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복숙
색즉시공
할빈의 봄은 해마다 꾸물거리며 늦게 찾아온다. 산동에 있는 친구는 벌써 위챗에 꽃잎이 떨어지는 사진을 올려놓으며 으시댄다. 그렇게 봄을 기다리기에 지쳐있을 때, 봄 같지도 않은 봄이 야윈 가슴을 드러낸 채 내 곁에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위여서 봄 같지 않은 봄, 짜증나는 봄, 뭐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봄이다.
그 무렵, 동생에게서 련락이 왔다. 5.1련휴에 딸애를 데리고 할빈에 놀러오겠다는 것이다. 조카가 오면 봄나들이를 해야겠는데, 얘는 아직 어려서 명승이요, 고적이요 하는 것에는 통 흥취가 없고 다만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점찍어놓은 곳이 할빈의 문화공원이다. 아들애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로 수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공원이다. 할빈에서는 놀이공원으로 유명하다.
거리는 아침부터 차와 행인들로 북적이는데 봄이랍시고 높고 푸른 하늘과 따뜻한 해볕마저 그 행렬에 가담해 세상은 온통 혈기왕성하고 시끌벅적하다. 봄바람에 풍선이 기우뚱거리며 춤을 춘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냐?!”
“와! 룰러코스터! 멋있다!”
공원은 온통 인파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놀이기구를 타려는 사람들은 구불구불한 긴 대기 행렬을 만들어놓았고, 아이들은 그 사이로 뛰여다니며 좋아했다. 그렇게 줄서기를 하여 차례가 다가왔지만 정작 룰러코스터가 멋있다고 한 조카는 점점 더 겁이 난다는 표정이다. 같이 탄다고 대답은 해놓았지만 거꾸로 놀이기구에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볼 경황없이 비명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정확히 1분 43초 동안, 1초라도 더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 질식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그 시각 놀이가 결속됐고, 나는 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면에 내려올 수 있었다.
지면에 내려서고 나니 ‘오, 이걸 두고 스릴이라 하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금방 스릴을 만끽했으니 다음번에는 좀 쉬운 걸로 놀기로 했다. 마천륜이였다. 바로 공원 문어귀에 있었지만 아까는 그냥 스쳐지나온 거였다.
룰러코스터가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거라면 마천륜은 늦은 속도를 추구한다. 속도가 느릴수록 차 안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팽팽해진 신경을 느슨하게 풀어줄 수가 있다. 게다가 온 시내의 전경을 천천히 다 구경할 수가 있어 좋다. 그러니 이것도 역시 다른 방식의 스릴이다.
정상에 올라갈수록 땅 우의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아지고 지나다니는 차량들도 아이들 장난감 같다. 더구나 바로 이웃에 있는 극락사의 내부가 분명하게 보인다. 평소 향객이 많기로 이름난 극락사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니 사람이 몇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바글거리는 공원과는 어쩐지 대비를 이루며 한산한 느낌을 준다.
극락사는 동북3성의 4대 명찰로 불리우는데, 사찰 내 7층 보탑이 명성 높다. 또한 이 7층 보탑과 키를 같이하는 황금색 대불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마천륜에 앉아서 사찰을 굽어보니 대불상의 부처님 꼬불꼬불한 머리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사찰 내에서는 부처님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발밑에 선 중생들을 굽어보는데, 여기서는 우리 같은 중생들이 부처님을 굽어보니 불경스럽기 그지없다.
극락사는 지난 세기 20년대에 지어진 사찰로, 어찌하여 문화공원과 이웃하게 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한 건국 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문화공원이 어찌하여 극락사 옆에 자리를 잡게 되였는지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한쪽에서는 중생들이 온갖 스릴을 다 추구하여 기이한 놀이기구를 만들어놓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쏠리고 하는 감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푸르스름한 분향 연기가 피여오르는 가운데 참배자들이 숙연하고 진지하게 부처님에게 기원을 한다.
불교에 색즉시공이라는 말이 있다. 불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적 뜻은,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그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며,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존재의 실상은 공이라는 것이다.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곳과 정신적 의탁과 즐거움을 찾는 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도 역시 인연은 인연이리라. 수십년을 그렇게 이웃하여 왔으니 그 인연 결단코 보통의 인연이 아니리라.
다시 지면에 내려왔다. 인파가 그냥 말 그대로 파도가 되여 들씌워진다. 그래도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이 가장 마음이 든든한 것 같다. 문득 여기서는 마냥 짜증스럽고 봄 같지도 않은 봄이 사실은 자연의 것이 아닌 인간의 열기로 봄이 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연이 그러할진대 짜증내서 더 뭘하랴? 놀이공원과 이웃하고 서 있는 부처님도 짜증을 내지 않고 있는데…
▣ 수필 / 채복숙
복장
아미산 금정.
