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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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재한 조선족도 사람대접 받아야 댓글:  조회:11044  추천:15  2014-11-19
  한국에 가면 힘들지만 일자리가 많고 돈을 벌기 쉬운 점을 감안해 중국동포들은 지금도 잘 살아보려는 일념으로 코리안 드림을 안고 방문취업제로 한국을 찾고 있다. 한국정부도 국가공무원들도 이런 동포들을 아주 뜨겁게 대하고 동포다운 사랑을 베풀고 있으며 봉사업체의 종업원들도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우리 동포들은 한겨레의 따사로운 사랑을 페부로 느끼며 한국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군한다. 하지만 섭섭할 때도 많았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일만봐도 그렇다. 일부 고용주들은 우리 조선족동포들을 마치 종 부리듯하면서 미개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한 채소농장에 가보았는데 거기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의 기숙사가 바로 채소하우스 안이였다. 주인집 애완견은 주인과 한방에서 같이 먹고 자고 했지만 중국동포들은 짐승자리보다 못한 벼짚우에 자리를 펴고 찜통같은 비닐하우스안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했다. 인격모독이라고 해야할지 참으로 격분할 일이였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다보니 같은 민족이라도 언어차이가 있어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이 때에도 욕을 보는 쪽은 당연히 우리 동포들이였다. 한국의 건설현장에서는 도구를 ‘연장’, 쇠줄을 ‘반생’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조선족들은 연장이나 반생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때가 많다. 그러면 현장담당자는 60세 이상의 고령동포들에게도 “반생도 몰라” 라고하며 반말로 꾸짖고 심할때에는 입에 담지 못할 쌍욕도 서슴치않고 있다. ‘반생’이란 한국어사전에도 없는 사투리를 쓰면서도 우리가 알아 못 듣는다고 욕설을 퍼부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말대꾸를 하면 쫓겨나는 판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꾹 참는 수밖에 없다. 한번은 중국동포까지 다하여 근로자가 7,8명 밖에 안 되는 모 두부공장에서 일하는 한 중국동포가 일이 있어 직접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는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그런데 그 사장은 일개 삯꾼이 어찌 감히 사장한테 직접 전화를 걸수있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동포가 말대꾸를 하자 삯전도 주지 않고 내 쫓으려다 로동부고용지원센터에 신고를 하겠다고 하니 겁에 질려 삯전을 주고 내 쫓았다. 연길에서 간 한 녀성은 서울시 서초구의 한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였는데 음식도 한자리에서 같이 먹을 수 없었다. 과일을 깎아 올려 바쳐도 저들끼리만 먹으면서 하나 먹어보라는 말도 하지않았다. 그리고 어른들이 마구 욕하고 천시하니 아이들도 어른들을 본받아 그 모양새였다. 그야말로 종살이가 따로 없었다.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지만 소수민족이라고 소외를 당하거나 멸시를 당해본적이 없는데 고국이라고 찾아간 한국에서 오히려 일부 고용주들한테서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 물론 전반 한국사회는 중국동포들에게 잘해주는 분위기지만 일부 소기업의 고용주들과 개별적인 사람들은 중국동포들을 무식하고 가난하다고 멸시하며 사람취급을 하지않고 있다. 여러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서로 다른 나라에서 생활을 하지만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동포들은 모두 한겨레며 한 피줄이다. 습근평주석이 지난 한국방문에서 중한 두 나라는 서로 중요한 이웃이고 좋은 동반자이며 좋은 친구라고 말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한겨레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한국정부의 배려하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한국에 가 돈도 잘 벌고 한국의 경제건설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한국의 3D업종에서는 인력을 많이 수요하고 있는데 중국동포들은 돈을 벌수만 있다면 그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지럽고 위험하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만 인격만은 무시당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의 모든 일터에서 기시당하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2014-11-18
202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고 간 자리도 아름답다 댓글:  조회:6631  추천:6  2014-07-16
  여름철만 되면 명절은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 같은 휴일에도 공원, 유원지 등 곳을 찾아 야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친구 혹은 친척, 가족끼리 음식물을 가지고 가서 먹고 마시고 하면서 련휴일을 즐겁게 보낸다.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여유작작하게 즐기는이들을 보노라면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구나 하는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아침산보를 나가보면 전날 먹고 마시고 간 자리가 너무나도 지저분하여 눈에 거슬린다. 숱불에 고기를 구워먹은 자리는 벽돌장이거나 돌덩이 그리고 검은 재가 그대로 남아있고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 음료병, 일회용저가락, 비닐봉지, 휴지 같은 쓰레기들이 도처에 널려있어 아침산책을 하는 시민들의 기분을 흐리운다. 물질문화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시민들의 음식문화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있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시민들의 공중위생의식도 따라가야 한다고 본다. 지난해 8월 5일 중국소비자협회에서는 광범한 소비자들에게 “문명하게 려행하고 리성적으로 소비”할것을 요구하면서 또다시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유치원 코흘리개들한테나 해야 할 교육을 아직도 전 국민을 대상해 해야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현실이 이러하니 어찌하겠는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고 간 자리도 아름답다”란 격언이 있다. 야외식사시 조금만 공중위생의식을 갖추어도 상기의 현상을 극복할수 있다고 본다. 기실 공원, 유원지 같은 곳에는 몇십메터 거리를 사이두고 모두 쓰레기상자들이 놓여있다. 기분 좋게 먹고난 다음 자기 집안이나 마당을 청결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쓰레기를 깨끗이 주어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면 자리를 뜰 때의 기분도 상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안한감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만약 쓰레기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곳을 지날 때 눈에 거슬려보이고 악취가 풍겨올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다시 그곳을 지난다 해도 마찬가지로 눈에 거슬려보이고 악취를 맡게 되여 기분이 나빠질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 혼자서만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사회공동체를 구성하고있다. 이러한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공중위생을 지켜야 할것이다. 그래야만 너도 나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여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에서 기분 좋게 살수 있을것이다. 연변일보 2014-7-16
201    현대고려장 댓글:  조회:8349  추천:8  2014-07-15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6) 주청룡 현대고려장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현대고려장”이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고려장”란 실제 있은 일이 아니라 일제가 조선인들을 비하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란 설도 있지만 여하튼 사전의 해석을 보면 “늙고 병든 사람을 산채로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 두었다가 죽으면 그 속에 매장하였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장에 대하여 여러가지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하여 진 이야기는 옛날에 사람이 나이가 70이 되면 그를 산중에 가져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일흔 살이 되었으므로 늙은 아버지를 버리기 위하여 그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는 약간의 음식과 늙은 아버지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 채 되돌아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라왔던 그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오기에 그는 아들에게 왜 지게를 다시 지고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저도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에 지고 와서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에 그는 크게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간 뒤에 잘 봉양하였다 합니다. 그 후 고려장을 취소하게된 여러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의 하나가 옛날 고려시대 효성이 지극한 아들과 나이 일흔이 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나이가 일흔이 넘으면 고려장을 하는 나라의 법을 따라야 했기에 할 수 없이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들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때에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서 잘 살기를 바라면서 돌아갈 때에 길을 잃을까 걱정되어 쉴 때마다 나무가지를 꺾어놓았으니 그 나무가지들을 살펴보며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에 너무도 감격되여 국법을 어기고 어머니를 도로 지게에 지고 집으로 와서 방구석에 숨겨두고 모시였습니다. 마침 이때에 중국의 황제가 고려에 해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재로 새끼를 꼴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고려의 왕과 대신들은 아무리 사색하여도 방법이 나오지 않아 전국적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방법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나라의 국법을 어기고 어머니를 도로 모셔온 아들이 국왕께 이 문제의 해답을 올렸습니다. 즉 새끼에 불을 달고 다 탈 때까지 다치지 않으면 재가 새끼모양으로 되므로 재로 새끼를 꼰것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고명한 방법이였습니다. 고려왕은 어떻게 되여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는가고 묻자 아들은 사실대로 나라의 국법을 어기고 도로 집에 모셔 온 어머니가 알려주었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왕은 아들의 효성과 늙은 어머니의 지혜에 너무도 감동되여 그 상을 그의 어머니에게 주고 어령을 내려 고려장을 페지하고 로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로부터 봐도 고려장이 살아진지 수백년이 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이 사회에 “현대(판)고려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대고려장”이란 늙은 부모나 자립할수 없는 사람을 사회복지원에 보내였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는것을 말합니다. 모 사회구역의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늙은 부모가 있었는데 령감이 중풍으로 몇 년 앓고 있을 때 전부의 병시중을 로친이 하다가 령감이 몇 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가고 로친도 령감의 병시중으로 너무 지쳤고 나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들어 누워 자립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이 할머니의 병시중은 당연히 아들 며느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러니 아들 며느리는 어머니의 병시중을 하기 실은 것은 물론 자유로운 활동을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토론끝에 어머니를 경로원에 보내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은 매일 마작판으로, 며느리는 매일 무도장으로 드나들고 있습니다. 