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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남방기행(5)--옛 월나라 도읍을 돌아보다 댓글:  조회:4302  추천:86  2006-12-12
옛 월나라 도읍을 돌아보다 1 로신의 고향으로 이름난 절강성 소흥시 성내엔 부산으로 불리우며 풍경이 수려한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도읍지가 있다. 즙산, 탑산과 더불어 시구역에 우뚝 솟은 부산은 력사문화, 인문경관, 산수풍경을 한품에 안은 명산이여서 부산을 처음 찾는 월수외국어대학 조선족교원들은 해빛이 넘치는 속에 옛 월나라 도읍지를 돌아보며 유쾌한 산행답사의 하루를 보내였다. 오늘은 2006년도 막가는 12월의 두번째날, 오전 8시에 월수외국어대학의 남대문에 이 대학에 근무하는 조선족교수들인 김덕모, 김성숙, 서재학, 정동규, 윤경옥, 박동섭 등과 새로 출전하는 20대 젊은 녀교원 조순화, 장국화, 김은복 등 10명이 모여들었다. 12월에 잡아들어도 여기 남방에서는 어여쁨을 뽐내는 교정의 가을국화들은 첫 결성산행을 떠나는 이들을 반기기라도 하듯 여적 떨기떨기 피여있었다. 월수 외국어대학 남대문 부근의 회계산풍경구에서 뻐스를 잡아타니 평소의 2선뻐스가 아닌 35선 뻐스다. 도심의 길가 한 거리에는 북방의 사시나무 방불케 하는 가로수들에서 누우런 잎들이 떨어지며 소스란 가을임을 알리지만 장국화 녀교원이 아버지 따른 어린애한테 자리를 내주어 가슴들이 뜨겁다. 어언속에 도심의 도시광장 뻐스정류소에 내리니 산행지ㅡ월나라 옛 도읍지가 눈앞이다. 별행한 조순화 녀교원을 기다려 길을 떠나니 오른쪽가에 월나라 옛 도읍 성벽이 펼쳐져 인상적이다. 력사속 월나라에 들어선듯 기분은 첫시작부터 상쾌하기만 하다. 2 부산은 일찍 춘추전국시기 월나라의 수도로서 기원전 490년에 월왕 구천의 령에 의해 대신 범려가 이곳에 나라의 도읍을 일떠세운것으로 전해진다. 완만히 남으로 뻗어내린 산세가 누워있는 룡같다 하여 와룡산, 월나라 대부 문종의 묘소가 있다하여 종산 또는 중산 , 청나라 강희년간에 성조 현엽이 거친 고장이라 하여 흥룡산으로 불리우던 력사의 고장ㅡ부산은 오늘날 경치가 삐여나 해발고 74.24메터 가진 주봉, 그 주봉우에 일어선 고월 제1루ㅡ비익루에 오르면 소흥시내 정경이 한눈에 안겨든다. 남으로 북으로 옛모습 간직한 소흥거리 구내를 지나 처음 이른 곳은 월나라 옛 월왕대와 월왕전이 자리잡은 남대문구역이다. 남대문 오른쪽 대문으로 들어서면 고색찬연한 월나라 왕궁ㅡ월왕대가 선찬 시야에 잡힌다. 《월왕대라, 월나라의 왕궁이네!》 산행일행은 저도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그럴만치 월나라의 옛 상징인 월왕대는 루루 2000여년 세월의 비바람속에서 수차 지어졌다간 수차 사라지기를 거듭하다가 1981년에 수건되여 우리 일행의 탄성을 자아낸다. 우리는 단걸음에 월왕대 웃층에 올라 월나라 력사진렬관을 돌아보며 한식경이나 월나라 그 시절속에 빠져보았다. 월왕대를 내리니 처음 발목이 잡히는곳은 정면길 왼쪽가에 름름히 서고있는 옛 측백나무 한그루라 할가. 세월속 마른 고목이라지만 나무정수리에 자라난 마른가지가 날아예는 룡모양 같다하여 룡두고백으로 불리우는 900년 수령의 마른 측백나무, 북송말년의 금나라 침략시 남쪽으로의 도주시절에 북송의 고종 조구가 친히 심었다는 측백나무다. 이 고목을 두고 서재학 선생은 처음 보는 신기한 나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윤경옥 선생 부부 또한 찬탄을 금치 못한다. 옛 나무 화석, 청백천 구내를 지나면 월왕대와 북으로 대칭되여 있는 월왕전이 반겨준다. 월왕전 웃층에 그려진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 그림, 구천의 좌우 팔이기도 했던 대신 범려, 문종이 그린 사진이 또 발목을 잡는다. 월나라 구천에 대해 해박한 편인 정동규 선생이 범려와 문종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김성숙, 조순화, 장국화 등 선생들은 오나라 격파에서 미인계로 나섰던 고대미인 서시에 대해 운운. 3 부산의 상징은 비익루가 아닌가 싶다. 해발 74메터의 주봉에 21메터의 높이로 다시 하늘을 떠이였으니 고월제1루라 불리울만도 했다. 월나라 대신 범려가 군사망원용으로 지은 루각, 송조이래 수건 9차에 이름바꾸기 4차를 거듭하며 1997년에 비익루로 재건된 고월제1루. 월왕대 구내를 벗어나 북쪽 산기슭따라 움직이면 렬사기념비가 정면으로 안기여 든다. 다시 오른쪽으로 에돌아 계단을 이룬 산간 소로길을 이어가니 비익루가 일어선 주봉 구내다. 서재학, 정동규, 박동섭 등이 앞서갈 때 김덕모선생이 뒤떨어진 김성숙, 조순화, 장국화, 김은복 등과 동행하는데 선후로 비익루 정상부에 오른 일행은 발아래 펼쳐진 소흥시 전경에 흠뻑 취해버린다. 비익루 아래 커다란 종 또한 50대선생들은 동년에로 이끌어간다. 서재학, 김성숙 선생이 소원성취로, 즐거움속에 종을 쳐울릴 때 윤경옥 선생 부부가 뒤를 이어 종을 울린다. 그 모습들이 흥나기만 하다. 비익루동북쪽 산기슭에 문종 묘소가 있어 발길을 돌려보았다. 월나라 대부이고 정치가인 문종이고 오나라 격파와 나라 재건에 혁혁한 공적을 쌓은 문종이였으나 오나라를 제낀후 패왕의 꿈을 꾸는 구천과 달리 조용히 월나라 떠나는 대신 범려의 말 흘려보내고 계속 월나라에 남았다가 구천이 내주는 검에 의해 자결의 길을 걷고만 비운의 인물, 그런 문종이 비익루 아래 기슭에 잠들어 있어 초라한 묘소가 구차스럽기만 하다. 1981년에 수건되고 묘소앞에 비정까지 세워졌다해도 구차스러움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4 오늘 산행이 바라는 바는 산악회 결성산행이다. 부산의 풍우정에서 절강 연우산악회의 정식결성을 선고하고 산을 내리는데 때는 오전 11시, 마침 녀교원 김은복씨의 23돐 생일도 오늘이다. (김덕모 선생과 더불어 내내 디지털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던 김은복씨 생일을 뜻깊게 세여 주어야지!) 일행은 한식경의 도보끝에 탑산 부근의 도문양구이점에 모여 김은복씨 생일축하오찬 겸 절강 연우산악회 결성축하오찬을 가지였다. 양뀀을 굽어내는 조순화 녀교원의 솜씨 일품이라 칭찬이 오가는데 스물세돐 생일 머나먼 남방 소흥에서, 연우산악회 결성일에 쇠는 김은복씨는 감개가 무량하다. 여기에 장국화 녀교원이 가세하여 흥미를 돋구는 20대 녀교원들의 모습이 일행의 감회를 자아낸다. 생기발랄한 그녀들이 생기를 부어준다. 오찬후 한때는 부근의 탑산산행이다. 도심속에 외홀로 솟아오른 탑산은 해발고가 31.3메터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산정상부에 월나라 유적으로 알려지는 응천탑이 있어 우리의 발길을 끌기엔 족하다. 응천탑 시초는 동진시기로 거스른다지만 당나라 874년에 재건되여 응천탑으로 불리운다. 명나라 가정년간에 다시 지어졌다가 청나라 광서 33년(1907년)에 재앙을 입고 사라지기에 이른다. 1985년에 새로 재건되니 탑은 6변형의 7층, 7층루각에 오르면 부산 비익루와 마찬가지로 소흥시를 한눈에 굽어볼수있어 좋기만 하다. 이미 수차 탑산을 다녀온 필자는 루각에 오르지 않았다. 벌써 4~5층에 오르다말고 김성숙선생이 나를 보고 손을 젓는다. 그 모습이 디지털사진기속에 고스란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탑의 정상부에서 김덕모, 윤경옥, 박동섭, 김은복, 장국화, 서재학 등 선생들이 또 환성을 지른다. 그 모습도 디지털사진기를 피해가지 못한다. 《오늘 산악회결성이 성수납니다!》 《등산로정을 잘 잡았습니다!》 산행일행 모두가 기쁨에 도취된다. 토요산행결성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만 간다.
104    남방기행(4)ㅡ소흥 향로봉의 첫 산행자취 댓글:  조회:3754  추천:96  2006-12-02
< src=http://www.ckywf.com/ybywforum/up/tour/2006_11_26_19_35_41_S6004089.JPG width=400 height=300>▲로봉선사의 일각과시 향로봉다웠다. 최정상부 향불 피우는 공간지대는 온통 향로들이고 끊임없는 기도객들로하여 그 연기가 자옥하다. 향로봉이라 부를만도 했다. 우스운 일은 이곳 향로봉에서 벌어졌는데 산행일행은 곧바로 폭소속에 빠져들었다. 폭소1: 김성숙선생이 불상앞에서 기도모습을 해보는데 류은종교수가 유머를 터뜨린다ㅡ천지보살님이시여, 저 녀사께 파파늙은 령감쟁이를 주선하시옵소서ㅡ그 소리가 어찌도 우습광스러운지 일행은 선자리에 떠나갈듯 박장대소! 폭소 2: 폭소2의 주인공은 나라는 못난이다. 김성숙 선생 따라 기도랍시고 흉내를 내는데 불교기도가 어망결에 천주교기도로 번져간다ㅡ성신과, 성부와, 성자와 아멘ㅡ그랬더니 류교수님이 “이놈아, 불상앞에서 천주교기도는 웬 기도냐?”, “예?”~ 나 스스로도 우스워죽겠다. 일행은 또 한번 뱅그르르 박장대소다. 말한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향로봉 관광객, 지도객들은 웬 일이냐듯 고개를 기웃기웃 돌려본다. 이날 우린 향로봉에 첫 산행자취를 남겨보았다. 최정상부 향로봉까지 10리안의 길을 세시간이나 소모하여 보았는데 향후 드팀없는 토요산행을 약속한것은 또 하나의 기꺼운 일이라 하겠다.
103    [남방기행](3) 령은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댓글:  조회:3822  추천:99  2006-11-19
령은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리 함기행을 올려 보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리며 내려가지 않는다.글에서 중국불교 4대보살 가운데의 한 보살인 지장보살을 스치고 지나면서 디지털사진기 반짝이는 섬광과 함께 온통 화광을 뿜는듯한 모습의 신비한 사진이 찍히였다고 했더니 연우산악회 상공님은 댓글에서 지장보살 사진을 빨리 올려달라고 한다.마음에 걸리는것이 바로 이거지,그래서 을 쓰게 된다.할진대 중국불교 4대보살중의 한 보살님인 지장보살이란 누구일가,지장보살이 과연 진실력사속 인물인가를 알 필요가 있을것 같다.지장보살은 흘러간 력사속 실제인물로서 이름은 김교각이라고 부른다.옛날 신라국 김씨왕의 가까운 친척이라고도 하고 신라국의 왕자라고도 하는데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으며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다.기원 653년(절강 천대산 국청사 자료에 이렇게 밝힘)인 24살 때 신라에서 홀로 당나라 구화산으로 왔고 그때의 구화산은 원시림 무인지대였다고 력사자료들은 밝힌다.깊은 산속 생활은 지극히 어려워 시초 관음토와 도토리 죽을 끓여 먹으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니 불교에 심취한 신라사람 김교각님의 근질긴 노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깊은 산속 석굴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 그 모습은 산아래 백성들과 지방관리들을 감동시키였다.그런고로 천고의 원시림지대에 절이 지어지고 신도들이 사처에서 모여 들었으매 75년간의 설교속에 그 이름이 국내외에 뜨르르 했다고 한다.그러던 김교각님이 99세에 구화산에서 시적하니 신도들은 한결같이 그를 지장보살이라고 칭하고 구화산을 지장보살도장으로 불렀다.세월의 흐름속에서 안휘 구화산은 절강성의 보타산,사천성의 아미산,산서성의 오대산과 더불어 중국 4대불교성지의 하나로 떠오르고 김교각은 보타산의 관음보살,아미산의 보현보살,오대산의 문수보살과 더불어 중국불교 4대보살중의 한 보살로 떠오르게 되였다.력사속으로 헤쳐본 신라인 지장보살님의 진실한 개괄이야기다.이런 지장보살님이 이미 답사한 소흥 향로봉 아래 불교사원 로봉선사에서 받들리고 절강성내 또 하나의 불교성지 천대산 국청사에 모셔졌으니 항주 4대절의 하나로 근 2000년의 유구한 력사가진 불교성지 서호가 령은사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볼수 없을가,이런 마음에서 나는 령은사에서 곧 하루문을 닫는다는데도 불구하고 문표를 사고 령은사로 들어갔다.나는 깜짝 놀랐다. 루루 근 2000년의 력사 가진 천년옛절ㅡ령은사는 그 규모와 건물들이 방대하여 어디서부터 답사하였으면 좋을지 몰랐다. 먼저 웅위하기로 이름높은 천왕전과 대웅보전을 돌아보고 동서 휘랑을 한바퀴 돌았지만 지장보살의 행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보다 규모가 뜨르르한 대웅보전뒤 락사전 등은 수건중이였기에 돌아볼수가 없었다. (중국 불교 4대보살중의 하나인 지장보살님이 불교성지에 모셔지지 않을수가 있을가?) 마음이 무거운속에서 바쁜걸음을 재촉하는데 령은사의 또 하나의 주체건물중 하나인 “500라한당”이 나의 앞에 나타났다. 유람객들속에서 끼여 무작정 그리로 들어가니 줄줄이 모셔진 500라한들이 제각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주조체로 모셔진 모습들이다. 내가 한창 5백라한당 안을 돌며 5백라한님들을 훑어갈 때 어느 순간엔가 나의 눈은 광채로 빛났다. 바로 나의 앞에 정방형으로 축조된 불교사원이 나타나고 정방형 한면이 절강성의 보타산 관음보살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보타산의 관음보살이면 4대보살을 차례로 모실것이 아닌가!) 흥분의 절정, 나는 정방형 축조 불교사원을 재빠르게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마지막 한면이 구화산이고 지장보살이였다. 때는 이미 불도 켜지 않은 어스무레한 당내였지만 나는 급기야 디지털사진기를 내들었다. 순간 나는 놀라마지않았다. 첫 사진인데 반짝이는 사진의 섬광과 함께 지장보살님은 찰나 온통 붉은빛을 내뿜으며 사진기속에 모셔졌다. 지장보살님과 그 주위가 붉은 빛속에 얼마나 현란하고 찬란하였던지 나는 정신이 활홀할 지경이였다. 신비하다면 신비하겠지만 아마 동으로 주조된 모양인지 지장보살 조각상에 찰나섬광이 비쳐지니 그 섬광 반사가 붉은 색으로 찬연히 빛난 모양이다. 나는 이윽도록 그 동빛찬란한 붉은 화광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다시다시 찍어보았지만 각도가 다른지 첫사진의 붉은 화광속 지장보살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지장보살님이 령험하여 1000여년후에 찾아뵙는 한 겨레에게 반가움의 후광을 넉넉히 발사한 모양이였다. 나에게는 그렇게만 안겨들었으니 그때 받은 그 감동, 그 순간은 이루다 형언할수가 없다. 령은사의 녀지기들이 문을 닫는다고 재촉하기에 그 자리에, 그 감동속에 더 묻혀있지 못하니 아쉬움이라고나 할가. (령은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소흥 회계산속 지장전에 이어 잠깐이나마 뵈였나니 후일 다시 찾아뵈우리다!) 나는 이렇게 속다짐하며 우리 송도님 찾아 령은사를 나섰다. 짧은 시간이지만 령은사답사는 헛되지 않았으니 지장보살님 찾아가는 길은 마냥 마음의 즐거움과 위안의 련속일것 같았다.< src=http://www.ckywf.com/ybywforum/up/tour/2006_11_18_18_51_26_S6001683.JPGwidth=370 height=500 > 지장보살님 조용히 뭔가를 응시하고있다
102    [남방기행] (2)--항주서호가에서 댓글:  조회:3502  추천:75  2006-11-13
【남방기행】(2) 항주서호가에서 북고봉에 올라 항주서호가에는 지난 50년대초, 중반에 모택동주석께서 세번이나 오른적 있다는 명산ㅡ북고봉이 있다. 령은사가 의지하는 유명짜한 산이고 남고봉과 십여리 떨어져 남북으로 대칭된 이 산은 서호 10경의 하나로서 해발고는 그닥 높지 않은 314메터를 이룬다. 서호에 여러번 다니면서도 북고봉에 오르지 않는다는것은 유감이라 송도님께 북고봉산행을 제의했다. 물론 송도님도 유쾌히 받아들여 우린 해발 200메터의 보석산을 내려 북고봉으로 출발했다. 보석산아래 음식점에서 점심을 에때우고 k7항주역~령은사행 뻐스에 앉으니 북고봉이 잠간이다북고봉에는 관광삭도가 운행중이지만 송도님은 쉽게 오르는 삭도는 멋없다며 도보산행을 주장했다. 그래서 굽이굽이 진짜 산행이 펼쳐졌다. 혼줄이 난것은 나라 할가, 한주일사이에 이미 세번이나 산행답사와 시내답사를 벌리여 발 장단지가 뻣뻣해난데서 한층계, 또 한층계 계단길은 고역의 련속이였다. 해발고가 314메터밖에 안되는 북고봉이 어찌도 아득하기만 한지 두다리를 옮겨 놓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20대후반의 송도님의 날렵하기만 하다. 두어번 쉬면서 그를 따라 북고봉정상에 오르니 온몸이 땀창봉이다. 하건 말건 나는 정상의 북쪽가에 세워진 관망대 모택동시비정으로 달아갔다. 시비정 해설에는 모택동주석께서 1953년 12월, 1954년 2월, 1955년 4월 선후 세번이나 북고봉에 올랐다는것과 1955년 4월에 올랐을때 흥이 도도하여《5언률시ㅡ산을 보다》를 지었다는 내용이 소개되여 있었다. 해당자료에는 또 절강텔레비죤방송국에서 모택동탄신 106돐을 기념하면서 1999년 12월 26일에 수속절차를 밟고 모택동시비정을 세웠다는것을 알리였다. 알고보면 북고봉정상에는 절강텔레비발사탑이 있고 그들이 풍경명승지에 모택동시비정을 세우는것이 옳았다. 모택동뿐아니라 력대의 위인들인 소동파나 청나라 건륭제 그리고 주덕원수 등께서도 북고봉에 올랐다면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이고 《신인구론》의 저자인 백세로인 마인초는 항주에 머무른 10년간에 매주 두번씩이나 북고봉에 올랐다니 북고봉은 과시 홀홀히 스쳐보낼 명산이 아니라 할수 없다. 우린 북고봉정상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관망대에서 항주시가지와 서호전경을 전망하기도 하고 디지털사진기로 활동사진도 찍기도 했다. 또한 정상부에 자리잡은 청춘세기종과 령승사, 텔레비발사탑 등을 돌아보며 북고봉에 대한 리해를 바로했다. 그속에서 시간은 일분일초 빨리도 흘러만 갔다. 모택동주석께서 일찍 오르신적 있는 북고봉 명산에 올랐다는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했다. 송도님의 얘기 또한 흥미롭기만 하다. 《항주에 살면서, 등산을 즐기면서 서호를 안다는 축인데 북고봉에는 정말이지 처음입니다. 밑에서 지나치며 보기와 오르기가 판이하게 다르다는것을 피부로 절감하였습니다.》 비래봉 그리고 령은사 내가 서호가의 비래봉에 첫발을 들여놓은것은 1983년이다. 그로부터 23년후에, 그것도 연우산악회의 이름으로 송도님과 함께 비래봉답사에 나선다는것이 꿈만 같다. 비래봉과 령은사는 북고봉산아래에 위치하여 우리 산행답사길은 자연히 비래봉~령은사로 이어졌다. 비래봉은 산홈을 사이두고 령은사와 마주하고 있는데 해발고가 167메터에 지나지 않지만 골안물을 따라 내리 오른쪽 석회암들과 동굴들에 338점 라한보살과 신불금강들이 살아있듯 조각되여 있어 《동남제일산》으로 불리운다. 1000여년의 력사 가진 이런 라한보살과 신불금강들은 길이 800메터의 비래봉산기슭에 조각되여 있어 우린 두 디지털사진기로 찍고 또 찍었는데 그속에 도취되다보니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우리의 흥취를 자아낸것은 비래봉중간쯤 기슭에 모셔진 여래불조각상이였다. 송도님은 여래불조각상은 비래봉의 상징이고 중심조각상이라면서 나를 그리로 안내했다. 웃으며 돌에 비스듬히 기댄 여래불의 모슴은 인간세상에 광림한 산 인간으로 비껴온다. 여유로움과 인자함이 극치라고나 할가.그옆에는 숱한 라한들이 옹위한 조각예술이여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사람들이 그칠줄 모른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다가 손자욱으로 매끌매끌해진 여래불조각상 아래 바위들을 다잡고 펑퍼짐한 바위돌너머로 올라섰다. 바위돌 뒤로 상반신과 머리를 내드니 그 순간을 놓칠세라 송도님이 찰칵 사진한장을 찍는다. 이윽고 송도님도 올라와서 우린 잊지못할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는다. 송도님이 유람했다기에 나 홀로 30원짜리 문표를 사고 비래봉 맞은켠 령은사를 답사했다. 오후문을 닫을 때여서 말 타고 꽃보기로 거대하고 웅장한 불교사원을 돌아볼수밖에 없었지만 령은사를 이룬 천왕전, 대웅보전, 동서회랑과 서상당 그리고 오백라한당은 잊을수 없는 인상을 남기였다. 북고봉아래 자리잡은 령은사는 동진 함화 원년인 기원 326년에 세워져 1680년의 기나긴 력사를 기록하고있다. 내가 기어이 령은사를 답사하려 함은 령은사의 어느 위치에 행여나 우리 민족의 무언가 깃들어있지 않나에서였다. 중국불교의 4대보살가운데 하나가 구화산불교창신자이고 신라사람인 지장보살ㅡ김교각법사님이 아니였던가! 과연 나는 웅장한 오백라한당에서 지장보살ㅡ김교각법사님 불상을 찾아냈다. 그때의 심정은 대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기분이라고 할가, 지장보살 불상은 오백라한당 중심부에 위치한, 중국불교 4대보살중에 모셔져있었다. 여기 중심부는 정방형으로 축조된 불교사원모양이고 네면에 각기 절강성의 보타산, 사천성의 아미산, 산서성의 오대산, 안휘성의 구화산 등 중국4대불교 성지와 불교성지 보살림 불상들이 모셔졌는데 지장보살님은 그가운데의 한 불상으로 천하를 응시하고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것은 그러한 모습의 지장보살님이다. 첫 사진으로 불상ㅡ지장보살님을 사진 찍었는데 어스끄레한 속에서도 반짝이는 섬광과 함께 온통 화광을 뿜는듯한 모습의 사진이 찍히여졌다. 나로서도 놀라마지않았다. 유독 지장보살 불상사진만이 사방으로 붉은 화광을 뿜으면서 그대로 찍히였으니 말이다. 무언가 겨레의 인연이 닿은 모양이다. 시간이 그 이상 더 허락하지 않아, 문을 닫는다기에 나와야 했지만 붉은 섬광속에 모셔진 지장보살님 사진이 신비하기만 하다. 밖에서는 송도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도님과 함께 항주역을 오가다가 헤여진것은 저녁 7시직후, 그러니 장장 9시간을 우린 산행답사길에서 보내게 되였다.
101    [남방기행](1) --항주서호가에서 댓글:  조회:3427  추천:92  2006-11-13
【남방기행】(1) 항주서호가에서 뜨거운 상봉 간밤에 자정을 넘도록 이저리 설치다가 아침이라 푸시시 일어나니 시침은 아침7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나는 와뜰 놀랐다.항주에서 기다릴 송도님이 걱정이다.급기야 복새판을 피우며 항주행 급행뻐스까지 오르니 8시 40분,항주 뻐스동역 도착은 오전 10시 미만이다. 이제나 저제나 대기중이던 송도님이 뜨거이 맞아준다.벌써 얼마만이던가,헤여진지 고작 두어달 푼히 밖에 안되는데 2년 세월은 쭈욱 흐른것 같다.우린 뜨거이 포옹하고 서호행 k55 환행뻐스에 올랐다.연우님들과의 그리운 이야기,산행이야기 그칠줄 모른다. 백거이를 만나보다 당나라 백거이를 만나 보았다면 웬일이냐듯 의아해 할 이들도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이다.환행뻐스에서 내리니 서호 동쪽가 호빈로인데 라고 새긴 커다란 돌비석이 우릴 반겨준다.이어 희넓은 서호가 눈뿌리 모자라게 펼쳐진다. 알고보면 항주 서호는 듯이 해내외에 뜨르르한 국가급 풍경명승구로서 호수따라 10여개 공원명승구로 이루어지고 풍경명승이 60여곳으로 헤아려진다.전체 면적이 60여평방킬로메터라고 할때 호수 수역면적만도 6.7평방킬로메터에 이른다. 서호 북쪽가 음악분수,지원군조각상을 지나 발목을 잡힌곳은 흘러간 세월속 일대위인 백거이를 만나본 시각이다.서호가에는 백성들이 백거이와 석별하는 동조각상 두어조가 일어섰는데 그 진지한 모습이 그리도 감동적이다. 불멸의 당나라 대시인 백거이는 시백 리백에 못지않은 걸출한 인물로서 기원 822년 만 50살에 항주지사로 3년간 뛰였다.그 과정에 백성들 신망 한몸에 안으며 업적을 쌓은 모양인데 육지와 호수안의 고산을 이어주는 백제를 수축하여 그 공적이 오늘에도 여전하다. 기원 824년 5월에 조정의 조서를 받고 락양으로 소환되는데 그를 떠나 보내는 백성들과 수레 등이 길에 넘쳐나는 장관이 펼쳐졌단다.서호가의 동조각상은 바로 그 석별사의 재현 모습인데 우린 이윽토록 발걸음을 움직일줄 몰랐다.항주 서호가에서 1000여년 전의 백거이 대시인을 만나보는 기분 또한 감미롭기만 하다. 보석산과 보숙탑 송도님은 오늘의 산행지를 보석산으로 잡아 보잔다.호적지가 항주이고 항주 3년경력자인 송도님은 서호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은터에 나는 무조건 그의 뜻을 따랐다. 백제를 통해 호수가 고산과 이어지는 단교,즉 단교잔설을 지나니 오늘의 첫 산행지-보석산이다.보석산 남쪽기슭의 대나무숲이 인상적이라면 산중턱 절벽에 내리 새긴 보석산 한자 세글자가 또한 인상적이다. 울울창창한 숲속 올리막 층계를 지나 보석산 정상에 오르니 가슴이 활 틔여온다.서호의 북고봉쪽에서부터 뻗어내린 산맥이 서호와 항주시가 사이를 누비며 동진했는데 그 사이에 외로운 섬마냥 두둥실 떠오른것이 보석산이다.남송시기에는 거석산으로 불리웠다는 보석산은 어딜보나 거대한 옹근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른다. 보석산 동쪽 변두리에는 소소리 높이 솟은 보숙탑이 손저어 부른다.역시 송나라 시기로 거스르는 보숙탑은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으며 원,명,청 시기에 수건을 거치는데 그 높이는 무려 45.3메터에 이른다.이런 보숙탑이 보석산에 풍치를 더해주는데 걸음걸음 보석산 옹근 바위산들 우에서 옹근 서호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 좋기만 하다. 송도님의 얘기에 의하면 옹근 서호를 가장 가까이에서,가장 인상깊게 볼수 있는곳은 바로 여기 보석산이라고 한다.과연 틀림이 없다.호수면만 해도 6.7평방킬로메터를 이룬다는 옹근 서호가 바로 발아래에 펼쳐진다.그런데도 관광가이드들은 저들의 사리에 잡혀 지나치며 보석산을 외면한다니 그 소행들이 허구프기만 하다.서호를 한눈에 굽어보는 기기묘묘한 각가지 형태의 바위산들이 그런 빗나간 소행들을 단죄하는상 싶다.
