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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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내 고향 여행(18)-천재적시인 윤동주의 고향 댓글:  조회:2936  추천:78  2006-01-16
내 고향 여행(18) 천재적시인 윤동주의 고향 리 함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면 우렷이 떠오른것이 연변 명동이 낳은 내고향 천재적 시인 윤동주이다.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는 1917년에 그 시절의 화룡현 명동촌(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나 1945년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하기까지 인생 28년을 살아오면서 생애의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내였다. 명동이란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정녕 유년기, 소년기 애틋한 모습을 비껴담은 잊을수 없는 고향이였다. 그제날의 애들한테는 명동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인 모양이다. 이 고장을 두고 윤동주의 소학교 동창생이며 외사촌인 시인 김정우선생은 일찍 자기의 글에 이렇게 묘사하였다. …명동촌…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고, 앞강가 우거진 버들숲 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였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있고 가을은 원근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이 글 묘사에 못지 않게 윤동주시인의 친동생 고 윤일주교수는 자기의 생가를 보는듯이 그려냈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김정우, 윤일주 선생이 묘사한 그림같은 이 고장이 명동촌인데 윤동주시인의 집은 학교촌으로도 불리운 이 동네 입구 첫집이였다. 다시말하면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의 교회당가까이 두채민가중 앞집이 윤동주의 생가였다. 어린 시절의 윤동주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 있는 뽕나무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그만큼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제일 부자로 알려진다. 밭도 많았고 제법 벼농사까지 지었는데 온 마을 치고 벼농사집 몇 세대중 윤동주네가 그중 한세대였다니 그 잘사는 정도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윤동주는 이런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나 최서해, 김창걸 등 작가들과는 달리 부럼없이 명동소학교를 다니였다지만 소학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어질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 따라 잘 울기도 해서 윤동주의 4학년때 담임선생 한준명목사의 회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하하! 본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오.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도는 거예요. 했으나 잘 울기와는 달리 윤동주는 똘똘이로 공부를 잘했고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정평이 났다. 한국 김정우시인의 회상에 따르면 명동소학교 4학년시절에 윤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출판하는 월간잡지 《아이생활》을 주문해서 읽었다. 그의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문학소년으로서 서울잡지 《어린이》를 주문해서 읽었는데 그들이 다 읽은후는 동네아이들 차례였다. 그 시절로 말하면 명동시골의 두 소년이 서울의 월간잡지를 구독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5학년때 윤동주와 송몽규의 발기로 그들은 등사월간잡지 《새 명동》을 몇호 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명실공히 문학소년반이고 앞날이 창창히 밝아오는 미래 시인이였다. 그후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남으로 근 10리 떨어진 화룡현성—한족 소학교 6학년에 통학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시절의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룡정 광명중학교 등을 거치며 22살되던 해 1938년 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그러던 26살되던 해 1942년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동지사대학 영문과에 다니다가 광복을 몇달 앞둔 1945년 봄에 한줌의 재가 되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1945년 3월초순에 룡정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에 의해 룡정 동산마루에서 윤동주시인 장례가 치러졌다. 이해 5월단오를 앞두고는 가족들에 의해 묘소에 《시인 윤동주지묘》비석이 세워졌다. 유고 31편으로 된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시》가 서울에서 출판된것은 1948년 1월이였다. 윤동주사망 10돐때는 또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시인의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다시묶어 같은 표제로 책을 펴냈다. 1968년 11월에는 한국 연세대학교 학생회와 문단친지들에 의해 연희전문시절 기숙사앞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하나 윤동주시인의 고향인 연변에서는 시인의 이름도 몰랐고 시도 몰랐고 묘소도 몰랐다. 1985년 5월, 윤동주시인연구에 조예가 깊은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권철선생의 안내하에 룡정에 나타나서야 룡정중학교 원로 력사교원 한생철선생의 도움으로 룡정 동산의 그리스도공동묘지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윤동주묘소는 국내외손님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떠올랐고 윤동주연구가 전에없이 활기를 띠여왔다. 1992년에 룡정중학교 대성중학 옛터앞에 윤동주시비가 일어선 뒤를 이어 1994년 8월에는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가을비가 잔잔히 내렸던 지난 9월 9일, 필자는 그제날 대성중학옛터—룡정중학교에 달려가 복원된 대성중학건물 2층에 박물관처럼 꾸려진 《룡정중학력사전시관》을 돌아보았다. 전시관에는 저항시인이며 고향시인인 윤동주의 생전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고 옛터 정문 왼쪽가에는 윤동주서시를 새긴 윤동주시비가 필자를 부르고있었다. 벌써 수차되는 걸음이였다. 윤동주묘소도, 윤동주생가도 수차 찾아보았다. 찾을 때마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윤동주고향시인의 유적지들이였다. 9월 9일 답사도 그러했다. 윤동주생가를 찾으면 선참 맞아주는것이 룡정—삼합행 룡북선 도료표식 15킬로메터가에 일어선 “윤동주생가”란 커다란 돌비석이다. 이곳에서 길을 내리면 신작로아래 복원된 명동교회옛터와 교회당남쪽가에 우뚝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소리없이 반겨맞는다. 300여년의 나이(?)를 가졌다는 고목—비술나무를 보노라니 어린시절 교회당과 우람진나무우에 올려진 교회당종각을 보며 뛰놀았다는 윤동주소년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드는것만 같았다. 교회당을 지나면 교회당 서북가에 자리잡은 윤동주생가가 보인다. 이 생가가 1994년에 복원되였다는 생가인데 생가집안에는 조선족의 가마며 물독이며 그릇들이 그대로 진렬되여 옛기분속에 빠져들게 한다. 생가 오른쪽가에는 “윤동주생가옛터”석비가 세워져 손님들을 부른다. 석비비문은 이러했다. 시인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로 된 집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력사적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정부와 룡정시문련은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유물로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신향인민정부 룡정시 문학예술계련합회 그때로부터 옹근 10년세월이 흘렀지만 복원된 윤동주생가와 무너져내린 우물터, 주위환경은 여전했다. 지난 10년간 명동과 생가를 찾은 국내외손님들이 얼마인지는 알아보지 않았지만 가을비도 마다하고 한국손님과 여기 안내자들을 실은 하이야 한대가 선행한 상태였다. 여러명은 잘되였는데 귀로시 또 택시 한대가 옛 교회당과 윤동주생가 옛 터에 들어섰다. 이름난 관광명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시각사진이였다. 생애 28년의 꼭 절반을 명동에서 보낸 윤동주시인, 시인은 정녕 일제치하기, 연변이 낳은 조선족 시인이요 세계적인 시인이였다.
44    내 고향 여행(17)-선바위와 륙도하 댓글:  조회:2936  추천:72  2006-01-16
내 고향 여행(17) 선바위와 륙도하 리 함 눈물겨운 겨레의 이주사를 펼치면 우리 멋이 진한 돌봉, 아들골, 애끼골, 외돌배기, 두텁골, 쇠골, 늪골 등 지명들에 접하게 된다. 아쉬운것은 그후 지명조사때 이런 마을이름들이 그 뜻과 발음에 따라 석봉(石峰), 자동(子洞), 제동(弟洞),고석동(孤石洞), 후동(厚洞), 금곡(金谷), 로과(芦菓) 등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허나 오랑캐령 북쪽너머 명동일대의 선바위는 그제나이제나 끄떡없이 그 이름 그대로 우뚝 솟아 길손들을 반긴다. 선바위, 우리 겨레로 말할 때 정녕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하기에 허다한 문인들은 명동을 외울 때 자연스레 선바위를 먼저 떠올리군 했다. 내 고향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한 학급동창생이며 외사촌인 한국시인 김정우선생은 자기의 글 “윤동주의 소년시절”에서 명동의 자연환경을 묘사하면서 선바위를 잘 그려냈다. —명동촌의 자연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북으로 완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주고있다. 그 바위돌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싸움터로 여겨지는 산성이 있고 화살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되군 하였다.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갔다. 어린시절의 회상이여서 어딘가 방향이나 산세에서 빗나간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선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명동의 주위환경을 보는듯이 그려냈다고 할수 있다. 이를 두고 불후의 걸작—“윤동주평전”을 펴낸 한국의 녀류소설가이고 력사학자이기도 한 송우혜녀사는 “김정우시인의 글은 윤동주의 명동시절의 자연환경을 정말 한폭의 그림그리듯이 서술하고있다. 참으로 아름답다.”고 적절히 평가를 내리였다. 이에 앞서 송우혜선생은 자기 저서 “윤동주평전”에서 선바위를 주축으로 하는 명동의 외형을 윤동주집안과의 관계속에서 살펴보았다. —명동은 그곳에 명동서숙이 생기면서부터 명동마을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다. 이민이 들어가기 이전 청국인 대지주 동한이 소유하고 있을 때엔 “동가지팡”, “부걸라재(凫鸽砬子: 비둘기바위란 뜻)” 등의 청국식 지병으로 불렸다. “부걸라재”는 명동에서 용정쪽의 골짜기입구에 커다란 바위 셋이 우뚝 서있었는데 (한인들은 이 바위들을 “선바위”라고 불렀다.) 거기 비둘기들이 많았던데서 연유했다는것이다. 선바위의 유래를 밝히는 실사구시한 서술이라 하겠다. 유감스러운것은 명동의 해당자료를 그 이상 더 접촉하지 못하여 명동이기에 앞서 지명이 룡암동이였다는것을 몰랐다는것이다. 이런 연유로 송우혜선생은 명동촌을 학교촌이라고도 했는데 학교촌, 룡암촌을 명동촌과 갈라본것 같다. 김정우시인과 송우혜소설가의 선바위글이 상기 인용이라면 필자의 친구이고 중년소설가인 류연산은 장편기행문—“혈연의 강들”에서 륙도하를 거스른 지신향 신동골어구에 예전엔 세개의 큰 바위산이 우중충 솟아있었다면서 그중 두개의 산(실제는 하나의 바위산이 없어졌음)이 없어진 비감을 이렇게 토로하고있다. —나는 룡정에서 명동으로 가는 길에 숭엄한 심정으로 선바위를 바라보았다. 그제날엔 세개의 바위산이 가지런히 솟아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의 산이 외홀로 하늘을 떠받든 기둥마냥 힘겹게 치솟아있었다. 돌을 까서 길을 닦느라고 남포질에 두개의 산이 거덜이 난것이다. 바위산이 있었던 흔적인 돌너덜은 마치도 전쟁의 창상마냥 참혹하게 안겨왔다. 그랬으면서도 거대한 탑마냥 하늘공중에 우뚝 솟은 외로운 선바위는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변하여 나의 시야로 달려왔다. 그것은 다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뒤바뀌기도 했다. 과시 소설가다운 마음의 토로이다. 전설속의 선바위, 이주의 옛말을 담은 선바위는 이 중년소설가에게 “장검을 비껴든 전설의 영웅”으로, “애국지사들의 장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 필자한테는 선바위가 또 윤동주소년시인의 거룩한 모습으로도 떠올랐다. 어떻게 보아도 소년 윤동주와 떼여놓을수 없었다. 선바위,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이는 상기 인용문에 밝히다싶이 윤동주의 소학교동창생 김정우선생의 글에 묘사된 한 단락이다. 사실 선바위부근의 장재촌이나 명동촌 등지의 사람들은 어른, 아이나를 막론하고 해마다 봄이 오면 삼형제바위를 찾아 들놀이를 즐기군 하였다. 지난 80년대로부터 이어진 명동일대답사시 장재촌, 명동촌의 로인들이 말이다. 그속에는 부자집장손으로서 “마음 여리고 공부 잘하던 어진 소년”윤동주도 들어있었다. 한창 나이의 소년— 윤동주 또래들에게 있어서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는 마을부근 야산이나 선바위는 그야말로 들놀이의 무릉도원이였다. 선바위가 주는 멋은 또 탁 트인 시야가 아닌가싶다. 선바위쪽에서 골따라 남쪽을 바라보면 명동지구라 일컿는 수십리골안과 골안저쪽의 오봉산이 한눈에 안겨든다. 그 골안 복판으로 내물을 방불케 하는 륙도하가 졸졸 흘러내린다. 륙도하는 백리륙도하라고도 일컿는데 룡정시 지신진 동남쪽의 오봉산기슭에서 발원하여 지신, 명동, 장재, 선바위구간, 원 광신향 구간을 거쳐 룡문교 웃쪽에서 해란강에 흘러든다. 말하자면 해란강의 하나의 지류인것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김성호선생은 “백리륙도하”라는 한편의 글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요람은 해란강이라고 말하고싶어졌다.”면서 해란강의 “하나의 줄기인 륙도하도 역시 우리 문화의 발전에서 씨앗을 발하시킨 젖줄기라고 여기지 않을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실 그러했다. 백리나 면면히 이어졌다는 륙도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내물을 방불케 한다지만 100여년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는 큰 강이였다고 한다. 이 강 량안에는 조선서 살길을 찾아온 조선이주민들이 여기저기 마을을 지어 모여살았다. 그래서 륙도하는 우리 겨레를 키운, 우리 문화를 이어준 생명의 젖줄기이기도 했다. 19세기 90년대이전만 해도 이 지구는 수림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한 한적한 고장이였다. 1885년을 계기로 청정부에서 200여년간이나 지속된 봉금령을 정식으로 페지하자 기아에서 허덕이던 조선 북부지대의 농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었다. 1899년에 이르러 장재촌에 30세대, 하중영촌에 10세대, 중영촌에 8세대, 성교촌에 20세대, 소룡동에 15세대, 대룡동에 20세대, 풍락동에 80세대를 이루었는데 이 7개 촌의 세대수는 무려 근 200세대에 달했다. 이해 1899년 2월 18일에 두만강남안의 조선 회령, 종성 등지에서 김약연 등 네 학자가문의 남녀로소 141명이 명동일대에 이주해오자 이 일대에는 서재들이 일어서며 새로운 부흥을 맞이했다. 이런 고로 오늘 륙도하를 거슬러 답사하노라면 그제날의 명동지구에서만 해도 김약연선생의 공덕비와 묘소, 윤동주시인의 생가, 청년문사 송몽규의 생가, 김창걸선생문학비, 그제날 명동학교자리와 복원된 교회당, 광복전 화룡현성자리—지신촌을 볼수가 있는걸가. 선바위 북쪽은 또 어떤가, 윤동주와 송몽규의 묘소가 룡정 동산묘지에 있다면, 3.13반일의사릉, 15만원 탈취거사 옛터, 1930년 5.30폭동지휘부 옛터, 주덕해생가 옛터기념비 등이 관광명소로 줄줄이 이어져 관광객들을 부른다. 선바위와 백리륙도하—이 고장들은 정녕 마음이 가 닿는, 또 마음이 끌려가는 력사의 고장이요, 문화유적지이다.
43    내 고향 여행 (15)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1) 댓글:  조회:2918  추천:53  2006-01-08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1) 리 함 1 연길시 동쪽 10킬로메터되는 곳에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성자산산성이 있고 한때는 력사상 단명을 가진 동하국의 사실상 수도였다지만 이곳 성자산성이 고구려시기의 산성이였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한것 같다. 병술년 새해 벽두에 연우산악회에서는 력사속 성자산성을 따라 두루 걸어보면서 내 고향 먼먼 그제날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1월 7일 오전 8시, 약속대로 시안의 로잔부근의 15선 시발점에 모이니 산악회회원들외에도 연변대 석사연구생 등 여럿이 섞이였다. 성자산산성을 전문 답사한다는 말을 듣고 모여든 그네들이였다. 연길시에 살면서 살아움직이는, 유구한 력사가 깃든 성자산성을 모른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그들이 대견스러워보였다. 헌데 성자산 서남쪽가에 이르니 어느 길을 택하느냐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서남쪽에서 성자산에 직접 오르는 흔히 걷는 길을 버리고 성자산을 북쪽으로 에돌아 북문자리부터 순서적으로 한바퀴 돌아보는 길을 택하였다. 겨울날씨 치고는 등산하기 좋은 일기였다. 성자산 서남쪽의 언덕을 넘으니 서쪽의 청차관에서부터 뻗어내린 골짜기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골짜기 북쪽너머는 루루 천년의 옛 산정늪이 있다는 욕지산이였다. 필자가 동행한 산신님과 욕지산의 유래를 곁들이는데 일행가운데는 잠간 걸음을 멈추고 성자산과 욕지산의 얘기를 듣자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고고학자나 고대사전공이 아닌 필자는 일순 헤둥대다가 아는만큼 털어놓지 않을수 없었다. 진짜 헤둥댄것은 골짜기가 끝나는 동쪽의 철길가였다. 여느때 같으면 철길가로 뻗은 남행길이 보이겠으나 굴삭기로 흙을 무져놓은데서 길이 동강났다. 그통에 일순 허둥거려야 했으니 이 길안내자의 체면이 구겨질번 했다. 흙무지를 넘으니 원길이 나타나고 한참 더 길을 조이니 성자산 북문이 오른쪽 눈앞이였다. 그러니 우린 성자산을 북으로 에돌아 3킬로메터쯤은 걸어온셈이였다. 2 성자산성 북문자리는 말발굽형으로 생겨난 옛 성터의 북쪽 계곡어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좌우 량측은 나무가 꽉 들어선 산이고 그 사이 계곡어구 옛 산성터에 세멘트로 만들어 세운 표시패가 두개 서있었다. 써놓은 글들이 비바람속에서 퇴색하여 성자산성, 4월13일이라는 글자를 알아내기엔 너무도 힘겨웠다. 실망이 뒤따른것은 옛산성이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성자산성 북쪽구간 산이였다. 참나무를 비롯한 키낮은 나무들이 촘촘히 들어선데서 그 사이를 헤쳐간다는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북쪽구간 옛 산성답사는 포기해야 하는 실정이였다. 별수없이 계곡 따라 조금 오르다가 왼쪽으로 언덕길을 잡아야 했다. 언덕에 오르면 옛 궁정터자리였다. 다시 말해서 산우 말발굽형으로 생겨난 분지에 생겨난 궁정옛터를 이른다. 사위는 온통 눈으로 덮혔지만 사이사이에 옛 기와쪼각들을 주을수도 있었다. 이때 성자산에 처음 오른다는 옥저님이나 산신님의 얼굴에 희열이 넘쳐남을 읽어낼수 있었다. 아는것만큼 보이고 느끼는만큼 감수가 다르다고 산신님은 연길시 가까이에 이런 옛 산성이 있다는것은 기적이라며 개발가치가 크다고 연신 되뇌이였다. 력사속의 성자산산성은 한때 단명과 비명에 사그러져간 동하국의 남경이였다. 알고보면 금나라말기에 료동선무사로 지내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서기 1215년에 동경으로 불리운 료양에서 천황으로 자처하면서 대진(大眞)국을 세웠다. 후에 국호를 동하(東夏)라고 바꾸었는데 동하국시기에 연변지구는 동하국에 망라되였다.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가 한때 연길시 동쪽 20리가의 성자산성을 행도남경(行都南京)으로 삼았기에 성자산성은 사실상 동하국의 수도로도 통한다. 그러던 1233년 9월, 적절히 말하면 동하국이 세워져 19년만에 신흥세력 몽골군이 동하국의 남경을 대거진공하였다. 원나라가 세워지기전의 일인데 성자산성을 지켜내는가 못하는가는 동하국의 운명을 판가르는 대사였다. 몽골군은 먼저 성자산산성의 평지성인 동쪽 강대안의 하룡고성(古城)을 들이쳤다. 때는 동하국사람들이 평지성을 몽땅 비우고 량곡과 무기까지 산성으로 옮긴 뒤라 두 나라 군대는 산성의 북문쪽을 에워싸고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다. 동하국의 군사주의력이 북문에 쏠린사이 몽골군의 주장 사찰은 군사를 갈라 산성의 서남쪽을 불의기습하였다. 서남쪽이 돌파되자 몽골군이 산성안으로 대거밀려들었다. 동하국군대와 백성들은 죽기내기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비운의 운명을 면치 못했다. 성자산성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쓸쓸한 페허로 되고말았다. 그때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도 산성안에 있다가 포로되여 죽었다고 전한다. 결국 동하국은 19년만에 력사무대에서 비명에 사라졌다. 필자가 옛 궁정터에서 동하국의 단명사를 피력하자 일행은 자연과 력사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성자산성은 그저 스치고 지날 산성과 옛터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3 따라서 필자는 사람들은 흔히 성자산성을 동하국의 산물로 알고있지만 기실은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라고 설명했다. 고고학계의 리문신선배의 주장이라면 연변 고고학계의 주장도 고구려산성이다. 궁정 동남쪽 200메터쯤 되는 평지에 고구려시기의 무늬암키와쪼각들이 대량 널려있는것이 그 유력한 근거였다. 이런 무늬암키와들은 고구려의 무늬암키와를 모방하여 만든것이라고 한다. 연변 고고학계 원로의 한분인 엄장록선생은 “무늬암키와의 출현을 통해 본 연변지구 옛 유적의 시대성격”이란 한편의 론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돌로 성벽을 쌓은 살기성(필자 주: 훈춘시에 있음.)과 성자산성은 고구려의 환도산성의 특징이 있으며 또 살기성부근에 양목림자 유적이 있고 성자산성의 부근에 하룡고성이 있는데 이는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위치배치와 같다. 즉 산성과 평원성을 배합하여 축조한 형식이다… 출토된 무늬암키와들의 모양과 색갈은 거개가 다 집안의 동대자유지,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무늬암키와와 비슷하거나 같다.” 력사로 보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료녕성 환인 오녀산성에서 건국된 뒤 기원전 28년에 오늘의 연변서 살고있던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만들었다. 그뒤 연변지구에서 고구려의 무늬암키와를 쓰게 된것이 서기 420년전후라고 하니 고구려산성도 그 시기의 산물이라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엄장록선생 등 연변 고고학계의 정설인데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성자산성은 그후 발해나 동하국 시기에 계속 사용된것으로 알려진다. 필자가 성자산성이 고구려산성이라고 밝히자 일행은 짙은 흥미를 가지면서 옛 성터에서 성자산의 지형, 산천초목을 둘러보았다. 이때에야 그네들은 옹군 성자산내는 말그대로 말발굽형으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중간이 움푹 패워들어갔음을 어렵사리 보아냈다. 서남에 위치한 산성의 주봉은 해발이 390메터이고 동쪽과 북쪽에 길지 않은 계곡이 있어 실개천이 각기 계곡따라 흐른다는것, 두갈래 실개천은 또 중간이 패운 산성 심장지대를 3개의 지대로 갈라놓고 산성의 동남쪽가에서 해란강물을 받아들인 부르하통하가 연길도문행 철길 따라 산성의 남쪽, 동쪽, 북쪽 삼면기슭을 에돌아 흐른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성자산성의 성벽은 산봉우리, 령마루, 산허리우에 쌓아져 그야말로 웅위로운 모습이였다. 한때는 미모의 궁녀들이 줄지은 옛성터였겠지만 그젯날의 미녀들도 세월을 피해가지는 못했으니 모든것이 세월속에 사라져버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일별하는사이 성자산산성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이 자리매김했다. 그 인상에 이어 일행은 서북쪽산으로 오르는 몇리 비탈길에 들어섰다. 도중에 수림속에서 따뜻한 우유, 콩물을 마시며 쉬여야 했지만 누구하나 행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늘찬 비탈길은 산기슭에 이르러 동강났다. 나무군들의 소수레길이였다. 그다음부터는 경사도가 심한 산비탈인데 숫눈길을 헤쳐야 했다. 그나마 한국산 등산신으로 무장한 산악회 회원들은 괜찮았으나 목이 긴 구두를 신었거나 유람용신을 신은 이들은 신바닥이 미끄러워 무척 신고해야 했다.
