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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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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행 이야기-미국탐방기 (4) 댓글:  조회:707  추천:0  2019-11-22
미국 탐방기 4   1, 광활한 모하비 사막 이번 미국 여행에서 가장 주되는 스케줄은 가족 여행지로 결정한 옐리스톤 캠핑카 여행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토랜스에서 온가족이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길에 올랐다. 옐리스톤으로 가는 길은 긴 노정이여서 모하바 사막을 가로질러 라스베이거스 등 많은 관광지를 경유하게 된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를 지난 후부터 캠핑카를 탈 계획이었다. 줄을 그어놓은 듯이 조금도 휘어듦이 없이 북으로 북으로 아득히 뻗어나간 국토 15호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시내를 벗어나자 앞 시야에는 달리는 차량들 외에는 아무것이 볼 것이 없다. 지평선 끝으로 달리는 감각이었다. 얼마를 달렸는지 드디어 도로 양옆에 광활한 모하비 사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에나바다 산맥에서 콜로라도 평원까지 뻗어 있다는 무려 65,000K㎡의 광활한 사막- 우리의 감각으로 말하면 캘리포니아 주에서 라스베이거스가지 한눈 가득 안겨오는 풍경이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사막은 기존 우리의 상상처럼 풀 한포기 없는 완전 모래사막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산악분지 지형이어서 군데 군데 식생이 분포되어 있는 것 이었다. 이 특수 건조 지역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메마른 사막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억센 작은 초목들이 듬성듬성 황량한 벌판에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초목들 속에는 죠수아 트리라고 하는 십자가 모양의 유명한 선인장들이 그 키 낮게 자리메김하고 있는 잡초들 속에서 키 자랑을 하고 있었다. 낮에 불같이 뜨겁고 밤엔 무섭게 추워지는 이모하비 사막의 혹독한 생태에 적응하느라 나무 모양은 그로테스크한 모양? 메두사처럼, 말미잘처럼 동화극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 옛날 궁지에 밀렸던 모르몬교들이 콜로라도 강을 건너 이 척박한 사막에 들어섰을 때 목은 마르고 밤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숨을 거두기 일보 직전인데 누군가 그들의 팔을 이끌어 데리고 가 물 있는 곳을 찾아주어 살게 되였다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서보니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닌 한그루의 나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일명 여호수아 나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인즉 “인도자”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지도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참 신기한 전설을 안고 살아가는 나무다.   한참 달리다 나니 차창 밖으로 시커먼 현무암들이 구릉과 산 능선을 이루며 무덕무덕 지나간다. 아마도 그 옛날의 화산 폭발의 흔적들일 것이다. 지루한 풍경이 계속되는 중 저 멀리 길고 긴 구렁이 같은 것이 도로와 평행선을 이루며 서서히 기어가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로 철길위에서 달리고 있는 아주 기다란 화물차였다. 무려 40여개의 차량을 단 무지긴 화물차다. 그 길이가 1.6M나 된다는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런 차량들이 가끔가끔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사막의 평원지대에서는 붕사, 산화 칼륨, 소금이 채취되며 금, 은, 텅스텐, 철 등도 적지 않게 채굴되고 있다고 하였다. 저 분주한 물류현상은 이 불모의 땅 밑에 숨어있는 풍부한 자원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도 한참을 달리니 현대차의 모하비 주행시험장이라는 팻말이 보이는데 그것을 보며 애들이 하는 말이 항공우주센터도 이 사막에 있는데 개인 자가용 비행장으로서 새로운 항공기 비행, 훈련장 겸 항공 조종사 양성지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 무덤”이란 곳도 있는데 몇십년 째 메마른 기후를 이용해 미국은 물론 전세계 여러나라들의 비행기 중고품과 폐쇄 품들이 찾아와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갑자기 차에 앉은 다섯 살짜리 외손녀가 “저것 봐!”하고 소리쳤다. 거대한 네모형의 눈부신 반사경의 모습이 하늘 반공중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양광 발전소인데 세계 최대 태양열 발전소로서 그 크기가 잠실 운동장의 35배나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모두 눈을 떼지 못하고 태양열 발전소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발전양은 연간 392와트라고 애들이 폰을 뒤적이며 얘기 했다. 즉 해당14만가구의 사용양이라는 것이다. 발전소에는 태양열을 반사하기 위한 저런 거울 347000개나 설치되어 있다하여 나는 믿기지 않아 다시 잘 읽어 보라 할 정도였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런-컴퓨터로 통제되는 반사경들이, 약140 메트 높이의 탑에 햇빛을 보이라로 반사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태양열이 강한 낮 시간에는 최고 섭씨 588도까지 올라간다니 생태계의 위협도 문제점이라고 보여 졌다. 그 옆으로 뿜겨 반사되는 열빛 근처로 지나가는 그 어떤 조류나 생물들도 금방 타 죽을 것이다! 이렇게 뜨거운 태양열 발전소가 있는가 하면 사막의 더운 공기와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기류와의 생성으로 세찬 바람이 사막에 일기도 하는데 차를 타고 가다나면 수백 개가 넘는 하얀 프로펠러가 좍 널어져 천천히 돌아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저 풍력 발전기 하나만 해도 10억이 넘는다는데 저런게 사막에 5000여개라니! 아주 오래전엔 바다였지만 화산 활동과 콜로라도 강의 퇴적 작용, 그리고 태평양 서북부의 특수 기후에 의해 불모의 사막이 되어버린 이곳에 인간들은 지혜와 꿈과 땀으로 거칠고 야성 충만한 대자연을 인류의 순복도구로 변신시켰다.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곧이어 내리막 구릉지, 길가의 높고 낮은 언덕 아래로 또다시 광활한 평원 지대가 펼쳐진다. 벌판엔 모두 목초지로 덮여있다. 늦여름인데도 그 목초들은 초록색이 아니라 누런 마른 풀들 같았다. 여기서 생산되는 목초는 살짝 말려서 비닐로 봉하고 질소를 넣는다고 한다. 목축의 사료로 뿐이 아닌 발효와 정제를 시킨 후의 목초의 용도는 상상 밖일 것 이란 걸 생각해본다. 정말 또 한참을 가니 초목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벌판 여기저기에 소떼와 말떼들의 방목 장면이 눈에 띄였다. 여기가 사막 지대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녹색지대는 점점 더 짙어진다. 완전 초록색 농장물들이 탐스럽고 어여쁜 자태로 차창밖으로 펼쳐진다. 각종 야채, 그밖에 오렌지, 포도, 아몬드, 등등의 농작물들이 휘휘 돌아가며 뿌려대는 수많은 스프링클러들의 시원한 물세례를 받으며 싱싱 자라고 있었다. 사막하면 끝없는 모래 평야와 모래언덕, 물을 실은 낙타가 터벅터벅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만 상상 해 오던 나로서는 생각 밖의 세상모습에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뜬 셈이다.   2,라스베거이스(LAS VEGAS) 깍아지른 듯한 누렇고 붉으스럼한 석토로 이루어진 절벽 계곡길로 고속도로는 계속된다. 곧 부서질 듯한 돌들과 붉은 바위산들이 수백 년의 변모의 전설을 장엄히 과시하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 다 와 갑니다.” 사위가 운전석에서 알려준다. 라스베이거스- 전번에 그랜드케년에 갈 때도 들렸었는데 내가 케년에 대한 환상에 젖어 이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에서 좀 오래 놀다 가자하는 애들의 의사를 모두 밀막아버렸었다.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만들어진 이 도박과 환락의 불야성-세계의 명성높은 라스베이거스! 차가 서서히 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 첫눈에 안겨오는 크다란 건축물의 현광 판-“멋진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 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란 영문판 글들이 두 눈에 안겨왔다 .스트립들로 가득 채운 고급호텔과 화려한 천국 같은 풍경이 벌써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트럼프”라는 이름의 호텔도 눈에 확 안겨온다. 트럼프의 금융계에서의 위력을 보아낼 수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서 주차를 위해 지하부터 위로 빙빙 돌아 올라가며 자리를 찾는데 도저히 빈자리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다. 7층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리 하나를 발견하였다. 도대체 이 도시에 몰려드는 사람 수는 얼마나 되는가? 후에 들은 얘기지만 연간 이리로 몰려오는 관광객은 4500만 명 이상이라 한다. 1905년에 사막위에 자리를 잡았고 1911년에 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미국에서 애클랜틱시티와 함께 유일하게 도박이 허용된 이 352㎢면적의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의 입으로 이렇게나 많은 용양이 밀려들어 가다니!   저녁이 되었으니 우리는 미리 예약해놓은 호텔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의 예약실은다른 별관으로 바뀌어 졌다고 하였다. 별관으로 힘겹게 찾아가 문을 열고 보니 이런, 침실 , 샤워 실…모두 우리 예약 해놓은 기준치와 틀렸다. 그런데다 에이콘 돌아가는 소리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아주 오래된 초창기의 호텔 같았다. 사위는 화가 나서 책임 직원께 전화를 했다. 딱한 상황이 생겨 이렇게 재 조정했으니 일부 환불해 주겠다고 하였다. 예약규칙을 함부로 변경시키고도 전화를 걸기전까지 아무 해석도 없었다는 점이 우리를 몹시 화나게 하였다. 우리는 곧바로 총경리게 직통전화를 걸었다. 몽당 환불받고 다른 호텔로 자리를 옮기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상황을 알게 된 총 경리는 바로 직원을 사직시키고 오늘밤 무료 숙식에다 다음번에 우리의 예약대로 4성급 무료 숙박까지 약속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의 마음도 가볍지가 않았다.   파리 뉴욕 베네치아 로마 리오 등 세계 모든 도시를 한곳에 모아놓은 것 같은 지구상의 유일하게 점직혀진 도시라는 의미를 새김질하며 이 자유왕국의 밤을 산책하였다.도시의 중심가이자 최대 유통지역으로 15㎞정도 거리의 메인스트립에는 최고의 볼거리, 럭셔리, 카지노 호텔 ,쇼핑물들이 즐비하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프랑스의 에펠탑, 리틀베네치아 곤돌라투어 등의 대형 조형물들, 벨라지오 호텔앞의 화려한 음악 분수쇼,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모여드는 ”태양의 서커스“ 지구상에서 가장 큰 170 메트 높이의 하이롤루와 르레브쇼, 미스트어쇼, 비 한 방울 안 내리는 이 도시엔 도처에 녹색 식목이 무성할 뿐만 아니라 하늘, 먹구름, 천둥, 비, 이런 신비한 것들도 머리위에서 진짜처럼 사람을 현혹시킨다. 세계 최고 수준의 레스토랑도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경험할 수 있으며 명품부터 아웃렛까지 선택의 폭도 아주 다양하다. 쇼핑과 엘티비티가 모두 어우러진, 그야말로 완벽한 엔터테인 맨트의 도시다. 듣자하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호텔 10개중 6개가 라스베이거스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호텔 값은 주말 빼고는 상대적으로 싸다. 즉 카지노 빼고는 라스베이거스 모든 물가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비교적 저렴하다. 말하자면 도박 하나로 승부를 걸며 도시를 충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카지노 안에서는 칵테일, 맥주, 콜라, 모든 음료가 무제한무료다. 호텔들은 모두 특별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데 카지노에 들어서면 아찔한 복장의 아가씨들이 사면팔방에서 춤을 추고 서빙을 하고 딜러를 본다. 문제는 뷔페로 가려하던 쇼핑을 하려하던 호텔밖으로 나가려하던 모두 카지노를 지나가야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숙박객은 본의 아니게 하루에도 수차례 카지노의 화려한 분위기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백화점 쇼핑물 심지어 에스켈레이트 까지 모두 카지노 중심으로 돌고 있다. 일단 손을 대면 처음엔 기필코 따게되는 운세에 걸려들어 작은 솔로머신 게임에서 10분~15분 하게 되면 야금야금 돈이 다나가게 되는데 다 털려도 별로 슬프지 않은 묘한 기분과 새로운 야심이 차오르면서 더 큰것에 손을 대게 된다. 이 도시는 이혼수속이 또한 세상 가장 간단한 것으로 유명한 “아혼도시”이기도 하다 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이 미국 각지에서 모여든다고 한다.   나도 한국 서울에 있을 때 강원도 정선에 들어가서 체험차로 작은 슬로머신에 손을 댔었는데 운좋게 첫 판에 8만원을 땄다. 더 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체험차로 왔다는 깨달음을 하며 나는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줄행랑을 놓으며 밖으로 뛰쳐나와 그 돈으로 저녁밥을 사 먹었다. 밥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점당포들이 줄지어 있었다. 돈을 다 잃은 후에는 시계나 반지를 들여대서라도 돌아 갈 차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 정선에도 온 들판에 차량들이 꽉 들어차 주차 할 자리를 찾느라 근 한시간 친구와 빙빙 돌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확천금의 꿈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으나 그기서 살아남는 행운아는 얼마나 되는가?! 라스베이거스, 아이러니한 인류 현대 문명의 도시여…                                                                                                                                                                                                                                                                                                                                                                                                                                                                                                                                                                                                                                                                                                                                                                                                                                                                                                                                                                                                                                                                                                                                                                                                                                                                                                                                                                                                                                                                                                                  
11    여행이야기-미국 탐방기(3) 댓글:  조회:692  추천:0  2019-11-22
