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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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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의 고향점경
2013년 11월 13일 10시 36분  조회:2749  추천:1  작성자: 회령

    중편실화 
                         기억속의 고향 점경
                                                                       회령
         부모님과 고향의 략사
    나의 고향땅은 “샘물깨”라는 산골농촌마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머니의 고향 이다. 어머니는 샘물깨에서 태여나서 뒷마을 로총각에게 시집간후 십여년 눈물겨운 타향살이를 하고 다시 샘물깨로 돌아와서 길지못한 한생을 마치였다.
    어머니 본가는 밥술을 자급하는 중농집이였지만 아버지네는 대대손손 가난뱅이 반소작농이였다. 욕심이 많고 심술사나운 외할아버지가 극악스레 살림했기에 어머니는 배고픈 고생은 별로 하지않고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안팍 온갖일로 잔뼈가컸다. 공부란건 어머니와 날때부터 인연이없었다. 외할아버지는 두 아들은 공부 시켰으나(시국때문에 초중까지 다녔다.) 딸 다섯은 이름도 바로 부르지않고 간나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일만 시켰다. 외할머니는 부창부수ㅡ 당연지사 최고지시로 외할아버지를 받들어 모시며 따랐다. 항렬에서 둘째인 나의 어머니는 그덕에 일이란 일자가 붙은것이기만하면 못하는것이 없었다. 잽싸게 알뜰하고 깐지게 잘 하였다. 어머니는 인민공사시절 공사(향)로동모범에까지 뽑혀 낫가락과 손바닥만한 목책을 상으로 탄 일까지 있다. 어머니 일생에서는 제일큰 영광이였고 제일큰 상품이였다. 목책은 나에게 주었는데 지금도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다.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도 쓸줄 몰랐지만 가감승제 산술은 100자리안에서는 쉽게 할줄 알았다. 그리고 각종 례의범절 경우시비에 막힘이 없었다. 이모들도 길쌈 뜨개질 수놓이… 못하는일 못하는재간이 없었다. 로동과 생활은 그들의 학교였든 것이다.
    옛날에는 이웃사이 혼인은 과거급제보다 더 힘들다고 했는데 그것은 상호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였다. 사돈에 팔촌까지 겉으로부터 속통머리까지 흉허물을 꿰뚫어 알다보니, 종신대사에 가뜩이나 심중하고 엄숙한 그때 사람들은 심사 결정을 대단히 까다롭게 했든것이다.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지금의 참군, 입당, 령도간부 선발시 정치사상 심사보다도 더 엄격했다. 눈, 코, 입까지 심사하고 턱이 뾰죽하거니 주걱이거니 복상이니 거북살이니 울상이니 하고 시비를했다. 촌장이나 향장선거는 거기에 비견하면 누워서 조개떡 먹기다. 시집 장가 들기가 이렇게 엄혹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마을이나 다름없는 앞뒤마을 혼사를 했다. 아버지 일가는 장가간 다섯형님네까지 누구하나 빠짐이없이 모두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화목하고 마음씨가 무던하고 더운 사람들이였다. 여섯째로 막내인 나의 아버지는 누가봐도 욕심낼 미총각이였는데 눈썰미 손재간이 특이하게 돌출했다. 씨름도 잘하고 퉁소 새납을 잘불고 북, 장구 잘치고 전책(소설따위)을 읽어 달라고 겨울이면 가까운데 남녀로소가 몰려들었다. 글읽는 소리가 노래처럼 듣기좋고 옛말을 한뉘 구수하게 잘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무궁무진한것 같았다. 학교라고는 문이 어데 달렸는지도 몰랐지만 당시의 소학문화정도는 넉근히 되였다. 지금말로 감정을 매긴다면 그야말로 “지, 덕, 체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인재”라고 할수있을것이다. 그때는 사회주의라는걸 모르는 때여서 무슨 사회주의건설인재라고 학식있게 말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지만 사람들은 “제노릇을 착실하게 할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공부를 시키면 무엇이 돼도 될사람인데…”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일가의 극진한 관심속에서 참답게 자랐을뿐 용맹스럽지 못했다. 이를테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하여튼, 역반심리가 없었다. 여북하면 아이때부터 한뉘 누구와 말다툼 한번 해본적 없고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겠는가. 나의 아버지가 생전에 때로는 감개무량해서, 때로는 의미심장하게 가끔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제량심을 가지고 왜서 제마음대로 살지못하겠는가. 천하에 나쁜일 하지않고 법을 어기지않는것이 제일 편안하다.”는 한마디 말씀이다. 나는 아버지 말씀이 음미해볼수록 명언중의 명언으로 인정 되였다. 나의 아버지는 80여세 고령후에도 이말씀을 두어번 하신것 같은데, 아마도 평범한 나의 아버지로서는 일생을 통하여 제일 심각하게 터득하고 총결해낸 인생철학인것 같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산이란 물질상 정신상 통털어 이한마디 말씀뿐이다. 하지만 내가 부모님들의 은덕을 길이길이 잊지 못하는것은 나라는 생명체를 만들어서 키워주고 공부를 시켜준것이다. 나를 사람이 되게 기초를 딲아준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인은 혼사말이 오고가고 사년만에 이루어 졌다. 아버지네 집에서는 처음부터 당길심이 굴뚝같았지만 외할아버지가 찌뿌둥했든 것이다. 리유는 아주 명확하고 간단했는데 그것은 반소작농 가난뱅이라는데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네를 “거렁뱅이들”이라고 착호지명을 내놓고 하였다. 심술사납고 고집불통인 외할아버지 안목에서도 나의 아버지는 욕심나는 사위감이였다. 밥술이나 먹는 집안이라면 자청해서 빼앗기라도 서슴없이 할 어른이였으나 째지게 가난한것이 치명적인 흠이였든 것이다. 남주기도 싫고 나먹기도 싫은 심술에서 될듯말듯 차일피일 끈것이 언뜰 사년이나 되는해 봄에 외할아버지는 허혼을 하였다. “꼭 제노릇을 착실하게 할것이다.”는 확신이 드디여 무르익어서 용단을 내렸든것이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오판을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때도 후에도 끝내 “제노릇”을 하지못했던 것이다. 하여 외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생전에 줄곧 미워하면서 “제노릇도 못하는 멍텅구리”라면서 줄욕을 하였다. 하다보니 나의 아버지는 가시집과 될수록 멀리 떨어져 살려고 무진 노력을 하였다.
   잔치를한 이듬해봄 외할아버지는 비좁은 집에서 부대껴 사는 딸의 처지가 안스러워 자기집 사랑채에 살림을 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앞마을 최지주의 논마지기, 밭뙈기를 소작맡아 농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때세월이나 지금이나 소작으로 농사만 해서는 영영 번신할수 없는 것이다. 윤두소(소몇마리를 키워주고 새끼를 낳으면 한마리를 가지는것)를 키우고 동삼에는 태가실이(조선 회령과 룡정으로 공량운수 등 삯전을받고 짐실이를 하는 부업. 남의 소수레를 세맡아 하는데 회령은 40리길, 룡정은 백여리. 그때의 겨울은 보통 령하40도.), 광주리며 바구니도 겯고 삿자리부업, 토끼 꿩 노루 멧돼지를 옥노와 착고로 사냥, 나무장사,(장마당은 회령과 룡정에만 있음.)… 어머니는 지주집 삯방아, 바느질(수놓이 뜨개질 옷짓기 등)… 봄부터 가을까지 산나물, 버섯, 약초캐기…하여튼 돈닢이 생기는 일은 부부가 일년사계절 하루도 노는날 없이 억척스레 부지런히 하였다. 헤여보면 돈벌이하는 항목은 수두룩해서 돈을 꽤나 버는것 같지만 기실은 고생만 죽도록 하고 몇푼이 생기지 않았다. 그사이 어머니는 두번 해산했는데 해산하는 날까지 일했고 산후에는 사흘 지나서부터 또 일손을 잡았다. 갓난애는 돌전에 다 잃고 신체는 몹시 망가지고 말았다. 그러나 약한첩 바로쓰지 못하고 또 전처럼 이악스레 일했다.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간혹 하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간고분투혁명사상교육을 하기위해 거짓부리를 지어낸다고 한다. 물론 우스개긴하지만 그들이 어찌 뼈저리게 실감나게야 느끼랴!... 사람이란 제발등의 불이고야 따가운걸 알기가 보통이다.
   아버지는 련속 두번이나 왜놈 “근로봉사대”(철길과 비행장 딲기. 무상의무로동.) 에 끌려 가다보니 두해 농사를 망쳐먹은건 둘째로 치고 한해는 거이 죽도록 앓기까지 했다. 결혼해서 5년세월이 지나갔지만 아버지는 “제노릇”을 못했을 뿐만아니라 자기가 앓은건 일어났으니 됐지만 안해는 을병이 들었고 늘어난건 빚이였다. 나쁜땅을 소작하다보니(그것도 겨우 맡은것) 워낙 농사가 잘되지 않았고 재해가 들었는데도 소작료는 한톨 드팀이 없었다. 게다가 3년이나 페농하다싶이 하지않았는가! 하여 윤두소로 얻은 금덩이 같은 송아지를 팔아먹고도 리자가 굴러가며 빚은 여전히 커만갔다… 외할아버지의 기색은 앓는 이빨에 돌알 씹은 상이였다.
