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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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동남아려행기[6] 댓글:  조회:17357  추천:0  2013-06-10
동남아려행기[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6-02 14:17:35 ] 클릭: [ ] 이튿날 우리 려행단은 타이 대황궁으로 갔다. 대황궁으로 가는 길에 가이드는 오른쪽의 한 건물을 가리키며 저것이 타이주재 중국대사관이라고 하였다. 차창으로 내다보니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가 바람에 나붓기고있었다. 몇개 나라를 다니며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본국에서 오성붉은기를 볼 때와 달리 이국땅에서 오성붉은기를 보면 하냥 마음이 설레이고 조국에 대한 경모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타이 대황궁 타이 대황궁은 18세기 이후부터 국왕이 머물렀던 공식관저이다. 건축은 1782년 라마 1세때 수도를 톤부리(吞武里)에서 방코크로 옮기면서 시작되였으며 여러번의 증축공사를 통해 계속 왕궁이 확장되였다. 방코크왕조 라마 1세부터 8세까지 이 왕궁에 있었으며 1946년 라마 8세가 이곳에서 피살된후 라마 9세,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아둔야뎃은 이곳에 머물지 않고 대황궁 동쪽에 새로 지은 치뜨랄다궁(集拉达宫)에 거주하고있다. 궁전은 방코크 중심의 차오프라야강(湄南河) 동쪽에 있으며 높이 5메터, 길이 1,900메터에 달하는 백색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 면적은 218,400평방메터이다. 대황궁은 주요하게 몇개의 궁전과 하나의 사원(玉佛寺)로 구성되였으며 타이의 여러 왕궁가운데서 가장 완미하게 보존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민족특색이 있는 왕궁이다. 대황궁전경 지금 대황궁은 대관식(加冕典礼), 궁전경축 등 의식과 활동외에 평시에는 대외에 개방하여 타이의 명승고적으로 유람지로 되고있다. 대황궁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것이 큰 잔디밭이다. 잔디밭 주위에는 보리수 등 이름 모를 열대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대황궁 안에는 네채의 웅위로운 건물이 있는데 차크리궁(节基宫, chakri Maha Prasad), 두씻 마하 쁘라쌋(都实宫 Dusit Maha Prasad)、아마린 비니차이전(阿玛林宫Amarin Winitchai Hall), 에메랄드사원(玉佛寺 Wat Phra Kaeo)이다. 대황궁의 두번째 문에 들어서면 한채의 웅위롭고 류달리 아름다운 3층건물이 있는데 국왕이 취임의식을 하는 곳으로서 대황궁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본당인 차크리궁이다. 이 궁전은 라마(拉玛)5세왕이 1876년에 시작하여 건축한것인데 그 특점은 기본 구조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예술이고 우의 3개의 뾰족한 지붕은 타이식의 지붕이다. 차크리궁 차크리궁의 서쪽에는 두씻 마하 쁘라쌋이 있는데 이것은 타이의 전통건축이다. 두씻 마하 쁘라쌋에는 라마1세왕 시대에 만든 어좌(御座)와 어상(御床)이 있으며 라마왕조의 제 1류의 예술품으로 전시되여 있다. 지금 두씻 마하 쁘라쌋은 주요하게 국왕, 왕후, 태후 등 왕실인물들이 상례(丧礼)를 지내는 곳으로 되고 있다. 차크리궁의 동쪽에는 아마린 비니차이전이 있으며 3개의 주요 건축물로 구성되였는데 이곳에서는 왕을 배알하는 아마린알견청, 대관식(일부 군주 국가에서, 임금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왕관을 써서 왕위에 올랐음을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박사청, 군주들의 관방주택으로 사용되던 카라마디만전이 있었는데 대외에 개방하지 않았다. 대황궁안에는 또 한채의 서양식 건축물이 있는데 우룽비만궁(武隆碧曼宫)이라고 하며 라마 5세왕이 1909년에 태자에게 지어준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구가원수 및 국빈과 황실귀족들의 영빈관으로 쓰이는데 일반적으 로대외에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에메랄드사원은 대황궁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타이에서 가장 이름 있는 불사이며 타이의 3대 국보중의 하나이다. 에메랄드 사원은 1784년에 건설된 타이 왕궁의 일부분이며 면적은 대황궁의 1/4을 차지한다. 사원은 타이 왕족이 옥불상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며 사원내에는 대웅보전(大雄宝殿), 선왕전(先王殿), 불골전(佛骨殿), 장경각(藏经阁), 종루(钟楼)와 금탑(金塔)이 있다.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황금체디탑. 대웅보전은 에메랄드사원의 주체건물이며 대전안에는 옥불상이 모셔져 있다. 매년 5월 농경절이면 국왕이 여기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풍수를 기원한다. 그리고 타이에서 내각을 선거할 때면 새로운 정부의 전체 내각성원들이 여기에 와서 국왕에게 선서를 하고 취임을 한다. 불상사원 벽에 있는 반인반조의 부조물. 그리고 절기가 바뀌울 때마다 국왕이 친히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하는 의미에서 불상의 옷을 갈아입힌다. 뜨거운 계절에는 붉은 보석을 박은 금의, 우기에는 람보석을 박은 금의, 서늘한 계절에는 순금으로 된 금의를 갈아 입힌다고 한다. 낀날리라 불리우는 신. 대황궁을 참관할때에는 복장차림새가 정결하고 정중하여야 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해야 하는데 대웅보전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신, 모자 선글라스를 모두 벗고 들어가야 한다. 하여 가이드가 전날에 벌써 주의사항을 다 주었다. 녀성들이 입는 치마도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야 한다고 규정했다. 만약 짧은 치마를 입었다면 대문어구에 치마대용으로 파는 천을 사서 허리 아래에 둘러야 한다. 사원내의 네 주위에는 길이가 약 1킬로메터되는 벽화 장랑이 있는데 178폭의 인도고전문학 《라마야나》사시를 제재로 한 정밀하고 아름다운 련환화가 그려져 있으며 사원내의 몇개의 대형도자기병풍에는 중국 《3국연의》이야기를 그린 채색그림들이 있었다. 대황궁을 다 참관하고 나오면서 우리 려행단은 에메랄드사원을 배경으로 대황궁참관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대황궁참관기념 대황궁앞의 타원형의 왕가전광장(王家田广场)은 면적이 12만평방메터인데 원래 궁정뜨락으로서 어용광장(御用广场)라고 불리웠다. 주위에는 타마린드 나무가 있으며 왕실과 정부의 주요한 행사가 여기에서 진행된다. 지금은 매년 5월 춘경절과 타이신년이면 국왕이 여기에서 경축의식을 사회를 한다고 한다. 주위에는 주요 대학, 정부사무실, 타이국가박물관, 국가극원, 국가예술관, 방코크수호신사(守护神寺)가 있다. [다음 계속]
162    동남아려행(5) 댓글:  조회:18148  추천:0  2013-05-27
동남아려행기[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27 10:45:26 ] 클릭: [ ]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 다음으로 우리는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으로 갔다. 베니스인휴가촌은 감자도 로감금광대로(凼仔岛 路氹金光大道)의 중심지대에 잡고있으며 미국의 도박업 거두인 샌즈그룹(金沙集团)에서 200억딸라를 투자하여 건설한 부지면적이 29만 9천평방메터, 총건축면적이 95만 1,000평방메터, 39층에 높이 144.8메터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아세아에서 가장 큰 종합적인 카지노설비를 갖춘 오락성이다. 베니스인휴가촌(威尼斯人度假村) 이 휴가촌은 이딸리아의 항구도시 베니스의 풍격을 따른것으로서 호텔주위의 베니스특색이 짙은 무지개다리, 작은 운하, 돌판길 등은 16세기 베니스문화부흥식의 풍격이 다분히 비쳐있어 베니스인의 랑만적인 생활과 그 풍채를 만끽할수 있었다. 베니스인휴가촌은 건축물이 특색이 있을뿐만아니라 호텔내에는 세계 일류의 카지노, 전시회, 쇼핑, 체육, 종합예술, 레저 등 종합시설을 갖고있다. 그중 사용공간이 12만평방메터되는 전시회쎈터, 3,000칸의 호화객방, 1만5천 좌석을 용납할수 있는 금광종합예술관, 2,00개의 좌석을 가진 연회청, 8,000평방메터의 수료쎈터(水疗中心), 사계절명품점, 멋진 태양곡마단 등도 갖고있다. 집이 어찌나 큰지 복도의 너비만 하여도 보통 15메터가량 되고 넓은 데는 30메터 되는데도 있었다. 베니스인오락장은 면적이 5만여 평방메터되며 850개의 자동설비를 갖춘 도박상, 4,100대의 슬로머신(角子机, 老虎机: 동전을 넣고 조작하여 그림이나 숫자의 정해진 짝을 맞추면 일정 액수의 돈이 나오는 도박기기) 도박상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박장이다. 우리 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은 호기심에 끌려 도박판에 들어앉았는데 처음에는 따는듯싶더니 결국에는 몇천원씩 잃고 나왔다. 베니스인휴가촌 도박장 베니스휴가촌 3층에 있는 대운하쑈핑쎈터는 오문에서 가장 큰 쑈핑쎈터로서 면적이 9만 3천 500여 평방메터이고 세갈래의 운하가 있는데 한밤중에도 푸른하늘 흰구름아래에서 배사공의 미묘한 노래소리에 도취되여 무지개다리 밑을 지나며 뽀트놀이를 하면서 운하 량안의 베니스 풍격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수 있고 여유롭게 거닐면서 쑈핑을 할수 있었다. 베니스인휴가촌 소운하 나는 하늘을 올리다 보며 너무도 신기하여 안내원에게 밤중인데 어떻게 저런 푸른 하늘, 흰구름이 있을수 있는가고 물으니 그것은 가짜인데 전반 쑈핑쎈터는 대형의 스크린으로 덮혀 있으며 컴퓨터조작으로 대형스크린에서 비추는 영상이라고 설명했다. 아침에 해 뜨는 영상, 저녁에 해지는 영상도 다 나타난다고 하였다. 해설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영상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고 진짜 푸른 하늘 흰구름 같았다. 쑈핑쎈터에는 여러가지 디지털전자제품, 진주보석, 금은장식품, 례물, 복장 등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제품들이 많이 진렬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모두 여러가지 명품, 기념품들을 어떤것은 돈을 아끼지 않고 사고 어떤것은 손에서 놓기 아쉬워하면서도 지나친 소비로 하여 사지는 못하고 있었다. 화페는 향항화페가 통용되였다. 전시회쎈터에는 여러가지 각국의 명품들이 다 있었는데 가장 인인기를 끄는 전시장은 전시면적이 가장 큰 자동차전시장이였다. 거기에는 승용차로부터 트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가지작색 자동차가 다 전시되여 있었다. 호화객방(70평방메터, 침실·응접실·주방·화장실 등 설비가 구비)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가격표를 보니 값은 하루에 향항화페로 6,325원이였다. 오문관광은 이것으로 끝내고 감자도에 있는 려경만호텔(丽景湾酒店)에 주숙을 정하였다. 향향에서부터 오문에 이르기까지 거리를 지나면서 나무의 수형이 거대하고 가지로부터 공중뿌리(공기뿌리, 기근)가 가득 땅에 내리박은 나무를 보면서 저것이 바로 어릴적에 영화 《홍색랑자군》에서 악패지주 남패천이 랑자군 당대표 홍상청을 나무에 묶어놓고 불을 질러 살해하던 그런 용나무가 아닌가 하여 안내원들과 물어 보았더니 그들도 나무이름을 몰라 참 유감스러웠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든 호텔마당에 수형이 거대한 두그루의 그런 나무가 있어 호텔관리원과 물어보았더니 그것이 용나무가 옳다는것이였다. 한가지 나무이름을 안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지방에서 볼수 없었던 수형이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아열대지방에 와서 직접 보았다는 그 자체가 나에게서는 이번 유람길에서의 또 하나의 성적이라고 느껴지면서 이튿날 아침에 흐뭇한 마음으로 렌즈에 담았다. 용나무(榕树) 이튿날 오전은 오문에서의 자유활동이고 오후에 전날 도착하였던 감자도 림시부두에서 려객선을 타고 향항에 돌아가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로 가게 되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오문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향항에 되돌아가서 비행기를 타는가?》고 인솔자에게 물었더니 오문비행장은 작아서 비행기를 타기에 불편하다는것이였다. 과연 오문국제비행장이 부두의 길 건너편 있어 비행장을 보았더닌 정말 작았다. 오후에 우리는 려객선을 타고 향항국제비행장으로 갔다. 향항국제공항은 대서산(大屿山) 이북에 바다를 메워 만든 첵랍콕(赤鱲角)섬에 위치하고 있어서 첵랍콕 국제공항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구룡반도에 카이탁공항이 있었는데 주변의 고층건물이 많고 또 산과 바다가 잇닿아있어 착륙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공항이였다. 하여 첵랍콕섬에 새로 공항을 건설하여 1998년 7월 6일에 개항한 후 카이탁공항은 지금 페쇄된 상태라고 한다. 향항 국제공항은 5성급공항으로서 면적이 1,255만 평방메터, 시간당 54회 리착륙이 가능한 3,800×60m 크기의 활주로가 2개가 있으며 매일 800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공항이라고 한다. 배가 3시에 향항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지만 방코크로 가는 비행기는 저녁 9시에 있어 6시간은 공항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6시간 한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게 너무나 무료하고 지루하여 공항안을 한바퀴 돌아보았더니 비행기 탑승구만 하여도 100개가 넘었다. 공항안은 하나의 자그마한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의복, 가죽제품, 전자제품, 금은장식품, 식품, 서점 등 가게들이 줄느런히 들어앉았으며 식당도 있었다. 그리고 공항벽이 모두 유리로 되여 밖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것을 다 볼수 있었다. 비행기가 2,3분에 한대씩 뜨고 있었는데  내가 보아온 공항중 제일 큰 공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9시에 방코크로 가는 비행기가 리륙하였는데 비행기에서 향항의 야경을 구경하는것 역시 가관이였다. 향항의 고층건물은 모두 네온등 불빛으로 장식되여 건물의 륜곽을 다 그려볼수 있었으며 비행기가 더 높이 떴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니 향항은 산간도시라 산마다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네온등 불빛이 산을 물들여 백화만발한 봄을 방불케하였다. 이러한 향항의 야경에 도취된 내 마음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비행기는 2시간 반을 날아 11시 반경에 방코크(曼谷)시의 상공에 들어섰다. 방코크시의 야경 또 특이하였는데 도시의 큰 길은 어찌나 곧게 뻗고 층집들이 어찌나 질서정연하게 들어앉았는지 마치 일망무제한 벌판의 원전화와도 같았다. 시내 가로등 불빛은 가로 세로 곧게 뻗은 논두렁에 비유할수 있었고 줄줄이 들어앉은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금방 모살이를 한 벼포기와 흡사하였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서니 려행사의 관광뻐스가 우리를 기다리고있었고 키가 자그마한 총각가이드가 아주 순통한 한어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가이드에게 어찌하여 한어를 그렇게 잘 하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화인후예라고 하였다. 뻐스가 호텔로 들어가면서 가이드는 타이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타이의 공식명칭은 타이왕국, 면적은 513,120 평방킬로메터, 인구는 2011년 통계로 6,672만명, 수도는 방코크, 정치체제는 의회 량원제이고, 군주립헌제이며 국가원수는 국왕(현재 푸미폰 아둔야뎃), 정부수반으로는 총리(현재 잉락 친나왓), 민족구성으로는 35개 민족으로서 타이족이 75%, 화인(华人)14%, 말레이인 2.3%이며 부유계층의 사람들 가운데서 화인이 6,70%라고 하였다. 공용어로는 타이어, 종교는 90%이상이 불교신자로서 불교왕국, 기후는 열대기후로서 년평균기온이 27도라고 한다. 시간대는 UTC+7로서 중국(UTC+8)보다 한시간 늦어 안내원이 우리더러 시계바늘을 한시간 뒤로 맞추어 놓으라고 하였다. 방코크시내로 들어서면서 볼라니 대부분의 집마당에는 불단(佛坛)이 있었다. 불교왕국이라는것이 확연하였으며 우리가 든 호텔 마당에도 불단이 있었다. 불단(佛坛)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61    동남아려행기[4] 댓글:  조회:21698  추천:0  2013-05-20
동남아려행기(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20 11:34:26 ] 클릭: [ ] 오늘의 로정은 오문으로 가는것이였다. 아침 8시에 향항에서 려객선을 타고 오문으로 향하였는데 배가 가는 량켠에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았다. 배는 9시 40분에 오문 감자도(凼仔岛)림시부두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려 입경수속을 하고 해관을 나서니 벌써 오문려행사의 관광뻐스가 해관마당에서 기다리고있었고 남성가이드가 우리를 뜨겁게 맞이하여 뻐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우리가 뻐스에 올라 오문반도로 들어가는 동안 가이드는 오문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오문은 주강삼각주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오문반도(澳门半岛), 감자도(凼仔岛), 로환도(路环岛) 등 섬으로 되여 있다. 로환도는 감자도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로감(路凼)공로로 련결되여 있고 감자도(凼仔岛)는 우의대고(友谊大桥), 오감대교(奥凼大桥), 서만대교(西湾大桥) 로 오문반도와 련결되여 있다. 전반 오문은 북쪽으로는 주해시와 압용하(鸭涌河)를 사이두고 서쪽으로는 주해시와 좁은 해협을 사이두고 있다. 총면적은 29.2평방킬로메터, 인구는 약 55.8만명, 인구밀도가 매 평방킬로메터당 1만 9천여명으로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크며 화인(华人)이 절대다수이고 언어는 광동어, 포도아어, 영어를 같이 쓴다고 한다. 오문은 원래 광동성 향산현(지금의 중산시)에 속하였는데 16세기 중엽부터 뽀르뚜갈인이 점차적으로 점령하면서 400여년 통치하게 되였다. 1999년 12월 20일, 중국정부는 오문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면서 오문특별행정구를 성립하였다. 우리는 서만대교를 건너 오문반도로 들어갔는데 서만대교는 오문반도와 감자도를 이어놓는 세번째 다리로 북으로는 오문반도 융화문(融和门), 남으로는 감자도부두와 련결되였으며 대교의 총길이는 2200메터이고 상하층으로 되였으며 상층은 쌍방향 6차도이고 아래층은 쌍방향 4차도이며 8급 태풍에서도 정상적으로 통차할수 있다고 한다. 서만대교를 건너자 해협 서쪽으로 고층건물들이 보였는데 안내원은 저곳이 바로 주해시라고 하였다. 해협이 좁아 주해시의 고층건물들이 똑똑히 보였다. 마조각 마조각(妈祖阁) 서만대교를 지나 우리는 마조각(妈祖阁)에 갔다. 마조각은 오문의 저명한 명승고적으로서 오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처음 명나라 홍치원년(1488년)에 세웠는데 1874년, 1875년에 두번이나 화재로 훼손되였다. 주민들이 돈을 모아 1875년에 재건을 시작해서 1877년에 락성한 이 건물은 500여 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주요 건축물들로는 석전(石殿), 대전(大殿), 홍인전(弘仁殿), 관음각(观音阁) 등 네채의 전당(殿堂)이 있다. 묘안에는 주로 도교녀신인 성모(妈祖)를 모시고있는데 매년 춘절과 음력 3월 23일 성모의 생일에 여기에 와서 향을 피우고 소망을 빌며 섣달그믐날에는 자정을 전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복을 빈다고 한다. 