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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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아리랑방송 《좋은 세상》 댓글:  조회:2867  추천:0  2021-05-25
  아리랑방송 《좋은 세상》   프로그램명 《좋은 세상》  방송날자 2021년 5월 24 일 주     제 기형적인 조선족소비문화에 대해 래     빈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 주청룡선생님 책임편집 강순선 사회자 조일광, 김설화           ---간주곡과 함께---   남; 례의민족인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쌀한알도 절약하는것을 미덕으로 삼아왔었는데요. 생활수준이 제고됨에 따라 절약의 미풍량속이 조금은 색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녀; 결혼, 생일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버젓이 차려놓고는 음식물이 절반넘게 남아버리는가하면 체면소비를 하는 현상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요. 남; 이런 과소비와 랑비현상은 가정경제를 파괴하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큰 피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   녀; 오늘 《좋은 세상》프로에서는《조선족의 기형적소비에 대해서》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프로그램 《로고송》 ************************************************************물음; (*);먼저 생방송실에 모신 원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주청룡 부교장선생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청룡; 인사나누기 ---   (1); 선생님께서는 사회발전과 생활수준의 제고로 산생된 조선족 기형소비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셔 “조선족 기형소비에 대해” 여러 칼럼을 발표하셨다는데요.    예, 이 방면에 대하여 《생일을 간소하게 치렀으면》, 《체면소비를 삼가하였으면》, 《집과 자가용을 사 주는 것도 부모의 의무인가?》, 《조선족의 기형적소비에 대하여》이렇게 네편의 칼럼을 썼습니다.     (2); 조선족들의 과소비현상은 타지역이나 타민족들의 눈에도 좀 심하게 비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고해야 할 과제가 아닐가 싶네요.   예, 시대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생활수준도 제고 되고 생활절주도 빠라야 된다고 봅니다. 절약 절약하면서 생활방식도 제고 되지않고 생활절주도 예날처럼 느릿느릿하면 우리의 생활수준이 제고 된것이 아니고 현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요. 절약하라 하여 소비를 하지 말란 말이 아닙니다. 소비는 랑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랑비를 반대하는 것은 소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소비를 억제하지도 않습니다. 랑비반대는 소비자극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소비가 있어야만 생활수준이 제고됩니다. 생산과 소비의 변증관계를 보면 생산이 소비를 결정하고 소비가 생산을 촉진합니다. 생산해 낸 산품이 시장에 나와 소비자들에게 팔리지 않으면 경제운행이 침체상태에 이르고 사회재생산의 과정도 정지됩니다. 생산, 소비, 재생산 이렇게 경제가 순환하여야 인민의 생활이 향상됩니다. 그러므로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반드시 소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소비를 하되 불필요한 기형적 소비를 하지 말고 그 돈을 자기의 적성에 맞는 창업에 쓰거나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더 바른 소비를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도 많은 제고를 가져왔으며 그 어떤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고 가장 앞줄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1992년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사회자 조충상이 연변에 왔을 때 인구비례로 하면 연변의 택시흐름량이 전국에서 광주 다음으로 두번째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연변사람들이 생활수준이 제고되였고 생활절주가 빠르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생활절주가 빠르고 생활수준이 많은 제고를 가져온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가운데는 떠벌려 랑비하는 바르지 못한 기풍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런 기형적인 소비는 절제할 바라고 봅니다. 우리와 같이 사는 한족들은 새내에서 1원짜리 대중교통을 리용하지 택시를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을 보면 뻐스를 타고 1원에 갈 곳을 급한 일이 아니면서 5원, 10원 지어는 몇십원을 팔면서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바로 사치를 피우는 기형적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연변의 정황을 보면 보편적으로 택시는 한족들이 몰고 타기는 조선족들이 많이 탑니다. 한족택시기사들의 말을 빌면 “조선족들이 없으면 우리 택시기사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들의 돈이 한족들에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도시의 진출 혹은 출국하여 돈을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친구들을 청하여 식당놀이를 하는 것은 규례가 아닌 규례로 되고 있습니다. 다년간 외지에 가 있다니 친구들이 그리웠고 또 돈도  벌어왔으니 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아 정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만하기도 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채를 주문할 때에 친구들이 채를 먹을 만치 올리라고 하면 돈을 벌어왔다는 게 째째하게 놀겠는가 하며 식탁에 다 먹지도 못할 채를 상다리 부러지게 올립니다. 결국파티가 끝날때 보면 절반도 먹지 못하고 쓰레기로 처리됩니다. 먹을 만치 채를 올리면 체면이 깎이고  상다리 부러지게 채를 올리면 체면이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기형적 소비라고 봅니다. 체면소비란 관념을 버리고 랑비가 없도록 먹을 만치 적당하게 채를 올리는 것이 바로 소비관념에서 제창할 바라고 생각됩니다.    (3); 절약은 미덕이라 하잖아요.  먼저 과소비와 랑비의 련관성에 대해 간단히 말씀주시렵니까?    과소비란 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고 경제발전수준에 맞지 않으며 기본적인 욕구와 지불능력을 넘어선 일종 비뚤어진 지속 불가능한 소비방식을 말합니다. 이는 개인의 품격과 사회기풍을 회손 하고 자원을 랑비합니다. 그 특점을 말하면 한 나라와 지구의 현실적인 경제능력을 초월하고 재부의 랑비를 조성하며 자연자원과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단시기적인 향수에 만족하고 경제의 장기적인 지속적인 발전을 저애하고 주민의 소비수준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는 데도 불리합니다. 그 위해성을 말하면 개인의 품격과 사회기풍를 파괴하고 자원을 랑비하고 빈부의 차이를 늘이고 사회통합을 파괴하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시키며 부자를 미워하는 현상을 초래하며 성공관의 왜곡을 초래 하고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의 구축에 불리한바 소득분배 조절을 통해 교육을 강화해 사치풍조를 개변해야 합니다.   (4); 그럼 조선족들의 과소비와 랑비현상이 어떤 면에서 표현되는지 그 실태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합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결혼식음식상이나 생일상을 차리는데서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과소비와 음식물낭비현상들이 존재합니까?     백성들은 자식들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다든가 생일을 굉장히 치른다든가 하는 과소비현상은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 일부 기풍이 바르지 못한 기관의 간부거나 큰 기업가들로부터 내려 온 바람이라고 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식이거나 기타 연회를 간소하게 치르면 자신의 신분과 체면에 맞지 않은 걸로 여기며 찬치에 하객이 많은가 적은가를 자기의 신분과 체면을 비기는 기준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객이 많으면 지위가 높고 체면에 맞는 것이고 하객이 적으면 자기의 신분과 체면에 맞지 않는 걸로 여기였습니다. 이러한 과소비와 체면소비로 하여 곤혹을 겪는 것은 저소득층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의 한 이웃은 삼륜차로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입니다. 얼마전 아들의 결혼잔치를 치르게 되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남들보다 더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들만치는 치러 주려고 친척, 친구들에게서 돈을 꾸어 아들의 잔치를 치러 주었는데 하객들의 보기에도 체면이 깎이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체면뒤에 오는 경제적 부담은 엄청나게 컸습니다. 비록 체면은 깎이지는 않았다지만 그 많은 빚은 언제 갚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체면소비라는 것이 없이 자기 집의 형편에 맞게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렀더라면 그렇게 큰 빛더미에 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가서 몇번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였는데 한국의 례식장의 식당을 보면 뷔페식이였습니다. 하객들은 모두 자기절로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을 만치 담아가지고 오니 마지막에 채가 남아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하여 누구 하나 주인측이 손님접대가 그닥잖다고 나무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규례로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반듯이 이런 소비를 따라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5); 결혼식, 생일상을 버젓히 차리는 이런 과소비로 인한 음식물랑비현상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깝고 가슴이 참 많이 아프지요?   예, 지금 과소비로 하여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갚고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지난 세기 1959년, 60년, 61년 3년 련속되는 재해와 쏘련의 빛재촉으로 하여 국민경제가 극히 곤란하고 량식고생하던 집체식당시기를 겪어 왔었는데 그때는 콩각대를 푹 삶아 갈아서 거기서 전분을 받아 거머거먼 죽물을 먹을 때의 일이 생각나면서 더욱 가슴이 아파납니다. 그렇다하여 생활이 발달한 현시대에 와서 절약한다고 하여 배를 고르며 아껴 먹으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는 처리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연변텔레비죤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보면 불후한 어린이들이 잎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입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먹다남은 음식이 쓰레기로 처리될 때에 이러한 불후한 어린이들이 생각나고 지금도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를 곯으면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후진국 나라 어린애들이 이렇게 먹다남은 음식을 보면 얼마나 먹고싶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6); 결혼식이나 생일상에서 뿐만아니라 평시 가정에서도 과소비로 인한 음식 물랑비 현상들이 많은데요. 이것은 가정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 하는지요?   예, 결혼식이나 생일상에서 뿐만아니라 평시 가정생활에서도 과소비로 인한 랑비현상이 많이 존재합니다. 례하면 육류, 어류나 비닐봉지로 포장된 음식제품들을 가득 사다가 랭장고에 1년이고 2년이고 처박아 두었다가 나중에는 류통기한이 지나 변질하여 맛도 보지 못하고 쓰레기를 처리되는 현상들이 있는데 이것도 가정생활에서 불필요한 소비이고 불필요한 경제 지출이라고 봅니다. 음식물의 랑비는 량식, 채소, 식용유 자체의 랑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음식물의 생산에 투입되는 물, 토지, 에너지와 기타 생산자료의 무효한 소모를 의미합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이  쓰레기로 처리될 때 거기에서 나오는 악취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쓰레기를 담은 분해 불가능한 비닐봉지는 지구를 오염시키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식랑비를 하지 않는 것은 자원랑비를 방지하고 환경오염을 방지하고 지구를 살리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7); 우리는 《절약은 미덕이다. 연필한꽁다리라도 아껴쓰라.》는 교육을,/ 집에서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쌀 한알이라도 흘리지 말고 버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왔지만요.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악순환적인 과소비와 음식물랑비현상은 계속 존재하고 있는데요.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예, 백성들은 체면소비란 이 과소비현상이 오게 된 주요한 원인은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 일부 기풍이 바르지 못한 기관의 간부거나 큰 기업가들로부터 내려온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도 여파로 내려오면서 악순환으로 되면서 남들이 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데 나만 음식을 먹을 만치 적당히 올리면 남들이 나를 뭐라할가? 나의 체면이 깎이지 않을가? 하는 우려심에서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올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돈을 팔때에는 값이 싼 채들을 올리며 돈을 아끼면서도 남들이 값도 마침하게 적당하게 올리면 짠돌이 같은 린색한 사람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인측이 차린 음식을 타발이 없이 먹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떻고 저것이 어떻고 하면서 자기의 구미에 맞는 고급료리를 올리라고 요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주인측에서는 할 수 없이 여러가지 많은 채들을 올리는 과소비란 악순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해 8월, 습근평 총서기는 음식랑비행위를 제지할 데 관하여 중요지시를 내려 립법을 강화하고 감독관리를 강화하며 효과적 조치를 취하고 장기적 효과기제를 구축하여 음식랑비행위를 견결히 제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랑비가 수치이고 절약이 영광스럽다는 량호한 기풍이 형성되도록 추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8); 체면때문에 모든 면에서 풍성함을 추구하다보니 과소비가 란무한데요. 솔직히 오는 손님들 앞에서 체면도 서고 버젓히 차려야 한다는 이런 관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체면소비는 삼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제한된 가정수입으로 질적인 생활을 추구하여야지 불 필요한 체면으로 과소비를 하면서 돈을 랑비하면서 가정생활에 영향을 줄 리유는 없다고 봅니다. 체면소비를 한다하여 자기의 정성과 진심을 다 표달하는 것도 아니고 과소비를 한다하여 차린 음식이 전부 연회참석자들에데 대접되는 것도 아니며 숟한 돈을 팔고 그저 음식찌꺼기로 처리되고 있으니 이러한 불필요한 기형적 소비는 반드시 절제하여야 합니다. 연회를 차리는 주인측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체면치례를 하지 말고 자기의 실정에 맞게 진정어린 마음으로 음식을 차려 손님을 접대하고 연회참석자들은 축복의 마음으로 주인측의 성의를 달갑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여 서로 부담스럽거나 불편한 마음이 없는 즐거운 장소로 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9); 우리 조선족들의 과소비는 자녀에게 집과 자가용을 사주어야 한다는 의무관념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안타까움이 있으신지요?    예, 자식들이 결혼한다면 부모로서는 매우 기쁜일이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이 사회를 보면 자식들의 결혼에 대하여 기쁨보다 근심이 앞서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는 아들을 가진 저소득층의 부모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물질생활수준이 제고되면서 지금 결혼당사자들은 결혼전의 물질적 요구도 만만치 않습니다. 박모 녀성은 부부간이 다 집체 기업단위에서 일하다가 둘 다 정리실업을 당하여 로무시장에 나가서 일당으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여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아들을 공부를 시키기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 여러 곳에서 7만원의 돈을 꾸어가지고 거간군을 통하여 한국로무길에 올랐습니다.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돈을 벌어  빚도 물고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도 다 하였습니다. 거간군을 통하여 가다니 불법체류여서 아들이 대학에 간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도 아들보러 오지 못하고 굽석굽석 일만 하였습니다. 10년 넘어 벌었으니 아들을 대학공부도 시키고 손에 쥔 돈도 적지 않았습니다. 불법체류라 숨어 다니면서 일하다니 서울구경도 못하고 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니 고달팠던 10년 한국생활을 접고 귀국하였습니다. 이 돈이면 집도 사고 아들을 장가도 보내고 아들의 집도 살 수 있겠다고 흐뭇한 생각을 굴리면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우선 아들의 집부터 사고 장식하여 아들의 결혼준비를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집은 아들의 결혼식을 치르고 천천히 사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느리 될 사람이 시어머니에게 돈이 있는 것을 알고 자가용을 사줄 것을 요구할 줄이야. 너무도 어이 없었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을 자그마한 도회지에서 출근길도 10분이면 족할 터인데 무슨 자가용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허영심에서였습니다. 박모 녀성은 자가용을 사 줘야 하는가 아니면 자기들의 집을 사야 하는가 고민중에 있었습니다. 자가용을 사주면 자기네는 한평생 부억에 불을 때는 온돌집에서 살아야 하고 안 사주면 고부관계가 원활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지요. 방법이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자가용을 사주고 자기네는 지금도 불을 때는 낡은 온돌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박모녀성이 사랑하는 가정을 떠나 10년 타향살이를,  그것도 불법체류라 숨어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겠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남편도 안해를 외국에 보내고 가정살림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0년 이런 고생을 하였으면 인제 그들이 60이 많이 넘는 나이라 아들을 장가를 보내고 행복한 로후를 맞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며느리 될 사람은 자기들은 현시대 사람이므로 현시대에 맞는 생활을 해야하고 시부모네는 늙은이기에 옛날 방식대로 불을 때는 온돌집에서 살아야 된다는 식이였고 아들은 부모들이 자기를 낳아 기르고 대학공까지 시키면서 이렇게 고생을 하였으므로 인제는 행복한 로후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좀만 가지였다면 자기의 미혼부의 그런 요구를 단연히 거절하였을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집과 자가용을 사 줘야 한다는 관념은 자식들로 하여금 자립하지 않고 부모가 늙어 죽을때까지 어미의 즙을 빨아 먹는 거미족이 되게끔 하게 합니다.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18세 후부터는 모들 것을 자립하게 한다고 합니다. 제가 얼마 전 연길에서 한국인 한 기업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천만 자산을 갖고 있지만 아들에게는 “나는 너에게 대학공부까지 뒤바라지를 하고 그 다음부터는 결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자립하여야 한다. 나의 이 자산은 우리의 로후생활과 자선사업에 쓰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아들도 “예, 저도 부모님의 신세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자립하며 앞으로 아버지보다 더 큰 사업을 벌리려 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식들의 생활에 대하여 부모들이 어디까지 대여 주는가 하는 것은 집집마다 다를 수 있고 부모들의 자원적인 행위이지만 자식들의 집을 사준다든가 자가용을 사준다든가 하는 것을 부모의 의무로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자기들은 현시대 사람이므로 현시대에 맞는 생활을 해야하고 부모들은 늙었이기에 옛날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여생이 많지 않은 부모들을 어떻게 더 행복하게 생활하겠는가를 생각하여야지 절대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부모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10); 과소비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전형적인 문제라면 부조문제가 아닐가 싶은데요. 누구나 겪게 되는 경조사에 부조를 하는 것은 미덕이였지만 예전의 고유의 전통이 퇴색하여 기형적으로 변한 부조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분들이 많은데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많은 분들 또한 동감하지 않을가 싶습니다. ( 바람직하지 못한 부조현상에 대해 실례를 들어 이야기)   예전의 우리 민족의 전통 부조문화를 보면 집안에 경조사가 생기면 서로 일손을 도왔고 물질적 생활조건이 풍요롭지 못하던 시절에 쌀, 기름, 술 등을 보내여 서로 도와주면서 경조사를 치르던 것으로 내려왔는데 지금은 생활수준이 많이 제고 되여 경조사를 모두 례식장에 가서 진행하므로 크게 일손을 도울 것이 없게 되였으며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쌀, 기름, 술 등 물질적 부조가 필요없게 되여 그 대신 약간의 돈으로 경사에는 축의금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고, 상사에는 조의금으로 상부상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전통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일부는 기형적인 부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패가 성행하던 시기에는 일부 령도간부들은 경조사를 돈벌이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경조사를 성대하게 치러 거액의 돈을 받아들이고 일부 승진을 요구하는 사람들이거나 자기 개인의 리익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은 높은 관직자들의 경조사를 회뢰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거대한 현금거래가 발생되기도 하였습니다.   (11); 이런 갖은 기형적인 과소비로 하여 존재하게 되는 현상과 어떤 문제점들이 뒤따릅니까?   여러해 전인데 다른 지방에서 연변에 와서 사업하다가 다시 본 고장으로 돌아가서 연변인민들에게 보낸 한 교원의 편지를 《연변일보》에서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저는 원래 이곳에서 교원사업을 하다가 연변이 로임이 높다는 말을 듣고 연변에 가서 교육사업을 하였는데 가보니 확실히 이곳보다 로임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높은 로임이라지만 대부분 부조돈으로 나가다니 생활하기 곤란하여 다시 본고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본고장에 돌아오니 로임은 비록 연변에 있을 때보다 적었지만 부조금이 없이 기본상 그 로임이 전부 생활에 쓰이니 연변에서의 높은 로임을 받기보다 훨씬 낫습니다.”라고 하면서 연변인민들에게 기형적소비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우리들에세 사색의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지금 부조금액을 보면 보통 200원, 300원을 하고 있는데 이런 부조도 한두 번이면 몰라도 한달에 7,8번 지어 10번 넘을 때도 있는데 그달 로임의 절반을 넘게 부조돈으로 나가니 가정생활에 큰 충격을 주게되니 또 부부간의 언쟁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부조바람은 우리 조선민족의 미량풍속에 먹칠을 하게 되는데 연변의 소품 《부조바람》도 연변의 이런 실정에 비추어 아주 해학적으로 엮은 소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2); 요즘은 몇년전에 비해 그래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이런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요?   예, 일반적으로 연변에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생일을 친족들이나 모여서 쇠지 손님들을 청하여 흥성하게 쇠지 않는데 조선족들이 생일잔치를 치르면서 청하니 내키지 않은 마음이지만 부조금을 들고 가서 참석합니다. 그리고 6,7년전까지만 해도 단위에서 령도간부들이 생일에 청하면 일반 직원들은 역시 내키지 않는 마음이지만 할 수 없이 참석하였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로임이 높지 못한데 새일, 결혼, 장례에 모두 참가하다니 생활에 큰 충격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습근평새시대에 들어와서 부패분자들을 타격하고 바르지 못한 기풍을 바로잡는 운동을 벌려 령도간부들이 경조사에 손님을 많이 청하지 못하게 하고 생일에 손님을 청하지 못하게 하니 가장 찬성하는 것이 바로 일반 백성들입니다. 그만큼 부조돈이 나가지 않으니깐요. 경제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결혼축하, 생일축하를 갈 때에는 생화나 축하편액, 혹은 정교한 기념품을 들고 가서 상징적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지만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이런 기념품보다 경제적 가치를 많이 추구하기에 축의금을 갖고 가는 것이 관례로 되고 있는데 우리도 친척이나 친구들의 생일에 초대되였다면 발달한 나라를 따라배워 생화나 축하편액, 혹은 정교한 기념품을 들고 가서 상징적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는 것을 관례로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13); 과소비로 인한 랑비 등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자신은 물론 사회는 반드시 어떤 극복대책들이 필요한지요 어떤 바램을 가져보는지요?   예, 이 문제는 금년도 4월 29일에 제13기전국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제28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식품랑비반대법》을 표결 통과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1. 공무활동식사는 규정 기준을 초과하지 못한다. 2. “그릇비우기행동”의 소비자에게 장례할 수 있다. 3. 음식을 주문한 후 랑비하면 음식물 찌거기 처리비를 받을 수 있다. 4. 상가가 소비자에게 과량소비를 유도할 경우 최고 1만원이 벌금을 부과 한다.  5. 식품생산경영자가 엄중한 랑비를 하면 최고로 5만원의 벌금을 부과 한다. 6. 폭음 폭식 동영상을 제작배포하면 최고 10만원의 벌금을 부과 한다.”라고 하였는데 사회상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집행하고 우리 모두 령도간부로부터, 나로부터 솔선적으로 우리 조선족의 례절바른 미량풍속을 지켜가며 아름다운 소비문화를 가꾸어 갓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결속어; 경제형편이 허락되지 못하면서도 안면이 가려워 통이 크게 내는 음식상차림으로 인한 과소비와 랑비현상은 가정경제를 파괴하게 하는것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큰 피해를 끼치기도 한답니다.  과소비로 인한 음식물랑비현상이 하루빨리 건전하게 발전하는 우리의 음식문화를 기원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282    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댓글:  조회:4925  추천:18  2020-11-03
아리랑 생방송 《좋은 세상》   프로그램명:  방송날자: 2020년 11월  2일 아침 8:00~8;40 방송내용: 책 출간식과 함께 거행한 뜻깊은 70돐 축수연 래     빈: 원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 주청룡 책임편집: 강순선-13179080088 사 회 자: 조일광, 김설화 ---프로그램 节目头--- 남; 70돐 축수연에 책출간식을 함께 거행해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뜻깊은 축수연을 맞이한 분이 계십니다. 녀; 바로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현재 로인협회회장직을 맡고 계시는 주청룡선생님이신데요.   남; 오늘 “좋은 세상”프로에서는 주청룡선생님을 생방송실에 모시고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보람찬 삶을 증명해온 두권의 책으로 더 빛나게 맞이한 70돐 축수연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 기대합니다.  **********************************************************************************생방송실에 나오신 원 룡정시직업중등전문학교 부교장이며 로인협회회장이신 주청룡선생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 습니다. 반갑습니다. 주청룡부교장; 인사 나누기 (1); 우선 70돐 축수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0월 25일  책 출간식을 함께 거행하는 의미있는 70돐 축수연은 하객들의 존경과 축복속에서 맞이하게 되였다는데요. 어떻게 되여 이런 뜻깊은 축수연을 거행할 생각을 갖게 되였는지요? 답: 예, 금년은 제가 70돐생일을 맞는 해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물질적 재산을 물려주고 있는데 저는 한평생 교원공작을 하다니 자식에게 물려줄 물질적 재산을 축적한 것이 없습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으면 무엇을 물려주겠는가고 생각하던 끝에 제가 퇴직한 다음 쓴 글들을 묶으면 책이 두권이 되겠는데 이것을 가문의 문화유산으로 하여 넘겨주면 의의가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번에 저의 생일 70돐을 맞으면서 이미 신문, 잡지, 방송에 발표된 글 가운데서 일부부를 뽑아 《주청룡문집》1, 2권을 출판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책을 묶은 것이 1권은 사회상의 화제를 다룬 칼럽집 《나는 중국조선족》이고 2권은 생활수기집 《성 쌓고 남은 돌》입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풍속은 환갑, 고희연 등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들이나 하객들이 나와서 절을 하는 형식으로 축수연을 치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행사가 더 많이 복잡하여지고 길어지지요. 저는 어쩐지 큰 상을 받으면서 절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객들이 많이 모인 기회에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면서 하객들에게 저의 책을 증정한다면 더  의의가 있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고 고희연 겸 저의 문집출간의식을 하게 되였습니다. (2): 출간의식에 선보인 두권의 책에는 어떤 내용을 담겨져 있는지요? 답: 예, 제1권 “칼럼집”은 총 505페지, 127편의  칼럼으로 되여 있는데 크게 두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에서 쓴 칼럼들인데 주로 우리 조선족의 “3농문제”를 다룬 칼럼과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다룬 칼럼이고 다른 하나는 친척의 요청으로 2007년부터 2010년, 3년간 한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의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과제를 가지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등 여러 편의 칼럼을 써서 한국사회에서 재한 중국조선족에 해한 인식을 바로 잡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 칼럼들입니다. 제2권 “생활수기집”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되여 있는데 주로는 국내 여러개 대도시와 동남아 여러개 나라와 지구 그리고 서유럽의 여러개 나라를 유람하고 쓴 기행문이고 그외에 또 생활수기부분들이 있습니다. (3); 독특했던 70돐 축수연에 대한 하객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을 같습니다. 답: 예, 저의 70돐축수연은 좀 특색적이였습니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고희연은 당사자가 큰 상을 받고 친척과 하객들에게서 절을 받는 형식으로 되였지만 저는 그런 형식은 없었고 생일단설기에 초불을 켜놓고 제자대표 넷이 나와서 우리 부부의 건강장수를 빌면서 함께 초불을 불어 끄는 형식으로 되였고 그 다음 책 출간의식은 저의 문집을 편집한 작가선생님이 편집과정을 소개하고 제가 문집출판소감을 이야기 하고 저의 원 단위, 룡정작가협회, 룡정아동문학회, 제자대표의 축사 등 절목들이 있어 전체 하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잃으켰습니다. (4); 대단하십니다. 두권의 책에는 그간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살아 오신 선생님의 기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기에 70돐 축수연이 더 빛났다는데요. 한점 부끄러움없이 살아온 70인생에 대해 자부심과 큰 보람을 느껴셨다면서요? 답: 예, 그날 하객들이 많았는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저의 제자 몇이 저의70돐축수연 및 책출간식을 기획하면서 위챗을 통하여 자기들의 동창들에게 서로 알리였는데 예상밖으로 많은 제자들이 와서 축하를 한 것입니다. 이때 저는 한편생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한 보람이 오늘 이렇게 많은 제자들에게서 이런 축복을 받는구나 하는 심정에서 감격의 눈물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5); 칼럼집이 보여주다싶이  선생님께서는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문제에 대해 예리한 필봉으로 127편의 칼럼들을 써내셨는데요. 칼럼은 언제부터 어떻게 되여 쓰게 되였는지? 첫 칼럼이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학교에서 지도자 직에 있다가 2006년 정년퇴직을 4년 앞두고 제2선에 물러나게 되였습니다. 제2선에 물러난다는 것은 기실 집에서 편히 쉬라는 것인데 서운한 말로 한다면 이젠는 성 쌓고 남은 돌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극진히 사업을 사랑하고 열심히 일해 오던 내가 사업을 그만둔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로 느껴졌으며 무엇이든 하지 않고 매일 마작치기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쪽걸상을 가지고 나가서 령감들과 같이 매일 그늘밑에서 소일하며 보낸다는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생활이라고 생각였고 일종 심리적 불안한 감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련 며칠 생각을 굴리다가 하루는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그럼 내가 중국조선족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런 취지를 갖게 되니 우리 조선족사회에 대하여 많이 사색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살던 고향마을과 주내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 다니며 3농문제에 대해 고찰하였습니다. 2006년 여러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고찰한 정황들을 종합하면 1.농촌인구가 현저히 감소되였고 2. 