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독교계열의 반일무장단체(46) 1919년 용정의 3.13운동을 전후하여 항일운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려면 반드시 자기의 무장으로 무장한 적을 때려부셔야 한다는 피어린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하여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맹렬한 무력항쟁을 보이었다. 아래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조직한 주요 반일무장단체들을 개략적으로 보기로 하자. 1) 신민단(新民团) 신민단은 기독교 성리교신도들을 주체로 1919년 3월 12일, 훈춘현 춘양향 초모정자에서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초기에 이 단체는 훈춘현과 왕청현 일대서 활동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러시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거점으로 하였다. 신민단의 간부진용은 이러하다. 단장:김규면 경리부장: 리존수 서기: 박재섭 총찰: 이인 , 이원섭 의사원: 김성배, 유봉득, 박득수 무장대 간부진용은 이러하다. 의사부장: 김준극 부부장: 박승길 군사령관: 양정하 부관: 주수 참모장: 김창순 대대장: 최규남 신민단의 무장대는 훈춘현 초모정자와 이수구 일대, 왕청현 춘화사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수차 무장투쟁을 벌리었다. 1920년 초 이후 두만강 이남의 조선 경내에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연하고 일본군초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해(1920년) 5월 무장대는 북로 독군부 제4대대로 통합된 후 무장투쟁을 보다 활발히 전개하였다. 6월 4일, 박승길은 30여 명 대원(47)을 이끌고 조선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하여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6월 6일과 7일에는 삼툰자전투, 후안산전투, 봉오동전투에 참가하고 10월 21일~10월 25일 사이에는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위력을 떨치었다. 신민단은 이동휘를 받들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부대와 어깨겯고 싸운 반일무장단체였다. 2) 훈춘한민회 훈춘현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 황병길은 1919년 2월 25일, 러시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산생된 상황에서 이명순, 이동휘, 구춘선 등과 연계를 가지고 4월 14일 경에 국민의회소속 훈춘지회를 조직하고 4월 23일에 훈춘현 탑자구에서 훈춘지회 제1차 총회를 가지었다. 이날 제1차 총회에서 선거된 간부구성은 아래와 같다. 회장: 이명순 부회장: 박관일(전) 윤동철(후) 총무: 서윤묵 도재무: 오현경 서기: 여남섭 오동환 연계장: 나정화 교섭과장: 황병길 나정화(겸임) 경비대장: 황병길(겸임) 1919년 8월 러시야의 국민의회가 상해임시정부와 연합하게 되니 훈춘지회는 훈춘한민회로 개칭되었다. 한민회의 전신은 1911년 황병길이 훈춘현 연통라자에서 조직한 기독교교우단이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급진단(激进团)”을 조직하고 연통라자 서골에 땅 49상을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자기 대오를 4개 중대로 편성하여 훈련을 짜고들었다. 그후 급진단은 탑자구에서 다른 무장단체 “의사단(议事团)” “포수단(炮手团)”과 연합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를 편성하였다. 군사부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군사부장: 황병길(전) 김정(후) 대대장: 최성삼 또는 김성삼 부대대장: 강석환 1중대장: 박기섭 또는 박기천 2중대장: 강석훈 3중대장: 김인화 4중대장: 정성규 기총대장: 최경천 1920년 5월 이후 훈춘한민회 군사부는 조직구성을 다시 편성하였는데 그 편성정황은 아래와 같다. 군무부장: 최경천 참모장: 나정화 학무 주계: 김정 군량 외교과장: 김화석 참사: 맹정국 대대장: 최성삼 또는 김성삼 1중대장: 박기천 2중대장: 정성오 3중대장: 이종우 헌병사령: 채덕승 헌병대장: 김인화 경호대장: 한수량 훈춘한민회 군사부는 군인모집, 자금모연, 무기구입에 힘쓰면서 1920년 초부터 무장투쟁을 활발히 벌리었다. 주요전투는 아래와 같다. (1) 1920년 1월 15일, 제2중대 조선 경원군 고건원의 일본헌병주재소를 습격(강석훈이 지휘). (2) 1920년 4월, 제2중대와 제3중대 경원군 동풍리와 서풍리 사이에서 매복전으로 경원군 일본수비대 수십 명을 사살. (3) 1920년 10월 9일, 훈춘현 하다문 하산촌 우두산에서 훈춘사건투입 일본군 한개 중대와 교전. (4) 1920년 11월 4일, 삼도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38려단 78연대의 우에사까소좌가 이끄는 2개 중대와 교전, 전투시 한민회 회장 이명순과 참모장 나정화가 전사. 3) 도독부 도독부는 최명록, 일명 최진동이 3.13운동 이후 봉오동에서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최명록은 귀화입적한 지주출신으로서 왕청현 가야하지구의 순경국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연길도윤공서 교섭서의 이동춘과의 사이가 좋아 선후로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왕청현 책임자로 뛰었다. 한편 봉오동에 학교를 꾸리고 반일교육에 몸을 담다가 3.13운동 이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무었었다. 도독부는 이 무장조직의 토대에서 결성한 단체로서 건립초기에 벌써 4개 중대에 200여 명을 가진 한개 대대로 되었다. 다른 반일무장과는 달리 이 도독부는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넉근하였는데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총재: 최명록 참모장: 박영 교련관: 변남길 외교원: 김호석 중대장: 김세종 조근식 강상모 강시범 4) 나자구의사부 1919년 3.13운동 이후 왕청현 나자구일대의 항일운동가들은 간도국민회, 훈춘한민회 맥을 이은 나자구의사부를 조직하고 대장에 이춘범, 최정국을 내세웠다. 그해 4월에는 이사장에 김석규, 총무에 김리근, 재무에 최정국, 의사원에 박창준, 오기연, 박순경, 이성렬 등을 내세웠다가 5월에 간부개선을 하였다. 간부개선은 아래와 같다. 의사부장: 김종식 재무총무: 박창준 서기: 이성렬 간부: 남영화 오백여 평의원: 최정국 김천남 1920년 8월의 자료는 이러하다. 의사부장: 김석규 총무: 김리근 재무: 최정국 의사원: 박창준 오기연 박순경 이성렬 동년 10월 경에는 간부진영이 또 바뀐 모습이다. 의사부장: 김리근 부부장: 김천보 총지휘관: 최정국 경무국장: 이춘선 재무국장: 박창준 부국장: 오백여 모연국장: 김학용 부국장: 이성렬 의사부무장대 병력은 약 200명이다. 