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
조성일프롤로그
강경애(1906-1944)는 일제식민지시대의 <<간도>> 룡정에 건너와 살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대어 궁핍한 민중의 삶과 항일운동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그 시기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강경애는 어두운 시대의 짧은 생애에 장편소설 2부, 중단편 17편, 기타 다수의 수필과 평론 등을 창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문제>>(1934), <<소금>>(1934), <<지하촌>>(1936), <<어둠>>(1937)등을 들수 있다.강경애의 <<간도>>에서의 처절한 삶과 고투, 어둠의 시대에 남긴 빛나는 업적, 삶의 고투속에서의 쓸쓸한 죽음 등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녀류소설가를 경모해 왔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작가 강경애를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문학전통으로 삼기 위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998년 8월 룡정시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뒤면에는 강경애의 간단한 략력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있다.<<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 바이다>>.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이처럼 문학비를 세워 강경애를 추모하고있는 와중에 강경애는 <<김좌진암살 교사범의 동거녀>>라는 청천벽력이 연변땅에 떨어졌다. 한심한 일이였다. 우리는 수수방관할수 없었다. 백주발검(白晝拔劒)의 기사
한국문화관광부는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이 거동은 한국내 일부 권위인사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한국의 한 기사에 따르면 2005년<<1월 4일 오후,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기자를 찾아왔다. A씨는 문화관광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강경애씨가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장군의 암살 교사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부 장관에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강경애에 대한 문화인물 지정 철회 민원을 제기했다>면서 문화부의 답신 두장을 보여줬다>. 문화부는 A씨의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각 시, 도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전문가 13인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넘겨서 선발을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관의 <친일행적>조사 등 인물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라면서 소정의 절차를 거친것이기 때문에 선정사항을 번복할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부는 귀하께서 제기하신 강경애씨가 <김좌진장군 암살 교사 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문화인물로 선정됐다>고 했다. A씨는 한국문화관광부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용정의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고 격분해 하고 한탄했다고 한다.이처럼 사태가 엄중해지는 시각에 한국 조선일보 사이트는 <<강경애는 김좌진 암살사주범의 동거녀>>라는 강경애에 대한 모독기사를 올렸다. 이 기사는 한국 <<월간조선>> 2월호에 <<월간조선>>의 오동룡기자가 한국 전 광복회 회장인 이강훈의 회고록에 의해 추적해 펴낸 추적기사이다. 실로 이 기사는 우리가 경모하는 저명한 작가 강경애를 모독하는 <<백주발검>>이라고 하겠다.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
지금도 잊을수 없는 지난해 2005년 1월 17일. 이날 종전대로 오전 8시경에 나는 사무실(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무실)에 출근하여 첫 일과로 추진회 사이트와 더불어 중국의 동포사이트 및 한국사이트를 방문하던 중, 조선일보 사이트에 <<월간조선>> 2월호에 발표된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사주범의 동거녀>>란 추적글이 올라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내가 자기를 진정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바장이는데 추진회에 출근하는 40대 후배 김혁씨가 들어섰다. 김혁씨도 인터넷에 뜬 추적글을 보았는지라 우린 강경애 모독기사를 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김좌진장군암살 진상여부에 대해 잘 모르고있는 우리로서는 이렇다 할 견해를 내놓을수가 없었다.