많은 농민들이 소농경제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한된 경작지에서 저 소득의 수입으로 입고 먹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있었으며 3. 3,40살을 먹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로총각들이 수두룩 하여 혼인균형이 파괴였으며  4.  학생수가 많이 줄어들고 많은 학교가 페교되였으며 5.외국로무로 외지의 사람들에게 경작지를 임대 혹은 양도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사자료을 가지고 “농촌조선족 인구의 이전을 어떻게 볼것인 가?”란 제목으로 2007년5월에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써서 흑룡강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에서 저의 육성으로 방송되였는에 처음으로 이런 내용의 글이 발표되니 조선족사회에서 큰나큰 반향을 잃으켰습니다.  (6); 여러매체와 손잡고 많은 칼럼을 쓰시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한몫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답: 예, 2011년 6월,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의 《오늘의 화제》담당편집선생님으로부터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다룬 칼럼 정기적으로 육성방송을 해 줄 것을 바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2011년 7월부터 매주 《오늘의 화제》프로에서 시리즈로 중국조선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어떤 모순과 갈등이 있는가?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것인가? 하는 문제와 기타 사회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써서  1년반 매 주일마다 련속 저의 육성으로 방송하였는데 지금은 중앙인민방송뿐만 아니라 길림신문, 연변일보, 흑룡강 신문 등 조선족 보도 매체에 계속하여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칼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7); 지금까지 각 매체나 언론사에 발표한 칼럼들이 참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선생님의 관심이 깃들어 있는 애증넘치는 필들이 있다면은요?     답: 예,  2010년 10월, 제가 살던 농촌 고향마을에 다녀오게 되였는데 그전에는 다른 민족이 한호도 없이 순 조선족이 60여 호 단란하게 모여 살던 곳이 2007년 한국 방문취업제 문이 열리자 출국로무요, 대도시요 하면서 떠나다니 조선족은 몇 호밖에 없고 대부분 다른 민족들이 밭을 부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다른 민족에게 누에 뽕입먹듯이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변의 여러 농촌들을 돌아보면서 3농문제를 조사를 하여보니 거의 다 제 고향마을과 비슷한 상황이였습니다.      농촌조사 가운데서 우리의 토지가 타민족에게 넘어 가는것이 가슴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토지는 임대한 것이기에 기한이 되면 도로 찾을수 있다고 하면서 아주 락관 적이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길고 세대가 바뀌게 되면 자연히 그 임대가 경영권으로 넘어갈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대학교나 기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과학적인 영농법을 배워가지고 본 고장에 와서 규모화 농업을 하려고 하여도 발을 붙일 자리마저 없게 될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을 영영 잃게 될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농촌 마을이 다 그런것은 아니였습니다. 저는 우리 조선족 농촌마을을 방문하면서 여러가지 선진적인 경영모식도 많이 찾아내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서 토지가 타민족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면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 방면으로 노력하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외지에 나간 촌민들의 토지를 촌민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본 지방 촌민들에게 임대주어 외지에 갔다가도 아무때든 돌아와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둘째로는 과학적인 규모화 농업을 하여 제한된 농경지에서 보다 높은 수확 거두어야 하고 셋째로는 생태농장을 꾸리여 한국의 사육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운 사육기술로 고향에 돌아와서 가축, 가금 생태농장을 꾸리는것입니다. 넷째로는 자연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당지의 농산품, 특산품 등을 여러가지 명브랜드로 가공하여 수출형 농업을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는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리는 것이였습니다. 분산된 농업으로는 다수확을 따낼수 없습니다. 농민전업합작사 혹은 전문농장을 꾸려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하여 농사도 짓고 다종경영을 하면서 통일관리, 통일생산, 통일수확, 통일가공, 통일판매를 하여 규모화, 기계화, 현대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였습니다. 여섯째로는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입니다. 분산된 자연툰을 합병하여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춘 곳을 선택하여 집중촌을 건설하여 제한된 경작지를 감농군들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많이 꾸리여 여유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키면 여유의 로동력을 합리하게 배치할수있습니다. 모두어 말하면 공농업이 결합된 집중촌을 건설하여 소도시화를 하는 것입니다. 소도시화를 하면 도시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적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 총각들의 혼인 불균형도 해결할수 있으며 인구가 증가되면 자연히 학생수도 늘어나 우리민족 교육도 보장할수 있으며 조선족공동체를 더욱 건전히 구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에 들어가 창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출국하여 번 돈으로 본 고장에서 집중촌건설에 투자하여 공업도 하고 과학적인 규모화농업을 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도 가꾸고 지킬수 있으며 이 터전을 우리의 후세에 넘겨 줄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으로 저는 농촌조사를 개괄하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우리가 가꾸고 지키자”란 제목으로 만여자 되는 글을 써서 2012년도에 흑룡강신문, 《농가》 잡지와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 방송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한수교 20주년을 맞으면서 “중한수교와 중국조선족사회”란 글을 써서 중앙인민방송, 〈농가〉잡지,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한국의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소제목형식으로 보면 1.자랑스러운 중국조선족 2. 중한수교전의 중국조선족사회  3. 중한수교후의 중국조선족사회  (1) 연해도시, 대도시에로의 인구이동  (2) ‘코리안드림’으로 인한 한국진출 (3) 외화수입은 자지방의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4) 인구이동이 조선족사회에 미친 영향 1) 조선족집거지 인구의 감소와 분산으로 하여 조선족공동체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2)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 점차 타민족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3) 농촌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렵게 되였다 4) 리혼률이 높아가고 결손가정자녀가 많아지고 있다 4. 금후의 전망 등 이러한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리고2014년도에 저와 농가잡지 주필 홍천룡선생님이 연변인민출판사의 위탁으로 20여일간 흑룡강성의 농촌조선족마을을 현지조사하면서 개혁개방후의 농촌조선족마을의 변화를 고찰 하고 3농문제를 다룬 계렬칼럼을 《길림신문》에 발표하였는데   《길림신문》 ‘오늘의 화제’ 평의에서 2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8); 칼럼집의 한부분에는 최근 몇년래 해내외에 다녀오면서 체험들을 필봉으로 펴내셨다는데요?  한국대통령에게 편지를 올림만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과 조선족에 대한 대변이 깃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주로 써온 칼럼에 대해 상세히)    답: 예; 2007년 7월에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방문길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간다면 아마 머리속에 돈벌이라는 사상이 앞설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보다도 우선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글로 써서 언론매체에 발표하면 우리 동포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항, 출입국 사무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신문사, 방송사 등 국가기관, 사업단위를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단위 일군들은 우리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에 있을 때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3D업종 일을 하면서 많은 멸시, 모욕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갖은 굴욕을 참으면서 일하여 왔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동포들이 3D업종 일을 하는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에 가서 그들이 고달프게 일하는 실생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현지체험을 하면서 보면 중국에서 간 일부 젊은이들은 기술부문에서 일하면서 그 어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하였는데 3D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듣던 바와 같이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이 중국동포들을 마구 욕하면서 부려 먹는 현상과 중국동포를 가정부로 둔 극 소수의 가정에서 가정부(나의 친척도 포함)를 종으로 여기며 최저 한도의 인권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현상을 가슴 아프게 보아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으로 돈벌러 왔고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 것만큼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인권은 보장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힘으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해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하여 재한 중국조선족의 지위를 확립하고 3D업종에서 그들이 인격적 무시를 당하지 말고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호소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여 저는 중국에서 조선족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자랑스럽게 생활한다는 것을 12가지로 개괄하여 말하면서 "중국조선족은 문화수준이 전국에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조선족은 로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의바르고 깨끗하고 문명한 민족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중한관계에서도 중국조선족은 가교작용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고 하여 소외당하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이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면서 당당하게 중국조선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한겨레의 나라 한국에 와서 일부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라는 리유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칼럼을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3D업종에서 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3D업종에서 내가 직접 목격하였거나 친척, 친구들이 멸시, 모욕, 학대를 받은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겨레의 사랑을 느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써서 동북아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저의 이런 글들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에서 일정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KBS-1 라디오방송에서는 제가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고 하며 저를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하였습니다. 저는 그 프로에 출연하여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에 준 사랑이다. 저는 우리를 보내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 준 한국정부의 사랑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3D업종에서 재한중국조선족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촌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월에《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저도 그 간담회에 초대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으로 하여 중국조선족들이 한국에 나와 돈을 벌고 있는 한편 한국의 경제건설에서도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반면에 제가 직접 목격한 농장, 건설현장, 산업현장의 일부 악덕 고용주들은 재한 중국동포들을 멸시, 모욕하면서 마구 부려먹는 사례들을 렬거하면서 한국기업인들에게 재한 중국로무일군들의 인권을 존중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간담회의 현장록화가 2009년 음력설 이튿날 저녁 10시에 KBS-TV-1에서 방영되여 온 지구촌에 전파되였고 이로 하여 한국사회의 중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중국동포들의 많은 절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실생활을 조사하고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단체에서 공동 주최한 여러 가지 행사에 참석하면서 한국사회와 재한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들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데는 중국동포들 자신에게도 찾아 봐야 할 부족점이 없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극 소수의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쓸고 다니면서 주정을 하거나 싸움질을 하고 불법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거기에 드나들고 위생을 잘 지키지 않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 등등 문제들이 존재하여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린다고 재한 중국조선족들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하여 저는 "재한 중국조선족들 자각적으로 준법의식을 높이자!", "아름다운 동포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자" 등 칼럼을 써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즐겨 보는 한국의 신문에 발표하여 재한 중국조선족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에 노력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9); 제2권은 총 465페지 51편의 수기들로 묶어진 생활수기집이라는데요. 퇴직후 부인과 함께 국내외 여러 나라와 지역들을 돌며 유람중 써낸 기행문들과 생활수기라면서요? 즐겁고 풍요로운 삶속에서 걷어낸 풍작이네요? 답: 예, 저는 퇴직후 안해와 함께 중국에서는 상해, 항주, 남경, 북경, 심양, 청도, 대만, 향항, 오문, 태산, 집안고구려유적지, 동녕요새 등 곳을 다니면서 유람하였고 국제 유람으로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제주도, 정선, 월미도, 진해, 장봉도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저의 옛조상의 사당 등 곳을 유람하고 조선의 평양, 금강산, 개성, 판문점을 유람하였으며 동남아의  타이, 싱가포르, 말레시아 그리고 서유럽의 이딸리아, 반띠까노, 오지리, 독일, 스위스, 불란서 등 나라를 유람하고 모두 려행수기를 써서 길림신문, 연변일보, 송화강잡지 등에 련재로 발표하였습니다 (10); 이외에 생활수기도 여러편 썼다고 하던데 거기에서 가장 인상깊은 생활수기가 있다면은요? 답: 예, 이외에 생활수기도 24편을 썻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인상깊게 쓴 생활수기는 《KBS와 함께하는 송년의 밤》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한국사회를 료해하고 재한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료해하고 한국정부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중국동포들이 한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기여, 한국과 재한 중국동포사회의 화합과 공존, 모순과 갈등,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것을 료해를 하고 이런것을 칼럼을 써서 한국의 언론매체에 발표하여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고 재한 중국근로자들의 인권을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KBS방송사의 인정을 받아 《KBS-1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공동 주최로 조직한 "한국기업인과 재한 중국동포 간담회"와 《KBS 송년의 밤》프로에 초대되여 제가 중국동포들을 대변하여 말한 것이 전파를 타고 그 록화영상이  지구촌에 곳곳에 펴졌고 중국과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서 많은 절찬을 받은 것을 소재로 쓴 것이여서 가장 인상 깊은 수기라고 할 수있습니다. (11); 우리민족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기에 이런 보귀한 글들을 펴내지 않았을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조선족민족력사문화에 관심을 갖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회원으로써 항일전적지 답사에 참가하여 민족의 력사발굴에 한몫 기여하는건 물론 자신의 인맥과 실력으로 이 땅을 가꾸어온 우리 조선족 명인들을 소개하는데 동조해오셨다지요? 답: 예, 2015년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중국조선족력사동 호회” 성원들이 대전자 항일전적지, 소사하항일전적지, 내두산 항일밀영유적지, 어랑촌 13용사전적지, 공도진렬사기념비, 장암동참사유적지를 답사하고 《중국조선족력사 동호회》성원들이 연변아동문학학회와 함께 흑룡강 동녕현에 있는 〈동녕요새〉를 탐방하였으며 이외 15만 탈출사건 력사유적지, 훈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답사  처창즈항일유격 근거지, 소왕청항일전적지, 진한장렬사 릉원 등 곳을 답사 하고 〈동녕요새〉 탐방 기행문은 이미 2016년도에 《송화강》잡지에 발표하였고 《중국조선족력사동호회》에서 답사기를 책으로  편찬하는데 다른 답사기도 다 써서 이미 협회에 교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춘텔레비죤방송국에서 비물질문화유산《중국조선족 명인기록편》 찍을때 주정협의 추천으로 촬영팀을 안내하여  전국로동모법이며 농민 벼재배전문가인 최죽송, 전국로동모범 김시룡, 전국로동모범 우편배달원 리호천, 전국3.8붉은기수 리옥금, 전국민병선진공작자 리종률, 연변사과배 품종을 백육해 낸 최창호, 조선족의 우수한 교육자 연변대학 초대 부교장 림민호, 중국조선족 음학사에서 정률성에 이어 공로가 큰 허세록 등 8명의 기록편을 찍었고 제가 쓴 전국로동모범 리호천사적이 《중국조선족백년실록》에 수록되였습니다. (12): 우리민족사회를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같아 일분일초가 아까울 정도로 분주히 보내신다면서요? 앞으로 타산에 대해 이야기 주시렵니까? 답: 예,  이미 써놓은 글들을 정리하면 또 책이 한권 거의 되고 앞으로도 제발로 걸어다니고 저의 사유로 글을 쓸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 《력사동호회》를 따라 력사답사를 하고 중국조선족사회에 대해 많은 유리한 일을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여 방송, 신문,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출판하려 합니다. **********************************************************************************결속어;  략 …     ………… 멋진 필봉과 취미생활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장식해가고 있는 주청룡선생님의 만년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리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281    교원의 사표(师表) 댓글:  조회:3956  추천:0  2020-09-10
교원의 사표(师表) 주청룡 사표란 사전의 해석을 보면 ‘학식이나 덕행이 높아 여러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였다. 교원은  교육사업의 직접적 담당자로서 응당 일반인보다 더 높은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표와 품위를 갖추어야 하며  품위는 사표를 통하여 표현된다. 교원의 사표는 여러가지 면으로부터 표현되지만 주로 아래의 네가지 면에서 많이 표현된다.  즉 학식, 품행, 언어, 옷차림을 통하여 한 교원의 사표를 보아낼 수 있다. 교원의 학식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으로서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에 제기된 상응한 학력과 교원자격증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일반 사람보다 더욱 풍부한 지식을 장악하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보다 더 훌륭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교원이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엉뚱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엉뚱한 질문이라지만 그 학생은 선생님의 교수과정에서 순간적인 계발을 받은 것이 있어 질문을 한 것이다. 만약 교원이 풍부한 지식을 장악하지 못하였다면 학생들이 제기한 이런 ‘엉뚱’한 질문에 대하여 해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교원이 한 과목을 가르치려면 교과서내용의 10배에 달하는 지식을 장악하여야 한다는 말도 있다. 많은 교원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초로 하여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많은 책을 보면서 부단히 자기의 지식을 충전하여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있기에 자기의 교수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교원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만족을 느끼고 학습에 게을리하여 자기자신을 부단히 충전하지 않기에 교과서 범위를 크게 초과하지 않은 정도의 지식으로 교수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엉뚱’한 질문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교원들은 교원으로서의 지식면의 미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원의 품행 교원은 반드시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당의 교육사업에 충성하는 훌륭한 정치사상수양을 갖추어야 한다. 교원은 학생들의 거울과 같은 본보기로서 언제나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하고 례절스러워야 하며 자기의 실제적인 품성과 행실로 인성교육을 하여야 한다. 교원은 절대로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학생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현상도 없어야 한다. 교원이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면 교원의 형상이 너무나도 깎이게 되고 학생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남학생들에게는 조건반사로 되여 담배를 피우고 싶은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친 화장이나 너무 화려한 장신구들은 녀학생들을 매혹시킬 수  있으므로 녀성교원들은 지나친 화장이거나 너무 화려한 몸치장도 삼가하여야 한다. 교원의 언어 교원의 언어는 학생들에게 직접 전수되고 가장 빨리 전수된다. 그러므로 교원들은 반드시 상냥하고 온화한 말씨로 표준말, 친절하고 례절 바른 말을 써야 한다. 애들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사회적 지위가 애로부터 학생으로 승격되며 그 지칭도 ‘애’로부터 ‘학생’으로 승격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존중하여 ‘애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학생도 완전한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한다. 어느 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교원으로서 “야, 이 자식아, 그게 무슨 짓이야.”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동무, 그게 무슨 행위인가요?”라고 한다면 전자는 그 학생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여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는 선생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수 있고 후자는 그 학생이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조선족교육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는 “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식의 하대형으로 말하지 말고 “동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하는 식으로 존대형을 써야 한다. 학생들에 대한 이러한 존대와 대등관계가 학생들의 인격도 존중하고 교원과 학생지간의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존사애생’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원의 옷차림 교원의 옷차림은 교원의 풍채를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표징으로 볼 수  있다. 교원으로서 딱히  어떤 복장을 입고 출근하고 교단에 나서야 한다는 엄격한 규정은 없지만 교원이 교실에 들어서게 되면 당연히 학생들의 시선이 교원에게로 쏠리게 되므로 교원의 옷차림은 반드시 품위 있고 정결하여야 한다.  인터넷에서 “한 교원이 개인의 자유와 자기 개성의 표현으로 자주 무용배우와 같이 너무 화려한 옷차림으로 출근하여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좋지 못한 반영으로  교장선생님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로출이 심하거나 너무 화려한 옷차림은 학생들의 시선을 너무 끌기에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되고 학생들사이에 수군덕거리는 산만한 수업질서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로출이 심하거나 너무 화려한 옷차림은 삼가 해야 한다고 본다.  정장차림을 요구한다고 하여 무더운 여름철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교단에 오르라는 것도 아니고 변함없이 매양 한가지 옷차림으로 교단에 나서라는 것도 아니다. 평복차림도 아주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될 수 있다.   이상 몇가지로 교원의 사표에 대하여 거론하였는데 교원은 인류령혼의 공정사로서 교원의 품성과 언행은 모르는 사이에 학생들에게 거울과 같은 모델로 될 수 있으므로 교원은 항상 품성이 바르고 례절스러워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훌륭한 원예사가 우량한 품종을 배육해내듯이 우수한 교원에게서 우수한 학생이 나올 것이다. 연변일보 
280    인생관에 따른 행복관 댓글:  조회:4650  추천:0  2020-07-31
인생관에 따른 행복관 주청룡   사전의 해석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 했고 행복에 대한 근본 견해와 태도를 행복관이라고 하였다. 어떻한 인생관을 수립하는가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남을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어떤 사람은 남을 해치면서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있다. 뢰봉은 일편단심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고 집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으며 우리 주변에도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고 집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여러 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다. 그들은 오직 내 이 한 마음, 내 이 한몸을 당에 바치여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인민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는 자아희생정신의 표현이였다. 이들이야말로 자아희생정신으로 남을 위하는 현시대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이번 전염병예방통제사업에서 도문시 월청진(연변)의 리금련 로인이 만원을 기부 하였으며 훈춘시 양포만족향 동아로촌(연변)의 리준성로인이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 두푼  모은 5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로 된 돈주머니를 전연병예방통제사업에 쓰라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와서 내놓았는데 그 액수는 만원이였다. 이 두 로인의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이였다. 두분 다  70세 넘는 보통농민이였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현시대의 뢰봉정신이라고 본다.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무한에서 화신산병원을 지은 농민공들이 로동공가를 한푼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의무로동으로 이번 코로나19와의 싸움을 지원한 것이였다. 농민공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이고 그들이 하는 일도 힘든 로동이고 그들의 생활도 넉넉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경제상으로 큰 지원을 못하게 되니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이번 바리러스와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서는 마음이 편안하고 약간이나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는 자신에 대한 위안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고상한 일인가?  하지만 전국인민들이 일심협력하여 전염병예방, 통제에 나설 때에 일부 사람들은 제멋대로 요언을 날조하고 퍼뜨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을 일종 쾌락으로 느끼는가 하면 일부 개인들과 애심단체에서 무한에 마스크를 지원하려고 하나 마스크가 긴장하여 살 수 없다는 정보를 장악하고 이것을 돈벌이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사기행각을 벌리는 불법분자들도 있었다. 파언현(흑룡강성 巴彦县)의 호보모의 마스크사기금액은 도합 314만원이나 되였다.   그리고 자기의 편리를 위해 전염병예방, 통제일선에 나선 사업일군들의 업무에 거역해 나서면서 그들을 구타하는 행위까지 벌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주택구의 경비인원들이 관련 규정에 의해 차를 주택구역으로 들어 못 가게 제지하자 칼로 경비원을 찔러 2명을 부상 입히고 1명을 숨지게 한 끔찍한 사건(연변)도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는가에 따라 그의 행복관과 행복에 대한 표준도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행복관은 인생관의 중요한 조성부분이고 사람들의 삶의 가치와 목표가 다름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지게 되며 인생관은 또 세계관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며 세계관의 제약을 받는다. 인생관은 주요하게 인생의 목표, 인생의 태도와 인생의 가치 이 세개방면으를 통하여 체현된다. 만약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다면 호금도 총서기가 제기한 사회주의 영욕관에서 8가지 영광을 지키는것을 행복으로 간주할 것이고 만약 그릇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다면 8가지 수치스러운일을 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낄 것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모두 평범한 의무일군들이고 리금련, 리준성 두 로인은 다 70세 넘은 보통 농민들이며 화신산병원을 지은 농민공들의 사회적 지위도 모두 최하층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소에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기에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의덕과 의술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워 수 많은 환자들을 구하였고 리금련, 리준성 두 로인은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두푼 모은 돈을 선뜻이 전염병예방통제사업에 기부하는 것으로써, 농민공들은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무한을 지원하는 것으로써 그들의 삶의 가치가 그들의 행복관으로 표현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상술한 불법분자들은 평소에 그릇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기에 삶의 목표와 가치가 달라졌으며 그에 따라 행복관도 달라져 남을 해치고 자기의 안일을 볼보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 하였기에 결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치안관리처벌법》에 의한 공안기관의 처벌과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에 의한 인민법원의 판결를 면치못 하게 되였다. 우리 다 함께 하는 세상에서 정확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여 서로 도우며 다 같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을 느끼면서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관이며 그에 따른 행복관이며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흑룡강신문 2020년 7월 17일