이들은 왕청현 경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면서 경신년대토벌에 뛰어든 일본군과 수차 교전하다가 1922년에 최정국의 지휘하에 왕청, 훈춘 중쏘국경지대에서 활동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말까지 전 동북 경내에 8,450명을 헤아리는 45개의 반일무장대오가 있었는데 그중 연변지구에는 4,650명에 달하는 24개의 대오(48)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상당한 반일무장단체가 기독교계열이나 그 영향하에 있은 단체들이었다. 8. 국민회군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 1919년 3.13운동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지령을 내려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 중학부들에서 학생골간들로 연합 “맹호단, “암살대” 등 반일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용정, 국가가와 투도구 등지에서 친일주구를 체포하거나 경고문을 내어(49) 이런 자들이 친일활동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명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충렬대, 단지동맹회, 결사대(50)들도 맹활동을 보이었다. 간도국민회에서 이동휘 등의 지지 밑에 무장투쟁방침을 시달하기 위해 각 지회를 통해 연변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널리 모집하여 러시야 연해주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할 때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학생들이 분분히 결사대에 참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데서 러시야 연해주 추풍지역의 도화동, 대지안, 사개정자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결사대원들은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대장 김하석, 교관 홍군표, 이흥삼, 김일, 오영선, 남공선, 러씨야 귀화조선인 김인수, 최와실린 등 장교들에게서 반일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결사대의 외교와 재무는 연변서 간 박동원, 박경철이 담당하였다.(51) 한편 간도국민회에서는 각 지방총회에 법무부를 설치하고 보편적으로 경호대, 맹호단을 조직, 지도하여 지방을 보위하게 하였고 모연대를 널리 조직하여 군자금 모연에 힘을 기울였다. 창동학교출신이고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간도국민회 총회의 통신원이며 와룡동일대 국민회 책임자인 정기선은 적의 손에서 권총 한자루를 빼앗아 경호대를 조직(52)하였다. 일찍 함경북도 무산지구 진위대 교련관이었던 안무는 1919년 4월 이후 간도국민회와 연계하여 화룡현 덕화, 상화, 숭선, 로과 등지에 국민회조직을 확대하면서 부동 등지의 청년들로 경호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며(53) 친일주구와 밀정들의 활동을 경계하였다. 각지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방보위에 전력을 다 했다. 1920년 봄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또 각지 경호대를 기초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 국민회군을 결사대와 경호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졌는데 경호대와 국민회군의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경호대 총사령: 이용 참모: 주건 국민회군 사령: 안무 부관: 최익룡 향관: 김석두, 허동규 중대장: 조권식, 임병극 국민회군은 본부를 화전자 명당모에 두고 부동, 명동, 명신, 화전자, 하마탕, 의란구 등지에 부대를 분산, 주둔 시키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사훈련을 내밀었다. 간도국민회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국민회군, 홍범도의 의군단, 신민단,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등 항일무장단체에 배치하니 국민회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났다. 1920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군의 총병력수는 400여 명(54)(적절히 말하면 450명)이고 무기는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군사인재를 양성코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 채영, 안정근 등의 협조하에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 속에 사관훈련소(55)와 군수창고, 피복공장, 18개 소의 병영을 수축하고 재봉침 13대, 군복용 포목 15필을 마련(56)하였다. 1920년 초부터 항일무장단체들 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이 중시를 받았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가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연속 작전을 펼칠 때 간도국민회에서 적극 받들어 나섰고 1920년 1월, 조선 국내진공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홍범도부대는 국민회본부가 설치된 북하마탕에 이르러 국민회간부들과 연합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뒤 2월 21일, 3월 8일-10일, 3월 25일, 간도국민회는 각 항일무장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제1차, 제2차, 제3차 하마탕 회의를 연속 소집하고 먼저 의견이 같은 국민회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조직(57)하였다. 같은해 5월 11일에는 봉오동에서 군무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4개 무장단체 지도자회의를 가지고 연합작전합의를 보았다.(58) 5월 28일에는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고 북로독군부의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임명명단(59)은 아래와 같다. 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정일 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이병채 향관: 안위동 군무국장: 이원 군무국 군무과장: 구자익 군무국 회계과장: 최종하 군무국 검사과장: 박시원 군무국 통신과장: 박영 군무국 치중과장: 이상수 군무국 향무과장: 최서일 군무국 피복과장: 박병극 제1군 산하 제1대대장: 이천오 제2대대장: 강상모 제3대대장: 강시범 제4대대장: 조권식 북로독군부는 사령부 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설치하고 병력을 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집결시키었다. 