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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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사진속의 육신보전 돌계단 이모저모 댓글:  조회:3516  추천:94  2007-07-26
육신보전 돌계단에는 허다한 심혈과 수수께끼가 담겨 있습니다.오늘 그 돌계단의 현장을 둘러보심이 어떠할가요?
184    【구화산순례】(7) 지장보살님 육신보전 찾아서(2) 댓글:  조회:3317  추천:106  2007-07-26
【구화산순례】(7)        지장보살님 육신보전 찾아서(2)         구화산에 오른 첫날 육신보전을 배알하였지만 시간에 쫓기는 걸음이다보니 무엇을 옳바르게 헤아리지 못했다. 더구나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돌계단 수자유래는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한데서 첫 걸음에 무심하게 지나치고말았다. 이것이 맘에 걸려 세번째날 오전, 나는 첫 코스로 육신보전을 다시 찾아나섰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북쪽산문을 지나고 미륵전을 지나니 지장선사 나타난다. 지장선사 남으로는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본격적인 돌계단길인데 첫구간은 좌우량측 랑하로 나뉘여져 두갈래로 오을수 있다. 두갈래가 합치는 곳에 정심전(定心殿)이 있고 그 다음부터는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외통 돌계단길이다.       돌계단길은 두개 계단으로 나뉘여있다. 첫계단 돌계단을 헤여보니 26개이다. 이는 김교각이 당나라에 올 때 나이를 가리킨다지만 지금도 깨치지 못하는것은 신라서 배로 올 때 나이 24살인데 26개로 나타나는 현실이다.       두번째 계단 돌계단은 비교적 가파롭지만 99개로 헤아려졌다. 이는 김교각님이 시적할 때 나이를 가리킨다고 가이드가 첫날 알려준바 있다. 하다면 84계단이요, 81계단이요 하는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나는 일순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행여나 하여 육신보전 오르는 남쪽구간에 가보니 나는 하마트면 큰 소리를 지를번 하였다. 남쪽 등반길 돌계단이 81개를 이루고있었다.       나는 끝내 육신보전 남북등반길의 돌계단수와 그 수수께끼를 터득하고말았다. 지금 그 유래를 밝히여본다.    시초, 1000여년전의 옛날 김교각님의 제자들은 스님을 모신 석탑을 보호하고저 탑밖에 장엄한 대전을 일떠세웠다. 오늘 말하는 육신탑이다. 김교각은 신라사람이여서 생전에 늘 자기의 사랑하는 조국을 되뇌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육신탑을 세울 때 좌북 남향의 상례를 타파하고 대전의 문을 좌남북향으로 열게끔 심혈을 기울였다. 또, 스님의 숙원을 존중하여 99는 81에 3급의 뜻을 따서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돌계단을 84개급으로 만들었다. 헌데 지금의 육신탑의 전문은 북이 아닌 남으로 열리여있고 돌계단도 84개급이 아닌 81개로 되여있었다. 이를 두고 나는 많은 자료들을 뒤적이여서야 그에 깃든 유래를 어느 정도 깨칠수가 있었다.    청나라 건륭재위기간에 건륭황제는 사복차림으로 수차나 강남땅에 다녀갔고 구화산에도 오른것으로 력사는 말한다. 육신보전을 배알할 때 건륭황제는 신변의 주지 방장을 보고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돌계단이 모두 얼마급으로 되였는가고 물었다. 방장은 84개급이라고 답하였다. 그 답이 건륭황제한테는 “84”의 “4”발음이 죽을 사(死)자로 들리였다.   “4는 죽는다는 뜻이지, 타당치 못해, 타탕지 못해.”    건륭황제의 말씀이다. 육신보전앞에 이른 건륭황제는 또 이마살을 찡그렸다.   “천하의 사찰들은 모두 북으로 앉아 남으로 열리였는데 이 대전만은 어이하여 좌남북향인고?”    이에 방장은 김지장이 신라출생이고 신라가 구화산의 북녘에 있기에 이렇게 일떠세웠다고 말씀올리니 건륭황제는 “김교각은 비록 신라왕실 출신이기는 하나 중화에 왔고 또 나 대청천민이니 어떻게 다를수 있는고?”라고 코방귀를 뀌였다.   건륭황제가 떠나간후 주지 방장은 곧 지방의 관부와 상의하고 육신보전의 산문을 북향으로부터 남향으로 앉게 하고 돌계단도 84개를 81개로 고치여놓았다.   “음, 이런 영문이였구나!” 나는 심산이 잡히여 그제야 남북쪽 돌계단 등반길을 떠나 육신보전에로 다시 돌아왔다. 육신보전의 유래소개가 또한 나의 마음을 무시로 끄당기였다.    육신보전—월신보전이라 불리우는 지장보살님 묘소는 오늘의 구화산 신광령 령마루에 자리잡고있지만 력사속의 신광령마루는 워낙 남대라고 불리였다. 김교각님이 늘그막에 늘 시종들을 데리고 남대에서 경을 읽고 참선하였다하여 제자들은 스님이 세상뜬 후 그의 시신을 남대에 모시였다. 3년후 안장하려고 항아리를 열어보니 앞에서 밝힌 신비한 광경이였다. 제자들이 보건대는 정녕 불경에서 밝힌 지장보살님의 변신이였다.    한데서 그들은 불교의 례법대로 스님을 가부좌 그대로 수습하여 항아리에 넣은다음 남대에 탑을 세우고 그안에 안치하여두었다. 후에는 탑밖에 또 전각을 세우고 월신보전이라고 불렀으니 탑의 건축구조가 특이할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각안에 탑, 탑안에 항아리, 항아리속에 김교각님 육신을 안장한 국내외에서 보기드문 안치방법이였다.    남대∼신광령에 육신탑이 세워져 천여년래 육신보전은 수차의 수리과정을 거치게 된다. 명나라 만력년간에 조정에서 금을 주어 절을 새로 수축하고 황제로부터 “호국육신보탑(護國肉身寶塔)”이라는 절이름을 하사받았다면 청나라 강희황제와 건륭황제는 구화산에 각기 “구화성경”(九华圣境), “분타보교”(芬陀普教)란 편액을 내리였다. 청나라 강희 23년에 안휘 순무 유성룡에 의해 육신보전은 거듭 수리되나 함풍 7년 화성사와 함께 재난속에 타버리자 청나라 동치년간과 민국초기에 다시 다시 수리하게 된다. 2005년 음력 7월 29일에는 강택민 주석이 월신보전을 시찰하고 “호국월신보전”이라는 편액을 써주시였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육신보전에 대한 리해가 깊어갈수록 더 알고만 싶고 떠나기가 아쉬웠다. 육신보전가를 조용히 거니노라니 북켠 왼쪽에 소소리 높이 일어선 두 그루의 고목이 나의 주의력을 끌었다. 한그루는 황담수, 수령이 533년이고 다른 한그루는 청전류(青钱柳), 수령이 382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중 청전류는 금전수로서 민간에서는 흔들면 돈이 떨어진다는 돈나무로 이어졌다.    청전류 바로 북쪽아래가 육신보전에로 오르는 돌계단길이다. 돌계단은 웃부분에 이르러 그 우가 육신보전 종루인데 종루아래를 남북으로 룡주교(龙珠桥), 천종교(天锺桥)로 부른다. 돌계단 아래서 올려다볼 때 천교가 하늘을 가로지른것 같다하여 천종교, 천종교를 지나 돌아보면 또 룡주교,그 아래로 가파르게 펼쳐진 두계단의 돌계단길, 귀로에 돌계단길을 다시 거치며 나는 송말원초의 진암의 시 “김지장탑”을 떠올렸다.    여든네개 돌층계 층층히 뻗치고  탑우의 풍경소리 반공에 울리네  오백년도 나마되는 지장무덤 예 있어  뭇사람들 저마다 꿈길을 더듬누나    시속에 흘러간 천고의 돌계단길 쭈욱 펼쳐지며 안기여드는것 같았다.  
183    【구화산순례】(6) 지장보살님 육신보전 찾아서(1) 댓글:  조회:3066  추천:101  2007-07-25
【구화산순례】(6)      지장보살님 육신보전 찾아서(1)     구화산에 이르니 구화산 관련안내서나 관광지도 등을 어렵사리 찾아볼수 있다. 여러 안내서들에서는 모두 구화산의 90여개 불교사찰중 가장 신성한 장소가 지장보살 김교각님 모신 육신보전이라고 한다. 민간 가이드녀와 육신보전을 먼저 찾아보자고 하니 그는 두말없이 나를 그리로 안내한다. 알고보면 육신보전은 구화거리 도심에 자리잡은 원 화성사 서쪽의 신광령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화거리를 동서로 지르는 거리길따라 걷노라면 길왼쪽가에 《구화산》《련화불국》이라고 쓴 산문이 보이면서 웅장한 대비보전과 화엄보전이 나타난다. 가이드는 새로 지어진 화엄보전을 가리키면서 구화산서 최대의 불교사찰로 곧 떠오르게 된다고 알리였다. 화엄보전 불교사찰 구간을 지나니 또 하나의 웅장한 불교사찰 대웅보전이다. 가이드는 대웅보전은 당신네 고대 조상 지장보살님 불상을 모신 불교사찰인데 보지 않겠는가고 물어온다. 그러면서 저 대웅보전을 9.9전이라 부른다고 동을 달았다. 99라면 지장보살님 나이를 가리키지 않냐고 했더니 옳다고 하면서 불상의 높이가 9.9메터라고 알려준다. 대웅보전 가까이 안내도에는 과연 99전이라고 밝혀져 있었다. 대웅보전을 지나면 민가와 영업가게들이 밀집한 구화거리의 중심거리이다. 이 중심거리 서켠 왼쪽가에 솟은 산이 신광령(神光岭)이고 신광령에 지장보살님 육신보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육신보전(肉身寶殿)은 워낙 김지장 탑으로 통하고 있었다. 김지장의 원래 이름이 교각인데 구화산의 모든 자료들에는 신라국의 왕자요, 김씨의 근친으로 밝혀져 있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즐기여 출가하더니 당나라 지덕년간에 항해하여 당나라에 이르렀고 나중에 구화산에 올라 도를 닦다가 학도들을 모아놓고 불교를 가르치니 어느덧 그 나이 99살. 99살 되던 해 정원 10년(794년) 어느날, 김교각은 갑자기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갈때가 되였다면서 3년후 다시 제자들 속에 오게 되리라고 얘기하고는 고별한다. 전설에서는 이때 산이 울리고 돌들이 굴러 내려왔다고 한다. 제자들은 스님을 항아리에 염하여 두었다가 3년만에 항아리뚜껑을 열어보니 스님의 안색이 산사람과 같고 비단으로 감싼 손이 부드러웠다고 알려진다. 팔을 쳐드니 뼈마디에서 금쇠 흔드는 소리까지 났다는데 불경에 시적한 부처의 뼈마디에서 금쇠흔드는 소리가 나게 되면 그는 곧 세상에 내려온 보살이라 기재되여 있질 않는가. 