 밖 상우 상포진에 이르니 사안묘는 모르고 동산재기요, 사안이요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후유~한숨만 나온다. 그렇게 어정쩡 헤매다가 다행히 부근에서 사안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택시에 오르니 택시는 상포진 동산구역을 다시 에돌아 어느 한 골짜기에 접어든다. 골짜기 어구에 “동산재기지”(東山再起地)라는 대형선전판이 세워져 있으니 오늘 답사가 헛걸음은 아닐것 같다.   2   택시는 어느덧 골짜기 어구를 지나 산등성이로 오르는 구비구비 등반길에  들어선다. 저 앞 산등성이에 옛스러운 건물이 보인다. 차로 달리니 상포진을 거치는 아스팔트길에서 산등성이까지 10리도 되나마나한 거리고, 옛스러운 우람진 건물은 동산사(東山寺)라는 사찰의 정문이다. 정문에서 동산사찰까지는 또 산등성이 평탄한 비탈길을 따라 조금 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몇분후 동산이라 불리는 산정아래 펑퍼짐한 곳에 노오란 칠을 한 길다란 담장이 나타나고 담장에는 중국어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큰 글씨가 씌여져 있다. 동산사찰이 옳았다. 그때에야 어인 연고임을 알았지만 동산사찰은 이미 일떠선 담장안의 웅장한 대웅보전(大雄寶殿)과 금방 지어놓은 천왕전(天王殿)을 제외하고는 여러 건물과 길 등 모두가 한창 수건중이였다. 사안이라는 이름난 력사인물을 살려 불교사찰과 관광이 하나로 어우러진 상우시 동산관광지를 건설하고 있다함이 옳을듯 하다. 어찌하든 나의 관심사는 첫째도 그러하고 둘째도 그러하고 모두가 옛 사안묘소를 찾는것이 아니던가. 마침 사찰 담장대문 어구에서 20대의 한 젊은이를 만나 물어보니 사안묘소가 저 안쪽 대웅보전 뒤쪽가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직접 안내자로 나서기에 그를 따르니 과연 대웅보전 정면 왼쪽가 뒤 산기슭에 시골묘소를 방불케 하는 소박한 모습의 사안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상우시 중점문물보호단위, 사안묘, 상우시 인민정부, 1987년 공포”라고 쓴 안내비가 서고있고 묘소에는 “진태부사공묘”(晋太傅謝公墓)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보매 사안 묘소는 옳다고 하는데, 주인없는 스산한 묘와 같아 선뜻 무엇이 안겨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다. 묘소 부근 산비탈에 길다란 사찰의 단층집이 보이여 그리고 올라가니 대문이 잠겨 있다. 나에게는 동진 사안의 고향집으로 보이지만 들어갈수가 없다. 다시 사안묘소로 돌아오니 묘소 앞에 “시x천”(始x 泉)이라는 밝힘의 샘물웅덩이가 발목을 잡는다. 사안이 동산에 은거할 때의 샘물터 같았다. 그때를 시작이라는 말 같은데 복판 글자는 어인 판국인지 사전에도 없어 헤아려 볼수가 없다.   3   나는 다시 사안묘소 앞에 섰다. 묘소 뒤는 울창한 대나무들로 둘러싸여 인상적인데 그 대나무 숲속으로 동진 때의 사안이 걸어나오는 것만 같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전 동진시절의 사안은 이곳 동산에 은거하여 있다가 다시 조정의 높은 관직에 오르며 불멸의 성구—동산재기를 탄생케 한 력사인물이다. 중국력사를 헤아리면 력사는 4000여년 전의 첫 노예제국가의 탄생으로부터 하, 상, 주 시기를 거쳐 기원전 221년의 진시황 통일에  의한 진(秦)나라에 이른다. 진나라 다음은 한나라요, 한나라는 서한과 동한으로 흐르다가 위, 촉, 오 삼국시기를 거치며 진(晋)나라 시기에 들어선다. 이 진나라(기원 265~420)는 선후하여 150여년을 지속하지만 서진과 동진으로 불리우며 서진은 삼세사주(三世四主)로 52년, 그 뒤를 잇는 동진은 사세십일주(四世十一主)로 력사를 이어간다. 이런 진조가 100여년 세월속에 권력다툼이요, 골육상잔이요 하면서 나라 전체가 혼란과 위기로 흔들리니 오죽하면 중국 유사이래 량진(兩晋)시기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라 할까. 이같은 어지러운 시절에 사안은 그 시절 이름난 진군양하(陳郡陽夏), 오늘의 하남 태강의 사씨사족 명문가문에서 기원 320년에 태여났다. 아버지는 조정의 리부상서(吏部尙書), 형과 여러 동생들은 모두 관리들이라 사안은 어려서 형을 따라  오늘의 소흥 회계산 일대에서 지내며 총명이 과인하여 4살에 벌써 “이 애는 보통 애가 아니라 장래에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사안은 름름한 자태에 풍도와 재질, 지식이 뛰어났으나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른으로 자라난 후 사안은 처음 조정의 사도부(司徒府)로부터 막료로, 다음은 조정의 좌저작랑(佐著作郞)으로 임명되였으나 모두 병을 핑게로 사절했다. 동산에 은거하니 명성이 급부상, 조정에서는 조정과 손을잡지 않는 명사들에 대해 “금고종신”(禁錮終身)이니, 금고종신이라 하면 지방감시에, 자기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정치활동에 가담할수 없다지만 실상은 가혹한 이 정치적징벌도 잘 지켜지지가 않았다. 대신 금고자인 명사의 명망만 부풀어 오를뿐. 동산 은거시절에 사안은 그 시절의 대서예가 왕희지, 문학가 손작, 리윤 그리고 불교계, 학계의 명사들과 동산 저택에서 지식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기를 즐기였다. 낚시질에 새잡이, 산수유람에 시와 글짓기에 빠져 든 사안. 은거 기간에 가까이로는 산아래 이름난 강—조아강(曹娥江), 멀리로는 오늘의 항주 저쪽 부춘강 류역 천목산(天目山)에 이르기까지 발자취를 남기니 세월은 그속에 흘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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