미 국 탐 방 기 3 켈리포니아주에서의 이곳저곳   켈리포니아주는 미국 서부 해안선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주로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다. 경제 성장 성취도 역시 가장 큰 주의 하나다. 시마다 기온차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다 온화한 해양성기후를 가지고 있어 옛날 8급 지진피해역사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건축물은 시멘트 구성은 거의 없고 모두 목조와 벽돌로 이루어졌으며 건축물마다 몇 십 년의 연륜에도 변함없는 풍채를 자랑하고 있다. 로스안젤렌스에서 나는 일 년이 지나도록 비오는 날을 한두 번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강우량이 적다. 그러나 주 중심에 형성된 센트럴벨리가 있어 북쪽의 새크라맨토 강과 남쪽의 샌 호아킨 강이 새롭게 준설되면서 내륙 도시에도 몇 개의 항구가 있고 벨리의 첨단적인 운영으로 이 주의 농업, 식수 모든 것을 충분히 해결 받고 있다. 키 높은 관목 수림과 사시장철 푸르른 잔디밭과 질줄 모르는 꽃나무들은 항상 찬란한 태양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   1, 센 디아고 나는 처음 센 디아고 라는 명칭을 들었을 때 그 위치 마침 남쪽으로 맥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와 인접해 있어 무심결에 하이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속의 주인공 산티아고를 연상케 했다. 두 이름이 얼마나 근사한가? 혹 어떤 연결 고리라도 있나 싶었지만 그건 너무 엉뚱한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고장에 마음이 끌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유명한 시프러빌리지에 위치해 있는 센 디아고의 대표적 관광 명소 —미드웨이 항공모함 박물관을 보러 갔다. 이 박물관은 바다위에 실제 항공모함을 띄워놓고 박물관 형태로 개조하여 관광객이 배에 올라타서 구경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그 항공모함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임무를 수행하면서 2004년에 와서야 퇴역한 실제 항공모함이었다. 박물관 안에서는 항공모함의 실제 시설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칸칸이 당년 전쟁 시에 겪었던 상황들을 영사막으로 재연하고 해설하고 있었다. 3층까지 돌다 배가 고파 밖으로 나오니 각종 휴식 시설과 먹거리 시설들이 즐비하였다. 젊은이들은 유명했던 영화 “탑건”에서 나오는 그때 그 전투기 옆에서 기념사진들을 찍고 최고 인기를 누렸던 그 미남 주인공 톰 크로즈가 들어가 식사하던 QQ큐 식당 안으로 들어가느라 분주들 하였지만 그 영화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흥취가 없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이 항공모함 박물관을 보고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미국의 항공모함의 놀라운 조기 발전이 아니라 박물관 밖에 세워져 있는 “수병의 키스”동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 될 때 목숨을 내건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나온 나 젊은 수병이 평화의 문턱에 들어설 때 그 치솟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어 해안에 내려서면서 부딪친 낯선 젊은 간호사를 무작정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장면이다. 당시 마침 이순간이 누군가의 카메라에 잡혔다고 한다. 그 후, 이사진은 전쟁과 종전의 회지로 동상이 만들어 졌으며 박물관 문전에 세워 졌다고 한다. 저런 미친 듯한 희열의 표현, 세계 평화에 대한 갈망은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모두 똑 같은 것이다! 나는 동상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이 지구에 전쟁이 없는 날이 영원하기를 조용히 묵도하였다.   2, 유 리 교 회 드라마 “올인‘에서 배우 이병헌과 송혜교가 결혼식을 올린 유명한 유리교회가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로스엔젤렌스 서남부에 자리한 팔로스 버디스 페인슐라에 위치하고 태평양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위에 건축된 이 교회는 1951년, 이 웨이스 체플이라는 교회는 미국 현대건축의 거장으로 알려진 프랭크 로이드라이트의 아들인 프렌고 로이드가 설계하였다고 한다. ’나무채플’이라는 것을 모티브로 삼아 간결한 프레임과 유리를 이용한 설계양식으로 마치 판타지 영화 속 한 장면에 서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이 유리교회가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유명세를 타는 이유로는, 바닷가가 보이는 숲속 오솔길을 따라 신랑 신부가 예식장에 입장하면 유리지붕을 통해 마치 천사가 축복하는 듯한 찬란한 햇볕이 머리위에 아름답게 쏟아지는 정경이야말로 참으로 황홀해 진다고 한다. 그 다음에 주례를 서는 목사님의 축도가 시작될 때 감동의 음악과 숲속안의 새들도 함께 축가를 부르듯 지저귄다고 한다. 비오는 날이 거의 없는 로스엔젤렌스에서 만은 참 환상적인 예식장이 아닐 수 없다. 100여명의 하객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 했을 때는 한창 혼례식이 진행중이여서 하객이 아닌 우리는 성당안의 예식을 볼 수 없었다. 성당 정원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바라보느라니 금방 식을 올린 한 쌍의 연인이 성당밖 나무숲에 나와 정자나무 아래서 저 멀리 바다와 팔로스 버디스라는 아름답기로 이름난 도시를 바라보며 키스를 하며 정열을 아낌없이 내여 놓는 장면이 보였다. 정원에 깔려있는 벽돌 같은 블록에는 여기서 식을 올린 쌍쌍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몇 백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지금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이 성스런 성당 안에서의 맹세는 혹 잊어버린 적은 없는지…항상 생각이 많은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넓고 두툼한 잔디밭에서 마음껏 뒹굴며 정원을 꽉 채운 향기에 취해 보았다. 나의 딸과 귀여운 외손녀가 잔디밭에 앉아있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나 평화로워 보일까!   3, 스텐포드 대학, 켈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는 우리 애들은 자기 아들이 장래에 미국의 하버드대학도 좋지만 본주에 위치하고 있는 스텐포드 대학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 날 우리는 애를 데리고 온 식구가 스텐포드(StanFord) 대학을 가 보기로 하였다. 이 대학은 센프란시스코에 있다. 서부 뉴욕이며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 울 만큼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이 거대한 국제항구 도시는 뉴욕 다음으로 금융업이 발달하여 서부 지역의 금융 행정 중심지이며 상업제조업의 중추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은 음악, 예술, 그리고 맛있는 음식향수 같은 최고의 문화적 쾌락을 모두 향유하는 상위권 세련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알코올 소비량과 자살률 또한 미국 상위권에 든다. 그곳의 금문교, 아름다운 꽃동네 속에 5매트 간격으로 굽이굽이 급커브가 이어지는 유명한 러시안 힐, 푸른 바다와 대조를 이루며 붉은 빛으로 빛나는 헤이그, 일광욕을 즐기는 바다사자와 해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는 피셔맨스워프, 차이나타운…볼거리가 참말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관광은 이미 전에 끝내고 오늘의 목적지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유명대학을 찾아가는 것이다.   1891년에 릴렌드스텐드가 설립한 이 대학은 미국의 대부분 주요 대학보다 설립 역사가 짧은데 비해 ‘금세기의 가장 성공한 대학’이라는 별을 안고 있다. 역시 학부 합격률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입학하기 힘든 학교라고 한다. 학교의 넓은 캠퍼스는 얼마나 큰지 여의도의11배, 서울대학의 8배나 된단다. 그래서 재학생도 가끔씩 모르는 빌딩에서 파이널 시험이라도 치르려면 구글맵에 띄워 스마트폰으로 지점파악을 해야 된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교정 안에서도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운행을 한다. 전 세계의 명석하고 재능 있는 학생들이 모여 자신들의 커리어를 추구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6,500여명의 학부생, 1만 1,000여명의 대하원생, 4백 50여명의 유학생이 재학하는데 그중 24%는 아세아계라고 한다. 유학생을 위해 714만 달러씩 지불할 뿐만 아니라 학생 가족 연간 수입이 10만 달러 미만이면 수업료를 면제 받으며 6만 달러 미만이면 숙식비 까지 면제 받는다니 학부의 배려 심과 재력 여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독특한 입학 평가 또한 유명하다. 성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다양한 평론가들이 모여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인성, 지적열정 등등의 다양한 분야를 검토해 본다고 한다. 물론 다방면의 골고루 뛰어난 학생과 한 가지 분야에 아주 특출한 재능보유자를 받아들이는 특색 있는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016년까지 현재 역대 6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 18명의 튜링상 수상자, 2명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했다니 정말 입이 딱 벌어졌다.   연황색 벽과 붉은 타일 지붕의 건축물들, 야자수 거리 ,넓은 푸른 융단 같은 잔디밭, 교문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메모리얼처치라는 고풍스런 성당, 메인퀴드라고 불리는 35개의 2층 건물, 타이거 우즈가 재학 시 놀았다는 18롤 골프장, 제 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후버 이름을 단 후버연구소…내가 보고 들은 것만도 이렇게 많다. 하루 종일 돌아도 다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애들을 데리고 간 우리로서는 거의 많은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햇볕이 쨍쨍하여 아이스크림만 찾는 애들 때문에 우리는 좀 서늘한 “생각하는 조각정원”에서 발길 바이오산업의 기적이 치솟는 시대이다. 스텐포드 대학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자연히 그 대학이 배출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구 글 본사에 들려 둘러보았다. 구 글(GoogIellc) 이란 사람들을 도와 준다. 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구 글은 1998년에 설립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가국에 40여개의 지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콧대 높은 구 글 본사의 깃대를 보며 정원에 들어서니 역시 여기저기 자전거들이 보였다 넓은 회사 안을 오가는데 직원들이 자전거와 스코트를 이용하기 때문이란다. 일요일이서 회사는 문을 잠군 채 조용하였다. 2015년 한해 순이익만 165억 딸라나 된다고한다.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이 회사는 7시 출근 ,오후 4시 반이면 칼 퇴근을 하는데 월등한 직장 환경이며 각종 체력단련시설과 고급 호텔 같은 휴식실들, 각종 게임 룸들도 인기지만 제일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는 그들의 음식 향수이다. 그들에겐 특급 일류 요리사들로 구성된 팀이 최고급 유기농 재료로 식단을 작성하는데 하루 세끼 세계 각국 음식을 고루 맛보게 한다니 옛날 황제에 비하겠는가! 그리고 여기저기 디즈터 바들도 널려있어 간식과 음료는 자유자제로 먹을 수 있다니 살이 찔 가 봐 제일 걱정이라는 직원들의 말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역시 문제점들도 있다고 한다. 구 글의 검색 능력이 너무 대단해 개인정보 보호 면이 취약하다거나 비정규직 차별화, 권력화 및 반독점, 부실한 고객 센트 등이 있다고 하였다. 문제가 생겨 고객 센터에 상담을 요구하면 통쾌하게 해결받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탈세 문제가 부상되어 땀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또 애플본사도 대로 옆에 있었다. 1976년에 설립된 애플 주식회사는 미국의 소포트웨어 및 컴퓨터 하드웨어 산업 하는 회사다. 스티브잡스, 위즈니 악과, 론 웨인 등 세 명이 창립자라고 한다. 이 회사에 대해 내가 제일 궁금한 것은 회사 로그에 대한 유래였다. 저 사과는 왜 한입 물어 먹었을까? 이번에 나는 그 유래를 들었다. 알고 보니 컴퓨터의 이론을 확립한 앨런튜링이 독이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죽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더욱 유력한 설은 성경에 나온 아담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물어 인류의 운명이 바뀐 것처럼 컴퓨터가 장래 인류의 문명을 바꿀 거라는 스티브잡스의 확신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 전망이 있는 예언이었다. 지금은 세계스마트폰 94%를 차지하는 회사라고 한다. 그러나 한동안은 유해물질 사용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4,사파리 공원, 그리고… 디즈니 위인 록에 심취되어있는 손자 놈이 아침부터 또 디즈니랜드에 가자고 졸라댔다. 이미 몇 번을 갔고 세상이 다 잘 아는 할리우드의 풍격도 맘껏 향수 했었다. 오늘은 애를 설득하여 센디아고에 있는 사파리 공원에 가기로 했다 생태적인 동물현장 체험이 애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센디에고 도심에서 30여분 차를 타고가면 에스콘 디도라는 소도시가 있는데 그 근처에 사파리 공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공원에 가보면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국 동물들, 특히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동물들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우리를 유혹하였다. 8월의 뜨거운 햇살아래 땀벌창이 되어 들어서는 우리에게 무성한 숲의 입구에는 안개처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냉증기가 우리를 시원히 맞아주고 있었다. 우리는 티켓을 사고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46개의 안락의자가 구비되어 있는 사파리 텐트, 즉 트램을 타고 광활한 대자연속에서 제 멋대로 생활하고 있는 생생한 동물관람에 나섰다. 이 동물공원의 면적은 1800에이크, 300여종의 동물이 생활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초식동물이 위주였다.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캥거루, 혈기왕성한 태즈매니아 주머니 곰, 기다란 목을 움츠릴 줄 모르는 기린, 코뿔소, 가젤, 양양…놈들은 이 인간 행렬과는 추호의 상관도 없는 듯이 느릿느릿 돌아다니며 제 하고픈 일들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옆에 귀여운 자이언트판다가 눈이 둥그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앞 석에 앉은 댓살 난 아주 예쁘게 생긴 미국 여자애가 손 벽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웃으며 속으로 네가 더 예쁘고 귀여워 라고 찬탄하였다. 아프리카 사자는 작은 텐트차량 뚜껑에 벌렁 누워 아랑곳없이 잠만 자고 있었다. 참 웃기는 놈이다. 위로 보니 열기구를 타고 날며 넓은 들판의 동물들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코끼리 계곡입구에는 캠프장이 있는데 아프리카 평야가 바로 앞이라고 한다. 그곳에 투숙하면 밤중에 아프리카 동물들의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지역의 강렬한 햇볕과 건조한 기후에 잘 적응하는 수천 종류의 나무들이 여러 대륙에서 옮겨와 잘들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애들은 작은 산양들 앞에 가서 건초를 먹이며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 했으며 할로원 축제에서 크리피 캠프에 들어가 유령과 오싹한 동물들의 갑작출연에 놀라면서도 좋아하였다. 마지막엔 선물까지 가지고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쿠아리움(수족관)에 가자고 애가 졸랐다. 그리 크지 않은 아쿠아리움이었다. 수족관은 어디나 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인상이 깊은 것은 송사리가 먹는다는 플라크톤, 그런데 그 플라크톤이란 것은 현미경으로 들어다 보았는데 그 미세 정도가 보통 미세먼지의 두 배 정도니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 즉 그것은 식물과 동물의 합성 물체라고 하였다. 물론 그 외 어느 수정관에서나 볼 수 있는 송사리, 상어, 해파리, 불가사리, 문어, 앞에 장애물을 헤치는갈구리 같은 것을 이마에 달고있는 아귀, 투명한 명주 같은 너울가지를 입고 있는 문 젤리…애들은 좋아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직접 물고기를 만져 보며 놀 수 있는 작은 시넷물 장소 같은 체험프로도 있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은 아쿠아리움을 나서며 즐겁게 산책할 수 있는 바다가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보트놀이도 가능했다. 배고픔을 달래려 우리는 급급히 근처의 태국 전통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도 태국 특징인 불교의 짙은 풍미가 곳곳에서 표현되고 있었다. 이름 모를 태국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도 남기까지 하였어도 나는 어쩐지 뭔가 좀 부족한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니 럭키가 꼬리를 저으며 반겨 날리었다.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금방 느꼈다. 그렇지, 이런 날엔 한국 신 라면을 꼭 먹어야 지성이 풀리는 것이다. 나와 딸은 한 봉지를 터뜨려 삶아 둘이서 후룩후룩 그 부족함을 채웠다.   2017, 11, 2 서울에서
