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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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만에 만난 담임선생님
2012년 08월 30일 23시 25분  조회:5062  추천:2  작성자: 주청룡
47년만에 찾은 담임선생님

주청룡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이 몇분 계시는데 그 가운데 한분이 나의 계몽스승이신 소학시절의 담인교원이신 김순애선생님이시다.

1963년 내가 소학교 4학년에 올라올 때에 공사(지금의 향)에 중심소학교가 서면서 우리 마을은 중심소학교 학구에 속하게 되여 중심소학교에 전학을 하였는데 나는 김순애선생님의 반에 편성되였다. 그때 나는 학급에서 중하급에 속하였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나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한 학기 지나 나는 도덕품성에서도 많은 전변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학습성적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4학년 2학기에 들어서자 선생님께서는 나를 중대장에 학습위원까지 시키는것이였다. 그때 나의 어린 심령에는 중대장표식을 달고 학습위원까지 하니 뿌듯하기만 하였다.

5학년에 올라와서 전교 문예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단독으로 콰이반(快板儿)을 출연시키는것이였다. 난생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서 출연하는데다 한어로 하니 너무 긴장하여 표현효과가 선생님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쓰다듬어 주면서 잘 하였다고 칭찬을 하여 주시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사랑을 떠 올리니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5학년 학기말 때에 6학년에서는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행사의 한가지로 룡정에 가서 영화구경을 하게 되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에서 나를 대표로 뽑아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시키셨다. 대표로 뽑히여 상급학년의 졸업행사에 참가한다는 것은 아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였다.

그때 덕신에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가자면 새벽 2시에 타야 했다. 아마 새벽 2시에 기차를 타기 힘든것을 고려하여 그랬던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그랬던지 상급학년의 일이라 모르겠지만 기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50리 길을 걸어 룡정에 갔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지금 기억에 아마 룡정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좀 지난것 같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싸고 온 도시락을 풀어놓고 나무그늘 밑에 모여 앉아 먹었는데 우리가 사는곳은 한전고장이라 도시락이라야 모두 조밥에 야채볶음, 닭알 두개씩이였다. 간혹 국가배급쌀을 타는 학생들에게는 이밥이 있었다.

우리는 오후에 영화를 구경을 하고 저녁 9시에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덕신(팔도하역)에 도착하니 9시 반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부모들이 마중 나오는것이 없이 3,4리 길을 모두 한 동네 아이들끼리 함께 집에 갔다.

6학년에 올라와 나의 학습성적은 더 우수하였고 도덕품성도 더욱 큰 발전을 가져와 모든 방면에서 돌출하여 우수졸업생으로 동학들이 일제히 나를 선거하였다. 나는 이렇게 우수졸업생의 상장을 않고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였다. 그 시기에는 중학교가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 두가지로 있었는데 공영중학교는 국가에서 꾸리는 전일제 중학교였고 농업중학교는 농민들이 자체로 꾸리는 반농반독의 학교였으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을 골라 공영중학교를 한개 반을 모집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농업중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영중학교와 농업중학교의 학생모집 비례는 1:3이였다. 소학교에서 우리는 두개 반이였는데 나는 2반이였다. 중학교입학시험에서 공영중학교에 1반에서 4명이 붙고 김순애선생님이 맡은 2반에서 10명이 붙었다. 원래도 학교에서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높았지만 그번 입학성적으로 하여 학교나 사회상에서도 김순애선생님에 대하여 평가가 대단하였다. 나도 운이 좋게 김순애선생님의 반이였기에 우수한 성적으로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나의 어린 생각에도 만약 내가 1반이였다면 공영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을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1반에서 공영중학교에 붙지 못한 우수한 학생간부들이 여럿이 있었으니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김선생님을 만나보려고 모교를 찾아갔었는데 그때는 이미 선생님께서는 부군(夫君, 선생님의 남편)님을 따라 료녕성 무순시로 조동하셨다는것이였다. 그다음으로는 더는 찾을 길이 없었다.

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원사업을 하면서 그 선생님이 더욱 그리웠다. 하여 그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아도 모두 모른다는것이였다. 몇십년이 지난 어느 때 선생님께서 부군님을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 소문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러나 어느 단위에서 무슨 사업을 하는지 몰라 찾을 수 없었다.

