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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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서문 댓글:  조회:4048  추천:160  2007-07-04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서문  김병민  (연변대학 총장, 교수, 박사)  2001년 봄인가 제자 류연산씨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재판본에 서문이라고 써준 바가 있다. 이태만에 또 제자 리광인씨의 청탁을 받고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서문을 쓰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것도 력사학부출신도 아닌 조문학부졸업생이 성과작들을 내게 되니 더욱 그러한가부다. 내가 리광인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대혁명》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될 때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선생이였다. 1978년 10월에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시험제도 회복후의 두번째기) 학생들이 입학한 후 나는 이들의 담임교원을 맡게 되였다. 그때 학급에는 리광인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나와 불과 몇해 년하였다. 헌데 어딘가 얼굴에 그늘이 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알고보니 그는 1976년 가을에 뜻하지 않은 《억울한 사건》으로 무르익던 입당은 고사하고 공청단조직에서까지 쫓겨나고 거듭되는 비판, 투쟁 끝에 한시기 류치장신세까지 져야 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여러 모로 《신소》했으나 해당 부문에서는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기막힌 일이였다. 앞길이 창창한 20대 젊은이에 대한 무단적인 결론은 나를 분노케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대학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뛰던 로동문선생을 찾았고 공청단연변주위를 찾았다. 드디어 리광인씨는 억울한 루명을 벗게 되고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늦게야 공청단원마크를 다시 달게 된 리광인씨는 나를 찾아 거듭 감사를 표시하였는데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내 잊지 못해하고 있다. 나와 리광인씨의 류다른 인연이라 하겠다. 그뒤 내가 받은 강한 인상이라면 리광인씨는 조선족항일력사소설을 쓰겠다며 력사공부에 손을 댔다가 너무 깊숙이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작자의 허구에 의한 력사소설이 아니라 진실한 력사를 쓰겠다는 것이 리광인씨의 소신이였다. 그러던 그는 과연 대학 재학시절에 벌써 항일인물과 이야기를 써서 척척 신문, 잡지와 책들에 발표하기 시작하더니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다가 아예 연변력사연구소로 넘어가 조선족투쟁사연구에 몸을 잠군 것이였다. 그로부터 10년세월이 흐른 1992년, 대학 졸업 10돐 때 보니 리광인씨는 중국 국내는 물론 멀리 일본과 조선까지 드나들며 국제학술세미나와 교류에 뛰어들었고 발표한 논문과 력사소재 글은 무려 100여만 자에 달해 동기동료와 선후배들 가운데서 탄탄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여 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주임 현룡순선생은 1994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가 걸어온 45성상을 한부의 걸작 《겨레의 넋을 지켜》(42만여 자)로 펴내며 조문학부 제25기생(즉 78년급)을 서술할 때 성과가 뛰여난 몇몇 학생들을 언급하면서 리광인씨는 《조선족역사연구에 달라붙어 숱한 항일이야기를 써낸》 학생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한데서 리광인씨는 중급직함도 동년배들 이르게 받았고 력사연구분야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리광인씨가 사단법인 조선민족력사연구소를 꾸리겠다고 직장에 적을 두고 나오더니 거의 10년간 소식이 끊기였다. 이를 두고 리광인씨를 알고있는 교수, 학자님들이나 동료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도 명색이 담임교원이라는 나도 아쉽기가 그지 없었다. 그러던 2003년 10월 17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제7차대표대회가 연길호텔에서 성황리에 열리였는데 이 대표대회 주석단손님으로 초대된 나는 우연하게도 협회부비서장으로 뛰는 리광인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또 사단법인 중국조선민족사학회의 부비서장이기도 했다. 오랜만의 상봉이였다. 리광인씨는 이번에 한국서 여러 권의 조선족력사저서를 펼치게 된다면서 먼저 출판하게 되는 인물편인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도합 4권)서문을 부탁하는 것이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비로소 리광인씨가 《잠적》한 10년사이 거의 10권에 달하는 저서를 집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졸업 20년 중 전 10년에 이미 조선족력사글 100여만 자를 정리, 발표했다면 《하해》(下海)한 후 10년간에는 전 10년의 100여만 자를 훨씬 능가한 알찬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나는 그의 헌신적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는 남성편 상하권, 여성편, 소년아동편 도합 4권으로 무어졌는데 여기에 오른 항일렬사는 무려  130~140명에 달한다. 내가 알건대 지난 80년대이후 20년간 중국 경내에서 정리, 발표된 겨례항일렬사전기가 180명 좌우에 달하는데 이번에 출판되는 전 4권까지면 항일렬사전기발표는 도합 240여 명이다. 그중 140명 전기가 리광인씨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후세에 이름도 없이 쓰러질번 했던 조선족항일렬사  140명을 단신으로 살리고 해빛을 보게 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뒤미처야 이를 알고 내심의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은 중년에 들어선 리광인씨와 같은 이런 제자들이 조선족력사연구를 망라한 여러 분야의 중임을 떠메고 나간다는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 중국조선족력사연구는 모진 진통을 겪고있다. 새 일대 연구일군들이 고갈되고 있다면 조선족력사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갈수록 적어지고있다. 이러한 때《인물 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이 출판된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정신은 민족의 력사 속에서 숨쉬고 그것은 력사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지성인들에 의하여 이어지고 있다. 민족의식의 함양과 고양에 있어서 력사교육보다 더 유력한것은 없을것이다. 나는 이 책들의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격변기의 진통을 겪고 있는 조선족력사연구에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기를 희망한다. 한편 리광인씨가 조선족력사연구에서 보다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하면서 자라나는 우리 후배들이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건실히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2003년 11월 5일    
164    력사의 뒤안길을 더듬어 20여년(흑룡강신문) 댓글:  조회:3775  추천:138  2007-07-03
력사의 뒤안길을 더듬어 20여년   연변 력사학자 리광인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출간     력사의 저 뒤안길에 파묻혀 자칫 세인들한테 알려지지 않은채 세파속에 그대로 매몰될수도 있는 진실을 파헤쳐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사람들한테 력사의 진실을 알리고 잘못 오해되고있는 력사를 바로잡는 어려운 작업을 하고있는 사람이 있다. 이미 이 세상에는 없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장장 20여년, 그것은 실로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각고의 행보였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 부장,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 부원장, 중국 조선민족사학회 부비서장, 연변중년문제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한몸에 짊어지고 조선족력사연구의 길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깡그리 바쳐가고있는 그가 바로 하해로 10여년간 중국조선족문단과 조선족사학계에서 ‘잠적’했던 리광인씨이다. 1954년 변방 오지의 시골 화룡시에서 태여난 리광인씨는 어려서부터 력사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고있었다. 1978년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여 자신을 충전하면서도 항상 력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굳은 의지를 식히지 않은 그는 재학시절 이미 항일인물과 항일이야기들을 써서 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였다. 그는 작가의 허구에 의한 력사소설이 아니라 진실한 력사를 그대로 재현해보이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을 항상 잊지 않았다. 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연변일보사에서 기자로 뛰다가 아예 연변력사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조선족항일투쟁사연구에 혼신의 정열을 바친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국내는 물론 멀리 일본과 조선까지 드나들며 국제학술세미나와 교류에 뛰여들었고 그 무렵 발표한 론문과 력사소재 글들만 해도 무려 100여만자에 달한다. 그뒤 보다 폭넓은 력사연구에 정진할 큰 뜻을 품고 그는 결연히 직업을 버리고 ‘하해’한다. 꼬박 십년 뒤 다시 사학계 및 연변의 문단회의 등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리광인은 그동안 자신의 뼈를 깎아 쓴 글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년사이 이미 조선족 력사관련 론문, 글을 100여만자 정리, 발표한 그는 ‘하해’한 십년사이 거의 10권에 달하는 저서들을 집필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헌식적 노력을 묵묵히 경주하여왔다. 이번에 한국에서 펴낸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는 1~2권이 남성편(그중 제2권은 순 화룡현 항일렬사들임), 제3권이 녀성편(녀항일렬사전기로는 처음 나온 책), 제4권이 아동편으로 되여있다. 도합 125만자에 140편의 전기를 수록, 취급한 렬사가 164명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서는 이왕의 렬사전기 정리법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수법을 기용, 단순한 렬사전이 아니라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로서 필요한 렬사에는 부록을 달았고 책마다 문헌자료와 조사자료 등 출처를 밝힌것이 눈에 띈다. 또 철저히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기술되였는바 기왕의 항일녀투사 최희숙은 희생될 때 적들이 두눈을 도려내고 심장까지 끄집어냈다고 되여있지만 이번에 그것은 가공된것으로 사실이 아님을 밝혀냈다. 그만큼 그는 력사에 충실하였다. 리광인씨가 지금까지 발표한 력사와 문학론문은 40여편, 이미 정리한 글과 저작이 300만자를 초과한다. 지난해 년초 한국에서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으로 몰아붙일 때 그는 결연히 나서서 그 시시비비를 갈라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그는 이제 륙속 ‘력사속의 1910-1920년대’, ‘력사문화기행’, ‘꼬마항일영웅들’, ‘리광인론문집’, ‘나의 문학예술세계’, ‘윤동주연구문집’, ‘강경애연구문집’ 등 책들을 펴낼것이라는 아름찬 계획을 담담히 흘려주었다. 하해한 이래 거듭되는 경제난과 자신의 행적에 대한 시야비야 등 그 모든 압력과 곤난앞에서도 머리를 숙일줄 모르고 감히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만만찮은 발자국을 뚜벅뚜벅 찍어온 이 사나이, 삼남매의 훌륭한 아버지, 안해의 모범남편으로는 늘 실격당하는 그지만 학술연구에만은 추호도 양보를 용서치 않는 맵짠 사나이, 누가 뭐라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자기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그한테 화이팅을 불러본다.                                                 한영남 기자                                 2006년 2월 25일 토요일 7면 《흑룡강신문》  
163    선렬들을 찾아 천만리(연변일보) 댓글:  조회:3787  추천:127  2007-07-03
     선렬들을 찾아 천만리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록되여있는데 군체(群體)까지 164명의 렬사가 소개되여있는 두터운 책이였기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에서 단편이상으로 정리된 항일렬사가 도합 180명좌우, 이번에 출판된 이 책에 오른것까지 합하면 260명좌우 되는데 그중 160명 렬사의 전기를 리광인씨가 혼자 힘으로 발굴과 정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렬사전ㅡ<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를 정리, 출판하는것은 저의 오랜 념원이였습니다. 2003년 10월 15일, 전 4권으로 된 이 책의 타자와 교정을 마쳤을 때 저는 그 감회가 참으로 깊었습니다. 이날을 위해 로심초사한지가 몇해였던가요. 이번에 쌍둥이 딸 설이와 향이가 이 많은 자료를 다 타자해줬고 아내의 도움도 퍽 컸습니다. 잊을수 없군요. 그리고 사실 <선렬들 찾아 천만리>의 발자국을 뗀지는 30년전부터라 해야 옳을겁니다.》 1973년 고중을 졸업한 리광인씨는 두만강상류에 위치한 화룡현광평농장에 자리잡았다. 20살 한창 나이인 리광인씨는《광평농장사》편찬과업을 맡고 답사하는 가운데서 농장일대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이 활동하던 유서깊은 고장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항일투쟁사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후 독물(讀物)을 통해 양정우, 진한장, 주보중, 리조린도 알게 되였다.  《1978년 대학시험에 합격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공부를 잘해서 조선족항일력사소설을 쓰려는것이 저의 리상이였습니다. 때마침 중공당사를 배워주던 최후택교수님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수많은 력사자료와 접하게 되였고 할빈에 가 동북렬사기념관까지 견학하게 되였습니다. 거기서 조선족항일투사 김순희렬사를 알게 된 저는 돌아온후 화룡현 약수동에 가 김순희의 투쟁사실을 취재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력사답사였습니다.》 그런데 력사공부에 너무 깊숙이 빠지는통에 차츰 허구에 의한 소설보다도 진실한 력사를 쓰는데로 돛을 올리게 되였다. 하여 대학 재학시절에 벌써 항일전적지를 답사하고 항일렬사가족을 방문하면서 정리한 항일인물과 이야기를 신문잡지에 척척 발표하기 시작했고 졸업후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다가 아예 연변력사연구소로 전근되여가 조선족투쟁사연구에 몸을 잠그기도 했다. 리광인씨는 선렬들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북경, 천진, 산해관, 청도, 상해, 남경, 항주, 소주, 남창, 구강, 광주, 서안, 연안 등지와 하북성, 동북 각지 취재길에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지 모른다. 연변의 산과 들은 물론 두만강, 압록강을 답사하고 여러 독립운동전적지와 항일근거지 전적지를 메주밟듯했다. 항일련군 제2군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날의 동만과 남만의 항일 싸움터들을 주름잡기도 했다. 이러는 가운데서 보관서류관, 기념관, 박물관 등을 통한 력사자료수집작업을 제외하고도 100여명 항일투사와 력사의 견증자들을 찾아볼수가 있었다. 그후 다시 연변일보사 기자로 복귀했다가 어쩌구려 하해(下海)하여 무술학교를 경영한다는 소문이여서 력사고 뭐고 아예 손털고 나앉은줄 알았더니 이렇게 두툼한 책을 척 출간할줄이야. 《하해한 10년간 저는 한번도 력사를 잊은적 없었습니다. 짬만 있으면 새롭게 답사하고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동안 모아진 자료들을 정리하군 했지요. 지금 정리를 미룬다면 허다한 렬사들을 영원히 해빛을 보지 못하게 할것이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게 할것이라는 사명감, 긴박감에 늘 모대기기도 했지요.》 지난세기 80년대에 방문했던 100여명 항일투사를 지금엔 거의 찾을수 없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번 방문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면서 리광인씨는 안도의 한숨을 톺기도 한다. 리광인씨의 력사에 대한 추적은 단순히 사건이거나 수자를 고증하는것이 아니였다. 한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 사람이 겪은 모든 일을 깡그리 알아내는것이였다. 이것은 아마 문학을 배워서 그런것 같다고 한다. 반일투사 김숙경녀사의 딸 황정일을 취재할 때였다. 꼬박 이틀간이나 항일투사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생소한것이여서 력사자료에만 의거했던 빈약점을 메울수 있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묻고 또 묻군 했습니다. <깡치>를 냈지요. 