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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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봄철농사준비를 잘 하자 댓글:  조회:6087  추천:0  2016-04-14
1년농사는 봄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봄에 씨를 잘 붙이지 못하면 그 해에 아무리 땀방울을 흘리고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헛농사를 하게된다. 그만큼 봄에 씨붙임을 잘하여 놓으면 그 해 농사에 희망이 보인다는 뜻이겠다. 봄철농사준비를 잘하는것은 농사군들에게 있어서 가장 관건적인 첫 시작이다. 그러므로 1년 생산계획, 종자선택, 비료, 농약준비, 1년동안 방치해 두었던 농기계점검 등등의 파종준비를 제때에 빈틈없이 잘해 놓아야 한다. 왕년의 사례를 보면 어떤 농민들을 종자를 당지 농업기술부분에서 권장하는 품종을 심는것이 아니라 개인장사군들의 감언리설에 귀가 솔깃하여 그들이 파는 저질종자를 심었다가 1년 농사를 망쳐먹고 화학비료, 농약 등도 아무곳에서나 사서 쓰다가 비료효과를 못보거나 농약의 해를 입는 사례들이 있었는데 종자, 화학비료, 농약은 꼭 당지 농업기술부문에서 권장하는것을 기술일군들의 지도아래에 쓰는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봄파종은 너무 일찍이 하여도 좋은것이 아니고 너무 늦게 하여도 생장기를 보장할수 없는것만큼 적당한 시기를 놓지지 말고 파종하여야 한다. 옛날부터 로농들은 “조파종은 곡우를 끼고 하고 콩, 옥수수파종은 립하를 끼고 한다”는 몇천년 내려오면서 쌓아 온 경험을 그대로 생산실천에 적용해 왔다. 그런데 과거 인민공사때에는 일찍이 파종할수록 좋다는 좌적사상의 영향으로 너무 일찍이 파종하여 종자가 싹도 못 트고 땅에서 곯아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므로 봄파종은 적당한 시기를 놓지지 말고 제때에 하여야한다. 그리고 왕년에 보면 물이 논에 제때에 들어가지 못하여 벼모를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지난해에도 해란강하류에 있는 룡정시 동성용진 인화촌에서는 벼모철이 다 지났는데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 농민들은 할수없이 300헥타르의 논을 파답하여 조숙종 옥수수를 심었다는 연변텔레비죤방송의 보도가 있었다. 농민들은 “강이 녹기시작면서 인차 관개수로에 물을 넣어주면 이런 일이 없었을것이다”며 원성이 자자했다. 농업전문가들에 의하면 연변에서의 가장 적당한 벼모시기는 5월 15일부터 5월 25일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세전이벌에 물이 흘러들기 시작한것은 5월 21일부터였다. 바로 모내기 적시의 마지막 시기였다. 그 주요 원인은 평강벌에서 논에 다 관개를 한 다음에야 조금씩 흘러내리는 물을 세전이벌에서 관개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다니 세전이벌의 막끝에 있는 인화촌에서는 벼모철이 다 지나도록 물이 내려오지 않아 파답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필자는 지난해 수리부문과 농민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어봤더니 수리부문과 농민들의 말이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수리부문에서는 “물을 일찍이 관개수로에 넣어주어도 농민들이 한전파종을 먼저 하면서 논갈이나 써레질을 하지 않아 관개를 하지 못한다.”고 했고 농민들은 해마다 물고생을 하는데 왜 물을 일찍이 보내면 관개를 하지 않겠는가?”고 반발했다. 수리관리부문에서 계획적인 물공급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농민들의 요구는 강이 녹기시작하면서 인차 물을 관개수로에 넣어주면 농민들이 논갈이 혹은 써레질을 하는 족족 물을 대면 벼모를 할 때 조금만 물을 보충하여도 모내기를 할수 있다는것이다. 수리관리부분에서도 농민들의 이런 건의를 귀등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될수록 빨리 관개수로에 물을 대는데 착안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1년농사는 봄에 달린것만큼 농민들이나 관계부문에서 일제히 농사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금년에도 우리 연변의 농사가 풍작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2016년 4월 13일  
222    하늘나라에 간 "기러기" 댓글:  조회:5029  추천:2  2016-02-17
하늘나라에 간 “기러기”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2-15 15:49:32 ] 클릭: [ ] -전국로력모범 고 리호천옹을 추모하여 2월 12일 오전, 뜻밖에 호천옹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놀라운 소식이였다. 무슨 청천벽력인가! 설날아침까지 서로 전화로 설인사를 나누지 않았던가! 비보를 접하고 황상박선생, 리광평선생과 함께 조문을 가니 11일부터 심장병으로 연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효과를 보지 못하고 12일 아침 6시 27분에 돌아가셨다는것이였다. 년세가 많은 분들은 지난 세기 60년대에 상영되였던 영화 《기러기(鸿雁)》를 본 기억이 있을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우편배달부《리운비(李云飞)》의 원형이 바로 지난 세기 50~80년대 전국로동모범으로 이름을 날렸던 연길현(룡정시) 덕신우전지국의 리호천이다. 리호천을 원형으로 촬영한 영화 《기러기(鸿雁)》의 포스터. 어릴 때에 나도 이 영화를 보았기에 지금도 가끔씩 영화속의 장면들이 나의 머리속에 떠오르군 한다. 후에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이 영화를 dvd로 제작하여 호천에게 보내왔는데 호천선생이 나에도 시디롭(光盘) 하나를 선물하여 지금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며 가끔씩 그것을 텔레비에 련결하여 본다.   나와 그는 한 고향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그는 벌써 전국로력모범이였다. 하여 우리 학교에서는 그를 초청하여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들은지 이제는 50년도 많이 넘어 그때의 보고내용은 기억에 어슴프레 하나 북경에서 모주석과 중앙의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았다는 내용만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어린심령에 “수도 북경”, “모주석”, “중앙령도” 등 이름들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이기에 우리는 호천선생을 몹시 흠모하였다. 나와 호천옹은 나이차이가 20살이나 되지만 어쩐지 각별한 인연이 있는것 같다. 그가 우편배달원으로 있을 때 그의 집과 우리집은 모두 덕신공사소재지인 숭민대대에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가 우편배달가방을 메고 다니는것을 보아왔으며 썩 후에 내가 공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에는 그의 딸이 내가 맡은 학급에서 공부하다보니 가정방문 등을 통해 그와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그가 1980년도에 룡정시 우전국 부국장으로 전근한후 인연이 이어지자고 그랬는지 나도 이듬해 룡정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우리는 룡정에 와서도 자주 래왕하였다. 나는 그의 사적을 정리하여 신문, 방송에 투고하여 여러번 발표하였는데 이러다보니 그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있는 편이다. 1932년 3월 5일, 연길현 지신구 성동촌에서 출생한 리호천옹은 1945년 8월 15일 연길현 덕신구 영동촌 중우동에서 해방을 맞았다. 생활난으로 1948년 16세 나던 해에 지신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52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연길현 덕신우전지국에서 우편배달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7개 생산대대, 51개 생산소대의 우편배달을 책임졌는데 100근 넘는 짐을 메고 11갈래의 물을 건너고 4개의 령을 오르내리면서 매일 거의 왕복 100리 되는 길을 다녔다고 한다. 60년전 배달로정 답사에 앞서 당시정황을 소개하는 리호천옹(가운데)(2015.11.4). 1964년 내가 중학교(연길현10중)를 다닐 때였다. 어느하루 자전거를 타고 배달다니던 호천옹이 갑자기 적갈색의 말을 타고 우리 학교에 왔다. 말잔등에는 우편물이 가득했다. 학생들은 우편배달부가 말을 탄것을 처음 보는지라 신기하여 그를 둘러싸고 구경하였다. 원래는 비오면 자전거를 탈수 없는 덕신길을 념려하여 길림성 우전관리국에서 그에게 말을 장려했던것이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아주 쉽게 배달을 하였는데 그것도 호천에게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말은 잠잘 때에도 누워 자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얼마 후에는 그 말은 잘 먹지도 않고 자주 누웠다. 그 말이 병이 있어 그런가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다른 말을 바꾸어 주었는데 그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침 인민해방군들이 덕신공사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말을 먹이는 군대들과 자기 말이 어째서 이러는가고 물어보니 그 해방군전사가 하는 말이 군대에서 통신원들이 타는 군마도 10리 길을 뛰고 다른 말을 갈아타야 하데 호천의 짐과 배달로정을 보면 말이 너무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였다. 하여 성 우전관리국에서는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었다.   그때가 바로 1966년도 가을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학생들이 전국적인 대교류(大串联)를 하던 때라 우리도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장춘에 들렀는데 우연한 일치라고 할가 그이와의 인연이 이어지느라 그랬을가 신비스럽게도 쓰딸린대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호천이와 마주쳤다. 우리가 너무도 반가워 그를 둘러싸고 어찌된 일인가고 물었더니 성우전국에서 지친 말대신 오토바이를 바꾸어 주어 지금 여기에서 오토바이련습을 한다는것이였다. 성 우전관리국에서 전국로력모범인 그에게 말과 오토바이를 장려하였지만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덕신길은 마른 날이면 길이 울퉁불퉁하고 비오면 참질땅이라 질척거려 오토바이를 타는 날이 매우 적었고 또 탄다 해도 매우 불편하였던것이다. 덕신중학교 교정에서 당년을 회억하는 리호천옹과 주청룡선생(2015.11.4). 호천옹은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쌓았다. 하여 당과 인민은 그에게 수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1956년 4월 30일에 전국 로력모범표창대회에 참가였으며 5월 1일에는 전국로력모범메달을 달고 천안문 관례대에 앉아 5.1절 경축대회를 관람한 다음 모주석과 중앙위원들의 접견을 받았다.그때로부터 그는 모주석과 중앙령도동지들의 접견을 7차례나 받았다. 그가 모주석과 중앙령도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기념메달들은 지금 국가우전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그의 집 벽에는 지금도 우전제복에 14매의 기념메달을 달고 찍은 사진과 모주석과 중앙의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을 때 함께 찍은 기념사진들이 커다랗게 확대되여 걸려있다. 전국로력모범이였지만 그도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주덕해보황파, 류소기 가짜로력모범, 조선특무 등으로 몰리여 비판을 받으면서 각종 회의에 참가할 권리마저 박탈당하였다. 1967년 8월 2일, 나와 몇몇 동학들이 학교로 갈때 마침 리호천선생이 우편물을 싣고 우리옆을 지나고있었다. 이때 우리 앞에 몽둥이를 쥔 한 반란파가 길을 가로막으면서 오토바이를 내놓으라고 외쳤는데 그가 오토바이를 세우지 않자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다행히 사람은 맞지 않았으나 오토바이 전등유리가 박산났다. 그는 “내가 못 타면 못 탔지, 절대로 너희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토바이를 분해하여 금곡마을의 개인집에 감추고 두발로 걸어다녔다. 그는 이 일때문에 반란파들에게 모진 매를 얻어맞았지만 오토바이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리호천옹은 항상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고 사업하여 오셨다. 비록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곁을 떠나셨지만 옹의 이름은 당신이 거둔 그 업적과 더불어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을것이다. 기러기가 되여 하늘나라에 가신 리호천옹의 명복을 삼가 빌고 또 빈다! 2016년 2월 15일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김태국기자
