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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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농촌인구이동 어떻게 볼것인가? (주청룡)
2007년 05월 21일 21시 59분  조회:4426  추천:151  작성자: ZOGLO

조선족 인구이동 어떻게 볼것인가?

주청룡


지금 조선족들의 출국바람 그리고 대도시와 기타 연해발달지역의 도시진출로 하여 일부 사람들은 우리 조선족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겟는가 하는 우려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필자는 아래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한다.


1. 연변에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된 력사적 배경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보면 주로 세개 단계로 볼수있는데 연변은 주로 첫번 째단계의 사람들이라고 볼수있다.


제1단계: 생계를 위한 이주(19세기 중엽부터 1910년《한일합병》까지)

1860 년대에 조선반도 지역에 련속된 흉년이 들었으며 특히1869년에 엄중한 수재 와 우박피해가 들었고 1870년에 또 엄중한 한재가 들어 주민들의 생활이 극 히 곤란하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한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그 피해가 엄청났었다. 게다가 탐관오리의 략탈과 무거운 세금 때문에 도저히 고향에서 살수 없어 이곳의 농민들은 몰래 강을 건너 간도땅에 와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청나라의 처벌을 두려워 아침에 와서 농사를 짓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출퇴근형식을 취했다가 점차적으로 봄에 와서 농사를 지어 가을에 량곡을 거두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는 자가 점점 늘어낫고 나중에는 아예 그 지역에 집을 지어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여1883년 조선정부에서는 부득불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북간도 이주 를 허락하였으며 청정부에서도 처음에는 자기네 선조의 발상지를 더럽혔다는 죄명으로 무단 월경자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고 가옥을 불질러 쫓아내기도 하였 지만 날이 갈수록 건너 오는 사람이 늘어 나고 이 지역에 조선인이 많아지자 만 주땅에 만족 이외의 그 어떤 민족도 입주하는것을 금지한다던 금지령을1885년에 취소하고 오히려 두만강이북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의 넓은 지역을 조선이주 민개척지로 정하고 개척민을 모집해서 조선인들을 리용하여 황무지를 일구게 하였 다. 이리하여 함경도의 많은 조선인들이 북간도(두만강 이북) 즉 지금의 연변으로 대량 이주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특히 두만강역 청평벌 일 대와 해란강 세전벌을 중심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일부 평안도의 농민들도 서 간도(압록강 이북)에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조선족이 간도땅 에 발을 부친 력사는 150년이 거의 된다.

제2단계: 항일을 위한 애국 지사들의 이주(한일합병부터 9.18 사변까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자 조선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잃은 슬픔을 안고 만주와 상해, 광주 등 곳에 들어와 항일 운동을 하였으며 초창기에 만주로 이 주한 항일애국지사들은 즉각적인 항일 투쟁보다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통 하여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양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리상설, 리동녕, 여준 등이 룡정에 세운 서전서숙(瑞甸瑞塾)을 비롯한 여러 조선족학교들 이 일떠 섰고 1919년 조선의 3.1운동 후에는 많은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반일감정을 지닌 수많은 조선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무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제 3 단계: 일본의 이민정책에 의한 강제 이주(9.18 사변부터 일본항복까지)

1937년 7.7사변으로 중국과 일본이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 가자 일제는 식량 생산기지를 건설하여 군량을 공급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만주 내륙으로 강제이주를 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이때 일제는 만주에 대한 이민 정책을 일본인을 조선 으로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는 환위이민(換位移民)정책을 실시 했다. 하여 조선총독부와 위만주국은 동북지역의 39개 현을 조선족의 《이민구》로 확정하고 1939 년부터 매년 조선으로부터 파산된 농민을 본격적으로 이주시켰으며 후에는 내몽골 지역까지지 확대하여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의해 강제이주 된 조선 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약 14 ~15만 명에 달할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북에서의 조선족의 분포정황을 보면 함경북도 대안인 연변 지역에는 함경도 사람이 다수 거주하고 평안북도 대안인 료녕성에는 평안도 사람이 대부분인것은 생계를 위한 월경이주였고 흑룡강성에 전라도나 경상도사람이 많은것은 일제 시기 일본의 강제이주에 의하여 개척 농장으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광복될때 중국의 조선족 인구를 보면 동북과 관내를 합친 총 인구는 216만이 었는데 그 대부분은 동북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약100만에 달하는 조선인들(대부분은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투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일부 강제이주 온 사람들)이 조선반도로 돌아가고1947년 동북 지방의 조선족 인구는 11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새중국이 창건된 후 우리 나라에서는 소수민족 자치제를 실시하여 1952년9 월3일 조선족이 집중된 연변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였고 1954년에 처음 으로 제정된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하였다.

