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파는 처녀》와 더불어 온 나날
1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하였건만
꽃분이의 정성이 아직도 모자랐단 말인가,
꽃분이의 정이 애틋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꽃분이가 그렇듯 간절한 희망을 안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고생을 마다하고 가시밭을 헤치며
츠렁바위를 톺아오르면서
꺽어온 꽃이면 그 얼마 였으랴!!!
한송이 한송이 꺽어온 그 꽃들을 깔아놓으면
온 마을을 덮고도 남으련만
어머니는 꽃분이가 꽃을 팔아 사온약도
보시지 못하고 갔으니
어머니가 딸의 심정을 몰라서란 말인가?
야속하다 야속하다 야속하다
천추에 사무친 이 원한이 무슨 까닭인지?
원한은 쌓여도 풀길없는 이 사연이
그 무슨 까닭인지 그 누가 대답해주랴
이는 당년 70년대초 중외를 감동시켰던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설화이다. 최근년간 한국문화로 통하는 한류가 중국대지에서 세차게 불어치는 시점에서도 요즘은 어쩐지 《꽃파는 처녀》에 끌려드는 자신을 어찌할수가 없다. 한류의 뿌리로 불리울만한 《꽃파는 쳐녀》는 벌써 30여년의 일이지만 지금도 이 설화를 읽으면 눈물이 앞을 막으면서 청춘의 활기로 넘쳐났던 20대 초반의 그 나날에로 돌아가게 된다.
말그대로 지난세기 70년대 초반은 젊음과 희망이 싱싱 피여나고 앙가슴에 더운피 끓어번지던 한창 나이였다. 갓 고중을 마친 나는 《사회주의 새농장을 건설하려는》 《장한 뜻》을 품고 장백산아래 백두고원의 광평벌로 달려갔는데 농장지도부에서는 나에게 양방목이란 이 간고한 일터를 잡아주었다.
때는 1973년 봄이다. 양방목의 원만한 수행을 위해 우리 양대에서는 농장본부의 동남쪽에 위치한 광평령을 넘어 10여리 떨어진 동경벌로 지대를 옮기게 되였는데 나는 선참으로 동경벌 진출조에 자보했다. 농장 공청단총지사업을 주도하는 나로서는 응당한 처사기도 했다.
5월이라 초순의 벌방은 신록이 한창이고 백화만발한 시절이라지만 백두고원의 광평령 북쪽기슭은 나무움이 금방 머리를 드는 앙상한 모습이다. 헌데 재미나는것은 령하나를 사이둔 광평령 남쪽기슭은 참나무, 개암나무, 봇나무들이 소리치며 푸른 잎들을 펼쳐내고 있었다. 대자연의 신기함에 도취되여 령을 내리니 동경벌 한복판에 자리잡은 게닥지같은 꺼진 귀틀집이 우릴 기다리고있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 한동안은 마음이 뒤죽박죽이였다. 눈길을 주어 사방을 살펴도 맞아주는것은 곰과 메돼지 출몰하는 우중충한 야산뿐이였다.
이러구러 차차 마음이 가라 앉았으나 문화생활은 빵점이였다. 갖고간 신화자전, 책 10여권이 고작이였으니 더 말해 뭘하랴, 온 나라가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받으며 《청춘의 노래》를 망라한 뜬다하는 거의 모든 도서들이 황색도서로 몰리고 해방후 문화대혁명전까지의 영화와 연극들이 거의다 금지품에 속했으니 960만 평방킬로메터 땅우에 판을 치는것은 이른바 경극—혁명적본보기극, 본보기노래가 아니면 전투성이 고조된 씩씩한 혁명가요들 뿐이였다. 나라가 겪어야 했던 문화의 기근은 백두고원의 동경벌에도 살풍경을 이루어 한창 피여나는 청춘을 여지없이 유린했다. 그 시대를 거치여온 40대~50대들은 동감이리라.
2
그래도 오는 봄은 막을수 없고 피여나는 청춘은 짓밟을수 없었다. 본보기노래는 진저리가 나고 10여권 책도 바닥이 날 때 귀틀집가에 자리잡은 고성리 원경지막에 나보다 조금 우인 한 조교청년이 친구로 되였다. 그한테는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 등 조선책들이 여러권 있었고 또 두만강너머 조선사람들한테서 이런저런 책들을 얻어 볼수가 있었다. 내가 우리 조선족력사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것은 백두고원 동경벌 귀틀집이여서 나름대로의 새로운 문화생활이 소리없이 깃을 드는데 수백리 떨어진 저기 자치주 수부, 현성들에서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가 영화관들을 초만원으로 만들며 눈물의 바다를 이룬다고 한다.