또, 불경의 기재대로 스님의 령이한 단상이 지장보살의 단상과 똑 같았음으로 제자들은 지장보살이 세상에 내려온 것으로, 다시 말하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기였다. 불교의 법대로 김교각의 육신을 항아리에 넣어 탑 밑에다 안장하고저 탑을 세울때 탑터에서 불빛이 번뜩번뜩하여 여기 산마루가 신광령이라고 불리우게 되였다고 전해진다. 불경의 소개에 따르면 지장보살이란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가 입멸하고 미륵이 탄생하기전에 고통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중생들을 구원해 주는 대비보살을 가리킨다. 불교속 지장보살 고불(古佛)은 석가모니의 부탁을 받고 중생을 구제하는 석가모니의 사업을 보좌하였는데 흉금이 대지처럼 넓어 무한히 자선할수 있는 씨앗을 간직하고 있었단다. 불교가들의 말이다. 그런 보살님의 맹세를 보노라면 《지옥에 있는 고통스러운 중생들을 몽땅 해탈시키지 못하면 천당으로 올라가도 부처가 되지 않겠다》이니 저명한 력사학가 범문란선생의 말처럼 《이 말은 정말로 그의 큰 포부를 말하》고 있었다. 신라인 김교각은 이같이 세상을 뜬후 안색이 산사람 같고 령마루가 빛났음으로 제자들에 의해 동방에서 광림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떠오르면서 김지장이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불교속 지장보살을 알고 김지장의 래력을 알게되니 육신보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만 진다. 도중에 련못가를 지나니 하늘높이 치솟은 웅위한 육신보전 산문이 시야에 안겨든다. 육신보전 산문내는 또 하나의 웅장한 미륵전이고 그 다음은 신성한 지장선사가 련이어 나타난다. 지장선사 다음이 령마루에 자리잡은 육신보전인데 육신보전으로 오르자면 가파른 기슭따라 올리뻗은 두갈래 돌계단랑하를 지나야 한다. 두갈래 랑하가 합치는 곳에 정심전(定心殿)이라고 불리우는 휴식정자가 있고 휴식정자부터는 육신보전으로 통하는 외통 돌계단 길이 보인다. 가이드는 여기 돌계단은 크게 두개 부분으로 되여 첫 부분은 계단이 26개, 지장보살이 신라에서 당나라로 올때 나이를 가리키고 둘째부분 계단 99개는 지장보살님의 나이를 가리킨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두 계단 100여개 돌계단을 오르면 령마루 왼쪽가가 지장보살님 모신 육신보전이다. 육신보전 앞 광장은 향대 타는 연기로 자옥하다. 나는 령아래 산문가에서 마련한 세대의 붉은 초에 불을 달고 향 세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쉽지 않았으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이드와 문의하면서 타들어가는 향대 세대를 정히 들고 육신보전을 향해, 동서남북을 향해 기도드리니 진짜 불교도를 방불케 했다. 육신보전 전당내에 지장보살님 모셔지고 그 우에 목질팔각형 7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의 매 층마다 크지않은 지장보살님 전신불상 8존이 모셔져 도합 56존을 이루니 그 기상이 지장보살님을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탑을 따라 왼쪽으로 세번 돌며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 나도 그들 따라 세번돌며 동서남북 네면 모두 경건히 기도드리니 지장보살님 뵈울 면목이 서는것 같았다. 겨레의 위대한 문화거인님이여서 경건한 기도는 응당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육신보전 배알속에 시간은 빨리도 흘러간다. 걸음마다 모든걸 알고 지나자면 시간이 허락하질 않는다. 나는 육신보전을 다시 한번 배알하면서 보다 더 헤아리기로 하고 남으로 신광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육신보전은 오르면서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돌아서지 않는다고 말을 건네온다. 무엇때문인가고 나는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182    (감상)구화산에 련꽃이 활짝 피였어요 댓글:  조회:3187  추천:106  2007-07-24
구화산 련꽃을 감상하세요.1000여년전 우리 겨레 고대위인 김교각님께서 구화산에 련꽃을 심으면서 구화산의 련꽃사가 시작됩니다......
181    【구화산순례】(5) 구화산 련꽃향에 늘 취하고 싶어 댓글:  조회:2849  추천:116  2007-07-24
【구화산순례】(5)    구화산 련꽃향에 늘 취하고 싶어     련화불국 구화산은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 경내에 위치, 풍경구 면적은 120평방킬로메터, 북으로는 장강에 잇대여 있고 남으로는 황산과 이어져 중국의 불교명산으로 그 이름이 해내외에 뜨르르하다. 이같이 이름난 구화산 불교명산 순례는 2007년 7월 9일, 내가 선참 순례의 발걸음을 내디디며 구화산의 련꽃향기 맡은것은 련화불국의 천고의 유래담긴 구화거리 첫 어구의 련꽃늪이였다. 구화산풍경관리구와 구화거리는 직접 고도 500메터쯤을 기록하는 산아래와 산우로 나뉘여 있는데 구화산의 유일한 평지는 구화거리가 자리잡은 구화산 산우에 있다. 민국 14년의 《구화산지남》에서는 《이곳은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성을 쌓아놓은것 같다》고 묘사하면서 《당조 지덕년에 고을의 제갈절 등이 지장왕을 위해 절을 지었고 또한 절앞에다는 방생지(放生池)를 팠다》고 기록했다. 《구화산지남》에 나오는 이 절이 화성사, 동방의 신라국에서 당나라 구화산에 와서 도를 닦던 김교각은 화성사 앞에다 《반달형의 못을 파고 고기를 기르고 련꽃을 심었다》라고 전해진다. 이 방생지가 반달형의 못이라 하여 월아지(月牙地)라고 부르다가 방생지로 이어지지만 지금의 방생지는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반달아닌 긴 타원형으로 되여있는데 천고의 련꽃은 볼수 없다. 그 시절 천고의 련꽃은 여기 방생지가 아닌 구화거리 첫 어구 길가 오른편에 펼쳐지고 있었다. 7월 초순은 아름다운 련꽃이 서로에게 뒤질세라 앞다투어 피여나는 호시절이다. 마침 이 호시절에 맞게 구화산에 이른데서 구화산의 백련, 홍련 련꽃세계가 나의 시야에 그대로 고스란히 안겨들었다. 련꽃을 자주 대하지 못하는 나한테는 신비의 세계이기도 하여 나는 련꽃늪 주위를 오가며 부지런히 디지털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내가 왜 대자연이 하사한 이 련꽃들에 이다지도 심취하게 되는걸가? 이를 알자면 지난해 2006년 9월 초 절강 소흥으로 온후 지장보살 김교각님의 발자취답사부터 얘기해야 할것 같다. 소흥에서 김교각님의 발자취 답사에 나서자면 절강의 불교사찰들을 찾아 다녀야 했다. 절강 천대산에는 불교사찰만 해도 110여개가 된다는데 불교사찰들에는 흔히 인공늪으로 된 방생지가 펼쳐지고 련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알고보니 불교에서의 련꽃은 군주의 형상으로 나타나면서 불교계에서 숭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만큼 불교의 상징으로 되는 련꽃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꽃으로서 그 시초를 거스르면 고인도의 부처님—석가모니가 설법을 하실 때에도 련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다고 알려진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날 영산회상(會上)에서 설법에 나선 부처님이 설법은 하지 않고 련꽃 한송이를 들어 신도들에게 보이고있었다. 그럴때 여느 신도들은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가섭 존자라는 제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가리켜 불교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라고 하는데 중국불교의 8대 류파의 하나인 선종(禪宗)에서는 세곳에서 마음 전하는 리치라면서 대단히 중히 여기고 있다고 한다. 다 아시다시피 련꽃은 늪이나 호수, 못의 진흙탕에서 자라난다. 이런 련꽃이 진흙탕이 무어냐듯 물들지 않고 주변의 어지러운 환경에 물들지 않고 도고하게 자라면서 아름답게 피여난다. 이런 련꽃현상을 가리켜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일컿는데 그 뜻인즉 더러운 진흙탕에서 자라면서도 항상 깨끗함이다. 다시 말하면 련꽃은 진흙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련꽃잎은 티끌하나 묻지 않고 깨끗하기만 하다, 련꽃잎우에서는 한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시라, 련잎에 떨어진 비물이나 이슬은 그대로 모여 굴러 떨어질뿐 물방울이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련꽃같이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라 하고 련꽃을 꿈에 보면 길하다고 한다. 하물며 꿈도 아닌 현실에서 련꽃을 보거나 대할 때의 정경은 어떠할가. 나는 지금 구화산의 련꽃늪가를 조용히 거닐며 련꽃향에 취하고있다. 천여년전의 지장보살 김교각님이 선참 심었다는 구화산의 련꽃, 활짝피여 웃고있는 한송이 한송이의 련꽃을 보니 말그대로 내 마음과 몸이 한결 맑아지고 포근해지는 느낌이다. 나도 련꽃처럼 활짝 피는, 성숙함이 풍기는 인품의 소유자가 된듯한 기분이다. 오, 구화산의 련꽃이여, 지장보살 김교각님의 숨결어린 련꽃이여~ 내 그대향에 늘 취하고 싶어, 내 그대향속에 살고만 싶어 구화거리 첫 어구의 련꽃늪에 이어 화성사 방생지 지나 육신보전 어구의 또 다른 련꽃늪 찾아가는걸가. 오, 나는 행복해, 나는 복받은 인간이지.  
