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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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어문자에서의 조선족과 한국의 차이 (주청룡) 댓글:  조회:12240  추천:64  2009-01-28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 두음법칙 ‘로인(老人)’을 ‘노인’,‘로(露)천무대’를 ‘노천무대’라 하는 한국말원래의 의미가 상실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주청룡    우리말(한겨레의 말)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은 한자를 받아들여, 자국어 에 고전 중국어계의 어휘를 대량으로 차용한 동아시아지역을 가리킨다. 주로 중국, 조선, 한국, 일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에 속하며 우리말의 명사에서 70%가 한자어에 속한다고 한다.여러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우리 겨레들은 부동한 지역에서 살면서 언어, 문자사용에서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한국에서 말하는 북한)과의 같은 사회주의체제와 정치적 리념으로 하여 조선과 많이 거래를 하면서 조선과 기본상 언어, 문자사용을 통일하여 왔다. 그러나 한중수교후 한국과의 민간교류를 통하여 한국에서 쓰는 언어를 많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의 공식적인 《언어, 문자사용규범》은 한국의 언어, 문자사용과 차이점들이 많다.아래에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 그 차이점들을 비교하여 보자, 1.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을 쓰지만 중국 조선족은 원래 음의 그대로 발음하거나 쓴다. 한국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두음법칙이란 단어의 첫머리가 다른 음으로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례하면 우리말에서 첫소리의 ‘ㄹ’과 중모음(重母音)앞의 ‘ㄴ’이 각각 ‘ㄴ,ㅇ’으로 발음 되는일. 래일(來日)이 내일로, 녀자(女子)가 여자로 되는 따위.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오는 페단:(1)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버들 ‘류’(柳), 도끼 ‘류’(劉) 수풀 ‘림’(林), 들보 ‘량’‘梁’자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불만이 많다. 두음법칙에서 버들 ‘류’,도끼 ‘류’를 모두 ‘유’라고 부르는데 성씨에는 그러할 ‘유’(兪)도 있다. 그러므로 버들 ‘류’, 도끼 ‘류’가 그러할 ‘유’와 혼돈하게 된다. 이외에도 두음법칙으로 하여 수풀 ‘림’과 맡을 ‘임’(任), 모두 ‘임’으로, 들보 ‘량’과 버들 양(楊)을 모두 ‘양’으로 발음하여 ‘林’과 ‘任’, ‘梁’과 ‘楊’이 구별이 안 된다.  한국은 2007년 8월 1일부터 두음법칙으로 하여 다른 음으로 변화되는 李, 柳, 劉. 林, 羅,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자원의 원칙으로 호적등록에서 원래의 한자어의 음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성명권을 존중한 것이라고 본다. (2.)단어의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다.한국에서는 두음법칙으로 하여 ‘로인’(老人)’을 ‘노인’이라고 하는데 ‘로인’이란 한자의 늙을 ‘로’자에 사람 ‘인’자를 써서 늙은이, 또는 늙은 사람이란 뜻인데 ‘노인’이라고 하면 한자어의 뜻이 상실된다. 또 한데 가설한 무대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로천무대’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천무대’라고 한다, 원래의 뜻은 드러날 ‘로’(露)자에 하늘 ‘천’(天)자를 써서 하늘이 들어난 무대란 뜻인데 노천무대라고 하면 단어의 원 의미가 없어진다. 2.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의 인명, 지명을 한자어 발음대로 말하고 쓰는데 한국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의 한자(漢字)음을 병음(?音)화 하고 그것을 영어발음으로 읽는다.  례하면 ‘모택동’(毛澤東)을 ‘ma o ze dong’화 하여 ‘마오쩌둥’, ‘등소평’(鄧小平)을 ‘deng xia o ping’화 하여 ‘덩샤오핑’, ‘호금도’(胡錦濤)를 ‘hu jin ta o’화 하여 ‘후진타오’로, ‘료녕성’(遼寧省)을 ‘랴오닝성’, ‘청도’(靑島)를 ‘칭다오’로 ‘신강’을 (新疆)을 신장으로 쓰고 부른다.3. 