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연변인민방송
방송일시: 2020년 3월 4일
기획: 황설화 사회: 황설화 제작: 손귀옥
--- 개 시 곡 ---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는 프로담당 황설화입니다.
프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일들을 담론하거나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방향을 제시하는 프로입니다. 요즘 힐링이란 단어를 많이 쓰시죠? 여러분들이 지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저희 과 함께 힐링이 되고 희망을 갖고 더욱 행복해지는 시간을 공유해보면 어떨가요?
래일은 3월 5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날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네, 3월5일은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인 1963년 3월 5일, 모택동주석은 공무집행중 희생된 심양부대의 영웅전사 뢰봉을 기리여 인민일보에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냈습니다. 그 뒤로 매년 3월 5일은 뢰봉따라배우기 기념일로 널리 알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뢰봉따라배우기 열조가 일었습니다. 하여 전국적으로 륙속 수많은 들이 나타나 우리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전파했습니다.
뢰봉이란 이름뒤에는 항상 사랑, 배려, 도움, 관심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따라다니는데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말들이죠. 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시고 길림신문특약기자이신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뢰봉정신과 그 핵심인 사랑과 배려, 베품에 대해 얘기나눠보겠습니다.
--- 간 주 곡 ---
네, 주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수고를 하십니다.
◆올해는 뢰봉탄생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익숙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뢰봉이란 이름만 들어봤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선생님, 뢰봉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가요? 그는 그 시대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현시대 청소년들은 뢰봉에 대해 잘 모르지요. 뢰봉은 22살 한창의 나이에 순직했으니 그의 일생은 매우 짧다고 할수 있지요. 악독한 지주놈의 핍박에 의해 부모님들을 잃고 7살에 고아로 되였고 해방후, 정부의 혜택으로 1956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몇달간 향정부의 통신원으로 있다가 현위에 전근되여 공무원으로 사업하였으며 1958년에 안산강철공장에 전근하여 뜨락또를 운전수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현위공무원, 안산강철공장에서 사업할 때에도 여러번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습니다.
1960년 20세의 나이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2등공 2차, 3등공 3차레 세웠습니다. 그는 부대에 있으면서 무순시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것입니다. 뢰봉정신은 이미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로 되였으며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되였습니다. 주은래총리께서는 뢰봉정신을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애증이 분명한 계급립장, 언행이 일치한 혁명정신,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개인의 리익을 희생하는 공산주의 풍격, 헌신적으로 분투하는 무산계급투지.”라고 괘괄하였습니다.
1) 뢰봉은 일생에서 남을 위하는 것을 락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5월의 어느날 이른 아침, 심양으로 가려고 아침 일찍 비를 맞으며 바삐 무순역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한손으로는 녀자애는 이끌며 기차역으로 힘겹게 가는 것을 보고 인차 자기의 비옷을 벗어 그 아주머니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애를 안고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기차에 올라서 녀자애가 추워서 떠는 것을 보고 뢰봉은 자기의 적삼을 벗어서 그 녀자애에게 입히였으며 그들이 아침식사를 한 것 같지 않아 자기가 차칸에서 아침식사로 먹으려던 만투를 꺼내서 그들을 먹게 하였습니다. 심양역에 내리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자 그 아주머니는 뢰봉에게 어떻게 감사를 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니까 뢰봉은 “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과 모주석께 감사를 드리라”고 하고는 자기 일 보러 떠났습니다.
