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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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호적제도에 대한 문화분석(選譯) 댓글:  조회:2657  추천:89  2008-01-08
호적제도에 대한 문화분석(選譯)                黄忠顺( 东莞理工大学 教授) 도시화의 급증에 따라 중국호적제도의 주요모순이 도시호적과 농촌호적의 모순으로부터 본적호적과 외지호적의 모순으로 전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공리적인 립장과 목적으로부터 아니라 사회정의와 사회공평을 수호하는 문화적인 입견으로부터 중국호적제도의 分割성과 등급성을 연구함도 필요성이 존재한다 1 현행되는 중국호적제도는 서방의 호적제도와 달리 인간의 민사적신분을 관리하는 공능외에도 사회치안을 통제하고 인구통계와 세무에 편리하며 또 사회자원과 경제분배를 관할하는 공능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분할성과 등급성 그리고 세습성을 특징하기도 한다. 규획경제시대의 산물로서 이런 호적제도는 시장경제시대에 6차에 걸친 조절을 거치면서 사회변혁에 적응하려는 적극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분할성과 등급성 그리고 세습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개변을 찾아보기는 힘들다.문화적인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호적제도사와 중국문화사상의 평등의식의 결핍성이 상술한 호적제도를 만들고 있다 생각된다. 2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등급제도는 사상가들의 평등에 대한 사색과 사상을 만들어주는 사회원인이다. 하지만 중국은 평등사상 대신 평균사상이 발달되여 왔다.평균사상은 사회적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기법으로서 사회모순을 완화하고 사회를 온정시키는 적극적인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가치관의 차원에서 사회의 평등과 공정성을 이루려는 리념으로 전변하지 못한 소극적인 면도 있다.물론 근대에 들어서서부터 강유위와 손문의 사상에 사회평등과 사회공정성에 대한 긍정면도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회의식을 이루는 기반적인 작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신중국창립초기의 호적제도의 확립도 마찬가지로 실용성을 출발점으로 한 산물이다.개혁개방이래의 호적제도도 근본적인 전변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으며 관리자의 립장으로부터만 출발하여 실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과 장래에 우리에게 가져다줄 부정적인 면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가공수출업을 위주로 하는 주강삼작주지역은 렴가의 농촌인력을 기반으로 하고있지만 농촌호적에 대한 정책이 큰 개혁이 없다면 경제불순기에 따르는 사회문제도 큰 우려점으로 되고있다. 3 문화가 제도를 만든다는 말이 있다.서방은 천성적인 평등사상으로 말미암아 현재는 호적제도의 불평등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중국은 평균사상의 지배아래 호적제도의 공리성이 많이 존재하며 현시대 이러한 호적제도에 대한 개혁은 불가피적인 사회점이라 보아진다.    
8    조상숭배 그리고 복고주의 댓글:  조회:2109  추천:125  2007-06-14
조상숭배 그리고 복고주의   내 조상은 바보야 또는 우리 조상은 바보야 하는 사람과 종족은 별로 드물다. 인류가 망망한 대자연속에서 군체방식으로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다가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방식개변을 전제조건으로 가족이 생기고 씨족이 생기고 씨족련맹이라는 부족이 생기고 현재는 민족국가가 지구라는 땅덩어리우에서 국가조직의 제일 중요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상,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상숭배를 할 자유가 있고, 또 조상들의 력사와 업적을 다루어서 자랑하기를 좋아함은 많은 종족들의 습관적인 행위와 심리로 되여있겠지만도 조상숭배가 가끔은 전통문화를 발양한다는 가면구를 쓰고 현세와 리익을 다투는 공구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하다. 