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http://www.zoglo.net/blog/liguangren 블로그홈 | 로그인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565 ]

5    천리두만강을 따라(5)ㅡ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 댓글:  조회:3351  추천:84  2005-06-05
천리 두만강을 따라(5) 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 리 함 변강소도시로 불리우는 남평진(원 덕화진)이 조선족이주의 전설이 깃든 유서깊은 땅이라면 국가풍경명승지ㅡ선경대를 끼고있는데서 관광명승지로도 이름이 높다. 두만강관광로선의 첫 길목에 자리잡은 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는 화룡지소재지에서 남으로 30킬로메터, 자치주 수부 연길시에서 100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동으로 두만강과의 거리도 불과 8킬로메터밖에 안된다.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는 2002년 5월 17일에 국무원에 의해 황산, 태산과 같은 국가중점풍경명승지로 되였는데 총면적이 32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이 풍경명승지는 괴봉, 괴암, 괴송, 은해, 해돋이 등 300여개의 아름다운 경관들로 이루어졌다. 그중 선경대의 주봉으로 불리우는 삼형제봉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기에 족하다. 해발 926메터되는 선경대주봉에는 20여메터 높이의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세 봉우리가 세 형제처럼 우뚝 솟아있어 삼형제봉으로 불리우는데 산꼭대기에는 우람진 너럭바위가 자리를 틀고앉아 있다. 특이한것은 너럭바위 우에 있는 40여개의 말발굽자국이라 하겠다. 말발굽자국 중에서도 제일 큰 자국의 직경은 30센치메터이고 깊이는 15센치메터나 되는데 아직까지 40여개의 이 말발굽자국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과학적으로 풀이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또 사철푸른 초선송(招仙松), 팔괴송(八怪松), 자매송들이 있어 유람객들의 눈길을 모으는데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그 풍경은 더욱 장관이다. 해발 846메터를 헤아리는 동쪽의 고려봉 또한 유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고려봉의 삼면은 100메터좌우의 낭떠러지이다. 고려봉으로 치닫는 소로길을 따라 해발 800메터 지점에 오르면 괴상하게 자란 판룡송, 궁룡송이 반겨맞는다. 판룡송은 100여년의 생장력사를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애솔 때 우에서 굴러내려온 4000여근 되는 큰 바위돌에 깔렸다지만 끈질긴 생명력은 육중한 바위돌의 지지누름을 이겨내며 굳세게 자라게 하였다. 이 판룡송은 직경이 35센치메터이고 나무의 전체 길이가 9메터인데 꿈틀꿈틀 몸을 탄 그 모습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룡을 방불케 한다. 100여년의 풍상고초를 이겨내면서 무거운 바위를 35센치메터나 자기 몸으로 들어 올렸으니 대자연의 걸작에 탄복이 가지 않을수 없다. 판룡송의 옆에는 180도의 호형을 이룬 괴송ㅡ궁룡송(弓龍松)이 있어 이채를 더해준다. 선경대는 실로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울만도 했다. 《신당서》, 《발해전》의 기재에 따르면 기원 724년에 발해국의 제3대왕 대흠무는 오늘의 돈화로부터 현주(显州)로 불리운 오늘의 화룡시 서고성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그 시절에 서고성발해옛터는 중경현덕부로 통했다. 