42    내 고향 여행 (16)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2) 댓글:  조회:2831  추천:62  2006-01-08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2) 리 함 4 드디여 서북쪽 정상에 올랐다. 무너져내린 옛 산성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산성안쪽에는 인공홈이 쭈욱 뻗어있었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올랐다. 새로운 세상을 본것 같았으니 산신님은 옛 사람들의 위대한 창조라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눈이 오솔길로 다져진것으로 보아 다녀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였다. 일행은 남쪽으로 뻗은 산성을 따라 걸음을 옮겨놓았다. 성벽둘레의 총길이는 4454메터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산등성이 아니라 옛 산성우를 따라 걷는셈이였다. 고구려때 서기 420년쯤이라 해도 1500여년의 력사를 가진 산성이니 숭엄한 기분속에 빠져듬을 어찌할수 없었다. 자연과 력사와 함께하는 시각이 좋았다. 산성 한구간을 조이니 저앞에 나지막한 등성이와 함께 오른쪽에 홈이 나타났다. 옛 석성이 그대로 실재하는 구간이였다. 잠간후에 일행 전체가 석성구간에 들어섰다. 모두가 놀라마지않았다. 처음에는 한메터쯤 되는 돌성벽이더니 그앞에는 높이까지 3메터도 넘는 돌성벽이 발목을 잡았다. 진실로 자연과 력사유적이 어우러진 구간이였다. 일행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 시각에 성벽을 자세히 관찰하노라니 깍은듯이 다듬은 돌구간은 한층한층 물려가며 쌓아 천여년의 비바람속에서도 그모양 그대로였다. 웃부분은 흙담이였는데 산성의 성벽을 돌로 쌓은 다음 돌담우에 흙을 무져 만들었다더니 그른데 없었다. 성벽은 일반적으로 밑면의 너비가 5~7메터이고 높이가 1~3메터라고 했는데 실감이 났다. 상공님과 옥저님은 각기 디지털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완정한 성벽구간너머는 동남방 가파른 내리막 길이였다. 산과 산사이 홈채기였는데 옛 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성문이 하나씩 축조되여있고 그중 서쪽, 동쪽, 북쪽 성문에 옹성(瓮城)이 설치되였다더니만 서쪽 옹성구간이 아닌가 싶었다. 이날 북쪽구간과 동북쪽 약간 구간을 제외한 산성 전체를 돌아보았지만 옹성이 설치되리만치 알맞은 서쪽성문구간은 두번 다시 찾아볼수 없었다. 성벽따라 안쪽에 홈이 뻗어있고 구간구간 웅덩이가 패워있는것이 인상적이였다. “서쪽성문”구간앞산에도 산성따라 오솔길이 뻗어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흔적을 나타내는데 크고작은 산봉우리 두세개를 지나며 동쪽으로 나아가니 자연과 하나되는 길이 끊기였다. 이곳구간에서 방향을 안쪽으로 잘못 잡아서인지 한동안은 엣 성터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동쪽구간에 들어서서야 옛 성터가 다시 보이였는데 옛 성터안에는 웅장한 높은산이 따로 솟아있었다. 해발 390메터의 주봉이 이 높은산이 아닌가싶었다. 옛 궁정터자리에서는 느낄수 없는 산안의 산은, 대자연은 어느것 하나 같은것이 없다는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5 동쪽구간의 옛 산성구간은 인적이 끊긴 지대였다. 오솔길도 생기지 않아 초행길을 헤치는 우리는 가끔 나무숲속을 헤쳐가야 했는데 나아가는 길 전체에 가랑잎이 무드기 깔려 가랑잎 밟는 소리가 그리도 정다울수가 없었다. 소시적 고향의 산에서 뛰놀며 가랑잎과 씨름하는 기분이였다. 옥저님도 소시적 철부지시절을 떠올렸는지 가랑잎이 쌓인 산성의 한 홈구간에서 벌렁 드러눕더니 얼굴부분을 제외한 몸전체가 가랑잎속에 묻히였다. “천진란만한” 그 모습을 사진찍느라고 상공님이 샤따를 둘러대고 뒤따르던 일행이 몰려들어 손벽치며 폭소를 터뜨린다. 산이 알고 우리 일행이 아는 즐거운 시각이였다. 우리 일행을 더욱 희한케 하는것은 동쪽의 산성구간에서 때아니게 피여난 무더기 진달래꽃이였다. 일전에 원 연변텔레비라지오방송국 부주필 김대현선생이 연변일보에 실은 한편의 기사에서 양력설밑에 성자산에 올랐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소담히 피여난 진달래꽃을 보았다더니만 과연 그러했다. 다른 점은 요즈음 강추위에 얼어서 옹송 그린 애절한 진달래꽃모습이라 할가. 일행은 한겨울에 피여난 진달래꽃은 처음 본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게다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의 합수목이 발아래에 펼쳐지고 평지성이 저 강너머여서 더 흥이 났다. 이러구려 일행이 나아가는 옛 산성길은 즐거움과 호기심과 환희로 넘친 답사의 시각시각이였다. 필자와 함께 시종 앞에서 새길을 헤쳐가는 이는 연우산악회의 봇나무님과 산신님. 옥저님과 더불어 누구보다도 성자산성답사에 빠져든 봇나무님과 산신님이 돋보이였다. 녀성의 몸인 봇나무님은 남자들에 못지 않게 잘도 산을 탔다. 때로는 옛 산성 따라, 때로는 옛 산성안 홈을 따라 나아가는 봇나무님은 랑자군(郞子軍)을 거느리는 녀장수를 방불케 하였다. 6 옛 산성은 다시 동북쪽으로 사리여든다. 이 구간은 때때로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지고 단나무가 빽빽이 들어설 때가 많아 길을 바꾸어야 했다. 어느덧 우리 일행은 동쪽의 성문을 가까이에 둔 구간에 이르렀던것이다. 산성을 따라 걸은 길만도 이미 6~7리는 잘되였으니 동쪽 동문가까이서 보는 타원형의 둥그런 산성이 또 다른 모습을 토해냈다. 성자산성 동쪽의 계곡을 따라 내리니 옹성이 설치되였다는 동쪽의 성문구간이다. 산과 산사이 두 비탈에는 뻗어내리고 뻗어오른 옛 성터자리가 완연했는데 계곡따라 올라오는 오른쪽 옛성터밑에 돌을 깍아세운 “성자산산성” 표시패가 조선어, 한어로 나뉘어 서있었다. 길림성문화유물보호단위인 성자산산성은 길림성인민정부에서 1961년 4월 13일에 공포하고 도문시인민정부에서 최근 10년안팎에 세운것으로 보이였다. 세멘트판으로 되여 글씨가 다 지워진 북쪽의 북문표시패에 비해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있었다. 표시패아래 계곡어구는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7대로 불리우는 산성리마을이다. 길가에서 한 로인을 만나 잠간 이야기를 나누니 워낙 30여세대를 이루던 조선족마을 이 지금은 15세대쯤 밖에 안되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있었다. 도시화의 흐름은 이곳에서도 막을수가 없는 시대적인 추세인가 본다. 일행은 산성리 부근에서 얼어붙은 강을 지나 천년송 세그루가 서고있는 하룡촌에서 따뜻한 점심상에 마주 않았다. 때는 이미 점심 12시반이라 오늘 답사산행은 장장 세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안내자가 없은데서 성자산의 평지성인 하룡고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답사할수가 없었다. 어찌하든 기쁘기만 한 즐거운 하루라는 일행이다. 대자연속에서 연우산악회와 함께하는 성자산산성 주말산행이 그리도 좋더란다. 서로 나누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산행이 그래서 좋다고 하는걸가, 우린 성자산산성 따라 쭈욱 걸어보았습니다.
41    내 고향 여행 (14) 백두산 무송쪽엔 서쪽비탈코스가 있다 댓글:  조회:3741  추천:80  2006-01-06
백두산무송쪽엔 서쪽비탈코스가 있다 리 함 내가 알기로 백두산에 오르는 관광코스는 네갈래라고 했다. 헌데 연변의 북쪽비탈로도 올라보고 장백현의 남쪽비탈로도 올라보고 조선의 삼지연쪽 코스로도 올라보았지만 유독 무송현의 서쪽비탈 코스로 올라보지 못하여 천만 유감이였다. 그러던 내가 행운이 터지여 련속 두번이나 무송의 서쪽비탈로 백두산에 오르게 되였으니 이 기쁨, 이 행운을 그 어디에 비기랴. 지난 7월 하순에 필자와 김수영씨는 한국 손님들을 동행하여 백두산과 집안땅을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가지였다. 우리 일행은 북쪽 기슭으로 백두산에 올랐다가 집안 고구려유적지를 유람하고 귀로에 올랐는데 백두산 서쪽비탈 산문을 앞두고 김수영씨는 한국손님들에게 서파(서쪽비탈)로 백두산에 올라볼 의향이 없는가고 물었다. 서파쪽엔 장백산대협곡도 있고 북파(북쪽비탈)보다 독특한 생태계가 있다고 하니 스케줄에 없던 관광코스가 잡히였다. 북쪽비탈과 서쪽비탈 산문간에는 이도백하서 서쪽산문까지 75킬로메터의 환구신작로가 수림속으로 줄곧 뻗어있었다. 밤을 서쪽비탈의 백운봉호텔에서 지새운 우리 일행은 이튿날 아침 5시반에 산문에 들어섰다. 서쪽비탈 산문인데 천지까지의 로정은 44킬로메터라고 한다. 관광용중형뻐스는 새로 닦은 포장용도를 따라 내처 앞으로 달리건만 망망한 림해는 끝간데가 없다. 한식경이 지나 백두의 활엽림대를 지나 침엽림대에 들어서는듯 하더니 김수영씨는 잠간 차를 세우라고 했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왼쪽길가에 서쪽비탈 고산화원이라고 쓴 나무표식이 유표하게 나타났는데 그 뒤로는 고원 꼬드개판을 메운 고산화원이 일매지게 펼쳐졌다. 나는 어떻게 차에서 뛰여내렸는지 몰랐다. 먼저 핀 꽃들이 한물 간 뒤여서 무성하는 꽃들은 볼수 없었으나 그래도 이름모를 갖가지 꽃들이 수없이 피여있었다. 고산화원을 처음 보는 한국손님들은 야생화 사진찍기에 여념없다. 그 사이에 고산화원소개를 보니 꼬드개판으로 되여있는 이곳 침엽림꼬드개판은 년강수량 900미리메터이고 해발 1700메터로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토해내고있었다. 관광용뻐스는 계속 앞으로 내달린다. 산정으로 통한 올리막 길에 들어서니 구간구간 길량켠 물도랑 세멘트화가 한창이였다. 아직도 물도랑 세멘트화까지 끝내자면 이슥한 품을 들여야 했다. 올리막길에서부터 수림이 사라지기시작하더니 대면적의 사스레나무림이 나타났다. 민간에서는 자작나무라고도 하는데 밑둥이 실하고 키가 너무 크지 않은 흰색 모양의 나무줄거리가 구불구불 옆으로 뻗어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한국인들은 아이들마냥 련속 탄성을 토해낸다. 북쪽비탈에서는 보기가 흔치 않은 서쪽비탈만의 풍경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사스레나무림대를 지나니 온통 고산초원인데 산우나 산허리나 골짜기나 어디라없이 푸른 단장이다. 이에 걸맞게 이곳의 서쪽비탈은 갖가지 뭇꽃들이 이자 한창이여서 그야말로 선경속을 달리는 기분이였다. 어느덧 관광용중형뻐스는 산정에로의 구비구비를 탈더니 우리 일행을 서쪽 비탈의 산등성이 주차장에 내려놓았다. 이제 한창 걸음마를 타는 서쪽비탈이라 주차장엔 간이음식부와 간이매대가 조금있을뿐 휑덩그렁한 모습이였다. 그래도 아침인데도 관광객들로 붐비고 이색적인 풍치여서 기분만은 좋았다. 이제부터는 포장길이 끝나고 산정으로 통한 계단길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담가와 담가군들이 보이기에 물어보니 그들은 수요되는 관광객들을 산정으로 세사람이 메여 올린다고 했다. 그러니 계단길이2000여메터나 산정으로 이어 졌다는 말인데 한번 담가로 다녀오는데 250~300원을 받는다고 하니 힘겨워도 도전해볼만한 돈벌이였다. 돌을 깎아 평탄하게 만든 계단길은 산정초원을 따라 곧추 올리뻗었다. 산아래에서는 지기 시작한 꽃들이 산정의 초원에서는 한창이라 식물에 조예가 깊은 40대 초반의 조재형선생은 디지털사진기로 야생화찍기에 여념없었다. 조재형선생한테서 나는 별꽃이요, 구슬봉이요, 룡담이요, 매발톱꽃이요, 구전초요, 황매화요, 노란화살곰취요, 노란물봉이요 하는 야생화이름들을 처음 듣게 되였다. 나이가 한창이라면 식물학자가 되고싶은 마음이였다. 식물학자라면 장백산의 야생화를 전부 사진찍어 분류하면 얼마나 좋아랴싶었다. 그러는 사이 2000여메터 계단길을 조이니 평탄한 산등성이다. 1990년도 표식으로 된 중조 5호 국계비가 시야에 맞혀왔는데 올라선 방향 왼쪽이 중국이고 오른쪽이 조선이였다. 우리쪽은 거무틱틱한 옥주봉(해발 2664메터)이 하늘가로 치솟았는데 조선쪽은 완만하게 점차 높아가는 발가벗은 그대로였다. 그때에야 나는 백두산 산정의 식물류파괴는 인위적인 파괴뿐아닌 자연적인 파괴도 크다는것을 실감하였다. 서쪽비탈산등성이에서 보는 천지모습은 완판 다른 모습이였다. 북쪽비탈쪽에 비하여 휘연한 천지가 거의 그대로 나타나는데 서쪽비탈에서 보는 천지의 오른쪽은 거멓고 들쑹날쑹한 산들이 괴물마냥 안겨들었다. 천지너머 천문봉이며 장군봉이며 천지물이 흘러나가는 곳이며가 마주 바라보여 이국땅에 들어선 기분을 안겨주었다. 사실 이국땅도 옳았다. 말이 중조 5호국계비지 중국측 관광객들은 조선측 땅에서 마음대로 뛰놀아도 관계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쪽비탈로 백두산에 여러번 오른 김수영씨는 이런 현실을 너무도 잘알고있었다. 여하하든 우리 일행은 진짜배기 행운아들이였다. 천지산정에서 내내 하맑은 날씨였으니 이런 복이 또 어데 있으랴싶었다. 누군가가 어제까지 련 12일 흐리며 안개가 끼여 천지를 볼수 없었는데 오늘은 아침내내 개여있다고 했다. 그러니 한국의 젊은 친구 장윤서씨는 한국인의 견해로는 《천지를 보려면 1년에 30일밖에 안 열린다》고 알고있다면서 한국의 지리산이야기를 꺼내였다. 《지리산 천왕봉도 일출보기가 무척 힘들어요. 여간하면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수 있다고 했겠나요, 우린 정말 복받은 사람들이지요. 1년에 30일밖에 보지 못한다는 천지, 어제까지 흐려 보이지 않았다는 천지를 아침내내 보고있으니 말입니다.》 인상깊은 이야기였다. 귀로에서, 흥분속에서 굽이굽이 길 따라 25킬로메터쯤 내리니 장백산대협곡이라고도 불리우는 금강대협곡이 우릴 맞아주었다. 관광안내서에서는 《금강대협곡은 장백산천지 서남쪽비탈에서 20킬로메터 되는 곳인 금강상류구에 위치》했고 깊이가 80~90메터, 너비가 200~300메터, 길이가 5킬로메터라고 했으나 눈앞에 보이는 금강대협곡은 깊이가 100여메터, 너비가 근 200메터, 깊이가 70킬로메터에 달한다고 했다. 금강대협곡 입구에서 대협곡까지, 대협곡에서 대협곡 따라 몇리 내려가다가 다시 입구로 돌아오기까지 전부 땅에서 간격을 둔, 널판자를 깐 길이고 입구와 대협곡사이는 넘어진 진대나무들에 이끼가 낀 진짜배기 원시림이였다. 금강대협곡이 이르니 흥분이 고조에 달하는데 비탈이 급경사이고 량측이 원시림으로 쌓인 협곡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연변쪽의 천연부석림은 비길나위조차없이 협곡내에는 특이한 기암과 절벽이 자리잡았는데 들쑹날숭 어여쁜 자태로 협곡 량측에 치솟은 기암괴석들은 동물, 사람 등 기이한 모습이여서 보면 볼수록 끌려드는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협곡 밑바닥으로는 금강물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어 현무암으로 된 기반지층이 오래동안의 침식을 받아 깎아지른듯한 골짜기가 이루어졌다는것이 알리였다. 연변쪽에서도 보고 장백현쪽에서도 보고 조선측에서도 본 협곡들이건만 이런 협곡들은 금강대협곡과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압록강상류의 대협곡이나 북쪽비탈의 대협곡도 금강대협곡을 따를수가 없으니 금강대협곡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원시림을 나서는 도중에 한그루의 소나무와 한그루의 사스레나무가 뿌리부터 서로 엉키여자란 송화련, 평지나 산간지대들에서도 볼수없는 아름드리 소소리높은 이깔나무가 가끔 보이여도 금강대협곡의 흥분속에 눌리여야 했다. 무송의 서쪽비탈쪽에는 또 산문으로부터 천지까지 구간에 옥란폭포, 두 계단 70메터로 된 금강폭포, 왕지, 온천, 쌍제자하(双梯子河) 등 관광명소가 있지만 서쪽비탈 사스레림대와 산정초원, 천지보기, 금강대협곡이면 족했다. 아침 5.30분에 떠난 관광길이 어느결에 점심으로 이어졌으니 백두산 서쪽비탈만의 이색적인 풍경은 내내 흥분속에서 흘러갔다. 나에게 백두산에 오르는 마지막 관광코스로 되여준 무송의 서쪽비탈코스, 백두산 서쪽비탈에서의 코스는 오늘도 나를 내내 흥분과 경탄속에로 끌어간다. 김수영씨와 리경호씨의 덕분임을 마음속에 되새겨본다.
40    내 고향 여행 ( 13) 모아산은 새해 첫 산행코스였습니다 댓글:  조회:4260  추천:72  2006-01-03
모아산은 새해 첫 산행코스였습니다 리 함 《오늘 아침 해돋이 구경하러 모아산에 갔더랬는데 너무 구름이 많아 보지는 못했지만 몇백명이 모인 장소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처럼 열심히 사는분들이 많다는데서 힘도 났구요.》 연변일보사 기자 김철호씨가 새해 첫날에 필자한테 보내온 축하메일의 한단락이다. 1월 2일, 연우산악회동료들과 더불어 새해의 첫 코스를 모아산으로 잡고 연길시가지 서남쪽변두리 원 려산화원에서부터 걷노라니 김철호씨의 메일이 떠올랐다. 필자가 이 얘기를 하며 어제 모아산해돋이보려고 모인 사람이 몇백명에 달했다고 하자 백수정님은 자기도 가까운 친구들과 같이 해돋이보러 갔었는데 과연 사람들이 많더라면서 대형뻐스만도 몇대, 자가용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더라고 뒤를 달았다. 감탄이 절로 났다. 새해의 축복을 받으려고 새해 소망을 빌고저 모아산으로 찾아드는 이런 현상을 두고 누가 모아산은 연길의 상징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몸과 마음 수련하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 모아산이라고 할 때 숲과 가까와지는게 소망이라는 연우산악회, 이들 일행은 산행 첫 코스를 모아산으로 잡고 모아산을 바라고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산에 마음 앗긴 사람들이 가는 산행길이다. 숲속길에 들어서자 모아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다. 몇해전까지만도 보이지 않던 오솔길, 얼마나 많은 연길사람들이 다녀갔으면 길이 생겨났을가. 우린 첫 산등성이 허리를 지른 왼쪽의 넓은 소로길을 택했다. 여기의 숲속나무들은 모아산 북쪽가의 대면적 숲속나무들에 비해 크기나 수령(树龄)이 무척 어려보이였다. 이는 이곳 식수가 모아산가 식수보다 퍼그나 늦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두드러지는것은 모아산과 그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가 인공림이여서 이깔나무가 아니면 잣나무 등 소나무류들뿐이여서 자연림들에 비해 단일함을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그래도 좋았다. 10여리 숲속길은 내내 모아산정상까지 뻗었으니 언제 보아도 모아산산행은 흥이 났다. 첫 산등성이 허리길을 축내고 민속촌입구 대문가를 지나니 먼저번 거치던 모아산 북쪽기슭을 두 동강낸 골짜기이다. 계곡에는 자그마한 내가 졸졸 흐르는데 겨울의 내는 꽁꽁 얼어붙어 미끄럼하기 좋았다. 얼음우를 먼저 지난 옥저님이 우스개를 피웠다. 《아래쪽을 디디면 늙은축이고 웃쪽을 미끌면 젊은축이다!》 이 우스개에 누가 아래쪽을 디디려 하겠는가, 일행은 한사람같이 웃쪽 얼음우로 미끄럼질했다. 동년을 방불케 하는 흥나는 얼음지치기였다. 골짜기를 넘으니 모아산에서부터 뻗어내린 완만한 북쪽기슭이다. 이곳의 숲은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것이 특징인데 왼쪽으로 뻗은 홈채기에는 아름드리 산백양도 가끔 보이였다. 《저런 나무들은 40~50년생은 쉬이 될겁니다.》 언제 봐도 나무들에 남다른 지식을 갖고있는 송이님의 단언이다. 그러는 송이님은 새로 산행에 가담한 김춘씨와 같이 앞장에서 풋풋한 푸른 숲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 구간 지날 때마다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는 고느적한 북쪽비탈이다. 한시간반쯤 조이니 웅장한 모아산이 앞을 막는다. 여기에서 길은 세갈래로 나뉘여지는데 복판길이 모아산을 오르는 북쪽비탈길이라면 왼쪽길은 동쪽으로 모아산을 에도는 길이고 오른쪽은 서쪽으로 모아산을 에도는 길이였다. 옥저님의 한패가 복판길에 들어설 때 바람님은 오른쪽 오솔길을 택했다. 다녀보지 못한 길을 가보자는 심산에 송이님이 따라섰다. 필자까지 합치니 오른쪽행은 셋이였다. 《다녀보지 못한 오솔길이라 서북쪽기슭으로도 오르고싶군요.》 《나도 동감입니다.》 바람님과 송이님의 단마디대화이다. 그 대화에 솔깃하며 수걱수걱 길만 조이는데 서북쪽비탈은 온통 키높은 자작나무숲이다. 이런 자작나무를 사스레나무라고도 하는데 지난가을 문화와 관광세미나때 비암산에서 보았던 북쪽기슭과 서북쪽기슭의 대면적의 자작나무림이 떠올랐다. 비암산의 자작나무는 애어린 자작나무라 할 때 모아산의 자작나무는 어른이 된 자작나무였다. 오른쪽 오솔길선택은 자작나무발견이란 뜻밖의 수확을 안겨주었다. 성수가 난 일행은 모아산나무류를 화제로 삼았다. 또 하나의 수확은 모아산산체의 나무는 인공림이 아닌 자연림이라는것이다. 산체아래구간의 이깔나무와 소나무류를 보면 대뜸 알리는 모습이였다. 지난 60년대초부터 장장 80년대에까지 이어진 모아산식수, 90년대초에는 제법 3300헥타르로 늘어난 모아산림구. 푸른 산은 인간의 동경이라더니 연길사람들은 불모지 민둥산을 끝끝내 가도가도 숲으로 덮힌 푸른산으로 만들어내고야말았다. 재미나는것은 모아산의 나무들은 동서남북방향에 따라 수종이 서로 다른것이라 할가. 동북쪽비탈은 참나무숲으로 일매졌을 때 서북쪽비탈은 자작나무숲이고 서쪽비탈은 남쪽으로 갈수록 큰나무들이 적어지며 단나무, 낫나무 세계를 이루고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봄이면 봄마다 남쪽비탈을 꽈악 덮으며 꽃들을 활짝 피여올리는 살구나무류였다. 나무숲에 정신을 파는사이 어느덧 모아산서쪽비탈에 들어섰는데 숲속으로 뻗어나간 오솔길은 정상에로 오를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한식경 더 나가서야 이 오솔길은 모아산기슭을 에도는 서북, 서남쪽 길이란것을 알았다. 한들 어떠랴, 내친걸음이라 서북, 서남방으로 모아산 산체를 한번 돌아보는것도 뜻깊은 일인데야. 시간이 한식경이나 흘렀을가, 우리 일행 셋은 모아산 남쪽기슭에 대이였다. 그곳에서 모아산을 톱기 시작했는데 남쪽으로의 모아산등반은 처음이였다. 남쪽구간길은 가파른 길이여서 조금만 나아가도 숨이 헉헉 차오르며 힘이 부치였다. 했건만 바람님과 송이님은 잘도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는 필자는 체력상 세대차이를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남쪽비탈을 3분의 2쯤 조인 구간에서 송이님은 필자를 기다리고있었다. 잠간 숨을 돌리다가 왼쪽 한 구간에 이르러 필자는 송이님을 잡아당겼다. 먼저번 남쪽비탈하산때 보았던, 땅기운이 서려오르는 구간에 이르렀기때문이였다. 움푹 패인 자리인데 돌쪼각들이 덮인 구간에는 지난때 두곳이 아니라 7~8개 곳에서 김이 서려오른 자취를 남기고있었다. 필경은 샘물이나 그 어떤 동굴모양이 있음을 알려주는 구간이였다. 모아산정상에 오르니 옥저님일행이 우릴 기다리고있었다. 산을 서북, 서남 쪽으로 돌다가 오른데서 시간이 퍼그나 지체되였던것이다. 시안의 변두리에서 산을 에돌아 정상에 오르기까지 두시간반쯤의 시간이 걸리였었다. 그만큼 모아산숲속을 헤치였다는 말이렸다. 언제 찾아도 정답기만 한 모아산 정상, 그제날 옛 봉화대자리——이 자리에서 몸에 지닌 보온병을 꺼내 뜨거운 우유를 마시는 우린 행복했다. 행복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했을 때의 감수라 하지 않았던가. 새해 2006년은 병술년 개띠해, 이 해의 두번째날 첫 산행코스로 되여준 모아산이 감사했다. 자연과 함께 하는 2006년의 첫 모아산행에서 모아산의 인공림, 자연림 지식을 닦았고 산을 서쪽으로 에돌아 남쪽비탈로 올라도 보았으니 매번 산행에 기대치 못한 즐거움이 있다는것이 실감났다. 그러는 연길의 상징——모아산이 전에없이 정다이 안겨들었다. 모아산이 내 맘속에 우렷이 솟아오르는 감격의 시각이였다. 현대인에 앞서 옛 사람들은 벌써 울울창창한 숲속은 인간에게 정기를 주고 몸과 마음을 맑게 수련시킨다고 했다. 그래서일가, 귀로에도 모아산숲속길을 헤쳐가는 일행은 마음이 각별히 열리면서 정화되는 기분이였다. 모아산 북쪽비탈길 귀로에서 롱담을 잘하는 송이님이 또 우스개를 만들어냈다. 《연우산악회가 벌써 두해철을 잡았습니다.》 과연 두해철이 옳았다. 며칠전 12월 24일 모아산서 연우산악회가 정식 발족될 때는 2005년이고 오늘 모아산행은 2006년에 들어선 시점이니 말이다. 이따라 송이님의 말뜻을 헤아린 일행은 웃음판을 터뜨렸다. 즐거운 웃음, 흥나는 웃음. 모아산은 새해 첫 산행코스였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성스런 산이였다.