180    【구화산순례】(4) 구화산서 돈미끼에 걸려들번 댓글:  조회:3624  추천:138  2007-07-23
【구화산순례】(4) 구화산서 돈미끼에 걸려들번       내가 투숙한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여느 려관집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니 음식제공도 없어 호텔아래 개인간이음식부에서 밀가루음식 따위로 대충 에때울수밖에 없었다.“마음씨 고운” 간이음식부 사람이 택시를 불러주어 나는 뜻대로 구화산순례에 나설수 있었다.     청양현성에서 구화산까지 서남방 20여킬로메터라고 한다.택시는 낯모를 부자간까지 태우고 잠간사이에 현성을 벗어나 구화산행 첫구간 산간길에 들어섰다. 현성보다 높은 지대였다. 내가 운전사와 실례인지는 모르겠으나 구화산을 끼고있는 청양현성이 아주 스산해보인다고 소감을 터놓으니 사실이라면서 지금 령도자들은 천혜의 구화산을 가진 지역적우세를 잘 리용할줄 모르니 현성의 모습이 그럴수밖에 없다고 동감을 표시한다. 그러던 운전사와 낯선 부자간이 오른쪽 골안어구를 가리키며 옛날에 지장보살 김교각이 구화산에 오를 때 거쳐가던 절이라며 보지 않겠는가고 물어온다. (구화산으로 데려다만 주면 되지, 도중에 시간을 지체하며 무엇인가 소개할 땐?) 나는 일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기고 호의로 거절해버렸다. 이번에는 또 묻지도 않고 골안 령마루 길가 왼쪽가 이른바 단층집 룡두사찰로 차를 몰아가며 지장보살님이 처음 수년을 거쳐가던 곳이라며 꼬드겨댄다. 신성한 불교사찰에서 돈냄새를 풍겨올 땐 흔히 얼떠기가 섞이였음을 의미한다. 허나 구화산행에서 여기를 거치지 않으면 지장보살님이 구화산에 다녀간줄 모른다고 거듭 주절대는데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수가 없다. “한번 향불에 값이 얼만데요?” 내가 묻자 승려복을 입는 사람은 성의문제라며 최소값이 100원이라고 모를 박는다. 별수없이 시킨대로 100원을 내고 향세대를 골라 향로불에다 불을 붙이는데 승려복임자는 무엇인가 주절거린다. 이윽고 향불기도가 끝나자 주절거리던 승려복임자는 또 뭐라고 주절주절대며 불교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거들은다.  순간 나에게는 승려복임자나 운전사가 모두 한통속 사기군들로 안겨들었다. 언젠가 소흥에서 약 100리 되는 고대미인 서시의 고향 제기로 갔고 태산묘인가 돌아볼 때 안해도 이런 승려복차림의 가짜 중들앞에 걸리여 들어 사주를 본다고  서두른다. 뒤미처 이를 발견하고 안해를 나꿔채 무작정 끌고가니 이른바 중은 얼굴색이 변해가며 나에게 독기를 피여올린다. 내가 무조건 막아나섰기에 말이지 그날 안해가 가짜 중의 설교에 걸려들었더면 그자들이 부르는것이 돈이라 그대로 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 눈앞의 승려복임자도 꼭 그러한 차비다. 나는 단연히 거절하고 운전사를 돌려세웠다. 그리곤 구화산행에 오르는 손님을 이런 곳에 데려온건 잘못이라고 모를 박았다. 설교를 서두르던 승려복임자 역시 제기때처럼 얼굴색을 흐려간다. 이쯤이면 무엇이 알리지 않는가, 이런 자들은 십중팔구는 승려의 행색을 내는 가짜 중놈들이다. 구화산에 오른후 내가 불교를 신봉하는 려관방주인과 룡두사찰이야기를 꺼냈더니 한마디로 믿을수 없는 사기군들이요, 가짜 중놈들이라고 찍어버린다. 구화산순례는 구화산에 올라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른바 룡두사찰에서 발목을 잡힐 필요가 없다고 동을 단다. 허나 돈미끼 행각이 이쯤에서 막을 내리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다. 구화산 120평방킬로메터 풍경구내가 99개 봉우리, 90여개 대소불교사찰로 이루어졌기에 안내자를 찾아야 했는데 민간안내자 녀인은 나를 흔들면 나올수 있는 돈주머니로 생각했던지 처음 안내로 어떤 불교중심사찰 건설현지로 데리고 간다. 불교사찰에 시주하라는 뜻이렸다. (내가 뭐 돈 내 풍기는 부자인가?) 기분이 잡친 나는 완곡히 사절해버리였다. 이번에는 지장보살 육신전에로 안내하며 향매대로 데리고 간다. 향불은 석대가 기본인데 흔히 50원이라나, 그럼 50원짜리를 달라했더니 50원대는 너무나 보통 향대라고 한다. 속이 비트러진 내가,얼마짜리를 사든 네가 비칠일이 아니잖으냐 하고 핀잔을 주었더니 찍소리도 하지 못한다. 남방에 온후 내가 고대 겨레발자취 찾아 다니는 곳이 흔히 불교사찰이지만 나는 기부나 향불, 기도에 뛰여들지 않는다. 불교도가 아닌데도 있겠지만 “가난한” 선비인 나로서 이런 행렬에 가담한다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였다. 그래서 일절 여기 쪽문을 열어보지 못했는데 지장보살도장 구화산은 사정이 달랐다. 우리 고대겨레이고 모처럼 구화산을 찾아왔는데 빈손답사는 할수 없지 않는가. 나는 향대에 50원, 지장선사 기부에 50원, 불교자료 기부에 20원 등등 거의 200원 돈을 내놓아서야 마음진정을 쏟은것 같았다. 하긴 룡도사찰 100원, 육신전에 근 200원—나로 말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였다. 점심식사로 한 음식점에 들어섰다가 나는 또 수백원 돈을 날릴번 하였다. 안내자와의 눈맞춤이였는데 음식부 주인인듯한 사람은 50여원, 100여원 하는 채만 가득 안내한다. 그저 지나칠수가 없어 내가 사람 둘이서 어떻게 먹으면 그걸 다 먹을수 있는가고 쐐기를 박았더니 둘 다 물안고말았다. 관광지의 어두운 행각으로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안타까운 현실이였다. 구화산서 돈미끼에 걸려들번 했던 수차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자면 끝이 없다. 많은것은 민간안내자와 관련되지만 그다음부터 그는 그의 뜻을 펴지 못하고 나의 안내를 고분고분 잘해주었다. 안내자의 덕분에 나는 첫날 구화산을 돌며 많은것을 보고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안내자의 이런 말은 실말로 헤아려졌다. 려행사의 가이드들은 두루두루 안내하며 관광객들을 자기들 구미에 따라 움직이게 하지만 구화산 당지사람들이고 불교의 영향을 심히 받은 자기네들은 손님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것이 아니라 관광수요대로 완전히, 철저히 안내봉사를 해드린다고 했다. 그가 가이드를 잘한데서 100원으로 정한 하루 가이드비를 팁까지 150원으로 주었더니만 안내를 잘한 값이라며 그렇게도 희열을 감추지 못한다. 구화산에서 돈미끼에 걸려들번 했었지, 사실 룡두사찰에서의 첫 100원은 내놓 미끼가 옳았고, 단지 그것으로 하여 처처에서 주의를 돌리며 더 큰 미끼에 걸려들지 않을수 있었으니 일종 액땜이라고나 할가. 신성한 불교성지에도 엉터리사기군과 참다운 불교도들이 공존하여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고는 있지만 가짜 중들이나 엉터리 놈팽이들로  불교성지를 평가절하하지는 말아야 했다.  
179    【구화산순례】(3) 청양에서 자정을 보내다 댓글:  조회:3455  추천:116  2007-07-22
【구화산순례】(3)   청양에서 자정을 보내다       밤은 8일 자정을 넘어간다. 고마운 운전사 덕분에 청양에 와서 쉽사리 호텔을 잡았으나 하루간 호텔주숙비가 70원, 나는 에어콘이 있다니 두말않고 주숙수속을 마치였는데 고급방이라는 4층의 2호실은 어느 향촌의 려관집보다도 허수름하였다. 마침 바깥으로 이어진 베란다가 있어 바깥베란다에 서보니 야색에 잠긴 청양현성이 한눈에 안겨진다. “?” 나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가 없다. 현성의 어느 모퉁이든, 현성의 교외이든 현성은 현성이겠는데 80년대의 연변 어느 현성마냥 스산하기가 그지없다. 구화산이 뜨고 지장보살님이 뜬다는 오늘의 중국불교 4대명산 지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21세기에 잡아든 청양현성거리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될가?) 리해할수 없는 의문이 일순 온몸을 휩쓴다. 내가 왜 구화산순례 첫 걸음을 청양으로 잡았던가? 말하자면 1989년 1월에 연변대학출판사에서 출판하고 조선족고적총서로 된 “지장보살 김교각법사”책부터 얘기가 돼야 할것 같다. 당나라 지덕년간에 신라인 김교각이 자기가 나서자란 조국을 떠나 당나라에 온후 자리를 잡은것은 오늘의 강남 제일강산 - 구화산. 산이 높고 경치가 수려한 구화산은 장강의 동쪽, 즉 강남 지주의 청양현 경내에 자리잡았으니 지장보살 김교각님을 떠올리면 자연히 청양부터 떠올려야 했다. 김교각님으로 말할진대 청양은 갈라볼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김교각님은  청양현 구화산에 이르러 산이 좋은것을 보고 마음 들어 오늘의 동애, 또는 동암이라고 불리우는 서쪽 산기슭 석굴에 헌 가마를 걸어 놓고 백토에 쌀을 약간 섞어 끼니를 이어가며 고심히 도를 닦고있었다. 그때가 20대중반의 한창 열혈나이. 당나라 지덕년초의 어느날 청양현의 신사 제갈절이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구화산의 산우평지에 올랐다가 김교각을 발견하고 감동된 나머지 귀가후 열성껏 의연금을 모아 김교각한테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구화산의 첫 불교사찰로 되는 화성사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건중년초에 이르러 강남의 지주군수 장암이 조정에 상주서를 올려 “화성사”란 편액을 하사받으니 중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화성사가 흥성의 일로를 걸었다고 전해진다. 김교각님이 처음 구화산에 자리잡고 도를 닦을 때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절에 민양화라고 부르는 청양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화산의 산주인이였다. 하루는 김교각님이 그를 만나 부처님 모실 땅을 달라고 청들자 민양화가 허락하매 김교각님이 입은 가사를 휙 펼치니 온 구화산이 덮이더란다. 민양화는 이 어른이 보통 어른이 아니라고 기끼어 땅을 희사하더니 그의 공자님까지 출가시킨다. 역시 김교각님에 걸맞는 청양땅이요, 청양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구화산순례에서 선참 찾고싶은 고장이 청양이였다. 청양이 현성이니까 청양을 찾으면 구화산을 쉽사리 찾을것 같았다. 과연 청양에서 구화산까지 32킬로메터 거리밖에 안되고 뻐스로 한참 정도면 간다니까 모든 시름을 덜어도 좋을것 같았다. 나는 이윽토록 청양의 밤거리를 일별하며 베란다를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 한쌍의 젊은 남녀가 팔을 끼고 거리를 조용히 산책하고있었다. 보매 본지방 사람 같질 않았다. 야색속에 산책하는 그들을 내려다보노라니 불현듯 24년 남방행이 떠올랐다. 24년전의 나는 연변대를 갓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한 한창나이다. 금방 결혼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배치받았는데 상해, 소주, 구강, 남창, 광주 등지를 두어달 누비며 력사답사길에 올라야 했다. 도리대로 말하면 처음 밟는 중국 제1  대도시요, 만리 장강이요, 겨울에도 꽃피는 광주요∼ 응당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다. 헌데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동행한 당사연구실의 왕청산선배 보고 말했다. “남자 꼬부랑 둘이서 돌아다니니 상해요, 광주요 해도 멋이 없군요.” “나도 쑈리와 같은 맘이네. 그래도 녀자가 있어야 멋이 나나 보지.” 조선말을 잘하는 선배 왕씨도 제법 동을 달아주었다. 정말이지 “선경”이라 해도 녀자없는 “선경”은 멋이 나지 않았었다. 그때 그 생각을 하며 나는 피씩 웃고말았다. 귀가행이 급하지 않았던들 이번 걸음에 안해와 경원이를 데리고 왔더면 얼마나 좋았으랴싶었다. 호텔침대에 누웠으나 이저리 궁싯거리며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언제 쪽잠에 곯아 떨어졌는지, 나는 달콤한 꿈나라에서 구화산을 찾아 헤매고있었다.  