279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댓글:  조회:4003  추천:2  2020-07-27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방송일시 기획 진행 출연 제작 2020년 7월 26일 리은파 서태문 주청룡 원미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프로진행을 맡은 서태문입니다. 표준어는 인민대중의 오랜 언어실천을 통해 다듬어지고 세련된 규범적인 언어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한 개 국가의 서울을 중심으로 표준어가 형성되는데 이를테면 한어는 북경어음을 표준으로 보통말 즉 표준어를 정했습니다. 표준어는 신문, 방송, 출판, 교육 등 의식형태령역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사범부문에서 두루 쓰이는 공용어입니다. 한마디로 교제의 수단으로서 표준어를 잘 알고 정확히 사용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의 표징의 하나이며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실천하는 경로이기도 합니다. 한편 방언을 많이 장악하고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우리 생활을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며 특히 문학예술작품에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선”을 가미해 이채를 돋구어 줍니다. 하지만 최근 년간 언어사용에서 보면 각종 원인으로 우리 말 즉 중국조선어표준어는 많이 흔들리고 있으며 방언을 “비속어”로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발굴, 연구,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있는 추세입니다. 이는 참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M- 오늘 “공감 40분”에서는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이같은 화제로 연변에서의 조선어 표준어 사용실태를 집중 점검해보고 방언사용이 조선족문화사 특히 언어생활에서의 중요성데 대해 심층 담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께서 나와계십니다. 물음1: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수십년간 교원, 특약기자 등 우리 말 관련 사업에 종사하면서 언어규범화에 왼심을 쓴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지금도 신문, 방송을 통해 꾸준히 문장을 발표하고 있던데요! 먼저 표준어의 정의와 중요성에 대해 말씀주시겠습니까? (신문, 방송, 출판, 교육 및 일상생활 등 )   대답: 예, 표준어란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표준으로 정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여러 방언 중에서 사용인구가 많고 가장 영향력이 크고 보급이 쉬운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그 나라의 공영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준어의 중요성을 놓고 말한다면 서로 자지방의 방언을 쓴다면 부동한 지방 사람들과 사이에 의사소통에서 아주 불편하지요. 서로 상대방에서 무엇을 말하는 지 알아 듣지 못하니깐요. 더구나 우리 나라는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따라서 방언도 많지요. 그렇다하여 관영방송국에서 방송할 때에 각 지방의 방언으로 다 방송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나라의 언어 통일을 위한 표준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제작한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화면 아래부분에 자막을 넣습니다. 왜서 자막을 넣겠습니까? 그 리유는 영화에서의 배음은 표준어인데 표준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 못 듣지요. 그런데 표준어든 방언이든 문자는 표기는 한가지이지요. 그래서 자막을 넣으면 표준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래 자막을 보고 그 말이 무슨 뜬인가를 알 수 있지요. 이렇게 우리 중국에서 주류민족이 문자는 통일이 되였지만 그 문자를 각 지방마다 자지방의 방언으로 읽다니 언어가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중화민국교육부에서 1923년과 1932년, 두번에 걸쳐 중국관방언어의 표준을 내왔고 새중국이 탄생하여 1953년에 하북성 승덕시 란평현(滦平县)을 보통화 표준음의 주요한 채집지로 하여 언어표준을 정한다음 1955년부터 전국에 표준어를 보급하기 시작하였는데 각 지방의 방언에서도 문자는 표준어와 같이 통일적으로 한자를 쓰는데 서로 다르게 읽으니 통일적인 발음표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58년에 통일적인 발음표기로 될 수 있는 로마자 한어병음표기법을 내와 한자의 표준발음을 보급시켰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한문으로 된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모를 글자를 자전으로 찾는데 한자옆에 표기된 병음을 보고 어떻게 읽는가를 알지요. 조선반도에서도 각 도마다 기본상 방언이 있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내오고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펴내면서 약 9,000개의 단어를 표준어로 정해 공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반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갈라지다니 남에서는 서울말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가공하고 규범화 하여 표준어로 하고 북에서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가공하고 규범화 하여 표준어로 하였습니다. 중국에서의 조선어의 규범화사업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되였으나 정부차원에서 계획적이고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국무원 [1975] 49호 문건정신에 따라 1977년도에 동북3성 조선어문사업 협의소조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여 조선어문사업일군을 조직하여 1985년에 처음으로 조선말 표준발음법, 조선말 맞춤법, 조선말 띄여쓰기, 조선말 문장부호법 등 조선말 ‘4칙’으로 되는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사회적 속성을 띤 언어문자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96년에는 1985년에 출판한 첫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수정하고 보충하여 두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으며 2007년에 또 세번째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어의 실정을 놓고 보면 2007년에 《조선말규범집》이 나와서부터 2016년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적지 않은 언어변화들이 생기였고 언어전산화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어의 맞춤법, 띄여쓰기 등에 대한 과학성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지금의 언어실태에 비추어 조선반도와의 공동성분을 늘이며 언어규범원리 즉 ‘과학성, 련속성, 점진성, 대중성을 골고루 돌보는 원칙’에 따라 2016년에는 2007년의 《조선말규범집》을 바탕으로 하여 부분적 내용들을 수정, 보충하여 네번째로 되는 《조선말규범집》을 내왔습니다. 그러니 1985년에 첫 《조선말규범집》이 나와서 2016년까지 10년에 한번씩 먼저번의 규범집을 수정, 보충하여 네번째로 《조선말규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질문2: 중국조선족은 천입민족입니다. 그래서 연변은 력사적으로 함경도에서 건너온 이민들이 많습니다. 또 각종 원인으로 평양말을 기준으로 연변조선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확실히 그러했습니까? 대답: 예, 력사적으로 본다면 1860 년대에 조선반도 지역에 련속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히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몰래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청나라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보면 두만강 건너면 바로 함경북도가 아니고 뭡니까? 그러니 함경북도 농민들이 처음메 두만강을 건너와 농사를 지은 것이 바로 지금의 연변땅이지요. 우리의 선조들이 두만강을 건너올 때에 함경북도의 언어, 민속을 그대로 가지고 오다니 지금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함경도 방언을 많이 쓰고 풍속습관도 그대로이지요. 그때로부터 연변의 력사와 문화의 밑바탕에는 함경도방언과 풍속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조선어가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게 된 것은 제가 알기로는 1963년 6월에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최용건동지가 당정대표단을 거느리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은래총리의 안내로 장춘에 오셨는데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 최채를 만난 자리에서 최용건동지가 당시 중공중앙간행물인 조선문으로 번역된 잡지를 례로 들며 “잡지의 글을 20~30% 정도는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때 중국조선어는 한어문을 직역하여 쓰는 경향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례를 들면 사회에서 자기의 로동으로 물질문화적재부를 창조하는 사람, 즉 한어에서 말하는 ‘工人’을 조선에서는 ‘로동자’라고 하지만 중국조선어에서는 ‘공인’이라 하였고, 곡식 가루를 반죽하여 발효시켜서 부풀게 해서 찌거나 구워만든 음식, 즉 한어에서 말하는 ‘面包’를 조선에서는 ‘빵’이라고 하지만 중국조선어에서는 ‘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최용건동지가 “잡지의 글을 20~30% 정도는 알아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겠지요. 최용건 위원장의 이 말씀은 주은래 총리의 중시를 불러일으켜 주덕해, 최채 등 동지들더러 이 문제에 대해 잘 연구하여 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해당부문에서 주은래총리의 이 지시를 받들고 토론연구하여 중국조선어가 평양을 따라배우는 규범화 방안을 작성하여 중앙에 올려 보냈는데 그해 주은래총리께서는 “중국의 조선말은 평양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저도 주총리의 이 지시에 대하여 여러 방면으로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하나는 서방흥교수의 에는 “朝鮮文有三種標準, 平壤, 漢城, 延邊, 平壤標準應該作爲典型的標準, 因爲我們朝鮮同志, 朝鮮人民都懂, 應該按照這個標準來說話, 寫文章”。 이 지시의 기본 내용:《조선문은 평양, 서울, 연변 3종의 표준이 있다. 반드시 평양표준을 전형적인 표준으로 해야한다. 왜냐 하면 우리 조선족동지들과 조선족인민들이 모두 리해를 하기때문이다. 반드시 이 표준대로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라고 하였고 그다음 에서 찾아보았는데 여기에 (원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 소장 김병선 언어학박사, 최창범, 리철억 등 3명이 쓴 글에는 “依我看来,现在的朝鲜语有三种标准,即有平壤标准、首尔标准和延边标准。我们应该以平壤的标准才是。因为跟我们文化交流的朝鲜人民都能看明白才对。”(중국조선족백년실록 제8권 288페지)라고 씌여 있는데 주총리의 이 지시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내가 보건대 지금의 조선어는 세가지가 표준이 있다. 즉 평양표준, 서울표준과 연변표준이 있다. 우리는 평양표준을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우리와 문화교류를 하는 조선인민들이 모두 보고 알도록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글에서 보면 그 기본내용이 다 평양표준, 서울표준과 연변표준이 있는데 평양표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중국조선어는 '평양기준'의 방향으로 나갔으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은 평양말과 똑 같지는 않습니다. 그 원인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생활속에서 중국이란 특정된 언어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질문3: 다 알고계시겠습니다만 어떤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표준어가 있고 방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는 땅이 넓어 보통말인 북경말이 있는 외에 광동어를 비롯하여 많은 방언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왜 서 표준어가 중요한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주시겠습니까? 대답: 예, 우리 나라는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따라서 방언도 많지요. 저는 언어학자가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깊이는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크게는 북방언어와 남방언어로 나뉘여 진다고 봅니다. 북방언어권에서는 권설음(卷舌音)이 있지만 남방언어권에서는 권설음이 없이 모두 평설음(平舌音)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례를 들면 북방어에서는 권설음으로 혀를 구부려 zh, ch, sh, r의 발음이 있지만 남방어에서는 평설음으로 혀를 펴는 z, c, s 로 발음을 하고 권설음의 zh, ch, sh, r의 발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해에 가면 수자 4와 10의 발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표준어에서는 4는 ‘si’로, 10은 ‘shi’로 구분되지만 상해말에서는 권설음이 없이 모두 ‘si’로 발음합니다. 그래서 수자 4와 10이 구별이 잘 안되여 손시늉을 할 때가 많습니다. 4는 손가락을 4개를 펴면서 ‘si’라고 말하고 10은 손가락을 열개를 펴면서 ‘si’라고 말하지요. 다만 성조(声调)에서는 4는 4성, 10은 2성으로 구별이 있지요. 같은 상해사람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잘 되겠지만 북방사람들과는 이런 권설음과 평설음으로 하여 의사소통이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 향항, 오문 그리고 동남아 여러 나라를 유람하다 보면 중국 관광객을 대상한 그곳의 가이들이 모두 복건이나 광동사람들의 후예들인데 수자 20을 말할 때에 원래 한어 표준어로는 ‘er shi’로 발음하여야 맞는데 그 사람들은 ‘r’의 발음이 없어 혀를 구부리지 못해 ‘e si’로 발음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나라와 지구를 유람하면서 가이드들이 ‘e si’, ‘e si’하니 저 무슨 말을 저렇게 하는가고 알아 듣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 무슨 굶어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고 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들어보니 아, 저 사람들은 ‘r’의 발음이 없으니 수자 20을 말한다는 것이 저렇게 ‘e si’라고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례를 들면 우리 나라의 특별행정구의 하나인 향항을 문자표기에서는 모두 한자로 ‘香港’으로 표기하지만 말로는 표준어에서는 ‘xiang gang’이라고 발음하고 광동어로는 ‘hong kong’이라고 발음하며 시간을 말하는 한시, 두시에서 1시를 문자로는 모두 한자로 ‘一点’이라고 표기하고 말로는 표준어에서는 ‘yi dian’이라고 발음하고 상해말로는 ‘yi di’로 발음하며 우리라는 뜻을 표준어로는 ‘wo men’이라고 발음하지만 상해말로는 ‘a la’라고 발음하며 문자로는 다 한자로 ‘我们’이라고 표기 합니다. 그들이라는 뜻을 표준어로는 ‘ta men’이라고 발음하고 상해말로는 ‘i la’라고 발음하지만 문자로는 한자로 ‘他们’ 라고 표기하며 학교란 뜻을 표준어로는 ‘xue xiao’라고 발음하지만 상해말로는 ‘o dang’으로 발음하는데 문자로는 한자로 ‘学校’로 표기합니다. 이렇게 지방마다 자기의 방언을 쓴다면 의사소통이 안되지만 문자로는 통일이 됩니다. 그래서 1958년에 통일적인 발음표기로 될 수 있는 로마자 한어병음표기법을 내와 한자의 표준발음을 보급시켰던 것입니다. 같은 북방어라도 동북방언 서북방언, 산동방언 등등 여러 방언으로 나뉘여 지고 같은 남방어라도 호남방언 사천방언 광동방언 등등 여러 방언으로 나뉘어 지지요. 지난세기 80년대에 제가 상해에 갔는데 제가 든 초대소에 산동에서 한 젊은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해에 병보이려 왔고 호남에서 또 한 젊은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보이려 왔는데 두 늙은이 사이에 서로 자지방의 방언을 하다니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어간에서 통역을 서서야 겨우 의사소통이 되였습니다. 자식들은 그래도 학교에서 표준어 공부를 했으니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요. 그러나 다 같은 한족이라도 표준어 공부를 못한 서로 다른 지방의 늙은이들 사이에는 전혀 의사소통이 안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상해에서 병원에 가보면 로인환자와 의사사이에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로인환자는 상해사람이고 의사는 다른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병원에 분배 받아왔기에 상해 말을 모르니 표준어를 모르는 로인환자와 상해말을 모르는 의사사이에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식들이 통역을 서서 환자와 의사사이 말 뜻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그때 제가 느낀 것이 한 나라에서 언어통일을 위해 반드시 표준어를 제정하고 전반 국민들에게 표준어를 보급해야 겠다는 것을 심심이 느꼈습니다.   질문4: 일상생활에서 보면 규범화된 언어 즉 표준어를 사용해야 할 장소에서 외래어, 한자말, 사투리를 람용하는 경우를 가끔 볼수 있는데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대답: 예, 방언을 존중한다하여 공식적 장소에서 방언으로 말하여야 한단 말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회의장소거나 학습장소에서 외래어를 쓴다거나 한어를 섞어 말한다거나 사투리로 말한다면 사실은 스스로 자신의 품위를 낮추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식적인 장소에서 사투리를 많이 쓴다면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 너무 낮아 보이고 공식적인 장소에서 외래어를 많이 쓰거나 전부 조선족으로 모인 장소에서 한어로 말 한다면 그 본인은 외래어도 많이 알고 한어도 잘 한다는 것으로 자기의 지식자랑으로 되겠지만 청중들은 그 사람을 높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례를 들어 공식적인 회의 장소거나 학습장소에서 ‘안해’를 ‘와이프’, ‘열쇠’를 ‘키’, ‘흰색’을 ‘화이트’라고 말한다거나 ‘비자루’를 ‘비강대’, ‘무우’를 ‘무끼’, ‘추워서’를 ‘치바서’, ‘물고기’를 ‘물괴기’라고 한다거나 전부 조선족들만 모이고 한어를 잘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인장소에서 조선말을 익숙히 잘 알면서도 한어로 말한다면 스스로 자기의 품위를 낮추고 청중들의 눈에는 거슬러 보일 것입니다.   질문5: 이와 같이 표준어는 소통, 교제, 정보전달의 도구로서 언어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아울러 한 사람의 문화정도와 수양 그리고 품위를 보여주는데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일전에 연변일보에 방언에 관한 칼럼을 발표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방언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 표준어는 우월(優越)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표준어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임을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합니다. 표준어는 주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습득되기 때문에, 표준어를 바르게 쓸 줄 안다는 것은 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표준어를 쓰는 사람은 사투리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배운 사람, 나아가 사회적으로 더 우위(優位)에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표준어의 우월의 기능의 하나입니다. 언어는 민족에 따라 다르고 같은 민족이라도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을 쓰고 있습니다. 방언은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므로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주로는 사용인구가 많은 어느 한 지방의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있습니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서울말을, 조선에서는 평양말을 가공,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했습니다. 중국조선어에서는 과거 많이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했던 토대에서 국제적으로 공감하고 우리의 특색을 살린 말을 중국조선어로 규범화하고있습니다. 표준어는 규범화하여 한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에 표준어 사용을 제창하고 보급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방언은 서로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는 의사 소통이 잘 되고 같은 지방 사람들에게는 표준어보다 더 큰 정다움과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되기에 같은 지방의 사람들은 주로 자기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데 습관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일종 우리 민족의 어느 한 지방의 언어이기에 자지방 사람들끼리 쓰는 방언을 무식하다고 보지 말고 존중해야 합니다.   물음 6: 방언을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극종목에 적당히 사용하면 작품의 감칠맛을 살리고 완성도를 높일수 있지 않습니까? 례를 들어 설명주시겠습니까? 대답: 예, 지금 연변에서 제작한 영화거나 연변소품들을 보면 표준어를 많이 쓰지만 해학적인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쓰거나 한어를 섞어 씁니다. 연변의 영화나 소품은 주로 연변의 조선족관중을 대상하였기에 해학적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사용하여야 연변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구수한 이밥에 토장국맛 나게 볼 수 있지만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관중들에게는 흥미를 돋구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한 감을 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나 소품은 당지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당지의 민족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릴 수 있지요, 연변사람들은 일상생활가운데서 함경도방언을 쓰고 또 중국에서 한족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한어를 섞어 말하는데 습관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변사람들의 언어생활실태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소품에서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사람들의 생활실태를 떠났기에 자연히 어색한 감을 주지요. 연변소품 에서 할머니가 하는 말은 전형적인 6진방언이지요. 이 소품을 보면 늙은 두 량주사이에도 서로 다른 방언을 쓴다는 것으로 표현 되였고 6진방언을 모르는 사람들도 아, 연변에는 이런 방언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전형적인 6진방언을 써 왔습니다. 저는 이 소품을 보면서 옛날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 오르면서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또 연변소품 에서도 한족과 조선족사에에 서로 한어와 조선말을 섞어 쓰고 있는데 이것은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이 다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언어습관이고 연변의 언어생활 실태를 반영한것이기에 연변관중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소설에서 당지 사람들이 당지의 방언을 쓰지 않고 모든 대화를 표준말로 한다면 당지의 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전임주석과 사학자 허성운 선생도 거의 사라져가는 연변방언을 수집, 발굴하고 있는데 이런 방언을 써왔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지면에서 이런 방언들을 보면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고 있습니다. 방언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은 표준어를 풍부히 하는 원천의 하나로 되고 언어발달사, 민족사, 민속사, 문물사 등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 있습니다.   소질문: 방언과 사투리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면서요? 대답: 예, 큰 의미에서 말하면 방언과 사투리를 동의어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방언이라 할 때에는 표준어와는 다른,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자 한 언어에서 사용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로서 두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사투리는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란 한가지 의미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라면 방언은 '사용 지역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인 사투리 뿐만 아니라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말의 체계’까지 포함되는 더 넓은 의미의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안에는 사투리도 포함 돼 있다고 리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사회계층에 따라 분화되였다는 말은 예전에는 량반계층에서 쓰는 말과 서민계층에서 쓰는 말이 달랐지요.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를 많이 쓰고 서민계층에서는 전부 우리말의 고유어를 썼지요. 례하면 당콩모양처럼 생기고 체내에서 피를 려과하여 오줌을 생산해 내는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신장’이라고 하고 서민계층에서는 원 우리말의 고유어로‘콩팥’이라고 하였으며 주기적인 수축에 의하여 혈액을 몸 전체로 보내는 순환 계통의 중심적인 근육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 ‘심장’이라고 하였고 서민계층에서는 우리말의 고유어로 ‘염통’이라고 하였으며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작용을 하는 기관을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로 ‘페’라 하고 서민계층에서는 우리말이 고유어로 ‘허파’라고 했지요. 이렇게 같은 말이라도 량반계층에서 하는 말과 서민계층에서 하는 말이 달랐지요. 옛날 생활이 곤난한 서민계층에서는 한자어를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 우리말 밖에 모르지만 량반계층에서는 한자어공부를 했다는 자랑거리로 한자어로 말하였고 더구나 “량반과 쌍놈이 다 같은 말을 하면 안된다. 우리들은 너희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쌍놈들이 우리 량반들의 말을 알아들으면 안된다.”하면서 한자어로 많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물음 7: 사람마다 특기가 따로 있고 물건도 용도가 각이한만큼 표준어와 방언도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사용하면 세상을 보다 립체적으로 보여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표준어와 방언이 어떻게 화음을 이루게 하면서 우리 생활에 이채를 돋굴수 있다고 보십니까? 대답: 예, 저는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표준어나 방언은 다 우리 민족의 언어이고 여러가지 방언 가운데서 어느 방언을 표준어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방언 자체에는 ‘고상한’ 말과 ‘저속한’말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표준어도 우점이 있고 방에도 우점이 있다고 봅니다. 표준어는 가공, 규범화 하였기에 세련 된 말이고 사용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언어교류를 원화하게 할 수 있고 방언은 비록 사용지역과 사용인구가 적고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과는 의사 소통도 불편하고 정다운 느낌도 그만큼 덜 가지게 되고 서로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이질감(異質感)을 불러일으키는 등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방언은 구체적인 생활세태를 보여주기에 일상생활에서 표준어휘에는 아주 원할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가 없지만 방언 가운데는 적절한 단어들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례를 들면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주정을 피우면서 가장 기물을 두들겨 팬다던가, 부부간이 싸움질하면서 가장기물을 두들겨 패는 등 이런 행위를 표준어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지만 우리 연변방언에서는 ‘가장치기’란 적절한 단어가 있고, 원래는 여위여서 보기가 실을 정도던 것이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는 적절한 표현이 표준어에는 없지만 연변방언에는 ‘푸들다’란 적절한 단어가 있고,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묵은 장에 새로 콩을 삶아 이기여 만든 장을 썩어 아주 맛있게 먹는데 이런 장을 표준어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지만 우리 연변방언에는 ‘오뉘장’란 적절한 단어가 있지요. 그래서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2016년도에 새로 편찬한 《조선말규범집》에는 대응되는 표준어휘가 없는 방언 즉 ‘가장치기’, ‘푸들다’, ‘오뉘장’ 등 연변방언 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켜 표준어를 더욱 풍부히 하였습니다. 표준어라고 하여 모든 우리 겨레들이 다 접수되는 것도 아니닙니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하여 리씨를 이씨라던가 류씨를 유씨라던가 림씨를 임씨라고 하는‘두음법칙’, 수도물을 수돗물, 바다가를 바닷가, 이사짐을 이삿짐이라고 하는 ‘사이시옷법칙’, 강원도(姜元涛)를 강 위안 타오로,   원송호(元松浩)를 위안 송 하오로, 고원호(高元镐)가오 위안 가오로, 룡정을 룽징, 연길을 옌지, 연변을 옌벤이라고 쓰는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한 표기법’, 게다가 외래어 혼용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페단이 많고 우리 말의 발음력을 퇴화시키고 우리 말의 순결도를 낮추는 등등 원인으로 하여 많은 중국조선족들에게는 접수되기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언도 존중해야 합니다. 제주도의 어떤 방언들은 표준말과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례하면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 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쓰이였으며 어떤 말들은 제주도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였는데 표준어에서의 쌍스러운 말로 되였습니다. 혹시 제도도방언이 쌍스럽고 비속하게 느껴져도 그 고장의 풍속문화를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저는 방언도 우리 민족의 말 가운데의 하나이므로 비속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고 천대를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언을 존중한다 하여 방언을 보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방언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닙니다. 다만 방언도 우리 민족의 일종 문화이고 당지의 우리 민족들이 쓰는 말이므로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천대하지 말고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방언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킨다면 우리의 말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이같은 화제로 얘기나눠보았습니다.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주청룡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 맺음말: 언어는 민족구성원간 교제와 소통의 도구이고 수단일뿐만아니라 국제적교류와 합작의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같은 언어라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쓸수 있는 공용어 즉 표준어가 없다면 마치 신호등 없는 십자자길과 같이 혼란할 것이며 원활한 소통과 교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기에 각국에서는 언어규범화, 표준화, 정보화에 품을 넣고있으며 이 방면의 국제적교류를 강화하고있습니다. 아울러 방언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응고된 지역말로서 당지 특색과 풍토인정을 보여주며 문학예술창작과 관광코스개발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목전 언어가 점점 글로벌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조선어 표준어와 방언을 정확히 알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후대들에게 우리 말을 바르게 곱게 전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리은파, 제작에 원미란이였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M-      
278    방언은 발굴하고 보존해야 댓글:  조회:3972  추천:0  2020-07-05
방언은 발굴하고 보존해야  주청룡   언어는 민족에 따라 다르고 같은 민족이라도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을 쓰고 있다. 방언은 어떤 지역이나 지방에서만 쓰이는 특유한 언어이므로 한 나라에서 언어의 통일을 위하여 주로는 사용인구가 많은 어느 한 지방의 방언을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고 있다.  례하면 한국은 서울방언, 조선은 평양방언을 가공, 규범화하여 표준어로 정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많이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조선어로 규범화하였다. 표준어는 규범화하여 한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에 표준어 사용을 제창하고 보급하여야 한다. 하지만 같은 지방의 사람들은 주로 자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데 습관되여왔다. 그러므로 방언도 일종 우리 민족의 어느 한 지방의 언어이기에 자지방 사람들끼리 쓰는 방언을 무식하다고 보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지금 연변에서 제작한 영화거나 연변소품들을 보면 표준어를 많이 쓰지만 해학적인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쓰거나 한어를 섞어 쓴다.  연변의 영화나 소품은 주로 연변의 조선족관중을 대상하였기에 해학적 대목에 가서는 연변방언을 사용하여야 연변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구수한 이밥에 토장국맛 나게 볼 수 있지만 전부 서울말이거나 평양말을 쓴다면 연변관중들에게는 흥미를 돋구지 못하고 오히려 어색한 감을 주게 될 것이다. 만약 소설에서 당지 사람들이 당지의 방언을 쓰지 않고 모든 대화를 표준말로 한다면 당지의 민족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당지의 민족특색을 살리지 못할 것이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전임 주석과 사학자 허성운 선생도 거의 사라져가는 연변방언을 수집, 발굴하고 있는데 이런 방언을 써왔던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지면에서 이런 방언들을 보면 아주 정감적으로 옛 정취를 느끼고 있다.  방언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은 표준어를 풍부히 하는 원천의 하나로 되고 언어발달사, 민족사, 민속사, 문물사 등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표준어나 방언은 다 우리 민족의  언어이고 여러가지 방언 가운데서 어느 방언을 표준어로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방언 자체에는 ‘고상한’ 말과 ‘저속한’말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에서 표준어휘에는 아주 원할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가 없지만 방언 가운데는 있는 것도 있다. 하여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새로 편찬한 《조선말규범집》에는 대응되는 표준어휘가 없는 ‘가장치기’, ‘푸들다’, ‘오뉘장’ 등 연변방언 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켜 표준어를 더욱 풍부히 하였다. 표준어라고 하여 모든 우리 겨레들이 다 접수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하여 ‘두음법칙’, ‘사이시옷법칙’을 쓰고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한 표기법’, 게다가 외래어 혼용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페단이 많고 우리 말의 발음력을 퇴화시키고 우리 말의 순결도를 낮추는 등등 원인으로 하여 많은 중국조선족들에게는 접수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방언도 존중해야 한다. 필자가 2008년 제주도유람을 가보니 제주도의 어떤방언들은 표준말과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었다. 례하면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 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가까이 오십시오.’는 ‘좃끝에 옵소.’로 쓰이였다. 필자도 그때에 제주도방언이 쌍스럽고 비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듬해 다시 제주도에 갔을 때 관광안내원과 마지막에 갈라지면서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란 뜻을 제주도방언으로 ‘오늘 폭삭 속았수다.’라고 작별인사를 하자 관광안내원이 ‘별말씀은요.’란 뜻으로 ‘소구멍 말멍했수다.’라고 하며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필자를 포옹하면서  어쩌면 중국조선족이 우리 말을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너무도 감격해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필자는 방언도 우리 민족의 말 가운데의 하나이므로 비속하다거나 고상하지 못하다고 천대를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언을 존중한다 하여 방언을 보급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방언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방언도 우리 민족의 일종 문화이고 당지의 우리 민족들이 쓰는 말이므로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천대하지 말고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있는 방언어휘들을 표준어휘로 인상시킨다면 우리의 말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변일보 2020년 7월 2일
