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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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이모와의 상봉이야기 댓글:  조회:1506  추천:5  2024-04-11
                       이모와의 상봉이야기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요즘따라 부쩍 옛 추억을 더듬음은 왜서일가? 몇해간 코로나 나날들의 지루한 일상 때문이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년륜에 따르는 인지상정일가? 아무튼 나에게 한분 밖에 없는 이모와의 상봉은 강산이 변해도 네번이 변해서야 겨우 이루어 질수 있었으니 나에겐 너무도 보귀한 하나의 인생추억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아니면 운명의 조화였던지? 세살도 안되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이모에게 업혀 자라던 이 조카딸은 그후 또 이모와도 갈라져 버려야 했다. 1950년대 초, 길림성 교육청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연변에 파견되여 왕청현 교육국 국장을 담임했었는데 3년 후엔 또 상급의 지시로 연변의 한어교육을 위해 을 설립할 임무를 안고 연길로 조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모는 왕청 기차역에서의 그 리별 순간이 수년 후에도 눈앞에 종종 떠오르며 늘 가슴이 아파났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새파랗게 젊은 25세 청년으로 군복외투에 세살난 딸애를 감싸 안고 들가방 하나를 달랑 든채 길을 떠났다. 아직 죽음이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기인 나는 아빠 품에서 엄마를 찾으며《병원 간 엄마는?》하고 졸라대자 《엄마는멀리갔다...》,《이모는?》,《이제 안녕!해야지 ... ...》아빠의 랭정한 대답이다. 철부지인 나는 고사리 손으로 아빠 입을 마구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불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갈라져서 내가 다섯살 나던 해 이모는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새언니 눈치를 보며 몰래 나를 둘처 업고는 밖에 나가서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마 일찍 죽은 언니가 너무 불쌍하고 또 어미 잃은 이 조카딸이 너무도 가여워서 슬프고 또 슬펏을 것이다.     아빠와 내가 왕청을 떠날그때, 항창 중학에 다니고 있은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 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단다. 함께 살았던 부모 같은 언니를 잃고 조카와 형부까지 눈물로 떠나보내고 나니 이모는 몇날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 쉬기 힘들었다 한다. 반주임 선생님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뭉쳐 있던 마음속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더란다. 그 세월에 사람들은 가슴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저 그렇게 풀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10년 강산이 네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동안 이모는 혼자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단다. 이모부는 그해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딸들은 모두 커서 셋은 출가하고 둘은 중학에 다닌다고 했다. 이모는 큰 결심으로 먼 타성에서 길을 떠나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만나보시고 새 언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한 열흘 계시다가 가셨다.     그번에 오셔서 이불장에 있는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는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 갔을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 옷감도 이불등도 솜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얻었고, 집의 낡은 솜으로 겨우 이불 한 채를 만들었었다. 새색시 짐이란 15원짜리 풍천트렁크 하나에 붉은 어록책 몇권과 집체호에서 나들이로 입던 검정 고리둥 옷 한벌을 개여 넣고 떠났던 것이다. 례단은 시어머니가 세수수건과 양발 등을 쎄트로 준비해 줘서 그나마 친척들께 인사선물로 내놓을 수 있었다. 이모가 그것까지 다 알았으면 더더욱 가슴이 저렸을 것이다.      몇년 후의 어느 가을날,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성 계동에 찾아갔었다. 오랜만에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탄광마을의 특이한 생활도 체험하며 즐거운 상봉의 나날을 보내였다. 난생처음으로 철갑모를 쓰고 매제가 출근하는 계동탄광의 깊은 갱도에도 들어가 보고 또 호탕한 광부들과 함께 식사하며 많은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그런데 재밋는 것은 그쪽 풍습이라나? 식구들이 모여 놀다가 식사시간이 되였는데 이모와 딸들을 비롯한 녀인네들은 그냥 나를 배동해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세 사위쟁이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나가는 것이였다. 준비한 식자료들을 헤치고 화기애애하게 토론하더니 제법 여덟가지나 되게 맛있는 요리들을 척척 만들어 낸 것이였다. 삽시간에 밥상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참으로 우리 연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동생들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되였다.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내외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이모는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였으니 좋은 세상에 복받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 뿐이다.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어린 나로서는 기억조차 없었던 그옛날의 추억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필을 들어 본다.     1930년대초,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피하여 한반도에서 만주땅 평안벌에 이주해 온 외할아버지는 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감농꾼이였단다. 그런데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도망가면서 터트려 놓은 그 지독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날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숨을 거두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시름시름 앓더니 얼마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20대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중학생 이였단다. 엄마와 이모는 여섯 살 나이 차이라는데 워낙 늦게 섬이 들어서 맨날 애보다 못하다고 언니한테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진짜 철부지 어린아이였단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다 세상을 뜨셨으니 삼촌은 하나밖에 없는 누나한테 찾아 올수밖에 없었다. 누나손에서 정성껏 병시중을 받았으나 그 시대의 페병이란《불치병》이여서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의지가지 없는 이모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밖에 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가 어찌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엄마가 늘 가시는 곳은 딱 기억해 가지고 이모가 혹시 잘못 가기나 하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그쪽 길을 가르켰다는 것이다.     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땅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을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살아 오면서 친정에서나 시집에서나 돈고생은 크게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그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때는 아직 건국 초기라 아빠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하당 활동에 종사하였다. 야학에서 아빠를 만나 결혼한 엄마는 역시 혁명가의 안해로 사회에 나섰단다.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해산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 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물레나 팽이로 실을 짜서는 밤에 낮을 이어 양발과 수갑들을 떠서 전선에서 싸우는 해방군께 보내는 지원활동들을 하였다 한다.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 다니느라 젖도 바로 못 먹였기에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고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으로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울고 있더라는 것이였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너무도 겁나고 기가막혀 이모는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한길되는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그땐 언니에게도 말 못하고 수년이 지나간 후에도 그 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했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빠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서 보니 녀자들만 사는 집이라 땔나무도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 부근의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가서 함께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배기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 것을 알고 무척 눈치를 보더란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먹는 것이 아니라 얼른 들고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어른신 입에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하면서 수염 가득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는 폐병환자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까지 그 병에 전염되고 말았다. 동생이 사망한 후 엄마는 늘 누워서 앓았다는데 당조직에서 정기적으로 귀한 마이싱, 베니싱을 가져다 주었지만 좁쌀죽도 못 넘기니 어찌 약이 들며 병이 나으랴? 결국 엄마는 지병이 들어 반년도 못 넘기고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청에서 우리와 갈라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왕청현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단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전문대를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처음인지라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자리를 정해 주었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     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숫한 애들을 버리고 언제 타성의 조카딸을 찾아 길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리해 할만도 한 일이다.         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 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전처 애들은 시부모님들이 데리고 한국에 있는 고향에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고향땅의 주소는 알았지만 남한길이 막혔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이 되여 서로 찾지 못하고 있었다.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와 이모부는 초청되여 한국의 시집식구와 형제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어릴때 눈물로 헤여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이고 교육가인 형부 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장에서 사업하며 또 믿음직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도 잘 키워 왔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이 놓인단다. 어느덧 이 조카도 인생의 저녁노을을 맞게 되니 지난세월 모두가 그 세상에서 태여 난 모든 이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조국해방의 포소리 속에서 한쌍의 청년혁명가 부부에 의해 세상에 태여 난 이 가여운 생명은 새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오성붉은기 아래에서 견건하게 성장하였다. 당의 배양과 자신의 신근한 노력 분투로 후회 없는 한생을 살아 왔다고 자부할 수 있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철없는 나이에 엄마의 사랑도 없이 고달프게 자란 그 슬픔도 아픔도 ... ... , 그 흑백전도의 특수년대에 로혁명가, 교육가의 딸이 하루밤새 《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의 딸로 둔갑되여 애들이 다 신나하는 홍위병완장도 못끼고  왕따되고 억압받은 그 억울함도 설음도 이제는 모두가 그 생애의 악몽이듯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기로 작정했다.     이모와의 상봉도 어느덧 또 하나의 10년 강산으로 변해간다. 아마 그 기나긴 리별의 아픔을 보상이라도 해 주시려는지? 존경하는 나의 이모께서 아직은 건강하시니 참으로 대견하시고 감사한 일이다.     이글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천변만화한 이 나라의 풍파와 시련이 나를 불태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져 가는 희노애락의 추억을 정녕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불러오지 못할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날의 그 흑백 인생드라마가 오늘따라 아름다운 칼라 드라마로 변하며 마음을 울린다. 이제 또 무슨 바램이 있겠는가?! 오직 살아온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석양빛 찬연한 여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                                                            2024년 4월 10일
54    황혼기 로인들에게 새 삶을 마련해주는 사람 댓글:  조회:783  추천:0  2023-05-31
                         황혼기 로인들에게                     새 삶을 마련해주는 사람         ---- 연길시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 김영자원장 이야기                                                               글 / 강순화      일찍 2002년 9월, 연변은 물론 길림성에서도 처음으로 사재를 털어 중로년활동중심을 친히 창립하고 20여년간 혼신의 정력을 다 몰붓는 김영자씨, 이순을 넘어 고래희에 톱아 오르는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정열을 자랑하며 찬란한 앞길만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를 두고 모두들 황혼에 붉게 타오르는 생명의 노을이라고 한다.                                            비운의 청춘시절      지난세기 60년대, 온 나라에 들씌운 정치동란의 대 재난으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반혁명으로, 특무로 억울하게 몰리여 박해받고 투쟁 맞고 로동개조를 하던 그 시대적 비극을 그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김영자씨의 가정도 례외가 아니였다.       연길시방산관리국에서 사업하던 부친은 일본말을 안다는 리유 하나 때문에《특무》로 몰리여 모진 구타를 받으며 투쟁받다가 얼마후에는 농장에 쫓기워 갔다는데 거기에서 또 광란하는 반란파들게 심한 구타를 받아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 을 수 없어 억울한 루명을 쓴채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1959년, 길림성 조선족씨름대회에서 1등을 하여 주덕해주장의 접견까지 받은적이 있는 소나무같이 억세고 튼튼하던 아버지가 그렇게 비참히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녀한테 덮쳐진 청천병력이였다. 화는 쌍으로 온다고 얼마 후에는 또 억울한 루명을 쓰고 피신해 다니던 하나밖에 없는 오빠마저도 교통사고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안도의 농장에서 일하던 영자씨는 갑작스레 날아든 부친과 오빠의 비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오빠는 젊디젊은 32살이였으니 말이다.      23살 꽃나이 처녀였던 영자씨는 잇달은 친인의 죽음으로 철저히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 마음씨가 무던하여 주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던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것만 해도 원통한데 생떼같은 오빠마저 죽다니…그녀는 무심한 하늘을 한없이 저주하고 밤낮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후부터 극심한 신경쇠약증을 앓게 된 그녀는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다.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진짜 너무도 원통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마음씨 곱던 분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사실 전 아버지를《일본특무》로 몰고 투쟁한 사람들이누군지 알고 있어요. 당시엔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었지만 결국은 용서하기로 했어요. 온 나라가 미쳐버린 그 동란의 년대였으니 말이죠.      저는 복수대신 사랑을 선택하기로 했어요. 내 힘이 자라는 대로 아픔과 불행을 겪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에 대한 나의 진정한 사랑이고 마지막 배려라고 느꼈거든요 ......》      그 몸서리나던 아픔의 기억들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 버리고 오직 오늘의 삶에 더 큰 보람을 창조하려는 영자씨의 담담하면서도 강인한 말이었다.      무지막지하던 동란의 년대는 드디여 결속되고 새로운 정책이 시달되면서 부친과 오빠의 억울한 루명도 모두 벗을 수 있게 되여 이제는 《반혁명》의 딸로 몰리던 그 굴욕적이고 한이 맺힌 지난날을 깨끗이 청산하고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진정 찾고 싶었다.      기회는 항상 준비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거세찬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원래 출근하던 연길시문구공장을 사직한 김영자씨는 1981년 제일 첫패로 연길시 서시장에서 복장판매를 시작했다.    《장사에서 제일 중요한것은 신용이였어요. 제가 신용을 잘 지키자 많은 복장도매업주들이 앞다투어 외상으로 물건을 주더군요. 그래서 장사는 날로 잘되고 그 규모도 커졌지요.》 하도 억척스레 일한 보람으로 처음에는 리자돈을 꾸어서 시작한 장사가 눈덩이 굴리듯 커지더니 나중에는 16개의 복장매장을 소유하게 되였다. 이제는 그녀도 어느덧《부자》행렬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불우하고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보노라면 자꾸만 지난날 자기의 아픔이 돌이켜졌다. 《복수》대신《사랑》을 실천할 때가 온것 같았다.                                          마음의 부자      영자씨는 경제적으로도 부자이지만 마음은 더욱더 부자였다. 1986년에 《주덕해기념비》를 세울 때 사회적으로 모금운동을 하자 그녀는 선듯 천원이라는 그 당시 한 개인으로는 큰 돈인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주덕해동지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아버지와 오빠의 뜻을 기리는 마음에서 였다.      