소문은 나래라도 돋친듯 오늘의 숭선진—고성리일대와 광평농장에 파다했다.
(우리도 언제면 꽃파는 처녀를 볼수가 있을가?!)
실로 그때 그 시절, 그 나날은 지루한 나날의 련속이였고 기다리기에 지친 갑갑한 나날이였다
.드디여 숭선쪽에서 소식이 왔다. 숭선의 아동촌에서 《꽃파는 처녀》를 돌린단다. 사람사태가 났다. 숭선향과 서북으로 50리를 사이둔 수십리 굽이굽이 산간길에 사람들이 쭈욱 늘어섰다. 울퉁불퉁한 산간길에 돌부리에 걸리기가 십상이지만 사람들 얼굴마다에는 웃음이 물결쳤다.
이렇게 본 영화가 오매에도 바라던 《꽃파는 처녀》였다. 아동촌 한 복판에 자리잡은 넓은 터는 영화관들 못지 않은 사람바다인데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영화에서 주역을 맡은 꽃분이역 홍영희가 진짜 가시밭을 헤치며 츠렁바위를 톱아오를 때, 꽃판 돈으로 약봉지를 들고 귀가길에 올랐을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몸부림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인차 자리를 뜰념을 못했다. 영화속에 빠져버린 우리들, 그네들이였다. 그밤으로 왕복 100리 귀가길에 올라도 농장사람들은 피곤한줄 몰랐다.
그때로부터 3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 그 저녁의 영화구경이 새록새록 안겨든다. 아마 왕복 100리 산길을 걸으며 《꽃파는 처녀》를 본 일은 연변에서도 금시초문 이야길것이다.
그날은 1973년 6월 12일이였다. 1972년 10월1일부 《연변일보》에 《피눈물의 공소, 굴할줄 모르는 인민—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보고서》가 실린것을 보아 연길에서는 이미 9월에 본것으로 되는데 장백산아래 백두고원에서는 그로부터 반년이 훨씬 넘은 뒤에야 보았으니 그 감수가 어떠랴. 일반가정들에 흑백텔레비도 없었던 그 세월엔 그럴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이 동경벌로 돌아 왔을 땐 밤중이였다. 나는 희미한 등잔불밑에서 일기를 써내려갔다.
《오늘 저녁 나는 바라고 바라던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어찌 영화를 그저 보았다고만 하랴, 이는 나에 대한 한차례 가장 심각한 계급교육이였으며 아직 세계에는 3분의 2의 인민들이 제, 수, 반의 무거운 철제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그곳의 어린이들은 〈꽃파는 처녀〉의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고난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50대에 들어선 오늘 이 일기를 보노라니 나로서도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10대 중반의 쌍둥이 딸애에게 이 일기를 읽어 주었더니 천진란만한 애들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3분의 2》는 무어며 《제수반》은 무언가고 묻는다.
《그 세월은 그랬어!》
그렇게 대답하는 나도 웃음도가니속에 빠져버렸다.
하나 그날의 그 일기가 32년이 지난 오늘에 이토록 소중한줄을 뒤미처야 알았다. 일기가 있음으로 《꽃파는 처녀》를 본 준확한 년도와 날자를 알았고 일기가 있음으로 그때의 그 감수를 다시 가슴 찡하게 느낄수 있었다.
3
70년대 초반의 그 나날,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온 중화의 대지를 울음바다, 감동의 바다로 만들었다. 이 영화가 중화전역을 휩쓸 때 문화생활의 기근에 허덕이던 이 나라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마차를 타고 뻐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몰려와 영화관은 초만원》을 이루었으니 흐르는 눈물에 손수건이 흥건히 젖어들어 영화관 매표구주위는 손수건장사군들이 신났다고 한다.
