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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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아리랑방송 《좋은 세상》 댓글:  조회:2253  추천:0  2021-05-25
  아리랑방송 《좋은 세상》   프로그램명 《좋은 세상》  방송날자 2021년 5월 24 일 주     제 기형적인 조선족소비문화에 대해 래     빈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 주청룡선생님 책임편집 강순선 사회자 조일광, 김설화           ---간주곡과 함께---   남; 례의민족인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쌀한알도 절약하는것을 미덕으로 삼아왔었는데요. 생활수준이 제고됨에 따라 절약의 미풍량속이 조금은 색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녀; 결혼, 생일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버젓이 차려놓고는 음식물이 절반넘게 남아버리는가하면 체면소비를 하는 현상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요. 남; 이런 과소비와 랑비현상은 가정경제를 파괴하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큰 피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   녀; 오늘 《좋은 세상》프로에서는《조선족의 기형적소비에 대해서》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프로그램 《로고송》 ************************************************************물음; (*);먼저 생방송실에 모신 원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주청룡 부교장선생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청룡; 인사나누기 ---   (1); 선생님께서는 사회발전과 생활수준의 제고로 산생된 조선족 기형소비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셔 “조선족 기형소비에 대해” 여러 칼럼을 발표하셨다는데요.    예, 이 방면에 대하여 《생일을 간소하게 치렀으면》, 《체면소비를 삼가하였으면》, 《집과 자가용을 사 주는 것도 부모의 의무인가?》, 《조선족의 기형적소비에 대하여》이렇게 네편의 칼럼을 썼습니다.     (2); 조선족들의 과소비현상은 타지역이나 타민족들의 눈에도 좀 심하게 비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고해야 할 과제가 아닐가 싶네요.   예, 시대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생활수준도 제고 되고 생활절주도 빠라야 된다고 봅니다. 절약 절약하면서 생활방식도 제고 되지않고 생활절주도 예날처럼 느릿느릿하면 우리의 생활수준이 제고 된것이 아니고 현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요. 절약하라 하여 소비를 하지 말란 말이 아닙니다. 소비는 랑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랑비를 반대하는 것은 소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소비를 억제하지도 않습니다. 랑비반대는 소비자극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소비가 있어야만 생활수준이 제고됩니다. 생산과 소비의 변증관계를 보면 생산이 소비를 결정하고 소비가 생산을 촉진합니다. 생산해 낸 산품이 시장에 나와 소비자들에게 팔리지 않으면 경제운행이 침체상태에 이르고 사회재생산의 과정도 정지됩니다. 생산, 소비, 재생산 이렇게 경제가 순환하여야 인민의 생활이 향상됩니다. 그러므로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반드시 소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소비를 하되 불필요한 기형적 소비를 하지 말고 그 돈을 자기의 적성에 맞는 창업에 쓰거나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더 바른 소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으며 그 어떤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고 가장 앞줄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1992년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사회자 조충상이 연변에 왔을 때 인구비례로 하면 연변의 택시흐름량이 전국에서 광주 다음으로 두번째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변사람들이 생활수준이 제고되였고 생활절주가 빠르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이 많은 제고를 가져온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가운데는 떠벌려 랑비하는 바르지 못한 기풍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런 기형적인 소비는 절제할 바라고 봅니다. 우리와 같이 사는 한족들은 새내에서 1원짜리 대중교통을 리용하지 택시를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을 보면 뻐스를 타고 1원에 갈 곳을 급한 일이 아니면서 5원, 10원 지어는 몇십원을 팔면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바로 사치를 피우는 기형적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연변의 정황을 보면 보편적으로 택시는 한족들이 몰고 타기는 조선족들이 많이 탑니다. 한족택시기사들의 말을 빌면 “조선족들이 없으면 우리 택시기사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들의 돈이 한족들에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도시의 진출 혹은 출국하여 돈을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친구들을 청하여 식당놀이를 하는 것은 규례가 아닌 규례로 되고 있습니다. 다년간 외지에 가 있다니 친구들이 그리웠고 또 돈도  벌어왔으니 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정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만하기도 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채를 주문할 때에 친구들이 채를 먹을 만치 올리라고 하면 돈을 벌어왔다는 게 째째하게 놀겠는가 하며 식탁에 다 먹지도 못할 채를 상다리 부러지게 올립니다. 결국파티가 끝날때 보면 절반도 먹지 못하고 쓰레기로 처리됩니다. 먹을 만치 채를 올리면 체면이 깎이고  상다리 부러지게 채를 올리면 체면이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기형적 소비라고 봅니다. 체면소비란 관념을 버리고 랑비가 없도록 먹을 만치 적당하게 채를 올리는 것이 바로 소비관념에서 제창할 바라고 생각됩니다.    (3); 절약은 미덕이라 하잖아요.  먼저 과소비와 랑비의 련관성에 대해 간단히 말씀주시렵니까?    과소비란 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고 경제발전수준에 맞지 않으며 기본적인 욕구와 지불능력을 넘어선 일종 비뚤어진 지속 불가능한 소비방식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의 품격과 사회기풍을 회손 하고 자원을 랑비합니다. 그 특점을 말하면 한 나라와 지구의 현실적인 경제능력을 초월하고 재부의 랑비를 조성하며 자연자원과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단시기적인 향수에 만족하고 경제의 장기적인 지속적인 발전을 저애하고 주민의 소비수준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도 불리합니다. 그 위해성을 말하면 개인의 품격과 사회기풍를 파괴하고 자원을 랑비하고 빈부의 차이를 늘이고 사회통합을 파괴하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키며 부자를 미워하는 현상을 초래하며 성공관의 왜곡을 초래 하고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의 구축에 불리한바 소득분배 조절을 통해 교육을 강화해 사치풍조를 개변해야 합니다.   (4); 그럼 조선족들의 과소비와 랑비현상이 어떤 면에서 표현되는지 그 실태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합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결혼식음식상이나 생일상을 차리는데서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과소비와 음식물낭비현상들이 존재합니까?     백성들은 자식들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다든가 생일을 굉장히 치른다든가 하는 과소비현상은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 일부 기풍이 바르지 못한 기관의 간부거나 큰 기업가들로부터 내려 온 바람이라고 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식이거나 기타 연회를 간소하게 치르면 자신의 신분과 체면에 맞지 않은 걸로 여기며 찬치에 하객이 많은가 적은가를 자기의 신분과 체면을 비기는 기준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객이 많으면 지위가 높고 체면에 맞는 것이고 하객이 적으면 자기의 신분과 체면에 맞지 않는 걸로 여기였습니다. 이러한 과소비와 체면소비로 하여 곤혹을 겪는 것은 저소득층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의 한 이웃은 삼륜차로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입니다. 얼마전 아들의 결혼잔치를 치르게 되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남들보다 더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들만치는 치러 주려고 친척, 친구들에게서 돈을 꾸어 아들의 잔치를 치러 주었는데 하객들의 보기에도 체면이 깎이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체면뒤에 오는 경제적 부담은 엄청나게 컸습니다. 비록 체면은 깎이지는 않았다지만 그 많은 빚은 언제 갚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체면소비라는 것이 없이 자기 집의 형편에 맞게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렀더라면 그렇게 큰 빛더미에 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가서 몇번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였는데 한국의 례식장의 식당을 보면 뷔페식이였습니다. 하객들은 모두 자기절로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을 만치 담아가지고 오니 마지막에 채가 남아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하여 누구 하나 주인측이 손님접대가 그닥잖다고 나무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규례로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반듯이 이런 소비를 따라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5); 결혼식, 생일상을 버젓히 차리는 이런 과소비로 인한 음식물랑비현상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깝고 가슴이 참 많이 아프지요?   예, 지금 과소비로 하여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갚고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지난 세기 1959년, 60년, 61년 3년 련속되는 재해와 쏘련의 빛재촉으로 하여 국민경제가 극히 곤란하고 량식고생하던 집체식당시기를 겪어 왔었는데 그때는 콩각대를 푹 삶아 갈아서 거기서 전분을 받아 거머거먼 죽물을 먹을 때의 일이 생각나면서 더욱 가슴이 아파납니다. 그렇다하여 생활이 발달한 현시대에 와서 절약한다고 하여 배를 고르며 아껴 먹으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는 처리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연변텔레비죤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보면 불후한 어린이들이 잎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입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 처리될 때에 이러한 불후한 어린이들이 생각나고 지금도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를 곯으면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후진국 나라 어린애들이 이렇게 먹다남은 음식을 보면 얼마나 먹고싶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6); 결혼식이나 생일상에서 뿐만아니라 평시 가정에서도 과소비로 인한 음식 물랑비 현상들이 많은데요. 이것은 가정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 하는지요?   예, 결혼식이나 생일상에서 뿐만아니라 평시 가정생활에서도 과소비로 인한 랑비현상이 많이 존재합니다. 례하면 육류, 어류나 비닐봉지로 포장된 음식제품들을 가득 사다가 랭장고에 1년이고 2년이고 처박아 두었다가 나중에는 류통기한이 지나 변질하여 맛도 보지 못하고 쓰레기를 처리되는 현상들이 있는데 이것도 가정생활에서 불필요한 소비이고 불필요한 경제 지출이라고 봅니다. 음식물의 랑비는 량식, 채소, 식용유 자체의 랑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음식물의 생산에 투입되는 물, 토지, 에너지와 기타 생산자료의 무효한 소모를 의미합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이  쓰레기로 처리될 때 거기에서 나오는 악취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쓰레기를 담은 분해 불가능한 비닐봉지는 지구를 오염시키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식랑비를 하지 않는 것은 자원랑비를 방지하고 환경오염을 방지하고 지구를 살리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7); 우리는 《절약은 미덕이다. 연필한꽁다리라도 아껴쓰라.》는 교육을,/ 집에서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쌀 한알이라도 흘리지 말고 버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왔지만요.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악순환적인 과소비와 음식물랑비현상은 계속 존재하고 있는데요.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예, 백성들은 체면소비란 이 과소비현상이 오게 된 주요한 원인은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 일부 기풍이 바르지 못한 기관의 간부거나 큰 기업가들로부터 내려온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도 여파로 내려오면서 악순환으로 되면서 남들이 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데 나만 음식을 먹을 만치 적당히 올리면 남들이 나를 뭐라할가? 나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가? 하는 우려심에서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올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돈을 팔때에는 값이 싼 채들을 올리며 돈을 아끼면서도 남들이 값도 마침하게 적당하게 올리면 짠돌이 같은 린색한 사람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인측이 차린 음식을 타발이 없이 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떻고 저것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의 구미에 맞는 고급료리를 올리라고 요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주인측에서는 할 수 없이 여러가지 많은 채들을 올리는 과소비란 악순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해 8월, 습근평 총서기는 음식랑비행위를 제지할 데 관하여 중요지시를 내려 립법을 강화하고 감독관리를 강화하며 효과적 조치를 취하고 장기적 효과기제를 구축하여 음식랑비행위를 견결히 제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랑비가 수치이고 절약이 영광스럽다는 량호한 기풍이 형성되도록 추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8); 체면때문에 모든 면에서 풍성함을 추구하다보니 과소비가 란무한데요. 솔직히 오는 손님들 앞에서 체면도 서고 버젓히 차려야 한다는 이런 관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체면소비는 삼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제한된 가정수입으로 질적인 생활을 추구하여야지 불 필요한 체면으로 과소비를 하면서 돈을 랑비하면서 가정생활에 영향을 줄 리유는 없다고 봅니다. 체면소비를 한다하여 자기의 정성과 진심을 다 표달하는 것도 아니고 과소비를 한다하여 차린 음식이 전부 연회참석자들에데 대접되는 것도 아니며 숟한 돈을 팔고 그저 음식찌꺼기로 처리되고 있으니 이러한 불필요한 기형적 소비는 반드시 절제하여야 합니다. 연회를 차리는 주인측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체면치례를 하지 말고 자기의 실정에 맞게 진정어린 마음으로 음식을 차려 손님을 접대하고 연회참석자들은 축복의 마음으로 주인측의 성의를 달갑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여 서로 부담스럽거나 불편한 마음이 없는 즐거운 장소로 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9); 우리 조선족들의 과소비는 자녀에게 집과 자가용을 사주어야 한다는 의무관념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안타까움이 있으신지요?    예, 자식들이 결혼한다면 부모로서는 매우 기쁜일이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이 사회를 보면 자식들의 결혼에 대하여 기쁨보다 근심이 앞서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는 아들을 가진 저소득층의 부모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물질생활수준이 제고되면서 지금 결혼당사자들은 결혼전의 물질적 요구도 만만치 않습니다. 박모 녀성은 부부간이 다 집체 기업단위에서 일하다가 둘 다 정리실업을 당하여 로무시장에 나가서 일당으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여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아들을 공부를 시키기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 여러 곳에서 7만원의 돈을 꾸어가지고 거간군을 통하여 한국로무길에 올랐습니다.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돈을 벌어  빚도 물고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도 다 하였습니다. 거간군을 통하여 가다니 불법체류여서 아들이 대학에 간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도 아들보러 오지 못하고 굽석굽석 일만 하였습니다. 10년 넘어 벌었으니 아들을 대학공부도 시키고 손에 쥔 돈도 적지 않았습니다. 불법체류라 숨어 다니면서 일하다니 서울구경도 못하고 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니 고달팠던 10년 한국생활을 접고 귀국하였습니다. 이 돈이면 집도 사고 아들을 장가도 보내고 아들의 집도 살 수 있겠다고 흐뭇한 생각을 굴리면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우선 아들의 집부터 사고 장식하여 아들의 결혼준비를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집은 아들의 결혼식을 치르고 천천히 사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느리 될 사람이 시어머니에게 돈이 있는 것을 알고 자가용을 사줄 것을 요구할 줄이야. 너무도 어이 없었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을 자그마한 도회지에서 출근길도 10분이면 족할 터인데 무슨 자가용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허영심에서였습니다. 박모 녀성은 자가용을 사 줘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들의 집을 사야 하는가 고민중에 있었습니다. 자가용을 사주면 자기네는 한평생 부억에 불을 때는 온돌집에서 살아야 하고 안 사주면 고부관계가 원활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지요. 방법이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자가용을 사주고 자기네는 지금도 불을 때는 낡은 온돌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박모녀성이 사랑하는 가정을 떠나 10년 타향살이를,  그것도 불법체류라 숨어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겠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남편도 안해를 외국에 보내고 가정살림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0년 이런 고생을 하였으면 인제 그들이 60이 많이 넘는 나이라 아들을 장가를 보내고 행복한 로후를 맞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며느리 될 사람은 자기들은 현시대 사람이므로 현시대에 맞는 생활을 해야하고 시부모네는 늙은이기에 옛날 방식대로 불을 때는 온돌집에서 살아야 된다는 식이였고 아들은 부모들이 자기를 낳아 기르고 대학공까지 시키면서 이렇게 고생을 하였으므로 인제는 행복한 로후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좀만 가지였다면 자기의 미혼부의 그런 요구를 단연히 거절하였을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집과 자가용을 사 줘야 한다는 관념은 자식들로 하여금 자립하지 않고 부모가 늙어 죽을때까지 어미의 즙을 빨아 먹는 거미족이 되게끔 하게 합니다.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18세 후부터는 모들 것을 자립하게 한다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 연길에서 한국인 한 기업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천만 자산을 갖고 있지만 아들에게는 “나는 너에게 대학공부까지 뒤바라지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결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자립하여야 한다. 나의 이 자산은 우리의 로후생활과 자선사업에 쓰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아들도 “예, 저도 부모님의 신세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자립하며 앞으로 아버지보다 더 큰 사업을 벌리려 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식들의 생활에 대하여 부모들이 어디까지 대여 주는가 하는 것은 집집마다 다를 수 있고 부모들의 자원적인 행위이지만 자식들의 집을 사준다든가 자가용을 사준다든가 하는 것을 부모의 의무로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자기들은 현시대 사람이므로 현시대에 맞는 생활을 해야하고 부모들은 늙었이기에 옛날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여생이 많지 않은 부모들을 어떻게 더 행복하게 생활하겠는가를 생각하여야지 절대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부모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10); 과소비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전형적인 문제라면 부조문제가 아닐가 싶은데요. 누구나 겪게 되는 경조사에 부조를 하는 것은 미덕이였지만 예전의 고유의 전통이 퇴색하여 기형적으로 변한 부조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많은 분들 또한 동감하지 않을가 싶습니다. ( 바람직하지 못한 부조현상에 대해 실례를 들어 이야기)   예전의 우리 민족의 전통 부조문화를 보면 집안에 경조사가 생기면 서로 일손을 도왔고 물질적 생활조건이 풍요롭지 못하던 시절에 쌀, 기름, 술 등을 보내여 서로 도와주면서 경조사를 치르던 것으로 내려왔는데 지금은 생활수준이 많이 제고 되여 경조사를 모두 례식장에 가서 진행하므로 크게 일손을 도울 것이 없게 되였으며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쌀, 기름, 술 등 물질적 부조가 필요없게 되여 그 대신 약간의 돈으로 경사에는 축의금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고, 상사에는 조의금으로 상부상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전통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일부는 기형적인 부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에는 일부 령도간부들은 경조사를 돈벌이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경조사를 성대하게 치러 거액의 돈을 받아들이고 일부 승진을 요구하는 사람들이거나 자기 개인의 리익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은 높은 관직자들의 경조사를 회뢰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거대한 현금거래가 발생되기도 하였습니다.   (11); 이런 갖은 기형적인 과소비로 하여 존재하게 되는 현상과 어떤 문제점들이 뒤따릅니까?   여러해 전인데 다른 지방에서 연변에 와서 사업하다가 다시 본 고장으로 돌아가서 연변인민들에게 보낸 한 교원의 편지를 《연변일보》에서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저는 원래 이곳에서 교원사업을 하다가 연변이 로임이 높다는 말을 듣고 연변에 가서 교육사업을 하였는데 가보니 확실히 이곳보다 로임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높은 로임이라지만 대부분 부조돈으로 나가다니 생활하기 곤란하여 다시 본고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본고장에 돌아오니 로임은 비록 연변에 있을 때보다 적었지만 부조금이 없이 기본상 그 로임이 전부 생활에 쓰이니 연변에서의 높은 로임을 받기보다 훨씬 낫습니다.”라고 하면서 연변인민들에게 기형적소비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우리들에세 사색의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지금 부조금액을 보면 보통 200원, 300원을 하고 있는데 이런 부조도 한두 번이면 몰라도 한달에 7,8번 지어 10번 넘을 때도 있는데 그달 로임의 절반을 넘게 부조돈으로 나가니 가정생활에 큰 충격을 주게되니 또 부부간의 언쟁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부조바람은 우리 조선민족의 미량풍속에 먹칠을 하게 되는데 연변의 소품 《부조바람》도 연변의 이런 실정에 비추어 아주 해학적으로 엮은 소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2); 요즘은 몇년전에 비해 그래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이런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요?   예, 일반적으로 연변에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생일을 친족들이나 모여서 쇠지 손님들을 청하여 흥성하게 쇠지 않는데 조선족들이 생일잔치를 치르면서 청하니 내키지 않은 마음이지만 부조금을 들고 가서 참석합니다. 그리고 6,7년전까지만 해도 단위에서 령도간부들이 생일에 청하면 일반 직원들은 역시 내키지 않는 마음이지만 할 수 없이 참석하였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로임이 높지 못한데 새일, 결혼, 장례에 모두 참가하다니 생활에 큰 충격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습근평새시대에 들어와서 부패분자들을 타격하고 바르지 못한 기풍을 바로잡는 운동을 벌려 령도간부들이 경조사에 손님을 많이 청하지 못하게 하고 생일에 손님을 청하지 못하게 하니 가장 찬성하는 것이 바로 일반 백성들입니다. 그만큼 부조돈이 나가지 않으니깐요. 경제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결혼축하, 생일축하를 갈 때에는 생화나 축하편액, 혹은 정교한 기념품을 들고 가서 상징적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지만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이런 기념품보다 경제적 가치를 많이 추구하기에 축의금을 갖고 가는 것이 관례로 되고 있는데 우리도 친척이나 친구들의 생일에 초대되였다면 발달한 나라를 따라배워 생화나 축하편액, 혹은 정교한 기념품을 들고 가서 상징적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는 것을 관례로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13); 과소비로 인한 랑비 등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자신은 물론 사회는 반드시 어떤 극복대책들이 필요한지요 어떤 바램을 가져보는지요?   예, 이 문제는 금년도 4월 29일에 제13기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제28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식품랑비반대법》을 표결 통과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1. 공무활동식사는 규정 기준을 초과하지 못한다. 2. “그릇비우기행동”의 소비자에게 장례할 수 있다. 3. 음식을 주문한 후 랑비하면 음식물 찌거기 처리비를 받을 수 있다. 4. 상가가 소비자에게 과량소비를 유도할 경우 최고 1만원이 벌금을 부과 한다.  5. 식품생산경영자가 엄중한 랑비를 하면 최고로 5만원의 벌금을 부과 한다. 6. 폭음 폭식 동영상을 제작배포하면 최고 10만원의 벌금을 부과 한다.”라고 하였는데 사회상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집행하고 우리 모두 령도간부로부터, 나로부터 솔선적으로 우리 조선족의 례절바른 미량풍속을 지켜가며 아름다운 소비문화를 가꾸어 갓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결속어; 경제형편이 허락되지 못하면서도 안면이 가려워 통이 크게 내는 음식상차림으로 인한 과소비와 랑비현상은 가정경제를 파괴하게 하는것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큰 피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  과소비로 인한 음식물랑비현상이 하루빨리 건전하게 발전하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기원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179    교원의 사표(师表) 댓글:  조회:3291  추천:0  2020-09-10
교원의 사표(师表) 주청룡 사표란 사전의 해석을 보면 ‘학식이나 덕행이 높아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였다. 교원은  교육사업의 직접적 담당자로서 응당 일반인보다 더 높은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표와 품위를 갖추어야 하며  품위는 사표를 통하여 표현된다. 교원의 사표는 여러가지 면으로부터 표현되지만 주로 아래의 네가지 면에서 많이 표현된다.  즉 학식, 품행, 언어, 옷차림을 통하여 한 교원의 사표를 보아낼 수 있다. 교원의 학식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으로서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에 제기된 상응한 학력과 교원자격증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일반 사람보다 더욱 풍부한 지식을 장악하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보다 더 훌륭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교원이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엉뚱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엉뚱한 질문이라지만 그 학생은 선생님의 교수과정에서 순간적인 계발을 받은 것이 있어 질문을 한 것이다. 만약 교원이 풍부한 지식을 장악하지 못하였다면 학생들이 제기한 이런 ‘엉뚱’한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교원이 한 과목을 가르치려면 교과서내용의 10배에 달하는 지식을 장악하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 많은 교원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초로 하여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많은 책을 보면서 부단히 자기의 지식을 충전하여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있기에 자기의 교수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교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만족을 느끼고 학습에 게을리하여 자기자신을 부단히 충전하지 않기에 교과서 범위를 크게 초과하지 않은 정도의 지식으로 교수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엉뚱’한 질문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교원들은 교원으로서의 지식면의 미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원의 품행 교원은 반드시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하는 훌륭한 정치사상수양을 갖추어야 한다. 교원은 학생들의 거울과 같은 본보기로서 언제나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하고 례절스러워야 하며 자기의 실제적인 품성과 행실로 인성교육을 하여야 한다. 교원은 절대로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학생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현상도 없어야 한다. 교원이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면 교원의 형상이 너무나도 깎이게 되고 학생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남학생들에게는 조건반사로 되여 담배를 피우고 싶은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화장이나 너무 화려한 장신구들은 녀학생들을 매혹시킬 수  있으므로 녀성교원들은 지나친 화장이거나 너무 화려한 몸치장도 삼가하여야 한다. 교원의 언어 교원의 언어는 학생들에게 직접 전수되고 가장 빨리 전수된다. 그러므로 교원들은 반드시 상냥하고 온화한 말씨로 표준말, 친절하고 례절 바른 말을 써야 한다. 애들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사회적 지위가 애로부터 학생으로 승격되며 그 지칭도 ‘애’로부터 ‘학생’으로 승격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존중하여 ‘애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학생도 완전한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한다. 어느 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교원으로서 “야, 이 자식아, 그게 무슨 짓이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동무, 그게 무슨 행위인가요?”라고 한다면 전자는 그 학생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여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수 있고 후자는 그 학생이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조선족교육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는 “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하대형으로 말하지 말고 “동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하는 식으로 존대형을 써야 한다. 학생들에 대한 이러한 존대와 대등관계가 학생들의 인격도 존중하고 교원과 학생지간의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존사애생’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원의 옷차림 교원의 옷차림은 교원의 풍채를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표징으로 볼 수  있다. 교원으로서 딱히  어떤 복장을 입고 출근하고 교단에 나서야 한다는 엄격한 규정은 없지만 교원이 교실에 들어서게 되면 당연히 학생들의 시선이 교원에게로 쏠리게 되므로 교원의 옷차림은 반드시 품위 있고 정결하여야 한다.  인터넷에서 “한 교원이 개인의 자유와 자기 개성의 표현으로 자주 무용배우와 같이 너무 화려한 옷차림으로 출근하여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좋지 못한 반영으로  교장선생님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로출이 심하거나 너무 화려한 옷차림은 학생들의 시선을 너무 끌기에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되고 학생들사이에 수군덕거리는 산만한 수업질서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로출이 심하거나 너무 화려한 옷차림은 삼가 해야 한다고 본다.  정장차림을 요구한다고 하여 무더운 여름철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교단에 오르라는 것도 아니고 변함없이 매양 한가지 옷차림으로 교단에 나서라는 것도 아니다. 평복차림도 아주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될 수 있다.   이상 몇가지로 교원의 사표에 대하여 거론하였는데 교원은 인류령혼의 공정사로서 교원의 품성과 언행은 모르는 사이에 학생들에게 거울과 같은 모델로 될 수 있으므로 교원은 항상 품성이 바르고 례절스러워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훌륭한 원예사가 우량한 품종을 배육해내듯이 우수한 교원에게서 우수한 학생이 나올 것이다. 연변일보 
