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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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칠월칠석—견우직녀 만나는 날 댓글:  조회:3163  추천:90  2007-08-19
    칠월칠석—견우직녀 만나는 날   오늘은 음력 칠월칠일—견우직녀 만나는 날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에서도 그러하지만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견우직녀가 칠월칠석에 서로 만난다는 이야기가 널리 류전되여 왔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말하는 견우별과 직녀별은 인간사회의 견우와 직녀의 화신으로서 그들은 하늘나라의 한갈래 천하—은하수에 격리되여 1년중 다만 칠월칠석, 다시 말해 음력 7월 7일 저녁에 한번 만날수 있습니다. 이날 밤이면 숱한 까막까치들이 날아가 자기들로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 견우직녀를 그들이 만든 오작교에서 서로 만나게 합니다. 견우를 둘러싼 아름다운 신화이야기지요. 8월의 밤하늘에 눈길을 모으면 뭇별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희부연 모양의 띠가 북쪽의 높은 하늘 카시오페이아(북극성을 사이두고 카시오페이아와 대칭되여 북서쪽하늘에 기울어진 별무리가 북두칠성)자리에서 옹근 하늘을 헤가르며 남쪽의 낮은 하늘가 궁수자리까지 이어집니다. 궁수자리서쪽가에 S자 모양을 하고있는것이 전갈자리입니다. 저녁 8~9시 경이면 우리는 북위 40도쯤되는 지리위치, 하늘중앙의 부근 은하서쪽에서 하나의 밝은 별을 볼수있습니다. 이 별이 바로 직녀성 베가입니다. 직녀성 왼쪽아래가에 4개의 작은 별이 평행사변형을 이루고있고 옛날사람들은 직녀가 천을 짜는 기계로 상상했습니다. 은하의 동쪽, 직녀의 아래쪽에 직녀성과 마주하고있는 밝은 별은 견우성 알타이르입니다. 견우성옆에 두개의 작은 별은 멜대를 련상시킵니다. 멜대두끝의 작은 별은 견우와 직녀의 두 어린애를 상상하구요. 또, 거문고자리 직녀성과 독수리자리 견우성, 백조자리 1등성 데네브는 여름철 밤하늘의 대삼각형을 이루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중국은 세계문명고국의 하나로서 중국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일월성진을 관찰한 력사는 대단히 유구합니다. 일찍 춘추시기에 나온 중국의 제1부 시가집 “시경”에 벌써 견우성과 직녀성이 시로써 언급되고 있습니다.   天上有条银河, 照人有光无形。 织女分开两脚, 一天七次行进。   虽说七次行进, 织布不能成纹。 牵牛星儿闪亮, 拉车可是不成。   이는 여관영의  “시경선역”에 나오는 해당역문으로서 시경에서 묘사한  织女分开两脚는 직녀성 옆의 두별을 가리킵니다. 두별은 직녀가 벌린 두발을 련상합니다. 一天七次行进은 직녀성이 하루밤사이 이동한 7개시진(七个时辰)을 말합니다. 기실 견우직녀이야기는 신화적 이야기로써 천문학으로 보는 직녀성은 우리와 대략 27광년 떨어져있고 견우성은 17광년에로 치닫고 있습니다.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 거리도 16광년이여서 달나라 상아가 직녀에게 빛의 속도로 전화한다해도 직녀는 27년후에야 들을수 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서로 전화를 주고받자해도 2개 16년이 걸려야 하니 견우직녀가 서로 만난다는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빛이 쉬지않고 1년동안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할때, 빛이 1초동안 30만 킬로메터 간다고 할때, 상상해보십시오. 1광년이라는 거리는 상상도 못할 머나먼 천문거리입니다.           (우의 그림은 한국의 별자리 인터넷에서 옮겨왔고 글과 지도는 필자가 그려 넣은 것임)   
204    【90돐특집】(25)명동학교 옛터서 윤동주 떠올리며 댓글:  조회:4005  추천:89  2007-08-18
【90돐특집】(25) 윤동주 발자취 (2)   명동학교 옛터서 윤동주 떠올리며   이 가을에 룡정 명동을 문앞 다니듯 했다. 그래도 만족이 아니여서 오늘 오후 또 안해를 잡아끌고 명동행에 나서보았다. 집안에 걸린 우리 집 고물—검은 벽시계는 오늘이 2004년 10월 3일임을 고스란히 알리고있었다. 오후 1시, 연길 로잔(老站)뻐스부를 출발한 소형뻐스는 30~40분만에 우리를 룡정에 이르게 했다. 룡정에서 다시 지신행 중형뻐스를 바꾸어타니 30리밖 명동이 잠간이다. 우리 부부가 내린곳은 명동촌 길가의 “윤동주생가”석비자리. 아름드리 바위비가 발목을 잡는다. 어쩌다 윤동주생가를 찾은 안해여서 바위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어주니 어린애처럼 활짝 웃어준다. 이어 안해가 큰길아래 명동교회당 전시관을 돌아보는 사이 나는 바깥의 옛 비술나무와 김약연목사기념비를 다시다시 사진에 담았다. 명동력사전시관에 이어 윤동주생가답사다. 우묵히 꺼져들어간 생가우물터가 우리의 화제로 떠오른다. “윤동주생가 우물터라면서 왜 복원하지 않을까요?” “글쎄……” 나는 대답을 얼버무려버렸다. 돈때문인지, 비준수속문제인지 나는 모르고있었으니 무슨 대답을 하랴. 그러는 나의 시야에는 옛날 그 시절 우물가에서  뛰놀았다는 윤동주의 어린시절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우물을 떠올리며 시를 짓는 자화상—윤동주의 모습이 어련히 밝혀온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1939년 9월에 지은 시 “자화상”의 첫 두구절이다. 이번에는 책가방 달랑 메고 학교로 가는 소학생 윤동주가 비껴오른다.그러는 마을길가 왼쪽가에 검은 양철을 얹은 옛기와집이 유표하게 안겨든다. (그젯날 명동학교 무엇이 아닐가?) 마침 집뜨락에는 안로인 한분이 붉은 고추를 다락에 널고있어 알은체 했다. “안녕하세요? 이 집이 명동학교 옛집이 아니세요?” “옳소. 광복전 이 집을 명동학교 <간사>라고 했소. 교원들 사택이라는 말이지.” 안로인은 함경도 연변사투리를 그대로 쏟아냈다. 뒤미처 나는 안로인 명함은 김명숙이고 올해 73살이라는것을 알았다. 바깥로인 송덕섭은 고향이 명동이고 광복전 명동학교 졸업생인데 안로인보다 5년이상인 로인이 한 5년전에 사망된데서 안로인은 홀로 집을 지키고있었다. “우리는 워낙 저 뒤집에서 살았소. 이 집에 옮겨앉은지도 벌써 7년에 나누만.” 담담히 이야기를 꺼내는 할머니, 나는 명동학교 간사를 사진에 담으면서 할머니를 그 배경속에 넣어서야 시름을 놓았다. 명동학교 옛간사 앞공지가 명동학교 옛터였다. 지금은 담배밭으로 되고있었는데 명동학교석비가 명동학교유래를 말해주고있었다.   1908년 4월 27일 김약연을 비롯한 반일지사들의 창시한 근대교육학교가 이곳에 설립되였다.”                                              1995년  4월 27일                                            룡정 3.13기념사업회   가까이 명동학교유적지 기념비 뒤면의 글도 석비의 글과 비슷했다. 소학교시절의 윤동주도 여기 명동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명동학교 옛터의 모든것이 정다히 안겨드는 순간이였다. 장래가 보이는 우리 조선족시인 윤동주는 명동학교에서 래일의 꿈을 꾸며 어린시인으로 커가고있었으니 명동학교 옛터는 무심히 지나칠 자리가 아니였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북으로 1킬로메터쯤 떨어진 장재촌을 가보아야 했다. 그러는 우리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질 않는다. 마치도 어린 윤동주의 뒤를 따라 명동학교로 들어가는 나를 보는듯, 기분은 감미롭기만 하다.
203    【구화산순례】(13) 동암을 지척에서도 볼수가 없어 댓글:  조회:3754  추천:121  2007-08-16
【구화산순례】(13)   동암을 지척에서도 볼수가 없어     세심한 분들이라면 필자가 조글로 명사미니홈에 올린 화엄령사진들에서 산정에 자리잡은 화엄보전 다음의 불교사찰에 류의하였을것이다. 산정의 이 불교사찰이 바로 동애선사이고 동애선사 왼쪽가, 즉 서쪽비탈에 김교각님이 구화산에 이른 초기에 도를 닦았다는 석굴이 있다. 화엄령에서 회향각(화엄보전)과 만불탑을 돌아보고 우린 산정으로 뻗어간 돌계단길따라 북으로 북으로 나아갔다. 동애선사는 화엄보전에서 그닥 멀지 않은 북쪽산정에 자리잡았는데 불교사찰로서의 동애선사 이모저모도 나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하였다. 한시바삐 동애선사 서쪽가 산비탈에 있다는 동암(동애)를 답사하고픈 일념뿐이다. 헌데 사정은 달랐다. 동암이 동애선사 바로 서쪽아래라지만 산비탈이 가파르고 위험하여 언녕 봉페상태란다. 그래도 가보겠다고 하니 가이드는 극구 말린다. 누구도 내려가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할수없이 주춤하다가 동애선사 서쪽아래 산정란간에서 조금 내려가보니 비탈이 대단히 가파로와 발을 붙일수가 없는데 수풀이 꽈악 우거져 촌보난행이다. 어이유, 나는 두손을 들고말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내려가질 않는다. 머나먼 길을 달려 구화산으로 왔고 동암의 바로 웃쪽산정에 이르러서도 답사할수 없다니 운이 따르지 못함을 탓할수 밖에 없는가부다. 이때를 두고 내가 얼마나 실망하며 바장이였는가는 하늘이나 알겠는지. 내가 찾고저 하는 동암이란 신라인 김교각님이 바다넘고 산너머 구화산에 오른후 초기에 도를 닦던 석굴을 가리킨다. 이 동암을 동봉, 동애, 연좌암 등 허다한 이름으로 불러오는데 구화산 구화거리 화성사의 바로 동쪽산에 자리잡고 있다. 구화거리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동쪽산 정상아래 기슭이다. 력사자료들에서는 화성사보다 지세가 3리나 더 높은 곳에 있다고들 하지만 어찌보아도 화성사와의 실제 수직고도는 100~200메터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암은 화엄령 북쪽산발 중봉(中峰) 서쪽기슭인데 어찌하여 “동”자를 달았을가, 무척 흥미로와 숱한 자료를 뒤적이는데 구화산의 력대 첫 불교사찰인 화성사 동쪽에 있다하여 “동”자를 달았다고 함이 가장 설복력이 있었다. 사실과도 어울렸다. 원래는 동봉이라고 불리웠는데, 명나라 왕수인이 구화산에 왔다가 동암이라고 고치였다나. 이 왕수인이 양명선생으로 통하는 이름난 문인인데 뒤글에서 품을 들여 소개하고 이글에서는 지나치려고 한다. 다시 돌아오면 원래 동봉을 동암이라 고쳐부르게 되였다함인데 봉우에 암석이 있고 암석이 가로 잘라져 병풍같기에 또 동애라고도 한다. 이 암석밑에 방같은 깊은 굴이 있는데 김교각님이 시초 이 석굴에 거처하며 도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석굴어구는 서쪽을 향하고 구화거리를 향했는데 방같은 석굴안에 펑퍼짐한 바위가 두층으로 되여있어 침대로도 쓰이고 살림기구들도 놓아둘수 있다고 한다. 관광소개들에 퇴운동(堆云洞)이라고 불리우는 이 석굴은 김지장이 거처한 굴이라 하여 “지장동”으로도 불리운다. 허나 구화산 소개자료들에 눈길을 박다보면 전체면적이 120평방킬로메터에 이르고 99개의 봉우리를 가지고있다는 구화산 풍경명승지에 이러루한 석굴이 10여개에 이르고 김교각님이 거처한 석굴도 여기 동암 하나뿐이 아니였다. 아래 김교각님과 관련된 석굴 두어개를 소개하여 본다. 구화산풍경명승구는 산문경관, 불성경관, 동애경관, 민원경관, 천대경관, 화대 경관, 후산경관 등 허다한 풍경구로 나뉘여지는데 그중 후산경관내에는 기반석과 지장동이 있어 주목을 끈다. 기반석과 지장동은 고목구역과 대나무림구역을 지나 협곡의 현애철벽가에 있다는데 평평한 바위아래 지장동이 있다고 소개되여 있다. 보다 주의를 끄는것은 이곳 평평한 바위우에서 김지장이 수년을 하루와같이 앉아 도를 닦았다하여 “김지장제일수행처”로 불리운다는 점이다. 화성사 동쪽의 동암보다도 이른 수행처도 나타난다. 이 수행처는 지장옛동(古洞)으로 통하는데 구화산 주봉 부근의 천대경관구내에 있다. 옛적에는 금선동으로 불리웠다는데 지금의 천대사찰가에 자리하고있고 김지장이 일찍 여기에서도 도를 닦은것, 다시 말해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럴진대 김교각님이 구화산에 올라 도를 닦았다는 석굴은 결코 동암 하나뿐이 아니렸다. 력사자료를 보면 동암하나뿐으로 나타나니 력사자료에만 매달리고 현지답사를 홀시하면 우리는 본의아니게 크나큰 오유를 범할수도 있다. 또 이런 글은 력사의 시련을 이겨낼수가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이름난 “사기”를 써낸 력사속의 사마천이 그러하지 않는가, 그는 력사의 시련을 념두에 두어서인지 발로 뛰여다니며 답사하고 고증하고 나중에야 사기를 묶었으니 위대한 력사학가의 고귀한 인품이 돋보이기만 한다. 했으나 어찌구러 나는 구화산 첫 답사에서 김교각님 관련석굴을 하나도 현지답사해보지 못해 유감을 남기고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아마도 지성이 모자라는걸가, 눈앞 지척에 이르고서도 동암을 볼수가 없었으니. 후~~그래서 구화산으로  두번, 세번은 가야 하는가부다.  
