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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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8) 댓글:  조회:10006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8) 주청룡 공자묘에서 다시 벽하사까지 내려와서 동쪽으로 좀 가면 해돋이를 본다는 일 관봉(日觀峰)이 있다. 일관봉으로 가는 길 왼쪽에 雄峙天東(웅치천동, 즉 떳떳하 게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다 란 뜻이겠다.)란 비석과 함께 孔子小天下處 란 비석이 있었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登泰山而小天下(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한데 대하여 지금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는 거의 비슷하였다. 즉 공자가 당시 자기의 사상과 포부를 세상에 떨쳐 보이고 싶었지만 그것을 받아줄 군왕이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태산에 올라서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하였단다. 즉 너희들이 권력으로 천하를 지배하지만 내 보기에는 그저 고만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군왕을 비하하며 자신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공자소천하(孔子小天下處) 이곳에서 동쪽으로 좀 더 가면 일관봉이며 일관봉에는 태산기상관측소, 8.1호텔, 일관봉호텔이 있었다. 일관봉(日觀峰) 일관봉에 있는 태산기상관측소 일관봉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망망대해였다. 즉 구름이 태산의 중턱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일관봉에서 내려다 본 운해(雲海) 일관봉에서 태산기상관측소, 태산의 운해까지 구경하고 나니 해님이 옥황정 서쪽에서 얼굴은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좀 지나 해가 구름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서쪽하늘이 여러가지 색갈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카메라를 들고 이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닮았다. 저녁노을에 비낀 옥황정과 송신탑 다음호에 계속
22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7) 댓글:  조회:10163  추천:23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7) 주청룡 태산이 높다하는것은 그의 해발고도가 높아서 높다는것이 아니다. 태산의 주봉 인 옥황정의 해발고도는 1,524m 이지만 장백산주봉인 백두봉의 해발고도는 2,749m 로서 태산의 해발고도보다 1,225m나 더 높다. 장백산은 절대고도는 높지만 상대고도가 태산에 비해 그리 높지 않기에 중국 동북과 조선반도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지만 우리의 시각으로는 매우 높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예로부터 무엇을 높이에 비길때 태산에 비하지 장백산에 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산은 해발50m이하의 화북 평원에서 해발 1,524m 의 높이로 우뚝솟아 절대고도는 높지 않지만 상대고도가 높기에 아주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옥황전 서북쪽에는 송신탑과 방송국 호텔이 있었다.     방송국호텔(電臺賓館)   정상일대와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호텔과 상가들 정상 옥황정 바로 밑에 공등암(孔登岩)이란 석각이 있다. 공자가 태산 정상을 오른 것을 기념한 표지석이다.   공등암(孔登岩) 옥황전 바로 밑에는 또 공자묘(孔子廟)가 있었다. 우리는 옥황정에서 천하절승경 개를 마음껏 흔상한다음 내려오면서 공자묘를 들러 보았다. 공자묘 입구에는 “공자묘”라고 쓴 커다란 패방(牌坊)이 있었다 .공자묘 패방(孔子廟牌坊) 패방에 들어서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공자묘이다. 공자묘(孔子廟) 묘안에는 공자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다.   공자소상(孔子塑像) 다음호에 계속
21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6) 댓글:  조회:10852  추천:26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6)                      주청룡 6536개의 돌층계를 톱아 드디여 태산의 극정 옥황정(玉皇頂)에 올랐다. 중국 력대의 제왕들이 봉신(封神)했다는 곳이다. 옥황정은 태산의 주봉인데 도교의 옥황상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정상에 옥황묘가 있다하여 이름을 옥황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태산의 극정에 있는 옥황전(極頂玉皇殿) 사당 중앙에는 옥황대제의 동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며 모든 것이 자의의 뜻대로 되여 줄것을 빌었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왼쪽엔 관음보살, 오른쪽엔 재물을 부르는 재신(財神)을 모시고 있었다.   옥황대제(玉皇大帝)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재신(財神) 정원에는 泰山極頂(태산극정) 1545米라고 새겨진 표지석(標識石)이 있었다. 신 화사전이나 지금의 중국지도에는 모두 태산의 해발고도가 1524 m로 되여 있는데 표지석의 1545 m는 어느 때에 측량한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의 측량수준으로 1545 m였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태산의 극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구름과 뭇 산봉우리들이 발 밑에 있었고 소박한 감정으로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이 시각 가습 뿌듯이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만 높다 하더라.” 란 시구를 다시 한번 읊었다. 오악독존의 절정에 오른 그 마음 어찌 흐뭇하지 않으랴. 그 흐뭇한 마음의 표현을 “不到长城 非好汉”(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란 모택동의 시구로써 하늘 높이웨치고 또 “不登泰山 非好汉!” “태산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 하며 하늘 높이 웨치고 또 웨치였다. 옥황전(玉皇殿) 1545m 극정석 주위에는 붉은 리본들이 매여 있었는데 온 가족에 복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고 헤아릴수 없는 자물쇠들이 잠겨 있는것은 옥황상제에 빈 복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말라는 뜻이란다. 붉은 리본을 매고 누른 자물쇠를 잠그어 놓은것이 이곳뿐만 아니라 태산의 모든 사당에 다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온 가족에 복을 가져온다는 붉은 리본 다음호에 계속
20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5) 댓글:  조회:10768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5)  주청룡 천가를 거닐면서 보면 상가들이 많거니와 여러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이 남겨 놓은 글들이 많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주은래 동지의 부인이며 생전 전국정협상회의 주석 등영초(鄧颕超) 동지가 80고령에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 (태산에 올라 조국강산 보니 장려하여라!)란 시구도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이 시구를 보면서 당시 등영초 동지의 심정이 태산에 올라 조국의 강산을 내려다 보니 중국 혁명의 성공에 흡족하는 듯한 심정이 아니였게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도 그런 마음에서 그 시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등영초동지의 시구 천가의 끝쪽에는 중국고대문화의 대표로 볼 수 있는 고대 건축 군을 볼 수 있는 데 이것이 碧霞祠이다. 벽하사에 오르는 유람객들 벽하사(碧霞祠) 벽하사는 옥황상제의 딸이자 태산의 녀신 벽하원군(碧霞元君: 도가의 학설에는 남자가 신선이 되면 ‘眞人’이라 하고, 여자가 신선이 되면 ‘元君’이라 한다.) 을 모시는 사원으로서 이 녀신은 태산을 지배하는 태산할머니라고도 한다. 태산할머니께 아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하거나 사업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하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 지는데 소원이 이루어 지면 그것을 보답해야 한다고 한다. 보답하는 방법은 태산에 나무를 심거나 사당을 증축하라고 기금을 하거나 간판을 선물하거나 향을 태우며 제를 지내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정성을 다하여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리념으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은 벽하원군에게 마음속 깊은 곳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벽하원군(碧霞元君) 벽하사를 나와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 절벽을 볼수 있다. 절벽의 이름은 대관봉(大观峰)으로 각 시대별로 조성된 석각 비문이 있다. 가장 유명한 석각비문은 세로 12.3 m 가로 5.3 m의 바위에 한 행에 51자씩 24행에 총 1008자가 새겨져 있는 당마애(唐磨崖: 당마애란 당나라때 갈아 만든 절벽이라는 뜻으로 리해된다.)라고 하는데 당나라 현종이 태산에서 봉선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당마애(唐磨崖) 당마애에서 태산의 정상인 옥황봉까지 도보로 몇분 거리에 불과한데 극정에 거의 오를 때에 五岳独尊(오악독존)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오악은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동악, 산동성의 태산(泰山1,524m), 서악, 섬서성의 화산(華山 2,160m), 남악, 호남성의 형산(衡山1,290m), 북악, 산서성 항산(恒山 2,052m), 중악 하남성의 숭산(嵩山 1,512m)을 말한다. 오악독존은 오악 중 태산이 최고라는 의미로 된다.   오악독존(五嶽獨尊) 다음호에 계속