항일투사 려영준아바이를 모시고 연변의 전적지들을 답사할 때였는데 장마에 갇혀 어떤 마을에 묵게 되였지요. 말문을 조만해서는 열지 않는 려영준아바이도 권하는 술을 몇잔 받아 마신후 끈질게 달라붙는 나의 성화에 끝내 말문을 여는데 밤낮 사흘동안아나 구수한 전투이야기를 엮더군요.》 고요한 산촌의 깊은 밤, 주룩주룩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면서 리광인씨는 취재수첩을 퍼그나 축내야 했다. 그가 이렇게 방문하여 말문을 열게 한 로인들은 200여명 되는데 많이는 당시 부득이한 상황과 핍박에 못이겨 기순한 사람들이였다고 한다. 그들은 정치운동때마다 두들겨 맞아 최하층의 따라지생활을 하고있었지만 한때는 목숨을 내걸고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며 력사의 견증자였다. 력사의 뒤안길에 《더럽게》쓰러진 이들을 취재한 자료도 잘 정리해 이제 한책 꾸미겠다는것이 리광인씨의 소망이기도 했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진실하게 서술해야 한다는것이 나의 신조입니다. 공개된 항일녀투사 최희숙의 사적가운데 많은 부분이 나의 조사와 다르더군요. 나는 수차 본 남편인 박원춘로인을 찾아가 당시의 정황을 조사했댔습니다. 이번에 이 책에 올린 최희숙투사의 사적은 진실한것입니다.》 력사에 대한 외곡을 절대 용납할수 없었던 리광인씨는 지난해 년초에 한국서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암살동거범으로 몰아붙일 때에도 많은 자료속에서 력사의 진실을 찾아낸후 인터넷을 통하여 시비를 벌린후 한국을 상대로 력사의 진실을 돌려놓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리광인씨가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하여 론문, 력사전기, 기행문 등을 100여만자 발표했고 40여편의 력사, 문학 론문을 지상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으며 300만자의 원고를 작성해놓고있는 상황이였다. 이 원고로 이제《력사속의 1910-1920년대》,《력사문화기행》,《꼬마항일영웅들》,《리광인론문집 <조선족력사문학 연구> (1, 2집)》,《나의 문학예술세계》, 《윤동주연구문집》, 《강경애연구문집》 등 수두룩한 책들을 펴내게 된다고 한다. 10년 하해에 돈은 벌지 못했지만 이런것을 벌었다고 스스로 흐뭇해하는 리광인씨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 부장,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 부원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부비서장, 연변중년문제연구소 소장 등 직을 맡고있는 리광인씨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조선족력사연구란 주선률을 틀어쥐고 부지런히 뛸 참이였다.               김철호기자 2006년 2월 24일 부 기획란 《연변일보》           
162    【고향단상】보름달 떠오르는 저쪽에 연변이 있지 댓글:  조회:3336  추천:99  2007-06-30
보름달 떠오르는 저쪽에 연변이 있지   요즘 어쩌다 월수대 운동장으로 저녁산책을 나가니 기분이 짱이다. 남으로 기우뚱한 동남쪽 하늘에 떠오른 화성과 서쪽의 높은 하늘에서 자맥질하는 금성도 우릴 보고 반짝이며 반기는것만 같다. 때를 같이하여 동남쪽 회계산 북쪽 산기슭에서 6월의 보름달도 반기는듯 머리를 빠끔 내민다. “보름달입다, 보름달입다!” 아들 경원이는 좋다고 소리소리 지른다. “보름달이지, 6월의 보름달이란다!” 나의 화답에 경원이는 보름달이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는가고 물어온다.그렇다고 하니 이번에는 경원집이 있는 연길이 동쪽이 아닌가고 또 묻는다. “그래 보름달 떠오른 동쪽 저 멀리에 경원이 고향 연변이 있지!” 경원이는 어린애들처럼 퐁퐁 뛰며 두손을 맞잡는다.그 모습에 전에없이 가슴이 뭉클해 난다. 여러날 후이면 방학이고 방학이면 연길집으로 간다고 하루에도 끝없이 되뇌이는 아들놈이 보름달을 보고도 내고향 연변, 연변의 연길집을 들먹이니 아버지 된 마음 어찌 뭉클하지 않으랴. 남방 절강에 온지도 어언 1년이 가까와 온다. 2월에 연변에 다녀온데다 매일같이 연변에 두고온 쌍둥이딸애들과 전화를 주고받으니 연변이 지척이런듯 멀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한다. 6월에 들어 련일 어찌도 바쁜지 그럴 겨를조차도 없었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할까.  그러는 이 마음에, 그것도 저녁산책에서 아들놈이 보름달을 보고 내고향 연변을 떠올리며 고향애를 부른다. 뉘한테 고향이 없으련만 이 시각처럼 고향애수에 잠겨본적이 없었지, 보름달이 떠오르는 동남쪽 하늘가를 바라보니 고향애수가 한결 짙어만 간다. 남방에 온후 나는 연변을 내고향 연변으로 정답게 부른다. 그만치 연변은 어딜보나 어딜가나 정다운 얼굴들이요, 정다운 우리 겨레가 반겨주는 약동하는 고향땅이다.그래서 인연이 닿으면 천리도 지척이라고 하는걸가, 마음속 고향은 천리를 가도 만리를 가도 지척이라고 하는걸가. 6월의 보름달은 회계산 북쪽 산기슭을 따라 각일각 고도를 높여간다.그러는 보름달 따라 마음은 한없이 고향땅에로 나래친다. “보름달 떠오르는 저쪽에 연변이 있지!” “보름달 떠오르는 저쪽에 연변이 있구말구!”     2007년 6월 30일                                                    남방  절강에서    
161    【론문요지】남방에서의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 문제 댓글:  조회:3641  추천:98  2007-06-29
남방에서의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 문제                         리  함     1.    제기되는 문제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남쪽가에는 불교명승지로 이름난 향로봉과 노봉선사가 있고 그 어구에 회계산 천복원과 지장전이 있다.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로 떠오른 지장보살, 그것도 지장보살의 부름을 딴 지장전이 왜 회계산 천복원 빈소에 일어섰을까? 2006년 9월, 필자는 남방 절강에 온후 이에 짙은 흥미를 갖고 지장보살님에 대해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는 점차 연구과제로 형성되고  “남방백성들 속에서의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문제”를 선참 론문연구로 떠올렸다.   2.    지장보살은 역사 속 진실한 인물      할진대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님인 지장보살이란 누구인가? 이를 알자면 지장보살이란 과연 진실 역사 속 인물인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보아진다.    지장보살은 흘러간 역사 속 실제인물로서 이름은 김교각이라고 부른다. 옛날 신라 김씨왕의 가까운 친척이라고도 하고 신라국의 왕자라고도 하는데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으며 출가한 것으로 알려진다.기원 653년(절강 천대산 국청사 자료에 이렇게 밝힘) 인 24살 때 신라에서 홀로 당나라 구화산으로 왔고 그때의 구화산은  원시림 무인지대었다고 역사자료들은 밝힌다. 깊은 산 속 생활은 지극히 어려워 시초 관음토와 도토리죽 을 끓여 먹으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니 불교에 심취한 신라사람 김교각님의 끈질긴 노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깊은 산속 석굴 속에서 홀로 도를 닦는 그 모습은 산아래 백 성들과 지방관리들을 감동시키었다. 그런 고로 천고의 원시림지대에 절이 지어지고 신도들이 사처에서 모여 들었으매 75년간의 설교속에 그 이름이 국내외에 뜨르르  했다고한다.그러던 김교각님이 99세에 구화산에서 시적하니 신도들은 한결같이 그를 지장보살이라고 칭하고 구화산을 지장보살 도장으로 불렀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안휘 구화산은 절강성의 보타산,사천성의 아미산,산서성의 오대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로 떠오르고 김교각은 보타산의 관음보살,아미산의 보현보살,오대산의 문수보살과 더불어 중국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로 떠오르게 되었다.    역사속으로 헤쳐본 신라인 지장보살님의 진실한 개괄이다.이런 지장보살님이 소흥 향로봉 아래 불교사원—노봉선사 종루에 모셔지고, 그 부근에 일떠선 웅장한 “지장전”에 모셔지고, 절강성내 또 하나의 불교성지 천대산 국청사에 모셔지고, 절강 서시의 고향—5설선사에 모셔지고, 항주 4대절의 하나로 근2000년의 유구한 역사 가진 불교성지 — 서호가  영은사 5백 라한당 등에도 정중히 모셔졌다. 그에 따라 필자는 절강 백성들, 더우기 남방 농촌들에서 지장보살에 대한 지장신앙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마지 않았다.    3.    남방 농촌들에서의 지장신앙      절강성 천대현 현지(县志) 기재에 따르면 매년 음력 7월 30일 지장보살의 탄생일 저녁이면 집집마다 옥변로방(屋边路旁)에 향을 꽂고 향불을 피우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등불과도 같이 가관, 이튿날 이른 새벽이면 아이들은 앞다투어 향대를 뽑아들고 기꺼이 즐긴다고 한다. 민간의 이런 풍습은 오늘에도 여전한 모양이다.    그러면 남방의 민간들에서는 어찌하여 이토록 지장보살을 존경하며 극진히 모시는 걸까? 해당 자료를 더듬는 가운데서 나는 두 가지 원인에 기인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1첫째 원인: 지장보살의 지위가 지고무상하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중국 4대 불교성지는 절강성의 보타산, 사천성의 아미산, 산서성의 오대산 등을 두고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4대불교성지는 보타산의 관음보살, 아미산의 보현보살, 오대산의 문수보살, 구화산의 지장보살의 수행(修行)한 도장을 가리키는데 구화산이 불교 4대명산으로 받들리는 것은 지장보살이 변신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경에 따르면 김교각에 앞선 고불(古佛)보살은 원래 불교시조 석가모니의 힘을 빌어 중생을 구제하는 석가모니의 대업을 보좌한 보살로 알려진다. 그러던 석가모니가 입멸(入灭)하고 미래의 미륵이 인간세상에 내세하기 전 이 기나긴 세월에 부처가 없었는데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부탁을 받고 이 기나긴 세월 속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중임을 짊어지게 된다. 마침 신라왕족 김교각이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와서 당나라 구화산에서 75년간 도를 닦다가 시적하게 되는데 시적한 후의 김교각의 모습이 불경에 기재된 지장보살의 모습과 꼭 같았기에 사람들은 지장보살이 구화산에서 변신, 즉 지장보살이 세상에 내려온 화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적절히 말하면 김교각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대지에 내려와 대지처럼 넓은 흉금과 착한 마음씨로 인간, 천당, 지옥의 육도중생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김지장, 즉 지장보살이니 현세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3.2둘째 원인: 지장보살의 숙원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직 “지장본원경”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본원경에는 석가모니가 일찍 지장보살을 불러 보살더러 영원히 유명교주(幽冥教主)가 되어 육도중생을 구제하며 다 같이 극락세계에 오르라고 부탁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고한다. 그런 지장보살님이기에 불교 시조의 막중한 부탁을 두고 불교 시조앞에서 바로 “지옥에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몽땅 해탈시키지 못하면 천당으로 올라가도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했고  대원지장의 존호(尊号)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지장보살의 화신이니 신앙자들이 줄을 서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남방 농촌들에 보편적인 모양인데 그들이 즐기는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의 주요책임이 인간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이라 할 때 지장의 중책은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 하나는 밝은 세상이고 하나는 어두운 세상이다.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과의 관계형성은 회계산 천복원 지장전을 찾으면 터득이 가게 된다. 남방 민간에서 어찌하여 매년 음력 7월 30일 저녁이면 향불을 피우며 소박한 행동을 하는 지가 헤아려진다. 지장보살이 1000여 년 전 음력 7월 30일 저녁에 갑자기 시적한 후 그의 제자들은 7월 30일 을 지장보살 탄생일과 지장보살 도장의 창립일로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매년 7월 15일부터 7월 30일까지 국내의 수많은 향객들은 구화산으로 몰려들고 7월 30일 밤이면 등불을 걸어놓고 종을 울리며 향불을 피우고 보살님께 절을 하며 경을 읽고 밤을 지새우는것은 이 때문이다.   4.지장보살 김교각은 신라인      지장보살—김교각은 신라인이였다. 절강 월수외국어대학에 와서 한족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면서 김교각에 대해 보다 이해하게 된다. 이같은 이해에 토대하여 본문에서 남방백성들 속에서 지장보살의 지위와 형상문제를 두고 실례를 들어 여러 모로 탐구하여 보았다. 이 속에서 우리는 신라인 김교각은 역사 속 이미 중국 불교 4대보살 중의 한 보살—-지장보살로 떠올랐고 남방의 백성, 더우기 농촌들에서 지울 수 없는 지위와 형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160    녕파의 고려사관에도 의천님 떠올라 댓글:  조회:3274  추천:98  2007-06-28
      오늘의 절강 녕파가 고려~송나라 때 명주로 불리웠습니다.      고대해상무역활동 중심지가 녕파였고 그시절의 녕파엔 고려사관까지 세워져 번성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송나라에 14개월 머무른 고려명승 의천은 그때의 명주에 발자취를 남기였습니다.
159    천대산 국청사서 의천님 뵈었습니다 댓글:  조회:3982  추천:112  2007-06-28
      항주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 연구와 관련하여 관련답사사진 일부를 소개합니다.오늘은 절강 천대산 국청사 답사사진 일부입니다.
158    【론문요지】항주 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 연구 댓글:  조회:3466  추천:88  2007-06-28
항주 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 연구     1.    문제의 제기 절강 항주의 서호가에는 근 1000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송나라의 고려사(高麗寺)가 있다. 옛 고려사는 1087년 고려의 명승(名僧) 의천(義天)이 거액을 들여 일떠세운 것인데 오랜 세월 속에서 그 형체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다가 2005년 9월부터 한국의 여러 지성인들과 항주시 정부의 노력에 의하여 서서히 웅장한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절강 천대산에도  1400여 년의 역사 가지며 중국 불교 성지의 하나로 “불국 선경”이라고까지 불리우는 국청사가 있고 1085년 고려 명승 의천이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럼 고려 명승 의천은 어떤 사람이고 어찌하여 항주 서호가와 천대산 국청사에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을까?   2.    고려명승 의천은 어떤 사람인가? 알고보면 고려의 명승 의천(1055-1101)은 오늘의 한국 천대종의 개종조사(开宗祖师)이고 대각국사(大觉国师)로서 고려 제11대 임금 문종(文宗)의 넷째아들이다. 성은 왕씨이고 본명은 후(煦), 11살에 출가하여 불교에 입문하니 13살에 우세승통(祐世僧統)시호를 받기에 이른다. 불전에 정통하고 천대종에 뜻을 두니 불교 천대종의 발상지이고 시조의 나라인 송나라에 가서 불도를 닦고 싶었다. 하지만 요나라와 송나라가 대립되어 있는 현실에서 임금인 아버지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3.    송나라에 머무른 14개 월 의천은 물러설 수가 없었다.그는 고려 선종 2년(1085년)4월에 사복하고 밤으로 조용히 빠져나와 상선에 올랐다. 그해 7월에 송나라 수도 변경(汴京)에 이르러 송황제 철종의 뜨거운 환대를 받고 송나라 수행인원들 배동하에 각지를 돌아보게 된다.그해 의천은 송나라에 왔다가 항주에 잠시 머물렀고 1086년 4월에 다시 항주에 이르러 서호가의 남고봉 혜인원에서 정원(淨源)의 화엄종대의를 청강하고 천대산(天台山)에 올라 불교 천대종 시조 지자대사 육신탑을 배알하면서 환고향 한후 천대종설교에 힘 다 하겠다고 맹세한다. 의천은 송나라에 머무르는 14개 월 간 고승 50 여 명을 뵙고 화엄종교의, 천대종, 유식종(唯識宗)등을 배웠다. 의천의 크나큰 공적은 고려의 대장경을 각인한 것인데 송나라에서 구한 불경과 유서가 대단히 많다. 삼장장소(三藏章蔬)만 해도 3,000 여 권이나 된다. 1085년 전 후 시기에 의천은 일행 10 여명과 함께 항주에 와서 혜인사에 출판기구를 세우고 경륜, 장소 등 각종 책들을 7,000 권 수집, 간행하여 고려에 보내기도 했다.의천은 금자서적 화엄경 300 부를 기록하여 항주 혜인사에 남기고 거액을 들여 화엄대각과 장경탑을 세우도록 한다. 항간에서 말하는 고려사의 건축이다.   4. 귀국활동과 대각국사 시호 의천이 송나라체류 14개 월 만에 귀국하니 형님인 임금과 모후(母后)는 성대한 환대를 베푼다.의천은 흥왕사 주지(住持)를 맡고 “고려속장경”(續臟經)을 간행하며 송나라와 불경을 교환한다.고려 숙종 2년(1097년) 2월에 고려국청사가 일떠서고 의천이 주지를 맡는다. 의천이 천대지관(止觀)학설을 설교하니 불교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의천은 고려천대종을 개설하고 고려국청사를 중심으로 나라 안에 6대 본산(本山)을 일떠세운다. 고려 숙종 6년(1101년)에 고려 천대종이 정식 창립되니 허다한 고승 및 사찰들이 분분히 천대종에 가담한다. 천대종은 크게 흥하다가 300여 년 후 지금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룬다. 의천이 죽은 후 고려임금 숙종은 의천에게 “대각국사”란 시호를 내리었다. 대각이란 부처라는 뜻이고 국사란 임금의 스승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이르는 대각국사는 불교 승려로서의 최고 영예를 뜻한다. 의천의 저서로서는 유고를 정리한 문집 20 권과 외집(外集) 13권이 있다. 문집에는 그의 서문, 정론, 불교 교의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고 외집에는 그의 업적과 친우(友人)들의 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원종문류” (圓宗文類)22권과 “석원사림”(釋苑詞林)5권, “유식론단과”(唯試論單科) , “천대사교의경”(天台四敎儀涇) 3권이 있다.   5. 의천대각국사의 거대한 기여 고려명승 의천은 생전에 송나라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항주 고려사를 세우고 송나라와의 두터운 문화교류, 고려 불교문화의 발전, 고려 화폐 개혁 등 면에서 거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를 기리여 1995년 6월 17일, 한국, 일본 등 해외천대종 사람 300여명이 절강 천대산 국청사에 모이어 중국 국내 각 명산장로(名山長老), 승려들과 더불어 성대한 의식을 가지고 “중한조사(祖師)기념당” 낙성을 경축했다.기념당내에는 천대종 시조 지자대사와 함께 의천대각국사, 현대 한국천대종 중흥시조 원각국사 세사람 청동불상을 모시었다. 이같이 의천대각국사를 중심으로 한 고대 송나라와 고려 두나라 천대종의 뜨거운친선교류는 중국 천대종의 부흥을 가져오고 고려천대종의 창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이로 보아 “항주고려사와 고려명승 의천 연구”는 그 자체의 크나큰 역사적 의의와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57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댓글:  조회:3199  추천:88  2007-06-27
