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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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2020년 11월 03일 13시 38분  조회:4653  추천:18  작성자: 주청룡
아리랑 생방송 《좋은 세상》

 
프로그램명:  <<좋은 세상>>

방송날자: 2020년 11월  2일 아침 8:00~8;40

방송내용: 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래     빈: 원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 주청룡

책임편집: 강순선-13179080088

사 회 자: 조일광, 김설화

---프로그램 节目头---

남; 70돐 축수연에 책출간식을 함께 거행해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뜻깊은 축수연을 맞이한 분이 계십니다.
녀; 바로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현재 로인협회회장직을 맡고 계시는 주청룡선생님이신데요.  
남; 오늘 “좋은 세상”프로에서는 주청룡선생님을 생방송실에 모시고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보람찬 삶을 증명해온 두권의 책으로 더 빛나게 맞이한 70돐 축수연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 기대합니다. 

**********************************************************************************생방송실에 나오신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로인협회회장이신 주청룡선생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 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청룡부교장; 인사 나누기

(1); 우선 70돐 축수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0월 25일  책 출간식을 함께 거행하는 의미있는 70돐 축수연은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맞이하게 되였다는데요. 어떻게 되여 이런 뜻깊은 축수연을 거행할 생각을 갖게 되였는지요?


답: 예, 금년은 제가 70돐생일을 맞는 해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물질적 재산을 물려주고 있는데 저는 한평생 교원공작을 하다니 자식에게 물려줄 물질적 재산을 축적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으면 무엇을 물려주겠는가고 생각하던 끝에 제가 퇴직한 다음 쓴 글들을 묶으면 책이 두권이 되겠는데 이것을 가문의 문화유산으로 하여 넘겨주면 의의가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번에 저의 생일 70돐을 맞으면서 이미 신문, 잡지, 방송에 발표된 글 가운데서 일부부를 뽑아 《주청룡문집》1, 2권을 출판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책을 묶은 것이 1권은 사회상의 화제를 다룬 칼럽집 《나는 중국조선족》이고 2권은 생활수기집 《성 쌓고 남은 돌》입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풍속은 환갑, 고희연 등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들이나 하객들이 나와서 절을 하는 형식으로 축수연을 치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행사가 더 많이 복잡하여지고 길어지지요. 저는 어쩐지 큰 상을 받으면서 절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객들이 많이 모인 기회에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면서 하객들에게 저의 책을 증정한다면 더  의의가 있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고희연 겸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게 되였습니다.

(2): 출간의식에 선보인 두권의 책에는 어떤 내용을 담겨져 있는지요?

답: 예, 제1권 “칼럼집”은 총 505페지, 127편의  칼럼으로 되여 있는데 크게 두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에서 쓴 칼럼들인데 주로 우리 조선족의 “3농문제”를 다룬 칼럼과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다룬 칼럼이고 다른 하나는 친척의 요청으로 2007년부터 2010년, 3년간 한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의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과제를 가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등 여러 편의 칼럼을 써서 한국사회에서 재한 중국조선족에 해한 인식을 바로 잡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 칼럼들입니다.

제2권 “생활수기집”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되여 있는데 주로는 국내 여러개 대도시와 동남아 여러개 나라와 지구 그리고 서유럽의 여러개 나라를 유람하고 쓴 기행문이고 그외에 또 생활수기부분들이 있습니다.

(3); 독특했던 70돐 축수연에 대한 하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을 같습니다.

답: 예, 저의 70돐축수연은 좀 특색적이였습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고희연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과 하객들에게서 절을 받는 형식으로 되였지만 저는 그런 형식은 없었고 생일단설기에 초불을 켜놓고 제자대표 넷이 나와서 우리 부부의 건강장수를 빌면서 함께 초불을 불어 끄는 형식으로 되였고 그 다음 책 출간의식은 저의 문집을 편집한 작가선생님이 편집과정을 소개하고 제가 문집출판소감을 이야기 하고 저의 원 단위, 룡정작가협회, 룡정아동문학회, 제자대표의 축사 등 절목들이 있어 전체 하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잃으켰습니다.



(4); 대단하십니다. 두권의 책에는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살아 오신 선생님의 기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에 70돐 축수연이 더 빛났다는데요. 한점 부끄러움없이 살아온 70인생에 대해 자부심과 큰 보람을 느껴셨다면서요?

