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문인에게는 오기가 넘치되 골기는 오히려 부족했다. 그런 심리장애가 있 었기에《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는 문화병이 생겨나 오늘까지 와전되고있다
원래《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소명문선(昭明文選)》에 처음 쓰인 단어인데 당시 해석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고 한다. 로신은 《차개정문집》에서 “문인상경은 국외 인(局外人) ”혹은 국외인인체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만약 자기가 내항에 든 사람이라면 곧 “경”을 당했거나 남을 “경”한 사람일것이기에 결코 대등함을 나타내는 “경”자 를 쓰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어찌할수 없을 때에는 이 네글자로 덮어감추는데 그것은 도망하는 길이며 또한 전술이기도 하다. 하여 사람들은 그냥 이 요어(要語)를 좋아하는것이다.”라고 쓰고있다.
어떤 사람은《상경》이 절대적으로 나쁜것은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문인은 마땅히 진리감과 시비관이 있어야 하느데 모종 의의에서《상경》은 개성과 사상의 표현 이라고 말하고있다.
시비야 어찌 갈리든간에 기실 “문인상경”은 대단할것이 없는바 서로 경원시하고 비하하면서 시야비야 후론하는데 그치고만다. 요는 바로 상경심리병이 골수에 사무쳐서 리지를 잃을 정도로 극심화되고 어떤 기후를 만나면 승격되여 끝내는 피를 보고야 마는 문인상잔(文人相残)이다.
어떤 지자가 중국의 력대문인들의 상잔사(相慘史)를 아래와 같은 세가지 원인으로 해석하고있다. 첫째로 모든 인간심령의 암증인 질투심때문이였다. 례하여 당송8대가의 한사람인 소식의 문재가 너무 뛰여나 은근히 질투하고있던 사악한 문인나부랭이들이 그의 한 시문에서 꼬투리를 잡아쥐고 크게 문장을 짓는바람에 시인은 투옥되였고 나중에 옥중에서 자결할번하였다. 그런 용렬한 문인들에게 차례진건 병태적인 복수심리의 만족이였으련만 왜 그렇게 혀까지 빼물고 바락바락 악을 썼을가?
중국력사상에서 문인끼리 못살게 군 첫사건은 공자가 사관벼슬을 한지 7일만에 소정묘를 죽인 일이라고 한다. 소정묘는 로나라에서 공자처럼 학교를 꾸리고 글을 가 르쳤다. 소정묘의 서당에는 학생이 넘쳐나고 공자의 서당은 텅 빌 때가 있었다. 공자가 소정묘에게 씌운 죄장은 다섯가지였지만 기실 한마디로 사상과 언론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이 력사사실에 대해 줄곧 의혹을 가지고 의론이 분분하지만 이 사건의 문화 적의의는 력사실보다 더 심원하다. 바로 그때로부터 누가 학술관점이 다르면 누가《소정묘》로 되여졌기때문이다. 악명높은《분서갱유》도 실은 진시황의 총신이였던 리사가 당시 진나라 유림들과 버성기다가 마침내 앙심을 먹고《상잔》을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도 간신 조고의 “상잔”으로 요참(腰斬)을 당하고말았으니 죄는 지은데로 가는 법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정치기후의 악성적인 변화에 따라 상잔하게 된것으로서 가장 돌출한 실례로는 청조의 건륭, 옹정시기의《문자옥》인데 그때 얼마나 많은 한인선비들이 목을 잘렸는지 모른다. 문인상잔사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것은 명조말기의 동림제현 (東林 諸賢)과 원대성과의 상잔이라고 사서에 기록되여있다.
셋째는 독재자의 지시에 맹종하여《상잔》하는것인데 이를테면 지난세기 50년대 말기의 반우파투쟁이였다. 소위《반우파동원령》이 인민일보에 발포되자 젊은문인이든 늙은문인이든 저명한 문인이든 무명소졸이든 덕망높은 사람이든 품질이 저렬한 작자이든 명령일하에 맹장마냥 전마에 뛰여올라 서로 시살했던것이다.