신생한 연합부대는 두만강 남안의 온성, 남양, 종성, 회령, 무산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군경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까지 해당 통계에 의하면 연합부대는 상기 조선 국내지구에 26여 차나 진출(60)하였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치는 첫 전투도 무르익어갔다. 동년 6월 4일, 일본군 남양수비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부대는 두만강남안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한 원 기독교계열의 훈춘 신민단출신인 북로독군부 박승길 등 30여 명을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 삼툰자를 들이쳤다.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한 월강추격부대도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섰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아군의 종적을 찾아 목도고개,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일대로 진격하였다. 원 국민회군 사령이며 북로독군부 부부장인 안무는 홍범도사령을 도와 6월 7일 일본군월강부대 200여 명을 봉오동상촌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1920년 6월 7일, 안무 등은 홍범도사령과 함께 봉오동 여러 마을의 민중을 대피시키고 400여 명 반일부대를 봉오동 상촌 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 고지에 진을 쳤다.(61) 이날 반일부대의 뒤를 밟아 후안산으로부터 쳐들어 온 야스가와소좌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일본군 200여 명은 아군의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가 섬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친 첫 전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신민단부대는 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 적들의 퇴각시 퇴로를 막아 답새긴 부대가 바로 신민단부대었다. 동년 8월 말 안무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이청배병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에 중국군 맹부덕부대가 일제의 강박으로 토벌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룡현 어랑촌일대로 전이하여 홍범도부대와 힘을 합치었다. 안무부대는 화룡현 삼도구, 맹가동, 부동과 강장동 등지 지형정찰을 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면서 홍범도부대와의 배합작전을 도모하였다. 10월 21일 일본군 제19사단 37려단장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며 두갈래로 나뉘여 북왈리거우와 남왈리거우에 달려들었다. 홍범도와 안무는 주력부대를 천리봉의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62)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고 진공하다가 크게 얻어맞았다. 적 수백 명이 전멸당한 왈리거우(曰日沟) 전투이다. 싸움의 그 나날에 안무부대는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여 봉밀구골안으로 철퇴했다가 천병마냥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하고 있는 천수동 우측 산마루에 나타났다.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서 결사의 각오로 싸우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 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 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두 독립군부대는 아즈마지대의 포위를 승리적으로 헤치고 서남방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25일 고동하강반에서 또 적들에게 섬멸적 타격(63)을 안기었다. 고동하전투를 치른 후 안무는 부대를 이끌고 맹가골 방향으로 이동하고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무는 맹가골일대서 북상지시를 받고 소속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나누어 돈화, 목릉을 거쳐 밀산으로 철퇴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불멸의 휘훈을 세웠다. 9. 15만 원 탈취사건 15만 원 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기독교 청년교도들인 최봉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등 6명이 군자금조달로 조선은행 회령지행에서 용정촌출장소로 보내는 길회철도부설자금 15만 원을 탈취한 용감한 행동이다. 1919년 3.13운동 이후 연변의 항일운동가들은 분분히 항일무장단체를 무으면서 군자금조달에 힘을 모았다. 그 시기 연해주에서 러시야에 대한 무력간섭에서 실패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체코군들이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에 일본돈 30원이란 싼 가격에 팔고있었다. 하여 간도국민회에서는 1919년 여름에 모은 군자금을 대한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한테 위탁하여 무기구입을 바랐다. 김하석과 신민단 단장 김규면은 이 군자금으로 러시야 군총 2,000여 자루와 수십 만 발의 탄약을 구입했으나 운수도중 태풍을 만나 배가 한 섬에 침몰(64)되어 큰 낭패를 보았다. 바빠 난 김하석은 동년 9월 연길현 와룡동출신인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을 찾아 최선을 다해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할 것을 지시(65)했다. 이에 최봉설 등은 용정의 일본은행을 털자고 의견합치를 보았다가 조선은행 회령지행 용정출장소 직원으로 근무하는 전홍섭한테서 일본놈들이 길회선 부설경비로 회령서 용정에 일본돈 15만 원을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상기 6명은 신속히 습격조를 뭇고 와룡동 최봉설의 집에서 15만 원 탈취거사를 주밀히 짜고 들었다. 달라자 명동촌의 김하규집은 그들의 비밀련락장소로 되었다. 김하규는 최봉설의 장인으로서 회령서 학자살림을 하다가 1899년 2월 18일에 회령과 종성의 우국동지들인 김약연, 문병규, 남도천 등 과 함께4대 가족 141명을 이끌고 명동, 장재로 집단이민한 사람으로서 당시 명동예배당을 거점으로 반일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잠간 최봉설 등 6명 기독교청년신도들의 행적을 살펴본다면 최봉설(이붕)은 창동중학을 졸업하고 와룡동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명동촌 여자를 아내로 맞은 사람이다.