답: 예, 그날 하객들이 많았는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저의 제자 몇이 저의70돐축수연 및 책출간식을 기획하면서 위챗을 통하여 자기들의 동창들에게 서로 알리였는데 예상밖으로 많은 제자들이 와서 축하를 한 것입니다. 이때 저는 한편생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한 보람이 오늘 이렇게 많은 제자들에게서 이런 축복을 받는구나 하는 심정에서 감격의 눈물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5); 칼럼집이 보여주다싶이  선생님께서는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문제에 대해 예리한 필봉으로 127편의 칼럼들을 써내셨는데요. 칼럼은 언제부터 어떻게 되여 쓰게 되였는지? 첫 칼럼이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4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인데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이젠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사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으며 무엇이든 하지 않고 매일 마작치기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쪽걸상을 가지고 나가서 령감들과 같이 매일 그늘밑에서 소일하며 보낸다는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생활이라고 생각였고 일종 심리적 불안한 감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던 고향마을과 주내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 다니며 3농문제에 대해 고찰하였습니다.

2006년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찰한 정황들을 종합하면
1.농촌인구가 현저히 감소되였고
2. 많은 농민들이 소농경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한된 경작지에서 저 소득의 수입으로 입고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있었으며
3. 3,40살을 먹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로총각들이 수두룩 하여 혼인균형이 파괴였으며 
4.  학생수가 많이 줄어들고 많은 학교가 페교되였으며
5.외국로무로 외지의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임대 혹은 양도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자료을 가지고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 가?”란 제목으로 2007년5월에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써서 흑룡강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에서 저의 육성으로 방송되였는에 처음으로 이런 내용의 글이 발표되니 조선족사회에서 큰나큰 반향을 잃으켰습니다. 

(6); 여러매체와 손잡고 많은 칼럼을 쓰시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한몫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답: 예, 2011년 6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오늘의 화제》담당편집선생님으로부터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다룬 칼럼 정기적으로 육성방송을 해 줄 것을 바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2011년 7월부터 매주 《오늘의 화제》프로에서 시리즈로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와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써서  1년반 매 주일마다 련속 저의 육성으로 방송하였는데 지금은 중앙인민방송뿐만 아니라 길림신문, 연변일보, 흑룡강 신문 등 조선족 보도 매체에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7); 지금까지 각 매체나 언론사에 발표한 칼럼들이 참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선생님의 관심이 깃들어 있는 애증넘치는 필들이 있다면은요?

    답: 예,  2010년 10월, 제가 살던 농촌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전에는 다른 민족이 한호도 없이 순 조선족이 60여 호 단란하게 모여 살던 곳이 2007년 한국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자 출국로무요, 대도시요 하면서 떠나다니 조선족은 몇 호밖에 없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이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누에 뽕입먹듯이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변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조사를 하여보니 거의 다 제 고향마을과 비슷한 상황이였습니다. 

    농촌조사 가운데서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 넘어 가는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토지는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락관 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농촌 마을이 다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족 농촌마을을 방문하면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경영모식도 많이 찾아내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면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 방면으로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본 지방 촌민들에게 임대주어 외지에 갔다가도 아무때든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둘째로는 과학적인 규모화 농업을 하여 제한된 농경지에서 보다 높은 수확 거두어야 하고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여 한국의 사육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가축, 가금 생태농장을 꾸리는것입니다.

넷째로는 자연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당지의 농산품, 특산품 등을 여러가지 명브랜드로 가공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리는 것이였습니다.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습니다.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려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하여 농사도 짓고 다종경영을 하면서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를 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였습니다.

여섯째로는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입니다.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춘 곳을 선택하여 집중촌을 건설하여 제한된 경작지를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많이 꾸리여 여유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키면 여유의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할수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을 건설하여 소도시화를 하는 것입니다. 소도시화를 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 불균형도 해결할수 있으며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으며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공업도 하고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저는 농촌조사를 개괄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란 제목으로 만여자 되는 글을 써서 2012년도에 흑룡강신문, 《농가》 잡지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글을 써서 중앙인민방송, 〈농가〉잡지,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소제목형식으로 보면

1.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등 이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리고2014년도에 저와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선생님이 연변인민출판사의 위탁으로 20여일간 흑룡강성의 농촌조선족마을을 현지조사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마을의 변화를 고찰 하고 3농문제를 다룬 계렬칼럼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는데   《길림신문》 ‘오늘의 화제’ 평의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8); 칼럼집의 한부분에는 최근 몇년래 해내외에 다녀오면서 체험들을 필봉으로 펴내셨다는데요?  한국대통령에게 편지를 올림만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조선족에 대한 대변이 깃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주로 써온 칼럼에 대해 상세히)

