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난 “상어”로소이다
김 혁
1
누가 나에게 무슨 띠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 못하고 문칫거릴때가 많다.
처음 신문기자생활을 시작했던 그 시기 나이를 물을라 치면 “토끼 띠”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필재 하나만 인정받고 파격적으로 스무살에 신문사에 입사했던 나는 애송이 얼굴의 나에게 몰부어지는 미심쩍어하는 눈길들에서 어린 나이를 감추고자 자기 나이를 몇 매듭 올려 붙인것이였다.
요즘은 누가 물어볼라치면 난 “양 띠”라 말하곤 한다. 이번엔 몇 매듭 내려 붙인 나이다. 한 옥타브 낮추어 웅얼거리는 그 혀아래 소리에는 어느새 훌쩍 가버린 청춘에 대한 추억 그리고 아직도 파랗게 남아있는 꿈에 대한 동경이 슴배여있다고 해얄것이다.
“김작가 나인 고무줄 나이요? 대체 무슨 띠게?”
호기심 많고 캐묻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이 “진드기”인양 진짜 나이를 집요하게 물을라 치면 난 한숨에 섞어 이렇게 괴여 올린다.
나 상어 띠 올시다!
뭐? 상어 띠?
띠를 물을라 치면 자신의 혁대를 내보이면서 장난 삼아 “물소가죽 띠”, 혹은 “악어가죽 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만 하필이면 왜 상어 띠냐 또 한번 집요한 물음이 나를 닦달질 한다.
왜 상어 띠냐고? 대답이 좀 길어진다.
2
매양 작품의 들머리나 책의 앞갈피에 작가 프로필을 적을때면 난 또 한번 난감해지곤한다. 문자 그대로 희비참반(喜悲參半)이다.
사실 창작 략력을 적을라치면 나름 적을 거리가 많다. 열아홉에 첫 소설을 발표하여 지금까지 곰바지런히 필밭을 경작해 왔으니깐.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대고 김을 잡고 거두어 들이고… 달을 이고 나가 해를 지고 돌아오는 우직한 농부자처럼 그렇게 필밭을 경운한지도 어언 20여년 철이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그 무슨 역마살이라는 주유(注油)를 받은 기계마냥 피스톤의 작동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그 하나의 단조로운 짓거리에 내 옹근 젊음과 삶을 바쳐왔다. 기자와 작가라는 완충지대에서 픽션과 논픽션사이를 오가며 각종 쟝르와 문체의 바다에 물이 그렇게 좋을수 없는 다이빙 선수처럼 기꺼이 옹근 나를 던졌다.
소설로 등단했지만 한때는 시에 빠져 시를 300여수 발표하기도 했고 아동문학에 심취되여 아동문학상의 수상으로 작가협회에 입문하기도 했다. 한해에 장편 두부를 동시에 련재하는 혈기를 보이기도 했고 한해에 문학상 4개를 연거번거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또 쟝르문학에서 단기필마(单骑匹马)로 독주(独走)하며 판타지, 초현실주의, 호러, 사이버, 력사제재의 소설들을 발표함과 아울러 그 작품들로 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꽤 부피가 커 보이는 창작의 적목을 쌓아올렸음에도 번마다 프로필에서는 어쩐지 헛헛함이 엿보인다. 바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명함 다음 줄에 또록또록 적어 넣는 모모대학 졸업이라는 그 부분이 비여 있는것이다. 수백 수천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10여권 가까이 작품집을 묶어내여 프로필이 장문으로 길기만 하지만 마냥 그 위치 그 자리만은 솎아낸 무우밭마냥 한줄 비여 있다.
사실 일찍 통신대학을 다니고 마흔 넘어 늦깎이로 석사연구생공부도 했지만 그 뒤에는 함수와 수료라는 딱지가 어김없이 붙어있다. 그 딱지는 내게서 보이지 못할 흉허물 같은 그닥 떳떳치 못한 딱지다. 마치 팔십만군교두 림충이나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처럼 위용이 뛰여날지라도 이마빡에 정배살이 신세라는 자자(刺字)가 새겨져 있는 그것같다고 해야할가. 그래서 그 무가내의 초근(草根)영웅들이 청사(靑丝)를 길게 땋아내려 살속 깊이 각인된 운명의 자자를 감추듯이 난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 빈자리가 커보여 은근히 써넣고 나면 왠지 “백정이 가마타고 대학 모퉁이”를 도는듯한 참괴감을 금할수 없다. 그러니 내내 써 넣지도 써 못넣지도 못하는 껄렁한 마음이다.