277    연변인민방송 <행복한 세상 정다운 목소리> 댓글:  조회:3968  추천:0  2020-06-15
                                      방송일시: 2020년 6월 3일                                          PD /기획 / 사회: 황설화                                          출연: 주청룡                                          제작: 손귀옥   --- 개 시 곡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생활에 행복과 활력, 재미나는 정보를 제공해드리는 프로담당 황설화입니다. 국내 코로나사태는 이미 상당히 좋아지고 있지만 국외 상황은 락관적이지 못합니다. 올해에 해외려행을 계획한 분들은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는데요, 사실 장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가야 하는 해외여행, 한번 떠나려면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계획하고 준비한 해외려행인데 올해는 물론, 래년도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려행을 즐기는 분들한테는 참 아쉬운 일이죠~ 코로나 사태로 려행을 못가서 마음이 근질근질한 여러분들을 위해 오늘의 , 코너에서는 유럽려행기를 준비했습니다. 근 두주간 유럽국가인 이딸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독일,스위스 등 나라를 려행한 분을 모시고 문화와 력사가 어우러져있는 유럽려행의 재미나는 이야기들을 들어볼가요?   --- 캠페인 곡 ---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시고 길림신문사 특약기자이신 주청룡 선생님께서 방송실에 나와계십니다. 네, 주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1. 려행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려행지가 유럽입니다. 특히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꼭 한번쯤은 유럽에 가보고 싶어하는데요, 주선생님께서 유럽려행을 선택한 리유도 있나요? 유럽려행의 첫 나라가 이딸리아라고 들었는데요, 장시간의 비행시간은 괜찮았는지? 그리고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을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참 궁금하네요. 예, 저는 려행을 즐기는 편이라 정령퇴직을 하고 마누라와 같이 국내 여러곳을 려행하고 한국, 조선, 대만 향항, 오문 타이, 싱가포를 말레이시아 등 나라와 지구도 려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8년에 부부 동반으로 서유럽려행을 하게 되여습니다. 장거리려행에서 제일 바쁜 것이 비행기를 타는 것이지요. 12일 북경시간으로 새벽 2시반에 비행기가 북경수도공항에서 리륙하여 이딸리아 북부도시 밀라노를 향해 떠났는데 장장 10시간을 날아 로마시간으로 5시반에 밀라노에 도착하였는데 북경시간으로는 12시 반이였으므로 이미 중국은 오후에 들어섰는데 미란은 아직 먼동도 트지않은 새벽이였습니다.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장장10시간 계속 밤으로 날았습니다. 장밤 10시간 비행기에 앉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몸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기에 어떻게 말하면 10시간 걸상에 묶이여 가는 거나 다름 없지요.  날이 밝자 우리는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뻐스를 타고 밀라노시내를 돌면서 여러 곳을 유람하였는데 이때의 감상이 그전에 국내의 여러 곳과 아세아의 여러개 나라와 지구를 유람하였는데 언제 기회있으면 유럽려행을 하였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정말 직접 유럽땅을 디디고 서유럽의 여러개 나라을 돌게 되였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상으로 정말 흐뭇하였습니다 2. 사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이딸리아 밀라노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밀라노는 이딸리아의 경제와 공업의 중심도시일뿐만 아니라 손꼽히는 세계적인 패션도시인데요, 매년마다 수많은 사치품 브랜드들의 모델상품쇼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멋의 도시인 이딸리아 밀라노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예, 밀라노는 이딸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인데  중국을 말하면 한개 성소재지에 해당하는 도시이지요. 밀라노는 이딸리아 최대의 산업 도시이자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라고 합니다. 밀라노패션위크는 뉴욕 패션 위크, 런던 패션 위크, 파리 패션 위크와 함께 "4대 패션 위크" 중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말에 딱 여기에 해당한 말이 없어 그러는데 패션 위크란 디자이너(设计师)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패션쇼(流行服装表演)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주간을 말하는 것으로서 밀라노에서는 1년에 두 번 열리는데 가을/겨울 행사는 2월이나 3월 중에, 봄/여름 행사는 9월이나 10월 중에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밀라노에는 세계최고 디자이너들의 본점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 거리에서는 마주오는 사람들은 모두 복장모델 같다고 할 정도로 패션의 거리답게 모두 옷 매무새에도 세련미가 가득하였습니다. 3.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가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의 애니메이션 인데요, 용감과 사랑, 배려를 주제로 하는 이 영화의 천공의 성은 이딸리아의 치비타로부터 령감을 찾아 구상한 영화입니다. 치비타는 현재 애니메이션의 흥행으로 관광명소가 되였는데요, 실제로 보면 천공의 성처럼 몽환적인 느낌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거든요. 예, 천공의 성 치비타(Civita)는 이딸리아 라치오주에 위치한 작은 진인 바뇨레조(白露里治奥)에서 동떨어져 있는 작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고대의 작은 마을입니다. 이 천공의 성은 몇백년간 황페한 유령도시로 불리우다가 1986년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이 그림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를 찍을 때 이 천공의 성으로부터 령감을 찾았다고 하여 이 작은 마을이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 잃으키면서 지금은 관광명소로 되였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사면이 깍아지르듯 한 산꼭대기에 집들이 촘촘히 들어 앉아 있었는데 지금 보존되여 있는 집들은 2~3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부분 중세기에 지은 집들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과 바뇨레조 진과의 련계는70m 높이에 약 300 m길이의 다리로 되였는데 다리가 좁고 중량감당제한으로 하여 큰 차는 다릴 수 없지만 승용차는 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공중도시를 건너가기 전에 구름이 이 도시 아래에서 흐르고 있어 이 도시가 마치 신기루마냥 구름우에 떠 있는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면서 사방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20~30분정도 걸어 이 공중도시에 올랐을 때에는 산아래에 약간한  구름이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하늘나라에서 천하세상을 내려다 보는 듯 한 감이였습니다. 위챗에서나 텔레비죤에서 아츨한 절벽우에 집들을 지어놓은 것을 여러번 봤는데 이곳에 와서 직접 제눈으로 그러한 그림같은 것들을 보니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야! 경관이다.” “야! 멋있다.” “야! 정말 하늘공중에 떠있는 도시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면서 서로서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4. 섹스피어의 명작 은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는데요, 그들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는 전 세계인들을 감동시켰죠. 명작속 줄리엣의 옛집이 이딸리아 베로나에 있는데요, 거기도 가보셨나요? 예, 베로나에 가서 다른 유람을 마치고 줄리엣의 옛집으로 갔습니다. 줄리엣은 이딸리아 베로나의 한 부유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영국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섹스피어의 명작 ㅡ 《로메오와 줄리엣》희곡 중의 녀 주인공 인물입니다. 섹스피어가 1594년에 쓴 희곡 ㅡ《로메오와 줄리엣》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에 대한 이딸리아 전설을 기초로 하여 극본을 썼다고 합니다.  줄리엣의 옛집은 13세기에 지은 오랜 건축물이였습니다. 아치형의 굴처럼 생긴 통로(门洞)으로 들어 서면 2층으로 된 줄리엣의 옛집이 있습니다.  줄리엣의 옛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로메오와 줄리엣이 만남을 약속한 베란다입니다. 당년에 줄리엣은 이 베란다에서 오래동안 서 있었고 로메오는 그 아래에서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베란다로 올라가서 절세미인과의 사랑이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갔을 때에 그 베란다 아래와 붉은 벽에 글을 써놓은 종이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외국어를 모르른 나로서는 너무도 이상하여 가이드와 물어보니 젊은 유람객들이 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자기들의 애정과 충성의 마음을 사랑하는 련인 혹은 안해에게 전달하는 내용을 담아서 써 붙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더욱 많은 것은 마음속에 가장 완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ㅡ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합니다. 당지 정부에서는 날로 늘어나는 편지가 전반 벽에 덧 붙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줄리엣구락부”란 조직을 내와 세계 각국에서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 온 사람들에게 줄리엣의 회답편지를 받도록 지원자들이 전문 줄리엣을 대리하여 회답편지를 써 보낸다고 합니다. 해마다 련인절이면 “사랑하는 줄리엣"이란 가장 우수한 사랑의 편지 징집활동도 벌리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넓다고 합니다. 줄리엣 옛집 정원에는20세기에 제작된 줄리엣의 전신 동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관습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너무 어루만지여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모두 줄을 서서 기다리여 줄리엣의 동상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는데 우리도 줄을 서서 한참 기라려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5. 오스트리아는 인구가 천만명이 안되는 작은 유럽의 나라이지만 고도로 발달한 나라중 하나로 OECD 창시나라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수도 윈은 음악의 성지인데요, 이딸리아와 달리 오스트리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요,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요?  예, 나흘동안 이딸리아의 유람을 마치고 16일 아침 오스트리아로 떠나 뻐스가 알프스산맥을 따라 달렸으며 오스트리아경내 들어섰는데 국계를 지날 때에 세관도 없었거니와 차량과 사람에 대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리였습니다. 가이드가 길옆의 패쪽을 가르키며 저것이 바로 국계를 표시하는 패쪽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연길과 룡정사이의 연룡도로를 달릴 때에 연길계(延吉界), 룡정계(龙井界)표시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저 영어로 이딸리아계, 오지리계라고 표시하였을 뿐 아무런 구속이 없이 차는 마음대로 달리였습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련합내에서는 국경지대에 세관도 없고 차나 사람이나 아무런 검사도 없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다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며 면적은 약 84,000㎢이고, 인구는 천만명도 안되는 약 875만명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서 시민을 위해 수준 높은 복지를 하는 나라이며 수도  윈은 수년 련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회원국이 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련합(EU)에 가입하였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립국입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로 갔는데 인스브루크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의 수부이며 오스트리아에서 다섯번 째로 큰 도시라고 합니다. 인구는 약 13만명 밖에 안되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지만 알프스산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겨울 스포츠 관광지라고 합니다. 1964, 197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1984, 1988년 동계 국제 장애인 올림픽운동회가 2회 련속 개최되였으며 2012년에는 제 1회 동계 청소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였습니다. 인스브루크는 바로 알프스산 밑에 있었습니다. 뻐스에서 내려서 알프스산을 바라보니 산에 구름이 꽉 껴 있었고 구름우로 신기루와 같이 산봉우리가 보였습니다. 인스브루크에서 우리는 황금지붕을 보러 갔습니다. 이 건물은1420년에 지은 건물인데 1500년, 당시 이곳에  거소를 두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바로 앞의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가 만들어졌고 그 우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였다고 합니다. 이 지붕에는 황금으로 도금된2,738개의 동판기와가 엊혀있었습니다.  6. 독일이라고 하면 흔히 품질 좋은 자동차로 유명한 국가입니다. 벤츠, 보마, 폭스바겐, 아우디, 로스레스, 람보기니, 부가디 등 브랜드를 보유한 국가인데요, 독일에선 어떤 지역을 돌아보셨나요?     예, 이번 려행기간에 독일은 두곳으로 가게 되였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갈 때에 독일의 퓌센에 들러 신 백조의 성과 구 백조의 성을 보았는데 신백조의 성은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성인데 루트비히 2세는 18세에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 된지 2년 만에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혀 신 백조의 성을 지어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기로 했답니다. 산 우에 세워진  이 성은 가극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전설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성 곳곳에 백조를 주제로 한 구조물이 있어 “백조의 성”이라고 합니다.  그는 해마다 여러 곳에 궁성 건축을 위해 약 150만 마르크를 사용했는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루트비히 2세는 국가 예산마저 랑비하게 되고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정신병자로 판정을 받고 강제적으로 퇴위당하고 말았습니다. 강제로 퇴위당한 후3일 만에 루트비히 2세는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고 합니다. 신 백조의 성은 1892년 완성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했는데 죽을 때에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허물어 버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나라의 재정을 돌보지 않고 성을 짓는 데만 빠져서 ‘미친 왕’이라 불리우며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그는 죽음으로 끝을 맺었지만 성은 허물어 지지 않고 그의 광기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관광명소로 되였고 후에 사람들은 관광 수입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구 백조의 성을 구경하였는데 이것은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지은 것인데 루드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는데 그는 이 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성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게 되였고 후날 왕이 된 후에 신 백조의 성을 지으면서 국고를 너무 랑비하여 결국은 강제퇴위를 당하고 자결까지 한 것이지요.  독일 퓌센에서는 이 두개의 성을 구경하고 다음 유럽려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에 독일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는 독일 중서부도시 프랑크 푸르트로 갔습니다. 이 도시는 인구가 74만 7천명으로서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합니다. 독일의 행정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 수도는 프랑크 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에서 경제적인 중심을 차지하고 유럽 련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이 도시에서 해마다 여러가지 박람회가 많이 열리는데 특히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자동차박람회가 유명하며 1485년에 시작된 력사가 깊은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 푸르트 국제도서전이 매년 10월 이 도시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학을 하거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괴테라면 다 알고 있지요. 독일의 대문호 시인, 소설가, 극작인 괴테(1749~1832,)도 이 도시에서 태여나서 활동하였으며 괴테의 생가가 지금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에 와서 뢰머광장, 시청사 등 여러 곳을 참관하고 괴테생가도 참관했는데 4층에 20여 칸의 방으로 된 집으로서 2층 객실은 매우 넓었으며 화려하고 우아한 붉은 색의 비로도로 장식되였으며 궤테가 중국문화를 숭배하였기에 객실벽지에는 농후한 중국풍치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객식을 “북경”청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3층에는 궤테의 만년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그 전에 그저 책에서 괴테에 대한 이야기를 봤지 그의 인물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랄었는데 이 집에서 그의 초상화를 보니 아주 영준하게 생긴 미남이였습니다.      7. 우리 나라에 희말라야산맥이 있다면 스위스에는 알프스산맥이 있습니다. 설경 또한 황홀하게 이쁜데요, 알프스산맥의 필라투스산은 어땠나요?   17일 우리는 스위스에 가서 설경을 구경하려고 필라투스산으로 갔는데  차에서 내리니 산기슭까지 구름이 꽉 내리드리우고 보슬비까지 오면서 산이 올리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구름이 꽉 끼고야 어떻게 설산을 구경할 수 있는가? 아세아의 동쪽, 중국의 가장 동쪽 끝에서 구라파의 서쪽 나라 스위스에 와서 그렇게 바라던 설산경관을 구경할수 없으니 정말 재수없다. 하필이면 왜 오늘 날씨가 이런가?’”라며 실망의 소리로 한탄하니 가이드는 “그래도 올라가 보자. 싼꼭대기에 올라가면 혹시 설산을 볼수도 있다.”고 우리를 위안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로 삭도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올라갈수록 구름은 떠욱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거의 오를 무렵 아마 8/10쯤 올랐을가 할때 삭도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면서 푸른 하늘에서 해님이 우리를 반겨 방긋 웃으면서 눈부신 해살를 내리 뿜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뻐 모두 일제히 “야!” 하고 웨치였다 마치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는 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하얀 구름바다가 우리의 발밑에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 삭도에서 내리니 이곳은 해발 2000메터 좀 넘는 산이라 눈이 없었는데 저 멀리 사방에 모두 이보다 더 높은 수백개의 설산봉우리 보이였는데 그야말로 가관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밑은 새하얀 구름바다였는데 드문드문 이름모를 커다란 산새들이 구름바다우로 날아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8. 스위스에서 기차려행도 하셨는데 기차려행도 응근이 재미있는 려행으로 려행애호자들의 로망입니다. 스위스에서의 기차려행은 어떠했는지요? 우리나라의 기차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예, 18일 오전 우리는 스위스의 루체룬에서 다른 도시 인터라켄으로 가면서 기차려행을 하게 되였습니다. 대합실로 들어 가 걸상에 앉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희귀한 일도 있었습니다. 아니 글쎄 참새들이 옛날 농촌에서 집안에 둥지를 튼 제비들처럼 집안에서 날아 다니다가도 우리가 앉은 걸상밑으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퐁퐁 뛰여다니면서 왔가갔다 하지 않겠습니까? 모양새는 우리 지방의 참새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경계심은 우리 지방의 참새들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지방의 참새들은 사람들의 곁으로 오지 않지요.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포르롱 하며 날아나면서 사람과의 경계심은 대단하지요.  그러나 이곳의 참새들이 사람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집비둘기처럼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물보호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다고 생각되였습니다.  기차에 올보니 중국의 기차는 모두 가운데 인행도이고 한쪽에 3인석, 다른 한쪽에 2인석으로 된 한줄에 5인석 표준궤도의 차였는데 이번에 스위스에서 탄 기차는 인행도 량켠이 다 2인석인 한줄에 4인석 좁은 궤도의 차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기차길도 좁아 보이였습니다. 기차는 루체른호(卢塞恩湖)연안을 따라 달렸는데 거울같이 맑은 루체른호와 호수 량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수 있었습니다. 호수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과 산봉우리에 싸인 하얀눈이 거울같은 호수에 빗겨 아래우가 서로 대칭을 이루면서 유람객들의 눈과 마음을 호수로 끌어 들였습니다. 우리가 탄 붉은 색 기차도 호수에 빗겨 마치 기차가 호수 우로 달리는 듯 하였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 빗긴 흰눈에 덮인 산봉우리들, 호수에 빗긴 호수량안의 다름다운경치, 거기에 농촌마을과 풀밭에서 여유롭게 풀을 뜻고 있는 소떼들,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채화였습니다. 9. 스위스 하면 또 시계를 뺴놓을수 없죠. 혹시 시계는 구매하셨나요? 예, 인터라켄에 도착하여 우리의 인솔자는 우리를 시계상점으로 안내하면서 시계를 사려면 여기서 사라면서 이곳은 다른 곳보다 시계종류가 많고 값도 싸다는 것이였습니다. 시계상점에 들어가 보니 확실히 시계종류가 다양하고 환률은 유러와 인민페가 1:8로서 값은 인민페로 몇백원, 몇천원, 몇만원, 지어 값이 제일 비싼것은 인민페로 250만원에 가는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나씩 사고 아들과 미래의  며느리 될 사람의 것까지 4개를 샀는데 값은 인민페로 1,500원에서 3,500원 사이였습니다. 어리때부터 스위스는 시계왕국이고 스위스의 시계가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지라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보니 아주 흐뭇한 마음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중국의 100원짜리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때 스위스의 몇 천원에 달하는 시계도 10시를 가리키지 그 이상 더 똑똑하게 시간을  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허영심이랄가? 긍지감이랄가? 가부간 스위스 시계를 찬것으로 하여 기분이 흐뭇한 것만은 확실하였습니다. 10. 빠리에는 유명한 향수박물관도 있는데요, 녀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이죠. 향수박물관은 어땠는지 참 궁금하네요. 향수박물관은 5,000년에 이르는 향수의 력사를 보여주기 위해 프라고나르회사가 1983년 설립하였는데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5만여 건에 달한다고 합니다. 향수박물관은 주로 력사구와 수장품구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향수를 비롯해 향수병, 향수 저장 용기, 제조도구, 화장품세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여 있었으며 동서양의 각 시대별 향수와 화장품 종류들도  전시되여 있었습니다. 각 시대에 만들어진 향수병은 당시의 류행을 반영한 것이여서 설계와 류행의 변화도 알아 볼 수 있었으며 향수 추출을 하는 증류기 등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전시되여 있어 향수의 제조와 포장 방법이 발달해온 력사를 알볼 수 있었습니다. 현대식 향수 제조방법도 제조공정 전체를 실제 설비 그대로 전시해 놓아 쉽게 리해할 수 있었으며 관람객들에게 향기를 맡는 법 등 향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었으며 향수 종류별로 냄새를 맡아보는 항목도 있었는데 젊은이들, 특히는 젊은 녀성들은 냄새를 맡아보고 여러가지 향수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를 하였지만 나로서는 남들을 따라 냄새는 맡아보았지만 맡아 본다더라고 맡았지 좋다 나쁘다 평가는 할 수 없었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프라고나르 회사의 화장품상점이 있어 유람객들은 그 자리에서 공장가격으로 마음에 드는 그 회사의 그라스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화장품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가운데는 세쌍의 젊은 부부외에 젊은 녀성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 사는 것보다 질도 많이 좋거니와 가격도 중국에서 사기보다 많이 싸다며 자기네도 쓰고 돌아가서 선물로 주겠다며 여러가지 화장품들을 쌌는데 저마다 한 가방씩은 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11. 주선생님께선 근 두주일동안 유럽 여러 나라들을 려행하였는데요, 사실 문화가 전혀 다른 지역을 돌면서 가장 힘든 점은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려행을 떠날 때 꼭 고추장을 갖고 가거든요. 외지음식을 며칠만 먹으면 김치와 고추장이 생각나요. 혹시 유럽려행시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환률차이로 가격도 꽤 나갈것 같은데요. 이딸리아의 피렌체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이딸리아에 와서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은 먹어 봐야지 하며 1인분에 인민페로 350원씩 하는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 스테이크, 우리말로 하면 소고기구이를 먹어보기로 했습니다. 소고기구이는 소고기 등심을 프라이팬(煎锅)에 구운 것인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딸리아의 사람들은 소고기구이를 할때 익은 정도를 기수로 말하지 우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딸리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5분숙(5分熟),7분숙(7分熟)으로 해서 먹지 전숙(全熟)으로는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5분숙은 피물이 뚝뚝 떨어지고 7분숙은 겉은 다 익고 내부는 조금 덜 익어 조금 붉으스레 하다고 합니다. 전숙으로 먹으면 질겨서 맛이 못하고7분숙으로 구워 먹으면 만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고기를 다 익혀 먹는 습관이 있기에 피가 떨어지는 5분숙은 먹을 수 없는 만큼 7분숙으로 먹기로 하였습니다. 소고기구이는 두사람이 한 프라이팬으로 해서 한상에 4명씩 앉아 먹었는데 우리 부부는 심양에서 온 젊은 부부와 같이 한상에 마주 앉아 먹었습니다. 소고기 스테이크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하지만 속이 채 익지 않아 붉으스레 한 것이 우리 부부의 입에는 맞지 않아 겨우1인분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마주한 젊은 부부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1인분을 그들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감사하다면 그것도 맛있게 다 먹었습니다. 음식문화도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우리 늙은이들은 동양음식문화에 습관되여 한 끼니에 인민페 700원을 팔고도 그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라는 것을 맛을 보았다 뿐이지 먹기는 맛없이 먹었지만 젊은이들은 맛있게 먹는 것을 봐서 서양음식문화를 인차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가장 우리의 습관과 맞지 않은 것이 바로 음식문화였다. 아침식사는 반드시 주숙한 호텔의 뷔페(自助餐)를 먹게 되였는데 뷔페란 전부 여러가지 종류의 빵과 우유, 과일였습니다. 저는 집에서부터 우유와 빵은 먹지 않는 습관이므로 아침에 식당으로 들어 가면서부터 우유냄새에 코를 찡그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별 타발이 없이 자기의 배는 채웠지만 70년간 내몸에 토장국냄새가 슴배이고 쌀밥에 토장국으로 내몸을 가꾸어 온 저로서는 입에 너무 맞지 않아 그저 굶지 않는다는 정도로 코를 찡그리며 억찌로 먹었습니다. 이번에 유럽에 가 보니 유럽에 가서 식당을 꾸리는 중국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인솔자도 중국인인지라 점심, 저녁이면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를 하였습니다.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라 점심, 저녁은 이밥에 여섯가지 채, 한가지 국(六菜一汤)이였기에 우리의 음식습관에 맞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 없었더러만 10여 일 간 유럽려행을 어떻게 하였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2. 려행이란 낯선 곳에 가서 그 지역의 문화와 력사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재밌는 일입니다. 보통은 처음 가는 곳이다보니 려행을 끝낼때 꼭 아쉬운 면들이 있던데요, 혹시 이번 유럽려행은 어땠나요? 예, 저는 어느 곳을 가나 그곳의 농업고찰을 하기 좋아 하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드문드문 옥수수가을을 하지 않은 것이 보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작물들은 가을을 한 뒤여서 농업고찰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였습니다. 이딸리아의 북부 미란에서부터 중부 로마까지 또 다시 중부로부터 북부에 이르기까지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여러 곳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뻐스에서 내다보면 그래도 잔디풀 같은 것이 온 전야를 덮었는데 제 생각에는 온 전야를 잔디로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되여 저것이 바로 동맥(冬麦)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솔자(가이드를 겸함)와 물어 보니 그도 중국인이라 그것은 몰랐습니다. 운전수와 물어보려 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니 방법이 없어서 가이드더러 운전수와 물어봐 달라고 하니 운전수도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운전수가 몰를 수 없겠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유감스러울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가이드도 중국인이라 어째든 당지의 가이드보다 제한성이 있다는 감이 들었다.   --- 맺 는 말 --- 네, 오늘은 주청룡 선생님을 모시고 유럽려행기를 들었는데요,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지난후 이 나라들에 려행가려는 분들한테 조금나마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본 프로기획에 황설화, 록음제작에 손귀옥이였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한테 힐링이 된 시간이였길 바라면서 다음주 이 시간에 더욱 힐링되는 내용으로 만나뵙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276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댓글:  조회:4045  추천:0  2020-05-06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ㅡ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방송일시: 2020년 5월 4일  기획: 리은파        사회: 서태문        출연: 주청룡        제작: 원미란         --- 개 시 곡 --- 사회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프로진행을 맡은 서태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전인 1919년 5월 4일, 북경의 청년학생 5,000여명이 천안문앞에 모여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벌였습니다. 