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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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내 고향 여행】(43)-선바위와 륙도하 댓글:  조회:2820  추천:134  2007-01-11
선바위와 륙도하 눈물겨운 겨레의 이주사를 펼치면 우리 멋이 진한 돌봉, 아들골, 애끼골, 외돌배기, 두텁골, 쇠골, 늪골 등 지명들에 접하게 된다. 아쉬운것은 그후 지명조사때 이런 마을이름들이 그 뜻과 발음에 따라 석봉(石峰), 자동(子洞), 제동(弟洞),고석동(孤石洞), 후동(厚洞), 금곡(金谷), 로과(芦菓) 등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허나 오랑캐령 북쪽너머 명동일대의 선바위는 그제나이제나 끄떡없이 그 이름 그대로 우뚝 솟아 길손들을 반긴다. 선바위, 우리 겨레로 말할 때 정녕 잊을수 없는 역사의 고장이다. 하기에 허다한 문인들은 명동을 외울 때 자연스레 선바위를 먼저 떠올리군 했다. 고향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한 학급동창생이며 외사촌인 한국시인 김정우선생은 자기의 글 “윤동주의 소년시절”에서 명동의 자연환경을 묘사하면서 선바위를 잘 그려냈다. —명동촌의 자연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북으로 완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주고있다. 그 바위돌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싸움터로 여겨지는 산성이 있고 화살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되군 하였다.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갔다. 어린시절의 회상이여서 어딘가 방향이나 산세에서 빗나간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선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명동의 주위환경을 보는듯이 그려냈다고 할수 있다. 이를 두고 불후의 걸작—“윤동주평전”을 펴낸 한국의 녀류소설가이고 역사학자이기도 한 송우혜녀사는 “김정우시인의 글은 윤동주의 명동시절의 자연환경을 정말 한폭의 그림그리듯이 서술하고있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적절히 평가를 내리였다. 이에 앞서 송우혜선생은 자기 저서 “윤동주평전”에서 선바위를 주축으로 하는 명동의 외형을 윤동주집안과의 관계속에서 살펴보았다. —명동은 그곳에 명동서숙이 생기면서부터 명동마을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이민이 들어가기 이전 청국인 대지주 동한이 소유하고 있을 때엔 “동가지팡”, “부걸라재(凫鸽砬子: 비둘기바위란 뜻)” 등의 청국식 지병으로 불렸다. “부걸라재”는 명동에서 용정쪽의 골짜기입구에 커다란 바위 셋이 우뚝 서있었는데 (한인들은 이 바위들을 “선바위”라고 불렀다.) 거기 비둘기들이 많았던데서 연유했다는것이다. 선바위의 유래를 밝히는 실사구시한 서술이라 하겠다. 유감스러운것은 명동의 해당자료를 그 이상 더 접촉하지 못하여 명동이기에 앞서 지명이 룡암동이였다는것을 몰랐다는것이다. 이런 연유로 송우혜선생은 명동촌을 학교촌이라고도 했는데 학교촌, 룡암촌을 명동촌과 갈라본것 같다. 김정우시인과 송우혜소설가의 선바위글이 상기 인용이라면 필자의 친구이고 중년소설가인 류연산은 장편기행문—“혈연의 강들”에서 륙도하를 거스른 지신향 신동골어구에 예전엔 세개의 큰 바위산이 우중충 솟아있었다면서 그중 두개의 산이 없어진 비감을 이렇게 토로하고있다. —나는 용정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에 숭엄한 심정으로 선바위를 바라보았다. 그제날엔 세개의 바위산이 가지런히 솟아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의 산이 외홀로 하늘을 떠받든 기둥마냥 힘겹게 치솟아있었다. 돌을 까서 길을 닦느라고 남포질에 두개의 산이 거덜이 난것이다. 바위산이 있었던 흔적인 돌너덜은 마치도 전쟁의 창상마냥 참혹하게 안겨왔다. 그랬으면서도 거대한 탑마냥 하늘공중에 우뚝 솟은 외로운 선바위는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변하여 나의 시야로 달려왔다. 그것은 다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뒤바뀌기도 했다. 과시 소설가다운 마음의 토로이다. 전설속의 선바위, 이주의 옛말을 담은 선바위는 이 중년소설가에게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 필자한테는 선바위가 또 윤동주소년시인의 거룩한 모습으로도 떠올랐다. 어떻게 보아도 소년 윤동주와 떼여놓을수 없었다. 선바위,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이는 상기 인용문에 밝히다싶이 윤동주의 소학교동창생 김정우선생의 글에 묘사된 한 단락이다. 사실 선바위부근의 장재촌이나 명동촌 등지의 사람들은 어른, 아이나를 막론하고 해마다 봄이 오면 삼형제바위를 찾아 들놀이를 즐기군 하였다. 지난 80년대로부터 이어진 명동일대답사시 장재촌, 명동촌의 로인들이 말이다. 그속에는 부자집장손으로서 “마음 여리고 공부 잘하던 어진 소년”윤동주도 들어있었다. 한창 나이의 소년— 윤동주 또래들에게 있어서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는 마을부근 야산이나 선바위는 그야말로 들놀이의 무릉도원이였다. 선바위가 주는 멋은 또 탁 트인 시야가 아닌가싶다. 선바위쪽에서 골따라 남쪽을 바라보면 명동지구라 일컿는 수십리골안과 골안저쪽의 오봉산이 한눈에 안겨든다. 그 골안 복판으로 내물을 방불케 하는 륙도하가 졸졸 흘러내린다. 륙도하는 백리륙도하라고도 일컿는데 용정시 지신진 동남쪽의 오봉산기슭에서 발원하여 지신, 명동, 장재, 선바위구간, 원 광신향 구간을 거쳐 룡문교 웃쪽에서 해란강에 흘러든다. 말하자면 해란강의 하나의 지류인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김성호선생은 “백리륙도하”라는 한편의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요람은 해란강이라고 말하고싶어졌다.”면서 해란강의 “하나의 줄기인 륙도하도 역시 우리 문화의 발전에서 씨앗을 발하시킨 젖줄기라고 여기지 않을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실 그러했다. 백리나 면면히 이어졌다는 륙도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내물을 방불케 한다지만 100여년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는 큰 강이였다고 한다. 이 강 량안에는 조선서 살길을 찾아온 조선이주민들이 여기저기 마을을 지어 모여살았다. 그래서 륙도하는 우리 겨레를 키운, 우리 문화를 이어준 생명의 젖줄기이기도 했다. 19세기 90년대이전만 해도 이 지구는 수림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한 한적한 고장이였다. 1885년을 계기로 청정부에서 200여년간이나 지속된 봉금령을 정식으로 페지하자 기아에서 허덕이던 조선 북부지대의 농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었다. 1899년에 이르러 장재촌에 30세대, 하중영촌에 10세대, 중영촌에 8세대, 성교촌에 20세대, 소룡동에 15세대, 대룡동에 20세대, 풍락동에 80세대를 이루었는데 이 7개 촌의 세대수는 무려 근 200세대에 달했다. 이해 1899년 2월 18일에 두만강남안의 조선 회령, 종성 등지에서 김약연 등 네 학자가문의 남녀로소 141명이 명동일대에 이주해오자 이 일대에는 서재들이 일어서며 새로운 부흥을 맞이했다. 이런 고로 오늘 륙도하를 거슬러 답사하노라면 그제날의 명동지구에서만 해도 김약연선생의 공덕비와 묘소, 윤동주시인의 생가, 청년문사 송몽규의 생가, 김창걸선생문학비, 그제날 명동학교자리와 복원된 교회당, 광복전 화룡현성자리—지신촌을 볼수가 있는걸가. 선바위 북쪽은 또 어떤가,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가 용정 동산묘지에 있다면, 3.13반일의사릉, 15만원 탈취거사 옛터, 1930년 5.30폭동지휘부 옛터, 주덕해생가 옛터기념비 등이 관광명소로 줄줄이 이어져 관광객들을 부른다. 선바위와 백리륙도하—이 고장들은 정녕 마음이 가 닿는, 또 마음이 끌려가는 역사의 고장이요, 문화유적지이다. (2004년 10월 6일)
124    [내 고향 여행](42)-용정은 그제날 우리 문화의 서울 댓글:  조회:3556  추천:118  2007-01-10
용정은 그제날 우리 문화의 서울 지난세기 10년대 후반기 개산툰 정동, 달라자 명동, 와룡동 창동, 소영자 광성 등지 학교가 연변조선족의 최초의 4대중학교로 떠올랐다면 20년대에 잡아든 용정은 은진(1920년 2월), 영신(1921년 5월), 대성(1921년 7월), 동흥(1921년 10월) 등 중학교들이 륙속 일떠서면서 용정은 일약 중국조선족문화의 서울로 떠올랐다. 배움에 뜻을 두고 반일에 뜻을 둔 겨레의 열혈청년들은 조선반도와 로씨야 연해주, 동북의 남만과 북만에서 용정으로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그 중심에는 대성, 동흥 중학교가 서 있었다. 지난 9월 9일, 가을비가 포근히 내리던 날 필자는 8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용정중학교를 찾았다. 용정중학교는 용정시 민성거리 789번지에 자리잡았고 이 중학교의 전신은 광복전 용정에 세워졌던 6개소 중학교들이였다. 6개소 중학교들로는 은진중학, 영신중학, 명신녀자중학, 광명녀자중학, 동흥중학, 대성중학교들인데 6개소 중학교의 련합물인 용정중학교는 그제날 대성중학교 옛터에 자리잡고있었다. 조선족문화의 서울속의 서울인 대성중학교 옛터에 들어서니 산뜻하고 아담한 옛 대성중학교건물이 어서 오라 손짓하듯 필자의 마음을 끌었다. 진회색을 띤 옛 대성중학교건물은 2층 구조물이였다. 2층 정문 오른쪽에는 용정시 관광지점이라고 밝힌 대성중학옛터 흰 패말과 6개소 련합기념비가 서 있고 왼쪽에는 윤동주시비가 서 있었다. 정면 복도에 들어서니 들어가는 오른쪽벽에 대성중학옛터 《복원기》가 씌여져있었다. 이 건물은 1921년에 건립된 원 대성중학으로서 기나긴 세월동안 우수한 인재를 수많이 배양(양성)하고 조선민족교육의 요람이였다. 74년기간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무너질 위험에 직면하였기에 본교에서는 용정시정부, 한국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주선과 (주) 금성출판사 耘平·김학준회장의 지원을 받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1994년 6월 15일 용정중학 복원기에 의하면 대성중학교옛터는 그제날 낡은 건물이 아니라 복원된 건물로서 어느덧 10년의 역사를 갖고있었다. 그에 따라 《용정중학역사전시관》이 2층에 설치되여 정규화한 박물관을 방불케 하였다. 역사전시관입구에 들어서니 전시관은 용정중학 연혁개황으로부터 시작되면서 은진, 명신녀자, 동흥, 광명, 대성, 광명녀자 중학교들이 합치여 우리 민족의 개척지, 반일독립운동의 책원지, 민족문화의 발상지, 종교활동의 중심지를 이루었음을 알려주고있었다. 역사를 펼치면 상기 6개소 중학교들은 1946년 9월 16일에 합병되여 길림성립 용정중학교로 되였다. 지금의 용정중학교로 다시 개칭된것은 1985년이였다. 그제날 일제치하, 민족수난의 시기에 6개소 중학교의 사생들은 반일, 항일구국,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반일민족교육과 문화계몽운동에 선뜻 뛰여들어 20세기 20년대로부터 수많은 반일애국투사, 항일투사들을 키워냈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족의 이름난 저항시인 윤동주, 청년문사인 송몽규가 있는가 하면 항일무장투쟁시기 동남만성위 조직부장 리동광,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1사 참모장 리민환, 왕청현위 제1임서기 김훈, 훈춘현위 제4임서기와 제5임서기인 오빈, 서광, 요하중심현위 서기 박진우,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당위서기 겸 조직부장 박봉남, 항일련군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리일평, 항일련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김근, 북만성위서기이며 항일련군 제3로군 지도자인 김책 등이 있다. 전임 조선총리 리종옥, 전임 한국총리 정일권 등도 6개소 출신들이였다. 역사전시관 뒤부분에 와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것은 겨례의 저항시인 윤동주의 사진과 해당자료들이라 하겠다. 아마도 윤동주시인의 생전사진들은 모두 전시관에 모아진것 같았다. 옛터의 정문 왼쪽가에 세워진 윤동주시비는 보다 인상적이였다. 이 시비는 1992년에 세워졌다. 1985년 5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권철선생이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교수를 안내하여 용정에 가서 3일간 있으면서 용정중학교 원로 역사교원 한생철선생의 도움으로 용정 동산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낸후 이해 6월, 용정중학교 사생들과 권철교수, 오무라교수, 윤동주의 친척들이 참가한 추모모임이 벌어지고 당시 용정중학교 교장 류기천의 노력과 미중한인우호협회 현봉학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성금에 힘입어 묘소가 일신되였다. 1985년이후 용정중학교에서는 사회지명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시인의 추모모임을 가지였다고 한다. 12월 30일 윤동주탄생일이면 《윤동주문학상》시상식이 마련되였다. 《연변문학》잡지사에서 1999년부터 《윤동주문학상》을 설치한것이 그러하다 하겠다. 이에 못지 않게 대성중학교 옛터 오른쪽에는 450여평방메터를 헤아리는 리상설전시관이 신설되여 흘러간 역사의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이런 분위기에 흠뻑 젖어 필자는 열심히 사진기샤따를 누르는 한편 그제날 대성중학교 사진들은 망라한 여러 중소학교들의 사진자료를 모아보았다. 물씬 풍겨오는 역사의 체취, 그 체취는 지난세기 20년대의 용정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서울로 되기에 손색이 없고 그 신문화운동의 중심, 항일투쟁의 최전렬에는 구심점인 용정대성중학교가 서있었다는것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2004년 9월 23일)
123    【내 고향 여행】(41)-룡정 3.13독립만세 소리 댓글:  조회:4883  추천:158  2007-01-08
용정 3.13독립만세 소리 용정에서 있은 흘러간 역사사건 치고 3.13반일운동처럼 이땅을 들썽한 역사사건은 없을것이다. 1919년 3월 13일에 벌어졌던 2만여명(혹은 3만여명) 군중이 참가한 그번 반일운동은 천지를 진감하며 어언 85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제날 부른 3.13독립만세소리는 오늘도 귀전에 들리는듯싶다. 며칠전 필자가 85년전의 만세사건으로 선참 찾은곳은 용정시중심유치원이다. 이 중심유치원마당 한쪽에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기념석비가 세워졌는데 석비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졌고 석비 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용정 3.13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용정시 중심유치원자리는 당년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자리이다. 3.13반일집회의 시작을 선고하던 역사의 종소리는 바로 여기에서 울리였는데 이 종소리에는 한 홍안소년의 진실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85년전의 3월 13일 그날 정오가 가까와오자 이곳 회장은 점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용정촌의 조선인은 물론 부근 100리안팎의 달라자, 개산툰, 평강벌 각지의 학생들과 남녀로소가 모이다보니 상부국 동산기슭엔 어느덧 2만여명의 군중이 모이였다. 그들속에는 320명의 학생충혈대와 국자가 도립중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1,000여명의 《자위단》단원들이 들어있다. 대오에는 일본간도총령사관 소속 간도보통학교의 200여명 남녀학생들도 섞이였다. 그들은 학교당국의 엄한 저애에도 불구하고 문을 박차고 나와 철조망담장을 짓부셨는데 일본인교장은 《10년교육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애탄해마지않았다. 그날 대회소집은 천주교교회당 정오 종소리를 계기로 시작하기로 약속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맹부덕퇀장과 상부국국장 장은적은 교회당 일체출입을 엄금하라고 교회에 알리였다. 용정촌의 반일지사 김일룡 등 3명이 장은적을 찾아 도리를 따졌지만 막무가내였다. 김일룡이 단신으로 교회당에 찾아가 보았으나 꾹 닫긴 교회당의 문은 좀처럼 열릴줄 몰랐다. 헌데 정오가 좀 지나자 대회시작을 알리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대회참가자들의 마음마음을 흥분시키며 《땡, 땡》 울려퍼지지 않겠는가. 이게 웬일인가, 김일룡은 벙벙해지고말았다. 그 시각 그는 우리 조선족항일투쟁사의 한개 기원으로 되는 이 역사의 종소리가 나어린 두 소년에 의해 울리였음을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날의 소년이고 3.13목격자이며 원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이였던 림민호선생은 후에 이렇게 회억하였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는 소년이였다.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고 아버지는 그 교회에서 심부름을 하였다. 이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바삐 먹은후 동네의 다른 한 동무와 함께 교회당종루로 올라가 숨어있었다. 거의 정오가 될 때 우리는 국자가, 투도구 방면으로부터 용정을 향해오는 대중대렬을 구경하며 대회장의 정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나는 같이 구경하던 동무와 함께 종루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종소리는 천공과 사변에 련속 울려퍼졌다… 우리 둘은 계속 종을 울렸던것이다. … 그때 종을 울린것은 우리 둘이였는데 우리는 누구의 지시를 받은적도 없었다. 그저 대회의 선포를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우연이라할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이 오직 홍안소년의 호기심과 갈망으로부터 울려퍼진 역사의 종소리는 수천수만 대회참가자들의 부푼 정열을 안정시키고 연변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 겨레들을 본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개막식에로 이끌었다. 그날 3.13반일집회는 김영학, 구춘선 등 33명 대회조직자측에 의해 종루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였다. 대회가 끝나자 성세호대한 시위행진이 열을 올리였는데 시위군중과 군경들사이엔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 결과 어지러운 총소리속에서 10명 투사가 당장에서 숨을 거두고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튿날 제창병원 치료도중 또 4명 투사가 숨을 거두었다. 그중 한 투사는 《죽는것은 아깝지 않으나 일본 사람의 손에 죽지 못한것이 한이로다!》라고 유언을 남기였다. 3월 13일 오후 대회해산후 조직자들은 구춘선, 강봉우 등 5명 대표를 국자가에 파견하여 연길도윤공서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그날밤 국자가로 전이한 대회조직자들은 적암령에 모여 김영학을 회장으로 하는 《국민의사회》를 조직하고 17일에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연길도윤공서와 용정상부국과 교섭하여 상부지구역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의를 얻어내고 장례의 순조로운 진행을 담보하였다. 3월 17일, 3,000-4,000명의 군중들이 제창병원 마당에서 14의사의 장례식을 장중히 가지였다. 오후 1시에 출빈행렬은 《조선독립수난자》라고 쓴 만장을 앞세우고 상여를 모시고 용정촌 동남쪽 4리가량 떨어진 합성리동산묘지로 서서히 향하였다. 오후 3시에 장례식이 끝나자 렬사들 묘지앞에는 나무로 정성껏 만든 묘패가 세워지고 그앞에 《충렬사제공지묘(忠烈士诸公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14렬사로는 박상진, 정시익, 공덕흡, 김태균, 김승록, 최일선, 리유주, 김흥식, 박문호, 리요섭, 장학관, 현봉률, 현상지, 차정룡이였다. 그후 3.13에서 중상 입은 투사들중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등 3명이 또 희생되다 보니 용정 3.13반일운동에서 희생된 렬사는 도합 17명이나 된다. 1919년 7월, 간도국민회에서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상해림시정부에서 17명 렬사유가족들에게 드리는 포충장(褒忠状)전달의식을 가지고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17명 렬사를 추모하였다. 1945년 8.15후 용정과 국자가의 해당인사들은 연변인민의 이름으로 용정 합성리묘소에서 17명 렬사의 위령제를 지내고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식을 가지였다. 돌이켜보는 당년 용정촌 3.13반일운동의 편단들이다.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답사에 이어 필자는 용정시가지에서 남으로 4리 좀더 떨어진 합성리묘소에 자리잡은 3.13반일의사들을 찾았다. 3.13반일의사들은 용정—삼합행도로표식 2킬로메터 동남쪽부근 길가에 위치, 3.13반일의사릉 반형은 떠다심은 소나무로 둘러싸이고 13묘소가 두줄로 배렬되였다면 그 중앙엔 《3.13반일의사릉》이라고 한자로 새긴 대리석기념비가 옹위되여있었다. 기념비뒤면에는 비문과 함께 상기 17렬사와 허준언, 원인선까지 도합 19명 렬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아무튼 3.13렬사를 두고 17명설과 19명설이 공존해있으니 어느 한 설이라고 딱히 지적하기 어려운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기념비 뒤면의 채창헌이름에 깊은 주의를 들리였다. 한것은 최근 몇달사이 채창헌렬사의 유가족이 필자를 찾아 역사해명을 부탁했기때문이다. 최근에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채창헌렬사의 유가족 채경옥녀사를 찾게 되고 취재하는 가운데서 채창헌의사의 가족래력을 다소 헤아리게 되였다. 채창헌렬사는 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응진촌사람이다. 20세기 10년대는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 흥영촌으로 통하였다. 채경숙녀사는 올해 76살로서 1929년생인데 녀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채창헌의 맏형이였다. 채창묵은 오도구에서 서당툰장으로 있었고 아래 채인묵, 채창호, 채창헌 세 동생을 두었다. 즉 4형제였는데 채창헌렬사는 형제중 막내로서 장가도 못간 총각으로 있다가 3.13에서 희생되였다. 렬사의 셋째형 채창호는 반일활동에 종사하다가 로씨야 연해주로 간 뒤 종무소식이고 둘째형 채인묵은 종적을 알수가 없다. 채경숙녀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광복전에 당지에서 사망,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헌데 험악한 세월에 차례로 여섯이 죽다보니 채경숙녀사의 아버지 채경천 하나만 생존, 지금은 저 세상사람으로 되였다. 지금 채경숙녀사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현철수(1955년생)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재직중이고 딸 현옥희(1993년생)는 연변주 당학교 법률학부 학부장으로 뛴다. 채경숙녀사를 통해 헤아린 채창헌의사의 가족형편과 유가족실태이다. 해당자료를 보면 채창헌은 당년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사람이다. 그는 천주교계통에서 꾸린 당지 사립경애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이에 앞서 그는 철혈광복단성원으로서 와룡동 창동학교 교원인 박문호 그리고 림국정, 최봉설, 최일선 등 철혈광복단성원들과 함께 리동휘가 꾸린 라자구사관학교에서 공부했었다. 용정 3.13반일운동때는 박문호, 최일선 등과 함께 희생을 각오한 충렬대의 지휘자로 뛰다가 적탄에 맞았고 1919년 3월 17일부터 3월 22일사이 불행히 희생되였다. 알고보면 용정 3.13반일운동에서 쓰러진 17명(혹은 19명) 렬사가운데서 유가족을 찾은것은 몇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채창헌도 그 유가족을 찾기전엔 가족관계를 알수가 없어 지금껏 렬사전기를 정리하지 못하고 응당 받아야 할 렬사 등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필자의 눈길은 내내 채창헌렬사의 이름에서 떠날줄 몰랐다. (2004년 9월 16일)
122    【내 고향 여행】(40) -서전서숙이 뿌리내린 고장 댓글:  조회:3584  추천:115  2007-01-07
서전서숙이 뿌리내린 고장 지금까지 1906년에 륙도구에 세워진 서전서숙이 연변의 첫 조선족근대학교로 알려졌다. 1904년에 세워졌다는 훈춘현 동광학교가 나타남에 따라 서전서숙은 첫 조선족근대학교의 월계관을 고스란히 내놓아야 했지만 조선족근대학교운동에서 일으킨 서전서숙의 역할은 여전히 막대했다. 그래서 필자는 룡드레우물에 이어 용정시안의 관광명소로 발돋음한 서전서숙옛터로 답사의 발길을 돌리였다. 서전서숙옛터 기념자리는 용정시 문화로 91번지—오늘의 용정시실험소학교운동장 왼쪽가에 자리잡고있었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선참 눈길을 끄는것은 운동장왼쪽가에 소소리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였다. 비술나무밑에 이르니 나무에는 《서전서숙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었는데 패쪽의 패문은 이러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걸음을 떼였는데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역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있다. 그러니 이 비술나무를 인격화한다면 비술나무는 진짜 역사의 견증인으로서 세월속에 묻힌 서전서숙의 유래를 그대로 말해주는듯싶었다. 비술나무 왼쪽가에는 커다란 옹근돌로 된 석비가 세워졌는데 석비에는 한자로 《서전서숙(瑞甸书塾)》이란 네글자가 검은 글씨로 새겨져있고 《옛터》 두 글자는 조선문으로 되여있었다. 석비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석비를 두어 서전서숙옛터비문을 새기였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1995년 4월 15일 용정 3.13기념사업회 서전서숙 옛터 돌비석 오른쪽가, 아름드리 비술나무 뒤에는 《리상설정》, 즉 6각정자가 세워져 어린이들의 휴식장소로 알맞춤했다. 천진하게 뛰노는 어린이들은 배경으로 사진한장을 찍어보았는데 정자안 천정에 모셔진 리상설(화상)선생이 그제날 서전서숙교사의 배경속에서 어린이들을 내려다보며 방불히 미소를 짓고있었다. 관광명소—서전서숙 옛터를 답사하는 필자는 용정시실험소학교 신형의 교사한쪽켠에 일어선 옛터기념물들을 두고 환희고무되기도 한고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였다. 옛터자리라고 서전서숙기념나무패쪽, 리상설정자, 우람진 돌비석을 일떠세운 용정3.13기념사업회 등 해당부문의 로고에 환희고무된다면 돌비석비문부터 엇갈려나가니 마음이 착잡할수밖에 없었다. 선참 맘에 걸리는것은 서전서숙을 세운 시간문제였다. 서전서숙설립시간은 일반적으로 1906년 8월이나 10월 등으로 알려지는데 존재한 시간은 8개월로 밝혀진다. 헌데 1906년 10월에 세워져서 1907년 9월경에 페교라면 1년이 거의 맞먹는 시간이다. 하기에 연구학자에 따라 서전서숙을 론할 때 설립일과 페교일을 준확히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 지나쳐버리기가 일쑤다. 이러함에도 용정3.13기념사업회에서는 1906년 10월로 설립일을 잡아 일대 용기를 보여주었다. 유감스럽게도 페교일은 밝히지 못하였다. 그럴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시간문제에 이어 서전서숙을 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라고 지적한것이 또 맘에 걸린다. 1904년의 훈춘현 동광학교가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세운 돌비석(1995년 4월 15일 세운것으로 되여있음.)이라 할 때 리해가 가긴 하나 계속 그대로 묵새겨 두는것은 어떻게 하여도 리해가 가질 않는다. 이것이 결론이라면 1904년의 훈춘현 동광학교는 어떻게 보아야 할가, 적절한 평가가 수요된다. 이밖에 서전서숙의 페교를 두고 무작정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의 간섭과 저애, 핍박으로만 몰아가는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여하하든 이것도 이 글에서 시야비야 할것이 못된다. 이글—용정향토순례에서 보여주자는것은 역사유적지, 관광명소로서의 서전서숙 옛터이니 말이다. 부대적으로 이모저모의 시비를 지적하는것은 관광명소로 떠오른 서전서숙옛터에도 이런 시비문제를 안고있다는것을 환기시키려는것뿐이다. 필자는 서전서숙 옛터에 폭 잠기여 이윽토록 귀로의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 여름날의 잔잔한 비가 옷을 적시여도 리상설과 그가 세운 서전서숙이 진한 감동으로 마음에 흘러들었다. 한번쯤은 발길을 돌려야 할 서전서숙 옛터, 그속에서 뛰노는 실험소학교 어린이들이 부럽기만 하였다. (2004년 9월 10일)
121    【내 고향 여행】(39)-룡드레우물의 변천 댓글:  조회:4083  추천:108  2007-01-05
룡드레우물의 변천 용정시 관광명소 치고 선참 가보아야 할곳은 아마도 조선족이주의 생생한 역사를 담은 시안의 룡드레우물일것이다. 시인민정부 서쪽 가까이 네거리에 자리 잡은 룡드레우물가 소개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용정지명기원지 우물이 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이민 장인석, 박인연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가에다 “룡드레”를 세웠는데 용정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1934년 용정촌의 주민 리기섭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메터높이의 비석하나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용정지명기원지 우물(龙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고 새겼다. 1986년 용정현인민정부에서는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파괴되였던 이 우물을 다시 파고 비석을 세웠다.용정현중점문화유물보호단위 용정지명기원지우물 용정현 인민정부 공포 1987년 2월 27일 소개비는 좌우량쪽에 조, 한문으로 두개 세웠는데 룡드레우물의 래력을 일목료연하게 소개하고있다. 룡드레우물주위는 1997년에 산뜻한 공원으로 준공되여 길손들의 발목을 잡고있다. 유서깊은 룡드레우물이다. 이 룡드레 우물을 두고 중년소설가 류연산씨는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 룡드레촌에 이렇게 썼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1886년 봄 정준(鄭俊)이라는 총각이 밭갈이를 하다가 돌각담에 파묻힌 이 우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먼 옛날 녀진족들이 판 우물이고 오래동안 쓰지 않아 돌벽이 무너졌고 이끼가 낀 돌우에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그들은 무너진 돌벽을 다시 쌓고 우물안을 가셔냈다. 우물은 꽤나 깊었는데 물을 마시니 맛도 별맛이고 이발이 찡하고 저려났다… 어느 해엔가 이곳에 이사온 한족사람 충(忠)씨가 우물곁에 말뚝을 박고 드레박을 단 용드레를 비끌어맸다. 그때로부터 이 마을을 용드레촌이라고 불렀다. 용드레촌을 한자로는 부득이 “용정촌(龍井村)”이라고 밖에 달리 표기할수 없은데서 오늘의 용정이 된것이라고 한다. 류연산씨가 적은 역사기재는 1880년간 조선이민 장인석, 박인연이 발견했다는 이야기와 유래를 달리하고있지만 구태여 시비를 론하고싶지 않다. 아무튼 우리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발견된것은 사실이니깐 말이다. 이런 룡드레우물이 그후 여러 역사시기에 걸쳐 풍상고초를 겪어야 했다. 조선족의 이름난 민간문학작가 정길운선생은 일찍 1956년 8월 31일부 “연변일보”에 향토순례차로 “룡드레촌”을 실은바 있다. 이는 필자가 접한 첫 룡드레우물소개글인데 정길운선생은 이 글에서 그 시절의 돌비석을 소개하면서 돌비석의 앞면에는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龙井地名起原之井泉)’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고 뒤면에는 ‘명치 21년 음 3월 13일 조선 회령읍 출신 리기섭 발견’(명치 21년은 기원 1888년임—편자.)이라고 새겨져있다. 이것이 용정진의 기원인것은 틀림없는것 같다.”고 밝히였다. 비석 뒤면의 글이 사실이라면 1934년 리기섭설과 큰 차이를 보여 오리무중이다. 그후 비석의 유래에 대하여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다가 10년 동란시기에 액운을 면치 못했다. 1985년 4월 20일부 “연변일보”에 그시기 용정현교원진수학교 황두일선생은 “용정지명우물비석을 찾아 세웠으면”하는 건의글을 실으면서 지난 30년대 사진책에서 찾았다는 우물비석 사진을 올리였다. 사진과 함께 글에서 황두일선생은 최근에 여러 방면으로 되는 료해를 거쳐 우물비석이 없어진 형편을 알아보았다면서 바로 용정진정거장앞 기념탑밑에 파묻혔다고 썼다. 그는 계속하여 “10년동란”시기에 이 비석을 영원히 없애치운다는 뜻에서 파괴했다고 하면서 “용정진 인민정부와 용정현조선족민속박물관 등 유관부문에서도 대책을 대여 원래의 자리에 비석을 찾아 세워주기를 바랍니다.”하고 적절히 호소했다. 필자가 본 두번째 글이다. 이 글—건의가 효과를 나타냈는지 아니면 해당부분에서 언녕 중시를 돌렸는지 그 이듬해 1986년 7월 15일부 “길림신문”에는 “용정지명발원지 복구공사 시작”이라는 짧은 기사가 실리였다. 기사는 용정지명발원지 복구공사가 7월 5일에 정식으로 시작되였다면서 원래보다 “더 우아하고 규모가 크게 복구된 옛우물터를 원래 모양대로 만들고 돌비석을 새로 세우며 그곳을 중심으로 면적이 6000평방메터되는 ‘용정고적풍경구’를 건설한다. 올 10월이면 초보적인 모양새를 이룬 제1기공사가 끝나게 된다.”고 알리였다. 최상선의 서명으로 된 글이였다. 풍상고초를 겪어온 룡드레우물과 우물비석이 마침내 해빛을 보았다. 필자는 길가 단층집가에 외로이 서고있던 아름드리고목—버드나무로부터 공사현장, 건설된후의 이모저모를 모두 지켜보았다. 했으나 원 우물비석의 운명은 그대로 불운한것으로 보인다. 중년소설가 류연산씨는 그의 장편기행문—“혈연의 강들”(상)에서 이를 밝히였다. —돌비석은 문화대혁명 란리판에 잃어졌다. 근간에 누군가 김치움을 덮었던것을 찾아냈는데 지금 용정시민속박물관 마당에 놓여있다. 부석처럼 구멍이 숭숭한 돌비석은 허리가 뭉청 끊어지고 글도 몇자가 부서진 돌과 함께 잃어지고 없다면서 박물관장은 애석해했다. 원 우물비석의 운명을 다룬 글의 부분이다. 어찌하든 새 우물비석은 다시 름름히 일떠섰다. 아래 사진은 1992년 6월 9일부 “흑룡강신문”에 실린 사진과 사진설명이다. 이 사진을 보면 우물비석은 새로 일어섰지만 우물가 두귀바른 틀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까지도 우물가틀은 세워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1993년 8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용정향토전설집—“용정전설”책표지 사진에도 틀이 없다. 그뒤 룡드레우물과 그 주위는 날따라 새모습을 자랑하면서 옛스럽고 아담한 틀이 세워지고 풍경이 수려한 공원으로 발돋움했다. 2004년 8월 19일 늦은 오후 필자는 용정에 달려가 다시 룡드레우물터와 우물가를 돌아보면서 유서깊은 룡드레우물의 여러 모습을 렌즈에 담아보았다. (2004년 8월 20일)
120    【론문】(19)-박윤서 당적개제문제 댓글:  조회:4045  추천:122  2007-01-04
박윤서 당적개제문제 지난세기 1930년 이해 연변의 반일투쟁역사를 돌이켜보면 그해에 맹렬히 일어난 5.30폭동과 중공에로의 합류,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약수동쏘베트, 8.1길돈폭동, 평강구, 개산툰구, 라자구 유격대조직 등 대사건들이 모두 박윤서와 관계됨을 헤아릴수 있다. 그만큼 1930년도 제반 투쟁은 박윤서를 떠나 론할수 없으며 박윤서는 연변 당조직의 지도하에서 이런 투쟁을 직접 발기하고 지도한 비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이해 12월 17일에 박윤서에게 이른바 성위명의로 돈화폭동을 지휘하고 개인관계로 유격대를 움직이고 자유행동을 했다는 세가지 문제를 들씌워 전문 《통지제6호》를 내여 박윤서의 당적개제를 선포하고 사실상 그를 적편으로 내몰았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인가? 이를 알자면 1930년도로 돌아가 그해의 대사건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지 않을수 없다. 그러면 동만특위의 《통지제6호》는 착오적이고 일방적이며 당년 투쟁실제를 떠났음을 쉽사리 보아낼수 있다. 1 박윤서는 일명 박형세로서 1896년생이고 로씨야 연해주사람이다. 1917년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폭발하고 로씨야 원동지구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공공연한 침략을 반대하고 백파군과 싸울 때 박윤서는 이 위대한 투쟁에 뛰여들어 용감히 싸웠고 1921년에 리동휘의 공산당 《상해파》에 가담①하여 활동하였다. 이에 대한 자료가 보이지 않아 그 이상은 더 알수 없으나 박윤서가 이미 맑스주의를 접수하고 조기조선인공산주의자로 된것만은 틀림이 없다. 1921년 10월 1일에 연변용정에 사립동흥중학교가 세워졌다. 잇따라 상해파의 수령 리동휘 등이 상해에서 지하간행물《새벽종》잡지와 기타 소책자들을 용정의 몇개 중학에 보내여왔다. 뒤미처 박윤서는 상해파의 파견을 받고 주청송 등과 함께 소련 연해주로부터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내에 《사회과학연구회》, 《친목회》등을 조직하고 맑스주의사상을 전파②하였다. 그뒤 박윤서는 조공당엠엘파 만주총국 군사부장의 책임으로 연변에 나타나고 연해주로 오가면서 화룡현 평강과 개산툰, 용정, 라자구, 돈화, 녕안 등지에 조공당 엠엘계통의 기층지부를 널리 조직하며 광범한 조선족군중을 불러일으켜 반제반봉건투쟁을 맹렬히 전개한다. 1928년에는 조공당 만주총국군사부(엠엘파)가 직접 지도하는, 7명으로 구성된 《철혈단》을 꾸리고 자금을 준비하여 반일무장단체를 내오며 특무, 주구를 숙청하며 무장투쟁을 진행하는것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웠다③. 그 이듬해 봄에 박윤서는 동지 강학제, 김철 등과 함께 북만의 녕안에 강습소를 꾸리고 수백명 남녀투사를 양성해내고 동만과 북만에서 반동분자를 소탕하고 10만여원에 달하는 고리대문서를 빼앗아 소각해버리고 부호의 곡물 300여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④. 상기 사실들은 조기공산주의자로서의 박윤서의 투쟁행정에 대한 고도의 개괄이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박윤서와 그가 지도하는 조공당동만도(엠엘파) 동지들의 노력으로 연변 각지에는 이 당의 기층조직이 널리 분포되었다. 박윤서의 뛰여난 투쟁예술의 직접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2 아래 몇개 부분으로 나누어 박윤서의 위인됨을 헤아려보기로 하자. (1) 조선공산당과 중공합류 문제 1925년 4월에 조선국내의 공산주의단체들인 화요회(이르크쯔크파), 무산자동맹회(서울, 상해파), 북풍회(북풍파) 등은 련합하여 서울에서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하고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제3국제공산당의 한개 지부로 되었다. 1926년 5월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녕고탑에 세워지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 구역국을 세웠다. 그중 동만구역국(즉 동만도)은 만주총국의 핵심조직이였는데 박윤서의 역할이 거대하였다. 헌데 1928년초에 조공당만주총국은 엠엘파, 화요파, 상해서울파로 분렬되었다. 이에 비추어 1928년 12월에 국제공산당에서는 지령, 즉 《12월 테제》를 내려 조선공산당 파벌조직을 해산하고 《일국일당(一國一黨)》의 원칙에 좇아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할것을 요구하였다. 1930년 1월에 할빈에서 《재만중조량당간부련석회의》⑤가 열리였다. 련석회의에는 중공중앙의 파견을 받고 온 중화전국총공회 상무위원 소문과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한빈, 리춘산 그리고 중공만주성위와 재만조공당 화요파, 엠엘파, 재건파의 거두들이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어떤 동지들은 조공당의 해산을 동의하지 않았으나 박윤서는 화요파, 엠엘파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재만조공 각파의 당원들이 중공에 가입하는것을 견결히 지지하여 나섰다. 회의후 박윤서는 오성륜 등과 함께 1930년 3월 20일에 엠엘파 만주총국의 이름으로 첫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430명의 조공당원들이 개인신분으로 중공 여러 조직들에 참가하였다.⑥ 1930년 4월, 박윤서는 남만의 반석현에서 중공당에 가입하고 오성륜, 진공목 셋이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사업위원으로 임명⑦되었다. 이들 셋은 모두가 원 조공당엠엘파의 당원들이여서 다른 파의 강렬한 반대를 야기시켰다. 했건만 오성륜은 남만으로, 진공목은 북만(북만에 갔으나 그는 배기지 못하고 돌아왔다가 동만에 나오게 됨)으로, 박윤서는 동만으로 파견되어 중공만주성위 순시원(또는 특파원)의 신분으로 조공당원을 중공당원으로 합류하는 사업을 직접 지도하게 된다. 이 시기의 박윤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원칙을 접수하고 견결히 중국공산당의 켠에 섰다. 문제로 되는것은 이들 셋이 모두 엠엘파로서 다른 파의 반대를 받을만도 헀으나 이는 박윤서의 자신의 착오로 볼수 없다. (2) 붉은 5월 투쟁과 5.30폭동문제 1930년 4월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좇아 《5월투쟁계획》을 제정하고 토지혁명과 쏘베트정권을 건립할 두개 대목표를 내놓았다. 이에 따라 박윤서는 4월 24일에 용정의 하승리에서 중공동만특별지부 서기 왕경(조선족), 원 조공동만도 책임비서 김근 등이 참가한 회의를 갖고 《5.1투쟁행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시기의 박윤서는 중공동만특별지부와의 밀접한 련계속에서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였는데 유감스러운것은 5.1투쟁행동위원회가 청일색의 조공당엠엘파의 단독 위원회라는 점이다. 책임면에서 만주성위 순시원 박윤서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겠지만 주요책임은 동만특별지부서기 왕경한테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때 특별지부에는 왕경외에도 화요파의 동만도책임자들인 김창일, 한별(즉 김인묵) 등이 있었기에 왕경의 한마디면 공동위원회를 구성할수 있었을것이다. 