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복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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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잦지 않네요…
2021년 12월 17일 15시 34분  조회:145  추천:0  작성자: 채복숙
바람이 잦지 않네요…
 
▣ 수필 / 채복숙
 
번화한 시가지 한 복판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 작은 골목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건물들 뒤로 뻗은 소로길이나 별로 다름없는 골목이였습니다. 음습하고 루추했습니다. 맹인안마방이며, 소액대출회사며 그러루한 간판들을 대충 내다 건 가운데로 아침녘에만 들어오는 해볕을 쬐러 우중충한 로인들이 맨 층계에 앉아 어쩌다 지나가는 길손을 구경하는 그런 거리였습니다. 골목 이름이 뭐였던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골목 이름 같은 건 알아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골목을 나는 매일 아침 걸어다녔습니다. 출근하는데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지름길이였기 때문입니다. 
 
음습하고 루추하고 소외된 골목이였지만 가을이면, 특히 가을 아침이면 진짜 아름다웠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 한그루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키도 훤칠하지 않았고, 몸매도 풍성하지도 않은, 별로 희한하지 않은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봄이면 흰색의 자잘한 꽃들을 피우면서 얄포롬한 향기를 풍겼습니다. 여름이면 2분이면 건너갈 수 있는 골목에 자그마한 푸름의 우산을 선사했습니다. 겨울이면 골목의 찬바람이란 찬바람은 혼자 다 막으려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이면 유별나게 붉디붉은 단풍옷을 입군 했습니다. 더구나 찬란한 아침 해살이 나무 전체에 오렌지색 빛무리를 만들어줄 때면 너무 황홀해서 눈이 다 부실 지경이였습니다.
 
“넌 왜 이렇게 아름답니?”
 
어느 날 아침 나는 잠간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나무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투명한 해살들에 정면으로 부딪친 단풍잎들은 메마른 맥락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 찬 서리를 견디느라 단풍잎들도 안깐힘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쩐지 살짝 안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마워.”
 
나는 총망히 발길을 옮기려 했습니다. 함께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시간이 급하니까요, 그리고 이튿날에도 단풍나무는 거기에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단풍잎 하나가 작은 바람에 하늘하늘 떨어지더니 내 발치 와서 딱 멈추는 것이였습니다.
 
“넌 왜 내 발치에 떨어지는 거니?”
 
“신발이 얇구나. 발이 시리겠다.”
 
단풍잎이 말했습니다.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여기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거죠. 서둘러 가야죠. 먹고 사는 일이 그렇게 수월할 수는 없잖아요. 나도 출근을 해야 먹고 살 게 아니예요. 하여튼 이튿날에는 집에서 1분이라도 좀더 일찍 나와야지, 그러면 1분이라도 더 나무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을 테니…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바닥에는 벌써 락엽들로 만들어진 레드 카펫이 쫘악 깔려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르락, 사르락”하는 가벼운 음조들을 토해냈습니다. 바람이 살짝 불었습니다. 그러자 레드카펫은 다시 형태를 바꾸어 한잎, 또 한잎의 붉은 꽃잎이 되여 내 발치를 뱅뱅 돌아쳤습니다. 내가 가는 걸음, 걸음마다에 조그마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 발길을 감싸려는 듯싶었습니다. 시인은 서리 든 단풍잎이 2월에 피는 꽃보다 더 붉다고 읊조린 적 있지요. 그러니 나는 한잎 두잎 붉은 꽃잎보다 더 붉은 단풍잎을 밟으며 나가는 게 아니겠어요. “사르륵 사르륵”하고 밟으며…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또 그 1분을 앞당겨 나오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흩날리는 진눈깨비에 우산을 찾을라, 지난번 사뒀던 예쁜 스카프를 꺼내 두를라, 그리고 또 두터운 신발을 찾아신을라 그만 또 그 1분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래도 단풍나무를 잊지는 않았습니다. 이 진눈깨비에 단풍나무는 잘 보내고 있겠는지 하며 은근히 걱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골목 어귀에서 나는 그만 당혹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였습니다. 나이 든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비자루를 쳐들고 단풍잎들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뭐하고 있어요? 이 아름다운 단풍나무를!”
 
“당신 같은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언제 한번 나무를 손질이라도 했나유? 나는 그냥 락엽을 쓸 뿐이에유, 오늘은 바람이 세서 락엽이 많이 졌어유. 바람이 세서…” 환경미화원 아저씨는 비자루를 내리우며 말했습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말을 인증이라도 할 세라 쌩―하고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츨츨하게 젖은 락엽들이 우수수 하고 떨어져 내렸습니다… 한잎, 두잎, 세잎, 네잎… 얼마인지 미처 헤아릴 수조차 없게 떨어졌습니다.
 
나는 한결 앙상해진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가여웠습니다.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괜찮아, 어서 가봐야지, 출근이 늦어지겠다.”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발길을 옮겼습니다. 
 
‘나무는 항상 여기에 있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나는 혼자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겨우내내 그 골목을 지나다니지 않게 되였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차를 타고 다니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는 거기에 있을 거고, 봄이면 또 하아얀 자잘한 꽃을 피울 테지요, 그리고 얄포롬한 향기를 풍기며 내 코끝을 간지럽힐 테니까요…
 
하지만 이듬해 나무는 그 하아얗고 자잘한 꽃들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얄포롬한 향기를 뿜어내지 못했습니다. 나무는 끝내 찬바람과 추위와 외로움과 아픔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생로병사는 자연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라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나무에게, 그 아름다운 단풍에게 마지막 사진 한장 남겨주지 못했네요. 
 
내 생명에서 이렇게 리별한 것은 나무뿐이 아니였습니다.
 
봄날에 나는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지난 겨울 고향에 찾아갔을 때에도 어머니는 파킨슨병으로 굳어진 얼굴에 안깐힘을 써가며 미소를 띄우려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너네 집에 나도 데리고 가니?” 친지들이 다 말렸습니다. 다들 출근하는데 누가 돌보냐,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데 어떻게 차에 타냐, 냄새가 나는데 젊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이제 봄이면 와서 데려가겠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봄이면, 날씨가 따뜻해지면 어머니를 데려와 얼마 동안 함께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아빠트 뒤에 새로 선 공원에 손잡고 산책을 가야지, 일요일이면 좋아하는 송화강 배놀이도 시켜야지, 활짝 핀 라이라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야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계획했습니다. 그것들은 작지만 행복한 일들이였습니다.
 
하지만 기차역으로 가는 나를 바래러 나온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한 것이 마지막이 되였습니다.
 
“춥겠다, 어서 차에 타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아―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잦지 않네요, 바람이 잦지 않네요, 바람이 잦지 않네요, 바람이 잦지 않네요, 바람이…

《도라지》2021년 1기(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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