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http://www.zoglo.net/blog/f_zhuqi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283 ]

263    서유럽려행기[22] 댓글:  조회:4271  추천:0  2020-02-24
서유럽 려행기 [22]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 다음으로 우리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갔다. 콩코르드 광장은 빠리시 한복판의 센강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 면적은 8.64ha로 파리에서는 가장 넓은 광장이다.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지만 북경의 천안문(44ha)에 비하면 1/5밖에 안된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광장은 원래 프랑스 부르봉왕조(波旁王朝)의 왕 루이 15세(재위 1715∼1774)의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1775년에 조성되였으며 이름도 당시에는 ‘루이 15세 광장’이라 불렸으며 1770년에는 왕세자(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玛丽•安托瓦内特, 1755~1793)의 결혼식이 거행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광장의 력사는 피로 얼룩지게 되였다. 1792년에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파괴되고 이듬해에는 기마상자리에 단두대가 놓여 왕족과 귀족, 성직자 등 1,343명이 처형당했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혁명중에서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였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을 잘리운 형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罗伯斯庇尔1758~1794,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와 조르주 자크 당통 (乔治·雅克·丹东1759~1794, 프랑스혁명시기의 정치가)마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분수대가 있다.   콩코르드  광장 1795년에 비로소 공포 정치가 끝나고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력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콩코르드  광장(协和广场)이라고 불리게 되였다고 하는데 우리 말로 하면 ‘협화광장’ 혹은 ‘화합광장’이라고 할수 있다. 현재 광장 중앙에는 1833년 이집트의 총독이였던 무하마드 알리 파샤(穆罕默德•阿里)가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왕(路易-菲利普, 1773~1850)에게 선물한  방첨탑 (方尖塔)이 우뚝 서 있다. 이 탑은 이집트의 람세스 2세(拉美西斯二世) 때 제작된 것으로 룩소르( 卢克索, 이집트 키나주에 있는 상업 도시) 신전(神殿)에서 옮겨왔는데 운송 기간만 약 2년반이 걸려1836년 10월에 빠리까지 왔다고 한다.  방첨탑의 높이는 23m에 230톤의 무게에 달하며 네 면에는 파라오(法老, 고대 이집트의 왕을 이르던 말)를 찬양하는 노래가 상형 문자로 새겨져 있다.  방첨탑의 좌우에는 로마의 산 피에트로 광장(圣彼得大广场)을 본딴 분수가 있으며 8개의 모퉁이에 코르투아 플라디에가 만든 녀신상이 놓여 광장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녀신상들은 각각 마르세유(马赛), 낭트(南特), 리옹(里昂), 보르도(波尔多) 등 프랑스의 8대 도시를 상징한다. 탑, 조각물이 분수로 이루어진 광장의 야경은 격동의 력사를 씻어 내듯 평화롭고 랑만적이다. 그때의 기술로23m높이에 230톤의 무게에 달하는 이 거대한 물체를 지중해 동남쪽 이집트에서 지중해 서북쪽 불란서까지 어떻게 운반해 왔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향수박물관  콩코르트광장을 다 구경하고 우리는 빠리의 향수박물관으로 갔다. 향수박물관은 프랑스 빠리 스크리브 거리에 있는 향수 전문 박물관이며 1860년에 세워진 나폴레옹 3세(1808~1873)의 저택을 박물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1926년에 세워진 향수 회사인 프라고나르회사가 5000년에 이르는 향수의 력사를 보여주기 위해 1983년 설립하였는데 회사 이름을 따서 '프라고나르 향수 박물관 이라고도 부른다. 이 향수박물관은 2004년 9월 30일에 페관하여 4년간의 대규모의 보수를 거쳐 2008년에 다시 개방하였는데 총 비용이 1,400만유러(약 1,881만딸라)가 들었다고 한다. 박물관은 보수를 거쳐 면적이 원래의 두배로 확대되여 1,500㎡로부터 3,000㎡로 확대되였다고 한다. 수건후의 박물관은 장식풍격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왔을 뿐만아니라 허다한 보기드문 수장품들을 전시하였는데 박물관에 소장된것이 5만여 건에 달한다고 한다. 향수박물관은 주로 력사구와 수장품구 두 구역으로 나누는데 각 시대별 가구들을 배경으로 향수를 비롯해 향수병, 향수 저장 용기, 제조도구, 화장품 세트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여 있으며 동서양의 각 시대별 향수와 화장품 종류들도  전시되여 있었다.     향수제조기기들 각 시대에 만들어진 향수병은 당시의 류행을 반영한 것이여서 설계와 류행의 변화도 알아 볼 수 있었으며 향수 추출을 하는 증류기 등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전시되여 있어 향수의 제조와 포장 방법이 발달해온 력사를 알아볼 수 있었다. 현대식 향수 제조 방법도 제조 공정 전체를 실제 설비 그대로 전시해 놓아 쉽게 리해할 수 있었으며 관람객들에게 향기를 맡는 법 등 향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었으며 향수 종류별로 냄새를 맡아보는 항목도 있었는데 젊은이들 특히는 젊은 녀성들은 냄새를 맡아보고 여러가지 향수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를 하였지만 나로서는 남들을 따라 냄새는 맡아보았지만 맡아 본다더라고 맡았지 좋다 나쁘다 감정 할 수 없었다. 박물관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전시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스 국왕 루이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 네트 왕후의 려행트렁크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791년 불란서대혁명 때에 마리 앙투아 네트 왕후는 이 트렁크를 가지고 프랑스에서 피란을 떠났다고 하는데 트렁크의 무게가 80킬로그람에 달했고 한다. 그 안의 물품들을 보면 마리 앙투아 네트왕후가 쓰던 보온병, 화장품상자, 그리고 야외식사도구 등이라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프라고나르 회사의 화장품상점이 있어 유람객들은 그 자리에서 공장가격으로 마음에 드는 그라스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화장품을살수 있었다.   향수판매진렬대에서 일을 보고 있는 한국녀성 우리 일행가운데는 세쌍의 젊은 부부외에 젊은 녀성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중국에서 사는 것보다 질도 많이 좋거니와 가격도 중국에서 사기보다 많이 싸다며 자기네도 쓰고 돌아가서 선물로 주겠다며 여러가지 화장품들을 쌌는데 저마다 한 가방씩은 되게 사는 것 같았다.     [다음 계속]
262    서유럽려행기[21] 댓글:  조회:4392  추천:0  2020-02-19
서유럽 려행기 [21] 루브르 박물관(卢浮宫博物馆)  12시 반 장장 5시간에 315㎞를 달려 빠리시에 도착하였다. 오늘 역시 운수가 좋았다. 우리가 그렇게도 근심하던 시위행진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루브르박물관을 향해 떠났다.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스 수도 파리의 대표적인 지표(地标)성 건축물로서 센강 우측, 파리 중심가 1구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미국 뉴욕시 센트럴 파크에 있는 미술관), 대영박물관(영국 런던에 있는 국립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미술관이다.(2010년 년간 관람 인원이 약 8백 5십만 명으로 집계됨)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프랑스 왕가의 궁전이었던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기원전4000년부터 기원 19세기에 걸친 각국의 미술 작품들이 약 38만 점의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약 3만5천 점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며 박물관의 부지면적이 198헥타르이다. 루브르박물관 루브르박물관의 주 전시관인 리슐리외관(리슐리외黎塞留. 1585 ~ 1642. 프랑스의 정치가루이 십삼세 때의 재상으로 대외적으로 삼십 년 전쟁에 간섭하고 식민 정책을 진행시켜 프랑스 절대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쉴리관(쉴리,1560~1641. 프랑스의 정치가 앙리 사세의 신임을 받아 사실상의 재상으로서 재정 재건,농업 부흥, 국내 교통망의 정비 따위에 힘써 부르봉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저서에 《왕실 재정 회상록》이 있다.), 드농(Denon) 관은 ‘ㄷ’자 모양으로 련결되여 있는데 반지층, 1, 2, 3층으로 되여 있으며 조각 부문은 1,2층에 , 회화, 공예 부문은 2,3층에 진렬되여 있다 . 회화는 드농 관 1층과 쉴리 관과 리슐리외 관 2층에 주로 전시되여 있고 고대 유물들은 드농관 1층, 쉴리관 1층, 리슐리외관 반지층 일부, 쉴리 관 남쪽 전시실 1층에서 관람할 수 있다. 조각 작품은 드농관과 리슐리외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드농 관에는 이딸리아 조각작품이, 리슐리외 관에는 프랑스 작품들이 있다. 1, 이집트 유물 부문에는 5만 점이 넘는 작품들이 속해있는데 기원전 4천년부터 기원후 4세기에 이르는 나일강 류역의 이집트문명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품, 미이라, 의복, 보석, 게임, 악기, 무기에 이르는 방대한 수집품들을 통해 이집트인들의 생활상과 각 시대의 시대상, 예술적 특징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스핑크스 (狮身人面像)   2, 근동 유물 부분은 1881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슬람의 공격을 받기 전, 근동 지역의 초기 문명과 정착 모습을 작품들을 통해 감상할 수 있었다. 지리학적 근거로 레반트 지역(중동지역, 수리아와 레바논을 일컫기도 함), 메소포타미아 지역(美索不达迷亚,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강底格里斯河과 유프라테스강幼发拉底河 사이에 있는 지역.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 동북부와 이란 서남부를 포함한다. 고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페르시아(현재의 이란) 지역으로 구분하여 수장품을 보여주고 있다. 3, 그리스, 에트루리아(伊特鲁里亚,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살던 지역. 지금의 토스카나 지방이다.), 로마 유물 부문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6세기까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4, 이슬람 미술 부문은 1,300년 간에 걸친 이슬람 문화의 유물들로 이루어지며 도자기, 유리, 철, 나무, 상아, 양탄자(地毯), 섬유 등을 포함한 5천 점 이상의 작품과 천 개 정도의 사금파리(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 조각들을 소장하고 있다. 5, 조각 부문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 부문에 속하지 않은 조각품들 중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로 구성되여 있다.  오직 이 부문에서 전시한 것들은 고대 건축 관련 작품들 뿐이다. 수장품도 100점 정도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조각 작품들은 베르사유(凡尔赛)의 왕실 조각 수장품에 귀속되여 있었다.  조각 부문은 그리스, 에트루리아(伊特鲁里亚), 로마 부문에 속하지 않은 조각품들 중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로 구성되여 있다.   6, 장식미술 부문은 중세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처음 이 부문은 조각 부문에 소속되여 있었다.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 검을 보관하고 있는 프랑스 왕실 묘역인 생드니성당(圣德尼圣殿) 으로부터 가져온 왕실 소유품들과 예술품들을 주로 관장(馆藏), 전시하였다. 7, 회화 부문은 약 6천 점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1,848년부터 13세기까지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2/3 정도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며 북유럽 작품들이 천 2백 점 이상이다. 이딸리아의 회화 작품들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1494년 ~ 1547년)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38년 ~ 1715년)의 유품들이 주를 이루며 나폴레옹 시대에 략탈한 후 반납하지 않은 전리품들과 박물관이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회화 작품들 중 프랑스와 북유럽 작품들은 리슐리외관과 카레 궁정에 전시되여 있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회화들은 데농관 1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모마리아 화상   8, 판화와 소묘 부문은 종이에 표현된 작품들로 구성된 수장품이다. 수장품의 원형은 8천 6백 점의 왕실  수장품, 1797년 아폴로(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화랑(画廊) 415점을 전시하였다.                   [다음 계속]
261    서유럽 려행기 [20] 댓글:  조회:4619  추천:0  2020-02-16
서유럽 려행기 [20]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로 가다 프랑스경내에 들어서면서 가이드는 프랑스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위치하며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이며 정식명칭은 프랑스공화국이다.  프랑스는 서유럽의 본토와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 (法属圭亚那.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령의 해외 레지옹이다.)를 비롯해 여러 대륙에 걸쳐 있는 해외 레지옹(관할 구역 안에 우리 나라의 성에 해당되는 프랑스의 광역 자치 단체)과 해외 령토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유럽련합 소속 국가 중 령토가 가장 넓다. 프랑스 본토는 남북으로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협과 북해까지, 동서로는 라인강에서 대서양에 이른다. 그 지형적 모양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종종 이 곳을 륙각형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수도는 빠리이며 국가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며 의회는 량원제로 구성된다. 면적은674,843㎢ , 인구는  65,630,692명(2012년)이다.     프랑스와 그 주변국가들 종족구성으로는  켈트족, 라틴족, 슬라브족, 북아프리카인, 인도차이나인 등이며 공용어로는  프랑스어이다. 종교는 로마가톨릭교 83%-88%, 이슬람교 5%-10%, 개신교 2%, 유대교 1%, 무교4%이다. 프랑스는 유럽련합(EU)의 창립 회원국으로서 설립 시부터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北约)의 회원국으로 1966년에 탈퇴 했다가 1992년에 재가입하였다. 프랑스는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이지만 소규모 기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된 혼합 경제이다. 공업(건축, 토목 사업 포함)에 종사하는 로동자가 전체 로동력의 1/3에 약간 못 미치고 GDP의 약 30%만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른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로동력의 약 7%로 비교적 적으며,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 미만이다. 경제구조는 농공업 대신 3차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총 로동력의  약 2/3와 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관광업은 직접, 간접으로 전체 로동력의 약 7%를 차지하고 GDP에서 약 8%를 차지한다. 프랑스에는 공교육과 사교육이 공존한다. 공교육은 일체 무료이며 교육부가 관리한다. 16세까지 중등교육을 무상의무제로 실시하고 빈민층에 대해 재정 지원을 강화한 결과 저소득 집단들의 지적, 사회적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5년제 초등교육을 마치고 11세가 된 학생들은 중등교육의 제1단계에 들어간다. 15세에 이 과정을 마치면 제2단계인 직업교육 면허증을 딸 수 있는 2년 과정과 대학입학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고등교육인 3년 과정 중에서 선택하여 진학한다. 