중경(中京)은 일찍 6개주와 30개현을 거느린 발해 5경중의 하나로서 5경중에서 주와 현이 가장 많은 경이다. 당년 대흠무는 제철업의 발전을 위해 철주(오늘의 무산)로 드나들다가 선경대에 발길을 멈추었는데 기기묘묘한 이곳 천태만상에 탄복한 나머지 《아, 실로 선경대로다!》하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선경대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겨나 오늘에 이른 모양이다. 선경대 해당자료에 의하면 그후 1777년에 고려봉으로 오르는 금계봉아래 펑퍼짐한 공지에 선경대절이 세워졌다. 조선식 집구조의 절 한채였다고 하는데 조선에서 들어온 하홍락, 유희춘, 황정숙 세 스님이 열심히 불도를 닦은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중년소설가 류연산은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에서 선경대 가까이에 있는 흥진촌 류영협(1913년 생)로인방문기를 이렇게 적고있다. 《내가 4살 때 선경대로 이사와서 줄곧 지금까지 살고 있수다. 내가 알건대 제일 처음 중으로는 하홍락이고 선경대절이라고들 했었지우. 그는 1885년에 절벽아래에 륙간초가집을 짓고 나무불상을 모시고 도를 닦았다는거였수. 매년 초파일이면 마을에서는 떡을 치고 감주를 해갖고 선경대절에 가서 기도를 드렸수다. 그후 유희춘이 있었는데 절당을 북두칠성절이라고 했수다. 유희춘을 사람들은 유대사, 스님, 신의(神醫)라고도 불렀지우. 그후 녀자중 황정숙이 북조선에서 손녀 둘을 데리고 왔었다우…》 《혈연의 강들》(상)은 계속하여 비구니 황정숙의 손녀 김영숙(1938년 생)이 화룡진 서가촌에 생존해있어서 유력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하면서 1940년에 황정숙은 팔간집을 짓고 칠성불묘를 하다가 1947년에 절을 떠났다고 했다. 절의 마지만 스님 황정숙은 조선 강원도 원산 독수절에서 에밀레종과 돌불상 두개를 모시고 선경대에 왔다고 하는데 지금도 북두칠성불묘 유지에는 성수(聖水)로 불리우는 감로천이 있어 선경대를 찾는 유람객들마다 맛보고 있다. 오늘의 선경대는 10여년의 건설을 거쳐 국내외관광객을 많이 끌어 관광수입을 대폭 늘일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가고있다. 게다가 선경대는 조선을 통해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으로 오르는 두만강관광로선의 길목에 놓였기에 두만강황금선이란 이 우세를 빌어 백두산유람시 하루나 이틀 묵어가는 관광지로 거듭 날수도 있다. 했으나 유감도 없지 않다. 선경대건설은 아직 정부적인 차원에서 움직이지 못하고있는 실정이고 경제투자가 따르지 못하여 그 진척이 아주 굼뜨다. 이에 선경대풍경명승구관리국 윤갑송국장은 얼마전에 필자와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인민페 2000만원이면 관광객들이 머물러갈수 있는 훌륭한 관광명승지를 건설할수 있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이제 화룡시는 조만간에 관광시로 발돋음하게 된다. 필자는 선경대 국가 풍경명승지가 이한 동풍을 타고 어서빨리 화룡시 경제번영의 희망으로 떠오를것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4    천리두만강을 따라(2)ㅡ두만강상류 제1번지-광평 댓글:  조회:4603  추천:88  2005-06-01
