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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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수필】수석 “선바위”와의 만남 댓글:  조회:2843  추천:147  2007-05-21
수석 “선바위”와의 만남                                         이 가을에 잡아들어 룡정향토순례차로 룡정땅 륙도하반의 명동일대에 자주 다니게 된다. 명동에 드나들려면 꼭 선바위를 지나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감 수가 새롭다. 이런 감수에 힘 입어서인지 선바위골 어구 강가와 부근에서 대자연의 걸작인  선바위 수석몇점을 탐석한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산과 들에 신록이 짙어가던 지난해 초여름의 어느날, 나는 유서깊은 선바위를 사진렌즈에 담을겸 탐석행으로 선바위골로 갔다. 선바위골이란 나만의 호칭인데 실상은 선바위앞에서 륙도하에 흘러드는 신동골 강물을 말한다. 말이 강이지 우기를 제외한 평소는 얌전한 색시마냥 조용히 흐르는 한낱 시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름난 수석산지여서 가끔 명석이 탐석되군 한다. 그만큼 수석인들이 발길이 가닿는 강이기도 하다.   신동골은 수풀이 무성한 골안, 서남쪽으로 한 30리 올리뻗었다고 한다. 인가가 희소한 깊은골이여서 나는 고작 가보았대야 10여리 길뿐인데 지난해 그날만은 어쩐지 둥둥 뜨는 기분이였다. 아마도 선바위에서 미쳐오는 미지의 무언의 힘 같았다.   꽤나 넓어보이는 신동골어구의 돌밭이 나를 반겨맞았다. 돌밭 두세곳을 지났을가, 저 앞은 벌써 강폭, 골안폭이 좁아지기 시작한다. 하긴 수석산지가 여전한데다가 수풀이 우거지고 강물이 맑아 기분이 비할데 없이 좋았다. 물장구치려고 강물에 들어서는데 뭔가 오석같은 수석한점이 강가에 댕그라니 누워있질 않겠는가, 심장이 툭 튀는것만 같아 무작정 눈을 감아버렸다.   (오, 대자연 선바위어른님, 저희에게 당신을 닮은 꼬마 수석한점 하사하는거옵니까?)   높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숨을 조절하다가 한참만에 눈을 떠보니 에누리없는 수석한점이다. 얼마전만 해도 수량이 많아 물에 잠겨있던것인데 물이 줄자 수면이 내려가면서 드러났던 모양이다.   꿈만 같았다. 그래도 덥석 잡을념을 못했다. 진짜 수석을 앞에 두고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것이 수석인의 마음인가보다. 한겻이 지나서야 나는 수석을 안아들고 이리저리 어루쓸다가 그 자리에 내려놓고 련속 셔터를 눌렀다. 기념을 남기고싶었다. 이렇게 찍은것이 이글에 올리는 강가수석이다.   재수좋은 날, 나는 탐석을 더 하다말고 그 수석을 배낭에 지고 만세소리속에서 귀로에 올랐다. 그때로부터 나한테는 귀한 수석한점이 더 늘어났다. 좌대를 깍는 사람이 마땅치 않아 수반에 놓았는데 그래도 좋았다. 어쩌면 달리는 준마의 말사등같기도 하고 어쩌면 작은 화분속에 축소시킨 대자연의 아름다운 산수같기도 하였다. 헌데 여러 수석친구들이 집에 다녀가며 괜찮다고는 해도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맘에 걸리였으나 그 원인이 수석의 기본상식으로 되는 날세우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 있다는것에 미처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수석세계에서는 수석의 날세우기를 연출이라고도 하는데 날세우기든 연출이든 같은 개념으로서 한 수석이 갖고있는 장점을 찾아내여 그것을 최고로 살리는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듯 중요한 날세우기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말사등같은 하나의 산수로만 보고 가로 눕혀만 놓았으니 남들의 눈길을 끌리가 만무했다.   같은 수석이라 해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수석개념이 다르고 수석을 즐기는 심미관이 다르다. 우리 중국에서 수석을 기석(奇石)이라고 할때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수석(壽石)이라고 하는것이 그 리치이다. 말이 없는 돌에도 스스로의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돌에도 생명이 있다며 목숨 수(壽)자를 칭하는 한국인들의 진지한 태도에 탄복이 간다. 그네들은 중국인들이 돌에 그려진 자연의 회화라고 흔히 문양석을 선호할 때 자기들은 수석은 산수경석의 략칭이라면서 산수석에 짙은 흥미를 가진다.   산수석은 한국인들의 수석관이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한국의 수석인들은 한점의 수석에서도 대자연의 멋을 여러가지 경치로 련상하면서 그 찡한 진미를 맛보고 즐기는데 나는 이런 특유의 심미관마저 갖추지 못했다. 말하자면 여러가지 종합지식을 요하는 수석에 입문하지도 못한 아마츄어에 불과했다.   참다운 수석인이 된다는것이 쉽지 않다면 참다운 탐석인이 된다는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탐석을 즐기는 수석인들은 흔히 연변의 수석탐석은 두만강에서 시작되여 두만강에서 끝을 본다고들 했다. 우리 고장의 수석산지는 무엇무엇해도 두만강이 으뜸이라는 말이 된다. 헌데 기이하게도 남들이 알아주는, 나에게서 손꼽히는 명석은 두만강이 아닌 륙도하로 통하고있으니 유서깊은 자연의 섭리라 할가.   어언 한해가 흘러갔다. 또 몇달이 더 흐른 이 가을 따라 선바위에 빠지고 명동의 유적지들에 빠져 들락날락하니 명동골어구의 유서깊은 선바위가 전에없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던 차 오늘 아침, 뭔가 뇌리를 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오랜만에 선바위골 수석을 이저리 모양새를 바꾸며 연출해보았다. 늦게나마 날세우기에 들어간것이다. 내가 한창 잔모래를 담은 깊숙한 수반에 척 세워놓고 수석의 새모습감상에 여념없는데 안해가 불쑥 대자연의 장엄한 립석이라며 찬탄을 련발했다.   (립석?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벌떠덕 일어났다. 그야말로 대자연이 하사한 그림같은 선바위였다. 산수미의 장엄한 세계가 저산이 아닌 내 집안에 펼쳐졌다. 대자연의 산수를 바로 눈앞에 두고 즐기는 내마음은 진짜 수석인이 된 기분이였다. 작은것에 큰 경치가 있다고 나는 때늦게야 선바위골수석한테 수석 선바위란 최고의 위치를 살려주었다. 그대로 두면 산수석이요, 엎지르면 수문석이요, 세워놓으면 선바위라 진짜 돌과 인간과의 만남, 아니, 수석과 나와의 만남이였다.  선바위라는 수석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즐기는 애장석에 이름을 부치는것은 사랑하는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것과 같은 리치로서 그야말로 뜻깊고 재미있는 일이렸다. 그런 뜻에서 우리 두만강수석회 신철호선생은 수석을 의인화하면서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혈육》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이름을 부치니 수석의 품위가 한결 높아지고 련상의 폭이 보다 넓어진다. 이때에야 나는 수석의 이름은 말그대로 단 그 수석만의것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살아난다는것을 절감하게 되였다.   산천경개가 삐여나고 유구한 문화를 자랑하는곳에 수석이 난다더니 조금도 그른데없는것 같다. 선바위골에서 선바위수석을 탐석한 뒤 나는 선바위북쪽 륙도하에서 차도가 있긴 하나 또 두점의 선바위를 탐석했다. 그중 내가 꼬마선바위라고 부르는 수석은 먼저의 어른 선바위처럼 가로 놓으면 망망한 바다가 바위산이요, 세로 세우면 하늘을 떠이는 립석(立石)—선바위이고 다른 한점은 말없이 명동골어구 선바위를 또옥 떼여닮은 장엄하고도 웅장한 옹근 바위산—선바위였다. 하기에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륙도하 수석 선바위 세점을 친자식인양 지극히 아끼며 사랑을 몰붓는다. 집안에 앉아 축소된 대자연의 산수경치를 감상하는 재미는 수석인이 아니고는 느낄수 없는 나만이 즐거움이다.      누군가는 돌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간직한 지구우의 형성체라고 했다. 천연의 소산인 수석 한점의 형성이 수천수백만년, 그것이 미적대상인 하많은 돌중의 행운아 수석으로 이루어지는 나와의 만남과 대화, 참으로 신기하고도 멋진 일이다.                                                        (2004년 9월 17일)                                        
144    【수필】무궁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댓글:  조회:3128  추천:117  2007-05-17
              무궁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리  함    무궁화는 온대지방에서 7~10월의 약 100일간 끊임없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나무라지만 우리 연변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꽃나무이고 화분에서나 볼수있는 락엽활엽관목이기에 무궁화에 대한 직감적인 사랑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무궁화라는 이 아름다운 꽃나무가 성큼 다가섰으니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기기묘묘하기만 하다.     지난 10월 13일 남방에서 대학교수를 맡게 된 나는 후배 어린 동료들인 연변대 조문학부 석사, 학사 출신 장국화씨, 김은복씨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의 극치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찾았다는 항주 서호를 유람하게 되였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더니 과연 그른데 없었다. 일대 문인 소동파가 이곳 절도사 시절 서호의 뚝을 막아 서호를 만들었다는 곳, 중국 최고의 차는 단연 서호가의 룡정차를 꼽는다는 곳, 룡정차를 위해 청나라 강희제가 수나라 수양제가 팠다는 대운하를 항주까지 련결했다는 곳, 이 나라 고대 4대미인으로 받들리는 월나라 서시가 놀았다는 곳, 당나라 때 대시인 이태백이 술을 따랐다는 곳ㅡ서호, 서호는 어딜보나 아름다움의 모음터여서 우린 서호에 발을 들여놓는 첫시작부터 기분이 한없이 좋기만 했다.     우리의 첫 발목을 잡은것은 넓다란 잎을 가진 한무더기 활엽관목나무에 화사하게 피어난 주먹크기의 연분홍꽃이였다. 이자 꽃봉오리가 맺혀지기 시작하고 활짝 피어난 꽃송이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꽃나무가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꽃나무와 꽃송이를 디지털사진기에 담아두는데 김은복후배가 기념사진을 남기겠단다. 그래서 잊지못할 기념사진이 찍히여졌는데 우린 이 꽃나무가 여기 남방의 무궁화나무라는것을 알수가 없었다.     그러던 10월 20일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연변팀 등산대원들이 소흥의 불교명승지ㅡ향로봉에 다녀오는데 꽃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있는 정현자선배가 나를 툭 치며 향로봉기슭 강가에 떨기떨기 피어난 꽃나무를 가리키며 저 꽃나무가 바로 무궁화나무라고 한다.     “예?!”     잘못듣지 않았나 제 귀를 의심했지만 눈앞의 꽃나무는 에누리없는 무궁화나무가 옳단다. 그럼 항주 서호가에서 본 꽃나무가 무궁화나무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첫 발목을 잡고 놓질 않았구나,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더니 생각지도 못한 무궁화나무를 남방 항주와 소흥에서 대하게 될 줄이야!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향로봉기슭 강가의 무궁화나무를 감상하며 사진찍기에 여념없었다. 일행도 다가와 기념사진을 남긴다. 과시 무궁화는 꽃중의 꽃이라더니 하나도 그른데가 없다.     해당자료를 보면 무궁화는 100일간이나 피여나는 꽃나무이고 키가 2~4메터에 이른다. 눈앞의 무궁화도 키가 보통 3~4메터 정도에 이르는데 그루 전체에 털이 거의 없고 한뿌리에서 엄지손가락 정도의 매끈한 가지가 7~80가지나 자라나며 가지마다 하많은 무궁화꽃을 토해낸다. 그에 못지않게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아직까지 무궁화 자생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5종에 달하는 무궁화속 식물이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나라꽃ㅡ국화로 받들리는 무궁화도 여기에 포함된다.    돌이켜보면 조선반도(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궁화를 널리 심은것으로 알려진다. 옛문헌에 의한 가장 오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经)”에 나타나는 모양인데 나는 아직 원문을 접하지 않았으나 이 산해경 제9권 “해외동경(海外东经)”에는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고 적혀있고 중국의 “고금주(古今注)”에도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다” 라고 씌어있다나. 이런 력사기록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무궁화를 심어온 력사가 수천년으로 거스른다는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신라 그 옛시절부터 한반도를 무궁화나라라고 불렀다고 하니 오늘의 한국에서 무궁화를 나라꽃ㅡ국화로 하는데는 력사적 제 원인이 있는것이다.    그래서일가, 항주나 소흥에서 대하는 무궁화가 전에없이 가슴에 와닿았다. 10월 20 바로 그날, 나는 일행이 모두 귀가한뒤 공원으로 되여있는 향로봉기슭 강가를 천천히 거닐면서 약속이라도 한듯 한창 활짝 피어나고있는 무궁화꽃을 디지털사진기로 찍고 또 찍었다. 그래도 무궁화를 향한 직성은 다 풀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는 나에게는 1910년대 훈춘 독립무장단체의 수령이였던 황병길지사가 떠올랐다.     지난 80년대 초에 훈춘에 가서 황병길기사의 친딸 황정일녀사를 취재할 때였다. 녀사는 연통라자시절의 아버지 황병길과 어머니 김숙정은 집앞내가의 오솔길가에 무궁화나무를 심어놓고 그리도 애지중지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는 그 뜻을 다 읽어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의 식민지로 된 조선, 일제놈들이 여지없이 짓밟고있는 무궁화를 훈춘의 한 오지에 심어놓고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의 래일을 무궁화에 기탁했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일본침략자들은 1910년 삼천리강산을 삼켜버린후 우리 조선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를 여지없이 뽑아버리고 누가 무궁화를 재배하거나 관심을 돌리면 무지곡직 잡아가두지 않았던가…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 황병길부부와 그이들이 심고 가꾸던 무궁화가 다시다시 재다시 떠오른다. 나는 어느덧 무궁화 꽃나무에 홀딱 반해버렸다.     며칠뒤 10월 26일, 나는 향로봉 기슭강가를 산책하며 무궁화꽃나무를 둘러보았다. 며칠전에 비해 꽃들은 많이 지고있었으나 100일쯤이나 줄기차게 피어난다는 무궁화꽃은 아직도 그 어여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궁화꽃나무는 여전히 피여나고있다. 항주, 소흥의 무궁화꽃나무는 마지막 향기를 토해내는 계단이지만 소흥에서 나무로 200~300리 떨어진 국가급관광명승지ㅡ천대산과 그 일대 무궁화나무는 이자 꽃봉오리가 지면서 바야흐로 피여나려 서두르고 있다.  무궁화, 한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는 여기 남방에서도 활짝 피어나고 있습니다.                                             (2006년 11월 8일)          
143    【수필】추석 보름날밤의 비애 댓글:  조회:2885  추천:144  2007-05-15
추                                 추석 보름날밤의 비애                                                                                                     리  함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조금도 그른데가 없는것 같다. 간밤까지도 만월이 가리여진 흐리터분한 날씨에 때아니게 비발을 날리기도 하더니 새날을 맞이한 추석보름날은 보기드물게도 온 하루 구름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다. 그야날로 청공만리(靑空萬里).      (오늘 추석 보름달은 과연 볼만 할거야!) 내 마음은 벌써부터 아이들처럼 들떠있었다. 우리 인류가 9년만에 처음 맞는 으뜸 만월이여서 더욱 그러했다. 오후 4시가 넘기 바쁘게 서쪽하늘을 보고 동쪽하늘을 보며 부산을 떨었다. 많은 경우에 보름달들은 하루길을 달린 해님이 서산마루에 꼴깍 넘어가기전에 동산마루에 머리를 내밀기 일쑤다. 헌데 오후 5시 5분에 해님이 서산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추석날 보름달은 동산너머에서 머리를 내밀지도 않았다.        기다리기에 지친 나는 층집에서 보다말고 급기야 강변놀이터로 나갔다. 물론 쌍안경을 지니는것을 잊지 않았다. 알맞춤한 자리를 정하고 추석 보름달이 떠오를 동산마루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25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음력 8월 보름달은 드디여 시선이 가닿는 연길시 하룡촌쪽의 오른쪽 낮다란 내리산비탈 중턱에서 머리를 빠끔 내밀었다. 해가 져서 불과 20분만의 떠오름이였다.      조금후 보름달이 동산마루와 뜸을 두더니 일대장관이 나타났다. 부르하통하를 가로탄 도심의 연신교에 일제히 등불이 켜지며 아치교기둥을 따라 장치한 짙은 하늘색 줄등불은 강안을 채운 물결우에 9개의 현란한 무지개를 수놓았는데 추석날보름달은 바로 그 우켠에 휘영청 떠올라 황홀경을 이루었다. 나의 흥분점은 절정에로 치달았다.       이럴 때 강변의 그네가, 철봉가에서 삼삼오오 노닐던 어느 중학교의 남녀학생들 중 한 녀학생이 옆의 녀학생과 소곤거렸다.  “얘, 저것 봐. 둥근달이야, 둥근달!” “야, 멋있다. 스우디 웨량(十五的月亮)이구나!”       두 녀학생은 너한마디 나한마디 주고받더니 화제를 은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밤하늘의 별세계로 돌리였다. “온 하늘서 제일 밝은 별이 뭐라 했지?” “그것도 몰라? 북극성이지!” “그래 북극성이 맞아.” “?”      찰나 나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듯 머리가 휭-해남을 느꼈다. 그네들은 북극성을 분명히 하늘나라의 제일 밝은 별로 오인하고있었다. 그 순간 정서쪽 높은 하늘에서 봄철의 대표적 별자리-목동자리의 1등성 아르쿠투르스가 반짝이고 하늘중앙에서는 여름철의 대표적별자리를 이루는 거문고자리의 1등성 직녀 베가, 독수리자리의 1등성 견우 알타이르, 백조자리의 1등성 데네브가 반짝이며 밝은 빛을 뿌리고있었는데 마치도 (1등성인 우리가 예 있는데 뉘라서 2등성에 불과한 북극성을 제일 밝은 별이라고 하는고?)하며 뽀로통해 하는것 같았다.       흥분의 절정에 올랐던 나는 졸지에 천길나락속에 곤두박히며 더없는 비애를 느꼈다. 뜻하지 않은 추석 보름날밤의 비애였다. 이는 두 녀중학생으로부터 오는 비애뿐이 아니였다.       평소 우리 글로 된 신문과 잡지들을 두루 살펴보면 《하늘과 별과 바람》을 써낸 불멸의 고향 시인 윤동주처럼 하늘과 달과 별을 주제로 작문을 쓴 중소학교학생들의 작문과 자주 맞띠우게 된다. 유감스러운것은 거의 모든 조선족학생들이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혼동시하면서 북극성을 온 하늘의 가장 밝은 별로 알고있다는것이다. 이를 어찌 우리 중소학교학생들의 오인이라고만 하랴. 그들이 어려서부터 어쩌면 부모님들에게서 받은 상식이 그러했고 선생님들에게서 받은 상식교육이 그러했으니 학생들만을 탓할 일이 아닌것 같다.       오인은 이쯤으로 그치면 족할지도 모른다. 우리 중소학교학생들이 몰라서 그러려니 하면 지나칠수도 있겠지만 작문을 편집하는 편집원들의 상식수준은 또 뭐라 할가, 거개가 대학교출신의 편집원이라 할 때 몰켜드는 허탈은 커지기만 한다.       비애는 여기에서 끝나는것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의 부모, 선생님들, 편집원들의 상당수가 이러하다면 뜬다 하는 작가님들의 글속에까지도 북극성이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로 묘사될 때가 가끔 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북극성이 가장 밝은 별이라면 이런 현상은 별을 묘사하는 작품세계, 장편소설에까지도 거리낌없이 만연된다. 모두들 북극성을 북두칠성으로 알고 저 하늘의 가장 밝은 별로 오인하니 이는 별세계를 둘러싼, 넓은 범위에 그야말로 광범위한 비애가 아닐수 없다.  알고보면 북극성은 지구의 자전으로 말미암아 모든 별의 구심점으로 되여 온 하늘의 별들이 모두 자기를 에워싸고 360도로 일주운동을 하게 하고 언제나 정북쪽 높은 하늘에 “고정”되여있어 북쪽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한데서 북극성은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별로 알려졌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이것이 제일    밝은 별로 오도된것 같다.       북극성은 우리 지구우의 인류의 시선에 맞혀 올 때는 눈으로 보이는대로 말해 제일 밝은 별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별들 세계에서는 2등성으로서 그 밝음도가 49번째에 지나지 않는다.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보이는 별을 일등성이라 하는데 그 일등성들로는 겨울철 큰 개자리의 으뜸별 시리우스, 거문고자리의 으뜸별 직녀 베가, 봄철 목동자리의 으뜸별 아르크투르스 등 21개의 별이다. 우리 연변에서 볼 때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등중에서 가장 밝은 별인 큰 개자리의 시리우스를 제외하고 가장 밝은 별은 목동자리의 아르크투르스와 거문고자리의 직녀성이다. 이는 흔히 아는 천체의 상식문제이지만 우리 사회의 허다한 모퉁이에서는 희미한 상식문제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받는 비애가 추석 보름달아래 이윽토록 가셔질줄 모른다.       어언 쟁반같은 추석 보름달이 저만치 휘영청 솟아올랐다. 가을철 밤하늘의 장관이 그대로 펼쳐지면서 량안을 꽉 채운 부르하통하 강물우에 저 동녘하늘의 보름달이 떨어져 하느작거렸다. 물우에 비낀 보름달의 또 하나의 모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쌍둥이딸애의 어릴적 재잘거림이 귀전에 맞혀온다.       그날도 8월 추석밤이라고 생각된다. 쌍둥이가 아장아장 걷던 두어살시절에 부르하통하 강뚝 따라 산책하는데 쌍둥이의 깜직한 눈에 강뚝아래 물우를 자맥질하는 보름달이 비껴왔다.       “달이 물에 떨어졌다, 달이 물에 떨어졌다!”       쌍둥이는 연해연방 소리지르면서 저 달을 빨리 건져내라고 지청구다. 원숭이의 소란과 똑같은 부산에 우리 부부는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산책에 따라 강물에 비낀 보름달이 졸졸 뒤를 따르니 이번에는 “저달이 우리를 따라온다!”고 재잘거리더니만 엷은 구름속에 살짝 숨어든 저 하늘의 보름달을 보면서는 “아야, 달이 제집에 갔다!”고 그토록 아쉬워 한다. 달이 엷은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 달이 제집 갔다왔다고 즐거워 퐁퐁 뛰는 천진하고 깜찍한 쌍둥이딸애.       나는 강물우에 비낀 보름달을 내려다보며 이윽토록 10여년전의 추석 보름달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두 녀학생의 뜻하지 않은 대화로 련쇄비애를 느꼈던 나의 기분은 쌍둥이딸애의 아장시절 회억속에서 소리없이 맑아갔다.       천체현상으로 볼때 온 하늘에서 가장 환하고 가장 크고 가장 사랑스럽게 안겨오는 천체는 달이다. 달은 우리 지구의 유일한 위성으로서 하많은 련상을 불러일으키면서 하많은 전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만큼 달은 천진한 동심의 다정한 벗으로서 동년의 철부지 그 시절부터 각별히 사랑스럽게 안겨진다.       그런 여유라 할가, 아장아장 시절에 달이 물에 떨어졌다고 재잘거리던 쌍둥이 딸애는 유치원시절에 상아처녀요, 오강이 계화수를 베오, 옥토끼가 약을 찧소 하며 곧잘 옛말 하더니 소학교시절에는 달님은 어이하여 저 하늘에 떠있는가, 달나라 분화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달나라에 어떻게 인류가 올랐는가, 북두칠성과 북극성은 어떻게 다른가, 온 하늘의 별들은 왜 북극성을 에워싸고 일주운동을 하는가고 묻기에 이르며 이후 커서 달나라, 별나라에 오르는 사람이 되겠단다.       비애의 엄습만이 아닌 희망의 언덕이 보이기도 한다. 때를 같이하여 추석 보름날 밤의 보름달, 9년만에 가장 어울리는 만월이라는 저 달님은 의연히 상승선을 그으며 남쪽하늘에서 끊임없이 위치를 바꾼다. 그에 따라 강물에 비껴든 달님도 끊임없이 자맥질하며 어서 오라 손질하듯 저의 달나라세계로 반겨부른다.                                                                           (2004년 9월)                  
142    【사진】오늘은 윤봉길의사 의거 75돐이 되는 날 댓글:  조회:3412  추천:122  2007-04-29
      오늘은 윤봉길의사 의거 75돐이 되는 날이다.이 뜻깊은 75돐을 앞두고 필자는 안해와 아들과 더불어 상해에 가서 시안의 로신공원에 세워진 의거현지와 의사 기념관으로 된 "매정"( 梅亭 )을 현지답사하였다.      오늘의 로신공원은 당년 윤봉길의사가 상해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던 황포강 기슭의 홍구공원이다.공원위치는 상해시 사천북로(  四川北路 )2288번지.      아래 "답사기행"에 앞서 부분적 답사사진을 먼저 올리면서 겨레 윤봉길의사 의거 75돐을 숭엄히 기념하는 바이다.