운동은 6월 3일 후 주력이 학생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바뀌였으며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에 파급되였습니다. 제1차세계대전기간 유럽렬강들이 동방을 돌볼새 없는 사이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했으며 중국의 주권을 엄중히 해쳤습니다. 중국인민의 반일정서는 날로 고조되였으며 1919년 이른바 “빠리평화회의”에서 무능한 정부 외교실패를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위대한 “5.4운동”이 촉발되였습니다.  “5.4운동”은 중국공산당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운동 발생 2년후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고고성을 울렸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들을 령도하여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라는 세 개의 큰산을 뒤엎는 위대한 장도에 올랐습니다. “5.4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구민주주의 혁명과 신민주의 혁명의 분수령으로 되였으며 새중국에서는 매년 5월 4일을 “청년절”로 정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M-   오늘 “공감 40분”에서는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한 지식인의 체험과 감수로부터 “5.4운동”이 중국인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 알아보고 “5.4정신” 발양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관계에 대해 심층 담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께서 나와계십니다. 사회자: 어서 오십시오! 저희 “공감 40분”에 나오 신 것을 환영합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5.4애국운동”은 력사적배경과 의의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 순서로 넘은 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히 설명주시겠습니까? 주청룡: 예, 오늘 방송국에서 우리 나라《5.4》청년절을 맞으며 아주 좋은 프로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금년은 《5.4》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해 4월 30일에 북경인민대회당에서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에서 습근평총서기는 중요한 연설을 발표하였으며 새시대 중국청년들에게   여섯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그 여섯가지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원대한 리상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위대한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세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시대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네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과감히 련마하고 분투해야 한다. 다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탄탄한 실력을 익혀야 한다. 여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품성을 닦아야 한다. 저도 작년에 《5.4》운도 100주년을 맞으면서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란 칼럼을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100년전의 일을 말하는가 하는데 5.4운동은 이미 100 년이 지났지만 100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 뿐이다. 《5.4 》운동 력사배경: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 국가들의 실패로써 끝났습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전승국 방면의 영국,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 일본 등 제국주의는 프랑스 빠리에서 소위 《평화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실제상에서 이는 제국주의 렬강들의 장물분배회의였습니다. 당시에 중국도 《전승국》의 하나로서 대표를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대표는 전국인민들의 압력하에 평화회의에 향하여 중국에서의 렬강들의 특권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또 일본제국주의가 원세개와 맺은 21개 조항의 불평등 조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진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대전때에 일본에 빼앗긴  산동에 있어서의 독일이 차지하였던 각종 권리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영, 불 제국주의의 조정과 북경군벌정부와 친일파이며 대반역자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등의 부패무능으로 말미암아 중국인민의 정의적 요구는 대회에서 부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회에서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접수하고 정식으로 산동에서 차지하고 있던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였습니다. 빠리평화회의에서 제국주의가 공공연하게 중국의 리익을 침범한 소식이 전파되자 중국인민들의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이래서 1919년 5월 4일에 북경의 5,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밖으로는 국권을 찾고 안으로는 매국적을 징벌하자!”, “21개 조약을 페지하라!”,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말라”는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친일파이며 매국역적인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를 처벌할 것을 일치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대와 경찰을 풀어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탄압하고 학생 30여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북경의 항생들은 총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전국에 통전을 내여 항의를 표시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5월 6일에는 천진, 상해, 장사, 광주 등지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북경학생들의 투쟁을 성원하였다. 6월3일과 4일에는 북양군벌정부는 북경의 학생 1,000여명을  체포하자 운동의 주력도 학생군중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들에로 파급되였습니다. 이러니 북양군벌정부는 할 수 없이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고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세 매국역적을 철직시켰으며 회의 마지막날인 6월 28일에는 《빠리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습니다. 그리하 반제, 반봉건적 투쟁은 초보적인 승리를 달성하였습니다. 《5.4 》운동의 력사적 의의: 《5.4 》운동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동시에 본건주의를 반대하는 위대한 애국운동입니다. 모택동동지는 《5.4 》운동의 특출한 력사적 의의에 대하여 “그것이 신해혁명으로서는 가지지 못하였던 그러한 자태로서 나타나게 되였다. 즉 반제국주의 철저성, 비타협성 및 반봉건주의의 철저성, 비타협성에 있다.”고 말씀하였으며 습근평총서기는 지난해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5.4운동의 력사적의의에 대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혁명성, 구국강국의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성, 여러 민족 각계 군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광범성으로 중국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를 추진했으며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위해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를 하고 새 혁명력량, 혁명문화, 혁명투쟁이 력사무대에 오르는 데 조건을 창조했는 바 중국 구민주주의혁명이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되여 근대이래 중화민족이 민족독립과 발전진보를 추구하는 력사과정에서 리정표적 의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5.4운동이 폭발하여 2년만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하였고 30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지난해에는 5.4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사회자: 선생님께서는 다년간 학교에서 책임일군으로 계시다가 은퇴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또 사업관계로 “5.4운동”이나 “1.29”행사를 많이 접하고 거기에 깃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5.4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처음 기억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주청룡: 예, 《5.4 》운동에 대해서는 제가 초중을 다닐때부터 학교에서 해마다 《5.4》운동기념활동를 하였으니  초중시절부터 《5.4운동》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게 되였지요. 그리고 여기에 《12.9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으니 《12.9 》운동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 합시다. 《12.9 》운동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규모가 큰 한차례의 학생운동입니다. 1935년 6월 국민당정부가 일본의 중국 화북에 대한 통치권요구를 접수한 《화북사변》이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 즉 《8.1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 인민들에게 일떠나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935년 12월 9일에 북평의 학생 5,6천여 명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서 시위행진을 하면서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게 외적에 대항하자!”, “화북자치를 반대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높이 웨쳤습니다. (제가 앞에서 《5.4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경이라 하고 《12.9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평이라고 말했는데 북경이나 북평은 다 지금의 수도 북경을 말하는데 원래는 지금 북경의 이름이 북평이였습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주태가 수도를 남경으로부터 북평으로 옮기면서 북경이라고 불렀고 불벌전쟁후 1928년 국민정부가 수도를 북경으로부터 남경으로 옮기면서 북경이 다시 북평으로 되였으며 1949년에 새중국이 탄생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도를 북평으로 정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북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국민당반동파들은  많은  군대와 경찰들을 풀어 학생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00여명이 부상당하고 30여명이 체포되였습니다. 북평학생들의 영용한 투쟁은 재빨리 전국 인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았습니다. 상해 남경, 항주, 무한, 광주, 서안, 천진, 성도 등 많은 도시들에서 선후하여 기세드높은 시위행진이 진행되였습니다. 북평과 천진의 학생들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남하확대선전단》을 조직하여 더욱 광범위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북평, 천진으로 돌아온후 《중화민족해방선봉대》를 조직해가지고 더욱 구국운동의 새 고조를일으켰습니다. 저도 교육사업을 하면서 젊었을 때에는 학교의 공천단 사업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5.4청년절이거나 12.9운동기념일이면 학생들을 조직하여 기념활동을 하였지요. 5.4청년절을 맞으면서는 해마다 전교적으로 입단의식을 하였는에 입단하는 학생들은 공청단휘장을 달고 붉은 주먹을 들고 단기앞에서 선서를 할때에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격동되고 기뻣지요. 그리고 입단을 요구하는 적극분자 학생들은 자기도 저 동학들을 따라 배워 빨리 입단을 쟁취하겠다는 심정이였지요. 12.9운동기념일을 맞으면서는 문예경연대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활동을 조직하게 되면 학생들이 열정이 매우 높습니다. 저도 반주임공작을 하면서 제가 맡은 반 학생간부들에게 기념행사 포치를 하면 그들이 자체로 공연절목을 짭니다. 그리고  1등을 쟁취하겠다고 열심히 련습을 합니다. 이리하여 몇번 전교 1등을 쟁취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기뻐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반주임으로서 저도 학생들과 같이 기뻐 춤도 추고 노래도 하군 하였습니다.     사회자: “5.4정신”하면 “애국, 진보, 민주, 과학”으로 간단히 귀납할수 있지만 그 표현과 내포는 무궁무진하며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혁명전쟁년대에는 새중국의 창건을 위해 생명을 바친 혁명선렬들이야말로 진정한 “5.4정신”의 구현자들이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혁명선렬을 가장 숭경하고 그들의 어떤 점을 따라배우고 본보기로 삼았습니까? 주청룡: 토지혁명전쟁시,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에 많은 혁명렬사들과 전투영웅들이 나왔지요.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학교를 다닐때에 한어교과서에 《동존서》가 있었고 《소년아동보》에도 동존서사적이 실렸고 또 《동존서》란 책도 나왔습니다.     동존서는 1945년에 팔로군에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48년 5월 26일에 하북성의 륭화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그가 소속된 련에 적의 토치까를 폭파하는 임무가 떨어졌습니다. 동존서는 폭파조 조장을 맏고 4채의 포루(炮楼)와 5개의 토치까를 폭파시켜 승리적으로 폭파임무를 완성하여 부대가 즉시 돌격을 시작할 때에 다리우의 음페된 토치까에서 맹렬히 불을 내쏘면서 아군의 전진을 가로 막았습니다. 이때 동존서는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련장에게 “나는 공산당원입니다. 저에게 저 폭파임주를 주십시오.” 라고 청원하였습니다. 련장이 그의 청원을 비준하자 그는 폭파약을 안고 토치까를 향해 기여가는 도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완강하게 견지하여 토치까 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폭파약을 놓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불을 내 뿜으면서 아군의 전진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을 보고 더는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그는 왼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겼습니다. 또치까는 폭파되고 아군의 전진의 길은 열어놓았지만 그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나이는 겨우 19살이였습니다. 부대당위에서는 그에게 《전투영웅》, 《모범공산당원》 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19살의 꽃나이에 새중국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은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공산주의 전사들에게서만 있을 수 있는 자아희생정신이라고 봅니다. 야! 생각만 하여도 너무나 경탄할 일이지요. 한 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길때 그에게는 오직 혁명을 위하여 내 이 한 몸을 바친다는 정신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소설 《붉은 바위에》에 나오는 허운봉, 강설금과 같은 혁명렬사들이지요. 그들은 적들의 그 가혹한 고문에 정신을 잃고 쓸어지면서도 굴하지 않고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영웅적 행동도 참으로 경탄할 일이지요. 손가락에 참대꼬챙이를 들이 꽂을 때 얼마나 참기 바빴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고수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놈들은 또 온 몸에 랭수를 퍼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또 다시 고문을 들이대며 이렇게 놈들은 이런 수단을 반복하면서 고문을 들이 댔지만 그들이 끝내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정신. 놈들은 그들의 입에서 조금한 비밀도 얻어내지 못하자 마지막에는 사형에 처하였지만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형장에서도 끝까지 놈들에게 굴하지 않고 《국제가》를 높이 부르고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만세”를 높이 부른는 혁명정신. 이들의 이런 투쟁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새중국을 맞이하였으며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양정우렬사는 적들의 포위속에서 일본놈들과 싸우가가1940년 2월 23일에 영용히 희생되였는데 일본놈들은 양정우가 2월 15일부터  자기들의 포위망에 들어 량식래원이 끊기였는데 2월 23일 희생될 때까지 8일동안 이 눈속에서 무었을 먹고 그렇게 완강히 싸웠는가고 너무도 의상하여 양정우의 배를 갈라보니 배안에는 채 소화되지 않은 나무껍질과 풀뿌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지민동지는 반역자의 밀고로 1935년 1월 29일에 국민당반동파들에게 체포되였는데 체포될 때에 국민당병사들이 방지민동지의 온 몸을 수색하였을 때 회중시계하나와 만년필 한대가 나왔을 뿐 돈은 이전한푼도 없었습니다. 놈들은 양정우동지나 방지민동지는 군대의 고위급 장령이니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그어떤 귀중한 물품이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러한 귀중한 물품들이 하나도 없었고 양정우동지에게는 배안에 나무껍질과 풀뿌리, 방지민동지에게는 회중시계와 만련필뿐이였습니다.  옥중에서 놈들은 방지민동지에게 백방으로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방지민동지는 견정불굴하게 “정의를 위하여 깨끗이 죽을망정, 너절하게 살지는 않는다” “혁명을 위해 죽지만  그 죽음은 가치 있고 영광스럽다.”라며 놈들과 완강하게 투쟁하여 공산당원의 절개를 보여 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는 감옥에 6개월 넘게 갇혀있는 동안 놈들이 그에게 자백서를 쓰라고 준 종이와 만년필로 《내가 혁명에 종사한 략술》, 《청빈》, 《사랑스러운 중국》, 《옥중실기》 등 10여편의 글을 써냄로서 공산당원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와 양정우동지의 일생은 민족의 해방, 인민의 행복을 위한 일생이였으며 공산주의 사업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한 일생이였습니다. 사회자: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인민의 생명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선뜻히 내놓은 영웅인물들이 매 력사시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2,3십대 젊은이들이였습니다! 선생님의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 있습니까?  주청룡: 예, 여기에서 구양해를 들수 있는데 1963년 11월 18일 이른 아침 부대에서 야영훈련을 하면서 철길역을 따라 행군을 하였는데 려객을 가득 실은 렬차가 기적을 울리며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잔등에 포를 실은 말이 놀라서 철길우에 뛰여 올랐습니다. 기차와 포를 실은 말이 마주 치려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구양해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철길에 올라 말을 있는 힘껏 밀어 냈습니다. 말을 철길에서 밀어내고 엄중한 사고는 피면하고 려객의 생명안전과 인민의 재산은 안전하게 지켜냈지만 구양해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왕걸을 들수 있는데 1965년 7월 14일 강소성 비현장루공사(邳县张楼公社)에 가서 민병훈련을 지도할 때에 이외로 폭파약이 폭발하려는 순간 왕걸은 12명의 민병과 무장부 간부의 생명안전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엎드려 목파약을 끌어 안고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도 23살이였습니다.  구양해와 왕걸은 뢰봉이 희생된다음 뢰봉정신을 이어받은 새시대의 첫영웅들이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나라와 집체를 위한 자아희생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1981년 일본에서 펼쳐진 제3차 녀자배구월드컵에서 중국녀자배구팀을 7전 7승의 성적으로 단연 우승을 따냈습니다. 그후 우리 나라 각 령역에서는 중국녀자배구팀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었으며 “녀자배구정신”이 지난 세기 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대명사로 됐습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완강히 분투하는 “녀자배구정신”은 “5.4정신”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녀자배구정신”이 “5.4정신”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까?  주청룡: 예, 현시대 청년들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 습근평총서기가 말씀 한바와 같이《당의 기대, 인민의 기대, 민족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며 이 위대한 시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운동원들이 나라를 대표하여 국제적 경기에서 상대방 나라 선수들과 겨루는 것은 총을 들고 맞다들어 싸우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금메달을 따올때까지는 피타는 노력이 들었지요.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세계급 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나라를 대표로 한 운동원으로서 당의 기대, 나라의 기대,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대와 결사적으로 싸워 조국의 영예를 위해 금메들을 따내는 것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중국 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이름이 나고 명성수가 되였지만 자만하지 않고 근본을 잊지 않고 자기의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의 로인들을 잊지 않고 고향의 후대양성사업에 관심을 돌려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20여 km의 아스팔트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 좋은 지방이름이 있는데.” 하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주정은 올해 《5.4》청년절을 맞아 제24회 중국청년 5.4메달 획득자 30명가운데 한명으로 입선되였는데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랑평이 중국 로녀자배구팀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주정은 신녀자배구팀의 선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정이는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으로서 그 간고한 훈련도 이겨내고 나라의 영예를 위하여 강팀들과 맏다들어 세계급배구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고향건설을 잊지 않은 정신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라고 봅니다. 사회자: 기원 2020년 신종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이 무한을 비롯해 우리 나라 대지를 덮쳤습니다. 중국은 전례없는 자연재해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습근평총서기를 총지휘로 하는 당중앙의 령도하에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전염병예방통제 총체전, 저격전을 벌였습니다. 최전선에는 항상 의료일군들이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는 특히 젊은 녀간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 어떠합니까?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진정한 시대의 본보기가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주청룡: 예, 붉은기가 나붓기고 격앙된 장엄한 《조국을 노래하자》 노래소리와 환영하러 나온 사회각계 군중들의 열정에 넘치는 환호소리 속에서 길림성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이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장백산공항에 내리는 장면을 텔레비죤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3월 24일에 25명, 28일에 4명 도합 29명의 연변의 무한지원 백의전사들도 있었다. 정말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습니다. 제가 지난해에 5.4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칼럼을 쓸때까지도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번 전염병에서 보면 평화시기라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이번에 호북지원 의무일군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지원을 간 것입니다.   당중앙의 호소와 성당위 성정부의 지시에 호응하여 우리 주에서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예방, 통제의 수요로 무한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게 되자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한의료지원에 나섰던 것입니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입원치료를 받다가 여러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오직 내 이 한 마음, 내 이 한몸을 당에 바치여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인민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는 자아희생정신의 표현이였습니다. 그들가운데는 2,3살 되는 애를 둔 애기엄마도 있었고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한의료지원팀으로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사업터에 나설 때에는 우선 방호복으로 전신무장을 하여야 했습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군사들이 쇠나 가죽으로 된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였다면 그들은 방호복이란 평화시기의 현대식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고 의료작업에 나섰습니다. 방호복을 착용한 다음부터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꼬박 쉴새없이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했습니다. 방호복을 입은 다음부터는 위생실도 갈 수 없기에 최소한 식사량을 줄이고 음료수와 기타 수분흡수도 줄여야 했습니다. 만약의 경우 고려해 영아처럼 기저귀도 차야 했습니다. 하루의 간고한 의료작업을 마치고 근무교대를 한 다음 번거로운 소독작업을 거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통기가 되지 않는 방호복 착용으로 하여 온몸이 땀벌창이 되고 방호용구의 압착으로 하여 얼굴에 패인 주름과 땀에 절어 몸, 얼굴, 손에는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것을 우리는 텔레비죤을 통하여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인민군중의 생명안전을 위해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태산보다 무거우며 전염병 발생상황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다.’는 습근평 총서기의 중요정신을 실천하고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용감히 싸워 승리하고 오늘 영광의 꽃다발을 안고 개선가를 부르며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변의 29명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우리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며 뢰봉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목전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향해 순항하고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정신”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것이며 그 외연과 내포가 날로 풍부해지면서 후대의 거울로 계승, 발양되고있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주청룡: 예,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본직사업을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사업을 하여야 만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 것이 아니며 습금평총서기가 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대로 하는 것이 바로 현시대에 5.4정신을 발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발전중에 있고 국제정세가 급격하고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리상신념을 견정히 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치여 19차 당대회 정신과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학습하고 터득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고 습근평총서기가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에 따라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얘기나눠보았습니다.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주청룡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   맺음말: “5.4운동”은 한부의 사시이고 력사극이고 교양악입니다. 그속에서 그리고 그후 수많은 지사들이 새중국창건을 위해 눈물겹고도 비장한 이야기들을 엮었습니다. 그중의 백미는 제1차국내혁명전쟁, 제2차국내혁명전쟁, 항일전쟁, 해방전쟁가운데서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위해 희생된 혁명선렬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희생 당시 2,3십대 젊은이였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매 력사시기마다 시대정신을 체현한 선진인물들이 용솟음쳐왔으며 이들은 “5.4정신”의 구현자, 시대의 본보기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이라는 선인들이 해보지 못한 위대한 장정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 발양하고 “5.4정신”을 널리 고양하는 것은 시대를 뛰여넘어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으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리은파, 제작에 원미란이였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75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영욕(荣辱) 댓글:  조회:4899  추천:0  2020-04-09
붉은기가 나붓기고 격앙되고 장엄한 노래소리와 환영하러 나온 사회각계 군중들의 열정에 넘치는 환호소리 속에서 길림성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이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장백산공항에 내리는 장면을 텔레비죤을 통해 보았다. 그 가운데는 25명의 연변의 무한지원 백의전사들도 있었다. 정말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다. 당중앙의 호소와 성당위 성정부의 지시에 호응하여 우리 주에서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예방, 통제의 수요로 무한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게 되자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한의료지원에 나섰던 것이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입원치료를 받다가 여러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다. 그들은 무한의료지원팀으로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떠났다. 그들이 사업터에 나설 때에는 우선 방호복으로 전신무장을 하여야 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군사들이 쇠나 가죽으로 된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였다면 그들은 방호복이란 평화시기의 현대식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고 의료작업에 나섰다. 방호복을 착용한 다음부터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꼬박 쉴새없이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했다. 방호복을 입은 다음부터는 위생실도 갈 수 없기에 최소한 식사량을 줄이고 음료수와 기타 수분흡수도 줄여야 했다. 만약의 경우 고려해 영아처럼 기저귀도 차야 했다. 하루의 간고한 의료작업을 마치고 근무교대를 한 다음 번거로운 소독작업을 거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통기가 되지 않는 방호복 착용으로 하여 온몸이 땀벌창이 되고 방호용구의 압착으로 하여 얼굴에 패인 주름과 땀에 절어 몸, 얼굴, 손에는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것을 우리는 텔레비죤을 통하여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인민군중의 생명안전을 위해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태산보다 무거우며 전염병 발생상황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다.’는 당중앙의 중요정신을 실천하고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용감히 싸워 영광의 꽃다발을 안고 개선가를 부르며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연변의 25명 무한지원 백의전사는 우리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현시대의 영웅들이다. 하지만 전국인민들이 이번 전염병예방, 통제 사업을 가장 중요한 정치임무로 삼고 일심협력하여 예방, 통제에 나설 때에 일부 사람들은 이번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제멋대로 요언을 날조하고 퍼뜨려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을 일종 쾌락으로 느끼는가 하면 지어 일부 사람들은 예방, 통제 일선에 나선 사업일군들의 업무를 방애를 하거나 거역해나서 에 의해 7~20일 행정구류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방역, 통제 일선에 나선 일군들을 구타하는 행위까지 벌려 유기징역 1년 2개월 판결을 받은 사건도 있는가 하면 더욱 한심한 것은 주택구의 경비인원들이 관련 규정에 의해 차를 주민 주택구역으로 들어 못 가게 제지하자 칼로 경비원 2명을 부상 입히고 1명을 숨지게 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일부 개인들과 애심단체에서는 무한에 마스크를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마스크가 긴장하여 살 수 없었다. 일부 불법분자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간주하고 사기행각을 벌리는 일도 있었다. 우리 연변에도 마스크 사기사건만 하여도 4건이 있었는데 그 사기금액이 각각 800원, 5000원, 8만원, 20만원이였다. 이들도 지금 인민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당을 믿고 당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우리 나라가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이만큼 승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중앙의 정확한 령도 아래 전민이 일심협력하여 예방, 통제에 나섰고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의 고생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아희생 정신으로 호북 전선지원에 나서서 바이러스와 영용히 싸웠기 때문이다. 또 각급 당위와 정부 공안경찰, 당지의 의료일군들, 사회구역 사업일군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한 전 국민의 간고분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며 친인들을 잃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고 전염병 예방, 통제 일선에서 밤낮없이 싸우는 백의전사들 모습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영광의 꽃다발을 안기기도 했다. 또 우리는 전염병 예방, 통제를 장난거리로 여기고 요언을 날조하여 민심을 소란시키는 사람들, 개인의 리익을 위해 마스크 사기행각을 벌리고 공무집행에 방해를 주고 공무집행에 거역해나선 사람들에게 치욕과 격분을 금할 수 없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판이한 영욕(荣辱), 다시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변일보
