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 바라는 바 없이
선생님, 수련을 할 때는 수련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는 하셨는데요.
“수련을 해서 나중에 베풀겠다, 열심히 해서 본성을 보겠다”
그런 욕심도 안 되나요?
그런 욕심으로 인해서라도 수련 자리에 앉을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제일 좋은 건 무심이에요.
이런 저런 생각도 없는 거죠.
베풀겠다는 생각도 없고 받겠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결국 자기가 갖추어지면 구제를 하게 되는 거거든요.
왜 베풀겠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되느냐 하면,
베풀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반대로 받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편한테 잘 하는 여자일수록 바가지가 심합니다.
마음속에 반대 급부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잘 해야겠다는 의식조차 없이 무심으로 하면
받겠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요만큼만 해줘도 감격합니다.
반면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아무리 해줘도 만족을 모릅니다.
수련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수련을 통해 기운이 커지고 맑아져서
베풀겠다는 마음이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수련이 안 돼요.
정도(正道)가 아니에요.
그런 마음조차 없어야 돼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뜻이 좋아도, 예를 들어 “내가 기운을 받아서 아픈 사람을 고쳐주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늘 마음 속에 그런 게 있어요.
“내가 수련해서 나 혼자 먹고 살겠다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 고쳐주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 기운이 안 내려오는가?” 그래서 늘 불만이에요.
기운을 10을 주어도 항상 100에 대한 마음이 있어요.
왜냐?
좋은데 쓰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죠.
그런 것이 전혀 없을 때, 그냥 오로지 수련하고 싶고 맑아지고 싶고,
본성이 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나의 원래 자리를 좀 알아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해야 돼요.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이에요.
모든 것이 다 모순투성이, 모르는 것 투성이잖아요.
원래의 나를 좀 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그것도 우선은 거창하게 생각할 게 없어요.
“나라는 사람이 뭐하던 사람인지만이라도 알고 싶다”
그런 마음 자체만 가지고 해야 합니다.
오로지 나를 찾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수련을 해야 하고 자연히 기운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무 마음이 없어야 되거든요.
오로지 진리를 알고 싶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답답하니까
우선 나를 알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수련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다른 것들이 오는 겁니다.
저는 구원이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남에게 베푼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도 없어야 돼요.
누가 나한테 뭘 주었는지 그런 것도 알 거 없고요.
“누가 나한테 뭘 줬지”하면 벌써 갚아야 된다는 부담 때문에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거래가 되는 거예요.
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항상 남에게 줘도 잊어버려야 돼요.
내가 줬는지 안 줬는지 기억하지 말아야죠.
그게 무심이에요.
자기는 그냥 보통 하듯이 했는데,
남한테 잘하는 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잘하려고 해서 잘하는 건 이미 잘하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