섬서성의 황제릉에서 몇년간이나 황제제를 크게 지내여 화인세계가 공인하는 문화제로 되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 하남성에도 올해에는 황제제를 크게 했다던가 곡부에서 공자제를 지내여 조금 이름이 나니 작은 동네에서도 우리동네 문묘도 중국4대문묘요 거금을 써가면서 공자제를 지내는 현상이 연발되는 그 내속은 << 문화의 다리를 놓고 경제의 발전을 도모한다 文化搭台,经济唱戏>>는 명목아래 진행되는 소위 정치업적이라도 만들려는 쇼라는 판단을 하면 현재 각종 제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사실을 두고 조상숭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고싶다. 인륜으로 보면 조상숭배는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어떤 부족의 어떤 시기에는 별로 시원치 않은 결과도 만들어주었다. 조상숭배란 만물의 령성을 믿던 선사시대로부터 발생된 부족문화현상이다. 대부분의 부족들은 조상숭배를 통하여 생명을 준 조상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함과 동시에 조상들에게 생존보호와 부족번영을 기원했으며 더욱이는 부족내부의 모순을 약화하고 부족의 응집력을 도모하여 외부의 생존적수를 대처하던 상투수단으로 사용하여 왔다. 하지만 조상숭배도 총명한 숭배가 있고 둔한 숭배도 있다. 형식으로는 조상을 숭배하는척 했지만도 저의 조상들에 대한 무자비한 해부를 진행하고 다른 부족들의 조상들이 남긴 지혜도 배운 부족들은 가끔 성공을 보였지만 무조건 제밖에 조상이 없는것처럼 둔한 조상숭배를 고집한 종족들은 좋은 결과를 본적이 적다. 또 누구의 조상숭배가 민족주의를 고취하는데 크게 리용되여 남을 해치고 제 발등도 깐 력사도 있었기에 나는 가끔은 조상숭배에 대한 의구심을 버릴수가 없다. 그리고 또, 나로서는 요즘은 <<백가讲坛>>이라는 테레비프로그램을 구경할 용기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있어서 그 누구나 사물에 대한 벌언권은 있어야 하지만 중앙테레비라는 막대한 공공자원을 람용하여 개인적인 감성적인 표상적인 허구적인 중국경전에 대한 해석과 심득을 중형폭탄처럼 마구 쏟아부으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또다시 언제처럼 우물안의 개구리로 전변할가봐 기우를 앓게 된다. 아직은 우물안의 개구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물을 기여나오려고 조금은 기술련마를 하는 도중에 소위 대사들이 <<야  너무 덤비지 말라이 . 우물안이 바로 세상이라>> 훈시를 하면 참으로 기분이 나쁘다.       근대로부터 중국은 복고주의가 몇번은 살판을 치기는 했지만도 가련하게도 성공한적은 없다.  조상이 만들었으면 무조건 좋은거고 우리의 체질에 적합하다고 소리를 질러보았자 현실은 서방의 공업문명과 민주문명의 위력 그리고 그 혜택을 우리는 거절할수가 없다.  
7    홍콩반환과 대만해협 그리고 반도통일(허동식43) 댓글:  조회:1984  추천:162  2007-03-30
          홍콩반환과 대만해협 그리고 반도통일                                             허동식   90년대 초엽에 홍콩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많은 홍콩사람들은 돈밖에 모르고 대륙에 대한 정감의뢰감이 적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했다. 97년에 홍콩반환이 실현될 때 내가 아는 홍콩인들이 일부는  미국과 카나다 그리고 호주로 이민을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대륙인들은 그들을 무시한다든가 욕한다든가 등 행위를 삼가했다. 국책을 따르느라고 그랬을가? 대륙은 인구가 많다는 배포심에서 그랬을가? 아니면 중용문화의 아량에서 그러한 마음가짐을 지녔을가? 잘 모르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현재 대륙과 홍콩은 <<1국2제>>의 혜택을 받아 기본은 잘 정진되고 있으며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는 현상도 있고 심지어는 대륙으로 입주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대륙인과 홍콩인들의 마음소통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낀다. 