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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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보도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댓글:  조회:7944  추천:34  2011-05-13
보도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4월27일 서울 북경올림픽성화봉송과 재한조선족유학생들의 현명한 안내문”을 보고서 청해 4월27일 북경올림픽성화가 서울에서 봉송되였다. 하지만 그 성화봉송 이 순리롭지는 않았다.  필자는 북경올림픽성화가 4월27일에 서울에서 봉송된다는 소식을 들 었지만 현지행사에는 참가하지 않았는데 보도매체를 통하여 서울봉송행사에 서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뉴스를 보면서 참으로 유감을 느끼면서 어리둥절 하였다. 그후 한국의 일부 언론들은 중국유학생들 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의 보도가 며칠 연속되였다 어쩌면 북경올림픽 성화가 서울을 지나는데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을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리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폭력행위는 어떻게되여 일어 났는가? 그 본질은 무었인가?   이런 언론보도만 들어서는 도무지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알수 없었다. 하여 필자는 현지 행서에 참가한 여러사람들과 조사를 해보고 인터넷에서도 많은 자료를 찾아 보는 가운데서 중국류학생들이 올림픽 성화봉송을 저지시키려는 중국 티베트(西藏)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 평화연 대’, ‘탈북인권단체총연합회’ 등으로 조성된 한국 시민단체와 충돌이 발생하 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국시민단체가 북경올림픽성화봉송을 저지하려는 것은 무었을 의미 하 는가? 단순히 반중국행위로만 볼수 없다. 올림픽대회는 전세계적인 대축제 인데 한국시민단체가 하필이면 이런 행사때에 떠들면서 북경올림픽성화봉송 을 저지시키려는것은 올림픽성화를 안전하게 봉송하려는 한국정부의 의도 와 배치되고 올림픽운동을 관심하는 전세계 모든 사람들의 념원과도 배치되 는 행위가 아닌가? 올림픽개막을 100여 일을 앞둔 이때 북경올림픽개최를 반대하면 올림픽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단말인가? 만약 한다면 어디에서 한 단말인가? 실질은 전세계적 행사로 되고 있는 올림픽개최를 교란하는 행위 로 밖에 볼수 없다. 중국유학생들의 강력한 애국심은 그 어떤 장애로 하여 올림픽성화가 꺼 지지 않고 순리롭게 서울에서 봉송되도록 하려는데서였다. 만약 한국시민단 체의 올림픽성화저지 행동이 없었더라면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가 있었겠 는가? 중국유학생들의 행위는 리해할만 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한국시 민단체와의 충돌에서 자제력을 잃고 폭력행위로 번져져 결국은 중국유학생 들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었다는 점은 꼭 지적할 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많 은 자료를 찾아보면서 4월27일 그 폭력행위의 사실의 진상을 파악한 후 일부 언론들이 편파보도를 하지 않았느냐는 의문과 질문이 있었다. 무엇때문 에 중국유학생들의 폭력행위를 규탄하는데만 치중하고 한국시민단체의 올림 픽성화봉송저지행위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는가? 하여 보도 매체의 언론 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글을 쓰려는 생각을 굴리던차에《중국동포타운신문》 제126호에 실린 본지 김용필 편집국장의 “4월27일 서울 북경올림픽성화 봉송과 재한조선족유학생들의 현명한 안내문”을 보고 이런 기사야말로 그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아주 객관적로 평가하였다는데서 아주 동감이 되 여 나도 한마디 나의 견해를 말하여 보자는 용기와 충동을 느끼여 필을 들 게 되였다. 김용필 편집국장의 글을 보면 4월25일,재한조선족류학생네트워 크(KCN)인터넷사이트에 게재된 안내문에는 KCN은 성화봉송시 공식적행사 조직을 하지 않는다는것,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현장질서를 준수할것, 일 부사람들의 올림픽저지시위도 예상되는데 과격한 대처행위를 자제할것, 행사 마감 후 쓰레기를 남기지 말것 등의 내용들이 있은것을 보아 사전에 조직적 인 활동이 없었다는것을 설명한다. 만약 ‘안내문대로’ 하였더라면 과격한 폭 력행위를 피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보도매체들은 사전에 미리 폭력행위를 조직한것으로 편파 보도를 하고있었다. 《중국동포타운산문》김용필 편집국장이 시사저널 ‘가리봉중국동포타운’ 보 도에 해명과 정정보도를 요구한것도 편파보도 때문이 아닌가? 언제나 보도 매체의 언론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2008.5.20 제127호에 게재  
62    단풍여행 -대둔산으로 댓글:  조회:6554  추천:19  2011-05-13
단풍여행 -대둔산으로   10월26일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여행동호회는 두 대의 버스로 가을 단풍여행을 대둔산으로 떠났다. 3일 연속 이따금씩 억수로 퍼붓던 비가 이날은 우리 동포들의 심정을 알아 주기나 하듯이 맑게 개인 하늘 높은 가을 날씨였다. 고속도로에서 그렇게 씽씽 달리던 버스가 대둔산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속도가 느리여지더니 입구 몇 킬로미터 전부터는 거부기 걸음을 하였다. 여행버스가 어찌나 길게 줄지어 늘어 섰는지 앞뒤 끝이 보이지 않게 객차바곤을 두 줄로 한데 이어 놓은 것 같았다. 버스에 앉아 가기보다 걸어 가는 것이 많이 빨랐다. 하여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30여분 정도 걸어서 대둔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대둔산(大芚山)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진산면. 논산시 벌곡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878m의 산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창의 단풍계절이라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여러가지 옷색갈로 하여 사람이 단풍과 함께 울긋불긋 산을 물들였다   입구에서 대둔산을 올리다 보니 나뭇잎들이 단풍이 들어 가을단풍이라는 경치를 감상할 수는 있었지만 소문과 인터넷에 오른 사진처럼 그렇게는 화려 하지는 않았다. 북경 향산공원의 가을단풍처럼 울긋불긋 화려하리라고 생각 하였는데 그렇지 못하니 우리들의 마음을 좀 서운하게 하였다. 관리일군과 무었때문에 소문과 이렇게 다른가 물으니 올해는 늦더위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비가 자주 뿌리면서 날씨가 얼어 붙은 날이 많았기 때문에 단풍이 왕년처럼 그렇게 잘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본래 산의 경치는 봉마다 기암 절벽이요, 돌마다 괴석으로 병풍을 이루었으며 임금바위와 입석대 사이에 80여m높이로 허공에 걸려있는 금강구름다리, 삼선바위를 톱아 오르는 계단식 삼선구름다리, 해발 878m로 하늘을 만질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마천대(摩天臺)에 세워진 마천대개척탑, 허공에서 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등은 그야말로 절경이였는데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하였다.    878m로 해발고도는 그리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대고도는 대단히 높았다. 하여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려 하였는데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케이블카가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황이여서 우리에게는 차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등산하여야 했다. 케이블카를 타면 허공에서 대둔산의 괴암괴석의 절경과 울긋불긋 물든 단풍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재미도 있었으 랴마는 걸어서 산을 오르는 것도 등산의 딴 의미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유쾌히 하였다. 등산길은 계곡을 따라 가파로운 돌계단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래 도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 나요”란 노래를 부르면서 톱아 올랐다. 계곡의 등산길은 오르내리는 관광객들로 붐비여 계곡으로 물이 흐르다기보다 사람이 흐른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산의 상대고도가 높고 너무 가파로와 산중턱까지 올라서 몸이 허약한 사람은 더 오르지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신체가 좋은 사람들은 조선시대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 라.”란 시구를 읊으면서 절정에 톱아 올랐다. 대둔산 초입에는 ‘동학농민혁명 대둔산 항쟁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내려올 때 그 비문을 상세히 읽어 보았다. 비문을 간추리면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에 패해 퇴각하게 되였다. 이때 최공우가 인솔한 농민군부대는 대둔산에 들어 와서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대둔산 근거지는 이듬해인 1895년 2월 18일 새벽안개를 틈탄 일본군의 기습에 의해 함락되였다. 이때 김석순은 한살난 어린애를 안고 150m의 절 벽을 뛰여 내려 장렬한 최후를 맞혔고 전사한 농민군 25명 가운데는 20대 후반의 임산부도 있었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희생된 렬사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전적비를 배경으로 너도 나도 기념사진 찍었다.     산을 내려와 식탁에 모여 앉아 모두 오늘의 즐거운 여행으로 웃음꽃을 피웠는데 절정에 오른 사람들은 “마천대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여라!”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진로’를 한잔 두잔 더 굽을 냈지만 절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졸장부라 더 무슨 할말이 있으랴. 하지만 절정에는 오르지 못 하였지만 대둔산의 절경들을 다 올리다 볼 수 있었기에 큰 유감은 없었다. 중국동포들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하루의 즐거운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리우고 귀경길에 올랐다.   청해 2008년 11월 16일 중국도포타운신문 138호에 게재  
61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 댓글:  조회:8345  추천:10  2011-05-13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                                     청  해 12월 3일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니 ‘중국동 포 送舊迎新의 밤’ 행사에 참석하여 달라는 《동북아신문》사의 이동렬 편집국장의 초청장이 날아와 있었다. 초청장을 받고 나는 몹시 기뻤다. 이 행사에는 많은 언론인들이 모이는 장소이므로 내가 평시에 즐겨 읽고 만나 보고 싶던 칼럼 칼럼니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범송 박사의 칼럼을 즐겨 읽었고 전번에는 인터넷으로 “‘조선(한)반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칭은 무엇인가요?”란 물음을 제기 하였는데 나 같은 면목도 모르는 하찮은 사람의 문의에 대하여 그렇게 시간이 바쁘면서도 메일을 받은 즉시로 정성껏 회답을 준데 대하여 이번 기회에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7일 저녁 회식 장에 도착하니 이미 면목을 아는 언론인들이 여럿이 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김범송 박사가 안 왔는가 고 물으니 누구도 못 보았다고 하였다. “혹시 다른 사유가 있어서 오늘 이 좌석에 참가하지 못하는 거나 아닐까?” 하는 데서 나는 몹시 서운하였다. 얼마 후   40대 초반의 한 분이 와서 주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나와 그분이 서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나의 옆에 앉았던 여호길선생이 나보고 “저분을 모르는가?”고 하였다. 내가 “모르겠는데?” 하자 그가 인사를 시키었는데 그가 바로 내가 오매에도 그리고 만나보고 싶던 김범송 박사였다. 서로 인터넷으로 문답이 오가고 그것이 《동북아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였지만 면목부지(面目不知)이던 것이 직접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만 하였다. 그도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나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김범송 박사가 나에게 한 분을 소개하였는데 흑룡강신문 연변지사 윤운걸 사장이었다. 세상일이란 참 묘할 때도 있었다. 윤운걸 사장 역시 면목부지이지만 내가 그에게 신세를 많이 져 한번 꼭 만나 보았으면 하던 분이다. 나의‘조선족공동체’에 대한 글들을 다른 신문에서는 민감한 민족문제여서 감히 실지 못하지만 윤사장께서는 우리 조선족들의 미래에 대한 방향성적인 좋은 글이라며 《흑룡강신문》에 실어 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어느 때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 보았으면 하였는데 오늘 본국에서가 아니라 고국 땅에서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천만 뜻밖이었다. 그도 나를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김범송박사와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그는 래일 있게 되는 연변취재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연합뉴스 선양특파원 조계창 기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오늘 중국에서 비행기편으로 한국으로 왔다가 오늘 이 행사에 참석하였던 것이었다. ‘送舊迎新의 밤’은 참말로 뜻 깊은 밤이었다. 《동북아신문》이 금년 일년 걸어 온 일들을 회고하는 모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인, 지성인들의 만남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날 모임에는 연합뉴스 영문팀 곽승지 팀장, 연변대학 인문사회과학학원 강용범 원장, 중국사회과학원의 정신철 교수, 조선족후원회 이상규 회장, 재한유학생네트워크 대표들도 참석하여 축사를 올리였는데 나는 이런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고국에서 뜻 깊은 송구영신의 밤을 보낸데 대하여 무한한 긍지를 느끼었으며 앞으로 더 좋은 글들을 써서 《동북아신문》에 올려야 하겠다는 결심도 나왔다.     2008년 12월 10일 동북아신문에 게재
60    우리는 하나 댓글:  조회:9276  추천:11  2011-05-13
우리는 하나 —2008 외국인 근로자 함께하는 한마음 축제   노동부(장관 이영희)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사장 유재섭) 주최로 지난 9월 28일 안산시 호수공원에서 ‘2008 외국인근로자와 함께하는 한마음 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일정에는《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생활 수기 현상공모》입선자 수 상식도 있어 나에게 이 축제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왔기에 나도 그날 그 축 제에 참석하게 되였다.   ‘우리는 하나 (We are One, 我们是一体)’라는 주제로 열린 ‘2008 외국인근 로자와 함께하는 한마음축제’에는 네팔, 베트남,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방글 라데시, 몽골, 중국, 중앙아시아(CIS), 재외동포,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12 개국 공동체들을 비롯해 총 5천 여명의 외국인 근로자와 고용주가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총 3부로 진행되였는데 제1부 ‘한마음’에는 12개국 부스가 오픈되었고 방글라데시, 중국, 스리랑카 등의 국가별공연이 진행되었으며. 2부 ‘열림’에서는 국가별 대표단이 입장하였다. 고용허가제 체결일 순서에 따라 각기 자기나라의 국기를 들고 입장하였는데 다른 나라의 대표단이 국기를 들고 입장할 때에는 의례적으로 박수를 치는데 그치였지만 나의 조국 중화인민공화국대표단이 오성붉은기를 들고 입장하는 순간, 자제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받아주어 고국에 와서 일하며 돈을 벌기에 한국정부에 감사하지만 그래도 조국이 사랑스럽고 조국이 그리웠다.   각국 대표단의 입장에 이어 노동부 이영희장관의 개회선언 등 축제 개회식이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전통문화예술공연단 ‘들소리’가 한국전통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어지는 3부 ‘어울림’에서는 방송인 김미화 씨의 사회로 인순이씨의 미니콘서트가 화려한 막을 올리고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의 국가별공연 2부가 진행되어 다채로운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 생활 수기 현상공모》입선자 수상식이 있어 나도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다.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순간 나도 중국의 일개 서민으로서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와서 이런 국제적 무대에 오를 수 있은데 대하여 긍지와 자호감을 느끼였다.         주변행사로는 12개국의 공동체들이 고유의 전통 놀이와 춤, 전통음식을 선 보이는 40여개의 부스로 구성된 다문화 일일장터가 열려 참가자들이 특색 있는 다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VANK)의 부스가 차려져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근로자들에게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 홍보행사가 눈에 띄었다. 그 밖에도 외국인근로자들과 고용주 및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생활에 필 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외국인관련 정보박람회’, 인력공단과 노동부의 ‘무료 노동상담부스’가 열려 임금체불, 출입국 체류 등에 대한 상담, 한국국제보건 의료재단의 ‘사랑의 의료클리닉’이 있었다. 나도 이 기회에 신체 검사를 하였 는데 모든 것이 정상이였다. 건강이 근본며 건강이 첫째라 모든 것이 정상이 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는 한국인과 아시아 여러 개 나라의 근로자들이 함께 만나는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서로 확인하며, 서로에게 담겨 있는 불신과 편견을 해소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는 화합의 자리로 되였으며 출신국가와 언어, 피부색, 문화 등은 다르지만 이번 축제의 주제와 같이 ‘우리는 하나’로 화합과 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2008년 10월 10일 중국동포타운신문 136호 6면에게재
59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댓글:  조회:8358  추천:11  2011-05-13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에게 경의를 드린다 청     해  한국정부의 방문취업제의 시행으로 하여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는 37만명을 넘어섰다. 따라서 중국동포 밀집지역이 생겨나 동포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절대 다수의 중국동포들은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기의 신근한 노동으로 부지런히 일하여 돈을 벌려고 하지 않고 비법적인 수단으로 위장영업을 하면서 퇴폐업소를 꾸리거나 그런 퇴폐업소로 드나들면서 흉기를 들고 폭력행위까지 감행하여 당지 지역주민들의 안전에도 위협을 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비해 영등포구 대림동 지구대, 구로구 가리봉 지구대에서는 중국동포 자율방범대를 결성하고 발대의식을 치른 후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인 가리봉과 대림동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우리 동포사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꾸는데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아주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자율방범대원들은 중국동포의 거리를 평온의 거리, 안전한 거리로 되게 하기 위하여 매일 10시간 이상의 고된 일을 마치고 밤이면 휴식시간도 마다하고 순라를 하고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고상한 사람들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나는 중국동포의 일원으로서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께 경의를 드리며 충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시한다.   “불법행위”와 “자율방범대” 서로 대립되는 용어이다. 무엇 때문에 같은 동포로서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고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판이한 대치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가? 만약 중국동포들의 불법행위가 없다면 중국동포 자율방범대가 결성될 필요가 있는가?   방문취업제의 시행은 우리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최대의 관심이며 배려라고 생각한다. 하다면 우리 동포들은 어떻게 한국정부의 이런 관심과 배려에 보답해야 하는가?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모두 자각적인 준법의식을 갖고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무슨 경제적으로나 집단적인 모임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고 더욱 실질적인 것이며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 하는 것이고 한국정부의 관심과 배려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로 우리 동포사회를 가꾸어 간다면 한국사회는 우리를 더욱 포옹해 줄 것이고 지역 주민들과도 더욱 잘 어울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어울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않고 불법행위를 저질러 동포사회를 어지럽히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우리를 보내 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준 한국정부에 모두 미안하게 될 것이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는 인간쓰레기로밖에 볼 수 없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려놓는다.》는 속담과 같이 이런 인간쓰레기들로 하여 우리 동포사회의 이미지는 엄중한 손상을 받고 있다. 우리 모두 자각적인 준법의식을 갖고 자율방범의 ‘빗자루’를 들고 이런 인간쓰레기들을 깨끗이 쓸어버려 중국동포의 거리를 깨끗한 거리, 안전한 거리로 만들어 전반 동포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 통합하는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 가자.    2008년 11월 7일 동북아신문,  2008년 11월 9일 한민족신문에 게재  
58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댓글:  조회:9330  추천:11  2011-05-13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ㅡ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서   나는 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 다시 림민호 교장선생님을 머리에 떠 올리게 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나의 모교 교장선생님이시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이는 이미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박해를 받아 세상을 뜬 뒤여서 비 록 그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나의 모교 제1임 부교장(당시 연변대학 교장으로는 자치주 주장 주덕해동지가 겸임하였는데 학교의 일상 사무는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주관하시였다.)이시고 연변대학을 창립하는데 서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고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라는 데서 그이를 매우 사모를 한다. 그러기에 림민호 교장선생님에 대한 자료들 을 즐겨 읽었다. 오늘 그이를 사모하면서 내가 본 자료와 선배님들에게서 들어 온 이야기들을 간략하여 이 글에 올린다. 1.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1904년 1월 3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한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 이듬해에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하였으 며 후에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겨갔다. 1919년 룡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에서 그이는 비록1`5세의 소년이였지만 그와 그의 친구 둘이서 천주교 례배당 종루에 올라가3.13반일운동시작의 종소리를 울렸으며 이때로부터 민족 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으셨다.   그이는 1920년 3월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에 입학하여1923 년 4월에 졸업하고 화룡현 동성촌 룡천동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이 듬해 2월 명을 받고 화룡현 투도구에 가서 "동아일보"투도구지국 기자와 상 점주인의 신분으로 지하사업을 하셨다. 1928년 9월 중순, 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하였 으며 1932년 5월 동 방대학교에서의 4년간 학습생활을 끝마치고 9월 조선 함흥, 흥남 지역으로 파견되여 지하사업을 하다가 3월 28일 흥남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여 6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으며 감옥에 서 감옥당국과 맞서 싸웠기에 1년 연기되여 7년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40년 출옥한 그이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42년초, 돈화에 서 일자리를 찾았다. 1945년 일제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여 광복을 맞이한 후 돈화현 부현장으로 사업을 하였으며 1946년 10월 "연변일보" 전신인 "길림일보" 조선문판의 총편집으로 임명되였다. 2.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용한 항일투사였을 뿐만아니라 또 연변대학창립 에도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다. 1948년초, 당시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던 림춘추와 함께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석하시여 연변에 민족대학을 꾸릴것을 제기하였으며 그해12월에 연변대학주비위원회가 성립되였는데 주 비위원회 주임으로는 림춘추, 부주임으로는 림민호가 임명되였으며 구체사 업은 림민호가 맡아 하도록 하였다. 그이는 학교의 성질을 문과, 리공과, 의과 농과를 망라한 종합성 민족대학으로 규정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손수 초빙장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여 교원문제를 해결 하였는데 가장 큰 곤난은 경비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동북인민정부거나 길림성 정부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여 조선족 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 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으며 유지인사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족들에게서 의연금과 물자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결과 동북 각지 조선족들이 쌀과 돈, 그리고 학교에 수요되 는 많은 물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초창기 학생이였던 선배님들의 말에 의하면 교실이 없어 공업학교를 빌어 쓰다가 1950년대초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올 때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 둥산이였으며 불에 타버린 일본관동군 병영이 벽체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교장선생님은 친히 교직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불에 타 버 린 병영을 수리하여 교실로 쓰고 새로운 사무청사와 실험실을 설계하여 짓 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조선민족대학의 창립과 발 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려 오시였으며 당의 교육방 침을 관철집행하고 근검하게 학교를 꾸려 특색있는 민족대학의 교풍을 수립 하고 교육과 교수개혁을 진행하여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하여 그이는 1950년 10월, 동북조선족을 대표하여 국경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시여 모주석과 주덕의 접견을 받았다. 3. 불행한 인생  1966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 혁명"에서 수많은 좋은 간부들을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 교장선생님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얼마되지 않아 홍위병들에게“변절자”,"주자파"(자본주 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리워 박해를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록 초급중학 교 학생이였지만 연변대학을 창립하시고 15년 넘어 그 학교를 운영하시느라 로심초사하신 분이 그 학교 학생들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정말 리해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항일구국운동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하시고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하여 오신 분이 어떻게 변절자, 주자파로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겼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1970년7월 14일 66세 의 아까운 나이에 원한을 풀지 못한 채 불행히 서거하셨다. 4. 시대의 공정한 평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사망한 뒤 8년이 지난 1978년 7월 14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결정을 내려 그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 주고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추도회와 유해이장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골회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일부분이 연변 대학정원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화룡현 동성향 고성촌 뒤산 림씨묘지에 안장 되였다.    1989년 연변대학창립 40돌에 즈음하여 연변대학에서는 대학교정에 림 민호 교장선생님의 반신석상을 세웠다가 연변대학창립 55주년이며 교장선 생님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석상을 동상으로 바꾸어 그의 업적을 기 리고있다. 나는 연변대학에 갈때마다 꼭꼭 교장선생님의 동상 앞에 가서 정중히 허리굽혀 세번 절을 하여 교장선생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시하군 한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우리 민족교육사업에 기여하신 그 업적 길이길이 후 세에 전하여 지리라!  《중국동포타운신문》2008.7.5 제130호에 게재