   아버지는 집이 송곳방석보다도 더 싫었다. 6년철이 되던해 이른봄부터 나의 아버지는 목재판, 공사장 같은데를 찿아다니며 외지에서 품팔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티(두해)가 지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조선 청진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는 고기배를 타고 어머니는 선주네(배임자)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선주녀편네는 앙칼스럽기 짝이없는 녀자였다. 그는 나의 어머니를 아주 종으로 취급하였다. 하루종일 일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였고 생전 듣지못하던 쌍욕을 쩍하면 퍼부었다. 어느날 강단이 센 나의어머니는 주인집 녀편네를 호되게 닦아세운후 식모살이를 걷어치웠다. 아버지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돌아온후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온돌쟁이 도배쟁이 집수리 각종공사판 날품팔이를 했다. 리발도 해보고 세다리사진기를 메고 촌으로 산골로 돌아다니며 사진업도 해 보았으나 어느일 하나 돈벌이는 커녕 입에 풀칠도 못했다.(사진기는 소위 친구라는 사람이 빌린다면서 메고 달아났다.) 어머니는 청진부두에 나가서 함지에 생선을 담아 이고 촌으로 산골로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돈을 받을때는 적고 강냉이나 감자 호박따위와 바꿀때가 많아서 어머니 머리에서는 무거운 함지박이 하루종일 떠날줄 몰랐다. 막닢에 오른 일본정부의 발악은 최하층 조선백성들이 더욱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며 헤매게 하였다. 쏘련군이 청진을 칠거라는 소문이 돌자(사변은 3년후에 발생) 나의 아버지는 그래도 고향가까이가 좋겠다는 생각에서 회령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최후의 발악으로 미쳐난 왜놈의 식민지 조선땅에서 어덴들 다르겠는가! 그러나 반나절 길, 40리 밖에있는 두만강 건너 고향 처가마을로는 가기 싫었다. 아버지는 회령바닥을 헤매며 종이공장원목자르기 목도 뗏목타기 공사장 철공소…삯군을 쓰는곳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며 품팔이를 하였다. 어머니는 이곳에서도 물고기함지박을 이고 장사를 하였다. 목과 발을 데여 밤낮 앙앙 울어대는 나를 업고 어머니는 눈물과 땀물을 씻으며 무척 모진 고생을 하였다. 회령도 우리에게는 살기힘든 곳이였다. 아버지는 고무산 세멘트공장에서 돌깨기 막일도 했고 무산철광에서 남포질도 하며 두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무진애를 썼다. 무산쪽이 전쟁판으로 된다는 소문이 돌자 우리는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아주 완전한 거렁뱅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향으로 가지않았다. 그는 옛날친구들을 찿아다니며 겨우 헛간 한칸을 얻어 쟁개비를 걸었다. 그리고 역전 기관고에서 막일을 하였다.
   언제부터 망한다 망한다하던 왜놈들이 끝내 망하고 말았다. 36년의 민족숙원 광복이 이루어 졌다. 회령판은 마구 끓어 번졌다. 인차 인민자치회가 서고 사회는 질서를 잡아 나갔다. 그러나 경제생활은 혹심한 난관에 부딫쳤다. 광복이듬해봄 어머니 금방 아래동생 큰외삼촌이 우리를 데리려 왔다. 이제 지주 부농을 청산하고 토지개혁을 한다는데 어서 고향마을로 가자는 것이였다. 아버지는 좀 더 지내보겠다면서 동의하지않았다. 그해 겨울부터 어머니는 앓기 시작했는데 끝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듬해 이른봄 큰외삼촌이 또 우리를 데리려 왔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더는 고집을 쓸수가 없었다.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샘물깨로 왔다. 그리고 다시 외가집 사랑채에 들었다. 아버지는 옛날처럼 소작농을 하였다.
   그때 고향 샘물깨에서는 토개공작대(다섯개 마을이 한개촌이였는데 공작대는 최씨 한사람임) 지휘하에 토지개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하나뿐인 부농을 청산하고 중농 세집은(모두세집임) 털것인가 말것인가 저울질하는 중이였다. 다행이 중학을 다니다가 그만둔 나의 작은외삼촌이 토지와 재산 계산에서 오차를 바로잡아 세집은 모두 무사히 고비를 넘었다. 그런데 우리집과 얼마후에 굴러온 다른 한집 똥돌이네는 토지를 한푼도 주지 않았다. 똥돌이네는 교화 근처의 어느곳에서 살다가 국민당이 처나오면 조선사람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돌자 고향으로(조선 강원도 율전)떠난것이 샘물깨까지 와서 똥돌이 아래로 계집애를 낳다보니 기진맥진하고 주저앉았던 것이다. 광복후에 이사온 집들은 토지분배에서 본토백이와 구별한다는 괴상한 조목이 있었는데(자체로 만든것) 그것을 뻗쳐들고 당시에 득세한 몇집이(빈고농협회 골간) 기세등등해서 횡포를 했든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촌에서는 족벌관념이 상당히 크다. 당시 샘물깨의 계급분석을하면 다음과 같다. 30여호가 몽땅 농사를 지었는데 식구중에서 외지에 나간 사람이 있는집은 한호도 없었다. 즉 참군을 했거나 큰학교에 갔거나 어데서 월급쟁이가 되였거나…출세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이렇게 샘물깨는 막히고 보수적이랄가 그런 마을이였다. 제일 째지게 가난한 소작농은(고농) 다섯집인데 네집은 삼촌 조카 매부하는 허씨네 소위 한개가문이고 다른한집은 타성으로 순전한 남이였다. 우리와 똥돌이네는 그들보다도 더욱 한심한 집도없는 거렁뱅이였으나 빈고농협회에 넣어주지 않았다.(갓이사온 집이여서 마을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농은 세집 부농은 한집이였다.(기실은 상중농임) 남어지 20여호는 모두 정도부동 병작을 하는 빈농들이였다.(자기밭도 일부 있고 남의 밭도 소작함. 반소작농)
   공작대 최씨는 30대 젊은이로 처자가 있는 흑룡강 사람이였다. 그는 때론 단포(목갑총)를 차고 마을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사람이 걍핍하고 팔팔했다. 혈기왕성한 그나이에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는 과분하게 급진적ㅡ말하자면 좌적으로 맹동하는 혁명자였다. 수평문제와 개성의 탓이였다. 그리고 녀자를 지나치게 탐했는데 이것이 그의 치명적 약점으로 되여 전도를 망치고 훗날 두고두고 후회와 한탄을 하였다.
   최씨의 지도하에 고농 다섯집 사람들은 대뜸 기를 펴고 활기가 넘쳐났다. 소위 허씨가문 네집은 협회령도권을 쥐고 샘물깨를 쥐락펴락 하였다. 두말할것없이 그들에게는 단포를 찬 최씨가 있었다. 그들은 말그대로 함께먹고 함께자고 개잡이 술놀이 청산투쟁 과실(청산한재물)분배 토지개혁… 혁명을 했는데 그야말로 한전호속의 친밀한전우 였다. 그런데 다른 한집은 아들이 넷이나 되였지만 스무살 안팍의 큰아들 작은아들은 완머슴 반머슴살이를 하고 아랫동생들은 코흘리개들이였다. 홀애비 아버지는 풍을 맞아 운신하기도 힘들어하는 장기환자여서 그는 허구한날 맨봉당에 거적을 깔고 누워 신음하였다. 이집의 맏이와 둘째는 허씨네 심부름군에 불과했을 뿐이다. 허씨네 안팍사람들은 한결같이 심술사납고 우락부락하고 녕악스러운 사람들이였다. 토지분배, 청산과실 분배에서 우리집은 밭 한이랑 숫가락 한개도 가지지 못했다. 똥돌이네는 의지가지 할데도 없는집이라 청산과실에서 그릇나부랭이며 강냉이 따위 먹을것을 조금 주었다. 고농우선의 원칙에서 허씨네가 좋은밭 좋은물건을 차지한것은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가지지 못해 안달이였다. 그해 우리와 똥돌이네는 이집저집 밭을 소작하였다. 광대한 빈고농을 일조에 번신시킨 토지개혁은 샘물깨에서만은 새로운 소작농을 만들어 우스운꼴이 되고 말밥에 올랐다. 이듬해 토개운동에서의 좌경착오와 편차를 시정했는데 그때는 우리 두집이 이미 이주민에 쫓겨 떠난뒤라 샘물깨에서는 편차고 시정이고 할것이 없었다.
   우리가 샘물깨로 이사온해 추석날밤 마을청년들이 나의 외가집 마당에서 오락을 했는데 술에 기세가 뻗친 최씨가 바로 우리집 정주문 앞에서 단포를 한방 갈겼다. 집이 터져나가는것 같은 굉음에 앓아 누워있던 나의 어머니는 기절하면서 류산을 했다. 동시에 하혈까지 심해서 어머니는 그날 지옥문앞까지 갔다가 다행히 개복하였다. 그후 어머니는 더욱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나의 큰외삼촌은 갱핍한 몸매에 날렵하고 아주 담대한 분이였다. 그는 최씨가 단포를 갈긴 바람에 누이가 죽는다 산다하자 최씨를 멧다꼰지고 한바탕 밟아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죽기만 하면 너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의 외삼촌은 정말로 그렇게 할수있는 사람이였다. 그후 얼마안되여 최씨는 무슨처벌을 받고 다른곳으로 갔다. 그가 가버린후 마을에는 퀴퀴한 소문이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허씨네 큰며느리(배씨. 부녀반장. 빈고농협회주임 큰허씨의 처)와 막내며느리와 통간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듬해 설이 금방 지나자 돈화 이주민 모집이 나왔다. 구(향)에서 내려온 간부는 이주민으로 가면 어떠어떠하게 좋다고 혀가 돌아가는 대로 한바탕 선동연설을 했다.(이주민을 많이 모집하면 성적이 오른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부식토 검은땅에서는 말대가리 같은 감자가 쏟아져 나오고 무리꿩은 집안으로 날아들고 노루가 사람뒤를 줄줄 따라다니는데 물고기 말씹조개는 발에 마구 밟힌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아쉬운것은 그곳 대눔아덜이(한족) 벼농사 할줄을 몰라서 이제 조선이주민들이 가서 마음껏 한바탕 수전을 풀텐데 5년은 공량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한집도 자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문전옥답을 푸짐히 분배받아(땅이 지나칠 정도로 넉넉했다) 재미가 깨소금인데 산설고 물선 타고장으로 그것도 한족들 세상으로 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더구나 대낮에도 훙후재(마적 토비)들이 날뛴다는데, 조선사람들이 거기로 가는건 위험해!...지랄나서 가겠는가!... 리치대로 말한다면 이런때에 소작농이 어쩌구저쩌구 말밥에 오른, 간부들에게 시끄러움을 끼치는 우리와 똥돌이네가 대뜸 자보를 해야 하련만 아닌보살을 하지않는가. 제일 안성맞춤인 일등대상들인데… 괘씸한 것들! 구간부와 마을간부ㅡ 허씨네는 조바심이 치밀었다. 그들은 우리두집 아버지들을 불러놓고 소위 설복을 한다면서 단지곰을 하며 강박을 하였다. 한편, 자리에 누워있는 나의 어머니와 똥돌이어머니는 부녀반에서 투쟁을 했는데 나의어머니는 죄인으로 닥달을 했다. 공작대가 총을쏴서 류산을 하고 골병이 들었다면서 공작대를 공격하고(기실은 옆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댄 여론이였다.) 뚜드려팼을 뿐만아니라 나아가서는 토개를 다시 하려는 앙큼한 심보를 품었다는 것이였다. 똥돌이어머니는 돼지새끼처럼 땅굴막에서 사는 주제에 땅도없으면서 왜서 정부의 말을 듣지않느냐고 저년과 짜고들었지? 같은 심보지?... 진땀나는 추궁을 받았다. 투쟁대회는 반장인 허주임 처 배씨가 지휘했다. 나의 어머니는 강단이 센 분인지라 머리를 수그리지 않았다. 수그릴 일도 없었다. 하여 투쟁대회는 계속되고 악에받친 허주임처는 나의 어머니를 머리끄뎅이를하고 귀뺨까지 쳤다. 엿새되는날 나의 어머니가 기혼을 하며 투쟁대회는 일단락을 지었다. 어머니가 그냥 앓아 눕다보니 며칠후에는 우리집에 와서 투쟁대회를 몇번 더 하고 걷어치웠다. 내가 죽기내기로 발악한 탓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끝내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우리 두집은 조선으로 나가겠다고 하였는데 구정부에서는 그건 절대로 안된다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주민으로 가는수밖에 없었다.