하문으로 가면 배를 타고 금문군도에 속하는 작은 섬 하나를 오르지는 못하고 눈길로 구경할수는 있다. 배가 하문부두를 떠날 때에는 륙지에 집채처럼 만들어놓은 거폭의 <<1국2제로 조국을 통일하자>> 라는 정치구호를 쳐다보았느데 금문군도의 작은 섬을 바라보면  <<3민주주의로 조국을 통일하자>>는 거폭의 선전구호가 보인다. 그래서 정치선전의 애매함과 허구함을 조금 느끼게는 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무슨 주의로 하던지 통일만 하면 중국인들의 감정완결도 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활무대가 이루어져서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대만인들과 거래를 하여보면 90년대 초엽에는 적관을 대륙에 둔 사람들이 대륙에 대한 정감의뢰감이 크지만 국민당의 토지개혁시기에 땅을 내놓아 부자로 된 대만토착인들은 대륙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보건대로는 현재 대만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은 통일을 별로 원하지 않고 좀 가난한 사람들은 많이 통일을 원하는듯하다. 돈이 많은 사람은 빼앗길가봐 가난한 사람은 통일을 계기로 신세개변을 꿈꾸느라고? 잘 모르지만 우리 대륙의 민간인들은 돈이 있든 없든 통일을 원하고 있으며 또 통일을 원하는 대만인과 통일을 원하지않는 대만인에 대하여 크게 차별하지는 않느다 회사에서 받아드리는 대만단체에 가끔 대만독립분자도 있기는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의 가이드와 기사들은 다 같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해주고 민감한 이야기는 되도록이는 삼가한다. 반도통일에 대한 한국인들 태도를 생각해보고싶다. 정확한 사회조사와 통계수자는 없지만 나의 허약한 경험과 판단으로 보면 돈이 있는 한국인들의 반도통일에 대한 생각이 좀 애매하다. 야, 그 많은 거지들을 어떻게 먹여살리겠나 하는 서늘한 이야기도 내뱉는 사람도 만나보았으니 나로서는 빼앗길가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심리를 리해해주고싶다. 돈 없이 조금 가난한 한국인들은 살기가 힘들어서인지 반도통일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고 또 감성적으로 반도통일을 원하기는 하지만 소위 <<정치민족>인데도 크게 열성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의 심리를 아직 알길이 없다. 물론 원해서 반도통일이 실현되는것도 아니고 원하지않는다고 반도통일이 도산되는 일은 아니지만  동북아의 정세가 소국의 의지로서는 좌우지못되는 현실앞에서 우리는 적어도 반도통일에 대한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쪼박글 하나를 갈겨본다.                    
6    동년시절 나와 돈 댓글:  조회:1629  추천:116  2007-03-29
3전이면 얼음과자 하나를 사먹던 소시적에는 철길에 버티고 앉아 돌틈 사이로 흘러내려가는 1전짜리 2전짜리 5전짜리 동전을 건져내는 꿈을 엄청나게 꾸었던 기억이다. 교환경제가 빈약했던 시골에서 애들이 느낀 돈의 용도란 기껏해야 사탕 과자를 싣고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던 <<마차이동상점>>의 물건을 살수 있다는 그런 정도였으니 그때에 가난은 했지만 돈에 대한 생각이 퍽 단순했기에 괜찮기도 했었다는 판단을 해본다. 그뒤 소학교를 다니면서 돈이 있으면 <<마차이동상점>> 대신 생겨난 공소합작사에 가서 공책도 사고 십몇전이면 카 하고 맛좋은 사이다도 사먹을수 있다는 경험이 쌓이여 유년시기보다도 돈의 용도를 많이 알고 더 좋아하게 되였다. 어느 초겨울에 어째서인지 갑자기 배가 아파서 부친께서 나를 생산대 소수레에 싣고 공사마을로 갔는데 나는 병원 대문을 들어가기도 전에 무엇을 좀 사달라고 떼질을 해서 끝내는 합작사의 신바닥과자와 귤을 얻어먹고나서 아마도 주사 맞고 약먹고 하는 일도 무서웠던지<<아버지 ,내 배 아니 아프꼬마 , 집에 가깁소 >> 해서 과자와 귤로 배 아픈 병을 치료한 전설적인 이야기도 엮은적이 있었으니 얼마나 먹고싶으면 그랬을가고 변명을 해본다.( 이런 연고가 있어 그런지 운청남시인의 소시적에 맞형의 잔치날에 귤을 얻어먹은 일을 그린 시 한수를 아주 즐겨읽는다.) 또 설이면 큰 매형이 주는 20전으로 100발짜리 폭죽을 사다가 하나하나 풀어서는 남들의 종종 걸음뒤에 터뜨리여 누군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구경하며 배를 끌어안고 좋아했던 장난질을 할수 있었다.