한국에서는 한자어도 아닌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어떤 것은 외국어 혹은 외래를 많이 쓰고 있다. 례를 들면‘아내’를 ‘와이프’, ‘열쇠’를 ‘키’,   ‘흰색’을 ‘화이트’, 이외에도 많고도 많다.4. 한국에서는 ‘이사짐’을 ‘이삿짐’으로, ‘오래동안’을 ‘오랫동안’ ‘수도물’을 ‘수돗물’로 쓰고 또 ‘ㅡ하고저’를 ‘ㅡ하고자’로, ‘ㅡ였다’를 ‘ㅡ었다’로 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못쓰게 된 차(廢車)를 ‘페차’로 표기하지만 한국에서는 ‘폐차’로 표기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폐’자를 쓰지 않고 “페’자가 오는 단어는 모두 ‘페’로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우리말에서 ‘페’자가 오는 모든 단어는 ‘폐’로 표기하고 외래어에서만‘페’로 표기한다. 같은 단어에서 발음은 한가지로 하지만 문자표기가 부동하다. 이 외에도 띄여쓰기, 문장부호 달기에서도 차이가 많다. 필자의 견해 (1)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오는 페단으로 하여 조선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두음법칙을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두음법칙을 쓰는 리유는 우리말에서 첫소리의 ‘ㄹ’과 중모음(重母音)앞에 ‘ㄴ’가 오면 발음하기 바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리 한겨레인 조선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ㄹ’과 ‘ㄴ’두음을 어려움 없이 발음하고 있다. 습관상의 문제이지 외국어나 외래어도 순통하게 발음할라니(외국어나 외래어에서는 두음법칙을 쓰지 않고 있다.) 사실 ‘ㄹ’과 ‘ㄴ’는 우리말 우리글이기 때문에 발음이 어려울 것 없다. 두음법칙의 사용은 우리의 발음능력을 퇴화시킨것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다년간 두음법칙으로 발음하여 왔으므로 습관이 되지 않아 두음법칙으로 오는 발음을 한자어의 원 발음대로 하려면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잠시적으로 발음은 두음법칙에 따라 하더라도 문자표기는 한자어음대로 쓰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2) 중국의 인명, 지명의 한자(漢字)음을 병음(?音)화 하고 그것을 영어발음으로 하면 원래의 인명, 지명이 왜곡되여 중국에서 한족도 조선족도 다 알아 못 듣는다. 그래도 한자어 발음대로 하면 조선족들은 알아 들을수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3) 24가지 자모로 이루어진 우리글이 그 표기가 제한되여 외국어나 외래어를 원음대로 표기 할수 없는것이다. 례하면 힘내라는 ‘fighting’을 원 음대로 발음은 할수있으나 우리글의 문자로는 어떻게 하여도 정확히 표기할수없다. 하여 어떤사람들은 ‘파이팅’, 어떤사람들은 ‘화이팅’으로 표기한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음이 왜곡된다. 지금은 중국의 조선족들도 한국나들이를 많이 하면서 한국사회에 습관되여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하면 이제 몇 세대 후에는 우리의 고유어가 점차적으로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우려된다. 외래어를 많이 쓰는 것은 국제화시대에 발맞추기 위한것이라고 하는데 몇가지 외국어 단어를 장악하여 가지고 국제화시대에 발을 맞출수 있겠는가? 우리말의 고유어거나 귀화어(귀화어란 한자어를 포함하여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글이나 말이 오랜세월동안 사용하면서 차용한 글의 原地의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우리글처럼 되어 우리글로 탈바꿈된 글이나 말)가 없는 말은 외국어거나 외래어를 써도 무방하겠지만 우리 겨레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려면 고유어가 있는 단어들은 고유어를 쓰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언젠가는 남북이 통일되여 하나의 통일된 나라, 통일된 민족, 통일된 언어, 문자사용이 있을 날이 오리라고 기대한다.
2    조선족 농촌인구이동 어떻게 볼것인가? (주청룡) 댓글:  조회:4433  추천:151  2007-05-21