274    서유럽려행기[32. 마지막회] 댓글:  조회:3623  추천:0  2020-04-04
서유럽 려행기 [32. 마지막회] 5)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 회화(绘画)적이고 극적인 복잡한 굴곡과 곡선의 움직임이 풍부하고 건축물의 안팎은 금빛의 눈부신 조각이나 그림으로 장식한 문예부흥시기  이후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된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이다. 례하면 바띠깐노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圣彼得广场)이다. 바로크건축(巴罗克建筑) 바띠깐노시국 특히 로마의 콜로세움은 서기 70년에 착공해 10년 뒤인 서기 80년에 준공되였는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0년 전에 지은 건물이지만 4층으로 되여 있으며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5~6만 명의 관중들이 입장하는데 30분, 퇴장하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게 설계되였다. 콜로세움은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1층은 도리아 양식(多立克柱式, 도리스인들이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기둥이 굵고 주추돌이 없으며 기둥머리 장식이 역원추 모양으로 간소하나 장중미가 있다), 2층은 이오니아 양식(爱奥尼柱式,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아테네 전성기 때에 이오니아지방에서 발생하여 1세기가량 성행하였는데 우아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3층은 코린트 양식(柯林特风格,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의 기둥과 원형에 가까운 아치로 장식되여 있다.  서유럽의 건축을 보면 대부분 4 ~ 5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10여일 동안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를 돌아보면서 6층이상의 건물은 몇채 보지 못하였으며 혹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건물을 봤다면 모두 교외에서 한 두채씩 보이였다. 그리고 이딸리아에서 도시의 거리바닥은 전부 돌을 깔았으며 유럽에서 도시의 대중교통으로는 뻐스이고 무괴도 전차와 유괴도전차도 있었으며 그들의 특정된 도로 점유공간이 없이 뻐스와 무괴도 전차들이 유괴도전차 레루장을 마구 깔며서 달리고 있었다. 이딸리아에서 도시의 어떤 거리들을 보면 매우 좁았는데 기동차가 없던 시대에 지은 집들이여서 그런지 4,5층으로 된 층집사이에서 뚱뚱한 사람이 둘이서 나란히 걷기 바쁠 정도로 좁은 길도 있었다. 유럽의 도시건축들을 보면 특히 궁전이나 대성당 같은 건물들은 몇 십 년, 지어 몇 백 년을 걸쳐 지었으며 대부분 지은 지 몇 백 년, 지어는 천년넘는 집들이였는데 그래도 아주 견고하게 서 있었다. 나는 유럽의 이런 건축물들을 보면서 이곳에서는 한번 집을 지으면 몇 백 년 지어 천년도 넘게 사용하는데 왜 우리 고장에서는 지은지 50년도 못가고 20 ~ 30년 되는 집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또 새로운 집을 짓는지 의문스러웠다. 질량보증이 그렇게도 안 되는지? 전형적인 실례를 본다면 연길시내에 있던 청년호텔을 들수 있다. 외관으로 14층으로 된 그 집은 지은지 20년이 좀 지나 허물고 다시 그자리에 그보다 좀 높은 새로운 층집을 지었다. 낡은 층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층집을 지으니 새로운 층집값에는 낡은 층집값까지 포함되였으니 새로 지은 층집값이 올라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둘째로 치고 건축물자재에 대한 자원랑비가 얼마이며 낡은 집을 허물었다면 거기에서 나오는 건축쓰레기는 얼마겠는가? 몇천년 가도 분해가 되지 않는 이런 건축쓰레기 처리도 얼마나 골치거리로 되는가? 우리도 유럽의 건축처럼 한번 지으면 몇백년 갈수 있게끔 지을 수 없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 귀국비행기에서의 체험   프랑크푸르트국제비행장 비행기가 베를린 시간으로 22일 오후 7시반(북경시간으로23일 오전2시 반)에 리륙하였는데 북경에 도착은 북경시간으로 23일 정오 12시였다. 갈 때에는 해뜨는 방향을 등지고 날다니 북경에서 새벽 2시반에 리륙하여 10시간 계속 밤으로 날았지만 귀국 할때에는 비행기가 해뜨는 방향을 마주하여 날았으므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랄산맥을 넘어 아시아의 경내에 들어 서면서부터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서 9시간 반의 비행로정에서 대부분 시간은 낮이였으므로 산과 전야, 하천과 호수 등 자연 풍경들을 다 볼수 있었으며 씨비리상공을 지날때에는 산들에 흰 눈이 덮여 있었다.   아세아와 유럽의 경계 우랄산맥 비행기가 날때에 매 승객들의 앞에 노트북의 모니터같은 스크린이 있어 영상으로 비행기가 날아야 할 시간과 거리, 비행기가 떠 있는 상공위치와 해발고도, 바깥기온, 비행시속변화, 이제 날아야 할 시간과 거리 등  수자적 정보가 다 나타났다. 비행기가 리륙할 때 보니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북경까지의 비행거리가 8,300㎞로 나타났으며 항선을 보면 약간 북으로 활등모양으로 호선을 그으며 날았다. 아마 직선거리로 날면 우랄산맥과 씨비리상공으로 날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상으로 수자적 정보가 나타남으므로 하여 많은 궁금증도 풀어 주었을 뿐만아니라 이미전에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이번의 려행으로 하여 직접적 체험으로 알게 되였다. 례하면 비행시속이 1,000㎞ 좌우, 비행고도가 만메터 좌우된다는 것과 해발고도가 매 100m 올라감에 따라 기온이 0.6도씩 내려간다는 것을 비행기에서 나타나는 수치로부터 알수 있었다. 비행기가 10,000m 상공에 떴을 때 외부 기온이 -60℃로 나타났는데 그때 아침이였음으로 지상기온이 0℃좌우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계산하여 보면 해발고도가 매 100m 올라감에 따라 기온이 0.6도씩 내려간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립증할 수 있었다. 12시가 되여 비행기가 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음으로 9시간 반 비행한 것으로 되다. 북경으로부터의 거리를 보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가 이딸리아의 미란보다 더 먼데 비행시간은 반시간 앞당겼으니 올때의 비행기가 비행시속이 더 빨랐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관검사를 마치고 세관을 나와서 우리는 각자 제 곳으로 가게 되여 서로 갈라지게 되였는데 이번의 려행길에 12일이란 시간이 그리 길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우리는 그 동안 모두 정이 들어 이후 서로 련락을 하려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아쉬운 심정으로 《안녕! 안녕!》하면서 갈라졌다.     이번 려행의 전체 팀원  [전문 끝] 서유럽려행기 전문 2019년 연변일보에 32기로 련재
273    서유럽려행기[31] 댓글:  조회:3854  추천:0  2020-03-31
서유럽 려행기 (31)   3. 농업고찰을 못한 유감 나는 어느 곳을 가나 그곳의 농업고찰을 하기 좋아 하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드문드문 옥수수가을을 하지 않은 것이 보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작물들은 이미 가을을 한 뒤여서 농업고찰을 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였다. 이딸리아의 북동부 미란에서부터 중부 로마까지 또 다시 중부로부터 북부에 이르기까지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여러곳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뻐스에서 내다보면 그래도 잔디풀 같은 것이 온 전야를 덮었는데 나의 생각에는 저것이 바로 동맥(冬麦)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솔자(가이드를 겸함)와 물어 보니 그도 중국인이라 그것은 몰랐다. 운전수와 물어보려 해도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니 방법이 없어서 가이드더러 운전수와 물어봐 달라고 하니 운전수도 모를 것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그럴 수 없겠는데. 그러나 가이드가 그렇게 말하니 유감스러울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이드도 중국인이라 어째든 당지의 가이드보다 제한성이 있다는 감이 들었다. 4. 서양음식문화 이딸리아의 피렌체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은 이딸리아에 와서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은 먹어 봐야지 하며 1인분에 인민페로 350원씩 하는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 우리말로 하면 소고기구이를 먹어보기로 했다. 소고기구이는 소고기 등심을 프라이팬(煎锅)에 구운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딸리아의 사람들은 소고기구이를 할때 익은 정도를 기수로 말하지 우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딸리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5분숙(5分熟),7분숙(7分熟)으로 해서 먹지 전숙(全熟) 으로는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5분숙은 피물이 뚝뚝 떨어지고 7분숙은 겉은 다 익고 내부는 조금 덜 익어 조금 붉으스레 하다고 한다. 전숙으로 먹으면 질겨서 맛이 못하고7분숙으로 구워 먹으면 만만하다고 하였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고기를 다 익혀 먹는 습관이 있기에 피가 떨어지는 5분숙은 먹을 수 없는 만큼 7분숙으로 먹기로 하였다.   소고기구이   소고기구이는 두사람이 한 프라이팬으로 해서 한상에 4명씩 앉아 먹었는데 우리 부부는 심양에서 온 젊은 부부와 같이 한상에 마주 앉아 먹었다. 소고기스테이크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하지만 속이 채 익지 않아 붉으스레 한 것이 우리 부부의 입에는 맞지 않아 겨우1인분만 먹었다. 그러나 우리와 마주한 젊은 부부는 맛있게 잘 먹었다. 하여 우리는1인분을 그들에게 주었더니 그들은 감사하다면 그것도 맛있게 다 먹었다. 음식문화도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우리 늙은이들은 동양음식문화에 습관되여 한 끼니에 인민페 700원을 팔고도 그저 이딸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소고기스테이크라는 것을 맛을 보았다 뿐이지 먹기는 맛없이 먹었지만 젊은이들은 맛있게 먹는 것을 봐서 서양음식문화를 인차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가장 우리의 습관과 맞지 않은 것이 바로 음식문화였다. 아침식사는 반드시 주숙한 호텔의 뷔페(自助餐)를 먹게 되였는데 뷔페란 전부 여러가지 종류의 빵과 우유, 과일였다. 나는 집에서부터 우유와 빵은 먹지 않는 습관이므로 아침에 식당으로 들어 가면서부터 우유냄새에 코를 찡그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않는다고 하면서도 별 타발이 없이 자기의 배는 채웠지만 70년간 내몸에 토장국냄새가 슴배이고 쌀밥에 토장국으로 내몸을 가꾸어 온 나로서는 입에 너무 맞지않아 그저 굶지 않는다는 정도로 코를 찡그리며 억찌로 먹었다. 이번에 유럽에 가 보니 유럽에 가서 식당을 꾸리는 중국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인솔자도 중국인인지라 점심, 저녁이면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를 하였다.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라 점심, 저녁은 이밥에 여섯가지 채, 한가지 국(六菜一汤)이였기에 우리의 음식습관에 맞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중국사람들이 꾸리는 식당이 없었더러만 10여 일 간 유럽려행을 어떻게 하였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5. 유럽의 건축문화 밀라노에 도착하여 유럽의 땅을 밟으면서부터 유럽 건축이 우리 동방과 다르다는 감이 들었다. 특히 궁전, 대성당 같은 건축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였다. 1)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 4세기경에 비잔티움(拜占庭, 기원전 7세기 메가라인麦加拉人 이 세운 식민 도시)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내부는 모자이크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큰 돔을 얹은 집중식 교회 건축이 특색인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이다. 례하면 피사의 세례당이다.   비잔틴 건축(拜占庭式建筑) 피사의 세례당  2) 로마네스크건축 (罗马风建筑) 천정은 돔(圆屋顶)모양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으며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한 10~12세기의 로마네스크양식 건축 (罗马风建筑)이다. 례하면 피사의 대성당이다.   로마네스크양식(罗马风建筑)피사의 대성당   3)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 하늘 높이 치솟은 뾰족한 탑이거나 지붕, 돔모양의 반구형 천장이거나 지붕으로 된 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나타난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이다. 례하면 밀라노대성당이다.   고딕양식의 건축(哥特式建筑) 밀라노대성당 4) 베네치아건축 (威尼斯建筑) 정면에 요철((凹凸))이 없이 평탄하며 우미하고 경쾌한 양식으로 문예부흥시기에 지은 베네치아건축 (威尼斯建筑)이다. 례하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이다. 베네치아건축(威尼斯建筑)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 [다음 계속]  
272    서유럽려행기[30] 댓글:  조회:3802  추천:0  2020-03-27
서유럽 려행기 [30] 우리는 궤테생가를 다 참관하고 다시 뢰머광장으로 왔다. 뢰머광장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마인강(美因河)이므로 우리 일행은 마인강 구경을 나갔다. 마인강은 라인강(莱茵河)의 최대 지류로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프랑크푸르트를 지나는 강이며 1천500톤 이상의 배가 항해하여 물자의 수송을 할수 있는 큰 강이다. 강변에 이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마인강에 가로 놓인 웅장한 아이젤너 다리(爱情桥)였는데 이 다리는 보행자 전용다리라고 한다. 특히 련인들이 즐겨 거니는 다리라고 하는데 아이젤너 다리를 한어로는 爱情桥라고 한다. 다리의 란간에는 빨간천으로 된 리본이 매여져 있는 사랑의 자물쇠가 조랑조랑 잠겨져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사랑의 자물쇠를 잠구어 놓으면 서로 갈라지지 않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한다. 다리우에는 노란 자물쇠를 파는 가게도 몇곳에 있었는데 사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글자도 새겨 주었다. 우리 일행도 이 다리에 올라서 거닐면서 강 저쪽켠까지 갔다왔는데 젊은이들은  가게에서 노란 자물쇠를 사서 자기들의 이름을 새겨서 빨간 리본과 함께 애정다리에 잠궈 놓았다. 영원히 갈라지지 않고 백년해로 한다는 것이였다. 자물쇠를 잠궜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꼭 그 념원대로 될 수가 있겠느냐마는 그들의 사랑의 념원만은 찬양할 바였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사랑의 자물쇠를 잠궈놓은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며칠 지나면 이 다리에 자물쇠가 가득 잠겨져 있다고 한다. 자물쇠가 너무 많이 달리면 해당부문에서도 이것을 제거 하는 것도 골치거리가 된다고 하는데 그 제거한 자물쇠를 페철로 팔아도 그것을 제거하는 일군들의 로동공가가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아이젤너 다리(爱心锁桥) 다음으로 눈에 크게 띄우는 것이 강 건너편에 높게 솟은 첨탑의 건물이였는데 가이드와 물어보니 드라이쾨니히교회라고 한다. 이번 려행에서 많은 성당을 참관 하였기에 일행 모두 그 교회를 가 볼 생각은 없었다.   마인강건너편 드라이쾨니히교회를 배경으로 강옆에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조깅하는 사람들, 애완견을 데리고 나와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원지 잔디밭의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비둘기와 백조, 오리 등 여러가지 물새들도 강우를 날아예다가도 사람들의 곁에 와서 내리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쪼르르 달려와 쪼아 먹고 또 주기를 기다리는 새들도 있었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나 그 나라의 상징적인 기념품을 사는 것을 잊지않고 있었기에 이곳에 와서도 상징적인 기념품을 사려고 돌아다니다가 둥근 도자기판에 프랑크푸르트의  징표로 되는  뢰머광장과 시청을 푸른하늘 흰구름을 배경으로 조각해 넣고 테두리를 노란색갈로 장식한 기념품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물로 될수 있다고 생각되여 그것을 샀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나니 오후 네시가 되였다. 이것으로 이번 서유럽의 려행은 끝이였다. 하여 우리는 귀국하려고 독일의 제1의 공항인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으로 갔다. 이번 려행에서 12일 아침 이딸리아의 미란공항에서부터 탄 이 뻐스를 22일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까지 10여 일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혼자서 6 개 나라를 돌았었고 또 다시 이딸리아로 돌아가야 함으로 그 뻐스운전수도 우리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다고 생각되면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저 손시늉으로 단 한마디 생큐(thank-you)하면서 손을 저어 감사의 뜻을 표할뿐이였다. 정말 영어를 모르는것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우리의 인솔자가 우리를 대표하여 영어로 그 운전수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니 그 운전수는 우리에게 웃음을 지으면서 몇마디 말하였는데 인솔자가 안녕히 귀국하는 뜻이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저어서 석별의 정을 표하며 갈라지였다. 공항에 들어서서 우리의 인솔자는 이번 려행에서 유럽련합내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들이 산 물건들을 면세수속을 하여 주었다.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청사   서유럽려행에서의 소감 이번 려행에서 여러 관광명소에 대한 소감은 이미 다 말하였기에 더 언급하지 않고 그외의 소감에 대해 몇가지 말하여 보려 한다. 1. 려행비용 2012년에 조선과 동남아의 몇개 나라와 지구(港澳新马泰), 2013년에 대만관광을 하였는데 관광비용이 경외관광(국제관광과 대만, 향항, 오문 포함)이 상대적으로 경내(중국대륙)관광보다 많이 눅었는데 이번의 서유럽려행도 연길로부터 서유럽까지 왕복 비행기로, 유럽에 가서 개인 쇼핑을 제외한 13일간의 모든 비용은 1인당 11,300원의 려행비용내에서 전부 해결되였으므로 상대적으로 국내려행보다 많이 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친척, 친구들에게 같은 값이면 국내려행보다 국제려행을 할 것을 권장하였다. 2. 기후 우리 연변은 북위 42도로서 기후는 북반구의 중온대 습윤한 계절풍기후로서 봄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에는 따뜻하고 덥고 비가 많으며 가을에는 시원하고 상쾌하며 비가 좀 내리며 겨울은 좀 길고 춥다. 나는 그전에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높은 곳은 다 연변보다 기온이 낮다고 생각했고 서유럽은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10도 좌우 높으므로 연변보다 기후가 많이 낮고 겨울이 연변보다 몹시 춥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어느 책에서 영국 런던의 기온이 대서양 편서풍의 난류로 하여 서울보다 여름기온이 낮고 겨울 기온이 높으며 런던의 강수량은 서울보다 계절에 따른 변동이 작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 서유럽려행을 떠날 때 옷 준비를 위해  떠나기 며칠전부터 우리가 가려는 나라의 기후를 인터넷 검색을 하여 봤다. 검색을 하여 연변기후와 비교를 해보니 우리가 가려는 나라의 기후는 련속 며칠간 모두 연변보다 4~5도 높았다. 하여 떠날 때에 옷을 가을 옷으로 두텁게 입지 않았다. 정작 서유럽에 가보니 확실히 우리 연변보다 기후가 따뜻한 감을 느꼈다. 우리 연변은 10월 중순이 지나면 나무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무가지만 남아있는데 우리가 서유럽을 갔을 때 11월 중순인데도 한창의 단풍계절은 좀 지났지만 나무잎들이 많이 있었고 어떤 나무들은 단풍이 한창이였으며 이딸리아에서는 포도재배가 많았는데 포도밭을 새노랗게 물들였으며 동맥(冬麦)이라고 짐작되는 잔디같은 새파란 풀들이 온 전야를 뒤덮고 있어 그야말로 록색세계라는감이 들었다.   이딸리아의 포도재배       [다음 계속]
271    서유럽려행기[29] 댓글:  조회:3737  추천:0  2020-03-23
서유럽 려행기 [29] 시청사(市政厅) 광장 서쪽에 자리한 3동짜리 건물은 시청사로서 원래 귀족의 저택이였으며 15세기에 시의회가 사들인 것이다. 계단식으로 된 삼각 지붕이 특징이며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있는 건물이며 가운데 건물을 뢰머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156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즉위 축하연이 열린 장소로서 축하연이 열린 2층의 방을 ‘황제의 방’이라 부르고 이후 1792년까지 약 200여 년간 호화로운 축하연 장소로서 영광을 누렸다.       건물벽에는 독일 출신의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오토 1세부터 프란츠 2세가 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독일 제국의 정식 명칭)의 황제 5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차례로 알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프랑크푸르트 대성당(法兰克福大教堂) 광장동쪽에는 또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852년 완공되어 왕실 례배당 겸 주교구 (主教区)성당으로 사용되였으며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성당이기도 하다. 1562년부터 1792년까지 모두 열명의 황제들이 이곳에서 왕관을 머리에 썼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관식을 마친 황제는 시청사 건물인 뢰머에서 축하연을 열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보물관이 있어서 추기경과 사제들의 화려한 의상과 금으로 씌운 장식품들이 전시되여 있다. 웅장한 멋을 자랑하는 95m 높이의 첨탑 위에 올라가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괴테생가(居歌德故) 다음으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중심거리에 있는 괴테생가로 갔는데 뢰머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괴테생가는 4층으로서 20여 개의 방으로 되여 있었으며 괴테와 그의 가족의 삶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도록 전시 돼 있었으며 당시 중상류층의 생활상도 짐작하여 볼 수 있었다.    괴테생가 1층은 대청(大厅), 식당, 그리고 주방칸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청에는 옷걸이, 프랑크푸르트식의 나무괴와 소형금고가 있었고 벽에는 괴테의 소년시기 초상화가 있었으며 창문밑에는 당년 괴테 어머니가 사용하던 재봉침이 있었다. 식당에는 당년에 사용되고 있던 바로크식의 원형의 식탁이 있었고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으며 주방칸에는 주방용구들이 있었다. 2층은 객실과 음악실이였는데 객실은 매우 넓었으며 화려하고 우아한 붉은 색의 비로도로 장식되였으며 괴테가 중국문화를 숭배하였기에 객실벽지에는 농후한 중국풍치 가득차 있었다. 하여 이 객실을 “북경”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년에 괴테는 여기에서 독일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 시인들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음악청도 음악을 즐기는 괴테일가의 늘 모여 즐기는 곳으로서 여기에 오래된 피아노 한대가 놓여 있었고 벽은  괴테가족성원들의 초상화로 장식되여 있었다. 3층에는 괴테가 태여난 방이 있었는데1749년 8월 28일에 동쪽의 방에서 태여났다고 한다. 이 방에는 괴테의 만년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괴테의 만년의 초상 3층 복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값 비싼 천문시계가 있고3층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고 3층에는 또 어머니의 단독 방도 있다. 3층에는 또 도서실과 화랑(画廊)이 있었는데 도서실에는 소장한 책이 2,000여 권이라고 한다. 화랑에서는 독일과 네덜란드 화가들의 수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3층 도서실 ‘시인의 방’이라고 불리는 4층 왼쪽의 방은 괴테의 명작 과 가 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은 괴테가 26세 때 단 4주 만에 완성했으며 그는 이 방에서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방에는 생전의 괴테의 책상과 자필 원고가 놓여 있다. 4층에는 궤테의 사무실에는  예술품, 장식품, 친필원고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이 집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많이 파괴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인 1951년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해 놓았다고 한다. 다행히 내부 살림들은 전쟁전에 괴테를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독일 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괴테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그는 황제의 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문학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독서를 좋아했던 아버지 한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는 8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시와 희곡 등을 습작하면서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슬픈 사랑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자신의 친구인 케슈트너의 약혼녀 샤르로테 부프를 짝사랑한 경험과 친구인 예루살렘이 유부녀에게 실연당해 자살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썼다고 한다.  그는 또 시인, 극작가, 문학가뿐만 아니라 바이마르궁전(魏玛行宫) 고문으로 활약한 정치가에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연구가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당시 나폴레옹마저 괴테를 만난 후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였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었다.
270    서유럽려행기[28] 댓글:  조회:3753  추천:0  2020-03-18
 서유럽 려행기 [28] 상공업중심지 메스로 가다 우리는 베르사유궁전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반에 프랑스의 동북부에 있는 도시 메스로 향해 떠났는데 뻐스는 장장 5시간 반 330㎞를 달려 저녁 7시에 메스에 도착해서 주숙을 정했다. 메스(梅斯)는 프랑스 동북부 모젤주(摩泽尔州)에 있는 모젤 강(摩泽尔河)과 세유 강(塞耶河) 의 합류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로렌(洛林)지방의 중심도시이며 독일, 룩셈부르크 국경과 가깝고 예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인구는 124,500명(2005년 기준)이다.   메스(梅斯) 철, 석탄이 풍부한 이 지역은 독일과의 분쟁 대상이 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1871년 독일에 넘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1918년에 다시 프랑스로 양도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시 독일에 다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오래동안 유럽 최대의 군사기지로 있다가 근대에 와서 상공업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후 20세기 후반, 새로 형성된 로렌 지방의  중심도시는 낭시(南希,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상공업 도시) 대신 메스가 되였다. 메스는 로렌지방의 중심지로서 제철 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공업이 발달하였고 빠리와 스트라스부르(斯特拉斯堡,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阿尔萨斯 지방에 있는 항구 도시)를 동서로 잇는 고속도로, 철도가 통하며 이는 독일로 련결된다. 북쪽의 룩셈부르그(卢森堡, 유럽 중부에 있는 립헌 군주국)로 련결되는 도로와 철도도 통하며 모젤 강과 통하는 운하로 련결되는 내륙 항구이기도 하다. 시내의 볼거리로는 고딕 양식의 메스 대성당(13∼16세기), 중세 시대에 구축된 성벽, ‘독일인의 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문(13~15세기), 로마 제국 시절의 유물 등이 있다. 메스는 또 시인 베를렌(1844~1896)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메스 대성당 독일의 경제중심 괴테의 고향 프랑크푸르트 로 가다 이튿날(22일) 8시 반 우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法兰克福)로 향해 떠났다. 뻐스에서 가이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해 소개를 하였는데 프랑크푸르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美因河畔法兰克福)의 략칭이라고 하며 독일 중서부 헤센주(黑森州)에 있는 도시로서 라인강(莱茵河) 지류인 마인강(美因河)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248.31 km2, 인구는 746,878 명(2017년)으로서 헤센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독일의 행정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 수도는 프랑크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에서 경제적인 중심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도시에 유럽 중앙은행이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도 있어서 영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럽 련합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 도시는 유럽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하여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도시 남서부에  독일에서 리용객이 가장 많은 독일 제1의 공항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제공항이  자리잡고 있어 독일을 중심으로 려행하는 려행객들에게 프랑크푸르트는 려행을 시작하는 관문이나 혹은 려행을 마무리하는 관문이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유렵려행의 제일 마지막으로 이 공항을 리용하여 귀국하게 되였다. 공업으로는 염료, 약품, 광학, 전기기기, 기계 등이 발달하였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항공, 철도, 자동차 교통의 요지가 되여 독일의 경제, 금융의 중심지로서 주식, 상품거래소가 있고 매년 국제박람회가 열리는데 기계공구, 생활용품, 모피, 액세서리 및 서적 등의 국제박람회로 알려졌다. 특히 2년마다 열리는 자동차박람회가 유명하며 1485년에 시작된 력사가 깊은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매년 10월 이 도시에서 열린다.  그리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 (歌德, 1749~1832, 시인, 소설가, 극작가)도 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활동하였으며 괴테의 생가는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 도시는 괴테의 도시로도 유명하며 괴테대학교, 국립예술대학, 자연박물관, 공예박물관, 력사박물관, 기타 문화, 교육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한편, 이 도시는 2006년 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축구 대회의 개최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반면에 2007년에는 독일의 DPA통신사가 조사한 결과 독일의 도시 중에서 범죄 발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야경   뻐스는 1시간 반 달려 10시에 독일 경내에 들어 섰는데 이곳에도 세관도 없고 아무런 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렸는데 세시간 반 250㎞를 달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뢰머광장으로 갔다. 뢰머광장(罗马广场) 뢰머광장은 프랑크푸르트의 구시가지 중앙에 위치한 광장인데 '뢰머(로마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인데 15~18세기의 건물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9세기부터 이 광장에서 박람회가 열렸으며 지금도 각종 국제전시장이 열리는 대형 광장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지표(地标)라고 한다. 15세기 초에 이 광장에 있던 저택 3채를 시에서 사들여 시청사로 개조하면서 중심 광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오랜 략사를 지닌 광장이지만 2차대전의 포화를 피하지는 못해 상당 부분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모습은 복원 공사를 거친 것으로서 중세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정의의 녀신 유스티티아(正义女神,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녀신)의 동상이 있는 분수대가 있다. 이 분수대는 1543년에 세워진 것으로 녀신상 오른손에는 검이, 왼손에는 천평이 들려 있는데 검과 천평은 정의와 법을 상징한다고 한다. 광장 주변에는 프랑크푸르트 대성당과 시청사 등 력사적인 건축물이 있다. [다음계속] 
269    서유럽려행기[27] 댓글:  조회:3862  추천:0  2020-03-15