1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4) 댓글:  조회:9783  추천:20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4)  주청룡 오대부송 북쪽에는 오송정(五松亭)이 있는데 정자 앞에 오대부송이 있는것으로 하여 오송정이라고 한다. 오송정(五松亭) 오송정을 지나면 태산의 등산로에서 제일 험준한 구간이 18반(十八盤)이다. 이 구간은 0.8km의 거리이지만 수직 높이는 400 m이고 1600여개의 돌계단으로 되였으며 량옆에는 손잡이 란간이 있었고 경사도는 70~80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정말 사다리를 놓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에 조선시대의 문신(文臣)이며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 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 뫼 만 높다 하더라”란 시구를 읊고 또 읊으면서 이 가파로운 돌층계를 한층 한층 톱아 올랐다. 이 시구는 우리에게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하늘 아래에 있는 산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을 기어이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씩 톱아 올라간다면 틀림없이 절정에 올라가 세상을 굽어보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하였다. 십팔반(十八盤)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여 남천문에 이르렀다. 남천문은 일천문, 중천문에 이어 삼천문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1,460메터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중천문에서 오른 케이블카의 종점인 월관봉(月觀峰)에서 온 유람객, 북천문(北天門)으로 오른 유람객, 돌층계를 따라 올라온 유람객들이 합류하는 곳이다.   여러 갈래로 올라 온 등산객들이 남천문에서 합류하다 남천문에 오르면 험한 지세는 다 오르고 여기로부터는 평탄한 길도 있고 층계가 있어도 많지 않거니와 가파롭지도 않았다.   남천문 남천문에서 동쪽으로 벽하사(碧霞祠)까지 0.6 km정도의 구간은 넓고 평탄한 곳인데 이구간을 천가(天街)가라고 한다. 즉 하늘거리 또는 하늘시가(市街)라는 뜻이겠다. 천가(天街)   천가에 들어서면 호텔, 상가(商家)들이 줄줄이 늘어섰는데 여러가지 공예품, 려행기념품들이 진렬되여 있었고 크고 작은 향(香)도 있었는데 어떤것은 삽자루만큼 큰것도 있었다.     천가에 줄줄이 늘어선 상가들 다음호에 계속
18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3) 댓글:  조회:9910  추천:21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3)                      주청룡 중천문에서 800 m쯤 걷다 보면 운보교(云步桥)가 나온다. 이 돌다리는 길이가 12.2m, 넓이가 4.35m, 높이가 6.1m로서 깊은 개울을 동서로 걸쳐져 있다. 안개가 자욱한 날 산우에서 바라보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마치 구름 우로 걷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운교보(雲步橋)   태산에서는 물을 보기 힘든데 계곡을 따라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운보교 북쪽에서 몇 갈래의 가느다란 물줄기의 폭포로 되여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가을이여서 물량이 더 적은 것 같았다. 비록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폭포라고 그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이 계곡에는 물량은 많지 않았지만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붐비여 계곡으로 물이 흐른다기보다 사람이 흐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보운보교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여름철 우기에는 폭포의 물량이 더 많다고 한다.   운보교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나니 배가 촐촐한 감이 나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도시락을 풀어놓고 점심을 먹었는데 둘이서 먹자니 술을 마이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너무 조용하여 흥이 나지 않았다. 하여 옆에서 식사를 하는 등산객들을 불러 인사를 나누고 같이 술을 마이면서 이야기 나누었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면서 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니 기분이 더욱 좋았고 여럿이 모여서 술을 마이면서 식사를 하니 흥이 났고 맛도 더 좋았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으며 식사를 하다    운보교에서 400 m정도 더 가면 오대부송(五大夫松)이 있다. 진시황이 태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곳이다. 당시 진시황제이 고마움의 표시로 이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고대 벼슬직위 의 하로서 24작위 (爵位) 중 9번째의 작위이다.) 작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 다 한다.  오대부송은 아무리 소나무일지라도 2천년 이상은 살 수 없음으로 지금 있는 3그루의 소나무는 청의 옹정(雍正) 황제 8년(1730년)에 보식된 것이라고 한다.      오대부송(五大夫松) 다음호에 계속
17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댓글:  조회:10120  추천:19  2010-12-29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2)                        주청룡 만선루에서 1Km 좀 더 오르면 오른쪽에 두모궁(斗母宫)이 있다.                                   두모궁(斗母宮) 두모궁은 태산을 수호한다는 불교의 북두칠성 어머니인 두모 녀신을 모신 도교 사원(寺院)으로서 예전에는 녀자 도사들만 머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8개의 팔을 가진 금빛의 두모 녀신상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절을 하고, 소원이 새겨진 자물쇠를 걸어 소망을 빌고 있다.    두모낭낭(斗母娘娘)   두모궁에서 층계를 따라 곧게 중천문으로 오르는 길과 동북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 동북쪽으로 약500 m쯤 골짜기를 따라가면 3000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평평한 돌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경석욕(經石峪)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당승이 황제를 따라 태산에 왔다가 도중에 큰 비가 내려서 불경이 비에 젖자 비가 그친 후 이 돌판에서 불경을 말리웠다고 한다. 돌판 우에는 1,400여년전의 "金剛般若波羅蜜經"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金剛般若波羅蜜經"은 신도가 지혜롭게 모든 고뇌를 벗어버리고 극락세계에로 갈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제시한 글이라고 한다. 글자의 크기는 약 50cm쯤 되며 원래 25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1067자 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협곡을 경석욕(經石峪) 이라고 한다. 이는 태산의 불교문화와 석각예술의 진기한 보물이다.      돌판우에 새겨진 경서 투모궁에서 계속 1.8 km 정도 직진하면 호천각(壶天阁)이 나온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라 말 그대로 마치 항아리 안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호천각(壺天閣) 호천각에서 700 m정도 올라가면 중천문(中天門)인데 해발 847 m라고 한다. 중천문은 말그대로 태산을 오르는 하늘중간의 문으로서 대종방으로부터 돌계단을 걸어 오는 길과 천외천에서 뻐스를 타고 종점에 올라와 만나는 곳이며 남천문으 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의 시발점이다.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계속하여 돌계단을 로 도보로 등산할수도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등산할수도 있는 곳이다.    중천문(中天門)                     다음호에 계속
16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1) 댓글:  조회:6965  추천:30  2010-12-24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내려다 보였다 (1) 주청룡 [서울=동북아신문]주청룡 유람기= 우리 부부는 청도의 려행을 마치고 10월 9일 오전 기차로 태산으로 왔다. 태산역에 내려서 호텔에 숙소를 잡고 행장을 풀어 놓은 다음 태산려행지도를 사가지고 태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려행지도에서 태산의 개황을 보면 태산은 산동성 중부 평원지대에 우뚝 솟아 있었는데 옥황정 주봉을 중심으로 112개의 이름있는 산봉우리가 있으며 유명한 절벽은 98곳, 계곡은 102곳에 널려있고 동서길이 30km, 남북 길이40km 총 면적은 426 km²로서 주봉 옥황정의 높이는 1524 m이다. 태산은 오악독존(五岳獨尊)으로서 중국의 대표적인 명산이며 1982년 국무원의 허가를 받은 국가급 중점 풍경명승구로 되였으며 1987년에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의 문화유산,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였다. 관광안내도를 보니 태산에 오르는 길은 동로(東路), 서로(西路), 도화욕로(桃花 峪路), 천촉봉로(天燭峰路) 네갈래가 있었는데 서로 다른 코스로 올라가면서 서로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쉽게 오를수 있는 코스는 서로(西路) 즉 천외촌(天外村)에서 셔틀뻐스(班車)를 타고 중천문까지 가서 거기로부터 남천문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것인데 비록 힘은 들이지 않고 쉽게 오를수 있지만 등산의 의미가 없거니와 등산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중국 고대의 문화 유산들을 일일이 감상(鑑賞)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중로(中路)라고도 하는 동로는 비록 가파롭기는 하지만 협곡을 따라 올라가는 직선거리로서 예로부터 황제나 문인(文人), 묵객(墨客)들이 오르던 길인데   연도에는 수많은 명승고적이 집중되어 있다. 우리는 동로로 등산하기로 하고 대묘로 갔다. 대묘는 태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는데 택시로 10원이면 갈수 있었다.            태산의 전경도                         태산을 보려면 우선 대묘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대묘는 력대의 제왕들이 봉선(封禪)의식[옛날 중국에서 제왕들이 문무대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하늘에 접근한 태산의 꼭대기에 둥근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였는데 이런 행사를 봉(封)이라고 하고 태산의 남쪽기슭에 사각형의 제단을 만들고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선(禪)이라고 한다. 제왕은 하늘의 명을 받고 세상에 군림(君臨)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이렇게 하여야 만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다고 믿었다.]을 하던 곳으로서 태산에서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고대건축물이다. 