그때다. 사무실에 50대초반의 리광인씨가 들어섰다. 리광인씨는 78년급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이지만 대학졸업 후 줄곧 조선족항일투쟁사를 전공한데서 뭔가 알고있을것 같았다. 2004년 3월부터 추진회에 출근했고 사이트에서 리함으로 통하고있는 리광인씨를 두고 강경애모독기사를 보았는가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했다.《리선생은 한국 인터넷에 뜬 추적 글을 어떻게 보고있소?》《전혀 엉터리없는 독단글입니다.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합니다.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사람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사람입니다.》리광인씨는 단마디로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함을 자르고있었다.《력사근거가 똑똑하오?》《저한테 자료가 있습니다.》나는 졸지에 희망의 섬광을 보아냈다. 이래서 우리 셋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서 강경애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자는데로 합의를 보았다. 리광인씨는 론문으로 써내겠다고 시원히 대답했다. 이는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력사의 숙제로 그냥 남아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억울한 사람을 친일파로 몰아부쳐서는 안된다. 식민지 36년이라는 우리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 만들어낸, 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은지 6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이 저승에 간 사람까지 억울하게 만든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강경애를 풀어주어 명예를 원상복구할수있는 유일한 길은 유력한 력사적증거를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투창(投槍)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월 24일 월요일인데 리광인씨가 사무실에 들어서며 론문을 메일로 넘기였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짧디짧은 며칠새에 해당 력사자료를 검토하고 론문으로 만들기까지 하였다니 말이다. 알고보니 리광인씨는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론문을 토요일인 1월 22일 써냈는데 그날과 이튿날은 련휴일이여서 월요일로 미루었던것이다.리광인씨의 론문을 읽으니 조리정연하고 설득력이 강했다. 또 편집자의 말까지 쓴데서 나는 신중성을 기하여 수정하고 김혁씨에게 넘기였다. 김혁씨는 유망한 젊은 작가이고 우리 문단의 인터넷고수이니 수정고 《편집자의 말》을 제꺽 타자해냈다. 사이버토론에 관한 부분적 마디는 김혁씨의 의견에 좇았다. 짤막한 《편집자의 말》을 전례없이 세 사람이 손을 댔다는 말이 된다.<<요즘 한국 <조선일보> 인터넷을 통해 일제 강점기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면서부터 혼선을 빚고있다. 이에 본 사이트는 리함의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라는 론문을 올리오니 국내외 지성인들이 강경애 시시비비토론에 적극 동참하여.주기를 바란다. 본 사이트는 <열린마당>코너를 통하여 이 토론을 한동안 지속적으로 끌고나가려 한다. 이 토론은 어디까지나 실사구시하고 학술적으로 되여야 하기에 인신공격이나 불순한 정치적목적이 담긴 글이 오를 경우에는 관리자들이 삭제할 권한이 있음을 알린다.>> (<<문화산맥사이트 편집자의 말>>)김혁씨의 한동안의 긴장한 인터넷작업을 거쳐 이 편집자의 말과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가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랐다. 시시비비의 대중화를 기해 《열린마당》 코너에 올리고 공지사항에 또 강경애의 사진석장을 이어 올리였다. 그때가 1월 24일 오전 10시였다. 여기에 또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틀전인 1월 22일, 《도라지》문학지 사이트에 북경의 장춘식박사가 반벽거사라는 필명으로 쓴 글 《조선족작가 강경애의 행적에 관련된 두 시각》이 이미 올라있었다. 리광인씨가 론문집필을 끝낸 1월 22일과 같은 시각이였다. 1월 24일 우리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강경애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자 그날 밤 8시 경에 장춘식씨가 필명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 《소설가 강경애의 김좌진장군피살 련루설에 대하여》와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을 본후의 추가론증을 올리였다. 북경의 40대 후배의 가담은 나에게 큰 힘으로 되였다.강경애시시비비에 대한 사이버토론이 벌어진후 리광인씨는 이 사이버토론에 뛰여든 사람을 찾기 어려울것 같다면서 북경에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장춘식씨와 손을 잡고 이 사이버토론을 벌려야겠다고 속타산을 터놓았다. 