   답: 예; 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들이 3D업종 일을 하는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서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보면 중국에서 간 일부 젊은이들은 기술부문에서 일하면서 그 어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하였는데 3D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나의 친척도 포함)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여 저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로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제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저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저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에《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저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제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동포들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렬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간담회의 현장록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여 온 지구촌에 전파되였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들의 많은 절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중국동포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하여 저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9); 제2권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묶어진 생활수기집이라는데요. 퇴직후 부인과 함께 국내외 여러 나라와 지역들을 돌며 유람중 써낸 기행문들과 생활수기라면서요? 즐겁고 풍요로운 삶속에서 걷어낸 풍작이네요?

답: 예, 저는 퇴직후 안해와 함께 중국에서는 상해, 항주, 남경, 북경, 심양, 청도, 대만, 향항, 오문, 태산, 집안고구려유적지, 동녕요새 등 곳을 다니면서 유람하였고 국제 유람으로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제주도, 정선, 월미도, 진해, 장봉도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저의 옛조상의 사당 등 곳을 유람하고 조선의 평양, 금강산, 개성, 판문점을 유람하였으며 동남아의  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그리고 서유럽의 이딸리아, 반띠까노, 오지리, 독일, 스위스, 불란서 등 나라를 유람하고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길림신문, 연변일보, 송화강잡지 등에 련재로 발표하였습니다

(10); 이외에 생활수기도 여러편 썼다고 하던데 거기에서 가장 인상깊은 생활수기가 있다면은요?

답: 예, 이외에 생활수기도 24편을 썻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인상깊게 쓴 생활수기는 《KBS와 함께하는 송년의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칼럼을 써서 한국의 언론매체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재한 중국근로자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KBS방송사의 인정을 받아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조직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와 《KBS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되여 제가 중국동포들을 대변하여 말한 것이 전파를 타고 그 록화영상이  지구촌에 곳곳에 펴졌고 중국과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서 많은 절찬을 받은 것을 소재로 쓴 것이여서 가장 인상 깊은 수기라고 할 수있습니다.

(11); 우리민족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기에 이런 보귀한 글들을 펴내지 않았을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조선족민족력사문화에 관심을 갖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회원으로써 항일전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민족의 력사발굴에 한몫 기여하는건 물론 자신의 인맥과 실력으로 이 땅을 가꾸어온 우리 조선족 명인들을 소개하는데 동조해오셨다지요?

답: 예, 2015년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력사동 호회” 성원들이 대전자 항일전적지, 소사하항일전적지, 내두산 항일밀영유적지, 어랑촌 13용사전적지, 공도진렬사기념비, 장암동참사유적지를 답사하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성원들이 연변아동문학학회와 함께 흑룡강 동녕현에 있는 〈동녕요새〉를 탐방하였으며 이외 15만 탈출사건 력사유적지, 훈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답사  처창즈항일유격 근거지, 소왕청항일전적지, 진한장렬사 릉원 등 곳을 답사 하고 〈동녕요새〉 탐방 기행문은 이미 2016년도에 《송화강》잡지에 발표하였고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에서 답사기를 책으로  편찬하는데 다른 답사기도 다 써서 이미 협회에 교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춘텔레비죤방송국에서 비물질문화유산《중국조선족 명인기록편》 찍을때 주정협의 추천으로 촬영팀을 안내하여  전국로동모법이며 농민 벼재배전문가인 최죽송, 전국로동모범 김시룡, 전국로동모범 우편배달원 리호천,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전국민병선진공작자 리종률, 연변사과배 품종을 백육해 낸 최창호, 조선족의 우수한 교육자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 림민호, 중국조선족 음학사에서 정률성에 이어 공로가 큰 허세록 등 8명의 기록편을 찍었고 제가 쓴 전국로동모범 리호천사적이 《중국조선족백년실록》에 수록되였습니다.

(12): 우리민족사회를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같아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분주히 보내신다면서요? 앞으로 타산에 대해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이미 써놓은 글들을 정리하면 또 책이 한권 거의 되고 앞으로도 제발로 걸어다니고 저의 사유로 글을 쓸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 《력사동호회》를 따라 력사답사를 하고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은 유리한 일을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여 방송, 신문,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출판하려 합니다.

**********************************************************************************결속어;  략 …
    …………
멋진 필봉과 취미생활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장식해가고 있는 주청룡선생님의 만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리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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