남북으로 장방형 모양으로 되여 있었는데 총면적은 9.6만 m²이고 주위는 높이 10여 메터의 담장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대묘는 남으로부터 북으로 정양문(正陽門), 배전문(配天門), 인안문(仁安門), 천황전(天貺殿), 후침궁(后寢宮), 후재문(厚載門)이 북경 고궁처럼 정렬로 배렬되여 있었는데    岱廟示意圖 그중 천황전(天貺殿)이 높이 22.3m, 넓이 48.7m로된 대묘의 주체건축물로서 웅위롭고 장려하여 북경 고궁의 태화전(太和殿), 곡부 곡묘의 대성전(大成殿)과 더불어 중국고대3대 궁전식 건축물이라고 한다.    천황전(天貺殿) 천황전 안에는 동악태산지신(東岳泰山之神)이 모셔져 있었고 내부벽에는 송조때에 그린 가로 62m, 세로 3.3m의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묘에는 고대의 제왕들이 사용하였던 많은 문물과 제기, 공예품, 경전들이 있었다.  동악태산지신(東岳泰山之神) 대묘에서 나와 북으로 약 500 m 쯤 가면 대종방(岱宗坊) 인데 등산 돌계단은 여기로부터 시작되여 옥황정까지 7.2km의 거리에 6536개의 돌층계가 있다.   대종방은 사주삼문(四柱三門)식의 패방[牌坊: 둘 또는 네 개의 기둥을 병렬해서 세운 웃부분에는 차양(遮陽)이 있는 장식용 구조물(構造物). 주로 시가(市街)의 중심이나 명승지(名勝地), 사당(祠堂)、 사원(寺원)、 릉묘(陵墓)에 세움]으로 되여 있는데 태산동로(東路) 등산의 첫 산문(山門)이자 태산의 첫 상가(商街)이기도 하다. 대종방(岱宗坊) 대종방에서 북쪽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일천문(一天門)이 이다. 대종방이 태산 의 산문(山門)이라면 일천문은 하늘에 오르는 첫 대문이라 하겠다.   일천문(一天門) 일천문에 들어서면 나무가 예쁘게 꼭대기를 가리우고 있는 사주삼문식 (四柱三门 式)으로 된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라고한 패방(牌坊)이 보이는데 공자가 태산에 온 것을 기념해서 건립한 것이였다.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 공자등림처를 지나면 홍문궁(紅門宮)있다. 홍문궁이란 이름은 북서쪽 대장령(大藏岺) 남쪽에 붉은 벼랑이 마치 문과 같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홍문궁에 들어서면 동쪽은 복도로 련결된 차집이 있었는데 과거에는 제왕들이나 관리들이 등산할 때 제왕을 수행했던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던 탈의정(更衣亭)이였다고 한다. 서쪽은 원군묘(元君廟)이다.     홍문궁(紅門宮) 홍문(紅門) 홍문궁에서 북쪽으로 600 m정도 가면 만선루(萬仙樓)인데 전하는데 의하면 선인(仙人)들이 집회하고 경을 읽고 일을 토의하는 곳이였다고 한다.            萬仙樓    만선루 북쪽에는 혁명렬사기념비가 있었는데 남북을 전전(轉戰)한 신사군1종 3려의 사적이 적혀있었으며 태성(泰城)을 해방할 때에 희생된708명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708명 렬사기념비 만선루에서 1Km 좀 더 오르면 오른쪽에 두모궁(斗母宫)이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c) 동북아신문(www.dbanews.com), 무단복제-재배포 금지! ]  
15    조선족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가 다수 (주청룡) 댓글:  조회:8679  추천:41  2010-08-22
중국동포 절대다수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 --“한국과 중국, 어느 나라에서 살고싶습니가?”실태조사를 분석하여 보다                        주청룡 지난해,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한중수교 17주년 기획특집으로 재한 중국동포를 대상하여 “한국과 중국,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가?”란 실태조사를 진행하였다. 응답자중 67%가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 하고 33%가 한국에서 살고싶다고 하였다.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 중국에 돌아가 살고싶다는 사람들의 리유를 정리하여 보면 첫째, 한국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살고싶지 않다. 한국사회가 전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업현장에서 보면 중국동포들을 조선족이라면서 눈높이를 아래로 하고 색다른 눈길로 보아 어쩐지 기시를 당하는 감이 난다. 특히 건설현장에서 중국동포들이 들어 보지도 못한 고유어가 아닌 외래어나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로 말하는것을(례하면 쇠줄을 반생으로) 알아 못들어 주춤거리면 듣기 구차한 쌍소리로 욕할 때에는 한국에서 살기싶은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다고 한다. 둘째, 한국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겹다.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동포들을 보면 한국의 인력부족을 메우는 일을 하기에 대부분 3D업종(위험한 일, 힘든 일, 어지러운 일)에서 일한다. 한국은 중국보다 로동강도가 심하고 로동시간이 길다. “OECD(경제협력기구)국가 가운데에서 한국이 로동시간이 가장 길다.”란 KBS 보도가 나왔다. 한국에서 일하려면 하루의 절반이상의 시간은 작업현장에서 보내야 하므로 너무나 힘들고 지겹는것이다. 셋째,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에 가서 써야 값있게 쓴다.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고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따라서 인건비가 낮다.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상대적인 이 차이를 리용하여 한국에서의 높은 인건비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가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모두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서 몇 년간 벌어 본 고장에 가면 도시에 현대화한 아파트를 사서 살수 있지만 한국에서 벌어서 한국에서 살면 집을 산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고 한평생 세방살이를 하여야 한다는것이다. 넷째, 조상들이 개척한 땅,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 우리 조상들은 쪽박차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을 개척하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닦았다. 중국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에 대하여 문화, 교육, 산아제한 등 방면에서 우대정책을 실시하고 있기에 한국에서 조선족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살기보다 중국에 돌아가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받으면서 마음편안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났다는것이다. 다섯째, 중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것을 보면 중국이 전망이 더 크다. 올해 상반년,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으로 된다는 KBS, 조선일보 등 언론매체의 보도가 나왔다. 또 일부 언론매체는 2019년에 가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될 전망이라는 보도까지 하였다. 중국은 지금 미국과 더불어 G2국가로 부상되였다. 때문에 후손들을 보더라도 강국으로 발전하는 중국에 돌아가 살려고 한다.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싶다.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싶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3D업종에서 일하지 않고 자기의 경제실체 혹은 중국어강사로 일하거나 힘들지 않고 대우가 좋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였는데 그들의 리유를 정리하여 보면 한국이 교통이 발달하고 질서정연하며 환경이 깨끗하여 살기 좋다는것이였다. 한국에 방문취업제로 온 중국동포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의 대도시에 못 가본 농촌이거나 자그마한 도회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러한 곳에서 한국의 수도권지역에 와보면 자기가 살던 고장에 비하여 모든 것이 우월하게 느껴진다. 하여 북경, 상해 등 중국의 대도시도 한국의 서울처럼 지하철을 (서울 10개 로선 개통, 상해 11개 로선 개통, 북경 시공중 로선까지 포함하여 16개 로선) 비롯한 대중교통이 사통팔달하고 질서정연하며 환경이 깨끗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한국이 중국보다 문명하고 선진적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싶은 생각을 갖는다.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열심히 일하느라면 영주권을 취득할 기회도 있다. 한국에서 살려 하던 중국에 돌아가 살려 하던 모두 제나름의 생각이다. 여하튼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와서 일하는것만큼 열심히 일하여 고국건설에도 힘을 이바지 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0년 8월20일
14    ‘신조선족’論에 대하여 (주청룡) 댓글:  조회:7249  추천:55  2010-06-22
‘신조선족’論에 대하여  주청룡   지금 어떤 학자들은 ‘신조선족’論을 제기하고 있는데 필자도 오늘 여기에 대한 견해를 말해 보려고 한다.    조선족이란 조선말대사전에는 “인종상으로나 민족상으로 본 조선사람. 또는 조선사람으로 이루어진 인종이나 민족.”이라 하였고 한국어사전에는 “1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 2 ‘한족(韓族)’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한족(韓族 = 韓民族)이란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한반도와 그에 딸린 섬에서 예로부터 살아온,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는 민족. 한국어를 쓰며 한반도와 남만주에 모여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조선족이나 한민족은 모두 우리겨레를 이르는 말이지만 남북의 분단으로 하여 우리겨레에 대한 지칭마저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조선말대사전에는 아예 한민족(韓民族)란 단어는 없다.   중국에서 우리겨레에 대한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 되여 중국사람들에 대하여 민족을 획분할 때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한국에서는 한인이라고 함)들을 ‘조선족’로 명칭 하였다.‘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국 현대한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우리나라 소수민족의 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에 대한 민족구분 행정용어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과 중국 사람들은 지구촌의 모든 우리겨레들을 다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은 전체 조선족이란 대 가족의 일원에 속한다. 