그리고 또 나이가 토끼띠 혹은 양띠 혹은 그 어느 문패에도 없는 “상어 띠”로 굴러가고 굴러오듯이 어느 대 어느 문하를 나왔느냐 묻는 말에는 “내가 상어띠니 한번 맞춰보세유”하고 는적거리거나 동문서답을 괴여올릴수 밖에 없어 한다.
그럼 대체 왜서 상어 띠냐?
여기서 잠깐 “사해(辞海)”를 펼치고 상어에 관한 전문지식을 빌려보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상어의 수는 약 400종이다. 상어의 조상이 지구에 나타난것은 고생대인 5억여년 전, 그러니 상어는 살아 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한때 유아독존으로 지구를 제패하다 간 공룡보다도 더 일찍 나타난 동물이니깐.
상어의 몸은 원통형 또는 방추형을 이루고 있다. 등지느러미는 보통 2개이나 1개인 경우도 있고 꼬리지느러미의 모양은 초승달을 닮았다.
골격은 연골성이고 특히 위가 발달하여 대부분 주머니를 뒤집듯이 소화되지 않은것들을 입에서 밖으로 내보내는것이 가능하다. 또 직장샘이 있어 염류의 배출에 관여한다.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수백메터 떨어진 곳에서 나는 냄새도 알아낸다. 시각도 색을 구별하는 원추세포가 있어 고도로 발달되여 있다.
그밖에도 상어의 주둥이와 머리에는 동물에게서 나오는 미약한 전류를 감지하는 로렌치니병이라고 하는 특수한 감각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먹이를 찾아낼때 리용되며 어두운 곳이나 바닥에 몸을 묻고 숨어있는 먹이를 찾아내는데 마치 레이다 같은 기능을 한다.
바다 생태계에서 가장 힘이 센 포식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어는 놀라울 만큼 약한 동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부언한다.
놀랍게도 상어에게는 다른 물고기와 달리 부레 기관이 없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부레로 부력을 조절해 물속에 떠 있게된다. 하지만 상어는 부레가 없어 부력은 유영하는것으로 유지한다.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또 유영함으로써 호흡을 하는데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가미호흡이 일어나지 않아 죽게 된다. 때문에 지느러미와 온 몸의 근육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다른 물고기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휴식의 방법은 뇌의 30%씩 돌아가면서 잠을 자고 나머지 70%는 깨여 있어 그냥 몸을 조절한다고 한다. 상어가 다른 어종이 비하지 못할 힘찬 근육과 우람한 몸체를 갖게 된것은 상어가 그렇게 쉼 모르고 끊임없이 깊은 바다, 넓은 바다를 누빌수밖에 없는 “결손”을 가지게 된것이기때문이다.
숨차게 빙~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 “부레”가 없다. 바로 학력이라는 부레다. 부레가 없는 상어에 대한 백과지식을 우연히 읽고 느닷없는 감동까지 일었었다. 이것이 내가 하필이면 자신을 “상어 띠”라고 자처하는 리유다.
3
흔히 작가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모모 대학, 모모학부를 나왔노라고 꼭 빠침없이 써넣는다. 요란한 미술체로 새기고 현란한 네온싸인으로 둘레를 쳐서 거리를 향한
현요한 위치에다가 내 거는 간판처럼. 그리고 전공도 문학쪽이 아니고 그 주변 학문일지라도 그예 써넣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무대에 나설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력이라는 것이 도대체 작가가 되고 창작을 하는데도 꼭 필요한것일가? 도대체 종이장 정도의 졸업장이라는것이 글을 쓰는데 왜서 중요한가?
이와 같이 로골적으로 질문을 했을때 아니!라는 대답도 무성하다.
여기서 잠깐 비록 학력이 불명이지만 그래도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몇몇 작가들의 사례를 감히 거들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모파쌍은 스무살도 못되여 군입대 하고 그 후에는 자그만 직원으로 일했기에 학력을 따낼 겨를이 없었고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마크 투웬은 열두살때부터 생계유지에 나서 우체국 배달부, 광부로 혹사했기에 학교란 운운하기도 어려웠으며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 역시 양치기, 회계등 직에 종사했기에 학력과 인연이 없었다.
이외에도 “현대시의 원조”로 불리우는 보들레르, “미국의 리얼리즘의 대표작가” 존 스타인백, “프랑스 현대문학의 정점(顶点)” 앙드레 말로 등등이 역시 줄느런히 무학력자의 서렬에 서게 된다.
“좁은 문”, “전원교향악”등 명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앙드레 지드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루기 전에 그만두어 학위의 문전에 거의 가 닿을번하기도 했다. 그중 카프카가 학력이 있긴 한데 있다손 쳐도 그는 문학과 매치가 안되는 의학쪽의 학력이였다.