      벌써 4주일째 옴짝달짝 못하고 있습니다      연우산악회 이슬비님,란란이님 그리고 한국의 대청봉님,경송님 등 고마운 분들이 저의 미니홈을 방문하시고 마음을 주고 힘을 주는 댓글들을 올려 주셨지만 제때에 화답하지 못해 송구스럽기만 합니다.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글로 올리니 서로의 이해를 기대합니다.      저의 글을 보아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이제 방학간 연길에 가면 이슬비님은 만날수 있을 테지만 란란이님도 만날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대청봉님은 인젠 남이 아니고 약속이 있으니까 그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요.       저의 미니홈  5월 24일에 올린 글--"부처님 오신날 떠올림은" 대청봉님의 메일에서 계시를 받고 쓴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경송님이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때때로 서로 마음을 열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서로 마음을 열어가노라면 뭔가 통하겠지요~~      여러분들, 다시다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시원한 글을 올렸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그럴 시간여유가 없음이 미안할 뿐입니다.이제 곧 사무실에 나가 보아야 합니다.      후일 다시 마음을 담아 올릴것을 약속 합니다......      두만강 올림
156    소흥 주변에도 고대 겨레발자취가 댓글:  조회:4064  추천:126  2007-06-21
소흥 주변에도 고대 겨레발자취가     소흥시는 중국 절강성의 한개 지구급 시로서 1982년에 국무원에서 첫패로 반포한 24개 력사 문화 명성(名城)이고 강남의 수향(水鄕)풍경을 한품에 안은 아름다운 관광코너입니다.이런 력사문화 도시와 그 주변들에 고대 겨레의 발자취가 력력해 주목을 끌고있습니다.   소흥은 동으로는 녕파시, 남으로는 대주시, 금화시, 서로는 항주시와 이웃하면서 동서길이 약 130킬로메터, 남북너비 약 116킬로메터에 달하며 총 면적은 8256평방킬로메터로 헤아려집니다. 또 시 산하에 소흥현, 신창현, 상우시, 승주시, 월성구 등 현 시와 구를 갖고 있고 전 시 인구는 430여 만 명, 소흥 도시 인구는 63.3만 명에 이릅니다.   소흥은 럭사가 유구하여 일찍 4000여 년 전에 치수천왕으로 불리우는 대우가 이곳 회계산에 올라 큰 물을 다스릴 법도를 얻고 아름답고 현숙한 안해를 맞아 중국의 첫 노예제 국가--하나라 천제인 아들 계(啓)를 낳았고 제후들을 불러 성대한 모임을 가지고 그 모임 지점--원래의 모산을 회계산으로 불렀습니다. 기원전 494년에 이웃 오나라 왕 부차에 의해 월나라가 패한 후 월나라 왕 구천은 오랜 세월 와신상담 끝에 출중한 대신 범려, 절세의 미인 서시 등의 도움으로 기원(서기)473년에 드디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치욕을 씻으며 춘추 5패왕 중의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소흥 도심의 부산이 바로 춘추 시기 월나라의 도읍입니다.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에 이 곳에 산음현을 설치하고 회계군에 소속시켰습니다. 서기 1130년에 소흥 월주는 송나라 고종 조구에 의해 한때 남송의 임시 도읍으로 되었는데 지금도 부산의 월왕전에 가면 그 시기 조구가 손수 심었다는 룡모양의 마른 측백나무 한그루를 볼 수 있습니다.   소흥은 역대의 명인들이 많기로 소문 난 고장입니다.명인들 중 일부만 렬거해도  춘추시기 월왕 구천과 그의 와신상담, 절세의 미인 서시, 동한의 유물주의 사상가 왕충, 동진시기 대서예가 왕희지, 동사재기(東山再起)의 사안, 당나라 대시인이고 서예가인 축지장, 남송의 애국시인 륙유, 근대 신해혁명시기 저명한 여혁명가 추근, 그리고 채원배, 범문란, 마인초 등을 꼽을수 있습니다.위대한 사상가이고 문학가인 로신도 유년시대와 소년시대를 소흥에서 보냈고 어린시절 한때를 소흥 할아버지댁에서 지낸 주은래도1939년 소흥을 찾아 항일강연을 했습니다.이같이 소흥은 걸출한 명인현상이 세상에 보기 드문 력사문화도시로서 일찍 모택동주석은 “감호월대명사향”(鉴湖越台名士乡) 이라고 필을 날리었습니다.   소흥은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명승풍경구가 많기도 한데 얼핏 보아도 대우릉, 월왕전, 회계산 향로봉, 신창대불사, 동호, 가암, 양산 등 국가급 문화재 9곳과 풍경구 2곳, 성급 문화재 46곳, 풍경구 8곳 등이 하늘의 뭇별처럼 총총합니다. 소흥은 또 다리의 고향이기도 하여 1만 여 개의 각이한 다리에 청나라 이전의 옛 다리만도 604개에 이릅니다. 소주와 더불어 말그대로 강남 수향인 소흥에는 다리가 많고 명인이 많아 그 이름이 온 세상에 뜨르르 합니다.     소흥의 란정 서예절, 대우 제사 대전, 소흥 황주절, 소흥 난화절, 후산 도화절,상우 포도절도 유명합니다.술류인 여아홍, 황주는 더욱 유명합니다.   여러 모로 보는 소흥의 개략소개입니다. 이런 이름 난 력사문화지구와 그 주변에는 우리 민족의 고대 발자취도 섞이여 있습니다.   절강 항주 서호가의 근 1000년의 역사 기록하는 신건된 고려사가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와 관련된다면 소흥 주변의 천대산엔 의천 등을 기리는 중한 조사(祖師) 기념당이 있고 중국 불교4대 보살 중의 한 보살인 지장보살(신라사람 김교각) 불상이 항주 영은사, 천대산 국청사, 제기 5설폭포 5설선사, 회계산의 노봉선사 등 불교사찰들에 모셔져 있습니다. 소흥에서 멀지 않은 녕파엔 고려사관 유적지, 중국 4대 불교명산의 하나인 주산군도 보타산엔 신라 때 고대해상왕으로 이름높은 장보고가 다녀간 신라초 기념비가 있습니다. 소흥과 그 주변은 실로 우리 겨레와 관련되고 관광하기 좋은 이상적인 천혜의 고장입니다.   그림 같이 아름답고 어딜 보나 공원 같은 소흥, 소흥으로 오십시오. 소흥은 물론 이 땅의 월수대 저희들도 뜨거이 맞이하며 안내 해 드릴 것입니다.     (2007년 6월 17일)                 
155    【인생소감】불현듯 쓰고 싶은 글 댓글:  조회:4949  추천:151  2007-06-14
【인생소감】불현듯 쓰고 싶은 글리광인 여기는 남방 절강 소흥땅. 하늘이 밑창이라도 뚫렸나, 어제 내내 간밤에 이어 이 오전도 주룩주룩 비가 그칠줄 모른다. 6층아빠트 베란다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젊음이 싱싱 피여 나던 나의 20대시절—20세기 70년대의 한 신문기사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그 시절 나는 한창 푸른 꿈을 안고 연변 두만강 상류—백두고원의  화룡현 광평농장(목축장)에서 나 인생의 어리숙 설계도를 펼쳐가고있었다. 재난의 운명이라고나 할가, 철부지 4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홑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나.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닌 녀동생 하나에 우로 형님, 누나 줄레줄레 넷이니 6남매가 대롱대롱 어머니란 갸날픈 넝쿨에 매달려야 했으니. 어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나의 소시적. 생활이 하도나 궁색했으면 소학교졸업사진 때 변변한 옷 한벌도 없어 마음씨 착한 이웃이 건네주는, 등이 휭 나간 웃옷을 걸쳐 입어야 했을가. 생활이 하도나 궁색했으면 중학교시절 내내 엉뎅이, 무릎 창이 나간 옷을 기워입으며 몇리밖 중학교를 오가야 했을가. 그래도 그 모진 생활고속에서도 다가오는 따스한 봄은 막을수가 없고 피여나는 젊음은 짓밟을수가 없었지. 소학교시절 학습위원으로부터 반장에 이르기까지, 중학교시절 반장으로부터 학교학생회(그시기는 홍대회라 불렀음.) 부주임에 이르기까지 끼끗한 소년, 청년으로 제딴에는 멋있게 인생의 청소년시절드라마를 엮어가느라 버둥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했던 1970년 12월 그때, 우린 행운스럽게도 “네가지 지향(四個面向)”에 맞띄워 시골졸업생 86명중 24명이나 훌 시골을 벗어나 날아가버렸다. 명색이 학교학생회 코치인 나는 사상이 빨개빨개서 선참으로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고향땅을 건설하겠노라며 귀향의 인생로를 택했다. 그런중 어쩌구려 13살우 큰형님의 주선으로 백두고원의 광평농장에 삶의 터를 옮겨야 했으니 그때가 17~18살의 10대후반, 모택동시대로 특징지어지는 년대의 70년대초반. 세상 인생사에는 극적인 변화가 때때로 주어지는가부다. 새농촌건설의 푸른꿈 펼치려던 내가 농장과 큰형님의 배려로200리밖의 현성—화룡2중 고중에 다니게 되였으니 ~ 그때까지도 나는 화룡2중시절이 오늘날 나 인생의 밑거름, 주추돌이 되여줄줄은 미처 몰랐다. 화룡2중에서도 나는 1000여명 학생들의 새별로 떠올라 동창 박세권, 지천 셋이서 학교 공청단위원회와 학생회를 이끌어가며 들썽이였다. 1973년 1월, 나는 화룡2중(고중)을 마치고 다시 나의 사랑—백두고원에 삶의 터를 잡아갔다. “농장에 뿌리박고 혁명하리!(扎根农场干革命!)” 젊음과 패기로 싱싱 끓던 20살 젊은이의 호언장담, 지금 생각하면 허구픈 웃음이 절로 나지만 70년대초반의 그 시절은 호언장담이자 나의 결심, 나의 행동의 지침이였다. 그런속에서 나는 호언장담을 행동화하며 현실로 펼쳐가고있었다. 허~허, 50대 나에게도 이같이 아리송한 력사가 있었다면 우리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할가, 허나 이는 지울수 없는 내 인생사의 20대의 한페지이고 나를 키워낸 시대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1973년 초겨울의 어느날, 350리밖 자치주 수부에서 연변일보사 한족기자 한분이 백두고원의 우리농장으로 취재를 왔다. 농장지도부를 통해 소개를 받은 손기자는 나를 농장젊은이들의 코기러기요, 농장의 미래라며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런속에서 이해 12월 13일부 “연변일보”에 실린 기사가 “흥성하는 광평목축장”이고 농장의 미래속 나도 기사의 한 주인공으로 둔갑했었다. 허둥지둥시절의 산물이라지만 필경은 신문에 처음 실려본 “사적”이요, 사회로부터 처음 받아본  나 평가라 할가.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30여년~ 50대에 접어들어 비내리는 날 왜 문뜩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싶을가, 왜 그때 그 시절 신문기사가 상기될가? 아마도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어도 추억속에 들어가 사는 상정을 떠날수 없는가부다. 음, 싫어도 피해갈수 없는 인생드라마의 한페지는 나 추억속에, 동년배들의 인상속에 또렷이 흔적을 남기였으니까. 그때의 적극적이고 향상적인 인생태도와 락관적인 현실태도가 오늘의 나를 잉태하지나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밖에서는 아직도 내가 그칠줄 모른다. 안해는 비내리는 바깥세계를 내다보며 비가 내리면 왜 상념이 떠오르고  흘러간 나날이 떠오를가고 묻는다. 그러면서 쌍둥이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오 ,나의 쌍둥이~랑랑 18세! 고향에 두고온 그애들은 지금 뭘 생각하고 있을가. 금방까지 웃학년생의 대학시험이 끝났다고, 인젠 고중졸업생이 된다고, 벌써부터 긴장된다고 하는 그애들은 지금 뭘 꿈꾸고 있을가, 명문대? 아니면 미만한 래일의 그 무엇? 18살쯤 그 나이에 새농촌, 새농장의 푸른 설계도 그리며 신문기자의 우스운 포착물로 되였던 나도 그 나이에 그랬었지. 30여년전 그나날, 신문기사속의 “나는” 푸른꿈 펼쳐가는 영준한 청년으로 나타나지만 지금보면 “광란의 년대”의 나~우습기만 하다.올해로 대학시험제도 회복 30년을 맞이하지만 그 시절 대학에 가지 않고 새농장건설에 한생을 바쳐갔더라면 그후의 내 인생을 어떠했을가. 아, 아~ 그래도 그래도 그 년대, 그 시절이 그리워난다. 50년대 중반에 들어선 나도 벌써 추억에 사는 삶을 맞았나? 아니지 아니지~ 나는 아직 할일이 많고 그 일속에서 걸어가야 할길이 멀고도 먼데, 올해로 대학졸업 25년을 맞아 사회진출 25년이라지만 아직도 20년-푸른꿈 제2인생을 살아갈수가 있는데……                                        (2007년 6월 14일)   【부록】(1) 흥성하는 광평목축장  야  국(연변일보사 기자) 지난 국경절 직후에 우리는 장백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신흥목장—화룡현 광평목축장을 찾아갔다. 지난날에 승냥이떼가 욱실거리던 황량한 이 초원은 지금 살진 양떼, 소, 말,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뜨락또르의 동음이 하냥 우렁차다. 광평은 장백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데 12만무의 무성한 초원과 2만 2,000여무의 비옥한 땅을 끼고있어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좋다. 일찍 1958년과 1961년에 선후로 두번이나 농장을 꾸렸었으나 ………   금년초에 목축장에 많은 지식청년들이 새로왔는데 어떤 청년들은 양몰이가 간고하고도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지부에서는 이런 문제를 발견한후 세심하게 교육하여 《양몰이는 전도가 없다》는 그릇된 사상을 극복하고 무산계급후계자를 배양할데 관한 다섯가지 조건으로 자기들을 엄격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단총지 부서기 리광인은 금년 1월에 고중을 마치고 양방목대에 왔었는데 신심이 아주 높았었다. 그런데 양몰이를 나선 첫날에 양 한마리를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오랜 양몰이군은 《양을 잃은것은 손실이 적지 않지만 이후부터 주의하면 되오. 앞으로 혁명적 책임감을 더 가지는것이 중요하오》라고 말하면서 인내성있게 교육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혁명을 위하여 보다 큰 공헌을 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뒤 그는 로방목원들에게서 허심히 배우면서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서 양을 사양하고 방목하는 여러가지 요령을 장악하였다. 그는 또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과 모주석의 저작을 참답게 학습하였는데 이미 《공산당선언》 등 5편의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과 모택동선집가운데의 많은 문장을 학습하고 계속 혁명일기를 썼다. 그는 또 정치야학교를 꾸리는데 열성적으로 나섰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젊은이가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시름을 놓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리광인은 《나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보다 퍽 못합니다》고 하였다. 실로 그렇다. 리광인과 같은 젊은이는 한두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혁명의 중책을 떠메고 힘있게 전진하고있다.                     1973년 12월 13일 부 《연변일보》   【부록】(2)   (삶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인생관 문제에 관한 지상토론 12)   생활의 개척자로 되여야 한다 고향마을을 건설하는 로력적투쟁에서 청춘의 리상을 활짝 꽃피워가리라 마음먹은 나는 1970년에 중학교를 마치고 발걸음도 가볍게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나는 단총지 부서기사업을 하면서 흑판보도 꾸리고 선전대도 조직하여 용솟음쳐 나오는 모범인물들을 선전했다. 짬을 타서 원고도 썼는데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나는 농장을 사랑했고 농장의 래일을 동경했다. 1976년 9월에 나는 뜻밖으로 억울한 사건에 걸려들어갔다. 하루밤사이에 비판, 투쟁 대상으로 되였다. 앞가슴에 늘 달고 다니던 공청단휘장을 떼야 했고 기간민병에서 쫓겨났으며 무르익던 입당도 물거품으로 되였다. 내가 《죄》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나를 현공안국 수용소 철창속에 걷어넣었다. 한 청년에게 있어서 뜻하지 않는 좌절도 불행이라 하겠지만 가장 큰 불행과 고통은 자기의 리상을 실현할수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뜻있는 청년이라면 넘어지면 일어서고 일어서면 자기 분투목표를 향하여 내달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수용소에서 나온후 들끓는 생활에 뛰여들었다. 내가 직심으로 일하니 농장에서는 나를 선진생산자로 선거했다. 나는 또다시 삶의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1977년에 나는 대학교시험을 쳤다. 신체검사에도 합격되였는데 대학교로 갈수 없었다. 나는 맥을 버리지 않고 또 시험공부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라고 무슨 대학시험공부를 하는가》고 놀려도 주었고 어떤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은 대학교에서 요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과학의 전당에 가서 더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싶은 불타는 구지욕만은 식지않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등불밑에서 공부하려 하니 졸음이 오고 피곤했지만 나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으며 공부했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였다. 나는 1978년에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다. 1979년 7월에 조직에서는 나에게 들씌웠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나는 다시 공청단휘장을 앞가슴에 달고 다니게 되였다. 생활은 나를 희망찬 래일에서 살도록 가르쳐주었다. 나는 파란과 곡절 많은 생활을 바랄지언정 잔잔하고 안일한 생활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전자만이 삶의 희열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대학생으로 된 영광을 한가슴에 안고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하고있으며 삶의 길을 개척하고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78년급 학생 리광인 1980년 12월 20일 부 토요일 3면 《연변일보》  