221    농촌에 대학생 촌간부가 수요된다 댓글:  조회:6116  추천:0  2015-10-11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87) 농촌에 대학생 촌간부가 수요된다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농촌에 대학생촌간부가 수요되다”는 내용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우리 조선족들은 앞선 의식, 빠른 실천으로 개혁개방의 앞장에서 달리고 있다. 중-한 수교 이후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로 하여 조선족들이 대도시, 연해도시에로 진출하게 되였으며 특히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문이 열리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출국하면서 지금 농촌의 조선족 마을들이 옛날의 아담한 모습과는 달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조선족마을들은 이전에는 순 조선족 마을로서 다른 민족이 한 가구도 없던것이 지금은 다른 민족이 한호 두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조선족 마을이 한족 마을로 변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조선족 촌에서는 조선족가운에서 촌장, 서기를 맡아 할 사람이 없어 다른 촌의 한족을 촌장 서기를 초빙하였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우리 조선족이민사에서 개척지이고 우리민족 문화의 발상지로 부리우는 곳에서도 조선족가운데서 촌장, 서기를 선거를 할 사람이 없어서 한족을 촌장, 서기로 선거를 하는 현상도 있습니다. 조선족마을에서 한족이 촌장, 서기를 맡아 하면 안 된다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촌에 조선족 가운데 촌장, 서기를 맡아 할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서운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촌들을 보면 조선족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본고장에 돌아와서 촌장, 서기를 겸하여 하는 대학생 촌간부들도 있습니다. 룡정시 삼합진 부유촌의 리종국촌장은 부유촌의 유일한 대학생으로 80년대에 할빈대학을 졸업하고 밀산조선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90년대에 하해하여 관내의 대도시, 연해도시로 진출하여 얼마간의 돈을 벌고보니 이제는 고향건설을 해야겠다고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와 촌장직무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이 촌은 원래 땅이라야 고구마,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 먹을수있는 척박한 사불땅이고 젊은이들은 외국이요, 연해도시요 하면서 고향을 떠나다 보니 남아있는 사람들로는 농사를 짓기 힘든 늙은이들뿐이라 토지를 무당 200원의 헐값으로 한족들한테 양도하다보니 이 마을이 한산하기로 그지없었다. 하지만 리종국이 이 촌에 와서 촌장을 맡아 하면서 마을이 새롭게 변모해 나가고 있습니다. 부유촌은 삼면은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봄이면 산과 마을에 아롱다롱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울긋불긋 온 산과 마을을 단풍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여름에 살구부터 나오기 시작하면 오얏, 복숭아, 사과배, 사과가 련이어 나오는가 하면 천불지산은 또 일본에 수출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송이버섯기지로 되고있습니다. 리종국촌장은 이러한 자연우세를 빌어 유람객들을 끌어들여 과일철이면 현지에서 과일을 따고 맛보고 자기 딴 것을 자기가 사는가 하면 송이철이면 송이축제 같은 행사를 벌려 송이캐기, 구워먹기 등 생태관광산업을 벌리여 촌민들의 수입을 늘이고 있습니다. 부유촌 하마래 마을 동남쪽 산우에는  청태조 누르하치의 선조가 구축한 둘레길이가 1500여 메터되는 “한왕산성”이 있고 산 아래는 관리들이 이 곳에 왔다가도 모래불에 말 발목이 빠져 말도 걷기 힘들어 말에서 내렸다하여 하마래(下马来)란 마을 지명까지 생겨난 력사가 뭍여 있는 마을입니다. 주정협, 성, 주 해당 연구기관의 전문가들로 무어진 전문고찰조가 현지고찰을 하여 력사적 고증을 이미 기본상 완성 하였으며 관광산업개발전망이 있는것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리종국촌장은 부유촌의 이러한 자연자원우세와 력사유적 자원우세를 리용하여 해당부문과 손잡고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리종국촌장은 또 국가의 변강농촌지원자금을 쟁취하여 500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촌 사무실과 오락실 짓고 그 옆에는 푸른 주단을 깐  문구장을 건설하여 로인들의 문체활동을 즐기도록 하고 있으며 하마래마을에 조선족 전통가옥을 40여 채를 지어 농호들에서는 호당 2만원씩 내고 전통조선족 가옥에 들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조선족 마을을 돌아보면 외지에 나간 사람들이 많아 빈집들에 널판자에 못을 쳐 문을 봉해놓아 마을이 스산하기 그지 없지만 하마래 마을은 이런 집은 하나도 없기에 마을이 한결 더 오붓하고 산뜻한 감을 줍니다. 리종국촌장은 가난하고 한산하던 부유촌을 이렇게 “한왕산성” 력사유적, 전통조선족마을, 자연자원에 의한 생태관광체험이 결합된 관광산업을 벌려 촌민들의 수입을 증가하고 있습니다. 도문시 장안진 벽수촌의 촌장 채성룡은2004년 연변대학 농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마치고  벽수촌 산간오지에 자리잡았으며 2007년 촌장선거에서100호 농민들이 채성룡을 만장일치로 촌장으로  선거하였습니다. 하여 그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 촌민들을 이끌고 공동치부하자 촌민들의 한결 같은 옹호를 받고 있습니다.  신가남은 대학을 졸업하고 2009년 돈화시 황니허진 전툰촌에 와 촌주임 조리직을 맡았고 2013년 당지부 부서기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전자상무플래트홈을 리용해 인터넷에 록색특산물 쇼핑몰을 개설하고 위챗을 통해 지난해에 검정귀버섯, 개암버섯, 꿀 3000키로그람을 판매해 5만원의 수입을 올렸으며 촌민들을 이끌고 공동치부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하여 촌민들은 신가남을 종합자질과 업무자질이 아주 높은 대학생촌간부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학졸업생을 선발해 촌간부로 임용하는 공정은 2008년에 시작하여 해마다 2만명에 달하는 대학졸업생을 촌간부로 초빙하였습니다. 연변의 왕청현에서만 하여도 2010년에 연변과 심수, 청해, 산서, 하남 등지의 1,000여명 대학생들을 공개, 공정, 공평의 원칙하에 종합지식, 전업기술시험을 쳐 최종 150명을 채용하였는데 동광진에만 하여도 18명의 대학졸업생이 촌간부로 임용되였습니다. 대학생을 촌간부로 임용하는 사업은 사회주의 새농촌을 건설하는 인재공정이다. 전면적으로 초요사회를 건설하는데서 중점은 농촌에 있으며 난점도 농촌에 있으며 희망 역시 농촌에 있습니다. 근래에 농촌로동력의 전이가속화로 하여 농촌에 인재류실이 비교적 엄중하여 인재결핍은 이미 농촌경제사회발전을 제약하는 가장 좁은 길목으로 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새농촌을 건설함에 있어서 자금, 기술 등 요소가 농촌으로 기울려야 하며 인재가 더욱 농촌으로 기울려야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생을 선발하여 농촌간부로 초빙하는 것은 농촌에 문화가 있고 기술을 알고 경제를 알고 관리를 아는 우수한 인재를 농촌에 투입하여 새농촌을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농촌은 광활한 천지로서 할일이 많습니다. 대학생 촌간부들은 모두 높은 학력을 갖고 있기에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새농촌건설에 응용하고 있습니다. 삼합진 부유촌의 리종국이 촌장을 맡아 하면서 촌을 변모시킨 사적, 장안진 벽수촌의 채성룡이 대학교에서 배운 축목 수의 기술을 응용하여 전촌의 목축업을 이끌고 촌민을 부유의 길로 이끈 사적, 황니허진 전툰촌의 신가남이 전자상무플래트홈을 리용해 인터넷에 록색특산물 쇼핑몰을 개설하는 등 사적들은 일반 농민들로는 하기 힘든 일이지만 고학력의 대학졸업생들은 쉽게 할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학생들이 본고장에 돌아와서 창업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대학생들도 본고장에 돌아와서 촌민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고향건설을 잘 하여 조상들이 개척한 삶의 터전을 잘 가꾸면서 조선족공동체를 굳건히 지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5년 10월 9일  
220    추석단상 댓글:  조회:7211  추천:1  2015-09-27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86) 추석단상 주청룡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추석단상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중국에서 고대 제왕들에게는 봄에는 해에 제사 지내고 가을에는 달에 제사 지내는 례법이 있었는데 가을에서 음력 8월15일 저녁 가장 밝고 둥근달에 제를 지내는 풍속이 점차 민간에까지 전해져 민간에서도 달을 향해 절하고(拜月) 달에 제사지내는(祭月) 풍속이 형성되면서 이것을 중추절이라고 하였습니다. 매년 중추절이 되면 사람들은 정성들여 만든 월병(月餠)을 차려서 달에 제물로 바치고 제물을 바친 후에 온 가족이 그것을 나누어 먹는데 이것은 온 가족이 즐겁게 한자리에 모인 것을 상징하여 “團圓節”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현시대에 와서는 달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살아지고 월병을 먹으면서 밝고 둥근 달을 감상하고 등롱을 구경하는 풍습만이 계속 전하여 내려오고 있으며 지금 우리나라에서 추석을 설, 청명, 단오와 함께 중국의 4대 전통명절의 하나로 하고 법적인 휴가일로 정하였습니다.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추석문화를 따라배워 추석이면 집집이 월병을 사먹으며 저녁이면 밝고 둥근 달을 구경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도 좋은 일이지만 우리는 조선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의 추석문화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입니다. 조선반도에서의 추석의 유래를 보면 신라 유리왕(儒理王)때에 여자들을 두편으로 나누어 두 공주가 각기 자기편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매일 뜰에 모여 밤늦도록 길쌈(피륙을 짜는 일) 을 하게 했다. 8월 15일이 되면 그 동안의 성적을 가려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했다. 이때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는데 이것을 추석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설, 단오와 함께 3대 명절로 하고 있습니다. (한식을 포함하여 4대 명절로도 하고있습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우리민족은 추석이 되면 햇쌀로 밥을 짓고, 햇쌀로 술을 빚으며,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고 햇과일을 마련하여 조상에 차례(茶禮란 매달 음력 초하루날과 보름날 또는 명절이나 조상의 생일날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는데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온 가족이 음복(飮福이란 제사를 마치고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데 벌초를 하고 여름비에 씼겨내려간 무덤에 가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농경사회에서 도시화에 들어서면서 농경사회때의 추석문화가 많이 살아져 가고 있지만 추석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것만은 지켜 내려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조상을 기리고 조상에 대한 효도를 오늘까지 지켜내려 오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옛날에는 우리민족은 추석 민속 놀이로 지방에 따라 강강수월래, 바줄당기기, 씨름, 활쏘기, 가마싸움, 소먹이놀이, 거북놀이 등 많은 놀이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민속놀이로는  강강수월래(수십 명의 부녀자들이 밝은 달밤에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노래하면서 춤을 추는 놀이), 바줄당기기, 씨름 등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이 지방에서 우리민족 추석민속놀이가 전부 살아지고 추석이란 우리민족의 전통명절이지만 아무런 민속놀이가 없는 것이 아주 서운합니다. 그런가운데 어느해 연변텔레비에서 청도조선족사회에서 추석을 굉장히 쇠면서 녀성들이 바다가에서 강강수월래 민속놀이를 하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민족의 긍지감으로 느껴졌습니다. 조선족의 산재지역에서 이렇게 우리민족의 전통추석문화를 지켜가고 있는데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왜 추석문화행사를 못 벌리겠는가 하는 생각이였습니다. 지금 연변지역에서 보면 정월 대보름날 윳놀이를 하거나 밤에 달구경을 하면서 불꽃놀이, 달집태우기 등 민속놀이를 하고 있는데 추석날에도 각지 문화부분에서 좀 관심을 돌린다면 강강수월래, 바줄당기기, 씨름, 활쏘기 등 민속놀이를 할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나라에서 추석을 전통명절로 하고 하루 휴식까지 주는데 추석을 아무런 민속활동도 없이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것은 우리 자체가 우리민족문화를 저버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해당부문에서 이 방면에 대한 관심을 돌려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5년 10월 2일    