(66) 한상호는 와룡동소학교와 명동중학을 졸업하고 와룡동소학교 교원으로 일하며 반일투쟁에 나섰고(67) 임국정은 워낙 조선 함흥에 살다가 창동중학을 다니고 나자구무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임뵈뵈는 기독교 교인으로서(68) 반일에 뜻을 품은 분인데 중학교 1학년에 다닌 아들 국정이를 반일정신으로 키우고저 와룡동 창동학원에 아들을 유학시켰던 것이다. 윤준희는 회령출신으로 서전서숙과 명동중학에서 공부하고 용정 영신학교에서 교원노릇(69)을 했다. 영신 학교는 캐나다 선교부 동산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독교교회의 학교였다. 박웅세는 명동촌 사람으로 명동중학을 졸업하고 3.13운동 이후 국민회경호원으로 활동(70)하고 있었다. 15만 원 탈취계획이 무르익은 후 최봉설과 한상호는 와룡동에 있으면서 용정에서 대거하는 윤준희와 임국정의 통지를 기다렸다. 1920년 1월 4일에 회령서 용정으로 떠난다는 전홍섭의 비밀통지가 전해지자 이들은 기타 4명과 함께 1월 4일 점심 때 쯤에 중국학생복에 중국 신을 신고 부처골어구와 재박골 사이 강변신작로에 나타났다. 재박골부근에서 이들 6명은 두패로 나뉘어 길에서 무질서하게 오가는 척 하면서 습격자세를 취해 보았다. 오후 6시경, 송금일행이 명동쪽에서 재박골부근에 나타났다. 송금일행은 간도일본총령사관 순사 나까도모와 조선이 순사 박연흠, 은행직원 하루구찌와 김용익 등 4명인데 도중에 회령의 조선인 상인 진길풍과 일본인 우편물수송원 가시하라가 동행한데서 도합 6명이었다. 박웅세와 김준이 재박골부근의 길가 주막집에서 나와 한어로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용정쪽으로 비청걸음을 해댈 때 저만치에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넷이 나타났다. 이들 6명은 송금수송대와 마주치는 찰나 불의습격을 가했다. 뜻밖의 사격에 선두에 섰던 나가모도순사와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권총 총탁으로 놈의 이마를 부셔놓았다.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조선인 상인 진길풍은 길손의 도움을 받아 그날 저녁으로 용정에 호송되었으나 구금치료 중 이튿날 오전 11시에 숨졌다. 김용억은 강을 건너 승지촌마을쪽으로 도망치고 우체원 가시하라도 줄행랑을 놓았다. 하루구찌와 박연흠순사가 동량어구촌에 달려가 중국순경들에게 알려 현지에 다달았을 때는 나까모도가 이미 절명하고 현금과 우편물을 실은 말들이 자취를 감춘 뒤었다.(71) 사건이 벌어진 후 박웅세와 김준이는 즉각 명동촌으로 떠나갔다. 새날이 밝으면 웅세는 장가를 들기로 사전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들 둘의 과업은 거사가 실현된 후 모집 중에 있는 종군 간호부 처녀들을 데리고 연해주로 가는 것이었다. 준희와 봉설이는 말을 지체없이 재박골로 몰아갔다. 제박골치기 동성참 산 속에서 뒤따르는 국정이와 상호를 만났다. 이들 넷은 말들을 나무에 매어놓고 제각기 돈짐을 나누어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그들은 해란강을 넘고 삼봉동, 조양천 부근을 지나 부르하통하를 건너 동틀무렵에 와룡동마을 서산너머에 가 닿았고 약속된 지점에서 좀 쉬면서 음식지닌 상호 아버지와 봉설 아버지를 만난 뒤 다시 길을 다그쳐 저물녘에 의란구의 산속 한 귀틀집에 들어섰다. 적들의 검거선풍을 피하여 두어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돈을 가지고 연해주 해삼위 신한촌으로 간 것은 그 뒤의 일이다. 15만 원 탈취거사 후 간도 전 지역에 걸쳐 대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과 국자가 관할 내의 와룡동이 거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국자가 령사분관의 주임이 연길도윤과 교섭한 끝에 일제총령사관과 국자가분관의 경부 2명이 지휘하는 순사 37명과 중국 측 군경 57명을 거느리고 와룡동에 달려들었으나 헛물만 켰다. 악이 난 적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체포했는데 그 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 최병국과 동생 최봉준도 들어 있었다. 적들은 최봉설일행이 의란구 방면으로 이동해 갔음을 확인(72)하였다. 뒤미처 비밀이 탄로되어 낌새를 챈 일본놈들이 신한촌의 주숙지를 돌연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적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끌며 동지들을 구하겠다며 선참 문을 박차고 나간 최봉설이 구사일생으로 포위를 돌파하고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불행히 체포되어 청진감옥에 압송(73)되었고 1921년 2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장렬히 희생(74)되었다. 윤준희 등이 청진감옥에 투옥된 후 연변과 연해주의 항일무장단체들에서 자기 동지들을 구출하고 저 각기 권총과 수류탄을 휴대한 박웅세, 김준, 염길룡 셋을 조선 청진으로 파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국정 등 셋이 처형된 후 국정의 어머니 임뵈뵈는 북간도 교회의 여전도사가 되어 평생전도회를 조직, 지도하며 독립운동에 전력했다(75)고 한다. 10. 경신년 “대토벌”과 반“토벌” 1919년 용정 3.13운동을 계기로 이 땅의 항일운동가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무장독립의 길에 나서자 이에 큰 위협을 느낀 일본제국주의는 1919년 하반년부터 “토벌’준비를 다그쳤다. 1920년 8월에 이르러 조선강점군 사령부는 전면적 “토벌”계획을 제정하고 나남주둔 제18사단을 “토벌”조직자로 내세웠다. 이달 블라디보스톡 파견군 제14사단을 토벌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10월 2일에는 이른 바 “훈춘사건”을 조작해 내고 이를 구실로 10월 6일부터 대“토벌” 전면 동원령을 내렸다. “토벌”에 투입된 군대, 경찰 등 총병력은 18,000~20,000명에 달하고 연변출병의 주력부대는 조선 주둔 제19사단이었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지대, 기무라지대, 아즈마지대 3개 지대와 사단 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어 물밀듯이 연변 각지에 덮쳐들었다.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일대를 소탕하고 백초구와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였다.(76) 그번 “토벌”후 기무라지대는 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에게 보고를 올릴 때 저들이 이르는 부락마다에서 불온단체들과 발견 후 달아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자랑하였다. 동만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압록강 이북의 조선인 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 《연변조사실록》에 의하면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족 촌락에 대하여 위협공갈하여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태워죽었다. 