내가 련계전화를 알리였더니 리광인씨는 주동적으로 장춘식씨와 통화하면서 긴밀한 합작을 기대했다. 이들은 서로 인연이 닿지 못한 사이였다. 하지만 장춘식씨는 괘히 승낙하였다.열린마당 코너에 오른 리광인씨의 론문을 보고 장춘식씨가 강경애의 1929년 룡정행을 두고 문의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에 리광인씨는 1월 25일 《반벽거사님께 해답》함이란 글을 올리여 자기가 1929년설을 따르게 된 연유를 성의있게 밝히였다. 장춘식씨도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였다. 이같이 이들은 사람에 앞서 인터넷으로 인연을 맺고 자주 통화를 가지였다. 장춘식씨는 무게있는 반론글들을 수차 올리면서 동참을 보이였다.사이버토론이 깊이있게 벌어질수록 떨쳐버릴수 없는 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집단적인 비밀행동이였다는것은 사실로 밝혀지면서 강경애와 무관하다는것이 지적되지만 이 기간의 강경애의 행적은 밝혀야 했다. 1929년 첫 간도행설이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한데서 더욱 그러하였다. 이 점을 리광인씨와 이야기해보았더니 그때까지도 강경애연구전문이 아닌 광인씨로서는 상기 《반벽거사님께 해답》정도에 머무르고있었다. 그랬지만 리광인씨는 이를 꼭 밝히여내겠다고 나에게 말하였다.드디여 2월 5일 우리 열린마당코너에 리광인씨가 쓴 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 올랐다. 사이버토론이 벌어져 10일만의 일이였다. 이 글에서 리광인씨는 강경애의 간도행은 재래의 1929년이 아니라 1931년 봄이라고 일목정연하게 밝히여 나를 탄복케 하였다.사연은 이러했다. 2월초의 어느날 리광인씨는 시가지에 볼일이 있어 나온 연변대 리광일교수를 만났다가 그한테서 한국판 《강경애전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리광인씨의 청구에 리광일씨는 그 시각 하던 일을 미루고 연변대학 자기 사무실에 가서 리광인씨에게 《강경애전집》을 넘겨주었었다. 2002년 5월 수정증보로 되고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녀교수의 엮음으로 된 《강경애전집》이였다. 리광인씨는 보물을 얻기라도 하듯 며칠간 <<강경애전집>>을 깐깐히 독파하고 강경애 본인의 평론과 수필을 통해 강경애 첫 연변행이 1931년 봄이란것을 실증했다. 이외 여러가지 자료연구를 통해 써낸것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다.내가 알건대 강경애의 첫 룡정행을 두고 강경애관련 연구학자들이나 해당 이들은 모두 1929년설을 따르고있는 실정이다. 연변대 채미화교수나 북경의 박충록교수, 연변의 김순금선생, 조선의 은종섭, 김창현 연구가들 모두가 그러했다. 리광인씨가 밝히여낸데 의하면 이들 연구가들의 연구시원은 모두 조선의 김헌순학자가 쓴 《강경애론>>이였다. 《강경애론》은 《현대작가론》에 실린 글로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1961년에 펴낸 책으로 알려진다. 이 책에서 김헌순학자가 1929년이라고 하니 그후 학자들은 모두 이를 답습하고있는 터였다.큰 시름을 덜었다. 김좌진장군의 암살자가 밝혀지고 강경애의 첫 연변행, 다시말해 첫 만주행이 1931년으로 밝혀짐으로써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과 무관하다는것이 사실로 립증되는것이다. 연변대 리광일씨가 큰 도움으로 되였다. 한국 이상경교수의 《강경애전집》이 아니였더면, 리광일씨의 도움이 아니였더면 1931년설을 인차 밝혀내기 어려웠을것이다. 따라서 리광일씨는 광인씨의 청구대로 한국의 이상경교수와의 련계를 이어주었다. 리광인씨는 이상경교수와 자주 메일련계를 가지는 가운데서 이상경교수를 통해 한국의 소식과 동태를 깊이 헤아릴수 있었다.이상경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고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한 분이며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전렬에 나선 분이였다. 하지만 이상경교수는 김좌진장군 피살력사를 모르고 그때까지도 강경애 첫 연변행을 1929년으로 본데서 힘있는 반론을 내놓을수가 없었다. 우리 문화산맥사이트가 시비를 벌리니 이상경교수는 상기 두가지 관건시비에서 큰 론거를 얻게 되여 강경애선정에서 끝끝내 관건적인 기여를 하게 되였다. 3월의 문화인물로 한국서 떠올랐던 강경애는 한달 푼히 문화인물란에서 소외되여 자취를 감추고있는 실정이였다.이에 따라 나는 강경애에 관한 토의가 영형력을 과시하자면 한국의 문화관광부사이트에 우리 글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리광인씨는 나의 뜻을 헤아리고 인터넷에서 문광부사이트를 찾아냄과 동시에 한국문화관광부 정동채장관에게 드리는 글 두 편과 강경애의 무죄함을 증명한 우리 글 8편, 도합 10편을 연속 올리여 한국의 지성인들과 배합하여 나섰다.이밖에 《도라지》문학지에서도 수고가 많았다. 이 문학지사이트는 문학살롱코너와 자유게시판코너를 통해 장춘식씨의 강경애 관련글들을 제때에 올리고 우리 문화산맥사이트의 사이버토론글 4편을 《문화살롱》코너에 올리여 지성인들의 주의를 보다 환기시키였다.《도라지》에서 이 모든것을 소리없이 이끈것은 반벽거사—장춘식씨였다.문화산맥사이트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강경애의 김죄진장군암살 시비≫는 2005년 1월 24일부터 3월 7일까지 한달 남짓이 지속되였다. 도합 근 20편의 론문과 글들이 올랐는데 장춘식씨가 3~4편의 글을 쓰고 대부분은 리광인씨가 썼다..