57    제1차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 댓글:  조회:6341  추천:13  2011-05-13
제1차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   -제2회 your옥천포도축제로  주청룡   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同好會)는 이미 35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7월20일 제1차로 제2회your옥천포도축제 떠났다. 우리 회원들은 모두 중국동포타운신문사에 집결하여 8시30분에 관광버스로 떠났는데 여행동호회 회원들은 연변, 길림, 흑룡강, 료녕 등 중국의 방방곳곳에서 온 동포들이였다. 달리는 버스에서 목단강에서 온 안영학 선생님의 사회로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비록 서로 면목을 모르는 사이지만 도두 중국동포라는 이 공통점이 한 가족성원으로 융합시켜 서먹서먹한 분위기 없이 너도나도 흥겹게 노래와 춤을 추면서 오랫동안 쌓인 피곤과 스트레스를 해소 하였다. 버스는 2시간반 달려 11시에 포도축제현장인 충북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금강유원지(금강2교 옆)에 도착하였다. 갈매기호 태풍의 영향으로 전날부터 아침에 서울에서 떠날 때까지도 지궂게 내리던 비가 충천도에 들어서면서 맑은 날씨를 보이더니 목적지에 도착하니 햇빛 쨍쨍 내리 쪼이는 완전 맑은 날씨였다. (그날 서울은 온 하루 폭우가 쏟아졌다한다.)  이것은 아마 하느님이 우리동포들의 즐거운 여행을 축하하여 내린 선물이라겠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 일행은 포도축제현장을 배경으로 영원한 추억으로 될 여행동호회회원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옥천군은 경치 좋은 산과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끼고 있어 그야말로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였다. 옥천군과 이웃인 영동군은 모두 포도의 주 생산기지인데 영동군에서는 로지(露地)포도 재배를 주로 하고 옥천군에서는 시설(施設)포도재배를 많이 하여 포도가 일찍이 시장으로 나간다고 한다. 우리 관광객들도 주위의 비닐하우스안에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린 보랏빛포도를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의 토지와 기후조건은 포도재배에 적합하여 색상이 좋고 당도가 높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옥천군은 시설 포도 재배면적이 전국 제2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축제현장에는 포도 품종 비교전시판매, 포도가공식품, 와인 및 포도원액 시식(試食)-시음(試飮) 및 전시판매 되였다. 관광객들은 시식, 시음도하고 아주 맛이 좋다며 여러가지 전시품들을 기념으로 샀다. 옥천군 포도축제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한 2008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진행되는 포도축제의 주제는 “보랏빛 향기 찾아 떠나는 여름여행”이고 주요행사들로는 포도관련 레그리에이션(포도 빨리 먹기, 포도 알 수 알아맞히기, 포도무게 알아맞히기, 포도품종 알아맞히기, 포도당도 알아맞히기, 포도 관련 즉석 OX퀴즈.), 제2회옥천포도가요제, 제2회옥천군향토음식경연대회, 청소년 페스티벌, 전자현악, 즉석노래방 등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는데 레그리에이션은 매일 중복되는 행사였으며 여러가지 행사가운데서 우리동포들이 참여할 수 있는 항목이 즉석노래방이여서 동포 몇이 노래장끼를 부리였는데 연길에서 온 채영화씨가 2등, 상금 5만원(1등 1명,10만원, 2등2명 5만원 3등 3명 3만원)을 타는 행운을 지니였다. 우리 동포들은 한결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오후5시반이 되여 우리 일행은 귀로에 올랐는데 버스가 시동을 걸자 올때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노래와 춤판벌어졌는데 8시, 신문사에 도착할 때까지 버스안이 들끓었다. 이렇게 우리는 즐거운 하루를 뜻깊게 보내고 9월에 있게되는 제2차 여행을 기대하면서 그때 다시 만나요. 빠이. 빠이 하면서 헤여졌다.   후기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여행부의 조직으로 된 중국동포들의 여행동호회는 이미 35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7월20일 제1차로 제2회your옥천포도축제 떠났다. 고된 로동에 지치면서 일만 할것 아니라 동포들의 여행동호회에 참가하여 두달에 한번씩 고국의 금수강산을 돌아보고 여러가지 지역축제도 보면서 고국의 력사와 문화를 터득하는 문화적 생활을 하는 것도 한국생활에서 한낱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매달에 회비 13,000원을 내는 것도 우리들의 조직생활을 의미하며 2달에 한번 26,000원의 회비로 한국의 여러곳을 유람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에게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지 않는가 생각하며 우리 동포여행동호회가 더 확대되여 앞으로는 두대, 세대의 버스로 함께 출발하여 우리 동포여행 대군체를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 중국동포타운신문》2008년8월5일 132호 제10면에 게재
56    정선기행 댓글:  조회:7052  추천:10  2011-05-13
정선기행  4월26일 토요일 우리는(우리 가족 3명과 중국 할빈에서 온 남현복 부부) 중국동포타운신문  여행사업부에서 조직한 정선관광을 하게되였다.     우리는 아침 7시10분에 서울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가는 관광열차르 타고 정선여행길에 올랐는데 기차는 용산역으로부터 중앙선을 달렸는데 서빙고로부터 한남, 옥수, 응봉등 한강유역을 지났기에 한강과 한강양안의 아름다운 경치, 그리고 한강 위에 가로 놓인 한강대교들을 기꺼이 볼 수 있었고 기차는 청량리 역을 지나 다시 덕소로부터 양평까지 한강유역으로 달려 또 다시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특히 팔당역을 지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곳에 수축한 팔당땜과 팔당호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나와 남현복씨는 카메라를 들고 팔당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곳 빼놓을세라 렌즈에 잡아 넣으면서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철도 연선의 아름다운 경치들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강원도는 산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예미로부터 증산으로 달리는 구간 기차가 산 중턱으로 달렸기에 산밑 골짜기로 다리는 자동차들을 보니 비행기에 앉아서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기차는 5시간 남짓이 달려서 12시 15분 열차종착역인 아우라지역에 도착하였다 1. 아름다운 전설이야기 아우라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야기가 있었다. 이곳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로서 오대산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송천과 임계 중봉산에서 발원되는 골지천이 합류(어우러지다.어우러지다가 점차적으로 아울러지다로 번저져)되여 흐른다 하여 아우라지로 불리웠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적인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陰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부르며 여름 철에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전해지 기도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뗏사공으로 떼를 팔아 돌아오면 처녀와 결혼하기로 다짐을 하고, 큰 물에 떼를 띄우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그 총각은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그 총각은 동강 어디엔가의 드센 여울에서 뗏목이 뒤집혀 목숨을 잃은 듯 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차 절망으로 변했다. 아우라지 나루에서  “님 언제 오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며 매일 총각을기다리던 처녀는 결국, 아우라지강에 몸을 던져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다.  1983년경, 이곳 사람들은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이 처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처녀상을 세웠다. 한편, 이 처녀상에 얼킨 또 다른 실제 이야기도 있었다. 한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 가마를 탄채  이 배에 오르게 되었다. 배에는 하객들 과 친척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줄배가 무게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바람에 가마에 탄 처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 후로는 해마다. 아우라지에서 는 두 세명씩의 익사 사고가 생겼다. 아마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사람들의 목숨을 앗 아간다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 처녀상을 세운 이 후로는 신기하게도 익사 사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여 이곳은 예로부터 남녀의 애환이 담긴 "정선아리랑"의 주요 발상지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강건너에 아우라지 비, 처녀상, 정자(여송정)를 세워 님을 기다리는 애절한 사연을 지금도 아리랑 가락에 담아 유유히 오가고 있는 유서깊은 곳,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전하고 있다 2. 신나는 풍경여행 레일바이크  레일바이크란 처음 미국서부지역에서 폐선된 철도를 버리기는 아쉬워 페달을 밟아 철로 위를 달리는 네바퀴 자전거를 레포츠에 이용한 것으로서 철도와 자전거의 약칭을 합친 말로 미국과 유럽의 산악관광지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다. 오늘 우리의 첫 관광코스가 바로 레일바이크를 타는 것이였다. 레일바이크는 바로 구절리역과 아우라지역사이의 폐선된 철도를 이용하여 탑승객이 페달을 이용하여 철도레일 위를 시속 15~20km의 속도로 운행할 수 있도록 제작한 철로자전거로서 가족과 연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저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철길 따라 레일바이크는 달리고 풍경은 흐르고 있었다. 총 7.2km 구간을 4,50분간 운행하는 레일바이크는 기차길과 함께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의 향기 만끽할 수 있는데 계곡의 강을 건너고 �아 지른 절벽 아래를 달리고 그림 같은 산골 마을을 지나고 세개의 터널을 지나는데 두번째 터널을 지날때에는 구슬픈 정선 아리랑 음악이 은은히 흘러 나온다. 아이들은 너무 흥겨워 자지러지듯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고 레일바이크가 철도와 도로 교차로를 지날때에는 교통지휘 일군이 붉은기를 들고 오가는 자동차와 행인을 멈춰 세우고 있었다. 비록 인력자전거이지만 철도 위로 달리는 것 만큼 그야말로 철도의 교통우세를 향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절리에는 폐객차를 개조하여 2마리의 여치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카페 ‘여치의 꿈(1층/스파게티 전문점, 2층/카페)과 아우라지역 동에는 천연기념물 제 259호로 지정된 어름치가 산란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카페 ‘어름치 유혹(패스트 푸드점)이 관광객을 맞이하였다. 3. 정선의 특산물과 향토음식 오전 관광은 이로서 끝나고 2시에 정선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점심식사는 올챙이국수, 콧등치기 메밀국수, 곤드레밥 등 당지의 향토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난다음 우리는 전국에서도 이름있는 정선5일(2, 7, 12, 17, 22, 27일)장이라는 장마당을 구경하였는데 우리가 간날은 26일기에 평일장이여서 그리 흥성하지는 않았지만 당지에서 나는 곤드레를 비롯한 산나물, 악초, 옥수수, 메밀 등 당지 특산품들은 구경하거나 살 수 있었다. 4. 화암8경     다음으로는 화암8경을 구경하는 것이였다. 제1경으로는 화암약수(畵岩約水)는1913년 9슬동(九瑟洞)마을에 살던 문명무(文命武)란 사람이 꿈속에 원(院)터의 동자(童子)바위아래에 청룡과 황룡이 서로 얽히고 설키여 서광(瑞光)을 발하며 하늘높이 날아 올라감으로 황홀감에 놀라 깨여보니 꿈인지라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아 땅을 파헤치니 붉은 물줄기가 솟아 두 손으로 받아 마시니 혀가 짜릿하고 시원하여 온 몸에 힘이 솟아 이를 온 세상에 알리니 신비한 맛과 함께 산화철탄산수로서 탄산이온, 철, 칼슘, 불소 외에 9가지 필수원소가 함유되여 톡 쏘는 맛을 내며 위장병, 피부병, 빈혈. 눈병 등에 매우 영험스런 효능을 나타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다른 곳은 벚꽃이 이미 다 떨어졌지만 정선의 화암 약수터에는 벚꽃이 한창의 계절이였다. 우리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제2경으로는 거북바위인데 깎아 찌른듯한 절벽 위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북바위는 이 고장의 수호신적 존재로 정성껏 지성을 드리면 무병장수하고 그해의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제3경으로는 용마소로서 조선 중엽 김씨라는 여인이 옥동자를 낳은지 사흘만에 아기가 이곳저곳을 날듯이 뛰여노는 것을 보며 장수가 태여났다 하여 잘못되면 일족이 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그후 용마가 나타나 주인을 찾아 다니다 주인이 죽은 것을 알고 이 소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용마소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여 있었다. 제4경으로는 화암(금강)동굴이였는데 화암동굴은 1922년부터1945년까 지 연간 순금 22,904g을 생산했던 천포광산으로 금광을 파던중 발견된 종유 굴과 금광갱도를 활용하여 테마형 동굴로 조성되여 대석순과 석주, 갖가지 형상의 종유석이 신비로왔다. 총 1,803m의 관광구간은 5개(역사의 장, 금맥 따라365, 동화의 나라, 금의 세계, 천연동굴광장)테마공간으로 구성되였다. 제5경으로는 화표주인데 화암리에서 화표동 입구 삼거리 우측으로 약 30m앞(소금강 경광 도로입구)절벽위에 뾰족하게 우뚝 솟은 두 개의 돌기둥을 화표주라 하였는데 예날 신선듣이 이 곳에서 신틀을 걸고 짚신을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제6경으로서는 소금강이였는데 화표주를 지나 물운대를 가기 전까지 펼쳐지는 수십미터의 기암절벽과 숲이 펼쳐져 있어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장관을 연출하여 소금강이라고 하며 특히 겨울철 설경이 아름다워 설암이라고도 하였다. 제7경으로는 몰운대인데 커다란 암석이 층층이 형성되여 있는 이곳은 광활한 반석이 있었으며 몰운리와 하천변 계곡의 아름다움을 관광할 수 있어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제8경으로는 광대곡이였는데 하늘과 구름과 땅이 맞붙은 신비의 계곡으로 옛날 심마니(산삼캐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산신께 기도를 드리면서 산삼을 캔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심마니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웰컴투동막골’ 촬영지,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아라리민속마을 등 광광명소들이 많지만 1일 관광으로는 시간이 안되는 것만큼 아쉬운 심정으로 오늘의 관광을 맡이고  돌아 오는길에 나는 정선은 정말 산이 많고 산세가 높고 물 맑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전설 많은 곳이여서 정말 관광명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2008년 5월 6일 중국동포타운신문,  2009년 4울 10일 한민족신문  에게재
55    중국동포들의 길잡이《중국동포타운신문》 댓글:  조회:8975  추천:14  2011-05-13
중국동포들의 길잡이《중국동포타운신문》   주철룡   금년 8월23일은 《중국동포타운신문》창간 5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리 길다 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이 5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 공존의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여온 5년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이 5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한국생활 에서 의 길잡이자 가장 친근한 벗으로 보내 왔다.  나는 원래 신문애독자인지라 한국에 와서 처음《중국동포타운신문》을 보았을 때 한국에 우리 동포들을 위한 이런 좋은 신문이 있구나 하며 너무 기뻐 그 즉시로 신문사를 찾아가서 직접 김용필 편집국장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지금 중국동포들이 이 신문을 즐겨 보는 이유는 신문에 법무부의 중국 동포들에 대한 출입국정책, 동포들에 대한 안내문(조선족동포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미래에 대해서 올바르게 준비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글), 동포들의 한국생활 수기, 등 중국동포들이 가장 관심 갖고 즐겨 읽는 문장들이 많이 실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자리 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신문이 매 한 호가 나오면 1면부터 12면까지 하 나의 기사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읽곤 하며 한편 정기적으로 원고를 써서 귀 신문에 투고를 하면 매 호의 신문마다에 내가 쓴 칼럼, 기행문, 생활수기 등 기사들이 한편씩 실리군 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은 보도매체의 작용을 할뿐만 아니라 또 중국동포 사회를 위하여 실질적 일들을 많이 해 왔다고 본다. 2005년, 2006년 법무부 는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를 위한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불법체 류중인 중국동포들이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면 합법체류로 한다는 정 책을 반포하였다.《중국동포타운신문》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안내상 담을 해주었으며 정부의 이런 정책이 나왔어도 불법체류자들이 정부의 정 책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자진출국을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중국동 포타운신문》신문사는 법적 담보를 서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자진 출국하였다 가 재입국하여 합법체류자로 되게끔 설득하였으며 이로 하여 이 신문사에 등록하고 자진출국한 사람은 2년에 무려 7천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신문의 홍보를 통하여 자진 출국한 동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로 하여 《중 국동포타운신문》은 중국동포들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였다. 그때 불법체류 자로 있다가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법적담보로 자진 출국하였다가 재입 국하여 인젠 합법체류로 있는 나의 한 친척은 “《중국동포타운신문》은 정 말로 우리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이다. 만약 그때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의 법적담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불법체류자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 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중국동포타운센터 법률구조본부> 에서는 동포들이 일하고도 고용주한테서 임금을 받지 못한 문제. 일하다 상하여서도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는 등 문제들을 해당부문을 찾아 해결하여주고 있으며 이외에도 중국도포들을 위하여 취업소개, 고충상담, 출입국수속대행, 한국생활안내관, 컴퓨터무료교육. 중국동포<사랑의모금함> 활동, 등등의 많은 일들을 하여 동포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지역주민들과 동포들이 함께하는 설맞이, 추석맞이 등 한중문화대잔치를 개최 하여 한국사회와 동포 사회를  화합과 공존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뉴대(紐帶)작용을 하고 있다. 앞 으로《중국동포타운신문》이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를 화합공존의 사회로 만 드는 데서 더욱 큰 기여를 하며 중국동포들의 훌륭한 길잡이 더욱 친근한 벗 으로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8년 8월 31일 일요일   (중국동포타운신문134호에 게재)
54    중국동포들이 보는 직업소개소 댓글:  조회:8645  추천:17  2011-05-13
중국동포들이 보는 직업소개소   지금 많은 중국동포들이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한국에 들어 와서 취업을 하고 있는데 직업소개소의 역할을 부인할수 없다.       원칙적으로 직업소개소에서 동포들의 직업을 소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바는 못되지만  원칙을 지키기보다 원치을 어기고 동포포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여주는 직업소개소가 교포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다. 많은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일자리를 해결하였기에 대부분 직업소개소에 대 하여 긍정적인 평가였고 일부분 직업소개소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것이다.      긍정적인면:    1. 대부분의 전철역 근처에 모두 직업소개소가 있기에 중국교포 구직자에게 아주 편리 하다. 2.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는 정규적 회사만 알선하여 주고 정규적 회사는 고령구직자들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고령 구직자들은 고용지원세터를 통하여 일자리를 해결할 수 없지만 직업소개소는 정규적 회사외에도 전국 각지의 어떻한 일자리도 다 소개를 하여 주기에 고령구직자들은 구직의 유일한 희망을 직업소개소에 두고 있다. 3. 많은 직업소개소에서는 구인자와 구직자사이에서 중개역할을 잘 하여 구인자와 구직자의 호평을 받고 있다.   부정적인면: 1.    직업소개소에서 말한 조건과 노동현장의 조건이 일치하자 않다. 일부 직업소개소에서는 아주 좋은 말로 소개를 하여 어떤 사람들은 소개소에서 소개한 조건만하면 가서 일할만 하다고 생각하고 현장에 가보면 소개소에서 말한것처럼 그렇게 좋은 조건이 아니였다. 소개소에서 소개한것보다 노동시간이 한두시간 더 길거나 노동강도가 더 세고 구인자는 분명히 숙식은 해결하지만 이부자리는 자체로 해결 하여야 한다고 말 하였는데 직업소개소에서는 이런것을 구직자에게 말 하지않았고 농장을 소개할 때 숙식을 해결한다고 갔지만 가보면 쌀만 대여주고 그외의것은 자체로 해결하여야 하며 잠자리는 하우스안이였다. 사람이 어찌 짐승의 자리보다 못한데서 잘수있겠는가? 쌀만대여주고 하우스 안에서 자는것도 숙식을 해결한다고 할수 있겠는가?    직업소개소에서는 구인자와 구직자사이의 중개작용을 통하여 돈벌이를 하는것만큼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구인자의 의사를 똑똑히 구직자에게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차비를 헛팔고 돌아 오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는 안들지만 이미 온바하고는 일하여보자는 것이였다. 직업소개소에서도 바로 구직자들의 이런 심리를 이용한것이였다 2.    직업소개비를 돌려 주지 않는다, 현장에 가서 며칠 일하다 보면 소개소에서 소개를 한것보다 차이가 너무 많아 돌아 오려고 일한 노동공가를 달라고 하면 구인측에서 우리는 이미 직업소개소에 소개비를 냈기에 노동공가를 줄수 없다하고 직업소개소에 와서 직업소개비를 돌려 달라면 우리가 보낼때에는 거기 조건이 어떠어떠하다고 상세히 다 말하였는데 이제와서 왜 이러는가며 소개비를 돌려 주지 않는 직업소개소가 있다. 이렇게되면 구직자는 차비를 헛팔고 노동공가도 못 받고 직업소개비도 허망 떼우고 만다. 하여 이들은 직업소개소를 사기치기군들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평가보다 긍정적인 평가 우세: 총적으로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이 더 많기에 많은 중국동포들이 직업소개소를 찾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동포들의 취업에서 직업소개소의 역할을 부인할수 없는것만큼 국가에서도 합법적으로 직업소개소를 동포들을 위한 직업소개소가 되게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국동포 주청룡 2008년 2월 20일《중국동포타운신문》제121호 2면에 게재 2008년3월30일《길림신문》에 전재 2008년7월28일《동북아신문》에 전재  
53    제주도 기행 댓글:  조회:5634  추천:10  2011-05-13
제주도 기행 주청룡    1.    제주도에 도착 나의 오래전부터의 소망이 조상이 누워 계시는 고국땅을 밟아 보았으면 하였는데 이번에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오게 되여 조상의 영전에 절을 올려 오매에도 그리던 나의 소원을 풀게되였으며 우리 부부는 이번에 또《중국동포타운신문》사의 김용필 편집국장님과 이성주 전무님의 알선으로 제주도 유람을 하게 되였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1월 20일 오후 1시 55분에 김포공항에서 이륙하여 50분간 날아 2시 55분에 제주공항에 착륙하였는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 제주도를 내려다 보니 산과 들, 집 그리고 거리에서 달리는 자동차들이 모두 한눈에 안겨 왔는데 나무와 풀들이 모두 푸른색 그대로이고 어떤 채소밭은 노란색 꽃이 온 밭을 덮었고 집은 남색, 붉은색 지붕으로 되여 있어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이 서로 조화되여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대합실에는 “주청룡”이라고 쓴 패쪽을 든 안내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밖에는 우리를 호텔로 안내하는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에 앉아 호텔로 가면서 밖을 내다 보니 귤나무에 귤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겨울에 이런것을 보고  너무도 신기하여 운전기사한테 물으니 이 귤은 겨울에 이대로 오렌지 색갈로 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푸른색으로 변했다가 가을이면 또 다시 오렌지 색갈로 변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러면 어느때에 떨어지는가고 물으니 그것은 실험하지 않아 모르겠다고 하였다. 달리는 승용차에 않아 길옆을 내다 보니 나무들이 푸른색 그대로였고 어떤 나무에는 꽃과 빨간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밭에는 배추, 무우, 시금치, 마늘 등 채소들이 푸르싱싱 자랐고 유채밭은 새노란 꽃이 밭을 덮고 있었다. 참으로 우리 중국 연변과는 딴 세상이였다. 나는 이 모든것을 관찰 하면서 너무도 신기스러워 제주도의 유람은 겨울에 하는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고장은 겨울에 소나무를 내 놓고는 푸른색 식물을 하나도 볼수 없는데 래일이 大寒인데도 이곳은 식물들이 푸른색 그대로이고 빨간색, 노란색 꽃과 열매들을 볼수 있으니 여름철 관광보다 더 신비한 감을 느끼였다. 물론 모든 식물이 다 푸른것은 아니였다. 단풍나무, 벗나무, 팽나무 등 낙엽수들은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고 갈대, 잔디풀같은 것은 얼지 않아도 말라든다고 한다. 차가 달릴때 바다가를 내다 볼수 있었는데 바다가의 돌과 바위들은 모두 검은색이고 구멍이 숭숭 난 것이여서 운전기사와 왜 이렇게 검은가고 물으니 제주도는 화산폭발로 하여 생긴 섬이기에 그것들이 모두 玄(검을 현)武 岩이여서 그렇게 검다는 것이였다. 밖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하는사이에 차는 어느덧 에뜨왈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성주 전무님이 우리가 간다고 미리 전화를 하였기에 호텔 책임자가 나와서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 하였다. 에뜨왈호텔은 바다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호텔밑이 곧바로 바다여서 침대에 누워서도 푸르른 바다를 내다 볼수 있었다. 이전무님의 알선으로 비행기도 기창옆의 제일 좋은 자리였고 호텔도 바다가의 제일 좋은 곳이였다. 우리는 호텔방에 행장을 풀어 놓고 호텔 책임자와 잠간 이야기를 나누고나서 바다가를 산책하였다. 우리 고장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바다가를 산책하는것도 별멋이였다. 더구나 나의 마누라는  50살을 넘어 먹으면서 바다구경이 처음이라 더욱 흡족해 하였다.   2.    서부관광 오늘은 24절기 가운데서 가장 춥다는 大寒이다. 우리 고장은 지금 모든것이 꽁꽁 얼어 붙어 붙어 있을터인데 제주도는 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수 없이 2만원 주고 우산 두개를 삿다. 유람길에 비가 내리여 서운하긴 하였지만 또 대한날에 비를 맞는것도 별멋이였다.     버스가 관광지를 향해 달리는 사이에 가이드는 제주도의 개황을 소개하였다. 나는 노트를 꺼내여 질문도 들이 대면서 빠질세라 하나 하나 적어 넣었다.     제주도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섬인데 한국에서 가장큰 섬으로서 남북의 길이는 41km, 동서의 길이는 73km의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해안선의 길이는 254km. 총면적은 1,825평방키로메터 라고 한다. 제주도의 인구는 현재 54만명이며 나라에서는 2006년 7월 1일에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규정하였다고 한다. 