178    【구화산순례】(2) 뻐스는 청양으로 달린다 댓글:  조회:3334  추천:83  2007-07-21
【구화산순례】(2)                       뻐스는 청양으로 달린다 안휘 구화산은 중국불교 4대명산의 하나이고 중국불교 4대보살의 한분이신, 신라인 김교각을 높이 모신 지장보살도장이라지만 어쩌구러 한번도 다녀오지 못했다.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련꽃 다투어 피여나는 계절이 오자 나는 모든것을 제쳐놓고 구화산행부터 스케줄을 잡아 보았다. 2007년 7월 8일, 나는 드디여 련화불국 구화산순례에 올랐다. 오후 3시 40분 소흥을 출발한 전용 쾌속뻐스는 구화산이 있다는 청양을 바라고 달리고 달린다. 나는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수가 없다. 구화산과 지장보살을 알아 벌써 얼마만이더냐. 인생사 도리켜보면 내가 구화산을 알고 지장보살님을 알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인 지난 80년대초의 일이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때 연변에는 “청년생활”잡지가 있었는데 연변대학도서관의 어느 선생인가 쓴 한편의 글이 실리였었다. 구화산과 지장보살님을 소개한 짤막한 글이였다. 겨레에 관한 글이면 모든것을 수집해 두는 나한테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여서 정히 스크랩해 두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으면 구화산에 꼭 다녀오리라 맘먹으면서 말이다. 허나 인생사란 모든것이 뜻대로 순순히 풀림이 아니였지, 그로부터 20여년 세월이 흘러 인생 50대 문턱에 올라서야 20대 청춘의 꿈을 비로소 바야흐로 현실로 펼치게 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쾌속뻐스는 나의 회상 싣고 달리고 또 달린다. 하긴 감개뿐이 아닌것 같다. 구화산을 다녀오지 못한 나로서는 청양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밖에 모르는데 그것도 청양행 뻐스가 아니여서 한밤중에 고속도로에서 내려야 한다니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깊은 밤중에 허허 고속도로에서 내리면 어떡하지?) 나의 근심은 무리가 아니였다. 올해에 잡아들어 지장보살님 추적하여 절강성 주산군도 보타산(중국불교 4대명산의 하나)답사길에 오른적이 있었는데 귀가길에 녕파에 이르자 이미 초저녁이다. 다행히 녕파역에서 항주까지 간다는 중형뻐스 한대를 만났는데 350리밖 소흥까지 무사히 갈수 있다던 운전사가 소흥에 다 왔다며 내리라고 한다. 보매 소흥뻐스역이 아닌 고속도로 정차소인데 내가 다녀본 곳이 아니다. 길가는 사람 하나, 택시 한대조차 볼수 없는 한적한 고장뿐이다. 돈밖에 모르는 운전사 놈팽이들에게 잘못 걸리여 든것이 물보듯 뻔했다. 그날 밤 한적한 교구에서 수십리밖의 소흥 도심까지 어떻게 찾아 왔던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그때가 금시같은데 오늘도 청양현성이 아닌 고속도로에서 내려야 한단다. 에라, 모르겠다, 될때로 되라지,  죽어보아 죽겠느냐 ~ 력사답사길에서 이런 일, 저런 일 수없이 겪어 본 나로서는 퇴로가 없었다. 가는데까지 가고 볼판이 아닌가. 속을 끙끙 앓다가 뒤늦게 운전사와 얘기를 나누니 운전사는 청양현성까지 실어다주겠단다. 같은 값이면 주숙할 곳까지 실어다 주면 고맙겠다고 한술 더 뜨니 근심하지 말란다. 운전사는 한밤중에 손님을 아무데나 두고 갈수가 있냐고 되물어 오더니 밤 12시쯤 청양에 도착하니 시름놓고 한잠 푹 쉬라고 한다. 2층으로 된 장거리 침대뻐스이니 잘만도 하였다. 아무튼 고마운 운전사이다. 모든 시름을 털어 버리니 기분이 류달리 맑아진다. 어느덧 오후 6시를 넘어섰다. 6일 이때쯤에 녕파~길림행 렬차에 오른 안해와 경원이 지금쯤은 집에 들어섰을것만 같아 핸드폰을 드니 연길의 쌍둥이 딸애중 막내 향이가 받으며 장춘~도문행 렬차가 두세시간 연착되여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절강에서 6000리 길을 달려 동북 길림으로 간 안해랑 내고향 연변을 가까이두고 연도고생을 하고있었다. 두어시간 지나 8시후 다시 련계하니 금방 연길역에 내리였고 집가는 도중에 있다고 알려준다. 나도 연도 고속도로가 아닌 청양현성까지 곧추 갈수가 있다고 알리니 안해랑 쌍둥이랑 시름을 놓았다며 기쁨을 전해온다. (안해랑 무사히 연길에 이르렀고 나도 무사히 청양현성까지 가게 되겠구나. 나무아미타불…) 불교도도 아닌 나지만 두손을 깍듯이 모아 가슴에 꼬옥 갖다대며 속으로 중얼거리였다. 불교의 교리에도 있듯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오긴 오는구나, 어둠이 살포시 깃을 내린 바깥대지를 바라 보노라니 마음이 전에없이 편안해진다. 그에 따라 가끔 꿈나락에도 떨어져 본다. “청양, 청양…” 내가 소스라쳐 깨여나니 운전사는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를 청양이라고 불러주며 청양현성에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시침은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길가의 그닥 크지 안은 호텔 몇개가 어서 오라 손짓하는것 같았다. 어언 근 1000리 밖의 청양에 이른것이다.구화산이 지척이지.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연신 쾌속뻐스 운전사에게 인사말을 건네였다…
177    【구화산순례】(1) 련꽃은 구화산순례 전주곡이였소 댓글:  조회:3157  추천:128  2007-07-20
【구화산순례】(1)     련꽃은 구화산순례 전주곡이였소       절강 월수대교정 남대문안 인공늪에는 화분통에 심은 련꽃들이 널리어 이채를 띤다. 기말이라 하도나 바빠 교실서쪽가 인공늪에 가볼사이도 없더니 여름방학을 맞이한 지금 련꽃으로 만발하여 우리들 발목을 잡았다. 오늘 소흥출발을 앞두고 선참 인공늪—련꽃 세계를 찾은 나와 안해, 아들은 감탄해마지않았다. 하늘의 태양은 땡볕 열기를 토해내여 잠시만 서있어도 물병아리가 되여버린다.진짜 죽을놈은 바깥세상에 나서보란다.       내가 왜  안해와 아들의 저녁 연변행을 두고 사랑하는 가족을 련꽃세계에로 안내했던가, 여기에는 나로서의 고심이 있었다. 그 고심이란 뭘가? 그 고심이란 바로 련꽃이 구화산순례의 전주곡으로 이어지기때문이였다. 지장보살도장인 구화산은 “련화불국(連花佛國)”세계로 알려지니 나는 구화산순례시기를 련꽃이 피여나는 7월초순으로 잡아보았던것이다.     우리 다같이 아름다운 련꽃세계에 묻히며 구화산순례에 올라보자, 련꽃이 만발한 구화산이 우리를 얼싸안을것이다. 월수대 련꽃은 구화산순례의 전주곡으로 피여올랐다오.                                                      (2007년 7월 6일)
176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댓글:  조회:3449  추천:118  2007-07-15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리 광 인   김범송님! 당신이 쓴 글 “모택동과 등소평 그리고 박정희”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 집니다. 터놓고 말해서 나는 모택동과 등소평에 , 박정희를 비겨 글을 쓰는것이 동의되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리만치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져온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단, 그의 과오는 일반적인 과오가 아닙니다. 광복전의 40년대 박정희는 철두철미한 친일행각으로서 그 죄는 묵과할수 없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문제는 력사적 사실입니다. 이를 시인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떠들어도 나라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며 차기 한나라당 대통령 양대주자중 한분으로 떠오른 박근혜님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김범송님, 저의 뜻이 리해되는지요? 리해하시기 바랍니다 력사학자, 더우기 조선족항일사가 전공인 필자로서는 친일문제를 묵과할수 없습니다    
175    님들께 인사 드립니다 댓글:  조회:3437  추천:110  2007-07-15
님들께 인사 드립니다   란란이님, 명상님 안녕하십니까? 인사 늦었습니다. 댓글로 몇번 시도했는데 오르지 않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인사드리는 바입니다. 님들이 나오면 기분이 왠지 너무너무 좋네요.. 미안한것은 인터넷상 문제로 사진을 접속시킬수가 없어요. 벌써 두어주일 너머 어쩌지 못합니다 .이제 연길에 가서 어째야  겠습니다. 단, 구화산행은 사진과 글을 모두 차례로 올리려하오니 시름을 놓기 바랍니다. 연길에서 만날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두만강, 월수대에서
174    【단상】우린 부끄럼 느껴야 댓글:  조회:2927  추천:132  2007-07-15
우린 부끄럼 느껴야 리광인이 며칠간 구화산에 다녀오고 나는 큰 충격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구화산을 다녀간 한국인이 수천명 되고 현재도 매일이다시피 다녀간다니 더욱 그러하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구화산은 마음에 와 닿는 성지이고 지장보살님이 인심에 먹혀들고 있는데 이땅의 우리들은 뭐했냐는 자문자답이다. 구화산은 안휘성 지주시 경내에 자리잡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중국불교 4대명산의 하나이고 국제불교 지장보살도장이며 첫패로 비준된 국가중점풍경명승구이고 선남선녀 배알성지이고 해내외 관광객이 즐기는 이름난 풍경관광구이다. 알다시피 구화산이 이같이 온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된것은 일찍 력사상 신라국 왕자(중국인들은 모두 이렇게 믿는다)였던 지장보살 김교각이란 위대한 문화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90여개 대소 불교사찰 따라 구화산을 답사하노라면 우린 어딜가나 우리 겨레의 고대 문화거장인 김교각의 숨결을 느낄수 있고 가슴이 세차게 고동친다. 그만큼 지장보살 김교각님은 해내외는 물론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지난해 공식적인 관광팀으로 온 분들만도 2000~3000명이 넘는다나. 나 가이드로 나선 민간가이드의 얘기에 따르면 거의 매일 구화산을 찾아오는 한국인을  대할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화산을 찾는 중국내 조선족은 혹시나외 거의 볼수 없단다. 그러면서 지장보살님은 당신네 고대선조인데 왜 찾아들 보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이에 내가 뮈라고 대답 주어야 하나, 가슴이 헉 막혀오는데 말이다. 참, 현실의 슬픈 비애가 아닐수 없다 .이 나라 200만도 넘는다는 우리 민족이 왜 이다지도 자기 력사에 대해 무관심이고 자기 선조에 대해 등한시하는 걸가? 곰곰히 도리키면 우리 200만 겨레를 나무랄 일이 아닌것 같다. 기어코 나무라야 한다면 구화산이 이같이 떠오르고 지장보살님이 이같이 위대한 문화거장으로 떠오르도록 우리 고대사 력사학자들은 무얼하고 기자님들은 무얼하고 지성인들은 무얼했느냐일 것이다. 글쎼 보시라, 지난 20여년간 지장보살 짧은 소개글이 두어편 달랑 실리고 연변대학출판사 출판 자료소개책 한책이 달랑, 그것도 모두 80년대의 일이니 우린 너나없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속에 력사공부를 한다는 나도 속하니 인제야 구화산을 찾은 그 책임 가슴을 지지 누르기만 한다. 구화산 홍보가 따르지 못하니 일반 사회인들이야 어찌 알리오?! 하긴 “소 잃고 외양간 고쳐도 늦지 않다”는 격언이 있다. 이제라도 구화산과 김교각님을 널리 알리고 우리 지성인들이 뛰고 뛴다면 구화산을 찾는 우리 겨레가 날따라 늘어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겨레에 당나라 대시인 리백과도 당당히 어깨를 겨루는 김교각님과도 같은 위대한 문화거인이 있었다는, 또 있다는것 이 아니 자랑이요!!! 겨레의 지성인들이여, 우리 너나없이 부끄럼 느껴보자, 우린 뭘 했느냐고……  사람들이여, 구화산을 찾아보자, 구화산에서 겨레의 위대한 문화거인을 만나보는 그 감수 어떠할가……                                     (2007년 7월 14일, 소흥에서)
173    【단상】구화산에 다녀 왔습니다 댓글:  조회:3063  추천:116  2007-07-13