10    여행이야기-미국탐방기(2) 댓글:  조회:667  추천:0  2019-11-22
미국 탐방기 2 미국 생활의 이모저모 낯선 풍경들   비행기를 타고 켈리포니아주 로스안젤렌스 공항에 내렸다. 새벽이었다. 딸과 사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청신한 새벽 공기를 헤가르며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토렌스에 있는 집으로 달렸다. 토렌스가 켈리포니아주에서 노후생활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서 애들은 나에게 토렌스에서 노후생활을 보낼 것을 권장 하였다. 나는 웃기만 하였다. 이미 몇 번째로 되는 토렌스에서의 낯선 미국생활을 나는 경험했기 때문이다.   토랜스의 자택과 교통 토랜스의 자택은 대부분이 별장식 전원주택이다. 주택 앞뒤로 펼쳐진 잔디밭, 과일과 꽃나무들, 겨울과 여름이 따로 없는, 사시장철 상쾌한 바닷바람을 품고 찬란하게 웃어주는 햇빛과 가슴을 씻어주는 청신한 공기…대자연이 준 혜택들이다. 이 터전이 얼마나 오랜 세월 평화롭게 살아왔는지 이곳의 가옥들은 대부분 오륙십년씩 된 연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한 견고함과 정교함으로 풍채를 자랑하고들 있었다. 집안의 가전제품들은 물론 인테리어들도 여전한 현대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뉴욕이나 워싱톤 같이 아파트가 빼곡한 대형 도시를 내어 놓고는 이렇게 별장식 전원주택에 사는 땅이 넓고 인구가 적은 곳에서는 집집마다, 사람마다 모두 자가용을 몰고 다니니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야한다.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스도 어쩌다 한번씩 있지만 영어가 능통치 못한 나 같은 경우에는 불안해 탈수가 없다. 친구들이 커피숍에 한번 모이는데도 모두 자가용을 몰고 가 모인다 나의 친구 하나가 역시 켈리포니아 주에 있는 딸네 집에서 시민권을 신청해 놓고 살고 있는데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한번 놀려오려 오랜 시간 벼루었지만 자식들이 차로 둬시간 실어다 줘야 하는 바쁜 일상에 제대로 여유를 만들 수 없어 계속 안타까운 전화만 오고 있었다. 끝네는 내가 딸과 함께 차를 타고 하루 품을 놓고 찾아갔다. 친구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그 친구는 외로워 재미없다며 괜히 시민권을 신청했다고 속상해 하였다. 솔직히 말해 나의 남편도 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적응되지 않아 여행을 가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 럭키(개 )와 노는 것이 취미다. 몇 발자국이면 지하철에 도달할 수 있고 거미줄 같은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나이가 얼마가 되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서울의 교통을 생각해 보니 그곳에서 나라의 노후연금이 아무리 돈둑해도 살고 싶지 않았다.   켈리포니아 주의 인 앤 아웃버거(In-N-Out)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보면 이탈리아는 피자, 프랑스는 바케트, 일본은 초밥, 미국은 햄버거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켈리포니아주에 가면 미국 전역으로 유명한 맥도날도를 앞지른 인 앤 아웃버거란 것이 있다. 이 버거는 켈리포니아주 어바인에 본사를 두고 서부 5개 주에 매장을 운영하는 즉석식 매장 연쇄점이다. 미국에만 존재하며 메뉴판에 오로지 버거와 프렌치 프라이, 그리고 음료뿐인 인 앤 아웃버거가 그처럼 문전 성사를 이루며 명성높이 성공한 비결은 바로 다른 페스트푸드와는 다른 신선함과 정직함-상업도덕성에 있다고 한다. 그들은 냉동이 아닌 냉장 패티를 사용하며 프랜치 프라이 역시 즉석에서 통감자를 썰어 튀겨내고 가격까지 아주 합리적이다. 신선한 재료의 유통을 위해 해외 매장은 한군데도 두지 않는다고 한다. 생고기의 질감과 육즙이 그대로 느껴지는 갓 구은 패티, 그리고 신선한 채소들의 조합, 아일렌드 소스와 쫀득하게 녹아내리는 치즈 한 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밀가루 음식을 완전 싫어하는 내가 켈리포니아주에 가면 꼭 이 버거를 사먹는 메니아가 되었으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매번 버거를 사먹고 나올 때 면 문에 걸린 인 앤 아웃버거의 표지간판 –노란 화살표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왜 아웃이라 했을까? 아이폰 애플이 사과 표지에 기어이 한입 물어버린 표시를 지금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듯 이것도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주말 브런치(Brun ch)와 韮菜盒子(부추속전병)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사위가 오늘같은 주말엔 브런치를 한단다. 즉 아침 식사와 점심식사를 대신하여 그 중간 시간에 먹는 식사란다. 한국에도 젊은 층에는 이런 식사가 있는데 속어로 아점이라 간칭하고 들 있다. 우리가 근사한 브런치를 하러 차를 몰고 간곳은 팬케이크 하우스였다. 9시반 이었는데 차가 식당 정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차장을 다 채운 차량들과 정원에서 서성이며 대기하고 있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었다. 11시가 거의 다 되여서야 식당 안에 들어서는데 역시 실내를 꽉 채운 손님들이었다. 오물렛, 팬케익, 버터 베이글, 쵸클렛베이글 그 외에도 이름모를…무한리필의 가종 음료, 큰접시에 수북수북 담은 양이 얼마나 많은지 미국사람들의 비만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주말 아침 식습관을 보여주는 낯선 풍경이었다. 주말아침 느슨히 일어나 식당서 맛나는 식사를 끝마치고 소풍과 주말 여행을 떠난단다.   그 다음 주말이었다. 남편이 말했다. 그 버런치인지 뭔지 그만 둡시다 시간도 너무 낭비고 우리입맛엔 별로야- 그래서 나는 좀 일찍 일어나 애들이 좋아하는 부추속 전병을 해 주기로 했다. 계란을 볶아 부추와 버무려 속을 만들었다. 뒤를 이어 나온 남편이 자기도 돕겠다며 반죽은 자기 몫이란다. 내가 속을 다 만들고 남편이 만들어 놓은 밀가루 반죽을 찾는데 뒤늦게 나온 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건 팬케이크 가루인데?-- 뭐? 남편도 나도 모두 깜작 놀랐다. 밀가루 봉지가 몇 개 가지런히 줄져 있는 중에서 봉투가 뜯기여 있는 것을 이미 쓰던것이라 여겨 무작정 꺼내어 반죽을 한 것이다. 하긴 하단에 작은 영문 표시가 있었고 팬케이크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뒤따라 나온 사위가 눈치있게 장인 편을 들어준다. 괜찮아요 더 맛일수도 있어요- 만들어 놓고 보니 케이크처럼 잔득 부풀어져 있는 모양새가 빵도 아니고 부추속 전병은 더욱 아니었다. 맛? 달짝지근하니 부추의 상큼한맛도 도망가고 또 부추 땜에 케이크의 고소한맛도 전무!… 손주놈 무작정 젓가락 놓아버리고 딸과 사위는 슬금슬금 눈치 보며 무작정 입에 구겨넣는데 일 저지른 내 남편만 맛있다고 허세를 부리며 먹고 있다. 휴, 웃을가, 화낼까? 환경의 변화는 이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미국의 ₵ 99 점포   미국에는 재래시장이라는 것이 없고 보통 마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코스트코(CosTco)에 가서 장을 보고 필요한 용품들을 산다. 그런데 알다시피 코스트코의 물건들이란 것은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질도 보장이 되지만 큰 포장을 그대로 사야하는 특점이 있어 한번 차를 몰고 가서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면 어느새 차안이 그득해진다. 그만큼 한 번에 묵 돈이 들어간다는 소리다. 이것은 중하층 생활권과 영세민들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들에게 알맞은 쇼핑을 하고 있을까? 미국이란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군데군데 ₵99 stcr 이라는 점포를 흔히 보게 된다. 즉 미화99불 점포이다. 매 상품 가격대가 99불이란 뜻이다. 물론 한국에도 천원점포가 가끔 선을 보인다. 그러나 그 천원이라는 것은 극히 범위가 좁은 일상 용 잡화에 그친다. 미국의 이 점포는 완전 다르다. 상품 구성내용을 보면 쌀, 밀가루, 각종 야채 먹거리, 일용잡회, 청소용품, 문구와 간단완구, 과일 각종 장식용품, 생화…등등 거의 백화점이다. 물론 쌀 같은 큰 포장은 99불은 아니어도 다른 점포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판매한다. 생활에 필요한 것이 거의 다 있다. 어떻게 이렇게 저렴할 수가 있는가? 각종 산품은 성수기호수 출하시 저가격으로 매입하여 일시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정부가 이런 특별한 도매밴드를 지원하여 빈곤층과 영세민들에게 공급하도록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황의 미국 서민들에게 아주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나의 남편도 툭탁하면 자전거를 타고 그 점포로 달려가서 마침마침 금방 들어온 물건들을 사들고 와서는 기분이 좋아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큰 소리로 외친다 - 야 이것봐, 이렇게 좋은게 99불밖에 아니라니! 코스코 구매밖에 모르는 애들은 머리를 갸우뚱하고 눈을 크게 뜬다. 과일 같은건 한창 성수기 때는 정말 그저 가져오는 감이 든다. 한국에서 팔고 잇는 체리- 즉 미국앵두이다. 시장에 들어가 보면 체리 파는 앞에는 항상 그 비상한 효능을 잔뜩 써 붙혀 놓았다. 몸에 그렇게 좋다니 소풍가는 손주놈에게 5천원 어치를 사 줬다. 그런데 정말 생각보다도 너무 조금이었다. 비싸다는 생각에 더는 사먹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99불 점포에 툭탁하면 달려가 실컷 먹어 보며 입맛을 해갈 하였다.   미국에서의 아동“보호” 그날 아침엔 애들을 데리고 레고랜드에 놀려 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도착거리 까지가 3시간 정도인데 아침 일찍 떠나야 길이 막히지 않는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난 손주놈의 정서가 아주 저락되어있었다. 빨리 준비하여 일찍 떠나야 하는데 밥도 안 먹고 짜증만 낸다. 엄마 아빠가 한마디씩 하자 점점 더 짜증을 부린다. 옆에 있던 아빠가 한쪽으로 데려가 뭐라고 한마디 훈계하는 것 같았다. -나 안갈거야! 그리곤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에 시동을 걸며 아무리 얼리고 불러도 그럴수록 거리 저쪽으로 더 멀리 달아난다. 저 엄마 아빠가 할 수없이 차를 몰고 따라라가며 빨리 올라타라고 아무리 얼리며 재촉해도 No! -죤, 우린 간다- 아들 이름을 화나게 부르며 그들은 떠나버렸다. 떠나는 차를 본 다음에야 손주놈은 슬슬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를 지났을까? 떠난 줄 만 알았던 차가 어디서 한 바퀴 돌고 반대 방향으로 해서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아들을 마주해 들어오고 있다. 집 앞에서 보니 저 엄마가 차에서 내려 뭐라고 한참 설득 중이다. 아바도 내려와 설득 중이다. -아빠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 큰소리로 외치는 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널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되돌아 왔겠니? 제 에미의 거의 울부짖는 소리다! 멀리서 듣고 있는 나는 화가 치밀어 죽을 지경이다. 저런 놈은 그저 팽개치고 갔다 와서 단단히 버릇을 고쳐줘야 해! 끝내 애를 차에 태워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탄하였다. 그래서 저녁에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한소리 하였다. 그러자 딸이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친구 중국인의 얘기란다. 한번은 그 친구가 너무 화가나 10살 된 아들의 뺨을 쳤단다. 밖으로 뛰쳐나가며 엉엉 우는 아들애의 모습을 본 이웃(미국인)이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정원에 경찰 둘이 들어 닥친 것을 본 아들이 중국말로 저 엄마에게 –아무일도 없었다고 해요-하고 짧은 부탁을 했다. 그리곤 경찰이 왜 우느냐? 너의 부모가 너를 때렸느냐? 등의 질문을 했다. 아이는 유창한 영어로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요, 그저 가끔 이렇게 떼질 한번씩 해요!- 그래도 경찰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두 부모를 세워놓고 질문하였다-글쎄요, 제가 왜 가끔 소리쳐 우는지 우리도 알아봐야겠어요. 그들도 알고 있었다. 원인을 막론하고 부모라도 애를 때렸다고 승인하면 경찰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고 억류당하고 벌금 한다. 좀 더 심각하다 생각하면 부모의 자격이 없다고 국가에 맡겼다 다른 집에 입양 시킨다. 그렇게 경찰이 아무 단서 없이 떠나긴 했어도 3달동안 계속 그 집 주위를 연행하며 감시했고 가끔은 집에 까지 들려 냉장고까지 열어보며 애를 제대로 먹이고 있는 집인가, 가만히 학대하지 않는가 등등을 확인해 보더란 것이다. 또 한 번은 초등학교의 담임이 학생들에게 집에서 학생들 샤워할 때 누가 도와주는가를 테스터 하였다고 한다. 애들은 모두 솔직한 대답을 하였다. 그 중 12살 난 여학생이 자기는 엄마가 없어 아빠가 도와서 씻어준다고 하였다. 선생님은 조용히 그 나이면 혼자 얼마든지 씻을 수 있지 않느냐 했더니 아빠가 마음을 못 놓는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여 그 아이는 다른 집으로 입양 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도 몇 번을 경찰의 호출에 곤혹을 먹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애를 차에 태워 쇼핑하러 가서 차안에서 애가 자고 있어 잠간이면 되지싶어 쇼핑몰에 들어섰다가 경찰에 발각 되는 날이면 벌금당하고 애를 빼앗기고 …이런 일이 어렵지 않게 발생한단다. 참 우리에겐 생소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쓰레기 분리수거 미국의 쓰레기 분리수거도 참 우리를 놀랍게 한다. 공원이나 공공장소 어디에나 커다란 뚜껑달린 철물 쓰레기통이 있는데 재활용, 일반쓰레기, 음식물쓰레기 할 것 없이 무조건 한통에 다 쏟아 버리는 것이다. 가정주택에는 대형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3개씩 되는데 검정(일반스레기), 회색(종이류), 파랑(정원 정리에서 나온 나무,풀) 등으로 분리 되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것을 꼭 지키는 감시 시스템도 없고 말하는 사람도 없으며 그저 쟈율에 맡기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도 작은 것은 싱크대 하수구 입구에서 직접 분쇄되여 흘러가고 큰 것은 아무 쓰레기통에나 쏟아 버린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일회용품들도 가차 없이 아무 쓰레기통에나 마구 던져진다. 재활이란걸 모른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시청 환경 관리국에서 대형트럭이 와서 집집마다의 그 큰 13 갤런의 쓰레기통을 커다란 집게손이 번쩍 들어 짐차에 꺼꾸러 푹푹 쏟아버린다. 특히는 얼마나 큰 가구나 물건들도 내여놓으면 언제인지 모르게 다 실어가 버린다. 한국에선 큰 가구 가전제품 등 은 동 사무에서 딱지를 사다 일일이 붙여야 하고 재활용품과 음식물 쓰레기는 신경을 써 엄밀히 분리한다. 더욱 골치 아픈 것은 보통 생활에서 패기 되어 나오는 큰 트렁크나 바퀴 달린 큰 장바구니 같은 것들은 쓰레기봉투에도 들어가지 않고 도대체 어디에다 분리할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구석구석 무단투기가 되어버리는 경우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국은 정말 아주 편안해서 무단투기라는 딱지는 절대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냉정히 생각해 본다.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규제하고 각 나라의 환경보존을 주장하는 선진국-미국, 그들은 인구가 적고 넓은땅, 풍족한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우월성을 이용해 이 모든 쓰레기를 대부분 재활 필요 없이 불모지에 화학 처리해 매몰시킨다. 화학처리 과정의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세상에 넘쳐나는 플라스틱 제품들이 일회용으로 다 소각되어 버리다니! 자원이 풍족하고 인력이 비싼 그 나라에서는 재활하는 과정이 더 큰 경제적 손실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나보다.      