   정월 대보름이 10여일 지나서 두집은 이민을 떠났다. 해춘이 되면 떠나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마다하고 엄동설한에(그때의 겨울혹한을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것이다.) 첯패 이주민을 따라 길을 떠나게 된것은 어머니가 어서 가자고 견결히 우겼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투쟁대회후 며칠 누워 있다가 어느날 벌컥 일어나시며 기력이 난다고 하셨다. 사람이 악이나면 순발력이 솟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날후부터 순전히 이 순발력으로 살았다. 우리두집은 외가집 수레에 보따리를 싣고 아이들을 태운후 마을을 떠났다. 수레는 큰외삼촌이 몰았다. 마을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멀리멀리 여니(배웅)를 했다. 허씨네 사람들은 아이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모질게 군것은 나의 외할아버지가 그들에게 원한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다욕하고 심술사나운 나의 외할아버지는 허씨네들이 감자며 호박 벼단을 훔친다고 쩍하면 도둑놈, 거렁뱅이, 마을에 두지못할것들… 하고 악담을 하며 줄욕을 했다. 지금 심술 대 심술이 붙은것이다. 그 화는 우리에게 떨어졌다. 똥돌이네는 곁불에 얻어 맞은듯, 꼭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10여리는 잘가서 산굽이를 돌자, 웬일이냐?! 허씨네 사내들이 오륙명 길옆 바위밑에서 벌컥벌컥 뛰쳐나오며 앞을 막지 않는가. 몽둥이를 든 자도 있었다. 이사짐이 규정을 어겼는지 조사해야겠다는 것이였다. “한마디도 없던 무슨 뚱딴지같은 규정이냐? 어느새끼 작간이냐?” 나의 큰외삼촌이 색을먹고 대들있다. “구정부 지시다!” 허씨네는 기세등등 했다. 외삼촌은 그자리로 30여리밖에 있는 구정부로 뛰여갔다. 구정부의 대답은 이사짐을 너무 많이 가지고 떠나면 잃어버릴수도 있고 불편하겠으니… 적당히 꾸리는게 좋겠다고 관심조에서 말했을뿐이지 무슨규정같은건 없다고 했다. (다른곳의 이주민들은 소수레 농구며 량식 종자까지, 넘쳐나게 이사짐을 싣고 굉장한 환송을 받으며 떠나갔다.) 그들은 너덧개뿐인 보따리를 샅샅히 뒤지였다. “길에서 먹을 주먹밥이나 사날분 가지면 된다는데 이건 무슨 기장쌀이랑 콩이랑…이건 가지구 못가오”. 그들은 10여근밖에 안되는 쌀자루 콩자루를 땅바닥에 내려 놓았다. “하! 닭알두 있구. 한개 먹어 보기우.” 한두개씩 쥐여내니 너덧알밖에 남지 않았다. 콩기름병도 쥐여 내리고 열콩자루도 쥐여 내렸다. “거기가면 무스게나 다 있다는데… 이건 금품이 돼서 안되우! 나라에서 총알 만드는데 쓰는건데. 이런건 어찌자구 가졌소? 큰일나지 못해서…”(왜놈시절에 하던 소리임) 그들은 외할머니가 사위에게 준 놋 밥식기와 나에게 준 꼭지달린 놋술, 젓가락 한쌍 마저 빼앗았다. “돈은 얼마를 가졌는지, 좌우간 가지구 가오. 그건 양보를 하겠소.(얼마 안될줄 아니까.) 됐소. 어서 떠나우.” 똥돌이네 짐에서는 아무것도 빼앗을것이 없었다. 아니, 똥돌이가 안고있는 씨암탉을 빼앗았다. “당신들 모두 잘 사오.” 나의 아버지는 한마디를 하고 수레를 몰았다. 그런데 그 한마디 말이 저주로 되였는지… 그후 10여년 사이에 허씨네 사람들은 선후로 죽어 나갔다. 좌상어른인 늙은 삼촌은 로친이 죽다보니 장가못간 아들과 홀애비 살림을 하고 큰조카의 안해 부녀반장 큰며느리는 풍을 맞아 페인이 되였는데, 그의 딸 하나는 강간범의 칼을 맞고 비명횡사를 했다. 별고 없은건 작은조카 작은 며느리네였는데 그의 남편은 팔부도 못되는 사람이다. 모두가 후대는 아들딸을 서넛씩 남겼으나 어느것 하나 제구실을 바로하지 못했다. 좌상어른은 멀건눈으로 남산만 쳐다보다가는 한숨만 쉬는것이 버릇으로 되여 버렸다. 선산을 잘못 썼나 악행을 너무 했나… 요상하고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가지만은 똑똑했는데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하고 미워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열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병이 나지않아도 죽는다고 했는데, 리치가 옳은 말인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새벽에야 룡정역에 도착했다. 이곳의 눈보라는 더욱 세차고 맵짰다. 집문앞에 서니 몸은 더욱 와들와들 떨리였다. 대합실 문은 안으로 채워져 있었다. 전등이 켜진 옆칸에서 뚜리모자를 쓴 사람이 끄떡끄떡 자블고(졸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조심조심 유리창을 똑똑 노크하자 뚜리모자는 화등잔같은 퉁방울눈을 뚝 부릅뜨고 쏘아보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와서 두손으로 불빛을 막으며 내다보드니 “써마?!(뭐야)”하고 소리쳤다. 똥돌이 아버지가 사정얘기를 하니 뚜리모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한참 보다가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저쪽문으로 나가드니 대합실 전등을 번쩍 켜고 왈카닥절커덕 문을 열었다. 대합실은 후끈 더웠다. 살것 같았다. 어른들은 감지덕지해서 굽석굽석 인사를 했다. 나는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고마운 뚜리모자 한족 아저씨였다. 기차는 오후 3시에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큰처남이 꼭 온다고 하면서 우리를 똥돌이 아버지에게 맡기고 소수레를 가지고 돌아섯다. 점심때가 거이 되여 아버지와 큰외삼촌이 수레를 몰고 역전으로 다시 왔다. 외삼촌은 우리를 데리고 역전앞 쾌관(작은음식점)으로 가서 맨톨(우동)을 사 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맛을 잊지 못한다. 외삼촌은 우리를 바래우며 눈물을 줄줄 흘리였다. 그는 나가는 길로 허씨네 종자들을 몽땅 때려치운다고 윽별렀는데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재삼재삼 말렸다. 그러나 일은 터지고 말았다. 후에 들은 말이 지만, 외삼촌은 우리를 강도질한 그 몇사람을 돌아가며 모조리 두들겨 팼다. 그리고 불질러 버린다고 날뛰는것을 마을사람들이 겨우 진정시켰다. 허씨들도 왁살스러운 사람들이긴 했으나 우선 꿀리는데가 있다보니 봉변을 당하고도 참는수밖에 없었다. 사연을 알게된 마을사람들은 “그런짓을 했는가?!”하며 입든사람마다 격분해서 그들을 “호적(강도토비)같은 쌍놈새끼들!” 이라고 직방 줄욕을 퍼 부었다. 빈고농협회주임인 큰허씨는 그날 빠졌기에 봉변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마을 흥화조화는 그가 다 부린다는것을 누가모르랴.
   어느날 그는 놋식기와 숟가락을 들고와서 너스레를 떨었는데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거들떠도 보지않고 곤두침만 뱉았다. 눈치무딘 큰허는 딴에는 뒤탈이 없게 잘 주물러 놓느라고 늘어붙었다. 그러다가 그만 나의 큰외삼촌의 주먹에 불이 번쩍나게 볼통을 쥐여박히우고 발길에 채여 바당에 굴러떨어지는 봉변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제야 케를 눈치챈 큰허는 그김에 아예 도망쳤다. 어망결에도 동작이 하두 빨랐기에 천만다행 더큰봉변은 당하지 않았다고 그는 몹시 감탄했다. 그런데 맨발로 뛰쳐나오다보니 발이 당금 얼어떨어지는것만 같았다. 이대로 집까지 가다가는 발을 얼구고야 말겠는데, 발을 얼구면 큰일아닌가! 어쩐담… 그는 강판처럼 다져진 눈길위에서 번갈아 외다리섬을하며 방안을 연구했는데 황급해서인지 신통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들어가서 제꺽 신을신고 나올가… 아니, 신을 달라고 소리칠가… 그런데 두가지가 다 겁이나서 결단하지 못하고 바장이는데 바당문이 벌컥 열리였다. 큰허는 화들짝 놀라며 뛰여야 한다는 본능에서 들었던 발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감때사나운 녀석이 아니고 인자한 할머니였다. 그의 손에는 신발이 쥐여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효자솟을 궁기(구멍)는 있다더니, 원, 그러면 그렇겠지! 아이구! 오마니!) 큰허는 펄썩 주저앉아 급급히 신을꿰고 달아났다. 그제야 잇몸이 지끈지끈 쑤시고 볼따구가 얼얼하다는것이 알리였다. 혀끝을 돌려가며 만져보니 어금니 두어대가 삐죽거리는데 한개는 다빠졌는지 건덩거리였다. 그는 눈을 질끔감고 건등거리는 이빨을 왈칵 잡아챘다. 생각밖으로 제꺽 빠져 나왔다. 원래부터 자주앓던 이빨을 손쉽게 뽑아 던진것이 무등 유쾌했다. 이빨앓이가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그느마새끼 주먹이 언뜰하는사이에 그것참! 회령이나 룡정으루 가야 빼는건데… 화가 복이됐네. 흐흐흐…”그는 한기를 맞으면 안된다는것이 생각나서 입을 꾹 다물고 코로 웃었다. 그러나 이 기쁨을 누구에게도 그건 안해에게도 말할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름대신 주임소리를 들으며 젊잖게 틀거지를 내며 령도어른행세를 해왔는데 이런 망신이 어데 있는가… 이번 거사는(우리네 이사짐을 턴것) 여간만 큰 랑패가 아니였다.