39    내 고향 여행(12)-모아산에도 옛 봉화대가 있어 댓글:  조회:3077  추천:80  2005-12-26
내 고향 여행(12) 모아산에도 옛 봉화대가 있어 리 함 연길시 남쪽 구릉지대에는 연길시민들이 즐겨찾는 모아산이 우뚝 솟아있다. 지난 12월 24일 이날 연우산악회회원들은 평봉산의 고구려 옛 장성과 청차관, 대돈대 답사에 이어 모아산답사길에 올랐다. 몸도 단련하면서 모아산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도 헤아릴 겸 모아산산정에서 자발적등산단체—연우산악회의 정식결성을 선포하자는데서였다. 이날 따라 날씨는 축복이라도 하듯 유달리 좋아 연우산악회 회원들의 모습은 저저마다 밝기만 했다. 아침 8시, 시안의 로잔(老站) 뻐스부 부근에서 43선 시내뻐스를 잡아탄 산악회일행은 모아산겨울종착역 민속촌갈림길에서 내린 뒤 모아산 북쪽비탈길을 택했다. 몇년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진 모아산북쪽비탈에는 길이 없었다. 이 구간 한번 지나자 해도 수풀속을 헤치기가 여간 쉽지 않았는데 《내가 가면 길이 된다.》더니 새로 생겨난 산행길은 근 5킬로메터나 쭈욱 뻗어나갔다. 겨울날 숲속은 한결 아늑한 포근함이 감돌았다. 뭇새들이 지저귀는 노래가 좋았다면 가끔 노오란색 다람쥐, 검스레한 꼬리긴 다람쥐가 뛰여다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 속을 헤쳐가는 일행은 생기가 넘쳐났다. 첫구간 내리막길을 동강내고 낮다란 골짜기를 넘으니 이깔나무, 소나무 하늘을 찌르는 울울창창한 모아산 북쪽비탈지대다. 일행은 뒤늦게야 지난세기 60년대초이전까지만 해도 모아산과 이 일대는 황량한 민둥산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감회가 새로왔다. 력사속의 위만주국 간도성 때 국자가(연길)에 사방공사(沙防公司)가 나오고 1942년에 모아산 명신골에 10헥타르의 이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헌데 붉으스레한 척박한 땅이라 사름률이 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고 하니 말이 나가지 않는다. 해방후인 1953년과 1958년에도 또 10여헥타르에 이깔나무를 심었지만 역시 효과가 그닥잖았다는 현실이다. 그러던 1962년 6월, 연변시찰길의 주은래총리가 헐벗은 모아산을 보게 되였다. 총리는 못내 가슴아파하며 동행한 자치주당위서기이고 주장인 주덕해를 보고 꼭 모아산을 록화하라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주총리께서 연변을 떠나신후 주덕해주장은 살손을 댔다. 그해 가을로 모아산림산작업소가 세워지고 이듬해 봄에 연길시 기관간부와 학생들이 봄철나무심기에 떨쳐나섰다. 사름률이 30%미만, 1964년에 350헥타르 면적에 심은 이깔나무와 흑송, 적송 등의 사름률은 일약 85%이상. 1965년의 식수면적은 또 300헥타르다. 그후도 나무심기가 계속되는속에 80년대에 심은 면적만 해도 수백헥타르나 된다. 9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모아산림구의 총면적은 3300여헥타르로 늘어나고 대면적의 수림이 우거졌으며 1992년 11월초에는 국가림업부에 의해 모아산국가삼림공원으로 떴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모아산수림속을 오르내리며 산행, 삼림욕에 열을 올리였는데 연우산악회도 그 행렬속에 끼이여 대자연의 혜택을 맘껏 즐기는것이 아닌가. 어느덧 산아래 숲속길을 조이니 장엄한 모아산이 눈앞이다. 언제 찾아도 반겨주는 모아산이지만 여기저기 파헤친 흔적이 눈길을 흐리운다. 이런 흔적투성이들이 세월의 흐름속에서 수풀에 가리여진것이 다행이라 할가. 그에 따라 구간구간 일행의 발목을 잡은것은 파헤쳐진 동강난 부분의 로출부이다. 드러난 부분은 겉면이 조금 흙에 가리여져있을뿐 엷은 토층아래는 전부가 부서진 돌들이여서 기이하기만 했다. 그것도 납작납작한 돌들로 엉키여 신비함을 더해 주었다. 유심히 살필수록 자연적소산이 아닌, 인류활동의 흔적임을 시사하고있었다. (하다면 옛 인류가 쌓은 흔적일가?) 아니,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산중턱에서부터 하나의 옹근 산을 돌쪼각으로 쌓아올렸다는것은 무리였다. 긍정할수 있는것은 모아산전체가 돌산이였다는것이다. 토층에 가리운 그 아래 돌쪼각들은 오랜 옛날에 벌써 인류활동으로 부서져 내려쌓인 뒤 다시 식물류가 뿌리를 내리면서 토층이 형성되여갔다고 보는것이 옳은것 같았다. 북쪽비탈 중간쯤 되는 곳에 펑퍼짐한 곳이 나타났다. 이곳에 이르러 일행은 휴식을 취하면서 각자가 새해의 소망과 산악회의 소망을 빌기도 하였다. 연길의 상징이기도 한 모아산에 바라는 소망이였다. 인기로운것은 연우산악회의 정식발족, 새해를 앞둔 모아산에서의 발족이니 그 의미가 깊을수밖에 없다. 몇달간의 산행에서 지성인들을 축으로 하는 10여명의 회원들이 똘똘 뭉치였으니 이날 모아산발족식에 참가한 회원만도 옥저님, 상공님, 송이님, 바람님, 산신님, 봇나무님, 뿌리님, 백수정님, 두만강님 9명이였다. 산악인다운 소박한 발족식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데 정상을 가까이 둔 곳에 커다랗게 파헤친 공간이 나타났다. 온통 겉면에 흩어진 돌쪼각들이다. 지리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니여서 현대의 산물인지, 고대의 산물인지는 가려볼수 없으나 고대의 산물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연길시문물지》에 따르면 모아산 정상 북쪽 150메터 되는곳에 크게 패운 원시유적지가 있는데 동서길이 15메터, 남북길이 20메터쯤이라고 했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다시 크게 패운 부분이 나타나질 않았다. 정상의 남쪽 50메터, 100메터 되는 비탈릉선 패운 부분에서도 소량(少量)의 윈시문물이 발견되였다는것으로 보아 북쪽비탈릉선의 패운 부분은 틀림없는 원시유적지였다. 이 사실을 옥저님과 얘기했더니 옥저님은 인차 이곳 모습을 디지털사진기에 담았다. 드디여 정상에 올랐다. 연길분지의 가까이 변두리에서 제일 높은산—모아산정상이다. 해발이 517메터라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산이여서 사방 30킬로메터쯤의 산맥이나 하류, 마을들이 한눈에 보인다. 그속에 부르하통하 유유히 흐르는 북쪽의 연길분지, 해란강 굽이치는 남쪽의 세전이벌, 서남쪽가의 룡정, 서북쪽 저멀리의 조양천, 산아래 서쪽릉선을 탄 만무과원 등이 반기며 안기여든다. 모아산정상에는 평평한 공간이 생겨났다. 그 중심에는 철로 된 삼각대가 높이 세워져있었다. 항로표시대인 모양이다. 일행이 “야호”삼창을 웨치는사이 필자는 정상 네면 기슭의 우묵진 곳들을 주의깊게 관찰해보았는데 모아산정상돈대는 부서진 돌쪼각들로 축조되였다더니만 과연 틀림이 없었다. 돈대높이가 3메터, 정수리직경이 6~8메터라는데 비해 돈대밑면의 길이가 15메터쯤 된다고 연길시문물지는 알리는데 손대중, 눈대중해 보아도 돈대 동서길이는 15메터는 쉬이 되여보였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수 없는 흔적들이다. 모아산돈대가 옳았다. 필자가 이 정상이 고구려시기의 돈대, 즉 옛 봉화대자리라고 하자 일행은 무척 흥미를 가지였다. 상공님이, 우린 2000여년의 력사를 기록한 봉화대우에 서고있다고 하여 그 흥미는 보다 감미로왔다. 1985년 11월에 출판된 《연길시문물지》는 정상주위에서 발해시기로 보는 기와쪼각이 발견되였다 하여 모아산돈대를 발해시기 돈대로 본다지만 필자나 부분적 연구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연길분지의 외곽으로 되는 서북쪽릉선과 북쪽구릉릉선을 따라 고구려 옛 장성이 뻗어갔고 그 장성안쪽에 성자산봉화대, 청차관, 대돈대, 소돈대 등 고구려시기 봉화대가 축조되였는데 이와 일치를 보이는 모아산에 봉화대가 서지 않았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에 연변땅엔 북옥저사람들이 살고있은것으로 알려진다. 북옥저시기의 유적이 100여곳 되는중에 연길시 구역내에만 해도10여곳 된다고 하는데 이런 원시유적은 흔히 벌판의 강언덕이거나 강과 가까운 나지막한 산언덕에서 많이 드러난다. 북옥저사람들이 이런 고장들에 원시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들 사회조직형태는 이미 모계씨족공동체로부터 부계씨족공동체로 들어섰고 철제도구를 쓰기 시작한 초기단계—원시사회말기에 처해있었다. 이는 그 시기 철기는 극히 적고 생산도구의 대부분이 의연히 석기였다는것을 말하는데 지난 70년대 모아산에서 발견되였다는 돌도끼나 돌보습 등이 그러하고 1985년에 수집되였다는 적잖은 생활기구들이 그러하다. 그러던 기원전 28년에 북옥저는 고구려에 통합되는데 이같은 력사사실을 보면, 고구려시기를 거친 수백년후의 발해시기에 모아산봉화대가 일어섰다면 믿기가 어렵다. 북옥저사람들에 의해 모아산정상에 돈대—봉화대가 이미 축조된것은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고구려시기에 모아산봉화대가 연길분지와 그 일대를 지켜서는데서 주요한 역할을 놀았음은 의심할나위도 없다. 12월 24일, 이날 날씨는 유난히 좋았다. 이에 힘입어 우리 일행은 모아산 남쪽비탈릉선 따라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움푹 패인 지대가 여러 곳 되여 어느 곳이 남쪽비탈릉선 원시유적지인지 가려볼수가 없었다. 북쪽비탈이 무너져내린 돌쪼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남쪽비탈은 들쑹날쑹바위들이 머리를 내민 세계였다. 인상적인것은 정상아래 남쪽비탈릉선의 펑퍼짐한 곳에 더운 기운이 서린다는것이였다. 주위세계는 온통 눈으로 덮혔는데 이 구간 오솔길 오른쪽가에 한메터가량 사이두고 두곳의 눈이 녹아있었다. 다가가보니 돌쪼각들이 널린 틈새로 김이 서려 오르고있었다. 돌쪼각밑부분에 동굴이나 무엇이 있는것 같았다. 저 아래에서 송이님이 부르는데서 더 관찰할 사이가 없었다. 처음 대하는 자연모습이였다. 남쪽비탈구간 아래쪽은 채석장이여서 심히 파괴되여있었다. 모아산유람구로 오래전에 채석이 중지된 상태지만 그 파괴는 엄청 컸다. 그 서슬에 1982년 식수구덩이를 팔 때 발견되였다는 원시무덤자리는 찾을바이 없었다. 한데서 필자는 산아래 남쪽언덕구간이 그제날 북옥저인들의 원시마을이였음을 환기시킬수밖에 없었다. 력사를 알면 그 산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고 모아산산행성과가 대단했다. 모아산정상 고구려돈대—봉화대를 처음으로 보아냈고 북쪽비탈과 남쪽비탈의 옛 유적지에 눈길을 돌리였으니깐. 그속에서 2000여년을 기록하는 북옥저시기 이후의 력사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감도 잡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던, 살아 숨쉬는 력사의 현장이였다. 남쪽비탈을 내리자 오솔길은 모아산을 에돌아 고느적한 북쪽숲으로 향했다. 귀로라 서로간 묵묵히 길을 재우치는데 송이님이 소리질렀다. 《벌써 맥이 다 진했습니까?!》 그 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말소리, 웃음소리 다시 터져올랐다. 옥저님, 바람님이 선두를 긋자 짜장 눈싸움이 벌어졌다. 서로간에 눈을 쥐여뿌리고 받는 그 모습은 철부지아이들을 련상시키였다. 누가 아이들에게 눈이란 항상 즐거운것이라 했던가 30대후반에서 40대초반을 이루는 이들이 진짜 동심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풋풋한 인정이 감돌며 서로간에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겨울날의 귀가길 색다른 풍경이였다.
38    내 고향 여행(11)-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 댓글:  조회:3484  추천:74  2005-12-18
내 고향 여행(11) 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 리 함 연길시 서쪽교외에는 남북으로 쭈욱 뻗은 와룡동이라는 골안이 있다. 이곳 와룡동은 지난세기 10년대 연변 최초 4대중학의 하나인 창동학원이 자리잡았던 곳이고 중외를 들썽한 15만원탈취거사가 처음 획책된 곳이여서 벌써부터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청차관산행에 이어 연우산악회가 잡은 코스가 와룡동이다. 12월 17일 토요일. 이날도 바깥 날씨는 혹독하리만치 추웠다. 하루 이틀간은 찬 날씨가 누그러지는 기세같더니만 그게 아니였다. 청차관 산행일에 못지 않은 차디찬 날씨다. 했으나 연우산악회의 기본성원들은 아침 8시에 시안의 공원뻐스정류소에 어김없이 모여 다가오는 37선 중형뻐스를 잡아 탔고 서쪽으로 10리쯤 가다가 원 시 건축재료공장 정류소에서 내리였다. 이제부터는 와룡동으로 향한 북행도보길이다. 골안 첫 어구는 연길시 원 소영향 민흥촌 본부가 자리잡았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상 소영진 민주촌에 통합되여 민주촌으로 불리였다 지난 5월 20일에 작가 김혁씨와 함께 와룡동을 찾을 떄는 여기저기 노오란 민들레꽃이 피여나고 배나무꽃 만발한 화창한 계절이더니 계절이 바뀐 지금에는 골안에서 불어나오는 매서운 하늬바람이 아삭아삭 옷속까지 파고든다. 골안어구를 지나 몇리 길 조여 원 민흥촌 3대구역 (민주촌 9대)에 들어서니 앞에서 걷고있던 김수영씨가 길 오른쪽 언덕으로 발길을 돌린다. 뒤미처야 우리는 마을가 언덕 사과배나무들에 숱한 배들이 그대로 주렁주렁 달리여 있다는것을 보아냈다. 흔치않은 겨울날의 사과배 풍경이였다. 김수영씨와 뒤따른 리용남씨가 한창내기 어린애들인양 나무가지를 주어들고 겨울배를 떨어뜨린다. 그러는 그들이 우스워 일행은 때아닌 웃음판을 벌리였다. 그 웃음속에서 혹독한 추위가 다 잊혀진다. 김삼씨는 마을어구 길가에 세워진 와룡동 지명표시패를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3대구역을 벗어나니 본격적인 와룡동마을이다. 약 40세대를 웃도는 아담한 시골마을이 겨울날의 또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선다. 민흥촌 4대구역인데 지금은 소영진 민주촌 10대로 통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을어구에서 오른쪽으로 굽어들며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최봉설의 옛집을 향했다. 최봉설이라면 당년 1920년 1월, 룡정 재박골 15만원탈취거사 6명중의 일원으로서 간도국민회소속 철혈광복단 성원이였는데 바로 이 옛집에서 15만원 탈취거사를 짜고들었었다. 우리 일행은 어느덧 거의 허물어져가는 찌든 옛집가에 서 있었다. 집터의 엉성한 마른 풀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김삼씨와 리경호씨는 디지털사진기 샤타를 부지런히 눌러댔다. 세월속에 곧 사라질 옛집을 사진속에라도 남기겠다는 고마운 소행이였다. 바로 그 시각 필자는 일행 6명한테 와룡동에 깃든 유서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와룡동이 살길을 찾아온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되기 시작한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990년에 필자가 민흥 4대 출신인 윤희섭씨를 만났을 때 윤씨는 자기 선조들은 와룡동 개척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할아버지 윤형보 때부터 따져도 100년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와룡동의 개척은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다. 어림짐작해도 19세기 70~80년대로 거스러 오른다. 지난 5월 20일 필자는 김혁씨와 더불어 와룡동을 찾았을 때 길가의 한켠에 자리잡은 새 벽돌가옥의 주인—윤희섭로인을 찾았었다. 1990년에 만났을 때는 50대의 중년이더니 15년후에 다시 만난 윤씨는 68살의 로인으로 필자한테 나타났다. 안로인 차순옥씨도 같은 나이 68살, 그때도 윤희섭씨는 조상들이 조선서 와룡동골안에 이주한후 그자리에서 나무를 베여 귀틀집을 짓고 살았다고 터놓았다. 후에 한세대, 두세대로 모여들면서 100여세대로 늘어나고 1908년에 창동소학교까지 일어서게 되였다는것, 중학부까지 설치되여 《창동학원》으로 불리운것은 1912년. 최봉설투사의 옛집, 바로 100여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는 이 옛초가팔간집에서 최봉설은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바로 이 집에서 피로써 독립항쟁의 기치를 든 철혈광복단(1914년)에 참가했다. 15만원탈취거사의 6명중의 하나인 림국정도 조선함흥출신으로서 이 집에 류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었다. 일행은 필자의 개략적은 소개에 귀를 기울리다가 유서깊은 최봉설의 옛집을 친히 보았다는것만도 행운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는 일행을 보노라니 마음이 한없이 후더워났다. 유감이라면 지난해 연변일보 김철호기자가 허물어져가는 이 옛집을 기사화하여 사진까지 곁들며 호소하였는데도 아무런 보호대책이 없다는 것이라 할가. 그런 마음에 휩싸이며 일행은 마을 동쪽가 골안바위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터를 찾았다. 샘물가는 잘 정리되여 비닐관을 통해 샘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날 마을사람들이 마시던 샘물이고 어린시절 최봉설 또래들이 뛰놀았던 샘물터이고 보니 마음은 력사의 언덕을 넘어 그 세월에로 뛰였다. 김수영씨가 고뿌에 물을 담아 일행 모두에게 건네고 김삼씨가 이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 일행은 발길을 다시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로 돌리였다. 사은기념비는 이곳 마을뒤 북쪽언덕가에 세워졌는데 비석의 높이는 1.8메터이고 너비는 0.5메터며 꼭대기에는 조선 8각 기와집모양의 운각이 씌여있었다. 비석정면에는 《사은기념비》라는 한자글발이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사립창동중학이라고 가로쓴 글과 그 글아래 력대원장들과 교원들의 이름, 학원창립경과와 시간이 새겨졌다. 비석좌우면에 새겨진 글을 보니 이 비석은 12명의 유지들이 1935년 9월 12일에 세운 것이였다. 이 사은기념비는 2003년 6월 연길시 민주소학교, 민주촌 촌민위원회, 문물관리소의 주선으로 수건되여 정히 보존되여 있었다. 골안의 막바지 가까이에 선 우리 일행의 시야에는 와룡동의 전경이 물결처럼 안겨들었다. 와룡동은 동, 북, 서 삼면이 구릉언덕에 둘러막히고 남쪽이 조금 열렸는데 그 길이는 어구부터 막바지까지 거의 5킬로메터는 실히 될것 같았다. 골안지형은 룡이 서리고 누워있는것 같다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 불리였다고 한다. 사은기념비 서쪽건너편 언덕 과수밭 평평한 곳이 창동학원 옛터자리로 알려졌다. 그제날 학원은 2층교사였다지만 지금은 그 옛모습 찾아볼수 없고 사은기념비만이 외로이 남아 이땅이 창원학원이 자리잡았던 력사의 고장이였음을 알리고있었다. 연변문학 주필 김삼씨는 오늘 산행이 진짜배기 력사현장답사라고 하면서 연우산악회의 남다른 추구가 틀리지 않는다며 감개에 젖어들었다. 그자리에 있던 리용남씨, 리경호씨, 김수영씨, 리화씨, 송문자씨도 뜻깊은 산행이라고 주고받았다. 한겨울의 추위속을 헤치며 와룡동을 찾은 그네들이 돋보이기만 했다. 그러니 몇달전 작가 김혁씨와 함께 사은기념비에서 와룡동을 일별하며 감회에 젖던 때가 재다시 상기되였다. 이제 남은것은 1920년 10월의 일제놈들의 경신년대토벌에서 쓰러진 정기선투사의 추모비였다. 이 추모비는 골안 남쪽어구에서 올라오다가 원 3대구역 오른쪽 언덕에 위치했기에 일행은 이곳 언덕을 가로 지르기로 했다. 와룡동 마을 동쪽가 샘물터를 질러 남쪽언덕에 오르니 리씨라고 부르는 한 조선족녀인이 길다란 온실에 씌운 이불덮개들을 벗기고 있엇다. 알고보니 땅을 파고 만든 온실은 느타리버섯온실이였다. 호기심이 동해 녀인따라 온실안에 들어가보니 두어메터 너비를 가진 길다란 땅속 온실안 량켠은 느타리균종덩어리들이 차례로 쌓이였는데 그 균종덩어리에서 느타리버섯이 자라났다. 겨울이여서 생장이 더디다지만 넘길때에는 한 킬로그람당 인민페 3원이라고 보니 집주위의 온실까지 합치면 일년수입은 인민페 몇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해볼만한 치부항목이였다. 부유에로 달리는 와룡동의 래일이 느타리온실에서도 느껴지는 시각이였다. 느타리버섯온실을 벗어나니 너비 10여메터가 훨씬넘는 골짜기가 앞을 가로막았다. 골짜기너머는 언덕받이 이깔나무와 소나무밭이다. 마침 무슨 선로인가 늘이느라고 나무를 찍어만든 오솔길이 곧추 남으로 수림속을 꿰질러있었다. 그통에 우리는 바람없는 아늑한 공간속으로 곧추 원 민흥3대 동쪽언덕에 세워진 정기선투사 추모비에 이를수 있었다. 묘소가 없는 흰 화강암 돌비석 정면에는 《석천거사 정기선추모비(石泉居士郑基善追慕碑)》 한자글이 새겨지고 비석 뒤면에는 비석을 세운 친속들의 이름과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비석 왼켠의 글로 보아 이 추모비는 1940년 4월 5일에 세운것으로 나타났다. 해당력사자료에 따르면 1920년 10월, 연변조선족집거구늘에서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한 일제침략자들은 간도국민회의 주축을 이루는 룡정 남쪽 15킬로메터의 명동, 개산툰 자동의 정동, 소영자 광성, 와룡동 창동 등 4대 중학과 그 고장 반일운동기지들에 대해 보다 야만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1920년 12월 6일, 일제침략군 보병 74련대 이와바시대대는 국자가 서쪽의 와룡동 창동학교에 불을 지르고 반일지사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창동중학교원이고 간도국민회 총부 통신원이며 철혈광복단 단원인 정기선은 권총과 등사기를 파묻고 서쪽 언덕너머 구수하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잔인한 놈들은 끝내 그를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고 두 눈알까지 뽑아내고는 집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그런 투사가 오늘은 추모비속에 남아 경신년대토벌 때 일제놈들 죄행을 단죄하고 있었다. 필자한테서 정기선투사의 최후를 들은 일행은 격분에 치를 떨며 이윽토록 정기선 추모비를 떠날줄 몰랐다. 와룡동, 력사가 그대로 살아숨쉬는 와룡동이었다. 이곳의 최봉설 옛집이며 사은기념비며 샘물터며 정기선추모비는 그제날 항쟁의 력사를 생생히 기록하는 력사의 견증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귀로에서 우리 일행은 정기선추모비 뒤언덕길을 택하였다. 언덕길은 연길시 서쪽 구릉릉선으로서 동서로 곧추 연길공원의 서쪽가 인민경기장까지 뻗어있었다. 5킬로메터는 쉬이 될 구릉릉선 량측은 일매진 원예농장의 대면적 과수밭인데 연길시동서남북 외곽의 중심지대로서 남쪽 저멀리 모아산이며 삼봉산, 마안산 그리고 장성마냥 동쪽을 가로 지른 웅장한 산무리, 북쪽의 평봉산과 청차관, 그 아래 대돈대 연길공원의 소돈대 등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참으로 잊지 못할 산행과 답사의 하루였다. 한겨울 추위도 마다하고 와룡동을 찾은 연우산악회일행은 앞으로도 등산과 력사의 어우름을 이어가겠다며 눈속길을 헤치고 또 헤치였다.