또 한번은 안동에서, 지금 말하면 단동이지요. 무순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양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려고 가방을 메고 지하도를 건너는데 한 할머니가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디로 가시는가고 물으니 자기는 관내에서 오는데 무순으로 아들 보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와 한길이라 그 할머니의 큰 짐을 자기가 지고 할머니를 부추켜 기차에 올랐습니다. 차에 올라 할머니에게는 자리표가 없자 자기가 서고 할머니를 자기의 자리에 앉히였으며 빵을 사서 할머니를 잡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집 주소를 물으니 처음으로 아들집으로 오는데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면서 편지봉투를 꺼내 보니는 것이였습니다. 봉투에 적혀있는 주소를 보니 뢰봉도 모르는 곳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순역에 내려서 할머니의 큰 보따리를 자기가 메고 할머니를 모시고 2시간이 걸려 겨우 아들집을 찾았습니다. 할머니와 아들은 뢰봉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감사할 것 있습니까, 응당한 일입니다.” 라 하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저녁무렵 비가 오는데 뢰봉은 길가에 한 녀인이 등에 보집을 지고 품에 아이를 안고 한손에는 또 큰애를 이끌며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다가가서 물으니 그 녀인은 친척집으로 가는데 아직도 십여리도 더 가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뢰봉은 두말없이 자기의 비옷을 그 녀인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아이를 안고 비를 무릅쓰고 그들을 친척집까지 데려다 주고 밤중에 련에 돌아 왔습니다.
2) 뢰봉은 못정신으로 학습을 하였습니다.
뢰봉은 시공임무를 하면서 종일 차를 몰고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다니 학습할 시간을 짜내기 힘들었습니다. 뢰봉은 늘 모택동저작을 군용가방안에 넣고 다녔는데 차가 서서 다른 일이 없을 때에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운전실에서 학습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일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 바빠 학습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사업이 바빠 그런 것이 아니라 네가 학습하려 하는냐 안느냐에 있으며 시간을 짜내려 하는냐 안는냐에 있다. 학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시간을 짜내는가 안내는가? 뚫고 들어 가는냐 안느냐에 달렸다. 널판자에 못을 박으면 구멍이 있어 못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못이 구멍을 뚫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못이 뚫고 들어가는 정신이다. 우리는 학습함에 있어서 이런 못정신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뢰봉을 열정적으로 동지를 대했습니다.
뢰봉반의 전사 교안산은 문화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뢰봉은 우선 그가 식자관부터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간만 있으면 직접 그에게 글자를 가르켜 주었을 뿐만아니라 산수까지 배워주었습니다.
뢰봉반에는 또 小周란 전사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전사몰래 그 전사의 이름으로 자기가 아껴 쓰면서 모은 생활수당금 10원을 문안편지와 함께 부쳐보냈던 것입니다. 그때에 부대에서는 전사들에게 비누, 치솔, 치약 등을 사라고 매달 3,4원의 수당금을 발급 할때이니 10원이면 석달의 수당금에 해당하지요.
뢰봉반에는 또 小韩이란 전사가 있었는데 일하다가 류산이 바지에 떨어져 몇군데 구멍이 뚤렸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여벌로 있는 모자를 뜯어 그의 바지를 기워 주었습니다.
4) 뢰봉은 일요일도 쉬지않고 지방의 공사장에 나 섰습니다.
1960년 여름의 한 일요일 뢰봉은 배가 너무 아파 퇀부 위생련에 가서 약을 떼 가지고 돌아 오는 길에 소학교를 짓는 한 공사장을 지나면서 들끓게 일하는 로동자들의 모습을 보게되였습니다. 뢰봉은 그 공사장에 들어가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가득 실고 공사장의 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를 알고 그의 한테 와서 어떻게 되여 이 공사장에 왔으며 어느 부대에서 왔으며 이름은 무었인가 물었을 때 뢰봉은 “저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회주의 건설에 저그나마한 힘이나 보탤 뿐입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건설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이 끝날 때까지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름모를 해방군전사가 우리 공사장에 와서 무상으로 우리를 도와 일하니 우리 모두 힘냅시다.”라고 방송하자 로동자들은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나르기 시합을 벌려 공사장은 더욱 들끌었습니다. 그러다니 이날 임무는 두시간 앞당겨 끝이 났습니다.
5) 뢰봉은 달갑게 바보로 살았습니다.