어찌하든 1930년 5월 1일, 용정의 로동자들과 학생들이 선참으로 파업,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붉은 5월 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잇따라 5월 29일 밤부터 5월 31일 새벽까지 투도구, 이도구, 삼도구, 사도구와 용정, 개산툰, 천도철도연선의 조선족혁명군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5.30폭동을 앞두고 원 화요파 동만도 책임자들인 김창일, 한별 등이 삼도구와 평강의 소속당원들을 불러 일으킨데서 폭동은 보다 성세를 이루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해당 통계자료에 의하면 폭동군중들이 주구의 가옥 19채에 불을 지르고 천도철도다리 네곳을 파괴하고 전화선 10여갈래를 절단하고 발전소 한곳을 훼손시키고 조선총독부 보조서당 5개소와 조선인민회 여러곳을 불살랐다.⑧ 당시 《간도일보》와 《민성보》는 간도 18개민회(주구단체)가 전부 소각되었다고 보도하였다. 5.30폭동의 주요발기자와 직접적인 조직자는 박윤서였다. 그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동만특별지부를 협조하여 광범한 조선족 혁명군중들을 붉은 5월투쟁과 5.30폭동에로 불러 일으켰다. 동만특별지부에서 성위에 올린 5월 8일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 운동은 완전히 중국당의 호소하에서 조직하였는데 운동가운데서 파벌적쟁의를 거의 볼수가 없었다.》 1930년 5월 8일의 이 《보고》만 보아도 박윤서의 위임됨을 잘 알수가 있다. 5.30폭동후 얼마 안되어 투쟁의 시련을 이겨낸 원 조공당 여러파의 당원들이 륙속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해당자료에 의하면 1930년 9월, 연변의 당, 단원이 근 1000명으로 발전하고 5000여명이 혁명군중단체들에 참가하였다. 혁명조직의 영향밑에 있는 군중은 5만여명에 달했다.⑨ (3) 약수동쏘베트문제 1930년 붉은 5월투쟁의 고조가 5.30폭동이라면 이 투쟁의 주요성과의 하나가 화룡현 약수동쏘베트의 수립이다. 이해 5월 27일,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약수동쏘베트정부가 탄생하였는데 이 쏘베트는 누가 발기하고 조직했을가, 장시기이래 연변역사분야에서는 약수동쏘베트의 조직자가 신춘인것만으로 알고있었다. 사실 신춘은 표면에 나선 지도자였을뿐이고 리면 발기자와 지도자는 실상 박윤서였다. 주지하다싶이 중공만주성위 순시원으로서의 박윤서는 농촌 토지혁명가운데서 쏘베트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중앙과 성위의 지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하기에 그는 붉은 5월투쟁가운데서 엠엘파의 동지이고 금방 입당한 중공당원 소성규와 신춘을 약수동에 파견하여 쏘베트건립에 착수하도록 하였다.⑩ 약수동은 박윤서가 평강벌의 기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자주 드나들며 혁명의 불씨를 뿌린 고장이다. 한데서 약수동 혁명군중의 주체는 조공당엠엘파계통이였다. 그에 따라 약수동은 화룡현뿐만아니라 연변혁명투쟁의 중심을 이루는 고장으로 떠올랐다. 하기에 박윤서는 쏘베트수립의 첫 목적지를 약수동으로 결정하고 소성규와 신춘을 파견하였던것이다. 신춘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일찍 1927년에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광주쏘베트정부수립에 직접 뛰여든 동지로서 믿을만 했다. 쏘베트수립기간에 박윤서는 소성규와 같이 수차 약수동에 가서 쏘베트정부수립을 지도하고 이끌었다.⑪ 이로부터 보면 박윤서는 조공당원이 중공당에로의 합류, 5.30폭동, 약수동쏘베트조직에서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놀았다. 3 1930년 하반년의 중공중앙과 만주성위, 동만특별지부의 해당문건들을 찾아보면 투쟁의 중심과업은 폭동이고 또 폭동이였다. 당내 《좌》경로선의 필연적 산물이였다. 하기에 박윤서는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수립된후 동만특별지부를 도와 평강벌 기타 지방과 개산툰일대에 쏘베트정부를 세우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비추어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는 만주성위순시원 박윤서의 발기하에 국제반제운동기념일인 8월1일을 계기로 돈화에서 대규모의 8.1길돈폭동을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박윤서를 총지휘로 하는 《8.1길돈폭동총지휘부》를 내왔다.⑫ 헌데 1930년 12월 17일의 《중공동만특위통지 제6호》는 그가 8.1길돈폭동에서 성위명의를 절취하여 돈화폭동을 지휘하였다는것을 첫째《죄장》, 주요한 죄장으로 내세우고있다. 사실은 어떠한가, 박윤서는 성위순시원 또는 특파원의 신분과 폭동총지휘의 신분으로 돈화에 나타나고 《중공동만특별지부 길돈선림시당부》의 이름으로 활동했지 만주성위의 이름을 빌지 않았다. 사실 8.1길돈폭동은 박윤서개인이 아니라 동만특위에서 조직하였다. 1930년 8월 1일에 동만특별지부에서는 길돈선림시당부의 이름으로 《8.1길돈폭동》격문을 내여 《결사혈전》으로 《개정권》을 짓부시고 《우리 공농의정부》를 수립하라고 호소하였으며 이날에 또 8.1길돈폭동 구호를 제출하였다. 8.1길돈폭동이 박윤서의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고 동만특별지부의 결의로 행동한것은 불보듯 뻔하다. 1930년 7월 28일, 박윤서는 김명균 등과 같이 돈화현 관지에서 폭동준비회의를 소집하고 폭동대를 7개 파괴대와 2개 습격대로 나누었다. 7월 31일 밤 10시, 폭동은 돈화, 액목, 교하 등 넓은 범위에서 일제히 일어났다. 파괴대는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고 전주와 전화선을 끊어버려 길회철도, 길하철도를 마비상태에 빠뜨렸다. 습격대는 당지의 여러 경찰서와 공안국을 습격하여 보총 16자루와 1000여발 탄약을 탈취하고 보안대의 병영 아홉칸을 불살랐다. 박윤서가 지도한 8.1길돈폭동은 이튿날 8월 1일까지 지속되었다. 이에 반동당국은 《8.1폭동은 세계공산당이 일으킨 대규모운동》이라고 놀라서 부르 짖으면서 현지에 많은 군경을 풀어 미처 피하지 못한 폭동대원 139명을 체포하였다. 폭동은 비록 적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기는 했으나 5.30폭동에 이은 또 하나의 대규모 군중무장폭동으로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국민당군벌정부를 크게 타격하였다. 박윤서의 이른바 두번째《중대한 착오》는 개인관계로 유격대를 지휘하여 연화유격대의 《도목구…실패》와 흩어진 운명을 초래했다는것이다. 이는 역사사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박윤서는 상기지적과 같이 조공당시절에 만주총국 엠엘파군사부장으로서 1928년 겨울에 벌써 반일무장단체—철혈단을 조직하였다. 그가 발기하고 조직한 5.30폭동은 사실상 무장폭동으로서 폭동중 각지 엠엘계통에서 준비한 토제작탄과 렵총, 권총 등은 폭동의 승리적진행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후 박윤서는 동만특별지부 군사부장의 신분으로 1930년 6월에 개산툰 학성에서 연변의 첫 유격대—개산툰유격대를 조직⑬한 뒤 7월에는 또 중공평강구위와 신춘을 도와 평강구유격대를 조직하고 성위의 지시에 따라 그 이름을 《로농홍군》으로 부르고 대외로는 《연화유격대》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해 10월에 왕청현 라자구에서 조직된 라자구유격대, 즉 왕청현유격대도 박윤서의 지도와 지시로 조직되었다. 라자구유격대 대장 김세훈은 박윤서가 녕안과 라자구에서 활동할 때의 조공당엠엘파당원이고 수하동지였다. 8.1길돈폭동이 폭발한후 박윤서는 동만특별지부 및 평강구위 지도자들과 상의하고 개산툰유격대가 연화유격대에 가담하여 7월말~8월초 사이 8.1길돈폭동을 성원하러 떠나게 하였다. 가는 도중에 이들 유격대가 도목구에서 우세한 중국륙군대의 돌연습격으로 엄중한 좌절을 당한것은 유격대의 무기결핍과 전투경험이 없는 등 탓이지 박윤서가 당의 책략과 로선을 위반하고 개인관계로 유격대를 지휘한것이 아니다. 연화유격대는 그날 일부 희생자와 체포를 초래하였지만 유격대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다시 재조직되어 맹활약을 보이였다. 평강구유격대가 그러했고 개산툰 유격대가 그러했다. 박윤서는 또 동지들과 조직의 신임을 받아 1930년 8월 13일 화룡현약수동에서 탄생한 중공연화중심현위 제1임 군사부장 중책을 짊어졌다. 그 다음은 박윤서당적개제의 《중대착오》로 된 《자유행동》문제이다. 《통지 제6호》에 의하면 연화현위에서 박윤서에게 《20일간의 시간을 주어 모지에 가서 모종문제를 해결하게 하였는데 5개월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뿐만아니라 통신련락마저 없었다.》하여 특위에서는 《공공연히 당조직을 떠났다.》고 점찍고있는데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박윤서는 연화중심현위가 존재한 1930년 10월까지 줄곧 중심현위 군사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달 10월에 연화중심현위가 연화현위로 개칭된후 신춘이 현위군사부장책임을 이어 받는다. 어떻게 하여도 《공공연히 당조직을 떠난》지 5개월이 되지 않는다. 박윤서의 행방을 두고 필자는 많은 역사자료를 뒤지였다. 그러나 모든 자료들에서는 박윤서의 활동이 1930년 10월까지 되어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필자는 지난 80년대초에 이미 당년 조공당화요파 중요인물이고 고려공청만주총국 선전부장이였던 량환준선생을 수차 방문하였는데 그는 《듣건대 소련에서 그를 불러다 밀정으로 처결하였다》고 알려주었다.⑭ 1971년에 형성된 화룡시 해당자료중 박윤서의 간력에도, 연변주당안관의 해당자료에도 그러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련에서 무슨 리유로 박윤서를 불러갔고 어찌하여 밀정으로 몰아 처결하였는가가 의문스럽다. 그야말로 하나의 수수께끼가 아닐수 없다. 4 이상에서 필자는 1930년 8월 13일부터 10월까지 연화중심현위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던 박윤서의 당적개제를 두고 그의 생평을 개괄적으로 언급하면서 1930년도의 대사건들과의 련관속에서 분석, 대비하여보았다. 결론은 하나다. 박윤서 당적개제의 세가지 《중대한 착오》는 엄중히 과장되어 놀라울지경이다. 실상 박윤서는 결합과 착오가 있고 도목구실패로 한때 군중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중국공산당을 믿고 따른 견실한 공산주의자이다. 지난세기 20년대후기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크게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로 분립되어 파쟁투쟁이 심각한 상태였다. 게다가 1930년 봄의 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3명위원 모두가 엠엘파인원들로 구성되어 새로운 분쟁의 불씨를 묻어두었다. 원 화요파계렬의 중공당원들은 엠엘파, 더우기 박윤서를 극단적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엠엘파라고 하면 저쪽으로 보는, 화요파의 중요인물 량환준선생의 글과 말에서도 쉽사리 보아낼수 있다. 이러한 인물 박윤서가 1930년 4월에 만주성위 순시원의 신분으로 연변에 왔고 자기파에만 의거하여 활동하니 화요파 등의 미움은 극도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 5.30폭동때 화요파는 대단히 피동적이였다. 폭동의 주체는 엠엘파당원들이며 5.1투쟁행동위원회의 전부가 엠엘계통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기의 약수동쏘베트나 8.1길돈폭동, 개산툰유격대도 모두 조공당엠엘파들에 의해 전개되였고 평강구유격대와 라자구유격대의 지도자와 핵심은 모두 엠엘파성원들이였다. 원 조공당화요파 등에서 이를 곱게 받아들이고 정당히 평가할리가 만무했다. 물론 엠엘파 등 당원들이 투쟁의 시련을 거쳐 중공당조직에 가입하고 박윤서가 중공당조직에서 중책을 맡은 이후의 사정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시기의 박윤서는 이파, 저파를 막론하고 중국공산당조직체로 행동해가는 세련된 혁명가였다. 그외 1930년도의 거의 모든 대사건들이 모두 박윤서와 관계된다. 성과가 출중하고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니 쉽게 남들의 말밥에 오르고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는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통병인데 박윤서의 경우라 하여 례외일수 없었다. 필자는 중공연화중심현위의 성원들을 주의하여 보았는데 서기 왕경을 망라한 절대다수가 화요계성원들이였다. 하기에 필자는 원 화요파의 동지들이 박윤서의 상기 치명적인 결함과 착오를 리용, 과장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이지 믿을만한 자료에 의한 결론이 아니다. 정황이 어떠하든 1930년 12월 17일의 《중공동만특위 통지 제6호》는 착오적이기에 이 《통지 제6호》에 근거하여 박윤서를 나쁘게 평가할수 없다. 박윤서는 결함과 착오가 있고 한때 자기파에만 의거한 엄중한 단점도 있긴 하나 맑스주의를 견지하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한 견실한 공산주의자임은 드팀이 없다.【주해】 ①⑦⑭ 량환준자료. 인물보(1) ② 연변문사자료(제6집). 제4페지③④ 장백의 투사들-연변항일렬사전(제3집).제3페지⑤ 중국공산당연변조선족자치주조직사.연변인민출판사, 1991.6. 제8페지 ⑥ 리창역. 조선공산당 개략적형편 및 재만조공당원들이 중공에 가입한 정황 전문보고. 1989. 3. 제9페지⑧ 화룡현 해당자료. 제61권⑨ 조선족간사. 연변인민출판사, 1986. 6. 제80페지⑩ 리광인 정리. 평강벌의 군중수령. 1998. 5. 27 ⑪ 리광인. 소성규렬사의 처제 홍인순취재자료. 1983. 2. 8, 3. 9⑫ 최성춘 주필. 연변인민항일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1997. 12. 제75페지⑬ 중공화룡현위 선전부 지방당사조사재료 (1) ⑭ 리원춘 구술. 김규선, 리규성 정리. 연변주당안관자료. 3046. 1961. 9. 16 연변대학학보 사회과학판 2003년4호에 게재 2003년 10월 대폭 수정
119    1910년대 연변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3) 댓글:  조회:5983  추천:133  2007-01-03
7. 기독교계열의 반일무장단체(46) 1919년 용정의 3.13운동을 전후하여 항일운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자기의 무장으로 무장한 적을 때려부셔야 한다는 피어린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하여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맹렬한 무력항쟁을 보이었다. 아래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조직한 주요 반일무장단체들을 개략적으로 보기로 하자. 1) 신민단(新民团) 신민단은 기독교 성리교신도들을 주체로 1919년 3월 12일, 훈춘현 춘양향 초모정자에서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 이 단체는 훈춘현과 왕청현 일대서 활동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러시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거점으로 하였다. 신민단의 간부진용은 이러하다. 단장:김규면 경리부장: 리존수 서기: 박재섭 총찰: 이인 , 이원섭 의사원: 김성배, 유봉득, 박득수 무장대 간부진용은 이러하다. 의사부장: 김준극 부부장: 박승길 군사령관: 양정하 부관: 주수 참모장: 김창순 대대장: 최규남 신민단의 무장대는 훈춘현 초모정자와 이수구 일대, 왕청현 춘화사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수차 무장투쟁을 벌리었다. 1920년 초 이후 두만강 이남의 조선 경내에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연하고 일본군초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해(1920년) 5월 무장대는 북로 독군부 제4대대로 통합된 후 무장투쟁을 보다 활발히 전개하였다. 6월 4일, 박승길은 30여 명 대원(47)을 이끌고 조선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하여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6월 6일과 7일에는 삼툰자전투, 후안산전투, 봉오동전투에 참가하고 10월 21일~10월 25일 사이에는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떨치었다. 신민단은 이동휘를 받들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부대와 어깨겯고 싸운 반일무장단체였다. 2) 훈춘한민회 훈춘현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 황병길은 1919년 2월 25일, 러시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산생된 상황에서 이명순, 이동휘, 구춘선 등과 연계를 가지고 4월 14일 경에 국민의회소속 훈춘지회를 조직하고 4월 23일에 훈춘현 탑자구에서 훈춘지회 제1차 총회를 가지었다. 이날 제1차 총회에서 선거된 간부구성은 아래와 같다. 회장: 이명순 부회장: 박관일(전) 윤동철(후) 총무: 서윤묵 도재무: 오현경 서기: 여남섭 오동환 연계장: 나정화 교섭과장: 황병길 나정화(겸임) 경비대장: 황병길(겸임) 1919년 8월 러시야의 국민의회가 상해임시정부와 연합하게 되니 훈춘지회는 훈춘한민회로 개칭되었다. 한민회의 전신은 1911년 황병길이 훈춘현 연통라자에서 조직한 기독교교우단이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급진단(激进团)”을 조직하고 연통라자 서골에 땅 49상을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자기 대오를 4개 중대로 편성하여 훈련을 짜고들었다. 그후 급진단은 탑자구에서 다른 무장단체 “의사단(议事团)” “포수단(炮手团)”과 연합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를 편성하였다. 군사부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군사부장: 황병길(전) 김정(후) 대대장: 최성삼 또는 김성삼 부대대장: 강석환 1중대장: 박기섭 또는 박기천 2중대장: 강석훈 3중대장: 김인화 4중대장: 정성규 기총대장: 최경천 1920년 5월 이후 훈춘한민회 군사부는 조직구성을 다시 편성하였는데 그 편성정황은 아래와 같다. 군무부장: 최경천 참모장: 나정화 학무 주계: 김정 군량 외교과장: 김화석 참사: 맹정국 대대장: 최성삼 또는 김성삼 1중대장: 박기천 2중대장: 정성오 3중대장: 이종우 헌병사령: 채덕승 헌병대장: 김인화 경호대장: 한수량 훈춘한민회 군사부는 군인모집, 자금모연, 무기구입에 힘쓰면서 1920년 초부터 무장투쟁을 활발히 벌리었다. 주요전투는 아래와 같다. (1) 1920년 1월 15일, 제2중대 조선 경원군 고건원의 일본헌병주재소를 습격(강석훈이 지휘). (2) 1920년 4월, 제2중대와 제3중대 경원군 동풍리와 서풍리 사이에서 매복전으로 경원군 일본수비대 수십 명을 사살. (3) 1920년 10월 9일, 훈춘현 하다문 하산촌 우두산에서 훈춘사건투입 일본군 한개 중대와 교전. (4) 1920년 11월 4일, 삼도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38려단 78연대의 우에사까소좌가 이끄는 2개 중대와 교전, 전투시 한민회 회장 이명순과 참모장 나정화가 전사. 3) 도독부 도독부는 최명록, 일명 최진동이 3.13운동 이후 봉오동에서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최명록은 귀화입적한 지주출신으로서 왕청현 가야하지구의 순경국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연길도윤공서 교섭서의 이동춘과의 사이가 좋아 선후로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왕청현 책임자로 뛰었다. 한편 봉오동에 학교를 꾸리고 반일교육에 몸을 담다가 3.13운동 이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무었었다. 도독부는 이 무장조직의 토대에서 결성한 단체로서 건립초기에 벌써 4개 중대에 200여 명을 가진 한개 대대로 되었다. 다른 반일무장과는 달리 이 도독부는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넉근하였는데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총재: 최명록 참모장: 박영 교련관: 변남길 외교원: 김호석 중대장: 김세종 조근식 강상모 강시범 4) 나자구의사부 1919년 3.13운동 이후 왕청현 나자구일대의 항일운동가들은 간도국민회, 훈춘한민회 맥을 이은 나자구의사부를 조직하고 대장에 이춘범, 최정국을 내세웠다. 그해 4월에는 이사장에 김석규, 총무에 김리근, 재무에 최정국, 의사원에 박창준, 오기연, 박순경, 이성렬 등을 내세웠다가 5월에 간부개선을 하였다. 간부개선은 아래와 같다. 의사부장: 김종식 재무총무: 박창준 서기: 이성렬 간부: 남영화 오백여 평의원: 최정국 김천남 1920년 8월의 자료는 이러하다. 의사부장: 김석규 총무: 김리근 재무: 최정국 의사원: 박창준 오기연 박순경 이성렬 동년 10월 경에는 간부진영이 또 바뀐 모습이다. 의사부장: 김리근 부부장: 김천보 총지휘관: 최정국 경무국장: 이춘선 재무국장: 박창준 부국장: 오백여 모연국장: 김학용 부국장: 이성렬 의사부무장대 병력은 약 200명이다. 이들은 왕청현 경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면서 경신년대토벌에 뛰어든 일본군과 수차 교전하다가 1922년에 최정국의 지휘하에 왕청, 훈춘 중쏘국경지대에서 활동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말까지 전 동북 경내에 8,450명을 헤아리는 45개의 반일무장대오가 있었는데 그중 연변지구에는 4,650명에 달하는 24개의 대오(48)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상당한 반일무장단체가 기독교계열이나 그 영향하에 있은 단체들이었다. 8. 국민회군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 1919년 3.13운동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지령을 내려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 중학부들에서 학생골간들로 연합 “맹호단, “암살대” 등 반일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용정, 국가가와 투도구 등지에서 친일주구를 체포하거나 경고문을 내어(49) 이런 자들이 친일활동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명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충렬대, 단지동맹회, 결사대(50)들도 맹활동을 보이었다. 간도국민회에서 이동휘 등의 지지 밑에 무장투쟁방침을 시달하기 위해 각 지회를 통해 연변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널리 모집하여 러시야 연해주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할 때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학생들이 분분히 결사대에 참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데서 러시야 연해주 추풍지역의 도화동, 대지안, 사개정자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결사대원들은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대장 김하석, 교관 홍군표, 이흥삼, 김일, 오영선, 남공선, 러씨야 귀화조선인 김인수, 최와실린 등 장교들에게서 반일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결사대의 외교와 재무는 연변서 간 박동원, 박경철이 담당하였다.(51) 한편 간도국민회에서는 각 지방총회에 법무부를 설치하고 보편적으로 경호대, 맹호단을 조직, 지도하여 지방을 보위하게 하였고 모연대를 널리 조직하여 군자금 모연에 힘을 기울였다. 창동학교출신이고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간도국민회 총회의 통신원이며 와룡동일대 국민회 책임자인 정기선은 적의 손에서 권총 한자루를 빼앗아 경호대를 조직(52)하였다. 일찍 함경북도 무산지구 진위대 교련관이었던 안무는 1919년 4월 이후 간도국민회와 연계하여 화룡현 덕화, 상화, 숭선, 로과 등지에 국민회조직을 확대하면서 부동 등지의 청년들로 경호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며(53) 친일주구와 밀정들의 활동을 경계하였다. 각지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방보위에 전력을 다 했다. 1920년 봄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또 각지 경호대를 기초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 국민회군을 결사대와 경호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졌는데 경호대와 국민회군의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경호대 총사령: 이용 참모: 주건 국민회군 사령: 안무 부관: 최익룡 향관: 김석두, 허동규 중대장: 조권식, 임병극 국민회군은 본부를 화전자 명당모에 두고 부동, 명동, 명신, 화전자, 하마탕, 의란구 등지에 부대를 분산, 주둔 시키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사훈련을 내밀었다. 간도국민회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국민회군, 홍범도의 의군단, 신민단,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등 항일무장단체에 배치하니 국민회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났다. 1920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군의 총병력수는 400여 명(54)(적절히 말하면 450명)이고 무기는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군사인재를 양성코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 채영, 안정근 등의 협조하에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 속에 사관훈련소(55)와 군수창고, 피복공장, 18개 소의 병영을 수축하고 재봉침 13대, 군복용 포목 15필을 마련(56)하였다. 1920년 초부터 항일무장단체들 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이 중시를 받았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가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연속 작전을 펼칠 때 간도국민회에서 적극 받들어 나섰고 1920년 1월, 조선 국내진공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홍범도부대는 국민회본부가 설치된 북하마탕에 이르러 국민회간부들과 연합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뒤 2월 21일, 3월 8일-10일, 3월 25일, 간도국민회는 각 항일무장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제1차, 제2차, 제3차 하마탕 회의를 연속 소집하고 먼저 의견이 같은 국민회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조직(57)하였다. 같은해 5월 11일에는 봉오동에서 군무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4개 무장단체 지도자회의를 가지고 연합작전합의를 보았다.(58) 5월 28일에는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고 북로독군부의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임명명단(59)은 아래와 같다. 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정일 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이병채 향관: 안위동 군무국장: 이원 군무국 군무과장: 구자익 군무국 회계과장: 최종하 군무국 검사과장: 박시원 군무국 통신과장: 박영 군무국 치중과장: 이상수 군무국 향무과장: 최서일 군무국 피복과장: 박병극 제1군 산하 제1대대장: 이천오 제2대대장: 강상모 제3대대장: 강시범 제4대대장: 조권식 북로독군부는 사령부 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설치하고 병력을 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집결시키었다. 신생한 연합부대는 두만강 남안의 온성, 남양, 종성, 회령, 무산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군경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까지 해당 통계에 의하면 연합부대는 상기 조선 국내지구에 26여 차나 진출(60)하였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치는 첫 전투도 무르익어갔다. 동년 6월 4일, 일본군 남양수비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부대는 두만강남안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한 원 기독교계열의 훈춘 신민단출신인 북로독군부 박승길 등 30여 명을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 삼툰자를 들이쳤다.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한 월강추격부대도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섰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아군의 종적을 찾아 목도고개,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일대로 진격하였다. 원 국민회군 사령이며 북로독군부 부부장인 안무는 홍범도사령을 도와 6월 7일 일본군월강부대 200여 명을 봉오동상촌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1920년 6월 7일, 안무 등은 홍범도사령과 함께 봉오동 여러 마을의 민중을 대피시키고 400여 명 반일부대를 봉오동 상촌 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 고지에 진을 쳤다.(61) 이날 반일부대의 뒤를 밟아 후안산으로부터 쳐들어 온 야스가와소좌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일본군 200여 명은 아군의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가 섬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친 첫 전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신민단부대는 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 적들의 퇴각시 퇴로를 막아 답새긴 부대가 바로 신민단부대었다. 동년 8월 말 안무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이청배병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에 중국군 맹부덕부대가 일제의 강박으로 토벌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룡현 어랑촌일대로 전이하여 홍범도부대와 힘을 합치었다. 안무부대는 화룡현 삼도구, 맹가동, 부동과 강장동 등지 지형정찰을 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면서 홍범도부대와의 배합작전을 도모하였다. 10월 21일 일본군 제19사단 37려단장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며 두갈래로 나뉘여 북왈리거우와 남왈리거우에 달려들었다. 홍범도와 안무는 주력부대를 천리봉의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62)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고 진공하다가 크게 얻어맞았다. 적 수백 명이 전멸당한 왈리거우(曰日沟) 전투이다. 싸움의 그 나날에 안무부대는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여 봉밀구골안으로 철퇴했다가 천병마냥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하고 있는 천수동 우측 산마루에 나타났다.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서 결사의 각오로 싸우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 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 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두 독립군부대는 아즈마지대의 포위를 승리적으로 헤치고 서남방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25일 고동하강반에서 또 적들에게 섬멸적 타격(63)을 안기었다. 고동하전투를 치른 후 안무는 부대를 이끌고 맹가골 방향으로 이동하고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무는 맹가골일대서 북상지시를 받고 소속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나누어 돈화, 목릉을 거쳐 밀산으로 철퇴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불멸의 휘훈을 세웠다. 9. 15만 원 탈취사건 15만 원 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기독교 청년교도들인 최봉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등 6명이 군자금조달로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용정촌출장소로 보내는 길회철도부설자금 15만 원을 탈취한 용감한 행동이다. 1919년 3.13운동 이후 연변의 항일운동가들은 분분히 항일무장단체를 무으면서 군자금조달에 힘을 모았다. 그 시기 연해주에서 러시야에 대한 무력간섭에서 실패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체코군들이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에 일본돈 30원이란 싼 가격에 팔고있었다. 하여 간도국민회에서는 1919년 여름에 모은 군자금을 대한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한테 위탁하여 무기구입을 바랐다. 김하석과 신민단 단장 김규면은 이 군자금으로 러시야 군총 2,000여 자루와 수십 만 발의 탄약을 구입했으나 운수도중 태풍을 만나 배가 한 섬에 침몰(64)되어 큰 낭패를 보았다. 바빠 난 김하석은 동년 9월 연길현 와룡동출신인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을 찾아 최선을 다해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할 것을 지시(65)했다. 이에 최봉설 등은 용정의 일본은행을 털자고 의견합치를 보았다가 조선은행 회령지행 용정출장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전홍섭한테서 일본놈들이 길회선 부설경비로 회령서 용정에 일본돈 15만 원을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상기 6명은 신속히 습격조를 뭇고 와룡동 최봉설의 집에서 15만 원 탈취거사를 주밀히 짜고 들었다. 달라자 명동촌의 김하규집은 그들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었다. 김하규는 최봉설의 장인으로서 회령서 학자살림을 하다가 1899년 2월 18일에 회령과 종성의 우국동지들인 김약연, 문병규, 남도천 등 과 함께4대 가족 141명을 이끌고 명동, 장재로 집단이민한 사람으로서 당시 명동예배당을 거점으로 반일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잠간 최봉설 등 6명 기독교청년신도들의 행적을 살펴본다면 최봉설(이붕)은 창동중학을 졸업하고 와룡동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명동촌 여자를 아내로 맞은 사람이다.(66) 한상호는 와룡동소학교와 명동중학을 졸업하고 와룡동소학교 교원으로 일하며 반일투쟁에 나섰고(67) 임국정은 워낙 조선 함흥에 살다가 창동중학을 다니고 나자구무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임뵈뵈는 기독교 교인으로서(68) 반일에 뜻을 품은 분인데 중학교 1학년에 다닌 아들 국정이를 반일정신으로 키우고저 와룡동 창동학원에 아들을 유학시켰던 것이다. 윤준희는 회령출신으로 서전서숙과 명동중학에서 공부하고 용정 영신학교에서 교원노릇(69)을 했다. 영신 학교는 캐나다 선교부 동산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교교회의 학교였다. 박웅세는 명동촌 사람으로 명동중학을 졸업하고 3.13운동 이후 국민회경호원으로 활동(70)하고 있었다. 15만 원 탈취계획이 무르익은 후 최봉설과 한상호는 와룡동에 있으면서 용정에서 대거하는 윤준희와 임국정의 통지를 기다렸다. 1920년 1월 4일에 회령서 용정으로 떠난다는 전홍섭의 비밀통지가 전해지자 이들은 기타 4명과 함께 1월 4일 점심 때 쯤에 중국학생복에 중국 신을 신고 부처골어구와 재박골 사이 강변신작로에 나타났다. 재박골부근에서 이들 6명은 두패로 나뉘어 길에서 무질서하게 오가는 척 하면서 습격자세를 취해 보았다. 오후 6시경, 송금일행이 명동쪽에서 재박골부근에 나타났다. 송금일행은 간도일본총령사관 순사 나까도모와 조선이 순사 박연흠, 은행직원 하루구찌와 김용익 등 4명인데 도중에 회령의 조선인 상인 진길풍과 일본인 우편물수송원 가시하라가 동행한데서 도합 6명이었다. 박웅세와 김준이 재박골부근의 길가 주막집에서 나와 한어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용정쪽으로 비청걸음을 해댈 때 저만치에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넷이 나타났다. 이들 6명은 송금수송대와 마주치는 찰나 불의습격을 가했다. 뜻밖의 사격에 선두에 섰던 나가모도순사와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권총 총탁으로 놈의 이마를 부셔놓았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조선인 상인 진길풍은 길손의 도움을 받아 그날 저녁으로 용정에 호송되었으나 구금치료 중 이튿날 오전 11시에 숨졌다. 김용억은 강을 건너 승지촌마을쪽으로 도망치고 우체원 가시하라도 줄행랑을 놓았다. 하루구찌와 박연흠순사가 동량어구촌에 달려가 중국순경들에게 알려 현지에 다달았을 때는 나까모도가 이미 절명하고 현금과 우편물을 실은 말들이 자취를 감춘 뒤었다.(71) 사건이 벌어진 후 박웅세와 김준이는 즉각 명동촌으로 떠나갔다. 새날이 밝으면 웅세는 장가를 들기로 사전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들 둘의 과업은 거사가 실현된 후 모집 중에 있는 종군 간호부 처녀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는 것이었다. 준희와 봉설이는 말을 지체없이 재박골로 몰아갔다. 제박골치기 동성참 산 속에서 뒤따르는 국정이와 상호를 만났다. 이들 넷은 말들을 나무에 매어놓고 제각기 돈짐을 나누어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그들은 해란강을 넘고 삼봉동, 조양천 부근을 지나 부르하통하를 건너 동틀무렵에 와룡동마을 서산너머에 가 닿았고 약속된 지점에서 좀 쉬면서 음식지닌 상호 아버지와 봉설 아버지를 만난 뒤 다시 길을 다그쳐 저물녘에 의란구의 산속 한 귀틀집에 들어섰다. 적들의 검거선풍을 피하여 두어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돈을 가지고 연해주 해삼위 신한촌으로 간 것은 그 뒤의 일이다. 15만 원 탈취거사 후 간도 전 지역에 걸쳐 대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과 국자가 관할 내의 와룡동이 거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국자가 령사분관의 주임이 연길도윤과 교섭한 끝에 일제총령사관과 국자가분관의 경부 2명이 지휘하는 순사 37명과 중국 측 군경 57명을 거느리고 와룡동에 달려들었으나 헛물만 켰다. 악이 난 적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는데 그 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 최병국과 동생 최봉준도 들어 있었다. 적들은 최봉설일행이 의란구 방면으로 이동해 갔음을 확인(72)하였다. 뒤미처 비밀이 탄로되어 낌새를 챈 일본놈들이 신한촌의 주숙지를 돌연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간 최봉설이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돌파하고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불행히 체포되어 청진감옥에 압송(73)되었고 1921년 2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장렬히 희생(74)되었다. 윤준희 등이 청진감옥에 투옥된 후 연변과 연해주의 항일무장단체들에서 자기 동지들을 구출하고 저 각기 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박웅세, 김준, 염길룡 셋을 조선 청진으로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국정 등 셋이 처형된 후 국정의 어머니 임뵈뵈는 북간도 교회의 여전도사가 되어 평생전도회를 조직, 지도하며 독립운동에 전력했다(75)고 한다. 10. 경신년 “대토벌”과 반“토벌” 1919년 용정 3.13운동을 계기로 이 땅의 항일운동가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무장독립의 길에 나서자 이에 큰 위협을 느낀 일본제국주의는 1919년 하반년부터 “토벌’준비를 다그쳤다. 1920년 8월에 이르러 조선강점군 사령부는 전면적 “토벌”계획을 제정하고 나남주둔 제18사단을 “토벌”조직자로 내세웠다. 이달 블라디보스톡 파견군 제14사단을 토벌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10월 2일에는 이른 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내고 이를 구실로 10월 6일부터 대“토벌” 전면 동원령을 내렸다. “토벌”에 투입된 군대, 경찰 등 총병력은 18,000~20,000명에 달하고 연변출병의 주력부대는 조선 주둔 제19사단이었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지대, 기무라지대, 아즈마지대 3개 지대와 사단 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어 물밀듯이 연변 각지에 덮쳐들었다.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일대를 소탕하고 백초구와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였다.(76) 그번 “토벌”후 기무라지대는 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에게 보고를 올릴 때 저들이 이르는 부락마다에서 불온단체들과 발견 후 달아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자랑하였다. 동만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압록강 이북의 조선인 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 《연변조사실록》에 의하면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족 촌락에 대하여 위협공갈하여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죽었다. 