202    【구화산순례】(12) 화엄령에 솟아오른 회향각과 만불탑 댓글:  조회:3819  추천:110  2007-08-15
    화엄령에 솟아오른 회향각과 만불탑     구화산우 구화거리 동쪽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높은산이 누워있다. 구화거리에서 도보로 산을 넘어 들쑹날쑹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구화산의 바깥산 천대로 가자면 이 높은산의 남쪽가에 자리잡은 화엄령을 넘어야 하는데 화엄령에는 회향각으로 불리우다가 화엄선사로 바뀌여진 불교사찰이 떠오른다. 화엄선사는 안휘성 중점 불교사찰의 하나로서 명나라때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허나 세월의 흐름속에서 자연적, 인위적 파괴를 받아 최근년간에 수건되고 지금도 새로 확건중에 있는것이 보인다. 이 사찰은 김교각님이 구화산에 오른 시초 석굴속에서 도를 닦던 동애, 또 동암과 가까이에 있어 나의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구화거리에 새로 일어서고있는 화엄보전에서 길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화엄령으로 오르는 구불구불 돌계단길이 산우로 뻗어간다. 단숨에 화엄령에 오르기란 쉬운일이 아니지만 화엄령에 오르면 구화거리가 발아래 펼쳐지고 천대로 이어지는 수십리 바깥산, 구화산의 주봉 십왕봉이랑 한눈에 가까이 안겨들어 구름우에 오른 기분이다. 구화산에 오른 첫날(2007년 7월 9일)오후라 가이드 동행. 가이드는 산으로 오르는 비탈길에서 김교각님이 서역에서 갖고왔다는 김지차(金地茶)를 열성껏 소개하더니 화엄령에 이르러서는 또 화엄령의 자랑거리로 되고있는 영객송(迎客松)을 열성적으로 소개하여주었다. 화엄선사의 서남가에 솟아오른 영객송은 과연 황산의 영객송을 방불케 했다. 같지 않은 점이라면 황산의 영객송은 바위가에 뿌리내렸다면 구화산의 영객송은 산우의 평지에 뿌리내린것이라고 할가. 화엄령 산우에 일어선 화엄선사는 1988년이래 선후로 대웅보전, 산문전, 지장전 등으로 이루어져 산아래 구화거리의 사찰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화엄선사의 남쪽 령마루에는 7층으로 된 만불탑(萬佛塔)이 하늘에 치솟아 그 위용이 이만저만 아니다. 만불탑기에 의하면 2006년 11월에 준공된 이 탑은 안팎이 전부가 금빛으로 빛나는데 새로 일어선 탑이여서 모든 관광소책자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불탑내는 층마다 불상들을 모시여 이색적이였다. 7층 정상부 란간에 오르면 구화거리 전체가 시야에 비껴들어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기분속에 빠져들게 된다. 구화거리에 있을 때는 산우의 거리라는 느낌을 가져볼수가 없는데 해발이 거의 800메터를 기록하는 화엄령 만불탑우에 오르니 구화산아래 평지와 엄청 수직차이를 이루고있다는것이 환히 안겨들었다. 구화산 아래우 수직고도가 500메터쯤에 이르고 구화거리와 만불탑이 또 200메터쯤 수직고도를 이루니 천하절경 예 아닌가 싶다. 산정의 만불탑우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쳤지만 나는 만불탑 7층란간에서 쉬이 떠나지 않았다. 천하절경의 구화산우나 만불탑이 일어선 화엄령도 좋았지만 나에게는 산아래 저 구화거리에 벼파도 넘실대는 만경창파 이룩한 1200여년전의 김지장님이 거닐고 있는것만 같아 마음이 울렁이였다. 구화산의 현실은 수천수백의 인구를 가진 구화거리가 구화산의 산우평지를 뒤덮었지만 구화산의 첫 불교사찰—화성사가 일어서던 1200여년전만 해도 저 아래 산우평지는 못이 여러 무를 이루고 논밭이 천석(千石)이나 되였다고 전해진다. 논밭 천석은 논밭의 면적크기를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논밭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되니 벼종자는 김교각님이 신라에서 가져온 황립도라고 한다. 이 낟알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크며 은색이며 말랑말랑하며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하니 못에는 물고기떼 노닐고 들에는 황금파도 일렁이는 모습, 뭇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하기에 김지장님과 동시대 사람인 당나라 청양현 사람 비관경은 시 “가을날 구화산에 올라 곡식밭을 바라보며”에서 이렇게 읊고있다 …… 날밝아 아름다운 강산 펼쳐질제 스님 따라 먼산을 향해 떠나가는데   동구밖엔 푸른 곡식밭 펼쳐져있고 푸른 산은 물우에 거꾸로 서있네.   이 시에서의 스님은 김지장님을 가리킨다. 푸른 곡식밭은 벼밭을, 푸른 산은 화성사의 동쪽 화엄령을, 물우는 화성사주위의 못들을 가리키고있다. 만불탑에서 내려온후 나는 가이드와 구화산일대에서 천여년전의 황립도를 찾아볼수 있는가고 물었다. 가이드의 대답 또한 긍정적이여서 저 산아래 수전들은 황립도와도 관계된다고 터놓았다. 나의 시야에 황금파도 넘실대는 들판을 거니는 천여년전 김지장님 비껴옴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노라니 또 송나라 진암의 옛시 한수가 떠오른다. …… 풍작의 3월이라 낫들고 가을하니 들판은 텅비고 말았구나 농한기면 쉴새없이 쌀찧으며 힘을 비기네 절앞에 물방아대가 있었지.  
201    【90돐특집】(24)소낙비 내리던 날 댓글:  조회:3385  추천:125  2007-08-13
【90돐특집】(24)  윤동주발자취 (1)     소낙비 내리던 날   【편자의 말】윤동주서거 90돐특집중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은 일전에 끝내고 오늘부터 윤동주발자취 련재글을 시작합니다.  윤동주는 생애 27년 2개월중 20년 8개월을 그제날 화룡현 명동과 룡정에서 살다가 간 조선족시인으로서 명동과 룡정 일대에 숱한 발자취를 남기였습니다. 이 련재글은 나의 윤동주연구문집에 들어갈 글들로서 처음으로 내놓게 됩니다.  이제 보면 알겠지만 우리 네티즌들은 처음으로 윤동주발자취를 밟게 될것입니다. 이 세상에 명동과 룡정의 모든 윤동주발자취를 아는 분들은 몇분 안됩니다. 선조들이 살았던  개산툰 자동위치 등은 저 혼자 알고있구요   하늘이 노기를 품었는지, 가끔 지나가는 소낙비를 내린다. 구질구질 지궂게 내리는 비가 아니여서 아들 경원이를 데리고 룡정~   명동행 답사에 나서보았는데 수차례나 소낙비와 어울려야 했다. 오늘은 2004년 9월 9일, 답사의 첫 스타트를 룡정시 제1실험소학교 울안 서전서숙옛터로 잡아보았다. 시안의 문화로 91번지를 찾으니 룡정시실험소학교이고 학교정문 오른쪽이 서전서숙옛터 석비, 세월의 풍상고초를 고스란히 이겨왔을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선참 반기여준다. 비술나무 나무소개패 글을 그대로 옮기여본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넘어가는 첫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깊이 전해가고있다.”   소개패 글로 보아 비술나무의 수령은 100년의 문턱에 오르고있었다. 이 글이 사실이라면 비술나무는 서전서숙을 알릴수 있는 력사의 산 견증자여서 바람에 설레이는 설레임으로 자기 소신을 밝히고 싶었으리라. 이윽고 비술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는데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자 아들 경원이는 비술나무 가까이 정자안으로 뛰여들어갔다. 6각정자로 된 “리상설정”이고 2002년 8월 20일에 일어선것으로 알려지고있었다. 정자안 천정에 서전서숙 사진배경속에 리상설화상을 모시여 여기가 리상설선생의 넋이 깃든 서전서숙옛터임을 알리고있었다. 리상설정자 주변은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성공석,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 – 배움석 등이여서 배움의 분위기를 다분히 풍기여준다. 정자 가까이에 “서전서숙” 석비가 일어섰다. 룡정 3.13기념사업회에서 1995년 4월 15일에 세운것인데 석비 소개글은 이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설하였다.”   서전서숙==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라 함이 눈에 거슬렸으나 서전서숙을 널리 알리고저 품을 들인 룡정 3.13기념사업회의 로고가 그대로 엿보이였다. 내가 왜 윤동주시인을 기린다며 발자취 좇아 처음으로 룡정 서전서숙옛터를 찾는걸가, 이를 한두마디로 해석하기는 어려울것 같다. 김약연선생과의 어울림인 명동학교가 서전서숙의 계속, 다시 말해서 이듬해 1년도 안된 서전서숙이 경비난과 일제놈들의 간섭으로 문을 닫게 되자 그 한부류가 훈춘에로 자리를 옮겨갈 때 한 부류는 명동에로 자리를 옮기여 김약연선생과 손잡으니 명동학교 고고성이요, 고고성 터뜨린 이 학교가 우리 윤동주시인의 모교로 된다. 그래서 윤동주를 알자면 서전서숙부터 알아야 하리라 ~~ 나의 답사의 첫 코스가 서전서숙에로 이어질수밖에 없다. 서전서숙에 이어 우리 부자간은 룡정의 룡드레우물자리와 대성중학교옛터를 돌아보고 곧추 룡정에서 남으로 15킬로메터 떨어진 명동 윤동주생가옛터로 갔다. 길가의 “윤동주생가” 석비를 지나 길아래로 굽어드니 명동교회 복원옛터에 꾸려진 “명동력사전시관”이 선참 시야에 안기여든다. 전시관 첫 입구에는 “김약연목사 기념비”가 서고있어 숙연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명동교회 옛터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윤동주생가가 나타난다. 생가라지만 최근년간에 복원한 생가여서 주인은 따로 없고 관리인 한둘이 맡아 볼뿐이다. 수필 “8.15날 윤동주 다시 찾아”에서 윤동주생가와 생가복원전후를 다루어보았기에 오늘은 손쉽게 스케치를 하여본다. 아무렴, “윤동주생가옛터”석비소개를 적어두기로 한다.   “시인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로 된 집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3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유물로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석비소개글은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신향인민정부와 룡정시 문학예술계련합회 서명으로 되여있었다. 누구의 서명이든 윤동주생가옛터에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여놓으니 그 소행이 그지없이 고마울뿐이다. 그때 하늘은 또 검은구름이 서켠에서 밀려오더니 대살같은 비를 내리드리운다. 그것도 한식경, 우리 부자간은 윤동주생가옛터를 떠나 북으로 가까이 장재촌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아들놈은 “오늘은 비가 왔다같다”한다고 주절댄다. 지력상수가 정상인에 미치지 못하는 그한테는 가끔 내리는 소낙비가 “왔다갔다”로 보일수밖에 없다. 하면서도 정상인들이 미처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모습을 아들놈은 “왔다갔다”의 행동형사유로 이끌어냈다. 장재촌의 김약연묘소와 규암재자리 등을 돌아보고 길가에 나섰는데 또 대살비가 쏟아져내린다. 급히 어디로 피할수가 없어 바장이는데 장재촌 길어구에서 수남으로 건너가는 륙도하 좁은 다리가 눈에 비껴온다. 나는 아들놈을 다리밑에 서도록 했지만 비가 금시 그쳐오질 않는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선 안되겠다. 내가 저기 다시 사진을 찍고 올테니 여기서 기다려. 다리밑에서 나가면 안돼.” 나는 아들한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륙도하건너 기슭에 일어선 “작가 김창걸문학비”로 달아갔다. 웃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 그 “장막”속에 사진기를 내여드니 비내리는속의 김창걸문학비를 사진기에 잡아둘수 있었다. 디지털아닌 수수한 촬영이긴 하나 력사의 현장잡기로서는 손색이 가지 않았다. 소낙비 내리던 날 룡정과 명동에로의 답사, 아들놈 동행한 윤동주발자취추적—시간은 어느덧 오후 귀가를 재촉하고있었다.