제주도는 暖帶성 해양성 기후로서 한국에서 가장 덮고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고 한다. 또 한라산(해발 1950m)을 사이두고 하루에도 동, 서, 남, 북의 날씨가 다르다고 한다. 제주도의 지표면은 화산에 의해 분출된 침수성이 강한 현무암층으로 덮여 있어 비가 많이 와도 모두 스며들어 건천(乾川)이 많아 논농사보다는 귤농사와 밭농사가 주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 관광의 첫 코스로는 龍頭岩을 보는것인데 龍頭岩은 그 형상이 마치 하늘로 날아 오르려다 굳어진 용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용의 머리 높이는 10m정도, 바닷속으로 잠긴 몸의 길이는30m쯤되는 바위인데 가만히 보면 정말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승천하면서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날아 나려할 때 노한 신령의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졌는데 몸은 바다에 잠기고 머리는 울부짖는 모습으로 물위에 솟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한라수목원을 구경하는 것이였다. 한라수목원은 면적이 5만여 평이였는데 제주도 자생수종(自生樹種)과 아열대식물 등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는데 만목(덩굴로뻗어 나가는 나무)원,화목(꽃나무)원, 도외수종원, 죽림(竹林)원 초본원, 수생식물원,삼림욕장 등으로되여 있었는데 야자수, 빠나나나무 등을 보니 마치 열대, 아열대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번째로는 해피타운(중국기예쇼)를 관람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중국에서 많은 곡예를 보았으므로 이번 관람은 그리 찬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7.8살되는 여자애의 몸 굴리기 표현은 그야말로 그림영화와도 같았으며 오토바이쇼는 직경이 7m밖에 안되는 지구모양의 쇠그물로된 구안에서 7대의 오토바이가 서로 교차를 하면서 타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였고 초인간적인 기예였다. 너무 아찔아찔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심장을 꼭쥐고 숨을 죽여 가며 구경하게 하였다. 이런것은 이전에 텔레비에서만 볼수 있었던 것을 오늘 직접 코앞에서 보니 정말 기뻤다. 다음은 버스가 남으로 계속 달려 소인국테마파크를 관람하는것이였는데 소인국은 세계각국의 이름있는 건물들(이들테면 북경의 만리장성, 파리의 에페르철탑, 이딸리아의 피사탑,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등 50여개의 명물을 그모양으로 축소해서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미리어처인데 북경의 세계공원과 비슷하였는데 세계각국의 대도시와 명승지를 여행하는 감을 느끼게 된다. 소인국을 떠나 버스는 계속하여 남으로 향하여 제주도의 남해안 서귀포시에 이르렀다. 서귀포시는 제주시(북해안에 위치)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끼고 있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깨끗한 감을 주었다. 서귀포에 오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정말 가이드의 말과 같이 하루에도 남북의 날씨가 달랏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는 유람선을 탓는데 유람선을 타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을 바라볼수 있었고 정방폭포도 보았는데 세갈래의 물줄기가 비단필을 내리 드리운듯 산에서 바다로떨어졌는데 마치도 우리 연변의 장백산폭포와 딱 같아 보이였다. 다만 그 락차가 장백산 폭포(68m)보다 낮을 뿐이였다. 만약 정방폭포를 찍은 사진을 연변사람들에게 보이면 모두 장백산 폭포라고 할것이다. 정방폭포(23m)는 천지연폭포(22m), 천제연폭포(22m)와 더불어 제주도의 3대 폭포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서귀포 남쪽바다에는 형제처럼 이웃한 3개의 수려한 섬이 사이 좋게 나란히 떠 있었는데 그 섬들로는 문섭, 섶섬, 범섬이였다. 우리 유람선은 범섬을 한바퀴 돌았는데 마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도 같다하여 범섬이라고 한다. 범섬에는 두개의 동굴이 있는데 설화속에 등장하는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베개로 삼아 누울때 뻗은 두발이 굴을 뚤었다는 재미있는 전설과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牧胡)들이 난을 잃으켰을 때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완전히 섬멸시킴으로써 몽고지배 백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이야기도 있었다, 다음으로 여행사의 배치에 따라 식당에 들어가 중식을 하였는데 점심상에는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해산물들이 여러가지 올라 입맛을 한결 돋구었다. 중식이 끝나고 잠수함을 타 보는것이였는데 이전에 나는 잠수함은 해군들만 탈수 있는 것아라고 생각하였는데 제주도에 와서 고래와 같은 잠수함을 타고 바다밑의 신비한 셰계를 경험할수 있었다.  해저 10m대에서는 나풀거리는 해초류, 20m대에서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  30m대에서는 형형색색의 진귀한 산호초들을 볼수 있어 나의 마음은 바다밑 세계에서 여행한다는 긍지를 느끼였다. 그다음으로는 바위기둥 외돌개를 보는 것이였는데 서귀포 해안가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기둥바위 외돌개는 육지와 떨어져 바다가운데 외롭게 있다하여 외돌개라 부른단다. 높이 20m의 기둥바위 외돌개는 약 150만년전 화산활동이 한창일 때 생성되였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바위 위에는 몇 그루의 작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바위뒤로는 범섬이 한눈에 들어 왔다. 외돌개에는 역사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고려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강점하였던 牧胡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지였는데 전술상 외돌개에 치장하여 거대한 장수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본 목호들은 진짜로 장군이 진을 친것으로 오인해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장군석”이라고 한다. 이곳은 또《대장금》촬영지여서 유람객들의 발목을 더 끌었다. 다음으로  귤농장을 참관하는것인였는데 귤농장에 이르니 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는데 새파란 잎과 오렌지 색갈의 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유람객들의 마음을 한결 더 끌었다. 가이드는 우리더러 직접 귤을 따 먹어 보라고 하여 하나 따 먹어 보았더니 귤맛도 별 맛이였지만 大寒날에 직접 귤을 따 먹으면서 귤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도 별 멋이였다. 귤은 밀감 종류만 하여도 45종인데 심어서 4~5년이면 열매가 열리는데 15개월이면 따는데 큰것을 따면 작은 것들이 연달아 자라나기에 1년 내내 딴다고 한다. 어제 운전기사와 물어 해결 못한 의문을 오늘 해결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니 동백나무에는 동백꽃이 새빨갛게 피여 있었고  멋나무에는 오미자와 같은 새빨간 열매들이 어찌나 많이 열렸는지 온 나무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채소밭에는 여러가지 채소들이 새파랗게 자라고 있었는데 겨울에 제주도를 유람 온데 대하여 더욱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분재예술원(盆栽藝術園)을 참괌하는 것이였다. 분재예술원에는 30년에서 250년에 달하는 희귀한 수목 100여 종과 정교하게 다루어진 2천여 점의 분재들이 제주 특유의 돌담, 연못, 돌다리, 야자나무, 인공폭포 등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으로 첫날의 서부관광은 끝났다. 여행사의 관광일정표에는 서부관광이라지만 기실 오늘 관광코스를 보면 제주 북해안의 용두암, 서부의 소인국 테마파크, 서귀포 남해안의 유람선까지 하면 북, 서, 남부를 다 돌았다.   3.    동부관광 이튿날 우리는 제주도의 동부관광을 시작하였다. 이날 첫코스로는 도깨비도로를 지나는 것이였는데 내리막에서 차의 시동을 끄고 정차하면 차가 저절로 올리막길을 향하여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도로 바닥에 캔이나 병을 굴려 보거나 물을 쏟아 보면  그것들이 올리막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이 도깨비도로의 길이는 약 100m 정도였는데 실제는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길이다. 나의 생각에는 뒤는 경사도가 강한 올리막 길이고 앞은 경사도가 강한 내리막길 사이에 이 100m 정도의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길이 있어 경사도의 상대적 차이로 하여 시각적으로 올리막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나지 않는가하는 것이다. 아무튼 전문가들이 측량기로 측량한 결과 올리막인 것이 아니라 경사도가 약한 내리막이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코끼리랜드를 관람하는 것이였다. 9마리의 코끼리가 라오스인의 조련사와 함께 20여 가지 각종 묘기와 재롱을 부리였는데 몸집이 육중한 코끼리가 국기를 계양하는가하면 볼링핀을 코로 줍고 붓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코리가 정성껏 그린 그림은 화가 못지않게 그려 냈다. 그리고 코끼리가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걸어 가는가하면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위로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나가는 모습, 코끼리가 몸위를 지나면 일년 내내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해설원의 말에 일부 광광객들은 너도나도 들어 누웠다. 그리고 코끼리의 외나무다리 건느기, 하모니카 불기, 코위에 사람 태우기, 관관객이 수비를 하는축구문대에 발로 슛하기 등의 묘기를 볼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승마장에 가서 승마체험을 하는 것이였는데 우리 부부는 나이 60을 거의 먹으면서 처음 말우에 올라 앉아 보았다. 처음 말을 탓지만 이미 훈련을 거친 말이여서 마구 행패를 부리지 않았기에 매우 안전 하였다. 겁이 있는 사람은 말을 걸기고 좀 담이 있는 사람들은 채찍질을 하여 달리게 하였다. 나도 채찍질을 하여 뛰게 하였는데 말이 세게 뛸 때에는 약간 겁이 들었다. 그러나 말안장을 꼭 붙잡고 두발을 힘있게 내리 디디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 위험성은 없었다. 그다음 우리는 중식을 하였는데 어제와는 달리 제주도의 특이한 요리 흑돼지고기 구이였는데 그것도 특이한 맛이였는데 거기에 소주 한잔씩 하니 더욱 감칠맛이 났다. 중식이 끝난다음 성읍민속마을을 참관하였는데 이 마을에는 유형문화유산으로는 300여 채의 초가집 군락을 비롯하여 鄕校(향교란 시골에 文廟와 거기에 부속되여 과있는 官立 학교), 정의현청의 일관헌, 돌하르방(제주도 도민들이 수호신으로 믿는 석상), 성터, 연자매 등이 있엇으며 무형의 문화유산으로는 민속놀이, 향토음식 등이 있었다. 이 민속마을 참관하면 제주의 옛 민속문화를 다 알수 있었는데 제주도에는 거지, 도적, 대문이 없는 3무의 섬이라고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자립심이 강해 거지가 없고 성품이 정직해 도적이 없으며 도적이 없으니 대문이 필요없었다. 대신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구멍이 세개 뚫어진 돌기둥(정주먹)을 양옆에 놓아 거기에 나무장대를 길게 3대 걸쳐 놓아는데 이것을 정낭이라고 한다. 정낭은 가축이 집안으로 들어 가는것을 막기도 하고 밭에 나가거나 외출을 할때 사람이 있고 없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낭 하나를 걸쳐 놓으면 집주인이 잠시 이웃에 갓다는 것을 표시하고 두개를 걸쳐 놓으면 아이들이 있으며 어른은 저녁때 집에 들어 온다는 것이고 세개를 걸쳐 놓으면 집안에 사람이 없거나 출타 중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정낭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습과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마을의 집은 모두 흙을 이개여 현무암을 쌓아 올렸거나 나무기둥에 흙과 짚을 한데 이개여서 바른 흙집이였으며 지붕은 모두 초가로 되여 있었고 유리창문이 없이 모두 창호지로 된 문이였다. 이곳 풍속은 한집에서 부모와 아들며느리가 서로 딴 세간으로 살고 있는데 며느리는 시부모가 늙어 죽을 때까지 밥을 해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밥을 해 드리면 시부모들을 빨리 죽으라는 뜻으로 된다고 한다. 밥을 하는 칸은 따로 있엇는데 한칸에 네개의 가마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두개는 시부모들이 쓰는것이고 두개는 아들며느리가 쓰는 가마였으며 구새가 없이 네개의 돌우에 걸쳐 놓여 있었다. 방구들을 덮이는 부엌은 따로 있었다. 이전에는 이 마을에 물이 없어 산에 가서 길어 왔으므로 물이 귀하여 동백나무 밑에 물독을 놓고 나무와 물독사이에 짚을 실하게 타래 쳐 놓았는데 비가오면 나무에 떨어진 비물이 모두 짚을 따라 독안에 흘러 드는것을 받아 먹었다고 한다. 그 짚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비물을 받는 작용도 하지만 려과작용도 한다고 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는 속담을 빌어 물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산 개구리를 그 안에 넣는다고 한다. 그러면 개구리의 운동으로 하여 물이 썩지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 이런것을 쓰지 않지만 유람객들을 위하여 그대로 놓아 두고 있었다. 이 마을의 변소(화장실)는 돌을 1m정도 높이로 쌓아 올리고 그우에 앉아서 대변을 보는데 그밑은 돼지굴과 통화여 똥돼지라고 하는 그지방 돼지들이 그것을 받아 먹는다고 한다. 대변을 볼때에는 쌓아 올린 돌우에서 아무런 가림막도 없이 보므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볼수 있는데 그것을 관계치 않는다고 한다. 지금 젊은이들은 이런 변소를 사용하지 않지만 노인들은 습관상 그냥 그런 변소를 사용한다고 한다.  제주도의 언어를 보면 표준말과는 완전히 달리 사용되고 있어는데 “고생 많았습니다”는 “폭삭속았수다”로, “별말씀은요”는 “소구멍 말멍했수다”로, “가까이 오십시오”는 “좃끝에 옵서”로, “바지런히 따라 오십시오”는 “보질보질 따라옵소”로 쓰이였는데 그지방 사람들끼리 말하는것은 우리는 한마디도 알아 들을수 없었다. 이 마을를 참관하면서 언어로부터 그 지방의 민속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주 원시적어라는 느낌이 들었다.(물론 삼무는 선진적 문화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발전과 더불어 정부에서 이 지방을 개방하고 많이 발전기켜 백성의 생활이 많이 개선되였지만 이 민속마을만은 유람객들을 위하여 정부에서 이 마을 사람들에게 생계비를 주면서 제주도의 민속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민속문화가 그렇게 원시적이고 내륙과 차이가 많은 것은 아마 외딴 섬에서 외지와의 연계가 극히 드물게 생활한 것과 관계 된다고 생각한다. 이곳의 어떤 노인들은 이 섬에서 태여나서 지금까지 이 섬외의 다른 땅을 디디여 본적이 없다고 한다. 한평생 1,825평방킬로메의 이 작은 섬에 같혀 산 셈이다. 지금은 내륙과의 연계가 아주 밀접하고 김포와 제주도사이에 비행기가 하루에 왕복 66차 날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외지의 선진적 문화들이 많이들어 온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하루 빨리 선진적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 이지방 사람들도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그다음은 미천굴을 보는 것이였는데 미천굴은 두대의 자동차가 서로 마주 달릴수 있는 터널과 같았는데 지금 개방한데까지는 365m이고 아직 위험하여 개방하지 않은 것이 17km나 된다고 한다.참말로 기이한 굴이였다. 지질학자들의 탐사에 의하면 이 굴은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 내리면서 외부는 식고 내부는 계속 흐르다가 차츰 식으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 굴은 현무암으로 된 굴이여서 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주도에는 이외에도 길이가 13.422km되는 만장굴도 있다고 한다. 그다음으로는 섭지코지를 보는것인데 코지는 코끝처럼 바닷가로 툭 튀여 나온 땅이라는 의미의 제주도 방언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는 왜적의 침임때 불을 피워 마을의 위급함을 알렷다는 연대, 용왕의 아들이 선녀에게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돌이 됐다는 슬픈 전설을 담은 바위, 삼성혈에서 나온 삼신인과 혼례를 올린 세공주가 목함을 타고 도착했다는 황금알을 볼수있었다. 마직막으로 동복리 해녀촌은 보는 것이였는데 우리가 그곳에 갓을때는 저녘무렵이여 마침 잠수복은 입은 해녀들이 해삼, 전복, 미역같은것을 건져 가지고 바다에서 올라 오고 있었다. 바다의 잠수업이 힘들다보니 해녀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해녀들은  모두 노년층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해녀촌에서 해녀들이 하는 음식점에 들어 가서 여러가지 해산물로된 음식을 석식으로 하고 공항길에 올랐다. 이렇게 하면 제주도의 2박3일 유람은 끝난셈이다. 이번 제주도 관광에 대하여 매우 흡족하면서도 유감스러운점이 두가지있었다. 하나는 제주도는 유람지가 100여 곳이 넘어서 이틀이란 시간이 너무짧아 그것을 다 구경하지 못한것이고 다른하나는 날씨가 흐리여 한국의 대표적 산인 한라산을 올리다 보지못한 것이였다. 앞으로 어떤 기회를 찾아 또 다시 제주도에 와서 이번에 보지 못한 곳을 보려는 마음이다. 공항에 와서 가이드가 주는 항공권을 가지고 가이드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여졌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8시 30분에 탑승이기에 1시간 좀더기다려 비행기에 올랏다. 마침 이번에도 우리의 자리는 기창옆이여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에 제주시의 야경을 볼수있었는데 오색영롱한 형광등 불빛이 온 제주시를 물들이였다. 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이틀반의 제주도의 유람으로하여 흡족한 마음으로 제주여 안녕히! 잘있으라 제주여! 하며 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비행기도 구름속르로 날아들었다.  2008년 1월 23일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20~126호에 련재
52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 댓글:  조회:8820  추천:15  2011-05-13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 주청룡   2007년,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온지도 벌2년이 넘는다. 한국에 와서 처음 몇 달은 아무 곳도 다니지 않고 회사에서 일만 하였다. 아무리 돈 벌려 왔다고 일만하니 인생살이가 너무나도 무의미 하였다. 우리가 사는 것이 일하여 재부(財富)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문화생활도 겸하여 하는 것이 사람이 삶의 의의이고 삶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 하루 중국식품상점에 들렸다가《중국동포타운신문》보게 되였다. 나는 원래 신문애독자인지라 처음 이 신문을 보았을 때 한국에 우리 동포들을 위한 이런 좋은 신문이 있구나 하며 너무나도 기뻐 그 즉시로 신문사를 찾아가서 직접 김용필편집국장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로부터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이 시작되었으며《중국동포타운신문》은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신문이 매 한 호가 나오면 1면부터 12면까지 하나의 기사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읽곤 하며 한편 정기적으로 원고를 써서 귀 신문에 투고를 하면 매 호의 신문마다에 내가 쓴 칼럼, 기행문, 생활수기 등 기사들이 한편 씩 실리군 한다. 나의 오래전부터의 소망이 나의 시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였다. 하여 나는 안해와 함께 토, 일 련휴일을 리용하여 멀리 전라남도 화순군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조선족 新安朱氏 始祖 朱濳(1194~1260)의 묘소를 참배 하였으며 그것을 글로 정리하여 여러 신문에 발표하였고《중국동포타운신 문》사 여행부의 안내로 한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유람을 하고 있으며 유람을 하고 돌아와서는 꼭꼭 기행문을 쓴다.   한국에 올 때 내가 행장을 꾸리면서 한국에 가서 볼 책들을 챙겨 넣자 곁에서 거들어 주던 친척들이 일하러 간다는 사람이 책은 무슨 책이야, 가서 일은 하지 않고 책만 보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나는 속궁리가 달랐다. 한평생 책과 함께 살아온 내가 일하러 간다고 어찌 책과 담을 쌓겠는가? 아무리 일이 바쁘더라도 시간을 타 책을 봐야지, 하며 책을 넣은 것이 내짐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한국에 와서 짬짬이 시간을 타서 중국에서 가지고 온 책들을 볼뿐만 아니라 일요일이면 서점에 가서 새로운 책들을 사 보곤 하는데 책도 보고 한국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글감이 생기고 그것을 칼럼, 수기, 기행문 등 형식으로 써서 한국의 여러 신문에 투고를 한다.   매 한편의 기사가 신문에 실리면 원고료가 어김없이 나의 저금통장에 입금되는 것도 재미였다. 그것이 바로 내 머리속의것을 글로 정리하는데 소모되는 정력의 가치이며 그 가치가 화페로 전화한 특수한 상품 (商品)인 것이다. 제일 처음으로 제주도 기행문을 썼는데 6번에 나누어《중국동포타운신문》 에 련재되였고 원고료도 24만원이나 나왔다.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그래도 제주도 유람이었다. 제주도의 경치는 물론이고 특이하다는 것은 우리가 간 날이 일년4계절 가장 춥다는 대한 날 이였는데 내륙과는 달리 모든 것이 푸른색 그대로였고 울긋불긋 가지각색의 꽃들이 만발하였으며 감귤도 나무에서 직접 따 먹을 수 있어 신비감을 느꼈다. 그리고 성읍민속마을을 참관하면서 지금까지 원시적으로 보존되여 온 제주도의 언어와 민속 문화를 현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도 특이하였다.   여러곳을 유람하려면 좋은 사진기가 있어야 했다. 원래 나에게 사진가가 한대 있었는데 필름을 넣고 쓰는 것이여서 컴퓨터와 디지털시대에 맞지 않았다. 하여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제주도기행문을 써서 받은 원고료 24만원을 기념으로 24만 원짜리 디지털카메라를 샀다.   아무튼 객지생활이라 고정된 거처가 없어 부피가 큰 컴퓨터는 거처를 옮길 때마다 불편하였다. 하여 컴퓨터도 노트북으로 사 놓고 매일 저녁 퇴근하면 인터넷에 접속하여 여러 신문의 뉴스를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필요한 자료를 찾으며 정기적으로 원고를 써서 신문사에 보내곤 한다. 매일 고향신문인 인터넷 연변일보를 보는것도 나의 하루 일과에 속한다.   지난해 8월에는 한국 산업인력공단에서 외국국적동포 한국취업생활 수기 현상공모가 있었는데《한민족신문》사에서 나의《나는 어떻게 성공적인 취업을 하였는가?》란 글을 추천한 것이 3등상에 입선되여 아세아 14개 나라 대표들이 모인 ‘2008 외국인근로자와 함께하는 한마음 축제’ 국제적 무대에 올라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였으며 또 50만원의 상금까지 타게 되였다. 그리고 이 수상작품으로 하여 KBS라디오방송의 ‘2008년 송년의 밤’프로에서도 출연하였으며 KBS1 TV 에서는 이 작품을 동화편 “행복한세상 프로를 제작하여 금년 11월 23일에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년 초에는KBS TV와 중국동포타운신문사에서 공동으로 한국고용주와 중국근로자들의 간담회를 조직하였는데 중국동포신문사에서는 나를 중국동포를 대표하여 발언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감담회에 참석하여 발언하게 하였는데 중국동포들의 절찬을 받았으며 이것이 음력설 이튿날 저녁에 KBS1 TV에서 방영하여 재한동포는 물론 중국에 있는 동포들도 다 볼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이렇게 일하여 돈도 벌면서 고국건설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을 통하여 나의 지식도 넓히고 공모전에 입선되여 국제무대에 올라 수상도 하고 KBS 와 함께 ‘송년의 밤’을 보내였으니 나의 한국에서의 문화생활이 풍요롭기만 하다.    동북아신문,   한민족신문,   중국동포타운신문,  연변일보에 게재     [removed]//[removed]
51    중국 동포들 자각적인 준법의식 높이자 댓글:  조회:8013  추천:11  2011-05-13
중국 동포들 자각적인 준법의식 높이자   최근 여러 보도매체에서 “구로경찰서, 중국동포 마작도박 단속합니다”란 기사가 보도 되였으며 SBS뉴스 보도(08.8.31)에서도 최근 중국동포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휴게실을 빙자한 불법마작 도박장이 우후죽순 증가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서울경찰청의 분석자료에 의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3년에 대비해 2007년 106만 명으로 57.1%증가 하였고 외국인 범죄 건수는 2003년6,144건에서 14,542건으로 136.4% 증가 하였으며 중국동 포를 포함한 중국인의 관련된 범죄비률은 전체 외국인범죄중 61.2%(2,9 88 명)를 차지하는 것으로 들어 났다. 이상의 분석자료를 보면 중국인의 범죄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청은 외국인범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외국인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에 나섰다. 특히 중국동포밀집거주지역을 중점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구로경찰서는 올해 4월부터 가리봉거리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가리봉지구대가 지난 5월 거리에서 검문검색을 할 때 칼과 같은 흉기를 소지한 중국동포들이 걸려들었고 동포들간에 발생한 싸움에서 흉기로써 살인한 끔직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로 하여 당지 지역주민 들의 안전에 위협을 주고 있으며 금년 4월과 5월 사이에 큰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였기에 한국의 언론도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 등 외국인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선정적인 보도가 잇따라 있었다. 이로 하여 우리 중국동포사회의 이미지에 엄중한 손상을 받고 있다. 나는 중국동포의 일원으로서 중국동포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모두 잘살아 보자는 목적으로 부모처(혹은남편)자와 리별하고 이국(고국이라지만 필경은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국으로 밖에 될 수 없다.)땅에 와서 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국에서 열심히 일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가지 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동포들이 준법의식이 차하여 폭력행위로 한 싸움을 한다든가 비법적인 수단으로 위장영업을 하면서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그런 퇴페업소로 드나들고 있다.《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려놓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우리 동포사회에 끼어든 미꾸라지라 할 수 있다. 이런 미꾸라지들로 하여 우리 동포사회의 이미지는 엄중한 손상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않고 불법행위로 하여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다면 우리는 우리를 보내 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준 한국정부에 모두 미안하게 될 것이 아닌가? 우리 동포들이 자각적으로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열심히 일한다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한국사회는 우리를 더욱 포옹해 줄 것이고 지역 주민들과도 더욱 잘 어울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어울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도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 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자기의 신근한 로동으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자각적인 준법의식을 제고하여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면서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 공존, 통합의 사회를 가꾸어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민족신문 2008.9.22, 동북아신문 2008. 9.9에 게재)
50    폭력행위를 엄격히 타격하여야 댓글:  조회:8116  추천:12  2011-05-13
폭력행위를 엄격히 타격하여야 주 청룡 2008년 7월 13일 일요일 본지 130호 제1면에 실린 외국인 범죄에 대한 관련기사를 읽고 놀라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에 외국인이 급증함에 따라 외국인의 범죄 률도 급증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의 분석자료에 의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3년에 대비해 2007년 106만 명으로 57.1%증가 하였고 외국인 범죄 건수는 2003년6,144건에서 14,542건으로 136.4% 증가 하였으며 중국동 포를 포함한 중국인의 관련된 범죄비률은 전체 외국인범죄 중 61.2%(2,9 88 명)를 차지하는 것으로 들어 났다.  이상의 분석자료를 보면 중국인의 범죄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청은 외국인범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외국인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에 나섰다. 특히 중국동포밀집거주지역을 중점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구로경찰서는 올해 4월부터 가리봉거리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가리봉지구대가 지난 5월 거리에서 검문검색을 할 때 칼과 같은 흉기 를 소지한 중국동포들이 걸려들었고 동포들간에 발생한 싸움에서 흉기로써 살인한 끔직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로 하여 당지 지역주민 들의 안전에 위협을 주고 있으며 일부 폭력자들은 경찰관의 멱살을 잡고 경 찰의 단속에까지 대항해 나서고 있다고 한다. 이로 하여 우리 중국동포사회 의 이미지에 엄중한 손상을 주고 있다. 금년 4월과 5월 사이에 큰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였기에 한국의 언론도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 등 외국인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선정적인 보도가 잇따라 있었다. 나는 중국동포의 일원으로서 중국동포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우리가 한국에 온 것은 모두 잘 살아보자는 목적으로 고국에 와서 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한국정 부의 좋은 정책으로 고국에 와서 일하여 돈을 벌면서 하필이면 동포사이에 폭력행위로 한 싸움, 지어는 동포들 사이에 파벌싸움까지 별리여 한국의 사 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시민들의 안전에까지 위협을 주고 있는가? 이로 하여 일부 언론들은 이런 것을 흑사회라하며 ‘흑룡강파’와 ‘연변 흑사파’로 나뉘어 양대 패밀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도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다면 우리는 우리를 보내 준 중국정부와 우리를 받아준 한국정부에 모두 미안하게 될 것이 아닌가? 우리 동포들이 한국의 법률을 준수하고 열심히 일한다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한국사회는 우리를 더욱 포옹해 줄 것이고 지역 주민들과도 더욱 잘 어울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서로 어울린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지 않겠는 가? 그리고 우리도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 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한국정 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폭력행위를 저지른 분자들을 모두 인간쓰레기로 여기며 거리에 나선 쥐를 모두 때려 잡아란 식으로 우리 모두 일떠나 그런 자들을 호되게 족쳐 중국동포의 거리가 평온의 거리, 안전한 거리로 되게 하며 전반 동포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자.     《중국동포타운신문》2008.7.20 131호 제2면에게재