2. 연변 농촌 조선족의 현황

(1) 인구

2000년 전국인구보편조사자료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 192.38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연변에 약 82만명이 살고 있는데 중국 조선족의42.62% 차지하고 전 주 인구의 37.7%를 차지한다. 조선족인구 가운데서 도시와 진(城镇)에 119.25 만 명으로서 61.98%를 차지하며 농촌(乡村) 인구가73.14만명으로서 38.02%를 차지하는데 10년전에 비해 조선족 도시인구가11.78포인트 증가되였다.

농촌처녀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농촌에는 장가들지 못한 40세 이상의 로총각들 이 수두룩 하다. 이런 혼인균형파괴로 하여 농촌에서 어린애들을 보자면 보배줏기 하기보다 더 힘들하다.(통계수자는 아래에《학교와 학생》을 보라.)

(2) 농경지와 농경인

개혁개방 이전 집체농사 때에는 많지 않은 농경지를 가지고도 늘 로동력이 모 자란 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기계화와 과학적 영농으로 하여 한 사람이 보통 4~ 5 헥타르의 경작지를 다루다니 농촌에는 많은 로동력이 남아 돈다. 필자의 옛 고향마을도 전에 70여호 되던 마을이 많은 사람들의 도시진출로하여 지금은 20여호밖에 되지 않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경작지를 다 다루고 있으며 아직도 밭이 얼마 있으 면 얼마를 다루겠다고 한다. 화룡시 투도진 룡문촌의 정만금은 25마력과 22 마력 짜리 뜨락락또르 두대를 사가지고 농망기에 도시일군을 고용하여 쓰면서 혼자 서 60헥타르의 경작지를 다루고 있으며 모든 생산비용과 품삯을 제하고도 년 수입 25만원을 올린다고 한다.

(3) 학교와 학생

필자가 교육사업을 하던 모 향의 중심중학교만도 지난 세기70년대에는 학 생이 근 1000명에 달하였으며 10개 촌에 소학교는 다 있었고 어떤 촌에는 초중 까지 있었는데 개혁개방후 산아제한 원인도 있겠지만 농촌인구의 도시진출 또 그 로인한 혼인균형파괴로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로 되여 지금은 10개소의 촌소는 전부 페교되고 전 향의 중소학교를 한곳에 집중하였어도 학생이 200명 가량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것도 지난 세기70년대에는 조선족이 다수이고 한족이 소수였 는데 지금은 반대로 조선족이 극 소수라고 한다. 이것은 조선족인구가 도시로 더 많이 진출하였다는것을 설명한다. 편벽한 산간지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룡정시의 백금향에는 중학교는 언녕 페교된지 오래고 이전에는 촌마다 학교가 있었고 학생 이 많을 때에는 400명을 넘던 향 중심소학교는 지금은 학생이 2명밖에 없으며 그 나마 한집의 쌍둥의 형제라고 한다. 그외에 다른 곳를 보더라도 평정소학교에7명, 석정소학교에 5명, 용신소학교에 4명… 이로부터 보아 농촌인구가 대폭적으로 감 소되고 있다는것을 알수있다.

3. 사회발전의 필연적 추세

우리는 사상을 해방하고 문제를 과학적발전관으로 보아여 할것이다. 발달한 나 라일수록 농업인구가 적은것이다. 지난 세기70년대에 벌써 발달한 농업국에서는 농업인구가 전국 총 인구의 5~7%밖에 안되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농촌인구가 도시로 진출하면서 농촌인구가 감소되고 도시인구가 증가되는것은 필연적인 추세 이다. 기계화와 과학적인 영농으로 하여 앞으로는 도시에 거주하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농사를 지을것이고 농촌인구의 감소는 지금보다 퍽 많을것이며 따라서 농촌학교의 페교는 필연적인것으로 될것이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농촌학교의 페교 로 하여 특히는 조선족학교의 페교로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가슴 아파 하지만 이 것은 시대의 발전추세로서 필연적인것이다.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를 고려하지 않고 낡은 관념을 고집하고 땅을 아쉬 워서 제한된 농경지에서 여러 세대가 모두 함께 농사를 짔는다면 너도 나도 다 잘 살지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상을 해방하고 새로운관념을 수립하여 사회발전의 수요에 따라야 한다.