200    여러님들의 진정에 마음 후더워 집니다 댓글:  조회:3767  추천:96  2007-08-13
여러님들의  진정에 마음 후더워 집니다   련재글 접겠다는  글 올려 5일간 련달아 오른 여러님들의 댓글을 보고 여러님들의 진정을 알게되면서 여러님들의 진정에 마음 후더워 집니다. 우에서 련재글 접겠다고 일단은 속내를 비치였지만 도무지 접을수가 없는 저입니다. 인젠 “문화산맥”,”조글로”등 인터넷 활동무대를 떠나서는 생활이 그만큼 의미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터넷에 빠져버린 저이지요. 하나 고충과 심려도 큽니다. 가장 큰 고충은 보아주는 이들이 적은데 있다고 할가요? 네티즌이 제한된 우리 조글로에서도 칼럼이나 현실을 다루는 글들은 어찌해도 조회수가 100여개, 200여개, 300여개 쭈욱쭉 오르지만 우리 력사를 위주로 다루는 저의 글들은 흔히 고작 수십개 내외, 그것도 댓글반영조차 가물에 콩나듯하고 관리자측의 가타부타 반영조차 없을때면 마음이 자주 크게 흔들립니다. 한마디로 별로 보아주지도, 반영도 없는 글들을 왜 올려야 하는가입니다. 그러던차 리해는 못할망정 기회가 생겼다고 비난에 헐뜻는 이들까지 나타나니 기분이 잡칠수밖에요. 방관자 무어라고 보는이들은 대수로보지만 그런 비난에, 조롱에 직면해서 허용과 아량을 베푼다는것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 여러님들의 진정어린 댓글들은 흔들리는 저의 마음을 다독여주는군요.   란란이님, 상공님으로부터 시작된 힘을 주는 댓글들—   한태익님— 우리 겨레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또 그것을 문자로 남기는 작업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력사에 충실하는 사명감이 없으면 할수없는 작업입니다.   강룡운님— 우리 민족을 위해서 로고를 마다하시는 두만강님의 그 충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분발하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박문희님— 말은 쉽사리 안해도 님을 리해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이충원님— 리선생님글 꾸준히 보면서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알게 되여서 감사합니다.   옥저님— 그사이 갖은 풍상고초도 두만강의 흐름을 막지 못했습니다. 민족의 애환을 담고 민족의 희망을 안고흐르는… 두만강… 두만강님의 이 한평생 민족사발굴과 전파라는 숙명을 타고 나셨기 때문…한편 한편 발로 뛰고 땀으로 쓴 소중한 민족자산으로 되였습니다…부딪치고 내리꼰져 무지개되고 거창한 폭포가 되소서.   조글로 내사랑님도 많은 고무와 힘을 주었습니다.   박문희님— 가차없이 잡아내거나 제때에 때려잡을것이 아니라 허용과 아량을 보여줘야 합니다.   광수님— 선의적인 비평리플은 살려내야   박영철님— 마음의 평정을 찾으시고 서운한 마음이 없으셨으면   다노님— 덕분에 많은 분들의 진심을 알게 되였습니다.   모두가 힘을 주고 고무를 주고 리해를 주는 진정어린 댓글들이였습니다. 여러님들의 진정을 알게되여 정말정말 기쁨니다. 그래도 저를 리해하고 저의 글을 보아주는 여러님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혀보는데요, 가령 한두분이 보아준대도 글을 꾸준히 올려야겠다는 마음 말입니다. 내가 혼자 알기보다 한사람이라도 더 알수있다는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여러님들, 며칠이라는 기간만이라도 여러님들에게 심려를 끼치여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인젠 시름을 놓아도 좋을것입니다. 저를 리해하고 저의 글을 보아주는 여러님들이 있는한 이 두만강은 옥저님의 말씀마냥 천리를 흘러가야하는 거창한 흐름에서 바위에 “부딪치고 내리꼰져 무지개되고 거창한 폭포가 되여” 힘차게, 줄기차게 흘러 흐를것입니다. 그리고 건의인데요, 우리 서로  님들의 글을 보면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누가누가 보아주는구나~~때때로 힘이 될텐데요. 저도 명사님들의 글 대부분 보고있지만 댓글만은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턴 저부터 행해보려 합니다.
199    련재글들 여기서 접으려 합니다 댓글:  조회:4352  추천:115  2007-08-09
련재글들 여기서 접으려 합니다   지금 한창 윤동주 90돐기념특집 글들과 구화산답사기 련재중인데 더 련재하고픈 맘이 없어지는군요. –력사학자님-등 댓글을 보고 너무나 기분이 흐려집니다.        솔직히 말해~~김범송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짤막한 글을 올린후 그에 따르는 부분 댓글들에 대해 반박하고픈 충동을 심히 느끼였습니다.그러다가 참고 또 참고 말았습니다.왜서겠습니까~~        나로 말해 김범송님은 잘 모르고, 익숙한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옥저님의 친구이고 같이 술도 마이며 인연을 맺은 후배친구이기에 나이 격차와는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는 사이입니다. 또,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글들에서 그 마음들을 익히 읽고있습니다.        그러던중 범송님 상기 글 한편이 올랐고 세 어른님들을 한데 어울려 공과를 론하는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그래서 아무런 편견도 없이 서로 믿고픈 마음에서 짤막한 글에 나의 소신을 밝히였습니다.        워낙 나도 당신들 얘기처럼 범송님의 글에 댓글로 올리려 했는데 조글로에서 댓글올리기 방식을 조절한 직후여서 나의 인터넷 재간으로는 수차 시도해 보아도 댓글이 뜨지 않더군요. 이런 의미였으니 잘못되였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마음의 불편을 느낀다면 송구스럽습니다.        단,한가지 밝힐것은 김범송님을 폄하하자거나 욕질이나 비난이 아닌 선의적인 글이라는 것입니다.이점을 범송님은 리해하고 있습니다. 하기에 우린 서로를 시비에 내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의 부름을 도용한 ~력사학자님~은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여 오는군요. 나도 이젠 50대 중반에 오른 사람입니다, 풍상고초를 심히 겪어오며 세상을 어느정도 알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님의 안중에 내가 ~뒤가 끌리여~댓글을 지워버릴 하찮은 존재로밖에 안보입니까???        정말이지 맘이 상하고 섭섭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음에도, 누가 뭐라해도 말없이 로심초사하며 ~ 우리 겨레에 뭔가를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어 묵묵히 뛰고있는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정말 정말이지 나의 글들이 현실에 주목하는 님들의 반향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마음이 흔들리는군요. 모처럼 강더위에 몸을 혹해하며 현지답사하고 쓰고 올리는 글들에 수고의 글 한마디 올리지는 못할지언정 비난이 란무하는 우리 인터넷현실이 통탄스럽습니다. 심히 우려됩니다.        그래서 련재글들이고 뭐고 일절 접기로 했습니다.그 와중에도 열심히 보아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께 미안한 마음 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서로 존중하며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기생각대로 깊은 사고없이 정치를 언급하는 님들께 충고 한마디 합시다. 여기는 중국입니다. 인터넷세상이 세외별장인가 합니까……
198    【구화산순례】(11) 랑랑탑에 깃든 김지장님 이야기 댓글:  조회:3493  추천:112  2007-08-09
【구화산순례】(11)  랑랑탑에 깃든 김지장님 이야기 리광인  구화산 화성사앞은 약 10무로 되는 광장으로 펼쳐져있다. 이 광장의 동남쪽 변두리는 옛날 철탑으로 되였던 “랑랑탑”자리라지만 지금은 그 철탑을 볼수가 없고 “랑랑정”으로 불리우는 우물이 탑자리에 자리하고있다. 여기 랑랑탑과 랑랑정에 김지장으로 통하는 김교각님 이야기가 스며있어 무심히 지나칠수 없게 한다.   랑랑탑과 랑랑정은 범상치 않은 래력을 갖고있었다. 뒤늦게야 이를 알게 된 나는 우물자리를 돌고돌았지만 세멘트로 우물자리를 봉한 평평한 웃면은 온통 향을 태운 검은 재로 뒤덮혀있어 한바탕 제사자리를 방불케 했다.   구화산관련자료들을 펼쳐드니 옛날 “신승전(神僧傳)”에 부처가 입멸한지 1500년후에 지장보살이 신라국의 왕실로 내려왔고 성은 김씨이고 호가 교각이라고 기재되여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김교각은 당나라 개원 6년(718년)에 24살나이로 당나라에 왔고 구화산에서 75년간이나 도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구화산 거의 모든 자료들이 이렇게 말하며 전하고있다.   허나 구화산사람이고 구화산력사문물관 부관장이였던 만홍매씨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만홍매씨는 김교각님이 기원 718년에 당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구화산으로 온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명산사찰들을 돌아다니다가 23년후에야 당년 구자산(九子山)으로 불리운 구화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이미 46살때인데 이로 보아 김교각님은 구화산 75년인것이 아니라 55년 춘하추동으로 헤아려진다고 만홍매씨는 밝히였다.   전설에 의하면 구화산에 머무른 55년 력사속에 신라국에서는 선후 3차나 사절을 보내여 김교각을 귀국시키려고 서둘렀다.   처음 파견된 사절은 신라국의 두 대신이였다. 이들은 당나라 절반을 돌아도 김교각을 찾지 못하고 나중에 구화산에 이르렀어도 김교각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할수 없이 구화산을 내려 산아래 이성전(二聖殿)에 이르렀지만 신라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 쌍쌍이 돌에 머리를 박아 운명하고만다. 구화산이 지장도장으로 된후 사람들은 이 두 대신을 기념하고저 신라국 두 대신이 절명한 자리에 이성전을 짓고 기념하여왔다.   신라국에서는 오래도록 두 대신이 종무소식이니 또 김교각의 외삼촌 둘을 보내여 김교각을 찾게 한다. 그들도 종당에는 조카의 영향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구화산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고기와 술에 절어있던 그들이 불교도들이 살생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등 다섯가지 계률을 이겨내지 못하여 결국은 김교각에 의해 산에서 내려가게 되며 구화산의 북쪽 산기슭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게 된다.   이런 형편에서 나중에 기다리기에 지친 신라국임금의 랑랑이요, 김교각의 모친이 직접 출마하여 구화산에 이른다. 구화산에서 랑랑은 아들 김교각을 만나나 이미 네부의 경서까지 만들고 불경에 심취된 아들의 마음을 돌려세우지 못한다.   그런던 하루 김교각은 화성사앞 광장에 우물이 있고 우물안은 별유천지로서 현실세계에서 초탈하여 지옥의 고생을 피해 천당에 오를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황혼에 랑랑은 아들이 또 경서에 빠져든것을 보고 홀로 우물가로 다가갔다. 헌데 이게 웬 일일이요, 아들이 우물안에서 경을 읽고있기에 부지불식간에 자기도 훌쩍 뛰여든다. 어떤 사람이 우물에 뛰여드는것을 보고 중들이 모여들어 건지려 하나 사람은 그림자도 볼수 없고 광장의 서쪽가에 랑랑이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지장왕의 법력이 어머니를 천당에 오르게 했다면서 사후에 그 우물자리에 7층철탑을 세우고 랑랑탑으로, 우물은 랑랑정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은 김교각님의 모친이 두 노복의 동행으로 구화산에 왔고 아들을 보고 희비가 섞이여 밤낮 3일을 울다가 실명했는데 모친이 늘 우물물로 눈을 씻은끝에 시력을 회복하여 우물을 명안천(明眼泉)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전설은 전설이로되 이국땅 화성사의 광장가에 자리잡은 우물에 김교각님의 모친 이야기를 담은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서리여 랑랑탑과 랑랑정이 신령스럽기만 하다. 청말민국초에 랑랑탑이 없어지고 우물이 메워졌다는것으로 보아 랑랑탑과 랑랑정의 존재는 력사사실이렸다. 1978년에 구화산이 대외에 개방된후 국가적투자로 화성사 광장이 다시 수건되고 랑랑정이 다시 원 모습을 찾았다는것은 기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일가, 나는 화상사를 답사하면서, 랑랑정을 거닐면서 자식에 대한 어머님의 절절한 사랑의 주인공 김지장모친님 그리고 그 아드님 지장보살 김교각님을 다시다시 재다시 떠올리게 되며 신격화된 지장님을 오래오래 기도해마지 않는다.  
