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리 광 인
1. 제기되는 문제
올해로 윤동주시인 서거 60주기를 맞기까지 윤동주와 시인의 시 연구는 거의가 한국 학계에 의해 주도되여왔다. 1948년 1월 30일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작품 31편 수록) 초간본이 간행된 이래 중판, 3판, 사진판으로 이어지면서 60년동안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윤동주를 《최고봉의 하나로서 취급》①하기에 이르렀다. 윤동주 시집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및 체코어 등으로까지 번역되여 이제 해외에도 널리 소개되고 있다.》② 하기에 윤동주의 작품들은 《한국 현대시사 (現代詩史)의 좌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심의 대상》③으로 되여오면서 《1980년대 이전까지는 전기적, 문학사적,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연구가 주된 것이였다면 1980년대 이후부터는 작품의 본질적인 성격을 규명하고자하는 작품 내적연구가 주류를 이루》④어 왔다. 이에따라 한국문학사들에서는 윤동주를 리육사와 더불어 일제식민지 후기의 조선민족(한민족)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동주시인은 중국 연변에서 태여나 연변에서 자랐고 연변에서 소학교, 중학교 공부를 하면서 생의 만 27년 2개월 중 20년 8개월이나 명동과 룡정에서 보냈기에 한국 학계에서는 윤동주시인의 생애, 발자취, 사상 등에 대해 허다한 면에서 잘 알지 못하며 안다해도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는고로 력사현실과 어긋나는 면이 가끔 보이는 실정이다. 윤동주시인의 선조들 이주와 가족관계, 다닌 학교 등 만을 보아도 그러하다. 윤동주의 사상과 경향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의 시각과 관점으로 스치면서 송우혜씨의 《윤동주평전》(신, 구판 포함)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본 론문에서는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총제목을 설정하고 1,2,3 등으로 나누어 연변에서의 윤동주 생애와 발자취, 사상 등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는 필연코 한국이나 조선의 학계 학자들 연구에 유조하리라고 믿어마지 않으면서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는 윤동주의 증조할아버지 때 살았던 자동, 명동촌의 실제, 달라자 관립학교 등을 3개 연구내용으로 나누어 전문 다루어 보려 한다.
2. 북간도 자동은 틀린 설법
윤동주시인의 가족사 연구자료들을 한데 모아보면 윤씨가문은 파평윤씨로서 이들 가문은 본래 함경북도 회령에서 삶을 영위했다. 그러다가 종성으로 이사하여 종성사람으로 알려지지만 기실은 회령사람들이여서 회령윤씨가문으로 통한다.⑤ 종성서 살때가 이미 1886년 이전이다.
1886년에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결단을 내리고 4남 1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 중류 북쪽대안인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새 삶의 터를 잡게 된다. 이때의 자동을 가리켜 한국 학계에서는 당시의 중국 지방행정기구와 흐름을 잘 모르기에 단순히《북간도 자동》이라고만 한다. 북간도 자동이란 취급은 완전히 틀린 설법이다. 왜서 틀린 설법일가, 이를 알자면 오늘의 룡정시가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개발되던 19세기 후반기 청동치(同治), 광서 년간으로 거슬러 오르지 않을수 없다.
(1) 룡정의 첫 이주민마을
력사자료에 눈길을 두면 지난 19세기 50년대 이전에 함경북도 북부의 조선사람들이 오늘의 룡정 이남의 봉금지에 들어와 수렵에 종사하거나 진귀약재를 채집하기도 했다. 나무를 찍어넘기여 터전을 만드는 일도 가끔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뙉밭을 일구고 채소나 곡식을 심다가 봄에 와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는 가을에 등짐으로 한짐한짐 운반하기가 일쑤였다.
룡정에 조선이주민 첫 마을이 생긴것은 1877년 봄으로 집고있다. 조선 평안북도의 난민 김언삼(金彦三)과 함경북도 회령의 난민 장인석, 박윤언(朴允彦) 등은 14세대의 일가식솔들을 거느리고 오늘의 룡정시 삼합일대에서 두만강을 건너 륙도하와 해란강이 합수되는 곳에 보짐을 풀었다.⑥ 잇따라 마을이 생기면서 이 마을이 룡정구역내 첫 조선인마을로 알려진다. 그와 때를 전후하여 오늘의 룡정시 구역에 밀려드는 조선이주민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였다.