   돈화에서 우리는 훈춘 화룡에서 왔다는 이주민들과 한패가 되여(13호) 말파리를 타고 깡거우재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가 우리의 마을이라고 했다. 현에서는 농량이라고 하며 막밀어 열넉량 금새로 호당 통강냉이 한마대와 수수쌀 한마대를 주었다. 그리고 언 무우와 시래기배추도 몇마대 주면서 나눠 먹으라고 했다.
   깡거우재란 어떤 곳인가? 백설에 덮히운 험산준령이 무시무시 둘러싼 복판에 운동장만한 버덕이 있는데 거기에는 ㅅ자형의 움막이 여기저기 10여채가 있었다. 동쪽으로 산기슭을 이리돌고 저리돌며 20여리 나가면 신작로가 나지는데 계속 40여리를 더 가면 지다주라는 작은 부락이 있다고했다. 그 신작로를 따라 반대켠으로 200여리를 가면 돈화라고 했다. 깡거우재는 철저한 심산속이였다. 험악한 산발은 산세가 강하고 높았는데 진동나무가 꽉 들어선것이 완전한 원시림이였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화전 한뙈기 일굴만한 곳이 없었다. 움막이긴해도 사람이 살 집인데 어떤 사람들이 지은건지 너무도 엉터리였다. 소위 구들은 온돌 대신 나무를 찍어 깔고 오지깨덩이(뗏장)를 대충 덮어 놓았다. 지붕은 나무가지를 얼기설기 덮어 말그대로 하늘이 환히 보이였다. 지금도 한심한 부실공정이 있지만 이건 짐승도 싫다고할 한심한 부실움막이였다. 며칠후부터는 이집저집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훈춘에서 온 어느집에서는 반신불수 할머니가 타죽는 끔찍한 참사까지 발생했다. 우리는 포대기가 타서 쟁반만한 구멍이 났다. 밤에 아버지가 불을 때며 지켰기에 다행히 나는 타죽지 않았다. 너무 심산이여서 그런지 짐승은 보지못했다. 어느날 밤중에 황소가 기침하는것 같은 거센소리가 여러번 울렸는데 어른들은 호랑이가 사람냄새를 맡고 왔다는 것이였다. 어른들은 이곳저곳에 우등불을 지르고 온 마을사람들이 떨쳐나서 쟁개비며 퉁재를 뚜드리며 장밤 고함을 질러댔다. 어른들은 마을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신칙했는데 겁나서 나갈수도 없었거니와 나갈데도 사실은 없었다. 호랑이는 피똥을 갈기고 도망쳤는지 다시 오지않았다. 우리는 깡거우재서 짐승도 아니고 원시인도 아닌 생활을 두어달 견지했다.(우리를 이런곳에 안배한 자는 현과 구의 국민당 특무였고 후에 총살했다는 말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똥돌이아버지를 비롯해서 마을사람 서넛을 데리고 돈화쪽으로 나가며 마을터를 찿았다. 일행은 돈화와 80여리 떨어진곳에, 신작로 남쪽에 마을터를 잡았다. 마을터 남쪽으로 이윽히 나가면 얕으막한 야산기슭이 소잔등처럼 부드럽게 길게 누워있고 신작로 곁으로는 냇물이 흘렀다. 신작로량옆은 무진장한 땅이였다. 마을터 좌우에는 7ㅡ8리 사이로 꽤나 큰 마을이 있었다. 작긴해도 소학교와 상점도 있었다. 초중과 구립병원은 돈화쪽으로 20리쯤 가서 구정부 마을에 있었다. “이렇게 좋은 고장을 놔두고 심산골에 쫓다니!… 쌍노무 간나새끼!” 사람들은 배치를 하던 간부를 죽일놈이라고 욕하며 귀로에 올랐다. 그들은 아랫마을에(물이 동쪽으로 흐르기에 아랫마을이라고 했다.)들려 하숙집을 빌었는데 한족들은 기꺼이 맞아주며 어서 그러라고 하였다. 개털모자를 쓴 털보촌장은 말파리 대여섯대를 끌고와서 하루품을 들여 우리를 몽땅 이사시켜 주었다. 이튿날 부터 움직일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서서 움막을 지었다. 털보촌장이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적극 도와주었다. 10여일후 마을사람들은 새마을에 입주했다. 그날 마을추렴으로 돼지를 잡고 그간 고생한 한족벗들도 청했는데 그들은 제일처럼 기뻐하며 양걸대까지 데려 왔었다. 그날 나의 아버지 제안으로 마을 이름을 “강남촌”이라고 지었다. 마을사람들은 나의 아버지를 마을 책임으로 위임하고 잘살아 보자고 서로 고무를 하였다. 그런데, 며칠후 구정부에서 우리를 안배하던 그 간부가 와서 도로 깡거우재로 돌아가라고, 누가 주모자냐고 잡아가겠다며 펄펄 뛰는것이 아닌가! 나의아버지와 똥돌이아버지는 현으로 가서 강남촌마을 허락을 받아왔다. 그해 여름 털보촌장은 나의 아버지 청탁을 받고 한족소학교에서 한칸을 떼여 조선족소학교를 꾸리게 하였다. 털보촌장과 나의 아버지는 오래동안 좋은 친구로 사귀였다. 3년의 신근한 로동으로 강남촌은 어였한 마을로 일떠섯다. 수,한전 농사는 점점 소출이 높아갔다. 움막은 하나 하나 없어지고 새집들이 일어섯다. 마을에는 발방아 두틀, 드레우물 두개를 팠고 냇물에는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토기막을 짛고 여러가지 질그릇을 구워냈다. 나의아버지는 그런 재간도 있었든것이다. 일년후에 우리집에서는 소수레를 삿는데 그때의 기쁨이란 한입으로는 다 말할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오막살이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샘물깨로 도로 나왔다. 아버지가 다른사람들의 집을 먼저 짛게하다보니 그렇게 되였다. 마을에서는 이제 우리집을 덩그렇게 잘 지어 주겠다고 했는데 이사호들이 자꾸 오면서 아버지는 집짛기를 뒤로 미루고 미루고 하였다. 집을 짛자고 하던해에는 홍석에서 살던 큰형님 아들ㅡ조카가 이사를 와서 재목으로 그의 집을 먼저 지어주었다. 그런데 일년도 안되여 조카가 병들어 누웠다. 나의 아버지는 소수레를 팔아가지고 조카의 병치료를 했는데 결국은 조카를 잃고 말았다. 그해 세살난 나의 남동생이 죽은후 어머니는 류산을 하고 자리에 쓰러졌다. 우환은 련이어 겹쳐 들었다. 유복자를 품고있던 안조카가 또 류산을하고 자리에 눕고만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백성에게는 제일 무서운것이 병이다. 그해 거이 한해를 아버지는 병구환에 동분서주 했다. 마을에서 도와주긴 했으나 농사는 페농하다싶히 되여 버렸다. 농민은 농사가 잘되여야 사는건데 우리 두집은(우리와 조카) 살길이 막막하게 되였다. 워낙 신병이 많고 몹시 허약한 나의 어머니는 이민온후 줄곧 수토가 맞지않아 더욱 자주앓으며 고생했는데 이번에는 더는 뻗칠것같지 못했다. 안조카도 부증이 심한것이 그저일이 아니였다. 마을사람들의 동정심은 지극했지만 모두가 마음뿐이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 이곳보다 훨씬나은 샘물깨로 갈수밖에, 그외의 출로는 죽는길 뿐이였다!… 싫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선 수토가 맞지않은가. 그리고 가시집이 있고 회령에는 큰병원이 있었다.(그때는 중한병이 나면 구정부 비준으로 조선에 가서 보일수 있었음) 아버지는 두집을 끌고 샘물깨로 가리라 결단을 내렸다. 봄, 우리두집이 강남촌을 떠날때 털보촌장은 마차를 끌고와서 우리를 돈화기차역 까지 여니를 했다. 마차에는 어머니와 사촌형수가 누더기를 감고 눕고 애들 셋을 앉 혔다.(나의 두살짜리 녀동생과5촌조카 남매) 두집의 재산이란 모두해서 나도 들수 있는 보퉁이네개뿐, 그것도 넝마같은 이복몇벌과 그릇나부랭이 뿐이였다. 우리는 올때 보다도 더욱 한심한 거렁뱅이가 되여 고향으로 갔다. 아버지는 털보촌장과 작별하며 한족친구들의 빚을 꼭 갚겠다고, 그간의 고마움은 평생을두고 잊지않을거라고 거듭 말씀하였다. 털보촌장은 빚은 자기가 안을테니 근심말라고 하였다.(빚은 60여만원, 만원은 지금1원임. 그때는 큰소 한마리가 5,6원이고 꽉 박아실은 장작한수레는 2ㅡ30 전이였다. 나는 아버지가 톱으로 토막을 친 아름드리 통나무를 도끼로 잘 쪼갰다. 12살전임)
   훗날, 문정일씨(연변전원공서 부전원. 중앙민족사무위원회주임직에서 오래동안 사 업. 서거.)는 “그때 이주민공작은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실패원인으로 교육, 의료, 적막을 꼽았다. 몇년사이에 이주민 80%가 “도망”쳤는데 우리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수있을것이다. 이주민의 절대대부분은 극빈한 빈고농인민대중들이였다. 지금와서 회고해 보면 이주민 조직자인 연변전원공서의 주관념원과 동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실사구시적이 못되고 주관주의, 관료주의공작작풍과 경제건설과 경제생활을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를하듯 명령식으로 냅다민 “좌”적방법이 실패의 근원으로 되였다. 거기에 인위적 파괴와 교란도 있었다.