197    【90돐특집】23)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7) 댓글:  조회:3398  추천:96  2007-08-07
【90돐특집】(23)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7)       내고향 시인 윤동주는 생의 만 27년 2개월 중 20년 8개월을 화룡현 명동과 룡정에서 살다가 간 조선족시인이다. 2005년 8월 15일 윤동주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는 이 조선족시인 서거 60주기를 기리는 기념활동의 절정이라고 할수 있다.       윤동주서거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연변대 조선한국학연구중심, 한국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등의 주최와 노력으로 2005년 8월 15일 연길시 세기호털 2층 회의실에서 성과적으로 펼쳐졌다. 8.15학술세미나는 나와 연변대 김경훈교수, 한국 ××× 셋의 론문발표와 답변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더우기 《윤동주는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라고 제목한 나의 론문은 제목자체부터 도전적이고 충격적이여서 같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통쾌하게 시인정의를 다루었다 하고 어떤 이들은 윤동주는 워낙 조선족시인이 아니냐며 신선감이 없다고도 했다. 오랜 기간 한국식 《민족시인》 정의에 물젖어 온 그들로서는 민족시인이면 곧 조선족시인이라고 보는 모양이였다. 윤동주는 우리 조선족시인이라고 한번 통쾌히 불러주지 못하고 민족시인에 도취되던 부류들에서 시닥잡아하지 않는것 같았다.       아무튼 나의 론문은 충격적이고 시비가 잖았다. 이는 무언가 문제를 던지였다는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박영우회장은 론문을 요구하더니 그해 가을호 《서시》계간지에 나의 론문을 게재하여 주었다.        8.15학술세미나를 계기로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윤동주연구에서의 련속적인 《폭탄》은 잔잔하고 미미하던 여기 연구분야에 파문을 던지며 충격파를 일구었다. 지난해 2004년부터 까근히 내밀어오던 윤동주 60주기 기념행사는 절정속에서 예기한 목적에 도달한것 같았다.       그날 오후 8.15행사주최측은 다같이 룡정과 명동으로 가서 윤동주생가와 윤동주묘소를 찾았고 조선족씨름경기 등 의의있는 활동을 벌리며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나는 제때에 《8.15날 윤동주를 다시 찾아》 수필을 써서 맘속 소감을 솔직히 터놓았다.       이로써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련재를 한계단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밖에도 써야 할 글들과 윤동주발자취 좇아 조선 종성을 다녀오고 중국내 윤동주 관련 연구성과자료들을 모두 수집하여 《윤동주연구문집》을 묶어두고 등 일들이 적지 않았다. 2004~2005년 이태사이에 나는 윤동주연구에 남다른 박차를 가하여 근 10만자에 달하는 론문과 수필, 기념 글들을 써서 신문, 잡지와 인터넷에 발표하여왔는데 이제 썼거나 쓰려는 글들은 2년전 이태간을 훨씬 초과한다. 윤동주탄생 90돐을 맞아 출판에 교부될 나의 윤동주연구문집이 잇따라 해빛을 보게 될것이다.      윤동주탄생 90돐에 제하여 돌이켜보는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 나는 이 훈풍의 진두에서 맘껏 나래쳐 보았다.
196    【구화산순례】(10) 구화산 화성사를 찾아서(2) 댓글:  조회:4618  추천:112  2007-08-05
【구화산순례】(10)            구화산 화성사를 찾아서(2)     구화산 화성사의 루루천년 변천사를 떠올리는 속에 가이드는 화성사 앞 광장 동남켠을 가리키며 저기는 랑랑탑터이고 탑아래 《랑랑우물》이 있으며 여기는 그젯날 김교각님이 몸소 팠다는 언월지-- 방생지라고 했다. 나는 먼저 방생지를 돌아 보았다. 방생지는 시초 반달모양 같다하여 언월(偃月)지라고 했다지만 지금의 모양은 반달모양이 아니라 옆으로 길죽하게 삐여진 타원형을 절반 쪼개여놓은 타원형 반원체 모양이였다. 이런 한무가량의 언월지를 김교각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파고 못에 물을 저축하여 수전을 관개하고 고기를 기르고 련꽃을 심었다고 가이드는 열성껏 설명하느라고 쉴줄을 몰랐다. 했으나 처음에는 련꽃에 꽃씨가 달리지 않아 걱정했더랬는데 후에는 씨가 너무도 잘 여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방생지란 뜻은 못에다 고기를 기른다는 뜻이라고 덧붙혔다. 그럴만한 해석이라 후에 자료를 뒤져보니 과연 그렇게 밝혀져 있었다. 《구화산지》민국때 자료를 보면 방생지에는 련꽃을 심고 고기를 길렀을뿐만아니라 방생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화당간(花塘涧)으로 이끌었다. 김교각님 그 시절에 화성사에 불객들이 제일 많이 모일 때는 수백명이나 되였고 그들이 불경을 읽고나서 꽃을 화당간에 뿌리게 되는데 그 꽃이 물에 흘러 내려가도록 하였다. 김교각님은 또 화당간에다 수대, 즉 물방아대를 만들어 놓아 풍취를 돋궜다고 하니 김교각님의 지혜가 그대로 드러난다. 가이드는 여기까지 설명이 닿지 못했지만 열성스런 모습은 여전했다. 방생지를 메우며 헤둥대는,그 수를 헤아릴수 없는 이름모를 붉은 고기들이나 펼친 주먹만큼의 기수부지 거부기들은 살생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덕을 입으며 자유로이 노닐고 있었다. 방생지를 지나면 그젯날의 화성사라지만1981년에 짓기 시작하여 1982년 가을에 개방된 구화산력사문물관 불교건물이 그대로 반겨준다. 구화산력사문물관에는 각종 불교경전들이며 불교기구들이며 성지들이며 서화며 도합 1000여점의 불교문물들이 소장되여 있다고 하는데 그중 적지 않은 문물은 세상에 희귀한 진품이라고 한다. 구화산력사문물관에 들어서자 선참 나의 발목을 잡은것은 문물관 한벽을 채운 첫부분의 《김지장생평사적전람》 설명문이다. 더우기 놀라운것은 김교각님에 대한 평가부분인데 《중국 불교사에서 외국승려가 보살로 떠오른 이는 김교각 한분뿐이》라며 중국불교에서의 일대 위인이요, 중국불교사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는 고도의 평가는 나를 크나큰 감동의 소용돌이에로 에워갔다. 나는 그 크나큰 감동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한채 문물관내의 매 하나의 문물에 눈길을 박았다. 문물중에서도 1705년에 청나라 강희황제가 구화산에 편액을 하사했다는 《구화성경》(九华圣境)과 1766년에 강희황제의 손자인 건륭황제가 하사했다는 편액 《분타보교》(芬陀普教)도 흥미로왔지만 나의 흥미를 무척 끈것은 지장보살 김교각님 관련문물들이였다. 선참 안겨드는것은 유리관 안에 잘 보관된, 동으로 주조된 독각맹수(独角兽) 표본이다. 독각맹수를 제정(谛听), 지청(地听), 좌기(坐骑), 신개(神犬)라고도 하는데 전설속 김교각님이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오던 그 시절에 신개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왔고 김교각님의 신변을 지켜섰다하여 더 친절히 안겨든다. 해당자료를 보니 신개표본은 키가 2자반, 길이가 3자, 너비가 2자, 무게가 250킬로그람으로 되여있었다. 이런 표본을 17세기 명나라 황제가 하사했다고 하는데 명나라의 한 예술인이 당년에 김교각이 타고온 신개를 상상하여 만든것으로 알려졌다. 전설에 따르는 신개는 영특하기로 이름이 나고 불법에 정통하고 사람들의 앞날과 길흉까지 점을 치는 보살의 화신이였다. 이런 신개표본을 두고 청조말년에 조옥파를 위수로 하는 조선의 불교대표단이 구화산에 와서 조배할 때 비싼 값을 주겠다며 팔것을 희망했으나 사절당했다는 력사기록이 나있다. 신개표본에 이어 경이에 찬 시선을 끈것은 김교각님의 생활품들이라는 짚신과 신 등 복제진렬품이다. 짚신과 신 등은 크기로 이름이 있는데 이는 김교각님의 생전 신체특징과 관계된다. 민국 27년의 《구화산지》에는 김교각님의 《키가 7척이 넘고 임금처럼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장수였다》고 기록되여 있고 모든 자료들이 《몸이 장대하고 머리에는 이상한 뼈가 솟아있었다》고 소개되여있다. 이런 김교각님이고 보니 신이나 생활품들이 그에 따를수밖에 없을것이였다. 어느덧 한시간도 훌쩍 지나갔다. 정오가 되여오기에 문물관과 그에 이어지는 대웅보전을 돌아보고 화성사 밖으로 나오는데 가이드가 바깥 돌계단 좌우켠을 지켜선 돌사자를 가리키며 800여년의 력사가진 진품이라고 소개했다. 800여년이라면 북송이나 남송시기와 맞먹는다는 말이니 두 돌사자를 송나라 이후 명청시기를 거치여오면서 수차 수축된 화성사를 지키여본 력사의 견증자라고 할수 있었다. 구화산의 화성사, 화성사는 실로 지장보살 김교각님을 떠올리는 여기 천여년전 력사속의 첫 불교사찰이였다.