49    아름다운《조선족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어 가자. 댓글:  조회:8299  추천:12  2011-05-13
아름다운《조선족사회》의 이미지를 가꾸어 가자.  -- “조선족사회 어지럽히는 행위 철저히 근절돼야”란 기사를 보고 주청룡          한국에서는 한국 본토에서 사는 우리 한겨레들을 한족(韓族) 혹은 한민족(韓民族)이라하고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을 조선족이라고 한다. 1992년 중한수교이래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나들이를 하면 서 많은 돈을 벌어 생활이 많이 펴여 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한국정부에서 우리 동포들을 생각해 방 문취업제를 실행하고 있으며 보도매체로서는 중국에서 길림신문, 한국에서는 중국동포타운신문이 공 동협력하여 방문취업제를 올바르게 인도하여 나가고 있다.이로하여 많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잘 살아 보자는 심정으로 고국에 와서 일하고 있으므로 하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이 35만명에  육 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럼에 따라 조선족밀집지역이 생겨 나면서 조선족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 면 우리는 고국에 와서 우리 조선족사회의 어떤 이미지를 보여  주어야 하겠는가?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신문》제128호에 실린 “조선족사회 어지럽히는 행위 철저히 근절돼야”란 기사를 보고 마음이 몹씨 무거워 났다. 우리가 고국에 와서 일하는 것은 모두 잘살아 보자는 목적으로 부모처(혹은남편)자와 리별하고 이국땅에 와서 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고국에서 열 심히 일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가지 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것이다. 하지만  일부 개명치 못한 사람들은 한국의 법률을 준 수하면서 자기의 신근한 로동으로 돈을 벌려하지 않고 조선족밀집지역에 끼여들어 비법적인 수단으로 위장영업을 하면서 퇴페업소를 꾸리거나 그런 퇴페업소로 드나들고 있다. 이러한것들은 우리 조선족 사회에 끼여 든 좀벌레라 할수있다.《미꾸라지 한마리가 개울물을 다 흐려놓 는다》는 속담과 같이 이 런 좀벌레들의 침습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사회의 이미지는 엄중한 손상을 받고 있다. 이러므로 하여 일부 바르지 못한 언론들은 과거를 현재로, 개별적인것을 전면적인것으로, 국부를 전반으로 과장하여 떠들고 있다. 이에《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용필국장님도 일부 바르지 못한 언론의 비방도 들어가면 서 중국동포타운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꾸기에 로심초사하고 있다. 일부 개명치못한 사람들의 이런 불미스러운 현실에 대비해《중국동포타운신문 》사는 중국동포자율 방범대를 조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조선족사회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꾸느데 대하여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아주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필자는 이에 아주 공감을 느끼고 적극 호응하면서 선참으로 중국동포자율방범대에 자원봉사를 지원하는바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2008.6.20 제129호2면에 게재  
48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댓글:  조회:13166  추천:3  2011-05-13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1) 주청룡   우리말(한겨레의 말)은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은 한자를 받아들여, 자국어 에 고전 중국어계의 어휘를 대량으로 차용한 동아시아지역을 가리킨다. 주로는 중국, 조선, 한국, 일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에 속하며 우리말의 단어에서 70%가 한자어에 속한다고 한다. 여러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우리 겨레들은 부동한 지역에서 살면서 언 어, 문자사용에서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 (한 국에서 말하는 북한)과의 같은 사회주의체제와 정치적 리념으로 하여 조선 과 많이 거래를 하면서 조선과 기본상 언어, 문자사용을 통일하여 왔다. 그러나 한중수교후 한국과의 민간교류를 통하여 한국에서 쓰는 언어를 많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의 공식적인 《언어, 문자사용규범》과 한국 의 언어, 문자사용에서 차이점들이 많다. 아래에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 그 차이점들을 비교하여 보자, 1.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을 쓰지만 중국 조선족은 원래 음의 그대로 발음하 거나 쓴다. 한국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두음법칙이란 단어의 첫머리가 다른 음으로 발음되는 것을 말한다. 례하면 우리말에서 첫소리의 ‘ㄹ’과 중모음(重母音)앞의 ‘ㄴ’이 각각 ‘ㄴ,ㅇ’으로 발음 되는일. 래일(來日)이 내일로, 녀자(女子)가 여자로 되는 따위.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오는 페단: (1)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버들 ‘류’(柳), 도끼 ‘류’(劉) 수풀 ‘림’(林), 들보 ‘량’‘梁’자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불만이 많다. 두음법칙에서 버들 ‘류’,도끼 ‘류’를 모두 ‘유’라고 부르는데 성씨에 는 그러할 ‘유’(兪)도 있다. 그러므로 버들 ‘류’, 도끼 ‘류’가 그러 할 ‘유’와 혼돈하게 된다. 이외에도 두음법칙으로 하여 수풀 ‘림’과 맡 을 ‘임’(任), 모두 ‘임’으로, 들보 ‘량’과 버들 양(楊)을 모두 ‘양’으로 발음하여 ‘林’과 ‘任’, ‘梁’과 ‘楊’이 구별이 안 된다. 한국정부에서는 2007년 8월 1일부터 두음법칙으로 하여 다른 음으로 변화되 는 李, 柳, 劉. 林, 羅,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자원의 원칙으로 호적 등록에서 원래의 한자어의 음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성명권을 존중한 것이라고 본다.   (2) 단어의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다.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으로 하여 ‘로인’(老人)’을 ‘노인’이라고 하는데 ‘로인’이란 한자의 늙을 ‘로’자에 사람 ‘인’자를 써서 늙은이, 또는 늙은 사람이란 뜻인데 ‘노인’이라고 하면 한자어의 뜻이 상실된다. 또 한 데 가설한 무대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로천무대’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천무대’라고 한다, 원래의 뜻은 드러날 ‘로’(露)자에 하늘 ‘천(天) 자를 써서 하늘이 들어난 무대란 뜻인데 노천무대라고 하면 단어의 원 의미 가 없어진다.   2.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의 인명, 지명을 한자어 발음대로 말하고 쓰는데 한국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의 한자(漢字)음을 병음(拼音)화 하고 그것을 영어발음으로 읽는데 례하면 ‘모택동’(毛澤東)을 ‘ma o ze dong’화 하 여 ‘마오쩌둥’, ‘등소평’(鄧小平)을 ‘deng xia o ping’화 하여 ‘덩 샤오핑’, ‘호금도’(胡錦濤)를 ‘hu jin ta o’화 하여 ‘후진타오’로, ‘료녕성’(遼寧省)을 ‘랴오닝성’, ‘청도’(靑島)를 ‘칭다오’로 ‘신 강’을 (新疆)을 신장으로 쓰고 부른다.   3. 한국에서는 한자어도 아닌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어떤 것은 외국어 혹은 외래를 많이 쓰고 있다. 례를 들면‘아내’를 ‘와이프’, ‘열쇠’를 ‘키’, ‘흰색’을 ‘화이트’, 이외에도 많고도 많다.   4. 한국에서는 ‘이사짐’을 ‘이삿짐’으로, ‘오래동안’을 ‘오랫동안’ ‘수도물’을 ‘수돗물’로 쓰고 또 ‘ㅡ하고저’를 ‘ㅡ하고자’로, ‘ㅡ였다’를 ‘ㅡ었다’로 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못쓰게 된 차(廢車)를 ‘페차’로 표기하지만 한국에서는 ‘폐차’로 표기한다. 중국의 조선족들 은‘폐’자를 쓰지 않고 “페’자가 오는 단어는 모두 ‘페’로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우리말에서 ‘페’자가 오는 모든 단어는 ‘폐’로 표기하고 외래어에서만‘페’로 표기한다. 같은 단어에서 발음은 한가지로 하지만 문자표기가 부동하다. 이 외에도 띄여쓰기, 문장부호 달기에서도 차이가 많다.   필자의 견해:   (1) 두음법칙의 사용으로 하여 오는 페단으로 하여 조선이나 중국의 조선족 들은 두음법칙을 찬성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두음법칙을 쓰는 리유는 우리 말에서 첫소리의 ‘ㄹ’과 중모음(重母音)앞에 ‘ㄴ’가 오면 발음하기 바 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우리 한겨레인 조선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ㄹ’과 ‘ㄴ’두음을 어려움 없이 발음하고 있다. 습관상의 문제이지 외국어나 외 래어도 순통하게 발음할라니(외국어나 외래어에서는 두음법칙을 쓰지 않고 있다.) 사실 ‘ㄹ’과 ‘ㄴ’는 우리말 우리글이기 때문에 발음이 어려울 것 없다. 두음법칙의 사용은 우리의 발음능력을 퇴화시킨것이 아니냐는 생 각이다. 한국에서는 다년간 두음법칙으로 발음하여 왔으므로 습관이 되지 않아 두음 법칙으로 오는 발음을 한자어의 원 발음대로 하려면 어려움을 느낄수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잠시적으로 발음은 두음법칙에 따라 하더라도 문자표 기는 한자어음대로 쓰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2) 중국의 인명, 지명의 한자(漢字)음을 병음(拼音)화 하고 그것을 영어발 음으로 하면 원래의 인명, 지명이 왜곡되여 중국에서 한족도 조선족도 다 알아 못 듣는다. 그래도 한자어 발음대로 하면 조선족들은 알아 들을수 있 지 않는가하는 생각이다.   (3) 24가지 자모로 이루어진 우리글이 그 표기가 제한되여 외국어나 외래어 를 원음대로 표기 할수 없는것이다. 례하면 힘내라는 ‘fighting’을 원음 대로 발음은 할수있으나 우리글의 문자로는 어떻게 하여도 정확히 표기할수 없다. 하여 어떤사람들은 ‘파이팅’, 어떤사람들은 ‘화이팅’으로 표기한 다.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음이 왜곡된다. 지금은 중국의 조선족들도 한국나 들이를 많이 하면서 한국사회에 습관되여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하면 이제 몇 세대 후에는 우리의 고유어가 점차적으로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우려된다. 외래어를 많이 쓰는 것은 국제화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것 이라고 하는데 몇가지 외국어 단어를 장악하여 가지고 국제화시대에 발 을 맞출수 있겠는가? 우리말의 고유어거나 귀화어(귀화어란 한자어를 포함 하여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글이나 말이 오랜세월동안 사용하면서 차용한 글의 原地의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우리글처럼 되어 우리글로 탈바꿈된 글이 나 말)가 없는 말은 외국어거나 외래어를 써도 무방하겠지만 우리 겨레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려면 고유어가 있는 단어들은 고유어를 쓰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언젠가는 남북이 통일되여 하나의 통일된 나라, 통일된 민족, 통일된 언어, 문자사용이 있을 날이 오리라고 기대한다.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2)   고유어와 한자어   고유어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한자어는 한자에서 온 말이지만 오래동안 사용하면서 우리 말로 탈바꿈하여 인제는 완전히 우리말로 쓰이고 있다. 한자어나 고유어나 모두 우리 말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 쓰는 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아래에 한국과 중국조선족들 사이에 고유어와 한자어를 쓰는 차이에 대하여 알아 보자.   1. ‘달걀’과 ‘계란(鷄卵)’ ‘달걀’은 순수한 우리의 말 닭의 알이란 뜻이고 ‘계란’은 한자어 닭 ‘계(鷄)’자에 알 ‘란(卵)’란자를 써서 닭의 알이란 뜻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리말로 ‘달걀’이라고 하지만 우리 민족고유어의 본국인 한국에서는 고유어로 된 ‘달걀’을 많이 쓰지 않고 한자어로 된 ‘계란’이라고 많이 쓰고 있다.   2. ‘편의 국수’와 ‘라면(拉麵)’ 한국에서 말하는 ‘라면’은 중국식 음식이다. 그런데 원래 중국음식 라면 과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되여 있다. 원래 중국식 음식 ‘라면(拉麵)’은 손으 로 쳐서 늘여 만든 국수를 말하고 한국에서 말하는 ‘라면’은 한국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기름에 튀겨 말리여 물만 넣고 끌이면 먹을수 있는 간단히 조리할수 있도록 만든 중국식 국수”라고 하였는데 중국에서 이렇게 만든 국수를 한어로는 ‘方便面(麵)’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편의 국수’라고 한다. 여기에서 ‘편의’는 한자의 ‘便宜’(간편하다는 뜻)에서 온 한자어이고 ‘국수’는 우리의 고유어이다. 즉 간편히 먹을수 있는 국수란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말하는 ‘라면’은 응당 ‘편의 국수’라고 말 하여야 맞는다.   3. ‘지붕우(위)’와 ‘옥상(屋上)’ ‘옥상’은 한자어 집 ‘옥(屋)’자에 우 ‘상(上)’자를 써 집우 혹은 지붕우(위)라는 뜻이고 ‘지붕우(위)’는 순수한 우리 말이다. 한국에서는 ‘지붕우’를 ‘옥상’이라고 하지만 중국조선족은 ‘옥상’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지붕우’라고 한다.   4. ‘아주’ 혹은 ‘매우’와 ‘굉장히’ ‘아주’,  ‘매우’, ‘굉장히’는 모두 우리말의 ‘퍽’, ‘썩’, ‘대단하다’의 뜻인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아주’ 혹은 ‘매우’를 많이 쓰고 한국에서는 굉장히를 많이 쓴다. 굉장히는 한자의 클굉(宏)자에 장할장(壯)자에서 온 말이므로 중국의 조선족들은 물체가 대단히 큰 경우에  ‘굉장히 크다’로 말하고 감정, 인식, 감각 등에서는 ‘굉장히’를 쓰지 않고 ‘매우’ 혹은 ‘아주’를 쓰지만 한국에서는 감정, 인식, 감각 등에서도 ‘굉장히’란 단어를 쓴다.  (유형과 무형 구분)   5. ‘다치다’와 ‘상하다’  ‘다치다’와 ‘상하다’는 모두 부딪치거나 맞거나 하여 상처를 입는것을 말하는데 ‘다치다’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상하다’의 상은 한자어 다칠상(傷)자로서 ‘상하다’는 한자어에서 온 말이다. 한국에서는 상처를 입는 것을 우리말인 ‘다치다’를 쓰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흔히 ‘상하다’로 많이 쓰고 있는데 이전 로인들은 다치다로 말하였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상하다로 많이 쓰고 ‘다치다’는 ‘건드리다’의 뜻으로 많이 쓰고 있다.   6. 간과(看過) 한자어 볼간(看)자에 지날과(過)를 쓴 ‘간과’는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1. 대충 보아 넘김, 2. 깊이 유의하지 않고 예사로 내버려둠”으로 되여있다. 이 간과에 대한 우리말 단어는 없다. 한국에서는 ‘간과’란 이 한자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간과’란 말을 쓰지 않는다. ‘간과’는 한자로 ‘看過’로 쓰지만 한어에서의 ‘看過’는 이미 보았다는 뜻이다.   7. 농성(籠城) 농성이란 본래 한자어로는 채롱롱(籠)자에 성(담)성(城)자를 쓴 ‘롱성’인데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으로 하여 ‘농성’이라고 하는데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1.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킴, 2. 어떤 목적을 위하여 줄곧 한 자리에 머물러 떠나지 않고 버티는 일”로 되여있다. 이 ‘농성’에 해당한 우리말 단어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농성’이란 한자어 단어를 쓰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 말을 쓰지 않는다. 이상의 례에서 보면 1~5까지는 고유어와 한자어로 된 단어로서 1~4까지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중국의 조선족들은 고유어를 쓰고 한국에서는 한자어를 쓰며 5에서는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자어를 쓰고 한국에서 고유어를 쓰고 있다.  6~7에서는 고유어가 없고 한자어만 있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는 고유어가 없고 한자어만 있는 단어를 하자어로 아주 간편하게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간과’나 ‘롱(농)성’같은 것을 한자어로 쓰지 않기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것을 단문(單文)형으로 길게 말하여야 한다.   필자의 견해: 한자어는 고유어와 별로 차이 없이 우리 말로 쓰이고 있으므로 한자어를 써 도 무방하겠지만 단일어에서 한가지 뜻으로 되여 있는 고유어와 한자어 두 가지가 다 있을 때에는 고유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고 복합어, 합성어에 서 한가지 뜻으로 되여 있는 고유어와 한자어 두가지가 다 있을 때에는 경우에 따라 다를수 있지만 일반적 경우에는 고유어보다 한자어를 쓰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본다.     고유어가 없이 한자어로만 있는 단어는 한자어를 쓰는 것이 좋다고 본다. ‘간과’나 ‘롱(농)성’과 같은 단어는 고유어 단어가 없으므로 우리말로 표시하 자면 너무 길어지여 문자 표기에서 불편한 점들이 많으므로 한자어를 쓰는 것이 편리하다고 본다.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3)   고유어와 고유어   고유어는 순순한 우리 겨레의 말이다.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한 겨레이지만 서로 부동한 지역에서 살면서 우리 겨레의 순수한 고유어도 서 로 다르게 쓰고 있다. 아래에 한국과 중국조선족들의 고유어 사용에서의 차 이를 알아 보자.   1.    ‘우’,와 ‘위’ 아래의 반대어를 한국에서는 ‘위’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라고 한다. 한국국어사전을 보면 한국에서도 옛날에는 ‘우’라고 하였다.   2.    ‘웨’와 ‘외’, ‘웨치다’와 ‘외치다’ 중국에서는 ‘웨’와 ‘외’는 문자 표기가 부동함에 따라 그 발음도 표준적으로 는 구별된다. ‘외’의 발음은 ‘웨’와 ‘에’사이의 발음으로서 ‘웨’보다 좀 된소리 가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발음의 구별이 없이 모두 ‘웨’로 발음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구별이 없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웨’로 발음 한다. 매우 큰소리로 부르짖는 것을 한국에서는 ‘외치다’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 족들은 ‘웨치다’로 표기한다.   3.     ‘머리’와 ‘대가리’ 중국의 조선족들은 두부(頭部)를 말할 때 존대(尊待)와 천대(賤待)에 따라 구별하여 말한다. 사람의 두부(頭部)를 말할 때에는 ‘머리’라 하고 동물의 두부(頭部)를 말할 때에는 ‘대가리’라 한다. 사람에 대하여서도 아주 업신여 겨 말할 때에는 ‘대가리’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이 구별 없이 두부(頭部)를 ‘머리’라고 말하며 또 동물에서도 소나 돼지의 두부를 말 할 때에는 ‘소머리’, ‘돼지머리’라 하고 개의 두부를 말할 때에는 ‘개머리’라 하지 않고 ‘개대가리’라고 한다.     4.    ‘빌리다’와 ‘꾸다’ ‘빌리다’와 ‘꾸다’는 구별된다. ‘빌리다’는 남의 물건을 잠시 갖다 쓰고 그 물 건을 그대로 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원 형태를 보존할수 있는 물건을 갖다 쓰고 도로 돌려 줄 때에 ‘빌리다’로 쓴다. 례를 들면 도구를 빌려 쓰다. 옷을 빌려 입다. 책을 빌려 보다. 등이다. 갖다 쓴 물건이 쓰고 나면 원 형태를 보존할수 없고 그 수량만큼 같은 종류 의 다른 물건을 돌려 줄때에 ‘꾸다’로 쓴다. 례를 들면 ‘돈을 꾸다.’, ‘쌀을 꾸 다.’ ‘기름을 꾸다’ 등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빌리다’와 ‘꾸다’를 이상과 같이 구별하여 쓰지만 한국에 서는 이런 구별이 없이 남의 물건을 갖다 쓰고 돌려주는 것을 모두 ‘빌리다’ 로 쓰고 있다.   5.    ‘미안하다’와 ‘죄송스럽다’ ‘미안하다’와 ‘죄송스럽다’는 완전한 고유어가 아니고 한자어와 고유어가 합 성된 단어이지만 완전히 우리 말로 쓰이고 있다. ‘미안하다’와 ‘죄송스럽다’는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불안스러운 마음을 가질 때 쓰이지만 중국의 조선족 들은 불안스러운 정도에 따라 달리 쓰이고 있는데 ‘미안하다’ 는 상대방에 대해 부끄럽고 겸연쩍은 마음이 있을때에 쓰이고 ‘죄송스럽다’ 는 마음이 죄 스럽고 황송할 때 쓰인다. 상대방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할 때 ‘죄송 스럽다’로 쓰이고 상대방에 대하여 불안한 마음이 좀 미약할 때에 ‘미안하다’ 로 쓰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안하다’란 말을 그리 쓰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불안한 마음의 강약차이 없이 ‘죄송스럽다’를 많이 쓰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우리겨레의 고유어상용에서 차이가 많고도 많다.   필자의 견해: ‘머리’와 ‘대가리’ 존대와 천대의 차이, ‘미안하다’와 ‘죄송스럽다’ 는 상대방 에 대한 불안스러운 마음의 정도 차이, ‘빌리다’와 ‘꾸다’ 는 남의 물건을 잠시 갖다 쓰는데 그 물건의 형태보존 여부의 차이에 의하여 구별되므로 이런 구별점이 있는 단어들은 그 구별점 따라 말하고 씀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주청룡 2009년 1월 27일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4)   거리의 간판   한국에서 거리의 간판들을 보면 우리말 간판, 한자간판, 영문간판, 영어를 한글로 표기한 간판, 영어와 한글을 섞어 쓴 간판 등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 거리의 간판들을 보면 한가지 간판을 두 가지 문자로 표시하였는데 우에는 조선문자 아래에는 한자로 표시되여 있다. 이를 어길 경우 행정수단으로 강제철거를 시킨다. 조선문자를 첫 자리에 놓는다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국에서의 언어, 문자사용을 ‘짬뽕’이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의 조선족들은 전국인구의 0.15%밖에 안되지만 그 넓은 땅, 그 많은 인구에서 우리말 우리글을 굳건히 아끼고 지켜 왔다는 것을 설명한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는‘조선말사용에 관한 규정’을 내 왔고 또 ‘조선말 규범집’책으로 출판하였다.   모회사를 지나다가 “XX엔지니어링㈜”란 간판(완전호칭을 밝히지 않고 한자어로 되여 있는 앞부분을XX로 표시)을 보았다. 그 회사의 직원들과 엔지니어링이란 무슨 뜻 인가고 물어보니 10여명 되는 직원가운데서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 이 많은 회사직원들이 모르고 누가 아는가?”고 물으니 “사장이나 알겠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이 그 간판 옆에 “XX 機械工業(株)”라고 한자로도 표시되여 있어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것이 모모 기계공업 회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엔지니어링이란 1. 공학(工學) 2. 재료, 기계, 인력 따위를 일정한 생산목적에 따라 유기적인 체계로 구성하는 활동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여러 회사의 사장들과 “무엇 때문에 간판을 한글로 표시하지 않고 영문 혹은 영어를 한글로 표시하는가?”고 물으니 대부분 회사사장들의 말 은“우리말로 하면 어딘가 촌스럽다. 그래도 영어로 명칭을 달아야 국제화 시대에 발을 맞추는 것 같다.”라고 하였고 일부 사장들은 “남들이 그렇게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한다.”라고 하였다.   영어를 우리글로 표기하면 그 표기가 제한되여 많은 단어들을 정확히 표기할 수 없다. 하여 영어를 잘 아는 외국사람들도 우리글로 표기된 영어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 본국사람도 모르고 외국사람도 모르는 그런 간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간판외에도 각종 언론 매체와 출판물에서 우리의 고유어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외국어, 외래어를 많이 쓰고 있다.   지금 세계언어학자들은 조선(한)글을 세계통용 문자로 하자는 주장도 나 오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조선(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것이다.  24가지 자모로 조선(한)글의 모든 문자를 다 표시할 수 있고 가, 나, 다, 아, 야, 어 등 기본음에 여러 가지 받침을 넣으면 그 계렬의 음을 문자로 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리유는 컴퓨터 문자입력에서 육필의 필순에 따라 건반을 치면 모든 글자들을 순조롭게 쳐 내려간다는 것이다. 컴퓨터 사용에서 그 어떤 다른 글보다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여 세종대왕이 600년 뒤에 올 디지털시대를 예견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렇듯 우리말 우리 글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이런 뛰어난 우월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본국(한국)에서 자기의 글을 도외시 하고 우리글로 정확히 표기할 수도 없는 영어간판을 쓰고 있는지? 이것도 국제화 시대에 맞추어 간다고 할 수 있는지?   인터넷에서 이런 글은 본적이 있다. “우리가 한국어와 한글을 더욱 사랑하 고 가꾸지 않는다면 한국어와 한글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00년 내지 200년 후에는 박물관에서나 한글을 찾아보겠지...... 온통 영어만 쓰고...... 이제 대한민국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한글을 사랑 하고 지키어 세계화하자.” 이는 외국어에 집착하고 조선(한)글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가운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우 리말,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하자’고 웨치고 싶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5) 필자註: 원래는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를 네 번에 나누어 두음법칙, 인명, 지명, 거리간판, 한자어와 고유어, 고유 어와 고유어, 고유어와 외래어 등 몇 개 부류로 나누어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씩 례를 들면서 차이점들을 말하여 네기로 끝을 맺으려고 하였는데 많은 독자 들의 요구에 의해 앞으로 계속하여 쓰려고 한다. 이번 기부터는 부류를 나누지 않고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언어, 문자 차이를 말하려 하는데 이미 끝을 맺으려 한 것을 계속 쓰므로 문장격식에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수 있으므로 독자들의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림업’(林業) 과’ 임업’ 각종 림산물(林産物)에서 얻은 경제적 리득을 목적으로 삼림을 경영하는 사업을 한국에서는 ‘임업’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림업’이라고 한다. 림업이란 한자 ‘林業’에서 온 한자어인데 삼립과 사업의 합성명사 이다. 때문에 림업이라고 하면 수풀 ‘림’온 업 ‘업’문에 되여 있기온 피득 듣거나 보아도 삼림을 경영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만 임업이 라고 하면 삼림과 사업의 합성어 의미에도 맞지 않고 하나의 단어만 써 놓 업의 무슨 뜻인지 리해를 하기 힘들고 원래 한자어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림업’을 ‘임업’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상관없다’와 ‘일없다’ 념려할 것 없다, 괜찮다의 뜻으로 쓰이는 ‘상관없다’를 중국의 조선족들 은 ‘일없다’로 많이 쓰고 있는데 이 말은 표준적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일없다’는 중국의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온것이다. 동북의 한족들은 ‘상관없다’를 ‘没事’(일없다)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도 표준적인 것이 아니며 표준적인 것은 ‘没关系’(상관없다, 관계없다)이다. 중국의 조선족 들은 여기에서 쓰이는‘일없다’를 반드시 표준적인 ‘상관없다’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덜’과 ‘슬’ 어떤 기준이나 정도가 약하게 또는 그 아래로의 뜻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덜’로도 쓰고 ‘슬’로도 쓴다. 례하면 ‘덜 되다’, ‘슬 되다’, ‘덜 춥다’ ‘슬 춥다’로 다 쓰지만 한국 사람들은 ‘슬 되다’나 ‘슬 춥다’라고 말하면 알아 못 듣는다. 친인(親人)과 친인 (親姻) 한국에서는 ‘친인’하면 ‘親姻’의 한자어의 뜻으로 배우자 혈족 등의 친족을 말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친인’하면 ‘親人’의 한자어의 뜻으로 직계 친족과 배우자를 가리켜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도 ‘親人’의한자어단어는없다. ‘안해’와 ‘아내’ 결혼한 녀성을 그 남편에 상대한 처(妻)를 한국에서는 ‘아내’라 하고 중 국의 조선족들은 ‘안해’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안 해’를 “1‘아내’의잘못. 2‘아내’의 옛말. 3‘아내’의 북한 어.” 