154    【수 필】귀향길 6천리 댓글:  조회:3469  추천:129  2007-06-12
   【수  필】 귀향길 6천리    내 고향 연변 떠나 한겨울 강추위를 모르는 남방에 가 대학교수에 나섰다지만 조선족 선후배 10여명과 어울리며 가족과 매일같이 통화를 가지니 연변이 지척인양 머얼리 떨어져있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러던 이 겨울방학에 렬차로 처음 연변행에 오르매 귀향길, 귀향길이 그리도 멀수가 없다. 남방 절강과 연변이 상상하기도 아찔한 6천리 길.   우리 일행 5명이 녕파—길림행 K76직행렬차에 오른것은 지난1월 28일 저녁 7시이다. 출발역은 절강 소흥, 연석차에서 포근한 밤을 맞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렬차는 서서히 서주역에 들어서고있었다. 밤 사이에 경치가 수려한 항주, 상해, 소주, 무석, 상주, 진강, 남경 등지를 거치였으나 꿈나라 여행길에 오른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절강, 상해, 강소, 안휘 4개 성과 직할시를 누비여 안휘와 산동 사이의 좁은 지대ㅡ강소의 북단에 대이였다는 말인데 이미 장강이남을 넘어선터에 더는 남방의 사철 푸른 산천모습을 엿볼수가 없었다. 중국이란 이 960만 평방킬로메터의 대지는 넓기도 하여 우리는 하루밤 새에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기후대에 들어섰던 것이다.     강소 북단땅 서주를 지나면 산동 최남단 땅에 들어서게 된다. 렬차는 그젯날 항일 철도유격대가 활동했다는 미산호를 가까이 두고 달리다가 오전 10시를 앞두고 천하절경ㅡ태산구내를 에돌아간다. 그러노라니 지난해 9월 3일 오후 2시~3시 사이 산동 제남을 지나 돌산구역인 태산일대를 거치던 정경이 떠오른다. 그 시각 나와 연변사범 김성숙선생은 차창가에 서서 내내 끝없는 돌산을 응시하고있었다. 태산을 지나서야 평원이던 그때가 어제런듯싶다. 태산을 지나고 제남을 지나니 산동의 북단 막바지ㅡ덕주역이다. 마침 정오가 갓 지난 시점이라 류은종선생과 서재학선생은 “덕주파지(扒鸡)를 몰라서야 안되지!”하면서 렬차에서 내리더니 덕주파지 하나 들고온다. 이미 숱한 먹거리에 연석차 술상이 차려지는데 무릇 고기라면 흥미가 없던 나에게 덕주파지가 그리도 맛날수가 있을가. 류은종, 서재학, 김성숙, 김은복 그리고 나 선후배 다섯이 웃고 떠드는속에 시간은 빨리도 흘러만 간다.     나는 다시 연석차 차창가에 나섰다. 우리 동북 연변과 서로 다른 기후대가 나의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제남, 덕주 땅을 달리고 달리여도 대지의 물은 얼줄을 모른다. 약간이나마 얼어든 모습들이 간혹 나타나기는 하나 살얼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망무제한 철도연선의 밭들엔 동맥이 쫘악 깔리여 대지는 또 다른 푸른 모습을 연출한다. 강추위 겨울이 한창인 우리 연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공화국의 960만 평방킬로메터 대지는 실로 여러가지 기후대를 낳고있구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난 80년대 초반과 후반에 겨레 발자취 좇아 남녘땅, 섬북땅을 두루 답사할 때는 정신적여유가 없어서였던지 아니면 신경이 다른데 팔리였던지 이런 감탄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한것 같았다. 감탄은 감탄의 경지를 넘어 자연스레 력사의 언덕을 넘어간다. 나의 눈앞에는 지난 세기 20년대와 30년대, 40년대에 진리를 찾아, 향도를 찾아 남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태항산으로, 연안으로 달려갔던 수백에 달하는 겨레의 열혈청년들이 방불히 보이는것만 같다.     …20년대 중반이후 수백의 우리 열혈청년들이 남경, 상해 등지를 거쳐 남녘땅ㅡ광주로 달려간다. 그들은 광주에서 다시 북상하며 중국의 절반땅을 휩쓸었던 위대한 북벌전쟁에 뛰여든다. 또 위대한 남창봉기, 광주봉기, 정강산회사에서 용맹을 떨친다. 30년대 초반이후 그들중 살아남은 소수 정령들이 중앙혁명근거지 서금, 2만 5천리 장정, 섬북땅에서 활동한다.     30년대 중반이후 또 수백에 달하는 우리 열혈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여 태항산근거지에서, 연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20년대의 그네들, 30년대~ 40년대의 그네들이 바로 이렇듯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서 피어린 발자취를 남기였었다. 력사의 언덕을 넘어 오늘은 그네들과 같이 열혈의 피를 지닌 우리들이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행로에서 렬차에 몸을 실었다.     “너, 무슨 생각에 골몰하니?!”    류은종교수님이 느닷없이 물어온다.    “예? ~그젯날 광활한 이 땅에서 활동했던 열혈청년들이 떠오릅니다!”    “너 생각이 어쩌면 내 생각과 똑 같니?!”    류은종교수님이 감탄에 취해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들이 나아간다…” 노래를 부른다. 연변대 출신의 스승님과 제자는 력사속을 헤치며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푹 취해버린다.     산동 덕주땅을 지나니 하북땅이고 천진을 앞두고 물이 얼어든 모습이니 여기가 북방임을 알려주는듯 싶다. 천진땅을 지나니 또 하북 당산땅이다. 하루길을 달린 해님이 서쪽 지평선에서 나물거리는데 때는 오후 5시 20분, 꼭 연변의 일몰과 한시간 차이를 이룬다. 중국의 시간대가 4시간 차이라더니 연변과 하북땅이 첫 한시간 차이로 안기여든다.    렬차는 어둠이 깔린 대지로 질주한다. 진황도, 산해관을 넘으니 추위속 겨울이 깔린 동북대지.꿈나락에 다시 빠져들었다가 밝아오는 새아침을 맞이하니 매하구를 지나온 반석—길림땅이 반겨준다. 길림대지 전체가 눈속세계를 이루어 우린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로 변해버렸다. 류은종교수님은 새벽에 매하구역에 잠간 내려 보았더니 섬뜩한 강추위가 일신을 강타하더라고 말씀하신다. 북방태생이지만 그동안이나마 푸르른 남방기후에 젖어있던 우리들에게는 마치 처음 느껴보는 다른 세계에 들어선듯하다. 불과 30여시간사이에 6000리길을 달리며 남방세계에서 북방세계에 들어섰으니 실로 기후의 변화와 자연의 무상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가고가도 끝없는 눈속세계의 연장이다. 그런 눈속세계가 길림에서 장춘ㅡ도문행 렬차를 갈아타고 연변땅에 들어서서도 변함이 없다. 설경이란 주로 그림과 텔레비죤을 통해서만 보아오던 남방의 대학생 애들이 떠날 때 나보고 꼭 설경사진을 찍어오라고 절절히 부탁하던 일이 그저 말이 아니였다. 철도연선 소나무들에, 나무들에 사뿐 내려앉은 눈꽃들이 다른 한 감각을 자극한다. 간밤이 아니면 이 새벽에 눈이 내리였음을 어렵사리 보아낼수 있었다.       어느덧 내 고향 연변땅, 안도 명월구역을 금방 벗어나니 흰눈을 떠인 명월구 동쪽산ㅡ토월산이 한눈에 안겨든다. 명월구 출신인 류은종교수님은 벌써부터 흥분에 젖어들더니 몇해전에 즉흥시로 써냈다는 노래 “영월산 토월산”을 떠올린다. 2004년 8월, 이룡산 밑에 집이 있었다는 교수님이 소굽시절 뛰놀던 이룡산ㅡ영월산에 올랐는데 마침 아침이여서 토월산으로 아침해가 솟더란다. 그 아침해가 언어학자이고 시인이기도 한 교수님한테는 토월산이 달 토하는 모습으로 안기여들었다나.    달 토한다 토월산아     달 맞는다 영월산아    달노래 산노래    흥겨웁던 옛시절이     꽃향기로 풍기노나    풀내음에 젖는구나    달이 밝아 명월이냐    산 푸르러 청산이냐    어린시절 몸에 맞춰    섬섬옥수 지은 옷이    푸른 주단 펼쳤구나    너울너울 춤추누나   류은종교수님은 시를 읊다말고 제법 박자를 쳐가며 최현숙의 작곡으로 된 “영월산 토월산”을 부르다가 후렴으로 넘어갔다.     아 그리운 고향산아     옛 친구는 어데 가고    너만 홀로 설레느냐    명시인에 명가사라고 서재학선생이 연신 추어올린다. 그에 진한 감동을 느낀 내가 “귀향길 6천리” 수필이 씌여진다고 했더니 김성숙선생은 “광인선생한테 보이는것은 온통 글이구만!”하며 웃음을 지어올린다. 연변대 출신의 20대 김은복선생도 우리의 정서속에 빠져 성수가 난다.     렬차는 각일각 자치주 수부 연길에 박근한다. “귀향길 6천리” 수필이 무르익어간다. 그속에서 여러 기후대가 흘렀고 중국대지 주름잡던 그젯날 열혈청년들이 스친와중에 흰눈이 내린 길림 연변 대지가 고향애 부르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 살 같아서일가, 내 고향의 그리운 가족이며 그리운 사람들이 마주 달려온다.                                           (2007년 2월 8일)  
153    라운규는 연변 명동학교출신이라오 댓글:  조회:2940  추천:136  2007-06-09
  라운규는 연변 명동학교출신이라오                                         1926년에 춘사 라운규 감독, 주연으로 탄생한 영화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의 일대기를 이루는 획기적인 사변, 그런 춘사 라운규가 연변 명동학교출신이라면 당신은 믿을 수 있겠는가~허나 이는 드팀없는 역사사실. 춘사 라운규의 출생시간을 두고 1902년설과 1904년설 두 가지가 보이는데 한국 인터넷에서는 1902년 10월 27일로 지적하고 있다. 사망도 1938년설과 1940년설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라운규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이고 약종상 라형권의 6남매 중 셋째아들로 통한다. 이 셋째가 자라면서 회령의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17년에 조정옥과 결혼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조혼이래도 엄청난 조혼이겠지만 그 시절엔 남녀 15살좌우이면 의례 결혼해야 하는 줄로 알았다. 결혼 이듬해, 적절히 말해 17살(1918년) 때 라운규는 장남 종익이를 보았고 이해에 배움의 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연변 명동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때 연변에는 명동, 정동, 창동, 광성 등 조선족 4대 중학교가 있었는데 4대 중학교에서도 단연 첫자리에 놓이는 것은 명동중학교였다. 이 학교의 교장이 《동만의 대통령》으로 불리우기도 한 회령출신의 항일독립투사 김약연이다. 이런 쟁쟁한 교장과 라운규가 무슨 인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라운규는 두말없이 명동중학교를 선택했다. 그제날 명동학교는 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자리 잡았는데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의 룡정시 삼합진이고 삼합진 경내에서 북으로 오랑캐령을 넘으면 곧 명동지구에 이르게 된다. 명동일대로 말할 때 1899년은 잊을 수 없는 한해라고 할까. 이해 2월 18일, 종성과 회령의 학자가문이며 우국동지들인 전주김씨 가문의 김약연, 남평문씨 가문의 문병규, 김해김씨 가문의 김하규,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등은 4대 가문의 20여 세대 일가식솔 141명을 이끌고 오늘의 명동으로 집단이주를 단행.1901년에 김약연선생이 장재촌에 규암재를 세우더니 소룡동에 소암재, 영암촌에 오룡재가 꾸려지고 서당교육이 실시되였다. 1906년에 세워진 룡정의 서전서숙이 페숙된 후인 1908년 4월 27일에는 서로간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일떠 세우더니 이듬해에는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떠올랐다. 이해 1909년에 이동휘의 동지이고 신민회간부인 기독교출신의 정재면이 명동학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숙감이던 김약연선생이 교장을 맡고 정재면이 교감을, 문치정이 재정을 맡아본다. 따라서 조선 국내에서 교사진이 대폭 밀려들더니 황의돈선생이 역사과목을 맡고 주시경의 제자 장지영선생과 한글학자 박태환선생이 국어과목을, 일본 와세다대학출신의 김철선생이 법학과를 맡았다. 1910년에 연변 최초로 중학부가 증설되더니 1911년 3월에 리동휘가 명동에 와서 김약연과 손을 잡은후 정신태, 리의순(리동휘의 차녀), 우봉순 녀교원이 부임하면서 녀학부가 설치되어 녀성교육이 막을 열었다. 쟁쟁한 교사진은 쟁쟁한 명동학교를 떠올렸다. 동북 내 남북만에서, 조선 함북에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김약연선생의 증손자 김재홍선생(한국)이 주도하여 서굉일교수와 함께 펴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에서는 그 세월 “명동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그치지 않았으며 시베리아에서도 학생들이 10명에서 15명씩 떼를 지어 왔다.”고 그리였다. “학생들이 온다면 규암(김약연선생을 가리킴)은 20리밖 마을어구까지 마중” 나갔다고 한다. 아마도 1910년대 그 시절에 회령출신의 라운규도 시대의 흐름인 명동행 학생대렬속에 끼이여 명동에서의 학창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규암 김약연선생》과 새로 나온 《문익환평전》에 따르면 라운규는 명동학교시절에 많은 일화를 남기였는데 그중 수학시간의 일화는 지금도 대표적인 일화로 흥미진진하게 전해지고있다. 그 일화는 대개 이러하다.   라운규는 수학시간이 되면 공부는 하지 않고 뒤줄에 혼자 앉아서 웃음연습에 열중하였다. 어떤 날은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본 즉, 책상 위에 거울을 꺼내놓고 허연 이발을 드러내며 벙긋벙긋 웃음연습을 하고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약연선생은 “망나니는 망나니지만 그 애가 장차 뭔가 될 거야” 하며 웃음으로 넘기었다.   《그애가 장차 뭔가 될 거야!》 과연 스승다운 스승이요, 제자다운 제자다. 그후 라운규는 김약연선생이 예견한 것처럼 끝내는 한국 영화사상 선두주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야말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라운규의 나날은 순탄치가 않았다. 명동중학교 입학 이듬해 1919년 연변 룡정에는 천지를 진감한 3.13독립만세운동이 맹렬히 터져올랐다. 2만 여 명 군중이 참가한 이 만세운동에서 명동중학교의 학생들이 선두에 나섰는데 이 운동에서 라운규도 주동자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방랑 중 러시아 백군에도 입대하고 1920년에 홍범도의 독립군에 가담했으며 1921년에 서울에 가서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이해 재학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되기까지 했다. 감옥에서 독립투사 리춘식으로부터 《춘사》라는 호를 얻은 것은 이 시기의 일이다. 만기출옥한 후에는 회령에 돌아와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고 부산 조선 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배우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앞서 명동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꾜 영화학교에 지원하여 시험을 볼 때의 일화도 명동시절의 일화 못지 않게 감미롭다.   시험문제가 또한 기발한 것이여서 1분 안으로 눈물을 흘리고 울어보라는것이였다. 다른 응시생들은 울기는커녕 픽픽 웃는 판에 라운규는 정말 눈물을 짜며 1분 안에 울었다. 아마 그는 명동에서 공부할 때 학자를 조달하기 위해 어머니가 회령에서 간도까지 소금밀수를 하던 일을 추억하고 울었는 지도 모른다.   진짜 흥미롭기도 하고 눈물나기도 한 일화이다. 명동에서 공부하는 아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회령에서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으로 드나들며 어려운 소금밀수에 나섰다는 라운규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눈앞에 방불히 보는 것만 같다.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김약연과 같은 스승이 있었기에 라운규는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을 떳떳이 살아간 것이 아닐까. 춘사 라운규가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23살)으로 알려진다.이해 라운규는 부산의 조선 키네마에 입사하여 제2회 작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영화에 데뷔한 후 《농중조》, 《심청전》, 《개척자》, 《장한몽》 등에 주연하여 뛰어난 연기를 보이었고 1926년에는 자신의 원작인 《아리랑》을 감독, 주연하여 선풍적 인기를 얻는다. 한국 해당 인터넷에 따르면 《아리랑》의 영화내용은 어느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광인 청년과 그의 여동생, 광인의 친구, 여동생을 탐내는 부자집마름 사이에 벌어지는 러브스토리와 살인에 관한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청년 영진은 마을을 휘젖고 다닌다. 그런 영진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여동생 영희의 가슴은 쓰리고 답답하기만 하다. 부자집 마름 오기호는 빚독촉으로 영진의 아버지를 채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희를 탐낸다. 영희를 아내로 준다면 빚도 대신 갚아줄 수 있다고 회유하는 마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 현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영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하지만 영진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을에서 풍년잔치가 열리던 날 마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오기호는 혼자 집에 있던 영희를 욕보이려 덤벼든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은 오기호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던 끝에 낫으로 그를 죽이고 만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제정신을 찾은 영진은 당황스러워 하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다. 흥겹던 마을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고 포승에 묶인 채 순사 손에 끌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바라보며 아리랑노래를 구슬프게 부른다.   n     자료 출처: 나운규. 조희문 지음. 한길사   연변 명동학교출신의 춘사 라운규가 감독, 주연한 일생일대의 명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1936년 《오몽녀》를 마지막으로 제작하기까지 춘사 라운규는  15편이 넘는 영화의 원작, 감독, 주연, 제작을 맡은 휘황한 성과를 올리었다. 이밖에 그는 모두 26편의 영화에 관여하면서 한국 영화사상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었다. 한국 영화계의 선두주자이고 항일독립투사인 춘사 라운규, 그는 명실공히 30여 년의 주어진 생애를 민족과 영화에 불태운 연변 명동학교 출신의 《아리랑》감독이요, 영화제작인이다!                                                   ( 2005년6월 23일)          