100    【수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댓글:  조회:4916  추천:86  2006-11-07
무궁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리 함 무궁화는 온대지방에서 7~10월의 약 100일간 끊임없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나무라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꽃나무이고 화분에서나 볼수있는 락엽활엽관목이기에 무궁화에 대한 직감적인 사랑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무궁화라는 이 아름다운 꽃나무가 성큼 다가섰으니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기기묘묘하기만 하다. 지난 10월 13일 남방에서 대학교수를 맡게 된 나는 후배 어린 동료들인 연변대 조문학부 석사, 학사 출신 장국화씨, 김은복씨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의 극치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찾았다는 항주 서호를 유람하게 되였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더니 과연 그른데 없었다. 일대 문인 소동파가 이곳 절도사 시절 서호의 뚝을 막아 서호를 만들었다는 곳, 중국 최고의 차는 단연 서호가의 룡정차를 꼽는다는 곳, 룡정차를 위해 청나라 강희제가 수나라 수양제가 팠다는 대운하를 항주까지 련결했다는 곳, 이 나라 고대 4대미인으로 받들리는 월나라 서시가 놀았다는 곳, 당나라 때 대시인 이태백이 술을 따랐다는 곳ㅡ서호, 서호는 어딜보나 아름다움의 모음터여서 우린 서호에 발을 들여놓는 첫시작부터 들먹이는 심정을 어찌할수 없었다 우리의 첫 발목을 잡은것은 넓다란 잎을 가진 한무더기 활엽관목나무에 화사하게 피어난 주먹크기의 연분홍꽃이였다. 이자 꽃봉오리가 맺혀지기 시작하고 활짝 피어난 꽃송이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꽃나무가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꽃나무와 꽃송이를 디지털사진기에 담아두는데 김은복후배가 기념사진을 남기겠단다. 그래서 잊지못할 기념사진이 찍히여졌는데 우린 이 꽃나무가 여기 남방의 무궁화나무라는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러던 10월 20일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연변팀 등산대원들이 소흥의 불교명승지ㅡ향로봉에 다녀오는데 꽃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있는 정현자선배가 나를 툭 치며 향로봉기슭 강가에 떨기떨기 피어난 꽃나무를 가리키며 저 꽃나무가 바로 무궁화나무라고 한다. “예?!” 잘못듣지 않았나 제 귀를 의심했지만 눈앞의 꽃나무는 에누리없는 무궁화나무가 옳단다. 그럼 항주 서호가에서 본 꽃나무가 무궁화나무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첫 발목을 잡고 놓질 않았구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더니 생각지도 못한 무궁화나무를 남방 항주와 소흥에서 대하게 될 줄이야!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향로봉기슭 강가의 무궁화나무를 감상하며 사진찍기에 여념없었다. 일행도 다가와 기념사진을 남긴다. 과시 무궁화는 꽃중의 꽃이라더니 하나도 그른데가 없다. 해당자료를 보면 무궁화는 100일간이나 피여나는 꽃나무이고 키가 2~4메터에 이른다. 눈앞의 무궁화도 키가 보통 3~4메터 정도에 이르는데 그루 전체에 털이 거의 없고 한뿌리에서 엄지손가락 정도의 매끈한 가지가 7~80가지나 자라나며 가지마다 하많은 무궁화꽃을 토해낸다. 그에 못지않게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아직까지 무궁화 자생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5종에 달하는 무궁화속 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나라꽃ㅡ국화로 받들리는 무궁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돌이켜보면 조선반도(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궁화를 널리 심은것으로 알려진다. 옛문헌에 의한 가장 오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经)”에 나타나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 원문을 접하지 않았으나 이 산해경 제9권 “해외동경(海外东经)”에는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고 적혀있고 중국의 “고금주(古今注)”에도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다” 라고 씌어있다나. 이런 력사기록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무궁화를 심어온 력사가 수천년으로 거스른다는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신라 그 옛시절부터 한반도를 무궁화나라라고 불렀다고 하니 오늘의 한국에서 무궁화를 나라꽃ㅡ국화로 하는데는 력사적 제 원인이 있는것이다 그래서일가, 항주나 소흥에서 대하는 무궁화가 전에없이 가슴에 와닿았다. 10월 20 바로 그날, 나는 일행이 모두 귀가한뒤 공원으로 되여있는 향로봉기슭 강가를 천천히 거닐면서 약속이라도 한듯 한창 활짝 피어나고있는 무궁화꽃을 디지털사진기로 찍고 또 찍었다. 그래도 무궁화를 향한 직성은 다 풀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는 나에게는 1910년대 훈춘 독립무장단체의 수령이였던 황병길지사가 떠올랐다. 지난 80년대 초에 훈춘에 가서 황병길기사의 친딸 황정일녀사를 취재할 때였다. 녀사는 연통라자시절의 아버지 황병길과 어머니 김숙정은 집앞내가의 오솔길가에 무궁화나무를 심어놓고 그리도 애지중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는 그 뜻을 다 읽어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의 식민지로 된 조선, 일제놈들이 여지없이 짓밟고있는 무궁화를 훈춘의 한 오지에 심어놓고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의 래일을 무궁화에 기탁했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일본침략자들은 1910년 삼천리강산을 삼켜버린후 우리 조선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여지없이 뽑아버리고 누가 무궁화를 재배하거나 관심을 돌리면 무지곡직 잡아가두지 않았던가…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 황병길부부와 그이들이 심고 가꾸던 무궁화가 다시다시 재다시 떠오른다. 나는 어느덧 무궁화 꽃나무에 홀딱 반해버렸다. 며칠뒤 10월 26일, 나는 향로봉 기슭강가를 산책하며 무궁화꽃나무를 둘러보았다. 며칠전에 비해 꽃들은 많이 지고있었으나 100일쯤이나 줄기차게 피어난다는 무궁화꽃은 아직도 그 어여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궁화꽃나무는 여전히 피여나고있다. 항주, 소흥의 무궁화꽃나무는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는 계단이지만 소흥에서 나무로 200~300리 떨어진 국가급관광명승지ㅡ천태산과 그 일대 무궁화나무는 이자 꽃봉오리가 지면서 바야흐로 피여나려 서두르고 있다. 무궁화, 한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는 여기 남방에서도 활짝 피여나고 있다.
99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진 주문빈렬사 댓글:  조회:4579  추천:96  2006-11-03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진 주문빈렬사1938년 봄에 중국혁명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하는 개란탄광대파업이 당산과 조각장 등지에서 맹렬히 터져올랐다. 조선족항일투쟁사가 전공인 필자는 모택동주석의 높은 긍정과 평가를 받은 이 대파업이 당년 중공당산사업위원회서기로 부임된 조선족 주문빈에 의해 조직, 지도 되였다는것을 알았지만 주문빈의 묘소가 하북성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는것은 몰랐다. 1999년 5월 석가장에 갈 기회를 가지였던 필자는 전국중점렬사기념건축물보호단위인 시안의 화북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도 주문빈의 사후행적을 알고 놀라도 크게 놀랐다.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지다화북렬사릉원의 전칭은 화북군구렬사릉원으로서 하북성소재지인 석가장시 중산서로2단(中山西路 2段) 165번지에 자리잡았다. 렬사릉원의 유래를 보면 당년의 주덕총사령과 관계됨을 알수 있다. 1948년 5월, 진찰기해방구의 진찰기군구가 화북군구로 바뀌였다. 이해 가을 석가장을 시찰하던 주덕총사령은 그때의 《승리공원》을 수건하여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는 렬사릉원으로 할것을 제의하였다. 드디여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준공되여 1954년 8월 9일에 장중한 락성식을 가지였다. 화북군구렬사릉원은 건국초기 우리 나라에서 수건이 빠르고 규모가 크고 조형예술이 독특한 렬사릉원으로 정평이 났다. 부지총면적이 21만평방메터를 헤아리는 화북렬사릉원은 남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릉원내에 들어서면 울울창창한 송백과 고목들이 래빈들을 숙연한 기분속에 잠기게 한다. 렬사릉원 정문가에 다가서면 한자로 된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렬사릉원》이란 금빛글자가 선참 시야에 안겨든다. 정문에 들어서면 만명을 받아들일수 있다는 추모광장이 펼쳐지면서 세개 조로 된 대형 동조각상이 반겨맞는다. 동쪽의 한조는 총가목을 거머쥔 팔로군전사의 조각상이고 서쪽의 한조는 지뢰매설을 경계하는 남녀민병의 조각상일 때 광장중앙의 주체조각상은 전신무장한채 《8.1》군기를 추켜들고 앞을 주시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 3명으로 이루어졌다. 추모광장의 북쪽가에 명비당(銘碑堂)이 자리잡았다. 명비당은 이 렬사릉원의 중심기념건축물로서 300여명 렬사의 영명록(英名錄)이 명비당 중앙에 모셔졌다. 인상적인것은 명비당내 네면벽에 새겨진 류소기, 주덕, 팽덕회, 서향진 등 당과 국가지도자들이 쓴 글자비이다. 이런 수령인물들의 글자비는 혁명렬사들에 대한 고도로 되는 평가를 보여준다. 렬사릉원에 안치된 렬사들의 묘소는 명비당의 뒤쪽가에 모셔졌다. 동서 두개 묘소구로 된 렬사묘군(烈士墓群)은 3개 중심비로 련결된 하나의 정체로서 렬사묘마다 규격이 비슷한 화강암묘를 만들고 묘뒤에 한백옥비(漢白玉碑)를 세워주었다. 필자가 놀란것은 이곳 렬사들의 묘소군체에서였다. 렬사묘소군체에는 317명 렬사들이 울울창창한 송백속에 안치되였는데 제일 앞자리 뚜렷한 위치에 우리 조선족을 빛내이는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의 묘소가 자리잡았다. 생각지도 못한 현실이여서 필자가 받은 감동은 한두마디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알고보니 20세기 30년대 후반의 주문빈은 당년 기동항일근거지를 창설한 중공기동지위서기이고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 주임, 중공기열변(冀熱邊)특위 조직부장이여서 렬사묘군체의 앞자리에 모실만도 했다. 필자는 주문빈렬사에 대한 숭경의 마음으로 신형의 기념건축물인 렬사기념당에 들어섰다. 부지면적이 1400평방메터를 헤아리는 렬사기념당은 렬사릉원의 최북단에 자리잡았는데 기념당내 중간청은 진찰기혁명기념관으로서 풍부한 혁명력사사진들과 혁명문물들이 진렬되여있었다. 필자는 렬사기념당에서 또 한번 놀랐다. 기념당 한쪽벽에는 《주문빈동지》라고 밝힌가운데 렬사의 사진과 략력, 회고담을 적은 글, 당년의 투쟁모습을 반영하는 그림 두장이 설명문과 함께 꾸며져있었다. 수백명을 헤아리는 렬사들속에서 기념당의 벽 한모퉁이씩 차지하면서 도편으로 소개된 렬사는 극히 소수인데 주문빈렬사가 그 소수인속에 들어있었으니 그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필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기념당에 이어 필자는 700여명 선렬들의 골회를 모신 기념당 동쪽의 렬사골회 안치실과 서쪽의 렬사유상실(遺像室), 기념당 앞광장 동서 량측에 일어선 원 홍5군단 군단장 동진당과 홍5군 부총지휘 조박생렬사의 기념비정(紀念碑亭)을 돌아보면서도 내내 주문빈렬사에 대한 생각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화북렬사릉원은 추모광장, 명비당, 렬사묘군체, 렬사기념당, 동진당기념정, 조박생기념정, 국제주의전사들인 베쮼의사의 릉묘, 커디화의사릉묘, 에드화박사기념비, 빠수의사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인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로세대혁명가들이 선후로 릉원을 시찰하고 친필제사를 썼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해마다 화북렬사릉원을 찾는 사람들이 70여만명에 달하고 100여개 국가와 지구에서 온 외빈들이 렬사릉원을 첨앙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족의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도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북경시 통현 첫 당지부북경에서 동으로 약 20킬로메터를 가게 되면 그제날의 사립로하중학교였던 오늘의 통현제1중학교에 이르게 된다. 1927년에 통현에서의 첫 중국공산당지부가 이 학교에 건립되였는데 그 조직자는 조선족 김성호(일명 주문빈)와 그의 형 김영호였다. 김성호는 1908년 9월 23일에 조선 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에서 김기창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반일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교양과 왜놈들에게 피살된 큰형 김승호의 반일사상의 영향을 받아 어린 성호의 가슴속에서는 반일사상이 움텄다. 그 시절의 성호는 1914년 봄에 부모를 따라 북경시 통주(오늘의 통현) 복흥장에 이주하여 1916년에 통현 사립로하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에 사립로하중학교에 들어갔다. 로하중학교는 1867년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인데 1918년에 사립로하중학교로 되였다. 이런 사립중학교에 조선의 열혈청년 40~50명이 선후로 이 학교를 다니였는데 김성호는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김성호의 고중 2학년시절이면 1926년이였다. 때는 국공합작시기여서 기세드높이 일어난 북벌전쟁과 사회주의사상은 금방 만 18살을 잡은 김성호를 지대히 고무하였다. 이해 김성호는 반내의 진보적인 학생들로 통현일대의 첫 《사회주의과학학습소조》를 조직하고 북경시 지하당조직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해 김성호는 또 둘째형 김영호의 영향하에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둘째형과 함께 학교에다 조선인학생들을 골간으로 한 청년단조직을 내왔다. 뒤미처 이 청년단조직의 성원 5명이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통현에서의 첫 중공지부—로하중학교당지부를 내왔다. 김성호가 당지부서기 겸 당소조장을 맡았다. 당지부의 활동은 다섯개 내용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째, 혁명을 배반한 국민당반동파의 죄행을 적발, 폭로.둘째, 당의 혁명적주장을 선전.셋째, 야학을 꾸려 교내로동자들에게 문화지식을 전수하고 혁명의 도리를 선전.넷째, 교내에 음페한 국민당분자를 타격.다섯째, 통주의 남자사범학교와 녀자사범학교의 혁명적학생들을 단합시켜 공동히 투쟁.1927년 4월, 장개석이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자 김성호는 당원들을 이끌고 로동자, 농민들 속에 들어가 야학교를 꾸리고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선전하였으며 국민당반동파의 죄악을 폭로하였다. 김성호를 서기로 하는 통현로하중학교 중심당지부는 이 지방 혁명활동의 중심으로 되였다.개란대파업 지도자1928년 가을, 김성호의 동생 김상호와 장진 등 학생들이 북경대학과 보인대학에 입학하였다. 김성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북경시 지하당기관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면서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에서 공부하고있는 중공당원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1933년에 동북의 료녕성 무순탄광에 파견하여 로동자들속에서 활동을 벌리다가 1936년에 중공당산시위 공위서기(工委书记)로 임명되여 당산으로 갔다.당의 지하활동에 뛰여들면서 언녕 주문빈으로 탈바꿈한 김성호는 개란광산지구의 조각장에 전기기구상점을 꾸리고 이를 음페로 지하사업에 나섰다. 그의 활동과 지도로 당산과 조각장 등지에 당의 비밀 당조직이 세워지고 로동자들속에서의 당의 영향이 날따라 커갔다.개란탄광은 중국내 가장 큰 탄광의 하나로 이름이 났다. 이런 탄광을 거느린 개란광무국은 일본, 영국, 중국의 공동경영으로 되였지만 실제대권을 영국인이 틀어쥐였다. 로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말이 아니였다. 1938년 3월 16일에 주문빈의 직접 발기와 지도하에서. 조각장탄광의 로동자들이 선참 대파업을 단행하였다. 22일에 만여명의 로동자들이 조각장탄광의 사무청사를 포위하며 성세를 일으켰다. 이어 림서탄광과 당가장탄광, 당산탄광, 마가구탄광에서도 파업투쟁에 궐기하였다.상기 5개 탄광의 로동자들은 주문빈과 당산사업위원회의 지도밑에 통일행동으로 나아갔다. 로동자들의 성세호대한 총파업이였다. 탄광측에서는 울며겨자먹기로 로동자대표와의 담판에 나섰는데 영국자본가들은 로동자들이 내놓은 조건에 일일이 응낙하는수밖에 없었다.5월 4일에 드디여 14차례 담판끝에 로자지간 16개 조항의 협약이 맺어졌다. 개란광무국산하 5개 탄광의 동맹총파업은 50일간 지속되다가 로동자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총파업의 승리는 개란 5개 탄광로동자들의 단결전투의 성과로서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인 주문빈의 조직재능과 탁월한 기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조선족 주문빈이 직접 지도한, 중국혁명사에서 유명한 수만명 로동자들이 궐기한 개란대파업은 중공중앙 화북국을 통해 모택동주석께 전해졌다. 모택동주석은 《참 잘 령도했습니다. 로동계급의 각성이 높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기동땅에 피흘리다개란 5개 탄광 동맹총파업후 주문빈은 당의 파견으로 선후로 중공기동지위서기 겸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주임, 중공기열변구특위 조직부장 등 중책을 짊어지고 기동이란 이 광활한 천지에서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벌리였다.1944년 10월 16일, 기열변구특위에서는 하북성 풍원현 장장자(张庄子)에서 해당 감조감식회의를 하다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위군(日伪军)놈들에게 포위되였다. 회의에 참가한 풍윤, 란현, 청안 등 현의 간부들은 주문빈의 지시대로 소부대로 나뉘여 남쪽의 리장자쪽으로 전이하였다. 어느덧 밤 10시경이 되였다. 주문빈과 그가 거느린 대오는 리장자에서 묵다가 이튿날 이른새벽에 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주문빈은 특무원한테 기관간부들은 양가포로 전이하고 제2련은 적의 전진을 차단하고 제1구대와 제4련은 북산에서 적의 측면을 습격할데 대한 명령을 내리고 간부들과 후근일군들을 이끌어 양가포로 향했다.양가포는 리장자이북 3리되는 곳이다. 주문빈과 그의 일행은 양가포에서 재차 우세한 적들과 맞다들었다. 우리 전사들이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릴 때 특위기관은 주문빈의 지휘하에 적의 포위를 헤치며 결사적인 전투를 벌리였다. 한편 주문빈은 리도와 함께 덮쳐드는 적을 쏴눕히며 전사들의 후퇴를 엄호하였다.어느덧 주문빈과 리도는 한개 고지를 차지하고 적 66명을 쏘아죽였다. 찰나 주문빈은 적탄에 머리를 맞고 희생되였다. 그들의 엄호로 특위기관은 적들의 포위에서 무사히 벗어났다.이날은 1944년 10월 17일, 희생될 때 주문빈의 나이는 만 36살, 희생지점은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杨家铺)!주문빈은 희생된후 당조직과 동지들에 의해 풍윤현 양가포 전모산아래 한 소나무곁에 묻히였다.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석가장시 원 승리공원에 준공된후 주문빈렬사의 묘소는 석가장시 화북군구렬사릉원에 모셔졌다.1996년 5월이후 화북렬사릉원에는 웅장한 렬사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릉원내에 또 혁명문물청, 영시청(影视厅)이 새로 일떠서고 명비당(铭碑堂)도 새롭게 수선되였다. 참신한 모습의 화북렬사릉원이 세인들앞에 나타났다. 렬사릉원내의 주문빈기념비는 해방후 광동성 광주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에 이어 중화대지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의 기념비였다.
98    【장정70돐특고】ㅡ장정길에서의 양림과 무정 댓글:  조회:5566  추천:86  2006-10-20
【장정70돐특고】 편자의 말: 올해 10월은 중국로농홍군 장정승리 70돐이 되는 달이다. 당년 세계를 진감한 2만 5천리 장정에 중앙홍군인 양림, 무정 등 십여명 조선족혁명가들이 참가했었는데 양림, 무정은 살아서 섬북땅을 밟은 두 조선인이였다. 위대한 장정승리 70돐을 기념하면서 특고 《장정길에서의 양림과 무정》을 본 코너에 올리는바이다. 겨레들이여, 그젯날의 2만5천리장정에도 우리 겨레가 참가하였다는것을 잊지 마시라! 장정길에서의 양림과 무정 리 함 1934년 10월, 중국로농홍군은 중앙쏘베트구역 서금 등 원래의 근거지를 떠나 세계를 진감한 2만 5천리장정을 시작하였다. 중앙홍군의 양림, 무정 등 10여명 조선족혁명가들도 부대를 따라 장정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혁명의 성지와 근거지의 인민들을 작별하였다. 장정이 시작되자 양림은 중앙군위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간부퇀은 2개 보병영과 1개 특과영(特科營), 1개 상간대(上干队)로 구성되였는데 상간대이외의 간부퇀 학원들은 모두가 부대에서 뽑혀온 련과 패의 간부들이였다. 간부퇀의 주요과업은 중앙기관과 중앙수장들의 경위를 담당하는것이였다. 양림의 어깨에 놓인 짐은 아주 무거웠다. 1935년 4월하순, 대오는 세갈래로 나뉘여 운남으로 진군하였다. 홍군주력부대가 곤명에 박근하자 혼비백산한 국민당반동파는 군대를 곤명에 집중시키는 한편 10여만의 군대를 풀어 홍군부대를 추격하였다. 4월하순의 어느날 저녁 간부퇀은 중앙기관과 함께 운남경내의 한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이튿날도 부대는 계속 마을에 머물러있었다. (곤명을 치게 될가? 금사강을 돌파하게 될가?) 전사들은 저마다 궁금해했다. 놈들의 대부대가 박근하고있다는 소문은 들리는데 부대는 사흗날 오전까지도 출발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전사들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다. 양림은 전사들의 심정이 리해되였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줄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택동동지가 홍군을 령도하시는한 놈들의 추격과 포위에서 꼭 벗어날수 있으리란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중앙수장들이 바삐 보내는걸 보아 중요한 결책이 무르익고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옳았다. 중앙군위에서는 금사강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고 교평도(絞平渡) 나루터를 탈취하여 후속부대의 도하를 엄호할 과업을 간부퇀에 맡기였다. 금사강은 사천과 운남변계의 천험지대를 흐른다. 게다가 홍군이 가야 할 구간은 가파로운 산비탈이여서 까딱 잘못하면 산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 양림은 임무의 간고성과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교평도나루터를 통제하여 부대전체가 금사강을 순조롭게 건너야만 적들의 포위,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수 있고 그래야만 전략적이동의 결정적인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것이다. 그는 진경퇀장, 송임궁정위와 토의하여 간부퇀의 2영을 선견지대로 하고 5련을 전위련(前卫连)으로 하였다. 전위련을 선두로 한 간부퇀이 금사강을 향해 움직이였다. 주야분전끝에 간부퇀은 200여리 길을 다그쳐 금사강가에 이르렀다. 때는 5월 3일 저녁녘이였다. 양림은 정찰병을 파견하여 적정과 나루터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다. 강대안에 세금을 징수하는 리금국(厘金局)과 30~40명의 보안대가 있고 그날아침 정규군 한개 련이 증파되였다는것이 밝혀졌다. 적들은 교평도의 나루배를 몽땅 강대안에 집중시키고 사복한 놈들을 수시로 건너보내여 형편을 탐지하였다. 그런데 그날은 어찌된 영문인지 강을 건너온 놈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아 두척의 배가 그냥 이쪽 뭍에 대여있었다. 양림은 동지들과 함께 연구한 끝에 소수 병력을 두척의 나루배에 태워 대안의 나루터를 신속히 습격, 탈취하기로 하였다. 강행도하가 시작되였다. 전위련의 1패, 2패가 나루배 두척에 갈라앉아 강심으로 나아갔다. 강이 넓고 물살이 세여 작은 배는 무시로 기우뚱거렸지만 우리의 용사들은 하나같이 힘을 내여 저었다. 배가 대안나루터에 닿자 전사들은 날렵하게 돌층계에 뛰여올랐다. 홍군전사들의 모젤권총앞에서 적의 두 보초병은 찍소리도 못했다. 우리 전사들은 총 한방 쏘지 않고 1개 련의 적군과 보안대놈들을 전부 생포하였다. 그들은 나루터를 재빨리 통제하고 나루배 5척을 수색해냈다. 교평도의 나루배는 7척으로 늘어났다. 밤낮 엿새동안의 도하를 거쳐 수만에 달하는 홍군대오가 금사강을 건넜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도 양림 등 간부퇀의 용사들이 열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나루배에 앉아 금사강을 건넜다. 그사이 양림은 강대안의 나루터를 공고히 하고 대부대의 순조로운 도하를 담보하기 위하여 퇀의 지도자들과 함께 부대를 지휘하여 종심에로 진격하였다. 무정은 팽덕회동지가 지휘하는 제3군단을 따라 장정길에 올랐다. 그는 1930년 7월, 홍군이 동정호반의 악주를 점령할 때 벌써 홍군패장으로 소문을 놓았고 장정길에서도 팽덕회동지의 유력한 조수였다. 무정은 부대를 따라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사품치는 금사강, 대도하를 건넜으며 백설이 아아한 설산, 일망무제한 초지를 지나 파서(巴西)지구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홍군총정위이고 홍4방면군의 지도자인 장국도는 각 군단간에 그리고 각 군단과 군사위원회 모택동동지와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제3군단을 자기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각 군단간에 정보를 이어주는 비밀전보부호책을 거두어들이였다. 심지어 제1, 제3 군단과 모택동동지의 통보용비밀전보부호책까지 거두었다. 제3군단에서는 돌발적인 사태에 대처하고저 무전기를 따로 갖추고 무전암호책을 달리 만들었다. 1935년 9월 3일에 이어 장국도는 또 홍군전적총지휘부 정위 진창호, 총지휘 서향전한테 전보를 띄워 남하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날 아침 전적총지휘부에 갔다가 사태의 험악성을 낌새 챈 팽덕회는 장국도에게 야심이 있다는것을 보아냈다. 전적총지휘부 참모장 엽검영은 이 일을 모택동동지에게 보고하였다. 그때 홍군부대의 행동배치를 보면 제1군단이 제일 앞에 서고 제3군단이 우익종대의 제일 뒤에 섰다. 홍4방면군 34군, 30군, 9군과 전적총지휘부는 대오의 중심, 즉 중간에서 행동하였다. 이 행동배치에 따라 모택동과 장문천은 전적총지휘부와 같이 움직이고 주은래와 왕가상이 병으로 제3군단 군단부에 머물렀다. 한데서 장국도가 변한다면 모택동 등 동지들의 안전을 담보할수 없었다. 제3군단은 대오의 뒤켠에 서다보니 홍군대오보다 하루이틀 늦게 아서, 파서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전적총지휘부와의 거리는 15~20리쯤 되였다. 그사이 안절부절 못하던 팽덕회는 숙영지에 이르기 바쁘게 전적총지휘부로 달려갔다. 파서에 4~5일 머무르는 사이에도 매일 찾아갔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제11퇀을 비밀리에 모택동의 주숙지와 가까운 곳에 배치하였다. 어느날 팽덕회는 전적총지휘부로 갔다가 참모장 엽검영한테서 아계지구로 진출한 제1군단이 향도를 찾지 못하여 무척 애를 먹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국도의 음모를 파탄시키고 위기를 제거하자면 아계로 진출한 제1군단에 무전암호책을 보내주어야 했다. 헌데 누구를 파견할것인가? 팽덕회는 선참 자기부하인 조선인 무정을 생각했다. 몇년동안 한부대에서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서 그는 무정의 사람 됨됨이와 혁명에 대한 헌신성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무정에게 무전기와 무전암호책을 맡기면서 아계로 진출한 제1군단을 찾아 꼭 전할것을 부탁하였다. 어디를 보나 망망한 초원이였다. 무정으로서는 아계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길잡이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었다. 있다면 수중의 지남침뿐이였다. 무작정 북으로, 북으로 가야만했다. 그것도 물을 찾아서말이다. 부대가 지난 방향이라면 물구뎅이곁에 밥지은 자리가 있기 마련이였다. 얼마를 걸었는지 어느날 홀연 가마걸었던 자리를 발견했다. 아직도 약간 온기가 있는걸 보아 홍군대오가 멀리 간것 같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솟구쳤다. 려로의 피로도 가신듯 사라졌다. 무정은 끝내 제1군단을 찾아 무전암호책을 넘겨주었다. 천만다행이였다. 이날 마침 제1군단에서는 제3군단에서 띄운 모택동동지의 긴급전보를 받았다. 사연은 이러했다. 팽덕회가 어느날 오전에 전적총지휘부로 가서 서로 북상을 주고받았는데 점심을 먹고 다시가니 진창호의 어조가 판이하게 달랐다. 북상항일은 일언반구도 없고 어느쪽이 어찌어찌 좋다는말 뿐이였다. 장국도한테서 전보가 왔다는 조짐이였다. 팽덕회는 이 일을 즉각 모택동에게 알리였다. 그로부터 두시간도 되지 않아 전적총지휘부 참모장 엽검영이 장국도한테서 남하하라는 전보가 왔다고 비밀리에 보고하였다. 모택동이 행동방침토론을 핑계로 진창호 등을 찾으니 진창호가 과연 장총정위의 전보내용을 털어놓았다. 모택동이 중앙서기처회의를 열어 남하문제를 토론하여야겠는데 주은래, 왕가상이 병으로 제3군단에 머물러있기에 장문천, 박고와 같이 3군단사령부로 가서 그들과 같이 회의를 해야겠다고 말하였다. 평소 모택동 등의 일거일동을 엄밀히 감시하는 진창호건만 이것이 몸을 빼는 탈신지계(脫身之計)라는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모택동동지는 제3군단사령부에 이르렀으며 제1군단에 긴급전보를 띄웠던것이다. 《림표, 섭영진: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다. 1군단은 제자리에서 대기할것.(林、聂: 行动方针有变, 一军团在原地等着。)》 모택동이 발송한 전보문이였다. 무정은 자기가 전한 무전암호책에 의해 전보문이 번역되는것을 보고서야 기쁨을 안고 귀로에 올랐다. 한차례 무시무시한 홍군분렬위기는 이렇게 무정이 전한 하나의 무전암호책에 의해 가시여졌다. 팽덕회는 이렇듯 홍군대오의 운명과 관계되는 더없이 중요한 과업을 조선인 무정한테 맡기였다. 무정은 이 과업을 출중히 완수하였다. 모택동 등 동지들은 제3군단과 함께 계속 북상하였고 드디여 아계에서 제1군단과 회합하였다. 무정은 실로 전반 장정기간에 홍 제3군단전적위원회 서기 팽덕회의 조수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1935년 10월, 홍군제1방면군의 주력부대는 승리적으로 섬북에 이르렀다. 이는 력사적인 승리였다. 양림, 무정동지는 제1방면군을 따라 섬북땅을 밟았다. 그외의 10여명 조선인동지들은 모두 장정길에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97    론문(12)-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 댓글:  조회:4537  추천:75  2006-10-01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 리 함필자의 말: 올해 2006년은 고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으며 필자는 이미의 평론글들에 기초하여 쓴 논문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를 《연변문학》9월호에 실었다. 다 알다싶이 김창걸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선구자이고 개척자이며 우리 향토문학의 정초자로 높이 받들린다. 