성모(妈祖) 세인트 폴 성당 유적 (大三巴牌坊) 다음으로는 세인트 폴 성당 유적지로 갔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大三巴牌坊)은 대삼파우가(大三巴右街)의 작은 산언덕에 자리잡고있는데 서방문명이 중국에 들어온 력사의 견증물이며 오문의 가장 대표적인 명승고적이다. 1580년에 준공된 세인트 폴 대성당은 화재로 1602년에 다시 수건하여 35년만인 1637년에 준공되였는데 1835년에 또 불이나 훼멸되여 지금의 앞벽만 남아 세인트 폴 성당 유적으로 되였다. 이 성당은 제수이트 교단의 이탈리아인에 의해 설계되여 구라파문예부흥시기와 동방의 건축풍격이 서로 결합된것으로서 동서방예술의 조화를 체현하여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그리스도 교회로 알려지면서 동방의 바띠까노로 불리웠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은 높이 27메터, 너비 23.5메터로서 이딸리아문예부흥시기의 바로크(barroco)식 건축물이며 모두 5층으로 되였는데 밑의 1,2층은 같은 장방형으로 되여있고 3~5층은 금자탑모양으로 되였으며 맨 꼭대기에는 《十》자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 5층 중앙에는 성령(圣灵)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되였고 4층 중앙에는 예수, 3층 중앙에는 성모조각상이 있으며 2층에는 세개의 창문이 있고 예수를 모시는 네명의 교도들의 조각상이 네칸에 각각 있으며 1층은 세개의 출입문이 있다. 세인트 폴 성당 유적 (大三巴牌坊) 금련화광장(金莲花广场) 오후의 첫 코스는 금련화광장이였다. 금련화광장은 오문반도 동남부 신항구부근의 필사달대로(毕仕达大马路)와 우의대로(友谊大马路)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다.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문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것을 경축하여 중앙정부에서 금련화조각상을 증정하여 광장에 앉혔는데 높이 6메터, 꽃의 최대직경이 3.6메터, 무게 6.5톤이다. 꽃을 받혀주는 적갈색의 화강암 기둥에는 황금색의《성세련화(盛世莲花)》란 편액이 있다. 조각상의 주체부분은 화경, 화판, 화예로 조성되였으며 청동으로 주조하고 표면을 황금색갈로 도금하였으며 그야말로 한창 피여나는 련꽃을 방불케 하였다. 련화는 오문특별행정구의 구화이며 련꽃이 천천히 피여나는 모습과 《성세련화》편액은 오문이 영원히 번영 창성함을 상징하고있다. 금련화광장 금련화광장에는 원래 국기게양대가 없었다고 한다. 2000년 오문특별행정구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성립 51주년을 기념할 때 향항의 금자형광장의 게양방식을 본받아 광장에 두개의 게양대를 세워 2000년 10월 1일 처음 국기와 구기게양식을 하였으며 이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일과 오문회귀기념일이면 정부측의 관례적인 경축활동으로 되였다고 한다. 게양의식은 매일 아침 8시에 중화인민공화국국가의 주악속에서 거행하며 저녁 6시에 강기의식을 한다. 포경오락장(葡京娱乐场) 포경오락장은 오문에서 가장 규모화한 도박오락장이며 오문반도의 최 남단 남만호부근의 포경로(葡京路)에 위치해 있다. 이 오락장은 오문관광오락유한회사에서 경영하는데 안에는 다종다양한 오락방식이 있으며 입장권이 없이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지만 18세 이하의 미성년과 21세의 당지의 사람들은 들어갈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오문에서는 도박을 행운박채(幸运博彩)라고 하고 도박장을 《오락장》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대형호텔에 설치하고 설비가 호화롭고 경비가 엄밀하고 관리가 현대적이다. 포경호텔 포경오락장은 포경호텔안에 설치되였는데 안에는 네칸의 오락장, 한칸의 카지노 슬롯 머신(角子机, 老虎机, 동전을 넣고 조작하여 그림이나 숫자의 정해진 짝을 맞추면 일정 액수의 돈이 나오는 도박기)가 있다. 포경호텔부근에는 여러 곳에 카지노 슬롯 머신이 있다. 오문의 도박업은 오문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당지 사람들이 이 도박장을 드나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람객들은 오문에 와서 도박을 한번 노는것을 하나의 쾌락으로 느끼고있다. 우리팀에서도 훈춘과 심양에서 온 신혼부부들이 호기심에 끌려 놀았는데 처음에는 5, 6백원을 따는것 같더니 마지막에는 결국 잃고 나왔는데 얼마를 잃은것은 말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오감대교를 건너 감자도로 향하였다. 오감대교는 1974년 10월에 준공하였는데 총 길이가 2.5킬로메터로서 오문반도와 감자도를 이어놓는 제일 첫 대교라고 한다. 오감대교를 건너면서 동쪽으로 좀 멀리 기다란 큰 다리가 보이였는데 안내원은 그 다리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우의대교라고 하였다. 우의란 중뽀우의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우의대교는 오문반도 수당각(水塘角)과 감자도 북안부두(北安码头)를 이어놓은 두번째로 건설된 가장 긴 다리로서 길이 4,414메터, 너비 19메터, 왕복 4차도로이다. 신호천지룡등(新濠天地龙腾) 감자도에 건너와서 처음으로 오문의 초급오락기함 《신호천지》(超级娱乐旗舰《新濠天地》)로 갔다 《신호천지》는 오문 감자도(凼仔岛)의 로감련관공로(路凼连贯公路)와 로감금강대도(路凼金光大道)구역에 있다. 《신호천지》오락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구형천막극장이 있는데 건축성본이 4천만딸라라고 한다. 여기에 들어가면 룡등(龙腾)표현이 있는데 삼차원립체영사관에서 방영하는 5D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화질의 단편영화인데 동시에 16대의 광속 30000ANS루멘의 영사기와 2만9천개의 극원 발광 2극관 조명을 집합한 고화질의 디지털영화로서 신비한 시청효과를 준다. 《룡등》은 진짜와 똑 같이 립체형상이 반구형천막에서 표현되여 관중들을 우주와 지구의 열대우림, 화산, 빙하, 심해를 실북나들다싶이 하면서 룡주를 호송하는 이야기를 엮은 영화인데 관중들로 하여금 바다세계에 들어선 감을 준다 《룡등》이야기는 처음에 룡주(龙珠)의 강대한 마술력으로 옥룡(玉龙)이 한 마리의 겸허한 작은 잉어로 변신하여 네 룡왕을 조각상으로부터 탈태시킨다. 네 룡왕은 룡주의 힘을 빌어 각자가 재간을 피워 관중을 이끌고 네 룡왕의 나라를 돌아다닌다. 마지막으로 작은 잉어가 힘이 강대한 옥룡(玉龙)으로 변신하여 네 룡왕을 진심으로 심복시킨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항상 다른 정체성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 준다. 룡등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후일 계속)
160    동남아려행기[3] 댓글:  조회:4821  추천:0  2013-05-13
동남아려행기[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5-13 10:43:40 ] 클릭: [ ] 해양렬차(海洋列車) 그 다음 순서는 산에 올라가서 구경하는것인데 북문에서 산으로 올라가려면 공중삭도거나 해양렬차를 타야 했다. 우리팀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공중삭도를 탔고 어떤 사람들은 해양렬차를 탔다. 나는 공중삭도는 태산이나 북경향산공원에서 타 보았기에 그것은 타지 않기로 하고 해양렬차라는 이름에 매우 호기심이 끌렸다. 말의 뜻대로 하면 바다밑이거나 바다우에서 달리는 렬차여야 하겠는데 산으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해양렬차를 타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해양렬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고 보니 해양렬차는 턴넬로 하여 산꼭대기를 올라갔는데 쌍방향으로 운행하는 강삭철도(鋼索鐵道)로서 운행길이가 1300메터이며 세개의 바곤이 련결되였다. 한번에 200명씩 탑승하는데 운행시간은 3분밖에 안 걸렸다. 이 차를 타면 차바곤 천장에 형광판(荧光屏)으로 해양세계를 감상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거대한 문어에게 공격당하거나 해저화산폭발 등 사람을 놀래우는 자극을 받을수 있었다. 산우에 올라가니 여러 가지 기동놀이시설들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팀원들은 시간상의 제한으로 하여 다 탈수는 없고 몇가지 큰것만 탔다. 거기에서 가장 짜릿하게 자극하는 것은 자유락하(极速之旅)와 롤러코스터(过山车)일것이다. 자유락하 자유락하는 먼저 천천히 62메터 (약 20층높이) 높이를 오른 다음 공중에서 몇초 정지하여 있다가 시속 65킬로메터의 속도로 급하강한다. 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는 청룡렬차 또는 레루가 8자모양처럼생겼다고 하여 88렬차라고 하는데 한어로는 过山车라고 한다. 이 차의 레루의 길이는 842메터로서 차가 동력으로 몇십메터의 높이까지 올라간 다음에 내려올 때에는 동력의 힘이 없이 위치에네르기가 운동에네르리기로 변하는 원리에 의하여 내려오는데 사람의 머리가 때로는 하늘로, 때로는 아래로, 때로는 옆으로 향하면서 자유락하의 속도로 운행는데 머리가 아래로 향하였를 때 떨어지지 않거나 머리가 옆으로 향하였을 때 뿌리워 나가지 않는 것은 구심력과 원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이 두가지 놀이기구는 어린이, 늙은이, 녀성들, 심장병, 고혈압환자들은 리용하기 곤난하다. 롤러코스터는 내가 20여년전의 젊었을 때에 상해에서 타봤기에 그것은 타지 안기로 하고 마천탑을 타보기로 하였다. 마천탑(摩天塔) 마천탑(摩天塔)은 전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활동식 관광탑으로서 높이가 72메터인데 천천히 오르고 내리여 어지간한 사람은 다 탈수 있었다. 거기에 오르니 심수만, 천수만 그리고 향향의 크고 작은 섬들을 볼수 있어 한결 가관이였다. 흔들배 흔들배는 15메터 높이에서 쪼각달모양으로 120도로 흔들거리면서 그네를 뛰는 식으로 운동하여 어지간한 사람은 다 탈수 있었다. 해도관 해도관(海涛馆) 은 거대한 늪으로 되여 있는데 길이 152메터, 너비 122메터, 깊이 2.7메터로서 여러가지 부동한 인공해안으로 만들었으며 부동한 해양동물들의 생활에 적합하게 하였으며 바다표범, 바다사자, 돌고래, 사다새(塘鹅), 펜귄새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인공파도는 전동파도기가 조정하여 파도기복이 1메터에 달한다. 여기에서는 바다사자와 돌고래의 표현이 유람객들의 인기를 끌었다. 바다사자는 조련사가 지휘하는대로 여려가지 동작들을 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물을 뿜어 바다가에 서있는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때면 조련사가 바다자에게 구명대를 가져오라 명하고 조련사가 구명대를 입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나오면 바다사자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시킨다. 관람객들이 잘한다고 박수를 치면 자기도 앞발로 박수를 치는것이 참 멋졌다. 그리고 돌고래의 표현도 아주 멋지였다. 먹이를 뿌려주면 물에 떨어지기 전에 물 우에 솟아올라 먹이를 받아먹고 때로는 수면에서 물을 헤가르며 헤염치는것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쾌속정이 물을 가르며 달리는것 같았고 때로는 물우로 솟아올라 날아옌다. 해도관(海涛馆) 집고촌(集古村) 집고촌은 해양공원의 남출구의 동쪽에 있으며 절반 박물관식의 력사생활전람공간이다. 그것을 구경하려면 에스켈러이터(电动扶梯)를 타고 내려 가는데 이 에스켈러이터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야외 에스켈레이터라고 한다. 촌내에는 주요하게 중국고대의 각종궁실 주택이 있으며 하(夏), 상(商), 주(周)로부터 진(秦)왕조의 진렬관, 한대고촌(汉代古村), 위(魏), 진(晋), 남북조석굴(南北朝石窟), 송(宋)、 료(辽)、 금(金), 원(元)의 질렬관,명나라 정화의 보물선박(明朝郑和宝船), 청나라의 궁전과 원림이 있다. 공중삭도(空中索道) 집고촌을 다 구경하고 다시 에스켈러이터를 타고 산우에 올라와서 또다시 우리의 뻐스가 기다리는 북쪽출구로 가야 했다. 올라올 때에 해양렬차를 탔기에 내려갈 때에는 나는 공중삭도를 타고 내려왔다. 삭도의 전장 길이가 1.4킬로메터였는데 삭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심수만, 천수만과 공원아래의 전경을 내려다 볼수 있어 또 다른 기분이였다. 공중삭도 해양공원을 다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은 자못 흐뭇하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해양렬차도 타보고 세계 10대 수족관의 하나인 해양기관과 그 안에서 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관상돔(观赏圆顶), 바다사자와 돌고래의 멋진 표현 등 아세아에서 가장 크다는 해양공원을 구경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흐뭇하지 않았겠는가? 이튿날은 향항에서의 자유활동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향항의 크다하는 백화점들을 다 다니면서 많은 물건들을 샀지만 우리는 쇼핑에 대하여 그리 흥취가 없어 몇개의 백화점을 돌아보고 몇곳의 서점을 돌아보면서 향항, 오문지도와 향항, 오문관광을 소개한 책을 샀다. 서점을 돌아보니 내지의 서점과 다른 점들이라면 내지에서 보지 못했던 정치인들의 인물전기가 많았는데 어떤 책들은 공산당 령수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쓴 책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법륜공에 관계되는 그림과 사진을 올린 선전화를 전시하여 놓고 법륜공을 선전하고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보아 향항이 조국에 귀속되였다하지만 한나라 두가지 제도로 하여 정치분위기는 대륙과 좀 다른 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안내원이 해설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모두 중국인이였기에 향항이 영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온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향항의 거리를 보면 넓은 거리가 얼마 안보이고 대부분 거리는 자동차 두대가 겨우 마주 달릴수 있을정도로 좁았으며 인행도도 매우 좁았다. 향항은 아마 땅이 귀하여 집도 빽빽하게 구새통처럼 올리 짓고 거리도 그렇게 좁게 낸것 같았다. 그리고 해빛이 쨍쨍 내리 쬐이는 32도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거리에서 양산을 들고 다니는 녀성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길 량옆은 모두 높다란 층집들이 콩크리트 숲을 이루어 해를 보려면 머리를 하늘로 곧추 쳐들고 봐야 했으므로 양산이 전혀 필요없었던것이다. 저 멀리 구룡반도가 바라보인다. 오후에는 해변가에 나가서 구룡반도를 바라보고 려객선과 화물선을 구경하기도 하고 낚시군들이 고기잡이를 하는것도 보았다. 글/사진 주청룡특약기자
159    백성들의 옹호를 받는 부패척결사업 댓글:  조회:8474  추천:13  2013-05-11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2) 청해   백성들의 옹호를 받는 부패척결사업   안녕하십니까? 오늘을 “백성들의 옹호를 받는 부패척결사업”이란 내용으로 말씁드리려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것이 부패분자입니다. 그들은 인민이 준 권력을 리용하여 나라의 재물을 탕진하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 사치를 부립니다. 진희동, 진량우, 박희래, 뢰창성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처단될 때마다. 백성들은 열렬히 환호하였습니다. 습근평총서기는 제18기 중앙규률검사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당풍렴정건설과 반부패투쟁은 장기적이고 복잡하고 간거한 임무다,”라고 하면서 “상시적이고 장기적으로 진행하여야 하며 결심을 확고히 하고 부패를 반드시 척결하며 탐오를 반드시 숙청하고 부패현상이 자생하는 토양을 계속 제거하여 실제적인 성적과 효과로 민중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하면서 “상부에 정책이 있으면 하부에서 대책을 대는 부처(部处)와 지방 리기주의 및 보호주의로 중앙의 명령이 제대로 리행되지 않는 현상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러 신문에서 촌장선거경쟁에서 표수를 얻기 위하여 몇만원, 십몇만원 지어 몇십만원 을 썼다는 기사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년전에 인민일보에서 연변의 한 정부관원이 주와 성의 령도와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사기협작 녀인의 꼬임수에 걸려 승진의 꿈을 안고 180만원의 거금을 그녀에게 처넣었다는 기사도 보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돈이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또 무엇때문에 이렇게 많는 거금을 팔면서 권력을 사려하겠습니까? 말치 않아도 번연한 일이지요. 만약 우리당이 부패척결사업을 틀어쥐지 않는다면 이런 분자들은 그 틈을 타서 집체의 재물, 나라의 재물을 자기의 수중에 넣으려고 할것입니다. 습근평총서기는 “호랑이”와 “파리”를 같이 잡는 원칙을 유지하며 어떤 사람이든 직위가 높든 낮든 막론하고 당의 규률과 국법을 어기면 엄숙히 추구하고 엄격히 처리하고 누구에게 미치든 끝까지 사출하며 절대로 사정을 두지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앙의 부패 척결 운동이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표대회가 페막된 후 벌써 사천성위 부서기 리춘성(李春城), 중앙 편역국 국장 리준경(衣俊卿), 등 고위급 간부들로부터 산서성 태원시 한 촌민위원회 주임에 이르기까지 그가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규률을 위반한 자는 모두 재빨리 조사, 처리하였습니다. 건국초기에 중국공산당은 류청산, 장자선의 탐오부패사건을 처리하였습니다. 류청산은 청진지위서기이고 장자선은 청진지위 부서기이며 고위급 간부로서 전쟁년대에 혁혁한 공로있는 공신들입니다. 그렇지만 평화시기에 부패분자들의 생활방식의 침습에 이겨내지 못하고 점차 부화타락하여 인민의 죄인으로 되였습니다. 이는 공화국이 창건되여 처음으로 나타난 부패의 싹이였습니다. 이러한 싹을 제때에 매버리지 않는다면 전당에 만연될수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그들의 전쟁년대의 공로를 생각하여 측은한 마음이면서도 “그들이 지위가 높고 공로가 크고 영향이 크기에 결심을 내리고 처단한다. 그들을 처단함으로서 20명, 200명, 2000명, 2만명의 간부를 구할수 있다.”고 하면서 무거운 심정으로 사형을 비준하였습니다. 건국초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이로부터 시작하여 “3반”(새중국 건립초기 당정군 기관, 인민단체, 국영기업과 사업단위 내부에 진행한 반탐오, 반랑비, 반관료주의 운동. 1951년 12월에 시작하여 1952년 10에 결속.), “5반”(새중국 건립초기 사영공상업자에 진행한 회뢰를 반대하고, 탈세루세를 반대하며, 국가의 자재를 훔치는 것을 반대하고 품을 속이고 원료를 줄이는 것을 반대하며, 국가의 경제정보를 훔치는 것을 반대 한 운동. 1952년 1월 시작하여 1952년 10월에 결속.)운동을 전개하여 로동계급의 정권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지금 각급 간부들 가운데 부패의 싹이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깊이 뿌리를 깊이 내린 부패분자들도 있습니다. 당중앙은 지금 결심을 내리고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잡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당중앙의 이 같은 부패척결사업의 성과에 대하여 백성들은 환호하면서 “이러한 부패분자들를 척결하여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습근평총서기는 제18기 중공중앙정치국 제1차 집단학습회의에서 송나라 시인 소식(苏轼)의 명언인 “물건은 먼저 썩은 다음에 벌레가 생긴다(物必先腐以后虫生)”는 고사성어를 인용하여 “부패가 만연하면 당도 국가도 망한다”고 말하면서 부패의 엄중성을 말하였습니다. 이 고사성어는 유물변증법원리에 맞는 철리가 있는 고훈입니다. 사물의 발전과정에서 외인은 변화의 조건이고 내인은 변화의 근거이며 외인은 내인을 통하여 작용합니다. 습근평총서기는 이 고사성어로 당이 자체건설을 잘 하여야만 외부의 침식을 막아낼수 있다고 전당에 경고를 주었습니다. 지난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온가보총리가 한 정부사업보고에는 “견결히 부패를 반대하여야 하며 렴정건설을 가강하고 제도상에서 권력이 너무 집중되여 제약을 받지못하는 상황을 개변하여 간부가 청렴하고 공정하며, 정부가 청렴하고, 정치가 맑고 깨끗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과 정부의 이 같은 부패척결사업에 대하여 민중은 견결히 옹호하며 새로운 당중앙지도집단에 대하여 더욱 큰 신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5월 6일  
