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봉기서 우리 겨레 피를 흘려
【 【편자의말】 래일이면 위대한 8.1남창봉기 80돐, 위대한 중국인민해방군건군 80돐되는 날이다. 국민당반동파에 첫 총을 쏜 남창봉기기념하여 정해진 건군절, 저 8.1군기에도 우리 조선족선렬들의 진붉은 피가 스며있다.
8.1군기와 조선족선렬들을 쓴 필자의 책이 이제 곧 출판발행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중 한편을 뽑아 인터넷의 수요대로 다시 축소수정하여 조글로미디어에 올리여본다. 훈춘의 최석승선생이 90년대 초에 쓴 관련렬사전기도 함께 그대로 올린다.
1926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드높은 북벌전쟁은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 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켰다.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떄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즉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제11군의 24사,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제4군 제25사, 하룡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제3군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 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제11군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이 부대 제 72퇀의 박인, 김철강 등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이 두개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퇀 퇀장과 24퇀 정, 부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이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적 제6군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제24사 71퇀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제20군은 적의 제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옛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봉기군 제20군 교도퇀과 제6퇀은 적군 제9군 79퇀,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월1일 새벽 이들은 적과 벽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 5시간만에 적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조선인전사가 수십명이다. 제4군교도퇀의 박영, 리용 등 200여명 조선인전사들은 국민당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월 2일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큰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등 조선인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년 4월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제4군으로 편성되였다. 8월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등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다. 그중 강석필 등 적지않은 동지들이 남창봉기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강 석 필
(1902~1928)
강석필(姜锡弼)은 1902년 11월 17일 길림성 훈춘현 삼가자향 고성촌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강천순은 조선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살길을 찾아 쪽박차고 남부녀대하여 중국에 이주해왔다.
일한합병이후 조선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하여 로씨야의 연해주와 중국의 연변과 상해 등지에로 몰려왔다. 그 당시 훈춘의 대황구에도 조선애국지사들이 모여들어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훈춘현 각지에서 기세드높은 반일투쟁을 벌리였다.
강석필의 아버지 강천순은 민족의 운명을 관심하고 구국의 큰뜻을 품고있었다. 그는 아예 온 가정을 거느리고 대황구의 빈낭골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강석필은 이고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였다.
그의 아버지 강천순은 빈낭골에 귀틀집을 지어놓고 아름드리나무를 찍어버리고 묵밭을 일쿠어 농사질하는 한편 황병길이 조직한 반일인민단체인 훈춘대한국민의회의 골간으로서 조선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강석필은 막내아들로서 두 형과 누님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반일투사들이였다. 맏형 강석환은 포수군으로서 《독립군》의 소대장이였으며 후에 풍옥상의 부관으로서 항일에 참가하였다. 누님 강정수는 반일부대조직의 책임자였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강석필은 어려서부터 반일투쟁사상을 품게 되였으며 그로 하여금 혁명의 길로 나가게 하였다.
강석필은 대황구에서 동창소학교에 다녔다. 이 학교는 애국인사들이 세운 신형의 학교였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고 공부에도 열심하여 학습성적이 특출하였다.
강석필은 1917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에 가서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거니와 노래도 잘 불렀고 운동도 잘하여 《팔방미인》으로 알려졌다.
강석필은 축구장에서는 《골받이》로 소문났다. 룡정축구판에서 이름이 있었을뿐만아니라 훈춘현축구대회에서도 여러번 소문을 내였다.
강석필이 중학교를 다니던 이 시기에 연변의 중심이였던 룡정에서10월사회주의혁명의 포소리가 울려왔고 맑스주의가 전하여왔다. 강석필은 이에 큰 흥미를 가지고 맑스주의서적들을 읽었으며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기에 노력하였다.
1922년, 그는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마을인 대황구에 돌아왔다. 그는 여기에서 일찍 대황구 북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쏘련에가서 혁명사업을 하다가 돌아온 김근과 가깝게 지내였다. 김근한테서 10월사회주의혁명을 소개받았고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찾으려면 10월혁명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923년 3월 1일 김근은 김성도, 리상준 등 동지들과 함께3.1 학교를 창설하였다. 이 학교는 공산주의사상으로 새 세대를 양성하고 반일혁명력량을 모으는 《공산주의자 양성소》로 이름난 혁명의 요람이였다. 강석필은 발벗고나서서 김근을 도와 이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친히 정치과를 수업하였다. 그의 수업은 학생들의 인기를 무척 끌었다.
이밖에도 강석필은 포스터를 그리고 연극을 꾸며 공연하였으며 한주일에 한번씩 웅변모임을 가지는 등 풍부하고 다채로운 형식으로 공산주의 새 세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심혈을 몰부었다.