152    【수상소감】력사연구 외통길에서 허우적이다가 댓글:  조회:3034  추천:119  2007-06-07
【수상소감】      력사연구 외통길에서 허우적이다가   이 두어달 저의 마음은 그지없이 불안하기만 합니다. 졸저 강경애에 대한 연구평론이 올해 윤동주문학상평론본상 수상작으로 뽑히였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부터였습니다. (나의 평론이 어찌 윤동주문학상평론본상으로 될수 있단 말인가, 여느 문학평론가들에 비해 아직 학문적으로나 연구깊이나를 막론하고 그닥지가 않은데…) 정말이지 불안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력사연구 외통길에서 20여년이나 허우적거리고있는 사람입니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나왔다는 사람이 어쩌구려 전공과는 다른 분야인 력사공부에 살손을 댔으니 운명은 조롱이라도 하듯이 저를 력사공부에로 떠밀기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28년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1978년에 저는 소원성취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학생으로 되였습니다. 시를 즐기였고 1979년 12월호 《연변문예》에 조시 《인삼장에서》를 처녀시로 발표하기도 한 문학도였으니  유망한 시인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고 할수 있지요. 하지만 피어린 조선족의 항일투쟁사와 접하면서부터 력사장편소설을 써내고싶은 욕심에 사로잡혀 그만 력사속에 빠져버리고말았습니다. 허구에 의한 력사창작품이 아닌 진실한 력사를 쓰고만싶었지요. 하여 저는 대학 재학시절에 항일사 관련글들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82년 여름 대학졸업후 저는 일터를 력사연구분야로 잡아버렸습니다.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뛰다말고 연변력사연구소로 아예 옮겨앉았지요. 이 기간 민간 력사연구소를 꾸려보려는 야망에서 하해하여 수년간 바닥인생을 살아보았고 아직도 살고있지만 조선족력사연구는 저의 평생의 집념과 추구였습니다. 저는 력사학자의 길을 걷고저 묵묵히 지나간 력사파헤치기, 어찌보면 따분한 연구를 거듭하기만 했습니다. 저희 발자취는 국내 멀리는 관내 광주, 서안, 연안 등지에까지, 국외로는 조선, 일본에 이르기까지 또렷이 찍히면서 수십편의 론문이 섞힌 수백만자의 글을 써내고 조선족소년렬사전, 조선족인물항일투쟁사(전 4권) 책출판을 망라하여 300여만자의 글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허나 믿기 어렵겠으나 문학분야도 아닌 고독한 력사분야여서 물론 설치한 상도 거의 없지만 이러루한 상은 저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2004년 봄이후 저는 조성일선생님을 회장으로 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일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조문학부 출신이고 기자출신이라 조선족력사에 대한 깊은 리해로 문학연구에 뛰여들었고 2년여기간 강경애, 윤동주 연구를 비롯하여 20여편의 문학론문을 써내고 대학학보와 신문, 문학지 그리고 인터넷에 발표를 하여왔습니다. 그러던중 북향회관련 강경애연구론문이 《연변문학》에 실리고 오늘 덕분에 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 수상작으로 당선되였군요. 진정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력사연구에 빠져버린 저로서는 문학연구와는 거리가 형편없이 먼 인간인데 저에게 평론본상의 영예를 안겨주다니, 그냥 애쓴데 대한 격려로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또 그러면서도 인생 반백을 살아오면서 처음 받아보는 문학상, 문학상과의 첫 인연이라 전혀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한테 문학상과의 첫 인연—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을 안겨주신 《연변문학》편집부 여러 선생님들과 여러 평심위원님들 진정 고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진지한 사랑과 배려 가슴 뜨거이 받아들이지만 여러분들과 애독자님들도 저의 평론이 수상작의 영예와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저의 진정을 헤아리시고 받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앞으로나 저는 삶을 다 할 때까지 숙명으로 되여버린 력사연구 외통길에서 허우적거려야 할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격려로 문학연구, 더우기 광복전 조선족문학연구의 성스러운 길에서도 뛰고 또 뛰여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도 하여봅니다.                                                  2006년 5월 31일              
151    【수 필】동백꽃 련정 댓글:  조회:3612  추천:124  2007-06-05
【수  필】  동백꽃 련정   동백꽃 피고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 … …   이는 한국노래 “소양강처녀”의 제2절 첫 단락이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동백꽃을 떠올리게 되고 겨울철에 핀다는 동백꽃이 신비하게만 안겨들었다. 그때마다 겨울철에 어찌 꽃으로 피어날수 있을까고 반신반의 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번에 남방 절강에 와서 2~3일이 멀다하게 동백꽃을 지켜보면서야 중국 동북이란 북방의 추운 겨울철에 견주어 동백꽃을 떠올린 내가 유치하기 그지없다는것을 자책하지 않을수 없다. 또, 인젠 동백꽃을 떠날수 없고 겨레의 또 하나의 꽃ㅡ동백꽃 련정에 깊이깊이 매료되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수도 없다. 지난 9월초에 남방 절강에 와서 월수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맡게 되고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면서 이곳 대자연에 매료된 첫 대상이 겨레의 꽃ㅡ무궁화라 할까. 다음은 훈풍에 하느작이는 갈대와 동백꽃이라 하겠다. 향로봉 산행이 이어지던 10월초순의 어느날 오전, 여느때와 같이 귀가길인데 회계산 풍경구 호수가를 지나며 여기 1년 선배 정현자선생은 가쯘하게 다듬어놓은 길가의 미화용 잔나무무리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들이 동백꽃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예? 동백꽃 나무라고요?) 나는 내가 잘못 듣지 않았나 하여 일순 어정쩡해 났지만 현실은 현실이였다. 꽃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정현자선생은 이제 곧 꽃봉오리들이 맺힐것이고 10월에 꽃피기 시작하면 겨울철 내내 피여난다고 동을 달기까지 하는데야. 그때부터 나는 며칠에 한번 꼴로 회계산풍경구 호수가와 강가를 찾아 동백꽃 감상에 열을 올리였는데 10월 중순 이후 콩알보다 커보이는 꽃봉오리들이 수없이 생겨나는것이 그렇게 흥겨울수가 없다. 며칠후에는 열콩알만큼 커지더니 붉은 색으로 부풀기 시작하면서 곧 꽃으로 피어나리라고 예시해주는것만 같았다. 나의 디지털사진기에 활짝 핀 동백꽃 송이가 처음 비껴 든것은 10월 26일, 때는 남방의 무궁화가 한창 만발하던 철이라지만 동백꽃은 그 선구자라 불리울수 있는 약간 송이들이 터져 올랐을 뿐이다. 그나마 결백하리만치 소중한 흰꽃들이 다수고 간혹 붉은 꽃이 섞이여 나를 부르고있었다. 일매지게 다듬어진 호수가 길가의 동백꽃 선구자들이였다. 11월에 잡아들어 동백꽃 송이들이 동백나무를 덮기 시작했고 피어나는 꽃들이 점점 늘어났다. 가물에 콩나듯 드문드문 피어올라 유감이더니 11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많아졌다. 그래도 만발한 모습만은 아니여 서운함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12월 초이후 호수변 남하의 동백꽃 나무들이 약속이라도 하듯 붉은 꽃들을 일제히 토해냈다. 초순을 넘기면서부터는 동백꽃 한자리가 만발한 양상을 보이여 나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4~5센치메터 폭의 붉은 동백꽃은 꽃잎이 무려 20여개로 헤아려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주변에는 희디흰 동백꽃도 있고 한국서 희귀로 알려진 연분홍 꽃도 수두룩하다. 헌데 전날비에 꽃잎들이 땅을 덮으리만치 많이도 떨어져 12월 15일의 감상모습은 아쉬움의 동반이다. 더 진한 아쉬움은 그후 며칠간이다. 요즘 며칠 련속 해맑은 날씨더니 12월 16일 토요일 새벽에 교정의 잔디에 첫 서리가 맺히고 이튿날엔 물기 축축한 흙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건너갔다. 월요일인 12월 18일 오후 급기야 붉은 동백꽃 만발한 호수면 강가를 찾으니 활짝 피어난 꽃들은 거의가 얼어서 누우런 색으로 추욱 늘어져 있어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맺힌 꽃봉오리들과 금시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만 그 모습이 여전하여 다행이라 할까. (겨울철 내내 피어난다던 동백꽃들이 남방의 늦가을 서리와 살얼음 추위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동백꽃 상식에 대한 빗나간 이해는 나를 꺠우쳤다. 한국의 해당 인터넷을 검색하면 동백나무는 다른 식물들이 활동하지 않는 겨울에 타는듯한 붉은 빛의 꽃을 피운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남방의 현실은 이런 상식에 붉은 등을 켠다고 할까. 다른 식물들이 활동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여기 절강만 해도 온 겨울 내내 산야는 푸른 모습 그대로이고 겨우내 피는 꽃들도 동백꽃만이 아니다. 찔레꽃 하나만 보아도 지금껏 내내 왕성한 모습으로 붉은 꽃을 피워올리며 길손들을 반기고 있다. 우리 겨레는 겨울의 상징 꽃으로 흔히 동백꽃을 피여올리지만 이는 따스한 남방 기후를 모르고 하는 얼뜨름한 상식임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상록소교목으로 세상에 알려져왔다. 중국어로는 동백( )이고 일명 산다화(山茶花)라고도 한다. 개화기는 12월부터 이듬해 봄사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경우에 어울리는 지는 몰라도 중국의 남방 지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12월 중순이후 선구자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무슨말을 해야할가. 또, 문헌상 동백꽃의 뿌리는 조선반도(한반도)라고 하지만 여기 남방에만도 보편적으로 자생하고 있음은 어떻게 해석할까. 그만치 동백나무는 일본으로부터 중국의 남방일대 전역에 걸쳐 자생하는 식물로서 동백류는 약 200종 이상으로 알려지고있다. 그중 약 70종이 동백아속(亚属) 일진대 한국에서는 붉은 동백꽃이 가장 보기좋은 계절을 2월하순~~3월중순 사이로 잡는것 같다. 이것도 한국의 경우에 해당하는 상식이겠지만 절강 소흥만 보아도 12월 초부터 붉은 동백꽃이 활짝 피어나니 동백꽃에 대한 한국의 상식은 현실과 꼬이는 점이 수두룩함을 드러내고있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기 남방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에 어찌 동백꽃이 피어날수 있으랴고 반신반의 하질 않았던가. 남방에 와서야 사실 여기 겨울은 북방에서 일컫는 겨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따스한 기후라는것, 한 겨울철이라 해도 낮 평균기온이 령상 7~8도 쯤은 유지한다는것ㅡ이런 제 조건으로, 겨울철 가장 짧은 낮 동지기간 일조기도 10시간인 조건으로 이곳 산야는 푸른 숲 그대로 동백꽃 등 겨울철 꽃나무들도 시름놓고 자랄수 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우물안 개구리 시절 우습기만 하다. 어찌하든 남방에 와서 동백꽃을 알고 동백꽃 련정에 빠져들었으니 좋기만 하다. 조선반도(한반도) 남해안과 도서지방에서만 피어나던 동백꽃이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남반부 전역은 물론 서울에까지 피고있다니 더욱 그러한데 충남 서천에 동백꽃 마을이 있어 해마다 꽃피는 황금 계절에 동백 축제를 가진다는 소식, 2월하순과 3월 중순 사이 동백꽃으로 덮히는 여수 오동도 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만치 “바다의 꽃섬”, “동백섬”으로 불리운다는 소식들에 마음은 보다 련정의 파도에 휩싸인다. 언제부터일까, 동백꽃이 질때 꽃봉오리 모두가 뚝뚝 떨어진다고 그에 따르는 애절한 마음, 청춘남녀의 사랑과 리별을 동백꽃에 비유한 시와 노래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니 서두에서 쓴 “소양강 처녀”의 노래가사도 이런 실례의 하나가 아니더냐. 동백꽃 련정, 남방에 와서 빠져든 동백꽃 련정은 시간과 더불어 부풀어만 간다. 동백꽃에 대한 감상과 리해가 깊어갈수록 더더욱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제법 동백꽃과 하나로 이어져 굽이치는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간만 있으면 월수외국어대학 가까이 호수와 남하로 동백꽃을 보러가며 동백꽃가를 거닐며 붉은 꽃, 흰꽃, 연분홍꽃 동백꽃 속에 묻혀본다.                                                                      (2006년 12월 20일)
150    《영화황제》 김염과 첫 부인 왕인미 댓글:  조회:3780  추천:143  2007-06-01
《영화황제》 김염과 첫 부인 왕인미                                                                                                        1   중국영화 100년사를 돌이켜 보면 지난세기 30년대 상해는 중국영화사상 첫번째 황금기를 기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우던 번영의 년대였다. 이 년대에 활동한 연예계 거물급 스타들가운데는 《영화황제》로 불리운 조선족 김염이 있었는데 그의 첫 부인은 상해 연예계의 스타로 떠오른 중국인 왕인미이다.      왕인미는 1985년에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자서전— 《나의 명성과 불행 — 왕인미 회고록》을 펴냈는데 회고록은 들은 바를 적는 형식으로 씌어졌기에 독자들에게 왕인미가 독자와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회고록에서 왕인미는 자기 첫 남편이었던 김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김염은 … 1927년에 상해 민신영화회사에 들어가 기록원이 되었지만 다음해 해고되고말았지요. 그는 1929년 손유감독의 《풍류검객》에 주역으로 데뷔해 스타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손유감독은 연화영업회사에서 《야초한화》를 찍게 되어 다시 김염을 주연으로 캐스팅했습니다. 이 역으로 김염은 영화계에 충격을 던지게 됩니다. 사진은 잘 받는 김염의 균형잡힌 키, 크고 날씬한 스타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그리고 청춘의 숨결 ㅡ 둥근 중국모자를 눌러쓰고 연신 추파를 던져댈 뿐 될성 부른 기미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영낙없는 철부지 역이였습니다. 모두들 낯빛이 변해 버렸지요. 이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김염의 스크린 데뷔작품이였습니다. 이것으로 새로운 타입의 남자배우로서 단숨에 1930년대의 영화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2년의 일이였어요. 상해에 《전성》(電聲)이라는 영화신문이 있었는데 판매를 늘이기 위해 영화팬들이 영화황제를 투표로 선출하는 기획란을 시작했어요. 《전성》에는 매주 투표결과가 발표되고 김염이 그 영광을 획득했던 것이지요. 김염의 매력은 솔직하고 성실한 성격이였습니다. 그는 오락보다도 농구, 사격, 수영, 사냥 등 몸을 단련하는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교제술이 서툴러서 사장이나 기자패거리들의 기분을 맞추어줄줄 몰랐고 남들이 자기를 추켜세우는 것도 싫어했어요. 《전성》이 김염을 영화황제로 선출한 뒤 어느 영화팬이 《페하!》하고 부르며 싸인을 부탁한 일이 있었지요. 김염은 깜짝 놀라 그 팬을 외면한 채로 달아나다싶이 했어요. 김염은 친구들에게 몹시 성실했습니다. 친구가 어려울 때는 늘 힘이 되어주었지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친구가 있으면 집으로 데려와 침식을 제공하고 일도 소개해주었습니다. 친구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꼈던 거지요.   왕인미는 이 길지 않은 몇단락 회상에서 20년대 후반기, 30년대 초반에 걸치는 김염의 상해에서의 연예활동과 영화데뷔, 영화황제의 내력, 사람됨됨이를 보는 듯이 그려내고 있다. 