때문에 우리로서는 ‘중국의 조선족’이라면 자랑스럽지만 한국인들은 중국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만 ‘조선족’이라 하기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우리 한겨레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또 ‘신조선족’이란 새로운 명칭이 나오면 같은 우리겨레에서 또 새로운 민족이 파생되여 나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조선족’論을 내놓은 학자의 말을 빌면 “‘신조선족’이란 한마디로 용이한 해석을 하면 새로운 생활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 시각을 갖춘 조선족의 새로운 패턴(型)의 탄생을 말한다.‘신조선족’은 국내(중국)에서는 대도시, 연해의 근대화문화, 산업의 도회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젊은 조선족 (물론 나이와는 상관없이 중, 장년, 노인도 포괄), 그리고 해외 세계 각 대도시들에서 일하며 공부하며 또는 정착하여 삶을 이어가고 있는 조선족들, 이들은 국경을 넘은 越境者들로써, 신형의 디아스포라로써 ‘경계’를 살아가면서 문화적 창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본 지방에서 사업하고 있는 국가 공무원, 문화, 과학, 교육, 위생 등 분야에서 사업하는 조선족들, 아직도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조선족들은 철학적 도리로 말하면 상대적으로 낡은 의식과 가치관, 시각에서 해탈되지 못한 ‘구조선족’ 또는 ‘낡은 조선족’으로 되지 않는가? 이들이 있음으로 하여 중국에서의 조선족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겨레들이 이역에 갔다가 다시 본 고장에 돌아와 생활할수 있는 삶의 터전이 있게 된다. 우리는 본 지방에 남아서 우리의 삶의 터전을 굳건히 지키고 조선족공동체를 고수하고 있는 이들의 공적을 아주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우리겨레들은 혈통, 언어, 문화, 지역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력사적으로 한 개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지만 남북의 분단으로 하여 지칭문제에서 ‘조선족’, ‘한민족’하는 정치적 론란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또 ‘신조선족’론을 내놓으면 한개 민족을 몇 개로 분류하겠는가? 같은 민족끼리 우리는 ‘한민족(韓民族)’, 너희들은 ‘조선족’하면 서로 차별시하는 감을 느끼게 되는데 또 ‘신조선족’론을 내놓으면 새로운 민족내부 모순을 초래하지 않겠는가 하는것도 우려되는 점이다. ‘신족선족’론에서는 또 외국에 나가있는 중국의 조선족들을 국경을 넘은 越境者들로써, 신형의 ‘디아스포라’라고 하였는데 ‘디아스포라[Diaspora]’란 그리스(희랍)어로서 고대 로마제국의 탄압에 의하여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을 이르던 말이기에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을 신형의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마치 민족탄압에 의해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는 의미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신조선족’론에 올린 댓글들을 보면 일부 긍정적인 글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의미로 쓴 글들이였다. 필자의 견해도‘신조선족’이라든가 ‘신형의 디아스포라’라든가하는 개념의 출연은 불필요한 론란을 잃으키며 이런 개념의 출현으로 하여 오히려 사회에 좋지못한 영향을 끼칠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다.    2010년 6월 18일   한국에서    
13    적절한 명칭은 ‘재중동포’ 혹은 ‘중국동포’ 댓글:  조회:8449  추천:41  2010-05-23
적절한 명칭은 ‘재중동포’ 혹은 ‘중국동포’ 주청룡 5월 10일  조글로 포럼에 《조선족, 중국동포, 중국교포. 적절한 명칭은?》란 글이 실렸다. 필자도 오늘 여기에 대한 견해를 말해 보려고 한다.   조선족이란 조선말대사전에는 “인종상으로나 민족상으로 본 조선사람. 또는 조선사람으로 이루어진 인종이나 민족.”이라 하였고 한국어사전에는 “1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 2 ‘한족(韓族)’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한족(韓族 = 韓民族)이란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한반도와 그에 딸린 섬에서 예로부터 살아온,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는 민족, 한국어를 쓰며 한반도와 남만주에 모여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남북의 분단으로 하여 우리겨레에 대한 지칭마저도 서로 다르고 있다. 조선말대사전에는 아예 한민족(韓民族)란 단어는 없다.   중국에서 우리겨레에 대한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여 중국사람들에 대하여 민족을 획분할 때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한국에서는 한인이라고 함)들을 ‘조선족’로 명칭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국 현대한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우리나라 소수민족의 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에 대한 민족구분 행정용어에만 국한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중국 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은 전체 조선족의 한 부분에 속한다. 때문에 우리로서는 ‘중국의 조선족’이라면 자랑스럽지만 한국인들은 중국국적을 가진 우리겨레들만 ‘조선족’이라 하기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같은 민족끼리 우리는 ‘한민족(韓民族)’, 너희들은 ‘조선족’하면 론리상에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차별시하는 감을 느끼게 된다.   ‘동포’에 대하여서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서 모두 한가지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한배에서 태여 난 형제자매라는 뜻으로 ‘한 나라, 한 민족에 속하는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포’라고 하면 형제자매라는 다정한 감을 느끼게 된다. ‘교포’에 대하여서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서 모두 같은 뜻으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라고 해석하여 별다른 거부감이 없지만 그 글자 뜻을 보면 더부살이 교(僑)자에 태의 포(胞)로 되여 있어 더부살이 하는 형제라는 듣기 좋지 않은 표현으로 느껴진다.  중국 국적의 우리겨레들에 대한 호칭을 당분간 통일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상에서 말한 세가지를 종합하여 보면 ‘조선족’하면 정치적인 론쟁이 있게 되고 ‘교포’라고 하면 더부살이 하는 형제자매라는 듣기 좋지 않은 표현으로 느껴 지지만 ‘동포’라고 하면 한 형제자매라는 다정한 감을 주므로 ‘중국동포’혹은 ‘재중동포’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는 소견이다.  
12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내가 바라는 마음 댓글:  조회:9201  추천:62  2010-04-30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내가 바라는 마음   주청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크   3월 26일 밤, 한국 서해 앞바다를 지키던 한국 해군 2함대 천안호 초계함(哨戒艦)이 침몰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침몰 당시 승선해 있던 104명 장병중 58명이 긴급 출동한 해경정과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되고 지금까지 40구의 시신을 찾아 내고 6명은 산화자(散花者)로 인정 되였다.   오늘(4월 29일) 대한민국은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이 46명의 희생자들을 海軍葬으로 치렀다. 나는 나라의 해역을 지키다 순국한 46명의 해군 장병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시하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 하늘나라에서 부디 안녕하시라.   이번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나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가슴 아프다. 천안함이 침몰되자 빨리 실종자를 구해내야 한다. 함미(艦尾)안에 갇혀있을 실종자들, 72시간 동안 생존가능성, 한시 급히 산소를 불어 넣어야 한다는 심정, 이는   실종자 가족들과 같은 심정이었으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는 그 심정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다 내 자식, 내 형제 같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실종자들의 생존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나의 마음도 실망으로 가슴 아파하였다.    또한 하루빨리 침몰된 함수, 함미를 인양하고 천안함 침몰원인 규명을 바라는 마음도 대한민국 국민들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뉴스를 보면서 ‘외부폭발 가능성이 크다’, ‘기뢰나 어뢰에 의한 폭발가능성이 크다’, ‘북한소행으로 보고 있다’ 등의 보도를 들을 때에는 무엇인가 내 가슴을 내리 누른 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북한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란 뉴스를 들을 때면 나의 마음은 더욱 가슴 아프다.   아직 최종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만약 북측의 소행이라면 민족의 비극이다. 어찌 한 핏줄로 이어진 같은 민족끼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북측의 소행이라면 한국에서는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려 할 것이다. 그 대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느 한 권위적 인사는  "진상조사 결과 북한의 개입이 드러나면 UN 안보리 제재는 당연하고 남북항해 통행 차단과 개성공단, 금강산·개성 관광 등 남북협력사업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무력제재를 배제해서도 안될 것"이라며 단호한 입장을 피력했다.   오늘 또 순국열사들의 영결식에서 해군의 한 고위급 장령은 “끝까지 찾아내어 더 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천안함 침몰사건, 이 비극에 이어 더욱 큰 비극이 벌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심을 갖게 된다. 제발 원인규명에서 북측의 소행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는 정치적 입장에서가 아니다. 나의 소박한 혈육의 감정에서이다. 남이나 북에는 모두 나의 혈육지친(血肉之親)들이 있다.   나는 조선이나 한국을 모두 적대시 하고 싶지 않다. 북이나 남이나 나에게는 모두 고국이다. 혈통적으로 우리는 모두 한겨레이다. 조선반도는 나의 조상들의 뼈가 묻혀있고 조상의 넋이 슴배인 곳이다. 나는 남북이 화목하고 조화롭고 같이 잘 살기만 바라는 마음이다.    2010년 4월 29일  