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허다한 명가들조차 학력에서는 낮은 모습들이 많다. 194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는 학교를 두번이나 중퇴하여 학력을 얻지 못했고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는 고중도 졸업못했으며 가까이 2007년 수상자인 영국 녀작가 도리스 레싱도 겨우 초중학력이였다.
중국쪽으로 보면 “멜로 소설의 녀왕” 경요(琼瑶), “동화대왕” 정연결 (郑渊洁)도 그렇고 “령혼과 육체”를 쓴 유명작가 장현량 (张贤亮), 변혁기 공업제재를 다루어 온 작가
장자룡 (蒋子龙) 그리고 요즘 드라마인기작가인 해암 (海岩) 도 들수가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뛰여난 작품을 남겨서 문학사에 길이 남는 유명하고 위대한 문인의 반렬에 드는 작가들이다.
몇해전 연변작가협회에서 사이트 관리를 맡아하면서 회원들의 신상명세와 창작상황을 데이터 베이스(数字库)화 하다가 놀라운 집계에 컴앞에서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지금의 중견으로 활약하고있는 3.40대의 작가의 거의 전부가 “부레가 없는 상어”의 신세였던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교육제도나 학력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도 독학으로 훌륭한 작품을 쓰고 문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경우가 우리 주변에까지도 수두룩하다. 어느날 갑자기 추종불가의 신선함으로 문단을 놀래우는 작품을 내놓는 작가, 그런데 그에게는 모두가 선참 따져보는 학력이 없다. 이외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결코 “짧지도”, “낮지도” 않다. 어쩌면 작품들이 사회 뒤골목에 내쳐진 밑바닥 삶을 사는 부류들처럼 거칠고 다부지며 치렬하다. 학위조차도 없으니 자연 그렇다할만한 명예나 지위도 없을 작가 자신이 실제로 사회 뒤골목에서 그런 삶들에 몸을 적셔 본 결과다.
작가의 사고방식과 창작성과는 흔히 동시대의 감성에서 피여난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파악이나 전달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난해한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가능한 쉽고 딱딱하지 않게 그런 “감성”으로 접근하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생활을 자신이 피부로 접하고 느낀 그만의 “감성”으로 설명할수 있다는 점은 무학력자들의 툽상스럽긴 하지만 하나의 우세라 할수도 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상상력과 직관과 자유로 자신을 키워나간다. 대학문전도 못 가본 초라니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때로는 대학가 최고의 명문의 작품보다 더 명쾌한 경우도 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설익은 것 같으나 책상머리에서의 개념적인 작업이 아닌 몸으로 느낀 감성의 작업이 바로 그들이 열애하는 문학에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이요, 첫걸음이 된다.
다른 화려한 어종에 비해 부레가 없다는 결손때문에 하루종일 몸부림치는 상어처럼 또 이러한 이들은 졸업장조차 없다는 결핍때문에 언제나 끝까지 가보려 시종여일의 작심하는 정신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다산을 낳고 그 와중에 수작(秀作)을 낳기도 한다. 작업에 림하면서 온몸을 던지고 끝장을 보려는 가렬처절한 문학정신. 그 열렬한 작업은 독자들을 전염시키고 감동시킨다. 작가가 직접 생활에 몸을 담그고 문학과 삶을 련결시키는 그들만의 작업에서 그 작가적 덕목이 더 핍진하게 잘 드러나는것이다.
때문에 고졸도 못해 학력 콤플렉스에 무척 시달려 온 귄터 그라스는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에 이런 구절을 적어 넣었다.
“고중도 졸업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좋은 점이 있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그 고중학업을 마치려고 노력적인 자아구원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학벌 지상주의”세상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학력은이 때로는 훈장으로 때로는 족쇄로 평생 따라다닌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여기서 학맥(学脈)은 부정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현실을 규정짓고 움직이는 거역할수 없는 작용을 논다. 학력보다 능력이 소중하다는 목소리들이 나오지만 현실속에서는 “마이동풍”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상에 편승하여 지나치게 합리적인것만을 추구하는 고등학부의 교육방식에 따끔히 일침을 가할 필요는 있다. 사실 근년래, 지어 십여년을 거슬러 보아도 우리 대학가가 배출한 작가가 몇이나 될가? 솔직히 몇손꼽아도 넉근히 헤아릴수 있을만큼 적을것이다.
한 사람의 능력을 보는 대신 학력과 학벌등이 갖춰지지 않은 개인을 무능력자로 락인찍는것도 문제다. 때문에 후진력랑에 엄연한 단층이 생기고 있는 문단은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학력지상주의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작가는 대부분이 풍부한 생활중에 일가를 이룬다. 진정한 작가와 우수한 작품의 탄생은 그 작가의 생활의 풍부한 루적과 그 와중에 깨닫는 돈오(頓悟)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런 작가들의 창작모식이나 성과를 그 어느 학부에서도 배양하거나 복제해 낼수 없다.