4. 농민들의 치부의 길

지금 농민들은《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입은것 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농사 지어서는 자식을 공부 못 시킨다.》,《좀 더 잘 살려면 그래도 밖에 나가야한다.》

고 말하는데 이는 농민들의 진실한 말이다.

그러므로 소농경제의식에서 벗어나 과학적발전관으로 새농촌건설을 하여 치부 의 경로를 찾아야 한다

(1) 농업기계화와 과학적영농을 하여 적은 로력으로 다면적의 경작지를 다루 어 인당 농업수입을 높여야 한다. (2.《연변 농촌 조선족의 현황》의《농경지 와 농 경인》에서 언급한것과 같음)

(2) 당지우세를 발휘하여 수출형농업으로 명브랜드를 창출하여 국내외 시장에 진출시켜야 한다.

연변에는 위만주국시기 강덕황제에게 올리 바치여 어곡미로 불리웠던 하천 평벌 어곡전의 입쌀과 같은 유기농업입쌀, 그리고 인삼, 록용, 사과배, 검정귀버섯, 송이버섯, 연변황소 등은 모두 연변의 특산이다. 이런 농산물과 특산품을 잘 가공, 포장하여 명브랜드로 창출시켜 국내외 시장에 진출시켜 높은 경제적 효익을 보는 것이다. (례하면 화룡시 동성진에서는 오리 유기농업법을 하여 《해란강》표 유기 입쌀을 명부랜드로, 룡정시 덕신향의 김영호는 당지에 잡곡 이 많이 나는 우세를 리용하여 잡곡을 가공하여 명부랜드로 하고 이외에도 왕청에는 검정귀버섯, 연길시 소영진에서는 양파재배 등등 명부랜등로 하여 시장에 진출시키는것.) 이외에도 생 태농업, 관광농업, 고기술과학영농 등으로써 새농촌건설을 추진하는것이다.

(3)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

공업으로 농업을 이끄는것은 공장도 잘 되고 농업도 잘되는 이중 리득인것이 다. 례를 들면 연길담배공장을 확건하므로 하여 그만큼 화건종담배와 양건종담배가 많이 수요되므로 그에 따라 농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수 있는것, 룡정의 화도닭고 기가공공장을 건설하므로하여 농민들을 닭사양업으로 치부할수 있겠끔 하느것, 아 마방직공장으로 농민들의 아마생산 수입을 높이는것 등이다.

(4) 향진(혹은 촌)기업을 잘 꾸리여 공업화된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이다.

강소성 강음시 화서촌의 경험은 전 촌의 제한된 경작지를 30여명의 감농군들 에게 맡기고 촌기업을 확대하여 그외의 로동력을 모두 촌기업으로 전이 시킨것이 다. 촌서기 오인보는 화서촌이 부유하여지자 주변의 16개 촌을 화서에 합병시켜 공동치부하여 촌민들의 년 평균 수입을 6.5만원에 달하게 하였고 나이 많은 농민 들은 달마다 1000여원의 퇴직휴양금을 받을수 있게 혀였으며 몇천세대의 촌민들 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고 대부분 촌민들이 자가용차와 별장을 갖고 있으므 로 많은 대학생들이 이 촌에 몰려 들고 외지에 시집가는 처녀는 없고 시집 오는 며 느리와 장가드는 사위들이 날로 늘어나니 인구가 자연히 증장하게 된다. 새로 들어 오는 사람은 대부분 학력이 대학이상의 연구생이거나 귀국류학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여1500여명 인구를 가지고있던 소화서가 3만여명 인구를 가진 소도시 —대화서 촌으로 건설한것이다. 하여 농업소촌으로부터 공업강촌으로, 농민들은 로동자로, 촌락은 도시로 변하게 하였다. 우리도 이렇게 하자면 분산된 거주와 로 력으로는 될수 없으므로 유리한 환경조건을 갖고있는 곳을 선택하여 공업이 일떠 선 집중촌건 설을 하여야 한다.

