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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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인생은 색갈의 강이야-
2021년 06월 24일 07시 45분  조회:20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수필
인생은 색갈의 강이야-

채복숙

 
출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휴일의 성소(圣所)는 침대’라는 말이 있다.(출처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본인의 명언으로 치자.) 더구나 해빛 따뜻하고 나른한 봄날 주말이면 침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산만함이 나처럼 게으르지만, 매일 아침 꼬박꼬박 제시간에 출근해야 할 출근족에게는 황금 같은 휴식일 것이다. 그런데 전번 휴일에는 아침부터 급히 나가 돌아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속으로 ‘알파카’라는 동물의 한어 속칭을 몇번이나 외우기는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였다.

바로 며칠 전, 사월 중순임에도 눈을 퍼부은 이 곳 북방 도시는 아직도 우중충했고, 나는 선잠에서 깬 아이처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온 오전 시간을 할애해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거리에 나서니 아침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텁텁한 다갈색으로만 인식되던 사위가 갑자기 연분홍 물결에 설레이고 있었다.

“어? 언제 꽃이 폈지? 아침에는 못 봤는데?”

그렇다, 아침에는 꽃이 핀 걸 못 본 거다. 선잠에서 깨여 떼를 써야겠는데, 떼를 쓸 수 없는 어른은 눈앞의 풍경도 선택적으로 본 것이였다.

거리 전체가 연분홍의 물결이 되여 흐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그 연분홍들은 솰솰 설레이였다. 긴 어둠의 겨울을 지나 드디여 봄이 온 것이였다.

봄은 연분홍이다.

젊은 시절 나는 연분홍을 되게 좋아했다. 옷장 전체가 연분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체격이 가녀린 나에게 연분홍 옷은 이래저래 잘 어울렸다. 친구들은 나와 같이 쇼핑을 나가면 분홍색만 봐도 “저기 네 스타일이 있다”고 소리칠 정도였다. 스스로도 연분홍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친구들이 “참 예쁘구나”고 할 때면 저절로 입이 함박만 해졌다. 나는 그렇게 나이가 꽤 들 때까지 그게 인사적인 칭찬일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심성이 단순해 빠진 건 확실하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고, 나는 리유 없이 마냥 빨간색이 좋은 시간을 보낸 적 있다.

온 여름 빨간 반팔티에 빨간 핸드백을 메고 사처로 쏘다니군 했으며 이래저래 사람을 웃기는 사고도 적잖게 쳤다. 그때의 나는 여러가지 일들에 참여했고, 또 그 모든 것들에 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 우에 놓인 빨간 계혈석 팔찌가 싱겁게 바닥 우로 굴러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비싼 것은 아니였지만, 그것은 내가 유난히 아끼는 것이였고, 여름 내내 나와 같이한 것이였다. 미신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주인을 대신해 액을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대로라면 나는 그것을 종이봉투에 담아 어디엔가 고이 매장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되여 그냥 쓰레기통에 담아버렸다.

그 날 저녁, 나는 한창 빨갛게 피고 있는 월계화 가지를 쑥덕 잘라버렸다.

“난 아직 자를 때가 안되였단 말이야!” 월계화는 이렇게 소리치며 내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뾰족하고 단단한 가시에 찔린 손에서는 찔끔―하고 새빨간 피방울이 배여 내왔다. 몇년 동안 잘도 꽃을 피우던 월계화는 이젠 내 기억에서 가물가물 사라져 간다.

가을이면 나는 락엽과 똑같은 색갈의 가벼운 재킷을 입기 좋아했다.

박봉을 받는 내가 백화점에서 일개 재킷 하나를 월급의 1/3을 주고 산다는 건 무리긴 무리였지만 나는 눈 한번 깜빡 안하고 그것을 사들이였다. 그것은 밝은 노란색 우에 흰색의 반투명 막을 친 것처럼 선명하면서도 뽐냄이 없고, 발랄하면서도 진중함이 있는 색상이였다. 재킷은 락엽처럼 가벼웠지만, 가을바람을 제법 잘 막아냈다. 그 시절 나는 자연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오후의 밝은 해살을 받으며, 락엽이 덮인 소로길을 걷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그것을 두고 나는 인생을 누리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때 나는 자연 속에서 많은 것들을 주어왔다. 다친 자국이나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락엽 한장은 좋아하는 시집 속에 끼워 넣었고, 탑처럼 정중한 모양을 가진 솔방울은 서가 우에 잘 세워 두었다. 그리고 맑은 하늘 아래의 산이며 들이며, 물이며 등 가을 풍경들은 사진으로 고화되여 내 기억 속과 클라우드 속에 동시 저장되였다.

북방의 겨울은 매섭기는 하지만 짜장 청정한 기운이 있다. 그 청정한 기운은 특히나 감청색의 하늘빛에서 선연하게 안겨온다. 감청색은 또 바다의 색갈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람보석의 색갈이기도 한다. 그것은 온갖 희열과 슬픔, 분노, 사랑과 미움이 인생이라는 용광로에서 단련되여 나온 것처럼 단단하고 순수하다.

그 단단하고 순수한 감청색을 옷으로 만들어 입으면 고상하고 신비스러운 멋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컨트롤하기 쉬운 색상은 아니다.

나는 겨울이면 감청색의 깃 높은 스웨터를 입는다. 그것을 입고 나면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 쌀쌀맞고, 랭정하면서도 순수한 시간들에 나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편린들을 손 가는 대로 잡히는 종이장에 아무렇게나 적어놓는다. 그 종이 조각 우의 글자들은 철학가의 고상한 언어들처럼 두서가 없지만 또한 내 삶의 단증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봄이 왔다.

나는 연분홍과 감청색으로 짜깁기를 한 스카프를 둘렀다. 연분홍과 감청색은 천생연분인 것처럼 잘 어울린다. 발랄하면서도 랭정하고, 순수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나는 봄바람 속에서 스카프를 날리며 꽃이 핀 것을 본다. 연분홍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봄날은 여전히 단순하다.

해빛이 내리쬔다. 투명한 해살은 온갖 색상들을 품고 있다. 애기풀의 화사한 연두색이며, 오래된 건물의 진중한 암회색이며, 지나가는 회사원의 깔끔한 하얀색이며… 세상은 색갈의 회합이고, 인생은 색갈의 강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으로 밝은 해살이 가득 들어와 침실은 명정한 분위기가 난다. 금전운이 좋으라 친 베이지색 카텐이 유난히 럭셔리한 감을 준다. 편안한 침대에 몸을 뉘였지만 생각은 제멋대로 쏴쏴― 흐른다. 올 봄에는 아까 보았던 아방가르드한 아가씨처럼 머리카락을 보라색으로 염색하면 어떨가? 그러면 계절의 륜회처럼 마음에도 또 새로운 색상들이 흘러들겠지…

 

《도라지》2021년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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