   우리는 6년만에 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처구니 없는 우리몰골을 보고 외할아버지는 한숨만 땅이 꺼지게 쉬며 “음ㅡ음ㅡ”신음소리를 자주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많은 생각이 있었을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죽은사람이 돌아온것처럼 놀라며 반기였다. 허씨네는 반기는척하기도 어색하고 모르는척하기도 난처해서 무척 궁색해 하였다. 나의부모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않았다. 다 지나간일이 아니겠는가…
  그사이 샘물깨는 이사온집들이 많아서 50여호의 큰마을로 되였고 소결이, 호조조를 거쳐 초급농업생산합작사로 집체화가 되였다. 집체화의 탄탄한 길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를 향하여 달리는중이라고 하였다. 갓입당한 큰허씨는 이번에는 초급사 주임이 되고 타 성씨 몇사람이 위원인데 나의 작은외삼촌은 회계를 맡았다.(그는 토 개때부터 마을의 회계문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해가을 더는 함께 살수없는 상황에서 사촌형수는 멀리 늙은홀애비한테로 재가를 했다. 울기도 하드니… 그후 그는 두루살다가 남편은 죽고 지금은 북경에서 옛말을 하며 잘 살고있다.
   집체화는 고급사로 한걸음 성큼 발전했는데 샘물깨는 구(향)내에서 제일큰 생산대 였다. 그때로부터 큰허씨는 집구석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페병에 걸려 그런다고 했는데 그에게는 심화병도 컸던것이다. 그는 사회무대에서 철저히 물러나고 몇년안지나 죽었다. 그후 고급사는 대약진을 해서 공산주의 바로 문앞에 있는 금다리 인민공사(향)에 풀떡 뛰여올랐다. 그리고 20년세월을 계급투쟁을 깡(기본고리)으로 숨차게 달려 개혁개방 시대를 맞았다.
   나의 아버지는 샘물깨로 돌아온후 집체화가 끝날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밭고랑을 타고 호미를 총으로 세계를 내대보며 제,수,반을(제국주의,수정주의,각국반동파) 겨누어 8억농민전우들과 함께 맹렬한 불질을했다. (입총을 맹렬히 쏘았다.) 세계혁명, 공산주의혁명을 한결같이, 꾸준히, 참답게, 열성껏, 시키는대로 계속혁명을 하였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와 하는 우스개말이고 사실상 우리아버지는 정치문맹이랄가 정치불문이랄가 정치와 관련되는 그런말은 80여 성상에서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다른사람들이 “인민공사 만세!” “류소기를 타도하자!” 목이터지게 웨쳐도 들었는둥 말았는둥… 그이가 알고있는 가장 무게있는 정치사상어록으로는 “량심”이라는말 한마디 뿐이였다. 그러나 볏모는 언제붓고 담배모는 언제내고 어느뙈기에 콩을심고 어느밭부터 가을하고 정월대보름에는 어떻게놀고… 이러루한 지엽적인 문제에서는 항상 중심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고지식한 어른은 우사칸 두병한쪼각 (사양원일때) 집체식당 가마치(누룽지) 한줌 자신께서 잣숫지않은건 그렇다치고 (집체식당 책임자였음) 부종병(영양부족)으로 누운 허씨네 삼촌한테는 뒷문을 쓰면서도 나에게는, 아니, 앓아누운 어머니에게는 숭늉물한모금이 어떻겠는가! 탈곡할때는 신발안에 들어 간 콩알 한알도 털어놓고 집으로 왔다. 집체화말기에 생산대에서는 배짱이 생겨서, 그야말로 너무도 가난하니까 혁명을 이르켰는데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절대엄금”이라는 자본주의꼬리ㅡ부업으로 참외를 심었다. 생산대에서는 년로하지만 기술있는 나의아버지를 쪼구(배려 돌봐서)해서 원두막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이럴수가 있는가?! 물러터진 참외를 몇개 잡숫고는 근을떠서 값을 물겠다는것이였다.ㅡ 나의아버지는 어머니가 장기 앓다보니 침을놓고 뜸을뜨며 여러가지 토방 험방을 알고 있었다. 하여 마을에서는 나의아버지를 보배라고 하였다. 그것은 허씨네가 더욱 그렇게 말했다. 그집 사람들은 웬일인지 아이고 어른이고 쩍하면 앓았다. 그들은 일만생기면 밤이고 낮이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나의아버지를 찿아오고 부르고 하였는데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따뜻이 도와 주었다. 궂은일(상측)도 여러번 거들어 주었다. 외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은 나의아버지를 “밸도없는사람”이라고 힐난 하며 매우 못마땅해 하였으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사람을 찿아와서 도움을 청하는데 사람이돼가지고 모르는척 한다는건 량심에 어긋나는, 도리가 아니라는것이 나의아버지의 진솔한 철학이였다.
   돌이켜보면, 개혁개방전까지 30년의 집체화시기(1953ㅡ1983년, 샘물깨에서는83년 봄부터 개체화를 실시.) 샘물깨력사는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기록할만한것이 아무것 도 없다. 그도 중국의 모든 생산대들과 마찬가지로 큰가마밥을 먹어왔을뿐이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반소량(국가량잠에서 꿔먹는것)을 먹고 분배몫이 있으면 생산대, 신용사 빚을 물고 그래도 몇푼 남으면 고맙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한푼도 못타면 부럽고 쓸쓸하고 막막하고 늙은이는 죽고 아이는 낳고 전해에 이어 금년이 그렇고 금년을 이어 명년도 그랬다. 계급투쟁을 동력으로 늙은쇠 볼기짝을 몽둥이로 잡아패듯 해해년년 끈질기게 틀어쥐고 끌고 밀고 기압을(정치운동)넣어도 그꼴이 그꼴이였다. 아니, 점점 못해만가는것은 도대체 무슨 속알머리냐?! 초급사가 호조조때보다 못하고 고급사가 초급사보다 못하고 인민공사는 더욱 망태기니 복통할 일이아닌가! 어리둥절속에서 허구한 날을 중국백성들은 먹는문제 때문에 허덕이였다. 나의부모들도 그속의 최하층 일원이였을 뿐이다. 그들의 후반생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끝내 배부른 세상을 보지못하고 마흔아홉에 한생을 마치셨다.
   동생을 시집보낸후 나는 아버지를 모셔왔다. 집이며 가장집물을 두루 팔아 생산대 빚을 물었는데 그러고도 빚은 적지않게 남아있었다. 2년후 샘물깨에서는 집체를 털었는데 마을에서는 나의아버지에게는 밭한이랑 소고삐한발도 분배해주지 않았다. 아주 빼버린 것이다. 내가 앞에서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산은 명언 한마디 뿐이라고 한것은 이래서 한, 빈말이아니다. 훗날 당시의 샘물깨 령도들과 그일을 외웠더니 그들은 매우 미안해 하였다. 나는 아무런 유감도 없이 그저 우스개로 한 말이였는데, 내가 되려 미안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13년을 살고 오래전에 리별한 어머니 한테로 갔다. 13년을 아버지는 만족해 하셨다. 모두들 나를 효자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나의 공인가. 개혁개방이 아니였으면 나라고 무슨 용빼는수가 있었으랴!...
   언젠가 나는 아버지에게 몇가지 일솜씨ㅡ 재능이 있었는가 계산해 보았다. 농사일에는 막힘이없고 목수 야장 목재판일 광산과 탄갱일 토기막 사진업 리발 토의사 돗자리틀고 바구니겯고… 이렇게 내리 엮어보니 할줄아는재간이 기술자급으로 무려28가지나 되였다. 해방전에는 밑천이 없는데다가 빚에 뜯기고 세금과 착취가 심해서 아버지같은 사람은 도무지 춰서기는 고사하고 살길이 항상 막막했다. 해방후에는 집체화의 틀속에서 대장이 시키는 농사일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속에서 재간을 피워본것은 고작 양봉 약재캐기 버들툴란재틀기(공정판에서 쓰는 버들광주리) 부업 정도였는데 그것마저도 자본주의 꼬리여서 금지를 당했다. 개혁개방후에는 돈벌이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때는 아버지가 세월을 따르지 못했다. 기력이다한 산골농부는 그저 마음뿐이였든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80여성상에서 “제노릇”이란 끝내 한가지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몇년전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안해와 함께 북경에서 머나먼 샘물깨와 강남촌에 가 보았다. 강남촌은 진에서 모범촌이라고 했는데 한국, 일본 그리고 내지에가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름껏 사업을 벌려 무척 흥성거리고 생기가 넘쳐났다. 마을은 개척2, 3세가 령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의아버지를 잊지않고 있있다. 내가 아무개 아들이라고하니 소꿉친구들은 너무도 반가와 하였다. 샘물깨는 완전히 달랐다. 20여호도 안되는데 빈집 서너채는 무덤처럼 쓸쓸하고 마을에는 기력이 다한 늙은이와 우두컨한 아이 몇일 뿐이였다. 허씨네 후손들은 거이 없었다. 마을길은 쑥들이 키들이로 우거져 오솔길이 돼버리고 그 많던 언덕아래 샘물줄기들은 사태에 뭍혀 흔적도 없었다. 우리가 쓰던 샘물은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머니의 빨래돌이며 아버지가 심은 구기자는 숲을 이루었는데 맑은 샘물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쿡! 솟았다. 마을책임(촌민소조 조장)은 “마, 정부에서 큰마을로 옮겨 주겠는지… 소핵교도 30리 밖에 있으니 아이들이 핵교두 못댕기구…”하며 연신 하품을 하였다. 반반한 사람들은 아예 모두 달아난지 오래다고 하였다. 그는 속상하고 답답해서인지 까치둥우리 같이 꺼부정한 머리를 득득 긁기만 했다.
