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우리 문단에도 잡문이 많기를
회령
내가 로신 대 문호를 알게 된것은 초중학교 학생 시절이다. 아니, 안다는것보다. 위인의 성함을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보았던것이다 그런데 선생의 글은 하나도 재미가 없어서 지레 싫증이 났다. 그리고 조건반사로 해서 잡문이라고 이름 띈 것은 모조리 거부 했는데 엄중한 편식증과 같았다 그렇게 아이때 생긴 버릇이 이십여년이나 갔다.
개혁개방 국책이 실시된후 나라 전체가 활기를 띄게 되였는데 문단에서 불쑥 뛰여 나온것이 잡문이였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문단에서는 김학철(홍성걸) 선생이 팔을 걷어부치고 제일 먼저 나섯다. 개혁개방은 “금지”` “차봉”을 많이 풀어 주었는데 잡문도 우사칸에서 나오게 되였다. 문화대혁명10년기간 거이 태양같이 빛나든 “문예혁명의기수” 강청은 여덟개의 본보기극만 마당에서 춤추게하고 다른 것들은 눈만 빠꼼이 떠도 정수리를 땅! 갈겨서는 찔끔 움츠러들게 했다. 여덟개 외의 모든 문예작품들은 그야말로 달걀에서 뼉다구 추리기로 흠집을 잡아서는 저승에 처 넣었던것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 폭정으로461명의 유생과 몇수레의 책을 (그때는 장작개비같은 죽간임. 지금책으로 환산하면 두어마대 정도.) 태워 버렸지만 강청은 수십만의 문예인재와 수천만부의 작품을 (서적,영화,그림,서예 등등 ) 분서갱유 해 버렸다. 그는 중국의 고금의 것만으로는 성차지않아서 외국의것도 분서갱유를 해치 웠다. 그런 살풍경속에서 잡문은 기겁을해서 저절로 우사칸으로 들어갔다 .자기진영에 대해서는 찬양만하고 적발, 풍자, 비판은 주제로 못 하는 상황에서 칼처럼 예리한 잡문은 쓸모가 없었던것이다. 제대로 말한다면 누구도 감히 쓰려고 못했다. 모르긴해도 담대키로 유명하다는 김학철선생도 그런때는 잡문을 추켜들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개방 덕분에 다시 붓을 들게된 김학철 선생은 잡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두어편을 읽어보니 재미가 깨소금 맛이였다. 그래서 김학철선생의 잡문은 두말할것 없고 다른 사람이 쓴 잡문도 만나기만하면 하던일을 제쳐놓고 무릎을 치며 읽었다. 하여 안해가 이상해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잡문이 너무도 적었다. 가물에 콩씨나기였다. 궁여지책으로 한문으로 된 “잡문월간” “잡문순간” “잡문보” “잡문특간”같은것을 사서 보기도 했는데, 기막히게 재미있고 느낌이 많았고 여운이 깊고 길었다. 잡문감질이 날때면 로신선생의 잡문을 다시 꺼내여 읽기도 했는데 역시 재미가 민숭맹숭했다. 나는 그 원인을 사색해 보았는데 하나는 나의 력사지식 등 감상수평의 부족이였고 다른 하나는 선생의 글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멀었기 때문이였다.
잡문은 반드시 어떻게 써야한다는 중공중앙선전부거나 아래다리인 문련, 작가협회의 규정 혹은 지시는 없는줄로안다. 그런데 잡문의 가장 큰 특점, 작용, 힘, 가치는 적발, 풍자, 비판에서 발휘된다. 현실비판에 있다. 이것은 그어느 문예쟝르도 비길수 없는 우세다. 그러니까 비판을 써야 한다는 말과 같은데, 꼭 그래야 한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이런 시비는 평론가 선생들께 맡기고, 김학철 선생은 어느글에서 “잡문을 써야 한다”고 말한바가 있다. 뜻인즉 “인간정신기사”요 “지성인”이요 하고 사회적으로 존경하는 작가선생들이 현실의 자산계급적사상, 생활방식, 썩어빠진 그 모든것들을, 온갖 비정의, 온갖 부정부패ㅡ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 이런현상을 묵과 하지말라는 것인것 같다. 예리한 비수ㅡ잡문을 들이대라는 것이다. 목적은 진리와 정이를 수호하며 사회진보를 위한것이리라.
개혁개방후 우리문단에는 시 소설이 우후죽순마냥 솟아 나왔는데 독자층을 살펴보면 텔레비 보는사람이 제일 많은데 소품을(단막극) 좋아하는 관중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지면에서는 실화와 잡문애독자가 제일 많다. 이것은 독자(인민)들의 수요와 구미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실화와 잡문이 너무도 적은것이다.
몇몇 중견작가씨들과 얘기를 해보니 하나는 수평이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그따위 잡글을 어떻게 쓰냐고 즉 얼굴이 깍인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끄럽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필화를 당한다는것이였다. 유력한 증거로 김학철선생을 대뜸 내대면서 잡문때문에 법원에서까지 왔다갔다한 사건을 실례로 들었다. “하두 김학철선생이시니 무사했지! 우리따위라면… 으흐흐 끔찍해라! 상상만해두 소름이끼쳐서…”하며 두억신을 만난 봉길이처럼 두눈을 흡뜨고 혀를 빼물며 손발을 벌벌 떠는것이였다.
김학철선생은 생전에 이런 명언을 한바가있다. “편안히 살겠으면 불의를 보고도 못본척 하고 사람답게 살겠으면 그것과 싸우라.” 세상사람은 누구나 다 사람답게 산다고, 살겠다고 말하지 개나 돼지같이 살겠다는 사람은 하나도없다. 사람은 불의를 보면 마땅히 싸워야한다. 그러나 그렇지못한것이 적지않은 현실이 아닌가?!... 정의용사 상금을 왜서 세웠는가? 거기에는 정의용사가 많기를 희망하는 일면도 있는것이다.
인간정신기사(령혼기사) 사회지성인이라고 하는 작가들이 숭고한 사명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정신적 량식을 제공하는것이 아니겠는가!.
김학철선생이 생전에 또 이런말도 한적이 있는것 같다. “지금은 잡문을 써야할 때다…” 물론 이말은 다른것을 쓰면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들이 잡문도 쓰기를 회망하는 말이다. 왜서? 당과 인민과 독자와 사회가 박절히 수요하기에. … 우리 문단에 잡문도 많아서 독자들이 즐거워 하였으면 좋겠다.
김학철선생 작고후 잡문이 사라지지 말고 더 만발하면 고인도 독자들과 함께 기뻐할것이다.
사람들은 잡문작가를 수평이 없다고 얕잡아 보지 않을뿐만아니라 오히려 무척 존경할것이다. 작가는 정의의 용사다! 정의의 용사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애대한다.
일전에 문화부장선생이 “문예작품은 무가지보다.”(값을 정할수없는 보배)라고 말하는걸 듣고 “그 량반이 제대로 말하는군! 말은 바른대루.”하고 크게 동감한바가 있다. 잡문도 문예의 일분과로서 무가지보다. 그도 정신문명건설과 화해사회건설에 크게 한몫을 한다.
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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