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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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뒤늦은 보고(7)-한글문화 대잔치 서예전(1) 댓글:  조회:3033  추천:71  2007-11-11
   뒤늦은 보고(7)-한글문화 대잔치 서예전(1)
224    뒤늦은 보고(6)-한글문화 대잔치 말하기대회(2) 댓글:  조회:3341  추천:72  2007-11-11
뒤늦은 보고(6)-한글문화 대잔치 말하기대회(2)
223    뒤늦은 보고(5)-한글문화 대잔치 말하기대회(1) 댓글:  조회:2937  추천:65  2007-11-11
뒤늦은 보고(5)-한글문화 대잔치 말하기대회(1)
222    뒤늦은 보고(4)-한글문화 대잔치 세종학당 댓글:  조회:2777  추천:68  2007-11-11
    뒤늦은 보고(4)-한글문화 대잔치 세종학당
221    뒤늦은 보고(3)- 여러 대학의 한국어 교수님들 댓글:  조회:3048  추천:81  2007-11-11
 뒤늦은 보고(3)-여러 대학의 한국어 교수님들
220    뒤늦은 보고(2)-한글문화 대잔치 서예대회 댓글:  조회:3251  추천:63  2007-11-11
     뒤늦은 보고(2)-한글문화 대잔치 서예대회
219    뒤늦은 보고(1)-한글문화 대잔치 경필대회 댓글:  조회:3339  추천:64  2007-11-11
    뒤늦은 보고(1)-한글문화 대잔치 경필대회지난 10월 25일과 26일 절강 월수대에서 이틀에 걸쳐 펼쳐졌던 중국내 한국어를 배우는 대학 30여개소가 참가했던 한글문화대잔치 5대행사를 사진으로 펼쳐 보입니다.
218    이번엔 절서대협곡에 빠져버렸지(2) 댓글:  조회:3047  추천:71  2007-11-09
이번엔 절서대협곡에 빠져버렸지(2) 4   동반자가 없는 나는 강소에서 왔다는 한 태평양보험회사 사람들과 섞이였다. 대협곡관광구에서 전용중형뻐스는 한패의 우릴 싣고 대협곡구내 아스팔트길로 달리더니 한구간에 이르러 원길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꺽어들었다. 대협곡의 첫 풍경구로 되는 자림포 폭포가 우릴 기다리고있었다. 이 구간부터는 대협곡의 폭이 좁아지면서 협곡 내측이 층암절벽들로 이루어져 대자연이 빚어낸 장엄한 신비미를 맘껏 느끼게 하였다. 자림폭포는 좁은 골안따라 흐르던 물이 갑자기 10여메터의 수직낭떠러지를 만나 아래로 내리꼰지면서 형성된 자연폭포였다. 수량은 많은 편이 아니나 절서 대협곡의 대표적인 폭포로서 바위에 따라 상하 두개계단을 이루며 아래로 떨어져내려 환성을 자아냈다. 관리구내 전용중형뻐스는 다시 원길에 들어서서 대협곡따라 때로는 협곡바닥가로, 때로는 산중턱길로 한참 달리더니 로대계라고 불리우는 풍경구에 살짝 멈추어섰다. 산중턱이라 계단길따라 대협곡바닥에 내려야 했는데 대협곡을 가로지른 수십메터 허궁다리가 반겨맞아주었다. 사람들이 올라서자 허궁다리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데서 녀성들과 나이지숙한 분들은 다리를 옮겨디딜 엄두도 못내고 괴성을 질러댔다. 허궁다리를 건너서는 관광소로길이 협곡 오른쪽따라 몇리를 뻗어올랐다. 이구간은 협곡의 폭이 넓어지고 협곡량측이 경사진 산비탈이여서 대협곡의 기분이 나질 않았다. 장백산 서쪽비탈의 금강대협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5   로대계풍경구에서 이색적인것은 로대계서쪽가에 일어선 널다란  “결혼육아문화풍정원”이라 하겠다. 이곳의 건축물과 시설들은 모두 결혼과 육아란 주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면 “벼짚사람광장”의 뚱족가무표현은 자못 인상적이였다. 가무표현무대에는 뚱족차림의 처녀애들이 긴 참대로 땅바닥을 치며 소리내는 뚱쪽의 참대무를 표현하기에 바쁘다. 처녀애들의 절주있는 참대무에 따라 몇몇 처녀애들이 참대가지 사이를 살짝살짝 뛰여넘으며 성수나게 놀아주는데 흥이 난 관광객들도 그속에 어울려 돌아간다. 참대무가 끝나면 뚱족처녀애와 관광객총각의 “맞선”이고 처녀총각은 다정히 손잡고 잘 꾸며놓은 “신방”으로 안내된다. 장백산 서쪽비탈의 금강대협곡에 비하면 별거아니라지만 자연관광과 인문관광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곳 절강사람들의 지혜, 그러면서 연변의 관광개발에 어쩔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내고향 천혜의 백두산 폭포가에도 우리 민족의 인문민속관광을 곁들이여 장백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겨레민속향수를 안기며 관광수입도 올리면 얼마나 좋을가…    텔레비에서나 보아왔던 소수민족의 참대무---이런 참대무를 절서대협곡에서  제눈으로 보는 멋이 별멋이기만 하다. 이구간을 지나면 다시 산을 타고 오르다가 기다리는 뻐스를 타고 대협곡으로 내려간다. 그다음부터는 대협곡을 가로막아 생겨난 맑은 협곡호수가 몇리에 뻗어있고 내리오른쪽 수직절벽에는 바위중턱을 가로 탄 관광소로길이 내내 펼쳐져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선듯한 기분이다. 절강 서북부에 자리잡았다하여 절서라 불리우는 절강 룡강의 대협곡—관광전문가들은 80킬로메터 길이를 이루는 이 대협곡을 “화동제1관광협곡”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토요일과 일요일 련휴일이면 절강주변을 중심으로 한 국내외관광객들이 까마득히 몰려드는걸가. 절서대협곡 2대풍경구의 주요경관들을 둘러보는속에 서너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대협곡바닥은 인공호수구역들외 전부가 수석인들이 찾아볼만한 희한한 돌밭세계여서 내 마음은 그냥 둥둥 뜨기만 한다. “대협곡의 아름다움에 취하며 탐석하는 재미 제법일거야!” 나는 대협곡 내내 탐석의 아름다운 꿈을 꾸고 또 꾸어보았다.   (2007년 11월 9일)    
217    이번엔 절서대협곡에 빠져버렸지(1) 댓글:  조회:2688  추천:78  2007-11-09
이번엔 절서대협곡에 빠져버렸지(1)   1   절강 룡강지역의 대규모 탐석지는 나를 놀라게 했다. 하루 묵으며 재차 탐석에 나서 보기로 했는데 고속도로휴계소 보안원 왕씨는 룡강대협곡에 가보았는가고 넌지시 말을 건네온다. “룡강에 대협곡이 있어요?” “있다뿐이겠습니까, 대단한 대협곡입니다.” 나의 물음에 왕씨는 긍정적인 답을 주면서 한번 가볼만하다고 퉁겨준다. “사실은 림천하에 가서 탐석하기로 했거든요.” “아이유, 대협곡바닥엔 흔한것이 강돌이랍니다.” “그래요?” 나는 벌써 룡강에 있다는 대협곡에 젖어들었다. 황차 대협곡팬인 나로서는 탐석지로도 된다니 한번 나서보기로 작심했다. 잠자리는 고속도로휴계소 호텔에 정해졌다. 시간도 있고하여 탐석기 한편을 쓰고나니 겨우 저녁 아홉시다. 나의 눈앞에는 수석에 못지않게 대협곡들이 둥둥 떠다닌다.                                         2   선참 떠오르는 것은 내고향 연변의 대협곡이다. 이 대협곡들은 내고향의 자랑—장백산에 분포되여있는데 연변측 백두산 북쪽비탈의 대협곡과 무송측 서쪽비탈의 금강대협곡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길이가 80~90메터, 너비가 200~300메터, 길이가 무려70킬로메터에 펼쳐졌다는 금강대협곡, 대자연의 경이로운 창조물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모두를 끝없는 경탄속에로 끌어간다.  2005년 7월말~8월초에 나는 두패의 한국손님들을 모시고 백두산행에 오르게 되였고 서쪽비탈의 금강대협곡에도 가보았다. 그때 여행을 즐긴다는 한국의 한 대학교수는 미국에 가서 한동안 교편을 잡으며 미국 아리조나주 그랜드 캐년을 여행한적이 있는데 세계 7대 불가사중의 하나요, 4억년의 루루 세월속에서 콜로라도 강의 급류가 만들어냈소, 길이만도 446킬로메터에 달하오---이 그랜드 캐년의 대협곡은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감회에 젖어있었다. 그래도 백두산의 금강대협곡이 볼멋이 다르고 더 친절하고 더 정이 간다고 한국교수는 덧붙혔었다. 그러노라니 1983년과 1988년에 조선 삼지연을 통한 백두산 등반과 우리측 장백현 백두산 남쪽비탈로의 등반시 압록강대협곡을 보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알고보면 장백산은 여러 곳에 대협곡이 있는데 그중 연변측 북쪽비탈의 대협곡, 무송측 서쪽비탈의 금강대협곡, 장백현측 남쪽비탈의 압록강대협곡이 유명하다. 이 세곳에 대한 대협곡답사로부터 지구상 대협곡에 대한 나의 리해는 날과 더불어 깊어만 갔다. 절강에 온후에는 황산의 대협곡이 발아래에 펼쳐졌다. 그 와중에 황산의 서해대협곡, 서장의 야루쟝대협곡, 천산의 신비대협곡, 귀주의 남강대협곡, 운남의 란찬강대협곡으로부터 대만의 태로각대협곡, 일본 제일의 구로베대협곡, 아프리카 동부 고원지대를 가로지나는 대협곡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나의 맘속에 자리를 잡아 갔다.   3   이틑날 11월 3일 아침, 수석탐석을 후날로 미루고 보안일군 왕씨를 찾으니 그는 오토바이로 나를 몇리밖의 룡강진에 안내하였다. 해살이 퍼지기전의 시간이라 찬바람이 온몸을 엄습하여 나는 때아닌 추위에 덜덜 떨어야 했다. “룡강의 아침이 이리도 추워요?!” “한랭기후의 영향으로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습니다.” 나와 왕씨와의 오토바이 두어마디 대화다. 룡강에서 나는 다시 오토바이를 바꿔타고 뒤에앉아4~5리 떨어진 절서대협곡 입구로 달려야 했다. 우리 연변의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방불케 하는 찬기운이 기승을 부려 정말이지 나는 동태가 될번 했다. 그속에서도 대협곡바닥에는 돌밭들이 쭈욱 깔리여 나는 넋이라도 잃을 지경이였다. 언젠가는 룡강을 흘러내리는 림천강을 망라한 대협곡바닥을 샅샅이 훓으리라고 다져도 보았다. 절서대협곡 입구에 이르니 대협곡의 관광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여지고 내가 가기로 한 룡강--백마애구간은 대협곡 길이만도 18킬로메터, 입장료가 60원, 전용뻐스표가 14원으로 나타났다. 뒤미처 안바이지만 절서대협곡은 절강~안휘 접경지대의 청량봉(11월 2일, 림천강 탐석시 보았던 해발 1800여메터의 주봉) 국가급자연보호구내 대협곡으로서 산은 황산의 여맥이요, 강물은 전당강이 원류였다. 이곳 대협곡은 80여킬로메터의 길이를 이루면서 자림포, 검문관, 로대계, 백마애 등 4대 풍경구와 120여개 관광점, 10여개 려행객 참여항목으로 이루어졌다. 한데서 생각밖으로 대협곡입구는 아침인데도 관광객들로 붐비였는데 상해, 강소, 소주, 무석, 항주…  등지에서 모여든 전용관광뻐스가 수없이 많았다.