      늙은 느티나무
   샘물깨에서는 토백이 김덕순이네가 부농에 뽑히었다. 덕순이는 드살이 센 과부어머 니와 함께 아이때부터 일손으로 잔뼈가 컸다. 덕순이가 여나문살이 될때 아버지는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때만해도 살림형편은 겨우 자작농 즉 지금 말로하면 빈농이였다. 덕순이네 살림이 펴이기 시작한것은 어머니가 나무장사를 하면서 부터다. 덕순이어머니는 어린아들과 함께 장작을 패서는 한수레가 되면 회령장마당으로 싣고가서 팔았다. 새벽에 떠나면 저녘늦어 돌아오는데 가고오고 꼬박 하루품이 걸렸다. 꼬부랑 암소는 엉덩짝을 맞아대며 과부녀인과 함께 농한기만 되면 고달픈 다리품을 팔아야 했다. 장작은 장터에 들어서기도 전에 빼앗으며 사갓지만 몇푼은 되지않았다. 대신 장세를 물지않아 고소했다. 그는 돌아올때면 소금에 절인 물고기며 바늘 실 성냥갑따위 잡동사니를 사가지고 와서는 마을과 린근동네에 팔았다. 돈이 없으면 쌀되박이나 콩 장작단과 바꾸기도 했는데 하면할수록 미릅이 트고 푼돈벌이가 솔솔 잘되여 갔다. 사람들의 무슨 부탁을 받으면 이를테면 편지를 부쳐주거나 광목(천)이거나 신을 사오거나 소금이며 백지 석유를 사다줄때도 장작단을 받으며 공짜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악스러운 과부녀편네라고 하면서도 응당지사라고 너그럽게 여겼다. 하루품이 먹는 길을 팔지않으니 편리해서 좋았다. 과부녀편네는 푼돈을 차곡차곡 챙겨서 수레 한틀을 마련한후 아들과 함께 열심히 나무장사를 하였다. 홀애비 집에는 이가 서말이지만 과부집에는 은이 서말이라는 말과 같이 덕순이네 집은 차츰 오붓해 지였다. 덕순이어머니는 대목을 불러다 샘물둥지 웅덩개에 물레방아까지 놓았다. 방아삯은 겨로도 받고 쌀되로도 받았는데 겨로는 돼지를 기르고 쌀은 장마당에 팔기도 하고 장리도 놓았다. 밑천이 있게되니 재산은 눈덩이 굴러가듯 부풀어 갔다. 그는 앞벌의 논뙈기를 한답한답 사들이며 신풀이도 해서 밭을 늘구어 갔다. 덕순이네 집은 마을복판에 있었다. 터는 널직해도 집은 움막이나 겨우면한 초가삼 간이였다. 장바 한컬레 되는 서쪽켠에는 양산같이 자란 느티나무 한구루가 있었는데 그것은 덕순이아버지가 심은것이였다. 거기에는 때론 매미가 날아와서 매암매암 울기도 해서 적적한 마을에 생기를 돋구어 주기도 했다. 덕순이네 집은 비록 보잘것 없었지만 알뜰한 부자라는건 원근에서 다 아는 사실이였다. 덕순이는 중키의 가무잡잡한 젊은이였으나 총명하고 젊잖은 사람이였다. 그는 정직하고 우선 부지런히 일을 잘했다. 학교문앞에는 가보지도 못했으나 소학교 초급생 정도는 되였다. 그는 스무살이 넘자 장가를 갔다. 색시는 뒤마을 소작농집 딸이였는데 함박꽃 같이 호함지고 체격이 늘씬한 처녀였다. 그저보기에는 덕순이보다 키가 더 커 보였으나 정작 같이 세워놓고 보면 어슷비슷 했다. 그들부부는 억척스레 일을 잘했는데 마을에서는 꼬리없는소라고 했다. 덕순이가 장가든후 그의어머니의 최대 목표는 기와집을 짛는 것이였다. 삼년거이 기를 쓰고 준비한데서 덕순이네는 마침내 열두칸짜리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지어 냈다. 잇따라 떡돌같은 아들형제와 딸형제가 두해 터울로 태여 났다. 과부녀편네는 집안 기틀을 마련하고 할미가 되였으나 점점 더 정정해서 대소사를 쥐고 흔들었다.
   덕순이네가 부자로 마을에 군림하기는 광복나기전 오년부터였다. 하지만 땅은 제힘으로 다루면서 계절고농을 2,3명씩 때로는 5,6명씩 썼다. 삯전은 누구보다 후하게 줬는데 허씨네는 그것이 생계를 이어가는 기본수단이기도 했다. 밭갈이부터 기음 가을 타작까지 그들은 일감을 다른사람에게 빼앗길가봐 마을사람들과 우락부락하며 눈을 부라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손이 거칠고 것등치기가 많아서 덕순이는 마음에 들지않았다. 기음 한가지만 보더라도 밭머리는 반반하게 매고 중간에 들어가서는 날치기를 하였다. 그러나 한마을에서 사정을 빤히아는 처지에 매몰차게 대할수는 없고, 덕순이는 앞장에서 그들을 신칙하며 함께 일했다. 장리쌀과 변놓이는 어머니가 주관했는데 사실은 뀌여주고 당자가 어느만큼 성이를 표시하면 어느만큼 받았다. 그의 원칙은 마을인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동중행사(산천당제례 상여월해)에는 늘 한몫을 담당했다.
   어느해 봄, 마을에 혈혈단신의 열대여섯살 되는 아이가 왔다. 조선 명천인가 한데서 살았다는데 고아가 되여 떠돌아 다니는 애였다. 이름은 김만순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덕순이네 집을 찿아가게 했고 덕순이네는 아이를 걷어 안는수밖에 없었다. 만순이는 온순하고 참한 아이였다. 그때로부터 만순이는 덕순이네 집에서 자랐다. 덕순이네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아들형제는 마누래(천연두)를 앓은후 얽둑이가 되였을 뿐만아니라 말도 얼버무리고 지력도 너무 차하여 단념하였다. 하지만 체격이 우둑진 아들들은 시키는 일은 군소리 한마디없이 수걱수걱 잘했다. 천생 일하자고 세상에 태여난것 같았다. 만순이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일했다. 머슴이라고 할수도없고 그렇다고 무슨 양자라고도 할수없는 야릇한 신분인데 앞으로 성가를 시키면 적당히 살림을 갖춰주면 될일이라고 덕순이모자는 그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순이는 나이는 어려도 셈이 든 애여서 덕순이네집을 하늘같이 고맙게 알았다.
   광복나기 이티전 앞뒤마을 지주들은 땅을 팔기 시작했다. 덕순이는 좋아라고 땅을 사 들였는데 일부는 몇집에 병작을 주었다.(산량을 절반씩 나눔.) 광복이 된 이듬해 4.6제 3.7제(4혹은3은 지주가 먹고 6혹은7은 소작인이 가짐.)를 하라고 하니까 덕순이네는 2.8제를 해서 정부에서 칭찬까지 받았다. 광복이되였다! 만민이 기뻐날뛰고 하늘땅이 환호하였다. 덕순이는 회령장마당에서 태극기 한폭을 사다가 집앞에 높히 걸어놓았다. 린근동의 부자들과 파출소 분주소의 순사들은 후퇴하는 왜군들의 꽁무니에 붙어 조선으로 달아났다. 어떤 사람들은 집문서 땅문서 빚문서를 덕순이에게 맞기면서 몇푼에 팔기도하고 혹은 자기가 돌아올때까지 리익을 공짜로 먹으며 보관만 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밀어 맡기는 판에 보관이야 못하랴 해서 덕순이는 받아 두었다. 이듬해에도 나가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으로 세상은 여전히 시글벅적이고 공산당 국민당이 어쩌구 저쩌구 모택동 장개석이 어쩌구 저쩌구하며 각가지소문이 무성하고 술렁술렁 들끓으며 뒤숭숭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샘물깨 사람들은 농사에만 열중했다. 밭이 흔하고 뜯어 먹자는 놈이 없고 왜놈이 없어지고 순사가 없어지고 별동대가 치안을 지켜주어 가난한 사람들은 기를 펴고 살수 있었다. 눙사는 잘되였다. 덕순이는 근심걱정없이 일에만 골몰했다. 자기는 지은죄가 없고 누구에게 인심잃은 일이 없으니 근심할것도 겁나할것도 없는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쩔쩔매며 도망치며 해덤비는 꼴이라니… 그러게 남과 이악스레 굴게뮌가! 제힘으로 먹고 살며 사람들과 화목하면 여북 좋은 일인가.
   광복 이듬해 하반년부터 토지개혁이 시작 되였다. 샘물깨는 구(향)적으로 제일 큰 마을이자 부자가 고스란히 그대로 앉아있어 해볼멋이 나는 마을이였다. 다른 마을들은 부자들이 도망가서 토지를 평균분배를 하면 그뿐이였다. 제마을 제집에 그대로 앉아있는 부자는 전 구에서 모두 세집뿐 이였는데 김덕순이는 도망갈곳도 없었거니와 도망할일도 없었다. 그는 시국이 어떻게 하라면 어떻게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다른 부자들도 대체로 그와 같은 생각들이였다.
   샘물깨로 들어온 공작대는 최씨라는 30대의 팔팔한 젊은이였다. 그는 흑룡강 어느농촌 사람이라 했는데 처자는 그곳에 있다고 했다. 중키의 걀캉걀캉한 사람이 눈매가 여무지고 약삭빨라 보였다. 문화는 없다해도 언변은 청산류수 였다. 그는 마을에 들어오자 빈고농협회부터 조직하고 고농 다섯집 사람들로 위원회를 만들고 큰 허씨를 주임으로 임명했다. 큰 허씨의 안해 배씨는 부녀반 반장을 시켰다. 최씨는 야학반도 조직했는데 청장년들은 글도 배우고(나의 두 외삼촌이 주로 선생질을 했다.) 노래도 배우며 오락이 위주였다. 남녀가 섞여 밤마다 웃고 떠들고 왁자하는것이 기분나는 일이였다. 최씨는 야학반에서 “사바께딴스”라면서 로씨야 발춤을 곧잘 춰서는 사람들을 웃기며 흥겹게 하였다. 그는 때로는 단포(목갑총)를 메고 마을에 나타나기도했다. 샘물깨는 마을은 커도 계급계선이 뚜렸해서 복잡할것이 하나도 없었다. 부농인 김덕순이만 처리하면 그것으로 토지개혁은 바로 끝나는 거고 괜찮다하는 다른세집은 밭면적을 조절하면 그뿐이였다.