219    무엇을 행복으로 간주해야 하나? 댓글:  조회:6306  추천:0  2015-08-30
  무엇을 행복으로 간주해야 하나? 주청룡      한국어사전에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행복”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어느 정도로 만족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고생으로 남을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나 어떤 사람은 남을 해치면서도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고 있다.   뢰봉은 일편단심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고 집체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였고 “2010년 중국10대 감동인물”중의 한 사람인 안산 광업공사의 곽명의 역시 그러한 사람이다.   그는 20년을 무상헌혈을 하였는데 누계로 6만 밀리리터로서 자기 총 혈액량의 10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는 식구 셋이 거의 30여 년 전에 지은 40평방미터도 안 되는 단칸 집에서 살면서 씻은 듯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16년 동안 희망공정과 재해지구에 10여 만원을 헌납하였으며 선후로 180여명의 빈곤학생을 도와 나섰다. 그는 이렇게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하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도 남을 돕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사람들을 볼수 있는데 화룡시 희망복리원의 리문철원장 부부와 도문시 장안진 희망원 한철범원장 부부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남들은 모두 돈이 있으면 현대화한 아파트에 현대화한 가구를 갖추어 놓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의지가지 없이 떠돌아 다니는 고아들을 데려다 자기의 친자식처럼 기르고 공부를 시켜 대학에 보내거나 사회에 진출 시키고 가정을 일궈주어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남을 해치는 못된 짓까지 하면서 남의 재물, 나라의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 안일을 추구하는 것을 행복으로 하고 있다. 주영강, 서채후, 곽백웅, 령계획 등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라의 돈과 재물을 탕진하거나 긁어 모았다.   주영강은 직권을 람용하여 일부 사람들로부터 21.36여 억 원의 부당이익을 챙기고 14.86여 억 원의 경제손실을 조성함으로써 공공재산, 국가와 인민의 이익에 중대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하여 천진시 제1중급인민법원으로부터 무기도형을 받고 정치권리를 종신 박탈당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원 부비서장 리녕과 그 가정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인민폐로 1836.665241만원에 해당되었다. 그 중 인민폐로 1060.154713만원에 해당되는 부분은 수뢰소득에 속했고 467.515315만원에 해당되는 부분은 합법적인 래원을 밝힐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중급인민법원으로부터 수뢰죄, 거액재산래원불명죄로 유기도형 16년에 언도되었다.  이런 탐관오리들은 나라에 엄중한 경제적 손실을 주었으며 공산당의 형상에 먹칠을 하고 인민군중들의 크나큰 불만을 자아냈다. 또한 재물을 탐내여 강탈 혹은 살인까지 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예하면 2009년 4월 18일 리해룡, 마향동, 호조군이 연길시의 한 슈퍼마켓에 들어가 호모 일가 세 식구를 살해하고 현금 과 은행카드를 강탈한 사건, 2011년 1월 31일 왕청현의 채해강이 한 마을의 리동환을 살해하고 금가락지를 강탈한 사건, 2011년9월 10일, 연길시의 계운봉이 14살 소녀를 살해하고 400원을 강탈한 사건 등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의 재산, 혹은 남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을 쾌락으로 느꼈지만 결국은 모두 법망에 걸려 인민법원의 판결을 면치 못하였다.   맹자는 자기의 행복관에서 “군자는 인생의 행복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로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일없이 건강한 것, 둘째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 셋째로,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 천하에 왕 노릇을 하는 즐거움도 이 세가지 행복중에 끼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곽명의, 리문철, 한철범은 모두 높은 관리가 아니다. 그들은 의지가지 없는 고아들에게 자기가 부모의 노릇을 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었으며 그 애들을 공부를 시켜 나라의 인재로 키우는 것을 자기의 행복으로 하였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게 살아오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하였다. 우리가 다 함께하는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다 같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을 느끼면서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행복이며 삶의 보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울=동북아신문]   
218    훈춘시 팔련성부터 경주 반월성까지 댓글:  조회:5009  추천:6  2015-08-07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훈춘시 팔련성부터 경주 반월성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4)     중국 길림성 혼춘시(琿春)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삼가자향(三家子鄕)에 자리 잡고 있는 팔련 성(八連城)은 지세가 평탄한 혼춘하(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있다. 두만강이 팔련성 서쪽 1km 떨어진 지점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팔련성은 팔뢰성(八磊城), 팔루성(八壘城), 반랍성 (半拉城), 고토성(古土城), 반랍성자토성(半拉城子土城) 등으로도 불린다. 팔련성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학계에서는 북대성과 7개의 성이 연결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조선의 고고학자인 주영헌 朱榮憲 선생은 팔련성이 8개의 내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르하퉁하와 세린하 합수목에 자리 잡은 패랑산 산성은 산 정상에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서 전략 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한자로 偏脸山城으로 표기하고 있어 사람들은 한자 의미에 따라 산 줄기가 기울어져 있어 그 명칭이 유래 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팔련성, 패랑산 지명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말 바람벽이라는 말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전을 펼치면 바람벽을 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언어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간혹 고유 어 바람(风)과 한자어 벽(壁)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추정하기 쉽다. 그런데 바람벽의 방언들을 살펴 보면 바름벽, 보름벽, 베름빡 등 다양한 소리로 나타나고 있어 이런 사투리들은 그 지역에 따르는 바 람 (风) 사투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바람은 벽(壁)의 고어로서 중세국어에서 (壁)람으로 나타난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바람(壁)과 바람(风)을 구 별하기 위해 바람벽(壁)이라는 동의중복(同義重複) 낱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 말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는 만주어를 살펴보면 벽(壁)을 빛랑 fajiran으로 새기고 있어 이에 대한 추론 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한국과 조선에는 반월성(半月城)이라는 명칭을 가진 유적들이 있다. 조선 개성 반월성은 도시성곽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반월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 리문 부근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남대문은 6.25 전쟁 때 부서진 것을 복구한 것이다. 성의 평면 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벽을 말하는 바람벽이라는 어원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한국 경주 반월성은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쌓고 그 위를 정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경주 반월성(半月城) 지명도 한국에서는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여 달 모양의 성으로 쌓여졌기에 붙여진 이 름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 한국 부여 금성산에 위치한 반월성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 된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바람(壁)은 한자로 八連城 半拉城 偏脸城 半月城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말 바람은 본래 벽(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언젠가부터 바람벽으로 단어가 바뀌면서 그 독립적 기능 이 상실되어 단지 지명용어로 쓰이는 말로 굳어졌다. 이런 지명들은 그 대부분이 토성으로 축성되어 있는 옛 산성 지명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바람(壁)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 변천을 거쳐 다른 파생적 지 명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세종시 부강면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금호리 마을에는 바람실이라 부르는 산 지명이 있다. 옛 날 주민들이 이곳이 마을을 지켜주는 산이라 믿어 왔기에 벽이 하는 기능을 이 산이 수행한다고 하여 바람실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금강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이 일대에 산성이 밀집하여 분포된 특징으로 보아 오래전에는 산성이 있었거나 원래 인근 산성에서 이주하면서 붙인 지명으로 추정된다. 몰론 우리의 지명에는 ‘바람고지’ㆍ‘바랑골’ㆍ‘바람들’ ‘바람말’ㆍ‘베랑모팅이’ㆍ‘베루바우’등 바람과 유사한 소리가 들어있는 명칭이 매우 많은데 이들 모두가 바람벽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 다. 여러 곳에 따라 바람 (风) 벼루 벼락 바랑(자루 같은 주머니)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드러 난다. 글 허성운