리성을 잃은 문인들만큼 무서운것이 없었다. 기탄없이 호상 검거적발하는 열풍에머리가 뜨거워져서 극히 사소한 문제도 무한히 강(綱)에 올려놓고 수술칼을 들이대는악착한 짓거리들이 비일비재였고 반드시 죄가 있어야 한다는식으로 날조중상하는 문인망나니들의 원형이 드러나기도 했다. 처음엔 남을 잡아내고 쾌재를 불렀지만 그 여흥이 사라지 기전에 제 자신도 결국 잡혀나와 가슴을 친 사람들이 많았다. 남잡이가 제잡이가 된다는 도리를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있었을 문인들이 그러하였으니 실로 회색유모아가 아닌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밝혀진 비밀이지만 원래는 순박해 빠진 문인들이 제 열정에 들떠서《운동》을 고조에로 끌어올리고 돌을 들어 제발등을 깐것이였다. 문헌기 재에 의하면 로신의 부인 허광평과 문일다의 부인 고진이도 반우파의 급선봉으로 충당되였다. 한평생 진리의 투사로 싸운 두 선생이 구천에서 개탄했을 일이 아닐가?
그때 오직 남은것이란 맹목적추종과 관능적인 공포증과 마비돼버린 심령속에서 분출한 광증뿐이였다. 침으로 무시무시한 악성순환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리발치는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의 등을 찌르려 할 때 다른 사람도 칼을 벼려들고 호시탐탐 한다는것을 몰랐던가? 먼저 칼을 놓은 사람이 부처님이 될수도 있었으련만 아무도 손에서 피비린 칼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옥석구분으로 되였으니 이 얼마나 슬픈 력사의 궤적인가?
인류의 력사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실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혹은 기타 부호로 썼거나 혹은 제작해낸것이다. 그래서 호적선생은 력사란 아무라도 치장해놓을수 있는 소녀와 같다고 했는지 모른다. 력사는 승리자가 쓰기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승리자가 가능하게 래일의 계하수로 될수도 있다는것을 부디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영웅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도 그렇다.
굽이굽이 뻗어나간 력사의 긴 랑하에서 우리가 읽을수 있는것이란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의 력사를 쓰고있다는것, 그리고 자기 인생에 끝까지(敗筆)을 쓰지 않은 사람이란 없었다는것이다. 생활은 때로는 소용돌이치지만 력사는 라선형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래서 인생현장에는 슬픈 궤적이 생기는게 아니랴,
우리 연변의 조선족문단에도 서로 구실을 만들어 상잔한 부끄러운 력사가 있다. 이른바 “반우파운동”때나 “문화대혁명”때에도 남잡이가 제잡이가 된 희비극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지만 묵은 뜨물독은 휘저으면 고약한 냄새가 나기마련이라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버리고말자.
그런데 관념을 갱신하느라고 시끌벅적하고 세계문화가 밀려오는21세기에 들어 와서도우리 중국조선족문단의 일부 어른들은 의연히 서로 “상경”하느라고 공연히 신경전을 하고있으니 정말 나같이 “상경”을 당할 자격도 없고 누구를 “상경”할 능력도 없는 국외인으로서는 안스럽기만 할뿐이다.
한 사람이 남을 칭찬할수 있는 아량과 포용력이 있다면 그 자신도 그만큼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설명이 된다. 남을 칭찬하기 정말로 싫다면 숫제 입을 다물고 담담한 체하는게 속창을 내비치지 않아서 마음이 편하고 체면이 설텐데…
광활한 신주대지의 구석쪽에서 근근득실로 문학을 하는 처지에서 서로 손을 잡고 부추겨주면서 동심동덕으로 배달문학의 명맥을 이어가면 얼마나 좋을가? 사실 우리 모두가 뛰여봤자 7월 풀메뚜기밖에 더될것 없고 내노라고 큰소리를 쳐봐야 우물안에 개구리같이 불쌍한 우리 조선족문인들이 아니던가? 남을 “상경”하려면 결국 자기 자신도 잃기마련이다.
“대해는 물방울을 비웃지 않고 태산은 돌멩이를 비웃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 서로 근신하며 자중, 자애하자, 대해는 몰라도 온갖 이물질을 받아들여 침식시키고 려과하며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쯤은 되여 보자!백두천지에서 쏟아져 내려온 백하수의 맑고 뭉친 흐름처럼 배달의 문화혈맥을 줄기차게 이어가면서 흐르는데까지 자랑차게 흘러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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