178    인생관에 따른 행복관 댓글:  조회:3934  추천:0  2020-07-31
인생관에 따른 행복관 주청룡   사전의 해석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 했고 행복에 대한 근본 견해와 태도를 행복관이라고 하였다. 어떻한 인생관을 수립하는가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어떤 사람은 남을 해치면서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있다. 뢰봉은 일편단심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고 집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으며 우리 주변에도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고 집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여러 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다. 그들은 오직 내 이 한 마음, 내 이 한몸을 당에 바치여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인민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는 자아희생정신의 표현이였다. 이들이야말로 자아희생정신으로 남을 위하는 현시대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이번 전염병예방통제사업에서 도문시 월청진(연변)의 리금련 로인이 만원을 기부 하였으며 훈춘시 양포만족향 동아로촌(연변)의 리준성로인이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 두푼  모은 5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로 된 돈주머니를 전연병예방통제사업에 쓰라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와서 내놓았는데 그 액수는 만원이였다. 이 두 로인의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이였다. 두분 다  70세 넘는 보통농민이였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현시대의 뢰봉정신이라고 본다.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무한에서 화신산병원을 지은 농민공들이 로동공가를 한푼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의무로동으로 이번 코로나19와의 싸움을 지원한 것이였다. 농민공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이고 그들이 하는 일도 힘든 로동이고 그들의 생활도 넉넉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경제상으로 큰 지원을 못하게 되니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이번 바리러스와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서는 마음이 편안하고 약간이나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는 자신에 대한 위안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하지만 전국인민들이 일심협력하여 전염병예방, 통제에 나설 때에 일부 사람들은 제멋대로 요언을 날조하고 퍼뜨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을 일종 쾌락으로 느끼는가 하면 일부 개인들과 애심단체에서 무한에 마스크를 지원하려고 하나 마스크가 긴장하여 살 수 없다는 정보를 장악하고 이것을 돈벌이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사기행각을 벌리는 불법분자들도 있었다. 파언현(흑룡강성 巴彦县)의 호보모의 마스크사기금액은 도합 314만원이나 되였다.   그리고 자기의 편리를 위해 전염병예방, 통제일선에 나선 사업일군들의 업무에 거역해 나서면서 그들을 구타하는 행위까지 벌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주택구의 경비인원들이 관련 규정에 의해 차를 주택구역으로 들어 못 가게 제지하자 칼로 경비원을 찔러 2명을 부상 입히고 1명을 숨지게 한 끔찍한 사건(연변)도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는가에 따라 그의 행복관과 행복에 대한 표준도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행복관은 인생관의 중요한 조성부분이고 사람들의 삶의 가치와 목표가 다름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지게 되며 인생관은 또 세계관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며 세계관의 제약을 받는다. 인생관은 주요하게 인생의 목표, 인생의 태도와 인생의 가치 이 세개방면으를 통하여 체현된다. 만약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다면 호금도 총서기가 제기한 사회주의 영욕관에서 8가지 영광을 지키는것을 행복으로 간주할 것이고 만약 그릇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다면 8가지 수치스러운일을 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낄 것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모두 평범한 의무일군들이고 리금련, 리준성 두 로인은 다 70세 넘은 보통 농민들이며 화신산병원을 지은 농민공들의 사회적 지위도 모두 최하층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소에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기에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의덕과 의술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워 수 많은 환자들을 구하였고 리금련, 리준성 두 로인은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두푼 모은 돈을 선뜻이 전염병예방통제사업에 기부하는 것으로써, 농민공들은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무한을 지원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삶의 가치가 그들의 행복관으로 표현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상술한 불법분자들은 평소에 그릇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기에 삶의 목표와 가치가 달라졌으며 그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져 남을 해치고 자기의 안일을 볼보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 하였기에 결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치안관리처벌법》에 의한 공안기관의 처벌과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에 의한 인민법원의 판결를 면치못 하게 되였다. 우리 다 함께 하는 세상에서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여 서로 도우며 다 같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을 느끼면서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관이며 그에 따른 행복관이며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흑룡강신문 2020년 7월 17일
177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댓글:  조회:3502  추천:2  2020-07-27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방송일시 기획 진행 출연 제작 2020년 7월 26일 리은파 서태문 주청룡 원미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프로진행을 맡은 서태문입니다. 표준어는 인민대중의 오랜 언어실천을 통해 다듬어지고 세련된 규범적인 언어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한 개 국가의 서울을 중심으로 표준어가 형성되는데 이를테면 한어는 북경어음을 표준으로 보통말 즉 표준어를 정했습니다. 표준어는 신문, 방송, 출판, 교육 등 의식형태령역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사범부문에서 두루 쓰이는 공용어입니다. 한마디로 교제의 수단으로서 표준어를 잘 알고 정확히 사용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의 표징의 하나이며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실천하는 경로이기도 합니다. 한편 방언을 많이 장악하고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우리 생활을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며 특히 문학예술작품에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선”을 가미해 이채를 돋구어 줍니다. 하지만 최근 년간 언어사용에서 보면 각종 원인으로 우리 말 즉 중국조선어표준어는 많이 흔들리고 있으며 방언을 “비속어”로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발굴, 연구,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있는 추세입니다. 이는 참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M- 오늘 “공감 40분”에서는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이같은 화제로 연변에서의 조선어 표준어 사용실태를 집중 점검해보고 방언사용이 조선족문화사 특히 언어생활에서의 중요성데 대해 심층 담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께서 나와계십니다. 물음1: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수십년간 교원, 특약기자 등 우리 말 관련 사업에 종사하면서 언어규범화에 왼심을 쓴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지금도 신문, 방송을 통해 꾸준히 문장을 발표하고 있던데요! 먼저 표준어의 정의와 중요성에 대해 말씀주시겠습니까? (신문, 방송, 출판, 교육 및 일상생활 등 )   대답: 예, 표준어란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으로 정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여러 방언 중에서 사용인구가 많고 가장 영향력이 크고 보급이 쉬운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그 나라의 공영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준어의 중요성을 놓고 말한다면 서로 자지방의 방언을 쓴다면 부동한 지방 사람들과 사이에 의사소통에서 아주 불편하지요. 서로 상대방에서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아 듣지 못하니깐요. 더구나 우리 나라는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따라서 방언도 많지요. 그렇다하여 관영방송국에서 방송할 때에 각 지방의 방언으로 다 방송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나라의 언어 통일을 위한 표준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제작한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화면 아래부분에 자막을 넣습니다. 왜서 자막을 넣겠습니까? 그 리유는 영화에서의 배음은 표준어인데 표준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 못 듣지요. 그런데 표준어든 방언이든 문자는 표기는 한가지이지요. 그래서 자막을 넣으면 표준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래 자막을 보고 그 말이 무슨 뜬인가를 알 수 있지요. 이렇게 우리 중국에서 주류민족이 문자는 통일이 되였지만 그 문자를 각 지방마다 자지방의 방언으로 읽다니 언어가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중화민국교육부에서 1923년과 1932년, 두번에 걸쳐 중국관방언어의 표준을 내왔고 새중국이 탄생하여 1953년에 하북성 승덕시 란평현(滦平县)을 보통화 표준음의 주요한 채집지로 하여 언어표준을 정한다음 1955년부터 전국에 표준어를 보급하기 시작하였는데 각 지방의 방언에서도 문자는 표준어와 같이 통일적으로 한자를 쓰는데 서로 다르게 읽으니 통일적인 발음표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58년에 통일적인 발음표기로 될 수 있는 로마자 한어병음표기법을 내와 한자의 표준발음을 보급시켰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한문으로 된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모를 글자를 자전으로 찾는데 한자옆에 표기된 병음을 보고 어떻게 읽는가를 알지요. 조선반도에서도 각 도마다 기본상 방언이 있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내오고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펴내면서 약 9,000개의 단어를 표준어로 정해 공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반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갈라지다니 남에서는 서울말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가공하고 규범화 하여 표준어로 하고 북에서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가공하고 규범화 하여 표준어로 하였습니다.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규범화사업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되였으나 정부차원에서 계획적이고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국무원 [1975] 49호 문건정신에 따라 1977년도에 동북3성 조선어문사업 협의소조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여 조선어문사업일군을 조직하여 1985년에 처음으로 조선말 표준발음법, 조선말 맞춤법, 조선말 띄여쓰기, 조선말 문장부호법 등 조선말 ‘4칙’으로 되는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사회적 속성을 띤 언어문자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96년에는 1985년에 출판한 첫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수정하고 보충하여 두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으며 2007년에 또 세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어의 실정을 놓고 보면 2007년에 《조선말규범집》이 나와서부터 2016년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적지 않은 언어변화들이 생기였고 언어전산화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어의 맞춤법, 띄여쓰기 등에 대한 과학성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지금의 언어실태에 비추어 조선반도와의 공동성분을 늘이며 언어규범원리 즉 ‘과학성, 련속성, 점진성, 대중성을 골고루 돌보는 원칙’에 따라 2016년에는 2007년의 《조선말규범집》을 바탕으로 하여 부분적 내용들을 수정, 보충하여 네번째로 되는 《조선말규범집》을 내왔습니다. 그러니 1985년에 첫 《조선말규범집》이 나와서 2016년까지 10년에 한번씩 먼저번의 규범집을 수정, 보충하여 네번째로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질문2: 중국조선족은 천입민족입니다. 그래서 연변은 력사적으로 함경도에서 건너온 이민들이 많습니다. 또 각종 원인으로 평양말을 기준으로 연변조선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확실히 그러했습니까? 대답: 예, 력사적으로 본다면 1860 년대에 조선반도 지역에 련속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히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몰래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청나라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보면 두만강 건너면 바로 함경북도가 아니고 뭡니까? 그러니 함경북도 농민들이 처음메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은 것이 바로 지금의 연변땅이지요. 우리의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에 함경북도의 언어, 민속을 그대로 가지고 오다니 지금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함경도 방언을 많이 쓰고 풍속습관도 그대로이지요. 그때로부터 연변의 력사와 문화의 밑바탕에는 함경도방언과 풍속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조선어가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게 된 것은 제가 알기로는 1963년 6월에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최용건동지가 당정대표단을 거느리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은래총리의 안내로 장춘에 오셨는데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최채를 만난 자리에서 최용건동지가 당시 중공중앙간행물인 조선문으로 번역된 잡지를 례로 들며 “잡지의 글을 20~30% 정도는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때 중국조선어는 한어문을 직역하여 쓰는 경향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례를 들면 사회에서 자기의 로동으로 물질문화적재부를 창조하는 사람, 즉 한어에서 말하는 ‘工人’을 조선에서는 ‘로동자’라고 하지만 중국조선어에서는 ‘공인’이라 하였고, 곡식 가루를 반죽하여 발효시켜서 부풀게 해서 찌거나 구워만든 음식, 즉 한어에서 말하는 ‘面包’를 조선에서는 ‘빵’이라고 하지만 중국조선어에서는 ‘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최용건동지가 “잡지의 글을 20~30% 정도는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겠지요. 최용건 위원장의 이 말씀은 주은래 총리의 중시를 불러일으켜 주덕해, 최채 등 동지들더러 이 문제에 대해 잘 연구하여 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해당부문에서 주은래총리의 이 지시를 받들고 토론연구하여 중국조선어가 평양을 따라배우는 규범화 방안을 작성하여 중앙에 올려 보냈는데 그해 주은래총리께서는 “중국의 조선말은 평양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저도 주총리의 이 지시에 대하여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하나는 서방흥교수의 에는 “朝鮮文有三種標準, 平壤, 漢城, 延邊, 平壤標準應該作爲典型的標準, 因爲我們朝鮮同志, 朝鮮人民都懂, 應該按照這個標準來說話, 寫文章”。 이 지시의 기본 내용:《조선문은 평양, 서울, 연변 3종의 표준이 있다. 반드시 평양표준을 전형적인 표준으로 해야한다. 왜냐 하면 우리 조선족동지들과 조선족인민들이 모두 리해를 하기때문이다. 반드시 이 표준대로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라고 하였고 그다음 에서 찾아보았는데 여기에 (원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 소장 김병선 언어학박사, 최창범, 리철억 등 3명이 쓴 글에는 “依我看来,现在的朝鲜语有三种标准,即有平壤标准、首尔标准和延边标准。我们应该以平壤的标准才是。因为跟我们文化交流的朝鲜人民都能看明白才对。”(중국조선족백년실록 제8권 288페지)라고 씌여 있는데 주총리의 이 지시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내가 보건대 지금의 조선어는 세가지가 표준이 있다. 즉 평양표준, 서울표준과 연변표준이 있다. 우리는 평양표준을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우리와 문화교류를 하는 조선인민들이 모두 보고 알도록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글에서 보면 그 기본내용이 다 평양표준, 서울표준과 연변표준이 있는데 평양표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조선어는 '평양기준'의 방향으로 나갔으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평양말과 똑 같지는 않습니다. 그 원인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생활속에서 중국이란 특정된 언어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질문3: 다 알고계시겠습니다만 어떤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표준어가 있고 방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는 땅이 넓어 보통말인 북경말이 있는 외에 광동어를 비롯하여 많은 방언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왜 서 표준어가 중요한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주시겠습니까? 대답: 예, 우리 나라는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따라서 방언도 많지요. 저는 언어학자가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깊이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크게는 북방언어와 남방언어로 나뉘여 진다고 봅니다. 북방언어권에서는 권설음(卷舌音)이 있지만 남방언어권에서는 권설음이 없이 모두 평설음(平舌音)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례를 들면 북방어에서는 권설음으로 혀를 구부려 zh, ch, sh, r의 발음이 있지만 남방어에서는 평설음으로 혀를 펴는 z, c, s 로 발음을 하고 권설음의 zh, ch, sh, r의 발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해에 가면 수자 4와 10의 발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표준어에서는 4는 ‘si’로, 10은 ‘shi’로 구분되지만 상해말에서는 권설음이 없이 모두 ‘si’로 발음합니다. 그래서 수자 4와 10이 구별이 잘 안되여 손시늉을 할 때가 많습니다. 4는 손가락을 4개를 펴면서 ‘si’라고 말하고 10은 손가락을 열개를 펴면서 ‘si’라고 말하지요. 다만 성조(声调)에서는 4는 4성, 10은 2성으로 구별이 있지요. 같은 상해사람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잘 되겠지만 북방사람들과는 이런 권설음과 평설음으로 하여 의사소통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 향항, 오문 그리고 동남아 여러 나라를 유람하다 보면 중국 관광객을 대상한 그곳의 가이들이 모두 복건이나 광동사람들의 후예들인데 수자 20을 말할 때에 원래 한어 표준어로는 ‘er shi’로 발음하여야 맞는데 그 사람들은 ‘r’의 발음이 없어 혀를 구부리지 못해 ‘e si’로 발음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나라와 지구를 유람하면서 가이드들이 ‘e si’, ‘e si’하니 저 무슨 말을 저렇게 하는가고 알아 듣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 무슨 굶어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고 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들어보니 아, 저 사람들은 ‘r’의 발음이 없으니 수자 20을 말한다는 것이 저렇게 ‘e si’라고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례를 들면 우리 나라의 특별행정구의 하나인 향항을 문자표기에서는 모두 한자로 ‘香港’으로 표기하지만 말로는 표준어에서는 ‘xiang gang’이라고 발음하고 광동어로는 ‘hong kong’이라고 발음하며 시간을 말하는 한시, 두시에서 1시를 문자로는 모두 한자로 ‘一点’이라고 표기하고 말로는 표준어에서는 ‘yi dian’이라고 발음하고 상해말로는 ‘yi di’로 발음하며 우리라는 뜻을 표준어로는 ‘wo men’이라고 발음하지만 상해말로는 ‘a la’라고 발음하며 문자로는 다 한자로 ‘我们’이라고 표기 합니다. 그들이라는 뜻을 표준어로는 ‘ta men’이라고 발음하고 상해말로는 ‘i la’라고 발음하지만 문자로는 한자로 ‘他们’ 라고 표기하며 학교란 뜻을 표준어로는 ‘xue xiao’라고 발음하지만 상해말로는 ‘o dang’으로 발음하는데 문자로는 한자로 ‘学校’로 표기합니다. 이렇게 지방마다 자기의 방언을 쓴다면 의사소통이 안되지만 문자로는 통일이 됩니다. 그래서 1958년에 통일적인 발음표기로 될 수 있는 로마자 한어병음표기법을 내와 한자의 표준발음을 보급시켰던 것입니다. 같은 북방어라도 동북방언 서북방언, 산동방언 등등 여러 방언으로 나뉘여 지고 같은 남방어라도 호남방언 사천방언 광동방언 등등 여러 방언으로 나뉘어 지지요. 지난세기 80년대에 제가 상해에 갔는데 제가 든 초대소에 산동에서 한 젊은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해에 병보이려 왔고 호남에서 또 한 젊은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보이려 왔는데 두 늙은이 사이에 서로 자지방의 방언을 하다니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어간에서 통역을 서서야 겨우 의사소통이 되였습니다. 자식들은 그래도 학교에서 표준어 공부를 했으니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요. 그러나 다 같은 한족이라도 표준어 공부를 못한 서로 다른 지방의 늙은이들 사이에는 전혀 의사소통이 안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상해에서 병원에 가보면 로인환자와 의사사이에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로인환자는 상해사람이고 의사는 다른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병원에 분배 받아왔기에 상해 말을 모르니 표준어를 모르는 로인환자와 상해말을 모르는 의사사이에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식들이 통역을 서서 환자와 의사사이 말 뜻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그때 제가 느낀 것이 한 나라에서 언어통일을 위해 반드시 표준어를 제정하고 전반 국민들에게 표준어를 보급해야 겠다는 것을 심심이 느꼈습니다.   질문4: 일상생활에서 보면 규범화된 언어 즉 표준어를 사용해야 할 장소에서 외래어, 한자말, 사투리를 람용하는 경우를 가끔 볼수 있는데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대답: 예, 방언을 존중한다하여 공식적 장소에서 방언으로 말하여야 한단 말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회의장소거나 학습장소에서 외래어를 쓴다거나 한어를 섞어 말한다거나 사투리로 말한다면 사실은 스스로 자신의 품위를 낮추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식적인 장소에서 사투리를 많이 쓴다면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 너무 낮아 보이고 공식적인 장소에서 외래어를 많이 쓰거나 전부 조선족으로 모인 장소에서 한어로 말 한다면 그 본인은 외래어도 많이 알고 한어도 잘 한다는 것으로 자기의 지식자랑으로 되겠지만 청중들은 그 사람을 높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례를 들어 공식적인 회의 장소거나 학습장소에서 ‘안해’를 ‘와이프’, ‘열쇠’를 ‘키’, ‘흰색’을 ‘화이트’라고 말한다거나 ‘비자루’를 ‘비강대’, ‘무우’를 ‘무끼’, ‘추워서’를 ‘치바서’, ‘물고기’를 ‘물괴기’라고 한다거나 전부 조선족들만 모이고 한어를 잘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인장소에서 조선말을 익숙히 잘 알면서도 한어로 말한다면 스스로 자기의 품위를 낮추고 청중들의 눈에는 거슬러 보일 것입니다.   질문5: 이와 같이 표준어는 소통, 교제, 정보전달의 도구로서 언어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아울러 한 사람의 문화정도와 수양 그리고 품위를 보여주는데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일전에 연변일보에 방언에 관한 칼럼을 발표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방언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 표준어는 우월(優越)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표준어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임을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합니다. 표준어는 주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습득되기 때문에, 표준어를 바르게 쓸 줄 안다는 것은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표준어를 쓰는 사람은 사투리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배운 사람, 나아가 사회적으로 더 우위(優位)에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표준어의 우월의 기능의 하나입니다. 언어는 민족에 따라 다르고 같은 민족이라도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을 쓰고 있습니다. 방언은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므로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주로는 사용인구가 많은 어느 한 지방의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있습니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서울말을, 조선에서는 평양말을 가공,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했습니다. 중국조선어에서는 과거 많이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했던 토대에서 국제적으로 공감하고 우리의 특색을 살린 말을 중국조선어로 규범화하고있습니다. 표준어는 규범화하여 한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에 표준어 사용을 제창하고 보급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방언은 서로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는 의사 소통이 잘 되고 같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표준어보다 더 큰 정다움과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되기에 같은 지방의 사람들은 주로 자기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데 습관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일종 우리 민족의 어느 한 지방의 언어이기에 자지방 사람들끼리 쓰는 방언을 무식하다고 보지 말고 존중해야 합니다.   물음 6: 방언을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극종목에 적당히 사용하면 작품의 감칠맛을 살리고 완성도를 높일수 있지 않습니까? 례를 들어 설명주시겠습니까? 대답: 예, 지금 연변에서 제작한 영화거나 연변소품들을 보면 표준어를 많이 쓰지만 해학적인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쓰거나 한어를 섞어 씁니다. 