서유럽 려행기 [27] 베르사유 궁전(凡尔赛宫)으로 가다 21일 아침 8시에 우리는 베르사유궁전으로 떠났다. 베르사유궁전은 빠리에서 남서방향으로 20km 떨어진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빠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원래 왕이 사냥할 때 머무는 여름 별장이였으나 루이 14(路易14世)세가 12살 때 처음으로 그곳에 사냥하러 갔다가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이 마음에 들어 왕위에 오른 다음 부왕이 지어놓은 별장 주변에 필요에 따라 건물을 증축하였는데 자기의 신하인 재무장관 푸케의 보 르 비콩트성을 둘러보고 온 후 그 어마어마하고 화려함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보 르 비콩트의 건축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을 불러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을 지으라고 명령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건축가 망사르, 실내 장식가 르 브룅, 조경가 르 노트르 등이 참여해 5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는데 원래 습지였던 이 땅의 자연 조건을 완전히 바꾸어서 숲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기 위해 몇 개의 강줄기를 바꾸었다고 한다. 1682년 루이 14세가 빠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빠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     베르사유궁전 이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오페라, 거울의 방, 넓고 아름다운 정원, 1,400개의 분수로 유명하다. 베르사유 궁전은 한번에 2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정원이 있는데 정원에는 루이 14세가 지은 대(大) 트리아농과 루이 15세가 지은 소(小) 트리아농을 포함하여 작은 궁전들이 있다. 궁전내부를 돌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수 있다. 1. 헤라클레스(赫拉克勒斯)의 방: 북쪽 날개에서 중앙까지 련결해 주는 곳에 있는 이 방은 궁전의 방 중에서 가장 크다. 벽난로 우에는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가 있고 천장에는  헤라클레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대의 영웅)를 례찬한 천장화가 장식되여 있다. 2. 풍요의 방: 천장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표현하는 천장화로 장식되여 있는데 르브룅(프랑스의 화가, 실내 장식가)의 제자인 르네 앙투안 오아스의 작품이다. 그리고 루이 14세의 아들과 손자의 초상화가 있다. 이 방은 연회와 뷔페 파티를 위해 사용되였다고 한다. 3. 비너스(维纳斯)의 방: 천장에는 미의 세 녀신에 둘러싸인 비너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美와 사랑의 녀신)의 모습이 있으며 정면에는 로마식 복장을 한 루이 14세가 있다. 4. 디아나(狄安娜)의 방: 천장에는 디아나(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의 녀신)가 장식되여 있다.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는 이 방은 주로 당구와 게임을 즐기던 방이라고 한다. 5. 마르스(马耳斯)의 방: 루이 14세의 경비로 되여 있던 이 방은 전쟁의 신 마르스(马耳斯, 로마 신화에 나오는 군신軍神)에 관한 장식으로 되여있다. 6. 머큐리(墨丘利)의 방: 도로의 신인 머큐리(로마 신화에 나오는 목축, 상업, 웅변 및 사자의 신)의 방의 천장화는 새벽 별과 함께 수레에 오른 머큐리의 모습을 표현해 놓았다. 7. 아폴론(阿波罗)의 방: 아폴론은 그리스신화에서 음악, 의술, 궁술, 예언의 신이라고 하며 광명의 신이기도 하여 후에는 태양신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이 방은 특히나 화려한데 루이 14세가 은제(银制) 왕좌에 앉아 신하들을 접견을 했다 해서 ‘옥좌의 방’이라고도 불린다. 8. 전쟁의 방 : 거울의 화랑(画廊)의 북쪽에 있는 방으로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용맹스러운 모습이 새겨져 있는 부조(浮雕, 돋을새김) 등, 승리를 거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는 방이다. 9. 거울의 방: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총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回廊)으로서 17개의 창문과 578개의 거울이 있는 방이다. 1678년~1684년에 건축가망사르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쪽 회랑 전체를 차지한 이 홀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천장에는 르 브룅이 루이 14세의 생애를 그린 대벽화가 있다. 수정샹들리에(水晶吊灯), 황금 초대, 화병 등의 장식품도 당시의 최고급품으로 놓여 있다.   이 거울의 방에서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체결되여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짓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였다. 거울의 방에서   10. 둥근 천장 창이 있는 대기실: 이 방은 왕의 침실과 입구 사이에 있는 방으로 왕을 알현하려는 왕족들의 대기실로 쓰던 방이다. 그래서 이 방에서는 갖가지 음모가 꾸며졌다고 한다. 11. 왕의 침실: 1701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방을 거울의  화랑 뒤쪽에 있으면서 궁전의 정면에 해당하는 장소인 이 방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715년 루이 14세는 이 방에서 숨을 거두었고 또한 프랑스 혁명때 1789년에는 루이 16세와 왕비가 이 방의 정면 베란다에 나와 군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고 한다. 12. 국무회의실: 왕의 침실과 거울의 방 화랑(画廊) 련결해 주는 방이다. 13. 평화의 방: 전쟁의 방과 거울의 화랑의 반대편인 남쪽의 모퉁이에 있는 방으로 벽화에는 유럽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는 등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는 각종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다. 14. 왕비의 침실: 침대 량옆으로는 베르사유를 통과하는 문이 있는데 왕비가 아이들에게 직접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방은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가 황태자를 출산한 곳으로서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을 재현해 놓았다. 거울 우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와 오빠인 요셉 2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5. 귀족의 방: 왕비가 귀족 부인들과 모임을 갖던 방이다. 마리 테레즈(프랑스의 수녀, 1873~1897)를 위한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16. 대기실: 왕과 왕비가 가족들과 함께 대중 앞에서 식사를 하던 곳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자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1764년에는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작곡가, 1756~1791)가 이곳에서 왕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17. 경호원들의 방: 1789년 10월 6일 프랑스 혁명 당시 경호원들과 혁명군 사이에 격투가 벌어진 장소이다. 18. 대관식(加冕仪式) 방: 이 방에는 다비드(나폴레옹의 궁정화가)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에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 걸려 있다. 대관식의 방   19. 왕실 소성당(小圣堂): 망사르가 설계한 성당으로 높은 천장에는 삼위일체(성부圣父, 성자圣子, 성령圣灵의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교의) 이야기 외에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등 성서를 기본색조로 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루이 15, 16,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이다. 이로서 베르사유 궁전 참관은 끝나고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집체사진을 찍었다.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다음 계속]
268    서유럽려행기[26] 댓글:  조회:4021  추천:0  2020-03-11
서유럽 려행기 [26] 유람선은 알마교에서 떠나 동쪽으로 앵발리드교가 있는 쪽으로 출발 하였는데 앵발리드교를 지나면 쎈강에서 가장 화려한 다리가 보이는데 그 다리가 바로 알렉상드르 3세교(亚历山大三世桥)이다. 이 다리는 파리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다리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 다리는1900년 프랑스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으며1896년 ~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다리의 명칭은1892년에 프랑스-로시아의 공조(共助)를 성사시킨 로시아의 알렉상드르 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로시아와 프랑스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였으며1900년 프랑스만국박람회 시기에 맞추어 개통되였다고 한다. 이 다리는 길이가 107m이지만  다리의 높이는 고작 6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량쪽 교두에 있는 17m 높이의 네 개의 화강암 기둥 덕분에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기둥들 꼭대기에는 각각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가 달린 천마(飞马)와, 과학, 예술, 산업, 상업을 우의적으로 나타낸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다. 다리의 량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표시등, 아기 천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녀신들도 역시 발전과 성취를 표상하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루이 14세, 그리고 현대의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알렉상드르 3세교   알렉상드르 3세교를 바라보며 왼쪽에는 그랑팔레(대형 전시장이자 박물관)와 프티팔레(파리 시립미술관), 오른쪽으로는 나뽈레옹의 유해가 묻힌 앵발리드가 보인다. 앵발리드는 군사박물관, 군사립체모형박물관, 해방훈장박물관, 현대사박물관,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 등 여러 기념물이 한데 집합되여 있는 파리 최대의 종합전시장이다. 알렉상드르 3세교, 그랑 팔레, 프티 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알렉상드르 3세교를 지나면 다음 다리인 콩코르드 다리가 보인다. 콩코르드 다리의 왼쪽 편을 보면 오전에 보았던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이 있다.   콩코르드 다리를 지나면서 왼편으로 펼쳐진 넓은 공원은 튈르리 공원이며 튈르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은 폐쇄된 전기 기관차 역을 개조한 것으로 1986년 12월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는데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1848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시기의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여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한것이기에 더 말할 수 없는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지나 고루아얄 다리를 지나면서 시테 섬으로 가기 바로 전에 있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예술의 다리라고 한다. 파리에 있는 4개의 보행자 전용 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로서 날씨가 좋은 여름 날 저녁에는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다리를 남녀가 함께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사랑의 다리’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예술의 다리를 지나면 시테 섬을 지나가게 되는데 시테 섬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퐁네프 다리이다. 퐁네프는 ‘새로 지어진 다리’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퐁네프는 1607년에 지어진, 쎈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퐁네프다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테 섬을 둘러보게 되는데 왼편으로 오전에 본 노트르담 대성당이 가까이에서 보인다. 시테 섬이 끝나고 이어지는 섬이 생루이 섬인데 시테 섬보다 조금 작지만 매력이 있는 섬이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으로 17세기 호화로운 대저택과 류행복상점, 그리고 장식품상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유람선에서 본 에펠탑 유람선은  생루이 섬을 돌아 방향을 바꾸어 올때의 반대방향으로 원래의 출발지점인 나루터로 돌아 간다. 왼편으로 보면 생루이 섬 가운데 위치해 있는 마리교는 빠리에서 가장 랑만적인 다리로 알려져 있는데 련인들이 이 다리에서 키스를 하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련인들은 저마다 이 다리에 와서 키스를 하면서 미래의 행복한 혼인생활을 동경한다고 한다. 생루이 섬을 지나면서 오른편으로 펼쳐진 곳이 동성 련애자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다고 하는 마레지구라고 한다. 생루이 섬을 지나 시테섬을 거의 지나게 될 때 강 오른쪽으로 멋있게 보이는 건물이 파리 시청사라고 한다. 파리 시청사는 1871년에 일어난 화재로하여 원래의 시청사가 무너지고 그후 그 장소에 지금의 새로운 시청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시청사 앞의 광장은 늘 여러 가지 행사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여름이면 해변가를 모방해서 만든 백사장,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체육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활동장소로 되고 있다고 한다.  시청사가 있는 부분이 파리의 중심이라고 한다. 시청사를 지나면 왼편으로 콩시에르쥬리가 나온다. 콩시에르쥬리는 프랑스 대혁명 기간 파리 재판소의 부속 감옥으로 사용되였으며 단두대에서 처형될 죄수들이 주로 여기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혁명 기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왕비)도 이곳에 수감된 죄수 중 하나라고 한다. 콩시에르쥬리를 지나면 시테 섬의 마지막 다리인 퐁네프의 오른편으로 사마리텐 백화점을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다시 루브르 박물관이 보이고, 아까 온 길을 다시 돌아가 선착장이 있는 알마교까지 간다. 알마교 중간에는 파리의 안전을 위해 쎈 강의 수위를 재는 동상이 있는데 이 동상의 코 높이가 홍수가 났을 때 파리 시내가 물에 잠기는 수위라고 한다. 알마교를 지나 유람선은 에펠탑이 있는 예나교까지 간다. 예나교의 오른쪽으로는 샤이요 궁, 왼쪽으로는 에펠탑이 있다. 예나교를 지나면 비르 아켐 교가 나오는데 비르아켐 교는 아래는 자동차와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그 우로는 지하철 6호선이 지나가는 다리가 있는 2층 구조이다. 비르아켐 다리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길게 펼쳐진 공원같은 곳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인공섬인 “백조의 섬”이란 뜻의 시뉴섬이다. 섬은 좁고 긴 모양을 띠고 있으며 길이는 850m이다. 백조의 섬의 오른편에 있는 화려한 건물은 프랑스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이다.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지나고 백조의 섬이 끝나는 그르넬교를 지나면서 보이는 동상은 자유의 녀신상이다. 자유의 녀신상은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기증한 것으로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녀신상의 4분의 1 정도로 작다고 한다. 자유의 녀신상을 끝으로 유람선은 다시 출발점이였던 나루터로 돌아간다. 다시 에펠탑을 지나고 처음 승선했던 나루터에 도착하면서 쎈강 유람이 모두 끝났다.   단풍계절의 빠리시     [다음계속]
267    서유러려행기[25] 댓글:  조회:4028  추천:0  2020-03-08
서유럽 려행기 [25] 에펠탑(艾菲尔铁塔) 다음으로 우리는 에펠탑 구경을 하려고 마르스 광장(战神广场)으로 떠났다. 빠리에 와서 마르스 광장에서 하늘을 찌르듯300m넘게 올리 솟은 웅장한 에펠탑을 올리다 보는 것이 기분이 제일 좋았다. 그것은 어릴때부터 에펠탑하면 빠리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빠리의 상징물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거대한 건축물이기에 언제 저 탑을 직접 가 볼수 있을가 하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오늘 직접 빠리에 와서 이 탑을 올리다 보고 또 이 탑을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에펠탑 에펠탑은 빠리시의 중심지역의 쎈강(塞纳河) 동남쪽 강변에 드넓게 펼쳐진 마르스 광장에 위치해 있는데 1889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박람회를 계획하면서 이에 적합한 기념물의 설계안을 공모했다. 100여 점의 설계안이 제출되였으나 100주년기념위원회는 유명한 교량기술자 귀스타브 에펠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하여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물로  구스타브 에펠(居斯塔夫•埃菲尔)의 설계로 1887년에 시작하여 1889년에 준공되였으며 이를 설계한 프랑스 공학자 및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명칭하고 1889년 프랑스만국박람회의 입구로 되였다고 한다. 1) 외부구조 프랑스의 대표 건축물인 이 탑은 격자 구조(格子结构)로 이루어져 금속 구조 전체의 무게는 총 7,300 톤이고 비금속 자재를 포함하면 대략 10,000 톤이 된다고 한다. 보통 기차바곤의 적재량이 50~60톤인데 10,000 톤이면 50톤짜리 기차바곤으로 200개의 바곤에 실을수 있다는 말인데 상상만 하여도 대단히 웅장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있다. 철기둥을 잇는데 강철부재(钢铁构件) 18,038 조각을 250만개의 못(铆钉)을 사용해 조립하였다고 하며 이 탑은 빠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높이가 300m는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건물이였다. 이는 81층 높이의 건물과 맞먹는 높이이며 1930년  미국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克莱斯勒大厦77层, 高度300m)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였으며 1957년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설치되어 높이도 324m로 되였다.  1975년에는 회전식 표지등이 설치되어 오늘날에는 파리의 야경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빛의 탑'으로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에펠탑구조도 2) 내부구조 1층에서 2층까지의 높이는 57.6m, 3층까지는  115.7m, 4층까지는 276.1m이며 1,2층은 식당이고  3층은 레스토랑이며 4층은 전망대이며2층과 3층 까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갈 수 있고 4층 전망대까지는 엘리베이터로만 올라갈 수 있다 에펠탑 건축 당시에는 우아한 파리의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철골 덩어리'라며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소설가 모파상은 에펠탑의 모습을 보기 싫어 파리 시내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에펠탑 내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완공된 후에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에는 파리의 지표(地标)로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 탑을 세울 때에는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계획이였고 20년 간 세울 수 있는 허가를 받았기에 20년 기한이 끝나는 1909년에 해체될 예정이였데 그 무렵 발명된 무선 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탑을 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탑의 해체는 중단되였다. 1916년에 세계 최초의 태평양 횡단 무선통화에 성공하고 1921년에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여서부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였다.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되어 있고 그래서 강한 바람에도 13cm 이상 흔들리지 않고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진다고 한다. 이 탑은 자칫하면 비참한 운명을 겪을 번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때인 1944년 8월, 련합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히틀러는 파리의 군정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에게 에펠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폰 콜티츠가 이 명령을 어겨 에펠 탑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늘 빠리를 상징하는 최대의 관광명소로 되였다. 만약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이 히틀러의 명령을 집행하여 에펠 탑과 도시 전체를 파괴하였더라면 그는 천추에 용서못할 죄를 짓고 그것만으로도 력사의 죄인으로 되였을것이다.   유람선 나루터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쎈강유람 다음으로 우리는 쎈강유람을 하려고 에펠철탑의 동북쪽에 있는 강건너 쎈강유람선 나루터로 갔다. 쎈강(塞纳河)은 프랑스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빠리시의 중심을 동남방향에서 서남방향으로 활모양으로 구불어 지나는 강으로서 넓은 데는 2㎞되며 빠리시내에서는 시테섬(西岱岛)과 생루이섬(圣路易岛) 두개의 자연섬과 하나의 인공섬인 시뉴섬(天鹅岛, 백조의 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쎈강 북쪽연안 알마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식당용으로 쎈강물우에 띄워 놓은 커다란 배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서남방향으로 강건너편에 빠리의 징표로 되는 웅장한 에펠탑이 건너다 보이였는데 에펠탑과 쎈강량안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도 있었거니와 쎈강으로 오르내리는 유람선과 화물선을 구경하는 멋도 참 좋았다. 점심식사 후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쎈강유람을 시작하였다. 나루터는 바로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던 알마교 부근이였는데 유람선은 1000여명이 탈수 있는 2층으로 된 배였다. 유람선이 떠나자 나는 쎈강량안의 건물과 경치에 대해 상세한 료해를 하려고 가이드의 팔을 끼고 갑판에 나가 가이드의 해설을 들었다. 마치 나 하나를 대상한 가이드와 같았다. [다음 계속]
266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댓글:  조회:4516  추천:0  2020-03-05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연변인민방송   방송일시: 2020년 3월 4일  기획: 황설화          사회: 황설화          제작: 손귀옥   --- 개 시 곡 ---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는 프로담당 황설화입니다. 프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일들을 담론하거나 더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방향을 제시하는 프로입니다. 요즘 힐링이란 단어를 많이 쓰시죠? 여러분들이 지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저희 과 함께 힐링이 되고 희망을 갖고 더욱 행복해지는 시간을 공유해보면 어떨가요? 래일은 3월 5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날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네, 3월5일은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인 1963년 3월 5일, 모택동주석은 공무집행중 희생된 심양부대의 영웅전사 뢰봉을 기리여 인민일보에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라는 제사를 냈습니다.  그 뒤로 매년 3월 5일은 뢰봉따라배우기 기념일로 널리 알려졌고 우리 나라에서는 뢰봉따라배우기 열조가 일었습니다. 하여 전국적으로 륙속 수많은 들이 나타나 우리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전파했습니다. 뢰봉이란 이름뒤에는 항상 사랑, 배려, 도움, 관심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따라다니는데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말들이죠. 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시고 길림신문특약기자이신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뢰봉정신과 그 핵심인 사랑과 배려, 베품에 대해 얘기나눠보겠습니다.   --- 간 주 곡 --- 네, 주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수고를 하십니다. ◆올해는 뢰봉탄생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아버지,어머니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익숙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뢰봉이란 이름만 들어봤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선생님, 뢰봉은 어떤 삶을 살아온 사람인가요? 그는 그 시대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현시대 청소년들은 뢰봉에 대해 잘 모르지요. 뢰봉은 22살 한창의 나이에 순직했으니 그의 일생은 매우 짧다고 할수 있지요. 악독한 지주놈의 핍박에 의해 부모님들을 잃고 7살에 고아로 되였고 해방후, 정부의 혜택으로 1956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몇달간 향정부의 통신원으로 있다가 현위에 전근되여 공무원으로 사업하였으며 1958년에 안산강철공장에 전근하여 뜨락또를 운전수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현위공무원, 안산강철공장에서 사업할 때에도 여러번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습니다. 1960년 20세의 나이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2등공 2차, 3등공 3차레 세웠습니다. 그는 부대에 있으면서 무순시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것입니다. 뢰봉정신은 이미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로 되였으며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되였습니다. 주은래총리께서는 뢰봉정신을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애증이 분명한 계급립장, 언행이 일치한 혁명정신,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개인의 리익을 희생하는 공산주의 풍격, 헌신적으로 분투하는 무산계급투지.”라고 괘괄하였습니다. 1) 뢰봉은 일생에서 남을 위하는 것을 락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5월의 어느날 이른 아침, 심양으로 가려고 아침 일찍 비를 맞으며 바삐 무순역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한손으로는 녀자애는 이끌며 기차역으로 힘겹게 가는 것을 보고  인차 자기의 비옷을 벗어 그 아주머니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애를 안고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기차에 올라서 녀자애가 추워서 떠는 것을 보고 뢰봉은 자기의 적삼을 벗어서 그 녀자애에게 입히였으며 그들이 아침식사를 한 것 같지 않아 자기가 차칸에서 아침식사로 먹으려던 만투를 꺼내서 그들을 먹게 하였습니다. 심양역에 내리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자 그 아주머니는 뢰봉에게 어떻게 감사를 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니까 뢰봉은 “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과 모주석께 감사를 드리라”고 하고는 자기 일 보러 떠났습니다. 또 한번은 안동에서, 지금 말하면 단동이지요. 무순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양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려고 가방을 메고 지하도를 건너는데 한 할머니가 커다란 보따리를 지고 지팡이를 집고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디로 가시는가고 물으니 자기는 관내에서 오는데 무순으로 아들 보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와 한길이라 그 할머니의 큰 짐을 자기가 지고 할머니를 부추켜 기차에 올랐습니다. 차에 올라 할머니에게는 자리표가 없자 자기가 서고 할머니를 자기의 자리에 앉히였으며 빵을 사서 할머니를 잡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집 주소를 물으니 처음으로 아들집으로 오는데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면서 편지봉투를 꺼내 보니는 것이였습니다. 봉투에 적혀있는 주소를 보니 뢰봉도 모르는 곳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순역에 내려서 할머니의 큰 보따리를 자기가 메고 할머니를 모시고 2시간이 걸려 겨우 아들집을 찾았습니다. 할머니와 아들은 뢰봉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감사할 것 있습니까, 응당한 일입니다.” 라 하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하루는 저녁무렵 비가 오는데 뢰봉은 길가에 한 녀인이 등에 보집을 지고 품에 아이를 안고 한손에는 또 큰애를 이끌며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다가가서 물으니 그 녀인은 친척집으로 가는데 아직도 십여리도 더 가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뢰봉은 두말없이 자기의 비옷을 그 녀인에게 씌우고 자기가 큰 아이를 안고 비를 무릅쓰고 그들을 친척집까지 데려다 주고 밤중에 련에 돌아 왔습니다.  2) 뢰봉은 못정신으로 학습을 하였습니다. 뢰봉은 시공임무를 하면서 종일 차를 몰고 동분서주하면서 보내다니 학습할 시간을 짜내기 힘들었습니다. 뢰봉은 늘 모택동저작을 군용가방안에 넣고 다녔는데 차가 서서 다른 일이 없을 때에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운전실에서 학습하였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일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 바빠 학습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사업이 바빠 그런 것이 아니라 네가 학습하려 하는냐 안느냐에 있으며 시간을 짜내려 하는냐 안는냐에 있다. 학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시간을 짜내는가 안내는가? 뚫고 들어 가는냐 안느냐에 달렸다. 널판자에 못을 박으면 구멍이 있어 못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못이 구멍을 뚫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못이 뚫고 들어가는 정신이다. 우리는 학습함에 있어서 이런 못정신을 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뢰봉을 열정적으로 동지를 대했습니다. 뢰봉반의 전사 교안산은 문화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뢰봉은 우선 그가 식자관부터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간만 있으면 직접 그에게 글자를 가르켜 주었을 뿐만아니라 산수까지 배워주었습니다. 뢰봉반에는 또 小周란 전사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전사몰래 그 전사의 이름으로 자기가 아껴 쓰면서 모은 생활수당금 10원을 문안편지와 함께 부쳐보냈던 것입니다. 그때에 부대에서는 전사들에게 비누, 치솔, 치약 등을 사라고 매달 3,4원의 수당금을 발급 할때이니 10원이면 석달의 수당금에 해당하지요. 뢰봉반에는 또 小韩이란 전사가 있었는데 일하다가 류산이 바지에 떨어져 몇군데 구멍이 뚤렸습니다. 뢰봉은 자기의 여벌로 있는 모자를 뜯어 그의 바지를 기워 주었습니다. 4) 뢰봉은 일요일도 쉬지않고 지방의 공사장에 나 섰습니다. 1960년 여름의 한 일요일 뢰봉은 배가 너무 아파 퇀부 위생련에 가서 약을 떼 가지고 돌아 오는 길에 소학교를 짓는 한 공사장을 지나면서 들끓게 일하는 로동자들의 모습을 보게되였습니다. 뢰봉은 그 공사장에 들어가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가득 실고 공사장의 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를 알고 그의 한테 와서 어떻게 되여 이 공사장에 왔으며 어느 부대에서 왔으며 이름은 무었인가 물었을 때 뢰봉은 “저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회주의 건설에 저그나마한 힘이나 보탤 뿐입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건설로동자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이 끝날 때까지 벽돌을 날랐습니다. 방송원 처녀가 “이름모를 해방군전사가 우리 공사장에 와서 무상으로 우리를 도와 일하니 우리 모두 힘냅시다.”라고 방송하자 로동자들은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나르기 시합을 벌려 공사장은 더욱 들끌었습니다. 그러다니 이날 임무는 두시간 앞당겨 끝이 났습니다. 5) 뢰봉은 달갑게 바보로 살았습니다. 1960년 여러름 부대 주둔지 무순에 큰 홍수가 져 뢰봉운수련에 홍수 긴급구조에 나서라는 임무가 하달되였습니다. 이때에도 뢰봉은 방금 화재진압에서 화상을 입은 손의 아픔도 마다하고 전사들과 함께 저수지에 가서 밤낮 7곱날 련속 홍수와 싸워 2등공을 세웠습니다. 한번은 심양역에서 아이를 업은 한 녀인이 돈과 길림으로 가는 차표를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을 때에 뢰봉은 선뜻이 자기의 돈으로 그 녀인의 기차표를 끈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녀인은 너무 감동되여 이름이 뭐이며 어디에서 사업하는가고 물었을 때 “나의 이름은 중국인민해방군입니다. 나의 집은 바로 중국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도 주소도 남기지 안으니 말입니다. 뢰봉은 또 거리에 나가 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망화구(望花区)에서 대생산동원대회를 하는 것을 보고 인차 저축통장에서 돈을 찾아 가지고 구당위를 찾아 가서  200원을 내놓자 망화구당위판공실에서는 100원만 받고 100원을 돌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뢰봉은 나머지 100원을 100년 불우의 홍수를 입은 료양인민들에게 지원을 보냈습니다. 련에서 롱구시합을 할 때에도 다른 전사들은 목이 컬컬하다고 사이다를 사 마셨지만 뢰봉은 랭수로 갈증을 달랬습니다. 매달 3,4원 하는 수당금으로 얼마동안 모으면 200원이 되겠습니까? 뢰봉이 이렇게 아껴쓰면서 모은 돈을 재해지구에 보내거나 곤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본 전사들은 뢰봉을 바보라고 놀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뢰봉은 “남들은 나를 바보라고 하지만 나는 달답게 이런 바보가 되련다.”고 말하였습니다. 6) 뢰봉은 훌륭한 반장이였습니다. 1961년 전 퇀에서는 일제히 뢰봉을 무순시 인민대표대회대표로 선거하였습니다. 뢰봉은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련에 돌아와서 2패 4반 반장을 맡아하였습니다. 4반은 그의 인솔하에 “4호반”으로 되였으며 뢰봉은 따라서 “사호반장”으로 되였습니다. 1963년 3월 모택동동지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제사가 발표된 때로부터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이 발랄히 전개되였으며 뢰봉정신도 전국 각지에서 피여났으며 평화시대의 영웅인물들이 많이 나왔지요. 례하면 초원의 소년영웅 룡매와 옥영자매, 구양해, 왕걸, 초유록, 공번삼 등 영웅들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용솟음 쳐 나왔습니다. ◆요즘은 세대차이라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50년대에 태여난 분들한테 뢰봉은 신변에서 나타난 영웅이고 80년대한테는 본보기, 요즘 세대들한테는 이름만 들어본 력사인물로 남습니다. 주선생님 세대들은 뢰봉에 대해 어떤 인상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예, 우리가 소학교시절에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났는데 그때 우리는 모주석의 “뢰봉동지를 따라배우자”란 호소를 받들고 뢰봉을 따라 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등교길이라든가 하교길에서 년세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그 짐을 들어 주고 렬군속집을 다니며 마당을 쓸어주고 나무를 패준다든가 물을 길어준다든가 하는 좋은 일을 찾아 하는 것으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동요에 란" 노래가있지 않나요. 