141    【90돐특집】(16) (론문)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2) 댓글:  조회:3495  추천:149  2007-04-10
4.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우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평가가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의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그럼 어찌하여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이여야 하는가? 이는 학계나 어느 개인이 윤동주시인의 실제를 떠나서 자기나름대로 지적할수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 알자면, 설복력있게 보여주자면 윤동주가족의 이주와 가족관계, 중국적에로의 가입, 청소년시절의 윤동주시인의 실태를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된다.   (1)    이주와 가족관계   이땅의 조선족력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것은 19세기 60년대부터라고 해야 할것이다. 18세기 중엽이후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이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이주는 아니였다. 19세기 초엽이후 그 수가 늘어갔다해도 본격적인 이주붐이 일지 않았다.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고 1869년과 1870년엔 또 련속 대한재가 덮치자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생활고를 헤치고저 분분히 두만강을 건너섰다.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시작인데 그후 조선 회령부사 홍남주로 인한 월강해제소식과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페지는 대이주붐을 일으켰다. 윤동주의 선조들도 이같은 이주의 물결을 탔다. 윤동주시인의 윤씨가문은 파평윤씨로 알려진다. 이들 《윤씨가문은 본래 종성사람들이지만 회령에서 살다가 넘어갔기 때문에 그후 회령 윤씨가문으로 통했다.》⑮ 그러니 함경북도 회령서 살다가 종성으로 갔다는 말인데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에 4남 1녀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섰다. 처음 자리잡은 곳이 두만강 중류대안인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이다. 그때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겨우 11살밖에 안되였다. 그후 1899년 2월 18일에 종성과 회령의 우국동지들인 김약연 등 4대가문의 대소가문 스물두집의 식솔 도합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 오늘의 명동, 장재에 와서 자리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그 이듬해 1900년에 지금의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왔다. 한데서 명동촌에 삶의 터전을 닦은 5대 가족⒃은 곧 김약연의 전주김씨가문, 문병규의 남평문씨가문, 김하규의 김해김씨가문,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남위언씨의 남씨가문 등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아버지 윤영석(1895—1965)과 어머니 김룡(1891—1948)사이 맏아들로 태여났다. 어머니 김룡은 열렬한 민족독립선구자이고 교육가였던 김약연선생의 누이동생이였다. 이런 실정은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도 중국태생이고 윤동주도 중국태생임을 알려준다. 이로부터 보면 윤동주시인은 정판룡교수의 지적처럼 《전형적인 중국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첫째가는 근거라 할수 있다.   (2)    중국적에로의 가입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정식페지와 함께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되는 지역이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되였다.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고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이에 따라 시기시기에 따른 조선이주민들의 토지소유권문제와 입적문제가 크게 대두하였다. 1909년 말에 청정부에서 최초의 국적법—《대청국적조례》를 제정하였다. 그뒤 이곳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김약연과 리동춘 등은 서로 토의하고 리동춘과 김립이 함께 만세대의 조선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북경에 가서 민국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간민회의 친중배일(親中排日)의 적시적인 조치였는데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다. 조선이주민들은 개인신분으로 입적수속을 할수 있게 되였으며 정식으로 국가법률의 보호를 받았다. 만호청원귀화입적 비준과 때를 같이하여 명동촌의 김약연 전주김씨가문과 윤하현의 파평윤씨가문 등 5대가족은 물론 명동일대 조선이주민들이 모두 중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되였다. 이는 간민회책임자들인 김약연과 리동춘의 연구자료와 김약연의 증손자 김재홍선생의 연구문집, 증언을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은 선참 중국적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조선족초기이민의 후손인 윤동주는 1917년에 중국조선족의 가문에서 태여나 조선족으로 자라게 되였다. 이밖에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과 모친 김룡은 이땅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조선족가문을 이어갔다. 모친 김룡이 1948년에 사망하고 부친 윤영석은 1965년에 룡정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앞서 윤동주의 셋째동생 윤광주(1933년생)는 광복후 아버지와 같이 지내며 시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2년에 페결핵으로 타계함을 보인다. 손아래 녀동생 윤혜원과 둘째동생 윤일주는 광복후 한국행에 올랐고 윤혜원녀사는 지금도 연변출신의 남편 오형범선생과 같이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있지만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린 연변사람이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⒄하고 말한다. 이같은 사실은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임을 지적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동주시인이 중국조선족이라는 둘째가는 주요근거라 하겠다.   (3)    윤동주생애 20년 8개월 연변에서   어떤 이들은 윤동주시인은 평양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사망한것을 리유로 한국이나 조선의 사람으로 착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민족시인 평가에만 류의하고 조선족시인으로는 평가하려하지 않는다. 윤동주는 확실히 평양, 서울, 일본에서 공부하였지만 이는 학문을 닦기 위해 떠난 공부행이였지 이주살이로 평양이나 서울, 일본 등지로 간것이 아니였다. 물론 공부하고 어디에 떨어지는가 하는것은 다른 문제이다. 본고는 윤동주시인의 생애를 두루 시간적으로 점검해보았는데 윤동주는 만 27년 2개월(해수로는 29년)의 생애를 살다가 떠나간 사람이다. 그중 생의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냈다면 생의 20년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내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윤동주시인은 소학교와 중학교시절을 명동소학교와 달라자 현립1교, 룡정은진중학교에서 보냈다. 평양숭실중학교 시절은 7개월, 서울 연희전문학교시절은 33개월, 일본 도꾜 릿꾜대학 문학부시절과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시절은 36개월—이 세곳 공부시절을 모두 합쳐보아야 6년 4개월밖에 안된다. 과연 생의 20년 8개월을 연변땅에서 보냈다는 말이니 시인 윤동주는 명실공히 손색없는 연변의 아들, 중국조선족의 아들이다. 누가 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가, 한국에서는 우리 민족의 시인이라고 민족시인으로만 받들어왔고 이땅에서는 력사적인 분석도 없이 민족시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으니 윤동주는 마치도 중국조선족이 아닌것으로 착각되였다. 또 한국에서 발굴되고 연구되고 연변에 전해졌다하여 중국조선족과는 큰 인연이 없는 시인으로만 알았다.   5. 맺음말   본고는 우리 민족의 일류 시인 윤동주를 두고 머리말, 윤동주시인 부름의 변화과정, 2005년도의 획기적인 변화, 왜서 윤동주는 먼저 조선족시인인가 등으로 나누어 윤동주는 당당한 중국조선족시인임을 여러모로 검토하여 보았다. 또 조선족시인이 옳음을 사실로 보여주기에 힘쓰면서 중국으로 볼때 모호한 민족시인개념을 더는 쓰지 말고 조선족시인으로 평가하여 자리매김을 할것을  희망하였다. 이는 1995년 룡정서 가진 윤동주 50주기 기념학술토론회에서 고 정판룡교수님께서 벌써 첨예하게 지적하였다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조선족시인인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옳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차실은 윤동주시인에게 더없이 미안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인 윤동주는 확실히 조선족시인이 옳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시인만으로 평가와 정의를 내릴 의도는 꼬물만치도 없다. 다만 윤동주는 우선 먼저 조선족시인임을 자리매김하려는것뿐이다.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시인이면서도 전체 우리 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각광받고있는 분이다. 본고는 맺음말의 최후부분을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의 말씀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가장 민족적인 시인만이 세계적인 시인으로 될수 있으며 또 모든 세계적인 시인은 우선 먼저 민족적인 시인으로 되여야 하는것처럼 시인 윤동주도 우선 먼저 우리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전 민족의 시인이라는것이다.》⒅             주해:    ①     정판룡, 중국조선족과 시인 윤동주, 민족시인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1995)     ②     우와 같음.  ③     《문학과 예술》(1985년 제5호) ④     《종합신문》(1987년 7월 29일,  8월2일부 3면) ⑤     《천지》 (1987년 제12호) ⑥     《문학과 예술》(1988년 제3호)   ⑦     임범송 권철 주필, 《조선족문학연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89.6) ⑧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7월)      ⑨     민족출판사, 1991년 7월, 제526페지 ⑩     2003년급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오광욱의 론문 ⑪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 연변교육출판사, 2002년 8월 ⑫     문화산맥 사이트 www.koreancc.com 2004년 10월 23일 ⑬     20세기 코리아문화양상과 전망 (2004년 12월 17일) ⑭     2005년 2월 17일 기사 ⑮     서굉일 김재홍 지음,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 고려글방, 1997년 10월, 제96페지 ⒃  우와 같음, 96페지 ⒄  2005년 7월 8일부 연변일보 제3면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 (김철호 기자) ⒅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기념학술토론회 론문집, 제8페지                                                      2005년 8월 5일                       윤동주서거60돐 중한학술세미나 발표론문                                 한국 "서시" 2005년 가을호 게재         
140    【90돐특집】(15) (론문)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댓글:  조회:3571  추천:110  2007-04-08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리  광  인   1. 제기되는 문제   올해로 윤동주시인 서거 60주기를 맞기까지 윤동주와 시인의 시 연구는 거의가 한국 학계에 의해 주도되여왔다. 1948년 1월 30일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작품 31편 수록) 초간본이 간행된 이래 중판, 3판, 사진판으로 이어지면서 60년동안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윤동주를 《최고봉의 하나로서 취급》①하기에 이르렀다. 윤동주 시집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및 체코어 등으로까지 번역되여 이제 해외에도 널리 소개되고 있다.》② 하기에 윤동주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시사 (現代詩史)의 좌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심의 대상》③으로 되여오면서 《1980년대 이전까지는 전기적, 문학사적,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연구가 주된 것이였다면 1980년대 이후부터는 작품의 본질적인 성격을 규명하고자하는 작품 내적연구가 주류를 이루》④어 왔다. 이에따라 한국문학사들에서는 윤동주를 리육사와 더불어 일제식민지 후기의 조선민족(한민족)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동주시인은 중국 연변에서 태여나 연변에서 자랐고 연변에서 소학교, 중학교 공부를 하면서 생의 만 27년 2개월 중 20년 8개월이나 명동과 룡정에서 보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윤동주시인의 생애, 발자취, 사상 등에 대해 허다한 면에서 잘 알지 못하며 안다해도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는고로 력사현실과 어긋나는 면이 가끔 보이는 실정이다. 윤동주시인의 선조들 이주와 가족관계, 다닌 학교 등 만을 보아도 그러하다. 윤동주의 사상과 경향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의 시각과 관점으로 스치면서 송우혜씨의 《윤동주평전》(신, 구판 포함)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본 론문에서는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총제목을 설정하고 1,2,3 등으로 나누어 연변에서의 윤동주 생애와 발자취, 사상 등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는 필연코 한국이나 조선의 학계 학자들 연구에 유조하리라고 믿어마지 않으면서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는 윤동주의 증조할아버지 때 살았던 자동, 명동촌의 실제, 달라자 관립학교 등을 3개 연구내용으로 나누어 전문 다루어 보려 한다.    2. 북간도 자동은 틀린 설법   윤동주시인의 가족사 연구자료들을 한데 모아보면 윤씨가문은 파평윤씨로서 이들 가문은 본래 함경북도 회령에서 삶을 영위했다. 그러다가 종성으로 이사하여 종성사람으로 알려지지만 기실은 회령사람들이여서 회령윤씨가문으로 통한다.⑤ 종성서 살때가 이미 1886년 이전이다.  1886년에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결단을 내리고 4남 1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 중류 북쪽대안인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새 삶의 터를 잡게 된다. 이때의 자동을 가리켜 한국 학계에서는 당시의 중국 지방행정기구와 흐름을 잘 모르기에 단순히《북간도 자동》이라고만 한다. 북간도 자동이란 취급은 완전히 틀린 설법이다. 왜서 틀린 설법일가, 이를 알자면 오늘의 룡정시가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개발되던 19세기 후반기 청동치(同治), 광서 년간으로 거슬러 오르지 않을수 없다.    (1)  룡정의 첫 이주민마을   력사자료에 눈길을 두면 지난 19세기 50년대 이전에 함경북도 북부의 조선사람들이 오늘의 룡정 이남의 봉금지에 들어와 수렵에 종사하거나 진귀약재를 채집하기도 했다. 나무를 찍어넘기여 터전을 만드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뙉밭을 일구고 채소나 곡식을 심다가 봄에 와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는 가을에 등짐으로 한짐한짐 운반하기가 일쑤였다.  룡정에 조선이주민 첫 마을이 생긴것은 1877년 봄으로 집고있다. 조선 평안북도의 난민 김언삼(金彦三)과 함경북도 회령의 난민 장인석, 박윤언(朴允彦) 등은 14세대의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오늘의 룡정시 삼합일대에서 두만강을 건너 륙도하와 해란강이 합수되는 곳에 보짐을 풀었다.⑥  잇따라 마을이 생기면서 이 마을이 룡정구역내 첫 조선인마을로 알려진다. 그와 때를 전후하여 오늘의 룡정시 구역에 밀려드는 조선이주민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2) 지방관아의 설치와 개방   광서 7년 1881년에 길림장군 명안은 조정에 상주하여 선참으로 두만강이북 지구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훈춘에 부도통(副都统)아문을 설치했는대 이 아문은 연변의 대부분 지구를 관리하는 최고행정기관이였다. 그해(1881년) 훈춘에 또 길림변무독판이 설치되여 훈춘 등지의 변무사무를 처리하고 또 훈춘에 초간총국(招垦总局)를 두었다. 총국아래 오도구(五道沟)에 남강 초간본국을 두고 개간사무를 보았다면 오늘의 룡정시 지신일대 (속명으로 달라자라고 함)는 남강초간 본국의 관할지대였다.     1884년에 청정부 지방관아는 화룡욕(지신진일대)에 월도국(越渡局)을 설치하고 조선이주민 접수를 취급했다.     광서11년 (1885년)에 화룡욕의 월도국을 월간국(越垦局), 일명 통상국(通商局)으로 개칭하고 광제욕(개산툰진 광소촌), 서보강(西步江, 훈춘강이 두만강에 흘러드는 곳)에 분카(分卡)⑦ 를 두면서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50리 지역을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였다.   (3) 자동은 녕원보 개운사 소속마을   청나라 지방관아의 개방조치는 숱한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결과 해란강이남지역에 벌써 5590여 세대의 조선인들이 밀려들었는데 청조지방관아는 이들 개간구역에 4대보(四大堡), 39개사를 설치하고 사아래에 129개 갑(甲), 갑아래에 415개 패를 두었다. 4개 보란 진원보(镇远堡), 녕원보(宁远堡), 수원보(绥远堡),안원보(安远堡)를 말하는데 윤동주의 선조들이 자리잡은 자동일대는 녕원보의 관할구역으로서 화룡욕 무간국 동북쪽에 위치한 두만강대안의 월청일대와 개산툰일대가 녕원보 관할밑에 있었다. 녕원보의 소재지는 광제욕이 자리잡은 오늘의 개산툰진 광소촌 두만강 북안이였다. 광서 23년(1897년) 에 화룡욕을 소재지로 하던 화룡욕 무간국이 광제욕에 자리를 옮기면서 자동촌 가까이에 있는 광제욕은 줄곧 화룡욕 무간국의 정치중심으로 존재했다.      당시 녕원보는 산하 13개사를 관할. 그중 《개》(开) 자가 들어간 사만 개태사(开泰社), 개원사(开远社), 개발사(开发社), 개문사(开文社), 개화사(开华社) 등 5개. 후에 2개사가 없어지고 개태,개원,개문 3개사가 남아 통칭하여 삼개사(三开社)라고도 했는데 자동과 그 일대는 개원사에 속했다. ⑧      력사사실이 이러하다. 하기에 윤동주 선조들이 살았던 자동일대를 북간도 자동이라하면 아니된다. 응당 훈춘 부도통, 혹은 길림변무독판 녕원보 개운사 자동이라고 불러야 한다. 후에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널리 불리워진 《북간도》란 말은 20세기 초이후의 일로서 1886년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씨가문에 북간도를 붙히면 력사현실을 떠나게 된다.   (4) 윤씨가문은 자동 어느 마을인가?   윤씨가문의 자동이주살이도 미적지근한것이 없지 않다. 제기되는것은 자동 어느 마을에 살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윤씨가문 가족사연구에서 이를 밝히지 못하였기에 오늘날에 이르러 이를 제대로 밝힌다는것은 자못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지난 세기 80년대초 자동골을 따라 막바지 채수골, 연두봉까지 답사하면서 당지 로인들을 방문한데 의하면 자동골은 첫 마을부터 왼쪽골의 막바지까지 10킬로메터도 넘는다.  개산툰진에서 자동촌어구에 들어서서 철길을 넘으면 자동촌 본부인데 자동골은 서남으로 올라가다가 두골로 나뉘여진다. 오른쪽골은 지신(달라자)금곡으로 넘어가고 왼쪽골은 채수골로 통하는 원골이다. 철길너머 마을이 종선촌이라면 3대는 자동 부렁촌이고 5대는 굴레장대밑, 6대는 후저골로 통한다. 자동 원골로 들어가면서 형성된 마을들인데 그 우로는 돌문밖, 돌문안, 채수골, 연두봉으로 이어진다. 돌문 그곳을 고석동이라고 하는데 고석동(孤石洞)을 우리 말로 풀이하면 외돌배기이다. 또, 자동 상촌이 채수골마을이고 채수령엔 마지막 마을 알미대가 있다. 20세기 초에 벌써 이런 마을들이 존재하고  200여세대도 넘게 생활했다고 할 때 윤씨가문이 1900년까지 14년간 생활한 그 시기는 마을이 몇개였고 세대수는 얼마인가, 아직 그 누구도 이에 100%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동 시초의 생활모습과 마을 형편을 보여줄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는것이 아니다.  