37    내 고향 여행(10)ㅡ옛모습 사라진 대돈대 살풍경 댓글:  조회:3717  추천:77  2005-12-16
내 고향 여행(10) 옛모습 사라진 대돈대 살풍경 리 함 연길시 구역내에 이름난 옛돈대만도 청차관, 모아산, 대돈대, 소돈대 등 넷이 있는것으로 알고있다. 그중 대돈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미지의 세계여서 언제부터 찾고 싶었지만 대돈대가 있다는 시안의 원 흥안향 동흥촌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한데서 연우산악회 일행 5명은 북산릉선 저멀리 청차관쪽으로 먼저 향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10일, 금방 시교의 북산 과학기술대학 구내를 벗어나 북을 바라고 걸음을 재우치는데 왼쪽가 골짜기 저끝에 덩실하게 솟아오른 《토산》(土山)이 안겨들었다. 아무리 눈주어도 북산의 시교구역내에서는 유일무이한 《토산》이라 우리가 사는 미지의 땅 너머에서 보는 기분이였다. 필자는 동행한 산악회코치 리경호씨를 툭 쳤다. 《저쪽의 저 〈토산〉이 암만해도 대돈대로 보이는구만.》 《글쎄요.》 리경호씨도 보이는 서북쪽 주변에 솟아오른 무엇이 없는걸로보아 그럴것 같다고 수긍하였다. 그러면서 디지털사진기를 내들었다. 칼바람속의 맵짠 추위에 맨손을 내들기가 말째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색과 명상속에 빠져드는 시각이였다. 그래서인지 대돈대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청차관샘물터 민가에 이르러 집주인인 안로인과 동흥촌이 어딘가 물었더니 서남쪽으로 언덕너머 골안이 옳다고 말하였다. 예까지 오는 도중의 왼쪽 골짜기였다. 그러면 아까 《토산》은 에누리없는 대돈대유적일 것이다. 가슴을 짓누르던 억만근 돌들을 부려놓은 심정이였다. 청차관과 더불어 대돈대도 오늘 자연과 함께 하는 산행의 목표인데 산행안내자가 모른다면 말이 안되였다. 청차관장성과 돈대산행을 마치고 귀로에서 수풀속에 잠긴 샘물터 푸른동산 음식점을 거치니 하루길을 달리던 해가 노루꼬리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가정주부 녀성들인 세 회원을 대돈대로 안내한다는건 시간상 무리였다. 도문시 장안진 광제 6대 마을을 지나고 동쪽의 성자산쪽에서 뻗어오는 골짜기 서쪽 언덕을 지나니 경사진 올리막이였다. 그 서쪽아래에 아담한 마을이 보이였다. 동흥촌의 막바지마을이라고 짚어도 무방할것 같았다. 남쪽의 과학기술대학쪽과 언덕 서쪽아래 갈림길에 이르러 필자는 일행 4명과 작별을 나누고 독행을 택하였다. 서쪽아래마을을 바라며 눈덮인 언덕길을 내리다가 순간적으로 뒤돌아보니 리경호 등 4명이 줄레줄레 따라서고있지 않는가. 가까이 이르러서야 대돈대산행을 포기할수가 없어 따라 섰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는 산악회일행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이윽고 언덕 경사진 길을 다 내리니 서쪽골짜기 첫 마을이다. 이곳 골안으로 말하면 치기마을이였다.마침 길가에 40대의 한족남성이 나타나 마을이름을 물으니 동흥촌이 옳았다. 막바지-치기마을로 불리우는 마을은 동흥촌 3대이고 동흥촌은 네개대로 구성되였다는것도 알았다. 원래는 연길시 흥안향의 한 촌이였는데 최근 년간에 시안의 의란향, 연집향, 흥안향이 합치여 하나의 의란진으로 통합된후에는 의란진 동흥촌으로 불리우는 실정이였다. 그때였다. 그 중년남성은 뒤미처야 우리 일행이 청차관산행을 마치고 오는길이란것을 알고 이 추운 날씨에 길을 나섰는가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노라니 오전 청차관산행시 샘물터에 들렸을 때 물길러온 택시운전사가 생각났다. 그 운전사는 벌거숭이 청차관이 뭐 볼게 있느냐며 산행에 나선 우리를 리해하지 못하였었다. 《그래도 모아산으로 다녀야지요. 나는 늘 모아산을 오른 답니다.》 그리곤 으썩해했다. 그로서의 그 시각 리해로서는 추운날 청차관을 찾는 우리 일행이 별스레 보였을것이다. 아무렴은 어떻고, 우린 웃음으로 답례했다. 지금 사나이도 비슷한 눈치였다. (한들 어떠랴, 무슨 대수랴, 등산과 문화의 어우름을 고집하는 우리들인데.) 일행은 역시 감사의 인사 올리며 웃음답례를 보내곤 다시 자연과 함께 하는 길을 조였다. 도중에 《연변중공우창》(种公牛场)과 맞띄웠다. 그곳 서쪽은 과수원이고 과수원건너가 바라던 대돈대 《토산》이였다. 때는 해가 이미 진 뒤라 일행을 더는 지체시킬수가 없어서 귀가를 권고했다. 그래도 리경호씨는 김수영, 리화, 송문자 세 녀동료들과 량해를 바라곤 필자를 따라섰다. 다시다시 고맙기만 한 리경호씨다. 둘이서 길없는 과수원과 홈채기 두어개를 넘으니 서쪽가에 봉긋한 《토산》이 나타났다. 가까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대돈대는 《토산》이 아니라 워낙 하나의 옹근 바위산이였다는 것을 알았다. 어쨋건 종내 대돈대를 찾았다는 그 기쁨이 한량 없었다. 했으나 그 기쁨도 잠간, 대돈대는 동쪽구간과 서남쪽구간을 모두 깍아내고 파헤쳐 볼썽사납기만 했다. 옛모습은 그만 두고라도 대돈대 전체가 반나마 결단나고 있었다. 보이는건 한산하고 엉성하고 비참한 모습뿐이다. 그래도 북쪽가가 옛모습을 갖추고있었다. 리경호씨는 예까지 이르러 대돈대에 오르지 않겠느냐며 앞에서 겅정겅정 정상을 헤치였다. 그 뒤를 따라 정상에 오르니 발딪고 설 자리 별반없이 남쪽은 거의 전부가 파내여 험한 낭떠러지를 이루고있었다. 그런 대돈대가 경사진 기슭에 자리잡아 남쪽켠을 상대한 우리 둘은 《아아한》 산우에 서있는것만 같았다. 인생은 너무도 작은 인생이라더니 이 도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시각이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세계에 비해 우린 정말 미소한 존재였다. 그렇게 높아만 보이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대돈대를 두고 1985년 11월에 내부자료로 출판된 한어문 《연길시문물지》는 아래와 같이 적고있다. 《대돈대는 워낙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조그마한 돌산이다. 근 몇년사이 산을 파헤치고 채석하는 통에 다만 북쪽켠의 3분의 1만 남았다. 대돈대 정수리 원시 문화층 웃쪽은 인공으로 흙과 돌을 쌓아 높이 약 4.1메터로 축조한 돈대이다. 옹근 돈대는 원추형으로서 꼭대기 2메터되는곳에 인공으로 수축한 환형층계가 있었다. 대돈대 밑면의 직경은 60메터, 높이는 17메터, 웃면의 직경은 약 20메터이다.》 이로부터 보아 소돈대로 불리운 연길시공원 서북쪽의 《토산》—정자에 비해 대돈대는 돈대의 밑면의 직경이 7메터나 더 길고 높이가 9메터나 더 높아 명실공히 대돈대로 불리울수 있었다. 이 유적지의 범위는 더욱 커서 동서 약 400메터, 남북 약 200메터로 헤아려진다고 문물지는 말한다. 두 돈대의 거리로 보아 10리 가량인데 서남쪽에 위치한 소돈대가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되고 정수리에 커다란 정자까지 일어섰다지만 대돈대는 북쪽켠 3분의 1이 남을 정도로 볼품없이 파괴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자연은 인문경관의 기본요소라고 하더니 대돈대는 인문경관 관광지로서의 구비조건을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문화대혁명과 그후로 보아지는 어쩔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다. 한데서 지나친다손치고 최근년간도 계속 파괴되고 있는 현실은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안타깝기만 했다. 서북쪽을 돌아 남쪽 낭떠러지 밑으로 가보니 깎아낸 바닥마저 이리 핥히고 저리 핥힌 참담한 살풍경인데 북쪽가에 조금 남아 잇는 밑바닥 천연암석이 싹 뜯기여 있었다.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려면, 문화유적을 보존하려면 자연속의 유적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건만 눈앞의 풍경은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대돈대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문화유적지로 알려진다. 대돈대 정수리와 그 아래 동, 남, 서 세면에 널린 원시 도자기 파편 등이 이를 증실. 대돈대 부근의 유물흔적은 더욱 늦어 철기시대로 짐작된다는데 그 년대는 중원의 전국시대로부터 한대에 이르는 시기와 맞물려 루루 2000년을 기록하고있다고 한다. 고구려와 맞먹는 시기로서 고구려후에도 조대가 수차 바뀌면서 꾸준히 사용되여온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대돈대 서남쪽 가까이 북대촌과 흥안촌에는 고구려유적지로 알려지는 북대고성(古城)과 흥안고성이 연집하 동안의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밖에 지난 80년대 중기에 이미 둘레 90킬로메터밖에 안되는 연길과 그 주변에서 고대문화유적 63곳이 발견되고 신세기시대 말기를 나타내는 유적만도 연길시에서 다섯곳이 발견되여 가장 이른 시기는 4500년전으로 소급된다고 한다. 소영자의 옛무덤군도 3000년 좌우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다니 루루 수천년을 이땅에서 살아온 선인들의 숨결소리 그대로 들리는듯 싶다. 대돈대는 이런 력사속의 한부분인데 심한 인위적 파괴를 당하고 있으니 가슴아플수밖에 없다. 대돈대 정상에 올라서면 서남쪽의 대돈대, 모아산, 북쪽의 청차관이 서남~동북주향으로 가지런히 이어져있음을 알수가 있다. 손대중해도 대돈대와 청차관까지 10리, 대돈대와 소돈대까지 10리, 소돈대에서 모아산까지 20리 잡을수 있는데 40리, 즉 20킬로메터쯤 되는 거리안에 이름난 돈대가 넷이나 있다는 말이 된다. 돈대는 흔히 료망대나 봉화대를 가리키니 고대의 연길시구역이 얼마나 주요한 군사기지였는가를 얼마든지 가늠할수 있겠다. 어언 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하고 지평선우 20도를 헤아리는 남쪽하늘에서 새별—금성이 불덩이를 이루며 떠있다. 대돈대를 내리는 길은 바로 남쪽방향이여서 금성이 우릴보고 반짝이는듯 싶다. 그 하늘아래 골안어구 농촌마을은 동흥촌 1대이고 연길-도문행 국도가의 원 흥안향정부자리에서 대돈대까지는 불과 1킬로메터 거리였다.
36    내 고향 여행(9)ㅡ칼바람속의 청차관 산행 댓글:  조회:4326  추천:84  2005-12-11
·내 고향 여행(9)· 칼바람속의 청차관 산행 리 함 연길분지 서북부 평봉산 바위산기슭에서의 고구려 옛장성—돌성벽의 발견은 남달리 등산과 문화유적 어우름을 주창하는 연우산악회에 뜻밖의 수확을 안겨주었다. 연길시 주변과 북산쪽에 또 이 고구려 옛장성의 연장으로 되는 청차관(清茶馆) 장성과 그 봉화대, 대돈대, 소돈대로 불리우는 료망대, 봉화대 유적이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잡은 자연과 함께 하는 코스가 12월 10일 토요일 청차관, 대돈대 산행이였다. 토요일 이날 따라 한겨울의 칼바람은 해종일 기승을 부리면서 엄동을 몰아왔다. 진짜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는 매서운 혹한이다. 그러건말건 오전 8시반에 연길시 26선뻐스 등 종착역인 북산 과학기술대학 정류소에서 내린 연우산악회의 리경호씨, 김수영씨, 리화씨, 송문자씨 등은 《랑하산의 다섯용사》인양 《연우 5용사》를 무어 북부의 청차관쪽으로 뻗은 언덕릉선길을 헤치기 시작했다. 살을 에일듯한 칼바람이 대지를 핥으며 요동쳐도 누구하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매번의 겨울산행이 제나름의 뜻밖의 수확과 즐거움을 준다는 그들앞에서 맵짠추위도 무색할지경이다. 어느덧 한 고개를 넘었는데 저앞에 또 고개길이다. 그제야 저 동쪽의 성자산 성쪽에서부터 뻗어오는 골짜기가 이곳 언덕릉선을 넘으며 연길시 의란진, 즉 원 흥안향 동흥촌골로 이어져 연길시가지 북쪽가로 빠진다는것을 알았다. 지금껏 미지의 세계, 미지의 땅ㅡ참으로 재미나는 일이였다. 연길시안에서 볼 때는 저 멀리 북부를 가로 지른 높은 구릉릉선이 그대로 연길시까지 뻗어내린것 같더니 그것이 아니였다. 동서로 근 20리나 뻗은 희한한 골짜기가 청차관으로 향한 경사진 기슭을 두 동강내고있었다. 대자연이 빚은 걸작이였다. 재미나는 일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두동강난 골짜기 동쪽은 도문시구역에 속하는 장안진 광제촌 행정구역이고 서쪽은 연길시구역에 속하는 오늘의 의란진 동흥촌 행정구역이다. 그러니 연길시 바로 북쪽 언덕뒤 동쪽구간이 도문시구역이라는 말인데 도문시 땅이 그대로 연길 북쪽가까지 내처 뻗어왔다면 그대는 믿을수 있겠는가, 연길사람들이 맨눈으로 볼 때는 일매지게 연길땅으로만 안겨지는 북산구간이니 말이다. 뜻밖의 수확과 산행의 즐거움속에서 첫 고개를 넘어 다시 북산언덕길을 톺으니 선참으로 맞아주는것은 도문시 장안진 광제 6대마을이다. 이 마을은 성자산쪽에서 뻗어오는 골짜기의 골안치기로 되는 도문시의 막바지마을인데 보매 30세대쯤 모여앉은 아담한 산간마을이였다. 사과배요, 샘물이요 하는 회사까지 들앉아 산간마을에 이채를 더해주고있었다. 산간마을의 서쪽 언덕릉선을 따라 한식경 나아가니 내내 세멘트포장길로 뻗어오던 오른쪽길가에 《동산식당》이라는 나무표시가 박혀있었다. 《마을도 없는 이곳에 웬 식당인가?》 일행중 누군가 의아해하는 말이다. 그말에 끌려 길가 오른쪽에 시선을 던지니 동, 북, 서 삼면이 언덕으로 둘러막힌 언덕아래 개활지에 벽돌집 한채가 잡혀왔다. 그제날 옛말속의 먼먼길가의 려인숙을 방불케 하는 언덕속의 민가였다. 추위도 덜겸, 휴식도 할겸 《려인숙》집을 찾으니 널다란 마당은 오리똥 천지인데 말뚝에 매여놓은 개 두마리가 우르렁거리며 길길이 뛰였다. 식당이 아니였다. 우리가 잠간 주춤하는 사이 남쪽앞가 동쪽언덕아래 택시차 한대가 보이였다. 그리로 다가서니 한족부부간이 비닐통 몇개에다 샘물을 담고있는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샘물이 좋아 이곳을 즐겨찾는다는 그들이였다. 찰나, 무언가 번개같이 뇌리를 때렸다. 청차관아래 샘물?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족녀인이 동을 달았다. 《이곳이 옛날 청차관이 아닙니까, 이곳의 샘물을 차물로 했으니 다니는 길손들이 즐겨 마셨다지요!》 (오, 워낙은 이런 사연이였구나!) 오늘날 지명으로 굳어진 청차관이 실감있게 안겨들었다. 한어로 된 청차관은 청나라때 차집이라는 말이니 연길~도문행 길이 없던 청나라말기 그 시절에 국자가에서 이곳 청차관을 넘어 도문~훈춘쪽으로 드나들던 길손들이 다리쉼을 하며 길가 차집에 앉아 차물을 마시는 정경이 신기루마냥 떠올랐다. 그속에 연길—국자가의 어제날이 섞이여든다. 19세기 이전의 연길-국자가는 말그대로 잡목과 버드나무가 꽉 들어찬 진펄이 였다고 력사는 전한다. 녀진어로는 이 지대를 《지누스》, 벌판이라는 뜻이란다. 력사속의 연길은 명조때에 건주좌위에 소속, 청조에 이르러서는 왈카부에 귀속되였다. 1644년에 청나라 주력군이 파죽지세로 관내로 쳐들어가고 명나라가 멸망, 그로부터 청조통치자들은 오늘의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장백산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룡흥지지》(龙兴之地)로 간주하고 강희년간(1669-1681)에 흥경(오늘의 료녕성 신빈)이동, 이통주 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封禁)하고 타민족이 봉금지내에 사는것을 엄금하였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운후 봉금정책은 보다 강화되여 연길을 포함한 이 지구는 가고가도 인적이 드문 황량한 고장으로 되고말았다. 청조는 이런 인적이 사라진 고장에 《남황위장》이란 사냥터를 꾸려놓았다. 그때 연변은 《녕고탑앙방장경》(宁古塔昂帮章京)에 귀속되여 여러 왕부(王府)에서 파견한 장정들이 사냥하고 인삼을 캐고 부르하통하에서 진주를 채집하는 장소일뿐이였다. 이런 연길의 지명을 두고 여러가지가 전해진다. 청조때에 연길을 남강(南岗)또는 얜지강(烟集岗)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시절의 연길은 녕고탑부도통의 관할하에 속했기에 북쪽인 녕고탑—왕청방향에서 볼 때 남쪽에 위치한 연길은 남강이였다나. 강희 53년, 즉 1714년에 청조통치자들은 지금의 훈춘시소재지에 훈춘협령을 설치하고 연변일대를 녕고탑장군의 휘하에 귀속시켰다. 18세기중엽이후 산동, 하북 등지의 관내한족들이 봉금정책에 눌리지 않고 료동, 길림 지방을 거쳐 연변에 밀려들기 시작하자 연길분지에도 류랑민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에 따라 조석으로 밥짓는 연기가 자욱하여 잘 빠지지 않으니 얜지강이라는 부름이 생겨난 모양이다.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도 리조조선의 엄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서고 점차 조선이주민들이 늘어갔다. 1881년에 청조에서 사실상 200여년간 봉금을 해제하고 이민실변 정책을 실시키로 하였다. 따라서 훈춘협령은 부도통아문으로 승급되고 훈춘에 간광총국(垦矿总局)을 설치, 훈춘과 훈춘동구 그리고 남강에는 초간국을 설치하였다. 이로부터 남강은 길림, 돈화에서 훈춘과 룡정, 두만강기슭으로 드나드는 길목으로 되였다. 1891년의 남강, 이해에 길림장군은 훈춘의 간광국과 월광국을 합치여 무간총국을 설치하고 1892년에 무간총국을 남강에 옮겨왔다. 남강이라 불리운 연길에 연길청이 설치된것은 1903년. 남강에 무간국과 세무국 등 기관들이 세워지면서부터 남강은 또 《국자가》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1909년이후 연길청은 연길부로 승급, 변무독판공서도 길림동남로병비도태공서로 개칭되고 연길, 왕청, 화룡, 훈춘, 돈화, 액목, 동녕, 녕안 등 8개 현을 관할, 연길부가 설치되면서 사람들은 국자가를 또 연길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민국시기인 1913년에 동남로병비도태공서는 길림동남로관찰서로 개칭되면서 상기 8개 현을 그대로 관할, 그제날의 훈춘청과 연길부는 현공서로 급별이 내려간다. 사람들에게 어느 기구보다 익숙한것은 연길도윤공서. 1914년에 길림동남로관찰서가 연길도윤공서로 개칭되고 1929년에는 또 연길교섭서로 바뀌여진다. 그후 연길교섭서는 수차의 이름변화를 거치지만 관할범위는 연길, 화룡, 왕청과 훈춘 4개 현뿐. 이 도윤공서 건물은 지금도 연길시 하남가 주인대상무위원회 북쪽 길건너 6층아파트속에 그대로 서고있다. 력사속을 거치여온 연길의 시기시기변화이다. 그 통치기구의 이름은 변화다단해도 이름유래로 보는 연길은 청조이후 남강 혹은 얜지강—국자가—연길로 불리여왔다. 그속에서 연길의 개척사는 200여년, 남강으로 불리운 연길에서 청차관을 넘어 훈춘쪽으로 드나들 때는 120년 쯤. 그러니 그 길가에 차집이 일어서고 청차관으로 불리여진것도 100년이상 웃돈다. 청차관이 생겨서 120년쯤후, 연우산악회 일행 5명은 청차관샘물자리에 서 있었다. 세월의 언덕언덕을 넘어온 120년후. 120년후의 길손인 우리는 샘물터 한족민가에서 잠간 몸을 녹이는 사이 60살을 눈앞에 둔 주인집 두씨 안로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로인은 저아래 골안치기마을이 허가골(서가골?)로 불리우는 장안진 광제6대이고 이곳이 청차관샘물자리라고 터놓았다. 그러면서 1947년 생이고 1969년에 산동에서 이사왔다는 안로인은 자기네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우리 일행은 안로인과의 얘기에 이어 바깥에 섰다. 창차관을 떠올리며 다시 주위를 일별하노라니 언덕아래 자그마한 개활지도 인상적이였다면 그 아래와 동쪽구간 양지쪽은 보다 유혹적이였다. 북산언덕 전체가 허허벌판인 밭들에 비해 이곳 언덕받이는 10년쯤으로 보이는 참나무가 꽉 들어서고 그 속에 별장을 방불케 하는 푸른 동산 음식점과 12월 15일에 개장한다는 썰매장이 꾸며져 래일의 관광지를 보는듯 했다. 전설속의 에덴 동산과도 같아 청차관장성과 청차관의 유래를 곁들이면 보다 뜰것만 같았다. 청차관샘물터 웃쪽언덕을 오르니 청차관장성아래는 대면적의 평탄한 지대다. 이런 평지에 적어도 200세대쯤은 되여보이는 한 농촌마을이 자리잡고있었다. 이색적인것은 이 마을 집집의 돌담들인데 평지는 온통 돌들이 널린 상태다. 어딜보나 돌들이라는 태항산을 방불케 했다.그 돌을 주어내고 집을 짓고 밭을 만든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력력했다. 마을뒤에서 보는 청차관산정은 우리를 놀래웠다. 멀리서보는 산정은 하나의 봉긋한 흙무덤에 지나지 않더니 가까이에서 보는 산정은 돌바위로 된 하나의 거대한 산, 어딜 보나 산도 평지도 온통 돌들의 세계였다. 칼바람을 헤치며 청차관정상에 오르니 그 정상에는 미크로파탑(微波塔)과 미크로파소가 주인없이 떨고있었다. 그 모습이 안스러웠지만 15리밖의 남쪽 모아산과 삼봉산, 마안산과 연길분지, 흥안과 연집 저지대, 북쪽의 의란과 도문행 저지대, 동쪽의 성자산성이 시야에 안겨들어 기분이 한결 좋았다. 모아산에 오르면 비행기에 앉은 기분이더니 청차관산정이 바로 비행기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느낌이였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동남쪽 저멀리 보이는 성자산과 그 이웃산 욕지산이다. 청차관 정상에서 보는 성자산과 욕지산은 강을 사이두고 동, 남, 북 3면이 뭇산들로 둘러싸여 하나의 거대한 섬으로 안겨왔다. 청차관정상에서만 느껴보는 거대한 섬 인상이였다. 대자연의 조화에 탄복하면서 청차관정상의 서쪽과 동쪽을 보니 연길분지 북쪽외곽으로 된 구릉릉선이 아득히 뻗어있었다. 그 동서릉선을 따라 고구려 옛장성이 줄달음쳤는데 패운 홈이라든가, 도드라진 흙담자리가 여기가 고구려장성이 지난 력사의 고장임을 알려주고있었다. 고구려장성에 대해서는 평봉산 등정기에 밝히였으므로 이 글에서 더 언급치 않는다. 다만 청차관장성이 있는 이곳 정상은 연길시구에서 15리 떨어졌고 흙과 돌을 섞어쌓은 이 구간 동서장성(비교적 완정한 곳의 밑너비는 6메터, 웃너비는 1~3메터) 길이는 10여리, 장성의 좌우량측에 돈대와 성들이 있었음을 부언해두고싶다. 력사속에 묻히지 않으면 그저 황량한 청차관산과 구릉릉선만 보일뿐. 칼바람속의 청차관산행은 뜻대로 풀려갔다. 귀로에서 청차관샘물터 푸른 동산음식점에 다시 들려 따뜻한 점심상을 받으니 맵짠 추위에 찌든 몸들이 후더워났다. 그속에서 그 먼저 지나친 평봉산의 돌성벽과 청차관장성을 떠올린다. 매일 도시의 콩크리트바닥에 찌들며 일상을 쫓기던 이들이 등산과 문화가 함께하는 번마다의 산행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면서 미지의 땅 너머로 온 기분으로 대자연속 자유를 만끽하며 얻는 수확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우리 산행은 남달리 남는것이 있군요.》 《건강만 사는것이 아니라 얻는 무엇이 있고 즐거움이 있어 좋습니다.》 《그뿐입니까, 먼 후날 추억도 남지요.》 《아, 명언입니다, 명언!》 경호씨, 수영씨, 리화씨, 문자씨가 주고받는 담소다. 그러는 연우산악회 《5용사》의 얼굴마다에는 겨울날 등산과 답사의 희열이 그대로 듬뿍 넘쳐난다. 동지를 앞둔 겨울해는 짧기도 했다. 오후 세시반이 지나자 벌써 서산에 꼴깍 지는해를 바라보며 우리 일행은 다시 서남쪽 곬을 따라 의란진 동흥촌 구간의 대돈대를 찾아 길을 재우쳤다.