216    절강에서의 첫 탐석 성수 났다오 댓글:  조회:2813  추천:59  2007-11-07
절강에서의 첫 탐석 성수 났다오   한차례 안휘 황산행에서 연도의 희귀한 수석탐석지를 보아냈지만 절강사람이 아닌 나로서는 어떻게 가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끙끙 앓다가 소흥 중심뻐스부에 가서 알아보니 안휘 황산쪽 장거리뻐스는 있었으나 그들도 내가 가야 할 절강 림안시 룡강을 거쳐가는지는 몰랐다. (에라, 내친김에 부딪치고 볼판이다!) 나는 종내는 룡강 가까이 절강 창화까지 가는 아침 7시반 뻐스표를 끊고말았다. 2007년 11월 2일의 뻐스표. 헌데 일어나니 아침 6시 10분이다. 늦잠에 든 안해도 세상모르고 자고있다. 급기야 한해를 깨웠지만 밥을 지어먹고 떠난다면 령락없이 뻐스를 놓치고 말 판이다. 다행히 안해가 교정의 학생식당 길가에서 간이음식를 사주었기에 하루주림을 면할수는 있었다. 가고저하는 탐석지는 안휘를 코앞에 둔 근 400리 밖 절강 룡강땅이다. 안휘 적계행 장거리뻐스에 오르니 운전사는 이 뻐스가 룡강을 거치여 간다고 알려준다. 이보다 기쁜 소식 또 어디 있을까, 잔뜩 흥분한 나의 눈앞에는 벌써부터 뜬다하는 수석들이 둥둥 떠다닌다. 어제까지도 오스스 날씨가 오늘은 해빛찬란한 날씨여서 기분이 진짜 짱이다. 안해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푸념이지만 이 사람은 기분이 하도나 좋은데야. 소흥을 떠난 장거리뻐스는 어느덧 항주 서호가를 벗어나 안휘와 절강 접경지대를 바라고 쉬임없이 달린다. 목적지 룡강—절강안휘 고속도로휴계소에 이르니 벌써 정오 12시를 앞둔 시점이다. 좋이 4시간을 달려왔다는 말이되나 나는 개의치를 않았다 .룡강 고속도로휴계소에서 이름도 모르는 강가 탐석지까지는 1킬로메터도 되나마나한 거리이니 웃음이 절로 난다. 고속도로휴계소에서 점심을 에때우고 부근의 고속도로 다리밑에 이르니 황산행관광뻐스에서 본바와 같이 수정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 보이는것은 온통 돌들세계이다. 문양이 박힌 돌들도 보이고 구멍이 관통하다만 돌들이 가끔 나타나는걸로 보아 어디에선가 “나 여기 있소!”하고 소리치며 수석이 불쑥 나타날것만 같다. 허나 수석인들은 알수있듯이 수석다운 수석을 탐석한다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벌써 여러점을 잡아 보았으나 이것이 흠 아니면 저것이 흠이여서 아쉬운대로 놓아버려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꼭 1년하고도 두어달이 더 지난 후, 내고향 길림 연변도 아닌 머나먼 6000리밖 절강땅에서 이곳 첫 탐석에 나선 기분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산수가 삐여난 곳에서 강남의 청신한 공기를 마이며 타향의 정취에 젖어봄도 좋은 일이렸다. 그러는 강물우에 100여마리도 넘어보이는 중오리떼가 나타난다. 인기척에 놀란 중오리들이 저마다 날개를 퍼덕이며 한쪽으로 몰키는 모양은 하나의 동화세계를 방불케 한다. 강서쪽에는 애어린 대나무숲이 강따라 길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하늘을 떠이기라도 하는 웅장한 산체가 시야에 안겨드는데 평지에서의 직접고도가 700~800메터는 될상 싶었다. 후에야 안바이지만 해발이 1800여메터에 달하는 이 일대 최고높이의 산—청량산, 사면이 모두 희한한 푸르른 산으로 둘러싸여 그림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코노래가 저도모르게 흘러나오는 속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휴대폰을 보니 어언 오후 3시가 되여온다. 두어시간 사이 점점이 검은 점이 박힌 소품 2점을 주어들고 문양석 한점이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과는 달리 리상적이지는 못하나 헛걸음은 아니였다. 그것도 절강땅에 와서 주어든 첫 소품이고 문양석이니 소중할것만 같았다. 다리 아래우 넓은 공간을 휘잡아가노라니 산기슭을 에도는 남쪽 저 아래에 또 넓은 돌밭이 펼쳐진다. 배낭을 둘러메고 강따라 아래 구간에 이르니 검은 점이 오구구 재미있게 박힌 소품 하나가 또 나를 빤히 올려다 본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어간다. 탐석을 마무려야 할 시점이라 아쉽기도 하지만 여기 강은 내내 돌밭의 연장이여서 탐석지로서는 안성맞춤이였다. 마침 귀로의 강뚝에서 한 중년사나이를 만나 말을 나누니  이강은 림천 (林泉) 강이라 부른단다. 이름모를 때는 룡강하(龙岗河)라 지어 수없이 불러 보았지만 이제는 강이름이 나져 시름을 놓았다. 절강에서의 첫 탐석으로 보낸 하루, 성수난 탐석의 하루는 빨리도 흘러간다   (2007년 11월 2일 밤, 절강안휘 고속도로 휴계소에서)    
215    문인들 글속의 오랑캐령 댓글:  조회:2991  추천:84  2007-11-07
문인들 글속의 오랑캐령         룡정에서 삼합으로 가려면 꼭 오랑캐령을 넘어야 한다. 오랑캐령은 룡정-삼합 도로의 도로표식 27-28킬로메터사이에 위치한 령인데 겨레의 이주사와 이어지는 령이여서 조선족들 치고 나이 지숙한 이들은 오랑캐령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글쓰는 이들에게 있어서 오랑캐령은 더구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마음의 령이다.     오랑캐령을 두고 광복전 조선현대문학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우수한 사실주의 작가이고 신경향파문학의 우수한 대표적작가인 최서해는 그의 대표작 《탈출기》에서 이렇게 취급하고있다.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서 망망한 평야와 산천을 바라볼 때, 청춘의 내 가슴은 리상의 불길에 탔다. 구수한 내 소리와 헌헌한 내 행동에 어머니와 안해도 기뻐하였다. 오랑캐령에 올라서니 서북으로 쏠려오는 봄새 찬바람이 어떻게 뺨을 갈기는지. <에그 칩구나! 여기는 아직도 겨울이로구나.> 어머니는 수레우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얼요, 이 바람을 많이 마셔야 성공이 올것입니다.> 나는 가장 씩씩하게 말하였다. 이처럼 나는 기쁘고 활기로왔다.   《탈출기》의 한 대목이다. 살길을 찾아 《새 희망을 품고 새 세계를 동경하여》 간도—연변으로 올 때의 모습이다.       조선의 저명한 작가 리기영은 그의 장편소설 《두만강》에서 오랑캐령을 명동촌과의 련계속에서 그려보이였다.   —명동촌은 남향한 언덕우에 위치하였다. 전면으로는 오봉산이 건너다보이고 그 어간에 습지와 진펄이 분지처럼 놓여있다. 진펄앞의 큰 개울은 해란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그 당시 이주민들은 부락 량쪽에 있는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하였다. 오봉산에는 가둑나무수풀이 울밀하고 잡초가 무성하던 이 통안에 농촌으로 개척되면서부터 마을의 풍경도 일변하였다. 봄에 파종을 하면 꼬량(高粱)과 조이삭들이 탐스럽게 모개미를 숙였다. 그것도 지난날에는 볼수 없던 곡창이 한곳새로 생기게 하였다.   《두만강》의 주인공 씨동이가 명동으로 올 때의 명동촌과 오봉산의 정경이다. 뒤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겠지만 이 오봉산이 바로 오랑캐령이다. 이는 리기영선생이 명동일대에 대하여 아주 익숙히 알고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조선의 작가 최서해, 리기영 선생이 이러하다면 우리 연변의 작가분들은 오랑캐령을 두고 어떠할가, 먼저 림원춘선생이 류룡규일가의 이주를 다룬 《분투의 발자욱》에서 한단락 보기로 하자.   —한숨과 한탄으로 부풀어오른 오랑캐령, 헐벗고 굶주린 겨레들의 굽빠진 초신짝과 동강난 나막신으로 높아만 지는 오랑캐령, 오랑캐령은 리별의 고개, 고생의 고개, 죽음의 고개였다. —바위도 얼어튀고 솔뿌리도 얼어터진다는 북간도의 혹한이다. 이런 날씨엔 산짐승도 자취를 감추건만 굽이굽이 아흔아홉굽이를 자으며 잔밥들을 거느린 한 가정이 힘겨웁게 오랑캐령을 톱고있다.   오랑캐령을 넘던 그제날 류룡구가정의 눈물나는 이야기이다. 이어 작가는 오랑캐령에서의 그날의 그 넘던 모습을 실감나게 생생히 그려냈다.       황장석선생은 2002년 제8호 《연변문학》에 실은 글 《최서해와 지신땅》에서 오랑캐령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이였다.   —나는 최서해가 묘사한 <오랑캐령>, 말하자면 지금의 오봉산기슭을 지날 때마다 최서해에 대한 숭경의 마음으로 가슴 설레이고 성동에서 지금 생활체험을 하면서도 이 성동사람들이 세대가 바뀌여서 그런지 최서해란 작가가 이곳에서 살았었다는것을 모르고있는것이 한스럽다. 연변땅, 달라즈, 성동의 비전동이 없다면 작가 최서해의 창작생활바탕과 문학배경이 그토록 풍부해질수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그 나날에 오랑캐령을 넘던 최서해선생이 한때 달라즈의 성동에 삶의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탈출기》는 소설이라 하지만 실상은 작가생활을 토대로 그린것이여서 실화체소설이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단, 이제 다른 글에서 전문 다루겠지만 최서해는 한때 한 시절만 지신땅에서 살았을뿐이다. 방랑시절의 최서해는 지신땅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발자취는 연변땅 곳곳에 남아있으니 말이다.       친구이고 중년작가인 류연산선생은 자기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에서1991년 마가을 그 시절의 나와 더불어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의 구성원들이고 작가님들인 최홍일, 우광훈, 리혜선 등 넷이서 그제날 명동지구를 답사하던 때를 무게있고 깊이있게 그리였다. 리기영선생이 《두만강》에서 명동촌과 오봉산어간에 《습지와 진펼이 분지처럼 놓여있다》고 했다면 류연산선생은 《그전의 습지와 진펄은 논으로 개답되여 논둑에는 벼하지들이 촘촘히 일어서고 꼬량과 조이삭들이 모개미를 숙였던 밭에는 잎을 떼운 앙상한 담배대들이 처량하게 줄지어서 있었다.》고 그리면서 오봉산을 다섯녀인에 비기였다.   —명동에서 서쪽으로 2리 상거해 있는 장재촌은 남으로 동실한 봉우리들이 다섯녀인같이 옹기종기 서있는 오봉산을 바라보며 사자산자락에 자리잡았다.   정말이지 그번 답사시 그네들은 명동과 오랑캐령을 두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것이다. 그때 그들 넷과 필자, 송춘남 등 6명이 사단법인—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이루었는데 우리는 조선족백년사를 여러 권으로 펼치려고 거창하게 구상하고 필자와 리혜선씨가 두만강을 따라 방천까지 조선민족사 답사의 길에 올랐던것이다. 그번 네 친구의 명동지구의 답사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네들을 통해 익히 알고있은 사실이다.       하다면 우리 문인들이 다루는 오랑캐령은 어떤 령일가,  문인들의 글로서 풀어내려가는 재미를 만끽하도록 하자.       황장석선생은 《최서해와 지신땅》에서 오랑캐령의 위치와 래원을 일목료연하게 개괄해냈다.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엔 오랑캐령이 나오는데 오랑캐령이란 삼합을 가기전의 령을 말하겠지요? 달라즈에서 동쪽으로 한 십리를 가서 넘게 되는 령을 말이지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채택룡선생께선 대답하시였다. 《민간에선 오랑캐령이라 하지만 기실은 오봉령을 말하는거지요. 봉우리가 다섯이라 오봉산이라 하는데 삼합과 달라즈, 말하자면 지금의 삼합지신사이에 있는 제일 높은 령이지요. 지도에는 해관경이라고도 하구요.》   채택룡선생과의 대담으로 오랑캐령이 가리웠던 면사포를 벗으며 선뜻 우리에게 다가선다.       류원무선생은 《오랑캐령》이라는 글에서 오랑캐령에 한걸음 더 다가섬을 보이였다. 선생은 오랑캐의 본의와 변이된 오랑캐령의 뜻을 자기나름대로 풀이하여 미더운 계시를 주고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주변의 민족들을 4이(四夷), 오랑캐라고 했다. 4이에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北狄)이 망라되였는데 북적은 녀진족이다. 고려나 조선조에서도 북적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두만강을 건너서면 그 <오랑캐>들이 차지한 땅이였다. 청조시기 우리 민족들은 강을 건너 남강산맥을 넘게 되면서부터 오랑캐령이라고 불렀다. 조선간민들이 그중 많이 넘은 령이 덕신령이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오랑캐>란 말이 멸시의 뜻이 바래여지고 고향을 등지고 이국땅에 들어선 한(恨)으로 전의되여갔다. 그렇게 되면서 밖에서 오르며 20리, 안으로 내리며 15리—아흔아홉굽이 험난한 삼합령이 그중 신고스러워 오랑캐령 이름을 혼자가진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류연산선생은 오랑캐령이 전반 남강산맥으로부터 삼합령 하나에 고착되였다면서 아흔하홉굽이에 새로운 해석을 주었다.   —원래 오랑캐령이라는것은 숭선에서 도문까지의 250킬로메터, 먼먼 남강산맥을 이룬 말이였다고도 하고 덕신령과 삼합령을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삼합령 하나에 그 이름이 고착되였다. —오랑캐령은 아흔아홉굽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흔두굽이라고 한다. 고개너머 달라즈에 이르기까지 늘찬 고개길은 숲에 묻혀있고 주변엔 인가라곤 없다. 그래도 지금은 하루 두번 왕복 뻐스가 있어서 호사지만 길도 없는 눈보라 숲길을 허기진 배를 부둥켜 안고 한발한발 조여갔을 이주민들의 고충은 어떠했으랴?   정녕 탄복이 간다. 사학가도 아니고 지리학자도 아닌 선배작가님들과 동년배친구들이 오랑캐령의 시원을 쭉 밝히여놓았다. 하기에 필자는 따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부대적으로 언급한다면 단 두가지. 한가지는 아스팔트길이 희 트인 오늘날의 오랑캐령은 일흔두굽이도 아니고 일사천리식으로 쭉쭉 뻗었다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두만강남안 회령쪽의 조선 북부지구 농민들이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해제와 더불어 대거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 명동지구로, 륙도하벌로, 세전이벌로, 평강벌로, 가야하쪽으로 밀려들었다는것이다.  하나 더 밝히고 넘을것이 있다. 조선이주민들중의 일부는 이미 두만강북안에 정착했던 이주민들이다. 그들은 다시 오랑캐령을 넘어 내지로 들어섰는데 룡정지명의 지칭 주인공들인 장인석, 박인언, 김언삼 등이 그러했다. 장인석 등 10여세대는 이미 삼합일대서 정착생활을 하다가 오랑캐령을 넘어 륙도하어구에 삶의 터전을 잡고 해란강과 륙도하의 강벌을 개간하기 시작하였었다.       우리 겨레의 이주사의 산 견증인 오랑캐령, 우리 문인들의 글속에 새겨진 오랑캐령—그래서 오랑캐령을 쓰고싶은걸가. 유감스러움은 겨레의 이주역사를 담은 유구한 오랑캐령에 그렇다 할 기념비 하나 없는것, 이주사기념비를 세우면 오늘의 명동지구가 보다 관광명소로 뜨련만은.    
214    절강 월수대에 중국 제4의 세종학당 뜬다 댓글:  조회:3020  추천:67  2007-10-28
절강 월수대에 중국 제4의 세종학당 뜬다   연변대학, 천진외국어대학, 중국해양대학에 이어 절강 월수외국어대학에 중국 제4의 세종학당이 뜨게 되였다.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의 노력으로10월 26일 오전에 중국 절강 월수외국어대학과 한국 국립국어원은 월수대 본부회의실에서 쌍방의 해당인사들과 중한한국어교원들이 참가한 모임을 갖고 세종학당 개설 업무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날 세종학당개설 업무협정 체결식에서 월수대 로세걸부총장과 최용기부장이 인사말을 나누고 각기 양은천총장과 리상규원장을 대표하여 업무협정서에 조인하고 서로 협정서를 주고받으며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어 한국측의 선물인사와 최용기부장의 세종학당 관련 특강이 뒤따랐다.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에서는 류은종소장이 연구소 10여부 연구저서들을 한국측에 드리여 리해를 보다 깊이하였다. 절강 월수대 세종학당, 이는 중국 제4의 세종학당이요, 중국 화동지구의 첫 세종학당으로 떠오르게 된다.