사교육은 주로 로마 가톨릭 계통이다. 프랑스 헌법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지만, 1959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거하여 사립학교는 정부의 일정한 간섭을 받는 대가로 재정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차가 프랑스경내에 들어서서 한창 달리고 있는데 먼저 빠리에 가 있는 중국의 다른 려행사의 인솔자가 우리의 인솔자에게 “지금 빠리시에서  유가상승으로 하여 마크롱정부에 향해 대형시위를 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아니나 다를가 5시 반이 되여 어둠이 깃들었을 때 길에서 연한 황록색의 조끼를 입은 경찰들이 교통지휘를 하였는데 다행히 우리가 가는 방향의 차들은 막지 않고 통과시켰지만 마주 오는 차량들은 모두 통행금지를 하여 몇 십리 길에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는데 마주 보면 전조등빛이 비추는 것이 마치 노란색의 구술을 꿰여 놓은 것처럼 보였고 돌아서 보면 마치 붉은색 구술을 꿰여놓은 것처럼 보였다.       유가상승으로 하여 마크롱정부에 향해 대형시위를 하다   그래도 우리는 운수가 좋았다. 6시 반까지 아무런 교통차단이 없이 무사히 프랑스의 어느 한 작은 진에 도착하여 주숙을 정하였다. 오늘은 운수가 좋아 무사히 여기까지 왔는데 래일이면 빠리시에 들어가야겠는데 계속 시위를 하면 어쩌는가하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 빠리 19일 아침 7시 반에 우리는 빠리로 향해 떠났는데 가이드는 빠리시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빠리는 프랑스의 수도로서 프랑스북부 일드프랑스(法兰西岛) 지방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센강(塞纳河) 중류에 있으며 면적은 105km2, 인구는 현재 224만 명이다. 파리의 행정 구역은 1~20구로 나뉘여 있다. 빠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교통, 학술,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빠리는 프랑스의 경제 중심지이며 세계 최고의 경제 도시이기도 하다. 빠리는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 상업적 요지이기도 하다.   저녁노을에 비낀 빠리시   1980년대에는 지하철로 매일 500만 명의 주민이 빠리로 통근했다. 정부가 지하철 운영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에 승객은 실제 비용의 절반만을 지불한다. 파리시의 뻐스 운행체계도 현대화되여 있다. 이같은 개선은 통근할 때 자동차를 리용하지 못하게 하여 교통문제를 완화시키려는 정부정책의 일부였으나 그 효과는 의문이다. 교통량은 크게 늘어나고 있으며 교통체증을 감소시키기 위해 많은 지하도로와 강변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광범위한 일방 통행망을 발전시켰다. 센강(塞纳河)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圣路易岛)과 시테섬(西岱岛)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뱅센 숲, 서쪽으로는 불로뉴 삼림공원이 이어진다. 센강의 남쪽을 ‘좌안(左岸)’, 북쪽의 보다 넓은 지역을 ‘우안(右岸)’이라고 부른다.  센강류역의 주요 유람지점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행정구역 상으로는 빠리 중앙지역인 5구에서 6구)에는 소르본대학을 비롯한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다음 계속]
260    서유럽려행기[19] 댓글:  조회:4636  추천:0  2020-02-12
 서유럽 려행기 [19] 9시가 되여 기차가 도착하여 기차에 올랐는데 이때까지 내가 타본 중국을 비롯한 아세아의 몇개 나라의 기차는 모두 한쪽에 3인석, 다른 한쪽에 2인석이고 가운데 인행도로 되여있는 가로줄로 5인석 표준궤도의 차였는데 이번에 스위스에서 탄 기차는 인행도 량켠이 다 2인석인 가로줄로 4인석 좁은 궤도의 차였다. 밖을 내다보니 기차길도 좁아 보이였다. 루체른 기차역   기차는 루체른호(卢塞恩湖)연안을 따라 달렸는데 거울같이 맑은 루체른호와 호수 량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수 있었다. 루체른호는 스위스 중부에 있는 호수로서 호수이름은 서쪽 끝에 있는 루체른 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였고 한다.  호수면적은 114 km², 최대길이 39km, 최대너비 3km, 평균수심이 104 m, 최대 수심은 214 m의 복잡한 형태의 호수이다.     기차에서 내다 본 루체른호와 알프스산의 설산   그리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흰눈이 덮인 알프스산의 산봉우리들을 볼수 있었으며 드문드문 가다 농촌마을들이 보이였는데 마을 주변은 모두 푸른 잔디밭이였으며 잔디밭에는 드문드문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이 보이였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에 빗긴 흰눈에 덮인 산봉우리들, 호수에 빗긴 호수량안의 다름다운경치, 거기에 농촌마을과 풀밭에서 여유롭게 풀을 뜻고 있는 소떼들,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채화였다.     렬차에서 내다 본 마주오는 렬차와 알프스산의 설산 기차는 10시 50분에 인터라켄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에서 내리니 우리의 뻐스가 기차먼저 달려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라켄(因特拉肯)은 독일어로 "호수사이 "라는 뚯으로 스위스 베른주(伯尔尼州)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에 있는 브리엔츠호(布里恩茨湖)와 서쪽에 있는 툰호(图恩湖)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시내에는 아레강(阿勒河)이 흐른다. 인터라켄은 알프스산맥이 죽 이어져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경승지로  세계적인 관광, 피서도시이자 등산기지를 이루는 도시다.  면적은 4.3km2,  인구는2010년 통계로 5,429명이며 시계, 섬유, 고무, 단술(甜酒)  공업이 활발하다. 우리의 인솔자는 우리를 시계상점으로 안내하면서 시계를 사려면 여기서 사라는 것이였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시계종류가 많고 값도 싸다는 것이였다. 시계상점에 들어가 보니 확실히 시계종류가 다양하고 값(1유러에 인민페 8원)은 인민페로 환산하면 몇백원, 몇천원, 몇만원, 지어 값이 제일 비싼것은 인민페로 250만원에 가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비싼 시계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일행이 여기에서 시계를 사는 사람이 많았는데 우리 부부도 시계왕국에 와서 스위스의 시계를 사서 차는 것도 일생의 기념이라고 시계를 사려고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런데 시계를 사려면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은데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정말 안타까웠다. 하여 우리 부부끼리 너무나도 안타까운 소리를 하는데 한 영업원이 우리가 하는 조선말을 듣고 어디에서 왔는가 하며 한국말로 물어보는 것이였다. 우리가 중국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자기는 한국인인데 여기에 와서 영업을 한다는 것이였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은인을 만난 것이였다. 그리하여 그 한국인과 이것저것 물어보며 어떤 것을 사면 좋은가고 하니 값이 비싸다고 하여 성능이 어떻게  좋다고 말하기 바쁘니 우선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것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다음 그 분이 시계의 성능과 가격할인, 면세 등에 대해 상세히 잘 설명하여 주었다. 정말 그 한국인이 고마웠다. 그렇지 안으면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그 분의 상세한 설명으로 하여 우리 부부가 하나씩 사고 아들 며느리 것까지 4개를 샀는데 값은 인민페로 1,500원에서 3,500원 사이였다.   우리가 산 시계 어리때부터 스위스는 시계왕국이고 스위스의 시계가 세계에서 최고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지라 시계를 사서 손목에 차고보니 자못 흐뭇한 마음이였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중국의 100원짜리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때 스위스의 몇 천원에 달하는 시계도 10시를 가리키지 그 이상 더 똑똑하게 시간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저 허영심이랄가? 긍지감이랄가? 가부간 스위스 시계를 찬것으로 하여 기분이 흐뭇한 것만은 확실하였다. 스위스에서의 려행은 이것으로 끝나고 오후 2시에  프랑스로 향해 떠났다. 4시에 스위스와 프랑스 접경지대의 세관에 이르러 입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차들은 거침없이 나가고 들어왔는데 우리는 인솔자가 차에서 내려서 출경수속을 밟았다. 입경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었다. 다만 유럽련합에 속하는 나라에서 산 물건은 유럽련합에서 마지막에 출국하는 나라 세관에서 면세수속을 밟게 되였지만 스위스는 유럽련합에 속하지 않기에 스위스에서 산 물건만은 이곳 세관에서 면세수속을 하여야 했다. 그것도 우리의 인솔자가 혼자 내려서 우리 일행의 면세수속을 대행하였다.              [다음 계속]    
259    서유럽 려행기 (18) 댓글:  조회:4616  추천:0  2020-02-08
서유럽 려행기 (18)   빈사의 사자상(濒死狮子像)  4시 40분에 루체른시에 내려와서 루체른의 호프교회 북쪽의 작은 공원 안에 가서 빈사의 조각상을 구경하였다. 빈사의 사자상은  덴마크의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이 설계하고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이 조각했다. 이 조각상은 세계에서 이름난 기념비조각상가운데의 하나이라고 한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립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 이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프랑스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玛丽•安托瓦内特)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였다. 사자의 발 아래에는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여 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하였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조각한 모습에 관광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숙연한 분위기가 흐른다.   빈사의 사자상 빈사의 사자상에서의 유람을 끝내고 우리는 카펠교 부근에 있는 시계상점에 들어가 들어갔다. 래일 이보다 큰 시계상점으로 간다기에 나는 상점을 한번 둘러 본다음 상점부근에 있는 카펠교 구경을 나갔다.   루체룬시가지 건물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루체른시는 루체른 호수에서 로이스강(罗伊斯河)이 흘러나오는 량쪽 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그중 카펠교는1333년에 로이스강에 놓인 다리로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다리로서 길이가 204m에 달하며 원래는 호수로 잠입하는 적들을 감시하기 위한 시설의 일부로 14세기에 지어졌으며 13세기에 건설된 요새화된 팔각형 수상 탑 앞을 지나가는데 눈에 잘 들어오는 우아한 형태로 루체른의 상징으로 되는 명물이다. 카펠교는 오지기와로 경사진 지붕이 기둥에 지지되여 다리를 완전히 덮고 있는 복도모양으로 되였다하여 한어로는 廊桥라고 한다. 다리는 부유한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였으며 다리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붕의 들보에는 루체른의 력사를 나타내는 스위스 력사상 중요한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성인의 생애를 표현한 112점의 삼각형 판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 중에는 17세기 하인리히 베그만의 작품도 10여 점 있다. 카펠교와 수탑(廊桥水塔) 그림은 루체른 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 1726년에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작품을 파괴하는 일을 막기 위해 경비원을 세워야 했고 1741년 홍수가 난 이후에는 다리가 부분적으로 무너져 소실된 그림들을 다시 채워넣어야 했기 때문이였다.  1993년 8월 화재가 발생하여 다리는 거의 모두 파괴되였다. 재건축은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다리는 예전과 완벽히 똑같은 복제품이다. 그림 또한 3분의 2가 파괴되여 화가들이 사진을 참조로 다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 교체 작업은 훨씬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다리옆의 수중에 있는 높이 34m의 팔각형 석조의 ‘물의 탑’은 등대를 겸한 루체른 방위 탑으로 위급할 때에는 시민에게 경종을 울려 알리는 종각으로18세기에는 감시탑, 감옥, 고문실, 금고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였는데 지금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밤이 되면 다리 주변에 조명이 들어와 경관이 아름답다. 기차려행 18일 오전 7시반 우리는 루체룬에서 인터라켄(因特拉肯)을 향해 떠났는데 뻐스를 타고 8시반에 루체룬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9시에 이 역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기차려행을 하면서 인터라켄이란 작은 도시로 가게 되였다.                                                           루체룬 기차역 기차를 타려고 대합실로 들어 가 걸상에 앉았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희귀한 일도 있었다. 아니 글쎄 참새들이 집안에서 날아 다니다가도 우리가 앉은 걸상밑으로도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왔가갔다 하며 뛰여다니지 않겠는가? 모양새는 우리 지방의 참새와 하나도 다른점이 없었지만 사람들과의 경계심은 우리 지방의 참새들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지방의 참새들이 지금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사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농촌에 모두 초가집일 때에는 처마밑에 둥지를 틀고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과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1957년도에 우리 나라에서는 참새전멸운동까지 벌렸으니 말이까. 그러나 이곳의 참새들이 사람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집비둘기처럼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물보호의식에 따른 결과라고 밖에 볼수 없다고 생각되였다.              [다음 계속]  
258    서유럽 려행기 [17] 댓글:  조회:5549  추천:0  2020-02-03