                     구화산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연변으로의 귀가일정을 뒤로 미루고 선참 홀로 근 1000리 밖의 안휘 구화산으로 달려 갔습니다. 구화산에 며칠 머무르면서 김교각님 발자취를 하나하나 추적하며 나는 놀라마지 않았습니다. 내 인상속의 지장보살 김교각님은 중국불교 4대보살의 한분이라는것이 고작이였는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나 지식수준의 한계를 드러내는 걸림돌이였지요.      내가 안휘 구화산에 대해 주의를 돌리고 지장보살 김교각님에 대해 상식적으로나마 알게 된것은 지난 8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 기억됩니다. 그때 그 시절에 연변의  “청년생활”잡지에 구화산과 김교각을 소개하는 한편의 짧은 글이 실리였는데 언젠가는 꼭 구화산을 답사하겠다는 것이 나의 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러 50대의 문턱을 넘어서서야 비로소 20대 시절의 꿈을 이뤄 안휘 구화산에 오를수가 있었습니다. 진정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구화산행은 7월 8일부터 12일까지 5일행이였는데 이 기간에 보고 듣고 느끼고 읽은것이 하도나 많아 이 한편의 짧은 글에는 삼가하기로 합니다. 지금도 가슴 울렁이며 흥분되는것은 중국에서의 지장보살님의 지위와 형상이 나의 상상을 뛰여넘는 것이라 할까요.     지금까지 나 지장보살님 지식을 통털어 놓아야 구화산과 지장보살은 중국 불교 4대명산의 하나이고 중국불교 4대보살의 한분이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고 론문을 써도 불교의 테두리안에서의 평가였습니다. 구화산을 련일 답사하여서야 나는 구화산은 세계적범위의 중국불교 4대 명산의 하나이고 지장보살을 모신 국제성 불교지장보살도장이라는것을 가슴치게 깨닫게 되였습니다.     구화산은 말그대로 중국에서 첫패로 개방한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서 하나의 대단한 불교명산이자 력사명산이요, 문화명산이자 풍경명산이였습니다. 하기에 내가 머무른 며칠간에도 구화산을 찾아 향불을 태우며 기도하는 선남선녀들이 줄줄이 이어서는데 나를 안내한 민간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지난 한해 구화산 입장료값만도 13~14억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구화산이 이같이 인기몰이하는것은 황산버금으로서의 특이한 자연경관에도 있겠지만 불교명산으로서의 지장보살이란 이 위대한 문화거인이 있기 때문이였습니다.     모택동주석은 일찍 연안에 계실 때 “불교는 문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신선생도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를 두고 “석가모니는 위대한 철학가”라고 지적했습니다.이로부터 보면 구화산 지장보살문화유산은 막대하여 중국뿐아니라 세계적 범위의 불교문화보물고의 주요한 구성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장보살과 구화산 불교문화가 있음으로하여 구화산은 중국불교의 4대명산으로 떠오르면서 “련화불국”, “향불 천하으뜸”명성을 얻게되고 천고의 휘황을 떨쳐오게 되였습니다.     지장보살 김교각님은 중국인이 아닌 고대신라인이지만 중국사람들 심목속에서의 지위와 형상이 대단하였습니다.중국 불교사에서 외국의 승려로서 중국 불교의 보살로 떠오른것은 김교각 한분이고 천고에 향불을 내내 피여오르게 한것도 김교각 한분이라고 합니다. 중국과 세계 불교사, 문화사에서의 일대 위인이고 거룩한 승려, 문화거인, 중국과 세계 불교사와 문화사에 특수한 지위를 갖고있다는것이 중국인들의 평가이지요.     나 끝내 구화산에 다녀 왔습니다.지장보살 김교각님을 새로운 시야,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된 걸음이였습니다. 나 지금 굉장한 흥분속에서 지장보살님 전문저서를  집필하고 있어요. 먼저 구화산 답사기행과 더불어 답사사진을 하나하나 륙속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겨레의 고대사에 지장보살 김교각님과 같은 위인, 문화거장이 있었다는것은 우리의 자호와 자랑이 아닐수 없습니다.                                   (2007년 7월 12일 밤, 소흥에서)  
172    【단상】현실의 슬픈 비애 댓글:  조회:3526  추천:142  2007-07-08
현실의 슬픈 비애 리광인  언젠가 수필 추석보름날 밤의 비애를 써서 마음의 슬픈 비애를 담은바 있다. 그런 내가 오늘은 현실의 슬픈 비애를 짤막한 단상에 담고싶다. 왜서일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흔히 흘러간 우리 력사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터넷세계, 우리 조글로만 보아도 그러하다. 포럼세계, 그것도 한국행과 관련된것이면 조글로의 아직 제한된 범위에서도 조회수가 쭈욱쭉 이어서지만 력사에 집착한 나같은 놈의 글은 보아주는이가 많지 못하다. 어쩌다 빛다른 글을 써야 어떨가 하는 현실이다. 마음을 열고 현실을 대하면 이해가 간다. 살아가는 현실이, 자기 신변사, 먹고사는 문제가 급선무인데 언제 흘러간 력사에 아까운 시간을 할애할가. 하면서도 이로부터 인기되는 현실의 슬픈 비애는 내내 가셔질줄 모른다. 도리는 불보듯 하고 할말은 많지만 더 전개하고픈 생각이 없다. 단, 지성인이라면, 우리 민족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나도 현실을 다루는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을 쓰고싶다. 써야 할 글들도 많고많다. 또 누구에 못지않게 잘 쓸수 있다. 하지만, 하나 늘 시간에 쫓기는 나로서는 어찔 겨를이 없다. 우리 력사란 이 난바다에 빠져 허우적이다보면 해야 할 일들이 하도나 많아 언제 현실문제까지 다룰 재개가 못된다. 이 아니 모순이오~~ 오호, 나의 현실의 슬픈 비애~~언제가면 가시여질가, 그날이 과연 올것인가……                                    2007년 7월 8일, 소흥에서  
171    【서문】조선족역사문학연구문집(1,2) 댓글:  조회:4254  추천:123  2007-07-08
조선족역사문학연구문집(1,2) 월수외국어학원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교수,박사 류은종   이번에 절강의 월수외국어학원에서는 새해 7.7사변 70돐을 앞두고 학원의 한국력사와 문화 담당교수이고 력사학자인 제자 리광인씨의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 1집,  2집을 연구성과로 펴내게 되었다. 50대에 잡아든 제자의 알찬 연구성과에 축하를 보낸다. 지금으로부터 28년전인 1978년 10월, 연변대학에서는 대학입시가 회복된 후의 두번째 학생들—78년급학생을 받아들이였다. 조문학부의 교수인 나는 78년급 조문학부의 언어학을 가르치게 되였는데 동북3성에서 모여온 이 학급 학생들중 화룡현 출신의 리광인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보매 마음이 어질고 성근한 20대중반의 학생이지만 문학, 언어학에 남다른 집착을 가지고 있어 나의 주의를 끌었다. 나는 학생들과도 스스럼없이 보냈는데 평소 말이 적고 조용한 타입의 리광인 학생은 집단활동에 빠질 때가 가끔 있었다. 알고보니 리광인학생은 조선족력사연구에 뜻을 두고 시간만 있으면 밖으로 돌며 사회조사에 나서서 력사의 견증자들을 방문하고 있었던것이다. (장차 뭔가 해낼 사람이야 !) 나는 78년급 조문학부 학생 리광인한테서 받은 인상이 너무 깊었다. 그러나 아쉽게도1982년 여름,  78년급 조문학부 학생들이 졸업한 후 나는 다시 리광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가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오,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일군으로 근무하오, 기층에 내려가 사회조사를 하고 있소…… 하는 말들을 들었고 조선족력사연구에서 탄탄한 실력을 떨치고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만남의 인연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던 지난해 7월 29일 오전, 연길시 모아산기슭에 자리잡은 연변휴일호텔 13층강당에서 연변인민방송국 전임 주필이였던 김대현선생 《문집》출간기념 및 작품세미나가 있었는데 그번 세미나에서 나는 리광인씨를 만났다. 리광인씨가 연변대졸업 근 30년만에 처음 만난 자리인데 리광인씨는 《여가문화의 추구자 실천자 김대현선생》이란 론문을 가지고 세미나에 참가했고 이렇게 만남의 장소가 이루어졌다. 쓰기가 쉽지 않은 글인데 리광인씨는 론문화하여 대회의 참가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뒤에. 나는 제자 리광인씨가 조선족력사연구에서 세인을 탄복케 하는 성과를 거두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10월에는 또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와 한국학술정보(주)를 통해 한국사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을 펴내 소문이 자자했다. 리광인씨는 지금까지 조선족항일사관련 수백만자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번에 또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1~2집을 세상에 내놓게 되였다. 조선족력사문학연구문집 1~2집 (50여만자)은 리광인씨의 20여년의 조선족력사연구 결정체로서 연구문집에는 20여년전 대학졸업론문이 있는가 하면 80년대, 90년대의 론문이 있으며 새세기에 잡아든 후의 력사, 문학 관련 론문들이 있어 자못 다채롭고 인상적이다. 최서해를 쓴 대학졸업론문은 시대적 제한성으로 계급투쟁이란 시대의 락인이 찍혀있긴 하나 그때의 학생수준으로 사실주의문학에서의 최서해의 정당한 위치를 찾아본다는것은 그 자세부터가 조련찮은 일이다. 80년대, 90년대의 론문들에도 일부 미숙한 점들이 가끔 보이지만 그때 그 시절의 연구성과와 수준으로 조선족력사의 이모저모를 수준있게 다룬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새세기에 들어선후 리광인씨는 10여년의 기층생활과 사회조사를 거치여오면서도 누구에게 뒤질세라 조선족력사연구에서 뛰여난 실적을 올려 사람들을 놀래우고있다. 학구적인 탐구정신이 없이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의 연구성과는 력사속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연구, 더우기 광복전 조선족문학연구에 이르기까지 탄탄한 실력을 쌓았다. 윤동주, 강경애, 김창걸 연구의 남다른 실력, 《혈해지창》,《싸우는 밀림》의 속속들이는 남들의 안목을 끌기에 족하다. 력사바로잡기로 일맥진 시기시기의 론문과 연구성과들은 지금이나 후세나 조선족력사연구의 귀중한 연구자료들이 아닐수 없다. 20여년전 연변대 리광인 스승으로서의 나는 선배스승들과 어깨를 겨루어가고있는 리광인씨를 두고 내심의 기쁨을 감출수없다. 앞으로도 리광인씨 같은 제자들이 후배들을 이끌면서 조선족력사연구, 문학연구에서 보다 뛰여난 성과를 올리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이것이 내가 리광인씨의 연구문집에 전하는 스승된 마음이며 희망이며 바램이다.   2006년 11월 8일
170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 댓글:  조회:2485  추천:130  2007-07-07
강경애 명예원상복구의 리면에 얽힌 이야기     조성일프롤로그 강경애(1906-1944)는 일제식민지시대의 <<간도>> 룡정에 건너와  살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대어 궁핍한 민중의 삶과 항일운동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그 시기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강경애는 어두운 시대의 짧은 생애에 장편소설 2부, 중단편 17편, 기타 다수의 수필과 평론 등을 창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문제>>(1934), <<소금>>(1934), <<지하촌>>(1936), <<어둠>>(1937)등을 들수 있다.강경애의 <<간도>>에서의 처절한 삶과 고투, 어둠의 시대에 남긴 빛나는 업적, 삶의 고투속에서의 쓸쓸한 죽음 등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녀류소설가를 경모해 왔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작가 강경애를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문학전통으로 삼기 위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1998년 8월 룡정시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뒤면에는 강경애의 간단한 략력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있다.<<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 바이다>>.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이처럼 문학비를 세워 강경애를 추모하고있는 와중에 강경애는 <<김좌진암살 교사범의 동거녀>>라는 청천벽력이 연변땅에 떨어졌다. 한심한 일이였다. 우리는 수수방관할수 없었다.                          백주발검(白晝拔劒)의 기사 한국문화관광부는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이 거동은 한국내 일부 권위인사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한국의 한 기사에 따르면 2005년<<1월 4일 오후, 국가보훈처 국장을 지낸 A씨가 기자를 찾아왔다. A씨는 문화관광부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강경애씨가 백야(白冶) 김좌진(1889-1930)장군의 암살 교사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부 장관에게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강경애에 대한 문화인물 지정 철회 민원을 제기했다>면서 문화부의 답신 두장을 보여줬다>. 