217    삼합 사물깨부터 경남 사천시까지 댓글:  조회:4484  추천:4  2015-08-07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삼합 사물깨부터 경남 사천시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3)   《중국고금지명사전》(中国古今地名辞典) 기록에 의하면 두만강 명칭은 만주어 tumen sekiyen 한 자로 图们色禽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주어 tumen sekiyen는 만 갈래 물줄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즈믄 (천 혹은 많다의 고어) 샴치(함경도 방언 샘물)라고 풀이 하면 그 해 석이 더욱 완벽하다. 수많은 샘물들이 두만강 양안에 모여 있는 까닭으로 이름이 붙여 진 것이다. 두만강 양안에는 말 그대로 샘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어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 붙지 않는다. 샘물 따라 물안개 보얗게 피는 곳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들어 앉아 마을 지명 들도 샘물둥지 샘물구파이 우물깨 약수동과 같이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 가운데 두만강 가에 자리 잡 은 삼합진에는 지명이 사물깨라는 동네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샘 줄기가 있는 바윗돌들이 군데군 데 자리해 있어 여러 갈래 샘물들이 사시장철 마르지도 않고 바위 밑에서 솟아 나왔다. 사물깨 마을 은 말 그대로 샘물이 주물러 자연 그대로 만들어 놓은 동네였다. 여기에서 사무깨란 말은 우물 샘 (새 미)의 받침소리 리을(ㄹ)이 탈락한 것이고 깨는 함경도 방언에서 지점 장소를 뜻한다. 연변 동불사 소재지에서 북으로 십리길 들어가면 사수(泗水)촌이 나타난다. 작은 하천을 끼고 마을 들이 이루어 졌으나 강물양이 적어 콧물처럼 흐른다 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명이 유래 되였 다는 설과 이 마을 우물들이 골고루 안물(함경도 방언 뽀얀 샘물)로 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 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마을 노인들은 가뭄에도 마루지도 않고 뽀얀 우물이 시원하 게 솟아나는데 한여름에도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약수 물이었다고 한다. 한국 경상남도 서남부에 사천시(泗川市)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사천시 지명을 뒤적 여 보면 조선 태종 때에 사천(泗川)현으로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였던 명 칭을 경덕왕이 사수(泗水)현으로 개명 한 것으로 기록 되여 있다. 사실상 사천시의 최초의 지명을 따 지고 보면 사물현(史勿縣)으로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 연변 지명과 한국 지명을 바탕으로 사물(史勿)이란 이 지명을 꼼꼼 히 캐고 보면 결국 샘물(泉)이란 뜻을 지닌 동음차자(同音借字)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 면 사물(史勿)은 원래 샘물을 뜻하는 우리 말 에 대한 한자음으로의 소리 옮김이고 사 수(泗水)는 그것에 대한 뜻 옮김이다. 샘물들이 흘러 내를 이루고 또 내가 흘러 강물이 되므로 샘의 뜻을 지닌 사물(史勿)이란 지명이 사천(泗川) 지명으로 이어 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 부처골 용진마을 사물깨, 조선의 장진호 연안 지명 사수(泗水), 전라도 만경강 옛 명칭 사수강(泗水江) 등 지 명들도 이런 맥락에서 해독 할 수 있다. 거기에 아득히 먼 고구려 지명 사물택(沙勿泽)과 인명 위사물 (位沙勿)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풀이하여 나갈 수 있다. 여기에서 사(沙)는 사(史)로 바뀌어 졌으나 사(史)와 사(沙)는 같은 음독(音讀)으로서 물(勿)과 함께 묶어 놓고 보면 사물(沙勿)은 샘물을 뜻하는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글누림에서 출판한에서 화룡에 있는 쓰렁바이 지명을 쓰렁바위로 착각하여 四人岩 四棱岩으로 새기고 인근 옥천동 지명을 충청도 옥천군 옥천동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허나 사실 쓰렁바이 지명은 만주어 seri 샘물과 ba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로서 샘물터라는 뜻 이다. 옥천동 지명도 샘물로 이름난 이 고장 쓰렁바이 지명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해야 정확한 것이다. 한국어 샘과 만주어 seri는 비슷한 음을 띠고 있다. 한 자 표기 된 지명은 사실 이런 의미를 연결시키는 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 지명을 올바르게 해독하려 면 이런 한자 지명 속에 구겨 넣은 최초의 말소리를 정확히 찾아 끄집어내야 한다. 연변 지역은 고대로부터 동북아 역사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왔으며 발해시기에 들어와 도성 이 자리 잡을 만큼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학계에서는 기존 고고 학적 기록과 유적에 매달려 조사하고 있을 뿐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이어온 고유의 문화 이를테면 지명과 방언에 대한 연구는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실정이다. 거기에 많은 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현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날 이에 대한 조사사업 은 시급하게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옛날에사 대촌이었지. 인자 성 쌓고 남은 노인들만 남 아. 이래가지고 동네가 우찌 될견지 농촌 다 망하는 게라이.」 연로한 할아버지의 한숨석인 독백, 오 늘의 연변 농촌 마을에서 가끔 듣게 되는 말들이다. 글 허성운
216    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댓글:  조회:4748  추천:5  2015-07-19
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2)   지난세기 60년대 전까지만 해도 광지바위는 장대한 기상을 품고 연길현 동성공사 덕신공사 석정공 사의 경계지대에 우뚝 솟아있었다. 천년 풍상을 견디며 버티고 서있던 광지바위가 동란의 세월에 접 어들면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힘없는 민초들의 슬픈 삶처럼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60년대 초에 연길 현 소재지였던 용정진에서 건축용 기초 돌을 전부 광지바위 돌을 캐서 날라 들이였는데 1965년에 이 르러 이미 바위 주변은 커다란 채석장으로 변하여 갔다. 바위를 폭파하는 발파소리, 망치와 징으로 돌 까는 소리로 광지바위는 걷잡을 없는 혼돈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천년동안 쌓아 온 광지 바위 기운이 꺾여서 일까 과거에 웃광지바위마을 아래광지바위마을 그리고 인근 개척기마을 사람들 이 어울러 삶의 터전을 가꾸어 오던 동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지나가는 길손들의 발길을 붙잡던 정경도 그때로부터 차츰 그 자취를 감추어갔다. 먼 전설에 의하면 옛날 장재비라는 인색한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청하니 장 재비는 소똥 한 바가지 퍼서 스님의 몸에다 부어 버렸다. 스님이 말없이 돌아가려 하자 장재비의 며 느리가 몰래 쌀을 시주하니 스님은 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하였다. 며느리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는데, 이제 막 산 정상에 올 라 설 무렵 별안간 하늘에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너무 놀라 스님의 말을 잊고 뒤를 돌아 보니 그가 살던 집은 땅속으로 함몰되고 그 자리는 커다란 늪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그 사이 광주리 를 인 자신도 아기와 함께 바위 돌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 커다랗게 광주리를 이 고 아기 업은 형상을 하고 서 있는 바위를 광지 바위라고 불렸다고 전하고 있다. 전라남도 장흥군 억불산 며느리바위는 멀리에서 바라만 보아도 신통히 중국 연변 광지바위와 꼭 닮 은 형상이다. 며느리바위도 광지바위와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명설화로서 이 광주리 바위 설화는 장자 못 설화와 함께 한반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함경북도 어랑군 장연호에 있는 광주리바위 ,강원도 판교군 광주리바위골, 평안북도 강계군 광 지암산, 평안북도 영변군 광주리 바위 고개 ,평안남도 북창군 광주리 바위산 등이 있다. 이제 우리는 광지바위 지명 풀이에서 하나의 관건적인 문제점과 부딪치게 된다. 즉 광주리바위 지명 에서 광주리가 지니고 있는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광지바위 전설이 불교설화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광주리와 광지와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이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일찍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 할 때 패엽(貝葉)이라는 나뭇잎에 부처 님 말씀을 새겨 보관하게 되었다, 우기 철이 오면 습기가 많아 부식이 잘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 여 광주리에 경전을 따로 담아 보관하게 된 데서 대장경 大藏经 인 삼장三藏(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 論藏)을 ‘세 개의 광주리(筐)’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몽골어로 대장경大藏经을 ganzuur ,만주어로 ganjur로 표기되고 있는데 어원은 티베트 불교 최고의 성서로 꼽히는 깐주얼(甘珠尔)에서 유래 되었다. 그리고 불교와 관련이 깊은 ‘광지’의 어원적 의미는 단지 언어학적인 추론이 아니라 바위 돌에다 불경을 새기는 티베트불교 문화와도 부합 되여 있다. 티 베트의 파스타 승려가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면서, 원나라에 티베트 불교가 받아들여졌고 원나라 간 섭시기에 티베트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다. 함경북도 경원군의 옛 지명이 광주(匡州)로 적혀 있는데 이 지역에서 발견된 12세기 경원군여진서비 慶源女眞字碑가 불교 사찰을 세운 이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광주라는 지명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광주리 의미로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세종 때부터 육진을 설치 하고 조선인 농부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으며, 그 결과 이들은 그 지역의 여진족과 섞이게 되었 다. 이들 중 대부분 사람들은 관청에서 찾을 수 없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갔으며 이 지역 여진족 과 동화하는 과정에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 (今西龍)는 부령의 북쪽에서 발견된 재가승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주목했다. 그들은 깊은 계곡, 산속 의 움집에서 살았는데 움집은 사원의 성격을 담고 있어서, 대부분의 재가승들은 경전을 읽을 줄도 몰 랐고 불상 앞에서 기도를 했으며 죽은 자들을 화장하고 姓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연변 광지바위 주변 가름산 절당께, 장남샘터 암자, 중평촌 사찰유지 그리고 이 지방 대부분 사람들 적관 (籍貫)이 함경북도 경원군과 경흥군으로 나오는 자료를 접하고 보면 광지바위와 경원군 옛 지명 광주 (匡州) 두 지명사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은 지명연구 시야를 넓혀주고 있는 것은 의심 할 바 없으나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니 현재로서는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지금까지 광지바위를 왜 광지바위라고 하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또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 지 모르면서 그냥 광지바위라고 불려왔다. 해석이 어렵고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은 그만치 광지바위에 는 우리 역사의 오랜 비밀이 숨어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리바위 지명은 연변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에서는 광지바위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광주리바위 또는 광지바위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며느리바위 부처바위 감투바 위와 같이 지명이 변종 되여 나타나고 있으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유사하다. 중국 강서성의 불교 명산 려산(옛 지명은 匡廬山) 지명과 동일한 경상남도 창원 광려산(匡廬山) 지명, 충청남도 예산군 후 사리에 자리 잡은 광주리봉 지명도 불교지명으로 추정된다. 절이 있어 뒷절 또는 후사라 하여 후사리 지명이 생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광주리봉도 역시 불교문화와 연관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허나 지명풀이에서 유사한 설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밖에 서울 구로구 광주리물 혹은 광지廣池 라는 지 명도 마찬가지이다. 글 허성운
215    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댓글:  조회:4041  추천:6  2015-07-19