그녀는 또 인재에 대한 투자야말로 으뜸가는 투자라고 인정하면서 학습성적이 우수하여 대학에 붙었지만 학비가 없어 가지 못하는 대학생을 여섯명이나 도와주었고 외국에 류학가려는 학생들에게 무리자로 돈을 대주어 그들이 이국땅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쟁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변텔레비방송국에서 조직하는《사랑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이들에게도 수차 적지않은 돈을 기부하였다.      이밖에도 김영자씨는 집을 사서 집없는 사람들을 우선 들게 하고 장사밑천도 대주면서 그들이 하루속히 곤경에서 빠져나오게 하였고 의지가지 없는 로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드리고 해마다 《로인절》도 쇠여드렸다.      1998년 8월15일 로인절에는 연길시로인들을 공인문화궁 1,2층에 모시고 공연을 감상하게 하였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천선복떡공장에서 나오는 떡을 각 로인독보조에 분배하였다. 그리고 70여명의 연원과 공작인원들을 식당에 안배하여 대접했으며 뻐스 한대를 내여 화룡에 있는 명승지--선경대까지 유람시켰다. 로인들은 이 특별한 명절대접에 너무도 감격해 마지 않았다.      항상 베푸는 마음만을 가졌기에 그는 자기가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성씨도 이름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제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것은 그들한테서 보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벌어드린 재부는 모두가 사회에서 온 것이니 응당 사회에 도로 돌려야지요.》사내대장부들도 가지기 힘든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씨, 역시 김영자씨는 아름다운 마음의 부자였다.                         로인들의 활무대-천선복중로인활동중심      일개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큰 장사를 벌리다보니 워낙 건강하지 못하던 몸이 더욱 쇠약해지였다. 정작 자신이 아프고나자 환자들의 아픔을 더 절실하게 느낄수 있은 김영자씨 머리속에는 대담한 구상이 무르익어갔다.      때는 2000년초였다. 건강이 얼마간 회복되자 그녀는 그간 무르익혔던 구상대로 서시장복장매점을 전부 처분하고 연길시 교외에 있는 소영향 민주촌에 3000평방메터의 땅을 사놓았다. 《장애인 재활원》을 꾸려 돈없고 가난한 환자들이 적은 돈으로도 만족한 치료효과를 볼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민주촌에는 이미 10여년 전 3층으로 된 아담한 장애인재활원 청사를 지어 놓았고《농장》도 꾸려 놓았다. 어써 빨리 더많은 로인들의 사회복지에 활용하고 싶어 하는 영자씨의 모습에서 그의 진한 인간애를 느낄수 있었다.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은 그녀가 직접 잉태하고 키운 하나의 사랑의 분신이다. 많은 중로인들이 퇴직후 즐거운 만년을 보낼수 있는 진정한 활무대를 만들어 드리려고 마음먹은 그는 주밀한 계획과 오랜 준비사업을 거쳐 드디여 2002년 9월 9일 정식으로 사회에 성립을 공포하였다.      면적이 800여평방메터되는 교실을 갖고있는 이 활동중심을 건립하면서 책걸상, 민족복장과 악기, 무용복, 컴프터 등 설비를 사는데만도 무려 30여만원의 거금이 들었다. 음악교실, 무용교실, 컴프터교실, 타악기교실, 태권도훈련장 등 다섯개의 반급을 설치하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전업교사들을 초빙하여 학원들에게 강의를 하게 하였다.      교원들의 강의비도 나오지 않는, 일년에 200원이라는 적은 학비로 로인들은 자신이 즐기는 교실의 과목을 배울 수 있으며 해마다 《3.8절》,《로인절》도 함께 기념하고 봄, 가을 들놀이와 같은 다채로운 과외활동에도 참가할 수 있다.      그렇게 적은 경비로 어떻게 운영해 나가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우리 중로년활동중심은 경영성을 띠지 않는 공익성 봉사단체입니다. 저는 다만 로인들에게 즐거운 만년을 보내드리려는 마음에서 이 중심을 창설했습니다. 로인들이 기뻐하고 행복해 하시면 저도 즐겁습니다.》김영자원장의 훈훈한 대답이다.      이 활동중심을 운영하기 위해 그녀는 자기가 경영하는 떡공장에서 나오는 리윤을 해마다 평균 4-5만원씩이나 부어 넣으면서도 전혀 후회가 없다고 한다. 하여 학원들은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자기 돈을 내여 우리 로인들에게 이처럼 훌륭한 활무대를 마련해주는 사람은 만에 하나도 없다》면서 감복해 마지 않았다.      또 이런 재미나는 에피소드도 있다. 2004년, 중앙텔레비죤방송국, 하남텔레비죤방송국 및 하북텔레비죤방송국에서 련합으로 민족대단결을 다룬 소수민족 제재의 20회 드라마《연분의 별하늘》을 연변에 와서 촬영하게 되었다.      드라마극조는 연길시 고려호텔에서 조선족환갑잔치 장면을 찍었는데 그때 군중배우로 이 천선복활동중심에 출연제의가 들어왔다. 영자씨는 조선민족을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로인들에게 화사한 민족복장을 입고 촬영현장에 오게 하였다.      그런데 드라마제작진에서는 연극의 수요라면서 수수한 옷차림을 요구하자 영자씨는 즉시《우리 조선족들도 개혁개방으로 치부하여 복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무엇때문에 수수한 옷을 입어야 합니까? 우리 민족복장을 바꾸라면 우리는 찍지 않으렵니다.》라고 당차게 나섯다.      결국 극조는 그녀의 주장을 동의하고 아름다운 민족복장을 입은 로인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덕분에 학원들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영광도 누리고 또 하나의 만년의 자랑거리도 만들게 되였다.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을 꾸려오면서 그 무엇보다 영자씨가 긍지를 느끼는 일은 평균나이 60이 넘는 문예반 로인들이 전국적인 대회에 나가 수차나 금상과 은상 및 우수상들을 수상한 사실이다.      2004년8월 중앙문화부예술봉사쎈터에서 주최하고 중앙음악학원의 협찬으로 열린 제1회성악기악무용경연에서 선보인《물동이 춤》은 영예롭게 금상을 수상하였는데 그해 12월25일과 26일에 련속 이틀간 중앙텔레비죤 문예채널에서 방송되였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영예를 떨친 이들에게 영자씨는 거금을 내여 1800원짜리 정수기 한 대씩을 상으로 주었다.      2005년 2월에는 수도에서 조직한《덕예쌍형(德艺双馨)》기념행사에 참가하여《칼춤》을 내놓았는데 또 영예롭게 은상을 받았다. 매차의 북경행은 몇만원씩의 경비부담을 안아야하지만 기차도 못타본《시골할머니》들이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때면 영자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더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2005년,한국과 합작하여 촬영한 중국영화《어머니 장국집 (妈妈的酱汤馆)》 에서는 또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 학원들을 초빙하여 어머니, 아버지 배역과 식당출납 등 군중배역을 맡아 하는 영광도 지니였다.      2011년4월에는 한국《민족문화교육원》의 초청으로 천선복예술단 일행 13명이 한국에 진출하여 10여가지 중국조선족 춤과 타악기등 절목으로 서울-부산-목포-제주도 등지에서 20여차 공연함으로서 한국 지역사회와 많은 로인복지 단체들의 열렬한 환영과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2011년5월, 중앙텔레비방송국《행복으로 가는 길 (向幸福出发)》절목의 요청으로 천선복예술단 12명학원들이 또 수도북경의 무대에 오르게 되였다.      2014년11월에는 연변텔레비방송국《음력설야회 프로》중 4분프로에 입선되여 장고, 북, 꽹과리 등 표연으로 고향 관중들을 감동시켰다.      2018년4월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의 초청으로 조선 평양에 가서 선북, 장고춤 등 여러 가지 문예절목들을 연출하였고 돌아올때 선북 여섯개, 장고 여섯개 등 근 만여원 가치의 타악기를 그들에게 무상으로 증정하였EK 그들이 그 악기를 가지고 련습하여 다시 중국 연길 환락궁에 와서 연출할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지난해 자치주성립 70주년 기념행사에도 이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에서는 여러가지 문예절목으로 경축행사에 이채를 돋구었다.      그의 수년간의 꾸준한 노력은 당과 정부의 인정과 지지를 받았는데:      2018년10월,연길시인민정부에서는 이 활동중심을 《중국조선족문화계승시범점》으로 임명해 주었고 2019년 12월, 연길시민정국에서는 전시 사회조직공작《선진단위》로 표창하였다.       2019년1월과 2020년1월에는 련속 두차례 중앙텔레비 춘절련환만회에 초청되여 조선족무용과 장구춤, 타악기 등 다채로운 절목을 연출하여《우수조직상》,《우수지도상》,《매력풍채 연출상》등등 많은 영예를 받아 안으므로서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우리 조선족을 널리 홍보하였다.      이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을 꾸려오는 20여년동안 그녀는 기쁨도 많았지만 근심걱정으로 잠못 이루는 때가 더욱 많았다 한다. 그럴때면 언제나 안해를 리해해 주고 지지해 주며 민음직한 후원자로 큰 뒤심이 되어 준 든든한 남편이 있어서 오늘까지 드팀없이 밀고 나갈수 있었다고 하며 항상 남편한테 고맙고 그래서 행복했다고 한다.      그녀의 금후 타산이라면 계속 이《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을 잘 운영함과 동시에《장애인재활원》을 잘 꾸려 가난한 로인과 장애인들에게 만년에 시름없이 료양치료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고 이 재활원을 통해 건강을 되찾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사심없는 헌신과 노력, 남한테 베풀며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참된 인생이고 복된 인생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김영자씨, 황혼녘에 더욱더 빛 뿌리며 생명의 진한 향기를 풍기는 그녀는 정녕 우리들 제2 인생의 산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2023년 5월     
53    서울 오빠네 이야기 댓글:  조회:1437  추천:0  2022-06-02
                               서울 오빠네 이야기                                                                                   글 / 강순화    20세기30년대, 일본놈들의 쇠사슬에 얽매인 한반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때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의 한 농가에서는 련 며칠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들 다섯, 딸 셋으로 팔남매를 둔 강씨네 가족은 만주로 이민가려 결정한 것이다. 일제의 압박착취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소문에 의하면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다는 그 두망강 건너 만주벌에 가서 논밭을 일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 이 지지리한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지 않을는지? 어린것들을 더는 배 굶기지 않고 공부라도 좀 시킬 수 있지 않을가 하여 우리할아버지 강만조 어른이 내린 결심이다.    1934년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겨울날, 드디여 이삿짐은 다 꾸려졌고 이미 출가한 두 딸은 친정에 달려와 짐 실은 수레바퀴를 끌어안고 발버둥치며 부모님과 오빠들의 만주행을 막아보려고 울부짖었지만《어서가자!》하는 할아버지 호령 한마디에 무정하게 길을 떠나버리고 마는 짐수레를 결코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무작정 갈라져 버린 친 혈육의 리산은 장장 기나긴 반세기 세월을 넘었다. 1989년, 서울길이 열려서 아버지와 형님들을 따라 떠났던 우리아빠- 아홉 살 막내가 60이 퍽 넘어서야 엄마와 함께 홍콩길을 에돌아 한국 전라남도 장흥군의 고향마을에 찾아갔다 하지만 그때 두 고모는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었다. 그러니 55년 전의 그 리별은 고모들의 생각 그대로 진짜 천륜지연을 갈라버린 생리별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 고모들의 자식들인 나의 고모사촌 형제들이 여러분 계셔서 그나마 혈육의 정은 끈끈이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 두 고모와 자식들인 사촌 오빠 언니들이 그땅에서 살아 온 세월들을 먼 이국에서 나서 자란 나로서는 알리 만무하지만 길이 열린 후 90년대 초부터 수년간 서로 오가면서 들어오고 나누어 온 옛 이야기들은 나에게 얼마간이나마 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길과 곡절 많은 삶의 륜곽들을 다소 알려주고 있었다.    한국이란 이 자그마한 분단국 섬나라에서 평생 일본놈과 미국놈들의 식민통치, 그리고 지주、자본가 세력의 압박착취 속에서 모두들 어떻게 살아 왔을까? 올해로 80세를 맞이한 큰고모의 둘째아들 -봉식오빠가 들려 준 인생담이 바로 한국 남정들과 그 가족들이 살아 온 인생길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여 이렇게 필을 들었다.    서울의 봉식오빠는 1938년, 우리 할아버지가 강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버린 4년 후에 태여 난 나의 고모사촌이다. 우리고모부는 그 세월 젊은 나이에 그래도 머리가 총명하여 일찍부터 가난하기 짝이 없는 고향땅을 선뜻 떠나 돈 벌수 있다는 일본으로 건너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온갖 밑바닥 허드레 일들을 가리지 않고 도맡으며 밤낮없이 일하여 얼마간의 돈을 모인 후 다시 집에 돌아와 고모를 데려갔단다.    그리하여 오빠네 네 남매는 모두 일본땅에서 태여났다. 봉식오빠가 일곱 살 되던 해 광복이 되어 고모부는 가족을 거닐고 다시 고향땅에 돌아왔으며 그간 해외에서 벌어 온 돈으로 고향마을 산밑의 넓은 땅을 사고 그 언덕에 큰 기와집도 지었으며 식구 모두 굶지 않는, 조금이나마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풍파란 알수 없는 것, 자기 두손과 피땀으로 이루어 낸 농사군의 평범한 생활도 오래동안 영위할 수 없는 것이 그 세상이였다. 광복이 되어 몇해 안 지나 또 이 터진 것이다. 마을에서 좀 떨어 진 동산 언덕에 널찍히 자리잡고 살던 오빠네 집은 산속에서 헤매고 있는 빨지산 군인들의 피신처로 지목되어 밤이면 그네들이 무작정 몰려 내려와 헛간의 쌀로 밥을 지어 먹고 갔으며 수시로 들락거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얼마간의 보상은 좀 주더라지만 순진한 농사꾼인 고모네는 그저 그렇게 당할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그 빨지산 군인들의 비밀행차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드디여 어느날 고모부는 그 죄로 경찰서에 끌려 갔으며 모진 매를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평생 일로 굳어져 소문난 감농군이였지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 미열로 끝내 중병이 들어버렸고 그후 몇달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고모도 세대주가 떠나버린 그 청천병력의 봉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지눕이를 하시더니 역시 고모부를 뒤따라가고 말았다.    그때 봉식오빠는 열네살, 금방 아래에 열두살, 그리고는 모두 열살 미만인 동생 셋이 있었다. 두 살 위인 형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온 가족의 생계는 둘째인 봉식오빠의 두 어께에 모두 지워졌단다. 그 난리판 형국에 공부는 둘째 치고 우선 온 식구의 때 끼니만은 이어대야 했다. 동네 형들은 숫한 동생들을 거느린 오빠가 너무 불쌍하여 여기저기 소일거리들을 알려주면서 돈을 벌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흥미나던 일은 미군기지에 가서 딸라를 벌어 오던 일이란다. 동네 형들이 맡아온 짝퉁 악세사리들을 상자에 담아 가지고 미군이 주둔한 부대의 철조망에 다가가《헤-로! 》하고 소리를 치면 보초서던 미군들이 다가온단다. 인차 그 악세사리들을 그들 눈앞에 흔들어 보이면 웬일인지? 바로《오-케이!》>하고 웃으며 딸라를 쥐여 주고는 그걸 모조리 걷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몇날몇일만 뛰여 다니면 그 돈으로 쌀 몇 포대는 살수 있어서 애들이 그나마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온갖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격어 왔었지만 그러다가도 생각 외로 기회가 생겨서 돈벌이가 될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친구와 차집에서 만나고 있는데 옆 좌석의 나이 지긋한 두 손님이 무언가를 진지하게 담론하고 있었다. 무얼 저렇게 흥미롭게 토론할가 싶어서 넌지시 건너다 보았더니 그중 한 어른이 눈치 채고 미소를 건네며《젊은친구, 뭘 좀 해볼 생각이 없나?》하고 물었단다.    사연인즉 인천부두가에 온갖 페철무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페철들을 정리하여 연과 동들을 떼여낸다면 큰돈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나이 들고 힘이 모자라 하기 힘드니 젊은이들이 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 좋은 아이디어였다.    한번 해볼 마음으로 주소를 확인한 후 친구와 함께 즉시 뻐스를 타고 인천부두까지 달려가 보니 참말로 말 그대로였다. 유관부문을 찾아 알아보고 허가를 맡은 후 일을 시작했는데 진짜로 수입이 좋아서 인건비를 넉넉히 주고도 적지않은 돈을 벌수 있었다. 이를 기초로 오빠는 아예 부근에 철공장을 세웠으며 그때부터 페철분류 사업을 주업으로 하기 시작하였단다.    이렇게 항창 사업이 흥성할 무렵, 하숙집 부근에 이모집이 있어 찾아온다며 오빠한테 길을 묻던 한 예쁜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우리 형님으로 된 경산북도의 한 시골처녀 장씨였다. 그때는 오빠처럼 머나먼 남쪽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자리 잡고 사업한다는 것은 큰 벼슬이나 한것처럼 시뚝하는 때라 시골처녀들의 선망 대상이기도 했었단다.《오빠는 어떻게 저런 예쁜 형님을 만났나요?》하는 나의 천진한 물음에 대한 오빠의 흐뭇한 답변이였다.    형님과 결혼하여 함께 열심히 일하니 살림은 피여 갔고 자식들도 잘 커서 모두 학업을 마치고 저마다 사업에 뛰여 들었다. 아들은 명문대인 서강대 전자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미국주재로 사업하다가 후에는 자기 자신의 회사를 꾸리고 번창한 사업을 하고 있단다.    큰딸은 의상학과를 전공하고 유명 디자이너로 사업을 벌리면서 40이 되어도 시집갈 생각은 안하고 수년간 번화한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메이커복장과 유럽녀성모자 전문가계로 소문나게 장사를 하였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란 년륜에 관계없이 때가 되면 이어지기 마련인가 본다. 늦게나마 지금의 선장 남편을 만나 매일 푸르른 바다가 부두에서 낚씨꾼 어선들을 관리하며 넘쳐나는 해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단다. 유명디자이너가 바다가 아씨로 둔갑한 모양이다.    둘째딸은 튼튼한 태권도사범 남편을 만나 애들을 잘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와 살림만 하는 상등 전업주부란다.    오빠는 젊은 그 시절 돈이 좀 모아지면 머리를 굴려 부동산에 투자도 하였고 여기저기 땅도 삿으며 시중심 좋은 곳에 4층빌라도 지었다. 90년대 초, 내가 처음으로 오빠집에 놀러 갔을때만 하여도 오빠 형님은 항상 작업복에 모자 쓰고 장갑을 끼고는 폐철수구소 마당 해볓밑에서 철물들을 분류하여 모이고 또 쉼없이 어데로 실어가군 하였다.    이렇게 땀흘려 번 돈으로 지은 빌라는 참 아름다웠는데 아래 윗층은 모두 남들게 전세를 주고 오빠네는 3층에 살고 계셨다. 내가 처음 서울 목동 오빠집에 찾아가서 보았을 땐 새로 이사한 때라 층계마다 꽃화분통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고 방마다 새 가구들이 들어와서 진짜 우리 연변에서는 볼수 없는 작은 같았다.    원래 미국이나 한국의 잘사는 사람들은 터가 널찍한 양옥들에서 살고 밀집한 아파트는 못사는 사람들의 주거지라고 하지 않는가? 오빠네가 사는 빌라 3층은 집안에 또 아래윗층으로 분류된 묘한 설계에 정연한 장식이며 홍송가구들이 저으기 부려움을 싸게 하였다. 집이 여러 층이라 전세돈이 꼬박꼬박 들어오고 거기에 모아진 돈들을 합쳐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그 자금들이 돌고 돌아 리자돈이 올라가고 하여 집 살림은 나날이 피여만 갔다. 그렇게 오빠 형님은 커가는 일남 이녀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출세시킬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만 가면 꼭 오빠집에 먼저 찾아간다. 나의 친고모 아들이니 나의 친 혈육이 아닌가? 세상이 험악하여 부모세대에서는 생리별 하였어도 하늘길이 열린 지금 자주 만나지 않으면 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는 친오빠도 없으니 사촌오빠도 친오빠 같았다. 그런데 또 형님은 얼마나 좋은 분인지《우리고모, 우리고모》하면서 나한테 너무도 잘해 주셨다. 갈 때마다 항상 귀한 손님대접을 받았고 언제나 새옷이며 이쁜 머리수건들을 선물로 주셨다. 만나면 기쁘고 따뜻하여 언제나 마음편히 찾아 뵙고 싶은 혈육들이다.    1992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출국길에 올라 서울오빠집에 찾아갔을 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때만 해도 가난한 중국의 작은 도시에서 처음으로 잘산다는 자본주의 나라 수도 서울에 간다니 우선 옷차림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겠는가?!    한달 전 부터 나는 거리에 나가 헤매기 시작했다. 늦가을이라 우선 가는 회색털실로 이쁘게 수까지 놓은 계내의를 고르고 그에 맞춰 줄이 간 니즈치마까지 샀다. 또 목걸이도 옷에 맞춰 굴직한 걸로 사서 걸고보니 제법 차림이다. 해관까지는 조선족들 너나없이 멋부리는 모양이 비슷하여 별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오빠집에 도착하니 중국손님 보러 온 서울친척들은 하나같이 수수한 티셔쯔에다 청바지들만 입고 있는데 주역인 나만이 희한한 옷차림과 악세사리까지 마치 북한에서 금방 건너 온 아줌마같이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제풀에 몸둘바를 모른 나는 얼른 그 화려한 옷과 악세사리들을 벗어버리고 형님더러 편한 티와 바지 하나를 달라 하여 바꿔 입고서야 그들과 다시 어울릴 수 있었다. 