원《룡정현 광개향 자연툰 건툰(建屯)시간》자료⑨에 따르면 자동의 응달촌, 연역툰, 리화동, 후저동 등 마을들의 형성시간은 광서초년으로 밝혀진다. 광서원년이 1875년이라고 하면 윤씨가문이 이주를 강행한 때가 광서 12년(1886년), 즉 광서초년에 해당하고있으니 그시절에 이미 여러개 마을이 실재한 형편이다.  량환준선생이 1986년 12월 12일에 당시의 광개향 자동촌에 가서 로인좌담회를 가진데 의하면 그해 67살에 난 자동 4대 박인언로인은 이렇게 증실하였다.     《젊었을 때 부친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친이 11살일 때 증조부가 가족을 데리고 조선 종성으로부터 월강하여 자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이곳에 인가가 없었다고 한다. 부친은 1946년도에 72살로 사망했으니 계시면 올해 112살이 된다. 그러므로 102년전이니 1884년에 이곳에 이주한것으로 된다.》      그번 좌담회에서 자동 5대의 유영준(78살), 자동 4대의 공흥렬(72살) 로인들도 비슷한 증실을 하였다. 세 로인들은 좌담회에서 또 마을 부근에서 옛 집터자리가 여러곳 발견되고 지하에서 방아호박, 손매돌, 밥조개 등 쪼각들이 적잖게 발견되였다고 하면서 자동의 이주유래는 오란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5) 북간도 자동은 모호한 기술(記述)   상기자료들에 비추어보면 윤씨가문의 이주는 청나라에서 1885년에 200여 년간이나 지속된 봉금령을 페지한것과 관련된다. 바로 봉금페지 이듬해 오늘의 자동일대에 이주했던것이다. 자동에서 불과 10여리 거리에 조선 종성이니 윤씨가문 등 적잖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왔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1886년 그때는 이미 자동일대에 여러개 마을이 나타난 실정이니 윤씨가문이 《북간도 자동》에서 살았다는 기술은 대단히 모호한 기술이 아닐수 없다. 시초 마을이 형성되여 퍼그나 흐른 시기까지도 마을들이 각기 이름을 갖고있고 자동으로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고로 필자는 윤씨가문이 이주하여 생활한 마을이 북간도 자동이라고 하는 설법은 틀린 설법이라고 못박는다.   2. 명동촌의 유래   지금까지 윤동주시인연구에서 보면 북간도 자동 설법과 같이 모호한 설법이 또 하나 있다. 명동촌의 유래문제가 그런 설법이라 하겠다. 명동연구 해당자료들에 따르면 명동이란 이 마을형성은 1899년 김약연 등 4대가문, 22세대, 141명이 이곳으로 이주한후 생겨난 마을이라고 일컿고있는데 이는 명동과 그 일대 마을들의 당시 형편을 모르고하는 설법이다. 윤동주의 고향마을이 명동이고 1899년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주동자 김약연선생이 윤동주의 외삼촌, 즉 동주 어머니의 친오빠인데서 명동의 유래는 밝히고 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력사속의 명동촌의 유래는 어떠한가, 아래 명동마을의 유래를 밝히노라면 이 문제가 스스로 풀리여진다.   (1) 명동지구의 개발   그제날 명동지구라 하면 룡정에서 남으로 12킬로메터 떨어진 선바위와 19킬로메터 떨어진 달라자사이의 륙도하북쪽에 위치한 성교촌, 중영촌, 명동촌, 장재촌과 륙도하 남쪽켠에 위치한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화전동(지금은 없음) 등 7~8개 마을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도 룡정에서 륙도하를 거슬러 남으로 15킬로메터되는곳에 자리잡은 명동촌은 이들 여러개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이였다.  이곳 해당 력사연구자료들에 따르면 19세기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명동지구는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885년에 청정부에서 봉금을 페지하고 조선이주민들의 이주와 개간을 허용하자 함경북도 북부의 조선인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하여 그 시기에 벌써 명동지구와 해란강, 부르하통하 류역에 모여든 조선이민수가 10만명 좌우⑩에 달했다.  량환준선생의 현지답사와 조사연구자료를 보면 조선이주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기전까지 명동지구에는 중국 관내에서 온 점산호 동한(占山戶, 董漢)이란 사람이 살았다. 동한은 100여명에 달하는 일군을 고용하면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는데 고용자 모두가 조선 회령과 그 일대서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은 봄에 와서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 지나 조선 고향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는데 조선 이주민들이 대거 밀려들면서 본래 일군들은 동한의 소작농이나 머슴군으로 되였다.   (2) 명동지구 마을의 형성   명동지구의 륙도하량안에 성교촌, 중영촌, 명동촌, 장재촌,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화전동 등 여러개 마을이 이루어진것은 1885년 봉금령페지이후의 일이다. 불과 10여년사이 7~8개 마을이 형성되였는데 1899년에 동한이 죽자 그 가족들은 토지를 팔아버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1899년 그때 여러개 마을의 세대수를 보면 장재촌이 30세대쯤, 명동촌이 10세대쯤, 중영촌이 8세대쯤, 성교촌이 20세대쯤, 소룡동이 15세대쯤, 대룡동이 20세대쯤, 풍락동이 80세대쯤에 달해 약 200세대⑪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조선이주민들은 입적하지 않아 토지소유권을 향수할수 없어 안성주, 김병호, 박윤   등 사람들이 동한의 땅을 사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 나누어 부치도록 했다. 이럴 때 종성과 회령의 김약연 등 4대 가족, 스물두집, 141명이 명동과 장재에 이주하여 왔다.   (3) 명동촌의 본래 이름은 룡암동   우에서 필자는 량환준선생의 자료를 통하여 명동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 여러개 마을의 형성을 간단히 밝히여보았다.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명동이 1899년 김약연 일행이주후 생겨난 마을이 아니라 그 전부터 실재한 마을이라는것이다. 량선생의 자료에서도 보여지다싶이 후에 명동으로 불리운 룡암동에 이미 10세대쯤의 세대들이 이미 띄염띄염 살고있어 룡암동으로 불리우고있었다.     1899년에 조선의 애국지사이며 한학자인 김약연 등 141명이 룡암동으로 이주하여 온후 룡암동의 이주민세대수는 많이 늘어나고 1901년 4월에는 김약연에 의해 장재촌에 규암재라 부르는 서당이 생겨났다. 같은 시기 김약연동반자들인 김씨가문의 김하규에 의해 대룡동에 소암재, 남씨가문의 남위언에 의해 중영촌에 오룡재가 일어섰다. 룡정의 서전서숙(1906년 세워짐)이 페숙된후 1908년 4월 27일에 이들 서로간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일떠세웠다. 그 이듬해 4월에 명동서숙은 사립명동학교로 개칭되였는데 명동서숙이 세워지면서부터 룡암동은 명동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⑫ 학교가 룡암동에 세워지다보니 룡암동을 또 학교마을이라 불렀다. 민간에서 굳어진 입말이였다.      이로부터 보면 명동촌이 형성되여 생긴 이름은 룡암동이고 학교가 서면서부터 명동촌 또는 학교마을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연구가들은 명동촌과 그 일대 여러개 마을을 합쳐 명동촌 또는 명동지구로 부르기도 하는데 일리가 없지않다.      지난해 2004년 10월 14일, 김약연선생의 증손자 김재흥선생 일행과 같이 명동과 그 일대를 답사할 때 당지 분들과 문의하니 지금의 중영촌(명동다음 마을)이 명동 1대고, 학교촌이 명동 2-3대, 륙도하너머 마을 대룡동이 명동 4-5대, 그 아래 소룡동이 명동 6대였다. 그제날에 명동과 그 주변마을들을 합쳐 명동촌 또는 명동지구라 불렀다면 오늘날도 명동과 그 일대 마을들은 서로 각기 이름을 갖고있어도 모두 명동촌에 속한 소속마을로 알려졌다.    3. 달라자학교는 현립1교   윤동주연구에서 북간도 자동이나 명동촌이 김약연일행이 이주해서 생겨난 마을이라는 설법 등이 오유적이라면 윤동주가 소학교를 마치고 고등부를 다니던 달라자학교를 중국인학교라고 학교이름을 부르는것 역시 오유적이다. 이점을 꼭 밝히고자 함은 윤동주시인을 연구하고 리해하는데 보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1906년 서숙서숙 설립이전만 하여도 연변의 초등교육형태는 서당교육이였다.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마다 서당이 일떠섰으니 불완전한 해당 통계자료에 의하면 1914년 연변내 연길현 한개 현만 하여도 봉건적인 조선족서당이 116개소에 달했다⑬고 한다. 서전서숙의 설립과 더불어 조선족집거구들에서는 근대적인 사립학교들이 흥기하고 1910년 전후부터 민국정부측에 의해 현립학교들이 분분히 일떠섰다. 달라자 현립1교가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연변은 조선이주민의 집거구로서 주민조성의 80%이상이 조선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편에서 현립학교들은 정부측에서 꾸렸다하여 한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인학교로 보이겠지만 절대다수 학생들이 조선족이였다. 한족학생만을 이루는 학교는 극히 적었으니 한족학교라 해도 조선족과 한족학생이 서로 섞이였다. 레컨대, 1907년 3월, 그후 간민회 주요책임자 리동춘에 의해 세워진 광소촌의 양정학당은 중국어를 주로 가르치는 신식학교였으나 이 학당 학생은 모두가 조선족학생들이였다.  1907년 8월에 일본침략자들이 룡정촌에 통감부간도 파출소를 세우고 1909년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이 설치되면서부터 일제는 저들 관할하의 지역들에 조선족공립보통학교를 세우고 시골들에는 조선총독부 관할하의 보조서당을 꾸리며 조선족동화교육을 서둘렀다. 이런 실정에서 민국지방정부에서는 일제의 침략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지구들에 분분히 현립학교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응하여 각지 조선족사립학교들에서는 협의하고 민국지방정부의 시책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교과서는 전부 조선어로 번역하여 교수하며 중국어의 교수시간은 매주 6교시 등을 조건으로 지방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때가 1910년 전후시기이다.      상기와 같이 광서 23년, 즉 1897년에 화룡욕 무간국이 두만강대안의 광제욕으로 옮겨간후 광제욕이 화룡욕 무간국의 정치중심으로 떠올랐다. 광서 28년(1902년)에 국자가에 연길청을 설치, 그해 또 연길변무공서를 세우고 화룡욕에 분방경력 (分防經歷)를 세웠다. 선통원년(1909년)에는 훈춘 부도통을 동남로병비도 (東南路兵备道)로 고치고 그 중심을 국자가에 옮기였다. 따라서 연길청은 연길부(府)로 승급하면서 국자가, 즉 연길이 훈춘을 대신하여 연변지구의 통치중심으로 떠올랐다. 연길부는 산하에 현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는데 1909년, 선통원년에 화룡욕분발경력은 현으로 승급하여 화룡현으로 불리였다.      그 시기 현립1교는 화룡욕 무간국이 위치한 광제욕으로 되고 화룡욕이 현립2교로 되여야 했으나 현이 화룡욕을 소재지로 하자 화룡욕이 현립1교로 되고 광제욕, 다시 말해서 광제욕의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되였다. 지난 80년대초 개산툰지구에 대한 현지조사에 의하면 달라자가 현립1교, 광소가 현립2교, 삼합 계사처가 현립3교, 오늘의 월청 마패가 현립 4개, 팔도하자가 현립 7교, 동해(룡신)가 현립9교였다.⑭ 정부측에서 꾸린 학교여서 중국인학교로 불리우지만 학생의 거개가 조선족학생들이였다. 학제는 모두 6년제를 실시했다.  하다면 현립1교와 현립 2교가 서로 지역을 바꾸며 정식 실시된것은 언제일가, 필자가 지난 80년대초 당지 사립학교와 현립학교들에 익숙한 자동의 몇몇 로인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탈바꿈한것은 1913년 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달라자의 현립1교도 원 2교로부터 1교로 된것은 1913년이라 해야겠다. 윤동주시인이 태여나기전 몇해전의 일이다.   4. 결속어   본문은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북간도 자동문제, 명동촌 유래문제, 현립1교 문제 등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첫째 부분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이상 몇개 문제를 검토하고 넘어야 함은 아래와 같은 리유에서였다.  첫째, 윤동주의 윤씨가문이 살길을 찾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잡은 첫 삶의 터가 그제날 자동이기에 이 자동마을을 옳바로 파악해야 했다. 이는 윤씨가문의 가족사와 윤동주의 발자취, 전기에서 홀시할수 없는 부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둘째, 윤씨가문이 종성에서 떠나 두번째로 자리잡은 삶의 터전이 윤동주의 고향으로 되는 명동마을이기에 그저 지나칠수 없었다. 한국의 허다한 윤동주연구와 명동의 후예들 중에는 명동촌을 김약연 일행이 와서 세운 마을이고 처음부터 명동촌이라고 주장하는데서 꼭 그 유래를 밝혀야 했다. 아마 이런 부류의 견해와 주장들은 명동촌을 이렇게 서술해야 한때 동만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운 김약연이나 그의 녀동생 김룡의 아들 윤동주의 격을 보다 높일수있는것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러지 않아도 룡정 명동은 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로 되기에 손색없는 마을인데도 말이다.      셋째, 달라자의 현립1교는 윤동주의 소학교시절에서 반드시 연구하고 취급할 부분이기에 홀시하지 말아야 했다. 헌데 한국의 연구자료나 성과들은 모두가 학교 이름이 관립학교가 아니면 중국인학교로만 되여있었다. 그것도 윤동주의 유명한 시—《별헤는 밤》에서 별의 시인답게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곁들이면서 별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며 현립1교 시절 그리운 이국소녀들인 패, 경, 옥 등 소녀들을 이색적으로 떠올린데서 더욱 취급하고 지나야 했다.  보는바와 같이 윤동주가 1931년 3월 15일에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달라자의 현립1교 고등부에서 1년간 더 공부하게 되는데 명동에서 남으로 10리 떨어진 곳으로 통학하는 어린시절 윤동주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현립 1교는 중국인이 꾸리고 중국인만 다니는 학교같지만 기실 절대다수 학생들이 조선족자녀들이다. 윤동주도 그런 조선족자녀 들중의 일원이였다.  인젠 상기 세가지 문제에서 서술할 부분은 기본상 다 서술한것 같다. 중국과 한국, 조선 모든 윤동주연구가들치고 처음 다쳐보는 연구분야기에 중국조선족시인이고 우리 민족의 시인이고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연구에서 도움과 보다 리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2005년 8월 6일)주해: ①                 오오무라 마스오(일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 연변교육출판사 (2002. 8). ②                 홍장학(한국),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4.7 머리말에서. ③                 조형언(한국), 문학석사학위론문─윤동주 시 연구, 한림대학교 문학원 국어국문학과. ④                 우와 같음. ⑤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한국 고려글방, 1997년 10월, 제 96페지 ⑥                 한생철 김석, 룡정개발사략, 룡정문사자료(1) 한문, 제3페지. ⑦                 연변지명연혁, 연변사지(延边史志), 1986년 1기. ⑧                 차성파, 청말 연변월간 4보 39개사의 위치에 관하여, 연변력사연구, 제1집 ⑨                 량환준선생의 자료, 필자는 1987년 5월 27일에 이 자료를 넘겨받음. 량선생은 지난세기 20년대 조공당 만주총국 산하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 부장으로서 광복후 연변인민출판사 제1임 사장을 하신 분으로서 조선족력사연구, 연변지명연구에 조예가 깊은 분이시다. ⑩                 량환준, 5.30폭동전의 사립명동학교, 연변문사자료  제2집, 한문 제17페지, 1984년 2월 ⑪                 량환준, 5.30폭동전의 사립명동학교, 연변문사 자료  제2집, 한문 제17페지, 1984년 2월 ⑫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고려 글방, 1997년 10월, 제97페지 ⑬                 연변조선족교육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7월, 제17페지 ⑭                 리광인, 1983년 1월 18일 룡정현 광개향 자동 6대 장승운(68살) 등 로인방문.                                                                                                                   "연변문학" 2007년 제2호 게재              
139    【90돐특집】(14) 윤동주와 더불어 길이 빛날 청년문사 댓글:  조회:4130  추천:156  2007-04-04
          윤동주와 더불어 길이 빛날 청년문사                                                                리광인       명동을 찾아 윤동주시인을 떠올릴 때 도저히 빠뜨릴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송몽규, 윤동주의 고종사촌으로서 청년문사로 이름이 났다. 그는 윤동주보다 석달 앞선 1917년 9월 28일에 윤동주네 집에서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리만치 평생 특이한 관계속에서 살아간 사람이다.     윤동주연구자로서는 다 알다싶이 윤동주의 본관은 파평이다. 파평윤씨의 족보는 옛날 보령공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윤동주는 보령공으로부터 20대에 머무른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尹在玉,1844-1906)은 보령공의 17대손으로서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서 살다가 42살되던 해 1886년에 솔가하여 두만강을 건너 종성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에 자리잡았다. 그때 윤동주의 조부로 되는 큰아들 하현은 11살이고 둘째아들 덕현이는 8살인 모양이다. 1900년에 윤재옥은 또 일가식솔을 휘동하여 자동에서 명동촌으로 옮겨앉았다. 명동촌에서도 부유한 살림은 매일반이였다. 첫 자동이주시 11살 소년이였던 윤하현은 자동에서 어른으로 자라나 강씨처녀와 결혼하고 20살때 외아들 영석이를 보고 그 아래로 두딸 신영과 신진을 보았다. 영석과 신영은 자동에서 낳은 자식들인데 영석은 커서 윤동주의 아버지로 되고 신영은 커서 송몽규의 어머니로 되였다. 윤영석은 1909년부터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가 북경류학을 하기로 하고 일본 도꾜에서 공부하며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윤영석은 결혼하고 1917년 12월 30일에 아들 윤동주를 보았는데 그의 큰 누이동생 윤신영(1897년생)은 1916년 봄에 명동학교 조선어교원 송창희와 결혼하고 역시 이듬해 1917년 9월 28일에 장남 송몽규를 보았다. 그때 윤신영부부는 처가에 얹혀 살다보니 송몽규를 윤동주네 집에서 낳았던것이다. 송창희가 처가집에 얹혀살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는 명동사람이 아닌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 출신으로서 웅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공부하다가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그럴 때 서울 청년학관 출신이고 주시경선생의 제자인 친구 박태환이 초창기의 명동학교에서 조선어교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어느날, 명동의 어느 학자 집안에서 좋은 신랑감을 박태환선생께 부탁하였다. 이에 박선생에게 선참 떠오른것이 송창희여서 친구를 명동으로 불렀다. 송창희는 결국 김약연학자 집에 머무르다가 윤동주의 어머니가 된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의 욕심으로 윤동주의 고모 윤신영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 눌러앉기에 이르렀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고종사촌관계를 밝혀주는 가족의 래력이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어려서 한 가마밥을 먹고 한 지붕아래, 한 반, 한 교실에서 공부하면서 지극히 이어진 삶을 살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그들이 다 읽은후면 동네아이들이 돌아가며 보았는데 그 시절에 벌써 송몽규네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널리 알려졌다. 5학년때에는 담임교원 한준명선생이 지어준 《새 명동》이름으로 등사월간잡지 몇호를 꾸리기도 하고 학기말이면 선생님의 지도하에 제법 연극을 놀기도 하였다. 문학기량을 닦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송몽규가 명동소학교 4~5학년을 다니던 시절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때 조공당만주총국 동만도의 활동은 성세를 일으키며 연변땅을 누비였고 사회주의사상은 갈수록 인심에 널리 침투되였다. 송몽규의 아버지 송창희선생이 새 사상에 동조하는 축이였다면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선생도 그런 경향을 띠여갔다. 이는 10대의 송몽규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수 없었다. 1928년에 사회주의 새사조와 반종교운동의 충격하에서 명동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명동교회의 장로이고 교장인 김약연선생과 정면으로 맞다들었다. 