강경애, 천국에서 미소 짓다
2월 28일, 우리는 한국의 이상경교수와 한국문화관광부 사이트를 통해 녀류작가 강경애는, 한동안 보류 혹은 락방될 위험 끝에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최종 선정되였다는 바라고 바라던 뉴스를 접하였다. 그리고 한국 이상경교수가 보낸 한국문화관광부 편 <<2005년 3월의 문화인물 강경애>> 책자를 받았다. 이는 단순한 선정이 아니라 강경애를 친일로 몰아가던 모독설에 대한 힘있는 반격, 강경한 부정이였다. 이로 하여 강경애는 천국에서 미소를 짓게 되였다. 이 뉴스는 그날로 리광인씨의 글 《강경애는 끝끝내 선정되였다》로 문화산맥사이트에 떴다.《도라지》문학지 사이트는 이 글을 적시적으로 본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리였다. 이튿날 3월 2일 그들 자유게시판에는 또 《강경애명예 원상복구에 힘바친 이들께》란 올드컴의 서명글이 올랐다. 머리가 수그러지는 감사한 글이였다. 이 글은 《도라지》사이트의 주선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도 떠서 힘으로 되여주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올드컴이란 김혁씨, 시시비비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혁씨의 소행이였다. 그 글을 옮기면 이러하다. <<지난 몇 달간 한국 매스컴들에서 반도를 들썽하며 혼선을 빚었던 강경애 김좌진 암살동거범 시비가 끝끝내 우리들의 승리로 락착을 보았다.이는 우리 재중조선족의 문화의 힘을 환기시켜주고있다.이 거대한 시비에서 북경의 반벽거사님, 연변의 리함님 등 여러 학자 지성인들이 사명감으로 강경애 위상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바치고있음을 그 동안 나는 보았다.력사의 음영 헤치기 작업에 로고를 아끼지 않은 반벽거사님, 리함님께 진심 축하와 감복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그리고 성숙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수고했수다>>라는 치하의 글을 올렸는데 그 원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우리 민족의 녀류작가 강경애가 시시비비 끝에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으니 참 잘했수다. 여러 지성인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리함, 반벽거사님 고맙습니다. 특히 <강경애 시시비비토론을 벌린 문화산맥 홈페이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잘했수다. 수고했수다.>>한국의 이상경교수(3월의 문화인물선정위원회 위원)도 2005년 2월 28일에 리함에게 감사의 메일을 보내왔다.<<리함선생님께답신이 좀 늦었습니다.강경애는 그대로 3월의 문화인물로 하기로 결정되였습니다.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고 또 연변에서 문광부 게시판에 글도 올려주시고해서 친일파 운운은 사실무근인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관심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서도 과거사 정리 어쩌고 하면서 앞으로도 다른 인물을 놓고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보훈처에서 제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10월에는 김좌진장군이 선정되여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관심 가져 주십시오.관련회의를 하면서 이쪽에서 제시했던 자료를 한부 첨부합니다. 참고해 주십시요.리광일 선생님, 장춘식 선생님께도 소식과 안부 부탁드립니다.이상경 드림>>.력사의 진실앞에서 모든 허위와 모독은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였다. 이번 토론에서 시종 주장으로 뛴 사람은 리광인씨이고 다음은 장춘식씨였다.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사명감을 지닌 노력이 없었다면 강경애 시시비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수가 없었을것이다. 력사는, 조선족문학사는 이들의 수고를 잊지 않을것이다. 아마도 지금 강경애는 천국에서 악령처럼 따라붙으려 하던 친일, 살인 혐의에서 놓여나와 환한 미소를 짓고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어느 누가 강박을 하지 않는데도 자진하여 일본극우세력의 충견(忠犬)으로 된 오선화, 김문학 같은 ≪신친일파(新親日派)≫들이 속출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일제 식민통치 36년, 광복후 60년 동안의 친일파숙청의 지연(遲延)이라는 이 콘텍스트를 념두에 두고 문제를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강경애를 두고 친일논난을 벌렸듯이 개인별 적발도 필요는 하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성을 기해야 할것이며 단 한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될것이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 다시 새로운 상처를 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리고 친일문제 해결에 있어서 개인별 적발과 동시에 구조적으로 친일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라는 큰 콘텍스트 안에서 친일문제를 다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접근을 넘는 기관단체들의 참회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대안일수도 있다. 각 종교단체, 각 언론단체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친일을 고백함으로써 대관용으로 가는 길을 예비해야 할것이다. 이를테면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여 혼선을 빚어냈던 한국 <조선일보>는 그래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놓여나는 근본적인 길은, 대관용을 바탕으로 동아세이와 함께 21세기를 여는 열쇠를 특히 죄없는.따는 그 근사한 작업에 모국이나 해외동포들이 동참할수 있을터인데, 모국인 한국에서 소모적인 쟁론만 횡행하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사람에게 억울하게도 친일파란 감투를 들씌움으로써 끍어 부스럼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안쓰럽기만 하다. 연변문학, 2007년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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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