이튿날 나는 당장 거리에 나가 그때는 나에게 큰 돈이였던 한화 이만원을 주고 흰적삼과 청바지 하나를 사 입으니 다행히 중국티를 면할 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도 보면 어쩐지 서울사람들 보다 아니 중국에서도 북경이나 상해, 광주사람들 보다 우리연변조선족들이 더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아마 류행을 먼저 따라서 일가?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는 그 、 때문일가? 여하튼 알고도 모를 일이다.    객지에서 손님으로 다니면 참으로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아무리 금옥(金屋)이요 은옥(銀屋)이요 해도 자신의 초옥(草屋)이 제일이다》는 말이 참 진리인 것 같다.    특히 생소한 외지에 가면 제일 힘든 것이 아마 목욕과 녀성들이 소홀히 할 수 없는 머리손질이지 않는가? 형님은 벌써 이를 알고 계셨다. 내가 도착한 이튿날 형님은 나를 데리고 목욕탕부터 찾았다. 며칠째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 나에게는 진짜로 최고의 대접인 듯 싶었다. 시원히 목욕을 마치니 또 미장원에 데려 간다. 지금은 아마 사라진 듯 싶은데 쇠절가락을 화로에 달궈 머리를 감아 지져서 멋진 헤어스타일을 만드는 곳이다.《그냥 다녀도 괜찮은데요...? 》하는 나의 말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끝내는 나를 이쁘게 단장시켜 주었다.    마침에서 동포대표로 선정되였으니 저더러 래일에 집합하라는 통지전화가 왔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부분적 해외동포들에게 베푸는 무료관광 혜택이였다. 나는 형님 덕분에 멋진 모습으로 신나게 일주간의 전국려행을 마칠 수 있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니 형님은 또 나를 동대문시장에 데리고 가서 중국에서는 볼수 없는 예쁜 장식품들과 칠색비단으로 된 바느질 광주리까지 여러 가지를 사 주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뜰히 쓰고 있으니 이 기념품들은 참으로 나의 즐거운 추억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여름 나는 임플란트하러 서울에 가게되여 또 봉식오빠댁에찾아 갔었다. 인젠 두분 모두 80세 좌우이시니 이전처럼 먼 길은 떠나시기 힘들어 하시고 매일 일상은 에 가셔서 같은 년배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활동하시다가 점심밥도 함께 드시고 가까이 산책도 하시며 편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오빠는 아직까지도 차운전을 하시였으며 나를 데리고 맛있는 집에 찾아가 점심도 사 주셨다. 평일에는 매일 아파트 앞의 한강강변에 가셔서 한시간씩 걷기운동도 하신다고 한다. 한국은 로년복지도 잘된 것 같았다. 두분의 매달 기본 년금 40만 한화를 가지고 20여평 아프트 운영비 18만 제하고도 남음이 있어 채소비도 보태고 투자한 자금들의 리자도 나오므로 여생의 생활은 근심걱정이 없는 듯 하였다.    평생을 허리 펼새 없이 일하며 손끝으로 벌어서 자식들을 키워오고 뒷바라지 해 온 우리 서울오빠와 형님, 인제는 한생의 할 일들을 다 하셨으니 마음 편히 건강하게 여생을 즐기며 사시는 것이 당신들의 소임이요 행복이 아니겠는가 생각되네요. 부디 로년에 만복을 누리며 무병장수하시기를 이 동생은 빌고 또 비는 바입니다.                                                                                2022년 5월 연길에서            
52    한 남한녀성의 삶을 들어본다 댓글:  조회:1420  추천:0  2022-05-01
                                                한 남한녀성의 삶을 들어본다       민족 상찬의 대 비극 - 6.25전쟁의 포성이 비참히 울부짖던 1950년대초, 남한땅 산간마을은 전쟁터로 되였고 가족들은 행방불명 갈라져 버려 부모들이 애들을 잃고 애들은 버려지는 일들이 기수부지였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절때 그게 아니였다. 끈질긴 모성의 힘으로 악착스레 자식을 붙잡고 있었기에 무남독녀 외딸인 나는 다행히 그 험악한 세상에서 태여 났어도 넓고 따뜻한 엄마품에 안겨 겁없이 자랐고, 커가며 글을 배워 무언가는 해야 할 몽롱한 한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인생길을 향해 쉼없이 달릴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워낙 금슬이 좋으시기를 그 시대에서는 보기드믄 분들이였는데 외동아들 하나를 애지중지 키우면서 청빈하고 근신하게 살아 오셨다. 외가는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이여서 우리 엄마는 어려서부터 진짜 귀동녀로 고이고이 자랐단다. 그런데 운명이란 웬 작간 이였는지 엄마는 그만 그 청솔한 가정의 독자아들이였던 아버지한테 시집가고 말았다.     그때는 어린 녀자애들이 마구잡이로 일제의 정신대에 끌려가는 동란시기라 그 구렁청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엄마는 열일곱 나이에 일찍 출가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 운명의 기구함을... ...  엄마는 결국 한평생 밤낮으로 아빠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허구한 인생을 살고 만 것이였다.     아버지는 워낙 책을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인지? 그 무슨 리론이요, 예술이요 하면서 온 세상을 처럼 방황하며 집에 오지 않는 것이 수년이 아닌 평생이 되고만 것이다.  엄마는 기약없이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위하여 집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고 생계를 위해 외동딸인 나를 이모집에 맡껴 키우며 힘들고 궂은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가면서 고난한 삶을 이어갔다.     나에게 엄마는 세상에 한분밖에 없는 목숨같이 귀하고 하늘같이 귀중한 존재였다. 어데 그뿐인가? 엄마 또한 얼마나 예쁜 미인이였던가. 외지에서 공부하다 방학에 집에 돌아오면 나는 엄마를 위해서 그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 어린나이에도 밤을 새며 엄마에게 부채질을 해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마는 행복해 하지 않았다. 딸의 정성이 아무리 지극해도 남편의 사랑과는 비교도 안되는 모양이다.     36세의 꽃나이에 수년을 독수공방하며 어찌 고독한 인생에 만족 할수 있겠는가? 나는 드디여 엄마를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가 중등학교에 금방 입학한 때였다. 재삼 권고하기를 1년이 넘어 엄마는 그만 아이 넷이나 되는 한 회사원에게 재가하였다.     갑자기 늘어 난 다섯 식구, 그것도 아무런 인연도 혈연도 없는 식구들과 큰언니, 큰누나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일이였던가?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나는 벌써 혈육이 아닌 남들을 섬기며 사는 법,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헌신하며 사는 법을 스스로 익혀 간 듯 하였다.     재혼한 엄마는 새 식구들을 거두기에 정신이 없었고 나는 나름대로 독방을 차지하고 자유로이 자기 앞날을 개척해 나갔다. 동서양 고금중외의 서적들을 미친듯이 탐독하였고 따라서 글쓰기에도 재주가 늘어 항상 최고로 인정 받았다.     허나 모든 학문이 인간학인 듯이 그 글들은 기쁨 없는 인생의 방황과 갈등만이 뒤엉켜 있어 남에게는 모종의 향수로 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고통의 추억과 그 현실 자체였다. 세인들의 칭찬은 의미가 없어 보였고 사랑이 없는 글들은 아픈 인생의 구슬픈 하소연 뿐 이였다.     살림에 타수한 엄마는 내가 대학입시 원서를 넣는 날 교통비도 제때에 갖춰 주지 않아 걸어서 늦게 도착하여 결국은 원하지 않는 2차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범 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 대학에서 나는 인기 인물이 되였고 교정의 한떨기 꽃송이로 불렸다. 국문학에 재능을 가졌던지라 신문과 방송으로 소문을 냈고 나날이 자신만의 화려한 대학시절을 장식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절친한 친구가 라고 권고했고 국문과 지도교수도 비록 아쉽기는 하지만 라고 추천서를 써 주시여 드디여 나는 신학대학에로 다시 전공을 옮겼다. 그때는 이미 대학 3학년 시절이였다. 신학을 배워보니 진짜 인간을 넘어선 우주적인 학문이였다. 신학을 배우면서 원래의 재능을 리용하여 계속 도 주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라 우리 진보적 성향의 학생들은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에 걸려들어 서대문감옥에까지 붙잡혀 들어가서 로 되었었다. 때는 1975년, 진보적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압제당하는 테러시기였다.                  감옥에서 보노라니 이러저러한 구실로 잡혀 들어 온 어린 학생들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 온 새끼양들 마냥 불쌍하게 여겨졌고 어서 빨리 나가서 다시 그들을 구해 주기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하층 백성들을 동정하고 세상을 넘나들며 우리민족에게 사랑과 나눔과 봉사의 정신을 가르치는 인문학의 기초가 되었지 않는가 생각된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나는 백두산 천지에서 힘차게 흘러내는 폭포수와 더불어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중국의 조선족 형제자매들과 어께곁고 배우고 배워주며 연변땅을 사랑하는 마음 한가슴 가득 안고 멀리멀리 푸르른 희망의 바다를 향해 쉼없이 달리고 있다.                                                                              (이진숙 구술, 강순화 정리) 연길민속촌 집단상담에서                                             ※ (이진숙: 1997부터 20 여년간 중한 합작으로 운영 된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한국측 원장 역임)
51    운(運)에 관하여 댓글:  조회:1314  추천:3  2022-04-15
                    운(運)에 관하여      운이라 하면 보통 운수, 운명, 행운 등 단어들이 떠오르겠지요?    그런데 기재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세가지의 운(運)이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천운(天運), 지운(地運), 인운(人運)이랍니다.    천운(天運)은 하늘이 정해준 운으로, 내 부모가 아무개라는 것, 내 성별이 남자 혹은 녀자라는것 등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지운(地運)은 타고난 재능으로 그림이나 연기, 노래 등 타고난 재능은 지운이 결정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아무리 천운과 지운을 잘 타고 났어도 마지막 인운(人運)에서 거르치면 삶이 힘들어진답니다.    인운(人運)은 사람 복을 말하며, 인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으며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됐는지 안됐는지는 인운(人運)으로 정해진답니다. 인운(人運)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인운(人運)을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서는, 천운(天運)과 지운(地運)을 탓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답니다. 부모를 탓하고 시대를 탓하고 직장을 탓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으며, 부모와 시대를 탓하는 것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설사 시대와 부모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이를 탓하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켜야 하겠지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불평하고 욕하는 사람도 잘 될수 없으며, 무엇을 탓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운(運)이 오지 않는답니다.  얼굴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에겐 운이 왔다가도 되돌아간대요, 사람의 만남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깐요.    한국의 대성인 류달영박사님은 자신의-인생노트-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훌륭한 스승, 훌륭한 제자, 훌륭한 배우자, 훌륭한 친구를 만나고 못 만나는 것으로 일생이 결정되는 것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여나 참 스승을 만난 행운아인 것을 언제나 고마워 한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인운이라는 것이겠지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리별의 순간까지도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 좋은 인운(人運)을 만나게 된다네요. 인운으로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좋은인연을 맺고 평생을 바쳐 귀하고 중하게 여기며 그로 인하여 항상 소원이 성취되시길 기원합니다.                                                       2022. 4. 15      
50    로씨아 극동도시 울라지보스또크 댓글:  조회:2419  추천:3  2022-03-27
                       로씨야 극동도시 울라지보스또크                                                     글 / 강 순 화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로씨아 울라지보스또크시가 2011년 5월 우호도시 친선관계를 건립한 이래 쌍방의 교류와 합작은 활발히 이루어 졌다. 특히 2013년 5월에는 항공기가 개통되고 철도 려객 화물 수송, 공로 화물 운수 등 여러 방면으로 연변, 나아가 중국, 길림성과 로씨야간의 경제, 무역, 관광, 등 제반 령역의 교류와 합작이 더욱 급물살을 타고 있다. 울라지보스또크시에는 이미 국내기업 600여개가 진출해 있었고 해마다 20여만명에 달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울라지보스또크를 찾고 있다한다. 바로 그해 우리 연변대학 동북아연구소 선생님들은 3박4일 일정으로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시를 참관, 방문하면서 아름다운 로씨아의 풍토와 인정에 깊이 매료되었고 또한 새로운 이웃나라 세상을 보고 배우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연변문화관광사의 안내에 따라 아침 일찍 관광뻐스를 타고 두시간쯤 달려 훈춘 장령자통상구에 도착하였다. 로씨아 해관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친후 다시 뻐스에 올라 한시간 반쯤 달리니 로씨아의 첫 소도시 크라쓰끼노가 한눈에 안겨왔다. 가이드에 따르면 이는 로씨아의 란다. 1905년 일본이 동북3성과 로씨아 극동지역을 집어 삼키려고 훈춘 방천지역에까지 친입하여 대전을 벌린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장고봉 전투이다. 이 전역에서 로씨아군은 일본군 3만명을 격사하고 수만명을 부상시킨 전과를 거두어 일본군의 침략야망을 일거에 분쇄해 버렸던 것이다.      오후 한시경 로씨아의 첫 항구 스라브양카에서 쾌속정을 타고 한시간쯤 달려 울라지보스또크 도착하였다. 항구대청에 도착하니 금발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로씨야 녀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띄워 꿈같이 느껴지던 작은 유럽 울라지보스또크행을 실감하게 되였고 순식간에 동방문화권에서 전혀 다른 유럽문화권으로 바뀌여져 마음은 어느덧 이번 려행에 대한 신비로움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울라지보스또크항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안내하는 가이드는 북경대학 중문학과에서 공부한 로씨아 류학생으로 중국어에 거침이 없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시내로 향하는 뻐스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바다의 해변가와 수림속으로는 여러가지 조형의 크고작은 이색적인 건물들이 빨갛고 노란색으로 오색 찬연한 가을 단풍과 어울려 려행객들을 반겨왔다. 그것은 로씨야인들의 별장구역이라 한다.      로씨야인들은 저마다 자기의 별장을 가지고 있으며 외면이 고급스럽고 우아한 별장은 부유한 사람들 소유이고 간단하게 꾸며진 작은 건물은 빈궁한 사람들 나름대로의 별장이라고 했다. 로씨야인들은 저마다 별장을 갖고있는 반면에 집을 갖추기에는 엄청 힘에 부친다고 한다. 집값은 평방메터당 싸야 3500딸라이고 가장 비싼 시내중심은 매 평방메터당 6500딸라까지 치솟아 올라 이곳에서 집을 소유한 사람은 명실공히 부자라고 하였다.      물가도 우리 고향보다 비싼 편이였는데 공급보다 수요가 많고 대부분 직접 생산하지 않고 수입한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로씨야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므로 자동차연료비용이 싸고 국민의 교육과 의료는 전부 면비제도라고 하였다. 로씨야에서도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주 5일근무제로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공휴일에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별장을 찾아 편안한 휴가를 보낸다. 마침 이날은 일요일이여서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별장주변 해변가나 공원에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평화로이 휴식을 즐기는 로씨야인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중심광장과 갈매기 날아예는 얼지 않는 항구      이튿날 우리 일행은 본격적으로 울라지보스또크 관광에 나섰다. 로씨야 원동지구에 위치해있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면적은 600평방키로메터이고 다섯개 행정구역인데 인구는 80여만명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구릉도시, 록색도시로 명성이 높은데 그것은 전기와 천연까스가 흔해 석탄이나 석유를 쓰는 일이 적으며 사시장철 푸른바다의 촉촉한 누기로 먼지가 없는 깨끗한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울라지보스또크에는 아무르만, 금교만, 우수리만 등 3개의 만을 사이에 낀 수려한 바다풍경에 군항, 상업항, 어업항 등 20여개의 부두가 있다. 울라지보스또크는 고풍스러운 유럽도시의 색채를 가장 잘 간직한 매력의 도시다.      울라지보스또크 관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광장은 옛 쏘련시기의 추억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곳 - 2차세계대전시기 홍군전사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다. 한 홍군전사가 나붓기는 깃발을 받쳐들고 멀리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동상을 배경으로 바로뒤에는 흰색건물 울라지보스또크 백화점이 보이고 동상앞 넓은 광장에는 날아예는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애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로 메아리친다. 삽시에 평화가 온몸으로 갈마드는 느낌이 찾아온다.      중심광장에서 앞을 내다보면 울라지보스또크 부동항(不冻港)이다. 항구에는 여러 나라의 선박들이 줄지어 정박해있고 기중기들은 선적작업에 분주하다. 길게 고동소리를 울리며 항구로 들어오는 화물선들도 이따금 눈에 띄우고 훈련을 앞두고 정박해있는 로씨야 극동해군함대의 구축함도 조용히 군항에 머물러 있어 조화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얼마전에 있은 평화사명 중-로해군합동군사훈련에 참가했던 중국해군의 구축함, 순양함, 보급함 등 각종 함정들이 바로 여기 부동항 로씨야 해군기지에 정박해 있었다고 한다. 극동지구에서 겨울에도 얼지않는 부동항, 20세기 90년대초까지만 해도 군사요충지로 묶여있는 금단의 땅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재 대외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제낀 울라지보스또크 항만은 신비롭기만 하였다.      APEC(아세아태평양경제협력체-2012)회의가 로씨야도에서 개최되면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을 이어놓은 웅장한 다리(교각높이 320메터)는 두팔을 벌리고 우리들을 어서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다. 로씨야도는 푸른 삼림과 아름다운 해변바다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관광려객선에 올라 배가 달리며 항구를 빠져나오자 관광객들은 저마다 빵을 찢어 갈매기한테 던져준다. 배뒤를 따라 공중에서 그대로 빵쪼각을 받아 삼키는 수백마리 갈매기들의 묘기로 려객선에 앉은 관광객들은 저마다 놓칠세라 부지런히 카메라 샤타를 누른다. 바다의 들끓는 정열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는 울라지보스또크의 경관이였다.                                                아무르만해안가와 금교만도로에서      울라지보스또크 관광지는 대부분 한곳에 집중돼있어 관광하기가 무척 편하다. 이날 오후 우리 일행은 아무르만 해안가에 위치한 잠수함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잠수함박물관은 제2차세계대전시기에 독일군 전투함 10척을 침몰시키고 4척을 격상시키며 혁혁한 공훈을 세운 C56잠수함 실물을 그대로 옮겨서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잠수함내부에 들어서니 널직한 앞부분은 전람실로 만들어 전투에 참가했던 24명 선원들의 실물사진과 훈장, 군복 등을 진렬해 놓았고 중간부분과 뒤부분은 잠수함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잠수함내부의 이름 모를 설비와 무기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일행은 바다밑에서 적함을 향해 용감히 어뢰를 발사하는 당년 영웅적 수병들의 생생한 모습을 다시한번 떠올려 보기도 하였다.      