이런 선생이 용정은진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1926년 14살 어린 나이때부터 벌써 학교학생회에서 꾸리는 벽보—《은진시보》에 수십편의 시와 시조, 잡문을 발표하더니 3학년때인 1928년 1월에 쓴 산문시 《동색》(즉 겨울색)은 혁명시인의 기질이 있다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선생은 문학창작에 헌신하려는 욕망으로 가슴을 불태웠지만 7~8년이란 기나긴 방랑생활을 거치다나니 1936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문학도의 문학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39년 양력설 그때의 《만선일보》에 실린 처녀작 《건설보》를 계기로 선생은 창작의 황금기를 맞아 수십편의 작품을 창작발표하기에 이르렀다.1986년에 연변에서는 김창걸선생문학활동 50돐기념행사를 가지고 10년후의 1996년에 또 김창걸탄생 85돐 대형기념세미나를 가지였다. 올해 김창걸선생문학창작활동 70돐을 맞으며 필자는 연구문집 (2)의 첫편으로 《김창걸선생과 그의 처녀작문제》를 넣으면서 선생의 문학창작활동 70돐을 기념하는바이다.1.서론김창걸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선구자이고 개척자이며 향토문학의 정초자이다. 이를 두고 연변대학 고 정판룡교수는 김창걸선생탄생 85돐에 즈음하여 이렇게 지적하였다.1970년대까지도 김창걸선생은 일찍 1930년대중엽부터 글을 썼던 작가 혹은 소설《암야》의 작자로만 알려진것이 1980년대 중국조선족문학사가 정리되면서 부터는 해방전 조선족소설문학의 대표작가의 하나로 부상되였으며 최근에는 암흑기 조선족문학사의 맥을 잇는 《일제통치하의 재만문학의 대표작가》로, 일반적인 조선문학으로부터 점차 중국특색을 가진 조선족문학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선구자적역할을 한 작가라는데로 의견이 점차 모아지고있다.①그러면서 정판룡교수는 김창걸선생을 우리 문학의 선구자이며 개척자,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의 대표작가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그대로 중국조선족문학계의 기성정론이기도 하여 1996년 김창걸탄생 85돐기념세미나에서 일치한 견해를 보이였다. 그만큼 김창걸선생의 우리 문학사적위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김창걸선생과 그의 작품을 두고 여러가지 부동한 견해들이 존재하는것은 사실로서 가장 관심사로 되는 쟁점의 하나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라고 할수 있다. 이는 연변대학 권철교수의 지적처럼 《아주 정상적인 현상》②으로서 이같은 문제를 풀며 탐구하는것은 중국조선족문학사의 맥락을 옳바르게 파악하는 면에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이에 본문에서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제나름의 견해를 내놓으려 한다. 확실히 우리 문학계에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가지고 같지 않은 두가지 관점이 존재하고있다. 처녀작이란 일반적으로 말해 작가가 간행물에 발표한 첫 작품이란 의미를 띠고있고 또 문단에 들어선 첫 작품이란 뜻도 갖고있다. 다시 말하면 창작활동의 시작이라고도 할수 있다.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는 또 광복전 전반 중국조선족문학, 더우기 소설사의 개척과도 관련되기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면 안된다.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한가지 견해는 1939년 1월에 《신춘문예지》에 발표한 《건설보》가 처녀작이라는 부류이다. 이 견해를 견지하는 이들은 김창걸선생 본인을 망라하여 원 《연변문예》편집부의 강장희선생, 연변대 현룡순교수, 원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림연연구원 그리고 필자 등을 들수 있다.다른 한가지 견해는 1936년에 창작된 미발표작 《무빈골전설》(단편소설)을 처녀작으로 보는 견해로서 우리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있다. 이 견해를 견지하는 대표적 이들은 연변대 권철교수를 중심으로 북경의 박충록교수, 연변대 전국권교수 등이다. 상술한 두가지 설법은 림연선생이 1996년 7월에 김창걸탄생 85돐기념세미나때에 김창걸선생의 학력과 처녀작문제에 관한 의문을 과제로 내놓았고 김창걸의 《절필사》에서 해석의 근거를 찾았다. 림연선생은 또 《건설보》의 류실에 유감을 표시하고《무빈골전설》이 처녀작으로 된 기성사실을 묵인하였지만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를 처녀작으로 할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기성연구를 보면 김창걸의 처녀작은 연구자의 연구시각이 다름에 따라 부동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전자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처녀작의 표준을 신문간행물에 발표되어 독자와 대면한 여부에 따라 그 처녀작표준을 가늠하였지만 후자는 그 시각을 창작조건과 발표조건의 제약성을 강조하는데 두었다. 전자는 거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한 실정이고 후자가 공인되어 기성사실로 굳어진 상황이다. 1996년 7월에 열린 김창걸탄생85돐기념세미나의 개막사에서도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하였고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김창걸은 1936년〈무빈골전설〉을 창작하여서부터 자기의 진정한 창작생애를 시작하였다.》③고 밝히였다. 이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를 두고 필자는 본문에서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는 마땅히 객관사실을 존중하는 토대에서 실사구시하게 역사사실문제를 구명하는 원칙에 따라야 하고 문학사적인 연구에서도 이런 원칙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보면서 필자나름으로의 견해와 주장을 펴보려고 한다.2.처녀작문제를 둘러싼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문제를 두고 먼저 기성사실로 문단을 휩쓰는 후자견해를 보기로 하자.후자견해의 대표자는 권철교수라 할수 있다. 권철교수는 김창걸선생과 그의 문학연구에서 우리 문학의 선구자, 개척자로 끌어올린 위인이지만 처녀작문제에서는 미발표작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주장하고있다. 그는 1986년의 한편의 글《우리 향토문학의 개척자》에서 《작가의 창작생애는 1936년 처녀작 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쓰고있다.④ 이는 권철교수의 일관한 주장으로서 조선족문학계의 기성사실로 굳어지도록 했다. 이에 따라 문학계는 이 주장을 따르게 되는데 장백일 서명으로 된 《김창걸단편소설연구》⑤는 보다 발휘되는 양상을 보이고있다.1936년 처녀작 《무빈골전설》(명동야학교의 교재, 김창걸 50주년기념 기점작)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작가 김창걸의 단편소설은 1936년 용정명동에서의 야학교교재로부터 시작된다. 그점에서 처녀작 《무빈골전설》은 그의 작가생활 50주년 기념의 기점작이 된다.이같이 처녀작 《무빈골전설》주장은 널리 동조되고있는데 북경의 박충록교수는 《해방전 김창걸의 작품세계》에서 《처녀작 (1936년)은 이주초기 빈부의 모순과 계급모순을 보여준 작품》⑥이라고 했고 연변대 전국권교수는 《일제치하 암흑기 간도땅 인간운명의 항쟁등불》에서 김창걸선생은 《처녀작 (명동야학교 교재)을 시작으로 창작생활에 들어갔다.》⑦고 쓰고있다. 이들은 모두 이미 굳어진 기성사실을 그대로 따르고있을뿐이다.상기 실례들은 1936년 미발표작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보는 대표적주장이고 견해들이다. 그럼 전자의 견해로 되는 1939년 《건설보》 주장을 어떠하고 역사의 사실은 또 어떠한가? 1981년, 김창걸교수는 《중국소수민족현대작가략전》에서 《당시 장춘에서 발간된〈만선일보〉에서 양력설이 되면 신춘문예발표장을 벌렸는데 1939년 1월에 나의 단편소설〈건설보〉가 입선되었다.》고 썼다. 1981년, 바로 새해벽두에 《연변문예》편집부의 강장희선생이 작가 김창걸, 시인 리욱 선생 방문기 《로작가 탐방기》를 《연변문예(1981.4)》에 발표하였다. 방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김선생은 1936년부터 창작에 몰두하여 1939년 1월에 마침내 《만선일보》(신춘문예)에 첫작품을 발표하였다. 1982년, 현룡순선생은 《김창걸과 그의 단편소설 〈암야〉》에서 《김창걸은 1939년 신춘문예에 처녀작 〈건설보〉를 발표해서부터 3년사이에 22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현룡순선생은 평론과 론문에서 줄곧 이 관점을 견지하였다. 문학계에서《건설보》를 처녀작으로 보는분은 현선생 한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86년에 이르러 현룡순선생도《현실주의작가 김창걸》이란 글에서 김창걸의 처녀작을 《무빈골전설》로 고치였다. 1981년 7월, 필자가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7차례나 김창걸교수를 직접 취재한적 있고 10여만자에 달하는 취재방문기를 남기였다. 그때는 가치를 많이 가늠 못했지만 지금 보면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때 김창걸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1926년에 은진학교를 다닐 때 작문을 잘 써 벽보〈은진시보〉에 몇십편의 시조와 잡문을 발표하였다. 산문시 〈겨울색〉은 전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선생을 위해 썼는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생님은 〈군에게 혁명시인의 기질이 있으니 앞으로 더 노력하시오.〉란 평어를 달아주었다.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문학창작을 하려는 욕망이 움텄다. 1936년부터 노트에 발표할 가능성이 많지 않은 작품을 적잖게 창작하였으며 1938년까지 견지하였다. 1939년 봄에 이르러 만주조선문문예보에 즉 〈만선일보〉에 〈건설보〉를 발표하게 되었다.》 상술한 자서전과 강장희, 현룡순 선생들의 글과 필자의 취재록을 보면 모두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를 처녀작으로 하고있다. 진정 처녀작은 1939년에 발표한 《건설보》이다. 이는 의심할바없는 사실이다. 원고의 류실을 여러 경로를 거쳐 해결할수도 있을것이다. 왜냐하면 필경 발표작이기에 세상 어디에나 남아있을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이든 처녀작은 특수한 의미를 상징한다. 처녀작은 작자가 문단에 등장함을 의미하므로 리정비적인 뜻을 가지기도 한다. 김창걸선생 역시 그러하다. 그는 자기의 《절필사》에서도《무빈골전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았지만 《건설보》에 많은 필묵을 들이였다. 필자가 탐방할 때 그는 《1936년에 다시 붓을 들었다.》고 강조하였다. 김창걸선생은 최초에 많은 자서전체작품을 썼는데 발표할 가망이 없었지만 드팀없이 문학창작에 집착하여 노트에 적었다. 그때 만주에 조선문 문예판 —《만선일보》하나밖에 없었기에 입선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건설보》는 도시교원이 촌에 가서 계몽교육을 하는 내용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창작의 황금기를 맞아 몇십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3.《무빈골전설》은 1982년도 발표작앞에서 언급하다싶이《무빈골전설》은 작자가 1936년에 창작하였지만 그때는 미발표작이였다. 1982년에 와서 료녕민족출판사에서 《김창걸단편소설집》을 출판할 때에야 해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1936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무빈골전설》은 비록 1936년에 노트에 적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1982년에 소설집을 낼 때 작자가 그때의 창작과정을 회상하여 재창작한 작품이다. 본인의 말을 빈다면 (1) 1982년에 발표한 소설집에서 3분의 1은 간행물에 발표된것이고 (2) 3분의 1은 원고가 류실된 상황에서 그때의 창작을 되살려 회상하며 보충, 창작한것이다. 《무빈골전설》은 두번째상황에 속한다. 그러므로 《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보는것은 억지적인 감이 없지 않다고 본다. 이를 두고 필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이트에 올린 평론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에 대하여》에서 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지적⑧한바 있다.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를 돌이켜보면 이는 불보듯뻔한 일이라는것을 쉽게 가려볼수가 있다. ㄱ.김창걸선생의 경력담김창걸선생의 생전취재에 따르면 선생은 1911년 12월 21일(양력)에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인생의 노를 잡게 되었다. 6살 되던 해 1917년에 부모를 따라 당년의 화룡현 지신사 명동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적절히 말하면 명동에서 3리 되는 고장—장재촌 수남마을이였다. 선생은 겨울철에만 꾸리는 당지의 구학서당에서 이태 겨울 공부하다가 1919년에 6년제 명동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생활난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일년간 구수하 구가지팡에서 지팡살이를 한데서 선생은 횡도하자 구학서당에서 반년간 공부를 하다가 다시 명동에 돌아가서 2학년 공부를 시작하였다. 소학교공부를 마친것은 1926년 3월이였다. 이해 3월에 김창걸선생은 용정에서 중학시험을 보고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은진중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여느 학생들과 더불어 대성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던 이해 1928년 9월에《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망명하여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톡로 갔다. 그때부터 선생의 7년간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돈화땅에서 지하공청에 가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울과 조선 흥남, 원산 등지를 떠돌기도 하였다.1934년 봄에 김창걸선생은 집에 돌아와 명동학교에서 한 10리 떨어진 신동학교에서 5년간 교편을 잡았다. 1940년 봄에는 페결핵진단으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래서 목단강에 가서 북만무역주식회사 사무원으로 뛰다가 1940년 11월에 교하현 황송전에 갔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그럼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는 어떠했을가, 이를 알려면 선생의 중소학교시절을 살펴보는것이 좋을듯싶다.김창걸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일찍 소학교시절부터 글짓기를 꽤나 잘한 모양이다. 1926년 용정은진중학교 1학년시절에는 작문을 잘지어 더욱 소문이 났다.1학년시절의 어느날 하학후 상급생들이 우루루 선생을 에워쌌다. 김학천(그때 이름)이 누군가 보자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작문선생이 김창걸선생이 쓴 작문을 상급생들 반에 가서 범독,소개한데서 상급생들의 인기를 끈것이였다. 한데서 선생은 은진중학교 1학년 첫 학기, 14살 어린나이에 학교학생회에서 꾸리는 《은진시보(时报)》의 벽보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시와 시조 그리고 잡문 수십편을 벽보에 발표하였다. 3학년때인 1928년 1월에는 《동색(冬色)》이란 작문을 썼는데 작문선생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문선생은 선생의 작문에 《혁명적시인의 색채가 농후하다. 힘써 정진하도록 하라.》는 평어를 써주었던것이다.이것이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의 한단락 역사이다. 그뒤 7~8년이란 방랑생활이 시작되면서 글을 쓸 시간적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선생의 말씀을 빈다면《방랑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문학을 할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다.》했으나 방랑생활가운데서도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이 기간 선생은 최서해와 리광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만큼 선생은 이들의 글을 많이 읽었던것이다. 더우기 방랑생활과 창작생활은 말그대로 선생의 문학창작의 밑거름으로 되었다. ㄴ.《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상기 《ㄱ》가 김창걸선생의 경력담이라면 《ㄴ》는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를 밝히게 된다.1928년 9월부터 시작된 7~8년의 오랜 방랑생활끝에 김창걸선생은 명동일대의 신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뭔가 써보겠다는 욕망을 다시 불태우게 되었다. 김창걸선생은 1936년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흥미를 느낀것이 소설이였다. 발표할 가망이 없었지만 내처 노트에 쓰기만 하였다. 그래서 만 이태만에 수십편을 써보았다. 선생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으면 《1938년까지 3년동안 습작을 해본셈》이다.그 시절에 조선사람들에게 만주로 불리운 동북에는 조선신문 문예면이라야 신경(즉 장춘)에서 꾸리는 《만선일보》뿐이였다. 그때 만선일보에서는 해마다 신춘 원단이면 응모활동을 벌리군 하였다. 이에 솔깃한 김창걸선생은 1938년 겨울에 3만여자나 되는 단편소설 《건설보(建设谱)》를 투고해보았는데 이 소설이 기적적으로 만선일보에 발표되었다. 1939년 새해 첫날에 신춘현상문예당선결과가 발표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1942년까지 선생은 만선일보의 문예란에 대표작이라고 불리우는 《암야(暗夜)》와《세상인심(世情)》,《락제(不及格)》, 《청공(晴空)》,《편운(片云)》,《마리아》 등 10여편의 단편소설을 륙속 발표하여 작가로 이름을 떨치였다.하다면 이른바《처녀작》으로 불리운 《무빈골전설》을 언제 발표하였는가, 알고보면 이 단편소설은 미발표작이였다. 그대로 솔직히 여쭈어본다면 습작으로 노트에 적어본 상태였다. 그나마 선생의 양동생이라고 불리운 양군이 습작품을 적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다가 해방때에 분실한데서 찾을길이 없었다. 헌데 어이하여 분실된 습작품─《무빈골전설》이 처녀작으로 되였는가? 이를 알자면 지난세기 80년대초로 돌아가야 할것 같다.1980년 10월에 김창걸선생은 당시의 료녕인민출판사로부터 광복전 소설집을 무을 청탁을 받았다. 연변대학의 권철교수님이 료녕출판사의 박화선생한테 소개하여 이루어졌던것이다. 박화선생은 연변의 동성용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9년에 료녕출판사로 전근된 시인이였다.그 시절 김창걸선생은 시안의 한 초라한 단층집에서 생활하였는데 연변대학치고 제일 추운 집이라고 하면 선생의 집이였다고 한다. 때는 한창 겨울철이라 너무도 추워서 이불을 쓰고 밥상에서 글을 써야 했다. 장장 8개월동안 매일 앓는 몸으로 두세시간씩 써내려갔는데 즐기는 산책도 하지 못하여 말이 아니였다. 선생은 필자의 취재때 정말 4월과 5월은 죽게 보냈다고 실토하였다. 출판사에 원고를 띄운 날은 1981년 5월 31일 오후 2시였다. 이렇게 출판된 소설집이 1982년 출판으로 된 《김창걸단편소설선집》(해방전편)이였다. 《무빈골전설》은 이 소설집에 첫편으로 수록되였는데 작자가《1936년 명동에서》라고 서명한데서 료녕인민출판사에서는 소설집의 후기 작자소개에서 《무빈골전설》을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으로 소개하고말았다.여기서 밝힐것은 이 소설집에 실린 13편의 단편소설들은 발표된 작품과 노트습작품이 산실된데서 거의가 회상으로 당년의 스토리를 되살려 정리하였다는것이다. 한데서 김창걸선생은 소설집의《작품집을 내면서》에서 《다시 새로 창작하는듯한 공력이 들었》다고 솔직히 터놓았다. 19세기 이주개척시기 조선족농민의 피눈물나는 운명을 다룬《무빈골전설》은 습작품인데다가 작품을 적은 노트를 잃어버린데서 회억을 더듬으며 다시 써서 소설집에 올리여야 했다.이것이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다. 사실 1936년에 습작으로 써보았지만 재창작으로 발표된것은 1982년이였다. 선생의 첫 작품으로 불리운 《무빈골전설》이 1936년에 창작되었다 하여 1936년이 김창걸선생의 창작생애의 시작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1986년에 김창걸선생의 문학활동50돐기념행사가 마련되었다.이상에서 무빈골전설의 진실한 발표이야기를 헤아려보았다. 《무빈골전설》이 사실 1936년에 습작으로 써보았지만 재창작으로 발표된것은 1982년이다. 하기에 필자는 《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4.1936년처녀작 형성원인과 무리세상, 더우기 문학에서의 모든 견해와 주장은 제나름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무빈골전설 주장도 례외가 아니다. 이 주장의 원인을 두고 림연선생은 《문학과 예술》 1996년 제5호에 실은 한편의 글에서 이렇게 분석하였다. 첫째,《김창걸단편소설집》을 펴낼 때《무빈골전설》을 첫 소설로 수록하였다. 그 창작년대는 1936년으로 하여《건설보》보다 이르다. 둘째,《건설보》의 원고가 류실하였기에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우리는 부득불《무빈골전설》을 처녀작으로 대할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것은 인위적인 처녀작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처녀작이 아니라고 보지만 김창걸선생 문학활동종사 50돐을 앞두고 몇몇 권위인사들은 《무빈골전설》이 당년 명동일대 농촌야학실교재로 쓰였다 하여 처녀작으로 인정할수 있다고 보았었다. 이는 억지가 아닐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의 처녀작이라면 지상발표가 아닌 등사본도 처녀작이요, 타자본도 처녀작이 될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김창걸선생이 은진중학교시절 벽보란에 발표했다는 글들이나 3학년때인 1928년 1월의 《동색》이란 작문—산문시도 처녀작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가. 더우기《동색》은 필경 당시 독자와 대면하여 독자들의 공명을 자아냈고 전문가의 평어가 있을뿐만아니라 일정한 범위에서 센세이숀을 일으킨것만은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를 두고 김창걸선생은 자기의 《절필사》에서 이렇게 쓰기까지 했다.산문시《동색》은 혁명적색채를 띠었다고 평가되였는데 이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금은보화로 생각하였다.허나 1936년도 미발표작 습작품《무빈골전설》이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으로 될수 없듯이 은진중학교시절 벽보란의 글들이나《동색》산문시도 처녀작으로 될수가 없다. 원인은 단 하나, 공개출판을 통한 지상의 정식발표가 아니기때문이다.5.결론본문에서 필자는 김창걸선생의 《처녀작》—《무빈골전설》을 둘러싸고 선생의 창작생애를 돌이켜보면서 서로 같지 않은 두가지 견해, 무빈골전설은 1982년도 발표작이라는것, 1936년 처녀작 형성원인과 무리 등을 서술하여보았다. 무조건결론을 내려보라면 필자의 결론은 역시 전자의 견해대로이다.《무빈골전설》은 김창걸선생의 처녀작이 아니고 1982년도의 발표작이라는것, 처녀작은 1939년 1월의 단편소설 《건설보》라는것이다. 이는 또 김창걸선생의 생전의 뜻이기도 하다. 김창걸선생은 1981년 필자의 취재를 접수할 때 자기의 처녀작은 1939년 1월에 발표된 《건설보》라고 거듭 명확하게 언급하였었다. 여기서 지적할것은 1939년 1월의 《건설보》가 처녀작이라 하여 김창걸선생의 문학창작활동이 1939년으로 되는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김창걸선생의 창작년대와 창작활동은 두말할것 없이 1936년 미발표작 《무빈골전설》 습작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김창걸선생은 1936년부터 3년간 본격적인 문학창작(물론 습작)에 정진한끝에 처녀작의 발표결실을 보게 되였기때문이다. 올해 2006년은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이 되는 해이다. 김창걸선생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 론문을 김창걸선생 문학창작활동 70돐에 삼가드린다. 【주해】① 문학과 예술, 1996년 제5호② 권철, 김창걸과 그의 소설문학, 중국조선민족문학대계 11, 소설집 해제에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12월③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제222페지④ 천지, 1986년 8월호, 제 12페지⑤ 대형문학총서 두만강 제5호, 료녕민족출판사, 1996년 10월, 제168페지, 188페지⑥ 문학과 예술, 1996년 1월호, 제73페지⑦ 연변문학, 1998년 2월호, 제260페지⑧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 사이트 www. koreancc.com문학코너 2004년 4월 24일연변문학, 2006년 제9호 게재
96    내 고향 여행(38)-삼합행—산행과 관광의 어우르름 댓글:  조회:3977  추천:107  2006-08-04
내 고향 여행(38) 삼합행—산행과 관광의 어우르름 리 함 1 7월 15일 룡정 선바위와 삼합 망강정 산행답사를 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뻐스로 통한 삼합행이면 선바위 중도산행을 담보할수 없기 때문인가부다. 다행히 목장님과 물고기님이 자가용을 몰고나선데서 며칠간의 걱정이 가신듯 사라졌다. 연길을 떠나고 룡정을 거치고 룡정 남쪽방 선바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문제는 선바위에 이른 후이라 할가. 장재요, 명동이요, 지신이요, 삼합행이요 수도없이 찾아 다녔지만 선바위정상에 단한번도 오른적이 없은 나로서는 남북두곳을 두고 어느길로 선바위정상에 올라야 할지 대중이 가질 않았다. 선바위 북쪽가에 정차했고 정차한곳의 산길이 선바위 바깥을 에돌아 동남쪽으로 이어진다지만 단언하기 어려웠다. (에라, 모르겠다. 북쪽가로 오르면 남쪽가로 멀리 에돌기보다는 나을테지.) 필자는 태연한체 앞에서 겅정겅정 걸어갔다. 상공님이 따르고 송이님이 따르고 뿌리님이 따랐다. 《이 길이 선바위로 이어질까?》 《두만강님이 이끄는데 근심할 필요가 없지.》 상공님과 송이님의 대화다. 이 대화가 압력이 큰데 산길은 선바위 북동가에 이르러서도 오른쪽의 정상가로 이어질 념을 하지 않는다. 그런대로 길을 조여가는데 오른쪽에 정산가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리로 오르면 정상이겠지!) 필자는 또 태연한체 앞에서 터벅터벅 나아갔다. 오솔길은 정상가로 이어지다가도 옆으로 탈며 수차 북행을 시도하는데 가령 이 오솔길이 정상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무산되면 이보다 난처한 난국은 없을것이였다. 또 다행히 하늘은 이 소인을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솔길은 내내 숲속으로 오불꼬불 이어지며 정상으로 뻗어갔다. 최정상을 눈앞에 두고 선바위 정상부는 호선(弧線)을 그으며 호선이 그대로 골짜기를 이루며 아래로 급강하를 보이였다. 그런 바위무리 정상부에 서니 서쪽가 선바위최정상을 왼켠에 두고 북쪽 원근(遠近)이 한눈에 밟혀왔다. 승지쪽에서 뻗어온 아스팔트길이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이 멋지기만 하다. 호선가를 남서로 도니 선바위 최정상이 발아래에 놓인다. 정상부는 아래서 보기와는 달리 꽤나 되는 공간을 가지고 있어 숱한 사람들이 단꺼번에 오를만도 하고 연우산악회 일행 12명은 그 공간속에서 이모저모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분주하다. 지난20~30년대 명동사람들에게 있어서 선바위정상가는 공원과도 같았다더니 조금도 그른데 없다. 최정상부는 정신이 상쾌하기만 한데 서쪽으로는 신동마을과 칠도구골이 안기여들고 남으로는 장재촌, 명동촌으로부터 지신지나 오봉산에 이르기까지 온 명동지구가 줄달음치며 가까이 다가선다. 겁나는건 최정상의 남쪽가와 서쪽가, 북쪽가에 바싹 다가설수 없는것이라할가, 70여메터 해발고를 이룬다는 선바위 최정상부는 하늘에 오른 기분이기만 하다. 2 선바위는 삼형제바위로도 통한다. 정상부가 세개의 바위봉우리로 되였으니 삼형제바위가 틀림이 없다. 헌데 지난 70년대인가, 가운데 바위봉우리를 남포로 헐어 륙도하 제방쌓기에 썼다니 무지한 년대의 무지한 소행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이 모든것이 동북쪽 발아래 펼쳐져 마음은 개운하지가 못하다. 선바위를 내리니 오전 10시를 앞둔 시점이다. 두대의 자가용은 다시 일행을 태우고 그젯날 “규암재”와 김약연선생묘소를 둔 장재촌, 윤동주생가와 명동학교터가 자리잡은 명동촌, 광복전 화룡현성자리 지신(달라자)진 소재지를 지나 오랑캐령으로 줄달음친다. 어떤 이들은 오랑캐령이라고 하니 신기하게 여기기만 한다. 실상은 오봉산(해발 1055메터) 산릉선을 가로 탄 룡정~삼합행 령길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은 오랑캐령을 오르고 내리고 일흔두굽이라고 했다지만 세멘트 아스팔트길이 쭈욱 뻗어간 오늘에는 오랑캐령이 12메터나 낮아져 해발고 830메터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오랑캐령에서 남으로 구비구비 골연을 빠져 두만강가 마을 강역 1대 구역에 이르기까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10킬로메터 길이다. 구비구비 일흔두굽이 땐 그 길이 더 멀고도 멀었으리라. 일행이 두대의 차에 나뉘여 앉은데서 연도 구간구간의 소개를 포기해야 했다. 그런 사이 두대의 차는 20리 산길을 내리였고 룡정시 삼합진 망강정에 쉽사리 이르렀다. 망강정(望江亭)은 삼합해관 북쪽산에 세워진 6각 나무정자이다. 이곳에 서면 삼합구간을 흘러내리는 구비구비 두만강이 발아래에 놓이고 두만강대안 회령시의 전경이 쭈욱 펼쳐진다. 그러는 속에 송이님, 골프님을 제외한 거개 님들은 망강정이 처음이라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서로 서로 눈길을 사방에 팔고팔며 기념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연길쪽에서 또 한패의 사람들이 차로 들이닥치며 망강정은 명절을 맞이한 기분이기만 하다. 점심은 망강정에서 나누기로 되였지만 새로 가담한 물고기님이 강역촌의 자기집으로 가잔다. 강역촌의 자기집이라, 일행은 일순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물고기님은 강역이 고향이였고 4살에 떠난 고장이라지만 잊을수가 없어 팔간집 등을 마련해놓고 다닌다고 했다. 이런고로 일행의 점심참은 강역촌에서 펼쳐져 이채롭기만 했다. 3 차는 다시 삼합~강역구간 근 20리길을 달린다 흥미로운것은 차를 몰아가는 목장님의 회억담이다. 《여기 강역이요, 북흥이요, 승적이요, 삼합은 잊을수가 없는 고장입니다…》 이렇게 말투를 뗀 목장님은 어린시절을 추억한다. 추억속의 목장님은 연길시에서 살았고 삼합 여기 여러 마을에 가까운 친척들이 많은고로 해마다 겨울방학이면 삼합으로 달려왔단다. 그것도 4남매 모두가 올수 없어 큰 누나와 아래 남동생 셋은 둘씩 두패로 나뉘여 삼합행에 올랐고 시골에서 이밥먹는 재미가 별재미였다나. 이밥먹기 위해 삼합행에 오르는 그네들이였다. 물고기님은? 알고보면 물고기님은 9남매라는가. 누님이 바로 연변서 《수이러우(水肉)》로 불리우는 이름난 소품배우 리옥희라고 하니 이들 남매는 사람들로부터 물고기로 불리우기가 십상이다. 그중의 하나가 물고기님으로서 고향 강역 3~4대 마을에 시골집을 마련했으니 시골집에서의 점심참은 일품이였다. 모두가 푸짐히 갖춘 풍성한 점심참인데 골프님이 손걷고 나서더니 잠간새에 시원한 랭국이 일행마다에 차례졌다. 손수 준비한 오이며, 파며, 마늘이며, 고추며가 그대로 랭국의 걸이로 되였으니 고향의 어머님을 방불케하는 시골집, 시골집의 점심참이 신나기만 하다. 보다 신나는것은 일행의 두만강변 산책과 수석탐석이다. 너도나도 강역 3~4대 앞 두만강 돌밭에서 열을 올리니 수석인이 따로 없다. 보통님이 꽤나 큰 흰돌모양의 돌에 《8》자가 새겨진 수석을 주어들었다면 목장님은 문양석 한점을, 봇나무님은 산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싱글벙글한다. 그에 못지 않게 모두가 탐석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줘 기쁘기만 하다. 산행과 관광의 어우름 새력사를 펼쳐가는 연우산악회 선바위 그리고 삼합 망강정행, 즐거움과 상쾌함속에서 시간은 빨리도 흘러간다.