무릇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 이는 경신년 대토벌을 비교적 실감나게 그린 글이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성역사자료를 보면 온 마을을 모조리 몰살한 사실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죽인다면 남자들만 골라서 죽였다는 것이다. 연길현 장암동은 오늘의 용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인데 조선말로 노루바위골이다. 1920년 참안 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한 마을이었다. 장암동 사람들은 거의가 기독교신자들이고 국민회회원으로서 간도국민회 제2동북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77)되어 있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양도헌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다.(78) 하기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1920년 10월 29일(30일이라고도 함) 새벽에 스즈끼대위가 거느린,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의 보병 70여 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마을의 청장년 33명을 붙잡아 영신학교에 처넣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는 사람들에겐 다시 총알을 안겼다.(79) 이에 앞서 놈들은 용정에서 찾은 5명의 조선인 향도가 장암동 길안내를 거절한다고 전부 죽여버렸다.(80) 이날 장암동과 그 일대 마을마다 불의 세례를 겪었으며 마을 밖에는 새 무덤들이 가득 나타났다. 며칠 후 일본군은 또 다시 마을에 쳐 들어와 유가족들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렸다. 악착하기 그지 없는 놈들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연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 버렸다.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 양도헌도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일제놈들은 간도국민회의 주축을 이루는 4대 중학과 그 고장 반일운동기지들에 대해 보다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1920년 12월 6일, 일제침략군 보병 74련대 이와바시대대는 와룡동 창동학교에 불을 지르고 반일지사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창동중학교 교원이고 국민회 총부 통신원이며 철혈광복단 대원인 정기선은 권총과 등사기를 파묻고 구수하쪽으로 피했지만 잔인한 놈들은 끝내 그를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고 두 눈알까지 뽑아 내고는(81) 집에 가두고 불태워 죽이었다. 동년 11월 3일, 일제침략군 야포 제25련대 가와가미토벌대는 위자구 토벌 끝에 소영자에 달려들어 광성학교와 최기업목사의 집에 불을 질러 재더미로 만들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82) 동년 10월 21일 밤, 한패의 일본군 수비대는 자동에 덮쳐들어 후저동 정동학교를 불사르고(83) 당지에서 체포, 학살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10월 20일, 일제 침략군 한패는 명동에 몰려와 사람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여놓고 수색전을 벌리더니 허익근, 이용훈, 최홍택 등 10여 명을 붙들어 살해하고 90여 명의 교직원과 마을 사람들을 체포했으며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마진의 집을 소각하였다. 치떨리는 “대토벌”이었다.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 3주일” 내에만 해도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단지 1920년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기간에 훈춘현에서 살해된 조선인만 해도 249명에 달한다.(84) 그외 가옥, 학교, 교회당, 양곡 등이 타버린 수와 양은 부지기수이다. 연변의 조선족 군중들은 일본침략군의 피비린 대살륙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더욱이 기독교계열의 그네들은 출몰하는 독립군 부대를 물심양면으로 받들었는가 하면 체포당하여도 떳떳이 허리를 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원수를 단죄하며 역사의 단두대에 올려놓았다. 일찍이 충렬단에 참가한 적이 있는 연길현 로두구 의봉촌의 이경찬(당시 20살)은 “토벌”대에 체포된 후 독립투사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놈들이 마음을 돌릴 것을 강요하자 그는 단연 거부해 나섰으며 죽음을 앞두고 “독립 만세!”를 세 번이나 불렀다.(85) 1920년 음력 9월 초나흩날 훈춘 애국부인회 회장 김숙경여사는 훈춘독립운동의 수령이었던 남편 황병길의 유물-권총과 태극기 보따리를 딴데 옮기자고 꺼내놓았다가 연통라자 서골에서 토벌대놈들과 맞띠웠다. 위급한 찰나에 여사는 유지에 싼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 것도 뒤지지 못하게 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음력 9월 초엿새날 “토벌”대는 대황구에 달려들었다. 황병길의 딸 황정일(1913년 생)의 구술(86)에 의하면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결의한 “7인 단지동맹”의 도끼, 목데기, 손가락 마디들이 발각되었다고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양병칠, 김하정 두 교원이 체포되고 마을에서도 20여 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결박되었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안았다. 하여 김남극, 양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날 적들은 김남극과 양병칠을 북산기슭에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죽였다. 학교에도 불을 놓았다. 1920년 10월 초 이후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와 홍범도 및 국민회군 등 반일부대가 원 근거지들을 떠나 육속 화룡현쪽으로 이동했다. 김좌진부대가 충신장(오늘의 화룡시 소재지)의 대진창에 이르자 당지 조선족 군중들이 신속히 동원하여 부대를 위문하면서 점심식사를 마련했다.(87) 그때 청산리 골안의 송월평으로부터 청산 증봉리에 이르기까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로 쫙 뎦혔다. 삼도구 국민회 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밥, 초신, 의복견지 그리고 정보 등을 전하였다. 송월평의 국민회 군중들은 큰 소 한마리를 잡았다.(88) 적들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좌진부대는 송월평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면서 인차 이동하였다. 밤도와 송월평을 떠난 김좌진부대는 백운평 위 증봉리 골안 직소에 가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족 군중들이 총동원되어 아침밥, 초신 등을 준비해 가지고 골안의 부대주둔지를 찾았다.(89) 식사가 끝난 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나남주둔 제19사단 73연대의 400여 명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놈들이 어디 갔다가 오는 길인가고 물었을 때 그들은 안도 갔다 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했을 때 못 보았다고 도리머리질 했다. 결과 놈들은 시름 놓고 골안 따라 올라가다가 김좌진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 안 되어 전멸당했다. 겨우 마병 3명이 살아 달아났을 뿐이다.(90) 악이 난 적 후원부대는 백운평마을의 22~23세대의 여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 건 젖먹이고 뭐고 몽땅 집에다 처 박아놓고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마을의 민간의사 이희보 및 그의 세째아들 등 셋이 겨우 살아났다. 김응준어린이는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수의 총창을 막아나선 통에 달아날 수 있었고 이희보는 그날 쟈피거우에 왕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아내가 여자옷을 입힌데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외 남자라는 사람 전부가 불 속에 거꾸러졌다.(91) 청산리전투 기간 식량이 떨어지자 삼도구일대 국민회소속 부녀들이 음식을 이고 비발치는 탄우 속을 헤치며 진지에 뛰어들었다. 어떤 전사들이 식사를 단념하고 싸움에 전력하자 울면서 “만일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음식을 기어이 입에 대도록 하였으며 부상병간호에 바삐 보냈다. 하기에 독립군부대들은 제때에 정보를 장악하고 부대를 영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1920년 10월 하순에 있었던 청산리전투(청산리일대와 어랑촌일대를 포괄)에서 일제침략군 수백 명을 죽여버릴 수 있었다. 1,200여 명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왔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주요활동무대를 잠시 그때의 소련 경내로 옮겼다. 전국 인민들의 반대와 독립군부대들의 무장항격, 조선족군중의 투쟁에 의해 일제 침략군은 1920년 말에 저들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전부 철거는 1921년 5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1. 맺는 말 상기와 같이 본 논문은 1910년대 북간도의 주요한 항일운동을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와의 관계속에서 검토하면서 이런 항일운동은 거의가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전개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새로운 역사시각으로 1910년대 항일사를 조명해 보는 시도라 하겠다. 어찌하여 새로운 역사시각이라고 하는가? 그 연유를 몇 가지로 개괄해 볼 수 있지 않을가 한다. 1.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북간도 항일사를 취급한 저서나 논문들에서 천주교나 대종교 등과 같이 기독교가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일으킨 역사적 역할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인정하나 이를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 시종 관통시키지 못하였다. 한데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이 시기시기 동강나면서 하나의 맥박 속에 포착되지 못하였다. 일례로, 간도교육회나 간민회는 이동휘, 이동춘, 김립, 김약연 등 기독교 동지들의 소행임에도 누구나 기독교계란 이 점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결과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은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2.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여러 종교나 항일운동가들을 망라하여 1910년대 항일운동을 전반 조선족의 항일운동으로 보면서 그 위치를 부여하는데 주력하였지 현상을 뚫고 그 내면의 참다운 뜻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지 못한 것 같다. 서전서숙을 예로 들면 그것이 구한말의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주도한 소행이고 조선족 근대학교의 첫 시도라고만 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 이상설이 뜻을 같이 하는 자기 동지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항일독립운동가 육성에 주력한 그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했다. 알고보면 서전서숙은 고립적인 단순한 근대학교 창설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가 시급한 육성이 주되는 목적이었다. 서전서숙의 갑반, 즉 고등반은 중학부와 같아 그 주요대상이 사회청년들로서 일정한 시기의 육성을 거쳐 각지에 나가 반일학교를 꾸리면서 항일독립기지건설에 뛰어들기로 되어있다. 3.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나라와 이념의 차이로 같지 않은 연구결과를 나타냈다. 예컨대,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그러하다. 연구시각이 다름에 따라 마치도 봉오동전투는 홍범도가 조직, 지도하고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조직, 지도한 것으로 나타나기가 일쑤이다. 사실은 그렇지만 않다. 봉오동전투는 간도국민회가 홍범도 등과 손을 잡고 꾸준히 노력한 연합작전의 결과이다. 청산리 전투도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와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연합부대—북로독군부 그리고 간도국민회 지방지회들의 공동투쟁의 산물이다. 이를 떠나서 1910년대, 20년대초 북간도 항일투쟁의 절정을 이루는 청산리전투를 평가할 수가 없다. 간도국민회를 주선으로 한 기독교계열 동지들의 역할이 연구부진인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흔히 이들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연구시각의 최대오유는 1910년대 제반 항일운동을 기독교와의 시종관계 속에서 보아내지 못한 그것이다. 천주교나 대종교의 항일도 거대하나 이런 종교로 1910년대 제반 항일운동을 하나의 연계속에서 이어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허다한 항일운동이 이런 종교의 기치를 든 항일운동가들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기독교계열동지들의 항일운동은 특수한 의의를 띠고 있다. 그 전열에는 이동휘와 구춘선, 김약연 등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이 뛰고 있었다.여기까지 밝히고 보면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는 그 자체의 특점을 갖고 있는 바 그 특점을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로 귀결시켜 볼 수가 있다. 첫째, 관통성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의 특점을 보면 1906년의 서전서숙으로부터 1920년의 경신년 “대토벌”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시종 관통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관통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계열의 동지들이 시종 하나 또 하나의 항일운동을 지도했거나 주력으로 등장하였다. 본고에 언급한 역차의 항일운동이 모두 그러하다. 둘째, 구심성 1910년대 기독교계 항일운동에서 선명한 특점은 1907년 9월에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택, “대한매일신보” 논설수필 신채호, 서북학회 주동인물 이갑, 애국청년 안창호, 정주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 등과 손잡고 비밀정치단체 “신민회”를 조직한 이동휘가 수령으로,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망국의 참담한 현실에서, 국내활동이 어려운 처지에서 이동휘는 신민회동지들과 함께 북간도 등지로 망명하여 김약연, 정재면 등과 함께 이 지역에 기독교문화를 전파하면서 민중을 묶어세우고 항일민족운동기지를 마련하며 항일운동과 무력항쟁을 주도하였다. 세째, 단결성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기독교계 지도자로 등장한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측근들이다. 간도국민회 회장 구춘선이 그러했고 그의 전신인 간민회 회장 김약연이 그러했다. 간민회시절에 그들은 벌써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인물들로서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이었다. 하기에 김립, 오영선,장기영, 김하석, 남공선 등이 이동휘를 따라 광성학교서 왕청현 나자구에 가서 사관학교를 꾸리며 무장투쟁준비를 다그치고 구춘선이 연길현 하마탕에 비밀활동기지를 구축할 때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정재면, 김영학, 마진, 최명록 등은 계속 자기 지방에 남아 후근 터전과 반일교육을 앞세우면서 반일인재육성에 전력하였다. 이는 장차 무력항쟁의 길로 나아가는데 튼튼한 경제적, 물질적, 인재적 토대를 닦아 놓았다. 네째, 우호성 중국 관리들과의 우호적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을 도모한 것은 1910년대 항일운동의 뚜렷한 특점이 아닐 수 없다. 1911년 전후시기 신민회 간부들에 의한 기독교 본격적 전파 때로부터 이들이 친중배일의 기치를 드니 중국관리들은 환영을 표시했다. 북간도 교회의 배일주의기치가 중국인과의 우호적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한데서 중국 관리들은 기독교친중파들을 우대하였다. 1913년 간민회설립이 바로 당시 북경정부(중화민국임시정부) 지지하의 산물이다. 이에 앞선 간도교육회도 연길도윤 도빈의 통역관 이동춘의 노력으로 연길도윤공서에서 지지한 산물이다.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 등은 수차 북경에 가서 원세개, 여원홍 등을 만나 간민회문제, 조선이주민 입적수속문제, 조선이주민들의 토지소유합법화 등 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하였다. 간민회 회장 김약연은 연길도윤 도빈과 막역한 사이로서 서로간 일을 처리하는 데 대단히 편리하였다. 다섯째, 통합성 1920년 초부터 시작된 항일무장단체들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은 1910년대 북간도 기독교 항일운동의 또 하나의 주요한 특점이다. 여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논것은 간도국민회이다. 1919년 하반기 이후 간도국민회는 중조국경지구에서 연속 작전을 펼치는 홍범도부대를 열성적으로 받들었고 1920년 1월에 국민회본부 북하마탕에서 선참 연합에 성공하였다. 뒤미처 국민회군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결성했고 동년 5월에는 또 봉오동에서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군무독군부, 북로독군부를 통한 이같은 통합이 이룩되었기에 북간도 항일무장단체들은 힘을 합쳐 1920년 6월과 10월에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강적 일본정규군 토벌대와 맞서 휘황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항일무장단체와의 통합과 연합작전에서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시종 선두적,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여섯째, 민중성 민심은 천심이고 병민(兵民)은 승리의 기본이라고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기독교계열의 가장 뚜렷한 특점은 민중성이다. 민중성을 지니게 된 원인은 대중의 수요를 알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파악한 데 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간도국민회라 하겠다. 간도국민회 중앙 총부로부터 기층지회까지 층층히 널리 줄을 뻗치었는데 그 세력범위는 남쪽의 화룡현 최남부 숭선으로부터, 북쪽의 최북단 나자구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양수천자로부터 서쪽의 명월구, 돈화 일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대를 포섭하고 있었다. 이 같은 넓은 지역에 걸쳐 민중이 항일에 궐기하니 그 힘은 대단히 컸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때 그 지방 국민회 지방총회와 기층지회들에서는 한 사람 같이 일떠나 독립군부대에 수시로 정보를 제공하며 물심면으로 받들어 나섰다. 이러한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당시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에로 이끈다는 것은 자못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특점들을 더 귀납할 수 있지만 관통성, 구심성, 단결성, 우호성, 통합성, 민중성이면 그런 대로 족할 것 같다. 1910년대 기독교계열과 그를 구심점으로 하는 북간도 항일운동이 이런 여러 가지 특점들을 구비하니 10년대 전반 항일사에서 중요한 자취를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주해】(1)(2) 연변문사자료, 제8집, 172폐지(3) 동상서, 177폐지(4)(5) 동상서, 114폐지(6)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290-291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10(7) 동상서, 290폐지(8)(9) 동상서, 293폐지(10) 연변문사자료, 제8집, 119-120폐지(11) 중국조선족교육사, 8폐지, 동북조선민족출판사, 1991. 5(12)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546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13) 연변문사자료, 제5집, 2폐지(14)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98-99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 10(15)(16)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 기념학술대회문집, “간도반일민족교육의 선구자 —김약연”에서 (17) 연변문사자료, 제5집, 112폐지(18) 동상서, 117-118폐지(19) 주해 14의 동상서, 95폐지(20) 송우혜, 윤동주평전, 44-45폐지, 한국 열음사, 1998. 10(21) 이림, 혁명투사의 요람—사립정동학교, 연변일보, 1988. 5. 25 (3)(22)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565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23) 용정 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177폐지, 연변인민출판사, 1999. 9(24) 윤병석,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 규암 김약연서거 55주년문집(25) 주해 22의 동상서, 571폐지(26) 1910년 2월 21일, 간도일본총령사관 총령사 나가다끼가 일본 외무대신 고바야시에게 보낸 “관할 내의 조선인자치회에 관한 문건”, 조선총독부: “청나라 국경관련서류”(27) 이는 일제 측의 해당자료에 의한 것이다. 전에는 “간민교육회”의 건립날자를 흔히 1909년 9월로 보았었다.(28) 주해 22의 동상서, 358폐지(29)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112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 10(30) 동상서, 113폐지(31) 연길현 연길부문집, 제28권, 1913. 2. 26, 연변조선족자치주 보관서류관 소장(32)(33) 이광인 정리, “이동춘”에서(34) 이광인 정리, “이동휘”에서(35) 강석훈 구술, 내가 다닌 북일중학교, 연변문사자료, 제5집, 201폐지(36)(37)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3), 14폐지(38)(39) 남해룡, 15만 원 사건(소련), 7-10폐지, 1963(40) 용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45폐지, 연변인민출판사, 1999. 9(41) 현대사자료 (26), 85폐지(42) 한국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 독립사 (3), 58폐지, 1968(43) 본 논문에 펼쳐진 용정 3.13운동 관련자료는 모두 1991년 제5호 “문학과 예술”지에 실린 이광인, 박경재 “이 땅을 들썽한 독립만세소리”를 주로 참조하였음.(44) 본 논문의 간도국민회 관련자료는 김태국이 쓴 “한족독립기성총회와 대한간도국민회”를 주로 참조, 이 글은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개척”에 실리었음(45) 고경(高警), 제40109호, 1921. 1. 1(46) 본 소제목의 대부분 자료는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391-403폐지에서 주로 참조(47) 현대사자료 (27), 632폐지(48) 양소전, 중조관계사논문집, 300폐지(49) 박금해, 국자가 소영자의 독립군학교, “광성학교”,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개척, 569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50) 동상서, 561폐지, 박금해, 북간도민족교육의 요람—명동학교(51) 현대사자료 (27), 197폐지(52) 강향란, 와룡동창동학교, 574폐지, 주해 49, 50의 동상서(53) 일목, 국민회군사령 안무, 692폐지, 동상서(54)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 243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55) 현대사자료 (27) 195-196폐지(56) 일목, 국민회군 사령 안무, 개척, 민족출판사, 693폐지, 1999. 10(57) 국민회 본부 보존서류에 관한 건, 국민회군제령(军制令), 제73호(58) 현대사자료 (27), 제346폐지(59) 동상서, 80-81폐지(60) 조선민족운동사연구, 제2호, 36폐지, 일본 아오사까사, 1985. 2(61) 이광인, 박경재, 봉오동대첩, 문학과 예술, 1992. 제2호, 65폐지(62) 이광인, 박경재, 청산리회전, 문학과 예술, 1992, 제4호, 65폐지(63) 동상서, 66폐지(64) 일본외무성경찰사, 제20권, 85-86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65) 한국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1), 630-631폐지, 1989(66)(67)(68)(69)(70)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 고려글방, 118-119폐지, 1997. 10(71) 본고에서 밝힌 15만 원 탈취사건 시말은 이광인, 박경재가 쓴 “피에 젖은 15만 원 탈취거사” 주로 참조, 문학과 예술, 1992, 제1호(72)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 76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73) 동상서, 82-83폐지(74)(75) 주해 66과 동상서, 119폐지(76) 연변대학민족연구소 편, 조선족연구총서 (1), 273폐지(77)(78) 김철호, 피로 물든 장암동, 연변일보, 2004. 7. 2 (3)(79) 상해시보, 1920. 11. 9-11. 13(80) 주해 86과 동상서, 208폐지(81) 황룡국 주필, 조선족혁명투쟁사, 68폐지(82) 박금해, 국자가 소영자의 독립군 학교 · 광성학교, 개척, 569폐지, 민족출판사, 1990. 10(83) 박금해, 두만강 기슭의 반일교육중심 · 정동학교, 동상서, 578폐지(84) 고영일, 조선족역사연구, 234폐지(85) 이광인, 1989, 6, 21, 이경찬의 딸—이기순(74살), 조애숙(1913년 생) 등 안노인들 방문 (86) 이광인, 1988. 12. 4, 황병길의 딸 황정일 방문(87) 문화대혁명 전 “중공화룡현위 선전부자료” (3)(88)(89)(90)(91)연변주 보관서류관 혁명역사자료, 3061【주요 참고도서】 1.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2. 규암 김약연선생 (서굉일, 김재홍)3. 중국조선족교육사4.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1), 개척5.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6. 윤동주평전 (송우혜)7. 용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8. 조선독립운동 (3) (김정명)9. 현대사자료 (26) 10. 한국독립사 (3) (한국국사편찬위원회)11. 현대사자료 (27) 12. 중조관계사논문집 (양소전 편)13.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14. 조선민족운동사연구 (제2호)15. 조선족연구총서 (1)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편)16. 조선족혁명투쟁사 (황룡국 주필)17. 조선족역사연구 (고영일)18. 문익환평전 (김형수, 한국)19. 통일할아버지 문익환 (김남일)20. 연변조선족교육사21. 중국조선족사연구 (2) (연변역사연구소 편) 조선족선교의 현실과 미래, 한국 도서출판 평화와 선교, 2005년 4월
118    【남방기행】(9) 향로봉 지장보살님은 종루에 모셔졌다 댓글:  조회:4594  추천:125  2007-01-03
【수 필】향로봉 지장보살님은 종루에 모셔졌다 천대산 국청사에 다녀온 이튿날 11월 19일은 마침 일요일이다. 오전에 서둘러 학생 기중시험 보도준비를 마치니 마음이 거뜬하다. 오후 한때 세번째로 소흥의 향로봉 로봉선사를 찾았다가 나는 놀라마지 않았다. 로봉선사 종루는 예견과 같이 지장보살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였었다. 월수외국어대학 남대문을 벗어나니 오후 1시, 두어시간이면 답사가 가능할것 같아 길을 다그치는데 회계산 풍경구에서 편리한 유람손님차가 대기중이였다. 이윽고 유람손님차는 호수가 다리를 지나 향로봉쪽으로 달리는데 가을의 정취가 전에 없이 진하게 펼쳐졌다. 겨울에도 내내 푸르름을 토해낼것 같던 이름모를 남방의 나무들에서 나무잎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떡잎같은 어떤 나무잎들은 누우런 색을 띠여가고있었다. (남방에도 가을은 오고있구나!) 나는 감개무량해 마지 않았다. 가을의 숲속을 달리는 기분이 그리도 즐거울수가 없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 아니던가, 로봉선사 종루아래 지장보살님이 모셔져있다면 그 수확은 엄청 더 클것이니 기대되는 마음 설레이기만 한다. 15원짜리 문표를 내드니 로봉선사 대문지기는 공손히 들어가라고 고개를 끄떡인다. 그 미소, 그 공손함에 받들려 로봉선사의 첫 정문ㅡ대문에 들어서는데 정문을 마주하고있는 꽃밭속에서 아름답게 피여난 동백꽃 몇송이가 반겨주어 기분이 그야말로 상쾌하기만 하다. 그중 한송이 동백꽃은 저 아래 회계산 풍경구 호수가에 화사하게 피여났던 무궁화꽃을 꼬옥 떼여닮아 나의 발목을 잡고 놓칠 않는다.우리 겨레의 또 하나의 꽃이여서 련속 디지털사진기에 잡아넣으니 사진기속 동백꽃은 더더욱 어여쁘기만 하다. 왼쪽 한면을 채운 선사의 방생지와 정원을 지나면 희한하게 솟아오른 삼문(三门)이 두번째 관문으로 나타난다. 말이 삼문ㅡ관문이지 기실은 하나의 거대한 궁궐이여서 그속에서 한패의 사람들이 나무로 조각하여 무은 거대형 불상 삼존(三尊)을 모시는 중에 있었다. 삼문뒤 정원에서는 또 10여명 사람들이 10여년생은 되여보이는 한그루의 푸르른 보타수를 이미 파놓은 구덩이에 엉기엉기 옮겨가고 있어 삼문주위의 록화 등은 꾸준히 이어짐을 시사했다. 삼문다음은 천왕전이고 그 사이에 계단식으로 높아져가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천왕전 앞 좌우켠에 종루와 고루가 일어섰는데 종루는 오른쪽에 위치하여 벌써부터 나를 끄당겨가고 있었다. 했으나 2층으로 된 종루에는 웃층에 커다란 종을 달았고 아래층에 불빛속에 빛나는 단아한 모습의 불상이 모셔져 있었을뿐 무슨 불상이라고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물어도 무어라고 하는데 소흥 말씨는 근본 알아들을수가 없다. 한동안 서성이고 있으려니 중차림이 아닌 키 작은 60대로인이 곁을 스친다. 다급히 그 로인을 다잡으니 지장보살이 옳단다. 그때에야 두번째로 로봉선사를 찾았을 때 물은적 있은 사람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종루에 가보라고 했지만 종루에 대한 지식이 따르지 못한데서 지나치고 말았었다. 이번도 또 종루라고 하는데는 무시할수 없었다. 마침 종루 맞은켠 고루에서 경읽기에 여념이 없던 까까머리 녀승 둘이 나와서 천왕전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작정 그들과 말을 건네며 종루를 물으니 종루속의 불상이 지장보살님이 옳다는데야. 순간 나는 오른쪽 손바닥을 가슴에 꼭 대였다. 로봉선사 사원을 드나들면서 얼마나 바라던 숙원이였던가, 아무렴 로봉선사에도 지장보살님을 모시고말고~~나는 40~50메터 거리를 어느결에 달음쳤는지 모른다. 과연 일전에 보았던 불빛속에 빛나는 단아한 모습의 불상이다. 저 단우에 모셔진 불상이 바로 지장보살님이란다. 나는 숨죽이고 이윽토록 지장보살님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디지털 사진기를 내들었다. 불교계에서는 불상을 사진찍는것이 실례라고 저지시키지만 력사속 겨레의 큰 인물인 지장보살님불상을 어찌 사진속에 모시지 않으랴, 지장보살님과 종루의 이모저모가 사진속에 뜻대로 비껴들었다. 바로 그때 불상 웃켠에 금박으로 새겨진 크지않은 글씨의 유명교주 네글자가 시야에 안겨들었다. 나는 그예 지장보살님을 찾고야 말았다. 유명교주란 지옥의 륙도중생을 거느린 사람이란 말이니 이는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의 뜻이렷다. 종루 정문웃켠에도 誓愿宏深 네글자 편액이 걸리여 석가모니앞에서 다진 지장보살의 맹세가 넓고도 크며 깊다는것을 알리고 있었다. (여기 지장보살님은 종루에 모셔졌구나!) 소흥의 로봉선사에서도 끝내 지장보살님을 찾아낸 기쁨 이를데 없다. 소흥, 항주, 녕파, 천대산을 수차 거치면서 답사와 해당지식 익히며 1000여리 길을 에돌아서야 로봉선사의 종루가 지장보살님을 모신 불교사당이라는것을 알았으니 력사공부, 력사답사의 길이란 과연 순탄치만은 않은가부다. 하나 겨레의 고대위인 지장보살을 찾아가는 길은 마냥 즐겁고 위안으로 넘쳐나니 이 길은 꾸준히 절강 주산군도의 불교성지ㅡ보타산 섬으로 이어지고 중국불교 지장보살의 도장(道场)인 련화불국(莲花佛国)ㅡ구화산으로 이어질 것이렸다. 두어시간을 바라본 로봉선사 세번째 답사가 어언 세시간을 넘어서고있었다. 귀로에 로봉선사밖 지장전을 거치려니 지장보살을 찬송한 당나라 때 대시인 리백의 명시가 우렷이 떠오른다. 석가모니 입멸하니 일월이 부서져 내리는데 부처님 지혜로 광명과 생령 내려주었다 보살님 대자대비의 힘 끝없는 고해에서 구해줄수 있나니 홀로 오래고 오랜 겁을 지내며 고해를 소통시켜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것은 지장보살 덕성이여라 (2006년 12월 20일)
117    1910년대 연변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2) 댓글:  조회:5334  추천:104  2007-01-02
3. 양정학당과 4대 중학교 보는 바와 같이 연변서 조선족사립학교운동과 항일민족교육의 서막을 열어놓은 이들은 기독교출신의 반일지사들이다. 훈춘현 동광학교와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연변에 세워진 조선족사립학교는 양정학당이다. 양정학당은 1907년 3월, 월간신동(越垦绅董) 이동춘(李同春)이 광제욕(지금의 용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에 설립한 것인데 이듬해 1908년 3월에 조선족사립신식학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관립학당으로 넘었다. 1901년에 명동일대의 달라자에 화룡현이 설치되자 양정학당은 관립 제2학당으로 되고 잇따라 현립2교로 이름을 바꾸었다.(17) 현성의 소학교가 현립1교로 되고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되었다. 이동춘은 김약연의 동지이고 기독교출신으로서 20세기 초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며 항일민족교육의 선구자였다. 그는 함경북도 종성군 태생으로서 1872년에 태어났다. 호를 우화(雨华)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열중해 온 그는 20대에 들어서자 한어에 제법 숙달하였다. 그는 일찍 중국에 이주하였고 한어에 정통한데서 조선주재 청나라 “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는 1894년에 이동춘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등용하고 “파총(把总)”이란 관직을 내리었다. 후에 다시 북간도에 돌아온 이동춘은 화룡욕분방경력(和龙峪分防经历) 장조린의 지지와 녕원보 13사 총향악 (十三社总乡约) 현덕승의 도움 밑에 민중의 힘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광제욕 광소사 상천평에 신식학교 양정학당을 세웠던 것이다. 양정(养正)이란 학생들의 민족적 기개를 키운다는 뜻이었다. 양정학당은 중국식 초가 14간으로 이루어졌는데 교실이 3간이고 숙사가 6간, 나머지 5간은 주방과 식당으로 사용했다. 이 학교에서는 초창기에 벌써 녕원보의 13개사에서 8~9살부터 20살 이하의 조선 간민자녀 60명을 받아들이고 첫 해에 중문, 중어, 일본어, 산학, 체조 5개 과목을 설치하였다. 교원은 2명이었는데 이동춘이 학교관리를 하면서 중어, 일본어, 체조과를 맡고 조선족 피원경이 중문, 산학을 맡았다. 이동춘은 학교운영에서 공개적으로 “반일친중”의 기치를 들고 학생들에게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키워주기에 열중하였다. 1908년 2월 27일 화룡욕분발경력 허덕유는 이 학당을 시찰하고 변무독판과 방판에게 올리는 서한에 “이와 같이 편벽한 산간마을에서 이렇듯 드높은 교육열의와 향학의 진취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흔치 않다.”(18)고 썼다.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장재촌에 온 박정서(박무림)와 김학연은 장재촌에 “규암재”를 꾸린 김약연선생 등과 손잡고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을 세웠다. 규암 김약연선생은 함경북도 종성출신으로서 한학자였다. 일찍부터 반일사상을 가진 김약연은 종성과 회령의 우국동지들에게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집단이주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종성에서 두민을 지낸 성암 문병규학자, 김약연의 스승인 남도천, 회령의 소암 김하규학자 등 실학파동지들이 대찬성을 하고 1899년 2월 18일에 네가문의 대소가문 스물두집의 식솔 141명이 오늘의 명동, 장재에 이주(19)하여 삶의 터전을 잡았다.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 네 학자는 모두 고향에서 서재를 열었던 훈장들로서 이주 후 이미 환갑이 넘은 문병규, 남도천 두 학자는 뒤로 물러섰지만 김하규(당시 38살), 김약연(당시 32살)과 남도천의 아들 남위언(20)은 1901년에 각기 소룡동, 장재촌, 영암촌에 소암재, 규암재, 오룡재를 꾸리고 교육, 문화 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들 세 서재는 힘을 합쳐 명동서숙이란 신문화교육기관을 세우고 초대숙장에 박정서, 숙감에 김약연, 재무에 문치정(문병규의 아들), 교원에 김약연, 김학연, 남위언, 김하규를 내세웠다. 설립 초기 학생은 42명이었다. 명동서숙은 사실상 서전서숙의 후신이라 1909년 4월에 현대 멋이 진한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획기적인 것은 이 시기 서울 상동청년학원(중등교육기관) 출신이며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의 명동학교교육 참여이다. 정재면의 정식 부임과 함께 김약연이 교장이 되고 정재면이 교감을, 문치정이 재정을 맡았다. 정재면의 부임조건이 성경과 설치와 매일 예배였다. 하여 명동학교는 첫 시작부터 예배수업을 하고 마을에도 명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기독교학교에 기독교마을의 탄생이다. 이어 정재면은 서울에서 황의돈(국사대가), 장지영(한족학자), 박태화, 김철(와세다대학 법학과 출신) 등 쟁쟁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역사, 국어, 법학 등 과목을 강의하게 하였다. 1910년에는 3년제 중학부가 증설되고 1911년 3월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데서 여학부가 설치되었다. 명동학교는 정신태, 이의순(이동위의 차녀), 우봉순 등 여교원을 초빙하여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여자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한데서 명동학교의 규모는 날로 확대되어 1911년에 벌써 학생수는 중학부에 160명(남학생 114명, 여학생 46명), 소학부 보통과에 121명, 고등과에159명, 여학부 보통과에 53명, 고등과에 12명이었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의 요람으로 되면서 중국 동북의 남만과 북만, 조선과 러시야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왔다. 《연변문사자료》제5집 제89폐지에 의하면 명동학교는 1925년에 중학부가 폐교될 때까지 18년 간에 무려 1,000여 명의 졸업생을 키워냈다. 1908년 10월 28일, 기독교출신들이며 반일지사들인 강백규, 강희헌, 유한풍 등은 녕원보 개운사 자동툰 후저동(지금의 용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제6촌민소조)에서 농가 한채를 사고 정동서숙을 세웠다. 교직원으로는 초대숙장 강백규, 숙감 강희헌, 학감 유한풍, 교원 최봉철 등 4명이고 학생은 20여 명이었다.(21) 1913년 3월에 정동서숙은 사립정동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때 교원은 5명, 학생은 8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14년 8월에 여학부를 설치하고 1917년 3월에 중학부증설을 결정하고 학생모집에 착수하였다. 학교의 성망이 높아지자 외지의 많은 학생들이 이 학교에 몰켜들었다. 정동학교는 명실공히 북간도 두만강북안의 또 하나의 반일민족교육진지로 떠올랐다. 1911년 3월에 연길현 소영자에 길동기독학당이 일떠섰다. 이 학당은 이동휘의 창의와 그의 동지인 이종호의 투자로 세워졌는데 그후 광성학교로 확대, 개편되었다. 교장은 이동춘이고 학감은 김립; 교원은 장기영, 오영선, 계봉우, 김하석, 문경; 간사는 구춘선, 이봉우, 황원호, 이남원; 재무에 정현서; 식당주임에 박춘서 등이었다.(22) 학교 내에 중학교와 법률정치과를 두고 그 부속으로 여자 학부와 소학과를 두었다. 중학교는 중학교로 발전되어 명동촌의 명동중학교, 와룡동의 창동중학교, 자동의 정동중학교와 더불어 연변의 최초4대 중학교로 이름이 났다. 학교의 취지가 항일인재양성인데서 “독립군학교”라고도 불리웠다. 그만큼 광성학교의 교직원들은 모두가 기독교계의 이동휘의 동지들로서 1914년 이후 이동휘가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꾸리니 대부분 교원과 학생들이 나자구로 옮겨갔다.