2
1924년 중국공산당의 창의와 지지밑에 광주에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졌다. 혁명적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이 학교의 창립은 중국혁명전쟁사에서 새로운 한페지를 열어주었다.
《황포군관학교로!》 당시 중국공산당에서 혁명청년들에게 이렇게 여러차례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시대 청년들의 부르짖음이기도 하였다.
《황포군관학교로!》이것을 혁명의 길로 나가는것으로 삼고 전국 각지에서 열혈청년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조선, 윁남, 몽골 등 동방약소민족의 혁명청년들이 찾아가는 집합장소이기도 하다.
《황포군관학교로!》 이 시대적사조는 연변과 쏘련의 연해주에까지 전파되였다. 당시 연해주에서 혁명사업에 종사하고있던 박영은 조선족혁명청년들을 동원, 조직하여 황포군관학교로 수송하고있었다. 강석필은 김근을 통하여 박영을 알게 되였으며 그리고 박영한테서 황포군관학교에 대한 소개도 들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자석마냥 그의 마음을 끌었다.
강석필은 대황구산골짜기를 벗어나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로 나가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고 군사기술을 배워 혁명사업에 몸바쳐 싸우리라 철석같이 마음을 다지였다.
그가 정작 황포군관학교로 찾아가자고 하니 그것은 실로 어려운 길이였다. 반일투사인 그의 아버지는 당지에서도 얼마든지 혁명할수 있는데 만리타향에까지 가서는 뭘 하느냐고 가로막아나섰으며 그의 안해도 남편을 보내지 않으려고 바가지를 긁었다. 그러나 이것은 강석필의 한번 먹은 마음을 굽힐수 없었다.
그리고 길을 떠나려 하니 로비가 한푼도 없었다. 강석필은 중거우에 가서 콩 4마대를 변을 맡아 그것을 팔고 친구들한테서 부조를 받아 로비를 마련하였다.
강석필은 자기의 딱친구인 채인동과 함께 대황구를 떠났다. 물론 집에 알리지 않고 가만히 떠났던것이다. 그들은 도보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로 간다는것과 변을 맡은 콩값을 갚아 달라는 사연의 편지를 띄우고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것이다.
황포군관학교는 광주에서 30리 떨어져있는 조그마한 황포섬에 자리잡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에서는 만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온 이 두 조선족의 혁명청년을 받아들였던것이다.
강석필은 어엿한 황포군관학교의 학원으로 되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회색옷을 입고 맨발에 짚신을 신었으며 철색나는 길죽한 얼굴에 슬기로운 두눈에 정열이 불탔다. 그는 더없는 긍지를 느꼈다.
당시 광동혁명근거지는 갓 세워지다보니 공고하지 못하고 매우 혼란하였다. 반동세력들이 사처에서 득실거리는 형편에서 학생들은 낮이면 학습하고 밤이면 보초를 서야 하였으며 한편으로 학습하고 3년이던것을 6개월로 줄이였다. 강석필은 이 간고한 환경에서 고심히 학습하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으며 혁명적각성을 높이였다.
바로 이때 광주에서 멀지 않은 혜주, 조주, 선두 일대에는 진형명반동세력이 둥지를 틀고 신생한 혁명정권을 압살하려 꿍꿍이를 꾸미고있었다. 광동혁명근거지는 엄중한 위기에 직면하고있었다. 1925년 2월초, 광동혁명정부에서는 진형명반동세력을 진압하고 광동혁명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하여 제1차동정을 벌리였다. 동정대오에는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강석필도 용약 이 동정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2개 퇀은 동정에서의 주력부대였다. 주은래의 직접적교양을 받은 이 학생군은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작전가운데서 용감무쌍하였다.
강석필이 소속된 부대가 어느 한 도시를 공격할 때였다. 적들은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우리 군을 향해 맹렬한 화력을 들이대였다. 적의 탄알은 콩볶듯 날아왔다. 우리 군의 공격부대는 잠시 진공을 멈추는수밖에 없었다. 이때 강석필은 엄페부를 찾다가 그만 깊은 함정에 빠졌다. 사다리도 없어 나올수도 없었다. 우리의 공격부대는 우회작전하여 적의 보루를 까부시고 계속 동정하였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에서는 강석필이 실종하였으니 전투에서 희생된줄로만 알았다. 그리하여 부대에서는 그의 가정에 그가 희생되였다는 부고를 전하였다.
비보를 접한 강석필의 집에서는 온 집 식구가 비통에 잠겨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3형제중에서 영웅》이더니 숨지었다고 통곡하였다. 바로 집에서 성북장례를 치르려고 차비하는 때였다. 남녘땅에서 강석필의 편지가 날아왔다. 강석필이 살아있다는 기적적인 소식이였다.