95    론문(11) 연변의 홍색관광자원과 그 개발전망 댓글:  조회:4001  추천:98  2006-07-31
연변의 홍색관광자원과 그 개발전망 리 함1. 서론 세계 최대산업으로 불리우는 관광업은 《연기없는 산업》, 《영원한 조양(朝阳)산업》으로 불리면서 일사천리의 속도로 발전하고있다. 이런 세게적 발전속에서 2001년의 우리 나라 국제관광수입은 처음으로 독일과 영국을 릉가하여 미국, 에스빠냐, 프랑스, 이딸리아 버금으로 세계 제5위①의 보좌에 올랐다. 우리 주 연변에서도 관광업에 눈길을 돌리며 관광업을 연변경제의 기둥산업으로 간주하고 틀어쥔데서 지난해 2005년 관광수입은 21.74억원에 이르러 2004년 같은시기보다 11.3%로 장성, 우리 주 GDP.(국민생산총액)중 관광수입이 10.4%를 유지②한 자랑찬 성과를 올리였다. 했으나 우리 주 관광업의 기적적인 발전은 연변의 브랜드 관광자원인 장백산관광과 입경관광, 국내관광 발전에 머무르는 정도로서 홍색관광, 생태관광, 민속관광, 변경풍경관광 등과 유기적으로, 효과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있다. 더우기 홍색관광은 새롭게 흥기하여 전국을 휩쓰는 신흥 관광자원인데도 우리 주는 애국주의교육기지로 불리우는 연변혁명렬사릉원을 위해 국가지원자금을 쟁취하고 약간의 성급 애국주의교육기지를 추천, 신고하면서 홍색관광선전방안을 제정하고 홍색관광수첩③을 편찬하는 정도에 그치고있다. 이로부터 보면 크게, 대대적으로 내밀어야 할 홍색관광은 연변관광업의 정품코스로, 풍경관광지로 개발되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피어린 항일의 력사 담고있는 내 고향 연변은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로혁명근거지로서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쓴것처럼 《산마다 진달래 촌마다 렬사비》를 이루었다. 여기에 이런 수자가 있다. 연변이란 이 땅, 4만여평방킬로메터에 지나지 않는 이 대지우에 해방전야 40여만의 인구가 살고있었는데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는 근 2만명④에 달한다. 그중 90%이상이 모두 조선족의 아들딸로서 전 주 8개 현시, 66개 향진, 1076개 촌에 근 600개 렬사비⑤가 세워져있다. 2개 촌에 이르지 않아 하나의 렬사비가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유서깊은 연변땅에는 헤아릴수 없이 많고많은 혁명유적지, 특수한 기념적의의를 가진 유적지, 관광코스에 놓인 유적지들이 있어 홍색관광정품코스로 개발할만하다. 2. 홍색관광 개념과 그 발전과정 및 전망 우리 나라에서 홍색관광이란 개념이 처음 제기되고 중국혁명사를 주제로 한 《홍색관광》기획이 시동되기 시작한것은 2004년 가을이다. 이에 따라 당중앙과 국무원의 동의를 거친 《2004년~2010년 전국홍색관광발전기획요강》이 출범하였다. 《기획요강》은 7년의 발전목표를 정하고 두 단계로 나누어 실행되는데 첫단계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12개 《중점홍색관광구》와 30개 《홍색관광상품코스》, 100개 《홍색관광대표풍경지역》을 꾸려 초보적인 홍색관광 발전규모를 이루는 것이다. 다음단계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기초시설의 전반수준을 높여 홍색관광발전을 추진하는 것이다.⑥ 《기획요강》에 따르면 홍색관광이란 주요하게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령도하여 혁명과 전쟁시기에 형성된 기념지, 표지물을 내용으로 한 관광활동을 말한다.⑦ 그 목적은 혁명력사문화자원을 발굴하여 애국주의교양과 혁명전통교양을 진행하고 민족정신을 양성하며 응집력을 높이고 경제를 조화적으로 발전시키는것이라 하겠다. 7년간의 일정으로 밀고나갈 이 사업에는 중국공산당의 로혁명근거지들인 정강산, 태항산과 같은 허다한 빈곤지역에 관광객을 유치하는것 등이 포괄되여있다. 중국 홍색관광의 출범과 실시는 나라안 로혁명근거지의 경제를 진흥시키고 애국주의교육을 강화하는 면에서 거대한 추진역할을 놀기 시작했다. 신화통신에 의하면 강서, 호남, 섬서, 중경 등 13개 성과 시의 150여개 《홍색관광구》에서 2004년 한해동안에만도 관광객 2000여만명을 접대한것으로 알려진다.⑧ 2004년 건당기념일전후에 해당부문에서는 20대의 비행기를 도맡으면서까지 근 10만명이 우리 나라 첫 농촌혁명근거지인 정강산을 참관하도록 하였다.⑨ 결과 《홍색관광》은 풍만한 경제효과성을 가져와 2004년의 수익은 인민페로 200억원에 이르렀다. 정강산지구의 관광업수입은 재정총수입의 35%이상에 달하는 기적을 창출하였다.⑩ 혁명전쟁년대에 중앙혁명근거지의 수도로 불리였던 강서 서금을 보면 2003년 관광객수는 45만명으로서 관광수입은 GDP의 5%에 이르지 못했는데 2004년에는 2만 5천리 장정 70돐을 계기로 관광객수를 60만명으로 끌어올려 관광수입을 GDP의 9%에 끌어올리려 작심했다.⑪ 보는바와 같이 중국내 로혁명근거지들은 대부분이 내륙지구의 산구들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경제가 빈궁한 현실이며 최근년래 시장경제의 대세에서 소외된 지구들이였다. 하기에 혁명성지 연안이나 서금, 정강산 등 지구들에선 《홍색관광》을 발전시킬 계획을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전국적인 홍색관광으로 추진되면서 놀라운 관광수입을 올리면서 애국주의 교양목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홍색관광은 애국주의를 고양하고 빈곤지구 경제를 추진하는 관광산업이라는 것이 사실에 의해 증명되였다. 국가 관광국에서는 이에 따라 홍색관광을 전국관광코스에 접목시키면서 앞으로 5년래 년 1억명의 《홍색관광》시장규모를 1.5억명에 도달시키고 10년후에는 3억명에, 관광수입 1000억원에 도달⑫시키려고 박차를 가하고있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장백산도 전국 12개 《중점홍색관광구》에 망라되였는데 그 주체형식은 《항일련군영웅, 림해설원》으로 건설될 전망이다. 3. 연변의 홍색관광정품코스와 개발가치 본문(2)에서 우리 나라에서 홍색관광이 제기된 배경과 개념, 그 발전과정, 전망에 대하여 쭉 훑어보았다. 홍색관광이 로혁명근거지의 경제를 진흥시키고 애국주의 교양을 강화하는 관광자원의 하나라는것이 사실에 의해 립증되였다. 하다면 우리 연변에서는 전국 12개 중점홍색관광구역에 망라된 장백산을 기치로 어떻게 홍색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완벽화해야 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우리 연변은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된 렬사가 근 2만명에 달하고 근 600여개의 렬사비가 세워져있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현상으로서 연변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여기에 천여곳에 달하는 혁명유적지까지 합치면 연변의 홍색관광자원은 역시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다. 하기에 2006년 2월 16일, 자치주 당위리론학습중심소조에서 가진 관광특강에서 중국관광협회 비서장 소잠휘는 《연변은 천혜의 관광자원소유지로서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있는 곳의 하나》라고 찍으면서 관광산업발전은 경제가 락후한 민족지구들에서 《빈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초요사회로 이르는 필연적선택》이라고 지적⑬하였다. 이는 홍색관광자원이 극히 풍부한 연변관광업의 개발전망을 예시하여주고있다. 하지만 연변에 렬사비가 근 600개에 이르고 혁명유적지가 천여곳에 이른다고 하여 이 모든것을 단꺼번에 다 개발할수는 없는것이다. 개발전망은 오직 중점홍색관광구를 정하고 정품관광코스를 개발, 완벽화하는 길 하나뿐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미 건설, 리용되고있는 연변혁명렬사릉원을 룡두 홍색관광자원으로, 성급 애국주의교육기지 후보명단에 든 연길시 65334부대 동존서기념관, 돈화시혁명렬사릉원, 훈춘시 대황구항일근거지 등 유적지 계속으로 아래와 같은 홍색관광자원을 중점으로 선참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한다. 1) 연길시에서: 연길시에서는 연변혁명렬사릉원, 동존서기념관과 결부하여 연길감옥전시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를 중점적으로 개발해야 할것이다. (1) 연길감옥전시관: 그제날 연길감옥은 오늘의 연길시 연변예술극장 자리에 위치했다. 위만시기의 연길 《모범》감옥이고 길림성 제4감옥인 연길감옥은 1931년 9.18사변후 일본군이 접관한후 간수(看守)가 30여명이고 가장 많을 때 《죄수》는 1천여명에 달했다. 중공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 중공훈춘현위 제1임 군사부장 신춘 등 수많은 항일투사가 쓰러진 이 감옥내에 한때 중공연길감옥위원회가 조직되고 1935년 봄에 김명주 등 동지들의 성공적파옥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유적지를 개발하고 전문 전시관을 꾸린다면 그 교양적가치와 경제적가치는 자못 크리라 보아진다. (2)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그제날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오늘의 의란진 구룡평에서 서남쪽으로 13킬로메터 떨어진 지대에 자리잡았다. 1932년 가을부터 1934년 가을까지 만 2년간 실재한 이 항일근거지는 북동, 남동 등으로 이루어지고 한때 중공연길현위와 동만특위가 자리잡았던 유서깊은 고장으로서 피어린 항일의 이야기가 많고도 많다. 지금 련화동(남동)에 부지 140만평을 가진, 두레마을이라고 불리우는 집단농장이 일어섰는데 이 두레마을은 1997년 한국인 김진홍목사에 의해 해빛을 보았다. 두레마을 건설자들은 두레마을과 그 일대를 홍색관광지로 개발하려고 준비를 다그치고있는데 그 개발전망이 클것으로 알려진다. 2. 룡정시에서: 룡정시에서는 현유의 대성중학교기념관, 간도일본총령사관 전시관, 윤동주생가, 비암산풍경구의 토대우에서 룡정시가지와 명동일대를 중심으로 연변 최대의 홍색관광구를 개발하여야 할것이다. (1) 간도일본총령사관 박물관: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일본 연변침략의 상징으로서 1909년 11월 2일에 정식 개관되고 1926년에 준공되였다. 부지면적이 4만 2944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이 2503평방메터에 달하는 이 총령사관은 1930년 5.30폭동의 지휘자인 김철 등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쓰러지고 수많은 투사들이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투옥된 력사유적지로서 룡정시에서는 응당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금을 모아 이 유적지를 전면 개발하면서 주위 여러 유적지들과 함께 연변 최대의 홍색관광구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 유적지와 이어지는 유적지들로는 3.13반일만세자리, 3.13반일의사릉, 서전서숙옛터, 대성중학교기념관, 5.30폭동지휘부자리, 15만원탈취거사 옛터 등등이다. 이런 유적지들을 보다 잘 개발하여 하나의 홍색관광정품코스로 완벽화하면 그 의의가 대단할것으로 보아진다. (2) 명동유적지: 명동지구로 불리여지는 지신골은 항일의 유서깊은 고장으로서 연변 최대의 홍색관광구로 개발하는데서의 거대한 관광자원가치를 갖고있다. 이 지구의 윤동주생가, 규암재자리, 명동학교 옛터, 김창걸문학비 등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개발하면서 홍색관광과 결부하여 민속촌으로 꾸린다면 룡정시가지와 명동골은 명실공히 연변 최대의 관광지로 떠오르게 될것이다. 3. 화룡시에서: 화룡시는 력사문화가 유구한 현급시이고 연변 근현대혁명의 책원지로서 풍부한 자연관광자원과 인문관광자원을 갖고있다. 이에 필자는 2004년 4월에 열린 화룡시 문화와 관광 및 화룡경제발전전략세미나에서 화룡시의 관광자원을 두갈래 황금선—두만강관광선과 장백산관광선으로 나누어 서술한바가 있다. 그중 장백산관광선은 주요하게 력사유적과 항일유적 등 인문관광자원으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항일유적들로는 약수동쏘베트 옛터, 어랑촌 13용사 옛터, 홍기하전적지 등을 실례로 들수 있다. 이같은 항일유적—인문관광자원은 홍색관광의 주체로 되여 개발가치와 전망이 대단히 큼을 시사하고있다. (1) 약수동쏘베트 옛터 약수동은 유서깊은 항일근거지로서 투도구에서 서북으로 10킬로메터 쯤 되는 시골에 위치하고있다. 이 항일근거지에는 전 동북으로 첫 인민정권 쏘베트 정부가 수립된 옛터와 약수동유적지의 상징인 옛 아름드리 버드나무, 김순희 등 8명 순난지, 평강구위 비밀아지트 등 홍색관광자원이 있어 크게 개발할만한 고장이다. (2) 어랑촌 13용사유적지 어랑촌은 연변의 이름난 항일근거지로서 1932년 겨울부터 1934년 겨울까지 지속된 피어린 항일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이 근거지에는 천리봉 망원초, 철공장, 천수동 및 샘물골전적지 등 유적지들이 널리여있는데 가장 대표적인것은 1933년 음력 1월 18일의 어랑촌 13용사전투이다. 연변의 항일사상 류례가 없는 13용사전투는 연변의 자랑으로서 그 일대의 선봉국가삼림공원 건설의 한 부분으로, 홍색관광자원으로 크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 (3) 홍기하전적지 전국 12개 중점홍색관광구 가운데 연변의 장백산이 그중의 하나이고 그 주체형상이 항일련군영웅, 림해설원이라면 1940년 3월, 우리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에 의해 벌어진 유명짜한 홍기하전투를 연변의 항일련군영웅, 림해설원 대표적 전적지로 개발하여야 할것이다. 올기강전투와 올기강밀영지도 홍기하전투의 한부분이기에 다같이 건설중에 있는, 광평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의 한 부분으로 개발하면 좋을듯 싶다.4. 왕청현에서: 왕청현에서 연변의 홍색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할 최대 항일유적지는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이다. 소왕청근거지는 중공왕청현위와 동만특위의 소재지로서 왕청에서 근거지의 본부였던 마촌까지 28킬로메터 거리이다. 이 근거지에는 최전방초소인 뾰족산이 있고 대리수구 골안따라 7킬로메터 안에 근거지 철공장, 인쇄공장, 병원, 유격대 본부, 우물, 동만특위 등 자리가 있고 패말비석들이 구전히 세워있기에 홍색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에 편리하다. 더우기 귀틀집자리도 여전한 동만특위 옛터는 길림성 중점문화유물보호단위로서 소왕청근거지의 중심을 이루고있다.4. 선행 절차와 여러 관광과의 접목 우에서 연변의 홍색관광정품코스와 개발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흝어보았다. 연변의 각급당위와 정부 지도자들, 해당부문에서 홍색관광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느끼고 이미 중시를 돌리고 있기에 정부에서 의사일정에 올려놓고 통일적으로 기획하고 강도높게 틀어쥔다면 우리 주의 홍색관광산업은 재빨리 궤도에 들어설수 있으리라고 보아진다. 그러자면 아래와 같은 절차들이 선행하여야 할것이다. 1) 정부에서 깊은 중시를 돌리고 관광부문에서 통일적으로 기획하고 내밀어야 한다. 선차적인것은 홍색관광정품코스를 선정하고 해당선전방안을 면밀히 짜고들어야 하는것이지만 주안의 각급 지도층으로부터 사상을 가일층 해방하여야 할것이다.연변의 홍색관광자원은 주로 산구를 둘러싼 여러 현, 시의 향진내에 산재해있다. 이런 향진의 지도층을 망라한 각급 지도간부들가운데는 자기의 임기내에 눈에 뚜렷이 보이는 사업실적만 올리려 하고 눈에 잘 보이지 않거나 경제발전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관광업에 대해서는 별로 손을 대려하지 않는것 같다. 하기에 필자는 주안의 각급 지도층의 이같은 현실존재문제를 중점적으로 지적하게 된다. 주안의 각급 지도간부들이 가일층 사상을 해방하고 눈앞의 사업실적만 강구하는 승진의 보따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진정 국민의 심부름군으로 되어 살손을 댄다면 연변의 홍색광광자원은 그 개발과 더불어 풍만한 경제효과성, 사회효과성을 올리게 되리라고 믿어마지않는다. 인민군중에게 리롭고 경제에 리로운 홍색관광은 더는 미룰수 없는 희망찬 사업이다. 2) 홍색관광정품코스 기초시설건설을 다그치고 혁명력사문화유산의 발굴, 정리, 보호, 전시와 선전해설수준을 전국적인 관광요구에로 끌어올려야 한다. 보는바와 같이 연변 주안의 현유 홍색관광정품코스는 연변혁명렬사릉원을 제외하곤 별로 언급할바가 못되며 이미 건설된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초시설수준과 규모가 그닥지가 않다. 하기에 새시기 연변의 홍색자원개발은 첫시작부터 전국적관광요구에 좇아 요구하며 움직여야 할것이다. 관건은 각급 지도간부들이 사상을 해방하고 결심을 내리며 틀어쥐는가 못쥐는가에 있다고 보아진다. 3) 홍색관광정품코스개발에서의 관건은 자금조달이다. 힘써 국가지원자금을 쟁취해야 하지만 국가지원자금은 제한되여있기에 민간경로, 외국자본유치 등 다방면의 길을 걸어야 한다. 연길시 왕우구근거지의 경우를 보나 룡정 명동지구 개발의 경우를 보나 민간경로나 외국자본유치는 완전히 가능한 일이다. (4) 홍색관광정품코스는 반드시 백두산관광과 국내관광, 입경관광, 생태관광, 민속관광 등과 접목하는 길을 걸으면서 특색있고 흡인력있는 관광산업으로 떠올라야 한다. 홍색관광산업은 외홀로 틀어쥐고 내밀 사업이 아니다. 여러 관광산업과의 유기적조화속에서만이 의미가 있고 크게 발전할수 있을것이다.5. 결론 연변의 홍색관광산업은 희망이 있는 관광산업이며 해볼만한 산업이다. 홍색관광자원이 기타 관광자원과 더불어 잘 개발되고 리용된다면 연변의 경제사회발전템포는 보다 빨라질것이고 홍색관광자원이란 이 인문관광자원을 갖고있는 지구와 시골들이 빈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초요사회로 이르는 길에서 힘차게 매진하리라는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것이다. 【주 해】① 중국관광통신 2002. (4) p.18② 연변일보 아리랑저널 (2006년1월 28일1면) 《지난해 관광수입 21.74억원》③ 2006년 2월 17일 (1면) 연변일보④주필 우뢰,《마을마다 렬사비》(상)연변대학출판사, 2005년 11월 ⑤ 동상서⑥ 흑룡강신문(주간지), 2005년 3월 13~19일 15면⑦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5년 1월 24일 2면⑧ 참고소식(한어문), 2005년 2월 25일 8면⑨ 우와 같음⑩ 우와 같음⑪ 《참고소식》(한어문) 2004년 9월 12일 8면⑫ 우와 같음⑬ 연변일보,《관광제품개발에 주력하라》, 2006년 2월 17일 1면 (예술세계 2006년 7-8호에 게재)
94    (14) 15만원탈취거사 지점문제 (2) 댓글:  조회:4408  추천:139  2006-07-21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14)15만원탈취거사 지점문제 (2)리 함1919년 룡정 3.13반일대집회는 일본군경과 중국륙군대의 잔혹한 무장탄압으로 끝나고 박문호 등 17명 (혹은 19명) 독립투사들이 피못에 쓰려졌다. 집회참가자들은 손에 무기를 잡지 못한것을 통탄했다. 그가운데서도 철혈광복단단원으로 이날의 충혈대, 즉 결사대에 참가한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이 더욱 그러했다.《태극기 하나만 들고 만세를 불러서 독립을 한다는것은 통분한 죽음이다! 총을 들고 나서라! 총을 들고 나서서 원쑤도 갚고 독립도 하자!》이들 6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부르짖음은 인차 행동으로 번져갔다. 1920년초에 연변을 들썽하고 그후에는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15만원탈취사건》이 바로 이렇게 일어났다.15만원탈취거사를 말하자면 아마 당년의 연길현 와룡동으로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와룡동에는 최봉설투사의 옛집(일전에 연변일보에서는 이 옛집이 거의 무너지고있다고 보도했다.)이 있는데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건너편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바로 이집에서 최봉설이 피로써 조선독립을 찾기 위한 철혈광복단(1914년)에 참가했다. 15만원탈취거사의 주동자 림국정도 이집에 류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다.림국정은 워낙 조선 함흥사람이고 그의 어머니는 예수교전도사이다. 국정의 어머니는 반일의 뜻을 품은분인데 간도 룡정에 조선인 반일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들 국정을 반일정신으로 키우고저 반일독립열이 가장 크다는 와룡동 창동학원에 아들을 류학시켰던것이다.1915년 5월단오에 국자가에서 열리였던 《전간도조선학생운동회》 (부르하통하와 연집하가 모이는 합수목의 모래밭)에서 장래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을 똑똑히 본 일본놈들은 창동학원과 소영자 광성중학교 등 학교의 진보적교원과 학생들을 박해,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창동, 명동, 광성, 정동 등 4개 중학교의 철혈광복단단원들은 분분히 왕청현 라자구에 설치된 사관학교로 달려갔다. 창동학원의 최봉설, 림국정, 한상호, 라일 등도 례외가 아니였다. 이듬해 (1916년) 여름에 최봉설, 한상호, 라일은 제고장으로 돌아오고 림국정은 돈을 벌어 공부를 계속하겠다며 로씨야로 일하러 갔다. 최봉설은 집에 돌아온후 와룡동에서 몇리 되는 부르하통하 건너편 적안평촌 학교에서 체육교원을 하며 아이들에게 체육과를 가르치는 한편 군사조련까지 시키려고 은근히 왼심을 썼다. 그때 독립정신을 키우기 위한 간도조선인교육의 골자는 체육운동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최봉설이 림국정이를 자기 집에서 다시 만난것은 1919년 3월초였다. 국정한테서 레닌과 로씨야 10월혁명, 로농국가 등 소문을 진실로 들은 최봉설은 조선의 독립이 당금 실현되는것만 같았다. 국정이와 같이 60~70리 길을 걸어 명동학교로 가니 수십명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모이였다. 그번 비밀회의에서 최봉설이는 림국정 그리고 룡정의 윤준희, 명동중학의 박웅세 등과 더불어 룡정의 3.13독립만세를 위한 충혈대에 가담했다.3월 17일 3.13수난자 장례식이 룡정 합성리 동산묘지에서 있은후 최봉설은 국정, 상호, 라일 등 여럿과 함께 룡정의 윤준희네 집에 모여 무기없는 자기네를 통탄하였다. 이날 그들은 말로써만이 아니라 총을 잡고 독립의 길에 나서야 되는 현실을 더욱 절감하였다. 그러면서 총문제를 놓고 골몰하다가 룡정의 일본은행을 털자는 의견에 합치되였다. 하여 일부는 일본은행시탐에 나서고 일부는 돈을 모아 권총 등을 마련하기에 동분서주했다. 이 시기 그들은 여러번 모여앉는 가운데서 은행을 터는것은 현실적이 아님을 보아냈다. 왜냐하면 터는날 은행에 돈이 딱 있다고 장담할수 없었기때문이다.이럴 때 조선은행 회령지행룡정출장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지하공작원 전홍섭한테서 일본놈들이 길회선부설경비로 회령서 룡정에 일본돈 15만원을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사람을 띄워 룡정에 가서 시탐해보니 사실이 옳았다. 윤준희, 림국정, 최봉설,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6명의 습격조가 무어진후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15만원탈취거사를 주밀히 짜고들었다. 달라자 명동촌의 김하규집은 그들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였다. 김하규는 최봉설의 장인으로서 명동례배당을 거점으로 반일비밀련락사업에 나서고있었다.와룡동을 돌아본 이튿날 필자 일행은 15만원탈취거사 지점답사길에 올랐다. 우리를 실은 찦차는 룡정시가지에서 떠나 륙도하를 따라 남으로 달리더니 잠간새에 부처골어구의 신화 6대에 이르렀다. 도로표식은 5킬로메터를 가리키고있었다. 여기서 서남방향으로 산굽이를 조금 돌다가 륙도하를 건너면 재박골(신화 7대)이고 재박골에서 다시 남으로 한참 걸으면 하승리(룡정시 지신진 승지1대)마을이다. 하승리는 부처골어구의 신화6대(원 신명촌)에서 2리가량 떨어진 산밑마을인데 당년의 15만원탈취거사는 바로 재박골과 하승리사이에서 생겼다. 거사지점이 재박골 맞은편 동쪽 강변산굽이라는 설도 있어 우리는 하승리마을안에서 박병선(90년도에 73살), 박병렬(90년도에 63살) 두 로인을 찾았다.두 로인은 6촌간으로서 모두 하승리 태생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때 조선회령서 이주해와서 여기를 개척한지도 90여년에 된다고 하는데 1920년초 당시에 10여세대 조선인들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길은 지금 위치가 아니라 지금의 부처골어구에서 산굽이를 돈후 륙도하를 건너 남북으로 앉은 강서쪽 산밑으로 올리 뻗었단다. 강동쪽 강변산굽이로 뻗은 지금의 신작로는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후인 지난 30년대에 닦았다고 하니 《동쪽강변산굽이》라는 설은 자연 취할바가 못되였다. 하승리의 두 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우리는 부근의 거사지점을 답사하였다. 거사지점에서 보니 룡정에서 남으로 펼쳐진 륙도하벌은 여기서 좁아지면서 갈지《之》자로 향하다가 동으로 굽어들었는데 달라자 명동촌과 승지촌사이 관문으로 되는 선바위가 환히 안겨왔다. 그래도 거리는 하승리에서 약 5킬로메터는 된다고 한다. 승지촌은 물건너 동쪽 2킬로메터 지점에 있었다. 이때에야 우리는 당년 투사들이 선택한 지리적위치가 독특하다는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거사후 와룡동, 의란구를 걸쳐 로씨야땅으로 가야 했으니 동쪽의 달라자나 서남쪽으로 뻗은 동량, 하승리 건너편쪽은 취할바가 못되였고 룡정쪽은 더구나 말도 말아야 했다. 이 4개 방향은 일본놈들이나 중국측군경 경계가 삼엄하고 불리한 생소땅이여서 제일 좋기는 하승리 아래마을 재박골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재박골로 빠지다가 동성참, 해란강을 거쳐 와룡동, 의란구로 가는것이였다. 이점을 그네들은 똑똑히 보아내고 사전에 길들을 모두 익혀두기까지 했었다.15만원탈취계획이 무르익은후 최봉설과 한상호는 와룡동에 있으면서 룡정에서 대기하는 윤준희와 림국정의 통지를 기다렸다. 1920년 1월 4일에 회령에서 룡정으로 떠난다는 전홍섭의 비밀통지가 전해지자 이들은 기타 4명과 함께 1월 4일 점심때쯤에 중국학생복에 중국신을 신고 하승리부근의 강변신작로에 나타났다. 이 장소를 택한것은 우에서와 같이 사전에 밀모한것이다. 습격지로는 오랑캐령이 좋지만 놈들이 오랑캐령에 이를 때는 낮이여서 행동하기 불편하고 멀리 전이하기도 불리했다. 가장 좋기는 해질무렵이나 어두운 때이다. 이때면 놈들이 승지촌을 지나 여기에 이를것이고 또 주위에 10여세대 되는 조선인산재호들이 있고 길가에 주막집도 있어 술을 마시는척하며 행동하기도 좋을것이였다.하승리 부근에서 이들 6명은 두패로 나뉘여 길에서 무질서하게 오가는척하면서 습격자세를 취해보았다. 자신이 있을 때 그들은 하승리어구에서 5킬로메터 밖에 있는 합성리공동묘지로 향했다. 해질무렵 박웅세와 김준 두 청년이 하승리부근 주막집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 둘은 자기 패들을 기다리는척 하면서 자주 바깥에 나가 회령쪽 길을 살피였다.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긴장한 속에서 마음이 한결 죄여드니 곁방에서 술군들이 떠들며 놀아대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린다면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뜨거운 숨결소리뿐이였다.얼마후 김준이 밖에 나갔다가 급히 들어서며 나지막히 웅세와 말했다. 《온다!》《온다구?!》일면 긴장하기도 하고 일변 반갑기도 한 시각이였다.때는 오후 6시경,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포근히 감싼 뒤였다. 전날 새벽 5시, 룡정주재 간도일본총령사관 순사 나까도모와 조선인 순사 박연흠은 길회철도부설전용경비 15만원수송임무를 맡고 룡정을 떠났다가 그날 오후 6시에 회령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오전 8시반에 귀로에 오를 떄 은행 직원 하루구찌와 김용억, 회령의 조선인 상인 진길풍이 동행하였다. 15만원 현금꾸레미와 기타 물건은 말에 실었다. 오후 2시에 신흥평에 이르러 다리쉼을 하고 다시 길을 조이던중 룡정에로 우편물을 수송하는 한 일본인이 행렬에 끼이였다. 현금을 실은 말이 앞서고 우편물을 실은 말이 뒤따랐다. 은행직원 김용억과 진길풍, 나까도모가 말을 따랐고 우편물수송원 가지하라와 은행직원 하루구찌, 조선인순사 박연흠이 각기 그뒤를 따랐다. 박웅세와 김준이 술집에서 나와 비청걸음을 해댈 때 마지막 말이 그들을 지나쳤다. 두사람이 말뒤를 따르며 한어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는데 저만치에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한상호 네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역시 한어로 이대로 가다간 언제 룡정에 들어서겠느냐며 말행렬의 왼쪽 옆에 다가섰다. 이때 네사람이 서로 길을 피하며 코말에 접근했다. 멀쩡한 놈들은 룡정쪽에서 오던 패와 룡정쪽으로 가던패들이 술을 거나하게 마이고 다투겠거니만 생각했다. 찰나 코말에 다가선 넷이 제꺽 손을 쓰며 말탄 놈들을 사격했다. 나까도모가 가슴과 왼손관절에 관통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총탁으로 놈의 이마를 부셔놓았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조선인상인 진길풍은 길손의 도움을 받아 그날 저녁으로 룡정에 호송(구급치료중 이튿날 오전 11시에 죽음)되였다. 김용억은 강을 건너 승지촌쪽으로 숨어버리고 가지하라는 내꼴봐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하루구찌와 박연흠순사가 동량어구촌에 달려가 중국순경들에게 알려 현지에 다달았을 때는 나까도모가 이미 절명하고 현금과 우편물을 실은 말들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뒤미처 총령사관의 10여명 순사가 다달아 현지를 샅샅이 수색하니 자루가 부러진 구식렵총 한자루와 우편물 네개가 눈에 띄일뿐이였다.사건이 벌어진후 웅세와 준이는 즉각 명동촌으로 떠나갔다. 새날이 밝으면 웅세는 장가를 들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여있었던것이다. 이들둘의 과업은 거사가 실현된후 모집중에 있는 종군간호부처녀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는것이였다. 준희와 봉설이는 말을 지체없이 재박골로 몰아갔다. 재박골치기 동성참 산속에서 다급히 짐짝을 헤치니 일화 15만원이 옳았다. 순간 그들은 심장이 툭 멎는것만 같았다. 이 시각을 위해 그들은 그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긴장히 보냈던가.밤은 각일각 깊어갔다. 헌데 와야 할 국정이와 상호가 나타나질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두 사람의 마음을 휩쌌다. 방정맞게도 말들이 이따금 소리를 지르는데 웬일인지 그 소리가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그래서 말들을 쏴죽이자느니 죽이지 말자느니 하며 옥신각신하는데 삭정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국정이와 상호가 그들앞에 나타났다. 그들 둘은 말을 놓이고 줄창 걸어왔던것이다.이들 넷은 말들을 나무에 매여둔채 각기 돈짐을 나누어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여기서 와룡동까지 돌아서 약 80리 길인데 기어이 날밝기전에 와룡동에 가 닿아야 했다. 그들은 거의 닫다싶이 하였다. 목에서는 겨불내가 콱콱나고 땀이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들은 내처 길을 조이기만 했다. 이러구러 해란강을 넘고 삼봉동을 지났다. 조양천 부근에 이르니 뉘집에선가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부터 5킬로메터되는 길을 기다싶이 하면서 걸어 끝내 부르하통하를 건너 동틀무렵에 와룡동마을 서산너머에 가 닿았다. 상호의 아버지와 봉설의 아버지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있었다.약속한 지점에서 좀 쉬고난 뒤 그들은 다시 길을 다그쳐 저물녘에 의란구의 산속 한 귀틀집에 들어섰다. 거사를 목적으로 이미전부터 이 산속에 와 집을 짓고 대기하고있던 한 철혈광복단 단원이 그들을 뜨거이 맞아주었다. 이 단원은 그 사이 이미 로씨야연해주 뽀씨예트의 조선마을 지신허까지 다녀오며 길을 익혀두었었다. 검거선풍을 피하여 두어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돈을 가지고 연해주 해삼위로 가는것이였다.15만원탈취거사후 간도 전 지역에 걸쳐 대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과 국자가관할내의 와룡동이 거점이라는것이 드러났다. 국자가령사분관의 주임이 연길도윤과 교접한 끝에 일제총령사관과 국자가분관의 경부 2명이 지휘하는 순사 37명과 중국측군경 57명을 거느리고 와룡동에 달려들었으나 헛물만 켰다. 악이 난 적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15만원탈취거사의 전후 과정이다. 와룡동과 룡정을 경유하여 하승리와 부처골부근의 현지답사까지 마친 우리는 내내 흥분속에서 솟아나지 못하였다. 의란구 산속에서 두어주일 머무르다가 그 귀틀집주인의 안내하에 눈우 모닥불곁에서 사흘밤을 새고 나흘만에 연해주 뽀씨예트의 지신허에 이르자던 그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조선인마을 신한촌에 가자던 그들, 신한촌에서 15만원 돈을 가지고 홍범도장군이 계시는 추풍 당어재골로 가서 그의 휘하에서 무기를 사고 즉각 군대를 편성하겠다던 그들, 신한촌서 열린 조선인 독립단체회의에서 연해주 수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연변의 라자구에서 군대를 편성하자는 결정을 지었을 때 그것이 벌써 다 성공된것처럼 그토록 기쁨에 차있던 그들을 우리는 방불히 보는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신한촌에서 무장독립과 승전을 약속하면서 불렀던 노래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 했다.이천만의 동포야 일어나거라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잃었던 네 자유와 너의 권리를 원쑤의 손에서 도루 찾도록나가라 싸워라 대승의 월계관네게로 오도록 나가라 싸워라… … … …헌데 뉘 알았으랴, 연해주 조선인독립단체의 배합밑에 총구입이란 이 큰일이 바야흐로 성사될 무렵 그만 비밀이 탄로되여 음페지점이 드러났다. 낌새를 챈 일본놈들은 신한촌의 주숙지를 돌연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간 최봉설이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돌파하고 나머지 셋—윤준희, 림국정, 한상호는 불행히 체포되여 조선 청진감옥에 압송되였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독립투사들이 청진감옥에 투옥된후 연변과 연해주의 조선인독립단체들에서 자기 동지들을 구출하고저 각기 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박웅세, 김준, 렴길룡 등 셋을 조선 청진으로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연해주 해삼위일대의 조선인독립단체와 독립투사들도 적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당했다. 팔의 상처를 치료한후 최봉설이는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싸웠다. 그후 그는 치따당학교에서 레닌의 교시를 직접 들었고 한때(1920년대) 돈화현 액목일대와 왕청일대서 반일투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56년에 최봉설은 고향인 와룡동을 찾아 창동학원 옛터를 돌아보면서 옛전우들을 그리였다. (후에 구쏘련서 사망.) 1990년 5월에 최봉설투사의 맏아들이며 원 연변총공회 주석 최동현(그때 73살)과 그의 부인, 최동현의 친동생이며 구쏘련 우즈베크공화국 따슈껜트시 꼴호즈총공정사인 구쏘련공민 최단일(그때 53살)과 농예사인 그의 부인 한짜라 (그때 50살), 최단일의 아들 최리쨔(그때 15살) 등이 연변에 친척방문을 왔던차에 력사부문과 항일로선배들의 동행하에 15만원 탈취거사지점을 돌아보았다. 이번 답사길에서 우리는 재박골과 동성참, 해란강, 삼봉동, 조양천, 부르하통하, 와룡동 비밀지점, 의란구 산속, 로씨야에로의 산길 등은 비록 일일이 답사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길로 이어져 달려와 15만원탈취거사 투사들을 우리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하게 하고있다.
