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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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수상록 54) 량지와 시비감
2017년 06월 01일 08시 49분  조회:3214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량지와 시비감
 
                                      진 언
 
    한 사람의 내심에 시비감은 자기행위, 의도 혹은 성격의 좋고 나쁨에 대한 인식인 동시에 좋은 사람으로 좋은 일만 하려는 자률정신을 가늠하는 잣대로 되며 내심에 바른 시비감은 선악의 천평이 되기도 한다. 선량과 진심은 금전으로 바꿀수 없는데 량심이 얼마나 값가느냐? 라는 질문 자체가 무모하다. 왜냐하면 선량과 진심은 무형의 존재로서 천층만층 구만층의 사람들이 부동한 시간, 부동한 장소에서 연출하는 각 색이 다르기때문이다. 장사군은 오로지 돈이 시비기준이기에 인간에게서 무가지보인 량심이 몇푼 안되거니와 오히려 일확천금에 걸림돌이라 생각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량심이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량심은 인간의 도덕의 대청을 받드는 금빛기둥이기에 그것이 없다면 인간정신이라는 대청이 곧 무너져버릴것이다. 량심은 한자루의 망치와 같아서 사람들의 선량한 심벽을 두드리고있다. 량심은 하나의 만능열쇠로서 인간의 마음의 골방을 열어제낀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떠올리면 그의 유명한 “단심가”가 외워질것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주지하다싶이 이 단심가는 음특한 리방원이 엮어댄 “하여가”에 대한 화답이다. 그먼저 리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렇게 읊조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를 읊조린 리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공양왕이면 어떠하고 이성계면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고려가 조선이 된 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정몽주 당신과 내가 리성계를 모셔 백년동안 권세를 누려보자)”이다. 그런데 “단심가”로 맺고끊듯이 거절한 정몽주에게는 주군을 잃은후 부귀영화가 의미없고 오로지 옛군주에 대한 일편단심뿐이다.
    물론 이 단심가의 핵심은 만고충신의 충절이고 기개이지만 결국 량심과 직결된 문제이다. 량심은 인생의 터넬속을 비추어주는 밝은 등불같아서 나갈길을 비추어주며 량심은 건들 불어오는 바람처럼 사회라는 하늘에 검은 구름과 비리의 안개를 산산히 헤쳐버리며 량심은 한 사람의 신의와 하는 일의 진속을 재이는 량지의 잣대이다.
    량심을 가진 사람은 량심이 없는 사람을 감화시키고 량지가 있는 사람은 량지가 없는 사람을 교화시킨다. 만약 량심을 가진 사람이 량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관용하고 량지가 있는 사람이 량지가 없는 사람을 묵인한다면 사회도덕은 형성되기 어렵 다. 그리하여 일편단심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에서 리방원의 살인패들에게 철퇴를 맞고 비명에 쓰러졌지만 선죽교의 전설과 더불어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 남게 되였다. 
    량심은 인정세계의 왕가물에 단비이며 한무더기 화토불처럼 사람들의 어두운 심신과 썰렁한 환경을 따스하게 녹여준다. 량심은 인생악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주곡으로서 사람들을 화해롭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며 량심은 마를줄 모르는 옹달샘처럼 메말라가는 인정을 차분히 적셔준다.
    화제를 조금 돌려서 글짓기에서 량심과 시비감문제를 말해보자. 작가로서의 량지와 시비감이 분명한 사람을 거론한다면 누구보다 조지 오웰을 손꼽아야 할것이다. 그에게는 “나는 왜 쓰는가?” 라는 에세이가 있다. 그는 사실적인 글쓰기를 지향했다. "에릭은 가고 오웰은 남다"는 그의 묘비에 쓰인 비문인데 파시즘, 전체주의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려했던 오웰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남아 시대의 실상과 아픔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례하여 식민지시절 경찰생활을 하며 겪었던 제국주의와 비인 간성에 대해서 고발하고있는 “코끼리를 쏘다”와 같은 같은 글에서 나타나듯이 그 시절에 그는 리상과 현실사이에서 많은 심리갈등을 암시하고있다.
    례하여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때 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게 그의 지배조건이기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글 에서처럼 그는 이러한 정치적 주제에서 벗어나 글을 쓴다는건 그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작가라면 넌센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하고싶었던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였다고 밝힌다. 오웰이 우리에게 남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설파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정신이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의 경우, 소위 정치적인 글을 쓴다는것은 그 시대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중국의 경우 로신선생이 암흑한 현실속에서 종횡무진하였다고 할수 있다. 그에게 장편소설이 없는데 아마 1930년대 중국의 환경에서 짧은 잡문들이 장편소설보다 더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 시대 사회병페를 찌르는데는 투창과 비수가 제격이였다. 투창과 비수는 야장간에서 뚝딱거려 만들수 있다. 그러나 대포, 포탄은 근현대화공장에서만 만들수 있다. 로신은 창을 든 필마단창의 열혈투사였다.
    우리 시대의 글쓰기는 어떤가? 우리들의 전통관념속에는 문학은 문학일뿐이라고 한다. 지당한 말이다. 작가가 민감한 문제에 관여할 때는 일반시민으로, 한 인간으로 관여해야지 아니면 말썽을 불러오기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회민감구와 전혀 무관한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것이 가능할가? 좋은것은 좋다하고 나쁜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지만 작가의 곤혹과 고충은 이 가불가에서 온다.
   오웰이 끝까지 파시즘에 대항하여 글을 쓰려 한것같이 지금도 거대한 권력에 맞서 글을 쓰려는 지자들이 있다. 그런 지성인들이 분발해야 우리 사회가 병들지 않고 발전한다. 이는 우리가 똑바로 보고있는 현실을 글로 옮기고 진실에 더욱 다가가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 리유이다. 물론 이것은 붓을 든 사람이면 다 해낼수 있는 쾌거가 아니다. 이는 문학의 원초적비애인지 작가의 한계인지 모른다.
    한편 화조월석이나 풍월하며 소일하는 문인들에게는 공자에게 대답한 로자의 말이 의미로울것이다. “마음이 곤하기만하지 알수는 없고 입이 닫혀져 말로 표현할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을 위해 대략 말해보겠습니다. 지극한 음기는 고요하고 지극한 양기는 동적인것입니다. 고요함은 하늘로부터 나오고 움직임은 땅으로부터 나오며 이 두가지 기운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룸으로서 사물이 생겨나는것입니다. 누가 그 법 도를 다스리고 있는지는 모르고 그 형체도 본일이 없습니다.”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 (橘 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라는 고사성어에 빗대여 같은 글이라도 작자의 관념에 따라 “격문”이 될수도 있고 “미문”이 될수도 있다고 리해해도 몰리해가 아니리라.                                                                                                                                                                                                                                                                                                                                                                                                                             아 아무튼 무지는 무위(无为)무능이요 풍월은 정서의 발로요 비평은 사유의 불꽃이다. 명철보신에 무지하다면 미련함이니 작가의 량지와 명철한 시비감은 어디 서야 하는가? 언어의 타락은 생각을 타락시키고 되돌아가 타락한 생각은 언어를 타락시키거늘….
                                 
                                                 2014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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