조선족 인구이동 어떻게 볼것인가?주청룡지금 조선족들의 출국바람 그리고 대도시와 기타 연해발달지역의 도시진출로 하여 일부 사람들은 우리 조선족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겟는가 하는 우려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필자는 아래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한다. 1. 연변에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된 력사적 배경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보면 주로 세개 단계로 볼수있는데 연변은 주로 첫번 째단계의 사람들이라고 볼수있다. 제1단계: 생계를 위한 이주(19세기 중엽부터 1910년《한일합병》까지) 1860 년대에 조선반도 지역에 련속된 흉년이 들었으며 특히1869년에 엄중한 수재 와 우박피해가 들었고 1870년에 또 엄중한 한재가 들어 주민들의 생활이 극 히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게다가 탐관오리의 략탈과 무거운 세금 때문에 도저히 고향에서 살수 없어 이곳의 농민들은 몰래 강을 건너 간도땅에 와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청나라의 처벌을 두려워 아침에 와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출퇴근형식을 취했다가 점차적으로 봄에 와서 농사를 지어 가을에 량곡을 거두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는 자가 점점 늘어낫고 나중에는 아예 그 지역에 집을 지어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여1883년 조선정부에서는 부득불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북간도 이주 를 허락하였으며 청정부에서도 처음에는 자기네 선조의 발상지를 더럽혔다는 죄명으로 무단 월경자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고 가옥을 불질러 쫓아내기도 하였 지만 날이 갈수록 건너 오는 사람이 늘어 나고 이 지역에 조선인이 많아지자 만 주땅에 만족 이외의 그 어떤 민족도 입주하는것을 금지한다던 금지령을1885년에 취소하고 오히려 두만강이북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의 넓은 지역을 조선이주 민개척지로 정하고 개척민을 모집해서 조선인들을 리용하여 황무지를 일구게 하였 다. 이리하여 함경도의 많은 조선인들이 북간도(두만강 이북) 즉 지금의 연변으로 대량 이주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특히 두만강역 청평벌 일 대와 해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일부 평안도의 농민들도 서 간도(압록강 이북)에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조선족이 간도땅 에 발을 부친 력사는 150년이 거의 된다. 제2단계: 항일을 위한 애국 지사들의 이주(한일합병부터 9.18 사변까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자 조선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잃은 슬픔을 안고 만주와 상해, 광주 등 곳에 들어와 항일 운동을 하였으며 초창기에 만주로 이 주한 항일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통 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리상설, 리동녕, 여준 등이 룡정에 세운 서전서숙(瑞甸瑞塾)을 비롯한 여러 조선족학교들 이 일떠 섰고 1919년 조선의 3.1운동 후에는 많은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감정을 지닌 수많은 조선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무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제 3 단계: 일본의 이민정책에 의한 강제 이주(9.18 사변부터 일본항복까지) 1937년 7.7사변으로 중국과 일본이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 가자 일제는 식량 생산기지를 건설하여 군량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만주 내륙으로 강제이주를 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이때 일제는 만주에 대한 이민 정책을 일본인을 조선 으로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는 환위이민(換位移民)정책을 실시 했다. 하여 조선총독부와 위만주국은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 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켰으며 후에는 내몽골 지역까지지 확대하여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이주 된 조선 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북에서의 조선족의 분포정황을 보면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고 평안북도 대안인 료녕성에는 평안도 사람이 대부분인것은 생계를 위한 월경이주였고 흑룡강성에 전라도나 경상도사람이 많은것은 일제 시기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광복될때 중국의 조선족 