하여 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조소의 눈길을 받고 있으며 그들은 귀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의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친구 안해는 중풍후유증으로 반신불수로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욕시키고 머리를 감겨주면서 근 10년 되게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의 사례와 아주 대조적 비교가 됩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우의 전설에서 나오는 어머니도 자기를 버리려 가는 자식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 걱정이 되여 쉴때면 나무가지를 꺾어놓았고 자기를 버리고 가는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부모의 자식사랑을 표현한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이 이러할진대 자식들은 응당 늙은 부모에 대하여 효성을 다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립할수 없는 부모를 사회복지원에 보낸는것은 사정에 따라 다르기에 일률로 좋다거나 일률로 나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출근족 가정에 자립할수 없는 부모나 병자가 있다고 할 때 병시중을 하기 위하여 직장을 포기한다면 사회에 대하여 유익한 일도 할수 없고 생활원천도 끊어지기에 할수 없는 사정에서 사회복지원에 보내는 것은 그 가정에서 실제적인 선택이므로 나쁘다고 말할수 없으며 사회의 질책도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우의 첫 사례에서처럼 마작판이거나 무도장을 다니면서 늙은 부모를 경로원에 보낸다는 것은 진짜 “현대고려장”으로서 사회의 질책을 받아야 할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7월 14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3) 주청룡 “헬기”와 “직승기”, “크레인” 과 “기중기”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무턱대고 외래어를 혼용하지 말고 우리말을 쓰자”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느 한 로인 활동실에서 텔레비죤으로 한국 《세월호》려객선침몰사건에 관한 보도를 시청하는데 “헬기”, “크레인” 등 로인들이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나와 “헬기”가 뭐고 “크레인”이 뭔가 하며 서로 묻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국에 로무로 갔다 온 한 사람이 한국에서는 직숭기를 “헬기”라 하고 기중기를 “크레인”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외래어들은 한국에서 쓰는 말이기에 우리로서는 왈가왈부 할것이 못되지만 중국의 일부 조선족매체에서도 한국에서 쓰는 말 그대로 “헬기”, “크레인” 등 외래어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헬기나 크레인은 어디까지나 외래어이지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말에 여기에 상응한 단어가 없는가? 우리말의 고유어는 아니지만 직승기, 기중기 등 한자어로 된 단어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직승기나 기중기는 아주 익숙한 말이지만 “헬기”, “크레인” 등 단어들은 아주 생소한 말들입니다. 이외에도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 ‘띠’를 ‘벨트’, 입장권, 승차권 구매권 등을 말하는 표를 ‘티켓’ ‘열쇠’를 ‘키’ ‘안해’를 ‘와이프’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우리말이 있는 단어들을 하필이면 우리말, 우리글의 순결도를 낮추면서 발음하기도 불편하고 정확히 표기도 할수 없는 외국어나 외래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연변의 한 독자는 조선문으로 된 신문 잡지를 내리 읽다가 가끔 알아보지도 못할 외래어가 나오면 밥을 “먹다가 돌을 씹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40가지 자모로 이루어진(한국에서는 합성자모를 정식자모로 인정하지 않기에 26가지 자모라고 합니다.) 우리글이 그 표기가 제한되여 외국어나 외래어를 원음대로 표기 할수 없습니다. 례하면 우리말에 ‘f’의 발음이 없기 때문에 영어의 ‘fighting’을 어떤 사람들은 ‘파이팅’, 어떤 사람들은 ‘화이팅’으로 발음하고 표기합니다. ‘헬기(helicopter)’나 ‘크레인(crane)’도 원 영어발음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글로는 원 음대로 정확히 표기할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어의 원음도 아니고 우리말도 아닙니다. 조선어는 한자문화권내에 속하며 우리말 단어에서 한자어가 70%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자어도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문자 사용에서 고유어거나 한자어를 쓰는 것은 정상적인 표현수법입니다. 경우에 따라 외래어를 섞어 쓸수는 있겠지만 한국에서 외래어를 혼용한다고 하여 우리도 맹목적으로 순수한 우리말을 버리고 외래어를 혼용할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중국조선족은 우리로서의 언어규범 즉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와 동북3성조선어문협의소조판공실에서 공동 편집한 《중국조선어규범》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대회에서 반포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어문자사업조례》가 있으며 조선어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 14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에서는 매년 9월 2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것들은 우리가 조선어사용에서의 법적의거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도외시 하고 우리글로 정확히 표기할 수도 없는 외국어나 외래어를 우리말에 많이 섞어 쓴다면 우리말의 순결도를 낮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새로운 세대들은 외래어는 많이 쓰지만 그것으로 순화되는 고유어는 생소한 단어로 됩니다. 그래서 기성세대 사람들은 이렇게 몇세대 내려간다면 우리의 고유어가 점차적으로 희박하여지고 우리말의 순결도가 낮아져 우리말은 잡탕으로 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고유어거나 한자어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외래어를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말의 순결도를 높이자면 우리에게 익숙한 말인 우리말의 고유어나 한자어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6월 30일  
199    모아산 두 주차장 사이 도로를 련결했으면 댓글:  조회:7344  추천:30  2014-05-08
연길시 철남시장부근의 철도와 도로 교차지점으로부터 모아산까지의 연남로(원 연룡로)는 원래 연길과 룡정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다. 그후 새로 연길과 룡정사이에 연룡로 1급도로를 건설하면서 원래의 연룡로는 모아산까지 와서 뚝 끊어졌다. 길을 끊어놓은데는 그로서의 리유가 있겠지만 차량과 행인들에게는 막대한 불편을 주고있다.   룡정에서 연길 철남을 가려면 연남로로 해서 가면 거리단축을 많이 할수 있지만 연룡로 1급도로로 해서 가면 많이 돌아가야 하거니와 시간랑비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지금 룡정시의 5선 공공뻐스가 모아산까지 통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5선 공공뻐스를 타고 모아산에 가서 휴식의 한때를 보내거나 모아산에서 다시 연길시의 16선, 21선, 46선 뻐스를 타고 연길로 가기에 하루에 승객이 몇천명이나 된다. 그런데 모아산에서 룡정주차장과 연길주차장사이의 불과 몇십메터밖에 안되는 구간이 끊어져 차량도 못통하고 인행도마저 없어 승객이나 행인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있다.   그 두 주차장사이의 도로를 끊어놓고 그 자리에 무슨 건물을 지으려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을 짓다가 중단된지 몇년째 되도록 그냥 중단된 상태(어떤 곳은 허물어지기까지 하였음)여서 승객이나 행인들의 시선을 흐리우고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건물을 짓다가 만 상태가 양돈장 같아보이기에 “저 돼지굴은 왜 짓다가 마는가?”라고 조소가 섞인 말을 하고있다. 이런 말들은 승객이나 행인들의 불편을 주지 않으면 하지 않을것이다. 길이 끊어지고 그 보기 싫은 건물이 가로 막아 뻐스를 탔던 승객들은 오솔길을 톱아올라 다른 뻐스를 갈아타야 하기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히 오솔길만 톱아오르면 모르겠지만 여기 소나무숲사이에는 많은 묘지들이 있는데 이 숲속에서 소나무를 안고 돌아야 하고 1메터도 되나마나한 묘지사이를 서로 비집고 오르내려야 하기때문이다. 비록 이 묘지들은 건사가 되지 않은것이지만 그래도 만약 묘주들이 알면 기분상하지 않을리 없을것이다. 더욱 께름찍한것은 행인들이 이 묘지사이를 비집고 지나는것을 꺼려한다는것이다.    이 사이를 외국손님들이 아니 다닌다고 말할수 없다. 만약 외국손님들이 이 묘지사이를 비집고 톱아오른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연변의 이미지가 무엇이 되겠는가? 승객들이거나 행인들이 길이 끊기여있는 그 구체 리유나 사연을 모르기는 하지만 하루에도 몇천명 되는 승객이나 행인들이 다니는 이 두 주차장사이를 대형차량이 아닐지라도 뻐스가 통할수 있는 도로, 그것도 아니면 인행도라도 하루빨리 련결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해란강닷컴  
198    농작물줄기를 합리하게 리용못할가? 댓글:  조회:6880  추천:6  2014-04-15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69) 주청룡 곡식줄기를 합리하게 리용못할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곡식줄기를 합리하게 리용못할가?”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봄철에 들어서면서 논과 밭에서 타래쳐 오르는 검은 연기가 온 대지를 휩쓸고 있습니다. 지금 농민들은 한전에서는 옥수수를 이삭만 따고 줄기를 걷어 들이지 않고 수전에서는 벼를 기계수확을 하여 벼알만 거두어 들이고 그 줄기는 모두 그대로 태워 버리는데 이는 막대한 대기오염을 조성할 뿐만아니라 농작물의 생태순환에서 엄중한 악순환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농업의 생태순환이란 농작물이 토양으로부터 여러가지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광합작용을 하면서 생장발육하여 뿌리, 줄기, 잎, 종자, 열매를 맺고 그것들이 다시 여러가지의 경로를 통하여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땅밑으로 들어가서 다시 농작물에 흡수되는 것을 말합니다. 토양은 농작물이 자랄수 있는 여러가지 영양성분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농작물의 씨앗은 토양속에서 발아하여 뿌리가 내리면서부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을 흡수하고 광합성작용을 하여 하나의 식물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토양속의 영양물질들은 제한성을 갖고 있지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수십년간, 수백년간 농작물이 자라면서 토양속의 영양물질만 빨아내고 그만한 영양물질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토양은 척박하여 더는 농작물의 다수확을 확보하기 힘듭니다. 그 영양물질의 보충이란 바로 동물의 배설물이나 식물의 잎, 줄기 등을 썩혀 농가비료를 하여 밭에 내는것입니다.   지난해 11월 15일 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로천에서 농작물줄기를 태우는 것을 금지할데 관한 통지를 발포하였으며 국무원 판공청에서는 《농작물줄기 종합리용을 빨리 추진할데 관한 의견》을 [2008]105호 문건으로 반포하였으며 금년 3월 17일 국가발전 및 개혁위원회, 농업부는 관련부서와 함께 곡식줄기를 합리하게 리용할 협조기제를 건립하여 곡식줄기를 종합적으로 리용하는 사업을 벌릴것을 제기하였으며 환경보호부는 각 지방을 도와 곡식줄기를 태우는 것을 금지하는 사업력도를 강화하는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부분적 지구에서는 곡식줄기를 종합적으로 리용하는 진전이 더디며 줄기를 태우는 현상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연변도 례외가 아니며 곡식줄기를 태우는 현상이 매우 엄중합니다. 곡식줄기를 태우면 재밖에 남는 것이 없는데 그 주요한 성분으로는 탄살칼륨(K₂CO₃)입니다. 이렇게 하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칼륨원소는 해결할수 있지만 여러해 장기적으로 한다면 알칼리성 토양으로 될수 있을 뿐만아니라 나머지 성분들은 연기로 되여 하늘로 날아가 대기오염밖에 조성하지 않습니다. 연기가운데의 이산화류황(SO₂)과 일산화질소(NO)로 하여 산생되는 이산화질소(NO₂)는 유해기체로서 대기를 오염시킬수 있지만 그것이 비료로 되여 땅속으로 들어간다면 농작물이 수요하는 영양원소로 전화할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가을에 옥수수를 뜯어낸 다음 줄기를 매초사료로 하여 소의 사료로 하고 나중에는 소의 분변을 비료로 하여 밭에 낸다거나 늪가스생산설비를 앉히여 옥수수의 줄기를 썰어서 늪까스 생산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다음 그것을 비료로하여 다시 밭에 낸다면 일정하게 생태순환을 시킬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전에도 일부 농촌마을에서 늪가스 생산을 한적이 있지만 그렇게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소규모로 하여 늪가스생산설비를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앉히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것을 대규모로 과학적이고 정밀하고도 공업화한 설비를 앉히고 늪가스생산원료를 농작물의 줄기로 한다면 원료래원을 충분히 해결할수 있고 농촌에서 온돌난방과 주방칸의 에너지 래원도 해결할수 있지않는가 하는생각입니다. 그러면 아까운 곡식줄기를 헛타이 태워버려 대기오염을 조성하는것도 피면하고 그것을 합리하게 리용하여 유기비료도 해결하고 에너지 원천도 해결하여 일거삼득이 되지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곡식줄거리를 어떻게 종합적으로 리용하든지 나중에는 비료로 되여 다시 땅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농업의 생태순환의 한 부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하튼 아까운 곡식줄거리를 헛타이 태워버리지 말고 합리하게 리용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4월 21일 2014년 4월 15일 연변조간신문 해란강닷콤에 게재  