213    07중국 월수 국제한글문화 큰 잔치 댓글:  조회:3163  추천:80  2007-10-27
07중국 월수 국제한글문화 큰 잔치   10월도 막가는 절강 소흥의 날씨는 한 여름의 더위를 련상시킨다. 10월 25일과 26일,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주최,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와 한국(사단법인)한국서학회 주관, 한국 문화관광부, 국립국어원 후원으로 펼쳐진 07 중국 월수 국제한글문화 큰 잔치는 10월의 남방 더위를  무색케 해 한국어열기가 한껏 고조를 이루었다. 절강 월수외국어대학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600여명으로 치닫고 중국적, 한국적 교수, 부교수를 선두로 하는 30여명의 한국어교원들이 활약하고 있어 중국 경내 최대의 한국어배움기지로 떠오르고있다. 이런 속에서 연변대 출신의 류은종교수, 박사를 소장으로 하는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에서는 지난 3월 15일에 월수 국제 한글문화 큰 잔치를 펼 방안을 내오고 성 해당부문의 비준을 받았다. 또 한국인 박병천, 리대로 두 교수의 성원으로 한국 해당부문의 물심면의 지지를 받아 10월 25일~10월 26일 이틀간 중국내 30여개 대학의 참가속에 한글문화 큰 잔치 쾌거를 일구어냈다. 07중국 월수 국제한글문화 큰 잔치는 중국대학생 한글 경필실기대회, 중국대학생 한글 서예실기대회, 중국대학생 한국어말하기대회, 세종학당 개설 실무협정체결식과 간담특강, 한글 서예작품초대전 등 5개 활동으로 나뉘여 벌어졌다. 한글 경필실기대회와 한글 서예실기대회는 10월 25일 오전 월수대 학생회관에서 전국대학생 대표 각기 30여명의 경쟁속에, 한국어말하기대회는 월수대 도서관내 넓은 강당에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10월 26일에는 월수대 본부회의실에서 세종학당 설립을 위한 한국 국립국어원과 절강 월수외국어대와의 실무협정체결식과 간담특강이 성과적으로 열리였다. 세종학당은 2007년 10월을 기준으로 개설실무협정을 체결한 곳은 16곳인데 절강 월수대는 연변대 과학기술대학, 천진외국어대학, 산동 중국해양대학에 이어 네번째로 펼쳐지는 중국내 세종학당. 또 중국 화동지구에서는 월수대가 첫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한국 한글서예작품 초대전은 중국내 30여개 대학 사생 수백명과 한국 해당인원, 서예가 수십명 참가자들의 찬탄과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결과 한글경필실기에서 월수대 리리학생이 대상을, 강소 소주대학 하빙, 절강관광학원 라소진, 북경 제2외국어대학 당흠이 각기 1~3등을 하고 한글서예실기에서는 상해 복단대학 황영학생이 대상을, 월수대 오엽, 월수대 주리영, 소주대학 고정이 각기 1~3등을 하였다. 한국어말하기 대회에서는 산동 연태대학 리약강이 대상을, 상해복단대학 황영, 강소 양주대학의 손의가 1~2등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10월의 절강 월수대를 달구며 이틀에 걸쳐 펼쳐진 07월수 국제한글문화 큰 잔치는 북경대학, 북경외국어대학, 북경제2외국어대학, 북경대외무역대학, 상해 복단대학, 상해사범대학, 상해공상외국어대학, 상해상학원, 상해외국어대학, 길림대학,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절강관광학원, 양주대학, 천진사범대학, 곡부사범대학, 사천외국어대학, 남경사범대학, 연태대학 등30여개 대학의 참녜속에서 성황리에, 성과적으로 펼쳐졌다. 절강 월수외국어대학의 한국어위상은 전례없이 높아졌다.                                  
212    축복속에 펼쳐진 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3) 댓글:  조회:3734  추천:85  2007-08-30
      류은종교수님 대학교직종사 40돐,  안해 량복선과의 부부회갑연 축복속에서 , 축복속에서 펼쳐졌습니다!!!
211    축복속에 펼쳐진 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2) 댓글:  조회:3292  추천:69  2007-08-30
      축복속에 펼쳐진 류은종교수님 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이      이어집니다!!!
210    축복속에 펼쳐진 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1) 댓글:  조회:3370  추천:91  2007-08-30
    2007년 8월 30일 , 수백명 귀빈 축복속에 연길시 성보빌딩에서 절강 월수대 류은종교수님 대학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이 펼쳐졌습니다.     아래 대학교직종사 40돐, 부부회갑연 일대성황을 세번에 나누어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209    【론문】우리글 인생을 살아온 류은종교수님 댓글:  조회:4518  추천:106  2007-08-30
【론문】 우리글 인생을 살아온 류은종교수님   1. 서론   살아가는 인생은 각각이라고 이 세상에 태여나 주어진 삶을 살다보면 이런 인생을 살수도 있고 저런 인생을 살수도 있다. 또, 인생에 따라서 삶의 가치나 한생이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 오늘의 대학교직종사 40돐, 회갑연의 주인공 류은종교수님은 한생을 우리 글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교수님이시다. 우리 글 하면 한글을 선참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것은 아니다. 우리 글은 나라와 살아가는 땅이 다름에 따라 한글로도 불리우고 조선어로도 불리우고 있는데 연변대 출신 류은종교수님은 조선어와 한글 `모두를 사랑하면서 우리 글의 보급과 발전, 세계화에 크나큰 기여를 하여왔다. 우리 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조선 세종 25년에 창제되고 세종 28년 1446년에 반포된, 글자마다 뜻을 가진 상형문자 한어와는 달리 적은 글자수로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표현할수 있는 우수한 소리글자이다. 그러나 력대 조선조에 의해 잘 보호되고 유지되여 왔지만 대중속에서 국어문으로 발랄한 발전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선말 또는 한말에 이르러 조선어—한글의 기틀을 세운 주시경선생이 나타나서야 우리 글은 진정 부흥의 중흥을 맞이하게 된다. 이같이 력사속에서 560여년전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우리 글을 창제했다면 주시경선생은 우리 글이 나라글이 되게 한 국어중흥의 선구자로 손색이 되기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류은종교수님은 21세기를 전후한 력사시기에 이땅의 조선족사회에서 우리 글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하여오며 그 누구보다도 우리 글 발전에 거대한 기여를 하여온 저명한 우리 글 언어학자이다. 류은종교수님은 1942년 3월 8일에 연변의 안도 시골에서 미래의 언어학자로 이 세상에 광림했지만 째질듯한 가난은 중소학교시절 내내 떠날줄 몰랐다. 그 속에서도 미래 언어학자는 무난히도 자라나 1962년 9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대학생으로 모습을 바꾸며 오늘 대학교직 종사 40돐 및 부인 량복선과의 회갑연을 맞기에 이르렀다.   2. 본문   서론에서 우리는 연변대 출신으로서의 류은종교수님은 한생을 오로지 우리 글과의 인연속에서 살아오며 우리 글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하였다는것을 리해할수 있다. 우리 글 인생을 살아온 분으로서 우리 글 조선족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류은종교수님과 어깨를 겨룰수가 없다고 보아진다. 그만치 류은종교수님의 교직종사 40돐은 우리 글 연구와 보급, 발전으로 이어지면서 세인을 놀래우는 성과로 주렁지며 사회활동에서나 절강 월수대에서나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1)      돌아보는 교직종사 40돐   류은종교수님이 안도 시골의 가난한 아이로부터 일약 대학생으로 변신한 것은 1962년 9월이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67년 8월, 류은종교수님은 연변대 학창시절을 마치고 우리글 인생속 대학교수 생활을 펼치여간다.   (1) 북경 민족출판사 번역시절 살벌한 강풍이 중화대지를 휩쓸기 시작하던 1966년, 류은종교수님은 행운스럽게도 연변대의 추천으로 북경 민족출판사에 가서 경전, 저서, 자본론, 반듀링론을 비롯한 6권 번역과 모택동저작 번역, 모택동 시사번역에 뛰여든다. 모든것이 뒤죽박죽인 시절에 모택동저작번역실만은 무릉도원, 이 무릉도원에서 류은종교수님은 한다하는 일류 번역가, 언어학자 10여명과 함께 맘껏 장기를 떨치게 된다. 이 기간에 류은종교수님은 모택동저작에 실린 어휘규범화 수요로 언어조사팀에 합류되여 동북3성 조선족거주지구 언어조사에 나서며 사회대학의 첫 공부를 체험할 기회를 가진다.   (2) 연변대 언어연구소 시절 연변대에 돌아온후 류은종교수님은 언어연구소에서 우리 글 본격적인 연구생애를 펼친다. 우리말 규범팀을 거느리고 재차 동북 3성 조선족거주지역을 돌면서 대표적인 방언지역, 조선어문사업기관, 교육기관 등의 우리말 사용실태조사에 나서고 우리 말 맞춤법과 문장부호법을 친히 작성, 《조선말규범집》(공저)집필을 마무리. 한편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후의 77년급, 78년급 조문학부 언어학교수에 전력한다. 80년대이후 류은종교수님은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상무리사로 활약하면서 어휘규범 원칙의 제정, 우리 글을 지키고 우리 글을 살려내기 위한 사업—어휘규범화 사업을 이끌어간다. 이 기간에 편찬된 책이 《조선말맞춤법사전》이다.   (3) 평양 김일성종합대 박사원 시절 열심히 사는 길에는 피곤과 라태가 없다. 류은종교수님이 살아가는 길이 바로 그러했다. 1987년 8월 ~ 1990년 4월 조선평양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 시절, 류은종교수님은 박사론문 《조선어의미론연구》를 집필, 출판하고도 《조선어동의어》, 《조선말 동의어, 반의어, 동음어》, 《조선어문수첩》(공저), 《조선말규범집 해설》(공저) 등과 여러편의 론문을 펴내는 쾌거를 이룬다.   (4) 연변대 교수시절 그후 류은종교수님은 연변대에 몸을 담고 본과학생들에게는 조선어 어음론, 문법론, 어휘론, 수사학, 문체론, 일반언어학 등 학과목을, 석박사생들에게는 조선어 의미론 연구, 문체론 연구, 언어리론, 화용론 등 학과목을 강의하며 필생의 정력을 제자양성에 몰붓는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 알려지고 사람은 일에 의해 평가된다. 류은종교수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교직종사 40년간20여명의 석박사생을 친히 키워내고 수많은 제자들이 동북3성, 북경, 관내에서 우리 글을 빛내여 간다.   2)      우리 글 연구성과 세인을 놀래워   세상사람들의 어떠한 성취나 연구성과들은 끈질긴 노력과 정비례를 이룬다. 