잠수함박물관입구를 나오니 바로 왼쪽 50여터되는 곳에는 11층 백색건물로 된 로씨야극동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생각 외로 삼엄한 경비도 보이지 않아 관광객들은 저마다 긴장감을 풀고 사령부건물을 배경으로 마음놓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수함박물관 오른쪽에는 2차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병사들을 기리는 영원한 불길이 지펴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울라지보스또크 시내 다른 곳과 다름이 없이 고요함이 깃드는 이곳 로씨야극동태평양함대사령부, 다른점 이라면 아무르만의 절주있는 파도소리와 관광객들의 수다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 먼 교회당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며 사람들에게 오직 평화와 발전만이 인류의 영원한 주제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우쳐 주기라도 하는 듯 하다.      참관을 마치고 우리는 금교만 해변가 도로에 올라섰다.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니 중고차로 길을 덮은 울라지보스또크의 남다른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일본 중고자동차시장이라 불리울 정도로 90%이상이 일본자동차다. 한국의 현대차와 기아자동차 그리고 등 한글간판이 그대로 붙은 중고 뻐스들이 거리를 누비는 흥미로운 정경이다. 허름한 일본자동차와 한국뻐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며 울라지보스또크의 또 하나의 이색적인 풍경선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이 자가용을 갖추는 리유는 신분의 상징이 아닌 편리한 이동수단 때문이란다. 보통 가격이 3000딸라내지 6000딸라면 좋은 중고차를 살수가 있었다. 울라지보스또크의 거리에서는 숱한 차들이 길을 메우면서 달리고 있지만 경적소리 하나 들을 수 없고 서로 서두르며 추월하는 차량도 볼 수가 없다. 이 신비한 소 유럽도시의 거리마다에서는 로씨아 신사숙녀들이 중고 차량을 끌고 신나게 달리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너무도 흔히 목격할 수가 있었다.                                            푸른 바다 넘실거리는 랑만의 해변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해변공원으로 갔다. 가없이 푸른 울라지보스또크 바다는 그야말로 랑만의 여름이였다. 바닷가 해수욕장에서는 시원한 여름을 즐기는 여러가지 피부색갈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맑은 바다물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 백사장에서 햇볕 쪼임을 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자유로운 여름바다의 진풍경이다. 우리도 바다의 유혹에 매혹되여 서둘러 수영복을 갈아 입고 푸른 바다가에 뛰여 들었다. 순간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와 닿으며 뜨거운 여름을 바로 날려 보내는 것만 같은 상쾌한 기분이다.      해수욕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수족관으로 향했다. 수족관에는 열대바다와 온대, 한대바다의 물고기들과 바다거북, 돌고래, 상어 등 다종다양한 바다생물들이 신나게 노닐며 바다속 세계를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게 그대로 복제해 놓은 것이였다. 어린이들이 신비한 바다속 세계를 관찰하는 체험장으로 추천해 볼만한 곳이다.      수족관을 나서자 눈앞에 방파제가 둘러쌓인 깊은 바다가 안겨왔다. 유람선과 쾌속뽀트가 쉼없이 바다속을 질주하고 작은 돛배는 가랑잎처럼 바람에 한들거리며 바다를 주름잡는다. 젊은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용감하게 바다 조약대를 뛰여 넘어 고난도 기교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며 자전거다이빙을 즐기느라 숨가쁘다. 그리고 방파제 유보도에서는 동양인들의 질투를 불러 일으킬만한, 쭉쭉 빠진 예쁘고 긴 다리를 자랑하는 로씨야처녀들이 넘실거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울라지보스또크국립대학 재학생인 유라씨와 나따샤라는 두 로씨야처녀를 만났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 청수한 얼굴을 가진 처녀들은 여름방학간 휴식을 취하러 바다로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자 처녀들은 무척 반기며 얼마전 행운스럽게 울라지보스또크를 방문한 중국해군함정에 올라 참관까지 하였다면서 중국해군장병들은 정말 멋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면 저마다 애국자라고 그들의 그 몇마디 칭찬에도 우리는 저절로 어께가 으쓱해 나며 중화민족의 한 일원임에 흐뭇한 긍지를 느꼈다.      우리 60년대 고중생들이 필수과목으로 배운 외국어는 로어였다. 처음으로 로씨아땅에 와서 그옛날 배워둔 외마디 로어들로 손짓 머리짓 해가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로씨아인들이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중-로 두 나라 인민의 력사깊은 우의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즐거운 만남 이후 우리는 아쉬운대로 해변공원을 떠났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은 금교만 해변에 위치한 따니야민속풍정원에서 로씨야 민속전통 료리와 해산물을 만끽하며 로씨야 민간예술가들이 출연하는 민속음악예술공연을 관람하였다. 푸짐한 산해진미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씨야 맥주의 맛도 별미이지만 로씨야 민간예술인들이 펼치는 멋진 공연은 우리들의 마음을 서양예술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하였다.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예술인들과 려행객들은 서로 손잡고 하나가 되여 음악회를 고조에로 이끌어갔다. 그속에서 로씨아 항구의 밤은 서서히 깊어만 가고 불야성을 이룬 해변도시의 불빛은 고요한 바닷물에 반사되여 우리의 마음을 끝없는 황홀감에 빠져들게 하였다.                                          레닌동상 그리고 고풍스러운 풍격의 기차역과 거리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3일째 되는 날은 안개가 자욱히 끼여 길에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들로 붐비였다. 울라지보스또크는 해안가 도시여서 온 시내가 자주 안개속에 잠긴다고 한다. 비록 날씨는 흐리지만 바다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스치며 우리들의 마음은 언녕 설레임으로 넘치였다.      이날 아침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해변가 광장에 위치한 레닌동상이다. 고개를 들고 오른손 식지로 저 멀리를 가리키며 바라보고 있는 레닌동상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뜻있게 시사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였다. 구쏘련이 해체되면서 로씨야 각지에 세워져있던 레닌동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울라지보스또크에는 아직도 옛쏘련의 추억이 담겨있는 기념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심지어 현재 시구역 5개구도 레닌구, 5.1구, 쏘베트구 등 옛쏘련시기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어서 우리는 레닌동상 바로 맞은켠에 위치해있는 울라지보스또크기차역으로 발길을 옮기였다. 울라지보스또크 기차역은 로씨야극동의 전략적요충지인데 여기서 부터 모스크바에 이르는 길이가 9288킬로메터에 달하는 대 씨비리 철도의 동쪽끝 시발점이다. 울라지보스또크의 유명관광명소로 꼽히우는 이 기차역은 100년전 이딸리아 설계사가 이딸리아 건축풍격으로 설계하였는데 씨비리 횡단철도 기차역중에서 가장 매력있는 건축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급행렬차를 타고 꼬박 7일달려야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나긴 씨비리 횡단 철도이다.      가이드의 소개에 의하면 현재 로씨야 철도는 중국의 고속철도시대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며 로씨야 철도는 하루속히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내에 들어서니 비록 색은 바랬지만 높은 천정과 사면 벽들의 우아한 서양벽화가 한눈에 안겨와 고풍스러운 100년 기차역 건물에 조화되면서 호화로운 궁전을 련상시키고 있었다.      깔끔한 기차역 건물도 의미가 있지만 2차대전시기에 전공을 세운 9288수자를 새긴 검은색 증기기관차 한대가 역내에 실물로 전시되여 관광객들을 더욱 흡인하였다. 애들은 좋아라 기관차에 올라 기차놀이를 하고 려행객들은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하다. 이 시각 우리는 이 멋스러운 증기기관차가 검은 연기를 내뿜고 9288킬로메터의 광활한 로씨야 령토를 질주하며 전선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당년의 위용을 눈앞에서 재현해 보는 것만 같았다. 이 기차역은 세계상 유일하게 항구와 기차역이 한곳에 머물러있는 독특함으로 유명하다 한다.     울라지보스또크역을 둘러보고나서 우리는 스비트란스까야거리에서 서투른 로어로 아진, 드바 뜨리 ... ... 해 가며 로씨아 위스키며 정교한 로씨아 해군모, 빠찌 등 기념품들을 골라 잡으면서 쇼핑을 즐겼다. 100여년 력사를 자랑하는 이 거리는 울라지보스또크시에서 유럽전통으로 된 가장 웅위롭고 아름다운 옛 건물들이 집중된 곳이다. 1891년에 건설된 개선문은 로씨야의 자부심으로 유명하다. 다른 한쪽켠에는 지난세기초에 지어진 건물로 울라지보스또크의 이민사와 풍부한 도시력사자료를 소장하고있는 아르쎄예브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환영을 가장 받는 고골리변구극장에는 지금도 늘 유럽과 로씨야 희극작품들이 공연되며 수시로 곡예무대도 펼쳐져 시민들의 생활을 보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든다. 로씨야전통문화속에 깊이 매료된 우리는 거리 한 모퉁이에서 몇몇 청년들이 신나게 기타를 타고 절주있게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금방 귀를 기울렸다. 로천에서 아무런 제한없이 쟈즈음악을 연출하는 그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며 우리는 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하였다.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드는 문화의 도시 울라지보스또크의 거리를 살펴 보노라면 일류 스타의 얼굴들을 가진 버들잎 같은 예쁜 미녀들이 쭉쭉 빠진 몸매를 자랑하며 수없이 눈에 띄운다. 너무도 우아해 같은 녀성들로서도 저도 모르게 하고 감탄의 환성을 울린다. 로씨야 젊은이 들은 체격, 인물도 곱지만 무척 례절스럽고 문명하다. 공공장소에서는 늙은이나 아이들이나 할것없이 두세 사람이라도 차표를 사고 물건을 사고 차에 오르내려도 반드시 줄을 지어 순서있게 기다리는 것을 숙명적인 행동으로 받아 들이는 것 같았다. 자각적으로 질서를 지키는 그들의 고상한 국민소질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 이였다.      울라지보스또크는 어디로 가나 거리와 건축물이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바다를 보면 내가 옮겨 다닌 거리들을 대뜸 알 수가 있다. 바다가 좌표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온화한 기후로 해안풍경이 다양한 이곳은 도시중심 건물들이 바다와 산등성이를 따라 이루어져 지형적으로 도시전체가 좁고 길죽한 것이 특징이다. 옛 건축물과 현시대 로씨야인들의 삶이 멋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해안가의 출렁이는 푸른 바다에 비껴 더욱 멋지다.                                   로씨야도와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울라지보스또크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마지막 날 오전 우리 일행은 로씨야도로 가는 길에 올랐다. 로씨야도는 일본해의 뻬쩨르대제만에 위치해 있으며 울라지보스또크시 중심과 불과 몇키로 밖에 않되는 곳에 있다.     로씨야도는 바다의 홀로 피여난 꽃이라 불리울 정도로 풍경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섬의 면적은 97.2평방키로메이며 중부지역에 세개의 높은 산이 위치해 있고 구쏘련 시절에는 군사기지가 있었으며 1990년 중반까지 군사금지구역으로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2012년 APEC(아세아태평양경제협력체)정상회의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륙지로부터 섬에까지 금각만대교가 건설되여 울라지보스또크시 또 하나의 경관으로 되었다.      우리가 이틀전 부동항에서 금각만대교를 바라보았을 때엔 바다속에 세워진 다리에서 차가 달리는 모습이 그토록 신기했지만 이날 직접 차에 앉아 높은 다리우를 질주하니 마치 하늘 속으로 차가 달리는 것만 같은 짜릿한 기분이였고 바스포라해협의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다리밑으로 각종 배들이 서서히 오가는 것이 정말로 가관이였다.      로씨야도는 푸른 삼림과 신비스러운 동화이야기를 간직한 곳으로 그 어느곳 보다 더욱 매력적이다. 로씨야도에 도착하여 가장 높은 루스키흐산에서 섬을 살펴보니 사면이 푸른 바다에 쌓여 명실상부한 하나의 섬이란 감을 주지만 낮은 곳에서 보면 여러가지 자연풍경과 건물들이 시야를 가려 섬이란 의식이 전혀 찾아들지 않는 륙지와 다름없는 땅처럼 느껴졌다. 로씨야도에는 현재 대규모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이미 APEC정상회의가 열렸던 회의중심건물들은 로씨야련방 극동대학교로 명칭을 바꿔 사용하고 있었다. 이밖에 5성급호텔, 국제상무중심, 태평양과학교육중심 등이 들어 있었고 대형 오락장, 해양수족관, 호화별장구역과 고급주택 구역도 한창 시공중에 있었다. 로씨야정부는 2010년에 이미 로씨야도를 관광레저산업 특별경제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 려행에서 가장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은 당연히 울라지보스또크가 한눈에 안겨오는 독수리전망대이다. 로씨야사람들이《새의 둥지》라고 부르는 산이 있다고 해서 독수리전망대라는 별칭이 붙혀졌다고 한다. 구불구불 산길을 에돌아 울라지보스또크시에서 191메터로 가장 높은 독수리전망대에 올라서보니 푸르른 바다가 한눈에 안겨오며 금각만이 보이고 당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장교 중 하나인 금각만 대교가 한눈에 안겨왔다.      독수리전망대에 세워진 기념비와 란간에는 아롱다롱한 자물쇠들이 수없이 채워져 걸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랑하는 커플들이 신성한 마음으로 잠가 놓은 것들 이란다. 아마도 독수리전망대는 로씨아련인들에게는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인 것 같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며 견증물로 잠군 자물쇠를 걸어 놓는 것이다. 사랑이 영원히 풀리지도 떠나지도 말고 두 사람에게만 채워지라는 뜻깊은 함의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드디여 우리 일행은 삼박사일의 울라지보스또크 려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려객선에 올랐다. 비록 짧디짧은 려행일정 이였지만 우리 모두의 기억속에는 아름답고 행복한 로씨아 울라지보스또크시의 희망찬 항구도시가 오래도록 기억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2022. 3. 25 재차수개)
49    스트레스에 관하여 댓글:  조회:1030  추천:3  2022-03-14
                           스트레스에 관하여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병들의 원인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 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불면증이 오고 식욕부진, 근육경직, 두통, 위장병 등과 같은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울해 지거나 조급해 지고 툭하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가정에 와서 풀려하면 가족이 공연히 화풀이 대상이 되어 폭언과 폭력을 당해야 하므로 결국은 부모 자식 간의 화목이 파괴되고 가정행복이란 운운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또 반대로 가정에서의 스트레스를 직장에 와서 풀려고 한다면 괜히 동료들과의 관계와 친목을 악화시키고 직장 분위기를 망쳐버리게 되며 사업의 성과도 망치게 되므로 결국에는 자신의 진보나 승진에 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인가요?    우선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때에 파악하고 적절한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혼자서 속을 태우거나 마음을 굳게 닫고만 있다면 스트레스는 더 쌓이게 되고 결국은 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절친한 친구나 가까운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어 볼 수도 있고 전화상담이나 심리전문가의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조용한 장소를 찾아 보고싶은 책들을 골라서 읽어 보던지 아니면 짬짬이 산책을 하거나 흥취에 따라 가벼운 운동도 찾아하며 충분히 잠을 자고 항상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 등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방법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리해하고 자기 내심속의 진, 선, 미를 찾아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나 절때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장점도 있으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그 만의 한가닥 빛과 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학적으로 스트레스는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랍니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긴장을 조성하여 업무의 능력을 증진하고 또한 자신의 삶의 질을 제고하는데 촉매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스트레스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주어진 현실 생활에 만족하고 생활을 즐겁게 의미있게 만들려는 태도를 가지며 항상 스트레스를 친구로 여긴다면 우리는 삶에서의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고 힘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길림성과 연변, 연길에 까지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들의 일상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지요. 정상적인 사업이나 활동, 그리고 친구들과의 교류도 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답답해지고 심정이 우울해 지며 저도몰래 짜증이 나는 등 스트레스 증상들이 나타나군 하지요. 이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이런 비상적인 때 일수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출근 못하는 여유 시간이면 꼭 매 하루의 일거리를 계획적으로 만들고 그것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며 또 혼자 할 수 있는 적당한 운동도 겸함으로서 매 하루하루의 충실한 시간을 만들어 간다면 스트레스는 결국 발붙일 곳이 없게 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 스트레스(stress) : 몸에 해로운 자극이 가해졌을 때 생체가 나타내는                                       방어반응 또는 그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                                                                                                      (상용 외래어사전)                                            연변대학민족교육원 심리상담실에서                                                           2022년 3월 10일
48    三,八 国 际 妇 女 节 댓글:  조회:1102  추천:6  2022-03-02
                                                         三,八  国 际 妇 女 节       1857年3月8日,美国纽约的服装和纺织女工举行了一次抗议,反对非人道的工作环境, 12小时工作制和低薪。游行者被警察围攻并赶散,两年以后,又是在三月,这些妇女组织了第一个工会。        1908年3月8日,15000名妇女在纽约市游行,要求缩短工作时间,提高劳动报酬与享有选举权,禁止使用童工。她们提出的口号是"面包和玫瑰",面包象征经济保障,玫瑰象征较好的生活质量。       1910年8月,在丹麦首都哥本哈根召开了国际社会主义者第二次妇女代表大会。出席会议的有17个国家的代表,会议讨论的主要问题是反对帝国主义扩军备战,保卫世界和平;同时还讨论了 保护妇女儿童的权利,争取8小时工作制和妇女选举权问题。     领导这次会议的著名德国社会主义革命家、杰出的共产主义战士克拉拉·蔡特金倡议,以每年的3月8日作为全世界妇女的斗争日,得到与会代表的一致拥护。从此以后,“三八”妇女节就成为世界妇女争取权利、争取解放的节日。         1911年的3月8日为第一个国际劳动妇女节。     1917年3月8日,俄国彼得格勒的女工,勇敢地举起了“三八”节的战斗红旗,举行了反对帝国主义战争、反对沙皇制度、反对饥饿的游行示威。        中国妇女第一次举行“三八”节纪念活动是在1924年,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广州劳动妇女举行纪念会和游行。会议由我国妇女运动的先驱何香凝主持,会上提出了 “打倒帝国主义”、“保护妇女儿童”的口号。这次活动显示了中国劳动妇女的觉醒和力量。     1938年3月8日,宋美龄动员妇女积极参与抗战救国。                1949年12月,中央人民政府政务院规定每年的3月8日 为妇女节。 联合国从1975年国际妇女年开始庆祝国际妇女节,确认普通妇女争取平等参与社会的传统。                  1997年大会通过了一项决议,联合国的倡议导致为实现男女平等建立了国家法律框架,并且提高了公众对于迫切需要在各个方面提高妇女地位的认识。                                                    (网上的資料)