11    한국언론의 "김정일訪中설"취급에 대하여 (주청룡) 댓글:  조회:7593  추천:34  2010-04-23
한국언론의 "김정일訪中설"취급에 대하여 주청룡   한국의 언론매체들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1월에 중국을 방문할것이라는 訪中설이 보도 되였다. 금년 1월부터는 여러 언론매체들에서 서로 다투어 김정일의 訪中설을 보도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이후 네번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중 2001년, 2006년 두 차려는 訪中이 1월 중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금년 1월의 訪中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압록강대교 보수작업을 하고 경비를 가강하는것으로 보아 김정일이 곧 중국을 방문할 조짐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언론매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이 추운 겨울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겠는가는 의문점도 제기하였다. 이렇게 한달 내내 매일이다 싶히 訪中설을 제기하였어도 결국은 1월에 중국방문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언론메체들에서는 김정일이 2월에 중국국을 방문할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최대의 전통명절인 춘제(春節)가 2월 14일인 것만큼 2월 중순에는 안되고 2월 초순이나 하순이 가능하다고 보도하였다. 또 김영일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장이 2월 23일부터 중국을 방문하자 김부장의 중국방문은 김정일위원장의 중국방문을 앞두고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3월1일 모 신문에서는 “김영일 로동당 국제부 부장이 23일 베이징에 도착한 첫날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예방하고,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회담을 가진데 이어 24일 톈진(天津)을 방문하여 장가오리(張高麗) 톈진시 서기를 만났고 27일에는 랴오닝(遼寧)성을 방문하여 왕민(王珉) 랴오닝 서기와 만났으며 28일에는 지린성을 방문고 쑨정차이(孫政才) 지린성 서기와 면담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을 위한 사전 답사 성격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3월 초와 중순사이에는 중국의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있으므로 3월하순에 중국방문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3월 6일 어느 한 언론은 김정일의 건강이 안 좋다는 점, 그리고 오는 8∼18일은 '키 리졸브' 한·미합동 군사훈련 기간으로 자리를 비우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김정일 대신 중국을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 했다. 하지만 3월에도 김정일이든 김영남이든 여전히 중국방문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 3월 30일 안영기 소장(남측의 준장에 해당)이 이끄는 조선 인민군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일부 언론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의 '경호. 의전. 보안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선발대라면서 방중이 임박했다고 보도 했다. 또 많은 언론매체들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오는 9일 개최되고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4월 12일 미국에서 열리는 핵 안보회의에 참석하는 등 북. 중 양측의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4월초에 방문할 것이리라고 보도 하였다. 4월 2일 어느 한 언론매체는 “대북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르면 오늘(22일) 중국 국경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유력한 근거는 김 위원장의 방중 가능성을 부인하던 중국 정부도 발언 수위를 누그러뜨렸다. 중국 단둥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잇달아 목격됐다. 중국과 북한 관계자들이 압록강 철교인 중조우의교의 상태를 점검했다. 또, 중국 해경과 북한군이 보트를 타고 압록강 주변을 순찰하기도 했다.”라고 했다. 4월8일까지 방중소식이 없자 한 동안은 방중설이 즘즘하던 것이 오늘 아침(4월18일)에는 모 방송사에서 또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 책임인원이 중국을 방문한것으로 보아 이달 말일에 방중이 가능할것이라고 일본 아사이 신문이 보도 하였다”고 하였다, 과연 이번에는 정말 방중이 이루어질것인지? 지난해 말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설이 주요 뉴스로 련속 보도 되였고 대북소식통의 이르면 오늘(4월 2일)이라던 것이 지금까지 중국방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론매체의 보도가 결국은 공담허설(空談虛說)에 불과하였다 보도매체라면 가능성이 높은 보도거나 근거가 확실한 결과적인 보도를 하여야지 “이럴가? 저럴가...... 그렇겠지.” 하는 식의 근거가 확실하지 못하고 가능성도 미미한 보도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언론매체의 보도가 참으로 믿기 어렵다.  
10    漢字교육의 필요성 (주청룡) 댓글:  조회:8581  추천:43  2010-04-16
漢字교육의 필요성                                                           주청룡 재한 칼럼니스트   조선일보가 1월 30일 “학부모 89%, 교사 77%가 원하는 초등학교 한자교육”이란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하여 교육과정평가원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한자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보고서를 교육부에 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조선일보 4월 7일자 A1면에"漢字 가르쳤더니 국어실력 늘더라",  4월 9일자 A37면에는 “漢字 많이 쓴 신문은 '어휘력 교과서’”란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필자는 이 두 편의 글을 읽고 漢字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이 두 편의 글을 보면 첫 편의 글은 퇴계학연구원과 전통문화연구회 두 연구팀이 지난해 3~12월 경북 포항 영일중학교 1학년생 4개 반(14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 한자를 가르쳤더니 우리말 어휘력이 향상 되였다는 실험결과가 나왔다는 보도였고 두 번째 글은 한자교육의 필요성으로부터 생활 속에서도 漢字를 많이 배울 수 있도록 신문에서 한자어표기를 한자로 많이 하였으면 하는 요구였다. 하지만 우리글을 오염시키다고 한자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한국에 와서 한자를 배운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자어 이해력이 한국인에 비해 훨씬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말 단어에서 70%이상이 한자어에 속한다고 한다 한자어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은데 한글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이므로 어떤 단어들은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를 병기 하여야만 그 단어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화장’이란 단어를 보면 동음이의어가 9개나 된다. 예를 들어 ‘지금 화장을 한다’에서 ‘화장’에 한자를 병기(倂記)하지 않으면 얼굴에 화장품을 바른 다는 말인지 아니면 죽은 사람을 불에 태워 장사를 지낸다는 말인지 모른다. 만약 ‘화장’에 ‘化粧’혹은 ‘火葬’이라고 한자를 병기한다면 그 뜻을 대뜸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광주’라고 하면 광주(光州)광역시 말하는지 아니면 경기도 광주(廣州)시를 말하는지 모르지만 ‘광주’에 한자 ‘光州’혹은 ‘廣州’를 병기하면 어느 곳을 말하는가를 대뜸 알 수 있다. 그리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사기'라는 한자어만 27개가 실려 있다. 이러한 단어들을 漢字로 표기하면 그 뜻을 모두 이해 할 수 있지만 한글로 한 개 단어만 표기하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이러한 실례로 보아 한글은 한자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한자를 떠날 수 없다고 본다. ‘漢字’를 우리가 ‘한자’로 발음하듯이 중국에서도 한가지 한자를 놓고 지금도 지방에 따라 자지방의 방언으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서로 다른 음으로 발음한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한글과 漢字는 그 표기방식이 다를 뿐 漢字를 우리 조상들이 중국사람들과 같이 수천 년 연구하고 사용하여 온 글이므로 漢字도 우리글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일보는 1월 30일 사설에서 “작년엔 전직 총리 20명이 청와대에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한자교육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냈다. 노무현 정부 때 총리를 지낸 이해찬·한명숙·한덕수씨도 참여했다. 총리들은 ‘반세기 동안 잘못된 문자정책으로 나라가 문화위기에 놓여 있다'며 ‘국어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해 한자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필자는 초등학교부터 한자교육을 하면 어린 학생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일부 한자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위에서 제기한 한자교육의 필요성과 어휘력의 향상, 국가경쟁력의 수요로부터 고려할 때 초등학교부터 한자교육을 하여야 한다고 본다. 漢字교육을 하되 중국대륙에서 쓰는 간체자(簡體字)를 가르치면 학생들의 부담을 많이 덜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漢字나 簡體字 를 번체자(繁體字)로 쓰면 매우 힘들지만 간체자로 쓰면 汉字, 简体字로 표기하기에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부담을 덜 수 있고 본다.   만약 학생들에게 간체자를 가르치면 번체자를 배운 기성세대 사람들과 모순이 있고 한국 역사속의 많은 고문서들이 번체자로 되어있어 많은 불편한 점들을 주지만 영원히 이어나갈 새 세대를 위해서라면 잠시적인 폐단을 극복하면서 간체자를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한자문화권에서 간체자를 쓰는 것은 중국대륙뿐이지만 그 사용인구가 세계인구의 1/5(2007년 통계)이라는 점으로부터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로 보아도 간체자교육이 옳지 안는가 하는 생각이다.   2010년 4월 15일