서유럽 려행기 [17]   알프스산맥(阿尔卑斯山脉) 스위스 세관에서 입경수속을 받은 우리는 설산구경을 하려고 알프스산맥에 위치해 있는 필라투스산으로 행했다. 이번에 우리 려행을 하는 나라들은 전부 아프스산맥에 위치해 있는 나라들이다. 하여 가이드는 알프스산맥과 우리가 가려는 필라투스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알프스산맥은 유럽의 중부에 있는 남서쪽 지중해의 제노바 만에서 북동쪽의 빈까지1,200㎞의 활 모양으로 뻗어 있는 산맥으로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서부(프랑스 남동부와 이딸리아 북서부), 중부(이딸리아 중북부와 스위스 남부), 동부(독일,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 알프스로 나누어지며 각각 여러 개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국경에 있는 몽블랑산(勃朗峰, 해발 4,807m)이며 평균 해발고도는 2,500m이다. 3,000m 이상의 높은 고산지대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암석과 만년설이 덮여 있다. 필라투스산(皮拉图斯山) 필라투스산은 스위스 루체른의 남쪽으로 15㎞떨어지 곳에 있는 스위스 중부의 루체룬을 내려다 볼수 있는 알프스산의 봉우리이다. 필라투스산은 여러개의 산봉우리로 되여 있으며 주봉인 톰리스호른봉은 해발 2,132m이다. 필라투스산 이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기원 36년간에 명성이 높은 이스라엘 지역의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당년에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提庇留)가 병이 걸리자 예수를 불러다 자기의 병을 치료하여 줄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예수가 필라투스에 의해 十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것을 알고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고 한다 감옥에 갇히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자살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를 이딸리아의 테베레강에 버리자 인차 무서운 폭풍이 일어나면서 물이 범람하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의 시체를 건져내 라인강에 던졌는데 라인강에서도 여전히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여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먼산(지금의 필라투스산)의 작은 호수에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하였지만 여전히 그의 유령이 란을 잃으켜 광풍이 휘몰아치며 호수의 배를 뒤집어놓았다. 이때부터 이 산을 그의 이름을 빌어 필라투스산이라고 하였으며 중세기까지 당지 사람들은 그의 유령을 건드릴가봐 그 산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금지령이 내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585년에 루체른에 교회에서 일찍 축출당한 한 목사가 한패의 용기있는 촌민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그 유령과 싸움을 벌리면서 호수에 돌을 가득 뿌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호수가 메워지고 그 유령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때로부터 필라투스산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금지령이 취소되였다고 한다. 그 호수도 지금은 말아버린 호수로 있다.   필라투스산   뻐스는 5시간 반 286㎞를 달려 오후 1시 20분에 필라투스산기슭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산기슭으로부터 구름이 꽉 내리드리우고 보슬비까지 오면서 산이 올리다 보이지 않았다. 매우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구름이 꽉 끼고야 어떻게 설산을 구경할 수 있는가? 아세아의 동쪽 중국의 가장 동쪽 끝에서 유럽의 서쪽 나라 스위스에 와서 그렇게 바라던 설산경관을 구경할수 없으니 정말 재수없다. 하필이면 왜 오늘 날씨가 이런가?’ 라며 실망의 소리로 한탄하니 가이드는 ‘그래도 올라가 보자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혹시 설산을 볼수도 있다.’고 우리를 위안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가이드의 안내로 삭도를 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올라갈수록 구름은 떠욱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꼭대기에 거의 오를 무렵 아마 8/10쯤 올랐을가 할때 삭도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면서 푸른 하늘에서 해님이 우리를 반겨 방긋 웃으면서 눈부신 해살를 내리 뿜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기뻐 모두 일제히 “야!” 하고 웨치였다 마치 비행기가 구름층을 뚫고 오르는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하얀 구름층이 우리의 발밑에 있었는데 비행기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구름층을 뚫고 올라오니 발밑이 구름바다였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 삭도에서 내리니 이곳은 해발 2000메터 좀 넘는 산이라 눈이 없었는데 저 멀리 사방에 모두 이보다 더 높은 수십개의 설산봉우리 보이였는데 그야말로 경관이였다. 산꼭대기에는 유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모두 삼삼오오 핸드폰이며 카메라를 들고 저 멀리 설산봉우리와 운해를 배경으로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느라 야단법석이였다. 필라투스산에서 바라 본 알프스산의 설산봉우리들 우리는 산봉우리의 산책로를 따라 한 고패 빙돌면서 설산봉우리와 운해를 구경하였는데 산세가 너무 험한데는 어떤 곳은 안전란간을 둘렀고 어떤곳은 절벽이여서 산책로를 닦을 수 없는 곳은 짧은 산굴을 뚫어 산책로를 닦아놓아 그것도 유람에서의 하나의 경관이였다. 태산이나 말레시아의 운정고원(云顶高原)에서 본 운해서는 설산봉우리들이 없었지만 이 곳에서는 사지장철 녹지않은 무수한 설산봉우리들을 볼 수 있어 더욱경관이였다. 드문드문 이름모를 커다란 산새들이 구름바다우로 날아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날아예는 갈매기를 방불케 하였다. 한국에서 온 한 유람객은 한국의 많은 높다한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을 등산하여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산봉우리들과 운해는 본적이 없다고 하였고 광동성에서 온 한 유람객은 텔레비죤에서나 눈과 설산을 보았을 뿐 이렇게 직적 제눈으로 흰 눈과 설산을 보기는 처음이라고 이번의 유럽유람에 대해 아주 흡족해 하였다. 그렇다 아열대 지방에서 사는 그들이 북방을 오지 않고서는 한평생 눈과 얼음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 희눈과 설산보우리들을 보고 우리보다 더 신기하게 느끼다는 것은 아주 필연적인 것으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리는 한시간 반 가량 여기에서 놀고 산아래로 내려와 4시에 루체른시로 떠났다. 삭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본 필라투스산의 운해         [다음 계속]  
257    서유럽 려행기 [16] 댓글:  조회:5236  추천:0  2020-01-29
서유럽 려행기 [16]    중립국 스위스(瑞士)로 가다 17일 아침 7시 50분에 우리는 스위스의 루체른(卢塞恩)으로 향했다. 루체른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는 스위스와 루체른의 개황을 소개하였다. 스위스는 중앙유럽에 있는 련방 공화국이고 내륙국이며 정식 명칭은 헬베티아 련방이지만 스위스 련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1848년에 스위스련방정부가 수립되였으며 면적은41,284km2이고 인구는 2018년도 통계로 850.89만 명이며 수도는 법률상으로 없으나 베른(伯尔尼)이 사실상 수도 기능을 하고 있으며 베른은 스위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며 최대 도시는 취리히(苏黎世)이다. 스위스는  1815년 빈 회의(维也纳会议)를 통해 영구 중립국으로 인정받았고 이에 따라 유럽 연합(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으며 스위스의 중립 정책에 따라서 많은 국제 기구가 본부를 스위스에 두고 있다. 종족구성으로는 게르만족(65%), 프랑스인(18%), 이탈리아인(10%) 등이며 공용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딸리아어, 로만슈어(罗曼什语)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의 릉선에 걸쳐있어 높은 산과 얼음으로 덮여 있으며 고원과 깊은 계곡, 호수도 많다. 이때문에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발달되였으며 세계 최고의 관광산업국가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으로 시계, 공구 등 정밀기계 산업이 발달되였으며 락농업(乳品农业)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스위스의 락농업   스위스 시계 력사의 시초   스위스 시계 력사의 시초 시발점으로는 바로 종교개혁을 이끈 칼뱅 (加尔文, 1509~1564프랑스 태생의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이다.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종교 박해를 피해 망명 중1536년 제네바에에 입성하여 불과 2년 후인 1538년 기존 교회와의 마찰로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되였다. 하지만 다시 제네바 시 의회의 합의로 1542년돌아와 1564사망까지 제네바의 목사로 살아갔다. 칼뱅교리는 목사로 있으면서 금욕(禁欲主义)를 주장하여 “사치품 금지법”을 내놓아 칼뱅의 금욕주의 여파로 제네바 성 피에르 대성당의 화려했던 벽화와 치장품 모두 없어지고 현재 수수한 모습으로 남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규칙적인 생활과 례배시간 엄수를 위해 "시계"는 사치품에서 제외되였다. 이 소식이 종교박해를 받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신교도 시계제작공들에게 알려지면서 일자리를 잃어가던 제네바의 보석상들과 결합하여 대량으로 시계생산에 들어가게 되였다.   모든 산업 발전에 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듯이 1,2 차 세계 대전으로 그나마 정밀시계를 생산하던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의 시계 산업은 항공 등 정밀도를 요구하는 군수산업 체계로 흡수되면서 그 력사가 끊어지고 중립국으로서의 스위스만 (소수의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 번창하게 되였으며 그후 스위스 시계는 혁신에 혁신을 거듭, 현재 스위스 시계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1970년대까지 전 세계의 시계 과반수를 스위스에서 생산했다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루체른(卢塞恩)   루체른은 스위스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이며 루체른 주의 주도(州都)이다. 면적은24.2 km2이고 인구는 2017년의 통계로7.8만 명 이다. 루체른 호의 서안에 면하며 로이스강(罗伊斯河)이 시내를 흐른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알프스 산맥(阿尔卑斯山脉)의 유명한 필라투스 산(皮拉图斯山) 기슭에 위치하여, 알프스 산맥과 루체른 호(卢塞恩湖)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성당과 박물관을 비롯한 옛 건물도 많이 남아 있다.   루체른   독일과 스위스는 린접된 나라지만 독일의 퓌센(福森)에서 스위스로 가려면 오스트리아의 서북부경내를 경과하여 가는 것이 많이 가까운 거리로 된다. 하여 우리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경내에 들어섰는데 가는 길에 지형을 보면 전부 구릉지대였으며 전부 잔디밭으로 되여 있었으며 드문드문 10여마리, 20여마리씩 되는 소무리들이 보일 뿐 사람은 한명도 못 봤다. 차가 2시간 20분 달려 10시 10분에 스위스경내에 들어서게 되였는데 스위스는 중립국이므로 유럽련합에 속하지 않기에 다른 나라와 달리 세관이 앉아 있었다. 세관이라 하여도 자그만한 2층짜리 농촌집 같은 것이 한채 달랑 있었는데 고속도로 수금소 보다도 통행이 엄하지 않았다.  고속도로 수금소에는 모두 통행차단대가 있어 금액이 지불되여야 통행차단대가 올라가면서 통차가 허락 될 수 있었지만 이곳은 세관이라 하여도  통행차단대도 없이 모든 차량들이 아무런 거침도 없이 나가고 들어 오고 있었다. 아마 이런 차들은 이미전에 다 출입경수속을 밟은 것 같았다.    스위스의 세관   우리 뻐스는 처음으로 스위스로 들어 오는 것만큼 입경수속을 밟아야 했다. 하여 우리의 인솔자가 입경수속을 하려고 차에서 내리니 세관공작인원이 한사람도 없었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토요일이여서 휴식이라는 것이였다. 그러자 내가 “그러면 입경수속이 없이 들어가면 안되는가?”고 하니 인솔자가 말하는 것이 “그래도 되는데 그러다가 만약의 경우에 스위스경찰의 검사에 걸리면 엄청난 벌금”이라는 것이였다. 하여 우리는 스위스 국경의 변두리를 따라 이보다 좀 큰 세관에 가서 입경수속을 하였다. 스위스는 비록 세관이 있다지만 통관검사는 없었다. 매개 사람에 대한 려권검사도 안전검사도 없었고 물건검사도 없었으며 우리는 뻐스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공작인원이 뻐스에 올라와서 사람인수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인솔자가 매개 사람의 려권복사본을 가지고 세관에 들어가 입경수속을 하면 되는것이였다. 인솔자가 입경허가증을 받아가지고 나오자 우리는 시름놓고 스위스 경내로 달리였다.       [다음계속]
256    서유럽 려행기 [15] 댓글:  조회:4722  추천:0  2020-01-24
 서유럽 려행기 [15]  서재에는 탄호이저(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독일의 중세 때에 기사이자 음유시인인 탄호이저가 마녀의 유혹에 빠져 관능의 포로가 되였으나 애인 엘리자베트의 순수한 사랑과 그녀의 죽음에 의하여 령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다.)의 모험담을 그려놓았으며 큰 응접실에는 백조의 기사(중세 유럽에서, 봉건 영주에 딸린 무사) 로엔그린(바그너의 랑만적 오페라)과 그의 아버지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꾸며 놓았다. 4층 음악실 벽에는 성배의 왕인 파르시팔(중세의 아서 왕 전설에서 성배를 찾으러 나선 기사)의 생애를 묘사 한 벽화로 채워졌는데 모두 바그너의 음악에 나오는 인물들이였다. 이런 벽화들을 보노라면 루트비히 2세가 다분히 바그너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벽과 바닥에는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 곳이 없고 푸른색의 둥근 천장은 별들로 장식했으며 붉은 반암으로 만든 둥근 기둥이 그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루트비히 2세의 침실은 특히 호화롭다.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바인슈타인성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성으로 만들기 위해 최고의 가구와 장식을 구입했다. 여기에 당대의 최신 과학기술을 리용한 시설들도 있었는데 수세식 화장실, 중앙난방시설, 음식을 나르는 선반, 엘리베이터 등 전기를 리용한 각종 시설은 물론 전화까지 설치했다. 그리고 뾰족탑, 망루, 인공동굴을 갖추고 있다. 높은 산 우에 세워진  이 성은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전설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성 곳곳에 백조를 주제로 한 구조물이 있어 “백조의 성”이라고도 한다.  루트비히 2세가 바그너를 워낙 총애한 나머지 국고를 랑비하고 바그너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국민들과 궁정 관리들은 바그너를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루트비히 2세는 1885년 바그너에게 바이에른을 떠나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마다 여러 곳에 궁성 건축을 위해 약 150만 마르크를 사용했는데 그 정도로는 그의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루트비히 2세는 국가 예산마저 랑비하게 되고 결국 반대자들에 의해 1886년 6월 9일 금치산자(자기 행위의 결과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일정한 자의 청구에 의해 가정 법원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선고를 받은 자)로 선고를 받았다. 네 명의 정신과 의사는 루트비히 2세를 검사하지 않은 채 정신병자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을 건설하려는 것 자체가 정신병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하여 그는 강제적으로 퇴위당하였다. 정신병자 판정을 받고서 강제로 퇴위당한 후3일 만에 루트비히 2세는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죽음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였으나 실제로는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했다. 루트비히 2세는 성이 관광지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다고 자신이 죽으면 성을 허물어 버리라고 유언을 했고 한다. 당시에는 나라의 재정을 돌보지 않고 성을 짓는 데만 빠져서 ‘미친 왕’이라 불리우며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그는 죽음으로 끝을 맺었지만 성은 허물어 지지 않고 그의 광기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관광명소로 되였고 후손들은 관광 수입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을 보고 있다.   호엔슈방가우 성(旧天鹅堡)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서로 마주 볼수 있는 또 하나의 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호엔슈방가우 성(旧天鹅堡)이다. 호엔슈방가우 성 이 성은  원래 중세 때 지어진 기사(중세 유럽에서 봉건 령주에 딸린 무사)의 성이였는데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다가16세기에 이르러 당시의 기사들이 전부 사망되고 호엔슈방가우 성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게다가 1800년 ~ 1809년 나쁠레온전쟁에서 엄중하게 파괴된것을 왕이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립한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이곳이 지세가 좋다고 하여 1832  ~ 1836년에 걸쳐 신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 성은 실제로 왕 내외의 거처로 사용되였고 루드비히 2세가 이곳에서 자랐는데 그는 이 성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성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하게 되였고 후날 왕이 된 후에도 이곳에 머물며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건설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밤에 본 호엔슈방가우 성   내부의 구조를 보면 지금은 기도대청, 당구유희청, 왕후의 화장실, 왕후 서재, 왕후의 일상생활을 하는 방, 국왕의 탈의실, 침실, 기사방, 응접실, 음악실, 도서실 등이 있다.   기도대청은 원래 무기실과 물마이는 곳이였으나 막시밀리안 2세에 의해 신고딕 양식으로 기도실로 재건되였으며 지금도 여기에서 일요일과 명절이면 성제(聖祭)를 거행한다. 당구유희청은 원래 왕의 접견을 받을 때의 대기실이였으며 이 실내 벽화는 당시의 기사 로엔그린의 전설중의 정경을 그린것이였는데 형식상에서는 랑만주의가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 퓌센에서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호엔슈방가우 성의 관광은 이로서 끝이 나고 호텔로 향하였다.    퓌센호텔            [다음계속]