남다른 창의력과 혼신의 정열을 몰붓는 피타는 노력이 없이는 어떠한 성취도 이룩할수가 없다. 류은종교수님은 이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한생의 집념과 추구로 세인을 놀래우는 성취를 이루어 냈다. 지난 세기 70년대이후 주요성과만을 보기로 하자.   70년대—   조선말 규범집(공저) 맞춤법이 달라진 단어들 조선어 철자법   80년대—   조선말맞춤법 사전 조선어 동의어 조선말 동의어, 반의어, 동음어            조선어문수첩(공저) 조선말규법집 해설(공저)   90년대—   조선어의미론연구 조선어어휘론 현대조선어어휘론   2000년대   문법(공저) 동의어 동음어 반의어 사전 가사문학대전(공동주필) 한국어열독(상) 한국어열독(하) 체육용어사전(주필) 우리말사전(주필) 중한속담사전(주필)   상기 2000년대 편찬한 사전들은 출판에 교부되였고 현재 월수대 한국어 계렬교재 20여권중 5권이 출판에 교부되여 출판과정에 있고 대형학술지 《동방학술론단》의 주필로 4권이 출판되였고 금년부터 계간으로 출판된다. 인생은 포기하면 끝나지만 노력하면 휘황한 빛을 뿌린다. 우리 글에 대한 류은종교수님의 남다른 사랑은 훌륭한 결실로 맺아졌다. 대학교직 종사 40년간 류은종교수님은 각종 우리 글 저서 20여권(공저, 주필 포함), 연구론문 120여편을 펴내 명실공히 이 땅의 우리 글 사랑의 거두로 떠올랐다.   3) 사회활동에도 값진 발자취 남기며   21세기에 들어선후 류은종교수님은 인생 60대의 문턱을 넘어선다. 나이들면 서로의 인생은 비슷하다지만 우리 글 인생을 살아온 류은종교수님의 인생은 의연히 청춘, 남다른 인생 그대로이다. 2003년에 류은종교수님은 우리 글을 새세기에 맞게 빛내가자면 대학의 연구만으로는 안된다, 대학과 사회가 어울려야 한다면서 사회법인단체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 회장, 연변로교수협회 문화담당 부회장 책임을 맡고 한국 학술정보[주]와 손잡고 중국 경내의 조선족문화유산정리와 발굴, 계승, 발전, 보존 사업을 힘있게 떠밀었다. 그 구체적 조치가 여러가지 사연으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중국경내의 조선족 로교수, 학자, 작가, 예술가, 문필가들의 저서원고가 해빛을 보게 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한국 학술정보[주]에서는 류은종교수님께 《동방학술론단》 학술지 주필을 위임하여 중국, 일본의 구독자를 상대로 한 학술지를 꾸려가고 있다. 겨레를 위한, 우리 글 발전을 위한 류은종교수님의 헌신적 노력은 또 하나의 풍만한 결실로 맺어졌다. 지금까지 한국 학술정보[주]를 통해 펴낸 여러 문집, 전집, 작품집 등 책은 무려 280여종에 이른다. 이면에서 연변인민출판사 편집출신인 류은종교수님의 부인 량복선선생의 숨은 노력이 컸는바 량선생님은 학술정보 중국측 편집국장을 몸소 맡고 묵묵히 이 일을 밀고나가고있다. 또, 최근 수년간 자체의 경비로 조선 평양을 여러번 다녀오고 연길에 조선학자들을 초청하며 남북의 저명한 언어학자들과 함께 2008년 북경올림픽 다국어 《체육용어사전》(공동주필) 편찬작업을 끝낸 후 한국 경희대학교 전문가들에게 번역시스템자동처리를 하도록 의뢰하였으며 북경올림픽에 사용되도록 기여하고있다.   4) 남방땅 월수대에 한국어보급기지 마련하고   19세기 전후반기, 20세기 초엽을 살다간 로씨야 위대한 작가 똘쓰또이는 일찍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5년에 걸쳐 집필하고는 이런 명언을 남기였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남을 위해 사는 지금에 와서야, 아니면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인생의 행복을 깨닫는다.   똘스또이 명언의 참뜻은 살다가 살다가 삶의 참다운 행복의미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보아지는데 류은종교수님이 바로 그러한 경지에 오른 분이시다. 교수님은 남북분단 50여년에 한글, 조선어가 흐름을 달리하는 현실이 가슴아파 우리 글을 새 세기에 맞게 발전시켜 가자면 서로 어울려야 우리 글 인생의 행복을 감수할수 있다며 2005년 2월에 절강성 소흥시 월수외국어대 동방언어학원 부원장 초빙에 나섰다. 그로부터 2년간에 교수님은 10여명 우리 글 전문인재를 받아들이고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애들이 600여명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했다. 중국내 중국애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최대의 기지중 하나로 떠올랐다. 이어 교수님은 절강 월수외국어대에 한국문화연구소를 세우고 월수배재한국어 교육원 원장,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는 새삶을 일궈냈다. 이 새삶이 한국어 교육과 보급에로 직결되는바 현재 《한국어열독》(상, 하, 주필)이 출판되여 교수에 사용되고 있으며《한국어기초》(시리즈), 《한국어회화》, 《한국어듣기》, 《한국력사》, 《한국문화》, 《영화로 배우는 한국어》 등 교과서 편찬사업이 놀라운 속도로 추진중에 있으며  이번 방학기간 《한국어회화》 초급과 중급(교원용과 학생용) (총4권) 《한국어듣기》가 이미 출판되였다. 또, 한국의 지성인들과 손잡고 한국 대전에 한국 자체로 꾸리는 월수학원, 월수국제류학원이 일어서도록 하여 중한문화교류와 류학생 상호파견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절강 월수대와 한국 배재대학 등 10여개 대학, 연구부문이 서로 자매관계, 동반관계를 맺게 한 이도 류은종교수님이다. 또, 한국문화연구소를 통한 한국 력사문화전문가를 초빙하여 《소흥방언과 한글관계연구》, 《항주고려사와 고려 명승 의천연구》, 《불교지장보살 김교각 연구》, 《고대 당나라 신라방 연구》, 《복건일대 고려김씨 후손연구》 등 고대 중한문화관계사 연구 등을 크게 진척시키고있다.   3. 결론   서론이 있으면 본론이 있고 결론이 있기 마련이다. 상기 서론에서 교대가 주어지면서 본론에서 우리 글 인생을 살아온 연변대 출신 류은종교수님을 -- 돌아보는 교직종사 40돐, 우리 글 연구성과 세인을 놀래워, 사회활동에도 값진 발자취 남기며, 남방땅 월수대에 한국어보급기지 마련하고 -- 등 네개분야로 나누어 교수님 대학교직 종사 40돐을 돌이켜 보았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교수님의 대학교직 종사 40돐은 실로 걸음마다 우리 글 인생으로 얼룩져있음을, 그 역할과 성과, 미치는 영향으로 보아 중국조선족 언어학계에서 돋보이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어렵잖게 보아낼수 있다. 류은종교수님처럼 조선반도(한반도) 남북을 드나들고 중국 대지를 누비며 그 깊이와 너비에서 우리글 연구와 보급에 기여가 큰 분은 조선족가운데서 찾아보기 드물다고 할수  있다. 이에 류은종교수님은 지난해 10월 9일, 서울에서 인생60대에 한국정부로부터 한글발전유공자 크나큰 영예를 받아안았다. 로무현대통령이 친히 발급한 한글발전유공자 문화포장은 우리글 인생을 살아온 류은종교수님에 대한 최대의 긍정, 최고의 영예로서 교수님의 대학교직 종사 40돐을 평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또 오늘 대학교직종사 40돐에 드리는 최대의 선물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필자는 500여년전 세종대왕님은 우리 글을 창제하시고 근대의 주시경선생은 우리 글의 중흥을 이룩하시고 류은종교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 글을  전파하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는데 기여한 공로자라고 평가하여 본다. 류은종교수님은 이런 평가를 받을만한 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글 인생을 살아온 류은종교수님》이라고 제목을 달아보았다. 25년전 연변대 재학시절의 제자이고 오늘도 스승님의 슬하에서 커가고 있는 필자로서 류은종교수님과 같은 스승님을 모시고 있음을, 대학교직종사 40돐 및 교수님 부부 회갑연에서 스승님의 우리글 인생을 돌이켜 볼수 있음을 더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한다. 스승님 살아가는 우리 글 인생길에 항상 영광, 또 영광만이 깃드소서!!!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한국문화연구소 리광인,                                               2007년 8월30일 연길에서
208    해살님은 항일렬사의 조카였다 댓글:  조회:3491  추천:97  2007-08-25
해살님은 항일렬사의 조카였다   지난 8월 11일, 연우산악회 일원인 필자는 화룡시 관문산산행에 나섰다가 우연히도 신입회원 해살님—최성희씨가 필자가 한국서 출판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4권에 넣은 항일렬사 최병학, 리동순 부부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 놀라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연우산악회 산행에서 20여년전 연변대 재학시절 수차 방문했던 항일투사를 그의 딸—최성희씨를 통해 다시 인연이 맺아지리라곤 전혀 생각밖이였지요. 최성희씨 아버지 최운학(일명 최영림)은 항일렬사 최병학의 친동생이였습니다. 아래 《부록》으로 정리한 글 한편과《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4권에 넣은 렬사전기를 올리여 봅니다. 정리부록은 이제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국경58돌 기획도서로 곧 출판되는 필자의 저서--《겨레 항일지사들》(전5권)에 오르게 됩니다.       【부록】(1)     리동순렬사를 한국서 이미 출판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 제3집 녀성편에 넣었지만 그의 남편 최병학(崔秉学)렬사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였다. 그러던차 이번 여름방학에 절강에서 연길에 왔다가 렬사의 유가족 최성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여 가정래력을 새로 듣게 되였다. 2007년 8월 11일, 늘 일에 쫓기는 필자는 어쩌다가 시간을 내서 연우산악회 토요산행에 가담하게 되였다. 산행지는 화룡시 관문산이고 항일운동가인 라철, 서일, 김교헌 삼총사 무덤 추모활동도 가지게 되였다. 이것이 인상적이였는지, 처음 대하는 최성희씨는 연길에 와서의 모임에서 렬사문제를 꺼내게 되고 서로간의 이야기에서 최병학렬사의 조카임을 알게되였다. 다시말해 최병학렬사의 동생 최운학(영림)이면 최성희씨의 아버지였다. 이런고로 며칠후 8월 18일, 필자는 연길시에서 최성희씨 그리고 최병학렬사의 동생 최남학렬사의 딸 최금선(79살)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토요산행에 다녀온 며칠간 최성희는 가족의 년장자들을 찾으며 가족사를 새로 정리하며 바삐 보냈다고 터놓았다. 