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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프롤로그-4]
환갑나이, 낯선 화두에 목숨 건 백발의 청년
이승률 연변과기대 부총장
따지고 보면 나도 시쳇말로 꽤 글로벌한 사람이다. 아이들이 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교회를 나가게 된 후 유명 목사님들을 따라 선교 여행차 세계를 많이 돌아다녔다. 아내와 함께 미국, 유럽, 러시아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숱한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남들은 그저 TV나 책에서 간접경험에 그친 곳들을 나는 직접 찾아가서 그 땅을 밟아보고 그 공기를 마시며 그 나라의 체취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나름대로는 화려하게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인생치고는 지금 내가 들고 다니는 명함에 박힌 용어들이 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명함은 각각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과기대 대외부총장 이승률’,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회장 이승률’
‘연변은 뭐고 또 동북아는 뭐야? 그게 언제 유행했던 말이더라.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언론인들이 한 때 떠들다가 지금은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묻혀진 말 아니었던가. 한국인이 우주를 오가는 시대에 이 무슨 캐캐 묵은 용어들이야?’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의문에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작 이 화두를 붙들고 살고 있는 내 자신도 사람들에게 ‘연변’과 ‘동북아’란 단어를 설명할 때마다 무척이나 답답하다. 첫 번째는 사람들에게 전혀 흥미를 주지 못하는 화두를 뒤늦게 붙들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해서고 두 번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붙들고 몸살을 앓아도 부족할 화두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답답해서다.
1990년 가을. 내 삶을 뒤흔든 한 크리스챤 지도자(연변과기대 김진경 총장)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동북아라는 개념과 조우했을 때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리에 어느 날 실수로 뚝 떨구어 놓은 귀찮은 분실물같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밀어내기를 계속하다가되려 그것이 내 운명이자 동시에 시대의 화두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희망이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제껏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본과 미국이 있는 동쪽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역사의 중심은 늘 그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 100년 동안에 일어난, 서양세력의 영향에 물든 겉모습 현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세월은 우리들에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역량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었지만 한편, 2분법적인 이념 분쟁?전통사회와의 단절을 가져온 갈등의 세월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이전의 수천년에 걸쳐 인류역사의 저변을 흘러온 근원적인 물결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동쪽에서 불어온 강력한 서구화의 바람에 휩쓸려 우리의 중심좌표를 勞儲値홱?것이다. 지난 백년, 우리 민족이 겪어온 난관과 위기는 어쩌면 이와같은 방향 감각의 혼돈과 미숙함에 기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방향이 잘못 되었다면 속도는 무의미하다’
간디가 한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제성장 신기록을 세운 민족이라 해도, 아무리 위대한 문화적 역량과 독창적인 재능을 갖고 태어난 민족이라 해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에게 오늘이 험난했듯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다.
모두가 동쪽을 바라보며 일본과 미국을 향해 박수치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등에 업고, 그들이 가르쳐 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중국이 있는 서쪽으로 향하리라. 관용과 조화의 미덕을 가슴에 품고, 잠자고 있는 땅 - 21세기 지구촌의 신천지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하는 서부 개척사를 펼치리라.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와 유럽을 지나 중동지역 팔레스타인 땅에 까지 나아가리라. 그 길에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으므로, 동북아를 변화시킬 새로운 활로가 있으므로,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 땅에 깃들어 있으므로 나는 그 길로 나아가리라.
이와 같은 역사의식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갖고 자신을 회고 해 볼 때, 나는 한동안 내게 가장 가까운 분이면서도 의식적으로 멀리 대하고 있었던 나의 선친에 대한 생각으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끊임없는 탐구욕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했던 젊은 날의 과오는, 결국 누구보다 맏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의 상처를 남겼다.
그런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 내게 유업처럼 남겨주셨던 고문서와 일기문과 사진 자료들은 이제 세상에서 어느 귀한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식으로 하여금 한민족 역사의 회복을 꿈꾸게 만든 거룩한 각성의 유품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나는 이를 “나의 아버지와 테라우치문고”란 글에서 자세히 썼다.
그리고 이 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꿈과 희망을 내 마음속에서 재발견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뜻 깊은 효도의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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