잇따라 《금희와 은희의 운명》, 《피바다》, 《보이지 않는 전선》, 《남강마을의 녀성들》, 《영원한 전사》, 《사과 딸 때》, 《꽃피는 마을》, 《한 간호사의 이야기》 등 영화와 연극들이 중국의 영화관, 극장들을 달구었고 그에 따른 영화의 주제가, 조선노래들이 신속히 류행되였다. 《꽃피는 처녀》의 주제가 《꽃파는 처녀》와 《남강마을의 녀성들》, 《사과풍년》 등 노래들은 중국인민들속에서 뜨거이 열창되면서 한시기 중국문화를 살찌웠고 한세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고로 한창 40—50대의 중년기에 처한 이땅의 그제날 젊은 세대들은 《꽃사시오》 등 조선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여기에 이런 자료가 있다. 2002년 봄에 상해에서 《2002년 상해의 봄 국제음악축제》가 열리였을 때 조선의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참가하여 소문을 놓았다. 두시간밖에 안되는 음악회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은 수십번이나 되는 갈채를 받았다고 하니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과 더불어 자라온 중국 그 세대의 관중들은 깊은 감동속에서 아름다운 회억에 빠져들지 않을수가 없었다.
또 이 몇해사이 조선의 《꽃파는 처녀》, 《피바다》 등 연극이 다시 중국의 대도시 무대에 올랐을 때 중국사람들은 같이 웃고 울며 노래부르며 70년대 초반을 그리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 40대~50대들은 오락회에서나 노래방들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돌아갈 때면 《꽃사시오》 등 조선노래를 즐겨부른다. 이런 노래들이 나올 때면 너도나도 들썩이며 더없이 열광적이다.
이렇듯 《꽃파는 처녀》와 그 뒤를 이은 영화, 연극 등 조선의 예술은 옹근 한세대에 영향을 주었다. 그로부터 꽃분이역 홍영희는 중국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치 일약 명배우로 떠올라 인기도를 누리였다. 그 세대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꽃바구니를 들고 미소를 짓는 그의 사진은 중국의 영화팬들속에 널리 류포되였다.
4
하다면 《꽃파는 처녀》를 전렬에 내세운 조선영화, 연극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중국땅에서 대성황을 이룰수 있었을가, 주되는 원인은 그래도 경제장성에 힘입은 조선예술의 대발전이 아닌가 싶다.
광복후 50~60년대의 조선은 나라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더불어 그 나라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수 있고 따뜻하게 입을수 있었던 상대적 경제발전시기였다. 경제의 활기는 예술의 번영을 가져와 조선예술은 《황금의 예술》로 불리우며 비약의 상승선을 탔다. 70년대 초 이후도 조선예술의 상승은 계속되여 《꽃파는 처녀》, 《금희와 은희의 운명》 등 많은 영화가 제작되여 중국에서 일대돌풍을 일구었고 《피바다》, 《한 자위간파의 운명》 등 가극들이 가세되여 조선예술이 중국땅에서 찬란히 꽃펴날수 있었다. 최근년간 한류가 나타나기 전, 70년대 초반과 중반의 예술대사태였으니 지금의 한류에 비하면 30년을 앞선 시기였다. 조선반도요, 반도의 한 겨레라고 할 때 한류의 진정한 뿌리는 최근년간이 아니라 《꽃파는 처녀》 등이 제작, 상영되여 전성기를 이루던 30년 전 그 나날로 보아야 할것이다.
했으나 70년대 중반이후의 조선경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자못 어려운 시기에 들어섰다. 80~90년대에는 조선국내서 《고난의 행군》, 《고난의 강행군》이 시작되면서 그토록 전성기를 보이던 조선예술의 정화들인 영화나 가극 등 예술작품들이 중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흥기한것이 오늘날 한류로 굳어진 한국의 문화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벌써 감격시대, 꽃마차, 휘파람 불며 등 한국노래들이 소리없이 중국에 류행되기 시작했다. 연변대학 시절에 기숙사에서 노래를 베끼고 반도체로 들으며 흥을 돋구던 때가 어제런듯 싶다. 내놓고 TV나 방송들에서 공개방송하던 시기가 아니였다.