라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옛날에는 ‘아내’ 라 고 한 것이 아니라 ‘안해’라고 하였는데 후에 한국에서는 ‘아내’로 고치여 말한 것이다. ‘애인’과 ‘정부’ 중국의 한족들은 안해를 ‘愛人’(애인)이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족말의 영향을 받아 ‘안해’를 ‘애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부녀가 몰고 정을 통하는 남자를 정부(情夫)라 하고 유부남이 몰고 정을 통한 녀자를 정부(情婦)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부나 련인을 모두 ‘애인’이라고 한다. ‘시끄럽다’와 ‘떠들썩하다’ 듣기 싫게 떠들썩한 소리를 한국에서는 ‘시끄럽다’라고 말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떠들썩하다’혹은 ‘요란스럽다’라고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귀찮고 성가시러울 때에만 ‘시끄럽다’는 말을 쓰고 있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이 두가지 경우를 다 ‘시끄럽다’라고 한다. ‘당근’과 ‘홍당무’ 한어에서 말하는 ‘胡萝卜’를 한국에서는 ‘당근’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홍당무’라고 하며 사투리로 ‘닌지’ 라고도 한다. 그러나 당근이라는 말은 원래는 몰랐던 것이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알게 된것이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껍질이 붉은 무우와 당근을 모두 홍당무라고 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6) ‘연체료’와 ‘체남금’ 금전의 지급이나 납입 등을 기한이 지나도록 지체하여 기간에 따라 지급하 는 추가료금을 한국에서는 ‘연체료’(延滯料)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의 영향을 받아 ‘체납금’(滯納金)이라고 한다. 한어에서 ‘滯納金’은 한국 에서 말하는 ‘연체료’ 뜻으로 쓰인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에는 체납금(滯納 金)을 한어에서의 체납금과 다른 뜻으로 기한까지 내지 못하고 밀린 돈이라 고 하였다. ‘컵’과 ‘고뿌’ 물, 차, 음료 등을 따라 마시는 잔을 한국에서는 영어발음으로 ‘컵’이라고 하 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일본어 발음으로 ‘고뿌’라고 많이 말하고 있으며 지 금은 한국나들이를 많이 하면서 일부 사람들음 ‘컵’이라고도 한다. 한국 국어 사전에 보면 이에 해당하는 명사는 우리말에 한자어단어 ‘잔(盞)’이라고 있지 만 민간에서는 컵(고뿌)보다 작은 술잔처럼 작은 용기 를 ‘잔’이라고 한다. ‘전분’과 ‘녹말가루’ 감자, 고구마 등을 가라앉힌 앙금을 말린 가루를 한국에서는 ‘녹말가루’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감분’ 혹은 ‘전분’ 이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에 도 녹말가루를 전분이라고 했다. ‘당면’과 ‘감자국수’ 녹말가루로 만든 국수를 한국에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되였다하여 ‘당면(唐麵)’이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 들은 ‘감자국수’ 혹은 ‘고구마국수’라고 한다. ‘맛난이’와 ‘맛내기’ 화학조미료를 한국 국어사전에는 속칭으로 ‘맛난이’라 하였고 식품포장에 는 ‘미원’이라고 하였는데 ‘미원’은 한국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화학조미료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맛내기’라고하는데 화학조미료가 생산되여 나온 력사가 이제 몇십년 밖에 안되기에 여기에 해당되는 우리말 고유어는 없이 민간에서 음식의 맛을 돋구는 조미료라고 하여 ‘맛내기’라고 하였으며 출판물에서도 민간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맛내기’로 쓰고 있다. ‘볼펜’과 ‘원주필’ 필 끝에 둥글고 작은 강철 알을 끼워 운필에 따라 회전하면서 기름잉크를 내리여 쓰게 된 필기구를 한국에서는 영어발음으로 ‘볼펜’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에서의 圓柱筆의 한자어발음으로 ‘원주필’이라고 한다. ‘상추’와 ‘부루’ 한어에서 말하는 ‘生菜’를 한국에서는 ‘상추’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부 루’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부루’를 ‘상추’의 옛말이라고 하 였다. 이러고 보면 예전에 조선반도에서는 ‘상추’를 ‘부루’라고 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피망’과 ‘사자고추’ 한어에서 말하는 ‘大辣椒’를 한국에서는 프랑스어 발음으로 ‘피망’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준말로는 한자어와 고유어의 합성단어로 ‘사자고추’라 하며 민간에서는 ‘한족고추’라 하고 끝이 뾰족한 고추는 ‘조선고추’라고한다.   ‘청국장’과 ‘썩장’ 삶은 콩에 곰팡이를 자라게 하여 고유한 맛과 냄새를 나게 한 장(醬)을 한국에서는 ‘청국장’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썩장’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한국과의 거래를 통하여 ‘청국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는 음식을 ‘썩장’이라고 하면 좀 속스러운 말 같지만 청국장(淸麴醬)이라 하면 맑을 ‘청(淸)’, 누룩 ‘국(麴)’, 장 ‘장(醬)’자의 한자어의 의미도 있어 더 문명스러운 말 같기도 하므로 ‘썩장’보다 ‘청국장’이라 하면 듣기가 고상한 감을 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7) ‘서민’ 과 ‘백성’ 한국에서는 일반 평민을 ‘서민’이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서민’을 아무런 벼슬이 없는 평민이라고 하였고 ‘백성’을 일반 국민의 예스 러운(옛것 같은 느낌)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예전에는 서민을 백성들 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일반 평민을 ‘백성’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한국과의 거래를 통하여 ‘서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도우미’와 ‘행사안내원’ 행사안내를 하거나 행사내용을 설명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는 요원을 한국에서는 ‘도우미’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행사안내원’이라고 한다. ‘도우미’란 말은 중국의 조선족들은 원래 모르고 있던 말들인데 한국과 거래를 한 사람들은 지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두우미’는 93대전 엑스포에서 처음 쓴 말이다.   ‘처가집’과 ‘가시집’ 안해의 본집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처가집’, ‘가시집’ 두가지로 다 말하고 한국에서는 ‘처가집’이라하며 ‘가시집’라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안해의 아버지, 어머니를 한국에서는 ‘장인’, ‘장모’라고 하고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라고 하지 않는다. 중국의 조선족들도 조선(한)반도의 북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라하고 남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장인’, ‘장모’라고 말한다.   ‘달래다’와 ‘설복하다’ ‘달래다’를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에는 “1. 위로하다. 2. 좋고 옳은 말로 잘 이끌어 꾀다.”라고 하였고 ‘설복하다’는 “알아 듣도록 말하여 수긍하게 함”이라고 하였다. 사전의 해석으로 보면 두 단어의 뜻이 대체적으로 비슷한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달래다’를 어린이들에 한해서 떼를 쓰며 말을 듣지 않을 때 ‘아이를 달래라’고 말하지 어른에 한해서는 ‘달래다’란 말을 하지 않고 ‘설복하다’로 말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른이나 어린이 구별없이 설복하다의  뜻으로 ‘달래다’로 쓰고 있다.   ‘꽃샘추위’와 ‘봄추위’ 이른봄 추위를 한국에서는 꽃이 필 무렵의 추위라고 하여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봄추위’라고 하지 ‘꽃샘추위’란 들어도 보지 못한 말이다.   ‘미쁘다’와 ‘미덥다’ 믿음성이 있다는 뜻으로 한국에서는 ‘미덥다’, ‘미쁘다’로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미덥다’로만 쓰고 ‘미쁘다’란 말은 들어 보지 못한 말이다.    ‘멍청이’와 ‘부실’, ‘부실’과 ‘실속없다’ 어리석고 정신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분석, 판다, 처리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한국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준적으로 모두 ‘멍청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사람들을 민간에서는 또‘부실하다’ 라고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부실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부실하다’를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 1 몸, 마음, 행동 따위가 튼튼하지 못하고 약함. 2 내용이 실속이 없고 충분하지 못함. 3 믿음성이 적음.”이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 사전 해석의 첫번째의 해석에 한해서는 쓰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해석에 한해서는 쓰지 않는다. 사전의 이런 해석으로 하여 한국에서는 ‘부실기업’,  ‘부실공사’,  ‘부실건물’ 등 단어들이 있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단어를 쓰지 않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우리말 단어가 없이 대개는 ‘부실’의 대신 ‘실속 없다’로 쓰고 있다.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8) ‘진작’과 ‘언녕’ 주로 기대나 생각대로 잘되지 않은 지나간 사실에 대하여 뉘우침이나 원망 의 뜻을 나타내는 문장에서‘좀 더 일찍’이란 뜻으로 한국에서는‘진작’이란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진작’과 ‘언녕’두가지 단어를 다 쓰고 있는데 보편적으로 ‘진작’보다 ‘언녕’이란 단어를 더 많 이 쓰고 있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언녕’이란 단어가 없다. ‘나중’과 ‘후’ 얼마 지난 뒤 또는 먼저 할 일을 한 다음의 뜻으로 한국에서는 ‘나중’이란 단어를 쓰면서 ‘나중에’라고 많이 말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나중’보다 ‘후’란 단어를 많이 쓰면서 ‘후에’라고 많이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에 보면 ‘후(後)’를 일이 지나간 얼마 뒤의 뜻으로‘추후(追後)의 준말이라고 하였는데 ‘추후’란 중국의 조선족들은 들어 보지 못한 단어이다. ‘오순도순’과 ‘오손도손’ 의좋게 지내거나 이야기하는 모양을 한국에서는 ‘오순도순’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오손도손’이라고 한다. 다 같은 순수한 우리말 고유어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이 서로 다르게 쓴다. ‘표현’과 ‘표달’ 중국어사전에는 ‘표현(表現)’을 “드러나다. 나타나다. 보이다. 활약하다.”로 해석하였으며 ‘표달(表達)’을 “(생각, 감정을) 나타내다. 드러내다. 표시하다. 표현하다.”로 해석하였다. 의사나 감정따위를 표현하여 전달하는것을 한국에서는‘표현’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현’,‘표달’두가지 단어를 다 쓰고 있는데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와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낼 때에는 ‘표현’이라는 단어를 쓰면 적합하지만 형상이 없는 단순히 언어로 의사를 전달할 때에는 ‘표현’보다 ‘표달’의 단어다 더 적합하다. 하지만 학국 국어사전에는 ‘표달’이란 단어가 없다. ‘굵다’와 ‘실하다’ ‘가늘다’ 의 반대어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굵다’ 혹은 ‘실하다’라고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굵다’라고 만 말하지 ‘실하다’라고 는 말하지 않는다. 한국 국어사전에도 ‘실하다’는 ‘가늘다’의 반대어로 쓰이는 의미가 없다. ‘시사’와 ‘안민고시’ 미리 간접적으로 일러주는 것을 한국에서는 ‘시사(示唆)’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시사(示唆)란 말이 없이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안민고시(安民告示)가 있다. '시사(示唆)'란 보일 '시'자에 부추길 '사'자의 한자어이지만 한어에는 '示唆'란 단어가 없고 한국 국어사전에는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안민고시’가 없다. ‘휴식’과 ‘휴무’ 중국의 조선족들은 직무를 보지 아니하고 하루 또는 한동안 쉬는 것이나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쉬는 것을 모두 휴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쉬는 시간의 차이를 가지고 ‘휴식’과 ‘휴무’두 가지 단어를 각이하게 상용하고 있는데 직무를 보지 아니하고 하루 또는 한동안 쉬는 것을 쉴 ‘휴(休)’자에 힘쓸 ‘무(務)’자를 써서 ‘휴무(休務)’라고 하며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쉬는 것을 쉴 ‘휴(休)’자에 숨 ‘식((息)’자를 써서 ‘휴식(休息)’이라고 한다. 중국 조선족들에게는 ‘휴무’가 너무 생소한 단어이다. ‘휴식’과 ‘휴무’는 모두 한자어로서 한자어 의미로 보면 한국에서 쓰는 쉬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휴식’과 ‘휴무’를 구별하여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식목’과 ‘식수’ 나무를 심는 것을 한국에서는 ‘식목’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식수’라고 한다. ‘수(樹)’와 ‘목(木)’ 은 모두 나무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목(木)’ 은 산 나무나 죽은 나무를 다 말하지만 ‘수(樹)’는 산 나무만 말 한다. 그러기에 심을 ‘식(植)’자에 나무 ‘수(樹)자를 써서 ‘식수(植樹)’라고 하는 것이 ‘식목(植木)’이라고 하는것 보다 더 적절하다고 본다. 한국 국어사전에도 식수란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식목’이라고 한다.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 (9) ‘밥솥’과 ‘밥가마’,‘누룽지’와 ‘가마치’ 밥을 짓거나 국 따위를 끓이는 그릇을 한국에서는 ‘솥’혹은 ‘밥솥’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가마’ 혹은 ‘밥가마’라고 한다. 같은 뜻으로 되는‘가마’와‘솥’이란 단어는 우리말의 고유어로서 한국이나 중국의 조 선족들에게 다 있는 말이지만 습관상에서 그 단어의 사용이 다르다. 가마(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한국에서는 ‘누룽지’라 하고 중국의 조선 족들은 가마 바닥에 붙었다고 하여 보편적으로‘가마치’라하고 ‘누룽지’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가마치’를 ‘눌은밥’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전(煎)’과 ‘지짐이’ ‘전’이란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얇게 썰어 밀가루를 묻혀 지진음식의 총칭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음식을 ‘전’이라고 하지 않고 ‘지짐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지짐이’ 란 “1 기름에 지진 음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국물이 적고 간이 좀 짜게 끓인 음식의 총칭”이라고 해석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 사전의 두번째 해석에 대하여서는 ‘지짐이’라고 하지 않고 ‘졸임’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한국어사전에도‘졸임’이란 단어가 없다. 개장국(개탕)과 보신탕 개고기를 고아 끓인 국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준적으로는‘개장국’이라 하고 비표준 적으로는 ‘개탕’이라 하고며 한국에서는 허약한 몸에 영양을 보충해 주는 국이라는 뜻으로‘보신탕’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개장국’을 ‘보신탕’이라고도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개장국’이란 말보다 ‘보신탕’이라고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산적(散炙)’과 ‘뀀’ 쇠고기나 양고기 따위를 잘고 얇게 썰어 양념을 하여 꼬챙이에 꿰여서 구은 것을 한국에서는 ‘쇠고기산적’ 또는 ‘양고기산적’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준적인 말이 없이 꼬챙이에 꿰였다고 하여 형상적으로 ‘소고기뀀’ 또는 ‘양고기뀀’이라고 하다가 한국과 거래를 하면서 한국말을 본받아 지금은 ‘쇠 고기산적’ 또는 ‘양고기산적’이라고도 한다. ‘백미’와 ‘입쌀’, 그리고 ‘백반’과‘이밥’ 벼를 찧어 나온 쌀을 한국에서는 흰쌀이라고 하여 흰 ‘백[白]’자에 쌀‘미[米]’자를 써서 ‘백미[白米]’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리말의 고유러로‘입쌀’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입쌀’을 “멥쌀을 보리쌀 따위의 잡곡이나 찹쌀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민간에서는‘입쌀’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입쌀로 지은 밥을 한국에서는 흰밥이라고 하여 흰 ‘백(白)’자에 밥 ‘반(飯)’자를 써서 ‘백반(白飯)’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이밥’이라고 한다. ‘이밥’이란 한국어사전에도 있는 단어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로 느껴지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백반’이라하면‘명반(明礬)’을 구어서 결정수를 제거한 다음의 물질인 백반(白礬)으로 여기지 흰밥이란 뜻의‘백반(白飯)’으로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느껴진다. 조선말대사전에서 ‘이밥’에 대한 해석을 보면 “흰쌀밥을 이르던 말. 리조봉건시기에 흰쌀로 지은 밥을 왕만이 먹는다는 뜻에서 ‘왕밥’또는 ‘이(리)밥’이라고 불렀다.”즉 이(李)씨 왕의 상에만 오르는 밥이라 하여 이밥이라고 하였다. ‘찰떡’과 ‘인절미’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찹쌀 따위의 차진 곡식으로 만든 떡을 ‘찰떡’이라 하였고 찹쌀을 쪄서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힌 떡을 ‘인절미’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찰떡’과 ‘인절미’구별이 없이 이 두가지를 모두 ‘찰떡’이라하였고 ‘인절미’란 단어는 없었다. 지금은 한국과의 거래를 통하여 ‘인절미’란 단어를 쓰는 사람도 있다. ‘수제비’와 ‘뜨더국’ 밀가루를 반죽하여 맑은 장국이나 미역국 따위에 적당한 크기로 떼어 넣어 익힌 음식을 한국에서는 ‘수제비’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표준말로는 ‘뜨더국’이라 하고 비표준 적으로‘뚜데국’이라고도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뜨더국’을 ‘수제비’의 북한어라고 하였다.‘수제비’와 ‘뜨더국’은 모두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한국에서는 ‘뜨더국’은 너무 생소한 단어이고 ‘수제비’는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 생소한 단어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0) ‘문어’와 ‘서면어’,‘구어’와 ‘구두어’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이 아닌 문장에서만 쓰는 말을 한국에서는 문어(文語)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서면어(書面語)’라고 하는데 한국어사전에도 ‘서면어’ 란 단어가 없다. 문장에서만 쓰는 특별한 말이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을 한국에 서는 ‘구어(口語)’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구두어(口頭語)’라고 한다. 한국어 사전에도 ‘구두어’란 단가 없다. ‘갈림목’과 ‘갈림길목’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곳을 한국에서는 ‘갈림목’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갈림길목’이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갈림길목’을 ‘갈림목’의 북한어 라고 하였다. ‘고고성’과 ‘고고지성’ 어린애가 갓 태여낫을 때의 울음소리를 한국에서는 ‘고고지성’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고고성’이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고고성’을 매우 높고 크게 내는 소리 뜻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줍다’와 ‘줏다’ 남이 분실한 물건 또는 바닥에 떨어지거나 흩어져 있는 것을 집는 것을 한국에서는 ‘줍다’로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줏다’로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줏다’를 “1‘줍다’의 방언(강원, 경기, 경남, 전남, 제주, 충청). 2‘줍다’의 옛말. 3‘줍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으로부터 보면 ‘줏다’란 단어를 옛날에도 썼고 지금도 조선(한)반도의 절대 대부분 지역에서는 쓰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통틀다’와 ‘통털다’ 있는 대로 모두 합하여란 뜻으로 한국에서는 ‘통틀다’로 말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통털다’로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통털다’를 1‘통틀다’의 잘못, 2 ‘통틀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가득’과 ‘골똑’ 분량이나 수효 따위가 어떤 범위나 한도에 꽉 찬 모양을 한국에서는 ‘가득’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가득’이라고도 하고 ‘꼴똑’혹은‘골똑’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골똑’을 ‘가득’의 함경도 방언이라고 하였다. ‘해지다’와 ‘판나다’ 옷 같은 것이 닳아서 떨어진 것을 한국에서는 ‘해지다’라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서면어에서는 ‘해지다’라고 말하지만 구두어에서는 일반적으로 ‘판나다’로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판나다’를 ‘해지다’의 함경도 방언이라고 하였다. ‘싸다’와 ‘눅다’,‘싼거리와’ ‘눅거리’ 물건값이 마땅한 값보다 적은 것을 한국에서는 ‘싸다’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싸다’와 ‘눅다’두가지 단어를 다 쓴는데 일반적으로는 서면어(문어)에서는 ‘싸다’로 쓰고 구두어(구어)에서는 ‘눅다’로 많이 쓴다. 물건을 싸게 팔거나 사는 일. 또는 그렇게 팔거나 산 물건을 한국에서는 ‘싼거리’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눅거리’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눅거리’를 ‘싼거리’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앉으세요’와 ‘사세요’ 한국에서는 로인들에게 세배를 올릴 때 “오래 오래 사세요.”라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오래 오래 앉으세요.”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말하는‘오래 앉으세요’는 ‘오래 사세요’의 존대어로서 웃어른에 한해서 말하고 대등관계에서는 오래 살라고 한다. 한국사람들 앞에서 “오래 오래 앉으세요.”라고 말한다면 앉은자리에서 잃어나지 말고 오래 앉아있으라는 뜻으로 리해를 하기에 오해를 할수 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1) ‘자재’와 ‘재료’ ‘자재’나 ‘재료’는 모두 무엇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료이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자재’나 ‘재료’를 언론매체나 출판물에서는 구별이 없이 쓰지만 구두어에서는 한어의 영향을 받아 보통 ‘재료’라고 많이 말하고 ‘자재’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한어에는 재료(材料)란 단어는 있지만 자재(資材)란 단어는 없다. 한국 사람들은 가구, 건축 등 부분에 쓰이는 원료들을 ‘자재’라 하고 음식, 복장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원료를 ‘재료’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국어사전에는 ‘자재’와 ‘재료’를 엄격한 구별이 없이 해석하였고 ‘건축재료’라고도 하였다. ‘졸대’와 ‘오리대’ 나무를 가늘고 길게 켠 막대기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오리대’라 하고 한국에서는 ‘쫄대’라고 말한는데 문자표기로는‘졸대’로 쓰고 있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오리대’를 북한어라고 하였다. ‘깔창’과 ‘신받치개’ 발에 신고 다니는 것을 한국사람들은 ‘신발’이라고 많이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신’이라고 많이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신발’을 “‘신’을 똑똑히 일컫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발의 바닥에 까는 것을 한국에서는 ‘깔창’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신받치개’라고 한다. ‘전봇대’와 ‘전선대’ 전선이나 통신선을 늘여 매기 위하여 세운 기둥을 한국에서는 전봇대(電報대)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전선대(電線대)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전선대’를 1‘전봇대’의 잘못. 2‘전봇대’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도 이전에는 ‘전선대’를 ‘전보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전선대’혹은 전기(번개) ‘전(電)’자에 기둥‘주(柱)’자를 써서 전주(電柱)라고 한다. ‘완행열차’와 ‘보통렬차’ 한국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 운행 속도가 빠르고 큰 역에서만 정차하는 렬차를 '급행(急行)렬차'라고 한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며 각 역마다 정차하는 렬차를 한국에서는 느릴‘완(緩)’에 다닐‘행(行)’자를써 서 ‘완행(緩行)열차’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한어로 느릴 ‘만(慢)자’에 수레 ‘차(車)’자를 써서‘慢車’라고 하는데 그 한자어 발음으로는 ‘만차’인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만차’라고 하지않고 ‘보통렬차’라고 한다. ‘레일’과 ‘레루’ 철도 차량이나 전차 따위를 달리게 하기 위하여 땅 우에 까는 가늘고 긴 강철재(鋼鐵材)를 한국에서는 영어 발음으로 ‘레일[rail]’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일어 발음으로 ‘레루[レ―ル]’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레루’를 ‘레일’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차량’과 ‘바곤’ 기동차에 줄줄이 이어놓아 사람이 타거나 물건을 싣는 부분의 매 한칸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바곤’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차량’이라고 한다. ‘바곤’이란 말은 로시아어로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다. ‘차량’이란 한어 ‘車輛’의 한자어 단어인데 한국 국어사전의 해석은 1. 여러가지 수레의 총칭. 2. 열차의 한 칸이라고 하였다. 단순히 차량이라고 하면 기동차를 말하는지 기동차에 달려 끌려 다니는 부분(바곤)을 말하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바곤’을 ‘차량(車輛)’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2) ‘날인’과 ‘도장을 찍다.’ ‘날인’은 누를 ‘날(捺)’자에 도장 ‘인(印)자의 한자 ‘捺印’의 한자어 단어로서 도장을 찍다의 뜻으로 되는데 한국에서는 ‘도장을 찍다’를 ‘날인’이란 한자어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날인’이란 너무 생소한 단어이며 이에 해당하는 합성명사가 없이 우리말 그대로 ‘도장을 찍다’로 말한다. ‘날인’은 ‘捺印’의 한자어 단어이지만 한어에는 ‘捺印’이란 단어가 없다. ‘ 방치’와 ‘내버려두다’ ‘방치’는 놓을 ‘방(放)자에 둘 ‘치(置)’자의 한자 ‘放置’의 한자어 단어로서 ‘내버려두다’ 뜻으로 되는데 한국에서는 ‘내버려 두다’의 뜻으로‘방치’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방치’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다가 한국과의 문화교류를 통하여 지금은 언론매체에서 ‘방치’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민간에서는‘방치’란 단어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에 해당한 합성명사도 없이 고유어 그대로‘내버려 두다’로 말하고 있다. ‘중차대하다’와 ‘중요하고 크다’ ‘중차대하다’는 중할 ‘중(重)’자에 또‘차(且)’자, 클‘대(大)’를 쓴 ‘重且大’의 한자어 단어로서 한국에서는 ‘중요하고 크다’의 뜻으로 쓰고 있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중차대하다’란 말을 모르고 있으며 그에 해당하는 합성명사도 없이 우리말 그대로‘중요하고 크다’로 말하고 있다. ‘중차대’는 ‘重且大’의 한자어 단어이지만 한어에는 ‘重且大’란 단어가 없다. ‘고참자’와 ‘참가한지 오랜 사람’ 한국 국어사전에는 오래 전부터 한 직장이나 직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예 ‘고(古)’자에 참여할 ‘참(參)’자를 써서 ‘고참자(古參子)’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이런 단어가 없이 우리말 그대로 ‘한 직장이나 직위에 오래 있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고참자’란 한자어 단어를 쓰기보다 매우 불편하다. 한어에도 ‘古參子’란 단어가 없다. ‘청가’와 ‘휴가를 신청하다’ 직장, 학교, 군대 따위의 단체에서 어떤 사유로 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쉴것을 신청하는 것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청할 ‘청(請)자에 겨를 ‘가( 假)’자를 써서 ‘청가(請假)’를 맞는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쉴 ‘휴(休)’자에 겨를 ‘가(假)’자의‘휴가[休假)]’를 신청하다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도 ‘청가’라는 단어가 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장기간 ‘청가’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 생소한 단어로서 ‘청가’란 뜻을 모르고 있다. ‘청시’와 ‘지시를 청하다’ ‘상급 기관이나 상사(上司)에게 지시를 청하다. 