길에서 돈지갑을 주어 교통경찰아저씨에데 바치니 경찰아저씨가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 하며 칭찬을 했고 뻐스에서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니 할아버지도 그 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뢰봉을 닮았구나”하며 칭찬했지요. 그러니까 그 어린이가 “아이참 글쎄 나를 뢰봉을 닮았대요.” 이렇게 교통경찰아저씨나 할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은 어린이가 주은 돈지갑을 교통경찰아저씨에게 바치거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하거나 한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거나 그런 말을 듣자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정말로 뢰봉을 따라배우는 마음으로부터 우르러 나오는 실제 행동이지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했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노래가 나왔지요. 가사란 시대의 배경을 노래하는 것이니깐요.  그런데 인제는 60년이 거의 지났으니 지금 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뢰봉이란 그저 력사인물로만 느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뢰봉은 항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친근한 존재였지만 현시대에 와서는 많이 잊혀지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는데요, 주선생님,과연 그런걸가요? 지난세기 8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처음으로 겪어보는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뢰봉정신에 대하여 한때 모호한 인식을 갖게되여 뢰봉을 따라배우는 열조도 식어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지금도 뢰봉정신을 말하는가”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여 한때 “뢰봉이 외국으로 갔다.” “뢰봉이 3월에 왔다가 4월에 돌아간다”는 유감스러운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말들은 확실히 한때 중국에서 뢰봉정신이 희박하여 졌으며 모주석의 뢰봉을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기념하여 형식적으로 3월을 뢰봉을 따라배우는 달로 하였다는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개혁개방이 더욱 심화되고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히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을 똑바로 함에 따라 계획경제시대나 시장경제시대나 할것없이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을 뿌려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였습니다. ◆네, 뢰봉이 희생된후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졌을지는 몰라도 그의 정신은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기부, 불우이웃돕기 등 선행들은 뢰봉정신의 연속이 아닐가 싶은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견해인지요? 느껴지지요, 여기에서 전형적인 실례로는 《2010년 중국10대 감동인물》중의 한 사람인 안산 광업공사의 곽명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매일 2시간 이상식 일찍 출근하여 15년의 루계로 하면 15,000여 시간이 되는데 5년의 공작량을 더 한셈이 됩니다. 그는 20년을 무상헌혈을 하였는데 루계로 6만미리리터로서 자기 총혈액량의 10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2010년 그때까지는 식구 셋이 거의 30여년 전에 지은 40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집에서 살면서 씻은듯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16년 동안 희망공정과 재해지구에 10여 만원을 헌납하였으며 선후로 180여명의 빈곤학생을 도와 나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당대의 뢰봉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네, 우리 지역에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애심기부활동들이 적잖습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 은 19년을 이어오면서 2,000여명의 아이들을 도와주었고 9.3애심협회, 고사모협회 등 수많은 민간단체들에서도 정기적으로 고아원, 복리원을 찾아 봉사하고 있습니다. 정이 많은 우리 조선족 사회의 따뜻한 일면이 아닐가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 사회단체들의 이러한 선두역할도 참 영향력이 크죠? 우리 주변에서도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연길시 북산가두의 뢰봉반들을 례로 들수 있습니다. 2007년 첫 ‘뢰봉반’이 건립되여 요 몇년전까지 59개의 뢰봉반이 형성되였으며 성원은 만여명으로 발전되여 빈곤가정과 장애인을 돕고 고아원, 양로원, 독거로인들을 찾아가서 사랑의 손길을 돌리고 있으며 의료구제, 법률원조, 평민봉사 등 지원자 활동을 적극 벌리고 성금을 모아 재해구에 보내기도 합니다. 하여 이 가두는 전국 우수지원자 봉사대상의 영예도 안아왔습니다. 이 가두의 단산사회구역 ‘로인뢰봉반’ 반장인 맹인 김봉숙할머니도 이반의 성원들을 이끌고 뢰봉따라배우기 활동을 적극 전개할뿐만 아니라 본인은 결혼반지를 팔아 문천지진구조에 기부해 전국을 감동시킨 일이며, 불우한 학생들을 도와 대학꿈을 이루게끔 사랑을 베푼 이야기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연변민들레문화교류협회에서도 전문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애심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불우한 어린이들이란 모두 가정환경이 매우 어려워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이지요. 생활이 괞찬은 어린이들은 하학후 과외보도반에 가서 보충수업을 받는다든가, 과외양성반에 가서 자기의 흥취에 맞는 써클활동에 참가할 수 있지만 불후한 어린이들은 경제난으로 그런데를 갈 수 없지요. 그래서 이 협회에서는 20여 명이 되는 이런 불후한 어린이들에게 하학 후 무료로 보충수업을 한다든가, 문예써클 같은 것을 하지요. 그리고는 이 어린들이 여기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자체프로를 만들어 이 협회의 행사때면 출연합니다. 저도 이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것을 몇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어린이들에게 생일파티도 조직하여 주고 혁명유적지를 찾아 가서 혁명전통교육도 하고 비암산풍경구의 동식물원에 가서 풍경유람과 자연에 대한 관찰도 하게 하였으며 쌀, 기름, 옷, 학용품 등을 사가지고 불우한 어린이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17살, 13살, 되는 녀자애와 5살되는 남자애 셋이 어머니는 하나지만  세 애의 성은 다 다르고 세 애들이 다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어머니도 이 애들을 버리고 어디인가 가버리고 이 동모이부의 세 애들이 한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협에서는 쌀, 기름, 그들에게 맞는 옷을 사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협회 신미화 비서장은 불우한 어린이 몇을 개별적으로 맡아 도와 주고 있습니다. 례를 든다면 한 애는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몸도 운신못하고 82세되는 할머니가 이 애를 기르는데 아이는 괜찮은데 가정교육이 따라가지 모하다니 정상적인 애들한테 다가서기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미화비서장은 원래 교원사업을 한 경력이 있는지라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면서 학교교육외에 개별적으로 보충수업도 하고 심리교육도 하고 음악에 흥취있으니 피아노도 배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어린이는 어머니는 일찍이 가출하고 아바지마저 소식이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게 살고 있는데 생활이 너무나도 말이 아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이래서 신선생님은 이불, 침대보, 옷 등을 싸가지고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할머니도 자립하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선생님은 이 애를 자기 집에 데려다 기르며 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현시대의 뢰봉이지요. 이 협회와 이 선생님의 사적이 사회 각계에 알려지자 사회적인 반향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여 이들의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국에까지 알려져 신미화비서장이 중앙방송국조선어방송에서 한번에 30분씩 두번에 나누어 이 협회를 소개를 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모모 연예인이 희망소학교 몇백개를 건립했고 모 기업가가 지진재해구역에 어마어마한 자금후원을 했다는 등등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기부나 선행은 돈많은 부자들이 하는 것이 옳지요. 나라의 정책이 좋고 사회에서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었고 그들이 이 사회에서 돈을 벌었으니 함께잘 살자는 취지에서 사회에 일정하게 반납하는 것도 옳지요. 그러나 꼭 돈많은 사람만 기부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연길 서시장에서 고추가루 장사를 하는 허애자녀성을 보면 그 본인이 장애자이며 말하기 바쁜 좋지않은 병으로 앓고 있으면서 고달프게 매일 고추가루를 팔고 있습니다. 고추가루를 팔아 돈을 얼마 벌겠습니까? 정말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이지요. 그렇지만 연변TV«사랑으로 가는 길»에서 보면 번마다 100원씩 의연하고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이 아니지요, 바로 마음가짐이지요. ◆자녀교육을 중요시하는 요즘, 아이의 심신발전을 모두 념두에 두어 아이들을 기부행사나 봉사활동에 동참시키는 부모들도 적잖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일부 안좋은 모습도 보였는데요, 한 학부모는 이런 경험담을 얘기하였습니다. 한번은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참가하였는데 김치를 담가 고아원에 제공하고 또 나머지 김치를 팔아 헌금하는 활동이였다고 합니다. 그날 활동에 봉사자외에 십여명의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하였는데요, 어머니들이 하는 일은 솔선수범하여 김치를 담그거나 아이에게 김치 담그는 조리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기집 아이를 둘러싸고 카메라 샤타를 눌렀다고 합니다.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단 한명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온 어머니들이였습니다. 어머니들의 요구에 따라 포즈를 취하며 한바탕 떠들어대던 아이들은 결국 배추 한포기씩 대충 주무르다가 어느순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데요, 요즘 사회에서 가끔 보는 모습인것 같네요. 주선생님, 현시대에 와서 기부나 선행은 때론 일부 사람들이 쇼를 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가 있죠? 이 행사의 취지는 아주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학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그 행사에 참가한 동기가 무었인지 모르겠지만 와서 하는 그 행동에서는 아이에게 애심교양을 하거나 애심김치담그기활동에 동참하여 자기의 저그만한 성의를 표달하자는 것이 조금도 안보이지요. 그저 그 행사를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요. 그리고 지금 보면 큰 기업인들이 많은 돈을 의연하여 사회에 건설에 지원하지요. 이런 것은 참 좋은 일인데 좀 유감스러운 것은 그 항목을 자기의 이름으로 해 달라는 것이지요. 자기의 이름을 날리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그렇지 않지요. 그는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요즘 제일 관심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페염과의 싸움이라고 볼수 있는데요, 뢰봉의 고향인 장사시에서는 “성성뢰봉, 가장 아름다운 모범”이란 활동을 벌려 코로나방역전역에서 용속음쳐나오는 영웅인물과 사적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사태가 발생한후 전국 각지에서 무한과 각지 병원에 의료물자를 기증하고 생필품을 지원하는 수많은 가슴훈훈한 이야기들이 전해졌는데요, 주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들이 인상깊었는지요? 예, 해방군에서와 여러 성에서 의료지원대를 무한에 파견하고 지원물자들이 자동차에 가득 실려 무한으로 들어가 것을 텔레비죤에서 많이 봤는데 거기에서 몇가지 더 감동적인 것을 말한다면 향항, 오문 동포들이 자금과 물자를 기부하는 실제 행동으로 내지 동포들에 대한 혈육의 깊은 정을 보여 준 것이였습니다. 2월10일까지 향항 사회 각계는 루계로 10억원을 기부했으며 일부 사회단체와 기구는 또 당지에 마스크, 보안경 , 방호복 , 수술복 등 방역 물자들이 없으니 해외에서 구입해 내지의 전염병 예방 통제 일선에 보냈것입니다 . 그리고10일까지 오문 각계에서도 인민페로 약 3억 1,000만원을 기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텔레비에서 볼때 만약 향항, 오문이 조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저렇게 내지에 대한 지원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향항, 오문은 특별행정구로서 비록 내지와 일정한 거리도 있고 사회제도가 다르다 하지만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혈육의 정만은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중국아세아경제발전협회에서 전세기를 내고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에서 마스크 12.536장, 의료용 장갑 11 만1천 켤레, 방호복 400벌, 총 128만9천 원 가치의 지원물자를 연변, 무한, 북경 등지에 보내여 따뜻한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련합회 산하의 협회뿐만 아니라 연합회에 속하지 않은 여러 조선족협회들에서도 모금 활동과 물자조달에 나섰으며 아무 협회에는 속하지는 않지만 자발적으로 개인의 명의로 기부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 장의 마스크, 한 컬레의 장갑, 한 벌의 방호복에 재일조선족들의 따뜻한 마음이 스며있었습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에게 크나큰 힘으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것은 무한에서 화신산병원을 짓는 농민공들이 거기에서 일한 로동공가를 하나도 받지 않고 자기들의 의무로동으로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농민공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최하층이고 그들이 하는 로동도 힘든 로동이고 그들의 생활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경제상으로 큰 지원을 못하게 되니 자기들의 힘든 로동으로 이번 바리러스와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것이였지요. 이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바로 바이러스는 무정하지만 사람은 유정하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기부와 선행이라면 또 따뜻한 마음과 열정적인 우리 연변사람들을 빼놓을수 없죠. 근일에 우리 지역에서도 각 기업과 개인이 방역물자를 기부하는 선행들이 이어졌는데요,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에서는 15일간 방역 1선 사업일군들한테 애심도시락을 전달했고 길림오동제약회사에서도 10여차에 걸쳐 500여만원 가치의 방역물품과 자금을 기증하였습니다. 또한 공청단주위의 조직하에 50개 애심단체와 천여명 각계 애심인사들이 155만원에 달하는 물자를 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달째 경영을 못해 수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200여분의 물만두를 일선일군들한테 전달한 연길시대방물만두집도 있습니다. 주선생님, 참 가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소식들이죠? 그렇지요 한곳에 곤난이 있으면 여러곳에서 지원한다는 말과 같이 연변, 그리고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도 큰 기업으로터 자그만한 애심단체, 그리고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방역전역에서 큰힘 작은힘 할것없이 지원에 나썼습니다. 례하면  통화청산그룹에서 100만원, 커시안그릅에서 1,000만원에 달하는 성금과 물자를 의연하였고 또 개인들로는 백청강가수가 마스크 1,100장, 중경력범팀 축구선수 원민성이 5만원, 도문시 월청진의 리금련 로인이 1만원을 기부 하였으며 또   연변TV에서 훈춘시 양포만족향 동아로촌의 리준성로인이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한푼, 두푼  모은 5짜리,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로 된 돈주머니를 전연병예방통제사업에 쓰라고 촌민위원회를 찾아와서 내놓는 것을 봤습니다. 그 액수는 만원이였습니다. 이 두 로인의 그 성의가 아주 감동적이였습니다. 두분 다  70이 넘는 농민이였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시대의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오늘날에 와서 물질적추구가 강해지면서 요즘 세대들속에서 뢰봉정신이 잊혀지지 않을가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전에 연길시중앙소학교 4학년 3학급의 남가이 학생은 자신이 아껴모은 마스크 100장을 신흥파출소에 전달하였습니다. 주선생님, 요즘 아이들이 독신자녀로 자라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하다고 여겨지지만 또한 어른들이 본보기를 보이고 인도하기 나름이 아닐가요? 그렇지요. 뢰봉의 영웅적 사적이 나타난 시기는 지난세기 60년대 초이고 지금은 21세기 20년대에 들어 섰으니 거의 60년 세월이 지났으니 현시대의 청소년들에게는 확실히 뢰봉이란 그들과 거리가 먼 력사인물로 느껴 질 수 있겠지만 먼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2천년도 많이 넘는 중국의 력사인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 각국에 공자학원이 많이 서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봐서 오랜 력사인물이라고 하여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성 세대의 사람들이 이런 력사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고 새일대들에게 어떻게 인도하여 주는가에 달렸다고 봅니다. 뢰봉정신은 우리 이 시대의 정신문명의 대명사이고 선진문화의 표징으로 된 것 만큼 한개 시의 중심광장에 크지는 않더라도 뢰봉의 조각상이 하나 세우고 거리나 기차역전, 뻐스부 같은 큰 공중장소의 벽에는 뢰봉이 인민군중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그림같은 것을 크게 그려놓으면 정신문명의 대명사로서의 뢰봉정신이 더 빛을 뿌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공뻐스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여 주는 작은 일도 좋고 아직까지도 빈곤호, 장애인, 독거로인 등 사회의 약세군체들이 있는 것만큼 그들을 찾아 가서 어떤 구체곤난이 있는가를 료해하고 그들을 집접 도와 줄 수 있는것은 그 자리에서 도와주고 청소년들이 자기의 힘으로 직접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부모들의 도움을 청한다든가 어떤 사회단체의 도움을 청하여 그들을 도와주고 소선대의 활동이거나 청년단의 활동으로 사회의 유익한 일들을 찾아 하도록 인도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뢰봉정신의 실질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 인민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요. ◆현재는 전국 지어 전 세계가 코로나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방역물자가 부족하고 자아격리, 공공장소에서의 마스크 착용 등 기부와 후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난관을 헤쳐가는데 힘이 되지 않을가요? 예, 이번 코로나방역전역은 인제는 많이 호전되여 가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락관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힘으로 지원을 못할 지라도 우리 주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페염역정 예방통제사업 지도소조판공실에서 전주 인민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잘 학습하고 자아 예방통제의식을 절실히 높혀  해당부문에서 제정한 교통관제를 준수하고 인구밀집장소에 대한 출입을 금지하고 모임을 갖지 말고 야생동물 거래를 엄금하며 야생동물고기와 멀리하는 등등의 구체 행동이 바로 제1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백의전사와 기타 사업일군들에 대한 도움이라고 생각됩니다.   --- 맺 는 말 --- 네, 요즘 우리들은 코로나사태로 다소 불편한 일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들려오는 각종 기부와 후원, 베품, 타인에 대한 배려 등 따뜻한 소식이 우리한테 힘과 희망을 줍니다. 본 프로기획에 황설화, 록음제작에 손귀옥이였습니다. 오늘 프로가 여러분들한테 힐링이 되는 시간이였길 바라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265    서유럽려행기[24] 댓글:  조회:4572  추천:0  2020-03-04
서유럽 려행기 [24] 빠리개선문 노트르담 대성당 마치고 우리는 빠리개선문을 향해 떠났다. 빠리개선문은 샤를 드골 광장 복판에 위치해 있는데 1805년 《아우스터리츠전투[奥斯特里茨战役,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亚历山大一世)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弗朗茨二世)의 련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격파한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1806년에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건축가 장 프랑수아 살그랑 의 설계로 건설이 시작되여 1836년 완공되였다. 이 개선문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온 것으로 신고전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나폴레옹은 개선문이 완공되기 전에 이미 사망하고1840년 그의 유해를 파리로 이장할 때 그가 이 문을 지나 앵발리드 돔 교회 아래에 매장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할 때 나치 독일 국기가 걸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드골 장군이 독일을 전승하고   파리를 해방시킨 다음 이 개선문을 통해서 행진대렬을 검열하기도 했다. 이딸리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315년에 세워졌으며 높이 21m, 너비 25.7m, 폭은 7.4 m에 달하였으나 빠리의 개선문은 프랑스 력사에서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가 50m, 폭이 45m로 건설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았는데 조선에서1982년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에 맞이 하여 평양에 개선문을 세웠는데 높이는 60m, 너비는 50m로,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 더 크게 지어 빠리개선문은 지금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개선문이 되였다. 가이드의 해설에 의하면 개선문의 높이가 50 m이므로 이 도시에서 건물을 지을 때 이 개선문의 높이를 초과를 하지 못한다는 정부의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빠리시의 건물들은 전부 4 ~ 5층으로 되여 있지 엘리베이터층집은 하나도 못 봤다. 또 빠리뿐만아니라 이번에 돌아본 유럽의 도시들에서 엘리베이터층집을 본것이 몇채 안된다. 엘리베이터층집을 보았다면 도시 밖에 나가서 혹간 몇채씩 보았다. 개선문의 벽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아부키 전쟁, 터키에서의 승리, 오스텔리츠 전쟁 등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여러 개의 조각들로 장식되여 있다. 또한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부대를 지휘했던600여 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그 안의 자그마한 미술실에는 개선문의 력사를 말해주는 그림, 사진, 모형들이 진열되여 있다.     에투알개선문 사진에서 ➀ 개선문의 전망대 바로 아래에 나폴레옹이 승리로 이끈 전투들의 30개의 방패에 새겨져 있고 ② 그 바로 아래 샹젤리제 거리(香榭丽舍大街)에서 바라보는 쪽에는 프랑스 군대가 출정하는 모습을, 뒤면에는 귀향을 조각해 놓았다. ③ 그 아래쪽 왼편 네모난 곳에는 나폴레옹이1790년 터키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묘사해 두었고 ④ 그 바로 아래에는 1810년 빈 조약을 기념하기 위한 조각으로서 나폴레옹이 승리의 녀신에게서 월계관을 받는 모습이다. ⑤ 오른쪽 네모난 곳에는 마르소 장군의 장례식을 묘사해 놓았고 ⑥ 그 아래에는 1792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시민들의 모습을 조각해 두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전쟁에서 사망한 신원 불명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무덤으로 매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홰불이 켜지며 매년 7월 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하며 11월 11일에는 무명용사의 묘비 앞에서 군사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   개선문앞에서 샤를 드골 광장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에서 빛나는 별처럼 보인다고 하여 별이란 뜻으로 원래는 이 광장을 "별의 광장”  이라고 부르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되여 있던 파리를 해방한 샤를 드골 장군의 영예를 기리여 1970년에 ‘샤를 드골 광장’으로 개칭되였다. 그러나 현재에도 ‘별의 광장’라는 부르는 파리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드골광장 빠리시가지는 이 샤를 드골 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부채모양으로 크게 12개의 거리로 되여 있기에 어디로 가나 거리 교차점이 열十자로 된것이 아니라 모두 X모양으로 교차되여 있었으며 따라서 집들도 대부분 직각사각형으로 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제형으로 되여 있었다.   빠리시의 거리와 건물 [다음 계속]
264    서유럽여행기[23] 댓글:  조회:4251  추천:0  2020-03-01
서유럽 려행기 [23] 20일 7시 반에 우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번에 유럽에 와서 몇개 나라를 돌아보면서 교통체증을 보지 못하였는데 프랑스 빠리에 와서는 어디로 가나 교통체증이 심하였다. 지도를 보면 우리가 주숙하였던 호텔에서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너무 먼 곳이 아니였는데 교통체증이 심하여 두시간이나 걸리여 9시 반에야 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하였다. 노트르담 대성당(巴黎圣母院)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중심인 센강(塞纳河)의 시테섬(西岱岛) 동쪽끝에 있었는데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들의 귀부인'라는 뜻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1163년 빠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의 주도하에 착공해서 많은 건축가들의 손에 의해 무려 180년이나 걸쳐  1345년에 완공돼 축성식을 개최했고 그후에도 부대공사가 이루어져 18세기 초 오늘날의 형태가 되였는데 12세기 고딕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낸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포도주 창고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그 후 나뽈레옹1세가 다시 성당으로 회복하고 자신의 대관식(1804년)을 이곳에서 거행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왕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였고 왕족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으며1455년에는 프랑스의 애국 소녀 잔 다르크(圣女贞德, 1412~1431)의 명예 회복 재판이 열려 마녀(魔女)에서 성녀(圣女)로 다시  명예가 회복되였다.  1572년에는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玛格丽特)왕녀의 정략결혼(政治婚姻, 가장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키는 결혼)장소로도 되였으며 드골 장군,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거행한 등 여러 가지 력사적 사건의 무대였으며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维克多•雨果)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선양하기 위해 〈노트르담의 꼽추〉를 써서 무대에 올려 유명하였으며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으며 매년 1200만 ~ 1400만 명가량의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프랑스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1) 성당외부 노트르담 대성당은 평면도로 보면 남북날개가 짧고 동서방향으로 길며 서쪽이 정면인 十자형으로 3층으로된 건축물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전체 길이 130m, 너비 48m, 천장 높이 35m, 성당 정면(서쪽)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한 쌍의4각형 쌍둥이 탑의 높이가 69m인 웅대한 건축물이다. 건물의 十자형 중심부에는 96m 높이 첨탑(尖塔)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19세기에 와서 추가로 건설된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외부 구조도    노트르담 대성당 정문(서쪽) 정면 1층 은 세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사진에서 ➀은 성모 마리아의 문(1210~20경)이고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천상 모후(天上母后)의 관을 받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했으며 사진에서 ➁는 최후의 심판 문(1220~30경)이며 최후의 날에 심판하는 예수의 모습과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사진에서 ➂은 성녀 안나의 문(1165~70경)인데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녀 안나의 문이다. 사진에서 ④는 세 개의 문 우에 28개의 립상이 있는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28명의 유대의 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다. 사진에서 ⑤는 둥근 장미 창(13~14세기 유럽의 고딕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꽃 모양의 둥근 창문, 직경이 10m)이고 아래에 성 모자상과 두 명의 천사상이 있다. 양쪽으로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있다. 사진에서 ⑥은 왼쪽(북쪽) 탑, ⑦은 오른쪽(남쪽) 탑이고 높이는 각각 69m이며 왼쪽탑 안에서 3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으며 전망대는 왼쪽 탑에서 오른쪽 탑으로 이어지며 전망대에서 파리 시의 전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1200년대 공사를 시작해 두 탑은 1245년경에 완성되였으며 대성당은 1345년 경에 완성되였다.  노트르담에는 5개의 종이 있다. 가장 큰 종인 엠마뉘엘(Emmanuel)은 오른쪽 탑에 있는데 무게가 13톤이 넘으며 하루의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나 여러 행사나 전례를 알리기 위해 울린다. 왼쪽 탑에는 부가적으로 4개의 종이 붙어 있는데 전례나 축제 때에 울린다. 2) 성당내부 성당내부는 동서방향으로 두줄의 콩크리트기둥으로 줄지어 서 있었는데 기둥과 기둥사이의 거리는 16 m, 높이는 3층까지 24 m이고 성당에는 서쪽, 남쪽, 북쪽 3면에 장미창(13~14세기 유럽의 고딕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꽃 모양의 둥근 창)이 있으며 서쪽 장미창이 가장 작지만 1225년에 제일 먼저 만들어졌고 남쪽과 북쪽 장미창은 직경이 13.1m 크기로 유럽에서 가장 큰 장미창이며 창은 각각 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 장미창은 이전에 화재로 파손됐으나 이후 복원되였는데 성모 마리아와 12사도(예수를 따르던 12명의 제자)들을 비롯한 성자들이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다. 장미창 아래에는 프랑스 제1의 성녀인 잔 다르크(圣女贞德)의 조각상과 제2의 성녀인 소화 데레사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내부에는 또 4세기에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있고 성가대석(성가를 부를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 벽의 돋을새김(浮彫)은  14세기의 작품으로서 예수의 일생을 묘사하고 있는데 성당이 지어질 당시 성직자와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라틴어를 읽을 수 없어서 성경 내용을 알기 쉽게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각각 예수의 탄생부터 이어지는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조각되여 있다.   19세기에 성당을 복원할 때 만들어진 성물 박물관(圣物博物馆)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과 가시면류관 (荆棘冕旒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로마 병정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하여 머리에 씌웠던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보관되여 있다. 성가대 뒤쪽으로는 니콜라 쿠스투(프랑스 조각가)의 피에타(기독교 미술에서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주제)가 있고 피에타 옆에는 루이 13세(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 재위 1610~1643)의 동상이 있다. 북쪽 장미창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로 묘사여 있고 장미창 아래에는 빠리 최초의 주교인 생드니 성인과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성당내부에는 또 도관풍금(管风琴)이 있는데 프랑스 성당에 있는 풍금 중 가장 큰 규모로 무려 8,000개의 도관으로 제작되였다고 한다. 성당 내부는 172개의 채색유리 창문으로 장식되여 있는데 중세 채색유리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또한 내외 벽면에는 성경 내용을 담은 4,000개의 조각으로 장식되여 있다. 이 기행문에서 바로 이 부분을 쓰는 날 인터넷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이 어제(2019년 4월 15일) 저녁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았으며 저녁에 중앙테레비죤뉴스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성당우의 첨탑(尖塔)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다. 빠리에 가서 이 성당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 성당이 화재에 휩싸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있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이 대성당을 참관하고 돌아와서 다섯달만에 이렇게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첨탑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는 순간에 정말 비감한 심정이였다.     화재에 휩싸여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이 성당이 완공되여 몇 세기를 내려 오면서 몇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여 복구를 하고 어떤 때에는 파손되여 보수를 하면서 오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런 장엄하고 웅장한 건물이 석조로 된 골조를 제외한 목재로 구성된 부분들은 이렇게 거의 폐허로 되는 장면을 볼대 참으로 가슴 아픈 아프게 생각되였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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