9    두음법칙의 페단 (주청룡) 댓글:  조회:9450  추천:56  2010-04-03
두음법칙의 페단                                               주청룡 한국에서는 일부의 소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발음되는 것을 꺼려 다른 소리로 발음되는 두음법칙(‘ㅣ, ㅑ, ㅕ, ㅛ, ㅠ’ 앞에서의 ‘ㄹ’과 ‘ㄴ’이 ‘ㅇ’이 되고, ‘ㅏ, ㅓ, ㅗ, ㅜ, ㅡ, ㅐ, ㅔ, ㅚ’ 앞의 ‘ㄹ’은 ‘ㄴ’으로 변하는 것)을 한글맞춤법에 적용하고 있다. 례하면 래일(來日)이 내일로, 녀자(女子)가 여자로 되는 등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하면 모종방면에서 우점이 있겠지만 필자는 그 우점보다 두음법칙으로 오는 페단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오는 페단들을 보면 (1) 서로 다른 성들사이에 혼돈이 생긴다.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버들 ‘류(柳)', 도끼 ‘류(劉)' 수풀 ‘림(林)', 들보 ‘량(梁)’자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불만이 많다. 두음법칙에서 버들 ‘류(柳)’, 도끼 ‘류(劉)’를 모두 ‘유’라고 부르는데 성씨에는 그러할 ‘유’(兪)도 있다. 그러므로 버들 ‘류’, 도끼 ‘류’가 그러 할 ‘유’와 혼돈하게 된다. 이외에도 두음법칙으로 하여 수풀 ‘림(林)’과 맡 을 ‘임(任)'이 모두 ‘임’으로, 들보 ‘량(梁)’과 백양 양(楊)을 모두 ‘양’으로 발음하여 ‘林’과 ‘任’, ‘梁’과 ‘楊’이 구별이 안 된다.   (2) 한 사람의 성이 경우에 따라 두가지로 된다. 례를 들면 리(李), 류(柳), 림(林)씨 등 성을 가진 아가씨를 부를 때 ‘미스리’, ‘미스류’, ‘미스림’으로 부르는데 이때에는 성이 뒤에 오므로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본래의 한자음대로 리, 류, 림으로 부르고 성이 앞에 올때에는 두음법칙이 적용되므로 이, 유, 임으로 부르게 된다. 이렇게 두음법칙으로 하여 한 사람이 두가지 성을 쓸 경우가 있다.   (3) 친 형제사이에도 서로 다른 성을 가지게 되다. 례를 들면 금강산 리산가족상봉에서 북쪽의 형님은 ‘리’씨인데 남쪽의 동생은 ‘이’씨이다. 분명히 동부동모(同父同母)의 친 형제인데 한국의 두음법칙으로 하여 성이 서로 다르게 된다. “조선의 태조 리성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성은 리씨인데 너희들은 리성계의 후손이라면서 왜서 성이 이씨냐?”는 우스개 소리도 나온다.      (4) 성명권 침해로 된다. 1996년 10월, 한국대법원에서 사람의 이름 성씨 적기는 두음법칙에 따른다는 내용을 담은 '호적예(례)규'를 발표하여 성씨 사용에서 강제적으로 두음법칙을 적용하였기에 두음법칙으로 하여 성씨가 변화된 사람에게는 성명권 침해로 되였다. 류(柳)씨성을 가진 사람을 비롯한 두음법칙으로 하여 성씨가 변화된 일부 사람들이 우리의 성씨를 돌려 달라는 함성도 있었다.  하여 2007년 8월 1일부터 두음법칙으로 하여 다른 음으로 변화되는 李, 柳, 劉. 林, 羅,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자원의 원칙으로 호적 등록에서 원래의 한자어의 음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성명권을 존중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한글맞춤법에서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현실에서는 상기의 페단을 극복하기 힘들다고 본다.   (5) 자전을 찾기에 불편을 준다. 한글은 표음(表音)문자이기에 뜻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글자나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한자자전에서 표의(表意)문자인 한자를 찾을 때가 있다. 성이 ‘羅(라)’씨인 사람이 두음법칙에 의해 성이 ‘나’씨로 되여있다. 자기의 성을 한자로 찾으려면 ‘나’자로 들어가면 찾을수 없기에 이때에는 ‘라’자로 들어가야 한자 ‘羅’를 찾을수 있다. 얼마나 불편을 주는가?   (6) 두음법칙은 한자어와 한자어단어의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다.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으로 하여 ‘로인’(老人)’을 ‘노인’이라고 하는데 ‘로인’이란 한자어 늙을 ‘[老]로’자에 사람 ‘[人]인’자를 써서 늙은이, 또는 늙은 사람이란 뜻인데 한자어에 늙을 ‘노’자는 없으므로 ‘노인’이라고 하면 단어의 원 뜻이 상실된다. 또 바깥에 가설한 무대를 한자음대로 하면 ‘로천무대’로 되지만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으로 하여‘노천무대’라고 한다, 한자어 원래의 뜻은 드러날 ‘로’(露)자에 하늘 ‘천(天) 자를 써서 하늘이 들어난 무대란 뜻인데 한자어에 드러날 ‘노’자가 없으므로 ‘노천무대’라고 하면 단어의 원 뜻이 상실된다.   한국에서 두음법칙을 쓰는 리유는 우리 말에서 첫소리의 ‘ㄹ’과 중모음(重母音)앞에 ‘ㄴ’가 오면 발음하기 바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두음법칙으로 쓰이는 말도 기실 전체 우리 겨레들이 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아니고 일부 지방의 방언에 지나지 않는 것을 두음법칙으로 만들어 한글맞춤법에 적용한것이다 .우리 한겨레인 조선과 중국의 조선족들 그리고 재일동포들은 ‘ㄹ’과 ‘ㄴ’두음을 어려움 없이 발음하고 있다. 습관상의 문제이지 한국에서 말하는 ‘라면(拉麵)’은 ‘나면’이라고 하지 않아도 아주 순통하게 발음되지 않는가? 외국어나 외래어도 순통하게 발음할라니(외국어나 외래어에서는 두음법칙을 쓰지 않고 있다.) ‘ㄹ’과 ‘ㄴ’은 우리말 우리글이기 때문에 발음이 어려울 것 없다. 오히려 두음법칙의 사용은 우리의 발음능력을 퇴화시킨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페단으로 하여 한국에서도 지금 두음법칙페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한국에서는 다년간 두음법칙으로 발음하여 왔으므로 습관이 되지 않아 두음 법칙으로 오는 발음을 한자어의 원 발음대로 하려면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일부 중국의 조선족들이 왜 무턱대고 한국을 따라배워 많은 페단을 갖고 있는 두음법칙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중국조선족은 반드시 중국조선어언어규범에 따라 두음법칙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흑룡강신문 2010년 4울 1일, 동북아신문 2010년 8월 3일,      중앙인민방송 2011년 10월 3일
8    영어 발음을 대체, 새 문자 찬성할 바 아니다 댓글:  조회:7588  추천:56  2010-03-27
영어 발음을 대체할 새 문자를 만들려는 것은 찬성할 바 아니다   주청룡   올해 년초 이인철 서울아산병원 울산의대 교수가 ‘f, v, z, r, th’ 등의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다섯 개의 새 한글 문자를 제안하는 글이 조선일보에 발표되자 지금 찬반양론(贊反兩論)계속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한국체 류중인 중국동포로서 여기에 대한 견해를 말해 보려 한다.  우선 우리는 외국어와 외래어 개념에 대하여 똑똑히 분별하여야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외국어는 말 그대로 “다른 나라의 말”이고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여 와 국어처럼 쓰이는 말이다.” 즉 외국의 말을 들여다가 원래의 음을 따르면서 우리말의 발음과 우리 문자가 있는 단어로 만들어 우리말로 사용하는 것이다.   문자표기에서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하려는 것은 틀린 생각이라고 본다. 외국어라면 반드시 그 나라의 문자로 표기하여야 정확히 표기할 수 있으며 외래어는 이미 국어화(國語化)하였기 때문에 원어의 발음과 똑 같을 수 없으며 또 한글로 표기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예하면 라디오, 텔레비전, 컵, 넥타이, 페이지, 바나나, 아파트, 베란다 등은 외래어로서 완전히 우리말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 한글로 충분히 표기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우리의 고유어는 물론 외래어까지 충분히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만약 이인철 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f, v, z, r, th’ 등의 영어 발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자를 한글에 보충한다면 한글의 의미를 떠나게 되며 그것은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일종 기호이지 한글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말에 ‘f’의 발음이 없기 때문에 ‘file’과 ‘pile’을 모두 한글로 ‘파일’로 적는데 원어의 발음과 의미를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한자어에 한자를 병기(倂記)하는 것처럼 ‘파일[file]’, ‘파일[pile]’ 등으로 원어문자 표기를 병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소견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 ‘아내’를 ‘와이프[wife]’ 흰색을 ‘화이트[white]’, ‘힘내라’를 ‘파이팅[fighting]’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고유어가 있는 단어들은 우리 말의 고유어로 쓰면 발음 표현과 문자 표기에도 아무런 장애도 생기지 않고 우리말, 우리글의 순결도도 높이고 있는데 하필이면 발음하기도 불편하고 정확히 표기도 할수 없는 외국어나 외래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며 영어 발음을 대체할 새 문자를 만들어 한글에 보충하여 우리의 글을 영어에 예속시킬 이유는 더구나 없다고 본다.   지금 한국에서는 우리의 고유어를 포기하고 외국어나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말의 순결도를 점차적으로 낮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새로운 세대들은 외래어는 많이 쓰지만 그것으로 순화되는 고유어를 모르는 것이 적지 않다. 