195    【90돐특집】(22)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6) 댓글:  조회:3543  추천:107  2007-08-04
【90돐특집】(22)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6)     최근년래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에서 윤동주기념활동을 해마다 계획적으로 끈기있게 벌려왔다. 윤동주기념행사에서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간간히 손을 잡았다. 2005년 2월 16일의 묘소추모활동이 그러하고 이해 7월 16일의 중학생 제6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이 그러했다. 2005년 7월 16일, 제6회 조선족중학생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은 오전에 연변과학기술대학 간호학부 5층강당에서 성황리에 열리였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는 특별귀빈이요, 협조단위로 되여 인터넷을 통한 이날의 보도를 전방위적으로 맡아 나섰다. 글쓰는 책임은 의례 나의 몫이였다. 혹자는 신문도 아닌 인터넷이라고 비하할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21세기 인터넷시대에 인터넷의 힘은 대단한것이여서 인터넷에만 오르면 글쓰는 이들의 동네방네, 연변뿐이 아닌 국내 각지, 해외에서도 모두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신문들은 하나하나 인터넷 신문꾸리기에 열을 올려야만 한다. 이날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서 가장 기꺼운 일은 윤동주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녀사와 매부 오형범선생과 같이 기념사진을 남긴것이 아닐가 싶다. 오래동안 조선족력사란 학술연구에서 헤둥거린 나로서는 윤동주문학상 관련행사들은 거리가 꽤나 먼 일이여서 윤혜원녀사 내외분을 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윤동주문학상(말이 문학상이지 기실은 작문경색)은 《중학생》에서 독점해 왔기에 이들 내외분은 “중학생”성원 단골손님으로 해마다 연변행에 오른다. 《중학생》편집부 허춘희주필께 감사를 드려야 했다. 허주필님이 우리 문화발전추진회와 공동전선을 구축하니 윤동주기념활동이 보다 뜨고 윤혜원녀사분들과 가까이 지낼수 있게 되였다. 솔직히 말해서 윤동주를 연구하고 윤동주를 홍보한다는 학자님들이 세계 여러 나라 윤동주연구가들과 천가래 만갈래 련계가 있는 윤혜원녀사님네를 모르고 지낸다는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윤혜원녀사님들과 함께 어울리는 내 마음 류달리 기쁜것일가. 7월 16일 윤동주문학상 시상식활동을 통하여 나는 또 한번 윤동주서거60주기를 빛내는데 힘을 보태게 되였다. 윤동주 우리 시인으로 말할 때 서거 60돐만에 시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겨레의 지기들을 만난다는것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까,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 행운은 보다 선명히 떠오르리라 나는 믿어마지 않는다.              
194    【90돐특집】(21)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5) 댓글:  조회:3610  추천:95  2007-08-03
【90돐특집】(21)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5)     2004년 한해 동안의 로고속에서 학술세미나 론문준비와 새해 2.16 60주기 서거 기념일 글들이 소리없이 씌여졌다. 그속에서 이해도 서서히 저물어가고 희망찬 2005년, 60주기 2월이 밝아왔다. 새해 2005년 첫 윤동주서거 60주기 기념행사는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같이 마련한, 룡정동산 윤동주묘소에서의 추모활동이였다. 전날따라 눈이 크게 내려 룡정 동산행 숫눈길을 헤치기란 쉽지 않았지만 추진회측 조성일회장님, 《중학생》잡지측 허춘희주필님, 시인 석화님, 연변일보 기자 김인선님 등 참가자 10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이날의 눈속에서 가진 야외추모모임소식은 그날로 사진들과 더불어 문화산맥사이트에 뜨고 2월 19일부 흑룡강신문 7면에 뉴스 《연변서 윤동주서거 60주년 추모모임을》과 함께 내가 쓴 글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특고와 함께 특집으로 뜨면서 2005년 윤동주서거 60주기 기념 첫 돌풍을 가져왔다. 60주기 특집으로 흑룡강신문 7면을 할애했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 잇따라 《생활안내》신문에서 주필 한태익선생의 배려로 내가 쓴 윤동주서거 60주기 기념 특집문장을 2월 16일부 한면에 실었다. 여직껏 생활안내 글들을 위주로 편집하면서 40~50대 중년층을 확보하던 신문에서 언감생심 윤동주특집을 꾸리니 반향이 비교적 강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2005년 첫 기념행사와 글들을 조선족사회를 리드하는 대표적인 신문과 더불어 일대 성공을 가져왔다. 첫 걸음을 순조로이 뗀 나는 북경의 장춘식씨 도움으로 함께《도라지》잡지사와 손잡고 공동히 2005년 제4호에 윤동주 기념특집을 꾸리였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들과 함께 나의 론문 《윤동주시의 별세계》가 실리여 문단에 파문이 일었다. 신문에서 기념포를 멋지게 쏘았는데 문학지에서 또 기념포문을 열어제끼니 윤동주가 화려하게 뜨면서 시인서거 60주기가 문단의 일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신문특집과 문학지특집을 통하여 윤동주시인과 시인서거 60주기가 널리 알리여졌다. 한발 늦은 연변일보에서 김인선기자와 김철호기자의 글로 가세한데서 60주기 기념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이런 속에서 나는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定义)를 차례로 심어갔다. 터놓고 말해서 1995년 룡정서 열린 윤동주서거 50주기 기념세미나 기조발언에서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님께서 윤동주는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라고 대성질호하여 강렬한 공명을 일으켰지만 우리 문단은 의연히 주로 《민족시인》이라는 자리매김에만 맴돌면서 떳떳하지 못하였다. 윤동주시인 리해와 시인연구의 부진을 그대로 말해주는 단적실례라 하겠다. 이에 비추어 나는 2004년 8월 이후 문화산맥사이트에 련재하기 시작한 룡정향토순례와 2005년 2월 16일 추모행사글에서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이라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흑룡강신문도 필자의 기념글특집을 내면서 편집자의 말에서《2월 16일은 연변이 낳은 조선족시인 윤동주서거 60주년 기념일》이라고 여론을 이끌어나갔다. 이에 동조하여 연변일보에서도 2월 18일 글과 7월 8일의 글에서 선후로 《연변이 낳은 우리 민족의 걸출한 시인》,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라고 극찬하여 윤동주는 우선 조선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를 드팀없는 사실로 밀고나갔다. 윤동주. 이 위대한 시인이 우리 조선족 사회에 알려져 20년만에 모호한 《민족시인》정의로부터 우리 민족의 시인으로, 조선족 시인으로, 조선족의 아들로 이 세상에 장엄히 나타났다. 여기에서 나는 주도적인 역할을 놀았다              
193    【구화산순례】(9) 구화산 화성사를 찾아서(1) 댓글:  조회:3639  추천:125  2007-08-02
【구화산순례】(9)  구화산 화성사를 찾아서(1)     구화산은 1000여년의 력사가진 불교성지이고 크고작은 불교사찰이 수림을 이룬다하지만 구화산의 첫 사찰로 불리우는것은 그래도 화성사를 꼽는다. 구화산에 오른 첫날 7월 9일 오전 나는 구화산의 육신보전을 배알한후 가이드더러 화성사를 안내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알고보니 화성사는 내가 주숙한 려관집에서 서쪽으로 멀지않은 구화거리의 부용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볼때의 화성사는 불교사찰로서의 절이 아니라 구화산력사문물관이였다. 하면서도 지장보살 김교각님을 찾아 구화산에 오른 나한테는 의연히 김교각님을 처음 모신 구화산의 첫 사찰로, 지장보살의 도장으로 안기여듬은 어찌할수가 없다. 구화산 화성사의 시원을 알자면 그래도 김교각님과 동시대 사람인 비관경의 《구화산 화성기》가 으뜸인것 같다. 비관경은 그의 《구화산 화성기》에서 김교각님이 자기 조국—신라국을 떠나 구화산에 자리잡을 때를 두고 이렇게 적고있다.   《그는 구름속에 솟은 구화산을 보고 기뻐서 산속으로 천리를 걸어들어갔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봉우리를 뛰여넘고 깊은 골짜기를 가로타고 하여 온 산속을 헤치며 돌아다녔다. 그는 깊숙한 골짜기에 평지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양지쪽에 널직하고 시꺼먼 땅이 있었는데 아주 기름져 보였다. 그리고 또한 골짜기에서는 맑은 샘물이 감로수마냥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골짜기에 있는 석굴에서 고심하게 도를 닦았다.》   비관경의 생생한 력사기록이다. 그로부터 퍼그나 세월이 흐른후의 당나라 지덕 초년인 기원 756년 김교각님은 산아래 제갈절 등에 의해 발견되고 획기적인 변화가 일면서 화성사로 이어지게 된다. 비관경 《구화산 화성기》는 계속 이렇게 쓰고있다.   《지덕년초에 제갈절 등이 산기슭으로부터 산우로 올라갔다. 그들이 산속으로 올라갈수록 사람하나 볼수 없었다. 그런데 맑게 개인날씨에 해빛이 환히 비치고 있는 석굴속에 한 중이 참선하고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그의 곁에는 굽이 있는 가마가 걸려있었다. 그 중은 백토에다 쌀을 좀 섞어서 밥을 지어먹는것이였다. 중이 이렇게 간고하게 생활하면서 수행하는것을 본 시골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에게 돈을 희사하였고 단공의 옛땅을 사서 주었으며 중을 위해 모두 발벗고 나섰고 중이 시키는대로 하였다.》   해당자료를 검토하면 제갈절 등 산아래 몇몇 어른들이 석굴에서 김교각님을 발견했을 때 김교각은 두눈을 감고 정좌하여 도를 닦고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굽이 있는 가마, 백토에 쌀을 좀 섞어 지은 나머지 밥—눈앞의 현실은 제갈절 등 어른들을 심히 감동시키였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내서 절을 지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화성기》에서 밝힌 단공의 옛땅을 사서 주었다는 사실은 기원 741년에 단이라는 사람이 경을 읽던 옛 절터를 가리킨다. 화성사짓기가 시작되자 산아래 사람들은 자기일처럼 기뻐하면서 모두 찾아와서 벌목하지 않으면 벽돌이나 기와를 옮기고 길을 닦아나갔다. 이 과정을 귀납해보면 이러하다. 첫번째 일: 사람들은 힘을 합쳐 페허를 청리하고 기초를 단단히 했으며 나무를 찍고 돌을 깎아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두번째 일: 산우 평지의 땅을 개간하여 곡식과 채소를 심어 먹는 문제를 해결해 갔다. 세번째 일: 물도랑을 빼고 샘물을 절에 끌어다가 마이는 수원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모든것은 김교각님의 요구에 따라 착착 풀리여 갔는데 사람들은 김교각님을 위해 모두 발벗고 나서며 시키는대로 부지런히 뛰였다.   이는 비관경의 《구화산 화성기》에서 밝힌 내용에 따라 후세에 이모저모 보충된 종합자료이다.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한 《지장보살 김교각법사》책에 따르면 비관경은 당나라 때 지주 청양현 사람, 학문이 있어 원화년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모친이 세상을 뜬데서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구화산 소미봉에 은거한것으로 나타난다. 김교각님과 동시대사람, 이런 지인이 쓴 견문이니 비관경의 견문은 믿을만해서 후세사람들은 흔히 이 화성기에 자료래원을 두고있다. 그후의 력사속 화성사의 변천사를 보기로 하자.   —당나라 건중 2년에 지주 태수 장암이 상주서를 올려 《화성사》 편액을 하사받고 지장왕 도장으로 떠올리다. —명조 선덕 10년에 복경이 화성사를 재건, 만력조에 돈이 내려와서 화성사를 또 재건하고 장경을 하사하여 절뒤의 장경루에 모시다. —청조 강희 20년때 안휘 순무 유성룡이 화성사를 복건하고 강희, 건륭 황제가 친필 편액을 두번 하사하다. —청조 함풍 7년에 병란으로 절이 전부 불타버렸지만 장경루만은 타지 않았고 광서 기축년에 재건하다.   기나긴 력사 대하속에 떠온 화성사의 흐름, 화성사가 구화산에 솟아 1000여년후 지금 나는 구화산 화성사 앞에 서있다. 비관경의 《구화산 화성기》를 떠올리고 화성사의 력사속 수차의 재건을 떠올리노라니 일대 문화거인 김교각님이 맘속에 우렷이 떠오른다.