또 자기가 김염을 즐기게 되고 앞으로 결혼에 이르게 됨을 암시하기도 했다.                                                           2   영화황제 김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는 에누리없는 조선인으로서 본명이 김덕린이고 1910년 4월 7일에 서울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친 김필순은 서울 한 병원의 의사이고 반일지사로서 1912년에 일본의 지명수배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중국 동북 통화로 이주했다가 1916년에 치치할에 옮겨앉았다. 김염의 집식구는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제자매 일곱 등 열식구로 알려지는데 김염은 형제중 셋째였다. 1918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늙은이와 철부지들만 남은 일가식솔들은 제각기 흩어져 살길을 찾아야 했다. 이런 고로 김염은 한 동생과 함께 상해에 있는 둘째고모와 셋째고모네 집에서 자라게 된다. 김염은 둘째고모네 집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13살에 제남에 있는 맏형님네 집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고 15살 때에는 천진북양대학에 초빙된 둘째고모부 김규식을 따라 천진에 가서 남개중학교에서 계속 학업에 몰두한다. 이 시기의 김염은 청년학생운동에 휘말리게 되고 로신선생을 아주 존경하며 이름을 김염으로 고친다. 17살 되던 해에 김염은 남개중학교를 마치게 되었지만 자체로 생활의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몇해동안 치치할, 상해, 제남, 천진 등지에서 생활하던 김염은 《밑천이 들지 않는 돈벌이》로 영화배우를 생각했다. 제일 밑천이 들지 않는 돈벌이 같았다. 그래서 친한벗들이 모아준 단돈 로비 7원을 달랑 갖고 1927년 봄에 천진에서 윤선을 타고 상해로 갔고 앞에서 왕인미가 말 한것처럼 상해 민신영화회사 기록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김염의 연예계데뷔에 손유감독의 지지가 컸다면 김염의 은사이고 길잡이는 중국현대연극의 창시자이며 걸출한 극작가인 전한선생이였다. 김염이 민신영화회사에서 《목란참군》, 《열혈남아》 두부의 영화에서 군중역을 맡다가 해고된후 열혈남아의 연출 만뢰천이 소개해준 것이 남국예술극사의 전한선생, 제1차 상해사변, 즉 1932년 《1.28》사변에서 전한선생의 집이 소실되였을 때 전한선생은 국민당의 체포를 피해 김염의 방에서 거처하게 되고 김염은 영화계의 유명스타들인 원령옥, 왕인미 등과 합작하여 민신, 명성, 연화, 예화 등 영화회사에서 연속 영화를 찍게 되었다. 1931년과 1932년 2년 사이만 해도 김염이 “연애와 의무”,  “도화읍혈기”, “들장미꽃”,  “황금시대”, “원대한 포부” 등 10부의 영화에서 주역으로 출연했다고 하니 김염은 드디어 상해 연예계의 유명 스타로 떠오르게 되고 1932년 상해의 영화신문 — 전성에 의해 상해 영화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그때 후에 김염의 첫 부인으로 된 왕인미는 상해연예계의 스타로서 주선, 호접과 함께 상해의 톱4미인 중 한사람이였다. 김염도 만만치가 않아 영화황제라면 1933년 2월 상해에서 중국영화문화협회가 조직되었을 때 전한선생과 같이 위원으로 되었고 왕인미는 이런 김염한테 점점 끌리게 되다가 나중에는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3   1933년도 막가던 시절에 김염과 왕인미는 결혼을 서둘렀다. 그때 김염의 말. “화려한 결혼식을 삼가하고 소박하게 합시다!” 왕인미도 절대 찬성, 그래서 결정한 결혼식이 1933년 섣달그믐날밤이였다. 마침 이날 밤, 연화회사에서 새해맞이 망년파티를 가지였다. 김염과 왕인미는 모두 보통 옷차림으로 손유 등 연예계인사들과 함께 웃으며 회장에 들어섰다. “땡, 땡, 땡……” 드디어 종소리가 12시를 알리자 김염과 왕인미는 호주머니에서 신랑신부라고 쓴 빨간 비단쪼각을 꺼내 옷 위에 둘렀다. 이에 따라 손유감독이 그들 둘의 결혼을 선포하였다. 그때 결혼을 두고 왕인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때와 같은 간단한 식은 없겠지요. 우리 두 사람의 간소한 결혼식은 당시 젊은이들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졌어요.》 김염과 왕인미의 결합은 그들 둘에게 행복도 갖다주고 고민거리도 안겨주었다. 연화회사의 주인은 여배우가 일단 결혼만 하면 광채를 잃는다면서 왕인미와의 계약을 사절했다. 허나 왕인미는 찍고 있던 《어광곡》을 다 찍고야말았다. 왕인미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집에만 있기를 달가와하지 않은 왕인미는 의연히 테니스장과 수영장에 다니다가 결국 조산하고말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기는 이 세상에서 며칠밖에 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이 김염을 매우 상심케 한 모양이다. 아기가 조산할 무렵 김염은 《대로(大路)》촬영에 바쁜 몸이었다. 대로는 항일전쟁을 위해 군사도로를 닦는데 힘쏟는 청년로동자들의 우정과 중국인민들의 항전결의를 그린 영화인데 손유감독이 늘 김염을 찾아 씨나리오를 의논했고 영화주제가 《위대한 길》의 작곡을 맡은 섭이는 자주 김염의 집에 가서 피아노를 치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군 했다고 한다. 영화 《대로》의 촬영시작은 1934년 7월, 이때를 두고 왕인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의 출산일에는 철야촬영이였어요. 그는 새벽에 잠간 집에 들어왔다가는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인지 낮에도 다시 보러왔어요. 아이가 태어나자 김염은 몹시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아이가 곧 숨을 거두고말았으니 고통스런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사람이 결혼한 후 친구들은 왕인미를 보고 《들고양이가 집고양이로 되여버렸다.》고들 말했다. 가정에 파묻히며 쾌활한 야성이 사라져가니 그럴만도 하였다. 왕인미에게 있어서 김염은 남편이기에 앞서 《나보다 뛰어나고 진보적이었으며 나의 사고에도 낡은 점이 적잖게 있었으니》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손유감독이 《사랑이란 받드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왕인미는 《여자는 자기의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을 잠자코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김염이 말하는대로 했다는 왕인미다. 1937년 11월, 일본침략군이 상해 주변지역을 점령하고 상해가 고도로 된후 일본 측에서 김염더러 일중합작영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일제놈들을 위해 절대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결심한 김염은 1938년 가을에 안해와 같이 일본 측의 감시망을 피해 상해를 탈출해 홍콩에 이르렀고 후에는 홍콩마저 일본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또 홍콩을 빠져 1942년 2월에 계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김염은 일을 찾아 중경으로 떠나고 왕인미는 계림의 친구집에 남아 김염의 연락을 기다렸다. 중경중앙전영활영소에서 출연하기로 한 항일영화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43년말에 김염은 성도의 중화극예사인가 하는 극단에 들어갔고 왕인미도 성도에 가서 부부상봉을 이루었다. 극단에는 이들 부부와 아는 사람이 많아 둘의 결혼 10돐 축하파티를 마련해주었다. 왕인미의 영어수준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서 1945년 3월 미군 곤명기지 타자원으로 취직을 했다. 헌데  이 일이 김염의 노여움을 자아냈고 왕인미가 자기를 망치려 든다며 야단을 부렸다. 외국인을 위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염이였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김염에 비해 왕인미는 활발하고 쾌활했는데 김염은 드디어 리혼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서로간의 이해는 너무도 부족하여 드디어 1945년 여름에 이혼하고야 말았다. 김염은 강렬한 애국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라면 왕인미는 가정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후에 그들의 친구들은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은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   그후 김염은 중경, 성도에서 무대배우로 인기를 누리던 진이와 가까이 지내다가 1947년에 홍콩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었다. 그때 김염은 36살이고 진이는 24살, 이들의 결합은 항일전쟁이 끝나면 김염과 다시 가정을 이룰 것을 기대하던 왕인미에게는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새중국이 탄생한 후 이들 세사람은 상해영화촬영소에 배치를 받았다. 한 직장 근무생활은 왕인미로 말하면 정신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왕인미는 우울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병이 나은후 왕인미는 문화부에 의해 북경영화촬영소에 전근하게 되고 10년간이나 외롭게 지내던 유명한 만화가 엽천여와 재혼하게 된다. 엽천여와의 재혼생활도 왕인미의 맘속에 뿌리내린 김염이를 잊지 못하게 하였다. 1985년에 왕인미는 자기가 구술하고 타인이 정리한 회고록 — 《나의 명성과 불행》을 펴내었다. 이 회고록은 자신의 출생부터 69살에 이르는 1983년까지의 생애를 술회한 것인데 책속의 많은 부분은 김염에 관한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왕인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도 김염을 잊지 못한 사람이었다. 왕인미의 가까운 친구 려은에 의하면 인미는 이혼후에도 김염에 대한 나쁜 말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의 회고록을 펴낸후 왕인미는 뇌출혈이 왔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조산한 통에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1987년에 파란많은 한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앞서 김염은 1983년에 73살을 일기로 병으로 세상을 떴다. 김염은 일생동안에 도합 34부의 영화와 많은 연극에 출연한 30년대영화황제이고 왕인미는 30년대의 연예계에서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상해 톱4미인 중 한사람이었다.     (2005년 5월 10일)                              
149    《꽃파는 처녀》와 더불어 온 나날 댓글:  조회:2655  추천:109  2007-05-29
《꽃파는 처녀》와 더불어 온 나날     1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하였건만 꽃분이의 정성이 아직도 모자랐단 말인가, 꽃분이의 정이 애틋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꽃분이가 그렇듯 간절한 희망을 안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고생을 마다하고 가시밭을 헤치며 츠렁바위를 톺아오르면서 꺽어온 꽃이면 그 얼마 였으랴!!! 한송이 한송이 꺽어온 그 꽃들을 깔아놓으면 온 마을을 덮고도 남으련만 어머니는 꽃분이가 꽃을 팔아 사온약도 보시지 못하고 갔으니 어머니가 딸의 심정을 몰라서란 말인가? 야속하다 야속하다 야속하다 천추에 사무친 이 원한이 무슨 까닭인지? 원한은 쌓여도 풀길없는 이 사연이 그 무슨 까닭인지 그 누가 대답해주랴   이는 당년 70년대초 중외를 감동시켰던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설화이다. 최근년간 한국문화로 통하는 한류가 중국대지에서 세차게 불어치는 시점에서도 요즘은 어쩐지 《꽃파는 처녀》에 끌려드는 자신을 어찌할수가 없다. 한류의 뿌리로 불리울만한 《꽃파는 쳐녀》는 벌써 30여년의 일이지만 지금도 이 설화를 읽으면 눈물이 앞을 막으면서 청춘의 활기로 넘쳐났던 20대 초반의 그 나날에로 돌아가게 된다. 말그대로 지난세기 70년대 초반은 젊음과 희망이 싱싱 피여나고 앙가슴에 더운피 끓어번지던 한창 나이였다. 갓 고중을 마친 나는 《사회주의 새농장을 건설하려는》 《장한 뜻》을 품고 장백산아래 백두고원의 광평벌로 달려갔는데 농장지도부에서는 나에게 양방목이란 이 간고한 일터를 잡아주었다. 때는 1973년 봄이다. 양방목의 원만한 수행을 위해 우리 양대에서는 농장본부의 동남쪽에 위치한 광평령을 넘어 10여리 떨어진 동경벌로 지대를 옮기게 되였는데 나는 선참으로 동경벌 진출조에 자보했다. 농장 공청단총지사업을 주도하는 나로서는 응당한 처사기도 했다. 5월이라 초순의 벌방은 신록이 한창이고 백화만발한 시절이라지만 백두고원의 광평령 북쪽기슭은 나무움이 금방 머리를 드는 앙상한 모습이다. 헌데 재미나는것은 령하나를 사이둔 광평령 남쪽기슭은 참나무, 개암나무, 봇나무들이 소리치며 푸른 잎들을 펼쳐내고 있었다. 대자연의 신기함에 도취되여 령을 내리니 동경벌 한복판에 자리잡은 게닥지같은 꺼진 귀틀집이 우릴 기다리고있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 한동안은 마음이 뒤죽박죽이였다. 눈길을 주어 사방을 살펴도 맞아주는것은 곰과 메돼지 출몰하는 우중충한 야산뿐이였다. 이러구러 차차 마음이 가라 앉았으나 문화생활은 빵점이였다. 갖고간 신화자전, 책 10여권이 고작이였으니 더 말해 뭘하랴, 온 나라가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받으며 《청춘의 노래》를 망라한 뜬다하는 거의 모든 도서들이 황색도서로 몰리고 해방후 문화대혁명전까지의 영화와 연극들이 거의다 금지품에 속했으니 960만 평방킬로메터 땅우에 판을 치는것은 이른바 경극—혁명적본보기극, 본보기노래가 아니면 전투성이 고조된 씩씩한 혁명가요들 뿐이였다. 나라가 겪어야 했던 문화의 기근은 백두고원의 동경벌에도 살풍경을 이루어 한창 피여나는 청춘을 여지없이 유린했다. 그 시대를 거치여온 40대~50대들은 동감이리라.   2   그래도 오는 봄은 막을수 없고 피여나는 청춘은 짓밟을수 없었다. 본보기노래는 진저리가 나고 10여권 책도 바닥이 날 때 귀틀집가에 자리잡은 고성리 원경지막에 나보다 조금 우인 한 조교청년이 친구로 되였다. 그한테는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 등 조선책들이 여러권 있었고 또 두만강너머 조선사람들한테서 이런저런 책들을 얻어 볼수가 있었다. 내가 우리 조선족력사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것은 백두고원 동경벌 귀틀집이여서 나름대로의 새로운 문화생활이 소리없이 깃을 드는데 수백리 떨어진 저기 자치주 수부, 현성들에서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가 영화관들을 초만원으로 만들며 눈물의 바다를 이룬다고 한다. 소문은 나래라도 돋친듯 오늘의 숭선진—고성리일대와 광평농장에 파다했다. (우리도 언제면 꽃파는 처녀를 볼수가 있을가?!) 실로 그때 그 시절, 그 나날은 지루한 나날의 련속이였고 기다리기에 지친 갑갑한 나날이였다 .드디여 숭선쪽에서 소식이 왔다. 숭선의 아동촌에서 《꽃파는 처녀》를 돌린단다. 사람사태가 났다. 숭선향과 서북으로 50리를 사이둔 수십리 굽이굽이 산간길에 사람들이 쭈욱 늘어섰다. 울퉁불퉁한 산간길에 돌부리에 걸리기가 십상이지만 사람들 얼굴마다에는 웃음이 물결쳤다. 이렇게 본 영화가 오매에도 바라던 《꽃파는 처녀》였다. 아동촌 한 복판에 자리잡은 넓은 터는 영화관들 못지 않은 사람바다인데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영화에서 주역을 맡은 꽃분이역 홍영희가 진짜 가시밭을 헤치며 츠렁바위를 톱아오를 때, 꽃판 돈으로 약봉지를 들고 귀가길에 올랐을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몸부림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인차 자리를 뜰념을 못했다. 영화속에 빠져버린 우리들, 그네들이였다. 그밤으로 왕복 100리 귀가길에 올라도 농장사람들은 피곤한줄 몰랐다. 그때로부터 3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 그 저녁의 영화구경이 새록새록 안겨든다. 아마 왕복 100리 산길을 걸으며 《꽃파는 처녀》를 본 일은 연변에서도 금시초문 이야길것이다. 그날은 1973년 6월 12일이였다. 1972년 10월1일부 《연변일보》에 《피눈물의 공소, 굴할줄 모르는 인민—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보고서》가 실린것을 보아 연길에서는 이미 9월에 본것으로 되는데 장백산아래 백두고원에서는 그로부터 반년이 훨씬 넘은 뒤에야 보았으니 그 감수가 어떠랴. 일반가정들에 흑백텔레비도 없었던 그 세월엔 그럴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이 동경벌로 돌아 왔을 땐 밤중이였다. 나는 희미한 등잔불밑에서 일기를 써내려갔다. 《오늘 저녁 나는 바라고 바라던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어찌 영화를 그저 보았다고만 하랴, 이는 나에 대한 한차례 가장 심각한 계급교육이였으며 아직 세계에는 3분의 2의 인민들이 제, 수, 반의 무거운 철제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그곳의 어린이들은 〈꽃파는 처녀〉의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고난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50대에 들어선 오늘 이 일기를 보노라니 나로서도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10대 중반의 쌍둥이 딸애에게 이 일기를 읽어 주었더니 천진란만한 애들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3분의 2》는 무어며 《제수반》은 무언가고 묻는다. 《그 세월은 그랬어!》 그렇게 대답하는 나도 웃음도가니속에 빠져버렸다. 하나 그날의 그 일기가 32년이 지난 오늘에 이토록 소중한줄을 뒤미처야 알았다. 일기가 있음으로 《꽃파는 처녀》를 본 준확한 년도와 날자를 알았고 일기가 있음으로 그때의 그 감수를 다시 가슴 찡하게 느낄수 있었다.   3   70년대 초반의 그 나날,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온 중화의 대지를 울음바다, 감동의 바다로 만들었다. 이 영화가 중화전역을 휩쓸 때 문화생활의 기근에 허덕이던 이 나라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마차를 타고 뻐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몰려와 영화관은 초만원》을 이루었으니 흐르는 눈물에 손수건이 흥건히 젖어들어 영화관 매표구주위는 손수건장사군들이 신났다고 한다. 