35    내 고향 여행(8)ㅡ평봉산의 옛장성 발견 댓글:  조회:3840  추천:87  2005-12-11
내 고향 여행(8)· 평봉산의 옛장성 발견 리 함 연길시에 살면서 그 주변과 외곽세계를 모른다는것은 유감이 아닐수 없다. 연길분지의 북부와 서북부를 가로 지른 평봉산과 그 이음산인 병풍산이 그러하다. 이럴 때 연우산악회에서 평봉산, 병풍산을 등산한다고 하니 나는 무척이나 기쁨에 들떴다. 12월 3일, 눈내린 뒤의 바깥세계는 어딜 보나 눈속세계. 아침 8시 연길시 공원다리 서쪽가에서 25번중형뻐스를 잡아타고 종점에서 내리니 원 연집향 대암 8대다. 연길~도문구간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10여리는 잘 되는것 같았는데 대암골에 첫발을 들여놓는 나로서는 모든것이 신나기만 했다. 대암8대 뻐스정류소에서 일행을 점검하니 도합 남녀 10명이다. 그들로는 연우산악회 회원들인 리경호씨, 김수영씨, 박춘실씨, 김삼씨, 리용남씨, 리화씨, 송문자씨에 새로 가담하는 공원소학교의 리희란씨, 지방세무국의 조미선씨 그리고 필자. 금방 마을을 벗어났는데 이 고장에 익숙해보이는 송문자씨가 저기 북쪽 산밑에 불교사원이 있다고 말꼭지를 뗐다. 연길시 북쪽 변두리에 연변최대의 불교사원이 일떠선다더니 대암골 어디인지는 딱히 모르는 일행들이였다. 벌써부터 맘이 들뜬 일행은 마을 서쪽골 등산코스를 대암 마지막 마을 뒤 북쪽골로 바꾸었다. 눈온뒤의 맵짠 추위는 얼굴을 베어갈듯 기승을 부리였다. 그래도 스적스적 걷기만 하는데 처음에는 민둥산을 방불케하는 주변산들과 그 기슭들이 스산하기만 하더니 그게 아니였다. 몇리길을 조여 산밑에 대이니 참나무 등으로 쫘악 덮친 산천은 별유세계였다. 그런 골안어구에 집몇채와 함께 허물어져가는 우리식 가옥한채가 일행의 발목을 잡았다. 보매 광복전의 옛집 같았다. 김삼씨는 그런 모습을 사진렌즈에 담았다. 후날 그 어느때일가, 이 고장 기념이 될만한 사진이였다. 이곳에서 골안은 왼쪽 서쪽골과 오른쪽 북쪽골로 갈라졌다. 오른쪽 북쪽골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니 골안어구에 림시로 만든 산문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서니 《연변대각사(大覺寺)》라고 쓴 글발과 한자로 된 커다란 불(佛)자가 시선에 잡혀왔다. 이제부터 대각사—불교사당구역이다. 산문 뒤 왼쪽가는 산발따라 이미 굉장한 터전을 잡아놓았는데 그 밑에 기다란 단층집이 보이였다. 집지기는 리씨성을 가진 60대미만의 어른이였는데 몸도 녹일겸 휴식하는사이 대각사의 래력과 그 건설전망얘기를 듣게 되였다. 연변 최대의 불교사찰로 일어설 그 전망이 눈앞이였다. 아직 산밑터전에 단층집하나를 달랑 가진 현실이지만 지난 8월에 이미 정초식을 가진 상태였다. 리씨어른은 우리를 언덕우의 불교사찰터로 안내하였다. 그때에야 우리는 이제 인민페 3억이 투자된다는 이곳 불교사찰은 이미 산기슭을 깎아 터를 닦았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아늑한 산속이라는것을 알수가 있었다. 멀리 하늘가 모아산이 정남쪽에 위치했고 서남쪽 산기슭엔 소나무들이 가득하였다. 소나무는 영원불변과 장생불로의 상징이라더니 곧 일어설 대각사에 정기를 더해줄것은 기정사실이였다. 송문자씨께 감사한 마음이다. 문자씨의 덕분에 불교사찰—대각사터를 돌아보게 된 우리 일행은 리씨어른과 작별하고 숫눈길을 헤치며 석인골이 보인다는 뒤산 산정에 올랐다. 북쪽산아래 석인골은 서남쪽으로 깊이깊이 뻗었는데 이골따라 들어가면 지난 30년대초반 연변의 항일근거지의 하나로 이름난 연길현 팔구항일유격근거지에 이르게 된다. 력사를 알면 그 산에 대한 느낌이 다르게 느껴진다. 대각사에 이어 접하게 된 팔구항일유격근거지를 지척에 두니 모든것이 정답기만 하다. 우리 일행은 자연과 력사문화가 어우러진 산야를 걷고 있었다. 눈덮인 산발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니 정다운 느낌은 한결 짙어만 갔다. 몇리 산등성이를 조이니 저 앞에 자그마한 바위산이 나타났다. 바위산을 넘으니 그 다음 구간부터는 연해연방 바위돌들인데 바위돌은 인위적으로 쌓아놓은 산성이런듯 산발을 쭈욱 주름잡았다. 남쪽과 북쪽은 경사도가 급한 산비탈이라 옛산성 갔다는 느낌이 보다 강하게 안겨들었다. 인위적산성은 아니더라도 자연적산성을 이어놓으면 난공불락의 요새로는 안성맞춤이였다. 또 북쪽이 깎아지른듯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남쪽이 무너져내린 바위돌들이여서 그 사이사이를 누비니 탄성이 절로 났다. 한발만 잘못디뎌도 바위산아래 굴러떨어질수 있는 구간구간들이 연달아 왔다가는 저뒤로 사라지군 했다. 김삼씨는 이 시각을 놓칠세라 디지털사진기에 담고 또 담았다. 그래도 옛산성이 아닐가하는 느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남북 량쪽기슭에 무너져내려 쌓여진 돌덩이들이 이런 느낌에 부채질했다. 생각밖으로 다닥친 바위산, 바위돌들 풍경이라 미처 예비지식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한식경이나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하긴 부질없는 느낌만이 아니였다. 몇리나 뻗어나간 바위산, 바위돌 산등성이구간을 지나니 가파른 산등성이가 사라지면서 아득한 산정벌이 이어선다. 리경호씨는 여기를 평봉산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그말과 같이 사방에 눈주어도 나무숲으로 덮힌 평탄한 산정벌이고 이 산정벌 남쪽은 여러 군데가 등골이 오싹해나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산정벌을 또 몇리 줄이다가 산봉을 이룬 두 낭떠러지 사이홈을 따라 나무숲을 내리헤치는데 가로지르며 무너져 내린 바위돌들이 앞을 막아섰다. 눈에 묻혀버린세계라 별생각이 없이 바위돌우를 걸어지나는데 김삼씨가 소리질렀다. 《리선생, 그저 지나칠 돌무지가 아닌데요?!》 《?》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필자는 와뜰 놀랐다. 정말이지 순간적으로 숨이 척 멈추어서는 기분이였다. 아래쪽을 보니 인위적 축조가 선명히 안겨들었으니 말이다. 《아니, 이거 고구려시기 석성(石城)으로 알려지는 이 아닌가!》 급기야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돌무지는 모두가 무너져내린채 좌우로 수십메터나 뻗었는데 석성의 너비는 2메터를 넘기지 않아 보이였다. 나무숲속에 잔나무가 꽉 서린데서 그 이상 더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북동쪽으로 뻗은 석성은 두산사이 골안 물홈에 이르러 동강났다. 다시 돌아와 그 높이가 한메터도 넘는 석성아래구간에서 제각기 기념사진을 남기는 필자와 김삼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행한 리경호씨도 그 흥분속에 젖어들었다. 력사속에 깊숙히 빠져들며 자연과 하나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우리 일행이 이미 산기슭아래로 사라진데서 더 이상 지체할수가 없었다. 민가의 점심참이 기다리는판이라 산을 내려야 했지만 생각은 저 웃쪽 두 바위산사이 석성에로 가 있었다. 때는 점심 12시와 1시 사이였다. 귀가후 집에 들어서기바쁘게 《연변문물휘편》(한어문)을 펼쳐든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만 싶은 심경이였다. 고대문물편 제5장 고구려시기 제2절 제5부분에는 과연 《옛 유적》조목이 적혀있었는데 천리장성이라 일컿는 장성은 화룡시 원 토산진 동산촌 동산에서 시작하여 화룡시 서성, 룡문 구간을 거쳐 룡정시 세린하, 로투구, 동불사, 팔도 그리고 연길시의 연집, 도문시의 장안진 계림북산에 이르면서 지금의 연길시 북쪽 산등성이에 수백메터구간의 석성을 남겨놓았다니 그럴만도 했다. 필자는 다시 대학동창인 류연산씨가 쓴 기행문 《연변의 고구려 산성》을 펼쳐들었다. 2003년 《연변문학》5호와 6호에 실린 련속기행인데 천리장성에 관한 해당자료연구와 현지답사를 결부하여 쓴 기행이여서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그중 한단락은 이러했다. 《연집 대암촌에서 북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 장성을 대암옛장성이라고 한다. 지금도 병풍산 동쪽 끝에서부터 동쪽의 돌벼랑사이의 산어구의 남측에는 300메터길이의 석성이있다. 그 넓이는 1.8메터, 남아있는 높이는 0.7~0.8메터이다. 돌벼랑의 동쪽으로부터 동남으로 방향을 꺽어서 소연길하골의 서쪽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은 대개 흙으로 쌓은 것인데 그 길이는 5리나되는데 보이는 곳도 있고 전혀 흔적이 없는곳도 있다.》 그럼 이 장성은 고대 어느시기의 창조물인가, 이를 두고 《연변문물휘편》은 옛장성의 년대문제는 학계의 설법이 서로 다르다면서 고구려시기 설, 발해시기 설, 동하국시기 설, 고려조시기 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편집진은《고구려 통치시기》로 잡는다면서 그 근거들을 내놓았다. 또, 이 책에서는 옛 장성은 화룡시 원 토산진구간부터 도문사 장안진 구간까지 길이 100여킬로메터고 훈춘시 경내의 옛장성과 이어졌는지는 보더 더 깊은 조사와 연구가 있어야겠다고 했다. 1988년까지의 연구결과이다. 했으나 류연산씨는 화룡시, 연길시, 도문시구간의 옛장성이 훈춘시 옛 장성과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옛장성에 관계되는 해당자료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현지답사를 거쳐 내린 주장이였다. 력사학자인 필자는 류연산씨의 주장에 동조되였다. 전공이 고대력사분야는 아니더라도 이면에도 흥취를 갖고 많은 책과 자료들을 보며, 현지답사를 하며 일가견을 가진 필자였다. 연길시 북쪽외곽으로 되는 대암의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걷노라면 사방이 환히 펼쳐진다. 산구인 서북쪽과 북동쪽 구간은 그만두고라도 구릉지대로 되여있는 동서 남쪽구간에 시선을 던지면 옛장성의 좌우량측에 수십자리의 돈대(墩坮)가 세워져 료망대나 봉화대로 쓰이였다는것이 실감나게 안기여든다. 대암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돈대만 해도 연길시 주변의 구릉지대에 우뚝 솟은 동쪽 저 멀리의 청차관(清茶馆) 돈대, 모아산 돈대, 의란진 동흥촌 구간의 대돈대를 들수 있는데 연길시 공원의 서쪽 정자자리 소돈대는 직접 한눈에 볼수 없을 뿐이다. 필자일행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는 이렇듯 고구려 시기 옛 장성과 그에 속한 옛 돈대도 갖고있는 력사와 문화가 유구한 고장이다. 누군가 중국의 명산—태산에서는 살아움직이는 력사를 만날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 연길시 외곽산들인 평봉산은 물론 곳곳에 루루 2000년을 자랑하며 살아숨쉬는 력사를 만날수 있으니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그 시각이 좋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속에 존재해왔다는것을 느끼는 그 시각시각이…
34    내 고향 여행(7)ㅡ나는 사이섬을 잘 몰랐다 댓글:  조회:2958  추천:86  2005-11-02
내 고향 여행 (7) 나는 사이섬을 잘 몰랐다 리 함 지난해 2004년에 나는 문화산맥사이트—koreancc.com에 올리려고 《천리 두만강을 따라》 10여편을 써낸바 있다. 두만강련속기행인데 그 여섯번째 기행이 바로 《사이섬 사이섬》이였다. 인터넷에 뜬후 반영도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제딴에 두만강사이섬을 안다고 자부했었다. 헌데 이번에 조선땅에서 두만강 종성구간을 답사하면서 나는 사이섬을 잘 몰랐다는것을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지난 10월 18일~24일 사~사 려행으로 조선행 답사길에 올랐다. 답사의 목적은 우리 조선족시인이고 민족시인이고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한편 사이섬 종성구간을 옳바로 돌아보는것이였다. 하지만 지척이 천리라는 말도 있듯이 강 하나를 사이둔 국경을 넘나들기란 여간 쉬운일이 아니였다. 형식이 사~사 려행이다보니 중조변경지구 출입경통행증을 내야 하고 조선측에서 국경통행검사수속과 일련의 체류등록 수속을 거쳐야 하는가 하면 려비외에도 빈손으로 갈수는 없는것이였다. 한마디로 돈인데 국내에선 20~30원으로 잠간이면 다녀올수 있는 길을 그 곱절이 아니라 수십배에 달하는 돈을 팔면서 적어도 수일내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래도 가야 하는 답사길이였다. 윤동주를 쓰면서, 사이섬을 쓰면서 이주사를 다루면서 종성을 모른다는것은 말도 안되였다. 10월 18일, 나는 우리측 개산툰 해관과 조선측 삼봉세관을 순조로이 통과하고 함북 온성군 삼봉땅에 들어섰다. 두만강 남양의 삼봉과 종성사이는 고작 10킬로메터 거리라지만 필요한 체류수속을 밟느라고 2~3일후에야 종성답사길에 오를수 있었다. 종성에 이르러 선참 찾은곳은 종성거리 중심가에 위치한 수항루였다. 수항루는 1610년에 세워져 근 400년의 력사를 가진 3층루각으로서 종성의 상징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10여년전에 전용차로 종성땅을 거치면서 잠간 내리기도 하였지만 중시가 따르지 못하여 인상이 그닥 깊지 못하였다. 이번에 다시 답사하니 인상이 전혀 달랐다. 종성군 동풍면에서 살아온 윤동주 할아버지세대가 거치여온 수항루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조선족 100여년 이주사의 산 견증물이여서 더욱 그러한가부다. 수항루에 오르니 깨끗한 종성 거리거리가 한눈에 안겨왔다. 그에 따라 나의 마음은 세차게 들먹이였다. 조선족이주사를 볼 때 종성땅은 정녕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기 때문이였다. 100여년 조선족이주사의 눈물어린 사이섬이 바로 종성이란 이땅에 걸터앉기도 하여 들먹이는 마음을 인차 진정할수가 없었다. 인상적인것은 지붕네각이 들린 고루한 팔간집 모양의 집이 허다하다는 것이였다. 전통적인 우리 식의 검은기와집들인데 우리측 두만강 연안과 연변시골들에서 아직도 가끔 찾아볼수 있는데다가 종성사람들의 말씨 또한 연변말씨와 똑같아 조선땅이라 하기보다 연변의 어느고장이라는 편이 더 나을것 같았다. 수항루와 종성거리거리를 인상깊게 일별한후 나는 발길을 두만강가 신흥촌 사적지쪽으로 돌리였다. 사적지는 수항루에서 곧추 북으로 통한 길 연장선에 위치했는데 수항루를 지나 종성~온성 구간 철길을 넘으니 사적지, 즉 원 사이섬구역이였다. 이 구역은 또한 일찍 김일성장군께서 력사적인 금산봉회의와 지하혁명조직의 사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1931년 5월과 1933년 5월에 선후 두차례나 두만강을 건너오신곳이여서 혁명사적지로 이름높은 구역이기도 했다. 철길을 넘고 논밭구간을 지나니 푸른 나무들속에 펼쳐진 널다란 운동장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정면으로 통한 운동장 저쪽가에는 그닥 크지 않은 흰색의 화강암 돌비석이 서고있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비문에는 1933년 5월 28일 김일성장군께서 한 부대성원들과 함께 이 운동장에서 단오명절을 즐기는 이곳 인민들의 운동회를 보아주시였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운동장 동쪽가는 수풀이 우거진 혁명사적지의 중심부분이였다. 여기에는 대형화강암 돌비석과 함께 오태희로인의 집, 마을집들 몇채, 박우물이 재현되여 혁명사적지로 잘 꾸려지고있었다. 오태희로인이면 지난세기 30년대초 왕청현 5구로 불리운 석현일대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쓰러진 오중화렬사의 아버지를 가리킨다. 오로인네 집안은 말 그대로 《보기 드문 대가정》으로서 워낙 함경북도 온성군 고작골에서 살다가 1914년경에 왕청땅에 이사하였었다. 오중화의 동생들인 오중흡, 오중성 등도 쟁쟁한 항일렬사들인데 이들 생전에 오태희로인은 두만강을 사이둔 왕청과 온성땅에서 활동하는 자식들의 뒤바라지로 한시기 지금의 혁명사적지인 종성 신흥촌 두만강가에 집을 잡고있었다. 당시 왕청현유격대대 정위로 활동하던 김일성장군은 1933년 5월 28일 온성 종성지구 지하혁명조직들의 사업지도차 이곳 신흥촌에 오셨다가 오태희로인네 집에 머무르게 되고 《물이 없어》 고생하는 마을사람들의 정상을 헤아리시고 친히 여기에 박우물을 마련하여주시였던것이다. 두만강가 신흥촌은 이같이 김일성장군의 항일혁명력사가 깃든 유서깊은 고장이였다. 그러던 이 고장이 오늘은 혁명사적지로 훌륭히 꾸려지고 박우물가에는 장군께서 친히 쓰신 모조품 삽이 정히 보관되여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이곳을 지나 나무숲속으로 뻗은 길을 따라 두만강쪽으로 나가면 또 대형화강암 돌비석과 함께 모조품 나루배가 늪가 정한 지붕아래 놓여져있는것을 볼수 있다. 김일성장군은 1931년 5월 14일 새벽 여기 비밀나루에서 배로 두만강을 건너 종성, 온성지구에 진출했고 1933년 5월 28일에는 또다시 종성지구에 진출하였다가 5월 29일 이곳나루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갔던것이다. 두만강가 원 사이섬 답사로 나를 흥분시킨것은 바로 이 구간에서였다. 김일성장군께서 지난 세기 30년대초반에 선후 두번이나 이곳 나루를 거치였다는것은 여기가 두만강사이섬 나루터라는것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가 신흥촌사적지를 소개하는것도 이곳이 두만강사이섬의 연장부분이고 사이섬 나루터의 옛터였기때문이다. 나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다. 나는 지금 조선측 그제날 사이섬나루터에 서고 있었다. 그때에야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신흥촌 혁명사적지 동쪽과 북쪽구간은 온통 늪세계였다. 늪들은 어디나 《부등매》식물이 무성히 자라고있었는데 어린 시절 부등매를 따서는 꺽어서 호호 불던 때가 금시런듯 했다. 그 시절 민간에서 부등매로 불렀기에 그대로 적어보는데 이 식물의 고유이름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사이섬 늪에 대한 시야는 넓어만 갔다. 뒤미처 지금의 혁명사적지가 자리잡은 곳도 많이는 늪자리였다고 하니 나는 더욱 놀랐다. 지난 80년대초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늪이 대단히 많은 모양이였다. 그러던것을 혁명사적지로 꾸리면서 온성군의 젊은이들을 위수로 하는 청년돌격대 8~9개 중대가 조직되여 옹근 2년만에 걸쳐 사적지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다. 사적지 수요로 적잖은 늪을 메우고 구뎅이를 메우고 높은데를 깎아내렸으니 그 토방량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적지에 일어선 여러 화강암비석들에는 시간이 모두 1983년 5월 28일이라고 새겨졌는데 이는 사적지의 대외개방시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다면 두만강가 이곳의 늪들은 천연적인 소산물일가, 다가 그런것이 아니였다. 우리측 사이섬과 그 일대만 보아도 그러하다.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연길현 개산툰구간 두만강은 광개향 선구촌구간에서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가 꽤나 되는 섬을 이루었다. 이 섬이 조선족이주의 력사, 북간도의 유래를 보여주는 사이섬이다. 력사자료를 보면 선구, 광소와 조선 종성사이로 흐르는 중국측 두만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고 이 복새험은 그제날 광제욕에 잇대여있는 륙지였다. 1881년에 청나라에서 연변지구의 봉금제를 사실상 페지한데서 조선사람들이 월경하여 광제욕 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뺐다고 하는데 그후부터 복새험으로 불리운 이곳땅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변하고말았다. 처음 조선사람들은 날농사를 하면서 이곳 땅을 사이섬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번지여 두만강북안은 조선사람들에 의해 북간도로, 압록강 북안은 서간도로 불리여졌다. 1885년에 봉금제가 정식 페지된후에는 더욱 그러했다고 알려진다. 다시 선구촌으로 돌아오면 선구촌의 원 이름은 사이섬으로서 선구촌의 1~5촌민소조 구역이 머리섬이고 천평벌 말단의 선구촌 6촌민소조구역이 꼬리섬으로 불리운다. 그러던것이 이곳에 나루터가 앉으면서 나루터가 번지여 선구(船口)로 되고 선구가 꼬리섬의 지명으로 되여버렸다. 이에 따라 광복전 강량안에 종성세관과 선구해관이 서고 우리측에 세무소, 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흥기하면서 나루터마을은 제법 흥성흥성한 동네로 알려졌다. 그제날 나루터마을이다. 선구 머리섬에서부터 섬을 이루며 흐르던 두줄기 강이 이곳 꼬리섬나루터에서 합수되면서 강폭이 아주 컸다고 하지만 지난50년대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당지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으며 제방뚝을 쌓기 시작한데서 강뚝이 앞으로 나아가고 나루터는 뚝밖으로 밀려났다. 지금도 선구 6촌민소조 앞구간 논밭머리 쑥대속에 가면 그 시절의 자그마한 콩크리트땜을 볼수 있다. 나루터의 흔적이라 하겠다. 이것이 중국측 상황이라면 조선측에서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두만강가 종성구간에 제방뚝을 높이 쌓으며 강물을 지금의 물곬으로 흐르게 하니 원 강곬에 숱한 늪들이 생겨날수밖에 없었다. 우리측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넣은것이 50년대부터라고 하니 조선측도 그때부터의 일로 보는것이 옳을것 같다. 광복전에는 강폭도 넓고 서로 나루배가 오갔다고 하니 두말이면 잔소리다. 했으나 조선측 늪들이나 사적지가 바로 길이가 길고 높은 제방뚝 남안에 있어 우리측 두만강 남안이나 선구 6대 뒤산에서도 볼수가 없다. 이런 고로 허다한 이주사연구관련자들은 사이섬건너 조선측 사정에 대해서 밝지가 못하게 된다. 이런 사정에서 필자는 1991년 8~9월간에 조선땅에서 두만강, 압록강 사적지들과 전적지들을 두루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종성의 수항루나 두만강가 신흥촌 사적지를 돌아보았음에도 그 시절엔 조선측 늪들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던것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그런속에서 답사의 하루가 어떻게 흐른지도 알지 못하였다. 조선측 두만강 뚝우에 오르지 못한것이 다소 유감스럽기도 했지만 1991년에 이어 종내, 뜻대로 종성구간을 답사하고야 말았다는것은 더 없는 마음상 위안으로 되였다. 마음이 거뿐하기도 하고 상쾌하기도 한 두만강남안에서의 나날은 살같이 흘러갔다. 정말이지 두만강 남안으로 답사의 한걸음을 내디딘다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지만 나는 그 한 걸음을 내디디고야말았다.
