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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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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없은 재수
2019년 03월 02일 07시 48분  조회:465  추천:0  작성자: 회령
     실화
                                          재수가 없은 재수
                                                                                                            회령
 
일전에 우리부부는 혼례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리는 신부측 하객이였는데 신부는 안해의 11촌조카 였다. 지금세월은 생활절주가 긴장하고 빨라서 그리고 계산적으로 살다보니 40여년전보다 인정이 많이 엷어 졌다. 친척도 5촌까지 꼽으면 법도와 례문이 있는 화목한 가문이라고 칭찬을 한다. 지금은 말할것도 없지만 옛날에도 8촌, 9촌이라하면 대체로 타남으로 여겼다. 하지만 우리가 11촌조카의 잔치에 먼 길, 교통불편도 헤아리지 않고 참석하게 된데는 특별히 깊은 정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이 중간쯤 되였을 때다. 7월 어느날 밤이다. 2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사는 안해의 9촌숙모가 갑자기 우리집으로 찿아 왔다. 9촌숙모는 어질디 어진 산골 아낙네인데 40푼하다. 그는 땀에 눈물범벅이 되여 두서없는 설분을 한바탕 발괄하였다.

자다 깬 우리부부는 자초지종을 반복해서 물어서야 상황을 알수 있었다.

안해의 9촌숙부벌이 되는 어른은 대대서기 겸 혁명위원회주임이였다. 그런데, 그는 젊은오끼(로망)를 쓰고 말았든 것이다. 40푼한 9촌숙은 사람이 워낙 약삭빠르고 해박스럽고 날파람이 있었다. 공부는 비록 잘하지 못했지만 아이때부터 똑똑하다고 칭찬을 들었고 해마다 공사(향)운동대회 때는 대대(촌)축구대 선수였으며 교련이 였다.

문화대혁명이 갑자기 터지자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얼떨떨 해서 멍해 있는데, 9촌숙만은 “홍소병”(소학생) “홍위병”(초중애들)애들과 섭쓸려 다니며 혁명을 하느라고 전 공사를 뛰여 다녔다. 그 꼬락서니가 마치도 열중의 무리에 끼운 게사니 같다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얼마 안 가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 될줄을 몰랐다. 그는 공사반란패두목이 되여 생산대(촌민소조)대장으로부터 공사당위서기, 사장에 이르기까 지 간부명색을 띈 사람이기만 하면 우선 뚜드려 부셧는데,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걸어놓고 계속 파며 뚜드리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입에서 한마디만 떨어지면 결판이 났다. 여북하면 아무깨가 왔다 하면 우는애도 그쳤다고 했겠는가… 그는 승승장구 하여 “토구납신”(낡은것은 토해 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인다)할때 입당을 하였다. 그리고 대대서기, 혁명위원회주임으로, 공사혁명위원회부주임으로 벼슬도 하였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가 호사다마라고 할가 개별적 사람들이 극히 비밀적으로 뒤에서 그에게 비람기가 있다고 하였다. 아무 부녀대장이, 아무 부녀주임이 “피둬”(비 판두쟁)판에서 해방을 받은것은 궁둥이 효과라느니, 어느 각시가 공소합작사(상점)에 영업원으로 들어 간 것은, 어느 처녀가 민반교원으로 된 것은 지어는 누가 대대위생소 접생원, 호사로 된 것도 무슨일이 있은것으로, 본것처럼 구설이 돌았다.