47    류달영선생님의 인생노트 댓글:  조회:1765  추천:2  2022-03-01
                                                                        류달영선생님의 인생노트       한민족의 공자(孔子)로 불리우는 星泉 柳達永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시대적 지성인입니다.  그이는 불같은 민족애와 탁월한 지혜로 우리민족의 진로를 밝히고 수많은 영재들을 키워오셨습니다.  심오한 철학과 해박한 지식, 풍부한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그이의 주옥같은 칼럼과 수필들은 우리연변대학교 캠퍼스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초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리념으로 흔쾌히 사재를 털어 연변대학교 캠퍼스에 민족문화교육원을 설립함으로서 우리동포사회의 민족교육과 사회복지를 위해 귀중한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여 오늘까지도 이 민족문화교육원은 여전히 우리민족 교육과 우리민족사회를 위한 각종 봉사활동의 훌륭한 기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몇해전 94세를 일기로 불행히 타계하셨지만 연변대학교 교정에 친히 심어 놓은 무궁화애목은 어느덧 키넘게 자라 해마다 천만송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길가를 지날 때면 마치 선생님의 교시를 듣는듯 저몰래 가슴이 울렁이군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존경하는 류달령선생님의 인생노트를 다시 한번 음미해 봄으로서 우리의 삶에 심사숙고의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삶                                                    반짝하는 삶이어니 부지런히 사올것이                                      단 한번의 삶이어니 의젓이 사올것이                                      영원의 삶이 옵도록 참되이 사올것이                                      이 민족 흥망의 날에 더욱 그러하올 것이     훌륭한 스승, 훌륭한 제자, 훌륭한 배우자, 훌륭한 친구를 만나고 못 만나는 것으로 일생이 결정되는 것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여나 참 스승을 만난 행운아인 것을 언제나 고마워 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신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건강을 위해 영양있는 음식을 평생 먹어야 하듯이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쉬지 않고 영양을 공급해야 한다.  정신의 양식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독서로 공급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돼지같은 큰 육체에 바늘같은 빈약한 정신을 가진 정신적 장애자가 너무도 많다.     우리나라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취미없는 인생은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이다. 취미는 스마일의 샘터이며 인생의 윤활유이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마음을 즐겁게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건강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밝은 미소로 일을 하면 어려운 일도 모두 잘 풀려 나간다.  즐거움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은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가는 것이다. 밝은 얼굴은 가는 곳마다 분위기를 밝게한다.  가시밭길도 꽃밭으로 바꾸면서 살아가게 된다.    ‘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며 사회적 동물 ’ 이라는 신념으로 나는 한결같이 살아왔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사회의 구성원이다.  공동사회에서 불리된 이기주의적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수가 없다. 사람은 공동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이 되어야 비로서 사람노릇을 하면서 값진 삶을 영위 할 수가 있다.     영구한 시간속에 한 찰라를 빌려 단 한번 태여나서 살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평범하게 내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배우고 성실하게 사귀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즐겁게 값진 봉사를 하는 삶을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다.     위대한 인물들의 공동된 특징은 지극히 평범한데 있다.  평범에는 거짓이 없다.  돈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생, 이것이야말로 최고 경지의 삶이다.     숨쉬는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생각하기 쉽다.  숨쉬는 것과 삶과는 그 뜻이 다르다. 의미없는 시간은 모두 죽은 시간이다.     나의 철학 --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                                 (류달영 박사님 : 한국 성천문화재단 이사장)
46    볼수록 좋은 글 댓글:  조회:989  추천:4  2022-02-23
                              볼수록 좋은 글...   ♬  몸에 생긴 흉터는 옷으로 가리고 얼굴에 생긴 흉터는 화장으로가린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려준다. ♬  깡통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속이 가득 찬 깡통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나는 깡통은 속에 무엇이 조금 들어 있는 깡통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아는사람도 아무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조금 아는 사람이 항상 시끄럽게 말을 한다. ♬  이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모두 자기얼굴이 잘났다고 생각하겠지. 어떤 얼굴이 나보다 예쁘고  어떤 얼굴이 나보다 미운지 모르겠지. 사람들의 삶에 반성이 없다면 모두 자기삶이 바르다고 생각하겠지. 어떤 삶이 옳은 삶이고 어떤 삶이 그른 삶인지 모르겠지. ♬  세상을 아름답게 살려면 꽃처럼 살면 되고 세상을 편안하게 살려면 바람처럼 살면 된다.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바람은 그물에도 걸리지않고 험한 산도 아무생각 없이 오른다. ♬  무심히 떠가는 흰구름을 보고 어떤이는 꽃 같다고 말하고 어떤이는 새 같다고 말한다. 보는 눈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 두고 어떤 이는 빠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느리다고 말한다. 세월의 흐름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 참았더라면, 그때 잘 했더라면,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조심했더  라면, 훗날엔 지금이 바로 그 때가 되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보내면서 자꾸 그때만을 찾는다. ♬  무지개는 잡을 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꽃은 피었다 시들기에 더 아름답지. 젊음은 붙들 수 없기에 더 소중하고 우정은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더 귀하지.  ♬  태풍을 막아 주는 나무, 홍수를 막아 주는 나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맑은 공기를 만들어 주는 나무, 나무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먼저 누군가의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  너의 밝은 웃음이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이 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빵이 되고,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되고 좋은 꿈을 꾸게 하는 베개가 된다. ♬  게으른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따르지 않는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겐 희망이 따르지 않고 간사한 사람에겐 친구가 따르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이 따르지 않고 비교하는 사람에겐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채송화 씨를 뿌리면 채송화를 피우고 나팔꽃 씨를 뿌리면 나팔꽃을 피운다.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일에 정성을 들이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고 좋은 일에 정성을 들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좋은 생각에 좋은 생각을    더하면 복이된다는건 몇사람이나 알까?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가 된다는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사랑에서 희생을 빼면 리기가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 똑똑한 사람은 더하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벌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 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친구한테서 선물받은 글)    
45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 댓글:  조회:951  추천:2  2022-02-23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   ◇ 화내지 마세요. 흥분 할 때마다 수십만 개의 뇌세포가 파괴됩니다. ◇ 좋은 물을 많이 마시세요. 몸도 마음도 머리도 맑아집니다. ◇ 성격을 개조하세요. 낙천적인 사람은 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 뇌에 영양을 주는 식품을 섭취하세요. 호두, 잣, 토마토, 녹차가    좋습니다. ◇ 두부, 청국장, 등 콩류를 많이 섭취요. 콩은 뇌영양물질 덩어리입니다. ◇ 계란은 완전식품입니다. 콜레스테롤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 식탁에 멸치그릇을 놓아두고 수시로 드세요. 멸치는 보약입니다. ◇ 치아가 손상되면 바로 고치세요. 이가 없으면 치매도 빨리 옵니다. ◇ 호두를 굴리세요. 호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굴리기를 하세요. ◇ 손으로 많이 쓰세요. 화가에게는 치매가 없습니다. ◇ 가운데 손가락을 마찰 하세요. 뇌가 즉각 반응합니다. ◇ 손을 뜨거울 때 까지 비비세요. 그 손으로 온 몸을 마찰하시면 좋아요. ◇ 뜨겁게 사랑하세요. 사랑이 뜨거우면 치매는 도망친답니다. ◇ 남을 미워 하지마세요. 미움은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 잔소리하지 마세요. 하는 이나 듣는 이나 다 같이 기가 소진됩니다. ◇ 짜증은 체질을 산성으로 만듭니다. 산성체질은 종합병원입니다.    짜증을 줄이세요. ◇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그러면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 책이나 글을 많이 읽으세요. 소리내어 읽으면 최고의 뇌운동입니다. ◇ 웃으세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입니다. ◇ 글의 쓰기와 읽기를 생활화하세요. 뇌 운동에는 그만 입니다 ◇ 많이 움직이세요. 몸도 마음도 활동이 멈추면 병들기 마련입니다..                                           옮긴 글     유유자 이웃추가
44    개똥쑥과 노벨상 댓글:  조회:1104  추천:3  2022-02-15
                                                                 개똥쑥과 노벨상      개똥쑥은 길가나 개울가에서 흔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이다. 국화과에 속하는 일년생으로 생존력이 강하여 1미터 이상으로 자란다. 그런데 2015년10월, 85세인 투유유(屠呦呦) 교수는 이 보잘 것 없는 풀을 수십년간 연구하고 30만종의 화합물을 선정, 실험하여 40년 후에는 중국인으로서는 첫 노벨의학상 을 받은 것이다.   1930년생인 투유유교수는1955년 베이징대학 의과대학 약학과를 졸업하고 그해에 전통의학연구원으로 들어가 평생을 전통의학연구에 몰두하였다.     2021년10월20일, 그녀는 또 자신의 연구팀을 거느리고 새로운 청고수 항학질 조합물을 연구함으로서 전 세계를 향해 이미 산생된 학원충을 소멸하게 되였다고 자랑스럽게 선포하였다. 하여 그는 아세아인으로는 처음으로 과 병행하는 후선인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 를 림상실험시 그는 동물 뿐 아니라 인간에게서의 반응후과를 확정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여 직접 자기 몸에 주사를 놓으며 실험함으로서 그 후이증의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한 백의천사 과학자의 고도로되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이 아닐수 없다.     그녀는 박사 학위도 없고, 해외에 류학한 적도 없으며, 중국에서 상 받은 적도 없는 소위  3무(三無)교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중국 자체의 녀성과학인이 세계적인 최고상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음으로서 중국의 첫 의학 노벨수상자가 된 것이다.     한 무명의 녀성이 평생을 한 길에 몰두하여 전통의학연구에 일생을 걸었던 결과 그런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는 그녀 개인의 영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체에 크나큰 영예와 기쁨을 주었다.     투유유 교수는 40세가 되던 어느 날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한 한의서에서 개똥쑥 한 움큼을 2승의 물에 넣고 끊여 즙을 내어 마시면 말라리아를 치료할 수 있다는 구절을 읽고 령감을 받아 평생을 개똥쑥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다.     개똥쑥이 말라리아에 효험이 좋다는 기록은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이미 나오는 지식이다. 그러나 개똥쑥에서 신약을 개발하여 말라리아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끈질긴 연구와 발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한의서의 그 기록을 읽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기록을 읽었어도 자신의 평생을 걸고 연구해 보겠다는 끈질긴 연구심과 도전정신 그리고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투유유 교수는 수십년간 끊임없는 연구와 수백차의 실험으로 기존의 방법과는 달리 개똥쑥을 53도의 약한 물에 데워 즙을 짜내면 그 효과가 최고로 높은 말라리아 치료약이 되는 원리를 발견하여 말라리아 치료신약을 개발한 것이다.     그녀는 그 방법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190번 실험을 하였으나 실패하다가 191번째에 성공하였다. 들에 나가면 지천에 널린 풀이 개똥쑥인데 그 풀로 중국의 한 녀성 의학연구원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과 탐복에 마지않게 된다.      그의 이 신약 개발에 아프리카에 만연하고 있는 수만의 말라리아 환자들은 물론 온 세계의 환난 생명들에게 무한한 복음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 투유유교수로 하여 중국은 전 세계에 또 하나의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똥쑥]은 어떤 약효를 가지고 있는가? 1. 항암효과: 개똥쑥의 가장 뛰여난 효능으로서 아르테미신이란 물질이  함유되여 있어 암세포만 골라 죽인다고 한다. 화학 항암제보다 1, 200배의 효능을 가지고 있고 부작용은 없다고 한다. 2. 해열작용: 열을 내려주고 염증을 가라앉혀주는 효능이 있다. 월등하게 포함된 비타민 A와 비타민 C로 피로를 해결하며 지친 심신에 활력을 증강 해 준다. 3. 말라리아치료: 말라리아나 장이 약하고 배탈, 설사, 리질, 결핵 등을 치료해 주며 어혈을 다스리거나 종기, 기생충, 가려움증 등 치료에 도움을 준다. 4. 간기능 향상: 뛰여난 해독작용을 지녀 손상된 간을 회복하고 간 질환이나 피로회복,  숙취해소에도 뛰여나다. 5. 면역력 강화: 뛰여난 항암효과를 지니는 만큼 체력개선이나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그만큼 환절기 감기를 치료하는데 많이 사용된다. 6. 변비 및 다이어트: 섬유질이 풍부하게 함유되여 있어 장의 연동 운동을 원활히 도와 변비를 예방하고 숙변을 제거하며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7. 각종 여성질환 치료: 개똥쑥을 리용하여 좌욕을 하면 살균효과가 있어 냉대하증에 도움을 주고 생리통을 개선하며 생리이상 질환을 치료한다.                                                                                                         강순화 / 편    
43    김문희선생님 생일축사 댓글:  조회:1016  추천:4  2022-02-14
                                             축     사                   ----- 김문희선생님 86주년 생신을 축하하며       "참 요지음 로인들은 년세에 비해 퍽 젊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60이 청춘이라는 말이 진짜로 되였고 70, 80이 되여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90된 로인들을 만남도 인젠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21세기 고령화 시대에 들아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현시대 로인들의 모범이 될수 있는 우리연변대학 퇴직처 녀성탁구조 원로 선생님들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모두 80을 넘어가는 년세이지만 꾸준히 활동실에 나오셔서 오락도 하시고 친목도 도모하시는 모습은 우리 후배들에게 평화로운 앞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중 우리의 원로 조장 -- 김문희선생님은 정녕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20대 청춘에 연변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장장 38년간 대학 병원의 백의천사로 주임의사로 일하시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또 동료와 후배들을 이끌고 건강을 위한 테니스 운동에 가담하고 또 연변대학 퇴직처에 녀성탁구 운동팀을 창발하였으며 20여년간 학교의 각종 활동에서 언제나 한 공산당원의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10여년간이나 병환에 계신 남편을 돌보면서도 꾸준히 퇴직처 활동을 견지하여 사회에서는 떳떳한 지성인으로 가정에서는 훌륭한 어머니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2남 1녀와 그 동반자까지 6명의 자녀중 3명의 당원, 3명의 박사, 1명의 석사를 키워냈고 큰아들은 연변대학공학원 령도 강위에서 다년간 사업하며 어머니의 활동을 지지하여 우리 탁구조에도 수년간 만여원의 활동자금을 후원하였습니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것은 80년대, 김선생님 한달 공자가 65원이던 그때, 물리학부의 한 학생 김영수가 찾아와 곤난을 이야기하자 그의 학습곤난을 해결하기 위해 100원의 현금을 선뜻 내 주었었습니다. 그일로 인하여 20년 후인 2014년, 북경에서 여행사업을 하여 성공한 그 학생이 김선생님에 대한 은혜의 보답으로 인민페 100만원을 후원하여 매년 20만원씩 5년간 를 세운것입니다. 그 혜택으로 우리 퇴직처의 70세이상 원로들이 모두 연변병원에 가서 종합적인 신체검사를 받게 되였습니다.    김문희선생님의 훌륭한 사적들은 수차 신문, 잡지와 인터넷방송들에 홍보되여 , 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런데 2018년 10월 청천병력으로 위암진단을 받고 여덟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하고 화료를 받았습니다. 그 참담한 역경을 강철의 의지로 이겨냈을 무렵, 지난해 8월16일 운동하다 돌아오던 길에서 넘어져 좌골 골절로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엎친데 덮친데라고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선생님은 이를 악물고 이겨냈으며 지난달 부터는 병마를 전승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시 퇴직처에 나오셨습니다. 참으로 기적입니다. 우리 탁구조 전체 회원님들은 모두다 환성을 올렸으며 선생님의 견강한 의지와 그 놀라운 모습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 김선생님을 모신 이 자리는 쉽게 얻어 온 자리가 아닙니다. 김선생님과 가족 여러분들의 피와 눈물, 의지와 결심으로 만들어 낸 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여 우리는 너무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여기에 오신 모든 분들이 진심으로 선생님의 건강장수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이 아닙니까? 다시는 더 아프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부디 오래오래 우리곁에 있어 주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다시한번 선생님의 86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연변대학 퇴직처 녀성탁구조 조장  강순화                                          2021년 6월 2일              