158    동남아려행기[2] 댓글:  조회:4757  추천:2  2013-04-29
동남아려행기[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4-28 13:08:28 ] 클릭: [ ] 이튿날 아침식사 후 우리를 실은 뻐스는 해저터널을 지나 구룡만국제무역전시쎈터로 갔다. 무역쎈터에는 여러가지 진주보석, 각국의 시계, 디지털 전자제품, 프랑스화장품, 복장 등 많은 상품들이 진렬되여 유람객들의 마음을 끌었다. 인민페와 향항화페의 비례는 100:120였는데 인민페가 통용되였으며 현금으로도 되고 은행련합카드사의 카드(银联卡)로도 되였다. 우리팀의 내몽골에서 온 로부부는 1만 5천원짜리 보석목걸이를, 훈춘에서 온 신혼부부는 5,000원짜리 핸드빽을, 심양에서 온 신혼부부는 3,500원짜리 화장품을, 무순에서 온 50대의 중년은 2,400원짜리 디지털촬영기를 샀다. 하여튼 모두 돈을 아끼지 않고 샀는데 이 령수증를 가지면 공항을 나설때에 세금을 물려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물건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호감이 없어 그냥 한고패 쭉 돌아보고는 가이드와 같이 앉아서 이것저것을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고 필기장에 적어 넣었다. 1. 황대선묘(黄大仙廟) 그다음으로는 구룡반도의 북쪽에 있는 황대선묘(黄大仙廟)를 참배하였다. 황대선묘의 원명은 색색원(啬色园)이며 1945년에 건설되였는데 부지면적이 1만 8천평방메터인데 향항의 주요한 명승고적의 하나이며 가장 이름있는 중국식 도교사원의 하나로서 향항에서 유일하게 도교혼례를 진행하는 도교사원이다. 이 사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성이 있으며 매년 음력 섣달그믐날이나 초하루부터 15일까지 시민들이 모두 와서 향을 피운다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 건축구도는 오행8괘(五行八卦)의 원리에 근거하여 설계하였으며 대전의 좌측에는 화형우향정(火形盂香亭)이 건축되여 있고 정원가운에는 토형 《조불》벽조(土形《朝佛》壁照)가 건축되여 있으며 서쪽에는 금형란대(金形鸾台)가 건축되여 있으며 경당(经堂)정면에는 옥같이 맑은 늪이 있어 5행가운데의 물과 서로 어울린다. 지금 황대선묘는 향항의 정신의탁으로서 안녕, 구직, 연분, 의난병 등 문제를 가지고 모두 여기에 와서 기도한다. 황대선묘는 대륙유람객들에게는 향향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다. 우리 유람객들은 도교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향불을 피우고 자기와 가정이 행복하고 모든 일이 순리롭게 되기를 비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는 정원을 돌아보며 마음에 드는 배경을 찾아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향항대황선묘입구에는 색색원이라는 원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2. 금자형광장(金紫荆广场) 우리는 부원호텔(富源酒店)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해저터널을 지나 향항도의 만자부두(湾仔码头)옆에 있는 인공섬으로 된 금자형광장(金紫荆广场)으로 왔다. 금자형광장은 향항회의전람쎈터(香港会展中心)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997년 7월 1일 향항조국회귀를 기념으로 향항특별행정구에서 건설하였으며 중앙정부에서 금자형동상을 증정하여 광장복판에 세웠다. 금자형광장에서 금자형동조각상의 높이는 6메터이고 설계방면에서 황금색의 박태기꽃을 적갈색 원형의 화강석기반우에 놓았으며 기반의 형상은 성벽의 모양으로 설계하였으며 성벽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상징하며 장성은 조국을 상징하고 박택기꽃은 향항을 상징하며 전반 설계는 향항이 중국의 령토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향항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상징하였다. 광장동북쪽에는 향항회귀조국기념비가 있는데 높이 20메터, 너비 1.6메터로서 기석(基石), 주신(柱身), 주두(柱头) 세부분으로 조성되였다. 기념비주신정면에는 강택민국가주석이의 친필제사[香港回归祖国纪念碑]란 비명이 새겨져 있다. 기석동서 량쪽에는 각각 중문과 영문으로 된 비문 새겨져 있다. 금자형광장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향항특별행정구 구기가 나란히 나붓기고있는데 매일 아침 8시에 국기게양식을 하며 저녁 6시에 국기강하식을 한다. 매년 7월 1일 향항특별행정구성립기념일과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이면 여기에서 국기게양식을 성대히 하며 특구행정장관이 특구정부 주요 관원들을 인솔하여 참가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항공복무부대가 직승기를 타고 낮게 광장상공을 날아예고 소방선이 분수표현을 하여 전체 시민과 유람객들을 감상하게 한다. 광장은 빅토리아항을 사이두고 구룡반도를 마주하고 있어 구룡반도를 건너다 볼수 있어 거기에서 구룡반도를 배경으로사진을 찍는 유람객들도 많았다. 3. 천수만(浅水湾) 그다음 코스는 향항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해양공원인데 거기에 가는 길에 먼저 천수만(浅水湾)에 들러 천수만의 해변가 풍경을 감상하였다. 천수만은 향항도의 남쪽에 있으며 산과 바다가 린접하여 있어 초생달 모양으로 되였으며 백사장이 넓고 길며 경사도가 약하고 모래가 보드라우며 물이 맑고 옅으며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차거워 향항사람들이 피서를 하기 가장 좋은 해수욕장이며 유람객들의 아주 좋은 관광지점으로 되고있다. 천수만은 향항의 최고 주택구의 하나이며 많은 별장과 호화주택이 모두 해만의 산기슭으로부터 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다 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천수만의 해수욕장. 이렇게 산수풍경이 좋기에 천수만은 《천하제일만》 또는 《동방의 하와이》라는 좋은 별칭도 가지고 있다. 천수만은 경치가 좋은 천연해수욕장이기에 해수욕을 하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시간상 관계로 해수욕은 하지 않고 풍경감상을 약 30분 정도 하고 해양공원으로 향하였다. 4. 해양공원(香港海洋公园) 해양공원은 향항남구의 황죽갱(黄竹坑)에 위치하여 있다. 면적은 87만 평방메터이고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은 심수만(深水湾), 남쪽은 동박료해협(东博寮海峡), 서쪽은 대수만(大树湾)과 접해있고 면적이 87만 평방메터로서 아세아주에서 가장 큰 해양공원이며 1977년 1월 10일에 개업하였다고 한다. 해양공원은 록야화원(绿野花园), 해양천지(海洋天地), 집고촌(集古村), 새천당(雀鸟天堂), 기동성(机动城), 급류천지(急流天地), 수상락원(水上乐园), 아동왕국(儿童王国) 등 8개 구로 나눈다. 해양공원은 북문과 남문이 있는데 북문이 정문이였다. 정문에 들어서면 록야화원(绿野花园)이다. 록야화원에서 가장 눈에 띄우는 것이 채색기구 승천이다. 채색기구 승천 직경이 22메터되는 커다란 고무풍선에 헬륨기체를 넣어서 100메터 상공으로 올라가는데 기구에 28명이 앉을수 있는 원형 의자를 달았다.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서 향항도 남구의 아름다운 정경을 볼수 있었는데 우리 팀에서도 몇몇 젊은이들은 거기에 올라탔다. 그다음으로는 대웅묘원이였는데 1997년에 중앙정부에서 향향조국회귀를 축하하여 기념으로 참대곰 안안(安安)과 가가(佳佳)를 증송한것이라고 한다. 2007년에, 또 조국회귀 10주년 기념으로 어린 참대곰 락락(乐乐)과 영영(盈盈)을 증송하였단다. 향항 당지 사람들이나 외국 유람객들은 참대곰에 대하여 특별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전에 여러 공원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그리 호기심이 없었다. 해양기관(海洋奇观) 산 아래에서는 그래도 해양기관이 제일 인기를 끌었다. 해양기관은 원래 산 우에 있었는데 지난해(2011년 1월)에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게 확건하고 이름을 원래의 《해양관》으로부터 《해양기관(海洋奇观)》이라고 고쳤는데 세계 10대 수족관의 하나라고 한다. 물 용량이 52만립방메터, 물 깊이가 11메터이고 400가지 품종의 5000여 마리의 진귀한 어류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관내에는 길이가 2센치메터의 작은 어류로부터 길이가 3메터의 상어 그리고 갯장어, 신선어, 우럭바리 등 산호초어류들도 있으며 이 관에는 또 산호와 산호초 전람도 있어 정말 바다 밑 세계에서 유람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안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직경이 5.5메터의 관상돔(观赏圆顶)이 있어 유람객들이 물밑세계를 관상할수 있었고 너비 13메터, 높이 8메터의 스크린이 있어 관내의 어류들은 다 볼수 있었다. 해양관이 원래 산우에 있을 때에는 한 시간에 800명의 유람객을 수용하였지만 지금은 3600명을 수용한다고 한다. 확건한 다음의 수족관을 구경하였으니 우리도 운수가 좋은 셈이였다. [다음 계속]
157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는 “8항규정”과 “6항금지령” 댓글:  조회:8532  추천:25  2013-04-23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0) 주청룡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는 “8항규정”과 “6항금지령”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는 “8항규정”과 “6항금지령”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18차 당대회 후 중공중앙에서는 “사업작풍을 개진하고 군중과 밀접히 련계할데 대한 8항규정”과 “6항금지령”을 잇달아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규정과 금지령은 백성들이 오래전부터 바라던것입니다. “8항규정”에는 “곤난과 모순이 집중된 곳에 내려가며 군중의견이 많은 곳에 가며 말타고 꽃구경하는식의 조사연구와 형식주의 사업작풍을 개진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규정은 지도간부들은 기층에 내려가 조사를 할 때에 형식주의를 취하지 말고 실질적인 조사연구를 하여 한다는 것을 제시하였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사업할 때의 일입니다. 주 당위서기가 우리학교에 와서 사업시찰을 하게 되였는데 시위의 교육을 책임진 부서기가 전날 우리학교에 와서 학교지도부성원들을 모아놓고 이튿날 주위서기가 와서 시찰할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포치하고 구체적으로 우리 학교에서 회보하여야 할 문제들을 토론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학교의 현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어떤 문제는 력사적으로 내려온 문제이기에 학교의 현임 지도자들이 해결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정부에서 나서야 해결할수 있다는것도 반영하려 하자 그 부서기는 그런 문제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것이였습니다. 아마 그런 문제를 반영하면 자기들에게 책임이 돌아간다고 그런것 같았습니다. 그때 우리의 생각에는 먼저 내려와서 빈틈없는 포치를 하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또 자기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못하도록 미리 침을 놓으려는것도 있다고 생각되였습니다. 이튿날 주위 서기가 와서 회보를 들을 때 교장이 전날에 틀에 짜놓은 회보를 하다니 학교의 실제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위서기의 조사도 실속이 없는 말타고 꽃구경식의 조사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한 잡지에서 본 기사입니다. 모 시에서 독일과 합작하여 기업을 꾸리게 되였는데 회사개업식 날 시장이 와서 테프를 끊고 회사의 중국측 대표가 발언할 때 “시위와 시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하에 우리 회사가 순조롭게 합작기업을 운영하게 되였습니다.”라고 말하자 독일측의 대표가 곁에 있는 동사자와 “집을 짓고 설비를 앉히는 과정에 시의 지도자들이 한번도 와 본 적이 없는데 무었때문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가 있었다고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 하였다고 합니다. 사업작풍을 개진할데 대한“8항규정”이 바로 지도간부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아래에서 작성한 보고서만 보지 말고 친히 기층에 내려가서 조사를 하고 기층에 내려가서도 미리 틀에 짜놓은 서면회보만 듣지 말고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서 실질적인 조사연구를 하고 실제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8항규정”에는 또 “경위사업을 개진하여 군중련계에 리로운 원칙을 견지하며 교통관제를 감소하고 일반정황 하에서는 길을 봉페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연길시내에서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거리를 가로 지나가야 했는데 거리에 10여 메터에 한 명씩 경찰들이 쭉 늘어섰고 교통이 차단되였습니다. 아마 모모한 수장이 온 것 같았습니다. 여러대의 고급승용차가 지나가고 교통봉쇄가 해제 된 다음 가다나니 결국 약속된 시간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교통을 차단할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교통질서를 유지하면서 경위사업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습근평총서기가 지난해 12월 심수시를 시찰할 때 교통을 차단하지 않고 지나가는 뻐쓰, 택시와 병행한 것이 바로 이 방면에서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8항규정”에는 접대를 간소화 해야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것은 랑비를 반대함과 동시에 "술 한잔 기울이면 정책이 느슨해지고 저가락 한번 들면 일이 성사되는 " 용속한 사업작풍을 개진하여야 한다는것을 설명합니다.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한 정부사업보고에는 “강력하게 정무공개를 추진하여야 하며 중점적으로 재정예산과 결산, 공무원접대, 공무차 구매와 사용, 공무로한 출국, 출경경비를 공개하여 인민군중들이 전면적으로 정부의 사업을 료해하고 더욱 유효하게 정부행위를 감독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중앙의 “8항규정”과 “6항금지령”은 당이 사업작풍을 개진하고 렴정건설을 하며 군중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 군중에게 편리하도록 하고 군중과 가까이 할수 있도록 하였기에 군중들은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는 규정과 금지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년 4월 22    
156    동남아려행기[1] 댓글:  조회:5095  추천:4  2013-04-18
동남아려행기[1]   지난해 10월, 우리 부부는 심양국제려행사에서 조직한 동남아관광을 떠나게 되였다. 퇴직한후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떠나는 국제관광이여서 그런지 마음은 젊은부부들의 가슴처럼 한없이 부풀기만 하였다.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23일 아침 심양역에 내리니 6촌 녀동생이 자가용을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동생이 우리를 싣고 도선공항(桃仙机场)으로 가는데 밤에 진눈까비가 내려 가는길이 매우 질척거렸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어구에 이르러 보니 고속도로에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지어 있었다. 알고보니 지난밤 진눈까비가 내린데다가 기온이 급속히 하강되여 고속도로가 빙판으로 되여 교통이 봉페되였던것이였다. 일반도로로 비행장에 갈수밖에 없었다. 비행장에 도착해보니 우리 관광팀은 모두 20명으로 구성, 심양, 안산, 연변, 통료 등 곳에서 왔는데 조선족으로는 우리 부부뿐이였다. 우리 관광팀에는 모두 7쌍의 부부가 있었는데 우리와 통료에서 온 부부가 60대이고 기타는 모두 젊은 부부들이였다. 신혼려행을 하는 부부도 있었다. 우리를 태운 심수항공기가 9시 25분에 리륙하여 심수에 도착하였을 때는 1시 25분이였다. 몸을 바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꼬박 4시간 고정자리에 앉아있는다는것도 쉽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 방송원이 지금 심수의 기온이 령상 30도라고 하였다. 집에서는 모두 솜옷을 입고 떠났는데 심수 보안공항에 내리니 심수의 날씨는 찌는듯 무더웠다. 숱한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을 곳을 찾다가 우리는 할수없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침에 솜바지를 입고 떠났던 녀성들은 점심에 치마로 탈바꿈을 하였다. 보안공항에서 나와 우리를 태운 뻐스는 심수시내를 가로질러 황강(皇崗)세관으로 향하였다. 달리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온 시내가 고층건물로 콩크리트숲을 이루고있었다. 원래 자그마한 어촌이였던 심수가 지금은 우리나라 개혁개방의 전초지로 된 모습을 보고 다시한번 등소평의 개혁개방로선이 락후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전변시켰다는것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황강세관에 도착하니 3시 10분이였다. 향항은 1997년에 이미 조국에 귀속되였다지만 한 나라 두가지제도로 한 특별행정구인것만큼 세관에서 향항입경수속을 해야 했다. 입경수속을 마치고 나와서 자그마한 강(심수하) 하나를 건너면 바로 향항특별행정구이다. 향항세관에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우리를 기다리고있던 향항려행사의 녀성가이드가 우리를 뜨겁게 맞이하였다. 뻐스에 오르면서 보니 뻐스문이 왼쪽에 있었다. 하여 내가 《아야! 뻐스문이 왼쪽에 있다.》고 하니 우리팀의 인솔자가 이번에 우리가 려행을 하는 지구와 나라의 교통은 모두 차가 왼쪽통행이기에 차문이 모두 왼쪽에 있으므로 앞으로 차를 탈 때에 왼쪽에서 탄다는것이였다. 심수에서 핸드폰으로 연변에다 통화를 하였는데 향항에 들어서니 핸드폰이 통화권을 벗어났기에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통화카드를 사야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향항시내로 들어가면서 가이드는 향항의 개황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향항은 신계(新界), 향항도(香港島), 구룡반도(九龍半島)와 그 부속섬과 부근의 해역이 포함되며 인구는 약 7백만이고 면적은 1,102평방킬로메터이고 언어는 광동어, 학카스어 (학카스족: 서진말년부터 원조이전까지 전쟁란리를 피해 중원으로부터 남방에 이주하여 정착한 한족) 와 영어를 사용한다. 향항은 자고로 중국의 령토였으며 1842년 아편전쟁후 영국식민지였던것이 1997년 7월 1일 중국에 귀한되여 향항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여 한 나라 두가지 제도하에서 향항인이 향항을 다스리는 고도의 자치권리를 행사하는 중화인민공화국 향항특별행정구이다. 