물어보다’ 의 뜻으로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請示’의 한자어 단어로 ‘청시’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청시’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지시를 청하다’라고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도 ‘청시’란 단어가 없다. ‘지참’과 ‘가지고 옴’ ‘지참’이란 가질 ‘지[持]’자에 참여할 ‘참[參]’자 ‘持參’의 한자어단어로서 한국 국어사전에는“무엇을 가지고 모임 따위에 참여함.” “지니고 옴”으로 순화 한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지참’이란 한자어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무엇을 ‘가지고 혹은 지니고 옴’이라고 한다. ‘지참[持參]’은 한자어 단어이지만 한어에는 ‘持參’이란 단어가 없다. ‘오도’와 ‘그릇된 길로 이끎’ ‘오도’란 그릇될 ‘오[誤]’자에 이끌 ‘도[導]’자 ‘誤導’의 한자어 단어로서 한국 국어사전에는 “그릇된 길로 이끎”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오도’란 한자어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그릇된 길로 이끎 혹은 그릇된 길로 인도’라고 말한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3) ‘편도’와 ‘한쪽 길’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왕복’이라고 하고 가고 오는 길 가운데 어느 한쪽 또는 그 길을 한국에서는 ‘편도(片道)’라는 한자어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순수한 우리말로 ‘한쪽 길’이라고 한다. ‘편도(片道)’는 한자어단어이지만 현대한어에는 ‘片道’란 단어가 없다. ‘편도’라는 단어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있는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추돌’과 ‘뒤에서 들이받다’ 자동차나 기차 따위가 뒤에서 들이받는 것을 한국에서는 쫓을 ‘추[追]’자에 부딪칠 ‘돌[突]’자를 써서 ‘추돌[追突]’이라는 한자어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을 이에 해당한 한자어 단어나 우리말 합성명사도 없이 우리말 그대로 ‘뒤에서 들이 받다’라고 말한다. ‘진화’와 ‘불끄기’ 불이 난 것을 끄는 것을 한국에서는 진압할 ‘진[鎭]’자에 불 ‘화[火]’자로 된‘鎭火’의 한자어 단어로 ‘진화’라고 말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진화’라고 하지 않고 순 우리말의 고유어로 ‘불끄기’라고 말한다. ‘진화[鎭火]’는 한자어 단어이지만 현대한어에는 ‘鎭火’란 단어가 없다. 지금은 한국의 영향을 받아 일부 방송, 출판물에서 진화란 단어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 ‘직진’과 ‘곧게 나감’ ‘직진’이란 곧을 ‘직[直]’자에 나아갈 ‘진[進]자의 ‘直進’의 한자 어 단어로서 곧게 나간다는 뜻으로 한국에서는 ‘직진’의 한자어 단어를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직진’이란 단어를 구령[口令]에서나 쓰지 일반적 대화에서나 서면어에서는 우리말 그대로 ‘곧게 나아감’이라고 말한다. ‘농무’와 ‘짙은 안개’, ‘박무’와 ‘옅은 안개’ 날씨정보를 알릴 때 한국에서는 자욱하게 낀 짙은 안개를 짙을 ‘농[濃]’자에 안개 ‘무[霧]’자를 써서 한자어 단어로‘농무[濃霧]’라 하고 엷게 낀 안개를 엷을 ‘박[薄]’자에 안개 ‘무[霧]’자를 써서 한자어 단어로‘박무[薄霧]’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농무’나‘박무’란 한자어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짙은 안개’, ‘옅은 안개’라고 하는데 ‘농무’, ‘박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알아 못 듣는다. ‘야유’와 ‘들놀이’ ‘야유회’와 ‘들놀이 모임’ 들에 나가 노는 놀이를 한국에서는 ‘들놀이’ 혹은 들 ‘야[野]’자에 놀 ‘유[遊]자의 한자어 단어로 ‘야유[野遊]’라 하고 집단적으로 하는 들놀이 모임을 ‘아유회[野遊會]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한자어 단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고유어로 ‘들놀이’라고 만 한다. ‘출하’와 ‘내여보냄’, ‘입하’와 ‘들여옴’ 짐이나 상품 따위를 내여 보내거나 생산자가 생산품을 시장으로 내어 보내는 것을 한국에서는 나갈 ‘출[出]’자에 짐 ‘하[荷]’자의 한자어 단어로 ‘출하[出荷]’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창고에서 나간다고 하여 ‘출고[出庫]’라 하거나 ‘내여 보냄’이라고 한다. 짐이나 상품 따위를 들여오는 것을 한국에서는 들일 ‘입[入]’자에 짐 ‘하[荷]’자의 한자어 단어로 ‘입하[入荷]’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창고에 들여온다고 하여 ‘입고[入庫]’라고 하거나 ‘들여 옴’이라고 한다. ‘입고[入庫]’나 ‘출고[出庫]’는 한국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모두 쓰는 한자어 단어이지만 ‘입하[入荷]’나 ‘출하[出荷]’는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4) ‘신장개업(新裝開業)’과 ‘새로 개업’ 새로 단장해서 영업을 시작하는 것을 한국에서는 새 ‘신(新)’에 차릴 ‘장(裝)’자를 써서 ‘신장개업’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새로개업’이라고 말하지만‘신장개업’이란 말은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일부 영업집 문에 ‘신장개업’이라고 써놓은 것을 볼수 있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 옆에 한자를 써놓지 않으면 ‘신장개업’이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잔업’과 ‘연장작업’ 정해진 로동 시간이 끝난 뒤에 하는 로동을 한국에서는 남을 ‘잔(殘)’자에 업 ‘업(業)’자의 한자어 단어로 ‘잔업(殘業)’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작업’(습관상 한어 그대로 加班)이라고 한다. ‘잔업(殘業)’ 이란 한자어 단어이지만 현대한어에는 ‘殘業’란 단어가 없기에 한국나들이를 하지 않은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잔업’이란 생소한 단어이다. ‘약비나다’와 ‘새나다’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진저리가 날 만큼 싫증이 나는 것을 한국에서는 ‘약비나다’로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새나다’로 말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새나다’를 “1‘약비나다’의 잘못. 2‘약비나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약비나다’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있는 말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도정’과 ‘정미’및 ‘아주먹이’ 와‘입쌀’ 곡식을 찧거나 쓿는 것을 한국에서는 찧을 ‘도[搗]자’에 찧을 ‘정[精]’자를 써서‘도정[搗精]’이라고 하며 중국의 조선족들은 찧을 ‘정[精]’자에 쌀 ‘미[米]’자를 써서 ‘정미[精米]’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정미’란 “1기계 따위로 벼를 찧어 입쌀을 만듦. 2 깨끗하게 쓿은 흰쌀.”이라고 하였으며 정미하여 나온 쌀을 아주먹이라고 한다. ‘도정’이나 ‘아주먹이’란 단어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수록된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이고 ‘정미’란 단어도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든 곡식을 찧는 것을 모두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벼를 찧거나 그 찧어 나온 입쌀을 말하므로 같은 단어이지만 그 뜻이 좀 다르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벼를 찧어 나온 쌀만 ‘입쌀’이라고 하지만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입쌀’을 “멥쌀을 보리쌀 따위의 잡곡이나 찹쌀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으며 민간에서는‘입쌀’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흉터’와 ‘허물’, ‘딱지’와 ‘더데’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상처가 아물고 남은 자국을 표준말로 ‘흉터’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또 ‘허물’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허물’이란 단어를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을 보면 “1 살갗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꺼풀. 2 파충류, 곤충류 따위가 자라면서 벗는 껍질.”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중국 조선족들이 말하는 ‘허물’의 뜻과 완전히 달리 해석되였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허물’이란 단어를 사전해석의 뜻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 때 피, 진물 따위가 나와 말라붙어 생긴 껍질을 한국에서는 ‘딱지’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더데’라고 하는데 ‘다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 해석을 보면 ‘다대’를 “해어진 옷에 덧대어 깁는 헝겊 조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대’란 단어를 사전의 해석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에피소드 중국동포가 일하는 한 건축현장에서의 일이다. 철근이 떨어지면서 아래에서 일하는 중국동포의 얼굴에 와 마쳤다. 상처가 좀 심하여 오야지가 차로 린근 병원으로 호송하여 몇 코 꿰여 매였다. 그 동포가 “상처가 아문다음 허물이 가지 않는가?”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그 말을 알아 못 듣고 반문하니 그 동포는 여전히 그 말을 되풀이 하였다. 의사도 오야지도 다 알아 못 듣자 옆에 있던 동포가 “흉터가 가지 않는가?”고 하자 “그러면 흉터라고 하여야지 허물이란건 뭔가?”고 의사가 물었다. 옆에 있던 중국동포가 중국의 조선족들은 ‘허물’을 ‘흉터’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고 말하자 서로 웃음이 나왔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5) ‘통째’와 ‘통채’ 나누거나 덜거나 헤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전체를 한국에서는 ‘통째로’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통채로’라고 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통채’를 “1 통째의 잘못. 2 통째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통째’와 ‘통채’는 모두 순수한 우리말의 고유어 단어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발음과 문자표기가 다르다. ‘담력’과 ‘담량’ 겁이 없고 대담하고 용감한 기운이나 기백을 나타내는 것을 한국에서는 쓸개 ‘담[膽]’자에 힘 ‘력[力]’자를 써서 ‘담력[膽力]’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쓸개 ‘담[膽]’자에 량(양) ‘량[量]’자를 써서 ‘담량[膽量]’ 이라고 한다. ‘담력’이란 단어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있지 만 ‘담량’은 없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담량’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한어의 영향을 받아 한어의‘膽量’을 한자어로 하여 ‘담량’이라고 부르고 있다. ‘담력[膽力]’이나 ‘담량[膽量]’은 모두 같은 뜻의 한자어 단어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다. ‘천시’, ‘멸시’와 ‘기시’ ‘천시[賤視]’, ‘멸시[蔑視]’, ‘기시[歧視]’는 모두 천할 ‘천[賤]’, 업신여길 ‘멸[蔑]’, 갈라질 ‘기[歧]’자에 볼 ‘시[視]자를 쓴 한자어 단어로서 업신여겨 낮게 보거나 천하게 여겨 깔보는 뜻의 동의어인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민족기시’, ‘종족기시’등 단어를 쓰지만 한국어사전에나 조선말대사전에는 다른 뜻으로의 ‘기시’란 단어는 있어도 천시하다, 멸시하다의 뜻으로는 ‘기시[歧視]’란 단어가 없다. 중국의 조선족들이 ‘기시’란 단어를 쓰는 것은 한어의 영향을 받아 한어의‘歧視’를 한자어로 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내’와 ‘인차’ 그리고 ‘금방(방금)’ 한국어사전에는 ‘이내’를 “1 그때에 곧. 또는 지체함이 없이 바로. 2 어느 때부터 내처. 3 멀지 않고 가까이 곧.”이라고 해석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뜻에서 구두어에서는‘인차’, ‘인츰’, ‘이내’란 단어를 모두 쓰고 있는데 표준적으로 서면어에서는 ‘인차’란 단어를 쓰고 있다. 한국어사전에는 ‘인차’를 ‘이내’의 북한어라고 하였고 ‘인츰’을 ‘이내’의 함경남도 방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어사전에는 ‘금방(방금)’을 “1 말하고 있는 시점(時點)보다 바로 조금 전. 2 말하고 있는 시점과 같은 때. 3 말하고 있는 시점부터 바로 조금 후”라고 해석하였는데 ‘금방(방금)’이란 단어를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으로 다 사용하고 있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해석 1 의 경우에만 ‘금방(방금)’의 단어를 쓰고 해석 2 와 3의경우에는‘금방(방금)’의 단어를 쓰지 않는다. 즉 과거형으로만 ‘금방(방금)’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현재형, 미래형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삐다’와 ‘풀치다’ 발목이나 손목, 허리나 목, 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따위의 뼈마디가 접질린 것을 한국에서는 ‘삐다’라고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삐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혹시 있지만 대부분은 ‘풀치다’라고 말한다. 한국어사전에는 ‘풀치다’를 북한어라고 하였다. ‘부수다’와 ‘부시다’ 그리고 ‘마스다’ 단단한 물체를 여러 쪼각이 나게 두드려 깨뜨리거나 만들어진 물건을 두드리거나 깨뜨려 못 쓰게 만드는 것을 한국에서는 ‘부수다’라고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마스다’혹은 ‘부시다’라고 말한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부시다’를 “1 ‘부수다’의 잘못. 2‘부수다’의 북한어.”라고 하였으며 한국에는 ‘마스다’란 단어가 없이‘마스다’를 북한어라고 하였다. [에피소드] 어느 언론인, 지성인들의 모임이였다. 필자가 우리 조선족은 소수민족이지만 중국에서 민족기시를 당하여 본적이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고국에 와서 일부 하류계층의 고용주들에게서 기시를 받고 있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는 한국인들이 기시라는것이 무슨 뜻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중국의 한 언론인이 천시, 멸시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말하자 한국인들은 기시란 말을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하여 필자는 집에 돌아와서 한국어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을 찾아보았는데 기시란 단어가 없었다. 이때에야 필자도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의 영향을 받아 한어의‘歧視’를 한자어로 하여 ‘기시’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것을 느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6) ‘토마토’ 와 ‘도마도’ 한어에서 말하는 ‘西红柿’를 한국에서는 영어발음으로‘토마토’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도마도’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도마도’를 ‘토마토’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도마도’도 원래는 영어에서 온 말인데 발음이 좀 달리 번져졌다. ‘자두’와 ‘오얏’ 한어에서 말하는 李子를 한국에서는 ‘자두’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방송, 출판물에서는 표준적으로 ‘오얏’이라 하고 민간에서는 대부분 함경도방언으로 ‘놀’혹은 ‘왜지’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오얏을 ‘자두’의 잘못, ‘자두’의 옛말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한자 ‘李’를 한자어로 ‘오얏리’라고 하였다. 이러고 보면 ‘자두’를 예전에는 ‘오얏’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말대사전에는 ‘오얏’을 ‘추리’라고도 하였다. ‘연근’과 ‘련꽃뿌리’ 련꽃의 구멍이 많이 난 땅속줄기를 한국에서는 한어 ‘蓮根’의 한자어 ‘련근’을 두음법칙으로 하여 ‘연근’이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순수한 우리말로 ‘련꽃뿌리’혹은 ‘련뿌리’라고 하는데 ‘연근’이라고 하면 생소한 말처럼 느껴진다. ‘목이벗’과 ‘검정귀버섯’ 한어에서 말하는 ‘黑木耳’을 한국에서는 보통 나무에서 나는 귀모양의 버섯이라고 하여 나무 ‘목[木]’자에 귀 ‘이[耳]’의 ‘목이버섯’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보통 참나무에서 난다고 하여 ‘참나무버섯’혹은 귀모양의 검은 버섯이라고 하여‘검정귀버섯’이라고 한다. ‘부추’와 ‘염지’ 한어에서 말하는 ‘韭菜’를 한국에서 는 ‘부추’라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출판물에서는 표준적으로 ‘부추’라고 쓰지만 민간에서는 ‘부추’라 말하는 사람이 극히 적고 보편으로 함경도 방언으로‘염지’라고 말한다. ‘연골’과 ‘삭뼈’ 연골질로 이루어진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뼈를 한국에서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연할 ‘연[軟]’자에 뼈 ‘골[骨]’자로 된 ‘軟骨’의 한자어 단어, ‘연골 [軟骨]’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또 구두어에서는 ‘삭뼈’라고 많이 말하는데 한국에는 ‘삭뼈’라는 단어가 없다. 한국어사전에는 ‘삭뼈’를 ‘연골(軟骨)’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발쪽’과 ‘족발’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각을 뜬 돼지의 발. 또는 그것을 조린 음식을 ‘족발’이라 하고 짐승의 다리에서, 땅을 밟아서 살가죽이 변형된 각질 (角質) 로 둘러싸인 부분을 ‘발쪽’ 이라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족발’과 ‘발쪽’ 이란 단어를 구별하여 쓰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족발’이란 단어가 없이 ‘족발’과 ‘발쪽’의 뜻을 모두 ‘발쪽’으로 쓰고 있다. [에소드피] 한번은 중국동포 몇이 한국의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서빙아가씨가 자리를 안내하면서 무었을 드시겠는가 하자 한 친구가 ‘돼지발쪽’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서빙아가씨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한국생활을 오래 한 다른 한 친구가 “야, 한국에서는‘발쪽’ 이라면 각을 뜨지 않은 짐승의 발을 말하고 ‘족발’이라면 각을 뜬 돼지의 발이나 그것을 조린 음식을 말한다.”그리고 서빙아가씨와 “‘족발’을 주세요.”라고 하자 서빙아가씨가 캐드득 웃으며 “그러세요? 알았어요. 발쪽을 달라고 하니 깜짝 놀랐어요.”라고 하자 먼저 말을 꺼낸 친구가 “허-허, 중국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발쪽’이라고 말하는데”하며 서로 웃음이 나왔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7) 중국의 조선족들 가운데서 대부분이 그 선조들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 갔으므로 지금도 그 후대들이 서면어에서는 표준말을 쓰지만 구두어에서는 함경도 방언을 많이 쓰고 있다. 친속관계에서 표준말과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함경도 방언을 비교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맏아바이’와 ‘큰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표준적으로 아버지의 형님을 ‘큰아버지’, 고모의 남편을 ‘고모부’, 어머니의 남자형제를 ‘외삼촌’. 이모의 남편을 ‘이모부’라고 하지만 함경도방언을 쓰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구두어에서 아버지의 형님, 아버지보다 년상인 고모의 남편, 어머니의 년상으로 된 남자형제, 어머니보다 년상인 이모의 남편을 모두 ‘맏아바이’라고 부르고 아버지 녀동생의 남편, 어머니 녀동생의 남편을 모두 ‘아즈바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남동생을 표준적으로는 ‘숙부’혹은 ‘삼촌’이라고 하지만 함경도방언으로 ‘아즈바이’라고 한다. ‘닫아매’와 ‘큰어머니’, ‘고모’, ‘이모’ 표준적으로 아버지 형님의 안해를 ‘큰어머니’, 아버지의 누님이거나 녀동생을 ‘고모’, 어머니의 녀자 형제를 ‘이모’라고 하지만 함경도방언을 쓰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구두어에서 아버지의 형님의 안해, 아버지보다 이상인 고모, 어머니보다 년상인 외삼촌의 안해, 어머니보다 년상인 이모를 모두 ‘맏아매’라고 부른다. ‘아재’와 ‘고모’, ‘이모’ 한국어사전을 보면 ‘아재’를 “ 1 ‘아저씨’의 낮춤말. 2 ‘아주버니’의 낮춤말.”이라고 하였다. 표준적으로 아버지의 녀동생을 ‘고모’, 어머니의 녀동생을 ‘이모’라고 하지만 함경도 방언을 쓰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구두어에서는 아버지의 녀동생, 어머니의 녀동생을 모두 ‘아재’라고 부르는데 한국어사전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게 부르고 있다. ‘매부’와 ‘자형’, ‘매형’, ‘매제’ 한국어사전에는 ‘매부[妹夫]’를 “1 손위 누이나 손아래 누이의 남편. 2 친정 언니나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하였고 ‘자형[姊兄]’이나‘매형[妹兄]’을 “손위 누이의 남편”이라 하였고 ‘매제[妹弟]’를 “1 누이동생. 2 손아래누이의 남편”이라고 하였으며 ‘형부’를 “언니의 남편”이라 하였고 ‘제부’를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하였다. 함경도 방언을 쓰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형부’, ‘제부’, ‘자형’, ‘매형’, ‘매제’란 말을 쓰지 않고 남자일 경우에는 손우 누이나 손아래 누이의 남편을 모두 ‘매부’라고 부르며 녀자일 경우에는 언니의 남편을 ‘아저씨’, 녀동생의 남편을 ‘생원’이라고 부른다. ‘누나’와 ‘누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거나 일가친척 가운데 항렬이 같은 사이에서 남자가 나이가 위인 여자를 부를 때 또는 남남끼리 나이가 적은 남자가 손위 여자를 정답게 이르거나 부를 때 한국이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누나’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또 ‘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한국어사전에는 중국의 조선족들이 부르는 뜻과 달리 ‘누이’를 “같은 부모에게서태어난 사이거나 일가친척가운데 항렬이 같은 사이에서 남자가 여자형제를이르는말. 흔히 나이가 아래인 여자를 이른다.”라고 해석하였다. [에피소드] 한국남성과 중국조선족 녀성의 결혼식장이였다. 결혼 당사자 녀성의 외조카가 자기의 이모를 보고 ‘아재’하고 불렀다. 그 자리에 앉았던 한국측 손님들이 의아해 하며 “저 애가 어쩌면 이모를 보고 아재라고 할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앉았던 중국측 손님이 “중국의 조선족 가운데서 함경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녀동생, 어머니의 녀동생을 ‘아재’라고 부른다.”고 하자 한국측 손님들은 “아, 그런가요? 한국에서 서울권내에서 보편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고 지방에서 ‘아재’란 ‘아저씨, 또는 ‘아주버니’를 따로 부르는 말인데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완전히 다른 것은 한국에서는 ‘아재’란 호칭 대상이 성별상으로 남자이고 함경도 방언에서는 녀자라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8) ‘꼴등’과 ‘말등’ 맨 마지막 등급을 한국에서는 ‘꼴등’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말등’이라고 한다. 맨 마지막 등급을 한어에서는 ‘末等’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의‘末等’을 한자어로 하여 ‘말등[末等]’이라고 하며 구두어에서는 ‘망꼬리’혹은‘빼꼴’이라고도 하는데‘꼴등’이란 단어는 쓰지 않고 있다. ‘꼴등’이란 말은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있는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꼴등’이라는 단어를 모르거나 쓰지 않고 있다 ‘늘’과‘하냥’ 계속하여 언제나의 뜻을 한국에서는 ‘늘’, ‘항상’ 이란 단어로 표현 하고 있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늘’, ‘항상’의 단어로 표현하면서도 문체에서는 ‘하냥’이란 단어로도 표현한다. 한국어사전에는 ‘하냥’을 “1‘늘’의 잘못. 2‘함께’의 방언(전북, 충청).”이라고 해석하였으며 조선말대사전에는 방언의 뜻이 없이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말과 같이 “(글체) 계속하여 줄곧.”을로 해석하였다. ‘쪽’과 ‘페이지’ 책이나 장부 따위의 한 면, 또는 그 면을 세는 단위를 한국에서는 순수한 우리말로 ‘쪽’이라고도 하고 원래의 영어가 귀화어로 된 ‘페이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순수한 우리말인 ‘쪽’이란 단어가 없이 귀화어로 된 ‘페이지’를 우리말처럼 쓴다. 한국어사전에는 ‘쪽’이란 단어가 있지만 조선말대사전에는 ‘쪽’이란 단어가 없다. ‘조각’과 ‘쪼각’ 어떤 물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부분을 한국에서는 ‘조각’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쪼각’ 이라고 한다. 따라서 반달보다 더 이지러진 달을 한국에서는 ‘조각달’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쪼각달’ 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쪼각’을 ‘조각’의 북한어라고 하였으며 ‘쪼각달’을 ‘조각달’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설레다’와 ‘설레이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리는것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설레이다’ 혹은 ‘설레다’ 두 가지로 다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설레다’로만 말하고 한국어사전에서는‘설레이다’를 “1‘설레다’의 잘못’2‘설레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하마터면’ 과 ‘하마트면’ 조금만 잘못하였더라면. 위험한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에 쓰는 말의 뜻으로 표현되는 말을 한국에서는 ‘하마터면’ 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하마트면’ 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하마트면’ 을 “1‘하마터면’ 의 잘못, 2‘하마터면’ 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에피소드] 한국의 한 초등생과 중국에서 온 이모 사이에 있은 대화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가 집에 돌아 와서 그날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모: “그럼 너는 오늘 달리기에서 몇 등을 하였니? 학생: “등수에 못 올랐어요.” 이모: “그럼 말등을 했지 않았니?” 학생: “말등이라는것이 무슨 뜻인가요?” 이모: “제일 마지막 등수에 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학생: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말등’이라고 하지 않고 ‘꼴등’이라고 해요.” ‘꼴등’이란 말은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있는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로 되고 한어의‘末等[말등]’을 한자어로 하여 ‘ 말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19) ‘사이-시옷’과‘사이-시읏’ 한글 맞춤법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났을 때 쓰는 ‘ㅅ’의 이름을 한국에서는 ‘사이시옷’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사이시읏’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사이시읏’을 ‘사이시옷’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순 우리말 또는 순 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 가운데 앞말이 모음으로 끝나거나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소리가 덧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ss’소리가 덧날 때에 한국에서는 사이시읏 맞춤법에 따라 ‘ㅅ’를 받치여 쓰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원래의 합성어 그대로 표기한다. 례하면 ‘머릿기름’과 ‘머리기름’, ‘이삿짐’과 ‘이사짐’, ‘아랫사람’과 ‘아래사람’, ‘나뭇잎’과 ‘나무잎’등과 같은것이다. 한국어사전을 보면 사이시읏 맞춤법에 따라 Tm지않고 원래의 합성어 그대로 표기한 단어들을 모두 북한어라고 하였다. ‘정상’과 ‘수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한국에서는 꼭대기 ‘정[頂]’자에 우 ‘상[上]’자의 한자어로 ‘정상(頂上)’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머리 ‘수[首]’자에 머리 ‘뇌[腦]’자의 한자어로 ‘수뇌자(首腦者)’라고 한다. ‘정상’이나 ‘수뇌자’자나 모두 한자어인데 한어에서는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수뇌(首腦)’라고 하지만 ‘정상(頂上)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어의 영향을 받아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정상’이라고 하지 않고 ‘수뇌’혹은 ‘수뇌자’라고 한다. 지금은 일부 조선족언론매체에서는 한국의 영향을 받아 ‘정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상’이나 ‘수뇌자’는 한국어사전에나 조선말대사전에 다 있는 단어이지만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은 습관상에서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원수’와 ‘원쑤’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사이에 문자표기에서 부동하다. 한국에서는 ‘원수’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원쑤’로 표기한다. 발음에서도 ‘수’와 쑤’구별된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원쑤’를 ‘원수’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의지력’과 ‘의력’ 어떠한 일을 이루고저 하는 마음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힘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뜻 ‘의[意]’자에 뜻 ‘지[志]’자, 그리고 힘 ‘력[力]’자의 한자어단어 ‘의지력[意志力]’ 혹은 ‘의지력[意志力]’의 준말로 ‘의력[意力]’, 이 두가지 단어로 다 표현하는데 주로는 ‘의력’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의지력’이란 단어로만 표현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의력’을 ‘의지력’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에피소드] 한국인과 중국동포들이 같이 앉은 모임이였다. 