그 때 우리 조선족 애들은 폭죽을 화약 줄에서 풀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담배장에 불을 달어서 들고다니면서 하나하나씩  터치웠느데 << 일년을 가난하게 살아도 설만은 가난하게 보내지 않느다>>(宁穷一年,不穷一日)라는 생활신조를 지키는 동네 한족집의 애들은 몇백개짜리 폭죽을 설날만이 아니라 정월 보름에도 줄배기로 터뜨리여서 아주 부러웠었다. 그 꿈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몇년전에 설에 계림으로 놀러 갔는데 현재는 폭죽을 금지하는 중국의 많은 도시와는 다르게 계림에서는 도시 주변의 큰 광장 하나를 폭죽을 마음대로 터뜨리는 장소로 지정하고 있어 밤에 광장으로 갔다가 아들놈과 둘이서 물동이 만큼 하고 하나에 350원 하는 제일 크고 비싼 花砲 에 눈독을 드렸는데 배동했던 우리집 재정부장(집사람)한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그날 밤 그 350원짜리를 사서 품에 안고 걸어다니던 꿈만으로 에따지웠다. 그래서 내가 동년시절에 걸렸던 폭죽부족증이 지금도 남아있음을 스스로 판단을 했다. 동년시절의 돈과 나의 관계를 총결하면 대답은 얼음과자와 폭죽 때문에 돈을 좋아했고 그리워했다는답이 나온다. 사실 돈의 사용가치에 대하여 간단하게 유치하게 알았던 시기이다.    
5    기억 1976년 댓글:  조회:2266  추천:182  2007-03-25
                                           기억 1976                                                                     허동식1976년이면 내가 만 아홉살 되는 해이다. 련발적인 사건들이 중국인들의 마음과 중국의 운명을 크게 흔들어놓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3월에 개학을 하니 <<우경번안풍>>을 비판한다고 우리 코흘리개 애들도 비판문장을 지어서 흑판보에 가득 붙혀놓았다. <<우경번안풍>>이란 무엇인지 누구도 몰랐지만 비판문장을 쓰면서 어느 정도는 글짓기 련습도 했고 글자를 곱게 쓰느라고 진땀을 펄펄 흘렸다. 4월인가?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적의 신문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1면이 나라 지도자들의 행적을 보도한 글과 사진이 실렸었고 또 인민공사의 영화방영대가 순회방영을 하면 주은래 총리가 외국손님을 만나는 뉴스 영화도 많이 보여주었길래 세상모르는 애들도 주은래 총리의 모습은 잘 알고 있었다. 인자하신 주은래 총리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니 슬퍼해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사실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는데 슬퍼하지 않으면 반동이라는 욕을 먹을가봐서 슬퍼하는척 하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청명은 성묘날이라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챙기여 좀 먹고나니 또 무슨 천안문사건이라는것이 발생해서 학교에서는 애들을 들볶으며 비판문장도 많이 쓰게 했고 <<소근장을 따라배우>>는 노래도 힘차게 부르게 했다.(유감스럽게도 소근장이 어디에 있는 동네인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소근장의 무엇을 따라배웠던지도 기억이 없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지 얼마 안되여 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주은래 총리 다음에 주덕위원장이 서거했으니 어른들이 올해는 무슨 해인가고 좀 수근거린다고 느꼈는데 얼마 안되여 또 모주석이 서거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우리는 더욱 큰 슬픔에 잠기고말았다.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검은 완장을 장만해서 팔에 걸었고 작은 흰 종이꽃을 가슴에 걸고 공사마을에 림시로 만든 추도장에 가서 경례를 하고 묵도를 하는 식으로 모주석을 추모했다. 우리 학생들은 학교의 통일안배로 난생처음 추도라는 회에 참가했느데 우는 애들이 참 많았다. 울고는 싶었고 또 슬펐지만도 무슨 영문에선지 나는 눈물은 못흘렸던 기억이다. 다행이 선생님에게 저 놈이 모주석 추도장에 가서 눈물도 아니흘리더라는 고자질을 하는 애가 없어 그럭저럭 고비를 넘겼다.    그 다음 달인가? 일요일날 엄마와 같이 발로 디디는 방아를 찧고 있느데 동네 어른들이 야, 모주석 부인 강청을 잡았다오 하고 서로 소식을 전했다. 