그에 따르면 할아버지 최수관은 항렬에서 셋째로서 한씨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아들넷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맏아들은 최상학이요, 둘째는 최병학, 셋째는 최남학, 그 아래 딸 최귀인, 막내 최운학- 둘레둘레 남매 다섯이다. 부모들이 일찍 병가한데서 맏아들 최상학이 동생들을 돌보았는데 지난세기 20년대 후반에 벌써 그의 반일사상의 영향하에서 동생들은 모두 혁명자로 자라나 오늘의 도문시 월청일대서 한다하는 항일가족으로 솟아올랐다. 1930년 연변 5.30폭동후 최씨형제는 어린 두 남녀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부부간과 더불어 중공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 가을의 추수폭동과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에서도 최씨가족은 투쟁의 주력이였다. 1932년 봄부터 일제놈들의 대거토벌이 시작된후 맏이 최상학과 그의 안해는 조직의 지시로 서남으로 수십리밖의 두만강가 개산툰 연두봉일대로 전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추위와 굶주림에 어느 한 마을로 내려왔다가 불행히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한집에 갇힌채 살해되고 만다. 최병학부부는 우의 본문—리동순부분에서 서술하였기에 피하기로 하고 셋째 최남학은 신씨녀인과 결혼하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부부 모두가 중공당원, 1932년 봄이후 적들의 겨끔내기 토벌로 낮이면 등산생활, 밤이면 하산생활로 투쟁을 견지하며 일제놈들이 새로 부설하는 연길현 조양천—개산툰구간 철도파괴투쟁에도 뛰여든다. 산속생활에 네살짜리 딸애가 문제거리다. 그들은 딸애를 화룡현 덕신사 남양동 서쪽너머 달라자의 한씨네 집에 부탁하고는 주저없이 떠나갔고 월청일대의 어느 고장에 땅굴을 파고 땅굴생활을 하다가 주구의 밀고로 기습당해 비장한 최후를 마치였다. 최귀인과 최운학은 두살차이다. 1931년 추수투쟁때 17살인 최운학은 손우 누나와 함께 소선대에 가입하여 삐라를 뿌리고 통신을 나르는 일들에 발벗고 나섰는데 최운학은 코끄미, 걸만동, 마패 세 마을로 이루어진 소선대중대의 소대장으로 뛰고뛴다. 그러다가 연길현 동성용 베틀골(동성9대)로 전이하여 활동, 적들에게 체포되여 연길감옥에서 비인간적인 8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최병학부부에 대해서는 더 언급치 않으나 남한테 주고간 그의 딸애는 찾지 못하였다. 광복후 연길시 렬군속식당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조선으로 나가고 만나지 못하고만다. 최남학의 딸애 최금선은 13살에 친인들의 품으로 돌아왔고 79살(2007년 8월)의 할머니로 되여 필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알고보니 최씨가족은 항일렬사만도 최상학부부, 최병학부부, 최남학부부 6명이였다. 고마운 이는 최성희씨다. 연변 연우산악회가 인연이 되여 이 렬사의 유가족을 만날수 있었는데 1981년과1983년, 1984년에 필자가 항일렬사조사로 연길현 조양천 교동의 현 원종농장으로 다니던 시절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필자를 보았다고 한다. 해방후 최성희씨 아버지 최운학(최영림)은 선후로 왕청현 동신구 구위서기, 왕청현 농업국 국장, 부현장으로 뛰다가 두번이나 전국로동모범으로 되여 북경에 가서 모택동, 류소기, 등소평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 남명학 등 지도동지들과 두터운 우정을 맺는다. 1965년에는 새로 건설하는 단위인 연길현 원종농장을 먼저 1년쯤 맡아달라는 주덕해와 남명학의 지시를 받고 농장장으로 부임되여 간다. 자치주에 등용하려는 조치였으나 이듬해 문화대혁명이 터지며 물거품이 된다.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입다가 복직하고66세에 리직,  1994년에 81세로 사망되였다. 최성희씨는 문화대혁명후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 첫해 연변의학원에 입학하여 77년급 학생으로 되였으며 지금은 연변사회정신병원 중층지도일군으로, 정교수급 주임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2007년 8월18일, 연길에서         【부록】(2)   혁명의 승리만을 믿고 (1907-1934)   리동순은 1907년에 화룡현 월청사 기신촌 곡구미(창신평,오늘의 도문시 월청향 기신6대)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생활형편이 어려운데서 학교갈 나이에 벌써 아버지,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나서야 했다.     어느덧 열대여섯 살이 되었다. 돈벌러 연해주로 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동순이는 오빠한테 동동 매달리며 소련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소련의 사회주의현실은 들을수록 신나기만 하였다. 어린 동순의 가슴속에는 사회주의사상이 소리없이 흘러들었다.    1926년경에 동순이는 한 마을의 혁명자 최병학과 결혼하고 살림을 차리였다. 별호는 《상고》로 통했다. 오빠와 남편의 영향하에서 동순이는 20년대 후기에 벌써 마을의 야학에 다니며 글을 익히였고 마을의 조공당부녀회원으로 활약하면서 혁명에 투신하였다. 시동생들인 둘째 남학이와 셋째 영림이도 투쟁의 골간으로 나섰다. 말그대로 한다하는 혁명가정이였다.    1930년 5.30폭동이후 리동순은 남편과 더불어 중공당원으로 되었다. 그들이 속한 지부는 중공개산툰구위산하 지부였는데 동순이는 지부의 부녀회책임을 맡아나섰다.     부녀회의 활동가운데서 여자해방문제가 하나의 내용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매매혼인문제는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마을의 리석현농군도 매매혼인을 극구 주장하다가 부녀회에 불리여가 한바탕 들볶이였다. 나중에 그는 울면서 자기가 못할 짓을 했다며 진심으로 속죄하였다.     동순이는 보통 키에 시리시리한 편이여서 사람들에게 《뚱보》로 불리우나 워낙 천성이 활발하고 너그러운데서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즐기였다. 게다가 그의 집이 지부통신처이다보니 드나드는 동지들이 많았다. 식량사정이 현실로 다가섰지만 그는 언제 한번 군소리없이 동지접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1년 가을 동만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월청일대에서도 기세차게 타올랐다.     개산툰구 사광사의 수천명 군중들이 중천평, 삼동포를 거쳐 창신방향으로 내려왔다. 월청사의 군중들까지 합치니 대오는 신속히 근 만 명으로 늘어났다. 동순이와 남편, 두 시동생은 기신촌의 투쟁골간으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수천명 시위대렬이 석건평아래 바위굽이에 이르렀을 때 두만강대안의 조선종성 일제수비대와 남양평, 걸만동경찰서의 100여 명 놈들이 마차 30여 대를 가지고 길을 막아나섰다.     시위대렬은 즉각 따발진을 치고 놈들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각 마을의 적위대와 소선대원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바깥에 서서 간부와 군중들을 보호하였다.     놈들은 해산하라고 고함치면서 바위에 대고 위협총질을 해댔다. 아츠러운 총소리가 메아리로 귀청을 때렸으나 시위대렬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악이 난  놈들은 10여 명 기병을 시위대렬속에 몰아넣었다. 적기병과 군중들사이에는 일장박투가 벌어졌다.    약 두시간쯤이 지나자 따발진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그 틈을 타서 우리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들어서 결박해 놓았다.    어느덧 체포된 사람들은 32명에 달했다. 적들이 그들을 마차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려 할 때 군중들이 결사적으로 막아나서며 동지탈환투쟁을 벌리였다. 32명동지들속에는 기신촌의 사람만 해도 6명이였는데 그속에는 리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도 들어있었다.     리동순은 부녀들과 함께 주저없이 마차에 올라 말고삐를 낚아채며 《내 동생을 내놓아라!》하고 소리쳤다. 잇따라 부녀들이 아우성을 쳤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     《내 오빠를 내놓아라!》     《내 아들을 내놓아라!》     수천명이 함께 웨쳐대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적들은 어리벙벙하여 일순 어쩔바를 몰랐다.     동지탈환투쟁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군중들은 끝내 결박당한 30여 명의 동지들을 몽땅 풀어냈다. 나중에 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 황운룡, 백원춘 등 10여명의 투쟁골간들이 끝내 적들에게 끌려갔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니 적들은 바위굽이에서 물러섰다. 그날 밤에 백원춘은 대안의 조선동관에서 풀려나왔다. 이튿날 아침에 또 조선 종성으로 끌려갔던 기신촌의 소선대원 최영림과 황금송이 풀려나왔다. 1983년에 필자가 용정시 조양천에서 노인이 된 최영림이를 만났을 때 그는 추수투쟁 때 그의 나이 17살이였고 큰아주머니 리동순은 그토록 이악스러웠다고 말하였다.     적들이 물러간후 시위대렬은 계속 기풍현으로 몰려갔다. 당지 지주들은 반항할념도 못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지주들의 승낙을 일일이 받은후 이튿날 새벽에 흩어져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 사광사와 월청사의 추수투쟁은 무려 4~5일간이나 지속되었다.      1932년봄에 또 동만각지에서 춘황투쟁(즉 기민투쟁)이 고조를 이루었다. 월청사의 군중 500여명은 마패골어구에서 약 20리 들어간 삼동에 집결하여 주구 두놈을 투쟁하였다. 이시기 남편은 반제동맹 지부책임을 맡았다. 리동순은 남편과 함께 투쟁의 골간력량으로 나섰다. 이때 적《토벌》대가 밀려드는데서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해 5월에 권총대와 장총대로 무어진 연화현유격대 일행 50여 명이 주구청산차로 기신, 립봉, 걸만 일대에 나타났다. 이들 주구청산은 지방적위대와의 배합하에서 일어났는데 리동순 등 부녀회원들은 적극 받들어나섰다.     한데서 월청사 범위내에서의 주구청산투쟁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기신촌의 주구 둘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중상입고 살아났으며 걸만일대의 부흥촌의 안일천은 수색중에 내닫다가 권총대의 총에 맞아죽었다.     