또 여러 해 지난 다음 선생님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만나 물어보니 그도 그저 지금은 연길에 와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다는것이였다. 여전히 묘연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 선생님과 한 마을에서 살던 한 친구와 물어보니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집편으로 친척이 되는데 지금 그 선생님의 소식은 모르나 그 선생님의 동서를 자주 만나는데 그 분과 물어보면 알수 있다는것이였다. 아주 기쁜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하여 그에게 꼭 알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더니 며칠 후 전화번호 둘을 알려주면서 하나는 그 선생님의 전화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선생님의 따님의 전화번호라고 하였다. 너무나도 기쁜 일이라 그 즉시로 먼저 선생님의 전화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가석하게도 空号 (빈 전화번호)라는 음성으로 들려왔다. 그다음 따님의 전화번호를 누르니 자기는 그런 선생님을 모른다는것이였다. 혹시나 하여 이튿날 다시 그 번호를 누르니 여전히 모른다는것이였다. 또 절망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여 보니 마지막 한 수자를 잘못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로 갈수 밖에 없지않는가?

이렇게 알만한 사람과 다 물어보아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지난 4월 14일 또 한 차례의 친구모임에서 소학교 때의 두 동창생을 만나서 물어보았더니 자기네는 그 선생님께서 도문에 계실때에 그 선생님의 집에 놀려 갔었는데 그때 이미 부군님께서는 세상을 떴더라는것이였다. 그것도 인제는 10년이 넘어서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는 것이였다. 내가 꼭 찾아야겠는 안타까움을 말하자 한 친구가 딱 찾자면 한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자기가 그 선생님의 시조카며느리를 자주 만나는데 거기를 통하면 가능하게 알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분의 전화번호를 꼭 알려달라고 또 부탁하였다. 3일 후 그 친구가 그 분의 전화번호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즉시로 그 분과 전화통화를 하였더니 그 선생님 따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것이였다. 나는 그 즉시로 그 번호에 따라 전화를 걸었더니 김순애선생님의 딸이 옳다는것이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아! 끝내 찾았구나!” 하며 외치다다싶이 말하며 선생님의 문안을 하였더니 지금 병으로 도문병원에서 입원치료중이라고 하였다. 오매에도 그리던 선생님을 찾게 되니 기쁘면서도 한 방면으로는 입원치료중이라니 마음이 쓰리여 났다.

나는 한시 급히 선생님을 만나 뵈려는 생각에 도문으로 행하였다. 도문에 가 병원의 침대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나는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한데 섞여 왈콱 쏟아져 나왔다. 47년만의 만남이였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 주청룡입니다.”라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인차 나를 알아보시고 몸을 움직이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못하시고 아주 똑똑한 의식과 정기도는 눈으로 나를 보시며 눈물이 글성하시였다. 말씀도 아주 힘들게 하셨다. 나는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선생님을 47년만에 만나다는것이 어쩌면 이렇게 병실서 만나는가? 어찌하여 선생님을 일찍이 찾아뵙지 못하였는가? 76세에 아직도 건강한 몸으로 계셔야 할 선생님께서 너무나도 일찍이 병상에 누워계신다는 서러운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려 선생님의 이불우에 뚝뚝 떨어졌다. 선생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

옆에는 아들과 딸이 다 있었다. 나는 그들과 선생님께서 무슨 병으로 입원하였는가고 물으니 뇌위축으로 몇 년 알으셨느데 금년 1월에 또 설상가상으로 허리를 상하여 이렇게 입원치료를 한다는것이였다.

선생님의 지나간 정황에 대해서는 자기들의 아버지가 북경석유학원을 졸업하고 무순시에 배치받았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무순조선족소학교에 전근하였다는것이였다. 그 후에 아버지가 길림화학공장에 전근하시자 어머니께서는 또 길림 화학공업공사의 자제학교에 전근하셨고 후에는 도문에다 석유제련공장을 앉히게 되자 아버지께서 그 공장을 창설하는 임무를 맞고 도문에 오시게 되니 어머니가 또 아버지를 따라 도문에 오셨다는것이였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직업중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는 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하다가 정령퇴직하고 지금은 글을 많이 쓴다는것을 이야기 하였더니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매우 기뻐하셨다. 비록 47년만에 선생님을 찾아 평생 소원은 풀었다지만 선생님의 건강상황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것이 유감이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게 되면 선생님을 모시고 동창모임도 하면서 소학시절의 추억으로 돌아갈수 있다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랴 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빌고 또 빌었다. 지금 이 시각도 빌고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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