하지만, 불거진 말썽은 별로 없이 9촌숙은 서기와 주임을 떳떳히 해 먹고 있었다. 그러는 중 약 보름전이다. 9촌숙과 뒷마을 부녀대장이 환한 대낮에 조밭에서 간통을 하다가 마을사람들에게 들킨 것이다. 그날 오후, 오쟁이를 진 사내 형제들이 9촌숙과 그의집을 들부셔 놓았다. 이튿날 새벽 9촌숙과 부녀대장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도망을 갔다. 3일후 그들은 조선으로부터 압송되여 돌아 왔는데, 현공안국에서는 심문을 해 보니 정치건은 아니고 작풍문제로 인민내부모순이 였다. 그런데 수정주의 로 달아난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반혁명, 판국(반역)죄”라고 하기는 어려웠다.(보수패라면 사정은 꼭 달라진다.) 그리고 사건담당자들은 반란패들로서 9촌숙과 이미 친한 사이들이 였다. 하여 본 대대에서 적당히 비평교육을 하라며 집으로 돌려 보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잘 아는 것이다. 우리는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여서 하회에 대하여 신경을 끄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말이냐?! 숙모의 말을 듣고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숙모의 말에서 보면, 적당히 하라던 비평교육은 말그대로 모든개매질인데 한개 생산대에서 2, 3일씩 몽둥이 닥달을 하는데 세번째 생산대로 넘겨졌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였다! 문제의 부녀대장은 원래 바람쟁이여서 자기마을에도, 이웃마을에 도 주전부리가 많았다. 두 바람쟁이는 간곳마다에서 이빨을 갈며 벼르는 피해자들을 만났다. 하다보니 그들은 머리는 언녕 가새질로 개뜯어먹개가 되였고 고깔에 개패에 헌 왕바신, 고무코신을 목에 걸고 바람 쓴 경과지사를 자백해야 했고 다른것도 다 몽땅 탄백하라는 몽둥이닥달찜질을 당했다.

세번째로 간 생산대에서는 오늘 보리저녘켠에 어린청년 둘을 숙모네 집에 심부름을 보내여 사람이 죽었으니 당장 주검을 가져 가라는 것이였다. 강에 빠져 자살한것을 오늘 점심후에 시체를 찿았다는 것이였다.

숙모는 마을에서 궂은일에 도움을 잘하는 이웃집 로인에게 청을 들었다. 로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죽은사람을 미워할수야 없지…”하고 말하며 대장을 찿아가 수레를 얻어 왔다. 숙모는 마을의 로인 두분과 함께 7,8리 먼 이웃 생산대 강변으로 가서 거적대기를 덮어 놓은 남편의 시체를 실어 왔다. 그리고 우리집으로 달려 왔는데, 그가 볼바에는 남편의 죽음에 의문점이 너무도 많았든 것이다.

9촌숙은 문화대혁명 시작부터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지어는 증오하는 일만 골라가며 했다. 그가 “혁명적 반란파”라며 “혁명적 맹장”이라며 기를 쓰고 밤낮 뛰여다니며 한 소위 “혁명적 행동”이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산골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소학교와 초중학교 애들이 “네가지 낡은것을 짓부쉬고 네가지 새것을 수립”(사상 문화 풍속 습관)한다는 행동으로부터 시작을 하였다. 앞에서 말했지만 9촌숙은 병아리무리에 끼여 든 게사니처럼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네가지 타파와 수립에 부쩍 열을 냈다. 그는 공사내에 있는 전부의 상여막(다섯채)에 직접 몽땅 불을 질렀고 20여 집을 들춰 베감투, 상복, 병풍, 지어는 개다리소반까지 빼앗아서는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제사를 못하게 하고 아이돌생진, 결혼잔치를 못하게 파토를 쳐 놓은 “혁명적영웅적미담”도 여러건인데, 지금도 구전민요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남의 궂은일을 잘 돕는다는 그 로인네 모친초상도 9촌숙이 파토를 쳐 놓았다. 다음은 잡귀신을 투쟁하고 간부명색을 띈 사람은 덮어놓고 우선 닦아세우고 보는데, 9촌숙의 고비를 넘는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꼬리를 끊어버리는 대회전에서도 9촌숙은 “혁명적영웅적미담”을 여러건 창조하였다. 뜨락에 있는 과일나무를 찍어버린다든지 피우자고 심은 초담배를 포기수가 초과되였다고 뽑아 버리고 닭도 마리수가 초과되였다고 때려잡고… 하여튼, 9촌숙같은 “반란패맹장” 은 흔치 않았다.