리동순의 남편도 개구유격대의 골간이였다. 그들 부부의 목표가 드러난데서 조직에서는 이들을 현위가 활동하고있는 평강구로 파견하였다. 그때 동순 부부에게는 애어린 딸애가 달려있었는데 지방에 떨구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시동생 남학에게도 딸애가 있었고 그가 1932년 《토벌》에서 희생된후 중국인집에 두었다가 찾아왔다고 한다.     1932년 여름에 리동순부부는 조직의 배치대로 평강구의 장인강 구룡평에 자리를 잡았다. 이해 겨울에는 또 새로 창설된 어랑촌근거지로 들어갔다. 그뒤 얼마 안되어 어랑촌의 한 팔간집에서 화룡현유격대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12월의 일인데 근 30명 유격대원들이 일제히 새 군복을 떨쳐입고 소련홍군식 꼭두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면서 근거지에 드나들 때면 정말 성수가 났다. 리동순은 인제야 제 세상에서 사는것만 같았다.     동순이와 그의 남편은 인차 어랑당지부에 망라되어 조직생활을 하였다. 사업의 수요로 남편이 어랑당지부책임을 맡았는데 이 지부에는 방승옥 (몽기동 사람, 선전위원), 리동규 (삼도구사람, 조직위원), 리명배 (당지 적위대원), 리화춘 (평강구사람, 원 평강구농민협회책임자), 안학선 (삼도구사람, 원 삼구구위서기), 원희숙 (평강구사람), 제국주의 (달라자사람), 정경옥 (약수동사람, 원 개구농민협회 부녀부책임), 오×× (어랑촌 사람, 중국인, 정경옥의 약혼자) 등 동지들이 소속되었다. 그들은 당지부 조직생활을 하면서 생산대와 청년돌격대에 망라되어 근거지의 한몫을 담당하여 나섰다.     1932년말과 1933년초에 일제놈들은 어랑촌근거지에 대해 연속 2차의 《토벌》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는 큰 손실을 당했으나 인차 원기를 회복하였다. 1933년 4월에 당평강구위 부녀위원 박정자가 불행히 희생된후 리동순이 그를 이어 당평강구위 부녀위원의 책임부서에 나섰다.     리동순은 구위 부녀위원책임을 맡은후 근거지로 들어오는 여성혁명자들을 배치하고 묶어세우며 적통치구역들에 비행선전대를 파견하거나 정치공작원들을 보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실, 병원, 철공장 등을 돌보며 유격대원호사업도 깐지게 내밀었다.     1933년 여름에 중공중앙《1.26》지시편지가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 전해진 뒤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사업은 한층 활기를 띠였다. 근거지 군민 200여 명과 함께 5.1메데기념시위에 참가한 리동순은 혁명의 승리가 방불히 보이는듯 싶었다.     그때 어랑촌근거지를 제외한 현안의 당조직과 혁명조직들은 거의가 파괴당하였다. 리동순은 현위의 지시에 따라 부녀비행선전대를 근거지주변의 봉밀거우와 쟈피거우, 고사리평 등지에 파견하였다. 리계순 등 동지들을 적들이 도사린 용정으로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근거지 정부 회장 김승학 등 동지들과 함께 늘 직접 현안의 삼도구와 평강구 등지에 숨어들어 파괴된 조직선을 찾아 연계를 가지거나 삼도구 우복동에 자리 잡은 삼도구의 동지들을 여러 모로 도와주었다.     1933년 봄이후 어랑촌근거지에서는 얼토당토한 반《민생단》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처음 어랑당지부의 리화춘이 잡혀나와 피살되더니 동순의 남편 최병학도 《민생단》으로 몰리였다. 1933년 가을부터 현당위 조직부장 요직을 차지한 리동규는 남편을 물고 놓질 않았다. 남편은 할수없이 안도 모 지방으로 피난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동순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남편이《민생단》이라니 웬말인가? 그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다. 그는 남편의 영향하에서 혁명의 장도에 올랐고 남편의 인도하에서 어랑촌근거지로 들어선것을 잊을수가 없었다. 어떤 여인들은 핍박에 못이겨 남편과 리혼했거나 맘에 없이 중국인을 만나 운동을 피하기도 했다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꼬물도 없었다. 그는 시간이 흐르느라면 조직에서 해명해 줄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적들의《토벌》이 거듭되고 반《민생단》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34년 새해가 밝아왔다. 뒤미처 우복동에서 투쟁을 견지하던 삼도구위가 파괴되고  구위서기 홍완구도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동순은 현위의 지시로 회장 김승학과 같이 삼도구일대를 돌아보고오다가 토산자 쟈피거우일대에서 적들과 맞띄웠다. 김승학은 가까스로 포위를 헤치고나갔으나 리동순은 그만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리동순―혁명의 승리만을 믿고 남편의 청백함을 믿고 살아가던 이 구위 부녀위원은 근거지  변두리땅에 쓰러진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뒤 이해 5월에 우심산―리동규가 근거지에서 도망한후 리동순의 남편 최병학은 근거지안의 버섯골로 돌아왔다가 왕우구에서 온 후임퇀정위 김락천에 의해 또 체포되고 말았다. 김락천은 이른바《심판대회》를 열고 최병학을《민생단》으로 몰아 살해하였다.     때는 1934년 7월경이다. 피살장소는 근거지의 최후의 보루―버섯골이였다고 한다.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3)》에서, 한국학술정보〖주〗, 2005년 10월 출판        
207    【90돐특집】(26) 외딴호와 윤동주묘소 사연 댓글:  조회:3173  추천:82  2007-08-20
【90돐특집】(26) 윤동주 발자취 (3) 외딴호와 윤동주묘소 사연     언제인가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나는 동료인 안화춘후배와 함께 오늘의 명동촌을 답사한적이 있다. 10년도 넘는 시절의 일인데 그날도 명동학교자리, 윤동주생가자리, 장재촌을 답사하며 많은 보귀한 사진을 찍었었다. 사진가운데서도 보귀한것은 장재촌 동쪽가 산밑의 외딴호라 할가, 유감스러운것은 어인영문인지 답사기록에 답사날자가 적히지 않아 딱히 어느때였던지를 밝힐수가 없는것. “10년도 나마되던 때 시절 저기 장재촌을 갔다가 김약연선생 옛집이라고 하는 한 외딴호를 사진찍은적 있는데 그리로 가 볼가?” 나는 안해보고 10여년전의 일을 끄집어냈다. 안해는 두말없이 나를 따라섰다. 우린 명동학교옛터를 벗어나 큰길따라 장재촌으로 가다가 마을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의 바깥길따라 동구어구에 자리잡은 외딴호로 향했다. 헌데 아무리 사위를 일별해도 있어야 할 산밑 외딴호는 보이질 않았다. 그때 오래전 외딴호를 찾았을 때의 집주인이 떠올랐다. 집주인은 현승룡이라 부르고 그해 33살이였다. 안해와 4살짜리 녀자애 세식구인데 저 아래 촌에 있다가 “지난해 11월 25일 1500원주고 이집사고 들었다”, 장재촌은 모두 4개 소대에 140세대쯤 된다, 여기는 장재3대이고 장재 몽땅 조선사람이다. 담배농사수입이 한 5000원 쯤 되는데 담배 1등값이 2원 80전이다… 하던 말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러던 옛집이 페허도 알리지 않게 사라져 버렸으니 궁금하기만 하다. 내가 한창 그전의 외딴호를 떠올릴 때 안로인 한분이 달래인가 캐여들고 밭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안로인과 이야기 주고받으니 안로인은 저 산밑의 외딴호가 김약연선생의 집이 아니라고 한다. “그때 현승룡이라고 부르는 집주인이 김약연선생댁이라고 하던데요.” “모르고하는 소리지. 나도 김약연선생의 친척이 되는 사람이고 장재에 시집와서 장재에서 늙었는데 내가 어찌 모르겠수?!” 그러면서 안로인은 래일(2004년 10월 4일), 김약연선생의 손자가 한국서 장재에 온다면서 그 손자가 여기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있다고 하셨다. 나로 말하면 새 소식이라 안로인의 알려준대로 안로인의 딸집인가, 아들집에 나의 전화번호를 남기고 김약연선생의 손자되는 분을 만나뵐수 있기를 바랐다. 밭머리에서의 장재촌 안로인과의 잠간 만남이였다. 안로인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나는 산밑 외딴집이 김약연선생의 댁이 아님을 처음으로 알았고 김약연선생의 손자되는 분 김재홍선생과의 만남을 이룰수가 있었다. 장재촌 북쪽 산자락의 김약연선생묘소를 배알하고 마을 큰길가에 나서니 하루길을 쉼없이 달리던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마지막 쉼을 한다. 지신~룡정행 중형뻐스로 내려 오다가 우린 룡정 남쪽교외 3.13유적지가에서 내리였다. 3.13유적지에 잠간 머물고 다시 발길을 룡정 동산의 공동묘지로 돌리였다. 때는 이미 해가 진후에서 어둠의 장막이 각일각 다가서고 있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동산길을 다그치는데 직행길이 없어 이나무밭, 저나무밭을 헤쳐나가야 했다. 동산을 앞두고 마지막 골안을 넘어서니 윤동주묘소구역이다. 안해로서는 처음 찾아보는 윤동주묘소요, 송몽규묘소라지만 어스름이 깃을 펴는데서 어스름속에 배알하며 사진을 찍어야했다. 나로 말하면 지난세기 80년대 중기이후부터 윤동주묘소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그러는 나의 마음을 자못 아프게 한것은 윤동주묘소 앞 오른켠에 새로 세워진 작은 묘비 글이였다.   시인의 조부 윤하현 (1875. 2.11음~ 1948.9.4양)        조모 남신필 (1886~1955)        부   영  석 (1895.6.11음~1965.4.20 양)        모   김  룡 (1891.8.29 음~ 1948.9.26양)        동생 광  주 (1933.5.15 양~1962.11.30양) 이 동산 어딘가에 잠들어계시지만 오늘날 묘소를 찾지 못함을 아쉬워 하며  누이 혜원, 조카 인석, 인하 새김   작은 묘비를 세운 시간은 2003년 7월 15일로 밝혀져 있었고 윤동주외 그의 일가족의 묘소를 모르고있다는 애절한 사연이 담겨져 있었다. 나의 마음은 대뜸 무거워났다. 윤동주시인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이 해방된 연변 이땅에서 선후로 돌아가시고 일가족이 없으니 세월속에 그 무덤마저 찾을길없다는 이야기— 어둠이 쫘악 깔린 룡정동산에 더 머무를수가 없어 자리를 뜨는데 저기저 서쪽의 비암산이 망망한 바다의 군함처럼 떠오른다. 룡정시가지를 보매 불야성을 이룬 거리거리가 인상적인 속에 하늘중앙에는 여름철대삼각형—견우, 직녀, 백조자리가 나타나고 서쪽하늘에는 봄철의 별자리 아르크투르스가 나타난다. 하늘의 별들에 너무도 익숙한 내가 북쪽하늘 북극성을 마주서서 두팔을 곧게 쳐드니 윤동주묘소쪽은 룡정의 정동쪽이고 비암산이 정서쪽으로 알려진다. “윤동주시인이 생전이라면 하늘의 별들을 잘 알고도 남으련만…” 나는 안해와 중얼중얼거리며 길을 다그치였다.  