인구를 보면 동북과 관내를 합친 총 인구는 216만이 었는데 그 대부분은 동북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약100만에 달하는 조선인들(대부분은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투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일부 강제이주 온 사람들)이 조선반도로 돌아가고1947년 동북 지방의 조선족 인구는 11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새중국이 창건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소수민족 자치제를 실시하여 1952년9 월3일 조선족이 집중된 연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였고 1954년에 처음 으로 제정된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하였다. 2. 연변 농촌 조선족의 현황 (1) 인구 2000년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 192.38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연변에 약 82만명이 살고 있는데 중국 조선족의42.62% 차지하고 전 주 인구의 37.7%를 차지한다. 조선족인구 가운데서 도시와 진(城镇)에 119.25 만 명으로서 61.98%를 차지하며 농촌(乡村) 인구가73.14만명으로서 38.02%를 차지하는데 10년전에 비해 조선족 도시인구가11.78포인트 증가되였다. 농촌처녀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농촌에는 장가들지 못한 40세 이상의 로총각들 이 수두룩 하다. 이런 혼인균형파괴로 하여 농촌에서 어린애들을 보자면 보배줏기 하기보다 더 힘들하다.(통계수자는 아래에《학교와 학생》을 보라.) (2) 농경지와 농경인 개혁개방 이전 집체농사 때에는 많지 않은 농경지를 가지고도 늘 로동력이 모 자란 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기계화와 과학적 영농으로 하여 한 사람이 보통 4~ 5 헥타르의 경작지를 다루다니 농촌에는 많은 로동력이 남아 돈다. 필자의 옛 고향마을도 전에 70여호 되던 마을이 많은 사람들의 도시진출로하여 지금은 20여호밖에 되지 않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경작지를 다 다루고 있으며 아직도 밭이 얼마 있으 면 얼마를 다루겠다고 한다. 화룡시 투도진 룡문촌의 정만금은 25마력과 22 마력 짜리 뜨락락또르 두대를 사가지고 농망기에 도시일군을 고용하여 쓰면서 혼자 서 60헥타르의 경작지를 다루고 있으며 모든 생산비용과 품삯을 제하고도 년 수입 25만원을 올린다고 한다. (3) 학교와 학생 필자가 교육사업을 하던 모 향의 중심중학교만도 지난 세기70년대에는 학 생이 근 1000명에 달하였으며 10개 촌에 소학교는 다 있었고 어떤 촌에는 초중 까지 있었는데 개혁개방후 산아제한 원인도 있겠지만 농촌인구의 도시진출 또 그 로인한 혼인균형파괴로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로 되여 지금은 10개소의 촌소는 전부 페교되고 전 향의 중소학교를 한곳에 집중하였어도 학생이 200명 가량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것도 지난 세기70년대에는 조선족이 다수이고 한족이 소수였 는데 지금은 반대로 조선족이 극 소수라고 한다. 이것은 조선족인구가 도시로 더 많이 진출하였다는것을 설명한다. 편벽한 산간지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룡정시의 백금향에는 중학교는 언녕 페교된지 오래고 이전에는 촌마다 학교가 있었고 학생 이 많을 때에는 400명을 넘던 향 중심소학교는 지금은 학생이 2명밖에 없으며 그 나마 한집의 쌍둥의 형제라고 한다. 그외에 다른 곳를 보더라도 평정소학교에7명, 석정소학교에 5명, 용신소학교에 4명… 이로부터 보아 농촌인구가 대폭적으로 감 소되고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3. 사회발전의 필연적 추세 우리는 사상을 해방하고 문제를 과학적발전관으로 보아여 할것이다. 발달한 나 라일수록 농업인구가 적은것이다. 지난 세기70년대에 벌써 발달한 농업국에서는 농업인구가 전국 총 인구의 5~7%밖에 안되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농촌인구가 도시로 진출하면서 농촌인구가 감소되고 도시인구가 증가되는것은 필연적인 추세 이다. 기계화와 과학적인 영농으로 하여 앞으로는 도시에 거주하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농사를 지을것이고 농촌인구의 감소는 지금보다 퍽 많을것이며 따라서 농촌학교의 페교는 필연적인것으로 될것이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농촌학교의 페교 로 하여 특히는 조선족학교의 페교로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가슴 아파 하지만 이 것은 시대의 발전추세로서 필연적인것이다.