(2) 지방관아의 설치와 개방
광서 7년 1881년에 길림장군 명안은 조정에 상주하여 선참으로 두만강이북 지구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훈춘에 부도통(副都统)아문을 설치했는대 이 아문은 연변의 대부분 지구를 관리하는 최고행정기관이였다. 그해(1881년) 훈춘에 또 길림변무독판이 설치되여 훈춘 등지의 변무사무를 처리하고 또 훈춘에 초간총국(招垦总局)를 두었다. 총국아래 오도구(五道沟)에 남강 초간본국을 두고 개간사무를 보았다면 오늘의 룡정시 지신일대 (속명으로 달라자라고 함)는 남강초간 본국의 관할지대였다.
1884년에 청정부 지방관아는 화룡욕(지신진일대)에 월도국(越渡局)을 설치하고 조선이주민 접수를 취급했다.
광서11년 (1885년)에 화룡욕의 월도국을 월간국(越垦局), 일명 통상국(通商局)으로 개칭하고 광제욕(개산툰진 광소촌), 서보강(西步江, 훈춘강이 두만강에 흘러드는 곳)에 분카(分卡)⑦ 를 두면서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50리 지역을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였다.
(3) 자동은 녕원보 개운사 소속마을
청나라 지방관아의 개방조치는 숱한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였다. 결과 해란강이남지역에 벌써 5590여 세대의 조선인들이 밀려들었는데 청조지방관아는 이들 개간구역에 4대보(四大堡), 39개사를 설치하고 사아래에 129개 갑(甲), 갑아래에 415개 패를 두었다. 4개 보란 진원보(镇远堡), 녕원보(宁远堡), 수원보(绥远堡),안원보(安远堡)를 말하는데 윤동주의 선조들이 자리잡은 자동일대는 녕원보의 관할구역으로서 화룡욕 무간국 동북쪽에 위치한 두만강대안의 월청일대와 개산툰일대가 녕원보 관할밑에 있었다. 녕원보의 소재지는 광제욕이 자리잡은 오늘의 개산툰진 광소촌 두만강 북안이였다. 광서 23년(1897년) 에 화룡욕을 소재지로 하던 화룡욕 무간국이 광제욕에 자리를 옮기면서 자동촌 가까이에 있는 광제욕은 줄곧 화룡욕 무간국의 정치중심으로 존재했다.
당시 녕원보는 산하 13개사를 관할. 그중 《개》(开) 자가 들어간 사만 개태사(开泰社), 개원사(开远社), 개발사(开发社), 개문사(开文社), 개화사(开华社) 등 5개. 후에 2개사가 없어지고 개태,개원,개문 3개사가 남아 통칭하여 삼개사(三开社)라고도 했는데 자동과 그 일대는 개원사에 속했다. ⑧
력사사실이 이러하다. 하기에 윤동주 선조들이 살았던 자동일대를 북간도 자동이라하면 아니된다. 응당 훈춘 부도통, 혹은 길림변무독판 녕원보 개운사 자동이라고 불러야 한다. 후에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널리 불리워진 《북간도》란 말은 20세기 초이후의 일로서 1886년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씨가문에 북간도를 붙히면 력사현실을 떠나게 된다.
(4) 윤씨가문은 자동 어느 마을인가?
윤씨가문의 자동이주살이도 미적지근한것이 없지 않다. 제기되는것은 자동 어느 마을에 살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윤씨가문 가족사연구에서 이를 밝히지 못하였기에 오늘날에 이르러 이를 제대로 밝힌다는것은 자못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지난 세기 80년대초 자동골을 따라 막바지 채수골, 연두봉까지 답사하면서 당지 로인들을 방문한데 의하면 자동골은 첫 마을부터 왼쪽골의 막바지까지 10킬로메터도 넘는다.
개산툰진에서 자동촌어구에 들어서서 철길을 넘으면 자동촌 본부인데 자동골은 서남으로 올라가다가 두골로 나뉘여진다. 오른쪽골은 지신(달라자)금곡으로 넘어가고 왼쪽골은 채수골로 통하는 원골이다. 철길너머 마을이 종선촌이라면 3대는 자동 부렁촌이고 5대는 굴레장대밑, 6대는 후저골로 통한다. 자동 원골로 들어가면서 형성된 마을들인데 그 우로는 돌문밖, 돌문안, 채수골, 연두봉으로 이어진다. 돌문 그곳을 고석동이라고 하는데 고석동(孤石洞)을 우리 말로 풀이하면 외돌배기이다. 또, 자동 상촌이 채수골마을이고 채수령엔 마지막 마을 알미대가 있다. 20세기 초에 벌써 이런 마을들이 존재하고 200여세대도 넘게 생활했다고 할 때 윤씨가문이 1900년까지 14년간 생활한 그 시기는 마을이 몇개였고 세대수는 얼마인가, 아직 그 누구도 이에 100%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동 시초의 생활모습과 마을 형편을 보여줄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는것이 아니다.