(23) 한때 이동휘의 장녀 이인순도 이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24)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 국자가 서북쪽 와룡동(지금의 연길시 원 소영향 민흥촌)에 창동서숙이 세워졌다. 반일지사들인 남성우, 이병휘, 오상근 등의 제의와 최병균, 최종한, 최병규, 오상인, 김성옥, 정지형, 지병학, 나시영, 전윤민, 정종현, 오관준, 한영운 등 12명 학교후원회의 합심이었다. 창동이란 조선의 창성을 도모한다는 뜻인데0년에(25)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창동학원으로 개명하였다. 윤병석선생의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에 따르면 개교 초기 이상근, 이병휘, 남성우가 정, 부 원장을 맡고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리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 등 8명이 교원을 맡았으며 중학부의 학생은 80여 명이었다. 지금도 와룡동에 가 보면 마을 동쪽 언덕에 1935년에 세운 “사은기념비”가 그대로 우뚝 서 있다. 상기에서 필자는 서전서숙을 발단으로 한 그후의 양정학당, 명동학교, 정동학교, 광성학교, 창동학교의 건립 맥락을 대충 헤아려 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는 당년 북간도의 4대중학교로 불리며 성망이 높았는데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런 학교의 교직원들 거개가 기독교출신들이고 이동휘계의 사람들로서 학교교육의 주체가 반일민족교육이었으며 1910년대 반일계몽운동의 주류를 이루며 1910년대 사립학교교육운동을 힘있게 앞으로 내밀었다. 4.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1909년 9월에 일제는 청정부를 핍박하여 이른 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간도협약에서 일제는 간도의 소속권이 중국에 속한다고 승인하였으나 대신 간도에 있는 조선이주민을 “한국교민”으로 하고 그에 대한 “보호권”을 취득하여 조선족들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이해 10월에 용정과 명동의 박무림, 김약연 등 30여 명 인사들은 “간도한인자치회”를 결성하고 연길지부에 수차 비준을 신청하였으나 일제의 반대와 연길지부 도빈의 거절을 받았다.(26) 어떤 글에서 보여지는 한인교민회나 간도교민회는 사실 간도한인자치회를 가리킨다. 그후 1910년 3월, 국자가를 중심으로 한 예수교와 천주교의 반일지사 40여 명도 연길지부 도빈에게 “간민교육회” 인가신청을 하였다. 도빈은 조선족학교에서 중국어로 교수하며 중국교과서를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준하고 일찍 귀화입적하고 변무공서 교섭과 통역을 맡은 “반일친중국”파이며 조선족교육가인 이동춘을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따라서 연길지부는 이동춘에게 노임을 발급하면서 2명의 서기를 배치하고 간도교육회 본부를 연길지부 내에 설치(27)하도록 하였다. 간민교육회는 회장에 이동춘, 부회장에 박찬익, 윤해, 평의장에 손운순, 재무장에 허순, 서기장에 허곤을 두고 여러 현에 지회를 두었는데 1911년에 벌써 회원이 130여 명에 이르렀다.(28) 한편 간민교육회는 조선이주민의 귀화입적을 선전하고 《월보》를 발행하면서 계봉우 등 학자를 청하여 조선족학교의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간민교육회는 간도조선족사회를 이끄는 이동휘 그리고 김립 등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를 받으면서 국자가에 길동기독학당(광성학교)과 길신여학교, 간민모범학당을 꾸리여 조선족교육발전을 크게 도모하기도 하였다. 1911년 2월 당시 간민교육회는 회원이 200여 명으로 발전(29)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이동휘의 측근들이다. 이동휘의 지도아래 간민교육회활동에서 중심이 된 이는 규암 김약연인데 그를 축으로 한 각 지역의 대표들이 뭉친데서 북간도에는 “72형제파”가 출현(30)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각지에서 학교를 꾸리며 교사를 파견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주력한데서 북간도 항일민족운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1911년에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1912년이 신생한 중화민국의 원년으로 되었다. 신해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고 북경정부 대통령으로 된 원세개가 “련성자치제(联省自治制)”를 주장하자 이동휘, 김립 등은 간도교육회의 이동춘, 정재면, 박찬익, 장기영 등 4명 대표를 북경에 보내어 연변조선족의 간민자치회 설립을 신청하였다. 북경 정부,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 부대통령 여원홍은 간민자치회의 자치를 삭제하고 간민회를 설립하도록 했다. 1913년 2월, 김약연, 이동춘 등에 의해 연길 지방정부에 간민회 신청서가 제기(31)되고 이해 4월 26월에 국자가에서 간민회총회가 열리었다. 이날 간민회규약이 통과되고 총회간부를 선거하였는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총회장 김약연 총무 도성 서기 박찬익 민적연구과장 남공선 재정과장 조영하 식산흥업과장 이동춘 의사과장 김병흡 평의원 김영학, 조극, 왕금붕, 현영주, 정재면, 리중집 등. 간민회 각 현 지회로는 연길현이 이근식, 문경, 박동원, 주건이고 화룡현이 마진, 남위언, 박정훈, 김시형, 남세극, 김순문이고 왕청현이 최명록 등이다. 이들은 모두 간민교육회시기의 골간들로서 간민회는 간민교육회의 계승과 발전이었다. 이동휘가 이 시기 러시야 연해주로 간데서 김약연을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간민회의 간부들은 모두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이동회계의 인물로서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이었다. 간민회는 설립된 후 조선이주민의 귀화입적운동을 크게 추진하고 사숙개량운동을 전개하면서 사립학교운동을 계속 내밀었으며 야학교와 식자반을 꾸리고 문맹퇴치를 내밀었으며 각지 농촌들에서 식산흥업(殖产兴业)운동을 벌리며 농민들의 수입을 늘이도록 이끌었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이주민들 조건이 여하하든 무조건 귀화입적을 강요하고 간민회에 끼어 든 일부 불순분자들이 간민회를 턱 대고 농민들을 억압하며 사복을 채우기도 한 등 문제들이 존재하기는 하나 북간도 조선족사회 항일민족운동의 토대를 마련하고 조선족사회의 새 기원을 열어놓은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단 귀화입적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삼켜버린 후 민국정부가 중국적에 가입하지 않은 조선 이주민에 대해 백방으로 압력을 가한데서 입적고조가 재빨리 형성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청에서는 “국적법이 나오지 않았기에 국제사이에서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입적수속을 해 주지 않았다. 이에 이동춘과 김립은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 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 (万户请愿归化入籍书) 를 제기하여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다.(32) 한데서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그때 민국정부에서는 법령을 내려 조선이주민들의 토지몰수를 합법화하였다. 이동춘은 또 북경에 가서 초대 대통령 원세개를 찾아 법령에 밝힌 간민들의 토지몰수규정을 철회케 하는 한편 조선이주민들의 이름으로 토지소유를 합법화(33)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4년 말 간민회는 농무계와의 모순으로 하여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간민회의 주요한 간부들은 두 패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한 패는 김립, 오영선, 장기영, 김하석, 남공선, 문경 등이 이동휘를 따라 나자구에 가서 사관학교를 꾸리고 구춘선 등이 하마탕에 비밀활동기지를 꾸려 그 뒤 국민회총부소재지를 마련하였으며 다른 한 패는 김약연을 중심으로 김약연, 정재면, 김병흡, 김영학, 박동원, 이중집, 마진, 주건, 남세극, 최명록 등이 계속 각지에 남아 반일교육을 앞세우면서 항일인재육성에 전력하였다. 간민회가 해산된 후 이들은 북간도의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면서 중국 지방관헌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조선족의 자치를 도모하는 한편 후에 나온 상해임시정부에 의거하여 항일민족무장투쟁을 크게 내밀었다. 5. 나자구사관학교와 철혈광복단 1910년대 조선 이주민이 모여살고 있는 북간도는 각종 종교단체들의 중요한 활동지대였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교(기독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1913년에 이동휘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간도교육회의 기초에서 간민회를 설립한 후 조선인의 귀화입적을 주장하며 반일문화계몽운동을 내미는 한편 예수교의 명의로 맹활약을 벌리었다. 이 시기 이동휘는 훈춘현에 가서 이 현에서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반일독립지사 황병길과 연계를 맺고 예수교의 힘으로 민중을 쟁취하면서 반일의 힘을 키웠다. 하여 짧은 시간 내에 연변의 예수교신도는 10여 만으로 늘어나 큰 세력으로 발돋움 하였다. 1914년 봄에 이동휘는 소영자의 학교지도를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김립 등과 함께 왕청현성에서 200여 리 떨어진 나자구로 갔다. 나자구는 지금의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변계에 위치한 편벽한 고장이다. 1910년대 초 이 고장 조선이주민들 호구가 이미 1,000세대를 넘기었는데 그들 모두가 연변 개척 초기에 이 고장에 이주해 와서 자리를 잡은 조선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조선서 망명한 의병과 애국지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나자구의 삼도하자와 태평구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반일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중 태흥서숙은 구한말 대신이었던 이용익이 나자구 지방유지들의 지지로 세운 학교인데 1913년 3월 경에 태흥서숙에 중학부를 설치하고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결과 이 학교의 학생수는 시초의 80여 명으로부터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해 가을에 소영자 광성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밀려 들자 학생 수는 보다 상승선을 그었다. 1914년 12월에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이 태평구 태흥서숙과 광성학교를 토대로 무관학교를 세우니 창동, 정동, 명동 학교들과 조선,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무려 300여 명에 달했다. 학교교장은 이동휘이고 김립, 장기영, 오영선, 김영학, 김광은 등이 지도책임을 맡았다.(34) 태평구무관학교의 기본 교수내용은 군사훈련과 반일독립사상전수이고 기본취지는 항일민족운동을 위한 군사골간양성이었다. 학생들은 과당에서 군사지식을 배우고 운동장과 야외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애국가”, “독립운동가”의 노래소리가 우렁찼다. 1915년, 교장 이동휘는 무기구입차로 러시야 연해주로 갔다가 독일특무의 혐의로 짜리러시야 경찰한테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태평구에 세워진 나자구 무관학교는 엄중한 위기에 직면한 데다가 일제의 협박에 의한 중국 지방정부의 해산령으로 1915년 말경에 취체되었다. 남공선, 장기영 등은 일부 사생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고 오영선 등 다수 사생들은 훈춘현 대황구로 옮겨가 당지의 양하구, 김남극 등 반일지사들과 상의하고 원래의 북일학교를 중학부가 달린 9년제 학교로 만들었다. 때는 1917년 1월이다.(35) 이동휘가 명예교장을 맡고 양하구가 교장, 김남극이 부교장, 오영선이 교장대리를 맡았다. 북일중학교는 나자구 사관학교의 후신으로서 사관학교의 맥이 그대로 이어졌다. 1910년대 중기 항일민족투쟁에서의 획기적인 사변을 나자구무관학교와 더불어 철혈광복단의 탄생으로 꼽을 수 있다. 철혈광복단은 1915년 전후에 북간도와 러시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36)이다. 말 그대로 비밀결사조직인데서 이 조직의 상세한 내막은 잘 알려지지 않으나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계 동지들에 의해 조직되고 움직여진 것은 사실이다. 철혈광복단은 결성된 후 이동휘 등에 의해 미국, 상해, 천진, 북경, 서울, 평양 등 각지의 반일지사들도 망라되었다고 하는데(37) 아직 이에 대한 연구자료가 잘 따르지 못하고 있다. 믿음직한 것은 1920년 1월, 15만 원 탈취사건참가자인 최봉설의 회상이다. 최봉설의 회상에 따르면 철혈광복단은 1914년 나자구사관학교출신인 남공선,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이 중심이 되어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 수십 명 열혈청년들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38)라고 한다. 최봉설 등이 철혈광복단에 참가한 것은 1914년 8월 10일로서 무명지를 깨물어 “철혈광복단 맹세”란 혈서를 썼다(39)고 알려진다. 해당자료를 보면 1919년 3.13운동에서 희생된 박문호나 채창헌, 최익선도 나자구사관학교시절에 최봉설과 같이 벌써 철혈광복단 성원이었다. 최봉설은 또 “박문호는 창동학원의 교원이었는데 1915년에 남공선교원과 함께 임국정, 최봉설, 최익선 등을 데리고 나자구사관학교에 갔다가 임국정, 남공선과 함께 노령에 들어간 후 다시 돌아와서 서고성자에서 소학교교원을 담임하고 반일운동을 하였”다고 회상(40)하였다. 최근에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철혈광복단의 주성원인 채창헌의 유가족 채경숙 여사를 찾게 되고 취재하는 가운데서 채창헌의 가족내력을 다소 헤아려 보았다. 채창헌은 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흥진촌 사람이다. 1910년대는 연길현 수신향 오도구 흥연촌으로 통했다. 채창헌의 출생시간을 알 수가 없지만 채경숙여사가 구술한데 의하면 채창헌은 오두구 흥영촌 출생으로 알려진다. 채경숙여사는 2004년 76살로서 1929년 생인데 여사의 친할아버지 채창묵은 채창헌의 맏형이었다. 채창묵은 오두구에서 서당훈장으로 있었고 아래 채인묵, 채창호, 채창헌, 세 동생을 두었다. 즉 4형제였는데 채창헌은 형제중 막내로서 장가도 못 간 총각이었다. 생전에 오도구 사립경애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확실히 왕청현 나자구사관학교시절에 쳘혈광복단에 가입했었다. 철혈창복단은 1919년 용정 3.13운동을 앞두고 크게 확충되었다. 이해 2월 18일 밤, 조선독립의사회의 사회하에 국자가 박동원의 집에서 3.13운동의 희생을 예견하고 혈서를 쓰고 철혈광복단 가입의식을 가지었는데 이날 밤 혈서를 쓰고 새로 철혈광복단에 가입한 이들로는 아래와 같다. 국자가 지방: 이홍준, 이성근, 박동원, 김영학 용정지방: 김정 개산툰지방: 백유정 팔도구지방: 유례군 평강구지방: 고동환 이밖에도 일찍부터 반일운동에 나섰던 김순문, 강룡헌, 구춘선, 이성호, 고평, 최봉렬, 박정훈, 이동식 등도 철혈광복단에 대거 가입(41)하였다. 철혈광복단의 주체는 기독교출신으로서 이동휘계의 사람들이었다. 6. 3.13운동과 간도국민회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이 내놓은 “민족자결론”은 해내외 각지의 조선인들을 지대히 고무했다. 미국의 조선인들은 빠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념원에서 그해(1918년) 11월 중순에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전 미 조선인독립청원집회를 가지고 빠리에 파견할 대표를 선정하는 한편 이 운동을 위한 의연금모집활동을 벌리였다. 이 소식이 일본 고베의 해당 신문들에 실리고 로씨야 연해주땅에 알려졌다. 연변에서도 독립운동의연금 모집위원회가 나오고 선정한 민족대표를 연해주에 보냈다. 기독교계열의 국자가 항일운동가들은 조선 고종황제의 인산, 즉 국장을 계기로 요배식을 가지기로 하고 1919년 2월 18일과 20일, 항일운동가 33명은 국자가 연길도윤공서 외교과 관원 박동원의 집에 모여 당면 투쟁방침을 토의하고 조선 독립운동의사회를 구성(42)하였으며 철혈광복단 혈서서명을 가지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전민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3월 7일 밤에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졌다. 용정, 국자가, 명동 등 지의 각 사립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가지고 연변의 반일집회를 촉구하였다. 3월 9일 저녁, 조선독립운동 의사회에서는 긴급회의를 가지고 연해주와 같이 행동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3월 13일 용정에서 먼저 “조선독립선언발표축하회”를 가지기로 결정 짓고 새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에 착수하였다. 이어 명동학교의 학생들은 정동학교와 연계를 맺고 320여 명의 충혈대를 조직하였다. 국자가 도립중학교에서는 자위단을 무었다. 1919년 3월13일, 용정에서는 연길, 화룡 등지의 민중 3만 여 명이 모여 전례없는 규모의 반일집회를 가졌고 성세호대한 반일대시위를 단행하였다. 경황실색한 중일군경들은 시위군중들을 잔혹하게 탄합하였는데 당장에서 10여 명이 죽고 20여 명이 부상당했다. 3월 13일 오후 대회해산 후 조직자들은 구춘선, 강봉우 등 5명 대표를 국자가에 파견하여 연길도윤공서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고 3월 17일에 제창병원 마당에서 3,000-4,000명이 참가한 14명 의사의 장례식을 성대히 가지였다. 오후3시에 합성리 동산묘지 장례식이 끝나자 렬사들 묘지 앞에는 나무묘패가 세워지고 그앞에 《충렬사제공지묘(忠烈士諸公之墓)》비석이 세워졌다. 그후 3.13중상자 중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등이 또 희생되다 보니 용정3.13운동에서 희생된 렬사는 도합 17명(19명라고도 함)이나 된다.(43) 용정 3.13후 이 운동은 북간도전역에서 맹렬히 터져올랐다. 1919년 3.13운동 이후 조선독립운동의사부는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길현 지인향 소완자(지금의 연길시 원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 3.13학살 선후사업을 토의하고 독립운동 의사부를 “한족독립기성총회”로 개칭하였다. 개칭된 후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회 장: 구춘선 부 회 장: 마진 의사부원: 유예균, 김병흡, 최원일, 고용환, 배형식, 강구우, 이대현, 이봉 우, 김순문, 김약연, 신명덕, 정재면, 김신근, 최자익, 박정훈 재무부원: 유찬희, 서성권, 진석함 교섭부원: 고용환(겸), 배형식(겸) 편집위원: 유하천, 최기학, 김정 통신부원: 이홍준, 강백규, 김상호, 경위부원: 박정훈(겸), 최웅렬, 이춘성, 장우범 3월 21일, 러시야에 간 김약연, 정재면 등 연변대표들이 국자가에 돌아와 2월 25일 러시야에 임시정부형식인 “국민의회”가 수립되었으니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러시야에서 이동휘, 국민의회 군사부장인 김하석과 토의한 무장투쟁방침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족독립기성총회는 반일무장투쟁의 수요에 따라 3월 21일-31일 경에 대한간도국민회로 개편하였다. 대한간도국민회는 중앙총부와 5개 지방총회로 되었는데 그 조직구성(44)은 아래와 같다. 중앙총부: 회 장: 구춘선 부 회 장: 강구우(초기) 서상용(후기) 총 무: 김규찬 비 서: 최자익 재무부장: 유찬희 서무부장: 김승국 편집부장: 이 완 사범부장: 최익룡 군사부장: 한중근 통신부장: 김병흡 통신부원: 정기선, 황일보 ※중앙총부 소재지는 처음에 구춘선이 활동하고 있는 연길현 하마탕에 설치하였다가 후에 연길현 의란구 구룡평으로 지대를 옮기였다. 중앙총부산하 5개 지방총회: 중부총회: 중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국자가서구(西沟)에 두고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중부지방회는 연길현 팔도구, 태양, 조양천 일대를 관할하고 제2중부지방회는 연길현 국자가 지방을 관할하였다. 동부총회: 동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지인향 화련리에 두었다가 연길현 용지향 화전자로 옮기였는데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동부지방회는 왕청현 양수천자(지금은 도문시에 귀속)일대를 관할하고 제2동부지방회는 용지향 화전자일대를 관할하였다. 남부총회: 남부총회는 소재지를 화룡현 지신향 명동에 두고 산하에 두 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남부지방회는 용정과 회령대안 일대를 관할하고 제2남부지방회는 화룡현 이도구, 삼도구, 무산대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서부총회: 서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숭례향 명월구에 두고 1.2지방회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돈화현 관내의 국민회지회가 서부총회에 소속되고 명월구에 《4.1상점》을 꾸렸다. 또 초기에는 제1남부지방회를 서부지방회로 부르다가 후에 남부지방총회에 넘기였다. 북부총회: 북부총회는 소재지를 연길현 춘화향 합수평 이대방자(지금은 왕청현에 소속)에 두고 산하에 두개 지방회를 두었다. 제1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화향 일대(지금은 왕청현에 소속)를 관할하고 제2북부지방회는 연길현 춘양향일대(지금은 왕청현에 소속)를 관할하였다. 이상이 간도국민회 중앙총부와 다섯개 지방총회 개략적인 소개이다. 국민회는 각 지방회 산하에 80여 개의 총지회(지방지회)(45)를 두었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총지회가 무려 133개를 이루었다. 세력범위를 보면 남으로는 화룡현 남부의 덕화, 숭선 일대에 이르고 북으로는 왕청현 나자구, 동으로는 양수, 서로는 명월구, 돈화 일대에 이르렀다. 명실공히 연변지구에서 가장 큰 항일단체었는데 조직취지는 항일무장투쟁이였다. 간도국민회는 청일색의 기독교계열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시 모두가 기독교명의를 띠었다.
116    【론문】(18)--1910년대 연변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 댓글:  조회:4247  추천:86  2006-12-31
1910년대 연변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 1. 머리말 일제하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기독교를 떠나서 운운할 수 없다. 당시 서양문화의 상징으로 된 기독교는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의 이주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마음과 생활의 피난처가 되고 보호자가 되고 안식처가 되었으며 항일민족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서양문명의 전달자로, 애국계몽운동의 수단으로, 항일구국운동의 구심점으로 되었다. 한데서 이 땅의 조선족들은 삶의 터전을 닦아가기 위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항일운동가들은 기독교란 이 교회조직을 기반으로 조선족사회를 통합하면서 그 뭉친 힘으로 1920년도까지 이어보는 1910년대 항일운동을 거세차게 밀고 나갔다. 기독교로 뭉쳐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은 항일운동가들과 조선족민중의 공동의 마음의 발로였다. 본 논문에서 펼쳐 보이는 1910년대 거창한 항일운동—이상설과 서전서숙, 양정학당과 4대중학교,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나자구사관학교와 철혈광복단, 용정 3.13운동과 간도국민회, 국민회군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 15만 원 탈취거사, 경신년 “대토벌”과 반 “토벌” 등은 모두가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주체가 되어 이뤄지고 추진되었다. 1910년대 조선족사회를 이끈 이런 굵직굵직한 항일역사사건들이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기독교출신의 동지들에 의해 펼쳐졌다는 것은 꾸밈이 아닌 역사의 진실이다. 했으나 지금까지의 1910년대 조선족 역사연구, 항일운동사 연구는 거의 모든 연구가들에 의해 항일역사의 흐름대로 펼쳐졌으나 이 모든 굵직굵직한 항일역사사건들을 하나같이 시종 기독교와의 관계속에서 펼쳐 보이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항일을 운운했다 해도 개개의 사건과 흐름이고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의 거창한 사변들을 기독교와의 관계속에서 하나하나 펼쳐보려 한다. 그 속에서 서전서숙이 떠오르고 명동을 주체로 한 최초의 4대중학교가 떠오르고 철혈광복단이 떠오르고 15만 원 탈취거사가 떠오르고 조선족 사회를 밀고 나간 간도교육회와 간민회, 간도국민회가 떠오른다. 이런 항일역사의 주인공들은 기독교출신의 동지들이다. 그네들은 기독교를 통한 민중의 뭉친 힘에 의해 용정 3.13운동을 조직하고 무력항쟁으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펼치었으며 치 떨리는 1920년 경신년 “대토벌”에 맞서 일제침략군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웠다. 하다면 서양문화의 상징으로 받들린 기독교가 어느 때 북간도에 들어왔고 언제부터 조선족사회에 받아 들여졌는가? 이를 알자면 20세기 초엽 전후시기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북간도라 하면 흔히 화룡, 연길, 왕청, 훈춘 4개 현을 가리키지만 돈화도 사실 북간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에 의하면 오늘의 연변땅 범위 내에서 기독교가 가장 일찍 밀려든 것이 돈화이다. 아편전쟁 후 기독교의 신교파 여러 종파들이 육속 중국에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돈화는 벌써 19세기 말엽으로 보이는 광서년간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었다.(1) 돈화의 기독교는 장로회파로서 시초 지금의 돈화려사부근에 초가집 세칸을 잡고 길림교회의 관할 밑에서 활동을 벌리었다. 광서 26년인 1900년에 의화단운동이 돈화까지 미치면서 목사는 자취를 감추고 교회당이 타버리고 신도 12명이 살해되었다(2)고 한다. 청정부에 의해 교회가 다시 선을 보인 것은 광서 29(1903)년이다. 돈화에 이어 안도현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진다. 명월진기독교의 흐름을 보면 1900년 전후로부터 성결교, 감리교, 장로교, 조선기독교, 동아기독교 등 5대 교파(3)가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 예속지인 캐나다 장로파교회 해외 선교부는 1898년에 연변에다 선교구를 정(4)하고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리었다. 이들 기독교선교부는 외국인들이 북간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대본영으로서 용정에 자리 잡은 10여 명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조선의 원산, 성진 등지에서 여러 해 전도활동(5)을 하다가 조선이주민들을 따라 1903년에 북간도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1905년에 일제침략자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은 캐나다 기독교선교사들의 지대한 불만을 자아냈다. 이들 선교사들이 조선민족에 대한 왜놈의 탄압을 반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조선이주민들의 반일감정과 독립염원을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조선족사회의 실제에 맞게 전도활동을 펼치니 대단히 인심을 샀다. 허나 북간도 교회의 중추세력을 이루며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고 조선족사회에 널리 접수된 것은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출신의 이동휘, 김약연, 구춘선, 황병길 등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의 수령으로, 조선족사회를 이끈 이동휘(1873년도 생)는 다 알다시피 함경북도 단천군출신으로서 1902년에 벌써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되어 어전을 지켜섰다가 1905년 11월에 굴욕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이에 반기를 든 사람이다. 이동휘는 1907년 7월에 또 나라가 군권을 잃고 국군까지 강제 해산 당하니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07년 9월에 양기택, 신채호, 이갑,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함께 비밀단체 서북학회의 토대 위에서 비밀정치단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각지에서 학교를 꾸리며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자유롭지 못한데서 1910년 봄에 이동휘는 안창호, 최석하, 이갑 등 신민회간부들과 긴급회의를 가지고 해외망명을 결의하고 여러 패로 나뉘여 해외망명길에 올랐다. 1910년 6월, 중국 청도에서 신민회 간부회의가 열린 후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의 주요활동무대는 중국의 북간도였다.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자면 급선무로 나서는 것은 조선족사회의 조직화였다. 당시 중국과 일제의 압력으로 공개적인 정치, 사회 단체를 조직할 수 없는 실정에서 가장 좋기는 기독교가 지닌 신성불가침의 힘과 영미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입장을 실제에 맞게 활용하여 교회란 이 끈끈한 힘으로 뭉쳐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이동휘는 조선 성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캐나다 선교사 구례선과 토의하고 동지들인 김립, 윤해, 계봉우, 정연호, 장기영, 고명수, 오영선, 유예균, 마진, 서상용, 김하석, 김하구 등과 함께 연해주, 북간도, 함경도를 포괄하는 한·중·노 기독교 선교단을 조직(6)하고 동지들과 더불어 북간도에 진출하여 포교활동을 본격적으로 내밀었다.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 우리도 서양문명국과 같이 잘 살 수 있다. 삼천리강산 한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이룩되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 (7) 눈물에 젖은 이동휘의 피타는 호소는 인심을 크게 샀다. 게다가 그가 북간도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신도 100만 명이 이룩되는 날이 나라가 독립되는 날이다!” 라는 구호를 내거니 북간도에서 일대 기독교운동이 일어났다. 훈춘현에서는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의 1910년부터의 전도에 힘 입어 항일운동가 황병길, 오병묵 등이 호응하여 훈춘기독교 강학당을 설치하고 교우회를 조직(8)하면서 반일사상으로 꽉 찬 본격적 선교활동을 밀고나갔다. 특히 북간도 기독교운동의 선두에서 달린 사람은 북간도 교회의 대표적 인물 김약연이다. 김약연은 1899년 2월에 종성과 회령의 4대 학자가족과 함께 명동, 장재에 집단 이민한 후 항일구국에 뜻을 두고 1901년에 규암재 등을 꾸리다가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 1908년 4월 27일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꾸렸는데 1909년에 이동휘가 파견한 신민회 회원 정재면이 명동학교 교원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권유로 김약연은 유교사상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학교와 마을을 기독교화하기에 이르렀다. 잇따라 김약연은 이동휘의 동지가 되고 집단이주시 성원들인 문치정, 김하규, 남위언 그리고 박무림, 김영학, 유찬희, 구춘선, 강백규, 마진 등과 더불어(9) 북간도 조선족사회를 거창한 항일에로 이끄는 민족지도자로 떠올랐다. 기독교 전도와 항일운동은 모순체가 아니라 동일한 성격이고 일본제국주의란 대적을 두고 중국과 조선은 동병상린인데서 중국의 지방관리들은 기독교도들을 우대하였다. 한데서 기독교는 여느 교보다도 더 빨리, 더 크게 북간도 조선족사회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해당통계자료에 따르면 1903년에 훈춘현에서 기독교 포교활동이 시작되어 1906년에 용정교회가 세워졌는데 1921년에 이르러 전 북간도에 교회 63개 소, 신도 6,442명으로 발전하였다. 1925년에는 교회가 85개 소, 신도가 10,277명, 가장 흥성기를 보였던 1932년에는 교회가 105개 소, 신도가 21,142명으로 치달았다. (10) 이같이 북간도의 기독교전도는 항일의 주선율을 타고 1910년대 초기와 중기의 발전을 거치면서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계열의 동지들에 의해 조선족사회와 교육사회를 이끄는 간도교육회와 간민회로 발전되었다. 이 조직구심점이 1919년 3.13반일운동을 계기로 다시 간도국민회로 이어지면서 간도국민회는 명실공히 북간도만이 아닌 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족 반일단체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가장 큰 반일무장단체로 발돋움했다. 본 논문은 이동휘와 그의 기독교 계열동지들이 전개한 1910년대 북간도의 중요한 항일활동과 역사사건들을 개략적으로 훍어보면서 그 시기를 1910년대를 중심으로 20세기 초엽부터 1920년 경신년 “대토벌”시기까지 잡아보았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1910년대 북간도 조선족의 항일투쟁을 시종 기독교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 초점을 두고 1910년대 역사연구를 하나로 일맥시킨 것은 본고가 처음이라고 보면서 1910년대 조선족사 항일연구에 도움을 주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 리상설과 서전서숙 20세기 초는 연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기독교가 항일운동의 발자국을 뗀 첫 출발시기이다. 첫 출발의 기꺼운 장이 바로 서전서숙의 등장이라 하겠다.조선족역사연구가들은 다 알다시피 조선 반도서 살던 우리 겨레가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에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예로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에 남다른 중시를 돌려온 이 땅의 조선족들은 매일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마다에서는 훈장을 모셔다 서당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최초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서당의 형태는 각이하여 온 마을이 힘을 합쳐 서당을 꾸리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서당을 꾸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러 유형의 서당이 우후죽순 일어섰는데 연변의 서당교육은 20세기 초까지 흥성의 일로를 걸었다. 해당자료에 의하면 1914년 연길현에 조선족이 꾸린 서당만 해도 116개 소에 달했다고 한다.(11) 그 시절에 시대사조인 사립학교가 흥성해 짐에 따라 서당교육은 된 충격을 받았으며 점차 근대학교교육으로 번져갔다. 근대학교교육의 선두에 선 학교 중의 하나가 용정에 일떠선 서전서숙이다. 1905년 11월 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수많은 항일민족운동가들이 해외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위해 그 당시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 중의 한사람이 의정부 참찬 이상설인데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여 싸운 것이 죄로 치부되어 옥에 갇혔다가 1906년 봄에 석방되자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이해 4월 18일(음력), 이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갔다. 이상설은 청도에서 여러 동지들을 만나 상론한 뒤(12) 그길로 러시야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이해 8월에 (10월이라고도 함)에 동지들인 이동녕, 정순만(왕창동), 황달영(전공달), 김우용(김동환), 여조현(여준), 박정서(박무림), 홍창섭 등과 더불어 용정촌에 왔다. 이상설은 선뜻 자금을 내놓아 기독교신자 최병익이 갓 지은 팔간집을 사서(13) 서전서숙을 꾸리었다. 이상설과 그의 동지들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인데서 최병익과 의기투합 되었다. 연변에서 실천적으로 펼쳐지는 기독교와 항일투쟁의 기꺼운 출발이었다. 이상설은 친히 서전서숙의 숙장을 맡고 교원까지 담당하였다. 그는 이동녕, 여조현, 김우용, 황달영, 정순만, 박정서, 홍창섭 등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기념세미나문집에 실린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윤병석선생의 글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에 의하면 이동녕은 이상설과 함께 활동하다가 3.1운동 이후 상해에서 의정원의 의장직을 맡아 임정을 세운 독립운동계의 원로이고 정순만은 서전서숙 후 연해주 《해조신문》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여조현, 즉 여준은 서전서숙에 이어 서북간도 각지에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다가 서로군정서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인물, 박정서, 즉 박무림은 서전서숙 폐숙후 장재촌의 김약연선생과 같이 명동서숙을 세우고 숙장이 되어 서전서숙을 정신적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이 같이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일제하 항일운동의 인재를 키우는 최전열에 나선 쟁쟁한 인물들이였다. 서전서숙은 첫 시작에 학생 22명을 받아 들이고 글을 가르쳤는데 이상설은 사재를 서슴없이 서숙의 운영경비로 내놓았다. 시초 학생모집이 어려울 때 명동 장재에서 규암재를 꾸리던 김약연이 사촌동생인 김학연과 남위언을 서전서숙에 보내주었다.(14) 어떤 글에서는 명동일대서 만도 20여 명 학생을 서전서숙에 입학(15)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일찍 서굉일교수와 함께 “규암 김약연선생”을 내놓은 김약연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은 2004년 10월 중순에 명동, 장재촌 답사 시 필자와 당시 김약연선생이 보낸 학생은 김학연과 남위언이였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사실을 보아도 시초 모집수가 22명이라 할 때 명동일대서 20여 명을 보냈다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연과 남위언은 젊음이 넘치는 청년들이고 또 남위언은 영암촌에 서당을 베풀어 한학을 가르치던 사람이고 보면 윤병석선생의 지적과 같이 서전서숙에서 갑반에 20세 전후의 청년들도 받아들였다는 것이 맞아 떨어진다. 항일운동가 양성이 목적이였으니 말이다. 서전서숙은 학생들을 갑반(고등반)과 을반(초급반) 두반으로 나누고 역사, 지리, 산술,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한문 등을 가르쳤다. 이상설은 손수 《산술신서》(상, 하 권)를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을,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산술과를, 여조현은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가르쳤다. 교원 모두가 기독교출신의 열렬한 항일민족운동가들이라 서전서숙의 실시는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이었다. 더욱이 항일인재를 키운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본다. 헌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고종황제의 밀사로 선정된 데서 서전서숙 운영은 말 그대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07년 4월 초순 경에 이상설이 비밀사명을 띠고 떠나자 서전서숙은 재정난으로 몇 개 월을 지탱치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여러 가지 자료에 따르면 서전서숙의 일부 교원과 재학생들은 훈춘현 탑자구에 옮겨가 서전서숙을 회복하고 학생을 더 모집하여 1년 간의 수업을 거쳐 3개 반 학생 74명을 졸업시키고 해산하였다고 한다. 서전서숙의 교원 박무림과 학생 김학연, 남위언 등은 명동에 돌아가 김약연선생을 도와 명동서숙 설립에 나섰다. 현재 서전서숙의 학생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것은 갑반에 윤정희, 이병징, 윤규한, 김정문, 남세극, 채우석, 이한용, 구자승, 구정서이고 을반에 김학연, 박일병, 오병묵, 이정징, 박효언, 구자익, 박세호, 남위언은 반이 알려지지 않는다.(16) 어찌하든 서전서숙은 신학문과목에 중점을 두고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면서 독립군양성소의 성격을 지닌 신형의 학교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조선족 교육사연구와 더불어 1904년에 세워졌다는 훈춘현 동광학교가 나타남에 따라 서전서숙은 첫 조선족근대학교의 월계관을 고스란히 내놓아야 했지만 조선족사립 학교교육 운동과 항일민족교육의 서막을 본격적으로 열어놓은 그 의의는 더욱 크다. 서전서숙은 기독교와 항일운동의 신성한 결합물이었다.