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를 고려하지 않고 낡은 관념을 고집하고 땅을 아쉬 워서 제한된 농경지에서 여러 세대가 모두 함께 농사를 짔는다면 너도 나도 다 잘 살지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상을 해방하고 새로운관념을 수립하여 사회발전의 수요에 따라야 한다. 4. 농민들의 치부의 길 지금 농민들은《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입은것 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농사 지어서는 자식을 공부 못 시킨다.》,《좀 더 잘 살려면 그래도 밖에 나가야한다.》 고 말하는데 이는 농민들의 진실한 말이다. 그러므로 소농경제의식에서 벗어나 과학적발전관으로 새농촌건설을 하여 치부 의 경로를 찾아야 한다 (1) 농업기계화와 과학적영농을 하여 적은 로력으로 다면적의 경작지를 다루 어 인당 농업수입을 높여야 한다. (2.《연변 농촌 조선족의 현황》의《농경지 와 농 경인》에서 언급한것과 같음) (2) 당지우세를 발휘하여 수출형농업으로 명브랜드를 창출하여 국내외 시장에 진출시켜야 한다. 연변에는 위만주국시기 강덕황제에게 올리 바치여 어곡미로 불리웠던 하천 평벌 어곡전의 입쌀과 같은 유기농업입쌀, 그리고 인삼, 록용, 사과배, 검정귀버섯, 송이버섯, 연변황소 등은 모두 연변의 특산이다. 이런 농산물과 특산품을 잘 가공, 포장하여 명브랜드로 창출시켜 국내외 시장에 진출시켜 높은 경제적 효익을 보는 것이다. (례하면 화룡시 동성진에서는 오리 유기농업법을 하여 《해란강》표 유기 입쌀을 명부랜드로, 룡정시 덕신향의 김영호는 당지에 잡곡 이 많이 나는 우세를 리용하여 잡곡을 가공하여 명부랜드로 하고 이외에도 왕청에는 검정귀버섯, 연길시 소영진에서는 양파재배 등등 명부랜등로 하여 시장에 진출시키는것.) 이외에도 생 태농업, 관광농업, 고기술과학영농 등으로써 새농촌건설을 추진하는것이다. (3)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 공업으로 농업을 이끄는것은 공장도 잘 되고 농업도 잘되는 이중 리득인것이 다. 례를 들면 연길담배공장을 확건하므로 하여 그만큼 화건종담배와 양건종담배가 많이 수요되므로 그에 따라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수 있는것, 룡정의 화도닭고 기가공공장을 건설하므로하여 농민들을 닭사양업으로 치부할수 있겠끔 하느것, 아 마방직공장으로 농민들의 아마생산 수입을 높이는것 등이다. (4) 향진(혹은 촌)기업을 잘 꾸리여 공업화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이다. 강소성 강음시 화서촌의 경험은 전 촌의 제한된 경작지를 30여명의 감농군들 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확대하여 그외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킨것이 다. 촌서기 오인보는 화서촌이 부유하여지자 주변의 16개 촌을 화서에 합병시켜 공동치부하여 촌민들의 년 평균 수입을 6.5만원에 달하게 하였고 나이 많은 농민 들은 달마다 1000여원의 퇴직휴양금을 받을수 있게 혀였으며 몇천세대의 촌민들 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고 대부분 촌민들이 자가용차와 별장을 갖고 있으므 로 많은 대학생들이 이 촌에 몰려 들고 외지에 시집가는 처녀는 없고 시집 오는 며 느리와 장가드는 사위들이 날로 늘어나니 인구가 자연히 증장하게 된다. 새로 들어 오는 사람은 대부분 학력이 대학이상의 연구생이거나 귀국류학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여1500여명 인구를 가지고있던 소화서가 3만여명 인구를 가진 소도시 —대화서 촌으로 건설한것이다. 하여 농업소촌으로부터 공업강촌으로, 농민들은 로동자로, 촌락은 도시로 변하게 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하자면 분산된 거주와 로 력으로는 될수 없으므로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고있는 곳을 선택하여 공업이 일떠 선 집중촌건 설을 하여야 한다. (5) 출국로무송출은 농촌잉여로력배치의 중요한 경로이다. 출국로무송출은 백성들이 짧은 시간내에 빈곤에서 해탈되고 치부할수 있는 선택이다. 지난해 연변에서는 해외 로무수입이 10.6억딸라를 초과하여 주 재정 수입의 2배를 넘었 다고 한다. 이가운데서 절반이상은 농민들의 로무수입 이라 고한다. 만약 출국바람이 불지 않아더라면 이만한 외화가 우리 연변으로 들어올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조선족들이 특히는 농민들이 현대화한 아빠트에서 현대화 한 문화생활을 할수있겠는가? 우리 조선족들의 해외로무수입은 주 경제발전 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있다. 이로하여 연변의 GNP는 전성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6) 도시진출도 농촌잉여로력배치의 또 하나의 중요한 경로이다. 지금 대중도시에서 보면 개혁, 개방전에 볼수 없던 농민인부군체들을 수두룩히 볼수있다. 이는 농촌잉여로력이 대중도시에로 대거 진출하였다는것을 알수있다. 