원《룡정현 광개향 자연툰 건툰(建屯)시간》자료⑨에 따르면 자동의 응달촌, 연역툰, 리화동, 후저동 등 마을들의 형성시간은 광서초년으로 밝혀진다. 광서원년이 1875년이라고 하면 윤씨가문이 이주를 강행한 때가 광서 12년(1886년), 즉 광서초년에 해당하고있으니 그시절에 이미 여러개 마을이 실재한 형편이다.
량환준선생이 1986년 12월 12일에 당시의 광개향 자동촌에 가서 로인좌담회를 가진데 의하면 그해 67살에 난 자동 4대 박인언로인은 이렇게 증실하였다.
《젊었을 때 부친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친이 11살일 때 증조부가 가족을 데리고 조선 종성으로부터 월강하여 자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이곳에 인가가 없었다고 한다. 부친은 1946년도에 72살로 사망했으니 계시면 올해 112살이 된다. 그러므로 102년전이니 1884년에 이곳에 이주한것으로 된다.》
그번 좌담회에서 자동 5대의 유영준(78살), 자동 4대의 공흥렬(72살) 로인들도 비슷한 증실을 하였다. 세 로인들은 좌담회에서 또 마을 부근에서 옛 집터자리가 여러곳 발견되고 지하에서 방아호박, 손매돌, 밥조개 등 쪼각들이 적잖게 발견되였다고 하면서 자동의 이주유래는 오란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5) 북간도 자동은 모호한 기술(記述)
상기자료들에 비추어보면 윤씨가문의 이주는 청나라에서 1885년에 200여 년간이나 지속된 봉금령을 페지한것과 관련된다. 바로 봉금페지 이듬해 오늘의 자동일대에 이주했던것이다. 자동에서 불과 10여리 거리에 조선 종성이니 윤씨가문 등 적잖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왔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1886년 그때는 이미 자동일대에 여러개 마을이 나타난 실정이니 윤씨가문이 《북간도 자동》에서 살았다는 기술은 대단히 모호한 기술이 아닐수 없다. 시초 마을이 형성되여 퍼그나 흐른 시기까지도 마을들이 각기 이름을 갖고있고 자동으로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념두에 둘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고로 필자는 윤씨가문이 이주하여 생활한 마을이 북간도 자동이라고 하는 설법은 틀린 설법이라고 못박는다.
2. 명동촌의 유래
지금까지 윤동주시인연구에서 보면 북간도 자동 설법과 같이 모호한 설법이 또 하나 있다. 명동촌의 유래문제가 그런 설법이라 하겠다. 명동연구 해당자료들에 따르면 명동이란 이 마을형성은 1899년 김약연 등 4대가문, 22세대, 141명이 이곳으로 이주한후 생겨난 마을이라고 일컿고있는데 이는 명동과 그 일대 마을들의 당시 형편을 모르고하는 설법이다. 윤동주의 고향마을이 명동이고 1899년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주동자 김약연선생이 윤동주의 외삼촌, 즉 동주 어머니의 친오빠인데서 명동의 유래는 밝히고 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력사속의 명동촌의 유래는 어떠한가, 아래 명동마을의 유래를 밝히노라면 이 문제가 스스로 풀리여진다.
(1) 명동지구의 개발
그제날 명동지구라 하면 룡정에서 남으로 12킬로메터 떨어진 선바위와 19킬로메터 떨어진 달라자사이의 륙도하북쪽에 위치한 성교촌, 중영촌, 명동촌, 장재촌과 륙도하 남쪽켠에 위치한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화전동(지금은 없음) 등 7~8개 마을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도 룡정에서 륙도하를 거슬러 남으로 15킬로메터되는곳에 자리잡은 명동촌은 이들 여러개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이였다.