잇따라 《금희와 은희의 운명》, 《피바다》, 《보이지 않는 전선》, 《남강마을의 녀성들》, 《영원한 전사》, 《사과 딸 때》, 《꽃피는 마을》, 《한 간호사의 이야기》 등 영화와 연극들이 중국의 영화관, 극장들을 달구었고 그에 따른 영화의 주제가, 조선노래들이 신속히 류행되였다. 《꽃피는 처녀》의 주제가 《꽃파는 처녀》와 《남강마을의 녀성들》, 《사과풍년》 등 노래들은 중국인민들속에서 뜨거이 열창되면서 한시기 중국문화를 살찌웠고 한세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고로 한창 40—50대의 중년기에 처한 이땅의 그제날 젊은 세대들은 《꽃사시오》 등 조선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여기에 이런 자료가 있다. 2002년 봄에 상해에서 《2002년 상해의 봄 국제음악축제》가 열리였을 때 조선의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참가하여 소문을 놓았다. 두시간밖에 안되는 음악회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은 수십번이나 되는 갈채를 받았다고 하니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과 더불어 자라온 중국 그 세대의 관중들은 깊은 감동속에서 아름다운 회억에 빠져들지 않을수가 없었다. 또 이 몇해사이 조선의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 연극이 다시 중국의 대도시 무대에 올랐을 때 중국사람들은 같이 웃고 울며 노래부르며 70년대 초반을 그리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 40대~50대들은 오락회에서나 노래방들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돌아갈 때면 《꽃사시오》 등 조선노래를 즐겨부른다. 이런 노래들이 나올 때면 너도나도 들썩이며 더없이 열광적이다. 이렇듯 《꽃파는 처녀》와 그 뒤를 이은 영화, 연극 등 조선의 예술은 옹근 한세대에 영향을 주었다. 그로부터 꽃분이역 홍영희는 중국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치 일약 명배우로 떠올라 인기도를 누리였다. 그 세대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꽃바구니를 들고 미소를 짓는 그의 사진은 중국의 영화팬들속에 널리 류포되였다.   4   하다면 《꽃파는 처녀》를 전렬에 내세운 조선영화, 연극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중국땅에서 대성황을 이룰수 있었을가, 주되는 원인은 그래도 경제장성에 힘입은 조선예술의 대발전이 아닌가 싶다. 광복후 50~60년대의 조선은 나라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그 나라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수 있고 따뜻하게 입을수 있었던 상대적 경제발전시기였다. 경제의 활기는 예술의 번영을 가져와 조선예술은 《황금의 예술》로 불리우며 비약의 상승선을 탔다. 70년대 초 이후도 조선예술의 상승은 계속되여 《꽃파는 처녀》, 《금희와 은희의 운명》 등 많은 영화가 제작되여 중국에서 일대돌풍을 일구었고 《피바다》, 《한 자위간파의 운명》 등 가극들이 가세되여 조선예술이 중국땅에서 찬란히 꽃펴날수 있었다. 최근년간 한류가 나타나기 전, 70년대 초반과 중반의 예술대사태였으니 지금의 한류에 비하면 30년을 앞선 시기였다. 조선반도요, 반도의 한 겨레라고 할 때 한류의 진정한 뿌리는 최근년간이 아니라 《꽃파는 처녀》 등이 제작, 상영되여 전성기를 이루던 30년 전 그 나날로 보아야 할것이다. 했으나 70년대 중반이후의 조선경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자못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80~90년대에는 조선국내서 《고난의 행군》, 《고난의 강행군》이 시작되면서 그토록 전성기를 보이던 조선예술의 정화들인 영화나 가극 등 예술작품들이 중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흥기한것이 오늘날 한류로 굳어진 한국의 문화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벌써 감격시대, 꽃마차, 휘파람 불며 등 한국노래들이 소리없이 중국에 류행되기 시작했다. 연변대학 시절에 기숙사에서 노래를 베끼고 반도체로 들으며 흥을 돋구던 때가 어제런듯 싶다. 내놓고 TV나 방송들에서 공개방송하던 시기가 아니였다. 80년대 중기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다. 《질투》, 《추억》, 《영화신화》 등 경전한국드라마들이 공개적으로 중국의 텔레비에 오르더니 중국 관중들은 한국드라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1997년 6월이후 한국 텔레비죤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연변의 이름난 번역가 김련란 등에 의해 한어로 번역되고 중앙 TV제2채널에서 저녁 8시좌우의 황금시간에 한주일에 두번씩 방송되면서 중국관중들은 한국드라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대만의 이름난 작가 경요나 홍콩 드라마에 흥미를 잃어가던 중국사람들로 말하면 한국드라마는 그야말로 청신한 바람이였다. 저녁 황금시간이면 가가호호 중국의 안방에서 《사랑이 뭐길래》가 시청되면서 《중국전역의 많은 도시들에서 길거리가 다 한산할 정도였다고》하니 한류의 세찬 정도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류는 갈수록 세차게 불어쳤다. 중앙TV 제1채널, 제2채널, 제8채널을 위시해서 각성, 시 TV를 켜면 흔히 보이는것이 한국 드라마들이다. 그만큼 한국 TV드라마를 즐긴다는 말인데 극장들에서도 한국영화행사가 빈번하다. 쓰다나니 한류로 돌아갔다. 《꽃파는 처녀》가 한류의 뿌리라는 것과 그 선후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현실은 이러해도 이땅의 40~50대 안목에서 70년대 초반의 《꽃파는 처녀》의 영향을 과소평가할수 없다. 한류의 세찬 충격에도, 한국노래의 판쓸이에도 흔들림없이 오락장에서, 노래방에서 《꽃파는 처녀》 등 당년의 조선노래들을 즐겨부르며 희열에 잠기는 중년세대들, 그들의 성장에서 청소년시기 받은 조선영화의 영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였다. 적지 않은 중년세대들은 아직도 한국노래보다 젊은 시절에 배운 조선노래들을 더 즐겨 부른다. 《꽃파는 처녀》로부터 심장속에 뿌리내린 조선예술의 거대한 힘이였다.   5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앞에는 채색립체사진으로 된 홍영희배우사진과 흑백사진 여러장이 놓여있다. 이 사진들을 구하기 위하여 장백산 아래에서 현성—화룡으로, 연길로 뛰던 그때가 어제런듯 하다. 또 《꽃파는 처녀》에 심취되여 그때 숭선과 광평에 온 영사대일군들을 졸라 《꽃파는 처녀》설화를 베끼던 일도 어제런듯 하다. 오늘의 중년세대들에게서 얻기어려운 이 영화의 설화가 나한테 있으니 문화대혁명 10년기간의 하나의 진품이 아닐수 없다. 이뿐이 아니다. 나에게는 또 그때, 그시절 흥나게 불렀던 조선예술영화 주제가들을 망라한 조선노래 필사본이 있어 소중한 기념품으로 되고있다. 이 조선노래 필사본은 당년 광평농장에 지식청년으로 내려갔던 녀자친구 최순녀가 정성들여 수집하고 베낀것인데 목책으로 불리운 일기책이 귀중했던 시절에 그 시절 흔하디 흔한 흰종이로 접어 소중히 맨 노래책이였다. 노래책을 펼치면 그 시절 널리 불렀던 조선노래 70여부가 그대로 나타난다. 노래베낀 순서에 따라 적으면 조선예술영화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당의 참된 딸 금강산처녀 피바다 압연공들 꽃피는 마을 남강마을 녀성들 보이지 않는 전선 사과 딸 때 로동가정 영원한 전사 금희와 은희의 운명 마을사람들속에서 숨길수 없는 정체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와, 무려 15부의 조선예술영화 제목들이다. 어찌하든 그 시절 불렀던 조선노래들은 거의 없는것이 없으니 진짜 소중한 기념품이다. 이는 녀자친구가 2—3년만에 광평농장을 떠나 현성으로 진출할 때 나에게 선사한 것인데 또 하나의 문화대혁명기간 소장품이 될줄을 몰랐다. 그때 농장 《모택동사상선전대》 책임자였던 나에게 여러책으로 된 노래필사본이 있어도 이렇게 전문 조선노래만 담은 노래책이 없다고 할 때 그 소중함이 가슴 찡하게 맞혀온다.   6   50대 초반을 잡은 나는 아직도 《꽃파는 처녀》속에 잠겨있다. 젊은 시절의 그리움에서일가 아니면 《꽃파는 처녀》의 매력이라 할가, 내내 홍영희란 이 꽃분이역의 이름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래서일가, 최근에 나는 조선영화배우 홍영희 관련자료를 얻게 되여 영화속의 꽃분이와 마음상 대화를 나눌 기회를 다시 갖게 되였다. 사실말해서 금방 20살을 잡았던 《철모르는》 시절이라 영화의 주인공 홍영희의 신상에 대해서 아는것이 거의 없었다. 해당자료를 보고서야 나는 홍영희배우가 18살의 어린나이에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역을 맡았다는것과 1955년도 생, 양띠라는것을 알았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홍영희배우는 1955년에 조선 량강도 운훈군의 한 보통일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남다른 기질은 그로 하여금 중학교 졸업반 시절에 지방으로 배우모집을 나온 연출들의 욕심을 자아내 평양영화배우양성반 4기생이란 이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했다. 그럴 때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는 김일성주석 탄생 60돐에 즈음하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영사막에 올리게 되고 김정일지도자의 배려로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행운스럽게도 《꽃파는 처녀》의 영화주역으로 나서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온 나라가 주목하는 꽃분이역이였다. 마침내 홍영희는 꽃분이역을 출중하게 감당했고 1972년 김일성주석 탄생 60돐 기념일인 4월 15일에 《꽃파는 처녀》 예술영화가 정식으로 개봉되였다. 이어 《꽃파는 처녀》는 체스꼬 제18차 까를테바아리 영화축전에서 특등상과 특등메달을 수상, 홍영희는 일약 조선영화계의 새별로 떠올랐다. 그해에 《꽃파는 처녀》가 중국에 진출하고 중국 전역에서 상영되면서 홍영희는 온 중국이 다 아는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였다. 영화개봉 이해에 홍영희배우는 조선영화 사상 최년소(18살) 공훈배우로 되였다면 8년후 1980년에는 조선배우의 최고영예—인민배우칭호를 지니였다. 조선영화대학에 입학하여 4년공부를 하면서 체계적인 예술기량을 닦은것은 그 뒤의 일이다. 홍영희배우는 18살에 본격적인 영화배우생애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네번째 겨울》,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민족과 운명》 등 3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당연히 홍영희배우는 조선인민이 사랑하는 국내 최정상급 배우였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당년의 꽃분이역—홍영희는 인젠 51살의 중년녀인으로 되였다. 원숙미가 흐르고 옛 미모가 여전한 그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있는데 남편 정윤식은 인민보안성협주단 음악지휘로 뛰다가 승직되여 지도직무를 맡은 모양이다. 취미생활은 독서, 영화관람, 음악감상이라고 한다.   7   일찍 70년대~80년대에 중국을 방문한적이 있는 홍영희, 《꽃파는 처녀》를 통해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배우 홍영희—그는 오늘도 조선국내 최정상급배우로 뛰고있어 금방 촬영을 마무리 지은 중조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에서 력도산의 어머니역을 맡게 되였다. 중조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은 당대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인민배우 홍영희 등 6명이 대거출마하는 수준급의 영화로 떠오르게 된다. 연변적 출신이며 《력도산의 비밀》 집행감독인 박준희감독에 따르면 력도산의 어머니역 홍영희배우는 《꽃파는 처녀》 주인공시절의 인상보다 중년녀인으로서 몸이 좀 실해보이는 편이지만 고전미인형으로서의 그는 여전히 이쁘다고 한다. 박준희감독은 현재 장춘영화그룹 제2영시공사 제작인, 감독으로 맹활약하고있다. 나와 동년배인 박감독은 기자시절의 인연은 없지만 2월 13일에 가진 조선족영화동호인 새해맞이만찬모임에서 허물없는 동년배로 정을 붙이였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동호인 고문이고 나는 50대초반의 영화동호회 신입회원이였던것이다. 그날 새해모임에서 우리는 박준희감독한테서 《력도산의 비밀》을 찍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홍영희인민배우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는데 전에비해 좀 실한편이지만 고전미인형으로서 이쁘기는 매일반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였다. 새해 2005년에 와서 다시 우리 영화동호인들의 화제속에 떠오른 홍영희배우, 안재욱, 김희선, 송승헌, 송혜교, 장동건 등 한국의 유명스타들이 오늘날 중국 허다한 관중들의 숭배의 우상으로 떠오를 때에도 중년세대들이 선참 떠올리며 알아주는 조선의 인민배우—그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속에, 마음속에 《꽃피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역으로 남아있다.                                                     (2005년 3월 18일)                                                  
148    【수필】가야하와의 인연 댓글:  조회:3408  추천:125  2007-05-26
가야하와의 인연      이 땅의 우리 겨례에게 있어서 가야하는 두만강, 해란강과 더불어 유서깊은 력사의 강, 전설의 강, 어머니 강이 아닐수 없다. 내가 이런 어머니 강 가야하와 인연을 맺은것은 40여년 전 철부지 소학시절로 거스른다.       내가 태여나 어린 시절을 보낸곳은 해란강상류의 한 농촌마을이였다. 뜻하지 않게 4살에 아버지를 여인 나는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야 했다. 그것도 우로 형님 셋에 누나 하나, 녀동생까지 6남매가 유일한 일손인 어머니에 의지해 살다보니 생활은 째지듯 가난하여 세 형님과 누나는 중학교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줄레줄레 물러서야 하는 신세. 그래도 막내 남동생이다보니 어려운 살림에도 형님, 누나들의 사랑을 받으며 외로움은 몰랐는데 여름방학이면 로임쟁이 아버지를 모신 나 또래들이 연길공원으로 간다, 친척집으로 간다며 뻐스에 오를 때면 그 모습이 그리도 부러울수가 없었다.       (나도 언제면 뻐스타고 놀러갈가?!)       그 시절 소학교 저급학년인 나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망과 꿈은 뻐스타고 고향밖으로 나가보는것이였다. 그래서 늘 가까운 고향의 서쪽 산정에 올라서 동쪽의 목도고개너머 멀리 평강벌, 비암산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보다 열세살 우인 큰 형님이 “가야하 푸른 물이” 어쩌고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였다. 문학을 즐기고 노래를 즐기는 큰 형님은 시골소학교 선생질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가야하노래가 그만 내 여린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배운 노래가 후날 커서 알게 된, 임효원 사, 동희철 곡으로 된 1958년도 작 “내 고향 좋구좋다”였다.   가야하 푸른 물이 논밭을 적시고 갈모자 산기슭에 소나무 무성한 … … …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왕청땅에 있다는 가야하가 내 어린 마음에 와 닿으며 끝없는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가야하는 어디지?)       대중없는 심산이지만 무작정 가야하가 보고싶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가야하, 가야하는 내 머리에서 떠날줄 몰랐다.       그런 막내가 안쓰러웠든지 하루는 어머니가 도문 북쪽 석현이라는 부근 고장에 친언니네가 살고있다고 했다. 귀가 번쩍 틔였다. 소학교 2~3학년 때던가 나는 어머니를 졸라 종내 석현행에 올랐는데 렬차타고 두세간 끝에 석현역에 내리니 외큰어머니댁은 석현에서도 가야하를 따라 북으로 10여리 더 가는 궁벽한 시골마을—룡북이였다.  그래도 좋았다. 꿈결에도 그리던 그 가야하였으니 가야하를 옆에 끼고 걷는 재미가 별 재미였으니 기분은 내내 둥둥 뜨기만 하였다. 노래와 같이 푸른물 일렁이는 가야하는 고향을 흐르는 해란강에 비기면 진짜배기 넓고도 큰 어머니 강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큰어머님네가 사는 가야하 기슭마을—룡북으로 달려갔다. 손우인 외사촌 형님네를 따라 처음 즐기는 가야하 줄낚시질이 좋았고 강가에서 물장구치다가도 가야하가 기슭을 치는 마을아래 저 병풍바위에 올라 맘껏 소리지르기도 하였다. 그 소리가 메아리되여 들릴때면 제세상이노라고 퐁퐁 뛰였다. 때론 외사촌 형님을 앞세우고 마을 북쪽의 산정에 올라 저쪽 산너머를 한없이 바라보기도 하였다.       (산 저쪽은 어딜가?)       외큰어머님은 산저쪽 가야하를 거슬러 오르면 목단지가 있고 삼도구가 있고 배초구가 있고 왕청이 있다고 했다. 가야하와 인연을 맺은 어린시절 나 모습이다.       어언지간 세월속에 묻히여 가야하로의 발길이 뜸해졌다. 큰어머님과 큰아버님이 선후로 세상뜨시고 외사촌형제들이 시골마을을 떠났다. 듣자니 가야하기슭마을 룡북촌이 많이 황페해졌다고하나 찾아본다는것이 여간 쉽지가 않았다.       하긴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였다. 몇년 전부터 수석에 취해버렸는데 탐석차로 가야하에 자주 다니게 되면서 가야하와의 인연이 다시 맺아졌다. 천교령아래로부터 대흥구, 왕청구간, 배초구에 이르기까지 다니지 않은곳이 없었다. 소시적 그 시절은 멀고도 먼땅으로 느껴지더니만 40년세월이 흐른 중년의 오늘에는 문앞이런듯 했다. 탐석행은 배초구 구간의 만천성풍경구아래에서 석현, 도문구간까지도 이어졌다.       2002년 여름이다. 석현~삼도구 구간 가야하 탐석차 룡북촌을 지나게 되였는데 살림집 몇채뿐인 황페한 마을이 시선에 맞혀와도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필경 어린 시절의 모습 어리고 꿈이 어리고 소시적 추억이 어린 가야하기슭의 시골마을이였다.       그러던 시골마을 룡북촌으로 지난해부터인가 도문—왕청구간 아스팔트길이 가로 지르니 룡북촌이 달라졌다. 더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택시나 뻐스로 잠간새면 가 닿을수 잇는 고장이였다.       그래서일가, 가야하기슭의 이 시골마을을 견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것 같았다. 그속에는 한국분도 끼여 개발여지가 큼을 시사하였다. 마을 앞으로 가야하가 흐르고 도문—왕청구간 신작로, 도문—목단강행 철도가 쭈욱 뻗은데다가 마을주위가 온통 부침땅이고 뒤쪽은 산으로 둘러있어 여간 좋은 고장이 아니였다. 큰 어머님네가 어찌할수없이 묻혀살던 시절은 옛날이였다. 한국을 다녀와 올해 연길시에 새 아빠트를 잡은 외사촌누님은 동생이 다니던 그때는 가난이 푹 배인 시절이였다고 몇번이고 되뇌이였다.       오늘도 나는 철부지 그 시절 어린 내 마음을 끄당기던 가야하를 가끔 찾는다. 수석찾아 강따라 장장 216킬로메터 가야하를 오르내릴 때면 내 마음은 하냥 그제날 가야하 기슭마을—룡북촌을 떠나지 않는다. 천교령구간 발원지에서 50킬로메터 내리흐르다가 천교령에서 북으로 내려오는 춘양하와 합수하면서 제법 강모습을 드러내는 가야하, 대흥구를 지나 왕청현성 서쪽구간에서 소왕청하와 십리평쪽에서 흘러내리는 대왕청하와 합류하여 큰강을 이루는 가야하, 서위자, 중안, 배초구, 삼도구, 석현, 곡수 구간을 스치며 두만강에 흘러들기까지 도합 78개의 크고작은 강을 포옹하는 가야하, 배초구진 구간에 만천성국가삼림공원을 가지게 한 유서깊은 가야하—이 가야하와의 인연을 나는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두만강, 해란강이 우리 겨레, 내 마음의 어머니 강이듯이 가야하도 잊을수 없는 어머니강이기만 하다.  또 하나의 어머니 강 가야하, 이 가야하의 류역면적은 6500평방킬로메터, 이 강 류역지구에는 옛날 두만강을 넘어서고 해란강을 건넌 조선이주민의 후예—우리 겨레들이 많이 살고있는데 총인구가 2만 명을 헤아리는 배초구진에만도 1만 1000여명의 조선족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야하기슭의 시골마을, 석현구간의 한 마을인 룡북촌도 이런 조선족마을의 하나가 아닌가! 만천성 국가삼림공원에 힘입은 룡북촌의 래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리고 인연이 닿은 가야하의 래일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2005년 7월 11일)                                                  