   설이 지난후 마을에서는 빈고농협회가 주동이 되여 덕순이네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초과되는 밭을 몰수하여 분배하면 되는것으로 청산을 생각했는데 정작 열이오르니 불길은 아예 깡그리 청산하자는데로 번져졌다. 일체재산을 몰수하고 사람을 빈몸으로 쫓아 내자는 것이였다. 하여 덕순이네는 만순이까지 여덟식솔이 일조에 한지로 몰리게 되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밖에 있으라고는 할수없는 일이고 우선은 허주임의 사촌동생네 움막집과 바꾸어 들었다. 이사는 간단했다. 사람만 바꾸면 되는거니까. 덕순이네는 졸지에 쟁개비 하나뿐인 맨봉당 움막에 들어가고 허주임막내동생은 고대광실 쯔르르한 기와집에 이사를 했다. 먹을것 입을것 덮을것이 무진장한 살림집은 말그대로 꿈인지 생신지 어리둥절 했다. 갑자기 흥부박이 이칸저칸에서 터진것 같았다. 공작대 최씨는 웃방을 차지하고 비단이부자리를 들들 감고 잤는데 그때부터 허주임의 막내제수를 끼고 잤다. 허주임의 막내동생은 팔부도 못되는 어리숙한 사람이였지만 그의 안해는 반주그레 한데다가 재잘거리길 잘했다. 두메산골에서 시집을 왔는데 남편되는 사람은 굽석굽석 일은 잘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덕순이 모는 미친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공작대 최씨를 날강도라느니 호적(토비)새끼라느니 벼락을 맞아 급살을 하라느니 하고 벼라별 악담을 다 하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집으로 와서는 “너들 거렁뱅이가 왜서 우리집 가마목에 들어 앉았어! 당장 나가!”하며 왜장독장을 치며 소란을 피워댔다. 최씨는 허씨네 사람들을 데리고 덕순이어머니를 느티나무에 동여맨후 물매를 들이댔다. 그래도 덕순이어머니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발악을 하였다. 련삼일 매질과 발악은 계속되였다. 나흘이 되던날 오후 덕순이어머니는 움막에 업혀가고 그날밤에 죽고 말았다.
   덕순이네는 돌밭 몇뙈기를 가지고 그냥 움막에서 살게 되였다. 그는 다른사람의 문서까지 문서한보따리를 빈고농협회에 바쳤으나 그것이 되려 악질부농이란 모자로 되였다. 그후 고급사 후기에야 그는 집체에 들었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한많은 한생을 마치였다. 그의 두 아들은 점점 더 사람구실을 바로하지못하고 훌애비로(장가라고 갔지만 부실한 녀편네들은 얼마 안되여 죽고 말았다.)있으면서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두 딸은 꽤 약삭빨랐는데 멀리로 시집간후 소식이 없었다. 아마 악질부농 본가와 계선을 철저히 갈랐는 모양이였다. 그후 문화대혁명 중기에 덕순이처와 두 아들은 불안정인소로 찍혀 내지 어느산골로 쫓겨 갔다. 거기서 그들은 모두 죽었다.
   공작대 최씨는 그해 추석날 밤 단포를 한방 갈긴후 다른곳으로 갔다가 얼마후에는 집으로 쫓겨 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향의 무슨 간부로까지 올라 갔다가 한족유부녀를 건드린것이 죄로 되여 다시 농민이 되였다. 합작화 바람이불자 최씨는 초급사 주임으로 된 허씨에게 편지를 하여 샘물깨로 이사를 왔다. 이사온 이듬해 가을 최씨와 허주임 막내동생처는 간통을 하다가 당장에서 덜미를 잡히웠다. 그날밤 막내동생이 마실을 나간 사이에 최씨는 그의 집에 기여들어 년놈이 뒹굴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막내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니 최씨는 뒤문으로 도망치고 집에가서 벌벌 떨다가 허씨네 떨거지들 한테 잡히웠다. 허씨들은 좌상어른인 삼촌의 지휘하에 최씨를 느티나무에 동여매고 개패듯 잡아쳤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에 마을사람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구경하니 허씨네는 더욱 기세가 올랐다. 그들은 엄히 문초를하며 가문을 욕보인 상놈을 호되게 징벌하는 위풍을 떨치느라 했지만 사람들은 킬킬거리며 입을 싸쥐고 잘코사니야 했다. 같잖은 것들이 저들이 가문은 무슨 개떡같은 가문이라구 지랄하구 자빠졌네. 마을사람들은 허씨네가 으시댈수록 꼴같잖게 여기며 우습게 보았든 것이다. 그날밤 최씨는 느티나무에 동여매인채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허씨네는 개잡은 포수처럼 우쭐대며 최씨를 구정부 파출소로 끌고 갔다. 점심후 막내동생의 처와 허주임 처 배씨를 파출소에서는 호출했는데 그들은 밤늦게 돌아왔다. 최씨는 이튿날 보리저녘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랴부랴 이사짐을 꿍져가지고 흑룡강으로 돌아갔다. 뒷따라 허주임 처 배씨와 막내동생의처가 토지개혁때부터 최씨와 배가맞아 돌았다는 비밀이 공개 되였다. 허주임은 그때로부터 고방구석에 들어박힌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전에 최씨는 덕순이처와 그의 큰딸을 강간하려다가 코를 떼웠다고 했다.
   느티나무는 두어아름되는 믿둥이 한길남짓 곧게 자라다가 허리통같은 가지를 남쪽으로 뻗었는데 거기에는 얼기설기 잔가지들이 무성했다. 마을 처녀들은 거기에 그네를 매고 단오와 추석이면 그네뛰기를 했다. 북쪽으로도 한가지가 뻗었으나 그것은 무성하지 못했다. 느티나무는 해마다 몇마대씩 종자를 뿌리였다. 70여년 자랐다는 느티나무는 샘물깨 명물이였다. 한것을 그밑의 곡식에 영향을 준다고 터밭임자가 베여버렸다.
       샘물깨 풍속놀이
   샘물깨마을의 풍속놀이는 문화대혁명 때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그전에는 해마다 풍속명절을 빼놓지 않고 쇠였다. 내가 어릴적에 본 풍속놀이는 명절기분 그대로였다. 풍속명절은 모두 음력으로 쇠였다.
   설: 설 이틀전에 마을에서는 살찐돼지를 두마리 잡았다. 집집마다 한두근씩 고기를 들어 가는데 어떤집에서는 고기를 가져가지 않았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고 했지만 그런집들에서는 고기한칼 먹을 상황이 되지 못했든 것이다. 마을에서는 간부들이 아이들을 시켜 그런집들에 고기를 가져가게 했다. 이런 명절에는 김덕순이네도 빼돌림을 하지 않았다. 설밑이 되면 대부분집들에서 콩나물과 록두나물을 키우고 두부를 앗고 록두지짐 동배지짐을 부치였다. 고사리 도라지를 불궈놓고 괜찮은 집들에서는 엿을 달여 켜 두고 태석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집들에서는 대개 감주도 담그었다. 설날아침이면 남정네들은 일찌기 마당을 깨끗히 쓸어놓고 조짚이나 벼짚을 펴 놓은후 떡구유와 메를 갖추어 놓았다. 이어 집집에서는 떡메소리가 을린다. 젊은이들은 두셋씩 패가되여 떡치려 다니기도 했는데 음식대접을 절대로 받지 않았다. 떡메질에 서툰치들은 나무를 패거나 곡괭이질을 하듯 완력으로 메를 쳤는데 그것이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로인들이 서너번 시범을 보여주며 요령을 가르켰다. 메를 어깨넘어로 가볍게 넘겼다가 쌩 내리치는데 팔굽은 그때만 펴는거라나. 무릎은 시종 엉거주춤 하고 다부지면서도 춤추듯 맵시가 고와야 미끈둥한 처녀가 생긴다고 했다. 설날이면 설비슴으로 새옷을 입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낡은옷을 깨끗히 다려 입었다. 그것이 제일 좋은 행세옷이였다.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집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일찌기 거행하기에 구경할수도 없었다. 차례는 조상들에게 주안과 음식상을 드리는 것으로 대체상 제례와 같은 격식이였다. 술을 세번 붓고 절을 세번 하는데 가장이 무어라고 중얼거리였다. 고맙고 보살펴 달라는 덕담을 했다. 차례상을 물린후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는데 그때는 세배돈을 주는법이 없었다. 없었다기보다 줄 돈이 없었다. 이어 음식을 쓰는데 음식상은 거이 점심때까지 이어졌다. 설날은 해마다 일기가 쾌청했다. 그날은 집집이 자기집에서 하루를 보내였다. 아낙네들은 집안 어른들집에 색다른 음식을 진상했다. 음식은 작은 함지에 조목조목 담았다. 아이들은 밖에서 모여 놀았다. 사내애들은 팽이 치기를 하고 녀자애들은 널뛰기를 했다. 남자애들이 슬금슬금 다가가서 발판을 히뜩 밀어 놓으면 녀자애들은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이튿날부터 세배가 시작 되였다. 세배는 3일 혹은 닷새안에 해야한다. 마을 좌상어른으로부터 부모벌 이상분들에게 빼놓지 않고 세배를 다니였다. 같은 벌수에서는 세배를 하지 않고 서로 정중히 축하를 하였다. 하루 이틀 품이 걸리는 먼곳에도 집안어른이 계시면 세배를 다녀와야 한다. 로인들은 이 며칠은 출입을 하지않고 버선까지 신고 세배를 기다렸다. 아낙네들은 팔각 개다리소반에 부침개며 소찬을 준비해 두었다가는 세배군들에게 술잔을 대접했다. 아이들에게는 엿꼬치를 쥐여 주었다. 동시에 아낙네들은 행력시(토정비결)를 보려고 몰려 다녔는데 마을에는 그 책이 우리외가집에만 있었다. 두 외삼촌은 행력을 볼줄 알았다. 그들은 토정비결과 만세력을 펼쳐놓고 수판알을 떼걱거리며 태세 월건 일진을 뽑아서는 상괘 중괘 하괘를 만들고 한해 운세를 읽어 주었다. 아낙네들은 작괘가 끝나고 원문을 읽을때까지 가슴을 조이며 긴장해서 듣는다. 그런데 리지함선생은 교묘한 분이라 누구의 운세나 마지막에 가서는 다 좋은 글귀로 끝나게 책을 만들었다. 새해에 희망과 신심을 갖고 분발하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설은 대보름전까지 보통 편안하고 조용한 기분속에서 보낸다.