이곳 해당 력사연구자료들에 따르면 19세기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명동지구는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885년에 청정부에서 봉금을 페지하고 조선이주민들의 이주와 개간을 허용하자 함경북도 북부의 조선인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하여 그 시기에 벌써 명동지구와 해란강, 부르하통하 류역에 모여든 조선이민수가 10만명 좌우⑩에 달했다.
량환준선생의 현지답사와 조사연구자료를 보면 조선이주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기전까지 명동지구에는 중국 관내에서 온 점산호 동한(占山戶, 董漢)이란 사람이 살았다. 동한은 100여명에 달하는 일군을 고용하면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는데 고용자 모두가 조선 회령과 그 일대서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은 봄에 와서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 지나 조선 고향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는데 조선 이주민들이 대거 밀려들면서 본래 일군들은 동한의 소작농이나 머슴군으로 되였다.
(2) 명동지구 마을의 형성
명동지구의 륙도하량안에 성교촌, 중영촌, 명동촌, 장재촌,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화전동 등 여러개 마을이 이루어진것은 1885년 봉금령페지이후의 일이다. 불과 10여년사이 7~8개 마을이 형성되였는데 1899년에 동한이 죽자 그 가족들은 토지를 팔아버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1899년 그때 여러개 마을의 세대수를 보면 장재촌이 30세대쯤, 명동촌이 10세대쯤, 중영촌이 8세대쯤, 성교촌이 20세대쯤, 소룡동이 15세대쯤, 대룡동이 20세대쯤, 풍락동이 80세대쯤에 달해 약 200세대⑪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조선이주민들은 입적하지 않아 토지소유권을 향수할수 없어 안성주, 김병호, 박윤 등 사람들이 동한의 땅을 사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 나누어 부치도록 했다. 이럴 때 종성과 회령의 김약연 등 4대 가족, 스물두집, 141명이 명동과 장재에 이주하여 왔다.
(3) 명동촌의 본래 이름은 룡암동
우에서 필자는 량환준선생의 자료를 통하여 명동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 여러개 마을의 형성을 간단히 밝히여보았다. 여기서 짚고넘어갈것은 명동이 1899년 김약연 일행이주후 생겨난 마을이 아니라 그 전부터 실재한 마을이라는것이다. 량선생의 자료에서도 보여지다싶이 후에 명동으로 불리운 룡암동에 이미 10세대쯤의 세대들이 이미 띄염띄염 살고있어 룡암동으로 불리우고있었다.
1899년에 조선의 애국지사이며 한학자인 김약연 등 141명이 룡암동으로 이주하여 온후 룡암동의 이주민세대수는 많이 늘어나고 1901년 4월에는 김약연에 의해 장재촌에 규암재라 부르는 서당이 생겨났다. 같은 시기 김약연동반자들인 김씨가문의 김하규에 의해 대룡동에 소암재, 남씨가문의 남위언에 의해 중영촌에 오룡재가 일어섰다. 룡정의 서전서숙(1906년 세워짐)이 페숙된후 1908년 4월 27일에 이들 서로간에 힘을 합쳐 명동서숙을 일떠세웠다. 그 이듬해 4월에 명동서숙은 사립명동학교로 개칭되였는데 명동서숙이 세워지면서부터 룡암동은 명동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⑫ 학교가 룡암동에 세워지다보니 룡암동을 또 학교마을이라 불렀다. 민간에서 굳어진 입말이였다.
이로부터 보면 명동촌이 형성되여 생긴 이름은 룡암동이고 학교가 서면서부터 명동촌 또는 학교마을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연구가들은 명동촌과 그 일대 여러개 마을을 합쳐 명동촌 또는 명동지구로 부르기도 하는데 일리가 없지않다.
지난해 2004년 10월 14일, 김약연선생의 증손자 김재흥선생 일행과 같이 명동과 그 일대를 답사할 때 당지 분들과 문의하니 지금의 중영촌(명동다음 마을)이 명동 1대고, 학교촌이 명동 2-3대, 륙도하너머 마을 대룡동이 명동 4-5대, 그 아래 소룡동이 명동 6대였다. 그제날에 명동과 그 주변마을들을 합쳐 명동촌 또는 명동지구라 불렀다면 오늘날도 명동과 그 일대 마을들은 서로 각기 이름을 갖고있어도 모두 명동촌에 속한 소속마을로 알려졌다.