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 (1)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 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 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 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 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중소학교 도덕교양자 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 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 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 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 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 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 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 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 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 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 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 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 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 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 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 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 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되여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바위의 의미를 지 니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옛 지명 月奈岳인 월악산은 기암괴석의 박물관으로서 사실 바위를 빼놓 고 월출산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 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 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 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 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 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 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 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 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 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 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 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 라남도 화순군 누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 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 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 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허성운  
214    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댓글:  조회:6694  추천:9  2015-07-19
사학자 허성운선생의 요구에 의해 그의 연변지명과 방언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저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원래 연변의 산 강 그리고 마을 지명들은 순수한 고유어로 다양하게 불리여 왔다. 그런데 지명이 지 금처럼3∼4자의 한자어로 고착 되여 버린 것은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많은 이름 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천불지산 동쪽 삼합진 북쪽에 자리 잡은 증봉산을 덴노후지산 (天皇富士山)이 라고 외곡 되여 불리여 왔고 천불지산 서남쪽에 위치한 큰 쓰레산 작은 쓰레산 지명 도 원래 함경도 방언 쓰레 (쓰레 라는 말은 빗물 따위에 쓸리어 나가 경사가 진 비탈을 가리키는 말이 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난 시기 연변의 많은 잡지 신문들에서는 큰 쓰레산을 한자어 표 기에 따라 그 지명을 공사령 孔石列 혹은 쿵스레 昆石列라고 잘못 적어 왔었다. 천불지산 지명도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지산을 천 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천불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풀과 나무가 불살라진 자리에 밭을 일구는 땅을 뜻한다. 일찍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고유 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 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룡정현지명지 해석에 따르면 하늘 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고 적고 있다. 천불지산이 국가급자연보호구로 선정되고 룡정시 천불지산송이문화관광절을 펼쳐가 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국내외 각종 신문 방송 언론매체들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 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해석하고 있다.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이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 있다 . 이 런 현실 속에서 원래의 천불붙이 지명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지여 가고 있다. 이는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땅을 개척해온 선조들의 후손으로서는 너무나도 부끄 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은 사회문화적인 존재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백여 년 세월을 훨씬 뛰여 넘어 뼈아픈 역사가 묻혀있는 연변. 그리고 그 땅 우에 아로새겨져 있는 지명들을 이제 하나 둘 우리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해가야 한다. 천불지산 지명도 그 동안 연변 각 현시 지명지 (地名志)와 연변대학 교수들의 논문과 자료에서 적지 않게 언급 되여 왔다. 하지만 이런 책과 논문들 에서는 모두가 한자의 뜻에만 몰입하여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되풀이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어 아 직도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조사 연구는 미흡한 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천불지산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계기로 이름이 지어진 것인지 기타 지역 지명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당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 날 와서 이 에 대한 조사사업은 시급히 이루어지어야 마땅한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밭을 하다게畑라 적고 불(火)와 밭(田)로 이루어 졌는데 화전은 오래전부터 동북 아세 아 지역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나타고 있다. 조선반도에서는 화전의 시초를 북방변경에서 생활하 고 있던 재가승들이(在家僧) 산간벽지에 은거하여 화전경작을 한데서 찾는다는 주장이 있다. 함경도 에는 심산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만든 화전(火田)을 이용하는 이른바 화전농법이 다른 어느 도에 비해서도 가장 많은 편이다. 1928년의 화전민을 지역분포별로 볼 때 북부지방이 80.1만 중부지 방이37.5만 남부지방이 6.3만이며 그 가운데 북부지방은 전체의 70% 이상을 점유하여 화전경작의 집중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화전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부 터 학정에 시달린 백성은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임꺽정 같은 소설이 되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화전을 부대기 부대밭을 일군다고 말한다. 천불지산 북 쪽에 자리 잡은 지신 성남의 불 붙이 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살던 노인들은 부대밭을 불대기(부덱이 火德)밭으로 풀이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체로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가을에 벌채해 두었다가 이듬해 해빙기에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 사람 들은 꽉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파종의 경우 주로 꽉지로 대충 골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묻는데 이것을 포지라고 말하며 이런 골 지명을 포지골 이라고 불려왔다. 그때 이런 밭에서 모기가 극성부리기에 쑥대를 길게 묶어 허리좌우에 뻗쳐 차고 두 끝에 불을 태워 모기를 피하군 하였다. 민 초들 가운데 북빼기집(농막의 일종)을 짓고 여름 내내 부대밭을 일구며 농사짓는 떠돌이 날농군들이 많았다. 화전 밭은 숙전과는 달리 밑거름으로 투입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 타서 남긴 재와 낙엽이 쌓 여 생긴 부식토로 지력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몇 년간은 경작하다가 떨어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여 휴경한다. 이렇게 몇 년간 밭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일구는 이런 밭을 묵밭을일군 다고 말한다. 화전농업은 이런 단계가 반복되다가 차츰 소와 쟁기를 사용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늘게 되고 따라서 계곡 경사면이거나 산기슭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된다. 이렇 게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최초의 함경도 이주민들을 화전민 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몇 백 년 전 두만강 이북 천불지산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가득 찬 망망한 임 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하늘에서 원인 모를 불똥이 떨어 지여 불이 났으며 이렇게 불에 탄 나무들이 있는 곳은 화전을 일구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였다 거기에 사회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산지를 도피 은거하는 백성들이 많아지면서 화전은 근세사회에 들어오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비탈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함경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천불지산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의식주 해결과 겨울이면 폭설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천불지산은 그래도 개척민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그리고 그 땅에서 수확한 보리 메밀과 감자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 나 다름없었다. 산세가 부드럽고 조망이 좋은 천불지산 정상에 서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 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뭇 봉우리들이 마치 두만강 물결처럼 굽이굽이 정상에 흘러와 뉘연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천불지산 정상은 북쪽의 오봉산과 서남쪽의 큰쓰레산과 달리 산세가 급하지 않고 부드 럽다. 산정상의 뉘연한 능선 사이로 여러 갈래 냇물들이 숲 속으로 흘러 내려가는 곳에 크고 작은 산 길들이 뻗어나 있다. 그 중에서 서래골로 뻗은 경우가 가장 많고 서남쪽 능선을 타고 중마래 하마래 로 내려갈 수도 있다. 북으로는 노름바위와 노루메기 작수동 범동 등 마을 거쳐 달라자로 가는 길이 있고 서북으로는 동쪽골로 원동 덕수로 이어지는 갈들이 뻗어있다. 천불지산 화전민의 취락은 음달진 북면이나 서면의 산허리보다 햇볕이 잘 드는 남면이나 동면의 지 역이 더 발달 되여 있다. 