255    서유럽려행기 [14] 댓글:  조회:4040  추천:0  2020-01-20
서유럽려행기 [14] 독일연방공화국퓌센으로 가다 오후 4시에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떠나 독일의 퓌센을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독일과 퓌센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독일의 정식 명칭은 독일연방공화국(德意志联邦共和国 )이고 략칭으로 독일이라 하며 중앙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독일령토는 357,021㎢ 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인구는 2011년 기준 80,219,695명으로 유럽 련합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공용어는 독일어이다. 여러 개의 독립국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普-法战争)을 거쳐 독일은 최초로 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였으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쏘련의 4개 련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렇지만 랭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 영국, 프랑스 관리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부독일)이, 쏘련 관리지역에는 독일민주주의공화국(동부독일)이 성립되여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였다가1990년에 통일되여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였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였다. 독일과 주변 국가들   독일연방공화국은 16개의 주가 각자 헌법, 정부, 재판소를 두는 련방 국가로서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고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로서 실질적인 정치는 총리에 의해 이루어지며 총리에게는 상당한 독립적 권한이 부여되여 있으며 정부 정책을 주도한다. 수도는 국내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다. 독일은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 G8, G20,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무역기구,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자동차와 철, 강철 제품을 수출한다. 오후 4시에 인스브루크에서 떠나 110km를 두시간 달려 저녁 6시에 독일의 퓌센에 도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길에 국경을 넘을 때에도 길옆에 오스트리아계, 독일계란 국경표시가 있을 뿐 국경검사가 없이 차가 거침없이 내달렸다. 퓌센(菲森) 퓌센은 독일남부 바이에른주(拜恩州)에 위치한 도시로서 면적은 43.52㎢, 인구는 15,265명(2015년 12월 31일 기준)이고 행정 구역상으로는 슈바벤 현에 속한다.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5km 정도이고 레히강(莱希河)을 끼고 있으며 알고이 알프스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뮌헨(慕尼黑)에서 100km 떨어져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新天鹅堡 )바이에른주 퓌센의 동쪽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新天鹅堡)은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路德维希二世1845년 ~ 1886년) 가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罗马式.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발달한 건축 양식. 로마식 둥근 아치, 두꺼운 벽, 높은 탑 따위의 특징을 보인다)의 성이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루트비히 2세(路德维希二世,1864~1886년 재위)는 18세에 바이에른왕국(巴伐利亚王国,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오늘날의 바이에른 주 및 팔츠 지방을 지배하였던 나라)의 왕이 된지 2년 만에 프로이센왕국(普鲁士王国, 1701―1918년, 독일 동북에 있는 왕국, 강국으로 성장하여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후에 독일 제국을 성립시켰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주권을 잃고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되였다. 이러한 정세로 인한 압박감에 본래 심약한 성품이 더해져 그는 고결한 왕들과 강인한 게르만족 신화속의 신들이 사는 바그너 풍의 몽상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理查德德瓦格纳, 1813~1883, 독일의 가극 작곡가)를 뮌헨으로 불러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작곡가 바그너는 빈 체제(1814년에 빈 회의에 의하여 성립한 정치 체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유럽의 현상 유지를 꾀한 국제적 보수적 반동 체제)에 반발하며 혁명에 가담했다가 반역자로 락인 찍혀 10년 넘게 해외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이런 그를 구해준 사람이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다. 어렸을 적부터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던 루트비히 2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그너를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초청해 곁에 있도록 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뮌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바그너 축제극장’을 건설하고 싶다고 루트비히 2세에게 털어놓았다. 밤에 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하여 루트비히 2세는 1868년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교권(종교에서의 권리나 권위)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광적으로 건축에 몰두했다. 그는 단순히 중세의 성을 충실히 재건한 것이 아니라 로마네스크, 비잔틴건축(拜占庭建筑, 4세기경에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발달한 건축 양식. 큰 돔을 얹은 집중식 교회 건축이 특색이고, 내부는 모자이크나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고딕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치게 하였다. 모든 방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特里斯坦与伊索尔德, 바그너가 지은 오페라), 그리고 그 밖의 바그너 주제를 묘사한 조각과 프레스코(湿绘壁画,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의 하나. 새로 석회를 바른 벽에,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수채로 그린다)를 볼 수 있으며 성 전체로 보았을 때에는 중세의 성배전설(圣杯传说, 중세 유럽 전설의 하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성배를 사용하였고, 요셉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성배(圣杯)에 받아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계속]
254    서유럽려행기[13] 댓글:  조회:3642  추천:0  2020-01-12
서유럽려행(13)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가다   이딸리아의 유람을 마치고 16일 아침 7시50분에 우리는 이딸리아의 베로나를 떠나 오스트리아(오지리) 인스브루크로 떠났다. 가이드와 운전수는 아마 려정을 단축하려고 그랬던지 고속도로로 달리지 않고 갈지之자로 알프스산을 톱아 오르고 있었다. 한시간 넘어 달려 산중턱에 거의 다달았을 때 앞에서 도로수리중이라고 차량통행을 금지시켰다. 우리는 할수 없이 원래의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그러다니 길에서 2시간를 랑비한 것이다.     이딸리아 주요 려행지점       이딸리아의 북부에서 중부까지 려행을 하면서 여러곳에서 포도재배를 하는 것을 많이 봤지만 특히 북부에서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평지나 구릉지대에서 포도재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두만강역에서 조선을 건너다보면 경작지가 없어서 산을 뚜지여 밭을 일구는 것처럼 일딸리아 북부에서도 산에다 밭을 일구어 포도재배를 하는 곳이 많았다. 북위 42°인 우리 연변은 10월 중순이면 나무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지만 이딸리아는 우리 연변보다 위도가 4, 5°나 더 높은 곳이지만 지중해의 해양성기후로 하여 11월 중순인데도 중부와 남부는 산에 나무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고 포도넝쿨의 잎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어 산야의 경치를 한결 아름답게 물들였다. 이딸리아의 최 북부에 와서는 나무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노랗게 물든 포도밭   오후 1시 30분에 이딸리아의 북동부의 도시 볼차노(博尔扎诺)를 지나서부터 오후 3시에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알프스산맥의 산골짜기로 차가 달렸는데 골짜기의 량 옆의 산들이 아츨하게 높이 보였다. 뻐스가 이 알프스산맥의 골짜기를 달릴 때에 가이드는 알프스산맥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알프스산맥은 유럽의 중부에 있는 산맥으로서  유럽 중남부에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으며 남서쪽 지중해의 제노바 만에서 북동쪽의 빈까지1,200㎞의 활 모양으로 뻗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서부(프랑스 남동부와 이딸리아 북서부), 중부(이딸리아 중북부와 스위스 남부), 동부(독일,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 알프스로 나누어지며 각각 여러 개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프랑스와 이딸리아의 국경에 있는 몽블랑산(勃朗峰, 해발 4,807m)이며 해발 4,478m의 마터호른马(特洪峰)을 비롯한 지역 대부분은 높은 봉우리와 급경사진 비탈이고 석회암 지역은 거대한 낭떠러지와 협곡이 많다. 산맥의 평균 높이는 1,800~2,400m이며 높은 고산지대(3,000m 이상)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암석과 만년설이 덮여 있다고 한다. 뻐스가 오스트리아 경내에 들어서면서 산꼭대기에 흰 눈이 보이는데가 많았다. 해발 2,700여m의 장백산에서도 여름이면 눈을 볼 수 없는데 이 알프스산에서 눈을 볼수 있다는것은 이 산의 높이가 장백산보다 많이 높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가면서 본 알프스산의 설산   뻐스가 2시반에 오스트리아경내 들어섰는데 국계를 지날 때에 세관도 없었거니와 차량과 사람에 대한 아무런 통관검사도 없이 차는 계속 달리였다. 가이드가 길옆의 패쪽을 가르키며 저것이 바로 국계를 표시하는 패쪽이라고 하였다. 마치 연길과 룡정사이의 연룡도로를 달릴 때에 연길과 룡정의 경계를 표시하는 연길계(延吉界), 룡정계(龙井界)표시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저 영어로 이딸리아계, 오지리계라고 표시하였을 뿐 아무런 구속이 없이 차는 마음대로 달리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련합내에서는 국경지대에 세관도 없고 차나 사람이나 아무런 검사도 없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든다고 하였다.     오스트리아(奥地利)   뻐스가  오스트리아경내에 들어서자 가이드는 오스트리아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중앙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며 면적은 83,879㎢이고, 인구는 약 875만명이다. 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서 시민을 위해 수준 높은 복지를 하는 나라이며 수도  윈은 수년 련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되였다고 한다 . 오스트리아는 중세기말부터 제1차세계대전 결속되기까지는 줄곳 유럽에서는 대국의 하나로 되였으며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왕가(哈布斯堡家族,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최대의 세력을 가졌던 명문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15년 오스트리아제국을 위수로한 독일련방을 성립하였으며 1866년에 해체되고 1867년 웽그리아(匈牙利)와 련합해 오스트리아-웽그리아제국으로 되였다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해체되여 1918년에 오스트리아공화국을 건립하고 1938년 독일에 합방되였으며 1945년 동맹군의 점령을 거쳐 1955년 독립주권을 회복했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며 공용어는 독일어를 사용한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유엔회원국이 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련합(EU)에 가입하였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립국이다. 인스브루크 (因斯布鲁克) 아침 7시 50분에 떠난것이 273㎞의 거리를 길을 잘못들어서 두시간을 랑비하다니 7시간 넘어 달려 오후 3시에야 오지리의 인스브루크에 도착하였다. 인스브루크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주(蒂罗尔州)의 주도(州都) 이며 오스트리아에서 다섯번 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는2016 추계로 130,894명 이며 언어는 독일어이다. 인스브루크는 알프스의 풍경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겨울 스포츠 관광지이다. 1964, 1976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였고 1984, 1988년 동계 국제 장애인 올림픽운동회가 2회 련속 개최되였으며 2012년에는 제 1회 동계 청소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였다. 인스브루크는 바로 알프스산 밑에 있었다. 뻐스에서 내려서 알프스산을 바라보니 산에 구름이 꽉 껴 있었고 구름우로 신기루와 같이 산봉우리가 보였다. 신기루와 같이 구름우에 보이는 산봉우리   인스브루크에서 우리는 황금지붕을 보러 갔다. 황금지붕은 인스브루크 구 시가지에 있는 후기 고딕양식의 건물의 베란다를 덮고 있는 지붕이다. 1420년 티롤(蒂罗尔, 오스트리아 서부의 주)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500년, 당시 이곳에  거소(居所)를 두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马克西米利安一世1832~1867)는  바로 앞의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가 만들어졌고 그 우에 황금지붕이 얹히게 되였다.  이 지붕에는 황금으로 도금된2,738개의 동판기와가 엊혀있다고 한다. 황제이니 광장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이 베란다를 만들었다는 것 까지는 리해가 되나 황금으로 도금한 지붕까지 얹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리해가 되지 않은 일이였다. 이 베란다에는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안해, 재상, 궁중의 광대,  무희들의 모습과 문장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이 집은 1996 년부터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로서 오스트리아의 려행은 끝이 났다. 그저 이딸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길에 들러 본거나 다름없었다.   황금지붕   [다음계속]  
253    서유럽려행기[12] 댓글:  조회:3748  추천:0  2020-01-09