33    내 고향 여행(6)ㅡ천년고도-성자산성을 찾아서 댓글:  조회:4083  추천:69  2005-11-01
내 고향 여행(6)편자의 말: 지난해 7월에 쓴 기행을 이번 력사문화기행에 올리는 바이다. 옛 산정늪과 더불어 천년고도 성자산성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천년고도—성자산성을 찾아서 리 함 2004년7월 21일은 연변백두산문인산악회로 말하면 뜻깊은 하루였다. 이날 백두산문인산악회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연길시 동쪽에 위치한 천년고도—성자산성에서 특이한 산악회창립 8돐 및 문집출간기념회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오전 9시가 되자 백두산문인산악회 김학송 등 여러 회원들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 일행 그리고 여러 문인단체들과 주내 보도매체들에서 찾아든 30여명이 어김없이 시안의 뻐스부 로잔(老站)—15선 뻐스시발점에 모이였다. 서로 만남의 기쁨을 주고받는 사이 15선 공공뻐스는 어느덧 15선종점역—성자산 서남쪽산밑에 자리잡은 연길시기름창고 부근에 이르렀다. 이어 등산행이 시작되였다. 북쪽언덕으로 올리뻗은 길을 따라 조금 나아가니 인차 숲속오솔길이 맞아주었다. 흐리터분한 날씨라지만 한여름이라 찌는듯이 무더운데서 등산객일행은 모두가 땀동이를 쏟아야 했다. 산중턱에 이르니 벌써 숨이차서 헐떡이는데 50대의 연변어머니수필회 최기자회장은 젊은이인양 생기로 넘쳐있었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이였다. 60대 후반에 이른 조회장은 감개무량해서 최근년간에 문화발전추진회 일에 좇기다보니 산에 한번 오르지 못하였는데 오늘 산행길에 나서니 마음이 더없이 상쾌하다고 속셈을 터놓아 중심화제를 모았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가 가끔 유머를 터뜨려 등산일행은 웃음속에서 시간가는줄 몰랐다. 두어번 휴식끝에 가파른 서쪽비탈길이 자리를 내고 남북으로 뻗은 숲속 산정오솔길이 펼쳐졌다. 무너져 내린 옛 성벽돌들이 수두룩하여 일행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있었다. 백두산문인산악회 부회장 류광철씨가 지금 우리 모두가 옛날 성벽우를 걷고있다고 하여 들뜬 마음들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정말이세요?!》 연길시 중앙소학교 교도주임 김영옥과 건공소학교 교도주임 허화월씨가 살짝 튕겨주자 산정은 또 한번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산정으로 뻗은 성벽소로길은 이윽토록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내 나무그늘속이였다. 이때 백두산문인산악회 김학송회장이 뒤켠에서 앞으로 튀여나오며 이제 조금 더 나아가면 옛 돌성벽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얼마 나아가지 않아 산정소로길 오른쪽아래가에 돌성벽이 나타났다. 장바 한마장 정도의 돌성벽은 천년세월이 지난 오늘도 옛모습이 여전하였다. 이때에야 등산일행은 실감이나서 옛성벽우로 걸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등산객들은 성벽가에 모여 너도나도 성자산성 지식을 쏟기 시작하였다. 알고보면 성자산성은 옛날 동하국의 남경옛터였다. 력사를 펼치면 오늘의 연변땅을 포함한 동북땅에는 료금시기가 있었다. 료나라는 북방의 소수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정권으로서 219년이나 존속하면서 북송과 대치하여왔다. 료나라말기에 이르러 거란족이 녀진족에 대한 압박이 가심화되자 녀진인들은 그 수령 아골타의 지도하에 반기를 들었다. 드디여 기원 1115년에 녀진족은 아골타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불렀으며 10년이 지난 1125년에는 료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금나라는 선후 120년간 존재하면서 나라안에 6경 19로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부, 주, 현들을 두었다. 그때 연변지구를 포함한 두만강 남북에는 해란로가 설치되여 상경로(上京路)에 예속되였다. 동하국의 력사배경으로 보는 북방소수민족정권인 료와 금의 간단한 소개이다. 금나라 말기에 몽고가 흥기하면서 금나라는 쇠잔의 일로를 걸었다. 이럴 때 금나라 통치계급내부에서 분화가 일면서 금나라 료동선무사(宣抚使)—포선만노(蒲鲜万奴)가 기원 1215년에 동경으로 불리운 오늘의 료양에서 천왕으로 자처하면서 대진(大眞)국을 세웠다. 후에 포선만노는 녀진인들의 지구로 자리를 옮기면서 국호를 동하(東夏)라고 불렀다. 동하국시기에 연변지구는 동하국에 망라되였는데 동하국 왕 포선만노는 한때 연길시 동쪽 20리가의 성자산성을 행도남경(行都南京)으로 삼았다. 오늘 성자산성 산정을 주름잡아 걷노라면 옛 돌성벽이 산정을 면면히 이어갔다는것을 볼수 있다. 해당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성자산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그후의 발해시기, 료금시기, 동하국시기에 계속 수건하면서 사용되였다고 한다. 전반 성자산산성을 살펴보면 말그대로 말발굽형으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중간이 움푹 패워들어갔음을 어렵사리 보아낼수 있다. 서북에 위치한 산성의 주봉은 해발고가 390메터이고 동쪽과 북쪽에 골짜기가 있어 실개천이 각기 골짜기를 따라 흐른다. 이 두갈래 실개천은 또 중간이 패운 산성의 복판지대를 3개의 평지로 갈라놓았는데 산성의 동남쪽가에서 해란강물을 받아들인 부르하통하가 산성의 남쪽, 동쪽, 북쪽 삼면기슭을 에돌아 흐른다. 등산일행중 누군가 옛날성벽의 높이는 6메터가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 알고보면 돌성벽의 높이는 1메터내지 3메터였다고 한다. 성벽기초의 너비는 5—7메터로서 성벽 전체 둘레의 길이는 4454메터로 나타난다. 산성의 동쪽과 북쪽, 서쪽 그리고 동남쪽에 각기 성문유적이 있는데 유심히 답사하면 옛날 성문흔적을 보아낼수 있어 콜롬보가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성자산성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이 자리매김했다. 필자가 해당자료에 따라 1223년에 흥기한 몽고군이 서쪽기슭을 따라 물밀듯이 밀려드는데서 동하국이 더 이상 견디여 내지 못하고 선후 19년간 존재하다가 력사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피력하자 일행중 아쉬움을 표시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고작 19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는가하는 눈치가 력연했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1223년 몽고군이 대거 진공할 때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가 성자산산성안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보면 동하국의 남경이였던 성자산성은 당년 동하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성벽가를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곤경에 빠진것은 중앙소학교와 건공소학교의 교원과 생활안내신문의 처녀기자였다. 등산임을 모르고 달려오며 뒤굽높은 산다루를 신었으니 그 신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래도 그들은 옆사람의 걱정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용케도 산행을 이어갔다. 수림속내리막길을 내리니 산아래 평지로 향한 홈채기 오솔길이다. 이곳 오솔길은 참나무 등으로 꽉 덮힌 산정과는 달리 어깨를 치는 억새풀이 기분을 한결 돋구어주었다. 연변방속국의 김기자가 억새풀밭을 지나는 기분이 어떠한가고 물음을 터뜨린데서 일행은 재다시 웃음꽃을 피우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산아래 평지의 수림속공간에는 벌써 《백두산문인산악회창립 8돐 및 문집출간기념회》 프랑카드와 산악회회기가 나무사이에 걸리고 좌석이 깔끔하게 정리되여 있었다. 누군가 이 자리가 옛날 동하국 궁녀들이 춤추던 자리라고 웃기여 기분이 한결 맑아졌다. 기념모임은 정오를 앞두고 열을 올리였다. (소식기사는 뉴스글을 참조!) 점심식사 안팎에 여러 회원들과 일부 기자들이 동쪽 아래쪽 묶은밭에 가서 산책하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곡식밭이였던 공지는 풀밭을 이루었는데 기와쪼각들이 흔해빠졌다. 처음 보는 이들은 신기한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성안의 사면비탈과 복판3개평지는 어디라없이 기와쪼각과 도자기그릇 쪼각들이다. 이런 쪼각들은 고구려, 발해, 료금시기의 쪼각편으로 헤아려지는데 중부지대의 궁전터는 료금시기의 유적들이라고 한다. 바로 우리가 선 자리였다. 궁전동남쪽 200메터쯤 되는 평지에 널린 기와쪼각, 도자기쪼각은 흔히 고구려시기것이라고 하니 고구려, 발해, 료금시기의 궁전들이 신기루마냥 시야에 안겨드는것만 같았다. 어느덧 오후 오락판도 막을 내리고 하루길을 달리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떠날 시각이 되였다. 기념모임 참가일행은 아쉬운대로 자리를 떠야 했는데 북쪽 골짜기 성문옛터에 박힌 성자산성 표시패말이 또 등산객들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80년대에 세운것으로 알려지는 세멘트패말은 글씨가 전부 지워져 알아볼수가 없었다. 큰돌에 새겨 넣었드면 얼마나 좋으랴싶었지만 눈앞의 현실은 아쉽기만 했다. 이태전에 볼라니까 동쪽골짜기의 성문옛터에도 세멘트 패말표시가 있었는데 그곳의 글씨는 그런대로 알아볼수가 있어 다행이였다. 또 하나의 불행중 다행은 연길시 모아산삼림공원 전망계획에 강건너 하룡쪽과 더불어 성자산산성도 개발계획에 넣었다고 하는데 그날이 언제일가, 무척 기대된다. 이 개발소식에 림해서인지 산성리라 불리우는 산아래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7대인가 하는 농촌마을에는 관광객을 위한 편이한 휴식터가 가끔 보이고있었다.
32    내 고향 여행(5)ㅡ동하국의 숨결어린 옛 산정늪 댓글:  조회:3443  추천:78  2005-10-30
내 고향 여행(5) 동하국의 숨결어린 옛 산정늪 리 함 력사전공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성자산 북쪽산정에 동하국의 력사를 나타내는 옛 산정늪이 있다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도 해당자료를 찾을바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등산팀 고치이자 조직자인 리경호씨께 여쭈었더니 여름과 가을에 이은 10월 15일 옛 산정늪 등산행이 쭈욱 펼쳐졌다. 늦가을의 날씨치곤 여름같은 날씨다. 연길시가지에서 15선뻐스를 잡아타고 소영촌에서 내리니 등산동아리는 제법 12명대오, 리경호씨의 숨은 노력이였다. 그들로는 “연변문학” 주필이자 연우포럼사이트 포럼장인 김삼씨와 시환경보호국의 리경호씨, 연변도서관의 김수영씨, 뱍향실씨 등에다 길림연대변호사사무소의 지영철씨, 정승필씨 그리고 여성 몇분이였는데 모두가 일정한 등산력사를 갖고 있는 유능한 등산애호가들이였다. 그 가운데서도 김수영씨는 2000년 3월 뾰족산 등반부터 등산을 3년간 꼬박 견지하다가 2001년 4월 연변등산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 국제등산마라촌 경기대회에 참가했고 한국등산학교에서 암벽등반까지 배우며 소문놓은 녀사였다. 성자산아래 서남쪽가 기름창고부근에서 북으로 령을 넘으니 령 저쪽 북녘에 덩실한 외진산이 시선에 맞혀왔다. 등산행의 목적산이였다. 헌데 누구도 길을 몰랐다. 필자도 성자산의 저 자매산은 숙맥이여서 길을 물어야 했는데 산 서남가의 완만한 기슭에 대이니 두갈래 소로길이 나타났다. (그래도 산쪽에 붙은 소로길이 지름길이겠지.) 나랑 몇몇의 주장에 산쪽 소로길에 나서니 이 소로길은 산기슭 옥수수밭으로 통한, 어이없이 막힌 길이였다. 그런대로 따놓은 옥수수이삭사이로 수걱수걱 걷는데 “푸드득”소리와 함께 꿩 한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두가 환성을 지르는 속에 누군가 “엄마 꿩이다!”, “장꿩이다!” 우스개를 올려 재밌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 토론속에서 막히는 숲속을 어느결에 헤치였는지도 몰랐다. 옥수수밭 북쪽가 홈채기를 건너 왼쪽 등성이에 오르니 산정으로 통하는 수레길이다. “그러면 그렇겠지!” 등산동아리 선술군 리경호씨가 선두를 긋자 수백메터밖의 산정을 잠간새에 조이였다. 눈앞에는 바자막이를 친 울타리가 나타나고 대문가 막사에서 강아지 한마리가 왕왕 짖어댔다. 잇따라 10살쯤 되여보이는 한족애가 쪼르르 나타나고 아가위(山楂)를 따는 한족로인 내외간이 우릴 맞아주었다. 그때에야 주위를 둘러보니 산정은 동으로 경사지고 움쭉 들어간 개활지대인데 꽤나되는 산정의 밭은 아가위, 사과배 등 과일나무들의 세상이였다. 산정의 밭과 과일나무는 한족내외간의 소유였다. 뒤미처야 안바이지만 바깥로인은 올해 73살에 나는 리학인(李學仁) 로인으로서 산아래 광흥 1대 사람이였다. 원적이 산동인 이 로인은 1952년에 도문을 거쳐 1955년에 이곳 광흥촌에 자리잡았는데 여기 산정의 주인으로 “군림”한지도 어언 35년 철을 잡고있었다. 처음에는 생산대의 땅 3무에 불과했지만 부지런히 가꾸며 쯤쯤이 손을 댄데서 밭면적이 1헥타르로 늘어났다. 사과배에다 아가위 등 까지 심으니 과일나무도 약 300주를 이루어 제법 과수밭으로 변져갔다. 필자가 리학인로인을 잠간 취재하는사이 등산동아리들은 가지 휘여지게 달린 아가위는 연변서 처음 본다면서 맛보기에 여념이 없는가하면 몇몇 녀성들은 과수밭 밑에서 가을민들레캐기에 열을 올리였다. 대풍이 든 이 가을의 풍경, 단풍이 빠알갛게 든 이 가을의 마지막 풍경은 동하국의 숨결 어린 여기 산정에도 그대로 연연했다. 풍년든 산정을 일별하노라니 저 아래 발치에 인공늪을 방불케 하는 애어린 늪이 보이였다. 저 늪이 최근년간의 산물인가고 묻자 리학인로인은 “선머? 이징치빠바이낸라!” (뭐, 이미 700~800년이 되네!) 하고 대답했다. “7~800년?” 나는 잘못 듣지나 않았나하여 다시다시 물어도 그 대답은 드팀없는 700~800년이다. 이곳이 원적이 아닌데 어떻게 아는가고 물으니 박물관에서도 오고 연변일보 한족기자들도 오가며 들은 풍월이란다. 어찌하든 늪의 력사가 700~800년이면 천년고도(古都)를 자랑하는 동남쪽건너 성자산의 동하국력사와 맞아 떨어진다는 말이된다. 이런 늪을 누가 반기지 않겠는가, 나와 김삼주필, 김수영씨, 리경호씨, 박향실씨 등은 늪가를 조용히 거닐며 동하국의 옛 숨결을 가늠해 보았다. 여기 산행의 목표가 바로 이 천년의 유구한 력사를 거치여 온 동하국의 옛 산정늪을 답사하는것이였다. 보매 옛 산정늪은 최근년간의 금시산물이나 다름없이 패워있었는데 너비는 불과 10메터 안팎이고 주변에는 한그루의 버드나무와 여러 그루의 과일나무들이 그림같은 풍치를 그려주고있었다. 늪면은 푸른 늪이끼로 덮히여 있었지만 손으로 가시고 보니 맑디맑은 물이였다. 로인내외쪽에 대고 소리치니 늪의 깊이가 한메터반은 잘 된다지 않는가. 찰나 나는 까알깔거리며 목욕에 여념이 없는 그 옛적 동하국의 궁녀들을 보는듯 싶었다. 이어 가마타고 성자산을 빠져나와 이곳 산정늪에 오르는 궁녀행렬이 보이며 동하국 그 시대를 떠올렸다. 지금에 이르러 내 고향 연변에 널리 알려진 성자산성은 연길시 동쪽 10킬로메터 되는 기름창고 뒤면산이다. 말발굽모양으로 움푹하게 패여들며 산정평지를 이룬 산정에는 주위 산발을 따라 산성이 근 10리나 뻗었는데 지금도 돌로 구축된 옛 산성모습을 가끔 볼수있다. 옛 품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는것은 기름창고 뒤산산정으로서 이곳에는 높이가 2메터도 넘고 길이가 10여메터나 뻗은 돌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등산객들과 답사자들을 반긴다. 이미 밭으로 되여버린 산성내 옛 궁터자리에 이르면 깨여진 기와쪼각들을 흔하게 볼수있는데 그만큼 력사 또한 유구하다. 고구려시기까지 소급한다니 더욱 그러하다. “연길시문물지”나 “연변문물간편”에 따르면 성자산성은 고구려시기에 구축되여 그후 발해, 료나라, 금나라시기를 거치여 온 것으로 알려진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 통치게급내부의 모순이 격화되고 분화되면서 금나라 료동선무사 포선만노가 반기를 들면서 선종정우 3년, 즉 1215년 10월에 동경인 오늘의 료양에 대진(大眞)국을 세웠고 녀진인의 옛지대로 옮겨앉으면서 국호를 “동하”라고 불렀다. 력사상 수명이 짧은 동하국의 출현인데 동하국 포선만노는 그의 행도남경(行都南京)을 성자산성에 두었다. 허나 동하국의 력사는 너무나도 짧았다. 기원 1223년에 흥기하던 몽고기병이 성자산성을 휩쓸면서 동하국은 패망의 고배를 마시면서 력사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건국 19년만의 액운, 그때 동하국 수령 포선만노가 곧바로 성자산성에 머물러 있었다고 력사는 전하니 성자산성-동하국의 이 남경은 에누리없는 동하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다. 력사로 보는 동하국 그리고 성자산성의 유래라 하겠다. 아마도 그 시절에 이곳 산정의 인공늪은 동하국 궁녀들과 귀족들의 놀이터로 무척이나 활기를 띤것 같다.리로인은 이곳 산 이름이 “위츠(浴池)산”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처음 위츠(鱼池)산, 즉 물고기늪산으로 리해했다. 그러면서 궁녀들의 목욕터로 자리잡히는 데는 어찌할수가 없었다. 후에보니 욕지산(浴池山)이 옳았는데도 말이다. 우리 일행 몇몇은 옛 산정늪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동료 김삼주필이 정성다해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그 시각 나의 가슴은 토끼를 품은듯 콩닥콩닥 뛰였다. 동하국의 옛 산정늪을 종내 찾고야 말았다는 기쁨의 발로였다. 이윽고 산행동아리들은 밭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찾아보았다. 봉화대주변은 온통 낮다란 나무숲으로 둘러 쌓이였는데 꼭대기에는 깊숙한 구덩이가 패워있었다. 그 서슬에 돌로 쌓은 측면이 드러나 여기가 그 옛날 봉화대자리였음을 알려주고있었다. 봉화대 답사를 마치고 서쪽기슭으로 내리는데 서남쪽 언덕너머 연길시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그에 따른 연길분지며, 광흥골안, 부암골안이 발치에 펼쳐져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그러니 이곳산정은 삼면이 크고작은 강으로 둘러 싸였는데 오늘날은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 광흥골, 부암골이 그 옛날에는 나무숲사이로 제법 출렁이며 흐르는 강물이였을것이다. 연길시에 살면서 연길시와 도문시 구간의 이같은 다른 세계 모습을 처음 대한다는것이 그리도 반가울리가 없었다. 다시 산등성이 아래 원지로 돌아오니 더욱 희한한 정경이 발목을 잡았다. 산정의 대문가에 동하국의 력사를 보여주는 정자 기초돌들이 동그랗게 그대로 나타나 있었던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정자자리가 또 나타났는데 역시 동그란 원을 지은 상태였다. 그러니 완만한 서쪽 기슭을 따라 오르는 이곳 산정에는 엣 정자만 해도 눈에 띄우는것이 두곳으로 알려졌다. 산행동아리들은 흥분에 젖어들었다. 등산을 위한 등산만이 아닌 력사 문화답사로 이어졌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웃쪽켠의 평평한 정자자리에 점심밥곽을 풀어놓으니 우리 일행은 그제날 궁녀들이 노닐던 자리를 차지한 셈이였다. 동쪽을 보고 서쪽을 보아도 이곳 정자자리는 사방을 한눈에 굽어볼수있는 명당자리임이 력연했다. 옛사람들의 지리적 선택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해 늦가을의 오후 한때, 늦가을의 단풍을 즐기는사이 나와 김삼주필, 김수영녀사 셋은 다시 산정답사길에 나섰다. 산정의 과수밭을 질러 동쪽가로 나아가니 와—환성이 저절로 터져올랐다. 동쪽가는 깎아지른듯 경사도가 급한 산지대인데 성자산을 에돌아 하룡을 거쳐 마반산쪽으로 빠지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합수물이 유유히 흐리며 거대한 영어자모 “U”(유)를 만들어내니 환성이 터지지 않을수 없었다. 연길시 동쪽변두리에 개발되지 않고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같은 천하절경이 있다는것이 쉽사리 믿겨지질 않았다. 성자산에서도, 하룡쪽산에서도 느낄수 없고, 볼수없는 여기만의 대자연의 걸작이였다. 우리 셋은 바로 산과 산 사이를 따라 동북쪽으로 흐르던 강물이 산에 막혀 다시 서북쪽으로 굽이를 타며 우리쪽으로 다가서다가 이곳 산밑에서 또 굽이를 북동쪽 산사이로 돌리는 중심지대에 서고있으니 대자연의 신비에 한껏 들떠올랐다. 김삼주필은 과연 천하절경이라며 이곳을 관광코스로 잘 개발하면 좋겠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그날이 언제일가?! 기대가 가는 마음이였다. 아쉬운대로 자리를 옮겨 북쪽 산등성이의 봉화대를 다시 찾으니 첫 인상과 확연히 달랐다. 인공축조로 된 봉화대와 봉화대를 에돈 물도랑홈이 그대로 펼쳐졌다면 돌과 돌을 이어놓느라 직각으로 쪼아놓은 돌 한점까지 발견되여 수확이 대단했다. 흥분속에서 일행셋은 봉화대 서쪽 기슭 풀밭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김수영녀사의 청에 의해 풀밭에 누워 천고마비의 10월의 가을하늘에 눈을 주었는데 그 느낌이 전에없이 좋았다. 그러노라니 지난 여름의 막바지에 한패의 한국인들 안내차로 김수영씨, 리경호씨와 더불어 백두산 북쪽비탈과 서쪽비탈로 백두산 산정에 오르던 때가 생각났다. 그나날 도보로 북쪽비탈로 백두산정에 오를 때도 수영씨의 제의로 풀밭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감상한적이 있었는데 서서보기와 누워보기가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수영씨의 말이 피부로 느껴졌다. 대자연의 품속에 안긴다는 그 기분은 과연 별멋이였다. 어느덧 귀로에 올라야 했지만 연연한 이음산이 아닌 성자산에 이어 그 북쪽가에 또 외홀로 솟은 옛스러운 이곳 산정이 전에 없이 정다이 안겨들었다. 흘러간 력사속에서도 그 위용을 잃지 않으려고 곳곳에 옛모습 드러낸 성스런 산이여서일가, 아니면 성자산성과 더불어 옛기운 서린 동하국의 숨결 깃들어서일가.
31    내 고향 여행(4)ㅡ연안의 땅우에서 댓글:  조회:3426  추천:76  2005-10-04
내 고향 여행(4) 연안의 땅우에서 리 함 1 우리 조선사람들로 무어진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이 연안을 떠나 동북진출길에 오른지도 어언 60주년이 된다. 60년전에 연안이란 바로 이땅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전사들과 조선독립동맹 맹원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 연안땅을 밟은 때가 어제런듯싶다. 벌써 10여년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 서안을 떠난 전용뻐스는 옹근 하루 낮을 달려 황혼이 깃들무렵에야 연안에 도착하였다. 1988년 10월에 공청단중앙은 서안에서 《항전시기의 청년운동학술세미나》를 주최하였는데 그들 일행 연안참관단성원중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연안이 아닌가! 나는 봉황산밑에 자리잡은 연안호텔 8층의 한칸에 행장을 풀어놓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불야성을 이룬 연안성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찰나 기적과도 같이 등불에 현란히 싸인 보탑이 신기루마냥 어둠속에 불쑥 나타났다. 좀 후에야 안바이지만 연안시에서는 우리 참관단일행을 환영하여 설명절이나 중요한 기념행사때에만 켠다는 보탑장식등불을 일제히 켜놓았던것이다. 이튿날 오전 8시 반 우리는 마침내 보탑을 얼싸안게 되였다. 연안시 동남쪽 연하강반의 가령산에 솟아있는 보탑은 그 높이가 44메터나 되는데 당나라때 세워진것이라 한다. 1937년 1월 13일 우리 당중앙과 중앙군위 등 지도기관이 연안에 들어선후 보탑은 연안의 상징으로 억만 로고대중의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보탑—연안, 그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과 혁명지사들이 구름떼처럼 연안으로 몰려들었던가. 그속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겨레혁명자들이 들어있었다. 조선족으로서 첫패로 연안에 들어선 사람은 보안(섬서성 북단에 있는 오늘의 지단현, 당중앙과 중앙군위가 연안에 가기전에 자리잡은곳) 주재 조선인대표 김산과 홍군지휘원 무정 두사람이였다. 연안이 평화적으로 해방된후 그들은 당중앙과 홍군부대를 따라 연안에 들어섰었다. 김산은 특별초청을 받고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항일군정대학으로 간칭)에서 일본경제학과 물리, 화학, 일본어,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무정은 팽덕회동지의 수하지휘원으로 있었다. 김산, 무정의 뒤를 이어 연안에 들어선 사람은 장학량장군의 수하군관으로 있었고 서안사변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족청년 서휘이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안에 들어간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2 전용뻐스는 보탑을 끼고 산을 에돌아 아래로 내리더니 청량산을 거쳐 왕가평(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와 팔로군총부 소재지였는데 모택동, 주덕, 주은래, 팽덕회, 엽검영, 왕가상 등 동지들이 일찍 이곳에 거주했었다.)에 자리잡은 《연안혁명기념관》에 이르렀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기념관이였다. 1950년에 봉황산밑에 세워졌다가 1978년에 이곳 왕가평에 옮겨진 기념관은 건축면적이 5,500평방메터였다. 웅위로운 기념관 정문과 정원을 지나 기념관에 들어서니 당년의 연안생활속에 뛰여든 심정이였다. 기념관에 전시된 홍군동정로선도(1936년 2월—1936년 5월)와 동정항일사진들을 보노라니 《홍군동정가》를 높이 부르며 황하를 뛰여넘던 홍군대오, 그 대오의 진두에서 진격로를 열어재꼈던 양림동지가 용맹을 떨치며 걸어오는것만 같았다. 1935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 당중앙은 섬북 와요보에서 회의를 열고 항일민족통일전선책략을 제정하였다. 회의후 당은 홍군대오를 이끌고 력사적인 동정과 서정 항일을 하였다. 그때 양림은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이였다. 그는 2만 5,000리 장정 때 중앙군위간부퇀의 참모장으로서 앞장서 금사강진격로를 개척한 우수한 조선족군사지휘원이였고 살아서 섬북땅을 밟은 두 조선족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동정항일에서 또 선발영을 이끌어 황하도하선봉이 된 그는 황하대안점령과업을 수행하고 계속 진격하다가 불행히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눈을 감기전에 《전방형편이 어떻소? 주석께서 도하하셨소?!》하고 동지들에게 물었다.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문물과 사진들을 바라보노라니 조선족 리철부가 조용히 미소짓고있는것 같았다. 1937년 5월 2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기간에 연안성내 대례당에서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당시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당위 서기로 있었던 리철부는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한 두차례 발언에서 백색구역에서의 《좌》경페문주의오유를 신랄히 비판하였으며 대회기간에 모택동동지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참관자들의 흐름속에 끼여 천천히 발길을 옮기다가 《간부학교창설, 혁명간부양성》전시품앞에 와서 하마트면 소리까지 지를번하였다. 그것은 《조선혁명군정학교》사진 한장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있었기때문이다. 1945년 2월 5일 연하강반의 라가평골짜기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근 200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학습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던 조선인혁명자들이다. 화북과 화중의 여러 조선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지대들에서는 중공중앙의 결정에 좇아 1943년말부터 조선인혁명자들을 륙속 연안으로 보내였다. 그들속에는 세살짜리 어린애를 업고 북평서 갓 온 녀전사도 있었다. 1944년 4월에 이르러 거의 모든 동지들이 연안에 집결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총부도 이곳에 자리잡았다. 민가가 없다보니 라가평은 사실상 조선사람마을이였다. 조선동지들은 이곳에서 정치, 문화를 배우고 군사자질을 높였다. 여기서 적들의 통치구였던 북평, 천진, 상해, 남경, 하남, 하북, 산동, 흑룡강 등 성과 시로 파견된 동지들도 적지 않았다. 3 오후에 참관단일행은 봉황산, 양가령, 조원을 돌아보았는데 양가령에서 받은 감격이 가장 컸다. 양가령은 연안성 서북 약 3킬로메터되는곳에 자리잡은 당년의 당중앙소재지이다. 양가령어구의 당중앙기관정문을 지나면 첫눈에 안겨오는것이 푸른 나무들속에 들어앉은 중앙대강당이였다. 1945년 4월 23일 오후 5시에 이 강당에서 력사적인 7차당대회가 열렸다. 조선사람으로는 박일우, 서휘 둘이 정식대표로, 최창익, 박효삼 둘이 방청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해 5월 21일 대회 21차회의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이였던 박일우도 발언하였다. 중앙대강당왼쪽 뒤켠엔 담벽에 둘러싸인 중앙판공청 3층청사가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안문예좌담회가 1942년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이 청사에서 열리였다. 문예사업일군 90여명이 이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였는데 저명한 조선족작곡가 정률성도 그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모택동동지를 모시고 찍은 사진에서 정률성을 찾아보는 나의 마음은 흥분으로 벅찼다. 중앙판공청청사를 지나 오른쪽산비탈에 접어드니 모택동동지가 거처하던 움집이 나타났다. 이 옛움집엔 한 조선족혁명가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쏘련 연해주에서 온 로홍군 최정무는 1943년 2월에 연안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조선사람 들속에서 생산관리원사업을 하였다. 어느날 밤 남새마대를 지고 양가령에 들어선 최정무는 등불빛이 새여나오는 한 움집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모주석이 계시는 움집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는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는 일찍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은 일이 있었던것이다. 1931년 11월 7일 강서 서금에서 제1차중화쏘베트공화국 로농병대표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그는 모택동의 친절한 접견과 살뜰한 관심을 받았었다. 그는 꼭 모주석을 찾아뵈리라 마음먹었다. 헌데 아무리 통사정을 하여도 보초병이 들여놓지 않았다. 별 뾰족한 수가 없게 되자 그는 남새마대를 깔고앉아서 모주석이 문밖에 나오기만을 바랐다. 밤은 깊어가고 찬이슬이 옷을 축축히 적시였지만 등불은 꺼질줄몰랐다. 그는 끝없는 회포에 잠겨 꺼질줄 모르는 등불을 지켜보다가 어린애처럼 섧게 울었다. 그는 이렇게 모주석의 움집밖에서 하루밤을 꼬박 새웠다. 움집안에 들어서니 글을 쓰고 계시는 모택동주석의 사진(1939년)이 안겨들었다. 그 밑에는 당년의 책상과 필묵 등이 놓여있었다. 모택동주석께서 이 움집에서 쓰신 많은 저작중 《모택동선집》에 수록된것만 해도 40편에 달한다고 한다. 어느덧 2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흗날 아침 8시 연안대교와 시구역을 벗어난 승용차는 귀로에 오른 우리를 싣고 곧추 연안비행장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 연안의 산과 들이 물결처럼 스쳐지났다. 라가평어구와 로신예술학원이 자리잡고있던 교아구어구, 중국의과대학 옛터어구가 달려왔다가는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잘 있으라 연안이여! 영원하라 겨레의 숨결이여!