147    【단상】부처님 오신 날 떠올림은 댓글:  조회:3451  추천:131  2007-05-24
  부처님 오신 날 떠올림은            일전에 한국의 산악인 대청봉님한테서 중국의 항주와 향로봉 등지를 여행하고프다는 의향이 전해졌다. 뒤미처 5월 24일 부처님 오신 날 전후하여 한국에 연휴가 시작되여 해외여행 떠나는 사람들이 넘쳐나 비행기표를 구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또 뒤를 물었다.   (부처님 오신 날?)   서로간 메일에서 처음 대하는 “날”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한국에 그런 날이 있거니만 보고 별로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헌데 대청봉님은 부처님 오신 날 전후연휴로 비행기표를 구할수 없어 정말 항주여행길에 오를수 없다고 고충을 알려오지 않겠는가. 그때에야 비로소 부처님 오신 날 해당지식을 찾아 검토하고 나는 저으기 놀랐다. 부처님이 오신 날은 다름아닌 석가모니 탄생일로서 우리 민족한테는 음력 4월 초파일로 통하고있었다.   음력 4월 초파일, 지난세기 50년대~ 60년대를 거치여 온 50대세대로 말할 때 4월 초파일은 생소한 들림이 아니다. 어릴 때 어머님한테서 늘 들어온 귀에 익은 말씀, 했으나 음력 4월 초파일이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연유된다는 사실은 감감 모르고 지내왔다. 단지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의 하나로, 그런 날로만 알고있을뿐이였다. 교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불교도가 아닌 나로서는 4월 초파일 리해가 세시풍속의 하나라는것이 고작이라 할가.   한국 대청봉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대청봉님이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떠올려 주었기에 이날이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는것을, 음력 4월 초파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였으니 말이다.   알고보면 해마다 음력 4월 초파일은 불교시조 석가모니의 탄생일로 통한다. 이날을 불교계에서는 불탄일(佛誕日), 욕불일(浴佛日)이라고 하나 우리 민속에서는 4월 초파일로 전하여진다. 이를 알자면 조선반도(한반도)의 삼국시기 신라로 소급하면서 2500년전의 석가모니시기로 거스르지 않을수가 없는것 같다.   석가모니는 력사상의 진실한 인물, 고인도의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진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565년~기원전 486년 사이를 살다가 간 사람으로서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로자(기원전 580년~ 500년),  공자(기원전 551~479)와 동시대 사람임이 이채롭기만 하다. 사실 석가모니는 불교시조의 진실한 이름이 아니다. 석가는 고인도에 살고있던 샤키아라고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고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의 뜻으로서 석가모니는 석가족출신의 성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석가족은 오늘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부근에 있던 한 지방에 거주하던 민족인데 성씨 고타마, 이름 시다다로 알려진 석가모니는 고인도 쟈비로위성국의 태자로 이어진다.       세월속에서 2500년전에 이런 태자 석가모니에 의해 종생평등(众生平等)등을 주창하는 불교가 창시되고 기원 67년, 즉 동한 영평10년에 중국에 전파됨을 알린다.불교는 중국에 전해진후 점차 천대종, 화엄종 등 8대 류파로 번져가며 전례없는 발전을 가져오던 중 또 한국, 일본, 윁남 등 나라로 번져갔다. 오늘날 세계상의 불교도들이 5억명에 달한다고 할 때 일본 인구 1억 2000여만명에 불교 각 류파신도만도 9500만명, 동남아의 여러 국가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불교는 이미 기독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종교가운데의 하나로 자리를 굳히였다.불교사찰이 있는곳엔 대웅보전이 있으니 대웅이란 석가모니의 덕호이고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를 공봉하는 보전을 말하는거지.   다시 옛날로 돌아가보면 신라시기에 불교의 축의행사(祝儀行事)—석가모니 탄생일은 팔관회로 거행됨을 보인다. 이런 불교행사는 그후 후삼국을 거쳐 고려조에 이르면서 점차 우리의 민속행사로 번져간다. 고려시기엔 정월 대보름기간의 저녁 연등놀이가 음력4월 8일로 옮겨졌으니 4월 초파일—불교의 축의행사는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우리 민족의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고착되여버렸다.   이는 력사속을 소급해 본 4월 초파일과 불교, 불교행사의 두루 연변과정이다. 그랬지만도 나는 의연히 이에 마땅한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세월속에 흘러왔다. 그러던 나에게 불교를 리해할 기회가 도래했으니 지난해 9월초이후 남방의 절강에 와서 중국 불교의 지장보살—김교각의 발자취를 추적하게 되면서 나 인생사 력사연구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게 되였다.   절강은 중국 남방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이르는곳마다 불교사찰, 즉 절들을 대할수가 있다. 불국선경으로 불리우는 절강 천대산 일대만 해도 국청사를 대표로 하는 불교사원이 110개소, 도교도관이 25개소에 이르니 불교에 대한 신앙과 포교정도를 헤아릴수 있을것이다. 그중 지장보살 자취를 느낄수도 있으니 지장보살—김교각을 찾아가는 길은 불교사찰에서 불교사찰로 이어지는 길이여서 불교에 대한 초보자 리해마저 따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행할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중국 불교계의 지장보살님은 워낙 신라사람 김교각이였다.그런 그가 기원 8세기 초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와서 구화산에 자리잡고 구화산불교의 창시자로 떠오르고  중국 불교 4대 보살중의 하나인 지장보살로 떠올랐으니 우리 겨레의 위대한 인물이 아닐수가 없다.   오늘날 중국 경내에는 절강 보타산, 사천 아미산, 산서 오대산, 안휘 구화산 등 4대 불교성지가 있다. 그중 구화산은 지장보살도장이고 지장보살님이 겨레의 력사속 위인임은 두말할것도 없다.불교사찰이 있는 곳이면 지장보살님의 흔적을 찾아볼수 있으니 보살이란 석가모니의 다음으로 가는 제2위치를 가리킨다. 불교계에서 그 위치는 대단하고 놀라울 지경이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떠올리니 마음이 한결 후더워지는걸까.   대청봉님을 통한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오신 날 통한 석가모니 탄생일 리해,우리의 세시민속으로 번져진 4월 초파일—불교사속에 위대한 인물 지장보살님이 있고 항주고려사와 이어지는 한국 천대종의 개종조사(開宗祖師)—의천 대각국사 (1055~1101)가 있으니 ~ 그 발자취 좇아 나는 가고간다.   오늘은 음력 4월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이날을 맞아 한국에는 숱한 신도나 방문객들이 불교사찰을 찾아간단다. 남방 절강에서도 석가모니 탄생일을 맞아 사람들이 이어서고 꽃불들이 하늘로 터져오른다.                                                  (2007년 5월 24일)
146    【수 필】갈대의 깨우침 댓글:  조회:3545  추천:137  2007-05-22
  갈대의 깨우침     인간의 삶이란 끝없는 배움의 연장이라더니 조금도 그른데가 없는가부다. 나서 자란 내고향 북방 연변도 아닌 머나먼 남방 절강에 와서 인간 삶의 배움의 길 리치를 뜻하지 않게 깨우치게 되였으니 그것도 인간이 아닌 대자연의 한낱 수수한 풀류인 갈대, 남방에서 갈대와 벗하며 인생 반백에 삶의 궤적이 영원한 배움으로 이어져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으니 대자연이 하사한 갈대무리에 허리굽혀 절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국경 연휴기간인 지난 10월 2일, 력사의 외통길을 고집하는 나는 외홀로 항주 옛 고려사 찾기답사에 나서 보았다. 항주고려사란 근 1000년전의 고려 명승 의천과 관계되지만 소흥~항주행 괘속뻐스로 항주에 이르매 항주고려사를 아는이란 거의 없다. 반나절의 갖은 신고끝에 항주 서호가에 자리잡은 고려사 옛터를 찾았고 옛터에 궁궐같이 일어선 복원된 웅장한 고려사를 보아서야 마음의 평온을 되살렸다.      귀로에 산간의 호수를 방불케 하는 항주 고려사 부근의 적산부 가까이 호수가를 지날 때였다. 호수가에 무더기로 자라난 갈꽃들이 해빛에 유난히도 눈부시여 발목이 잡히는데 그 한번 발목잡힘이 갈대와의 숙명적인 만남, 인연으로 이여지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사진 몇장을 찍어가지고 귀가하니 나는 깜짝 놀랐다. 깃털같은 갈꽃이 그리도 마음을 다잡을줄이야, 보고보아도 끌려드는 내 자신을 어찌할수가 없다.       갈대의 상식에 빠져보면 갈대는 습지나 내가에서 흔히 숲을 이루고 자라는 벼과의 다년생 초, 즉 풀이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갈은 지구라는 땅덩어리 북극에서 열대지방에 이르기까지 호수나 습지, 개울가를 따라 자란다고 하니 줄기는 곧고 매끈하고 키는 1.5메터내지 5메더, 잎은 길고 넓은 편이다. 이런 갈대가 줄기를 발, 삿갓, 삿자리 등에 제공하고 뿌리줄기를 중약의 약재로 제공한다면 굼실굼실 훈풍에 하느작이는 갈꽃은 또 그 신기한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잡으니 갈대 전체가 보배덩이가 아닐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갈대의 지구상 존재로 하여 녀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갈대같은 허무한 인생,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다… 등등 속담과 명구들이 생겨나질 않았는가. 그중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주견없는 사람, 너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키니 오늘날 갈대가 내가 어디 그런 존재냐고 항의를 제기해 올 지경이다.       아무렴, 이런 갈대가 내 마음을 다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갈대는 항주 서호가에서 나의 발목을 잡더니 소흥의 회계산 풍경구 호수가와 외성하가에서 또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 속에서 어언 두어달 남짓, 나는 남방의 무궁화, 동백꽃과 더불어 갈대와 벗하며 가는 곳마다에서 갈대를 찾고 갈대를 디지털사진기에 잡아두었다.       인생사에서 두어달이란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다. 인생백년을 살아야 3만6천500일이요, 1200달이라고 보아질 때 더구나 그러하다. 이 두어달 기간중 지난 12월 5일, 월수 외국어대학에서 10여리 떨어진 정산(亭山)--영화탑(永和塔)에 다녀올 때가 갈대로 말해 가장 소중한 시간인것 같다.       이날 오전, 해당 강의를 마치고 영화탑에 다녀오다가 소흥의 아름다운 외성하를 따라 걷고 또 걷는데 홀연 저 앞 강가에 무리를 이룬 갈대들이 시야에 맞쳐 오질 않겠는가, 갈꽃들이 마침 가장 희한한 시기를 잡을 때여서 나는 감탄이 절로 났다. 내가 갖고있는 지식을 통털이로 털어놓아도 갈꽃의 희한함을 형용해낼 재간이 없다. 그러면서도 외성하 따라 길게 길게 뿌리 내린 갈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무리 무리 갈꽃들은 나를 인류전설속의 에덴동산에로 끌어들이는것만 같았다.  알고보면 항주나 소흥 일대의 여기 남방 갈대들은 내가 본것만 하여도 희한한 여러 종으로 헤아려졌다. 나는 나의 무지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소시적 연변의 한 시골에서 동년의 갈대피리를 만들어 불며 뛰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소학교 시절 논가의 늪에서 갈대 베여 누워놀던  떄가 어제 같은데~ 갈대라면 의례 그러한 종 뿐인가고만 리해했다. 허나 그게 아니였다. 항주, 소흥 일대서 본 같대는 내 고향 연변과는 전혀 다른, 연변서는 볼수조차 없는 특이하고도 희한한 품종이였다. 갈대를 보면서 재래의 틀안에서 한곳에만 머물러살았던 나,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생겨나는 리유를 알것 같았다.       그때부터 인터넷에 저장해놓은 갈대와 갈꽃을 들여다 보는것은 나의 남방생활의 일종 취미로 자리잡았다. 그때마다 이렇듯 희한하고 아까운 갈대와 갈꽃을 어찌 외홀로 감상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며 인터넷에 올려야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또, 공연한 짓으로 취미없는 뭇님들이 얼굴찌프림을 초래할가봐 저어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끝내는 조선족문화를 리드하는 대표적인 사이트중의 하나인 연우미디어 연우산악회 코너에 몇번에 나누어 10여장을 올리고야 말았다.       그날이 12월 13일. 인테넷에 띄우고도 반향이 어떨가 흔들리기만 한데 상상외로 반향이 좋았다. 갈대를 무척 좋아한다며 해마다 가을이면 산에 가서 갈대를 꺽어와 주방식탁위 나무꽃병에 꽂아올린다는 산무님, 갈대를 보면 인생사를 상기하며 멋진 작품 만들고싶다는 상공님, 갈대에 깃든 애절한 옛 사랑이야기—옛날 로마 신화 스토리를 떠올리는 조약돌님—정말이지 나는 이것만으로도 갈대공유가 보람있는 일이라고 느껴만 진다. 그 가운데서도 조약돌님 떠올려준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지금도 나의 마음을 울려준다. 인생이란 워낙 배움의 끝없는 길임이 다시다시 알려진다.   세월의 무상함을 일컸는 저 무성한 갈대엔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깃들어있답니다.       먼먼 옛날 로마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무스는 아름다운 녀인 갈라테아를 짝사랑했답니다. 그러나 갈라테아는 목동 아키스를 사랑하고있었대요. 질투심에 이성을 잃은 폴리페무스는 결국 아키스를 죽이고맙니다. 죽은 아키스는 강물로 변해 흘렀고 갈라테아는 쓸쓸한 갈대로 되여 영원히 아키스를 지켜준대요. 그래서 갈대의 꽃말은 <애절한 사랑, 간절한 사랑>이랍니다. 이 신화 듣고나면 녀자의 마음은 갈대갔다는 얘기 안하실거죠? …   내가 미처 몰랐던 참으로 너무나 감상적인 댓글이다. 갈대에 깃든 애절한 사랑, 한 녀인의 섬세한 마음 담은 또 너무나 충격적인 댓글이다. 한편의 수필이 강하게, 또 강하게 뇌리를 스치며 나를 떠밀어준다.       사실 하나의 연우산악회로 이어지고있지만 나는 아직 조약돌님을 대면조차 하지 못했다. 산행사진들에서 보고 댓글을 보며 조약돌님을 안것이 고작이다. 그러던 와중에 산무님의 댓글이 조약돌님한테서 조선력사책을 받았소, 력사공부하오 하니까 무언가 잡히는데가 있는데 력사공부 근 20년이란 조약돌님의 댓글이 뒤미처 떠오른다.  또 뒤미처 갈대에 깃든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가슴에 찡하게 와닿는다. 또, 너무나 류행인 <녀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를 조약돌님의 얘기처럼 흔들리는 녀자가 아닌,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 간절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충격적으로 느끼게 된다.       갈대로부터 인간 삶의 배움의 인생리치를 새로 터득하기까지, 갈대로부터 옛 고대 로마신화에 깃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리기까지 나는 정말이지 많고 많은것을 배웠다.       오늘도 저 무성한 갈대, 저 굼실거리는 갈꽃을 보면 인생을 떠올리고 마음가짐을 바로하게 되고 인생살이란 정녕 갈대와도 같다는 것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대자연속의 갈대가 아닌, 생각하는 갈대— 나는 오늘도 갈대와 벗하며 깨우침을 받으며 나의 식대로, 나의 멋대로 하루하루 보람있고 뜻깊고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애써본다.       갈숲은 나에게 인간은 움직이며 배우고 움직이며 깨닫는다는 도리를 깨쳐주었고  곳에 따라 기후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고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섭리를 알게 하였다.                                          (2006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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