1960년 여러름 부대 주둔지 무순에 큰 홍수가 져 뢰봉운수련에 홍수 긴급구조에 나서라는 임무가 하달되였습니다. 이때에도 뢰봉은 방금 화재진압에서 화상을 입은 손의 아픔도 마다하고 전사들과 함께 저수지에 가서 밤낮 7곱날 련속 홍수와 싸워 2등공을 세웠습니다.
한번은 심양역에서 아이를 업은 한 녀인이 돈과 길림으로 가는 차표를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에 뢰봉은 선뜻이 자기의 돈으로 그 녀인의 기차표를 끈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녀인은 너무 감동되여 이름이 뭐이며 어디에서 사업하는가고 물었을 때 “나의 이름은 중국인민해방군입니다. 나의 집은 바로 중국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도 주소도 남기지 안으니 말입니다.
뢰봉은 또 거리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망화구(望花区)에서 대생산동원대회를 하는 것을 보고 인차 저축통장에서 돈을 찾아 가지고 구당위를 찾아 가서 200원을 내놓자 망화구당위판공실에서는 100원만 받고 100원을 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뢰봉은 나머지 100원을 100년 불우의 홍수를 입은 료양인민들에게 지원을 보냈습니다.
련에서 롱구시합을 할 때에도 다른 전사들은 목이 컬컬하다고 사이다를 사 마셨지만 뢰봉은 랭수로 갈증을 달랬습니다. 매달 3,4원 하는 수당금으로 얼마동안 모으면 200원이 되겠습니까? 뢰봉이 이렇게 아껴쓰면서 모은 돈을 재해지구에 보내거나 곤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본 전사들은 뢰봉을 바보라고 놀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뢰봉은 “남들은 나를 바보라고 하지만 나는 달답게 이런 바보가 되련다.”고 말하였습니다.
6) 뢰봉은 훌륭한 반장이였습니다.
1961년 전 퇀에서는 일제히 뢰봉을 무순시 인민대표대회대표로 선거하였습니다. 뢰봉은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련에 돌아와서 2패 4반 반장을 맡아하였습니다. 4반은 그의 인솔하에 “4호반”으로 되였으며 뢰봉은 따라서 “사호반장”으로 되였습니다.
1963년 3월 모택동동지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가 발표된 때로부터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이 발랄히 전개되였으며 뢰봉정신도 전국 각지에서 피여났으며 평화시대의 영웅인물들이 많이 나왔지요. 례하면 초원의 소년영웅 룡매와 옥영자매, 구양해, 왕걸, 초유록, 공번삼 등 영웅들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용솟음 쳐 나왔습니다.
◆요즘은 세대차이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50년대에 태여난 분들한테 뢰봉은 신변에서 나타난 영웅이고 80년대한테는 본보기, 요즘 세대들한테는 이름만 들어본 력사인물로 남습니다. 주선생님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어떤 인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예, 우리가 소학교시절에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났는데 그때 우리는 모주석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호소를 받들고 뢰봉을 따라 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등교길이라든가 하교길에서 년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그 짐을 들어 주고 렬군속집을 다니며 마당을 쓸어주고 나무를 패준다든가 물을 길어준다든가 하는 좋은 일을 찾아 하는 것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동요에 란" 노래가있지 않나요.
길에서 돈지갑을 주어 교통경찰아저씨에데 바치니 경찰아저씨가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 하며 칭찬을 했고 뻐스에서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니 할아버지도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하며 칭찬했지요. 그러니까 그 어린이가 “아이참 글쎄 나를 뢰봉을 닮았대요.” 이렇게 교통경찰아저씨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어린이가 주은 돈지갑을 교통경찰아저씨에게 바치거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거나 한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거나 그런 말을 듣자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정말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마음으로부터 우르러 나오는 실제 행동이지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했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노래가 나왔지요. 가사란 시대의 배경을 노래하는 것이니깐요.