연변의 영화나 소품은 주로 연변의 조선족관중을 대상하였기에 해학적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사용하여야 연변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구수한 이밥에 토장국맛 나게 볼 수 있지만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관중들에게는 흥미를 돋구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한 감을 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나 소품은 당지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당지의 민족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릴 수 있지요, 연변사람들은 일상생활가운데서 함경도방언을 쓰고 또 중국에서 한족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한어를 섞어 말하는데 습관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변사람들의 언어생활실태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소품에서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사람들의 생활실태를 떠났기에 자연히 어색한 감을 주지요. 연변소품 에서 할머니가 하는 말은 전형적인 6진방언이지요. 이 소품을 보면 늙은 두 량주사이에도 서로 다른 방언을 쓴다는 것으로 표현 되였고 6진방언을 모르는 사람들도 아, 연변에는 이런 방언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전형적인 6진방언을 써 왔습니다. 저는 이 소품을 보면서 옛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 오르면서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또 연변소품 에서도 한족과 조선족사에에 서로 한어와 조선말을 섞어 쓰고 있는데 이것은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이 다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언어습관이고 연변의 언어생활 실태를 반영한것이기에 연변관중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소설에서 당지 사람들이 당지의 방언을 쓰지 않고 모든 대화를 표준말로 한다면 당지의 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전임주석과 사학자 허성운 선생도 거의 사라져가는 연변방언을 수집, 발굴하고 있는데 이런 방언을 써왔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지면에서 이런 방언들을 보면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고 있습니다. 방언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은 표준어를 풍부히 하는 원천의 하나로 되고 언어발달사, 민족사, 민속사, 문물사 등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 있습니다.   소질문: 방언과 사투리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면서요? 대답: 예, 큰 의미에서 말하면 방언과 사투리를 동의어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방언이라 할 때에는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자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로서 두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사투리는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란 한가지 의미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라면 방언은 '사용 지역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인 사투리 뿐만 아니라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까지 포함되는 더 넓은 의미의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안에는 사투리도 포함 돼 있다고 리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사회계층에 따라 분화되였다는 말은 예전에는 량반계층에서 쓰는 말과 서민계층에서 쓰는 말이 달랐지요.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를 많이 쓰고 서민계층에서는 전부 우리말의 고유어를 썼지요. 례하면 당콩모양처럼 생기고 체내에서 피를 려과하여 오줌을 생산해 내는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신장’이라고 하고 서민계층에서는 원 우리말의 고유어로‘콩팥’이라고 하였으며 주기적인 수축에 의하여 혈액을 몸 전체로 보내는 순환 계통의 중심적인 근육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 ‘심장’이라고 하였고 서민계층에서는 우리말의 고유어로 ‘염통’이라고 하였으며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작용을 하는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 ‘페’라 하고 서민계층에서는 우리말이 고유어로 ‘허파’라고 했지요. 이렇게 같은 말이라도 량반계층에서 하는 말과 서민계층에서 하는 말이 달랐지요. 옛날 생활이 곤난한 서민계층에서는 한자어를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 우리말 밖에 모르지만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공부를 했다는 자랑거리로 한자어로 말하였고 더구나 “량반과 쌍놈이 다 같은 말을 하면 안된다. 우리들은 너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쌍놈들이 우리 량반들의 말을 알아들으면 안된다.”하면서 한자어로 많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물음 7: 사람마다 특기가 따로 있고 물건도 용도가 각이한만큼 표준어와 방언도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사용하면 세상을 보다 립체적으로 보여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표준어와 방언이 어떻게 화음을 이루게 하면서 우리 생활에 이채를 돋굴수 있다고 보십니까? 대답: 예, 저는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표준어나 방언은 다 우리 민족의 언어이고 여러가지 방언 가운데서 어느 방언을 표준어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방언 자체에는 ‘고상한’ 말과 ‘저속한’말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준어도 우점이 있고 방에도 우점이 있다고 봅니다. 표준어는 가공, 규범화 하였기에 세련 된 말이고 사용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언어교류를 원화하게 할 수 있고 방언은 비록 사용지역과 사용인구가 적고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과는 의사 소통도 불편하고 정다운 느낌도 그만큼 덜 가지게 되고 서로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이질감(異質感)을 불러일으키는 등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방언은 구체적인 생활세태를 보여주기에 일상생활에서 표준어휘에는 아주 원할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가 없지만 방언 가운데는 적절한 단어들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례를 들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주정을 피우면서 가장 기물을 두들겨 팬다던가, 부부간이 싸움질하면서 가장기물을 두들겨 패는 등 이런 행위를 표준어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지만 우리 연변방언에서는 ‘가장치기’란 적절한 단어가 있고, 원래는 여위여서 보기가 실을 정도던 것이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는 적절한 표현이 표준어에는 없지만 연변방언에는 ‘푸들다’란 적절한 단어가 있고,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묵은 장에 새로 콩을 삶아 이기여 만든 장을 썩어 아주 맛있게 먹는데 이런 장을 표준어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지만 우리 연변방언에는 ‘오뉘장’란 적절한 단어가 있지요. 그래서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2016년도에 새로 편찬한 《조선말규범집》에는 대응되는 표준어휘가 없는 방언 즉 ‘가장치기’, ‘푸들다’, ‘오뉘장’ 등 연변방언 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켜 표준어를 더욱 풍부히 하였습니다. 표준어라고 하여 모든 우리 겨레들이 다 접수되는 것도 아니닙니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하여 리씨를 이씨라던가 류씨를 유씨라던가 림씨를 임씨라고 하는‘두음법칙’, 수도물을 수돗물, 바다가를 바닷가, 이사짐을 이삿짐이라고 하는 ‘사이시옷법칙’, 강원도(姜元涛)를 강 위안 타오로,   원송호(元松浩)를 위안 송 하오로, 고원호(高元镐)가오 위안 가오로, 룡정을 룽징, 연길을 옌지, 연변을 옌벤이라고 쓰는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한 표기법’, 게다가 외래어 혼용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페단이 많고 우리 말의 발음력을 퇴화시키고 우리 말의 순결도를 낮추는 등등 원인으로 하여 많은 중국조선족들에게는 접수되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언도 존중해야 합니다. 제주도의 어떤 방언들은 표준말과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례하면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 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쓰이였으며 어떤 말들은 제주도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였는데 표준어에서의 쌍스러운 말로 되였습니다. 혹시 제도도방언이 쌍스럽고 비속하게 느껴져도 그 고장의 풍속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저는 방언도 우리 민족의 말 가운데의 하나이므로 비속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고 천대를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언을 존중한다 하여 방언을 보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방언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닙니다. 다만 방언도 우리 민족의 일종 문화이고 당지의 우리 민족들이 쓰는 말이므로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천대하지 말고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방언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킨다면 우리의 말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이같은 화제로 얘기나눠보았습니다.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주청룡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 맺음말: 언어는 민족구성원간 교제와 소통의 도구이고 수단일뿐만아니라 국제적교류와 합작의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같은 언어라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쓸수 있는 공용어 즉 표준어가 없다면 마치 신호등 없는 십자자길과 같이 혼란할 것이며 원활한 소통과 교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기에 각국에서는 언어규범화, 표준화, 정보화에 품을 넣고있으며 이 방면의 국제적교류를 강화하고있습니다. 아울러 방언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응고된 지역말로서 당지 특색과 풍토인정을 보여주며 문학예술창작과 관광코스개발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목전 언어가 점점 글로벌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조선어 표준어와 방언을 정확히 알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후대들에게 우리 말을 바르게 곱게 전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리은파, 제작에 원미란이였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M-      
176    방언은 발굴하고 보존해야 댓글:  조회:3496  추천:0  2020-07-05
방언은 발굴하고 보존해야  주청룡   언어는 민족에 따라 다르고 같은 민족이라도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을 쓰고 있다. 방언은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므로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주로는 사용인구가 많은 어느 한 지방의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있다.  례하면 한국은 서울방언, 조선은 평양방언을 가공,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많이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조선어로 규범화하였다. 표준어는 규범화하여 한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에 표준어 사용을 제창하고 보급하여야 한다. 하지만 같은 지방의 사람들은 주로 자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데 습관되여왔다. 그러므로 방언도 일종 우리 민족의 어느 한 지방의 언어이기에 자지방 사람들끼리 쓰는 방언을 무식하다고 보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지금 연변에서 제작한 영화거나 연변소품들을 보면 표준어를 많이 쓰지만 해학적인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쓰거나 한어를 섞어 쓴다.  연변의 영화나 소품은 주로 연변의 조선족관중을 대상하였기에 해학적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사용하여야 연변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구수한 이밥에 토장국맛 나게 볼 수 있지만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관중들에게는 흥미를 돋구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한 감을 주게 될 것이다. 만약 소설에서 당지 사람들이 당지의 방언을 쓰지 않고 모든 대화를 표준말로 한다면 당지의 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리지 못할 것이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전임 주석과 사학자 허성운 선생도 거의 사라져가는 연변방언을 수집, 발굴하고 있는데 이런 방언을 써왔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지면에서 이런 방언들을 보면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고 있다.  방언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은 표준어를 풍부히 하는 원천의 하나로 되고 언어발달사, 민족사, 민속사, 문물사 등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표준어나 방언은 다 우리 민족의  언어이고 여러가지 방언 가운데서 어느 방언을 표준어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방언 자체에는 ‘고상한’ 말과 ‘저속한’말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에서 표준어휘에는 아주 원할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가 없지만 방언 가운데는 있는 것도 있다. 하여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새로 편찬한 《조선말규범집》에는 대응되는 표준어휘가 없는 ‘가장치기’, ‘푸들다’, ‘오뉘장’ 등 연변방언 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켜 표준어를 더욱 풍부히 하였다. 표준어라고 하여 모든 우리 겨레들이 다 접수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하여 ‘두음법칙’, ‘사이시옷법칙’을 쓰고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한 표기법’, 게다가 외래어 혼용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페단이 많고 우리 말의 발음력을 퇴화시키고 우리 말의 순결도를 낮추는 등등 원인으로 하여 많은 중국조선족들에게는 접수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방언도 존중해야 한다. 필자가 2008년 제주도유람을 가보니 제주도의 어떤방언들은 표준말과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었다. 례하면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 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가까이 오십시오.’는 ‘좃끝에 옵소.’로 쓰이였다. 필자도 그때에 제주도방언이 쌍스럽고 비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듬해 다시 제주도에 갔을 때 관광안내원과 마지막에 갈라지면서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란 뜻을 제주도방언으로 ‘오늘 폭삭 속았수다.’라고 작별인사를 하자 관광안내원이 ‘별말씀은요.’란 뜻으로 ‘소구멍 말멍했수다.’라고 하며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필자를 포옹하면서  어쩌면 중국조선족이 우리 말을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너무도 감격해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필자는 방언도 우리 민족의 말 가운데의 하나이므로 비속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고 천대를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언을 존중한다 하여 방언을 보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방언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방언도 우리 민족의 일종 문화이고 당지의 우리 민족들이 쓰는 말이므로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천대하지 말고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방언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킨다면 우리의 말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변일보 2020년 7월 2일
175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댓글:  조회:3609  추천:0  2020-05-06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ㅡ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방송일시: 2020년 5월 4일  기획: 리은파        사회: 서태문        출연: 주청룡        제작: 원미란         --- 개 시 곡 --- 사회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프로진행을 맡은 서태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전인 1919년 5월 4일, 북경의 청년학생 5,000여명이 천안문앞에 모여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벌였습니다. 운동은 6월 3일 후 주력이 학생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바뀌였으며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에 파급되였습니다. 제1차세계대전기간 유럽렬강들이 동방을 돌볼새 없는 사이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했으며 중국의 주권을 엄중히 해쳤습니다. 중국인민의 반일정서는 날로 고조되였으며 1919년 이른바 “빠리평화회의”에서 무능한 정부 외교실패를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위대한 “5.4운동”이 촉발되였습니다.  “5.4운동”은 중국공산당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운동 발생 2년후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고고성을 울렸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들을 령도하여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라는 세 개의 큰산을 뒤엎는 위대한 장도에 올랐습니다. “5.4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구민주주의 혁명과 신민주의 혁명의 분수령으로 되였으며 새중국에서는 매년 5월 4일을 “청년절”로 정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M-   오늘 “공감 40분”에서는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한 지식인의 체험과 감수로부터 “5.4운동”이 중국인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 알아보고 “5.4정신” 발양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관계에 대해 심층 담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께서 나와계십니다. 사회자: 어서 오십시오! 저희 “공감 40분”에 나오 신 것을 환영합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5.4애국운동”은 력사적배경과 의의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 순서로 넘은 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히 설명주시겠습니까? 주청룡: 예, 오늘 방송국에서 우리 나라《5.4》청년절을 맞으며 아주 좋은 프로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금년은 《5.4》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해 4월 30일에 북경인민대회당에서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에서 습근평총서기는 중요한 연설을 발표하였으며 새시대 중국청년들에게   여섯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그 여섯가지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원대한 리상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위대한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세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시대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네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과감히 련마하고 분투해야 한다. 다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탄탄한 실력을 익혀야 한다. 여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품성을 닦아야 한다. 저도 작년에 《5.4》운도 100주년을 맞으면서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란 칼럼을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100년전의 일을 말하는가 하는데 5.4운동은 이미 100 년이 지났지만 100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 뿐이다. 《5.4 》운동 력사배경: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 국가들의 실패로써 끝났습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전승국 방면의 영국,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 일본 등 제국주의는 프랑스 빠리에서 소위 《평화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실제상에서 이는 제국주의 렬강들의 장물분배회의였습니다. 당시에 중국도 《전승국》의 하나로서 대표를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대표는 전국인민들의 압력하에 평화회의에 향하여 중국에서의 렬강들의 특권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또 일본제국주의가 원세개와 맺은 21개 조항의 불평등 조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진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대전때에 일본에 빼앗긴  산동에 있어서의 독일이 차지하였던 각종 권리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영, 불 제국주의의 조정과 북경군벌정부와 친일파이며 대반역자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등의 부패무능으로 말미암아 중국인민의 정의적 요구는 대회에서 부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회에서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접수하고 정식으로 산동에서 차지하고 있던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였습니다. 빠리평화회의에서 제국주의가 공공연하게 중국의 리익을 침범한 소식이 전파되자 중국인민들의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이래서 1919년 5월 4일에 북경의 5,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밖으로는 국권을 찾고 안으로는 매국적을 징벌하자!”, “21개 조약을 페지하라!”,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말라”는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친일파이며 매국역적인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를 처벌할 것을 일치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대와 경찰을 풀어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탄압하고 학생 30여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북경의 항생들은 총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전국에 통전을 내여 항의를 표시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5월 6일에는 천진, 상해, 장사, 광주 등지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북경학생들의 투쟁을 성원하였다. 6월3일과 4일에는 북양군벌정부는 북경의 학생 1,000여명을  체포하자 운동의 주력도 학생군중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들에로 파급되였습니다. 이러니 북양군벌정부는 할 수 없이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고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세 매국역적을 철직시켰으며 회의 마지막날인 6월 28일에는 《빠리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습니다. 그리하 반제, 반봉건적 투쟁은 초보적인 승리를 달성하였습니다. 《5.4 》운동의 력사적 의의: 《5.4 》운동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동시에 본건주의를 반대하는 위대한 애국운동입니다. 모택동동지는 《5.4 》운동의 특출한 력사적 의의에 대하여 “그것이 신해혁명으로서는 가지지 못하였던 그러한 자태로서 나타나게 되였다. 즉 반제국주의 철저성, 비타협성 및 반봉건주의의 철저성, 비타협성에 있다.”고 말씀하였으며 습근평총서기는 지난해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5.4운동의 력사적의의에 대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혁명성, 구국강국의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성, 여러 민족 각계 군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광범성으로 중국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를 추진했으며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위해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를 하고 새 혁명력량, 혁명문화, 혁명투쟁이 력사무대에 오르는 데 조건을 창조했는 바 중국 구민주주의혁명이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되여 근대이래 중화민족이 민족독립과 발전진보를 추구하는 력사과정에서 리정표적 의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5.4운동이 폭발하여 2년만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하였고 30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지난해에는 5.4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사회자: 선생님께서는 다년간 학교에서 책임일군으로 계시다가 은퇴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또 사업관계로 “5.4운동”이나 “1.29”행사를 많이 접하고 거기에 깃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5.4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처음 기억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주청룡: 예, 《5.4 》운동에 대해서는 제가 초중을 다닐때부터 학교에서 해마다 《5.4》운동기념활동를 하였으니  초중시절부터 《5.4운동》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게 되였지요. 그리고 여기에 《12.9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으니 《12.9 》운동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 합시다. 《12.9 》운동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규모가 큰 한차례의 학생운동입니다. 1935년 6월 국민당정부가 일본의 중국 화북에 대한 통치권요구를 접수한 《화북사변》이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 즉 《8.1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 인민들에게 일떠나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935년 12월 9일에 북평의 학생 5,6천여 명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서 시위행진을 하면서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게 외적에 대항하자!”, “화북자치를 반대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높이 웨쳤습니다. (제가 앞에서 《5.4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경이라 하고 《12.9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평이라고 말했는데 북경이나 북평은 다 지금의 수도 북경을 말하는데 원래는 지금 북경의 이름이 북평이였습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주태가 수도를 남경으로부터 북평으로 옮기면서 북경이라고 불렀고 불벌전쟁후 1928년 국민정부가 수도를 북경으로부터 남경으로 옮기면서 북경이 다시 북평으로 되였으며 1949년에 새중국이 탄생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도를 북평으로 정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북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국민당반동파들은  많은  군대와 경찰들을 풀어 학생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00여명이 부상당하고 30여명이 체포되였습니다. 북평학생들의 영용한 투쟁은 재빨리 전국 인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았습니다. 상해 남경, 항주, 무한, 광주, 서안, 천진, 성도 등 많은 도시들에서 선후하여 기세드높은 시위행진이 진행되였습니다. 북평과 천진의 학생들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남하확대선전단》을 조직하여 더욱 광범위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북평, 천진으로 돌아온후 《중화민족해방선봉대》를 조직해가지고 더욱 구국운동의 새 고조를일으켰습니다. 저도 교육사업을 하면서 젊었을 때에는 학교의 공천단 사업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5.4청년절이거나 12.9운동기념일이면 학생들을 조직하여 기념활동을 하였지요. 5.4청년절을 맞으면서는 해마다 전교적으로 입단의식을 하였는에 입단하는 학생들은 공청단휘장을 달고 붉은 주먹을 들고 단기앞에서 선서를 할때에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격동되고 기뻣지요. 그리고 입단을 요구하는 적극분자 학생들은 자기도 저 동학들을 따라 배워 빨리 입단을 쟁취하겠다는 심정이였지요. 12.9운동기념일을 맞으면서는 문예경연대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활동을 조직하게 되면 학생들이 열정이 매우 높습니다. 저도 반주임공작을 하면서 제가 맡은 반 학생간부들에게 기념행사 포치를 하면 그들이 자체로 공연절목을 짭니다. 그리고  1등을 쟁취하겠다고 열심히 련습을 합니다. 이리하여 몇번 전교 1등을 쟁취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기뻐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반주임으로서 저도 학생들과 같이 기뻐 춤도 추고 노래도 하군 하였습니다.     사회자: “5.4정신”하면 “애국, 진보, 민주, 과학”으로 간단히 귀납할수 있지만 그 표현과 내포는 무궁무진하며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혁명전쟁년대에는 새중국의 창건을 위해 생명을 바친 혁명선렬들이야말로 진정한 “5.4정신”의 구현자들이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혁명선렬을 가장 숭경하고 그들의 어떤 점을 따라배우고 본보기로 삼았습니까? 