9    ㅁ여행이야기ㅡ미국탐방 기 (1) 댓글:  조회:753  추천:0  2019-11-22
미국 탐방기 1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자유여행의 작은 이야기들. 가다 서고 섰다 다시 가는 두서없는 행선이었다. 그 속에서 몰려오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과 기진맥진한 피로…그래도 사람들은 소중한 돈과 시간, 체력을 투자하며 길을 떠난다. 그것은 그 낯선 세상과 문화가 가져다 주는 신비함과 감동이 움츠린 내 가슴의 용속함을 풀어주며 내 머릿속에 지울 수 없는 보석같은 추억이란 것을 심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1, 세계 여행지의 진주―하와이   나는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꾜에 내려 몇 시간이란 환승시간을 기다려 하와이를 향한 비행기에 올랐다. 하와이 하면 애들과 함께 한국 KBS방송 ‘골든밸 ’프로를 즐기다가 수학여행을 늘 하와이로 보내는 것을 보면서 점을 찍어 두던 곳이다. 매번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의 습관대로 나는 먼저 위키백과를 통해 사전 답사를 한다. “하와이 주는 태평양의 하와이 제도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폴리네시아 민족의 땅으로 여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으나 1959년, 8월21일,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이 되었다. 본토에서 370km 떨어져 있는 해외 최 남단주이다. 하와이 섬, 마우이 섬, 오하우 섬, 몰로카이 섬등의주요8개의섬과 100개 이상의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도(州都)는 호놀루루이다.”   그러고보니 비행기에서 내린 공항이 바로 호놀루루었다. 호놀루루는 하와이어로 ‘보호받는곳“이란 뜻이라 했다. 어떻게 보면 불안정했던 그의 역사가 남긴 아픔인 것 같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투숙하게된 호텔은 와이키키비치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번화한 상가와 즐비한 음식점들, 아름다운 바다가 눈앞에 다가오는 너무 좋은 위치였다. 나는 짐을 풀고 거리로 나갔다.   세계에서 아세아인들이 제일 즐기는 유람지며 세계 최고의 휴양지라는 말답게 별의별 복장을 한, 각양가색의 유람객들이 거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유분방하게 자기들이 좋아하는 형형색색으로 온 거리를 채색 무지개마냥 장식하고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인들의 숨트이게 내여놓은 앞가슴과 엉덩이들, 그리고 여러가지 야생화 같은 꽃 머리띠를 머리에 두르고 다니는 모습이었다. 나도 꽃화환을 머리에 얹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었다. 상가에 들어서면 ABC란 마트가 연이어 눈에 띄우는데 모두 이고장 50%를 차지하는 일본인들이 가게 주인이라고 하였다. 하와이 하루 기준으로 한국사람은 제일 많이 오는날이 200명인데 비하여 일본인은 평균 6000명이라니 모든 상권과 관광업에서 자연 한국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보다는 일본인이 우세를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와이키키 해변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카일루아 비치도 다가왔다 세계 3대 비치로, 미국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비치 1위로 등록된 해변중의 하나다.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오게 하는, 말그대로 에메랄드색 바다, 하늘과 바다는 모두 파란색이라고만 일괄 짓던 나는 이때 정말 파란 하늘색과 아름다운 바다색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 파도를 가르며 서핑을 즐기는 람들, 햇볕은 뜨거운데 선들선들 얼굴을 식혀주는 바닷바람, 얼굴을 덮고 백사장에 누워 번들번들 근육을 구을리는 사람들, 그리고 파라데이소에 누워 책을 읽거나 소담을 즐기는 한가로운 모습 그대로가 요양지가 따로 없어 보였다. 또 한참 걸으니 방파제로 바다 파도를 인공적으로 막아놓아 너무 깊지도 않고 파도도 없어 부모들을 따라 유람길에 오른 어린 애들이 바다에서 애기 고래들처럼 펄덕이며 즐기고 있었다. (사진) 비치를 둘러싼 공원가를 걷노라니 줄기인지 뿌리인지 모를 키높은 무성한 나무들이 종종 눈에 띄였다. 이고장의 특종 나무였다. 알고보니 반얀트리 나무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아마 榕樹라고 하는 나무인 것 같았다. 나는 처음보는 나무인지라 한참을 서서 살펴보았다. 반얀트리는 수많은 가지가 땅으로 뼏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뿌리가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내려오고 땅에 닿은 뿌리로 다시 가지가 지주근(支柱根)이되어 하늘로 뻗어 자라는 굉장한 생명나무였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감에 있었어도 이런 천방백계를 다하는 생명력이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하랴!(사진)   하와이 하면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던지게 한 도화선―진주만전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하와이에서 공용버스 이용은 그리 편리하지 못하다. 진주만까지 가는데 버스가 있다고 하여 버스를 정류소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탈 수 있었고 또 환승을 위해 또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 일본 군대가 태평양 미군기지에 있는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새벽 4시에 돌연 습격하여 천척의 배가 침몰되고 10여만의 군대가 사망되었다고 한다. 그 화근으로 45년도에 미국은 일본 도꾜에 원자탄 2개를 떨어뜨려 30~40만명의 살상을 내였다. 인과보응이란 단어가 자연히 떠오른다. 그러나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지금 미국과 일본은 떨어질 수 없는 우방이지 않은가! 전쟁기념관은 침몰되였던 배안에 설치되여 있었다. 나는 사전 예약이 없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당시 배와 운명을 같이한 1200여명의 에리조나 해군장병을 기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유람객 속에 일본인들도 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먼 태평양을 바라보며 삼라만장이 잠든 그 고요한 새벽에 벌어진 그 끔찍한 참사를 상상해 보았다.   하와이 오하우 섬에는 다이아 몬드헤드산이란 것이 있다. 이름을 들어면 멀리서 봐도 엄청 반짝거리는 산일 것이라 생각이 들것이다. 그러나 올려다보니 정반대로 반석,돌덩어리들로 이루어진 , 헤드높이 232m에 나무 몇포기 안되는 민둥산이었다. 알고보니 하나의 사화산인데 산 정상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있었다. 옛날에 일어난 화산폭발로 지금의 모습이 형성되였다. 다이아몬드헤드산이라 불리운 이유는 먼 바다에서 항해하다 돌아오면 산이 빛을 뿌리듯 빤작거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 왕복2시간이 걸리는 등반시간에 꼬불꼬불 흙,돌자갈길을 걸어서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몇 번의 높은 계단을 올라야 되는데 나는 체력이 딸려 땀벌창에 짜증에 휴~ 그런데 앞을 보니 댓살난 여자애가 앞에서 열심히 걷고 있었다. 내가 정말 늙긴 늙었나 보다 그래서 다시 힘을 돋구어 부지런히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상에 올라`파란 하늘을 이고 맞받아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눈에 안겨오는 전체적인 와이키키를 보게되는 순간 모든 피로가 일소되었다. (사진)   점심과 저녁은 항상 밖에서 당지의 음식을 찾아 먹었다. 그러나 아침식사는 호텔메뉴를 따랐다. 여러 가지 뷔페식 메뉴가 나왔는데 스크램불 네그 베이컨 포테이트 프렌치 토스토 또는 와플 씨리얼 제철과일 요거트 다양한 종류의 빵과 쥬스 우유 ,그기다 아세아사람들이 많은 점을 감안하여 쌀밥, 일본식 멀건 된장국, 한국식 아주 짠 배추김치가 있었다. 이만하면 정말 훌륭한 식단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한창 식사를 하다 옆을 보니 30대 부부인 듯한 일본인 젊은이가 식탁에 앉아 쌀밥 한 공기를 가져다 놓고 주머니에서 작은 치약 같은걸 꺼내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비행기 탑승때 내여준 고추장 같았다. 그것을 꾹 짜서 밥에 얹더니 아무것도 곁들지 않고 그것만 쓱쓱 비벼 먹는 것이었다. 헐, 음식 문화와 식습관의 완고함을 다시 한번 심히 느꼈다. 여행에서 집밥을 동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와이여행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플리네시아 문화센트 방문이다. 남태평양 소재 섬들을 모티브로 재현해 놓은 종합테마파크 pcc는, 와이키키에서 한시간거리에 열대 야자수가 우거진 16만8천㎡ 의 광대한 부지에 7개섬 원주민들의 전통 생활양식과 문화를 집대성해 놓았다. 그들의 전쟁춤, 불꽃춤. 전통혼례식, 태초에 불을 지폈던 일, 나무를 쪼아만든 티키상, 등등을 그들은 황홀한 에니메이션을 동반해 대형연극 서사시로 연출해 보여줬다. 그리고 화려한 하와이훌라댄스 배우기, 하늘높이 솟아오른 야자수에 맨발로 올라가기 등등의 쇼와 귀신동굴구경 볼트놀이 등 볼거리가 너무 많아 어느듯 해가지는지도 몰랐다. 문화센트에서 공급하는 점식식사도 거의 호텔식 뷔페에 가까운데다 원주민들의 전통음식까지 곁들여 먹거리가 참 풍성하였다. 아참, 좋았어요 “아로하” (안녕 이란 뜻, 원주민들의 인사말)! (사진)   근 일주일의 관광을 마치고 호놀루루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 황궁 박물관―이올라니 궁전을 둘러보았다. 1882년, 하와이 왕국의 칼라카우아 왕이 건설하고 1893년, 하와이 왕국 최후의 군주(여왕) 릴리우오 칼라이가 페위하여 고궁이 되였다 한다. 지금은 미국영토의 유일한 궁전이 되였다고 했다. 유람객이 많지 않았다. 한적하고 풍경 좋은 정원엔 옛 궁전때 부터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교향악단이 많지 않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고전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이 일요일이여선지 궁전안은 들어갈 수 없어 나는 반시간 정도의 외경을 돌며 사진을 찍고 점심 식사할 자리를 찾기 위해 나와 버렸다. 한 한국 식당하나를 간신히 찾아내어 오랜만에 순두부찌개를 시켜 먹었는데 화장실을 찾는 게 문제가 되었다. 꾀 멀리 떨어져 있는 월마트를 찾아 가란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길에서 일본음식점이던 당지 음식점이던 거의 다 식당 안에 화장실이 없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두다 어느 어느 대형마트를 가르키며 안내를 해 주었다. 한국에서 음식점들 대개가 화장실을 겸하고 있던 생활에 습관된 나로서는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땅값이 금값이여서 조그만한 가게하나 사서 설치하기도 힘드니 화장실 겸용은 아예 생각도 않는걸가? 여행은 항상 불편함을 감안해야 되는거다. 공항에서 나는 다시 켈리포니아주 로스애젤레스로 날아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    가을의 향연 댓글:  조회:761  추천:0  2019-11-21
가을의 향연 류재순 조용한 멜로디가 내 귀가로 흘러들어 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6시, 시원하고 경쾌한 기운이 밤새 답답이 숨을 죽이고 있던 내 폐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스며든다. 매일 시작되는 나의 아침 산책ㅡ빠른 걷기 운동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리 아래 영등포 수변 둘레길, 도림천 둘레길에 이르게 된다. 가을이다. 9월의 가을은 아직은 완연한 황금빛과 단풍 빛이 아닌 녹색의 미련들을 머리에 버티고 있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생긴 황갈빛이 녹음의 원숙이 남아있는 그 독특한 진녹색을 헤치고 언뜻언뜻 선을 보이고 있다. 발효된 내음 같은 것이 저 멀리 숲속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다가와 계절의 발걸음 소리를 노크 한다. 짙은 보랏빛, 연두빛 , 핑크빛 새벽 나팔꽃들이 싱싱히 피여서 길 량 옆을 수놓고 있다. 저 야트막한 오른쪽 둔덕길에는 넓은 부영 꽃 밭, 그리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길 량 옆 흐트러진 풀숲에서는 타닥타닥 무엇인가 여물어 가는 소리, 채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걷는 산책길 옆 자전거 도로는 벌써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비둘기들의 구구 소리, 까치들의 깍깍 반가운 소리와 모습이 자전거 행렬 속에서 흩어졌다 모였다 바쁜 날개 짓을 한다. “ 누님, 좋은 아침!” 칼칼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젊은 아저씨가 나에게 건네는 인사말,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아침운동에서 익숙해진 얼굴이다. 어쩐지 기분이 업그레이드 된다. 이름 모를 설레임과 즐거움을 안고 가슴을 쭉 펴고 뒤 발꿈치를 먼저 땅에 부착 시키며 제대로 된 걷기운동 자세로 활기차게 걸어간다. 생활 패턴이 각자 다른 낯설고 낯익은 사람들이 앞뒤로 스쳐 지나며 나름대로의 자태로 열심히 걷고 뛰는 행렬 속에서 나는 생명이 자기의 연장선을 위한 갈구와 분투의 소리를 듣는다. 길 양 옆의 가로수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성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기다란 녹색 터널ㅡ구로 올레길은 내가 꼭 거치는 코스다. 그곳엔 즐비한 운동기구와 다문다문 세워져 있는 시목( 诗木 ) 들이 넘 좋다. 여기에 오면 나는 동반하던 음악을 끄고 물 안개마냥 끝없이 피여 오르는 내 사색의 해양에서 유영 하게 된다. 눈앞엔 윤동주 시인의 “코스모스” 시목이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써늘이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 간다...“ 나도 소녀 시절의 안타까웠던 첫 사랑을 떠 올린다.그 여운은 오랜 세월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과는 저기 걷고 있는 노부부들처럼 한번도 정답게 나란히 손을 잡고 다닌 적 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본분과 직책을 다하며 지금의 이 가정을 지켜 왔다. 어느날 나는 약을 입에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난 어떻 하라구..” 내 입 옆에서 약을 든 손이 가볍게 떨리며 말하는 남편의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여 더 약을 먹을 수 가 없었다. 무심히 덤덤하게 같이 걸어 온 세월, 언제 이렇게 하나가 되였나, 그것은 분명 봄, 여름, 그리고 냉냉한 겨울도 겪었던,오랜 기간 발효된 탁주 같은 취향(醉香)ㅡ.