93    (12)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댓글:  조회:4790  추천:133  2006-07-20
바로 잡아야 할 우리력사(12)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리 함1920년 10월, 일본제국주의는 근 2만명에 달하는 정규부대를 연변 등지의 조선인집거구에 파견하여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살륙을 감행하였다. 사람들은 이 피비린 대살륙을 말할 때 일제놈들은 이르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고 말한다. 그 전형적 개괄이 바로 《3광정책》, 즉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기이다. 허나 력사를 보면 이는 어긋나도 크게 어긋난다. 더우기 닥치는대로 모조리 죽인다는 말은 통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3광정책》은 력사학가들이 후에 당년 일제놈들의 간악한 행위를 세가지로 개괄한것이지 일제놈들이 그때 3광정책을 만들어내고 그대로 행한것이 아니다. 이는 경신년 대토벌을 보면 리해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경신년대토벌 견증자들에 대한 현지취재를 통하여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1《일본놈들 때문에 숨도 바로 쉬지 못했습니다.…》1989년 6월 17일 오후, 연길시 새마을(新村)에서 순난렬사의 후대 조애숙(그해 77살)을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허두를 떼였다. 그리고는 가슴이 막히는듯 인차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지나 천천히 이야기를 터놓았다.조애숙은 충청북도 충주군의 한 천주교가정에서 태여났다. 그가 7살나던 해 겨울에 아버지의 이불짐우에 앉아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집은 곳이 연길현 팔도구 수북천(룡정시 팔도향 팔도촌부근)이였다. 그때 애숙의 아버지 조병일은 신의질을 하면서 천주교를 믿었지만 실상은 조선에서부터 활약한 열렬한 독립운동가로서 팔도구일대 독립무장단체의 책임자였다. 1920년 10월 하순에 일제토벌대가 팔도구일대에 덮쳐들었다. 이에 앞서 친분이 두터운 팔도구경찰서의 백순사(백인칠의 아버지)가 수북천에 와서 조병일을 보고 어서 피하라고 하였다. 그때 조병일은 누구나 다 피신하면 독립운동은 누가 하겠느냐며 피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무리 일본군이 그의 집에 주숙을 정하게 되였다. 그러자 그의 안해는 안절부절 못했다. 집안천정에는 독립군부대에 주려고 모은 양말, 신, 의복, 약품 등 물건이 있었던것이다. 다행히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병일의 신분이 드러났다. 어느날 저녁 놈들은 조병일을 붙잡아 학교로 끌고갔다. 이튿날 오후 그의 안해와 딸 애숙이가 호출을 받고 가보니 조병일은 놈들의 혹독한 고문으로 머리가 터졌는데 강당엔 피가 질벅했다.그의 안해는 구해낼 방법이 없음을 직감하고 남편의 부탁대로 교회당의 최신부를 모셔왔다. 천주교의 종부성사가 끝난후 국수집에 가서 국수 한그릇 받아왔지만 조병일은 물도 넘기지 못했다. 그들 모녀가 집에 와서 얼마안되여 총소리가 세번 울리였다. 애숙이는 이렇게 8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이튿날 조병일의 안해는 가을한 조이밭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딸 애숙이와 함께 대충 묻어놓았다. 그리고는 경찰서 백순사를 찾아 성당묘지에 모시도록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일본놈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세번 부른 사람이여서 다치지 못한다고 했다. 백순사가 이듬해 밭갈이에 시끄럽다며 재삼 제기해서야 겨우 허가를 받았다.조애숙은 69년전의 일을 회상하며 손등을 자주 눈굽에 가져갔다. 6월 21일, 우리는 조애숙, 심태순(조애숙의 외손녀)과 함께 팔도구를 찾아갔다.그날 우리는 조병일의 순난터와 수북천마을자리, 천주교회당, 성당자리 등을 답사하고 팔도촌의 권오승로인집에서 이 촌의 몇몇 로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그들은 팔도구일대서 성망높은 독립투사—조병일을 잊을수가 없다며 혀를 찼다. 그 자리엔 또 당년 일본토벌대에 피살된 리경찬투사의 딸 리기순(1989년에 74살)도 있었다. 리기순은 팔도구 수커리(쌍봉촌)출신인데 경신년대토벌 때 6살이였다. 그해 그의 아버지 리경찬은 30대의 사나이로서 조병일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팔도촌 건너 마을 수커리에서 일본토벌대놈들에게 체포되여 수북천으로 끌려갔다. 그는 수북천에서 조병일의 집마루기둥에 묶이워있다가 교회당 웃쪽 3층대바위에 가서 학살당하였다. 시체는 한달만에 찾아서 수커리뒤산에 겨우 매장했다고 한다.우리는 또 독립투사 김병렬에 대한 이야기도 감명깊게 들었다. 김병렬의 며느리 박복실(그해 69살) 등 로인들의 소개에 따르면 김병렬은 성당촌 사람으로서 조병일의 수하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일제토벌대의 심사를 받을 때 정신병자로 가장했다. 낮에는 분별없이 《애국가》 등 노래를 부르며 다니고 밤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소리치며 다니니 놈들은 깜짝 속히웠다. 김병렬은 늘 술에 취한척하면서 영어로 일본놈들을 욕했다. 이 무렵에 경찬의 안해도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야수들은 갓 해산한 그를 수북천 버들방천에 끌고가서 옷을 홀딱 벗기고 군도로 찌르는 형용을 하며 악랄하게 위협하였다. 넋이 날아날지경이였지만 녀인은 뻗쳐냈다. 그만큼 팔도구는 당년 독립운동의 주요한 활동지구였다. 1988년 10월 21일과 22일 왕청현 춘양진에서 전명준(그해 88살)로인을 취재할 때 그는 당년 팔도구에서 홍범도장군을 여러번 보았다고 했다.전명준로인은 당년 지방독립운동단체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평강군태생인데 18살 때 부모를 모시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그의 일가가 팔도구 수커리에서 살다가 목단천을 거쳐 의란구학교촌에 이사한 때는 1920년 가을이였다. 그때 마을의 호주인(戶主人)은 리씨라고 하는 60살좌우의 로인이였다. 모두들 그를 리주사라 불렀는데 원근에 성망이 높았다. 그때 그는 늘 팔도구로 다니였다. 후에야 알고보니 그는 조선독립운동가로서 그가 팔도구로 다닐 때는 꼭 회의하러 갈 때였다. 1920년 10월 어느날, 리주사 등 12명이 팔도구에 가서 긴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의란구쪽에서 나오는 일제놈들에게 몽땅 붙잡혔다. 놈들은 그들을 결박해가지고 가다가 어느 산에서 살해하였다. 리주사와 끌끌한 장정이 잃어지자 온 마을이 동원되여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이듬해 봄 햇풀이 머리를 들때에야 겨우 시체를 찾았는데 이 생매장된 시체들마다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하늘도 저주할 만행이였다. 그럼 팔도구와 의란구부근의 산에서 귀축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 대체 일본군 어느 부대일가? 로인들은 머리만 가로 저었다. 기억난다면 일본군이 노랗게 밀려들더라는것뿐이였다. 21919년 《3.1》운동이후 동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독립 지사들은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조선독립의 길에 나섰다. 통계에 따르면 동만지구만 해도 규모가 비교적 크고 무기가 겸비한 조선인독립무장단체가 7개 있었는데 대원은 2900여명에 달하고 두만강남부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운 차수는 1920년 한해만 해도 1651차에 달했다고 한다.적들은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언녕 1919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다그쳤던 조선강점군사령부는 1920년 8월에 전면적토벌계획을 제정하고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을 토벌조직자로 내세웠다. 그때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을 토벌에 끌어들일 타산도 계획에 들었다. 그리고는 10월 2일에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내고 이를 구실로 10월 6일부터 전면동원령을 내리였다. 토벌에 투입된 총병력은 1만 8000~2만명에 달했는데 그 주력부대는 라남주둔 제19사단이였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시지대, 아즈마지대 3개지대와 사단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여 물밀듯이 동만각지에 덮쳐들었다. 19사단소속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일대를 소탕하고 배초구와 왕청, 훈춘 등지 그리고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살해했다. 우에서 언급한 팔도구와 의란구의 수난자들은 바로 기무라지대의 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된것이다. 동만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압록강이북의 조선인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 《연변조사실록》에서는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인촌락에 대하여 위협공갈하여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채 불을 질러 태워죽이였다. 무릇 불속에서 뛰쳐나오는자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고 밝히였다.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는 《최근 3주일내에…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고 썼다. 훈춘시는 경신년대토벌에서 심한 재난을 당했다. 1988년 11월 22일 훈춘에 갔을 때 우리는 먼저 마천자향 포태촌의 김하익로인(그해 75살)을 찾았다. 《나는 경신향 회룡봉태생인데 경신년토벌때 백부 김홍석이 회룡봉에서 붙들려 금당에서 죽는것을 직접 보았수다.》그는 이렇게 허두를 때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백부 김홍식은 회룡봉 현립8소 교원으로서 지방에서 독립선전활동을 벌리며 의연금을 모았는데 놈들에게 살해될 때 29살쯤밖에 안되였다. 그날 놈들은 회룡봉과 그 일대에서 김홍석, 박현규 등 7명을 붙잡아 금당촌(경신진 금당촌) 숭실학교에 끌고가서 불태워 죽이였다. 김하익로인은 먼발치에서 이 비장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1992년 2월에 필자는 녀류작가 리혜선씨와 함께 두만강이주답사차로 방천에 갔다가 그때의 경신향 금당촌에도 가보았는데 당년의 순난터—숭실학교자리에는 그때의 기초돌하나가 그대로 박혀있었다. 당지 사람들은 혁명자들의 넋이 스며있다 하여 이 기초돌을 《귀신돌》이라고 불렀다. 훈춘시가지에는 당년 국내외에 이름떨쳤던 반일독립투사 황병길의 딸 황정일(1913년~1989년)이 살고있었다. 필자는 일찍 황정일로인을 찾아 황병길과 그의 일가를 둘러싸고 옹근 3일이나 이야기를 들었었다. 1920년 음력 4월 중순 황병길이 불행히 사망된후 그의 안해 김숙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권총과 태극기보따리를 목숨처럼 아끼며 잘 간수하였다. 그해 음력 9월 초나흗날 훈춘애국부인회 회장인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다른 곳에 옮기자고 내놓았다가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위급한 찰나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유지로 쌌기에 탈이 없었음)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것도 뒤지지 못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이날 아무것도 얻지 못한 놈들은 동네의 남자들만 열댓을 연통라자의 빈학교에 가두고 불을 지르려고 서두를 때 김숙경이 척 나섰다. 《이 사람들은 죄없는 사람들이얘요. 〈죄〉는 나에게 있으니 이 사람들을 어서 내놔요.》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났다. 다만 한 30살 되는 최현숙이라는 남자가 이에 앞서 뛰다가 총에 맞아죽었을뿐이였다. 이날 그녀는 놈들에게 끌려갔다가 36명 우리동지들과 함께 마적달아래에서 적들 총구앞에 나섰다. 기관총소사가 곧 시작될무렵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한 일본군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자 놈들은 36명 동지들을 순순히 내놓았다. 일본놈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는 모양이였다.김숙경이 한족형제들의 마차에 실려 연통라자의 자기집에 도착한것은 집떠난지 10여일후였다. 그해 음력 9월 초엿새날 일본군은 대황구에도 달려들었다. 마침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결의한 《단지동맹 (斷指同盟)》의 도끼, 목데기, 손가락마디가 발각되였다. 이는 그들이 손가락마디를 도끼로 자를 때 쓰던 물건들이라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교원 량병칠, 김하정이 체포되였다. 마을에서도 20여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나왔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 《이 물건들은 내가 감추어둔것이니 쏠테면 나를 쏘라.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다.》고 비호해 나섰다. 놈들은 김남극, 량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내놓았다. 이날 놈들은 김남극과 량병칠 두 사람을 북산기슭의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죽이고 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놈들이 물러간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을 껐기에 학교는 한쪽켠이 좀 탔을뿐이였다. 그후 사람들은 다시 학교를 수건했는데 그때부터 이학교를 《3.1》학교라고 불렀다. 황정일은 후에 김남극의 며느리로 되면서 대황구에서 항일활동에도 종사하였기에 대황구의 정황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일본침략군은 연통라자, 대황구, 회룡봉외에도 훈춘각지에서 대토벌을 일삼았다. 조선강점군 제19사단 이소바시지대는 훈춘에서 다시 3개 토벌대로 편성된뒤 10월 14일 밤중부터 훈춘일대에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훈춘 동부와 동북부의 28개 부락을 토벌하였다…제2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훈춘 일대의 허다한 부락을 토벌하였다…제3토벌대는 15일 훈춘 동북부와 동남부의 많은 부락을 토벌하였다…로씨야 원동지구에서 투입된 제11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의 토문자지대(12월 15일 로씨야경내로 퇴각)와 제13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은 제19사단의 이소바시지대와 배합하여 토문자, 로흑산과 라자구일대를 토벌하였다. 했으나 일제토벌대놈들은 가는곳마다에서 조선인반일독립투사들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3당년의 연길현 장암동(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은 일명 노루바위마을이라 하는데 경신년대토벌 그해 심한 토벌란을 겪었다. 당시 룡정촌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이였던 마띵은 노루바위골을 현지답사하고 《견문기》를 썼는데 그가운데 한토막은 이러하였다. 《나는 10월 31일(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진 장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하였다. 10월 29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그후 이 견문기는 서방 여러나라 신문에 널리 실려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노루바위골은 우리의 마음을 몹시 끄당기였다. 1991년 12월 10일 필자 일행은 마침내 노루바위골 답사길에 올랐다.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그때의 동성용향소재지로 간 우리는 7~8킬로메터를 좋이 걸어서야 이 향의 동명촌(동명 2대)에 이를수 있었다. 이 촌은 노루바위골 원골의 중간쯤에 위치한 마을로서 일명 삼구촌이라고도 불렀다. 해당조사자료에 의하면 지형은 여기서 다시 남북방 세개골로 갈라지는데 원골을 남골이라 하고 북쪽골을 북골, 중간골을 새골(사이골이란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구촌이라 부르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이날 우리는 동명촌에서 1.5~2킬로메터 떨어진 북골의 북동(동명3대)에 가서 김흥섭(1991년 72살) 로인을 취재하는가운데서 세개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그것은 남골, 북골을 각기 남노루바위, 북노루바위로 부른다는것과 새골은 다시 새골과 웃새골 2개 마을로 갈라지는데 경신참변을 당한 마을이 바로 웃개골이라는것이였다. 여러 자료들에서 말하는 장암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큰 의미로 볼때 장암동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엄격히 따지면 《웃새골》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참변을 당한것이 이 마을이고 당년 이 일대의 중심지가 웃새골이였기때문이다.김흥섭로인의 아버지 김경흥(광복직전에 70살로 사망)이 조선서 이고장으로 이주할 때는 19살이였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119살(1991년)이 된다. 100년전에 벌써 북노루바위에 자리잡았다는 말이다. 그때 이 일대에 조선인이 몇세대 되였으니 이곳 개척은 19세기 90년대 이전으로 되고있다. 조선인으로서 지금의 룡정에 첫발을 들여놓은것이 1884년이라고 할 때 이와 비슷한 시간이 된다. 김로인은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19세기 90년대초의 일이다. 수수를 좀 심어야겠는데 씨종자가 없었다. 마침 서남으로 35리쯤 가면 조선인마을이 있다고 하기에 그리로 가니 과연 우물가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다름아닌 우리가 일컫는 룡드레촌(룡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노루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였다. 하여 그때로부터 노루바위골에도 수수를 심게 되였다. 이주초기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귀맛당기는 일화였다.김로인은 경신년태생이다. 그가 태여나던 해에 웃새골에 20세대가량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7~8살 될 때에는 30여세대로 늘어났다. 후에 김로인은 자기마을력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허창호 등 로인들한테서 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상깊은것은 경신참변이였다.당시에 노루골에는 경신참변을 앞두고 한 엿장사가 나타났다. 그는 엿을 파는척하면서 조무래기들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는가고 물었다.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한 청년이 이 말을 듣고 의심이 들어 인차 국민회조직에 알리였다. 하여 마을청년들은 엿장사를 불러다 따지고 들었다. 그자는 모르쇠를 대였다. 그러자 청년들은 그자를 뻐드러지게 때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두워지니 더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시체》가 오간데 없었다. 이때 룡정에서 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파다히 퍼졌다. 독립운동투신자들은 분분히 피신하였다.그러던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30일)이다. 밤중에 웃새골에 이른 일제토벌대놈들은 동살이 잡히자 일제히 마을에 덮쳐들었다. 마을의 남정들은 모두 결박당한채 학교마당으로 끌려갔다.토벌대놈들은 32명 남자들을 학교마당에 꿇어앉히고 독립운동을 안하는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호통쳤다. 뒤이어 학교마을에 떠밀어넣고 기관총소사를 들이대고는 학교에 불을 질렀다. 뛰쳐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다시 떠밀어넣었다.일제놈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남자라고 보이는것은 무턱대고 총질했다. 그 서슬에 남쪽 령너머 덩때마을(동명 5대)에서 웃새골로 다니며 토기막을 하던 김씨(약 40살)가 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의 동명촌(당시 삼구촌으로서 물건너에 있었음) 남쪽밭에서 일하던 늪지골(북노루바위의 뒤너머 마을)의 리관준(30여살) 농민은 물건너 3호동네로 내달아 3부자가 사는 농막에 뛰여들었다가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뒤미처 농막에 이른 놈들은 악이 나서 그 농막과 곡식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웃새골이 당한 경신참변의 대체적상황이다. 마띵의 《견문기》등에는 10월 29일이라고 하나 마을사람들은 10월 30일로 가슴속에 아로새겼으니 구태여 캐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일제놈들에 대한 피의 원한이 가슴 한가득 괴여오른다.김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우리는 집마당에 나가 동쪽산을 바라보았다. 산기슭엔 과연 노루를 방불케하는 바위무리가 있었다. 노루바위라고 한것은 저 바위에서 인기되였다고 김로인은 덧붙였다. 이어 우리는 김로인의 안내하에 마을앞 개우물을 건너 새골에 접어들었다. 어구가 새골옛터라고 하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동으로 뻗은 새골을 따라 1킬로메터 남짓이 걸으니 웃새골옛터였다. 웃새골은 새골치기였는데 역시 밭으로 되여있었다. 밭가운데로 나가니 사기와 질그릇쪼각들이 가끔 눈에 띄웠다. 김로인은 당년의 그릇쪼각들이라고 하였다. 밭 웃쪽의 낮다란 산밑에 자리잡은 교회당 자리도 보이였다. 지금은 옛 모양이 력연했으나 터자리와 주위는 온통 나무판이였다. 아름드리나무도 가끔 섞이였다. 흘러간 력사속에 묻히며 해당조사자료를 펼치니 마을의 주민 모두가 예수교를 믿었다. 당시 국민회계통에서는 예수교를 외의로 지반을 닦았는데 웃새골은 노루바위일대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 되였다. 마을의 지방국민회책임자는 한국룡(당시 약 60살)과 그의 아들 한두현(당시 약 30살)이였다. 그시절 웃새골과 그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소리가 터져올랐다. 이 마을조직은 왕청현 봉오동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들이 모은 군자금과 무기 등은 지체없이 봉오동으로 넘어갔다.우리는 발길을 학교자리로 돌리였다. 금방 마을자리를 지나니 골짜기 왼켠에 있는 마른 옛 박우물터가 발목을 잡았다. 70여년 세월이 흘렀으나 박우물터는 돌하나 파손없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골짜기를 건너니 학교자리가 나타났다. 옛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항일로간부 량환준 등 로인들이 이 학교를 1914년에 예수교계통에서 세웠고 학교이름을 《사립영신학교》라고 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경신참변후 학교는 령너머 원골(동명 4대)로 옮겨갔다지만 옛모습은 여전했다. 산기슭에 닦은 터, 그 터를 받들어주는 돌담들이 정답게 안겨들었다.필자 일행은 학교자리에서 이윽토록 떠나지 못하고 남쪽켠의 학교밭(당지 사람들이 이렇게 부름)자리와 골짝너머 웃새골옛터, 교회당자리, 32인무덤산 그리고 웃새골의 정경을 한껏 되새겼다. 일제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운 우리 겨레가 장하게, 장하게만 안겨왔다.청산리전투후 연변의 독립군부대들은 활동무대를 잠시 지금의 로씨야경내로 옮기였다. 전국인민들의 견결한 항전과 연변인민들의 무장항격에 의해 일본침략군은 1920년 말에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전부 철거는 1921년 5월) 시키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 대살륙의 전후관계이다. 일본침략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죽이고 불사르고 지랄했지만 닥치는대로 모조리 잡아죽인것이 아니다. 어느 한 마을에 진주할 때엔 사전의 정보에 따라 반일에 나선 청장년 남자들을 어느 빈집이나 학교, 교회당에 처넣고 불지르고 기관총소사를 하였지 애매한 부녀자들이나 반일단체밖의 남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보이는 남자들에 대해 아이건, 어린애건 모조리 집안에 떠밀어넣고 살륙한것은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군대가 잘못되였다고 판단하고 피비린 보복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남자로 생긴건 모조리 잡아 죽인 경우는 많지가 않다.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력사의 진실이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진실로 말해야지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이고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족속들이라 하여 모조리 잡아죽이지 않은것을 모조리 잡아죽였다 해서는 안될것이다. 중국을 망라한 조선, 한국 등 일제의 철제아래 허덕인 아세아나라들이 일본정부가 력사교과서를 마음대로 외곡하는 현실을 두고 규탄할 때 규탄하는 우리들이 우리들로부터 사실을 과대하며 력사를 외곡해서야 되겠는가?! 흘러간 력사를 제대로 정시하며 진실로 말하는것만이 맑스주의유물론자의 립장과 태도가 아닐가, 사학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리라!