192    【90돐특집】(20)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4) 댓글:  조회:3404  추천:103  2007-08-01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4)     내가 조성일선생님이 회장으로 뛰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 다니기 시작한것은 2004년 3월의 일이다. 서로간의 의기투합이여서 하는 일들이 잘도 물려갔다. 하긴 인터넷을 잘 모르는 나의 일이라야 부지런히 글들을 써서 문화산맥 사이트에 끊임없이 올리는 것이였다.      서로간의 리해를 거치면서 일정한 시간이 흐른후 나는 조성일회장님 보고 공식적인 제안 하나를 드렸다. 새해 2005년이면 윤동주서거 60주기를 맞는 해이니 60돐맞이 학술세미나를 추진회의 이름으로 조직하자는 제안이였다. 회장님은 전적인 지지를 표시하면서 한국의 해당 인사들과 부지런히 메일, 전화를 주고받더니 될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학술세미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자면 세미나 론문준비도 따라야겠지만 우선 먼저 경제문제를 선행시켜야 했었다.      후에 연변대 김호웅교수의 도움으로 박영우회장이 이끄는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와 《서시》계간지에서 우리 문화발전추진회와 공동개최를 하고 한국측에서 해당경비를 지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헌데 어찌구려 윤동주서거 60주기 학술세미나가 무산될 처지에 놓이였다. 우리 추진회는 빠지고 연변대 조선한국학중심에서만 나서기로 했다는것이다.  이를 두고 나는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모른다. 학술세미나 주최측 론문 3편중 내가 한편을 맡기로 했는데 이것이 물건너간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2005년 윤동주 서거 60주기 기념행사중의 최대행사를 나는 학술세미나로 보았으니 그에 따르는 실망도 무척이나 컸다고 보아진다.      한동안이 지나 일은 다시 원 계획대로 물려갔다.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에서 계속 공동개최자로 나서기로 하고 나는 론문준비를 빈틈없이 내밀었다.      나는 윤동주 관련연구론문을 두편으로 잡았다. 한편은 2004년 11월에 열리는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 창립세미나》에 《윤동주시의 별세계》를 발표해야 하고 다른 한편은 2005년 8월 윤동주서거 60돐 중한학술세미나에 《윤동주는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를 내놓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윤동주의 100여편의 기존 시작품과 한국의 윤동주연구성과, 1985년 4월에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 교수님에 의해 윤동주시인이 중국조선족사회에 처음 알려진후의 모든 연구성과들을 일일이, 전면적으로 검토해보기 시작하였다.      드디여 나는 첫 론문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윤동주시의 별세계연구는 한국을 망라하여 첫 시도라고 할수 있었는데 다행히도 2004년 11월, 연변동북아 문화연구원 창립세미나에서 괜찮은 효과를 보았다. 윤동주연구가들에 대한 충격이 꽤나 되는 모양이였다.      새해 2005년 윤동주서거 60돐 학술세미나 준비도 빈틈없이 착착 추진되여 갔다. 학술세미나 론문준비도 뜻대로 풀리여 갔다.  
191    【90돐특집】(19)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3) 댓글:  조회:3578  추천:98  2007-07-31
【90돐특집】(19)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3)     윤동주 60주기로 말할때 2004년은 정녕 잊을수 없는 한해였다고 본다. 이해 9월과 10월 사이만도 나는 명동일대 답사에 자주 나서군 했는데 뜻밖의 엄청난 수확은 당년 《동만의 대통령》으로 불리우리도 한 김약연선생, 그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을 연길에서 만나게 된것이다. 2004년 10월 3일 오후, 나는 안해와 더불어 또 명동일대 현지 답사에 나섰다. 그날 룡정~지신행 소형뻐스로 명동에 간 우리 부부간은 윤동주생가 어구에서 내리였다. 먼저 길가의 윤동주생가 석비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명동교회당 전시관, 김약연목사 기념비, 윤동주생가와 우물터를 다시 돌아보고 마을의 복판터에 자리잡은 명동학교 옛터를 찾았다. 명동학교 엣터에서 그젯날 명동학교 사택자리 주인인 김명숙(2004년, 73살) 안로인을 만난 뒤 걸어서 북으로 1킬로메터 밖에 있는 장재촌으로 갔다가 장재촌 동쪽어구 터밭에서 밭에 다녀오는 안로인 한분을 만나게 되였다. 알고보니 이 안로인은 김남숙이라고 부르고 77살인데 김약연선생의 직계친척으로 헤아려졌다. 할머니와의 말말가운데 래일 김약연 증손자 김재홍선생이 장재로 온다는 소식을 귀동냥하고 나는 무등 기뻤다. 그래서 그 할머니 아들집에 쪽지 한장을 남기였는데 그 이튿날 한국서 명동에 이른 김재홍선생이 련계전화대로 낯모를 나를 찾는것이였다. 이렇게 우리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인연이 맺아졌다. 김재홍선생의 련계로 2004년 10월 15일날 우린 전날 14일에 도착한, 명동 출신의 서울 문익환선생의 딸 문영금, 동생 문영환 선생 등과 더불어 옛날 김약연선생 4대 가족 22세대가 널려 살았다는 소룡동, 대룡동, 명동마을 동쪽 언덕의 문씨네 선산, 장재촌의 동골 문익환선생 생가자리, 청년문사 송몽규 묘소자리, 마을 동쪽어구 외딴호 유래, 어린시절 윤동주, 문익환 등이 어울려 놀았다는 언덕자리 등을 일일히 답사하는 흔치않은 기회를 가지였다. 그날 김재홍선생은 연변대 박창욱교수님을 포괄해서 이렇게 모두 세세히 답사한 적이 없으므로 중국에 사는 조선족으로서 윤동주 관련 모든 명동 유적지를 답사한 사람은 리광인선생이 오늘 첫 사람이라고 하였다. 중국에 사는 동포로서 누군가는 모든 유적지를 알아야겠기에 리광인선생을 선택하게 되였다는 말씀에 나는 가슴이 찡해났다. 명동답사에서 한국인 김재홍선생을 알게 된것은 나, 윤동주 연구에서의 일대 전환점이였다. 나는 처음으로 명동과 장재를 둘러싼 소년시절 윤동주의 모든 유적지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행운을 지니였고 윤동주연구의 발걸음을 크게 다그쳐 갈수 있었다. 그번 김재홍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크게 힘입은 나는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으로 수차 다니며 윤동주할아버지랑 중국에 이주 첫발을 들여놓은 자동마을을 확인하게 되고 그들 발자취를 따라 조선 종성까지 다녀오며 옛 종성의 모습을 나타내는 보귀한 문화재 사진을 찍어오게 되였다.  
190    8.1봉기서 우리 겨레 피를 흘려 댓글:  조회:2964  추천:109  2007-07-30
8.1봉기서 우리 겨레 피를 흘려                        【  【편자의말】    래일이면 위대한 8.1남창봉기 80돐, 위대한 중국인민해방군건군 80돐되는 날이다. 국민당반동파에 첫 총을 쏜 남창봉기기념하여 정해진 건군절, 저 8.1군기에도 우리 조선족선렬들의 진붉은 피가 스며있다.           8.1군기와 조선족선렬들을 쓴 필자의 책이 이제 곧 출판발행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중 한편을 뽑아 인터넷의 수요대로 다시 축소수정하여 조글로미디어에 올리여본다. 훈춘의 최석승선생이 90년대 초에 쓴 관련렬사전기도 함께 그대로 올린다.   1926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드높은 북벌전쟁은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 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켰다.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떄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즉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제11군의 24사,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제4군 제25사, 하룡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제3군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 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제11군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이 부대 제 72퇀의 박인, 김철강 등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이 두개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퇀 퇀장과 24퇀 정, 부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이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적 제6군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제24사 71퇀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제20군은 적의 제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옛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봉기군 제20군 교도퇀과 제6퇀은 적군 제9군 79퇀,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월1일 새벽 이들은 적과 벽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 5시간만에 적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조선인전사가 수십명이다. 제4군교도퇀의 박영, 리용 등 200여명 조선인전사들은 국민당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월 2일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큰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등 조선인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년 4월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제4군으로 편성되였다. 8월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등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다. 그중 강석필 등 적지않은 동지들이 남창봉기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강  석  필 (1902~1928)     강석필(姜锡弼)은 1902년 11월 17일 길림성 훈춘현 삼가자향 고성촌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강천순은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살길을 찾아 쪽박차고 남부녀대하여 중국에 이주해왔다. 일한합병이후 조선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여 로씨야의 연해주와 중국의 연변과 상해 등지에로 몰려왔다. 그 당시 훈춘의 대황구에도 조선애국지사들이 모여들어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훈춘현 각지에서 기세드높은 반일투쟁을 벌리였다. 강석필의 아버지 강천순은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고 구국의 큰뜻을 품고있었다. 그는 아예 온 가정을 거느리고 대황구의 빈낭골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강석필은 이고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였다. 그의 아버지 강천순은 빈낭골에 귀틀집을 지어놓고 아름드리나무를 찍어버리고 묵밭을 일쿠어 농사질하는 한편 황병길이 조직한 반일인민단체인 훈춘대한국민의회의 골간으로서 조선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강석필은 막내아들로서 두 형과 누님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반일투사들이였다. 맏형 강석환은 포수군으로서 《독립군》의 소대장이였으며 후에 풍옥상의 부관으로서 항일에 참가하였다. 누님 강정수는 반일부대조직의 책임자였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강석필은 어려서부터 반일투쟁사상을 품게 되였으며 그로 하여금 혁명의 길로 나가게 하였다. 강석필은 대황구에서 동창소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애국인사들이 세운 신형의 학교였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고 공부에도 열심하여 학습성적이 특출하였다. 강석필은 1917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에 가서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거니와 노래도 잘 불렀고 운동도 잘하여 《팔방미인》으로 알려졌다. 강석필은 축구장에서는 《골받이》로 소문났다. 룡정축구판에서 이름이 있었을뿐만아니라 훈춘현축구대회에서도 여러번 소문을 내였다. 강석필이 중학교를 다니던 이 시기에 연변의 중심이였던 룡정에서10월사회주의혁명의 포소리가 울려왔고 맑스주의가 전하여왔다. 