3. 달라자학교는 현립1교
윤동주연구에서 북간도 자동이나 명동촌이 김약연일행이 이주해서 생겨난 마을이라는 설법 등이 오유적이라면 윤동주가 소학교를 마치고 고등부를 다니던 달라자학교를 중국인학교라고 학교이름을 부르는것 역시 오유적이다. 이점을 꼭 밝히고자 함은 윤동주시인을 연구하고 리해하는데 보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1906년 서숙서숙 설립이전만 하여도 연변의 초등교육형태는 서당교육이였다.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마다 서당이 일떠섰으니 불완전한 해당 통계자료에 의하면 1914년 연변내 연길현 한개 현만 하여도 봉건적인 조선족서당이 116개소에 달했다⑬고 한다. 서전서숙의 설립과 더불어 조선족집거구들에서는 근대적인 사립학교들이 흥기하고 1910년 전후부터 민국정부측에 의해 현립학교들이 분분히 일떠섰다. 달라자 현립1교가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연변은 조선이주민의 집거구로서 주민조성의 80%이상이 조선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편에서 현립학교들은 정부측에서 꾸렸다하여 한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인학교로 보이겠지만 절대다수 학생들이 조선족이였다. 한족학생만을 이루는 학교는 극히 적었으니 한족학교라 해도 조선족과 한족학생이 서로 섞이였다. 레컨대, 1907년 3월, 그후 간민회 주요책임자 리동춘에 의해 세워진 광소촌의 양정학당은 중국어를 주로 가르치는 신식학교였으나 이 학당 학생은 모두가 조선족학생들이였다.
1907년 8월에 일본침략자들이 룡정촌에 통감부간도 파출소를 세우고 1909년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이 설치되면서부터 일제는 저들 관할하의 지역들에 조선족공립보통학교를 세우고 시골들에는 조선총독부 관할하의 보조서당을 꾸리며 조선족동화교육을 서둘렀다. 이런 실정에서 민국지방정부에서는 일제의 침략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조선사람들이 모여사는 지구들에 분분히 현립학교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제의 동화정책에 대응하여 각지 조선족사립학교들에서는 협의하고 민국지방정부의 시책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교과서는 전부 조선어로 번역하여 교수하며 중국어의 교수시간은 매주 6교시 등을 조건으로 지방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때가 1910년 전후시기이다.
상기와 같이 광서 23년, 즉 1897년에 화룡욕 무간국이 두만강대안의 광제욕으로 옮겨간후 광제욕이 화룡욕 무간국의 정치중심으로 떠올랐다. 광서 28년(1902년)에 국자가에 연길청을 설치, 그해 또 연길변무공서를 세우고 화룡욕에 분방경력 (分防經歷)를 세웠다. 선통원년(1909년)에는 훈춘 부도통을 동남로병비도 (東南路兵备道)로 고치고 그 중심을 국자가에 옮기였다. 따라서 연길청은 연길부(府)로 승급하면서 국자가, 즉 연길이 훈춘을 대신하여 연변지구의 통치중심으로 떠올랐다. 연길부는 산하에 현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는데 1909년, 선통원년에 화룡욕분발경력은 현으로 승급하여 화룡현으로 불리였다.
그 시기 현립1교는 화룡욕 무간국이 위치한 광제욕으로 되고 화룡욕이 현립2교로 되여야 했으나 현이 화룡욕을 소재지로 하자 화룡욕이 현립1교로 되고 광제욕, 다시 말해서 광제욕의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되였다. 지난 80년대초 개산툰지구에 대한 현지조사에 의하면 달라자가 현립1교, 광소가 현립2교, 삼합 계사처가 현립3교, 오늘의 월청 마패가 현립 4개, 팔도하자가 현립 7교, 동해(룡신)가 현립9교였다.⑭ 정부측에서 꾸린 학교여서 중국인학교로 불리우지만 학생의 거개가 조선족학생들이였다. 학제는 모두 6년제를 실시했다.
하다면 현립1교와 현립 2교가 서로 지역을 바꾸며 정식 실시된것은 언제일가, 필자가 지난 80년대초 당지 사립학교와 현립학교들에 익숙한 자동의 몇몇 로인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양정학당이 현립2교로 탈바꿈한것은 1913년 이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달라자의 현립1교도 원 2교로부터 1교로 된것은 1913년이라 해야겠다. 윤동주시인이 태여나기전 몇해전의 일이다.