   대보름: 보름을 이 삼일 앞두고 오락준비가 시작 되였다. 보름에는 왁자 떠들고 마을이 들썽들썽 들끓게 노는것이 기본이다. 샘물깨에는 북과 새장구 징 꽹과리 새납과 퉁소가 있어서 농악을 흥겹게 칠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몇가지 농악을 능숙하게 다를줄 알았다. 그는 상모도 날릴줄 알았지만 그것을 갖추지 못해서 늘 아쉬워 했다. 농악놀이는 보름밑에서부터 서너번 했는데 장소는 덕순이네 옛집이였다. 제일 성수나는것이 닐리리타령과 풍구타령이였다. 풍구타령은 두 사람이 풍구를 밀고 당기고 한사람이 메기면 쌍메질 삼메질을 하는데 입을 도깨비처럼 실룩여 대고 눈알을 히번득 거리는것이 오줌쌀지경으로 사람들을 웃기였다. 낫가락이며 괭이를 벼리는 시늉을 하고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동작을 너무도 생동하게 하였다. 때로는 대장쟁이가 청중을향하여(특히 부녀자들을 향하여) 오줌 싸는 시늉을 해서는 녀자들이 나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보름날 남먼저 샘물을 길어다 아침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지만 거기에 명심하는 아낙네는 별로 없는것 같았다. 다같이 벌어먹고 사는 세상에 복은 무슨놈의 복이 따로 더 있겠는가. 아침밥은 누구네나 오곡밥이다. 그리고 고사리채를 꼭 먹는데 그것은 허리가 아프지 말라고 그런다는 것이였다. 빼놓지 않는것은 귀밝이술이다. 이 술은 아이들도 먹이였다. 달맞이는 먼저하면 소원성취가 된다고해서 아이들이 지붕꼭대기나 느티나무에 기여 오르기도했다. 정작 기원이 있는 처녀 총각들은 뒤울안에서 슬그머니 달맞이를 하고는 아닌보살을 했다. 그들의 기원은 주로 월하빙인이 짝을 맺어 줍시사 하는 것이였다. 보름이면 제일 야단법석인 놀음이 윷놀이였다. 먼저 몇개조를 나누어 도태전을 한후 결승전을 하는데 상품은 체경(거울) 꽃소래같은 것이였다. 청년조와 장년조에서 남녀가 편을 갈라 치는 단체경기가 제일 성수가 났다. 응원과 똥먹이기는 각양각색이여서 밤이 새는줄을 몰랐다. 입이 걸기로 유명한 치들은 이때가 바로 저희들이 판을 칠때라는듯 벼라별 똥료리를 다 만들어 댔다. “몇놈아?” 혹은 “어디에 있겐?” 하고 일제히 소리를 치며 내대는 2,30개 주먹에서 윷씨를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애가나는 운수놀음이였다. 두주먹이 다 나왔거나 먼저 혹은 뒤에 나온 주먹은 죽은것이여서 눈을 밝히고 잡아내서는 쫓아 버린다. 나온 주먹들은 또 별 괴상한 것이 다 있었다. 상소리로 내대는 주먹이 있는가 하면 해뜩 번져 내는 주먹도 있어서 한바탕 웃기였다. 너무도 어기낭차한 똥을 먹이면 어떤 녀자들은 정말로 구역질까지 해서 한바탕 법석구니가 일게했다. 이런 놀음은 보통 대였새씩 계속되고 끝날때는 목이쉬는 사람이 여럿이였다. 윷놀이를 할때면 우리 조무래기들을 심부름을 시켰다. 술과 사탕 과자, 언 배를 사오게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적당히 탐오해서는 냠냠 먹었다. 청년들은 국수되놀이 떡되놀이도 했는데 정월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농사차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보름날 욕사발을 얻어 먹으면 좋다고 해서 우리는 우사 헛간에 가서 수레를 끌어내여 길에다 팽개치거나 지어는 번져 놓기도 해서 줄욕을 얻어 먹기도 했다. 제일 요란하게 호된욕을 잘하는 사람은 우사칸 령감이였다. 우리는 킬킬거리며 욕사발속에서 수레를 제자리에 갔다 놓았다.
   청명: 청명 전날에는 반드시 돼지를 잡았다. 우리는 돼지오줌깨를 뿔궈 뽈을 찼다. 아이들은 며칠전부터 메를 파 왔다. 그것으로 메떡을 만들면 맛이 일품이였다. 이날은 산소에 가는것이 전부의 행사였다. 봉분에 새흙을 입히고 제를 올렸다. 마을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터밭이나 파 일군 뙈기에 마늘이며 올종 남새를 심기도 했다.
   산천당 제례: 샘물깨에서는 해마다 사월초파일이면 남녀로소 전부가 떨쳐나서서 정중하게 산천당제례를 거행하였다. 제례는 동구앞 참나무거목숲에서 진행하는데 거기에는 천신 지신 동신(마을보호신)을 상징하는 자동차대가리만한 바위가 세개 있었다. 마을에서는 동네추렴으로 돼지를 잡고 집집이 정성을 다하여 쌀이며 반찬거리를 보시하는데 그것으로 그날음식을 준비했다. 행사는 마을에서 제일 좌상인 로인이 도감을 맡고 유사가 집행을 하였다. 이 행사의 격식은 차례와 같다. 사람들은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자기 자기집 마을이 일년 내내 무사태평 만사대길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날 하루는 마을에서 휴식하며 다 같이 차례음식을 먹었다.
   상두월해(상여년례): 곱게 만든 상여는 다섯개마을에서 함께 썼는데 사월초파일후 적당히 날을 잡아 년례제를 거행했다. 상여막은 다섯개마을에서 비슷한 거리의 공터에 있었다. 제례는 다섯개마을의 60세이상 로인들이 모여 진행했다. 이 행사도 격식은 차례제와 같았다. 도감과 유사는 마을들이 돌아가며 륜번으로 했다. 제례음식은 집체에서 전담을 했다. 상여는 장정 여덟이 메는데 상측에 쓰는 일체기구가 구전 하였다. 그것은 고인이 타고가는 마지막 기구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파4구”때 머리 큰 반란파들이 홍위병 애들을 데리고 와서 불질러 버렸다. 그후부터 망인들은 덜컹덜컹 수레에 실려 나갔는데 허연관은 생자들을 민망하게 하였다.
   단오: 단오가 되면 모내기가 끝나서 마침 한숨쉬게 되였다. 마을에서는 돼지를 잡고 감분국수를 사오고 모내기 총결을 하는데 총결시간은 길지 않았다. 모범 서너사람을 뽑아서 초모자를 한개씩 주거나 런닝그를 하나씩 주었다. 점심과 저녘은 집체에서 한방을 쏘았다. 어떤 집들에서는 별미로 쑥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힘들고 시끄러워 차츰 없어졌다. 지금 장마당에서 파는 쑥떡은 가짜가 많다. 낮에는 처녀들이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방올차기 경기를 했는데 3등까지 뽑아서 체경이며 꽃소래를 상품으로 주었다. 저녘에는 유치원 마당에서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다가 자유오락으로 넘어갔다. 단오를 계기로 농민들은 며칠 쉬였다 이때를 맞아 피나무 껍질을 벗기려 감농들은 산으로 가기도 했다.(피나무 껍질로는 바줄을 들였다.) 처녀 총각들은 산보를 나가서 천렵놀이를 했다.
   추석: 추석에도 농민들은 한숨 쉬게 된다. 마을에서는 추석이 되면 꼭 소를 잡았다. 추석 찰떡감으로 찰벼를 따로 심었는데 그것을 먼저 타작했다. 상급에서 그러지 못하게 했지만 집단적으로 그렇게 하는데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하여 하향간부도 모르는척 눈을 감아 주었다. 후에는 소출이 많은 늦종을 심으면서 떡쌀이 없어졌다. 안로인들이 있는 집들에서는 솔가지를 쪄다가 송편을 만들기도 했다. 추석에는 누구라 없이 산소에 가는데 광주리에 제물을 담아 이고 온 가족이 모두 가는것이 규례였다. 묘소와 주변을 깨끗히 벌초를 하고 제례를 울린후 가족이 음복을 하며 고인을 추모 했다. 오후에는 그네를 뛰고 밤에는 농악놀이를 했는데 정경은 단오절과 같았다.   
   동지: 동지가 되면 오구랑팦죽이 으례식인데 다른 행사는 없었다. 오구랑떡속에 엽전을 넣어 그것을 누가 씹나 보기를 하는것이 제일 큰 오락이였다.
  
   지금은 모든 풍속이 없어졌다. 남아 있다면 청명과 추석에 흔드적 먼드적 산소에 가는것 뿐이다. 못사는 마을은 모든것이 쇠퇴하고 시들해 갔다. 지어는 마을 전체가 조락하고 괴괴해 져서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잘사는 마을은 한국식 조선식 한족식 서양식 신식 구식이 범벅이 돼서 새로은 풍속이 제멋대로 생기는데 그것도 한멋이라 하겠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떠랴. 여러가지 문화를 어우러 자기 구미대로 만들어 쇠는것이 지금세상의 행세다. 이것 저것과 동거를 하다가 한놈 찍었다며 약혼을 하고 아이가 네댓살이 되여 잔치를 해도 누구하나 군소리가 없다. 하객들은 축의금만 잘내고 배불리들 먹는다. 애비의 생일에는 커다만 단설기에 초불을 달아놓고 흰머리 꼭대기에는 알락달락한 꼬깔을 씌운후 깔깔거리며 좋다고 손벽을 친다. 그리고는 생일축하 어쩌구 저쩌구 하다가는 초불을 휘익 불어끄고는 환성을 질러댄다. 추석에는 월병을 먹고 그믐날 밤중에는 죠즈를 먹는다. 회갑날밤은 애비에미를 호텔에 재우고 초상에도 굽석굽석 세번 경례를 하면 대사필이다. 성탄절이니 련인절이니 과부절이니 멍텅구리절이니… 옛날에야 알기나 했든가. 지금은 남의 젯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듣자는 사람도 없다. 오뉴월에 외를 거꾸러 쥐고 먹든 바로 쥐고 먹든 나 하고 싶은 대로하니 편리해서 좋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며 진보하는 것이다. 옛날을 그리워 하며 어떤문인들은 비애의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뒤떨어진 사고이며 부질없는 짓이다.

                                                                                                                                                                                          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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