서유럽려행(12)   력사가 유구한 문화유산의 옛도시 베로나(维罗纳)로 가다 4시에 우리는 베니스의 유람을 마치고 출성(出城)하여 우리의 관광뻐스를 갈아타고 베로나를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가이드는 또 베로나의 개황에 대해 소개르 하였다. 베로나는 이딸리아 북부 베네토주 (威内托州) 아디제강(阿迪杰河)류역에 있는 도시이며 전통 미술품과 건축물, 공연예술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이딸리아북부의 주요 관광지이다. 면적은206.63 km2, 인구는 2015년 기준 약 26만 명이다. 베로나는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였고 5세기에 동고트인(东哥特人, 고대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  6세기에 롬바르드인(伦巴德人, 고대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 그리고 774년에 샤를마뉴(夏尔马涅, 800-814 서로마 제국의 황제)에 의해 점령되였으며 12세기 초에 독립 자치제가 되였다. 그후 1405년에 베네치아에 넘어갔고 1797년부터는 오지리 제국의 일부가 되였으며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였다.     에르베광장(百草广场)   5시 반에 베로나에 도착하여 먼저 에르베광장으로 갔다. 에르베광장은 로마제국시대의 공공집회 장소였으며 지금은 정치, 행정의 중심일 뿐만아니라 상업의 중심지로 광장주변에는 큰 상점들이 들어 서 있었다. 광장에는 또 식료품과 의료품들을 파는 로점상들이 많이 들어차 있었다. 이 광장에는 시청사로 사용하였던 종탑이 있는 바로크양식(巴洛克风格,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한 예술 양식)의 마베이 궁전이 있다. 종탑의 높이는 84m로 1172년에 처음 짓기시작하여 1464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종탑에는 네개의 종이 걸려 있으며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1779년에 붙여졌다고 한다. 광장에는 마돈나분수와 유명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들이 있었다.     마돈나분수   줄리엣의 옛집(朱丽叶故居) 에르베광장유람을 마치고 우리는 줄리엣의 옛집으로 갔다. 줄리엣은 이딸리아 베로나의 한 부유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섹스피어(1564-1616. 영국의 극작가, 시인)의 명작 ㅡ 《로메오와 줄리엣》희곡 중의 녀 주인공 인물이다. 섹스피어가 1594년에 쓴 희곡 ㅡ《로메오와 줄리엣》은 서로 적대적인 두 가문에 대한 이탈리아 전설을 기초로 하여 극본을 썼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력사 속에서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사랑이야기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였다고 한다.  줄리엣의 옛집은 에르베광장에서 남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줄리엣의 옛집은 13세기에 지은 오랜 건축물이다. 아치형의 굴처럼 생긴 통로(门洞)으로 들어 서면 2층으로 된 줄리엣의 옛집이 있다.  줄리엣의 옛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로메오와 줄리엣이 만남을 약속한 베란다이다. 당년에 줄리엣은 이 베란다에서 오래동안 서 있었고 로메오는 그 아래에서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며 베란다로 올라가서 절세미인과의 사랑이 시작되였다.   줄리엣과 로메오의 사랑으로 이어졌던 베란다   우리가 갔을 때에 그 베란다 아래와 붉은 벽에 글을 써놓은 종이장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외국어를 모르른 나로서는 너무도 이상하여 가이드와 물어보니 젊은 유람객들이 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자기의 애정과 충성의 마음을 사랑하는 련인 혹은 안해에게 전달하는 내용을 담아서 써 붙인 것이라고 한다. 더욱 많은 것은 마음속에 가장 완미하고 사랑하는 사람 ㅡ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라고 한다. 당지 정부에서는 날로 늘어나는 편지가 전반 벽에 덧 붙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줄리엣구락부”란 조직을 내와 세계 각국에서  사랑의 편지를 써 보내 온 사람들에게 줄리엣의 회답편지를 받도록 지원자들이 전문 줄리엣을 대리하여 회답편지를 써 보낸다고 한다. 해마다 련인절이면 “사랑하는 줄리엣"이란 가장 우수한 사랑의 편지 징집활동도 벌리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넓다고 한다. 줄리엣 옛집 정원에는20세기에 제작된 줄리엣의 전신 동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이 수없이 조각상의 오른쪽 가슴을 어루만지면 사랑에 행운이 따른다는 관습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가슴을 너무 어루만지여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모두 줄을 서서 기다리여 줄리엣의 동상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는데 우리도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려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줄리엣의 옛집참관으로 이딸리아의 유람은 끝났다. 나는 섹스피어가 쓴《로메오와 줄리엣》의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되여 이렇게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가 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으나 중문이나 조선문로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쓴 것을 찾지 못하여 매우 유감스럽다.   줄리엣의 동상   [다음에 계속]
252    서유럽려행기[11] 댓글:  조회:3925  추천:0  2020-01-05
서유럽려행[11]       산 마르코 광장(圣马可广场)  다음으로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산 마르코광장은 베네치아의 가장 유명한 광장으로 베네치아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던 광장이며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건물이 광장의 3면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이여 나폴레옹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고 찬사했다고 한다. 광장에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다는 99m의 종루와 베네치아의 상징인 사자상이 서 있다. 이 종루의 전망대에서 광장 주변은 물론 멀리 아드리아 해(亚得里亚海)까지 보인다. 종탑에서 저 멀리보이는 아드리아해 광장 주변의 건축물들은 모두 베네치아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해 온 력사적인 건물들이다. 광장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과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두칼레 궁전이 있다. 두칼레 궁전 맞은편에는 건축가 산소비노(圣索维诺 1486~1570, 이딸리아 문예부흥시대의 건축가, 조각가)가 설계한 16세기 건물인 마르차나 도서관이 있다. 귀중한 고문서를 포함해 90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이다. 광장 서쪽에는 코레르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의 회화관에서 조반니 벨리니(乔凡尼•贝利尼, 이딸리아의 화가1430년∼1516 )의 (聖母子,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아울러 이르는 말)와 카르파초(卡尔帕乔, 1460~1525 이딸리아의 화가)의 를 볼 수 있다. 산 마르코 광장 설명조   광장에는 유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예거나 광장에 내려 사람들과 아무런 거림감이 없이 주의를 맴돌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먹이를 주면 우르륵 몰켜드는데 그야말로 조류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조류와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관계      산 마르코 대성당(圣马可大教堂)     산 마르코 대성당은 서기 828년, 성인(圣人) 마르코(신약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도의 한 사람)의 유골을 애급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와 도시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납골당으로 세워진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대성당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864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10세기 후반에 일부가 불에 타 버린 것을 11세기에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부는 13세기와 15세기에 증축한 것으로서 산 마르코 대성당은 864년부터 15세기 사이에 점차적으로 완성되였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물로서 건물이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장식되여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건축의 장점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베네치아건축(베네치아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시기의 건축. 처음에는 고딕 건축이였으나 후에는 정면에 울퉁불퉁함이 없이 평탄하며 우미하고 경쾌한 양식으로 변하였다.)이란 새로운 건축 양식이다. 다섯 개의 거대한 돔과 입구 정면의 화려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색상의 기둥과 대리석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플(君士坦丁堡, 지금의 토이기 이스탄불)과 애급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건축 기법과 재료를 리용한 것이고 정문 우에 세워진 성 마가의 말 조각과 입구를 장식한 조각은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성당제단 뒤에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제단 오른쪽 앞에 있는 보물관에는 동방침략 때 략탈해 온 보물과 전리품이 전시되여 있고  성당 안에 장식된 여러 조각상은 로마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에서 구입하거나 전쟁 때 빼앗은 것이고 모자이크 벽화는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계속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산 마르코 대성당은 토이기, 애급을 비롯한 동양의 건축과 로마, 지중해의 건축이 혼합되여 있는 동서양의 건축 기법과 장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웅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여 후날 서유럽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总督宫)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대성당과 함께 베네치아 관광의 중심지다. 베네치아의 권력과 영광의 상징인 이 궁전은 9세기에 베네치아 통치자의 관저로 세워졌는데 몇 차례 화재로 여러 차례 개축을 거친 후 1309~1442년에 완성되였다고 한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외관을 흰색과 분홍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문양으로 장식되여 산뜻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이 궁전은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되였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였으며 지금은 박물관으로 내부가 공개되고 있다. 두칼레 궁전   두칼레 궁전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평의회, 원로원(元老院 ,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립법, 자문 기관. 실질적인 지배 기관으로 내정과 외교를 지도하였다.), 재판소, 감옥, 무기고가 있다. 1층은 사법기관으로 해군 사무실, 배의 설비 사무소 등이 있으며 2층은 총독의 거주지였다. 두칼레 궁전의 호화로운 내부에는 베네치아파 화가들의 회화가 전시되여 있다. 그중 3층 대평의회의 방에 있는 틴토레토(丁托列托, 1518~1594, 이탈리아의 화가)의 벽화 (그가 죽은 후 아들 도메니코에 의해 완성되였다)이 유명하다. 가로 24.65m, 세로 7.45m 크기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우며 분위기를 압도하는 이 벽화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평화에 관한 알레고리(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가 돋보이는 베로네세(保罗•委罗内塞, 1528~1588이탈리아의 화가)의 등 수많은 그림들이 있다. [다음에 계속]
251    서유럽려행기[10] 댓글:  조회:3779  추천:0  2019-12-31
서유럽려행(10)   수상도시 베니스(威尼斯)로 가다 15일 아침 8시에 우리는 피렌체에서 이딸리아 북동부에 있는 베니스로 향해 떠났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또 베니스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영어로는 베니스(Venice), 이딸리아어로는 베네치아(Venezia)라고 하는데 이딸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베네토주 베네치아 광역시에 속하는 도시로서 베네토 주(威内托州)의 주도(州都)이다.  베니스는 중세시대에는 이딸리아 최강의 공화국이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14~15세기에는 동방과의 향료 및 비단 무역을 통해 부유한 해상 무역 국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국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1866년 이딸리아 통일왕국에 합병되면서 지금은 수상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로 아름다운 관광 도시로 유명하다. 베니스의 인구는 2006년 집계 당시 26만 9천명이고 원도심은 륙지로부터 약 3.7 km 떨어져 있으며 베네치아 만(湾) 안쪽의 석호(潟湖, 모래불에 의하여 바다와 막혀있는 바다가의 호수)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가 378개의 다리로 련결되였고 그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여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운하의 공공 교통수단인 수상뻐스는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수상뻐스   뻐스는 세시간에 260㎞를 달려 11시에 베니스에 도착하였다. 베니스에 도착하니 외부의 차들은 일률로 입성(入城)이 금지되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땅이 작고 인구가 많은 이 도시에서 교통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차량제한으로 외부의 차량은 일률로 입성이 금지되고 입성하려면 그 도시의 뻐스를 갈아 타야 한다고 하였다. 하여 우리도 우리의 뻐스에서 내려 그 도시의 뻐스를 갈아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 들어 가서 점심을 먹고 12시부터 유람선을 타고 도심밖의 바다이면서도 호수인 량안의 풍경을 구경하였다. 유람선은 저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 오는데 도심쪽에는 이딸리아 풍격의 각양각색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바다쪽은 드문드문 가다가 여러가지 건물들이 있었지만 울긋불긋 당풍든 여러가지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유람객들로 하여금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도록 하여 “야! 경치좋다.  야! 아름답다.” 하며 저마다 감탄사가 튀여 나왔다. 그러면서 너도 나도 카메라며 핸드폰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이였다. 유람선에서 본 베니스       한시간 가량 걸려 유람선이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4명이 한조로 작은 뽀트에 앉아 수상도시를 유람하였다. 수상도시는 그야말로 집들이 물우에 지어졌고 집과 집사이는 륙로로 이어진것도 있었지만 수로로 이어진것이 많았다. 우리가 뽀트를 타고 유람할 때에 아빠트에서 내리 손을 저어 유람객들에 향해 우의를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올리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뽀트가 아치교 밑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로 다리우에서 우리를 향해 내리 손을 저어 우의를 표시하면 우리도 올리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간단한 손흔들림으로 하여도 당지 사람들과 유람객들 사이, 유람객들과 유람객들 사이에는 백색, 황색, 갈색, 흑색의 서로 피부색갈이 다른 인종, 언어가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른 민족이지만 하나의 지구촌 인류운명의 공동체내에서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바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상도시 베니스(1)     나는 뽀트를 타고 이렇게 베니스 수상도시를 유람하면서 2012년에 동남아 여러개 나라와 지구를 유람할 때에 오문의 베니스휴가촌에 갔을 때의 정경이 다시 떠 올랐다. 오문의 베니스휴가촌에서도 이딸리아의 수상도시를 모방하여 집과 집사이에 세 갈래의 소운하를 만들고 유람객들이 뽀트를 타고 베니스휴가촌을 유람하도록 하였다. 그때의 심정이야 말로 이딸리아의 베니스락원에 와 본다는 느낌에 흥분에 들뜰었는데 ‘오늘은 직접 이딸리아의 베니스의 수상도시에 와서 뽀트를 타고 베니스의 수상락원을 유람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수상도시 베니스(2)        우리는 반시간 넘어 뽀트놀이를 하고 륙지에 올라와서 륙로를 따라 아치다리를 건너면서 베니스수상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며 우리도 다리아래에서 뽀트를 타는 유람객들에게 손을 들어 우의를 표시하니 그들도 역시 손을 저으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베니스는 이런 아름다운 수상도시로 하여 세계 각지의 유람객들을 끌어 들이고 베니스의 수입은 대부분 이 유람업으로 온다고 한다. 수상도시 베니스(3) [다음에 계속]