92    (13) 15만원탈취거사지점문제 (1) 댓글:  조회:3359  추천:127  2006-07-20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 (13)15만원탈취거사지점문제 (1)리 함 1920년 1월에 벌어진 15만원 탈취거사 지점문제를 두고 우리 사학계에는 주로 세가지 설법이 존재하고있다. 즉 동량어구, 부처골어구, 재박골(재바위골)이다. 그중 동량어구 설법은 이렇게 말하고있다.《1920년 1월 4일,…해가 질 무렵 동량어구에 나타난 송금일행은 제일 앞에 우편물을 실은 마바리와 은행돈을 실은 마바리를 세우고…오후 6시경에 룡정에서 약 15리 떨어진 화룡현 승지촌부근인 동량어구에 이르렀다. 이때 버들방천에 매복하고 있던 윤준희 등은 송금호송대에 불의의 습격을 가했다.》①재박골 설법은 1993년 8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룡정향토전설집— 《룡정전설》에 나타나고있다. 이 전설집의 《재바위골 15만원탈취시말》에는 이렇게 밝혀졌다. 《1920년 1월 3일, 동량어구 재바위골 술집에는 낯모를 학생과 농민들이 들락날락하였다. 그들인즉 지형을 탐지하러 온 〈결사대〉 대원들이였다. 지형을 정찰한후 그들은 두개 조로 나누었다. 최봉설 등 3명은 섬바위밑 아래쪽에 매복하고 윤희준을 비롯한 세 사람은 동량어구 재바위골 버들방천에 매복했다가 놈들이 포위권안에 들면 앞뒤에서 기습하여 일망타진하기로 하였다.》이것이 재박골설법이라면 부처골어구 설법은 15만원탈취거사의 주요참가자인 최봉설의 회억이다. 15만원 탈취거사후 최봉설,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등은 빼앗은 돈을 가지고 로씨야 연해주 신한촌에 갔다가 그들의 주숙지가 일제놈들의 돌연습격을 받았다. 이 습격에서 최봉설은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포위돌파에 성공하였다. 최봉설은 팔의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백파군과 싸웠다. 그뒤 그는 치따당학교에서 레닌의 교시를 직접 듣기도 하였다가 쏘련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1956년에 최봉설은 고향인 연길시 와룡동을 찾아 창동학원 옛터를 돌아보면서 옛전우들을 그리였고 부처골어구가 15만원탈취거사지점이라고 회억하였다. 1990년 5월에 최봉설투사의 맏아들이며 원 연변총공회 주석 최동현(그때 73살)과 그의 부인, 최동현의 친동생이며 우즈베크공화국 따슈껜트시 꼴호즈총공정사인 구쏘련 공민 최단일(그때 53살), 최단일의 아들 최리쨔(그때 15살) 등이 연변에 친척방문을 왔던차에 해당인사들의 동행하에 15만원탈취거사지점을 돌아보았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그들과 동행답사기회를 갖지 못하였다가 후에 그네들을 통하여 최봉설이 쓴 력사실화—《15만원탈취거사》를 받아보게 되였다. 구쏘련에서 출판된 조선문 이 책은 진실한 력사를 다룬 력사실화집인데 15만원탈취거사지점을 부처골어구라고 찍으면서 15만원탈취거사의 전후관계를 이야기화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세가지설법 모두가 자기의 도리가 없는것이 아니였다. 필요한것은 현지답사라고 느껴졌다. 이에 필자일행은 1990년도에 15만원탈취거사의 발자취를 따라 와룡동, 재박골, 해란강, 삼봉동, 조양천 등지를 돌아보았다. 그해에 와룡동답사에 이어 부처골어구의 신화 6대에 가보니 도로표식은 5킬로메터를 가리키고있었다. 여기서 큰길 따라 서남방향으로 산굽이를 조금 돌다가 륙도하를 건너면 재박골(신화7대)이고 재박골에서 산기슭을 따라 다시 남으로 1킬로메터 가량 나가면 하승리(원 광신향 승지 1대, 지금의 지신진 승지1대)마을이다. 필자일행은 하승리마을에서 박병선(90년도에 73살), 박병렬(90년도에 63살) 두 로인을 찾았다. 두 로인은 6촌간으로서 모두 하승리태생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때 조선회령서 이주해와서 여기를 개척한지도 90여년이 된다고 하는데 1920년초 당시에 10여세대 조선인들이 살고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길은 지금 위치가 아니라 지금의 부처골어구에서 산굽이를 돈후 륙도하를 건너 재박골에서 하승리쪽으로 올리뻗었단다. 륙도하동쪽 산굽이로 뻗은 지금의 신작로는 일제놈들이 이땅을 강점한후인 지난세기 30년대에 닦은것으로 알려진다. 하승리의 두 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필자일행은 재박골과 부처골어구를 답사하였다. 재박골에서 보니 룡정에서 남으로 펼쳐진 륙도하벌은 6킬로메터지점인 재박골부근에서 좁아지면서 신작로가 거의 갈지자를 이루었는데 달라자 명동촌과 승지촌사이 관문으로 되는 선바위가 환히 안겨왔다. 그래도 거리는 재박골에서 5킬로메터는 잘 되였다. 승지촌은 물건너 동남쪽 2킬로메터 지점에 있었다. 이때에야 우리는 당년 투사들이 선택한 지리적위치가 자못 독특하다는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거사후 와룡동, 의란구를 거쳐 로씨야땅으로 가야 했으니 재박골 남쪽의 달라자나 동량어구, 하승리 건너편 쪽은 취할바가 못되였고 룡정쪽은 더구나 말도 말아야 했다. 이런 몇개 방향은 일본놈들이나 중국측군경 경계가 삼엄하고 불리한 생소땅이여서 제일 좋기는 하승리아래마을 재박골어구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10여리 재박골로 빠지다가 동성참, 해란강을 건너 와룡동, 의란구로 가는것이였다. 이점을 그네들은 똑똑히 보아내고 사전에 길들을 모두 익혀두기까지 했었다. 여러 자료들이 그러하고 최봉설의 력사실화책이 그러했다. 와룡동, 부처골어구, 재박골, 하승리 답사를 거쳐 필자는 동량어구설을 부인할 근거를 찾았다. 동량어구설법은 일본의 《외무성경찰사》자료에 의해 15만원탈취거사 지점을 동량어구로부터 승지촌사이—강변도로 가까이로 인정했는데 이는 력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떄 신작로는 상기지적과 같이 지금의 강동쪽이 아니라 강서쪽 산굽이를 따라 이어졌으니 일본자료는 믿을바가 못되고 또 승지촌과 동량어구촌엔 중국순경들이 진을 치고있는데다가 이곳엔 15만원탈취후 빠져나갈 곳이란 없다. 이 지대를 아는 사람이라면 서남쪽으로 뻗은 용신, 백금행 신작로 쪽으로는 근본 해란강쪽으로 빠지지 못한다는것을 잘알고있다. 재박골설법은 지대로 보아 바람직한 지점이기는 하나 당년에 지금처럼 마을이 없었고 주말집도 없었다. 이제 남은것은 부처골어구이다. 이곳엔 마을도 있고 주막집도 있었다. 거리상 재박골보다 조금 떨어지기는 했으나 최봉설은 15만원탈취거사지점이 이곳이라고 긍정적으로 밝히였다. 15만원탈취거사의 직접적인 참가자여서 설복력이 강하다. 일제측의 해당자료에서도 동량어구라고 긍정적으로 밝히지 못한 형편에서 더욱 그러하다. 현지답사로 보아도 부처골어구에서 재박골로 곧추 빠지면 쥐도새도 모르게 된다. 최봉설의 회억이 이를 잘 알려주고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구자료로 보아 하승리와 재박골사이가 가장 현실적인 지점으로 다가선다.아래 15만원탈취거사의 그 나날에로 돌아가 보면 이 모든것이 잘 알려진다. 15만원탈취거사를 말하자면 아마 당년의 연길현 와룡동으로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참 찾은곳이 와룡동이였다.
91    (11) 청산리 백운평대참안??? 댓글:  조회:3902  추천:119  2006-07-17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11)청산리 백운평대참안???리 함일전에 필자는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순위로 《〈해란강대혈안〉진상》 이란 글을 사이트에 올린바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른바 《해란강대혈안》자체에 의문을 던지면서 이 《대혈안》에서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살해된 해란구의 혁명자와 백성이 1700여명이 아니라 170여명이라고 밝히였다. 헌데 올 여름이래 청산리전투나 경신년대토벌을 엮은 글들이 가끔 발표되면서 이런 과대서술이 다시 란무하는데 대하여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아래 청산리전투를 취급한 두편의 인용문을 보기로 하자.—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다.—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백운평참안을 다룬 두편 글의 해당 인용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과대서술. 웬간한 참안이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겠지만 우리 겨레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획을 그을 청산리전투의 백운평 주요전적지이니 단순히 스쳐 지날수가 없다. 백운평은 우리 겨레의 반일투쟁사상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여서 더욱 그러하다.그럼 어찌하여 백운평대참안은 놀라운 과대서술이라고 하는가? 이는 당년 력사의 진실을 펼쳐보이면 스스로 풀리는 문제이다.당년 오늘의 화룡시소재지—삼도구, 즉 충신장(忠信場)에서 청산리 백운평까지는 27-28킬로메터 거리였다. 이 50여리 구간은 충신장과 지금의 송하평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십리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에는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평양평(즉 청산촌), 백운평 등 조선이주민들 마을이 있었고 백운평 동북쪽에 베거우 (北沟)와 쟈피거우 등 조선인마을이 있었다. 그중 평양평은 조선의 평양이주민들이 이주한 고장이여서 평양평이라고 불리였는데 1984년에 출판된 《화룡현지명지》에 의하면 평양평이 청산리로 이름을 바꾼것은 1932년이라고 한다. 백운평은 평양평(청산촌)에서 서쪽으로 7~8킬로메터 떨어진 산간마을이였다.백운평마을의 형편과 청산리 전투때의 형편은 연변주보관서류국(당안관)의 혁명력사자료-3061에 잘 반영되였다. 이 3061에 반영된 자료는 당년 1920년 10월 백운평참안을 겪은 이 마을의 력사의 견증자들이 직접 구술한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에 의하면 당년 백운평마을의 인가는 50~60세대가 아니라 22~23세대였다.력사를 펼치면 1920년 10월, 송월평으로부터 청산리백운평에 이르기까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들이 쫙 덮히였다.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워낙 충신장아래 토산자 관문에 진을 치고 뒤따르는 일제침략군을 일망타진하려다가 그 일대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싸움터를 지금의 청산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충신장의 대진창에서 점심을 치르고 이 늘찬 수십리 서쪽골짜기에 들어섰는데 삼도구일대 국민회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을 거두어 부대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송월평의 조선사람들은 큰 소 한마리까지 잡았다. 그때 적들이 계속 뒤쫓는데서 서일과 김좌진장군은 송월평군중들이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부대를 인차 해란강을 거슬러 계속 올라가게 하였다.일제침략군이 새까맣게 밀려든것은 독립군부대가 떠난뒤였다. 통역 한놈이 송월평의 한 군중을 붙들고 독립군이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니 그 군중은 《우리 백성들이야 어찌 알겠소.》하고 대꾸하였다.이때 마을 뒤켠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적들은 김좌진과 동성동명인 한사람을 묶으며 야단법석이였다.애매한 군중이 욕을 보는 판이였다. 이때 일본말을 아는 마을의 김천일농민이 일본군장교한테 다가가 경례를 굽석하고 무어라 여차여차 하자 일본군장교는 고개를 끄떡이며 김좌진군중을 풀어놓게 하였다.이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송월평에서 전해진 일화이다.이미 전에(즉 송월저수지가 앉기전에) 전용뻐스로 수차 답사해보니 그때의 화룡현성에서 청산리까지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킬로메터를 반시간안에 달린 것이다.전용뻐스는 청산에 잠간 멈춰섰다가 베개봉밑으로 뻗은 서쪽 산길을 들추더니 10분만에 청산촌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백운평 마을옛터에 이르렀다. 백운평 마을터는 베개봉밑의 좁은 개활지에 놓였는데 개활지바닥으로는 작은 개천에 지나지 않는 맑은 해란강물이 골따라 졸졸 흐르고 북쪽켠엔 북쪽골이라 할만큼한 골이 가로 뻗어있었다.다시 력사의 현장에 다가서면 송월평을 급급히 떠난 북로군정서부대는 백운평마을에 잠간 머물렀다가 베개봉아래 직소(直沼)부근에서 밤을 새웠다. 직소란 로일령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이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이곳 바위에 이르러 내리 꼰지며 꽤나 큰 소를 이룬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때는 마가을이라 독립군장병들은 저마다 오스스한 한기에 시달려야 했다. 적의 대부대를 지척에 두고 모닥불 한무지 피울수 없었던것이다. 당년 력사견증자들의 회억자료에 의하면 새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사람들이 아침밥, 초신 등을 갖추어가지고 몇리 떨어진 계곡의 부대주둔지를 찾았고 식사가 끝난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 73련대의 400여명 일제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고 한다. 적들이 어디로 갔다오는가고 물으니 그들은 안도로 갔다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하니 모르쇠를 댔단다. 결과 놈들은 시름놓고 골안으로 올라가다가 우리 독립군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안되여 전멸당하고 겨우 마병 셋이 살아달아났다고 백운평마을 사람들이 말했다.해당자료들도 약 400명이 전멸당했다고 전하고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야스가와 (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련대의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얼마안되여 북로군정서 부대매복에 들어 거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야마다련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말았다. 이러고보면 당년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이 력사자료와 기본상 어울린다. 서일, 김좌진의 독립군부대는 청산리대첩 첫 전투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일본침략군은 미쳐 날뛰였다. 적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세대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력사의 진실이 바로 이러하다. 온 마을 남녀로소가 아니라 남자들만 말이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들에 대해 적들은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허나 남자들이라하여 모두가 죽은것이 아니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이 마을의 민간의사 리희보 및 그의 셋째아들 셋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이는 어찌된 일인가,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자료에 따르면 김응준어린이의 집은 마을 뒤켠의 외딴집이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쑤의 총창을 막아나서며 시간을 지연시켰기에 김응준은 달아나 나무밭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리희보는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리희보의 안해가 재빠르게 녀자옷을 입힌데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외 남자라는건 전부가 불속에 꺼꾸러졌다.이는 당년 일본침략군의 만행에서 살아난 백운평마을과 그 주변마을사람들의 진실한 증언이다. 이 자료가 지금 연변주보관서류국에 보관되여 있다. 하기에 필자는 백운평의 당시 인가를 50~60세대로, 한세대당 5명으로, 전체 살해를 300여명으로 지적한것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다. 모르면 추측으로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학자의 준칙아닌 준칙이건만 때로는 그렇지가 못하다.남자셋에 녀자들이 살아남은것은 백운평의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백운평일대와 청산리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는것은 모르는 소리이다. 20여년간 이면에 주의를 돌리였어도 백운평을 제외한 마을들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송월평 등지 군중들의 증실자료에도 이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백운평의 민간의사 리희보가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다가 살게 되였다는것도,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등 마을의 군중들이 청산리전투와 경신년대토벌을 증실한 자료를 보아도 이런 마을들이 일본놈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좋은 근거로 된다.