아열대해양기후에 속하는 향항은 년평균기온이 22.8도이고 봄은 따뜻하고 안개가 많은것이 특징이며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은것이 특징이다. 가을은 시원하고 맑으며 겨울은 건조하고 좀 차다. 향항은 10~12월이 유람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향항은 국제 금융중심으로서 금융정책이 고도로 개방되였으며 국제성 은행업무와 황금시장, 외화시장, 주식시장, 보험시장이 활약상을 보이는데 뉴욕,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 대금융쎈터이다. 향항은 자유무역항으로 15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지리적으로 아세아태평양지구의 중요한 길목으로 세계 각국의 화물이 관세없이 들어오고 나갈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각국의 최신 제품이 자유로이 향항시장에 들어올수 있어 세계 명품들이 이곳에 집중되고 시대적 풍조를 따를수 있으며 가격이 적당하여 《쇼핑천당》으로 불리고있다. 안내원이 향항의 개황을 소개를 하는 사이에 뻐스는 신계와 구룡반도를 지나 해저터널에 들어섰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구룡반도와 향항도를 이어놓는 이 해저터널은 빅토리아항 밑으로 지나는데 동구, 중구, 서구 세개의 턴넬이 있으며 길이가 2킬로메터 정도 된다고 하였다. 해저터널 우리를 태운 뻐스는 해저터널을 나와서 향항에서 자장 높다는 태평산에 올랐다. 태평산은 해발 554메터로서 향항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줄곧 향항의 표징으로 되였으며 향항의 유람명승지의 하나이다. 태평산에 올라서니 향항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볼수 있었는데 하늘을 찌르듯 한 고층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그야말로 콩크리트 숲같이 보였다. 손바닥만한 땅을 사서 구새통처럼 높다랗게 집을 지은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과 집사이는 한 사람이 나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향항은 산간도시로서 평지가 얼마 없다니 산에다 층집들을 줄줄이 가득 올리 지었는데 층집들 사이에 난 《之》자형 길을 통해 뻐스는 산꼭대기까 올라갈수 있었다. 태평산에 올라서면 가장 눈길이 오래 머무르는것이 빅토리아항구이다. 책에서만 많이 보아왔던 빅토리아항구를 직접 보게 되니 자못 흥분되였다. 빅토리아항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항구이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항구이며 구룡반도와 향항도사이의 바다항구이다. 이 항구는 넓고(41.88 km²) 수심(평균 깊이 12.2m)이 깊어 천연적으로 량호한 항구이다. 향항 역시 이로하여 《동방진주》로 불리고있으며 《세계3대 천연항》, 《세계 3대야경》의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고있다. 빅토리아항의 이름의 유래는 영국의 빅토리아녀왕으로부터 온것이다. 이 항은 일년 사계절 자유로이 드나들수 있다. 영국은 향항을 청정부로부터 자기들의 수중에 넣은 다음 원동의 해상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빅토리아항은 줄곧 향항의 력사와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향항의 경제와 관광업의 발전을 주도하여 왔으며 향항을 국제화 대도시로 건설하는데서의 관건적인 작용을 놀았다. 태평산에서 바라본 빅토리아항구. 태평산에서 내려와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빅토리이항 량안의 야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수풀처럼 들어선 고층건물들이 5색령롱한 네온등 불빛으로 륜곽을 이루고 그 고층건물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서로 어울려 향항도와 구룡반도로 이어진 빅토리아항의 전경을 그대로 그려냈으며 또 그 불빛이 바다물에 반사되여 황홀한 빅토리항의 야경에 관광객들은 너무나도 매료되였다. 《야! 멋있다! 야! 황홀하다!》는 감탄소리가 끊일줄 몰랐다. 빅토리항의 야경은 일본의 하코다테와 이탈리아 나폴리의 야경과 더불어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다 구경하니 저녁 8시 반이 되였다. 려행사에서 정해준 숙소는 바로 북각부두(北角码头)부근에 위치한 가락헌(嘉樂軒)호텔이였다. 호텔은 4성급이여서 안의 설비는 좋았다. 호텔에 들어 잊지 말하야 할것이 사진기의 전지를 충전하는것이였는데 향항의 콘센트는 영국식이여서 내지와 달랐다. 향항세관을 나설 때 콘센트전환기(插座转换器)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려행사에서 미리 준비시켰기에 떠날 때에 벌써 사가지고 왔었다. 향항의 콘센트에 콘센트전환기를 꽂은 다음 내지의 전기플러크를 꼽으면 충전할수 있었다. (타이의 콘센트가 중국것과 같았다.) [다음 계속] 주청룡특약기자  
155    더 바른 시각으로 중국을 보았으면 댓글:  조회:11527  추천:68  2013-04-06
더 바른 시각으로 중국을 보았으면 —- [특별기획3] 《한국언론. 붙는 불에 키질》을 보고 청해   길림신문의 [특별기획3] 《한국언론. 붙는 불에 키질》을 보고 필자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일부 바르지 못한 언론으로 하여 끼친 부정적인 영향들을 다시 떠 올리게 된다. 필자가 한국에서 체류하는 기간 한국인들과 국제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의론을 하는 가운데서 한국인들이 대만을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라고 우기는것을 보았다. 완전히 랭전시대에 받은 교육 그대로였다. 이때 필자는 “만약 당신네 나라에서 대만이 독립적 국가라고 인정한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수 없다.”고 말하니 “대만이 독립적 국가인것과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였다. 이때 필자는 “만약 한국에서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을수 없다. 당신네 나라에서 대만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두 나라가 수교를 할수 있었다. 우리도 랭전시대에는 당신네 나라를 한국이라 하지 않고 남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1년 9월 17일에 유엔에서 조선을 160번째로, 한국을 161번째로 유엔에 가입시킨 다음부터 남조선이라 하지 않고 대한민국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국제사회가 조선과 한국을 다 주권국가로 인정하자 중국도 한국과 1992년 8월 24일에 정식 수교를 하였다. 두 나라가 수교를 하였기 때문에 내가 바로 한국으로 방문을 와서 이 자리에 있을수 있다.”고 말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여 있다가 필자가 반복적으로 설명해서야 그런가 싶다고 하였다. 그러던 며칠 후 북경올림픽대회가 개막되였다. 이때 한국TV에서도 올림픽 개막식을 생방송 하였다. 그런데 각 대표단들이 입장할 때에 중국에서는 204개 나라와 지구의 대표들이라고 방송하지만 한국 TV 해설원은 204개 나라 대표들이 입장한다고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는것이였다. 이때 필자는 ‘대만과 향항이 이전의 관례대로 각기 한 개 지구로 참가하는데 왜 대만과 향항을 포함하여 204개 나라라고 하는가? 그러면 한국사람들이 향항과 대만을 어떻게 보겠는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데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나가니 대만을 독립국가로 우기던 사람들이 “어제 저녁에 올림픽 실황방송을 하는것을 봤는가? 대만을 포함하여 204개 나라라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필자에게 반문 하는것이였다. 이때 필자는 다시 그 사람들에게 상세히 해석하면서 ‘확실히 일부 언론의 그릇된 보도가 한국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구나’하는것을 생각을 갖게 되였다. [특별기획]은 한국언론의 대 중국 보도를 두고 장춘에서 3년간 공부중인 두 한국 류학생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중국에 와보고서야 한국언론에 났던 많은 기사들이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는것을 알았어요. 긍정적인것보다는 부정적인것을 내보내는 한국언론들이 문제죠. 식품문제, 분유사건 등 중국산에 가짜가 많다라고 중국의 사건사고를 나쁘게 내보내요.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 국민은 구체적인걸 모르니까 전체 중국산이 다 나쁘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지요. 언론이 보도한대로 리해하니깐요.》 어느 나라나 구석구석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일부 구석들에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있고 쓰레기도 있을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중국주재기자들은 중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어서 방송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필자는 한국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롱담조로 “당신네 기자들은 왜 쓰레기를 줏기를 그리 좋아하는가? 당신들은 중국의 구석을 돌아다며 쓰레기를 주어서는 방송을 하지만 중국언론에서 언제 한국의 어두운 구석을 찍어 보도를 하는것을 봤는가?”라고 말한적이 있다. [특별기획]에서 지적하다싶이 많은 한국사람들은 중국을 조롱거리로 삼는것으로 민족자부심을 느끼는데 한국언론은 이런 민중심리에 부채질하며 중국의 흠집을 들춰내는데 열중하고있다. 이러한 여론은 중국인민들로 하여금 혐한감정을 가지게 하는 요소로 될뿐 중한관계 발전에서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다. [특별기획]이 보도 하다싶이 이러한 원인으로 하여 중국네티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라》를 제1위로 한국을 꼽았다.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첨소홍이 지적하다싶히 《중한 민중간의 사이가 버성긴데는 한국매체에 아주 큰 책임이 있다. 중국의 언론 특히는 주요 관방매체들은 한국에 대한 보도에서 주요하게는 정면보도를 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한국언론은 중국에 대한 부정적뉴스를 신문자유라는 명목으로 제멋대로 무책임하게 보도한다.》 보도매체는 언제나 언론이 공정해야 한다. 옥과 옥이 만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두 나라 기자들이 모두 상대방을 존중하고 공정하게 사실적으로 보도를 한다면 중한과계의 발전에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할것이라고 본다. 2012년 12월 18일
154    《출국 리산가족》에 부탁 한마디 댓글:  조회:7692  추천:12  2013-03-29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우리 조선족사회는 출국로무의 정책적혜택으로 거대한 물질적부와 정신적부를 창조하여 타 민족에 비해 한참 앞서간다는 평을 받고있다.   하지만 출국로무에 대한 인식에서 자기 가정의 실제 정황에 따르지 않고 돈 버는 유일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폐단도 있는데 이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출국리산가족》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심각해진 우리 조선족사회는 그에 따르는 자식교양문제, 가정해체 등 문제로 몸살이를 앓는 상황이기도 하다.   한 고향친구는 아들이 일본에서 자그마한 회사를 꾸리고 안해가 한국에 나간지 7,8년이 되다보니 세 식구가 3국에서 사는 리산가족으로 세월을 보내는 처지다.   고향친구는 집에서 농사를 짓는데 수입이 짭짤하지만 밭일에 지치고 거기에 안해없는 썰렁한 집에서 고독한 마음을 달래느라 늘 술과 동무하다보니 몸도 많이 망가졌다.   어느날 아침 그의 녀동생이 자기 집에 와서 식사를 하라고 오빠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아 불길한 생각에 달려가보니 그는 쓰러져있었고 옆에는 김치쪼각에 술병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급히 병원에 호송하였으나 이미 치료에 가망이 없단다.   한 퇴직교원의 무직업 안해는 로씨야장사부터 한국로무까지 타국생활이 인젠 15년이 넘는다. 안해가 러시아장사를 떠날 때에는 그의 혼자 로임으로 자식 둘을 공부시키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큰아들이 한국에서 회사에 출근하고 작은 아들이 미국에서 일하며 그의 퇴직금도 3,500원이 넘어 아무런 근심없이 여유로운 만년을 누릴수 있는 조건이 되였다. 그러나 15년이란 홀아비생활에 그는 몸이 다 망가져 늘 병원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의 안해는 돈을 버는 재미에 한국에서 계속 일하고있다.   남편들이 자기의 건강을 잘 챙기지 못한것은 그들 자신이 게으른 점도 있겠지만 가정살림에서 남성이 할일, 녀성이 할일이 따로 있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다. 아무리 남성들이 가정살림을 잘 꾸려간다 해도 안해가 없으면 그자리가 비게 되고 아무리 자기 건강을 잘 챙긴다 하여도 안해의 따뜻한 보살핌보다 못하다는것은 너나가 다 아는 섭리다.   《출국리산가족》들의 공동의 아픔은 너무 멀리, 너무 오래 갈라져 산다는것이다. 대부분의 출국리산가족들에게는 농사지을 땅이나 퇴직금 그리고 사회양로보험이나 의료보험이 있다. 눈앞의 돈때문에 멀지 않은 앞날의 건강과 행복을 도외시한다면 돌이킬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수 있다는 점에서 심사숙고할것을 권장하고싶다.   모든 《출국리산가족》들에 가족의 신체정황, 경제정황, 갈라져 산 시간 등등을 다시한번 돌이켜볼 시간을 가지기를 부탁하며 우리의 로무일군들이 돈을 벌려는 욕심만 가지지 말고 인젠 그만하고 귀국할것인가, 아니면 부부동반 출국할것인가 하는 합리한 선택을 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153    서로 상대방을 료해하고 편견 극복해야 댓글:  조회:7910  추천:6  2013-03-19
길림신문의 [특별기획4] 《상처에 소금 뿌리는 〈악플전쟁〉》을 읽으면서 필자는 서로 상대방을 료해하고 편견을 극복했으면 서로의 불편한 심리를 해소할 수 있다고 느꼈다. [특변기획]취재팀이 중국류학생들과의 담화에서 중국류학생 왕모의 말을 인용하면서 “국제관계교수토론모임에 참가했는데 중국의 '혐한류'원인은 한국언론과 한국악플에서 받은 상처가 중요한 원인이라고 모두들 주장하더라.”라고 하였다. 필자는 좀 글을 쓰는 편이라 인터넷에 적지 않은 글을 올리며 중한관계를 다루는 글도 적지 않게 올리는데. 중국과 한국 관계를 말할 때에는 꼭 ‘중한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면 한국네티즌들로부터 “한민족(조선족)으로서 무엇때문에 ‘한중관계’라고 하지 않고 ‘중한관계’라고 하는가?”라는 질책을 받게 된다. 그러면 필자는 “내가 고모의 자식을 ‘고모사촌’이라 하고 고모의 자식이 나를 ‘외사촌’이라고 하 듯이 내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므로 국제관례에 따라 반드시 ‘중한관계’라고 말하여야 하지 ‘한중관계’라고 하면 독자들이 내가 한국의 국민으로 리해를 한다.”고 답변을 주면 그 다음에는 “너는 민족을 앞에 놓는냐? 나라를 앞에 놓는냐? 국제관례가 다 뭐냐?”라는 악플적인 공격이 나온다. 이런 글들을 중국인들이 보면 당연히 혐한감정이 생기게 될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이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 하는 문제에서 일부 한국인들이 필자에게 당신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고 물을 때에 떳떳하게“나는 중국인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너는 우리 같은 민족인데 왜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인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필자는 “내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기에 중국인이지 어떻게 한국국적도 안 가진 내가 한국인가?”라고 답변을 주면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한국사람들은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을 중국에 정착하여 사는 한국인으로 보지 중국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을 포용하여 한국인이라고 하는 그 심정은 리해를 하고 감사한 일지만 우리로서 우리의 사정이 있지 않는가?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라 하지만 중국국적의 공민으로서 어찌 자기 나라를 배반하면서 나는 한국인이라고 할수는 없지 않는가? [특별기획]은 또 한국 TV방송 MBC뉴스는 중한 수교 20주년 기획보도에서 《중국을 너무 모르는게 아닌지? 안다 해도 그 인식이 너무 편면적이 않은지? 또 너무 얕은건 아닌지.》 이렇게 자문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 보면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료해가 너무나 적은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랭전시대의 사유로 그때 받은 교육 그대로 중국을 인식하고 있었다. 중한수교 후 중국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이라는것을 시인하면서 한국의 우수한 점들을 많이 따라 배우고 있는데 일부 한국사람들은 발전도상의 중국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냥 가난한 나라, 락후한 나라라고 말하고있다. 랭전시대의 사유는 한국사람들이 중국사람들보다 더한것 같았다. 필자가 중국에 갔다 온 학자, 기업가들과 “일부 한국사람들이 그냥 중국을 가난한 나라, 락후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신들이 중국에 가보니 어떻던가요?”하고 물으니 그들은 “아니, 중국이 대단히 발전하였어요. 중국에 갔다오지 않고서는 중국을 몰라요.”라고 하며 중국의 발전에 대하여 매우 감탄해 하였다. [특별기획]은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 민귀식교수가 한국 《서울신문》에 발표한 사설에서 《한국에서 중국 관련 뉴스가 대부분 부정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전달되면서 그 결과 우리는 국가능력이 강한 중국 그리고 시민의식과 공중도덕 수준이 낮은 중국인이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통해서 중국을 바라본다. 그래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필자가 중한합작학교에서 중국측대표로 당지부서기 사업을 할 때 한국의 모 대학교교수로 있었던 한국측 대표가 “내가 중국으로 파견되여 올 때에는 공산당이 머리에 뿔이 난걸로 생각했어요. 이러한 중국에 가서 어떻게 사업을 하겠는가고 근심을 하였어요. 그런데 중국에 와서 주서기와 같이 사업을 하면서 보니까 한국에 있을 때의 생각과 완전히 달라요.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말하는것이였다. 이러한 지식인들도 중국에 와 보지 않고서는 중국을 리해하지 못하고 랭전시대에 교육을 받았던 그대로 공산당이 머리에 뿔이 난걸로만 인식한다.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료해하고 리해를 하여야만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고 편견을 극복할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길림신문의 [특별기획4]까지 다 보면서 서로 불편한 심리를 해소하려면 서로 상대방을 더욱 잘 료해하고 서로 신뢰하고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상대방의 우점을 따라 배운다면 더욱 화목한 이웃으로 지낼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언론매체의 작용이 가장 크다고 본다.  