한 중국동포가 5살 때 한 정신질병환자의 칼에 두 손목을 잘리운 연길시2중의 김련화 학생이 금년 대학교 입시에서 전교 2등으로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하였다는 인터넷에서 본 기사를 이야기하자 한 중국동포가 “야! 걔가 의력이 대단하다.”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한 한국인이 “의력이란 것이 무쓴 뜻인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필자가 “‘의력’이란 ‘의지력’의 준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한국인이 “그런가요? 우리 한국에서는 ‘의력’ 이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라고 하는것이였다. 필자는 ‘무엇 때문에 ‘의지력’이라면 알고 ‘의력’이라면 모를가 하며 집에 와서 한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의력’을 ‘의지력’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0) 련결어미 ‘-고자’와 ‘-고저’ 어떤 행동을 할 의도나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련결 어미를 한국에서는 ‘-고자’로 표현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고저’로 표현한다. 주로는 련결어미 ‘-려고’ 와 같은 뜻으로 많이 쓰이는데 례하면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람하려고 서울로 떠났다.” 에서 한국에서는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람하고자 서울로 떠났다.”로 표현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람하고저 서울로 떠났다.”라고 표현한다. 한국어사전에는 “‘-고자’는 의도나 욕망의 뜻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이며, ‘-고저’는 ‘고자’의 옛말이다. 따라서 ‘-고자’만을 표준어로 삼는다.”라고 하였으며 조선말대사전에는 ‘-고자’를 ‘-고저’ 의 비규범적인것이라고 하였다. ‘안쓰럽다’ 와 ‘안스럽다’ 손아랫사람이나 약자에게 도움을 받거나 폐를 끼쳤을 때 마음에 미안하고 딱하거나 혹은 손아랫사람이나 약자의 딱한 형편이 마음에 언짢고 가엾게 여겨질 때의 단어표현을 한국어사전에서는 ‘안쓰럽다’라고 하였고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안스럽다’라고 하였다. 이런 표현을 한국에서는 한국어사전에 따라 문자상‘안쓰럽다’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조선말대사전에 따라 문자상‘안스럽다’로 표기한다 ‘샅’과 ‘ 가달두새’ 또는 ‘두 물건의 틈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는 두 다리의 사이, 또는 두 물건의 틈을‘샅’ 이라고 하였다. ‘샅’ 은 표준적인 우리말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단어이다. 그리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두 다리 사이를‘가달두새’ 라고 하는데 한국어사전에는‘가달두새’ 를 ‘샅’ 의 함경북도 방언이라고 하였다. 내’와 ‘내굴’ 그리고 ‘연기’ 물질이 탈 때에 생겨나는 흐릿한 기체나 가루상태의 물질(즉 연기)을 한국어사전에 나 조선말대사전에는 모두 ‘내’라고 하였고 조선말대사전에는 ‘내굴’ 이라고도 하였으며 한국어사전에는 ‘내굴’을 ‘내’의 함경도방언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내굴’이나 ‘연기’를 모두 서면어나 구두어에서 다 쓰는 말인데 일반적으로는 서면어에서는 ‘연기’라고 많이 쓰고 구두어에서는 ‘내굴’ 이라고 많이 말하지만 ‘내’라고는 하지 않는다. ‘굳은살’과 ‘썩살’ 잦은 마찰로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생긴 두껍고 단단한 살을 한국에서는 ‘굳은살’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썩살’이라고 하며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장알’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의 해석을 보면 ‘썩살’을 ‘굳은살’의 북한어라고 하였으며‘장알’을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뜻하는 북한어라고 하였다. [에피소드] 한 건설현장에서 있은 이야기이다. 휴식시간이 되여 한국근로자와 중국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중국동포가 “한국에 와서 이렇게 일을 세게 하니 손에 썩살이 다 배기였다.”고 말하자 한 한국 근로자가 “썩살이란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중국동포가 손바닥을 내 보이면서 “한국에 와서 일을 세게 하니 손바닥의 살이 두껍고 단단하여 졌다.”라고 말하자 그 한국인은 “우리는 그런 것을 ‘굳은살’이라고 해요.”라고 말하는것이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1) 격식체와 비격식체 한국과 중국조선족의 언어 사용에서의 가장 큰 차이는 격식체와 비격식체이다. 한국에서는 공식적 행사나 장소에서는 격식체를 사용하고 비공식적 장소나 실생활에서는 비격식체를 사용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공식적인 행사나 장소에서 격식체를 사용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격식체를 사용하고 남도( 경기도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를 통털어 이르는 말.)사람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실생활에서 비격식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격식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서 의례적으로 쓰며 표현은 직접적, 단정적, 객관적이다. 격식체에는 해라체, 하게체, 하오체, 합쇼체 따위가 있다. ‘해라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 상대편을 아주 낮추는 종결형의 말체로서 “승호야, 빨리 일어나라. 이번 주일은 네가 주번이여서 일찍이 등교하여야 한다.”에서 ‘일어나라’, ‘한다’가 ‘해라체’에 속한다. ‘하게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 보통으로 낮추면서 약간 대우하여 주는 종 결형의 말체로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화자가 나이가 든 손아랫사람이나 같은 년배의 친숙한 사이에 쓴다. “상호, 이걸 좀 해 보게. 혼자 할수 있겠나?” 에서 ‘보게’, ‘있겠나?’가 ‘하게체’에 속한다. ‘하오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 상대편을 보통으로 높이는 종결형의 말체로서 현대 한국어의 구두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빨리 일하시오. 왜 지금도 시작하지 않았시오?”에서 ‘일하시오’, ‘않았시오?’가 ‘하오체’에 속한다. '합쇼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서 상대편을 아주 높이는 종결형의 말체로서 ‘안녕히 계십시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반갑습니다’ 에서 ‘십시오’, ‘입니다’, 습니다’가 합쇼체에 속한다 ‘비격식체’란 표현이 부드럽고 주관적인 느낌을 주는 상대 높임법으로서 ‘해체’, ‘해요체’ 따위가 있다. ‘해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 상대편을 높이지 않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형의 말체로서 격식체인 ‘해라체’와 ‘하게체’를 쓸 자리에 두루 쓰는 비격식체이다. “강호야, 어서 먹어” “빨리 일해”에서 ‘먹어’, ‘일해’가 ‘해체’에 속한다. '해요체’란 상대 높임법의 하나로, 상대편을 보통으로 높이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형의 말체로서 격식체인 ‘하오체’와 ‘합쇼체’를 쓸 자리에 두루 쓰는 비격식체이다.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오겠어요’에서 ‘계세요’, ‘오겠어요’가 ‘해요체’에 속한다. ‘화장실’, ‘위생실’, 그리고 ‘변소’ 중국의 조선족들은 밖에다 전문 대소변을 보도록 한 곳을 ‘변소’라하고 실내 에 대소변도 보고 세수도 할수 있게끔 위생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을 위생실이 라 하지만 한국에서는 밖의 것이나 실내의 것이나 구별없이 화장실이라고 한다. 따라서 중국의 조선족들은 위생실에서 쓰는 휴지를 ‘위생지’라 하고 한국에 서는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를 ‘화장지’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화장실’을 “‘변소’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고 조선말대사전에는 ‘화장실’을 “거울, 손씻는 설비를 갖추어 놓은 ‘변소’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2) 뛰여쓰기의 차이 일반적으로 중국조선족에 비해 한국에서는 띄어쓰기를 하는 것이 더 많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뛰여쓰기에 엄격한 규정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띄여써도 되고 붙여써도 되는 규정이 좀 느슨한 점들이 있다. 그 주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불완전명사(의존 명사) 불완전명사(한국에서는 의존명사라고도 한다)를 앞의 단어와 한국에서는 띄여 쓰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붙여 쓴다. 수사와 단위명사의 띄여쓰기도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 붙여 쓰지만 한국에서는 고유어수사와 단위명사는 모두 띄여쓰고 한자어수사와 단위명사는 붙여쓰는 것을 허용한다. 불완전명사: 것, 김, 나름, 녘, 둥, 대로, 데, 리, 만, 무렵, 바, 번, 법, 분, 사, 상, 수, 시, 자, 적, 줄, 즈음, 지, 짓, 척, 체, 터, 폭, 따름, 때문, 뿐, 쪽, 양, 이, 나위, 따위…… 한국 중국조선족 내 것 내것 할 수 있다 할수 있다 한 개 한개 세 마리(3 마리 혹은 3마리,) 세마리(3마리) 열 장(10 장 혹은 10장) 열장(10장) 열 시(10 시 혹은 10시) 열시(10시) 2. 보조 용언 보조 용언은 한국에서는 띄여 쓰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붙여 쓴다. 단, 한국에서는 일부 경우에 붙여쓰기도 허용한다. 한국 중국조선족 먹어 보다(먹어보다) 먹어보다 올 듯하다(올듯하다) 올듯하다 읽고 있다 읽고있다 하고 싶다 하고싶다 우와 같이 한국에서는 ‘-아/-어’형이나 관형사형 뒤에 보조 용언이 올 때 붙여쓰기를 허용하고 있으나 ‘-고’ 뒤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3. 하나의 개념을 나타낸 것 두 개 이상의 단어가 어울려서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은 한국에서 원칙적으로 띄여쓰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붙여쓴다. 단, 고유 명사와 전문 용어에 관해서는 한국에서도 붙여쓰기를 허용하고 있다. 한국 중국의 조선족 국어 사전 국어사전 경제 부흥 상황 경제부흥상황 연변 대학교 사범 학원(연변대학 사범학원) 연변대학교 사범학원 그러나 한국에서는 띄어쓰기의 기준이 불확실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일성이 없다. 례를 들어 ‘국어 사전’만 보아도 이것을 두 단어로 인식한 사람은 띄여쓰고 한 단어로 인식한 사람은 ‘국어사전’처럼 붙여 써 실제 띄어쓰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현실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3) 문장부호의 명칭의 차이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같은 부호이지만 서로 다르게 부를는것들이 있다. 아래에 서로 다르게 부르는 부호들은 렬거 한다. 한국 중국조선족 . 온점 . 점 : 쌍점 : 두점 { } 중괄호 { } 대괄호 [ ] 대괄호 [ ] 중괄호 - 줄표 - 풀이표 - 붙임표 - 이음표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따옴)하여 쓸 때 “ ”를 쓰고 ‘따옴표’라고 명칭하며 ‘ ’를 ‘작은따옴표’라고 명칭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 》를 쓰고 ‘인용표’라고 명칭하고 〈 〉를 ‘거듭인용표’라고 명칭한다. ‘에어컨’과 ‘공기조절기’ 실내공기의 온도,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의 기계를 한국에서는 우리말 단어가 없이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에어컨’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공기조절기’ 또는 ‘공기조화기’라고 하며 구두어에서는 한어 ‘空氣調和器’를 간략하여 ‘空調[쿵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국어사전에는 ‘공기조화기’ 또는 ‘공기조절기’를 ‘에어컨’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리모컨’과 ‘원격조정기’ 텔레비, 오디오, 공기조절기 등에서 사용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기기나 기계류를 제어하는 장치를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그대로 받아들여‘리모컨’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서면어에서는 ‘원격조정기’라고 하지만 구두어에서는 간편하게 한어로 ‘遙控器[요쿵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어사전에 ‘리모컨’은 올랐지만 ‘원격조정기’는 오르지 않았다. ‘배터리’와 ‘전지’ 핸드폰, 노트북컴퓨터, 록음기 등에서 전원이 없는 상태에서 전기를 제공하는 부분을 중국의 조선족들은 ‘전지’라 하고 한국에서는 ‘전지’라고 도 하지만 민간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일어로‘밧데[patteri ]리’라고 하는데 방송, 출판물에 서는 영어로‘배터리 [battery]’라고 한다. ‘케이크’와 ‘단설기’ 밀가루, 달걀, 버터(우유의 지방을 분리하여 응고시킨 식품), 우유, 설탕 따위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서양 음식을 한국에서는 우리말이 없이 영어발음으로 ‘케이크[cake]’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리말로 ‘단설기’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단설기’를 북한어라고 하였다. 따라서 생일축하선물로 한국에서는 ‘생일케이크’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생일단설기’라고 한다. [에피소드] 한 회사에서 있은 이야기이다. 중국동포 강호의 생일이였다. 저녁에 동료들이 강호의 생일을 축하하기로 하였다. 한 한국동료가 “그럼 ‘생일케이크’를 준비하여야지.”라고 하자 갓 한국에 온 동포가 “‘생일케이크’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고 하자 한국생활을 오래 한 중국동료가 “한국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생일단설기’를 ‘생일케이크’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국동료가 ‘생일단설기’란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케이크’란 영어이므로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고 ‘단설기’란 북한어라고 하였으니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로 밖에 될수 없는것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4)  ‘신정’과 ‘원단’ 양력 1월 1일, 즉 양력설을 한국에서는 ‘신정[新正]’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元旦’ 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元旦’ 의 한자어로 ‘원단’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양력설을 ‘원단[元旦]’이라고 하지만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는 ‘원단[元旦]’을 설날 아침이라고 하였다. ‘구정’과 ‘춘절’ 음력 1월 1일, 즉 음력설을 한국에서는 ‘구정[舊正]’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春節’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春節’의 한자어로 ‘춘절’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음력설을 ‘춘절[春節]’이라고 하지만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는 춘절[春節]’을 ‘봄철’이라고 하였다. ‘증정[贈呈]’과 ‘증송[贈送]’ 어떤 물건 등을 성의나 사례, 축하나 기념 등의 표시로 드리는 것을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는 줄 ‘증[贈]’자에 들릴 ‘정[呈]’자의 한자어로 ‘증정[贈呈]’이라고 하였고 한어에서는 줄 ‘증[贈]’자에 보낼 ‘송[送]자로 ‘贈送[증송]’ 이라고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방송, 출판물에서는 이런 것을 ‘증정’이라고 하지만 민간에서는 한어의 영향을 받아 ‘贈送’을 한자어로 하여 ‘증송[贈送]’이라고 많이 말하고 있다.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는 정한 수량보다 더 늘려 보내거나 실어 나르는 뜻으로의 ‘증송[增送]’은 있지만 ‘증정하다’ 의 뜻으로 되는 ‘증송[贈送]’은 없다.    정치 체제, 사회 제도로 인한 일부 명사차이 한국                               중국조선족 북한(北韓)                    조선(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한반도(韓半島)                       조선반도(朝鮮半島) 한국 전쟁(韓國戰爭)             조선 조국해방전쟁(朝鮮祖國解放戰爭) 초등학교(初等學校)                       소학교(小學校) 중학교(中學校)                      초급중학교(初級中學校) 고등학교(高等學校)                    고급중학교(高級中學校) 교감(校監)                            부교장(副校長) 대학교 총장(大學校總長)                  대학교 교장(大學校長)   [에피소드] 한 회사에서 있은 이야기이다. 휴식시간이 되여 한자리에 모여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한국근로자가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어느덧 2009년을 마감하고 새해 신정도 며칠 안 남았구나!”하자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한 중국동포가 “신정이라는 것이 무었인가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국생활을 오래한 한 중국동포가 “한국에서는 원단을 신정이라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한국인들은 중국에서는 양력설을 원단이라고 하는가요? 그러면 음력설은 뭐라고 하는가요?”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러자 한국생활을 오래한 그 중국동료가 “한국에서는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춘절이라고 해요.”라고 말하자 한국인들과 중국동포들은 모두 “한국과 중국에서 양력설과 음력설을 부르는것도 서로 다르구나.”라고 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5) ‘트랙터’와 ‘뜨락또르’ 여러가지 농기계를 끌거나 짐을 나르는 특수한 자동차, 즉 한어에서 말하는 ‘拖拉機’ 를 한국에서는 영어로 ‘트랙터[tractor]’ 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로시아어로 ‘뜨락또르[traktor]’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뜨락또르’를 ‘트랙터’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헬리콥터(헬기)’와 ‘직승비행기(직승기)’ 기체 우에 대형의 회전날개를 달아 수직상승, 하강, 전진, 후퇴, 공중정지를 할수 있는 항공기 즉 한어로 直昇飛行機(直昇機)라고 하는 비행기를 한국에서 는 영어로 헬리콥터(Helicopter) 또는 헬기(helicopter機)라고 하며 중국의 조 선족들은 곧을 ‘직[直]’자에 오를 ‘승[昇]’자 즉 곧게 오르는 비행기라는 直昇飛行機 (直昇機)를 한자어 단어로 하여 직승비행기(직승기)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직승비행기(직승기)를 ‘헬리콥터’의 북한어 라고 하였다. ‘탱크’와 '땅크’ 물, 가스, 기름 등을 넣어 두는 큰 통, 그리고 무한궤도를 갖추고 두꺼운 철판으로 장갑(裝甲)하고, 포와 기관총 따위로 무장한 군사에 쓰는 차를 영어로 ‘tank’ 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것을 ‘탱크’로 표기하고 발음하며 중국의 조선족들은 ‘땅크’로 표기하고 발음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땅크’를 ‘탱크’ 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크레인’과 ‘기중기’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려 아래우나 수평으로 이동시키는 기계를 영어로 ‘ crane’ 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나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이것을 ‘크레인’ =‘기중기’ 라고 하였다. 한국에서는 ‘기중기’라고 말하는 것보다 보편적으로 ‘크레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기중기’라고 만 말하지 ‘크레인’이라고 하면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콤프레샤’와 ‘공기압축기’ 공기를 대기압 이상의 압력으로 압축하여 압축공기를 만드는 기계를 영어로는 ‘aircompressor’라고 한다. 이것을 한국어사전에서는‘공기압축기’또는‘에어 컴프레서’라고 하였고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콤프레샤’ 라고 하였다.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이기계를 ‘콤프레샤’라고 말하고 ‘공기압축기’란 단어는 기본상 쓰지 않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서면어에서는‘공기압축기’라고 말하 지만 구두어에서는 보통 한어 ‘空氣壓縮機’의 략칭으로‘空壓機[쿵야지]’ 라고 말하고 ‘에어 컴프레서’혹은 ‘콤프레샤’ 라고 하면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에피소드] 한 건설현장에서 있은 이야기이다. 힘든 일을 하고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하늘에서 직승기(헬기)가 날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한 중국동포가 한국인을 보고 “저 직승기는 무얼하느라고 매일 저렇게 날고 있는가?”물었다. 그러자 그 한국인은 “‘직승기’란 무었인가?”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중국동포는 하늘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를 가리키면서 “지금 저 하늘에서 날고 있는 비행기를 직승기라고 하지요.”라고 하자 그 한국인은 “아, 저것을 중국에서는 직승기라고 하는가요? 우리나라에서는 ‘헬기’라고 하는데요.”라고 하였다. 같은 물체이지만 한국에서는 외래어로 말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어로 말하니 서로 다 못 알아들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6) 한국에서는 자모 중에 합성 모음 ‘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와 합성 자음 ‘ㄲ, ㄸ, ㅃ, ㅆ, ㅉ’을 정식 자모로 인정하지 않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러한 합성 자모도 정식 자모로 인정한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14개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24개 자모라고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19개의 자음과 21개의 모음으로 40개의 자모라고 한다. 이로 하여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 사전 표제어 배열에서 아래와 같은 구별이 있다. [모음] 한국: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중국: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 ㅒ ㅔ ㅖ ㅚ ㅟ ㅢ ㅘ ㅝ ㅙ ㅞ [자음] 한국: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중국: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ㄲ ㄸ ㅃ ㅆ ㅉ 일부 자음의 명칭에서도 차이가 있다. 한국: ㄱ 기역, ㄷ 디귿, ㅅ 시옷, ㄲ 쌍기역, ㄸ 쌍디귿, ㅃ 쌍비읍. ㅆ 쌍시옷, ㅉ 쌍지읒 중국: ㄱ 기윽 ㄷ 디읃, ㅅ 시읏, ㄲ 된기윽, ㄸ 된디읃, ㅃ 된비읍, ㅆ 된시읏, 된지읒 ‘산책로’와 ‘유보도’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걸도록 만들어 놓은 거님 길을 한국에 서는 ‘산책로[散策路]’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유보도[遊步 道]’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유보도’를’산책로’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산책로[散策路]’나 ‘유보도[遊步道]’는 모두 한자어단어지만 현대한어에는 이런 단어들이 없다. 고사(考査)와 고시(考試) 한국어사전에는 ‘고사[考査]’를 “1 자세히 생각하고 조사함. 2학생들의 학업 성적을 평가하는 시험.”라고 해석하였고 ‘고시[考試]’를 “1 공무원의 임용 자격을 결정하는 시험. 2 과거(科擧)의 성적을 살펴서 등수를 매기던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여 학생들의 학업성적을 평가하는 시험을 한국에서는 고사[考査]라 고 한다. 례하면 ‘중간(기중) 고사’, ‘학기말(기말)고사’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것을 ‘고사’라고 하지 않고 표준적으로는 ‘시험’이라고 하지만 한어 ‘考試’를 직역하여 고시라고도 한다. 례하면 ‘중간(기중)시험’, ‘학기말(기말)시험’ 혹은 ‘중간(기중)고시’, ‘기말고시’라고 말한다. 한어에서 ‘考査’는 평가나 심사를 목적으로 하여 일정한 표준에 따라 사찰하는 것을 말한다.   ‘소정’과 ‘정해진 바’ 한국에서는 ‘정하여지는것, 또는 정하여진 바’의 뜻으로 바 ‘소[所]’ 자에 정할 ‘정[定]’자의 한자어단어 ‘소정[所定]’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소정[所定]’이란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정하여지는것, 또는 정하여진 바’라고 말 하고 있다. ‘소정[所定]’이란 단어는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있는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 단어를 모르거나 쓰지 않고 있다. 지금은 한국의 영향을 받아 일부 방송, 출판물에서 이 단어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 례하면 '소정의 절차를 밟다.' '소정의원고료를 지불하다.' '한달의 소정 근로 시간 수' 등이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7) 용언 어형에 관한 문자표기의 차이 1. -아/-어형 어간 끝소리가 ‘ㅣ, ㅐ, ㅔ, ㅚ, ㅟ, ㅟ’인 모음 어간은 한국에서는 ‘-어’가 붙지만 중국의 조선말규범에서는 ‘-여’가 붙는다. 한국                                            중국조선족 피어                                               피여 내어                                               내여 세어                                               세여 되어                                               되여 뛰어                                               뛰여 희어                                               희여 2. 어미에서 ‘ㄹ’ 직후의 경음 표기 종성(끝소리) ‘ㄹ’을 포함한 어미들 가운데 한국에서는 ‘-ㄹ까, -ㄹ쏘냐’ 등으로 표기되지만 중국의 조선말규범에선 ‘-ㄹ가, -ㄹ소냐’와 같이 ‘ㄹ’ 직후가 평음 글자로 표기한다. 이러한 어미는 어원적으로 관형사형 ‘-ㄹ’을 포함한 형태인데 중국의 조선말규범에서는 ‘-ㄹ’ 직후의 경음을 평음 글자로 표기한다. 례하면 “찾을까(을가)?”에서 한국에서는 ‘ㅡ을까?’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ㅡ 을가?’로 표기한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지겠느냐?’의 표현에서 한국에서는 “내가 너에게 질쏘냐?”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내가 너에게 질소냐?”라고 표기한다. ‘참’과 ‘간식’ 일을 하다가 잠깐 쉬면서 먹는 음식을 한국에서는 ‘참’혹은 ‘새참’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사이 ‘간[間]’자에 먹을 ‘식[食]’자의 한자어단어 로‘간식[間食]이라고 한다. ‘숙주’와 ‘녹두나물’ 녹두를 시루 같은 그릇에 담아 물을 주어서 싹을 낸 나물을 한국에서는 ‘숙주’ 또는 ‘숙주나물’이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녹두나물’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의 잘못이라고 하였다.‘숙주’나 ‘숙주나물’은 한국어사전이나 조선말대사전에 모두 있는 단어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로 느껴진다.   ‘두부’와 ‘초두부’ 눌러서 굳히지 않은 두부를 한국에서는 ‘순두부’라고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초두부’라 하며 비 표준적으로 함경도 방언으로‘두부’ 를 ‘두비’라고 하며 ‘초두부’를 ‘초두비’라고도 하는데 한국어사 전의 해석을 보면 ‘초두비’를 ‘순두부’의 함경도 방언이라 하였고 조선말대사전에는 ‘초두부’를 ‘순두부’의 비규범적인 말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초두부’를 아주 표준적인 말처럼 사용하여 왔었는데 지금은 한국과의 거래를 통하여 ‘순두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피소드] 초두부를 주세요. 한국에 금방 온 중국동포 녀성이 시장의 두부상가에 가서 “초두부를 주세요.”라고 하였다. 상가주인이 초두부라는 말을 몰라 멍해 있자 같이 따라갔던 조카애가 “아이, 이모도 한국에 와서 초두부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들어요? 한국에서는 이것을 순두부라고 해요.” 라고 하자 상가 주인이 벙긋이 웃으면서 “중국에서는 이것을 초두부라고 하는가요?”라고 하면서 순두부를 건네주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8)   한자음 표기에서의 부동한점   한자 廢, 閉, 肺, 弊, 幣, 陛, 蔽, 등을 한자음으로 표기할 때에 한국에서는 모두 ‘폐’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모두 ‘페’로 표기한다. 한국어사전에서는 외래어에서 오는 ‘페’ 발음은 모두 ‘페’로 표기하지만 한자어에서 오는 ‘페’는 모두 ‘폐’로 표기하고 발음은 ‘페’로 한다. 조선말대사전에는 ‘폐’로 오는 음절이 없다.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 사이에 같은 단어에서 발음은 한가지로 하지만 문자표기에서 이렇게 부동한 점들이 있다.   일부 한자는 한자음이 다른 경우가 있다. 한자 비뚤 ‘歪’자를 한자음으로 한국에서는 ‘왜’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외’로 표기한다. 례하면 ‘歪曲’을 한자음으로 한국에서는 ‘왜곡’이라고 표현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외곡’이라고 표현한다. 한자 쉴 ‘憩’자를 한자음으로 한국에서는 ‘게’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계’로 표기한다. 례하면 ‘休憩所’를 한국에서는 ‘휴게소’라고 표현하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은 ‘휴계소’라고 표현한다.     짐’과 ‘하물’ 그리고 ‘하치장’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챙기거나 꾸려 놓은 물건을 고유어로는  ‘짐’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또 짐 ‘하[荷]’자에 물건 ‘물[物]’자의 한자어단어 ‘하물[ 荷物]’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물[荷物]’이란 단어는 한국어사전에나 조선말대사전에 다 있는 말이지만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그리고 짐을 두는 곳, 짐을 부리는 곳, 또는 쓰레기 따위를 거두어 두는 장소를 한국에서는 짐 ‘하[荷]’, 둘 ‘치[置]’, 마당 ‘장[場]’자의 한자어단어 ‘하치장[荷置場]’으로도 표현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는 ‘하치장[荷置場]’란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이다.   ‘상차[上車]’와 ‘裝車[쫭처]’, ‘하차[下車]’와‘卸車[쎄처]’    짐 따위를 차에 싣는 일을 한국에서는 오를 ‘상[上]’자에 수레 ‘차[車]’자의 한자어단어 ‘상차[上車]’로 표현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차에 짐을 싣는다’로 말하지만 구두어에서는 쉽게 한어로 ‘裝車[쫭처]’라고도 말한다. 한어에서 ‘上車’는 ‘차를 타다’또는 ‘차에 오르다’의 뜻으로 되지 ‘차에 짐을 싣는다’의 뜻으로는 되지 않는다. 타고 있던 차에서 내리거나 차에서 짐을 내리는것을 한국에서는 또 내릴 ‘하[下]’자에 수레 ‘차[車]’자의 한자어단어 ‘하차[下車]’로 표현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이런 한자어를 쓰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차에서 내리다’혹은 ‘차에서 짐을 부리다’라고 말한다. 차에서 짐을 부리울 때에는   구두어서 쉽게 한어로 ‘卸車[쎄처]’라고 말하기도 한다.    ‘승강기’와 ‘리프트’ 동력을 사용하여 사람이나 화물을 아래우로 나르는 장치를 영어로 ‘lift’라고 하는데 한자어로는 ‘승강기’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한자어를 기본상 쓰지 않고 영어발음으로‘리프트’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오를 ‘승 [昇]’자에 내릴 ‘강[降]’, 틑 ‘기[機]’즉 오르내리는 기계란 뜻의 ‘昇降機’의 한자어로 ‘승강기’라고 한다. [에피소드] 작업반장이 갓 한국에 온 중국동포에게 이 물건들은 리프트에 올리라고 하였다. 그 중국동포는 무슨 말인지 리해를 못해 멍하니 서 있자 작업반장이 “왜 빨리 하지않고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가” 라고 하자 먼저 한국생활을 한 중국동포가 “이 물건들을 승강기에 올리란다. 한국에서는 승강기를 리프트라고 한다.”라고 말하여서야 그 중국동포는 작업반장의 말을 리해하고 물건들을 리프트에 올리였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리말의 한자어로 ‘승강기’라 하고 한국에서는 영어로 ‘리프트’라고 하니 서로 의사소통이 않되였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29)    합성어의 표기에서도 사이읏표기법외에 일부 어근 표기에서도 부동한 점이있다. 합성어 표기는 낱낱 어근을 명시하는 것이 원칙이나 어원 의식이 희박한 경우에는 명시하지 않도록 되어 있어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이 동일하다. 그러나 어근을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 몇몇 합성어의 경우 표기법의 차이가 보인다. 한국                            중국의 조선족 올바르다                             옳바르다 벚꽃                                  벗꽃 우에서 ‘올바르다’는 한국에서는 ‘올’의 부분이 어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하여 발음대로 ‘올바르다’라고 표기하는데 반해 중국의 조선족들은 ‘옳다’의 어간이라 판단하여 ‘옳바르다’(발음은 [올바르다]로 동일함)라 표기한다. ‘벚꽃’은 한국에서는 ‘벚’과 ‘꽃’의 합성어로 파악한데 반해 중국의 조선족들은 어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하여 ‘벗꽃’으로 표기한다.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승강기’ 사람이나 화물이 자동적으로 위아래 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계단 모양의 장치를 한국에서는 영어로 에스컬레이터[escalator]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어로 ‘계단승강기’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계단승강기’를 ‘에스컬레이터’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계좌’와 ‘구좌’ 금융기관에 예금하려고 설정한 개인명이나 법인명의 자리를 한국에서는 ‘계좌[計座]’라 하고 그 자리의 번호를 ‘계좌번호’라하며 중국의 조선족들은 ‘구좌[口座]’라고 하고 그 자리의 번호를 ‘구좌번호’라고 한다.    ‘ ‘택배’와 ‘문전송달’ 우편물이나 짐, 상품 따위를 요구하는 장소까지 직접 배달해 주는 일을 한국에서는 ‘택배’라 하고 중국이 조선족들은 ‘문전송달’이라고 한다. ‘택배(宅配)’의 어원을 보면 ‘집 배달’ 또는 ‘문 앞 배달’을 たくはい (宅配) 라고 하는 일본어한자음[宅配]에서 온 것으로서 한국에서도 ‘택배’란 단어를 쓴 력사는 20년도 안된다.   ‘장갑’과 ‘수갑’  손을 보호하거나 추위를 막거나 장식하기 위하여 손에 끼는 물건을 한국에는 ‘장갑’이라 하며 중국의 조선족들은 ‘장갑’ 또는 ‘수갑’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수갑’을 ‘장갑’의 북한어라고 하였으며 조선말대사전에는 ‘수갑’= ‘장갑’이라고 하였는바 중국의 조선족들은‘수갑’을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수갑’이라고 하면 죄인이나 피의자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양쪽 손목에 걸쳐서 채우는 형구인 ‘쇠고랑’으로만 리해를 한다.    [에피소드] 한 회사에서 있은 일이다. 갓 한국에 온 중국동포가 자기가 쓰던 장갑이 닳아 구멍이 나자 작업반장에게 “수갑을 주세요. 저에게 수갑이 없어요.” 라고 하자 작업반장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이사람 죄수라고 수갑을 달라고 하나? 무슨 뜻인가요?”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중국동포는 장갑을 낀 손을 내 밀며 나의 수갑이 닳아서 구멍이 났어요.”라고 하자 작업반장은 “그것이 장갑이지 어디 수갑인가?”라고 하자 다른 한 동포가 “중국의 조선족들을 이것을 장갑이라고 하지만 수갑이라고 도 해요.” 라고 해석하였다. 작업반장은 그저 웃고 말았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30)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차이   1.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 파열음(페에서 나오는 공기를 일단 막았다가 그 막은 자리를 터뜨리면서 내는 소리. ‘ㅂ’, ‘ㅃ’, ‘ㅍ’, ‘ㄷ’, ‘ㄸ’, ‘ㅌ’, ‘ㄱ’, ‘ㄲ’, ‘ㅋ’ 따위가 있다.)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소리 나는 대로 된소리로 표기한다. 례하면 사람들을 실어 나늘수 있도록 만든 합승자동차를 영어로 ‘bus’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버스’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뻐스’로 표기한다. 한국어사전에는 ‘뻐스’를  ‘버스의 잘못, ‘버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실제 발음은 된소리를 그대로 내고 있다.   아래에 이에 관련되 몇가지 례를 들면 영어표기            한국에서의 표기         중국조선족들의 표기 Soviet             소비에트(소련)              쏘베트(쏘련)  Portugal          포르투갈                     뽀르뚜갈  Haiti             아이티                       아이띠 PortauPrince       포르토프랭스                 뽀르또쁘랭스 Stalin            스탈린                      쓰딸린  Boat(작은 배)     보트                        뽀트  Ball (공)         볼                          뽈 Sofa             소파                         쏘파    Dam(언제)         댐                          땜 Dollar            달러                        딸라 2.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례하면 공산주의 (맑스주의)창시자인Marx, Karl 를 중국의 조선족들은 겹받침 ‘ㄺ’써서‘맑스’로 표기하지만  한국에서는 우의 표기법 원칙에 의하여 받침 ‘ㄺ’를 쓰지 않고 ‘마르크스’로 표기한다.   3.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는 또 쟈·져·죠·쥬·챠·쳐·쵸·츄 등은 쓰지 않고 대신 자·저·조·주·차·처·초·추 등을 쓴다. 이로하여 한국과 중국의 조선족들이 외래어 표기에서도 차이점을 갖고 있다.   ‘고르바초프’와 ‘고르바쵸브’ 1985년-1991년에 쏘련공산당 총서기로 있던 정치인물을 한국에서는 ‘고르바초프'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고르바쵸브’로 표기한다.   ‘초콜릿’과 ‘쵸콜레트’ 코코아 씨를 볶아 만든 가루에 우유, 설탕, 향료 따위를 섞어 만든 과자 [chocolate]를 한국에서는 ‘초콜릿’으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쵸콜레트’로 표기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쵸콜레트’를 ‘초콜릿’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찬스’와 ‘챤스’ 기회란 뜻의 ‘chance’ 를 한국에서는 ‘찬스’로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챤스’로 표기한다. 한국어사전에는 ‘챤스’를 ‘찬스’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같은 영어 외래어라도 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달라 결과적으로 다른 어형이 되는 경우도 있다. 례하면 높은 압력의 류체를 날개바퀴의 날개에 부딪치게 하여 힘을 얻는 원동기를 영어로는 ‘turbine’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터빈’이라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타빈’이라고 한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수력터빈’, ‘증기터빈’, ‘가스터빈’이라 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수력타빈’, ‘증기타빈’, ‘가스타빈’이라고 한다. 한국어사전에는 ‘타빈’을 ‘터빈’의 북한어라고 하였다. 이런 차이들은 또 ‘러시아’와 ‘로시아’, ‘캐나다’와 ‘카나다’ ‘필름’과 ‘필름’, ‘레이더’와 ‘레이다’ 등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의 언어, 문자사용에서의 차이(31)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차이   4.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는 “중국의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라 고대인인 ‘孔子’, ‘孟子’같은 과거인들은 한자음대로 ‘공자’, ‘맹자’로 표기하지만 현대인에 대해서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어로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므로 그 표기와 발음이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례하면 ‘毛澤東[모택동]’을 ‘마오쩌둥’, ‘鄧小平[등소평]’을 ‘덩샤오핑’, ‘胡錦濤[호금도]’를 ‘후진타오’ 등으로 표기한다.   5.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는 “중국의 역사 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한자음대로 하고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의하여 한국에서는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어로 표기하기에 그 표기와 발음이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료녕성(遼寧省)’을 ‘랴오닝성’, ‘청도(靑島)’를 ‘칭다오’, ‘신강 (新疆)’을 ‘신장’,  ‘길림[吉林]’을 ‘지린’, ‘연변[延邊]을 ‘옌볜’, ‘룡정[龍井]을 ‘룽징’으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6.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는 “중국 및 일본의 지명가운데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관용이 있는 것은 이르 허용한다.”는 원칙이 있다. 례하면 東京을 도쿄 또는 동경, 京都를 교토 또는 경도, 上海를 상하이 또는 상해, 臺灣을 타이완 또는 대만, 黃河를 황허 또는 황하 등이다. 한자음으로 표기할때에는 중국의 조선족들의 표기와 같게 된다.       그리고 외국 국명이나 지명은 한국에서 영어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음역(한자를 가지고 외국어의 음을 나타내는 것)에 의한 명칭이거나 현지 언어에 의한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은데 반해 중국의 조선족들은 영어명칭을 사용하거나 현지 언어에 의거한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고 주로는 음역에 의한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                                         로시아 베트남                                         월남           태국                                       타이 터키                                          토이기 호주                                           오스탈리아 그리스                                         희랍 미얀마                                         버마 네덜란드                                        화란 폴란드                                          뽈스까 이집트                                          애급 오스트리아                                      오지리 아랍에미르트                                    아랍련합추장국 캐나다                                          카나다 쿠바                                            꾸바 스페인                                          에스빠냐 캄보디아                                        캄보쟈 홍콩                                            향항 마카오                                          
47    폭죽문화에 대하여 댓글:  조회:8145  추천:12  2011-05-13
폭죽문화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는 설을 쇠거나 경축활동을 할때 폭죽을 터뜨리는 풍속습관이 있 는데 20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깊은 바다물속에  《년(年)》이라고 부르는 흉악한 괴물이 있었는데 해마다 섣달 그믐날 저녁이 면 물에서 나와 마을을 덮쳐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해 섣 달 그믐날 저녁에 마을의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추워서 대나무를 태우면서 놀 았는데 대나무속의 공기가 열을 받아 팽창하여 땅땅 소리를 내면서 터지니 아이 들은 재미있다고 떠들석 하였고 이때 마침 그《년》이라는 괴물이 마을로 왔다 가 이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바람에 그날 밤부터 1년간 무사하였다고 하여 사람들 은 대나무를 태워 터뜨리여 소리를 내는것을 귀신을 쫓고 화를 막는것으로 여기 여 매년 섣달 그믐날은 물론 경사스러운 일에 모두 참대를 불태워 터뜨리였으며 폭죽이라는 말 뜻은 여기로부터 기원되였는데 (爆竹)참대를 터뜨린린다는 뜻인것 입니다. 후에 화약이 발명되면서 대나무에 화약을 넣어서 터뜨리다가 북송 때에 와서 민간에서 화약을 종이에 말아서 폭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폭죽을 터뜨리는것은 선진적문화라고는 할수 없지만 중화민족의 2000여년 내 려 온 전통풍속으로서 막기는 어려운것입니다. 폭죽으로인한 소음, 화재, 환경오염, 경제적랑비 등 원인으로하여 북경시 에서 1993년10월에《폭죽을 터뜨리는것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세워 10여년간 폭죽을 터뜨리는것을 금지하였다가 백성들의《명절분위기가 없다 명절멋이 너무 없다》는 등 의견과 폭죽을 터뜨릴것을 요구한데 근거해 2005년12월에 다시 《폭죽안전관리규정》을 세워 금지하던것을  제한한다고 고친것입니다. 폭죽을 터뜨리면 확실히 화재가 발생한다든가 어린이들이 손을 상하거나 눈 이 실명하는 페단들이 있는데 몇년전에 연길공원앞에서 폭죽상가들의 부주의로 큰 화재가 났고 매년 설, 보름 사이에 폭죽으로 인한 화재로 하여 소방차들의 사 이렌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런 사고를 미연히 방지하기 위하여 12일, 리경호 부 주장은 해당부문 책임일군들의 안내하에 폭죽시장안전정황을 검사하여 문제점들 을 발견 하고 제때에 조치를 대도록 하였으며 보도매체에서 폭죽관리안전집법정 황과 비법 경영정황을 제때에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경영법을 준수하고 안전하게 폭죽을 터치우는 여론분위기를 형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북경시의 규정을 보면 문물보호단위, 기차역, 비행장과 같은 교통중심, 기름, 가스 등 쉽게 불이 붙고 폭발할수있는 위험품이 저장된곳과 기타 소방단위, 전기 수송설비, 의료기구, 유치원, 경로원 삼림, 묘포장과 같은 중점 방화구, 중요한 군 사시설 등 금지구역을 정하였으며 제한된 지점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시간은 섣 달 그믐날, 정월 초하루, 초이틀, 대보름으로서 매일 아침7시부터 저녁12시까지 사이이며 기타 시간에는 터뜨리지 못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폭죽을 터뜨릴 때에도 사람, 차량, 건축물에 뿌리지 못하며 건축물내, 지붕, 베란다에서 터뜨리거나 밖에 뿌리지 못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행인과 차량의 안전통행을 방애하여서는 안되며14살 이하의 미성년은 후견 인 혹은 기타 성인의 감시하에서 터뜨린다고 하였으며 경축활동이거나 기타 명 절에 폭죽을 터뜨릴 경우에는 정부에서 결정하고 공고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지방을 보면 결혼식이나 상가들이 개업식에 폭죽을 터뜨리는것이 규범화 되지 못하여 문명하지 못하게 아무때 아곳에서나 터뜨리고 행인이 있던 없던 관계하지 않는데 어느 개인의 희사에 주민들이거나 행인들이 소음이나 환 경오염의 곤혹을 겪을 리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세상에서 타인 과 도시 환경오염을 고려하여 결혼식, 상가들의 개업식에는 폭죽을 터뜨리지 않 는것이 좋지 않는 가하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설, 보름기간에 일부 집들에서는 남 들이 다 잠든 0시 후에도 터뜨리는데 북경시에서는 설, 보름기간에도 0시부터 7 시 사이에 못 터뜨 린다고 합니다. 또 어떤 집들에서는 층집에서 밖에내다 뿌리 면서 터뜨리는데 이는 행인들에게 매우큰 위험으로 될수 있는것입니다. 때문에 북경에서는 집안에서 밖에내다 뿌리지 못한다는 규정도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어 린이들이 터뜨릴때에는 북경시에서 결정한것처럼 꼭 어른들이 감시하여 의외의 사고를 미연히 방지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폭죽을 터뜨리는것을 너무 막을바가 못되는 이상 터뜨리데 문명하게 터뜨리며 폭죽을 사되 상징적으로 얼마간씩 사고 서로 경쟁적으로 한아름씩 사는 과소비를 반대하였으면 합니다.   연변인민방송국 2007년2월16일 아침 6시30분 생방송
46    제1차《현대가정교육컵》공모작활동을 마무리면서 댓글:  조회:7885  추천:11  2011-05-13
제1차《현대가정교육컵》 유상공모작품경색활동을 마무리면서   전사회적으로 가정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수준을 제고하기 위하여 본 구락부에 서는 연변대학조선족교육연구소와 함께 제1차 《현대가정교육컵》유상공모작품경 색할동을 벌렸습니다. 저는 이번 이 응모작품평심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이 활동을 마무리면서 이번 응모작품들에 대한 감수를 말하려 합니다. 이번 이 응모작품경색활동통지가 나간다음 가정교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많 은 분들이 문장을 써서 본 구락부에 보내여 왔는데 모두 106 편의 문장을 받았습 니다. 그가운데서 1등상 1명,  2등상 2명,  3등상 3명, 우수상 7명을 뽑앗습니다. 우리는 이번 이 입선작품들을 선후로 《현대가정》신문을 통하여 발표하며 아 리랑방송에서 수상자들과 직접 생방송을 하려합니다.    이 응모작품가운데서 우리는 가정교육에 대한 성공적인 사례와 경험, 새로운 교 육모식 대한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받았습니다.    1등에 입선된 흑룡강성밀산시라디오텔레비죤방송국의 리동식이 쓴 《드팀없는 삶의 신조에 비낀 눈부신광환 — 역경속에서도 간난신고로 자식들을 룡으로 키우 기까지》의 문장에서 문현출, 허채숙부부는 큰아들 흥식이 부부가 중국의 최고 학 부인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박 사학위를 따낸다음 조국에 돌아와서 국 가의 첨단전자학 분야에서 고 급 연구원으로 활약하고 작은 아들 흥엽이 역시 중 국의 명문대학인 중국과 학기술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계속 박사공부를 하고 있으 므로하여  농촌에서 아글타글 고생스레 자식들의 뒤바라질을 하엿지만 이 고생이 락으 로 느껴진다는 가슴뿌듯한 기뿜.    2등상에 입선된 훈춘시반석중학교 주현길이 쓴 《황금을 줏는 사람 — 딸 백 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많은 결손가정들에서는 비록 외국 나 들이바람에 돈은 많이 벌어 왔지만  자식농사를 잘 짓지 못하여 땅을 치 며 통곡하고 있지만 우리 집에서는 외국으로 돈벌이 갔던 너의 어머니도 여러해 만에 많은 돈을 벌어 왔을 뿐 만 아니라 나도 집에서 자식농사를 잘하여 딸애를 중국의 최고학부인 청화대 학에 보내여 어거리 풍년을 거 두어 자식교양에서 황금을 줏는 사람이라고 가슴 뿌듯이 자랑하는 백설의 아버지.    2등상에 입선된 길림대학과 일본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어 교육석사학 위 를 따내고 현재 천진남개대학빈해학원 일본어강사로 사업하고 있는 양화가 쓴 문 장 《내가 본 우리부모님의 가정교육》에서 《응 아!》하는 딸애의 첫 울음소리 와 함께 자기도 엄마가 되였다는 양화,  자기의 곁에서 쌔근쌔근 잠자는 딸애를 볼 때, 캐득캐득 웃으며 자기를 반겨 맞아주는 딸애를 볼때마다 부모님의 생명의 연장 인 자기가 인젠 엄마로 된 기쁨, 또 자기생명의 연장인 딸애를 보는 기쁨과 딸애 의 미래를 그려보는 마음으로 자기를 어엿한 대학교선생으로 키워온 부모님들의 가 정교육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서 자기도 딸애에 대한 교육을 잘 하여 딸 애로 하여금 나라의 인재로 키워보려는 양화, 이 모든것들은  현대가정 교육에서의 본보 기로 되고 산교재로 되고 있습니다.    이번 응모작품들 가운데서 미읍한 점들이라면 가정교육에 대한 성공적인 사례 와 경험, 새로운 교육모식을 찾는데서 어떤 작품은 사적만 있고 리론적 서술이 없 으며 어떤 작품은 리론적 서술만 있고 사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부모들은 자식본인의 흥취보다 부모의 기습으로 아이를 이런저런 모든 써클에 다 참가시키여 아이의 부담을 가중화 시키는데 아 이가 받아 당하기 어려운데도 억지로 시키는 현상입니다.    바라건대 제2차 《현대가정교육컵》공모작품경색부터는 실제 사적과 리론이 결 합된 완전한 경험과 모식이 있었으면 하는것이고 이번의 작품은 모두 성공적인 경 험들만 있는데 다음번부터는 실패된 교훈의 문장도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분들이 우리 구락부에 가입하여 구락부의 각종 활동에 적 극 참가하시여 우리함께 가정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사회각계의 여러 분 들의 열정적인  지지와 방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이 응모작품의 평의심사에 참가하시여 심혈을 몰부으신 연변대 학 조선족교육연구소 소장 박태수교수님, 연변일보사 론설위원이며 고급기자인 송철운 선생님, 현대가정신문사 총편 김범룡선생님, 연길인민방송국아리랑방송 총감독 김 춘극선생님, 연변TV방송국사회교육부 주임 리승희선생님 이 다섯분의 선 생 님 들 에게 충심으로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제1차《현대가정교육컵》응모작품평의심사위워회      (주청룡) 2006년 7월 28일
45    장정정신을 발양하자 댓글:  조회:7735  추천:11  2011-05-13
장정정신을 발양하자   장정은 전 세계에서 있어 본적이 없는 력사적 기록인것입니다. 왕명의《좌》경기회주의로선의 착오적인 령도로하여 제5차《반포위토벌》이 실패하자 홍군은 할수없이 1934년10월에 중앙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장정을 시 작하여 1935년 10월에 제1장면군이 섬서성북부의 오기진에 이르기까지 12개월간 에 공중에서는 매일 수십대의 적기가 정찰, 폭격하고 지상에서는 수십만의 적군이 포위, 추격, 차단, 저격하였지만 이 모든것을 격파하고 적수하를 네번이나 건너고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금사강을 뛰여 넘고 로정교를 탈취하여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센 대도하를 도강하고 천험한 랍자구를 돌파하고 눈사태에 파묻기면 시신도 찾기 어려운 설산과 사람이 빠지면 나오기도 바쁜 초지를 지나면서 2만5천리를 걸었는데 매일 평균 70리를 걸은것으로 됩니다. 로정교를 탈취할 때에는 적들은 홍군이 네바퀴가 달렸다 하여도 밤새에 로정교에 이르지 못 할것이라고 한것을 홍군은 두발로 강행군하여 로정교에 도착하여 로정교를 탈취하 였던것입니다. 장정은 이루다 형언할수 없는 간난과 위험에 봉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발로 11개 성을 종형하면서 2 만5천리의 험로를 답파하였다는것은 그야말로 세상을 놀래우는 인간기적을 창조한것입니다. . 장정정신은 고도의 애국주의 열정과 그 어떤 난관도 두려워 하지않고 영용분 투한 공산주의 정신인것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국민당반동파와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새중국을 창건할수 있었던것입니다. 장정이 승 리한지 70년이 되지만 우리는 지금도 앞으로도 여전히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발양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란들은 그것은 그 시기 그 런 환경이였기 때문에 장정을 하였지만 지금 와서 왜 그렇게 하며 지금 와서 그런 정신이 무슨 필요한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위대한 도사 맑스께서는 《과학에는 탄탄대로가 없다. 오직 가파로운 오솔길 을 톱아 오르는 자만이 과학의 빛나는 절정에 오를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고 인조지구위성을 태공에 올린 과학가들의 그 과학의 탐구의 길도 그렇게 순탄한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도 그 어떤 난관도 물 리치는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방사성원소의 인체에 대한 위험도 무릅쓰고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었고 인조지구위성을 태공에 올릴수 있었으며 양리위, 비준룡, 섭 해승도 바로 그런 장정정신이 있었기에 그 간고한 기술훈련도 이겨내고 마침내 태공에 오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수있는 일인데 참군하여 신병훈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 오는 현상들이 있는가하면 저당금까지 합하여 6만원, 거기에 가옥소유증까지 저당시키고 로무송출로 나갔다가 간고한 로 동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것을 볼수 있 는데 이런것들은 모두 장정정신과 같은 그런 간고분투의 정신이 없기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 장정정신을 고양하는것은 당년의 그 홍군의 간고분투의 정신을 기리는것도 있겠지만 우리의 사업은 지금에나 앞으로나 이 장정정신을 수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할것없이 계속하여 우리의 후대 들에게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장정정신으로 애국주의교육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 주의 리완빈이 바로 이런 사람가운데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아 들을 데리고 1년내에 홍군 제1방면군의 전반 장정코스를 답파하면서 아들에게 홍 군의 장정력사를 알게끔하고 홍군의 그 어떤 난관도 물리치는 장정정신을 체득시 키는것으로써 애국주의교육을 하였고 또 아들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시킨것입 니다. 그리고 그 자신으은 또1년을 거쳐홍군 제2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전부 답파 하였을뿐만 아니라 이달부터 시작하여 또 홍군 제4방면군의 장정코스를 따라 제3 차 장정을 시작하려고 한답니다. 우리는 이 리완빈처럼 장정정신을 고양하고 장정정신을 발양하여 장정정신으 로 하여금 영원히 빛발치게하여야 하겠습니다.   2006.11.12.6:30 연변인민방송 《일요칼럼》에서 방송
44    인체의 로출현상을 어떻게 볼것인가? 댓글:  조회:7910  추천:10  2011-05-13
인체의 로출현상을 어떻게 볼것인가?    삼복철에 택시를 타다보면 운전사들이 웃옷을 훌떡 벗고 차를 몬다든가 로천 음식 점에서 웃옷을 훌떡 벗고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성들을 보게되 는데 공중장소에서 웃옷을 훌떡 벗고 있다는것은 문명치 못한 행실이 아닌가 봅니 다.     의복의 기원을 보면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석기를 사용하면서부터 짐승의 가죽으로 자기의 알몸을 가리우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는데 이렇고 보면 원시사회에서 원시인들도 자기의 알몸을 드러내는것을 꺼려하엿다는것을 알수 있 으며 옷을 입는것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구별점의 하나라고 볼수 잇습니다.     인류는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발전으로하여 자기의 몸치장을 주로 의복으로 가꾸고 있습니다. 생활조건이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자기의 몸치장을 어떻게 잘 하 는가 하는것은 자중의식을 높이고 공식장소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고 례절이라 고 봅니다. 옷차림은 그 사람의 품위를 보여주고 잇는데 공중장소에서 웃옷을 훌떡 벗고 있다는것은 첫째는 자기의 존재가치와 품위를 너무 낮추는것이고 둘째는 상 대방 혹은 공중들에 대한 무시이고 례절스럽지 못한 행실이며 셋째는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문명치 못한 행실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일부 청소년들은 텔레비죤이나 영화에서 어떤 배우가 그 어떤 양식의 옷을 입었다면 무작정 그것을 패션으로 보고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색 하여 볼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생산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옷이 해여지면 깨긋히 빨아 서 기워 입는것으로써 인간의 문명을 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생산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일부 청소년들이 새옷을 뜯어서 바지깃이 너덜너덜하고 무릎이 보기싫게 들여다 보이게 입고 다니고 젊은 녀성들이 배꼽을 들어내놓고 다니는것 을 어떻게 보아야 할가?     강택민동지는 《세가지 대표》의 중요한 사상을 제기할때에 《중국의 선진문 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하여야 하다.》고 지적 하였습니다. 배꼽을 들어 내놓고 다니거나 새옷을 뜯어서 허들허들하게 입고 다니는것은 아무 리 어떻게 보아도 선진적 문화라고는 볼수 없지 않는가?       2006.8.20 일요일 연변인민방송《일요칼럼》에서 방송 2006.10.25. 수요일 10:10아리랑방송《녀성시대》에서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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