80년대 중기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다. 《질투》, 《추억》, 《영화신화》 등 경전한국드라마들이 공개적으로 중국의 텔레비에 오르더니 중국 관중들은 한국드라마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1997년 6월이후 한국 텔레비죤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연변의 이름난 번역가 김련란 등에 의해 한어로 번역되고 중앙 TV제2채널에서 저녁 8시좌우의 황금시간에 한주일에 두번씩 방송되면서 중국관중들은 한국드라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대만의 이름난 작가 경요나 홍콩 드라마에 흥미를 잃어가던 중국사람들로 말하면 한국드라마는 그야말로 청신한 바람이였다. 저녁 황금시간이면 가가호호 중국의 안방에서 《사랑이 뭐길래》가 시청되면서 《중국전역의 많은 도시들에서 길거리가 다 한산할 정도였다고》하니 한류의 세찬 정도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류는 갈수록 세차게 불어쳤다. 중앙TV 제1채널, 제2채널, 제8채널을 위시해서 각성, 시 TV를 켜면 흔히 보이는것이 한국 드라마들이다. 그만큼 한국 TV드라마를 즐긴다는 말인데 극장들에서도 한국영화행사가 빈번하다.
쓰다나니 한류로 돌아갔다. 《꽃파는 처녀》가 한류의 뿌리라는 것과 그 선후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현실은 이러해도 이땅의 40~50대 안목에서 70년대 초반의 《꽃파는 처녀》의 영향을 과소평가할수 없다. 한류의 세찬 충격에도, 한국노래의 판쓸이에도 흔들림없이 오락장에서, 노래방에서 《꽃파는 처녀》 등 당년의 조선노래들을 즐겨부르며 희열에 잠기는 중년세대들, 그들의 성장에서 청소년시기 받은 조선영화의 영향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였다. 적지 않은 중년세대들은 아직도 한국노래보다 젊은 시절에 배운 조선노래들을 더 즐겨 부른다. 《꽃파는 처녀》로부터 심장속에 뿌리내린 조선예술의 거대한 힘이였다.
5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앞에는 채색립체사진으로 된 홍영희배우사진과 흑백사진 여러장이 놓여있다. 이 사진들을 구하기 위하여 장백산 아래에서 현성—화룡으로, 연길로 뛰던 그때가 어제런듯 하다. 또 《꽃파는 처녀》에 심취되여 그때 숭선과 광평에 온 영사대일군들을 졸라 《꽃파는 처녀》설화를 베끼던 일도 어제런듯 하다. 오늘의 중년세대들에게서 얻기어려운 이 영화의 설화가 나한테 있으니 문화대혁명 10년기간의 하나의 진품이 아닐수 없다.
이뿐이 아니다. 나에게는 또 그때, 그시절 흥나게 불렀던 조선예술영화 주제가들을 망라한 조선노래 필사본이 있어 소중한 기념품으로 되고있다. 이 조선노래 필사본은 당년 광평농장에 지식청년으로 내려갔던 녀자친구 최순녀가 정성들여 수집하고 베낀것인데 목책으로 불리운 일기책이 귀중했던 시절에 그 시절 흔하디 흔한 흰종이로 접어 소중히 맨 노래책이였다.
노래책을 펼치면 그 시절 널리 불렀던 조선노래 70여부가 그대로 나타난다. 노래베낀 순서에 따라 적으면 조선예술영화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당의 참된 딸
금강산처녀
피바다
압연공들
꽃피는 마을
남강마을 녀성들
보이지 않는 전선
사과 딸 때
로동가정
영원한 전사
금희와 은희의 운명
마을사람들속에서
숨길수 없는 정체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와, 무려 15부의 조선예술영화 제목들이다. 어찌하든 그 시절 불렀던 조선노래들은 거의 없는것이 없으니 진짜 소중한 기념품이다. 이는 녀자친구가 2—3년만에 광평농장을 떠나 현성으로 진출할 때 나에게 선사한 것인데 또 하나의 문화대혁명기간 소장품이 될줄을 몰랐다. 그때 농장 《모택동사상선전대》 책임자였던 나에게 여러책으로 된 노래필사본이 있어도 이렇게 전문 조선노래만 담은 노래책이 없다고 할 때 그 소중함이 가슴 찡하게 맞혀온다.
6
50대 초반을 잡은 나는 아직도 《꽃파는 처녀》속에 잠겨있다. 젊은 시절의 그리움에서일가 아니면 《꽃파는 처녀》의 매력이라 할가, 내내 홍영희란 이 꽃분이역의 이름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래서일가, 최근에 나는 조선영화배우 홍영희 관련자료를 얻게 되여 영화속의 꽃분이와 마음상 대화를 나눌 기회를 다시 갖게 되였다.