250    서유럽려행기[9] 댓글:  조회:3678  추천:0  2019-12-28
서유럽려행[9]   〈천국의 문〉산 조반니 세례당(圣若望洗礼堂) 다음으로 우리는 “천국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산 조반니 세례당을 참관하였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피렌체대성당 앞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으로서 현재의 건물은 4세기경에 건조되였던 소성당이 1060∼1150년경에 재건된 것으로서 피렌체의 수호 성인 산 조반니(로마 교황 ‘실베스테르 3세’의 본명)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이 세례당은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성당이다. 원래는 피렌체의 구대성당이였으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건립된 뒤에 세례당으로 되였다고 한다. 이 세례당은 팔각형으로 지은 집인데 그 우에  둥근 지붕을 올려 팔각지붕을 덮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罗马式, 고딕에 앞서 서유럽에서 성행한 기독교 미술 양식. 10~12세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지배적이였던 종교미술양식. 천정은 궁륭식으로 하고 내부에 매우 둔중한 굵은 기둥들을 많이 세웠으며 벽체는 두껍게 하고 거기에 날개벽을 덧붙여 보강하였다. 창문은 좁고 길며 벽, 기둥, 아치 등에 벽화 또는 돋을새김으로 장식하였다.)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이라고 한다. 산조반니세례당   외벽은 백색과 록색의 대리석에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였는데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례당 자체보다 부조(형상이나 무늬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김)가 새겨진 3개의 청동문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제1문 (남문1336년에 완성)은〈세례자 요한의 이야기〉와 가톨릭의 충(忠), 효(孝), 인(仁), 의(義)를 나타내고 제2문(북문1404~1424년에 완성) 에는〈그리스도전〉,  〈사복음서(마태오복음서马太福音, 마르코복음서马可福音, 루카복음서路加福音, 요한복음서约翰福音)기자〉, 〈성자전〉(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신자를 위하여 주로 운문韻文으로 쓴 전기)을 나타내고 제3문(동문1425~1452년에 완성)에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로렌초 기베르티(洛伦佐•吉贝尔蒂, 이탈리아의 조각가1378~1455)가 제작한 동쪽 출입문은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米开朗琪罗,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가 '천국의 문답다'고 극찬했다고 하여〈천국의 문〉이라고도 한다. 내부장식은〈최후의 심판〉( 세계의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인류를 심판한다는 사상)의 대구도를 중심으로 해서 9계단의 천사군天(使群), 〈창세기〉(기독교 모세 오경 가운데 첫 번째 책. 50장으로 구성되여 있으며 천지 창조의 시작, 죄의 기원, 락원 상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생애 따위가 수록되여 있다.)의〈천지창조에서 대홍수까지의 이야기〉, 〈요셉(约瑟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나 그곳에서 오히려 크게 출세하여 후에 곤궁에 몰린 아버지와 형들을 맞아들였다. )의 이야기〉, 〈그리스도전〉, 〈세례요한( 십이 사도의 한 사람)전〉을 나타낸 모자이크( 여러가지 색갈의 돌, 유리, 수지, 나무쪼각, 조개껍질 같은것을 박거나 붙여서 만든 미술작품.)가 둥근천장을 장식했다.  시뇨리아 광장(领主广场) 시뇨리아 광장은 시정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접해 있는 광장으로 13~14세기에 조성되였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베키오 궁전과 더불어 력사 깊은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산책코스이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민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던 곳이다. 베키오 궁전 앞의 대광장에는 코지모 데 메디치( 1389~1464,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주인. 1434년 이래 피렌체를 독재적 권력으로 지배하면서 문인과 예술가를 보호하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의 이  있다. 코지모 데 메디치 청동 기마상 시뇨리아 광장에는 또 수십 개의 조각상들이 유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유명한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1475~1564이딸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의 작품인〈다비드〉(1748~1825, 프랑스의 화가, 나폴레옹의 궁정宮廷 화가로 나폴레옹의 업적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다.)의 모조품과 첼리니(切利尼, 이딸리아의 조각가)의 작품인 메두사(美杜沙,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고르고 세 자매의 막내로,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아테네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뱀이고 메돼지의 엄니와 황금의 날개를 가졌으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였다고 한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려서 죽었다.)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珀耳修斯,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의 청동상, 잠볼로냐(플랑드르 출신의 조각가)의〈사빈 여인의 강간〉 등  문예부흥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조각상1   조각상2 조각상3 조각상4   광장 중앙에는 한때 피렌체를 지배했던 수도승 사보나롤라(萨沃纳罗拉, 1452~1498, 이딸리아의 종교개혁자. 교회의 부패와 메디치가의 전제에 반대하고 신권정치를 단행하였고 로마 교황과 대립하여 처형되였다.)의 처형지임을 알리는 화강암이 서 있다. 나는 이러한 조각품들을 보며 시뇨리아광장은 누구나 편안하게 르네상스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전시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베키오 궁전(维琪奥王宫)     시뇨리아 광장을 상징하는 건물은 94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 있는 베키오 궁전이다. ‘옛날 건물, 혹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의 베키오 궁전은 1314년에 완성된 것으로 오랫동안  관공서로 사용되였으며 지금도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웅장한 외관은 전형적인 중세풍으로 무척 딱딱하고 어둡지만 건물 안은 여러 예술가의 수많은 작품으로 장식되여 있어 부드러움과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 2층에는 ‘500인의 살롱’이란 넓은 방이 있는데 실제로 500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방으로 천장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꽉 차 있었다. 이 방에는 천장화 외에도 바사리(瓦萨里, 1511~1574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의 작품과 미켈란젤로(米开朗琪罗, (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ㆍ조각가ㆍ건축가ㆍ시인)의 〈승리〉 상 같은 그림과 도나텔로(多纳泰洛, 1386~1466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 조각가)의 조각상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관광객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3층에는  마키아벨리(马基亚维利, 1469~1527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외교가, 역사학자)가 일하던 방이 보존되여 있었다. 산지미냐노의 건축과 피렌체의 건축은 다 중세에 시작하였는데 산지미냐노의 건축은 그 시기의 건축으로 머물러 있어 아주 낡고 어두운 감을 주었지만 피렌체의 건축은 하나의 건물에 대하여 몇백년 내려오면서 보완하였기에 맑고 현시대 건물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베키오 궁전   [다음 계속]
249    서유럽려행기[8] 댓글:  조회:3889  추천:0  2019-12-23
서유럽려행(8)   문예부흥의 발원지 - 피렌체(佛罗伦萨)를 가다 14일 아침 우리는 로마를 떠나 문예부흥의 발원지인 피렌체를 향해 떠났다. 달리는 뻐스에서 가이드는 피렌체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피렌체는 이딸리아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의 주도(州都)이고 피렌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2천800명(2015년통계) 면적은102.41 km2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명으로서 토스카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阿诺河)변에 위치해 있으며 력사상 중세, 문예부흥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문예부흥시대의 본 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메디치(梅迪奇,1389~1464. 1434년 이래 피렌체를 독재적 권력으로 지배하면서 문인과 예술가를 보호하여 피렌체를 문예부흥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가문이 다스렸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피렌체(佛罗伦萨1)   피렌체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을 하였으며 번영한 무역업과 중세시대 코무네( 12세기부터 13세기에 이딸리아 북부와 중부에 있던 주민의 자치 공동체. 영주권을 배제하고 주변의 농촌지역까지 지배하는 도시 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금융업의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이딸리아 문예부흥의 탄생지가 되였다.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핵심도시 중 하나라고 말한다. 피렌체(佛罗伦萨2)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都灵, 이딸리아 서북부 포강기슭에 있는 공업 도시. 한때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자동차공업의 중심지로 피에몬테주皮耶蒙特州의 주도州都이다.)를 대신해 이딸리아의 수도기능을 대신하였으며 이탈리아 귀족 력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여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였다. 로마에서 아침 8시 반에 떠난것이 3시간반 북으로 270㎞ 달려 오후 1시에야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피렌체 대성당(圣母百花圣殿) 점심을 먹고 우리는 피렌체 대성당을 참관하였다. 피렌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13세기 말, 이미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점점 붕괴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 시기에 인구가 급증하는 피렌체에서는 원래의 성당이 너무 작았다. 점점 번영하던 피렌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圣彼得大教堂)이나 세인트 폴 대성당(圣保罗大教堂), 세비야 대성당(塞维利亚大教堂), 밀라노 대성당(米兰大教堂)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 하여 피렌체 정부는 산타 레파라타 성당자리에 피사와 시에나의 성당보다 더 큰 새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에 짓기시작해서1349년 대성당 종탑을 완성하고 중심부는 1380년 완성되였고 8각형 돔(圆屋顶)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여 1436년에 완성되였는데 이 돔(내경內经 42m)은 력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서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였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며  문예부흥시대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1469년 8각돔 꼭대기에 구리로 된 구를 설치하면서170여 년간 여러 세대의 피땀의 노력으로 기본상 완성되였으나 전면은 그때까지도 아직 미완성이였다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1)     1864년 대성당의 새로운 전면에 대한 현상설계가 열렸고 공사는 1876년 시작되였으며 1887년 완공되였다고 한다. 실외는 하얀색으로 륜곽선을 두르고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판으로 된 이 고딕 양식(哥特式, 12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생긴 건축 양식)의 전면으로 대성당과 종탑, 세례당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전면이 과도하게 장식되였다는 비판도 있다고 한다.   세개의 거대한 청동문은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의 것이다. 이 문들은 성모 마리아의 삶에서 따온 장면들로 장식되였다고 한다. 전면 우에는 열두 사도(예수가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뽑은 열두 명의 제자)가 있는 틈새(벽감, 조상 등을 두기 위해 벽이 움푹 들어간 곳)가 있는데 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다. 정문 우에는 거대한 시계가 있는데 시계의 네 모서리에는 파울로 우첼로(保罗•乌切洛1397~1475 이탈리아의 화가)가 1443년에 그린 네 명의 복음사가(福音史家, 신약 성서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해 기록한 복음을 기록한 네 명의 사람, 즉  마태오马太, 마르코马可, 루카路加, 요한约翰)의 초상화가 있다. 피렌체 대성당(2)   바늘이 하나인 이 전례 시계는 24시에 해가 질 때 끝나는 시간 주기인 “이딸리아 시각”의 24시간을 보여준다. 이 시간표는 18세기까지 사용되였으며 당시 만들어져 아직도 작동하는 몇개 안 되는 시계 가운데 하나이라고 한다. 피렌체 대성당은 특히 44개의 채색유리창으로 유명한데 이것을 만드는 것은 14세기와 15세기 이딸리아의  채색유리 제조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였다고 한다. 측랑(교회당 건축에서 측면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의 밖에 있는 복도) 안과 익랑(侧廊, 대문의 좌우 량편에 이어서 지은 행랑) 안의 창들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이 묘사되여 있다. 한편 돔의 원통형 안과 출입구 우에 있는 둥근 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묘사되여 있다. 이들 작품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이라고 하다. 이 대성당은 길이153m, 폭이 38m에서 90m에 이르는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측랑에서 아치까지의 높이는 23m이고, 바닥에서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90m에 이른다.