천리두만강을 따라 (2) 두만강상류 제1번지―광평 리 함 안도현 내두산이 백두산북쪽의 하늘아래 첫동네라면 화룡시 광평은 백두산동쪽의 하늘아래 첫동네이다. 백두고원벌이 넓고 평탄하다 하여 광평(广坪)이라 불리운 이 고장에서 백두산 산문까지의 거리는 100리 미만이여서 백설을 떠인 아아한 백두산이 어디서나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만 해도 광평은 천고의 수림과 초원으로 뒤덮힌 황막하고 습한 지대였다. 일찍 1905년경에 조선이주민들이 한 세대, 두 세대 두만강을 넘어서면서 인가가 생겨났다. 1943년 봄에 이르러서는 일제놈들의 강제이주정책이 실시되면서 워낙 100여 세대밖에 안되던 광평과 그 일대 동경벌은 일약 500~600세대로 늘어났다. 광평과 그 일대 동경벌을 몽땅 비운것은 광복후 1953년 가을이다. 그후 1958년부터 1979년사이 이땅에는 지방국영농장이 세번 건립되였지만 모두 해산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세번째 농장은 1971년에 서서 1979년도까지 유지되였는데 그때의 화룡현 각지에서 새 농장건설에 뛰여든 지식청년들만 해도 근 200명이나 되였다. 화룡림업국 광평림산작업소가 세워진것은 몇해후인 1983년이다. 지금 이 림산작업소에서 다루는 림지경영면적은 2만 2 300여헥타르로서 주안의 200여개 림산작업소중 단연 첫자리를 차지한다. 오늘 광평령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노라면 넓고 기름진 광평벌, 그 벌을 둘러싼 뭇산들, 도시를 방불케 하는 아담한 림산작업소 본부와 문화주택들, 두 나라 기슭을 치는 은백색 띠모양의 두만강이 한눈에 안겨온다. 젖빛안개가 흰이불처럼 백두고원의 광평벌과 강하나를 사이둔 조선 5호종합농장벌을 포근히 감쌀 때면 실로 장관이다. 그때마다 꼭 비행기에 앉아 구름바다우로 날아예는 황홀한 기분인데 안개바다우에 머리를 빠금 내민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바다에 떠오른 섬들을 방불케 한다. 여기의 두만강은 폭이 좁고 류속이 빠른데 수풀속과 깊은 골짜기, 바위짬을 누비며 줄기차게 흘러 물이 한 여름에도 뼈가 쩡하게 차겁다. 이곳은 또 경치가 절경이여서 천리두만강에서 두번 다시 찾아볼수 없다. 강에는 찬물에만 사는 붉은점이 가담가담 박힌 산천어가 떼지어 노니는데 그 고기맛 또한 별미이다. 그래서 《산천어 굽는 냄새에 나갔던 며느리도 되돌아온다》고 하는가부다. 광평의 사람들은 이렇듯 오염 하나 없는 맑디맑은 두만강물을 음료수로 한다. 게다가 두만강가에 바위밑에서 솟아오르는 정갈한 샘물—천연약수가 있어 개발전망이 자못 크다. 이곳의 두만강은 차고 샘물이 많아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는다. 그래서 두만강 물안개가 보얗게 피여오르면서 강가의 수풀을 눈꽃으로 수놓는데 아침해에 눈뿌리를 시게 자극한다. 광평벌동쪽의 동경벌을 꽉 메운 봇나무숲은 또 어떤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철이면 청청하던 봇나무잎들이 황금빛으로 일매져 보면 볼수록 황홀해진다. 가을의 독특한 이 경치엔 선경도 무색할 지경이다. 동경벌의 독특함은 그뿐이 아니다. 광평령을 사이두고 남북에 위치한 동경벌(남쪽)과 광평(북쪽)벌은 기후차이가 대단하여 광평령북쪽가 나무들에 새움이 돋을 때면 광평령남쪽가 나무들은 푸른 단장이 한창이다. 이곳의 두만강가에는 남북으로 10리가량 뻗은 좁고 긴 분지가 있는데 두만강량안이 아찔하고 길다란 병풍벼랑이여서 풍경이 수려한 지하분지를 이룬다. 무상기가 짧아 광평과 그 일대에 오곡을 가꾸지 못할 때 이곳 분지는 오곡이 무르익어 또 하나의 경관을 이룬다. 백두고원의 특산물인 들쭉, 박달나무숲사이를 메운 황기, 세신, 구멍이 숭숭한 용암돌과 부석, 뭇별처럼 총총한 여러가지 형태의 늪들, 초원을 누비는 노루사슴과 메돼지, 곰 그리고 범이 가끔 출몰했다는 지난 이야기—광평은 실로 한번 가볼만한 하늘아래 첫 동네요, 두만강상류의 제1번지이다. 광평땅은 또한 곳곳에 우리 항일련군들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두만강저쪽에 신개척, 두지바위, 대홍단벌 등 항일전적지들이 있다면 두만강량측엔 1937년 5월의 붉은바위전적지(2군 4사), 1939년 5월 조선 무산지구에 대한 전투를 마치고 우리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일명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화룡땅에 들어섰던 두만강 7호물동 등이 있어 유서깊은 혁명전적지이기도 하다. 7호물동 여기를 조선에서는 《무포숙영지》라고 하는데 우리측에서는 《김일성낚씨터》로 통한다. 두만강가의 특이한 경관이다. 이렇듯 광평과 그 일대는 산좋고 물좋고 경치좋은 두만강가 절경이다. 