197    현대풍각쟁이 댓글:  조회:9611  추천:23  2014-04-10
풍각쟁이란 사전의 해석을 보면 “구사회에서 시장이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여 돈을 구걸하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또는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한어로는 “卖唱(儿)的”이라고 한다. 사전의 해석을 보면 풍각쟁이란 고상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속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구사회에서 풍각쟁이들을 보면 대부분 일하기는 싫고 하니 자기의 약간의 노래재간이나 간단한 악기를 다루는 재간을 가지고 장마당이나 생일, 결혼, 환갑 등 잔치집들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구걸하였다.   현대사회에서도 풍각쟁이들을 볼수 있는데 대도시를 다니다 보면 거리에서나 지하도에서 기타 같은 간단한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면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간혹 볼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맹인이거나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자들이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또 다른 류형의 “문명”한 풍각쟁이들이 있다. 돌생일, 결혼, 환갑 등 례식장에 가보면 례식사회자의 사회하에 악사가 전자풍금으로 연주를 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것이 례식에서 빼여놓을수 없는 프로이다.  례식장에서 하객들이 노래를 부르는것은 례식당사자에 대한 축하의 의미에서이다. 그렇지만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축하의 의미라고 말하기 바쁘다. 왜내하면 당사자와 가수사이는 서로 이름도 면목도 모르는 사이이기때문이다. 이름도 면목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감정이 있어 축하를 할수 있겠는가? 가수는 노래 한수를 부르고 200~300원(지어 400원을 요구하는 가수도 있다)을 챙긴후 줄행랑을 놓듯이 부랴부랴 례식장을 떠난다. 또 다른데로 돈벌이를 떠나는것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런 가수들을 “현대(판)풍각쟁”이라고 한다.   구사회의 풍각쟁이와 “현대풍각쟁이”의 구별이라면 구사회의 풍각쟁이는 노래를 한 다음 돈을 달라고 구걸하지만 현대풍각쟁이는 좀 문명스럽다. 돈을 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아니 가수가 문명하다기보다 주인측이 더 문명스럽다. 주인측이 먼저 주동적으로 돈을 주니 말이다.   례식장을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을 보면 모두 그닥 명성이 높지 않은 가수들이다. 명성이 있는 가수들은 이런 곳에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것을 낯이 깎인다고 생각한다. 바로 현대풍각쟁이로 되지 않는다는것이다.   예전의 전국체육운동대회개막식에는 유명가수들을 청하였지만 지난해 심양에서 열린 제 12회 전국체육운동대회에서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유명가수들을 청하지 않고 대형 문예공연 대신 국민건강운동을 선보였으며 개막식 노래와 주제곡도 모두 자원봉사자들이 불렀다.    마찬가지로 례식장에 꼭 노래 한수에 200~300원을 주면서 면목도 모르는 가수를 청하여 기형적 소비를 할 필요가 있는가?  오히려 하객들이 나와 자유오락으로 노래와 춤을 추면서 축하한다면 그것이 례식장의 분의기를 더 돋구고 축하의 의미도 더 있지 않는가? 청아한 명가수의 노래가 례식장의 분위기를 더 돋군다면 가수의 직접출연보다 감상효과에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상으로 할수 있는 명가수의 노래록음을 풀어놓아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여하튼 례식장의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관례를 타파할것은 타파하고 비용을 절약할수 있는것은 될수록 절약하면서 기형적 소비를 절제 하였으면 좋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해란강 4월 3일자
196    선진단위 취재, 번다스러운 절차 걸쳐야 하는가? 댓글:  조회:6471  추천:2  2014-03-31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4) 주청룡   선진단위 취재, 번다스러운 절차 걸쳐야 하는가?   3월 21일 연변작가협회와 여러 매체의 기자들로 조직된 력사문화동호회가 모 국가급생태위생향에 가 력사문화탐방을 하게 되였다. 갔던김에 취재를 하여 생태위생향이란 그 향의 면모를 언론매체를 통해 홍보하려 했다. 하여 필자는 향의 지도자를 찾아 우리들의 의향을 말하면서 의향이 있으면 홍보자료를 미리 준비하여 줄것을 부탁드렸다. 향의 책임자는 취재를 하려면 상급 해당 분문의 비준을 받아야 하므로 우리더러 상급 해당 부문의 비준을 받고 오라는것이였다. 그러자 우리가 상급의 청시를 받을것까지 없다. 《국가급생태위생향》이라고 하니 이 향을 전국에 홍보하려는 좋은 뜻에서 였는데 그런 번잡한 절차를 받아야 한다면 취재하지 안겠다》고 하면서 돌아섰다. 뻐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한참 지나서 필자한테 전화가 왔다. 모 시의 모 부문이라고 하면서《오늘 모 향으로 취재하러 갔는가?》고 묻는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였더니 《자기네들도 상급 해당 부문의 비준이 없이는 취재를 허락 못한다면서 취재를 하려면 한급 높은 해당 부문의 비준을 받고 오라는것이였다. 그러면 자기네들이 취재를 허락하겠다.》고 하는것이였다. 필자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 향이 이라고 하니 그 향의 면모를 전국에 널리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여 취재하려는것이지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일거리를 찾아다니는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력사문화탐방만 하고 그 향의 취재를 취소하겠다》고 했다. 필자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몰랐겠는데…그 향에서 상급에 필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준것이 틀림 없다. 향에서,시에서 취재를 거부하는것이 아니라 상급 해당 부문의 비준을 받지 않았으니 취재를 접수 못한다는 뜻이였다. 이 전화를 받고 필자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너무나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진단위, 선진인물을 취재하려면 반드시 상급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가? 어디에 선진단위, 선진인물이 나타나면 두말할것도 없이 그 단위, 그 인물을 찾아가서 취재 하여 널리 선전하는것이 바로 기자들의 기본 직책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국가급 선진단위라고 하니 더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고 작가들이라 좋은 글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는가? 만약 그 향이 시에서도, 주에서도 선진단위로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취재한다면 몰라도 이미 《국가급생태위생향》이라고 국가의 명명을 받았음에도 번다스럽게 이 부문 저 부문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가? 이러한 비준제도는 당의 후설작용을 하는 기자들의 뒤심으로 되는 주추돌로 되는것이 아니라 걸림돌로 된다는 생각이다. 상급 해당 부문에서 당의 언론매체인 신문사, 방송국의 기자들을 이리도 믿지 못한다면 기자들이 어떻게 당의 후설작용을 충분히 발휘할수 있겠는가? 정말로 선진단위, 선진인물을 취재하려면 상급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이런 규정이 있는지? 아니면 기층에서 상급의 규정을 잘못 리해했는지 의문스럽다. 정말로 이런 비준절차가 있다면 당의 기본로선교양실천활동을 통하여 이러한 번다스러운 규정도 취소돼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선진단위의 취재를 하는데 이렇게 번다스러운 절차를 걸쳐야 하는가?”란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3월 21일 연변작가협회와 여러 매체의 기자들로 조직된 력사문화동호회가 모 국가국급생태위생향에 가서 력사문화탐방을 하게 되였는데 갔던김에 취재를 하여 그 향의 생태위생향의 면모를 언론매체를 통하여 홍보를 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틀 먼저 그 향에 가서 향의 령도를 찾아 우리들의 의향을 말하면서 우리의 취재를 접수할 의향이 있으면 홍보자료를 미리 준비하여 줄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니 향의 책임자가 하는 말이 취재를 하려면 상급해당분의 비준을 받아야 하므로 우리더러 상급해당부문의 비준을 받고 오라는것이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우리가 상급의 청시를 발을것까지 없습니다. 우리가 취재를 하려는 목적은 이 향이 ‘국가급생태위생향’이라고 하니 이 향을 매체를 통하여 전국에 홍보하려는 좋은 뜻에서였는데 그런 번잡한 절차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취재를 취소를 하겠습니다.”라면서 돌아섰습니다. 뻐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한참 지나서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모시의 모모 부문이라고 하면서 “오늘 모 향으로 취재를 하려 갔었는가?”고 묻는것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상급해당부문의 비준이 없이는 취재를 허락 못한다면서 취재를 하려면 한 급 높은 해당부분의 비준을 맞고 오라는것이였습니다. 그러면 자기네들이 취재를 허락하겠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 향이 ‘국가급생태위생향’이라고 하니 그 향의 면모를 전국에 널리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여 취재를 하려는것이지 우리가 할일이 없어서 일거리를 찾아다니는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력사문화탐방만 하고 그 향의 취재를 취소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전화가 걸려왔겠습니까?  그 향에서 상급에 저의 전화번호를 알려 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 향에서나 이 시에서 우리의 취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취재를 하여 전국에 홍보를 하였으면 하는 마음이였으나 우리가 상급해당부분의 비준을 맞지 않았으니 취재를 접수 못한다는 뜻이였습니다.  이 전화를 받고 저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너무나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진단위, 선진인물을 취재하려면 반드시 상급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가? 어디에 선진단위, 선진인물이 나타나면 두말할 나이 없이 그 단위, 그 인물을 찾아가서 취재를 하여 널리 선전하는것이 바로 기자들의 기본 직책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국가급 선진단위라고 하니 더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작가들에게서 얼마나 좋은 글들이 나오겠습니까? 만약 그 향이 시에서도, 주에서도 선진단위로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취재를 하여 널리 선전을 하면 몰라도 이미 “국가급 생태위생향”이라고 국가의 명명을 받았는데도 번다스럽게 이 부문 저 부문의 비준을 맞아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비준제도는 기자들이 당의 후설작용을 하는데서 뒤심으로 되는 주추돌로 되는것이 아니라 걸림돌로 된다고 생각됩니다. 상급 해당부문에서 당의 언론매체인 신문사, 방송국의 기자들을 이리도 믿지 못한다면 기자들이 어떻게 당의 후설작용을 충분히 발휘할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선진단위, 선진인물을 취해하려면 상급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이런 규정이 있는지? 아니면 기층에서 상급의 규정을 잘못 리해를 하였는지 하는 것이 의문스럽습니다. 정말로 이런 비준절차가 있다면 당의 기본로선교양실천활동을 통하여 이러한 번다스러운 규정도 취소되여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7월 7일   길림신문 2014년 3월 28일              