그때 명동소학교 4학년생인 송몽규는 12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앞에 척 나서서 학교교육은 반드시 교회와 분리하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로하였다.  1931년 3월, 송몽규는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윤동주와 더불어 달라자 현립 1교 6학년에 전학하고 룡정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윤동주의 공부로 동주의 가정이 룡정으로 이사하게 된데서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거처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송몽규는 은진중학교시절에 문학장끼를 떨치기 시작했다. 1934년 12월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작품을 응모했는데 송몽규의 작품 《술가락》(숟가락을 가리킴)이 콩트에 입선되여 1935년 1월 1일부 동아일보에 실리였다. 이에 앞서 송몽규는 1934년 중학교 3학년 시절에 자기의 호를 문해(文海)라고 짓고 작가로 되려는 굳은 포부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1935년 4월에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명희조선생의 파견을 받고 북경을 거쳐 남경에 가서 김구선생을 만났고 락양군관학교시절을 거치다가 제남주재 일본령사관에 체포되기도 한다. 락양군관학교시절에 송몽규는 군사훈련여가에 자기가 중심이 되여 300페지쯤 되는 등사책을 만든 문학청년이다. 김구선생이 몹시 칭찬하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된것은 1937년 4월이다. 1938년 초봄에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이 서울에 가서 연전 입시에 합격되여 연희전문학교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때의 모습은 연전시절에 여러 학생들과 같이 찍은 사진에 그대로 잘 나타난다. 이 시절에도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문과학생회 문우회 문예부장을 맡고 문우회의 잡지 《문우(文友)》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문우지의 원고수집으로부터 배판, 검열, 교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였는데 《편집후기》도 송몽규가 직접 써냈다고 한다. 1942년 4월에 송몽규는 일본 교또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도꾜의 입교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명동의 한집에서 석달 간격으로 태여난 송몽규와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달라자 현립1교, 룡정 은진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일본류학 시절을 같이했다면 또 나흘을 앞두고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먼저 사상범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1945년 일본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또 한달간격으로 나란히 옥사당한 비극사를 가지였다. 이들은 참으로 길지 않은 인생길에서 생과 사를 함께 나눈 《쌍둥이》였다. 송몽규, 자기의 겨레와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안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달리고 달리던 이 청년문사는 1945년 3월 10일에 이국땅에서 옥사한후 아버지 품에 안겨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부모들은 아들을 그제날의 연길현 지신향 장재촌 북산 송씨가문묘지에 고이 묻어주었다. 묘비를 세운것은 그해 6월 29일로서 윤동주묘비보다 15일 뒤였다. 그러나 지난 80년대 중기에 이르기까지 연변의 고향사람들은 윤동주는 물론 송몽규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198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가 연변대학에 객원교수로 오셨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은 그때부터 연변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송몽규의 묘소도 룡정중학교 교장 류기천 등이 장재촌로인들을 통해 알게 되고 1989년 12월 18일에 권철교수, 류기천교장 등 일행이 비로소 선참 배알하게 되였다. 권철교수의 회상에 따르면 오래동안 가토를 하지 못한 무덤은 퍽 작아지고 잡초가 무성했으며 《청년문사 송몽규지모(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고 새겨진 묘비는 넘어져 있더란다. 1990년 4월 5일 청명날에 송몽규 청년문사의 묘소는 룡정중학동창회의 주최로 룡정시 동산 중앙교회묘지에 이장되였다. 윤동주시인의 묘소와는 서쪽으로 불과 10여메터 떨어진 곳이였다. 헌데 이것이 그제날 5대가문 후손들의 유감을 자아냈다. 5대가문이란 1899년 2월 18일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과 회령서 살다가 명동으로 집단이주한 김약연 등 네 가문, 총 141명과 그뒤 개산툰 자동서 명동에 들어선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일가를 가리킨다. 지난 10월 15일에 필자는 김약연선생의 증손 김재홍선생과 문익환선생의 딸 문영금, 문선생의 친동생 문영환선생 등 분들과 함께 명동과 장재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날 명동일대의 소룡동과 대룡동, 명동마을 동쪽 언덕의 문씨선산 답사에 이어 문익환목사 생가터인 장재촌 동구, 김약연선생 묘소, 규암재자리 등을 답사하였는데 답사도중에 장재촌 동쪽언덕에 자리잡았던 송몽규묘소자리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때다. 김재홍선생과 문영금녀사는 움푹 패인 원 송몽규묘소를 안타까이 지켜보면서 송몽규묘소를 룡정동산묘지로 이장한 자체가 잘못이였다면서 그제날 5대가문 후손들의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장재 송씨가문의 후손중의 한 사람인 한국 송우혜녀사(“윤동주 평전”을 펼친 사람)는 1993년 4월 5일에 벌써 송몽규묘소자리에 “청년문사 송몽규이묘유지”비석을 세워주었다. 비석은 자그만한 돌비석이였는데 외롭게 송몽규 원 묘소를 지켜주고있었다. 뒤늦게야 송몽규 원 묘소를 찾아본 필자는 “청년문사 송몽규이묘유지”비석이 갖는 의의를 깨닫고 송우혜녀사한테 진정 탄복이 갔다. 이 비석이 세워짐으로 하여 사람들은 송몽규묘소자리를 알게 되고 송몽규문사를 보다 기리게 되며 송몽규묘소자리가 명동일대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게 하였다. 송몽규, 민족의 정통문화를 지켜내기 위하여 이국땅 일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이 조선족청년문사는 드디여 고향사람들의 맘속에 영생하게 되였다.                                                              (2004년 10월20일)  
138    【90돐특집】(13) (론문)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1) 댓글:  조회:2787  추천:109  2007-04-01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                                                      리 광 인   1. 머리말        올해는 연변이 낳은 천재적인 우리 조선족시인 윤동주서거 60주기가 되는 해이고 윤동주시인이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에 따라 윤동주시인은 낯선 사람처럼 서먹서먹하던데로부터 친근한 존재로 알려져왔고 시인과 시인에 대한 시연구도 한걸음 한걸음 깊이있게, 심층에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시인이고 우리 조선민족(한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시인의 시인정의(定義)평가에서는 게걸음을 치면서 남을 따라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는데 머물러있다. 여기에서 저항시인이라는데는 이의가 없지만 민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평가를 놓고볼 때 한국이나 조선이 아닌 중국이라는 시점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을수 없다. 다 알다싶이 한국이나 조선은 단일민족국가로서 민족시인이라 하면 모두가 통하게 되여있다. 다시 말해서 민족시인이면 곧 조선민족(한민족)을 가리키니 타당한 시인정의평가라 하겠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다르다. 중국은 56개 형제민족이 단란히 모여사는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시인이라면 곧 조선족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다. 시인부름에서 여러개 형제민족을 통털어 민족시인이라 일컿고 있으니 민족시인이라는 정의는 우리 조선족사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헌데 무엇때문에 우리 조선족사회의 작가나 평론가들은 깊은 연구와 따짐이 없이 민족시인이라는 시인정의평가를 그대로 답습하기를 즐기는 걸가, 문제의 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동주시인은 연변에서 태여나 연변에서 자랐고 연변에서 소학교와 중학교공부를 하고 죽어서 연변땅에 묻힌 시인이다. 허나 력사적인 제원인으로 하여 시인의 모든 현존시고는 광복후 시인의 아버지분부와 시인의 녀동생 윤혜원녀사에 의해 한국땅에 머물게 되고 한국에서 첫시집이 출간되면서 시인에 대한 연구가 세월의 흐름속에서 깊이있게 전개되였다. 리념과 주의의 대립, 장기적인 봉쇄정책으로 우리는 이런 실정을 알수가 없었다. 또, 윤동주시인이 우리 조선족사회에 알려진후에도 시인은 《마치도 우리와는 시간상 거리가 먼 그런 력사인물처럼 생각되였으며》① 《마치도 우리 중국조선족과는 큰 인연이 없는 그런 시인으로 여겨》②지면서 한국이나 조선의 시인으로 착각되였기에 민족시인이라는 부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중국조선족 시인이라고 지적하지 못하였다. 지적하였다 해도 글이나 평론, 론문중에 스치고 지났을 뿐이지 시인정의평가에서는 의연히 민족시인이라는 이 평가를 따랐다. 다같은 조선민족(한민족)이라고 해도 소속나라가 다름에 따라 시인에 대한 시인정의평가는 다를수가 있는것이다. 이면에서 윤동주시인은 우리 민족이 공인(公認)하는 우리 조선민족(한민족)의 시인이기도 하고 세계적인 시인이기도 하지만 중국이라는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서는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다. 하다면 이땅의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민족시인이라는 부름으로부터 조선족시인의 부름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의 흐름과 과정을 거치였는가? 아래 윤동주시인의 부름의 변화과정을 개략적으로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2. 윤동주시인 부름의 변화과정   윤동주시인이 1985년 5월이후 일본의 저명한 학자 오오무라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알려진후 《문학과 예술》지에 의해 윤동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지면에 나타났다. 그 첫글이 박동철선생의 《고귀한 령혼을 부르며》③인데 그후 지면에 실린 글들과 더불어 윤동주시인을 모두 《저항시인》, 《민족시인》이라고 불렀다. 《비명에 쓰러진 저항시인—윤동주》④,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지켜》⑤, 《윤동주를 추억하여》⑥ 등 모든 글들이 그러했다. 윤동주시인이 서먹서먹하던 시절이라 그럴수밖에 없었지만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별로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있다. 권위적인 연구집《조선족문학연구》 윤동주론에서는 윤동주시인을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고결한 민족의 지조를 간직하고 일제식민통치에 끝까지 저항해 나선 민족의 시인이다.》⑦라고 시인평가정의를 내리였다. 조선족시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감히 조선족시인이라는 평가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다. 1990년 7월에 펴낸, 조성일, 권철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사》 제5장 《김창걸, 윤동주》에서도 상기와 같이 《시종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자기의 시와 삶을 바친 재능있는 저항시인이며 인도주의시인》⑧이라고 못박았다. 《천지》 1987년 제12호는 윤동주 시묶음을 펼쳐내면서 윤동주시인을 《조선저항시인》이라고 했고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결전에서는 《민족의 저항시인》⑨이라고 규정했다. 그뒤 《문학과 예술》 1993년 제2호에서는 시인 탄생 75돐맞이 윤동주연구토론회 해당기사를 다루면서 《룡정이 낳아 기른 겨레의 저항시인 윤동주》로, 《문학과 예술》 1995년 제5호에 실린 윤동주서거 50주기 기념활동기사에서는 《세계적인 시인이며 중국조선족문화의 가장 걸출한 대표자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번 《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론문집》에서도 책제목부터가 《민족시인》이라고 점찍었다. 그때까지도 사상이 개방되지 못한 뭔가 두려움의 발로라 하겠다. 지난 90년 중반이후에는 민족시인과 조선족시인이라는 부름이 서로 교차되면서 큰 변화를 나타내고있다. 례컨대, 일철의 서명으로 되고 1998년 제1호 《연변문학》에 실린 《시인 윤동주의 생애》에서는 윤동주시인을 《해방전 조선족시문학의 최후를 빛나게 장식한 민족시인》 그대로라면 연변대《조문학부연구생론문집》(1) 《윤동주향토애의 심성과 그의 시세계》에서는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⑩라고 지적하면서 지난 시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1995년 제12호 《천지》에 실린 리상각선생의 평론 《윤동주의 시세계》는 《윤동주시인은 바로 이곳 연변에서 태여났고 연변에서 자랐으며 연변에서 공부하고 연변에서 시를 쓴 우리의 시인이다. 그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조선족이라고 할수 있다.》고 못박았다. 《우리의 시인》이면 조선족시인을 가리키는데 그때까지도 두려움이 아직 철저히 가셔지지 않아 《중국조선족이라고 할수 있다》면서 피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일찍 윤동주시인을 우리 조선족사회에 소개한 일본의 오오무라마스오 교수는 그의 한편의 글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에서 이땅의 우리 조선족들을 아래와 같이 깨우쳤다. 《윤동주는 일본에서 죽었지만 연변에서 태여났으며, 연변이 낳은 시인으로서 조선족문학속에서 장래에도 다루어질것은 틀림이 없다.》⑪ 이 글에서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를 《조선족시인》이라고 굳이 찍지는 않았으나 연변이 낳은 조선족시인임을 환기시켜 주고있다. 이와 비슷한 평가는 1991년 8월 22일부 《길림신문》3면에 실린 림연선생의 종합글 《고향이 낳은 시인—윤동주》이다. 지난 80년대 중기에 조선족사회에서 지면에 윤동주를 처음 소개한 공로자인 림연선생은 윤동주를 《고향이 낳은 시인》이라고 대담히 대서특서했다. 조선족시인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시인이라고 명분을 주지못한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지난 90년대 초여서 그럴수밖에 없는 현실을 념두에 두면서 말이다. 이상 실례들에서 보면 윤동주시인정의평가에서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으로의 변화과정과 그 태동을 력력히 가늠할수 있다.   3. 2005년도의 획기적인 변화   올해 2005년이 윤동주시인 서거 60주기,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라는것은 윤동주시인에 관심을 둔 사람이면 다 알수있는 사실이다. 윤동주시인이 우리 사회에 알려져 20년을 맞이하면서 윤동주시인 시인정의평가는 예전의 불투명한 민족시인으로부터 조선족시인으로 고착되고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시인 윤동주 조선족시인평가문제는 1995년에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께서 예리하게 지적했고 연변대 최문식, 김동훈의 편으로 되고 연변대학출판사에서 1996년 12월에 펴낸 《윤동주유고집》에서도 시인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학계와 글쓴이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 최근 이태간 윤동주시인과 시연구, 소개글에서 조선족시인평가로 처음 떠오른 글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산맥사이트에 올린 글—룡정향토순례(7)이다. 룡정향토순례(7)의 제목은 《명동이 낳은 내고향시인》인데 이글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을 《명동이 낳은 내고향 저항시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⑫라고 평가하였다. 그뒤 필자는 또 지난해 11월에 있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창립세미나에서 론문— 《윤동주시의 별세계》를 발표하면서 윤동주시인을 《내고향시인이요, 조선족시인》⑬이라고 재차 평가를 내리였다. 이 론문은 올해 《도라지》 제4호에 《윤동주연구특집》으로 실리였다. 올해 윤동주서거 60주기를 기리며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내리는 룡정 동산의 윤동주시인묘소에서 60주기 기념행사를 가지였다. 이 기사가 필자의 서명으로, 《연변서 윤동주서거 60주기 추모모임이》으로 문화산맥사이트 www.koreancc.com ⑭에 올랐다. 이 기사에서 필자는 윤동주시인을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이라고 지적하였다. 2005년 2월 19일부 《흑룡강신문》 7면에서도 이와 달리 쓴 필자의 추모모임기사 《연변서 윤동주서거 60주년 추모모임을》을 실으면서 《2월 16일은 연변이 낳은 조선족시인 윤동주서거 60주년기념일》이라고 밝히였다. 상기 흑룡강신문 7면에서는 또 7면톱에 필자가 쓴 글 《연변이 낳은 천재시인 윤동주》을 같이 실으면서 윤동주시인을 두고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라고 극찬하면서 편집자의 말에서 《연변명동이 낳은 조선족시인》이라고 평가를 내려주었다. 지난 이태사이 조선족신문의 기사로서는 조선족시인평가가 처음인것 같다. 우리 글 신문의 선두주자—《연변일보》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연변일보는 2005년 2월 18일 4면에서 16일 윤동주묘소에서의 기념행사를 크게 다루면서 사진을 눈에 띄이게 실음과 함께 김인선기자의 기사 《윤동주시인타계 60주기 기념모임거행》을 실었다. 이 기사에서 연변일보는 《여기는 연변이 낳은 우리 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묘소》,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이라고 시인정의평가를 옳바로 지적하였다. 흑룡강신문과 연변일보의 적시적인 시인정의평가라 하겠다. 이에따라 2005년 2월 21일부 《생활안내》신문 5면에서는 필자의 글 《명동이 낳은 내고향시인 윤동주》를 실어주면서 편집자의 말에서 윤동주시인을 《명동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이라고 정의를 내리였다. 이에 따라 연변일보는 윤동주시인 시인정의평가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드팀없는 평가를 주었다. 2005년 7월 8일부 연변일보 3면에는 김철호기자가 쓴, 꽤나 큰 편폭의 글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가 실리였는데 이 글은 결말부에서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족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 앞에 나섰다.》고 옳바르고 타당한 평가를 하기에 이르렀다. 글을 발표하기전에는 글쓴이의 개인견해라 하겠지만 글이 지면에 발표될 때는 개인견해만이 아닌 그 신문, 그 잡지의 견해로도 된다. 편집자의 말은 더욱 그러하다.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생활안내 등 신문들의 솔선수범으로 하여 윤동주시인은 이곳 조선족사회에 알려져 20년만에 모호한 민족시인이 아닌 우리 민족의 시인으로, 조선족시인으로, 조선족의 아들로 이 세상에 장엄히 나타났다. 조선족시인 이 문제는 연변대 고 정판룡교수님께서 일찍 룡정시 1995년 윤동주 서거50주기기념세미나에서 첨예하게 지적하였다. 교수님은 연변대 조선한국연구중심, 연변작가협회,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 조선언어문학부, 연변대 조선언어학연구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에서 공동주최한 《민족시인 윤동주 50주기기념학술연구회》(2월 14~15일)에서 기조발언을 하시면서 윤동주시인은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라고 대성질호하였다. 교수님의 옳바른 시인평가와 정채롭고 심각하고 설복력있는 분석은 학술기념회 참가자들의 공명을 일으켜 그번 기념회를 《시인 윤동주의 호구를 붙여주고 신분증을 내여주는 회의》라고 뜻깊게 불렀다. 그러나 그번 학술토론회 론문집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조선족시인이라고 책제목을 달지 못하고 민족시인이라고만 평가하였다. 윤동주시인 리해와 시인연구의 부진을 그대로 말하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그후 10년간도 우리 문단의 학계나 글쓴이들은 많이는 의연히 민족시인을 받아들였고 일부는 우리 민족시인, 조선족문학사의 뭐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조선족시인이라고 떳떳이 평가를 내리지 못하여 유감을 남기고있다.  