그때 어느날, 나는 9촌숙에게 그를 생각해서 넌짓히 한마디를 권고 한 바가 있다. “혁명을 하는건 좋은데, 해야하는거지만… 군중들의 미음을 사기보다는 인심을 얻는게 더 좋지 않겠는가.”고 말했다가 부옇게 몰리우고 말았다. 그는 먼저 “혁명은 칭커츠판이 아니며 수놓이도 아니며…”란 모주석의 어록을 한단락 인용한 다음 나에게 훈계하기를 “강청동지를 따라야지 군중을 따라서는 우경착오, 로선착오를 범하기 쉬우니 특히 조심하라.”고 엄포를 놓은후 “너와만 하는 말인데, 지금 이 문화대혁명은 내가 산골 농사군 신세를 벗어메치고 출세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고 말하며 어데 가 외우지 말라고 재삼 당부를 하는것이 였다. 나는 입이 쓰거워서 더 말하지 않았다.
  
한쌍의 바람쟁이가 세번째 생산대로 끌려가서 피둬를 받는 두번째 날이다. 그날도 낮에는 집집의 변소를 치고 저녘후 “경과보고”와 탄백을 하며 란타를 맞은후 그들은 가둬두는 집으로 끌려 갔다.

그 생산대의 현임 정치대장은 9촌숙 못지않게 총명하고 문화대혁명 초발에 벌써 반란으로 일떠선 사람이였다. 그도 야심이 만만치 않은 맹장으로서 공사반란패 우두머리자리를 결정할 때도 그리고 그후의 혁명위원회 위원선거 경쟁에서도 그는 9촌숙의 뻐근한 적수 였다. 안달이 난 9촌숙은 악착스러운 한가지 꾀를 사용했다. 그는 정치대장이 집체호 모, 모 녀지식청년들과 애매한 관계라는 소문을 은밀히 퍼뜨린후 군중들의 반영을 들었다며 공사파출소와 현공안국에까지 익명밀고를 하였다. 하여, 정치대장은 여러번 조사를 받았고 큰문제는 없는것으로 두리뭉실, 미지근하게, 흐지부지하고 말았는데… 뀌면 쐈다고 하는 그때세월 이건 그의 명성에 먹칠이였고 똥칠로서 영향이 아주 컸다. 정치대장은 대개 9촌숙의 작간이라고 추측은 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심기가 불편하고 앙앙불락이였지만 뭘 어쩔수는 없었다.

옛말에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옛말과 같은 형국이 되였다. 그 생산대에도 9촌숙을 은근히 의심하는 사내들이 몇이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잔뜩 벼르고 있는 그들을 정치대장은 의미심장하게 부추기기까지 하였다. 밤이 깊어가자 정치대장은 피둬대회를 그만하고 그들을 외딴집으로 데려갔다. 그집은 로인량주가 사는 집인데 마을에서 퍼그나 떨어져 작으마한 시냇물 가까이에 있었다. 정치대장은 의처증이 가득한 사람 둘을 데리고 밤을 지키기로 안배를 하였다. 로인량주는 요즘을 다른집에 가서 자게 되였다.

숙모는 그들이(정치대장네) 남편을 때려죽이고 강물에 처 놓었다는 것이였다. 숙모는 정치대장과 남편사이가 앙숙인 전후사정을 이미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남편의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가 흐물흐물한 것이 박살이 난것 같더라는 것이였다. 그뿐이 아니다. 조리돌림이 시작되는 첯날 그는 남편에게 새바지를 입게하고 새운동화를 신게 하였는데, 바지무릎과 엉덩이가 풀썩 다슬어 헐렁채가 되였더라는 것이였다. 운동화 앞코와 신등, 뒤축도 다슬어 구멍이 났더라고 하였다.(녀자의 시체는 찿지 못했다.)

듣고보니 9촌숙의 죽음이 이상스러웠다. 나는 세개공사의 법의를 겸하고 있었는데, 숙모를 데리고 파출소 소장을 찿아갔다. 소장은 현공안국에 즉시 보고를 하고 우리는 밤도와 현장으로 내려갔다.