처음에는 요언날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선방송과 신문을 통해 <<4인방>>을 분쇄했다는 소식이 확인되였고 우리 애들은 또  <<4인방>>을 비판대회도 열었고 의미도모를 비판문장을 엄청나게 썼다.     나느 편벽한 작은 시골에서 이렇게 1976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동년이였던 나에게는 거의 무의미한 한해였다. 비판문장을 쓰고 슬픔에 잠기고 그리고 공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지금은 애들마저 정치에 내모는 세월과 굿두바이를 했다  이것도 중국이 진보했다는 하나의 유력한 증거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국민들이 자기의 운명을 어느 개인에게나 소수인의 집단에 맡겨야 했던 이야기도 서서히 종말을 보인다고 생각된다.
4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허동식39) 댓글:  조회:2059  추천:143  2007-03-25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                                                                    허동식연변 조선족들이 안쪽에 사는 남도치들의 아빠, 밥 먹어라 하는 식의 억양을 웃었고 어른이고 애들이고 남자고 녀자고 데꺽하면 엠나 에미나 하는 갱명치못한 말들을 입밖에 내뱉는 신세이면서도 가시나 계집애 하는 소리들은 귀에 거슬리게 받아들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남도치들은 연변에서는 돼지고기를 도투고기라 하구 개장국을 개탕이라 하더라, 그리고는 연변인들 앞에서 어느 정도는 야유의 정서도 내비치면서 겠습둥? 꾸마! 등 접미사 사용법을 흉내내느라고 진땀을 펄펄 빼었었다. 같은 종족에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면서도 부동한 사투리를 구사한 덕택으로 우스운 일도 좀 두었었고 심지어는 오해까지 발생했었다. 그 원인은 서로의 래왕이 적었기 때문이였고 또 서로가 아량이 적었기 때문이였다고 생각된다. 살다가 오늘날에는 가끔 허선생 고향이 어디세요? 억양이 북쪽 같은데 라는 질문을 받는 사례가 있다. 예 함경북도입니다. 억양이 서걱서걱 합지 퍼그나 거칠꾸마. 하는 우스개식으로 대답을 해놓고는 억울한 생각끝에 나는 괜히 <<삼십년은 강 동쪽 삼십년은 강 서쪽>> 하는 중국속담 풀이을 못해주었다는 후회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우리는 북쪽 말씨를 표준어로 배웠는데 당신들은 영어권과 좀 사귀여서 외래어도 척척 잘 쓰지만 영어권과 직접적인 래왕을 못한 우리는 그렇게 <<간단>>한 외래어도 모래밥을 씹듯이 삼키고 있다는것,또 언어도 경제실력을 안받침한다는데 우리도 잘 살 때가 있겠지 하는 식으로 그 때가 오면 우리 북쪽 말씨가 표준어로 될지도 모른다는 어린애식 심리반발을 나로서는 거절하기가 조금 힘들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 북쪽 말씨가 거치르고 공산국가의 언어는 공격성이 강하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나면,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도, 오늘은 연변말과 북쪽 말을 위한, 아니  우리말 사투리들을 위한 변명을 꿰하고싶다.     언어에 대한 정리도 좋고 표준말씨를 규준한 언어통일도 좋기는 하지만 나는 사투리가 출렁거리는 현상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단일민족으로서 문화적인 구성이 단일한것이 우리의 약점이기도 하다. 또 어떻게 보면 인구가 적은것이 우리의 가벼운 부위기도 한데 ,오늘날까지 여러가지 사투리가 그나마 조금은 생생하게 남아있고 이런저런 오해라든가 상술한 불필요한 심리반응까지 가지게 되지만 여러가지 사투리의 존재를 근거로 우리도 꽤나 큰 종족이구 사람종자두 많아서 사는게 재미있다는 결론을 남들에게 보이고싶다. 그리고 또 언감생심 우리도 그저 그렇게 간단한 종족은 아니다 하는 식의 자존심과 자신심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조선과 한국의 언어가 어떻게 구별되고 중국의 조선족언어와 한국어가 어떻게 구별되는가는 질문을 받을지라면 나는 아예 아닌 보살하고 당신 광동말을 전혀 못알아듣지? 아마 북경말과 광동말만큼의 구별은 될거야! 하고 으름장도 아닌 으름장을 한다. 돌아서서는 가만히 제 입을 딱 벌리기도 한다.     이상 두서없는 글을 우리말 사투리를 위한 변명으로 읽어주시면 크게 쎄쎄하겠다. 또 쌘큐하겠다.
