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무정타하지만 정으로 이루어지고 정으로 남는 게 세월인것 같다. 30여년간 연변대학에서 일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희노애락들을 보아 왔지만 대학교수들인 한족 진경지(陈琼芝)와 조선족 리경숙(李京淑)의 사연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안겨주는 감동적 이야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1960년 가을,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변강을 건설하기 위해 연변대학에 찾아 온 한쌍의 청년교원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현대문학을 전공한 미인 진경지(陳琼芝)와 고전문학을 전공한 미남 두영재(窦英才) 두 한족 젊은이였다. 중국 남방의 사천 출신인 두영재와 호남출신인 진경지는 혈기왕성한 젊은시절 산 설고 물선 연변 땅에 찾아와서 고생을 락으로 삼으면서 장장 26년 세월을 우리 조선족들과 함께 살아왔다. 1960년대초“3년 재해”시절, 이들은 우리 조선족과 함께 나무껍질로 만든 대식품을 먹었고“문화대혁명”때는“구린내 나는 지식분자”로 몰려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온갖 수모와 괄시를 다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시종일관 조선민족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교학 일선에서 자신의 청춘과 정열을 고스란히 바쳐왔다. 리경숙은 연변출신으로서 연변대학 화학학부를 뛰여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은 청년 녀교원이였다. 1970년 12월의 어느 하루 그녀가 화학실험실에서 유기합성실험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실험실의 150대기압의 염소통이 갑자기 고장났다는 아우성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실험실에 있는 5명의 학생들이 생명의 위험에 처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안전은 추호도 념두에 없이 선뜻 그 위험한 구역에 뛰여 들어갔다. 엄동설한이라 창문들은 신문지로 단단히 봉하고 있었는데 우선 빨리 문을 열어 제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공구도 찾을새 없이 맨손으로 창턱에 뛰여 올라가 안간힘을 다하여 문을 뜯어 열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의 두손은 피투성이가 되였고 련속 사흘동안 의식을 잃었다. 병원측의 갖은 노력과 구급치료로 요행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의 중추신경과 기관지가 크게 상하였다. 여러 달의 입원치료를 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수년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종종 아프고 잠을 못자는 고생을 하고있다 한다. 그 당시 병원에서는 그의 건강상태로 보아 교학할수 없다고 하였고 학교측에서도 그더러 학교도서관에나 가서 외국어서적이나 관리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교단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그후의 30여년간 하루도 교학일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그는 항상 녀성강자였다. 당시 진경지와 리경숙은 연변대학교의 독신숙사에서 벽을 사이 두고 이웃으로 지냈다. 둘은 어느새 절친한 친구로 되었으며“문화대혁명”때에는 사회문제를 보는 견해나 관점이 서로 비슷하여 그야말로“같은 전호속의 친밀한 전우”로 되었다. 하여 이들 두 녀성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도 간직되고 있었다. 1967년 8월 파벌투쟁이 고조에 올랐을 때다. 어느 날 저녁 진경지는《극좌파를 비판한 언론》이 있다고 홍위병들의 추격을 받게 되였다. 평민백성이 마음대로 총까지 들고 날치던 때라 만약 무지막지한 그들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물매를 맞고 어딘가에 감금될 판이였다. 진경지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리경숙은 얼른 그녀를 자기 숙소에 숨겨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둘은 서로 손을 잡고 허리까지 넘치는 푸르하통하를 건너서 하남거리에 있는 리경숙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홍위병들은 진선생의 침실에 뛰여 들었으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화가 동한 그들은 온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고 상해표 손목시계며 량표, 우산, 탁상등 등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 그 뒤에도 홍위병들은 진경지가 숙소에 돌아오면 붙잡으려고 가끔 숙사 주위를 돌아보군 했다. 