(5) 출국로무송출은 농촌잉여로력배치의 중요한 경로이다.

출국로무송출은 백성들이 짧은 시간내에 빈곤에서 해탈되고 치부할수 있는 선택이다. 지난해 연변에서는 해외 로무수입이 10.6억딸라를 초과하여 주 재정 수입의 2배를 넘었 다고 한다. 이가운데서 절반이상은 농민들의 로무수입 이라 고한다. 만약 출국바람이 불지 않아더라면 이만한 외화가 우리 연변으로 들어올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 조선족들이 특히는 농민들이 현대화한 아빠트에서 현대화 한 문화생활을 할수있겠는가? 우리 조선족들의 해외로무수입은 주 경제발전 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있다. 이로하여 연변의 GNP는 전성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6) 도시진출도 농촌잉여로력배치의 또 하나의 중요한 경로이다.

지금 대중도시에서 보면 개혁, 개방전에 볼수 없던 농민인부군체들을 수두룩히 볼수있다. 이는 농촌잉여로력이 대중도시에로 대거 진출하였다는것을 알수있다. 대 도시 혹은 연해도시에 진출한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막벌이 로동을 하지않고 업무원이나 관리인원으로 일하면서도 다른 인부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현재 농촌에 잉여로력이 많은 상황에서 출국로무로 나갈수 있는 사람은 나가 고 대도시로, 연해도시로 진출할수 있는 사람은 진출 하라는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조선족공동체해체위기에 우려를 가지는분들은 그닥 접수되지 않 을수도 있다. 출국한 사람가운데 일부 비 도덕적인 사람들로 하여 혼인과 가정의 파괴도 있고 결손자녀가 있게되는 페단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점가운데의 단점이라 하겠다. 쉬파리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근다면 한평생 장을 먹을수 없지 않는가? 한국정부에서 우리 조선족들에 대하여 방문취업제 범위를 많이 넓히고 중국에서의 한국기업들에서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막로동을 시키지만 우리 동포들 에게는 관리인원으로 많이 쓴다는것도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국내 연해도시진 출에로의 우세가 아니겠는가? 이런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곳이면 떠나라는것이다. 다 떠나면 누가 농사를 짓겟는가 하는 사람도 있는데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경작지가 더 차려지기 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수입도 그만큼 높아 가므로 나중에 떠난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의 수입이 평형을 이룰 때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는 떠나지 않는다. (우 에서 말한 정만금처럼) 이것은 경제철학이다.


5. 조선족공동체해체의 방지대책

(1) 향진(혹은 촌)기업을 잘 꾸리여 집중촌건설을 하는것이다. (우에서 례를 든 화서촌처럼)

(2)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4.《농민들의 치부의 길》의 《룡두기업을 많이 세워 농업을 이끄는것이다》에서 언급한것과 같음)

(3) 출국하였거나 대도시 혹은 연해도시에 진출한 사람들이 돌아 와 새로운 창업을 하는것이다.

우리 주의 출국로무일군중의 절반 이상은 농민들이다. 이들중 적지않은 농민 들은 출국하여 많은 돈을 벌고 거기에서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배워가지고 돌아와 연길시나 기타 현시의 도회지에서 창업을 하면서 현대화한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 들이 적지 않다. 례를 들면 한국은 모두 조선족이므로 음식습관과 문화가 우리 연변과 같은 점이 매우 많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일하면서 돈을 버는 기회에 료리기술과 음식문화를 배워가지고 연변에 돌아와 한식관을 꾸리는 사람 들을 볼수있다. 그외에도 한국에서 일하면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연변에 돌아와 창 업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출국하였거나 연해도시에 진출한 절때 대부분 조선족들은 돈을 번 다음 조선 족집거지인 연변에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며 살고 있거나 또 그렇게 하려하고 있다. 이 몇년래 연길시부동산업 및 제3산업이 활발하게 발전할수 있은것은 귀국 로무인원들의 투자와 갈라 놓을수 없다.

(4) 신흥공업집중구를 건설하는것이다.

공업으로 우리 주를 부강하게 하는것은 연변진흥행정의 근본적 경로이다. 연 변의 진흥행정은 공업화의 행정에 달렸다. 도시화는 연변진흥의 관건적 조치이다.