사실은 이러했다. 강석필이 함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여 안타까와할 때 피난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함정에서 인기척이 나는것을 발견하고 사다리를 놓아 그를 구원해냈던것이다. 그는 인차 부대를 찾아왔다. 강석필은 진형명반동세력을 부시는 가운데서 영용무쌍하게 싸웠다.
이해 6월초, 전계군벌 양희민과 계계군벌 류진환이 광주에 쳐들어와 반란을 일으켰다.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은 양, 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강석필은 황포군관학교 학생군의 교도퇀에 편입되여 싸움에 참가하였다. 이 교도퇀에 편입된 강석필은 광주시교의 반란군의 거점을 까부시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한주일동안의 치렬한 싸움을 거쳐 양, 류 반동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다시 광주를 광복하였다.
3
1926년 7월 1일에 《북벌선언》이 발표되고 위대한 북벌전쟁의 나팔소리가 울렸다. 국민혁명군대오에는 조선족전사 강석필도 어엿이 끼워있었다.
10만을 헤아리는 북벌대군이 광주에서 떠날 때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군벌을 타도하자》는 우렁찬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강석필도 구호를 웨치면서 북진의 힘찬 발자국을 내디디였다. 북벌대군은 반동군벌세력을 무찌르면서 승승장구로 북진하였다. 전투마당에서 강석필은 영용하게 싸웠다.
강석필은 무한에 이르러 하룡이 인솔하는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 제20군에 편입되여 무한혁명정부를 보위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하룡의 제20군이 인차 남창으로 이동하자 강석필도 부대를 따라 남창으로 갔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주은래, 주덕, 하룡, 엽정 등 동지들의 지휘하에 남창봉기가 일어났다. 국민당 반동파에 첫포를 내쏘았다.
강석필이 소속된 제20군은 하룡의 직접 지휘하에 주배덕이 지휘하는 적의 제5로군의 총지휘부를 공격하는 전투과업을 맡았다. 제5로군의 주력부대는 길안, 동향에 주둔하고있었으며 남창시에는 총지휘부와 경위부대 한개 퇀의 병력만 있었다.
적의 총지휘부는 바로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고 적들은 거리 서쪽에 있고 아군은 거리 동쪽에 있었다. 적의 총지휘부앞에는 낮다란 낡은 성루가 가로막히여있었다. 우리 군이 공격을 발동하자 적들은 이 낡은 성루에 올라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아군을 맹렬한 화력으로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은 종시 적의 총지휘부의 문을 열지 못하였다.
이 적의 방어선을 뚫기 위하여 강석필 등 몇몇 전사들은 비발치는 적의 총탄을 무릅쓰고 성루곁에 있는 지부우로 기여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다리를 놓고 성루에 올라가 적의 화력망을 벙어리로 만들었다. 3시간 남짓한 격렬한 전투를 거쳐 적의 경위퇀을 소멸하고 적의 총지휘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봉기군은 5시간동안 남창에서 적군을 대량적으로 소멸하고 남창봉기의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였다. 조선족전사 강석필은 적의 총지휘부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전공을 올려 전군에 그 이름을 떨치였다.
남창봉기가 있은후 강석필은 북벌군의 대오를 따라 광주에로 되돌아왔다. 그가 소속한 북벌군 제4군 교도퇀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가 피비린 대도살을 당한 다음 강석필은 홍군 4사에 편입되여 1928년 1월에 해륙풍 현소재지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팽배의 직접 지휘하에서 첫 쏘베트정권을 보위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국민당 반동세력은 여러개 사의 병력을 그러모아 해륙풍 쏘베트정권을 요람에서 압살해치우려고 미친듯이 날뛰였다. 적아력량대비는 너무도 현저하였다.
강석필이 소속된 홍군 4사가 보녕의 삼항으로 전이하였을 때 여기서 적들과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강석필은 이 싸움에서 적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그리하여 병원에 후송되여 치료하였으나 낫지 않아 남녘땅에서 고이 눈을 감았다. 그때 그는 27세였다.
강석필, 훈춘현 대황구산골짜기에서 자라난 강석필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녘땅에서 영용무쌍하게 반동세력들과 싸워 전공을 떨쳤으며 중국인민의 위대한 해방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청춘과 생명을 바쳤으며 피어린 발자국을 남기였다. 중국력사의 흐름과 더불어 조선족전사 강석필의 이름도 영원히 빛나리라!
최석승, 조선족혁명렬사전(제3집),
료녕민족출판사, 1992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