오늘의 향연이였다 . 올레길을 내려와 다시 도림천 둘레길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에서 휠체어 하나가 다가온다. 벌써 며칠 째인가 오늘은 어쩐지 눈길이 자꾸 휠체어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휠체어를 미는 여인의 긴 생머리가 아침 바람에 가볍게 흩으러지고 있다. 그 앞 휠체어에는 70대쯤 되여 보이는 할아버지가 힘없이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앉아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늦어진다. 오늘은 휠체어 한쪽에 예쁜 코스모스 몇 송이가 걸려 있다. 휠체어가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서히 옆으로 지나간다. “ 아빠, 눈 좀 뜨고 이 꽃 좀 봐요” 젊은 여인의 말이다. “ 애 데리고 매일 출근길도 바쁜데... ” 힘은 없으나 분명한 뜻이 전달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씀 이였다. 나는 금방 머리에 감이 왔다. 무엇인가 좀 더 듣고 싶은데 휠체어와 나의 간격은 벌써 멀리 떨어져 버렸다.. 이 세월에 조금은 낯선듯 한 오늘의 풍경,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또다시 스펀지마냥 무겁게 퍼져 나가는 나의 생각...진주보다 더 귀한 자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글타글 키우느라 아빠가 보낸 그 겨울, 봄, 여름의 헌신과 고투를 생각 해 본다. 그 무게는 저 늙고 병든 몸에 무겁게 무겁게 쌓여져 있을 것이다. 그 무거움에 비해 아침마다 병든 아빠의 건강을 위해 휠체어 산책에 나선 딸자식의 마음은 어쩌면 아빠의 넓은 바다 같은 수심의 몇 방울의 무게 뿐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어이하여 지금 이 가을 햇빛 아래서 이처럼 오색령롱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끝없이 높고 파아란 하늘, 자갈돌 위에 돌돌 굴러가는 맑은 개천 물, 늦은 사랑에 심취되어 예쁜 끼를 한 것 뽐내는 아름다운 들꽃들,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곡식, 이제 곧 불타는 단풍이 올 것이고 바야흐로 풍요로운 황금 들녘이 펼쳐 질 것이다. 이 속에는 지나간 날 언 땅을 비집고 일어선 봄 새싹들의 의지와 갈구, 한 여름의 무성한 성장 진통이 수렴 되여 있다. 정말 뿌려놓았던 모든 것이 가식 없이 결실을 드러내는 긴 장막극의 에필로그다. 나도 지나간 나의 세월들을 반추해 본다. 열차 밖의 풍경처럼 언뜻언뜻 지났던 한번밖에 스칠 수 없었던 그 매매일의 “현재”를 혹 “다음 역에서 보자”는 게으름의 빙자로 모두 무심이 흘려버리지 않았는지?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센티멘탈의 우수가 밀려온다. 그것은 항상 부족함의 기아를 안고 사는 인간의 상정 이라기 보다 분명 내 자신이 불충실함이 빚어낸 만회 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다. 다시 되돌아 갈 수 있는 유턴의 신호는 인생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다는 이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는 왜 때늦은 뒷 풀이로만 되고 마는가. 복합의 멀티 맛으로 가득 찬 이계절의 특유의 칵테일이 각자 앞에 놓여있다. 가을이 선물한 내 앞의 이 찰랑이는 칵테일은 나에게 과연 어떤 맛을 선물 할 것인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해 본다. 저 넓은 들녘의 개미보다 못한 이 미소한 존재 에게도 후회 없는 삶으로 인생의 가을에 티끌같이 작은 아름다움의 향연이라도 남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20015 9 25        서울에서
7    감 향기 날려올때 댓글:  조회:530  추천:0  2019-11-21
감 향기 풍기는 날 류 재 순   컴퓨터 앞에서 한창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있는 중인데 사무국의 최미영씨의 전화가 들어왔다. 오늘 협회사무국 송연옥씨의 집으로 가서 “마당쓸기” 체험하려 가려는데 같이 동참 해주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무국이라면 김재연, 최미영, 송연옥 세사람이다. 며칠 전 송연옥씨의 수필 “마당쓸기”가 큰 공감을 일으켰었다.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지만 몸이 좋지 못하여 푸른 숲이 우거진 공기 좋은 곳에 한적하게 생활하면서 이 가을 감나무 낙엽 쓸기에서의 인생회감을 쓴 따뜻한 글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지 않아도 한번쯤 가서 연옥씨의 건강현황과 생활환경을 알고 싶어 하던 터였다. 특히는 연옥씨가 자기 글의 팬들에게 “감나무 집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마당에서 바비큐 하시고 싶은 분들 연락 주세요”하고 마중의 손길을 뻗히고 있는 터였다.   우리는 김재연씨의 승용차를 타고 숲이 우거진 대곡동을 향해 신나게 달렸다.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조금은 연륜이 있어 보이는 2층 빌라의 1층에 자리잡은 남향집이었다. 작은 언덕바지들과 푸른 숲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분좋은 자연 경계, 그 숲속에서 빠끔빠끔 홍조띤 단풍잎들의 사이사이에서 보내오는 눈인사, 나뭇가지사이로 쫙 날개를 편 파아란 가을 하늘, 그 창공에 걸려 여름날의 공격적인 정열보다는 눈부시면서도 은근한 따사로움으로 온몸의 세포를 열어주는 가을 태양의 친화력이 가슴을 안아준다. 그리고 멀리보이는 텃밭들, 장마철이면 제법 큰물이 흐를 것 같은 내천 계곡위에 놓인 그리 세련되지 못한 겁먹을 만한 다리…서울 근처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몸과 마음이 힐링 받기에는 충분히 좋았다. 마당엔 정말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는데 한쪽으로 수북히 쓸어 넘긴 낙엽들과 푹 물러 꼭지에서 떨어진 홍시가 가끔은 땅에 얼룩을 놓고 있었다. 연옥씨가 수필에서 하루에 적어도 둬 번씩 마당 쓸기를 해야 한다던 말이 상기되어 미소가 떠올랐다.   도착한 때가 정오를 넘긴지라 우리는 분주히 바비큐 점심 준비를 하기에 바빴다. 연옥씨가 우리를 데리고 텃밭으로 갔다. 싱싱한 풋채들이 넓은 잎을 휘적거리며 벙긋벙긋 웃고 있었다. 배추, 열무, 쑥갓, 고추등을 푸짐히 바구니에 담아왔다. 부지런한 재연씨는 눈치껏 재빨리 야채들 씻기에 바쁘다. 가져온 삼겹살, 오징어 버섯 북어 방울토마토 등을 펼쳐 놓으니 야, 그야말로 푸짐한 한상이 되었다. 나는 아직은 속이 앉지 않은 그렇게 큰 생배추도 생으로 먹는것에 놀랐고 그 맛 또한 그처럼 별미인지 처음 알았다. 마트에서 사온 배추에는 절대 이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 싱싱함과 푸른빛이 너무 좋아 나와 재연이는 배추잎을 볼에 대고 머리를 흔들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벽에 걸린 스피카에서는 벌써 기분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며 우리의 가을 가슴을 다독여 준다! 밥상위에는 든든한 파라숄이 3개나 세워져 있었다. 연옥씨의 말이 가을의 이 파라숄은 물러떨어지는 홍시를 막아주기 위한 것이란다. 그래서 우리도 일제히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이미 많은 잎새와 열매를 땅에 떨어뜨려 크다란 감나무는 조금은 휑등그레 해 보여도 무르익어 곧 떨어지려는 홍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만 놔두면 다 떨어지고 말테니 우리보고 많이 따가라고 연옥씨는 거듭 부탁하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몸가짐이 경쾌하며 행동이 날렵한 미영씨가 밥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연옥씨가 찾아준 ,그물망이 달린 긴 창대를 들고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높이 달린 감들을 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서투러 창대 끝이 열매에 닿기만 하면 감이 제 먼저 땅에 떨어져 터졌다. 그러나 머리 좋은 미영이는 어느결에 그 비결을 터득하고 하나 둘, 그다음엔 세개식 그물망에 낙차없이 따 넣고 있었다. 우리는 박수를 쳤고 나는 그물망의 감을 밥상위에 꺼내놓느라 바빴다. “이젠 그만해요 좀 덜 익은건 남겨 두세요” 정신없이 따내는 미영을 보고 내가 말했다. “아유, 다 따 가요. 금시 다 익어 떨어져요. 우린 시골 시댁에 가면 또 많아요” 부자 집 맞 며느리 같이 푸근함을 주는 연옥씨의 말이다. 나는 상에 수북히 쌓여진 홍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경기도 이천에 사시다 두만강을 건너 추운 동북땅에 정착하시고 눈을 감을 때 까지 고향의 홍시, 연시, 곷감을 외우시던 할머니었다 밤늦은 가을 밤이면 중국 동북 땅에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그 열매들의 이름을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영문도 모른채 애수에 젖은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 드리군 하였다.… 나는 또다시 홍시가 매달린 파란 창공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오덕 선생님의 유작시가 생각났다. 아침에/ 감나무 밑에 가서 바알간 홍시 하나 단풍잎으로 받쳐 먹고 쪽빛 하늘 쳐다 보니 … 시인은 그 하늘에서 하나님을 봤다고 했다. 나는 그리운 할머니가 보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을 알고나 계실까? 그리웠던 고향의 이런 홍시를 그곳에서 혹시 맛보고 계시는지…   우리는 배추며 열무며 홍시며, 지어는 연옥씨의 반찬 솜씨를 담은 나백열무 물김치며를 가득싣고 귀로에 올랐다. 떠나는 차안으로 여름내 이 울안을 가득 채웠던 감나무의 싱긋한 향기가 가을바람에 휘휘 날리며 물씬 풍겨 들어왔다. 연옥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당쓸기” 수필에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확의 계절은 또한 어떤 시작의 계절이란 것이다. 그렇지, 이결실의 계절에 낙엽 밑에 묻히는 씨앗들도 이제 또 동면을 거치고 봄날의 해동을 거치며 줄기차게 성장할 성스런 생명력의 꿈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붉게 익은 홍시를 키워 온, 모든건강을 되찾은 연옥씨의 가슴에도 또 새로운 강한 생명력의 싹이 꿈틀거릴 것이다.     2007 ,10, 15 서울에서
6    나의 사춘기 댓글:  조회:497  추천:0  2019-11-21
나의 사춘기 류재순   가끔,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사춘기를 떠올려본다. 그때마다 나의 열 한 살의 기억과 열다섯의 실수가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가슴을 찌른다. 나의 아버지 나이 열아홉에 내가 태여 났다고 한다. 양쪽 부모님들의 수선으로 일찍 장가를 간 아버지는 한 달도 채 못 되어 부모님과 어린 색시를 남겨놓고 전방으로 떠나셨단다. 게다가 열네 살 밖에 안 되는 유일한 남동생 하나까지 부모 몰래 빼돌려 같이 전방으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그해 내가 태어났는데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출산과 함께 나를 할머니 품에 안겨놓고 돌아 가셨다니, 나는 젖 한 모금 못 빨아보고 할머니 손에서 미음을 먹으며 자랐다. 딸은 못 낳아보고 아들 형제만 낳고 어떻게 단산이 되어버렸던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 다 전방으로 ‘도망’가고 며느리마저 잃어버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시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나는 깊은 아픔이었으며 극진한 ‘ 사랑 선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은 물론, ‘엄마’란 이름을 입에 올려보지도 못했던 나는 다른 애들은 왜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를까? 하는 착각의 유년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소문난 ‘서울 댁’이었다. 비록 고향인 서울을 떠나 만주 땅에 힘겹게 정착하면서도 서울식 긴 흰 앞치마를 항상 앞에 두르시고 제비 같이 반들반들한 자그마한 까만 머리통에 짧은 은비녀를 가뜬히 찌른 그 뒷모습은 좀 작은 키와 단아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키가 껑충하고 구레나룻이 시커먼 할아버지는 예쁜 할머니를 바라보며 늘 싱글벙글 하셨고 그 힘든 농경 일에도 집안 앞뒤일 다 잘 처리하시며 서울의 어린 시절에 익히지 못했던 한글을 ‘야학’까지 다니는 배움을 가지며 열심히 사는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안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할머니 등에서, 할머니 뒤꽁무니에서 항상 으썩거리며 어린 강아지처럼 붙어 다녔다.   그렇게 나는 열한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독방 하나를 내 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른 큰 방을 써셨다. 밤에 잠을 자다보면 나는 아무리 곤하고 오줌이 마려워도 아침까지 꾹 참고 일어나기 바쁘게 시원하게 한바탕 해소하군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어떻게 된판인지 한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깊이 잠 들 수가 없었다. 자기 전에 물을 너무 많이 들이켰던 모양이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오줌이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급기야 방 미닫이문을 확 밀어 제치고 요강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뛰어 들었다. 이때 내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발견됐다. 맨 엉덩이를 다 내놓은 할머니가 요강에서 급히 일어서는데 배꼽아래 이상한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놀래서 무심결에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는데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줄로만 여겼던 할아버지가 멀쩡히 눈을 뜨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할머니 쪽을 바라보시던 중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할머니가 저렇게 남자인 할아버지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맨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있다니? 그 시절의 순진한 열한 살 소녀의 머리로서는, 그것도 남 여구별에 예민하기 시작한 사춘기에 갓 들어선 나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최고’였고 마을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아름다운 형상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해 있었고 할아버지는 외려 싱긋이 웃고 계셨다. 