사실말해서 금방 20살을 잡았던 《철모르는》 시절이라 영화의 주인공 홍영희의 신상에 대해서 아는것이 거의 없었다. 해당자료를 보고서야 나는 홍영희배우가 18살의 어린나이에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역을 맡았다는것과 1955년도 생, 양띠라는것을 알았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홍영희배우는 1955년에 조선 량강도 운훈군의 한 보통일가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어릴 때부터 예술에 대한 남다른 기질은 그로 하여금 중학교 졸업반 시절에 지방으로 배우모집을 나온 연출들의 욕심을 자아내 평양영화배우양성반 4기생이란 이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했다.
그럴 때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는 김일성주석 탄생 60돐에 즈음하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영사막에 올리게 되고 김정일지도자의 배려로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행운스럽게도 《꽃파는 처녀》의 영화주역으로 나서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온 나라가 주목하는 꽃분이역이였다.
마침내 홍영희는 꽃분이역을 출중하게 감당했고 1972년 김일성주석 탄생 60돐 기념일인 4월 15일에 《꽃파는 처녀》 예술영화가 정식으로 개봉되였다. 이어 《꽃파는 처녀》는 체스꼬 제18차 까를테바아리 영화축전에서 특등상과 특등메달을 수상, 홍영희는 일약 조선영화계의 새별로 떠올랐다. 그해에 《꽃파는 처녀》가 중국에 진출하고 중국 전역에서 상영되면서 홍영희는 온 중국이 다 아는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였다. 영화개봉 이해에 홍영희배우는 조선영화 사상 최년소(18살) 공훈배우로 되였다면 8년후 1980년에는 조선배우의 최고영예—인민배우칭호를 지니였다.
조선영화대학에 입학하여 4년공부를 하면서 체계적인 예술기량을 닦은것은 그 뒤의 일이다. 홍영희배우는 18살에 본격적인 영화배우생애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네번째 겨울》,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민족과 운명》 등 3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당연히 홍영희배우는 조선인민이 사랑하는 국내 최정상급 배우였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당년의 꽃분이역—홍영희는 인젠 51살의 중년녀인으로 되였다. 원숙미가 흐르고 옛 미모가 여전한 그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있는데 남편 정윤식은 인민보안성협주단 음악지휘로 뛰다가 승직되여 지도직무를 맡은 모양이다. 취미생활은 독서, 영화관람, 음악감상이라고 한다.
7
일찍 70년대~80년대에 중국을 방문한적이 있는 홍영희, 《꽃파는 처녀》를 통해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배우 홍영희—그는 오늘도 조선국내 최정상급배우로 뛰고있어 금방 촬영을 마무리 지은 중조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에서 력도산의 어머니역을 맡게 되였다.
중조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은 당대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인민배우 홍영희 등 6명이 대거출마하는 수준급의 영화로 떠오르게 된다. 연변적 출신이며 《력도산의 비밀》 집행감독인 박준희감독에 따르면 력도산의 어머니역 홍영희배우는 《꽃파는 처녀》 주인공시절의 인상보다 중년녀인으로서 몸이 좀 실해보이는 편이지만 고전미인형으로서의 그는 여전히 이쁘다고 한다.
박준희감독은 현재 장춘영화그룹 제2영시공사 제작인, 감독으로 맹활약하고있다. 나와 동년배인 박감독은 기자시절의 인연은 없지만 2월 13일에 가진 조선족영화동호인 새해맞이만찬모임에서 허물없는 동년배로 정을 붙이였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동호인 고문이고 나는 50대초반의 영화동호회 신입회원이였던것이다.
그날 새해모임에서 우리는 박준희감독한테서 《력도산의 비밀》을 찍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홍영희인민배우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는데 전에비해 좀 실한편이지만 고전미인형으로서 이쁘기는 매일반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였다.
새해 2005년에 와서 다시 우리 영화동호인들의 화제속에 떠오른 홍영희배우, 안재욱, 김희선, 송승헌, 송혜교, 장동건 등 한국의 유명스타들이 오늘날 중국 허다한 관중들의 숭배의 우상으로 떠오를 때에도 중년세대들이 선참 떠올리며 알아주는 조선의 인민배우—그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기억속에, 마음속에 《꽃피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역으로 남아있다.
(2005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