195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끝] 댓글:  조회:5607  추천:0  2014-03-10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3-03 10:42:47 ] 클릭: [ ] 국부기념관 계속하여 우리는 국부기념관을 참관하였다. 국부기념관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1866—1925)선생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관으로 대북시 신의구인애로4단(信义区仁爱路四段)505번지에 자리잡고있다. 국부기념관은 총 부지면적이 110,788평방메터, 높이가 30.4메터, 네변의 길이가 각각 100메터인 정방형모양의 중국궁전식 건물로 건축면적은 29,464평방메터이다. 중산기념관 기념관 1층의 중앙대청에는 손중산선생이 쏘파에 앉아있는 동상이 모셔져 있는데 동상의 높이는 5.8메터이고 무게는 17톤이다. 여기에서도 중정기념관과 마찬가지로 륙해공 3군 의장대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 시간마다 교대의식을 하고있었다. 국부기념관 중앙대청 대청 동서 량측에는 국부사적전시관이 있는데 동쪽은 중산선생과 중화민국을 주제로 한 중화민국건립 관련 자료를 전시하였고 서쪽은 중산선생과 대만을 주제로 한 손중산선생의 활동과 대만 관련 활동사적, 진귀한 사료들을 전시하였다. 국부기념관 1층 북쪽에는 2,500 좌석의 대강당이 있다. 강당의 면적은 2,844평방메터로서 중요한 경축행사와 시상식을 진행하며 평일에는 국내외 예술단체가 표현하는 연극, 음악, 무용 등을 공연한다고 한다. 1층에는 또 강연실, 중산강당, 일선책방이 있다. 2층에는 중산국가화랑과 손일선박사도서관이 있다. 중산국가화랑은 국제적인 화랑으로 국제급전시회 및 국내외 예술계에 명성이 높은 유명 예술가의 작품전시회를 자주 개최한다고 한다. 손일선박사도서관은 중산학술사상, 근/현대사, 각 대학의 중산학술과 석/박사 론문, 사회과학 및 대만연구 관련 도서 그리고 신문, 잡지 등이 소장되여 있다. 3층에는 일선예술화랑, 덕명예술화랑과 일선방영실이 있다. 국부기념관을 다 참관하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면세점으로 갔다. 면세점은 전문 경외인원을 대상하였기에 대만의 가이드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면세점에는 전자제품, 시계, 금은보석, 화장품, 복장, 가죽제품, 술, 담배 등 각가지 상품들이 가득 진렬되여 있었다. 나는 대만으로 올 때에 친구들로부터 대만에 가면 대만 특산인 금문고량주(金门高粱酒)를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그 술을 샀다. 금문고량주는 36도로부터 58도에 이르기까지 부동한 도수의 술이 다 있었는데 나는 58도술을 택하였다. 58도술은 한 포장에 750밀리리터짜리 술이 두병이 들어있는데 인민페로 214원이였다. 그것도 해관검사에서 한 사람이 두병 밖에 휴대를 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네병을 샀는데 령수증만 주고 술은 공항에 가서 출경수속을 마친 다음에야 찾는다는것이였다. 면세점에서 산 물건은 일률로 령수증을 갖고 공항에 가서 찾도록 되였다. 그것은 면세점의 상품이 밖으로 나와 당지 사람들에게로 넘어가는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튿날(5월 8일)은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이였다. 우리가 든 호텔은 마침 신북시 만리구(万里区)의 해변가에 있는 비취만휴가촌(翡翠湾度假村)이여서 환경이 아주 좋았다. 호텔내에 온천욕장이 있고 호텔앞은 해수욕장이여서 오전의 활동은 온천욕도 하고 해수욕도 하는 자유활동이였다. 비취만휴가촌 나는 대만에 와서 온천욕이나 해수욕을 여러번 했기에 해변가를 산책를 하면서 비취만의 자연풍경을 감상하기로 하고 연길에서 온 한 친구와 같이 해변가를 산책하였다. 비취만 해변가에서 해변가를 산책하다가 한 낚시군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한어를 하는것을 보고 그 낚시군은 중국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우린 모두 중국사람이 아닌가고 말하자 그는 자기는 대만 본토 사람으로서 종래로 대만을 중국에 속한다고 여기지 않았다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이드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대만에는 3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조국통일을 갈망하고 민진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만독립을 부르짖으며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통일을 하든 독립을 하든 관계치 않는다고 하였다. 총적으로는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것이였다. 가이드는 전적으로 통일을 갈망하는 편이였다. 이번 대만관광에서 인상적인것을 들라면 인구가 가장 밀집된 대북시에 대중교통수단인 뻐스나 승용차가 연길시보다 퍽 적었고 오토바이가 많았다는것이다. 사거리에 붉은 등이 켜졌다가 푸른 등으로 바뀔 때면 오토바이부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대만의 오토바이는 모두 한 공장에서 찍혀 나왔는지 색갈이 조금씩 다를뿐 모두 답판식(踏板式)오토바이였다. 가이드와 어찌되여 차량이 적고 오토바이가 이렇게 많은가고 물었더니 대만은 길이 좁아 차량들이 다니기에 불편하고 주차장도 없어 차를 세워놓을 곳이 없다는것이엿다. 그러기에 교통수단이 오토바이가 가장 적합하다는것이였다. 내가 다녀본 가운데서 길이 가장 좁은 도시는 향항이였고 그다음으로는 대북시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만의 토지는 개인소유이기에 길을 넓히려면 개인들로부터 토지를 사들여야 하고 그러자면 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그렇게 하기 곤난하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1시가 되여 도원비행장으로 향하였다. 《대만지구입출경허가증》은 대만을 출경할 때에는 해관에 바쳐야 한다.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기념을 남기려고 그것을 미리 복사해 거기에 장개령(張凱羚)이라는 자기의 도장과 전화번호를 찍어 넣고 앞뒤면을 비닐박막으로 압착하여 우리에게 주는것이였다. 나도 이후 그와 련결을 하려고 이메일주소를 교환하였다. 비행장에 도착하여 출경수속하는 곳까지 우리를 안내하여 주고 갈라지게 되는 순간 가이드는 눈물이 글썽하여 있었다. 그렇다. 대만에서의 8일,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중국동포라는 믿음으로 8일간 정을 붙이고 함께 유람하면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우리는 석별의 정을 않고 아쉬운 심정으로 갈라졌다. 대만 도원비행장에서 비행기는 오후 3시 20분에 리륙하였는데 나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이번 대만관광으로 하여 흡족한 마음을 안고 기창으로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대만도를 내려다보았다. 《대만이여 잘 있으라! 대만이여 안녕히!》하며 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나의 인사를 뒤로 남기고 비행기는 구름속으로 날아들었다. 비행기는 오후 5시에 광주에 착륙하였고 우리는 이튿날 10시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오후 3시 반에 연길에 도착하였다. 주청룡특약기자 [전문 끝]
194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0] 댓글:  조회:6323  추천:0  2014-03-0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10]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24 10:24:44 ] 클릭: [ ] 대옥보석박물관 800여만원짜리 미륵보살(弥勒佛) 이튿날(5월 7일) 우리는 먼저 대옥보석박물관(大玉宝石博物馆)을 참관하였다. 화련현 수풍향(寿丰乡)의 풍전(丰田)과 서림(西林)지구에 뱀무늬 돌층은 부분적으로 연옥대(软玉带)를 함유하고 있었는데 초기의 저장량이 60만톤에 달하였다고 한다. 품종으로는 주요하게 람석(蓝石), 묘안석(猫眼石), 취옥(翠玉) 7색옥(七彩玉) 등이였으며 통털어 《대만옥(台湾玉)》이라고 하며 그 빛깔이 정밀하고 아름다워 세계 명옥의 하나로 불리우고있다. 2008년 북경올림픽 동메달에 박힌 옥이 바로 이곳의 옥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 때 대만관(台湾馆)의 대리석장식에는 모두 이 화련현의 대리석이 사용되였다고 한다. 화련현은 풍부한 석재와 돌조각예술로 하여 《돌의 고향》, 《돌예술의 고향》으로 불리고있다. 대옥보석박물관에서는 이곳의 아름다운 옥돌을 가공, 수장, 전시판매하고있었다. 박물관에는 수천가지의 옥돌 가공품들이 전시되여 있었는데 크게는 몇톤으로부터 작게는 몇그람짜리도 있었다. 그 색갈 또한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분홍색 등 각가지 색갈로 되여 눈부실 정도였다. 그중에서 크고 가장 비싼것은 황옥으로 조각한 미륵보살(弥勒佛)이였는데 대만화페로 3,980만(인민페로 847만)원이였으며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것은 칠색옥 꽃병이였는데 대만화페로 158만(인민페로 33만6천)원이였다. 칠색옥꽃병(七彩玉花瓶) 우리 팀에서도 인민페로 몇백원에서 몇천원에 이르는 반지, 팔찌, 목걸이 등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연길에서 온 한 녀성은 인민페로 4천원짜리 칠색옥꽃병이 욕심나서 손에서 놓지 못했지만 돈이 아름차서 끝내 사지 못하였다. 그런데 상해에서 온 한 관광객은 칠색옥꽃병을 인민페로 3만 8,000원에 사는것이였다. 경제가 발달한 지역과 발달하지 못한 지역의 차이를 느끼는 대목이였다, 대만에서 최남단인 간정국가공원으로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 오른쪽은 동해안이고 왼쪽은 전부 높다란 산이였는데 바로 중앙산맥이였다. 그러니 평지라고는 찾아볼수 없었고 산과 바다사이에 단 한 갈래의 철로와 한 갈래의 성급도로뿐이였다. 해안의 바위들은 전부 검은 회색이여서 가이드와 물어보니 그것이 바로 산호초(珊瑚礁)이라고 하였다. 기차려행 대옥보석박물관에서 나와 우리는 계속 북상하게 되였는데 이곳 북포(北埔)로부터 소오(苏澳)까지 약 65킬로메터되는 거리는 도로가 너무 험하기에 안전을 위하여 기차를 탄다는것이였다. 부지중 우리가 탔던 뻐스는 어떻게 하는가 하는 부질없는 걱정이 생겼는데 가이드는 우리 생각을 알아맞히기라도 한듯 우리는 지금 역시침 방향으로 북상하고 다른 한팀은 순시침방향으로 남하하는데 이 뻐스는 소오에서 기차로 이곳까지 와서 남하하는 관광객을 받아싣고 다시 되돌아가며 우리는 기차로 소오까지 가서 저쪽 관광객을 싣고 온 뻐스를 타고 대북으로 간다는것이였다. 그러니 뻐스와 뻐스가 서로 손님을 바꾸어 싣고 되돌아서 달리는것이였다. 북포역(北埔站) 우리는 북포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작은 정거장이였다. 기차도 낡은 기차였는데 차바곤 련결부분으로 레루장과 침목이 다 내려다 보이였으며 자칫하면 발이 빠질것만 같았다. 밖을 내다보니 산세는 매우 험하였다. 약 65킬로메터 달리는데 길고짧은 턴넬이 8개나 있었고 크고 작은 다리는 너무도 많아 셀수 없었다. 1시간 20분 달려 의란현 소오에 도착하였다. 소오역 역시 그리 크지 않은 정거장이였지만 그래도 북포역보다는 많이 컸다. 소오역(苏澳站) 기차에서 내리니 수십대의 관광뻐스가 대기하고있었는데 우리는 지정된 뻐스를 타고 대북시로 향하였다.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여기로부터는 대단히 넓은 평원이였다. 이곳은 대만에서 동북부에 속하는데 동부와 북부에서 가장 큰 벌판이라고 한다. 전부 수전이였으며 농촌집들을 보면 농가마다 모두 2, 3층으로 되여 있었다. 대륙의 강소, 절강일대의 농가와 비슷하였다. 이 평원을 지나 신북시(新北市)경내에 들어서면서 점차 산이 많아졌다. 오후 2시가 되여 대북시에 들어섰다. 이렇게 5월 3일 대북시를 떠나 서부, 남부, 동부로 하여 대만도를 한바퀴 돌아 다시 대북시에 돌아왔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 대북시에 돌아와 우리가 향한 곳은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대만에서는 총통부라고 함)였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는 대북시 중정구중경남로(中正区重庆南路)와 개달격란대로(凯达格兰大道)가 교차되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대만 강점시기 대만총독부청사로 지은것이다. 총독부는 1912년 6월 1일에 착공하여 1915년 6월에 주체공사가 완성되고 몇년의 시공을 거쳐 1919년 3월에 마침내 준공되여 일본의 대만총독부로 사용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미군의 폭격으로 많이 훼손되였다고 한다. 대만광복후 대만성행정장관공서(行政长官公署)에서는 이 《총독부》를 장개석의 생신 60주년을 맞이하여 1946년에 수건을 시작하여 1948년에 준공한후 정식으로 《개수관(介寿馆)》으로 명명하였다. 1949년 장개석정부가 대북에 이주하여 장개석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면서 대만에서 명의상의 《중화민국총통부》로 되였으나 간판은 그냥 《개수관》으로 있다가 2006년 민진당이 집정하면서 진수편의 지시에 의하여 간판을 《총통부》로 고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주체건물이 5층이고 중앙탑이 12층으로 높이가 60메터인데 원래의 설계는 6층이였으나 일본식민통치의 권위를 돌출이 하기 위하여 12층으로 높이였다고 한다. 이 청사는 몇곳에 보초병은 있었지만 담장은 없었으며 청사앞에서 마음대로 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대만당국지도자사무청사앞에서 [후일 계속] 주청룡특약기자
19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9] 댓글:  조회:6484  추천:0  2014-02-24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9]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17 10:00:00 ] 클릭: [ ]   북회귀선기념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또 다시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여 태로각국가공원으로 향하였다. 태로각국가공원을 가려면 2시간 넘어 걸린다면서 가이드는 대륙의 가요프로를 틀어놓았는데 텔레비화면에 제일 첫 곡으로 우리 나라에서 대형행사를 할 때마다 부르는 《오성붉은기 휘날리고(五星红旗迎风飘扬)》라는 노래가 나왔다. 대만에서 이 노래를 들으니 대륙에서 들을 때와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대륙에서 들을 때에는 그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정도였지만 대만에서 듣는 순간 부모처자를 대륙에 두고 장개석을 따라 대만에 온 국군장병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름할수 없는 애절함에 목이 메였다. 그토록 대륙을 그렸고 또 죽어서도 고향땅에 돌아가지 못한채 외로운 이 섬에서 무주고혼이 된 국군장병들을 생각하니 그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억제할수 없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노래는 《남니만》, 《연안송》 등 항일가요와 현시대 가요들이 있었는데 번체자가 자막으로 나오는걸 보면 대만의 민간에서는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린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가이드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뻐스안은 춤판으로 번져갔다. 가이드는 주동적으로 대륙동포들을 끌어안고 춤을 추었는데 대륙동포를 끌어안은 그의 심정은 아주 격동되였다. 그리고 팽려원이 《전우여 안녕!》이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자 《우리의 국모가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고 말하면서 더욱 격동된 모습이였다. 나는 가이드의 일거일동에서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태로각국가공원(太鲁阁国家公园) 노래와 춤판으로 시간이 가는줄 몰랐는데 어느덧 태로각국가공원에 도착하였다. 태로각국가공원(太鲁阁国家公园)은 대만의 유명한 관광명소로서 대만 동부 화련현(花莲县), 대중시(台中市), 남투현(南投县) 이 3개 행정구내에 있다. 공원내에는 대만에서 첫 갈래로 되는 동서를 가로 찌르는 중횡공로(中横公路: 대만 동부와 서부를 이어놓는 공로로, 해발 3000메터의 중앙산맥과 협곡을 가로 뚫고 지난다.)가 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대리석 협곡이며 20킬로메터의 길이로 길게 뻗은 U형협곡이 있으며 립무계(立雾溪)가 주류로 흐르고 있으며 공원 총면적은 92,000헥타르로서 옥산 다음으로 대만에서 두번째로 큰 공원이라고 한다. 태로각국가공원에는 연자구(燕子口), 구곡동(九曲洞), 장춘사(长春祠) 3개의 경승지가 있다. 연자구는 U형 협곡으로 량안은 깎아찌르는 벼랑으로 되여 있으며 기봉이 하늘 높이 솟아 산세가 높고 험하다. 