42    청춘부활의 샘물터 댓글:  조회:2062  추천:5  2022-02-14
                                     의 샘물터                            -- 66년급 고중동창 모임에서         세월이 류수같다 하더니만 그것도 아니네요, 세월은 진짜 화살 같구려 ... ... 우리 모두 어느새 인생길의 고래희 고개 올랐다지 않소? 남자애들은 메낀바지 흰적삼, 녀자애들은 까만치마 흰저고리 교복받쳐입고 붉은 넥타이 앞가슴에 휘날리며 학교가던 동년시절이 엊그제 같고, 까만 쯤에리 정복에 단발머리 중학생으로 신나던 그 황금시절이 어제 같은데 누가 생각이나 했나요, 이렇게 백발이 되어가며 또다시 만나고들 있음을 ... ...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제군들, 란 정녕 마력의 감로수가 아닌가? 이렇게 다시 만나서 마시고 부으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서로서로를 쳐다만 보아도 그 천진하던 동년시절이 눈앞에서 설레이고 그 랑만적이던 청춘이 다시 돌아와 우리 모두를 황홀케 하고 너와 나를 즐겁게 하거늘, 고 허공속에 목놓아 외칠 일이 있는가?! 이렇게 모이고 만나고 나누면 그 시절이 저절로 다시 찾아 오는걸.      하여 동창회는 사랑의 감로수,  동창회는 청춘부활의 샘물터라 하겠지!  이 나이에 그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라고 욕할가? 그런데 어쩌지? 철없던 그때 그 시절엔 감히 주지도 받지도 못했던 그 을 이제라도 몰래 받아보고 이제라도 몰래 주고싶은 마음인 것을 ... ... 주책이라 웃지들 마시라! 인간이란 워낙 영원한 이 아닌가?       앞만보고 달려 온 그 세월, 희비극이 곂치며 만감이 교차 하네구려.  그래도 우리 조상, 우리 부모들에 비하면 전쟁없이 재난없이 굶지않고 떨지않고 살아 온 우리 세대가 그래 가 아닌가?  이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열심히도 살아 왔으메 하냥 감사하기만 하네. 동창이 있어 좋고  친구가 있어 좋은 세상, 함께라서 늘 행복할 뿐이구만. 이시각 오직 하나의 바램이라면 우리 제군들 모두 이제 남은 여생에 오직 건강과 안녕, 평화와 행복만이  남아 있기를... ...      기쁨찾아 웃음찾아 뻐스타고 기차타고 비행기 날려 달려 온 학창의 친구들,  보고 봐도 또 보고 싶은 나의 동년의 책상친구, 내 청춘의 련인들이여!  중년이면 어떻고 로년이면 어떻소? 이리 둘러 보니 모두가 젊은이요, 모두가 청춘들이구만. 저녘녁의 불타는 석양은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 못지않게 황홀 하거늘, 남은 인생 길지 않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우리 모두 힘내여 더 멀리멀리 걸어가 보세,  력사에 남을 그 동란시대의 답게,  아니 그보다 더 자랑찬 중화대지의 의  영원한 청춘답게 말일세!                                                                                 2019년 황금가을 동창회에서의 발언고                                                                                      강 순 화  
41    그때, 그 시절의 잊지못할 추억 댓글:  조회:8584  추천:17  2018-09-20
                                          그때, 그시절의 잊지못할 추억                          -- 나의 고중시절 반주임선생님을 그리며                                            윤승일 구술,   글 / 강순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고 하지 않는가!  내 나이 칠십을 훌쩍 넘긴 이 세월까지도 마음속 깊이 간직되고 잊지 못하는 한분이 계시니 그이는 바로 50년대《연변제2고중(현--연변1중)》시절의 나의 반주임이였던 김도권 선생님이다.   연길현 태양구 길성소학 시골에서 유일한 록취자로 연길시1중에 왔고, 3년 졸업후에는 또 수석으로 연변1중에 입학했을 때 김도권선생님은 금방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일중에 분배받아 첫 교편을 잡으며 우리반주임으로 되였던 것이다.   보통 키에 단정한 몸매, 긴 하이카라 검은머리를 뒤로 넘기고 강의할 때면 무시로 머리를 휙! 뒤로 재끼며 미소를 머금는 멋진 스타의 20대 젊은청년 교사였다. 나이도 우리학생들과 여섯 살 차이밖에 안되는지라 너무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고 과당에서의 재밋는 강의와 무시로 이어대는 유모어들로 하여 전반 학생들의 환심을 금시 독차지 하였었다.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반공반독》해야 한다고 매일 오후면 학생들을 일터에 내 몰았다. 학교식당에서 옥수죽 한그릇씩 밖에 못 먹고는 줄창 걸어서 기차정거장까지 가서는 온 얼굴이 새카맣게 석탄먼지를 들쑤고 화물차에서 석탄을 부리고 또 그 150근도 더되는 석탄상자를 두사람씩 짝지어 어께에 메고는 50여메터 떨어진 벌판에 가져다 무져야 하였다. 원래 튼튼치도 못한 김선생은 항상 우리와 함께 석탄을 메여 날랐고 함께 어듬속을 걸으며 학교까지 돌아오군 하였다.   일하고 밤늦게 돌아 올때면 항창 자라는 우리들 그 나이에 진종일 고된일로 하여 너무도 배가 고파서 몇몇이 저마다의 호주머니 부스럽 돈들을 털어모아 가지고 작은 식당에 찾아가서 량표받는 옥수수밥은 겨우  한그릇을 사서 한 슷가락씩 나누고 국을 몇사발 청하여서는 한사발씩 눈깜짝새 후루룩 마셔 헛배를 채우군 하였다.   이렇게 두달 남짓이 애써 일했지만 보수는 커녕 임무를 제때에 못했다고 학교에서 도리여 벌금을 했다고 하니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애들은 모두들 기진맥진했고 대부분이 빈한한 농민의 자식들이라 서로 나눠 먹는다 해도 하나 둘씩 점점 식비가 떨어져 버렸다. 드디여 누구도 식권를 살수가 없어서 애들은 굶기 시작하였고 어느 날엔가는 온 숙사 10여명 애들이 몽땅 드러누워 일어날 수 없게 되였다.   이를 알게 된 반주임 김선생님은 즉시 식당에 달려가 자신의 한달 공자를 몽땅 내여 학생들의 식권를 사서 숙사에 누워있는 우리반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당시 한달 식비 5원, 선생님의 공자는 50원좌우였으니 임시구급은 한 셈이다. 학생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 밥들을 먹었으며 겨우 방학까지 견지할 수 있었다.   때는 1957년, 나라적으로《정풍운동》을 호소하여 당내의 주관주의, 종파주의, 관료주의를 반대한다는 주제를 가진다고 지시했지만 기층에서는《대명대방(大鸣大放)》의 명의로 군중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때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고 유능한 김선생은 항상 학생들께 배움의 중요성을 가르켰고 학생의 첫째 임무는 학습임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로 될줄이야? 어느날 부터인가 연변일중 교학로 정문청사의 높은 란간 삼면 벽에는 대자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드디여 어느 오후《김도권은 반동적 학술권위, 수정주의 교육로선의 고취자》라는 제목의 시커먼 글자가 보이는 기다란 대자보도 무명으로 씌여져 나 붙었다.   아니, 우리 반주임선생님이 무슨 나쁜분자라고? 어데 말이나 되는가? 어떤 놈이 이런 파렴치한 흑백전도의 무함과 모독을 한단 말인가? 절때 그냥 보고 놔둘 수 없다! 그날밤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학생신분이라 그런 선생들과 대자보로 싸울수도 없고, 오직 깡그리 없애버리는 수 밖에 ... ...   밤 12시가 넘어 온 숙사의 애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졌고 오직 사감실 방만은 당직 아바이가 드문드문 기척을 내군 하였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창문을 살짝 열어 제치고 뒷마당에 뛰여 내렸다. 별 인기척이 없는 눈치라 살그머니 학교 청사로 뛰여갔다. 희미한 달빛에 어슴프레 보이는 검은글자의 대자보들은 유령처럼 높은 벽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오후에 봐둔 위치를 더듬어 왼쪽벽 중간 위에서《김도권》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한 나는 얼른 그 대자보를 잡아뜯어 감아서 웃옷속에 감추었다.   당직실에서도 별 인기척이 없자 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가만가만 학교청사를 빠져나와 북쪽에 있는 옥수수밭으로 냅다 뛰여 갔다. 두 손가락에 피가 터지도록 땅을 허비여 파 헤치고 그 대자보를 부랴부랴 파뭍어 버리고는 누가 볼가봐 두려워 일부러 학교 담장길을 에돌아 다시 숙사화장실 창문으로 기어올라 침실에 돌아 왔다.   이튿날, 온 학교는 들썩하였다. 누가 밤에 대자보를 뜯어 갔을가? 김도권의 보황파가 틀림없다. 헌데 누구도 보지 못했으니 추궁할 방법이 어데 있는가 ... ...? 그저 그렇게 찬 서리바람은 몇일간 휘몰아쳐가고 그 특의한 의문의 사건도 그 세월과 그 가슴들에 뭍혀져 잊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려구려 그 김도권선생님과 헤여진지도 수십년 되던 어느날 장춘에 전근해 가셨던 반주임이 정년퇴직하여 연길에 놀러 오신다는 기별이 왔다. 그당시 나는 정부관원으로 출근하고 있는 때라 내가 동창들은 불러 모았다. 아니나 다를가 아홉명의 동창들이 반주임을 만나려고 달려왔다. 그때엔 그래도 제일 잘나간다는 연길 동북아호텔 회전식당에 모여서 기쁨의 상봉과 더불어 지난세월 겪어 온 희노애락의 엣 이야기들을 꽃피우던 중 누군가 문뜩 그《대자보 실종》의 특종 의문사건을 내 놓았다.   어느덧 40년이나 지난 일인데 지금까지 속이고 감춰둘 필요는 없지 않는가? 나는 선뜻 그 일의 자초지종을 피력하였다. 동창들은 금시 환호하였고 반주임은 눈물을 흘리며 얼싸 나를 끓어 안았다.    《고마워, 승일아 ... ! 》또다른 그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뒤이어 아홉일행은 일제히 반주임과 나에게 모여와 부등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시대의 파란만장 속에서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 이 세대들, 인제는 사회나 가정의 모든 짐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뜻깊은 그 추억들에 울고 웃으며 오늘의 보람찬 삶을 마음껏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길 끝까지 건강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자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 이 글은 이미 잡지 2018년제4기에 실렸음 )           
40    로 년 례 찬 댓글:  조회:3311  추천:10  2017-04-05
                                                     로  년  례  찬                                                                                            글 /  강순화     로년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영원히 살것 같던 인생도 결국은 그렇게 길지 않음을 인지하게 되면서 자신이 젊었을 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서둘러 찾아 해보려 애쓰게 된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성공하였던 실패하였던 기뻣던 슬펐던 그 영예나 좌절 모두가 저 흐르는 강물과 같이 서서히 그 세월에 묻혀지고 있음을 심히 감지하게 된다.     로년에 들어서면 그젯날 그 청춘의 광열과 랑만은 사라졌어도 인생과 생활에 대한 감오(感悟)와 리해는 오히려 더욱더 완선화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60여년 인생려정을 되돌아 볼때 그 무슨 세상을 놀래운 업적이나 큰 일은 해놓치 못했어도 자기 나름대로 평생을 앞만 보며 뛰였고 그 무언가를 위해 추구하며 분투하였고 노력하였다면 그에 만족하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어느 로인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현재의 82세 로인은 20년 전 65세 로인의 신체나 사회적 건강상태와 같다고 한다. 즉, 오늘날의 로인들은 20년 전의 로인들 보다 무려 17년이나 더 젊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80대가 마라톤에 참가하고, 70대가 히말리아산맥에 오르는 등 놀라운 사실들은 바로 100세 장수시대의 도래를 의미하지 않는가!     예전에는 60을 맞으면 환갑잔치를 하고나서 로인이 다 된듯 뒤로 한발 물러나 소극적으로 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퇴직 후 5,60에 다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청장년보다 더욱 활기차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떤 이는 못다 이룬 꿈을 향하여 쉼없이 달려 나가고 어떤이는 두려움을 접은 채 낯설거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도 한다.     로년기에 들어서면 젊었을 때 보다 세상에 쓸모가 적어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이 들면서 찾는 삶의 보람을 더 키워간다면 그는 곧 가치있는 인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가치있게 나이 든다는 것은 그런 삶의 보람의 크기를 스스로 높이기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춘이 가는 것을, 늙는다는 것을 그 누군들 반가워하랴? 하지만 지나간 세월을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가는 세월은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니 나이가 드는 것을 안타갑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정 안타까워해야 할것은 로년에 들어서면서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결코 쇠약의 길만이 아닌 지혜롤 쌓아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차려지는 여생을 좀 더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시간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 로인들이 할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는가! 의학계 연구와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는 70대라고 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가정이나 사회의 모든 시름을 벗어버리고 더 많은 지혜와 추억과 경험과 자유시간, 그리고 여유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고 함께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년의 특혜란 바로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승진을 위해 밤낮으로 분투해야 하는 그 벅찬 청춘의 삶의 무게를 시원히 집어 던지고 젊어서는 깨닫지 못한 즐거움을 반추하며 음미할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다. 로년에 이르면 자연히 가슴에는 바다도 담을 수 있고 사해 풍운도 두렵지 않으며 은혜나 원한 그 모두를 너그러히 받아줄 수 있는 넓은 흉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모든게 비슷비슷하지만 로년의 삶은 자기 하기 나름에 따라 너무나 차이가 나지 않는가. 외모나 신체적 격차는 물론, 정신적인 차이도 말 몇마디 오가고 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세월이 화살같이 빨리 간다고 한탄만 하지말자. 여유로운 삶을 스스로 쉼없이 만들어 간다면 로년의 시간도 유유한 물결을 타고 천천히 흘러가게 할수 있지 않는가?     나이를 먹어도 감성이 살아 있고 리성을 잃치 않으며 사회나 그 누군가를 위해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다면 그는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춘이다. 활동적이고 충만한 삶을 살면 실제 나이보다 퍽 젊게 보이고 팔팔해 보이며 따라서 하냥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저녘녁에 지고 있는 석양도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화려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어느 작가는 “꽃은 질때도 아름다워야”라는 소설을 쓴 것이다. 저 구름사이로 서서히 사라져가는 석양은 가슴이 저려오도록 황홀하다. 영원히 늙지 않는 저 푸르른 소나무를 어찌 일출에만 비기랴.     이것이 바로 로년인것을 ... ...                                            (본 문장은 잡지  2017-- 4기에 실렸음)         
39    100년 시인 윤동주를 그리며 댓글:  조회:3594  추천:20  2017-02-25
100년 시인 윤동주를 그리며                                                                           글/ 강 순 화       지난 2월16일, 룡정 윤동주연구회에서는 우리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탄생 100주년과 시인 윤동주 옥사 72주기를 기념하여《100명 시민 100년 시인을 노래하다》는 테마로 룡정과 연길시의 100여명 시민들을 이끌고 룡정 명동 동산에 자리잡은 윤동주묘소를 찾아 경배활동을 진행하였다.   필자도 소식을 듣고 이 뜻깊은 행사에 참여하였는데 현장에서의 감회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깊은감동》그 자체였다. 특히 젊은 문화인들이 주최하고 어린 학생들까지 참여한 이 행사를 보면서 우리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사랑과 추모는 세세대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심히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나는 80년대부터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학자이고 교육자이며 우수한 작가와 평론가이신 원 연변대학 부총장 정판룡교수님을 보좌하면서 그이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12년간 함께 사업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수년간 정판룡교수님을 따라 진행해 온 우리민족 문화사업중 시인 윤동주묘소를 찾고 시인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각종 기념활동들을 조직하면서 동분서주했던 그 나날들이 오늘따라 유달리도 새롭게 머리에 떠오른다.     일찍 80년대 초만 하여도 우리는 시인 윤동주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룡정에서 태여나고 룡정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지금도 룡정 동산에 고이 잠들고 있는 우리고향 시인 윤동주》는 사실 우리와 가장 가깝고 가장 자랑으로 여겨야 할 엄연한 우리민족 시인임에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마치 그저 외국에서나 기념하는 우리와는 거리가 먼 력사인물로만 여긴 것이다.     운명적인 시대의 풍운으로 하여 시인 윤동주는 짧디짧은 28년의 생애에 무려 17년이란 세월동안 두만강을 넘나들고 한국, 일본땅을 정전하면서 학업의 끈을 놓치 않았고 일제의 박해와 이역땅의 고통, 지어 옥중에서도 민족의 량심과 예지로 저항하며 피와 정열과 재능으로 엮어진 주옥같은 시로서 민족의 넋과 얼을 굳게 지켜 왔다. 하지만 그의 고향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이가 세상을 떠난 50년이 되도록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윤동주시인에 대하여 깜깜부지인 연변땅에 처음으로 등불을 밝혀 정보를 가져오고 룡정 동산에 묻혀있는 그의 묘소를 발견한 이는 바로 연변대학에 객좌교수로 오신 일본 와세다대학교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였다. 그이는《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하는 학자였다.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1950년대 중반부터 조선문학에 관심을 모았고 특히 세월의 거치른 언덕에 묻히여 망각되였거나 희미해진 항일지사와 문인들을 발굴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그들의 생애를 추적하는 많은 저서들을 펴냈다. 하여 일찍부터 윤동주연구에도 힘을 기울려왔고 그의 생애와 문화적 업적을 정리하면서 시인 윤동주는《고향이 낳은 세계적 대 시인》이란 평가까지 하고 있었다.     시인 윤동주묘소를 찾은 5일 후인 1985년 5월 19일, 연변대학 정판룡교수, 권철교수를 위수로한 5명교수와 연변민족박물관의 책임일군 그리고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 부인 등 일행 9명은 정성껏 제물을 갖추어가지고 시인의 묘소에 가서 조선민족의 풍습대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번 행차는 이곳 룡정땅에서 광복후 최초로 되는 시인에 대한 추모의식이였다. 그 이후로부터는 학생들, 친척들 그리고 각분야의 인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활동들을 이어 왔다.     1995년7월14일과 15일에는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연변문학예술연구소, 연변대학조문학부, 연변대학조선언어학연구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의 공동주체로《민족시인 윤동주50주기기념학술토론회》를 가졌다.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시인의 고향땅 룡정에서 첫 기념회를 가졌고 고향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윤동주를 기리게 된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기념활동으로 시랑송과 노래표연, 학술론문발표, 모교참관과 묘소에서의 제사 등 행사들을 진행하였다.     