하여 기성세대 사람들은 우리의 고유어가 점차적으로 희박하여지고 우리말의 순결도가 낮아지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한글을 쓰는 것은 한글을 장악하고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하는 것이지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을 대상한 것이 아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우리의 글에 외국어나 외래어를 쓴다고 하여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필자는 우리말, 우리글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며 더욱이는 영어 발음을 대체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찬성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7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 댓글:  조회:8500  추천:45  2010-03-11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   주청룡   중국조선족의 이주 력사를 보면 대부분은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 《한일 합병》까지 생계를 위한 이주였는데 1860 년대에 조선반도 지역에 련속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히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하여 이곳의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몰래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간도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생계를 위한 이주이고 두 번째로는 한일합병부터 9.18 사변까지 항일을 위한 애국지사들의 이주였고 세 번째로는 9.18 사변부터 일본항복까지 일제는 식량 생산기지를 건설하여 군량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만주 내륙으로 강제이주를 시켜 농사를 짓게 했는데 이것이 일본의 이민정책에 의한 강제이주였다.   광복 후 일부 강제이주민들과 대부분의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투사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조선(한)반도로 돌아가고 대부분의 생계를 위한 이주민들은 만주 땅에 남아서 농사를 지었다. 우리 조선족이 간도 땅에 발을 붙인 력사는 150 년이 되며 간도의 벼농사는 우리 조선인들로부터 시작 되였고 그 기술은 전 만주에 보급 된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국적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살다가 새중국이 창 건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우리를 품에 안아 주어 떳떳하게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되였고 전국의 56개 민족의 대가족 일원으로 나라의 어엿한 주인으로 되였으며 연변에는 조선족자치주를 건립하여 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전에 중국에서 어떤 민족은 땅을 농민의 명맥이라고 자식들을 공부도 채 시키지 않고 농사일을 시켰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의 뜻인 즉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면서라도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후대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한 꿈이였으며 우리들에 대한 기대였다. 이렇게 하였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괭이 메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은 그 후대들이 국가 공무원이나 문화, 교육, 과학, 위생 등 지식분야에서 크나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정신이 없었더라면 우리 조선족들은 아직까지 농촌의 소농경제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1992년 중한수교이래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을 방문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지여 한국나들이를 많이 하고 있으며 생활도 많이 피여 가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 하면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전반 한국사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우리 중국의 조선족에 대하여 일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한때 재외동포법에 중국조선족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전에 출국하였다는 리유로 재외동포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론란도 있어고 지금도 이미 국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재외동포법 개정안이 시행되지 않아 출입국, 취업 등 방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에 대하여 눈높이를 아래로 하는 이런 사람들은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한국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주변인이라면서 아무런 정치권리도 인권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다.(주: 필자와의 대화에서) 사실 우리는 중국에서 모든 정치권리를 다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소수민족의 우대정책을 향수하고 있다.   중국 연변에는 조선족인구가 전주 인구의 37%밖에 안 되지만 나라에서는 연변을 조선족자치주로 정하고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하여 중대한 회인《당대표대회》와《인민대표대회》도 조선말로 진행하고 학교에서도 조선족 언어, 문자로 교육을 받으며 거리의 모든 간판도 조선문자와 한자 두 가지 문자로 표시하는데 조선문자를 우에 한자를 아래에 놓고 있다. 연변에는 길림성에서 세 번째 순위에 이른 20개 학원을 가진 조선족 종합대학이 있다. 연변 외에도 조선족이 집거 해 있는 곳에는 국가에서 꾸리는 조선족 중소학교와 언론매체들이 다 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의 문화수준은 전국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통계자료를 보면 15세이상의 인구문맹률을 볼 때 전국 평균수준은 22.21%인데 조선족은 7%밖에 안된다. 그리고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의하면 대학수준소유자가 전국 평균수준은 매 만명당 122명인데 조선족은 381명에 달하고 석사, 박사는 전국 평균수준이 매 만명당 8명인데 조선족은 17명이다. 교육에서 이렇게 전국 평균수준을 훨씬 초과를 하였을 뿐만아니라 방송, 출판, 문예, 체육 등 방면에서도 전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여 1993년 10월 20일, 중앙텔레비죤방속국 아침 뉴스에서도 조선족은 우생우육(优生优育)에서 돌출한 성과를 취득하였으며 문화교육이 세계 선진수준에 접근하였다고 방송하였다. 산아제한 정책에서도 대민족인 한족은 한 쌍의 부부가 아이 하나만 나을 수 있지만 우리 소수민족은 아이 둘씩 나을 수 있다.   조선족은 로인을 잘 모시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례절바르고 깨끗하며 문명스러운 민족이라고 전국에 널리 자랑을 떨치고 있다.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것은 연변가무단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용《연변의 봄》을 2008북경올림픽개막식에 올리여 전 세계에 우리 중국의 조선족을 널리 자랑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에서 소수 민족이라 하여 소외를 당하였거나 소외감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한 겨레의 한국에 와서 일부분 사람들에게서 ‘조선족’이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에서 살길이 없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 한국에 와서 취업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은 서민들이지만 중국에서 모두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여 보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싸기에 그에 따라 인건비가 높고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따라서 인건비가 낮은 것이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상대적인 이 차이를 리용하여 한국에서의 높은 인건비로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가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물가가 낮아 생활소비가 적게 들기에 한국에서 번 돈을 값있게 쓸 수 있으므로 모두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고 있다.   한국정부에서도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 조선민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중국과 구 쏘련 지역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친척 없는 동포들에게도 무연고 방문취업제를 실시하였다고 본다. 우리 동포들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한국정부의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 동포들도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을 잘 하여 한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한다.   여러 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서로 다른 나라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우리 조선민족은 모두 한 겨레의 피줄로 이어진 동포라고 생각한다.   우리민족은 단군이 나라를 건립하였을 때의 국호가 조선이였고 1392년 리성계가 나라를 세워서부터 1910년 한일합병까지 역시 조선시대였으며 그 후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여 왔으며 한국에서 말하는 북한도 지금까지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후손이므로 자랑스럽게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선(한)반도의 우리 겨레를 한민족(韓民族)이라 하고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겨레를 재외 동포라고 하며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 만 조선족이라고 한다. 중국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겨레들은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세상에 널리 자랑하고 있다. 동북아신문 2009년 3월 30일, 료녕신문 2009년 4월 5일, 흑룡강신문 2009년 4월 11일, 중앙인민방송 2011년 9월 26일
6    우정과 애정에 대하여 (주청룡) 댓글:  조회:8081  추천:43  2010-03-10