주청룡: 토지혁명전쟁시,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에 많은 혁명렬사들과 전투영웅들이 나왔지요.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학교를 다닐때에 한어교과서에 《동존서》가 있었고 《소년아동보》에도 동존서사적이 실렸고 또 《동존서》란 책도 나왔습니다.     동존서는 1945년에 팔로군에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48년 5월 26일에 하북성의 륭화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그가 소속된 련에 적의 토치까를 폭파하는 임무가 떨어졌습니다. 동존서는 폭파조 조장을 맏고 4채의 포루(炮楼)와 5개의 토치까를 폭파시켜 승리적으로 폭파임무를 완성하여 부대가 즉시 돌격을 시작할 때에 다리우의 음페된 토치까에서 맹렬히 불을 내쏘면서 아군의 전진을 가로 막았습니다. 이때 동존서는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련장에게 “나는 공산당원입니다. 저에게 저 폭파임주를 주십시오.” 라고 청원하였습니다. 련장이 그의 청원을 비준하자 그는 폭파약을 안고 토치까를 향해 기여가는 도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완강하게 견지하여 토치까 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폭파약을 놓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불을 내 뿜으면서 아군의 전진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을 보고 더는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그는 왼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겼습니다. 또치까는 폭파되고 아군의 전진의 길은 열어놓았지만 그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나이는 겨우 19살이였습니다. 부대당위에서는 그에게 《전투영웅》, 《모범공산당원》 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19살의 꽃나이에 새중국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은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공산주의 전사들에게서만 있을 수 있는 자아희생정신이라고 봅니다. 야! 생각만 하여도 너무나 경탄할 일이지요. 한 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길때 그에게는 오직 혁명을 위하여 내 이 한 몸을 바친다는 정신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소설 《붉은 바위에》에 나오는 허운봉, 강설금과 같은 혁명렬사들이지요. 그들은 적들의 그 가혹한 고문에 정신을 잃고 쓸어지면서도 굴하지 않고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영웅적 행동도 참으로 경탄할 일이지요. 손가락에 참대꼬챙이를 들이 꽂을 때 얼마나 참기 바빴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고수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놈들은 또 온 몸에 랭수를 퍼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또 다시 고문을 들이대며 이렇게 놈들은 이런 수단을 반복하면서 고문을 들이 댔지만 그들이 끝내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정신. 놈들은 그들의 입에서 조금한 비밀도 얻어내지 못하자 마지막에는 사형에 처하였지만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형장에서도 끝까지 놈들에게 굴하지 않고 《국제가》를 높이 부르고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만세”를 높이 부른는 혁명정신. 이들의 이런 투쟁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새중국을 맞이하였으며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양정우렬사는 적들의 포위속에서 일본놈들과 싸우가가1940년 2월 23일에 영용히 희생되였는데 일본놈들은 양정우가 2월 15일부터  자기들의 포위망에 들어 량식래원이 끊기였는데 2월 23일 희생될 때까지 8일동안 이 눈속에서 무었을 먹고 그렇게 완강히 싸웠는가고 너무도 의상하여 양정우의 배를 갈라보니 배안에는 채 소화되지 않은 나무껍질과 풀뿌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지민동지는 반역자의 밀고로 1935년 1월 29일에 국민당반동파들에게 체포되였는데 체포될 때에 국민당병사들이 방지민동지의 온 몸을 수색하였을 때 회중시계하나와 만년필 한대가 나왔을 뿐 돈은 이전한푼도 없었습니다. 놈들은 양정우동지나 방지민동지는 군대의 고위급 장령이니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그어떤 귀중한 물품이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러한 귀중한 물품들이 하나도 없었고 양정우동지에게는 배안에 나무껍질과 풀뿌리, 방지민동지에게는 회중시계와 만련필뿐이였습니다.  옥중에서 놈들은 방지민동지에게 백방으로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방지민동지는 견정불굴하게 “정의를 위하여 깨끗이 죽을망정, 너절하게 살지는 않는다” “혁명을 위해 죽지만  그 죽음은 가치 있고 영광스럽다.”라며 놈들과 완강하게 투쟁하여 공산당원의 절개를 보여 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는 감옥에 6개월 넘게 갇혀있는 동안 놈들이 그에게 자백서를 쓰라고 준 종이와 만년필로 《내가 혁명에 종사한 략술》, 《청빈》, 《사랑스러운 중국》, 《옥중실기》 등 10여편의 글을 써냄로서 공산당원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와 양정우동지의 일생은 민족의 해방, 인민의 행복을 위한 일생이였으며 공산주의 사업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한 일생이였습니다. 사회자: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인민의 생명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선뜻히 내놓은 영웅인물들이 매 력사시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2,3십대 젊은이들이였습니다! 선생님의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 있습니까?  주청룡: 예, 여기에서 구양해를 들수 있는데 1963년 11월 18일 이른 아침 부대에서 야영훈련을 하면서 철길역을 따라 행군을 하였는데 려객을 가득 실은 렬차가 기적을 울리며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잔등에 포를 실은 말이 놀라서 철길우에 뛰여 올랐습니다. 기차와 포를 실은 말이 마주 치려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구양해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철길에 올라 말을 있는 힘껏 밀어 냈습니다. 말을 철길에서 밀어내고 엄중한 사고는 피면하고 려객의 생명안전과 인민의 재산은 안전하게 지켜냈지만 구양해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왕걸을 들수 있는데 1965년 7월 14일 강소성 비현장루공사(邳县张楼公社)에 가서 민병훈련을 지도할 때에 이외로 폭파약이 폭발하려는 순간 왕걸은 12명의 민병과 무장부 간부의 생명안전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엎드려 목파약을 끌어 안고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도 23살이였습니다.  구양해와 왕걸은 뢰봉이 희생된다음 뢰봉정신을 이어받은 새시대의 첫영웅들이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나라와 집체를 위한 자아희생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1981년 일본에서 펼쳐진 제3차 녀자배구월드컵에서 중국녀자배구팀을 7전 7승의 성적으로 단연 우승을 따냈습니다. 그후 우리 나라 각 령역에서는 중국녀자배구팀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었으며 “녀자배구정신”이 지난 세기 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대명사로 됐습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완강히 분투하는 “녀자배구정신”은 “5.4정신”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녀자배구정신”이 “5.4정신”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까?  주청룡: 예, 현시대 청년들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 습근평총서기가 말씀 한바와 같이《당의 기대, 인민의 기대, 민족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며 이 위대한 시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운동원들이 나라를 대표하여 국제적 경기에서 상대방 나라 선수들과 겨루는 것은 총을 들고 맞다들어 싸우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금메달을 따올때까지는 피타는 노력이 들었지요.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세계급 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나라를 대표로 한 운동원으로서 당의 기대, 나라의 기대,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대와 결사적으로 싸워 조국의 영예를 위해 금메들을 따내는 것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중국 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이름이 나고 명성수가 되였지만 자만하지 않고 근본을 잊지 않고 자기의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의 로인들을 잊지 않고 고향의 후대양성사업에 관심을 돌려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20여 km의 아스팔트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 좋은 지방이름이 있는데.” 하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주정은 올해 《5.4》청년절을 맞아 제24회 중국청년 5.4메달 획득자 30명가운데 한명으로 입선되였는데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랑평이 중국 로녀자배구팀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주정은 신녀자배구팀의 선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정이는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으로서 그 간고한 훈련도 이겨내고 나라의 영예를 위하여 강팀들과 맏다들어 세계급배구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고향건설을 잊지 않은 정신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라고 봅니다. 사회자: 기원 2020년 신종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이 무한을 비롯해 우리 나라 대지를 덮쳤습니다. 중국은 전례없는 자연재해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습근평총서기를 총지휘로 하는 당중앙의 령도하에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전염병예방통제 총체전, 저격전을 벌였습니다. 최전선에는 항상 의료일군들이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는 특히 젊은 녀간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 어떠합니까?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진정한 시대의 본보기가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주청룡: 예, 붉은기가 나붓기고 격앙된 장엄한 《조국을 노래하자》 노래소리와 환영하러 나온 사회각계 군중들의 열정에 넘치는 환호소리 속에서 길림성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이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장백산공항에 내리는 장면을 텔레비죤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3월 24일에 25명, 28일에 4명 도합 29명의 연변의 무한지원 백의전사들도 있었다. 정말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습니다. 제가 지난해에 5.4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칼럼을 쓸때까지도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번 전염병에서 보면 평화시기라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이번에 호북지원 의무일군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지원을 간 것입니다.   당중앙의 호소와 성당위 성정부의 지시에 호응하여 우리 주에서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예방, 통제의 수요로 무한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게 되자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한의료지원에 나섰던 것입니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입원치료를 받다가 여러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오직 내 이 한 마음, 내 이 한몸을 당에 바치여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인민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는 자아희생정신의 표현이였습니다. 그들가운데는 2,3살 되는 애를 둔 애기엄마도 있었고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한의료지원팀으로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사업터에 나설 때에는 우선 방호복으로 전신무장을 하여야 했습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군사들이 쇠나 가죽으로 된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였다면 그들은 방호복이란 평화시기의 현대식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고 의료작업에 나섰습니다. 방호복을 착용한 다음부터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꼬박 쉴새없이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했습니다. 방호복을 입은 다음부터는 위생실도 갈 수 없기에 최소한 식사량을 줄이고 음료수와 기타 수분흡수도 줄여야 했습니다. 만약의 경우 고려해 영아처럼 기저귀도 차야 했습니다. 하루의 간고한 의료작업을 마치고 근무교대를 한 다음 번거로운 소독작업을 거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통기가 되지 않는 방호복 착용으로 하여 온몸이 땀벌창이 되고 방호용구의 압착으로 하여 얼굴에 패인 주름과 땀에 절어 몸, 얼굴, 손에는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것을 우리는 텔레비죤을 통하여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인민군중의 생명안전을 위해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태산보다 무거우며 전염병 발생상황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다.’는 습근평 총서기의 중요정신을 실천하고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용감히 싸워 승리하고 오늘 영광의 꽃다발을 안고 개선가를 부르며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변의 29명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우리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며 뢰봉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목전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향해 순항하고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정신”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것이며 그 외연과 내포가 날로 풍부해지면서 후대의 거울로 계승, 발양되고있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주청룡: 예,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본직사업을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사업을 하여야 만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 것이 아니며 습금평총서기가 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대로 하는 것이 바로 현시대에 5.4정신을 발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발전중에 있고 국제정세가 급격하고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리상신념을 견정히 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치여 19차 당대회 정신과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학습하고 터득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고 습근평총서기가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에 따라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얘기나눠보았습니다.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주청룡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   맺음말: “5.4운동”은 한부의 사시이고 력사극이고 교양악입니다. 그속에서 그리고 그후 수많은 지사들이 새중국창건을 위해 눈물겹고도 비장한 이야기들을 엮었습니다. 그중의 백미는 제1차국내혁명전쟁, 제2차국내혁명전쟁, 항일전쟁, 해방전쟁가운데서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위해 희생된 혁명선렬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희생 당시 2,3십대 젊은이였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매 력사시기마다 시대정신을 체현한 선진인물들이 용솟음쳐왔으며 이들은 “5.4정신”의 구현자, 시대의 본보기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이라는 선인들이 해보지 못한 위대한 장정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 발양하고 “5.4정신”을 널리 고양하는 것은 시대를 뛰여넘어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으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리은파, 제작에 원미란이였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174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영욕(荣辱) 댓글:  조회:4415  추천:0  2020-04-09
붉은기가 나붓기고 격앙되고 장엄한 노래소리와 환영하러 나온 사회각계 군중들의 열정에 넘치는 환호소리 속에서 길림성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이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장백산공항에 내리는 장면을 텔레비죤을 통해 보았다. 그 가운데는 25명의 연변의 무한지원 백의전사들도 있었다. 정말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다. 당중앙의 호소와 성당위 성정부의 지시에 호응하여 우리 주에서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예방, 통제의 수요로 무한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게 되자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한의료지원에 나섰던 것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입원치료를 받다가 여러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다. 그들은 무한의료지원팀으로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떠났다. 그들이 사업터에 나설 때에는 우선 방호복으로 전신무장을 하여야 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군사들이 쇠나 가죽으로 된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였다면 그들은 방호복이란 평화시기의 현대식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고 의료작업에 나섰다. 방호복을 착용한 다음부터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꼬박 쉴새없이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했다. 방호복을 입은 다음부터는 위생실도 갈 수 없기에 최소한 식사량을 줄이고 음료수와 기타 수분흡수도 줄여야 했다. 만약의 경우 고려해 영아처럼 기저귀도 차야 했다. 하루의 간고한 의료작업을 마치고 근무교대를 한 다음 번거로운 소독작업을 거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통기가 되지 않는 방호복 착용으로 하여 온몸이 땀벌창이 되고 방호용구의 압착으로 하여 얼굴에 패인 주름과 땀에 절어 몸, 얼굴, 손에는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것을 우리는 텔레비죤을 통하여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인민군중의 생명안전을 위해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태산보다 무거우며 전염병 발생상황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다.’는 당중앙의 중요정신을 실천하고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용감히 싸워 영광의 꽃다발을 안고 개선가를 부르며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연변의 25명 무한지원 백의전사는 우리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현시대의 영웅들이다. 하지만 전국인민들이 이번 전염병예방, 통제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임무로 삼고 일심협력하여 예방, 통제에 나설 때에 일부 사람들은 이번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제멋대로 요언을 날조하고 퍼뜨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을 일종 쾌락으로 느끼는가 하면 지어 일부 사람들은 예방, 통제 일선에 나선 사업일군들의 업무를 방애를 하거나 거역해나서 에 의해 7~20일 행정구류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방역, 통제 일선에 나선 일군들을 구타하는 행위까지 벌려 유기징역 1년 2개월 판결을 받은 사건도 있는가 하면 더욱 한심한 것은 주택구의 경비인원들이 관련 규정에 의해 차를 주민 주택구역으로 들어 못 가게 제지하자 칼로 경비원 2명을 부상 입히고 1명을 숨지게 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일부 개인들과 애심단체에서는 무한에 마스크를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마스크가 긴장하여 살 수 없었다. 일부 불법분자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사기행각을 벌리는 일도 있었다. 우리 연변에도 마스크 사기사건만 하여도 4건이 있었는데 그 사기금액이 각각 800원, 5000원, 8만원, 20만원이였다. 이들도 지금 인민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당을 믿고 당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우리 나라가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이만큼 승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중앙의 정확한 령도 아래 전민이 일심협력하여 예방, 통제에 나섰고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의 고생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아희생 정신으로 호북 전선지원에 나서서 바이러스와 영용히 싸웠기 때문이다. 또 각급 당위와 정부 공안경찰, 당지의 의료일군들, 사회구역 사업일군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한 전 국민의 간고분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며 친인들을 잃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고 전염병 예방, 통제 일선에서 밤낮없이 싸우는 백의전사들 모습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영광의 꽃다발을 안기기도 했다. 또 우리는 전염병 예방, 통제를 장난거리로 여기고 요언을 날조하여 민심을 소란시키는 사람들, 개인의 리익을 위해 마스크 사기행각을 벌리고 공무집행에 방해를 주고 공무집행에 거역해나선 사람들에게 치욕과 격분을 금할 수 없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판이한 영욕(荣辱), 다시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변일보
173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댓글:  조회:4101  추천:0  2020-03-05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연변인민방송   방송일시: 2020년 3월 4일  기획: 황설화          사회: 황설화          제작: 손귀옥   --- 개 시 곡 ---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는 프로담당 황설화입니다. 프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일들을 담론하거나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방향을 제시하는 프로입니다. 요즘 힐링이란 단어를 많이 쓰시죠? 여러분들이 지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저희 과 함께 힐링이 되고 희망을 갖고 더욱 행복해지는 시간을 공유해보면 어떨가요? 래일은 3월 5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날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네, 3월5일은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인 1963년 3월 5일, 모택동주석은 공무집행중 희생된 심양부대의 영웅전사 뢰봉을 기리여 인민일보에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냈습니다.  그 뒤로 매년 3월 5일은 뢰봉따라배우기 기념일로 널리 알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뢰봉따라배우기 열조가 일었습니다. 하여 전국적으로 륙속 수많은 들이 나타나 우리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전파했습니다. 뢰봉이란 이름뒤에는 항상 사랑, 배려, 도움, 관심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따라다니는데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말들이죠. 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시고 길림신문특약기자이신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뢰봉정신과 그 핵심인 사랑과 배려, 베품에 대해 얘기나눠보겠습니다.   --- 간 주 곡 --- 네, 주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수고를 하십니다. ◆올해는 뢰봉탄생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익숙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뢰봉이란 이름만 들어봤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선생님, 뢰봉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가요? 그는 그 시대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현시대 청소년들은 뢰봉에 대해 잘 모르지요. 뢰봉은 22살 한창의 나이에 순직했으니 그의 일생은 매우 짧다고 할수 있지요. 악독한 지주놈의 핍박에 의해 부모님들을 잃고 7살에 고아로 되였고 해방후, 정부의 혜택으로 1956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몇달간 향정부의 통신원으로 있다가 현위에 전근되여 공무원으로 사업하였으며 1958년에 안산강철공장에 전근하여 뜨락또를 운전수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현위공무원, 안산강철공장에서 사업할 때에도 여러번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습니다. 1960년 20세의 나이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2등공 2차, 3등공 3차레 세웠습니다. 그는 부대에 있으면서 무순시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것입니다. 뢰봉정신은 이미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로 되였으며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되였습니다. 주은래총리께서는 뢰봉정신을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애증이 분명한 계급립장, 언행이 일치한 혁명정신,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개인의 리익을 희생하는 공산주의 풍격, 헌신적으로 분투하는 무산계급투지.”라고 괘괄하였습니다. 1) 뢰봉은 일생에서 남을 위하는 것을 락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5월의 어느날 이른 아침, 심양으로 가려고 아침 일찍 비를 맞으며 바삐 무순역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한손으로는 녀자애는 이끌며 기차역으로 힘겹게 가는 것을 보고  인차 자기의 비옷을 벗어 그 아주머니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애를 안고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기차에 올라서 녀자애가 추워서 떠는 것을 보고 뢰봉은 자기의 적삼을 벗어서 그 녀자애에게 입히였으며 그들이 아침식사를 한 것 같지 않아 자기가 차칸에서 아침식사로 먹으려던 만투를 꺼내서 그들을 먹게 하였습니다. 심양역에 내리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자 그 아주머니는 뢰봉에게 어떻게 감사를 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니까 뢰봉은 “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과 모주석께 감사를 드리라”고 하고는 자기 일 보러 떠났습니다. 또 한번은 안동에서, 지금 말하면 단동이지요. 무순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양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려고 가방을 메고 지하도를 건너는데 한 할머니가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디로 가시는가고 물으니 자기는 관내에서 오는데 무순으로 아들 보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와 한길이라 그 할머니의 큰 짐을 자기가 지고 할머니를 부추켜 기차에 올랐습니다. 차에 올라 할머니에게는 자리표가 없자 자기가 서고 할머니를 자기의 자리에 앉히였으며 빵을 사서 할머니를 잡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집 주소를 물으니 처음으로 아들집으로 오는데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면서 편지봉투를 꺼내 보니는 것이였습니다. 봉투에 적혀있는 주소를 보니 뢰봉도 모르는 곳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순역에 내려서 할머니의 큰 보따리를 자기가 메고 할머니를 모시고 2시간이 걸려 겨우 아들집을 찾았습니다. 할머니와 아들은 뢰봉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감사할 것 있습니까, 응당한 일입니다.” 라 하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저녁무렵 비가 오는데 뢰봉은 길가에 한 녀인이 등에 보집을 지고 품에 아이를 안고 한손에는 또 큰애를 이끌며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다가가서 물으니 그 녀인은 친척집으로 가는데 아직도 십여리도 더 가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뢰봉은 두말없이 자기의 비옷을 그 녀인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아이를 안고 비를 무릅쓰고 그들을 친척집까지 데려다 주고 밤중에 련에 돌아 왔습니다.  2) 뢰봉은 못정신으로 학습을 하였습니다. 뢰봉은 시공임무를 하면서 종일 차를 몰고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다니 학습할 시간을 짜내기 힘들었습니다. 뢰봉은 늘 모택동저작을 군용가방안에 넣고 다녔는데 차가 서서 다른 일이 없을 때에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운전실에서 학습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일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 바빠 학습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사업이 바빠 그런 것이 아니라 네가 학습하려 하는냐 안느냐에 있으며 시간을 짜내려 하는냐 안는냐에 있다. 학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시간을 짜내는가 안내는가? 뚫고 들어 가는냐 안느냐에 달렸다. 널판자에 못을 박으면 구멍이 있어 못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못이 구멍을 뚫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못이 뚫고 들어가는 정신이다. 