30    내 고향 여행(2)ㅡ중화대지의 또 하나의 렬사기념비 댓글:  조회:3946  추천:84  2005-09-30
내 고향 여행(2) 중화대지의 또 하나의 렬사기념비 리 함 조선족항일투쟁사가 전공인 필자는 모택동주석의 높은 긍정과 평가를 받은 1938년 봄 개란탄광대파업이 당년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로 부임된 조선족 주문빈에 의해 조직지도되였다는것을 알았지만 주문빈의 묘소가 하북성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는것을 몰랐다. 1999년 5월 석가장에 갈기회를 가지였던 필자는 전국중점렬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인 시안의 화북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도 중화대지에 일어선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를 접하였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주문빈, 뒤늦게야 주문빈의 사후행적을 알고 필자는 놀라도 크게 놀랐다. 1 화북렬사릉원의 전칭은 화북군구렬사릉원으로 알려진다. 하북성 성소재지인 석가장시 중산서로2단 165번지에 자리잡은 이 렬사릉원의 유래는 당년의 주덕총사령과 이어진다. 1948년 5월, 진찰기해방구의 진찰기군구가 화북군구로 바뀌였다. 이해 가을 주덕총사령은 석가장을 시찰하다가 그때 시안의 《승리공원》을 수건하여 화북땅에서 쓰러진 렬사들을 기념하는 렬사릉원으로 할것을 제의하였다. 드디여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준공되여 1954년 8월1일에 장중한 락성식을 가지였다. 화북군구렬사릉원은 건국초기 우리 나라에서 수건이 빠르고 규모가 크고 조형예술이 독특한 렬사릉원으로 정평이 났다. 화북렬사릉원은 총면적이 21만 평방메터로 헤아려지고 남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릉원내에 들어서면 울울창창한 송백과 고목들이 래빈을 숙연한 기분속에 잠기게 한다. 렬사릉원 정문가에 다가서면 한어문으로 된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렬사릉 원》이란 금빛글자가 선참 시야에 안겨든다. 정문에 들어서면 만명을 받아들일수 있다는 추모광장이 펼쳐지면서 세개조로 된 대형 동조각상이 반겨준다. 동쪽의 한조는 총가목을 거머쥔 팔로군전사의 조각상이고 서쪽의 한조는 지뢰배설을 경계하는 남녀민병의 조각상일 때 광장중앙의 주체조각상은 전신무장한채 8.1군기를 추켜들고 앞을 주시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 3명으로 이루어졌다. 추모광장의 북쪽가에 명비당(铭碑堂)이 자리잡았다. 명비당은 이 렬사릉원의 중심기념건축물로서 300여명 렬사의 영명록(英名录)이 명비당중앙에 모셔졌다. 당내 네면벽에 새겨진 류소기, 주덕, 팽덕회, 서향전 등 당과 국가지도자들이 쓴 글자비가 인상적이다. 이런 수령인물들 글자비는 혁명렬사들에 대한 높은 중시와 고도로 되는 평가를 보여준다. 렬사릉원에 안치된 렬사들의 묘소는 명비당의 뒤쪽가에 모셔졌다. 동서 두개 묘소구로 된 렬사묘군(烈士墓群)은 3개중심비로 련결된 하나의 정체로서 렬사묘마다 규격이 대동소이한 화강암묘를 만들고 묘뒤에 한백옥(汉白玉)비를 세워주었다.필자가 놀랐다는것은 이곳 렬사들의 묘소군체에서였다. 렬사묘소군체에는 317명 렬사들이 울울창창한 송백속에 안치되였는데 제일 앞자리 뚜렷한 위치에 우리 조선족을 빛내이는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의 묘소가 자리잡고있었다. 전혀 상상밖의 일이다. 그래서 필자가 받은 감동을 한두마디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20세기 30년대후반의 주문빈은 당당한, 당년기동항일근거지를 창설한 중공기동지위서기이고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주임, 중공기열변(冀热边) 특위 조직부장으로서 렬사묘군체의 앞자리에 모실만도 하였다. 헌데 주문빈렬사는 1944년 10월 17일에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에서 희생되였다는데 어떻게 석가장에 묘소가 있을가, 충격적인 현실앞에서 궁금증은 갈수록 커만 갔다. 2 필자는 짙은 궁금증을 안은채 신형의 기념건축물인 렬사기념당에 들어섰다. 부지면적이 1400평방메터를 헤아리는 렬사기념당은 렬사릉원의 최북단에 자리잡았는데 기념당내 중간청은 진찰기혁명기념관으로서 풍부한 혁명렬사사진들과 혁명문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 필자는 렬사기념당에서 또 한번 놀랐다. 기념당 한쪽벽에는 《주문빈동지》라고 밝힌가운데 렬사의 사진과 략력, 회고담을 적은 글, 당년의 투쟁모습을 반영하는 그림 두장이 설명문과 함께 꾸며져있었으니 말이다. 수백명을 헤아리는 렬사들속에서 기념당의 벽 한모퉁이씩 차지하면서 도편으로 소개된 렬사는 극히 소수인데 주문빈렬사가 그 소수인속에 들어있었으니 그때 받은 충격은 수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기념당에 이어 필자는 700여명 선렬들의 골회를 모신 기념당 동쪽의 렬사골회안치실과 서쪽의 렬사유상실(遗像室), 기념당앞 광장 동서량측에 일어선 원 홍 5군단 군단장 동진당과 홍5군 부총지휘 조박생렬사의 기념비정(纪念碑亭)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필자는 주문빈렬사에 대한 추적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화북렬사릉원은 굉장하고도 숙연속에 묻히는 렬사릉원이였다. 추모광장, 명비당, 렬사묘군체, 렬사기념당, 동진당기념정, 조박생기념정, 국제주의 전사들인 베쮼의사의 릉묘, 커디화의사 릉묘, 애드화박사기념비, 빠수의사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진 이곳 렬사릉원은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로세대혁명가들이 선후로 릉원을 시찰하고 친필제사를 쓰시여 렬사릉원의 품위가 한결 오르고있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화북렬사릉원을 찾는 사람들이 70여만명에 달하고 100여개 국가와 지구에서 온 외빈들이 렬사릉원을 첨앙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조선족의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도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3 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 찾은 주문빈렬사묘소와 행적, 필자는 진한 흥분과 궁금증을 어이할수 없었다. 그래서 배알을 마치고 렬사릉원 선전교양과를 찾았더니 동승의(董胜义)라고 부르는 중년연구일군이 연변서 왔다는데 흥취를 가지고 하북성 애국주의교양기지 자료총서의 하나로 된 《화북렬사릉원》이란 책자를 내주었다. 1996년 9월, 하북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이 책자에는 화북군구렬사릉원소개와 함께 18명 혁명렬사의 략력이 서술되였는데 주문빈 렬사도 그 18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 였다. 주문빈략력에는 앞부분이 이렇게 씌여졌다. 주문빈(1908-1944), 원명 김성호, 조선 평안북도 사람, 1914년에 부친을 따라 통현에 이주한후 중국국적에 가입, 1916년 통현 로하소학교에서 공부, 1922년 로하중학교에 입학, 이기간에 둘째형 김영호의 영향밑에서 사상이 진보하고 마레주의 기본원리를 학습하기 시작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후 백색공포하에서도 개인안위를 돌보지 않고 계속 당의 비밀활동을 견지. 선후 5~6명의 당원을 발전시키고 중공 로하중학지부를 건립. 지부서기를 맡음. 1928년에 로하중학을 졸업한후 당조직의 배치대로 당의 비밀사업에 나섬. 주문빈렬사의 조선에서의 이주와 통현에서의 중소학교시절 략력이다. 연변서 알고있는 렬사의 사적과 시간상 어울렸다. 다만 략력이여서 상세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았을뿐이였다. 내가 이점을 환기시키자 동선생은 략력에서 좀 더 알고있지만 자기들은 당신들 조선족연구가들처럼 그렇게 상세하고도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족연구가들을 찾고싶었는데 잘 되였다면서 서로간 련계를 바랐다. 통현이라 함은 북경시 통현을 가리킨다. 오늘의 북경에서 동으로 약 20킬로메터를 가게 되면 그제날의 사립로하중학교 엣자리인데 현재는 통현 제1중학교로 통한다. 1927년에 통현에서의 첫 중국공산당지부가 이 학교에서 조직되였는데 그 조직자는 다름아닌 조선족 김성호(즉 주문빈)와 그의 형님 김영호였다. 필자가 통현로하중학교 당지부는 통현에서의 첫 중공조직일뿐만아니라 통현일대 혁명활동의 중심이였다고 강조하자 그는 전적인 동감이였다. 그날은 1999년 5월 8일이다. 필자는 그날 동선생과 오랜 지기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주문빈렬사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궁금증도 풀게 되였다. 4 1928년 가을, 김성호는 화북렬사릉원의 략력이 보여주는것처럼 당조직의 파견으로 북경시 지하당기관에서 비밀사업에 종사하면서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의 중공당원들을 지도하게 된다. 1933년에는 료녕성 무순탄광으로, 1936년에는 당산에 파견되여 중공당산시위 공위서기(工委书记)를 맡아본다. 이때의 김성호는 언녕 주문빈으로 탈바꿈했다. 개란광산지구의 당산, 조각상 등지는 그의 지도범위였다. 1938년 3월 16일에 주문빈은 선참 조각장탄광대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림서탄광과 당가장탄광, 당산탄광, 마가구탄광에서도 파업투쟁에 궐기하니 탄광로동자들의 파업은 5개탄광 로동자들의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개란광무국 산하 상기 5개탄광의 동맹총파업은 50일간이나 지속되다가 로동자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총파업의 승리는 개란 5개 탄광로동자들의 단결전투의 성과로서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이기도 한 주문빈의 탁월한 조직재능과 기여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혁명사에서 빛나는 한획을 긋는 수만명 탄광로동자들의 개란대파업을 조선족 주문빈이 직접 발기하고 지도했다는것은 특히 대서특서할만한 일이다. 이에 필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개란대파업의 소식이 중공중앙 화북군을 통해 모택동주석께 전해지고 모택동주석은 《참 잘 령도했습니다. 로동계급의 각성이 높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자 동선생은 머리를 끄떡이면서 주문빈렬사를 통해 조선족의 헌신투쟁정신을 알게 되였다면서 주문빈렬사는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진 주요지도자의 한분이라고 열을 올리였다. 5 우리의 화제는 주문빈렬사의 발자취를 따라 기동땅으로 옮겨갔다. 개란 5개 탄광 동맹총파업후 주문빈은 선후로 중공기동지위서기 겸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주임, 중공기열변구특위 조직부장 등 중책을 짊어지고 기동이란 이 광활한 천지에서 줄기찬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던 1944년 10월 16일, 기열변구특위는 하북성 풍윤현 장장자(张庄子)에서 해당 감조감석회의를 하다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위군(日伪军)놈들에게 포위되였다. 이날밤 회의참가자들인 풍윤, 란현, 천안현의 간부들이 주문빈의 지휘하에 소부대로 나뉘여 남쪽의 리장자쪽으로 전이했으나 이튿날 이른새벽에 또 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리정자이북 가까이 양가포에서 주문빈과 그의 일행은 재차 우세한 적들과 맞다들었다. 우리 전사들이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릴 때 특위기관은 주문빈의 지휘하에 적의 포위를 헤치며 결사적인 전투를 벌리였다. 한편 주문빈은 리도와 함께 전사들의 후퇴를 엄호하며 한개 고지를 차지하고 적 66명이나 쏘아죽인 쾌거를 이룩하였다. 허나 그 찰나 주문빈은 적탄에 머리를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날은 1944년 10월 17일, 희생될 때 주문빈의 나이는 만 36살, 희생지점은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杨家铺)! 시초 화북렬사릉원에서 주문빈묘소를 알게 된후 궁금증은 점차 풀리였다. 주문빈은 희생된후 당조직과 동지들에 의해 풍운현 양가포 전모산아래 한 소나무곁에 묻히였다. 그러나 주문빈은 화북대지의 주요한 당지도자였다. 그래서 1953년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석가장시 원 승리공원에 준공된후 주문빈렬사의 묘소는 석가장시 화북군구렬사릉원에 모셔졌던것이다. 벌써 반세기나 되는 력사속의 이장이였다. 필자는 동선생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의 배웅밑에 렬사릉원 추모광장에 다시 나섰다. 나의 시야에는 1996녀 5월 이후 렬사릉원내에 새로 일떠섰다는 웅장한 렬사기념비가 안겨들었다. 렬사기념비를 바라보면서 필자가 감회에 젖어들자 동선생은 96년이후 릉원내에는 또 혁명문물청, 영시청(影视厅)이 새로 일떠서고 명비당도 새롭게 수선되였다고 열정스레 알려주었다. 세인들앞에 참신한 모습으로 떠오른 화북렬사릉원, 렬사릉원내의 주문빈기념비는 해방직후 1954년에 광동성 광주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과 더불어 중화대지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였다.
29    내 고향 여행(3)ㅡ24년만에 다시 찾은 심양 9.18사변지 댓글:  조회:3483  추천:76  2005-09-30
내 고향 여행(3) 24년만에 다시 찾은 심양 9.18사변지 리 함 9월도 막가는 때에 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일원으로 조성일 회장, 한정자 사무국장 등과 더불어 한국 주심양총령사관의 특별초대로 심양에 가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행운을 지니였다. 이튿날에는 심양시안의 9.18사변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9월 29일 오전 8시, 나는 서탑에 자리잡은 주숙지 서울호텔을 떠나 택시를 잡아타고 곧추 9.18사변지로 향하였다. 20여년전에는 익숙한 길이였으나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수도 없어 택시에 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약 반시간만에 이 거리 저 거리 동북방으로 6킬로메터 달려 심양시 대동구 망화남가 9.18사변지에 이른 나는 눈앞의 정경에 놀라마지 않았다. 그제날 철길가 풀밭은 언제런듯 《9.18력사박물관》이 반겨맞는것이 아니겠는가! 보매 9.18력사박물관은 심양북역에서 할빈으로 통한 철길과 시내신작로사이에 길이 500메터도 훨씬 넘게 뻗어있었는데 출입구 첫 구간은 휘넓은 광장이였다. 나의 첫발목을 잡은것은 광장의 출입구 맞은켠에 세워진 거대한 종이였다. 동으로 주조된 종에는 9.18사변기록과 함께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国耻)는 한자 네글자가 박히여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심양 동융신형건축자료유한회사에서 1999년 9월 18일에 헌납한 《경세종》(警世钟)인데 9.18사변지를 찾는 사람마다 선참 찾아보고 기념촬영을 남기는 곳이라고 한다. 경세종 오른쪽가에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옛 력사모습대로 누워있었다. 너무도 눈에 익은 류조호폭파지점비였다. 내가 심양 9.18사변지를 처음 찾은것은 9.18사변 50돐을 맞던 해인 1981년으로 거스른다. 지금으로부터 24년전이라는 말이 된다. 그해 9월 14일부터 10월 16일까지 졸업을 한해 앞둔 우리 연변대 조문학부 78년급 심양소조는 심양시 조선족1중에서 실습을 하게 되였는데 나는 이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해 10월 12일, 주제반회 재검토를 마치고 홀몸으로 9.18사변지를 바라고 떠났지만 물어보는 심양시민들마다 거의가 9.18사변지를 모르고 있었다. 시내뻐스를 세번이나 갈아타며 묻고 물어서야 마침내 《류조구》와 북대영을 찾을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것은 철길가 풀숲에 처박힌 지금의 9.18사변류조호폭파지점비이고 주위에는 북대영 낡은 건물들과 농촌채소밭들 뿐이였다. 콩크리트로 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9.18사변지의 유일한 견증물인것 같았다. 지점비에는 《9.18를 잊지 말고 피눈물의 원한 아로 새기자!》 (不忘九一八,牢记血泪仇)는 검은 붓글씨가 씌여있었다. 별수없이 처박힌 지점비를 사진찍고 귀로에 오르다가 부근의 류조호대대를 찾아 선후로 한족로인 세분을 방문하였는데 수확이 컸다. 모든 력사책들과 력사서술에서 9.18사변지는 류조구(柳条沟)로 되여 세상사람들은 류조구로 알고있었지만 세분 로인들은 9.18사변 그때를 망라하여 여기는 류조호(柳条湖)로 통했지 류조구가 아니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새로운 발견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누가 뭐라하든 9.18사변관련 모든 글들에 류조호라고 썼는데 이번에 보니 9.18사변지 주위 도로표식이나 소개글들에 모두 류조호라고 밝혀져있었다. 이런 연고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인상깊은 력사의 고장이라 하겠다. 허나 다시 찾은 사변지에서 지점비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20여년전의 검은 붓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도 알리지 않아 그 앞에 세워진 안내글을 보고서야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옮음을 확인했다. 안내글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군은 저들이 남만철도 심양류조호구간을 폭파하고 중국군대의 소행이라고 중상하고는 이것을 구실로 무장으로 중국 동북을 침점하였다. 후에 폭파지점 옆에 목제표식패를 세우고 《소화 6년 9월 18일 지나병선로 폭파지점》이라고 하였다. 1938년에 또 이곳에 작탄꼬리깃형 세멘트비를 다시 세웠는데 비의 높이는 7메터이고 아래 제형받침자리에 《폭파지점》이라고 썼다. 폭파지점비 오른쪽 광장복판에 9.18사변의 시간을 알려주는 《잔력비(残历碑)》가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잔력비, 즉 일력비는 네모반듯한 돌들로 쌓은 웅위로운 건축물이였는데 비의 정면에는 1931년 9월 18일 일력이 그대로 새겨지고 왼쪽켠에 밤 10시라고 밝힌 모습이였다. 일력비를 에돌면 또 광장이고 철길가를 막은 길다란 높은 담장에는 강택민동지의 친필로 된 《력사박물관》제사가 검은 글씨로 새겨져 여기가 9.18사변지임을 알려준다. 광장 동북쪽켠은 철길따라 길게 뻗은 9.18력사박물관 주체건물로 이어진다. 박물관내에 들어서면 널다란 대청—서정(序厅)인데 서정은 사면벽을 감싼 흰색의 산모양조각품과 검은색의 대리석지면이 조화되여 백산흑수(白山黑水)의 장려한 경상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아름답고 부요한 동북의 산천을 상징하고 있다면 대청 한쪽가에는 동으로 주조된 누운비가 있고 비의 중간에는 꺼질줄모르는 화염이 불탄모습으로 나타나며 동북인민들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민족기개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8개전람청과 10여개 대형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선다. 9.18력사박물관 안내글을 보니 이 력사박물관은 원명이 《9.18》사변박물관으로서 1991년 9.18사변 60돐을 계기로 착공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건축물이라야 9.18를 나타내는 웅장한 일력비뿐이였다. 그래서 일력비 건설시간을 1991년이라고 밝힌것이였다. 그로부터 수년후인 1997년 9월에 심양시에서는 9.18력사박물관을 확건하기로 결정짓고 2년간의 간고한 시공을 들여 신관을 일떠세우고 1999년 9월 18일에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었다. 새로 일떠세운 신관은 9.18사변일력비, 경세종정(警世钟亭), 주관(主馆), 승리기념비 등 특이한 풍격의 건축군들로 구성되였다는것은 뒤미처야 알았다. 이런 신관은 총점유면적이 3만 5000평방메터, 건축면적이 1만 2600평방메터, 전람면적이 9180평방메터로 헤아려진다. 상기와 같이 전람청은 8개전람청에 10여개 대형장면으로 이루어졌다면 관내 진렬연장선은 510메터로서 진귀한 력사사진 800여점, 문물과 자료 500여건, 대소력사장면재현 19개이고 담당구내 방송계통, 중앙에어콘계통, 영시(影视)보고청, 전자열람실, 다매체인터넷계통, 네트워크 등 시설이 구전하다. 그만큼 관내 진렬은 1931년 9.18사변 이전으로부터 1945년 일제패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력사가 재현되여있어 그 교육가치와 감상가치가 대단히 높다.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것은 신관(新馆) 진렬청 여기저기에 꾸며진 우리 조선족들의 영용한 투쟁모습이였다. 처음으로 시선은 《동북군민의 항일투쟁》 진렬청 동북항일련군 각군장령 18명 사진에 멈추어졌다. 양정우, 주보중 등과 더불어 항일련군 제7군 대리군장이며 참모장인 최석천(최용건),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두분의 사진이 모셔진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진렬청의 한쪽벽에는 또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이 총닦는 모습의 사진, 밀영의 조선족전사들, 남만의 철도선에서 전투하는 항일련군전사들 등 세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 함게 진렬되여 있었다. 세 사진 모두가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의 모습들인데 김일성장군의 부인 김정숙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진에 남만철도선의 항일련군전사들이라고 밝히니 유감스럽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강사한테 이 점을 지적했더니 그런가고 대꾸할 뿐이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동북군민의 항일투쟁》부분에는 3개조로 묶어진 소형 립체조각품이 붉은 색 조화속에 실모습처럼 진렬되였는데 3개조중 2개조가 우리 조선족항일전사들의 모습이란것이 인상적이였다. 《를 매복습격하다》립체조각상은 그 설명에 1933년 3월에 조선족 량성룡, 김일성의 령솔하에서 왕청유격대가 소왕청근거지에 기여든 적 토벌대 300여명과 이틀간이나 싸워 20여명을 소멸하고 적들을 격퇴시키는 모습이고 《항일화장(化裝) 선전대를 조직하다》는 립체조각상은 1932년 음력설기간에 중공탕원현위서기 배치운(조선족) 등 항일화장선전대가 반일선전을 벌리면서 항일의 불길을 지피는 모습이였다. (우리 조선족의 투쟁모습도 끼이였구나!) 나는 다소 마음의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것이 쌀속의 늬라해도 좋았다. 조선족의 투쟁모습이 없는 동북군민의 항일투쟁은 상상할수도 없기 때문이였다. 어느덧 두시간이 훌쩍 지났다. 귀로에 올라야 하는 나는 웅장한 일력비 앞 광장에서 서성이였다. 수백으로 헤아리는 한패 또 한패의 붉은넥타이들 답사행렬이 그칠줄 몰랐다. 답사자들속에는 중년과 로년들 40대~60대가 가끔 보이였고 공청단기를 앞세운 공청단원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9.18를 잊지 않으려는 그들, 대를 이어나아가려는 그들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그래, 오늘의 우리 행복은 쉽게 오지 않았지, 그속에는 우리 조선족투사들의 피와 생명도 섞이였지…) 9.18사변 50돐 첫 답사에 이은 24년만의 광복 60돐 맞이 9월의 두번째 답사였다.