137    【90돐특집】(12) 연변이 낳은 천재시인 윤동주 댓글:  조회:4079  추천:112  2007-03-31
연변이 낳은 천재시인 윤동주                     윤동주시인의 생가명동이 낳은 내 고향 조선족시인이고 저항시인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그 시절의 화룡현 명동촌(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하기까지 인생 28년을 살아오면서 생애의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내였다. 명동이란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정녕 유년기, 소년기 애틋한 모습을 비껴담은 잊을수 없는 고향이였다. 하기에 윤동주시인의 친동생인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는 자기의 생가를 보는듯이 그려냈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윤일주교수가 묘사한 그림같은 이 고장이 명동촌인데 윤동주시인의 집은 학교촌으로도 불리운 이 동네 입구 첫집이였다. 다시말하면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의 교회당가까이 두채 민가중 앞집이 윤동주의 생가였다. 어린 시절의 윤동주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 있는 뽕나무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윤동주시인의 생가는 룡정에서 남으로 1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명동촌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이르러 선참 맞아주는것이 룡정—삼합행 룡북선 도료표식 15킬로메터가에 일어선 “윤동주생가”란 커다란 돌비석이다. 이곳에서 길을 내리면 신작로아래 복원된 명동교회옛터가 나타나고 교회당을 지나면 교회당서북가에 자리잡은 윤동주생가가 보인다. 이 생가가 1994년 8월 29일에 룡정시 지신향인민정부와 시 문련에서 연변대 조선연구중심의 주선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으로 복원하였다는 생가인데 생가집안에는 조선족의 가마며 물독이며 그릇들이 그대로 진렬되여 옛기분속에 빠져들게 한다. 생가 오른쪽가에는 “윤동주생가옛터”석비가 세워져 손님들을 부른다. 석비비문에는,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 성생이 지은 집으로서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시인이 이 집에서 태여났다고 씌여있다. 그때로부터 옹근 10년세월이 흘렀지만 복원된 윤동주생가와 무너져내린 우물터,  주위환경은 여전했다. 지난 10년간 명동과 생가를 찾은 국내외손님들이 얼마인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오늘도 국내외 손님들의 발길은 그칠줄 모른다. 이름난 관광명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현실이라 하겠다.                       앞날이 창창한 문학소년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제일 부자로 알려진다. 밭도 많았고 제법 벼농사까지 지었는데 온 마을 치고 벼농사집 몇세대중 윤동주네가 그중 한세대였다니 그 잘사는 정도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윤동주는 이런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나 최서해, 김창걸 등 작가들과는 달리 부럼없이 명동소학교를 다니였다지만 소학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어질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 따라 잘 울기도 해서 윤동주의 4학년때 담임선생 한준명목사의 회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하하! 본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오.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도는 거예요.       했으나 잘 울기와는 달리 윤동주는 똘똘이로 공부를 잘했고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정평이 났다. 윤동주의 소학교 동창생이며 외사촌인 한국시인 김정우선생의 회상에 따르면 명동소학교 4학년시절에 윤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출판하는 월간잡지 《아이생활》을 주문해서 읽었다. 그의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문학소년으로서 서울잡지 《어린이》를 주문해서 읽었는데 그들이 다 읽은후는 동네아이들 차례였다. 그 시절로 말하면 명동시골의 두 소년이 서울의 월간잡지를 구독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5학년때 윤동주와 송몽규의 발기로 그들은 등사월간잡지 《새 명동》을 몇호 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명실공히 문학소년반이고 앞날이 창창히 밝아오는 미래 시인이였다.                           윤동주 연변에 알려진 후   우리 연변에서 명동이 낳은 내고향 시인—윤동주를 처음 알게된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의 일이다. 1985년 5월 14일, 연변대 조문학부교수 권철선생이 윤동주시인연구에 조예가 깊은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를 안내하여 룡정중학교에 나타나서야 윤동주란 이 시인이 학교와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뒤미처 룡정중학교 원로 력사교원 한생철선생의 도움으로 룡정 동산의 그리스도공동묘지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다. 벌써 20년전의 일, 그때부터 윤동주묘소와 명동의 윤동주생가는 국내외 손님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떠올랐고 윤동주연구가 전에없이 활기를 띠였다. 1992년에 룡정중학교 대성중학옛터앞에 윤동주시비가 일어서고 1994년 8월에는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1985년 6월에 룡정중학교 사생들과 권철교수, 오오무라교수 부부 및 윤동주의 친척들이 참가한 첫 추모모임이 있은후 룡정중학교에서는 사회지명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시인의 추모모임을 가지고 12월 30일, 윤동주시인 탄생일이면 “윤동주 문학상” 시상식을 가진다. 특히 연변작가협회 기관지 “연변문학” 잡지사에서는 1999년부터 시인을 기리고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윤동주문학상”을 세웠다.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편집부에서도 2000년부터 “윤동주문학상”을 세우고 해마다 시상식을 가지군 한다.                                                         
136    【90돐특집】(11) (수필)오오무라선생과의 두차례 인터뷰 댓글:  조회:3181  추천:134  2007-03-30
수 필                   오오무라선생과의 두차례 인터뷰                                                     이 세상 하많은 어휘명사들가운데는 기자들의 전용어와도 같이 취재, 조사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인터뷰라는 명사가 있는데 그 의미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필요한 취재를 벌리거나 정보를 수집하거나 조사하는것을 말한다. 기자라고 글쟁이라고 글쓰기노릇을 하다보면 영향력있는 인물을 두고 인터뷰에 나서야 할 때가 가끔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한 기자, 한 문인이 한 인물을 거듭 인터뷰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인것 같다. 극히 드물다는 말은 두번, 세번 인터뷰도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일본 와세다대학교수 오오무라선생의 경우가 그러하다. 오오무라선생은 불멸의 고향시인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를 처음 연변에 알리고 소개한 일본인학자인데서 나는 16년이란 뜸을 두고 선후로 두번이나 인터뷰를 나눌 기회를 가지였다.     인터뷰의 힘을 빌어 첫번째 인터뷰에 나선것은 16년전인 지난 세기 80년대후반이다.     1984년 11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후 “개황”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 책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장악하여 편집하는 “민족문제에 관한 5종 총서”의 하나로서 연변력사연구소에서 집필을 맡아보았는데 1985년 4월에 처음 연변에 들어선 일본 와세다대학교수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의 주의를 끌었다. 그때 오오무라교수는 안해와 더불어 연변대학에 와서 객원교수로 있으며 중국조선족문학자료수집과 연구에 종사하고있는 터였다. “개황”을 일본문으로 출판할 뜻을 세운것은 “개황”이 출판된 몇달후, 드디여 오오무라선생을 주요역자로 하는 일본문 “개황”이 1987년 12월에 해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1988년 8월에 오오무라선생은 연변력사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세번째로 연길에 오게 되였다. 그때 나는 한준광소장의 위탁을 맡고 동료인 기자 김명철을 청해 같이 선생의 주숙처인 연변빈관으로 가서 취재노트를 펼치였다. 오오무라선생 부부와의 첫 인터뷰이고 첫 만남이였다. 내 인상속의 오오무라선생은 전형적인 학자형 타입이였다. 선생은 겸손하고 말수가 적은 편인데 류창한 조선말로 우리와 스스럼없이 대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선생의 조선말수준에 놀라마지않았다. “오오무라선생은 50년대 대학연구생시절부터 조선말을 배웠지요.” 곁에 앉은 오오무라선생의 부인이 동을 달았다. 알고보니 선생의 부인은 50살에 난 일본태생의 조선녀성으로서 남편의 유력한 조력자, 남편의 주요연구대상이 현대조선문학으로 정해진후 남편의 연구를 한맘으로 받든 현숙한 겨레녀인이였다. 현대조선문학연구중 오오무라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이 남북을 포괄한 조선문학연구에 도움을 주며 광복후 조선족문학은 조선문학과 갈래를 달리하는 하나의 문학이라는것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그래서 선생은 1985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안해와 함께 연변대학 객원교수로 근무했고 일본문 “중국조선족단편소설선”을 묶기 시작했었다. 취재시 내가 오오무라선생과 연변에 대한 인상을 물었을 때 선생은 감개에 젖어있었다. “실로 연변은 인상이 깊은 정든 고장이지요. 매번 올 때마다 변화가 큽니다.” “정말 그렇군요. 여기가 고향인것 같아요. 일본에서 태여난후 조선사람이 모여사는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곳이 연변이니까요!” 선생부인의 마음속 토로였다. 오오무라선생과의  첫 인터뷰는 성공적이였다. 그번 인터뷰가 1988년 8월 20일부 “연변일보” 컽과 우리 글 신문들인 흑룡강, 료녕 신문에 실린후 강렬한 반향을 자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변은 물론 중국경내에서 일본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극히 소수인에 불과했다. 1990년 8월, 일본 오오사까에서 열린 고려학 제3차 국제학술세미나에 참가한, 조선족사회를 이끌어간다고도 할수 있는 90여명의 조선족학자와 문인들 거의 모두가 일본행이 처음이고 출국이 처음이였으니 미지의 경제강국인 일본에서 일본문으로 “개황”이 출판되였다는것은 우리 조선족의 희사중 일대 희사였다. 그뒤 나는 인생길이 바뀐 삶을 살다보니 다시 오오무라선생을 대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오오무라선생에 대한 인상도 삭막해갔다. 했으나 한 사람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지워버릴수가 없는 모양이다. 지난 2~3년간 사회생활의 원점으로 돌아와 조선족력사집필속에 몸을 잠그면서 우리 문학과의 거리를 좁혀가니 오오무라선생이 때때로 머리에 떠올랐다. 이번 룡정향토순례속에서 선생은 나의 인상속 존귀한 분이였다. 불멸의 고향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를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처음 알린 분이 오오무라선생이라고 할 때 더욱 그러했다. 정말이지 지난세기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이를 두고 우리 조선족의 저명한 시인 리상각선생은 1995년 12월호 “천지”에 실은 평론 “윤동주의 시세계”에서 이렇게 밝힌바 있다.   —외국과의 문화교류가 있기전까지 우리는 시인 윤동주를 몰랐다. 그것은 윤동주시인이 생전에 별반 이름이 나지 않았고 해방후 그의 유작시집이 한국에서 출판되였지만 외세의 봉쇄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문이 굳게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들어와서야 우리는 윤동주의 빛나는 시집을 놀랍게 읽었고 그에 대한 수많은 평론과 론문을 접하게 되였다. 윤동주시인은 바로 이곳 연변에서 태여났고 연변에서 자랐으며 연변에서 공부하고 연변에서 시를 쓴 우리의 시인이다.   리상각선생의 글은 사실이였다. 1985년 4월, 오오무라선생이 연변에 처음 와서 연변대학 교수 권철 등 선생들에게 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 그리고 이들에 관한 연구상황을 알려주어서야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름이 비로소 이땅의 조선족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권철교수와 그 시절 룡정중학교 교장 류기천 선생 등 분들의 노력으로 1985년 5월과 1989년 12월에 윤동주, 송몽규의 묘소가 룡정 동산과 지신 장재촌 북산언덕에서 선후로 발견되고 추모행사가 뒤따랐다. 1990년 4월 5일 청명에는 룡정중학동창회의 주최로 장재의 송몽규묘소가 룡정시 동산 중앙교회묘소로 이장되여 윤동주묘소와 불과 20메터 사이를 두었다. 고종사촌간으로서 명동의 윤동주집에서 석달을 사이두고 태여났고 평생을 그림자처럼, 쌍둥이처럼 거의 같이 지내며 생사를 같이한 이들 둘은 하늘나라 사람이 된 45년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이였다. 이는 모두 오오무라교수의 뜻깊은 노력과 갈라 볼수 없다. 이같이 오오무라교수는 이 땅의 우리 조선족을 위해 큰 일을 해낸 존경이 가는 분이여서 명동행답사길에서 다시 만날것같은 예감이 떠날줄 몰랐다. 과연 두번째 인터뷰기회가 돌아왔다. 지난 9월 22일 점심, 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의 알선으로 회장님이 손수 마련한 연길시의 오찬에서 드디여 오오무라교수와 교수의 부인을 다시 만나 상봉의 기쁨을 나누며 가담가담 인터뷰를 리드했다. 옹근 16년만의 만남이였다. 심련수시인 장서(藏书)연구차로 연길에 오신 오오무라교수부부께서 16년전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개황”을 되새기는데다가 대학시절의 동창인 연변대학 김호웅교수가 자리를 같이 하여 기쁨은 한결 짙어갔다. 흘러간 10여년간 오오무라교수는 윤동주문학연구와 출판, 조선족문학연구, 조선족작가작품집 번역출판, 일본과 연변의 문학교류에서 휘황한 업적을 올리였다. 2001년과 2003년에 출판한 “윤동주와 한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와 전개”만도 한결 돋보이였다. 윤동주와 송몽규와 오오무라선생, 우리 겨레의 문학사로 볼 때 정녕 갈라볼수 없는 귀재들이다. 한사람의 인생에서 16년이라는 세월 몇번이나 있을가, 그 세월속에서 마음에 자리잡은 귀한 회억의 존재로 되여 인터뷰에 다시 나설 사람 또 몇이나 될가. 정말 뛰여난 인물이 아니고서는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시간의 공간속에서 거듭 인터뷰를 나눈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오무라선생은 이 류형에 속하는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다.     흘러간 16년 세월속에, 내 삶의 외진 인생속에 유일하게 두번이나 나와 인터뷰를 가진 오오무라선생! 내가 이 선생을 존경하며 글속에 모시며 세상에 널리 알리고싶음은 오직 하나—조선족이 아닌 일본인 교수님께서 윤동주시인과 송몽규문사를 우리 겨레사회에 알리고 소개한 첫 분이고 우리 시인 윤동주연구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은 분이기때문이리라!                                                            (2004년 10월 5일 )                                
135    【90돐특집】(10)일본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 마스오를 찾아서 댓글:  조회:3758  추천:140  2007-03-29
             그의 추구와 끈질긴 노력            —일본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 마스오를 찾아서                                                                                                           리광인    기자 김명철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이 일본에서 번역출판되였는데 주요역자는 일본와세대대학 교수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이다. 그가 연변력사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연길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며칠전에 연변빈관으로 갔다. 그는 올해 55살이라지만 나이보다 더 젊어보였다. 보통키에 지혜를 뿜는듯한 부리부리한 한쌍의 눈, 어딘가 학자다운 풍모가 엿보이는 인상좋은 분이였다. 우리가 찾아온 의향을 서슴없이 터놓자 오오무라선생은 천천히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개황>을 처음 접촉한것은 1985년이지요.  <개황>이 출판된 몇달후였습니다. 그해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안해와 함께 연변대학에 와서 중국조선문학 자료수집과 연구에 종사할 기회를 가졌지요. 이 기간에 <개황>에 몹시 끌렸지요. 그래서 일본문으로 번역출판할 뜻을 세웠드랬습니다.》 《선생께서 우리 겨레를 세상에 소개해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기쁜일이지요. 여러 면의 도움도 컸습니다.》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겸손어린 류창한 조선말로 우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그의 조선말수준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오무라선생은 50년대 대학연구생시절부터 조선말을 배웠지요.》 곁에 앉은 오오무라선생의 부인이 동을 달았다. 알고보니 그는 일본태생인 50살에 난 조선녀성으로서 남편의 유력한 조력자였다.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의 주요연구대상은 현대조선문학이나 연구가운데서 그는 중국조선족문학은 조선문학연구에 도움이 되며 해방후문학은 조선문학(남북을 포괄)과 다른 하나의 문학이라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그래서 1985년에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오게 되였고 일본문 《중국조선족단편소설선》을 묶기 시작했다. 래년 9월쯤 출판할 의향인데 이미 작품선택을 거의 마무리고있었다. 이름난 저항시인 윤동주를 연구하고 윤동주를 우리에게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실로 연변은 인상이 깊고 정든 고장이지요. 매번 올 때마다 변화가 큽니다.》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감개무량해하였다. 《정말 그렇군요. 여기가 고향인것 같아요. 일본에서 태여난후 조선사람이 모여사는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곳이 연변이니깐요!》 그의 부인도 동감이였다. 이야기를 끝마칠무렵, 오오무라 마스오선생은 중국의 조선족문학연구에 계속 박차를 가하련다 하면서 이미 무르익은 한가지 의향을 터놓았다. 《<개황>과 <조선족단편소설>외에도 6권으로 된 <중국현대문학선>을 묶어볼가 합니다. 한 작가의 작품이 한권을 이루는데 조선족과 회족이 각기 한권씩 차지하지요. 그중 내가 한권을 맡았는데 여기에 조선족소설가 림원춘의 작품을 취급할 예정이지요.》   —연변일보, 1988년 8월 20일, 제1면, 주말특집
134    【90돐특집】(9)(론문)윤동주시의 별세계(리광인134) 댓글:  조회:3524  추천:126  2007-03-27
                               윤동주시의 별세계                                                             리   함  편집자의 말: 올해 2005년 2월 16일은 연변 명동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 시인—윤동주가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한 60돐 기념일이고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에 의해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돐 기념해이다. 이에 우리 문화산맥은 리함의 론문 《윤동주시의 별세계》를 본 사이트에 올리면서 윤동주시인 사망 60주기를 기념하는 바이다.     1. 머리말   맑고 깜깜한 밤하늘은 세상 아름다움의 반이라고 별빛이 내리는 야외에서 은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별세계에 도취되여 별자리와 별이름을 별들로 다가서는 큰곰자리와 작은 곰자리의 북두칠성과 북극성,여름밤, 가을밤에 이어 머리우로 흐르는 아름다운 은하수와 은하수를 사이두고 바라보는 견우별과 직녀별—전설속의 이런 별들을 대할 때면 더욱 멋지기만 하다. 가슴을 울렁이며 들뜨게 하는 그 시각의 설레임과 정겨움과 황홀경은 실로 그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내고향 시인이요, 조선족시인인 윤동주가 바로 이런 경지에 빠져든 시인이였다. 별세계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은 특별히 동경의 대상으로, 꿈의 세계로, 다정한 친구사이로 되였다. 하기에 한국과 중국의 여러 문학평론가들은 윤동주시인을 《암흑기 하늘의 별》(1) 《암흑기 최후의 별》(2) 《어둠속에서 별을 바라보며 민족과 조국을 생각한 시인》⑶ 이라고 평가를 모았다. 알다싶이 중국 당나라때 시인 리백은 달에 대하여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달을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다. 이에 대비해 윤동주는 별에 대하여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별을 노래한 내고향 시인이다. 그만큼 윤동주는 일제치하에서 《별을 바라보며 민족과 조국을 생각한 시인》이고 별을 시의 원천으로 간주하면서 별과 운명을 같이한 하나의 별로서 그의 시에는 별을 노래한 시가 많고 산문에도 가끔 별이 떠오른다. 요즘 필자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윤동주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4)를 살펴보았는데 사용도가 가장 높은 시어는 나, 내, 밤, 하늘이고 그 버금으로 가는것은 달과 별로서 달의 언급이 32개, 별의 언급이 24개였다. 그중 별과 관련된 시가 《서시》,《눈감고 간다》, 《별 헤는 밤》, 《산림》, 《무얼 먹고 사나》,《오줌싸개지도》 등인데 시 《별 헤는 밤》에만 해도 별이 무려 열두번이나 떠오른다. 이는 우리 시단에서 극히 보기 드문 현상으로서 별의 시인인 윤동주의 품위를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이런 고로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자기 론문이나 평론들에서 별과 시인을 이어놓으며 평론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연변지역의 밤하늘, 특히는 가을의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쏟아져내리는듯한 그 야경을 보지 못하고서는 윤동주가 읊조린 하늘이요 별들에 대해 리해하기 힘들것이》⑸라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유감스러움도 없지 않다.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별의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와 시인의 별세계를 전문 다룬 론문이나 평론을 한편도 찾아볼수 없고 이 면에 대한 연구가 따르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이에 비추어 본 고에서는 별과 별세계에 대한 진지한 리해가 없이는 윤동주시인을 옳바로 리해할수 없다는데 초점을 두면서 머리말과 맺음말외 별 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 동심에 젖은 맑은 별시들, 맑지만 않은 슬픈 모습도,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의 참모습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윤동주시의 별세계》를 전문 검토하고자 한다. 본 론문은 한국과 중국의 겨례문학평론가들의 해당론문과 평론들에 토대해 2002년 7월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윤동주시집—《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를 기존 연구사료로 하였음을 밝히면서 윤동주와 그의 시 연구에 힘을 보태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 별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   윤동주는 별에 특이한 사랑을 지니고 별세계에서 희망과 광명의 새 세계를 찾은 시인이다. 하다면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별에 대하여 그다지도 유별난 애착을 가지게 되였을가? 한 인간의 성장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단무의식(集体无意识)의 침전을 무시할수 없다고 할때 우리 배달민족의 반만년의 력사를 거스르면서 고시대부터 헤아리면 이런 애착의 뿌리와 그 계승을 잘 알수 있을것이다.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란 말이 있듯이 인간이 지닌 본성을 인성이라고도 하고 천성이라고도 한다. 인성이 천성이라고 함은 사람과 하늘이 아주 가깝고 서로 통한다는 의미를 띠고있다. 이같이 인성은 하늘의 원칙인 천성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은 곧 해와 달과 별의 세계로서 하늘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하늘을 우러르고 숭상하는것은 지구상의 모든 고대민족들에게서 다 찾아볼수 있는 일이다. 배달민족도 례외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유고문화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하늘》 혹은 《하느님》(하나님)을 자주 부르지 않고 가슴속에 깊이 소중하게 모셔왔다. 그만큼 표면상 하늘을 숭배하는 일에 유별나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했으나 오늘날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별을 새긴듯한 선사시대의 암각화, 즉 바위그림이 여러곳에서 발견된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별을 인식하고 별세계에 집착한것으로 알려진다. 나일성 저, 한국천문학사에 따르면 경남 울산군 두동면 천전리와 경남 한안군 가야읍 도항리, 경북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 등 세곳에서 고대인들의 별을 상징하는 암각화가 발견⑹되였다. 이런 암각화들에는 동심원으로 곱게 새겨진 무늬와 점들이 있어 아주 인상적이다. 도항리의 암각화에는 수많은 작은 둥근 점들이 박힌 가운데 여러 개의 동심원 무늬가 새겨져 특기할만하다. 천전리 이북의 영일군 칠포면 칠포리에서는 1994년에 포철 고문화연구회에 의해 수십개의 암각화가 발견 또는 조사⑺되였다고 하는데 어떤 바위에는 북두칠성을, 어떤 바위에는 복잡한 모양의 별들이 기록, 또는 새겨져있었다. 상고시대 고대인들은 별에 관한 자료도 남기였다. 이런 자료들중 가장 오랜것은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기원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2점의 토기와 두개의 석판⑻이라고 한다.  2점의 토기는 달을 상징한 그림이고 두개의 석판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있단다. 그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조 세종시대에 별을 관측한 기록이 많은데 이런 기록들은 《삼국사기》, 《고려사》천문지와 오행지,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승정원일기》 등 ⑼에 자세히 남아있다. 고려(918-1391)시대에 일식, 월식을 비롯한 여러가지 천문과 기상현상관측자료가 풍부히 기록되여있다면 조선조 세종시대에는 관측의기가 완비하리만치 천문관측이 활발했다. 암각화나 천문기록자료가 이러하다면 전설 또한 상당히 풍부하다. 그중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안겨지는 전설은 북두칠성이나 견우, 직녀 전설일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땅의 40, 50대들 치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자연시간 선생님의 말씀에서 상기 전설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더우기 우리 동양문화권에서 베틀을 돌리는 소녀로 전해지는 직녀별, 이 별이 포함한 거문고자리 작은 삼각형에는 우리가 어린 시절 많이도 들었던 선녀와 나무군의 전설이 살아 생생히 숨쉬고있다. 이같이 하늘나라, 별나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밤별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는 소망은 의식, 무의식간에 어린 윤동주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 별자리이야기를 두고 가슴을 뭉클케 하는 생동한 자료가 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⑽는 형님 동주의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⑾ 귀향때의 모습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남기였다.   동생들은 방학기간에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방학숙제도 같이하고 대학생이던 그와 구슬치기며 공차기 등 장난도 많이 하였다. 