우리는 학습함에 있어서 이런 못정신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뢰봉을 열정적으로 동지를 대했습니다. 뢰봉반의 전사 교안산은 문화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뢰봉은 우선 그가 식자관부터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간만 있으면 직접 그에게 글자를 가르켜 주었을 뿐만아니라 산수까지 배워주었습니다. 뢰봉반에는 또 小周란 전사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전사몰래 그 전사의 이름으로 자기가 아껴 쓰면서 모은 생활수당금 10원을 문안편지와 함께 부쳐보냈던 것입니다. 그때에 부대에서는 전사들에게 비누, 치솔, 치약 등을 사라고 매달 3,4원의 수당금을 발급 할때이니 10원이면 석달의 수당금에 해당하지요. 뢰봉반에는 또 小韩이란 전사가 있었는데 일하다가 류산이 바지에 떨어져 몇군데 구멍이 뚤렸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여벌로 있는 모자를 뜯어 그의 바지를 기워 주었습니다. 4) 뢰봉은 일요일도 쉬지않고 지방의 공사장에 나 섰습니다. 1960년 여름의 한 일요일 뢰봉은 배가 너무 아파 퇀부 위생련에 가서 약을 떼 가지고 돌아 오는 길에 소학교를 짓는 한 공사장을 지나면서 들끓게 일하는 로동자들의 모습을 보게되였습니다. 뢰봉은 그 공사장에 들어가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가득 실고 공사장의 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를 알고 그의 한테 와서 어떻게 되여 이 공사장에 왔으며 어느 부대에서 왔으며 이름은 무었인가 물었을 때 뢰봉은 “저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회주의 건설에 저그나마한 힘이나 보탤 뿐입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건설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이 끝날 때까지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름모를 해방군전사가 우리 공사장에 와서 무상으로 우리를 도와 일하니 우리 모두 힘냅시다.”라고 방송하자 로동자들은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나르기 시합을 벌려 공사장은 더욱 들끌었습니다. 그러다니 이날 임무는 두시간 앞당겨 끝이 났습니다. 5) 뢰봉은 달갑게 바보로 살았습니다. 1960년 여러름 부대 주둔지 무순에 큰 홍수가 져 뢰봉운수련에 홍수 긴급구조에 나서라는 임무가 하달되였습니다. 이때에도 뢰봉은 방금 화재진압에서 화상을 입은 손의 아픔도 마다하고 전사들과 함께 저수지에 가서 밤낮 7곱날 련속 홍수와 싸워 2등공을 세웠습니다. 한번은 심양역에서 아이를 업은 한 녀인이 돈과 길림으로 가는 차표를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에 뢰봉은 선뜻이 자기의 돈으로 그 녀인의 기차표를 끈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녀인은 너무 감동되여 이름이 뭐이며 어디에서 사업하는가고 물었을 때 “나의 이름은 중국인민해방군입니다. 나의 집은 바로 중국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도 주소도 남기지 안으니 말입니다. 뢰봉은 또 거리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망화구(望花区)에서 대생산동원대회를 하는 것을 보고 인차 저축통장에서 돈을 찾아 가지고 구당위를 찾아 가서  200원을 내놓자 망화구당위판공실에서는 100원만 받고 100원을 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뢰봉은 나머지 100원을 100년 불우의 홍수를 입은 료양인민들에게 지원을 보냈습니다. 련에서 롱구시합을 할 때에도 다른 전사들은 목이 컬컬하다고 사이다를 사 마셨지만 뢰봉은 랭수로 갈증을 달랬습니다. 매달 3,4원 하는 수당금으로 얼마동안 모으면 200원이 되겠습니까? 뢰봉이 이렇게 아껴쓰면서 모은 돈을 재해지구에 보내거나 곤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본 전사들은 뢰봉을 바보라고 놀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뢰봉은 “남들은 나를 바보라고 하지만 나는 달답게 이런 바보가 되련다.”고 말하였습니다. 6) 뢰봉은 훌륭한 반장이였습니다. 1961년 전 퇀에서는 일제히 뢰봉을 무순시 인민대표대회대표로 선거하였습니다. 뢰봉은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련에 돌아와서 2패 4반 반장을 맡아하였습니다. 4반은 그의 인솔하에 “4호반”으로 되였으며 뢰봉은 따라서 “사호반장”으로 되였습니다. 1963년 3월 모택동동지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가 발표된 때로부터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이 발랄히 전개되였으며 뢰봉정신도 전국 각지에서 피여났으며 평화시대의 영웅인물들이 많이 나왔지요. 례하면 초원의 소년영웅 룡매와 옥영자매, 구양해, 왕걸, 초유록, 공번삼 등 영웅들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용솟음 쳐 나왔습니다. ◆요즘은 세대차이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50년대에 태여난 분들한테 뢰봉은 신변에서 나타난 영웅이고 80년대한테는 본보기, 요즘 세대들한테는 이름만 들어본 력사인물로 남습니다. 주선생님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어떤 인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예, 우리가 소학교시절에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났는데 그때 우리는 모주석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호소를 받들고 뢰봉을 따라 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등교길이라든가 하교길에서 년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그 짐을 들어 주고 렬군속집을 다니며 마당을 쓸어주고 나무를 패준다든가 물을 길어준다든가 하는 좋은 일을 찾아 하는 것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동요에 란" 노래가있지 않나요. 길에서 돈지갑을 주어 교통경찰아저씨에데 바치니 경찰아저씨가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 하며 칭찬을 했고 뻐스에서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니 할아버지도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하며 칭찬했지요. 그러니까 그 어린이가 “아이참 글쎄 나를 뢰봉을 닮았대요.” 이렇게 교통경찰아저씨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어린이가 주은 돈지갑을 교통경찰아저씨에게 바치거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거나 한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거나 그런 말을 듣자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정말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마음으로부터 우르러 나오는 실제 행동이지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했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노래가 나왔지요. 가사란 시대의 배경을 노래하는 것이니깐요.  그런데 인제는 60년이 거의 지났으니 지금 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뢰봉이란 그저 력사인물로만 느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뢰봉은 항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친근한 존재였지만 현시대에 와서는 많이 잊혀지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는데요, 주선생님,과연 그런걸가요? 지난세기 8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처음으로 겪어보는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뢰봉정신에 대하여 한때 모호한 인식을 갖게되여 뢰봉을 따라배우는 열조도 식어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지금도 뢰봉정신을 말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여 한때 “뢰봉이 외국으로 갔다.” “뢰봉이 3월에 왔다가 4월에 돌아간다”는 유감스러운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말들은 확실히 한때 중국에서 뢰봉정신이 희박하여 졌으며 모주석의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기념하여 형식적으로 3월을 뢰봉을 따라배우는 달로 하였다는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개혁개방이 더욱 심화되고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히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을 똑바로 함에 따라 계획경제시대나 시장경제시대나 할것없이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을 뿌려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였습니다. ◆네, 뢰봉이 희생된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졌을지는 몰라도 그의 정신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기부, 불우이웃돕기 등 선행들은 뢰봉정신의 연속이 아닐가 싶은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견해인지요? 느껴지지요, 여기에서 전형적인 실례로는 《2010년 중국10대 감동인물》중의 한 사람인 안산 광업공사의 곽명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2시간 이상식 일찍 출근하여 15년의 루계로 하면 15,000여 시간이 되는데 5년의 공작량을 더 한셈이 됩니다. 그는 20년을 무상헌혈을 하였는데 루계로 6만미리리터로서 자기 총혈액량의 10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2010년 그때까지는 식구 셋이 거의 30여년 전에 지은 40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집에서 살면서 씻은듯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16년 동안 희망공정과 재해지구에 10여 만원을 헌납하였으며 선후로 180여명의 빈곤학생을 도와 나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대의 뢰봉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네, 우리 지역에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애심기부활동들이 적잖습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 은 19년을 이어오면서 2,000여명의 아이들을 도와주었고 9.3애심협회, 고사모협회 등 수많은 민간단체들에서도 정기적으로 고아원, 복리원을 찾아 봉사하고 있습니다. 정이 많은 우리 조선족 사회의 따뜻한 일면이 아닐가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 사회단체들의 이러한 선두역할도 참 영향력이 크죠? 우리 주변에서도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연길시 북산가두의 뢰봉반들을 례로 들수 있습니다. 2007년 첫 ‘뢰봉반’이 건립되여 요 몇년전까지 59개의 뢰봉반이 형성되였으며 성원은 만여명으로 발전되여 빈곤가정과 장애인을 돕고 고아원, 양로원, 독거로인들을 찾아가서 사랑의 손길을 돌리고 있으며 의료구제, 법률원조, 평민봉사 등 지원자 활동을 적극 벌리고 성금을 모아 재해구에 보내기도 합니다. 하여 이 가두는 전국 우수지원자 봉사대상의 영예도 안아왔습니다. 이 가두의 단산사회구역 ‘로인뢰봉반’ 반장인 맹인 김봉숙할머니도 이반의 성원들을 이끌고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적극 전개할뿐만 아니라 본인은 결혼반지를 팔아 문천지진구조에 기부해 전국을 감동시킨 일이며,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 대학꿈을 이루게끔 사랑을 베푼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연변민들레문화교류협회에서도 전문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애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불우한 어린이들이란 모두 가정환경이 매우 어려워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지요. 생활이 괞찬은 어린이들은 하학후 과외보도반에 가서 보충수업을 받는다든가, 과외양성반에 가서 자기의 흥취에 맞는 써클활동에 참가할 수 있지만 불후한 어린이들은 경제난으로 그런데를 갈 수 없지요. 그래서 이 협회에서는 20여 명이 되는 이런 불후한 어린이들에게 하학 후 무료로 보충수업을 한다든가, 문예써클 같은 것을 하지요. 그리고는 이 어린들이 여기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자체프로를 만들어 이 협회의 행사때면 출연합니다. 저도 이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것을 몇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린이들에게 생일파티도 조직하여 주고 혁명유적지를 찾아 가서 혁명전통교육도 하고 비암산풍경구의 동식물원에 가서 풍경유람과 자연에 대한 관찰도 하게 하였으며 쌀, 기름, 옷, 학용품 등을 사가지고 불우한 어린이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17살, 13살, 되는 녀자애와 5살되는 남자애 셋이 어머니는 하나지만  세 애의 성은 다 다르고 세 애들이 다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어머니도 이 애들을 버리고 어디인가 가버리고 이 동모이부의 세 애들이 한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협에서는 쌀, 기름, 그들에게 맞는 옷을 사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협회 신미화 비서장은 불우한 어린이 몇을 개별적으로 맡아 도와 주고 있습니다. 례를 든다면 한 애는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몸도 운신못하고 82세되는 할머니가 이 애를 기르는데 아이는 괜찮은데 가정교육이 따라가지 모하다니 정상적인 애들한테 다가서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미화비서장은 원래 교원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지라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면서 학교교육외에 개별적으로 보충수업도 하고 심리교육도 하고 음악에 흥취있으니 피아노도 배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어린이는 어머니는 일찍이 가출하고 아바지마저 소식이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게 살고 있는데 생활이 너무나도 말이 아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이래서 신선생님은 이불, 침대보, 옷 등을 싸가지고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할머니도 자립하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선생님은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며 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현시대의 뢰봉이지요. 이 협회와 이 선생님의 사적이 사회 각계에 알려지자 사회적인 반향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여 이들의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국에까지 알려져 신미화비서장이 중앙방송국조선어방송에서 한번에 30분씩 두번에 나누어 이 협회를 소개를 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모모 연예인이 희망소학교 몇백개를 건립했고 모 기업가가 지진재해구역에 어마어마한 자금후원을 했다는 등등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하는 것이 옳지요. 나라의 정책이 좋고 사회에서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었고 그들이 이 사회에서 돈을 벌었으니 함께잘 살자는 취지에서 사회에 일정하게 반납하는 것도 옳지요. 그러나 꼭 돈많은 사람만 기부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연길 서시장에서 고추가루 장사를 하는 허애자녀성을 보면 그 본인이 장애자이며 말하기 바쁜 좋지않은 병으로 앓고 있으면서 고달프게 매일 고추가루를 팔고 있습니다. 고추가루를 팔아 돈을 얼마 벌겠습니까? 정말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이지요. 그렇지만 연변TV«사랑으로 가는 길»에서 보면 번마다 100원씩 의연하고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이 아니지요, 바로 마음가짐이지요. ◆자녀교육을 중요시하는 요즘, 아이의 심신발전을 모두 념두에 두어 아이들을 기부행사나 봉사활동에 동참시키는 부모들도 적잖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일부 안좋은 모습도 보였는데요, 한 학부모는 이런 경험담을 얘기하였습니다. 한번은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참가하였는데 김치를 담가 고아원에 제공하고 또 나머지 김치를 팔아 헌금하는 활동이였다고 합니다. 그날 활동에 봉사자외에 십여명의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하였는데요, 어머니들이 하는 일은 솔선수범하여 김치를 담그거나 아이에게 김치 담그는 조리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집 아이를 둘러싸고 카메라 샤타를 눌렀다고 합니다.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단 한명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온 어머니들이였습니다. 어머니들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며 한바탕 떠들어대던 아이들은 결국 배추 한포기씩 대충 주무르다가 어느순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데요, 요즘 사회에서 가끔 보는 모습인것 같네요. 주선생님, 현시대에 와서 기부나 선행은 때론 일부 사람들이 쇼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가 있죠? 이 행사의 취지는 아주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학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그 행사에 참가한 동기가 무었인지 모르겠지만 와서 하는 그 행동에서는 아이에게 애심교양을 하거나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동참하여 자기의 저그만한 성의를 표달하자는 것이 조금도 안보이지요. 그저 그 행사를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요. 그리고 지금 보면 큰 기업인들이 많은 돈을 의연하여 사회에 건설에 지원하지요. 이런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그 항목을 자기의 이름으로 해 달라는 것이지요. 자기의 이름을 날리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요즘 제일 관심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페염과의 싸움이라고 볼수 있는데요, 뢰봉의 고향인 장사시에서는 “성성뢰봉, 가장 아름다운 모범”이란 활동을 벌려 코로나방역전역에서 용속음쳐나오는 영웅인물과 사적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사태가 발생한후 전국 각지에서 무한과 각지 병원에 의료물자를 기증하고 생필품을 지원하는 수많은 가슴훈훈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들이 인상깊었는지요? 예, 해방군에서와 여러 성에서 의료지원대를 무한에 파견하고 지원물자들이 자동차에 가득 실려 무한으로 들어가 것을 텔레비죤에서 많이 봤는데 거기에서 몇가지 더 감동적인 것을 말한다면 향항, 오문 동포들이 자금과 물자를 기부하는 실제 행동으로 내지 동포들에 대한 혈육의 깊은 정을 보여 준 것이였습니다. 2월10일까지 향항 사회 각계는 루계로 10억원을 기부했으며 일부 사회단체와 기구는 또 당지에 마스크, 보안경 , 방호복 , 수술복 등 방역 물자들이 없으니 해외에서 구입해 내지의 전염병 예방 통제 일선에 보냈것입니다 . 그리고10일까지 오문 각계에서도 인민페로 약 3억 1,000만원을 기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텔레비에서 볼때 만약 향항, 오문이 조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저렇게 내지에 대한 지원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향항, 오문은 특별행정구로서 비록 내지와 일정한 거리도 있고 사회제도가 다르다 하지만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혈육의 정만은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중국아세아경제발전협회에서 전세기를 내고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에서 마스크 12.536장, 의료용 장갑 11 만1천 켤레, 방호복 400벌, 총 128만9천 원 가치의 지원물자를 연변, 무한, 북경 등지에 보내여 따뜻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련합회 산하의 협회뿐만 아니라 연합회에 속하지 않은 여러 조선족협회들에서도 모금 활동과 물자조달에 나섰으며 아무 협회에는 속하지는 않지만 자발적으로 개인의 명의로 기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 장의 마스크, 한 컬레의 장갑, 한 벌의 방호복에 재일조선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스며있었습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에게 크나큰 힘으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무한에서 화신산병원을 짓는 농민공들이 거기에서 일한 로동공가를 하나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의무로동으로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농민공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이고 그들이 하는 로동도 힘든 로동이고 그들의 생활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경제상으로 큰 지원을 못하게 되니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이번 바리러스와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지요. 이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바로 바이러스는 무정하지만 사람은 유정하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라면 또 따뜻한 마음과 열정적인 우리 연변사람들을 빼놓을수 없죠. 근일에 우리 지역에서도 각 기업과 개인이 방역물자를 기부하는 선행들이 이어졌는데요,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에서는 15일간 방역 1선 사업일군들한테 애심도시락을 전달했고 길림오동제약회사에서도 10여차에 걸쳐 500여만원 가치의 방역물품과 자금을 기증하였습니다. 또한 공청단주위의 조직하에 50개 애심단체와 천여명 각계 애심인사들이 155만원에 달하는 물자를 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달째 경영을 못해 수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00여분의 물만두를 일선일군들한테 전달한 연길시대방물만두집도 있습니다. 주선생님, 참 가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소식들이죠? 그렇지요 한곳에 곤난이 있으면 여러곳에서 지원한다는 말과 같이 연변, 그리고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도 큰 기업으로터 자그만한 애심단체, 그리고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방역전역에서 큰힘 작은힘 할것없이 지원에 나썼습니다. 례하면  통화청산그룹에서 100만원, 커시안그릅에서 1,000만원에 달하는 성금과 물자를 의연하였고 또 개인들로는 백청강가수가 마스크 1,100장, 중경력범팀 축구선수 원민성이 5만원, 도문시 월청진의 리금련 로인이 1만원을 기부 하였으며 또   연변TV에서 훈춘시 양포만족향 동아로촌의 리준성로인이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 두푼  모은 5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로 된 돈주머니를 전연병예방통제사업에 쓰라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와서 내놓는 것을 봤습니다. 그 액수는 만원이였습니다. 이 두 로인의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이였습니다. 두분 다  70이 넘는 농민이였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시대의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오늘날에 와서 물질적추구가 강해지면서 요즘 세대들속에서 뢰봉정신이 잊혀지지 않을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전에 연길시중앙소학교 4학년 3학급의 남가이 학생은 자신이 아껴모은 마스크 100장을 신흥파출소에 전달하였습니다. 주선생님, 요즘 아이들이 독신자녀로 자라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하다고 여겨지지만 또한 어른들이 본보기를 보이고 인도하기 나름이 아닐가요? 그렇지요.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난 시기는 지난세기 60년대 초이고 지금은 21세기 20년대에 들어 섰으니 거의 60년 세월이 지났으니 현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확실히 뢰봉이란 그들과 거리가 먼 력사인물로 느껴 질 수 있겠지만 먼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2천년도 많이 넘는 중국의 력사인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 각국에 공자학원이 많이 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봐서 오랜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성 세대의 사람들이 이런 력사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고 새일대들에게 어떻게 인도하여 주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뢰봉정신은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이고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된 것 만큼 한개 시의 중심광장에 크지는 않더라도 뢰봉의 조각상이 하나 세우고 거리나 기차역전, 뻐스부 같은 큰 공중장소의 벽에는 뢰봉이 인민군중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그림같은 것을 크게 그려놓으면 정신문명의 대명사로서의 뢰봉정신이 더 빛을 뿌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공뻐스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여 주는 작은 일도 좋고 아직까지도 빈곤호, 장애인, 독거로인 등 사회의 약세군체들이 있는 것만큼 그들을 찾아 가서 어떤 구체곤난이 있는가를 료해하고 그들을 집접 도와 줄 수 있는것은 그 자리에서 도와주고 청소년들이 자기의 힘으로 직접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부모들의 도움을 청한다든가 어떤 사회단체의 도움을 청하여 그들을 도와주고 소선대의 활동이거나 청년단의 활동으로 사회의 유익한 일들을 찾아 하도록 인도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뢰봉정신의 실질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 인민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요. ◆현재는 전국 지어 전 세계가 코로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방역물자가 부족하고 자아격리,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 등 기부와 후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난관을 헤쳐가는데 힘이 되지 않을가요? 예,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은 인제는 많이 호전되여 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락관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힘으로 지원을 못할 지라도 우리 주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페염역정 예방통제사업 지도소조판공실에서 전주 인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잘 학습하고 자아 예방통제의식을 절실히 높혀  해당부문에서 제정한 교통관제를 준수하고 인구밀집장소에 대한 출입을 금지하고 모임을 갖지 말고 야생동물 거래를 엄금하며 야생동물고기와 멀리하는 등등의 구체 행동이 바로 제1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백의전사와 기타 사업일군들에 대한 도움이라고 생각됩니다.   --- 맺 는 말 --- 네, 요즘 우리들은 코로나사태로 다소 불편한 일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들려오는 각종 기부와 후원, 베품, 타인에 대한 배려 등 따뜻한 소식이 우리한테 힘과 희망을 줍니다. 본 프로기획에 황설화, 록음제작에 손귀옥이였습니다. 오늘 프로가 여러분들한테 힐링이 되는 시간이였길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172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댓글:  조회:5515  추천:0  2019-05-16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연변일보 2019-05-08 15:37:38 1919년 5월 4일 북경의 5,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으며 6월3일 후에는 운동의 주력도 학생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들에로 파급되였다. 습근평총서기는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5.4운동의 력사적 의의에 대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혁명성, 구국강국의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성, 여러 민족 각계 군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광범성으로 중국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를 추진했으며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위해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를 하고 새 혁명력량, 혁명문화, 혁명투쟁이 력사무대에 오르는 데 조건을 창조했는바 중국 구민주주의혁명이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되여 근대이래 중화민족이 민족독립과 발전진보를 추구하는 력사과정에서 리정표적 의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5.4운동이 폭발하여 2년만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하였고 30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금년에는 5.4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애국, 진보, 민주, 과학의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이 정신이 한대 또 한대의 청년들을 분발시켜 나라를 부강시키고 중화민족의 진흥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5.4 정신을 말하고 있는가고 하는데 5.4운동은 이미 100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100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뿐이다.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것이다. 습근평총서기는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운동의 주제, 새시대 중국 청년운동의 방향, 새시대 중국 청년의 사명은 바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견지하고 인민들과 함께 ‘두개 백년’분투목표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시대 청년들이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야 하며 《당의 기대, 인민의 기대, 민족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며 이 위대한 시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본다. 태공에 오른 녀 우주비행원 류양과 왕아평을 비롯한 항공우주비행원들은 그 간고한 기술훈련도 이겨내고 마침내 태공에 오른것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세계급 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본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본직사업을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업을 하여야만이 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것이 아니며 습근평총서기가 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대로 하는 것이 바로 5.4정신을 발양하는것으로 볼수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발전중에 있고 국제정세가 급격하고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리상신념을 견정히 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치여 19차 당대회정신과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학습하고 터득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고 습근평총서기가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에 따라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여야 한다.  