무릇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 이는 경신년 대토벌을 비교적 실감나게 그린 글이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성역사자료를 보면 온 마을을 모조리 몰살한 사실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죽인다면 남자들만 골라서 죽였다는 것이다. 연길현 장암동은 오늘의 용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인데 조선말로 노루바위골이다. 1920년 참안 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한 마을이었다. 장암동 사람들은 거의가 기독교신자들이고 국민회회원으로서 간도국민회 제2동북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77)되어 있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양도헌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다.(78) 하기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1920년 10월 29일(30일이라고도 함) 새벽에 스즈끼대위가 거느린,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의 보병 70여 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마을의 청장년 33명을 붙잡아 영신학교에 처넣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는 사람들에겐 다시 총알을 안겼다.(79) 이에 앞서 놈들은 용정에서 찾은 5명의 조선인 향도가 장암동 길안내를 거절한다고 전부 죽여버렸다.(80) 이날 장암동과 그 일대 마을마다 불의 세례를 겪었으며 마을 밖에는 새 무덤들이 가득 나타났다. 며칠 후 일본군은 또 다시 마을에 쳐 들어와 유가족들을 강박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렸다. 악착하기 그지 없는 놈들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연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 버렸다.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 양도헌도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일제놈들은 간도국민회의 주축을 이루는 4대 중학과 그 고장 반일운동기지들에 대해 보다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1920년 12월 6일, 일제침략군 보병 74련대 이와바시대대는 와룡동 창동학교에 불을 지르고 반일지사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창동중학교 교원이고 국민회 총부 통신원이며 철혈광복단 대원인 정기선은 권총과 등사기를 파묻고 구수하쪽으로 피했지만 잔인한 놈들은 끝내 그를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고 두 눈알까지 뽑아 내고는(81) 집에 가두고 불태워 죽이었다. 동년 11월 3일, 일제침략군 야포 제25련대 가와가미토벌대는 위자구 토벌 끝에 소영자에 달려들어 광성학교와 최기업목사의 집에 불을 질러 재더미로 만들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82) 동년 10월 21일 밤, 한패의 일본군 수비대는 자동에 덮쳐들어 후저동 정동학교를 불사르고(83) 당지에서 체포, 학살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10월 20일, 일제 침략군 한패는 명동에 몰려와 사람들을 학교운동장에 모여놓고 수색전을 벌리더니 허익근, 이용훈, 최홍택 등 10여 명을 붙들어 살해하고 90여 명의 교직원과 마을 사람들을 체포했으며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마진의 집을 소각하였다. 치떨리는 “대토벌”이었다.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 3주일” 내에만 해도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단지 1920년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기간에 훈춘현에서 살해된 조선인만 해도 249명에 달한다.(84) 그외 가옥, 학교, 교회당, 양곡 등이 타버린 수와 양은 부지기수이다. 연변의 조선족 군중들은 일본침략군의 피비린 대살륙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더욱이 기독교계열의 그네들은 출몰하는 독립군 부대를 물심양면으로 받들었는가 하면 체포당하여도 떳떳이 허리를 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원수를 단죄하며 역사의 단두대에 올려놓았다. 일찍이 충렬단에 참가한 적이 있는 연길현 로두구 의봉촌의 이경찬(당시 20살)은 “토벌”대에 체포된 후 독립투사로서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놈들이 마음을 돌릴 것을 강요하자 그는 단연 거부해 나섰으며 죽음을 앞두고 “독립 만세!”를 세 번이나 불렀다.(85) 1920년 음력 9월 초나흩날 훈춘 애국부인회 회장 김숙경여사는 훈춘독립운동의 수령이었던 남편 황병길의 유물-권총과 태극기 보따리를 딴데 옮기자고 꺼내놓았다가 연통라자 서골에서 토벌대놈들과 맞띠웠다. 위급한 찰나에 여사는 유지에 싼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 것도 뒤지지 못하게 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음력 9월 초엿새날 “토벌”대는 대황구에 달려들었다. 황병길의 딸 황정일(1913년 생)의 구술(86)에 의하면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결의한 “7인 단지동맹”의 도끼, 목데기, 손가락 마디들이 발각되었다고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양병칠, 김하정 두 교원이 체포되고 마을에서도 20여 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결박되었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안았다. 하여 김남극, 양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날 적들은 김남극과 양병칠을 북산기슭에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죽였다. 학교에도 불을 놓았다. 1920년 10월 초 이후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와 홍범도 및 국민회군 등 반일부대가 원 근거지들을 떠나 육속 화룡현쪽으로 이동했다. 김좌진부대가 충신장(오늘의 화룡시 소재지)의 대진창에 이르자 당지 조선족 군중들이 신속히 동원하여 부대를 위문하면서 점심식사를 마련했다.(87) 그때 청산리 골안의 송월평으로부터 청산 증봉리에 이르기까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로 쫙 뎦혔다. 삼도구 국민회 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밥, 초신, 의복견지 그리고 정보 등을 전하였다. 송월평의 국민회 군중들은 큰 소 한마리를 잡았다.(88) 적들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좌진부대는 송월평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면서 인차 이동하였다. 