대 도시 혹은 연해도시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막벌이 로동을 하지않고 업무원이나 관리인원으로 일하면서도 다른 인부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현재 농촌에 잉여로력이 많은 상황에서 출국로무로 나갈수 있는 사람은 나가 고 대도시로, 연해도시로 진출할수 있는 사람은 진출 하라는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조선족공동체해체위기에 우려를 가지는분들은 그닥 접수되지 않 을수도 있다. 출국한 사람가운데 일부 비 도덕적인 사람들로 하여 혼인과 가정의 파괴도 있고 결손자녀가 있게되는 페단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점가운데의 단점이라 하겠다. 쉬파리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근다면 한평생 장을 먹을수 없지 않는가? 한국정부에서 우리 조선족들에 대하여 방문취업제 범위를 많이 넓히고 중국에서의 한국기업들에서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막로동을 시키지만 우리 동포들 에게는 관리인원으로 많이 쓴다는것도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국내 연해도시진 출에로의 우세가 아니겠는가? 이런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곳이면 떠나라는것이다. 다 떠나면 누가 농사를 짓겟는가 하는 사람도 있는데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경작지가 더 차려지기 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입도 그만큼 높아 가므로 나중에 떠난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의 수입이 평형을 이룰 때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는 떠나지 않는다. (우 에서 말한 정만금처럼) 이것은 경제철학이다. 5. 조선족공동체해체의 방지대책 (1) 향진(혹은 촌)기업을 잘 꾸리여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이다. (우에서 례를 든 화서촌처럼) (2)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4.《농민들의 치부의 길》의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에서 언급한것과 같음) (3) 출국하였거나 대도시 혹은 연해도시에 진출한 사람들이 돌아 와 새로운 창업을 하는것이다. 우리 주의 출국로무일군중의 절반 이상은 농민들이다. 이들중 적지않은 농민 들은 출국하여 많은 돈을 벌고 거기에서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배워가지고 돌아와 연길시나 기타 현시의 도회지에서 창업을 하면서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 들이 적지 않다. 례를 들면 한국은 모두 조선족이므로 음식습관과 문화가 우리 연변과 같은 점이 매우 많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 기회에 료리기술과 음식문화를 배워가지고 연변에 돌아와 한식관을 꾸리는 사람 들을 볼수있다. 그외에도 한국에서 일하면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연변에 돌아와 창 업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출국하였거나 연해도시에 진출한 절때 대부분 조선족들은 돈을 번 다음 조선 족집거지인 연변에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며 살고 있거나 또 그렇게 하려하고 있다. 이 몇년래 연길시부동산업 및 제3산업이 활발하게 발전할수 있은것은 귀국 로무인원들의 투자와 갈라 놓을수 없다. (4) 신흥공업집중구를 건설하는것이다. 공업으로 우리 주를 부강하게 하는것은 연변진흥행정의 근본적 경로이다. 연 변의 진흥행정은 공업화의 행정에 달렸다. 도시화는 연변진흥의 관건적 조치이다. 지금 우리 주에서 연룡도 경제일체화, 구역일체화를 하여 연길을 길림성의 동 부 중점도시로 건설하면서 많은 공업집중구가 형성되면 농촌인구가 이런 공업구 에 들어 올수 있으므로 이것도 조선족 공동체의 해체를 해결하는 하나의 조치라고 할 수있다. (5) 연성환경건설을 하는것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조선족집중지인 연변에서 살려고 한다. 연길을 경제가 발달한 길림성의 동부중점도시로 변혁시키고 연성환경건설을 잘하여 봉황이 오동나무숲으로 날아들게 한다면 외지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조 선족 기술일군들이 연변으로 돌아와 연변진흥에 기여할수 있고 연변에서 간 대 학생들과 석사, 박사학위를 딴 류학생들이 우리 연변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의바지 할것이라고 믿는다. 