여전에는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올라가면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동 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자연부락을 단위로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 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였으며 20세기30~40연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 들은 산비탈에 귀틀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 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적도 있었다 해방 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 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 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 마을 흔적은 서서히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와 닿지 않은 서래골 마래골 계곡 구석구석을 온종일 누비며 헤쳐보아도 이젠 그 옛 날 화전민이 일구었던 화전 밭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노송아래 파란 이끼가 두 텁게 내려앉은 바위위에 앉아 땀을 들이노라면 희미한 꿈결처럼 저 멀리 구불구불 길게 뻗어간 오솔 길로 지게를 지고 함지를 이고 하얀 옷을 입은 화전민들이 당금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지산은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임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 들어와 화전 밭을 일구면서 천불지산의 역사가 시작 되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왔 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 했던 역사는 아니러니 하게도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것을 꽁꽁 숨기 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 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사람들의 기 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연변 역사는 어느 한 위인이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서있는 연변 땅 곳곳에서 땀 흘 리며 살아왔던 평범한 백성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가로 세로 촘촘히 엮이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우 에 연변의 문화가 소박하게 이름 없는 꽃으로 피여 나온 것이다 . 보잘 것 없고 초라하고 하찮다고 생 각한 민초들이 천불지산에 흘린 땀의 기록은 진실성을 갖고 있기에 진실한 역사로 기록 되어 남아야 한다. 오늘날 와서 우리가 적어도 천불붙이란 이 진실한 지명에 의지하고 또 적어도 이 진실한 지명 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지켜 나간다면 선조들의 원초적인 삶의 흔적이 아로 새겨진 이 지명은 많은 연변 사람들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 똑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씨 앗처럼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 싹으로 움터 자라 날것이다. 천불지산의 역사는 화전민이 개척해온 피눈물의 역사이며 천불지산 지명은 함경도 이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아로새겨 놓은 이름이다. 연변지명에서 이처럼 이주민들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묻어나는 지명이 과연 또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처럼 너무나도 쉽게 잃고 있거나 이미 까마 아득히 잃어버린 소중한 지명유산은 얼마나 될까 ... 지금 천불지산은 똑 마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 절을 흘러 보내고 담담해진 연로한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앉아 유유 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한테 다가가서 그의 진 실한 이름을 불러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허성운  
213    방학을 어떻게 보낼가? 댓글:  조회:5978  추천:5  2015-06-30
방학을 어떻게 보낼가? 주청룡   방학이란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수업을 일정 기간 정지하고 쉬는것을 말한다. 여름방학 은 더위로 학업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때에 수업을 정지하고 쉬는 기간을 말하며 겨울방학은 추위 로 학업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때에 학업을 정지하고 쉬는 기간을 말한다.   방학을 그 의의로 말하면 한 학기동안 교실이란 작은 공간에서 긴장하게 진행되던 학습에서 해탈되 여 머리를 쉬우면서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자기의 흥취에 맞는 여러가지 활동도 하 고 사회와 접촉하면서 학교에서 배울수 없었던 지식을 학습하며 자신의 창의력을 키우는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중소학교 학생들은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해야 하는가? 아래에 몇가지로 말해보자.     문체활동   음악, 무용, 미술, 체육 등 자기의 흥취에 맞는 여러가지 문체활동에 참가하여 기량을 닦아 자기의 특 장을 발휘할수 있도록하여야 한다고 본다.     독서   과외독서를 많이 하고 그 책속에서 여러가지 지식을 배우고 독후감을 쓰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로 문 장을 짓는것으로써 자기의 습작능력을 제고 할수 있다고 본다.     자연에 대한 관찰   반급을 단위로 하여 등산, 야영 같은 활동을 하여 대 자연을 관찰하고 그 소감같은 것을 글로 정리한 다면 자연에 대한 지식을 넓힐수 있다고 본다.     사회조사   5~6명씩 한 개 소조를 무어 시장조사, 농촌조사, 공장에 대한 조사 등 사회조사를 하고 조사보고를 작 성하여 피 조사단위의 심사를 거치고 학교에 회보하는 활동을 한다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질수 있 고 창의능력을 제고할수 있어 앞으로 사회에 진출함에 있어서 밑거름으로 될수 있다고 본다.     유람   홍색관광을 조직하여 당지의 혁명력사유적지를 돌아본다면 오늘의 행복이 어떻게 왔는가하는 것 을 느낄수 있으며 경제적 조건이 구비된다면 바다구경, 명승고적, 대도시를 유람하면서 세상과 접촉 한다면 학생들의 시야를 넓힐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람을 하고 기행문을 쓴다면 영원한 추억으 로 될수 있고 습작능력도 제고 할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주변을 보면 학생들이 방학을 하게 될때에 사처에 “가정교사”광고들이 나붙고 심 지어 담임선생님을 찾아 자기에게 학생을 보내달라고 하고 학생을 얼마 보내주면 그만큼 수수료 를 주겠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교사”를 꾸리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수 없지만 거기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는 너무나 큰 부담으로 되고 학습효률도 높지 못하다. 학생들이 본래 한 학기동안 교실이란 작은 공 간에서 긴장하게 학습하였는데 또 그보다 더 작은 공간에 넣고 같은 내용을 곱씹으니 학생들이 흥취 를 잃고 학습능률이 매우 낮다.  하여 하여 교육부는 일전 “중소학교와 재직 중소학교 교원 유상보충수업을 엄금할데 대한 규정”을 출 범하고 다음과 같은 6가지 “엄금조치”를 내놓았다. 1. 중소학교에서 유상보충수업을 조직해 학생들의 참가를 요구하는것을 엄금한다. 2. 중소학교와 교외양성훈련기구가 련합으로 유상보충수업을 진행하는것을 엄금한다. 3. 중소학교들에서 교외양성훈련기구에 교육교수시설 또는 학생정보를 제공하는것을 엄금한다. 4. 재직 중소학교 교원들이 교내 유상보충수업을 조직, 추천, 유도하는것을 엄금한다. 5. 재직 중소학교 교원들이 교외양성훈련 또는 기타 교원, 학부모, 학부모위원회 등 조직의 유상보충 수업에 참가하는것을 엄금한다. 6. 재직 중소학교 교원들이 교외양성훈련기구와 타인에게 학생자원을 소개하거나 관련 정보를 제공 하는것을 엄금한다. 교육부에서도 이런 규정을 출범한것만큼 학부모들도 다른 애들이 간다고 하여 덩달아 따라 할것이 아니라 자기집 애의 특장을 봐서 그 특장에 맞는 활동에 참가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방학이면 학생들로 하여금 방학숙제를 참답게 완성하는 기초에서 독서도 하고 자기의 흥 취에 맞는 여러가지 문체활동에 참가한다든가 사회조사, 야영, 홍색관광, 유람 등을 조직하여 사회와 의 접촉을 많이 하여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총적으 로 학생들로 하여금 유쾌하고 즐거운 방학이 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212    0도 수자이자 수이다 댓글:  조회:7393  추천:11  2015-06-09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6-04 10:49:04 ] 클릭: [ 126] 0도 수자이자 수이다 주청룡   수학에서 0을 기준으로 정수(正数)와 부수(负数)로 나눈다. 즉 0보다 큰 수는 정수이고 0보다 작은 수는 부수이다. 아래의 수축(数轴)에서 0을 기준으로 왼쪽은 0보다 작기에 부수로 표시하고 오른쪽은 0보다 크기에 정수로 표시한다.   수축   이 수축을 세워놓으면 온도계도의 수자표시와 마찬가지로 된다. 온도를 측정할 때 0℃를 기준으로 령상, 령하로 구분한다. 때문에 수학에서 0은 하나의 수이자 수자이며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지금 수를 읽을 때 수의 중간에 0이 들어 있으면 0을 빼버리고 읽지 않는다. 례를 들면 2008년 하면 “이천공공팔년”이라고 하지 않고 “이천팔년”이라고 읽는다. 이럴쯤 해도 의사전달에는 큰 페단이 없다. 상대방이 2008년으로 들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산을 놓거나 계산기를 사용할 때에 한 사람이 수자를 부르고 다른 사람이 주산을 놓거나 또는 계산기를 칠 때가 있는데 빨리 계산을 하기 위해 대방이 수자를 읽기 바쁘게 주산을 놓거나 계산기를 치는 사람은 손을 놀린다. 이럴때 만약 부르는 사람이 수의 중간의 0을 빼놓고 읽으면 계산과정이 흐트러진다. 례를 들면 [1958 + 2008]을 부르는 사람이 [일천구백오십팔] 더하기 [이천공공팔]이라고 부르면 주산을 놓는 사람이 2를 천의 자리에 놓고 8을 단의 자리에 놓고 계산하기에 아무런 문제 없다. 그러나  [2008]에서 0을 빼 놓고 [이천팔]이라고 부르면 주산을 놓는 사람은 8을 단위자리에 놓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백의 자리에 놓게 되여 2800으로 되고 계산기를 치는 사람은 수자를 입력하여 놓고 보면 2008이 되는 것이 아니라 28로 된다. 0은 값이 없지만 수에서 수자라는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값이 없다하여 읽을 때에 자리도 밝히지 않는다면 우에서 말한것처럼 [2008]이 [2800]혹은 [28]로 된다. 그러기 때문에 0도 수자라는 것을 홀시하지 말고 수를 읽을 때에 0이 수의 가운에 있으면 그 0을 꼭 [공]이라고 읽어야 한다. 지금 수를 읽는것도 늙은이들과 젊은이들이 읽는 것이 다르다. 례를 들어 [2008]을 늙은이들은 [이천공공팔] 혹은 [이천공팔]이라고 읽고 젊은이들은 [2천팔]이라고 읽는다. 지금 소학교에서부터 그렇게 배우고 있으니 말이다. 수의 중간에 있는 0을 어느때부터 빼놓고 읽지 않았는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50, 60년대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수의 중간의 0을 모두 [공]이라고 읽었다. 그리하여 주산을 놓을 때에 아무런 페단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수의 중간에 있는 0을 빼고 읽기에 우에서 제기한 페단들이 있다. 0도 하나의 수자이자 수인데 왜 읽을 때 빼버리겠는가? 우에서와 같은 페단을 극복하자면 필자는 예전과 같이 수의 중간에 있는 0을 빼놓지 말고 꼭 [공]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1    책향기 넘치는 사회를 가꾸자 댓글:  조회:6654  추천:1  2015-05-31