강석필은 이에 큰 흥미를 가지고 맑스주의서적들을 읽었으며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기에 노력하였다. 1922년, 그는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마을인 대황구에 돌아왔다. 그는 여기에서 일찍 대황구 북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쏘련에가서 혁명사업을 하다가 돌아온 김근과 가깝게 지내였다. 김근한테서 10월사회주의혁명을 소개받았고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찾으려면 10월혁명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923년 3월 1일 김근은 김성도, 리상준 등 동지들과 함께3.1 학교를 창설하였다. 이 학교는 공산주의사상으로 새 세대를 양성하고 반일혁명력량을 모으는 《공산주의자 양성소》로 이름난 혁명의 요람이였다. 강석필은 발벗고나서서 김근을 도와 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친히 정치과를 수업하였다. 그의 수업은 학생들의 인기를 무척 끌었다. 이밖에도 강석필은 포스터를 그리고 연극을 꾸며 공연하였으며 한주일에 한번씩 웅변모임을 가지는 등 풍부하고 다채로운 형식으로 공산주의 새 세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심혈을 몰부었다.     2     1924년 중국공산당의 창의와 지지밑에 광주에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졌다. 혁명적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이 학교의 창립은 중국혁명전쟁사에서 새로운 한페지를 열어주었다. 《황포군관학교로!》 당시 중국공산당에서 혁명청년들에게 이렇게 여러차례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시대 청년들의 부르짖음이기도 하였다. 《황포군관학교로!》이것을 혁명의 길로 나가는것으로 삼고 전국 각지에서 열혈청년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조선, 윁남, 몽골 등 동방약소민족의 혁명청년들이 찾아가는 집합장소이기도 하다. 《황포군관학교로!》 이 시대적사조는 연변과 쏘련의 연해주에까지 전파되였다. 당시 연해주에서 혁명사업에 종사하고있던 박영은 조선족혁명청년들을 동원, 조직하여 황포군관학교로 수송하고있었다. 강석필은 김근을 통하여 박영을 알게 되였으며 그리고 박영한테서 황포군관학교에 대한 소개도 들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자석마냥 그의 마음을 끌었다. 강석필은 대황구산골짜기를 벗어나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로 나가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고 군사기술을 배워 혁명사업에 몸바쳐 싸우리라 철석같이 마음을 다지였다. 그가 정작 황포군관학교로 찾아가자고 하니 그것은 실로 어려운 길이였다. 반일투사인 그의 아버지는 당지에서도 얼마든지 혁명할수 있는데 만리타향에까지 가서는 뭘 하느냐고 가로막아나섰으며 그의 안해도 남편을 보내지 않으려고 바가지를 긁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석필의 한번 먹은 마음을 굽힐수 없었다. 그리고 길을 떠나려 하니 로비가 한푼도 없었다. 강석필은 중거우에 가서 콩 4마대를 변을 맡아 그것을 팔고 친구들한테서 부조를 받아 로비를 마련하였다. 강석필은 자기의 딱친구인 채인동과 함께 대황구를 떠났다. 물론 집에 알리지 않고 가만히 떠났던것이다. 그들은 도보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로 간다는것과 변을 맡은 콩값을 갚아 달라는 사연의 편지를 띄우고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것이다. 황포군관학교는 광주에서 30리 떨어져있는 조그마한 황포섬에 자리잡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에서는 만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온 이 두 조선족의 혁명청년을 받아들였던것이다. 강석필은 어엿한 황포군관학교의 학원으로 되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회색옷을 입고 맨발에 짚신을 신었으며 철색나는 길죽한 얼굴에 슬기로운 두눈에 정열이 불탔다. 그는 더없는 긍지를 느꼈다. 당시 광동혁명근거지는 갓 세워지다보니 공고하지 못하고 매우 혼란하였다. 반동세력들이 사처에서 득실거리는 형편에서 학생들은 낮이면 학습하고 밤이면 보초를 서야 하였으며 한편으로 학습하고 3년이던것을 6개월로 줄이였다. 강석필은 이 간고한 환경에서 고심히 학습하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으며 혁명적각성을 높이였다. 바로 이때 광주에서 멀지 않은 혜주, 조주, 선두 일대에는 진형명반동세력이 둥지를 틀고 신생한 혁명정권을 압살하려 꿍꿍이를 꾸미고있었다. 광동혁명근거지는 엄중한 위기에 직면하고있었다. 1925년 2월초, 광동혁명정부에서는 진형명반동세력을 진압하고 광동혁명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하여 제1차동정을 벌리였다. 동정대오에는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강석필도 용약 이 동정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2개 퇀은 동정에서의 주력부대였다. 주은래의 직접적교양을 받은 이 학생군은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작전가운데서 용감무쌍하였다. 강석필이 소속된 부대가 어느 한 도시를 공격할 때였다. 적들은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우리 군을 향해 맹렬한 화력을 들이대였다. 적의 탄알은 콩볶듯 날아왔다. 우리 군의 공격부대는 잠시 진공을 멈추는수밖에 없었다. 이때 강석필은 엄페부를 찾다가 그만 깊은 함정에 빠졌다. 사다리도 없어 나올수도 없었다. 우리의 공격부대는 우회작전하여 적의 보루를 까부시고 계속 동정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에서는 강석필이 실종하였으니 전투에서 희생된줄로만 알았다. 그리하여 부대에서는 그의 가정에 그가 희생되였다는 부고를 전하였다. 비보를 접한 강석필의 집에서는 온 집 식구가 비통에 잠겨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3형제중에서 영웅》이더니 숨지었다고 통곡하였다. 바로 집에서 성북장례를 치르려고 차비하는 때였다. 남녘땅에서 강석필의 편지가 날아왔다. 강석필이 살아있다는 기적적인 소식이였다. 사실은 이러했다. 강석필이 함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여 안타까와할 때 피난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함정에서 인기척이 나는것을 발견하고 사다리를 놓아 그를 구원해냈던것이다. 그는 인차 부대를 찾아왔다. 강석필은 진형명반동세력을 부시는 가운데서 영용무쌍하게 싸웠다. 이해 6월초, 전계군벌 양희민과 계계군벌 류진환이 광주에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켰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은 양, 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강석필은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의 교도퇀에 편입되여 싸움에 참가하였다. 이 교도퇀에 편입된 강석필은 광주시교의 반란군의 거점을 까부시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한주일동안의 치렬한 싸움을 거쳐 양, 류 반동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다시 광주를 광복하였다.   3     1926년 7월 1일에 《북벌선언》이 발표되고 위대한 북벌전쟁의 나팔소리가 울렸다. 국민혁명군대오에는 조선족전사 강석필도 어엿이 끼워있었다. 10만을 헤아리는 북벌대군이 광주에서 떠날 때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군벌을 타도하자》는 우렁찬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강석필도 구호를 웨치면서 북진의 힘찬 발자국을 내디디였다. 북벌대군은 반동군벌세력을 무찌르면서 승승장구로 북진하였다. 전투마당에서 강석필은 영용하게 싸웠다. 강석필은 무한에 이르러 하룡이 인솔하는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 제20군에 편입되여 무한혁명정부를 보위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하룡의 제20군이 인차 남창으로 이동하자 강석필도 부대를 따라 남창으로 갔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주은래, 주덕, 하룡, 엽정 등 동지들의 지휘하에 남창봉기가 일어났다. 국민당 반동파에 첫포를 내쏘았다. 강석필이 소속된 제20군은 하룡의 직접 지휘하에 주배덕이 지휘하는 적의 제5로군의 총지휘부를 공격하는 전투과업을 맡았다. 제5로군의 주력부대는 길안, 동향에 주둔하고있었으며 남창시에는 총지휘부와 경위부대 한개 퇀의 병력만 있었다.  적의 총지휘부는 바로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고 적들은 거리 서쪽에 있고 아군은 거리 동쪽에 있었다. 적의 총지휘부앞에는 낮다란 낡은 성루가 가로막히여있었다. 우리 군이 공격을 발동하자 적들은 이 낡은 성루에 올라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아군을 맹렬한 화력으로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종시 적의 총지휘부의 문을 열지 못하였다. 이 적의 방어선을 뚫기 위하여 강석필 등 몇몇 전사들은 비발치는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성루곁에 있는 지부우로 기여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다리를 놓고 성루에 올라가 적의 화력망을 벙어리로 만들었다. 3시간 남짓한 격렬한 전투를 거쳐 적의 경위퇀을 소멸하고 적의 총지휘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봉기군은 5시간동안 남창에서 적군을 대량적으로 소멸하고 남창봉기의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였다. 조선족전사 강석필은 적의 총지휘부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전공을 올려 전군에 그 이름을 떨치였다. 남창봉기가 있은후 강석필은 북벌군의 대오를 따라 광주에로 되돌아왔다. 그가 소속한 북벌군 제4군 교도퇀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가 피비린 대도살을 당한 다음 강석필은 홍군 4사에 편입되여 1928년 1월에 해륙풍 현소재지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팽배의 직접 지휘하에서 첫 쏘베트정권을 보위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국민당 반동세력은 여러개 사의 병력을 그러모아 해륙풍 쏘베트정권을 요람에서 압살해치우려고 미친듯이 날뛰였다. 적아력량대비는 너무도 현저하였다. 강석필이 소속된 홍군 4사가 보녕의 삼항으로 전이하였을 때 여기서 적들과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강석필은 이 싸움에서 적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병원에 후송되여 치료하였으나 낫지 않아 남녘땅에서 고이 눈을 감았다. 그때 그는 27세였다. 강석필, 훈춘현 대황구산골짜기에서 자라난 강석필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녘땅에서 영용무쌍하게 반동세력들과 싸워 전공을 떨쳤으며 중국인민의 위대한 해방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청춘과 생명을 바쳤으며 피어린 발자국을 남기였다. 중국력사의 흐름과 더불어 조선족전사 강석필의 이름도 영원히 빛나리라!                                최석승, 조선족혁명렬사전(제3집), 료녕민족출판사, 1992년 3월  
189    【구화산순례】(8) 금사천에서 두 위대한 문화거인 만나 댓글:  조회:3807  추천:120  2007-07-30