하기에 이 고장에 광평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이 일떠서게 된다. 이 삼림공원은 2002년 12월에 국가림업국의 비준을 거쳐 정식 국가급삼림공원으로 되였는데 동서길이 65킬로메터, 남북너비 13킬로메터로서 부지면적은 1만 2636헥타르로 헤아려진다.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경내에는 숭선의 군함산, 두만강발원지, 중조21호국계비, 옥녀늪, 김일성낚시터, 적봉, 두만강협곡, 들쭉원, 고산습지, 락엽송림, 침활엽혼합림, 봇나무림 등 많은 자연경관이 있다. 그중 두만강발원지풍경과 두만강협곡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지금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은 한창 진척중에 있다. 총길이 76.3킬로메터인 숭선—쌍목봉 국가2급도로가 지난해말 이미 통차되여 숭선에서 장백산까지 곧추 달리는 꿈, 장백산 환행관광(环行旅游) 꿈이 현실로 펼쳐졌다.
3    천리두만강을 따라 (1)ㅡ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 댓글:  조회:4109  추천:88  2005-06-01
천리두만강을 따라 (1) 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 리 함 백두산 동쪽기슭에서 흘러내리는 천리두만강은 오늘도 예이제없이 중조 두 나라의 기슭을 치며 유유히 흐르고있다. 이 강 연안의 연변땅엔 지금 80만을 훨씬 넘기는 조선족이 살고있다. 두만강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그제날은 설음의 강, 수난의 강이였으나 오늘은 력사의 강, 어머니강으로 되여 우리 모두들 깊은 감회에 잠기게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강들이 원천이 있듯이 천리 두만강도 례외가 아니다.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는 하늘아래 첫동네라 불리웠던 화룡시 숭선진에서 서북쪽으로 74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쪽의 적봉부근에 있다. 적봉은 원명이 홍토산(红土山)이다. 산에 붉은 흙이 많다하여 생긴 이름인데 만족들은 그들 시조이름을 본따 부쿠리산이라고 부른다. 해발 1321.2메터인 이 산은 장백산 산문(山门)과의 거리가 17킬로메터가량밖에 안된다. 그만큼 적봉은 백두산과 그 일대에 널린 수많은 화산중의 하나로서 산형태가 초모자모양을 이루었다. 화산우에 발육된 화산토양이다보니 토층이 얇아서 나무가 자라기는 해도 평지보다 못하다. 적봉의 동쪽에 중조변계를 나타내는 21호국계비가 있다. 21호국계비는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며 똑같은 국계비 세개가 서로 마주보며 서있는데 이것은 1962년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협상하여 설정한 국경선이다.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해 세워진 여러 국계비는 21호국계비에 이르러 끝이 난다. 이곳부터는 두만강이 흐르기에 두만강은 천연국경선으로 되고있다. 다시 돌아와서 21호국계비를 보면 한쪽은 중국이라 쓰고 다른 한쪽은 조선이라고 썼다지만 주위를 살펴보아도 고지개판이 아니면 관목숲뿐인 무인지경이다. 21호국계비 가까이에 두만강발원지가 있다. 남쪽발원지는 조선의 무두봉에서 흘러내리는 홍토수이고 북쪽발원지는 장백산동쪽에 있는 무수림하이다. 이곳 발원지라야 고지개판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실개천이 조선쪽에서 흐르는 홍토수와 합치면서 점차 사품치는 큰강으로 되여 동쪽과 동북쪽으로 흐르며 화룡시와 룡정시를 거치다가 도문시 량수진부근에서 동남쪽으로 흐름길을 바꾼다. 그러다가 훈춘시 경신진 방천부근에 이르러 로씨야와 조선 두 나라 사이를 누비며 일본해(조선서는 동해로 부름.)로 들어간다. 