지금 우리 주에서 연룡도 경제일체화, 구역일체화를 하여 연길을 길림성의 동 부 중점도시로 건설하면서 많은 공업집중구가 형성되면 농촌인구가 이런 공업구 에 들어 올수 있으므로 이것도 조선족 공동체의 해체를 해결하는 하나의 조치라고 할 수있다.

(5) 연성환경건설을 하는것이다.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조선족집중지인 연변에서 살려고 한다. 연길을 경제가 발달한 길림성의 동부중점도시로 변혁시키고 연성환경건설을 잘하여 봉황이 오동나무숲으로 날아들게 한다면 외지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조 선족 기술일군들이 연변으로 돌아와 연변진흥에 기여할수 있고 연변에서 간 대 학생들과 석사, 박사학위를 딴 류학생들이 우리 연변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의바지 할것이라고 믿는다. 채성룡이 바로 이런 사람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연변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대도시에 들어가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모교에 와서 석사 공부를 마친다음 2004년3월에 도문시 장안진 벽수촌에 자리잡고 경작지 15헥타 르, 림지 1헥타르를 임대맡고 기계화농사를 함과 동시에 처음 몇 마리의 소로부터 인젠 50여마리의 소를 기르면서 목축업도 크게 벌리고 있을뿐만 아니라 자기가 배 운 지식을 가지고 전 촌의 촌민들을 이끌고 공동치부하고있다.

(6) 코리안타운이 서는 곳마다 조선족학교를 세우는것이다.

지금 북경, 심양과 연해지구의 대도시들에 코리아타운이 일어 선것도 우리 조 선족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에로의 진입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디에 코리아 타운이 서면 어디에 조선족 소학교를 세울수 있는것이다. 청도의 서 원장(西元庄)소학교가 이면에서 모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이러면 우리의 후대들이 민족 언어와 문자를 잊어버릴 우려도 없거니와 한족애들보다 한가지 언 어, 문자를 더 장악한 우세를 갖고 있을수있다. 우리 조선족들이 출국 혹은 도시에 로의 진출로 하여 우리 주 농촌을 보면 한족인구가 증가되고 조선족인구가 감소 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종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인식이 앞서고 더

진보적이라는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이전에 어떤 민족은 땅을 농민의 명맥이라고 자식들을 공부도 채시키지 않고 농사일을 시켰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는 예로부터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속담이있다. 이 말의 뜻인즉 소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면서라도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킨다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후대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한 꿈이였으며 우리들에 대한 기대 였다. 이렇게 하였기에 우리 조선족들은 쪽박차고 두망강을 건너와 땅을 일구어 삶 의 터전을 닦았고 오늘은 그 후대들이 국가 공무원이나 문화, 교육, 과학, 위생 등 지식분야에서 크나 큰 활약을 하고있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정신이 없었더라면 우리 조선족들은 농촌의 소농경제울타리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을것이다.

떠날수 있는자는 모두 떠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돈도 벌고 선진적문화도 배우 고 돌아와 새로운 창업을 하여 고향건설을 한다면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해체되지 않을뿐더러 더 선진적인 민족공동체를 형성할수 있지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렇 게 하면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드는 혼인균형파괴형상도 해결할수 있다고 본다. 물론 목전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류동이 있으나 이것은 그 래도 극 소수라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농촌잉여로력이거나 도시의 무직업인원은 출국하든 대도시와 연해 발달지역의 도시에 진출하든 돈을 많이 벌수 있는곳이면 떠나서 돈을 많이 벌고 오라는것이다. 그러면 그 본인도 잘 살수 있을 뿐만아이라 우리 주의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수있다. 떠나되 우리가 다루던 농경지만은 타지방의 사람들에게 양도 하지 말고(타지방 사람들에게 양도하면 집도 쉽게 처리할수 있고 농경지도 좀 높 은 값으로 양도 할수 있겠지만 한고향에서 같이 살던 정을 봐서라도 그리고 외지 에 갔다가도 고향생각이 나면 다시 본 고장으로 되돌아와 살수도 있지 않는가?) 촌민위원회의 동의를 걸쳐 남아있는 자지방의 농민들에게 양도하면 떠난 사람도 잘 살수있고 남아있는 사람도 잘 살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터전도 지킬수 있지 않 는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 조선족의 아름다운 미래를 펼쳐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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