밤도와 송월평을 떠난 김좌진부대는 백운평 위 증봉리 골안 직소에 가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족 군중들이 총동원되어 아침밥, 초신 등을 준비해 가지고 골안의 부대주둔지를 찾았다.(89) 식사가 끝난 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나남주둔 제19사단 73연대의 400여 명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놈들이 어디 갔다가 오는 길인가고 물었을 때 그들은 안도 갔다 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했을 때 못 보았다고 도리머리질 했다. 결과 놈들은 시름 놓고 골안 따라 올라가다가 김좌진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 안 되어 전멸당했다. 겨우 마병 3명이 살아 달아났을 뿐이다.(90) 악이 난 적 후원부대는 백운평마을의 22~23세대의 여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 건 젖먹이고 뭐고 몽땅 집에다 처 박아놓고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마을의 민간의사 이희보 및 그의 세째아들 등 셋이 겨우 살아났다. 김응준어린이는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수의 총창을 막아나선 통에 달아날 수 있었고 이희보는 그날 쟈피거우에 왕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아내가 여자옷을 입힌데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외 남자라는 사람 전부가 불 속에 거꾸러졌다.(91) 청산리전투 기간 식량이 떨어지자 삼도구일대 국민회소속 부녀들이 음식을 이고 비발치는 탄우 속을 헤치며 진지에 뛰어들었다. 어떤 전사들이 식사를 단념하고 싸움에 전력하자 울면서 “만일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음식을 기어이 입에 대도록 하였으며 부상병간호에 바삐 보냈다. 하기에 독립군부대들은 제때에 정보를 장악하고 부대를 영활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며 1920년 10월 하순에 있었던 청산리전투(청산리일대와 어랑촌일대를 포괄)에서 일제침략군 수백 명을 죽여버릴 수 있었다. 1,200여 명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왔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 부대들은 주요활동무대를 잠시 그때의 소련 경내로 옮겼다. 전국 인민들의 반대와 독립군부대들의 무장항격, 조선족군중의 투쟁에 의해 일제 침략군은 1920년 말에 저들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전부 철거는 1921년 5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1. 맺는 말 상기와 같이 본 논문은 1910년대 북간도의 주요한 항일운동을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와의 관계속에서 검토하면서 이런 항일운동은 거의가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전개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새로운 역사시각으로 1910년대 항일사를 조명해 보는 시도라 하겠다. 어찌하여 새로운 역사시각이라고 하는가? 그 연유를 몇 가지로 개괄해 볼 수 있지 않을가 한다. 1.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북간도 항일사를 취급한 저서나 논문들에서 천주교나 대종교 등과 같이 기독교가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일으킨 역사적 역할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인정하나 이를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 시종 관통시키지 못하였다. 한데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이 시기시기 동강나면서 하나의 맥박 속에 포착되지 못하였다. 일례로, 간도교육회나 간민회는 이동휘, 이동춘, 김립, 김약연 등 기독교 동지들의 소행임에도 누구나 기독교계란 이 점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결과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은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2.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여러 종교나 항일운동가들을 망라하여 1910년대 항일운동을 전반 조선족의 항일운동으로 보면서 그 위치를 부여하는데 주력하였지 현상을 뚫고 그 내면의 참다운 뜻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지 못한 것 같다. 서전서숙을 예로 들면 그것이 구한말의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주도한 소행이고 조선족 근대학교의 첫 시도라고만 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 이상설이 뜻을 같이 하는 자기 동지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항일독립운동가 육성에 주력한 그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했다. 알고보면 서전서숙은 고립적인 단순한 근대학교 창설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가 시급한 육성이 주되는 목적이었다. 서전서숙의 갑반, 즉 고등반은 중학부와 같아 그 주요대상이 사회청년들로서 일정한 시기의 육성을 거쳐 각지에 나가 반일학교를 꾸리면서 항일독립기지건설에 뛰어들기로 되어있다. 3.지금까지의 연구시각은 나라와 이념의 차이로 같지 않은 연구결과를 나타냈다. 예컨대,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그러하다. 연구시각이 다름에 따라 마치도 봉오동전투는 홍범도가 조직, 지도하고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조직, 지도한 것으로 나타나기가 일쑤이다. 사실은 그렇지만 않다. 봉오동전투는 간도국민회가 홍범도 등과 손을 잡고 꾸준히 노력한 연합작전의 결과이다. 청산리 전투도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와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연합부대—북로독군부 그리고 간도국민회 지방지회들의 공동투쟁의 산물이다. 이를 떠나서 1910년대, 20년대초 북간도 항일투쟁의 절정을 이루는 청산리전투를 평가할 수가 없다. 간도국민회를 주선으로 한 기독교계열 동지들의 역할이 연구부진인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흔히 이들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연구시각의 최대오유는 1910년대 제반 항일운동을 기독교와의 시종관계 속에서 보아내지 못한 그것이다. 천주교나 대종교의 항일도 거대하나 이런 종교로 1910년대 제반 항일운동을 하나의 연계속에서 이어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허다한 항일운동이 이런 종교의 기치를 든 항일운동가들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기독교계열동지들의 항일운동은 특수한 의의를 띠고 있다. 