협곡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물안에서 밖을 내다보는듯한 감을 느낀다. 벼랑밑은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대리석으로 된 암석에는 여러가지 아름다운 무늬가 나 있었다. 절벽에는 또 동굴이 가득하여 제비들이 이곳에 와서 둥지를 틀고 하늘을 날아예며 고요한 협곡에 생기를 보태여 준다고 하여 연자구(燕子口)라 부른다고 한다. 연자구(燕子口) 연자구에서 차를 타고 더 앞으로 가면 구곡동(九曲洞)에 이른다. 구곡동은 더욱 험준하여 사람을 경악하게 한다. 구곡동에는 오솔길이 있는데 여러개의 동굴과 공로를 이어져 동굴안에 동굴이 있고 동굴밖에 기이한 경치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룬다. 그런대로 연자구는 겨우 차량으로 이동했지만 구곡동은 길이 있어도 차를 드리댈수 없다. 길 오른쪽은 곧바로 깎아지르는 절벽이기때문이다. 너무 위험하여 모두 내려서 걸으면서 자연경관을 감상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너무 험하여 관광객들이 여기를 지날 때에는 안전모를 써야 한다. 구곡동(九曲洞) 구곡동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의 태로각 맞은켠 벼랑에 장춘사(长春祠)가 있는데 장춘사에는 중횡공로 시공과정에 순직한 225명의 병사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서 그들의 위패(灵位)가 모셔져 있다. 이곳의 길은 모두 깎아 찌르는듯한 절벽가운데 있으며 국민당 로병들이 1956년 7월에 시공하여 1960년 5월에 통차하기까지 3년 9개월이 걸렸으며 턴넬을 뚫고 길을 닦았는데 마치 당년의 우공이산과도 같았다고 한다. 턴넬을 뚫을 때에는 병사들은 마치 사자입안의 고기덩이 신세로 수시로 삼키울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중횡공로(中横公路)턴넬 당나라 풍격의 장춘사는 태로각 협곡의 벼랑에 들어 앉아있으며 아담하면서도 장엄하게 건축되였고 새맑은 광천수가 벼랑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와 일년 사계절 《장춘폭포》로 비단필을 드리워 중횡공로의 경관으로 되고있다. 장춘사는 1958년에 건설되였는데 1979년에 지진으로 하여 붕괴되자 3년후에 수건하였고 1987년 제2차 지진으로 완전히 붕괴되자 이듬해에 원래의 지점에서 왼쪽으로 옮겨 다시 건축하였다고 한다. 장춘사를 올라가는데는 갈지자(之)형의 길이 있으며 380개의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관음동(观音洞)에 이르는데 굴안에는 관음석불(观音石佛)과 중횡공로의 시공전체지도(施工全图)가 있다. 풍경이 수려한 장춘사(长春祠) 아미문화촌 태로각국가공원을 다 구경하고 계속 북상하면서 아미문화촌에 이르렀다. 아미문화촌(阿美文化村)은 화련현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촌에는 높이가 22메터 되는 높다란 신상(神像)이 있었는데 관광객들은 그 신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아미족의 가무표현 타미무(打米舞)   촌에는 또 아미족(阿美族:고산족의 한개 족군)의 원시가옥, 관광기념품, 장식품, 대리석그릇, 일용품, 복장, 토산물, 고기잡이공구, 고산족들이 가장 일찍 고기잡이에 사용하던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아미족의 전통 가무표현도 있었는데 혼례무, 농경무, 타미무(打米舞), 아리족의 영웅기개를 표현한 영웅무 등 표현이 있어 유람객들이 아미족의 문화에 대하여 료해할수 있었다. 주청룡특약기자 [다음 계속]
192    공무차량사용에서의 두세대 간부들의 대조적 비교 댓글:  조회:6757  추천:20  2014-02-20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1)      주청룡 공무차량 사용에서의 두세대 간부들의 대조적 비교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공무차량 사용에서의 두세대 간부들의 대조적 비교”라는 내용으로 말씁드리려 합니다. 국가 재정부, 국가 발전개혁위원회와 국가통계국의 조사에 의하면 목전 당정기관과 행정사업단위의 공무차량 총수량은 200여 만대에 달하고 매년 공무차량소비지출이 1,500만 억 ~ 2,000억 원(병원, 학교, 국유기업, 군대 및 편제를 초과한 차량을 포함하지 않음)에 달하며 매년 공무차량구매지출이 20%씩 증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무차량이 많이 늘어난데다가 공무차량관리가 규범화 되지 못하여 일부 간부들은 공무차량은 관원의 신분과 대우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공과 사의 구별이 없이 개인의 일에도 꺼리낌없이 공무차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치랑비와 특권의식은 인민군중들의 강렬한 불만은 자아내여 당과 정부의 형상에 엄중히 손해를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번 기자가 장춘시 모 소학교문 앞에서 하루아침 조사한데 의하면 제집 아이를 학교까지 실어다 준 공무용차가 160여 대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와 선명한 대조로 되는것은 1977년초, 호요방동지가 중앙당학교 상무부교장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호요방의 부인이 손자가 갑짜기 열이 몹씨 올라 급히 병원에 가야 했기에 호요방의 전용차를 쓰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호요방동지는 “이 차는 나의 공무용차요. 내가 공무집행시에 쓰는 차이므로 개인일로 쓸수없소. 밖에 공공뻐스가 있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면 되지 않소?”라고 딱 잘라 말하며 공과 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당정기관 절약실행 랑비반대 조례” 제 25조에는 공무차량에 대하여 “사회화, 시장화 방향을 견지하고 공무차량제도를 개혁하고 공무차량실물 배급방식을 개혁하며 일반공무차량을 취소하고 공무교통비보조금을 적당히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몇 년간 편제외의 공무차량이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공무차량지출은 공무교통비보조금의 몇십배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하기에 일반공무차량을 취소하는데 대하여 군중들은 아주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세기 80년대에 연변농학원의 장기건원장은 그의 행정급별에 따라 고급승용차가 배당되여 출퇴근도 승용차로 하게끔 규정되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휘발유를 절약하기 위하여 퇴직할 때까지 날마다 보통 교원, 종업원들과 함께 통근뻐스에 앉아 출퇴근하였습니다. 얼마나 대중화한 간부였습니까? 그리고 “당정기관 절약실행 랑비반대 조례” 제27조에는 “공무차량은 엄격히 규정한 년한에 따라 갱신해야 한다. 갱신년한이 되였으나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은 반드시 계속 사용해야 하며 지도간부 직무승급, 전근 등 원인으로 앞당겨 갱신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남경군구 모부《주덕경위퇀》은 1985년부터1993년까지의 8년사이에 선후로 다섯 명의 정위가 바뀌였지만 모두 제1임 정위가 남겨놓은 자전거를 타고《하향》하였다. 그러나 한 시기 일부 지방에서는 새로 령도가 바뀔 때마다 공무차량도 한 단계 높은 차로 바뀌였습니다. 하여 백성들은 “우리 단위에 새로 령도가 왔으니 또 차도 더 고급으로 바뀌겠구나.” 라는 조소가 섞인 말도 있었습니다.  현대화한 시대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공무를 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근검소박한 절약정신을 본받아 엄격한 규정에 따라 공무차량을 갱신해야 하고 공무차량사용에서 공과 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공무차량은 공무수행지에만 사용하여야 한다는것입니다. 기실 차가 나빠서 사업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차의 좋고 나쁨을 자기의 지위와 상등하게 대하여 차가 좋은 것이면 자기의 지위가 높고 차가 나쁘면 자기의 지위가 내려가는걸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당의 군중로선교육실천활동을 통하여 해당부문에서는 “당정기관 절약실행 랑비반대 조례”를 엄격히 관철집행하여 공무차량관리를 잘하고 우리의 령도간부들은 로일대 혁명간부들의 근검소박한 사업작풍을 따라배워 틀거지를 버리고 대중화한 간부로 되기를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려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5월 5일   2014년 2월 19일길림신문      2014년 3월 5일 연변조간신문 해란강닷컴                         
191    아직도 공금으로 유람을 하다니! 댓글:  조회:6900  추천:10  2014-02-18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오늘의 화제》 시리즈 록음방송(70) 주청룡     아직도 곻금으로 유람하다니!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아직도 공금으로 유람을 하는가?”하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개혁개방 30여 년래 당정기관, 사업단위의 사업내용과 형식이 풍부하고 다양해졌습니다. 이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함으로 하여 많은 사회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과 내용가운데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는 일부 부정기풍도 존재하여 왔습니다. 이런 부정기풍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변칙적인 공금유람이였습니다. 일부 지도간부들은 참관, 학습이란 턱을 대고 공금으로 전국 각지를 유람하고  “출국고찰”이요 하면서 외국려행을 하였지만 실절적 내용이 없는 학습과 고찰이였기에 실제효과는 하나도 없고 머리속에는 명승지인상뿐이고 그들의 가방에는 관광쇼핑물과 기념사진만 꽉 차있으니 이거야말로 “개대가리를 내걸고 양고기를 파는”격이 아니고 뭔가? 그래서 모 단위의 공회주석은 “‘서기’, ‘장’자가 붙은 ‘나으리’들은 유람길에 흥이나고 우리 공회주석들은 화장터﹝본 단위의 가속이거나 관계단위에 사망자가 나면 공회주석이 화장터로 간다﹞다니기에 바쁘다오.”라며 유모아적으로 불만을 터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가 밀접하여지면서 형제단위요, 자매학교요 하면서 한국의 일부 기층단위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이러한 자매결연들을 보면 일부 단위에서는 사업상의 실질적 교류를 진행하면서 아주 의미있게 보내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업상의 실질적 교류보다도 한국측에서는 중국측의 요청으로 연변에 와서 장백산유람이 목적이였고 중국측의 목적은 한국측의 요청으로 한국유람을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사업교류가 없는 결연이였기에 서로간의 관광목적이 달성되면 그 결연의 활동도 흐지부지하게 되고 나중에는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고 맙니다. 하기에 군중들은 “이런 자매결연은 본 단위에는 조그마한 리득도 없고 지도간부들이 공금으로 출국관광을 할수 있는 기회밖에 조성하지 않았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아갔습니다. 18차 당대회 후 당중앙에서는 사업작풍을 개진할데 대한 “8항규정”과 “6항금지령”을 발표하였으며 지난해 11월 중공중앙, 국무원에서는 “당정기관 절약실행 랑비반대 조례”를 인쇄 발부하여 각 지역, 각 부문에서 진지하게 관철집행할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조례의 제13조에는 “공무목적이 불명확한 출장, 관광활동을 엄금하며 공무출장과 관광을 리유로 변칙적으로 관광하는 것을 엄금하고 타지방부문간의 실질적 내용이 없는 학습교류와 고찰, 현지조사를 진행하는 것을 엄금한다.”고 하였으며 제15조에는 “배려식이거나 실질적 내용이 없는 일반 출국방문 또는 고찰식 출국방문을 조직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당중앙의 “6항금지령”에는 또 “공금으로 산수풍경을 감상하거나 개인 휴가려행을 하거나 출국(경)려행을 하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당중앙의 사업작풍을 개진할데 대한 “8항규정”과 “6항금지령”이 반포된 후 백성들은 두손들어 찬성하고 각급 지도간부들은 사업작풍을 개진하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단위의 지도간부들은 고찰을 한다는 명의로 공금으로 유람을 다니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보도를 듣고 놀랐습니다. 일전 심양시규률검사위원회는 군중의 제보에 근거하여 시사법국에서 지난해 11월, 26명 기관간부를 조직하여 고찰을 한다는 명의로 규정을 어기고 공금으로 합비, 천진, 하문 등 9개 도시를 돌면서 산수풍경을 감상하면서 유람을 한 문제를 조사하고 엄숙히 처리함과 동시에 전시에 통보하였습니다. 지난 해 6월부터 당중앙에서는 당의 군중로선교육실천홛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가운데서 솔선적으로 당의 규률을 준수하고 법을 집행하여야 할 사법기관 간부들이 공금으로 유람을 하면서 산수풍경을 감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간부들에 대하여 백성들은 너무나도 실망을 가지지 않을수 없습니다. 백성들의 순박한 마음은 당의 군중로선교육실천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간부들이 백성들이 믿을수 있는 간부로, 백성들을 위한 간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4년 4월 28일 2014년 2월 17일 길림신문 2014년 3월 5일 연변조간신문 해란강닷컴