문화부는 A씨의 질의에 대해 <2005년 문화인물은 각 시, 도 관련단체에서 추천을 받아 전문가 13인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 넘겨서 선발을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관의 <친일행적>조사 등 인물검증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것이라면서 소정의 절차를 거친것이기 때문에 선정사항을 번복할수 없다고 답했다>. <문화부는 귀하께서 제기하신 강경애씨가 <김좌진장군 암살 교사 공범>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문화인물로 선정됐다>고 했다. A씨는 한국문화관광부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용정의 비암산에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문화인물로까지 선정했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는가>>고 격분해 하고 한탄했다고 한다.이처럼 사태가 엄중해지는 시각에 한국 조선일보 사이트는 <<강경애는 김좌진 암살사주범의 동거녀>>라는 강경애에 대한 모독기사를 올렸다. 이 기사는 한국 <<월간조선>> 2월호에 <<월간조선>>의 오동룡기자가 한국 전 광복회 회장인 이강훈의 회고록에 의해 추적해 펴낸 추적기사이다. 실로 이 기사는 우리가 경모하는 저명한 작가 강경애를 모독하는 <<백주발검>>이라고 하겠다.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 지금도 잊을수 없는 지난해 2005년 1월 17일. 이날 종전대로 오전 8시경에 나는 사무실(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무실)에 출근하여 첫 일과로 추진회 사이트와 더불어 중국의 동포사이트 및 한국사이트를 방문하던 중, 조선일보 사이트에 <<월간조선>> 2월호에 발표된 <<강경애는 김좌진장군 암살 사주범의 동거녀>>란 추적글이 올라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내가 자기를 진정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바장이는데 추진회에 출근하는 40대 후배 김혁씨가 들어섰다. 김혁씨도 인터넷에 뜬 추적글을 보았는지라 우린 강경애 모독기사를 두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김좌진장군암살 진상여부에 대해 잘 모르고있는 우리로서는 이렇다 할 견해를 내놓을수가 없었다.그때다. 사무실에 50대초반의 리광인씨가 들어섰다. 리광인씨는 78년급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이지만 대학졸업 후 줄곧 조선족항일투쟁사를 전공한데서 뭔가 알고있을것 같았다. 2004년 3월부터 추진회에 출근했고 사이트에서 리함으로 통하고있는 리광인씨를 두고 강경애모독기사를 보았는가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했다.《리선생은 한국 인터넷에 뜬 추적 글을 어떻게 보고있소?》《전혀 엉터리없는 독단글입니다.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합니다.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사람은 조공당 만주총국 화요파사람입니다.》리광인씨는 단마디로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암살과 무관함을 자르고있었다.《력사근거가 똑똑하오?》《저한테 자료가 있습니다.》나는 졸지에 희망의 섬광을 보아냈다. 이래서 우리 셋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서 강경애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자는데로 합의를 보았다. 리광인씨는 론문으로 써내겠다고 시원히 대답했다. 이는 정의감에 불타는 합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력사의 숙제로 그냥 남아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억울한 사람을 친일파로 몰아부쳐서는 안된다. 식민지 36년이라는 우리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 만들어낸, 식민지로부터 광복을 맞은지 6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이 저승에 간 사람까지 억울하게 만든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강경애를 풀어주어 명예를 원상복구할수있는 유일한 길은 유력한 력사적증거를 확보하는 길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투창(投槍)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월 24일 월요일인데 리광인씨가 사무실에 들어서며 론문을 메일로 넘기였다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짧디짧은 며칠새에 해당 력사자료를 검토하고 론문으로 만들기까지 하였다니 말이다. 알고보니 리광인씨는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론문을 토요일인 1월 22일 써냈는데 그날과 이튿날은 련휴일이여서 월요일로 미루었던것이다.리광인씨의 론문을 읽으니 조리정연하고 설득력이 강했다. 또 편집자의 말까지 쓴데서 나는 신중성을 기하여 수정하고 김혁씨에게 넘기였다. 김혁씨는 유망한 젊은 작가이고 우리 문단의 인터넷고수이니 수정고 《편집자의 말》을 제꺽 타자해냈다. 사이버토론에 관한 부분적 마디는 김혁씨의 의견에 좇았다. 짤막한 《편집자의 말》을 전례없이 세 사람이 손을 댔다는 말이 된다.<<요즘 한국 <조선일보> 인터넷을 통해 일제 강점기 녀류작가 강경애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면서부터 혼선을 빚고있다. 이에 본 사이트는 리함의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라는 론문을 올리오니 국내외 지성인들이 강경애 시시비비토론에 적극 동참하여.주기를 바란다. 본 사이트는 <열린마당>코너를 통하여 이 토론을 한동안 지속적으로 끌고나가려 한다. 이 토론은 어디까지나 실사구시하고 학술적으로 되여야 하기에 인신공격이나 불순한 정치적목적이 담긴 글이 오를 경우에는 관리자들이 삭제할 권한이 있음을 알린다.>> (<<문화산맥사이트 편집자의 말>>)김혁씨의 한동안의 긴장한 인터넷작업을 거쳐 이 편집자의 말과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 《강경애는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인가?》가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랐다. 시시비비의 대중화를 기해 《열린마당》 코너에 올리고 공지사항에 또 강경애의 사진석장을 이어 올리였다. 그때가 1월 24일 오전 10시였다. 여기에 또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틀전인 1월 22일, 《도라지》문학지 사이트에 북경의 장춘식박사가 반벽거사라는 필명으로 쓴 글 《조선족작가 강경애의 행적에 관련된 두 시각》이 이미 올라있었다. 리광인씨가 론문집필을 끝낸 1월 22일과 같은 시각이였다. 1월 24일 우리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강경애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자 그날 밤 8시 경에 장춘식씨가 필명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 《소설가 강경애의 김좌진장군피살 련루설에 대하여》와 함께 리광인씨의 론문을 본후의 추가론증을 올리였다. 북경의 40대 후배의  가담은 나에게 큰 힘으로 되였다.강경애시시비비에 대한 사이버토론이 벌어진후 리광인씨는 이 사이버토론에 뛰여든 사람을 찾기 어려울것 같다면서 북경에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장춘식씨와 손을 잡고 이 사이버토론을 벌려야겠다고 속타산을 터놓았다. 내가 련계전화를 알리였더니 리광인씨는 주동적으로 장춘식씨와 통화하면서 긴밀한 합작을 기대했다. 이들은 서로 인연이 닿지 못한 사이였다. 하지만 장춘식씨는 괘히 승낙하였다.열린마당 코너에 오른 리광인씨의 론문을 보고 장춘식씨가 강경애의 1929년 룡정행을 두고 문의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에 리광인씨는 1월 25일 《반벽거사님께 해답》함이란 글을 올리여 자기가 1929년설을 따르게 된 연유를 성의있게 밝히였다. 장춘식씨도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였다. 이같이 이들은 사람에 앞서 인터넷으로 인연을 맺고 자주 통화를 가지였다. 장춘식씨는 무게있는 반론글들을 수차 올리면서 동참을 보이였다.사이버토론이 깊이있게 벌어질수록 떨쳐버릴수 없는 하나가 내 마음을 울렸다. 1930년 1월의 김좌진장군 피살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집단적인 비밀행동이였다는것은 사실로 밝혀지면서 강경애와 무관하다는것이 지적되지만 이 기간의 강경애의 행적은 밝혀야 했다. 1929년 첫 간도행설이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한데서 더욱 그러하였다. 이 점을 리광인씨와 이야기해보았더니 그때까지도 강경애연구전문이 아닌 광인씨로서는 상기 《반벽거사님께 해답》정도에 머무르고있었다. 그랬지만 리광인씨는 이를 꼭 밝히여내겠다고 나에게 말하였다.드디여 2월 5일 우리 열린마당코너에 리광인씨가 쓴 글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 올랐다. 사이버토론이 벌어져 10일만의 일이였다. 이 글에서 리광인씨는 강경애의 간도행은 재래의 1929년이 아니라  1931년 봄이라고 일목정연하게 밝히여 나를 탄복케 하였다.사연은 이러했다. 2월초의 어느날 리광인씨는 시가지에 볼일이 있어 나온 연변대 리광일교수를 만났다가 그한테서 한국판 《강경애전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리광인씨의 청구에 리광일씨는 그 시각 하던 일을 미루고 연변대학 자기 사무실에 가서 리광인씨에게 《강경애전집》을 넘겨주었었다. 2002년 5월 수정증보로 되고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녀교수의 엮음으로 된 《강경애전집》이였다. 리광인씨는 보물을 얻기라도 하듯 며칠간 <<강경애전집>>을 깐깐히 독파하고 강경애 본인의 평론과 수필을 통해 강경애 첫 연변행이 1931년 봄이란것을 실증했다. 이외 여러가지 자료연구를 통해 써낸것이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년》이다.내가 알건대 강경애의 첫 룡정행을 두고 강경애관련 연구학자들이나 해당 이들은 모두 1929년설을 따르고있는 실정이다. 연변대 채미화교수나 북경의 박충록교수, 연변의 김순금선생, 조선의 은종섭, 김창현 연구가들 모두가 그러했다. 리광인씨가 밝히여낸데 의하면 이들 연구가들의 연구시원은 모두 조선의 김헌순학자가 쓴 《강경애론>>이였다. 《강경애론》은 《현대작가론》에 실린 글로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1961년에 펴낸 책으로 알려진다. 이 책에서 김헌순학자가 1929년이라고 하니 그후 학자들은 모두 이를 답습하고있는 터였다.큰 시름을 덜었다. 김좌진장군의 암살자가 밝혀지고 강경애의 첫 연변행, 다시말해 첫 만주행이 1931년으로 밝혀짐으로써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과 무관하다는것이 사실로 립증되는것이다. 연변대 리광일씨가 큰 도움으로 되였다. 한국 이상경교수의 《강경애전집》이 아니였더면, 리광일씨의 도움이 아니였더면 1931년설을 인차 밝혀내기 어려웠을것이다. 따라서 리광일씨는 광인씨의 청구대로 한국의 이상경교수와의 련계를 이어주었다. 리광인씨는 이상경교수와 자주 메일련계를 가지는 가운데서 이상경교수를 통해 한국의 소식과 동태를 깊이 헤아릴수 있었다.이상경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고 강경애를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추천한 분이며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전렬에 나선 분이였다. 하지만 이상경교수는 김좌진장군 피살력사를 모르고 그때까지도 강경애 첫 연변행을 1929년으로 본데서 힘있는 반론을 내놓을수가 없었다. 우리 문화산맥사이트가 시비를 벌리니 이상경교수는 상기 두가지 관건시비에서 큰 론거를 얻게 되여 강경애선정에서 끝끝내 관건적인 기여를 하게 되였다. 3월의 문화인물로 한국서 떠올랐던 강경애는 한달 푼히 문화인물란에서 소외되여 자취를 감추고있는 실정이였다.이에 따라 나는 강경애에 관한 토의가 영형력을 과시하자면 한국의 문화관광부사이트에 우리 글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리광인씨는 나의 뜻을 헤아리고 인터넷에서 문광부사이트를 찾아냄과 동시에 한국문화관광부 정동채장관에게 드리는 글 두 편과 강경애의 무죄함을 증명한 우리 글 8편, 도합 10편을 연속 올리여 한국의 지성인들과 배합하여 나섰다.이밖에 《도라지》문학지에서도 수고가 많았다. 이 문학지사이트는 문학살롱코너와 자유게시판코너를 통해 장춘식씨의 강경애 관련글들을 제때에 올리고 우리 문화산맥사이트의 사이버토론글 4편을 《문화살롱》코너에 올리여 지성인들의 주의를 보다 환기시키였다.《도라지》에서 이 모든것을 소리없이 이끈것은 반벽거사—장춘식씨였다.문화산맥사이트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강경애의 김죄진장군암살 시비≫는 2005년 1월 24일부터 3월 7일까지 한달 남짓이 지속되였다. 도합 근 20편의 론문과 글들이 올랐는데 장춘식씨가 3~4편의 글을 쓰고 대부분은 리광인씨가 썼다.. 강경애, 천국에서 미소 짓다 2월 28일, 우리는 한국의 이상경교수와 한국문화관광부 사이트를 통해 녀류작가 강경애는, 한동안 보류 혹은 락방될 위험 끝에 2005년 <<3월의 문화인물>>로 최종  선정되였다는 바라고 바라던 뉴스를 접하였다. 