나는 그것이 더 이해가 안 갔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요강을 두 손으로 내 방에 옮겨놓고 방 미닫이를 찌르륵 ‘쾅’하고 닫아 버렸다. 아마 그렇게 근 일 년을 할머니의 그 창피했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더는 자랑할 만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나만의 ‘비밀’에 묻혀 있었다. 내가 할머니로부터 소원해지고 괜히 트집을 잡으며 말대꾸하는 나를 보고 하루는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너도 이담 커서 결혼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시작한 나의 사춘기는 열다섯에 이르러 최고봉에 이르렀다. 반의 한 남학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받았다. 당혹감으로 나는 일부러 그 남자애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애는 방과 후 여유가 생기면 우리 집 뒤 담장 밖에서 집 창문가를 바라보며 배회하기 일쑤였다. 무언가를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할머니가 그 남자애 앞으로 찾아가 냉철히 손을 휘저으며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나는 방안에서 창문으로 보게 되었다. “제가 반장인데요, 부반장과 반의 일을 좀 상의할게 있어서요.” 그건 학교서 상의 할 일이지 왜 방과 후 집까지 찾아오느냐고 할머니의 야멸친 언성이 들렸다. 할머니의 매서운 눈빛에 그 남자애는 너무 무참하여 귀뿌리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곤 급급히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사실 그 남자애는 반에서 여자애들의 인기 남이었다. 할머니에게 된 무안을 당한 후로는 반에서 나와 눈 맞추기도 피하는 듯했다. 나의 마음은 무겁고 답답했으며 할머니가 꼭 그렇게 내쫓아야 했을까 달통이 안 되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까지 무시로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병원 간호사로 있는 나의 절친한 친구가 생리를 하는 나에게 생전 보지 못했던 하얀 병원용 거즈로 만든 깨끗한 생리대 두 개를 주며 엇갈아 빨아가며 쓰라고 주는 것이었다. 자기 엄마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하였다. 그때는 생리대라는 것을 파는 것이 없어서 우리 여자애들은 신문지를 둘둘 말아 팬티 속에 끼워 넣기도 했고 헌 헝겊 조각을 무어 대충 생리대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헌 헝겊도 많지 않던 시대여서 한번 생리가 올 때면 푹 젖은 그것을 온종일 끼고 있다가 밤에 급히 씻어 말려 이튿날 학교 갈 때 쓰는 게 보통이었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 불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말하자 할머니 시대는 이것도 없어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를 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갑자기 몇 년 전 밤의 요강 사건, ‘남자친구’ 내쫓던 일, 생리대도 잘 만들어 주지 못 하는 일, 그리고 어렸을 때 가끔 회초리로 사정없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일… 많은 일이 삽시에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한족 농촌 생산 대에서 수전 기술원으로 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원래 농사를 짓던 분이시라 시가지 생활에 적응이 안 되어 중국 촌에 가셨다.) 이튿날 떠날 준비로 무언가 서두르고 있었다. 첫 행차도 아닌데 나는 괜스레 이름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와?” “글쎄, 챙겨드리고 될수록 빨리.” “나도 엄마가 키웠음 좋았을 거야, 왜 할머니야?” 번연한 생활을 나는 이렇게 당치도 않는 트집을 잡으며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할머니의 손에 잡혀있던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털렁’ 들렸다. 할머니는 멍한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셨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그랬구나, …” 사실 친척들은 늘 할머니가 외동 손녀 하나를 너무 애지중지 손 받들어 키워서 앞으로 좋을 게 없다고 하였고 친구들은 동네에서도 제일 똑똑하고 대단한 할머니가 있다고 부러워하였다. “재순아, 할머니가 좀 놀랬다. 네 어린 것이 지금까지 엄마 생각을 그렇게나 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어 하는 물고기 한번 제대로 해먹이지 못했구나.”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돌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싶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사람이 죽으면 눈을 감게 된다며 어느 날인가는 할머니도 저 세상 사람이 될 터이니 우리 재순이를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가끔 몸져누우실 때면 자그마한 손으로 성냥개비를 들고 할머니가 눈을 감게 되면 눈꺼풀을 받쳐 놓을 준비를 하는 어리석은 응석 등이었다. 할머니가 내 옆을 떠날 수도 있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알고 컸다. 그런데 왜, 어디서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과 오기가 생겼을까? 이튿날 내가 방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자그마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흰 밥상보를 열고 보니 처음 맡아보는 군침 도는 냄새, 이름만 들어보던 조기 생선찜이 놓여 있었다.   며칠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돌아오셨다. 그때야 나는 나에게 조기찜을 해놓고 떠나시던 날이 바로 할머니의 육순 환갑날 이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그때 전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연대까지 졸업하고 새 가정을 이루며 중학교 교직으로 있다 ‘우파’로 몰려 어디에선가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도 유지하기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금쪽같이 키우는 손녀마저 ‘배신’을 하며 외로운 환갑날을 보낸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내 마음속에 깊이 묻혀있는 사춘기 시절의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은 항상 아픈 피고름으로 괴여진다. 딸 삼아 손녀 삼아 모든 면에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혼신을 다 하고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니가 만약 나의 이 속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할머니~!     2019 , 11 , 13 서울에서
5    수필 나의 첫 김밥말이 댓글:  조회:763  추천:0  2019-11-21
  나의 첫 김밥 말이 류재순   나라마다 그 나라 음식문화의 대표성적 간식이 있다. 미국엔 햄버거, 일본엔 타코야끼,( 요사카 지방) 중국의 월병이나 탕후루, 프랑스엔 크레이트, 이타리아엔 아이스크림… 그리고 한국엔 한국인에 의하여 향유되고 한국인의 풍토에 맞게 재창조 변형되어 국민간식으로 자리매김한 맥심커피, 신라면 등이 있으며 건강식품으로 더욱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김밥일 것이다. 반듯하게 김밥용 김 한 장을 놓고 한 주걱 밥을 골고루 펴 놓은 후 단무지, 햄, 계란, 시금치, 당근, 어묵, 우엉…등 몇 가지 가능한 재료들을 밥 위에 모둠 놓기를 한 후 두루루~ 말면 김밥이 된다. 특히 지금은 가끔 냉장고 내용물들을 정리하며 쓰다 남은 식 재료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초 간단하게 김밥 말이를 하는 것도 주부들의 지혜다. 특히 야채를 잘 안 먹는 애들도 여러 야채를 듬뿍 넣고 치즈를 살짝 끼어서 만들어 주면 해맑은 얼굴에 입이 터지는 듯 즐겁게 먹고 있으니 근간의 웰빙 열풍에는 더욱 엄지 척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한국에 와서 이런 초 간단 국민간식-김밥 작식법을 몰라 잊을 수 없는 수치와 곤혹을 치룬 적이 있다. 그 속에 파묻힌 아프고 아름다운 한 토막의 추억은 그 후 나의 인생길에서 가끔은 속이 뒤집히고 머리에 뿔이 나려는 순간이 올 때마다 가슴의 열기를 식히고 마음을 따뜻이 잡아보며 바른 처신의 길을 찾아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1990년 대 말의 일이었다. 중국을 떠나 김포공항에 내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알려 준대로 ‘직업소개소’를 향하였다. 땀을 줄줄 흘리며 두 손에 이삿짐 같은 큰 트렁크 두 개를 밀고 들어서는 나를 본 직업소개소 소장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공항에서 내려 바로 오는 길이며 당분간 거처 할 자리가 없으니 숙식 제공이 되는 일자리를 가능한 빨리 구해 줬음 한다는 뜻을 밝히었다. 소장님은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한국에서 일을 해 본적이 있느냐 물었다. 그때 나는 비록 두 번째 한국행이었지만 정작 일을 하러 오기는 처음 이였다. 한번은 내 소설집을 출판한 서울의 모 출판사의 초청으로 고작 며칠 서울에 머물다 간 것이 전부였고 이번이야말로 서울에 일가친척 하나도 없이 처음으로 생계를 위해 무작정 ‘돈벌이’행차로 달려온 셈이다. 그때만 해도 서울엔 ‘불법체류’로 숨어서 일하는 친구가 둿 있긴 했지만 그들의 처지도 처지인지라 날 보고 돈도 벌기 전에 셋집은 얻을 수 없으니 무조건 짐을 가지고 숙식 제공하는 일터를 직접 찾으라는 것이었다. 한국 일에 초보이며 그것도 바로 숙식 제공하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나의 뜻에 소장 아저씨는 머리를 설래설래 저으며 난처해하였다. 아무튼 당분간은 그리 쉽지 않을 거라며 어딘가에 가서 며칠 쉬며 소식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제야 이 두서없고 막무가내인 자신의 경솔한 행차의 황당함을 침통히 느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다급히 울리며 소장님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 김밥집요? 지금 당장요? 사람이 있긴 한데 초보여서…” 보아하니 저쪽은 다급히 인력이 수요 되는 지라 두말없이 빨리 보내라는 소리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소장 아저씨가 지하철 로선을 가르쳐 준대로 두 손에 짐을 들고 그 김밥 집을 찾아 갔다. 찾아 간곳은 김밥 프렌차이즈, 체인점인데 내가 문어귀에 들어서며 보니 점심시간이여선지 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밖에서부터 길게 줄을 서 대기하고들 있었다. 내가 손님들 속을 비집고 식당에 들어서 주인을 찾았다. 어깨 너머로 긴 생머리를 가뜬히 묶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내 앞에 섰다. 중키를 좀 넘는, 살짝 통통한 아주 균형 잘 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사슴같이 순진해 보이는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식당 사장님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너무 앳된 모습에 나도 놀랐고 큰 짐을 들고 이 좁은 식당에 일하러 온 나를 보고 그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서 방금 들어온 초보란 말에 또 한 번 놀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엔 아직 교포일군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잔뜩 실망스런 표정이었지만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인지 빨리 저쪽 김밥 싸는 아줌마 옆으로 가서 같이 일을 하라고 하였다. 자그마한 김밥 가계에 손님까지 꽉 차니 가져간 짐을 어디에다 놓고 일을 시작한담? 내가 겨우 주방 한끝에 자리를 찾아 트렁크 두 개를 놓고 나오며 보니 주방 일꾼들은 물론, 직원들 모두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그 광경 내가 봐도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가 김밥을 전혀 쌀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정을 이미 직업소개소 소장 아저씨께 말했으니 허드레 일이나 시키는 줄 알았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중국 동북쪽에 쭉 살아 온 나에게 그때까지 김밥이란 너무 생소한 음식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후에 들은 얘기지만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이나 동남아 많은 국가들에서도 김밥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음식 문화차이 때문에 웃지 못 할 사건도 발생한 적이 있었단다. 2차 대전 중 해안 지방에 있던 일본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김을 떼서 배식 한 적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전쟁 재판이 벌어졌을 때 포로학대의 근거로 ‘검은 종이’를 강제로 먹였다는 죄목으로 채택 된 적도 있었다 한다. 물론 내 세대에 와서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국과 작은 왕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김밥이란 이름과 개념을 알게 된 것에 불과 하였으니 첫 일터가 이런 자리란 것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김밥아줌마 옆에 다가가 ‘흉내’를 내보려 하였다. 그런데 그 아줌마 김밥 싸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도무지 시늉도 낼 수가 없었다. 김 한 장을 척 놓고 잽싼 솜씨로 밥 한줌을 쭉 깔아 펴드니 어느 결에 여섯 가지 재료를 스치듯 한 손에 모둠 놓기를 하면서 휙 하고 한 번에 말아버리니 김밥 한 줄이 되었고 칼을 손에 드는 덧 하더니 한줄 김밥이 토막토막 완성이 되었다. 그의 ‘히든카드’를 발견하려고 전신의 거미줄 같은 신경세포를 몽땅 곤두세워 눈 한번 깜짝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 한 장을 앞에 놓고 밥 고루 펴기가 그렇게 힘들었고 여섯 가지 재료를 하나하나 집어오는데도 한참,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김 속에 말아 넣는데도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진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바질바질 타고 있는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우둔한 여자란 것을 심심히 느꼈으며 줄 서있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내 이마에선 땀이 방울방울 돋아났다.