책 볼 시간이 아까우면서도 동생들이 귀여워서 놀아주는것이다… 또 한가지 잊혀지지 않는것은 내가 소학교 4학년때로 짐작되는데, 그에게서 별자리를 배우던 일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북두칠성과 북극성들의 위치를 마당에 나와서 가리키면서 참 요령있게 가르쳐주던것이다. 여름 저녁의 시원한 바람, 어린 나를 안다싶이 하던 정다운 그의 체취, 별을 가리키던 그의 손가락 등 모든것이 그립다…⑿   동생 윤일주가 형님을 그리는 윤동주의 연전문과 1학년때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 시절 교과서에 별자리랑 오른 모양인데 그때 벌써 별자리를 알고 동생들에게 요령있게 가르쳤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별자리와 별자리의 위치를 모른다는것을 념두에 둘때 더욱 그러하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그 시절에 벌써 별자리를 가르칠만치 별세계에 숙달하였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지옥이라 일컽는 땅을 살피면 시원한 호흡 한번 바로 할수 없이 숨막히기만 한데 천당이라 일컽는 하늘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니 그런 하늘에 집착할수 밖에 없은것 같다. 한데서 윤동주는 그제날 일제치하에서 별수없이 별에 희망을 기탁하고 시를 써서 마음의 념원을 표달한것이 아닐가.   3.       동심에 젖은 맑은 별시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가슴 뜨거이 와닿는것이 동심과 같이 청순하고 거짓없는 마음이다. 하기에 명동 장재촌 출신이고 시인이고 명동소학교시절 윤동주와 동기동창인 한국의 고 문익환목사는 《윤동주를 회상하는것만으로 언제나 정신이 맑아진다.》고 내심을 토로⒀한적 있다. 확실히 윤동주의 시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울렁이며 정신이 맑아지게 하는 특점이 있다. 동심의 경우도 례외가 아닌데 지금까지 알려지는 윤동주의 시작품 110여수중 35수 정도가 동시들로서 《이들 동시의 세계는 순수하고 청순한 동심의 세계라 할수 있》⒁을것이다.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15살나이로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공부를 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명동소학교시절 벌써 송몽규 등 또래들 같이 자체로 문예지 《새 명동》을 간행하고 동요, 동시 창작에 열을 올리였으며 은진중학교 1-2학년때는 제법 윤석중의 동요, 동시에 깊이 심취되여있었다. 광명중학교 4-5학년을 다니던 1936년과 1937년 2년동안에는 시창작의 왕성기를 보이며 무려 29편의 시작품을 남기였는데 광명중학교 첫해인 1936년은 윤동주가 동시를 많이도 쓴 해였다. 이해에 쓴 16편 시중 10편이 동시로 나타난다. 1936년과 1937년 이 시기는 윤동주가 동시창작으로부터 시창작의 원숙한 모습을 보이던 시절로서 병아리, 비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 5편의 동시가 북간도의 어린이월간지—《카톨릭소년》에 실리였다.⒂ 그중 《카톨릭소년》 1937년 1월호에 발표된 《오줌싸개 지도》와 1937년 3월호에 발표된 《무얼 먹고 사나》가 별나라와의 관계속에서 씌여졌다. 《오줌싸개 지도》는,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는 간밤에 동생이 오줌싸 그린 지도가 그려졌는데 시인의 눈에는 그 지도가 천국에 계신 엄마의 별나라지도로 보인다. 《무얼 먹고 사나》도 별나라와 통하는데 별나라 자체가 벌써 동심이 흐르는 세계이다.   바다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무얼 먹고 사나》                     (1936.10)에서   이 동시는 참으로 동심이 넘치며 감칠맛 있게 씌여진 작품인데 바다가 사람, 산골 사람, 별나라 사람간의 대비속에서 동심의 시야로 안겨지는 미지의 세계—별나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1936년이후 윤동주의 시는 보다 원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원숙한 시속에는 의연히 동시적인 가락이 면면히 흐르고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1941년 11월 5일에 쓴 《별 헤는 밤》이다.   ……상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씀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략……   이 시는 청신한 가을밤의 맑은 별빛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이다. 시에서 윤동주는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는데 그속에는 달라자 현립1교시절에 한 학급에 다니던 패, 경, 옥 등 중국인 소녀들의 이름이 곁들어지는가 하면 대자연의 동물군체까지 곁들면서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우에》자기를 내세우고 《나는 아무걱정이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 합니다.》하고 내심을 드러낸다. 일제치하의 암담한 시절에도 가을 밤하늘아래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는 그 시각만은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게 한다. 그만큼 이 시에는 동심이 가득 넘치고 있는바 그 동심은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그리움과 슬픔으로 나타나면서 동심의 세계는 그리움으로 확산된다. 서울 연전졸업반때 지은 이 시는 멀리 북간도에 대한 그리움을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면서 쏟아붓는다. 그러면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면서 밝아오는 새 세상을 한없이 동경한다. 이렇듯 윤동주와 시인의 시세계—별세계는 맑고 청결한 기품으로 흘러넘치면서 천진란만한 동심에 함뿍 젖어있다. 하기에 허다한 시인과 문학평론가들은 윤동주의 어지럽혀지지 않은 순결은 영원한 동심이라고 평가를 한곬으로 모았다.   4.       맑지만 않은 슬픈 모습도   윤동주의 순결은 영원한 동심으로서 맑고 청결한 기품이 흐른다지만 시인과 시인의 시세계는 결코 맑지만은 않다. 하늘 나라, 별나라를 스친 그의 시세계는 가끔 슬픈 모습들이다. 먼저 《무서운 시간》(1941. 2. 7)을 보기로 하자.   거 나를 부르는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것이요. ……하략……   보다싶이 윤동주는 《무서운 시간》에서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는 《나》를 그리면서 험악한 그 세월의 하늘에는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고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도 없다고 통탄한다. 이는 그 시대에 대한 강렬한 울분과 하소연이 아닐수 없다. 시 《아우의 인상화》(1938. 9. 15)는 하늘나라의 달이 그려져있는데 시에서 나오는 달은 싸늘한 모습이다. 《싸늘한 달》의 어린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일 수밖에 없다. 윤동주는 아우의 인상화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슬픈 그림》이라고 형상성있게 그려냈다. 시 《비애》(1937. 8. 18)에 그려진 젊은이는 《호젓한 세기의 달》아래에서도 《피라미처럼 슬픈》모습인데 그런 모습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니 그 처경은 《외로》울뿐. 윤동주는 1937년 4월 15일에 쓴 《달밤》에서 또 다른 하나의 슬픈 모습을 살려냈다.   흐르는 달의 흰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하략……   이 시에서 나오는 주인공은 달빛이 흐르는 달밤에 북망산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북망산은 묘지를 상징하는데 고독한 마음에 북망산을 향한 마음은 슬플수밖에 없다. 윤동주시에 반영된 또 하나의 슬픈 모습이다. 이런 슬픔 모습속에서 1936년 6월 26일, 시창작의 왕성기에 쓴 별시 《산림》은 희망이 동반된 새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계가 자근자근 가슴을 때려   불안한 마음을 산림이 부른다     천년 오래인 년륜에 짜들은 유암한 산림이   고달픈 한몸을 포옹할 인연을 가졌나보다     산림의 검은 파동우로부터   어둠은 어린 가슴을 짓밟고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바람이   솨 —공포에 떨게 한다     멀리 첫 여름의 개고리 재질댐에   흘러간 마을의 과거는 아질타   나무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시로 보아 첫 여름의 고느적한 저녁 한때인데 시속의 주인공은 《불안한 마음》, 《고달픈 한몸》을 달래려고 산림으로 향한다. 허나 《어둠》, 《바람》으로 상징한 일제치하는 어린 가슴을 짓밟으며 공포에 떨게 한다. 슬픈 모습이 나타나는 또 한수의 시지만 이 시에서의 모습은 슬프지만은 않다. 나무틈새로 비껴드는 별빛은 《불안한 마음》, 《고달픈 한몸》에 새날의 희망을 듬뿍 안겨준다. 윤동주의 여러 시들속에서 맑지만 않은 슬픈 이모저모의 이미지들을 살펴보았다. 그 시대의 락인인 슬픈 모습들이다. 하늘나라, 별나라를 통한 슬픈 모습들에서 우리는 시대상을 재치있게 다룬 윤동주의 세련된 솜씨를 깊이 터득할수 있다.   5.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의 참모습   윤동주는 하늘과 별에 꿈과 희망을 기탁하면서 밝아올 세상을 기대하는 아름다운 시편들을 많이 써냈다. 1938년 2월, 22살에 나는 윤동주는 룡정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 이해 한해동안 《새로운 길》 등 8편의 시와 《산울림》 등 5편의 동시, 《달을 쏘다》 산문 1편을 써냈다.(16)  이같이 윤동주는 연전시절에 시창작에 몰두했는데 인생의 갈림길에서 공부하던 1941년 한해 동안에만 해도 그의 대표작으로 되는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별 헤는 밤》,《새벽이 올  때까지》등 시작품을 포함해 주옥같은 수십편의 시편들을 썼다.     윤동주의 만 27년이란 생애에서 연희전문 문과시절 4년은 《가장 풍요로왔던 시기,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알려진다. 이 시기의 시들이 그 앞선 시기보다 확연히 다른것은 시인의 보다 원숙한 모습인데 그의 시작품들에는 일제 암흑기에도 열심히 살고 깨끗이 살려는 깊은 정서가 푹 배이면서 주어진 길, 새로운 길을 추구하며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는 마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바라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강하게 안겨든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후 윤동주가 쓴 첫 시는 《새로운 길》(1938.5.10)이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고 쓰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펼친 청춘의 활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 《십자가》(1941.5.31)는 명동소학교시절의 그리움을 나타내면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한다면 기꺼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하고 맹세한다. 겨레를 위해서라면 한 목숨도 주저없이 바치겠다는 비장한 맹세가 거침없이 풍겨온다. 시 《새벽이 올 때까지》(1941.5)에서 시인은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거외다》하고 확신하면서 일제가 꼭 멸망하고 조선민족이 꼭 해볕을 볼 날이 올것임을 보여주었다면 시 《또 다른 고향》(1941.9)에서는 어둠이 비낀 고향 아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새 세상을 동경한다.     일제의 멸망을 예고한 윤동주의 이색적인 시는 1942년 6월 3일 일본땅에서 쓴 《쉽게 씌여진 시》이다. 이해 4월 윤동주는 일본 도꾜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도꾜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다니게 되였는데 그때의 조선은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한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런 식민지나라의 청년이 자기의 시 《쉽게 씌여진 시》에서 일본은 남의 나라—6첩방이라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일본의 신민이 아님을 결연히 선언했다. 한편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깊이 반성한다. 나중에 자기의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이 시구에서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어둠》에 비유하면서 《등불》로 이 어둠을 내몰아간다면 해맑은 아침이 밝아오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일본땅에서의 대담한 마음의 거사가 아닐수 없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를 잘 보여준 한편의 훌륭한 시라 하겠다. 이밖에 상기와 같이 별과 관련된 시 《산림》에서도 어둠의 불안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새 생활의 상징, 광명의 상징인 별만이 《나무틈으로 반짝》이며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고 했다면 별시 《눈 감고 간다》(1941.5.31)에서는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별을 사랑하는 아이》 모두가 밤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눈 감고 가더라도 광명을 바라고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고 호소한다. 이 씨앗을 뿌리며 가는자는 다름 아닌 항일의 선구자들일것이다.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발전과정과 나아갈 길은 그의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 《화원에 꽃이 핀다》와 가장 대표적인 시들인 《별 헤는 밤》,《서시》 등에서 잘 드러난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가 선명한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에서 윤동주는 일제치하 현실사회의 어둠과 밝음, 불행과 행복을 뚜렷한 명암대비속에서 보여주면서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위한 어둠과의 전투를 선언했다. 이 선언이 바로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훤히 새벽이라는 새로운 손님을 불러》오는것이다. 결국 시인은 동서남북—《어디로 가야 하느냐》에서 《별똥 떨어진데가 내가 갈 곳》이라고 단언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또 다른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는 세계관, 인생관을 스치면서 《정확한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이 모습속에서 시인은 《서리발에 끼친 락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것을》 굳게 믿었다.     별시를 포함해서 윤동주시의 가장 대표적인 시는 《서시》와 《별 헤는 밤》(1941.11.5)이다. 우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별 헤는 밤》에서 별은 12차나 거듭된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말을 붙여보는 이런 별 하나하나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밤이 물러가면 아침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희망의 별에도 봄이 온다며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 《서시》에서는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 나아갈 길이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서시》는 윤동주가 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로서 연전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18편의 시에 담은 머리시이다. 머리시는 한국의 송우혜선생이 분석한것처럼 《자연히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각오를 총체적으로 담는 내용》(17)으로 엮어졌다. 보다 더 강조한다면 이 머리시는 윤동주 생활의 신조이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집대성으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와 했》던 시인 윤동주의 량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따라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속마음을 내비치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결의한다. 이 결의가 바로 그한테 《주어진 길》을 따라 나아가는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서시》를 통하여 윤동주사상의 성숙과정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시인의 진정을 헤아리게 된다.    6.     결속어   본 론문에서는 내고향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를 처음으로 별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조명하면서 별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윤동주의 참모습을 헤아리려고 시도하였다. 본문 시작에서 별애착의 뿌리를 거스르면서 윤동주의 성장에 끼친 집단무의식의 침전을 건드려본것이 그러하고 윤동주의 시를 별시에 따라 분류하면서 맑은 동심이 반짝이는 시들, 흐리고 슬픈 모습들, 별에 희망을 기탁하며 삶을 도모한 진지한 모습을 헤아린것이 그러하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별은 동심이요, 슬픔이요, 희망이요, 결의요, 참모습이였다. 문학을 지향한 윤동주는 하늘과 별을 시상을 기탁하는 매개물로 삼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시세계에서 그토록 별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그토록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였는가를 보다 리해하게 된다. 어찌할수 없는 현실에서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 윤동주의 참모습이 우렷히 떠오른다. 그 참모습을 아래와 같이 개괄해볼수가 있다. 첫째, 하늘과 별에 대한 전통숭배의식은 의식, 무의식간에 성장하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 배달민족은 여느 민족들에 못지 않게 하늘을 받드며 별을 숭배하여온 민족이다. 본문에서 취급한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력대의 천문자료들, 대대로 전해내려온 전설들이 이를 잘 알려주고있다. 한데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서울 연전시절을 통한 윤동주는 하늘에 숙달하리만치 별과 별자리에 익숙했다. 이는 문학을 지향한 윤동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수 없었다. 둘째, 일제하 암담한 시대에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저항할수 없은 윤동주는 새 세계, 새 희망을 별에 기탁하면서 동심이 흐르는 맑은 시들을 적잖게 창작하였다. 동시로부터 보다 원숙한 모습으로 나타난후에도 그의 시에는 보이는바와 같이 동시적인 가락이 그대로 흘러넘치고있다. 동심과 같이 청순하고 거짓없는 윤동주에게 있어서 별의 세계는 그야말로 희망이 넘치는 세계요, 환상의 세계였다. 숨막히는 시대에 살면서 윤동주가 마음상 위안을 느끼며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은 때가 바로 하늘나라, 별나라를 바라보는 그 시각이였을것이다. 하늘과 별의 세계에서 마음을 달랜것이다.  셋째, 실생활속의 윤동주가 보는 세계는 어지러운 세상 그대로여서 이런 숨막히는 현실은 시인의 시작품에 반영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직접적반영이 하냥 동심과도 같이 맑을수만은 없는 슬픈 모습의 등장이다. 손들어 표할 하늘이 없다는것이나 싸늘한 모습의 달과 그에 비낀 아우의 슬픈 인상화나 북망산을 향한 슬픈 마음이나 세월에 찌든 고달픈 한몸 등등이 그 진실한 체현이라 하겠다. 넷째, 윤동주는 살아가는 험악한 현실에서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저항한 시인은 아니여도 그의 시세계는 결코 소극적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저항이 곳곳에 엿보이는 세계였다.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시세계에서 그토록 별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그토록 밝아올 새벽 그리고 아침을 기대하였는가가 여기에서 풀려간다. 하늘과 별, 자연의 섭리가 시에서의 이미지형상화에 좋은 감으로도 되겠지만 일제하 험악한 세월에 윤동주시인은 시라는 무기를 들고 그런 방식으로 싸워갈수밖에 없었다. 시창작이란 이 주어진 길로 나아가는것이 윤동주시인의 삶의 자세였다. 결론은 하나다. 윤동주는 별을 사랑하고 별을 노래하려는 결의를 지니고 시창작에 나선 별의 시인이였고 자기한테 주어진 길— 시창작으로 훌륭한 시편들을 써내며 마음을 표달한 투사시인이였다.           주해:   (1)(2) 한국 충남대 신용협선생의 론문—《윤동주론》에 따르면 한국의 백철선생이 윤동주를 《암흑기 하늘의 별》로, 김우종선생이 《암흑기 최후의 별》로 보았다. 《윤동주론》은 1994년 제6호 《문학과 예술》지에 실리였다. (3) 박충록, 윤동주의 시세계, 《장백산》1991년 제3호, 제123페지 (4)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7월 (5) 김성호, 민족시인 윤동주님을 기리며: 윤동주시집,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7월 (6) 나일성 저,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년 10월, 제61-62페지 (7) 동상서, 제65페지 (8) 동상서, 제67-68페지 (9) 동상서, 제107페지 (10) 윤동주는 항렬에서 맏이고 그들 남매는 3남 1녀였다. 동주 아래로 녀동생 혜원, 남동생 일주, 광주가 있었는데 막내 광주가 룡정태생인외 웃 3남매는 모두 명동태생이다. (11) 1917년생인 윤동주는 1925년, 만 8살에 명동소학교 입학, 1931년 3월 25일에 졸업하고 달라자 현립1교 6학년에서 1년 공부, 1932년 4월에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 그간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다가 페교되니 룡정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 1938년 2월 17일에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하고 4월 9일에 서울 연전에 입학. (12) 송우혜: 윤동주평전, 한국 열음사, 1988년 10월, 제199-200페지 (13)(14) 신용협 (한국 충남대): 윤동주론, 문학과 예술, 1994년 제6호, 제60페지 (15) 송우혜, 윤동주평전, 한국 열음사,  1988년 10월, 제175페지 (16) 동상서, 제191페지 (17) 동상서, 제248페지   <<도라지>>2005년 제4호    
           윤동주 송몽규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까지                                         리광인                                           ▲1985년 5월 14일,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권철선생이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교수를 대동하여 룡정에 와 3일간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룡정중학교 원로 력사교원 한생철선생님의 안내하에 비로소 룡정동산에 있는 그리스도공동묘소에서 윤동주의 묘소를 찾게 되였다. 그리고 이해 6월에 룡정중학교 사생들과 권철교수, 오무라교수 및 윤동주의 친척들이 참가한 추모모임을 가졌다. 이후 당시 룡정중학교 교장이였던 류기천선생님의 노력과 미국중국한인후호협회의 현봉학회장 등 유지인사들의 성금으로 쑥대만 무성했던 시인의 묘소를 수선하였다.     이때로부터 룡정중학교에서는 사회지명인사들과 함께 해마다 시인의 추모모임을 하게 되고 12월 30일, 윤동주탄생일이면 “연변문학”잡지사에서는 1999년부터 시인을 기리고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윤동주문학상”을 세웠다.                  —전광하, 윤광수, 박용일 편, 윤동주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제 145-146페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7월   ▲윤동주의 모교로 치부되는 룡정중학에서 제일 먼저 윤동주붐이 일어났다. 1985년 5월 14일, 오오무라 마스오교수가 이 학교를 방문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윤동주의 시집을 선물하였다. 그러면서 해외에서 높이 추대되는 이 시인이 바로 룡정중학졸업생이라는것과 그의 묘지가 룡정부근에 있어 그 존재여부를 직접 확인하고싶어 찾아왔다는 사연을 알려주었다. 이 놀랍고도 희한한 소식은 삽시에 교정에 퍼졌고 사생들을 몹시 흥분시켰으며 5월의 특대뉴스로 한동안 온 룡정판을 들썽하게 하였다.   그해 5월 하순경에 이 땅에서 처음으로 윤동주추도회를 가지였다. 추도회는 학교측에서 주최하고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 부인, 윤인주를 비롯한 윤동주의 친척들이 참석하였으며 몇몇 교원과 학생 2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를 계기로 룡정중학에서는 해마다 윤동주의 탄생일과 서거일에 기념활동을 하고있으며 청명이 오면 윤동주의 묘소에 가서 추모활동을 가진다.   —  림연: “고향이 낳은 시인 윤동주”, 길림신문 (1991년 8월 22일 3면)      ▲1985년 4월,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가 연변대학에 객원교수로 오셨는데 그는 시인 윤동주실적조사의 과제도 가지고있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에 대하여서와 이들에 관한 연구정황들을 알려주었다. 그후 우리들은 합력하여 윤동주의 묘소를 찾고 그의 행적을 더듬으며 조사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인 윤동주에 대한 인식을 더 깊이 하였으며 더불어 송몽규의 험난했던 생애와 빛나는 업적에 대하여서도 보다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  권철: “청년문사 송몽규의 행적을 더듬어”, 문학과 예술, (1994.9-10) ▲4월 5일 40여년동안 세인들의 기억속에 망각되였던 반일청년문사 송몽규선생의 묘지와 묘비를 찾아내여 룡정시 동산의 윤동주묘지와 가지런히 모시였다. 이날 룡정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대표 그리고 주 문예선전부문의 대표와 룡정시 해당부문대표들이 반일청년문사 송몽규선생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다.       —  기자 김인선 보도: “청년문사 송몽규와 저항시인 윤동주 별세 45년만에 한자리에”, 길림신문(1990.4.10)   ▲1985년 6월 11일, “윤동주문학사상학습소조” 30여명이 시인의 묘지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 등이 사진자료로……   —  기자탐방: “바람에 스러진 별하나 그리며”, 문학과 예술, (1988.3)   ▲송몽규의 묘소가 룡정의 지신향 장재촌부근에 있다는것은 1985년 5월 시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고 그의 행적을 조사연구하는 과정에서 거론되여 알게 되였으나 당시 그 구체지점은 딱히 확인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를 선색으로 송몽규묘소 채문에 나선 원 룡정중학교 교장 류기천 등이 장재촌 로인들을 통하여 그 구체지점을 알게 되였다. 그후 1989년 12월 18일 류기천과 필자 등 몇몇은 추모의 정을 한가슴에 지니고 그 묘소를 찾았다.   송몽규의 묘소는 룡정시 지신향 장재촌에서 1리쯤 상거한 북산언덕에 자리잡은 송씨가문의 묘지에 있었다. 그 묘소를 지켜보노라니 여러 해 동안 묘소를 찾은 사람이 없어서 그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보기에도 못시 스산하였다. 묘소우켠에 송씨가문에서 언젠가 심어놓은 우뚝 자란 노간주나무(이곳에서는 노루향나무라 부름.) 만이 유표하게 서 있었다.                      … …      묘소를 찾은 이듬해인 1990년 4월 5일 청명절에 룡정중학동창회의 주최하에 송몽규의 묘를 룡정시 동산중앙교회묘지에 있는, 시인 윤동주묘와 서쪽으로 20메터 상거한 곳에다 이장하였다.          —권철: “청년문사 송몽규의 행적을 더듬어”, 문학과 예술(1994.9-10)    (2005년 7월)
제6회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시상식 대성황      올해는 항일전쟁승리 60돐, 세계반파쇼전쟁승리 60돐이 되는 해이자 윤동주시인타계 6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런 평범치 않은 해를 맞으며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는 7월 16일 오전, 연변과학기술대학 간호학부 5층강당에서 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제6회 시상식을 성황리에 가지였다.     이날의 제6회 《윤동주문학상》시상식에는 중학생편집부 허춘희주필,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 연변작가협회 김호근부주석, 연변대 김호웅, 권철, 김동훈, 김만석 등 교수, 연변과학기술대학 김진경총장, 후원자측 박종오리사장, 윤영균교수, 박경오소장, 윤동주시인의 누이동생 윤혜원녀사와 매부인 오형범선생, 두분의 큰따님 오인순 등 문학계, 교육계, 여러 보도매체, 유가족, 각계 인사와 수상자, 수상자지도교원, 수상자 부모님 등 140여명이 참가하여 시상식 자리를 같이 하였다.     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은 1999년말에 현봉학박사님을 비롯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고마운 후원으로 설립되여 올해까지 련속 6년째 이어오고있다. 조선족중학생들의 환영을 받는 문학상으로 자리를 탄탄히 굳힌 올해 제6회 시상식은 미중한인우호협회와 한국 민족문화교육원, 꿈· 희망· 미래 재단의 고마훈 후원, 연변과학기술대학의 고마운 협찬으로 펼쳐졌다.  