그리고 한국 이상경교수가 보낸 한국문화관광부 편 <<2005년 3월의 문화인물 강경애>> 책자를 받았다. 이는 단순한 선정이 아니라 강경애를 친일로 몰아가던  모독설에 대한 힘있는 반격, 강경한 부정이였다. 이로 하여 강경애는 천국에서 미소를 짓게 되였다. 이 뉴스는 그날로 리광인씨의 글 《강경애는 끝끝내 선정되였다》로 문화산맥사이트에 떴다.《도라지》문학지 사이트는 이 글을 적시적으로 본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올리였다. 이튿날 3월 2일 그들 자유게시판에는 또 《강경애명예 원상복구에 힘바친 이들께》란 올드컴의 서명글이 올랐다. 머리가 수그러지는 감사한 글이였다. 이 글은 《도라지》사이트의 주선으로 문화산맥사이트에도 떠서 힘으로 되여주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올드컴이란 김혁씨, 시시비비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혁씨의 소행이였다. 그 글을 옮기면 이러하다. <<지난 몇 달간 한국 매스컴들에서 반도를 들썽하며 혼선을 빚었던 강경애 김좌진 암살동거범 시비가 끝끝내 우리들의 승리로 락착을 보았다.이는 우리 재중조선족의 문화의 힘을 환기시켜주고있다.이 거대한 시비에서 북경의 반벽거사님, 연변의 리함님 등 여러 학자 지성인들이 사명감으로 강경애 위상복구작업에 많은 힘을 바치고있음을 그 동안 나는 보았다.력사의 음영 헤치기 작업에 로고를 아끼지 않은 반벽거사님, 리함님께 진심 축하와 감복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그리고 성숙이라는 필명으로 우리 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수고했수다>>라는 치하의 글을 올렸는데 그 원문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우리 민족의 녀류작가 강경애가 시시비비 끝에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으니 참 잘했수다. 여러 지성인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리함, 반벽거사님 고맙습니다. 특히 <강경애 시시비비토론을 벌린 문화산맥 홈페이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잘했수다. 수고했수다.>>한국의 이상경교수(3월의 문화인물선정위원회 위원)도 2005년 2월 28일에 리함에게 감사의 메일을 보내왔다.<<리함선생님께답신이 좀 늦었습니다.강경애는 그대로 3월의 문화인물로 하기로 결정되였습니다.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고 또 연변에서 문광부 게시판에 글도 올려주시고해서 친일파 운운은 사실무근인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관심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서도 과거사 정리 어쩌고 하면서 앞으로도 다른 인물을 놓고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보훈처에서 제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10월에는 김좌진장군이 선정되여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관심 가져 주십시오.관련회의를 하면서 이쪽에서 제시했던 자료를 한부 첨부합니다. 참고해 주십시요.리광일 선생님, 장춘식 선생님께도 소식과 안부 부탁드립니다.이상경 드림>>.력사의 진실앞에서 모든 허위와 모독은 정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강경애의 명예는 원상복구되였다. 이번 토론에서 시종 주장으로 뛴 사람은 리광인씨이고 다음은 장춘식씨였다. 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사명감을 지닌 노력이 없었다면 강경애 시시비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수가 없었을것이다. 력사는, 조선족문학사는 이들의 수고를 잊지 않을것이다. 아마도 지금 강경애는 천국에서 악령처럼 따라붙으려 하던 친일, 살인 혐의에서 놓여나와 환한 미소를 짓고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어느 누가 강박을 하지 않는데도 자진하여 일본극우세력의 충견(忠犬)으로 된 오선화, 김문학 같은 ≪신친일파(新親日派)≫들이 속출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감안하여 볼 때 일제식민지시대의 친일파숙청은 반드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일제 식민통치 36년, 광복후 60년 동안의 친일파숙청의 지연(遲延)이라는 이 콘텍스트를 념두에 두고 문제를 생각하기도 해야 한다. 강경애를 두고 친일논난을 벌렸듯이 개인별 적발도 필요는 하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성을 기해야 할것이며 단 한사람이라도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될것이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 다시 새로운 상처를 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리고 친일문제 해결에 있어서 개인별 적발과 동시에 구조적으로 친일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성이 처한 곤경이라는 큰 콘텍스트 안에서 친일문제를 다시 파악함으로써 개별적 접근을 넘는 기관단체들의 참회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대안일수도 있다. 각 종교단체, 각 언론단체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 친일을 고백함으로써 대관용으로 가는 길을 예비해야 할것이다. 이를테면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공범이라는  뉴스를 게재하여 혼선을 빚어냈던 한국 <조선일보>는 그래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악령처럼 따라붙는 친일귀신으로부터 놓여나는 근본적인 길은, 대관용을 바탕으로 동아세이와 함께 21세기를 여는 열쇠를  특히 죄없는.따는 그 근사한 작업에 모국이나 해외동포들이 동참할수 있을터인데, 모국인 한국에서 소모적인 쟁론만 횡행하는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사람에게 억울하게도 친일파란 감투를 들씌움으로써 끍어 부스럼을 만들어가는 현실이 안쓰럽기만 하다.                                                                                      연변문학, 2007년2월호 문화산맥 Koreancc.com        2007년 2월 1일                                
169    【론문요지】고대 해상왕 장보고의 국적문제 댓글:  조회:5511  추천:138  2007-07-06
고대 해상왕 장보고의 국적문제  1.      장보고는 어느 나라 사람?    절강성은 중국의 연해지구의 한개 중요한 성으로서 녕파를 중심으로 한 고대 신라 등 나라와의 해상무역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다. 월수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교수를 맡게 되면서 필자는 당나라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해상무역에 흥미를 가지었는데 짙은 흥미를 끈 것은 고대 해상왕ㅡ장보고였다. 장보고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두고 중국과 한국의 해당인사들이  각기 자기 주장을 펼치여 필자는 “고대해상왕 장보고의 국적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2.       고대 해상왕—장보고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전해진다. 그 시절 일본 승려 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记)에는 장보고라고 기록되어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궁복, 궁파로 불리운것은 역사사실로 나타난다. 어찌하든 장보고는 신라가 낳은 바다의 영웅이고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그후 장보고는 청년으로 자라난 후 자기보다 열 살가량 어린 동향후배 정년과 더불어 당나라로 건너갔고 30살 쯤에 서주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828년에 당나라서 귀국한 뒤 신라왕에게 청해를 진수(镇守)할 것을 상주했다. 당시 서남 해안에서는 당나라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 통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장보고는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하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와 함께 교관선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펼치었다. 840년에는 일본에 회역사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내면서 일본과의 무역을 밀고 나갔다. 결과 장보고는 신라, 당나라,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권을 장악한 해상왕으로 떠올랐고 그의 세력과 경제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막강함을 보여주었다.   3.  나라들에 따르는 각자의 견해   역사로 보면 장보고는 확실히 신라가 낳은 바다의 영웅이요, 왕이었다. 이런 그가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두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데 각자의 주장이 서로 도리가 없지 않다. 문제는 장보고의 유년시절에 대한 정보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신분상의 문제로 하여 역사서들에서는 그의 출생, 출신 등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에 비추어 아래 찾아볼 수 있는 자료들을 펼쳐 보기로 하자. 3.1 한국 측 견해: 3.1.1장씨족보 “장씨연원보감”기록: 장보고의 부친은 장씨도시조인 백익, 중국 절강 소주부 용흥사람, 신라에   귀화하여 완도에 정착, 장보고는 완도읍 장좌리에서 출생. 3.1.2삼국사기: 장보고를 궁복이라 하면서 “해도 출신”으로 기록, 삼국유사: 궁파로 기록, 또 장보고의 신분이 “특미”하다고 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공통점은 장보고가 신라 출신의 신라인이라는 것이다. 3.2일본 측 견해: 일본승려 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라 기록, 장보고라는 이름의 함의는 신라, 당,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권을 장악하고 경제력이 막강하었기에 장보고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3.3중국 측 견해: 3.3.1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장보고·정년전”에서는 “해도인”, 즉 바닷가출신의 천한 백성이었다고 기록. 3.3.2산동성 영성시 “장보고역사연구회” 회장 장협은 장보고는 아버지가 오늘의 영성시 석도진 출신이며 신라에 귀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4. 장보고는 신라사람   우에서 장보고의 국적문제를 두고 한국, 일본, 중국 측의 해당자료와 견해를 두루 살펴보았다. 종합하여 보면 장보고가 신라 출신의 신라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장보고의 아버지가 당나라 출신인가, 신라 출신인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한 자료는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다. 가령 장보고의 아버지가 당나라의 출신이라 한다 해도 이미 신라에 귀화하였기에 당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사실로 알려진다. 이에 비추어 필자는 장보고 부친의 당나라나 신라 출신문제는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야 함을 지적하면서 장보고는 신라사람이며 신라가 낳은 바다의 영웅임은 드팀없는 역사사실임을 밝히고 싶다. 필자가 쓴 “고대 해상왕 장보고의 국적문제?” 논문이 보여주자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168    【심사평】문학평단에 떠오른 두 얼굴 댓글:  조회:3792  추천:130  2007-07-05