그 전열에는 이동휘와 구춘선, 김약연 등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이 뛰고 있었다.여기까지 밝히고 보면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는 그 자체의 특점을 갖고 있는 바 그 특점을 아래와 같이 여러 가지로 귀결시켜 볼 수가 있다. 첫째, 관통성 1910년대 북간도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 기독교의 특점을 보면 1906년의 서전서숙으로부터 1920년의 경신년 “대토벌”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시종 관통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관통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계열의 동지들이 시종 하나 또 하나의 항일운동을 지도했거나 주력으로 등장하였다. 본고에 언급한 역차의 항일운동이 모두 그러하다. 둘째, 구심성 1910년대 기독교계 항일운동에서 선명한 특점은 1907년 9월에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택, “대한매일신보” 논설수필 신채호, 서북학회 주동인물 이갑, 애국청년 안창호, 정주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 등과 손잡고 비밀정치단체 “신민회”를 조직한 이동휘가 수령으로,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망국의 참담한 현실에서, 국내활동이 어려운 처지에서 이동휘는 신민회동지들과 함께 북간도 등지로 망명하여 김약연, 정재면 등과 함께 이 지역에 기독교문화를 전파하면서 민중을 묶어세우고 항일민족운동기지를 마련하며 항일운동과 무력항쟁을 주도하였다. 세째, 단결성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기독교계 지도자로 등장한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측근들이다. 간도국민회 회장 구춘선이 그러했고 그의 전신인 간민회 회장 김약연이 그러했다. 간민회시절에 그들은 벌써 이동휘의 두리에 뭉친 인물들로서 당시 북간도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이었다. 하기에 김립, 오영선,장기영, 김하석, 남공선 등이 이동휘를 따라 광성학교서 왕청현 나자구에 가서 사관학교를 꾸리며 무장투쟁준비를 다그치고 구춘선이 연길현 하마탕에 비밀활동기지를 구축할 때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정재면, 김영학, 마진, 최명록 등은 계속 자기 지방에 남아 후근 터전과 반일교육을 앞세우면서 반일인재육성에 전력하였다. 이는 장차 무력항쟁의 길로 나아가는데 튼튼한 경제적, 물질적, 인재적 토대를 닦아 놓았다. 네째, 우호성 중국 관리들과의 우호적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을 도모한 것은 1910년대 항일운동의 뚜렷한 특점이 아닐 수 없다. 1911년 전후시기 신민회 간부들에 의한 기독교 본격적 전파 때로부터 이들이 친중배일의 기치를 드니 중국관리들은 환영을 표시했다. 북간도 교회의 배일주의기치가 중국인과의 우호적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한데서 중국 관리들은 기독교친중파들을 우대하였다. 1913년 간민회설립이 바로 당시 북경정부(중화민국임시정부) 지지하의 산물이다. 이에 앞선 간도교육회도 연길도윤 도빈의 통역관 이동춘의 노력으로 연길도윤공서에서 지지한 산물이다.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 등은 수차 북경에 가서 원세개, 여원홍 등을 만나 간민회문제, 조선이주민 입적수속문제, 조선이주민들의 토지소유합법화 등 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하였다. 간민회 회장 김약연은 연길도윤 도빈과 막역한 사이로서 서로간 일을 처리하는 데 대단히 편리하였다. 다섯째, 통합성 1920년 초부터 시작된 항일무장단체들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은 1910년대 북간도 기독교 항일운동의 또 하나의 주요한 특점이다. 여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논것은 간도국민회이다. 1919년 하반기 이후 간도국민회는 중조국경지구에서 연속 작전을 펼치는 홍범도부대를 열성적으로 받들었고 1920년 1월에 국민회본부 북하마탕에서 선참 연합에 성공하였다. 뒤미처 국민회군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결성했고 동년 5월에는 또 봉오동에서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군무독군부, 북로독군부를 통한 이같은 통합이 이룩되었기에 북간도 항일무장단체들은 힘을 합쳐 1920년 6월과 10월에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강적 일본정규군 토벌대와 맞서 휘황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항일무장단체와의 통합과 연합작전에서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시종 선두적,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여섯째, 민중성 민심은 천심이고 병민(兵民)은 승리의 기본이라고 1910년대 북간도 항일운동에서 기독교계열의 가장 뚜렷한 특점은 민중성이다. 민중성을 지니게 된 원인은 대중의 수요를 알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파악한 데 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간도국민회라 하겠다. 간도국민회 중앙 총부로부터 기층지회까지 층층히 널리 줄을 뻗치었는데 그 세력범위는 남쪽의 화룡현 최남부 숭선으로부터, 북쪽의 최북단 나자구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양수천자로부터 서쪽의 명월구, 돈화 일대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대를 포섭하고 있었다. 이 같은 넓은 지역에 걸쳐 민중이 항일에 궐기하니 그 힘은 대단히 컸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때 그 지방 국민회 지방총회와 기층지회들에서는 한 사람 같이 일떠나 독립군부대에 수시로 정보를 제공하며 물심면으로 받들어 나섰다. 이러한 민중의 지지가 없었다면 당시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에로 이끈다는 것은 자못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특점들을 더 귀납할 수 있지만 관통성, 구심성, 단결성, 우호성, 통합성, 민중성이면 그런 대로 족할 것 같다. 1910년대 기독교계열과 그를 구심점으로 하는 북간도 항일운동이 이런 여러 가지 특점들을 구비하니 10년대 전반 항일사에서 중요한 자취를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주해】(1)(2) 연변문사자료, 제8집, 172폐지(3) 동상서, 177폐지(4)(5) 동상서, 114폐지(6)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290-291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10(7) 동상서, 290폐지(8)(9) 동상서, 293폐지(10) 연변문사자료, 제8집, 119-120폐지(11) 중국조선족교육사, 8폐지, 동북조선민족출판사, 1991. 