90    (10)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인가? (2) 댓글:  조회:3611  추천:111  2006-07-16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10)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인가? (2)리 함 2.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이라는 문제홍범도장군은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이 아니다. 이는 시비할 나위조차 없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력사사실을 모르는데서 인기된것이기에 당년 홍범도장군에 앞서 국제공산당 제1차, 제2차, 제3차 대표대회 등에 참가하여 레닌의 접견을 받은 조선인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 스스로 풀이된다. 흘러간 력사는 언제나 진실로 통하는 법이다. 지금까지 알려지는데 의하면 가장 이른 시기에 레닌을 만난 조선인은 강상주로 나타난다. 물론 이면에 대한 자료가 따르지 못하기에 누가 첫 사람이라고 찍기는 어렵지만 강상주는 1894년 울라지보스또크 태생이다. 그는 어부, 터널작업 토역군으로 일하던중 제1차 세계대전초기에 징병에 끌려 서유럽전선으로 갔다가 1918년에 모스크바 조선인로동자사회조직에 참여, 1919년에는 볼쉐위크당원으로 이해 3월에 국제공산당 제1차총회(즉 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까지 한다. 총회기간의 어느날, 레닌이 보통 총회대표자들이 식사하는 장소에 나타나 대표자들과 스스럼없이 롱담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회 어느 휴식시간에 한 대표자 집단이 레닌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제의하자 레닌은 동의를 표시하며 《멀리 떨여져있던 강상주를 가리키면서 합류할것을 요청했다》고 한다.④ 강상주의 추억속에 남은 위대한 혁명지도자 레닌의 풍모이다. 국제공산당 제2차 총회는 1920년 7월 19일부터 8월 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리였다. 조선인 박진순이 제2차총회조선인대표였다. 박진순은 1897년 연해주태생인데 그를 알자면 리동휘의 한인사회당을 언급해야만 한다.1918년 4월 28일(로씨야력으로 보면 5월 10일),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리동휘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인사회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였다. 한인사회당은 조선민족의 첫 사회주의정당인데 박진순은 이 당의 비서부장이였다. 이 당의 창립에서 리동휘를 도와 결정적역할을 논 인물은 저명한 국제주의혁명가이며 조선인인 김알렉산드라 녀사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논 또 한사람은 박진순이다. 박진순은 짜리로씨야시대에 벌써 모스크바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사회주의리론에 비교적 숙달한 인테리였다. 리동휘를 볼쉐위크당에로 이끈 길잡이는 다름아닌 박진순이다. 리동휘는 박진순을 통해 하바롭스크 볼쉐위크당의 지시를 전달받았으며 박진순을 통역으로 내세우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박진순은 조선혁명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조선인혁명가였다. 1919년 4월 25일, 리동휘는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에서 한인사회당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는 국제공산당에로의 가입신청을 위해 박진순, 박애를 대표로 내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박진순, 박애, 리한영이라고 알려진다. 박애는 한인사회당의 부위원장이고 리한영은 정치부장⑤이다. 그런데 쏘베트로씨야는 제국주의개입군들과 백위군의 봉쇄작전에 처했기에 모스크바행은 비밀리에 행해져야 했다. 도중 예까쩨린부르끄에서 박애가 병이 난데서 박진순은 혼자서 천신만고를 겪으며 1919년 11월경에야 모스크바에 이를수있었다. 어떤 자료는 박애도 모스크바에 간것으로 알려진다. 1920년 7월 19일부터 8월 6일까지 사이 국제공산당 제2차총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자 박진순은 한인사회당 대표로 이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결의권을 행사할수 있었다. 결의권은 국제공산당에 무조건가입을 성명한 당에만 주었다고 하는데 박진순은 리동휘의 당을 국제공산당성원으로 등록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대회에서 원동문제를 가지고 훌륭한 연설을 하여 대회참가자들의 이목을 끌고 레닌의 접견까지 받았다고 하니 그 시대의 조선인으로서 참으로 희귀한 일이 아닐수 없다.보다 경의로운것은 제2차총회기간 찍은 사진들 가운데 레닌의 집무순간이 담긴 사진하나가 있는데 레닌의 곁에서 사진기정면을 진지하게 주시하는 젊은 조선인이 바로 박진순이라는 것이다. ⑥1919년 8월 30일,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김립과 사위 오영선 등과 함께 상해로 갔다. 림시정부는 이해 4월 10일에 수립되였는데 이 정부에서 리동휘는 처음 군무총장으로 있다가 몇달후에 국무총리로 추대되였다. 이해 10월, 리동휘는 안창호, 려운형, 리동녕, 리시영, 신규식 등 요인들과 회합을 가지고 모스크바 국제공산당 2차대회에 대표를 보내여 레닌정부와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독립운동자금을 얻어보자고 하였다. 그 대표로 려운형, 안공근, 한형권이 선출되였는데 결국 리동휘는 정사에 능한 한형권만을 밀파하였다. 이렇게 되여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가서 먼저간 동료당원 박진순 등의 협조로 레닌의 접대를 받았고 독립운동 자금 60만루불(40만루불이라고도 한다)을 받았다.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였다. 이르크쯔크파의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여 제3차총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 앞서 이들은 로씨야 공산당대표 슈미야스끼의 도움으로 5월 말에 레닌을 만나게 되였다.⑦1921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서로 대립하고있던 리동휘의 상해파와 이르크츠끄파는 1921년 5월에 고려공산당 창립총회를 가지고 전체조선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당으로 떠올랐다. 총회는 남만춘 등을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대표로 선출하였다. 남만춘은 1892년 극동지구의 아무르주 태생이다. 그의 혁명활동은 학업과 더불어 시작되였는데 1920년 1월에는 이르크쯔르크에서 창설된 국제공산주의사단의 참모장 책임을 맡았다. 같은해 3월 그는 이르크쯔크 도당위원회 소수민족부장을 맡아나섰다. 한명세는 연해주 태생이다. 그는 1917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에 입당했다가 이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알고 퇴당하여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총회에 참가하고 총회중앙위원과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대표로 선출되였다.상기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은 이렇게 모스크바에 가서 국제공산당 제3차총회에 참가했고 레닌의 접견을 받은 조선인으로 되였다. 총회에서 남만춘은 장편연설을 하여 고려공산당의 립장을 천명하였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기간 모스크바와 뻬제르부르그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리였다. 홍범도장군은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가 레닌을 뵈울 기회를 가진것 같은데 한명세는 또 극동민족대회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고 《레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행운》⑧을 지니였다. 진짜 행운스럽게도 두번이나 레닌을 만난 조선인으로 되였다. 레닌을 두번씩이나 만난 사람은 한명세뿐이 아니다. 리동휘 한인사회당의 박진순도 또 한번 레닌을 만난 영광을 한 몸에 받아 안았다. 두번째는 혼자가 아니라 리동휘 일행속의 한사람으로 나타났다. 1921년 5월에 리동휘는 조선국내와 중국 동북, 로씨야의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 등지의 대표들 참가하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당재건을 선포하고 당선언을 채택하였다. 대표자회의는 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리동휘, 박진순, 홍도를 선정하였는데 리동휘와 박진순은 이해 6월말에 상해를 떠났다. 바다길을 택해 인도양, 프랑스를 거치는데서 11월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할수 있었다. 홍도는 할빈, 치따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렀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기간 그들은 국제공산당 관계자들과 활발한 접촉을 가지면서 국제공산당의 수령 레닌을 만나 뵐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드디여 11월 26일(28일?) 오후 다섯시에 레닌이 리동휘 등 대표를 회견하련다는 통지가 전해졌다. 국제공산당은 리동휘의 당을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조선공산당으로 인정하였다. 아래 리동휘가 지도한 대표단의 통역 자격으로 레닌과의 회견에 참석한 A.A.김의 회고담을 그대로 펼쳐보기로 하자. A.A.김은 1900년에 연해주 하산구역에서 태여났는데 1921년 5월에 이르크쯔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총회에 참가하고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 가게 되였다. 《…때는 1921년 11월이였다. 나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와의 관계를 위해 도착했던 조선인사절단의 비서자격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우리 공산당의 차후활동과 관계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였다. 우리는 이제 극동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떠나기 이전에 우리의 경애하는 지도자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의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지게 되였다. 우리의 전화신청에 대해 곧 레닌이 조선혁명가인 우리 사절단의 대표 리동휘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회답이 왔다. 회견은 저녁 5시로 정해졌다. 회견에 늦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시간전에 크레믈리궁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네사람이였다. 리동휘, 홍도, 박진순, 그리고 나…우리는 커다란 방으로 통하는 레닌의 집무실로 안내되였다. 우리 모두는 대단히 흥분했다. 여러 반대자들과 투쟁했던 백발의 리동휘도 흥분했다. 다른 동무들도 흥분했다. 나 역시 흥분해 있었다. 내 임무는 통역이였다.문이 열렸다…막역하고 자애로운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꿈을 꾸듯이 지도자의 손을 잡았다. 레닌은 우리의 손을 두손으로 쥐면서 우리모두와 따뜻하게 인사했다. 그는 조선식 악수례법을 잘 알고있는듯 했다. 그리고 나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공산당원들을 만나게 되여 정말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등나무 팔걸이의자에 앉더니 그는 손짓으로 우리에게 반대편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우리에게는 30분동안의 회견시간이 주어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곧 회견에 들어갔다. 리동휘는 조선어로 말했다. 그는 우리가 레닌의 추종자로서 블라지미르 일리치를 만나러왔기 때문에 레닌과 대단히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레닌은 미소를 띄면서 솔직하게 대답하자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뒤 레닌은 직선적이면서도 공손하게 자신은 극동지방의 제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과 린접국가들의 상황에 관해 상세하게 알려줄것을 요구했다.우리는 될수있는대로 간결하게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적상황을 설명했다. 우리의 정보전달은 간간히 블라지미르 일리치의 예기치 않은 질문으로 중단되였다. 회담과정은 대단히 푸근하고 격의없는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레닌은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이 조선에서 지나치게 탐욕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식민정책에 관해 주의깊게 경청했다. 우리는 책상에 놓여있는 지도를 펼쳐서 조선의 철도배치와 철도구간을 블라지미르 일리치에게 설명해주었다. 또 전차로선의 부설, 일본식민주의자들의 공장개설 등도 알려주었다…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조선 공산주의지하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표명했다. 레닌은 1919년 3.1봉기의 패배원인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나서 리동휘에게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조건에 관해 캐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화의 중심지에서 살고있는 이때에 당신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추적을 당하면서 산악과 숲을 따라 표류하고 있구려. 그대들을 위해 국제적원조를 조직해야겠군요.〉이때 한 녀성이 들어오더니 회견시간이 지났다고 알려주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회견시간을 25분 연장하겠다고 말했다.레닌의 책상에는 문서꾸러미가 놓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예전에 발송했던 우리의 정보문서를 지적했다. 블라지미르 일리치는 통 그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고 사과했다.》A.A.김의 이 회고담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리동휘편에 실리였는데 원문은 《태평양의 별》하바롭스크., 1926년 1월 22일자이다.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닌은 하나하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리동휘의 손을 특히 오래잡으며 믿음과 희망을 안겨주었다.이로부터 우리는 홍범도에 먼저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레닌을 만나보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주요한 도경은 국제공산당대표대회거나 기타 대회등이였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1919년, 국제공산당 제1차 총회에서 조선인 강상주가 레닌의 접견을 받다.▲1919년, 조선인 한형권이 리동휘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에 갔다가 레닌의 접견을 받다.▲1920년, 국제공산당 제2차 총회(7월 19일—8월 6일)에서 조선인 박진순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1921년, 국제공산당 제3차 총회(6월 22일—7월 12일)기간 조선인 남만춘,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 ▲1921년 11월 26일, 리동휘, 박진순, 홍도, A.A. 김 등 넷이 레닌의 접견을 받다.▲1922년, 로씨야 극동민족대회( 1월 21—2월 2일)가 모스크바에서 열렸을 때 조선인 한명세가 또 한번 레닌의 접견을 받다. 홍범도장군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가 레닌의 접견을 받은것으로 알려진다.여러 자료를 통해 살펴 본, 조선인들이 레닌을 만난 력사사실들이다. 분명히 밝힐것은 이는 필자가 찾은 자료의 범위내에서의 사실이지 레닌을 만나본 조선인의 전체가 아니라는 저이다. 이밖에 레닌을 만나 본 조선인들이 더 있을수 있으나 필자는 아직 이 이상 자료를 더 접촉하지 못했다. 어찌하든 홍범도장군에 앞서 레닌을 만난 조선인들이 수두룩하다는것은 드팀없는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주 해:①《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 126페지②동상서 90페지③홍범도장군(한어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9월, 제221페지④《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133-134페지⑤한국공산주의운동사(1), 제167페지⑥《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 제128페지⑦동상서, 제37페지⑧ 동상서, 제 139페지
89    (9)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인가?(1) 댓글:  조회:3164  추천:125  2006-07-15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 (9)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인가?(1)리 함최근년래 우리 학계와 한국 학계, 구쏘련 학계에서는 당년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문제에 대해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있다. 이런 견해와 력사의 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홍범도장군을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으로 오인한다. 력사의 진실을 말할라치면 홍범도장군은 사실 레닌을 만난 첫 사람이 아니며 장군에 앞서 레닌의 접견을 받은 조선인들이 수두룩하다.아래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났다는 문제와 레닌을 만난 첫 조선인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1.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났다는 문제구쏘련에서:구쏘련의 조선인력사가 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은 일찍 로어문으로 《일제하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그후 오래동안의 기다림끝에 이 로어로 된 책은 한국의 력사비평사에 의해 1990년 8월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였다. 역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책의 저자 마뜨베이 김은 《이 책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운동주체의 한 사람이였고 운동주체의 립장에서 작성된 자료를 리용》하고 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베리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들은 극동에서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라고 밝히면서 리동휘, 홍범도 등 인물 72명을 소개하였다. 어쨋든 이 책은 구쏘련국적을 가진 조선인력사가에 의해 씌여졌다는 점에서 중요시되고 있다.책의 저자 마뜨베이 김은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서 리동휘와 시베리아 지구의 걸출한 조선인녀혁명가 김알렉산드라에 이어 홍범도장군을 취급하면서 장군이 레닌을 만났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이렇게 쓰고있다.《1921년 홍범도는 레닌의 발의에 따라 소집된 극동민족대회의 대표로 발탁되였다. 홍범도는 다른 대표들과 함께 레닌과 만났으리라는 추측도 있다.》①보다싶이 마뜨베이 김은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 이는 쏘련국적을 가진 조선인력사가가 썼다는 점에서 홀시되고 지날 일이 아닌것 같다. 마뜨베이는 1919년 7월에 벌써 울라지보스또크 볼쉐위크지하당 조직의 당원이였다.②구쏘련의 조선인작가 김기철선생은 《홍범도장군의 전투려정과 쏘련에서의 만년생활》③이라는 글에서 얼마전에 끄질—오르다시 고문서고(古文書庫)에서 홍범도장군이 친히 쓴 리력서와 자전을 행운스럽게도 찾아냈다면서 장군의 리력서와 자전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리력서의 공로와 장려란에는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권총 한자루와 100루불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자전에는 《1921년 11월에 나는 조선유격부대 대표단에 참가하여 모스크바에 이르러 레닌동지에게 사업을 회보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홍범도장군이 확실히 레닌을 만나 보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리력서와 자전에서는 누구에게서 권총과 돈을 받았는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김기철선생의 이 글은 구쏘련의 1989년 4월 11일부 조선글신문 《레닌기치》에 실린 글이다. 한국에서:한국의 젊은 교수 고 고송무선생은 1990년에 출판한 저서 《쏘련의 한인들》에서 독립운동가의 한 례로 홍범도장군을 취급하면서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문제를 객관적으로 시비하고자했다. 고송무선생은 필자와 교분이 있는 분으로서 1947년 충남 금산출생이다. 1967년에 핀란드 헬싱키국립대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한후 그는 선후로 동대학의 학사학위, 석사학위, 대학박사학위와 동대학 국가박사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의 동아시아학과 초대 정교수로 초빙되였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유럽을 류학하고 한국국적 소지자로서는 최초로 쏘련 해당부문의 공식초청(1989년)을 받았다. 한편 그는 구쏘련의 조선인들에 대해 짙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차에 1990년 2월에 《쏘련의 한인들》을 펴내였다.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쓰고있다.《홍범도가 과연 레닌을 만났는가 하는 문제는 쏘련 학계에서 많은 관심거리로 되고있다. 이 역시 확실히 만났다고 서술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있지 않으나 김세일선생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자료들에서는 홍범도가 레닌을 만났음을 증명하는 물증들이 있음을 1989년 5월 하순 쏘련 여행시 필자가 직접 확인했다… 홍범도가 모스크바에 갔었던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로는 1921년 붉은 광장에서 부죤늬 모자(꼬깔형의 일종의 군대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홍범도가 레닌을 만난것이 확실하다면 이동휘의 경우와 거의 같은 시기가 될것이다.》이 단락에서 저자는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났는가하는 문제가 쏘련학계의 관심거리로 된다면서 만났다는 확실한 자료는 그때까지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으나 김세일선생의 자료는 만났음을 증명하는 물증들이 있다고 피력했다. 저자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수가 없어 《만난것이 확실하다면》같은 필법을 쓰고있다. 김세일선생은 작가로서 구쏘련에서 홍범도장군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에 기틀을 마련한 분이였다. 연변에서:고 강룡권선생은 생전에 연변력사연구소의 연구일군으로서 1992년에 《홍범도 장군》이란 저서를 펴내였다. 이 저서에서 강룡권선생은 홍범도장군이 대회기간에 레닌의 친절한 접견을 받고 레닌동지한테서 권총과 100루블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보매 홍범도장군의 리력서와 자전의 해당구절 답습이지 새로운 발견이 아닌것 같다. 강룡권선생의 저서는 또 레닌의 접견을 받은 홍범도장군의 《일지(日志)》를 인용하고있다. 《…나도 레닌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나는 레닌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서 레닌을 뵙고 그이의 물음에 대답했다… 또 레닌과 함께 기록편을 찍었다.》이 일기가 사실이라면 의심할 나위도 없이 믿어야 할것이지만 필자는 일기의 출처에 대해서는 감감이다. 구쏘련의 조선인작가 김기철은 상기글에서 홍범도장군에게는 워낙 손수 쓴 일기가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일기를 기초로 하여 쓴 장편소설 《홍범도》를 탈고한후 얼마안되여 옷을 씻을 때 웃옷주머니에 넣었다가 그만 잘못되였다고 썼다. 그러면서 이는 《크나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고 개탄하였다. 그러한 일기가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타났는지 필자는 모르고있다.아무튼 상기에서 보면 우리 학계나 한국 학계, 구쏘련 학계에서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난 사실을 회피하거나 확실히 긍정하지 못하거나 장군의 리력서와 자전을 실례로 레닌을 만났다고 주장하고있다. 이 리력서와 자전으로 보면 레닌의 접견을 믿어야 할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 확실히 그렇다고 긍정하지 못하는 견해가 존재하는것도 사실이다.
88    (8) 김순희렬사전기에서 제기된 몇가지 문제 댓글:  조회:3957  추천:123  2006-07-13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 (8)김순희렬사전기에서 제기된 몇가지 문제리 함돌이켜보면 20여년전의 일이다. 대학재학시절에 필자는 항일투쟁사 현지답사와 취재를 시작했었는데 첫 답사지가 화룡현 약수동이였다. 약수동과 서성, 룡정 등지에서 력사의 견증자들인 박동활, 김승룡, 리종빈, 손성찬, 황옥순, 차정희 등 로인분들을 취재하고 항일로간부인 량환준선생을 찾아 뵙고 해당자료를 깊이있게 탐구하는가운데서 약수동의 항일투쟁력사를 체계적으로 그려낼수 있었다. 김순희렬사가 그 가운데의 한부분을 이루었다.약수동항일투쟁사연구는 해당연구부문과 성, 주 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분야의 깊은 중시를 받았다. 그때 성, 주 부녀련홥회에서는 한창 부녀운동사연구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한데서 자치주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조의 리결사주임(현임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상임 부주장), 김영홍(자치주 래신래방국 주임)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게 되였고 성부녀련합회의 녀성간부 여럿이 수시로 필자를 찾았다. 성 부녀련합회 부녀운동사의 장정이 그 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우린 연길에서도 만났고 장춘에서도 만났다.1983년 2월 13일 음력설날에 필자는 장정의 전화요구에 따라 “성부녀련합회 장정에게 보낸 편지”, 즉 “김순희렬사에 관하여”를 써서 띄웠다. 이에 앞서 필자는 대학 3학년때 “김순희렬사의 보도에 대하여”를 써서 해당부문에 띄웠으며 신문과 방송에서도 보도를 해주었다. 이는 모두 20여년전의 일이다. 필자의 노력으로 김순희 1931년 희생설과 최후는 력사의 본래면모대로 돌아섰다. 헌데 지금까지도 어떤 이들은 이전의 제한된 력사전기에 따라 김순희희생을 1932년 봄으로 취급하거나 과장, 허구된 최후를 그대로 답습하는 페단이 존재하고있어 혼란을 가져오고있다.아래 조선족항일렬사의 대표인물로 떠오른 김순희렬사전기에서 제기된 몇가지 문제를 다시 언급해보기로 하자.1. 김순희래력문제:최현숙의 정리는 문학식으로 되였는데 렬사를 안도현 소사하사람으로 보았다. 무슨 근거로 이러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부동한 견해들도 있어 홀시할수가 없다. 당년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이였던 황옥순은 화룡현 이도구 수성촌에서 1932년 봄에 약수동으로 가서 한동안 활동하였는데 그때 손태익의 본처는 병사하고 오누이를 거느린 홀애비였다고 한다. 그때 공청단평강구위서기 안정로는 “손태익이 처가 없는데 하나 소개할가?”하는 말을 수차 했고 얼마후 김순희가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섰다고 한다. 지난세기 80년대초반에 필자는 황옥순녀사를 자주 찾았는데 그떄마다 황녀사는 이 말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김순희는 룡정에서 조직선을 따라 온 중공당원이였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공청단구위 서기 안정로의 말이였다고 한다. 안정로는 룡정중학교출신으로서 룡정의 지하당조직과 밀접한 련계를 가진 혁명자였다. 보매 김순희는 지식인티가 다분했고 옷차림도 농촌차림이 아니였다.공청단평강구위 부녀위원 차정희녀사도 1932년 봄에 약수동에 갔을 때 김순희가 없었고 얼마후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선 녀자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순희를 안정로가 약수동에 데려왔으며 룡정방면이 옳다고 지적하였다.상기 두 녀사분의 회상에 따르면 김순희는 확실히 안정로가 룡정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안정로와 김순희는 룡정중학시절에 이미 잘아는 사이였다. 이런 실례는 가끔 찾아볼수가 있다. 당년 연길현 봉림동에서 활동한 항일투사 리용국(공청단동만특위서기와 왕청현위서기를 력임)은 투쟁의 수요에 따라 대성중학교출신인 김정길을 룡정에서 봉림동에 데려갔다. 모두 조직선을 통해 한 일들이였다. 김순희도 이런 관계로 약수동에 들어섰다.허나 김순희가 고향이 어디며 신분이 어떠하며 래력이 어떠한가를 누구도 알지 못하고있다. 황옥순, 차정희 녀사가 모르며 약수동사람들이 모르며 손태익의 두 자식들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보아 연변출신의 렬사들은 래력이 밝혀지며 가족관계가 나타나기가 십상인데 전국적으로 선전되는 김순희렬사는 지난5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투사인데 래력이나 가족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한 비밀로 남을것 같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필자는 김순희가 로씨야 연해주에서 온 사람이 아닐가 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를 약수동에 데려온 안정로가 바로 연해주출신이였다.2. 김순희가 약수동에 나타난 시간:김순희는 1932년 봄에 약수동에 나타났고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섰다. 처녀로서 오누이를 가진 남자와 결혼했던것이다.3. 희생된 시간:1932년 봄 희생설은 력사사실과 어긋난다. 준확한 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 (양력 12월 1일)이다.4. 최후의 상황:김순희렬사의 최후에 대하여 이미 1981년 4월에 쓴 한편의 글에서 언급한바 있기에 구태여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분명한것은 적들이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위협할 때 김순희가 척 나선것이 아니라는 점이다.김순희렬사에 대해 필자는 20여년이나 지켜보았다. 일반 렬사면 틀린부분이 있어도 그러려니 지나치겠지만 김순희렬사는 다르다. 김순희렬사는 지난 50년대부터 선전되고 전국적인 렬사전기종합에도 오른, 조선족항일렬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여서 그저 지나칠수가 없는 실정이다. 지금도 때론 력사를 모르는 문인들이 렬사에 대한 해당자료와 연구동태를 모르면서 최현숙의 해당 글을 그대로 옮겨놓으니 가끔 혼란이 일어날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글 쓰는 이들에 따라 재현될수도 있기에 김순희렬사전기에 대해 시정할것은 시정하면서 밝히는작업은 매우 필요한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아무튼 김순희렬사에 대해 실사구시의 원칙대로 행했으니 시름이 놓인다. 지금이나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뿌듯하기만 하다.부록1: 김순희렬사의 보도에 대하여80년대에 잡아든후 우리 글, 우리 말 신문잡지와 방송들에서는 우리 조선족항일렬사들의 전기를 륙속 취급하고 있다. 우리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김순희녀사도 그 가운데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족항일녀성영웅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장렬한 최후에 대한 보도는 력사사실보다 꾸밈이 있어서 진실하지 못하게 되였다. 력사사실을 진실하게 쓰는것은 영웅인물을 존중하는것이며 더우기는 당의 실사구시의 작풍을 견지하는것이다.최근에 보도된 김순희렬사의 영웅사적들은 다음과 같이 되여있다.1979년 《길림청년》10~11호에 실린 《죽어도 굴하지 않은 김순희》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씌여졌다. 1932년 3월 4일, 돌연히 약수동에 덮쳐든 일제 《토벌대》는 약수동적위대들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헛물을 켠 적들은 온 마을의 부녀들을 붙들어놓고 적위대의 행방을 알려한다. 부녀들에 대한 위협공갈이 로골화되고 무시무시한 참살이 눈앞에 박두하자 김순희는 더는 참을수 없어 부녀들속에서 결연히 나선다. 1980년 10월 26일부 《연변일보》에 실린 수필 《불멸의 자욱》에서의 김순희는 한층 더 발휘되고 있다. 《1932년 봄의 어느날, 일제침략자들은 유격구를 소탕하고 수백으로 헤아려지는 무고한 백성들을 붙잡아다가 총칼앞에 세워놓았다. 그들이 금시 무참하게 참살될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자기의 한몸으로 붙잡힌 군중들을 구원하자고 두주먹을 부르쥔 김순희는 분연히 적들앞에 나타났다… 당의 비밀을 루설하라고 조겨대자 김순희는 추호의 주저도 없이 혀를 물어 끊었고 유격대가 간곳을 쓰라고 을러메자 그는 또 오른손의 다섯손가락을 몽땅 물어 끊었다. 나중에 그는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는 사형장으로 떳떳이 걸어 나갔던것이다.》1981년 3월 8일부 《길림일보》의 《항일녀영웅—김순희》에서도 그러하다. 어떤곳에서는 필자의 뜻에 따라 이러저러한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우에 언급한 글들과 기본상에서 같다. 올해에 들어와서 한 연변인민방송국의 방송도 상기와 같이 보도되였다. 그렇다면 김순희렬사의 최후는 과연 어떠하였는가?김순희가 희생된 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이지 1932년 3월 4일이거나 1932년봄이 아니다. 항일의 유서깊은 그제날 화룡현약수동은 이름난 항일근거지의 하나로서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쏘베트정부가 세워졌던 고장이다. 당년에 중공평강구위와 그 직속기관들이 약수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공화룡현위도 한때 약수동에 거처했고 동만특위의 주요간부들도 때떄로 약수동을 찾았다.약수동에 《큰둥지》가 들어 박혔다며 일찍부터 냄새를 맡고있던 일제투도구령사분관에서는 1932년 음력 10월 22일의 제1차토벌에 뒤이어 2차토벌을 개시했다. 음력 11월 4일, 날이 푸름푸름해오자 적들은 이미 마을가까이에 있는 조개산에 노랗게 올랐다. 조개산보초선에서 발견했을때는 벌써 늦었다. 전날밤의 어둠을 타서 세린하쪽으로 감쪽같이 기여들었던지라 마을에서 몇리 떨어진 도끼지팡(지금의 진화)의 첫보초선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것이다. 