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채복숙
어버이의 마음, 그리고 효란?
꽃잎이 떨어진 채 어지러운 감탕 우에 스러져가는 련꽃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아프다. 그네들도 흰 볼에 붉은 연지 바르고 화사하게 웃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네들도 몽실몽실 귀여운 봉오리를 가진 사랑스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립추가 지난 지 며칠 안된 것 같은데, 그처럼 줄기차게 쏟아지던 폭염이 거짓말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다. 계절이 다른 한 륜회의 길 우에 올라선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스러져가는 련꽃을 보면 참으로 씁쓸한 기분이 된다. 계절의 륜회 우에 올라선 사람도 저 련꽃들처럼 스러져가겠지…
인간의 생로병사는 진시황도 어쩌지 못했다고 하지만, 로쇠를 막고 싶은 건 인간의 영원한 욕심일 것이다. 그나마 희던 얼굴에 검은 버섯들이 서서히 피여나갈 무렵, 나는 지나가는 풍문에 들은 대로 미국제 나이트크림이라는 걸 샀고, 몇날 며칠을 두고 온갖 정성을 다해 얼굴에 두텁게 칠을 해댔다. 하느님이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던지 그 날 저녁도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니 눈가에 있던, 온 얼굴에서 가장 큰 검버섯이 진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과연 신통하구나— 한통 더 사야겠는 걸. 아니, 엄마에게도 한통 사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나는 금방 흠칫하고 말았다. 이건 생각이 빗나간 게 아닌가? 엄마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은가.
엄마는 꼬박 1년 반 정도 몹시 아프다가 다른 세상으로 갔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총망한 걸음이였다. 아프면서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가끔씩 아주 말짱하게 제법 엄마다운 말을 하군 했다.
“나도 이젠 오십견이 오나봐, 어깨가 결려—”
곁에 있는 동생과 한 말인데 령혼이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있던 엄마가 갑자기 께끼였다.
“벽에 기여오르는 동작을 해야 한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봤다. 혹시라도 제정신이 돌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텅 빈 눈길이여서 실망감이 썰물처럼 밀려들었었다.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본능적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옛날에 어느 한 시골에 엄마와 아들이 살았다. 아들은 장날이 되면 나무를 해서 시장에 가져가 팔군 했다. 그 날도 엄마는 저녁밥상을 준비해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이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걱정되여 도무지 그대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장에 나가 누군가와 다툰 건 아닌지, 길에서 강도나 도둑을 만난 건 아닌지… 엄마는 끝내 동구 밖에 나가 큰 나무 우에 올라서서 아들이 언제 돌아오나 눈이 빠지도록 바라보았다고 한다…
바로 그리하여, 나무 목(木)자 우에 올라서서(立)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보았다는 견(見)자가 합치여 한자 번체자의 친(親), 어버이라는 글자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무심결에 본 것이지만 어느 결에 머리속에 각인이 되여버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는가?
머나먼 나라로 아들애를 떠나보내던 날,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애에게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가 쑥스러워 있는 힘껏 참고 있다가, 아들애가 공항 보안검색대 안으로 사라져서야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다 어른이 된 아들애이지만 이역만리에 보내고 나니 별의별 걱정을 다하게 되였다. 밥은 끼니마다 챙겨먹는지, 날씨가 차가와지는데 옷은 잘 껴입는지, 인종차별시를 당하지는 않는지, 코로나 감염 위험에 로출되지는 않는지… 지인들은 내게 이 어수선한 세월에 애를 볶아댈 필요 없이, 학업을 끝낼 때까지 귀국하지 말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는 아마 마음속 동구 밖의 커다란 ‘나무’ 우에 천번 만번은 더 ‘올라서서’ 눈이 흐릿해질 때까지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어버이의 마음은 자신이 어버이가 되여서야 안다. 엄마도 이 딸을 밖에 내놓고 얼마나 애틋하게 그리웠을가.
동구 밖 나무 우에 올라서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바라보았다는 엄마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들은 나무를 다 팔고, 그 돈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도 사고 하다보니 결국 늦어서야 돌아오게 되였는데, 동구 밖에까지 나와 기다리는 엄마를 보게 되였다. “다리도 아프고 불편할 텐데, 왜 집에 계시지 않고 나와 계시오.”하더니 훌쩍 둘쳐업고 집에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한자에서 효도 효(孝)는 늙을 로(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다. 년로한 어버이를 등에 업고 가는 그 모습이 그대로 굳어져 효(孝)자가 된 것이리라.
세월이 실버시대에 들어서며, 로년기에 대한 아름다운 격언들이 많이 생겨났다. 노을처럼 우아한 로년을 보내야 한다든지, 나이가 드는 것이란 늙음이 아니라 붉게 익어가는 것이라든지 등등… 로년 생활에 대한 지침도 많아서 운동은 여차여차하게 해야 하고 음식은 여차여차하게 먹어야 한다는 등등 리론이 많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활기차고 우아하게 로년을 보내자고 해도 몸이 안 따라주면 도리가 없을 것이다. 스러져가는 련꽃을 바라보는 듯한 씁쓸한 기분은 자신이 체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리라.
그럼 나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엄마에게 진정 효를 행했던가? 1년에 한두번뿐인 명절에 내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여, 엄마는 마음속 동구 밖 ‘나무’ 우에 수도 없이‘올라가 서서’ 내가 오기만을 ‘고대했을’ 건데, 그런 엄마를 두고 나는 노을이요, 익어감이요 하는 아름다운 언어로 얼렁뚱땅 넘어가지는 않았던지?
가족이란 늘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할 수 있을 때에야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된다. 또한 그렇게 함께하는 것이 가족간의 진정한 행복이다. 세상이 지구촌이라고 하지만, 혹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하지만, 어버이의 마음을 알고 나면 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라지》2021년 5기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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