115    [론문](17)-백두산천지가의 종덕사 유래문제 댓글:  조회:4867  추천:79  2006-12-29
백두산천지가의 종덕사 유래문제 1. 서론 백두산천지가에는 일찍 반일기운이 짙게 서린 사찰———종덕사가 있었다. 이는 지울수 없는 역사사실로서 종덕사는 바로 천지물이 흘러나오는 천지 동북쪽 4~50메터 절벽우 평평한 바위에 자리잡고있었다. 지금은 쓸쓸한 옛터가 외로이 남았다지만 한때는 종소리 은은하고 반일의 목소리 높은 유명짜한 절당이였다. 헌데 문제로 나서는것은 백두산천지가의 이 종덕사를 어떤 사람들이, 어떤 뜻에서 세웠는가 하는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누구도 이 유래문제를 풀이하지 못한것 같다. 누가, 언제 세웠는가 하는 시비도 숱한 문제투성이를 안고있다. 이에 필자는 본문에서 지난 90년대초이래 새로 발견한 선색과 해당자료에 따라 종덕사의 유래문제를 전문 서술해보려 한다. 종덕사의 유래문제를 역사의 원 모습대로 밝히는것은 당년 연변지구의 반일종교활동과 장백산의 인문역사를 옳히 리해하는데 크게 유조할것이다. 이는 또 장백산관광의 중요한 인문관광자원복구가 아닐수 없다.1. 최시현이 1928년에 세웠다는 문제 백두산의 종덕사연구에 실머리를 던져준것은 1985년 2월에 내부자료로 출판된 《안도현문물지》(한어문)로 알려진다. 이 문물지의 주요편찬인들은 연변박물관의 박룡연, 김철수 등이다. 그들은 문물지의 제3장 근현대유적유물 제1절에서 《백두산팔괘묘》를 취급하면서 《백두산천지》라는 책의 기재에 의하면 팔괘묘로 불리운 종덕사의 건축년대는 1929년이고 주요건축자는 조주귀이나 1931년이라는 설도 있다고 하였다. 《안도현문물지》에서 원 장백산보호국 국장 리주철의 1964년 조사기록을 인용한데 의하면 종덕사유적지에서 나진 두개의 목비중 오른쪽 비문에 《최씨시현공덕무진 4월 5일 립비 (崔氏时玄功德戊辰四月五日立碑)》라고 씌여있더라고 하였다. 무진년은 1928년을 가리킨다. 이에 《문물지》는 《비석을 세운 시간으로 보아 이 절은 제일 늦어 1928년에 세워졌고 절을 세운 사람은 응당 최시현이여야 할것이다.(从立碑的时间看,此庙最晚建于1928年,建庙人应是崔时玄)》 고 밝히였다. 분명히 지적할것은 건축시간이 《제일 늦어 1928년》이고 《절을 세운 사람은 응당 최시현이여야 할것》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1928년에 최시현이 세웠다는 긍정적인 지적이 아니라 제시일따름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는데서 긍정적으로 지적할수도 없는 실정이였다. 그뒤 1988년 9월에 출판된 《연변문물략편》(한어문,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에서도 《안도현문물지》대로 백두산종덕사를 서술하였다. 편찬진이 연변박물관 연구일군들이니 그럴만도 하였다. 문제는 그후의 집필자에 따라 시끄러움을 보이고있는것이라 하겠다. ◎ 《관동 제1산 장백산》(한어문)①에서: 이 책은 종덕사의 건축시간문제에서 무척 서두름을 보이였다. 책에서는 아예 《해당 자료기재에 의하면 절을 1928년에 세웠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였다. 《제일 늦어》를 빼버린 무단지적이 아닐수 없다. ◎ 《연변관광》(한어문)②에서: 《연변관광》은 《안도현문물지》를 답습하고있으면서도 자료출처를 밝히지 않은 흠집을 드러내고있다. 또 건축시간에 한해서 《제일 늦어》를 그대로 서술하였으나 건축자를 최시현이라고 준확히 찍은 페단도 남기였다. 《연변관광》은 《절을 세운 사람은 응당 최시현이여야 할것이다.》는 대목을 아예 최시현이라고 긍정해버렸다. ◎ 《안도관광대관》(한어문)③에서: 《안도관광대관》은 《안도현문물지》의 서술이 시끄러운 모양이였다. 그래서 종덕사의 수건시간을 두루뭉실히 《감정과 고증을 거쳐 절을 세운 시간을 민국초년으로 인정》한다고 서술하였다. 중화민국원년이 1912년이니 20세기 10년대란 말이 되겠다. 언제 세운것을 딱히 모르면서 민국 초년이라고 했으니 모호한 지적이기만 하다. ◎ 《연변관광자원과 리용》(조선문)④에서: 이 책에서는 상기 책들과 다른 서술을 보이였다. 다르다는 서술법이 바로 《〈안도현문물지〉에서 고증한데 의하면 이 법당은 1928년 (어떤 자료에는 1929년, 1931년으로 되였음)에 최시현이 세웠다고》 밝힌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상기에서도 알려진바와 같이 《안도현문물지》에서는 1928년이라고 고증하지 않았다. 그것도 《안도현문물지》의 고증이 아니고 원 장백산보호국 국장 리주철의 1964년의 조사기록에 의한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상기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관광서로 된 여러 책들에서는 종덕사를 《최시현》이 《1928년에 세웠다》는데서 혼란을 보이였다. 말하고픈것은 종덕사를 세운 시간이 제일 늦어 1928년도 아니고 더 이르다는 점(아래에서 따로 서술함), 종덕사를 세운 사람이 최시현이라고 100%로 긍정할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 종덕사란 이 사찰을 언제 세웠고 세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가, 이는 하나의 수수께끼여서 애써 풀어보아야 했다.2. 현지답사에서의 최석도로인의 구술문제 역사문화가 깃들지 않은 관광을 논할수 없듯이 관광은 역사를 떠날수 없기에 량자는 쌍둥이라고 해야겠다. 이에 따라 연변의 인문관광자원으로 되는 백두산종덕사는 필자의 관심사로 되었다. 필자일행은 항일로간부 려영준로인을 모시고 안도현과 돈화시, 무송현 등 항일무장전적지를 답사하던차에 1991년 11월 15일에 연변 최후의 항일근거지인 내두산을 거치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내두산 본부락에서 최용철(당시 65살), 최석도(72살), 김남식(60살, 내두산로인회 회장) 세 로인을 모시고 내두산의 개척사를 취재하던중 필자는 그해 72살에 난 최석도로인한테서 우연히 백두산종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최석도로인의 구술에 의하면 광복직전에 일본놈들이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의 식물, 동물, 천지 등에 대해 전문조사를 하였는데 그때 내두산에 살고있던 최석도 등 당지사람들이 짐군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조사대의 일본인들이 한 50명, 경비대가 한 10명, 짐군이 약 30명이였다고 한다. 짐군들은 쌀, 생활용품 등을 지고 두축씩 오가면서 도보로 3일만에 대택인 백두산정에 올랐는데 일본놈들이 천지길이를 재이며 서두르는 기간 짐군들은 내처 3일을 놀게 되었다. 누군가 천지가에 세워진 종덕사를 구경하자 하여 가보니 종덕사는 팔각형모양으로 지어졌는데 팔간집 복판에 부처가 약 세개 있더란다. 방석돌 기윽자돌도 보이고 종도 있고 팔각형모양의 집옆에 또 온돌사택까지 있었는데 일본놈들이 투항하면서 갈 때 종덕사를 헐어대면서 야단이였다고 한다. 후에 다시 가보니 종을 쪼개서 화로를 만들었고 나무판에 꽉 차게 새긴 글과 바위돌에 새긴 숱한 글들이 보이였다. 그날 저녁 필자는 최석도로인한테서 또 종덕사의 유래도 듣게 되었다. 사실 1986년 이전까지만 해도 속명 팔괘묘라고 불리운 종덕사는 그 이름이 분명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숭덕사(崇德寺)로 부르고 어떤 이들은 존덕사(尊德寺), 송덕사(宋德寺), 종덕사(宗德寺)로 부르기도 하였다. 《연변문물략편》⑤에 의하면 1986년 9월에 사찰터에서 종덕사라고 씌여진 철편 종쪼각이 발견된후부터 정식 종덕사로 부르게 되었다. 최석도로인은 천지가의 절은 본래부터 종덕사로 불리웠다면서 본세기(20세기) 20년대에 조선 북부에서 온 《덩덕궁》패들이 세웠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최석도로인의 말씀에 따르면 1910년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삼천리강산을 삼켜버린후 조선사람들의 상투머리를 《좀마개》라고 부르면서 가는곳마다에서 가위를 들고 상투를 베여버렸다. 이에 반일민족정서가 농후한 덩덕궁패들은 일본놈들의 꼴이 보기 싫다면서 반일을 결심하고 장백산심산속으로 지대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 시절에 《진대나무 우거진 곳이 피난처》란 말이 있었는데 참솔이 우거진 송풍라월이 가장 리상적인 곳이였다. 그래서 이도백하를 망라한 여덟곳의 송풍라월이 덩덕궁패들의 활동무대로 되고 내두산과 백두산의 천지가에 절당을 세우기로 하였다. 헌데 천지가와 대택(꼭대기)일대에는 나무가 없어 15리 떨어진 곳에 가서 나무를 베여와야 했다. 그때 지금의 조선 삼지연일대와 중국측 내두산의 조선이주민들이 적잖게 나섰는데 그들은 지혜를 모아 15리를 오르내리면서 잣나무—홍송을 운반했다. 절당 짓기는 30명이 도맡았다. 천지가에 절을 짓게 된데는 조선사람들을 살려주고 일본놈들을 망하게 하여달라고 천지신령님께 기도하기 위한것이였다고 최로인은 강조하였다. 믿음이 가는 구술이고 옆의 로인들도 이에 수긍하였다. 그후 여러 모로 되는 자료연구와 《안도현문물지》해당 자료에 따라 필자는 1992년 9월 12일부 《연변일보》제2면에 《천지가의 종덕사》라는 한편의 글을 실어 최석도로인에 대한 취재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조선 북부에서 온 《덩덕궁》패들이 백두산종덕사를 일떠세웠다고 처음으로 명확히 밝히였다. 그러나 해당 부문과 해당 인사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편이 옳을것이다. 그후의 관광서들은 어느 하나도 이를 서술하지 못하였다. 하긴 필자는 《덩덕궁》패들이 누구며 무얼하는건지 알지 못하였다. 안다면 일본놈들을 더없이 증오하며 반대하는 반일패들이라는 점, 종덕사를 지은 시간도 지난세기 10년대가 아닌20년대라는것뿐이였다. 또 《덩덕궁》패들 이야기는 문헌자료를 찾지 못한 실정에서 최석도로인한테서만 좀 들은터여서 더 이상 파고들수가 없었다.4. 김일성장군 회고록에서의 내두산과 덩덕궁패들 김일성장군의 회고록은 도합 8권이 출판되였는데 그중 《세기와 더불어》(1)은 1992년 4월에 출판된 회고록이다. 회고록은 《우리 가정》부터 시작하여 1912년 4월 15일 태여나서부터 길림시절의 1930년 5월 길림감옥출옥까지 다루고있다. 1927년초부터 시작된 장군의 길림육문중학교시절—길림시절은 선진사상의 탐구로 불탄 청년학생운동시절이였다. 그 시절인 1927년 겨울방학은 연예선전대의 활동으로 무송 등지로 순회공연을 하던 시기였는데 1928년 음력설후 그 시절의 김성주는 일부 청년학생운동골간들과 함께 장백산밀림속에 자리잡은 안도현 내두산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역사기재에 의하면 내두산은 안도현에서의 조선이주민들의 첫 개척마을이다. ⑥ 다시말하면 조선이주민들이 안도현에 들어선것은 내두산이 처음이라는것이다. 이런 내두산마을은 한때 독립군의 홍범도와 최명록 등이 활동하던 고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조선이주민들만 모여사는 내두산에는 주로 최씨, 김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았는데 주변 100여리안팎에 인가가 없다보니 이곳 사람들은 바깥세상과 등진 상태에서 서로 삼각혼사를 맺기가 일쑤였다. 하다보니 온 마을이 말그대로 친척관계로 얽히다싶이 하였다. 특이한것은 내두산사람 거의가 천불교를 믿은것이였다. 아직 필자는 천불교의 해당자료를 접하지 못하였지만 《회고록》은 천불교신자들이 《하늘에서 99명의 선녀가 내려와 백두산천지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갔다는 전설에 기초하여》 백두산천지가에 《〈덩덕궁〉이라는 99간짜리 절간을 지어 빌고 일년에 두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리였다.》⑦고 밝히였다. 내두산의 최석도로인의 구술과 어울리였다. 천불교신자들은 내두산마을에도 《〈천불사〉라는 절간을 지어놓고 열흘이나 한주일에 한번 정도씩 가서 기도를 드》⑧린 모양이다. 마침 김성주일행이 내두산에 이른 날은 천불교신자들 기도날이여서 절간근처에 가보니 옛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올리고 울긋불긋 옷차림에 꽹과리와 제금을 치고 북과 목탁을 두드리는 덩덕궁소리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고 한다. 덩덕궁이란 조직이름은 이렇게 생겨났는데 그들은 내두산과 백두산천지의 절간이름을 조선말로 《덩덕궁》이라고 지어 부른 상태이다. 필자는 《회고록》(1)를 보고서야 덩덕궁의 유래를 비로소 처음 알게 되었다. 김일성장군은 《회고록》(1)에서 내두산에 자리잡은 천불교 교주 장두범을 만난 이야기도 언급하였다. 《장두범은 한때 독립군에서 싸우던 사람이였는데 독립군이 맥을 못추게 되자 총을 내던지고 내도산에 들어와 왜놈들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는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천기에 빌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하는 천불교를 만들었다는것이였다.》 이는 천불교의 교주가 원 독립군이였던 장두범이고 장두범이 내두산에서 천불교를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장두범이 어떤 사람인가는 아직 모르지만 천불교가 애국, 애민족적인 반일종교인것만은 틀림이 없다.《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천불교》란 언급은 최석도로인의 구술이 실제사실임을 립증하여주고있다. 천지가에 세운 종덕사의 건축년대를 몇년도라고 딱히 찍을수는 없지만 당년의 김성주일행이 1928년초에 내두산에 갔을 때 천불교신자들이 이미 일년에 두번씩 백두산절간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는것을 보아 1927년이전임을 시사해주고있다. 적절히 말하면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후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밀산현쪽으로 전이하였다가 로씨야로 넘어간 이후인것 같다. 천불교교주 장두범이 독립군에서 싸우다가 《독립군이 맥을 못추게 되자 총을 내던지고 내도산(조선서는 내도산으로 부름— 필자 주)에 들어》갔다는 점이 이를 잘 알려준다. 5.종덕사 유래에 관한 기타 자료 종덕사유래를 두고 이런 자료도 보이고있다. 《연변관광자원과 리용》에 의하면 1943년 8월, 당시 용정중학 지리교원이고 후날 연변대학 교장이였던 박규찬은 일본인들이 조직한 대형탐사대에 섞이여 백두산으로 갔을 때 도중의 노랑포에서 동행한 《장수같은 로인님》한테서 《젊은 일행과 함께 3년이란 시간을 리용하여 사람이 살수 있는 자그마한 온돌방이 달린 종덕사를 짓게 되였는데 락성식을 한날 저녁 그만 화재가 나서 모두 타버렸고 다시 1년이란 시간을 들여 지금의 목재구조로 된 팔괘묘를 지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진실여부는 아직 다른 자료로 증실할수는 없지만 내두산의 최석도로인의 이야기—《팔각형모양의 집옆에 또 온돌사택까지 있었》다는 역사사실과 맞아떨어진다. 다만 《장수같은 로인님》이 누구인지를 확실이 모르는 점이다. 이 로인이 천불교교주 장두범이 아니가는 아직 확정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문 (2)에서 언급한 최시현은 누구일가, 역시 수수께끼가 아닐수 없다. 원 장백산보호국 국장 리주철의 기록에는, 목비의 글로 보아 최시현이 무진년 4월 5일, 즉 1928년에 비를 세운것으로 나타나는데 필자가 인정컨대 이는 목비를 세운 년월일을 가리키지 종덕사를 세운 시간이 아니라는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깊은 주의를 돌려야 할 부분이 있다. 《안도현문물지》에서 《백두산천지》책의 기재를 인용한데 의하면 주요건축자가 조주귀(曹周奎)라는 지적이 나온다. 조주귀가 누구이고 종덕사 주요건축자가 옳은지는 알수 없으나 련계시켜 보아야 할 발견이 보인다. 지난 2005년 7월 28일, 필자는 백두산에 올라 처음으로 종덕사옛터를 답사했는데 옛터주추돌 측면에는 한자로 《허×귀》(许×魁)라는 인명이 새겨져 있었다. 가운데 글자는 번자체여서 일시 알아볼수 없었는데 필자는 주추돌에 이름을 새긴것으로 보아 이 사람이 종덕사 주요건축자가 아닌가싶어진다. 허×귀를 조주귀로 잘못 전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다.a) 종덕사 페사와 최후 파괴문제 우에서 종덕사의 유래를 두고 이모저모로 탐구하여보았지만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던차 필자는 이 겨울을 잡아 연변도서관의 김수영씨한테서 그가 한국서 갇고온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이 귀중한 자료는 2001년 10월에 창간된 한국의 산악잡지 《마운틴》의 2002년 10월호인데 여기에는 천지가의 사찰 종덕사와 완정한 종덕사사진이 게재되어있다. 잡지에 의하면 글과 사진의 제공자는 일찍 1943년에 서울 양정중학교 산악부의 사생 15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오른 1940년대 백령회(한국 산악회 전신)멤버——고희성선생인데 그는 60년이나 소중히 소장했던 1943년에 찍은 종덕사사진을 제공했을뿐만아니라 1944년에 쓴 글에서 종덕사는 《한때 태극교도들이 이곳에 와서 사원을 창건하고 수도하던 곳》⑨으로서 《마적때문에 페사》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있다. 그 출처는 1930년 8월에 백두산에 오른 안재홍, 황욱 등의 《백두산 등척기》에 두고있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이 자료는 종덕사의 연구에서 자못 귀중한 자료라고 보아진다. 태극교도나 팔괘묘는 종덕사를 세운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조직체인가를 알리고있다. 이 조직체의 주인공들은 다름아닌 덩덕궁패, 천불교 교인들이라고 할 때 20년대 한때 흥성의 일로를 걷던 종덕사가 마적때문에 페사되었다는것은 일리가 없지 않다. 열렬한 독립운동가, 교육실천가, 사상가, 철학가이고 시인이기도 한 김중건, 즉 소래의 경우도 그러했다. 1889년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이고 원종(元宗)이라는 새주의의 창시자인 김중건은 1914년 봄에 두만강을 건너섰고 훈춘, 안도, 장백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후 장백현 덕수를 떠나 안도로 오다가 중무리란 곳에서 마적들한테 붙들려 한달만에 겨우 살아났다. 김중건의 생애에서 여러가지 액운이 뒤따랐는데 그중 한가지 액운이 바로 마적의 행패였다. 일찍 안도일대에서 활동했던 작가 최서해의 경우도 마적을 떠올리고있다. 당년의 안도현, 장백현에는 마적패들의 활동이 극심했는데 백두산천지가의 종덕사도 《마적때문에 페사》했다는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고희성의 글을 보면 1930년 8월에 안재홍, 황욱 등 문인들이 백두산에 올랐는데 3중 8각전인 종덕사는 이미 《사람이 없는 빈 절》이였다. 1943년 7월말에 고희성 등 16명 등산대가 백두산에 올랐을 때에도 종덕사는 빈 절이였다고 한다. 1943년 8월, 후날 연변대학 총장이였던 박규찬이 일본인들이 조직한 대형탐사대에 섞이여 백두산에 갔을 때도 그러하고 안도현 내두산의 최석도로인이 광복직전 종덕사를 찾아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할진대 백두산 종덕사의 페사시간은 청년 김성주일행이 내두산에 갔던 1928년 음력설후부터 1930년 8월까지 사이로 찍을수 있다. 그후 때때로 사람들이 종덕사를 거치기도 했지만 종덕사는 다시 춰설수가 없었다. 계속하여 종덕사건물이 역사속으로 사라진것은 지난 70년대 중반이후의 일이다. 1974년인가 1975년에 그 시절 연변일보사 리론조의 김희관, 김종국, 장정일, 그리고 김일 선생이 길림일보의 한족기자들과 함께 백두산관광길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 팔괘묘로도 불리운 종덕사의 주체건물이 그대로 서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보면 8각기둥을 이루며 잔재했던 종덕사건물이 최후로 사라진것은 지난70년대 중반이후의 일이라고 찍어말할수 있다.7. 종론 본문에서 필자는 백두산 종덕사의 유래문제를 두고 최시현이 1928년에 세웠다는 문제, 현지답사에서의 최석도로인의 구술문제, 김일성장군 회고록에서의 내두산과 덩덕궁패들, 종덕사유래에 관한 여러 자료, 종덕사페사에 관한 한국 고희성선생의 글 등을 두고 진지하게 탐구하여보았다. 지금까지의 연구자료로 보아 종덕사를 세운 시간은 지난세기 20년대초반과 중반으로 좁혀지고 그 주인공들은 조선 북부에서 온 덩덕궁패들—천불교교인들이고 그 교주가 장두범이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장두범이란 부름이 진실한 이름인지, 별명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있다. 이쯤하면 종덕사연구가 끝을 보는것일가, 그런것도 아니다. 아직도 덩덕궁패—천불교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접하지 못하여 종덕사를 세운 정확한 시간, 그 구성멤버, 구체활동, 페사에 대해 그대로 알수가 없는것이 유감이다. 안다면 종덕사 륜곽자료여서 계속되는 깊은 연구가 기대되며 바위돌우에 새긴 글자발굴과 일본측 해당자료, 한국의 부분적자료의 발굴이 절실한 과제로 남아있다고 지적하고싶다. 여하튼 역사의 베일에 가려졌던 백두산종덕사의 유래가 서서히 밝혀지는 실정이다. 종덕사를 쓴 필자의 글이 올해 흑룡강신문 8월 20일부 일간지 7면과 주간지 9월 18일—24일부 23면에 크게 실리였고 여기 문화산맥사이트와 중국조선족연우미디어에 떴고 한국의 인터넷들에 대폭 뜨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백두산종덕사의 유래가 어느정도 밝혀짐으로 하여 연변지구의 조선족반일종교활동에는 장백산일대의 천불교의 힘도 섞이였다는것이 알려지게 되였고 장백산이란 이 관광자원에는 천지가의 종덕사란 이 중요한 인문관광자원이 망라되기에 장백산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개발해야 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한때 조선족반일지사들이 운집했던 백두산천지가의 종덕사, 그 옛터는 오늘도 계속되는 연구와 본격적인 개발을 기다리는 한편 관광객들을 반기며 종소리 은은했던 그제날을 떠올린다. 【주해】① 리립지, 학복강, 요문귀, 리방정 저. 지진출판사, 1993년9월. 제57페지② 우려방,해수진.후위 저 연변대학출판사, 1997년12월. 제61페지③ 이빈 주필. 연변대학출판사, 2002년8월. 제61페지④ 김희정, 온렴령, 류충걸 주필. 연변대학출판사, 2002년9월. 제55페지⑤ 연변문물략편(한어문). 연변박물관편찬조. 연변인민출판사, 1988년 9월⑥ 안도현개황(1935년)⑦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1)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년4월. 제265페지⑧ 동상서⑨ 안도현문물지. 1985년 2월⑩ 마운틴(한국산악잡지). 2002년 10월호. 70페지⑪ 비암산에서 열린 《우리 주 문화와 관광 세미나》때 김희관, 김일 선생을 취재. 2005년 8월 19일 (2005년 11월 17일)
114    남방기행(8)--천대산 국청사에도 지장전이 있어 댓글:  조회:4708  추천:108  2006-12-28
남방기행(8)천대산 국청사에도 지장전이 있어 리 함 절강 천대산 국청사는 1400여년의 력사 가진 중국 불교성지의 하나로 “불국선경”이라고까지 불리우고 있다. 이런곳에 1085년 고려 명승 의천이 발자취를 남기게 되고 그 발자취 따라 일전에 천대산에 다녀왔지만 지장전이 있다는것은 금시 초문이다. 얼마후인 2006년 11월 18일 나는 다시 천대산행ㅡ지장보살 찾아가는 길에 올랐다. 부랴부랴 아침을 에때우고 소흥시 뻐스중심부에 가서 뻐스에 오르니 발차시간은 오전 8시 50분이다. 어제 해종일 질금질금 비가 내리고 간밤에도 비가 내리더니 한시간반이면 달리던 300리 길을 두시간만에야 축냈다. 그래도 시간만은 넉넉하여 천대뻐스부에서 택시타고 5킬로메터를 달리니 택시가 멈춘곳이 바로 북쪽으로 천대산 국청사 풍간교다리가이다. 나의 흥미를 무척 끌어당긴것은 보기에 수수해보이는 풍간교 돌다리라 하겠다. 보기에는 수수해도 골안물을 건너 국청사로 이어지는 주통도(主通道)요, 송나라 때 산물이라 홀홀히 스쳐지날 다리가 아니였다. 하나 얼마전 천대산 국청사를 처음 찾을 때는 풍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돌아와서 사가지고 온 천대산 국청사 안내자료를 보고서야 나는 이 돌다리는 송나라 때에 만들어지고 청나라 건륭년간인 1765년에 수건되였다는 것을 알았다. 풍간교라는 이름도 당나라 때 국청사 고승 풍간승려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나의 무지와 소홀을 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 곧추 풍간교를 찾았고 돌다리 이모저모를 디지털사진기에 담아넣었다. 보기에는 길이가 14.4메터에 너비가 3.4메터밖에 안되지만 수백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력사의 창상에서도 파괴됨이 없이 그 모습을 이어왔다. 그 모습을 이어왔다는 것은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의 천대산 국청사는 불국선경 천대산의 중심사원으로서 사원의 부지면적은 73만 평방메터, 전당 등 건물수가 800여칸, 건축면적이 2.4만 평방메터에 이른다. 산문지기와 물으니 지장전은 대웅보전 왼켠이라고 한다. 산문은 국청사로 들어가는 정문인데 정문을 통과하고 북쪽으로 꺾어 국청사 산문전(山门殿)으로 불리우는 첫 불전(佛殿)ㅡ미륵전을 지나니 두번째 불전ㅡ우화전이 맞아준다. 우화전은 기실 불교의 4대천왕을 기리는 천왕전을 가리킨다. 천왕전이 우화전으로 불리기까지는 수나라 년간에 천대산에 온역이 돌발한데 기인되는데 이곳 천대종 5세로 불리우는 장안대사가 온역의 만연에서 평민백성들을 구출하고저 천왕전에 단을 설치하고 련속 7일간 경을 외우며 기도했다고 한다. 이에 하늘이 감동되여 법우(法雨)를 내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모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과 같더라나. 그래서 천왕전은 우화전으로 불리우게 되였단다. 아는것만큼 보인다더니 우화전도 무심히 지나칠 불전이 아님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우화전을 지나면 불교의 조상 석가모니를 기리는 대웅보전이다. 우화전과 대웅보전 사이에는 수백년이나 묵은 고목 네그루가 하늘을 떠인 널직한 정원인데 이 정원의 왼쪽가 건물에 그쪽 어디론가 통하는 평범한 문 하나가 열려있다. 문가에는 국청사 불교연구소 나무패가 내리걸리여 기억하기 좋았다. 헌데 서쪽행 랑하에 들어서니 어둑스레하기만 한데 묘법당을 지나고 옥불각에 들어서도 지장전이 나타날 조짐이 알리지 않았다. 옥불각은 그 남쪽가의 라한당과 더불어 남쪽으로 자리하고있었다. 옥불각을 돌고 라한당을 돌아도 지장전은 묘연하기만 하다. 별수없이 라한당 젊은 중과 물으니 지장보살님을 찾자면 저기 동쪽의 종루(钟楼)로 가야한단다. (이거, 오리무중이다. 국청사의 중들 말이 엇갈리니 지장전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는 맥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뭔가 300리 길을 다시 달려올 때의 상상보다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지장전이 있다면 옥불각이나 라한당 같은 그럴법한 건축물이겠는데 어이하여 눈에는 띄이지도 않느냐. 종루는 서쪽가의 고루(鼓楼)와 더불어 동서로 앉은 국청사의 주요건축물의 구성부분이다. 이런 종루가 국청사의 산문전인 미륵전 북문동쪽가에 일어섰는데 2층루각으로 지어진 종루에는 2층루각안에 청나라 가경년간에 주조되고 그 울리는 소리가 10리에 들린다는 청동종이 달려있을뿐 외면상 무엇을 보아낼수 없었다. 종루동쪽가의 정원들과 건축물들을 샅샅이 뒤져도 지장전은 숨박꼭질이라도 하려는듯 나타나질 않았다. 고마운것은 길가던 한 나젊은 중이였다. 그는 지장전은 개방하지 않은 전이지만 금방 가보았다는 옥불각 서쪽가 골목을 빠지면 찾아볼수 있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옥불각 골목가에 천대현 국청문물보호소 간판이 걸려있다고 동을 달았다. 나젊은 중 덕분에 옥불각 서쪽가 좁은 골목을 지나 또 다른 대문가를 넘어서니 화분이나 엉성같은 풀들로 어수선한 정원이다. 정원가에는 “ㄴ”자형 2층건물인데 사람들이 살고있는 모양으로 살림짐맛을 다분히 풍긴다. 지장전은 바로 북쪽가에 앉은 길다란 궁전같은 기와집인데 기와집 정면에 걸린 “지장전” 간판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과연 개방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옳았다. 기와집의 북쪽면 정면 모두가 유리창문으로 되여있어 들여다보니 자그마한 지장보살 불상이 정면 중앙대에 모셔져 있고 그 앞은 기도드리는 상이 놓여져있었다. 인적이 깃들지 않아 먼지와 복새판인데 불상 좌우켠은 사람 이름을 적은듯한 패쪽들이 가득 달려있어 뭔가 다른 세계같은 감이 들었다. 마침 지장전 정면 한켠에서 중차림의 한 중년이 걸상에 앉아 불경인가 보고있었다. 지장전이 왜 이런 모습인가고 물으니 워낙 외진 곳이고 지옥세계를 관리하는 보살이 아닌가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좌우켠의 패쪽은 죽은 사람들의 명부가 적힌 위패라고 알려준다. (아, 그렇구나!) 순간 뇌리에는 소흥 로봉선사의 남쪽가에 궁궐같이 일어선 지장전이 떠올랐다. (그 지장전 전당도 소흥의 릉묘구역내에 세워져 죽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보살로 모셔지고 있었지!) 뭔가 알리는것 같았다. 소흥의 릉묘구내 지상전을 찾았을 때 릉묘의 한 중년관리일군은 관음보살은 지상세계를 관리하고 지장보살은 지옥세계를 관리한다고 말해준바 있었다. 고로 소흥에서는 릉묘구내에 뜨르르한 지장전을 일떠세우고 전내에 지장보살 불상을 정성스레 모시였다면 천대산 국청사에서도 불교신도들이나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외진곳에 지장전을 세우고 죽은 사람 위패를 관리하게 하고 있는것이구나. 허나, 허나 나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만 났다. 항주 령은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처럼 그 어떤 기대감과 희한한 상상을 안고 소흥에서 뻐스타고 두시간이나 달려왔건만 현실세계에 펼쳐지는 천대산 국청사에 모셔진 지장보살 불상은 너무도 초라한 모습의 불상이기만 했다. 하긴 위안도 없지 않았다. 초라한 모습의 지장보살 불상이나마 국청사의 한부분ㅡ지장전으로 남아있다는 점, 종루아래는 지장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라는것, 천대산 국청사 안내책에 지장전이 전문 제목으로 소개되고 남방의 불교 신앙자들중 지장신앙자가 특별히 많은데 그 신앙자가 농촌들에 보편적이라는것ㅡ위안을 느껴도 괜찮을 성과물들이였다. 오늘도 나는 신라인 지장보살 찾아 가고간다. 그길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위안도 있고 리해도 있고 있으리라!