3    이 겨울에 동년의 겨울놀이를 돌이켜본다 댓글:  조회:2007  추천:129  2007-03-20
겨울에는 한가한지라 친구들끼리 돈내기 마작을 좀 엄청나게 했다. 좋은 습관은 아닌줄은 알지만도 <<중국오락문화의 으뜸>>이고 <<변증법의 교과서>>이라는 나의 평가를 받은 마작놀이, 하여튼 놀고나면 허리가 시큰하지만도 재미는 있다. 마작을 하고나면 흘러간 동년이 생각힌다. 내 아이적에는 친구들과 같이 어떤 놀이를 했던가? 연변의 겨울은 춥고도 길기에 눈쌓인 산등성이에서 썰매를 타던가 얼음판에서 <<애도>>를 탄든가 손을 홀홀 불며 딱찌치기 한다든가를 내놓고도 실내놀이도 많이 했었다.      실내놀이로서 첫번째로 기억나는 놀이는 이야기놀이다. 집구석에 주렁주렁 모여앉아 애들끼리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놀이인데 책도 얼마 읽지를 못했고 세상구경도 얼마 못했으니 한다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였을가? 거의가 애들이 쥐꼬리만한 상상력을 리용하여 꾸며낸 이야기로서 고향말로 <<주겁에 들지 못하는 >> 그런것들이였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야기인데. 내용은 애들이 개미굴을 파보니 구멍이 점점 커지더라는걸,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않고 수십메터 파고들어가니 끝내는 특무들이 우글우글하는 지하궁전 하나를 발견했고 해방군들과 민병들이 특무굴을 크게 소탕해버렸다는. 누가 꾸면낸 이야기인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또 어느 정도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 때문에 내 또래들이 좀 골탕을 먹었었다. 다음해 봄에 우리보다 큰 애들이 우리를 이끌고 산비탈에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 힌트를 받아  동굴을 크게 만들어서 마을의 전기가지 끌어들여 큰 지하왕국을 건설한다 했었다. 그래서 우리 열몇명이 이틀간 크게 고생하면서 거의 3메터 깊이의 작업을 완성했느데 산비탈 우에 있는 달구지길이 무너진다고  생산대원들의 큰 야단을 당했다. 그리고  또  지하궁전공정이란 사실 우리의 힘에 너무 부치는 일이여서 우리는 그 위대한 공정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윷놀이였다. 열콩으로 만든 윷은 모와 슝이 잘 나오지 못하고 뒤똘만 나오는지라 아예 싸리나무 가지를 절반 쪼개여서 윷을 만들면 가마목 부근의 공골에서 모와 슝이 제법 잘 나왔다. 허지만 아무런 내기도 걸지 않으면 너무 재미없기에 한판 끝나면 어른들한테서 당한 <<똥 먹이기>>를 했다 .