152    중국동포들도 한겨레의 사랑을 바란다 댓글:  조회:7466  추천:8  2013-03-18
중국동포들도 한겨레의 사랑을 바란다 -- 《재한 중국인범죄 그  불편한 시선》을 읽고                            청해   길림신문의 [특별기획2] 《재한 중국인범죄 그 불편한 시선》을 읽고 필자는 한국에서 3년 남짓이 체류하는 기간 중국동포들이 3D업종에서 고달프게 일하면서 한 겨레의 사랑을 갈망하던 모습들이 삼삼히 떠오른다. 중국동포들도 잘 살아보려는 일념으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갔다. 한국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아 공항, 출입국 관리소, 취업교육장, 로동부 고용지원쎈터 등 국가기관, 사업소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곳들이다. 이런 곳을 다니면서 보면 한국의 국가공무원, 사업일군들은 동포들에 대하여 아주 뜨겁게 대하였고 동포다운 사랑을 주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열정스럽게 대하였다. 이럴 때마다 동포들은 고국 땅에서 한 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채소농장에 가 보면 동포들의 기숙사가 곧바로 채소하우스 안이였다. 주인집 애완견은 주인과 한방에서 같이 먹고 자지만 중국동포들은 짐승자리 보다 못한(벼짚우에 비릴박막을 편) 하우스 안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하니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 받는 일이였다.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중국동포들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몇 달 혹은 몇 년 뼈빠지게 일하고도 고용주가 달아나는 바람에 로임 한푼도 받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다. 전형적인 실례로는 흑룡강성 녕안현 와룡조선족향의 리영준(58세)이 한 오리구이 집에 갇히여 아무런 자유도 없이 물매를 맞으면서 8년간 로임봉투 한번 손에 쥐여 보지 못하고 현대판 노예생활을 하다가 KBS방송사에서 제보를 받고 현지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도움으로 풀려나온 사실이다. 한국의 많은 3D업종에서 인력을 많이 수요하는것만큼 중국동포들은 3D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개의치 안아 한다. 하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하고 한겨레의 사랑을 바랄뿐이다. [특별기획2]에서는 중국인의 범죄, 그 불편한 시선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필자는 본문을 읽으면서 중국인들의 법죄행위가 있게 되는 원인을 많이 생각하여 보았으며 한국에 있을 때에도 중국동포신문사와 함께 중국동포들의 범죄행위가 나타나는 원인에 대하여 분석해 본적이 있다. 그 원인들을 보면 1. 한 가정이 오래동안 갈라져 있으면서 감정불화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로 술을 마이고 무단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 2. 동료들 지간에 음주 후 사소한 일을 가지고 다투다가 리지를 잃고 악성사고를 저지르는 경우 3. 한때 연변패요, 흑룡강패요 하는 패거리 싸움 4.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의 멸시로부터 직접 고용주에 대한 반항으로 오는 경우 5.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묻지마 하는 범죄행위 6. 개인의 불법리익을 위한 강간, 강탈, 절도행위 등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일부 고용주 대한 불만이 오게 된 주요한 원인이라면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지만 소수민족이라고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적이 없는데 고국이라고 찾아온 한국에서 오히려 일부 고용주들에게서 업신 여김을 받은데서 반감을 싸게 되였다. 여기에서 특별히 지적할것은 전반 한국사회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사랑을 주고 있지만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과 개별적인 하류계층의 사람들의 중국동포들에 대한 멸시로 하여 일부 인식이 낮은 중국동포들은 전반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여기고있다. 한국에서의 중국동포들의 살인사건들 가운데서 오원춘의 토막살인사건 같은것은 전형적인 ‘묻지마 살인사건’이지만 일부 살인사건 같은것은 중국동포들을 너무 학대하거나 업신여긴데서 비롯된것이다. 1996년 페스카마 15호 선장살인사건은 전형적인 학대사건으로 인기 된것이고 금년 리모의 영등포직업소개소 소장살인사건은 로임체불로 인한 살인사건이다. 이 두 살인사건에서 보면 만약 선장이 가혹한 학대가 없었다면 돈을 벌려간 사람들이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를지 않았을것이고 직업소개소 소장이 그 소개소의 녀성직원처럼 동정어린 말이 아닐지라도 욕설의 말이 아니였더라면 그러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것이고 소장은 아까운 목숨까지 잃지 안았을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런 악성사건에 대하여 변명하는것 같지만 중국동포들에 대한 무자비한 인격무시가 아니였더라면 이러한 악성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라는것을 지적한는 바이다. 어떤 원인으로 일어났던 살인사건이거나 기타 범죄행위는 어디까지나 용서못할것이고 법률의 엄격한 제재를 받아야 할것이다. [특별기획2]에서 지적되다싶이 한국인 범죄자 비률은 인구 대비 4.0%이지만 같은 기간 한국 내 거주 중국인 범죄자는 인구 대비 범죄자 비율은 3.6%로 집계되여 한국인 범죄비률에 비해 적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의 범죄는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절대다수의 중국동포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물을 흐려놓는다고 극 소수의 범죄분자들에 의하여 많은 중국동포들이 같이 한국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이국 땅에서 생활을 하지만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우리 동포들은 모두 한 겨레의 피줄로 이어진 동포라고 생각한다. 한국정부의 배려 하에 우리 중국동포들도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는데 한국의 법률과 제도를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여 한국사회에 중국조선족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한국사회는 우리를 더욱 포옹해 줄것이고 한국인과 중국동포들이 서로 신뢰하고 함께 융합된다면 화합, 공존의 사회로 가꾸어 지리라고 믿는다. 2012년 12월 16일
151    공금절약의 새로운 기풍에 박수를 댓글:  조회:7231  추천:8  2013-03-14
개혁개방이래 물질문화수준의 부단한 제고와 더불어 일부 바르지 못한 기풍도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주요한 표현중의 하나가 공금을 람용하거나 공금으로 먹고마시며 떠벌려 랑비하는 현상이다. 해마다 년말년시면 각 단위에서는 《송구영신》이요, 《년말총화》요 하면서 집체적으로 식당에 가서 한바탕 크게 차려놓고 떠벌려 랑비하는것을 례사로 여겼다. 습근평총서기가 《근검적약을 리행하고 떠벌려랑비하는것을 반대할》데 대한 중요한 지시를 내린후 전국 여러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며 공금랑비현상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다. 왕년에는 많은 식당들에서 돈벌이가 잘 되였는데 금년에는 너무나 잠잠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미리 주문하였던 단위들에서도 연회를 취소하였다니 그럴 법도 한 일이다. 연변의 정황을 봐도 해마다 3.8절은 각 단위에서는 먹고 마시고 노는 큰 행사로 취급되였는데 금년에는 정부로부터 3.8절에 공금으로 먹고 마시지 못한다는 령을 내렸기에 집체적으로 식당에 가는 행사가 거의 없었다. 요즘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 기간에도 비행장, 기차역과 대표단이 거처하는 곳에서 영접과 환송의식을 하지 못하며 대표위원이 든 방에 생화를 놓지 못하며 회의화식표준도 엄격히 집행하고 고급료리, 술과 음료를 놓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당중앙의 사업작풍을 개진할데 대한 《8항 규정》과 《6항 금지령》이 내린후 각급 지도간부들이 사업작풍을 개진하기에 노력하고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민대중이 바라는바이다. 각급 당정간부들이 모두 당의 우량한 사업작풍을 발휘한다면 당이 군중의 신임을 얻게 되며 당과 군중과의 관계가 밀접해지게 되여 간부와 군중이 융합된 조화로은 사회로 구축될것은 두말할것 없다. 요즘에 나타난 이런 신선한 기풍이 하루살이현상으로 되지 말기를 바라며 우리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규정과 습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50    조선관광(9) 댓글:  조회:7836  추천:1  2013-03-11
조선관광(9)  발전하고 있는 평양   고려성균관을 다 참관하고 우리는 다시 뻐스에 몸을 실어 평양으로 달렸다. 평양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좀 넘었다. 아직 저녁때 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그리하여 뻐스는 평양의 주요한 거리들을 돌면서 우리를 구경시키는것이였다. 평양시의 거리들은 정말 깨끗하고 새로 지은 고층건물들이 많았다. 지도원의 소개에 따르면 평양의 창전거리(仓田街)는 새로 건설한 구역으로서 올해 6월 완공됐다고 한다. 창전거리에는 고층건물이 가득 들어 섰는데 45층짜리 고층아빠트가 14동이 있으며 이 구역에 백화점, 식당, 목욕탕, 리발소 등 복무시설과 학교, 유치원 등 교육시설이 다 갖춰졌다고 한다. 사진(1): 평양시의 창전(仓田街)거리   거리를 지나면서 보면 녀성들의 복장도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것 같았다. 무릅까지 올라오는 짧은 치마에 굽높은 구두를 신고 머리단장도 새로운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는 사람, 상점에서 짐꾸러미를 들고 나오는 녀성들의 밝은 모습, 아이들의 씽씽 로라스케트를 타면서 달리는 모습도 볼수 있었다. 사진(2):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조선녀성   사진(3): 물건을 가득 사든 녀성의 밝은 모습   사진(4): 로라스케트를 타고 있는 어린이들   평양시의 주요한 거리를 다 돌면서 구경을 한 다음 지도원은 평양에 왔다가 지하철을 안 타보겠는가고 하면서 모두 내리라는것이였다. 우리는 “그것도 좋지” 하며 내리여 지하철역으로 들어 갔는데 딱 한 정거장구역만 탄다는것이였다. 다른 여러 나라에 가서 지하철을 타 봐도 여러 개 층으로 꺾어 내려가면서 에스컬레이터(电动扶梯)가 있었는데 이곳의 지하철은 여러 층으로 꺾지 않고 지하 150m를 경사지게 곧추 내려가는것이였다. 마지막 끝은 아츠랗게 보이였다. 아마 이 역은 지하철이 서로 교차가 되는 곳이 아닌 모양이였다. 사진(5):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한 정거장 구간이라도 지하철을 타 봤으니 그래도 평양에 왔다가 지하철을 타 봤다고 말 할수 있었다. 2분이니 다음 역에 도착하였는데 올라 올때에 보니 여전히 에스컬레이터가 꺾지않고 곧추 지상으로 경사를 지어 올라가는것이였다. 평양시내의 주요한 거리, 주요한 관광명소를 다 구경하고 지하철까지 타 보았으니 평양시의 관광은 다한 셈이였다. 산에 가서는 등산을 하여야 했고 련며칠 대부분의 시간은 뻐스에서 보냈으니 관광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였다. 다시 양각도 호텔로 돌아오니 사맥이 나른했다. 그리고 우리 관광팀에는 한국에서 카나다로 이민으로 가서 카나다에서 목사로 있다는 70대의로 로 부부가 연길로 친척방문을 왔다가 이번 금강산 관광으로 왔었는데 우리 팀의 조선 지도원은 가는 곳마다 그곳 사업일군들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어디를 가나 반갑게 맞아주며 남측의 동포가 북으로 방문왔다고 그 분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을 돌리였다. 그 목사도 조선에서 태여났으며 어릴때에는 조선에서 자랐다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조선전쟁이 폭발하기 직전에 남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 못 오고 남에서 자라 후에는 카나다로 갔다는것이였다. 60여 년만에 고향땅을 밟았으니 그들의 감정이야 더 어떻다 말할수 없고 우리 집체적 행사외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난다든가 하는 개별적인 행사도 많았다. 그럴때마다 조선의 동지들이 그들에게 여러모로 편리를 도모하여 주었다. 4박5일의 관광이라지만 마지막 날의 일정은 그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것이였다. 아침 7시 반에 뻐스에 앉아 순항공항으로 가는길에 지도원은 4박5일, 길지는 않지만 그 동안 중국동포들과 같이 지내면서 많은 정을 부치였는데 인차 갈라지게 되는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랠길 없다며 그도 눈물이 글썽하여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 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하며 노래을 부르는것이였다. 그러자 뻐스안은 또 다시 쓸쓸한 분위기였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내가 “안녕 평양! 잘 있으라 조선!”하고 그의 노래에 대하여 답사를 하자 모두들 같이 “안녕 평양! 잘 있으라 조선!”하며 그에 대한 석별의 인사를 하는였다. 뻐스가 순항공항에 도착하자 모두들 내려 조선의 지도원, 안내원들과 쓸쓸한 심정으로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공항에 들어섰다. 이번 조선관광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고 새로운 인식도 많이 가지여 얻은 수확도 많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 아쉬운 점들이라면 하나는 금강산의 1만 2천봉, 세자하여도 다 셀수 없는 그 아름다운 절경들을 어찌 일일이 다 구경하랴만 그래도 이틀이란 시간이 짧았다는것이고 두번째로는 금수산에 가서 김일성주석의 유용를 참배하자고 하니 지금 김정일위원장의 유용을 함께 모시느라고 지금 한창 공사중이되여 못 들어 간다는것이였다. 세번째로는 조선의 지도원, 안내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중국에 돌아가서 이메일로 보내여 주자고 그들의 이메일 주소을 물었더니 국내에서는 이메일이 통할수 있지만 국외에까지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나 혼자서만이 두고 볼수 밖에 없는것이다. 사진(6) 평양순항공항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다 마치니 조선시간으로 9시였다. 우리는 다시 고려항공기에 앉아 평을 떠나 연길로 날았다. 비행기가 순항공항에서 리륙하여 평양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조선의 아름다운 강산을 내려다 보면서 속으로 “잘있으라 조선이여! 다시 만나자 조선이여!”하며 속으로 되뇌였다. 4박5일, 일생에서의 한 순간이라고 말할수 있지만 그래도 조상의 뼈가 묻히고 넋이 슴배인 고국땅을 밟은 그 기쁨, 조선의 아름다운 강산을 흔상한 그 즐거운 마음, 조선의 지도원과 안내원들과 맺은 혈육의 정, 조선의 력사와 문화를 더 한층 터득한 이번 조선려행은 나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것이다. [전문 끝] 2012년 10월 20일
149    조선관광(8) 댓글:  조회:5891  추천:0  2013-03-02
조선관광(8): 고려 옛 수도 개성   이로서 우리의 판문점 관광은 끝이 났다. 우리는 또 다시 뻐스에 올라 개성으로 향하였다. 나는 개성으로 향하는 뻐스에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 판문점, 비 무장지대를 바라 보면서 남북의 통일만 갈망하고 또 갈망하였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신라시대 후기의 행정단위를 송악군과 개성군으로 개편하면서 개경 또는 송도로 불렀다. 919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개성군과 송악군을 통합하여 개주라 하였으며 960년에는 개경, 995년에는 다시 개성부로 개칭했으며 1394년 조선 태조 리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이 날때에는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었으므로 한국에 속했으나 1953년 정전협정후에는 군사분계선 이북에 있음으로 조선에 귀속되였다. 1954년에는 황해북도에 귀속되였으나 1955년에 개성시와 개봉군, 판문군을 통합하여 개성직할시로 하였고 2003년에는 개성특급시로 하였다. 인구는 2000년 통계로 145만 명이라고 한다. 개성시는 고려시대 행정, 교육, 문화, 상업의 중심지로서 예로부터 고려자기(高丽瓷器)와 고려인삼이 유명하다. 시내에는 개성성터를 비롯하여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남대문, 선죽교 등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많고 력사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개성은 조선의 남쪽 관문으로서 판문점과 련결되어 있으므로 시가지가 잘 정비되어 있고 문화관광도시로 개발되였다. 개성에서의 우리의 관광코스는 김일성동상과 선균관을 참관하는것이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먼저 김일성 동상이 있는데로 갔다. 동상은 개성시 북쪽 산언덕에 세워져 있었는데 광장은 모두 화강암을 깔았으며 대단히 넓었으며 몇십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김일성의 동상인데 동상의 크기도 평양의 만수대에 있는 동상과 비슷하게 보였다. 우리가 갔을 때에 한쌍의 청년남녀가 결혼식을 하면서 동상앞에 와서 생화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아래쪽 산기슭에서는 중로년들이 모여서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날은 바로 조선로동단 창건 67돌 기념일이여서 하루 휴식을 하기에 이렇게 휴식의 한때를 즐긴다는것이였다. 사진(1): 개성 김일성동상   그다음으로는 개성 선균관을 갔는데 성균관은 개성시 부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원래는 고려의 별궁(別宮)인 대명궁이 있던 곳이였는데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으로도 사용되였다가 1089년에 국자감(고려 시대, 국가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을 이르던 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였다. 1304년(충렬왕 30)에 국자감의 이름을 국학으로 바꾸면서 대성전(大成殿)을 짓고,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으로 개명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복원하였다. 바로 현재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2): 고려성균관   총 부지면적이 약 만평방메이고 200여 칸에 달하는 20여 채의 집이 배치되여 있는데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하여 앞 구역과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뒤 구역으로 나눈다. 입구에는 천년 넘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가득하였다. 외삼문(外三门)문으로 들어오면서 정면에 명륜당(정면 5칸, 측면 3칸)이 있고 그 좌우에는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해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东斋)와 서재(西斋)가 각각 27칸이 있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内三门)을 지나 정면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던 대성전(정면 5칸, 측면 3칸)이 있고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던 동무(东庑)와 서무(西庑)가 각각 28칸씩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으며 고려성균관건물은 고려시대 교육기관의 면모를 그래로 보존하고 있고 지금은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으며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이 놓여있다. 박물관에는 그릇과 고려왕씨족보도, 세계 최초의 활자, 청동으로 만든 주전자 와 당시에 쓰던 기타 많은 그릇, 놀이감으로 만든 청동말, 청색의 자기(瓷器)주전자, 일본이 도굴해간 청자단지를 재일 동포들이 사서 다시 기증한 것 등 고려시대의 문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사진(3): 고려박물관의 자기그릇들   어느 관광명소를 가나 기념품상점이 다 있었으며 그렇게 풍성하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공업품, 공예품, 보건품, 특산물, 사탕, 술, 담배들이 다 있었다. 성균관안에도 기념품상점이 있었는데 술, 인삼, 록용, 웅담, 령지버섯 등 여러가지 종류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조선돈과 인민페의 환률은 약 100 : 7정도였다. 하지만 조선돈이 없어도 인민페로 직접 교역이 되여 불편한 점은 없었다. 관광객들은 돌아가면 친척, 친구들에세 기념으로 선물하려고 자기들이 마음에 드는 기념품들을 샀다. [후일계속]