그런데 인제는 60년이 거의 지났으니 지금 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뢰봉이란 그저 력사인물로만 느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뢰봉은 항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친근한 존재였지만 현시대에 와서는 많이 잊혀지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는데요, 주선생님,과연 그런걸가요?
지난세기 8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처음으로 겪어보는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뢰봉정신에 대하여 한때 모호한 인식을 갖게되여 뢰봉을 따라배우는 열조도 식어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지금도 뢰봉정신을 말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여 한때 “뢰봉이 외국으로 갔다.” “뢰봉이 3월에 왔다가 4월에 돌아간다”는 유감스러운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말들은 확실히 한때 중국에서 뢰봉정신이 희박하여 졌으며 모주석의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기념하여 형식적으로 3월을 뢰봉을 따라배우는 달로 하였다는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개혁개방이 더욱 심화되고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히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을 똑바로 함에 따라 계획경제시대나 시장경제시대나 할것없이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을 뿌려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였습니다.
◆네, 뢰봉이 희생된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졌을지는 몰라도 그의 정신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기부, 불우이웃돕기 등 선행들은 뢰봉정신의 연속이 아닐가 싶은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견해인지요? 느껴지지요,
여기에서 전형적인 실례로는 《2010년 중국10대 감동인물》중의 한 사람인 안산 광업공사의 곽명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2시간 이상식 일찍 출근하여 15년의 루계로 하면 15,000여 시간이 되는데 5년의 공작량을 더 한셈이 됩니다. 그는 20년을 무상헌혈을 하였는데 루계로 6만미리리터로서 자기 총혈액량의 10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2010년 그때까지는 식구 셋이 거의 30여년 전에 지은 40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집에서 살면서 씻은듯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16년 동안 희망공정과 재해지구에 10여 만원을 헌납하였으며 선후로 180여명의 빈곤학생을 도와 나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대의 뢰봉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네, 우리 지역에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애심기부활동들이 적잖습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 은 19년을 이어오면서 2,000여명의 아이들을 도와주었고 9.3애심협회, 고사모협회 등 수많은 민간단체들에서도 정기적으로 고아원, 복리원을 찾아 봉사하고 있습니다. 정이 많은 우리 조선족 사회의 따뜻한 일면이 아닐가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 사회단체들의 이러한 선두역할도 참 영향력이 크죠?
우리 주변에서도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연길시 북산가두의 뢰봉반들을 례로 들수 있습니다. 2007년 첫 ‘뢰봉반’이 건립되여 요 몇년전까지 59개의 뢰봉반이 형성되였으며 성원은 만여명으로 발전되여 빈곤가정과 장애인을 돕고 고아원, 양로원, 독거로인들을 찾아가서 사랑의 손길을 돌리고 있으며 의료구제, 법률원조, 평민봉사 등 지원자 활동을 적극 벌리고 성금을 모아 재해구에 보내기도 합니다. 하여 이 가두는 전국 우수지원자 봉사대상의 영예도 안아왔습니다.