이긴 편이 진 편을 상대로 주먹을 등위에 감추고 윷의 개수를 선택하여(빈타지도 포함) 내놓고는 몇개 있냐 물으면 대방이 알아마추면 끝나고 알아맞추지 못하면 알아맞출 때까지 개똥에 사람똥에 피똥에 하고 수두룩한 똥을 먹이고는 나중에는 장싸재 피똥이라는것까지 먹였다. 후에 알고보니 장싸재란 동네에 살던 한족사람 张瞎子가 무슨 일로 불타죽었는데 그 주검이 까맣게 타버려서 아주 흉했던지 동네에서는 죽은 사람까지 끌어넣으면서 윷놀이를 했던것이였다. 진짜 똥은 먹어보지도 먹이지도 못했지만 운수가 사납고 기술이 약하면 너무 당하는 판이라 지고는 도망가는 애들도 더러 있었고 윷놀이 <<똥 먹이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가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헌데 재래적인 윷놀이는 너무나 단조로워서 후에는 큰 종이장우에 자동차와 기차 그리고 기선과 비행기 등 교통수단을 그려넣고 정해진 선로에 간혹 지름길도 만들고 후퇴하는 길도 만들어놓은 윷판이 퍽 류행했던 기억이다. 현재도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 내가 비행기는 어느 정도 그릴수 있는게 아마 그적에 윷판을 좀 그려본 덕택이라고도 생각된다. 세번째로 기억나는 실내놀이는 화투치기와 트럼프 놀이다. 화투는 현문화관에 미술을 담당한 분이 그려서 간단한 인쇄만 해서 동네 친척집에 놓고 한장에 십전씩 팔었었다. 그림 한장에 48장의 화투가 그려져있어 반성품식이였느데 좀 부지런한 애들이 풀을 끓여놓고 낡은 트럼프장을 오려서는 거기에 화투그림을 하나하나 바르고 나중에 퉁기(清漆)칠까지 하고나면 한 이틀간은 신고해야 했다. 나도 한번은 그렇게 화투 한세트를 제작했느데 셋째형이 어떻게도 나를 구슬려서 내가 놀아보지도 못한 화투를 제가 몇일 놀고는 나한테 돌려주었던 기억도 난다. 화투란 노는 방식이 기껐해야 <<펄 따기>>여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고 재미가 적었던지 후에는 우리는 트럼프 놀이를 더 즐겼었다.누구던지 트럼프 한셋트만 있으면 꽤나 득세나 한것처럼 우쭐렁거리며 애들을 모여놓고  <<3자번지기>>  또는 <<썸지(升级)>>라고도 하는 놀이거나 도둑빼기를 하면 어느덧 방학이 다가고 개학을 맞이게 되였었다. 소학교 5학년때부터였던가? 우리는 내기가 없는 트럼프놀이가 싫어서 집의 석냥을 들고 나가 <<갑오배기>> 또는 <<싼따이>>로 석냥개비 내기를 했는데 애들의 손때가 너무 묻어서 석냥개비를 마찰해도 화약에 불이 일어나지 않으니 종종 엄마의 야단도 맞았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나의 동년. 그 때 모여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현재는 한국으로 러시아로 많이 나갔고  <<팔팔하지 못한 >> 몇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언제이면 또 그들의 얼굴 한번 더 볼수가 있을가? 그립다.