148    조선관광(7) 댓글:  조회:8613  추천:6  2013-02-21
조선관광(7) 판문점(板門店)   10일, 오늘의 관광은 판문점이였다. 오전 8시에 우리는 평양을 떠나 한 갈래의 고속도로를 따라 세시간 넘어 달려 개성에 도착하였는데 평양에서 개성까지의 거리는 160km였고 또 개성에서 판문점까지는 8km였다 판문점은 원래 이름도 없는 자그마한 산촌이였는데 거기에 남북을 오가는 손님들의 편리를 위해 널판자로 만든 주막과 점포가 있었으며 한자로 “板門店”이라는 간판이 있었으며 판문점이란 이름은 이렇게 지어진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의 이름도 들어 못 보던 자그마한 산촌이 조선정전협정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곳으로 되였으며 지금은 국내외 광광명소로도 되고 있다.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가는데 비 무장지대가 있다. 비 무장지대에 이르자 초소가 있었는데 지도원이 내려서 관광통행증을 내 보이자 우리 팀의 세대의 뻐스는 무사히 통과되였다. 판문점 군사분계선까지 가는데 이런곳을 세번 지나야 했다. 어떤사람들은 이런곳을 지날 때마다 긴장감을 느꼈지만 나는 그런 긴장감은 없었다. 비 무장지대에 들어서자 나의 뒤에 앉았던 연길에서 온 한 관광객이 나의 어깨를 다치면서 판문점이란것이 바로 38선인가고 물었다. 이에 나는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에 있고 38선과 군사분계선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하면서 38선과 지금의 군사분계선이 생기게 된 경과에 대하여 해석하여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에 쏘련군이 북으로부터 북위 38도선까지, 미군이 남으로부터 북위 38도선까지 들어가면서 조선반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졌고 보통 그 경계를 38선이라고 하였으며 여기에는 북위 38도선이라는 지리적 개념이 포함되여 있으나 지금의 군사분계선은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당시 량쪽의 군대가 대치상태에 있던 곳을 경계로 하여 군사분계선을 그은 것이기에 지리적 개념이 내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금방 우리가 지나온 개성시도 지금은 북측에 속해 있지만 38선을 경계를 할 때에는 남쪽에 속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것을 모르고 자기는 지금까지 남북경계를 38선이라고 하는가 하였다고 하였다. 비 무장지대 안에는 조선인민군들이 있는 몇채의 단층집들이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집은 전문 관광객들에게 판문점과 군사분계선에 대하여 설명하는 곳이였는데 한 조선인민군 해설원이 우리에게 군사분계선과 비 무장지대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비 무장지대란 남북이 각각 군사분계선에서 2km 지역 내에서는 민간행사와 구제사업을 제외한 어떠한 적대시설이나 적대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여 있고,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는 구간을 말한다고 하였다. 비 무장지대를 완충지대라고 하며 이 안에 들어와서 주의 할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는 벽에는 비 부장지대에 대한 도해(图解)를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조선인민군 해설원이 우리를 데리고 그리 넓지 않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가더니 나무들이 꽉 들어선 곳에 두채의 단층집이 있었는데 한집은 정전협정 담판회의장이고 다른 한집은 정전협정조인장이였다. 정전담판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길옆에는 “정전담판회의장”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기념사진 한장 남기였다. 사진(1): 정전담판회의장   정전담판회의장 안에는 담판회의 석상이 있었는데 담판은 1951년 7월부터 진행되여 2년간 끌어오다가 1953년 7월 27일에야 정전협정이 체결되였다고 한다. 담판과정에 조선인민군측에서는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 지원군측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총 참모장 해방(解方), UN군 측에서는 미군 륙군중장 W.K 해리슨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담판회의장에서 나와 우리는 좀 큰 집으로 갔는데 그 집 문앞에 “정전협정조인장”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사진(2): 정전협정조인장 기념비   정전협정조인장 안은 아주 넓었으며 록색의 모포 (毛布)를 펴놓은 커다란 상이 세개 놓여 있었다. 들어가면서 첫 상우의 유리상자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꽂혀져 있었는데 조선인민군 대표의 자리이고 제일 안쪽 상우의 유리상자 안에는 UN국기가 꽂혀져 있었는데 UN군 측의 자리이고 가운데 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협정서를 교환하는 상이라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10시에 조선측에서는 남일대장, UN군측에서는 W.K 해리슨 중장이 정전협정서와 기타 관련 문서에 조인하고 그날 저녁 10시에 김일성원수는 평양에서, 련합군 사령관 크라크는 한국 문산에서 정전협정서에 조인하고 이튿날 지원군 총사령원 팽덕회는 개성에서 협정서에 조인하였다고 한다. 조선전쟁 “정전협정”의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서명이 있다. 朝鲜人民军最高司令官 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元帅 金日成(签字) 中国人民志愿军司令员 彭德怀(签字) 联合国军总司令美国陆军上将 马克·克拉克(签字) 出席者: 朝鲜人民军与中国人民志愿军代表团首席代表 朝鲜人民军大将 南日(签字) 联合国军代表团首席代表 美国陆军中将 威廉·凯·海立胜(签字) 사진(3): 정전협정조인장   해설을 다 들은 다음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조인석에 앉아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나도 남일장군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기념사진 한장 찍었다. 사진(4): 남일대장의 조석에서   정전협정조인장에서 나와 우리는 뻐스에 앉아 군사분계선 련합안전구로 갔다. 정전후 조한 쌍방은 이곳에 직경이 약 800m의 “련합안전구”구를 앉히고 24채의 건물을 앉히였다고 한다. 북측에서는 “판문각”, “통일각”, 남측에서느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을 앉히여 각기 북과 남의 쌍방 련락기구를 설치하여 대화의 장소로 하고 있다. “련합안전구”의 군사분계선 우에는 낮다란 단층집이 7채가 가지런히 앉아 있는데 가운데 하늘색 나는 세채는 판자집이다. 이 구간의 군사분계선은 너비 30cm 높이 10cm 의 콩크리트 격리대로 되여 있다. 군사분계선의 총 길이는 248km, 1291개의 황색 패말이 있다. . 사진(5): 회담실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사진(6): 군사분계선   가운데 판자집이 바로 쌍방의 회담실이다. 회담실은 대략 40m²되며 한 가운데는 긴 상이 가로 놓여 있는데 록색의 모포가 덮여 있고 상우에는 4대의 마이크가 놓여 있으며 그 상이 바로 군사분계선 우에 놓여 있다. 회담을 할 때에는 각기 이 가로 놓인 상에 마주 앉아서 담판을 진행한다고 한다. 회담을 진행할 때에는 엄숙하게 경계선을 넘지 못하지만 평시에는 이 집안에서만 마음대로 오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그날 그 집안에서 남북경계가 없이 마음대로 자리를 찾아 앉아서 해설원의 해설을 들었다. 사진(7): 회담실   나는 의식적으로 남북분계선을 건너 남쪽에 가 앉았다. 그 분계선을 건너는 순간 텔레비죤 화면에서 본 로무현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건너는 장면이 떠 올랐다. 로무현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은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여 모든 백성들이 이런 경계선이 없이 남북을 마음대로 오갈수 있도록 하려는 그의 념원념을 표달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생각되였다. 사진(8):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로무현대통령   또 그곳의 규정에 의하면 북측에서 관광객이 그 안에 들어왔을 때에는 남측에서 못 들어오고 남측에서 관광객이 들어왔을 때에는 북측에서 못 들어 간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날 우리 관광팀은 남측에서 들어 오기 전에 먼저 들어가느라고 길을 재우쳤던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판문각에 올라 군사분계선과 비 무장지대를 내려다 보았다. 비 무장지대는 60년간 사람의 손이 닿지않은 곳이여서 풀과 나무숲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곳은 각종 동물들의 서식지로 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분계선을 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란 이 사람을 경악하게 하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22만평방키로메터의 그리 크지 않은 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여 우리민족이 이렇게 서로 래왕할수도 없는 리산가족으로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갈라져 살고 있지않는가? 1975년 유엔총회 제 30차 회의에서는 《유엔군사령부》를 해산하고 한국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데 대한 《조선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되지 못하고 한시도 시름을 놓을수 없는 전쟁위험이 존재하여 있다. 내가 언제면 이 분계선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일되여 마음대로 서로 래왕하면서 혈육의정을 나눌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안내원이 인제는 갈 시간이 되였다면서 모두 내려 오라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마음도 무거워졌고 판문각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사진(9): 판문각에서   [후일계속]
147    조선관광(6) 댓글:  조회:11072  추천:1  2013-02-12
조선관광(6) 다시 평양으로   모두들 호텔에 들어가서 자기의 짐들을 챙겨가지고 다시 뻐스에 올랐다. 처녀 안내원은 자기의 집은 여기 온정리에 있기에 곧 중국동포들과 갈라지게 된다면서 눈물이 글썽하여 “잘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여 소리 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하며 노래을 부르는것이였다. 그러자 뻐스안은 매우 쓸쓸한 분위기였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3일간 조선처녀와의 맺은 혈육의정, 곧 갈라지게 될 아쉬운 마음이 한데 뒤엉키면서 서로 서러운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뻐스가 온정리 마을에 이르자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가볍게 손을 저으며 “잘 가십시오 안녕히!” 하며 우리와 석별의 인사를 하며 내리는것이였다. 우리도 “잘 있어요, 다시만나요”하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가지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뻐스가 금강산을 떠나 원산으로 향해 달리였는데 때로는 동해안 해변가를 따라 달리였는데 맑고 푸르른 바다가 끝없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없이 넓은 벌판을 달리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은 논이였다. 농사를 보면 우리 연변의 벼농사처럼 그렇게 굵다란 벼이삭들이 꽉 박아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선 농민들에게 풍작을 가져다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1): 주체농법   그리고 저 멀리 농민들의 주택이 보였다. 농민들의 주택이 내부구조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볼 때 조선의 전통가옥으로서 모양을 보면 지붕, 벽체, 문 모양이 전부 똑 같았다. 지도원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도시든 농촌이든 국가에서 집을 지어 국가의 소유로 되고 입주자는 사용권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집을 사려고 아글타글 돈을 모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농촌에서도 지금 주택개혁을 하여 새로 짓는 집들은통일적으로 2층, 3층로 짓는가고 한다. 저 멀리 보면 그런 층집들이드믄드믄 보였다. 사진(2): 농촌마을의 전경   그리고 때로는 철길옆으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넘기도 하였는데 지도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철길은 원산으로부터 속초까지 이어졌으며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2007년 5월 17일에 경의선, 동해선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동시 시행되였던 것이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2008년 12월 1일부터 남북철도운행이 중단되였다는것이다. 다년간 기차가 다니지 않아 철길을 보니 전부 적갈색으로 녹이 끼여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남북의 혈육을 이어놓고 정을 이어놓으며 경제명맥을 이어놓는 이 철도운행  중단으로 하여 두나라 인민들에게 가져다 주는 심리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 났다. 사진(3): 녹쓴 동해선 철도   뻐스는 두시간을 달려 원산에 도착하였는데 갈때에 들러 저녁을 먹던 해변가에 자리 잡은 송도려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사진(4): 원산 송도원려관   만수대(万寿台) 원산에서 점식식사를 하고 뻐스는 다시 4시간 달려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제일 먼저 만수대(万寿台)로 갔다. 만수대는 평양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김일성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만수대로 올라가면서 관광객들은 길옆에 설치한 꽃가게에서 생화 한묶음 (인민페 20원) 씩 사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동상앞에서 헌화를 하고 숙연히 머리숙여 묵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모두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사진(5): 만수대 동상앞에서   만수대 근처에는 만수대의사당, 조선혁명박물관, 천리마동상, 모란봉극장, 모란봉청년로천극장, 아동백화상점 등 주요 건축물들이 있다. 그중 천리마동상(千里馬銅像) 은 만수대 언덕에 우뚝 세워져 있는 조각상으로서 청동 조각상 높이는 14m, 길이는 16m이며 받침대 높이는 32m, 총높이는 46m이며 1961년4월 15일에 제막하였다. 청동 조각상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편지(높이 1.3m×1m)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 남성 로동자와 벼단을 안은 녀성 농민이 날개를 펼친 천리마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받침대는 화강암 2,500개를 붙여 제작되었다. 조국해방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들의 영웅적 기상을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6): 천리마동상 만경대(萬景臺) 그다음 뻐스는 우리를 싣고 만경대로 향하였다. 만경대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들이 있으며 푸른 소나무와 버드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산봉우리에는 돌로 쌓은 고대의 봉화대가 있으며 봉화대 아래의 벼랑은 대동강까지 깍아내려 산의 모든 경치들을 거울처럼 대동강에 반사되여 만가지 경치를 다 볼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만경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만경대 주봉인 만경봉 정상에는 만경루(万景楼)가 있는데 거기에 올라서면 평양시의 전경에 다 안겨온다. 만경봉 기슭에는 초가집 한채가 있는데 김일성의 증조부때부터 4대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주석도 1912년 4월 15일 바로 이 집에서 태여났으며 동년을 이집에서 보내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중국동북으로 걸어서 구학하러 갔다고 한다. 그뒤 부친이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그는 또 걸어서 고향집으로 왔다고 한다. 김일성장군의 어머니와 동생 역시 혁명의 길에서 일본놈들의 총칼에 학살당하였다. 김일성장군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맞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다시 혁명투쟁의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 뒤 김일성장군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만주의 산천을 누비면서 일본제국주의와 피어린 투쟁을 투쟁을 벌려 드디여 1945년 광복의 그날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 돌아와 군중대회에서 새조선의 탄생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로 고향집에 찾아와 친인들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생가울안에는 살림집, 창고, 외양간 그리고 다락이 있었으며 김일성 일가에서 사용하던 음식그릇, 농구, 가구와 김일성이 쓰던 책상 등 문물과 사진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7): 김일성 생가   집주위에는 그네장, 군함암(军舰岩), 씨름장, 우물 등이 있으며 만경대 생가 기념비도 있다. 생가 부근의 언덕에는 만경대혁명사적관 있는데 거기에느 김일성 일가가 혁명활동에 종사해온 도편과 자료들이 진렬되여 있다. 사진(8): 김일성의 증조부모   사진(9): 김일성의 조부모   사진(10): 김일성과 그의 부모   만경봉 산기슭에는  조선인민군 만경대혁명학원과 만경대 유희장이 있다. 유희장에는 관성렬차, 대관람차, 관성단차, 회전비행기를 비롯한 40여종의 유희시설, 80여종의 전자오락기구들과 보트장, 활쏘기장 등이 있다. 사진(11): 만경대 유희장 개선문(凱旋門) 다음으로 개선문으로 갔다. 개선문(凱旋門)은 1982년에 평양시 모란봉의 개선문 광장에 김일성의 독립운동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개선문은 모란봉구의 모란봉대가와 개선대가가 이어지는 곳에 건축되였는데 이 문을 통하여 두 거리가 이어진다. 개선문은 파리시의 개선문이 모델이 되였는데 높이는 60m, 너비는 52.5m로, 파리에 있는 개선문보다 10m 더 높게 건축되였다. 남쪽 기둥에는 '1925'와 '1945'라는 수자가 새겨져 있는데, '1925'는 김일성이 조국 독립을 위해 고향집을 떠났다는 해인 1925년을, '1945'는 조국이 독립한 해인 1945년을 가리킨다. 