【구화산순례】(8)         금사천에서 두 위대한 문화거인 만나다   구화산에 오른 7월 9일 오전의 일이다. 육신보전을 배알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하여 그대로 남으로 육신보전 내리는데 신광령아래 동남 산 허리, 고목이 울창한 수림속에 옛스런 불교사찰 하나가 눈에 띄운다. 가까이 가보니 《상선당(上禅堂)》이다. 《전국 중점사원의 하나인데 보고 가시죠?!》 《지장보살 찾는 나한테 뭐가 볼게 있어요?》 《이제 가보면 알거예요.》 가이드는 무작정 나를 상선당안으로 이끌어간다. 상선당 당내를 에돌아 사찰의 서쪽가 나아가니 인젠 다 왔다며 바위에 새겨진 글을 보란다. 붉은 글씨로 바위에 새겨진 글문 《금사천》(金沙泉) 세글자가 너무도 선명하게 안겨든다. 내가 무슨 의미냐듯 가이드를 마주보니 그는 금사천 세 글자는 당나라 대시인 리백의 소행이라고 한다. 리백이 구화산에 발자취를 남기였다는것 쯤은 알고있지만 리백의 글씨가 구화산에 남아있으리라곤 전혀 상상밖이다. 금사천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샘물이 사철 마를줄 모른다고 한다. 쪼르륵 떨어지는 한가닥 샘물인데 졸졸 내리는 샘물을 샘물가 고뿌로 마셔보니 그 맛 또한 시원하기만 하다. 물이 바위로 떨어진다고 적수(滴水)라 하면서 금사천에 그닥 크지 않는 적수관음정(滴水观音亭)을 일떠세우니 금사천의 품위가 높아만 간다. 금사천 가까이에는 한그루 돈나무(金钱树)가 하늘에 치솟고있었다. 이 금전나무도 리백이 심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리백은 술과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구화산에 올랐을 때 지팽이에 돈주머니를 달아매였다. 높은 산에는 술이 없기에 금사천의 샘물로 술을 빚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지팽이를 금사천가에 꽂아놓았는데 생각밖에 지팽이에 순이 돋고 잎이 자라 돈나무로 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보아지는 구화산의 돈나무이다.    전설적 이야기는 상선당 금사천에 아름다운 색채를 더해주었다. 그에 따라 나의 마음도 금사천에 몹시 끌리였다. 금전수는 금전류, 청전류, 돈나무라고도 하는데       주숙지에 돌아온후 해당 관광안내서들을 펼치니 금전나무는 구화산의 상선당, 구화거리, 감로사 등지에만 보이는 희귀나무로서 지금까지 구화산에서 발견된 금전나무 즉 돈나무는 열두그루밖에 안된다고 기록되여 있다. 열두그루 중 상선당의 금전나무가 구화산의 최대 금전나무라고 하니 높이는 20여 메터, 나무 아래폭이 2자 정도, 금사천의 또 하나의 리백 관련 독특한 풍경이댜. 하루순례를 마치고 나는 려관방에서 다시 전부의 해당 관광안내와 자료들을 검토하여 보았다. 뒤늦게야 나는 상선당 금사천에는 당나라 위대한 시인 리백만이 아닌 동시대 위대한 문화거인 김교각님의 이야기도 스며있다는것을 알고 놀라마지 않았다. 그리도 자상하던 가이드도 이면에 대해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내비치지도 않았으니 유감이라 할가. 육신보전이 일어선 옛날 남대는 김교각님의 휴식장소로 유명하다. 휴식할 때면 그는 늘 남쪽비탈의 금사천에 이르러 금사천 샘물에 차를 풀어마시군 하였다. 이 차 또한 보통차가 아닌 구화산만의 특이한 김지차(金地茶)여서 김교각님이 서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일설은 신라에서 가져온것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진암의 《구화시집》에는 김지차를 이렇게 소개하고있다.   《김지차는 대가 가늘고 잎이 뾰족하며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데 이 차를 오래 씹으면 피곤이 풀리고 정신이 들게 된다.》   첫날 오후 화성사 동쪽산의 회향각, 동애선사 등을 답사할 때 산으로 오르는 돌계단 소로길가에 마침 몇무더기 김지차가 있어 다행이였다. 가이드가 아니였드면 그냥 모르고 지났을 것이였다. 이런 김지차가 금사천에 어려오니 감탄이 절로 난다. 금사천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김교각님한테서 2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한수의 시 《동자를 보내며》는 금사천에서 동자를 바래던 감명적인 이야기를 시로 적은 것이였다.   중생활 쓸쓸해 집생각 나더냐 정든 절 떠나 구화산 떠나는 동자야 죽마지우 언제나 그리워하더니 금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누나 첨병골의 달구경도 이로써 마지막 자명구의 꽃놀이도 이로써 마지막 리별의 마당에서 눈물 흘린들 무엇하랴 로승은 이제 안개와 구름을 벗 삼아 살리라.   《전당시》 권 808에 실린 한편의 중문으로 된 시인데 같이 지내던 동자를 떠나 보내는 김교각의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 《안개와 구름을 벗 삼아》 불교에 정진하겠다는 굳은 의미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고보면 상선당 금사천은 소홀히 대할 경관이 아니였다. 당나라 때 두 위대한 문화거인을 구화산 상선당 금사천에서 만날수 있으니 가이드에게 두고두고 감사를 드려야겠다. 그의 주동적 안내가 없었더면 나는 상선당 금사천의 존재를 알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구화산을 보시라, 구화산사람들은, 구화산 연구가들은 구화산이 천여년에 이어 오늘에 흥성하며 해내외에 이름이 뜨르르한것은 당나라 때 리백과 김교각 이 두 위대한 문화거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두 위대한 문화거인을  금사천에서 만날수 있으니.  
188    【90돐특집】(18)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2) 댓글:  조회:3358  추천:116  2007-07-29
【90돐특집】(18)                                        나와 윤동주서거 60주기 훈풍(2)   룡정향토순례차로 룡정에서 명동골로 오르내리며 윤동주시인은 나의 머리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거룩한 존재. 그때마다 우렷히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다름아닌 일본 와세다대학교수 오오무라 마스오 선생, 어쩐지 그이를 만날것 같은 예감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오오무라 마스오 선생은 우리 시인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린 첫 분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가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를 처음 대한것은 1988년 8월의 일이다. 그때 필자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다말고 연변력사연구소로 전근하고 말았는데 연변력사연구소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을 펴내여 일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 책은 일본에서 또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여 반영이 강렬했다. 《개황》을 일본어로 번역, 출판한 분이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이였다. 이해 8월중순의 어느날, 여느 때와 같이 연구소로 출근하니 한준광소장님은 나보고 지금 연변호텔에 오오무라교수님이 부인과 함께와 계시니 아무쪼록 인터뷰를 잘하여 연변일보에 실어달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연변일보사 정치생활부 동료기자인 김명철씨를 불러 동행하게 되였는데 그날이 8월 중순의 어느 하루라고 기억된다. 오오무라 교수님 내외간은 연변력사연구소의 초청으로 연길행에 오른 분들인데 그때가 세번째로 되는 연길행이였다. 만나고보니 오오무라 교수님은 보통 키에 지혜를 뿜는듯한 부리부리한 한쌍의 눈, 어딘가 학자다운 풍모 엿보이는, 55살의 점잖고 인상좋은 분으로 안겨들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내가 쓰고 김명철씨가 조금 손을 댄 인터뷰가 1988년 8월 20일부 연변일보 1면 주말특집에 실리여 반향이 좋았다. 흑룡강신문과 료녕신문에 전재되고 연변방송에서 보도하여 반향이 보다 강렬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조선족과 일본과의 관계는 공백이나 다름없어 오오무라 교수님과 《개황》번역출판 소식은 센세이숀을 불러 일으킬만도 하였다. 그번 인터뷰가 의미있는것은 윤동주시인을 지상에서 언급해 본 나의 첫 글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이름난 저항시인 윤동주를 연구하고 윤동주를 우리에게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오오무라 교수님을 윤동주시인과 련계시켜 본 나의 첫 글이였다. 그후 나는 오오무라 교수님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고 나의 기억속에서 가물가물 사라져갔다. 그러다가 16년후 오오무라 교수님이 다시 내 마음속에 자리잡으며 그리워짐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할가. 하루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이 나를 불렀다. 오오무라교수님이 오셨는데 추진회 이름으로 그분을 오찬에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였다. 근일에 뭔가 예감이 사라질줄 모르더니 그 예감은 적중했나부다. 그날은 2004년 9월 22일이였다. 조성일회장님, 한정자 사무국장님, 나 셋은 연길시의 한 음식점에서 김호웅 연변대 교수님과 동행한 오오무라 교수님 내외간을 만나 따뜻히 이야기를 나누며 기쁨의 한때를 보내게 되였다. 나와 오오무라 교수님 내외분간의 16년만의 상봉이였다. 오오무라 교수님은 16년 전에는 연길행 세번째로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 번역, 출판차로 오셨지만 16년후 그 나날은 심련수 시인 장서연구차로 연길행에 나섰던것이다. 16년전의 그 나날을 돌이키며 감회에 젖어드는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님 내외간이 돋보이였다. 나는 이를 제때에 수필 《오오무라 교수님과의 두차례 인터뷰》로 완수하여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리고 또 올해 윤동주 90돐 특집에 올리였는데 반향이 괜찮은 것 같다. 인터넷의 힘은 크고 컸다. 내가 16년 사이에 선후 두차례나 오오무라 교수님을 취재, 인터뷰하게 되고 교수님을 존중하게 됨은 다름아니다. 오오무라 교수님은 우리가 윤동주를 모르던 그 시절에 중국의 우리 조선족사회에 윤동주를 알리고 윤동주 연구를 깊이 하여온 일본의 이름난 교수이고 학자분이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28일 오후)          
187    【90돐특집】(17) 나와 윤동주서거 6 0주기 훈풍(1) 댓글:  조회:3771  추천:104  2007-07-28
【90돐특집】        나와 윤동주서거 6 0주기 훈풍(1)         올해는 윤동주탄생 90돐을 맞는 해라지만 2년전 2005년은 윤동주서거 60주기되는 뜻깊은 해였다. 이해 윤동주서거 60주기를 맞이하며 우리 문단이나 매체들에서는 60주기기념활동이 세차게 불어쳤는데 그 훈풍의 진두에는 나 무명소졸 리광인이 서고있었다. 여느 분들은 잘 믿기지 않을것이다. 허나 이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이 점을 처음으로 터놓으면서 회고의 글을 련재로 실어본다.     사실 윤동주시인 서거 60주기훈풍은 2005년에 이르러 갑자기 불어치게 된것이 아니다. 이해 훈풍을 위해 나는 2004년부터 하나하나 살손을 대 나가야 했다. 2004년초이전까지 한 10년간 나는 우리 문단을 외면한 사람이였다. 력사연구의 외통길을 고집해온 나로서는 문단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문단과의 거리는 멀어져도 광복전문학과의 거리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더우기 우리 조선족시인 윤동주연구에서는 거리가 령거리로 가까와졌다. 조선족사 연구가 평생의 집념이다보니 광복전 우리 문학 연구에서 적잖은 돌파성적인 진전을 보일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광복전 우리 력사를 잘 모르는 문단의 이들에 비해 나는 력사를 좀 아니까 그 깊이가 들여다보이였던것이다. 이런 우세에 힘입어 나는 2004년 8월이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룡정향토순례”를 련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이해 8월~9월기간 명동골안으로 얼마나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명동이란 이 지신골안의 개척력사를 환히 꿰고다니니 나의 눈에는 지신의 개척, 명동촌의 유래, 장재촌의 서당, 명동학교의 전후관계, 명동소학시절을 보낸 윤동주의 소년시절---모든것이 들여다보이였다. 지금도 잊을수 없는2004년 9월 9일이라고 할가. 이날은 흐리고 비가 자주 지나가는 날인데 룡정향토순례 련재를 위해서 또 명동행에 나서야 했다. 아들 경원이 따라나서서 데리고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대살같은 비가 자주 퍼부어 어려움도 많았다. 어찌하건 룡정의 룡드레우물부터 서전서숙 옛터, 대성중학교 옛터, 룡정중학 력사전시관에 이르기까지; 명동촌 윤동주생가로부터 명동교회 옛집, 김약연목사 기념비, 장재촌의 작가 김창걸문학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의 답사를 깨끗이 마무리 지어나갔다. 그러다가 장재촌 물건너 수남촌을 앞두고 또 소낙비가 한바탕 쏟아져내렸다. 허허들판에서 피할길이 없어 아들놈은 좁은 허궁다리밑에 서있도록 하고 나는 웃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는 김창걸문학비를 련속 사진렌즈에 담았다. 그것도 사진기가 비를 맞을가봐 웃옷으로 막으며 무척 조심해야 했다. 룡정 명동골답사는 이런 하나 또 하나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신고로 나는 우리 조선족의 이름난 시인 윤동주를 주선으로 선참 룡정향토순례를 써서 문화산맥사이트에 련재할수 있었다. 룡정향토순례가 룡정에서 명동으로 이어나가는 한편 새해 2005년 윤동주서거 60주기를 위해 나는 우리 신문과 잡지들에 실을 기념글들이나 연구론문들을 착실히 준비해놓아야 했다. (윤동주서거 60주기기념 일대강풍은 우리 매체들이 일으켜야지!) 연변일보사 기자출신인 나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 2007년 7월 28일 오전)
186    사진으로 보는 또 다른 모습 댓글:  조회:4030  추천:147  2007-07-27
신광령 아래우 사진중 약간장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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