248    서유럽려행기[7] 댓글:  조회:3724  추천:0  2019-12-19
서유럽려행 (7)   가이드는 성 베드로 대성전 오른쪽에 있는 사도궁전을 가르키면서 평상시 교황은 저기에서 자신의 집무를 수행하고 외국에서 온 사절을 맞이하며 바띠까노 시국내에는 하나의 직승기 비행장이 있는데 출국할 때에는 그 비행장에서 직승기를 타고 로마비행장에 내려 거기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출국방문을 한다고 하였다.   방첨탑과 사도궁전   현재의 제266대 교황(2013년 3월 19일 재위)은 남반구, 아메리카 출신인 프란치스코이다. 교황청은 교황을 중심으로 바띠까노시국과 로마 성청을 다스리며 세계 가톨릭 교회 및 교도를 통솔한다.  바띠까노 시국은 독립국가인 만큼 당연히 독자적인 통신, 금융기관, 화폐, 방송국, 군대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바띠까노시국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성직자나 수도자로 이루어졌고 군대는 사도 궁전의 치안을 포함해서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데 100명의 스위스 근위대(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립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스위스에서 용병을 파견한다고 한다.)를 용병으로 쓰고 있다. 중국과 바띠깐과의 관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과 로마교황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다. 그 중요한 원인은 바띠깐노시국은 지금도 대만과 외계관계를 갖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대륙내의 종교를 중국정부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라는 관영단체 산하의 공동체만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로마교황청 측에서는 중국내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를 교황청 관리하에 두어야만 수교가 가능하다는 립장을 보이고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립장을 굽히지 않아 현재까지도 바띠깐노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론의는 진전없다 바띠깐노시국은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중국 교구의 주교 임명권을 바띠깐노시국이 행사하는 것을 중국이 인정할 것 △종교의 자유를 좀 더 폭넓게 허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중국 정부는 △대만과의 외교관계 단절 △종교를 명분삼아 중국의 내정에 간섭 못한다는 립장이다.    중국정부는 중국 대륙 내의 주교 임명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으며 교황청은 이렇게 임명된 주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정부는 " 바띠깐노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종교를 내세워 중국의 내부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바띠깐노시국과 수교할 준비가 되여 있다"고 하였다. 바띠깐노시국은 교황이 거주하는 사도궁전을 중심으로 성 베드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6개의 입구가 있는데 그중에서 성 베드로 광장, 대성당 정면의 종탑 아치, 북쪽 성벽에 있는 바띠깐노 박물관 입구 등 3개의 입구만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여 있다. 그나마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중국과 바띠깐노시국과의 외계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원인으로 중국관관객들에게는 성 베드로 광장만이 개방되였다고 한다. 하여 우리는 이 광장에서 사도궁전, 대성당 등 건물과 광장내에 있는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方尖塔) 등을 볼수 있었으며 여기에서 놀고 사진도 찍었다. 성 베드로 광장(圣彼得广场) 성 베드로(예수를 따르던 열두 명의 제자가운데의  첫번째 제자) 광장은 산피에트로광장이라고도 하는데 바띠깐노시국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바로 앞에 있는 광장인데 최대 5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광장은 이탈리아 바로크양식(巴洛克风格,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류행한 예술 양식)의 거장인 화가, 조각가 베르니니(1598~1680,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하였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으로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圆屋顶)을 머리로 상징하고 반원형의 회랑(回廊) 두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전과 방첨탑   회랑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좌우로 타원이며 좌우 반원씩 서로 대칭을 이루고 좌우 너비는 480m이며 정면 끝은 성 베드로대성당의 입구이다. 성 베드로 광장 량켠의18m 높이의 회랑은 각각 네 줄로 늘어선 284개의 원기둥과 88개의 방주(方柱)로 주랑(柱廊)을 이루고 있다. 주랑 우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圣人像)이 조각되여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加利古拉, 재위 37~41년)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기원40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방첨탑 (方尖塔.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웠던 기념비. 네모진 거대한 돌기둥으로서 우로 갈수록 가늘어지고 꼭대기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되여 있으며 기둥면에는 상형문자로 국왕의 공적이나 기타 도안이 그려져 있다.)가 우뚝 서 있다. 이  방첨탑은 로마로 옮겨진 뒤 경기장에 세워졌으나 후에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西斯都五世, 제227대 교황,  재위: 1585년 - 1590년 )의 지시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방첨탑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历山七世, 제237대 교황, 재위: 1655년 4월 7일 - 1667년 5월 22일) 가문의 문장(紋章. 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지를 도안한 그림이나 문자로 되여 있다. )과 십자가가 장식되여 있는데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이다.  이 거대한 물체를 그때의 기술로 지중해 동남쪽 이집트에서 지중해 서북쪽 로마까지 어떻게 운반해 왔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 베드로 광장   하지만 이 탑을 세우는데는 이런 에피소스가 전해지고 있다. 이 탑을 세우는 작업에 수백 필의 말과 수천 명의 근로자가 동원되였고 굵은 나무와 바줄, 안전목 등이 사용되였다. 무게가 320톤이나 되는 이 거대한 돌덩이를 세우는 것은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였기에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한 마디라도 소리를 낼 경우엔 바로 큰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자 바줄과 바줄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이 붙었다. 그대로 작업을 계속하면 바줄도 끊어지고 탑도 넘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모두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 때문이였다. 그때 한 사람이 “바줄에 물을 부으시오!”라고 외쳤다. 선원이였던 그 남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해결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라 즉시 바줄에 물이 부어졌고 근로자들은 아무 사고 없이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고함을 지른 용감한 선원은 처벌받을 대신 교황으로부터 성지주일(부활절 바로 전의 주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 종려나뭇잎(성지가지)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을 상으로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특권을 누리고 있다. 방첨탑 좌우에는 2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으며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47    서유럽려행기[6] 댓글:  조회:3822  추천:0  2019-12-15
서유럽려행(6)   트레비 분수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저녁 6시에 우리는 바띠까노시국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갔다. 바띠까노 시국(Vatican 市國)은 략칭으로 바띠까노이고 이딸리아의 로마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령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륙국이자 도시국가이다.  바띠까노시는 바띠까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띠까노 평원을 포함하며 면적은0.44km2  즉 북경 천안문광장의 면적과 같으며  인구는2016년의 통계로 842명이다.  바티칸시국의 지도   바띠까노 시국의 령토는 로마의 북서부에 있는 바띠까노 언덕과 그 앞 린근에 성 베드로 대성전, 사도 궁전과 시스티나 경당 그리고 바띠까노 미술관 등의 건물들이 세워진 평원이다. 이 지역은 1929년까지 로마의 보르고 지구의 일부분이였다. 로마시와 분할된 것은 레오 4세(利奥四世,  제103대 교황, 재위: 847년 4월 10일 ~ 855년 )가 테베레 강 서쪽연안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길게 성벽을 쌓아 올린 때부터이며 이후 레오 4세의 벽을 포함하여 바오로 3세(保禄三世, 제220대 교황, 재위: 1534년-1549년), 비오 4세(庇护四世, 제224대 교황, 재위: 1559년~1565년), 우르바노 8세(乌尔巴诺八世, 제235대 교황, 재위: 1623년 -1644년)가 새로 쌓아올린 성채 덕분에 면적이 더 확장되였다. 1929년 라테라노조약(拉特拉诺条约,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과 바띠까노시국 량국이 라테라노 궁전(拉特朗宫)에서 체결한 조약)을 맺으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바띠까노의 령토를 환상선에 의해 둘러싸인 구역을 경계선으로 명시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일부 국경 지역은 벽이 없는 대신 어떤 건물들로 선을 긋는 것으로 대신하였으며 국경의 작은 일부분에는 현대식 벽을 건설하였다. 바띠까노의 령토에 포함된 성 베드로광장은 로마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탈리아 정부와  바띠까노시국은 대체적으로 성 베드로광장 밖의 비오 12세 광장 구역을 가상의 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또한 라테라노조약에 따라 교황청은 이딸리아 령토안에 일정한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카스텔간돌포(冈多菲堡)와 대주교좌 성당들 그리고 로마와 이딸리아 전역에 산재한 교황청 소속의 관청이나 사무소 등으로 이러한 소유지는 외국대사관의 지위와 류사한 치외 법권(다른 나라의 령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국제법에서의 권리)을 누리고 있다. 성 베드로광장은 일반적으로  바띠까노시국과 이딸리아 량국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띠까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였으며 성 베드로(예수를 따르던 열두 명의 제자가운데의  첫번째 제자, 나중에 로마에서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尼禄의 박해로 순교하였다)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맞은편에는 비아 코르넬리아를 경계로 삼아 고대 로마시대의 공동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4세기 초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 언덕은 다신교의 각종 이교 신들을 위한 제단과 무덤, 비문 등이 지어졌다. 이러한 고대의 잔재들은 수세기에 걸쳐 문예부흥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사를 할 때 빈번하게 발견되였으며 교황 비오 12세 치세에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적인 발굴작업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누스(君士坦丁, 중기 로마 황제, 재위 306년 - 337년)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6년 성 베드로의 무덤 우에 최초의 성당인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진 것이 기원이며 5세기 초에 대성전 근처에 교황의 궁전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 건물은1506년에착공되여 1626년에 준공되였으며 초기 르네상스식의 대표적 건축이다.   성 베드로 대성전과 그 앞의 광장   세월이 흐르면서 교황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커져갔으며 19세기 중반에 신흥국가인 이딸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약 천년동안 로마와 그 주변 지역들을 장악해 교황령(教皇国,  로마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령역.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 이후  바띠까노시국을 이르는 말이다.)이란 이름 아래 다스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동안 교황들의 거주지는  바띠까노가 아닌 라테라노 궁전(拉特朗宫 )이였으며 아비뇽유수기(1309년 - 1377년)를 제외한 최근 세기 동안에는 퀴리날레 궁전(奎里纳尔宫)이였다. 19세기 중엽 이딸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창궐하면서 교황청은 차츰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1870년에는 마침내 수도인 로마마저 점령당하면서 교황의 소유지들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되였다. 1861년부터 1929년까지 60여 년 동안 이러한 로마 문제라고 불리는 상태가 유지되였다. 이로 인해 천년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종말을 고하고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의 상층부들은 바띠까노로 대거 피신했다. 이후 교황들은 로마 및 기타 지역에 대한 이딸리아 국왕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이딸리아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당한 요구라며 항의했고  바띠까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교황령이 이딸리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이딸리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교황청의 이딸리아로부터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다. 이딸리아는  바띠까노 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한 무력행사를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퀴리날레 궁전(奎里纳尔宫)을 포함하여 교회 재산의 상당수를 몰수해갔다. 교황령의 마지막 통치자인 교황 비오 9세(庇护九世)는 로마를 잃은 이후 스스로를 ‘바띠까노의 포로’라고 표현했다. 이런 상황은 1929년 2월 12일 이딸리아정부와 교황청 간에 라테라노조약을 체결되면서 종식되였다.     바띠까노 박물관   라테라노조약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알바니아의 군주, 1869년~1947년)와 교황 비오 11세(이딸리아 출신 교황, 1857년 ~ 1939년) 량측으로부터 전권을 이양받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에 의해 각각 조인되였다. 이 조약으로 이딸리아는  바띠까노 시국을 독립국가이며 교황청의 소유와 국제법상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며 가톨릭교회를 이딸리아의 국교로 삼았다.  바띠까노 또한 로마를 수도로 한 이딸리아 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더불어 량측은 라테라노 조약에 반대되는 이전의 모든 법들을 페기하였다. 라테라노 조약은 파시즘 정권이 물러나고 1947년 이딸리아 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채택되였다. 다만 1984년 량측 합의로 가톨릭교회를 이딸리아의 국교로 존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정교 협약으로 수정되였다. 바띠까노 시국은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국가(神权国家)로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 본부이다. 교황은 직무상 바띠까 시국의 국가원수이자 바띠까노 시국의 정부 수뇌자이며 법적으로 교황은 절대 군주에 해당하며 바띠까노 시국의 립법권, 행정권, 사법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교황은 유럽에 남은 유일한 절대 군주이다. 교황은 콘클라베(教宗选举, 교황을 뽑는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 교황이 사망하거나 물러나면 16~19일 사이에 교황청의 시스티나 성당西斯廷小堂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한다.)에서 여든 살 이하의 추기경들이 선출한다.  