그 무렵 남편 두영재선생은 자치주의 당학교에 학습하러 갔는지라 임신 5개월이 된 진경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리경숙의 집에 얹혀 살수밖에 없었다. 리경숙의 친정집에는 부모님과 함께 오빠네 부처간이 살고있었다. 그런데 식구마다 여러 반란조직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에 제각기“백공”,“홍련”, “8.27”, “홍색”등 조직에 가담해 있었다. 이들 네 식구는 밥상에 마주 앉기만 하면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갑론을박으로 아옹다옹 다투었다. 하지만 일단 진경지만 들어서면 이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입을 다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부모님은 몰론이요, 오빠네 부처간도 진경지의 생활을 구석구석 보살펴 주었다. 한달 남짓한 피신 생활에서 경숙이네 부모님과 오빠네 부처간은 진경지를 마치 친정집에 찾아온 딸이나 누이동생처럼 살뜰하게 대해주었기에 진선생은 그집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지낼수가 있었다. 1986년,“변강에 가서 20년 이상 일한 지식인들은 원적지로 돌아 갈수 있다”는 정책이 시달되자 진경지 내외는 정든 연길을 떠나 수도 북경에 있는 중국청년정치학원에 전근하여 교수와 연구를 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지도 3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진경지와 리경숙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두 녀성은 자주 편지를 하고 한달에 두 번씩은 꼭꼭 전화를 주고받았다. 몸은 수천 리 떨어져 있었지만 친자매와 같이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의 풍운조화는 참으로 알 길이 없었다. 대학교의 중견교수로 맹활약을 하던 리경숙은 1990년대 초반에 남편을 불치의 병으로 저 세상에 떠나보내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였다. 그의 남편은 할빈공업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연길시설계원에서 일했었다. 그는 연길시의 체육관, 박물관, 소년궁전 등 건물들을 설계한 유명한 건축가였다. 남편을 잃고 그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아들까지 리혼을 하게 되었다. 리경숙선생은 엄마를 잃은 네살짜리 철부지 손자를 받아 안고 키워야만 하였다. 강의를 해야 하고 연구를 해야 하며 손주까지 보아야 하는 그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통을 힘으로, 고생은 락으로 바꾸고 대학교의 강당에서 쓰러질지언정 교편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사범학학원 부원장 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고 거기다가 15년간이나 자치주 정협 부주석과 전국정협 상무위원 등 중책까지 맡고 조선족녀성으로서 참정의정에 놀라운 재능과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매년 전국정협회의 차로 북경에 가게 되면 진경지는 어김없이 호텔에 찾아와 리경숙과 한 침실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한것 같다. 이처럼 아름다운 두 녀성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혹하니 말이다. 2001년 4월, 진경지는 청천벽력같이 유방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였다. 5년 남짓한 동안 4차례의 수술과 20여 차례의 화학치료를 거듭 받았지만 병세는 점점 심해만 갔고 다시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것을 운명으로 받아 드렸고 명지한 선택을 해나갔다. 시간을 쪼개가며 파금(巴金)에 관한 연구저서《생명의 불꽃》을 마무리했고 기타 현대문학에 관한 학술저서들도 꼼꼼히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일들도 하나하나 마무리를 지어나갔다. 진주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2005년의 어느 하루, 진경지선생은 조용히 남편을 자기 곁에 불렀다. 《여보, 당신 몸도 든든치 못한데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구만요. 저는 아무래도 이렇게 먼저 가겠지만 당신 여생이 큰 걱정이구만요.》 《무슨 소리요? 나는 큰 병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소. 건강관리만 잘하면 별 문제가 없을거요.》 《그래도 자꾸 마음이 불안하구만요. 당신 나 없으면 어떻게 혼자 살겠어요? 