이 가두의 단산사회구역 ‘로인뢰봉반’ 반장인 맹인 김봉숙할머니도 이반의 성원들을 이끌고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적극 전개할뿐만 아니라 본인은 결혼반지를 팔아 문천지진구조에 기부해 전국을 감동시킨 일이며,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 대학꿈을 이루게끔 사랑을 베푼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연변민들레문화교류협회에서도 전문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애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불우한 어린이들이란 모두 가정환경이 매우 어려워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지요. 생활이 괞찬은 어린이들은 하학후 과외보도반에 가서 보충수업을 받는다든가, 과외양성반에 가서 자기의 흥취에 맞는 써클활동에 참가할 수 있지만 불후한 어린이들은 경제난으로 그런데를 갈 수 없지요. 그래서 이 협회에서는 20여 명이 되는 이런 불후한 어린이들에게 하학 후 무료로 보충수업을 한다든가, 문예써클 같은 것을 하지요. 그리고는 이 어린들이 여기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자체프로를 만들어 이 협회의 행사때면 출연합니다. 저도 이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것을 몇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린이들에게 생일파티도 조직하여 주고 혁명유적지를 찾아 가서 혁명전통교육도 하고 비암산풍경구의 동식물원에 가서 풍경유람과 자연에 대한 관찰도 하게 하였으며 쌀, 기름, 옷, 학용품 등을 사가지고 불우한 어린이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17살, 13살, 되는 녀자애와 5살되는 남자애 셋이 어머니는 하나지만 세 애의 성은 다 다르고 세 애들이 다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어머니도 이 애들을 버리고 어디인가 가버리고 이 동모이부의 세 애들이 한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협에서는 쌀, 기름, 그들에게 맞는 옷을 사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협회 신미화 비서장은 불우한 어린이 몇을 개별적으로 맡아 도와 주고 있습니다. 례를 든다면 한 애는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몸도 운신못하고 82세되는 할머니가 이 애를 기르는데 아이는 괜찮은데 가정교육이 따라가지 모하다니 정상적인 애들한테 다가서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미화비서장은 원래 교원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지라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면서 학교교육외에 개별적으로 보충수업도 하고 심리교육도 하고 음악에 흥취있으니 피아노도 배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어린이는 어머니는 일찍이 가출하고 아바지마저 소식이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게 살고 있는데 생활이 너무나도 말이 아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이래서 신선생님은 이불, 침대보, 옷 등을 싸가지고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할머니도 자립하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선생님은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며 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현시대의 뢰봉이지요.
이 협회와 이 선생님의 사적이 사회 각계에 알려지자 사회적인 반향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여 이들의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국에까지 알려져 신미화비서장이 중앙방송국조선어방송에서 한번에 30분씩 두번에 나누어 이 협회를 소개를 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모모 연예인이 희망소학교 몇백개를 건립했고 모 기업가가 지진재해구역에 어마어마한 자금후원을 했다는 등등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하는 것이 옳지요. 나라의 정책이 좋고 사회에서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었고 그들이 이 사회에서 돈을 벌었으니 함께잘 살자는 취지에서 사회에 일정하게 반납하는 것도 옳지요. 그러나 꼭 돈많은 사람만 기부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연길 서시장에서 고추가루 장사를 하는 허애자녀성을 보면 그 본인이 장애자이며 말하기 바쁜 좋지않은 병으로 앓고 있으면서 고달프게 매일 고추가루를 팔고 있습니다. 고추가루를 팔아 돈을 얼마 벌겠습니까? 정말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이지요. 그렇지만 연변TV«사랑으로 가는 길»에서 보면 번마다 100원씩 의연하고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이 아니지요, 바로 마음가짐이지요.
◆자녀교육을 중요시하는 요즘, 아이의 심신발전을 모두 념두에 두어 아이들을 기부행사나 봉사활동에 동참시키는 부모들도 적잖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일부 안좋은 모습도 보였는데요, 한 학부모는 이런 경험담을 얘기하였습니다. 한번은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참가하였는데 김치를 담가 고아원에 제공하고 또 나머지 김치를 팔아 헌금하는 활동이였다고 합니다. 그날 활동에 봉사자외에 십여명의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하였는데요, 어머니들이 하는 일은 솔선수범하여 김치를 담그거나 아이에게 김치 담그는 조리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집 아이를 둘러싸고 카메라 샤타를 눌렀다고 합니다.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단 한명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온 어머니들이였습니다. 어머니들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며 한바탕 떠들어대던 아이들은 결국 배추 한포기씩 대충 주무르다가 어느순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데요, 요즘 사회에서 가끔 보는 모습인것 같네요. 주선생님, 현시대에 와서 기부나 선행은 때론 일부 사람들이 쇼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가 있죠?