1993년 2월 25일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와 시인의 친속들은 공동으로《윤동주생가 유지에 문학비를 세울데 대한 발기서》를 발표하고 모금활동을 벌리였다. 1993년 6월30일에는 다시 윤동주생가를 복원하고 그 정원에 표식비를 세우자는 의견에 합의를 내오고 연변대학의 정판룡교수를 회장으로 권철교수를 주관으로 한《시인 윤동주생가복원촉진회》를 성립하였다.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에 그의 조부 윤하현선생이 명동촌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고간이 달린 조선민족전통구조로 된 농가집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시인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승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룡정으로 이주하였다. 나중에 이 집은 매도되여 다른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리운 것이다.     1993년 3월 지신향 명돈촌이 룡정시의 관광명소로 지정되면서《윤동주생가복구》가 의사일정에 오르게 되였다.《시인 윤동주생가복원촉진회》를 내온 후 우리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에서는 전문가를 초청하여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경비예산을 연구했으며 복구자재를 락실하는 등 많은 일들을 벌리였다. 그 과정에서는 실로 많은 어려움이 부딪쳤으나 국내외 인사들, 특히 리윤기선생 등 한국한민족연구회와 룡정시지신향정부 등 단위의 협찬하에 1994년 8월 28일 드디여 이 생가와 명동교회당을 복원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필자 역시 이 사업 추진회의 한 일원으로 연길-룡정-명동을 수없이 오가며 문건을 전하고 후원금을 전달하였는데 그때에 어데 지금같이 통신이나 은행계좌가 구전했던가? 한국이나 사회 각지에서 전해 온 딸라나 한화로 된 후원금들은 현금 그대로 봉투에 넣어들고 룡정문련을 찾아 다녀오던 일들이 아직도 어제일 같이 떠오른다.     한번은 답사를 갔다오던 자동차가 명동촌으로 가는 올리막 산비탈에서 번져지는 바람에 연변대학 권철교수가 앞가슴 륵골 다섯대나 부러지는 큰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그때 온 가슴을 붕대로 감고 병상에 누워 입원치료를 하면서도 우리에게《생가복구》일정을 문의하고 의견을 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히 보인다. 선인들의 이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시인 윤동주 생가도 다시 복구될수 있었고 시인의 정신은 오늘도 래일도 드팀없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시인만이 세계적인 시인으로 될수 있으며 또 모든 세계적인 시인은 우선 먼저 민족적인 시인으로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시인 윤동주도 우선 먼저 우리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전 민족의 시인인 것이다. (정판룡)》우리는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의 숭고한 지조와 그가 우리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 거대한 공헌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윤동주의 생애는 너무나도 짧았고 그가 남긴 유작도 많지 못하다. 하지만《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주어진 길》에서《한점 부끄럼》없이 분투한 그의 일생과 불후의 시편들은 세세대대로 세인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고 있다.《그처럼 캄캄한 일제하의 암흑기에 윤동주는 한민족에게 그 어둠속에 빛나는 빛줄기였다》라고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말한다. 서서히 빛을 뿌리는 혜성 윤동주는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 다시금 시인 윤동주묘소앞에서 그의《서시》를 정히 읊으니 가슴은 뭉쿨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한  한없이 숙연해 지기도 한다. 우리모두 시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이처럼《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주어진 길》에서 떳떳이 걸어갈 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한번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2월 20일
38    홍콩、심천 려행기 댓글:  조회:5544  추천:5  2016-09-06
                                                                               홍콩、심천 려행기                                                                                                   글 / 강순화       지난 5.1 휴가기간 나는 홍콩, 심천려행을 떠났다. 그 두곳 모두 우리 동북 연변에서는 아득히 머나먼 땅이지만 이곳 아들이 거주하는 광주시에서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으니 말이다. 중국려행사를 통해 239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우선 홍콩 일일려행 수속을 마쳤다. 4월 30일, 예약대로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니 그날따라 날씨도 너무 좋아 기분은 자못 상쾌하였다. 며느리가 미리 예약해 놓은 신주택시가 문앞까지 달려와서 10분도 안걸려 집합장소인 에 당도하였고 우리를 안내할 려행사뻐스도 인츰 도착하였다.     홀로 떠난 려행길이라 고독하면 어쩌려나 하고 근심했었는데 차에 오르니 마침 앞자리에 우리연변 돈화에서 려행 온 60대 부부가 있어서 한 고향사람이라 서로 반가히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만난 오랜 친구처럼 재미나게 려행의 일과를 즐길 수 있었다.     뻐스가 출발하자 로카라 부르는 홍콩인 가이드의 재미나는 소개는 우리들을 점차 신비한 세계에로 이끌어 갔다. 홍콩사람들의 수입이며 생활이며 중국에 반환된 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생소한 일이였기에 그곳은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이였다. 가이드가 홍콩인이라 보통화 발음이 순통치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말을 명심해 들으며 새로운 세상살이에 귀를 기울렸다.     어느덧 변계에 다달아 해관수속을 마치고 붐비는 인파에 밀리면서 홍콩땅에 들어서니 어쩐지 기분이 별로였다. 부자나라 상징으로 생각했던 휘황찬란한 환상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변계에는 낡고 헐망한 건물들만 눈앞에 안겨와 신선한 멋은 전혀 없고 그저 고로한 섬나라에 들어선 듯 하였다. 멀리 보이는 거리의 높다란 건물들은 모두 수십 수백년 풍설에 모대겨 온듯 횡하니 다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길옆에 펼쳐진 120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경마장도 텅텅 비어있었고 오랜 층집들에는 한집 건너 세를 준다는 광고가 다닥다닥하게 붙어 있었다. 워낙 땅이 금쪽같이 귀한 곳이라 작은 집 한칸이라도 주거로나 창고로 세를 주면 그나마 좋은 수입원이 된다는 것이다.     더욱 남다른 것은 대륙에서처럼 한개 공장이라면 어련히 한 건물을 몽땅 독차지하고 담장까지 둘러치고 있어야 하련만 홍콩은 그게 아니였다. 낡은 층집 한 채에 숱한 공장들이 세를 들고 있었는데 그런 건물들을 라 하였다. 그 옆에는 낡은 층집들이 련이어 보였는데 그런 곳에는 에르베이터도 잘 설치되지 않았고 지어 까스도 통하지 않아 집집이 전기나 석유를 쓴다고 한다. 발달한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빈부 차이는 리해 할 수 없으리 만큼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려행코스로 제일 먼저 보여주는 황대선(黃大仙)이라는 큰 절당만은 금빛이 휘황하여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왔다. 사람들은 이곳이 만사가 령통하는 곳이라 하여 눈부신 부처님께 앞다투어 절을 하고 두손 모아 향을 올리느라 빈틈이 없었다. 나는 제일 높은곳에 얼른 올라가서 그저 자식들의 성공만을 마음속으로 정성껏 기도하고는 기념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려행뻐스에 올랐다.     다음 코스로는 홍콩 3D기환세계(香港3D奇幻世界)라는 립체 미술관이였다. 이태리의 저명한 시각설계사가 홍콩을 주제로 3D화를 그려 놓았는데 그 매폭의 길이가 11메터나 되었다. 여러가지 참신한 풍경화에 촬영위치를 제공하여 기묘한 촬영효과를 나타내게 하는 여간 흥미스러운 코스였다. 려행객들은 가이드의 도움으로 앞다퉈 기념사진 몇장들을 멋지게 남기며 함참 동안은 애들처럼 들뜬 기분이였다.     뒤이어 뻐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에돌라 태평산이라는 곳에 오르니 높은 관광대가 있었다. 구룡도가 한눈에 보여왔고 멀리 아래로 굽어보니 작은 섬나라에 비집고 들어선 고층건물들이 빼곡이 줄을 지어 일떠서 있었다. 붐비는 섬나라가 한눈에 안겨오는 전망대였다.     그 다음코스로는 첨수만 해변가이다. 홍콩에는 거의 절반 인구를 차지하는 320만이 부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이곳 경치좋고 풍수보금자리(风水宝地)로 소문난 첨수만(浅水湾) 해변가 언덕 위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각가지 형태의 멋진 별장들이 여기저기 담을 쌓고 자리잡아 있었는데 홍콩의 거물들인 동건화、 리가성、 포옥강、 려명 등등 제1호의 부자들이 모두 그곳에서 살고 있었고 세계적인 영화 명배우 성룡의 집도 그 첨수만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의 집값은 대부분 300여억딸라 라고 하니 보통사람들은 어데 쳐다나 보겠는가? 게다가 건너편 높은 산 등성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을 찌를듯한 몇십층의 높은 건물들은 마치 바람만 불어도 금방 넘어질듯 아찔하게들 서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그 대부분이 1-2년 홍콩에 와 있는 외국 주재원들이나 각나라 부자들이 종종 드나드는 호텔들이라고 하였다. 해변가를 오르내리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면서 신나게 기념촬영을 남기고는 아쉬운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첨수만을 떠나 새 코스로 가는 길옆에는 아직도 당년 식민지의 흔적인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150년도 더 된다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저마다 마당을 골프장처럼 넓게 차지하고 그 무슨 잔디밭 구류장(草地滚球场)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우리 대륙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운동항목인 것 같았다.     워낙 땅이 비좁은 곳이라 길도 너무 좁았는데 차가 막힐라치면 조금도 과장없이 진짜 서로 비비다시피 지나가야 했고 거기에다 A자가 앞에 있는 차는 정부의 차량이므로 무조건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관료라고 다를게 있겠는가? 부자들은 오른손에 돈을 쥐고 왼손에 권력까지 움켜쥐고 있어 4층집도 에르베이터로 오르내리며 호강하지만 인구의 절반을 넘는 가난한 백성들은 작디작은 층집방에서 까스도 없고 전기도 마음대로 쓸수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공평치 못한 세상살이인가! 길거리의 낡은 집들은 건축개발상들이 싹쓸이로 싸게 사들여서는 조금씩 장식하고는 다시 비싼 값으로 되팔아 넘기며 혹시 그러는 중 그곳에 지하철이나 통하게 되면 그 집값이 하루밤새 서너배로 뛰여 오르군 한다고 한다. 우리 대륙의 큰 도시들 역시 이런 경우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원래 소문없던 치벽한 곳도 지하철이 생긴다니 그 집값이 4배 올리 뛴 것도 사실이 아닌가?! 홍콩에서 제일 잘나가는 직업이 무어냐고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바로 중국어 보통화를 가르키는 교사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정치, 경제, 문화, 무역 등 각 령역에서 대륙과의 교류에 제일 수요되는 것이 언어소통이였던 것 같다. 하여 홍콩에서 중국어 보통화를 안다면 제일 직업을 찾기 쉽고 월급도 높은데 자기들 려행가이드보다 두배는 더 받는다고 한다.     홍콩에는 720만 인구가 있는데 최저 공자도 7200원이며 길거리 청소공도 6000원 이상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이하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오로지 정부의 구제를 받아야 살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물가가 하늘을 찌른다니 그곳에서 사는 백성들이 슬그머니 가여워났다. 그들과는 달리 대부분 백성들이 그래도 큰 걱정없이 살고있는 우리대륙의 인생살이가 저으기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     홍콩 려행에서 제일 뜻깊은 코스는《홍콩 골든 보히니아 광장》이다. 넘실대는 바다 옆에 태양과 같은 금빛 조형물을 세워놓은《홍콩 골든 보히니아 광장(回归纪念碑--金紫荆广场)》은 1997년 7월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념해 만든 광장이란다. 순금으로 제작한 6메터 높이의 조형물은 홍콩의 시화인 자형화(紫荆花)를 형상화하였는데 그 화려한 꽃속에는 156년만에 홍콩을 중국에 돌려받은 기쁨을 담뿍 담고 있다고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홍콩특별구 깃발이 가지런히 꽃힌 조형물은 중국정부가 기증했다고 하는데 그 밑의 화강암 좌대와 만리장성 모양의 기단은 홍콩이 엄연한 중국의 령토임을 상징하였다. 매일 아침 8시엔 국기 계양식을 하고 18시엔 하강식을 한다고 한다.     마지막 려행코스는 빅토리아항 야경이다. 빅토리아항(维多利亚港) 야경을 보지 못하면 홍콩을 보았다고 할수 없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였다. 120원의 배표를 더 끈었어도 그 이상의 보람을 만끽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녘녁이 되자 홍콩섬과 구룡반도 사이를 가로 지르는 바다를 중심으로 량쪽에 펼쳐지는 오색찬연한 항구의 장관은 그야말로 홍콩의 대표적인 관광코스였다. 부두의 수심 면적이 41.88평방킬로 세계의 삼대 천연항으로 인정되고, 또 그 황홀한 야경으로 라는 애칭까지 가지고 있는 손색없는 세계적인 야경이다. 이 항만은 1843년 당시 영국의 녀왕이였던 빅토리아를 기념하여 붙혀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빅토리아시는 홍콩의 수도요, 중심지였다.     날이 저물어 지자 우리 일행은 유람선을 잡아타고 검푸른 바다길에 들어섰다. 려행선 제일 윗층에 오르니 해안마다에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도시빌딩의 화려한 전경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고 줄지어 일떠선 그 빌딩들은 서로 조화롭게 어우려져서 다채로운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현란한 조명들이 바다로 반영되여 황홀한 야경을 자랑하며 그 어느 곳 보다도 랑만적인 빛의 향연을 수놓았다.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홍콩야경의 진수요, 진짜 백만불짜리 야경이다. 너무나도 강렬했던 밤의 풍경이라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 도저히 눈을 뗄수가 없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상쾌히 맞으며 조금씩 각도가 변하는 또다른 느낌의 야경을 쉴새없이 스마폰 카메라 에 담으면서 나는 저도몰래 어릴적부터 수없이 들었던《홍콩의 밤》노래를 흥얼거렸다. 참으로 그 노래를 실감케 하는 야경의 도시였다.     가슴벅찬 홍콩의 하루 려행을 마치고 귀로에 오를때는 어느덧 밤 10시가 지났다. 너무나도 알찬 하루려행이다. 다시 두시간 반을 줄기차게 달려 광주시에 들어서니 밤 12시반이다. 다행히 금방 택시를 잡아탈 수 있어서 아들집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 다음날은 중국남방의 참신한 젊음의 도시 심천특구 려행이다.     500년 력사를 보려면 수도 북경에 가야하고 200년 력사를 보려면 동방의 명주 상해에 가야하며 20-30년 개혁개방의 력사를 볼려면 신형의 도시 심천에 가야한다고 한다. 려행사 가이드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광주시내에서 3시간 쯤 달리니 길옆에 우뚝 세운 개혁개방의 설계사 등소평동지의 초상화를 볼수 있었다. 심천에 들어 선 것이다. 한 시대를 바꾸어 놓은 세기의 위인이였던 등소평 동지의 80년대 남하시찰 모습이다. 이 초상화는 2000년 11월 심천경제특구 성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고 한다. 1977년과 1984년 등소평 동지께서 두차례로 남하시찰을 하시면서 이곳 이름없던 하류골짜기 땅을 경제특구로 만들어 놓았고 또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심천시는 오늘의 현대화한 비약의 도시로 변화발전된 것이다.     광주에서 100킬로메터, 차로 3시간 거리밖에 안되는 이 도시는 2020만 평방킬로메트 면적에 그 6분의 1인 320만 평방킬로메터의 특구를 가진 중국에서 손꼽이는 부유의 도시이다. 원래 깊은 하곡이라 하여 심천(深圳)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하루밤새 일떠선 신형의 도시란다. 30년 전만 하여도 황량한 벌판이였던 심수만에는 과학공업단지가 줄지어 건설되였고 남해 변경선에는 400억의 자금이 투자되여 완전 동방의《하와이》로 만들었다. 이곳 직장인들의 최저 공자가 월 1만원이 넘다고 하니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치고 제일 잘사는 부자동네란 말이 생길만 하기도 했다.     홍콩이 대륙에 반환되고 심천이 경제특구로 지정된 이후로 정부에서 내린 많은 새로운 우대 정책의 고무하에 북방과 내지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륙속 이땅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마음껏 창업하고 취직하여 대부분 성공의 길에 들어섰고 지금은 모두가 부자로 되었다고 한다. 당년의 평당 몇천원짜리 집들이 지금은 평당 10만원이 되었으니 그 천지개벽의 속도를 가히 가늠할 수도 있지 않는가?     려행차는 지나가는 길에 황강촌이라고 하는 홍콩 변계선 마을에 잠시 내렸는데 이곳이 바로 당년 밀수로 소문난 곳이란다. 집집이 갱도를 파고 변계선의 철사망을 피로 물들이며 밀수품들을 날라서 떼돈들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홍콩돈이 인민폐의 10배나 되었다고 하니 대륙과 홍콩의 생활은 천양지차였단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아마 심천이 홍콩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된것 같았다.     북경에 가면 몰려드는 인파를 보고 광주에 오면 구릉다리마다의 록색 풍경을 보며 심천에 가서는 하늘을 찌르는 신축 건물들을 보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려행코스의 정수로 꼽히는 곳이 바로 지왕호텔(地王大厦)이였다. 땅이 제일 비싼 곳이라고 지왕이라는 이름을 붙혔다는 이 호텔은 384메터 높이의 건축물로서 69층 관광코스에서 내려다 보니 한눈에 안겨오는 심천시가 참으로 가관이였다. 마치 구름위에 올라서서 한 신생의 도시를 굽어보듯 여간만 흥분되는 기분이 아니였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지왕호텔 69층 중앙에 위치한 위대한 개혁개방의 지도자 등소평동지께서 1986년 10월 영국의 녀왕 엘리자베스(伊丽莎白)2세를 접견하는 장면이였다. 두 시대적 위인의 조각상(雕象)을 진짜 사람의 크기와 같게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두 어르신 모두 살아 숨쉬는듯 그야말로 생생한 모습 그대로였다.     북경에 가서 만리장성에 못 오르면 호한(豪汉)이 아니고 심천에 와서 를 못보면 평생 유감(遗撼)이라고 했다. 그만큼 또 신기한 곳이 바로 이곳 길이 250메터, 너비 30메터의 였다. 이곳은 정녕 한개 나라 두개 제도의 면사포를 벗어 던진 곳이다. 사람들은 두 지역의 변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두곳 상인들의 온갖 면세품들을 사고 즐기며 마음껏 활보할 수 있다. 더더욱 흥미로운것은 대륙에서 심은 나무가 세월이 흘러 자라고 자라면서 허리가 굽혀져서 상반신이 완전히 홍콩땅에 쏠려진 것이다. 그래서《륙지사람들이 심은 나무의 시원한 그늘 혜택을 홍콩사람들이 향수하고 있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려행객들 모두 그 신기한 곳에서 앞다투어 기념사진을 남겼다.     심천이란 곳은 워낙 중국 남방의 아열대 지방이라 일년 내내 평균 기온이 23도이며 가장 추운 겨울이라도 15.4도 밖에 안되는데 그것도 한달이 안되는 기간이란다. 이렇게 사계절이 분명치 않아 일년내내 마치 봄날같다고 한다. 기후가 온화하고 대지는 푸르러서 곳곳에 화초가 만발하고 끝없이 이어진 화원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그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그야말로 에덴동산이 따로 없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큰길 량옆에 붉은 국기가 수없이 줄지어 나붓기고 있어 마치 엄연한 중국땅임을 선언하듯 특이하였고 새로 일떠선 건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웅위로움과 오색찬란한 신형의 멋을 자랑하듯이 유난히 빛을 뿌렸다.     홍콩을 보고 와서 다시 심천을 보니 그 고로한 섬나라에 비해 생기발랄하고 나날이 향상하고 있는 심천시가 더더욱 돋보였다. 그도그럴것이 30대의 발랄한 청춘도시와 백여년의 식민지였던 년로한 섬나라를 어찌 비길 수 있겠는가? 세상은 영원히 청춘들의 활무대이니깐 말이다. 위대한 령수 모주석도 핸드폰을 만져보지 못했고 시대의 개척자 등소평도 홍콩땅을 밟아보지 못했으니 세월의 무정함을 어찌 탓하랴?! 허나 세상사람들 모두 깊히 명기하고 있듯이 당년 중국의 그 일대 위인들이 아니였다면, 또한 그들의 그같은 초 인간적 담량과 원견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중국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더더욱 오늘의 심천시 같은 비약의 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 공민으로서, 이나라의 혁명과 건설을 평생 몸소 격어 온 60대의 한 지성인으로서 이번 려행은 참으로 생동한 한차례 정치교육이였고 남다른 인생체험이였다. 나는 이 나라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에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느끼며 즐거히 귀로에 올랐다.                                                                                                              2016년 7월 광주에서  