급보를 받은 마을의 적위대들은 선후로 몸을 감췄지만 앓고 있거나 마을주위에서 보초를 서던 적위대원 몇몇은 피하지 못하고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변절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지하조직명단이 토벌대의 손안에 들어갔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집들마다엔 삼단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점심이 되자 혈안이 되여 미쳐 날뛰던 토벌대와 그 주구들은 해산달이라 피할래야 피할수없어 집에 남아있던 김순희를 데려다 마을의 몇몇 로인들과 같이 점심을 끓이게 했다. 김순희는 별수없이 반찬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때 주구들이 몇번이고 들어가서 이것저것 캐여묻는품이 아무래도 좋은일이 아니라고 느낀 그 자리에 있던 정명화는 말린 가지를 주면서 얼마 떨어진 허룡남(적위대원) 집으로 피신하라고 권했다. 그가 금방 허룡남의 집에 들어서자 뒤따라 더러운 마수가 뻗쳐갔다. 했으나 그자들은 오산하였다. 악에 바친 일제주구들은 야만적인 첫고문을 들이댔다. 손가락사이마다 네모난 참대저가락을 끼워넣고 꽁꽁 동인다음 모가난 절을 마구 틀었다. 나중엔 묶어서 정태준네 마당으로 끌고갔다. 정태준(명의상 호제회회장이였지만 일찍부터 아들딸들을 혁명에 내보내고 지하사업에 발벗고 나섰던 공산당원) 등 6명은 이미 잡혀있었고 마을의 로인들도 마구다지로 끌어왔다. 인피를 쓴 승냥이들은 김순희를 널판자우에 묶어놓고 다시 널을 만삭이된 배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앞뒤에서 널을 마구 누르며 뜀질하며 대라고 조겨댔다. 원쑤에 대한 끝없는 증오로 타오르던 김순희의 이글거리던 두눈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사람이 잘못되면 무엇을 알아내지 못할가봐 겁을 먹은 승냥이들은 나중엔 고추물을 들이댔다. 그래도 그에게선 아무런 단서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맥이 진한 그자들이 고추물 가지러 나간 잠간 사이, 무엇보다도 조직의 비밀을 목숨보다도 더 중히 여긴 김순희는 자기의 혀를 물어끊었다. 고추물을 다시 부어 넣으려는 순간, 그는 붉은 선지피와 함께 끊어진 혀를 확 내뱉았다. 절망에 빠진 적들은 야수적인 본성을 드러내고말았다. 졸개들을 시켜 마당에 있던 조이짚을 집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한편 마당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문마다 열어제끼고는 정태준 등 6명을 정주칸에 끌어다 세워놓았다. 기관총련발사격소리와 함께 우리의 동지들은 하나하나 쓰러졌다. 널판자우에 묶이운 김순희에게는 여섯놈이 달려들어 총창으로 찔러 웃방에 떠밀어놓고 처마끝마다 돌아가며 불을 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조사,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김순희의 최후는 바로 이러했다. 이는 한두사람에게서 취재한것이 아니다. 이로부터 보면 김순희렬사에 대한 상기보도는 잘되지 못한것 같다. 문학작품이라면 다른 문제겠지만 력사인물의 전기에서는 허구가 용인되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력사인물에 대한 형상을 높인다고 하기보다 도리여 그 형상에 손색이 가게 되며 지어는 영웅인물과 대중을 탈리시키는 엄중한 문제를 초래시킨다. 영웅인물의 사적은 그의 투쟁력사사실이지 종래로 작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웅인물에 대한 소개는 과장이 조금있어도 되는듯이 생각하는데 이는 더없이 오유적인것이다. 력사연구가로서, 전기정리가로서 구체적이고 참다운 조사연구를 하지 않고 여기저기 발표된 자료에만 의거하여 제나름대로 꾸미는것은 삼가해야 할 바라고 느껴진다.김순희, 당의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기 위하여 일제의 피비린 총칼아래에서도 굳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스물두살의 나젊은 생애를 바친 영웅의 빛나는 그 이름은 인민들속에서 대대로 길이 전해질것이다!연변대학조선어문학부 78급(3학년) 학생 1981. 4. 5부록 2성부녀련합회 장정에게 보낸 편지장정(张晶)동지, 음력설에 안녕하십니까, 전화는 이미 받았으나 제때에 회신하지 못하여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에야 편지를 띄우니 량해를 구하는바입니다. 김순희렬사에 대하여 알려드리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김순희렬사에 관하여첫째, 시간문제에서:김순희렬사의 장렬한 최후는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습니다.◎ 화룡현 민정국 렬사보관서류 김득봉렬사략력에 의하면 김득봉렬사는 1932년 11월 4일에 희생되였습니다. 그는 김순희렬사와 같이 희생된 렬사입니다.◎약수동출신인 정창근로인 (현재 연길시)의 증실에 의하면 김순희렬사희생시간은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바로 그날은 정창근의 부친 정태준(중공당원)로인의 환갑날이였습니다. 정태준로인도 김순희와 같이 희생된분입니다.◎ 현재 화룡현 약수동에 거주하는 박동활, 김승룡 등 로인들의 증실도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그전날 11월 3일이 바로 김승룡 부친의 생일이여서 돼지를 잡았다고 합니다.◎ 당년에 화룡현 약수동에서 활동하였던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 황순옥(일명 황옥순, 별호 평강나비)의 증인입니다. 그는 1932년 봄에 약수동에 갔는데 그때 공청단구위서기 안정로한테서 “손태익이 처가 없는데 하나 소개할가?!” 하는 말을 수차 들었다고 합니다. 황순옥은 롱담으로만 알았는데 그후 얼마가지 않아 과연 낯모를 녀성이 약수동에 나타났구요. 그는 약수동적위대 부대장 손태익의 후실로 들어선 김순희였습니다. 그때 황순옥은 안정로에게서 김순희는 룡정에서 온 중공당원이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차정희(현재 룡정에 거주)의 증실. 차정희는 1981년에 69살로서 별명은 맑스로 통했습니다. 그는 1932년 봄에 공청당평강구위 부녀위원의 신분으로 약수동에 갔습니다. 김순희가 약수동에 나타나기전의 일이였습니다. 김순희보다 한발 앞섰지요. 그때 차정희는 김순희를 친히 찾아보았다고 합니다. 그해말에 차정희는 정태준로인의 딸인 정경옥에게서 약수동참안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개산툰에 지대를 옮긴 후의 일이였지요.◎ 고창일(현재 백성시에 거주)의 증실.당년 고창일은 화룡현 농협부녀책으로서 1932년에 약수동에서 김순희를 보았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또 흥미로운 일이 있습니다. 약수동에 다니며 박동활, 김승룡, 리종빈 등 로인을 방문하였을 때 얻어낸 수자입니다. 박동활은 1981년 61살, 참안시 12살, 김승룡은 1981년에 참안시 14살, 리종빈은 1981년에 66살, 참안시 17살, 리종빈의 안해는 남편보다 한살 이상이여서 참안시 18살, 이런 년령수자들은 하나같이 1932년을 가리키고있습니다.상기 조사와 증실자료로부터 보면 김순희렬사 희생시간은 틀림없는 1932년 음력 11월 4일입니다. 1931년 설이거나 1932년 봄 설은 발을 붙이기 어렵습니다.둘째, 김순희렬사의 최후에 관하여:1.녀류작가 최현숙이 쓴 김순희는 허구가 적지 않습니다. 례컨대, 적들이 군중들을 모아놓고 위협할 때 김순희가 결연히 적들앞에 나섰다는 문제입니다. 이는 력사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력사의 최후에 대해 제가 쓴 글을 참고(1982년 3월 7일 “연변일보”조선문에 실은 글과 저와 권립선생의 서명으로 “지부생활”(조선문)에 실은 글, 1982년 어느 호던지 잊었습니다.)하십시오.2.안도현 소사하출신이라는 문제는 아직 얻어들인 자료가 없습니다. 만약 성부련회에서 계속 최현숙의 글대로 한다면 력사진실을 떠난 오유를 범하게 될것입니다.최현숙작가는 일찍 약수동에서 정명화할머니를 방문했는데 그때 취재가 수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현재 약수동에 거주하는 김승룡이 정명화의 아들입니다. 최현숙취재시 김승룡과 리종빈도 자리를 같이 했고 그때 력사사실대로 반영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최현숙작가의 글에 이의를 갖고있습니다.하긴 긍정적으로 말해 김순희의 어떤 사실에서 최현숙작가가 저보다 아는것이 더 많다고 봅니다. 그는 필경 50년대에 벌써 약수동에서 취재한분이기때문입니다. 아는것만큼 적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간 련계와 올해 사업의 순리를 기대합니다!1983년 2월 13일음력설날
87    (7) 리계순 선후로 남편 셋 댓글:  조회:4059  추천:120  2006-07-12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 (7)리계순 선후로 남편 셋리 함연변의 항일렬사전을 펼치면 항일련군 제2군 6사의 녀전사였던 리계순렬사를 대할수가 있는데 그는 줄곧 중공화룡현위 제5임서기였던 김일환의 안해로만 나타난다. 이는 력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리계순은 특정된 력사환경속에서 선후로 세 남자의 안해로 되여야 했다. 아래 《좌》적사조의 산물인 리계순렬사전기와 흐름을 달리하면서 력사속의 진실한 리계순녀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김일환은 사실 리계순의 두번째 남편이였다. 첫 남편—김익춘그제날의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은 항일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른 유서깊은 고장이다. 1914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1일)에 리계순은 이 마을의 한 가난한 리씨댁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털면 먼지뿐인 살림이라 아버지 리원백은 종일 아글타글 해도 처녀애로 자라난 리계순을 학교에 보낼 힘마저 없었다.그 세월에 금곡촌에는 사립원동학교가 있었다. 1928년에 조선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외지의 한 혁명자가 장창환이라고 변성명하고 안해와 같이 원동학교에 와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도움으로 리계순은 늦게나마 이해 여름에 원동학교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었다. 장창환은 교원신분을 음페로 안해 리씨와 같이 금곡일대에 혁명의 불씨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마을에는 야학실이 꾸려지고 장선생 안해 리씨가 부녀강습을 맡았다. 그때 금곡에는 길림, 국자가, 룡정 등지에 가서 공부하는 채수항, 리지춘 등 학생들이 30여명이나 되였다. 그들이 때때로 마을에 돌아와 장씨와 손을 잡으니 반일기운은 날따라 짙어갔다.리계순은 길림사범학교 출신인 오빠 리지춘과 장창환, 채수항 등의 영향밑에서 혁명에로 강단을 내리였다. 1930년 6월 이후 마을의 리지춘, 장창환, 김정숙 등 한패의 투쟁골간들이 선참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더니 채수항을 서기로 하는 금곡지하당지부가 조직되였다. 당이 지도하는 공청단, 부녀회, 소선대, 농민협회, 적위대 등 혁명단체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하자 리계순은 부녀회에 참가하여 맹활약을 보이였다. 그후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과 1932년 봄의 춘황투쟁에서 리계순은 쇠소리가 쟁쟁하는 투쟁골간으로 나섰다.1932년 4월에 김경욱이라고도 불리운 중공당원 김익춘이 달라자구위 농민협회 책임자로 부임되였다. 그는 워낙 화룡현 평강구 약수동사람인데 금곡촌에 친척들이 있었다. 후날 화룡현유격대녀전사 김정옥도 금곡촌출신으로서 김익춘의 사촌 녀동생이였다. 이런고로 1907년 생인 익춘이는 나이가 많아서 금곡촌에 가서 원동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자기보다 예닐곱아래인 리계순을 알게 되고 후에 사랑을 속삭이게 되였다. 1932년에는 이미 부부관계로 널리 알리여졌다. 리계순의 첫 남편이였다. 1932년 여름에 조직의 부름으로 리계순은 남편과 함께 화룡현 약수동으로 지대를 옮기였다. 남편 김익춘은 후날의 화룡현유격대 대장이고 렬사인 김세와 손잡고 평강구유격대를 재건하는 투쟁에 나서고 리계순은 약수동적위대에 편입되여 활동하였다. 이해 8월 리계순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1932년 가을 평강구유격대가 약수동에서 재건되였다. 대장 김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안도산속의 중국륙군대속에 들어가 구국군쟁취사업에 나서고 김익춘이 림시대장을 맡아보았다. 그러던 이 가을의 어느날 평강구유격대는 세린하의 한 악질주구 백호장을 죽여버렸다가 세린하대지주 손가놈자위단의 추격을 당했다. 수명의 유격대원들은 약수동 뒤산언덕에서 놈들의 포위속에 빠지였다. 위급한 찰나 김익춘은 놈들을 자기한테로 끌며 대원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놈들은 공산당을 잡았다면서 익춘의 목을 베여 세린하대지주 손가놈의 대문앞에 달아매기까지 하였다.리계순은 이렇게 화룡현약수동에서 첫 남편 김익춘을 잃었다. 이에 앞서 달라자에서 활동하던 오빠 리지춘도 놈들에게 체포되여 불행히 희생되였다. 두번째 남편—김일환1932년 가을이후 산구에 자리잡은 어랑촌에 화룡현의 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약수동에서 활동하던 화룡현위와 평강구위가 어랑촌으로 전이하자 리계순도 어랑촌으로 전이하였다.1933년 음력 1월 18일(양력 2월 12일) 어랑촌 13용사전투에서 화룡현위 제4임서기 최상동이 희생된후 현위 조직부장 김일환이 제5임 현위서기로 부임하였다. 리계순은 새로운 현위의 비서로 되여 김일환의 신변에서 싸우게 되였다.새 현위서기 김일환은 화룡현 덕신사 금곡촌출신으로서 리계순과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혼하고 어랑촌 서남쪽의 야지골어구 외딴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리계순은 투쟁속에서 만난 두번째 남편을 더없이 사랑하면서 시어머니 오옥경(렬사), 시5촌조카 김선(항일녀전사) 이와 더불어 남편의 발이되고 팔이되여 주었다.1933년 봄에 화룡현 유격대는 《1.18》의 엄청난 손실에서 벗어나 시초의 한개 중대로부터 3개중대를 가진 대대로 발전하였다. 일제놈들은 1933년 봄과 여름의 수차의 토벌에 이어 가을에 또 일만(日滿)련합토벌대를 무어 수백에 달하는 병력으로 어랑촌근거지를 대거진공했으나 패주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헌데 1933년 이해 봄부터 악성적으로 벌어지던 대내 반《민생단》투쟁은 가을이후 보다 고조를 이루었다. 리계순의 남편 김일환은 하루아침에 현위서기 직무에서 해임되여 온가족을 데리고 처창즈에 가서 구국군쟁취사업에 나서야 했다. 때는 1933년 11월이였다.계순이 일가는 처창즈로 간후 세대주 성씨를 리씨로 변성명하고 처창즈동쪽골에 있는 중국인지주집에 일군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농사를 은페로 구국군공작에 나설 때 계순이는 부녀공작에 뛰여들었다. 시어머니 오옥경은 통신공작, 조카 김선이는 아동공작에 나서니 온 집안모두가 기계치륜처럼 물려 돌아갔다.처창즈의 사업이 성과적으로 진척되여갔다. 1934년 가을이후 어랑촌근거지의 군민들은 선참으로 새로 개척한 처창즈근거지로 전이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남편은 정식으로 《민생단》의 혐의를 받다가 1934년 음력 11월(양력 12월)에 끝내 당조직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계순이와 시어머니, 조카―세 녀인은 서로 붙안고 비분의 눈물을 쏟았다.그런데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로당원인 시어머니는 당적을 제명당하고 계순이는《민생단》혐의추적을 받았다. 이듬해 봄에 조카 김선이는 옥수수를 심을 때 너무도 배고파 못쓰게 된 옥수수알 몇알을 먹었다고 《민생단》혐의로 체포되여 3일간이나 묶이여 지내야 했다. 15살밖에 안된다는데서 일주일만에 놓여나오니 계순이는 너무도 억이 막혀 시어머니와 같이 밭머리에 나가 한바탕 통곡하였다.했으나 계순이는 혁명을 염오하거나 근거지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강심을 먹고 일어나 투쟁을 견지하는것으로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하였다.1935년 음력설이 지나 연길현 여러 근거지의 혁명군중들이 또 처창즈에 밀려들었다. 자그마한 처창즈에 군중만 해도 500명을 훨씬 넘어서니 처창즈의 식량사정은 극도에 달했다. 군중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목숨을 부지할수밖에 없었다.그때 조카 김선이는 근거지적위대에 참가하여 집단생활을 하고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처창즈북산에 초막을 지어놓았다. 만삭이 된 그는 몸을 힘겹게 움직이면서도 매일 부녀와 군중들한테 가서 곤난을 이겨내고 투쟁을 견지하자고 고무하여주었다. 그의 완강한 투쟁정신은 사람들을 심히 감동시키였다.1935년 이해 봄에 계순이는 딸 정자(김일환과 계순사이의 자식)를 낳았다. 몸이 너무 허약하여 젖이 나올리가 만무하였다. 헌 두루마기에 싸인 갓난애는 배가 고파서 울기만 하였다. 계순이는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어느날 적위대에 갔던 김선이가 아기 보러 왔다. 세식구는 오래간만에 모여앉아 소나무껍질로 저녁을 굼때였다. 문뜩 계순이가 시어머니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였다.《어머니, 앞으로 우리 정자랑은 이런것을 먹지 않겠지요?!》《아무렴, 우리가 지금 이런것을 먹는것은 애들이 더는 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지!》 시어머니는 애기를 들여다보면서 락관적으로 말하였다. 계순이는 어린것을 위해서 넘어가지 않는 소나무껍질을 또 억지로 넘기였다.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은 이토록 컸다.세번째 남편—남창수1935년 여름이후 처창즈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토벌은 더욱 우심해졌다. 이해 봄에 다시 군중해산문제가 제기되였으나 누구하나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음력 10월에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세갈래로 나뉘여 처창즈근거지에 일시에 덮쳐들었다. 항일부대는 여러 날이나 싸웠지만 나중에는 일부 소부대만 남기고 음력 10월 9일(양력 11월 4일)에 내두산일대로 전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근거지해산문제가 다시 일정에 올라 청년들은 앞다투어 부대에 편입되고 로약자와 부녀들은 조직의 지시에 의하여 무조건 하산하여야 했다.그러나 계순이는 시어머니와 함께 죽어도 산아래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뻐기였다. 하여 김일네 집안(부처간)과 남창수네 집안(삼형제), 강일수네 집안, 리계순네 집안(네식구) 도합 16명 《민생단》련루자가족들은 먼저 서남차골안에 초막을 지어놓고 남아서 계속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후에는 동남차골짜기 막바지에 귀틀집하나를 지어놓고 단합살림을 꾸리였다. 리계순네 가정은 말그대로 계순이와 시어머니 오옥경, 조카 김선, 딸애 정자 네식구이다. 에누리없는 청일색의 랑자군이였다. 집안에 있을 사람은 다 있어야 한다고 살다 보면 남자의 일손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16명의 대가정성원들은 서로 믿고 받들었지만 삼형제중 맏이인 남창수는 더욱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며 의례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것은 애틋한 사랑으로 번져갔다. 계순이의 시어머니도 남달리 왼심을 쓰는 창수를 두고 눈치를 모르는바가 아니였다.1936년 새해에 들어선 어느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조용히 찾아 남창수가 좋으니 마주서보라고 귀뜸하였다. 처음에는 아닌 보살을 했지만 그 마음을 어디에 감출수 있으랴. 마음은 있어도 시어머니앞에서 선뜻 말을 내지 못했던 그는 시어머니의 처사가 돋보이기만 했다.후에 리계순은 조직의 비준으로 남창수와 결혼하고 부부간이 되였다. 꼭 김일환이 희생되여 2년만에 있은 세번째 재혼이다.동남차막바지에 단합살림을 꾸린후 이들 네 집안은 산속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련계를 가지고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계순이와 김선이는 이 자위대의 녀대원으로 되였다.1936년 음력설을 앞두고 그들은 한개 분대를 거느리고 8퇀부대를 찾고있는 김명주를 만났다. 그한테서 3사 8퇀(후에 6사 8퇀)이 안도현 경내에서 활동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도움으로 8퇀과 련계를 가지였다.8퇀 퇀장 전영림은 리계순네 모두를 퇀의 특수반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하였다. 이는 겨울이 발버둥질치는 1936년 이른봄의 일이다. 총을 잡고 원쑤놈들과 싸우려는 리계순의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전영림의 8퇀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소속이였다. 6사 8퇀의 이 특수반에는 젖먹이 정자도 있는가 하면 나많은 오옥경시어머니도 있어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치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적의 《토벌》대와 맞띄워 그 자리에 음페했는데 첫돌이 갓 지난 정자가 배고프다고 울어댔다. 전체의 목표가 로출될 시각에 계순이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고리솜을 꺼내 아기의 입에 틀어막았다. 아기는 낯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내아들의 후대는 이것뿐이라며 입에 솜을 빼고 아이를 안은채 산속으로 천방지축 깊이 들어간데서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사경에서 벗어날수 있었다.더는 부대에 시끄러움을 끼칠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어린 정자를 데리고 하산을 결심했다. 리별이 각일각 다가오는 이 시각에 계순이는 철 모르는 유복녀를 누가 앗아가기라도 하듯 꼭 업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이 사람 며느리! 내가 살아있는 한 정자도 살아있을것이니 근심말고 잘 싸우게!》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막아서며 정자를 받아업었다.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정자는 어머니한테 가겠다고 기를 쓰면서 울어댔다. 시어머니도 울고 계순이도 흐느꼈다. 시어머니는 강잉히 정자를 둘쳐업고 급급히 그 자리를 떴다.정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내내 발버둥질이다. 그러는 살붙이가 너무 불쌍해서 계순이는 막 달려가며 시어머니를 불렀다. 그러건말건 시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아래로, 산아래로 내려가기만 하였다.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눈물겨운 인생리별사의 한페지였다. 그후 그들은 서로 다시 한번의 면회도 가져보지 못하였다.* * *그후 6사 8퇀은 1936년 봄과 여름, 가을 내내 안도현과 무송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이해 11월에 6사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장백현 희샤즈거우밀영으로 움직이였다. 그해 따라 강산같은 눈이 일찌기도 내려 부대의 행군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해산후 몸을 춰세우지 못한 계순이는 이를 악물고 대오를 따라섰다. 그러다가도 로숙할 때면 작식대원들의 선두에서 돌아치면서 전사들의 식사를 마련하였다.행군 도중에 리계순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 더는 대오를 따를수가 없었다. 퇀부에서는 그와 몇몇 부상자, 로약자들을 무송현의 후방밀영에 남아 치료하도록 조치를 대고는 계속 길을 다그쳤다. 조카 김선이는 계속 부대를 따라갔다.한동안의 치료를 거쳐 리계순의 동상은 차도가 보이였다. 1937년에 잡아든후 계순이와 그의 동지들은 무송현의 후방밀영을 떠나 끝내 장백의 희샤즈거우밀영에 이르러 오매에도 그리던 부대의 넓은 품속에 안기였다. 그후 리계순은 동상을 입은데다가 임신한데서 백두산 최후방밀영으로 불리우는 횡산밀영을 거쳐 홍두산밀영으로 가는 태고연한 밀림속의 천연바위굴로 옮겨갔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이름난 백두의 홍두산림시병원―바위굴 병원이다. 그러던 이 바위굴 병원이 1937년 겨울에 200여명쯤 되는 적들의 돌연적 습격을 받았다. 포위돌파중 리계순은 불행히 체포되여 장백현성에 설치된 류치장으로 끌려갔다가 류치장에서 남자애를 낳고 1938년 1월의 어느날 장백현 리수구의 대호에서 적들에 의해 비밀리에 잔인하게 살해되였다.리수구 대호에는 세호의 조선족세대가 살고있었다. 적들이 물러간 후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렬사의 유체를 고이 묻어주었다.1972년 5월 1일에 장백현에서는 렬사의 무덤을 현성의 탑산남쪽가에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1988년 5월 6일에는 중조 두나라의 해당 부문과 일군들이 참가한 의식을 가지고 리계순렬사의 유골을 장백으로부터 조선으로 옮겨갔으며 조선 평양의《대성산렬사릉》에 고이 모시였다.해당 자료에 의하면 리계순의 시어머니는 산에서 내려간후 혁명이란 이 두글자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굳세게 살아가면서 손녀애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계순의 친정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수가 없어 외손녀의 생사여부로 골몰하다가 조선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외손녀를 만났고 딸 계순이 남긴 달비를 외손녀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리계순이 1937년 12월 23일에 감옥에서 낳은 갓난애는 그와 남창수의 소생이였다. 이 갓난애는 남충일이라고 불렀는데 남의 집에서 자라다가 후에는 무송현 우전국 국장으로 사업했으며 최근년간에 사망하였다.
86    (6) 최희숙녀사 체포시 임신중 댓글:  조회:3565  추천:115  2006-07-11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 (6)최희숙녀사 체포시 임신중리 함지난 세기 80년대 우리 연변을 망라한 조선족사회에서는 렬사인물전기가 열을 올리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좌”적 사상의 영향이 뿌리깊을 때라 렬사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기에 올릴수가 없었다. 정리자가 자기 글에 올렸다 해도 편집진은 이를 모두 지워버리였던것이다. 최희숙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는 피어린 항일무장투쟁가운데서 두번째 남편을 맞아들이고 임신까지 했으나 렬사전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야 항일투사, 항일렬사다운 시절이였다.사실 항일투사들도 피와 살로 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였다. 최희숙이라하여 례외일수가 없었다.1939년 5월 18일,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방면군지휘 김일성장군의 지휘하에 장백의 5호물동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섰다. 최희숙은 부대와 함께 조선무산지구 대홍단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수행한후 5월말에 두만강상류의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너섰다. 6월 10일에는 올기강전투를 멋지게 벌려 뒤따르는 정안군 한개 중대를 요정냈다. 그후 부대는 그해 늦가을까지 활동하면서 올기강일대에 후방밀영을 설치하였다. 1940년 3월에 최희숙은 부대를 따라 화룡현 대마록구삼림경찰대 습격전투와 홍기하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뒤 그는 부대와 함께 안도, 돈화 일대에 진출하였다. 이해 가을이후 제2방면군부대는 제1로군 산하 여러 항일련군부대들과 함께 소부대로 나뉘여 활동하다가 점차 쏘련경내로 전이하게 되였다. 최희숙은 남창수가 지도하는 소부대에 소속되여 화룡현 오도양차밀림에서 겨울을 나게 되였다. 그때 그들 소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었다. 식량이 떨어진데다가 사령부와의 련계도 끊어졌다. 먹을것이 없어 최희숙이 난감해 할때 남창수가 여러모로 살뜰히 도와 나섰다. 그들은 서로 리해하고 받들던데로부터 끔찍히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최희숙의 본 남편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후 종무소식이고 시집과의 련계도 끊어진지 오란데 남창수 역시 안해 리계순이 1938년 1월에 장백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후 홀몸을 지내고있었다. 1941년 2월경 최희숙소속 항일련군소부대 7∼8명은 남창수의 인솔하에 중쏘변경에 진출한 제2방면군사령부를 찾아 동으로, 동으로 움직이였다. 적들이 사처에 우글거리는데서 그들은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만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식량이 떨어진지 오랬다. 당년의 화룡현 용신구―오늘의 두만강변 룡정시 백금향 송림촌 매대골 부근에 이르러서는 더 행군할 기력이 모자랐다. 식량을 얻어야만 하였다. 소부대일행은 매대골의 한집에 들어가 식사를 청하고 감자굴에 숨었는데 누군가 당지 경찰분주소에 고발한데서 사태는 험악하게 번져갔다. 금방 하루가 지났는데 적들은 룡정, 지신, 용신, 삼합, 백금 등지의 모든 력량을 동원하여《만산토벌》에 내몰았다.소부대는 인차 산속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그러자 적들은 여기저기에 풍막을 치고 자면서 포위진을 펼치였다. 최희숙 등이 가까스로 령하나 넘는데 적들은 《투항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집요하게 뒤를 물었다. 송림 덧고래에 이르러서는 서로 접전이 벌어졌다.맞불질은 치렬하게 번져가는데 최희숙이 다리에 심한 관통상을 입고 비칠거렸다. 게다가 임신한데서 그 자리에 풀썩 물앉았다. 한 전사가 제꺽 부축하는데 덧고래 아래마을 말뚝에 백마 한필이 매여있었다. 이 전사는 급기야 백마를 끌고와서 희숙이를 태우고 포위를 헤치려 했다. 이때 또 한 동지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희숙이는 삶의 희망을 주저없이 자기 동지한테 돌리였다. 백마는 중상자를 싣고 네굽안고 달리였다. 희숙이의 얼굴엔 미소가 어렸다. 적들은 계속 추격해왔다. 동지들은 희숙이를 업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간신히 옮겨놓았다. 걸음이 갈수록 떠지고 희숙이는 몸부림치면서 애원하였다. 《절 내려놓아요. 이러다간 모두가 잡혀요. 제발 절 내려놔요! 》했으나 동지들은 희숙이를 업고 걷고 또 걸었다. 적들은 점점 가까이 육박하고 적탄은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귀전을 스치였다. 어느덧 적들이 앞을 지르자 동지들은 오른쪽으로 꺽어들었다. 더 지체할수 없었다. 희숙이는 또 모지름을 썼다.《안돼요. 동무들은 시급히 사령부를 찾아야 해요. 제발, 제발 저를 내려놓고 뛰세요!》 자기보다 동지들을 아끼는 절절한 부르짖음, 전우들의 가슴은 애절히 저려났다. 오른쪽에도 적들이 나타났다. 동지들은 희숙이를 한 바위밑에 숨기고 적들을 맞받아 싸웠다. 희숙이는 맥이 풀려 동지들을 도와 적 한놈이라도 요정내자 해도 생각뿐이였다. 다리에서 흐르는 피는 바지가랭이를 흥건히 적시며 바위밑의 눈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희숙의 가슴은 바질바질 타들었다. 상처의 아픔보다도 적들과 생사판가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럴 때 희숙이는 왼쪽에서 달려든 적들에게 발견되여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였다. 동지들은 적과 싸우기에 여념이 없은데서 이를 알리 만무했다. 적들은 희숙이의 몸에서 금반지와 회중시계까지 빼앗아내니 기뻐 야단이였다. 희숙이는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았다. 악착한 원쑤들에게 생포된것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제2방면군 책임자로부터 받은 반지와 시계를 눈을 펀히 뜨고 빼앗기니 더욱 그러했다. 희숙에게 있어서 반지와 시계는 힘의 원천이였고 마음의 기둥이였다. 그토록 어려운 전투환경속에서도 흠이 질세라, 잃어버릴세라 소중히 간직하며 혈전의 길을 헤쳐온 그였다. 《희숙동무, 잘 싸웠소, 앞으로 더 잘 싸워주시오.》반지를 주실 때 하시던 제2방면군 책임자의 말씀이 생생히 떠올랐다. 희숙이는 눈앞의 원쑤놈을 쏘아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공산당원답게, 항일련군의 전사답게 싸울 비장한 결의로 이글거렸다.희숙이는 적들에게 끌리워가면서 모진 동통으로 이를 악물었지만 근심나는것은 애오라지 동지들이였다. 그는 동지들이 무사히 포위를 헤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적들은 희숙이를 송림의 한 마을에 끌고간 뒤 어느 집 뜨락에 내동댕이치고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왔다.《〈공산당〉계집을 잡아왔으니 어떤 몰골인가 잘 보아라. 누구든 대일본제국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따른다면 이런 꼴이 될줄 알아라.》한놈이 기고만장해서 한바탕 으름장을 놓았다. 다른 놈들도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총박죽으로 희숙이의 배를 툭툭 치며 조롱하였다. 《배속에 든게 무어냐?》《퉤, 더럽다. 몰라서 묻느거냐? 낳으면 공산당을 낳지 너따위 개같은 놈들을 안 낳는다.》《히히, 입이 센데? 공산당이 아니면 어떨가?》《공산당이면 공산당이지 또 뭐겠느냐?!》희숙이는 원쑤놈들을 노려보며 불을 내뿜듯 쏘아붙였다. 그는 심한 갈증으로 전신을 태우다가 입술을 깨물고 결연히 일어나 앉았다.《공산당원도 사람이다. 구경할것 없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일제를 타도하려는 애국자이다… 우리 공산당은 일제놈들과 그 졸개들을 쳐부시고 나라를 다시 찾고야 말것이다. 너희들은 침략자 일제놈들을 할애비처럼 믿으며 개노릇을 하지만 일제는 얼마 못가서 망하게 될 것이다!…》희숙이는 또 모여온 군중들을 바라보며 연설하였다. 《여러 아버님과 어머님들,오빠, 언니와 동생들, 힘을 내세요.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선 우린 한시도 잘 살수 없어요…》놈들은 희숙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경황하게 날치였으나 심장의 메아리는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급해난 놈들은 뜨락에 모인 군중들을 억지로 해산시켰다.점심을 처먹은 후 놈들은 희숙이를 달라자의 현경찰서로 압송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통이 풀리지 못한데서 담가에 들고가는수밖에 없었다. 현경찰서에서 놈들은 희숙에게서 무언가 알아내려고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무지막지한 고문도 들이댔지만 종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였다. 들었다는것이 고작 이런 말이였다. 《나는 네놈들과 말할게 없다. 나에게서 뭘 얻어들으려니 생각도 말아라. 너들한테 굴복할 내가 아니다.》랑패상이 된 놈들은 희숙이를 룡정에 있는 제2성립병원 2층병실에《입원》시켰다. 《입원》기간에 놈들은 최후의 방법을 썼다. 그 방법이란 얼마전에 귀순한 김재범을 데려다가 희숙이의 마음을 돌려세우는것이였다.김재범은 워낙 항일련군 제2방면군 7퇀 정위이며 중공 남만성위 후보위원이였다. 1940년 9월 김재범 등 5명은 부대의 파견을 받고 연길현을 중심으로 적후공작에 나섰는데 역시 지방공작에 나섰다가 귀순한 원 1로군 경위려 3퇀 퇀장 김백산의 유혹하에 재범도 귀순하고 말았던것이다.그러나 적들은 철저히 실패했다. 제딴에는 좋은 방법이라고 희망을 걸었으나 최희숙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비루한 반역자야, 빨리 물러가라! 진짜 공산당원은 백번 죽어도 적앞에 굴복하지 않는다!》재범이는 별수없이 물러가고말았다. 그후 놈들은 다시 심문을 들이댔으나 최희숙은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며칠후 최희숙은 놈들의《입원》실에서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때는 1941년 2월경의 일이다.이것이 최희숙렬사의 빛나는 최후이다. 그는 임신한 몸으로 적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고 임신한 몸으로 적들에게 심문과 구타를 당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녀성으로서, 항일투사로서의 최희숙녀사의 참모습이다. 가담가담 동강났던 력사를 바로 잡으니 최희숙렬사는 참모습, 참인간으로 우리한테 우렷이 안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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