채성룡이 바로 이런 사람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연변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대도시에 들어가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모교에 와서 석사 공부를 마친다음 2004년3월에 도문시 장안진 벽수촌에 자리잡고 경작지 15헥타 르, 림지 1헥타르를 임대맡고 기계화농사를 함과 동시에 처음 몇 마리의 소로부터 인젠 50여마리의 소를 기르면서 목축업도 크게 벌리고 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배 운 지식을 가지고 전 촌의 촌민들을 이끌고 공동치부하고있다. (6) 코리안타운이 서는 곳마다 조선족학교를 세우는것이다. 지금 북경, 심양과 연해지구의 대도시들에 코리아타운이 일어 선것도 우리 조 선족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에로의 진입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디에 코리아 타운이 서면 어디에 조선족 소학교를 세울수 있는것이다. 청도의 서 원장(西元庄)소학교가 이면에서 모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이러면 우리의 후대들이 민족 언어와 문자를 잊어버릴 우려도 없거니와 한족애들보다 한가지 언 어, 문자를 더 장악한 우세를 갖고 있을수있다. 우리 조선족들이 출국 혹은 도시에 로의 진출로 하여 우리 주 농촌을 보면 한족인구가 증가되고 조선족인구가 감소 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종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인식이 앞서고 더 진보적이라는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이전에 어떤 민족은 땅을 농민의 명맥이라고 자식들을 공부도 채시키지 않고 농사일을 시켰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는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속담이있다. 이 말의 뜻인즉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면서라도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킨다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후대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한 꿈이였으며 우리들에 대한 기대 였다. 이렇게 하였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쪽박차고 두망강을 건너와 땅을 일구어 삶 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은 그 후대들이 국가 공무원이나 문화, 교육, 과학, 위생 등 지식분야에서 크나 큰 활약을 하고있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정신이 없었더라면 우리 조선족들은 농촌의 소농경제울타리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을것이다. 떠날수 있는자는 모두 떠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돈도 벌고 선진적문화도 배우 고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여 고향건설을 한다면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해체되지 않을뿐더러 더 선진적인 민족공동체를 형성할수 있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렇 게 하면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드는 혼인균형파괴형상도 해결할수 있다고 본다. 물론 목전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류동이 있으나 이것은 그 래도 극 소수라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농촌잉여로력이거나 도시의 무직업인원은 출국하든 대도시와 연해 발달지역의 도시에 진출하든 돈을 많이 벌수 있는곳이면 떠나서 돈을 많이 벌고 오라는것이다. 그러면 그 본인도 잘 살수 있을 뿐만아이라 우리 주의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수있다. 떠나되 우리가 다루던 농경지만은 타지방의 사람들에게 양도 하지 말고(타지방 사람들에게 양도하면 집도 쉽게 처리할수 있고 농경지도 좀 높 은 값으로 양도 할수 있겠지만 한고향에서 같이 살던 정을 봐서라도 그리고 외지 에 갔다가도 고향생각이 나면 다시 본 고장으로 되돌아와 살수도 있지 않는가?) 촌민위원회의 동의를 걸쳐 남아있는 자지방의 농민들에게 양도하면 떠난 사람도 잘 살수있고 남아있는 사람도 잘 살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터전도 지킬수 있지 않 는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 조선족의 아름다운 미래를 펼쳐보는 마음이다.