올라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요즘 말로만 들어온 보현보살이 머리우 푸른 하늘에 비늘구름을 쫘악 펼쳐놓은 채 높이높이 앉으셔서 금빛찬란하게, 사면팔방, 아래우에서 동시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쯤 내리깐 눈으로 중생들의 놀란 모습을 굽어보는 보살님의 입가에는 알릴락 말락 느긋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찬란함의 극치였고 화려함의 극치였다.
잠간 넋 나간 사람처럼 보살님을 쳐다보며 와아― 를 련발하던 중생들의 발길이 빨라졌다. 다투어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관광지들은 항상 사람이 개미처럼 바글바글해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고르려면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해야 하며, 얼굴에는 철판을 깔아야 한다.
그래도 여기 금정에서는 중생의 고민을 잘 아시는 보살님이 사면팔방, 아래 우로 모두 얼굴을 볼 수 있게 계셔서 그나마 사진찍기가 쉬웠다.
부지런히 샤타를 눌렀다. 코끼리 우련화대 높은 곳에 단정히 앉아계시는 보살님, 날아갈듯 처마가 번쩍 들린 금전, 금빛찬란한 대웅보전…
인터넷에 널리 류행되는‘바가지 잘 씌우는 중국 9대 관광 명승지’인 세번째 순위로 이름을 올린 불교 명승지 아미산, 이 가이드북에 따르면 아미산에서 분향하는 건 그냥 돈을 태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과연, 아미산에 오기 전부터 가이드 언니는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불교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강의에 이어서는 생년월일을 놓고 운수를 보는 일대일 상담이 이어졌다. 나는 살이 끼었다고 했다. 운수가 불길하다고 했다. 그러니 아미산 고승이 개안공양을 하는 불상을 모셔야 하고, 방생도 해야 하고, 분향도 해야 하고… 물론 이 모든 것은 자원적이라고 했다.
가이드 언니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상담에는 벌써부터 돈냄새가 팍팍 풍기고 있었다.
각설하고, 아미산에 와서부터 가이드 언니는 불상을 함부로 사진 찍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물론 이러한 상식 쯤은 나도 알고 있다. 과학적으로 풀이한다면 주로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이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불상에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리유는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가이드 언니의 해석에 따르면, 불상이나 보살상을 함부로 사진 찍는 것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며, 또 다른 일설로 ‘부처님을 모셔오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정의 보현보살은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는 것이였다. 복장(腹藏)을 하지 않았기에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것이였다.
여기서 새로 알게 된 것이 바로 복장이란 불교 용어다. 복장이란 불상의 내부에 사리나 보화, 경전 같은 것들을 봉안해넣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이 오장륙부가 있고 령혼이 있는 것처럼 복장을 하면 부처님이고 보살님이지만, 복장을 하지 않으면 그냥 불상이고 보살상일 뿐이라고 했다.
가이드 언니의 말을 들으며 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령혼이 있어야 인간이고, 령혼이 없으면 그냥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찬란하고 화려하지만, 또 사진에 아름답게 나왔지만, 어쩐지 숭엄한 분위기가 결여된 듯한 느낌,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좋은 향수를 치더라도 인간의 마음과 령혼에서 풍겨나오는 내면의 향기를 따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여기 금정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잘생긴 승려를 만났었다.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배우가 되지 않은 것이 아깝구나 할 정도의 미남이였다. 신도들인지, 현지인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곁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투어 길을 비키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 승려 또한 친절하게 웃으며 겸손히 답례를 했다. 그리고 역시 길을 비키는 것이였다. 그렇게 서로 겸양하며 바람결처럼 잠간 옷깃을 스쳐지나갔지만, 따뜻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고승의 고매한 풍채가 돋보이는 대목이였다.
그러고 보면 불교는 참으로 묘한 종교이다. 처처에서 인연이 따른다.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의 돈나무가 되여주기도 하고, 속인들이 돈을 내고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또 심오하기 이를데 없는 철학이기도 하고, 깨달음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초탈을 얻게 하기도 한다.
찬란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보현보살을 우러르며 내 마음의 복장에는 무엇을 넣어두어야 할가를 다시 생각했다.
▣ 수필 / 채복숙
세상의 밖
“쾅당― 나무아미타불― 쾅당― 나무아미타불―”
…
끝내 세상에서 멀어진 것 같다. 혹은 세상 밖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있는듯 없는듯 고요히 흐르는 단조로운 불교음악, 그리고 그 사이로 가끔씩 끼여들어서는 쾅당― 하고 존재감을 알리는 바람…
그래 멀어졌어.
당연히 멀어져야겠지.