책향기 넘치는 사회를 가꾸자     주청룡     제9회로 되는 금년 연변의 독서절은 4월 23일부터 시작해 10월 23일에 막을 내리게 되며 금년 독서절의 활동 주제는 “책향기 넘치는 연변을 건설하고 함께 중국꿈을 이루자”이다.     책의 향기넘치게 하려면 사람마다 모두 책을 읽는 고조를 잃으켜야 하며 중국꿈 즉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자면 사람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책이 선생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는 무엇을 하다가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책을 찾아 보고 거기에서 부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고 거기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사업을 하자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을 가지고는 매우 부족 하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하여 사업에서 막힘이 없는것이 아니고 만사대길도 아니다. 사업에서 큰 성과를 올린 사람들을 보면 소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 배운 지식이 그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가운데의1/10 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흔이 “그 친구, 어릴때부터 책을 많이 보더니 끝내 큰 일을 해냈구나.”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는 책을 읽는것이 바로 성공의 길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만약 책을 읽지 않고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물처럼 유전적인 본능행 위밖에 할수 없다.     꼭 대학교를 다녀야 큰일을 해 낼수 있고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면 큰 일을 해 낼수 없는것이 아니다. 그 어떤 원인으로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더라도 꾸준히 책을 읽고 학습하여 지식을 장악한다면 대학교를 다닌 사람과 같이 큰 일을 해 낼수 있다고 본다. 모택동 동지는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였지만 꾸준히 책을 읽으며 학습하였기에 수 많은 저작들을 써 낼수 있었고 또 그 리론을 중국혁명의 구체 실천에 결부시켜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룩하였으며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 하였고 그이는 중국인민의 위대한 수령이 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서의 의의를 잘 리해하고 책이야말로 훌륭한 선생이고 지식의 바다라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당 년 평균 독서량이 일본이 40권, 로시아 55권, 유태인이 68권인데 반해 우리 나라는 6.97권으로 알려졌다. 이는 독서량이 많은 유태인들에 비해 1/10정도 좀 넘는 정도밖에 안된다는것을 설명한다. 지금 도서관을 다니면서 보면 독자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린이들로부터 로인들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독서를 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참으로 돋보이고 있다. 열심히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책을 읽어 많은 지식을 탐구하려는것일것이다.      그런데 좀 유감스러운것은 지금 도시에서 보면 간판은 "사회구역활동실" 혹은 "로인활동실" 이라고 써 놓았지만 실질은 그런곳을 지날때엔 마작을 젓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오고 안에 들어 가 보면 책 한권 신문 한장 보이지 않고 담배연기가 뽀얗게 집안 공기를 흐리우고 있는데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열독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가?      그리고 또 지금 도시사람들, 더욱이 령도간부들은 10여 만원 지어는 몇10만원을 들여 자택을 장식하고 가정용 전기제품들을 뜨르르 하게 갖추어 놓고 살고 있는데 유감스러운것은 집에 들어가 보면 서재는 물론 책장마저 보이지 않는다. 책장이 없다는것은 그만큼 책을 보지 않는다는것을 설명한다. 책을 보지 않고 어떻게 령도사업을 하는가 싶다.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부단이 충전을 시키지 않으면 사용 할수 없다는것은 어린이들도 다 아는 일이다. 우리의 두뇌도 마찬가지다.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에 독서하여 새로운 지식으로 우리의 두뇌를 충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두뇌는 속이 텅비여 사회발전에 따라 가지 못 하고 새로운 사업을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책을 영원한 선생으로 삼고 책이란 이 지식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염치면서 지식을 탐구하여 책향기 그윽한 사회를 건설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것을 바란다. 해란강닷컴 2015년 5월 30일
210    모아산 그리고 식수조림 댓글:  조회:10762  추천:0  2015-04-14
모아산 그리고 식수조림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4-13 21:00:19 ] 클릭: [ ]   지금은 북방의 식수철이다. 3월 12일이 우리나라 식수절이지만 땅이 넓고 기후차이가 크기에 각 지구의 식수일이 다르다. 길림성은 매년 4월 12일-18일, 연변은 매년 4월 10일-16일을 식수절로 정하고있다. 식수철이면 나무를 심어야 한다. 이런 연구결과를 보면 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도시에서 한그루의 나무는 자동차 한대가 16km달릴 때 배출하는 오염물을 흡수한다. 도시록화면적이 1% 높아지면 따라서 여름의 기온이 0.1℃가 내려간다고 한다. 농경지의 방풍림은 풍속을 30~40% 감소시키고 상대습도를 5~10%로 높일수 있으며 토양함수량을 10~20% 증가할수 있다. 1헥타르의 림지를 맨땅에 비교하면 3000립방테터의 물을 더 저장할수 있고 1만무 삼림의 저수능력은 100만립방메터의 저수지와 같다고 한다... 식수조림을 하지 않으면 수토류실이 엄중해지면서 생태환경이 엄중히 파괴된다. 서북지구의 사막화로 일어나는 황사현상의 피해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교훈과 식수조림의 절박성을 느끼게 하고 있지 않는가? 《식수조림의 공은 당대에 있고 덕은 천추에 있다》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연길 내지 연변의 명소로 손색이 없는 모아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감회가 깊다. 1962년 6월 23일 주은래총리께서 연변을 시찰하실 때 모아산이 록화가 잘 되지않은것을 보고 주덕해동지에게 《우리는 자손후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삼림을 잘 보호하지 못하면 자손 후대들이 우리를 욕합니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후 모아산은 철따라 해마다 변모해 오늘날의 아름다운 국가삼림공원으로 가꾸어졌다. 주총리나 주덕해 등 로일대지도자들도, 당년에 나무를 심은 많은 사람들도 오늘의 경상을 보지도, 누리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그이들한테서부터 모아산국가삼림공원을 물려받아 그 은혜를 이렇게 입고있지 않는가. 2013년까지 진행한 전국 제8차 삼림자원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삼림피복률은 21.6%로서 세계에서 115번째 순위에 있는데 비교해 연변은 삼림피복률이 83.3%로서 상대적으로 삼림피복률이 높다. 이는 연변의 생태환경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락관,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4월부터 동북3성과 내몽골지역의 국유중점림구에서 상업성 채벌을 전면 중지하면서 연변의 10대 림업국도 상업성 채벌 68년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이는 지난 70년간 해마다 식수를 한다지만 삼림채벌량을 보충하지 못하여 삼림피복률이 엄중히 감소되였다는것을 설명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일전에 소집된 연변주 조림록화사업회의서 연변은 금년에 4만 2000헥타르의 면적에 숲을 만들고 14만 7000무 되는 농경환림면적에 식수를 하며 농촌마을과 도로, 하천 주변에 37만주의 나무를 심고 101개 의무식수기지의 399헥타르 면적에 327만주의 나무를 심는다고 했다. 이렇게 나무그루수까지 밝혀진 올해의 식수임무포치가 반드시 휼륭히 완수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렇게 식수조림하여 생태환경을 한층 완벽화하고 연변을 명실상부한 생태복지로 만들어 후대들에게 복을 마련해 주어야 할것이다. /주청룡
209    전통 설문화를 살렸으면 댓글:  조회:6790  추천:6  2015-02-18
전통 설문화를 살렸으면 주청룡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음력설이면 가족, 친척들끼리 단란하게 모여서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면서 즐겁게 보내는 풍속이 있다. 음력설을 어떻게 의의있고 즐겁게 쇠는가 하는것은 매 가정마다 정황에 따라 다를수 있다. 음력설 련휴일을 리용하여 가정유람을 할수도 있고 평소 바쁜 일상때문에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수도 있고…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친인을 더 그린다고 로인들은 자기의 자손들을 몹씨 그리워한다. 명절때문에 이런 마음이 더 간절할것이다. 전통명절인 음력설 련휴일에는 한집 식구나 친척들이 집안의 어른님을 모시고 한자리에 모여 앉아 그리운 정을 나누면서 즐겁게 설을 쇠는것도 로인들에 대한 효도이고 우리의 전통풍속이라고 하겠다. 새로 수정한 《중화인민공화국 로인권익보장법》 제 18조에도 《별거하여 있는 가정성원은 경상적으로 로인들을 찾아보거나 문안을 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보충하였는데 이것은 로인들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 것임이 분명하다. 예로부터 설날아침이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오래오래 앉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공손히 절을 올렸다. 어른들은 또 아이들에게 덕담을 하면서 간단한 생활소비, 혹은 학용품을 사라고 약간의 세배 돈을 쥐여 주었다. 어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조선민족의 전통풍속이 돋보이는 모습이다. 지금도 많은 집들에서는 이 풍속을 지켜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 집들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세배 돈을 주는 것이 몇 백 원, 몇 천원 지어는 그 이상으로 되고 있는데 어린이들은 또 설이 지나면 학교에 나가서 “나는 이번 설에 세배 돈을 얼마 받았다. 너는 얼마를 받았니?” 하며 서로 비기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풍속과 어긋난다고 본다. 세배 돈은 그 아이의 정상적인 소비수준에 맞게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아이들의 정상적인 소비수준과 관리능력을 떠나 몇 백 원, 몇 천원 지어는 이상의 돈을 주는것으로써 체면을 세우려 하는데 이러한것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풍속의미를 떠날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세배를 하여 많은 돈을 가지려는 사상을 키워 주게 되며 어떤 아이들을 그 돈으로 음식점, 전자유희청 등 곳을 다니면서 마구 써 버리는 기형적 소비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요즘 사회구역에서도 동네 학생들을 조직하여 방학기간의 활동으로 설을 맞이하여 영예군인, 오보호, 장애인, 늙은 량주 혹은 독거로인들을 방문하고 학생들이 도와 줄수 있는 일을 하고 세배를 올리는 등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미량풍속을 살리고 설의 의미를 보다 풍부히 하는데 보탬이 되는 바람직한 일이다. 옛날 설이면 집단적으로 윳놀이, 상모춤, 널뛰기, 썰매타기 등 민속놀이와 오락성적인 체육활동을 많이 벌리였는데 지금은 이런것들이 전부 살아지고 친척끼리 모여 앉아 트럼프치기나 마작판을 벌리는 집들도 있으며 그것도 돈이 몇백원씩 나들고 있는데 이런 도박성적인 놀음은 금지하고 집단적인 민속놀이는 하지 못하더라도 집안끼리 앉아서 노래와 춤, 윳놀이 등 활동을 벌린다듣가 스케트장, 스키장 등 곳에 가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가족사진 같은것을 찍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는것도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설문화를 살리면서 음력설을 즐겁게 보낼수 있는 좋은 모습들이 아니겠는가?    2015년 2월 17일 연변일보
208    폭죽소리 없는 설 기대 댓글:  조회:6440  추천:11  2015-02-15
설이나 정월대보름날을 비롯한 명절이나 경사스러운 날이면 아직도 폭죽을 터치우는 사람들이 있다.물론 명절분위기를 돋굴수도 있지만 화재나 인원상해사건을 유발하고 타인한테 소리오염피해를 주기에 이를 제지하는 규정이 출범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2010년 8월 16일 흑룡강성 이춘시의 화리실업유한회사에서 폭죽폭발사고가 발생하여 37명이 사망하고 152명이 상하였으며 직접적 경제손실이 6818만원에 달했다. 공안부가 2011년 설기간의 폭죽사고를 통계한데 의하며 전국적으로 1만 1800여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여 40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상하였다. 2011년 음력설날 0시 심양 황조만흠국제청사(皇朝万鑫国际大厦)의 45층과 38층으로 된 두채의 5성급 호텔이 폭죽으로 인한 화재로 전부 타고 벽체만 남았다.뼈아픈 교훈이 풀술하다. “중화인민공화국꽃불폭죽안전관리조례” 제 30조에는 “문물보호단위, 기차역, 부두, 비행장 등 교통중추와 쉽게 연소하고 폭발할수 있는 물건을 생산, 저장하는 단위, 변전소, 의료기구, 유치원, 중소학교, 경로원, 삼림, 초원 등 중점방화구에서는 포죽을 터뜨리는것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길림성의 “폭죽꽃불안전관리규정” 제6장에는 “폭죽을 터뜨릴 때에 어떠한 단위와 개인의 정상적인 생산, 생활, 학습질서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국경절, 춘절기간과 특수정황외에는 도시와 진에서는22시와 이튿날 6시까지는 폭죽을 터뜨리지 못한다.”,“실내와 인원이 밀집된 장소, 공공장소, 령도기관, 요해부문, 중점환경, 문물보호구, 유람구, 및 쉽게 연소하고 폭발하는 위험품을 생산, 저장하는 공장과 창고부근에서 폭죽을 터뜨리는것를 엄금한다.”,“혼례, 장례, 개업식, 준공의식을 할 때에는 낡은 풍속습관을 타파하는 원칙에 따라 적게 혹은 터뜨리지 않는다.폭죽을 고층건물에서 아래로 던지지 못하며 행인, 차량, 주택 등에 던지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함께하는 세상에서 타인과 도시 환경오염, 그리고 생명재산안전을 고려하여 올해 설엔 폭죽을 터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변일보 2015년 2월 13일자  