28    내 고향 여행(1)ㅡ남녘땅 광주봉기렬사 릉원에서 댓글:  조회:3899  추천:85  2005-09-27
내 고향 여행 (1) 남녘땅 광주봉기렬사 릉원에서 리 함 1 1981년 연변대 재학시절에 조선족문학사 강사 리정문선생한테서 1927년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1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종내 기회가 오고야말았다. 대학을 마친 이듬해 5월말, 개자귀나무꽃이 붉게 피는 계절에 나는 남녘땅 광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였는데 처음 광주에 가는 사람들치고 양성(羊城)이라 이름높은 광주시 전경을 눈아래 굽어볼수 있는 월수(越秀) 공원을 돌아보지 않으면 유감이라 한다지만 나는 선참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다. 그날은 해맑은 6월 1일이였다. 중국출국상품교역회를 벗어난 광주시내 1호전차는 동으로, 동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는 사시절 봄과 같은 아열대풍취가 안겨들고 남녘땅에 특유한 오동나무가로수들이 줄달음쳐왔다가는 소리없이 뒤로 물러섰다. 1호전차는 어느덧 중산기념당, 광주농민운동강습소를 지나 광주봉기렬사릉원 앞에 멈춰섰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3년 여름이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은 당년에 봉기전사들이 피흘리며 싸웠던 시안의 홍화강(红花岗)에 자리잡고있었다. 1954년에 벌써 수건된 이 렬사릉원은 릉원과 원림 두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전체 릉원면적은 26헥타르에 달했다. 렬사릉원밖은 그 세월 연변에서는 흔치않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고 릉원정문 량쪽은 짙은 민족풍격을 띤 정자지붕형 대형기둥벽으로서 대형기둥벽에는 주은래의 친필로 된 《광주봉기렬사릉원》이란 금빛글발이 새겨졌다. 대문에 들어서면 휘넓은 광장이다. 광장량켠에는 뭇꽃들이 다투어피는 20개의 큰 화단들이 펼쳐지고 측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중충하여 한결 장중하고 숙연한 감을 안겨준다.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푸른 송백속에 모셔진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렬사묘는 옛 황릉들처럼 거대한 하나의 웅위한 묘인데 렬사묘를 둘러싼 콩크리트담장정면에는 《광주봉기렬사지묘》라고 쓴 주덕동지의 친필제사(题词)가 숙연히 안겨든다. 렬사릉원 안내자의 소개에 따르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용사들이 많고 한데 쌓여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어 무덤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렬사묘에는 조선족렬사들도 적지 않게 묻히였다고 동을 달았다. 《…》 나는 일순 할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에서 머리 숙여 묵도하고는 숙연한 기분으로 렬사묘둘레를 천천히 거닐었다. 높은 콩크리트담장에 둘러싸인 기둥체 꼭대기마다에는 앞발을 척 뻗친 40마리 돌사자가 올려져있었는데 렬사묘를 옹위한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름 모를 조선족 전사들은 누구누구일가?…)나의 머리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면서 두어깨에 지워진 조선족력사탐구자의 책임이 자못 무겁다는것을 새삼스레 깊이 느끼였다. 2 렬사묘를 내려 고색이 짙은 울창한 푸른 송백속을 지나면 넓은 호수속에 2층의 정자지붕으로 된 호수 정자가 나타난다. 호수에서는 천진란만한 아이들과 어린이들이 마침 6.1절이라 명절배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니 저 아이들은 얼마나 복 많은 세대들인가 하는 생각이 북받쳤다. 그 시각 저 아이들이 저 렬사묘에 잠든 용사들중에 우리 조선족의 전사들도 섞이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갈마들어 나 스스로도 피씩 웃고말았다. 유람지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꽃밭속에 잠겨있는 《중조인민혈의정》이 시선을 잡는다. 중조인민혈의정은 장방형모양의 2층 정자형으로 되였는데 혈의정 복판에는 거대한 대리석비석이 모셔지고 비석정문에는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업검영동지의 금빛 제사가 새겨져있다. 대리석 비석뒤면의 비문은 이런 글로 엮어졌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 로동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기세드높은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들 가운데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는데 그들은 중국전우들과 더불어 의기(义旗)를 높이들고 어깨겯고 싸우며 나중에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 영용히 희생되면서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표현하였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 중조 두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나는 정말이지 숙연한 기분속에서 인차 헤여나오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여나 20대 후반을 잡으며 그떄 그 시각처럼 조선족의 자부심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남녘땅 광주봉기와 그에 앞선 위대한 북벌전쟁에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했고 광주봉기에서만 150여명 아닌 200여명이 희생되였다는것은 대단하고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나는 중조인민혈의정을 천천히 거닐다가도 가까이 《중쏘인민혈의정》에도 가보고 민족풍격이 짙은 혈의정뒤 정자군체의 유람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당기는것은 중조인민혈의정 정자도안으로 된 진달래도안이다. 진달래도안은 중조 두나라인민의 친선을 상징하고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못 깊었다. 오늘날 진달래는 우리 연변에서 자치주 주화(州花)로 높이 받들리고있다. 20년도 넘는 80년대초반에 남녘땅 광주에서 진달래도안을 흔상하였다는것은 그저 스치고지날 일이 아니다. 진달래는 조선민족을 상징하고 선렬들의 붉은 피를 상징한다고 할 때, 또 저명한 하경지시인이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 라고 읊조렸을 때 50년대 그 세월 진달래도안 설계자와 결책자들에게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수 없었다. 3 중조인민혈의정에로 다시 돌아오면 혈의정 중심정자 량켠엔 각기 《L》자형 길다란 랑하와 정자가 있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다. 혈의정앞 작은 인공못에는 갓 피여난 소담한 연분홍 련꽃송이가 물에 동동 떠있고 분수는 반공중에 새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인공못에 이채를 더해준다. 정녕 잊지 못할 광주봉기렬사 릉원이였다. 허나 대학을 마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서는 위대한 광주봉기와 조선족전사들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자료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렬사묘아래에 자리잡은 광동성혁명렬사박물관을 찾아 해당 연구일군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박물관의 일군들은 내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왔고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당신들 조선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중년을 잡은 한 녀성연구일군은 중조인민혈의정 대리석비석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중 거의가 희생되였다고 씌여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면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녀성은 나를 박물관내 한 진렬대로 안내하였다. 진렬대 유리안에는 한 조선족전사가 사용했다는 막심기관총이 진렬되여있었는데 이름도 모를 그 전사는 광주쏘베트정부와 총지휘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이 막심기관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쓰러눕히였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의 나젊은 생명을 바쳤단다. 이야기 도중 중년녀성이 특히 마지막까지 사하를 지켜서고 철거를 엄호한것은 조선사람들로서 광주봉기연구에서 조선족은 주요한 연구대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눈굽이 찡 젖어들었다. 그때로부터 조선족연구의 한 주요과제는 북벌전쟁과 광부봉기로서 관련론문이나 소개글들을 해당 학보나 조선문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에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널리 알려왔다. 더우기 광주봉기 61돐기념일을 맞으며 나는 1988년 12월 10일부 《길림신문》 제3면에 《광주봉기에서의 조선사람들》 장편글을 실었는데 편집부를 대신하여 쓴 《편집자의 말》에서 필자는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이렇게 개괄하였다. 12월 11일은 광주 봉기 61돐 기념일이다. 위대한 광주봉기에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조선본토와 동북, 쏘련 연해주, 모스크바, 일본 등지에서 모여든 20대의 열혈청년들이였다. 거개가 이름있는 정치, 군사, 활동가들인 그들은 1919년 조선 3.1 운동전후 일제의 기반에서 조국을 구하고저 중국에 모여든 당년의 조선혁명의 선구자들이였으며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들의 정화(精华)였다. 애석한것은 철퇴의 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봉기에 참가한 우리 겨레 200여명이 남녘땅에 쓰러졌다. 그후 중앙쏘베트구역에 조선동지들이 희소했고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이 10여명밖에 안된것은 그번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선각자들 거개가 희생된데 기인될것이다. 중국의 절반땅을 누빈 위대한 북벌전쟁에 우리 겨레 수백명이 참가하였고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우리 겨레 200여명 혁명자들이 장렬히 붉은피를 뿌렸다. 이는 세인들앞에서 너무나도 떳떳이 납함할 겨레의 긍지와 자랑이다. 아마 이런 글이 진동이 꽤나 되는 모양이였다. 연변력사연구소 시절인데 길림신문 편집부를 통하여 문의하거나 감사하다는 전화나 전갈이 가끔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위안을 느끼군 하였다. 력사로 보아도 1927년 12월 11일 이른 새벽에 폭발한 광주봉기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던 수백명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하였었다. 조선인 김규광이 당책임자로 있던 교도퇀 제2영 제5련은 모두가 조선동지들로 이루어졌다면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200여명 전사들중에도 조선족전사가 150여명이였다. 또, 광주봉기 폭발을 앞둔 력사적인 시각에 교도퇀 사령부에서 봉기동원연설과 전투과업포치가 있을 때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리용이 교도퇀의 새 퇀장(엽검영이 홍군 부총지휘로 되였음.) 엽용의 군사정치고문, 즉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광주봉기 주력부대인 교도퇀의 참모장이 우리 조선족이라는 말이다. 이에 앞서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인들이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각 봉기부대의 군사참모, 포병지휘관, 포사격수, 기관총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교도퇀 각 중대와 소대의 당대표들 중 조선인공산당원들이 적지 않았다. 군벌 장발규경위퇀의 조선인공산당원 문손적, 김형평 등은 중국인전우들과 함께 대부분의 관병들을 광주에로 이끌었다. 12월 4일, 중공광동성위 서기 장태뢰가 광주시내의 황화강(黄花岗)에서 교도퇀내 공산당원 활동분자회의를 열고 무장봉기의 의의와 교도퇀이 짊어져야 할 과업에 대해 피력할 때도 양달부, 김규광, 리용, 박영, 김은혁, 리빈 등 수십명 조선인공산당원들이 참가했으니 조선동지란 존재는 광주봉기에서 특수한 의의를 띠였다.12월 13일, 철퇴하는 봉기주력부대의 엄호를 특무영의 조선족전사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사하에서 싸움을 벌리였다. 그러던 이들이 한떄 사하를 점령하였으나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여 끝내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고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봉기사령부에서는 철퇴중에 그들을 잊고 련계하지 못했던것이다. 하여 특무영의 150여명 조선족 전사들이 희생된 비극이 초래되였다. 결과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족전사는 도합 200여명이나 된다. 당년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족들의 정화가 광주봉기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고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르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도 례외가 아니다. 더우기 광주봉기렬사묘와 중조인민혈의정에서 1년이고 2년이고 서있고만 싶은 심정이였다. 4 렬사릉원은 진정 아름다운 유람지로, 행복의 락원으로 꾸려졌다.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치는 6.1절호수가에는 붉은넥타이들이 환락에 들끓고있었고 어린이들을 태운 배들은 잔파도 일으키며 앞으로 미끄럼치고있지 않는가. 그날 6.1아동절 렬사릉원에서 어떻게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발길을 떠였고 어떻게 렬사릉원 정문을 나섰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머리속에 온통 광주봉기 아니면 조선족전사들이였으니 그렇게 된것 같다.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이 렬사릉원을 다녀온지도 어언20여년이 지났다. 허나 마음은 늘 젊음에 넘치던 그시절, 광주봉기렬사릉원 옛터로 달려간다. 그러면 광주봉기 조선족 우리 전사들과 맘속대화를 주고 받는다.
27    연변의 국가급관광명소(마지막회)ㅡ장백산 국가급자연보호구 댓글:  조회:2792  추천:68  2005-09-11
장백산 국가급자연보호구 리 함 수려하고 웅장한 장백산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우리 조선민족의 성산으로서 이름난 자연관광지들이 무려 169개소나 된다. 백두산정의 기이한 20여개 봉우리, 맑고 투명한 천지, 하늘에서 쏟아지는듯한 폭포, 다양한 형태의 대협곡, 사철 솟구치는 온천, 천고의 원시림, 화산체의 생태수직대, 눈부신 빙설세계—과연 하늘이 내린 천연박물관, 물종저장고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장백산은 이런 천혜의 자원에 힘입어 국가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 4월 18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에서는 장원한 목표에서 출발하여 장백산을 중심으로 한 안도, 무송, 장백 3개현의 190평방킬로메터 범위를 장백산자연보호구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4일에 장백산자연보호구는 정식으로 유엔의 《인간과 생물권》 보호망에 가입하여 대자연 생태환경보호가 가장 잘된 세계자연보류지의 하나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천연박물관》, 《물종저장고》로 불리우게 되였다. 1986년에 장백산 자연보호구는 림업부의 심사결정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또 국가급 삼림과 야생동물류형자연보호구로 되였으며 1999년에는 국가관광국에 의해 국가 AAAA급관광구로 지정되고 전국 16개 중점관광코스의 하나로 지정되였다. 2003년 1월 17일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가진《내 마음속 중화명산 추천활동》에서 《중화10대명산》의 월계관을 안았다. 그만큼 장백산맥의 주봉을 이루는 장백산은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관광업발전전망이 매우 광활하다. 백두산관광자원은 크게 자연관광자원과 인문관광자원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1. 자연관광자원에서 자연관광자원은 지형, 기상, 수면, 생물 등 자연요소로 이루어지기에 그 중심을 화산산수, 빙설풍광, 호수, 자연수직대 등에 들수 있다. (1) 화산산수경개 백두산의 화산수량은 전국에서 손꼽힌다. 백두산일대의 260개 소화산, 천지를 둘러싼 2500메터이상의 20여개 봉우리, 천지가의 들쑹날쑹한 기암괴석들과 집채같은 바위, 기이한 대협곡 등은 어마어마한 화산세계를 이루었다. 백두산천지는 세계화산호의 왕으로서 세계화산호 치고 해발고가 가장 높고 수심이 373메터(조선에서는 384메터로 기록함.)로 가장 깊고 수면면적이 9.82평방킬로메터로 가장 넓다. 백두산과 그 일대의 30여개 지점의 온천군들 그리고 높이가 68메터되는 장백폭포 및 지하폭포로 일컿는 동천폭포 등은 그야말로 가관을 이루고있다. (2) 빙설풍경 백두산은 보통 8월30일경에 첫눈이 내리고 6월 24일경에 마지막 눈이 내린다. 그만큼 겨울이 길고 춥다. 전형적인 겨울풍경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중순까지이다. 이 시기의 림해설원, 스키타기, 스키모터찌클, 설산에서 쏟아지는 장백폭포, 적설속의 온천과 온수욕 등이 관광내용을 이룬다. (3) 호수풍경 백두산에는 력대 화산활동으로 인한 많은 화산구호수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천지, 소천지, 옥녀늪만을 소개한다. ①천지 (략) ②소천지 장백폭포에서 약 3킬로메터 내려가면 빙설기지초대소가 있는데 그 북쪽으로 이도백하를 건너 200메터쯤가면 은환호의 동호라고 부르는 소천지가 있다. 소천지는 둘레의 길이가 260메터로서 물이 맑으며 떡갈나무들속에 감싸여있는데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③옥녀늪 옥녀늪은 한어로 원지(圓池)라고 불리우고있는데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메터 떨어진 현무암지대에 위치해있는 화구호이다. 늪의 직경은180메터가량 된다. 물이 얕고 맑으며 풀도 많고 물고기도 많다. 주위는 략엽송으로 둘러싸여 휴식의 한떄를 즐길수 있는 리상적인 관광명소인데다 만족의 시조전설과 조선족의 항일이야기가 담겨있어 더욱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④세강의 발원지 우리 백의겨레들에게 있어서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은 잊을수 없는 강들이다. 이 세강은 각기 백두산의 천지물을 발원지로 하고있는데 그중 동쪽의 두만강발원지와 21호국계비 등은 모두 볼만하다. 2. 인물관광자원에서 (1)력사유적 백두산지구에는 고구려와 발해 등 시기의 유적지들과 항일유적지 등이 많아 백두산 계렬관광열점으로 되고있다. 그중 백두산 천지가의 종덕사유적지가 가장 유명하다. 종덕사는 지난 세기 20년대에 조선북부에서 전이하여온 반일지사들인 덩덕궁패들이 지은 99칸자리 목조팔괘묘로서 지금은 옛터의 일부 주추들과 타다남은 나무쪼각들, 주추들과 평평한 바위우에 쓴 수많은 글씨 등이 남아있다. (2) 풍토인정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 민족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조선족과 만족의 풍토인정을 엿볼수 있는 민속촌이거나 기지들을 개발, 리용하게 되면 더욱 이채를 띠게 될것이다. (3) 현대도시 모습 백두산과 두만강삼각주일대에 자리잡은 안도, 연길, 룡정, 화룡, 도문, 훈춘 중소도시들은 개혁개방의 동풍을 타고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그중 자치주 수부로 불리우는 연길시의 도시변화는 비약의 나래를 펼치였다. 연길시는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의 중심지의 우세 그대로 연변의 관광중심으로 되였다. 상술한 자연, 인문관광이 장백산 북쪽 비탈 연변쪽의 개략적 소개라면 장백산 서쪽비탈의 풍경 또한 이색적이다. 안도현 이도백하진에서 장백림해로 내처뻗은 모래길—환구도로를 따라 75킬로메터가면 무송현경내 서쪽비탈 장백산산문에 이르게 된다. 산문에서 천지까지는 44킬로메터 포장도로로서 도중에 왕지(王池), 옥란폭포, 금강폭포, 온천, 쌍제자하(双梯子河), 장백산대협곡 등을 볼수가 있다. 필자가 보건대 서쪽비탈에서 가장 볼만한것은 그래도 천지구경, 사스레림대, 산정초원, 장백산대협곡이라고 보아진다. 서쪽비탈은 최근년간에 개발되고 아직 관광조치들이 미약하기는 하나 대단한 전망을 갖고있는 백두산관광지로 떠오르고있다. 1. 사스레림대 서쪽의 대면적 사스레림대는 북쪽비탈 관광구내에서는 볼수 없는 특이한 경관이다. 서쪽비탈로 오르는 마지막 수목인 사스레나무들은 나무 통사리가 실하고 키가 너무 높지 않고 가지들이 사방으로 구불구불 뻗어 흰색차림의 그 모습 보는이들의 련속 탄성을 자아낸다. 2. 산정초원사스레림대를 지나면 경사진 평지고 산이고 구릉이고 골짜기 모두가 푸르른 초원이다. 철에 따라 피는 별꽃, 구슬봉이, 룡담, 매발톱꽃, 구절초, 황매화, 노란화살곰취, 노란물봉선, 만경초 등 갖가지 야생화들은 말그대로 황홀경을 이룬다. 산정초원의 야생화는 평지와 달리 7월말, 8월초순이 한창이다. 3. 천지구경 천지로 향하는 서쪽비탈의 포장도로는 천지를 2000여메터를 앞둔 주차장까지 뻗었고 그로부터 천지구간은 2000여메터 올리막 계단길이다. 평탄한 산등성이에 오르면 북쪽비탈보다 더 넓고 이채로운 천지를 볼수가 있어 이색적이다. 더구나 계단길이 끝나는 곳에 중조5호국계비가 있어 조선땅을 밟아볼수 있는 천혜의 지대이다. 4. 장백산대협곡 장백산대협곡은 원명이 금강대협곡인데 보통 깊이가 100여메터, 너비가 근 200메터, 길이가 70킬로메터에 달하는 진짜배기 대협곡이다. 서쪽비탈산문에서 19킬로메터되는 곳에 위치한 천태만상의 금강대협곡은 그야말로 장관이여서 연변쪽의 천연부석림은 비길바도 못된다. 이곳 대협곡은 1987년 7월이후 대풍습격손실을 고찰하기 위해 심산에 들어간 한갈래 장백산삼림고찰소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였는데 세월의 비바람침식속에서 다채롭고 웅위롭고 장려한 천태만상경관이 형성되였다. 협곡에 치솟은 기암괴석들은 동물, 사람 등 기이한 모습이 많아 달과 같은 모양, 금닭같은 모양, 락타같은 모양, 관세음보살 모양, 사랑에 빠진 처녀 그리고 엄마가 아이를 안은 등 모양으로 대자연의 걸작을 이루고있다. 대협곡은 또 저온이고 습한데서 수림속은 이기가 무성한 원시림을 이루고 아름드리나무가 많다. 다시 돌아와서 북쪽비탈을 보면 국가급자연보호구, 관광지로서의 백두산에는 관광에 따른 천지호텔, 삼강호텔, 백두산대우호텔, 장백산국제관광호텔, 천상온천 관광호텔, 두견산장, 온천별장, 비호산장, 백화림호텔, 조선족풍정원, 백산차예관, 백산대주점 등 호텔이나 봉사시설들이 비교적 구전하다. 관광구내에는 또 공공변소, 위생함, 위생차 등이 마련되여 관광기초시설이 보다 완벽화했다. 최근년간 연변의 관광업은 백두산관광을 룡두산업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세인의 주목을 끌고있다. 오늘의 장백산도 좋지만 래일의 장백산은 더더욱 좋을것이다.
26    연변의 국가급관광명소(7)ㅡ국가급훈춘자연보호구 댓글:  조회:2846  추천:77  2005-09-04
연변의 국가급관광명소(7) 국가급훈춘자연보호구 리 함 우리 나라에 여러가지 형태의 국가급자연보호구는 많고많지만 동북호랑이를 주요보호대상으로 하는 국가급자연보호구는 훈춘이 유일하다. 중국, 미국, 로씨야 3국 전문가들의 현지고찰에 의해 훈춘경내 삼림산일대에는 우리 나라 야생범, 표범 밀도와 수량이 제일 높은 지역이라는것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2001년 10월 22일, 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동북범, 극동표범을 주요보호대상으로 하는 훈춘자연보호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12월 12일에 길림훈춘자연보호구관리국이 정식으로 설립되였는데 그의 주요과업은 동북범, 극동표범과 두만강하류의 습지를 보호하고 관리하는것이였다. 중국환경보호총국은 최근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17개 국가자연보호구를 새로 설립하기로 선포하면서 길림 훈춘자연보호구를 동북호랑이를 주요보호대상으로 하는 국가급자연보호구로 승격시키였다. 국가급훈춘자연보호구의 설립으로 하여 연변에는 국가급자연보호구와 그에 따르는 관광명소가 또 하나 새로 늘게 되였다. 이 자연보호구는 훈춘경내의 중, 조, 로 3국교차지점에 위치했는데 총면적은 8만 8913헥타르이고 외곽보호대는 5만 3565헥타르로서 삼림피복률이 높고 기온이 습윤하고 개울물, 습지가 많아 여러가지 야생동물이 번식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훈춘자연보호구는 말그대로 야생동물의 왕국으로 이름이 높다. 이 자연보호구내에는 노루, 메돼지, 들토끼따위들이 자유로이 뛰노는가 하면 두견새, 큰새매, 백두루미, 갈매기 등 새무리들이 하늘을 날아옌다. 2002년 8월 24일부 연변일보 4면에 따르면 훈춘자연보호구에는 32목 72과 298종의 야생동물이 있는데 그중 국가중점보호야생동물 1, 2급에 속하는 야생동물만 해도 큰고니, 흰두루미, 쇠기러기, 원앙새, 흰쭉지수리, 흰꼬리수리 등 38종으로 헤아린다. 이밖에 짐승류가 꽃사슴, 검은돈, 메돼지, 여우, 노루 등 5목 11과 23종이고 파충류가 누른등늘메기, 살모사, 꽃도마뱀, 기름개구리, 자라 등 9종, 어류가 연어, 잉어, 송어, 기목어 등 44종이다. 식물류도 이에 못지 않다. 식물류에서 홍송, 락엽송, 개곰솔, 인삼, 가시오가피나무, 만년석송, 사초, 둥글레 등 6과 279종이라면 습지고등식물은 51과 305종에 달한다. 그중 야생장미, 야생련꽃 등 8종은 국가중점보호야생식물종으로 알려진다. 더우기 경신일대의 야생련꽃은 1억 3500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어 관상가치가 한결 높아가고있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훈춘자연보호구에서의 명물은 동북호랑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동북범, 극동표범을 주요보호대상으로 하는 자연보호구인것만큼 동북호랑이가 가끔 출몰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2004년 1월 한달사이만 해도 1월 16일밤, 춘화진 초평촌 린근에서 동북호랑이가 민가의 말을 잡아먹는다더니 1월 26일 밤에는 마적달촌 보호소범위내에서 민가의 황둥개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1월 16일 밤 말잡이모습은 면바로 훈춘시자연보호관리국 사업일군의 먼적외선사진기에 찍히였고 1월 26일 밤 개잡이는 또 이 관리국 사업일군의 추적을 받아 동북호랑이의 행적이 알려졌다. 이 동북호랑이의 출몰은 두번째로 동북호랑이를 촬영한 지점과 50여 킬로메터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훈춘자연보호구는 이같이 야생동물의 왕국답게 동식물류가 특이할뿐만아니라 경치 또한 독특하여 이색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연변에 둘도 없는 두만강변 사막경치, 한눈에 3국 바라보기, 해안 제1봉, 동방제1제방, 삼림산, 설대산, 수류봉, 장고봉, 지하삼림 등은 풍부한 관광자원을 이루었다. 훈춘자연보호구관리국에서는 보호구생태환경보호에 전력하면서 변경관광, 로씨야려행, 조선려행, 바다려행, 생태려행, 고적답사려행, 겨울철려행 등 관광자원개발에도 모를 박아가고있다. 이런 관광자원개발에서 열점으로 떠오른것은 새세기 중국 대지의 첫서광으로 된 삼림산이다. 2000년 11월 12일에 중국과학원 북경천문대 명예대장과 중국과학원 자금산천문대 대장이 공동으로 공동보도문을 발표해 길림성의 동부삼림지역—— 훈춘시가 새 세기 첫 서광의 최적관측지라고 한데서 훈춘시의 삼림산은 대번에 이름이 났다. 삼림산은 훈춘에서 동으로 66킬로메터 떨어진 고장으로서 산천이 아름답고 삼림이 무성하다. 2001년 1월 1일 아침 6시 44분 2초에 삼림산우로 중화대지의 새 세기의 첫 서광이 비끼자 연변TV, 중앙TV의 “동방 시공간”에서 현지 생방송을 하여 장엄하고도 신성한 이 시각을 만방에 널리 알리였다. 오늘의 훈춘자연보호구내에 있는 삼림산은 새세기의 축복을 받는 명산으로 떠올랐다. 연변을 빛내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국가급훈춘자연보호구, 이 자연보호구로 하여 동북호랑이, 극동표범은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고 두만강하류의 천연습지가 그 생태대로 보호를 받게 되니 이 아니 좋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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