171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댓글:  조회:7003  추천:1  2018-12-24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흑룡강신문 //hljxinwen.dbw.cn  2018-12-17 09:03:04                     작성자: 주청룡   (흑룡강신문=하얼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이다.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인제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다. 하여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것이였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다. 그러던차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에 종사하면서 많은 멸시와 모욕을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한다고 들어왔던 터라 그들의 실생활을 알려면 바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야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은 곳이 서울 교외의 한 채소농장이었다. 농장에 가보니 중국조선족들이 온 하루 비닐하우스 안이나 뙤약볕에서 쉴새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숙소마저 채소하우스 안이어서 찜통처럼 뜨거운 환경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잠자리는 땅바닥에 널판자를 펴고 그 위에 볏집을 깔고 비닐박막을 폈는데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농장주의 애완견은 주인과 같이 집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격적인 모욕감까지 들었다. 하여 농장주를 찾아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하는가?’ 하면서 잠자리를 개선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더니 “돈 벌러 온 사람이 이러면 됐지 무슨 요구가 그리 많은가? 실으면 가라”는 것 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격분하여 그 현장을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가더라도 당신들이 며칠 내에 일꾼들의 잠자리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의 언론 매체에 공개를 하겠다고 위협적인 말을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후 거기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농장주가 언론에 공개될까봐 두려웠던지 아니면 가책을 받았던지 창고 한칸을 내어 침대도 너무 헐망하지 않게 잠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국에 와서 작으나마 조선족의 인권보장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뿌듯한 감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몇몇 건설현장에 가서 현지 체험을 하였다. 건설현장에서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안전화, 안전벨트, 안전모로 전신무장을 하고 건설현장에 나섰다. 이렇게 3무장을 한다는 자체가 현장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측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철판으로 된 폼(模板), 강관, 철근 등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한참 일하고 나면 겨울에도 온 몸이 땀벌창이 되곤 하였다. 그래도 청부업자들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해대고 있었다. 부동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 차이가 있으므로 하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에 그 말을 알아 못 들으면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하며 반말을 써가며 욕하고 어떤 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스러운 욕을 퍼붓고 있었다. 표준말을 하는데 우리가 못 알아 들으면 욕해도 무방하겠지만 ‘반생’이란 한국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고달프게 일하는 중국동포들의 실행활을 료해하려 갔기에 쫓겨나는 것이 겁나지 않았다. 하여 고용주를 찾아 중국동포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보장여 줄 것을 제기하였다가 결국 내가 해고당하고 말았다. 합리적인 건의를 제기한 것도 고용주와 엇선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일은 격분한 일이지만 또 다른 현장에 가서 실생활을 체험하여야 했기에 나를 놓고 말하면 크게 손해를 본것은 없다고 생각되였다. 오히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건설현장에서의 실생활을 체험하였고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마구 욕을 하면서 부려 먹으며 불공정한 대우를 하는 것도 직접 목격하였기에  나에게는 큰 성적으로 되였다고 생각되였다.   건설현장에서 해고 당하였으니 또 다른 현장에 가야 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미 농장, 건설현장을 다 체험하여 봤으니 이번에는 산업현장에 가서 체험하는 것이다. 하여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찾은 것이 어느 한 조명등조립회사였다. 이 회사는 어지럽거나 위험한 일은 없었는데 노동시간이 12시간이나 되었고 어찌나 속도를 강조하는지 손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며 조금만 속도가 늦어도 쌍욕을 퍼부었다. 지나치게 속도를 강조하다니 간혹 불량품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책임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 댔다. 중국조선족들이 일하는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보면 어떤 현장에서는 일을 하고도 청부업자가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몇 달씩 일하고도 삯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일부러 불법체류자를 쓰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도 불법체류자이기에 어디 가 신고를 하지 못하는 약점을 쥐고 일년 넘도록 월급을 주지 않는 악덕 고용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다. 나의 한 친척도 한국의 한 자그마한 건설현장에서 반년간 일하였는데 청부업자가 다음 달, 그 다음 달 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월급을 주지 않다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반년 노동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다른 일자리로 옮겨 돼지 사양장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하루 아침 돼지사양장에 불이 나자 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자아희생적으로 불끄려 들어갔다가 돈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온 몸이 새까마게 재가 되여 그 자리에서 화장되여 나왔다. 잘 살아보려고 이국땅에 돈벌려 나갔다가 일한 노동공가도 못 받고 한줌의 재가 되여 고향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최하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노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예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나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내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나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청하였다. 나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나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9년 1월에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조선족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나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었다. 그 회의에서 나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정책에 힘입어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내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조선족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간담회의 현장녹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어 온 지구촌에 전파되었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의 많은 절찬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조선족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재한조선족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하여 나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2010년 한국에서 돌아와서 연변의 많은 농촌마을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고찰하고 2014년도에는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 선생과 함께 20여 일간 헤이룽장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을 고찰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사회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특히는 한국 노무송출이 조선족농민들과 도시 저소득층 조선족들에게서는 국내 다른 민족에 비해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버는 아주 좋은 기회였으며 빈곤해탈의 지름길이 될 수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로 하여 많은 조선족들이 빈곤에서 해탈될 수 있었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부 농민들은 도시에 아파트를 사놓고 안락한 도시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농민들은 한국에서 일하는 기간 축산농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선진적인 사육기술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축산농장을 경영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고 있으며 어떤 농민들은 한국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선진적인 유기농법(예하면 표준화 육모관리, 오리농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무당산량을 제고할 뿐만 아니라 유기농입쌀을 명브랜드로 하여 높은 값으로 쌀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도시에 한식점을 꾸리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가지고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귀향창업을 하여 치부의 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빈곤에서 해탈하고 한국의 선진기술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서 새로운 창업을 하는 사례들은 우리가 한국노무송출을 통해 얻은 긍정적인 부분들이지만 반면에 잃은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우리의 영농실력이 많이 뒤떨어지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으로 나갈 때에는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맸지만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돌아와 보니 그 기간 다른 민족들은 대중형 농기계를 갖추어 놓고 조선족들이 내 놓은 토지에 규모화 경영을 실현해 인력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우리 삶의 터전에서 거대한 수입을 창출하며 막강한 영농실력을 과시하면서 지역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족농민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의 토지를 찾아 농사를 짓자 하여도 소농경영수준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리 애를 쓰고 농사를 지어도 얼마 떨어지는 것이 없으니 다시 토지를 그들에게 임대를 주고 임대비를 받거나 그들의 밑에서 고용일꾼으로 일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찌 잘 살수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이 한국노무송출에서 돈을 좀 벌어 빈곤에서는 해탈되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기의 실력이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에는 실력이 강한 자에게 먹히게 된거나 다름 없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우세도 잃고 있다. 하여 조상들이 억척스레 가꾸어 놓은 우리 삶의 터전이 온전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각 향촌마다 우리 민족을 주체로 한 전문농장이나 농민전업합작사를 꾸려 외지에 나가는 촌민들이라도 이런 전문농장 혹은 농민전업합작사에 토지를 들여 놓고 주식형식으로 농장이나 전업합작사경영에 참가한다면 자기의 토지도급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농촌집체경제조직성원이면서도 농장 혹은 전업합작사의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시장주체의 평등지위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 인구의 대 이동으로 하여 지금 조선족 농촌마을이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심각하다. 대부분 조선족들이 한국노무송출이나 대도시로 나간 지 10년이 거의 되고 일부는 10년, 15년, 20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언어가 통하는 동족국가이고 한국노무는 짧은 시일내에 많은 돈을 벌어 빈곤에서 해탈할 수는 있지만 필경은 자기의 나라가 아닌만큼 우리가 한평생 살 곳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서 내 고장, 내 집에서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자지방의 자연우세를 충분히 살려 내 땅에서 농사도 짓고 다각경영도 하고 더 크게는 제2차산업, 제3차산업과 같은 구상으로 새로운 창업을 하면서 조상들이 우리에게 넘겨준 삶의 터전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권고하고 싶다.   3년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사회를 조사하고 중국조선족들의 실생활을 체험하였으며 중국에 돌아와서도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조사하였기에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해 분석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 한국과 재한 조선족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여러 편의 글들을 써서 여러 언론매체에 발표할 수 있었으며 2012년에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라는 1만 2000자에 달하는 묵직한 글도 써서 "중앙인민방송",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 등 여러 매체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년에는 3농문제 관한 계열칼럼을 써서 "길림신문"에 발표하여 "오늘의 화제"2등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총적으로 나는 중국조선족이다. 나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유리한 일을 하는 것으로써 힘이 자라는 데까지 나의 여생을 바치려고 한다.      
170    ‘향촌진흥 전략’과 우리의 자세 댓글:  조회:4280  추천:1  2018-11-25
‘향촌진흥 전략’과 우리의 자세   du  연변일보   2018-11-22 08:40:17   최근, 중앙에서는 ‘향촌진흥 전략계획’(2018-2022)을 발표하였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고 향촌진흥을 다그치는 중요한 전략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농민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앙의 이런 보조에 맞추어 우리가 취하여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는가?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제2차 농촌토지 도급 기한이 지난 다음 또 30년 연장정책을 실시한다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런데 토지도급 경영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토지를 우리가 다루지 않고 타민족에게 장기적인 임대를 준다면 그들이  대중형 농기계를 갖추고 대면적의 토지를 다루어 영농실력을 자랑하면서 그 지역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조선족촌민들은  영농실력을 키우지 못하였기에 타민족의 영농실력에 먹히우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역우세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각 향촌마다 우리 민족을 주체로 한 전문농장이나 농민전문합작사를 꾸려 외지에 나가는 촌민들이라도 이런 전문농장 혹은 농민전문 합작사에 토지를 들여놓고 주식형식으로 농장, 전문합작사 경영에 참가한다면 자기의 토지도급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농촌 집체경제 조직성원이면서도 농장, 전문합작사의 성원으로서의 지위와 시장주체의 평등지위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지역우세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고학력의 인재를 양성하고 영입해야 한다. 우리 주에서는 이미 2016년부터 우수한 대학졸업생, 석사, 박사 등 1000명 인재영입 프로제트를 가동하였다. 이에 적극 호응해나서는 인재들이 있는데 례하면 중앙민족대학 박사졸업생 리광이다. 그는 지금 고향에 돌아와 기층단련으로 왕청현 백초구진 당위 부서기, 정부 부진장을 맡고 빈곤해탈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데 나라의 전면 빈곤해탈 공략 목표보다 2년 앞당겨 올해에 빈곤해탈 임무를 완성하고 있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을 실시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고학력의 인재가 겸비되여 그들이 실제 사업을 이끌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생존조건이 악렬하고 생태환경이 취약하거나 자연재해가 빈번한 마을, 인구류실이 엄중한 마을을 이전하여 합병한다고 하였다. 인구가 적고 생태환경이 좋지 않은 마을은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에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어 살기 좋은 곳에 이전해야 한다. 한때 국가에서 농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호당 3~4만원을 보조하면서  농민들이 주택개조를 하게끔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살던 한 고향마을만 보더라도 어떤 농민들은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 이 시기를 놓치다보니 국가에서 주는 3~4만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이번에도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 보조에 맞추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연풍경, 력사유적지, 혁명전적지 등을 리용하여 관광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농촌의 관광산업을 대폭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내의 어떤 농촌들을 돌아보면 아주 특이한 자연풍경, 소수민족의 특색부락, 력사유적지, 혁명전적지 등을 갖고 있어 관광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우세를 가지고 있다.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의 김경남은 마을의 백년되는 조선족 전통가옥을 보수하고 거기에 조선족들의 전통 유형문화재들을 수집하여  조선족 백년부락으로 건설하여 국내외의 관관객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문시의 민족문화 행사도 그 마을에서 진행하고 있어  촌의 경제수입도 많이 올리고 있다. 왕청현에서는 새일대관심위원회 김춘섭 주임의 노력으로 항일전적지와 항일렬사들을 적극 발굴하고 기념비들을 세워 혁명전통 교양기지로 정하고 홍색관광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렇게 특이한 자연풍경을 갖고 있거나 력사유적, 혁명전적지 등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적극 발굴하여 이번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에 맞추어 주밀하게 관광산업 발전 계획을 짜서 해당부문에 제출하여 국가의 자금을 쟁취하여 관광산업을 발전시킨다면 본 지방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향촌진흥 전략계획’에는 또 농촌 기층 당조직의 향촌진흥에 대한 전면적인 령도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도 조선족 당원 양성에 힘써야 한다. 지금 여러 농촌의 조선족촌들을 보면 대부분 젊은이들이 모두 출국하였거나 대도시에 진출하였기에 촌에서 핵심적 역할을 발휘하여야 할 젊은 당원들이 적다. 촌의 많은 중대한 사항들은 당지부대회에서 결정짓게 되는데 만약 조선족 당원이 없다면 어떻게 조선족농민들의 리익을 대표하여 발언하며 어떻게 민족특색이 있는 촌으로 건설하겠는가? 중앙의 ‘향촌진흥 전략계획’은 수많은 농민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으로서 우리 주내의 수많은 향촌들에서도 이번의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고 중앙의 보조에 잘 맞추어 주인공의 자태로 아름다운 향촌, 아름다운 조선족사회 건설에 적극 나섰으면 하는 마음이다.  