207    횡단보도에서 누가 우선인가? 댓글:  조회:7036  추천:0  2015-02-04
[주청룡]횡단보도에서 누가 우선인가?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4 15:37:42 ] 클릭: [ ]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보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지나기가 참말로 어렵다. 횡단보도를 지나려고 행인들이 무리를 지어 서있는데도 자동차운전사들은 양보할념을 하지 않고 고속으로 차를 몰고간다. 얼마전에 있은 일이다. 연길공원앞의 횡단보도에서 행인들이 길을 건너고있었다. 이때 공원다리쪽으로부터 한 승용차가 질풍같이 달려오더니 한 행인의 옷섶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행인이 너무 놀라 뒤로 넘어지는것을 같이가던 행인이 부추겨 일으켰다. 그런데 승용차는 아무런 일도 없는듯 계속 달려갔다. 이때 그 뒤를 따라가던 필자가 격분하여 그 차를 쫓아가면서 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후시경으로 봤던지 차를 세웠다. 《행인을 다치게 해놓고 그렇게 달아나면 되는가?》고 사고현장까지 끌고왔다. 다행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손을 좀 다쳐 아프다고 했다. 이때 그 운전사는 자기가 경적을 울렸는데도 계속 길복판으로 걸어오더라고 했고 다친 행인은 교통규칙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자기의 부주의로 일이 생겼다고 사과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필자가 《무슨 시비를 이렇게 하는가? 자동차가 교통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지날 때 보행자가 우선이라는 규칙을 모르는가? 행인이 교통규칙을 위반한것이 아니라 당신이 교통규칙을 위반하였구만.》고 질책했다. 그러자 그는 교통규칙을 아는 사람의 앞에서 어쩔수 없다고 느꼈는지 그 행인에게 사과를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 제47조에는 《자동차가 횡단보도를 통과할 때 감속 운행해야 한다.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고있을 때는 정지한후 행인이 먼저 지나도록 양보한다.》고 썼다. 그런데 일부 운전사들은 행인들이 이미 도로중간까지 들어섰는데도 경적을 빵빵 울린다. 행인들은 어찌할바를 몰라 갈팡질팡이다. 만일 행인이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차창밖으로 내다보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가 행인이 《당신 뭐라오? 누가 우선으로 지나가야 하는가?》라고 맞대고 말하면 계면쩍게 웃으며 속도를 내서 줄행랑을 놓는다. 내가 알기로는 선진국들에서는 운전사들이 될수 있는한 경적을 울리지 않으며 횡단보도에 행인만 있으면 차를 멈춰세우고 행인더러 지나가라고 손짓하면서 행인에게 양보한다. 행인들이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도 있다. 신호등을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차와 속도를 비기면서 길을 건너간다.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앞질러 길을 건너고 차와 차사이를 요리조리 빠지면서 가로 찔러가는데 위험하고 문명치 못한 행위라 하겠다. 행인들은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좌우를 살펴보고 차가 지나간다음 횡단보도에 들어섰으면 좋겠다.마찬가지로 운전사들도 행인이 우선이라는 의식을 항상 갖고 교통규칙을 자각적으로 준수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6    보건품도 몸에 맞게 써야 댓글:  조회:7152  추천:0  2015-02-04
  [주청룡]보건품도 몸에 맞게 써야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4 11:06:38 ] 클릭: [ ] 얼마전 길림신문에서 《집 판 돈에 경작지를 임대해준 돈까지 12만원을 몽땅 보건품에 홀라당》이란 기사를 보았다. 화룡시 투도진에서 농사를 짓던 한 늙은 량주가 집을 판 돈과 경작지임대비까지 12만원을 가지고 연길에 있는 아들집에서 살면서 보건품을 팔러다니는 장사군의 감언리설에 얼리워 12만원을 모두 보건품장사군에게 밀어 넣었다는 기사였다. 12만원어치의 보건식품을 자시고 무병장수 하였으면 뭐라 말할수 없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년후에 로친은 저세상으로 가고 령감은 자기의 손에 돈 한푼도 없게 되자 할수 없이 한국에서 일하고있는 아들며느리를 따라 한국으로 돈벌러 갔다는것이다. 지금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이러루한 일이 한두집 일이 아니다. 연길시의 모 사회구역에서 있은 이야기이다. 아들 며느리가 모두 한국에 나가 고된 일을 하면서 돈벌이를 하였다. 그런데 70고령의 로모가 혼자 집에 계시는것이 안스러웠고 어머니의 건강이 근심스러워 아들이 먼저 귀국하였다. 아들은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어머니에게 다 맡겼다. 아들의 효성은 찬양할것이고 사회의 본보기로 될만한것이다 그런데 1년만에 아들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게 되였다. 어머니가 응당 아들이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치료비료 내놓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치료비로 내놓을 돈이 없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맡긴 수만원 돈이 모두 보건품에 들어간것이다. 그러니 안해가 한국에서 뼈빠지게 번 돈을 남편의 치료비에 쓸수밖에 없었고 물론 고부간의 관계도 좋을리 없다. 어렵게 살던 과거에는 보건품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수준이 많이 제고되였고 특히 퇴직금이 있는 로인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있다. 로인들은 자연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욕망에서 보건품에 집착한다. 보건품장사군들도 바로 이런 로인들을 상대하여 감언리설로 보건품에 대해 확대 광고한다. 그런데 광고에서 선전한것처럼 병 치료되고 건강에도 두드러진 효과가 있는것이 아니다.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총국에 따르면 보건식품광고의 90% 이상이 허위적인 불법광고이다. 이중 보건식품이 치료역할을 한다고 선전한 광고가 39%를 점했다.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총국은 제남기업해통생물기술유한회사 등 32개 기업법인에 대해 행정경고를 주었다. 이로부터 보아 광고나 장사군들의 감언리설에 유혹되지 말고 의사의 진단과 조언을 들어보고 자기의 몸에 맞는 보건품을 사는것이 건강에도 좋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것이라고 권고하기싶다.
205    분해불가비닐제품 사용금지에 우리부터 댓글:  조회:6652  추천:0  2015-02-04
[주청룡]분해불가비닐제품 사용금지에 우리부터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04 10:03:34 ] 클릭: [ ] 올해 1월 1일부터 길림성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길림성 1회용 분해불가비닐제품 생산판매, 제공을 중지할데 관한 규정》(아래 규정이라 략칭)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연변에서도 1월 1일부터 분해불가비닐제품 생산판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감독을 하고있다. 그런데 시장에 가 보니 아직도 분해불가비닐제품을 사용하는자가 적지 않게 있다. 《규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 12월 31일 국무원판공청에서 《2008년 6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두께 0.025mm 안되는 1회용 비닐주머니 생산판매와 사용을 금지한다.》고 통지를 발표했다. 분해불가비닐제품을 사용하면 환경을 오염할뿐만 아니라 신체건강에도 해롭다는 의식을 높여주는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유력한 조치는 분해비닐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소비자들의 수요를 만족시키는것이다. 다음 분해불가비닐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막아야 한다. 시장에서 이런 제품을 팔지 않으면 시민들도 자연 사용할수 없다. 분해불가비닐주머니를 시장에서 팔 경우 판매자에게 경고, 몰수, 벌금 등 행정수단을 취할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생산지점을 사출하여 제품을 몰수하고 다시 생산하지 못하도록 공장을 차압하는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공상행정관리부분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있지만 계속 분해불가비닐제품이 팔리고있다는것은 아직도 빈 구석이 있음을 설명하므로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분해불가비닐주머니제품을 배격하는 시민의식을 높이는것도 중요하다. 연길시 하남가두 담배공장사회구역에서는 《규정》에 발맞춰 《록색쇼핑을 선도하고 분해불가비닐제품 사용을 금지하자》란 주제로 선전특강을 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백색오염의 위해성을 인식하게 했다. 하여 주민들은 장보러 갈때에는 가방을 들고다닌다.
204    주민위원회 선거, 이렇게 해도 되나? 댓글:  조회:6913  추천:0  2015-02-04
[주청룡]주민위원회 선거, 이렇게 해도 되나?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12-12 12:32:29 ] 클릭: [ ] 지금 연변의 각 사회구역에서 사회구역 주민위원회 기바꿈사업을 하고있다. 룡정시의 모 사회구역에서도 기바꿈선거를 하고있는데 선거과정과 선거결과에 대하여 많은 불만과 의견을 제기하고있다. 12월 8일 룡정의 모 사회구역 로인협회 5명위원이 필자를 찾아 이런 선거도 있는가 하며 사회구역주민위원회 선거과정과 결과에 대하여 하소연을 하였다. 로인협회 5명 전체 위원이 함께 찾아온것을 봐서 대표성을 띠였다고 봐야 할것이다. 선거과정을 보면 원래 당 사회구역 주임이였던 모모가 년령제한으로 이번기에 자리를 내놓게 되고 그가 이번기 선거위원회 주임을 맡아 하였다. 후선인가운데 그가 사회구역 주임으로 있을 때 그와 의견이 맞지 않고 그에게 자주 의견을 제기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주임은 이 사람을 선거에서 떨어뜨리기 위하여 뒤에서 갖은 소동작을 하였다. 다시말하면 그 사람에 대한 보복이였다. 선거권을 가진 대표들을 찾아다니면서 선거할 때 누구를 선거하고 누구를 선거하지 말라는것이다. 선거하라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고 선거하지 말라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에게 의견이 많던 그 사람이였다. 당 사회구역의 로인협회에서는 그의 소동작을 간파하고 상급 부문인 사회구역사업 지도기관을 찾아 반영했다. 그런데 지도기관 사업인원은 당 사회구역 군중들을 찾아 알아보지 않고 소동작을 한 당사자를 찾아 물었다. 당사자는 당연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다. 지도기관 사업인원의 엉터리없는 조사이고 또 그는 소동작을 묵과한것으로 돼 버렸다. 선거하는 날, 그는 또 자기의 의사와 틀리게 투표할 수명 대표들더러 아예 선거장에 오지 말라 했다는것이다. 그 몇명 대표들은 무책임하게 투표장에 오지 않았으며 더욱 한심한것은 선거구역이 아닌 자기의 친신을 불러 투표시키려 했는데 군중들에게 발각되여 쫓기워나가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선거결과가 뻔했다. 모든것이 그의 뜻대로 되였다. 하여 로인협회 위원들이 너무도 격분하여 필자를 찾아와 하소연한것이다. 필자가 당 사회구역의 일부 주민들로부터 알아본 결과도 상기와 같았다. 이들의 하소연을 듣고 기바꿈선거에서의 허점들을 짚어보았다. 주민대표는 사회구역 선민들의 선거에 의해 산생되며 선민의 감독을 받으며 선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사회구역주민들의 옹호를 받는 사람이 선거위원회 주임으로 된다면 그런 보복행위의 소동작이 없었을것이다. 만약 사회구역 사업지도기관의 사업인원이 군중들의 반영에 중시를 돌리고 참답게 조사를 하고 그러한 부정행위를 묵과하지 말고 조치를 대였더라면 군중들의 불만을 자아내는 결과가 없었을것이다. 만약 주민대표들이 어느 한 사람에 의해 피동적으로 놀것이 아니라 주민대표의 직책을 참답게 리행하였다면 다수 주민들의 불만을 자아내는 결과가 없었을것이다. 주민대표로서 대표의 직책을 참답게 리행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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