113    [론문](16)--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과 동북항일무장투쟁 댓글:  조회:5101  추천:94  2006-12-27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과 동북항일무장투쟁 1.서론 지난세기 1931년 9.18사변전후 동북의 동만, 남만, 북만 등지에는 보편적으로 조선족 중공당원들을 선두로 한 당조직이 뿌리 박히고 우리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 조직들이 활동하고있었다. 이런 유격대를 9.18사변전에는 흔히 《반일》 또는 《홍색》,《로농홍군》 등으로 불렀는데 그 조직자, 지도자들이 상당수가 일찍 광주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 등을 졸업하고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족 열혈청년들이다. 이는 드팀없는 역사적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이에 중시를 돌리고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이가 거의 없어 하나의 역사적공백으로 남아있었다. 황포군관학교는 일찍 중국혁명을 위하여 많고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피끓는 조선족열혈청년들로서 중국의 절반 땅을 휩쓸었던 북벌전쟁 그리고 남창봉기, 광주봉기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살아남은 일부 조선족열혈청년들은 천신만고끝에 동북에 돌아왔다. 그들은 황포군관학교의 혁명정신과 광동 등지의 혁명경험을 동북에 갖고와 연변과 남북만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면서 당의 기층조직과 무장대오를 건립했으며 당조직과 항일무장대오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다. 일제놈들을 몰아내는 가렬처절한 싸움터에서 그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 불멸의 기여를 하였고 영광스런 혁명렬사로 되었다. 황포계출신의 그네들은 중국조선족의 자랑이고 중화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이에 비추어 본문에서는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들과 동북항일무장투쟁이란 주제로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황포계출신들의 역사적역할과 불멸의 기여를 서술하면서 1931년 9.18사변전후시기를 배경으로 동북의 여러 당조직과 유격대조직, 그 활동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들의 헌신적투쟁을 전면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 2.황포군관학교와 조선족청년들 다 알다싶이 1924년과 1925년은 중국혁명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1924년 1월, 중국혁명의 선행자 손중산선생은 중국공산당의 방조와 협력하에 광주에서 공산당인이 참가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열고 련소, 련공, 부조농공의 3대정책을 확정하였으며 국민당을 개조하고 제1차국공합작을 실현하였다. 이해 5월, 군사정치간부양성을 취지로 한 황포륙군군관학교가 건립되었다.① 이듬해 1925년 7월 1일에는 광주에서 국민정부가 건립되고 산하의 부대를 국민혁명군으로 편성하였다. 광동의 국민정부는 중국공산당이 배합하에 국민정부를 엄중히 위협하는 진형명 등 각파 군벌을 소멸하고 광동 전 성을 통일하였다. 1925년 3월, 손중산선생이 북평에서 불행히 서거하였지만 광주는 의연히 혁명의 대본영이였으며 국제공산당의 지원을 받았다. 광동혁명정세의 신속한 발전과 황포군관학교의 영향은 대단했다. 혁명의 봉화를 본 조선족 선진분자들은 《국공합작》, 《타도군벌》, 《타도제국주의》의 불타는 념원을 안고 조선, 만주, 소련 극동 등지로부터 광주에 모여들었다. 그 진두에는 리용 등이 서있었다. 리용은 조선 함경북도 북청군사람으로서 중국 운남강무학교 출신이다. 그는 1920년 6월, 왕청 봉오동전투때 벌써 독립군 작전참모로 있었으며 1922년 원동 블라디보스톡 쟁탈전때 조선인 홍군총지휘로 명성을 떨치였다.② 그는 중국인민의 북벌을 지원할데 관한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들고 1925년에 중국에 건너와 조선족청년들을 동원하여 상해로 보냈다. 상해 프랑스조계지안의 복신로 182번지 2층에는 조선공산당지하지부가 있었다.③ 이 지부의 서기는 려운형인데 후에 제3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좇아 1927년 9월, 이 지부의 당원전체가 개별수속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강소성위 홍남구한인지부를 구성하였다. ④ 조선족청년들은 흔히 이 지부를 거쳐 광주로 향발하여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거나 국민혁명군에 가입하였다. 당년 많은 조선족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거나 중산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소련공청단원이며 블라디보스톡 쌍성자 출생인 최정무는 1926년에 원동의 조선인공산주의자 박우의 소개로 다른 소련공청단원 5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갔고 동북 경내의 《적기단》 등 여러 반일단체와 조공당 여러 파들은 자기 산하의 조선족청년들을 동원하여 광주로 보냈다.⑤ 동만만 보더라도 화룡현 개산툰 회경의 장자관, 자동의 박의정, 한영섭, 김영식, 광소의 주봉석⑥과 훈춘현 대황구 북골의 엄상호, 리태훈, 리상준, 강석필⑦ 등도 조직의 파견을 받고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후날의 중공화룡현위 제4임서기 김철산, 중공연길구위서기 조기석, 중공훈춘현위 제1임 군사부장 신춘, 중공화룡현위 제1임군사부장 방상범 등도 그 시기에 광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들어갔다. 1925년 가을, 조선족 김산(후날 중공북평시위 조직부장, 렬사)이 광주에 갔을 때 조선인이 60여명뿐이였는데 1927년에 이르러서는 800여명으로 늘어났다.⑧ 김산이 소개한데 의하면 일본에서 간 조선인이 약 20명, 소련 원동에서 간 조선인이 100여명, 조선서 간 조선인이 100여명, 모스크바에서 간 조선인이 30명, 만주에서 간 조선인이 약 400명이였는데 거개가 공산주의사상을 따랐다고 한다.⑨ 대혁명시기 광주의 조선인들을 보면 주요하게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항공학교와 국민혁명군 각 부대에 분포되었다. 황포군관학교 본교 및 부속부대에만 해도 조선청년들이 200명을 웃돌았다.⑩ 원 호남농학원교수였던 조선인 류자명선생이 《나의 회억》에서 밝힌데 의하면 당년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중 1924년부터 1927년까지 황포군관의 역사자료를 엮은 《황포군관학교자료》동창록에 조선인이라고 밝힌것만 해도 제3기생에 4명, 제4기생에 24명, 제5기생에 6명이나 된다.⑪ 그 시기 황포군관학교는 또 조주, 남녕, 장사, 무한 등지에 허다한 학교를 증설하였는데 이런 분교들중 조선청년들은 제1차국공합작시기의 무한분교에 많이 집중되었다.⑫ 그들가운데는 포병훈련교관, 소련고문의 통역 등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교도퇀의 중대장, 대대장을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 1926년 5월 20일,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골간으로 한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이 선참으로 호남으로 진격하여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7월 9일에는 북벌선서대회가 열리고 10여만에 달하는 국민혁명군 8개 군이 서로, 중로, 동로 세개 로로 나뉘여 북벌의 원정에 올랐다. 수백명의 조선인들도 대부분이 제4군에 편입되고 일부가 주배덕의 제3군, 정잠의 제6군, 당생지의 제8군 등에 편입되어 광주를 떠나 북상하였다.⑬ 중국공산당의 영향과 추동,인민군중의 지지밑에서 북벌군은 반년 남짓한 기간에 오패부, 손전방 등의 수십만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중국의 절반 땅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27년 4월과 7월, 장개석이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키고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가 7월 15일 무한에서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한데서 국공합작이 파렬되고 기세드높던 대혁명도 실패로 돌아가고말았다. 허나 투쟁의 시련을 겪은 거의 모든 조선인들은 확고부동하게 중국공산당켠에 섰다. 그중 수십명이 남창봉기에 참가하고 대부분이 남하하여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는데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혁명자들만 해도 200여명에 달하였다.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조선인혁명자들중 오성륜(전광), 진공목(리병희), 박봉, 최석천(최용건), 마천목, 신춘, 방상범, 김철산, 조기석, 리창혁, 장자관, 박의정, 김영식, 반경유, 리계동 등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수로(水路)와 륙로를 통해 남만과 동만, 북만으로 돌아왔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동북 당조직의 건설과 항일무장투쟁에서 크나큰 역할을 놀면서 불멸의 기여를 하게 된다. 3. 황포계 출신들과 동만항일투쟁 역사적원인으로 하여 황포군관학교출신의 중국조선족혁명자들이 얼마이고 동북, 더우기 연변에 돌아와 항일투쟁에 뛰여든 동지들이 얼마인가 하는 똑똑한 통계자료가 없다. 그러나 10여명 황포계 조선족혁명자들이 동만, 즉 연변에 돌아와 항일투쟁에 참가한 사실은 비교적 명백하다. 양림은 원명이 김훈으로서 양주평, 양녕, 필사제 등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1919년에 망명하여 조선서 길림성 통화현 하니타에 왔다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1920년 2월에는 왕청현 서대파 북로군정서 사관학교에서 군사교관을 맡았고 그해 6월과 10월에는 독립군부대를 따라 도문일대의 봉오동전투와 화룡일대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뒤 운남강무학교에 들어갔다. 1924년초 졸업할 때 강무학교에서 교관으로 남을것을 바랐으나 그는 완곡히 사절하고 결연히 광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1월,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 학생대 제4대 상위대장으로 임명되어 동정에 참가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그해 11월에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즉 엽정독립퇀) 제3대대 대대장 겸 중공당소조당을 맡았다.⑭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후 그는 당조직의 파견으로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 륙군보병학교에 가서 2년간 정치와 군사를 배운 뒤 1930년 여름에 상해에 돌아왔다. 이해 8월에 그는 중앙군위의 지시로 동북에 파견되어 중공만주성위 군위서기를 맡았다. 1930년 10월, 양림은 성위의 파견을 받고 연변에 와서 중공동만특위 군위서기책임을 맡았다. 그는 신춘 등 황포계출신의 동지들을 찾아 동만특위 군사위원회를 조직한 뒤 연변 4개 현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방상범 등 동지들을 화룡현위 군사부장 등으로 임명(1931년 봄.)하였다. 동지들의 노력으로 수십명으로 헤아리는 특위직속유격대가 조직되었다. 1931년초에 양림은 훈춘현 밀강일대에 가서 수백명 군중을 동원하여 당지의 악패지주장원을 포위하고 숱한 무기와 총을 압수하였으며 많은 량곡을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양림은 유격대건설의 여가에 친히 《동만유격대사업요강》⑮등 일련의 중요한 문건을 써내였는데 이런 문건들은 연변의 유격대건설에서 중요한 지도역할을 놀았다. 9.18사변후 그는 중공만주성위의 소환으로 계속 성위 군위서기를 맡고 남만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을 힘있게 지도하였다. 조기석은 1912년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삼촌을 따라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동성용에 이주, 연길현 현립 제2소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에 용정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에 그는 일본 도꾜에서 고학할 때 중국 북벌전쟁이 곧 개시된다는 소식에 접하고 연변에 돌아왔다. 그는 조공당 엠엘파의 파견을 받고 리창혁(후날의 중공훈춘현위 조직부장), 강현철의 동생 등과 함께 광주로 달려가 황포군관학교 교도대에서 학습하였다. 1927년초에는 강서성 구강주둔 국민당 등연달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6 북벌전쟁이 실패한후 병을 구실로 등연달부대에서 나와 용정에 돌아왔다. 1929년초에 그는 연길현 세린하공립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으면서 지하혁명투쟁에 뛰여들었다. 1930년 2월에 학생들은 조기석의 지도하에서 투도구로 달려가 반일학생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이해 5월에 그는 동만 5월 투쟁행동위원회의 파견을 받고 왕청현에 가서 5.30폭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 여름에 조기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봄이후 그는 중공연길구위 제1임서기 겸 동만특위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해 가을에 그는 연길구와 해란구의 수천명군중을 불러일으켜 추수투쟁을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또 성세호대한 춘황투쟁을 벌리고 주구청산투쟁을 지도하였다. 이 투쟁가운데서 조기석은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어 28명 동지들과 함께 연집강에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때 그는 28살이였다. 신춘은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27년 12월 11일에 그는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제2중대(중대장은 최용건.) 조선인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 연변에 돌아온후 신춘은 1930년 5월에 화룡현 약수동과 그 일대 군중들을 지도하여 반일반봉건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해 5월 27일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약수동쏘베트를 조직하고 대규모의 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약수동쏘베트는 동북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인민의 정권이였다. 1930년 7월 10일에 중공평강구위가 조직되고 신춘이 평강구유격대 대장을 맡았다. 이달말에 평강구유격대가 조직되였는데 이 유격대는 대오로 로농홍군, 연화유격대로 통했다. 8월초에 신춘은 상급의 명령을 받고 100여명 유격대를 이끌고 돈화, 액목 일대의 8.1길돈폭동을 지원하러 가다가 연길현 도목구(오늘의 안도현 석문진 경내.)에서 우세한 동북군벌의 포위에 들어 참패했다. 신춘은 전투중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도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하여 유격대를 사경에서 구해냈다. 약수동에 돌아온후 그는 다리를 치료하는 한편 불철주야로 사업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이해 9월 7일에 평강구쏘베트정부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1930년 10월에 신춘은 신생한 중공연화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달에 그는 중공훈춘현위 첫 군사부장으로 전근되였으며 무기탈취투쟁과 주구청산투쟁을 활발히 지도하였다. 1931년초에 신춘은 훈춘현 대황구에서 적들에게 불행히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갇히였다. 그는 옥중의 동지들과 함께 옥중투쟁을 드세게 벌리다가 1934년 6월에 연길일본헌병대 특무들에게 암해되었다. 희생될 때 그는 28살이였다. 장자관은 1928년 봄에 개산툰에 돌아와 자동의 정동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학교내에 보습반을 꾸리고 자동, 회경, 학성 등지의 한패의 골간청년들을 받아들이였으며 그들을 제때에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1930년 4월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6월에 개산툰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 유격대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연변의 첫 반일유격대 조직이였다. 1931년초에 장자관은 중공평강구위 제4임서기로 활동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용정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었다. 김철산은 동지들로부터 《꼬마레닌》으로 불리였다. 그는 1926년에 조공당 서상파의 파견으로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연길현 왕우구로 돌아온후에는 사립학교 교장을 맡고 혁명투쟁에 뛰여들었다. 1930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왕우구지부서기를 맡았다. 1931년 4월에는 중공의란구위 제1임서기로, 1931년초에는 중공연화현위서기, 중공화룡현위 제3임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는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면서 적들에게 파괴된 당조직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방상범은 방창범이라고도 하는데 당년 연길현 의란구 (오늘의 연길시 의란진.) 태평동사람이였다. 1926년 여름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고 1927년 12월 11일에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1928년초에 연길현 의란구로 돌아왔다. 그는 당지에서 반일계몽운동에 종사하다가 1930년 5.30폭동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의란구위 제1임군사부장을 맡았다. 1931년 봄에는 양림의 추천으로 중공화룡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제발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한때 당내 《좌》경로선의 지도로 흐지부지해졌던 유격대조직들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32년 봄이후 화룡현의 평강구, 삼도구, 달라자구, 개산툰구에 모두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대가 회복되었다. 그와 현위동지들의 노력으로 이해 가을이후 어랑촌에 화룡현의 첫 항일유격근거지가 서게 되고 화룡현유격대가 조직되었다. 1933년 음력 1월 18일, 300여명의 일제토벌대놈들이 어랑촌에 덮쳐 들었을 때 방상범은 13용사전투를 지휘하여 근거지를 지켜냈다. 이해 2월, 그는 적후투쟁에 나섰다가 적들에게 불행히 희생되었다. 진공목은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남만의 반석현 연통라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 위원으로 뛰였다. 1931년초에는 성위의 파견을 받고 안도현 대사하, 소사하 일대서 20여명의 중공당원을 발전시키고 중공안도현위를 조직, 현위서기책임을 짊어졌다. 안도현위가 파괴되자 그는 활동지대를 연길현으로 옮기였다가 중공연화현위 제5임서기로 부임되었다. 1931년 4월 8일, 진공목은 적들에게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었다. 4. 황포계 출신들과 남, 북만 항일투쟁 1927년 남창봉기와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소수의 조선족동지들이 동북의 남만과 북만으로 돌아왔다. 오성륜(전광), 진공목(리병희), 박봉, 최석천, 마천묵, 반경유, 리계동 등이 그 걸출한 대표들이다. 그들은 중공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동북 당조직의 건설과 항일유격대 건설에서 한몫을 맡아나섰다. 1925년부터 1930년초사이 동만과 남만, 북만을 포괄한 동북의 광활한 농촌들을 보면 특정된 역사적원인으로 하여 소수의 중공당원들만이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비밀활동에 종사하고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광범한 군중들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한 상태였다. 그대신 동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의 농촌들에는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이주민들이 많이 생활하고있은데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및 그 산하의 군중조직이 맹활동하고있었다. 이럴 때인 1930년 1월, 황포군관학교출신이고 중공당원이고 조공당 만주총국(엠엘파) 주요인물인 오성륜이 상해로부터 만주에 왔다. 그는 당중앙의 지시로 봉천(심양)에 자리잡은 중공만주성위와 련계한후 성위산하에 중공만주성위 소수민족위원회(일명 소수민족부)를 설치하였는데 오성륜, 진공목, 박윤서가 소수민족위원회 사업위원으로 임명되고 각기 남만, 북만, 동만의 순시원(일명 특파원)을 맡았다. 반석현은 남만혁명의 발원지이다. 1929년 당조직에서는 황포군관학교출신들인 박봉형제를 이곳에 파견하여 조선족들가운데서 중공당원을 발전시키게 하였다. 그들형제와 오성륜 등의 노력으로 1930년 6월까지 반석현에는 중공당원이 40명으로 늘어났는데 그들 모두가 조선족들이였다.○17 남만에서의 중공당원발전사업은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변시키는데 훌륭한 토대를 마련하여주었다. 1930년 3월과 4월, 원 조선공산당 엠엘파만주총국과 화요파만주총국 동만도 등은 국제공산당이 제기한 《일국일당》 원칙을 접수하고 각기 해산선언을 발표한 뒤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엠엘파계통 조공당원은 43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중공만주성위에서는 1930년 7월부터 10월까지 사이에 강삼, 료여원 등 동지들을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남만과 동만, 북만의 농촌들에 순시원으로 파견하여 당지의 조선족중공당원들을 도와 중공현위와 구위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1930년 7월과 8월기간에 강삼의 지도밑에 황포계출신 박봉을 서기로 하는 반석중심현위와 리창일을 서기로 하는 류하현위, 안일상을 서기로 하는 청원현위, 김만성을 서기로 하는 해룡 중심현위가 륙속 조직되었다. 1930년 여름 원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중대 중대장이였던 최석천(최용건)은 북만의 요하현 조선족집거구에서 당의 선전, 조직 사업을 잘하여 조선족당원을 위주로 한 중공요하현위를 건립하였다. ○18 북만에서 황포계출신들은 항일무장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조선태생이고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계동(일명 리유백)은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동북에 돌아온후 선후로 료녕의 흥경현, 흑룡강의 녕안현 동경성, 아성현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참가하고 1932년 9월에 주하중심현위 위원책임을, 1933년 10월에는 주하반일유격대 군수공급책임을, 1934년 6월에는 주하유격대로 개편된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경제부장 책임○19을 맡고 주하반일유격대와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34년 7월에 그는 특무 주광아에 의해 불행히 살해되었다. 그때 그는 38살이였다. 반경유(본명 리기동, 렬사)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으로서 북벌전쟁과 남창봉기에도 참가하고 소련에 가서도 공부한적 있는 조선족혁명가이다.○20 지난 30년대초반에 그는 선후로 중공녕안중심현위서기, 중공수녕중심현위서기, 중공길동국 조직부장 등 요직에 있으면서 1934년 5월에 동지들과 함게 녕안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21 이 유격대가 1935년 2월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최석천(당년 부른 이름은 김지강.)은 1933년 4월에 요하에서 요하농공의용대를 조직하고 대장직을 맡았다. 이 의용대가 1934년 2월에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로 개편되었다가 1936년 11월에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발전하였다. ○22그때 최석천은 군 참모장이였는데 1937년에는 군당위서기 겸 대리군장으로 부임되었다. 동북항일련군의 11개 군가운데서 기본주력은 제1군부터 제7군까지인데 북만의 제5군, 제7군은 진짜 쇠소리 쟁쟁나는 항일부대였다. 5. 결론 본문에서 필자는 동만, 즉 연변을 중심으로 남만과 북만으로 나누어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혁명자들의 동북에서의 항일활동형편을 두루 살펴보았다. 유감스러운것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상기 동지들을 제외한 기타 황포계출신들에 대해 서는 모르고있는 실정이다. 황포계 출신들이 동북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역할은 간과할수 없다. 황포군관학교출신 조선족혁명자들은 연변과 남만, 북만의 당조직건설, 유격대건설, 항일무장건설에 중대한 기여를 하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피어린 싸움에서 불가결의 역할을 함으로써 항일유격대의 토대와 연변 당조직의 토대를 굳게 다져주었다. 이는 지난세기 30년대중반이후 동북항일련군투쟁의 견실한 기초로 되였는바 동북항일투쟁에서 정초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인민들은 동북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일으킨 상기 황포계출신들의 역사적공훈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주해】① 중공당사강의(讲义)(신민주주의 혁명시기).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982년 7월 제32페지②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Ⅳ-A14③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조선문).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제69페지④ 관내지구 조선인반일운동자료 회편(한어문, 상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⑤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IV-A14⑥ 연변 주당안관자료:3060⑦ 원 연변역사연구소 자료 Ⅱ-C44⑧ 김양, 복찬웅, 김우연. 광주봉기와 조선용사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3년, 제145페지⑨ 김산. 중국혁명대오에서(한어문). 향항 남월출판사, 1977년⑩ 권립. 중국조선민족사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3년, 제145페지⑪ 황포군관학교 자료. 광동인민출판사, 1982년 2월, 제93페지⑫ 한준광. 중국조선족인물전.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제107, 17, 31페지⑬ 조선족백년사화 제2집. 료녕인민출판사, 1984년 4월, 제22페지⑭ 한준광. 중국조선족인물전.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제107, 17, 31페지⑮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조직사. 연변인민출판사, 1991년 6월, 제60페지○16 리광인방문. 유영효 취재기. 1981. 5.25○17 1987년 11월 5일부 흑룡강신문○18지부생활. 1986. 제7호, 제47페지○19 김우종, 원인산, 리영옥 번역. 불멸의 투사. 북경: 민족출판사, 1982. 제123페지 ○20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3) 제83페지○21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 1985년 4월, 제87페지○22 흑룡강당사자료 제1집. 1985년 4월, 제148페지 문화산맥 문화총서(7) 연변교육출판사, 2006년 6월
112    [론문](15)--9.18전후 일제의 문화침략과 조선족인민들의 반대투쟁 댓글:  조회:3773  추천:108  2006-12-27
9.18전후 일제의 문화침략과조선족인민들의 반대투쟁 지금으로부터 70년전—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는 공공연히 9.18사변을 발동하고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우리 나라 동부의 130만평방킬로메터의 땅을 점령하고 이른바 《만주국》이란 괴뢰정권을 조작해내여 중국인민에게 이루다 말할수 없는 크나큰 재앙을 들씌웠다. 9.18에 이어 일제침략자들은 정치, 경제, 군사 제반 분야에서 동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동북의 조선족인민들을 저들 일본민족으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조선족에 대해 전대미문의 문화침략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여왔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침략이란 주로 문화교육을 가리키는데 일제의 문화침략은 9.18후 처음 실시된 것이 아니다. 이 침략은 1907년 8월 용정촌에 《통감부간도파출소》가 설치된 때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는 바 9.18사변후에는 전면적으로 크 게 번져갔다. 이에 맞서 조선족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우며 일제의 문화침략에 드센 강타를 안기였다. 본문에서는 조선족인민들에 대한 일제의 문화침략을 문화교육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점적으로 서술하면서 이를 반대하여 싸운 조선족인민의 투쟁을 9.18전후와 백색구역, 적색구역으로 나누어 전방위적으로 취급해보려 한다. 1 다 알다싶이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은 이 땅의 토착민족이 아니며 지난 19세기중엽이후 살길을 찾아 조선반도(한반도)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온 이주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문화는 하늘에서 동떨어진것도 아니고 이주한후 새로 생겨난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가 자기의 기원과 원류를 갖고있듯이 중국의 조선족문화도 반도의 조선민족과 원류를 같이 하다가 근대에 와서 그 흐름을 달리하여 이주란 이 새로운 문화공간속에서 자기의 독특한 문화를 이어오고있는 것이다.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본제국주의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짓밟고도 성차지 않아 이 땅의 조선민족의 문화흐름을 거꾸러돌려 저들 일본문화에로 융합시키려고 광분하였다. 그 구체표현이 바로 군사침략, 경제침략에 힘입은 문화침략이란 이 무기였다. 하다면 일본제국주의가 동만 나아가 동북에 대한 문화침략은 9.18사변후에 와서야 시작된 걸가? 대답은 판이하다. 이를 알자면 일제가 연변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던 20세기초로 거슬러 올라야 할것이다. 동만, 즉 연변은 우리 나라의 동부변강에 위치한 산악지대라 하지만 그 지리적위치와 인적요소는 자못 우월하다. 일본침략자들이 통감통치를 실시하고있는 조선과 두만강 하나를 사이두고 있고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는데다가 많은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어 일제놈들은 언녕부터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 자들은 일러전쟁에서 이긴 후 1906년과 1907년의 두차례 일러비밀조약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 료동반도와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게 하였고 동만지구를 저들 침략세력이 동북복지로 뻗치는 주요통도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침략자들은 1906년에 많은 간첩을 동만에 침투시킨 뒤 1907년 8월에 사이또 스에지로 중좌가 거느린 한패의 군경들을 동만의 용정촌에 비법적으로 파견하여 《조선인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1909년 9월에는 부패무능한 청조정부를 유인협박하여 《도문강중한계무조약》, 즉 《간도협약》을 체결하여 용정촌, 국자가, 백초구, 투도구 등지를 상부지로 개방하게 하고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일약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탈바꿈시키였다. 이어 상기 상부지들에는 각기 령사분관을 설치하고 치외법권을 향유하면서 정치, 경제와 문화 등 방면에서 조선족인민들에 대한 통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우리 나라 동북 3성에는 조선족사립학교열이 일어났다. 그 일례가 1906년 8월에 조선의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이 설립한 조선족의 근대학교—서전서숙일것이다. 반일의 성격을 띤 《서전서숙》은 전통적인 구식서당교육으로부터 근대적인 학교교육에로 넘어가는 시작이였다. 이에 일제의 《통감부간도파출소》가 백방으로 압력을 가하고 또 경비난에 봉착한데서 서전서숙은 불과 8개월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잇따라 1908년에 서전서숙자리에 일제침략자들의 이른바 공립보통학교—간도중앙학교가 일어서고 국자가, 백초구, 투도구, 훈춘 등 일제령사분관 소재지에도 선후하여 공립보통학교가 일어섰다. 이 자들은 이런 저들의 보통학교를 통하여 굴욕적 노화교육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이 휘두른 문화침략의 첫 걸음이라 하겠다. 뿌리 깊은 조선민족의 교육열은 준엄한 시련에 부딪쳤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육숭상을 바탕으로 반일계몽운동, 즉 신문화운동에 의해 활발히 일어났던 조선족의 사립학교교육열은 그렇게 순순히 사그러질수 없었다. 《아는것이 힘, 배워야 한다》,《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존할수 없다》는 신식구호가 민족의 선각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면서 일제의 문화침략앞에 흔들리던 교육열에 생기를 부여하였다. 조선족인민들의 사립학교교육열은 크나큰 설립운동으로 번져갔다. 서전서숙을 중심으로 했던 반일지사들과 이 서숙을 다녔던 청년학생들이 이 운동의 앞장에 섰다. 한데서 1908년에 국자가 와룡동의 사립창동서숙, 국자가 소영자의 사립광성서숙, 화룡현 달라자 명동촌의 사립명동서숙, 화룡현 광개사 자동촌의 사립정동서숙, 북만의 녕안현 고려영의 사립고안촌서숙 등 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섰다. 후에 연변의 이 학교들은 모두 선후로 중학교로 발전하였다. 1908년 이해 조선족반일민족지사들은 또 남만의 류하현 삼원포에 신흥학교를 세웠다. 얼마후 이 학교는 통화현 하니하로 옮겨갔고 이름을 《신흥무관학교》①로 고치였다. 이 학교가 남만일대에서의 첫 조선족중학교로 된다. 조선족사립학교열은 료원의 불길처럼 동만, 북만, 남만으로 널리 확산하면서 수많은 사립학교들을 배출시키였다. 1911년과 1913년에는 일약 88개②로 늘어났다. 그후 사립학교는 일대 동풍을 탔는데 1916년 12월 일제침략자들의 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여러 도경을 거쳐 설립된 조선족사립학교가 도합 239개였다. 그중 연변4개현에 156개(화룡현 56개 연변 총수의 35.9%, 연길현 55개 연변총수의 35.39%, 훈춘현 32개 연변총수의 20.5%, 왕청현 13개 연변총수의 8.3%)를 헤아렸다.③ 일본침략자들이 조작한 1920년 10월의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에서 상기 달라자의 명동학교, 자동의 정동학교를 비롯한 숱한 조선족사립학교들이 불에 타버렸지만 조선족인민들은 그 자리에 다시 학교를 일떠세웠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사립학교설립운동은 료원의 불길처럼 맹렬하였다. 이 시기 조선족교육의 특점은 교육과 반일운동의 결합이였다. 여러가지 류형의 각종 학교들은 모두 반일을 교육의 취지로 삼고 교학과 강연 등 활동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사회주의 새 사조, 새 사상을 선양하기에 힘 다하였다. 이에 대비해 장백현 지방당국은 이른바 《봉천성교육청훈령》에 의해 현내 8개소뿐인 조선족사립학교(현성 서가의 장명학교, 녀자소학교와 대리수구의 영신학교, 태평구의 중흥학교, 소리수구의 덕신학교, 조양구의 육영학교 등)들을 전부 해산④시켰다. 통화현 지방당국에서도 봉천성당국의 해당 명령에 의해 《조선인들의 교육권을 거두어 들인다》는 이름으로 조선족들이 집중된 쾌대모자, 금두 등지의 조선족서당⑤과 사립학교들을 강제적으로 해산시키고야 말았다.⑥ 그래도 총적으로 보아 동북에서의 조선족사립학교열은 상승선을 그었다. 1987년 7월에 출판된 《연변조선족교육사》에 따르면 1928년 그때 동북경내에는 여러 류형의 조선족학교가 621개였다고 한다. 그중 사립학교가 388개로써 조선족학교 총수의 62.5%를 차지하는데 연변에만 해도 사립학교가 211개나 되었다. 위《만주국교육방안》의 통계자료(1928년 5월)를 보면 동북경내 조선족사립학교 총수는 470개에 이른다. 이는 그해 조선족학교 총수의 66.2%를 차지한다고 한다. 조선족사립학교의 신속한 흥기는 20세기 20년대 초부터 조선족사회에서 급격히 보급되기 시작한 러시야10월혁명의 사상과 사회주의 새 사상과 갈라볼 수 없다. 이 시기에 이르러 교육열은 전반 20년대에 걸쳐 단순한 반일독립지사와 지식분자들뿐이 아닌 조선인사회주의자들의 대폭 참여하에서 놀랍게 번져간다. 조공 만주총국의 엠엘계통, 화요계통 등에서는 각기 동만과 남만, 북만 각지의 조선족들속에 깊이 뿌리를 박은데 토대하여 사립학교운영에 큰 힘을 넣었다. 뿐만아니라 학교교육이란 이 좁은 범위를 벗어나 사회교육, 가정교육까지를 포함한 사회의 제반 교육,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의 교육에까지 손을 댔다.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을마다 여러가지 류형의 야학실이 일어서고 청장년들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조선족 로고대중들이 자기 글로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을 익히며 반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해갔다. 대중적 반일투쟁은 일촉즉발의 경지에 이르렀다. 일본침략자들은 절대 이를 달가와하지 않았다. 이 자들은 대량의 경찰과 헌병 등을 풀어 검거와 탄압을 일삼는 한편 저들의 침략세력이 미치는 범위내에 저들의 공립보통학교 12개(만철계통7개 포함)를 세웠는데 1928년 5월말 현재 해당자료에 의하면 연변이 12개 중 5개를 차지한다. 이는 1932년판 《만주국교육방안》에서 보여지는 수자이다. 침략자들은 또 용정에 간도보통학교, 즉 중앙 본교를 두고 각지에 본교의 지교를 설치하였다. 보통지교의 교원은 흔히 중앙본교에서 파견하였는데 당년 화룡현 개산툰 지방에만 해도 회경, 광종, 개산툰에 3개의 지교를 두었다. 이밖에 연변 내외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경비를 보조해 주는 《보조학교》, 즉 조선족학교를 두었는데 1928년의 불완전한 통계자료에 눈길을 던지면 전 동북에 이런 보조학교가 54개에 달했다. 연변 4개현에만 해도 30개에 이르렀다. 후에는 40여개로 늘어났다. 일본침략자들의 로골화한 노화교육의 강화는 조선족반일지사들을 격분시켰다. 그들은 민중의 힘에 의거하여 사립학교건설을 보다 다그치는 한편 9.18사변전에 벌써 일제의 노화교육을 배격하는 투쟁을 드세게 벌리였다. 