애들도 밖에 있지… 아무래도 다른 녀성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 《무슨 소리요? 이 나이에 다른 녀성이라니? 이제 학교의 강의가 마무리 되면 차차 애들한테 가면 되지.》 《아니, 지금의 젊은 세대와 우리는 완판 달라요. 늘그막에 마음 착한분이 옆에 있어야 편히 지낼수 있어요. 저의 청을 들어줘요 … 내 친구 경숙이를 당신 곁에 데려 오면 어떻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수 있을텐데 … 》 안해의 진정에 넘치는 간곡한 부탁을 들으며 두영재는 할말을 잊었다. 그것은 안해의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안해의 바다같은 사랑을 가득 담고 한없이 한없이 흘러내릴 뿐이였다. 안해를 하늘나라에 보낸지 1년이 훨씬 넘는 어느 하루, 두영재는 자신의 서재에 외롭게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해의 유상을 바라보노라니 그녀의 유언이 떠올랐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긴장되였다. 송수화기를 손에 들었지만 다이얼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드디여 용기를 내서 다이얼을 눌렀다. 《경숙선생, 그간 잘 지냈소? 나, 오래동안 고민해 보았는데 안해의 소원대로 우리 합하면 안 될가? 》 리선생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다. 남편이 사망한 후 16년동안 일편단심 사업에만 몰두하였고 아들의 가정풍파로 말미암아 철없는 손자를 떠맡아 키워오느라 다른 일에는 전혀 눈을 팔 새가 없었던 것이다. 단 한번도 자신의 여생을 두고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두선생님, 너무나 뜻밖입니다. 저는 여태껏 재혼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저 아직은 손자녀석 때문에 한시도 연길집을 떠날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혼자 살렵니다.》 《아니, 손자가 무슨 큰 문제요? 북경에 데려다 우리 둘이 함께 공부시키면 되지 않겠소?…》 너무나도 고마운 말씀이였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을 한 조선족 동료에게 맡기려는 진경지선생의 그 믿음도 눈물겨웠지만 두선생님의 바다같이 넓은 흉금 또한 그처럼 고마울수가 없었다. 일본에 류학중인 경숙의 딸은 이 소식을 듣고 재삼 어머니를 설복하면서 혼자 여생을 고독히 보내지 말고 두선생님과 한 가정을 이룰것을 재삼 권고하였다. 그후 몇 달간, 리선생 역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친척친우 하나 없는 두선생의 처지에 대해서도 동정의 마음이 생겼다. 그들의 진정어린 따뜻한 대화는 전화선을 타고 수천리 상공을 오갔고 그들의 저녁노을은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소유라고 하였던가? 인생의 풍상고초를 다 겪은 이 두 민족 로일대의 사랑은 어쩌면 젊은이들의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할수 있지 않겠는가? 2006년 9월, 두 민족 가정의 짝 잃은 두 남녀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꽃을 피워갔고 그 향기는 북경과 연변 사이를 오가면서 많은 친구, 동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다. 모든 편견과 관습, 민족과 세속을 초월한 이들의 사랑과 행복에 그 누가 두 손 모아 축복하지 않으랴! 두영재와 리경숙 두분 교수 모두 연변대학교의 교육사업에서 지울수없는 기여를 하였기에 학교 령도에서는 이 희사를 매우 중시하였고 교장선생님께서 친히 연회를 베풀어 원로교수님들과 함께 그들의 행복을 축원하였다. 동료와 친구들도 분분히 축하파티를 마련하여 그들의 영원한 사랑과 건강을 기원해 주었다. 오늘도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수도 북경의 천안문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올 겨울방학에는 리경숙선생의 고향이자 두영재와 진경지선생의 제2의 고향인 연변에 다시 찾아와 옛 친구들과 상봉할 약속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다고 한다. 이 어찌 대학가에서 피여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랴! 이들은 이렇게 비통을 힘으로 바꾸고 역경을 이겨내며 자신의 두손으로 만년의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인간의 우정과 사랑을 가득 싣고 멀리멀리 저 구중천에 날아올라 진경지선생께 전해질 것이다. 그이께서도 이 세상에 남겨둔 시름을 훨훨 털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좀 더 마음편히 보내시리라는 애틋한 바램으로 재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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