하늘의 끝에도 다녀왔을라니…
이른봄, 오후의 해볕이 황갈색 나무가지 사이로 흔들리며 얼른얼른한 그림자를 만든다. 바람은 그 나른한 해볕과 나무가지 사이를 넘어서 덜 닫긴 문고리를 당긴다. 그리고 쾅당― 소리를 지르고는 언제 그랬냐 싶게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 그 자리에 “나무아미타불―”의 단조로운 곡조가 스멀스멀 집안에, 아니, 내가 앉아있는 자죽원 안에 기여든다. 반복이라는 그 하나의 방법만으로 사람을 세뇌시키려고 단단히 준비한 음악이다.
이 자죽원은 공원이 아니라, 식당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찰 내의 채식 식당이다.
여기는 중국 산동 영성, 오늘은 불교 관광지 적산이다.
자신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마음이 힘들다는 리유로, 아니, 사람들에게는 내놓고 말할 수 있는 그럴듯한 리유를 만들어놓고 나는 여기 영성에 와 있다. 이른봄, 꽃이 피지 않은 영성은 어디나 한적하다. 그 한적함과 더불어 한가하고 한적해보이는 내가 홀로 사진기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나는 워낙 외계인이라는 딱지가 붙었는지라, 어디서나 눈총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오전에 이 관광지로 올라올 때 앉았던 불법택시의 기사는 아예 “웬 녀자가 홀로 구경을 다니느냐?”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뭐 그래도 다른 나쁜 시도는 없어 그나마 여기 민풍이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관광지 안에서 홀로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나니 점심을 거르게 됐고 시간은 오후 2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별로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자죽원 정원 문앞이 하도 고요해서 그 안에 들어서면 인간계를 벗어날 것 같은 느낌에 무작정 문턱을 넘었다.
내가 마침 정원의 문턱을 넘어서는데 식당의 반쯤 열린 문을 밀고 웬 뚱뚱한 녀자가 나왔다. 나이는 오십대 쯤인데, 펑퍼짐한 체격에 벌겋고 큼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구경 온 관광객으로 생각하는지 밥 먹겠는가 묻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먹을 게 있나요?”
녀자는 아예 나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비수기여서 관광지에 손님이 별로 없으니 식당이라고 잘될 리 없었다. 랭동 만두가 있다고 했다. 냉이소 만두로 메뉴를 정했다.
식당 안은 텅텅 비여있었다. 트럼프 타워도 울고 갈 휘황찬란한 황금색으로 도배되여있는 식당이였다. 불교사찰의 채식 식당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무도 없다는 그 한가지가 퍼그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갈증이 몰려왔다.
더운물 한잔 청해서 마시며 앉아있으니, 저 바람이 알은 체하고, 저 불교음악이 끈질기게 나를 세뇌시키려 든다.
이미 찍은 사진들을 두루 들여다본다.
음악광장에 높이 앉으신 보살님은 보살님답지 않게 너무 아름답다. 보살님이 음악과 분수에 맞춰 빙빙 돌 때면 정병에서 감로가 흐른다. 그 장면을 찍고 나서 나는 보살님에게 내 마음도 청정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보살님은 듣지 못하셨는지 그냥 한결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조금은 서운했다. 그렇게 해주마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셨으면 내 마음이 즐거웠을 건데.
더 높이 앉으신 명신은 역광이여서 얼굴이 시커멓다.
너무 높이 앉으셔서 그런지, 역광이여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내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 신이다.
장보고기념관 내부는 고적함을 넘어서 살짝 음산한 기운까지 돌았다. 다행히 기념관 밖은 해빛이 짱짱해서 좋았다.
어제 가본 하늘의 끝에는 고적함이 가득 흘렀다. 물가에 홀로 선 바위가 고적했고, 선연하고 아름다운 단청과 황금빛의 유리기와를 한 궁정 같은 건물도 고적했다.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소형 장성은 더욱 고적했다. 덕분에 사진 찍기에는 안성맞춤이였다. 나 같은 아마추어의 렌즈에도 길게 잘 잡혀줬다.
이윽고 음식이 들어왔다.
직경이 30cm는 잘될 듯한, 얼핏 보기에도 접시가 아닌 대야에 물만두가 그득 담겨있다. 15원 어치의 음식이다.
“너무 많습니다. 이건 랑비입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한그릇이 워낙 그렇습니다.”
나의 항의에 녀자는 이렇게 한마디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상냥해보일 것이라 여겨지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나가버렸다.
딱히 무슨 맛이라고 할 수 없는 만두이였지만, 그럭저럭 거의 절반을 먹어치웠다. 그것도 녀자에게 한결 친근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위속이 그득 차고 나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다시 인간계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바람소리도 음악소리도 그냥 바람소리요, 그냥 음악소리가 되여 별 볼일 없이 내 귀가를 맴돌았다.
아― 인간의 삶이란 아무래도 정해진 우리를 떠날 수 없구나.
세상 밖 어디에도, 심지어는 하늘의 끝도 결국은 인간의 우리이다.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외계인의 마음을 지녔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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