이듵날 늦은아침켠에 현공안국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시체를 힐끔 보고 사진을 두어장 찍은후 정치대장네를 만나려 가면서 장례를 해도 된다고 하였다. 사체해부검사를 해야하지않는가고 내가 말하니 책임자는 필요없다고 하였다. 숙모가 왜서 이사람이 죽었는가고 물으니 책임자는 “자살”이라고 하면서 찌프를 타고 뿌르릉 떠나가 버렸다.

나는 숙모에게 장례를 하지말라고 이른후 점심을 먹고 떠나는 뻐스를 타고 현공안국으로 달려 갔다. 현공안국의 원래의 국장과 서기는 지금 모두 공안국 혁명위원의 령도로 복귀를 했는데, 나와 잘 아는 사이다. 그들은 나의 말을 자세히 들은후 즉각 현 법의와 형사조를 파견하였다. 우리는 찦차로 숙모네 집으로 달려왔다.

사체부검으로 명확히 타살이 판정되고 돌격적 조사가 진행되였다. 4일만에 안건은 결론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딴집으로 돌아온후 정치대장과 두 사내는 대대공소사(상점)에서 사 온 술을 마이며 “오늘밤 저새끼한테서 실토를 받아내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들이 받아내자고 하는 실토는 세가지 였는데, 하나는 정치대장을 지식청년처녀들과 작풍문제가 있다고 네놈이 꼬장을 하지않았는가? 하는 실토고 다른 두가지는 우리안까니와 잤는가 않잤는가? 그것에 대한 실토였다. 그들의 모진매질에 9촌숙은 세가지를 다 승인하고 더욱 죽을 매를 맞았는데, 그들이 부녀대장을 륜간한후 조금 지나 정말로 숨을 거두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들은 부녀대장도 머리를 쳐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끌고 나가 냇물에 던지고 녀자는 버들방천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은 남자는 이미 머리를 많이 뚜드려 맞아댔기에 법의가 머리뼈가 부서진것을 밝힌대도 누구의 탓인지는 공안국에서 짚을수 없기에(모든개 물매니.) 자살로 쉽게 인정이 되리라 믿었고 녀자는 머리를 별로 맞은 사람이 아니여서 파묻어 흔적을 없앴던 것이다.

남편이 죽은 후 숙모는 여섯남매를 데리고 모진고생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항렬로 맏이인 큰딸은 아버지가 죽은 해에 명색이 고중을 졸업하고 그 다음의 큰아들은 초중졸업반이 였는데 모두 엄마와 함께 농사일을 시작 했다. 아래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9촌숙이 죽은 후 숙모는 자식들의 문제를 거이 우리와 의논하고 처리했는데, 결혼이며 승학이며 취직이며… 우리의 견해를 따랐다. 우리는 여러해를 있는힘껏 숙모네를 방조했다. 나는 “관계망”(뒷문치기)을 뚫어 킅딸은 소학교 민반교원으로, 큰아들은 공사공소사(중심상점) 보조회계로, 작은아들과 딸 하나는 공사림창과 량잠에 취직을 시켰다. 아래로 둘은 대학을 졸업한후 국가분배로 하나는 병원에, 하나는 공안국에 취직을 하였다. 숙모네는 우리의 관심과 방조를, 사실대로 말해서 일정하게 받은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숙모는 우리의 관심과 방조를 공으로 받기만 한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배급절반의 잡량을 자기네가 먹고 그만큼 우리에게 세량을 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토장과 간장을 담당해 주었고 땔나무까지도 해마다 두 세 수레를 해다 주었다. 인정이란 부모자식간에도, 형제자매간에도, 친척, 남과도 오고가며 주고받는 것이다. 여러해를 우리두집은 깊은 정을 쌓았다…

선량한 숙모는 일희일비의 눈물을 자주 씻었다. 출세를 한 여섯 남매를 볼때 그들의 아버지를 잊을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쉬운 심정은 정도부동하게 있었지만 한 사람도 그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안해의 9촌숙의 이름은 재수.)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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