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김밥도 쌀 줄 몰라요?”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버럭 화를 냈다. 하긴 김밥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식사대용으로 집집마다 싸는 가장 보편적인 초 간단 레시피니 한국 아줌마로서는 도무지 리해가 안될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직장의 어떤 일도 다 이것보다 훌륭히 해 재꼈던 일이 떠올랐다. 사람은 이렇게 바보가 되는 구나… 옆에서 호통을 치면 칠수록 내 손은 점점 더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깔끔히 말고 또 말아놓은 후에도 터지지 않게 한 칼에 또박또박 잘라놓기가 쉽지 않았다. 요령이 없다보니 김이 잘리는 것이 아니라 칼에 눌리어 김밥이 썰려질 때 마다 안의 내용물이 분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김밥 옆구리가 터졌다는 말은 일이 안 될 때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을 마구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할 때 쓰이는 말이란 걸 후에 알게 되었다. 비록 비유의 말이지만 그 모양새의 황당함은 충분히 표현이 된 것이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후끈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옆 아줌마가 참지 못하고 또 소리쳤다. “사장님, 나 이 아줌마하고 같이 일 못 하겠어요. 나 혼자에게 일이 다 밀려 있자나요. 도대체 뭣 하러 여기 왔는지 모르겠네요!” 휴, 김밥 모양도 모르고 살았던 우리 사정을 그가 어떻게 알랴! 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앳된 사장아가씨가 달려왔다. “전에 김밥 싸 본적이 없으세요?” “네, 제가 살던 고장에서는…” 죄책감에 말이 목에 막혀 나가지 못 했다. “쳇, 소개소에서는 저런 사람을 왜 보냈데. 소개비만 받으면 그만인가!” “그만 하세요.” 그 아줌마에게 조용히 한마디 던진 사장 아가씨는 잠간 멈춰 있는 덧 하더니 그 바쁜 와중에도 내 손을 잡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터지지 않게 썰어내려면 김밥을 적절하게 잡고 김밥 바로위의 약간 뒤쪽으로부터 시작해 칼을 내리면서 몸 쪽으로 당겨 온다는 느낌으로 썰어보라 하였다. 그가 이렇게 요령을 알려주자 굳었던 내손이 풀리기 시작하며 인지도가 따라가는 듯 했다.   어느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고 식당이 비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3시간이라는 황금 시간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들어가 그렇게 엉망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드디어 저녁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이 바쁜 매점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금 시간을 나 때문에 급한 손님들이 근처 식당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많은 매출이 내려갔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직원들의 냉냉한 시선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엿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그 어린 사장님 앞에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오늘 임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젊은 사장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앳된 얼굴에 차분하고 약간은 슬픈 표정 같은 것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녀는 조용히 내손을 잡았다. 그 손에는 5만원이 쥐여져 있었다. 일당 배당이 얼마 안 되는 그때는 큰돈이었다. “괜찮아요. 금방 오셔서 고생이 많으실 텐데, 다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종이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자기 고모가 운영하는 고기 집인데 그곳은 숙식도 제공되니 일단은 먼저 그 식당에 가서 설거지 하는 일을 하며 차차 다른 일들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쪽지에는 전화번호와 소개하는 자기 이름까지 뚜렷이 적어 주었다. 아직은 이 세상 속세를 잘 알 것 같지 못해 보이는 어린 사장님 앞에서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려 이모뻘쯤 되는 내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파란만장 했던 한국 디아스포라 삶에서 많은 것을 착실히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자신을 성숙시켜 나갔다. 물론 나도 한국사람 부럽지 않는 김밥 말이 ‘스타’가 되었다. 그 한걸음 한 걸음에는 세속에 때 묻지 않은, 그때의 그 앳된 사장의 얼굴이 항상 어른거렸다.   2019, 8, 20 서울에서        
4    류재순 앨범 (초상) 댓글:  조회:601  추천:0  2019-11-19
3    [수필] 겨울 녀인-류재순 댓글:  조회:650  추천:0  2019-07-17
류재순 겨울 녀인       쌓여진 가을 락엽을 밟으며 단풍의 의미를 새김질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새파랗게 올려붙은 겨울창공에서 싸늘하게 불어오는 찬공기가 귀뿌리에 빨간 불을 지핀다. 라목이 된 가로수를 가로 지나 기다란 산책길을 걷고 있다. 아직 미련을 다 털어버리지 못한 모든 의미의 풍경에 어김없이 찾아온 계절을 실감하며 움츠러지는 내 형체를 현실 앞에 자백시키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산책길 옆에는 봄, 여름, 가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좀작살나무, 볼레나물, 산철죽, 개쉬땅나무 등 키 낮은 관상용 잡목들이 즐비하게 줄져있다. 이제는 그 이름을 분간하기 어렵게 똑같이 벌거벗은 모양새로 추위에 떨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 종류의 나무가 유별히 눈길을 끈다. 꽃도 잎도 다 떨어진 라목이긴 한데 이 추운 겨울의 언덕에서 물 오른 봄버들마냥 초록빛 매끈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황매화이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서서 바라본다. 조그마하게 씌여진 패말속 설명서를 읽는다. 황매화의 꽃말은 숭고, 고귀, 왕성을 뜻한단다. 나무 전체를 뒤덮는, 4~5월에 피여나는 노란 꽃은 개화기간이 유난히 길 뿐만 아니라 가을의 노란 단풍과 추운 겨울에도 잃지 않는 매력적인 초록색 줄기로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단다. 그리고 음지와 양지를 가리지 않고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추위와 공해에 강한 것이 특징이란다… 이 신비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미약하게나마 분명 따뜻한 해살 몇오리가 집요하게 내 머리결을 헤치고 입맞춤을 해준다. 가슴 한구석의 어느 세포가 봄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꽃잎마냥 환생의 입김을 상생시킨다. 나는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속엔 분명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얕고 짙은 주름을 지닌 작은 키의 로녀(老女)가 서있다. 아, 저 얼굴, 나는 누구인가? 내 나이는 얼마인가? 어느 날 손자놈이 할머니하고 달려올 때, 나는 한번 깜짝 놀랐었다. 아직도 풋풋하게 느껴지는 내 가슴에 할머니라니!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텔레비죤앞에서 골몰하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이 한마디 했다. “당신, 왜 그렇게 입을 헤벌리고 봐? 똑 마치 치매 걸린 사람같이.”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화를 버럭 내였다. 남편은 웃으며 롱담이라 하였지만 나는 당시의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장면을 나는 료양원 할머니들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놀란 내 가슴은 슬픔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젊음, 아름다움, 능력, 민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우주의 섭리 속에 그려진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나의 초상화다! 어느 날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완전 가능하게 치매로인이 될 수도 있는… 환각일가? 거울속에서 겨울동화속 같이 새파랗게 물올라있는 황매화가 예쁜 윙크를 보내고 있음을 보아냈다.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하나의 ‘나’를 발견하였다. 유치하고 감성이 넘치며 바다 저편의 신기루를 기다리는 귀여운 소녀 같은 천진한 눈길, 삭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절절한 삶의 추구를 가진 지꿎은 생명력, 어쩌면 볼품없는 겨울나무에 청사과(青苹果)를 만들려는 착각은 아닐가? 한번은 한 문학후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어머 선생님, 발톱 메니큐도 빨갛게 하셨네요!”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웃으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응, 내 마음가짐의 표현이야.” 그렇다. 나는 꺼지지 않는 추구와 향기를 가지고 싶은 내 마음의 소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청춘은 얼굴에 크림 한번 못 바르고 예쁜 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처녀로 시집온 나의‘새엄마’의 보얀 얼굴을 보고 그가 바르던 크림을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발라봤던 소녀시절, 할머니에게 들켜 종아리가 빨갛게 회초리 세례를 받던 일은 나에게 오랜 아픔이였다. 그래서 이 나이에도 키 작은 자신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이힐을 신고 다니며 문밖에 나설 때면 옷장안에서 내 기질에 맞는 옷을 고르느라 무지 기운을 뺀다. 녀인들은 모임에 나설 때면 옷장에 아무리 옷이 가득하다 해도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고르다 시간이 되여버리면 아쉬움을 삼키며 급급히 블랙으로 된 옷가지를 몸에 걸치고 떠난다. 어느 장소에서나 무난한, 소화가 되는 색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면 꼭 립스틱을 바르는 걸 잊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를 그렸을 때 마지막으로 눈을 그려넣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다. 바람이 불어 로녀의 머리를 푸시시 날리는 계절이면 녀인 식 베레모를 예쁘게 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류행을 따르는 건 질색이다. 댄스 추러 다니고 가끔은 친한 친구들과 마주 앉아 마작도 치고 려행도 다니지만 나에겐 또 하나의 취미가 있다. 열다섯살 소녀시절, 그때 아주 보기 드물었던 《음식 만드는 법》이라는 북조선에서 나온 책을 보게 되였다. 할머니가 해주는 밥만 먹으며 음식 작식법에 전혀 무관심했던 나였는데 내용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그 책을 한글자도 빠짐없이 다 읽어버렸다. 그리곤 뒤장에 엉뚱한 글 한 줄을 써놓았다. 음식을 잘 만들어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 이것은 녀인의 직책, 지금 생각하면 같잖아죽겠다. 그 나이에 뭘 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도 가족들에게 갖가지 영양가치에 신경을 써 음식을 차려주는 것이 마냥 즐겁다. 일하러 갔다 돌아온 식구들이 내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맛갈스레 먹는 장면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한없이 행복하다. 마음은 그러한데 탄력 없는 나의 성격으로 유모아도 없는 나의 직설적인 표현에 가끔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가 있고 또한 나의 굳은 표정은 상대방의 거부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남편과 잘 다툰다. 군인 출신의 그와의 혼인 생활은 감성이 넘쳐나고 완벽함을 주장하는 나와 현실적이고 편안함을 좋아하는 그와 쇠소리 나게 부딪칠 때가 많다. 일평생 원망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몇년 동안 그와 갈라져있을 때, 나는 공중전화를 붙들고 그와 대화를 하다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에 말이 막혔었고 남편이 맹장수술을 할 때에도 수술실 밖에서 엉엉 울어 뭇사람들을 웃겼다. 젖먹이 어린 것을 등에 업고 방에 엎드려 밤을 새우며 글을 쓰던 그 나날에 돈벌이도 안되는 글쟁이가 되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소원이였다는 나의 한마디 말에 남편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옛날 그 시절”이란 말을 문학후배들 앞에서 절대하지 않는다. 이십 몇년이라는 창작 공백이 지금의 나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또다시 글쟁이라는 주술에 빠져들고 말았다. 늦게 다시 시작한 문학창작이지만 무뎌진 솜씨에도 글 한편을 금방 탈고하고 필을 놓는 그 순간, 산출의 그 환희와 쾌락과 행복감은 글쟁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리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적인 작가들도 초고는 끔찍했다고 말한다던데 나는 볼품없는 그 첫 탈고의 ‘성공’에 도취되여 자신이 아직은 청춘이고 최고인 줄 안다. 매번의 이런 유혹에 빠져 이 로녀의 마음에도 겨울 황매화의 초록색 줄기가 풋풋하게 살아나는 것이 아닐가. 그렇다고 내가 여생에 무슨 대단한 성과를 이루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세상을 나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상을 잉태하여 글을 써내는 주술에 빠진 인생을 즐기려 한다. 그것이 나라는 겨울 녀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좀비 같은 존재를 면할 수 있는 내 특유의 길일 것이다. 자신을 향기의 녀인으로 포장하며 그 속에 끊임없이 내 추구의 내용물을 리필하련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마지막 퍼즐을 잘 맞추어보리라.  