131    【90돐특집】(6)8.15 빛낸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 댓글:  조회:3494  추천:117  2007-03-20
8.15 빛낸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                                                      리  함   올해는 광복 60돐을 맞는 해이자 윤동주시인서거 60주기를 맞는 해이고 윤동주시인이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 뜻깊은 해 8.15일 오전에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중심, 한국윤동주문학사 상선양회, 《서시》문학과 함께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한국스포츠 외교문화원의 후원으로 연길시 세기호텔 2층회의실에서 중국조선족시인이고 우리 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서거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를 성과적으로 가지였다. 이날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에는 조선족문단과 문화계의 인사들인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과 연변대 조선한국학중심 김호웅교수, 권철 교수, 해당인사 40여명과 한국서 모처럼 오신 주최측과 후원측의 인사들인     리기택 리사장,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소장, 한국 스포츠외교문화원 박영우 원장 등 20여명이 참가하여 8.15세미나를 빛내였다. 윤동주서거 60주기세미나는 김호웅 박사, 교수의 개회사와 이윤기소장, 박영우원장의 축사에 이어 연변대 김경훈교수의 《윤동주시의 공간의식연구》, 한국덕성여대 김우종교수의 《윤동주의 순결주의 민족주의 인류평화주의》,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리함부장의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 등 세편의 론문발표가 있었다. 이날 세미나는 이왕의 학술세미나들과는 달리 원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의 김××, 전성호, 조일남 등 연구원들이 해당 론문들에 깊이있는 질문을 들이대고 론문발표자들이 답변하면서 주제발표와 자유토론의 형식으로 활기있게 개최되였다. 세미나에서 리함의 론문 《윤동주는 우선 먼저 우리 조선족시인》이 특히 열점화제로 되였는데 세미나 참가자들은 윤동주시인은 우리 민족의 시인이고 세계적인 시인이지만 이에 앞서 우선 먼저 중국조선족시인이라는데 리해를 깊이하였다. 윤동주 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가 거둔 크나큰 성과라 하겠다. 세미나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김희검 부회장이 사회하고 연변대 김관웅교수가 주제발표를 하면서 상기 성과들을 리론의 높이에 끌어올리며 윤동주서거 60주기세미나가 가지는 의의를 피력하였다. 오후에 세미나 중한 참가자들은 전용뻐스로 룡정 명동의 윤동주생가와 룡정동산에 모셔진 윤동주, 송몽규 묘소를 배알하고 세미나 후원측인 한국스포츠외교문화원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씨름협회서 명동촌에서 공동주최한 《시인 윤동주컵 조선족민속씨름경기》를 관람하였다.                                                   2005년 8월 15일
130    【90돐특집】(5) 눈속에서 가진 야외 추모모임 댓글:  조회:4097  추천:132  2007-01-17
눈속에서 가진 야외 추모모임 오늘은 2월 16일,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 윤동주사망 60주기 기념일이다. 이 기념일을 기리여서인지 해종일 내리는 싸락눈은 그칠줄 모른다.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눈내리는 야외 룡정 동산의 윤동주시인 묘소에서 뜻깊은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추모모임에는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편집부 허춘희주필과 편집들인 최리화, 박문파, 오경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과 한정자사무국장, 리함부장; 작가이고 시인들인 김인선(연변일보사 조선문문화부 부장)선생과 석화선생(연변문학월간사 편집);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제4회, 제5회 수상자들인 연길시 백산실험학교 고중부 3학년 3반 리혜정,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5반 권영령, 연변대학 부속중학교 2학년 3반 리나,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12반 허은희, 왕청현 제5중학교 3학년 2반 조금희 등 14명 대표들이 참가하여 윤동주시인을 심심히 그리였다. 그들중에는 아침 7시에 벌써 왕청현성을 떠나왔다는 오돌찬 소녀 조금희학생도 들어있었다. 오전 10시가 퍼그나 지나 추모모임이 시작되자 중학생편집부의 최리화편집이 사회를 맡고 조성일회장이 선참 추모사를 드리였다. 조회장은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 시대와 국경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빛날 한점의 별빛이 되여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기에 손색이 없는 영원히 아름다울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연변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허춘희주필의 《윤동주생애에 대한 간단한 회고》가 뒤를 이었다. 이어 눈속에서의 생화 드리기다. 조성일회장과 허춘희주필이 소속단체를 대표하여 윤동주시인 기념비에 묶음 생화를 드린뒤 추모모임 참가자들이 저마다 생화 한점씩 갖고 나가 진지하게 애도의 뜻을 표시하였다. 보다 인상적인것은 윤동주시랑송. 석화시인이 시인답게 윤동주의 《서시》를 랑송한뒤 전체 참가자들이 함께 《서시》를 재차 랑송하여 시랑송을 고조에로 이끌었다. 초고중대표 녀학생 5명도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쉽게 씌여진 시》, 《십자가》를 읊으면서 윤동주시랑송에 열을 올리였다. 눈속의 산언덕은 한겨울의 추위를 련상시키였다. 정오 12시가 되여 추모모임이 막을 내릴 때 여러 참가자들은 추위에 부르르 떨었다. 그속에서도 겨울옷을 엷게 입은 녀학생들이 관심의 대상이였다. 숫눈길을 헤치며 룡정시가지에서 늦게야 점심상을 받았을 때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12반 허은희학생이 《날씨는 추웠지만 가슴은 뜨거웠다.》고 속셈을 터놓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였다.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 1학년 5반의 권영령학생이 바깥날씨를 《눈이 이쁘게 내리는 날》이라고 묘사하여 찌든 추위를 단번에 가시여주었다. 눈속에서 가진 윤동주사망 60주기 추모모임의 이색적인 성과는 여러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간칭—윤사모)을 결성하기로 합의를 본것이라 하겠다. 윤사모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산하에 두기로 했는데 이는 윤동주시인 고향인 연변땅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첫 결성모임으로 된다. 드디여 룡정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눈은 계속 소리없이 내린다. 중학생잡지 편집부의 모든 준비와 조직후원하에 펼쳐진, 진짜 눈속에서 가진 뜻깊은 60주기 추모모임이였다. . (2005년 2월 16일)
129    【90돐특집】(4) 연변서 윤동주사망 60주기 추모모임이 댓글:  조회:3773  추천:109  2007-01-16
연변서 윤동주사망 60주기 추모모임이 올해 2월 16일은 연변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 윤동주사망 60주기 기념일이다. 이날을 맞으며 연변인민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는 해종일 내리는 싸락눈을 헤가르며 룡정 동산에 자리잡은 윤동주묘소를 찾아가 윤동주사망 60주기 추모모임을 가지였다. 별의 시인으로 불리우는 조선족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 명동촌(오늘의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태생으로서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남으로 근 10리 떨어진 화룡현 현립1교 6학년에 통학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시절의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룡정 광명중학교 등을 거치며 22살되던 해 1938년 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공부, 그러던 26살 되던해 1942년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후로 도꾜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동지사 대학 영문과에 다니다가 송몽규와 함께 이른바 《사상범》으로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옥살이, 광복을 몇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하고 한줌의 재가 되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전에 한점 부끄럼없는 삶을 살면서 동시를 망라한 주옥같은 시 100여편을 남기였고 1985년 4-5월부터 연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이름난 내고향 조선족시인 윤동주사망 60주기에 제하여 중학생잡지편집부 허춘희주필과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회장 등 주최측의 해당일군들과 작가이고 시인들인 김인선(연변일보사 조선문문화부 부장)선생과 석화선생 (연변문학월간사 편집)그리고 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제4회, 제5회 수상자들인 연길시와 왕청현의 초고중 녀학생 도합 14명 대표들이 참가하여 윤동주시인을 심심히 추모하였다. 추모모임에서 조성일회장이 선참 추모사를 드리였다. 그는 추모사에서 《윤동주는 별을 노래한 시인답게…영원히 아름다울 별의 시인》이라고 격조높이 평가하면서 《자라나는 새 일대인 중학생들은 대를 이어 윤동주의 넋을 기리면서》,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키워낸 연변땅에서 제2의 윤동주, 제3의 윤동주로》성장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추모모임은 허춘희주필의 《윤동주 생애에 대한 간단한 회고》에 이어 단체별, 개인별로 차례로 윤동주묘소에 생화를 헌화하고 석화시인, 전체, 녀학생들이 윤동주의 시를 랑송하였다. 윤동주시인 사망 60주기 추모모임은 장중한 기분속에서, 추운 눈보라속에서 열리였다. 이날 추모모임의 이색적인것은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산하에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간칭《윤사모》﹞을 설립하기로 합의를 본것이다. 이는 윤동주시인 고향인 연변땅에 처음으로 무어진 윤동주를 기리는 모임으로 된다. (2005년 2월 16일)
128    【90돐특집】(3)-윤동주시인 사망 60주기를 기리며 댓글:  조회:4559  추천:117  2007-01-15
윤동주시인 사망 60주기를 기리며편집자의 말: 올해 2005년 2월 16일은 연변 명동이 낳은 내고향 조선족시인—윤동주사망 60주기 기념일이고 그 이름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 기념해이다. 이를 기리며 본 생활안내 편집부에서는 리함의 정리로 된 "별세계에 숙달하다"등 3편의 글을 본 신문에 실으면서 심심한 애도와 경의를 표시하는바이다. 별세계에 숙달하다 요즘 필자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윤동주시집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를 살펴보았는데 사용도가 가장 높은 시어는 나, 내, 밤, 하늘이고 그 버금으로 가는것은 달과 별로서 달의 언급이 32개, 별의 언급이 24개였다. 그중 별과 관련된 시가 《서시》,《눈감고 간다》, 《별 헤는 밤》, 《산림》, 《무얼 먹고 사나》,《오줌싸개지도》 등인데 시 《별 헤는 밤》에만 해도 별이 무려 열두번이나 떠오른다. 이는 우리 시단에서 극히 보기 드문 현상으로서 별의 시인인 윤동주의 품위를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 별자리 이야기를 두고 가슴을 뭉클케 하는 생동한 자료가 있다. 윤동주의 친동생인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는 형님 동주의 서울 연희전문학교 시절 귀향때의 모습을 두고 이런 이야기를 남기였다. 동생들은 방학기간에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방학숙제도 같이하고 대학생이던 그와 구슬치기며 공차기 등 장난도 많이 하였다. 책 볼 시간이 아까우면서도 동생들이 귀여워서 놀아주는것이다… 또 한가지 잊혀지지 않는것은 내가 소학교 4학년때로 짐작되는데, 그에게서 별자리를 배우던 일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북두칠성과 북극성들의 위치를 마당에 나와서 가리키면서 참 요령있게 가르쳐주던것이다. 여름 저녁의 시원한 바람, 어린 나를 안다싶이 하던 정다운 그의 체취, 별을 가리키던 그의 손가락 등 모든것이 그립다… 동생 윤일주가 형님을 그리는 윤동주의 연전문과 1학년때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 시절 교과서에 별자리랑 오른 모양인데 그때 벌써 별자리를 알고 동생들에게 요령있게 가르쳤다는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별자리와 별자리의 위치를 모른다는것을 념두에 둘때 더욱 그러하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그 시절에 벌써 별자리를 가르칠만치 별세계에 숙달하였다. 동심에 젖은 맑은 별시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가슴 뜨거이 와닿는것이 동심과 같이 청순하고 거짓없는 마음이다. 하기에 명동 장재촌 출신이고 시인이고 명동소학교시절 윤동주와 동기동창인 한국의 고 문익환목사는 《윤동주를 회상하는것만으로 언제나 정신이 맑아진다.》고 내심을 토로한적 있다. 확실히 윤동주의 시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울렁이며 정신이 맑아지게 하는 특점이 있다. 동심의 경우도 례외가 아닌데 지금까지 알려지는 윤동주의 시작품 110여수중 35수 정도가 동시들로서 《이들 동시의 세계는 순수하고 청순한 동심의 세계라 할수 있》을것이다.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15살나이로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공부를 하다가 1932년 4월에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명동소학교시절 벌써 송몽규 등 또래들 같이 자체로 문예지 《새 명동》을 간행하고 동요, 동시 창작에 열을 올리였으며 은진중학교 1-2학년때는 제법 윤석중의 동요, 동시에 깊이 심취되여있었다. 광명중학교 4-5학년을 다니던 1936년과 1937년 2년동안에는 시창작의 왕성기를 보이며 무려 29편의 시작품을 남기였는데 광명중학교 첫해인 1936년은 윤동주가 동시를 많이도 쓴 해였다. 이해에 쓴 16편 시중 10편이 동시로 나타난다. 1936년과 1937년 이 시기는 윤동주가 동시창작으로부터 시창작의 원숙한 모습을 보이던 시절로서 병아리, 비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 5편의 동시가 북간도의 어린이월간지—《카톨릭소년》에 실리였다. 그중 《카톨릭소년》 1937년 1월호에 발표된 《오줌싸개 지도》와 1937년 3월호에 발표된 《무얼 먹고 사나》가 별나라와의 관계속에서 씌여졌다. 《오줌싸개 지도》는,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는 간밤에 동생이 오줌싸 그린 지도가 그려졌는데 시인의 눈에는 그 지도가 천국에 계신 엄마의 별나라지도로 보인다. 《무얼 먹고 사나》도 별나라와 통하는데 별나라 자체가 벌써 동심이 흐르는 세계이다. 바다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사람  감자 구워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무얼 먹고 사나》    (1936.10)에서 이 동시는 참으로 동심이 넘치며 감칠맛 있게 씌여진 작품인데 바다가 사람, 산골 사람, 별나라 사람간의 대비속에서 동심의 시야로 안겨지는 미지의 세계—별나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1936년이후 윤동주의 시는 보다 원숙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원숙한 시속에는 의연히 동시적인 가락이 면면히 흐르고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1941년 11월 5일에 쓴 《별 헤는 밤》이다. ……상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씀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략…… 이 시는 청신한 가을밤의 맑은 별빛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이다. 시에서 윤동주는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는데 그속에는 달라자 현립1교시절에 한 학급에 다니던 패, 경, 옥 등 중국인 소녀들의 이름이 곁들어지는가 하면 대자연의 동물군체까지 곁들면서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우에》자기를 내세우고 《나는 아무걱정이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 합니다.》하고 내심을 드러낸다. 윤동주로 말하면 일제치하의 암담한 시절에도 가을 밤하늘아래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는 그 시각만은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게 하는 시각이였다. 그만큼 《별 헤는 밤》에는 동심이 가득 넘치고 있는바 그 동심은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그리움과 슬픔으로 나타나면서 동심의 세계는 그리움으로 확산된다. 서울 연전졸업반 때 지은 이 시는 멀리 북간도에 대한 그리움을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면서 쏟아붓는다. 그러면서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면서 밝아오는 새 세상을 한없이 동경한다. 이렇듯 윤동주와 시인의 시세계—별세계는 맑고 청결한 기품으로 흘러넘치면서 천진란만한 동심에 함뿍 젖어있다. 하기에 중국과 한국의 허다한 시인과 문학평론가들은 윤동주의 어지럽혀지지 않은 순결은 영원한 동심이라고 평가를 한곬으로 모았다.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 맑고 깜깜한 밤하늘은 세상 아름다움의 반이라고 별빛이 내리는 야외에서은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별세계에 도취되노라면 가슴을 울렁이며 들뜨게 하는 그 시각의 설레임과 정겨움과 황홀경은 실로 그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내고향 시인이요, 조선족시인인 윤동주가 바로 이런 경지에 빠져든 시인이였다. 별세계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진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은 특별히 동경의 대상으로, 꿈의 세계로, 다정한 친구사이로 되였다 1938년 2월, 22살에 나는 윤동주는 룡정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 이해 한해동안 《새로운 길》 등 8편의 시와 《산울림》 등 5편의 동시, 《달을 쏘다》 산문 1편을 써냈다. 이같이 윤동주는 연전시절에 시창작에 몰두했는데 인생의 갈림길에서 공부하던 1941년 한해 동안에만 해도 그의 대표작으로 되는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별 헤는 밤》,《새벽이 올 때까지》등 시작품을 포함해 주옥같은 수십편의 시편들을 썼다. 윤동주의 만 27년이란 생애에서 연희전문 문과시절 4년은 《가장 풍요로왔던 시기,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알려진다. 이 시기의 시들이 그 앞선 시기보다 확연히 다른것은 시인의 보다 원숙한 모습인데 그의 시작품들에는 일제 암흑기에도 열심히 살고 깨끗이 살려는 깊은 정서가 푹 배이면서 주어진 길, 새로운 길을 추구하며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는 마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바라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강하게 안겨든다.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후 윤동주가 쓴 첫 시는 《새로운 길》(1938.5.10)이다. 이 시에서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고 쓰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펼친 청춘의 활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 《십자가》(1941.5.31)는 명동소학교시절의 그리움을 나타내면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한다면 기꺼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하고 맹세한다. 겨레를 위해서라면 한 목숨도 주저없이 바치겠다는 비장한 맹세가 거침없이 풍겨온다. 시 《새벽이 올 때까지》(1941.5)에서 시인은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거외다》하고 확신하면서 일제가 꼭 멸망하고 조선민족이 꼭 해볕을 볼 날이 올것임을 보여주었다면 시 《또 다른 고향》(1941.9)에서는 어둠이 비낀 고향 아닌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새 세상을 동경한다. 일제의 멸망을 예고한 윤동주의 이색적인 시는 1942년 6월 3일 일본땅에서 쓴 《쉽게 씌여진 시》이다. 