우정과 애정에 대하여   주청룡       우정과 애정은 이성 사이, 동성 사이에 다 생길 수 있는 감정이다. 오늘 여 기에서는 이성간의 우정, 애정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남녀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서로 이성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는 것은 인간 의 본능이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이성간의 호감으로부터 가깝게 지내면 점차적으로 우정이 생기고 어떤 우정은 평생 그 우정으로 유지되고 어떤 우 정은 점차 애정으로 발전한다. 우정은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에 오가는 정으로서 서로 정치, 사상, 사업, 생활, 애호 등에서 서로 돕고 고무하고 추동 하면서 리상과 목표를 향해 나 가며 서로 다른 점과 곤란한 점들이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청하고 도와 주면 서 나가는 것이다. 우정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비슷한 년령단계에서 많이 생기게 되지만 어떤 때에는 부동한 연령단계에서도 같은 리념, 같은 애호로 하여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혁명가들이 부동한 년령 단계 이지만 같은 리념으로 하여 동지적인 우정을 맺고 함께 사업을 해가고 있다. 또 유부녀 유부남 사이의 우정은 어떤 때에는 기형적인 애정으로 넘어 가는 것도 있다. 이런 기형적 애정은 가장 위해로운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두 가정이 다 파멸되고 원래의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막심한 심리적 고통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유부남 유부녀 사이에 우정관계를 유지할 때에는 우정과 애정의 경계선에서 절대로 한계를 초월하여 기형적인 애정으로 넘어 가지 않도록 서로 자제하여야 한다.  애정은 련인 사이, 부부 사이, 보모자식 사이, 형제자매 사이, 사제(师弟) 사이에 다 있을 수 있는 감정인데 이런 애정은 모두 정상적인 애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성연애를 동반하는 애정은 기형적 애정이다. 오늘 말하려는 애정은 련인, 부부 사이의 애정을 말한다. 애정은 일부 일 처제의 사회제도하에서는 딱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부부 사이의 애정은 많은 경우에는 이성간의 우정으로부터 련정(恋情)으로, 련정으로부터 부부 사이 애정으로 발전하고 그 애정을 기초로 하여 부부관계가 형성된다.  부부 사이의 애정이 견고한가 견고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그 애정기초가 어떠한가에 달렸다. 지금 한국으로 나와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하는 남편 혹은 아내와 리별 하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 사람들은 오직 지금의 내 남편(안해)을 일생의 동반자로 하고 내 한 가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돈을 버는데 정력을 몰 붓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이런 마음으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본국에 돌아가 행복한 살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애정기초가 건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런 리념도, 감정기초도 없는 우정도 애정도 아닌 단순한 이성호감을 갖고 동물의 본능적인 이성접촉으로 한 육체적 성 만족을 느끼기 위해 같이 붙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이성관계는 아주 저속적인 이성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저속적인 이성관계는 아무런 감정기초도 없기 때문에 서로간에 조금이라도 심리적, 물질적 욕구에 맞지 않으면 대판 싸움을 벌리고 갈라지며 최악의 경우에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사례도 있다. 또 일부 애정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생이 얼마라고 고독하게 내 혼자서 보내겠는가 하며 이성을 친하여 한집에서 부부처럼 생활하고 있다. 이런 것이 나중에는 본국에 있는 배우자한테 소식이 가서 ‘네가 거기에서 그렇게 하는데 내라고 여기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내겠는가’ 하며 그도 이성친구를 사귀어 부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내 안해(내 남편), 내 자식, 내 가정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자기만 림시적 욕구를 만족시키면 된다는 건전하지 못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속적인 행위가 나온다.  이런 련쇄반응으로 하여 그들의 가정은 종당에는 파멸로 되여 버린다. 결국은 가장 큰 심리타격을 받는 것은 그들의 자식이다. 그러한 심리타격으로 하여 일부 청소년들은 사회상의 어중이 떠중이들과 휩쓸려 다니며 기로에 들어서 사회적으로 큰 악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한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여 우리의 삶의 의의를 정확히 인식하고 우정이든 애정이든 모두 건전한 사상기초를 닦고 그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해 나가야 한다.
5    주청룡 프로필 댓글:  조회:4836  추천:73  2010-03-07
주청룡 프로필   필명: 청해 1950년 룡정시 덕신향에서 출생 연변대학 졸업 고급교사 룡정시 직업중등전문학교 퇴직교원 현재 연변작가협회회원, 길림신문특약기자  E-mail: zhuqinglong2006@hanmail.net      
4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나의 견해 (주청룡) 댓글:  조회:8007  추천:65  2010-02-28
한국의 중국 인명,지명에 대한 나의 견해주청룡 강원구, 김광림 교수의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두편의 글을 보고 지난해 12월 24일 흑룡강신문에 실린 강원구 교수의 " '북경'이냐, '베이징'이냐"와 금년 1월 27일 흑룡강신문에 실린 김광림 교수의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의 혼돈”을 보고 이 두편의 글은 다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의 한국의 중국의 인명, 지명 표기원칙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글이라고 생각되어 아주 공감을 가지고 필자도 나의 견해를 발표해 보자는 충동을 느꼈다.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 중국어 표기는 웨이드식[Wade式](중국어의 로마자 표기 방식의 하나)을 한글로 표기하고 “중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역사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한자음대로 하고 현재의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일본의 지명 가운데서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관용이 있는 것은 이를 허용한다. (예를 들면 上海를 상하이 혹은 상해, 黃河를 황허 혹은 황하)”고 하였다. 우리말에서 한자음은 강원구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들여오면서 무려 2천년 동안 갈고 다듬어 완전히 우리말로 만든 아주 세련된 말이다. 이런 세련된 말은 우리 민족은 들기도 쉽고 발음 하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쉽다. 그러나 웨이드식 한글표기로 하면 중국어의 원음과도 같지않고 우리말의 한자음과도 같지않은 중국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말로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의 인명, 지명을 한국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웨이드식을 한글 표기로 하면‘모택동[毛澤東]’을‘마오쩌둥’, ‘등소평[鄧小平]’을‘덩 샤오핑’, ‘호금도[胡錦濤]’를‘후진타오’로, ‘료녕성[遼寧省]’을 ‘랴오닝성’, ‘청도[靑島]’를 ‘칭다오’로 표기한다. 이렇게 하면 ‘모[毛]’는 ‘마오’로, ‘소[小]’는 ‘샤오’로, ‘도[濤]’는 ‘타오’로, ‘료[遼]’는 ‘랴오’로, ‘도[島]’는 ‘다오’로 표기하는데 이것들은 한자와 한글 한자음으로는 모두 한 음절이지만 웨이드식 한글표기로 하면 두 음절이 되므로 중국어의 원음도 아니고 우리의 한자음도 아닌 말로 된다. '장쩌민[江澤民]'에서의 '江[강]', '신장[新疆]'에서의 '疆[강]' 은 원음대로 하면 ‘쟝’으로 표기 되어야 하고 원자바오[温家宝]에서 ‘家[가]’는 원음대로 하면 ‘쟈’로 표기되어야 하는데 한국의 중국어 표기법의 ‘ㅈ, ㅉ, ㅊ’ 자음 뒤의 ‘ㅑ, ㅖ, ㅛ, ㅠ’음은 ‘ㅏ, ㅔ, ㅗ. ㅜ’로 적는다”는 원칙에 의하여 ‘쟝’을 ‘장’으로 ‘쟈’를 ‘자’로 표기한다. 이렇게 하니 이것도 중국어의 원음도 아니고 우리의 한자음도 아닌 왜곡된 말로 된다.  그리고 또 한국의 중국어 표기법의 “성조(聲調)는 구별하여 적지 는다.”는 원칙과 웨이드식 한글표기는 어떻게 하든지 중국어의 원음대로 표기할 수 없는 왜곡된 말로밖에 되지 않는다. 김광림 교수가 말한 것처럼 '國家體育場', '鳥巢'을 ‘국가체육장’ ‘새둥지’라고 하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 명칭의 뜻을 이해하겠는데 ‘궈자티위창’, ‘냐오차오’라고 말하거나 쓰면 누가 이 생소한 단어를 알아 듣거나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의미가 불명확한 명사를 쓰면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불편을 가져다 주는가? 지금 한국에서 중국의 지명에 대하여 완전히 중국의 인명, 지명 표기원칙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원구 교수가 말한 것처럼 대만(臺灣)은 타이완으로 부르면서, 중국(中國)은 왜 쭝궈로 발음하지 않고, 중국의 천안문(天安門)은 듣기만 해도 대뜸 알 수 있는데, 톈안먼으로 발음하고,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자금성(紫禁城)은 완리창청과 쯔진청이라 쓰지 않는 등이다. 그리고 중국의 인명을 한국의 중국어 표기법으로 하여 성명권을 침해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조선족인 강원도(姜元濤)의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에 이름이 병음으로 JIANG YUAN TAO로 표기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이 사람의 서류를 작성할 때에는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법에 의하여 ‘장위안타오’라고 한글로 표기한다. 이러한 사례들이 많고도 많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이 사람의 조선어로 된 이름도 아니고 중국어로 된 이름도 아닌 한 사람의 이름을 마구 뜯어 고친 성명권 침해로 된다고 본다. 하여 중국의 조선족들은 “어떻게 하면 ‘강원도’가 ‘장위안타오’로 되는가?”우리 이름을 되돌려달라고 함성을 지르기도 한다. 웨이드식은 한자음이 없이 로마자를 사용하는 영어권에서는 중국어의 음역(音譯)사용으로 가능하지만 우리말, 우리글은 한자문화권내에 속하기 때문에 웨이드식 한글표기는 정확하지 못하며 우리의 한자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기방법이다. 때문에 필자도 김광림 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우리의 한자음으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 한자를 병기하거나 원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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