190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8] 댓글:  조회:6168  추천:0  2014-02-1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8]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2-06 10:03:48 ] 클릭: [ ] 기려산호박물관(绮丽珊瑚博物馆) 이튿날(5월 6일), 우리는 먼저 대동역 맞은켠에 있는 기려산호박물관(绮丽珊瑚博物馆)을 참관하였다. 기려(绮丽)란 아름답다는 뜻이므로 아름다운 산호박물관이라고 리해하면 될듯싶다. 박물관 해설원의 소개에 의하면 세계에서 산호는 주로 지중해, 미드웨이섬(中途岛: 북태평양의 작은 산호도)해역과 동남아해역에서 나는데 세계 80%의 산호가 대만에서 나며 대만의 80% 산호가 대동에서 난다고 한다. 산호는 10년에 1센치메터씩 자라고 300년에 1킬로그람씩 증가되며 일반적으로 몇백년, 지어 몇천년 자라야 하나의 나무가지 모양으로 된다고 한다. 대만산호는 품질이 좋기에 거의 99%가 수출되며 《산호왕국》의 칭호를 받는다고 한다. 홍산호(紅珊瑚) 비록 산호는 산호충의 분비물로 형성된것이지만 고대 로마사람들은 일종 재화를 막고 사람에게 지혜를 갖다주며 지혈과 열을 제거하는 기능을 갖고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산호를 불교칠보(七宝)가운데의 하나로 넣기도 한다. 때문에 산호는 장식물과 일종의 길상물로 패용(佩戴)되고있다. 남산호(蓝珊瑚) 이 박물관에 전시된것은 110메터~1800메터의 심해에서 캐여낸 산호들이였는데 진홍색, 분홍색, 자색, 남색, 록색, 황색, 백색 등 여러가지 모양을 가진 가지각색의 산호들이 다 진렬되여 있었다. 황산호(黃珊瑚) 산호박물관내에는 또 산호장식품 상점도 있었다. 상점에는 산호를 가공한 여러가지 장식품들이 진렬되여 있었는데 푸른색 목걸이는 3만 7000원(인민페), 붉은색 목걸이는 12만 3400원(인민페)이였다. 우리 팀에서도 몇백원 혹은 1~2천원씩 하는 목걸이와 팔찌를 사는 녀성들이 적지 않았으며 안해에게 대만기념 선물로 사는 남성들도 있었다. 연길에서 간 한 녀성은 친정어머니께 드리려고 1500원짜리 홍산호목걸이를 샀는데 산 다음에 생각하여보니 시어머니가 알면 언짢게 생각할가봐 시어머니것도 똑같은걸로 샀다고 했다. 기관(奇观) 산호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대동현 동하향 도란촌(台东县东河乡都兰村)으로 갔는데 이곳에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奇观(기관)》이라고 씌여진 비석에는 《‘사람은 올리 톺고 물은 내리 흐른다.’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믿지 못하겠으면 여기에서 한번 감상하시라.》 라고 씌여 있었다. 기관 비문 이곳에는 농경지에 물을 대는 한갈래의 물도랑이 있는데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물이 올리막으로 거꾸로 흐르고있다.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올리 흐르고있었다. 자연현상으로 말하면 이는 어떻게든 성립될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사람의 눈에 물이 올리 흐르는것으로 보이는가? 가이드도 물이 거꾸로 흐를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그 현상에 대하여 해석은 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확실한 답안을 내놓지 못하였다.   물이 올리 흐르고있다   나도 정말 의혹스러웠다. 하여 어찌하여 이런 현상이 생길수 있는가 하면서 지형을 관찰하여 보니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물도랑이 사람의 시각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리막이였으며 같은 방향으로 물도랑 오른쪽은 경사도가 강한 내리막길이였다. 이렇게 보면 아래에 내려와서는 길과 물도랑사이의 상대고도는 매우 차이가 많았는데 물도랑이 길보다 많이 높았다. 이리하여 길과 물도랑 사이에서 보면 시각적으로 물이 올리 흐르는 착각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누가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여전히 수수께기로 남을수 밖에 없다. 북회귀선 표지탑 다음은 계속하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북회귀선 표지탑을 구경하는것이였다. 차가 화련현 풍빈향(花莲县丰滨乡)에 이르렀을 때 높다란 흰 원주형 탑이 보였는데 운전수가 차를 그곳에 세웠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그 탑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바로 북회귀선표지탑이라고 하였다.     북회귀선 표지탑 지구에서 북위 23°27′선을 북회귀선이라 하고 남위 23°27′선을 남회귀선이라고 하는데 태양이 하지에 북회귀선에서 직사를 하고 동지에는 남회귀선에서 직사를 한다. 바로 이 회귀선을 계선으로 온대와 열대가 갈라진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바로 북회귀선이 동서로 지나는것였다. 그러니 우리가 서있는 곳의 북쪽은 온대에 속하고 남쪽은 열대에 속한다. 그러므로 지금 북회귀선 우에 서 있는것도 이번 대만관광에서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한가지였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대만에는 북회귀선표지탑이 모두 3개인데 하나는 서반부의 가의현 수상향(嘉义县水上乡)에 있고 다른 두개는 동반부의 화련현 서수향(瑞穗乡)과 풍빈향(丰滨乡)에 있는데 우리가 보는것이 바로 풍빈향의 북회귀선표지탑이였다. 풍빈향의 탑은 높이가 20메터인데 탑에는 세로로 《北回歸線(북회귀선)》란 네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탑 밑부분에는 《北纬(북위)23°27′4.51〃》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40분간 놀면서 북회귀선 기념탑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후일계속] 주청룡특약기자
189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7] 댓글:  조회:6033  추천:0  2014-02-0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7]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27 11:04:08 ] 클릭: [ ] 간정국가공원(垦丁国家公园) 이튿날(5월 5일), 우리는 대만 최남단인 간정국가공원(垦丁国家公园)으로 갔다. 간정국가공원은 병동현(屏东县)경내에 위치한 항춘반도(恒春半岛)에 자리잡고있다. 륙지면적은 18,084헥타르이고 해륙총면적이 33,249헥타르로서 모두 열대에 속한다. 간정국가공원은 삼면이 모두 맑고 푸른 바다이며 동쪽은 태평양, 서쪽은 대만해협, 남쪽은 바스해협(巴士海峡)과 잇닿아 있으며 지질변화가 복잡하여 관광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간정국가공원 묘비두(猫鼻头)풍경구는 서쪽끝에서 뿔처럼 남쪽으로 바시해협을 향해 뻗어 나왔고 아란비(鹅銮鼻)공원은 동쪽끝에서 남쪽으로 바시해협을 향해 뻗어 나왔는데 뿔모양으로 된 이 두 곳은 대만도 최남단이 된다. 묘비두풍경구 묘비두(猫鼻头)풍경구는 대만해협과 바시해협의 분계점에 있으며 묘비두에는 바다절벽에서 떨어져 내린 산호초암이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고양이가 쫑그리고 앉아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묘비두라고 하였단다. 묘비두는 전형적인 산호초해안침식지형으로서 산호초들이 지각운동으로 하여 해면에 로출되여 장기적으로 파도에 씻기고 풍화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둥, 그릇, 주름치마, 동굴 등 기이한 모양을 이루어 산호초해안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묘비두픙경구 묘비두 대만의 최남단인 간정국립공원은 유명한 풍경구라 볼것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하루로 제한되여 그곳을 일일이 다 돌아볼수 없었다. 하여 서쪽끝에 있는 묘비두공원에서 자연경관들을 감상하면서 여러가지 배경을 선택하여 멋진 포즈를 취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기였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동쪽끝에 있는 아란비공원으로 가면서 창밖으로 공원해안의 자연경관들을 감상하였다. 묘비두공원과 아란비공원사이는 만(湾)으로 되여 있었는데 이것을 남만이라고 불렀다. 륙지와 바다사이는 대부분 벼랑으로 되여 있고 바다의 산호초로 형성된 기암괴석과 수백종의 열대식물들이 서로 어울려 바다가 없는 우리 북방의 연변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하여 모두 《야~ 경치가 좋구나!》 《야! 멋있다!》는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아란비공원 뻐스가 아란비공원에 도착하여 공원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오후에는 아란비공원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실컷 놀았다. 공원에는 산호초, 석회암이 사처에 널려있고 기암괴석이 가득하였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연변사람들에게 이런 기회가 몇번 찾아오랴.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모두들 물속에 첨벙첨벙 뛰여들었고 나름대로 자맥질에 흥이 났다. 헤염칠줄 모르는 사람들은 옅은데서 물장난을 하였고 헤염 깨나 하는 사람들은 좀 깊은 곳에 들어가서 헤염재간을 피웠다. 그런데 한 사람은 계속하여 헤염쳐 들어갔다. 너무 안으로 깊이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은 저러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인젠 그만 들어가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 사람은 정말 헤염재간이 대단하였다. 몇백메터 헤염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나왔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였는데 그 사람은 아무일도 없는듯이 태연스레 오래간만에 이렇게 헤염을 쳐 본다면서 자못 흐뭇해 하는것이였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본래 어릴때부터 도문의 두만강가에서 살았으며 헤염재간을 많이 익혔다고 했다. 아란비공원 아란비등탑 공원안에 있는 아란비등탑은 아란비의 표징이였다. 19세기 중엽에 각국의 배들이 아란비의 근해를 오가면서 암초에 부딪쳐 자주 전복되군 하였다. 청정부는 미, 영, 일 렬강들의 압력하에 1883년에 아란비등탑을 웠는데 당시에는 세계상의 유일한 무장등탑으로 되였다고 한다. 갑오중ㅡ일전쟁(1894년)후 청군이 철거하면서 이 등탑을 폭파하였는데 1898년에 다시 건축하였다. 대만팔경 아란비 표지석 등탑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무장등탑으로서 백색의 원주형철탑으로 되여 있으며 높이가 24.1테터이고 둘레의 길이가 110메터로 모두 5층이다. 1층은 석유를 저장하고 2층은 그린포(格林炮)를 장치하고 3층은 휴게소며 4층은 용림포(榕林炮)를 장치하고 5층에는 광원(光源)이 있다. 아란비등탑은 포대(炮台)로 되였는데 탑을 둘러싼 담벽에는 화구들이 있었으며 담벽 주위에는 또 전호(战壕)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군의 포격을 당해 파괴된것을 후에 신식 대형 4등급 회전식 렌즈전등으로 수건하여 10초에 한번씩 번쩍거리는데 비추는 거리는 27해리(50킬로메터)이며 목전 대만지구에서 불빛이 가장 강한 등탑이라고 한다. 온천수영장 간정국가공원에서 실컷 논 우리는 오후 4시가 되여서야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다. 저녁 7시 반이 되여 대동현(台东县)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숙소를 잡은것은 바로 온천호텔이였다. 호텔은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산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을 끌어들여 온천욕장, 온천수영장을 만들었단다. 이 호텔에 들게 되면 온천욕, 온천수영은 면비로 되여 있어 우리팀원들은 모두 저녁식사가 끝나자 려로의 피로를 풀기 위해 온천욕장으로 갔다. 욕장과 수영장은 모두 호텔 뒤울안에 있었는데 온천수는 몇길 잘 되는 절벽에서 넓다란 폭포수로 떨어졌다. 그전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온천욕을 하였지만 로천온천욕장은 처음이였다. 지난 해 금강산에 가서도 온천욕을 하였는데 로천온천욕장이 있다고 하면서도 개방은 하지 않아 매우 서운하였는데 이번에 대만에 와서 산에서 직접 퍼붓는 온천폭포를 맞으면서 온천욕도 하고 수영도 하니 기분이 한결 더 좋았다. [후일 계속]
188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6] 댓글:  조회:6212  추천:0  2014-01-2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6]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22 11:51:44 ] 클릭: [ ] 오전에 아리산 관광이 끝나고 오후에는 남하하여 고웅시로 갔다. 고웅시로 가면서 보니 대만의 서해안은 평원이 많았는데 벼농사가 위주였다. 대북의 논에는 벼가 모살이를 방금 끝내고 분얼하는 시기였는데 중부에 이르니 벼모가 우썩 커있었고 좀더 내려가니이삭을 올리밀기 시작하더니 남부에 이르니 벼이삭이 누렇게 되였다. 대만섬의 남북의 길이는 400킬로메터도 되지 않지만 벼의 생장차이가 이렇게 큰것을 보면 남북의 기온 차이가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와 물었더니 남북의 기온차이는 보통 3,4도 혹은 4,5도 차이가 나며 북부는 2모작, 남부는 3모작을 한다고 소개하였다. 고웅시(高雄市) 뻐스는 3시간가량 달려 4시에 고웅시에 도착하였다. 고웅시에 들어서면서 대북시와 많이 다르다는 감이 들었다. 대북시는 거리가 좁고 오랜 건물들이 많아 좀 어두운 느낌이라면 고웅시는 거리가 넓고 새로운 건물들이 많아 아주 깨끗하였다. 대만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고웅시(高雄市)는 2010년 12월에 원 고웅시와 고웅현을 합병하여 면적이 2,947평방킬로메터, 인구가 278만에 달하며 당전 대만경내에서 면적이 제일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직할시다. 고웅은 19세기말에 항구를 건설하였고 일제통치시기에 항구도시와 군사요충지로 발전, 20세기중엽 후에는 대만 남부의 정치, 경제, 교통중심으로 되었다. 지금 고웅시는 중공업을 위주로 한 중요한 항구도시이며 대만남부에서 바다길로 통하는 대문으로 되고 있다. 고웅시에 들어서서 우리는 애하(爱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애하량안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애하우에 가로 놓인 다리, 애하량안의 유보도 그리고 고층건물과 나무숲은 애하량안의 경치를 한결 더 아름답게 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애하는 고웅시를 동서로 가르면서 고웅항으로 흘러들었다. 고웅시의 음료수는 주로 이 애하의 물로 해결하기에 이곳사람들은 애하를 생명의 강이라고 부른다. 서자만에서 상해지식청년을 만나다 우리는 애하를 건너 항구가 있는 서자만(西子湾) 갔다. 서자만은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였다. 동쪽은 그리 높지 않은 반달모양의 산이였는데 산에는 빠나나를 비롯한 이름 모를 열대식물들이 가득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층집들이 들어섰는데 상점, 사찰, 영국령사관 관사 등이 있었고 벼랑같이 생긴 산 밑에는 한갈래의 넓은 길이 있었는데 길 한 가운데는 노란색으로《國立中山大學》(국립중산대한)이라고 새긴 적갈색의 커다란 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탑에서 길을 따라 약간 굽이돌아 들어가면 바로 중산대학이라고 한다. 길 서쪽이 바로 서자만인데 서자만이 바로 고웅항이였다. 고웅항 서자만은 유람객들로 붐비였다. 우리는 산이며 부두며 중산대학 간판으로 세워진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거기에는 우리 팀 외에도 대륙의 길림, 산서, 광서, 상해 등 여러 지방에서 온 관광팀이 있었다. 