누가 보통학교에 들어가면 그 학생은 물론 학부형까지도 일본놈들의 주구나 민족망나니로 치부당했다. 용정촌에 꾸려진 일본침략자들의 간도중앙학교를 꾸릴 때 교원은 17명이나 되어도 학생은 가까스로 54명에 불과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급해 난 조선총독부는 간도중앙학교의 건물과 시설을 보다 훌륭히 하고 교육경비를 대폭 늘이고 학생들에게 매달 5~6원의 금액을 보조해주고도 학생무료기숙과 교과서 무상공급, 졸업후 취직알선 등 월등한 조건까지 내걸어도 그상이 장상이였다. 1930년 5월과 가을에 연변에서 당이 지도한 5.30폭동, 추수폭동 등 대중적투쟁이 맹렬히 일어났을 때 각지 조선족혁명군중들은 화룡현 이도구 구산장의 보통학교, 회경가 동호학교, 사도구 중평촌의 보광학교, 남양평 중흥학교 등 일제놈들의 보통학교와 보조서당 34개에 불을 질렀거나 태워버렸다. 그 대부분이 오늘의 화룡시 소재지와 60리 평강벌, 천도철도 연선인 용정일대와 용정시 개산툰진 일대에 집중되었다. 1931년 9.18사변 직전에 이르러 조선족들에 대한 일제의 통치가 보다 우심해지고 노화교육을 통한 문화침략이 보다 노골화 되었지만 조선족인민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2 1931년 9.18사변 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날로 가심해지고 조선족인민들에 대한 문화침략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었다. 1932년 3월 이른바 위만주국이 설립된후 일제는 동북 각급 학교에 령을 내려 삼민주의 민족사상이 흐르는 중국교재를 쓰지 못하고 중국국기와 중국지도를 걸지 못하며 중화란 말과 글도 쓰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조선족학교들에서는 일률적으로 조선역사교수를 취소당하고 조선태극기와 조선애국가마저 내동댕이쳐야 했다. 이에 따라 조선족서당과 사립학교의 교수내용과 교재, 교육방침이 무조건 페지되고 교육질서가 흐트려졌으며 문화침략의 걸림돌로 되는 조선족사립학교들은 강제로 페교되거나 합병 또는 개편되었다. 한데서 1932년에 이르러 동북의 조선족학교 710개중 377개(근 47%)나 감소되었다.⑦ 1932년 5월의 통계자료를 펼치면 조선족사립학교는 원래의 109개중 77개가 페교되어 70%을 이루고 한족학교는 172개중 141개가 페교되어 80%로 치달았다. 지어는 조선족 학교들에서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고 일본역사를 《국사》라고 받들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였다. 그나마 이른바 《국사》는 엄중히 위조되고 날조된 역사였다. 1937년에 일본침략자들은 동북에서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철페하고 형식상 조선족학교에 대한 교육행정권을 위만주국에 넘기었지만 문화침략의 실질은 조금도 다를바 없었다. 1937년 5월 2일에 《신학제》를 공포하고 이듬해 1월부터 실시하였는데 따지고 보면 이른바 《신학제》의 근본취지는 식민지 노화교육, 즉 문화침략의 전면적인 가동에 있었다. 그럼 《신학제》의 내용과 실시는 어떠하였는가? 장백현의 경우가 이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위 강덕4년(1937년) 10월 10일 위만주국 민생부에서는 령을 내려 이미 실시했던 소학교 6년제를 취소하고 《4.2》제 국민학교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첫 4년은 국민학교이고 후 2년은 국민우급학교였다. 그해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고 보편적으로 소학교를 설치하였다지만 위강덕 6년 6월 22일에 있은 한차례 《아동취학상황》에 의하면 현안에 단일한 조선족소학교는 4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조선지리와 조선역사마저 취소당하고 일본어시간이 크게 늘어났다.⑧ 일제침략자들은 문화침략을 다그치기 위하여 각 학교들에 명령하여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일본 천황과 위만주국황제에게 《요배 (遙拜) 》하고 《국민훈 (國民訓) 》을 암송하며 정오에는 천황, 황제의 안녕을 비는 등 《정오묵도》를 강요하고 달마다 한차례씩 《신사》(神社)를 참배하게 하였다.⑨ 위 강덕6년, 즉 1939년부터는 얼토당토않은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학생들의 조선족 성과 이름을 무조건 일본성과 이름으로 고치게 했고 조선어과를 취소하고 모든것은 일본문으로 된 교재를 사용하게 하였다.⑩ 일본민족으로의 동화를 가속화 하는 절차로서 누가 조선말을 하고 조선글을 사용하면 호된 징벌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하면 《황민화》를 위한 괘속진군이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노화교육을 통한 문화침략정책과 강압실시는 조선족인민들의 지대한 분노와 격분을 자아냈다. 문화침략의 실질은 강제동화여서 더욱 그러하였다. 사립학교 초기부터 일제침략자들과 굴함없이 싸워온 조선족인민들은 여러가지 형식으로 침략자의 문화침략을 반대하여 나섰다. 아래 동만, 북만, 남만으로 나누어 개략적으로 훑어보기로 한다. 동만에서: 동만의 투쟁에서 선두에 선것은 그래도 용정의 사립대성중학교와 사립동흥중학교를 꼽아야 할것이다.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는 모두 1921년 10월에 설립된 학교로서 설립시초부터 맑스주의 전파와 사회주의사상선전에서 영광스런 역사를 갖고있는 학교들이다. 언녕부터 이 두 중학교를 눈에든가시로 보아왔던 일제놈들은 1934년 3월에 두 학교와 농업중학교를 합치여 《민성중학교》로 만들고 부설소학교들인 동흥소학교와 무산아동학교를 합쳐 《동흥소학교》란 이름을 내걸었다.⑪ 후에 상기 세 중학교의 사생들이 힘을 합쳐 투쟁하니 반일정서는 더욱 앙양되었다. 1년 후에 일제놈들은 대성, 동흥을 원래대로 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농업중학교만 페교시킬 뿐이였다. 대성중학교의 반일투쟁은 날로 고조되었다. 1935년과 1937년에 있은 간도성 축구경기에서 대성중학교 축구팀은 거듭 우승금기를 따내였다.⑫ 1935년 겨울방학에는 허세록 등 30여명 학생들이 문하영선생의 지도밑에 《고국위문공연단》을 무어 조선의 회령, 청진, 성진, 길주, 명천, 라진 등 10개 도시에 나가 50여차의 공연을 하였다.⑬ 이에 질겁한 일제는 일본인 교원 가쯔다와 사도를 학교에 보내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편 사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면서 일본말 사용을 강요했다. 이를 우습게 여긴 전교 사생들은 일치단결하여 일본어과목의 기타 과목과 모든 활동에서는 의연히 조선어를 사용하였다.⑭ 일제놈들이 학교 동쪽교문밖에 접수실과 비슷한 벽돌집을 짓고 경찰분주소를 앉히자 사생들은 동쪽문을 막아버리고 교문을 남쪽으로 옮겨버렸다. 어찌할수 없는 일제놈들은 대성중학교는 《공산당을 길러내는 소굴》이라고 저주하였다.⑮ 일본침략자들은 1936년부터 이른바 《황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켰다. 이 운동이 일본인이 통제하는 학교로부터 사회에로 번져지자 동흥중학교의 사생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1939년 6월에 전교 학생들은 《일본령사관의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련속 7일간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며칠후의 깊은 밤에는 일제의 밀정을 붙잡아 마대에 넣어 마차로 철다리밑에 끌고 갔고 한바탕 패준후 일제놈들의 주구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서야 놓아주었다.○16 1939년 6월 15일에 일제놈들은 대성, 동흥, 두 중학교를 다시 합쳐 용정국민고등학교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북만에서: 일제침략자들의 일본어강요에 맞서 아성현 조선족국민우급학교 교장 권태동은 조선어교수를 떳떳이 견지하면서 반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교가도 내놓았다. 이 학교에서는 1937년에 조선말을 하면 벌금시킨다는 일제의 강박조치에 반항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권태동교장은 철직당하고 일본헌병대에 구류까지 당하였다.○17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리상강은 일본과 조선 경성에서 활동하다가 주하현으로 지대를 옮긴후 하동 16개 학교를 꾸리고 반일계몽교육에 종사하다가 체포되어 조선 경성남대문감옥에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18 오상현 숭인국민우급학교 교장은 조선인이였다. 그는 부임 후 첫 수업시간에 흑판에 《조선인립》(朝鲜人立)이란 네 글자를 번듯하게 써놓고 반일사상을 설교하였다.○19 북안 천덕국민우급학교 교장 장정수는 청년야학실을 꾸리고 문화전수와 함께 한일합병, 조선망국, 중국의 〈12.9〉학생운동 등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학교부근의 공지에는 대형 조선지도모형까지 제법 만들고 반일활동을 짜고들었다.○20남만에서: 남만의 투쟁에서 길림지구의 조선족교원과 학생들이 주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지구의 소성소학교의 일부 진보적 교원들은 중공길림현위에서 파견한 조선족 지하당원들의 지도밑에 1936년 6월에 조선족청장년들을 대상한 야학실을 꾸리고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치면서 반일사상을 애써 설교하였다. 이들의 기세에 학교의 친일분자들은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21 길림 제6국민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조선말 금지》라고 새긴 나무패쪽을 만들고 조선말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 패쪽을 거는 학교당국에 항의하여 과감한 투쟁을 벌리였다.○22 이상에서 필자는 《중국조선족교육사》등에서 보여지는 문화침략 배격투쟁자료를 두루 흝어 보았다. 동만과 북만, 남만의 이르는 적 점령구마다에서 조선족인민들은 일제의 문화침략에 맞서 불요불굴의 투쟁을 벌리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고 이것이 바로 진실한 투쟁화폭이였다. 3 일제침략자들이 동북을 강점한후 군사, 경제침략과 더불어 문화침략을 크게 강화한것은 주목하는 사실이다. 침략이 있으니 반침략이 있기 마련인데 일제의 문화침략을 반대하는 조선족인민들의 투쟁은 적점령구의 변두리에 일떠선 우리 항일유격근거지내에서도 거세차게 벌어졌다.ㄱ. 아동구락부 형식: 1932년 가을이후 우리 당이 지도하는 항일유격근거지가 동만 4개 현(연길, 화룡, 왕청, 훈춘)의 여러 산구들에 거연히 일떠섰다. 시초 근거지내에는 구와 촌 쏘베트정부들이 보편적으로 조직되었는데 통일전선에 관한 중공중앙의 1933년 1.26지시편지가 시달된 후에는 모두 인민혁명정부로 개칭되었다. 인민혁명정부는 중공동만특위와 소속현위의 지도하에 여러 유격대원호사업을 중심으로 근거지의 제반 사업을 까근히 내미는 한편 학령아동들과 근거지내 항일렬사들의 유자녀를 대상으로 근거지마다에 아동구락부를 세우고 전반적인 면비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아동구락부는 사실상 아동단학교로서 공청단조직의 위임을 받은 현과 구의 아동국장들이 지도하였으며 구체책임자는 아동단지도원들이였다. 학과목은 주로 정치, 조선어, 조선역사, 조선지리, 군사, 산수, 체조, 창가 등이었는데 모든 학과목은 일률로 조선 말과 글로 가르쳤다. 일제의 식민지 문화침략—동화정책에 대한 쟁쟁한 선전포고였다. 아동구락부의 기본목적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사상, 지식, 도덕과 튼튼한 체력을 갖춘 혁명의 후비대로 건실히 키우는것이였다. 하기에 아동단원들은 평소 목에다 붉은넥타이를 매고 허리에 포승을 두르고 곤봉을 찼으며○23 소선대조직과 더불어 근거지안팎의 비밀통신련락, 정탐, 보초, 유희대 등 임무수행에 힘다하였다.아래 구체적인 실례의 여러 측면에서 《아동구락부》어린이들의 투쟁모습을 엿보기로 하자. △팔도구근거지에서: 연길현 팔도구근거지의 아동단원들은 다른 근거지들과 마찬가지로 거개가 항일렬사의 후대가 아니면 싸움터에 나선 유격대원들의 자제였다. 팔구정부에서는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전문 아동구락부를 꾸리고 항일투사 김정숙을 아동단지도원으로 파견하였다. 아이들은 아동단지도원의 지도밑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유희와 노래를 배웠으며 보초, 통신, 정탐도 하고 유희대도 꾸리였다. 아동단 유희대는 근거지의 선전대와 함께 수차 근거지밖의 팔도금광으로 드나들며 연길현유격대가 요새지를 지켜선 가운데 수백명로동자들을 대상으로 위문공연을 벌리였다. 선전대가 시사와 항일선전고동을 정면으로 들이댔다. 이에 크게 고무된 금광의 많은 로동자들이 근거지에 들어가 유격대에 참가했거나 근거지내 혁명조직에 망라되었다. △왕우구근거지에서: 왕우구근거지 북동의 아동구락부의 아동단원들은 배움에 열중하는 한편 아동단지도원의 지도밑에 싸우는 고지에 올라가서 구호를 웨치거나 항일가요를 부르면서 유격대원들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유격대원들이 싸우고 돌아올 때면 아동단원들은 정연히 열을 지어 열성껏 환영하였다. 축사와 답사에 이어 혁명가요를 부르면서 춤추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소왕청근거지에서: 1933년 봄에 소왕청근거지에서 적과의 가렬한 전투가 계속될 때 왕우구근거지에 있다가 아동단지도원을 따라 다홍왜근거지를 거쳐 왕청현 소왕청근거지로 들어간 아동단원 김금녀는 근거지의 아동유희대와 함께 싸우는 뾰족산과 마반산에 올라 진지 뒤에서 삭정이를 모아 불을 피우고 눈에 젖은 유격대원들의 신을 말리우고 더운 물을 끓이였다. 그리곤 적탄이 비발치는 진지에 들어가 혁명가요를 목청껏 불렀다. 이에 힘입은 유격대원들이 원쑤들을 무데기로 쓸어눕힌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1934년 봄에 이 아동유희대는 특위아동유희대로 발전하였고 요영구근거지로 전이하였다가 이해 여름에 북만 녕안에서 활동하고있는 수녕반일동맹군 책임자 주보중의 초청을 받고 멀리 북만원정길에 올라 대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처창즈근거지에서: 1935년 봄에 이르러 당년 안도현 경내에 자리잡은 처창즈근거지의 식량난은 절정에 달하여 아사자가 날로 늘어갔다. 모진 역경속에서도 그들은 자녀교육을 중시하고 아동구락부를 세우고 풍금까지 마련하였는데 아동단원들은 자기가 배를 곯으면서도 유격대아저씨들을 생각하였다. 이해 가을 이후 근거지가 해산되고 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유격대가 남만으로의 원정길에 오른 뒤 워낙 하산하기로 했던 아동구락부의 손명직 등 14명 아동단원들은 산속에 모여 결의를 다지고 죽어도 항일대오에서 죽자면서 혁명군아저씨들의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가고가도 끝없는 눈보라의 서정길을 헤치며 그들은 천신만고를 겪다가 끝내 부대의 품에 안기였고 무송현 마안산을 거쳐 장백땅에서 항일련군 제2군 6사의 소년중대에 가입하였다. 공산당이 키운 항일아동단원—혁명의 후비대로 되기에 손색이 없은 그들이다. ㄴ.성인교육의 형식: 항일유격근거지의 인민혁명정부에서는 근거지내 혁명군중들을 위해 성인야학실을 꾸리고 정치교육과 문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성인교육의 주체는 문맹퇴치를 위한 반일계몽교육이였다. 이를 위해 근거지들에서는 1933년도부터 《성인기초독본》이란 전문교재를 사용하였다. 한데서 문맹퇴치는 군중성운동으로 번저져 짧은 시간내에도 큰 성과를 거둘수 있었으며 동만 여러 근거지가 해산되는 1935년 가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근거지의 특점은 적점령구의 비밀형식과는 다른 공개형식이였다.1936년 가을이후 백두의 여러 밀영들을 중심으로 장백근거지가 형성된다. 동만의 자제들로 조직된 항일련군 제2군 제6사는 동만으로부터 무송현을 거쳐 장백현으로 지대를 옮긴후 수십명 정치공작원들을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는 압록강 북쪽의 마을마다에 파견하여 혁명적으로 개조한다. 마을마다에는 야학실이 일어서고 항일계몽교육이 놀라운 은을 낸다. ㄷ.적후투쟁 형식: 근거지시기에 동만 당조직에서는 유능한 정치일군들을 백색구역○24으로 불리운 적통치구역에 파견하여 적후투쟁을 활발히 벌리였다. 그 일례로 화룡현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만을 보기로 하자. 1932년 겨울에 산구에 위치한 어랑촌과 그 일대에 근거지가 세워진후 어랑촌근거지를 제외한 현내 당조직과 혁명조직들은 거개가 파괴당하였다. 현위와 근거지내 중공평강구위에서는 수시로 비행선전대를 무어 근거지 주변의 봉밀구와 쟈피구, 고사리평 등지에 파견하는 한편 간도일본총령사관이 도사리고있는 용정시가지에 정치공작원 박파와 리계순 등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분공하여 파괴된 용정구위 당기관과 혁명단체 복구에 나서면서 사립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 비밀리에 침투하여 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박파가 체포되어 불행히 희생된후 리계순은 의연히 투쟁을 견지한다. 본문에서 필자는 문화교육을 대상한 일본제국주의의 문화침략과 조선족인민의 반대투쟁을 9.18사변 전후로 나누어 력점을 전반 30년대에 두면서 두루 살펴보았다. 총적으로 보아 일제놈들의 군사, 정치, 경제를 비롯한 문화침략은 개시 시초부터 조선족인민들의 강렬한 반항에 부딪쳤는바 1945년 8월, 무조건항복에 이르기까지도 끝끝내 이 땅의 조선족인민들을 동화시키지도, 굴복시키지도 못하였다. 20세기 30년대에 이어 40년대로 뻗어간 조선족인민들의 투쟁은 백색구역과 적색구역 투쟁이란 자발적 투쟁과 자각적투쟁으로 계속되었는데 용정의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가 시종 투쟁의 진두에 나섰다. 이 투쟁가운데서 조선족인민들은 항일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수많은 희생과 대가를 내였다. 역사는 그들을 잊지 않을것이다. 【주해】: ① ⑤⑥《통화시 민족사무위원회 사지(史志)자료》(1988년)② 《연변조선족교육사》(1987년 7월), 연변인민출판사, 제21페지③ ⑦동상서, 제28페지④ ⑧⑨⑩리권수 정리: 구중국 장백조선족교육 (1986년 9월)⑪⑫⑬⑭⑮○16 《용정문사자료》(1), 제57-84페지○17○18○19○20○21○22 《중국조선족교육사》(1991년 5월), 제187-193페지○23 당년 붉은넥타이와 포승, 곤봉을 아동단의 3대무기라고 했다.○24 당년 항일투사들은 우리 항일근거지를 적색(赤色)구역으로 부르고 적통치구를 백색구역으로 불렀다. 9.18사변 77주년 학술세미나 발표논문, 2001년 9월 심양,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주최중국조선족교육, 2002년 제1호, 제2~3호에 상, 하로 연재
111    [론문](14)--《해란강대혈안》에서 1700여명 살해되었는가? 댓글:  조회:4345  추천:93  2006-12-25
《해란강대혈안》에서 1700여명 살해되었는가?1. 제기되는 문제 연변의 항일투쟁사를 펼치면 성서처럼 드팀없는 《해란강대혈안》이란 참상이 떠오른다. 이에 따르면 지난 30년대초에 일제놈들과 그 주구들은 당년의 연길현 해란구, 즉 화현리일대에 대해 전대미문의 94차의 포위토벌을 감행하여 1700여명의 혁명자와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살해하였다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알고보면 이는 놀라웁게 과대된 어처구니 없는 수자가 아닐수 없다. 연변 당조직의 한 구위 이름으로 역사에 실재했던 연길현 해란구는 실상 화련리를 가리킨다. 화현리는 당년 국자가 동쪽방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류한 지방에 자리잡았는데 해란강을 거스르면서 20리쯤을 사이에 두고 여러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용정시 당시연구실에 의해 정리된 한편의 글①과 해당자료에 의하면 화련리는 수침통, 류정촌, 학교촌, 상중개동, 하중개동, 북화련리, 남화련리, 상촌, 중촌, 농골, 계림촌, 로가촌 등 12개 마을, 200여세대②로 되어있지만 다른 해당자료에는 9개 자연툰에 180여세대③가 살고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지난 60년대 초에 연길시 장안진 마반 1대 서운파가 48살되는 때에 서술한 것인데 그의 증실자료는 비교적 실사구시적으로 되어있다. 화룡 베개봉에서 발원하는 해란강은 화룡시 평강벌과 용정시 세전이벌을 적시며 흐르다가 원 석정향의 구간을 지나서는 산간 지대를 따라 흐른다. 원 석정향 구룡촌을 벗어나서는 해란강은 두산사이 좋은 계곡을 따라 동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방향을 북으로 꺽으며 10여리 흐르고 다시 우중충한 산들에 막혀 방향을 남으로, 서쪽으로 돌리며 오늘의 연길시 동쪽 하룡촌에서 부르하통하와 합수한다. 이렇게 동으로, 북으로, 남으로, 서로 흐르는 해란강 20리쯤 구간은 두산이 서로 맞대인 산간지대로서 이 좁은 계곡 사이에 9개 자연툰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합수목에 자리잡은 하룡촌의 여러 마을외 그제날 다른 마을터들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화련리 여러 마을들이 해란강을 따라 자리잡았다하여 해란구로 불리우고 광복직후에는 화련리대혈안대신 해란강대혈안으로 불리웠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화련리 여러 마을들이 자리잡은 지대는 두산 사이에 끼인 해란강의 좁은 지대이며 인구라야 200세대쯤밖에 안된다. 한세대에 평균 5~6명으로 계산한다해도 전체인구가 1000명좌우밖에 안된다. 헌데 이런 화련리에 1700여명이나 살해되었다고 하니 말이 아니다. 화련리 전체 인구를 들이밀어도 근본 1700여명에 이르지 못한다. 하다면 1700여명 대혈안설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고 이 수자가 어찌하여 어처구니 없는 과대수자라고 할가, 이를 알자면 당년의 연길현 화련리로 돌아가 그 전후관계를 헤아리지 않으면 안된다. 2. 화련리 항일투쟁과 적들의 첫 “토벌” 1930년 연변 《5.30》폭동이후 화련리일대에 조직된 우리 당조직은 계림촌에 조직된 중공당소조이다. 이 당소조는 화첨자당지부에 소속되어 중공의란구위의 지도를 받다가 1931년 11월 초부터 새로 건립된 중공해란구위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신생한 해란구위는 산하에 동성용지부, 화첨자지부, 화련리지부 등 3개지부를 두었는데 구위서기는 리상근이 아니라 오현정이였다. 리상근(1908년생)은 화련리사람으로서 당구위가 조직될 때 공청단구위서기 책임을 맡았다. 구위 조직위원은 세린하에서 화련리로 온 장상순이 맡고 선전위원은 김정규가 맡았다. 구위는 화련리 류정촌에 자리잡았다. 1931년 가을 온 연변땅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화련리일대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11월 5일, 해란구와 연길구의 농민대표로 무어진 《소작투쟁위원회》 5명성원들이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승과 담판하다가 시거우공안분주소에 체포되었다. 이 소식이 화련리 여러 마을들에 전해지자 화련리의 군중들은 구위의 지도하에 시거우공안분주소로 달아갔다. 해란구와 연길구에서 모인 군중은 2000여명에 달했다. 덴겁한 공안분주소 소장은 2명 대표를 내놓았으나 3명 대표는 이미 국자가 연길공안국에 넘어갔다고 실토하였다. 이날 밤, 분노한 시위대렬이 2개구위의 지도밑에 홰불을 들고 공안분주소 소장을 앞세우고 소영자로부터 국자가로 향할 때는 그 수가 5000여명에 달했다. 근 만명으로 치달았다고도 한다. 수천명 군중들이 위연길현부를 겹겹히 에워싸고 《농민대표를 내놓으라!》, 《현장을 불러내라!》하고 구호를 부르니 위현장은 할수없이 체포한 3명대표를 내놓고 군중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4.6제의 정당한 요구를 접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시위대렬은 그길로 소영자의 대지주 송보승의 장원을 에워싸고 곡식낟가리를 헤쳐 비례대로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1932년 봄에 동만특위에서 춘황투쟁(즉 기민투쟁)을 호소하자 화련리의 농민들은 구위의 지도밑에 재차 일떠났다. 그들은 친일주구인 화련리의 툰장 김성기, 하동촌의 주구 허병팔, 계림촌 촌장 겸 조선인민회 참의원이며 일본의 훈팔급(勋八级) 수훈자인 김동후 등을 붙잡아 끌고다니며 투쟁하였다.④ 그리고 친일지주와 지주들의 식량, 재물을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화련리와 그 일대의 추수춘황투쟁은 적들을 놀래웠다. 일제놈들은 1932년 3월, 화련리에서 무장자위단을 조직한뒤 이놈들을 선두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한데서 1932년 음력 3월 28일(양력 5월 1일)에 화련리는 첫토벌의 세례를 겪게 된다.⑤ 이날 50여명의 적들은 마차에 앉아 오는 도중 남화련리에서 청년 김룡수를, 중촌에서 중의 김도제를, 류정촌에서 리삼달의 부친 리동근을 체포하여 가지고 학교촌으로 내려왔다.⑥ 학교촌에는 6년제 사립명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무렵에 학교촌의 등산보초는 김하연의 딸이였다. 소녀는 산동성이에서 나물을 캐는것처럼 가장하고 보초를 서다가 일제토벌대놈들을 보자 저고리를 벗어 흔들며 마을에 암호를 띄웠다. 토벌대놈들은 낌새를 채고 이 소녀를 붙들어 갖은 심문과 구타를 들이댔다. 했건만 소녀는 나물을 캐다가 더워서 옷을 벗어흔들었다고 할 뿐이였다. 적들이 학교촌에 들이닥치니 사람들은 소녀의 암호에 의해 대부분이 이미 피신한 터였다. 이때 미처 피하지 못한 리호일과 석건평에서 온 리동근이 불행히 체포되었다. 이날 화련리일대에서 체포한 동지들은 도합 21명이였다.⑦ 적들은 이들 21명을 월청사 우리골에 끌고 가서 체포된 사람들을 저저마다 구뎅이를 파게 한뒤 저고리고름이나 동정을 뜯어 눈을 가리게 한 다음 군도로 개개의 목을 쳐죽이였다.⑧3. 해란구유격대 활동과 《8.7》참안 무장한 적은 무장으로 대처하여야 했다. 1932년 5월, 중공해란구위에서는 계림촌의 김순덕(렬사)을 대장으로 하는 해란구적위대(후에 유격대로 불리움)를 조직하여 적들의 학살과 역청산에 맞서 나섰다. 김순덕 등은 구위의 지도하에 류정촌, 중촌, 상촌과 계림촌 삼호동네의 심산속에 대장간을 차려놓고 큰칼, 단도, 날창 등 원시적인 도창무기를 만드는 한편 적위대를 이끌어 무기탈취투쟁을 줄기차게 벌린다. 그 나날에 김순덕과 그가 이끄는 적위대는 짧디짧은 두달동안에 30여자루의 보총과 권총, 목갑총을 갖게 되었다.⑨ 이에 따라 그해 7월에 해란구적위대는 구유격대로 개편되었다. 해란구유격대의 활동은 일제놈들의 두통거리로 되었다. 빈번히 유격대의 타격을 받은 적들은 일본군토벌대와 무장자위단을 내몰아 화련리일대에 련속 덮쳐들었다. 이자들은 1932년 5월1일부터 시작하여 1933년 2월에 이르는 기간에 화련리 일대 9개 자연툰을 참빗질하며 무려 50여차 토벌을 감행하여 혁명자와 군중 170여명을 학살하고 많고많은 집들을 불태워버렸다.⑩ 그중 1932년 음력 8월에 있었던 《8.7》참안에서만도 53명이 쓰러졌다. 그중 23명은 연화유격대의 대원들이다. 연화유격대는 1932년 5월에 개산툰에서 정식으로 조직된 연화현유격대로 알려진다.⑪ 중공동만특위에서 《9.18》사변후의 새로운 투쟁정세에 좇아 조직한 유격대인데 그 대원들은 개산툰유격대를 토대로 평강구, 삼도구 등지의 골간들로 무어졌다. 이 유격대는 개산툰일대에서 무기탈취투쟁과 주구청산투쟁을 하다가 해란구유격대, 의란구유격대와 함께 해란구 계림촌에 주둔하는 철도호로대의 40여자루 보총을 탈취하고저 화련리에 오게된다.⑫ 8월 6일 저녁 연화유격대는 소홀한 탓으로 문전보초만 세우고 바깥보초를 세우지 않은데서 일이 생겼다. 그들은 리삼달의 집과 리삼달의 큰아버지집, 리삼달의 삼촌집과 리성보네 집 등 여러집에 나뉘여 자게 되었는데 문전보초가 그만 졸게 된데서 적들은 그 틈새를 탔다. 8월 7일 새벽 2시경에 소야평(하남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수비대 약 50명이 지방자위단놈들의 배합밑에 중기와 경기관총을 가지고 맹렬한 소사를 들이댔다. 연화유격대는 오전 9시까지 반격하며 포위를 돌파하며 피어린 싸움을 벌리였다. 이해 10대 소년에 불과하였던 리삼달의1964년 증실자료⑬에 따르면 유격대는 불지르러 접근하던 적병 두놈을 죽이고 한놈을 부상입히기는 했으나 피동적국면을 근본 돌려세울수가 없었다. 다행한것은 유격대 35명중 12명이 포위를 돌파했고⑭ 해란구유격대의 대원들은 그날 류정촌에 없었던것이다. 역사에 실재했던 1932년 해란구 《8.7》참안의 진상이라 하겠다. 연화유격대가운데서 이름을 찾아볼수 있는 유격대원은 개산툰구 군사부장 김락영과 리동일, 태양욱, 태양윤, 김복만, 김호준, 한익수 그리고 소대장 김마즈, 대장 류기룡, 정치지도원 최병조 등 10명이다. 이 10명중 김락영, 리동일, 태양욱 셋이 포위를 돌파하고 7명은 장렬히 희생되었다. 희생된 유격대 23명중의 7명이다.⑮ 유격대외 알아 볼수 있는 희생자들로는 공청단 해란구위서기 리상근, 당구위조직위원 장상순, 선전위원 김정규, 구위간부 오용묵, 리삼달의 집안사람 10명과 리성보 등으로 나타난다.4. 《8.7》참안의 두가지 시비 《8.7》참안을 두고 꼭 밝히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시비가 있다. 첫번째 시비는 연화유격대 대장으로 알려지는 류기룡문제이다. 당년 연화유격대의 대원 태양욱은 지난 60년대초와 70년대 초 두차례의 증실자료에서 류기룡을 그번 참안의 주구로 지적하였다. 60년대 초의 증실자료는 연변주당안관의 자료 《차상춘 등 6명 담화기록》(3060)이다.○16 이 자료에서 태양욱은 이렇게 말했다. 《소선대에 그날 보초정황을 물은즉 대장 류기룡이 보초를 거두라고 하기에 보초를 서지 않았다고 하였다. 유격대가 화련리를 떠난후 류기룡은 지방에 나타나게 되었다. 지방조직에서 가의하여 심문한 결과 류기룡이 일군수비대에 련락하였고 보초도 거두라고한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군중대회에서 타살하였다.》 70년대 초의 증실자료는 화룡현의 해당자료이다. 이는 1971년 8월 19일의 증실○17로 되었는데 태양욱은 이해 71살이였다. 그는 이 자료에서 이렇게 거듭 말했다. 《이 사건은 류기룡(화련리 웃농골사람)이란 놈이 연길현유격대 대장질하면서 적에게 물어넣어서 생겼다고 한다. 후에 군중들이 그를 때려 죽였다는 말이 있다.》 태양욱이 이 자료에서 연길현유격대라고 한것은 그가 연화유격대를 화룡현유격대와 연길현유격대로 보았기때문이다. 어찌하든 이 자료에는 또 리삼달과 김동진의 증실자료가 첨부되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화련리사람으로서 《8.7》참안 그해 리삼달은 12살이고 김동진은 16살, 후에는 연길현 왕우구근거지에 들어가 소선대와 공청단간부로 활동하던 분들이였다. 이런 경력의 소유자들이기에 그들은 류기룡은 월청구 걸만동사람이고 《8.7》참안시에 희생된 렬사라고 지적하였다.○18 1971년 그해 도문시 민족식당 출납원으로 있던 류기룡의 딸 류인숙도 같은 증명인○19으로 나섰다. 태양욱증실자료외 여러 자료들에서도 모두 류기룡이 《8.7》참안에서 희생된것으로 밝히였다. 태양욱의 증실은 사실을 잘 모르는데서의 오유임이 드러났다. 두번째시비는 주구밀고문제이다. 첫번째시비에서 제대로 밝힌 리삼달, 김동진은 두번째시비에서 《8.7》참안의 주구를 백창헌으로 보고있다. 연변주당안관의 자료ㅡ《리철순(즉 리삼달) 동지 담화기록》(4023)에 의하면 1964년 1월 16일 증실로 된 이 자료에서 리삼달은 《8.7》참안은 《가능하게 백창헌의 수작》으로서 백창헌이 《유격대는 아직 군사기술이 따르지 못하여 군사훈련이 수요된다는것을 구실로 습격날자를 미루었다.》고 하면서 백씨가 자기 처삼촌인 리성보와 매부인 조혜천을 주구와 특무로 내세웠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였다. 이 자료에서 리삼달은 또 《백창헌은 일제의 주구로서 그는 1929년ㅡ 1930년 좌우에 체포된후 일제에게 투항하고 연길감옥에서 탈옥의 형식으로 혁명대오에 혼입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1971년의 화룡현 해당자료에서도 백창헌을 주구로 몰았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백창헌은 1932년《8.7》참안의 주구가 아니다. 그는 화룡현 소오도구 (지금의 화룡시 동성진 보성촌)출신으로서 1928년에 벌써 소오도구 명신학교에서 교원질을 하면서 혁명활동에 나선 사람이다. 1930년 7월 10일과 11일, 화룡현 약수동에서 중공평강구위가 조직될 때 그는 소오도구지부대표로 그번 회의에 참가하였다가 공청단구위서기를 맡았다. 이해 가을이후에는 당구위 조직부장,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그는 1931년 음력 3월의 어느날 평강구 포지동의 어느집에서 공청단구위의 백창원, 차정숙, 김갑, 안두천 등과 함께 회의를 하다가 서백리보위단에 체포되어 연길감옥에 압송되었다. 지난 80년대 초에 필자가 이날의 차정숙녀사를 수차 방문한데 의하면 백창헌은 체포된 동지들에게 모든 책임을 자기한테 밀라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리곤 감옥에서 파옥계획을 내밀었는데 파옥3일을 앞두고 비밀이 탄로되어 15년 언도를 받은 모양이다. 15년언도를 받은후 매달 2차의 면회기회에 백창헌은 부친 백태경을 통하여 가족에서 보내오는 음식 또는 옷속에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다시 파옥계획을 짜고들었다. 1932년 음력 2월에 백태경은 소오도구의 혁명자 한사람과 함께 바를 가지고 와서 파옥을 도와나섰다. 백창헌은 감옥에서 한달동안 벽을 뚫으며 비밀통로를 만들었는데 감옥내 4명인원과 함께 탈옥하다가 마지막으로 토성을 넘던중 부주의로 벽돌장을 떨구었다. 감옥안에서 호각소리가 나며 놈들이 몰려오는데서 탈옥한 4명과 바깥의 백태경 등은 산산히 흩어졌다. 탈옥한후 백창헌은 곧추 아무도 모르게 화련리의 처삼촌 리성보집으로 갔다. 그는 처삼촌네 집에서 몸조리를 하면서 조직선을 통해 연길현위와 련게를 가지였다. 이럴 때 《8.7》참안이 터지였다. 그때 백창헌은 연길현위 위원이 아니였을 뿐만 아니라 연화유격대를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가 없었다. 《8.7》참안후에 백창헌은 조직의 신임으로 연길현위 위원으로 뛰게 되고 1933년 음력 2월에 소오도구의 부친집에 왔다가 용정 총령사관에 의해 귀순하게 되었다. 귀순후 조직의 탄로와 혈채는 보이지 않는다. 1933년 음력 9월에 총령사관의 고등계 부장 최창락을 위수로 한 12명방문단에 섞이여 서울의 일제 조선총독부에 다녀오고 총독부앞에서 사진까지 찍은적이 있었다. 이는 1933년 음력 2월에 귀순한후의 일로서 화룡현해당자료○20인 1971년 1ㅡ1ㅡ4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선색에 따라 필자는 지난 80년대초에 연길과 백성시에서 수차 고창일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는 당년의 남편 백창헌이 귀순한것은 사실이나 《8.7》참안의 밀고자는 아니며 그럴수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 단락의 역사를 실사구시하게 밝혀줄것을 필자와 거듭 부탁한바가 있다. 용정에서 찾은 차정숙녀사도 백창헌이 연길감옥에 갇혔을 때와 《8.7》참안시 주구가 아니였다고 찍어 말하였다. 백창헌의 진실한 한단락 역사이다. 리삼달 등의 증실자료는 쟁론할 나위도 없이 부정되어야 한다. 《8.7》참안에서의 두가지 시비는 거두어들일 때가 된것이다.5. 해란강대혈안의 진상 인제는 해란강대혈안의 진상을 까밝힐때가 된것같다. 진상문제를 두고 한심한것은 당년 화련리일대에서 적들의 50여차 토벌에서 쓰러진 사람이 도합 170여명인데 어찌하여 《0》이 하나 더 붙어 1700여명으로 된것이라 하겠다. 이 수자이면 화련리 9개자연툰 전체군중들이 죽었다는 말과 같은데 허황하기가 그지 없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실사구시하게 씌여져야 한다. 화련리일대 50여차의 토벌에서 가장 많이 쓰러진 한차례가 《8.7》참안의 53명이다. 이날 참안으로 하여 화련리에는 12명의 무명렬사묘○21가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그뒤 역사를 보면 1932년 10월 12일 토벌에 늙은이와 젊은이 16명이 희생되고 12월 12일의 토벌에 8명이 희생○22되었다. 이렇게 수차의 거듭되는 토벌에서 희생된 사람이 170여명으로 헤아려진다. 이것이 역사이며 이것이 화련리 수차참안의 참기록이다. 본문에서 필자는 역사에 대해 책임지는 실사구시의 원칙에 따라 지난세기 30년대 초 화련리 항일투쟁과 해란구유격대 활동, 적들의 련속 토벌과 8.7참안의 전후관계를 그대로 서술하여 보았다. 이런 전후관계 해명을 통해 우리는 당년 연길현 화련리일대에서, 적들의 50여차 토벌에서 쓰러진 사람이 도합 170여명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문제는 이 170여명에 《0》하나가 더붙어 1700여명으로 대거 확대된것인데 이 수자는 상기와 같이 화련리 9개 자연툰 전체인가가 다 죽고도 모자란다는 말과 통한다. 이 엄청난 수자로 하여 광복후 1946년 10월에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길현해란강살인사건청산대회》가 열리고 전대미문의 《해란강대학살》 또는 해란강대혈안으로 번져졌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사실에 따라 실사구시하게 씌여져야 한다. 화련리일대 50여차의 토벌에서 가장 많이 쓰러진 한차례가 8.7참안의 53명이고 이 참안으로 하여 화련리에서는 12명의 무명렬사묘가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그뒤 1932년 10월 12일 토벌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16명이 희생되고 12월 13일의 토벌에서 또 8명이 희생된다. 이렇게 수차의 거듭되는 적들 《토벌》에서 희생된 사람은 도합 170여명이다. 이것이 역사진상이며 이것이 화련리수차참안의 참 기록이다. 【주해】①②화련리 항일근거지(초고) 중공용정현위당사자료연구실 1984.11③연변주 당안관자료: 3020 해당연변항일시기의 조사방문자료(2)④연변문사자료(1) 화련리농민투쟁 (량환준)⑤⑥연변주당안관자료 3020 해당연변항일시기의 조사방문자료(2)⑦⑧연변주당안관자료 3020 해당연변항일시기의 조사방문자료(2)⑨연변주당안관자료 3020⑩연변주당안관자료 3020 ⑪1983년 10월 13일 도문시 월청향 마패 3대 방정환 구술. 이광인 방문.⑫연변주당안관자료 3060 그날의 개구유격대원 태양욱 구술.⑬연변주당안관자료 4023, 리철순(리삼달)구술.⑭화룡현해당자료 제2호 권종. ⑮연변주당안관자료 3060, 태양욱구술.○16우와 같음. ○17화룡현해당자료 제2호권종.○18우와 같음. ○19우와 같음. ○20화룡현해당자료 1971. 1~1~4○21○22연변주당안관자료 3020, 원 화련리 사람 서운파 구술. 2006년 3월 21일
110    【수필】--동백꽃 련정 댓글:  조회:4242  추천:96  2006-12-24