개선문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1만500개의 화강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개선문의 남북 량켠의 문미(門楣)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각기 1절과 2절로 새겨져 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자욱 /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 력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자욱 /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사진(12): 개선문   중조우의탑 그다음으로 우리는 개선문을 지나 중조우의탑으로 향하였다. 60여년전, 134만명의 중화의 아들딸들이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들고 조선전장에서 피흘리며 싸웠고 14만에 달하는 지원군 장병들이 조선땅에서 희생되였다고 한다. 우의탑은 조선인민을 도와 피흘려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9년10월 25일에 평양의 명승고적인 모란봉의 북쪽기슭에 세운것이다. 건축지점과 건축조형은 1958년 2월에 조선 방문중이던 주은래총리가 김일성주석과 만난 자리에서 선정하고 심사결정한것이라고 한다. 우의탑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일인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부분은 1025쪽의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한다. 우의탑의 총 부지면적은 12만평방메터이며 높이는 30메터이다. 그 주위에는 소나무, 전나무, 목란 등 1만9천그루의 화목들로 둘러싸여져있다. 사진(13): 중조우의탑   우의탑은 이로부터 한대 또 한대의 중조 두 나라 인민의 마음속에 뿌리 내렸다. 중국의 대표단들과 관광객들의 조선방문에서 우의탑의 참관과 헌화하는것은 거의 필수코스이다. 그리고 참전기념일이 되면 해마다 적어도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이 나서서 기념하고 중요한 해에는 고위급대표단이 나선다. 관광객들은 모두 꽃가게에서 생화를 사들고 조선전장에서 피어린 생명을 바친 수많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으로 렬사비앞에 헌화를 하고 60여명이 집체적으로 세줄로 정연하게 서서 숙연히 세번 허리굽혀 절을 하였다. 중조우의탑은 두층의 기반과 탑신으로 구성되였으며 탑꼭대기에는 붉은 별이 반짝인다. 탑신의 앞에는 《우의탑》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탑기반의 1층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14): 우의탑비문   기반 량측에는 중조우의와 중국인민지원군용사들의 씩씩한 자태와 중조친선을 형상화한 미술작품들이 부각되여 있다 그리고 기반 뒤에는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약 100m²되는 탑중심 대청이다. 대청 중앙의 대리석탁자에는 지원군렬사들의 이름을 적은 인명부(花名冊)가 있고 벽에는 세편의 대형벽화가 있었는데 참전편, 전투편, 건설편으로 되여 있었다. 벽화에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은 황계광과 물에 빠진 조선의 어린이를 구하다가 희생된 라성교의 빛나는 형상이 각별히 눈에 띄였다.  인명부는 열책으로 되여 있는데 총 22700명의 조선전쟁에서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과 적관, 희생된 년월일이 기록되여있었던것이다.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인명부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에서 1958년에 제공한 렬사명단에 의해 편찬한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택동동지의 아들 모안영의 이름도 있었다. 나는 모안영의 이름을 보는 순간 한 나라의 주석으로서 자신의 아들마저 가렬처절한 전쟁마당에 보내였고 모택동 자신도 수천수만의 지원군 렬사부모들 가운데의 일원으로 되였다는 그의 위인이 됨을 다시 한번 새삼스레 느껴보게 되였다. 당시 모안영은 사령부의 로어번역으로, 지금 중국조선족으로서 가장 명망이 높은 조남기는 사령부의 조선어번역으로 한 숙사에서 같이 있었다. 조남기가 모택동주석을 만날 간절한 마음을 표달하자 모안영은 “전쟁이 승리한후 우리 아버지 만나러 함께 가자”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안영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많은 지원군 렬사들과 함께 조선땅에 묻혀져 있고 조남기 혼자 모주석 뵈러 갔다고 한다. 우의탑을 다 돌아보고 나는 중조인민의 피로 맺어진 우의와 피끓는 청춘을 이땅에 묻은 지원군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심정으로 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우의탑의 계단을 내려왔다. 우의탑을 내려와서 우리는 저녁식사하려 고려동포회관으로 향하였다. 여러 식당을 다니면서 먹었지만 아마 이 식당의 채들이 가장 풍성한것 같았다. 흑돼지 고기며, 물고기 튀김이며 하여튼 이름 모를 여러가지 채들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맥주며 기타 음료도 올랐는데 모두 무상이였다. 그러지만 배갈만은 없었다. 다른 관광객들은 무상으로 오른 맥주며 음료며 모두 신나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나누었지만 나와 김욱선생님 그래도 이런 채에 배갈이 좋다며 한병에 인민페로 30원 하는 평양술을 사서 마시였다. 식사가 거의 끝날무렵 조선의 처녀들이 하나씩 엇갈아 마이클를 들고 나와서 노래를 하는가 하면 몇이서 같이 나와 하기도 하였는데 인물도 예뻤거니와 목소리도 그렇게 청아하였다. 이때 나는 외금강호텔, 삼일포, 온정각 등 곳에서의 녀성복무원들의 모습을 련상하여 보면서 정말로 남남북녀라더니 그 말이 틀린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국에 가서의 인상이 보편적으로 남자들은 인물체격이 괞찬았지만 녀성들은 보편적으로 예쁘다하는 인상을 주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예쁜 얼굴에 꾀꼴새 같은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하니 관광객들도 너도 나도 나와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하여 중조인민들의 우정를 더한층 융합시켰다. 김일성광장 저녁식사후 우리는 김일성광장으로 향하였다. 김일성광장은 평양시의 중심구역 대동강변 서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1954년에 건설되었으며 면적은 약 7만 5,000㎡이다. 44만평방메터되는 천안문광장에 비하면 1/6에 거의 해당하지면 그래도 세계에서 16번째로 큰 광장이라고 한다. 광장은 직사각형이며 지면은 화강암으로 포장되였으며 중대한 정치문화활동,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하는 장소이다. 광장서쪽의 건물은 인민대학습당인데 1982년에 개관되였으며 조선의 대표적인 복합문화시설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10동, 10층으로서 34개의 전통조선식의 청기와로 된 지붕으로 되여있으며 총건축면적은 10만 m²로서 집 높이는 64m, 너비는 151m, 길이는 190m이다. 인민대학습당은 5000천개의 좌석에 1만여명을 용납할수 있으며 3천만권의 도서가 있으며 600간의 열람실로 되여 있으며 녹음실, 학습실, 강의실 등 시청각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인민대학습당의 광장을 마주 한 건물은 경축대회, 공중집회, 열병식을 진행할 때에 주석대로 사용되고있다. 사진(15): 김일성광장과 인민대학습당   광장 남쪽에는 조선미술박물관이 있고 북쪽에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있으며 동쪽은 대동강이고 대동강 건너편에 바로 주체사상탑이 있다. 사진(16): 주체사상탑의 야경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 김일성광장을 다 구경하고 나니 저녁 9시가 넘었다. 뻐스는 우리를 싣고 양각도 국제호텔로 향하였는데 지도원은 양각도 국제호텔에 대하여 소개를 하였다. 양각도 국제호텔(羊角島國際饭店)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지금 사용중에 있는 호텔로는 가장 큰 호텔이자 호화스러운 호텔인데 대동강 한가운데 있는 양각도(섬이 양뿔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양각도라고 부른다.)에 위치해 있으며 1995년에 개관했다고 한다. 호텔은 부지면적은 10만m², 총건축면적은 약 9만 m²에 47층으로 되여 있으며 현대화 설비를 갖춘 1000여개의 부동한 등급의 객실이 있고 한다. 사진(17): 양각도 국제호텔   지하에는 오문에서 관리하는 식당, 나이트클럽, 사우나, 도박장이 있다. 1층에는 수영장, 안마실, 사우나 보건중심, 볼링구장, 당구장, 카라OK실, 리발실, 미용실 등이 있다. 2층에는 600명을 용납할수 있는 연회청이 있으며 4개의 식당이 있는데 각기 조선료리, 중국료리, 서양료리 등을 한다. 그리고 회의청, 회담실, 동시통역회의청, 국제통신소(국제우전업무와 전자우편을 처리)가 있으며 다방, 상점, 화페태환처, 서점, 사진관도 있다. 중앙대청에는 수족관이 있는데 철갑상어, 도미 등 이름도 못 들어본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있었다. 47층은 130개 좌석의 원형 회전음식점으로서 음식을 먹으면서 평양시의 전경을 다 구경할수 있다. 밖에는 9000m²의 골프장과 뽀트놀이, 낙시터가 있다. 호텔에 숙소를 잡고 보니 정말 현대화한 설비였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인터넷이 련결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인터넷이 많이 공제되여 있는 모양이였다. 지도원의 소개에서 가장 호기심을 끄는 것은 회전 음식점과 지하도박장이였다. 하여 호텔에 들어 행장을 풀어놓자마자 평양시의 야경을 보려고 인차 승강기를 타고 회전음식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밤 10가 넘은지라 고객들이 얼마없고 띄염 띄염 2,3명씩 앉아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점은 회전하지 않았다. 복무원 처녀와 왜 회전을 하지 않는가고 물으니 손님이 이렇게 적을 때에는 회전를 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벽이 전부 유리로 되여 있기에 빙 돌아 가면서 평양시의 야경을 다 구경할수 있었는데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광장이 가장 뚜렷이 알렸다. 평양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다시 승강기를 타고 지하도박장으로 내려 갔다. 도박장 어구에는 보안일군들이 서 있었는데 도박장 구경을 왔다고 하니 한 사람이 나를 안내하여 도박장 안으로 안내하였다. 도박장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군데 군데 여러곳에서 도박을 노는데 도박을 노는데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도박을 노는 방법을 모르니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하면 돈을 따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잃는지 몰라 구경을 한다 하여도 재미는 없었다. 그리하여 10여분 구경하고 올라와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는 여러가지 책들이 진렬되여 있는데 평양지도와 조선관광을 소개한 책이 나의 눈에 들어 그것을 샀다. [후일계속]
146    동성애자가 결혼할수 있는가? 댓글:  조회:9669  추천:46  2013-02-06
동성애자가 결혼할수 있는가? 청해   최근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두 로인이 “두 령감의 애정”이라는 웨이버 아이디로 인터넷에 그들의 사랑과 근일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공포하고 1월 30일에는 북경평곡(北京平谷)에서 그들의 몇몇 가까운 친구들과 2명의 네티즌의 축복을 받으면서 “혼례식”까지 치러 중국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퇴직교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물을 나르는 사람이다. 경상적으로 교원의 집에 물을 나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생겨 “결혼식”까지 치렀다고 한다 . 그렇다면 동성애자가 결혼할수 있는가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말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여러 사전의 해석으로부터 보면 그 해석의 심도차이가 있을뿐 공통한 점은“결혼”이란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것이다. 다시말하면 결혼 당사자의 일방은 남자이고 다른 일방은 녀자여야 된다는것이다. 둘째로는 우리나라 혼인법으로 보면 혼인법 제 5조에는 “결혼은 반드시 남녀쌍방이 완전 자원이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결혼이란 사전의 해석과 혼인법으로 보면 반드시 결혼당사자의 일방은 남자이고 다른 일방은 녀자여야 한다. 즉 이성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이성관계인 것이 아니라 남남 혹은 녀녀 동성관계이다. 때문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거니와 륜리에도 어긋나는 변태적 행위라고 말할수 있다. 혼인법 제 8조에는 “결혼하려는 남녀쌍방은 반드시 친히 결혼등기기관에 가서 결혼등기를 하여야 한다. 결혼증을 취득하면 곧 부부관계가 확립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혼인기관에서 발급한 결혼증을 취득하지 못하였기에 부부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므로 결혼이라든가 혼인관계라고 말할수 없다. 그러므로 “동성결혼”이란 있을수도 없고 결혼식을 치룰수도 없는것이다. 만약 동성지간에 “결혼”하고 “결혼식”을 치렀다 하더라도 이것은 법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그날 어느 일방의 아들이 와서 음식상까지 번져놓는 일까지 발생하였다고 한다. 지금 국제상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적지 않게 있다. 한 사람이 어떤 형식으로 누구를 사랑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이다. 그렇지만 륜리에 어긋나거나 법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정신병자”라거나 짐승보다 못하다든가 하면서 비방하거나 천시하지 말고 그들이 정확한 인생관, 가치관, 혼인관을 갖도록 잘 인도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가운데서 살지 말고 많은 사람과 감정상에서 융합되도록 하여야 한다.
145    조선관광(5) 댓글:  조회:7330  추천:0  2013-02-04
조선관광(5) 만물상구역   코스: 외금강호텔→ 금강산호텔→ 금강산온천→ 문주담과 곰바위 → 관음폭포→ 육화암→ 만상정(주차장)→ 삼선암(습경대)→ 귀면암→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하늘문→ 천선대 → 안심대→ 후고대→ 천해관→ 망양대 사진(1): 만물상코스   이튿날 아침 뻐스는 만물상 구역으로 향하였다. 뻐스는 갈 지(之)자형으로 굽이를 돌기 시작하자 안내원은 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나는 또 극소형 록음기를 켰다. 안내원은 이 길이 굽이가 106개이고 온정령(해발857m)이라고 하며 온정리에서부터의 오름길이 18km 되는 큰 령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침략자들은 이 령에 길을 빼려고 백성들을 동원하였지만 산세가 가파롭고 험준하여 10년이 넘도록 길을 닦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 당시 이 온정령 너머에 상감령(지도를 보면 온정령 금방 너머는 아니고 그래도 70km는 되는 것 같았다.)이 있는데 조선인민들은 무기와 식량을 수송하기 위해 길닦이에 나서서 두달만에 이 106굽이 령길을 닦아내고 전선지원을 하였다는것이다. 조선전쟁에서 가장 치렬한 전투인 《상감령전투》가 바로 이 령 넘어에서 벌어졌단다. 이런 해설을 듣는 순간 어릴때에 보았던《상감령》영화의 영상들이 한편의 영화필림으로 나의 눈앞에서 돌아갔으며 피끓는 청춘을 이 땅에 바친 황계광, 양근사 등 영웅인물들의 형상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달리는 뻐스안에서 안내원은 차창밖으로 여기 저기 가리키면서 만물상구역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소개하면서 또 그에 깃든 전설도 이야기 하였다. 뻐스는 이 꼬부랑길을 106개의 굽이를 톱아 힘겹게 만상정 주자장까지 올라왔던것이다. 만물상구역은 또 한하계(寒霞溪), 만상계, 만물상으로 나눈다고 한다. 사진(2): 만물상 등산로 한하계(寒霞溪) 온정리에서 계곡을 따라 만물상 구역으로 올라가는데 길 왼쪽로는 온정천이 흐르고 있다. 이 온정천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하관음봉, 중관음봉·상관음봉의 관음련봉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에는 수정봉·문주봉 등이 있다. 온정천의 물줄기를 따라 육화암에서 온정리까지를 ‘한하계’(寒霞溪: 찬 안개가 낀 골짜기라는 뜻이라는데 무엇때문에 안개 '霧'자를 써서 '寒霧溪' 하지 않고 노을 '霞'자를 써서 '寒霞溪'라고 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라고 하는데 골 안의 폭이 넓고 환하게 트여 있어 장쾌한 계곡미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골짜기는 시시각각으로 그 모습이 변하는 계곡미와 아침안개의 산악미를 함께 느끼게 하는 곳이다. 상관음봉(1,227m)을 비로하여 련봉들이 늘어서 키돋음하고 눈꽃바위, 곰바위, 돌문 등 기암들이 자기의 모양을 자랑하는 관음련봉의 산악미는 특이하다.   문주담(文珠潭)과 곰바위 온정천 왼편에 있는 중관음봉 중턱 벼랑 우에는 앞발은 뻗디디고 입은 벌리고 목은 빼들고 아래골짜기를 내려다 보는듯한 자세가 흡사 곰과 비슷하다고 하여 곰바위로 불리우는 기암이 보인다. 곰의 형상을 닮은 바위 하나가 있어 이를 ‘곰바위’라고 부른다. 이 곰바위 아래에 수정같이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소(沼)가 하나 있는데, 구슬같이 아름답고 작은 돌멩이들이 소 밑에 깔려있다고 해서 문주담(文珠潭)이라고 한다. 사진(3): 문주담(文珠潭)   여기에는 이런 흥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비로봉에 살던 곰 한 마리가 봄을 맞아 먹을 것을 찾아 양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곰이 중관음봉 끝을 넘어서려는데 요란한 개울 물 소리가 들려 왔다. 내려다보니 문주담 맑은 물 속에 도토리가 수북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허기진 곰은 맑은 문주담물속에 있는 구슬같이 작은 돌들을 도토리로 여기고 중관음봉에서 단숨에 뛰여내렸다. 그런데 중턱의 절벽우에 떨어져 발이 바위틈에 빠졌다. 움직일수 없게 된 곰은 계속 입을 벌리고 문주담을 내려다 보다가 돌로 굳어졌다는것이다. 관음폭포(觀音瀑布) 문주담을 떠나서 문주교을 건너 계속 가면 중관음봉 골짜기 절벽에 길이 43m, 너비 4m인 관음폭포가 보인다. 갈라진 바위틈에 커다란 돌이 하나 끼어 있고 그 아래로 물이 쏟아지는 폭포의 생김새도 독특하다. 관음폭포는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있어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관음폭포 오른쪽 산줄기에는 부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중관음봉에 있다고 해서 중관음바위라로 부른다. 사진(4) 관음폭포 륙화암(六花岩) 관음폭포를 지나면서부터 골짜기는 구부러지고 숲은 점점 깊어지고 경사도 높아진다. 그 길을 잠시 오르면 한껏 좁아졌던 시야가 한꺼번에 탁 트이면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골짜기며 산봉우리들을 둘러볼 수 있을 만한 편편한 바위가 나온다. 이곳에 륙화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륙화암이 아니라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바위벽이 육화암이다. 금강산, 특히 만물상 구역의 기암들이 모두 그 모양새를 본따 명명된 것과는 달리 륙화암은 전혀 눈꽃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약 1백m에 이를 만큼 긴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그 빛깔이 유난히 희고 험난하다. 그 창백한 바위 절벽이 달빛을 받으면 횐 눈처럼 빛난다고 한다. 눈을 륙화라고 비유한 까닭은 눈의 모양이 륙각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금강산에 살면서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긴 양사언이 달밤에 이곳에서 맞은편 절벽을 보다가 절벽이 마치 횐 눈에 덮인 듯 눈부시게 희다고 해서 륙화암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전한다. 관음련봉(觀音連峯) 올라가면서 골짜기 왼쪽에는 긴 담장처럼 뻗어 있는 높고 험준한 산에 련달아 뻗어있는 세 봉우리와 사람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여 관음보살에 비유하여 각각 상관음봉(1,132m), 중관음봉(892m), 하관음봉(458)이라 하였다. 