나는 서자만의 경치를 다 구경하고 걸상에 앉아 쉬면서 옆에 앉은 60대의 남성과 이말 저말 대화를 나누었다. 상해에서 왔다는 그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길림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길림 어디에서 왔는가고 바싹 묻는것이였다. 내가 연변에서 왔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알고보니 그는 지난 세기 60년대에 연변에 하향했던 상해지식청년이였다. 그는 자기 옆에 앉은 녀인을 가리키면서 자기들은 부부간인데 자기는 화룡현 남평에 하향하고 안해는 룡문에 하향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변은 자기들의 제2고향이며 연변에서 온 나를 만나니 매우 반갑다는것이였다. 그렇다! 그시절 그들은 어린 나이에 연변의 농촌마을에 내려와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연변에 대해 짙은 감정을 키웠고 연변을 제2고향으로 간주하며 연변을 잊지 않고있다. 나는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우리 팀을 따라 산우에 있는 따꺼우영국령사관(打狗英国领事馆官邸)으로 갔다. 따꺼우영국령사관(打狗英国领事馆官邸) 따꺼우영국령사관은 고웅시 고산구(鼓山区)에 서자만(고웅항) 북안의 높은 언덕우에 있었는데 북쪽으로는 산과 린접하였고 동, 남, 서쪽은 모두 깍아찌르는듯한 벼랑으로 바다와 잇닿아 있었다. 령사관내에는 진귀한 고웅의 력사자료, 도편, 실물 및 모형들이 진렬되여 있어 일명 고웅사적문물관이라고도 부른다. 따꺼우영국령사관은 대만에서 제일 먼저 건축한 2층으로 된 양옥이며 높은 언덕우에 있기에 항구와 고웅시를 내려다 볼수 있었다. 따꺼우영국령사관 1858년 천진조약과 1860년 북경조약이 체결된후 대만은 점차 통상구를 개방하였다. 이때 영국은 대만무역의 경제리익을 확장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이곳에 령사관을 설치하고 상무와 지방교섭사무를 대행하였다. 1894년 갑오전쟁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면서 일본사람들이 따꺼우영국령사관을 고웅해양관측소로 고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비행기의 폭격으로 파손되고 수차례 태풍의 습격을 받아 페허로 된것을 1985년에 복원하고 1987년에 2급고적에 넣고 고웅사적박물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따꺼우(打狗)》란 대만의 원 주민들이 이곳에서 참대를 많이 생산하면서 생긴 지방 이름이라고 한다. 평포족어(平埔族语)로 《takau》는 죽림(竹林)이란 뜻인데 한어 음역으로는 《打狗》로 되여 이 지방을 따꺼우라고 부른것이지 영국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일본강점기에 일본인들은 《打狗》란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이 지명을 《高雄》(고웅)이라고 고치였다. 애하의 야경 저녁에는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고웅시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나는 야시장을 한바퀴 돌아보고 서점에 들어가 보았는데 대만지도와 관광안내 책들이 있기에 그것을 사가지고 애하강변에 가서 량안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후일계속] 주청룡 특약기자
18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5] 댓글:  조회:6186  추천:0  2014-01-22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5]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11 15:17:06 ] 클릭: [ ]   이튿날(5월 4일)에는 대만의 명산 아리산으로 향했다. 뻐스가 아리산을 향해 발차하자 가이드가 아리산의 개황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였다. 아리산은 대만의 유명한 풍경구로서 대만성 가의시(嘉義市)에서 동쪽으로 75킬로메터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옥산(해발 3952메터)과 린접하여 있다. 아리산은 18개의 높은 산으로 조성되였는데 옥산산맥의 지맥이라고 한다. 제일 높은 곳은 대탑산(大塔山)으로서 해발 2663메터이고 총면적이 1,400헥타르로서 신목(神木: 아리산의 회목군), 벚꽃(樱花), 운해(雲海), 일출(日出) 이 네가지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때문에 《아리산에 가보지 않으면 대만의 아름다음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아리산은 기후가 상쾌한데 년평균기온이 섭씨 10.6도이고 여름이 평균14.3도, 겨울이 평균 6.4도라고 한다. 아리산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 산에는 원래 추족(邹族: 고산족의 13개 족군가운데의 하나)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약 250년전에 이 부족을 이끌었던 아바리(阿巴里)라고 하는 추장(부족두령)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으며 사냥도 잘 하여 덕망이 매우 높았는데 추족들은 그를 경모하여 그의 이름으로 이산을 아리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으로 올라가는 뻐스에서 밖을 내다보니 구릉지대는 주요하게 열대활엽림이였다. 대만 아카시아나무(相思樹), 닥나무(构树: 뽕나무과에 속하는 활엽관목), 빠나나나무, 빈랑(檳榔)나무, 참대 등이 위주였고 해발 800메터로부터 1,800메터 사이에는 녹나무(樟树), 단풍나무(枫树), 참대, 참나무과의 난온대식물이 위주였으며 1,800메터부터는 아리산의 5목으로 불리우는 붉은 전나무(紅檜), 대만측백나무(台湾扁柏), 대만삼나무(臺灣杉), 철삼나무(鐵杉), 화산송(華山松) 등 침엽수들이 대량으로 생장하였다. 아리산의 천년 회목군(檜木群)은 대만에서 가장 밀집된 거목군(巨木群)이라고 한다. 뻐스는 계속하여 갈지(之)자로 허위허위 산을 톱아 올랐는데 앞의 뻐스가 우리의 머리꼭대기로 지나가고 뒤의 뻐스가 우리의 발밑에서 기여가고있었다. 산중턱부터는 구름이 우리가 탄 뻐스와 삼림을 할기작거리며 스쳐지나갔고 산꼭대기에 거의 오르니 구름이 우리의 발밑을 핥으며 흘러가고 있었다. 산중턱을 많이 넘어서부터 산꼭대기를 거의 올라갈 때에 드문드문 농가가 보이고 차밭이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아리산차라는것이였다. 아리산 처녀들이 한창 차잎을 뜯고 있었다.   차잎을 뜯고있는 아리산 녀성들   우리는 뻐스로 신목(神木)역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소철을 타고 다음역인 아리산역까지 가게 되였다. 기실 뻐스는 아리산엮까지 갈수 있었지만 아리산의 소철을 타보는것도 관광코스의 하나라고 하였다. 신목역과 아리산역에는 모두 해발고도가 표시되여 있었는데 신목역의 해발고도는 2,138메터이고 아리산역의 해발고도는 2,216메터였다. 아리산의 소철 가이드와 물어보니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역은 소평역(沼平車站)이며 해발 2,274메터라고 하였다. 아리산의 직선거리는 15킬로메터밖에 안된다. 그러나 한층한층 라선형으로 타래쳐 올라가는 철로는 그 길이가 72킬로메터이며 산꼭대기에 거의 올라가서는 갈지(之)자형으로 올라가는데 3시간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일본침략자들은 아리산의 목재를 략탈하기 위해 1899년부터 시작하여 아리산에 최대 경사도가 6.25도, 최소 반경이 40메터되는 소철을 부설하기 시작하여 1924년에 해발 30메터의 가의역(嘉义車站)으로부터 해발 2,216메터의 아리산역까지 총길가 71.4킬로메터의 철로를 부설하였다. 이 철로에는 49개의 턴넬, 77개의 철교, 21개의 정거장이 있다. 각 삼림구는 지선으로 련결되였는데 총길이는 1,000킬로메터고 82개의 턴넬중 가장 긴 턴넬은 1,300메터에 달한다고 한다. 아리산철로는 인도의 대길령(大吉嶺)로부터 희말라야산까지의 철로, 칠레로부터 아르헨띠나의 안데스산까지의 철로와 더불어 세계 세갈래의 등산철로라고 한다. 나는 가이드의 이런 소개를 듣고 일본침략자들의 욕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도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략탈해 가기 위하여 많은 철로를 부설하였고 여기 대만에도 역시 삼림자원을 략탈하기 위해 이렇게 높은 고산철로들 부설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또 조어도까지도 자기네 령토라고 주장을 하는것을 보면 군국주의 그 본질은 개변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산역에 내려 우리는 아리산삼림공원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대부분 붉은 전나무들이였는데 모두 난생처음 보는 몇아름씩 되는 거목들이였다. 아리산에는 원래 높이 60메터, 직경이 6.5메터되는 붉은 전나무(紅檜樹)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세계상에서 발견한 제일 큰 붉은 전나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1997년 7월 1일에 넘어지면서 세계 제1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우리가 본것도 특별히 컸는데 그 옆의 표시판을 보니 《樹種: 紅檜 (수종: 붉은 전나무), 胸圍: 12.3m (흉위: 12.3m), 樹高: 45m (수고: 45m), 樹齡: 約2300年 (수령: 약 2300년)》이라고 씌여 있었다. 둘레의 길이가 12.3메터이니 나무의 직경이 3.92메터가 되는 셈이였다. 나무가 너무도 굵으니 우리 팀의 녀성들이 팔을 벌리고 나무를 둘러쌌는데 8명이 팔을 쭉 펴야 둘러쌀수 있었다. 아름드리 붉은 전나무(紅檜樹) 아래서 아리산에는 또 자손3대가 한자리에서 자란 나무들이 있는데 제 1대가 늙어서 넘어진 다음에 제2대가 거기에서 자라고 제 2대가 늙어서 넘어진 다음 제3대가 또 다시 거기에서 자라 자손 3대가 한자리에서 자란다고 하여 3대목(3代木)이라고 하였다. 3대목(三代木) 아래서 아리산에는 또 아리산박물관도 있었다. 박물관 안벽에는 일본침략자들의 목재를 략탈해간 죄악적 사실들이 적혀 있었고 그때 당시 철도 로동자들이 쓰던 공구, 전화 등이 전시되여 있었으며 당시에 사용하던 기관차와 지금에 사용하는 기관차 모형도 전시되여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일제가 쓰던 기관차모형 내려오면서 우리는 모두 차점에 들어서 대만기념으로 아리산차를 샀다. 아리산에 와서 나는 일생에서 타보지 못하였던 소철도 타보았고 아리산 박물관 그리고 직경이 4메터 거의 되는 거목과 더불어 삼림의 경치를 쭈욱 감상하였다. 하지만 아리산은 또 벚꽃과 일출, 일몰이 그렇게도 아름답다고 하는데 계절과 일시가 맞지 않아 큰 유감으로 남길수밖에 없었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86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4] 댓글:  조회:6212  추천:0  2014-01-13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4]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1-08 10:46:50 ] 클릭: [ ] 이튿날(5월 3일)부터는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유람하게 되였다. 가는 도중에 안내원은 동영상으로 대만의 력사에 대하여 간단간단하게 소개하였다. 간추리면 1624년부터 1662년까지 38년간은 화란이, 1662년부터 1683년까지 21년간은 정성공(명나라)이, 1683년부터 1895년까지 212년간은 청정부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은 일본이, 1949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은 장개석(국민당)이,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은 장경국(국민당)이,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2년간은 리등휘(국민당)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8년간은 진수편(민진당)이 통치했고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마영구(국민당)가 령도하고 있다는것이다.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부분이고 행정구역으로는 중국의 한개 성이며 중국의 보배섬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대만은 아직 완전히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있다. 언제면 엄격한 관문이 없이 자유롭게 래왕할수 있는 그날이 올수있을가, 나는 착잡한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짐을 느꼈다. 중대선사(中台禪寺) 우리의 관광코스는 대만 중부의 중대선사, 일월담, 아리산 등이였는데 중대선사가 첫코스였다. 중대선사(中台禪寺)는 중대산(中台山)이라고도 하는데 남투현포리진(南投县埔里鎮)에 자리잡고있었으며 유각(惟觉)스님이 1994년에 창설한 불교사원이다. 집의 높이는 136메터이고 37층으로 되여 있는데 목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불교사원이다. 대만에 80개 분원이 있다고 한다. 중대선사(中台禪寺) 사원안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사천왕전(四天王殿)이다. 사천왕은 불법의 신명(神明)으로서 각기 《동방지국천왕(东方持国天王)》,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长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广目天王)》, 《북방다문천왕(北方多闻天王)》으로서 그들의 손에는 각기 풍조(风调), 우순(雨顺), 국태(国泰), 민안(民安)을 상징하는 법기(法器)들이 쥐여있었다. 사대천왕의 신상은 산서의 화강암으로 조각하였고 높이는 모두 12메터이고 무게는 100톤이였으며 커다란 기둥과 같이 전당의 네 모퉁이에 받혀 새워져 있었다. 사천왕전(四天王殿) 사천왕전은 중대선사의 주체전당으로 미륵보살(弥勒菩萨)이 전당중앙에 모셔져 있다. 미륵보살(弥勒菩萨) 미륵보살의 뒤에는 갑옷을 입고 두손으로 검을 쥔 베다보살(吠陀菩萨)이 있었다. 사천왕전에서 넓다란 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가면 대웅보전(大雄宝殿)인데 대웅보전은 대사원에서 불상을 모시는 정전(正殿)이다. 정전에는 인도의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석가모니상이 전당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유람객가운데서 불교신도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가족의 행복이나 자신의 앞날에 대한 소망을 안고 불상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나는 비록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대하여 리해가 가면서 그것도 일종 불교사원에 들어와서의 례의가 아닌가 싶었다. 