5(12)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546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13) 연변문사자료, 제5집, 2폐지(14)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98-99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 10(15)(16)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 기념학술대회문집, “간도반일민족교육의 선구자 —김약연”에서 (17) 연변문사자료, 제5집, 112폐지(18) 동상서, 117-118폐지(19) 주해 14의 동상서, 95폐지(20) 송우혜, 윤동주평전, 44-45폐지, 한국 열음사, 1998. 10(21) 이림, 혁명투사의 요람—사립정동학교, 연변일보, 1988. 5. 25 (3)(22)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565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23) 용정 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177폐지, 연변인민출판사, 1999. 9(24) 윤병석, 북간도의 민족주의교육, 규암 김약연서거 55주년문집(25) 주해 22의 동상서, 571폐지(26) 1910년 2월 21일, 간도일본총령사관 총령사 나가다끼가 일본 외무대신 고바야시에게 보낸 “관할 내의 조선인자치회에 관한 문건”, 조선총독부: “청나라 국경관련서류”(27) 이는 일제 측의 해당자료에 의한 것이다. 전에는 “간민교육회”의 건립날자를 흔히 1909년 9월로 보았었다.(28) 주해 22의 동상서, 358폐지(29)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112폐지, 한국 고려글방, 1997. 10(30) 동상서, 113폐지(31) 연길현 연길부문집, 제28권, 1913. 2. 26, 연변조선족자치주 보관서류관 소장(32)(33) 이광인 정리, “이동춘”에서(34) 이광인 정리, “이동휘”에서(35) 강석훈 구술, 내가 다닌 북일중학교, 연변문사자료, 제5집, 201폐지(36)(37)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3), 14폐지(38)(39) 남해룡, 15만 원 사건(소련), 7-10폐지, 1963(40) 용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45폐지, 연변인민출판사, 1999. 9(41) 현대사자료 (26), 85폐지(42) 한국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 독립사 (3), 58폐지, 1968(43) 본 논문에 펼쳐진 용정 3.13운동 관련자료는 모두 1991년 제5호 “문학과 예술”지에 실린 이광인, 박경재 “이 땅을 들썽한 독립만세소리”를 주로 참조하였음.(44) 본 논문의 간도국민회 관련자료는 김태국이 쓴 “한족독립기성총회와 대한간도국민회”를 주로 참조, 이 글은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개척”에 실리었음(45) 고경(高警), 제40109호, 1921. 1. 1(46) 본 소제목의 대부분 자료는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 개척, 391-403폐지에서 주로 참조(47) 현대사자료 (27), 632폐지(48) 양소전, 중조관계사논문집, 300폐지(49) 박금해, 국자가 소영자의 독립군학교, “광성학교”,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1)·개척, 569폐지, 민족출판사, 1999. 10(50) 동상서, 561폐지, 박금해, 북간도민족교육의 요람—명동학교(51) 현대사자료 (27), 197폐지(52) 강향란, 와룡동창동학교, 574폐지, 주해 49, 50의 동상서(53) 일목, 국민회군사령 안무, 692폐지, 동상서(54)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 243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55) 현대사자료 (27) 195-196폐지(56) 일목, 국민회군 사령 안무, 개척, 민족출판사, 693폐지, 1999. 10(57) 국민회 본부 보존서류에 관한 건, 국민회군제령(军制令), 제73호(58) 현대사자료 (27), 제346폐지(59) 동상서, 80-81폐지(60) 조선민족운동사연구, 제2호, 36폐지, 일본 아오사까사, 1985. 2(61) 이광인, 박경재, 봉오동대첩, 문학과 예술, 1992. 제2호, 65폐지(62) 이광인, 박경재, 청산리회전, 문학과 예술, 1992, 제4호, 65폐지(63) 동상서, 66폐지(64) 일본외무성경찰사, 제20권, 85-86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65) 한국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11), 630-631폐지, 1989(66)(67)(68)(69)(70)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 고려글방, 118-119폐지, 1997. 10(71) 본고에서 밝힌 15만 원 탈취사건 시말은 이광인, 박경재가 쓴 “피에 젖은 15만 원 탈취거사” 주로 참조, 문학과 예술, 1992, 제1호(72)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 76폐지, 일본후지출판사, 1998(73) 동상서, 82-83폐지(74)(75) 주해 66과 동상서, 119폐지(76) 연변대학민족연구소 편, 조선족연구총서 (1), 273폐지(77)(78) 김철호, 피로 물든 장암동, 연변일보, 2004. 7. 2 (3)(79) 상해시보, 1920. 11. 9-11. 13(80) 주해 86과 동상서, 208폐지(81) 황룡국 주필, 조선족혁명투쟁사, 68폐지(82) 박금해, 국자가 소영자의 독립군 학교 · 광성학교, 개척, 569폐지, 민족출판사, 1990. 10(83) 박금해, 두만강 기슭의 반일교육중심 · 정동학교, 동상서, 578폐지(84) 고영일, 조선족역사연구, 234폐지(85) 이광인, 1989, 6, 21, 이경찬의 딸—이기순(74살), 조애숙(1913년 생) 등 안노인들 방문 (86) 이광인, 1988. 12. 4, 황병길의 딸 황정일 방문(87) 문화대혁명 전 “중공화룡현위 선전부자료” (3)(88)(89)(90)(91)연변주 보관서류관 혁명역사자료, 3061【주요 참고도서】 1.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2. 규암 김약연선생 (서굉일, 김재홍)3. 중국조선족교육사4.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1), 개척5. 연변문사자료, 제5집, 교육사료전집6. 윤동주평전 (송우혜)7. 용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8. 조선독립운동 (3) (김정명)9. 현대사자료 (26) 10. 한국독립사 (3) (한국국사편찬위원회)11. 현대사자료 (27) 12. 중조관계사논문집 (양소전 편)13. 일본 외무성경찰사, 제20권14. 조선민족운동사연구 (제2호)15. 조선족연구총서 (1)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편)16. 조선족혁명투쟁사 (황룡국 주필)17. 조선족역사연구 (고영일)18. 문익환평전 (김형수, 한국)19. 통일할아버지 문익환 (김남일)20. 연변조선족교육사21. 중국조선족사연구 (2) (연변역사연구소 편) 조선족선교의 현실과 미래, 한국 도서출판 평화와 선교, 2005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