1    학부모위원회 옳바른 역할 해야 (주청룡) 댓글:  조회:7188  추천:150  2007-04-11
학부모위원회 옳바른 역할 해야주청룡학부모위원회는 학교, 사회, 가정 3결합 교육련락망의 한 부분이고 학부모회의의 상설기구이며 민주적으로 학교를 꾸리는 중요한 형식의 하나로서 보편적으로 학급마다 (일부 학교들에서는 학교학부모위원회,학년학부모위원회,학급학부모위원회를 건립하고있다.) 학부모위원회를 건립하고있다. 학부모위원회 취지는 학교의 관리를 강화하고 학교교육, 사회교육, 가정교육을 유기적으로 결부하여 서로 협조하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덕,지,체,미,로가 전면 발전하는 교육방침을 견지하고 전체학부모들을 단결하며 학부모가 학교의 교육,교수 사업에 참여하고 감독하는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며 수시로 학부모를 대표하여 학교에 의견,건의,요구를 제기하여 학교교육개혁을 추진하고 교수질을 제고하는데 동참하는것이다. 전 주적으로 중소학교들에서 학부모위원회를 건립하여 학교,사회와 련계를 하고 학교교육을 위하여 많은 좋은 일들을 하여 학교,사회,학부모들로부터 많은 절찬을 받고있다. 반면에 일부 조선족학교의 학부모위원회에서는 그 역할을 잘 발휘하지 못하여 학교와 사회의 불만을 자아내고있다. 그 주요한 표현들로는 다음과 같다. 일부 학부모위원회의 위원들은 그 자체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모르고 사업하기에 본인들은 매우 수고를 하지만 사업효과에 대하여서는 긍정을 받지 못한다. 매번 학부모회의를 한 뒤끝에는 담임,과임을 포함한 여러 교원들을 모시고 식당,노래방으로 가는것은 규례로 되고있는데 이런 행위는 사회의 질책을 받고있으며 <<저런 돈으로 그 학급의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다면 얼마나 빛이 나겠는가?>>하며 뒤공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학부모위원회에서는 경제적,물질적으로 교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역할만 한다. 운동대회요,들놀이요,교원절이요,설명절이요,졸업식이요,방학이요 하며 아무튼 수금명목이 많다. 때문에 이런 학부모위원회를 사회에서는 수금위원회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생활이 곤난한 일부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하여가는 현상들도 있다. 일부 소학교들에서는 들놀이거나 교내 운동대회를 조직하면 학부모위원회에서 나서고 학부모들이 나서서 열을 올리는통에 교내 학생들의 활동의미를 떠나고있다. 어느 부문에서 학교로 위생검사를 오거나 개학 혹은 방학이 되면 소학교의 일부 학부모위원회에서는 학부모들을 동원하여 대청소를 하고있는데 그들의 동기는 리해를 할수 있으나 이것은 학생들에 대한 고생교육과 자립의식 양성에서는 상반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학부모위원회의 사업이 사회의 질책을 받지 않고 지지와 옹호를 받자면 각 학교들에서도 학부모위원회의 규약을 제정하여 학부모위원회의 사업을 정규적으로 진행하여 학교교육,사회교육,가정교육이 유기적인 련계를 가지게 해야 한다고 본다. 학급마다 새로 학부모위원회를 선거할 때 먼저 그 학교 학부모위원회의 규약을 학습하여 학부모들이 모두 그 규약을 알게 하여야 하며 새로 당선된 학부모위원회 위원들도 자기들의 사명을 알게 해야 한다. 다년간의 교육사업의 경험으로 보면 학부모위원회의 위원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1. 학교교육사업에 참여하여 학교,사회,가정 교육의 일체화를 실현하여야 한다.2. 학교 교육사업의 현상태를 료해하고 학교의 교육과 교수 사업에 대하여 수시로 의견,건의,요구를 제기하여야 한다.3. 적극적인 요소(인력,물력,재력)를 동원하고 쟁취하여 학교운영조건을 개선하는데 지원을 하여야 한다.4. 학생들의 건전하지 못한 행위(싸움,음주,련애 혹은 황색소설,록화를 보는것)거나 고상한 행위를 발견하면 제때에 학교측과 련계하여 교   육조치를 대거나 표창하여야 한다.5. 학생과 학생지간,학생과 교원지간,학부모와 교원지간에 분규가 있을 때에 중재를 한다.6. 학부모와 학교사이에서 교량작용을 하며 가정교육면의 성공적인 경험과 사례들을 수집하여 교류를 진행한다.7. 학급의 결손자녀 학생들의 심리,생활 면의 곤난한 점들을 료해하고 해결하기에 힘써야 한다.8. 과외교육보도소를 건립하고 훌륭한 과외보도원을 초빙하여 법제교육을 진행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법을 알고 법을 지키도록 하여 애국주의교양을 진행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정확한 조국관,력사관,민족관,향토관을 수립하도록 하여야 한다. 학부모위원회 사업이 전체 학부모와 학교, 사회의 옹호를 받는가 아니면 질책을 받는가 하는것은 학부모위원회의 역학을 어떻게 잘 발휘하는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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