【심사평】문학평단에 떠오른 두 얼굴    조성일 (평론가)       “연변문학”지 편집부는 2003년 윤동주문학상평론후선작품으로 본상에 “세기촌과 세기말에 그려진 ‘탈출기’”(엄정자), “소재의 상사성이 묵인되는 리유 그리고 사색할 문제”(김운일), “조선족수필의 쟝르적 변화와 서영빈의 수필”(장춘식),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리광인), 신인상에 “예민한 감수성과 남다른 안목”(서채화), “리서구 시에서의 색채와 왕사정의 신운설 수용”(박향숙) 등을 심사위원회에 교부하였다. 윤동주문학상심사위원회에서는 상술한 후선작품을 놓고 심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기대여 거듭되는 심사와 검토를 거쳐 리광인의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연변문학” 2005.11)을 윤동주문학상 평론본상 수상작으로, 서채화의 “예민한 감수성과 남다른 안목”(“연변문학”2005.5)을 윤동주문학상 평론신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리광인은 최근에 평문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50대 평론가로, 서채화는 평단에 갓 대두한 20대 신진평론가로, 바꿔말하면 자기 나름의 상리와 모습을 가진 두 얼굴로 우리 조선족평단에 떠올랐다. 평론문학에 대한 그들의 진지하고도 성실한 자세와 훌륭한 평문의 수준에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리광인은 력사연구에 투신하여 장장 30성상을 주름잡은 력사학자이다. 그는 최근에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 출판)을 펴내여 조선족력사계의 이목을 끌고있다. 또한 지난해 초반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저명한 소설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 암살 동거범으로  몰아부칠 때 리광인은 인터넷에 자기가 갖고있는 사료와 조사에 따른 여러 편의 글을 올려 “동거범”설을 사실무근임을 밝임으로써 한국 력사계와 문단의 호평을 얻기도 했다. 리광인 력사연구와 더불어 조선족문학연구에도 열을 올려 이 몇년 사이에 훌륭한 평문창출로 우리 평단에 “청량제”를 안겨주었다. 이번에 수상하는 평문이 그 일례라 할수 있다. 리광인의 수상작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은 소설가 강경애연구에 있어서 력사의 뒤자락에 깔려있던 력사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파헤쳐 복원하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있다. “북향회”는 지난세기 30년대 중반 룡정에서 세워진 우리 민족의 문학동인단체로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마멸할수 없는 빛나는 한페지를 수놓았다. 강경애는 룡정거주시절에 “북향회”고문으로 활약하면서 “북향회” 및 그 동인들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그 활약상이 후세에 진실하게 잘 전해지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리광인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본 수상작을 통해 “북향회”의 창립시간 및 그 전후 시기에 따라 “북향회”에서 일으킨 강경애의 역할을 재검토하면서 “북향회” 관계 강경애의 활약상을 우리 평단에서 처음으로 폭넓게 그려냈다. 이 평문을 통해 우리 가슴에 뜨겁게 안겨오는것은 선배평론가들의 연구성과에 대한 공정한 분석, 력사와 진실에 대한 존중 및 그에 대한 끈질긴 추구, 자기의 견해를 사실로 립증하는 학구적인 자세이다. 그는 이 평문을 통해 강경애문학연구에서의 미흡한 점을 보완했을뿐만아니라 문학에 대한 우리 평론가들의 접근방법에도 새로운 계시를 주고있다. 윤동주문학상 평론신인상을 수상한 서채화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4학년 학생이다. 그는 “예민한 감수성과 남다른 안목”이라는 평문을 통해 우리 평단에 두각을 내밀었다. 이 평문은 김명순의 시 “성에꽃사랑”, “소외”의 가치판단을 함에 있어서 재래의 도식적인 정치평론 혹은 도덕적설교의 격식을 초탈하여 시작품 텍스트의 “구조”와 “관계”에 치중하고 시의 이미지를 비롯한 수사적장치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시의 텍스트 표층구조의 저변에 깔려있는 심층의미를 설득력있게 설파하였다. 이 평론은 자기의 평론대상에 대하여 심미적자세로 접근하면서 예술적분석에 모를 박음과 동시에 사회비평적성격을 곁들여 내용과 형식에서의 시작품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밝혀냈다. 특히 이 평론에서는 작자가 시에 깊이 감동할수 있는 반응능력과 시적인 미를 민감하게 감수하는 능력, 그리고 문학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와 짜임새있는 론지전개능력이 돋보이며 시작품의 텍스트의 내부구조와 이미지를 거머지고 시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발상에 흥미롭다.또한 그는 평론방법과 평론문제의 참신성을 탐구함에도 일조하였다. 서채화의 수상작을 통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도리를 다시한번 실감나게 하였다. 그의 창창한 앞날을 바라마지 않는다. 문학평론은 문학의 다른 쟝르에 고용되는 “시녀”와  “기생”이 아니다. 우리의 문학평론은 자기의 주체적인 생리와 체질을 더욱 단단히 굳히면서 세월의 흐름을 타고 더욱 아름다운 미래를 안아오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젊은 세대 평론가들에게 기대를 건다. 수상을 축하하며 지속적인 정진을 부탁드린다.   2005년 제26회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작품집, 연변문학월간사
167    2005년 연변문학 윤동주 문학상 총평(절록) 댓글:  조회:3438  추천:120  2007-07-05
2005년 연변문학 윤동주 문학상 총평                                                                       김 호 웅 (연변대학 교수, 박사)    2005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을 통해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참신한 문학세계를 개척해가는 우리 작가들의 치렬한 작가정신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심사위원회는 조성일, 리상각, 김병민, 김호웅 등 평론가, 시인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의 분과별 심사평을 요약, 종합해 총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하 략) 평론부분: 문학평단에 떠오른 두 얼굴리광인의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을 본상 수상작으로, 서채화의 《예민한 감수성과 남다른 안목》을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리광인은 최근에 평문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50대 평론가로, 서채화는 평단에 갓 대두한 20대 신진평론가로, 각자 자기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 조선족평단에 떠올랐다.   리광인의 수상작 《북향회와 강경애고문의 활약상》은 강경애의 연구에 있어서 력사의 뒤안길에 깔려있던 진실을 객관적으로 파헤쳐 복원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있다.《북향회》는 지난 세기 30년대 중반 룡정에서 세워진 문학동인단체로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세웠다. 강경애는 룡정거주시절에 《북향회》고문으로 활약하면서 《북향회》 및 그 동인들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그 활약상이 후세에 잘 전해지지 않고있는 상황이다. 리광인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비해 《북향회》의 창립시간 및 그 전후에 《북향회》에 끼친 강경애의 역할을 재검토하면서 《북향회》와 관련된 강경애의 활약상을 처음으로 폭넓게 그려냈다. 이 평문을 통해 우리 가슴에 뜨겁게 안겨오는것은 선배평론가들의 기성 연구성과에 대한 공정한 분석, 력사와 진실에 대한 존중 및 그에 대한 끈질긴 추구, 자기의 견해를 사실로 립증하는 학구적인 자세이다. (이하 략)   모두어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우리 문학의 더욱 큰 발전을 기대해 본다.     연길, 제26회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시상식에서                                                                                  2006년  8월  16일        
166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우수 도서상 댓글:  조회:3929  추천:159  2007-07-04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우수 도서상   절강 월수대 한국문화연구소 교수,박사,소장 류은종   2006년 8월 18일,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와 한국 학술정보(주)의 주최로 풍경이 수려한 만천성 천성호락원에서 “조선문 도서출판 2주년 기념회 및 우수도서 시상식”이 펼쳐졌다. 시상식에는 연변의 해당 도서작자와 작가, 예술인, 학자 등 7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지난 1년래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의 편집과 한국 학술정보(주)에 의해 출간된 연변 여러 작자님들의 128종의 도서들중, 시인 리근영, 교수 우상렬 등의 9종이 평심위원들의 엄격한 선정을 거쳐 우수도서상으로 떠올랐다. 9종 수상중의 하나가 리광인씨의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전 4권)이다. 이 책으로 리광인씨는 우수도서상 수상자로 되여 수상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1.       재래의 렬사전 등에 비해 리광인의 인물항일사 전4권은 사적(史的)연구로 력사적인 맥락이 이어져 격이 보다 높아졌다.       지난 80년대, 90년대초 연변이나 조선족사회에서 출판된 《장백의 투사들》이나 《조선족혁명렬사전》 등은 렬사전기의 각도에 머무르고있었다. 리광인의 책은 사적연구시각에서 렬사들을 하나의 력사적인 흐름선에 이어놓고 조명하면서 책마다 주요참고문헌과 자료래원을 밝히고 부분적렬사들에 한해서는 부록까지 달아 인물사의 체계를 이루었다.   2.       인물항일사는 처음으로 조선족항일렬사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집대성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전 4권은 도합 125만자로서 140편의 전기가 수록되고 총수 164명을 취급하고있다. 지금까지 정리, 발표된 렬사전기는 240명~250명쯤인데 리광인이 단신으로 150명쯤을 정리하였다. 이는 대단한 연구성과가 아닐수 없다.     또, 전 4권은 1~2권이 남성편, 제3권이 녀성편, 제4권이 소년아동편으로 되어 처음으로 성별적인 시각과 군체의 각도에서 집대성을 보여주었다. 그중 제2권은 순수 화룡시렬사편으로 되여 정리할수 있는 화룡시의 모든 항일렬사들을 살리였다. 제3권은 녀성편으로서 지금까지 녀성렬사전이 없던 공백을 메워놓았다. 전에 《항일녀투사들》 등과 같은 책이 나오긴 했으나 광복후 살아있는 인물들까지 취급하여 순수 혁명렬사전이 아니였다.   3. 집필격식에서 순수 전통관습에 구애되지 않          고 활발하게 정리화했다.   이미의 렬사전들은 력사적인 제한성으로 하여 하나같이 렬사들을 영웅인물화하여 결함이 있어도 안되고 사생활을 건드려도 안되였다. 하나 인물항일사는 재래의 이런 금지구역들을 타파하면서 활발하게 씌여졌다. 례하면, 이름난 녀투사 리계순렬사는 선후 남편이 셋이였는데 리광인은 이를 그대로 서술하였다. 하여 렬사들은 뼈도 있고 살도 있고 피도 있는 살아움직이는 인간으로 우리한테 다가선다.   4.          4.  자료의 결핍으로 정리하기 어렵거나 정리할수          없는 렬사편들을 조합식으로 하여 최대한 살         려냈다.   례컨대, 제2권 《우복동의 항일렬사들》은 조합식방법으로 동파, 안영숙 등 12명의 렬사들을 취급하여 이름없이 사라질번한 렬사들을 해빛을 보게 하였다. 사명감이 없이는 해낼수 없는 거동이다. 전4권에는 이런 조합식이 여러 면에서 체현되어 쓸수 없다던 20여명의 렬사들을 살리여 인물항일사에 올리였다.   5.       인물항일사에서 두드러지게 기꺼운 점은 력사바로잡기이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초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류형의 렬사전들이 출판되였는데 시대적 제한성과 관념상의 구애성 그리고 력사연구의 부진으로 많은 점이 틀리기나 오류로 남아있었다. 리광인은 인물항일사 취급인물에서 력사바로잡기를 실사구시하게 벌려 상기 페단들을 최대한으로 돌려세우기에 힘다 했다. 례컨대, 이름난 녀투사 최희숙은 희생될 때 적들이 두 눈을 도려내고 심장을 끄집어낸것으로 비장하게 묘사되였다. 리광인은 이는 력사사실이 아닌 허구임을 그대로 밝히여 력사진실로 돌려놓았다. 이외에도 인물항일사 전 4권에는 눈에 띄우는 특점이나 주의점들이 보여지는데 여기에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어찌하든 인물항일사는 우리 조선족사회의 최신렬사연구성과로서 이번에 우수상을 당당하게 받을수 있는 도서이다.                                                             2006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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