우리가 작가로 성정하는 첩경(捷径) 내지 왕도(王道)는 무엇이냐? 이 문제에서 답안은 학력과 무관하다.
고학력은 작가의 화려한 포장에 또 다른 멋진 옷에 다름 아니다. 학력으로 작가의 성패를 가늠짓는것은 작가나 문학에서의 병페가 아닐수 없다.
“가방 끈이 짜른” 학벌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려온 사람으로서 때로 이런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깟 학력이 뭐 그리 대수야? 글쓰는 일이란 결국 누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느냐 하는것이 중요한것일테고. 누가 사회의 속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리해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어떻게 맛깔스럽게 전달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느냐의 재능이 아닐가? 그리고 글을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획득되는 테크닉, (테크닉 technic. 재간 있게 부리는 기술이나 솜씨)을 갖추고 그 무엇보다는 남보다 곱배로 되는 노력으로 로동력과 시간을 바치면 되니깐.)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과 지식적인 접근이 필요한 지점에서 학력의 유무론을 들먹이는것은 일종의 도피적인 사고 방식, 지어 무지한 소행일수도 있다.
깊은 학문은 정신을 열어주고 사물에 대한인식을 넓혀주고 견해나 성찰을 더욱 심오하게 한다. 요즘의 문학은 복잡한 현대인의 삶만큼이나 복잡다단한데 때문에 탄탄하고 깊은 학문과 성실한 립장을 가진 진정한 작가의 배육과 배출을 문단 그리고 사회는 바라고 있다.
해마다 세계각지에서 상어는 30만톤이나 어획되며 고기는 식용된다고한다. 힘줄은 줄에 리용되고 가죽을 말린것은 핸드빽이나 칼자루 장식으로 쓰기도 한다. 상어의 간에 함유되어 있는 스쿠알렌은 고급화장품이나 약품의 원료로서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그럼에도 다른 해양동물들에 비해 상어는 유난히 인간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동물이다. 가끔씩 생기는 인명 피해는 상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대화시킨다. 그 수는 극히 미미하더라도 이 때문에 “상어=식인어”란 오해를 종종 받는다.
어찌보면 상어는 돌고래처럼 귀엽지도 고래처럼 장엄하지도 거북이처럼 구순하지도 해파리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바다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상어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상어가, 거의 5억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한 상어는 최근 20년간 대량의 포획으로 멸종위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룡처럼 상어라는 족속이 몽땅 멸종되여 그 뼈조각이나 줏고 그 가상도를 볼때가 되면 아마 사람들은 상어를 다시 그리워하게 될것인가? 그리고 그때서야 “부레가 없으나 바다의 제왕”으로 위풍당당 행진을 해나가던 이 오연한 생령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생각해볼 지도 모른다.
한 마리의 외로운 상어처럼 신체의 결손을 엎누르며 몸퉁이 흔들고 지느러미 저으며 어두운 심해에서도 오연하게 앞길을 헤여나가고있는 우리 문단의 “상어 띠”들, 문뜩 그네들이 대견해 지고 자랑스러워 진다. 그네들의 지속되는 선전(宣战)과 당당한 활보를 흥감스러움이 아닌 “동병상련”, “부레없는 상어”의 진솔함으로 비원해 보면서 모든 “상어 띠”들에게 그리고 상어를 좋아하는, 미워하는 모든이들에게 한국 시인 권대욱의 “바다 상어를 위한 변명”을 선물한다.
바다 상어는 외롭다
정말 아프다
생존을 위한 본능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의 존재
컴컴한 세상의 바닥에서
번득이는 눈빛으로
잠시 평온을 위한 여유를 망각하고
산호초의 평원에서 상실되었던 야성이
포만 겨운 날을 찾았을 뿐이다
여기 배고픈 존재가 갈구한 풍요를 위하여
묽은 피를 뿌렸던 바다에도
생명의 시작과 역동의 날이 머물고
재생을 기약하는 소멸이 있었기에
죽음의 사자가 육신을 부둥켜안아도
황홀한 봄이 찾아온다
외로운 삶 하나는 떳떳하게 울부짖고 있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 이 바다에서
그냥 살아온 상어의 절규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태초에서부터 그렇게 들려온다
포효하는 격랑, 약육강식의 질서속에서
이 바다의 자양분으로 부활하는 날까지
바다 상어는 혼자 아프다.
“도라지”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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