246    서유럽려행기[5] 댓글:  조회:3907  추천:0  2019-12-13
서유럽려행(5)   콜로세움 (斗兽场)  콜로세움(斗兽场)은 로마제국 시대에 높이57m, 둘레 527m, 직경이188m, 156m의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인데 고대 로마 유적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경기장으로서 로마의 제5대 네로황제(尼禄黄帝)의 황금궁전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다고 하는데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였으며 노예들은 로마에서 20km정도 떨어진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 왔고 콜로세움은 목재, 응회암, 석회암, 콘크리트, 타일과 같은 재료로 지어졌는데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였으며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维斯帕西安)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인 서기80년에 아들인 티투스(提图斯) 황제때에 준공되였다고 한다. 경기장이 준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100일 동안 계속되였으며 축제에서 티투스 황제가 개회를 선포하였다고 한다.     콜로세움(1)   콜로세움은 5~6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고 4층으로 되여 있으며 80여 개의 아치문을 통해 관중들이 입장하는데 30분, 퇴장하는데 불과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한다. 콜로세움은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1층은 도리아 양식(多立克柱式, 도리스 인들이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 기둥이 굵고 주춧돌이 없으며 기둥머리 장식이 역원추 모양으로 간소하나 장중미가 있다. ), 2층은 이오니아 양식(爱奥尼柱式, 고대 그리스에서 발달한 건축양식. 아테네 전성기 때에 이오니아지방에서 발생하여 1세기가량 성행하였는데 우아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 3층은 코린트 양식(柯林特风格,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발달한 건축양식. 화려하고 섬세하며,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의 기둥과 원형에 가까운 아치로 장식되여있다. 이 경기장에서는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시민들이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자리가 달랐으며 1층은 황제가족과 귀빈, 2층은 기사계급, 3층은 일반서민,  4층은 천민 계급들이나 노예들의 좌석으로 나위여졌다.     콜로세움(2)   이 경기장은 여러가지 경기도 하고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였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剑斗士)와 맹수가 싸우거나 검투사끼리 결투를 벌이는 경기가 주로 열렸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때 콜로세움에서 죽어나간 맹수가 5,000마리가 넘었고 맹수와 싸움을 하거나 검투사끼리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중요한 기념일이나 행사 때는 경기장에 물을 채운 뒤 벌이는 해전게임 같은 특별한 경기도 열렸는데 배를 타고 바다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던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도 실제 전투에서처럼 서로 죽이는 경기를 펼쳤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였으나 검투사가 되면 리득도 있었는데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대접을 받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 3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검투사들의 경기가 계속되다가 450년 호노리우스(霍诺里乌斯) 황제가 이것이 너무 야만적이라는데서 경기를 중지시켜 그러한 경기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후 콜로세오는 지진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부자들이 저택과 궁전을 짓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콜로세움의 대리석과 장식물을 가져다 사용하면서 내부와 외벽 많이 뜯기게 되여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는 못해 아쉽지만 2,000년 전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지금은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 명소로되여 매일 수천명의 관광객이 모여 든다고 하니 그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었다.     콜로세움(3)   트레비분수(特雷维喷泉) 우리는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로마시내에 있는 트레비분수로 갔는데 이때는 이미5시가 넘어 어둠이 깃들었다. 트레비분수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딸리아에는 한 처녀가  로마제국의 제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奥古斯都)가 명한 ‘처녀의 샘’으로 전쟁에서 돌아온 목마른 병사들에게 물을 준 전설이 있는데 트레비분수는 이 처녀의 샘을 수원으로 분수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트레비분수의 중앙에 있는 근엄한 모양의 조각상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波塞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 강, 샘을 지배하는 신)이며, 량쪽에 말을 잡고 있는 두 명의 신은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이다.   분수 왼쪽에 날뛰는 말은 풍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말은 고요한 물을 상징한다. ‘포세이돈’ 옆에 있는 두명의 녀인은 각각 건강과 풍요의 녀신을 상징하고 건물 우부분에 4개의 녀인 조각상은 4계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1)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은 오랜 전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예전 로마제국에서는 전쟁터로 간 남편이나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이곳에 동전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어져 지금은 로마려행 중 꼭 거쳐 가야 하는 동전 던지기 장소로 유명하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하나 던져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두 개가 들어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고 세 개가 들어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던져진 동전은 매일 3,000유로 정도가 트레비 분수대 바닥에 쌓이는데 로마시에서는 매일 밤 이 동전을 수거하여 로마시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쓰고 있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2)   트레비 분수는 높이가 25.9m, 너비는 19.8m로서 로마에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분수라고 한다. 바로크양식(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는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 분수 주위에는 숫한 사람들이 둘러 싸여 있었는데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뿌리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일행가운데서도 동전을 뿌리는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동전을 뿌린다 하여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저 로마에 와서 한번 이런 재미를 보자는데서 뿌렸다.     트레비 분수(3)  
245    서유럽려행기[4] 댓글:  조회:4257  추천:0  2019-12-07
서유럽려행(4)        이딸리아수도 로마로 가다     우리는 이 천공의 성을 다 유람하고 오후 1시에 이딸리아의 수도 로마를 향해 떠났다. 로마로 가려면 120여 ㎞의 거리를 가야 하므로 가는길에 가이드는 먼저 로마명칭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로마신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직 로마라는 도시가 형성되기 전에 지금의 로마린근 지역에는 알바-롱가(Alba-Longa)라는 도시국가가 있었고 그 곳의 왕은 누미토르(Numitor)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왕의 동생인 아물리우스(Amulius)가 왕인 형을 페위시켜 멀리 내쫒아 버리고 스스로 왕이되였다.     왕이 된 아물리우스는 전왕의 공주 즉 자기의 질녀인 리아 실비아(Rhea Silvia)를 협박해서 신녀( 불교를 믿는 녀자)가 되게 하였다. 신녀가 되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후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의 군신 마르스(Mars)가 공주에게 나타나나 실비아와 정을 통한 후 공주는 임신하게 되였다. 후에 실비아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로물루스(Romulus), 둘째아들을 리무스(Remus)라 이름지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아무리우스왕은 질녀인 실비아에게 “쌍둥이 아들들을 상자에 넣어 티베르강台伯河에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주었다. 실비아는 아들을 상자에 담아 강에 버렸다. 아이들을 담은 상자는 물결따라 떠내려가다 강가로 밀려나왔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들은 새끼낳은지 얼마되지 않은 늑대가 그리로 지나다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였다. 얼마후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온 한 목민이 상자에 담겨있는 아이들을 본다. 그는 아이들을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아내와 의론후에 자신들의 아들로 키우게 되였다.     그 쌍둥이 아이들이 다 성장한후 어느날 형의 꿈에 마르스가 나타나 그들의 배경을 말해 주며 “쫓겨난 네 할아버지를 복위시켜라”고 말한후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로물루스는 자기 부모에게 자신의 출생비밀을 묻는다. 대략의 이야기를 들은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 왕을 죽이고 페위된 누미토르를 복위시킨다.     그후 쌍둥이 형제는 현 도성이 좁다고 티베르 강을 중심으로 더 넓고 아름다운 새 도시를 지으려고 나섰다. 그러나 장소선정 문제로 형제의 의견이 대립되면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형이 동생을 살해 하였다. 이후 형은 7개의 언덕이 펼처져있는 티베르강변에 도성을 건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신도시를 ‘로마’라고 명명했고 한다.      1960년 제17회 올림픽운동회가 로마에서 개최되였을 때 로마올림픽을 상징하는 휘장이 바로 암늑대가 두 남자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였다.  제17회 올림픽운동회 휘장      가이드는 다음으로 수도 로마의 개황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로마는 이딸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주拉齐奥州의 주도로서 테베레 강 연안에 위치해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km2, 인구는 290여만명(2014년)이다. 로마는 2,5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력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였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教皇国. 로마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령역.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 이후 바띠까노 시국을 이르는 말이다. )의 수도가 되였다고 한다. 이딸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딸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딸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바띠깐노는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띠깐노 시국은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로마시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력사, 종교, 문화적으로 이딸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오후 한시에 바뇨레조 진에서 떠난 것이 124㎞의 거리를 2시간 달려 오후 3시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콜로세움 斗兽场으로 갔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君士坦丁凯旋门 콜로세움 앞 광장 서쪽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마지막 비 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君士坦丁大帝1세가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황제 막센티우스(马克森提乌斯306~312년 재위)와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315년에 세워졌으며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의 중간에 당시 승리의 환호성을 올리던 군인들이 점령했던 비아 트리움팔리스에 자리 잡고 있다. 개선문은 영원히 남을 기념비로 세워지며 정치적 위력의 과시로 보이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특히 그 기하학적 비례로 눈길을 끈다고 한다. 이 개선문은 높이 21m, 너비 25.7m, 폭은 7.4 m에 달하며 모두 세 개의 아치가 있는데 중앙 아치는 높이가 12 m, 량옆의 아치는 7 m 이다. 이 개선문은 고대 로마 1200년 력사에서 로마의 심장부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현재 로마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개선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량호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다음호에 계속)
244    서유럽려행기[3] 댓글:  조회:4272  추천:0  2019-12-05
서유럽려행[3]     산 지미냐노(圣吉米亚诺) 피사에서의 유람을 마치고 오후 4시반이 되여 인류문명의 유산도시 산 지미냐노(圣吉米亚诺)로 향하였는데 갈지 (之) 자로 높은 령을 톱아 오르고 또 갈지 (之) 자로 그 높은 령을 내려오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아슬아슬하였다. 그러다니78㎞의 길을 2시간 반이 걸려 7시에야 산지미냐노에 도착하였다. 산지미냐노는 이딸리아의 중서부에 있는  토스카나주(托斯卡纳州) 시에나(锡耶纳)현에 있는 천년되는 작은 도시인데 중세기에 번창했던 곳으로서 중세기 건축풍격이 농후한 작은 도시로서 해발 324 m, 면적은 138 km2 , 인구는 7,800명이다. 11세기에서 13세기 무렵, 산 지미냐노는 로마를 왕래하는 순례자들이 거치는 프란치제나 길의 중요한 련결지점으로 되여 농업 생산물, 주로는 건위제, 진정제, 향료, 염료 따위로 쓰이는 사프란(藏红花) 무역과 성지순례길로 번성했다고 한다. 이 도시에는 교황을 지지하는 아르딩헬리(Ardinghelli) 가문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살부치(Salvucci) 가문이 있었는데 이 두 가문이 이 도시를 지배하였으며 서로 경쟁하는 이 두 가문사이에는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였다고 한다. 이 귀족가문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약 72채의 고층 주택을 세웠는데 이 중 몇몇은 높이가 50m에 달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가 끝날 무렵 귀족들은 저마다 요새화 된 탑건물을 지어 70m가 넘는 72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여 이 도시를 탑의 도시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이 높은 성곽을 짓는 경쟁은 마침내 의회가 팔라초 코무날레(지금의  산지미냐노의 시청)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명을 내리면서 자제되였다고 한다. 지금은 14개 탑과 궁전, 교회 등 건물만 보존되여 있지만 봉건시대의 분위기와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중세기 이딸리아 예술의 걸작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였다고 한다. 우리가 본 이 건물들은 다 8, 9백년전의 건물들이였는데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때의 기술로 어쩌면 이렇게 견고하게 지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지방의 건물과 비교 할때 나로서는 리해를 할수 없었다.     밤에 본 중세기 건물   밤에 보다니 이렇게 천년되는 옛도시의 야경은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전반 도시의 경치를 보지 못하는것이 유감이였다. 그래도 이튿날 뻐스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날 때에 전반 도시를 볼수 있어서 좀 유감을 풀수 있었다.     이튿날 이 도시를 떠나면서 본 산지마냐노   천공의 성(天空之城)치비타    13일 8시 반 우리는 산 지미냐노를 떠나 역시 이딸리아의 중서부 바뇨레조(巴尼奥雷焦)진에 있는 천공의 성(공중도시) 치비타(奇维塔)로 향해 떠났는데 178㎞의 길을 3시간 달려 11시 반에야 바뇨레조 진에 이르렀다.  천공의 성 치비타(Civita)는 이딸리아 라치오주(拉奇奥州) 비테를보현에 위치한 인구가 2,000여 명되는 작은 진인 바뇨레조(巴尼奥雷焦)에서 동떨어져 있는 작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고대의 작은 마을이다. 이 천공의 성은 로마로부터 120㎞ 떨어져 있는데 몇백년간 황페한 유령도시로 불리우다가 1986년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감독이 애니메이션 (그림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之城拉普达)〉를 찍을 때 이천공의 성으로부터 령감을 찾았다고 하여 이 작은 마을이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 잃으키면서 지금은 관광명소로 되였다고 한다.   공중도시(天空之城1)   이 마을은 사면이 깍아지르듯 한 산꼭대기의 응회암(화산이 터질 때 뿜어나온 재와 모래, 자갈과 같은 화산물들로 이루어진 암석)우에 집들이 촘촘히 들어 앉아 있었는데 지금 보존되여 있는 집들은 2~3층으로 되여 있었으며 대부분 중세기에 지은 집들이라고 한다.       공중도시(天空之城2)   이 마을과 바뇨레조 진과의 련계는70m 높이에 약 300 m길이의 다리로 되였는데 다리가 좁고 중량감당제한으로 하여 큰 차는 다릴수 없지만 승용차는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다리로 이 공중도시를 건너가기 전에 구름이 이 도시 아래에서 흐르고 있어 이 공중도시가 마치 신기루마냥 구름우에 떠 있는것 같았다. 우리가 다리를 건너면서 사방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20~30분정도 걸어 이 공중도시에 올랐을 때에는 산아래에 약간한  구름이 흐르고 있어 마치 하늘나라에서 천하세상을 내려다 보는 듯 하였다. 위챗에서나 텔레비죤에서 아츨한 절벽우에 집들을 지어놓은 것을 봤는데 이 곳에 와서 직접 제눈으로 그러한 그림같은 것들을 보니 유람객들은 너나없이 “야! 경관이다.” “야! 멋있다.” “야! 정말 하늘공중에 떠있는 도시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면서 서로서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공중도시(天空之城3)   마을의 집들을 보면 대부분 2~3층으로 된 살림집이였으며 마을 복반에는 세인트 도나토 성당(圣多纳托教堂)이 있었는데 큰 마을은 아니지만 성당은 꽤 커 보이였다. 성당 서쪽벽 옆에는 3층 높이의 두배로 되는 성당종루가 공장굴뚝처럼 높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성당앞은 작은 마을 치고 꽤 넓은 광장이 있었다. 이것을 봐도 옛날에도 많은 집회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도나 토 성당   성당안에는 6세기의 순도자(殉道者) 세인트 도나토 (圣多纳托)의 유체를 모시고 있으며 이 지구에서 널리 존경을 받고 있는 3세기 순도자 세인트 빅토리아(圣维多利亚)의 유물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당 오른쪽은 문예부흥시기에 건축된 아레마니궁전(阿勒曼尼宫)인데 몇년전에 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력사는 선사시대(史前时代)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마을 지하의 큰 무덤에서 발굴한 문물로부터, 2,000여 년전에 트루리아 (이탈리아 중서부에 있던 옛 나라)인들이 이미 여기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마을은 또 보나벤투라(波拿文都拉, 1221 ~ 1274.이탈리아 성인으로 중세 최대의 스콜라 철학자의 한 사람)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이 섬같은 작은 마을에는 장기적인 주민호는 10여 가구가 있고 대부분의 집들은 별장으로 사용되여 여름이면 피서도 하고 관광성수기에 부근의 주민호들이 올라와서 숙박업도 하고 교회당도 문을 열고 례배활동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에 교회당도 문을 열었고 유람객들가운데서 예배를 하는사람들도 있었으며 거리 량켠의 여러 집을에서는 관광상품 가게를 꾸리고 관광상품을 팔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