이 행사의 취지는 아주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학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그 행사에 참가한 동기가 무었인지 모르겠지만 와서 하는 그 행동에서는 아이에게 애심교양을 하거나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동참하여 자기의 저그만한 성의를 표달하자는 것이 조금도 안보이지요. 그저 그 행사를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요.
그리고 지금 보면 큰 기업인들이 많은 돈을 의연하여 사회에 건설에 지원하지요. 이런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그 항목을 자기의 이름으로 해 달라는 것이지요. 자기의 이름을 날리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요즘 제일 관심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페염과의 싸움이라고 볼수 있는데요, 뢰봉의 고향인 장사시에서는 “성성뢰봉, 가장 아름다운 모범”이란 활동을 벌려 코로나방역전역에서 용속음쳐나오는 영웅인물과 사적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사태가 발생한후 전국 각지에서 무한과 각지 병원에 의료물자를 기증하고 생필품을 지원하는 수많은 가슴훈훈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들이 인상깊었는지요?
예, 해방군에서와 여러 성에서 의료지원대를 무한에 파견하고 지원물자들이 자동차에 가득 실려 무한으로 들어가 것을 텔레비죤에서 많이 봤는데 거기에서 몇가지 더 감동적인 것을 말한다면 향항, 오문 동포들이 자금과 물자를 기부하는 실제 행동으로 내지 동포들에 대한 혈육의 깊은 정을 보여 준 것이였습니다.
2월10일까지 향항 사회 각계는 루계로 10억원을 기부했으며 일부 사회단체와 기구는 또 당지에 마스크, 보안경 , 방호복 , 수술복 등 방역 물자들이 없으니 해외에서 구입해 내지의 전염병 예방 통제 일선에 보냈것입니다 . 그리고10일까지 오문 각계에서도 인민페로 약 3억 1,000만원을 기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텔레비에서 볼때 만약 향항, 오문이 조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저렇게 내지에 대한 지원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향항, 오문은 특별행정구로서 비록 내지와 일정한 거리도 있고 사회제도가 다르다 하지만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혈육의 정만은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중국아세아경제발전협회에서 전세기를 내고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에서 마스크 12.536장, 의료용 장갑 11 만1천 켤레, 방호복 400벌, 총 128만9천 원 가치의 지원물자를 연변, 무한, 북경 등지에 보내여 따뜻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련합회 산하의 협회뿐만 아니라 연합회에 속하지 않은 여러 조선족협회들에서도 모금 활동과 물자조달에 나섰으며 아무 협회에는 속하지는 않지만 자발적으로 개인의 명의로 기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 장의 마스크, 한 컬레의 장갑, 한 벌의 방호복에 재일조선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스며있었습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에게 크나큰 힘으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무한에서 화신산병원을 짓는 농민공들이 거기에서 일한 로동공가를 하나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의무로동으로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농민공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이고 그들이 하는 로동도 힘든 로동이고 그들의 생활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경제상으로 큰 지원을 못하게 되니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이번 바리러스와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지요. 이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바로 바이러스는 무정하지만 사람은 유정하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라면 또 따뜻한 마음과 열정적인 우리 연변사람들을 빼놓을수 없죠. 근일에 우리 지역에서도 각 기업과 개인이 방역물자를 기부하는 선행들이 이어졌는데요,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에서는 15일간 방역 1선 사업일군들한테 애심도시락을 전달했고 길림오동제약회사에서도 10여차에 걸쳐 500여만원 가치의 방역물품과 자금을 기증하였습니다. 또한 공청단주위의 조직하에 50개 애심단체와 천여명 각계 애심인사들이 155만원에 달하는 물자를 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달째 경영을 못해 수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00여분의 물만두를 일선일군들한테 전달한 연길시대방물만두집도 있습니다. 주선생님, 참 가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소식들이죠?
