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전의 일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어느날 상강대대합작의료위생소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는 리선생이 걸어왔는데 그는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김선생! 이거 큰일 났습니다! 허동무가 사고를 쳤습니다!...”
사연은 이렇다.
현방역짬의 포치에 따라 우리공사에서는 파상열예방접종을 하게되 였는데 상강1,2대를 맡은 허동무(부유보건원)가 오작을 하였다. 그는 두사람분의 감독활균역묘를 한사람에게 접종해 버린것이다. 파상열이란 가축으로부터 전염되는 질병이다. 감독활균역묘는 독성을 약화시킨 산 세균으로 제조한것이다. 잘하느라고 한 예방이 오히려 병에걸릴 위험을 주었든 것이다.
나는 즉각 현에 보고한후 자전거로30여리 먼 현장으로 달려갔다. 내가 땀벌창이 되여 응급처리를 하는데, 현과 주에서도 달려왔다. 사건이 발생한후 나는 현으로부터 엄격한 추궁을 받으며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처리는 너그럽게 받았다.
허정숙씨는 30여세의 해사한 젊은과부로 어린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접산이며 계획생육, 유치원위생관리 등 사업을 괞찮게 하였고 호사업무도 하여 대대령도와 군중들은 기본상 만족해 하였다.
그는 사고를 낸후 앓아눕기까지 했다. 하지만 리선생과 피해받은 농민들이 떠들어 대며 량해하려 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웬일인지 공사혁명위원회주임도(반란파 맹장) 합세를 하였다 주임은 단통 “계급투쟁의 새로운동향”이라느니, “혁명과 생산을 파괴 한 현행반혁명사건”이라느니 하면서 호되게 투쟁한후 현공안국에 넘기라고 하였다. 아주 단매에 사람을 때려잡자는 것이였다.
나는 납득이 되지않았지만, 나의 리해득실로 부터 출발하여 적극성을 보이느라고 그를 공사내 위생계통에서 개패까지 걸고 비판투쟁한후 상강대대에서도 비판투쟁하며 위생소에서 캐출할것을 대대에 건의했다.(그때 나는 입당심사를 앞에 두고있었다.) 허정숙씨는 위생소에서 쫓겨난후 먼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가서 대대위생소에 들어갔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나는 차츰 량심을 찿게 되였다. 생각해 보니 나의 사상, 량심이 협애하고 저렬하고 비루했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세상에 한명도 없지않은가?! 고의적인것도 아니고 순전한 순간의 사업상실수를, 그것도 만회할수 없는 손실을 빚은것도 아닌것을, 그리고 또 주동적으로 사고를 보고했는데… 나는 그때일이 줄곧 가슴에 걸려 있었다. 원칙을 견지못하면서 당원은 무슨 당원! 참! 부끄럽다. 미안하다.
너무 늦었지만… 허정숙씨 죄송해요. 량해를 바랍니다.
14.7
박은자씨 죄송하오
우리 림상의사실습조 10여명이 훈춘현병원에서 긴장한 림상실습을 할때의 일이다.
5월 13일 오후 3시 실습조 전체가 긴급회의를 하게 되였다. 회의는 우리의 실습을 책임진 유광의주임(외과)의 지시에 의하여 소집된것인데 당연히 집행은 실습조조장인 김성철이 하게 되였다. 점심때 성철이는 나를 찿아와 박은자(성씨는 똑똑히 기억되는데 명함은 가물가물하다. 왕청사람.)의 련애사건을 바판하겠는데, 호되게 중점발언을 잘하라는 것이였다. 나는 쾌히 대답했다.
성철이는 나와 한반인데 세살 이상이다 그는 벌써 사회생활에 대하여 나보다는 훨씬 로련한 사람이였다. 나는 그때 20살, 그야말로 천진하고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생기발랄한 청년이였다. 줄곧 학생으로, 자고자대 교오자만 남을 깔보며 으시대거나 건방진… 그러한 나쁜품행은 나에게 없었지만 진취심 경쟁심 승벽심같은것은 개성이랄가 아주 강렬하였다.
회의에서 은자는 원래 해말쑥한 예쁜얼굴이 홍당무가 되여 누구와 련애한 사실을 자아검사, 자아비판을 하였다.(현병원 내과 청년의사. 훗날 그들은 결혼.) 은자가 교대한 련애착오란 사랑한다는 편지를 두번 주고 받은것 영화를 세번 보고 함께 국수를 먹은것, 그리고 서로 손을 잡아본것… 이것이 전부였다. 그때 은자는 스물서넛 되였던것같다.
왜서일가? 누구못지않게 리론이 세고 말을 잘하는 성철인데, 개회사로부터 두루뭉실 미적지근한 말만 얼버무려 하고는 우리더러 비판방조의 발언을 용약하라고 거듭 강조하는게 아닌가… 나는 성철이가 집이 은자와 같은현이여서 낯이 가려워 그러는가 짐작하면서, 나의 실력을 과시하려고 마음먹었다. 누구보다 더 잘 말하려고 목청을 다듬고 대뜸 엄격한 어투로 비판의 예봉을 들이댔다. 필요이상 높은 악청으로.
그때 학교에서는 우리들의 작풍, 규률을 엄격히 강조했는데, 련애는 절대로 엄금이였다. 때문에 나의 호된 비판발언은, 물론 명정언순이다보니 말이 거침없이 잘 나갔다. 나는 은자의 엄중한 착오는 “실습조와 모교의 얼굴에 먹칠한 비루하고 수치스럽고 가증한 행위”라느니 “학교에 보고하여 퇴학처리를 줘야할 정도”라느니 “당의 배양과 기대를 저버린 자산계급후대, 수정주의싹”이라느니… 아주 원쑤를 족치듯 무자비하였다. 은자는 수수떡이 되여 울기까지 했다. 다른 동학들은 묵묵불언이였다. 나의 격앙한 장광설은 저녘때가 되여서야 끝났다. 성철이는 미지근하게 두어마디를 하고 회의를 끝냈다.
나는 은자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평생 잊을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두달후 우리는 림상실습을 끝내고 돌아와서 필업시험을 친후 모두 통일분배를 받아 조국각지로 나갔다. 은자도 별일없이 활짝웃으며 공작강위로 갔다. 련애건에 대한 그의 자아검사가 심각했고 뉘우침표현이 좋았고(총각과 래왕을 엄격히 단절했다.) 필업시험성적도 좋았든 것이다. 그리고 유광의주임의 감정서도 좋았다.
동창들을 그리며 잊지못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동창들을 생각할때마다 나는 은자씨가 먼저 생각된다. 그때마다 나의 유치함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왜서 그리 “각박”했던가… 나는 다른동창들보다 셈이 늦게 들었던 것이다…
훗날 느낀바지만 다른사람의 결점(착오)을 비평한다는것은(그것은 가족, 친구간에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평은 어디까지나 아주 성근한 선의적인 “방조”여야 하며 절대로 감정을 상하게 하여서는 않된다. 말한자는 죄가 없고 듣는자가 삼가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것이 아니다. 말할때는 반드시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어느때고 꼭 은자씨에게 진솔한 사과를 하고 량해를 구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주소를 알수없어 마음속에만 넣고 있었는데, 30년만에 동창회가 열렸다. 나는 은자씨를 만날수 있을거라고 믿으며 동창회에 갔는데, 은지는 오지 않았다. 동창회 이틀간 나의마음 한구석은 내내 무겁고 아쉽고 섭섭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은자씨! 그때 철부지였든 이 동창을 너그럽게 생각해 주오. 정말 부끄럽고 미안 하오. 건강과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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