37    모아산의 생태환경을 보호할데 관하여 댓글:  조회:4712  추천:24  2015-10-22
     연길 2016년 혜민프로젝트 응모--                 모아산의 생태환경을 보호할데 관하여      근 15년간 연길시 모아산을 등산하고 있는 한 시민으로서 최근 년간 산에 오를 때마다 눈에 띄게 파괴되여 가는 모아산의 생태환경에 가슴이 아프고 늘어가는 처참한 자연파괴 현장에 분노를 느낍니다.    모아산 기슭에 있는 옆 큰길로 걸어 올라 가노라면 연룡로 1939호 맞은켠의 길옆 나무들은 그 누군가에 의해 몽땅 잘리워 없애 버려지고 대신 뙈기밭(小片開荒)고랑들을 버젓이 만들어 놓은 광경을 놀랍게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올라가 해방군부대기지 서남쪽으로 가노라면 가로세로 뙈기밭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날따라 늘어나고 있는데 서로 밭들을 넓혀 가느라 잔나무들은 물론이고 길옆의 큰나무들까지도 다 찍어 눞혔고 나뭇가지며 가시철망으로 진을 치고 있으며 지어 돌담까지 만들어서 등산길을 좁이고 모아산의 아름다운 생태환경을 마구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파렴치한 불법행위를 정부나 림업계통 그 누구도 관여하지 않으며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름 모를 묘지들이 소나무 숲속 곳곳에 해마다 늘어나서 지나다니는 등산객과 려행객들의 기분을 여지없이 잡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구 점령 당하고 있는 그 뙈기밭들과 무명 묘지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넓은 땅들에 해마다 나무를 심는다면 우리 모아산은 얼마나 푸르른 명품산으로 되겠습니까?   엄연한 국가의 산이고 인민의 산인 우리 모아산을 정부와 시민들은 응당 함께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서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넓은 길을 빼고 통로를 닦아 연길시의 아름다운 관광코스로 건설하려 하였지만 일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의 무법천지 행위로 하여 신성한 모아산 기슭이 날로 처량한 뜨깨산으로 변하고 있으니 어찌 힘없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지 않겠습니까?   정부에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중시하고 조사해 보아야 할것이며 새해에는 꼭 의 홀시못할 한 항목으로 의사일정에 올려 놓고 속한 조치를 실시해 주실 것을 한 시민의 목소리로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사실 금년 4월초, 우리 등산협회에서 이 문제를 이미 시정부 강호권 서기님께 上書 하였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기에 이렇게 다시 연변일보(10월14일)에서 공포한 연길시 당위와 정부의 응모에 제출합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연변대학 퇴직교원 2015.10.20)  
36    녀성의 심미적 교양에 관하여 댓글:  조회:5393  추천:12  2014-04-15
                                      녀성의 심미적 교양에 관하여                      미(美)를 론한다면 자연히 녀성과 갈라 놓을수 없다. 그것은 녀성 특유의 미에 대한 집착과 미에 대한 추구 및 미의 가장 직접적인 체현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를 싫어하는 녀성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고대 미녀의 화신이였던 서시, 중국고전명작《홍루몽》속의 림대옥, 조선의 춘향과 같은 미녀들도 그 미모에 금상첨화로 자신을 더욱 황홀하고 아름답게 가꾸기에 애썼으니 천생적으로 못생긴 녀자라 할지라도 그들만의 미에 대한 추구는 여전한 것이다.      현시대의 녀성들도 모두 나름대로 자신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고급화장품이라던가 남다른 머리 스타일, 각양각색의 복장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려 한다. 그들은 자연미를 즐길 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미와 예술적 미도 사랑한다. 아름다움을 모방하기 즐기며 또 아름다움의 추구에 따라 자신의 가정생활과 인생을 안배하려 노력한다.      一. 현대 녀성의 심미 심리 특점     심미(审美)란 사람들이 미적 사물에 대한 감지(感知)、 판단、 분석과 감별, 흠상을 말한다. 심미과정은 곧 심미객체의 미가 심미주체의 감각기관에 작용하여 서로 교류하고 융합되는 심리체험 과정이다.    미감(美感)은 사람들의 행위를 조절할 수 있고 이런 행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단히 더욱 높고 더욱 아름다운 경지에로 발전하게끔 추진한다.    녀성의 심미는 표면적인 것, 외재적인 미를 중시하고 정감상의 수요와 만족을 중요시 하며 미의 조화로운 통일을 중요시한다. 또한 녀성의 심미는 민감하고 섬세하고 풍부하고 독특하며 강렬한 감염력을 갖고있다.       그렇다면 녀성의 심미심리 특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민감한 심미직각(直覺)이다.    녀성은 비교적 높은 심미 감상력이 있으며 미적 사물에 대하여 대단히 민감하다. 녀성은 선천적으로 감각기관에 우세가 있다고 한다. 촉각、 후각、 청각、 시각 등 방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며 미의 외재 형식 감수가 빠르고 좋다고 한다.     녀성은 심미령역에서 왕왕 그들의 령민한 직각우세를 충분히 발휘한다. 허다한 녀성들은 이 우세에 의하여 아주 손쉽게 자신과 주위 환경의 미를 꾸며내며 또 각종 사물 중에서 자각적으로 미를 발견한다. 녀성의 지혜는 직감의 지혜이다. 녀성은 경상적으로 예민한 자기들의 직감에 의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군 한다.       둘째 특점은 세심한 심미 정감이 있는 것이다.    정감(情感)이란 사람들이 객관세계에 대한 일종 특수한 반영형식이다. 심미정감은 생리적으로 즐거운 기초상에서 정신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을 말한다.    녀성들은 민감한 신경과 세심한 심리소질이 있으며 격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자신의 풍부한 내심감수를 쉽게 표달한다. 하여 왕왕 TV와 영화를 보면서 저도몰래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남의 이야기에도 쉽게 감동되고 흥분한다. 또 자기가 보고 느낀것을 항상 친구들께 이야기하고 나누기 싶어 한다.      셋째 특점은 풍부한 심미상상이 있는 것이다.    심미의 매력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상상에 있으며 심미의 즐거움도 바로 자유자재로운 상상에 있다. 례하면 높고 험준한 산봉을 바라보면 우리는 즉시 그것의 위엄과 숭고함을 느끼게 되고 졸졸 흐르는 냇물을 보면 유쾌하고 상큼한 생기를 감수할 수 있으며 창공에 검은 구름이 지지 누를 때 우리는 일종의 위압감에 자기도 모르게 불안해 나고, 멀리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력사의 흐름과 세월의 무정함에 상심하게도 되는 것이다.      넷째 특점은 독특한 심미 깨달음이다.    감수한 기초 상에서 사물의 의미 혹은 작품의 의의와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을 심미 깨달음 혹은 심미리해라고 한다.    녀성은 생리, 심리 및 사회문화의 각종 영향과 제한을 받아 력사, 민족, 사회, 인생 및 자아사색 등 방면에서 필연적으로 그 독특성이 나타나게 되며 녀성적인 사물관찰 방식을 갖게 된다. 녀성들은 민감한 관찰력, 온정된 주의력, 섬세한 심미정감이 있기에 심미창조나 심미흠상에서나를 물론하고 모두 세절을 발견하는 재능을 갖고 있다. 이로부터 독특한 감수와 깨달음을 얻게 된다.       二. 현대 녀성들의 량호한 심미관념의 수립      인간의 미감과 감상능력은 지식, 경력과 밀접한 련관성이 있다.    만약 한 사람이 감상능력과 필요한 지식경력이 결핍하다면 그가 보는 사물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 사물에 대해 심각한 체험을 느낄 수 없다. 하여 그 누구든 무엇을 관찰하던《아는것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미감은 또 도덕감, 리지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眞), 선(善), 미(美) 3자는 통일된 고상한 도덕 정조이다.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는 열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렬한 것과 저급적인 취미에서 벗어나게 하며 미감수평을 제고하게 한다.       미는 또한 그 범위가 광범한 것이다. 근근이 예술미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인물 미, 생활 미 또한 과학적인 미도 중요시해야 하며 인격미, 정신미, 도덕미, 지혜미의 고도로 되는 조합을 이루어야 더욱 높은 미적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례하면 자연경물의 아름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넓은 마음과 깨끗한 정신을 갖게 하고 흉금이 활달하고 생기발랄하게 하며 음악의 아름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분발되고 랑만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것이다.      총적으로 이런 미감은 사람의 정신생활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참 의의를 깨닳고 적극적으로 분발향상하게 한다.     녀성들의 량호한 심미심리는 혼인과 가정의 행복에 유조하며 가족들의 화목에 유조하고 심리건강에 유익할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건강한 성장에도 유조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더욱더 원만하게 할 수 있다.       三. 녀성의 미적 관념의 변화와 발전      녀성의 심미심리도 시대의 흐름과 사회문화 발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녀성들은《三綱五常》의 쇠사슬에 속박되여 남자의 부속물로 얽매여 살아야 했다. 녀성은 자기의 매력, 기지와 자아가치를 완전히 그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남자에게 기탁하였다. 봉건례교《三從四德》에는 녀자는 일생에 세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 후에는 남편을, 늙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綱: 提罔的 總繩,  事物的 關鍵部分,  三綱: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妻綱,                五常: 仁, 義, 禮, 智, 信,    三從: 從夫, 從父, 從子, 四德: 婦德, 婦言, 婦容, 婦功)         신해 혁명이후부터 녀성의 자아가치의식과 사회의식은 각성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적 지위는 점차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례없는 “문화대혁명” 그 시대에서 심미는 완전히 수정주의 자본주의 범주에 속하였다. 누구도 감히 녀성의 특징적인 미에 대해 언급조차도 할수 없었다. 그 시기의 심미관념은 단일의 회색과 남색속에 혼돈되었고 당시 젊은 녀성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패션은 군복이였고 제일 리상적인 대상도 군인이였다.      개혁개방후 녀성의 심미관념에는 천변만화의 태세가 나타났다. 녀성들은 점차 독특한 시각으로 자신의 내심세계를 전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자립, 자강, 자존의 인격을 강조하였고 미적 수양에서도 전통과 습관에만 얽매우지 않고 용감히 탐색, 창조하며 개성과 기질을 돌출히 하였다. 하여 자아를 찾고 자아를 단장하는 것이 녀성시대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녀성들의 복장이 그 변화의 대표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여름 패션엔 잔등을 드러내 놓는 것도 성차지 않아 이젠 배꼽까지 드러내 놓고 다닌다. 옛날 같으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복장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四. 정확한 녀성미 관념      인간의 미는 내적미와 외적미의 조화로운 통일이다. 외적미란 인체미와 수식미를 말하며 내적미란 풍도기질 미와 정신심령미를 말한다. 생리미는 인체의 자연미를 말하며 수식미란 의복의 양식, 머리 모양, 장식도구 등의 미이다.    생리미와 수식미를 적당히 추구하는 것은 녀성심리의 수요이다. 우리는 화장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부족점을 미봉하면서 용모의 매력을 높여 자아심리의 만족감을 얻게 된다. 화장하는 것은 녀성으로 하여금 유쾌한 정서를 보존하고 자신심을 증강하는데 유조하며 사람간의 교제에도 유리하다. 녀성이 아름답게 꾸미고 출근하면 남성들도 기뻐하고 직장의 환경도 아름다워진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집밖에 나올 때는 화장하지 않는 녀성이 거의 없다. 이것은 녀성들의 미의식이 진보된 표현이다. 녀성이라면 적당히 화장술도 공부하여 자신의 나이와 신분에 알맞은 화장을 하여 자신의 품위를 높여야 한다. 화장도 일개 녀성의 심미수준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외적미의 중요한 점은 자연스러운데 있다. 이쁘고 젊은 녀자가 너무 울긋불긋 요란하게 장식을 하였을 때 오히려 그것은 그의 미에 손상을 주게 된다. 그리고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화장과 장식도 삼가할 바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움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녀성이라면 꽃처럼 아름다운 면도 있고 잎처럼 소박한 면도 있고 줄기처럼 강인한 면도 있고 뿌리처럼 드팀없는 일면도 있어야 할 것이다. 녀성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그에 따르는 적당한 얼굴 주름도, 흩날리는 은빛 머리결도, 느긋하고 품위있는 걸음걸이도 모두 그녀의 성숙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풍도기질미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언행거지에서 나타난다. 정신심령미는 인체미의 핵심으로써 정신미가 사람의 행위, 언어 방면에서 체현될 때 풍도의 미로 표현된다. 녀성의 풍도기질미는 녀성의 경력, 수양, 성격, 정감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정신심령 미는 의지, 리상, 도덕, 정조, 지혜, 재능을 주요표현으로 한다. 용모의 아름다움이 정신미와 결합되지 않았을 때 그 매력은 잠시적이고 표면적인 것이다.      값비싼 시체 옷에 멋을 한껏 부린 예쁘장한 녀자라 할지라도 쌍스러운 욕을 입에 담거나 또 휴지를 아무데나 버리는 등 문명치 못한 행위를 할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미적 인상은 삽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고대의 희랍의 한 철학가는 이런 정채로운 말을 남겼다. 《신체의 미가 만약 총명 재질과 결합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모종 동물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녀성의 매력근원은 내적정신세계에 있다. 충실한 내심세계를 갖춘 녀성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뿜는 풍도와 매력은, 예쁜 용모는 있어도 내심이 텅빈 녀성과는 비할 수도 없으며 기질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년간에 거쳐 지어는 수십년을 거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그의 기질과 수양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내뿜는 분위기와 향기도 각기 다른 것이다.      五. 녀성의 미적 관념의 그릇된 구역      첫째, 외적미만 중시하고 내적미를 홀시하는 것이다.     젊은 녀성들이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저기를 적당히 드러내고 자기의 성적매력을 나타내는 것도 현시대 자기표현의 합리적인 형식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기 위해 맹목적으로 시체를 따르는 것은 제창할 바 못 된다.      두번째는, 맹목적인 모방이다.     인류가 미의 감수나 체험 면에서 공성은 있지만 그가 속한 계급이나 민족습관, 문화교육, 개인심리 특점 등 부동한 인소에 따라 미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것이다. 때문에 자기 민족습관과 개인의 개성특점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낸다.       六. 현대 녀성의 량호한 심미심리의 배양      심미활동은 인류의 특유한 정신수요이다. 미적 감수는 또한 옅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부동한 수평과 다 층차로의 심리결구이다. 심미능력의 배양과 제고는 예민한 감지력, 풍부한 상상력, 투철한 리해력을 배양할 것을 수요 한다.      1. 중년 녀성은 사유능력이 일정한 정도로 발전되여 있고 경험이 풍부하고 리해력과 판단력 수준이 비교적 높으며 강한 동정심이 있고 의지 또한 강하다. 그들의 심미수평은 성숙되고 온정되여 나이는 비록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얼굴에는 봄빛이 무르녹아 있는 것이다.      로년녀성은 경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하고 사유가 넓으며 심미심리가 이미 정해 져 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냥 낡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서 과거만 회고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며 심미의 시대적 감각을 따라잡아야 한다.      2. 민감한 감지력을 배양해야 한다.    맑스는 말하기를 “비음악적인 귀에는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의의가 없다.”고 하였다. 녀성들은 자신의 감지력을 배양하기 위해 기본적인 형식미의 지식을 주동적으로 배워야 한다. 다방면의 심미활동을 주동적으로 진행하여 미적 감수력도 부단히 제고하며 자신들의 심미수준을 높여 간다면 더욱 유쾌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해 나갈수 있을 것이다.      3. 투철한 리해력을 배양해야 한다.    심미리해의 배양은 자연, 사회와 예술과의 대량적인 감성 접촉을 요구하며 일정한 문화지식, 력사지식, 지리지식, 사회학지식, 예술지식 등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즉 부단한 노력으로 시대정신에 뒤떨어 지지 않는 배움과 리해를 말하는 것이다.      七. 중국조선족 녀성들의 미의식      중국조선족 녀성들의 미의식은 그 모체로 되는 조선민족 전통의 혈연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고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서 중국적인 미의식 영향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조선고대 문화의 구체적 형태의 하나로서 심미의 기본취향은《덕(德)》을 미적 가치판단의 주요한 척도로 하는 것이었다.《녀성미》는 바로《덕미》로서《성미(性美)》는 《덕미》에 의해 대체되고 훼멸되었던 것이다.      녀자는 굴종과 순종의 품덕으로 연약하고 가냘픈 미를 끌어내고 자기를 억제하고 달게 희생하는 정신으로부터 함축적인 미를 나타냈다. 우리민족 녀성들의 정신세계와 미적추구는 상술한 전통적 민족기질의 영향과 불가분리의 관계 속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개 소수민족으로서 모체의 미의식 전통의 관성과 중국문화의 전면적인 영향 속에서 자체의 독특한 미의식을 정비하는 노력과 탐구가 수요되는 것이다.     현시대는《부덕(婦德)》의 미적추구를 과감히 버리고 녀성의 독립적, 자주적 인격을 추구하면서 건강하고 활달한 성격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녀성미의 규범을 타파하고 용감히 남성세계에 도전을 하면서 주견이 있고 용감하며 형상이 씩씩하고 단조로운, 남성미에 가까운 것을 미적 리상으로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민족녀성의 전통적인 미적추구의 심각한 변파이면서도 다른 한 극단적인 페단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였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대환경은 조선족녀성들에게 미의식 각성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오늘의 시대적 풍모를 체현하는 녀성형상은 과거의 소박하고 단순하고 씩씩하던 모습이 아니라 품위도 있고 외형적인 미적 매력을 갖춘 체현자들이다. 오늘의 조선족녀성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미적 리상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분투노력하고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조선족녀성들의 미적추구가 새롭게 진전을 보이고 있는 동시에 적지 않은 폐단도 동반되고 있다. 이를테면 물질적 향락과 관련된 지나친 사치와 성적매력을 편면적으로 강조하면서 성의 문란과 사회도덕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는 것, 외국의 미적 표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등등이다.    우리는 반드시 미적교양과 심미수양의 제고를 강화하여 조선족녀성들의 미의식이 시대적, 민족적 특색이 결합된 발전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연변대학 제5차녀성학학술회 론문집에서 발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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