그렇지요 한곳에 곤난이 있으면 여러곳에서 지원한다는 말과 같이 연변, 그리고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도 큰 기업으로터 자그만한 애심단체, 그리고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방역전역에서 큰힘 작은힘 할것없이 지원에 나썼습니다. 례하면 통화청산그룹에서 100만원, 커시안그릅에서 1,000만원에 달하는 성금과 물자를 의연하였고 또 개인들로는 백청강가수가 마스크 1,100장, 중경력범팀 축구선수 원민성이 5만원, 도문시 월청진의 리금련 로인이 1만원을 기부 하였으며 또 연변TV에서 훈춘시 양포만족향 동아로촌의 리준성로인이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 두푼 모은 5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로 된 돈주머니를 전연병예방통제사업에 쓰라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와서 내놓는 것을 봤습니다. 그 액수는 만원이였습니다. 이 두 로인의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이였습니다. 두분 다 70이 넘는 농민이였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시대의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오늘날에 와서 물질적추구가 강해지면서 요즘 세대들속에서 뢰봉정신이 잊혀지지 않을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전에 연길시중앙소학교 4학년 3학급의 남가이 학생은 자신이 아껴모은 마스크 100장을 신흥파출소에 전달하였습니다. 주선생님, 요즘 아이들이 독신자녀로 자라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하다고 여겨지지만 또한 어른들이 본보기를 보이고 인도하기 나름이 아닐가요?
그렇지요.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난 시기는 지난세기 60년대 초이고 지금은 21세기 20년대에 들어 섰으니 거의 60년 세월이 지났으니 현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확실히 뢰봉이란 그들과 거리가 먼 력사인물로 느껴 질 수 있겠지만 먼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2천년도 많이 넘는 중국의 력사인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 각국에 공자학원이 많이 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봐서 오랜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성 세대의 사람들이 이런 력사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고 새일대들에게 어떻게 인도하여 주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뢰봉정신은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이고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된 것 만큼 한개 시의 중심광장에 크지는 않더라도 뢰봉의 조각상이 하나 세우고 거리나 기차역전, 뻐스부 같은 큰 공중장소의 벽에는 뢰봉이 인민군중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그림같은 것을 크게 그려놓으면 정신문명의 대명사로서의 뢰봉정신이 더 빛을 뿌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공뻐스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여 주는 작은 일도 좋고 아직까지도 빈곤호, 장애인, 독거로인 등 사회의 약세군체들이 있는 것만큼 그들을 찾아 가서 어떤 구체곤난이 있는가를 료해하고 그들을 집접 도와 줄 수 있는것은 그 자리에서 도와주고 청소년들이 자기의 힘으로 직접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부모들의 도움을 청한다든가 어떤 사회단체의 도움을 청하여 그들을 도와주고 소선대의 활동이거나 청년단의 활동으로 사회의 유익한 일들을 찾아 하도록 인도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뢰봉정신의 실질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 인민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요.
◆현재는 전국 지어 전 세계가 코로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방역물자가 부족하고 자아격리,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 등 기부와 후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난관을 헤쳐가는데 힘이 되지 않을가요?
예,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은 인제는 많이 호전되여 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락관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힘으로 지원을 못할 지라도 우리 주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페염역정 예방통제사업 지도소조판공실에서 전주 인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잘 학습하고 자아 예방통제의식을 절실히 높혀 해당부문에서 제정한 교통관제를 준수하고 인구밀집장소에 대한 출입을 금지하고 모임을 갖지 말고 야생동물 거래를 엄금하며 야생동물고기와 멀리하는 등등의 구체 행동이 바로 제1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백의전사와 기타 사업일군들에 대한 도움이라고 생각됩니다.
--- 맺 는 말 ---
네, 요즘 우리들은 코로나사태로 다소 불편한 일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들려오는 각종 기부와 후원, 베품, 타인에 대한 배려 등 따뜻한 소식이 우리한테 힘과 희망을 줍니다.
본 프로기획에 황설화, 록음제작에 손귀옥이였습니다. 오늘 프로가 여러분들한테 힐링이 되는 시간이였길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