4. 결속어
본문은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북간도 자동문제, 명동촌 유래문제, 현립1교 문제 등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윤동주연구에서 제기되는 첫째 부분으로 검토하여 보았다. 이상 몇개 문제를 검토하고 넘어야 함은 아래와 같은 리유에서였다.
첫째, 윤동주의 윤씨가문이 살길을 찾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잡은 첫 삶의 터가 그제날 자동이기에 이 자동마을을 옳바로 파악해야 했다. 이는 윤씨가문의 가족사와 윤동주의 발자취, 전기에서 홀시할수 없는 부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둘째, 윤씨가문이 종성에서 떠나 두번째로 자리잡은 삶의 터전이 윤동주의 고향으로 되는 명동마을이기에 그저 지나칠수 없었다. 한국의 허다한 윤동주연구와 명동의 후예들 중에는 명동촌을 김약연 일행이 와서 세운 마을이고 처음부터 명동촌이라고 주장하는데서 꼭 그 유래를 밝혀야 했다. 아마 이런 부류의 견해와 주장들은 명동촌을 이렇게 서술해야 한때 동만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운 김약연이나 그의 녀동생 김룡의 아들 윤동주의 격을 보다 높일수있는것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러지 않아도 룡정 명동은 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로 되기에 손색없는 마을인데도 말이다.
셋째, 달라자의 현립1교는 윤동주의 소학교시절에서 반드시 연구하고 취급할 부분이기에 홀시하지 말아야 했다. 헌데 한국의 연구자료나 성과들은 모두가 학교 이름이 관립학교가 아니면 중국인학교로만 되여있었다. 그것도 윤동주의 유명한 시—《별헤는 밤》에서 별의 시인답게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곁들이면서 별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며 현립1교 시절 그리운 이국소녀들인 패, 경, 옥 등 소녀들을 이색적으로 떠올린데서 더욱 취급하고 지나야 했다.
보는바와 같이 윤동주가 1931년 3월 15일에 명동소학교를 마치고 달라자의 현립1교 고등부에서 1년간 더 공부하게 되는데 명동에서 남으로 10리 떨어진 곳으로 통학하는 어린시절 윤동주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는듯 싶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현립 1교는 중국인이 꾸리고 중국인만 다니는 학교같지만 기실 절대다수 학생들이 조선족자녀들이다. 윤동주도 그런 조선족자녀 들중의 일원이였다.
인젠 상기 세가지 문제에서 서술할 부분은 기본상 다 서술한것 같다. 중국과 한국, 조선 모든 윤동주연구가들치고 처음 다쳐보는 연구분야기에 중국조선족시인이고 우리 민족의 시인이고 세계적인 시인인 윤동주연구에서 도움과 보다 리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2005년 8월 6일)주해:
① 오오무라 마스오(일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 연변교육출판사 (2002. 8).
② 홍장학(한국),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4.7 머리말에서.
③ 조형언(한국), 문학석사학위론문─윤동주 시 연구, 한림대학교 문학원 국어국문학과.
④ 우와 같음.
⑤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한국 고려글방, 1997년 10월, 제 96페지
⑥ 한생철 김석, 룡정개발사략, 룡정문사자료(1) 한문, 제3페지.
⑦ 연변지명연혁, 연변사지(延边史志), 1986년 1기.
⑧ 차성파, 청말 연변월간 4보 39개사의 위치에 관하여, 연변력사연구, 제1집
⑨ 량환준선생의 자료, 필자는 1987년 5월 27일에 이 자료를 넘겨받음. 량선생은 지난세기 20년대 조공당 만주총국 산하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 부장으로서 광복후 연변인민출판사 제1임 사장을 하신 분으로서 조선족력사연구, 연변지명연구에 조예가 깊은 분이시다.
⑩ 량환준, 5.30폭동전의 사립명동학교, 연변문사자료 제2집, 한문 제17페지, 1984년 2월
⑪ 량환준, 5.30폭동전의 사립명동학교, 연변문사 자료 제2집, 한문 제17페지, 1984년 2월
⑫ 서굉일 김재홍,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한국고려 글방, 1997년 10월, 제97페지
⑬ 연변조선족교육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7월, 제17페지
⑭ 리광인, 1983년 1월 18일 룡정현 광개향 자동 6대 장승운(68살) 등 로인방문.
"연변문학" 2007년 제2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