이해 4월 윤동주는 일본 도꾜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도꾜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다니게 되였는데 그때의 조선은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한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런 식민지나라의 청년이 자기의 시 《쉽게 씌여진 시》에서 일본은 남의 나라—6첩방이라고 지적하면서 자기는 일본의 신민이 아님을 결연히 선언했다. 한편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스스로를 깊이 반성한다. 나중에 자기의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이 시구에서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어둠》에 비유하면서 《등불》로 이 어둠을 내몰아간다면 해맑은 아침이 밝아오리라고 굳게 확신한다. 일본땅에서의 대담한 마음의 거사가 아닐수 없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를 잘 보여준 한편의 훌륭한 시라 하겠다. 이밖에 상기와 같이 별과 관련된 시 《산림》에서도 어둠의 불안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새 생활의 상징, 광명의 상징인 별만이 《나무틈으로 반짝》이며 《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고 했다면 별시 《눈 감고 간다》(1941.5.31)에서는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별을 사랑하는 아이》 모두가 밤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눈 감고 가더라도 광명을 바라고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고 호소한다. 이 씨앗을 뿌리며 가는자는 다름 아닌 항일의 선구자들일것이다.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발전과정과 나아갈 길은 그의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 《화원에 꽃이 핀다》와 가장 대표적인 시들인 《별 헤는 밤》,《서시》 등에서 잘 드러난다. 어둠과 밝음의 명암대비가 선명한 산문 《별똥 떨어지는데》에서 윤동주는 일제치하 현실사회의 어둠과 밝음, 불행과 행복을 뚜렷한 명암대비속에서 보여주면서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위한 어둠과의 전투를 선언했다. 이 선언이 바로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훤히 새벽이라는 새로운 손님을 불러》오는것이다. 결국 시인은 동서남북—《어디로 가야 하느냐》에서 《별똥 떨어진데가 내가 갈 곳》이라고 단언하면서 나아갈 길을 찾는다. 또 다른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는 세계관, 인생관을 스치면서 《정확한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이 모습속에서 시인은 《서리발에 끼친 락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것을》 굳게 믿었다. 별시를 포함해서 윤동주시의 가장 대표적인 시는 《서시》와 《별 헤는 밤》(1941.11.5)이다. 우에서도 스치고 지났지만 《별 헤는 밤》에서 별은 12차나 거듭된다. 윤동주는 아름다운 말을 붙여보는 이런 별 하나하나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밤이 물러가면 아침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희망의 별에도 봄이 온다며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 《서시》에서는 윤동주시인의 세계관, 인생관, 나아갈 길이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서시》는 윤동주가 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로서 연전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18편의 시에 담은 머리시이다. 머리시는 한국의 송우혜선생이 분석한것처럼 《자연히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각오를 총체적으로 담는 내용》으로 엮어졌다. 보다 더 강조한다면 이 머리시는 윤동주 생활의 신조이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의 세계관, 인생관의 집대성으로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와 했》던 시인 윤동주의 량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따라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속마음을 내비치면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결의한다. 이 결의가 바로 그한테 《주어진 길》을 따라 나아가는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서시》를 통하여 윤동주사상의 성숙과정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시인의 진정을 헤아리게 되며 내고향 시인이고 조선족시인인 윤동주의 참모습을 헤아리게 된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별은 동심이요, 슬픔이요, 희망이요, 결의요, 참모습이였다. 이런 참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시인이 어찌하여 시세계에서 그토록 별에 희망을 기탁하면서 그토록 밝아올 새벽, 아침을 기대하였는가를 보다 리해하게 된다. 어찌할수 없는 현실에서 별에 희망을 기탁한 시인 윤동주의 참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
127    【90돐특집】(2)(수필) - 8.15날 윤동주 다시 찾아 댓글:  조회:3881  추천:116  2007-01-14
8.15날 윤동주 다시 찾아 매년 몇번이고 다녀오는 윤동주생가지만 광복 60돐 8.15에 찾아가는 윤동주생가가 그리도 정다울수가 없다. 광복 60돐을 맞는 날이자 윤동주 조선족시인 서거 60주기, 조선족사회에 알려진 20주기가 되는 해여서 더욱 그러했는가부다. 오전에 연길시에서 윤동주서거 60주기 중한학술세미나를 성과적으로 가진 주최측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와 연변대학 조선한국학중심, 한국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서시》 문학 해당인사들과 세미나 부분적 참가자들은 오후에 또 올들어 보기드문 무더위에도 전용뻐스로 룡정 명동에 가서 윤동주생가를 찾았다. 답사자일행의 모습들엔 윤동주시인에 대한 다함없는 추모의 정이 그대로 흘러 넘치었다. 일행가운데서도 선배어른들이신 중국측 조성일회장님과 한국측 한국 해외한민족 교육진흥회 이사장이고 전 민주당총재인 이기택 이사장님, 한국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님 등 분들은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석연한 기분속에 빠져들었다. 숱한 연변의 문화행사와 시상식 후원 외에도 10여전에 벌써 이곳 윤동주생가와 룡정 대성중학교 옛터 교정에 윤동주시비를 세우도록 성금을 지원했다는 이윤기소장님, 연변 민족교육진흥에 힘다하는 이기택 이사장님은 인차 깊은 회포와 감회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윤동주생가는 1994년 8월에 그때의 룡정시 지신향정부와 룡정시문련,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한국해외한민족연구소의 후원으로 윤동주시인의 옛집터에 복원된것으로서 두만강가 삼합진 강역 5대의 조선족 옛기와집을 사고 헐어다가 생가자리에 살손을 댄것이였다. 이날 윤동주생가 뒤쪽 백양나무 숲속에서 가진 시인윤동주컵 조선족민속씨름경기도 흥미를 끌었지만 생가 동쪽가에 복원된 옛우물이 특히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그제날 명동에서 태여난 윤동주(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어린시절에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리곤 하였다. 그때 그 시절을 두고 윤동주시인의 친동생 한국의 고 윤일주교수는 그제날 생가와 우물 등을 두고 이렇게 회상하였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밭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보는듯이 생생히 그려낸 옛모습이다. 지금은 복원된 집이고 집뒤에 자란 애어린 살구나무와 앵두나무들이 반겨주었지만 올해 봄 이전까지만도 잡초가 우거지고 무너져내린 쓸쓸한 우물터가 옛모습 그대로 다시 복원되니 그지없이 반가왔다. 어린 시절 우물가에서 뛰놀던 윤동주시인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었다. 알고보니 옛우물복원은 이번 윤동주세미나 주최자와 후원자측의 하나인 한국스포츠외교문화원 박영우원장과 한국 엔티에스 대표이고 공학박사인 김정윤선생의 정성에 의해 옛모습을 갖추었었다. 이에 감동된 한국시인협회 리근배선생은 우물가에 자리한 바위비에 친히 우물복원글을 쓰고 정면에 윤동주 시 《자화상》의 편단을 새기기까지 하였다. 바로 8.15 60돐을 하루 앞둔 일이라 한다. 시 《자화상》은 시에 나오는 우물이 어디 우물이겠는가고 시비가 있기도 하지만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 하여 더욱 인상적이다. 복원된 옛 우물가는 물마이는 사람들로 조용할줄 모른다. 깊은 우물의 시원한 물을 드레박에 올려 바가지로 마시는 이들속에는 무더위 씨름경기에 나선 젊은 씨름군들도 있고 한국서 오신 손님들도 있으며 세미나 참가자들도 있어 흥미를 무척 끌었다. 저저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드레박에 바가지로 물마이는 기분이 별기분이라며 차디찬 물맛이 좋고 더위를 가신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올해 48살에 난다는 룡정시 지신림장의 리종화씨는 끊임없이 드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손님들을 반기였다. 그는 명동이웃 마을인 주용촌(명남)에서 태여나 얼마안되여 부모님을 따라 윤동주시인 생가로 이사하여 7살까지 바로 이 원 생가에서 생활하였다면서 열성을 보이였다. 윤동주컵씨름경기가 끝난후 명동촌에 마련된 풍성한 만찬에 앞서 답사자일행은 한패가 이기택리사장, 이윤기소장, 조성일회장, 한정자사무국장 등 일행속에 섞이여 두만강가 도문시로 향하고 다른 한패는 전용뻐스를 잡아타고 룡정 동산의 윤동주묘소를 찾았다. 필자는 윤동주묘소 답사일행속에 섞이였다. 전용뻐스는 잠시후에 룡정시가지 묘소로 통한 언덕길에 들어섰다. 전용뻐스가 언덕길에서 물러서자 소형뻐스로 대신할수밖에 없었는데 묘소에 이른 이들은 숭엄한 기분속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답사자들 모두가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시인이 아니면 문인들이라 그 감정이 특이했다. 윤동주묘소를 처음 찾은 한국문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윤동주묘소는 룡정 동산의 그리스도묘지에 자리잡았는데 묘소량켠의 잎이 무성한 살구나무와 비술나무가 그늘을 지어주고있었다. 일행은 먼저 리근배시인 선생의 사회와 박영우원장의 주선으로 윤동주묘소에 생화를 드리고 묵도하고는 술병을 터뜨려 묘소에 부으며 추모의 정을 표달하였다. 답사자일행속에는 중국측인사들인 연변대 권철교수와 해마다 이곳 묘지에 모셔진 부모님들 묘소로 청명, 추석에 다닌다는 길림신문사 류일석기자도 섞이였다. 70고개를 넘긴 권철교수가 20년전 1985년 4월에 일본에서 오신 오오무라교수와 연변대 리해산교수, 룡정중학교 한생철선생 등과 함께 동산묘지를 쓸며 윤동주묘소를 처음 찾아내던 이야기를 떠올려 답사자일행의 깊은 경의와 감회를 자아냈다. 한국시인이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서시》문학 총무국장인 김영은녀사는 연신 고개를 끄떡이였다. 윤동주묘소참배의 클라이막스는 한국서 오신 편정옥 녀류시인이 금방 쓴 시 《시인의 사후》였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년 민족시인 윤동주 조국과 겨레 앞에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육신은 한줌 흙으로 산화하셨어도 이승의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평화로운 용정 동산에서 그리운 어머니와 만나 생그런 흙내와 풀향에 묻혀 살벌한 세상소식 귀를 닫고 만년설이 녹아든 산소같은 시를 쓰며 날이새도록 별을 헤고 계십니까 참으로 별의 시인 윤동주에 대한 추모의 정이 듬뿍 어린 절절한 시였다. 그래서일가, 답사자일행은 《날이 새도록 별을 헤고 계》실듯한 시인을 그리며 이윽토록 윤동주묘소를 떠날줄 몰랐다. 세미나와 답사의 하루는 8.15날 윤동주시인을 다시 찾은 사람들의 사랑과 추모속에서 빨리도 흘러갔다. ( 2005.8.16)
126    【90돐특집】(1)-명동이 낳은 내고향 시인 댓글:  조회:3886  추천:149  2007-01-12
편자의 말: 올해는 내고향시인 윤동주 탄생 90돐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이 뜻깊은 90돐을 맞으며 이 몇년간 써온 글들을 "윤동주탄생 90돐특집"으로 묶으면서 조선족사회90돐맞이 서막을 열어 봅니다. 명동이 낳은 내고향시인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면 우렷이 떠오른것이 명동이 낳은 내고향 저항시인 윤동주이다. 이땅의 조선족문학의 선두주자로, 조선족시인으로 떠오른 윤동주는 1917년에 그 시절의 화룡현 명동촌(오늘의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여나 1945년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옥사하기까지 인생 28년을 살아오면서 생애의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보내였다. 명동이란 윤동주시인에게 있어서 정녕 유년기, 소년기 애틋한 모습을 비껴담은 잊을수 없는 고향이였다. 그제날의 애들한테는 명동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인 모양이다. 이 고장을 두고 윤동주의 소학교 동창생이며 외사촌인 시인 김정우선생은 일찍 자기의 글에 이렇게 묘사하였다. …명동촌…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여 피고, 앞강가 우거진 버들숲 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였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있고 가을은 원근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이 글 묘사에 못지 않게 윤동주시인의 친동생 고 윤일주교수는 자기의 생가를 보는듯이 그려냈다. …우리 남매들이 태여난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였다.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김정우, 윤일주 선생이 묘사한 그림같은 이 고장이 명동촌인데 윤동주시인의 집은 학교촌으로도 불리운 이 동네 입구 첫집이였다. 다시말하면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의 교회당가까이 두채민가중 앞집이 윤동주의 생가였다. 어린 시절의 윤동주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같이 과수원울타리로 되여 있는 뽕나무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그만큼 윤동주네는 명동에서 제일 부자로 알려진다. 밭도 많았고 제법 벼농사까지 지었는데 온 마을 치고 벼농사집 몇 세대중 윤동주네가 그중 한세대였다니 그 잘사는 정도를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윤동주는 이런 가문의 장손으로 태여나 최서해, 김창걸 등 작가들과는 달리 부럼없이 명동소학교를 다니였다지만 소학시절의 윤동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어질기로 소문이 났다. 그에 따라 잘 울기도 해서 윤동주의 4학년때 담임선생 한준명목사의 회상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하하! 본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오. 공부도 잘하는 축이였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도는 거예요. 했으나 잘 울기와는 달리 윤동주는 똘똘이로 공부를 잘했고 그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으로 정평이 났다. 한국 김정우시인의 회상에 따르면 명동소학교 4학년시절에 윤동주는 벌써 서울에서 출판하는 월간잡지 《아이생활》을 주문해서 읽었다. 그의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문학소년으로서 서울잡지 《어린이》를 주문해서 읽었는데 그들이 다 읽은후는 동네아이들 차례였다. 그 시절로 말하면 명동시골의 두 소년이 서울의 월간잡지를 구독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토대하여 5학년때 윤동주와 송몽규의 발기로 그들은 등사월간잡지 《새 명동》을 몇호 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명실공히 문학소년반이고 앞날이 창창히 밝아오는 미래 시인이였다. 그후 윤동주는 1931년 3월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에서 남으로 근 10리 떨어진 화룡현성—한족 소학교 6학년에 통학하다가 1932년 4월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시절의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 용정 광명중학교 등을 거치며 22살되던 해 1938년 봄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그러던 26살되던 해 1942년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동지사대학 영문과에 다니다가 광복을 몇달 앞둔 1945년 봄에 한줌의 재가 되여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1945년 3월초순에 용정에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에 의해 용정 동산마루에서 윤동주시인 장례가 치러졌다. 이해 5월단오를 앞두고는 가족들에 의해 묘소에 《시인 윤동주지묘》비석이 세워졌다. 유고 31편으로 된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시》가 서울에서 출판된것은 1948년 1월이였다. 윤동주사망 10돐때는 또 서울 정음사에서 윤동주시인의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다시묶어 같은 표제로 책을 펴냈다. 1968년 11월에는 한국 연세대학교 학생회와 문단친지들에 의해 연희전문시절 기숙사앞에 윤동주시비가 세워졌다. 하나 윤동주시인의 고향인 연변에서는 시인의 이름도 몰랐고 시도 몰랐고 묘소도 몰랐다. 1985년 5월, 윤동주시인연구에 조예가 깊은 일본 와세다대학 오오무라교수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권철선생의 안내하에 용정에 나타나서야 용정중학교 원로 역사교원 한생철선생의 도움으로 용정 동산의 그리스도공동묘지에서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윤동주묘소는 국내외손님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떠올랐고 윤동주연구가 전에없이 활기를 띠여왔다. 1992년에 용정중학교 대성중학 옛터앞에 윤동주시비가 일어선 뒤를 이어 1994년 8월에는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가을비가 잔잔히 내렸던 지난 9월 9일, 필자는 그제날 대성중학옛터—용정중학교에 달려가 복원된 대성중학건물 2층에 박물관처럼 꾸려진 《용정중학역사전시관》을 돌아보았다. 전시관에는 저항시인이며 고향시인인 윤동주의 생전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고 옛터 정문 왼쪽가에는 윤동주서시를 새긴 윤동주시비가 필자를 부르고있었다. 벌써 수차되는 걸음이였다. 윤동주묘소도, 윤동주생가도 수차 찾아보았다. 찾을 때마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윤동주고향시인의 유적지들이였다. 9월 9일 답사도 그러했다. 윤동주생가를 찾으면 선참 맞아주는것이 용정—삼합행 룡북선 도료표식 15킬로메터가에 일어선 “윤동주생가”란 커다란 돌비석이다. 이곳에서 길을 내리면 신작로아래 복원된 명동교회옛터와 교회당남쪽가에 우뚝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소리없이 반겨맞는다. 300여년의 나이(?)를 가졌다는 고목—비술나무를 보노라니 어린시절 교회당과 우람진나무우에 올려진 교회당종각을 보며 뛰놀았다는 윤동주소년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드는것만 같았다. 교회당을 지나면 교회당 서북가에 자리잡은 윤동주생가가 보인다. 이 생가가 1994년에 복원되였다는 생가인데 생가집안에는 조선족의 가마며 물독이며 그릇들이 그대로 진렬되여 옛기분속에 빠져들게 한다. 생가 오른쪽가에는 “윤동주생가옛터”석비가 세워져 손님들을 부른다. 석비비문은 이러했다. 시인 윤동주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로 된 집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용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용정시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정부와 용정시문련은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역사적유물로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1994년 8월 29일용정시 지신향인민정부용정시 문학예술계련합회 그때로부터 옹근 10년세월이 흘렀지만 복원된 윤동주생가와 무너져내린 우물터, 주위환경은 여전했다. 지난 10년간 명동과 생가를 찾은 국내외손님들이 얼마인지는 알아보지 않았지만 가을비도 마다하고 한국손님과 여기 안내자들을 실은 하이야 한대가 선행한 상태였다. 여러명은 잘되였는데 귀로시 또 택시 한대가 옛 교회당과 윤동주생가 옛 터에 들어섰다. 이름난 관광명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시각사진이였다. 생애 28년의 꼭 절반을 명동에서 보낸 윤동주시인, 시인은 정녕 일제치하기, 명동이 낳은 저항시인이요, 내고향 시인이였다. (2004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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