석가모니불상(释迦牟尼佛像) 사원에는 이외에도 대장엄전(大庄严殿),대광명전(大光明殿), 만불전(万佛殿), 보살전(菩萨殿), 삼세불전(三世佛殿), 원명전(圆明殿), 선당(禅堂), 강당, 등이 많았는데 사실 불교문화를 모르고 보다니 그저 말타고 꽃구경하는식으로 어디에 가나 여러가지 형태의 불상들이 많았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중대산박물관(中台山博物館) 중대산박물관은 불교문물을 주체로한 박물관으로서 중대선사(中台禅寺)옆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009년 10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창설인은 유각(惟觉)스님이였고 그 취지는 종교를 널리 선전하고 《불법의 예술화》를 락실하며 불교력사문화를 보존하고 계승발전하며 연구하여 불교예술을 발양하려는데 있다고 한다. 안에는 근 200년의 중국내지, 서장, 인도 등 삼대지역의 력대 불교문물과 석상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일월담(日月潭) 오후에는 일월담으로 갔다. 일월담은 대만도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구로서 대만서부의 남투현어지향(南投县鱼池乡)에 있으며 대만에서 가장 큰 천연호수이며 옥산과 아리산사이에 단렬된 분지에 모인 물로 형성되였다고 한다. 호수 둘레의 길이는 35킬로메터이고 면적은 7.7평방킬로메터, 수심은 20메터내지 30메터이고 수면은 항주 서호(6.5평방킬로메터)보다 크며 수심은 서호(2.27메터)의 10배를 넘는다고 한다. 일월담은 본래 두개의 단독섬으로 되였는데 후에 발전(发电)의 수료로 하여 두 섬을 련결시켜 놓았다고 한다. 호수의 북반부는 해와 같이 좀 둥글게 생겼고 호수의 남반부는 좀 반달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월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일월담전경 호수안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진주가 물우에 떠 있는것같다고 하여 《진주섬》으로 불리우며 일명 라루도(拉鲁岛)라고도 한다. 일월담주위에는 많은 정자루각, 사당, 옛탑이 있고 산허리에는 현장사(玄裝寺), 문무묘(文武庙) 등 여러개의 명승고적이 있다. 호수주위가 산으로 둘러있으며 호수가 잔잔하고 맑아 주위의 산과 건물들이 호수에 비껴 마치 거울같았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일년 사계절, 아침과 저녁에 호수에 비끼는 풍경이 변화무쌍하여 전설가운데의 선경이라고 한다. 겨울의 평균기온이 15℃이상이고 여름기온이 22℃로서 사계절의 기온이 사람에게 적합하여 아주 좋은 피서지이며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되고있다. 일월담은 원래 경치가 좋은데다가 장개석과 송미령도 이곳을 자주 찾아 다니면서부터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호수의 남쪽대안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가운데의 진주섬을 지나 북쪽대안의 산에 올라가서 여러 명승고적과 호수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많은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나는 명승고적과 호수와 호수주위의 뭇산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보배섬이 하루속히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후일계속]
185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3] 댓글:  조회:6308  추천:0  2014-01-07
아름다운 보배섬, 대만에 가다 [3]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12-27 14:05:57 ] 클릭: [ ] 다음으로는 대북의 101빌딩으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안내원은 텔레비죤을 켰는데 호금도주석과 국민당영예주석 련전이 악수하는 장면, 그리고 온가보총리와 대만당국지도자 마영구가 회담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만약 량안관계가 긴장한 상태에 있다면 내가 어찌 이 대만으로 올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런 지도자들이 있어 량안관계를 개선하였기에 오늘 내가 이 대만에 와서 유람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1빌딩 차가 대북시에 들어서자 안내원이 차창밖을 내다 보며 《저 멀리 보이는 것 101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밖을 내다보니 정말 공장건물가운데 우뚝 솟은 굴뚝처럼 시내의 수풀같이 들어선 건물 한 가운데 하나의 건물이 굴뚝처럼 우뚝 솟아있었다. 101빌딩은 별칭으로는 대북국제금융쎈터(台北国际金融中心)인데 대북시 신의구(信义区)에 위치해 있으며 총 부지면적이 30,278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은 28.95만 평방메터, 탑 꼭대기의 높이는 509메터, 층집의 높이는 449메터, 지하 5층, 지상 101층으로 되여 있다. 이 빌딩은 1999년 7월에 시공, 2004년 12월에 준공되였는데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였다. 그 후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탑 (哈利法塔: 162층 높이 828메터)와 광주탑(广州塔: 600메터)에 밀리워 지금은 세계 3위다. 101빌딩앞에서. 이 빌딩은 쑈핑쎈터, 식당, 레저오락, 회의쎈터, 국제금융쎈터, 사무실, 전망대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설비용은 대만화페로 58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쑈핑쎈터에는 시계, 전자제품, 금은보석, 화장품, 의복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명품들이 다 진렬되여 있으며 식당도 세계 여러 나라 음식들을 다 맛을 볼수 있다고 한다. 101빌딩 89층은 전망대였는데 거기까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승강기문이 닫혀 얼마 안된것 같은데 전망대에 도착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벌써 올라왔는가고 하니 안내원이 이 승강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승강기로서 초속이 16.83메터, 89층까지 올라오는데 39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망대는 사면이 다 유리벽으로 되여 있어 한 바퀴 빙 둘러보면 대북시의 전경을 다 내려다 볼수 있었다. 대북시는 분지로서 사면이 산과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었고 시안에는 고층건물들이 콩크리트숲을 이루었으며 한가운데로 담수하(淡水河)가 흐르고있었다. 시내를 내려다보면 가장 눈에 띄우는것이 굽이쳐 흐르는 담수하였다. 전망대에서 본 대북시 일각(멀리 담수하가 보인다).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은 부지면적이 25헥타르로서 주체건물은 중정기념당이고 그 주위는 각종 나무와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화초로 된 공원이다. 기념당 남쪽정문 앞은 자유광장이고 광장남쪽에는 《자유광장》패방(牌坊)이 있다. 광장동쪽에는 가극원, 서쪽에는 음악청이 있는데 중국궁전모식으로 지었는데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자유광장》패방의 높이 30메터 너비 80메터, 6주5문(6柱5门) 11개 지붕으로 되여있으며 중정기념당으로부터의 거리는 470메터이다. 자유광장패방앞에서. 자유광장은 넓은 면적에 주위 건축물들이 웅위롭고 아름다워 대만 민중들의 레저광장으로 사용되고있으며 각종 집회도 이곳에서 진행되는 등 관광명소로 되고있다. 중정기념당에서 내다본 자유광장.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이름 중정, 자 개석)의 이름으로 명명한 기념당으로 대북시 중정구 중산남로 21번지에 위치하여 있다. 장개석이 1975년 4월 5일에 병사하자 대만당국은 중정기념당을 지을것을 결정짓고 1977년에 시작하여 1980년에 준공하고 동년 4월 5일부터 대외에 개방하였다. 2007년 5월 민진당정부에서 《중정기념당》을 《대만민주기념관》으로 고치고 간판도 고쳤는데 2008년 5월 국민당이 다시 집정하자 그것을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고치고 2009년 7월 간판도 《중정기념당》으로 다시 걸었다고 한다. 기념당의 정문으로 올라가는데는 화강석으로 된 층계가 89개가 있는데 장개석이 89세까지 향수(享壽)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중정기념당 중정기념당 안에는 기념대청, 문물전시실, 중앙복도, 강연청, 회은화랑(怀恩画廊), 중정기념도서관, 중정기념실 등이 있다. 기념대청은 기념당의 중앙부분으로서 1,2층을 통칸으로 하여 높이 6.3메터, 무게가 21.25톤이 되는 장개석이 쏘파에 앉아있는 모양의 동상을 커다랗게 모셔놓았다. 그리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의장대가 매 시간마다 근무교대의식을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도 교대의식을 하였다. 호위근무는 한 조에 5명씩이였는데 교대의식을 하는 것이 총창을 빼들고 여러가지 표현동작을 하면서 하였는데 10분도 더 되였다. 중정기념대청 중정기념실에는 장개석의 사무실을 원 모양대로 장식하여 놓고 밀랍상(蜡像)으로 장개석이 사무를 보는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문물전시실에는 장개석의 일련의 활동사진과 문헌들이 있었고 장개석이 입던 군복과 례복들이 진렬되여 있어으며 중앙복도에는 장개석이 타고 다니던 캐딜락(凯迪拉克)승용차가 전시되여 있었다. 장개석의 사무실 강연청에는 학자, 전문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회은화랑(怀恩画廊)에는 예술가들이거나 예술단체의 예술작품전람을 하는 장소로 되고있었다. 주청룡특약기자 [후일계속]
184    물을 줄 아는 사람이 아는것이 많다 댓글:  조회:8609  추천:6  2013-12-19
주청룡  물어본다는 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일종의 표현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책이나 컴퓨터를 찾아보면서 답안을 찾는것도 역시 물음을 가지고 찾는것이다. 물음이 있으면 답안을 찾게되며 모르던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물음끝에 답안이 나온다고 말할수 있으며 물을줄 알면 곧 알게 된다. 학교운동장 상공으로 비행기가 날아 가고 있었다. 이때 한 학생이 선생님께“저 육중한 비행기가 어떻게 하늘을 날수 있는가?”고 물었다. 선생님은 비행기는 양력과 추진력에 의해 날수 있다고 했다. 이때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의 그 해답에 만족을 했으나 그 물음을 제기한 학생은 그 해답에 만족하지 않고 후에 다시 선생님을 찾아 양력과 추진력이 산생되는 원리를 더 캐여 물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의 지식욕이 기특하여 비행기가 나는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비행기 날개의 단면을 보면 아래면은 평평하게 직선을 이루고 우면은 불룩하게 류선형 곡선을 이루었다. 때문에 날개의 앞뒤 사이의 거리는 우면이 아래면보다 길다.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고속으로 달릴 때에 공기의 흐름은 날개에 부딪혀 두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한 갈래는 날개우에서 불룩한 곡선을 따라서 흐르게 되며 다른 한 갈래는 날개 아래쪽에서 직선으로 흐르게 된다. 이때 같은 시간내에 긴거리를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속도는 더 빠르게 된다. 속도가 증가하면 압력이 감소하고, 속도가 감소하면 압력이 증가한다.그러므로 날개 우부분의 기압이 아랫부분보다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기압은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작용하므로 아래에서 우로 비행기를 올려주는 힘, 바로 양력(杨力)이 산생된다.   분기식비행기는 연소시킨 가스를 뒤쪽으로 뿜어내어 그 반동으로 강한 추력을 발생시켜 앞으로 나가게 된다. 선생님은 이렇게 비행기의 양력과 추진력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렇게 되여 선생님의 첫 해답에 만족을 느낀 학생들은 그만한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지만 더 캐고 물은 학생은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완전히 리해하게 되였다. 우리는 학습을 함에 있어서 많은 물음을 가져야 한다. 어느 하루 뉴톤이 사과나무 밑에 누워서 책을 보는데 사과 하나가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사과가 너무 익으면 땅에 떨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뉴톤의 사유는 그렇지 않았다. 사과가 왜 떨어지는가? 떨어지면서 무엇 때문에 올라가지도 않고 빗겨나가지도 않고 곧추 땅에 떨어지는가? 등등 여러가지 의문을 갖고 연구한 끝에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생기며 그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만유인력법칙을 내놓았다. 만약 뉴톤이 사과가 떨어진데 대하여 여러가지 의문이 없었다면 만유인력법칙을 연구할 수가 없었을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가운데서 아는 사람일수록 의문이 더 많고 물음이 더 많으며 모르는 사람일수록 의문이 적고 물음이 적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시말하면 물을줄 아는 사람일수록 아는 것이 더 많다는것이다. 어떤 사람(학생)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 않는 이상하고 엉뚱한 물음을 제기한다. 뉴톤의 사과가 왜 떨어지는가? 떨어지면서 무엇 때문에 올라가지도 않고 빗겨나가지도 않고 곧추 땅에 떨어지는가? 등등의 의문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그가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여겼을것이다. 그렇지만 그 엉뚱한 생각이 만유인력의 과학적 법칙을 낳았던것이다. 어떤 사람(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있어도 허심하지 못하게 창피스럽다고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모르는것이 더 많게 된다. 모르는것이 창피가 아니다. 모르면서도 아는것처럼 물어보지 않는것이 더 수치스러운것이다. 그러므로 학습을 함에 있어서 《무엇때문에?》란 많은 의문, 많은 물음,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것을 대담하게 물어서 해결해 나간다면 더욱 많은 지식을 얻를수 있고 우리의 두뇌를 더욱 충전할수 있을것이다. 연변일보  2013년 12원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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