169    하늘 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누렸으면 댓글:  조회:6553  추천:0  2018-10-29
 하늘 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누렸으면 주청룡     나의 처가집 형제들은 우리 집을 제외하고 네 집 식구나 모두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몇 달 사이 두고 두 집 처조카들이 결혼식을 하는것도 한국에서 하게 되여 나의 안해는 조카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한국에 나가고 아들은 외지에서 사업하다보니 요즘은 나절로 땍식이며 빨래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랭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들이 구전하여 모든것이 손만 좀 놀리면 전부 자동으로 작동되여 어려울것이 없다. 이런 가전제품들이 자동으로 작동되는것을 보면서 나는 짜꾸만 저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이 생각나군 한다. 우리 부모님세대에 70년대 말까지는 재봉기, 라지오, 손목시계, 자전거를 네가지 중기(四大件)라 하였는데 한 가구에 한두 가지는 있었지만 네가지를 다 갖추어 놓고 사는 집은 드물었으며 네가지가 다 있었다면 생활수준이 아주 높은 집이라고 말하였고 그 이상 더 본것이 없었기에 그것을 최고의 생활수준으로 생각하였으며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행복지수가 높았다. 그러나 현시대에 와서는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자가용차로 바뀌고 핸드폰의 시계가 손목시계를 대체하고 라지오가 텔레비죤에 밀리우고 재봉기는 고물로 되여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수 있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현대식 주방용 전기제품들은 하나도 없었고 전부 재래식이였기에 지금에 비하면 번다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나도 어릴적에 혹간 어머니가 외출하시면 내가 밥을 지었는데 쌀을 씻어 가마에 안치고 물을 맞추는데 처음 부은 물이 많은것 같아 좀 떠내면 적은 같고 다시 넣으면 또 많은것 같아 몇번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된밥이 되지 않으면 죽밥이 될 때가 있었으며 부엌을 오르내리며 불을 때는것도 쉽지 않았다. 좀 세게 때면 밥이 타고 탈가봐 약하게 때면 밥이 설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쌀을 씻어 전기밥가마에 안치고 눈금에 맞추어 물을 붓고 버튼을 누르면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진행되며 거기에 아가씨의 명랑한 알람소리가 곁들어 나온다.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 부모님들은 상상도 못한 것들이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국을 끓이거나 료리를 하고 덥혀먹을 때에는 가마에 안치고 부엌에 불을 때야 했다. 좀 간편하게 하려면 풍로에 곡스(농촌에서 황연불을 땔 때에 석탄재에 섞여 나온 채 타지 않은 석탄)불을 피워 료리를 하거나 덥혔다. 곡스는 연기가 없어 좋으나 곡스가 없으면 검은 연기가 가득나는 석탄불을 피워야 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점심에 일밭에서 들어오시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늘 이렇게 번다스러운 일을 하셔야 했다. 초중시절, 내가 일요일에 집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들이 일밭에서 들어 오시자마자 점심을 드시게 하려고 풍로불을 피웠는데 한번은 곡스가 없어 풍로에 석탄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다 피여 오른 다음 남비를 올려놓아야 하는것을 연기가 다 피여 오르기 전에 올려놓아 새하얀 남비를 새까맣게 그을게 하였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였는데 어머니께서는 야단을 내시는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대견스럽게 여기면서 이제는 내가 셈을 차리여 부모들을 생각할줄 안다며 잘했다고 치하를 하시는것이였다. 지금 같으면 전자레인지에 넣고 몇 십 초 혹은 1~2분 돌려내면 다 될것을 그때에는 이런 것은 상상 할수도 없는 것으로서 그저 그렇게 번다스럽게 하였다. 지금은 빨래질을 하려면 빨래감을 세탁기에 넣고 전기만 넣으면 완전히 자동으로 탈수까지 되여 나온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세대에는 빠래감을 큰 대야에 가득 이고 강에 나가 방치질을 하면서 씻었는데 그것도 여름이면 괜찮았지만 이른 봄이나 늦가을이면 찬물에 손을 거의 얼구다 싶이 했다. 어느 해 늦가을 어머니가 병환으로 여러 날 들어 누어 빨래감이 큰 대야에 가득 쌓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병이 좀 나은것 같아 빨래감을 한 대야 가득 이고 강에 나가 빨래를 하시고 들어오셨는데 찬물에 손이 빨갛게 되였으며 너무 추워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던것이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면서 다시 앓기 시작하여 또 다시 병원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좀 셈이 들었더면 어머니가 앓는 기간 자그마한 빨래들을 내가 조금씩 손빨래를 하였더라도 빨래감이 그렇게 쌓이지 않았을것이고 어머니는 채 났지 않은 몸으로 그날 빨래하러 나가지 않았을것이라고 반성하여 본다. 이외에도 지금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 비하면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나도 원시적인 생활을 해 온것같다. 우리 부모님시대에는 가정용전기제품이란 고작 라지오 하나뿐이였다. 그것도 1962년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유선방송을 듣다가 내가 생산대에 나와 일하면서 가정수입이 좀 있게 되여1970년도에야 라지오를 샀으며 그 라지오 하나로 뉴스나 문예프로 등을 듣는데만 끝였기에 감상효가가 많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텔레비죤의 보급으로 하여 집안에 않아서 ‘국내외 뉴스’, ‘TV련속극’, ‘동물세계’ ‘세계각지’ 등 프로를 통하여 세상 구경을 다하며 지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서 진행하는 올림픽실황을 구경한다. 얼마나 현대적인 문화생활인가? 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하늘에서 날아 가는 비행기를 지상에서 올리쳐다 볼뿐 그것을 타리라곤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되였으며 일자무식인 나의 장모님도 80고령에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 자식 집 저 자식 집 왔다갔다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지난해에 87세의 년세로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생전에  “나는 현대 가정용 전기기구를 써 볼것을 다 써보고 비행기까지 타고 한국에도 몇번 다녀왔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 고 말씀하시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80년대 초에 모두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그때에 도시에는 텔레비죤,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지, 세탁기, 전기랭장고가 나오기 시작하였나 농촌에서는 미태동(未胎动)이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평생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생활하시다니 이런것들을 구경도 못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였다. 문화생활이란 어떤 것인걸 모를시고 평생 고생으로 살아 오시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 참으로 가엽게 생각된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들 하늘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받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문화시대〉 2018년 제2기에 게재  
168    우리의 고향 우리가 보듬고 가꿔야 댓글:  조회:5167  추천:0  2018-06-09
우리의 고향 우리가 보듬고 가꿔야 연변일보  2018-06-06 17:11:56     가 가 지금 대도시요, 연해도시요, 출국로무요 하면서 많은 조선족농민들이 타향으로 떠나고 원래 아담하고 살기 좋던 조선족 농촌마을에 가구수가 줄어들고 집이 있다 하여도 사람이 없고 터밭이 쑥대가 무성한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가 살던 고향의 한 마을을 보면 원래 60여가구에 인구가 300여명 되던 인품 좋고 살기 좋은 순 조선족 마을이였는데 지금은 호구가 있는 조선족 호수는 42가구이지만 본 마을의 사람은 2가구가 살고 농사 짓는 호수는 한가구밖에 없으며 타민족이 5가구가 들어와서 살며 촌민소조의 조장도 타민족이 맡아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 호구도 있고 집도 있는 호수가 8가구가 있으나 다 외지에 가 있고 그외의 30가구는 본 마을에 호적은 있다지만 집도 없이 연길, 룡정에 들어와서 아빠트를 사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한국에서 벌어 온 돈으로 하루하루 ‘강태공의 낚시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려상(강태공)은 재능이 있었기에 입궁하여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재능도 없이 도시에 들어와 ‘강태공의 낚시질’을 한들 어찌 ‘입궁’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한국에서 벌어 온 돈을 다 써버리고는 또 한국행으로 새로운 리산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토지면적은 100여헥타르인데 본 마을의 한 가구가 8헥타르의 밭을 부치는외에 90여헥타르의 토지는 이 마을에 들어와 사는 5가구의 타민족들이거나 주변의 타민족들이 부치고 있다. 어떤 집에서는 토지를 임대주고 어떤 집들에서는 경영권까지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를 한 실정이다. 더욱 한심한것은 토지도급권도 양도하고 집도 팔아버렸다. 습근평 동지는 19차 당대표대회 보고에서 제2차 토지도급이 끝나면 또 30년을 연장한다고 하였고 올해 중앙1호 문건에도 ‘도시에 들어가 호구를 붙인 농민들의 토지도급권, 주택기지 사용권, 집체수익분배권을 보호하여야 한다’고는 하였지만 주택을 이미 팔아버렸기에 ‘주택기지를 한번 이상 더 분배받지 못한다’는 정책으로 하여 이런 사람들은 주택기지 사용권을 이미 상실한 것으로 된다. 그들이 도시에 호구를 붙이고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직업을 찾았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도시에서 장기적이고 안정된 직업이 없이 남의 밑에서 눈치보기 일을 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시 본고장에 돌아와 살려고 하여도 집이 없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리고 다른 민족이 들어와 우세를 점하다 보니 원래 갖고 있던 조선족의 문화를 보존하기 어려우며 일부는 이미 파손되였으며 그 마을의 조선족들의 권익도 침해를 받은 실정이다. 이렇게 되면 조상들이 억척스레 개척한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 수도 있다. 이리하여 아직까지 그 마을에 호적이 있는 조선족 가구수가 40여호가 되는 이상 그 마을의 조선족문화를 보존하고 그 마을 조선족들의 리익을 보장하려고 그 마을에 호적을 두고 외지에 있는 일부 사람들과 그 마을 출신의 일부 지성인들이 함께 그 마을로 찾아가 해결을 하려 하였지만 그들이 조선족 지성인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법적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고향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한평생 농사만 지으란 말이 아니다. 도시에 들어가 창업을 하거나 자기의 적성에 맞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도시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민족이 농경인으로부터 도시인으로 되는 좋은 현상이다. 그렇지만 도시에 들어가 아무런 창업도 하지 않고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도 없이 남의 밑에서 눈치보기 일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거나 로동능력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강태공의 낚시질’하는 사람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본고장에 돌아와 자기의 집, 자기의 토지를 찾아 착실하게 농사도 하고 다각경영을 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가꾸고 내 고향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167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댓글:  조회:5158  추천:0  2018-04-16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육성방송   98.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돌아가야 한다”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2년전까지만 하여도 봄철에 들어서면서 논과 밭에서 타래쳐 오르는 검은 연기가 온 대지를 휩쓸면서 막대한 대기오염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곡초수거기계가 나와 곡초를 거두어 들이고 있는데 이는 아주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수거한 곡초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일부 농민들은 옥수수줄기를 소사료로 하고 있지만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한 곡식줄기는 대부분은 재생에너지발전소에 판매되여 연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부 매체에서는 이것을 아주 잘 된걸로 보도 하고 있는데 저의 견해로는 이는 절대적으로 NO. 제창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농업의 생태순환에서 엄중한 악순환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농작물의 줄기를 전부 다 곡초수거기계로 수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거하지 못한 곡초는 봄에 나가서 그대로 논과 밭에서 소각하고 있는데 발전소를 가거나 밭에서 그대로 태워버리나 농업의 생태악순환을 조성하는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농업의 생태순환이란 농작물이 토양으로부터 여러가지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태양에네르기로 광합작용을 하면서 생장발육하여 뿌리, 줄기, 잎, 종자, 열매를 맺고 그것들이 다시 여러가지의 경로를 통하여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땅밑으로 들어가서 다시 농작물에 흡수되는 것을 말합니다. 토양은 농작물이 자랄수 있는 여러가지 영양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농작물의 씨앗은 토양속에서 발아하여 뿌리가 내리면서부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을 흡수하고 광합성작용을 하여 하나의 식물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은 제한성을 갖고 있지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수십년간 농작물이 자라면서 토양속의 영양물질만 빨아내고 그만한 영양물질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토양은 척박하여 더는 농작물의 다수확을 확보하기 힘듭니다. 그 영양물질의 보충이란 바로 동물의 배설물이나 식물의 잎, 줄기 등을 썩혀 농가비료를 하여 밭에 내는것입니다.  곡식줄기를 밭에서 태우면 재밖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 주요한 성분으로는 탄살칼륨(K₂CO₃)입니다. 이렇게 하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칼륨원소는 해결할수 있지만 여러해 장기적으로이런 방식을 취 한다면 알칼리성(K₂CO₃가 알칼리성) 토양으로 전화할 뿐만아니라 나머지 성분들은 연기로 되여 하늘로 날아가 대기오염밖에 조성하지 않다습니다. 연기가운데의 이산화류황(SO₂)과 일산화질소(NO)로 하여 산생되는 이산화질소(NO₂)는 유해기체로서 대기를 오염시킬수 있지만 그것이 비료로 되여 땅속으로 들어간다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영양원소로 전화하게 됩니다. 이 방면에서 선진적인 생태순환 농법을 하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왕청현 종산목업(众山牧业)유한회사 리일룡 사장입니다. 그는 대량의 소와 닭을 기르고 20여 쌍의 밭을 다루고 있는데 수거한 옥수수줄기를 매초사료(青贮饲料)로 가공하여 겨울에 소의 주요한 사료로 하며 소가 배설한 분변으로는 대량의 지렁이를 번식시켜 닭사료로 하고 닭똥과 지렁이가 소의 분변에서 영양을 다 섭취한 다음의 잔류물은 유기비료로 다시 밭에 거름으로 내고있습니다. 이렇게 토양 → 농작물 → 가축사료 → 가축분변 → 토양으로의 생태순환을 하게합니다. 이외에도 곡초가 생태순환을 할수 있는 좋은 방법은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여 곡초를 썰어서 늪까스 생산원료로 하여 다 발효시킨 다음 그것을 비료로하여 다시 밭에 내는것입니다. 이 방면에서는 흑룡강성 녕안시 명성조선족소진에서 시범적으로 “4위1체”생태온실하고 있습니다. “4위1체”생태온실이란 일광온실, 가축가금우리, 변소, 늪가스 이 네개 부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생태농업을 하는 하나의 생산모식입니다. 즉 태양온실의 한쪽에 가축가금우리를 짓고 그 밑에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고 온실에서 남새, 과일을 생산할수 있고 뿌리, 줄기, 잎 등은 사료로 하거나 늪가스 생산원료를 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늪가스로 밤에 온실안의 온도를 높이거나 주변 주민호에 에네르기를 공급할수 있으며 늪안에서 산생된 발효물질은 작물의 비료로 합니다. “4위1체”생태온실은 토지자원을 기초로하고 태양에네르기를 동력으로, 늪가스를 련결체(纽带)로 종식, 양식을 결합할수 있으며 페물을 보물로 전화시킬수 있는 자연생태순환계통입니다.  이미전에도 일부 농촌에서 늪가스 생산을 한적이 있지만 그렇게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소규모로 하여 늪가스생산설비를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앉히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이것을 정밀하고 과학적이며 규모적인 설비를 앉힌다면 농촌에서 온돌난방과 주방칸의 에너지 래원도 해결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유기비료도 생산할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운 곡식줄기를 헛타이 태워버려 대기오염을 조성하는것도 피면하고 그것을 합리하게 리용하여 유기비료도 해결하고 에너지 원천도 해결하여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정부로부터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도록 강제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농민들로 놓고 보면 정말 딱한 사정입니다. 정부에서는 농작물줄기를 밭에서 태우지 못하게 하지, 또 태우지 않으면 한전 파종이나 수전모내기를 할수 없지 그럼 농민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정부와 과학기술부문에서 농민들이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수 있는 방법과 기술지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잠시는 생태순환조건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대로 소각하거나 재생에너지발전소에 가져가지 말고 움푹한 곳에 싸여 놓고 록비(绿肥)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곡식줄거리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리용하든지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다시 땅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자 리상적인 농업의 생태순환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년 4월 13일
166    설날 아침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댓글:  조회:5037  추천:0  2018-03-06
이 세상 많은 일터에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본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은 그 어떤 명예도 직위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음력설날 아침 나는 무술년 새해 도시 면모를 흔상하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생각밖으로 밤새 터뜨린 폭죽쓰레기를 쓸어담고 힘겹게 쓰레기차를 끌고 있는 환경위생종업원이 눈에 안겨왔다. 순간 나의 머리 속에는 설도 따로 없이 도시의 환경미화를 위하여 거리를 누비는 이들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하고 고결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명절도 따로 없이 설날 아침에도 쓰레기차를 끄는 이들의 소행에 감동되여 이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쓰레기차를 끄는 아주머니는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거동이 불편한 시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설명절이라 친척들이 모두 자기 집에 모여서 설을 쇤다고 했다. 밤새 아침 준비를 다 하고 아침 일찍 나와 일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같이 설도 쇠지 못하고 일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물음에 “우리가 하지 않으면 도시환경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시부모님과 친척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고 대답했다.   쓰레기를 쓸어모으는 아저씨는 “무한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딸애도 오고 대련에서 근무하는 아들,며느리도 다 와서 설을 쇤다.”고 했다. “외지에 나간 자식들이 모두 돌아와서 한 가정이 단란이 모여앉아 설을 쇠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참 수고 많으십니다.” 나의 말에 그는 “설날 아침에도 1년에 한두번쯤 있는 자식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해 서운하기는 하지만 이 일은 우리의 직업이니까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라고 하였다. 둘 다 가식이 없는 간단하고도 순박한 말이다. 이들의 한마디가 전체 환경위생종업원들을 대표한 마음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도시미화를 직업으로, 자기의 담당이라도 생각하기 때문에 사명감으로 여기고 직업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가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이들이 신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환경위생의식을 한층 더 높여 자기가 터뜨린 폭죽쓰레기를 자기가 쓸고 함부로 거리에 페기물, 담배꽁초를 던지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곳이 더 아름다워지고 환경위생종업원들도 숨 돌릴 사이가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1년 사계절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명절에도 휴식 못하고 불평없이 묵묵히 거리를 누비는 환경위생종업원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숭고한 경의를 드린다. 길림신문 2018.3.5 
165    우리의 영농실력 남보다 못해 댓글:  조회:7594  추천:0  2018-01-29
[주청룡 홍천룡] 우리의 영농실력 남보다 못해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19 15:24:37 ] 클릭: [ ] 19세기 후반기부터 항일전쟁승리후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조선반도로부터 동북에 건너와 괭이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놓았다. 동북의 벼농사는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되였으며 조선족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조선족들의 인구 대 이동으로 그 자랑스러운 ‘특허’도 이제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도 안전성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중한수교후 한국기업이 중국의 연해도시에로 대거 진출하면서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 많이 취직하게 되였으며 특히는 한국방문취업제로 많은 조선족들이 토지를 국내의 다른 민족에게 임대 혹은 양도하면서 한국로무의 길에 올랐다. 10여년동안 한국에서 돈을 벌었으니 이만하면 이제는 외국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고 고향에 돌아온 조선족도 있는데 정작 와보니 그전과 완전히 다른 상황에 부딪쳤다.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집에 돌아온 김모는 자기의 논을 되찾아 1년동안 농사를 지어보았는데 생각과는 딴 판이였다. 소농경제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농사를 짓다나니 많은 품을 들였으나 수입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그 기간 조선족만의‘특허’였던 벼재배기술을 다 장악하고 대중형 농업기계를 갖추어놓고 조선족들이 내놓은 토지를 임대맡아 농민전문합작사 혹은 전문 농장을 꾸려 규모화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들은 인력을 얼마 팔지 않고서도 거대한 수입을 창출했다. 영농실력의 차이가 천양지차였다. 김모는 할 수 없이 토지를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다시 임대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지임대비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였다. 약육강식이라고 김모는 비록 한국로무에서 돈을 좀 벌고 빈곤에서는 해탈되였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결국 자기보다 실력이 강한 사람들에게 먹히우고 만것이였다. 동북의 농촌 조선족마을을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조상들이 알심들여 개척한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조상들이 가꾸어 놓은 삶의 터전을 그래 그저 이렇게 잃고 말아야 한단 말인가? 이는 아주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필자는 도시에 들어와 ‘강태공 낚시질’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에게 각성하고 속히 정든 고향에 돌아가 자기의 집, 자기의 땅을 찾아 착실하게 농사를 지을 것을 권장하고 싶다. / 길림신문 칼럼리스트 주청룡 홍천룡 2018년 1월 19일 길림신문
164    남명학 부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댓글:  조회:7273  추천:0  2018-01-02
[아름다운 추억 64]남명학 부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25 14:54:24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대의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콩기음을 맸다. 그 날 오전 우리가 한창 기음을 매고 있는데 찌프차 한대가 밭머리에 와서 발동을 끄는 것이였다. 지금은 찌프차라면 보잘 것 없는 차지만 그 때 세월에는 찌프차라면 현급 이상의 간부들이 타고 다니는 차였기에 찌프차 한대 지나가도 모두 그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우리 밭머리에 와 서다니. 우리는 모두 일손을 멈추었다. 차에서 한 늙은이가 내리자 리휘 부장이 마중나가 그와 반가이 악수를 하는 것이였다. 나는 틀림없이 주의 간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리휘 부장이 이 분이 주정부 남명학 부주장(그 시기의 직명은 주혁명위원회 부주임이였지만 습관상 그냥 부주장이라고 불렀다)이라고 우리에게 소개를 하였다. 나는 남명학이라고 하는 분이 주정부 부주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뵌 적은 없었는지라 정말 기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새나 모든 행동거지를 보면 주의 간부다운 데는 한곳도 없이 보통 백성과 같아보였다. 그 때 우리 실험소조에는 로농 한분에 계셨는데 남명학 부주장께서는 인사가 끝나자 자기가 왔기에 일에 지장을 준다며 그 로농의 호미를 앗아쥐고 자기부터 엎드려 기음을 매였다. 그의 기음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쉼시간에 우리는 남주장 주위에 둘러앉았는데 그이는 노래 한수씩 부르며 즐겁게 쉬자고 하셨다. 그 때는 지정된 몇수의 혁명가요만 부르는 시절이라 모두 혁명가요 한수씩 불렀다. 그 자리에서 누가 이번에는 남주장님의 노래를 들어보자고 하였다. 남주장께서는 기다렸다는듯이 인차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는데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말 들어보소-” 하며 첫마디를 떼시였는데 〈농부가〉였다. 모두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자 “왜 이 노래가 나쁜가? 농부의 소박하고 랑만적인 마음을 담은 노래인데 왜 못 부르겠는가?” 하며 끝까지 불러내려갔다. 그러자 모두 “야, 듣기 좋은 노래다.” 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때 내가 지금 이런 노래를 불러 되는가고 묻자 “이 노래가 우리 조선민족의 민요인데 왜 자기 민족의 민요도 못 부르겠는가?”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서 “농사철에 대해서는 로농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 상급의 지시라고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로농들의 말을 들어야 하오.” “조 홰지(파종)는 곡우를 끼고 해야 하고 콩갈이(파종)는 립하를 끼고 하면 되오.”라고 하시며 곁에 앉은 로농에게 “로인님 제 말이 어떤가요?” 라고 물으신다. 이에 그 로농은 “글쎄 말씀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하였으면 좋겠는데 상급에서 어찌나 일찍 파종하라고 하는지. 우리는 리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남주장께서는 “지금은 군대 대표요, 반란파 대표요 하는 사람들이 올라앉아 맹목적으로 지휘한다니까.”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로농들을 존중하고 로농들의 말을 잘 들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는 인차 “자, 또 한쉼 매여봅시다.” 하며 호미를 들고 일어나 선줄로 나가시는 것이였다. 점심때가 되자 공작대들원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불의에 닥친 일이라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우리 지방은 한전고장이라 그 때 시절에는 입쌀 한줌도 없어 그저 조밥을 대접하였다. 그런데 남명학 부주장은 오후에도 계속 나가 기음을 매고 하루 밤 우리 집에서 묵을 타산이였다. 그런데 리로 놓고 말하면 저녁식사 대접이 문제였다. 어떻게 저녁에 또 조밥만 대접하겠는가? 도시와 50리 떨어져있는 농촌이라 어디에 가서 돼지고기도 사올 형편이 못되였다. 그렇다고 하여 돼지를 엎어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되였다 그래서 실험소조의 조장은 우리 어머니더러 저녁에 두부를 앗아 대접하자고 하였다. 쟁글쟁글 끓는 뙤약볕에서 남주장은 우리와 같이 온 하루 기음을 매시고 저녁에 해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오셨다. 조장이 나를 시켜 술을 사오려는 것을 눈치챈 남주장께서는 친히 자기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를 주면서 이 돈으로 술을 사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한사코 안 받자 그이께서는 호미자루로 나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쇼주(小朱) 왜 내 말을 안 들어?” 하면서 기어이 그 돈으로 술을 사오라고 하시는 것이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남주장에게서 호미자루에 엉덩이를 한매 얻어맞았다. 어쩌면 그 한매가 나의 마음을 그렇게도 기쁘게 하였던지? 나는 그런 매라면 자꾸만 맞고 싶었다. 저녁식사 때 조장이 “남주장께서 모처럼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온 하루 이렇게 수고를 하셨는데 우리 농촌에는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습니다. 저녁에 두부를 준비하였는데 서거픈 음식이지만 많이 잡수십시오.”라고 말하자 남주장께서는 “두부 만치 좋은 음식이 어디에 있소. 자 어서 가져오오. 그럼 오늘 농촌 아주머니가 손수 앗은 두부를 먹어봅세.”라고 말씀하시며 술잔을 들고 “자, 우리 같이 한잔 들어봅시다.” 하며 음식상의 기분을 돋구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은 다 가고 남주장께서와 비서, 그리고 리휘 부장이 남아서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되였다. 사실 그 날 남주장께서는 사업토론을 하려고 리휘 부장을 찾아왔었는데 리휘 부장이 공작대를 거느리고 우리 실험전에 와서 기음을 매자 그이도 우리와 같이 온 하루 일하시고 저녁에 리휘 부장과 사업토론을 하시는 것이였다. 사업토론이 끝나자 나도 그 자리에 끼여서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이가 리휘 부장(한족)과 이야기를 할 때 한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시여 완전히 한족 같은 느낌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여 한어를 그렇게 류창하게 하시는가고 물었더니 어릴 때에 연길현 동성용 동성촌의 한 한족지주의 머슴으로 들어가서 돼지를 먹이다가 후에 공산당을 만나 혁명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연변의 열혈청년들을 인솔하여 항미원조전장에 났갔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 날 저녁에 그에게서 많은 혁명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아침식사가 끝나고 그들이 떠날 때에 비서가 식비를 계산하여 내놓는 것이였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장 어른께서 여기에 오셔서 일하신 것만 하여도 송구한 일인데 어떻게 식비를 받을 수 있습니가?” 하며 한사코 받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 어머니가 재봉기을 쓰려고 재봉기에 덮었던 보를 드니 그 밑에는 식비 명세표와 현금 그리고 량표  놓여있었다. 우리가 보지 않는 틈에 비서가 넣어놓은 것이였다. 그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되여 눈물까지 훔치였다. 지금 세월 같으면 남주장께서 우리 실험전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기음을 매시고 쉼시간에 이야기를 나누시는 장면들을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영원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겠지만 그 때 세월에는 손에 쥔 것이 호미자루 밖에 없었으니 그런 영상자료 하나 없이 그저 머리속의 추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으로 되고 있다. 길림신문 2017-12-25