영국 문학 탐방 이야기                                           류재순   영국이란 나라를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오래전에 봤던 영화 《OLIVER TWiST雾都孤儿》의 장면들이였다. 안개 속에 가려진 우중충한 하늘과 침침한 추위와 음침한 사람들 속에서 한 고아가 겪는 비참한 정경들… 정말 찬란한 해빛과는 대조적인 인상이였다. 12시간의 비행을 거쳐 그 찬란했던 력사와 문화의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리사장의 란 축사로부터 양왕용 부리사장님의 , 문학 평론가 임영천선생님의 그리고 수필가이며 한국 문학사 편찬 위원장인 권대근선생님의 이란 강좌를 하셔 한국 문학과 영국 문학의 탐방 길에 참고의 시야를 만들어주셨다.  해외 문학상은 미국 텍사스에서 온 박인애 시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한국 작가 한강의 가 영국 부커서가 제정한 맨부커상이였다는 점에 우리의 생각은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1.케임브리지대학교(cambrige University) 우즈강 지류인 캠강의 동안- 케임브리지, 예로부터 런던과 북부 지방을 잇는 교통요지이며 중세기에는 스타브리지 시장도시로 알려진 상업도시였는데 지금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소재지로 영국의 유일한 ‘참다운 도시’로 일컬어져있다고 하였다.  중국이나 한국 혹은 미국처럼 학교교사校舍가 한군데 멋지게 운집되여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중앙을 흐르는 캠강 량안의 력사를 자랑하는 35개의 칼리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케임브리지대학교란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 칼리지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며 법적으로도 독립되여있었다. 대학교에는 114개의 도서관이 있는데 서울대학교의 30배에 달한다고 한다. 무려 3000 만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가 비치되여있다고 하니 영국출신 노벨 수상자 90 명 중 32명이 이 대학교 출신이라는 기적적인 인재배출의 놀라운 수자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가 싶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와 같이 워즈워드 등 문인과 뉴턴, 베이컨, 반고 등 유명 인사들이 수학한 유서 깊은 곳이란 점에서 더욱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월계관을 쓰고 있던 중세기의 영국의 주역들을 키워냈고 지금도 새로운 주역들을 키우고 있는 요람임이 분명하였다. 별로 크지 않은 사과나무가 만유인력을 창조한 뉴턴이 수학했던 한 켈리지 문앞 정원에 자라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앞다투어 기념사진 남기느라 분주한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년륜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저 작고 애된 나무가 과연 몇백년 전의 그 나무일가 머리가 갸우뚱거려졌다. 그가 쓴 《돈 주앙》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작품이였다.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의식, 자유분방하고 유려한 문체로 랑만주의 문학을 이끈 이 시인은 자신이 “하루라고 밤 자고 났더니 유명해졌더라.”라고 할 정도로 한때 쓰나미처럼 영국 전역을 휩쓸며 천재적 위상을 떨쳤지만 “내가 영국에 맞지 않던가, 영국이 내게 맞지 않다.”는 비감을 토로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만나는 녀성들을 기절시킬 정도라는 그의 조각 같은 멋진 외모와 과분한 자유분방함으로 하여 그의 천부적 시 창작으로 인기가 치솟는 시기 녀성들과의 너무 많은 염문을 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켜 상류계층의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구름 한점 없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어둠과 광명의 모든 정화는 하늘이 눈부신 한낮엔 보이지 않는 …   A.《폭풍의 언덕》 브론테Bronte 자매의 령혼    리즈에서 우리는 아트 갤러리를 관람하였는데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들이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갤러리 관람을 끝마치는 대로 우리는 급급히 하워드를 향한 뻐스에 올라탔다. 영국 전체의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지만 산지가 적어 가용 면적이 한국의 4~5배 수준이라 하는데 목축업과 밀, 보리, 감자 농사가 위주이고 물가가 아주 비싼 데 비해 감자는 굉장히 싼 모양이다. 가이드의 말에 툭탁하면 돈 떨어지면 감자만 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겨울에는 령하로 내려가는 추위도 없지만 여름엔 안개와 비가 많고 섭씨 30도를 못 넘기는, 따가운 해볕이 없는 이 나라 땅에는 벼농사를 할 수 없어 입쌀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게 우리에겐 은근한 거부감을 안겨주었다.  드디여 우리는 브론테 자매의 고장 하워드에 도착했다.  나는 저 멀리 우거진 숲속에서 관광 온 련인들이 작은 벤치에서 은밀한 정을 나누는 다문다문 눈에 띄는 그림 같은 풍경들을 훔쳐보며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사랑 스토리를 음미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해석해본다. 《폭풍의 언덕》이 만들어낸 워킹 코스를 따라 산책하던 나도 언덕의 한 의자 우에서 한컷을 남긴다. 나에게 사랑은 어떤 것이였던가… 《폭풍의 언덕》 견학 후 우리는 근 5시간의 뻐스 질주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에든버러에 도착하였다. 에든버러에 도착하며 가이드는 먼저 에든버러성에 깃든 잉글랜드에 정복당한 스코틀랜드 왕가의 비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에든버러성은 에든버러의 캐슬 록이라는 가파른 바위산에 세워진 고대의 군사요새였다. 그 치욕을 담은 력사의 후환으로 지금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하다못해 스포츠 경기를 볼 때도 잉글랜드가 우승하는 꼴을 못 본다는 우스개도 하였다.(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4개의 구성국이 합쳐진 나라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의 기념탑을 먼저 둘러보았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아이반호》를 읽어보지 못해 유감이였다. 이어서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의 구상을 무르익혔다는 엘리펀트하우스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카페였는데 역시 관광객이 바글바글하여 급급히 나와버렸다. 작가 롤링이 사색을 더듬었을 그 분위기를 체험해보려던 나의 욕망은 무산되여버렸다. 이어서 ‘작가박물관’ 왕관모양의 지붕이 독특한 ‘성자일스성당’의 외관도 둘러보았다.    에든버러에서 하루밤 잠을 자고 우리는 또 5시간의 뻐스 운행을 거쳐 잉글랜드 중부 원드미어로 향했다. 원드미어는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생가가 있는 글라스미어와 이어져있다. 원드미어에는 길이 17㎞ 된다는, 중국의 서호와 닮은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그리고 15개의 호수가 주변의 수려한 산들과 아기자기한 농가들로 어우러져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령감을 안겨준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했다. 원드미어에서 나와 반시간 쯤 달렸더니 드디여 작은 호수 그리스미어가 보이고 부근 한적한 시골에 윌리엄 워즈워드 시인의 생가에 도착하였다. 돌로 쌓아올린 소박한 중세기 시골집 형태였다.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과 유명세를 생각하면 조금은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된 조금은 침침하고 크지 않은 침실과 서재 복도 층계… 시인의 자취를 찾아본다. 정원의 한쪽에는 시인의 묘와 안해의 묘 그리고 평생 결혼도 안하고 존경하는 오빠의 시 작품들을 내조하였던 녀동생의 묘도 나란히 있었다. 초원의 빛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나는 그대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꽃의 영광이여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그리고 오스틴Austin… 드디여 오늘의 목적지, 쉐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 (Straford upon Avon)에 도착하였다. 세계 최대 문호라는 타이틀을 가진 불멸의 작가 쉐익스피어를 탄생시킨 이 소도시로 들어서면서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희극과 비극, 력사와 시 등 47여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읽은 글은 고작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오셀로》, 《베니스의 상인》 등 몇편 밖에 없다. 세인들은 그를 “뛰여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보는 통찰력, 놀랄 만큼 풍부한 언어 구사, 다양한 무대 형상화 등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평한다. 마을 입구의 광장으로 들어서니 쉐익스피어의 연극 에 나오는 어리광대 터치스톤의 동상이 유람객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크지 않은 소도시는 올드 시티와 뉴 시티로 나뉘여져있었는데 쉐익스피어 센트는 뉴 시티- 스트랫퍼드다. 센트 입구로 들어서면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RSC라고 크게 쓴 간판이다. 그의 극 작품을 공연하는 대형 극장이였다. 이어서 쉐익스피어 박물관 생가 등등이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며 차례로 눈에 안겨왔다. 길 량쪽으로 줄 지어선 목조 건물들이 중세기의 모습 그대로 선을 보이고 있었다.  우선 먼저 2층으로 된 그의 생가로 들어갔다. 역시 400여년 된 목조 건물이다. 그가 쓰던 침실, 서재, 거실, 식탁… 우리는 이 대문호의 옛 자취와 정서를 찾느라 구석구석 조용조용 살펴보며 머리와 가슴에 무엇인가 묻어보았다. 도시 전체를 가로질러 흐르는 에어번강- 강 우를 자유로이 헤염치는 백조들, 각양각색의 요트, 강가의 잘 다듬어진 산책로, 벤치… 그리고 좀더 걸으면 쉐익스피어의 무덤, 8세 년상이였던 안해-앤과 쌍둥이 남매 자식들의 무덤도 있다는데 우리는 가보지 못하였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쉐익스피어는 자기의 무덤에 “내 무덤을 파는 자는 엄정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비문을 남겼다 하여 충격을 받았다. 왜 그랬을가?  관광 중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다. 대학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하나의 장갑 제조업자의 아들, 그러나 “대학을 다니진 않았지만 자연과 인간의 실제 삶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고 세인들은 평한다. 비평가 칼리일이 “영국 식민지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으로 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명언이 있다. 그중 두마디를 골라본다. “녀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D.제인 오스틴 배스는 로마 시대로부터 잘 알려진 온천 도시로 18세기부터 영국의 부유층이 가장 선호하는 료양과 사교의 세련된 도시로 거듭났다고 한다. 이곳에는 1801년부터 1806년까지 오스틴이 살던 집이 있었다. 사실은 내부를 개조하여 오스틴이 살았던 거리와 집안 분위기를 재현한 것이였다. 11살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오스틴은 처음엔 닉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왕궁의 왕세자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등 사후 그의 작품은 식상하고 진부할 수 있는 소재와 통속적인 구조 속에서도 주제의식과 재미 두가지를 다 잡아낸 작가라는 평가의 재조명을 받았다. 우리는 그 후 관람했던 원체스톤 성당에서 그의 납골탑이 세워진 것을 알게 되였다. 3.이곳저곳 볼거리, 그리고 그 의미들 영국기행을 시작 할 때부터 우리는 안개와 비가 많으리라는 영국의 기후 특점에 비추어 사람마다 우선 비옷과 우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어느 날이나 날씨가 다 맑았고 특히 관광할 때는 해볕이 따가울 정도여서 녀사님 둘이는 양산을 받쳐들고 걸었다. 그러자 가이드가 그 분들께 대오에서 떨어져 걸으라는 충고까지 하였다. 왜냐 하면 쉽지 않게 내리쬐는 영국 하늘의 해볕을 그들은 소중하게 여기며 모처럼의 일광욕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눈에 양산으로 해볕을 가리고 걷는 일은 도저히 리해할 수 없는 비정상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날씨가 영국 사람들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겨울엔 거의 한달 내내 해빛을 보기 힘들다 한다. 추운 날씨와 강한 바람, 해가 잘 나지 않는 어둠침침한 날들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그들만의 마음속 깊은 곳의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가 생각의 깊은 곬을 만든다고들 한다. 영국에 대문호들이 많은 것도 이렇게 고독과 사색을 만들어내는 날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다. 4500년 전, 선사 시대의 높이 8메터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여든여개가 황야에 덩그러니 세워져있었다.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지금도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꼽힌다고 했다. 대자연은 영원한 신비이고 력사 속에 묻혀진 비밀들은 영원한 탐구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비슷한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이미 많이 접촉하고 있는듯하다. 그래도 신비설은 계속 흐르고 관광객은 계속 찾아온다. 이튿날, 우리는 다시 런던으로 향했다. 그러니 우리는 남단의 런던에서 시작하여 북단의 스코틀랜드를 거쳐 다시 런던으로, 서쪽과 동쪽을 모두 누비며 영국을 한바퀴 도는 셈이다.  먼저 윈체스터 성공회의 대성당에 들렸다. 영국엔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장로회 등이 있는데 주요 성공회가 대부분이다. 이어서 우리는 런던 근처의 윈저성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런던 근교의 성으로 엘리자베스 2세 녀왕이 주말에 와서 쉬는 궁전이며 국빈을 영접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왕이 올 때는 탑 우에 영국 국기가 아닌 왕실기로 바뀐다고 하였다. 우리가 도착한 바로 2주 전에 세계적인 풍문을 날렸던 다이애나비의 둘째아들 해리 왕자와 미국 할리우드 배우 매건마크리의 결혼식이 여기서 거행됐었다는 점으로 나는 많이 흥분되였다. 영국 왕실 최초 혼혈 왕세자비라고 한다. 윈저성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5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웨딩마차가 요란스레 들어왔을 멋진 그 왕의 길에서 앞을 다투어 인증샷을 날렸다.   런던은 진짜 볼거리가 많았다. 버킹엄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영 박물관, 그 밖에도 유명한 런던 브리지… 다음은 유명한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대영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이곳에는 전세계의 문명권의 력사 문화 유적 800만점 이상이 소장되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람을 하면서 알고 보니 그 대부분은 모두 중세기에 많은 식민지를 만들며 타국에서 ‘략탈’해온 귀중한 문물임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력과 탐욕의 전리품들이라는 것이 오히려 맞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박물관 입구에 보면 첫눈에 안겨오는 것은 불교의 대형 부처상이다. 중국 혹은 인도의 문물? 똑똑히 알 수 없었다. 운반 중 과실이였는지 팔 하나가 떨어진 상태다. 그다음 보이는 아늑한 한국식 한옥모델 하우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신전 전시관도 주목을 끌었다. 그 속에는 영국 배가 그 문물들을 실어오다 바다에 침몰하여 그 아까운 장식물들 대부분을 다 잃어버리고 조각들만 남았다는 스토리가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훼손당하고 잃어버린 중국의 유명한 문물-원명원 圆明园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이집트 미라가 전시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래세에 다시 살아나기 위해 죽는 즉시로 70일 동안 피기 없이 가공하여 40일 산에서 바싹 말려 이루어진다는 각양각색의 미라들을 보면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집착과 그 허망함을 사색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성공회 본부로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 장례식이 거행되는 왕실 교회인바 잉글랜드와 영국 왕의 장지葬地이기도 하다. 성당 밖에 따로 무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당 안에 유해를 안치한다. 력대 왕들과 총리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을 비롯한 위인들의 무덤이 성당 곳곳에 있는데 우리가 주목한 것은 이곳에도 역시 유명 문인들-챨스 디킨스, 토머스 하디, 키플린 등이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 묻힌 쉐익스피어, 브로테 자매, 제인 오스틴 등의 기념비까지 보충해놓았다는 것이다. 영국에서의 문인들의 가치와 열애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사원의 화려하고 장엄한 건축물은 영국건물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뾰족뾰족한 고딕형 지붕으로 된 클래식한 품격의 최고치인 것 같았다. 그 모던한 구성감각 또한 감탄이 절로 나온다.   13일간의 해외 문학 탐방을 끝내고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였다. 관광뻐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무한대의 그린세계, 하늘의 구름, 새, 풍차 흰 양떼들… 그것들은 밝은 날 흐린 날 상관 없이 대자연과 인류의 큰 재앙 없이 여유 있고 평화로운 이 섬나라에 펼쳐져있다. 물론 아쉬운 이야기도 들었다. 자연은 아름다우나 고률의 세금과 높은 물가로 실질 소득은 적으며 의료 복지가 잘되여 병원비가 전액 무료인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다지만 예약과 실질 진료 혜택이 너무 동떨어져 작년에 수술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이 4200명이라니 무상복지의 민낯이 보인다.  김재진 시인이 쓴 려행시 한구절이 생각이 난다. 지구의 반대편을 걸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기약 없는 리별일 때 있어라 때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1    류재순(柳才顺) 댓글:  조회:901  추천:0  2013-09-27
류재순柳才顺 프로필   닉네임-냇버들   1948, 11, 09 길림성 서란 출생 현주소: 서울 1966년 서란현 조선족고중 졸업, 1969년부터 상업부문에서 일하다가 1986년 5월부터 서란현 문화관에 전근하여 문학창작   중국 작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중단편소설집, 북경민족출판사,  서울 과학과 사상사 각각 출판. ‘설원문학상’ 소설대상. ‘도라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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