206    견우 직녀 백두산에서도 서로 만나 댓글:  조회:3519  추천:100  2007-08-19
견우 직녀 백두산에서도 서로 만나     해마다 칠월칠석이면 전설속의 저 하늘세계에서 은하수를 사이둔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서로 만나 그리움의 회로를 푼다지만 아름다운 성산인 저 지상세계의 백두산에도 견우도가 있고 직녀봉이 있어 견우와 직녀가 백두산에서도 서로 만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전한단다. 천지물은 예이제없이 천지가의 보천석, 우랑도를 지나 약 1250메터 흐르다가 깎아지른듯한 절벽으로 곤두박히며 높이 68메터의 장쾌한 장백폭포를 이룬다. 장백폭포 왼쪽가를 따라 폭포우에 이르노라면 바위사이로 세차게 급류되여 흐르는 한갈래 강물을 볼수 있는데 먼곳에서 보면 이 강물이 하늘나라를 가로지른 은하와도 같다하여 천하라고 부른다. 천지가의 종덕사 옛터자리 주추돌에도 천하라는 두 글자가 한자로 새겨지면서 우리 민족은 이 강을 천하라고 즐겨 불렀는데 전설속의 이야기에서 쪽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한어로 승사하(乘槎河)라고도 부른다. 승사하는 룡문봉과 철벽봉사이의 《V》형 협곡을 따라 북으로 흐르다가 폭포아래서부터 송화강의 원류인 이도백하로 불리운다. 이 승사하를 거슬러 천지를 눈앞에 둔 평평한 지대에 이르면 왼쪽의 승사하가 바위돌에 붉은 글씨로 새긴 우랑도(牛郎渡) 한자 세글자를 볼수 있다. 영문을 알리없는 관광객들은 웬 글자가 저 바위돌에 새겨져있는가 주츰하고는 지나지만 백두산 견우직녀의 이야기가 이 바위돌에서부터 시작된다는것을 알면 어떨가. 지난 2005년7월 하순 내가 천지가 승사하 건너쪽 40~50메터 절벽우 평평한 곳에 자리잡은 종덕사옛터를 답사하고 산기슭을 따라 올리 뻗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니 눈앞이 천하—승사하였다. 강물은 뼈속을 핧는듯 차서 걸음을 재우치는데 눈앞의 한무리 바위돌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보매 바위돌들은 강물의 섬바위를 방불케 하였다. 강물을 건너다말고 승사하 건너쪽 물가 바위돌우에서 련속 샤타를 눌렀는데 저쪽의 한 바위돌에 새긴 우랑도 세 붉은 글씨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시선을 잡았다. (우랑도라고 바위돌에 글자를 새겨넣을땐 영문이 있을텐데…) 궁금증에 사로잡힌 나는 강물을 건넌후 천지가 보위일군으로 보이는 검은 복차림의 젊은이한테 유래를 물었다. 그랬더니 젊은이는 이 자리가 견우의 이야기를 담은 우랑도이고 강물속의 바위무리로 승사하를 건너면 곧추 직녀봉에 이를수있다고 했다. (직녀봉?) 너무도 흥분된 나는 직녀봉이 어느 봉우리인가고 물었다. 알고보니 직녀봉은 건너편 산정의 세 봉우리가운데 중간 봉우리였는데 왼쪽 봉우리는 승사하의 동쪽 룡문봉과 마주한 해발 2620메터의 천활봉이고 오른쪽 봉우리가 동쪽의 천문봉과 가까이 한 해발 2560메터의 철벽봉이였다. 직녀봉은 바로 천활봉과 철벽봉 사이에 끼워있었다. 직녀봉을 쳐다보며 천활봉, 철벽봉에 시선을 던진 나는 순간적이나마 와뜰 놀랐다. 우리 일행은 얼마전 흑풍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천문봉에 올랐고 천문봉에서 다시 산을 타고 천지가로 내려왔는데 곧바로 철벽봉 서쪽으로 내리 뻗은 돌무지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던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두산의 20여개 봉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로 서는 우리 일행이 직녀봉과 철벽봉사이 오솔길에 들어섰다는것을 몰랐었다. 때늦은 무지를 탄하며 직녀봉이 있는 세 봉우리, 그 사이로 산정까지 뻗은 오솔길에 눈길을 던지노라니 30년전 70년대 중반의 백두산행이 떠올랐다. 장백산 동쪽아래 광평농장시절이였다. 50년대 조선의 이름난 시인이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고 명구를 남기였다지만 광평의 산들에선 어디서나 멀리 장백산이 보인다. 하루는 농장의 지도일군들이 장백산유람을 간다하여 그날 새벽 20대에 금방 오른 햇내기인 내가 무작정 풍천을 두른 자동차에 뛰여 올랐는데 그래서 떠난 걸음이 나 장백산등반의 첫 걸음이였다. 그 시절엔 산아래 주차장에서 천문봉으로 오르는 포장길이 없었고 폭포아래서 왼쪽의 산비탈, 산등성이를 따라 천지로 향한 세멘트 계단길도 없었다. 오솔길을 따라 천지에 이르니 이번엔 장백산기상대가 있다는 산정에 오르고 싶었다. 젊음의 패기가 솟구치던 때라 필자는 또 무작정 산기슭 돌무지에 나섰는데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쭈볏이 일어선다. 지금처럼 산정으로 통한 오솔길조차 없던 시절이라 산중턱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잠간새에 짙은 안개가 천지간을 뒤덮어버렸다. 동서남북 어디가 어딘지를 가늠할수 없었다. 사방에서 괴물이 나타나 뒤덜미를 잡는듯 나는 대뜸 겁이나서 어쩔줄 몰랐는데 돌아서자니 다리가 떨려 한발자국도 내리 디딜수 없었다. 백두산을 잘 모르던 시절이라 더욱 그러했다. 나한테는 돌무지를 따라 계속 오르는 수밖에 없엇다. 별수없이 돌사이를 이저리 타며 앞으로 앞으로 오르기만 했는데 몇메터밖도 분간할수 없는 산비탈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내내 오른쪽켠으로 톺다나니 인연이 닿지 못하는 산비탈에 들어섰던것이다. 진짜 정신이 아찔아찔한 순간순간이였다. 한시간 푼히 지나 사경을 헤치고 지금의 철벽봉변두리 산마루에 가까스로 오르니 안개가 사뭇 가시여지고 발아래 푸르른 천지가 펼쳐졌다. 그때에야 살았구나 숨을 활 내쉬니 금방 있은 내 소행이 어처구니가 없어보이였다. 한발의 실수만 있어도 그 실수는 죽음으로 통한 길이였겠으니 말이다. 지금도 내가 오르던 비탈엔 오솔길조차 없다. 젊음의 패기로 넘치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데 맥없이 철벽봉아래 앉아 천지를 한눈에 굽어보던 그때가 금시런듯 싶다. 30년이 지난 오늘 직녀봉쪽을 쳐다보니 30년전의 안개속 등반이 떠오르며 그렇게도 정다울수가 없엇다. 이미 산을 내린터에 직녀봉 전망대에 올라 천지의 모습을 굽어보지 못한것이 맘에 걸리나 승사하의 우랑도와 직녀봉이 한 시선에 맞혀오며 위안을 느끼기도 하였다. 저 하늘의 견우, 직녀 백두산에서도 서로 만난다? 참으로 흥나는 상상이였다.  올해 칠월칠석을 눈앞에 둔 시점이라 그 흥은 저 하늘의 견우직녀와 한데 어우려져 돌아갔다. 칠월칠석이면 견우와 직녀가 서로 오작교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이 이야기는 오랜 옛적부터 중국과 조선, 한국 등지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전설이다. 이런고로 견우직녀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해마다 음력 7월 7일 저녁이면 숱한 까치들이 하늘나라 은하수에 날아올라 오작교를 놓아 그리움에 절은 견우와 직녀를 서로 만나게 했다니 실로 심금을 울리는 아름답고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천문학의 원리에 따르면 은하수는 하늘나라의 강물이 아니고 견우별과 직녀별도 서로 만날수가 없다. 은하수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무수한 항성들로 이루어진 우주세계로서 그 수가 하도나 많고 촘촘하고 거리가 멀어 우리들에게 은은한 강처럼 보인다. 이런 천체현상, 은하수를 사이둔 천상의 견우와 직녀별이 지상의 우리 인간들에 의해 전설속의 미남미녀로 나타나 칠월칠석 오작교 상봉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백두산에서도 승사하를 사이두고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난단다. 아름다운 성산  백두산은 이렇듯 천상의 견우직녀를 자기품에서 만나게도 하는 더없이 아름답고 수려한 산이다. 지금도 나는 우랑도에서 맘을 떼지 못하며 직녀봉까지 한가슴에 끌어안는다. 그러면 천지가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오르며 수많은 관광객을 끄당기는 희망의 래일이 줄달음쳐 오는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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