163    외국로무는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니다(주청룡, 홍천룡) 댓글:  조회:5839  추천:0  2017-12-25
한국의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로무의 길에 올라 적지 않은 돈을 벌어 빈곤에서 해탈되였다. 소로 밭을 갈고 호미로 기음을 매던 시기에 한국로무는 조선족농민들에게는 빈곤에서 벗어나는 필연적인 선택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본 고장에 남아있는 다른 민족들도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외지로 떠나간 조선족들의 토지를 임대 맡아 다루기 시작하였는데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하여 그 사이에 농촌에서 기계로 밭을 갈고 살초제를 사용하여 풀 한포기 매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풍작을 거두고 당지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다각경영을 하면서 많은 수입을 올려 빈곤에서 해탈했을 뿐만 아니라 치부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남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연해도시나 외국로무의 길에 오를 때 흑룡강성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금성촌의 우경철씨는 자지방의 자연 우세를 빌어 목장, 무공해 채소재배기지, 양어장 등을 경영하고 여기에서 나는 무공해 육류, 어류, 채소를 자기가 꾸리는 식당에 공급함으로써 생산, 가공, 판매를 일체화한 집단형 업체로 발전시켰다. 당지에 본사를 두고 탕원, 가목사, 학강, 이춘, 이란, 목단강 등 8곳에 ‘탕왕우씨불고기성’ 체인점을 경영하는데 일석3조의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왕청현 배초구진 서성촌 김송섭은 토종 흑돼지 육질이 좋아 개량종돼지고기 가격보다 곱절 비싸고 수요량이 많다는 정보를 알았다. 그는 당지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왕청현동북토종흑돼지사육합작사를 꾸리고 477헥타르에 달하는 서산 골짜기에서 육질이 좋은 토종 흑돼지를 사육하고 있다. 2008년도에 4마리로 시작한 토종 흑돼지 사육이 계속 늘어나 지금은 6,000여마리나 되였다. 사육기간이 최소 1년, 한마리에 3,000원씩 해마다 4,000마리 정도 출하면서 치부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외국로무는 대부분 가족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눈치보기를 하며 고된 일을 이겨내며 돈 벌고 있다. 하지만 우경철씨와 김송섭씨는 본 고장에서 단란한 가족생활을 하면서 당지의 자연우세를 빌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돈 벌려고 한국간지 10년이 되여가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고 지어 15년, 20년이 다 되는 사람도 있다. 한국로무는 짧은 시일내에는 빈곤에서 해탈할 수 있지만 한평생 살곳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자지방의 자연우세를 리용하여 자기의 영원한 터전을 닦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냐고 권고하기 싶다. 길림신문 2017.12.22
162    ‘학생들’과 ‘애들’ 어떻게 불러야 할가? 댓글:  조회:4889  추천:0  2017-09-29
지금 학교에서 보면 일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학생들’이라고부르지 않고 ‘애들’이라 말하고 학생들과 말할 때에도 “동무 어디로 갑니까? 동무 여기로 오시오.” 이렇게 말하는것이 아니라 “얘, 니 어디로 가니? 얘, 니 여기에 오너라.”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요즘 젊은 세대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하는 식으식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니? 저렇니?”하는 식으로 말하는데 때론 늙은 세대로서 듣기에 참 거북스럽다. 학교에서 교육대상의 주체는 학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7주세 되면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사회적 신분이 학생으로 되고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고 그 신분이 법률적인 인정을 받게되므로 학생이란 사회적 지위를 갖게된다.   그 어떤 원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지칭은 어디까지나 ‘어린이’ 혹은 ‘애’이지 ‘학생’이 아니다.‘학생’이라는 것은 ‘어린이’ 혹은 ‘애’보다 사회상에서 승격된 지칭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어린이(애)들일지라도 학교에 다니면 그들의 사회적지위를 존중하여 ‘학생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애들’이라고 부르는것보다 더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전에 우리의 선생님들은 학교교육대상에 대하여 ‘학생’, ‘학생동무들’이라고 불러왔지 ‘애들’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우리반 학생들이”라고 말했지 “우리반 애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세기 8,9십년대에 들어 서면서부터 우리나라 조선족교육에서 점차적으로 ‘학생들’이라고 부르는것보다 ‘애들’이이라 부르는 것이 더 보편화 되여가고 있다.   이런 습관이 소학교에서 뿐만아니라 초중, 고중에서도 보편적이고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학생들까지 애들이라고 부르면 년령구조단계를 봐도 ‘애들’이란 지칭이 맞지 않거니와 대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너무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대화를 할때에는 무조건  “이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존대형 혹은 대등관계로 말하였고 학생들과 “이래라”, “저래라” 이런 하대형으로 말하는 교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일부 선생님들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업을 하고 있는 제자를 보고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도‘야’ ‘자’하면서 말하는데 아무리 사제간이라고 하여도 제자가 인젠 사회인이기때문에 사적인 자리외에는 존대형 혹은 대응관계로 말하는게 바람직 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교육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로서 학생은 반드시 선생님을 존중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사랑하는 ‘존사애생(尊师爱生)’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해야 하며 인격상에서도 선생과 학생을 대등관계로 대하고 어떤 활동에서도 학생이 자기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민주를 발양해야 한다.   교원들이 학생을 지칭할 때에는 ‘애들’이라기보다 ‘학생들’이라 지칭하고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는 “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하대형으로 말하지 말고 “동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하는 식으로 존대형을 써야 한다. 어찌보면 작은 일이라기도 할수 있지만 학생들에 대한 이러한 존대와 대등관계가 학생들의 인격도 존중하고 선생과 학생지간의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존사애생’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연변일보 2017- 9- 27  
161    생방송: 이밤을 함께 합시다 댓글:  조회:5886  추천:0  2017-08-27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 생방송 2017년 8월 22일 주청룡 개시곡--《아름다운 동행》-- 안녕하십니까? 《이 밤을 함께 합니다》에서 인사 드리는 남경언입니다. 나라의 흥망은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주인공적 자세로 나라와 집단, 사회를 대한다면 문명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한몫 할수 있습니다. 지성인으로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칼럼쓰기와 민족력사답사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있는 분이 있습니다.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에서 부교장사업하다 퇴직하신 주청룡선생님이 바로 그런분입니다. 오늘밤 생방송실에 모셨는데요, 잠시후 만나보겠습니다.             --타이틀--《아름다운 동행》--   인사 나누고: 물음: 1. 선생님은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문제에 대해 예리한 필봉을 돌리시고 많은 칼럼을 쓰시였는데요, 어떻게 되여 컬럼을 쓰시게 되였는지요? 학교에서 좀 령도사업을 하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것이였습니다.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인제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사업을 해 오던 내가 사업을 결속짓는다는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습니다. 무엇이든 하지 않고 매일 마작치기를 하거나 그렇지않으면 쪽걸상을 가지고 나가서 늙은이들과 같이 그를밑에서 소일하며 보낸다는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생활이라고 생각였고 일종 심리적 불안감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내 고향은 연변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내 고향 연변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랐기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던 고향을 비롯하여 연변의 여러 농촌을 돌아 다니면서 농촌실정을 고찰하였습니다.    2006년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찰한 정황들을 종합하여 보니까 1.    농촌인구가 그 전에 비해 감소되였으며 그때까지도 많은 농민들이 소농경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    많은 농민들이 제한된 경작지에서 저 소득의 수입으로 입고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였습니다. 3.    장가를 못간 로총각들로 하여 혼인균형이 파괴되였습니다. 4.    학생수가 줄어들고 많은 학교가 페교 되였습니다. 5.    조선족들이 외국로무로 나가면서 외지의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임대 혹은 양도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자료을 가지고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가?”란 제목으로 10,000여자 되는 글(론문)을 써서 2007년 6월에 흑룡강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에서 저의 육성으로 방송되였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첫째로 중국조선족의 이주력사를 간단히 서술하고 연변에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된 력사적 배경과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성립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두번째로는 농촌인구, 농경지와 농경인, 학교와 학생 등 연변 농촌조선족의 현황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농업인구가 감소되고 농촌학교 학생수의 감소와 작은 학교의 페교는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는 것을 지적하고 조선족 교육을 보장할수 있는 대안을 제기하였습니다 세번째로는 농민들이 치부의 길로 나가는 도경을 6가지로 론술하였습니다. 네번째로는 혼인불균형 해결점과 조선족 공동체 해체의 방지대책에 대하여 6가지로 론술하였습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우리의 터전을 잘 가꾸고 지키고 조선족 공동체를 공고히 하며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것이였습니다. 2.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거쳐 필봉으로 우리 조선족을 대변하였다면서요? 예, 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 길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도 하고 일도 하면서 한국생활을 체험 하여 보면 출입국 관리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중국동포타운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고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의 실생활을 료해하자면 바로 산업현장, 건설현장에 가야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처음으로 서울 교외의 한 채소농장에 가봤습니다. 농장에 가보니 중국동포들이 온 하루 비닐하우스 안이거나 뙤약볕에서 쉼도 없이 구술땀을 흘리며 일하는데 숙소마저 찜통처럼 뜨거운 채소하우스 안이였고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했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그집 애완견도 집주인과 같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 짐승자리보다 못한 곳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서울과 경기도의 몇몇 건설현장에 가서 현지체험을 하였습니다. 건설현장에서는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안전화, 안전띠, 안전모로 전신무장을 하고 건설현장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3무장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수 있었습니다. 중국동포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철판으로 된 폼(模板), 강관(鋼管), 철근 등 전부 무거운 물건들을 나르는 것이였는데 한참 일하고 나면 온 몸이 땀참봉으로 되였습다. 그래도 청부업자는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하였습니다. 3D업종에서 다 그런것이 아니라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을 아무런 정치권리도 인권도 없는 인간으로 업신여기면서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부려먹는것이였습니다.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돈벌이 온 것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고용주들은 의식적으로 불법체류자를 쓰면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도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신고를 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쥐고 일년 넘도록 월급을 주지않는 일이 있었고 지어는 일년 넘게 일하고서도 청부업자가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로동공가를 받지 못한 일, 등 이러한 일들은 많고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와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중국에서 듣던바와 같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리고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는 가정부를 종으로 여기여 고용인들이 최저의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돈벌러 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내 힘으로서는 중국동포들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중국동포들이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준은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족은 로인을 잘 모시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절바르고 깨끗하며 문명스러운 민족이라고 전국에 널리 자랑을 떨치고 있으며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고 제기하였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 하여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한 겨레의 고국에 와서 일부 하류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동북아신문, 중국의 흑룡강신문, 료녕신문에 발표하여 중국에서 우리 조선족은 아주 우수한 민족으로 부상하고 있으므로 한국사회도 우리 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을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며”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자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리하여KBS-1 라지오에서는 제가 중국동포들의 의사를 충분히 말을 할수 있다고 하며 저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그 프로에 참석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이 사랑에 감사를 들이며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중국에 돌아가서 잘 살겠다는 내용으로 말하였는데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곳곳에 전하여졌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에 KBS-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에서 공동 주최하여 《한국기업인과 중국동포와의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신문사에서는 또 제가 중국동포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표달할수 있다고 그 간담회에 초청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정책이 좋아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많이 나와 돈을 벌고 있고 우리 동포들도 고국건설에 한몫을 담다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모든 고용주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불공정한 대우를 하면서 일을 시키는 사례들을 숫해 들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것을 호소 하였습니다. 이것이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여 많은 중국동포들의 절찬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도 조선족들이 이 프로를 보고 제가 중국동포들의 속심의 말을 아주 잘하였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이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중국동포들에게서 찾아 볼점이 없는것은 아니였습니다. 중국동포들에게서 찾아볼 문제들을 보면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어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준수하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중국동포들의 이미지에 엄중히 손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들 자각적으로 한국의 벌률과 제도를 준수하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중국동포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몇몇 신문에 발표하여 중국동포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것으로써 한국정부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것을 호소하였습니다. 3. 여러 매체와 손잡고 많은 칼럼을 쓰시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한몫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예, 한국에서 3년 남짓이 체류하면서 한국사회와 중국조선족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체험하면서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글을 많이 썼지요. 그리고 2010년 10월에 중국에 들어왔는데 이듬해의 어느 하루 중앙인민방송국의 《오늘의 화제》담당편집 박민걸 선생님이 저한테 전화가 왔던데  《선생님의 글을 보니 인제 중국에 들어오신 것 같은데 이제부터 우리방송의 〈오늘의 화제〉프로에 칼럼을 하여 달라는 청탁받았습니다. 그래서 2011년 7월부터 매주 《오늘의 화제》프로에서 시리즈로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와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육성방송으로 칼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1년반 련속  출연하다나니 매주일마다 하나의 화제를 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 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하업하시던 채영춘선생님, 연변대학 김관웅, 우상렬 교수님, 원 연변인민출판사 〈농가〉잡지 주필이였던 홍천룡선생님 등 분들을 중앙방송에 추천하여 같이 륜번으로 칼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앙인민방송뿐만 아니라 길림신문,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등 조선족 보도 매체에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4.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듯이 그런 비판과 반성의 자세가 있어야 우리에 대한 정학한 이미지  정립을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돌아오신 후에도 여젼히 필을 놓지 않고 우리 민족의 발전과 진보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2010년 10월에 귀국하여서도 우리 조선족사회를 위해 무얼 해야하는가 하는것을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굴리던 중 한번은 제가 살던 농촌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전에는 다른 민족이 한호도 없이 순 조선족이 60여 호 단란하게 모여 살던곳이 2007년 한국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자 출국로무요, 대도시요 하면서 떠나다니 조선족은 몇호밖에 없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이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누에 뽕입먹듯이 잠식되고 있었다. 매우 가슴아픈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농업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룡정시의 원 광신향 당위 김재범서기와 함께 연변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조사하였습니다. 연변의 농촌 각지를 돌아 보니 거의 다 제 고향마을과 비슷한 상황이였습니다. 우리는 농촌조사가운데서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 넘어가는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토지는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락관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농촌 마을이 다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주 농업위원회를 찾아 우리의 뜻을 말하고 주 농업위원회의 알선으로 몇개의 선진촌들도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촌들을 방문하면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경영모식도 많이 찾아내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면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 방면을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본 지방 촌민들에게 임대하여주어 외지에 갔다가도 아무때든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과학적인 규모화 농업을 하여 제한된 농경지에서 보다 높은 수확을 따내야 합니다.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는 것이였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가축, 가금 생태농장을 꾸리는것입니다. 넷째로 자연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당지의 농산품, 특산품 등을 여러가지 명브랜드로 가공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리는 것입니다.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습니다.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려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하여 농사도 짓고 다종경영을 하면서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를 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섯째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입니다.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춘 곳을 선택하여 집중촌을 건설하여 제한된 경작지를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많이 꾸리여 그외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키면 여유의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할수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을 건설하여 소도시화를 하는것입니다. 소도시화를 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 불균형도 해결할수 있으며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으며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공업도 하고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농촌조사를 개괄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란 제목으로 만여자 되는 글(론문)을 써서 2012년도에 흑룡강신문, 《농가》 잡지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론문을 써서 중앙인민방송, 〈농가〉잡지,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소제목형식으로 보면 1.  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등 이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리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국가중점도서의 항목으로〈개혁개방과 중국의 조선족〉이란 계렬 도서를 출판하게 되였는데 3농문제에 관한 책은 출판사의 홍천룡선생님과 저에게 맡겨 쓰게 하고 2015년도에 우리더러 농촌조사를 하라고 하여 목당강지구에 가서 녕안, 해림 등지를 돌고 계서지구에 가서 계서, 밀산 등지를 돌았으며 할빈지구에 가서 오상, 아성, 상지 등지를 돌았으며 가목사지구에 가서 화천현, 탕왕현 등 흑룡강 농촌 조선족 마을을 다니면서 3농문제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5. 우리 민족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기에 그런  보귀한 글들을 펴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밖에 선생님은 《중국조선족백년실록》 편찬사업에 참가하여 우리 력사 보존사업에 자신의 힘을 이바지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아, 이건 제가 《중국조선족백년실록》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기보 다 제가 쓴 전국로동모범 리호천사적이 여기에 수록되였지요. 6. 또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 회원으로서 항일전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민족의 력사발굴에도 한몫 하고있다지요. 2015년 한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성 원들이 대전자 항일전적지, 소사하항일전적지, 내두산 항일밀영유적지, 어랑촌 13용사전적지, 공도진렬사기념비 등 곳을 답사하였고 6월에는 장암동참사유적지를 답사했으며 10월에는 또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성 원들이 연변아동문학학회와 함께 흑룡강 동녕현에 있는 〈동녕요새〉를 탐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연변 조선어방송 애청자협회의 회원으로 협회에서 조직한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소왕청항일전적지, 진한장렬사릉원 등 곳을 답사 혹은 참배를 한 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에서는 이런 답사기를 묶어서 책으로 편찬하려고 하는데 저는 이런 답사기를 써서 협회에 교부하였고 〈동녕요새〉 탐방은 기행문을 써서 지난해《송화강》잡지에 발표했습니다. 7. 우리에게는 참으로 자랑할만한 력사가 있지요.우리의 선배들이 피땀을 흘려 바꾸어온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의 력사를 전해가는것은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국가에서도 이 방면의 사업을 지지하면서 비물질유산발굴 등 면에서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하고있잖아요, 선생님은 자신의 지식과 인맥으로 우리 연변의 명인들을 소개하여 많은 호평을 받은걸로 알고있습니다. 금년 6월에 장춘텔레비죤방송국에서 비물질문화유산《중국조선족명인 기록편》 찍으러 연변에 왔었는데 주정협문사자료실에 찾아가서 자기들의 촬영을 도와 줄 사람을 요구하였는데 주정협에서 저를 추천하여 제가 촬영팀을 안내하며  전국로동모법이며 농민 벼육종가인 최죽송, 전국로동모 범 김시룡, 전국로동모범 우편배달원 리호천, 전국3.8붉은 기수 리옥금, 전국민병선진공작자 리종률, 연변사과배 품종을 백육해 낸 최창호, 조선족의 우수한 교육자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 림민호, 중국조선족 음학에서 정률성에 이어 공로가 큰 허세록 등 8명의 기록편을 찍었습니다. 8. 자신의 실제행동으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보여주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항상 손에서 필을 놓지 않고 보람있는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지요. 기행문도 쓰시였다지요. 한국에서 여러곳을 다니면서 유람을 하고 모두 기행문을 써서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였지요. 려행수필을 쓰면 문학적으로는 차원이 더 높겠지만 저는 수필을 쓰는 능력이 모자라는 것도 있겠지만 독자들에게는 려행수기를 써야 글을 보면서 관광단과 함께 명승지를 돌아본다는 감을 주기에 중국에 돌아와서도 상해, 항주, 남경, 북경, 청도, 태산, 집안고구려유적지 등 곳을 다니면서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여러 신문에 발표하였고 조선의 평양, 금강산, 개성, 판문점, 동남아의 향항, 오문, 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그리고 대만 등  곳을 려행한 것을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길림신문에 30여 기를 련재로 발표하였습니다.   아나운서: 필봉으로 멋진 만년을 장식해가고 있는 선생님이신데요, 만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   맺는말:   2017년 8월 22일 밤 9시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에서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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