두만강발원지는 이렇듯 여러가지 함의를 가지고 인기를 모으는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발원지주위와 길 량옆은 하늘을 치솟는 원시림이여서 원시림관광도 해볼만하다. 두만강발원지에서 장백산산문으로 통한 큰길을 따라 한참 가노라면 오른쪽 원시림가에 물안개 피여오르는 거울같이 맑은 늪이 있다. 이 늪의 평균깊이는 1메터정도이고 둘레는 1킬로메터 남짓한 원지(园池)인데 호수면은 해발이 1 270메터인 원형으로서 늪의 폭은 약 180메터에 이른다. 만족들은 이 늪을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 혹은 부러후리(만족어)라고 부르면서 백두산동쪽의 첫늪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청나라시조 아이신죠로 부쿠리 옹순이 여기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옹순은 아릿다운 선녀 푸로룬이 이 늪에서 미역을 감다가 주과를 먹고 낳은 소생이라고 한다. 그는 태여난후 인차 말할줄 알고 체격이 특이했는데 커서는 왕이 되고 만주부락을 일떠세웠다고 전한다. 하여 청조의 력대황제들은 이 늪을 줄곧 성지로 받들어왔단다. 우리 조선족들은 이 늪을 옥녀늪이라고 친절히 부른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전설이 여러가지로 전해지는데 그중의 한 줄거리는 대개 이러하다. 항쟁의 봉화가 타오르던 그 시기에 옥녀라고 하는 조선족소녀가 포수인 아버지와 함께 늪가에 초가삼간 짓고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해 장백산밀림속에 기여든 일제토벌대와의 싸움에서 우리 항일부대에 부상병이 여럿이 나타나게 되고 옥녀부녀가 그들을 살뜰히 간호하게 되였다. 그후 일제토벌대가 달려든데서 아버지는 부상병들을 빼돌리고 옥녀가 붙잡히게 되였는데 그는 한사코 모르쇠를 대며 적들을 늪 저쪽의 절벽가로 끌고갔다가 적지휘관을 떠밀면서 절벽에 몸을 날리였다. 그후 늪의 물은 옥녀의 고결하고 순박한 마음을 비껴담아서인지 하나의 큰 거울과도 같이 보다 맑고 푸르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량하고 용감한 이 조선족소녀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백산밀림속이 이 늪을 옥녀늪이라고 불렀다. 허나 유감스러운것은 오늘의 늪가에 《천녀욕궁지》라는 비석은 있어도 옥녀늪이라는 유래비가 없는것이다. 한어문으로는 《원지》라고 해도 조선어로는 《옥녀늪》이라고 해야겠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울퉁불퉁한 길이 구불구불 뻗어있던 이곳에 오늘은 산뜻한 변경도로가 화룡시 숭선진에서부터 장백산산문까지 곧추 뻗었다. 지난해까지 새로 닦은 큰길은 이제 곧 포장도로로 바뀐다고 하는데 숭선에서 장백산산문까지의 거리는 불과 91킬로메터, 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은 장백산 환행로(环行路) 관광코스에 놓이였다. 숭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명승지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는 오늘 두만강발원지까지도 두어시간이면 다녀오겠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2    리광인 프로필 댓글:  조회:2539  추천:87  2005-06-01
필명: 리함 , 두만강 ⊙ 1954년 화룡 출생 ⊙ 198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본과 졸업 ⊙ 연변일보사, 연변력사연구소 근무 ⊙ 현재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력사연구소 소장 ☞ e-mail: guangren33@hanmail.net
1    <리함역사탐색> 코너 태스트 입니다. 댓글:  조회:3486  추천:86  2005-04-28
코너 태스트 입니다.
‹처음  이전 24 25 26 27 28 2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