2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과 문학인인격에 대한 평론 댓글:  조회:1652  추천:149  2007-03-19
좋은 건축물 하나를 두고 보는것으만으로도 누리는것으로만 만족을 느껴도 괜찮다. 구태연히 건축설계자의 사소한 일까지 알아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훌륭한 영화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이다. 스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운운지정까지 적라라하게 기록하여 대중들에게 선을 보이는 일은 일부 오락계 기자들의 생존수단이기는 하지만 가벼운 웃음 하나로 슬그머니 지나쳐버리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평론도 문학작품만을 거론하는 편이 신사다운 일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사람이니 인격적인 흠집도 있기 마련이고 생활고도 있기 마련이고 감정파렬도 있기 마련이다. 또 문학인의 취미와라든가 가치론 등도 평론자와는 크게 거리를 두었을지도 또는 손바닥과 손등처럼 완연 다를수도 있겠다.그래서 문학사적인 평론도 아닌데 문학인의 사사로운 일가지 건드리며 옴니암니 캐고드는 일은 어딘가 우스운 일이다. 윤리주의를 리상화로 추구하는 동네여서 그런지 아니면 요즘 무슨 바람이 잘못 불었느지 문학작품 평론에는 문학인의 인격을 크게 작게 건드리는 글들을 읽어보게 된다. 원래부터 큰 잔치도 아닌데 잔치에 오려는 사람들의 사적인 일들을 다룬다면 잔치에 참석하려는 인원수가 자연히 적어질거고 또는 마음을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서로 두던해주는 패를 무어서 잔치를 들락날락할것이다.그러면 잔치는 명색이 잔치이지 루추한 싸움터로 변해서 세인들 웃음거리를 하나 더 만들기가 아주 가능하다. 추어올리기나 내리깍끼나 되도록이는 문학인의 인격에 대한 평가거나 건드림이 없도록 진행함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문학평론은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을 리지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지 문학인에 대하여 감성적으로 좋거니 나쁘거니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일은 절때 아니지 않느가고 이 쪼박글을 위하여 변명해본다.  
1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을 댓글:  조회:2196  추천:87  2007-03-19
      필리핀은 세계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가는 로무수출 나라이다. 필리핀의 해외에서 로무에 종사하는 인구가 700만명이며, 년간 로무수입이 75억딸라로서 로무수출이 국민경제를 거의 좌우지한다고 한다. 필리핀의 로무수출은 20세기 60년대로부터 시작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는 40여년이라는 동안에 외화를 적잖게 챙겨을것이고 국민경제도 많이 발전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로무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원시자본축적을 완성하는 흉내만 내고 현재도 후진국 딱지를 벗지못하고 있다. 필리핀인들은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들인 돈으로 먹고 마시고 쓰고 탕진했느가? 그들의 소비구조와 투자경제운행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필리핀의 이러한 상황은 세인들의 거울로 되여있음은 틀림이 없다.        작년 겨울에 연길행차를 했다. 2년사이에 연길은 크게도 변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이 크게 맑아졌고 고급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일어섰다.헌데 마음구석에는 연길의 인구가 얼마길래 아파트를 이렇게 많이 지을가고 의구심도 있었다. 그래서 연길 체류기간에 아파트가격과 판매상황에 대하여 조금 문의해보았고 또 아파트를 세를 주는 시세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나는 연길의 부동산 개발은 경제적인 규칙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경제현상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였다.    담배공장과 술공장을 내놓고는 산업경제가 거의 침체상태에 머물어있는 고장에서 가련할 정도의 농업경제의 수입으로는 학교도 운영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해외로 나간 20여만명의 로무자들의 피땀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부동산 개발을 한다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납득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부동산 투자도 경제의 장래성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안받침하여야 한다고 하지만은 무조건 집값이 오를거라는 생각 하나로 피땀으로 챙긴 돈으로 아파트를 장만하고 다시 해외로의 로무수출의 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꽤나 많음을 느꼈다.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을 망탕 소비하기보다는 <<고명>>하겠지만 경제의 장래성이 별로 시원치 못한 고장에서 부동산 투기보다는 산업주의 정신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파트도 그렇고 부동산도 그렇고 산업경제에 비해서는 투기성이 강하고 주기가 짧은 경재투자이다. 산업경제가 락오되고 인구류실이 엄중한 연길에서 좋은 아파트를 많이 짓는다 해도 텅 비여가는 도시의 집값이 얼마나 오를가? 화페적인 계산으로 오를수도 있겠지만 내실이 빈약한 경제구조로서는 경제구조의 안바란스와 포말경제의 도래를 맞이하기가 쉽다. 나의 욕심으로는 몸뚱이로 힘겹게 벌어온  돈일수록 알차게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농군들의.경제정신과 경제경험이 부족하며 또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연변은 아직 민영경제의 규모적인 활성화를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지만 정부와 연변국민경제 발전계획의 올바른 주도와 유도아래  우리도 차츰차츰 산업경제의 기능을 련마하고 산업경제의 머리를 키우면서 살어가는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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