【수필】 동백꽃 련정 동백꽃 피고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 … … 이는 한국노래 “소양강처녀”의 제2절 첫 단락이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동백꽃을 떠올리게 되고 겨울철에 핀다는 동백꽃이 신비하게만 안겨들었다. 그때마다 겨울철에 어찌 꽃으로 피어날수 있을까고 반신반의 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번에 남방 절강에 와서 2~3일이 멀다하게 동백꽃을 지켜보면서야 중국 동북이란 북방의 추운 겨울철에 견주어 동백꽃을 떠올린 내가 유치하기 그지없다는것을 자책하지 않을수 없다. 또, 인젠 동백꽃을 떠날수 없고 겨레의 또 하나의 꽃ㅡ동백꽃 련정에 깊이깊이 매료되고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수도 없다. 지난 9월초에 남방 절강에 와서 월수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맡게 되고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면서 이곳 대자연에 매료된 첫 대상이 겨레의 꽃ㅡ무궁화라 할까. 다음은 훈풍에 하느작이는 갈대와 동백꽃이라 하겠다. 향로봉 산행이 이어지던 10월초순의 어느날 오전, 여느때와 같이 귀가길인데 회계산 풍경구 호수가를 지나며 여기 1년 선배 정현자선생은 가쯘하게 다듬어놓은 길가의 미화용 잔나무무리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들이 동백꽃나무라고 알려주었다. (예? 동백꽃 나무라고요?) 나는 내가 잘못 듣지 않았나 하여 일순 어정쩡해 났지만 현실은 현실이였다. 꽃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정현자선생은 이제 곧 꽃봉오리들이 맺힐것이고 10월에 꽃피기 시작하면 겨울철 내내 피여난다고 동을 달기까지 하는데야. 그때부터 나는 며칠에 한번 꼴로 회계산풍경구 호수가와 강가를 찾아 동백꽃 감상에 열을 올리였는데 10월 중순 이후 콩알보다 커보이는 꽃봉오리들이 수없이 생겨나는것이 그렇게 흥겨울수가 없다. 며칠후에는 열콩알만큼 커지더니 붉은 색으로 부풀기 시작하면서 곧 꽃으로 피어나리라고 예시해주는것만 같았다. 나의 디지털사진기에 활짝 핀 동백꽃 송이가 처음 비껴 든것은 10월 26일, 때는 남방의 무궁화가 한창 만발하던 철이라지만 동백꽃은 그 선구자라 불리울수 있는 약간 송이들이 터져 올랐을 뿐이다. 그나마 결백하리만치 소중한 흰꽃들이 다수고 간혹 붉은 꽃이 섞이여 나를 부르고있었다. 일매지게 다듬어진 호수가 길가의 동백꽃 선구자들이였다. 11월에 잡아들어 동백꽃 송이들이 동백나무를 덮기 시작했고 피어나는 꽃들이 점점 늘어났다. 가물에 콩나듯 드문드문 피어올라 유감이더니 11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많아졌다. 그래도 만발한 모습만은 아니여 서운함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12월 초이후 호수변 남하의 동백꽃 나무들이 약속이라도 하듯 붉은 꽃들을 일제히 토해냈다. 초순을 넘기면서부터는 동백꽃 한자리가 만발한 양상을 보이여 나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4~5센치메터 폭의 붉은 동백꽃은 꽃잎이 무려 20여개로 헤아려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주변에는 희디흰 동백꽃도 있고 한국서 희귀로 알려진 연분홍 꽃도 수두룩하다. 헌데 전날비에 꽃잎들이 땅을 덮으리만치 많이도 떨어져 12월 15일의 감상모습은 아쉬움의 동반이다. 더 진한 아쉬움은 그후 며칠간이다. 요즘 며칠 련속 해맑은 날씨더니 12월 16일 토요일 새벽에 교정의 잔디에 첫 서리가 맺히고 이튿날엔 물기 축축한 흙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건너갔다. 월요일인 12월 18일 오후 급기야 붉은 동백꽃 만발한 호수면 강가를 찾으니 활짝 피어난 꽃들은 거의가 얼어서 누우런 색으로 추욱 늘어져 있어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맺힌 꽃봉오리들과 금시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만 그 모습이 여전하여 다행이라 할까. (겨울철 내내 피어난다던 동백꽃들이 남방의 늦가을 서리와 살얼음 추위도 이겨내지 못하는구나!) 동백꽃 상식에 대한 빗나간 이해는 나를 꺠우쳤다. 한국의 해당 인터넷을 검색하면 동백나무는 다른 식물들이 활동하지 않는 겨울에 타는듯한 붉은 빛의 꽃을 피운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남방의 현실은 이런 상식에 붉은 등을 켠다고 할까. 다른 식물들이 활동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여기 절강만 해도 온 겨울 내내 산야는 푸른 모습 그대로이고 겨우내 피는 꽃들도 동백꽃만이 아니다. 찔레꽃 하나만 보아도 지금껏 내내 왕성한 모습으로 붉은 꽃을 피워올리며 길손들을 반기고 있다. 우리 겨레는 겨울의 상징 꽃으로 흔히 동백꽃을 피여올리지만 이는 따스한 남방 기후를 모르고 하는 얼뜨름한 상식임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상록소교목으로 세상에 알려져왔다. 중국어로는 동백( )이고 일명 산다화(山茶花)라고도 한다. 개화기는 12월부터 이듬해 봄사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의 경우에 어울리는 지는 몰라도 중국의 남방 지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12월 중순이후 선구자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무슨말을 해야할가. 또, 문헌상 동백꽃의 뿌리는 조선반도(한반도)라고 하지만 여기 남방에만도 보편적으로 자생하고 있음은 어떻게 해석할까. 그만치 동백나무는 일본으로부터 중국의 남방일대 전역에 걸쳐 자생하는 식물로서 동백류는 약 200종 이상으로 알려지고있다. 그중 약 70종이 동백아속(亚属) 일진대 한국에서는 붉은 동백꽃이 가장 보기좋은 계절을 2월하순~~3월중순 사이로 잡는것 같다. 이것도 한국의 경우에 해당하는 상식이겠지만 절강 소흥만 보아도 12월 초부터 붉은 동백꽃이 활짝 피어나니 동백꽃에 대한 한국의 상식은 현실과 꼬이는 점이 수두룩함을 드러내고있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다. 여기 남방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에 어찌 동백꽃이 피어날수 있으랴고 반신반의 하질 않았던가. 남방에 와서야 사실 여기 겨울은 북방에서 일컫는 겨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따스한 기후라는것, 한 겨울철이라 해도 낮 평균기온이 령상 7~8도 쯤은 유지한다는것ㅡ이런 제 조건으로, 겨울철 가장 짧은 낮 동지기간 일조기도 10시간인 조건으로 이곳 산야는 푸른 숲 그대로 동백꽃 등 겨울철 꽃나무들도 시름놓고 자랄수 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우물안 개구리 시절 우습기만 하다. 어찌하든 남방에 와서 동백꽃을 알고 동백꽃 련정에 빠져들었으니 좋기만 하다. 조선반도(한반도) 남해안과 도서지방에서만 피어나던 동백꽃이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남반부 전역은 물론 서울에까지 피고있다니 더욱 그러한데 충남 서천에 동백꽃 마을이 있어 해마다 꽃피는 황금 계절에 동백 축제를 가진다는 소식, 2월하순과 3월 중순 사이 동백꽃으로 덮히는 여수 오동도 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만치 “바다의 꽃섬”, “동백섬”으로 불리운다는 소식들에 마음은 보다 련정의 파도에 휩싸인다. 언제부터일까, 동백꽃이 질때 꽃봉오리 모두가 뚝뚝 떨어진다고 그에 따르는 애절한 마음, 청춘남녀의 사랑과 리별을 동백꽃에 비유한 시와 노래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니 서두에서 쓴 “소양강 처녀”의 노래가사도 이런 실례의 하나가 아니더냐. 동백꽃 련정, 남방에 와서 빠져든 동백꽃 련정은 시간과 더불어 부풀어만 간다. 동백꽃에 대한 감상과 리해가 깊어갈수록 더더욱 그러하니 나의 마음은 제법 동백꽃과 하나로 이어져 굽이치는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간만 있으면 월수외국어대학 가까이 호수와 남하로 동백꽃을 보러가며 동백꽃가를 거닐며 붉은 꽃, 흰꽃, 연분홍꽃 동백꽃 속에 묻혀본다. (2006년 12월 20일)
109    [론문](13)--서전서숙과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문제 댓글:  조회:4243  추천:90  2006-12-23
서전서숙과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문제1. 제기되는 문제 올해는 연변 용정에 세워졌던 서전서숙 창립 100돐이 되는 해이다. 그만큼 역사가 유구하여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서전서숙을 연변조석족의 첫 근대학교로 여겨왔다. 조선족교육을 론한 지금까지의 자료와 글들이 모두 그러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가를 모르고 오늘까지도 이 실수가 거듭 되어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로 100돐을 떠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용정시 실험소학교 교정에 세워진 서전서숙 비문에도 연변의 최초 근대학교로까지 새겨져 더욱 그러하다. 그럼 서전서숙은 어찌하여 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닌가, 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는 어느 학교를 곱아야 하는가, 이를 밝히자면 조선족 이주후의 첫 교육기관ㅡ서당으로부터 리상설과 서전서숙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고 서전서숙에 앞선 훈춘현 동광학교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이속에서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니라는것이 스스로 풀려지게 된다. 2. 리상설과 서전서숙 흘러간 역사는 조선서 살던 우리 겨레가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량적으로 중국에 이주하기 시작한것은 19세기 중엽부터임을 알리고 있다. 예로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에 남다른 중시를 돌려온 이땅의 조선족들은 매일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형편에서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당시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마다에서는 훈장을 모셔다 서당을 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당은 중국에 이주한 우리 겨레들에게 있어서 최초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였다. 그만큼 서당의 형태는 각이하였다. 온 마을이 힘을 합쳐 서당을 꾸리고도 했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서당을 꾸리기도 하였다. 살림이 유족한 집들에서는 자기 집이나 친척집의 자녀들을 위해 단독으로 서당을 꾸리기도 했다. 그 시절 서당의 선생을 훈장이라고 불렀다. 당시 훈장가족의 생활비는 학부형들이 부담하였다. 객지생활을 하는 훈장일 때는 훈장의 식사, 의복도 학부형들이 도맡아 책임지였다. 학도가 많은 큰 서당은 훈장, 접장(接長), 학도로 이루어졌다. 훈장은 학습성적이 월등하고 나이가 많은 학도를 접장으로 지정하였다. 접장은 자기가 먼저 배우는 한편 나어린 학도들을 가르치였다. 이렇듯 조선족이 모여사는 마을마다 거의가 서당이 일어섰는데 연변의 서당교육은 20세기초까지 흥성의 일로를 걸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연길현에 조선족이 꾸린 서당이 116개소에 달했다고 한다.① 그후 사립학교가 흥성해짐에 따라 서당교육은 된 충격을 받았으며 점차 근대학교교육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서당교육은 단번에 일소되지 않았다. 근대학교교육의 선두에 선 학교중의 하나가 서전서숙이다. 서전서숙을 말하자면 리상설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1905년 11월, 일제침략자의 핍박에 의해 치욕적인 매국조약ㅡ《을사5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조선인민들의 지대한 민족적의분을 자아냈다. 1907년 5월에 네덜란드의 헤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의정부참사로 있던 리상설은 나라를 잃게 된 기막힌 처지를 온 세상에 공소하며 외세의 동정을 얻으려고 생각하던차에 1906년 봄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용정촌에 와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표면상에서는 망명자의 신분이였으나 기실은 고종왕의 밀령을 지니고있었다. 당시 조선과 린접되어 있은 연변은 조선애국지사들의 해외구국운동의 중요한 활동무대로 되고있었다. 《배우는것이 힘이다!》, 《배워야만 망국노의 처지에서 벗어날수 있다!》 이렇게 뜻을 세운 리상설은 리동녕, 려조현, 정순만, 박정서(박무림), 황달영 등 조선인애국지사들과 함께 1906년 8월 육도구(지금의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② 리상설은 선뜻 자금을 내놓아 용정촌기독교회 인사 최병익의 8간집을 사서 서전서숙으로 하였던것이다. 리상설은 친히 서전서숙의 숙장을 맡고 교원까지 담당하였다. 그는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 등 3명을 교원으로 초빙하고 처음으로 학생 22명을 모집하여 글을 가르치면서 자기의 재산을 서슴없이 서전서숙의 운영경비로 내놓았다. 그는 일제의 노화교육을 반대하고 학교에서 자연과학지식을 보급시킬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 진보적주장은 서전서숙의 운영방침으로 되었다. 1907년 4월에 리상설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고종왕의 신임장과 러시아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지닌 리준을 만났다. 리상설은 리준과 함께 씨비리렬차를 타고 러시아수도에 가서 러시아주재 조선공사로 있었던 리위종을 만났다. 조선밀사로 된 이들 셋은 5월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그에 도착하여 조선대표로 회의에 참가할것을 수차 요구하였으나 번마다 거절을 당했다. 이에 분노한 리준은 조국을 구원하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기고 이역만리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서는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리상설이 네덜란드의 헤그로 간후인 1907년8월에 용정에 주재하는 일제의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가 세워졌다. 일제를 반대하고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자는 서전서숙의 학교운영방침은 이 파출소놈들의 불안을 자아내게 되고 서전서숙은 경비난③, 일제놈들의 핍박에 의해 페교되고 말았다. 그후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훈춘현 탑자구 부근에 옮겨가 3개 반급을 설치하고 74명의 학생을 받아들인후 단기속성반을 꾸렸다고 알려진다.④ 탑자구는 훈춘현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110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1934년도 탑자구에 조선총독부에서 제2차로 건설한 집단부락이 일어선데서 당지에서는 이 부락을 조선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렀다. 리상설은 그후 러시아 연해주의 신한촌, 수청 등 조선인집거지구에 선후하여 20여개 학교를 꾸리는것으로 배일애국투쟁에 종사하다가 1917년 봄에 연해주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7살이였다. 리상설은 바로 이런 위인이였다. 하기에 사람들은 리상설을 조선족근대학교교육의 제1인 선구자로 보면서 서전서숙을 조선족의 최초의 근대학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3. 서전서숙에 앞선 동광학교 우에서 리상설과 서전서숙을 떠올리면서 리상설의 위인됨을 밝혀보았다. 조선족교육사에 종사한 연구가들은 리상설을 조선족근대학교교육의 제1인 선구자로 보면서 서전서숙을 조선족의 최초의 근대학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족교육사에 무딘 지난 80년대의 인정이다. 이것이 정설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80년대이후 조선족교육사에 대한 연구가 깊어짐에 따라 용정의 서전서숙이 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니라는것이 서서히 밝혀졌다. 지난 80년대 후반에 연변역사분야에서는 이를 두고 시야비야 했고 훈춘현의 모 학교라는 주장이 펼쳐지기는 했으나 현지조사가 따르지 못한데서 명확히 어느 학교라고 지적하지 못했다. 역사분야의 연구일군 모두가 전공이 광복전 조선족교육사가 아니니 그럴수밖에 없은것도 사실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주장이 그대로 글로 되어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편찬으로 된 《문화산맥》 제4집에 실린다. 이 책의 한편의 글에서 남일성선생은 중국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1904년에 당년의 훈춘현 옥천동(오늘의 훈춘시 경신진 경내)에 세워진 동광학교라고 밝힌다.⑤ 이 글에 의하면 동광학교가 1904년에 기독교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당지 로인들에 대한 조사에서 실머리를 잡은것으로 나타난다. 강덕2년(1935년) 6월에 출간된 만주국 《문교월보》 제3호에는 훈춘현 동광학교의 설립이 명치 27년 4월 16일로 기재되어 있다. 명치 27년이면 1894년을 가리키니 역사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남일성선생은 1987년에 당지 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동광학교는 1904년에 기독교선교사들에 의해 일어섰음을 밝혀낸다. 따라서 만주국 《교육월보》의 기재는 사실 명치 37년의 오식임을 지적한다. 헌데 동광학교는 왜서 조선인이 아닌 기독교선교사들에 의해 일떠섰을가, 이를 알자면 서양문화의 상징으로 받들린 기독교가 연변에 들어온 시기를 헤아리면 리해할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오늘의 연변땅 범위내에서 기독교가 가장 일찍 밀려든것은 돈화이다. 아편전쟁후 기독교의 신교파 여러 종파들이 육속 중국에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돈화는 벌써 19세기 말엽으로 보이는 광서년간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였다.⑥ 돈화의 기독교는 장로회파이다. 돈화에 이어 안도현에 기독교가 전해진것은 1900년 전후로 알려진다. 명월진 기독교의 흐름을 보면 1900년 전후로부터 성결교, 장로교, 조선기독교, 동아기독교 등 5대 교파⑦가 나타나게 된다. 영국 예속지인 캐나다 장로파교회 해외선교부는 1898년에 연변에다 선교구를 정하고⑧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린다. 이들 기독교선교부는 외국인들이 북간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대본영으로서 용정에 자리잡은 10여명 카나다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조선의 원산, 성진 등지에서 여러 해 전도활동⑨을 하다가 조선이주민을 따라 1903년에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들 카나다선교사들이 훈춘에 발을 붙이면서 1903년도부터 훈춘땅에도 기독교를 전도하기에 이른것이다. 이주역사를 보아도 훈춘지구는 조선이주민이 일찍 들어선 지구라는것을 알수 있다. 역사기재에 의하면 200여년간의 청조 봉금시기 훈춘일대에는 만족들이 여기저기 살고있었을뿐 조선사람이라곤 없었다. 19세기초에 두만강대안의 일부 조선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건너 훈춘일대에서 인삼을 캐거나 사냥했으며 산협에 황무지를 일구고 날농사를 지었다. 1848년에 조선이주민 리응삼이 흑정자에 와서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⑩ 흑정자는 훈춘시 경신진 경내의 마을로서 1884년에 이르러 흑정자에 자리잡은 조선이주민이 벌써 110여세대를 이룬다.⑪ 1889년에는 훈춘일대에 들어선 이주민이 2350세대에 12490명에 달한다고 하니⑫ 오늘의 경신일대는 두만강대안의 삼가자, 량수 등지와 더불어 당년의 훈춘현에서 조선족의 이주역사가 가장 길다는것을 알수 있다. 동광학교가 세워졌다는 경신진의 옥천동이 바로 흑정자이다. 1904년도 아닌 1884년에 벌써 흑정자ㅡ옥천동에 조선이주민이 110여세대를 이루었다고 하니 카나다 선교사들은 이 마을에 발을 붙이고 선교활동의 한 수단으로 학교교육에 살손을 댔다. 동광학교는 주변마을의 학생들까지 통학하거나 기숙하여 한때 학생이 150여명에 달했으니⑬ 이학교는 경신일대는 물론 연변경내에서도 연변조선족근대학교의 선구자로 될만도 하다. 4. 결론ㅡ서전서숙은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니다 2001년 9월, 원 연변역사연구소 소장 한준광선생이 리사장을 맡은 중국조선민족 사학회는 심양에서 9.18사변 70돐 학술세미나를 가지였다. 그번 세미나에서 필자는 “9.18사변전후 일제의 과 조선족 인민들의 반대투쟁”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습관대로 서전서숙은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라고 불리우지만 사실은 아니며 조만간에 훈춘현의 모 학교로 밝혀질것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1999년 6월에 출판된 “문화산맥” 제4집을 2004년 3월에야 보았으니 2001년에는 그렇게 지적할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서전서숙이냐, 동광학교냐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아도 잘못알았기에 서전서숙이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로 뛰여올랐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조금만 역사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변에서 서전서숙보다 이른 학교가 오늘의 연길시 북산소학교라는것을 알것이다. 공립학교로 불리운 이 학교는 1901년에 설립되었다는 설도 있긴 하지만 믿을만한것은 그래도 《연길현지》에 기재된 1904년이다. 아직 이보다 이른 학교는 보이지 않는다. 본문에서 용정의 서전서숙과 훈춘의 동광학교를 둘러싸고 그 역사배경을 밝히면서 연변조선족 첫 근대학교의 역사를 서술하여 보았다. 역사를 쓰는 글은 어디까지나 역사에 대한 실제연구와 검토를 거친 뒤에 씌여져야 역사의 시련을 이겨내고 오류에 오류를 피할수 있다. 이런 취지에 립각하면 서전서숙은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니며 연변최초의 근대학교는 더구나 아니다. 리상설과 그가 세운 서전서숙이 서당교육에서 근대학교교육으로 넘어서던 역사적시기에 중국조선족의 초기의 근대학교교육에서, 용정이라는 조선족문화의 서울에서 일으킨 역사적 역할은 마멸할수 없지만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기에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란 월계관은 더는 쓸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결론은 한마디다. 서전서숙은 연변조선족의 첫 근대학교가 아니다. 아직 1904년에 설립된 훈춘시 동광학교보다 더 이른 학교는 모르는 시점에서 동광학교가 서전서숙을 대체하여야 함은 역사적 결론으로 알려진다. 동광학교가 있었음으로 하여 연변조선족 근대학교사는 2년을 앞당기게 되고 1904년에 세워진 연길시 북산학교와 더불어 일치를 가져오며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주해】:①연변조선족교육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7월, 제17페지②동상서, 제23페지③송우혜, 윤동주 평전, 한국열음사, 1988년 10월, 제55페지④연변문사자료 제5집, 제3페지⑤문화산맥, 제4집,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9년 6월, 제131페지⑥ 연변문사자료, 제8집, 172페지⑦ 동상서, 177페지⑧ 동상서, 114페지⑨ 동상서, 114페지⑩ 문학과 예술, 1991,3, 제 51페지⑪ 문학과 예술, 1991,3, 제52페지⑫ 동상서 ⑬ 문화산맥 총서(4),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9년 6월, 제132페지 ( 2006년 3월 22일)
108    [남방기행](6)--두번째 산행지는 울부짖는 산 풍경구 댓글:  조회:5549  추천:91  2006-12-21
【남방기행】(6) 두번째 산행지는 울부짖는 산 풍경구 1 오늘 12월 9일은 절강연우산악회 결성후의 두번째 산행일이다. 시초 란정풍경구를 산행지로 잡았다가 울부짖는 산ㅡ후산(吼山)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래도 무조건 따라주는 이곳 연우님들이 고맙기만 했다. 아침 8시 직후 월수외국어대학 북대문에서 35선뻐스를 잡아타니 소흥시내를 빙빙 돌기만 하는 공공뻐스가 스트레스를 떠올리긴 족하다. 그보다 심각한 스트레스는 찬바람이 불어치는 첫추위 날씨라 할까. 소흥 중심 뻐스부에서 후산행 107선뻐스를 기다리는 사이만도 온몸이 오싹오싹해 나는데 오늘의 산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릴수 있을까가 걱정이다. 연우님들에 비해 옷을 엷게 입은 장국화, 김은복씨는 벌써부터 몸을 움츠려드린다. 다행히 흐린날 첫추위여도 걱정이던 비는 내리질 않는다. 게다가 10여킬로메터를 달려 소흥평원속에 외홀로 솟아오른 후산에 이르니 후산의 령험에서인지 날씨가 퍼그나 누그러져 시름이 한결 덜어만진다. 산아래 자리잡은 후산풍경구 구내에 들어서니 첫 시야에 안겨드는 누워버린 바위에 새겨진 붉은 글씨에 “월궁신견(越宫神犬)” 네글자와 그 옆에 울부짖는 개 조형으로 된 개무리 돌조각상이다. 일행이 뜻하지 않은 월궁신견이요, 개들 돌조각상 앞에 발걸음을 멈출 때 나는 울부짖는 산ㅡ후산은 사실 개산, 견산이였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하긴 연우님들과 마찬가지로 후산에 처음 오는 내가 알면 무엇을 알겠는가, 다만 해당관광안내를 먼저 보고 눈속에, 마음속에 후산을 미리 익히여 보았을 따름이였다. 2 알고보면 후산은 소흥 성 동쪽 12킬로메터 되는곳에 자리잡은 평원지대의 외진 산, 이런 외진산이 누워있는 개모양, 대가리 들고 멀리 바라보는 개모양 같다하여 개산으로 불리웠다는 얘기다. 2000여년전에 월나라 왕 구천이 대부 범려를 이곳에 보내여 사냥개를 키워 남산의 흰 사슴을 사냥하여 오나라 왕께 바치게 하였다니 일명 견산(犬山)으로 통할만도 했다. 아마도 월나라가 오나라에 패하여 월왕 구천이 3년간 오나라에 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돌아온 후의 일인것 같다. 개산, 견산이 다시 짐승이 울부짖는다는 울부짖는 산ㅡ후산으로 된것은 그후 역사속의 일이다. 재미있는것은 장국화씨이다. 나더러 후산의 표징으로 되는 개들 돌조각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며 포즈를 취한다. 멋진 포즈가 고스란히 사진으로 덮히며 성수가 난다. 기이한것은 저기 산기슭에서 뻗어져내린 나지막한 언덕받이 바위들은 먼 옛날에 벌써 채석장이였다는 점이다. 현세에 상상하는 그런 채석장이 아니라 칼로 베어낸듯 규칙적으로 다듬어낸 채석이여서 이를데없는 풍경구를 이루었으니 산기슭 첫 시작이 벌써 우리들의 마음을 끌었다. 깍아지른듯 수직절벽을 이룬 아래 인위적 못이 방생지(放生池)로 나타난다. 수직절벽가에는 아름드리 돌기둥이 일어서 그 사이로 크나큰 동굴모양을 이루어 그야말로 가관이다. 여기 바위들은 지세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전부가 칼로 찍어낸듯 다양하게 채석해낸 자리다. 3 정문앞 구간을 지나고 대면적의 귤나무 밭을 지나니 산기슭에 접어드는데 산기슭 첫 구간이 또 인위적 높은 수직절벽아래 맑은 물이 넓게 고인 못이다. 그다음 구간이 후산의 상징으로 되는 기반석(棋盘石). 기반석은 말 그대로 장기판 바위라는 말인데 하늘에 치솟은 웅장한 바위기둥우에, 그것도 30여메터를 이룬 높이우에 3개의 천연바위가 놓여있다면 운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까이 바위기둥은 더욱 높이 솟아있는데 우는 실하고 아래는 가늘며 정수리에 또 버섯모양의 거대한 돌갓을 쓰고 있어 그 모습에 입만 딱 벌어진다. 내가 그젯날 왕이라는 인물들은 일신의 향락을 위해서 천연바위를 깍아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개탄하니 박교장으로 통하는 박동석 ㅡ전임 연변재무학교 교장은 그랬기에 오늘날 풍경구를 이루지 않았는가고 유머를 터뜨린다. 유쾌한 유머속에 추위도 주춤하고 나와 김은복씨는 사진찍기에 여념없다. 그 한장한장의 사진속에 박교장부부가 다정히 들어오고 서재학선생과 박교장, 김성숙선생과 윤경옥선생, 김덕모선생, 장국화, 김은복 처녀선생들이 자리를 잡아간다. 이채로운것은 기반석아래 평평한 곳에 돌로 만들어놓은 장기돌들이다. 서재학, 박동석 선생 등이 하나의 장기돌을 들수 있을가고 모양을 낼 때 20대 중반의 장국화씨는 자기가 들어보겠다며 하나의 장기돌을 온 힘을 다해 들어올린다. 김은복, 윤경옥 50대 분들도 장기돌을 움직여본다. 김은복씨는 아름찬 장훈돌을 안아본다. 그 모습들이 사진기속에 비껴들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늘을 떠인 웅장한 기반석에 그 아래 하나하나의 장기돌들이 무척이나 이채롭기만 하다. 기반석 구간을 에돌면 허궁 세멘트계단길이 산의 정상에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부에는 수녕선사라 불리우는 불교사원이 자리하고있다. 거대한 불교사원은 아니나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루 등을 가지고 있고 대웅보전에 석가모니를 모시기까지 하여 불교사원의 모습을 갖추고있었다. 워낙 남송시기 애국시인 륙유의 선조들이 산의 동산에 절당절반, 가옥절반식으로 만적암으로 불리웠다는데 최근년간에 후산풍경구내에 옮기여 새로 일떠세웠다고 한다. 4 불교사원정문앞은 경사진 차밭으로 펼쳐졌다. 윤경옥선생의 차밭을 가까이에서 처음본다면서 기념사진을 찍으란다. 김성숙선생도, 장국화선생도 나도나도다. 그 모습들이 사진으로 찍히여질 때 부근의 대나무밭에서는 또 장국화, 김은복, 김성숙선생이 기념사진을 남긴다. 대나무에 매달리기라도 하는 김은복씨의 모습은 천진한 소녀를 방불케 한다. 그런속에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쉬운대로 후산풍경구를 내려야 하는데 평지에 나서니 동북의 한겨울을 련상시키는 찬바람이 또 일신을 강타한다. 한시간나마 밖에서 107선 뻐스를 기다리노라니 저저마다 첫추위에 톡톡히 당해야 했다. 그래도 뜻하지않게 후산풍경구를 산행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만은 후더워났다. 그저 스칠 후산ㅡ울부짖는 산이 아니였다. 지난해 중앙텔레비를 위시하여 인위적 창조물로 된 후산풍경구에서 30집 텔레비드라마 “월왕구천”을 성공적으로 찍었다면 “서유기”의 속편 등 10여부 드라마가 후산풍경구를 배경으로 하였다니 유구한 력사를 가진 소흥 후산풍경구를 산행답사한 우린 행복했다. 다시 107선 뻐스에 올라 귀로에 오를 때는 오후 1시를 앞에 둔 시점이였다. 두번째 산행지ㅡ후산, 울부짖는 산 풍경구는 갈수록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107    [남방기행](7)--뒤늦은 남방 산행일기 댓글:  조회:4332  추천:98  2006-12-21
[남방기행](7) 뒤늦은 남방 산행일기(1~3) 리 함2006년 9월 16일 남방에 와서의 두번째 산행이다. 월수외국어대학 동남쪽의 향로봉은 리상적인 산행지로 정평이 나있으나 15원이란 입장권을 받기에 취할 산행코스는 아니였다. 9월 10일 로봉선사(禅寺) 구내를 통한 향로봉산행에서 골안 따라 산행길이 아닌 산릉선을 타고 내리는 또 하나의 산행길을 발견했기에 우리 산행코스는 자연스레 가다가 오른쪽 산릉선으로 이어졌다. 오늘은 오전 8시에 외국어대학의 남대문에 모이였다. 일행은 류은종교수와 서재학, 정현자, 김성숙, 나 5명으로서 류교수님을 제외한 모두가 50대 중년들이다. 향로봉아래 기슭호수와 수풀가 풍경구구내를 벗어나 로봉선사 산문가에 이르니 반시간만의 로정이다. 향로봉정상으로 이어지는 산 릉선길은 세멘트포장도로이고 로봉선사 산문 오른쪽 담벽가를 에도는데 담벽가와 산기슭포장길가에 무더기로 피여난 고사리들이 무척이나 흥취를 자아냈다. 여기 선배 정현자선생의 얘기에 따르면 국내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남방진출을 하기전까지만 해도 남방사람들은 고사리를 한낱 풀로만 간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사리에 맛을 들인 남방인들의 흥취는 어떠했을가, 우리 조선사람들이 즐겨먹는 고사리가 머나먼 남방땅에서도 무럭무럭 자란다는것이 희한하기만 했다. 향로봉 산릉선대문아래 산중턱까지 이르는데 또 반시간이 걸린다. 산행 최종지는 이곳 산중턱에서 접기로 했다. 귀가까지는 도합 한시간반 내지 두시간 로정이니 몸단련으로서는 바람직한 거리로 느껴졌다. 언제나 걸죽하게 유머를 터뜨리는 류은종교수님이 있어 산행길은 마냥 웃음으로 넘쳐난다. 2006년 10월 1일 국경일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우린 외국어대학의 동쪽방 회계산기슭에 위치한 대우릉을 산행답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우릉의 주인공—대우는 전설속의 치수(治水)영웅으로서 실제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대우님은 화하민족의 신주대지에 나라를 일떼세운 위대한 조상인물로 받들리는데 그의 최대의 공적은 치수와 나라를 세운것이라고 한다. 대우는 성이 사로서 기원전 21세기 인물, 처음에는 부락수령이였다가 중국의 첫 세습제노예제 국가—하왕조의 창건자로 떠오르는데 그의 아들 계가 하왕조의 첫 국왕으로 된다. 일생을 소흥 회계산수(会稽山水)일대서 보낸 대우는 그 영령이 회계산의 대우릉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는 옛 기운이 그대로 서린 대우릉과 높이 21메터, 무게 118톤에 달하는 거대한 대우동상이 세워져있는데 대우릉묘의 수건시작은 하조때로부터 거스르나 력사기록으로 보는 건설시작은 남조시기인 545년으로 헤아려진다. 지금 보여지는 건축물은 명청, 민국 시기의 건축위주로 되고있단다. 이런 대우릉을 지척에 두고있으나 올해 9월초 남방에 온후 대우릉을 답사한것은 나 하나뿐이다. 이럴 때 대우릉산행답사를 하게 되니 오전 10시직후 외국어대학 남대문에 모인 이들은 사유로 불참인외 윤경옥선생과 그의 남편 박동섭, 서재학과 그의 동생 친구 엄사장, 정현자, 나 도합 6명이다. 잔잔한 비가 내리는속에 산행답사가 시작되였다. 향로봉아래 호수구역을 지나고 대우릉 보행신도(神道)—대우릉패방(牌坊)을 지나니 산밑가 제우광장—제사무대가 나타난다. 대우릉과 이곳은 전국의 제우(祭禹)중심으로서 1995년 4월에 절강성 및 소흥시 각계에서는 여기에서 공제(公祭)대우릉활동을 굉장하게 벌리였다고 한다. 대우릉출입구내에서 정자속돌비석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대우릉 세글자가 반겨주고 대우릉비에서 945계단 층계를 오르니 회계산 석범산산마루에 일어선 거대형 대우동상이 우리 북방손님을 반겨준다. 높이가 21메터나 되는 대우동상은 2001년 4월에 대우릉의 제4부분 경관(景观)으로 일떠섰다고 한다. 대우동상은 그야말로 장관, 소흥시내 정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대나무숲과 이름도 모를 남방 나무숲으로 울창한 945계단 내리막길을 내리니 오른쪽가 산기슭이 대우릉구간이다. 대우릉은 오문(午门), 제정(祭厅), 대전(大殿) 등과 대전속의 대우상 등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산행과 답사로 두시간 푼이 이어진 오늘 산행은 몸을 단련하고 정서도 도야시키고 력사지식도 배우며 유람도 즐긴 일석다조 연속이였다. 2006년 10월 20일 한글발전유공자로 금방 한국에 가 대통령포상을 수상한 류은종교수님이 17일 귀가하셨다. 교수님은 려로의 피곤도, 바쁜 일정도 마다하고 오늘의 산행에 가담했는데 동행한 이들로는 서재학, 김성숙, 정현자, 윤경옥, 백미란, 나 도합 7명이다. 산행지는 의연히 향로봉 산릉선이다. 산행스케줄은 오전 7시 외국어대학 남대문출발, 8시 산행지 도착, 8시반 귀가로 짜보았다. 10월하순에 잡아드는 날씨이고 흐리터분한 날씨인데도 반팔적삼이나 와이샤쯔 차림새 산행이 성수났다. 산정에서 류교수님은 그래도 등산이 스트레스도 풀고 정신이 나는 운동이라고 평가, 등산경력자인 백미란, 김성숙, 정현자 등 선생들도 동감이다. 모두가 이같이 좋은 산행을 꾸준히 이어갈것을 표시했다.
106    [수필]--갈대의 깨우침 댓글:  조회:4125  추천:97  2006-12-21
【수필】 갈대의 깨우침 리 함 인간의 삶이란 끝없는 배움의 연장이라더니 조금도 그른데가 없는가부다. 나서 자란 내고향 북방 연변도 아닌 머나먼 남방 절강에 와서 인간 삶의 배움의 길 리치를 뜻하지 않게 깨우치게 되였으니 그것도 인간이 아닌 대자연의 한낱 수수한 풀류인 갈대, 남방에서 갈대와 벗하며 인생 반백에 삶의 궤적이 영원한 배움으로 이어져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으니 대자연이 하사한 갈대무리에 허리굽혀 절을 올려야 하지 않을가. 국경 연휴기간인 지난 10월 2일, 력사의 외통길을 고집하는 나는 외홀로 항주 옛 고려사 찾기답사에 나서 보았다. 항주고려사란 근 1000년전의 고려 명승 의천과 관계되지만 소흥~항주행 괘속뻐스로 항주에 이르매 항주고려사를 아는이란 거의 없다. 반나절의 갖은 신고끝에 항주 서호가에 자리잡은 고려사 옛터를 찾았고 옛터에 궁궐같이 일어선 복원된 웅장한 고려사를 보아서야 마음의 평온을 되살렸다. 귀로에 산간의 호수를 방불케 하는 항주 고려사 부근의 적산부 가까이 호수가를 지날 때였다. 호수가에 무더기로 자라난 갈꽃들이 해빛에 유난히도 눈부시여 발목이 잡히는데 그 한번 발목잡힘이 갈대와의 숙명적인 만남, 인연으로 이여지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사진 몇장을 찍어가지고 귀가하니 나는 깜짝 놀랐다. 깃털같은 갈꽃이 그리도 마음을 다잡을줄이야, 보고보아도 끌려드는 내 자신을 어찌할수가 없다. 갈대의 상식에 빠져보면 갈대는 습지나 내가에서 흔히 숲을 이루고 자라는 벼과의 다년생 초, 즉 풀이라는것을 알수가 있다. 갈은 지구라는 땅덩어리 북극에서 열대지방에 이르기까지 호수나 습지, 개울가를 따라 자란다고 하니 줄기는 곧고 매끈하고 키는 1.5메터내지 5메더, 잎은 길고 넓은 편이다. 이런 갈대가 줄기를 발, 삿갓, 삿자리 등에 제공하고 뿌리줄기를 중약의 약재로 제공한다면 굼실굼실 훈풍에 하느작이는 갈꽃은 또 그 신기한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잡으니 갈대 전체가 보배덩이가 아닐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갈대의 지구상 존재로 하여 녀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갈대같은 허무한 인생,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다… 등등 속담과 명구들이 생겨나질 않았는가. 그중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주견없는 사람, 너무 흔들리는 사람을 가리키니 오늘날 갈대가 내가 어디 그런 존재냐고 항의를 제기해 올 지경이다. 아무렴, 이런 갈대가 내 마음을 다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갈대는 항주 서호가에서 나의 발목을 잡더니 소흥의 회계산 풍경구 호수가와 외성하가에서 또 발목을 잡아당긴다. 그 속에서 어언 두어달 남짓, 나는 남방의 무궁화, 동백꽃과 더불어 갈대와 벗하며 가는 곳마다에서 갈대를 찾고 갈대를 디지털사진기에 잡아두었다. 인생사에서 두어달이란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다. 인생백년을 살아야 3만6천500일이요, 1200달이라고 보아질 때 더구나 그러하다. 이 두어달 기간중 지난 12월 5일, 월수 외국어대학에서 10여리 떨어진 정산(亭山)--영화탑(永和塔)에 다녀올 때가 갈대로 말해 가장 소중한 시간인것 같다. 이날 오전, 해당 강의를 마치고 영화탑에 다녀오다가 소흥의 아름다운 외성하를 따라 걷고 또 걷는데 홀연 저 앞 강가에 무리를 이룬 갈대들이 시야에 맞쳐 오질 않겠는가, 갈꽃들이 마침 가장 희한한 시기를 잡을 때여서 나는 감탄이 절로 났다. 내가 갖고있는 지식을 통털이로 털어놓아도 갈꽃의 희한함을 형용해낼 재간이 없다. 그러면서도 외성하 따라 길게 길게 뿌리 내린 갈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무리 무리 갈꽃들은 나를 인류전설속의 에덴동산에로 끌어들이는것만 같았다. 알고보면 항주나 소흥 일대의 여기 남방 갈대들은 내가 본것만 하여도 희한한 여러 종으로 헤아려졌다. 나는 나의 무지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소시적 연변의 한 시골에서 동년의 갈대피리를 만들어 불며 뛰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소학교 시절 논가의 늪에서 갈대 베여 누워놀던 떄가 어제 같은데~ 갈대라면 의례 그러한 종 뿐인가고만 리해했다. 허나 그게 아니였다. 항주, 소흥 일대서 본 같대는 내 고향 연변과는 전혀 다른, 연변서는 볼수조차 없는 특이하고도 희한한 품종이였다. 갈대를 보면서 재래의 틀안에서 한곳에만 머물러살았던 나,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생겨나는 리유를 알것 같았다. 그때부터 인터넷에 저장해놓은 갈대와 갈꽃을 들여다 보는것은 나의 남방생활의 일종 취미로 자리잡았다. 그때마다 이렇듯 희한하고 아까운 갈대와 갈꽃을 어찌 외홀로 감상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며 인터넷에 올려야겠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또, 공연한 짓으로 취미없는 뭇님들이 얼굴찌프림을 초래할가봐 저어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끝내는 조선족문화를 리드하는 대표적인 사이트중의 하나인 연우미디어 연우산악회 코너에 몇번에 나누어 10여장을 올리고야 말았다. 그날이 12월 13일. 인테넷에 띄우고도 반향이 어떨가 흔들리기만 한데 상상외로 반향이 좋았다. 갈대를 무척 좋아한다며 해마다 가을이면 산에 가서 갈대를 꺽어와 주방식탁위 나무꽃병에 꽂아올린다는 산무님, 갈대를 보면 인생사를 상기하며 멋진 작품 만들고싶다는 상공님, 갈대에 깃든 애절한 옛 사랑이야기—옛날 로마 신화 스토리를 떠올리는 조약돌님—정말이지 나는 이것만으로도 갈대공유가 보람있는 일이라고 느껴만 진다. 그 가운데서도 조약돌님 떠올려준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지금도 나의 마음을 울려준다. 인생이란 워낙 배움의 끝없는 길임이 다시다시 알려진다. 세월의 무상함을 일컸는 저 무성한 갈대엔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깃들어있답니다. 먼먼 옛날 로마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무스는 아름다운 녀인 갈라테아를 짝사랑했답니다. 그러나 갈라테아는 목동 아키스를 사랑하고있었대요. 질투심에 이성을 잃은 폴리페무스는 결국 아키스를 죽이고맙니다. 죽은 아키스는 강물로 변해 흘렀고 갈라테아는 쓸쓸한 갈대로 되여 영원히 아키스를 지켜준대요. 그래서 갈대의 꽃말은 이랍니다. 이 신화 듣고나면 녀자의 마음은 갈대갔다는 얘기 안하실거죠? … 내가 미처 몰랐던 참으로 너무나 감상적인 댓글이다. 갈대에 깃든 애절한 사랑, 한 녀인의 섬세한 마음 담은 또 너무나 충격적인 댓글이다. 한편의 수필이 강하게, 또 강하게 뇌리를 스치며 나를 떠밀어준다. 사실 하나의 연우산악회로 이어지고있지만 나는 아직 조약돌님을 대면조차 하지 못했다. 산행사진들에서 보고 댓글을 보며 조약돌님을 안것이 고작이다. 그러던 와중에 산무님의 댓글이 조약돌님한테서 조선력사책을 받았소, 력사공부하오 하니까 무언가 잡히는데가 있는데 력사공부 근 20년이란 조약돌님의 댓글이 뒤미처 떠오른다. 또 뒤미처 갈대에 깃든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가슴에 찡하게 와닿는다. 또, 너무나 류행인 를 조약돌님의 얘기처럼 흔들리는 녀자가 아닌,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 간절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충격적으로 느끼게 된다. 갈대로부터 인간 삶의 배움의 인생리치를 새로 터득하기까지, 갈대로부터 옛 고대 로마신화에 깃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리기까지 나는 정말이지 많고 많은것을 배웠다. 오늘도 저 무성한 갈대, 저 굼실거리는 갈꽃을 보면 인생을 떠올리고 마음가짐을 바로하게 되고 인생살이란 정녕 갈대와도 같다는 것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대자연속의 갈대가 아닌, 생각하는 갈대— 나는 오늘도 갈대와 벗하며 깨우침을 받으며 나의 식대로, 나의 멋대로 하루하루 보람있고 뜻깊고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애써본다. 갈숲은 나에게 인간은 움직이며 배우고 움직이며 깨닫는다는 도리를 깨쳐주었고 곳에 따라 기후에 따라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고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섭리를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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