관음련봉은 산세가 웅장하고 장중하기로 유명하다. 사진(5): 관음련봉(觀音連峰)   륙화암을 마주하여 길 오른쪽의 문주봉 중턱에는 범이 쭈크리고 앉아 내려다 보는듯한 범바위가 보인다. 여기에는 범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만물상에서 살던 범이 먹을것을 찾아 문주봉을 돌아내려오다가 사람들이 달빛어린 금강산의 절경에 감탄하여 시를 읊으며 흥겨워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되였다. 그리고 자기가 금강산에 사는 짐승으로서 저 사람처럼 금강산을 사랑해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곳에서 굳어져 버려 범바위가 되였다고 한다. 만상계(萬象界) 륙화암을 지나면 한하계는 끝나고 만상계로 접어들게 된다. 만상계에서 주로 만날수 있는 풍경은 기기묘묘한 바위와 그에 얽힌 전설들이다. 금강산을 지켜싸운 무사가 철갑투구를 눌러쓰고 모로 서있는듯한 ‘장수바위’, 세 아이들이 앉아있는 것 같은 ‘동자바위’, 쌍초대를 세워놓은듯한 ‘초대바위’, 말새끼가 고개를 쳐들고 주춤거리고 있는 모양을 한 ‘망아지바위’, 어미말이 뛰여가는것처럼 보이는 ‘말바위’ 등의 조각품과 같은 바위들이 수두룩하다. 이 모양들을 련결시켜 꾸민 전설들이 있다. 옛날 3명의 동자가 금강산에 들어와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들은 깊은 밤중에도 촛불로 어둠을 밝히고 글을 읽었는데 금강산에 살던 여러 짐승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불빛을 따라 동자들이 공부하는 곳까지 이끌려왔다. 어린 동자들이 밤을 잊고 공부에 정진하는 것을 본 짐승들은 그들을 방해할까 두려워 제각각 집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그런데 망아지를 데리고 왔던 어미 말은 성미가 급해 내처 달리면서 망아지를 재촉했지만 걸음이 더딘 망아지는 뒤로 처졌고 이들은 그대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동자바위, 촛대바위, 망아지바위, 말바위를 한꺼번에 엮어 만들어진 전설이다. 만상정(萬象亭) 뻐스는 40분 정도 거의 달려 만상정 주차장에 이르렀는데 해발 650m라고 한다. 주차장 바로 우에는 만상정(萬相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내금강, 비로봉, 만물상과 온정령을 오르내리는 중간 길목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고 한다. 만물상 등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부터는 뻐스에서 내려 등산을 해야 했다. 이 일대의 산악미와 계곡미를 종합적으로 볼수 있다. 그옆에는 한번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맑은 샘물 ‘만상천’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고 주변경치를 보면 피로대신 새 힘이 솟는다. 만상정에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계속 따라 오르면 온정령을 넘게된다. 만상정에서 오른쪽 길을 잡아 오르면 만물상의 절경이 펼쳐진다. 만물상(萬物相) 만물상은 특정한 봉우리 아니고 온정령 북쪽 금강산의 오봉산 일대 기암군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층암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봉우리 군들로 이루여져 있다. 세상만물의 모형을 모두 한곳에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만물상(萬物相)이라고 불렀다. 만물상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오봉산 천선대에서 만물상을 굽어보면 천태만상의 돌바위 만물상이 마치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는 듯 한눈에 안겨온다. 오봉산은 해발 1,264m의 5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여기에는 완만한 산세의 석가봉(釋迦峰), 굴곡이 심하고 둥근 모양의 라한봉(羅漢峯), 하늘을 떠받들 듯이 높이 솟은 천주봉(天柱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지봉(勢至峰), 흰 빛깔의 크고 작은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모여있는 천녀봉(天女峰)이 제각기 특색을 지닌 채 늘어 서 있다. 삼선암(三仙岩)과 독선암(獨仙岩) 삼선암은 봉우리에 얹힌 바위의 형상을 따온 이름이 아니라 3개의 봉우리 자체가 3명의 신선처럼 보여 붙여진 것이다. 높이 30m~75m 정도의 세바위가 서로 비슷하면서도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맨 앞의것은 창끝같이 날카롭고 가운데것은 좀 뭉툭하며 맨 뒤의것은 더 둔하게 생겼다. 옛날 하늘나라 4명의 신선이 자주 만물상에 내려와 장기를 두었다. 그런데 한 신선이 너무 얄밉게 훈수를 두다가 미움을 받아 건너편 봉우리로 쫓겨갔다. 세월이 흘러 세 신선은 한 곳에서 바위로 변했는데 이 세바위를 삼선암이라 하고 미움을 받고 쫓겨난 신선은 끝내 혼자 외롭게 세 신선이 장기를 두는 것을 바라보다가 바위로 변하였는데 이것을 독선암이라고 한다.   사진(6): 삼선암   습경대(習景臺) 습경대는 우리 팀의 금강산 관광코스의 제일 마지막 지점이였다. 만물상의 뭇 봉우리들을 한눈에 전망하기 좋은 곳이 바로 삼선암 우에 있는 습경대이다. 삼선암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2∼3분 올라가면 습경대인데 정선대 혹은 만물상 전망대라고도 한다. 이곳에 서면 만물상의 높고 낮은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것에서부터 멀리 펼쳐진 것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듣던 만물상의 험준한 바위 산맥을 직접 보는 순간, 인간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선계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하늘을 향해 뾰죽뾰죽 솟은 날카로운 봉우리, 어느 것 하나 매끈한 것 없이 세로로 섬세한 결을 이루고 있는 화강암 무더기들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 자연의 신비한 힘을 뿜어내고 있다. 우리 팀은 모두 이곳에 집결하였는데 어제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김욱선생님을 모시고 구룡폭포의 관폭정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오늘은 기어이 김선생님네 량주를 모시고 만물상전망대에 까지 올랐다. 우리는 정성대에서 마음껐 만물상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기였다. 사진(7): 만물상전경 귀면암(鬼面岩) 만믈상의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멀지않은 거리에 삼선암 정도 높이의 귀면암이 험악한 귀신 얼굴을 한 채가 우리를 마주 본다. 귀면암(鬼面岩)에는 이런 전설이 있단다. 천하를 유람하기 좋아하는 네 명의 신선이 있었다. 이들은 천하의 이름난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금강산에 이르렀다. 금강산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던 신선들은 드디어 만물상에 이르러 천천히 경치를 감상하면서 천화대에 올랐는데, 마침 그곳에는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풍악을 울리면서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신선들은 선녀들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날이 저물자 선녀들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 때 한 선녀가 신선들 앞에 무릎을 꿇더니 부탁이 있다고 했다. 선녀들이 경치 좋은 만물상에 수시로 와서 노닐고 싶지만 귀신들이 와서 훼방을 놓으니 그 귀신들이 오지 못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신선들은 만물상 계곡 입구에 바위로 커다란 귀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귀면암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험상궂은지 그것을 만든 이후부터는 귀신들이 무서워서 만물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였고 대신에 천화대 쪽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노닐기 때문에 귀신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바위 모양을 하도록 하였다. 모두들 귀면암을 배경으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여 가면 사진기의 샤타를 누르고 있었다. 사진(8): 정선대에서 귀면암을 배경으로   귀면암에서 동북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만물초, 하늘문, 천선대, 천녀화장호, 망양대 칠층암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기암괴석과 봉우리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우리의 관광코스는 여기까지이기에 그외의것은 멀리 바라보면서 맘물상의 전경을 만끽하였다. 김욱선생님도 “어제는 구룡폭포를 보지못하여 유감이였지만 오늘은 만물상의 전경을 다 보았으니 인젠 원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시였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만물상의 전경을 다 감상하고 오던 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뻐스에 앉았다. 뻐스는 또 굽이를 돌면서 우리의 주숙처인 외금강 호텔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아츠랗게 내려다 보이는 것이 마치 비행기를 탄 것 같았다. 뻐스가 굽이를 돌때면 골짜기를 날아 넘는가 하였더니 운전수는 그래도 용케 운전대를 돌려 골짜기를 날지 않고 계속 제길로 다니는것이였다. 굽이를 돌때마다 우리는 조마조마게 가슴을 조이였는데 산기슭으로 내여 와서야 한도의 숨을 쉬면서 인제는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려오면서 굽이를 세여 보니 정말 106개더라고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천하절승의 금강산을 뒤로하면서 외금강호텔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금강산 관광은 끝이 난 셈이다. [후일계속]
144    조선관광(4) 댓글:  조회:7871  추천:0  2013-01-26
조선관광(4) 해금강구역   주창장에 와서 우리는 다시 뻐스를 타고 해금강으로 향하였다. 해금강은 삼일포구역과 해금강구역으로 나뉜다. 해금강으로 가려면 먼저 삼일포구역로 간다. 사진(1): 삼일포와 해금강코스   삼일포(三日浦) 사진(2): 삼일포 관광로   삼일포는 외금강호텔이 있는 온정리에서 12km 거리에 있는 큰 호수로 관동팔경[(강원도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락산사 (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말하며,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넣기도 한다.]의 하나이다. 호수의 둘레는 8km, 깊이는 9~13m이다. 삼일포는 원래는 동해바다에 접한 만(湾)이었는데 남강에서 밀려온 흙과 모래에 만의 입구가 막혀 호수가 되였고, 그 안에 고여있던 바다물은 숫한 세월속에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민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네 화랑들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이 하루만 놀러 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3일을 놀고 갔다고 해서 삼일포라 한다. 또 금강산을 다녀간 시인묵객 중에서 삼일포를 찾지 않은 이 없고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이 없어 가장 많은 시를 낳은 곳이 삼일포라고 한다. 단풍관(丹楓館) 단풍관은 아름다운 삼일포를 배경으로 한 하얀 석조건물로 단풍이 붉게 타는 계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 녀사가 다녀갔던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식당이라고 한다. 단풍관은 절반 륙지에 있었고 절반은 호수우에 여러 개의 콩크리트기둥으로 받쳐 있어 한결 더 경관을 보이였다. 우리는 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그리 풍성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대지고기볶음, 꼬치구이, 생선구이, 감자전, 찐 옥수수 등 여러가지 채들이 올랐으며 봉황맥주도 무상이였다. 나와 김욱선생님은 “이런 채에 그래도 소주가 좋지”하며 평양소주를 한병 인민페로 15원(인민페도 통용되고 있었다.) 주고 사서 마시였다. 소주를 마시고 나니 한결 기분이 더 좋았다. 식사를 하고 단풍관을 돌아보니 2층은 호수안의 섬들과 풍경을 조망하는 전망대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기념품상점도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보니 모두 예뿐 처녀들이 매장에 서서 아주 상냥한 태도로 전시품들을 소개하였다. 이때 나는 “남남북녀”라더니 정말 북쪽의 녀성들이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점에는 솔꽃가루, 령지버섯 등 조선의 특산품들과 약품, 그리고 여러가지 공예품를이 전시되여 있었다. 우리 부부는 상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령지버섯이 마른걸로 한주머니(300그람)에 인민페로 50원하니 그래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 두 주머니 샀다. 단풍관에서 호수를 내다보면 커다란 검은 바위가 보이는데 마치 돌고래가 물 우에 떠 있은것 같다 하여 돌고래바위라고 한다. 사진(3): 단풍관과 돌고래바위   호수 안에는 또 신선들이 춤을 추던 무대라는 무선대(舞仙臺), 네 명의 화랑이 노닐던 정자라는 사선정(四仙亭), 화랑들이 다녀간 흔적인 ‘술랑도 남석행(述郞徒 南石行)’ 이라는 붉은 빛을 발하는 글씨가 적인 돌과 매향비가 있는 단서암(丹書岩), 소나무가 우거진, 누워 있는 소 모양의 와우도(臥牛島)등 4개의 섬과 이름 없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호수주변으로 36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자태가 잔잔한 수면우에 담겨 있다고 할 만큼 호수는 맑고 깨끗하였다.     사진(4): 와우도(臥牛島)   사진(5): 사선정, 단서암, 무선대   그 다음은 해금강으로 가는데 도중에서 련화대, 봉래대, 장군대를 볼수 있다. 단풍관에서 호수가로 해서 걸어서 장군대를 가려면 4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걸어서 호수가를 거닐기도 하고 출렁다리를 건너기도 하면서 장군대로 올라가고 늙은이들은 뻐스에 앉아서 장군대로 갔다. 련화대(蓮花臺) 련화대에는 5개의 큰 바위가 서로 각이한 높이로 동그랗게 모여 섰는데 호수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그것이 련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바위들을 ‘련꽃바위’라고 하며 련꽃바위가 있는 전망대라는 의미에서 련화대라는 이름이 생겼다. 사진(6): 련화대   련화대는 삼일포에서 가장 이름난 전망대이다. 이곳에서는 삼일포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과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사진(7): 련화대와 그 아래의 풍경   봉래대(蓬萊臺)   이 전망대는 16세기의 이름난 시인이며 명필인 양사언(楊士彦 號 蓬萊)이 이곳에 와 공부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봉래대이다. 밋밋한 넓적한 반석으로 되어 있는데 100여 명이 함께 삼일포의 절경을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봉래대 아래에는 양사언이 호수의 절경을 바라보며 공부했다는 ‘봉래굴’이 있다. 봉래대에서 장군대로 가는데는 또 출렁다리가 있다. 사진(8): 봉래대와 출렁다리     장군대(將軍臺) 이 전망대는 1947년 김일성주석과 안해 김정숙이 이곳에 왔다가 혁명을 끝까지 하려 맹세하며 권총으로 과녁의 목표물을 단번에 맞힌것을 기념하여 1974년 9월에 지은 루각인데 장군대 혹은 충성각이라고 한다. 장군대에서는 삼일포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주위 환경에 잘 어울린다. 사진(9): 장군대   해금강(海金剛) 장군대에서 삼일포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보고 뻐스는 우리를 싣고 해금강으로 향하였다. 해금강구역은 삼일포에서 약 8㎞ 떨어진 남강을 따라 이어진다. 뻐스에서 안내원은 우리에게 해금강지역은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비무장지대로서 초소나 특별지역은 사진촬영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한참을 달리니 앞에는 초소가 있었는데 철조망으로 된 대문이 가로 막혔다. 지도원이 내려서 보초를 서는 두 병사와 뭔가를 이야기 하더니 대문을 열어주었다. 해금강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민통선지역이란다. 하루에 한 번씩 해금강관광을 하는 시간에만 열리는 특별한 지역이다. 해금강은 본래 고성군 해금강리 수원단으로부터 남쪽으로 해만물상, 립석, 칠성바위를 거쳐서 남강하구의 대봉섬에 이르는 남북 6km, 동서 2km 내 좁은 범위의 명승지를 말한다. 넓게는 외금강의 동쪽 해안 일대에 펼쳐진 명승 즉 삼일포와 남강하류에서 더 남쪽으로 영랑호, 감호, 화진포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금란굴과 총석정 일대까지도 포함하는 남북 약 30km 구간을 말한다. 해금강에서 우리의 관람은 해만물상 구역이였다. 사진(10): 해금강 관광로   나는 해금강 도대체 얼마나 경치가 아름답길래 ‘바다의 금강’이라 하였을가 하는 호기심도 있었다. 해만물상((海萬物相))은 바다에 솟은 만물의 형상을 가진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경관을 일컬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파도와 비바람의 풍화작용에 오랜 세월 시달리면서 여러가지 기기묘묘한 형상들을 만들어 내였는데, 그중에서도 마치 사공이 배 우에 우뚝 서 있는 듯한 사공바위를 비롯하여 배바위, 동자바위, 서적바위, 사자바위, 고양이바위, 잉어바위, 땅크바위, 초대바위, 얼굴바위, 칠성바위 등의 이름이 붙은 수많은 기암들을 볼 수 있었다. 사진(11): 해금강1 사진(12): 해금강2   사진(13): 해금강3   사진(14): 해금강4   사진(15); 해금강5   해금강에는 바다기슭의 흰 모래사장, 그 뒤에 둘러선 소나무 숲, 물결에 씻기운 절벽, 립석, 푸른 소나무로 덮인 섬바위, 그 우로 날아다니는 바다새 등 바다가의 특수한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안내원은 남쪽을 가리키며 《저 멀리 바위산이 닿는 끝에 건물들이 서있는것이 보이죠? 저곳이 바로 남조선 속초라는 곳입니다. 오늘같이 맑은 날씨에는 여기서 남조선이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어렴푸시 보이는 속초를 바라보며 ‘우리 중국동포들은 그래도 남북을 다 드나들면서 혈육의 정을 나눌수 있지만 조선인민들에게 있어서는 남조선, 한국국민들에게 있어서는 북한, 서로 부모형제, 친 혈육이 갈라져 있고 건너다 보면서도 갈래야 갈수없는 그리움의 땅으로 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오직 통일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 정말 가슴아픈 현실로 느껴지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 났다. 해금강구경을 다 하고 우리는 온정리로 돌아왔다. 온정리에는 외금강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남쪽에 단층집들이 줄느런하게 있었는데 온정각, 면세관, 문화회관, 특산물전시관 등이 있었다. 면세관에는 술류, 담배, 건강식품, 특산물, 공예품 등 물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관광객들은 그래도 특산물에 마음이 끄려 거기에서 여러가지 조선의 특산물들을 샀다. 온정각에는 남북화해와 공동개발에 기여한 공신인 정주영의 다섯째 아들인 전 현대아산룹 정몽헌 회장을 추모하여 세운 커다란 화강암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엔 라고 씌여 있었다. 사진(16): 정몽헌 추모비문   사진(17): 정몽헌추모비   비석 왼쪽으로 하여 좀 뒤에 테두리가 화강암으로 된 장방형의 평토무덥이 있었으며 무덤 앞에는 자그만 하게 “유물안치소”라라고 씌여져 있었는데 거기에다 정몽헌의 일부 유물들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온정리에서의 관광을 끝내니 아직 저녁때는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호텔에 들어가 휴식하고 어떤 사람들은 호텥에서 동북쪽으로 한 1km 정도로 떨어져 있는 금강산 온천으로 모욕하려 갔다. [후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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